* * *
"정든 이곳을 떠난다니, 참으로 눈물이 앞을 가리네요."
이제 더 이상 위버하임에 머물 이유는 없다.
선제후가 된 루페르트의 처소는 같은 주에 속한 슈발츠마인가(家)의 성으로 옮겨질 것이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위버하임을 찾아왔다.
물론 여기엔 리프니에의 독촉이 있었다.
떠나기 전에 자신의 사당을 한 번 더 보고 싶다고.
"그나저나, 루페르트 가우저. 당신은 이번에 상상 이상의 일을 해 줬어요."
위버하임이 다가오자 리프니에가 갑자기 칭찬의 말을 건넸다.
판텔레온을 죽인 이후에도 별말이 없던 그녀다.
선제후에 오를 때도 아무 말도 없던 그녀다.
그런 그녀가 갑자기 다시 입을 열었다.
루페르트의 얼굴에 화색이 돈 건 당연한 수순.
'여신님. 삐친 게 아니었구나. 아니, 이제 와서 풀린 걸까.'
"설마하니 그 괴물을 죽이다니. 이거, 루페르트 가우저. 당신을 다시 봐야겠는데요?"
"그 말씀은 제 빈약한 평가를 수정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음, 솔직히 당신 평가가 별로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거, 당신도 알잖아요? 생각해 보세요. 소라고둥이 없는 자신을!"
"그, 그건 그렇지요."
"그나저나 그건 도착했으려나."
"그것이라니요?"
"어머. 설마 잊었나요? 전에 제 조각상 주문했잖아요?"
"아. 그렇습니다. 확실히 디터팔츠의 카를 빔펜이라는 사람에게 주문했습니다."
리히트 보덴에서 돌아온 후 루페르트는 탐욕을 드러내는 리프니에의 성화에 결국 사당에 금칠을 하는 대신 조각상 하나를 만들어 주기로 합의했었다.
'열네 살 정도의 소녀상을 만들어 달라고 했었지. 그것도 조각사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아름다운 여인의 14세. 14세 때의 모습을 조각해 달라고. 지나치게 구체적인 의뢰였지.'
의뢰는 확실히 했다.
그런데 조각이란 게 그렇게 빨리 진행되는 게 아니다.
루페르트는 본 적이 있다.
황궁의 벽에 조각된 역대 황제의 조각상 하나를 만드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는지.
루페르트가 황제가 된 지 5년이 지난 뒤에서 조각사들이 선제의 조각상을 다듬고 있었다.
'그게 그리 빨리 되는 건 아닐 텐데.'
전혀 아니었다.
리프니에의 사당 안에 떡하니 등신대의 조각상이 당당하게 놓여 있었다.
"아, 그 사람요? 네. 직접 마차를 몰고 왔지 뭐예요. 뭔가 이상해 보였어요. 넋이 좀 나간 느낌? 그래도 보수는 충분히 제공했답니다."
집사 세바스티안이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그렇군."
루페르트는 하인들을 물리고 사당 안에 들어갔다.
목에 건 소라고둥이 가볍게 흔들렸다.
"어머."
리프니에가 조각상을 발견했다.
"정말 잘 만들어졌네요."
루페르트도 조각상을 보았다.
열네 살 정도 소녀의 느낌.
앳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기품이 느껴졌다.
'카를 빔펜. 놀라운 실력이군. 단시간 내에 이런 걸 만들어 내다니. 과연 여신님이 그 이름을 알 정도구만.'
그런데.
이 조각상의 얼굴, 이상할 정도 눈에 익다.
분명 모르는 사람이고 처음 보는 얼굴일 텐데.
수많은 얼굴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간 끝에 정확히 일치되는 얼굴이 운명처럼 눈앞에 떠올랐다.
'잠깐. 이건.'
"저기 루페르트 가우저."
소라고둥이 조각상 옆에서 가볍게 몸을 흔들었다.
"이거 보세요. 저랑 완전 판박이에요."
여신의 천진난만한 목소리를 들으며 루페르트는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이건 안젤리나 대황후의 어린 시절 모습이잖아.'
"저를 꼭 빼다 닮았다고요."
그때가 처음이었으리라.
혼백마저 잃어버릴 것 같은 심해의 악취를 느낀 건.
48화 13. 회랑의 노인 (2)
제국 의회가 소집됐다.
선제 클라우데 2세가 붕어한 지 6년이 지난 해였다.
안건은 황제의 선출.
소집자는 선제의 배우자 안젤리나였다.
노예제 티그리트가 남긴 규율에 따라 제국 의회의 개최는 소집 발령 후 100일 뒤, 제도 테타우의 황궁에서 개최된다.
물론 선거는 그냥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이 기간 동안 각 후보자는 자신의 능력과 부, 인맥을 이용하여 최대한 많은 표를 확보해야 한다.
또 다른 형태의 경쟁이 그 막을 올린 것이다.
현재 차기 황제 후보로 거론된 건 다섯.
그 명단은 아래와 같다.
첫 번째 후보 로이겐 뇌르겐틀링. 21세.
루페르트와 작은 악연이 있기도 한 그 거만한 사내는 디터팔츠 선제후의 아들이다.
두 번째 후보는 마티아스. 45세.
그는 노르드마르크 선제후의 사촌임과 동시에 철혈대제 앞의 황제인 천둥제의 외손자이기도 하다.
세 번째 후보는 카를 호이징거. 19세.
그는 가장 최근에 입후보된 사람으로 마티아스처럼 천둥제의 후손, 정확히는 직계라고 한다.
자세한 사항은 알려진 바 없으나, 고어문트 선제후 골트문트가 강력하게 추천했다고 알려져 있다.
네 번째 후보는 렌타이어마르크 선제후 본인이 입후보했으나, 어찌 된 영문인지 중도에 기권했다.
마지막 다섯 번째 후보는 루페르트 가우저다.
그는 선제의 혈족이자 슈발츠마인 선제후다.
한때 모든 후보 중 가장 보잘것없는 자였으나 메헨부르그의 야수, 리히트보덴의 식민지 탈환 같은 하나도 이루기 어려운 굵직한 업적을 연달아 쌓았고, 거기다 오로지 실력만으로 슈발츠마인 선제후의 자리에 올랐다.
소문에 따르면 그 루페르트 가우저는 키가 2미터가 넘는 거한에 그 힘은 홀로 사륜마차를 들어 올릴 수 있을 정도이며 목소리는 유리를 깨뜨리고 커다란 술통 하나를 단숨에 비울 수 있을 정도의 대식가라고 한다.
"라고 하는데요?"
이곳은 선제후의 궁전.
루페르트의 집무실이다.
혼자 쓰기엔 황송할 정도로 넓은 집무실 중앙엔 작은 제단이 있었고 그 위에 말하는 소라고둥이 똑바로 선 채 즐거운 목소리로 재잘거리고 있었다.
"뜬소문이죠. 소문이라는 게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루페르트가 쓴웃음을 머금으며 제단 위의 소라고둥을 지친 눈으로 응시했다.
"절반은 사실 아닌가요?"
"괴력 말입니까."
"네. 덕분에 그 괴물을 쓰러뜨렸잖아요?"
"그건 그렇습니다만...."
루페르트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씌워졌다.
판텔레온을 처치한 것까진 좋다.
그러나 당시 목격했던 광경은 루페르트의 마음에 결코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남겼다.
뭐랄까, 마음이란 것이 완벽한 원형을 이루는 고리라고 가정하면 그 일부분이 찌그러졌다고나 할까.
마음을 다독이며 그 찌그러진 부분을 바로 폈지만, 이미 상한 부분은 완벽하게 복구되진 않는 느낌이다.
자꾸 그날의 참상이 떠오른다.
아마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봐서는 안 될 걸 본 느낌이다. 그건 사람이 해서는, 사람이 상상조차 해서는 아니 되는 일이었다.'
그 인간이었던 것과 오크는 안투안 쿠르스트가 이끄는 토벌대가 당도했을 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들이 남긴 참상과 악취는 지금 이 순간에도 루페르트의 마음 한구석에 끔찍한 형태로 유리 파편처럼 박혀 있다.
'제국 성인. 대체 그들은 누구지? 대체 어떻게 천 년 전 사람이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고, 대체 그 괴이한 힘은 뭐란 말인가.'
판텔레온은 인간조차 아니었다.
그는 인간의 탈을 쓴 괴물이다.
"루페르트 가우저. 또 그 생각을 하시나요?"
리프니에가 루페르트의 표정을 읽고 부드럽게 묻는다.
루페르트는 고개를 떨군 채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이고 그날의 악몽을 꾸었습니다."
"그럴 거 같았어요. 당신이 감당하기엔 지나치게 끔찍한 것들이었죠. 해서 그 계집아이가 죽는 선에서 일을 마무리하려 했었는데. 그 계집아이는 어디에 있나요?"
"글쎄요. 소식이 끊긴 지 꽤 오래되었습니다."
"뭐, 그래도 그 정도면 괜찮은 결과라고 생각해요. 그 괴물도 처치했고요."
루페르트가 제단 위의 소라고둥을 가만히 응시했다.
약간의 망설임이 루페르트의 흐릿한 눈동자 위에 스치고 지나갔다.
"저기, 여신님."
"네."
"그 괴물들에 대해 아시는 바가 있습니까?"
"조금은요?"
"정말입니까?!"
루페르트의 눈이 번쩍 뜨였다.
여신이 대답해 줄 거라 기대도 안 했다.
"네. 제가 알기로 이 세상엔 섭리를 거스른 존재들이 더러 있어요. 당신이 빙해에서 상대했던 그 흉물들."
"스크라엘링 말씀이군요."
"그것 외에도 저 멀리 까마득한 남쪽의 사막 쪽엔 영원히 사는 저주에 걸린 사람들이 있지요."
"그, 그렇습니까? 그런데, 그게 저주인가요?"
"네. 저주가 맞는 거 같아요. 그 사람들의 상태를 보면 말이죠."
"그렇군요."
루페르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여신님. 제국 이외에도 다른 곳의 사정도 알고 있었군. 까마득한 남쪽 사막이라니. 들어 본 적은 있지만, 그곳의 사정까지 알고 계실 줄이야....'
"아무튼 루페르트 가우저. 그것들 또한 세상의 섭리를 벗어난 존재예요. 이 세상엔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죠."
"이 세상엔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들."
루페르트의 눈동자 깊숙한 곳에 강렬한 불길이 피어올랐다.
'놈들이 말했다. 놈들은 제국을 멸하겠다고.'
실로 그러하다.
놈들은 얀란트의 크로지우스가 예언했던 제국을 파멸하려는, 제국의 적이다.
"저는 그것들을 괴물이라고 부른답니다. 하지만 그 괴물들은 매우 교활하지요. 당신 황제 시절을 생각해 보세요."
"...확실히 제국이 멸망해 가는 와중에도 그들의 이름은 들은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들도 불멸의 존재는 아니랍니다. 저의 힘과 당신의 용기, 그리고 제가 강조한 황제의 덕목을 이용한다면 당신은 그 괴물을 상대로 능히 싸워 나갈 수 있을 거예요!"
"여신님...."
루페르트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짧게나마 리프니에를 의심했었다.
그녀의 행동에 의구심을 품기도 했다.
당장 집무실 구석에 덩그러니 놓인 안젤리나를 꼭 닮은 조각상이 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루페르트가 결국 최후에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건 리프니에뿐이다.
'호라교 경전에 의하면 호라신도 믿는 자를 몇 번이고 시험에 들게 했다고 했다. 일가족을 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했던 호라에 비하면 리프니에 님이 날 시험하는 건 아무것도 아니야.'
감사함과 죄스러움을 담아 루페르트는 소라고둥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저는 언제까지나 여신님의 신도로 남을 것입니다."
"그거 고맙네요. 인간의 약속이란 건 솔직히 믿기 어렵지만요."
"저는 다를 겁니다."
"누구나 같은 소리를 하죠. 그런데 루페르트 가우저. 그 괴물에겐 일행이 있는 거 같던데요."
"그렇습니다."
아직 일곱이 남았다.
그들이 누구인지, 어떤 존재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리 쉽게 처치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리라.
무엇보다 두려운 건 그것들이 보여 줄 끔찍한 무언가다.
이미 상상 이상의 것을 보았다.
그보다 더한 것이 본다면.
"...."
마음이 버틸 수가 있을까?
"자신이 없나요?"
리프니에가 은근히 묻는다.
잠시 흔들렸던 루페르트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혀, 아닙니다."
리프니에는 마음을 다잡는 루페르트를 가만히 바라보다 가볍게 소라고둥 전체를 흔들었다.
"그래야죠. 당신은 제국의 황제. 반드시 제국을 지켜 내야 해요. 저는 비록 이름도 없고, 신전도 없고, 신도도 없는 비루한 신이지만 당신을 돕겠어요."
"여신님...!"
"저밖에 없죠?"
"당연한 말씀입니다."
"조만간 당신에게 부탁해야 할 일이 하나가 있을 거 같은데, 물론 들어주겠지요?"
"퀘스트입니까?"
"맞아요. 여신의 퀘스트죠. 물론 당신이 마음에 들어 할 보상이 주어질 거예요. 하지만 그 전에 당신이 해야 할 일이 있지 않나요?"
"그렇습니다."
루페르트는 선제후의 집무실 중앙에 자리 잡은 크고 화려한 서재를 응시했다.
서재 위에 황궁에서 보낸 금인 칙서가 놓여 있다.
곧 선거가 있을 것이다.
제국의 황제를 선출하는.
루페르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행사다.
* * *
"후보가 역대급으로 많기에 표가 분산될 확률이 대단히 높습니다."
슈발츠마인 선제후가 되자, 자연스레 가문에 소속된 인재들이 루페르트에게 따라붙었다.
제국 동남부 잉겔하트 공작령의 군주 프리드리히 헤첸도 그중 하나였다.
그는 소국의 군주이지만 영지의 통치는 동생에게 맡기고 자신은 보다 권세 높은 상위 군주의 책사로 활동하는 데 특이한 인물이었다.
작은 키지만 움직임은 힘이 있었고, 카랑카랑한 목소리엔 열정이 느껴졌다.
성실하고 루페르트에 대해서도 우호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리프니에의 평가는 가혹했다.
< "잉겔하트 공작" 프리드리히 헤첸에 관한 보고 >
1. 개요
종족: 인간 - 제국인
분류: 범인
성별: 남성
연령: 37세
명성: 꽤 유명함
신체상의 특징: 벗겨진 머리
2. 운명의 실타래
소국의 공작: C+
무능력하지만 일을 매우 열심히 함: C-
가난한 식탁에 딸린 입: D+
3. 특기사항
- 특별히 없음
4. 등급
C+ (가까이하지 마세요)
'공작이나 되는 사람 등급이 이렇게 낮다니.... 거기다 가까이하지 말라는 여신님의 주석까지....'
어지간히 밉보인 모양이다.
그래도 그가 제공하는 정보는 귀담아들을 가치가 있다.
"중요한 건 과반수를 얻는 거지요. 제국법전에 따르면 황제는 반드시 총투표수의 절반, 즉 네 표 이상을 얻어야 합니다. 하지만 현재처럼 후보가 난립한 상황에 과반수를 얻는 건 어려운 일이지요."
황제 선출의 투표권자는 총 여덟 명.
그중 일곱은 선제후며 나머지 하나는 선제 본인 혹은 선제가 지정하는 사람이다.
"일단 선제후께서는 두 표를 확보하셨다고 보시면 됩니다."
당연한 일이다.
선제, 클라우데 2세가 지정한 사람은 다름 아닌 안젤리나니까.
'2표를 가지고 시작한다. 한 표는 나, 다른 한 표는 안젤리나 대황후.'
루페르트에게 필요한 건 두 표다.
두 표만 더 얻을 수 있다면, 루페르트는 황제가 될 수 있다.
선제후 둘만 설득하는 것으로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는 소리다.
문제는 어떻게 선제후의 지지를 얻느냐다.
"일단 후보를 세운 선제후의 지지는 포기하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루페르트를 제외하고 후보를 세운 선제후는 고어문트, 노르드마르크, 디터팔츠 세 명이다.
렌타이어마르크, 트라이아, 아카이아는 후보를 세우지 않았다.
즉, 이번 선거의 향방은 이 세 군데 선제후령을 공략하는 데 사활이 걸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일단 사자를 보내 보는 건 어떻습니까?"
프리드리히가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득의만면한 얼굴로 묻는다.
마치 모든 수를 준비했다는 표정.
미덥지 못하지만, 일단은 지켜보기로 했다.
물론 가장 중요한 작업을 하는 건 잊지 않았다.
여신의 아티팩트, 시간의 책갈피 사용이다.
* * *
"렌타이어마르크, 트라이아 선제후 쪽에서 회신이 왔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프리드리히가 활짝 웃는 얼굴로 찾아왔다.
"그렇습니까?"
루페르트는 지친 얼굴로 책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제도 밤을 새웠다.
선제후가 된 후 루페르트의 일정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으니.
할 일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선제후의 업무에 대한 교육과 인수인계, 가문의 구성원과의 대면식, 우호 관계의 설정, 선제후 영지의 정보 습득 및 관리, 가문에 속한 자들의 관리 등등 하루에만 수십 개가 넘는 결재 문서가 올라오고, 그걸 일일이 검토하고, 서명을 해야 했다.
"뭐라고 하시던가요? 두 선제후께서는?"
"말 그대로입니다. 긍정적으로 검토하신다고 합니다."
"애매모호한 표현이 아닌가요?"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당장 트라이아 선제후는 고어문트 선제후와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또한 노르드마르크 선제후와도 앙숙이지요. 디터팔츠 선제후와는 중립적인 관계지만, 지켜야 할 의리는 없습니다. 고로 우리 쪽에서 약간의 약속을 해 준다면 가볍게 넘어오지 않을까요?"
"흐음."
말은 그럴듯하다.
실제로 선제후 간의 관계는 사실이기도 했고.
트라이아 선제후 레벤호스트는 골트문트와도, 게오르크 아르님과도 사이가 좋지 않다.
"그쪽에서 원하는 게 뭔지 물어보고 그걸 전달하도록 해 봅시다."
시작이 반이라고 했던가.
처음 선거전에 들어섰을 때만 해도 방법이 없어 보이던 황제 선거지만, 막상 들어가니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프리드리히가 무능한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두 표를 획득한 상황에서 나머지 두 표를 얻는다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선제후 두 명만 구워삶으면 그만이니 말이다.
루페르트는 프리드리히의 조언에 따라 렌타이어마르크, 트라이아 두 군데 선제후에 대한 포섭 작전에 들어갔다.
수많은 서신이 오갔다.
선제후들이 원하는 건 당연히 이권이다.
광산 채굴권, 삼림 벌채를 비롯해 제국 도시에 관한 영향력 상승 등등 선제후의 요구는 다방면에 걸쳐 이루어졌다.
개중엔 무리한 요구도 있었고 쉬운 요구도 있었다.
루페르트는 프리드리히 그리고 슈발츠마인 선제후 가문의 인재를 최대한 활용하여 그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걸 구분하여 협의를 이끌어 갔다.
쌓이는 서신의 양과 합의된 사항이 많아질수록, 루페르트는 흐릿하던 윤곽이 확연해지는 걸 느꼈다.
그렇게 한 달을 남겨 놓고 한 장의 서신이 도착했다.
평범한 서신과는 다르다.
두루마리 겉봉부터 금박에 장인이 아로새긴 갖가지 화려한 장식과 문양으로 가득했다.
두루마리를 펼치자 그 안엔 무려 레벤호스트 본인이 친필로 쓴 서신이 담겨 있었다.
우리 트라이아는 슈발츠마인 선제후를 강력하게 지지하는 바이오.
'저 레벤호스트가 날 지지하는군. 날 그렇게 업신여기던 그 멋쟁이 선제후가.'
레벤호스트의 지지 선언은 루페르트를 강하게 고무시켰고, 불안을 확신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건 가능할지도?"
렌타이어마르크 선제후는 친필 서신은 보내지 않았지만, 거의 비슷한 급의 확약을 해 왔다.
루페르트의 가슴은 전례 없이 두근거렸다.
'보인다. 황제의 자리가. 황궁이. 황궁의 벽이 내 눈에 보인다.'
최대의 난관이 의외로 쉽게 넘어갈 조짐이 보인다.
어찌 기쁘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시간은 흘러 선거일.
테타우의 황궁 안에서 선거가 진행됐다.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투표가 이루어졌고, 곧 중재자인 아카이아 대주교가 결과를 발표했다.
"걱정할 건 하나도 없습니다. 선제후님."
자신보다 더 의기양양한 프리드리히를 뒤에 거느린 채 루페르트는 발표를 기다렸다.
곧 아카이아 대주교가 제국 의회의 만인이 보는 앞에서 결과를 발표했다.
"결과. 로이겐 뇌르겐틀링 1표. 마티아스 1표...."
순조로운 출발.
이변은 없을 것이다.
'내 표와 대황후의 표. 거기다 선제후 두 명의 표가 나에게 있다.'
루페르트는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 아카이아 대주교의 다음 말에 귀를 기울였다.
"카를 호이징거 4표."
"?"
루페르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4표? 카를 호이징거가?'
루페르트는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왜냐하면 그뿐만 아니라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꽤 오래전부터 활동했던 루페르트나 로이겐과 달리, 카를 호이징거는 불과 두 달 전에 나타난 아무 명성은커녕 정보조차 없는 인물이었다.
'그자가 4표라고...? 그 무명의 인간이 황제가 된다는 소린가?!'
"그리고 마지막. 루페르트 가우저."
아카이아 대주교의 주름진 눈이 루페르트를 향한다.
"1표."
[ 역시 예상한 그대로네요. ]
리프니에가 혀를 찼다.
[ 빨리 나팔을 부세요. 지금 당장! ]
* * *
"...."
어두운 회랑.
루페르트는 조금은 얼빠진 얼굴로 어슴푸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니, 1표라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린가? 분명 내가 얻어야 할 건 4표인데. 어째서 1표지? 대황후는? 대황후께서는 내게 투표하지 않으신 건가?! 아니 대황후의 표를 얻었다고 해 봐야....'
루페르트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너무 쉽게 생각한 걸까.
아니, 생각이고 뭐고 할 것도 없다.
그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프리드리히가 아무리 무능한 인간이라고 하지만, 사안이 단순한 만큼 그의 주장은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아니, 그런 약조까지 받았는데.'
[ 루페르트 가우저. ]
회랑 너머에서 뚜렷한 여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페르트는 보이지 않는 여신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네. 여신님."
[ 제가 볼 때 이번 사안은 당신으로서는 해결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여요. ]
"...그, 그렇습니까?"
[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이 문제를 해결할 사람이 당신을 도울 테니. 이를테면 조력자지요. ]
"조력자요?"
[ 네. ]
순간 루페르트는 앞을 보았다.
한 사내가 서 있었다.
크고 기골이 장대한 보는 것만으로 위압감이 느껴지는 거한.
그런데 이 사내.
루페르트가 아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늘 이곳의 의자에 앉아 있던 그 노인?!'
늘 안락의자에 앉아 있던 노인이 위풍당당하게 루페르트 앞에 서 있었다.
"루페르트 가우저라고 했나?"
노인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으며 두건의 그늘에 가려진 그럼에도 선명히 보일 것 같은 강렬한 안광을 내뿜으며 루페르트를 응시했다.
"이번엔 함께 가세."
49화 13. 회랑의 노인 (3)
날씨는 화창했고, 바람은 선선했다.
활짝 열린 창문 너머엔 기하학적인 미를 간직한 잘 정돈된 정원의 풍광이 펼쳐져 있었다.
양옆에 두 개의 잘록한 기둥을 거느린 발코니 위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는 건 최근 몇 달간 오직 루페르트의 특권이었다.
한 사람이 추가됐다.
10분이 지났건만 루페르트는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자신 옆에서 말없이 정원을 바라보는 노인의 옆모습을 응시했다.
'이 사람도 밖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이었나.'
내심 결정지었다.
이 노인은 그 어두운 회랑에 묶인 수인(囚人)이라고.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루페르트의 생각이었다.
노인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시간과 차원의 벽을 넘어 루페르트가 시간의 책갈피로 저장한 세계에 나타났다.
묘한 침묵이 흐르던 선제후의 집무실에 이윽고 진한 한숨 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려 퍼졌다.
"실례했네. 모처럼 밖에 나오다 보니 살아 있는 햇빛과 풀 내음을 머금은 바람, 흐르는 구름과 무엇보다 저 동화 같은 하늘색이 내 마음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더군."
노인이 몸을 돌렸다.
"그럼 시작해 볼까?"
순간 루페르트는 노인이 갑자기 젊어진 것 같은 착시를 느꼈다.
"결과와 경위를 간략하게 설명해 보게."
그는 뒷짐을 진 채 방 안을 소리 없는 발걸음으로 거닐었다.
루페르트는 노인의 일거수일투족에 묘한 전율을 느끼며, 그에게 있었던 일을 정리해 노인에게 말했다.
어떻게 선거를 준비했고, 어떻게 선거 전략을 짰고, 선제후의 마음을 얻기 위해 들인 노력과 정성, 그리고 처참한 결과에 관하여.
"...."
노인은 이야기가 지속되는 내내 집무실 안을 거닐다 이야기가 끝나는 시점엔 한 동상 앞에 머물러 그것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직 피지 않은 풋풋함을 갖춘 소녀의 조각상.
리프니에의 주문품이다.
노인은 꽤 오랫동안 짙은 음영이 드리운 눈동자로 조각상을 응시했다.
그 모습을 보고 루페르트는 생각했다.
'이 노인은 아마도 선제, 철혈대제. 역시 아내의 어린 시절의 조각상을 보고 느끼는 바가 있었던 걸까.'
둘은 천상의 짝으로 알려졌다.
금슬은 말할 것도 없었다.
제국의 역사를 통틀어 황제와 황후의 이름이 나란히 거론된 건 선제 시절을 제외하면 전무했으니까.
오랜 침묵 끝에 노인이 입을 열었다.
"이건 카를 빔펜의 작품인가?"
"맞습니다."
루페르트가 속으로 놀라움을 감추며 대답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작자를 알리는 표식은 어디에도 없는데."
"이런 걸 만들 수 있고 만드는 건 오직 카를 빔펜뿐이지."
'유명했구나. 그 사람.'
노인은 청초한 모습으로 살짝 뒤돌아선 조각상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듣자 하니 안젤리나도 그대에게 표를 주지 않았다고 하던데."
"그렇습니다."
"그녀의 몸이 좋지 않다고 들었는데."
"네. 그렇습니다."
루페르트는 죽어 가던 대황후의 모습을 떠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어쩌면 지금쯤, 돌아가셨는지도 모르지.'
지난 선거에서 투표를 행사한 표는 총 7개.
한 표는 기권했다.
그 기권표의 주인이 대황후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나중에 한번 만나러 가세."
"네?!"
"문제라도 있나?"
"그게, 아마 대황후께서는 저를 만나 주지 않으실 겁니다."
"걱정하지 말게. 젊은 황제. 다 방법이 있으니. 거기다가 안젤리나 표는 딱히 없어도 관계가 없어."
노인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으며 집무실 중앙에 놓인 회의 테이블 앞에 앉았다.
알 수 없는 위압감에 루페르트 또한 노인 반대편에 자연스럽게 착석했다.
루페르트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저 노인, 아니 그 불세출의 황제인 철혈대제가 집무를 시작하려 하는 것이다.
이건 상상으로도 생각해 보지 못한 기연이다.
두 개로 분열될 뻔한 제국을 하나로 합치고, 저지대의 반란을 위시한 최근 기세가 차오르던 외국 동맹군을 분쇄하여 누란지위에 처했던 제국의 지위를 다시 대륙 최강국으로 끌어올린 저 위대한 황제의 통치를 바로 옆에서 볼 수 있다니.
"잉겔하트 공작이라고 했나? 자네의 조언가로 활약했다는 자가?"
"네. 그렇습니다."
"정확히는 잉겔하트-게슈나우 공작이겠지. 안 그래도 좁은 영지가 아들 넷에게 상속돼서 네 개로 다시 쪼개졌거든. 아무튼 그 인간은 썩 머리가 좋은 사람이 아니야. 그래도 성실하니, 큰 책임이 따르지 않는 작은 잡무나 시키면 되겠지."
루페르트는 감탄을 담아 노인을 응시했다.
'이분. 분명 그 회랑에 적어도 10년은 넘게 갇혀 있을 터인데 프리드리히 헤첸 같은 평범한 사람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어.'
"개에겐 개의 일이 있고 고양이에겐 고양이의 일이 있지. 말도 소도 저마다의 목적을 가지고 사육되지 않나? 인간도 크게 다를 바가 없어. 저마다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있어. 단지 옷을 입었고 출신과 배경이라는 깃털을 달고 있기에 쓰임새를 알기가 어려울 뿐이지."
노인은 책상 중앙을 자리 잡은 제국 전도를 응시했다.
슈발츠마인 선제후령을 위시한 일곱 선제후령, 선제후령만큼이나 제국의 상당 부분을 차치하는 교회령과 세속 군주령, 그 사이사이 요지에 알처럼 박힌 제국 도시들.
이 수많은 독립된 국가와 사회가 느슨하게 연합한 것이 소위 말하는 제국이다.
노예제 티그리트가 세운, 천 년을 향해 달려가는 제국이다.
앞으로 6년만 지나면 제국은 천 년을 넘어선 유일무이한 제국으로 거듭난다.
툭.
노인이 지도 구석 은으로 만든 상자에 담긴 장기말을 하나 꺼내 지도 위에 놓았다.
지도 위에 놓인 장기말은 일곱 개, 모두 선제후령 위에 우뚝 섰다.
"그렇다면 선제후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
그게 핵심이란 건 루페르트도 알고 있다.
투표권을 쥔, 저 강력한 선제후가 대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지난 회차에서 루페르트가 프리드리히와 함께 골머리를 싸매가며 알아내려 하던 것이었다.
결국 찾아낸 해답은 개인적인 이익이었다.
그러나 그 답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잘 모르겠습니다."
루페르트는 정직하게 답했다.
노인의 시선은 지도를 향했다.
"선제후의 일은 영지의 보존과 발전이야. 그들은 신에게 상업의 발전과 제국의 평화를 기원하지. 하지만 모든 선제후가 같은 소원을 비는 건 아니야."
노인의 주름진, 그러나 여전히 억셈이 남은 손이 그 장기 말 중 하나를 들어 올렸다.
장기말 아래에 쓰인 문구.
[ 고어문트 ]
"고어문트는 최근 몇 년 사이에 지나치게 부유해졌지. 크로지우스가 일으킨 난 때문에 교역의 중심이던 제국 도시 몇 개가 불에 타고 거기다 새로운 도로와 교역망이 자기 영지에 생기면서 그전까지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거대한 부를 손에 쥐게 되었어."
노인은 그 장기말을 만지작거리며 방 안을 천천히 거닐었다.
"돈은 인간을 변하게 하지. 돈 자체엔 가능성이라는 속성이 있거든. 고어문트 선제후는 신에게 새로운 것을 기도하기 시작했지. 바로 왕조적 야심이란 선제후에게 금지된 것들을."
"왕조적 야심...."
"사람들은 크로지우스가 제국을 끝장낼 뻔했다고 떠들어 대고 있지만, 진정한 재앙은 고어문트였지. 천년 간 유지되던 일곱 선제후의 힘의 균형이 무너질 수 있었으니."
노인이 장기말을 지도 위에 눕혀서 내려놓았다.
루페르트는 고어문트라는 문구 위에 누운 장기말을 보며 조용히 타오르는 전율이 몸을 휘감는 걸 느꼈다.
"...."
단 한 번도 들은 적도 없고 생각해 본 적이 없던 주제다.
저 크로지우스보다 더 위험한 재앙이 존재했다니.
"선대의 이야기지. 현재의 고어문트 선제후와는 관계가 없는 이야기지. 골트문트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루페르트는 저 울피아나의 부친이자 은발의 미남자 얼굴을 떠올렸다.
"그 사람은 절 탐탁지 않게 여기더군요."
"그래?"
"몇 번이고 암살자를 보냈습니다."
이에 노인은 웃었다.
"당연한 결과지. 자기 부친이 당하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봤으니. 아마 모든 선제후를 통틀어 가장 슈발츠마인 선제후가 제위에 오르는 걸 반기지 않을 인물일걸?"
"그가 세운 후보가 황제가 되었습니다."
지난 시간 축에서 황제가 됐던 자는 카를 호이징거.
선거가 있기 불과 두 달 전 골트문트가 급히 후보에 올린 무명의 젊은이다.
"그래? 그럼 그 젊은이나 한번 보러 갈까?"
노인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긴 눈썹과 음영에 가려져 있지만, 그의 얼굴엔 소년의 호기심 같은 반짝임이 있었다.
의외였다.
어둠과 하나 된 것 같은 사물과 별반 다를 바 없던 저 노인에게 이런 일면이 있다는 건.
똑똑.
시종이 문을 두드렸다.
루페르트가 묻자 문 너머에서 시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잉겔하트 공작께서 방문하셨습니다."
루페르트는 노인을 응시했다.
노인이 다시금 장난기를 담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의 뜻을 읽은 루페르트는 고개를 끄덕이고 문 너머를 향해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분에게 전해 드려라. 안타까운 일이지만, 생각이 다른 거 같다고."
잉겔하트는 해고다.
그의 방법은 엉터리고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어둠 속의 노인이 곁에 있다.
철혈대제일지도 모르는 존재가 있는데, 어찌 잉겔하트 같은 하찮은 자를 곁에 두겠는가.
"그나저나 이 문을 나서야 한다는 소리군."
노인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그의 뜻을 알아차린 루페르트가 조용히 물었다.
"대단히 실례되는 일입니다만 그쪽을 뭐라고 부르는 게 좋을까요?"
노인은 집무실 구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녀 시절의 안젤리나의 동상이 말없이 서 있었다.
"루돌프."
노인이 말했다.
"안드리아의 루돌프라고 불러주게."
* * *
제국의 선제후는 제국의 국경 밖에서 왕을 칭하는 군주와 동격이다.
따라서 그의 행차는 철저히 공적인 것이고 그 자체가 정치적인 행위다.
그러나 루페르트와 루돌프는 선제후와는 거리가 먼 은둔자의 방식을 택했다.
루돌프는 놀라울 정도로 저택의 구석구석을 잘 알고 있었고, 암행에 필요한 준비와 방식을 꿰고 있었다.
"놀랍군요. 새 선제후께서 이곳을 찾아오실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말입니다."
선제후 저택의 뒤편에 자리 잡은 하역장엔 린넨부르크라는 험상궂은 사내가 있었다.
피부색도 그렇고 생김새도 그렇고 그에게선 사막의 색채와 사나움이 느껴졌다.
루페르트는 그가 상의에 달고 있는 브로치를 보았다.
여섯 개의 별.
그것은 한 민족을 상징한다.
'하브루타 사람인가?'
하브루타인은 사막의 주민으로 나라를 잃고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유랑 민족이다.
타민족에 섞이는 대신 자신의 종교와 정체성을 유지하려 들기에 가는 곳마다 박해를 당하지만, 특유의 근면성과 부유함 덕에 사회 곳곳에서 암약한다.
저 사내, 린넨부르크가 속한 여행자 길드도 그중 하나다.
다만 그 여행자의 길드의 사업이란 게 범법과 준법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지라 평판은 썩 좋지 못했다.
'묘하군. 저잣거리도 아니고 슈발츠마인 선제후 저택에 저런 자들이 존재하고 있었다니.'
의심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루페르트를 보며 린넨부르크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거의 10년만일 겁니다. 선제후 본인께서 직접 이곳을 찾는 건. 제 선임자의 선임자 일이라 말로만 들었는데 진짜로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이야...."
루돌프는 린넨부르크에게 필요한 것들을 요청했다.
린넨부르크는 루돌프를 유심히 봤지만, 그의 얼굴까진 알아보지 못하는 눈치였다.
다만 루돌프의 수완과 지식에 탄복하는 눈치.
필요한 서류를 작성하며 조심스레 묻기까지 했다.
"실례지만 그쪽은 우리 여행자 길드와 거래를 튼 적이 있으신가요? 저보다 실무를 더 잘 아시는 것 같아서 묻는 말입니다."
이에 루돌프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소싯적에 여행자 길드에 몸담은 적도 있었지. 다 지난 일이긴 하지만. 그보다 최근 사업은 어떠한가? 잘되고 있는가?"
"그게 최근은 어렵습니다. 새로운 도로가 닦이고 치안이 좋아지면서 도적도 줄고, 돈이 된다는 소문이 도니 경쟁자도 많아지고. 심지어 고어문트에선 우리 길드를 드러내 놓고 배격하는 눈치지요."
"세상이란 바다는 늘 변하기 마련이니, 시대에 던져진 자는 언제나 그 흐름을 눈여겨봐야지."
필요한 걸 모두 얻은 후, 루페르트와 루돌프는 조용히 고어문트 선제후령을 향한 짧은 여행에 나섰다.
카를 호이징거는 이곳 슈발츠마인에 있었다.
루페르트처럼 드렌부르그라는 작은 영지의 남작을 맡아 체류하고 있다고.
하루는커녕 2시간도 걸리지 않는 여정이다.
신록이 돋아나는 봄의 풍경을 보며 루페르트는 루돌프와 말머리를 나란히 한 채 목적지를 향해 나아갔다.
루페르트는 루돌프의 눈치를 보다 조심스레 물었다.
"정말이십니까? 여행자 길드에 계셨다는 게?"
믿기지 않는 소리다.
나라에서 인정했다고 하나 린넨베르크의 행색을 보면 알겠지만 반쯤은 깡패 집단이다.
골트문트가 괜히 배격하는 게 아니라는 소리다.
"이민족 집단에 몸을 담은 적은 없네."
루돌프가 웃으며 답했다.
"거짓말을 한 거지."
"그렇군요."
"마음에 들지 않는가?"
"그건 아닙니다."
"호라도 말했지.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하지만 말이야. 거짓이라는 게 반드시 나쁜 것일까?"
"글쎄요. 반드시는 아니겠죠."
"거짓에도 종류가 여러 가지 있지. 수가 뻔히 보이는 천박한 거짓, 말하는 자신조차 속아 넘어갈 정도로 기만적인 거짓이 있는 반면 타인의 기분을 달래기 위한 선의의 거짓도 있어."
루돌프가 루페르트를 돌아보았다.
두건의 음영이 가린 깊이를 알 수 없는 푸른 눈동자 중앙에 루페르트의 앳됨이 남은 얼굴이 선명하게 박혔다.
"황제는 늘 거짓을 가까이해야 하지. 신과 비슷한 위치에 있지만, 신과 달리 유한한 권능을 가졌기에 만인의 청을 전부 들어줄 순 없거든."
"그런 말을 들은 적은 있습니다. 좋은 황제는 좋은 거짓말쟁이라고."
"모든 약속을 지킬 필요는 없어. 불가능하기도 하고. 그러나 아무 약속이나 허투루 어긴다면 평판에 금이 가게 되겠지. 고로 우리는 잘 고르고 선택해야 하지. 반드시 지켜야 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멀리 푸른 하늘 아래 아담한 푸른 지붕의 저택이 보인다.
기묘하게도 그 장원은 위버하임과 거짓말처럼 닮아 있었다.
"카를 호이징거 남작님 말씀입니까? 남작님은 지금 저택에 계시지 않으세요. 실례지만 누구라고 전해 드릴까요?"
저택의 고용인이 의심쩍은 눈으로 이쪽을 응시했다.
루돌프가 무뚝뚝한 어조로 답했다.
"한스라는 사람이오. 나중에 다시 찾아오겠다고 전해 주시게."
저택을 떠나면서 루페르트가 물었다.
"그냥 가명을 밝히는 것보다 돈이라도 쥐여 주는 게 낫지 않았을까요?"
"돈을 주면 반드시 우리를 남작에게 말하겠지. 먹을 걸 주면 다시 찾아오는 짐승처럼 말이야. 그건 불필요한 일이지."
"그러고 보니."
"그보다 남작은 어디에 있을까? 짐작 가는 곳은 없나?"
당연히 있다.
루페르트는 쓴웃음을 머금으며 장원에서 멀리 떨어진 소도시로 향했다.
카를 호이징거.
장래의 황제는 주점에서 도박판을 벌이고 있었다.
"하하하하하!!! 또 내가 이겼네! 하지만 이 돈은 모두의 것. 나 혼자 가지진 않겠어! 어이! 모두에게 한 잔 돌려! 카를 호이징거, 아니 카를 3세가 사는 거야!"
저 대책 없는 탕아.
추하고 천박한 여자와 깡패, 비열한 아첨꾼에 둘러싸인 자가 장래의 황제다.
"...."
루페르트는 착잡한 눈으로 왁자지껄 떠드는 젊은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판박이다.
과거의 자신과.
아니 적어도 자신은 저렇게까지 추잡하게 놀진 않았다.
그런데 저 자격 없는 인간이 황제란다.
'역시, 선제후가 원하는 황제는 꼭두각시라는 소리인가? 그들이 눈치를 보지 않고 그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 그럼 다시 묻지. 선제후가 원하는 게 무엇일까?"
두 번째 질문이다.
루페르트는 여전히 루돌프의 깊이를 알 수 없는 눈 안의 감정을 읽어 내지 못했지만, 그가 나름 정리한 역사와 사고를 담아 담담한 목소리에 풀어냈다.
"그들은 자유를 원하는 게 아닐까요?"
정확히는 황제로부터의 자유.
철혈대제 같은 폭군 아래서 눈치를 보고 노예처럼 기어야 했던 시절을 반복하지 않는 것.
그것이 선제후들의 목적으로 보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과거의 자신이나 카를 호이징거 같은 자를 황제로 세울 일은 없었을 터이니.
"반은 맞는 소리군. 하지만 진실에 근접하진 못했어."
루돌프가 미소 지으며 창밖을 응시했다.
루페르트는 답을 갈구하며 루돌프를 바라보았다.
'대체 무엇을 본 겁니까. 당신은?'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눈은 빠르게 흘러가는 구름을 담고 있었다.
'알고 계신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알지 못하는, 당신이 아는 진실을...!'
잠시 후, 루돌프가 얕은 탄식과 함께 짧은 침묵을 깼다.
"...그들이 원하는 건 제국의 해체야."
50화 14. 선거 (1)
"그것은 선제후조차 모르는 욕망이지."
루돌프가 덧붙였다.
"감히 상상조차 해 보지 않았거든. 그 욕망은 마음 깊은 곳에서 그들조차 형태를 알아보지 못하는 덩어리에 머물고 있어. 그러나 그들의 사고와 행동이 가리키는 방향은 명확하지."
루돌프의 눈은 제국 전도 중앙에서 살짝 비켜난 지방을 응시했다.
"희미하게나마 그 욕망의 실체를 이해하고 있는 건 골트문트일 게다."
"골트문트."
과거의 장인이자, 현재 최대의 위협.
"녀석이 선제후들의 여론을 주도한다. 선제후 중 개인적으로 그를 좋아하는 자는 단 하나도 없지만, 적어도 그들의 이권을 위해 뭉칠 때 골트문트는 훌륭한 구심점이지."
그러나 루돌프의 눈에 비친 골트문트의 크기는 대수롭지 않았다.
"하지만 말이야. 우리는 그가 원하는 게 알고 있지 않나?"
* * *
황제 선거를 앞두고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슈발츠마인 선제후가 고어문트 선제후를 방문했다.
최강의 선제후라는 슈발츠마인 가문답게 성대하고 화려한 행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고어문트에게 부를 안겨다 주는 도로를 따라 고어문트의 수도인 브라이아에 도착했다.
고어문트 선제후 골트문트는 성문 밖까지 몸소 나와 신생 슈발츠마인 선제후를 영접했다.
이어진 자리.
루페르트는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이야기했다.
"오는 선거에서 저를 지지해 주셨으면 합니다."
골트문트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맺혔다.
"그것이 선제후께서 저를 찾아온 목적입니까?"
나긋나긋하면서도 가시 돋친 한마디.
골트문트는 진지하게 화를 내고 있었다.
그 분노의 형태는 그의 딸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었으니.
'역시 부전자전인가.'
이번 생에서 울피아나를 황후로 들일 일은 없을 것이다.
독신으로 죽더라도 그 여자와 함께하고 싶진 않다.
그렇게 생각하며 루페르트는 과거의 장인을 보며 담담히 흉중에 담았던 비장의 한마디를 꺼냈다.
"고어문트의 독립을 보장하겠습니다."
루페르트는 골트문트의 얼굴을 유심히 관찰했다.
표정 관리에 능한 골트문트답게 그의 얼굴엔 별다른 표정이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저 차분한 눈동자 깊숙한 곳에 이는 풍랑은 진짜다.
"방금,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말 그대로입니다."
루페르트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선제후령의 독립이라니. 그것이 얼마나 반역적인 언사인지 알고 계시는지?"
"아, 제 배움이 짧아 의도보다 강하게 표현된 것 같군요. 제 의견은 고어문트를 위시한 선제후의 자치권을 대폭 보장하겠다는 이야기입니다."
무지는 늘 루페르트의 약점이었지만 이제 루페르트는 그것을 무기로 활용한다.
'루페르트 가우저. 상상 이상으로 큰 남자다.'
더 이상 루페르트 가우저는 시골 출신 무지렁뱅이가 아니다.
자신과 같은 반열에 놓인 위협적인 경쟁자다.
그렇게 생각하며 골트문트가 넌지시 물었다.
"선제후께서 생각하시는 자치권의 확장에 관해 구체적인 사항을 듣고 싶군요."
"선제후의 권한을 늘릴 생각은 없습니다."
골트문트의 얼굴에 노골적인 반감이 떠오른 그 순간, 루페르트는 빙그레 웃으며 자신의 의견을 보충했다.
"대신 황제의 권한을 대폭 축소할 생각입니다."
루페르트는 상대방을 보았다.
그토록 거대하고 치밀하며 속을 알 수 없었던 선제후가 지금 정수리를 드러내고 있다.
마치 거인의 손바닥 위에 오른 채 춤을 추는 것처럼.
"그거 흥미로운 이야기군요."
골트문트의 지지를 이끌어 내진 못했다.
다른 선제후처럼 그 또한 애매모호한 방식으로 답변을 회피했으니.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다음을 위한 포석이다.
"골트문트의 지지를 받지 못한 게 못내 아쉬운가?"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루돌프가 창밖을 바라보는 루페르트를 응시하며 진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조금은 아쉽군요. 그분이 뭘 원하는 조건을 가지고 갔다고 생각하는데."
"어차피 골트문트의 지지 따윈 기대하지도 않았어. 중요한 건 그다음이지."
"그다음이 있습니까?"
"아마 지금쯤이면 시작하고 있겠지?"
루돌프가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골트문트가 내세운 후보 카를 호이징거의 비위가 알려진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자세한 사항은 어떤 세력의 개입에 의해 흐릿하게 가려졌으나, 카를 호이징거가 마약에 취해 사람을 다치게 하고 여급 하나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까진 가리지 못했다.
"이를테면 마음의 빗장을 푼 격이지."
루돌프는 즐거워 보였다.
"그대를 만나 그대의 생각을 듣지 않았다면 여전히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을 터이고, 자신이 내세운 허수아비를 최후까지 끌고 안았겠지."
여행자 길드를 위시한 가문의 밀정이 치열하게 움직이며 소식을 전했다.
골트문트는 카를 호이징거에 대해 대단히 실망했으며, 그답지 않게 고성까지 내지르며 카를 호이징거를 책망했다고 한다.
"이제 작은 균열이 생겼군."
루페르트는 묻지 않았다.
카를 호이징거의 행위 이면에 자리 잡은 내막을.
다만 속으로 생각할 뿐이다.
'손을 쓰셨군. 카를 호이징거에게.'
극도로 효율적이지만 동시에 극도로 비정한 방법.
그것은 철혈의 길이다.
"자, 그럼 이제 다른 얼간이들을 설득해 볼까?"
철혈의 길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루돌프의 조언은 루페르트가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로 그 보폭이 넓었다.
"...그런 약속을 하라는 말입니까?"
가장 따라가기 어려운 건 루페르트가 봐도 도저히 지킬 수 없는 허무맹랑한 약속이었다.
'이건 반드시 나중에 문제가 될 것이다.'
"나중에 문제가 될 거라고 생각하나?"
루돌프는 날카롭게 질문을 던졌다.
마치 생각을 읽히는 기분.
루페르트는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건 걱정할 필요가 조금도 없는 거야."
먼 곳을 바라보며 루돌프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황제가 되면 많은 것들이 변하기 마련이니."
그렇게 많은 약속이 오갔다.
슈발츠마인 가문의 가로들이 단체로 찾아올 정도로 엄청난 약속들이.
"아니, 갓 우리 가문에 편입된 자가 가문을 통째로 팔아넘기려는 건가?"
"아무리 황제직이 중요하다고 하나 우리의 등골을 빼 주면 다음은 어쩌라는 건지?"
가문의 불만이 팽배했으나, 루페르트는 무시했다.
이 또한 루돌프의 생각이다.
"오히려 훌륭한 흐름이군. 우리 가문 안에도 얼간이들의 세작이 있을 터이니. 가문이 부작위로 우리를 돕는 거지."
선제후들이 루페르트를 부르거나, 또는 스스로 찾아왔다.
그중엔 루페르트를 그토록 싫어한다는 노르드마르크 선제후 게오르크 아르님도 포함되어 있었다.
대뜸 루페르트의 집무실로 쳐들어온 그는 걸걸한 목소리로 팔다리를 휘저으며 고성을 냈다.
"서신은 보았다만, 지킬 수는 있는 약속인가? 내 듣자 하니 다른 선제후에게도 약속을 남발했다고 하던데."
이에 루페르트는 게오르크 아르님에게 은은한,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머금었다.
게오르크 아르님의 눈동자가 루페르트의 입가에 고정됐다.
여기 오기 전, 루돌프가 한 말이 있다.
"높은 사람일수록 할 수 있는 거짓의 종류는 늘어나는 법이지. 물론 높은 사람이 거짓을 남발하면 높은 곳에서 끌어내려지겠지. 고로 현명하게 행동할 필요가 있어. 내가 생각할 때 최고의 거짓말은...."
루돌프가 미소를 머금었다.
은은하면서도 신비롭고 위험과 권위가 느껴지는 힘을 머금은 미소.
'이것이 황제의 미소인가.'
그 미소는 단지 미소만으로 머무르지 않는다.
미소를 머금은 채 루돌프가 덧붙였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오류에 빠지도록 하는 것이지."
그 미소는 늪이자 펄이며 욕망을 삼키는 소용돌이다.
같은 미소가 다른 곳에서 다른 사람에 의해 재현됐다.
게오르크 아르님은 굳은 얼굴로 저 젊은 선제후의 미소를 노려보았다.
'이 친구.'
만만치 않은 인간이다.
실로 만만치 않다.
별 볼 일 없는 무지렁뱅이가 아니다.
'왜일까. 이 친구에게서 클라우데 2세의 냄새가 느껴지는 건.'
이 친구는 위험하다.
그것도 대단히 위험하다.
그러나 그가 제시한 조건은 그 위험을 감수할 수 있을 정도로 달콤했다.
'설마 이 친구가 감히 날 상대로 약속을 어기겠어?'
게오르크 아르님은 물러났다.
자신이 오류에 빠진지도 모른 채.
"저 친구는 자네에게 투표하지 않겠지."
루돌프가 안락의자에 앉은 채 조용히 읊조렸다.
"저에게 표를 안 준다는 말씀입니까?"
"줄 인간이 아니야. 남 잘되는 걸 죽어도 못 보는 인간이지. 하지만 적어도 타인을 뽑지도 않겠지."
그만이 아니다.
루돌프는 레벤호스트도,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도 같은 위인이라고 평가했다.
"그나마 표를 줄 만한 건 아카이아 대주교인가?"
유일한 성직 선제후 아카이아 대주교.
그의 마음을 얻기 위해선 굳이 그를 찾아갈 필요는 없었지만, 대신 그보다 몇 배는 수고로운 행사를 치러야 했다.
5월이라고 하나 타는 듯한 햇볕이 내리쬐는 거리.
한 사내가 맨발로 뜨거운 대지 위에 서서 앞을 노려본다.
그 앞엔 채찍을 가지고 양옆으로 도열한 사내들이 두건을 쓴 채 길을 열어 놓고 있었다.
사내는 맨발로 뜨거운 대지를 걸으며 행렬의 중앙을 향해 나아갔다.
채찍들이 사내의 등을 사정없이 후려친다.
피가 튀고 발걸음이 휘청거리지만, 사내는 굳은 얼굴로 행렬의 끝을 향해 묵묵히 걸어갔다.
이른바 태형장의 행진.
호라신에게 제국의 안녕과 평온을 기원하는 룸 제국 시절부터 이어진 행사다.
"...크윽."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루페르트는 제대로 눕지도 못하고 엎드린 채 상처의 고통을 감내하고 있었다.
[ 정말이지, 야만적인 행사네요. ]
오랜만에 여신님이 말을 걸어왔다.
"그렇습니다. 정말이지 야만적인 행사네요."
[ 제국인이 잔인하다고 하지만, 원 제국, 룸인들의 잔혹성과 포악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죠. ]
"그렇다고들 하더군요."
루페르트도 알고 있다.
그 강성하던 룸 제국이 천 년도 버티지 못해 멸망하고, 그 룸 제국의 후예라고 칭하는 나라조차 존재하지 못하는 이유는 룸인들이 저지른 죄악의 업보라고.
[ 그나저나 루페르트 가우저. 잘 배우고 있나요? ]
"네, 그렇습니다."
루페르트는 루돌프 쪽을 쳐다봤다.
안락의자에 앉은 노인은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잠깐의 오수를 즐기는 모양.
"정말이지, 너무나 배울 게 많아서 걱정입니다."
루페르트가 인상을 찌푸렸다.
채찍에 맞은 상처에 땀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크윽! 가, 가끔 이상한 일만 시키지 않으시다면 말입니다."
[ 당신이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니 보기가 좋네요. 루페르트 가우저. 아마 다음에 우리가 만날 땐 당신은 황제가 되어 있겠죠? ]
"그랬으면 좋겠군요."
[ 여전히 확신이 없네요. 당신이라는 사람은. ]
"...죄송합니다."
[ 당신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지만 저는 당신이 평범하기에 남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실제로 당신은 이미 많은 일들을 해냈잖아요? ]
"그렇습니다."
[ 용기를 가지세요. 루페르트 가우저. 당신은 어쩌면 당신이 상상하는 이상으로 대단한 사람일지도 모르니까요. 게다가 저 말고도 당신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거 같네요. ]
과연 그 말대로였다.
시녀가 문을 두드리더니 편지 한 장을 가지고 왔다.
루페르트는 엎드린 채 편지의 발신인을 읽었다.
[ 피리스 ]
'피리스?!'
실로 오랜만에 듣는 이름.
루페르트는 고양이처럼 눈이 큰 붉은 머리 아가씨를 떠올리며 편지를 개봉했다.
남작님, 잘 지내고 계시죠?
저 정규 과정에 들어갔어요. 자랑은 아니지만 거의 역대급으로 빠른 승급이라고 하네요.
지도 교수님도 생겼어요. 놀랍게도 헬브라이트 베틀렌 교수님이세요! 남작님이 저에게 사 줬던 그 책을 쓰신 분 말이죠! 매일매일이 꿈속에 사는 것 같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 중심엔 남작님이 있답니다!
좀 더 노력하고 남작님에게 도움이 되도록 정진할게요.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마법적인 날을 기다리며, 테타우에서 피리스가.
편지를 읽는 내내 루페르트의 입가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피리스. 너도 열심히 하고 있었구나. 그러나 피리스. 그런데 난 이제 남작이 아니라 선제후님이란다....'
루돌프가 눈을 떴다.
"오. 선제후."
루돌프가 지그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은 일이라도 있나?"
"아, 아는 사람에게 편지가 와서요."
"여잔가? 그것도 나름 마음을 줄 정도로 매력 있는 여성일 거 같은데."
"어떻게 알았습니까?"
"뭐, 남자라는 건 단순한 생물이니. 나도 그런 적이 있기도 했고."
"당신께서 말입니까?"
"나도 사람이니. 괴물처럼 보지는 말게. 그보다 진짜 괴물한테 연락이 온 거 같던데."
루돌프가 소라고둥을 깊은 눈으로 응시했다.
"괴, 괴물이라니요."
"괴물 맞잖아? 그런 걸 괴물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뭘 괴물이라고 불러야 할까?"
갑작스러운 루돌프의 언사에 루페르트는 강한 혼란을 느꼈다.
'아니, 농담치고는 과한 거 같은데. 그보다.'
"저기, 리프니에 님이 들으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못 들어."
"?!"
루돌프가 빙그레 웃었다.
"알려 줄까? 우리의 여신이 언제 어떻게 느끼고 반응하는지."
"?!"
'이건, 농담이 아니다.'
"리프니에의 패턴이 알고 싶나?"
'진심이다. 이건.'
순간 루페르트는 느꼈다.
어쩌면 저 노인, 루돌프는 리프니에를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51화 14. 선거 (2)
"그 작은 소라고둥 안을 들여다본 적이 있나?"
소라고둥 안을 들여다본 적은 없다.
호기심이 없진 않았지만, 루페르트의 신앙심은 그 가벼운 호기심을 덮어 버릴 정도로 강했으니까.
다만 일상을 영위하던 중 얼핏얼핏 보았던 소라고둥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무게도 그러했고.
"텅 비어 있지. 아무것도 없어."
루돌프는 루페르트와 신앙심의 깊이가 달랐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 소라고둥이 그대와 여신의 매개체라는 건 확실하지. 하지만 말이야. 젊은 황제여. 여신이 과연 그 소라고둥 안에 항상 머문다고 단정할 수 있는 걸까?"
"죄송합니다."
루페르트가 루돌프에게 정색한 표정으로 아뢰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어렴풋이 그의 정체를 파악한 루페르트로서 저 노인은 동경의 대상이자, 되고자 하는 모범이니까.
그러나 아무리 그라고 해도 리프니에를 의심하거나 모독하는 건 루페르트로서는 넘어갈 수 없는 일이다.
"저는 그 사안에 관심이 없습니다."
루페르트는 딱 잘라 말했다.
루돌프의 살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호오."
"...."
"여신님을 어지간히 존경하는 모양이군."
"그분은 저에게 모든 걸 주신 분입니다. 여신님이 없었다면 저의 생은 불타는 황궁에서 그대로 끝이 났겠지요. 황궁의 벽에 새겨지지도 못한 미완의 황제로 말입니다."
"그대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더는 이야기하지 않겠네. 하지만 그대도 숨기고 싶은 사적인 영역 정도는 있지 않나?"
"...그건."
루돌프가 소년 같은 짓궂은 미소를 머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찰나에 루페르트는 루돌프가 젊어 보이는 듯한 착시를 느꼈다.
노인이 아닌 힘 있는 턱과 강렬한 선을 가진 쾌활하면서도 올곧은 눈빛을 가진 젊은이의 모습을 보았다.
그 환각은 곧 연기처럼 사라지고, 지혜만 남은 노인의 얼굴이 제자리를 찾았다.
"여신님이 늘 모든 걸 지켜보는 건 아니야. 대부분은 늘 그대 곁을 떠나 있지. 그대도 느끼지 않았나? 여신님이 가끔 지나치게 오래 말씀하시지 않는 것을?"
"...."
그렇다.
리프니에는 말을 할 때보다 말을 하지 않는 때가 더 길다.
분명 루페르트는 그것이 여신이 자신에게 실망했거나 혹은 굳이 말할 가치를 느끼지 못해 그러는 것이라고 이해했었다.
하지만 저 노인은 루페르트가 생각하지 못했던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분명 들어서는, 듣기 싫은 내용이지만 호기심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멈춰야 하는데. 이 이상의 불경을 여신님께 저지르고 싶지 않아.'
갈등 속에서 노인의 말은 이어졌다.
"어쩌면 여신은 아주 짧은 순간 그 소라고둥에 머무를지도 모르지. 그대가 강한 충격을 받거나 강렬한 감정을 느낄 때? 한 가지 확실한 건 정오 무렵에 여신님은 결코 그 안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거지."
이어지는 말속에서 루페르트의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고 루돌프의 그늘 진 시선은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그대 표정을 보니 이쯤 해 두는 게 좋겠군."
루돌프는 웃음기를 머문 채 돌아섰다.
"...그 믿음. 소중하게 간직하길."
뒤돌아서자마자 루돌프의 웃음기가 섬뜩할 정도로 빠르게 지워졌다.
* * *
등의 상처가 아물며 고통이 참기 어려운 가려움으로 변할 무렵, 아카이아 대주교가 사람을 하나 보내왔다.
그는 힐데브란트 주교라는 사람으로 싸움질이나 할 법한 우락부락한 생김새의 소유자였는데, 생긴 대로 행동도 막무가내였다.
"무례한 일인지 알고 있습니다만 선제후님의 상처를 봐도 될까요? 꼭 제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습니다!"
정말로 터무니없을 정도로 무례한 요청이지만 루페르트는 오히려 이를 반겼다.
'바라던 바다!'
입에서 억 소리가 나올 정도로 채찍질을 당했는데 이걸 묵히는 건 일생의 손해.
루페르트는 흔쾌히 상의를 벗어 등의 상처를 힐데브란트에게 보여 줬다.
"이건...!!"
힐데브란트의 눈동자가 놀라움으로 물들였다.
"한 치의 사정도 두지 않은 태형장의 행진이군요!"
"그렇습니까?"
루페르트는 쓴웃음을 머금으며 하인의 보조를 받아 상의를 다시 걸쳤다.
힐데브란트는 우락부락한 얼굴에 나름 경의를 담아 예를 표한 후 걸걸한 목소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조곤조곤한 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러 위대한 황제의 노고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점점 타락으로 물들고 있습니다. 신앙과 미덕을 숭상하는 풍조는 사라지고 돈이나 권력 같은 세속적인 가치가 최고라는 망발이 타의 모범이 되어야 할 귀족들의 입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망조 속에서 신앙의 빛은 점점 시들어 가고 있습니다."
틀에 박힌 소리지만 얼마 전에 호되게 두들겨 맞기도 했겠다, 루페르트는 내심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생각했다.
'확실히 신앙의 빛이 희미해지는 시대이긴 하지. 불신자도 이단도 많아지고. 나중 되면 악마 숭배를 하는 놈들마저 나타나는 판국이니. 당장 나만 해도 호라를 안 믿잖아?'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힐데브란트의 말은 이어졌다.
"예전처럼 이단자가 활개를 치진 않지만, 여전히 제국의 절반에는 신교라는 해충이 뿌리 깊게 파고들어 있죠. 당장 선제후의 절반이 신교를 믿고 있으니 말입니다."
힐데브란트의 눈동자가 루페르트를 은근히 탐색했다.
아마도 표정 변화를 보려는 모양이다.
신교에 대한 루페르트의 감정을 확인하기 위해서 말이다.
루페르트는 아카이아 대주교의 고리타분한 늙은 얼굴을 떠올렸다.
'어지간히 사람을 못 믿는군, 늙은이. 그렇다고 하나 이런 단순한 인간을 보내다니. 아니, 어쩌면 이조차 그 늙은이의 안배일지도.'
루페르트의 얼굴에 아무런 변화가 없자 힐데브란트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어이쿠, 이건 어디까지나 저의 미천한 사견이니 비밀로 해 주시길!"
"심려하지 마세요. 주교님. 제 입은 꽤 무거운 편입니다."
"역시 제국에서 가장 강력한 슈발츠마인의 선제후다운 배포이십니다!"
루페르트는 입에 발린 칭찬에 미소로 응답했다.
"아무튼, 요즘 세상에 선제후님처럼 신앙심이 깊은 분은 찾아볼 수 없지요. 아카이아 대주교께서는 그 많은 후보 중 선출할 인물이 하나도 없다고 탄식하고 계시지만 제가 오늘 두 눈으로 선제후님의 신앙심을 확인했습니다."
힐데브란트가 등잔처럼 큰 눈을 좌우로 굴리더니 귀띔했다.
"좋은 결과가 있으실 겁니다!"
힐데브란트는 과장스러운 몸짓으로 넙죽 인사를 한 후 집무실을 나섰다.
그가 사라지자 기둥 구석에서 한 사내가 소리 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름 아닌 루돌프다.
그는 닫힌 문 쪽에서 쿵쿵 들려오는 힐데브란트의 발소리를 들으며, 집무실 구석에 마련된 안락의자에 느긋하게 몸을 뉘었다.
"이걸로 한 표는 확보했군."
"확보... 한 걸까요?"
"저 주교가 말하지 않았나. 아카이아 대주교. 클라인하르트 본인이 뽑을 인물이 없다고 투덜거리고 있다고. 저 주교가 말했다시피, 여전히 선제후의 절반은 신교를 믿고 있어. 그대도 두 눈으로 보지 않았나?"
"그렇습니다."
"아카이아 대주교는 구교를 믿는 사람 중 그나마 마음에 드는 자에게 표를 행사할 거야. 신심이 사라진 시대에 자네의 행동은 설령 그 의도가 불순하다고 할지라도 아카이아 대주교에겐 충분히 표를 행사할 만한 동기를 준다고 할 수 있지. 애당초 성직 선제후는 그 특성상 기권이라는 행위를 할 수 없거든. 선거에서 기권이라는 행위는 신자의 자살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 알다시피 호라교는 자살을 죄악시하지 않나?"
"...그렇군요."
루페르트는 루돌프의 식견에 내심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지금 루페르트에겐 2개의 표가 있다.
아직 두 표가 부족하다.
"나머지 표는 누구에게서 확보해야 할까요? 일전에 루돌프 님은 세속 선제후 중 대부분은 표를 던지지 않을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만."
현재 투표권을 가진 세속 선제후는 루페르트를 제외하면 다섯 명.
트라이아의 선제후 레벤호스트.
디터팔츠의 선제후 막스 게오르크.
노르드마르크의 선제후 게오르크 아르님.
렌타이어마르크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마티아스.
그리고 고어문트의 선제후 골트문트다.
과연 이 중에 누가 루페르트에게 표를 던질 것인가.
도무지 갈피가 잡히지 않는다.
후보를 내지 않은 선제후들은 죄다 표를 던지지 않을 거라고 루돌프가 확언했으니.
느닷없이 나타난 침묵 속에서 루돌프가 손가락 하나를 펴서 지도를 가리켰다.
손가락 끝을 본 루페르트의 눈동자에 놀라움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건.'
[ 고어문트 ]
루돌프의 손가락은 운명의 표를 행사할 사람이 골트문트라고 적시하고 있었다.
'그 사람이?'
믿을 수 없다.
저 골트문트는 자신을 감시한 걸 모자라 몇 번이고 이쪽을 죽이려 들지 않았던가.
그는 지난 시간 축에서 루페르트를 제쳤던 카를 호이징거를 내세운 자이며 제국의 해체를 소원하는 자다.
루페르트를 뽑을 확률은 영에 수렴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오직 그만이 그대에게 표를 줄 수가 있어."
"어떻게 말입니까?"
루페르트의 물음에 루돌프는 특유의 소년 같은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했다.
"그에겐 딸이 있지 않나?"
"...."
루페르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핏기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하얗게.
그럴 수밖에 없다.
그녀, 울피아나는 루페르트에게 있어서 그 어떤 악마보다 가혹한 운명의 심판 그 자체였으니.
"문제라도 있나?"
"그, 그게."
"그대가 그녀와의 결혼 생활에 실패한 건 알고 있네.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지. 성정이 강한 여자더군. 하지만 말이야. 그건 어디까지나 과거의 그대지. 현재의 그대가 아니잖나?"
"그렇다 하더라도...."
루페르트는 주저했다.
다른 건 다 참을 수 있겠지만, 그녀가 남긴 상처가 너무나도 컸기 때문이다.
루돌프가 그런 루페르트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겨우 여자 하나 제대로 상대하지 못하는 자가 제국을 구할 수 있겠나?"
"...."
루페르트는 몸을 축 늘어뜨린 채 고개를 숙였다.
반박하고 싶지만 반박할 수 없다.
반박을 하려고 생각을 짜낼수록, 루돌프의 의견이 정론이라는 것밖엔 보이지 않는다.
'빌어먹을. 하필 울피아나라니.'
루돌프는 고뇌하는 루페르트를 깊은 눈으로 응시하며 의미심장을 미소를 머금었다.
"그대는 여리군."
"...죄송합니다."
"죄송할 거 없어. 여리다고 해서 반드시 암군이 되는 건 아니니. 하지만 말이야. 그대의 소원을 생각한다면 조금은 더 강해졌으면 하는군. 제국을 위해서가 아닌, 그대 자신을 위해서라도."
"...."
루페르트는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모자람을 책망함과 동시에 루돌프에 대한 무한한 감사를 떠올렸다.
'부끄럽다. 정말로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워. 이분은 오직 호의를 가지고 날 대하는데 의심하기나 하고. 여신님에게 악감정을 가질 수도 있는 거지. 솔직히 우리 여신님께서는 지나치게 사치를 좋아하시고 마음대로 하시는 구석도 있으니까.'
툭.
루돌프가 루페르트의 어깨를 쳤다.
마치 친우를 대하는 허물없는 모습.
깜짝 놀라 자신을 바라보는 루페르트를 보며 루돌프가 말했다.
"걱정 말게. 선제후."
"네?"
루페르트가 놀란 눈으로 그를 보자 루돌프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머금으며 허공을 그늘진 눈으로 노려보았다.
"골트문트는 딸을 주지 않을 거야."
52화 14. 선거 (3)
등에 새겨진 딱지가 저절로 떼어지고 가려움이 가시길 시작할 무렵, 루페르트는 골트문트에게 방문하겠다는 전갈을 청했다.
때마침 시의적절하게 리히트보덴에서 진상품을 보내왔다.
노르드마르크의 상회를 통해 운송된 진상품엔 평소 보던 일각고래의 뿔만 아니라, 영롱한 색채로 사람의 눈을 홀리는 진주 또한 가득 포함되어 있었다.
함께 동봉한 아서 픽튼의 서신엔 아래와 같은 글귀가 투박하고 강한 필체로 적혀 있었다.
-약소하지만 선제후님을 위해 준비했습니다. 다음에 연락선이 올 땐 황제가 된 선제후님의 소식을 듣고 싶군요.
'아서 픽튼.'
루페르트가 슈발츠마인을 손에 넣었다고 하지만 모든 재정을 자신이 관리하는 건 아니다.
슈발츠마인에도 선제후 궁정이 있고 궁정의 재정은 가문의 일원들로 구성된 가신들이 관리한다.
재정 지출의 큰 방향과 방침을 정할 순 있지만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자금은 한정되어 있다.
애시당초 별다른 작위도 돈 되는 영지도 없는 루페르트에게 리히트보덴이라는 든든한 자금줄은 루페르트가 정치를 할 수 있는 힘 그 자체다.
돈이 모든 게 아니라고 하지만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건 군주라고 해도 다를 바가 없으니 말이다.
개인의 알량한 충성심은 현실의 고통 앞에서 쉽사리 증발하기 마련이니 말이다.
루페르트는 보석함 안의 진주 중 가장 알이 굵고 색깔이 좋은 것 몇 개와 일각고래의 뿔 중 최상품을 뽑아 골트문트에게 줄 선물로 준비했다.
"호오. 이게 그 일각고래의 뿔입니까? 상아보다 더 윤기가 돌고 감촉이 좋으며 색채 또한 아름답군요."
선물을 싫어하는 군주는 단 한 명도 없다.
대륙에서 가장 부유하다는 골트문트도 예외는 아니다.
있는 놈이 더 밝힌다고 그는 루페르트의 진귀한 선물을 보자마자 흡족한 미소를 머금으며 꽤 오랫동안 그것을 감상했다.
"최상품의 진주군요. 이건. 이런 건 얕고 따뜻한 남쪽 바다에선 나지 않는 것이지요. 아내가 대단히 좋아할 거 같습니다.
하지만 선물은 선물이고 정치는 정치다.
골트문트는 누구보다 그 양자를 뚜렷하게 구분하는 사람이다.
선물을 바라보던 흐뭇한 시선이 날카로운 경계의 시선으로 바뀌는 데는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원하는 게 무엇인지?"
단도직입적인 물음.
예상된 반응이다.
루페르트는 골트문트와 꽤 오랫동안 함께했으니까.
갑작스러운 감정 변화는 골트문트의 특기다.
하지만 루페르트는 알고 있다.
저렇게 표변하듯 행동하고 있지만 진귀한 선물로 골트문트의 마음속 어딘가엔 루페르트의 평가가 살짝 올라갔다는 걸.
총점이 100점이라면 10점 정도는 가뿐히 올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걸 알고서도 루페르트의 마음은 좌불안석이었다.
전매특허인 포커페이스조차 흔들릴 정도의 감정의 폭풍이 내면에서 휘몰아치고 있었던 것이다.
'빌어먹을. 표정 관리가 안 돼!'
어쩔 수 없다.
오늘의 목적은 루페르트에게 아마 이 세상에서 자신을 파멸시켰던 융커스 베샤문트만큼이나 두려워하는 여인 울피아나니까.
이번 생엔 절대로 황후로 맞이하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던 그 무시무시한 여자를 자신에게 달라는 말을 해야 한다.
'진짜 골트문트가 그녀를 내게 내주면 어떻게 하지? 회귀를 해야 하나? 아니, 그 전에 그 여자를 다시 만날 수도 있다는 이야기잖아?'
"선제후님?"
골트문트가 의아해하며 묻는다.
'이 친구. 이런 사람이었나. 촌뜨기라고는 하지만 지난 회합에서 그는 상당히 세련되고 여유가 있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는 순수한 실력으로 선제후 자리를 꿰찬 모두가 주목하는 신성 아닌가?'
골트문트의 시선이 의문에서 의심으로 바뀌기 시작할 때였다.
"저기."
루페르트가 두서없이 입을 열었다.
동시에 그는 자기도 모르게 소라고둥을 꽉 쥐었다.
이유는 알지 못한다.
오랜 습관인지 아니면 리프니에에 대한 믿음이 행동으로 옮겨졌는지.
그런데 그 작은 손짓은 의도치 않은 결과를 가지고 왔다.
[ 흐음. ]
리프니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대충 무슨 사정인지 알겠네요. ]
'여, 여신님!'
[ 참으로 꼴불견이네요. 루페르트 가우저. 정말이지 여자한테 몇 번 당했다고 이런 추태를 보이다니. 도저히 안 되겠어요. 당신의 평가를 하향해야겠네요. 여자아이한테 지는 남자로! ]
'크윽.'
[ 하지만 제가 있잖아요? ]
'여신님.'
루페르트의 눈이 크게 떠졌다.
[ 저질러 버리세요! 루페르트 가우저! ]
여신이 보증했다.
그 말은 어떤 울림보다 그 어떤 선언보다 루페르트에게 명확하게 와닿는다.
루페르트는 의아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골트문트를 의젓한 눈빛으로 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송구합니다만."
루페르트는 소리 내지 않고 침을 꿀꺽 삼켰다.
"일전에 말씀 주신 따님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여신의 응원이 있다고 하지만 마음의 엉킴까진 풀지 못하는 모양이다.
한계 이상의 스트레스 때문인지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예법 교수에게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던 세련된 언어와 정중한 귀족의 화법은 고사하고 기본적인 단어마저 떠오르지 않았다.
"뭐라고요? 제 여식에게 말입니까?"
골트문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루페르트는 그것이 골트문트가 불쾌감을 느꼈을 때 보이는 습관이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미 호랑이 등에 올라탔다.
뭐라도 끝을 봐야 한다.
황제로서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니지만 루페르트는 축구의 달인으로 집요한 골잡이다.
가장 중요한 시간이 언제인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크윽!'
머릿속은 그야말로 백지장.
그러나 뭐라도 내뱉어야 한다.
"그, 그러니까. 한눈에 반했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 일생일대의 거짓말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될 테니까.
폭탄과도 같은 고백에 골트문트가 입을 다물었다.
"?!"
천하의 골트문트가 당혹감을 얼굴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제아무리 음모에 능한 그라고 해도 루페르트가 이런 식으로 나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지금이다!'
루페르트는 호흡을 고르며 최대의 자기기만을 마무리했다.
"따님을 주십시오!"
차디찬 시선이 느껴진다.
루페르트는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듯한 저릿한 감각을 느끼며 골트문트를 응시했다.
선제후가 이보다는 더 차가울 수 없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거절합니다."
* * *
영지로 돌아오는 길.
루페르트는 채찍질을 당했을 때보다 더 넋이 나간 얼굴로 간신히 좌석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었다.
"...."
거의 혼백이 다 빠져나간 얼굴.
'황제가 되는 것이 이토록 어려운 일이라니....'
그 앞엔 루돌프가 앉아 있다.
그는 루페르트를 보며 뭐가 그리 웃긴 지 연신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루페르트는 루돌프를 살짝 원망하는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루돌프 님께서 즐거우시다면 그걸로 충분히 만족합니다만...."
"즐거워. 즐겁고말고. 정말이지 그대를 보고 있으면 실로 오랜만에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는군."
루돌프는 진정으로 즐거워하고 있었다.
루페르트는 축 늘어진 자세를 고쳐 앉으며 루돌프가 은근히 사람을 골리는 걸 좋아하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며 멋쩍게 웃었다.
"하하...."
잠시 어수선했던 분위기가 정돈된 후, 루돌프가 입을 열었다.
"걱정할 필요는 없어. 투박한 형태였지만 오히려 그 투박함은 어떤 감언이설보다 확실하게 골트문트의 마음에 새겨졌을 테니까."
"그럼 그분이 저에게 표를 주신다는 말입니까?"
솔직하게 이걸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아직은 부족해. 하나가 더 남았지."
루돌프가 손가락 하나를 펴 보였다.
"그런가요? 그 하나라 함은?"
"그건 이미 진행되고 있네."
루돌프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스며들었다.
루페르트는 어째서인지 그 미소에서 끝없이 빨려 들어가는 수렁을 연상했다.
* * *
카를 호이징거는 불과 1년 전만 해도 허름한 영지에서 계모의 구박을 받으며 살던 하급 귀족이었다.
철혈대제 이전의 황제 천둥제의 후예라고 하지만 그 천둥제라는 작자가 좀 자식을 많이 남겼어야지.
사생아를 포함하면 아들만 30명이 넘어간다.
그중에 분명 큰 지분을 차지한 자식도 있겠지만, 적어도 카를 호이징거의 부친은 그 정도로 많은 애정을 받진 못했다.
그는 하급 귀족에 머물렀고, 그 자식의 운명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가난하고 보잘것없으며 존경도 없고 기대도 없는 삶.
그러던 어느 날 카를 호이징거의 인생은 갑자기 변했다.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무위도식하며 군인이나 돼 볼까 기웃거리던 그에게 한 사내가 찾아왔다.
그의 정체는 고어문트 선제후 골트문트.
일면식도 없는 중년의 미남자는 그의 손을 잡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이야말로 내가 찾던 사람이야. 당신 같은 선량한 사람이 황제가 되어야 이 제국에 평화가 찾아올걸세."
상상도 못 한 작위, 영지, 부유함이 선물로 주어졌다.
꿈만 같았다.
원하던 미주(美酒)도 마음대로 먹고 계집질도 마음껏 했다.
옆에는 든든한 호위가 지키고 서 있었고, 언제라도 호위를 이용해 마음에 안 드는 녀석을 흠씬 두들겨 패 줄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큰 변화는 주변에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겉보기에도 무지하고 촌스러운 고향 친구들 대신 세련되고 우아한 사람들이 측근으로 붙었다.
황제 후보가 된 이후 얼마 동안은 고향 친구들과 함께했지만, 친구 사이 간이라고 해도 격차가 크면 자연스레 마음도 멀어지는 법.
스스럼없이 이름을 부르던 친구들은 점점 자취를 감추었고, 오직 한 녀석만이 끈덕지게 옆을 지켰다.
한스라는 이름의 평민이다.
돈 좀 만진 상인의 아들이라고 하지만 그쪽도 아들이 많아, 막상 물려받을 게 없는 비슷한 처지의 친구였다.
그 친구가 오늘도 찾아왔다.
"저기. 카를. 진짜 걱정해서 하는 말이야. 네 새 친구들 말이야. 다 좋다 이거야. 하지만 한 달 전부터 옆에 나타난 사람들 말이야. 평판이 안 좋아. 여행자 길드 출신이라고 하던데. 너도 알잖아? 여행자 길드가 뭐 하는 인간들인지? 하브루타 사람 패거리잖아?"
한스의 성격은 잘 알고 있다.
괜찮은 친구다.
평소엔 띠껍게 대하지만 속이 깊고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지혜의 편린이 있다.
무엇보다 그는 진정한 조언을 하는 친구였다.
잘못된 선택을 할 때마다 한스는 짜증 날 정도로 집요하게 찾아와 카를의 생각을 바꿔 놓곤 했다.
충동적으로 외국 상선에 타려고 했을 때 막아 주던 것도 그였다.
그 외국 상선은 출항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크라켄의 자식이라 불리는 바다 괴물에게 당해 침몰했다.
한스가 아니었다면 카를 호이징거도 물고기의 상차림에 올랐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변했다.
이제 카를 호이징거는 제국의 황제마저 바라보는, 명실상부한 제국의 중심부에 선 자다.
상대는 보잘것없는 상인의 자식.
재산이라도 많다면 모를까, 가진 거 하나 없어 좋아하는 여자아이에게 구혼조차 못 한 채 그녀가 늙은 용병한테 시집가는 걸 지켜볼 정도로 무력한 인간이다.
그의 조언이 인생에 도움이 된 건 맞다.
목숨을 건진 것도 맞다.
그러나 둘은 다르다.
그 본질은 아무리 속이고 감추어도 바꿀 수 없다.
"어이. 한스."
카를 호이징거가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나와 너와는 입장이 다른 거 같다."
모두 알고 있지만 감히 말하기 어려운 한마디가 친우의 입을 통해 스스럼없이 튀어나왔다.
"우리 집안이 가난하고 물려받은 것도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너희들과 섞이긴 했지만, 너도 알고 있잖아? 나와 네가 같지 않다는 거."
"그, 그건 맞아."
친우가 고개를 떨구었다.
카를 호이징거는 그 모습을 보며 냉담하게 덧붙였다.
"앞으로 만나지 말자."
"조, 좋아.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한스가 고개를 들었다.
평민, 상인의 아들치고는 지나치게 올곧은 눈빛.
카를 호이징거 마음 깊숙한 곳의 기억들이 떠오른다.
그가 잘못된 길을 가려 할 때 몇 번이고 자신에게 조언을 하던 바로 그 눈빛이다.
53화 14. 선거 (4)
'한스.'
일말의 죄책감을 느낀 건 사실이다.
카를 호이징거는 선인도 아니지만, 악인도 아니니까.
하지만 생각을 고칠 생각은 없다.
'다 너를 위해서다. 나쁘게 생각 마라.'
새로 사귄 친구들이 말했다.
격이 다른 자는 결국 다투기 마련이니 그 다툼이 커지기 전에 미리 헤어지는 것 또한 친구들에 대한 예의라고.
어쩌면 그들이 황제가 된 이후에 발목을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복잡한 심경 속에서 한스의 목소리가 또렷이 들려왔다.
"하지만 내 말. 명심해. 그 친구들. 네 편은 절대 아니야. 전에 네가 그 사고를 쳤을 때도 그 녀석들이...."
카를 호이징거가 손짓했다.
'한스. 미안하지만 어쩔 수가 없구나. 좀 아프겠지만 널 위한 거다. 아니, 우리를 위한 거야.'
험상궂은 사내들이 나타나 한스를 에워쌌다.
"카를?! 카를?!"
당황하는 한스가 카를을 불러 보지만, 카를은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한스!!"
뒤이어 둔탁한 타격음이 들리고 구슬픈 비명이 들려왔다.
앞으로 그를 볼 일은 영원히 없을 것이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저기 저편엔 보다 세련되고 멋진 친구가 있으니까.
그중 하나는 단지 보는 것만으로 욕정을 느끼게 할 정도로 요염한 여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마르가르테라는 이름의 신비로운 여인.
이민족인 하브루타인답게 그 용모는 제국인과 조금 달랐지만, 그 차이가 오히려 제국 여인과 뚜렷이 구분되는 매력으로 여겨질 정도의 미인이었다.
그녀는 지적이었고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말을 할 줄 알았으며, 밤에는 갖가지 쾌락의 기술로 동정이었던 카를 호이징거의 혼을 쏙 빼놓았다.
그것만이 아니다.
마르가르테는 마음의 병을 낫게 만드는 미약 또한 가지고 있었다.
그가 다가가자, 마르가르테는 요염한 표정을 지은 채 위를 바라본다.
건장한 하브루타인들이 숙소의 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
거기엔 갖가지 향료와 목욕물과 침대가 있었다.
잠시 후, 카를 호이징거는 미약에 취한 채 잦아드는 쾌락의 여운에 잠겨 있었다.
"저기. 카를."
마르가르테는 먼저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대를 보며 머리를 빗고 있었다.
한바탕 정사를 치렀지만, 그녀의 굴곡 있는 뒷모습을 보니 카를 호이징거는 욕정이 끓어오르는 걸 느끼며 상반신을 일으켰다.
"응. 자기. 무슨 일이야? 갑자기 내 이름을 부르고."
"당신 뒤에 골트문트라는 사람이 있다고 했지?"
"그래. 그 양반이 내 뒷배경이지."
"요즘은 어때?"
그 물음에 카를 호이징거의 얼굴에 격한 분노가 스스럼없이 묻어 나왔다.
"아주 날 안 좋게 보고 있어. 화대를 받고도 안 받았다고 사기를 치는 술집 년 하나 홧김에 밀쳐서 죽인 거 뭐가 대수라고. 귀족 상대로 사기를 치려는 년은 예전 같으면 광장에서 돌로 찍어 죽였을 건데!"
"설마 그 사람이 널 후보에서 끌어내리려는 건 아니겠지?"
"날 후보에서 사퇴시킨다고?"
"보조금도 끊었다며? 알현을 요청해도 받아 주지도 않고?"
부드럽지만 가혹한 진실의 연타.
카를 호이징거는 울상을 지으며 손톱을 입으로 물어뜯었다.
마르가르테는 검은 눈동자로 카를 호이징거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교태로운 미소를 머금으며 은근히 말했다.
"그 사람에게 딸이 있다고 들었는데."
"아, 날 벌레처럼 보던 그 여자?"
카를 호이징거는 코웃음을 쳤다.
"마음에 안 드는 년이야."
"골트문트에게 그 딸을 달라고 하는 건 어때?"
"어림도 없을걸? 안 그래도 날 마음에 안 들어 하는데."
"딸 쪽에서 네가 좋다고 한다면?"
"그 여자는 날 싫어해."
어깨를 축 늘어뜨린 사내를 검은 눈의 여인이 가만히 쳐다본다.
촛불이 일렁거리며 타들어 가는 가운데, 마르가르테는 붉은빛의 약제가 든 약병을 흔들며 교태로운 눈웃음을 머금었다.
"이 약을 써 보는 건 어때?"
"약?"
카를 호이징거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술과 미약에 취한 그의 눈동자엔 숨길 수 없는 기대가 떠올랐다.
그럴 수밖에 없다.
저 여자 마르가르테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기적을 안겨다 주었던가.
원하는 여자를 바로 안게 해 주었고, 도박판에서 몇 번이고 거액의 돈을 따게 할 정도로 신통력이 있는 여자다.
'이 하브루타 마녀. 다른 건 몰라도 신통력 하나만은 확실하지.'
욕망을 어설프게 숨기며 카를 호이징거가 물었다.
"무슨 약이지?"
마르가르테가 웃음을 머금은 채 답했다.
"사랑의 묘약이야."
"사랑의 묘약...?"
카를 호이징거의 입에서 침이 떨어졌다.
"응. 그 어떤 사람도 거역할 수 없는."
마르가르테는 속을 알 수 없는 야릇한 미소를 머금으며 카를 호이징거를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때? 해 보지 않겠어?"
카를 호이징거의 눈이 그토록 흔들리는 건 약 기운 때문만은 아니리라.
* * *
황제 후보 중 하나였던 카를 호이징거가 변사체로 발견된 건 선거가 있기 불과 2주 전의 일이었다.
가까운 곳이기에 루페르트는 루돌프와 함께 장례식을 보러 갔다.
다른 시간 축에서 황제로 선출된 남자의 장례식은 조촐하기 짝이 없었다.
묘역, 관, 묘비 모두 상급의 재료를 사용했지만 모인 사람이 지나치게 적었다.
"...."
그 자리엔 검은 두건을 쓴 두 사내가 있었다.
그의 정체는 다름 아닌 루페르트 가우저.
루페르트는 굳은 얼굴로 장례식의 풍경을 응시했다.
공허하고 쓸쓸하다.
우울한 부슬비가 내리며 망자의 죽음을 슬퍼할 뿐, 살아 있는 인간 중에 슬픔을 느끼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보였다.
"재산은 어떻게 하나?"
"남긴 재산이 없다고? 아니, 골트문트한테 받은 게 있을 거 아닌가?"
"골트문트가 어떤 인간인데. 어험! 선제후는 계산이 칼같은 사람이야. 돈이 필요하면 그때그때 소액을 가불하는 식으로 용돈을 줬다지 뭐야. 그마저도 후반기엔 끊었던 모양이군. 재산 같은 게 모일 리가 있나."
형제와 친척들.
오직 돈만을 이야기할 뿐, 망자에 대한 예의 같은 건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그렇게 당당할 수 있는 건 이 자리에 온 것만으로 망자에 대한 예의를 전부 갖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저것이 나를 제쳤던 남자의 최후인가.'
루페르트는 오싹한 공포에 잠겨 들었다.
남의 일이 아니다.
그 또한 중도에 죽었다면 비슷한 형태의 결말을 맞이했을 것이다.
카를 호이징거는 형제라도 많았지 루페르트는 슈발츠마인 선제후 가문에 편입되기 전엔 친척 하나 없는 몸이었다.
'이것이 황제가 되었던 사내의 최후인가.'
검은 면사포로 얼굴을 가린 여성이 루페르트와 루돌프에게 다가왔다.
펑퍼짐한 옷과 면사포로 몸과 얼굴을 가렸음에도 미인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체형과 눈을 가진 여성이었다.
루페르트는 빨려들 것 같은 검은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제국엔 보기 드문 색채.
미지의 여성은 루페르트를 힐끗 쳐다보고는 루돌프에게 목례를 했다.
'아는 사인가?'
루돌프가 손을 흔들자 그녀는 말없이 자리를 떠났다.
그녀의 등 뒤로 참배객의 싸늘한 목소리가 화살처럼 꽂혀 들었다.
"저 여잔가? 형을 갖고 놀았다는 여자가."
"하브루타인과 놀아났다고 하더니. 진짜였군."
"구원받지 못할 족속들과 놀았으니 동생도 구원받긴 글렀구만."
의문의 여성이 떠난 직후 한 사내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검은 옷을 입고 있음에도 가릴 수 없는 가난함과 비천함이 드러나는 촌스러운 사내였다.
그 사내는 막아서는 장의사들을 밀어내고, 땅에 반쯤 파묻힌 망자의 관을 붙잡은 채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이 바보야! 이 멍청아! 내가 그렇게! 그렇게 그것들을 멀리하라고 했는데! 왜 너는 모르냐? 너는 한낱 권력자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의 이름이 누군지 모른다.
알 필요도 없으리라.
하지만 루페르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카를 호이징거. 나와 비슷한 처지라고 생각했지만, 너는 나보다 나은 인간이었군. 적어도 직언을 할, 그리고 너의 죽음을 위해 울어 줄 친구가 있었으니.'
사내의 애도를 보며 루돌프가 말했다.
"이걸로 또 한 표 확보했군."
"...이것도 당신의 안배입니까?"
"골트문트도 의외로 과격한 구석이 있군. 죽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고어문트 선제후가 그를 죽인 겁니까?"
"간단한 공작을 했지."
"공작요?"
"사람의 본성이라는 건 대체로 현재 가진 지위나 재산, 권력에 의해 가려지기 마련이지. 흔히들 농부는 선량함과 가까운 속성이 있다고들 표현되지 않나?"
루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느낌이 있지요."
"하지만 모든 농부가 선량할까?"
"그건 아닐 겁니다."
루페르트는 보잘것없던 남자 정원사 막스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를 호이징거의 인격을 확인했지. 나름 귀족치고는 소탈하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아니나 다를까 골트문트가 뒤를 봐주기 시작한 뒤부터 본성을 드러내더군. 그래, 한 마리 개라고 할까. 개에게 오물을 뒤집어씌우게 하고 사람을 물어뜯게 만들었지."
장의사의 곡소리가 들려왔다.
우울한 노래 속에서 망자의 관이 장지에 매장됐다.
여러 개의 삽이 흙으로 관을 덮는 가운데, 머리가 벗어진 구교 신부가 향로를 흔들며 틀에 박힌 기도문을 외워 댔다.
"골트문트가 이해타산적인 인간인 건 맞아. 자신의 왕조적 야망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딸도 거침없이 카드로 쓸 인간이지. 하지만 말이야."
그때 장지 쪽에서 누군가의 구슬픈 곡소리가 울려 퍼졌다.
유독 초라하게 차려입은 보잘것없는 사내의 것이었다.
"카를! 우린 친구였잖아!"
카를 호이징거의 형제들이 불쾌하면서도 수치심이 깃든 얼굴로 그 사내를 바라본다.
그들도 알고 있다.
피로 이어진 형제자매보다 저 사내가 망자를 기리는 마음이 더욱 크다는 걸.
그의 곡소리가 커질수록 묘지엔 우울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러나.
"자네가 골트문트라면 사람을 물어 죽이고 오물을 뒤집어쓴 미친개한테 귀한 딸을 내주겠는가?"
우울한 분위기 속에서도 루돌프는 소년 같은 천진난만한 미소를 머금을 수 있었다.
슬픔, 후회, 면피.
루돌프의 얼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감정이다.
그는 순수하게 자신의 승리를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루페르트는 알 수 없는 오싹함을 느끼며 몸을 움츠렸다.
'이것이 철혈의 길인가.'
결과만 놓고 보면 최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약간의 공작만으로 후보를 제거할 수 있었으니.
하지만 왜일까.
이 익숙한 반감은.
문득 마를로네의 무표정한 얼굴이 루페르트의 눈앞을 흐릿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늘 안개가 낀 듯한 흐릿한 눈으로 바라보는 그 얼굴은 어딘가 모르게 그를 질책하는 것처럼 비쳤다.
"...."
사내의 곡소리를 뒤로한 루페르트의 앞에 제국의 수도 테타우의 성벽이 희미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 * *
현재까지 확보한 표는 셋.
세속 선제후 중 하나.
성직 선제후 하나.
루페르트 가우저 본인의 표.
남은 마지막은 정해져 있었다.
선제가 지정한 자, 안젤리나의 표다.
지난번, 그녀는 루페르트에게 표를 행사하지 않았다.
이유가 무엇일까.
늘 궁금했지만, 그녀는 더 이상 루페르트를 만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가문의 가장 큰 어르신인 그녀에게 대답을 요구할 순 없었다.
'결국 나머지 하나는 대황후의 손에 달렸다. 하지만 그분을 만날 수 없는 지금, 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루페르트는 무의식적으로 루돌프를 바라보았다.
늘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노인은 언제나 그렇듯 야릇한 침묵에 잠겨 있었다.
필요한 순간에만 입을 여는, 그것도 중요한 이야기만 하는 그의 모습은 리프니에와 닮은 구석이 있었다.
성격도 태도도 느껴지는 성숙함도 전혀 딴판이지만 말이다.
이제는 이 노인에게 기댈 수밖에 없다.
그는 루페르트를 황제로 만들어 주려 온 사람이니까.
루페르트의 시선을 느꼈을까.
침묵에 잠겨 있던 루돌프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집무실 한구석을 차지한 소녀의 조각상을 무심한 눈으로 응시했다.
음영에 가려 희미한 눈동자 너머로 갖가지 감정의 그늘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제 그녀를 만날 시간이 왔군."
"안젤리나 대황후 말씀입니까?"
"그녀 이외에 누가 있겠는가."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세. 최후의 한 표를 받으러."
54화 14. 선거 (5)
그 저택의 지붕은 붉은색이었다.
지붕 위로는 높게 솟은 담장과 그 담장과 하늘을 찌를 듯이 솟은 탑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수십 년간 철혈대제의 황후로 황궁 안을 지키던 안젤리나의 마지막 장소가 황궁 옆 저택이라는 건 어떻게 보면 순리에 맞는 선택처럼 보였다.
그 저택 주변엔 많은 병사가 지키고 있었지만, 메헨부르그나 슈발츠마인 저택처럼 창살을 박은 높은 담장은 없었다.
단지 장미 덤불로 만든 생울타리가 시간의 고즈넉함을 간직한 저택을 아담하게 둘러싸고 있을 뿐이었다.
갖가지 색깔의 장미들은 아직 채 꽃피지 않은 채 저마다의 꽃봉오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만개하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다.
제국의 장미는 여름부터 서서히 피며 가을에 절정을 맞이하니까.
이 저택은 정해진 이름은 없었다.
위치부터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대로의 끄트머리에다 그 옆엔 황궁이 자리 잡고 있었으니까.
이 저택을 아는 소수의 사람들은 이 저택의 위치와 담장을 보고 '장미 저택'이라고 불렀다.
장미 저택의 주인은 모든 손님의 방문을 거부했다.
예외는 없었다.
모든 선제후 중에서 가장 배분이 높은 아카이아 대주교 본인이 직접 찾아왔음에도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 저택 앞에 또 한 명의 권력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대단히 송구하오나 선제후님이라고 할지라도 이 저택에 발을 들이는 건 불가합니다."
안젤리네의 시종이 정중하게 루페르트를 막아섰다.
그 뒤로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메헨부르그 때부터 인연이 있던 수렵대장 안투안 쿠르스트다.
물론 전과는 태도가 같을 수가 없다.
안투안 쿠르스트는 루페르트를 보자마자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제가 따로 선제후님에게 설명을 드려도 될까요?"
루페르트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저택 건너편에 자리 잡은 아담한 호수로 안내했다.
호수 주변엔 아무도 없었고, 그 너머로 호라교단 대성당이 우뚝 솟아 있었다.
성당의 모습을 고스란히 머금은 잔잔한 호수의 물결을 보며 안투안 쿠르스트가 깃털이 달린 챙 넓은 모자를 고쳐 썼다.
"알고 계시겠지만 지금 대황후께서는 대단히 위독한 상황입니다. 하루하루 넘기는 것 자체가 그분에겐 기적이지요."
"그렇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안투안 쿠르스트의 얼굴인 은은한 슬픔과 상실감이 묻어 있었다.
"하지만 한 시대의 막이 이렇게 초라하게 저물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
대황후의 전성기를 본 적은 없다.
초상화와 조각상을 통해 젊은 날의 아름다움을 어렴풋이 본 게 전부였다.
하지만 그녀가 가진 진정한 힘은 단순히 육체를 감싼 껍질에만 있지 않다는 걸 루페르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분도 죽는구나.'
그다지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고, 오랜 시간을 보낸 적도 없다.
하지만 그녀가 그에게 베풀었던 것들은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어떤 의미로 제2의 부모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존재였다.
'부모님이라....'
흐릿한 기억을 제외하면 육친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다.
단편적으로 떠오르는 이부자리의 따뜻함, 떠들썩한 식탁, 손을 잡고 예배당에 가던 것들이 아련하게 뇌리에 떠돌 뿐이다.
그 이후는 방황의 연속이었다.
목동을 하기도 했고, 플루트 주자로 혹은 각 지역에서 벌어지는 축구 경기에서 선수로 활동하기도 했었다.
참으로 하릴없고 보잘것없는 나날이었다.
황궁에서 사람들이 오지 않았다면 죽을 때까지 그렇게 하루를 허비하며 살아갔을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부모님의 초상화. 챙겼었던가.'
적어도 집무실에 없는 건 확실하다.
크게 신경을 쓰지 못했다.
'나중에 확인하자. 그나저나.'
루페르트는 먼 곳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검은 로브를 걸친 노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정말 자신이 있는 걸까. 방법이 있는 걸까. 이분이라면 비장의 한 수가 있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지만, 대황후도 죽음을 앞둔 몸이다. 판단이 흐려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지.'
루돌프가 손짓했다.
"루페르트 가우저."
그가 루페르트의 이름을 부르는 건 드문 일이다.
그의 시선이 똑바로 루페르트의 눈을 직시하는 것 또한 드문 일이다.
루돌프의 눈은 희미한 자줏빛을 띤 푸른 눈으로 무한한 지혜와 경륜(經綸), 그리고 의미를 알 수 없는 공허함이 서려 있었다.
"날 저택 앞으로 데리고 가 주게."
"복안이 있습니까?"
"복안이랄 것도 없지. 일단 데리고 가 주게. 그대는 선제후니, 아무것도 없는 나 같은 자보다는 저 앞에 서기 수월해지겠지."
"알겠습니다."
루돌프를 데리고 저택 앞으로 갔다.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 시종이 다시금 저택 밖으로 나왔다.
선제후 앞이라 자제하고 있지만, 그의 얼굴엔 분명한 항의가 서려 있었다.
"슈발츠마인의 선제후님. 거듭 말씀드리지만, 현재 안젤리나 대황후께서는...."
"제가 아닙니다."
루페르트는 고개를 돌려 루돌프 쪽을 응시했다.
'시종이라면 어쩌면 이분을 알고 있을지도.'
시종이 루돌프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루페르트는 조용히 시종의 표정을 살폈다.
분명 변할 것이다.
어쩌면 소스라치게 놀라는 걸 걱정해야 할지도 모를 것이다.
그런데.
"실례지만 어디의 누구신지요?"
시종은 루돌프를 알아보지 못했다.
꾸며 낸 움직임이 아니다.
실제로 전혀 모르는, 타인을 본 표정이다.
'시종이 중간에 바뀐 것인가. 하긴 클라우데 2세가 돌아가신 이후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으니.'
그런데 덜컥 걱정이 든다.
'시종이 알아보지 못한다면 이분이 대황후를 만날 기회도 없을 텐데? 이거 설마.'
갖가지 걱정과 의혹이 소용돌이치는 와중 루돌프가 저 호수의 표면처럼 잔잔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안드리아의 루돌프가 왔다고 전해 주시게."
"안드리아의 루돌프 님 말씀입니까?"
시종은 여전히 모르는 눈치.
루돌프은 은은한 미소를 머금으며 상대방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시종은 그 태도에 의아함을 느꼈지만, 곧 알 수 없는 위압감을 느끼며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루페르트가 루돌프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걸로 충분할까요?"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루돌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하고도 남지."
그의 목소리엔 확신이 묻어 있었다.
잠시 후, 저택의 문이 열렸다.
"들어오시지요."
루돌프가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마치 자신이 이 자리의 상전인 것처럼.
루페르트는 반발하지 않았다.
단지 조용히 속으로 확신을 굳힐 뿐이다.
'역시 이 사람은.'
철혈대제 루돌프 클라우데.
죽었다고 알려진 선제가 돌아왔다.
그가 있어야 할 자리에.
* * *
어두운 방 안은 죽은 듯한 적막에 잠겨 있었다.
은은한 장미 향이 방 안을 감싸고 있었지만, 만연한 죽음의 냄새까지는 가려 주지 못했다.
활짝 열린 창문, 높은 침대 하나가 창 너머의 호반에 떠오른 것처럼 솟아 있었다.
그 침대 위엔 죽어 가는 여인이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방 안엔 아무도 없었다.
자초한 초라함이라고 하지만 그 누구도 저 일세를 풍미했던 여인이 이런 식으로 쓸쓸하게 최후를 맞이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으리라.
두 눈을 감은 채 실낱같은 숨을 이어 나가는 여인을 향해, 한 사내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안젤리나."
짧고 묵직한 한마디.
그러나 그 안엔 그 어떤 수사보다 더 깊고 풍부한 울림이 담겨 있었다.
안젤리나가 힘겹게 눈을 뜨고 루돌프를 간신히 올려다보았다.
앙상한 손이 경련하며 그 얼굴을 쓰다듬었다.
안젤리나는 그러나 목소리를 내진 못했다.
죽음의 기운은 이미 그녀의 목청마저 앗아 간 것이다.
하지만 둘 사이에 목소리가 나오고 말고는 크게 중요한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서로 눈을 마주 보는 것만으로 둘은 모든 것을 이해한 듯 각자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굳은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루페르트는 안젤리나의 얼굴이 평소와 조금 다르다는 걸 발견했다.
저 대황후, 안젤리나가 얼굴에 화장을 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 것이다.
알 수 없는 착잡함과 헤아릴 길 없는 숙명을 느끼며 루페르트는 고개를 숙였다.
"걱정 마시게."
루돌프가 말했다.
"그대를 만난 것만으로 나는 모든 걸 얻었으니."
안젤리나는 두 눈을 감은 채 행복한 미소에 잠겨 들었다.
루돌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페르트는 마치 시종처럼 그의 뒤를 따랐다.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안젤리나의 숨소리는 끊이지 않았지만, 그건 크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리라.
하나의 시대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철혈의 치세라 불리는 제2의 황금기가.
* * *
제국의 수도 테타우.
황궁 옆에 자리 잡은 제국의회에 무수히 많은 사람이 운집했다.
제국의 선제후, 각지의 군주, 호라교단의 주교들, 마법대학의 쟁쟁한 교수, 전쟁터에서 명성을 얻은 군인, 인기 있는 수도회, 갖가지 조합을 대표한 상인, 그리고 그들을 구경하러 나온 평범한 사람들.
이중 극히 일부만이 제국의회에 참가할 수 있으며 그중에서도 단지 여덟만이 선거에 참가할 수 있다.
[ 드디어 시작이네요. 루페르트 가우저. ]
모처럼 리프니에가 말을 걸어 주었다.
루페르트는 발코니 너머로 들려오는 군중들의 웅성거림을 들으며 거울의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승리는 확정적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이렇게 긴장이 되는걸.
차라리 프리드리히의 말을 듣던 첫 회차가 덜 긴장이 됐던 것 같다.
[ 걱정하지 마세요. 루페르트 가우저. 당신은 그 사람의 도움을 받았잖아요? ]
"그렇죠."
안드리아의 루돌프는 안젤리나를 만난 후 자리를 떠났다.
자신이 할 일이 모두 끝났으며 더는 할 게 없다는 이유를 들어서였다.
그가 어디로 떠난 지는 루페르트 본인조차 알지 못하지만 결국 그 또한 수레바퀴에 속하는 자, 어떤 식으로든 리프니에에게 돌아갔다는 게 루페르트의 생각이었다.
어떤 마법을 부린지 모르겠지만, 그의 얼굴은 수십 년간 안젤리나를 옆에서 모신 시녀조차 알아보지 못하였으니 말이다.
"네, 잘됐으면 좋겠군요."
루페르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모았다.
운집한 군중들이 창가의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보며 손을 흔들며 환호했다.
"와아! 슈발츠마인 선제후다!"
"메헨부르그의 야수를 해치운 분이라지?! 엄청난 거인이라던데."
"맨손으로 사람의 목을 뽑아 버린다고 들었는데 음? 생각한 것보다 작은 느낌인데?"
루페르트는 난무하는 낭설에 쓴웃음을 머금으면서도 눈에 밟히는 것들을 보고 미소를 지워 버렸다.
곳곳에 제국 성인을 묘사한 성화를 든 사람들이 서 있었다.
[ 영원한 고행자, 성 발렌티아누스 ]
[ 천연두를 지우는 자, 슈타우펜 ]
[ 아가티아, 만인의 연인 ]
'제국 성인이라....'
그 끔찍했던 판텔레온의 얼굴이 악몽처럼 눈앞을 덮어 나간다.
"...."
속이 메스꺼워지고 기분이 안 좋아진다.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무슨 일이냐?"
"만슈타인이라는 분께서 편지를 보냈습니다."
"만슈타인?"
'아, 리히트 보덴에서 날 도와주었던 그 사람이군.'
"가지고 오게."
편지의 내용은 단순했다.
[ 황제가 되신 걸 미리 축하드립니다. ]
루페르트는 실소를 머금었지만, 곧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해 냈다.
'저번 회차엔 이런 일이 없었잖아?'
그렇다.
프리드리히를 조언가로 두던 시절엔 만슈타인은 편지를 보내오지 않았다.
'그 친구. 역시 평범한 사람은 아닌 모양이군.'
루페르트는 만슈타인의 편지를 시종에게 맡기며 거울 앞에 섰다.
이제 곧 선거가 있을 것이다.
다른 방엔 저마다의 경쟁자가 있다.
카를 호이징거가 죽은 현재 가장 강력한 경쟁자는 디터 팔츠 선제후의 아들인 로이겐 뇌르겐틀링이지만 객관적으로 그는 루페르트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복도에서도 두 눈으로 확인했다.
메헨부르그에서는 그토록 고압적이고 거만했던 청년이 이제는 그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숙이고 땅을 쳐다봐야 했던 것을.
'결과는 명확하다.'
남은 건 그 결과를 확인하는 것.
여섯 선제후, 선제의 대리인, 호라 교단의 고위 성직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루페르트는 다른 경쟁자와 함께 제국의회의 가장 앞자리에 앉았다.
선거를 주관하는 아카이아 대주교가 금박을 입힌 화려한 두루마리를 들고 연단 위에 서자 장내엔 죽은 듯한 정적이 찾아왔다.
숨소리조차 제대로 낼 수 없는 그 정적 속에서 대주교가 느릿하고 힘없는 어조로 말했다.
"오랫동안 우리 제국엔 황제가 없었습니다. 선제후를 위시한 군주들의 노력으로 제국은 황제의 공백기 속에서도 평화와 안녕을 구가했지만, 제국 내외에서 불온한 움직임이 조금씩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는 건 여기 계신 제국의 군주들이라면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아카이아 대주교가 두루마리를 내려놓았다.
"누군가는 힘없는 황제를 원하셨을지도 모릅니다. 선제가 위대한 황제라고 하나 선제의 치세 동안 고통받은 사람도 있는 건 분명하니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또 다른 위기를 봅니다."
철혈대제의 오른팔이자 친우, 그리고 심복이었던 노인의 시선은 루페르트를 향했다.
"누가 그 위기에 가장 잘 대처할 수 있는가? 그건 저의 통찰로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신심이 충만한 사람이라면 그 어떤 역경과 이단의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겠지요."
아카이아의 목소리가 변했다.
힘없고 어눌한 어조에서 광신적이고 포효하는 듯한 울림으로.
"슈발츠마인 선제후시여. 자리에서 일어나십시오."
"...."
루페르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수한 시선들이 꽂힌다.
의심, 질투, 분노, 조롱, 회의, 경계.
저마다의 생각들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제국을 칭하나 실상은 수백 개의 자치령으로 갈라지고, 거기에 대해 종교마저 반으로 찢긴 이 제국을 통합하는 것이 황제가 해야 할 일이니까.
이미 완성된 제국이 필요한 건 확장도 정복도 아니다.
천 년에 이르는 갈등의 봉합.
그것이 천년기(千年期)를 바라보는 황제가 해야 할 일이다.
"루페르트 가우저."
"내가 루페르트 가우저요."
율법에 따라 루페르트가 복창하자, 아카이아 대주교는 연단에서 내려와 루페르트 앞에 서서 두 손을 잡고 고개를 숙였다.
"그대는 이제 룸인의 왕이며 제국의 황제가 될 것입니다."
모든 이가 고개를 숙였다.
제국의 새로운 황제를 향하여.
"...."
루페르트는 굳은 얼굴로 자신에게 숙인 고개들을 응시했다.
제국의 새로운 시대는 이제부터 시작되리라.
* * *
루돌프가 떠나기 전의 일이었다.
집무실을 나서는 루돌프를 향해 루페르트가 소년처럼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은 채 그에게 다가갔다.
"저기. 루돌프 님."
루돌프는 의아해하며 루페르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기, 갑자기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이상할지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었습니다."
루페르트는 황제의 벽 마지막을 차지한 마치 이 세상의 군주 같던 위대한 황제의 조각상을 떠올렸다.
그가 닮고 싶었던, 되고 싶었던 모범.
그 웅장했던 조각상을 떠올리며 루페르트가 말했다.
"당신의 정체는 루돌프 클라우데 2세. 저 철혈대제라 불리신 분이 맞으시지요?"
알고는 있었지만, 함부로 꺼낼 수 없었던 그 말.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오."
루돌프가 살짝 놀라워하는 반응을 보였다.
"언제부터 그런 결론에 이르게 되었나?"
"그, 그야. 일어나는 상황과 대황후님과의 관계만 보더라도."
"유추하신 거구만. 뭐, 어려운 건 아니지."
"아, 사실 처음 볼 때부터 그런 느낌이 왔습니다."
"그렇군."
루돌프의 입가에 미소가 배어들기 시작했다.
"철혈대제, 맞으시지요?"
왜 같은 질문을 반복했는지 루페르트 본인조차 알 수 없었다.
단순한 치기인지 오랜 선망이 가져다준 조급함인지.
다행히 보상은 주어졌다.
"그런 이름으로 불린 적도 있었지."
확답을 받았다.
"폐하!"
루페르트는 감동에 찬 얼굴로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가슴 속에서 솟아 나오는 격동을 진정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역시! 이분은 클라우데 2세! 내가 누구보다 닮고자 했던 바로 그 위대한 황제셨어!'
루돌프는 격동의 여운에 잠긴 루페르트를 보며 야릇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것은 그 자신이 루페르트에게 직접 가르쳐 주었던, 상대방이 스스로 오류에 빠지게 놔두는 그런 종류의 미소였다.
55화 15. 황제의 길 (1)
선거로 황제에 선출된 자가 즉시 황제에 오르는 건 아니다.
먼저 룸왕이라는 직위를 받는다.
말 그대로 이미 멸망해 버린 룸의 왕으로 땅 한 조각, 영민 하나 없는 명예직이다.
하지만 이 작위는 대단히 중요하다.
최초의 황제가 제국 법률에 정하길, 제국의 황제가 될 수 있는 자는 오직 룸인의 왕이라고 정해 놓았기 때문이다.
즉, 룸왕은 황제가 되기 위한 사전 절차다.
룸왕이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룸 제국의 옛 수도 룸으로 순례를 떠나 한 가지 의례를 치러야 한다.
이름하여 망조의 알현.
멸망한 룸 제국의 마지막 황제의 시체를 두 눈으로 직접 보고 그 시체에 채찍질을 가하는 것이다.
옛 의식이 그러하듯 불필요하고 장황하며 의미 부여에 치중된 허례허식이지만 천 년 동안 제국의 모든 황제가 치렀던 행사다.
물론 루페르트도 경험해 본 일이다.
"또 그 폐허로 가야 하나."
루페르트의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과거에 보았던 구 제국의 몰락한 정경이 아스라이 떠올랐다.
쇠락 그 자체를 담은 풍경이랄까.
과할 정도로 거대한 건조물이 반파된 채 시간의 풍화작용 속에서 마멸되고 있었고, 그 아래 천박하고 열화된 난잡한 주거지가 곰팡이처럼 자생하고 있었다.
거기서 치렀던 행사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참 무의미했고 잔인하기까지 했던 행사였다.
"참 의미 없는 행사였지."
루페르트는 말 대신 수레를 끌던 한 사내의 초라한 등을 떠올렸다.
"루페르트 가우저."
제단 위의 소라고둥이 가볍게 몸을 움직였다.
"여신님."
"그렇게 리프니에라고 부르라고 했건만 당신의 호칭은 변할 줄을 모르는군요."
"죄송합니다."
"뭐, 그때처럼 토끼 사육장 같은 작은 곳이 아니라서 별문제는 안 되겠지만요."
"위버하임 장원 말이군요."
"아무튼, 황제가 된 거 축하드려요!"
소라고둥이 제단 위에서 우뚝 서더니 갑자기 덜덜 떨며 껍질과 대리석 상판을 부딪치며 딱딱거리는 소리를 냈다.
딱딱딱.
루페르트는 의아한 눈으로 그 모습을 응시했다.
'뭐지? 설마 박수를 치시는 건가?'
"와아! 축하해요!"
예상이 맞았다.
진짜로 여신은 박수를 치고 있는 것이다.
루페르트가 겸연쩍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가, 감사합니다. 여신님!"
"그보다 그 사람. 안 보이네요?"
소라고둥이 몸을 좌우로 돌렸다.
"루돌프 님 말인가요?"
"그런 이름이었나요?"
"성함을 모르시는 겁니까?"
"뭐, 당신도 대충 그 사람 정체를 알고 있지 않나요?"
"그건 그렇습니다만."
"저는 사람 이름 같은 걸 잘 기억하지 않아요. 루페르트 가우저. 당신의 이름을 계속 부르는 것도 당신의 이름을 잊지 않기 위함이지요."
소라고둥이 슬며시 루페르트를 향해 몸을 돌렸다.
"당신은 인간 중에서도 각별한 존재니까요."
"그, 그렇군요. 황송할 따름입니다."
"아무튼, 슬슬 룸 제국에 방문하겠네요?"
리프니에의 웃음기 섞인 물음에 루페르트는 쓴웃음을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곳으로 갑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요."
직립했던 소라고둥이 갑자기 제단 아래로 푹 꺼지듯 누워 버렸다.
"저는 안 갈래요."
"네?"
"절 놔두고 가라는 말이에요."
루페르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한 몸과 같던 소라고둥을 놓고 가라니.
그 소라고둥이야말로 루페르트의 모든 것 아니었던가.
리프니에는 마치 루페르트를 보듯 소라고둥의 입구 쪽을 빙글 돌리더니 퉁명스레 말했다.
"저, 그 나라 싫어요."
"...룸 제국 말입니까?"
"네. 냄새나고 지저분하고 아무튼 보기 싫은 게 너무 많아요."
"그, 그렇군요."
순간 루페르트가 느낀 감정은 당혹감 그 자체였다.
어린아이도 아니고 무려 신이라는 존재가 이런 투정을 한다는 게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혼란 속에서 리프니에가 불쑥 물었다.
"전에도 갔다 왔었죠?"
"네. 그렇습니다."
"문제가 있었나요?"
"특별한 문제는 없었습니다. 아니, 일어날 소지 자체가 없기도 하고요."
황위에 오를 룸왕의 행차엔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의전이 따라붙는다.
명성 높은 제국 보병연대 하나, 귀족 자제로 이루어진 기병대대 하나, 제국 마법대학의 고위 마법사 하나.
선제후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로 화려한 수행원이다.
루페르트도 이들의 호위를 받은 바가 있어 잘 안다.
이 과도할 정도로 화려한 행렬의 목적은 단지 차기 황제를 경호하겠다는 것만이 아닌, 인근 주변국 특히 룸 제국의 후예들에게 새로운 제국의 힘을 과시하려는 것이라는 걸.
'여신님 말씀대로 별문제는 없을 거야. 누가 감히 룸왕의 행차를 막겠어?'
룸왕은 곧 제위에 오를 자.
수행하는 자는 자신의 이름을 넘어 가문의 이름까지 걸고 수행한다.
어설픈 매수나 모략 같은 것이 들어갈 여지는 없다.
그래도 방심을 늦출 순 없다.
회귀라는 최대의 카드가 리프니에의 변덕으로 가로막힌 이상 이쪽도 최악을 대비할 필요가 있으니.
우선 한스 징펠만을 수배했다.
선제후가 된 이후 만난 적이 없었지만, 그라면 언제든 부르면 달려와 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루페르트는 빙판 위에 우뚝 서 있던 건장한 사내와 몰려드는 스크라엘링을 앞에 둔 채 이쪽을 가만히 응시하던 소녀를 떠올렸다.
'그들에겐 몇 번이고 도움을 받았지.'
안젤리나가 죽은 현재 그들은 고용주가 없다.
뒤를 봐주던 거물이 사라진 지금 그들은 구걸밖에 할 수 없는 일개 도펠죌트너에 불가하다.
지금 루페르트의 권세와 힘이라면 능히 그들을 찾을 수 있으리라.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 리프니에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저기, 루페르트 가우저."
"네. 여신님."
"저, 전에 제가 말했던 퀘스트 기억하고 계시죠?"
"네. 그렇습니다."
"곧 그걸 주게 될 거 같아요. 아마도 그 시점은 당신이 그 악취 나는 나라에서 돌아온 직후가 되겠지요."
리프니에는 루페르트가 아닌 다른 방향을 응시하고 있었다.
선제후의 집무실 구석에 덩그러니 놓인 소녀의 조각상이다.
"아까도 말한 거 같지만, 그 사람은 대체 어디로 간 걸까요?"
"루돌프 님 말씀입니까?"
"오랜만의 바깥 공기가 퍽이나 마음에 들었나 보네요. 뭐, 언젠간 돌아올 사람이긴 하지만 괜히 신경 쓰이게 하는 게 조금은 짜증이 나네요."
명백한 투정.
루페르트는 쓴웃음을 머금은 채 리프니에의 투정을 곱씹었다.
'여신님. 가끔 보면 귀여운 구석도 꽤 많단 말이지.'
"저기, 루페르트 가우저."
"네. 여신님."
"혹시 그 사람이 제 욕을 하던가요?"
"아, 아니요!"
'갑자기 이렇게 들어오시면...!!'
뒤이어 리프니에가 은근히 떠보는 어조로 물어온다.
"그 사람이 못된 짓 가르친 건 아니겠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흐음~"
소라고둥이 루페르트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그야말로 들여다보는 듯한 행동.
"흠흠!"
표정 관리에 능하다고 하지만 여신 앞이다.
슬슬 얼굴에 경련이 올 무렵 소라고둥이 몸을 돌렸다.
"뭐, 당신들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냐마는."
"하하하...."
천만다행이다.
여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진 않지만 루페르트에겐 철혈대제 또한 선망의 대상.
괜한 구설수로 그에게 진심으로 조력을 아끼지 않는 둘 사이를 나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튼 여신의 볼일은 여기까지인 것으로 보였다.
"그럼 루페르트 가우저. 잘 다녀오세요. 균형의 여신 리프니에의 깜짝 퀘스트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리프니에가 바닥에 누웠다.
'여신님의 깜작 퀘스트라. 뭔가 불안한 느낌인데?'
의아함과 당혹감, 그리고 약간의 웃음과 함께 루페르트는 소라고둥에게 머리를 숙였다.
그 어떤 사심도 없는 순수한 경배의 마음을 안고서.
소라고둥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리프니에가 소라고둥을 떠난 모양이다.
때마침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성직 선제후 아카이아 대주교가 보낸 사람이다.
"룸왕 전하를 배알합니다."
대주교만큼은 아니지만 높은 우관을 쓴 성직자가 루페르트에게 예를 갖췄다.
"다름이 아니오라, 룸왕께서 옛 제국을 순방하고 오신 뒤 대주교께서 직접 찾으실 일이 있을 거라고 전해 드렸습니다."
"대주교께서요?"
"네, 긴히 사적으로 드려야 할 말씀이 있겠다고."
"그렇군요."
과거엔 없었던 일이다.
아카이아 대주교는 대관식에 잠깐 얼굴을 비췄을 뿐이고 사적으로 직접 찾은 일은 없었으니.
루페르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만큼 내가 인정받았다는 건가.'
그러나 그 미소는 과거의 기억과 함께 빠르게 희석됐다.
'그 꽉 막힌 늙은이한테.'
루페르트의 아카이아 대주교에 대한 감정은 썩 좋다고 할 수 없다.
고리타분한 얼굴로 그럴듯한 말만 늘어놓던 그 늙은이는 겉으로는 참된 신앙인으로 불리지만, 실제로는 자기밖에 모르는 늙은이였다.
제국의 위기를 알고 선제후 간의 알력을 알고 있음에도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생의 말년에 그가 한 일이라고는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일이 터지지 않게 조치한 게 전부다.
자신의 명예에 누가 되지 않도록 말이다.
풍문에 따르면 이 복지부동의 늙은이는 마지막 순간 그답지 않은 최후를 맞이했다고 한다.
자살.
호라교에서 가장 금기시하는 방법으로 능동적으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이다.
"...."
잠시 부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혔던 루페르트는 그 감정을 한숨 하나에 담아 날려 보냈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난 변했다. 내가 변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변한 것도 보았다. 그 늙은이 또한 내가 일으킬 변화 안에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겠지.'
루페르트는 조용히 창밖의 들판을 응시했다.
햇살을 받고 자라는 들판 너머로 짙은 먹구름이 모여들고 있었다.
한바탕 비가 올 모양이다.
* * *
"룸왕 전하를 수행하게 되어 정말로 영광입니다."
호위대의 대장을 맡은 건 제국 백작 에른스트 분더발트다.
그는 백작이라는 작위를 가지고 있지만 대령이라는 계급으로 불리는 걸 더 선호하는데, 실제로 자신의 이름을 딴 제국 보병연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이 사내는 그 자체로 약간의 변화를 의미했다.
'분더발트 연대라. 전에는 로젠샤프트 연대였는데.'
나쁠 건 없는 변화다.
잔뼈 굵은 전쟁 베테랑이라고 하나 술주정뱅이 로젠샤프트가 이끄는 연대는 제국 내에서도 평가가 좋지 못한 2선급의 연대인 반면, 분더발트 연대는 어떤 전투에서도 가장 치열한 국면을 맡길 수 있는 1선급 연대로 평가받고 있으니까.
분더발트 뒤엔 형형색색 화려한 안감을 이어 만들고 장식용 갑옷을 걸친 위풍당당한 병사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질서정연하게 도열해 있었다.
루페르트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분더발트에게 지휘봉을 건넸다.
"그야말로 제국 보병대의 거울과 같군요. 짧지 않은 여정이겠지만 마음 편안히 갈 수 있겠습니다."
루페르트는 분더발트와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연대를 사열했다.
굳은 얼굴로 보병대를 보던 루페르트의 입가에 점차 흐뭇한 미소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왔다.
'역시, 제국 보병대다.'
보병이 약한 나라가 제국을 세울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제국은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제국 보병대는 대륙에서 으뜸간다.
남쪽의 카스무어 왕국 보병대가 최근 명성을 떨치고 있다지만 제국 동맹국의 군인들은 제국군을 상대해 본 적이 없다.
'1선급 연대가 호위로 붙다니. 마음 한번 든든한데?'
제국의 보병연대는 그 자체로 하나의 움직이는 성채다.
방패에 비견되는 장창, 검에 비견되는 화승총으로 완전 무장 한 그들의 방진을 뚫어 낼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다.
그들만 해도 든든한데, 룸왕엔 또 다른 수행원이 붙는다.
"제국 남작 마르틴 후스입니다. 룸왕 전하를 옛 제국의 수도까지 안전하게 모실 기병들의 대장을 맡고 있지요."
약 200여 기에 달하는 기병대.
그들은 루페르트를 가장 가까이서 호위할 친위대다.
금빛과 은빛으로 번들거리는 얇은 흉갑을 입고 기병도와 피스톨로 무장한 그들은 그 아름다움만큼이나 치명적인 칼날이리라.
그들만이 아니다.
"사각(四角)의 마법사. 지겔슈타트라고 합니다."
제국의 가장 강력한 우군.
제국 마법사가 루페르트의 군기 아래에 섰다.
56화 15. 황제의 길 (2)
제국 마법사의 위계는 기하학에서 그 개념을 따온 오각, 사각, 삼각, 선, 그리고 점. 다섯 위계로 이루어져 있다.
점이 가장 낮으며 오각이 가장 우수하다.
사각의 마법사는 오각의 마법사, 제국 전쟁 마법사보다 겨우 한 단계 급이 낮은 강력한 마법사다.
제국 전쟁 마법사보다 급이 낮다고 하나 그들을 우습게 볼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제국에서도 겨우 스무 명 안팎이 이 위계에 머물러 있으니까.
당장 사각의 마법사가 외국에 간다면 능히 대마법사 칭호를 받고도 남는다.
지금 수습 마법사인 피리스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라고 할까.
그 정도로 강력한 존재가 루페르트에게 담담하면서도 힘 있는 어조로 선언했다.
"제가 옆에 있는 이상 그 누구도 전하를 해칠 순 없을 것입니다."
지겔슈타트는 신비로운 기운이 느껴지는 자줏빛 눈동자와 빨아들이는 소용돌이 같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 존재감은 단지 옆에 서는 것만으로 확실히 느낄 수 있다.
이들은 인간의 모습을 한 다른 무언가라는 걸.
도펠죌트너가 이능의 힘을 사용한다지만 본격적인 마법사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소모품이고 제국 마법사는 한 명 한 명이 주력 전함급에 해당하는 귀중한 전투자원이니까.
'기병대장은 같은 사람이지만 마법사는 바뀌었군. 그전엔 엘리사였나? 만사 귀찮아하는 여자 마법사였는데. 위계도 삼각에 불과했고.'
제국 보병대, 제국 기병대, 제국 마법사.
이것만으로 능히 강철의 진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루페르트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전하."
알록달록한 화려한 옷을 입은 이각모의 사내가 과할 정도로 허리를 숙이고는 선제후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한스 징펠만 엽사."
루페르트의 얼굴에 꾸밈없는 순수한 미소가 떠올랐다.
첫 번째 영혼 동맹이 그에게 찾아왔다.
"사냥은 진즉 끝났을 터인데 왜 연락이 없었습니까?"
"아, 그게. 막상 남작님. 아니 룸왕 전하께서 선제후가 되시고 나니, 볼 면목이 없었습니다. 저 같은 일개 사냥꾼이 과거의 친분을 이유로 선제후나 되는 분을 만난다는 것이...."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제가 룸왕이 됐건 황제가 됐건 전 여전한 루페르트입니다. 전혀 어려워하실 필요가 없어요."
루페르트가 빙그레 웃었다.
"거기다 제가 아니면 누가 당신에게 짜릿한 모험을 선물하겠습니까?"
한스 징펠만이 웃음으로 화답했다.
"그랬으면 좋겠지만, 없는 쪽이 아마도 제국엔 더 좋은 일이 아닐까요?"
"그것도 그렇겠지요."
한스 징펠만과 감격의 해후가 끝난 후, 마지막 수행원이 방을 찾아왔다.
문 너머에서부터 느껴졌다.
세상 그 자체를 부정하는 듯한 타오르는 듯한 분노의 열기가.
문 너머로 건장한 초로의 남성과 모자를 푹 눌러쓴 소년의 실루엣이 드러났다.
루페르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오랜만입니다."
베르크 란과 마를로네 란.
두 조손이 다시 한번 루페르트의 운명의 실타래 위에 나타났다.
"룸왕 전하께서 우리 같은 자를 찾아 주시다니,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을 정도로 감격하고 있습니다."
남작 시절과는 다르다.
선제후 시절과도 온도 차가 있다.
당연한 일이다.
왕관만 쓰지 않았다 뿐이지 루페르트는 사실상 제국의 황제니까.
천하의 베르크 란도 고개를 숙인 채, 그가 할 수 있는 최상급의 경의를 보였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루페르트는 그들에게서 지난번 마주했을 때와 또 다른 형태의 섬뜩한 분노가 그들의 마음을 조용히 불사르고 있는 걸 발견했다.
안젤리나와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베르크 란 일행과 함께 하는 내내 마를로네는 그녀의 흉을 봤었고, 베르크 란은 그녀에게 내심 기대하는 게 있었기에 따르는 눈치였으니.
'역시 안젤리나 님과 문제가 있었던 걸까.'
기대는 대체로 배신당하는 법이다.
저 철혈대제, 루돌프도 하급자의 기대를 이용하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루페르트는 시종일관 고개를 숙인 채 아예 눈 맞춤을 예방하고 있는 마를로네를 힐끗 보고는 베르크 란에게 넌지시 물었다.
"안젤리나 님의 근황은 알고 있습니까?"
베르크 란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대황후께서 몸져누우신 이후 단 한 번도 만나 볼 기회는 갖지 못했습니다."
'역시.'
안젤리나는 그들을 버렸다.
루페르트에겐 그토록 많은 걸 베풀었건만, 그녀를 위해 일하던 저 조손에겐 아무것도 베풀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렇군요."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다.
안젤리나가 청산해야 할 부채를 떠안고 싶진 않았다.
안젤리나는 안젤리나고, 루페르트는 루페르트다.
"다시 만나게 되어 정말로 마음이 놓이는군요. 다름이 아니라 이번 여정에서 저의 호위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루페르트는 이제 그들의 고용주로서 새로운 관계를 만들려 한다.
이미 실력은 검증됐고, 몇 번이고 위험을 함께했다.
"아시다시피 저는 곧 룸왕의 의례를 치러야 하니 말입니다."
"경호 말씀입니까? 저 같은 비천한 자에게 그런 일을 맡겨 주시는 건 영광이지만."
베르크 란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전처럼 곁에서 호위하는 건 불가능한 일로 보입니다만."
시종일관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마를로네가 루페르트 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흐릿한 안개에 잠긴 듯한 눈동자가 뭘 말하려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강의 감정을 눈치챌 수 있다.
"그럼 약간 거리를 두는 형태로 하죠."
처음부터 신분이 달랐다.
저쪽은 천대받고 기피당하는 제국에 버림받은 자였고, 이쪽은 제국의 귀족이었다.
그 차이는 더욱 커졌다.
그쪽은 여전히 바닥에 머문 반면 루페르트는 이제 제국의 황제를 눈앞에 둔 자다.
시대의 부산물인 도펠죌트너 따위가 옆에서 경호한다는 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이며, 주변에서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어이. 저길 봐. 빨간 명찰이야."
"왜 따라오는 거지? 황제가 될 분이라 얻어먹을 게 많다고 생각하는 건가?"
"부정 타겠는데?"
단지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만으로 연대 병사들은 아낌없는 적의와 경멸을 드러냈다.
일부는 총까지 만지작거리며 그들을 겨누는 시늉을 할 정도였다.
도시 안에서 이러는데, 몸이 피곤해지는 행군 길에서 그들이 무슨 짓을 할지는 연대장도 모른다.
결국 루페르트는 연대장을 찾아갔다.
"도펠죌트너로 하여금 종군하게 할 생각입니까?"
분더발트는 큰 반감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붉게 그은 얼굴엔 귀찮다는 감정이 가감 없이 드러났다.
"병사들에게 일러 두도록 하겠습니다만 가급적이면 병사 눈에 안 띄는 걸 추천하겠습니다. 신병의 비율이 높아져서 기강 관리가 쉽지 않으니 말입니다."
마르틴 후스의 경우엔 아무래도 좋다는 느낌이었다.
"부하들에게 통지하겠습니다. 그런데 도펠죌트너라는 게 아직도 세상을 돌아다니고 있었군요."
멋들어진 콧수염을 기른 그는 난봉꾼 기질이 다분해 보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마를로네의 성별을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 파악했다.
"저건 여자 같네요. 소년처럼 꾸미고 있지만, 여성의 골격은 숨길 수가 없군요. 다만 그다지 매력적인 여성으론 보이지 않는군요."
마르틴 후스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차피 오래는 못 살겠지만."
루페르트는 쓴웃음을 참으며 마지막 주요 인물인 지겔슈타트를 응시했다.
"도펠죌트너 말입니까?"
예상은 했었다.
도펠죌트너 이야기를 꺼냈을 때 가장 크게 반감을 드러낼 이가 지겔슈타트라는걸.
"그런 자들이 뭘 할 수 있겠습니까?"
신비로운 광택을 머금고 있던 지겔슈타트의 눈동자에 불길한 빛이 서렸다.
마법의 기운을 감지하는 루페르트의 눈엔 지겔슈타트 뒤에 시커먼 거인이 서 있는 것으로 보일 정도의 마력이다.
'다른 건 몰라도 실력 하나만은 확실하구만.'
"전쟁에서 대폿밥으로 쓰던 자들입니다. 약간의 이능을 갖고 있다고 하나 우리 마법사에 비할 바가 아니지요."
그 대목에서 루페르트는 약간의 불쾌감을 느꼈다.
베르크 란과 마를로네를 대폿밥에 비유하다니.
실제로 도펠죌트너가 대폿밥이었다고 하더라도 결코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다.
둘과는 많은 인연이 있으니까.
하지만 역정을 낼 필요는 없다.
이 지겔슈타트라는 인물은 마법 대학에서 직접 선택한 인선, 넓은 의미에서 마법대학이 보낸 사자와도 같은 존재다.
사이가 나빠질 이유는 단 하나도 없으며 지겔슈타트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그의 불쾌감도 근거가 있다.
도펠죌트너가 사각의 마법사인 그의 영역에 끼어들 여지가 있으니 말이다.
실제로 그게 루페르트가 의도한 바이기도 하고.
"유사시 전령으로 쓰려합니다."
루페르트가 담담하게 말했다.
"전령요?"
"그렇습니다. 기병대가 있다고 하지만 큰 산맥을 지나치지 않습니까? 산지에선 말보다는 사람 쪽이 좀 더 유연성이 있는 법이지요."
"확실히, 산지에서 공격받는 사태가 일어나면 그들이 나을 수도 있겠군요. 가능성은 희박합니다만."
"세상에 절대라는 건 없으니까요."
마지막으로 지겔슈타트의 협조도 받았다.
하지만 여전히 베르크 란과 마를로네의 대접은 처참했다.
둘은 행렬 안에 끼는 것조차 용납받지 못한 채 거의 지평선 끝에서 간신히 보일 정도로 멀찌감치 서서 루페르트 일행을 따라와야 했다.
"...나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만."
도펠죌트너와 달리 한스 징펠만은 루페르트의 곁에 머물렀다.
특별한 결격 사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불과 철의 형제단은 잔뼈 굵은 군인에겐 높은 명성을 누리는 존재니까.
일부 장교와 하사관이 앞다투어 찾아와 총기를 훔쳐볼 정도였다.
"어쩔 수가 없는 일이겠지요."
베르크 란의 실력을 잘 아는 한스 징펠만은 못내 그들이 그런 취급을 받는 게 안타까운 모양이다.
"...."
루페르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현재의 불편한 감정을 가슴에 담아 놓았다.
'언젠가는.'
그들에게 명예와 자유를 돌려주리라.
* * *
제국 수도 테타우.
시민들이 운집한 가운데, 룸왕의 행차가 시작됐다.
하늘에선 꽃잎이 쏟아지고 거리에선 음악이 끊이지 않았다.
그 기대와 흥분은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모두가 새로운 황제의 즉위를 기다리고 있었다.
만인의 축복 속에서 루페르트는 제도를 떠나 남쪽을 향한 여정을 시작했다.
슈발츠마인, 디터팔츠, 고어문트. 3개의 선제후령을 차례로 지나가자 제국의 국경이 나타났다.
제국의 남부 국경은 붉은 산맥이라 불리는 대륙 중남부에 우뚝 솟은 험준한 산악지대를 따라 형성되어 있다.
붉은 산맥은 만년설이 쌓일 정도의 태산준령의 집단으로 일찍이 룸 제국 시절부터 함부로 지나가기 어려운 천연 장벽이었다.
다만 이름과 달리 산맥은 대체로 눈으로 뒤덮인 흰색을 띠고 있었는데, 그건 시대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룸 제국이 건재하던 시기엔 노상엔 늘 전쟁 포로와 노예가 흘린 피가 끊임없이 쌓이는 눈을 물들일 정도로 흘러넘쳤다고 하니까.
룸 제국은 인간이라는 연료로 돌아가는 거대한 살육 기계였다.
좁게는 룸이라는 도시, 넓게는 그들의 근거지인 카르파티움 반도에 살아가는 이들을 위해 국경 밖에서 무수히 많은 노예를 끌고 왔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룸 제국 안에서 신음하다 죽었는지는 오직 그들의 신만이 알 것이다.
산맥을 지날 때 특별한 일은 없었다.
병사 하나가 넘어져 발목을 삔 게 유일한 사고였다.
다만 이른 새벽 산맥 사잇길을 행군할 때 루페르트는 저 까마득한 설봉 위에서 아스라이 울려 퍼지는 음울한 포효를 듣고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빠져들었다.
루페르트는 옆을 지키는 한스 징펠만에게 저 포효의 주인공이 누군지 물어보았다.
"글쎄요. 익숙지 않은 소리입니다. 제국 방방곡곡을 활동했다지만, 남부 산맥 쪽은 또 저희들과는 인연이 없어서요."
"그렇군요."
"그나저나 멀리서 들려옴에도 오싹한 울음이네요. 마치 전설 속의 설인이 내지르는 포효를 연상케 합니다."
"설인이요?"
루페르트가 흥미를 드러냈다.
'그런 것도 있었나. 전에 여길 지났을 땐 듣지도 보지도 못했는데 말이야.'
한스 징펠만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울타니아의 설인이라 불리는 괴물입니다."
"울타니아의 설인이라. 울타니아는 지명처럼 들리는군요."
"룸 제국 시절에 이 지방은 그들의 언어로 울타니아라고 불렸던 모양입니다."
"호오, 구 제국 시절부터 알려진 괴물이군요. 어떤 녀석입니까?"
"영원히 얼어붙었고, 얼어붙을 운명의 설봉 위에 산다고 알려진 마물입니다."
흥미진진해 하는 루페르트와 달리 한스 징펠만의 표정엔 경계심이 잔뜩 묻어 있었다.
루페르트가 생각을 읽고 물었다.
"위험합니까?"
한스 징펠만은 찰나의 망설임조차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사냥이 불가능한 괴물입니다. 우리 불과 철의 형제단이 반드시 피해야 하는, 금지된 다섯 중 하나입니다. 존재 자체가 재앙이자 죽음을 의미한다고 할까요?"
한스 징펠만의 말을 듣고 있던 지겔슈타트가 끼어들었다.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전하. 그 설인은 설봉 아래로 좀처럼 내려오는 일이 없으니까요. 기록에 의하면 딱 한 번, 설봉 아래로 내려온 적이 있습니다."
"언제입니까?"
"룸 제국이 멸망하던 날, 울타니아의 설인은 수도를 구원하기 위해 산맥을 지나던 제국 최후의 군단을 홀로 찢어발겼다고 하더군요."
"군단을 홀로...."
알려지기로 룸 제국의 일개 군단은 6천 명이다.
6천 명이 괴물 하나한테 당했다는 소리다.
상상이 가지 않는다.
대체 어떤 괴물이길래 홀로 그토록 많은 인간을 죽일 수 있는지.
지겔슈타트는 상상에 잠긴 루페르트를 향해 은은한 미소를 머금으며 예의 신비로운 눈동자를 번득였다.
"일종의 은유가 아닐까요? 전설의 괴물마저 룸 제국을 증오한다는."
"그럴 수도 있겠군요."
루페르트는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 설봉 쪽을 슬며시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왜 설인이 지금 포효하고 있을까요?"
아무도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57화 15. 황제의 길 (3)
오싹한 설인의 포효 속에서 루페르트 수행단은 붉은 산맥의 고갯길을 따라 산맥을 넘었다.
간간이 마주친 산맥의 주민들은 우호적이었고, 루페르트에게 존경과 경의를 표시했다.
일부는 길잡이를 자청하기도 했는데, 마르틴 후스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최근 산맥 지방엔 기근이 들어 적지 않은 사람이 일자리와 식량을 구하러 제국으로 향했다고 한다.
"산맥 사람들은 훌륭한 병사들이죠. 사투리가 섞여 있긴 하지만 우리와 같은 언어를 쓰는 데다 끈질김과 근성은 제국 어디에 내놔도 부족함이 없을 겁니다."
분더발트는 산맥 사람들을 병사로서는 높이 평가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일자무식인 촌놈들이 제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용병밖에 없다는 냉정한 평가도 함께 내렸다.
산맥의 끝자락은 초원과 설산이 한데 어우러진 동화 속 한 장면 같은 아름다운 풍경이 연이어 펼쳐졌는데, 이 아름다운 땅끝에 제국의 봉신 자부아 공국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미 루페르트가 온다는 걸 알고 있던 자부아 사람들은 먼 곳까지 소수의 기병을 보내 루페르트를 환영했다.
루페르트가 기병 대장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공작님은 부재중이시겠지요?"
기병 대장이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야.'
전에 와 본 적이 있으니까.
루페르트의 지위가 바뀌고, 수행단 구성원도 바뀌었지만, 세상엔 변치 않는 것도 적잖이 있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루페르트의 영향을 받는 게 아니니까.
자부아 공국 이남엔 드넓은 벌판이 펼쳐졌다.
병사들이 웅성거렸다.
"드디어 평지다."
"코미투스 평야다. 여기서부터가 옛 제국의 땅이지."
"룸에 도착한 건가."
"룸이라는 도시는 좀 더 가야겠지."
잔뼈 굵은 병사들의 말대로 저 평원은 룸 제국의 영역이다.
악의 제국의 백성과 군사를 길러 낸 비옥한 평원은 이제 황무지로 전락했다.
씨앗을 뿌려도 싹이 트지 않고, 혹 싹을 틔운다고 해도 알 수 없는 괴질과 때 이른 서리가 농사를 모조리 망쳐 버렸다.
역병이 수시로 돌았고 마물이 사람 행세를 하며 사람을 죽였다.
옛 룸 제국의 영토는 버려진 자들의 땅이다.
루페르트는 곳곳에서 제국과 비교되는 처참한 궁핍과 후진성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의 신에게 버림받은 땅이군요."
한스 징펠만이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보며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자업자득이지요."
창밖 너머로 초라한 텃밭을 가꾸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볼이 움푹 들어가고 퀭한 눈에 피부가 까맣게 타들어 간 그들은 생기 없는 눈으로 북쪽에서 온 외국인의 행렬을 말없이 응시했다.
"곧 옛 제국의 수도, 룸입니다."
마르틴 후스가 말을 마차 가까이 붙여 루페르트에게 목적지가 다가왔음을 알렸다.
루페르트는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어 점점 가까워지는 거대한 폐허를 두 눈에 담았다.
"멸망한 제국이라...."
폐허로 이루어진 시내엔 시궁쥐를 닮은 비참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감히 구걸하는 무리도 없었다.
제국인의 행차에 감히 손을 내민다는 것이 어떤 일을 초래할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철혈대제가 이곳에 행차했을 때, 한 룸인이 구걸을 하다 도시 절반이 불에 탔던 건 유명한 이야기.
제국인의 눈에 비친 룸인들은 인간 이하의 짐승과 다를 바가 없다.
루페르트가 온 목적도 크게 다르지 않다.
"멸망한 제국의 말예가 새로운 황제를 배알합니다."
다른 룸인들보다는 확연히 구분되는 기품을 머금은 중년 사내가 루페르트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소개한 대로 이 사람은 옛 제국 마지막 황제의 후손이다.
한때 세계를 지배했던 옛 제국의 핏줄은 이제 새로운 제국의 은전에 기대서 살아간다.
새로운 제국이 그들에게 부여한 역할은 하나다.
"그럼 의례를 시작하겠습니다."
루페르트가 승낙하자 그 사내는 모습을 감추었고, 잠시 후 웃통을 벗은 채 마치 자신이 소나 말인 것처럼 빛바랜 청동 수레를 몸소 끌고 왔다.
영원히 반복되는 조롱.
이것이 그와 그의 가문이 대를 이어 가며 해야 할 일이다.
자신의 가문을 욕보이는 대가로 이 사람은 룸이라는 폐허의 주인으로 행세할 수 있다.
짧게는 수년, 길게는 수십 년에 한 번 하는 것으로 제국의 보호를 받을 수 있으니 어찌 보면 수지맞는 장사일지도 모를 일이다.
루페르트는 사내의 이름조차 묻지 않았다.
진정한 황제는 멸망한 제국의 황제 이름까지 알 필요가 없다.
이것이 관례다.
"시작하라."
루페르트가 그답지 않게 고압적인 어조로 명령했다.
사내가 루페르트가 타기 좋게 수레를 기울였다.
루페르트가 수레에 올라타자, 사내는 수레를 끌기 시작했다.
제국 군인들이 양옆에서 호위하는 가운데 루페르트를 태운 수레는 룸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대로를 지났다.
루페르트는 무심한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생기 없고 무력한 눈동자들이 보인다.
입고 있는 옷은 지저분하고 낡았고, 소재가 좋지도 않았다. 그 궁상맞음은 나름 고위층이나 평민이나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리라.
그들의 땅은 신에게 저주받았고 제국의 군홧발이 주기적으로 그들을 짓밟았으니.
당장 선제 철혈대제만 해도 룸왕 시절에 호위대를 동원해 도시를 불태우고 무수히 많은 사람을 학살했다.
철썩!
가벼운 채찍질이 사내의 등을 후려쳤다.
이것은 새로운 제국의 황제가 구 제국에게 내리는 모욕이다.
저 마차를 끄는 자는 구 제국 황실의 혈족이니.
그러나 구 제국의 시민들 얼굴엔 분노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거의 천 년간 이어진 행사다.
중간중간 반발이 일어나긴 했으나, 그때마다 도시의 시민은 절반 혹은 그 밑으로 줄었다.
조상이 저지른 업보를 그 후예들이 받고 있는 것이다.
구 제국의 말예(末裔)가 끈 마차에서 내린 루페르트는 반쯤 무너진 궁전에 이르렀다.
거기엔 사슬에 묶인 백골이 있다.
앙상한 팔목에 낀 금팔찌와 목걸이, 머리에 쓴 빛바랜 왕관이 그가 생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말해 준다.
룸 제국의 마지막 황제다.
새로운 제국의 건국자 티그리트가 그를 사로잡은 뒤 소감을 물었을 때 그는 아래와 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그대라면 더 잘할 것 같은가?"
이에 대한 티그리트의 답은 채찍질이었다.
티그리트 본인이 구 제국의 마지막 황제를 사슬에 매달아 죽을 때까지 매질했다.
그때 그가 보인 분노는 그 어떤 사람도 감히 말릴 수 없을 정도로 맹렬했다고 한다.
룸왕이 옛 제국의 수도에 온 것은 그 채찍질을 재현하기 위함이다.
루페르트가 채찍을 들었다.
이미 생전에 수십 번의 매질을 당했고 죽어서도 끊임없이 채찍질을 당한 백골에 한 번의 채찍질이 추가됐다.
"당연히."
티그리트와 같은 대답이 루페르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것으로 룸왕의 유일한 임무가 완결됐다.
남은 건 단 하나.
제국으로 돌아가 두 개의 관을 쓰는 것이다.
룸 제국의 녹슨 월계관과 카렐리아의 왕관.
제국의 황제는 두 개의 관을 쓴다
* * *
"날씨는 좋습니다. 공기도 선선하고 쾌적하고 좋은 바람이 불고 있군요. 도시에 하루도 머물지 않겠다는 전하의 의견엔 병사들도 깊이 동감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이런 끔찍한 폐허에서 하루를 보내고 싶지 않을 겁니다."
루페르트의 제안에 따라 분더발트는 최대 속도로 귀로 여정을 잡았다.
짐을 가벼이 하고 몸이 아픈 자를 위해 새로운 수레와 마필을 샀다.
마르틴 후스의 기병대는 일부를 선발대로 풀어 혹시 모를 위협에 대비했다.
"이 도시가 마음에 들지 않으신가 보군요."
지겔슈타트가 루페르트를 신비로운 눈으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정확한 통찰이다.
루페르트가 길을 서두르는 이유는 비단 빨리 황제가 되고 싶은 것만은 아니었다.
그냥 이 폐허가 싫었다.
망국의 백성들을 보는 것도 싫었고, 도처에 만연한 패배의 공기를 마시는 것도 기분이 나빴다.
왜냐하면 이 도처에 늘린 패배감은 루페르트가 맛보았던 제국의 마지막과 쌍둥이처럼 닮아 있었으니까.
이미 멸망한 제국과 곧 멸망 당할 운명의 제국.
둘 사이엔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룸 제국은 그들의 악덕으로 망한 거다. 신조차 버렸다는 이야기지. 하지만 우리 제국은 다르다. 적어도 룸 제국처럼 악독하게 타국와 타민족을 다루진 않았다.'
떠나기 전에 룸 황실의 마지막 후예가 찾아왔다.
루페르트의 수레를 말처럼 끌었던 수척한 중년 사내였다.
상의를 벗고 맨몸을 드러낸 의식 때와 달리 의관을 제대로 차려입은 그의 모습은 이지적이고 기품이 있었다.
"전하께서 일정보다 빠르게 제국으로 돌아가신다는 말씀을 전해 들었습니다."
어제 이름을 듣긴 했지만 루페르트는 그 이름을 기억하지 않았다.
앞으로 더 이상 볼 일이 없을 터이니.
"무슨 일입니까?"
필경 금전적인 지원을 요구할 거라고 생각했다.
룸 제국의 마지막 후예는 제국의 은전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으니.
손해 볼 건 없는 장사다.
짧게는 수년, 길게는 수십 년 황제가 바뀔 때마다 짧은 연극을 하는 대신 옛 제국의 폐허 안에서 풍요롭게 살 수 있으니 말이다.
"자유민의 제국이 건국된 지도 곧 천 년이 다 되어 가는군요. 제 기억이 맞다면 10년도 채 남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8년 정도 남았지요."
"특별한 일이 없다면 황제 폐하의 치세 중에 자유민의 제국은 천년기를 맞이하겠군요."
"아마도 그렇겠지요. 그런데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루페르트가 얕은 한숨을 내쉬며 룸 제국의 후예를 싸늘하게 응시했다.
"원하는 게 있습니까?"
루페르트의 차가운 시선을 받은 룸 제국의 후예는 살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딱히 원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다만?"
사내의 입가에 의미를 알 수 없는 야릇한 미소가 맺혔다.
"곧 제위에 오르실 룸왕 전하께서 대단히 영민하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요."
루페르트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사내를 노려보았다.
이 대화를 더 이상 원치 않는다는 강한 표현이다.
사내는 루페르트의 뜻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숙였다.
루페르트는 지체 없이 뒤돌아섰다.
개인적인 혐오나 감정은 없다.
단지 이 자리가 싫었다.
몰락한 제국.
그리고 그 후예.
그것은 루페르트의 가장 어두운 과거와 맞닿은 영역이니까.
떠나가려는 루페르트를 향해 사내가 고개를 들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거 아십니까?"
'또 할 말이 남은 건가.'
루페르트는 등을 내보인 채 살짝 고개만을 돌렸다.
어쩌면 화를 낼지도 모른다.
감정이 그렇게 요동치고 있다.
불안한 침묵 속에서 사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국 최초의 황제가 우리의 선조에게 채찍질을 가한 이후에 한 말을 알고 계십니까?"
루페르트의 눈동자에 희미한 이채가 떠올랐다.
'그 뒤가 있었다고?'
발언권을 얻었다는 걸 확신한 몰락 제국의 후예는 루페르트의 등을 잿빛 눈동자로 응시하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천년 제국을 만들겠다."
"천년 제국...?"
"너희들이 이루지 못한 천년의 제국을."
알지 못한 내용이다.
어떠한 사서도 기록도 이런 대화를 기록하지 않았다.
순간 생각했다.
혹 꾸며 낸 건 아닐까.
룸 제국의 후예가 은은한 미소를 머금었다.
"제 이름은 파비안 아비투스입니다."
순간 루페르트는 마법의 냄새를 감지했다.
그것도 대단히 강렬한.
'마법?'
루페르트는 파비안 아비투스를 노려보았다.
'룸 제국의 후예가 마법을 익혔다는 소린가?'
가능성은 적다.
룸 제국은 마법을 철저히 금지한 나라다.
일개 개인이 고귀한 룸 제국의 귀족보다 강하고 우월하다는 것이 그들의 질서에 도전하는 행위라 보았기 때문이다.
그 옛 제국의 후예가 마법을 익힌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느껴졌던 마법의 냄새는 곧 씻은 듯이 사라졌다.
허나 여전히 의심이 간다.
루페르트의 시선은 파비안 아비투스라는 사내의 손을 무심코 응시했다.
그의 손에 반지가 끼어 있었다.
금도, 은도 아닌 뼈로 만든 음울하고 기괴한 반지였다.
마법의 잔향이 그 반지에서 감돌고 있었다.
"...그 반지는 뭔가?"
루페르트가 날카롭게 묻자, 파비안 아비투스는 선뜻 반지를 빼 루페르트에게 내밀었다.
"선조의 유골로 만든 반지입니다. 조상의 시신 일부분을 취해 장신구를 만드는 건 옛 제국의 오랜 풍습이지요"
루페르트는 반지를 살폈다.
마법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왜일까. 자꾸 불길한 마음이 드는 건.
분명 어디서 경험한 듯한 꺼림칙함이 느껴진다.
'저주라도 받은 건가. 잘도 이런 불길한 걸 끼고 다니는군.'
루페르트는 반지를 돌려주고 말없이 돌아섰다.
파비안 아비투스는 인사도 없이 사라지는 제국의 황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황제 폐하의 행운을 빌겠습니다."
고개 숙인 그의 입가에 섬뜩한 미소가 떠올랐다.
* * *
떠나가는 마차 안.
차창 밖엔 정오의 태양이 내리꽂고 있다.
폐허가 된 도시엔 궁상맞은 빈민과 주인 없는 들개 몇 마리만 보일 뿐이었다.
"뭘 그리 심란해하십니까?"
동승한 분더발트가 물었다.
"아니오. 별거 아닙니다."
루페르트는 파비오 아비투스라는 사내를 생각하고 있었다.
몰락한 제국의 그림자.
제국을 위해 사육되는 연극배우 정도로 생각한 사람이었다.
그가 생각지도 않은 형태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기묘하군.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그 사내는 루페르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묵묵히 마차를 끌고 채찍을 두 손으로 받쳐 올리며 룸왕이 황제가 되기 위한 연극을 성실하게 수행했을 뿐이다.
그 이후 그 사내가 어떻게 된 건지, 이 룸 제국의 폐허가 어떻게 됐는지는 알지 못한다.
제국 본토가 불타는데 몰락한 폐허의 사정을 어찌 알겠는가.
"이 도시가, 이 제국이."
루페르트는 턱을 괸 채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분더발트는 물론 함께 탄 지겔슈타트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요?"
루페르트의 물음에 분더발트는 껄껄 웃었고, 지겔슈타트 또한 굳은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알고 계시겠지만 이 도시는."
지겔슈타트가 신비로운 눈동자로 차창 밖을 응시했다.
폐허 너머에 나무 없는 작은 동산이 야트막하게 솟아 있었다.
그 동산은 나무 대신 폐허의 돌조각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보는 이에 따라 혐오감을 느낄 정도로 규칙적인 거리와 배열로.
"선제께서 철저하게 짓밟으셨습니다."
그 무수한 돌조각이 의미하는 건 그 숫자만큼의 죽음이리라.
'저렇게 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것인가.'
하지만 왜일까.
죽은 사람의 숫자보다 비석의 숫자가 더 오싹하게 느껴지는 건.
58화 16. 모독자들 (1)
제국으로 돌아가는 여정이 시작됐다.
예정대로 행군은 쾌속으로.
최소한의 휴식만을 취할 뿐, 어지간한 마을과 도시는 무시하고 빠르게 카르파티움 반도를 벗어나는 여정이었다.
병사 입장에서 욕이 나올 정도의 강행군이지만, 정예 연대는 정예 연대다.
단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병사들은 묵묵히 그들의 의무를 수행했다.
왜 분더발트 연대가 룸왕의 호위로 인정받았는지 행동으로 증명하는 순간이었다.
이틀간 이어진 행군이 끝난 후 루페르트 일행은 지평선 너머 솟은 산맥을 보았다.
붉은 산맥, 그 아래에 자리 잡은 자부아 공국이 지친 병사들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루페르트 수행단이 도시에 들어오자 화려한 의복을 차려입은 토착 귀족과 가신들이 루페르트를 맞이했다.
"현재 출타 중인 공작을 대신해 제국의 황제가 되실 룸왕 전하께 인사드립니다."
여전히 자부아 공작은 영지를 비운 상태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실제로 자부아 공작이 자신의 영지에 있는 날은 얼마 되지 않으니까.
공작은 부르봉 왕국에서 나고 자란 완벽한 부르봉인으로 말도 다르고 춥고 눈으로 덮인 산간 지역 대신 모친에게 상속받은 온화한 부르봉 남부 영지에서 일 년의 대부분을 지낸다.
공국 측에선 루페르트에게 최상급의 편의를 제공했다.
공작의 저택에서 루페르트는 발코니 아래 펼쳐진 도시와 주변 풍광을 둘러보았다.
도시를 병풍처럼 둘러싼 가파른 산맥과 저 아래 탁 트인 코미투스 평야가 그림처럼 펼쳐졌다.
'자부아 공국이라.'
루페르트는 오랜만에 회귀 전의 기억을 더듬었다.
제국 멸망기 자부아 공국은 제국을 배신했다.
제국의 봉신에서 부르봉 왕국의 봉신으로 주인을 바꾼 것이다.
중신들은 자부아 공국을 규탄하며 엄벌에 처해야 된다고 열변을 토했지만 누가, 어떤 군대가 그들을 벌할 수 있단 말인가.
군대도 조직할 돈도, 운영할 돈도 군대를 거느릴 장군도 없을뿐더러 당장 내전을 벌이는 선제후들을 중재할 힘조차 없는데.
오히려 은근한 오기가 끓어 올랐다.
'이번 치세에 자부아 공국이 부르봉 왕국에 붙을 일은 없을 것이다.'
하나의 작은 목표가 추가됐다.
그 목표 달성을 위한 본격적인 노력은 곧 시작될 것이다.
저 산맥만 넘으면 제국이다.
길고 지루한 여정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여행 전엔 걱정했지만, 지나고 보니 하품이 나올 정도로 편안하고 안락한 여정이었다.
건너편에 앉은 한스 징펠만에게 미안할 정도로 말이다.
물론 더 미안해야 할 사람들은 따로 있다.
루페르트는 망원경을 들어 도시 밖 빈자들의 천막 지대에서 서성이는 두 사람을 흐릿한 눈으로 응시했다.
베르크 란과 마를로네 란.
"...."
그들은 도시에 들어오지도 못했다.
여기만이 아니었다.
곳곳에서 핍박과 무시를 받았다.
루페르트가 푹신한 침대에서 잘 때 그들은 광야에서 별을 보며 잠을 청해야 했고, 루페르트가 부드러운 빵과 고기를 먹을 때 그들은 식은 감자 한 덩이로 주린 배를 채워야 했다.
수시로 지나가는 기병과 병사들이 조롱을 하는 건 덤.
개인적으로 챙겨 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선제가 직접 핍박을 지시한 도펠죌트너를 차기 황제가 개인적으로 챙겨 주기라도 한다면 구설수에 오를 것이 뻔하니.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루페르트는 특히 마를로네 쪽에 오래도록 시선을 주었다.
남자아이처럼 꾸미고 있지만, 보면 볼수록 여성스러움이 진하게 느껴진다.
'마리.'
그녀에겐 빚이 있다.
몇 번이고 목숨을 빚졌다.
그녀가 없었다면 황제가 될 일도 없었을 것이다.
"!"
문득 재밌는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지금 통찰의 만화경을 사용해 볼까?'
거리가 제법 멀다.
망원경으로 보아야 얼굴을 확인할 수 있는, 못해도 60보는 족히 넘는 거리다.
이 먼 거리 안에서도 통찰의 만화경이 가능할 것인가.
시도해 본 적은 없다.
이단으로 몰리지 않기 위해 늘 자신을 노출하지 않는 곳에서 여신의 권능을 사용했었으니까.
하지만 이 거리에서, 망원경을 사용해 통찰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다면?
어쩌면 루페르트의 약점 하나를 극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건 여신의 당부다.
리프니에가 말했다.
도펠죌트너는 감이 좋다고.
일전에 그들을 통찰하려고 했을 때 여신이 루페르트는 제지하기도 했으니.
하지만 여신이 없는 지금 루페르트를 말릴 수 있는 건 그의 양심뿐이다.
'한 번만 해 보자. 혹시 알아?'
두 번이나 목숨을 구해 주고, 몇 번이고 운명에 엮인 여인과 노인의 운명은 어떠할 것인가.
루페르트는 망원경에 마를로네를 고정한 채 통찰의 만화경을 떠올렸다.
잔잔한 파도 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듯한 감각과 함께 그의 눈동자에 불경한 녹색빛이 일렁거리기 시작한다.
'어? 정말로 가능한 건가?'
가슴이 두근거리며 기대감에 두 눈에 이채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
마를로네가 갑자기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눈과 눈이 마주쳤다.
"헉!!"
루페르트는 황급히 통찰의 권능을 회수했다.
이쪽이 보이기라도 하는 걸까.
망원경을 쓰고 있다지만, 렌즈를 사이에 두고 두 눈동자가 마주친 기분이다.
루페르트가 가슴을 졸인 채 망원경을 내려놓고 딴청을 피우는 동안, 마를로네는 계속해서 루페르트 쪽을 올려다보았다.
흐릿한 안개가 낀 듯한 에메랄드빛 눈동자는 꽤 오랫동안 루페르트를 응시하다 돌아섰다.
"마리."
베르크 란이 그녀를 불렀다.
"왜?"
"소시지가 먹고 싶다."
"아까 훔쳐 왔잖아?"
베르크 란은 고개를 돌려 산맥 쪽을 노려보았다.
구름이 많은 날이었다.
어둠에 잠긴 산맥은 평소보다 훨씬 더 어둡고 괴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고요한 분위기지만 베르크 란은 그 산맥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한 소문을 들었다.
그는 검 한 자루를 손에 쥔 채 산맥을 향해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어디가?"
"아무래도 불안하군. 너는 룸왕에게 소식을 전해라."
"가 봐야 문도 안 열어 줄 건데?"
"그렇다면 소시지를 훔쳐야겠지?"
마를로네는 할아버지의 뜻을 알아차리고 쓴웃음을 머금으며 멀리 보이는 저택 쪽을 흐릿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발코니 쪽에 있던 젊은 황제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혀 차는 소리가 미약하게 터져 나왔다.
"...우리 전하도 참. 뭐가 안 맞네."
* * *
궁정은 루페르트에게 차가운 감옥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황제의 의자에 앉아 공허한 알현실을 보고 있노라면 활짝 열린 문 너머 열주(列柱)가 들어선 복도 쪽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자격 없는 사람이 그 자리에 앉으니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야."
"누가 알았겠나? 그 강성하던 단 한 명이 바뀌었다고 멸망의 길을 걷게 될 줄은."
이름 모를 귀족과 군주의 웅성거림이다.
그들의 말엔 주어가 빠져 있지만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그들은 루페르트를 탓하고 있었다.
치세 초반에만 해도 루페르트도 혈기가 있었고 황제로서의 자존심이 있었기에 버럭 화를 내기도 했고 주의를 주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명백해진 중반기 이후로는 마음대로 지껄이게 내버려 두었다.
화를 내본들 그가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기에.
그렇게 무수히 많은 말로 이루어진 칼날이 루페르트의 마음을 찌르고 토막 냈다.
비난에 익숙해질 즈음 루페르트의 두꺼운 신경을 긁을 수 있는 비난은 몇 되지 않았지만, 유독 한마디가 기억에 남는다.
"평범한 사람이 그 자리에 있으면 안 돼."
한 신부가 말했다.
"평범한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되는 자리라고. 그 황제라는 자리는."
느릿한 울림이 귓가에 끝없이 메아리치는 걸 느끼며 루페르트는 눈을 떴다.
누군가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시종이 보고했다.
"지겔슈타트 님께서 성내에 잠입하려는 침입자를 포획했다고 합니다."
"침입자?"
"그 침입자가 전하를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그래?"
"자신의 이름만 대면 바로 달려와 줄 거라고 자신하더군요."
"이름이 뭐지?"
"마를로네입니다."
루페르트는 즉시 그녀를 들이라 명했다.
곧 쇠사슬 소리와 함께 익숙한 실루엣이 병사들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전하. 이렇게 다시 봬서 정말로 반가워요."
쇠사슬에 묶인 금발의 소녀가 사슬을 찰랑거리며 부자연스러운 자세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루페르트는 쓴웃음을 머금은 채 마를로네를 살폈다.
다치거나 상한 곳은 없었다.
그저 모자가 벗겨지고 팔다리에 굵직한 수갑과 족쇄가 채워졌을 뿐이다.
시종이 귀띔했다.
"지겔슈타트 님을 만나자마자 바로 항복했다고 하더군요. 너무 빠른 항복에 지겔슈타트 님마저 놀랐다고 합니다."
그녀 앞에 마련된 심문자용 책상엔 지겔슈타트가 여느 때처럼 신비로운 눈빛을 과시하며 두꺼운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그는 뒤늦게 루페르트의 기척을 알아차린 시늉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전하."
그가 자리를 양보했다.
루페르트는 좌석을 사양하며 지겔슈타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사건의 개요는 단순했다.
마를로네가 성벽을 넘어 루페르트의 저택으로 진입했다.
저택 일대에 삼엄한 경계망을 펼치고 있던 지겔슈타트가 그녀의 기척을 눈치챘고, 지붕 위에 있던 그녀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다음은 루페르트가 익히 아는 대로다.
"현명하게도 바로 투항하더군요."
지겔슈타트가 헛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이에 마를로네가 지겔슈타트를 빤히 쳐다보며 퉁명스레 입을 열었다.
"상대가 안 되는 게 뻔한걸요. 나쁜 용무로 온 것도 아니고요."
"그래서 하는 말인데."
지겔슈타트가 주위의 시종을 손짓으로 물리고는 루페르트에게 돌아서며 목소리를 낮췄다.
"저 도펠죌트너가 이상한 소리를 하더군요."
"이상한 소리요?"
"정체불명의 군대가 오고 있답니다. 이곳 드부이성으로 말입니다."
루페르트는 마를로네를 향해 돌아섰다.
"마리. 그게 정말이냐?"
"네."
"왜 정문으로 오지 않았지?"
"병사들이 무시하던걸요. 들여보내 주지도 않고. 아시잖아요?"
마를로네가 살짝 불편한 심기를 내비치며 사슬을 가볍게 흔들었다.
쇠사슬이 맞물리며 찰랑거리는 소리가 컴컴한 옥중의 공기를 가볍게 떨치고 지나갔다.
루페르트는 좌우에게 일렀다.
"사슬을 풀어라."
"하오나 전하."
지겔슈타트가 바로 반대 의견을 표했으나, 루페르트의 결심은 확고했다.
"내가 고용한 사람이오. 대학의 마법사님."
정중하면서도 강렬한 말에 지겔슈타트는 한발 물러섰다.
"...전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차가운 정적이 뇌옥을 어두운 밀물처럼 채웠으나, 곧 그 정적은 하찮은 생리 작용에 의해 가볍게 부서졌다.
꼬르륵.
마를로네의 배에서 뱃고동이 울렸다.
루페르트는 쓴웃음을 머금었고, 지겔슈타트도 고개를 돌릴 정도의 감정의 변화를 보였다.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걸 집무실에 가지고 와라. 이야기는 집무실에서 듣겠다."
* * *
집무실에 다섯 사람이 모였다.
주요한 인물은 루페르트와 마를로네였고 제삼자는 지겔슈타트였다. 나머지 두 명은 서기와 자부아 쪽 사람이었다.
분더발트와 마르틴 후스를 부를 수도 있었지만,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을 깨우는 건 이야기를 듣고 난 이후에 해도 늦지 않으니까.
"그래, 마를로네. 네가 보고 들은 이야기를 해 보아라."
마를로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슬에서 풀려난 그녀는 머리가 약간 헝클어지긴 했지만 다소곳한 자세로 탁자에 앉아 루페르트와 지겔슈타를 번갈아 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할아버지 말로는 농민 폭도로 이루어진 반란군이라고 하더군요. 실제로 그렇게 보였고요."
마를로네는 한마디 할 때마다 책상에 놓인 과자를 하나씩 집어 먹었다.
"숫자는 5천 정도라고 하더군요. 저는 잘 모르겠지만 할아버지는 전장에 오래 있었으니 보는 눈이 있나 봐요."
그동안 형편없는 음식만 먹어서 그런지 말을 하면서도 맛에 놀라는 눈치였다.
그래도 과자를 입에 넣은 채 우물거리거나 입 안의 내용물을 튀기는 등의 경박한 행동은 하지 않았고, 과자로 배를 채운 후 꾸깃꾸깃한 손수건을 꺼내 입을 닦을 정도의 매너는 있었다.
시종이 그녀에게 물을 건네자 그녀는 단숨에 한 잔을 비워 내고 또 한 잔을 요구했다.
차분하게 물을 마시는 마를로네의 모습을 보며 루페르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번 일도 전에는 없었던 일이다.'
사실 농민 반란이 일어났는지조차 알 수 없다.
제국 본토도 아닌 일개 봉신의 영토에서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키건 말건 루페르트와는 하등 상관없는 일이니까.
지금도 그렇다.
자부아의 농민 반란은 자부아 공작이 직접 해결해야 할 일이다.
일 년 내내 성을 비우고 세금만 쏙 빼먹는 그의 행태가 반란의 씨앗에 가장 큰 지분을 차지했을 테니까.
그런데 하필 운 없게 그 반란군이 루페르트가 머무는 시점에 성을 향해 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어디에 있지?"
"지척에 있어요. 곧 성 앞에 이르러 성을 포위하겠죠."
59화 16. 모독자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