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reads / ALQUISDE / Chapter 2 - 2

Chapter 2 - 2

11화. 배치고사 (3)

[현자의 돌이 리바운드를 최소화합니다.]

[현자의 돌의 등급과 레벨에 비례해, 소모되었던 업적 포인트 50점을 돌려받습니다.]

허공에 떠오르는 메시지창.

그것을 확인한 시문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옵시디언 태블릿이랑 융합하고 등급이 E로 올랐는데 돌려주는 업적 포인트는 그대로네?"

-이씽! 오빠, 리바운드가 뭔지 몰라서 그래?

그 말에 울컥한 목소리가 가슴 중앙에서 흘러나왔다.

현자의 돌이었다.

-그 어떤 연성물도 감히 리바운드는 간섭 못 해! 나니까 이 정도라도 하는 거라고!

"그래그래, 잘 알고 있지."

뭔가 연성에 관한 자존심적인 부분이 있는 건지.

파르르 떠는 현자의 돌에 시문은 서둘러 가슴을 쓸었다.

"저번보다 네 레벨이 2나 올랐으니까. 혹시나 해서 해 본 소리야. 내 마음 알지?"

-흐으으응....

어딘가 불만족스러운 목소리.

그러나 쓰다듬어 주는 것이 좋은지.

-리바운드 관련은 아무리 나라도 관여가 힘들어. 적어도 B등급까진 도달해야 한다구.

녀석의 목소리는 한결 차분해졌다.

시문은 눈을 반짝이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럼 우리 현자의 돌을 위해서라도 내가 열심히 해야겠네."

-나, 나를 위해... 어머머! 오빠앙! 그게 무슨 뜻이야~? 웅?!

순식간에 비음이 섞이며 간드러지는 목소리.

'하여간에.'

그 모습에 피식 웃은 시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때.

[성좌 제우스가 당신의 효율적인 아스트라페 사용에 흐뭇한 미소를 짓습니다.]

[성좌 제우스가 업적 포인트 100점을 후원합니다.]

"오오!"

생각지도 못한 후원에 시문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방송도 안 켰는데 후원이라니?'

그것도 같은 사람이 아닌, 성좌의 후원이다.

비록 방송에 쓰이는 AP(Arena point)가 아니긴 했으나.

'옵시디언 태블릿의 완성도도 그렇고, 앞으로 연성해야 할 게 많은데 잘됐어.'

시문에겐 성장과 무력에 직결되는 업적 포인트인 만큼.

오히려 AP보다 좋은 자원이라 볼 수 있었다.

"후원 감사합니다, 제우스 님."

시문은 밝아진 얼굴 그대로 감사를 표하곤, 전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치이이익.

무슨 폭격이라도 가해진 것처럼.

허연 김을 풀풀 뿜으며 새까맣게 타 버린 수십의 고블린들.

놀랍게도.

50여 마리의 고블린들이 단 일격에 쓸려 나가 버린 것이다.

그것들을 쭉 훑던 시문의 시선에 한 남자가 들어왔다.

'역시 잘 피했구나.'

B급 특성 재빠른 몸놀림의 소유자인 만큼.

김민형은 어느새 앞을 가로막던 창을 밟고, 그 뒤로 넘어간 상태였다.

사전에 이야기했던 작전대로.

천둥소리가 들리자마자 목표 지역으로 잘 달아난 것이다.

"키...."

"...."

김민형의 앞을 가로막은 덕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10여 마리의 고블린들은 바짝 얼어 있었다.

그럴 수밖에.

눈 깜빡하는 사이에 동족 수십이 통구이가 되었고.

그 무시무시한 광경을 바로 코앞에서 목격했다.

어느 누가 제정신을 유지하겠나?

그런 고블린들의 심정과 달리.

시문의 눈가엔 아쉬움이 맴돌았다.

'아쉽네. 한 번은 더 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사아아아.

입자화 되어 사라지는 아스트라페.

한 번 더 사용해 확실히 본전을 뽑을 생각이었건만.

'연성에 투자한 등가를 모두 소모해도 리바운드가 진행되는 거구나.'

일종의 소모성 배터리와 비슷하달까?

업적 포인트 500점에 해당하는 힘을 전부 소모되었는지.

아스트라페는 곧장 리바운드가 진행되었다.

'뭐, 싸게 배웠어.'

보통 이런 디테일한 부분은 여러 번의 실험을 거쳐 통계를 내야 하는데.

졸지에 얻은 이득에 시문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살아남은 10여 마리의 고블린들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김민형 씨, 전 괜찮습니다. 어서 가세요."

그 뒤의 목표 지점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김민형이었다.

"저,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방금 보셨잖아요."

시문은 보란 듯이 양팔을 쫙 펼쳤다.

고기 특유의 탄내가 진동하고, 그에 걸맞은 수의 사체들이 지천에 깔려 있다.

맑고 뚜렷한 이목구비의 시문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광경이었지만.

"전 마저 처리하고 갈 테니, 먼저 들어가세요."

시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김민형의 클리어를 독촉할 뿐이었다.

그럴 수밖에.

시문이 살아온 전생에 비교하면 이 정도 광경은 애교에 불과하니까.

"에, 예!"

그 사실을 모르기 때문일까.

김민형은 침을 꿀꺽 삼키곤 얼른 목표 지역으로 발을 들였다.

"꼭! 꼭 성삼 길드를 찾아 주십시오! 반드시 사례하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빛이 되어 스르르 사라지는 김민형.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자, 그럼 마무리를 해 볼까."

시문은 두 손을 비비며 연성력을 끌어올렸다.

"키, 키...."

"킥...."

아직도 충격으로 얼어 버린 10여 마리의 고블린들.

어떻게 하면 이것들을 최소한의 연성력으로 처리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찰나.

오싹.

-오빠!!

등골에 어리는 오싹함과 함께 현자의 돌의 비명이 들려왔다.

시문은 어떤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따악.

곧장 손가락을 튕기며 바닥을 박찼다.

쿠웅!

묵직한 진동이 아래에서 울린다.

재빠르게 다리에 연성한 [블랙팬서의 신체조직]이 아니었다면, 바닥 대신 시문의 몸이 박살 났으리라.

"키, 키킥! 대장!"

"대, 대장이다!"

얼어붙었던 10여 마리의 고블린들이 환호성을 내지른다.

멀리 착지한 시문은 그런 고블린들을 보지도 않은 채, 기습자의 정체를 확인했다.

"저건...."

푸석한 붉은 피부.

작고 마른 고블린의 평균 체형과 달리, 오크를 연상시킬 정도로 다부진 근육질의 체격까지.

기습자의 정체를 확인한 시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홉고블린?"

"크르르. 인간."

고블린 특유의 소리가 아닌 짐승을 연상시키는 목소리까지.

기습자의 모습은 시문이 알고 있는 홉고블린 그 자체였다.

'홉고블린이 여긴 왜... 아!'

갑작스런 홉고블린의 등장에 의문을 품던 시문은 작게 탄식했다.

'그래, 여긴 [잠식된 고블린의 교두보]였지.'

그리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갤럭시 아레나는 다양한 방법으로 진행되는 아레나의 힌트를 던지곤 한다.

'잠식은 높은 확률로 마기와 관련된 힌트였어.'

그리고 홉고블린은 우수한 고블린이 마기의 영향을 받아 생겨나는 몬스터인 만큼.

이 [잠식된 고블린의 교두보]에 등장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몬스터였다.

다만.

'아무리 높은 MMR대라도 홉고블린은 오버 아냐?'

설마 검문소로 부족해 몬스터까지 플래티넘급으로 낼 줄은 몰랐기에.

차마 홉고블린까지 예상하지 못한 시문은 머리를 긁적였다.

"크락! 부하들의 복수다!"

격한 함성과 함께 달려드는 홉고블린.

그러나.

쿠웅.

다리에 연성한 [블랙팬서의 신체조직]으로 여유롭게 놈의 도끼를 피해 내는 시문.

그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씩씩거리는 홉고블린을 바라봤다.

'설마...?'

다행히도 갤럭시 아레나 측에 양심이라는 게 남아 있는 걸까.

저 홉고블린은 전생에 시문이 알던 홉고블린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바로.

"쥐새끼 같은 인간!"

쿵, 쿵.

속도였다.

정확히는.

'전체적인 신체 능력이 진짜 홉고블린보다 떨어져.'

본래 시문이 알고 있는 홉고블린이 맞는다면.

아무리 [블랙팬서의 신체조직]이라도 12%의 완성도론 피할 수 없어야 정상이었다.

홉고블린은 엄연히 플래티넘 랭크대에 등장하는 몬스터였으니까.

하지만 아까의 기습도 그렇고.

"크라락!!"

'느려도 너무 느려.'

시문은 서슬 퍼런 홉고블린의 공격을 여유롭게 피하며 거리를 물렸다.

'그래도 나름의 양심은 있는 것 같으니 다행이네.'

아무리 MMR이 높게 측정되었다 해도.

배치고사 첫판에 플래티넘급 몬스터를 붙이는 건 선을 넘는 거지.

물론 너프를 먹였다 해도.

이 구간대에서 무시무시한 스펙이란 건 변함없었지만 말이다.

'업적 포인트가 아깝긴 하지만, 혹시 모르니 확실히 처리해야겠어.'

뭐든 오차를 싫어하는 연금술사답게.

시문은 조금의 변수라도 차단하고자.

"현자의 돌."

-응! 오빠, 기다리고 있었어.

파지직.

곧장 아스트라페의 연성을 준비했다.

그때.

[성좌 검은 염소가 연이은 제우스의 번개에 눈살을 찌푸립니다.]

[성좌 검은 염소가 당신이 지닌 옵시디언 태블릿을 가리키며 불만을 표합니다.]

"응?"

갑작스러운 검은 염소의 반응에.

시문은 곧바로 아스트라페의 연성을 공간폭발로 변경했다.

펑!

"크라아악!"

달려들던 홉고블린이 폭발과 함께 밀려난다.

그 모습에 시문의 눈빛이 한층 깊어졌다.

'너프를 먹어도 홉고블린이라 이건가.'

아무리 진짜 폭발 마법과 연금술을 비교하기 힘들다 해도.

고블린의 팔 하나쯤은 쉽게 날릴 수 있을 텐데.

홉고블린은 밀려났을 뿐, 두툼한 양팔을 교차해 꿋꿋이 버텨냈다.

퍼펑.

시문은 두 번 더 공간폭발을 일으키며, 홉고블린과의 거리를 더욱 벌렸다.

이어.

[성좌 검은 염소가 당신에게 미션을 겁니다.]

"미션?"

시스템창이 시문의 앞으로 떠올랐다.

[미션]

-성좌 검은 염소는 제우스의 번개만을 사용하는 당신에게 강한 불만을 느낍니다.

이번 종목의 보스, 홉고블린을 '인체 연성'만으로 쓰러뜨리세요.

보상 : 업적 포인트 500

미션을 확인한 시문은 눈을 끔뻑였다.

'고작 이런 미션으로 업적 포인트를 500점이나 건다고?'

업적 포인트 500점이면 아스트라페 모조품 한 자루다.

특히나 자신의 후원자가 아니면.

미션을 거의 걸지 않는 것이 성좌임을 고려해 보면 무척이나 의외인 일.

그러나 시문은 어렵지 않게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군. 자존심 때문이구나.'

아스트라페는 분명 강력한 무구다.

하지만 등급만 따지고 본다면, 옵시디언 태블릿 역시 부족하지는 않을 터.

검은 염소는 그런 자신의 신물을 손에 넣고도.

아스트라페를 계속 사용하는 것에 자존심이 상한 거다.

특히나.

'내가 연금술사니까 더 그렇겠지.'

옵시디언 태블릿은 인체 연성의 집합체.

어떤 의미로 연금술사에겐 최고의 장비나 다름없을진대.

그걸 두고 아스트라페만을 사용하니 어찌 자존심이 상하지 않겠는가?

시문은 하늘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이 미션 받을게요."

[성좌 검은 염소가 만족스럽게 웃습니다.]

[성좌 제우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불만을 표합니다.]

[성좌 검은 염소가 '망할 색마 새끼가 어디서! 오랜만에 올림푸스 한번 들를까? 어?!' 으름장을 놓습니다.]

"으, 응?"

검은 염소의 급발진에 당황하는 시문.

[성좌 제우스가 '저편의 미친년은 여전하군.' 고개를 젓습니다.]

[성좌 제우스가 뒷짐을 지며 한 걸음 물러납니다.]

그러나 제우스가 한발 물러섬으로써.

두 성좌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후, 다행이야.'

시문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자신을 후원자로 지정하진 않았지만.

방송도 켜지 않았는데 두 성좌 모두 후원과 미션을 줄 만큼 호감을 보이는 상황이다.

굳이 두 성좌와 척을 지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시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곤 정면을 바라봤다.

"크르르! 망할 인간! 감히 나를 농락해!!"

같은 기술로 거리만 벌리는 것에 화가 난 걸까.

홉고블린은 어디서 주웠는지도 모를 나무 방패를 앞세우며, 득달같이 달려오고 있었다.

시문은 그런 홉고블린의 돌진을 여유롭게 바라봤다.

'인체 연성만으로 처리라....'

비록 아스트라페를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지만 큰 상관은 없었다.

'뭐, 못 할 것도 없지.'

쉬운 길을 살짝 돌아가야 할 뿐.

못 가는 길은 결코 아니었으니까.

타닥.

시문이 바닥을 박차며 내달린다.

"크륵?"

도망가기만 하던 시문이 설마 맞달려 올 줄 몰랐던 것일까.

홉고블린의 눈엔 잠깐의 당혹감이 서렸지만 그뿐.

"크아아아! 좋다! 아주 박살을 내 주마!"

순식간에 살기로 변하며, 질주에 박차를 가했다.

이내.

빠가각!

나무 파편들이 비상했다.

시문의 맨주먹이 홉고블린의 조악한 나무 방패를 박살 낸 것이다.

"크, 크륵?!"

홉고블린의 눈이 부릅떠진다.

나무 방패가 부서져서가 아니었다.

'크륵! 인간 주제에 무슨 힘이....'

방패가 부서지며 맞닿은 주먹.

오크와 견주어도 부족함이 없는 그의 주먹이.

우드득.

반밖에 되지 않는 인간의 주먹에 무참히 부러진 것이다.

하나 홉고블린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놈!"

손이 부서지는 고통을 씹어 삼킨 홉고블린은 곧장 다른 손에 있는 도끼를 내려찍었다.

하지만.

"어림없어."

이미 예상했다는 듯.

시문 역시 다른 손을 뻗어 내리꽂히는 도낏자루를 붙잡았다.

그것을 보자마자.

"크핫! 걸렸구나!"

웃음을 터뜨리며 도낏자루를 놓아 버리는 홉고블린.

놈은 도끼를 내리찍던 움직임 그대로 시문을 덮쳤다.

"지금이다!!"

우렁차게 소리치는 홉고블린.

"키킥! 인간 잡혔다!"

"대장 최고다!"

그와 함께 시문의 뒤에선 고블린 특유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살아남은 10여 마리의 고블린이었다.

피핑.

작은 바람 소리와 함께 날아드는 독침.

놈들은 홉고블린을 의식하지도 않는지, 쉬지 않고 독침을 쏘아 댔다.

"윽!"

등 뒤에서 무자비하게 박히는 독침 세례에 신음하는 시문.

"크큭! 어떠냐, 인간. 움직이기 힘들지?"

독한 악취가 풍겨 온다.

코앞까지 다가온 홉고블린이 흉한 미소를 지은 것이다.

하지만 그 악취마저도 점점 희미해졌다.

"크큭! 인간이란 참 하등하단 말이지."

홉고블린은 구속하던 팔을 보란 듯이 풀었다.

놈의 팔에는 고블린들이 쏜 독침이 빼곡했다.

"고작 이따위 수작에 당하다 못해, 마비독에 내성조차 없다니."

놈은 독침이 빼곡한 팔로 떨어진 도끼를 들었다.

"아니지. 마비독 덕분에 고통을 느낄 수 없으니 이득인가?"

놈은 고통 대신 공포라도 심어 주고 싶은지.

도끼날을 혀로 슥 핥고는 아주 천천히 도끼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우선 팔다리부터 하나씩 토막을 내 주마. 크핫!"

위압적인 양날 도끼가 시문의 팔로 내리꽂히는 순간.

턱.

"크륵?"

꼼짝도 하지 않던 시문의 팔이 귀신처럼 움직여, 홉고블린의 팔을 잡았다.

"무, 무슨!"

놈이 당황할 틈도 없이.

우드득.

오크처럼 굵직한 팔이 힘없이 부러졌다.

"끄아아... 컥!"

비명을 지르던 홉고블린의 소리가 뚝 끊어진다.

시문의 손이 어느새 놈의 목을 움켜쥔 것이다.

"케, 케헥!"

"고블린이란 참 하등하단 말이지."

서늘하게 가라앉은 시문의 눈동자.

그 안에는 컥컥거리는 홉고블린과 놈의 목을 꽉 쥔 자신의 팔이 보였다.

그 위로는 [오우거의 신체조직]이라는 정보창과.

[고블린의 신체조직]이 떠올라 있었다.

"고작 이따위 수작에 내가 걸려들 거라 생각하다니."

눈빛만큼이나 서늘한 미소.

그것이 시문의 입가에 걸리는 것을 신호로.

"안 그래?"

우득.

두터운 홉고블린의 목이 꺾였다.

제12화

12화. 배치고사 (4)

털썩.

붉은 피부의 덩치.

목이 부러진 홉고블린이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성좌 검은 염소의 미션을 완수하였습니다.]

[업적 포인트 500점을 획득합니다.]

[성좌 검은 염소가 인체 연성의 활용도에 굉장한 만족감을 표합니다.]

[추가로 업적 포인트 500점을 획득합니다.]

"오오!"

서늘했던 시문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진다.

'업적 포인트 500점을 또 주다니!'

속으로 쾌재를 내지른 시문은 은근슬쩍 하늘을 힐끔거렸다.

'역시 제우스는 짠돌이였나.'

과거 튜토리얼에서 1등에 업적 포인트 1,000점 미션을 걸었던 제우스.

튜토리얼이 끝나고 추가로 100점을 줬던 것과 비교하면 상당히 많은 양이었다.

물론.

'뭐, 총량을 따져 보면 제우스가 더 준 거긴 하지만.'

튜토리얼 때 1,100점을 쐈던 제우스와 비교하면, 이번에 1,000점을 준 검은 염소와 큰 차이가 없긴 했다.

어쨌거나 업적 포인트 1,000점에 아까 제우스가 후원했던 100점을 더하면 1,100점.

튜토리얼 때와 변함없는 점수 벌이였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히든 보스 '홉고블린'을 단신으로 처치하였습니다.]

[보상으로 업적 포인트 500점을 획득합니다.]

'히든 보스라고?'

추가로 업적 포인트를 500점이나 더 벌었음에도.

시문의 미간은 찌푸려질 따름이었다.

'잡으라고 만들어 둔 게 아니었구나.'

히든 보스.

종종 해당 랭크대의 수준을 벗어나는 힘을 지닌 괴랄한 존재들.

물론 그런 히든 보스를 역으로 잡아 버리는 괴물 루키들도 있었다.

'시혁이 녀석이 대표적이지.'

자신의 동생인 김시혁.

후에 '검성'라고도 불리는 잘난 동생 녀석은 날 때부터 떡잎이 다르다고.

저랭크 때부터 히든 보스를 죽이고 다니긴 했었다.

'누구는 현자의 돌에 신화급 무구들을 연성해서 잡는데 말이지.'

동생의 터무니없는 업적에 헛웃음을 터뜨리던 그때.

[당신에 대해 의논 중이던 갤럭시 아레나가 당신의 소식에 경악합니다.]

[성좌 검은 염소가 '병X들, 행정 하는 꼬라지하곤. 이러니 내가 성좌 등록을 안 했지.' 의회를 비웃습니다.]

[당신에 대한 갤럭시 아레나의 논의에 더욱 박차가 가해집니다.]

허공으로 메시지창이 우수수 떠올랐다.

그중에서 시문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다름 아닌.

'나에 대한 논의라고?'

고개를 갸웃하던 시문.

하나 짐작 가는 것이 있는지,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옵시디언 태블릿을 만들었을 때도 이런 말이 있었지.'

[연달아 이어지는 믿을 수 없는 업적에 갤럭시 아레나에서 플레이어 김시문에 대한 논의가 들어갑니다.]

아마 튜토리얼 때부터 행한 일들이 갤럭시 아레나에 어떤 영향을 준 모양.

또한 검은 염소가 '갤럭시 아레나에 등록되지 않은 성좌'라는 말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시문은 턱을 괴었다.

'갤럭시 아레나의 관심. 이게 좋은 쪽일까?'

갤럭시 아레나의 관심.

전생에도 갤럭시 아레나 자체의 관심을 받았던 플레이어는 본 적이 없었다.

아니면.

'해당 플레이어가 대외적으로 밝히지 않았거나.'

어느 쪽이건.

갤럭시 아레나의 관심이 반갑게만은 느껴지지 않았다.

'좋게 생각하자. 리스크와 리턴은 확실히 해 주는 게 갤럭시 아레나니까.'

이번 아레나만 해도 무려 5인 협력에, 플래티넘에서나 등장하는 검문소 맵.

거기에다 시문 혼자서 모든 고블린들을 쓸어버리지 않았는가?

클리어 보상이 얼마나 될지는 감도 잡히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 고민한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없으니, 보상이나 받으러 나가자.'

그렇게 시문이 몸을 돌리는 순간.

"키, 키킥!"

"키이...."

10여 마리의 고블린들이 풀썩 주저앉으며, 온몸을 덜덜 떨었다.

수십의 동족들이 단숨에 죽어 나가고.

대장인 홉고블린마저 죽어 버렸으니, 전의 상실은 당연한 결과였다.

"이렇게 보니 괜히 마음이 아프네."

-잘생긴 것들은 얼굴값을 한다더니. 우리 오빠, 마음 이렇게 약해서 어디 쓰겠어?

시문의 읊조림에 현자의 돌이 대번에 반응했다.

"그래 보이냐."

너털웃음을 흘리는 시문.

그가 아무런 제스처 없이 그저 걸음을 옮기자.

"키, 키익... 인간, 우리 살려 주나?"

"착한 인간!"

영악한 고블린답게.

녀석들은 더욱 몸을 떨며 눈망울을 적셨다.

-고블린 주제에 가지가지 하네. 오빠 속지 마. 저러고선 뒤론 칼 갈고 있을 거야. 뻔하다고!

"나도 알아."

앙칼진 현자의 돌의 말을 뒤로하고.

시문은 고블린들을 지나 목표 지역으로 걸어갔다.

"킥! 인간! 착하다!"

"키킥! 고맙다, 인간!"

뒤에서 고블린들의 열띤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머머? 이 오빠 봐라? 이것들 진짜 살려 주게? 진짜? 리얼?

얼이 빠진 현자의 돌의 목소리.

그러나 시문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고.

"키킥! 답례, 해 준다!"

그건 고블린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현자의 돌, 너 아까부터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 같은데."

-응?

그 비루한 살기를 느끼며.

"난 살려 준다고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어."

따악.

시문의 손가락이 튕겨졌다.

* * *

잔잔한 빛과 함께 자취방으로 귀환한 시문.

그의 앞으로.

[아레나 '잠식된 고블린의 교두보'를 성공적으로 클리어하셨습니다.]

[5인 협력 조건에서 홀로 모든 적을 처치하였습니다.]

[활약에 따라 클리어 보상이 증가합니다.]

[귀속된 특성 '현자의 돌'이 일정량의 경험치를 분배받습니다.]

[레벨이 4 올랐습니다.]

[현자의 돌 레벨이 2 상승했습니다.]

[클리어 보상으로 '홉고블린의 전투 도끼'를 획득합니다.]

어마어마한 양의 시스템창이 범람했다.

[히든 보스 홉고블린을 혼자 처치하였습니다.]

[보상으로 '잠식된 홉고블린의 혈청'이 지급됩니다.]

[히든 업적 '히든 보스 잡기 (1/?)'을 달성하셨습니다.]

[업적 포인트 1,000점을 획득합니다.]

"와아...."

눈이 어지러워지는 보상들.

시문은 곧바로 상태창을 열어 레벨부터 살폈다.

[상태창]

칭호 : 연금술의 선구자 (외 2)

계통 : 마법계

레벨 : 7

소속 : 대한민국

힘 : 4

민첩 : 4

체력 : 5

연성력 : 13

잔여 스탯 : 4

보유 특성 – 현자의 돌 (E)

업적 포인트 – 9,350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업적 포인트였다.

검은 염소의 미션 보상으로 총 1,000점.

홉고블린 처리 업적으로 다시 총 1,500점이 더해져 6,850점이던 업적 포인트는 무려 9,350점이 되었다.

"이 기세면 만 점은 금방 달성하겠네."

만점이 된다면 또 옵시디언 태블릿을 연성할 수 있을 터.

시문은 제 가슴을 내려다봤다.

"현자의 돌, 만 점이면 옵시디언 태블릿을 또 연성할 수 있는 거 맞지?"

-응. 근데 뒤로 갈수록 업적 포인트의 요구량이나 상승 퍼센티지가 달라질 거야.

"그래? 알았어."

-잉? 뭐야. 왜인지 안 물어봐? 물어볼 줄 알았는데.

"연금술 경력이 몇 년인데. 그 정도는 대충 예상하고 있었어."

이미 비슷한 아이템인 에메랄드 태블릿을 접촉해 본 시문이다.

뒤로 갈수록 엘릭서와 현자의 돌 연성에 중요한 내용들이 실렸던 만큼.

옵시디언 태블릿 역시 마찬가지겠지.

'그래도 투자를 안 할 수 없어.'

당장 소모성인 아스트라페와 다르게.

옵시디언 태블릿은 무려 영구제다.

게다가 옵시디언 태블릿이 선사하는 인체 연성의 위력은 이미 충분히 경험하지 않았나?

'연성력의 성장에 맞게, 꾸준히 투자를 해줘야 해.'

어느 버프도 해내지 못하는 능력치 상승에다, 연성 종족의 특징까지 고스란히 가져온다.

육체적인 부분이 부족한 마법계에겐 최고의 능력이었다.

더불어 업적 포인트를 소모하지 않는다는 부분이 가장 중요했다.

이는 순수한 자신의 전투력과 직결되는 문제니까.

-그래도 두 번째 연성까진 만 점에 20%의 성장치가 그대로 적용될 거야.

"그럼 당장 40%의 완성도까지는 연성 비용이 그대로란 거네?"

-응응. 맞아.

"좋아. 그거면 됐어."

시문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수치로만 계산해도 인체 연성의 능력이 지금보다 두 배는 강해진다는 뜻이니까.

'그래도 여유 포인트는 좀 남겨 두고 연성하는 게 좋겠지. 업적 포인트는 내 주력 자원이니까.'

만 점을 달성하자마자 톡 털어 쓰기보다는.

2,000~3,000점 정도의 여유 포인트를 더 쌓고 연성하는 게 효율적이리라.

'그나저나 클리어 보상이 증가해도 AP는 안 주는구나.'

AP(Arena point).

방송이나 아레나 클리어 보상으로 간혹 얻을 수 있는 점수로 화폐 대용으로 자주 쓰였다.

아레나가 등장한 초반부엔 당장 돈이 필요한 이들이 AP를 현금으로 팔았고.

장비나 기타 무구가 필요한 이들은 아레나 상점에서 AP를 사용했었다.

지금에 와선 플레이어 간의 거래나 경매장 등에 주로 쓰이는 달러 위의 화폐라 볼 수 있었다.

다행히도 각성한 이들만 보유가 가능했기에.

지구의 화폐가 아예 휴지 조각이 되는 불상사는 없었다.

'뭐, 아직 배치고사 구간이니까.'

아쉬움을 털어 낸 시문은 레벨업으로 얻은 잔여 스탯 4개를 모두 연성력에 투자했다.

이로써 연성력은 총 17.

더불어 현자의 돌의 레벨도 5에서 2레벨이 올라 7레벨이 된 상태다.

등급은 옵시디언 태블릿을 만들었을 때 달성했던 E등급 그대로였으나.

전반적인 연성 수준이 나아졌으리라.

"자. 그럼 이제 메인 디시인가."

시문은 두 손을 슥슥 비볐다.

사실 메인은 레벨업과 같은 능력의 증가였지만.

손에 잡히는 물질적인 보상인 만큼, 기대감이 상당했다.

특히나 익숙한 이름의 보상도 있었으니까.

"인벤토리."

시문의 앞으로 작은 창이 열린다.

흔한 RPG게임의 아이템처럼.

인벤토리 속엔 축소화된 형태의 양날 도끼와 유리병에 담긴 검붉은 액체가 보였다.

시문은 양날 도끼부터 확인했다.

[홉고블린의 전투 도끼]

등급 : B

-모든 베기 공격 10% 증가.

-생명체 공격 시 마비 발생.

-힘 스탯 +5

제한 : 50레벨, 힘 35 이상.

정보를 확인한 시문의 눈이 반짝였다.

"오오!"

홉고블린의 전투 도끼.

전투계들이 선호하는 그린스킨 시리즈의 아이템.

흔히들 말하는 '교복', 그중에서도 도끼류에 속하는 아이템이었다.

마법계인 시문도 잘 알고 있는 아이템이었으나, 놀라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아이템 옵션은 플래티넘 드랍 그대로네?"

너프를 당한 상태로 출현했던 홉고블린.

물론 배치고사 구간이기에, 그조차도 히든 보스로 분류될 정도로 강력했다.

그래서일까?

보상으로 나온 [홉고블린의 전투 도끼]는 따로 옵션의 너프를 받지 않고.

플래티넘 구간에서 드롭되는 옵션과 똑같았다.

"심지어 힘은 +5나 붙었어."

보통 힘 스탯 옵션은 1~3으로 붙는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5나 붙은 건 최고급 옵션이라 볼 수 있었다.

"최대가는 확정이겠군. 이거 과하게 짭짤한데."

흡사 소금 한 주먹을 퍼먹은 느낌이다.

시문은 기쁜 마음 그대로 옆의 유리병을 확인했다.

[잠식된 홉고블린의 혈청]

등급 : C

홉고블린의 혈청.

과도한 마기에 잠식되어 독성이 한결 강해졌다.

재료 아이템답게 정확한 효과가 표기되지 않았으나.

"회귀한 지 얼마 안 됐는데, 뭔가 되게 오랜만에 보는 느낌이네."

시문은 누구보다 이 재료의 효과를 잘 알고 있었다.

단순히 연금술사라서가 아니었다.

-응? 오빠, 뭐 말하는 거야?

"이거 말이야."

인벤토리에서 잠식된 홉고블린의 혈청을 꺼내는 시문.

느릿하게 찰랑거리는 검붉은 액체를 보며, 시문의 얼굴은 조금 복잡해졌다.

-이건 홉고블린의 혈청이잖아? 이게 왜... 아.

의문을 표하던 현자의 돌이 작게 탄식한다.

연금술의 신화적인 산물답게.

[홉고블린의 혈청]이 지니는 효력을 알고 있는 것이다.

-오빠, 나 연성하기 전까진 약으로 버텼구나?

시문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력불능의 부작용.

정규 아레나가 시작되고 진행되는 육체의 쇠락은 설명하기 힘든 고통을 선사했었고.

시문은 그때마다 특제 마취 포션을 사용해 왔다.

그리고 이 [홉고블린의 혈청]은 마취 포션에 들어가는 주재료 중 하나였다.

홉고블린의 피는 그 자체만으로 뛰어난 마비 독성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근데 오빠는 엘릭서까지 만들었잖아. 그거 왜 진작에 마시지 않았던 거야?

"그건...."

잠시 머뭇거리던 시문이 조용히 말했다.

"...사정이 좀 있어서."

-으이구! 그런 게 어디 있어? 본인 몸부터 챙겨야지! 뭐, 덕분에 내가 거의 최상의 상태로 연성되긴 했지만.

그 말에 시문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네 말대로네. 엘릭서를 기반으로 널 연성 안 했으면 이런 회귀도 불가능했겠지."

마력불능의 회복과 11년이나 회귀시키려면 어지간한 대가론 등가교환이 되지 않았을 테니까.

-그건 그래. 회귀라는 거 자체가 성좌도 못 하는 일이니까.

"그래? 근데 넌 뭘 연성해서 날 회복시키고 회귀까지 한 거야?"

-그게 가능한 존재가 있거든. XXXX라고... @#!*

"뭐? 너 뭐라고 했어?"

중간부터 잘려 버리는 현자의 돌의 말.

시문의 의문에 현자의 돌은 짧게 혀를 찼다.

-쯧. 언급하면 안 되나 보네. 하긴, 성좌들도 경계하는 존재니까.

"그렇게 말하니까 더 궁금해지는데?"

-말해주고 싶은데 못 들을 거야. 갤럭시 아레나에서 나한테 지금 개X랄하고 있거든.

"갤럭시 아레나가?"

-엉. 아주 눈앞이 어지러울 정도로 메시지를 보내고 있어. 언급하지 말라고.

시문의 앞엔 어떤 시스템창도 떠오르지 않는데.

하나 현자의 돌이 거짓말할 이유도 없으니.

"안 되면 어쩔 수 없지."

시문은 별 호기심을 드러내지 않고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헤헤. 얼굴만큼이나 쿨해, 울옵! 그나저나, 혈청으로 어쩔 거야? 오빠 이제 마력불능도 없잖아.

"맞아 이제 진통제 형식으로 제조할 일은 없긴 하지."

-근데 왜... 어멋!

갑자기 하이톤으로 솟구치는 녀석의 목소리.

그 목소리엔 얕은 흥분이 어려 있었다.

-서, 설마 이 독으로 영약을 만들려는 거야?!

"그래. 연금술사에게 독은 약이기도 하니까."

-어머어머어멍!! 나 이런 거 너무 좋아!!

극도로 텐션이 올라가는 현자의 돌.

그에 시문의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곧 현자의 돌의 마음을 이해했다.

애당초 녀석의 존재 의의는 연금술에 있으니.

연금술로 무언가를 연성하는 것이 이토록 즐거운 것이겠지.

-녀석의 근본을 우리 마음대로 조교하는 거잖아? 앗흥! 너무 기대된다아앙!!

라고.

-마기 좀 섞인 걸 보니 아주 앙칼진 녀석이겠지?

"...."

-독이라는 본래의 자신이 정반대인 영약의 성질로 변해 버리면 얼마나 치욕스러워할까! 하아... 흥분돼!

아주 어리석은 오판을 해 버렸다.

제13화

13화. 갤럭시 아고라 (1)

"수고하세요."

탁.

택시의 문이 닫힌다.

차에서 내린 김시문의 고개가 쭉 하늘을 향해 올라갔다.

한 눈에 다 들어오지도 않는 크기와.

고개를 한참 들어야 끝이 보이는 높이까지.

"여긴 여전하네."

전생에 한국이 멸망하기 전 그 모습 그대로인 건물.

시문은 약간의 아련함이 담긴 눈으로 거대한 건물을 바라봤다.

-호오~. 크긴 엄청 크네. 여기가 그 플레이어들의 성지라는 곳이야?

"응. 정확히는 갤럭시 아고라라고 하지."

압구정의 한 백화점.

로데오 거리 위쪽에 위치해, 한강뷰까지 챙긴 이곳은 다름 아닌 플레이어들의 성지.

갤럭시 아고라였다.

-갤럭시 아고라? 이거 아레나 측에서 내준 건물이야?

"그건 아니야. 갤럭시 아레나에서 직접적으로 관리하는 건 방송 쪽이지."

-하긴, 물리적인 개입은 거의 안 하니까. 그럼 이건 왜 갤럭시 이름을 달고 있는데?

"일종의 구색 갖추기지. 여기 말고도, 나라마다 갤럭시 아고라가 최소 하나씩은 있거든."

-흐응~ 어떤 느낌인지 대충 알겠네.

현자의 돌은 흥미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여기서 아레나의 물건을 사고파는 거야?

"그래. 경매나 개인 상점부터 파티 구인까지. 온라인 커뮤니티가 있어도, 아고라를 많이 이용하는 편이야."

요즘 시대에 오프라인이 웬 말이겠냐마는.

생각보다 오프라인을 이용하는 플레이어들은 많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뭐든 직접 봐야 안심이 되니까.'

기본적으로 가격대가 센 아이템의 특성상, 직접 보고 구매하는 것을 선호하는 것이다.

실제로 커뮤니티를 이용한 온라인 거래도 적지 않았으나.

그마저도 간단한 재료나 포션에 한해서다.

수백만 원대를 쉽게 넘는 장비류들은 배송으로 받기에는 꽤 많은 우려들이 있었다.

함께할 파티원을 구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아무래도 사람과 합을 맞추는 일이니까, 한 번은 만나 봐야지.'

일종의 면접이랄까?

아레나를 함께할 사이니, 직접 만나 판단하는 걸 선호하는 플레이어들이 상당수였다.

덕분에 갤럭시 아고라는 어느 나라에서나 핫플레이스였다.

그렇게 현자의 돌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사이.

"실례합니다. 각성자신가요?"

"예."

시문은 어느새 입구에 도착했다.

그 앞을 가로막은 검은 정장 차림의 여성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잠시 확인 절차가 있겠습니다. 이걸 인벤토리에 넣었다 빼 주시겠어요?"

고개를 끄덕인 시문은 여성이 건넨 최하급 포션을 받았다.

"인벤토리."

이어 인벤토리를 연 시문은 포션을 넣고.

2초 정도 기다린 후 다시 빼내었다.

아마 남들의 눈엔 쥐고 있던 포션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모습이겠지.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여기 플레이어 워치입니다."

여성은 심플하게 디자인된 팔찌를 내밀었다.

플레이어 워치.

개인 계좌나 거래 내역을 데이터로 남겨 주는 기능부터.

파티 구인이나 아고라 내부 지도 등, 다양한 기능들을 탑재해 놓은 일종의 첨단 아티팩트.

시문은 익숙하게 그것을 왼손에 착용했다.

그러자 가슴에서 작은 이명이 울렸다.

-오옹. 오빠, 이거 연성물이네?

'맞아. 연금술사가 만든 거지.'

연금술로 태어난 존재답게.

현자의 돌은 플레이어 워치의 정체를 금방 눈치챘다.

-근데 연금술이 메인이긴 해도 꽤 여러 방면에서 합작했네? 이거 누가 만든 거야?

'음, 거기까진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아마 협회나 유명 길드 쪽 연금술사가 아닐까?'

덩치 좀 있는 세력이라면 제작과 연관된 플레이어들이 다수 소속해 있으니까.

아마 국가 소속인 협회나 납품 의뢰를 받은 유명 길드 쪽의 작품일 가능성이 높았다.

"혹시 갤럭시 아고라엔 처음이신지요? 워치 사용의 설명이 필요하시면...."

"괜찮습니다. 사용해 봤거든요."

"알겠습니다. 그럼 좋은 시간 보내시길."

각성자임을 확인해서일까.

여성은 한결 부드러워진 눈으로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문을 통과한 시문은 플레이어 워치를 이리저리 매만졌다.

워치 위로는 작은 홀로그램들이 떠올랐는데.

꼭 갤럭시 아레나의 시스템창과 닮아 있었다.

'참 볼 때마다 신경 많이 쓴 게 느껴진다니까.'

간단한 개인정보로 워치 동기화를 끝낸 시문은 곧바로 걸음을 옮겼다.

외부에서 봤던 어마어마한 크기가 무색할 만큼.

"들었냐? 어제 전갈 길드가 저랭크 길드원들 싹 정리했다더라."

"또 미국에서 누가 성좌의 선택을 받았다던데. 으아! 존X 부럽다!"

"이거 보여? 무려 S급이라고 S급! 상대팀이 삽질해 줘서 아주 보상 날로 먹었지. 크핫!"

"제길. 저번 아레나에서 분란 좀 있었다고 시청자가 반 토막 났어. 나 어쩌냐...."

수많은 인파가 꽉 들어차 내부의 활기를 더했다.

-히야, 사람 더럽게 많네. 이 사람들이 전부 플레이어인 거야?

"그래. 그냥 각성만 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일단 인벤토리가 없으면 출입 자체가 안 되니까."

현자의 돌과 조곤조곤 대화하며, 시문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층수는 4층.

플레이어 전용 경매장이 있는 곳이었다.

몇몇 사람들이 더 타자,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다.

이어.

"이번 각성 아카데미 기수들 미쳤다면서?"

"역대급이라더라. 특히 김시혁이랑 이유정이 투톱이라던데."

"걔네들 진즉 다이아 뚫고 랭커 먹었잖냐."

흘려듣기 힘든 이야기가 들려왔다.

"랭커라고? 언제?"

"꽤 됐어, 인마. 몰랐냐? 데뷔한 지 4년 만에 다이아 뚫은 애들이잖아. 한국에선 역대급이라고."

"미쳤다 진짜! 누군 골드에서 4년째 이 X랄인데."

고정 파티라도 되는 것일까.

함께 탄 4명의 플레이어들은 쉴 틈 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수저 차이지. 나도 협회의 독남이고, 성삼 독녀면 랭커 뚫었어."

"X랄하네. 아카데미에 아무나 못 들어가는 거 모르냐? 걍 그 둘이 괴물인 거야."

"그래. 철저하게 각성 스탯이랑 특성으로 받잖아. 듣기론 둘 다 특성도 2개라던데?"

"나도 그 이야기 들었어. 뭐 특성이 생기는 아이템이라도 있는 거 아니냐?"

띵.

알림음이 울리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시문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응? 오빠, 왜 웃어?

"그냥, 재밌어서."

각성하며 얻어지는 스탯과 특성은 현실의 배경과는 어떤 관련도 없다.

아무리 한 나라에서 날고 기는 권세가나 부자라 해도.

반대로 비루하다 못해 당장 끼니를 굶으며 살아가는 이라 해도.

각성 후 주어지는 특성, 스탯 앞에선 모두가 평등하다.

그렇기에 아직 각성하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각성을 염원하는 것 아니겠는가?

가장 빠른 인생 역전의 기회였으니까.

그러나 저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었다.

'결국 각성 후 주어지는 스탯이나 특성도, 일종의 수저나 마찬가지인데 말이지.'

플레이어도 결국 각성할 때 얻는 것들에 따라, 미래가 결정지어진다.

물론 개인의 노력으로 주어진 특성과 스탯의 한계를 넘는 경우도 많았지만 말이다.

'뭐, 이해 못 할 것도 없지.'

그래도 시문은 저들의 심정은 나름 이해가 갔다.

'나도 한땐 저랬으니까.'

오히려 더 억울해했지.

그때 김시혁과 이유정.

만약 그 두 사람을 위해 자신이....

짝!

'아니! 김시문,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자.'

시문은 고개를 휘휘 저으며 제 볼을 두들겼다.

이미 지나간 일이고 그때의 일은 후회해서도 안 된다.

결국 전생의 경험을 돌이켜 보면.

그때의 선택은 분명 옳은 선택이었으니까.

결정적으로.

'난 이미 용서했어.'

속으로 그렇게 말하면서도 시문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사실 용서라는 단어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그건 엄연한 사고였고.

다시 그때로 돌아가더라도, 자신은 똑같은 선택을 했을 테니까.

그때.

-저기 오빠?

가슴 중앙에서 작은 이명이 울렸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얼굴은 손대지 마. 나 진지해.

"...오냐."

시문은 조용히 볼에 붙은 손을 내렸다.

* * *

시문이 향한 곳은 4층 중앙을 통째로 사용하는 경매장의 외각.

일종의 상점가였다.

그중에서도 개인 상점이 아닌, 길드 상점들이 즐비한 곳.

'아무래도 경매로 팔기엔 조금 애매하니까.'

시문은 인벤토리에 있는 [홉고블린의 전투 도끼]를 힐끗했다.

도끼를 사용하는 전투계의 교복 무기로 분류되고 옵션까지 최고치인 힘 +5.

분명 좋은 아이템이었으나.

'교복'이라는 카테고리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이미 경매를 내기란 힘들었다.

대부분 적정가가 형성되어 버린 상태니까.

잠시 외곽의 상점들을 둘러보던 시문에게, 유난히 큰 상점이 눈에 들어왔다.

익숙한 푸른색의 로고.

'성삼이군.'

갤럭시 아레나가 등장한 이후에도.

한국은 물론 세계적인 기업의 위치를 유지 중인 성삼.

그 위명답게 4층의 길드 상점가에서도 가장 거대한 평수를 자랑하고 있었다.

'아고라 건설에 투자를 좀 했나 보네.'

아무리 갤럭시 아고라가 국가의 관리 구역이라 해도.

대기업들의 손이 닿지 않았을 리 없다.

뭐.

플레이어 길드로서도 손꼽히는 성삼이니 더더욱 그렇겠지.

잠시 주변을 살핀 시문은 곧장 성삼의 상점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유는 별거 아니었다.

'큰 길드일수록 거래가 빠르고 깔끔하니까.'

스르륵.

"어서 오십시오."

성삼이란 이름답게.

자동문만큼이나 깔끔하고 세련된 인테리어가 눈에 들어온다.

아이템들 역시 하나같이 C등급 이상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방향에 따라 더욱 높은 등급과 낮은 등급으로 이어지는 매장의 구조까지.

'역시 대기업은 대기업이네.'

매장 내를 둘러보던 시문은 곧장 계산대로 다가갔다.

아이템을 닦고 있던 중년의 남성이 시문을 위아래로 슥 훑더니.

빙긋 웃으며 물었다.

"찾으시는 물건이 없으십니까?"

"구매는 아니고, 판매를 하러 왔습니다."

"아아, 판매라...."

중년인의 미소가 한결 짙어졌다.

"판매를 목적으로 방문하신 분은 오랜만이군요. 이쪽으로 오시지요."

그렇게 말한 중년인이 매장 끝 쪽으로 움직였다.

그곳엔 감정 스크롤부터 시작해, 다양한 아티팩트들이 깔끔히 정리되어 있었다.

"판매하실 물건은 이쪽에 올려 주시면 됩니다."

중년인이 저울대처럼 보이는 선반을 가리킨다.

인벤토리에서 [홉고블린의 전투 도끼]를 꺼내는 시문.

"호?"

그것을 본 중년인의 눈이 반짝였다.

시문이 도끼를 선반 위에 올리자.

"이건...."

아티팩트로 보이는 외알 안경을 낀 중년인은 곧장 아이템을 훑었고.

"홉고블린의 전투 도끼로군요? 그것도 최상급 옵션으로 말이죠."

"예. 바로 처분이 가능할까요?"

"당연하지요."

그도 플레이어인 걸까.

중년인은 시문의 것보다 조금 더 복잡한 플레이어 워치를 이리저리 눌렀다.

이내.

"여기, 최근 갤럭시 아고라에서 거래된 홉고블린의 전투 도끼의 시세와 내역입니다."

질서 정연하게 정리된 숫자와 그래프들을 내미는 중년인.

그것을 확인한 시문의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4,200만 원?"

아무리 교복이라곤 하나 고작 B급 아이템이다.

한데 4,200만 원이나 하다니?

이내.

"예. 어제 기준으로 3,800만 원에 팔렸습니다만... 그건 힘 스탯이 +4였거든요."

중년인이 짚어 주는 거래 내역을 보며 시문은 깨달았다.

'맞아. 여긴 11년 전이었지.'

정규 아레나와 지구의 멸망 직전까지 갔었던 전생.

그때의 B급 아이템의 가치와 지금 B급 아이템의 가치는 아예 달랐던 것이다.

'다이아 랭크가 엄청 많던 시기는 아니니까.'

당연히 다이아 랭크 초입까지 쓸 수 있는 홉고블린의 전투 도끼는 비쌀 수밖에.

'이거 생각지도 못한 수입이 되겠네.'

전생의 시세로 대충 천만 원대를 생각했던 걸 떠올려 보면 두 배가 넘는 가격.

'만들려던 영약의 급을 좀 올려도 되겠어.'

흐뭇한 미소를 지은 시문이 거래를 받아들이려던 찰나.

"그런데...."

중년인이 다소 차가워진 눈초리로 시문을 바라봤다.

"혹시 이 아이템을 어떻게 얻으신 건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그는 다시 한번 시문의 위아래를 슥 훑었다.

"제가 생산계 플레이어이긴 합니다만, 고객님께서 딱히 고레벨로는 느껴지지 않아서 말이지요."

"아."

시문은 왜 중년인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깨달았다.

'의심하고 있구나.'

무리도 아니었다.

생산계 플레이어로 아고라에서 일을 하고 있다지만.

성삼에 소속된 이상 적은 레벨은 아닐 터.

그런 중년인의 시선엔 시문이 [홉고블린의 전투 도끼]를 얻을 수준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다.

"혹시 레벨을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7레벨입니다."

"7레벨이라...."

헛웃음을 흘린 중년인은 재차 물었다.

"금액은 AP없이 전부 현금으로 받으려고 하셨을 테고?"

"예."

"하, 이거 참."

외알 안경을 벗은 중년인은 깍지를 끼며 말했다.

"손님, 여긴 성삼입니다. 아니, 성삼이 아닌 어느 매장을 가시더라도 문제 있는 아이템은 거래하실 수 없습니다."

이미 단정 짓는 듯한 중년인의 모습에.

"잠시만요. 뭔가 오해가 있으신 거 같은데."

시문은 서둘러 답했다.

"이건 순수하게 제가 아레나를 뛰어서 얻은 겁니다."

"7레벨이? 플래티넘 랭크의 상위에서나 드롭되는 아이템을 획득하셨다?"

점점 어이가 없어지는 중년인의 목소리에 시문은 머리가 아파 옴을 느꼈다.

'하. 이거 복잡하게 꼬이네.'

재료 아이템의 특성상, AP보단 현금 거래가 주로 이루어진다.

주 구매층인 생산계들에게는 AP의 중요도가 그리 크지 않으니까.

한데 하필이면.

저렙이 고렙의 아이템을 가져와 현금으로만 받아가려한다?

'당연히 의심이 가겠지.'

누가 7레벨이 아레나를 뛰어 플래티넘에서나 드롭되는 아이템을 얻었다고 생각하겠는가?

시문 스스로가 생각해도 믿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사실인 것을.

증명하기가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당장 함께 아레나를 진행했던 김민형만 해도 성삼 길드 출신 아니던가?

"이야기가 좀 길어질 것 같네요. 그게 말이죠...."

그렇게 시문이 말을 이으려던 찰나.

"이보게. 자네."

중년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가 부른 것은 시문이 아닌, 시문의 뒤에 자리하고 있던 여직원이었다.

"저쪽에 고객님 오셨다네."

"네, 지점장님."

손님은커녕 쥐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거늘.

여직원은 군말 없이 자리를 물러났고.

그녀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서야, 중년인은 입을 열었다.

"고객님, 길게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는 바로 옆에 설치된 붉은 버튼을 턱짓했다.

"저 벨을 누르면 아고라의 경비들이 몰려올 테고. 자연스레 도난 물품의 주인도 찾을 수 있겠죠."

"저기요. 믿기지 않는 건 이해합니다만, 아무 증거도 없이 사람을 이렇게 범죄자 취급하는...."

"하지만."

중년인은 시문의 말을 자르고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그쪽 같은 사람들은 늘 딱한 사정이 있기 마련이니, 내가 좀 도울 수도 있겠군."

플레이어 워치를 조작하는 중년인.

"현금 천만 원."

그는 천만 원이 입력된 송금 화면을 띄워 시문에게 내밀었다.

"이 가격에 넘기면, 난 저 벨을 누르지 않겠네. 물론 자네에 대해서도 확실히 함구해주지."

어느새 비릿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중년인.

"자, 선택하게나."

절대적인 갑의 위치라 여기는지 어느새 말까지 놓아 버리는 중년인.

버튼을 누르고 아고라 관리자들이 오면 상황은 분명 복잡해지겠지만.

어차피 성삼의 김민형부터 자신에게 당한 전갈 길드의 3인방까지.

무죄를 증명해 줄 사람은 넘쳐났다.

하나 그 이전에.

'하! 이 아저씨가 듣자듣자 하니까, 진짜.'

명색이 대기업.

그것도 지점장으로 보이는 자가 심증만으로 고객을 범죄자 취급하다니?

"저기요, 지금 저랑 장난하...."

시문이 냉담해진 눈빛으로 반박을 하려던 찰나.

"참 재밌는 이야길 나누고 계시네요, 김 점장님."

맑고 청아한.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시문의 귓가로 흘러들었다.

시문은 홀린 듯.

목소리가 들려온 뒤편으로 고개를 돌렸고.

"압구정 지점장 되시더니, 아주 배짱도 좋아지셨어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청순.

그 한 단어로 모든 걸 표현할 수 있는 아름다운 여성을.

"성삼의 매장에서 대낮부터 부정을 다 저지르시고. 혹시 미치셨나요?"

"아, 아가씨?! 여긴 어떻게!"

청순한 외모에 맞지 않는 차가운 미소.

이내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는 시문을 보고선, 거짓말처럼 따스한 미소를 지어 오는 여성.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앞으로 9년 후.

"이유정...."

무너져 가는 대한민국을 완전한 멸망으로 밀어 넣는 장본인을 말이다.

제14화

14화. 갤럭시 아고라 (2)

치익.

탄산 특유의 청량한 소리가 울린다.

"드세요."

캔을 따 내미는 이유정.

그 모습에 시문은 몹시도 큰 괴리감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무려 성삼가의 독녀가 아니던가.

탄산음료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그것을 손수 내미니, 어찌 괴리감이 느껴지지 않겠는가?

하나 그것보다 더욱 큰 괴리감을 선사하는 것은.

'이 손이었지.'

섬섬옥수라는 말이 찰떡같이 어울리는 손.

어느 연예인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는 손이다.

그러나 시문이 마지막으로 본 이유정의 손은 탄산 캔 대신 피에 적셔진 해머가 쥐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해머로.

'할아버지, 이순철 회장의 머리를 박살 냈지.'

이순철뿐만이 아니었다.

함께 연회를 즐기던 여러 고위 인사들이 전부 머리가 날아갔었다.

대한민국이 멸망으로 들어서는 시발점이라 볼 수 있었지.

더 놀라운 것은.

당시 이유정은 개인 방송으로 이 모든 광경을 생중계했다는 것이다.

그때 받았던 충격은 아직도 뇌리에 선명했다.

'대체 왜 그랬을까?'

묵묵히 살려달라는 고위 인사들의 머리를 깨부순 이유정.

자신이 알던 이유정이란 사람과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는데.

대체 왜....

"이상하네요."

그렇게 심각한 표정으로 뚫어져라 캔을 바라보는 시문에.

"오라버니는 사이다를 참 좋아하셨는데. 혹시 입맛이 달라지셨나요?"

이유정은 부드럽게 웃으며, 쥐고 있던 캔을 슬쩍 흔들었다.

그에 캔을.

정확히는 이유정의 손을 뚫어져라 보던 시문이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아! 미안. 잠깐 딴생각에 빠져서...."

"후후, 오라버니는 여전하시네요. 뭐 하나에 몰두하면 주변을 못 보는 거."

"내가 그랬나?"

"네. 덕분에 뭔가에 몰두하는 남자의 매력을 알게 됐죠."

싱긋하며 청아한 미소를 짓는 이유정.

그에 시문 역시 미소로 화답했다.

물론.

"유정이 너도 여전하네."

그 미소엔 작게나마 씁쓸함이 묻어 있었지만 말이다.

"음? 저 따라 하기예요?"

"정말이야."

전생의 그토록 비관적이던 자신.

비록 대한민국의 멸망 이후엔 비관적이던 감정을 싹 털어 버리고.

끊었던 동생 김시혁과의 관계까지 회복했었으나.

'그 자리에 유정인 없었지.'

눈앞에 이 청아한 여성.

또 하나의 동생인 이유정과는 그럴 수 없었다.

"또또."

볼에 차가운 감각이 닿자.

"읏! 차거!"

시문은 화들짝 놀라며 얼굴을 뒤로 물렀다.

어느새 이유정이 사이다를 볼에 가져다 댄 것이다.

"오라버니, 사람 앞에 두고 자꾸 딴생각하기예요?"

"...미안."

"헤헤. 사과할 거까진 없고요."

배시시 웃는 이유정.

그때.

"아가씨."

하얀 와이셔츠에 H형 스커트를 입은 여성이 이유정을 향해 다가왔다.

"여기 입금 내역입니다."

"고마워요."

플레이어 워치에 내역을 이어받은 이유정은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다영 언니? 내가 생각한 거랑 내용이 좀 다른 거 같은데요?"

"이게 맞습니다, 아가씨."

딱 잘라 말하는 여성.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던 이유정은 잠시 불만스러운 얼굴로 눈을 감고는.

"좋아요. 고생했어요."

곧장 시문의 앞으로 홀로그램을 내밀었다.

그곳엔 [50,000,000원] 이라는 숫자가 쓰여 있었다.

"오라버니가 파셨던 [홉고블린의 전투 도끼] 정산금이에요."

"5천? 원래 가격보다 좀 많은데?"

"우리 쪽 직원이 오라버니한테 큰 실수를 했잖아요. 일종의 위로금이랄까... 후, 너무 적죠? 근데 최대한 신경 쓴 거라네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일까.

이유정은 아랫입술을 슬쩍 깨물며, 다영이라는 여성을 흘겼다.

그걸 본 시문은 직감했다.

'화가 났군.'

그것도 꽤 많이.

10년도 넘은 기억이긴 하나, 저런 상태의 이유정은 할아버지인 이순철도 막지 못했다.

평소에는 청순한 외모에 어울리는 잔잔한 성격이지만.

한번 화가 나면 끝을 보는 성격이었으니까.

"마음 같아선 더 챙겨 드리고 싶었는데... 문제가 있나 봐요."

"유정아. 난 괜찮아."

시문은 얼른 손을 내저었다.

"네가 성삼의 직계이긴 해도 공과 사는 확실히 구분해야지."

"...오라버니는 정말 예전 그대로시네요."

뭔가 말실수라도 한 걸까.

입술을 깨무는 힘이 더 들어간다.

이내.

"그래도 다행이네요."

이순철 회장도 못 말리던 화가 서글픈 미소로 녹아내렸다.

"변함없으시니. 제가 이렇게 오라버니와 이야기라도 나눌 수 있는 거겠죠."

이유정은 서글픈 미소 그대로 시문을 바라봤다.

당연히 시문은.

'뭐야. 얘가 갑자기 왜 이래?'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10년 넘도록 만나지 않았다곤 하나, 어렸을 때부터 소꿉친구처럼 지냈던 사이다.

해서 이유정이란 사람에 대해 나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하긴, 그 후로 꽤 많은 시간이 흘렀으니 이상할 것도 없나?'

그 작던 소녀가 어엿한 여성으로 자란 만큼.

자신이 알고 있던 그때의 이유정과 다를 수밖에 없겠지.

시문의 당황을 느낀 것일까.

이유정의 서글펐던 미소는 다시 맑게 변했다.

"이런,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그만 추태를 보였네요."

"아니, 뭐 추태랄 거까지야."

기회다 싶었는지.

시문은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그나저나 너, 아직도 날 오라버니라고 부르냐?"

"에? 제가 그랬나요?"

시문의 질문에.

도리어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유정.

이내 그녀는 평소처럼 배시시 웃었다.

"하도 어릴 때부터 쓰다 보니 입에 붙었나 봐요. 음... 처음 오라버니라 부른 게 7살 때였죠?"

"그렇게 어릴 때였나?"

"맞아요. 오라버니는 11살일 때겠네요. 그때, 우리 별장에서 시혁이랑 소꿉놀이 했었잖아요. 기억 안 나요?"

"아아, 그랬었지 참."

시문은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적.

아직 자신이 김씨 가문에 속해있었을 때.

늘 동생 김시혁, 이유정과 함께 놀았었다.

당시 소꿉놀이에 재미를 붙인 유정에 맞춰, 소꿉놀이를 굉장히 자주했었지.

현실에 버금가는 장난감과 소품들을 가지고 말이다.

"넌 희한하게 엄마 역할을 하기 싫다고 떼를 썼지."

"제가 언제 떼를 썼어요? 그냥 엄마보단 여동생이... 더 어려 보이니까 그랬죠."

"뭐, 덕분에 아빠 역할을 하던 시혁이가 엄청 좋아하긴 했지. 너랑 부부 안 해도 된다고."

"...오라버니."

"하하!"

너털웃음을 짓는 시문.

그 모습에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뜨던 이유정은 고개를 슬쩍 돌렸다.

"아 참, 말이 나와서 말인데."

사이다를 마시느라 이유정의 얼굴을 못 본 시문은 물었다.

"이모님은... 잘 계셔?"

"아... 네."

어느새 시문과 시선을 맞춘 이유정은 작게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 미소는.

"아직 의식은 없으시지만, 괜찮으세요. 제가 꾸준히 가서 케어해 드리거든요."

아까 전의 시문처럼 작지만, 분명한 씁쓸함이 묻어 있었다.

"그렇구나. 고생 많겠네."

"솔직히 힘들긴 해요. 이제 졸업반인 4학년이라서 그런지, 여러모로 바쁘더라고요."

"아레나만 엄청 뛰어서 그런 건 아니고?"

"히힛! 사실 병문안 핑계로 아레나만 하고 있긴 해요. 엄마 병실에 전용 접속기기도 가져다 뒀거든요."

시문의 예리함에 멋쩍은 듯 볼을 긁적이는 유정.

"근데 오라버니."

이내 그녀는 조심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이 아이템, 아레나에서 얻었다고 하셨잖아요."

"그랬지."

"그럼 이제 몸은... 다 회복되신...."

차마 말을 끝맺지 못하는 이유정.

그 모습이 과거.

한국이 멸망하고 처음 시혁이 녀석과 만났던 때와 흡사하다고 느낀다면 착각일까?

잠시 쓰게 웃은 시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마력불능은 완전히 회복됐어."

"저, 정말요?"

반대로 밝아지는 유정의 얼굴.

"정말이야. 운 좋게 튜토리얼에 소환되기 전에 회복됐거든."

"다행이다!"

이내.

"아. 죄, 죄송해요! 너무 유난스러웠죠?"

환하게 웃던 그녀는 목소리가 너무 컸다 생각했는지.

슬쩍 어깨를 움츠리며 애꿎은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렸다.

그러곤.

"저... 제가 이런 걸 물을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어떻게 회복하셨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조심스레 이어지는 유정의 질문에 시문은 잠시 침묵했다.

이유는 다름 아니었다.

'회귀하는 김에 회복도 했어! 라는 건, 턱도 없는 답이겠지.'

아무리 자신의 말을 찰떡같이 믿어 주는 이유정이라 해도.

저런 소릴 들으면 미친놈 취급할 터였다.

시문의 침묵은 길지 않았다.

"그냥 운이 좋았어. 언제부턴가 조금씩 마력이 느껴지더라고. 그러다 완전히 회복된 거지."

"그렇군요. 정말 다행이네요."

깊은 숨을 내쉬는 이유정.

그녀는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제가 이런 말 하는 것도 웃기지만, 사실 저 정말 많이 걱정했거든요. 마력불능은 아무리 치료법을 알아봐도 도저히...."

"유정아."

시문은 고개를 저으며 유정의 말을 끊고.

"그동안 마음 써 준 거로 충분해. 그러니 그런 자책은 하지 마라."

전생의 시혁이 녀석에게 해 줬던 말을 똑같이 해 주었다.

"오라버니."

"그때 그건 사고였고, 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야."

"하지만!"

"그만."

반문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딱 잘라 버리는 시문에 이유정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시 말하지만, 그때 그건 내 선택이었어. 설령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내 선택은 안 변해."

그렇게 말하면서도 시문은 내심 스스로를 비웃었다.

그때의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면서.

그날 이후, 왜 자신은 두 동생들의 연락에 답하지 않았단 말인가?

물론 외부의 압박도 없지는 않았다.

안 그래도 바깥 여자에게서 난 자식.

거기에다 플레이어로선 불구가 되었으니, 김씨 가문에선 이참에 영영 꺼졌으면 싶었겠지.

하지만 어린 시절 함께 자란 두 동생과 연락을 단절한 건, 엄연히 시문 스스로의 선택이었다.

실제로.

'가문을 나오고 나서도, 두 녀석은 꾸준히 연락을 해 왔었지.'

당장 회귀를 한 그날에도.

자신의 핸드폰엔 김시혁과 이유정의 메시지가 가득 차 있지 않았던가?

녀석들은 자신이 답을 하지 않음에도 꿋꿋이 연락을 이어 왔었다.

'다시 생각해도 참 부끄럽네.'

굳이 변명을 하자면.

이맘때의 자신은 마력불능이란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당연했다.

마력 스탯 10이라는 창창한 미래를 두고, 사고 한 번으로 그 모든 걸 잃어버리지 않았나?

가문에서 퇴출까지 된 시점에, 스스로를 추스르기도 벅찬 상태였다.

그렇기에 세상과 선을 그은 것이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나 하나 건사하기 힘들었으니까.

'어쩌면 속으론 이 녀석들을 원망했었는지도 모르겠어.'

그때 너희만 아니었다면 내 인생은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말이다.

하지만.

'이젠 아니지.'

그런 어리석었던 생각은 털어 버린 지 오래고.

설령 같은 일이 되풀이된다 해도, 자신은 같은 선택을 할 인간이라는 걸 안다.

그렇기에.

늘 이맘때의 자신을 후회했다.

특히나 유정이의 경우엔 더더욱 그랬다.

늘 부모님께 혼이 나고 울먹거리던 유정을 달래 줬던 옛날처럼.

'내가 계속 유정이의 곁에 있어 줬더라면....'

세계 3대 미친년.

배반의 악녀라는 오명으로 생을 마감할 일은 없었을지도 모르는데.

대체 유정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니, 유정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든, 무슨 짓을 했든 이제 상관없어.'

고개를 저은 시문은 어느새 촉촉이 젖어 가는 이유정과 눈을 맞췄다.

'바꾸면 되니까.'

한동안 눈을 맞추던 두 사람.

그리고 먼저 입을 연 건.

"오라버니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실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는데...."

이유정이었다.

"그래요, 오라버니는 그런 사람이었죠. 그때로 되돌아 가셔도 같은 선택을 할 사람."

그녀는 물기 어린 눈가를 슥 닦고는 말했다.

"그렇다고 없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니에요. 그때 저희가 스스로 방어할 힘만 있었더라도, 그런 결과는 안 벌어졌을 테니까요."

"유정아."

"그래도 오라버니, 오라버니가 괜찮으시다면 그걸로 됐어요."

전 절대 아니지만요.

뒷말을 삼킨 이유정은 벤치에서 일어났다.

"그나저나, 아레나 시작하신 지 얼마 안 됐죠?"

"응? 아! 며칠 안 됐지. 아직 배치고사도 안 끝났거든."

"그래요?"

이유정의 고운 눈썹이 슬쩍 올라간다.

그녀는 이체 완료가 뜬 플레이어 워치를 가리켰다.

"그런데 저걸 다 현금으로 받으셨네요. 혹시 길드에 가입하셨어요?"

"아니, 안 했어."

"그럼 AP가 많이 필요하시지 않아요?"

갓 아레나에 진입한 뉴비가 가장 고생하는 부분이 바로 장비다.

초반 장비가 그리 비싼 편은 아니었으나, 배치고사에서 AP를 지급하지 않는 만큼.

길드에 들거나 사비를 털어서 무기라도 맞춰야 했으니까.

물론.

"AP는 괜찮아. 나 장비는 크게 안 급하거든."

신화급 장비를 직접 연성해 쓰는 시문에겐 전혀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장비가 안 급해요? 오라버니 마법계 아니세요?"

"맞아. 직업은 연금술사고."

"연금술사! 그래서 그렇군요."

이유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마법계지만 생산계에 가까운 취급을 받는 연금술사.

반대로 초반에 연금술사들이 사용하는 재료는 현금으로도 싼 가격에 구비가 가능했기에.

타 계통들보다 AP가 급하진 않았으니까.

"그럼 그 돈으론 연금술 재료를 사시려고요?"

"어. 마침 운 좋게 얻은 레시피가 몇 개 있어서."

몇 번이나 나오는 '운 좋게'.

저 부분을 한 번쯤은 의심해 볼 법도 하건만.

"잘됐네요!"

이유정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마침 저도 필요한 재료가 있었거든요."

"필요한 재료?"

"네!"

밝게 답하는 유정에 시문은 고개를 갸웃했다.

"유정이 너 전투계잖아. 네가 무슨 재료를...."

"에이, 전투계는 뭐 무식하게 무기만 휘두르나요? 훈련에 도움되는 약들을 직접 만들기도 한다고요."

"그런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부분은 연금술사나 타 생산계들에게 의뢰하는 게 효율적일 텐데?

더군다나 이유정은 무려 성삼의 독녀에다 랭커 아닌가?

마음만 먹는다면 온갖 영약은 쓸어 담을 수 있을....

그때.

"아이참!"

시문의 의문은 뚝 끊어졌다.

이유정이 시문의 왼팔에 찰싹 달라붙은 것이다.

"저 시간 없어요. 좀 있다가 엄마 병문안도 가야 한단 말이에요."

이 어리숙한 오라버니의 생각이 길게 이어지기 전에.

이유정이 먼저 조치를 취한 거였다.

"유, 유정아? 우선 이것 좀 놓고...."

왼쪽 팔에서 전해져 오는 형용할 수 없는 감각에.

"그러니까 빨리 가요."

"아, 알았으니까! 일단 팔 좀!"

"오라버닌 마법계라서 느리잖아요! 제가 끌고 가는 게 빨라요."

시문은 뻣뻣하게 굳어진 채 이유정을 따라 그대로 끌려갔다.

그리고.

"하."

이 모든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던 H형 스커트의 여성.

'내숭에 꼬리치기까지? 우리 유정이. 새로운 모습 많~이도 본다.'

아니면 저게 자신이 모시는 아가씨의 원래 모습인 걸까?

강다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

제15화

15화. 갤럭시 아고라 (3)

"수제 회복 포션 팝니다! 중급부터 최하급까지 다양해요!"

"온갖 잡템 다 매입합니다. 최근 5일간 시세로 맞춰 드립니다!"

"각종 스크롤 팝니다. 생산계 협회에서 인증받은 플레이어들이 만들었어요!"

북적거리는 시장통이라 해도 믿을 광경.

갤럭시 아고라의 3층, 자유 광장의 한편에 벌어진 광경이었다.

본래라면 거래의 요충지인 4층에 있어야 할 광경이지만.

층수의 반절 이상을 차지하는 경매장과 각 세력의 상점에 밀려난 노점들이 3층까지 번진 것이었다.

그리고 노점들이 끝나는 출구엔.

"이제 됐다니까."

"에이, 연금술사들은 늘 재료가 부족하잖아요. 조금 더 봐요."

뚜렷한 이목구미의 미남과 청순한 여성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이만하면 충분해. 이것도 예상한 것보다 훨씬 많이 샀어."

시문이 단호하게 고개를 젓자, 이유정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그럼 오라버니, 이거 하나만 더 챙겨 가세요."

또 휘말려 시장을 더 돌아다니게 될까 봐.

"그만 됐다니까. 나 인벤토리 터지려고 그래."

시문은 서둘러 손을 저었다.

다행히도.

"그러지 말고요. 제가 꼭 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요."

쇼핑을 더 하는 것은 아니었는지.

인벤토리를 여는 이유정의 모습에 시문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타인과의 쇼핑이 이렇게 무서울 줄이야.'

같은 등급의 재료에도 크기나 색의 차이까지.

전투계면서 하나하나 꼼꼼하게 따지는 이유정은 보통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물론 연금술사라면 이유정처럼 세심하게 따져야 정상이겠지만.

'난 등급만 맞으면 다른 부분은 상관없다고.'

1레벨로 전생의 지구에서 살아남은 연금술사.

더불어 이젠 현자의 돌과 신화급 무구까지 연성하는 시문에게는 그다지 의미 없는 부분이었다.

"자, 여기요."

생각에 잠긴 시문의 앞으로 이유정이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건...."

그걸 확인한 시문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3D 고글 형태의 기기.

"아레나 접속기기잖아?"

"맞아요. 성삼에서 만든 완전 최최!최신형! 접속기기예요. 아직 미출시이거든요. 헤헤."

아레나 접속기기.

헬멧부터 캡슐, 눈앞의 고글까지 다양한 형태로 출시되는 접속기기들은.

놀랍게도 갤럭시 아레나가 직접 각국의 정부와 접촉해 만들어 낸 결과물이었다.

처음엔 강대국인 미국과 중국, 두 나라만 생산이 가능했지만.

당연하게 발생한 두 나라의 독점과 갑질에, 갤럭시 아레나가 직접 전 나라의 정부와 접촉한 것이다.

더불어 독점을 향한 갤럭시 아레나의 경고는 덤이었다.

방법은 간단했다.

'중국과 미국, 두 나라의 플레이어들 전원의 자격을 박탈해 버린다고 했었지.'

뉴스로도 생중계되었던 그 사건은 아직도 두 강대국의 치욕으로 남아 있다.

물론 경고 조치였기에 치욕은 그때뿐.

지구 양대 강대국이라는 타이틀과 권세는 여전했다.

지구가 멸망하기 직전까지 말이다.

"미출시 접속기기라고? 이런 걸 나한테 줘도 되는 거야?"

"이미 저나 성삼 길드의 상위 플레이어들은 다들 사용하고 있어요. 그냥 상용화만 안 된 거죠."

"아니 내 말은, 난 외부인인데 이런 걸 줘도 되냐는 거야."

"뭐 어때요? 내가 주겠다는데."

자기들이 뭐 어쩌려고요?

이유정은 밝은 미소를 걸치며, 어깨를 으쓱할 따름이었다.

"아! 혹여나 그런 이유로 성삼에서 찾아오면 저한테 꼭 말해 주셔야 해요."

그렇게 말하는 이유정의 눈에 희미한 살기가 스쳤다.

"아셨죠, 오라버니?"

안타깝게도.

시문은 접속기기를 확인하느라, 그녀의 살기를 캐치하지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냥 성삼 스토어에서 적당한 걸 내가 사는 게 좋지 않겠냐."

"아이참! 기기 없이 아레나 뛰면 몸이 상할 수도 있다고요!"

이유정의 볼이 불만으로 조금 퉁퉁해졌다.

"정 신경 쓰이시면 아까 지점장이 굴었던 무례에 대한 보답이라 생각해주세요."

"뭐,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슬쩍 깨물리는 그녀의 아랫입술까지 확인한 시문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정이 아랫입술을 깨문다는 건, 고집을 부리려 할 때 나오는 습관.

괜히 요 녀석의 황소고집과 맞설 필요는 없었다.

특히나.

'잘됐다. 안 그래도 접속기기도 하나 구하려고 했는데.'

슬슬 아레나 방송을 고려 중이던 시문에겐 더더욱 말이다.

고글을 인벤토리에 넣으며, 플레이어 워치의 시간을 확인한 시문은 말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유정아, 나 이제 가 봐야겠다."

"네! 마침 저도 엄마 병문안 갈 시간이네요."

접속기기를 챙기는 시문에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이유정.

그에 잠시 멈칫하는 시문.

'그러고 보니 이모님도 아레나 관련 질병이셨지.'

갤럭시 아레나가 열리고, 자신이 앓았던 마력불능처럼.

상태창의 특성 칸에 뜨는 상태이상들이 두루 존재했다.

각성자들에게만 나타나는 일명 '아레나 질병'이었다.

'이모님의 병명이 뭐였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한때 성좌의 선택까지 받았던 플레이어였으니.

어느 정도는 버티시겠지.

'빨리 성장해서 치료제 제작을 시작해야겠어.'

현자의 돌과 인체 연성까지 지니고 있는 자신이다.

성장은 시간문제고, 치료제 제작 역시 문제되지 않으리라.

'이모님껜 빚진 것도 있으니까.'

어린 시절.

사생아인 자신을 늘 상냥하게 챙겨 주셨던 유정의 어머니를 떠올린 시문은 몸을 돌렸다.

"그럼 유정아. 난 간다. 조심해서 들어가라."

"네. 아 참! 오라버니."

시문의 소매를 붙잡은 이유정.

"왜?"

그녀는 시선을 내리깔며 잠시 머뭇거리더니,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 저한테도 답장... 하셔야 해요?"

"답장?"

그 말에 고개를 갸웃하는 김시문.

이내.

"아. 메시지?"

무언가 떠오르는 게 있는지, 시문은 작게 탄성을 흘렸다.

그에 이유정의 입이 조금이지만 삐쭉 튀어나왔다.

"치. 오라버니께서 답장 보내셨다고 시혁이 그게 얼마나 자랑을 했다고요."

"자랑? 아니, 할 게 없어서 그런 걸로 자랑을 하냐?"

"그러니까요! 엄청 짜증 나더라고요!"

그렇다면서 넌 또 왜 짜증이나?

그전에 너희 나이가 몇인지는 알고 하는 소리냐?

라는 말이 목까지 치솟았으나,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진 않았다.

"그래. 도착하면 메시지 보낼게."

"힛! 진짜죠?! 약속한 거예요?"

어린 시절 그때처럼 밝게 웃는 이유정.

그에.

"녀석."

슥슥.

"...?"

시문은 본능적으로 유정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당연히 이유정은 순식간에 얼어붙었고.

'아차! 그러고 보니 여자애들은 머리 만지는 거 엄청 싫어하지.'

지금의 이유정은 그 시절의 이유정이 아니거늘.

어릴 적이 떠올라 습관적으로 머리를 매만진 시문은 얼른 손을 뗐다.

물론 그녀의 머리는 어느 정도 헝클어진 뒤였지만.

"흠! 그, 그럼 조심해서 들어가라."

혹여나 난감한 일이 벌어질까.

시문은 얼른 걸음을 옮겨 사라졌고.

계속 그대로 얼어 있는 이유정의 곁으로 H형 스커트의 여성.

"참 매너 없는 남자네요."

강다영이 다가왔다.

"아무리 아는 사이라도 세팅한 머릴 그냥 손으로 뭉... 응?"

익숙한 손놀림으로 이유정의 머리를 복구하던 강다영이 눈을 깜빡인다.

'얘가 왜 꼼짝을 안 해. 설마 빡친 건가?'

평소엔 선머슴처럼 외모는 신경 쓰지 않더니.

그래도 여자라 이건가?

강다영의 눈이 바쁘게 주변을 훑었다.

'여기서 X랄하면 곤란한데....'

보는 눈이 너무 많다.

특히 모두가 플레이어인 만큼, 아무리 성삼의 이름을 빌려도 입막음이 어려우리라.

강다영은 서둘러 꼼짝도 하지 않는 유정을 달랬다.

"아, 아가씨.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금방 손질해...."

그러곤 뚝 움직임을 멈췄다.

"어라?"

이유정의 얼굴을 본 강다영의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러나 그뿐.

"언니, 방금 건 못 본 걸로 해 줘요."

"으, 응? 아! 네."

마른세수와 함께 순식간에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이유정.

그에 강다영은 얼른 허리를 빳빳하게 세웠다.

그렇게 한동안 김시문이 사라진 방향을 물끄러미 보던 이유정은.

"그나저나 언니, 그 건은 어떻게 됐어요?"

어느새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언니, 둘밖에 없잖아요. 편하게 말해요."

"그 건이라니? 무슨 건을 말하는데? 아아! 그거?"

손뼉을 치는 강다영.

그녀는 서둘러 핸드폰을 꺼내, 바쁘게 터치했다.

그러곤.

"10년 전 그 사건 말하는 거라면... 놀랍게도 아직 파악된 게 단 하나도 없어."

자신감 있게 답했다.

"언니, 보고 내용에 전혀 어울리는 목소리가 아니라는 거 알아요?"

"파악된 부분은 있으니까."

"이젠 방금 한 보고와도 안 어울리는 소릴 하네요."

이유정의 너스레에 강다영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내 주변을 힐끗거리곤, 이유정의 귓가에 속삭였다.

"말 그대로야. 파악된 게 정말 '단 하나도' 없어."

유난히 한 부분을 강조하는 강다영에 이유정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그 말은...."

"그래. 마치 누가 지워 버린 것처럼 말이지."

강다영은 주변을 힐끔거리며 말을 이었다.

"이상하지 않니? 너뿐만 아니라 한국의 상류층이 테러를 당했는데 이렇게 정보가 없다는 게."

당시 화두가 되긴 했으나 그뿐.

그때의 열기는 거짓말처럼 식어 버렸고.

지금은 아예 일어나지도 않은 일처럼 조용하다.

무려 상류층들이 습격받은 사건인데 말이다.

웃기지 않은가?

"작은 스캔들 하나에도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언론이 그 뒤로 쭉 침묵이라는 거죠?"

"기가 차지? 얼마 전에 ST그룹 아들이 개인 방송에서 트롤했다고, 언론이 아주 개X랄을 했잖아."

고작 골드 따리에 불과한 재벌 3세인데도.

고작 트롤 한 번에 나라가 뒤집힐 듯 들끓었던 것에 비하면, 확실히 비현실적이었다.

"꼭 누군가 의도적으로 덮고 있다는 것처럼 들리네요. 그것도 꽤 힘 있는 사람이."

"역시 똑똑한 것들은 같이 일하기 편하다니까. 그래서, 어쩔 거야?"

강다영은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느낌 딱 오잖아? 여기서 더 들어가면 뭐든 분명히 문제가 생길 거야."

이유정은 입꼬리를 비죽 끌어 올렸다.

"왜, 무서워요?"

"계집애가 언닐 뭐로 보고! 너 괜찮은지 묻는 거야, 요것아. 넌 나랑 다르게 잃을 게 많잖니."

성삼의 독녀라는 배경부터 이미지까지.

비단 그것뿐만이 아니다.

플레이어로서도.

이유정은 김시혁과 함께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별생각이 없는지.

"언니, 저도 더 잃은 건 없어요."

무미건조하게 답할 뿐이었다.

이내.

"아니."

시문이 사라진 방향을 다시 한번 힐끔거렸다.

"방금 생기긴 했네요. 그래서 더욱 알아야겠어요."

"그래그래, 어련하시겠니."

그 모습에 고개를 젓는 강다영.

그녀는 누군가의 번호를 찍고는 통화 버튼에 손가락을 올렸다.

"그럼 작업에 들어간다? 이거 착수하면 못 되돌려."

"네, 착수하세요. 자료가 있다면 가져오고, 각성자가 연관되어 있다면...."

고개를 끄덕이는 이유정의 눈빛은.

"목이라도 썰어서 가져오세요. 최근에 꽤 재밌는 아이템을 주웠거든요."

서릿발처럼 차가웠다.

* * *

"후, 피곤하네."

오랜만의 외출이라서일까?

밀려오는 피로감에 시문은 외투를 벗어 던지곤 침대로 몸을 던졌다.

"역시 내 집이 최고라니까."

좁은 평수에 싸구려 침대 하나였으나.

그 위에서 늘어져 있으면 심신이 절로 안정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잠시간 휴식을 취하던 시문의 가슴 중앙이 울렸다.

-오빠. 근데 아까 그 애, 친한 애야?

"아까? 아, 유정이 말이야?"

눈을 끔뻑이던 시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친하지. 최근에 텀이 있긴 했지만, 5살 때부터 만나서 같이 컸으니까."

-흐응... 그래?

어딘가 묘한 현자의 돌을 비음.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냥, 뭐랄까.

겉과 속이 다른 어마어마한 애 같아서.

라는 뒷말을 현자의 돌은 애써 삼켰다.

'어렸을 때부터 친했으면 내가 말해 봐야 먹힐 리도 없으니....'

정말 낚이려 할 때만 도와주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한 현자의 돌은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얼른 영약 제조하자. 만드는 거야 금방이니, 그거 먹는 게 피로 회복에도 빠를걸?

"그렇겠네. 읏차! 그럼 세팅 좀 해 볼까."

인벤토리를 연 시문.

그곳에서 각종 플라스크를 포함한 여러 물건이 잡혀 나왔다.

갤럭시 아고라에서 구한 연금술 도구들이었다.

시문은 그것들을 대충 침대에 넣어 놓고 자취방의 한쪽 구석을 바라봤다.

좁은 방이긴 했으나, 컴퓨터와 옷걸이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았다.

"이 정도면 대충 사이즈는 맞겠네."

인벤토리에서 두툼한 원목을 꺼낸 시문.

한 손으로 들기엔 제법 무게가 있었지만.

팔에 [오우거의 신체조직]을 연성하자, 어린아이의 장난감처럼 가볍게 느껴졌다.

원목을 든 시문은 손가락을 튕겼고.

따악.

파츠측.

연성력에 휘감긴 원목은 넓은 직사각형으로 펼쳐졌다.

그것은 자취방 구석에 딱 알맞은 사이즈가 될 때까지 펼쳐지더니.

아래로는 4개의 다리를 만들어갔다.

시문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딱 맞췄네."

-그러게.

순식간에 원목 테이블을 만들어 낸 시문.

비록 전생에서 허름한 판잣집에 살았어도.

있을 건 다 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연금술의 몇 안 되는 장점이지.'

필요한 가구나 도구 등을 즉석에서 연성해 내는 것.

물론 영약 조제 도구와 같은 특수한 처리가 필요한 것들은 무리였지만.

테이블을 만드는 것 정도는 주성분이 되는 원목만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했다.

-오빠, 이왕 하는 거 이 방에 있는 가구들도 좀 바꾸면 안 돼? 나 좀 연금술사의 방다운 광경을 보고 싶은데.

"뭐, 못 할 건 없지만...."

현자의 돌의 말에 주변을 슥 둘러보는 시문.

이내.

"당장 불편한 것도 없고, 여기 오래 있을 것도 아니니까 굳이 힘 안 쓸래."

-히잉! 그게 언제가 될지 모르잖아.

"얼마 안 걸릴 거야. 근데 불편해도 내가 불편하지, 네가 불편할 게 뭐가 있냐?"

-시각적으로 불편하다 이거지. 내가 얼마나 섬세한 연성물인데.

"그렇구나."

건성으로 답한 시문은 매끄럽게 도구들을 세팅했다.

전생부터 연금술사였던 만큼, 대략적으로 선호하는 작업 환경이 잡혀 있는 것이다.

"일단 영약 관련을 제일 가운데로 두고, 포션은 급한 게 아니니까 저쪽으로...."

순식간에 조제 도구들로 세팅되는 테이블.

일반적인 연금술사의 작업 환경을 고려해 보면 무척이나 소박했지만.

당장 필요한 것부터 차차 늘려 가면 되었기에.

시문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세팅된 테이블을 바라봤다.

-흐응. 뭐, 연금술 도구 수준은 괜찮네.

"말했잖아. 여기 생활계 플레이어들 수준은 무시 못 한다고."

떨떠름한 현자의 돌의 목소리에 시문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유는 다름 아니었다.

'오빠, 차라리 내가 만드는 게 낫다니까? 업적 포인트만 딱 바쳐! 내가 고급지게 싹 세팅해 준다!'

얼굴도 모르는 인간들이 만든 연금술 도구보다.

자신이 직접 연성한 도구가 뛰어날 거라는 현자의 돌의 말 때문이었다.

물론 시문 역시 녀석의 말에 동의했다.

현자의 돌의 연성 능력은 몸소 체감하고 있으니까.

단지.

'그런 데 쓰기엔 업적 포인트가 너무 아까워.'

최소 1,000점.

제대로 각 잡으면 포션이나 영약 등, 테마별로 10,000점 가까이 들 거라던 현자의 돌.

그 점수면 [옵시디언 태블릿]을 한 번 더 연성할 수 있지 않은가?

'당장은 내 성장이 먼저니까.'

연금술사로서.

그리고 연금술의 장점인 생산 능력을 제대로 이용하려면 분명 투자해야 하는 부분은 맞다.

하나 어지간한 연성은 당장 손가락만으로 해결할 수 있으니.

시문은 도구를 연성하는 대신 구매를 택한 거였다.

-뭐, 이 정도면 재료의 효력을 까먹을 일은 없겠어.

"그렇지?"

시문은 아고라에서 사 온 재료들을 꺼내, 테이블의 빈자리에 올려 두었다.

-근데 오빠, 영약의 능력은 어떤 방향으로 잡을 거야?

"본래라면 원료의 효능을 극대화하는 쪽이겠지만...."

-겠지만?

[잠식된 홉고블린의 혈청]을 꺼내 든 시문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이번엔 방향을 좀 바꾸려고."

-어떻게?

"고블린 관련 재료들은 보통 마비 쪽과 관련이 있잖아?"

-그렇지. 고블린이 쓰는 마비독은 전부 자기들의 피로 만들어 내니까. 뭐, 일단은 잠식한 마기부터 정화를... 잠깐.

뭔가 짐작 가는 것이 있는 걸까.

현자의 돌의 목소리는 빠르게 가라앉았다.

-오빠, 설마! 마비 독성 관련의 보너스를 받으려는 게 아니라....

"그래. '잠식된' 난 이 부분에 초점을 둘 거야. 어차피 영약으로서의 스탯 증가는 비슷할 테니까."

-....

잠시간 이어지는 침묵.

이내.

-오빠아아! 미쳤어?!

가슴 중앙에서 강렬한 이명이 울렸다.

-세상에! 마기를 가지겠다고? 오빠는 마족도 아니고, 초급 흑마법조차 모르잖아!

한껏 격앙된 현자의 돌.

그러나 녀석의 목소리에 담긴 건 분노가 아닌.

-마기는 워낙 난폭한 기운이라 품고만 있어도 육체를 망가뜨리잖아!

걱정이었다.

"알고 있어."

-아, 알고 있다고?

애당초 정규 아레나부터 출현하는 마족들이나 사용하는 기운.

흑마법과 같은 특별한 접점이 없다면.

마기는 스탯으로 보유할 시 마력불능에 버금가는 페널티를 가지게 된다.

오로지 페널티만 말이다.

하지만.

-그걸 아는 사람이 이래? 자칫하다간 마력불능 때로 돌아갈 수도 있어!

"걱정하지 마. 다 방법이 있으니까."

'마기를 다룰 수 있는 기술'만 있다면.

마기 스탯은 고유 스탯에 준하는 아주 강력한 스탯이 된다.

실제로 마기 관련 직업을 지닌 플레이어들은 하나같이 굉장한 파괴력을 뽐내지 않는가?

그리고 시문은 그런 플레이어들 중.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마기를 아주 기막히게 쓰는 녀석이 있거든."

마기의 본주인인 마족들까지 두들겨 패는 괴물을 하나 알고 있었다.

-그게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이 다를 줄 아는 거지 오빠가 다룰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정확히 짚었어. 그래서 말인데."

시문은 상태창을 띄워 업적 포인트를 바라봤다.

만 점이 코앞인 9,350점.

[옵시디언 태블릿]의 업그레이드를 위해 모아 두었던 업적 포인트의 사용처를.

"현자의 돌? 우리 연성 하나만 하자."

시문은 잠시 바꾸기로 했다.

제16화

16화. 마기 (1)

"...이렇게 하는 거야. 이건 지식적인 부분이잖아. 안 그래?"

-오빠... 진짜 잔머리 잘 굴린다.

시문의 설명에 얼이 빠진 현자의 돌의 목소리.

"녀석, 말을 해도. 그냥 똑똑하다고 그래라."

그에 시문은 헛웃음을 흘리며 가슴의 정중앙.

현자의 돌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래서, 불가능하겠냐?"

-...아니, 충분히 가능해. 단언할 순 없지만, 아마 리바운드도 없을걸?

"정말?"

-응. 이건 옵시디언 태블릿이랑 같은 경우잖아. 능력을 사용하는 도구가 아니니까.

현자의 돌의 말에 시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번에 연성하려는 건 지식을 담은 책이지.'

인체 연성의 지식을 담은 [옵시디언 태블릿]처럼.

지금 연성하려는 '이것' 역시 아스트라페처럼 즉시 능력을 발현하는 형태가 아닌.

엄연히 지식을 담은 책의 형태였다.

-하지만 옵시디언 태블릿과 마찬가지로 중후반부를 연성하려면, 요구 대가는 확 달라질 거야.

"그 말은 업적 포인트가 엄청 들 거라는 뜻?"

-오빠의 연성력만 받쳐 주면 그런 일이 없긴 하지.

"그게 그 소리잖아, 욘석아."

장담컨대 지금 연성하려는 이건 분명 신화 등급의 물건일 터.

그걸 연성력만으로 감당하려면, 대체 연성력 스탯이 얼마나 높아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마 스탯을 전부 연성력에 올인해서 랭커 수준대의 레벨까지 찍어도 불가능하겠지.'

따지고 보면 당연했다.

신화급 무구는 성좌가 자신이 선택한 후원자에게만 조건부로 허락하는 아이템이다.

그런 걸 고스란히 베껴 만들어 내는데.

그 등가교환의 값을 일개 플레이어가 전부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럼 연성에 필요한 업적 포인트는 얼마 정도 될 거 같아?"

-으음... 잠깐만. 계산 좀 해 보자.

만약 이번 연성의 요구 포인트가 9,000점을 넘으면, 마기 영약도 만들지 않을 생각이었다.

어차피 지금 상태로도 이 구간의 랭크대는 압살하고 다니니.

아레나를 좀 더 뛰어 요구량을 맞춰두고, 마기 영약을 제작하면 되니까.

'업적 포인트를 금방 버는 편이기도 하고.'

성좌 제우스와 검은 염소의 태도를 보아, 앞으로도 계속 자신을 주시할 테고.

성좌들의 미션이나 아레나에서 좋은 성적을 내면, 업적 포인트는 알아서 벌릴 터였다.

-일단 완성도를 얼마나 두느냐에 따라 달라. 솔직히 저번 옵시디언 태블릿은 운이 좀 좋았거든.

"운이 좋았다고?"

시문이 고개를 갸웃하자, 현자의 돌은 긍정적인 이명을 냈다.

-응. 오빠가 연금술사라는 부분에서 보너스를 받기도 했고, 내가 또 좀 이뻐? 옵태가 나한테 홀딱 반해서 싸게 먹힌 거지.

"그... 이쁘다는 게 현자의 돌이라는 연성물의 특수성을 말하는 거지?"

-아 씨! 그냥 좀 이쁘다고 하면 안 돼?

"어, 그래. 너 이쁘다."

-아이! 그래도 그렇게 대놓고 말하면 나 빨개지잖앙~!

곧바로 간드러지는 현자의 돌을 무시한 채.

시문은 턱을 괴었다.

'완성도라....'

현자의 돌이 말하는 완성도는 필시 [등급 – 모조품(%)] 부분을 말하는 것일 터.

'이걸 낮출수록 대가는 싸진다 이거지?'

하지만 무작정 낮출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스트라페와 같은 무구라면 괜찮을지 몰라도....'

무구형은 비록 낮은 완성도라도 그에 해당하는 수준의 능력을 사용할 수는 있었지만.

'지식은 다르지.'

지식은 아무리 대단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어도.

중간에 읽다 끊겨 버리면 아무 소용도 없으니까.

"잠깐."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현자의 돌. 뭐 하나만 물어보자."

-웅웅! 뭐가 궁금해?

시문은 옵시디언 태블릿 때를 떠올리며 말했다.

"너 옵시디언 태블릿이랑 융합했잖아."

-정확히는 내게로 흡수된 거지. 제가 잘나봐야 결국 연성물이잖아?

녀석의 말에 시문은 눈을 반짝였다.

"그럼 연성물이라는 조건이면 지식도 흡수가 가능하다는 거지?"

-당연하지. 오빠, 나 엄청 지적인 여자야. 몰라?

현자의 돌의 자신감에 혹시나 했던 가정이 확신으로 변한다.

시문은 쾌재를 내지르며 연성력을 끌어올렸다.

"좋아. 현자의 돌? 그럼 바로 연성을 시작하자."

그에 현자의 돌이 물었다.

-완성도는 얼마 정도로 잡게? 오빠, 알겠지만 지식이라는 게 무구랑은 좀 다르....

"딱 10%. 그거면 충분해."

-흐음. 보아하니 연성물의 구조를 아는 눈치네?

"대충은. 정확히는 들은 이야기지만."

시문은 몇 안 되는 지인 중 하나인 고말숙의 넋두리를 떠올렸다.

'야, 똑똑이. 이것 좀 봐 봐라. 넌 이 개소린지 뭔지 알아먹겠냐?'

아주 낡고 얇은 서책을 툭 던지며 신경질을 부리던 고말숙.

'이 망할 무공은 대성인 10성에 맞춰, 딱 10장으로만 이루어져 있거든?'

'근데 X발! 난 대가리가 나빠서 7성밖에 못 하겠더라.'

'너 감정도 잘하잖냐. 혹시 이 구결 같은 거 해석 좀 못 하냐?'

전생의 그녀는 성좌 천마에게 받은 신화급 아이템.

[천마신공]의 해석을 의뢰한 적이 있었다.

물론 전승자만 읽을 수 있다는 조건 덕분에, 시문은 글자조차 못 봤으나.

'천마신공이 총 10장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지.'

이를 상식적으로 나눠보면 1성당 10%

고로 천마신공의 완성도 10%에 해당하는 부분이 1성의 구결을 담고 있다는 것일 터.

'본래라면 천마신공을 직접 읽고 해석할 생각이었는데 말이지.'

무려 7성만으로 고말숙이라는 하이랭커를 만들어 낸 천마신공이다.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간에.

시문은 어떻게든 천마신공을 해석하고, 직접 익혀 나갈 생각이었다.

나름의 자신도 있었다.

고말숙이 사용하던 기술이나 전투 방식도 어느 정도 봐 둔 상태였으니까.

하나.

'현자의 돌이 연성물에 수록된 지식을 흡수할 수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옵시디언 태블릿에 있던 인체 연성의 지식처럼.

일종의 특성의 형식으로 자신에게 적용될 테니까.

그럼 힘들게 구결을 해석할 필요도 없이, 천마신공을 사용할 수 있는 몸만 준비하면 되었다.

'그리고 몸은 인체 연성이면 충분해.'

생각을 정리한 시문은 물었다.

"현자의 돌, 10% 완성도로 연성하면 대가는 얼마나 들겠어?"

-완성도 10%면 그리 비싸지 않지. 음, 한 5,000점이면 되겠는데?

"5,000점? 싸네."

-대신 뒷부분은 장난이 아닐걸. 신화급 지식이니까.

"뭐, 당장 1성은 익힐 수 있으니까. 그 정도면 충분해."

시문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20%에 10,000점이 들던 옵시디언 태블릿의 절반 아닌가?

같은 신화급 등급임을 따져 보면 깔끔한 계산이었다.

"좋아. 바로 연성에 들어가자."

-웅!

고말숙이 건넸던 낡고 얇은 서책 [천마신공]

그 외형을 펼쳤을 때 아무 글자도 보이지 않던 내부를 떠올리며 연성을 시도하자.

[요구치에 맞는 연성을 이루기에는 연성력이 부족합니다.]

익숙한 메시지창이 눈앞으로 떠올랐다.

[현자의 돌이 부족한 등가교환을 성립시키기 위해, 업적 포인트 5,000점을 요구합니다.]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망설임 없이 예를 터치한 시문은 업적 포인트 5,000점이 소모되자마자 손가락을 튕겼고.

따악.

파츠츠측!

손가락 끝에서 얽히고설키는 연성 특유의 빛이 아주 얇게 저며지더니.

한 장의 낡은 종이가 되었다.

팔랑.

바람도 불지 않는데.

낡은 종이 한 장이 힘없이 허공을 나풀거린다.

그것을 본 시문의 얼굴은 밝아졌다.

이유는 간단했다.

'보인다!'

과거 고말숙에게 건네받았었던 [천마신공]

그저 백지로만 보였던 낡은 종이 위로, 빼곡히 들어찬 정체 모를 글자들이 보이는 것이다.

시문은 조심스레 그것을 받아 정보를 확인했다.

[천마신공]

등급 – 모조품 (10%)

성좌 천마의 무공.

익힐 수는 있지만, 어째서인지 제힘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한다.

"됐다!!"

시문은 저도 모르게 폴짝 뛰며 환호를 질렀다.

연금술이 좀 까탈스러운가?

아무리 구조를 알고 있다지만, 말 그대로 구조뿐.

혹여나 초반부의 지식의 질이 어쩌고 하면서 추가 연성을 요구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헌데 10성으로 이루어진 천마신공에서 1성만 쏙 빼서 연성했으니, 어찌 기쁘지 않으랴?

"자, 현자의 돌? 어서 흡수하자."

-웅! 근데 오빠, 방방 뛰는 거 너무 귀엽다! 토끼 귀 연성해서 다시 뛰....

"빨리."

음흉함이 가득한 녀석의 말을 칼같이 자른 시문은 얼른 천마신공을 가슴에 가져다 댔다.

-우움! 성좌 거라 그런지 맛은 있넹.

우물거리는 듯한 현자의 돌의 목소리.

그와 함께 천천히 가슴 중앙으로 스며드는 천마신공을 보며 시문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나저나, 이번엔 성좌가 반응을 안 하네?'

솔직히 나름 긴장했었다.

아스트라페 때는 올림푸스의 성좌들 전부가.

옵시디언 태블릿 때에는 검은 염소가 직접 관심을 보였으니까.

'다행이라고 봐야겠지.'

모든 성좌가 자신에게 호의적이리란 법은 없다.

당연했다.

자신의 것을 멋대로 모방, 창조해 버리는데 좋게 보기도 쉽지 않겠지.

실제로 검은 염소의 경우가 그렇지 않은가?

'칭호 [저편의 시선을 받는 자]가 아니었다면. 아마 검은 염소와 마찰을 겪었을 거야.'

진노했다는 메시지도 그렇고.

제우스와 다투던 성격을 보아, 좋은 꼴은 보기 힘들었을 거다.

-오빠! 흡수 다 했어.

"그래?"

현자의 돌의 말에 시문의 눈이 반짝였다.

그때.

-웅! 근데 이거 더럽게 난해하다. 무슨 개념이 뜬구름 잡는 것처럼....

현자의 돌의 말이 흐릿해진다.

그뿐만이 아니다.

늘 이어져 있던 녀석과의 존재감마저 느껴지지 않았고.

종례엔 모든 감각이 흐릿해졌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이미 한 차례 겪어 본 적이 있었다.

'이건 회귀 전의....'

그 생각을 끝으로.

시문의 정신이 끊어졌다.

* * *

"으음...."

시문의 고운 미간이 찌푸려진다.

'여기는?'

점차 감각이 돌아오는 것을 느끼며, 눈을 뜬 시문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탁 트인 자연 풍경.

기암괴석부터 장엄한 폭포까지.

흡사 무릉도원을 연상시키는 이곳은 어느 유명 동양화 한 폭을 실사화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바로 뒤에서.

"허허. 일어났는가?"

현숙하면서도 묘하게 패기가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어찌, 몸은 괜찮은지 모르겠구먼."

수수한 정자에 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

"아. 괜찮습니다."

시문은 얼른 몸을 일으켰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만큼, 과도한 노인 공경은 아니더라도.

그에 대한 예우가 배어 있는 것이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든 것일까?

"허헛! 요즘 젊은이들답지 않군. 앉게나."

노인은 한층 커진 웃음과 함께 옆자리로 손짓했고.

시문이 뭐라 답할 틈도 없이.

스륵.

미끄러지듯 노인의 앞자리로 이동되었다.

'세상에....'

그에 시문의 눈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어떻게 단순히 권한 것만으로 사람의 위치를 이렇게 바꾸어 버린단 말인가?

이내.

'그렇군.'

시문은 깨달았다.

이곳은 무릉도원 같은 곳도 아니었고.

눈앞의 존재는 그저 외형만 인자할 뿐.

"이렇게 성좌를 직접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요."

"호오. 마치 본좌를 아는 듯한 말투로구먼?"

"모를 수 없죠. 이곳으로 오기 전 연성한 것이 천마신공인걸요."

제우스와 함께 상위 서열 꼽히는 성좌.

'천마'라는 것을 말이다.

그것을 증명하듯.

"허헛! 그렇겠군. 내 괜한 것을 물었어. 자네 말이 맞네. 본좌가 바로 성좌 천마일세."

[지구인 최초로 성좌를 직접 대면하셨습니다.]

[업적 포인트 5,000점을 획득합니다.]

시스템은 업적 포인트를 무려 5,000점을 건네주었다.

이어.

[성좌 천마는 매우 위험한 존재입니다.]

[저희 측에서 최선을 다해 플레이어의 안전을 위해 노력하겠지만, 그를 향한 섣부른 자극은 자제를 당부드립니다.]

[돌발 상황 발생 시, 플레이어 김시문은 즉시 지구로 역소환됩니다.]

긴장이 절로 들게 만드는 문구들이 줄지어 이어졌다.

'시스템이 경고를 할 수준이라....'

시문은 살짝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오! 이 망할 영감탱이가 또!'

'X! 쉬운 미션 좀 주면 어디 덧나냐? 앙!'

'이 미친 변태 영감이 진짜!'

이미 고말숙을 통해 성좌 천마란 존재가 어떤 자인지 어렴풋이 알고 있었으니까.

메시지를 받은 건 시문만이 아니었던 걸까?

"쯧쯧. 어지간히들 X랄이군."

인자한 인상과 달리, 너무나 자연스레 배어 나오는 욕설.

천마는 귀찮음이 가득한 손짓으로 허공을 휘휘 저었다.

아마 시스템 측에서 한창 경고를 날리는 모양이었다.

'그 스승의 그 제자구나.'

순간 고말숙의 모습이 겹쳐 보인 시문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절 부른 이유는 천마신공 때문이겠군요."

"허헛. 단도직입적인 친구로군."

천마가 당돌하고 단도직입적인 걸 선호하는 건, 이미 전생의 고말숙에게 들은 상태.

역시나 잘 먹힌 것인지.

"답답하지 않아서 좋군. 그래, 젊은이라면 무릇 패기가 있어야 하지. 하나 잘못 짚었네."

천마는 만족스러운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인전승이 원칙이긴 하나, 천마신공은 큰 문제가 아니라네. 내 관심은 다른 부분에 있지."

부드럽고 인자한 얼굴로 말을 이어 가는 천마.

하나 그 인자함 사이로 비치는 눈빛은.

"자네, 대체 정체가 뭔가?"

혼이 시릴 정도로 섬뜩했다.

제17화

17화. 마기 (2)

"무슨 뜻인지요?"

"말 그대로일세."

성좌라는 것을 증명하듯.

범상치 않은 눈빛으로 지그시 바라보는 천마.

그에 시문은 지지 않고 무덤덤한 얼굴을 고수했으나, 속은 그렇지 않았다.

'설마 회귀 여부를 묻는 것일까?'

상위 서열의 성좌이니 회귀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제우스와 검은 염소는 회귀를 전혀 모르는 눈치였는데.'

검은 염소의 서열은 모르겠으나, 제우스는 분명 상위 서열의 성좌였다.

한데 그가 묻지도 않았던 부분을 천마가 묻다니?

시문의 고민은 길게 가지 않았다.

"감히 본좌 앞에서 시침을 떼는 겐가? 허헛! 그저 맹하지만은 않다는 거군."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천마는 이미 시문의 대답을 확정 지은 느낌이었다.

"자네, 본좌를 얼마나 아는가?"

뜬금없는 천마의 물음에 시문의 머릿속엔 온갖 정보들이 떠올랐다.

주로.

'변태 영감, 망할 영감탱이, 미친 새끼, 강자충....'

전생의 고말숙이 내뱉었던 이미지들이 대표적이었다.

물론 머릿속에 있는 것을 그대로 내뱉는 우는 범하지 않았다.

"패도(覇道)를 추구하고 마계처럼 강자존을 선호하는 성좌,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젊은 친구가 참으로 똑똑하이. 제대로 봤네."

시문의 대답에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천마.

하나 잔주름 사이로 비치는 눈빛은 그렇지 않았다.

"본좌는 성좌라는 존재가 되기 이전부터, 끊임없이 힘을 추구하며 패도의 길을 걸었다네."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속을 비집고, 전신을 바짝 얼어붙게 만드는 형형한 천마의 눈빛.

'저 눈빛은....'

이는 이전에도 한 번 경험해 본 적이 있는 눈빛이었다.

'그래. 전생에 본 그 거대 눈알이랑 비슷한 느낌이야.'

그 말은 전생에 본 그 거대 눈알도 최소 천마급의 성좌라는 거겠지

형형한 천마의 시선은 정자 옆.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 자연경관을 향했다.

그러자.

"헛!"

꾸준히 포커페이스를 유지해 오던 시문이 저도 모르게 헛숨을 내쉬었다.

그럴 수밖에.

절경이란 단어가 어울리던 그 풍경은 어디로 갔는지.

스아아아아!

꼭 별 한 점 없는 우주에 홀로 유기되어 버린 것처럼.

시커먼 어둠만이 정자 밖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마치... 끝을 모르는 어디론가 가라앉는 느낌이다.'

그래.

꼭 심연에 빠져드는 것처럼 말이다.

근데 어째서일까?

'전혀 무섭지 않아.'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분명 대경실색을 했을 텐데.

시문은 풍경이 달라졌다는 사실에 놀랐을 뿐.

그 이상의 어떤 감정도 들지 않았다.

도리어.

'뭔가 친숙해.'

알 수 없는 안락함이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그때.

"역시, 그의 흔적을 지닌 자답군. 필멸자가 공허를 보고도 이토록 의연하다니."

천마의 목소리가 시문의 귓가로 파고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처음 보았던 현숙한 눈으로 돌아와 있는 천마가 보였다.

"이래도 모르는 체할 셈인가?"

다 알고 있다는 듯.

능글맞은 웃음을 띠는 천마.

그에 시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제가 지닌 칭호 때문인가 보군요."

"칭호?"

"예. [저편의 시선을 받는 자]라고, 제가 얻은 칭호가 하나 있거든요."

그 말에.

"크하하하하핫!!"

쿠르르르르.

터져 나오는 천마의 대소와 함께 세상이 흔들렸다.

흡사 재앙이라 부를 수 있을 현상이었지만.

시문은 침착한 눈빛으로 천마를 바라볼 뿐이었다.

"저편, 저편이라... 그래, 그라면 스스로를 한 차원으로 표현할 만하지! 크핫!"

이윽고 그의 웃음이 잦아들고.

천마는 한껏 가라앉은 얼굴로 앞에 놓여 있던 잔을 비웠다.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던 시문은 말했다.

"그 저편이라는 존재와 만나 본 적이 있으시군요."

천마의 움직임이 뚝 멈춘다.

이내.

주름진 천마의 입가가 빙그레 호선을 그렸다.

"그렇다네."

"아마 지셨을 테고요?"

"허허! 이 친구, 참으로 당돌하구먼."

오싹.

정체 모를 기운이 시문의 등허리를 타고 전신으로 흘러들었다.

그게 천마의 살기임을 눈치채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나 시문은 겁을 먹지 않았다.

이미 천마의 성격은 알고 있을뿐더러.

'내게 문제가 생긴다면, 검은 염소가 가만있지 않을 테니까.'

이렇게 저편의 공허를 직접 마주해 보니 알겠다.

만약 여기서 자신에게 위협이 생기면.

저편이라는 차원의 성좌인 검은 염소가 즉시 손을 쓰리라는 것을.

어떻게 확신하냐고?

-후후....

천마가 만들어 낸 저 시커먼 심연 속에선.

검은 염소로 추정되는 존재의 의미심장한 웃음소리와 끈적한 시선이 느껴졌으니까.

'고로 난 안전해.'

그 덕에 시문은 천마의 살기에 작은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고.

"크핫! 역시 그의 시선을 받을 만하구먼! 저 미친년이 관심을 보이는 것도 이제야 납득이 가."

그것이 마음에 들었는지.

천마는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곤 잔을 마저 비웠다.

그러곤 씁쓸하게 시인했다.

"그래, 자네의 말 그대로일세. 본좌는 그에게 패배했다네. 그것도 꽤 무참히 말이지."

갤럭시 아레나.

혹은 천마를 제대로 알고 있는 존재라면 모두 눈을 부릅떴을 말.

하지만 안타깝게도 시문은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기에.

"그랬군요."

그저 덤덤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 모습이 더욱 마음에 든 것일까.

"해서 더더욱 흥미가 생기는구먼. 자네의 어떤 면이 그의 관심을 끌었는지 말일세."

천마는 진득한 미소를 머금으며 시문을 바라봤다.

"사실 자네 앞이니 하는 말이네만, 본좌가 그의 시선을 끄는 데만 자그마치 천 년이 걸렸거든."

"...처, 천 년이요?"

"그렇다네."

천 년이라는 세월을 쉽게 이야기하는 천마.

"그러고 보니 필멸자인 자네는 아예 모르겠군. 그 존재는 말일세...."

그는 뭐라 더 이야기를 이어 가려 했으나.

"거참! 잡것들이 시끄럽군."

갤럭시 아레나 측의 언질이 있는 것일까?

천마는 허공으로 손을 휙휙 저었다.

이내 허공을 몇 번 더 노려보고는.

"알았네, 알았어! 쯧. 연자여, 안타깝게도 이번 만남은 이쯤 해야겠구먼."

"예. 근데 연자라니요?"

"자네는 천마신공을 잇지 않았는가? 그럼 나의 연자나 다름없지."

그 말에 시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천마의 선택을 받고 무공을 사사받은 것은 아니니.

제자가 아닌 연자라는 위치는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럼 앞서 말씀하신 것처럼...."

"물론이네. 본좌는 자네가 천마신공을 익히는 데에 어떤 불만도 없다네. 오히려 환영이지. 그의 관심을 받는 자가 내 진전을 이어 주니 말일세."

흐뭇하게 웃는 천마.

"하나 자네는 내 제자가 아니지. 해서 내 부탁 하나 함세."

[성좌 천마가 퀘스트를 의뢰합니다]

[퀘스트창이 활성화됩니다.]

메시지창을 확인한 시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퀘스트라고?!'

성좌나 시청자들이 거는 미션과 달리, 갤럭시 아레나에서 직접적으로 걸어 오는 임무.

보상 역시 일반적인 범주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기에.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퀘스트를 받으려고 안달이 나 있었다.

시문은 서둘러 퀘스트창을 확인했다.

[제자를 찾아라]

-성좌 천마가 후원할 만한 인재를 찾아 주십시오.

보상 : 업적 포인트 5,000, 천마신공 2성

"이건!"

"어떤가? 이 잡것들이 제안하는 양식으로 맞춰 봤네만."

내용을 확인한 시문의 눈이 부릅떠졌다.

단출한 내용에 지극히 효율적인 보상.

하나 그것을 논하기 이전에.

'성자가 후원할 만한 인재라고?'

자신 때문에 고말숙의 미래가 달라질까 덜컥 걱정이 든 것이다.

그런 시문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마는 조건들을 늘어놓았다.

"자네는 그의 관심을 받는 인물이니, 안목 역시 남다를 거라 믿네. 그러나 몇 가지 조건은 충족해 주었으면 하는구먼."

"조건이요?"

"그렇다네. 사내는 자네가 있으니, 이왕이면 여인이었으면 좋겠어."

"예?"

다행히도.

"또 젊어야 해. 자네보다 어린 나이가 좋겠지. 미색은 뛰어나야 하고, 성격은 당돌함을 넘어 좀 괄괄해도 좋겠네. 천마신공은 저돌적인 무공이니 말일세."

"저기 잠시...."

"당연히 팔다리는 시원시원하게 길어야겠지. 아! 본좌는 피부가 뽀얀 편이 좋다네."

"처, 천마 님?"

"있어 보게! 제자란 무인에게 아주 중요한 사안이니! 거기에다 흉부와 둔부는 크고 허리는...."

정, 말, 다행히도.

천마가 될 고말숙의 미래는 큰 변함이 없어 보였다.

* * *

"후아, 진이 다 빠지네."

'천마신공을 익힐 후계자의 조건' 이라 쓰고.

'천마의 개인 취향'으로 읽는 조건을 쭉 듣고 돌아온 시문은 침대 위로 몸을 축 늘어뜨렸다.

피곤함이 잔뜩 밀려들었지만.

'그래도 다행이야.'

시문의 입가는 작은 호선을 그렸다.

'말숙이의 미래는 달라지지 않겠구나.'

어차피 천마의 후원을 받을 운명이겠지만.

이제 천마의 후계자를 오직 시문만이 정할 수 있게 되었으니.

혹시 모를 나비 효과는 아예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고 보니, 말숙이 녀석. 플레이어가 되기 전엔 부산에 살았다고 했었지?'

1레벨 연금술사인 자신과 교류하던 몇 안 되던 지인.

자신과 정반대의 성격이었던 그녀를 떠올리자, 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때.

-오빠아아악!!

"으, 응?"

가슴에서 강렬한 이명이 찌르르 울렸다.

-괜찮아? 정신 차린 거 맞아?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가 왕왕 울려온다.

현자의 돌이었다.

"아, 미안해. 잠시 딴생각에 빠져서."

-정말이지!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왜 갑자기 기절한 건데?

"기절? 아! 그게 말이지, 변...."

변태 영감을 만나고 왔어.

라는 말을 가까스로 삼킨 시문은 숨을 고르곤 답했다.

"성좌를 만나고 왔어."

-성좌? 정규 아레나도 아닐 텐데 어떻게 성좌를 만나? 잠깐. 설마... 천마를 만난 거야?

"어? 아는 눈치다?"

-알지! 힘밖에 모르는 개또라이 성좌로 유명하잖아.

현자의 돌은 잔뜩 흥분해 말을 이었다.

-거기에다 색은 또 오지게 밝히잖아. 그 명언 몰라? 사내든 여인이든 맛만 좋으면 그뿐이랴!

"뭐, 뭣?!"

시문의 숨이 절로 멈춘다.

신선처럼 인자하던 그 외형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으니까.

-오빠 혹시 천마한테 뭔 짓 당하고 온 건 아니지?

"아니. 전혀 그런 건 없었어."

-다행이네. 애당초 그 사이코를 만나고 멀쩡히 돌아온 게 행운이야. 장담하는데 오빠가 존못이었으면 즉시 죽여버렸을 걸?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워진다면 착각일까?

시문은 이마에 손등을 척 올리곤 잠시간의 침묵에 빠졌다.

-여하튼 그 색마가 곱게 보내 준 거면 오빠한테 호의는 있나 보네. 천마신공 익혔다고 X랄 안 하고?

"그러진 않았어. 오히려 익혀 줘서 좋다고 하던데."

-소문대로 미친놈이네. 뭐, 우리야 좋지.

그렇게 답한 현자의 돌은 말을 이었다.

-그럼 빨리 영약이나 만들자. 이제 마기 다룰 기술도 있겠다, 언능 마기 획득해야지.

"그러자."

시문은 곧장 몸을 일으켜 세팅해 둔 작업 테이블로 다가갔다.

그 위론 아까 올려 둔 재료들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바로 시작할게."

-웅웅! 레시피는 따로 안 알려 줘도 되는 거지?

"물론."

홉고블린의 혈청은 전생부터 수도 없이 다뤄 본 재료다.

시문은 익숙하게 혈청을 정제하고, 부가 재료들의 손질을 시작했다.

물론.

-아아! 들려? 독기를 제거할 때마다 혈청이 비명을 지르고 있어. 날 어떻게 할 셈이냐! 면서 말이야.

-오호홋! 독기가 아주 쏙 빠졌네? 앙칼지던 모습이 어디 갔는지 몰라?

-어머나~ 벌써 항복이야? 너무 싱거운데. 더 버텨 줄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지.

가슴에서 쉴 새 없이 울리는 의미 모를 말은 말끔히 무시했다.

이내.

"됐다."

검녹색의 슬라임과 같이 탱글탱글한 질감의 무언가가 테이블 위로 자리했다.

-어라? 포션이 아니라 환단이네?

"준비한 용기가 없어서 액체 형태는 힘들어."

-하긴, 마기를 베이스로 만들었으니까.

영약은 그 원료와 중점이 되는 효능에 따라 형태가 달라진다.

지금처럼 환단의 경우.

기운의 소실이 적어 대다수의 영약이 제조될 때 취하는 형태 중 하나였다.

액체류처럼 따로 전용 용기가 필요 없다는 장점은 덤이었고.

"그럼 상태 좀 볼까."

조심히 손바닥 위로 영약을 올린 시문은 정보창을 띄웠다.

[혈화단]

등급 : C

-복용 시 힘, 민첩, 체력 스탯이 영구적 2 상승.

-복용 시 높은 확률로 스탯 마기 획득.

특별한 피를 베이스로 만들어진 영약.

고수준의 연금술로 재료의 주 효능이 아닌, 잠식하고 있던 마기를 극대화했다.

"키야!"

탄성이 절로 나온다.

'내가 만들었지만 참 잘 만들었단 말이지.'

영약은 오랜만에 만들어 보는 거라 내심 긴장을 했는데.

이렇게 영구 스탯 상승 옵션을, 그것도 힘민체 전부에서 뽑아 낼 줄이야.

-재료가 구려서 C등급이긴 해도 옵션은 미쳤는데? 역시 울옵! 날 연성할 만하다니까!

탄복하는 현자의 돌.

연성을 위한 존재답게.

현자의 돌은 혈화단의 가치를 완벽히 파악하고 있었다.

-근데 자칫하면 마기를 얻기 힘들 수도 있겠는데? 확률이 100%는 아니잖아.

"일반적으론 그렇지."

혈청에 잠식된 마기량이 적어서일까.

영약의 옵션엔 확정적 마기 스탯 획득이 붙어 있지 않았으나.

크게 문제되지는 않았다.

"천마신공 1성의 구결은 이미 여기에 다 있잖아. 복용 후 운용만 잘하면 돼."

시문이 제 가슴을 톡톡 두드리자.

-아 참, 그랬지? 후후, 오빠 나만 믿어!

현자의 돌이 기분 좋은 고양이처럼 몸을 파르르 떨었다.

"녀석."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을 흘린 시문은 곧바로 영약을 삼켰다.

사르르.

살얼음처럼 입 속에서 녹아내리는 영약.

시문은 침까지 모아 가며 그것을 고스란히 삼켰고.

[영약의 효력으로 힘이 2 증가합니다.]

[영약의 효력으로 민첩이 2 증가합니다.]

[영약의 효력으로 체력이 2 증가합니다.]

기분 좋은 메시지들이 줄지어 떠올랐다.

하지만 시문은 긴장을 풀지 않고, 곧바로 가부좌를 틀었다.

현자의 돌이 천마신공의 구결을 완전히 이해했기 때문일까.

인체 연성을 사용했을 때처럼.

가부좌에서 이어지는 운기는 수년이나 익혀 온 듯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얼마 가지 않아.

'찾았다.'

시문은 내부에서 일렁이는 시커먼 기운을 포착했다.

마기였다.

하지만.

'이런! 벌써 소실되고 있잖아?'

영약 제조로 극대화가 되었음에도 서서히 옅어지고 있었다.

높은 확률이라는 옵션과 반대로.

마기 스탯을 얻지 못할 낮은 확률에 당첨된 것이다.

시문은 급히 천마신공의 구결로 옅어지는 마기를 붙잡고 외쳤다.

'현자의 돌!'

-알고 있어. 잡았다! 요놈!

곧바로 현자의 돌이 연성력을 운용해 그것을 낚아챘다.

정확히는 감싸 안았다고 해야겠지.

'높은 확률이라더니, 하마터면 그대로 날릴 뻔했군.'

마기의 소실이 멈췄음을 확인한 시문은 그것을 배꼽 아래, 단전의 위치로 보내려 했다.

'우선 단전부터 만들고 대주천을....'

-오빠, 잠깐만.

현자의 돌이 가로막지 않았다면 말이다.

-있잖아, 단전을 꼭 배꼽 아래에 만들어야 해?

제18화

18화. 마기 (3)

'왜 그래?'

운기 중이었기에 입을 열지 않고 의사를 전달하는 시문.

-말 그대로야. 단전을 꼭 배꼽 아래에 만들어야 해? 아니, 애초에 단전이라는 게 필요해?

잠시 할 말을 잃은 시문.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한 번도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 탓이었다.

-들어 봐. 결국 단전이라는 건 기를 효율적으로 저장, 사용하기 위한 일종의 응집체잖아?

'그렇지.'

-근데 뭐 하러 배꼽 아래로 가? 오빠는 이미 이 세상 최고의 응집체를 가지고 있잖아.

그게 뭔데?

라는 멍청한 질문은 하지 않았다.

신화급 무기 연성부터 지식의 흡수까지.

현자의 돌은 최고의 응집체라 부르기 손색이 없었으니까.

'확실히, 현자의 돌 널 단전으로 삼아도 상관없겠네.'

오히려 더 좋을 것이다.

현자의 돌은 귀속되던 그때부터.

시문의 몸 전체에 뿌리를 내렸고, 융합된 옵시디언 태블릿 역시 그것을 사용 중이지 않은가?

'오히려 단전보다 낫겠어.'

-그렇지. 거기에다 천마신공을 익혔다 해도 오빠는 결국 연금술사잖아. 근본을 잊으면 안 돼.

그 말이 시문의 정신을 일깨웠다.

'그래. 난 연금술사지.'

갤럭시 아레나가 시작되고 전생부터 지금까지.

연금술은 여전히 천대받는 영역이었으나, 시문에게만큼은 아니었다.

'내 인생을 바꾼 건 연금술이다.'

회귀도, 마력불능도, 그리고 이 천마신공도.

결국 지금의 상황에 이르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연금술이었다.

그것을 깨닫자 정신이 한층 맑아지는 걸 느꼈다.

'고맙다. 덕분에 하나 깨달았어.'

-헤헤!

헤실거리는 녀석에게 속으로 웃어 준 시문은 다시 천마신공의 구결을 운용했다.

'그럼 부탁할게.'

-부탁할 것도 없어. 마기고 자시고, 이 몸에겐 한낱 조교 대상에 불과하다고?

자신 있게 답하는 현자의 돌.

피식 웃은 시문은 단전으로 향하던 마기를 가슴 중앙으로 이동시켰고.

-어쭈? 가만있지 못해?! 꼴에 마기라고 개기냐?

현자의 돌은 기다렸다는 듯.

주변으로 모여든 마기를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얼마 가지 않아.

[마기를 성공적으로 흡수하셨습니다.]

[특수 스탯 마기를 획득합니다.]

시스템이 마기 스탯이 획득되었음을 알려 왔고.

시문은 천마신공의 구결을 단전 대신 현자의 돌을 중심으로 운용했다.

[단전이 성공적으로 현자의 돌과 융합합니다.]

[현자의 돌의 영향으로 마기가 연성력에 귀속됩니다.]

'귀속되었다고?'

운기를 끝낸 시문은 곧장 상태창을 열었다.

[상태창]

칭호 : 연금술의 선구자 (외 2)

계통 : 마법계

레벨 : 7

소속 : 대한민국

힘 : 6

민첩 : 6

체력 : 7

연성력 : 17

-마기 : 8

잔여 스탯 : 0

보유 특성 – 현자의 돌 (E)

달라진 상태창.

힘민체는 영약의 영향으로 각 2씩 증가되어 있었다.

시문의 시선은 새로 추가된 마기 스탯을 향했다.

'이게 귀속된 스탯의 형태구나.'

귀속된 스탯을 보는 건 처음이었으나, 이해가 어렵진 않았다.

그때.

"음? 아니!"

시문의 눈이 부릅뜨인다.

그의 시선은 마기 옆의 숫자를 향했다.

"막 얻은 스탯인데 벌써 8이라고?!"

홉고블린의 혈청을 잠식한 마기가 많은 양도 아니었거늘.

질도 그리 좋지 않았다.

한데 8스탯이나 된다니?

시문은 이 현상의 원인을 대번에 깨달았다.

"그렇군. 귀속된다는 게 표기 위치만이 아니라...."

-맞아. 스탯에도 영향을 줘. 공생이 아닌 귀속 관계니까.

"그럼 저 8스탯은...."

시문의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갔다.

'현재 내 연성력은 17이니까, 마기 스탯이 8이라는 건....'

대충 연성력의 '절반' 정도.

"하."

계산을 끝낸 시문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그럴 수밖에.

'완전 초대박이다!'

사실 플레이어의 입장에서 새로운 스탯을 얻는 게 마냥 좋은 일은 아니었다.

'스탯 하나 올리기가 얼마나 힘든데!'

해당 스탯에 새로운 투자를 해 주어야 했으니까.

애당초 기본적인 스탯의 성장 자체가 무척이나 어려웠다.

별도의 수련이나 영약 섭취로 스탯 증가가 가능하다지만.

그조차 피땀 흘리는 수행과 내성을 보완하는 상위 영약이 받쳐 줘야 했다.

결국 가장 빠르게 스탯을 성장시키는 방법은 레벨업에서 얻는 잔여 스탯인데....

'그걸론 턱도 없이 부족하지.'

알다시피 레벨당 잔여 스탯은 1씩 주어진다.

괜히 시문이 업적 상점의 스탯 구매에 눈이 돈 것이 아니란 말이다.

한데 그런 스탯을 1, 2도 아니고.

'시작부터 무려 8이나 땡겨 버릴 줄... 잠깐.'

기쁨에 몸을 부르르 떨던 시문의 움직임이 뚝 멈춘다.

"저기, 현자의 돌?"

-응, 오빠. 왱?

이내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는 사람처럼 아주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연성력이 성장하면... 마기 스탯도 같이 오르는 거야?"

-당연하지! 내가 오빠의 성장에 영향을 받는 거랑 비슷하다 보면 돼. 결국 귀속 관계니까.

"아."

시문의 입가에 함박웃음이 어린다.

그것을 본 현자의 돌은 흐뭇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흐흐! 그래도 만능은 아니다? 반올림은 적용되지 않거든. 스탯은 무조건 짝수를 맞춰야 돼.

"그걸로도 충분해! 요 복덩아!"

-그렇게 좋아? 그럼 나 쓰다듬어 줘!

아주 죽도록 쓰다듬어 주마!

시문은 환희가 가득한 손짓으로 가슴 중앙을 마구 문질렀다.

'연성력만 올려도 마기가 복사가 된다고!'

당장 마기를 잔여 스탯으로 환산해도 8레벨의 가치를 지닌다.

7레벨인 자신이 15레벨은 되어야 얻을 수 있는 스탯이란 말이다.

심지어 계속 성장할수록 그 가치는 커질 터.

'이거 다음 아레나가 기대되는데?'

현 7레벨에서 8이라는 수치의 스탯은 어마어마한 효율을 가져온다.

"흐흐!"

시문은 절로 흘러나오는 감정을 숨기지 않았고.

-하아앙! 존잘의 손길에 마구 눌려져 버렷!!

그건 시문의 기쁨을 느낀 현자의 돌 역시 마찬가지였다.

* * *

[갤럭시 아레나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번 아레나의 종목은 '서바이벌'이고, 참가 인원은 100명입니다.]

[인원이 모두 보이면 아레나가 시작됩니다.]

눈앞으로 떠오르는 일련의 알림창들.

그것을 확인한 짧은 머리칼의 남성.

"아, 서바이벌이네. 짜증 나게."

스트리머 돈킹은 눈살을 찌푸렸다.

-어쩌겠음. 여긴 심해인걸.

-ㄹㅇ ㅋㅋㅋ. 괜히 심해 3종 세트라 불리겠음?

-그래도 1/3확률인데. 얜 뭐 큰손만 들어오면 이러냐? 운도 오지게 없네 ㅋㅋ.

시청자들의 반응 역시 돈킹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디펜스, 오펜스, 서바이벌.

브론즈, 실버 랭크는 물론.

본격적인 플레이어의 시작이라는 골드 랭크에서도 자주 매칭되는 종목들이다.

덕분에 사람들 사이에선 심해 3종 세트로 불렸다.

"어허, 여러분들. 발언 조심해 주세요. 서바이벌은 상위 랭크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종목입니다."

-맞지, 맞지. 오늘 심해의 큰손들을 모셨는데, 다들 발언 조심하라구!

-역시 돈 앞에선 장사 없네. 어젠 심해 3종을 그렇게 까더니 ㅋㅋㅋ.

-돈킹은 돈미새~~.

주르륵 올라오는 시청자들의 반응.

그러나 애당초 돈킹의 방송이 어떤지 알고 있는 시청자들이었기에.

채팅창은 적당한 선에서 농담만 오가는 형태를 이루었고, 이 이상 랭크를 비하하는 발언은 나오지 않았다.

'하여간에, 우리 시청자들은 뇌절을 안 해서 좋다니까.'

그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돈킹은 몸을 돌렸다.

"자. 그럼 손님들?"

그곳엔 돈킹과 달리.

"아시겠지만, 서바이벌 종목은 버스 운영에 가장 최악인 종목입니다."

다소 허술한 차림의 플레이어 셋이 자리하고 있었다.

"보시다시피 지금 우리 파티도 풀렸잖습니까?"

"뭐야? 진짜잖아?"

"이런 씨! 천만 원이나 냈는데! 이거 어쩔 거예요? 예?!"

손님으로 불린 플레이어 중 2명이 오만상을 찡그리며 짜증을 표출했다.

-손님들 뿔났누. ㅋㅋㅋ

-돈킹 어쩌냐. 환불각?

-ㄴㄴ. 환불을 왜 함? 애초에 종목은 랜덤이잖아. 그거 알고 버스 받는 거 아님?

-뭐래 병X이. 버스비 싸게 받은 것도 아니고. 천만 원이면 기존가 두 배가 넘는 돈임.

-왜 욕질임? 네가 돈 냈음?

분개하는 손님들의 반응에 다시 활발해지는 채팅창.

돈이 관련되어서일까?

채팅창은 순식간에 환불과 버스비 내용으로 불타올랐다.

당연히 방송을 확인하고 있던 손님들의 얼굴 역시 불안감으로 번져 갔다.

"자자, 다들 진정하세요. 손님분들도 채팅창 너무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돈킹은 서둘러 채팅창을 진정시키며, 불안해하는 손님들을 향해 차분히 말했다.

"어차피 서바이벌 보상은 등수별로 나뉩니다. 100인이니 최소 보상이 50등부터고 최고 보상이 1등이겠네요."

돈킹의 설명에 유일하게 침묵을 지켜 오던 중년의 손님이 입을 열었다.

"그 말은 우리를 1등부터 3등까지 만들어 주겠다는 건가?"

"제대로 보셨습니다! 역시 연륜이 있으시니 이해가 남다르시네요."

입에 침 한번 안 바른 장사꾼처럼.

돈킹은 비즈니스 미소를 한껏 머금고 답했다.

"저 돈킹, 버스비는 비싸지만 값어치는 확실히 합니다. 그건 여기 시청자분들도 인정하시죠."

-고럼. 얘가 돈미새라 그렇지 실력은 확실함.

-애당초 다이아 노리던 새끼가 심해 내려와서 노는데 실력이 부족할 수가 있음?

-버스 기사에 자부심을 느끼는 우리 돈킹! 참 대단해~.

중년의 손님 역시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자네의 실력을 알고 맡긴 거긴 하네. 다른 버스들과 클리어 확률부터 다르니까."

"하하! 이렇게 대놓고 금칠을 해 주시니 좀 쑥스럽네요."

사람 좋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는 돈킹.

그에 다른 손님들이 물었다.

"그럼 우리를 어떻게 1등부터 3등까지 만들어 준다는 거예요?"

"별거 없습니다. 티밍을 맺으면 되죠."

"티밍? 하지만 그러면 우리 평판만 나빠지잖아요."

"그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돈킹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일종의 동굴.

드문드문 횃불이 걸려 있긴 했으나 전체적으로 어두운 굴 형태의 지형이었고.

돈킹은 익숙하게 벽면을 짚으며 말했다.

"보아하니 폐광 맵 같은데, 뒤쪽에 잘 숨어만 계시면 티밍을 눈치채긴 어려울 겁니다."

"확실히 그렇겠군. 이 랭크대에 기척 감지가 뛰어나지도 않을 테고."

중년의 손님이 고개를 끄덕이자, 돈킹이 제 가슴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버스 방식은 간단합니다. 제가 싹 쓸어버리고, 딱 저희 4명만 남았을 때 깔끔하게 자살하겠습니다."

"그럼 우리 3명이서 등수를 결정지어라?"

"그렇죠. 다들 버스비는 균등하게 내셨으니, 등수까지는 제가 손댈 수 없지 않겠습니까?"

돈킹의 논리정연한 말에.

-키야! 우리 돈킹, 프로 정신 으마으마하쥬?

-맞는 말이긴 함. 버스비 다 똑같이 냈는데 등수를 돈킹이 정해 주면 안 되지.

-그럼 뭐야? 손님들끼리 싸우는 거야?

-ㄷㄷ 진짜들의 대결이잖아?

-그걸 못 보다니. 너무 아쉬운데 ㅋㅋㅋ.

-손님들! 갠방송 좀 열어 줘요! 꼭 보고 싶습니다!

채팅창이 다시 한번 범람했다.

이어.

파앗.

작은 빛과 함께 멀지 않은 곳에 한 남성이 나타났다.

그를 확인한 돈킹의 눈가가 호선을 그렸다.

"이야, 이거 운이 좋네요. 퍼킬을 날로 먹겠습니다."

-ㄹㅇ ㅋㅋ. 먹이가 대놓고 나타나네.

-심지어 갑빠랑 무기도 없네?

-쟨 개억울하겠다 ㅋㅋㅋ.

-잘 먹을게, 꺼~~~억!

돈킹의 미소와 함께 시청자들이 줄지어 안타까움을 표한다.

물론 버스 방송들의 흔한 채팅창들이 그렇듯.

안타까움을 가장한 조롱이 대부분이었다.

[참가 인원이 모두 매칭되었습니다.]

[지역은 '식어 버린 폐광'입니다.]

메시지창과 함께 지하 특유의 답답한 공기가 코 속으로 스며든다.

돈킹은 그 공기를 깊게 들이마시곤 말했다.

"후우. 그럼 손님분들? 뒤에 잘 숨어 계세요."

"알았어요."

"알겠네."

손님들은 재빨리 거리를 벌리곤 주변 엄폐물을 찾아 숨었다.

그들이 모두 숨었음을 확인한 돈킹은 주먹을 말아 쥐었다.

스륵.

마치 맞춤제작을 한 반지처럼.

검은색의 너클이 그의 양손을 부드럽게 감아 왔다.

'확실히 비싼 건 촉감부터 다르다니까.'

생활계 협회 측에 무려 8천만 원이나 주고 맞춤 제작한 너클.

그 값어치답게, 너클은 주먹을 쥐는 것만으로도 큰 만족감을 선사했다.

'이래서 내가 버스를 못 끊어.'

클리어 보상만 찔끔찔끔 받아 언제 이런 장비를 맞추겠는가?

그렇다고 거대 길드 밑에서 족쇄 차고 사는 것은 사절이었다.

[아레나를 시작합니다.]

[모든 적을 섬멸하십시오.]

아레나의 시작 알림이 뜨자.

사람 좋게 웃던 돈킹의 눈빛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그 눈이 향하는 곳은 당연히 멀지 않은 곳에 소환된 후드티의 남성.

"그럼...."

타앗.

순식간에 땅을 박차고 나아가는 돈킹.

어둑한 주변 폐광의 풍경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간다.

소리를 들었는지.

이제야 고개를 돌리는 회색 후드티의 얼굴에.

"잘 먹겠습니다!"

돈킹은 따끈따끈한 신상 너클을 쑤셔 박았다.

제19화

19화. 천마신공 (1)

[참가 인원이 모두 매칭되었습니다.]

[지역은 '식어 버린 폐광'입니다.]

익숙하게 떠오르는 시스템창들.

그러나 이어지는 시스템창은 그렇지 않았다.

[그간의 업적과 플레이어 김시문에게 측정된 MMR값으로 규정의 변화가 생깁니다.]

[이번 아레나를 기점으로 플레이어 김시문의 랭크 배치 구간을 종료합니다.]

'이건 또 뭐야?'

내용을 확인한 시문은 고개를 갸웃했다.

배치고사 구간을 이번 1판으로 끝내 버리겠다니?

통상적으로 5~10판 정도를 거쳐 랭크를 배정받는 걸 고려해 보면 무척이나 파격적인 처사였다.

'뭐, 그리 이상할 것도 없나.'

앞선 '그간의 업적과 측정된 MMR값'이라는 부분을 보면 이해 못 할 것도 없긴 했다.

어마어마한 연성 속도와 각종 신화급 무구들의 연성.

더불어 정규 아레나를 1레벨로 살아남은 경험까지.

스스로를 이렇게 평가하기 좀 낯 뜨겁지만.

이만하면 저랭크 구간에선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시문은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랭크를 부여하고 날 성장시킬 속셈인 거야.'

더 이상의 배치고사는 무의미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서둘러 적정 랭크대로 보내 버리고 싶다는 게 갤럭시 아레나 측의 입장이겠지.

'뭐, 나도 수준만 된다면 올라가고 싶긴 하니까.'

회귀 전까지 쭉 1레벨이었던 자신이다.

마력불능이 회복되고 강력한 능력까지 얻은 지금.

1명의 플레이어로서 더 위로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이리라.

"아 참, 방송 켜야지."

이번 아레나의 접속은 이유정이 건네준 성삼의 비공개 최신식 접속기기를 이용한 상태.

따라서 방송 기능의 활성화가 가능했기에.

시문은 옵션을 열어 방송 기능을 활성화했다.

"당장이야 시청자가 없겠지만...."

앞으로 계속 좋은 성적을 보인다면 시청자는 알아서 생겨나리라.

그럼 방송 관련 업적도 하나둘씩 클리어가 될 테니.

'업적 포인트도 짭짤하게 벌리겠지. 흐흐!'

그걸로 또 뭘 연성할까?

천마신공이나 옵시디언 태블릿의 뒤 내용?

아니면 새로운 연성물?

그렇게 행복한 고민을 하던 시문의 앞으로.

[성좌 제우스가 방송에 입장하였습니다.]

[성좌 검은 염소가 방송에 입장하였습니다.]

[성좌 천마가 방송에 입장하였습니다.]

믿기 힘든 알림들이 줄지어 올라왔다.

"어?"

가만히 눈을 끔뻑이는 시문.

'뭐야. 성좌가 방송에도 참여가 가능했어?'

회귀 전.

성좌의 후원을 받는 이들의 방송에도, 성좌가 나타났다는 소리는 들은 적이 없었다.

한데 성좌들이 방송에 입장하다니?

하나 그런 성좌들의 등장에 놀랄 틈도 없이.

"잘 먹겠습니다!"

먹방에서나 볼 법한 멘트와 함께.

후우우웅!

강렬한 파공음이 시문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 * *

'끝났군.'

사실 끝이니 뭐니 따질 것도 없었다.

잦은 패착으로 능력치 하락부터 온갖 페널티를 받긴 했으나.

결국 최대 스탯 10이 받는 90%와 100이 받는 90%의 페널티는 전혀 다르니까.

더불어 한때 다이아 랭크를 노리던 나름의 실력자 아니던가?

'이래서 양학이 꿀잼이라니까.'

그간의 노하우와 센스, 스킬과 아이템까지.

이 구간에선 어느 누구도 돈킹을 이길 수 없었다.

그래.

분명 그래야 했는데.

터억.

"음?"

생활계 협회에서 맞춤으로 제작한 너클.

그것을 부드럽게 잡아챈 후드티의 눈빛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 증거로.

"꽤 빠르네."

주먹을 막아 낸 후드티의 눈빛이 순식간에 날카로워진다.

그리고 돈킹이 뭐라 사태를 파악할 틈도 없이.

퉁.

명치로 파고드는 주먹에 돈킹의 육체는 허공을 날았다.

이내.

'이것 봐라? 심해 주제에 이걸 받아쳤어?'

주먹을 가볍게 피해 공중제비를 돌며 착지하는 돈킹.

그는 놀람 반, 흥미 반이 섞인 눈으로 회색 후드티의 남자.

시문을 바라봤다.

"여러분. 저 사람 제법인데요?"

-??

-방금 뭐임? 맨몸으로 기습을 막고 카운터까지 박은 거임?

-에이, 돈킹 이 새끼 또 방송각 잡으려고 기를 쓰지!

-뭐래. '잘 먹겠습니다'는 돈킹의 킬 전용 대산데.

-그러게. 방금 진심 펀치 아니었냐?

순식간에 물음표로 도배되는 채팅창.

돈킹은 가볍게 목을 꺾으며 말했다.

"그렇게 안 보이는데, 좀 치는 분이시네요?"

그에 시문은 말없이 돈킹을.

정확히는 돈킹의 명치를 바라봤다.

'그 찰나에 흘리기를 했다고?'

일순 타격 부위를 움직여 피해를 최소화하는 고급 기술 '흘리기.'

착용한 장비를 보아 하니 격투가 쪽인 거 같은데.

아무리 몸을 쓰는 데 특화된 격투가라 해도.

반격을 받는 시점에서 저렇게 흘리기는 어려웠다.

'그것도 특성의 도움이 아니라, 순수 실력으로 피한 거야.'

이 구간은 엄연한 배치고사.

흔히들 말하는 심해 구간이 아닌가?

방금의 흘리기는 특성만으로 이루어 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거기에다 착용한 장비들도 범상치 않고....'

시문의 시선이 빠르게 돈킹을 훑는다.

이내.

-오빠? 뒤쪽에 사람이 더 있어.

'그래, 나도 방금 느꼈어.'

시문의 시선은 돈킹의 너머를 향했다.

영약으로 힘민체가 2씩 증가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8이나 되는 마기 스탯과 천마신공을 얻었기 때문일까?

시문은 돈킹의 뒤편에 숨어 있는 세 사람의 기척을 느꼈다.

'저 사람의 기습은 가까이 올 때까지 눈치 못 챘는데.'

은신하고 있는 세 사람의 기척은 손쉽게 잡힌다.

이는 기습자와 숨어 있는 자들의 실력 차이가 상당하다는 뜻.

아울러.

"걱정 마시라니까. 아무리 심해라도 올라갈 사람은 있는 거죠. 저분은 올라갈 사람으로 보이네요."

기습이 실패했음에도 조금의 당황도 없이.

아주 여유롭게 허공을 보며 소통하는 모습까지.

'대충 견적이 잡히는군.'

시문의 눈빛이 서늘해진다.

시문은 돈킹의 뒤편을 흘낏하곤 말했다.

"당신, 버스 기사구나?"

"오오, 그건 또 어떻게 아셨대?"

"척 보면 알지."

"대단하시네요. 근데... 어째 말이 좀 짧으시다?"

"돈 받고 버스나 태우는 인간을, 존대라도 해 줘야 하나?"

버스 기사.

고의적인 패배 작업으로 함께 매칭된 플레이어들에게 피해를 주고.

그렇게 낮아진 MMR로 하위 랭크에 내려와 돈을 받고 손님의 랭크를 올려 주는 족속들.

이들은 시문이 가장 혐오하는 플레이어들 중 하나였다.

왜냐하면.

'정규 아레나 때 저놈들 때문에 상당수의 플레이어가 죽었지.'

본인 실력도 아니면서 버스를 타고 랭크를 올린 플레이어들.

소위 말하는 '손님'들 때문이었다.

당연했다.

버스를 받고 올라온 플레이어가 해당 랭크대에서 1인분의 가치를 하기란 불가능했고.

모든 것이 현실이 되어 버리는 정규 아레나에선 여과 없이 걸러졌다.

문제는.

'저 혼자만 죽는 게 아니라는 거지.'

특히나 협력 조건, 또는 협력을 요구하는 던전이나 레이드형 아레나가 걸린다면?

함께 매칭된 플레이어들 모두가 몰살이다.

버스로 랭크를 올린 플레이어들 때문에 멀쩡한 플레이어들까지 목숨을 잃는 것이다.

물론 돈까지 내 가며 버스를 타는 손님 쪽도 문제였지만.

'기사가 더 문제야.'

일종의 마약 중독자와 마약 공급자의 차이랄까?

시문의 눈엔 버스를 운영하는 기사들이 더 악질로 보였다.

그 곱지 않은 눈초리에.

"이야! 역시 심해는 패기가 남다르네요. 제가 버스 기사인 걸 알면서도 이런 태도라니."

-ㅋㅋㅋㅋ 그냥 미친 거지 뭐.

-유인원 수준의 능지로 사태 파악이 되겠음?

"어허, '유인원 수준의 능지'라니요. 말들이 심하시네. 그냥 올라갈 사람인 거죠. 하핫!"

돈킹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과장된 제스처를 취했다.

사람 좋게 웃으며 굳이 채팅창의 비하 발언을 되짚기까지.

의도는 뻔했다.

'자, 빡치지? 들어와라.'

도발.

돈킹은 방금의 반격으로 시문이 평범한 심해 플레이어가 아니라는 걸 파악한 것이다.

하나 아레나는 외적인 요소로만 승부가 갈리지 않았다.

'정면으로 붙어도 지지야 않겠지만, 확실한 게 좋으니까.'

멘탈을 건드려 상대의 페이스를 흔드는 것 또한 실력.

더불어 감히 심해 새끼 주제에 자신의 기습을 반격한 수모를 그대로 갚아 줘야 했다.

하지만.

"하위 매칭으로 들어와 놓고 뻔한 도발까지 하다니...."

돈킹의 의도를 파악한 것일까?

시문은 헛웃음을 흘리며 다가갔다.

"너무 저급하게 노는데?"

"하! 그렇습니까? 그런데 말하는 것치곤...."

다가오는 시문을 보며, 돈킹의 미소는 한결 짙어졌다.

"잘 먹힌 거 같은데요? 혹시 빡치셨습니까?"

"아아, 빡친 건 아니고."

걸음을 멈추지 않고 돈킹을 향해 여유롭게 걸어가는 시문.

"내 귀한 시청자께서 방금 미션을 걸어 주셔서, 뒤로 빼기가 좀 그렇네?"

"푸하하핫!"

시문이 발을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왔음에도.

돈킹은 대소를 터뜨렸다.

어쩔 수 없었다.

"이거 제가 대단한 분을 몰라봤네요. 이 랭크대에서 미션까지 다 받으시고."

브실골 방송에서 미션이라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소리였으니까.

-ㅋㅋㅋㅋㅋㅋㅋㅋ 존X 웃기네 ㅋㅋㅋ.

-아이고! 우리 돈킹은 미션도 없어서 어쩌나~.

-저런 애 잡는 데 미션 걸렸으면 돈킹 지금 재벌 됐엌ㅋㅋ.

돈킹과 함께 박장대소하는 채팅창.

그러나.

"그러게, 배치 구간에서 미션을 다 받네. 내가 좀...."

그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대단한가 봐!"

진각과 함께 주먹을 뻗어 오는 시문.

당연히 반격을 대기 중이던 돈킹은 곧장 시문의 주먹으로 팔을 뻗으며 엎어치기를 준비했으나.

파팍.

'무슨!'

돈킹의 눈이 부릅떠진다.

마치 질주하는 트럭을 맨손으로 잡아채려던 것처럼.

손목과 팔꿈치를 잡아 반격하려던 그의 양손을 그대로 뚫고.

빠악.

시문의 주먹이 가슴으로 틀어박힌 것이다.

쿠웅.

"컥!"

폐광의 벽면에 그대로 처박히는 돈킹.

벽면이 갈라지며 일어난 자욱한 흙먼지는 처박힌 돈킹을 완전히 파묻어 버렸다.

'좋아. 이번엔 제대로 들어갔네.'

시문은 손등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타격감에 미소를 지었다.

'왜 뻔한 도발까지 하나 했더니... 역시 반격을 노리던 거였어.'

그냥 흘리기를 시도했다면 이렇게 정타를 허용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뻔한 도발과 똑같은 반격으로 되돌려 주려다, 되레 정타를 맞은 것이다.

'역시 버스 돌리는 걸 방송까지 하는 애들의 심리는 너무 뻔해.'

소위 말하는 양민 학살을 일삼으면서 실력 있는 척 허세를 부리는 것들.

눈앞의 저 버스 기사도 그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세상에!"

"도, 돈킹 님!"

뒤편에서 당황스러운 목소리들이 울린다.

은신해 있던 손님들이었다.

그들에겐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시문은 다시 전투태세를 갖췄다.

아무리 인체 연성과 천마신공을 운용한 주먹에 맞았다 해도.

'버스 기사에 저 정도 장비면 이 정도로 뻗을 리는 없지.'

그것을 증명하듯.

"이 망할 새끼가!"

자욱한 흙먼지를 가르고.

욕설과 함께 돌려차기로 날아드는 돈킹.

"뒈져!!"

쐐애애액!

버스를 운영하는 기사답게 발차기에서 흘러나오는 파공음은 가히 범상치 않았다.

하나.

그것을 묵묵히 응시하며.

시문은 아까와 같이 현자의 돌에서 기운을 끌어올렸다.

스으으.

저돌적인 흑색 기운이 시문의 회로를 타고 오른손으로 뻗어 간다.

'마는 곧 패도이고....'

흡수한 천마신공의 구결에 따라.

저돌적인 마기는 시문의 주먹 끝에 도달했고.

우웅.

희미한 이명을 띠며 돈킹의 정강이와 마주했다.

그리하여.

우드득.

"끄아아아악!"

충격 흡수에 뛰어난 가죽 재질 방어구와 격투용 각반이 무색할 만큼.

썩은 나뭇가지처럼 꺾여 버리는 돈킹의 정강이.

그러나.

"빌어먹을 놈이!!"

버스 기사 짓은 괜히 하는 게 아닌지.

돈킹은 정강이가 꺾이는 고통 속에서도 몸을 비틀며 주먹을 내질렀다.

파앙.

돈킹이 내지르는 주먹에서 갑작스레 공기가 터진다.

주먹뿐만이 아니다.

파앙. 파앙!

그의 허리와 어깨, 팔꿈치까지.

주먹을 휘두르는 데 필요한 모든 부분에서 공기가 터지며, 회전력에 힘과 속도를 더했다.

시문은 단번에 그것의 정체를 깨달았다.

'A급 특성, 격발이군.'

순간적으로 기운을 격발시켜 힘과 속도를 더하는 특성.

전투계라면 전사나 암살자, 그리고 궁수까지.

그 어떤 직업과도 잘 어울리는 높은 티어의 특성이었다.

'그럼 아까 그 발차기도 격발을 이용한 거였구나.'

비록 천마신공이라는 절세의 무공 앞에 무너지긴 했으나.

방금의 발차기는 분명 이 구간대에서 구경할 위력이 아니긴 했다.

"뒈져라아아!!"

부아아아앙!

특성 격발의 도움으로 어마어마한 파공음과 함께 날아드는 주먹.

'원래라면 피하는 게 맞는 선택이지만....'

아무리 천마신공을 익히더라도 레벨과 스탯, 아이템의 차이를 메꿀 순 없다.

하지만.

'미션을 놓칠 순 없지.'

성좌 천마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시문은 회피 대신 손가락을 튕기는 걸 택했다.

따악.

꿈틀.

오른손부터 팔의 끝까지.

[오우거의 신체조직]이 연성된 근육이 요동친다.

후우웅.

돈킹의 주먹에 뒤지지 않는 속도로 뻗어 나가는 시문의 주먹.

그 속엔 천마신공의 구결에 따라 연성력의 정제를 거친 마기가 야생마처럼 질주했고.

천마신공(天魔神功).

격(擊) 패황쇄(覇皇碎).

천마신공의 초식이 돈킹의 주먹과 맞닿는 순간.

쿠르르르르르!

어둑한 폐광이 깊은 비명을 질렀다.

제20화

20화. 천마신공 (2)

"거짓...말!"

힘없이 떨리는 음성.

그도 그럴 것이 현 돈킹의 상태를 돌이켜 보면 말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소위 말하는 '교복' 수준에 들어가는 우월한 방어구.

특히나 충격 흡수에 뛰어난 효능을 보이는 가죽 재질임에도.

그의 가죽 갑옷은 태풍이라도 만난 것처럼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으니까.

더불어.

또옥.

종유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연상시키듯.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그의 오른손은 언급할 가치도 없었다.

무슨 수류탄이 맨손에서 터진 것처럼.

형체도 남김없이 사라졌으니까.

오로지.

-...미친!

-방금 그거 뭐임?

-순간 화면 다 일그러져서 하나도 못 봤는데?!

-나 저거 본 적 있음. 옛날에 돈킹 다이아 갈라고 빡겜할 때 쓰던 권기가 딱 저랬음.

-X랄 ㄴ. 돈킹도 스탯 딸려서 권기를 못 쓰는데. 심해 구간에서 권기를 어케씀?

-그럼 ㅅㅂ! 아이템이나 특성이라도 썼겠지! 넌 저게 뭔지 설명이나 가능함?

잠시의 침묵과 함께 불타는 채팅창만이 돈킹의 생존 소식을 알려 왔다.

물론 그것도 오래가진 못했다.

털썩.

방송의 주체인 돈킹이 쓰러지자, 방송 화면 역시 꺼져 버린 것이다.

그와 함께.

[퍼스트 블러드를 달성하셨습니다.]

[이번 아레나의 클리어 보상이 증가합니다.]

일련의 알림이 시문의 앞으로 떠올랐다.

* * *

'후. 초식 자체를 펼쳐 내는 건 아직 힘드네.'

감기 몸살에라도 걸린 기분이랄까.

전신이 축 처지는 피로감에 시문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때.

[성좌 천마가 패도적인 당신의 행보에 굉장한 만족감을 보입니다.]

[성좌 천마가 업적 포인트 500점을 후원합니다.]

성좌 천마의 후원이 시문의 앞으로 떠올랐다.

"미션도 모자라 이런 걸 다 주시고."

피로감이 싹 가시는 기분.

물론 영약 섭취로 7이나 되는 체력과 압도적인 연성력 회복 속도 덕분이긴 했지만.

정신적인 피로 회복도 무시 못 하지 않는가?

"천마 님이 걸어 주신 미션도 만족하실 수 있게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성좌 천마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입니다.]

시문은 흐뭇한 미소로 화답했다.

'상위 서열의 성좌라 그런가? 확실히 후하네.'

그러나 시문이 후원의 기쁨을 곱씹을 틈도 없이.

[상위 서열의 성좌 3명에게 후원받은 당신에게 갤럭시 아레나가 찬사를 보냅니다.]

[업적 보상으로 업적 포인트 1,000점을 획득합니다.]

[업적 보상으로 칭호 '왕들의 픽'을 획득합니다.]

잇따른 알림창이 시문의 앞으로 떠올랐다.

'엥? 이런 업적이 있었어?'

시문은 즉시 상태창을 열어 획득한 업적 포인트 1,000점을 확인하곤.

칭호란을 살폈다.

[왕들의 픽] - 갱신형

상위 서열 성좌들의 관심을 받는 당신.

그들의 관심이 늘어날수록, 당신의 미래도 커지리라.

-모든 능력치 +3

-상위 서열 성좌의 후원을 받을 때마다 옵션이 갱신된다.

등록된 성좌 : 제우스, 검은 염소, 천마

"미친...."

저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온다.

당연했다.

'갱신형 칭호라니?!'

갱신형 칭호.

성장형 칭호와 비슷하게 특정 조건을 만족하면 옵션이 달라지는 칭호였다.

그러나 '갱신형'이라는 말답게.

성장형 칭호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성장형은 옵션의 저하가 없지.'

말 그대로 '성장'을 하는 칭호이기에.

특정 상태이상이나 페널티를 받지 않는 이상, 옵션의 저하는 없었다.

하지만 갱신형 칭호는 달랐다.

조건에 따라 옵션이 낮아지기도 하는 칭호.

시문은 [왕들의 픽] 칭호의 정보를 세세히 살폈다.

'저거로군.'

시문의 시선이 한 곳에 고정되었다.

상위 서열 성좌의 후원을 받을 때마다 옵션이 갱신된다.

후원을 받을 때마다 모든 능력치가 +1씩 증가되는 사기 옵션.

하지만 반대로.

'후원하던 성좌들이 떨어져 나가면 그만큼 옵션도 내려가겠지.'

시문은 칭호란을 끄고, 상태창의 스탯을 살폈다.

레벨 : 7

소속 : 대한민국

힘 : 6 (+3)

민첩 : 6 (+3)

체력 : 7 (+3)

연성력 : 17 (+3)

-마기 : 10

잔여 스탯 : 0

"하... 미친 옵션이긴 하네."

힘, 민첩의 총 스탯은 9.

체력은 무려 10에 달하고 연성력은 20이다.

누가 이걸 7레벨의 상태창으로 보겠는가?

입을 헤 벌리던 시문은 마기를 보고선 입맛을 다셨다.

"쩝. 마기는 적용되지 않나 보네."

연성력에 귀속된 스탯이라서 그런 걸까?

8이었던 마기는 20이 된 연성력의 절반인 10으로 변해 있을 뿐.

추가로 [왕들의 픽]이 주는 +3의 옵션은 적용되지 않았다.

"좋게 생각하자. 그렇다고 마기 스탯이 아예 증가 안 한 것도 아니니까."

연성력의 증가로 마기 스탯 역시 2나 증가했으니.

아마 아까 사용했던 천마신공보다 위력이 더 강해질 터.

'왕들의 픽. 확실히 까다롭긴 해도 관리해 줄 맛이 나는 칭호야.'

올 스탯 증가 옵션은 분명 엄청난 옵션이다.

생각해 보라.

만약 순수하게 모든 스탯을 +3씩 올리려면 잔여 스탯만 총 12개가 필요하다.

이는 곧 열두 번의 레벨업이라는 뜻으로 직결된다.

헌데 고작 칭호 하나만으로.

시문은 +12레벨의 스탯 효율을 보는 것이다.

연성력에 비례로 상승하는 마기는 덤이고 말이다.

'성좌들이 얼마나 까다롭게 굴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미션 같은 건 최대한 받아줘야겠어.'

호응도 적절히 해 주고 말이다.

그렇게 생각을 마무리한 시문이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돈킹이... 진다고?"

"거, 거짓말이지?"

잔뜩 겁에 질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맞아, 저 사람들이 남아 있었지.'

돈킹의 손님들.

잠시 그들을 보던 시문은 주먹을 말아 쥐고 다가갔다.

"히, 히익!"

"오, 오지 마! 오면 찌를 거야!"

헛웃음이 절로 나오는 말.

실제로 벌벌 떨며 무기를 들어 올리는 손님들의 모습은 퍽이나 어이가 없었다.

'대체 튜토리얼은 어떻게... 아니지. 내가 특수 케이스이긴 했네.'

회귀 전엔 마력 10.

회귀 후엔 연성력 10.

1레벨이 지닐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스탯인 10짜리 스탯을 지니고 있었으니.

시문이 치렀던 튜토리얼은 일반적인 플레이어들의 것과 비교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었다.

그렇다곤 하나.

'이건 좀 심하잖아.'

배치고사는 끝낸 플레이어들 같은데.

"이익!"

"쏘, 쏠 수 있어! 나 정말 쏠 수 있어!"

달달 떨리는 검 끝과 화살촉은 대체 뭐란 말인가?

'이런 인간들 때문에 정규 아레나에서 멀쩡한 플레이어들이....'

아직 정규 아레나는 시작되지도 않았건만.

이 어처구니없는 행태는 보기만 해도 화가 솟구쳤다.

시문은 그런 감정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후웅.

[오우거의 신체조직]은 연성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마기를 담은 주먹을 휘두르기만 해도.

"끄악!"

"컥!"

검과 활을 든 두 손님은 허무하게 쓰러졌으니까.

지금 지닌 스탯만으로도.

버스만 타 온 이들을 처리하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뚜벅.

그렇게 두 손님이 쓰러졌지만.

시문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팔짱을 낀 채 묵묵히 이 상황을 보고 있는 마지막 손님.

중년의 플레이어가 남아 있는 것이다.

"자네는 강하군. 무척이나."

앞서 벌벌 떨던 두 손님과 달리, 어떤 동요도 보이지 않는 중년인.

그는 시문의 위아래를 무슨 상품을 보듯 훑었다.

"타고난 스탯도 우월해 보이고, 약자라고 봐주지 않는 것 또한 마음에 들어."

그 말에 시문은 어이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저기요, 뭔가 착각하고 있으신 거 같은데. 여기 아레납니다. 원래 약자를 봐주는 건 없어요."

"그렇지. 그래서 더욱 마음에 드는 거라네. 알다시피 우월한 스펙을 지니고도 활용 못 하는 이들이 많지 않은가?"

"그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정규 아레나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사실상 게임의 형태나 마찬가지.

따라서 아레나에서의 통증은 현실의 절반조차 되지 않았고.

그조차 접속기기를 통해 줄일 수 있는 게 현실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이 특유의 리얼리티 때문인지.

생명을 죽인다는 거부감에 아레나 자체를 참여하지 못하는 이들도 꽤 있었다.

재능에 비해 과한 스탯이나 특성을 받은 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시문은 뚜둑, 하며 손을 풀었다.

"혹여나 시간 끌 생각이라면 잘못 생각하셨습니다. 전 그쪽 살려 둘 마음이 없거든요."

"하하! 패기도 마음에 드는군. 당연한 말이네. 자네는 강자고 난 엄연한 약자 아닌가?"

중년인의 호탕한 웃음에 시문의 한쪽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이 사람, 대체 뭐지?'

저 태연한 모습에 직감적으로 느낀 것이다.

이 중년인은 단순히 쩔이나 받는 손님이 아니라고.

그것을 증명하듯.

"하지만 말일세, 세상은 무력만으로 돌아가진 않다네."

중년인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러곤 손바닥을 펴려다 잠시 주춤했다.

"그러고 보니 자네, 방송을 켠 거 같던데. 혹시 꺼줄 수 있겠나?"

"그럴 이유는 없습니다만...."

말끝을 흐린 시문은 잠시 채팅창을 훑었다.

방송을 켜고 꽤 시간이 지났음에도.

어떤 채팅도 올라와 있지 않았다.

당연했다.

시청자라곤 고작 3명 있는데 그들 모두가 상위 서열의 성좌이니까.

"신경 쓸 필요도 없습니다. 딱히 보는 사람도 없거든요."

"하핫! 역시 아까의 그 미션 이야기는 허세였나 보군."

"그건 허세 아닌데...."

"크하하! 이해한다네. 무릇 싸움이란 기세도 빼놓을 수 없는 노릇이지!"

무언가 단단히 오해를 한 모양새이지만.

시문은 굳이 중년인의 오해를 풀어 주지 않았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 궁금해진 탓이다.

그리고 그건.

"자. 여기 받게나."

중년인이 내민 한 조각의 종이를 보고 완전히 풀려 버렸다.

"이건?"

"내 명함일세."

[인사부 과장 후연룡]

그 옆으론 이름으로 추정되는 한자들이 쓰여 있었고.

아래론 전화번호와 이메일 등이 기재되어 있었다.

문제는.

'+86? 이거 중국 번호 아냐?'

언젠가 한번 메시지로 받아 본 적이 있는 번호.

뒷자리는 모두 기억하지 못하지만, 앞자리 +86은 외워질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대부분 스팸이나 보이스피싱 관련 번호였으니까.'

하지만 아레나 내에서 그딴 짓을 할 머저리는 없으니.

답은 하나였다.

"당신, 중국의 스카우터였군요?"

"호오, 거기까지 알아보다니. 머리도 꽤나 쓰는 친구로군."

더더욱 마음에 들어.

그렇게 읊조린 후연룡은 탐욕이 가득한 눈빛으로 시문을 바라봤다.

"본래라면 스트리머 돈킹에게 건넬 제안이었네. 고작 버스 기사 노릇만 하기엔 그의 재능이 너무나 아까웠거든."

"그럼 돈킹에게 주면 되지 않습니까."

"물론 그럴 생각이네. 그가 다시 방송을 켠다면 말이지."

빙긋.

비즈니스적인 미소를 베어 문 채, 명함을 흔드는 후연룡.

시문은 그런 후연룡의 명함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정확히는.

'이걸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명함 최상단에 위치한 익숙한 한자를 바라봤다.

'대륙성이라니.'

대륙성.

미국과 함께 세계의 투 탑을 달리는 중국 최대의 길드.

창왕 종리추가 길드 마스터로 오르면서 본격적으로 발돋움을 시작하는 길드이기에.

안 그래도 슬슬 움직일 것 같다고 생각은 했는데.

'인재 빼내기는 진즉부터 하고 있었나 보군.'

"의심되겠지. 이해한다네."

시문이 명함을 받지 않고 빤히 보는 것에 무언가 떠오른 걸까.

후연룡은 어색하지 않은 움직임으로 명함을 거두며 말했다.

"한국 내에서의 중국 이미지를 나도 모르진 않으니까."

"그러시겠죠. 귀화까지 해 가면서 한국 아레나 매칭을 돌렸을 테니까."

"하하! 어쩔 수 없지 않겠나? 글로벌 매칭은 플래티넘 랭크부터 가능하니 말일세."

어깨를 으쓱하는 후연룡.

그는 시문의 눈치를 슬쩍 살피며 물었다.

"혹여나 이렇게까지 스카우트 행위를 하는 내가 불편한가?"

"썩 좋지는 않지만, 불편한 정도는 아닙니다."

"호오? 그렇게 말하는 플레이어는 처음 보네만."

"세계적으로 벌어지는 아주 흔한 일이니까요."

사실 중국뿐만 아니라.

이미 2020년부터.

미국을 비롯한 여러 강대국들은 암암리에 타국의 플레이어들을 스카우트하고 있었다.

물론 간판 플레이어나 랭커급의 플레이어들은 스카우트가 굉장히 힘들었기에.

저랭크 존에 싹이 될 만한 존재들을 주로 노렸었다.

이 후연룡이라는 아저씨도 그런 부류의 스카우터겠지.

"흔한 일이라...."

후연룡의 한쪽 눈썹이 슬쩍 올라간다.

"자네는 단순히 무력만 뛰어난 것이 아니군."

시문에게 측정했던 가치가 더 올라간 것일까?

시문을 보던 후연룡의 눈빛이 한결 깊어졌다.

"어찌 알았나? 나처럼 귀화까지 해 가며 스카우트를 행하는 나라는 굉장히 적을 텐데."

"제가 그걸 그쪽에게 말할 이유는 없지 않을까요?"

"그도 그렇군."

한 번쯤 더 물어볼 법도 한데.

후연룡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이내.

"측정 가치를 더 높여야... 가용 가능한 조건은... 흠, 좋아. 이만하면 되겠군."

그는 잠시 턱을 괴며 중얼거리더니, 시문을 향해 손가락을 쫙 펼쳤다.

"뭐 하는 겁니까?"

"500만 위안."

후연룡은 자신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현 환율로 약 9억 2천에 달하는 돈이지. 바로 선지급하겠네."

"이보세요."

"잠깐. 아직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네."

후연룡은 어느새 손에 쥔 막대로 허공에 조건들을 줄줄 써 나갔다.

일종의 아티팩트인 건지.

"이는 그저 성의 표시에 지나지 않네. 우리 대륙성으로 가입만 한다면 추가금을 더 지불하지."

"한화로 5억 상당의 무기와 한 피스당 1억 이상의 방어구 역시 지급될 거네."

"계약 조건은 3년 갱신이네. 물론 계약이 끝나더라도 지급한 아이템은 자네의 소유라네."

허공에 쓰인 후연룡의 조건은 어둑한 폐광 속에서도 반짝거렸다.

"더불어 중국으로 귀화까지 선택한다면."

그는 한 번의 멈춤도 없이 허공에 조건들을 줄줄 써 나갔다.

"차후 선지급의 열 배인 5천만 위안을 추가로 지급하겠네. 한화로는 약 92억에 달하는 금액이지. 물론 자네의 활약에 따라 금액은 올라갈 수도 있다네."

그렇게 마침표를 찍으며 말을 끝맺은 후연룡은 자신감이 넘치는 얼굴로 시문을 직시했다.

'거절할 수 없겠지. 그 잘난 성삼도 저랭크 플레이어에게 이만한 조건을 내걸진 않으니.'

성삼 길드가 신입 길드원에겐 C~B급대의 장비를 지급한다는 건 이미 다 파악한 사실.

물론 그조차 어마어마한 투자였으나.

감히 대국의 자금력에 비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증거로.

'지금껏 한 번도 거절당한 적이 없던 제안이지.'

비록 국적을 바꾸는 일까진 자주 일어나지 않았으나.

그가 스카우트했던 이들 중 99%가 이 조건을 받아들이고 현재 대륙성의 이름으로 활동 중이었다.

또한 3년 계약이 만기된 플레이어들 중 대다수가 재계약을 했지.

'뭐, 당연한 결과지. 이런 소국에선 감히 상상도 못 할 조건이니까.'

결코 거부할 수 없을 거다.

그렇게 쐐기까지 박은 후연룡은 당연히.

"당장 결정하라는 것은 아니네. 해외 생활을 하는데 어떤 각오가 필요한지는 내 무척이나 잘 이해하니."

거두었던 명함을 다시 내밀었다.

그 모습에 헛웃음을 흘린 시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확실히 어마어마한 조건이긴 하네요."

"하하! 자네 같은 이들을 위해 특별히 신경을 많이 쓴 조건이라네. 어때? 구미가 당기지 않나?"

"예. 꽤 많이들 넘어갔겠어요."

"그렇다네. 사실 지금까지 접선한 이들 중 9할 이상이 조건을 받아들였지."

"음음, 그럴 만해요."

시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심해로 분류되는 저랭크만 노렸다면.

당연한 눈을 뒤집고 넘어갈 조건이다.

심지어 3년이라는 짧은 계약 기간에 족쇄가 되는 조건은 1도 없지 않은가?

귀화를 선택하지 않고 꿀만 쪽 빨아 먹고 와야지!

하고 넘어가는 이들이 많을 터였다.

하지만.

'난 대륙성의 방식을 잘 알지.'

아주 신물이 날 정도로 지긋지긋하게 잘 안다.

저런 식으로 넘어가, 점차 저도 모르게 놈들의 수작에 잡아먹히게 된다.

그 루트는 언론과 인터넷을 통한 매국노 프레임부터 이중 사기 계약.

또 극단적으론 약이나 정신계 능력을 통한 세뇌까지 무척이나 다양했다.

결정적으로.

'각성 전이면 모를까, 각성 후에 국가를 버리는 건 미친 짓이야.'

플레이어의 소속이 정해지는 시점이 바로 각성 당시의 국가라는 점이었다.

해외여행 와중에 각성을 해, 타국의 소속이 되어 버린 경우도 있는 마당에.

'귀화한다고 소속이 달라질 리 없지.'

미리 다른 나라로 귀화하더라도 결국 지구의 서류상 귀화이지.

갤럭시 아레나가 각성 시 정해 둔 소속은 변하지 않는다.

당장 상태창의 소속란만 보더라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귀화를 하는 이유는.

'해당 국가에 귀화하면, 그때부턴 매칭이 해당 국가로 잡히니까.'

당장 상태창의 소속 문구보단 현실적인 금액이 더 체감되니까.

좋은 조건이 오면 해당 국가로 귀화해버리는 것이다.

또 저 후연룡처럼 물밑 스카우트 작업도 있고 말이다.

'뭐, 이해는 가. 국가 소속을 잃었을 때 페널티는 겪어 본 적도 없을 테니까.'

소속을 잃은 패널티는 정규 아레나부터 시작되는 일이니까.

생각에 잠기는 시문.

이런 시문의 침묵이 망설임으로 보인 것일까?

"슬슬 받아 주지 않겠나? 이젠 나이도 있다 보니, 팔이 좀 아픈데 말일세."

후연룡은 명함을 내민 팔을 슬쩍 흔들었다.

"아, 죄송해요. 제가 생각에 빠지면 주변을 잘 못 봐서."

싱긋 웃은 시문은 후연룡이 내민 손을 마주 잡았다.

"근데 있잖아요, 후연룡 과장님."

그러곤 아주 자연스레.

스윽.

마주 잡은 후연룡의 손을 당겼고.

"명색의 인사부 과장이신데, 사람 보는 눈을 좀 키우셔야겠어요."

뻐억.

명치로 검은 기운에 휩싸인 주먹이 틀어박혔다.

"끄...!"

눈을 부릅뜬 채,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는 후연룡.

"어째...."

그의 핏발 선 눈엔 육체의 고통보다.

자신의 조건을 거절한 시문에 대한 의문으로 가득했다.

그에 시문은.

"아아, 별거 아니에요."

빠각!

미소를 유지한 채 또 한 번 명치로 주먹을 박아 넣을 따름이었다.

"조건이 마음에 안 들어서요. 거기에다...."

털썩.

명치가 함몰되어 쓰러지는 후연룡.

시문은 그가 들을 수 없는 뒷말을 읊조리며.

"너희가 어떤 놈들인지 몸소 겪어 봐서 너무 잘 알거든."

뚜벅.

어둑한 폐광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제21화

21화. 천마신공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