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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6 - 6

53화. 새 집

넓다.

과장 좀 보태면 광활하다.

복층의 구조는 기본이요, 큼직한 다수의 방과 욕실 그리고 루프톱 가든까지.

'과연 랭크팰리스답네.'

이 럭셔리 펜트하우스는 당장이라도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호화로웠다.

"그러니까."

더더욱 놀라운 것은.

"여기가 고작 40억이라고?"

이곳이 고작 40억밖에 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물론 이건 시문이 알아본 시세가 아니었다.

"응. 정확히는 41억이야."

"맞아요, 오라버니. 원래 매매할 계획이 없던 곳이라 싸게 나왔대요."

짜 맞춘 듯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는 김시혁과 이유정.

당장 두 사람의 사이를 따져 보더라도.

이만큼 서로 합이 맞는다는 것은 말이 되질 않았으나.

"혹시 여기에 방사능 피폭이 이루어졌다거나, 아웃브레이크에서 살아남은 고위 언데드가 숨어 있다거나, 뭐 그런 거야?"

시문에겐 이곳의 시세가 고작 40억.

아니지.

41억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 더 말이 되지 않는 상태였다.

또 마냥 의심할 수도 없는 것이.

"에이, 형. 농담도 잘해."

"그러게. 후후, 오라버닌 늘 재밌으세요."

이 시세의 정보는 실제 현 랭커팰리스의 거주자인 두 사람.

그것도 랭커팰리스 중에서도 가장 비싸고, 호화스러운 층에 사는 거주민들 아닌가?

"하...."

이마를 짚은 시문은 작게 헛숨을 쉬었다.

'그럼 진짜 여기가 41억이라고?'

김시혁과 이유정.

두 사람이 지닌 스펙과 배경만 보아도 의심 자체가 불가했거늘.

'왜 이렇게 믿기가 힘들지?'

시문은 좀처럼 두 동생의 말에 믿음이 가질 않았다.

단순히 그들과 친한 관계여서가 아니었다.

'전생의 시세긴 하지만, 내가 알기론 랭커팰리스의 시세는 분명 수백억 원대였는데....'

전생에서 뉴스 기사로나 보았던 랭커팰리스의 시세.

물론 아직 정규 아레나도 아니고, 다이아급 플레이어들이 그리 많지 않은 상태긴 하다지만.

그걸 다 고려하더라도 말이 되지 않는 시세이지 않나?

무엇보다.

'왜 하필 41억이야?'

시문이 의문을 가지는 것은 바로 이 부분이었다.

'이곳에 최소한의 가구들을 들여도 연금술 기구들을 들이려면 최소 4억, 5억은 넘어.'

물론 그것도 부족하겠지만 당장은 필요한 것들은 채울 수 있으리라.

한데 묘하지 않은가?

[김시문 : 형 말이 맞지? 덕분에 역배 거하게 땡겨 간다 ㅋㅋ.]

[김시문 : 46억 개꿀! 꺼억~!]

'왜 하필 내가 시혁이한테 자랑한 문자가 자꾸 떠오르는 걸까?'

집에 41억, 그 외의 내부 살림에 5억.

마치 위의 문자로 때려 맞힌 듯한 이 시세는 대체 뭐란 말인가?

미간에 골까지 파이며 깊이 고민하는 시문.

그 모습이 어딘가 불안했던 것일까.

"저... 형? 고민되면 아예 내 집에서 지내도 돼. 난 오히려 그편이 좋거든."

"맞아요. 또 그런 테러가 생기면 안 되잖아요. 이건 거주 이전에 안전의 문제니까 찬찬히 고민해 보세요, 오라버니."

김시혁과 이유정은 조금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이내.

"그래도 결정은 되도록 빨리하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이런 기회가 두 번 있을 거 같진 않아서...."

시문의 눈치를 보던 이유정은 한마디를 더 보탰다.

그 말이 결정타가 된 것일까.

"그래. 하자, 계약."

"정말이지?"

"잘 생각하셨어요. 오라버니!"

시문은 결국 매입을 결정했다.

물론.

"갑자기 41억에 나온 거부터 해서, 하필 이곳의 거주민이 딱! 너희 둘밖에 없는 곳인 것까지 이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마지막까지 의문을 표출하는 건 숨기지 않았다.

"그래도 이만한 집을 41억에 판다는데, 여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이런 매물은 바로바로 사야지."

"어... 맞아! 형, 그렇지!"

"...그, 그쵸! 있을 때 사야죠!"

현 랭커팰리스의 시세는 잘 몰랐지만.

이 랭커팰리스의 값이 수백억 원대로 날아오른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41억에서 수백억 원대로 뛰는 집이 있다?

'이건 못 참지.'

이걸 누가 참아.

* * *

이사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사실 이사란 말도 웃겼다.

'전부 다 박살이 났는데 이사는 무슨.'

제이스 클라크의 화려한 폭발쇼.

덕분에 없는 생활에 힘들게 모았던 생필품부터 옷, 가구까지.

모든 것이 한순간에 잿더미가 되어 버리지 않았나?

그래도 새집 살림을 채우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형! 입주 선물이야!"

"왠지 오라버니라면 매입하실 거 같아서 미리 준비했어요. 아! 괜찮으시면 가구 배치는 제가 해도 될까요?"

김시혁과 이유정.

두 동생 녀석들은 매입이 끝나자마자 가구들을 들여온 것이다.

가구뿐이던가?

"형이 뭘 좋아할지 몰라서 옷은 디자인별로 다 준비해 봤어. 나랑 사이즈가 비슷하잖아."

"잔은 이쪽, 냉장 보관이 필요 없는 식재료는 이쪽에 있어요. 여기 바는 와인이랑 양주나 수제 맥주를 가득 채워...."

"컴퓨터랑 트레이닝실은 다 최신식으로 세팅해 놨어."

"오라버니는 약건성이시니까 샤워할 때 이거, 끝나면 이거 바르세요. 그리고 얼굴은 스킨부터 앰플, 에센스에 바로 크림으로 넘어...."

먹는 것부터 입는 것, 쓰는 것, 씻는 것, 바르는 것까지.

정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살림을 죄다 들여다 놓았다.

'너무 한순간의 일이라 깜짝 놀랐었지.'

단 두 시간.

이 넓은 펜트하우스를 채우는 데 드는 시간이었다.

당연했다.

수십 명의 인부들이 우르르 몰려와, 마치 시뮬레이션이라도 돌려 본 것처럼.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가구와 살림을 세팅하고 가지 않았나?

특히나 먹는 것들을 아예 냉장고에 채워서 통째로 가져왔을 땐 조금 경악까지 했었다.

어쨌든 간에.

"캬하! 맛 죽이네. 비싸서 그런가?"

이사 당일에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이렇게 시원한 수제 맥주를 깔 수 있으니 그걸로 된 거 아닌가?

"한 잔 더 마실까."

시문이 어느새 밑바닥을 보이는 잔을 보며 바 쪽으로 움직이려던 그때.

-오빠, 그쯤만 마셔. 아까 애들이랑 혼자 술은 많이 안 마시기로 했잖아.

명랑한 목소리가 가슴속에서 울려 왔다.

현자의 돌이었다.

"내, 내가 그랬나?"

-응, 완전 그랬어. 나 다 들었거든?

"그래도 한 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오빠!

"알았다, 욘석아."

현자의 돌의 제지에 시문은 체념하고 빈 잔을 내려놓았다.

어지간히도 아쉬워 보이는 그 몸짓에 가슴속 현자의 돌이 살랑살랑 움직이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마치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것처럼 말이다.

-으이구! 그럴 거면 아까 애들이 집들이하자 할 때 하지 그랬어? 자기들이 요리도 해 주겠다던데.

"그건 안 돼. 받은 게 얼만데. 제대로 대접해야지."

그에 시문이 단호하게 고개를 젓자, 현자의 돌은 말을 이었다.

-헤에, 역시 모른 척해 준 거였구나?

"모를 수가 있겠냐."

피식 웃은 시문은 주변을 돌아봤다.

비록 집은 자신의 돈으로 사긴 했으나,

'정황을 보면 두 녀석들이 시세에 손을 썼을 게 분명하겠지.'

거기에다 이 펜트하우스에 걸맞은 살림까지.

"이만큼 해 줬는데 또 요리까지 시키는 건 선을 넘어도 한참 넘은 거지."

-근데 걔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할걸? 오히려 오빠가 이렇게 생각하는 걸 섭섭해할 거 같은데.

"그렇겠지. 워낙 착한 녀석들이니까. 그래도 아닌 건 아닌 거야."

두 사람보다 연장자의 입장이기도 하지만.

아무리 가족, 그에 준하는 사이라도 이만한 호의를 받고 대충 넘어가는 건 시문의 성격에 맞지 않았다.

"나중에 제대로 대접해야지."

-흐음. 오빠, 뭔가 단순히 식사만을 놓고 말하는 느낌은 아니다?

"역시 우리 복덩이는 눈치가 빠르다니까."

-헤헤! 내 눈치가 좀 쩔긴 해!

기분 좋게 웃는 현자의 돌.

-근데 뭘 해주게? 그 두 사람 보니까 그리 부족한 것도 없어 보이던데.

"잘 물어봤다. 네 말대로 우리 동생들이 워낙 잘나서 부족한 게 없긴 해. 근데...."

현자의 돌의 물음에 시문은 씨익 웃으며 곧장 걸음을 옮겼다.

"그렇다고 원하는 게 없는 건 또 아니거든."

이미 시혁이나 말숙이와 같은 하이랭커들과 부대끼며 살아 본 경험이 있기에.

그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도 잘 알고 있는 시문이었다.

유리로 이루어진 통로를 지나 여러 개의 방 중 하나의 문을 여는 시문.

으리으리하게 꾸며진 다른 방들과 달리, 이 방은 그저 널찍한 평수를 자랑할 뿐.

어떤 가구나 인테리어도 존재하지 않았다.

방 안을 본 현자의 돌이 말했다.

-여긴 연구실 만들기로 한 방이잖아?

"맞아."

다행히 재료의 대부분은 인벤토리에 보관하고 있어 손실이 없었지만.

나머지 연금술 도구들은 폭발 테러로 싹 날아가 버렸다.

특히나.

'영약 숙성기를 잃은 건 좀 아까웠지.'

업적 포인트가 들어간 영약 숙성기의 소실은 상당히 뼈아팠다.

그래도 새집도 샀겠다, 새로 출발하는 느낌으로 이 방은 연구실로 만들기 위해 비워 둔 것이다.

-아아, 이제 알겠다. 오빠, 그 애들한테 영약을 만들어 주려고 그러는 거구나?

"그래."

강자들이 원하는 게 뭘까?

이미 지난 생을 하이랭커들과 부대껴 온 시문은 잘 알고 있었다.

'힘이지.'

하이랭커들과 수많은 국가들이 그토록 원했던 건 다 힘이었고.

창왕 종리추 역시 힘을 갈구해서 그런 선택을 했을 터.

그리고 그들이 힘을 계속 추구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경지가 높을수록 작은 성장으로도 엄청나게 강해지지만... 그 작은 성장을 이루기가 무척이나 힘드니까.'

레벨업 자체가 더뎌지고.

깨달음까지 요구하는 게 최상위권의 현실.

결국 다른 이들과 격차를 내기 위해선 아이템이나 영약 쪽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는데.

'고등급의 귀한 영약들은 돈만으로 얻어지는 게 아니지.'

고레벨이 될수록 영약 역시 그에 준하는 등급으로 먹어 줘야 한다.

당연히 시중에 풀리는 고등급 영약은 제작보단 아레나 보상이 주류.

말 그대로 없어서 못 먹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다.

하지만.

'난 아냐.'

전생에서도 레벨만 1일 뿐.

연금술의 신화적인 산물인 엘릭서까지 연성했던 자신이다.

그때도 많은 최상위권 플레이어들이 고등급의 영약 의뢰를 해왔었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영약 레시피들을 난 다 알고 있으니까.'

물론 진귀한 재료들로 제작에 다소 어려움은 있겠으나, 적당한 수준의 영약은 만들어 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영약도 영약인데, 연구실이 완성되면 유정이한테 알려 줄 게 있거든."

-알려 줄 거?

시문은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모님, 그러니까 유정이 어머님이 많이 아프셔. 나처럼 아레나 질병 환자시거든."

-아!

현자의 돌의 탄식이 이어진다.

시문의 생각을 눈치챈 것이다.

-아레나 질병 치료제를 만들어 주려고 그러는구나?

"어. 당장은 힘들겠지만, 때가 되면 내가 아레나 질병 치료제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은 알려 주려고."

-좋네. 그러면 치료제에 들어갈 재료들도 쉽게 모을 수 있겠다. 유정이 걔 랭커잖아.

"그런 것도 있지."

일단 이모님의 병명부터 알아야겠지만.

'그 강하신 이모님이 혼수상태가 될 정도의 병이면, 지금의 내 수준으로 치료제를 만드는 건 무리야.'

아마 상위 플레이어로 나뉘는 플래티넘까지는 도달해야 가능할 것이다.

생각을 정리한 시문은 인벤토리를 열었다.

"일단 온 김에 만들 수 있는 도구들은 미리 만들자."

-응~! 전체적인 설계는 내가 할래! 완전 효율적인 동선으로 짜 줄게!

연구실을 만든다는 사실에 신이 난 현자의 돌.

"녀석."

그에 피식 웃은 시문이 목재를 비롯한 연성 재료들을 꺼내려던 찰나.

"아."

시문의 시선이 인벤토리 한 곳에 고정되었다.

'이걸 깜빡하고 있었네.'

머리를 긁적인 시문은 곧장 그것을 꺼냈다.

정체는 다름 아닌 저번에 마르넬과 만났던 아레나의 보상이었다.

[변질된 혈청]

등급 : F

억겁의 세월로 변해 버린 혈청.

파충류의 비늘을 연상시키는 독특한 유리병에 담긴 액체.

시문이 그 정보를 확인하자마자.

[성좌 제우스가 옥좌에서 벌떡 일어납니다.]

[성좌 검은 염소의 눈이 번들거립니다.]

[성좌 천마의 눈이 부릅떠집니다.]

[성좌 오딘의 천진난만하던 얼굴이 무섭도록 굳습니다.]

예기치 못한 메시지들이 우르르 솟아났다.

제54화

54화. 용족 (1)

갑작스러운 성좌들의 반응.

그에 시문은 다시 한번 보상 아이템의 정보를 훑었다.

[변질된 혈청]

등급 : F

억겁의 세월로 변해 버린 혈청.

여전히 볼품없는, 아주 흔한 F급 재료 아이템의 정보창.

그러나 성좌들의 반응까지 겪은 지금.

시문에 눈에는 한 가지 부분이 새롭게 보였다.

'억겁의 세월?'

억겁.

흔히들 무한한 시간을 의미할 때 쓰는 단어.

그런 억겁의 세월을 거쳤는데도 고작 혈청의 형태다?

'억겁의 세월을 겪기 전에는 뭔가 아주 대단했다는 뜻인데....'

일반적인 피라면 억겁이란 세월에 아예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야 정상 아니던가?

거기에다.

"병도 굉장히 독특해."

마치 뱀의 그것.

파충류의 비늘처럼 조각된 유리병은 전생에 수많은 재료들을 만져 온 시문으로서도 처음 보는 형태였다.

그리고 그 의문은.

-그건 용족의 물건이라서 그래.

가슴 정중앙에 위치한 동반자.

현자의 돌이 알려 주었다.

"용족의 물건?"

-응. 유리병이든 뭐든, 용족은 나름 귀하다고 여기는 물건엔 저런 방식으로 세공을 해 둬. 내가 보기엔 영 구린데 말이지.

"그렇구나."

시문은 찬찬히 고개를 끄덕이며 비늘이 세공된 유리병.

변질된 혈청을 바라봤다.

'용족의 물건을 왜 보상으로 준 걸까?'

그것도 고작 F급의 아이템을.

물론 현자의 돌의 말을 따져 보면 저 유리병 속에 든 혈청 자체가 무척이나 귀한 것.

정확히는 '귀했던 것'이지 않나?

"잠깐."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시문은 황급히 인벤토리를 열어, 아이템을 하나 더 꺼냈다.

[용혈]

등급 : C

하급 용족의 피.

용족 이외의 종족에겐 독으로 작용한다.

매끈한 유리병이지만 F급인 [변질된 혈청]보다 높은 등급의 용혈.

'이것도 마르넬과 연관 있는 아레나에서 얻었었지?'

첫 특수 아레나이자 마르넬과 처음 만났던 [열띤 광산의 악몽].

당시 갤럭시 아레나 측도 예상 못 한 클리어 방향에 용혈과 더불어 미스릴 바를 획득했었다.

그리고 용혈과 미스릴 바 모두 차후, 제작에 쓰기 위해 인벤토리에 고이 모셔 놨었지.

두 아이템을 보는 시문의 눈이 가늘어졌다.

'뭔가 있어.'

보상은 나름 확실하게 챙겨 주는 곳이 갤럭시 아레나다.

그런 갤럭시 아레나에서 두 번 연속 용족 관련 아이템을 보상으로 주는 건.

분명 무언가 신호를 주는 것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게 뭘까?'

턱을 괸 그대로.

오랫동안 고민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흐아! 머리 아프다. 일단 뭐라도 한잔 마시자."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마구 헝클인 시문은 힘없는 걸음으로 터덜터덜 바를 향했다.

-오빠, 술은 안 돼.

"알아. 그냥 답답해서 시원한 거나 마시려는 거뿐이야."

작게 투덜거리며 냉장고의 문을 여는 시문.

음료 칸엔 유제품을 비롯한 많은 탄산 계열의 음료수들이 즐비했다.

'녀석들. 마냥 돈만 쓴 게 아니구나.'

자신이 톡 쏘는 탄산을 좋아한다는 걸 훤히 꿰뚫고 있는 두 동생.

새삼 두 동생들의 배려에 감사를 느끼며, 음료를 하나를 꺼내려던 순간.

"음?"

시문의 시선이 바로 위 칸의 우유에 고정되었다.

그곳엔.

[유통기한 02. 29. 22 : 30]

어느 우유에나 흔히 기입되어 있는 유통기한이 보였다.

'왜 이걸 생각 못 했지?'

그걸 본 시문의 입꼬리가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현자의 돌."

-응?

"우리 연성 하나만 하자. 이렇게."

시문은 즉시 방금 떠오른 생각을 그대로 현자의 돌에게 전달했다.

-호오. 우리 오빠, 아주 야무진 생각을 해냈네?

"어때? 가능하겠어?"

-등가교환만 성립한다면야 못할 것도 없는데....

흔쾌히 승낙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말꼬리를 묘하게 흐리는 현자의 돌.

이내.

-오빠가 알진 모르겠지만, 사실 시간을 다루는 물건은 그리 많지 않거든.

"그렇겠지."

시간에 영향을 끼치는 힘.

당연히 그 힘을 담은 물건들이 흔할 리 없었다.

-특히 시간을 거스르는 방식이 가장 어려워. 심지어 억겁을 거슬러? 아주 어마어마한 대가가 필요해. 오빠라면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 거야.

"아."

시문은 탄식과 함께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회귀했을 때를 말하는 거군.'

당시 자신의 회귀의 대가로 쓰였던 등가교환은 다름 아닌 현자의 돌 자신.

정확히는 현자의 돌의 메인 동력원이 되는 희대의 영약 [엘릭서]였다.

하지만.

'당장 엘릭서를 만들기는 불가능한데.'

전생의 자신도 온갖 운에 운이 겹쳐서 겨우 만들 수 있었던 영약.

애당초 기본이 되는 재료들 하나하나가 정규 아레나가 열려야만 구할 수 있는 진귀한 것들이다.

현 시점에서 레시피만 안다고 제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시문의 마음을 읽은 것일까?

-걱정 마. 엘릭서까지 필요하지는 않으니까.

현자의 돌은 안도의 말을 건넸다.

-일단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베스트는 해당 물건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서 받는 거야.

"받아?"

연성이라고 답할 줄 알았던 예상과 완전히 빗나가는 답.

-응. 마침 오빠를 관심 깊게 보는 존재 중 하나가 요걸 딱 들고 있을 거거든.

그 말에 시문의 시선은 자연스레 천장을 향했고.

-안 그래? 제우스.

현자의 돌의 물음과 함께.

[성좌 제우스가 말없이 당신을 내려다봅니다.]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이어.

[성좌 제우스가 '크로노스의 모래시계는 내게 없다.' 고개를 젓습니다.]

실망스러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엑?! 없다고?

[성좌 검은 염소가 '망할 난봉꾼아, 그게 왜 없어!' 소리칩니다.]

[성좌 오딘이 '설마 잃어버리거나 도둑맞은 건 아니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뜹니다.]

[성좌 제우스가 '너희에게 말해 줄 의무는 없지.' 단호하게 선을 긋습니다.]

물건 하나 없다는 게 뭐 그리 놀라운 일인 건지.

현자의 돌에 이어 성좌들이 줄줄이 경악을 토했다.

비교적 멀쩡한 시문은 어깨를 으쓱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뭐."

-아니, 어쩔 수 없으면 안 돼! 그게 어떤 건데!

"없다잖아. 설마 성좌가 이런 걸로 거짓말이라도 하겠어?"

-그건 그런데. 아니... 그게 없다고? 대체....

횡설수설하는 현자의 돌.

시문은 차분한 어조로 녀석을 달랬다.

"어차피 방법이 두 가지라며?"

-그렇긴 하지. 직접 연성해버리면 되니까. 근데 오빠, 혹시 크로노스의 모래시계가 어떤 형태인지 알고 있어?

"아니, 전혀 몰라."

-그치? 알다시피 대상의 구조를 잘 알수록 연성에 들어가는 대가가 줄어들잖아.

"결국 지금까지처럼 연성하면 된다는 거잖아?"

-맞긴 한데. 크로노스의 모래시계는 이야기가 좀 달라.

현자의 돌은 한숨을 푹 쉬고는 말을 이었다.

-그걸 연성하려면 업적 포인트가 최소 50만 이상은 필요하거든.

"뭐어?!"

놀란 토끼처럼 눈이 커져 버리는 시문.

그럴 수밖에.

"5만도 아니고, 50만이라고?"

연성 한번 하는 데 업적 포인트 500,000점이 든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그마저도 최소라니?

-어쩔 수 없어. 크로노스의 모래시계는 신들의 시간에도 영향을 끼친단 말이야.

'신들의 시간에 영향을 끼친다고?'

말만 들어도 얼마나 대단한 물건인지 알 수 있는 부분.

그러나 시문의 눈은 한결 차분해졌다.

"하지만 우리가 되돌리려는 건 이 혈청이잖아."

-그렇지.

"그럼 적당한 수준으로 줄여서 연성해 보면 안 돼?"

애당초 시문이 연성하는 신화급 무구들도 일종의 너프를 먹은 상태 아닌가?

크로노스의 모래시계도 별반 다르지 않을 터였다.

-그래도 대가가 너무 커. 애당초 시간을 건드린다는 근본적인 메커니즘 자체가 엄청난 대가를 요구하거든.

"그럼 일부분만 연성하는 건 어때?"

-일부분?

"그래. 어차피 무기로 쓸 것도 아니잖아? 아주 일부분, 예를 들어 모래시계의 모래 한두 알 정도면 되지 않을까?"

시문의 말이 끝나자마자.

[성좌 제우스가 헛웃음을 흘립니다.]

[성좌 오딘과 천마가 얼이 빠진 얼굴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좌 검은 염소가 깔깔대며 웃습니다.]

성좌들의 반응이 줄지어 올라왔다.

'뭐야. 다들 갑자기 왜 저래?'

그런 시문의 마음을 읽은 것인지.

-진짜... 그런 식으로 연성할 생각을 하다니....

"어... 그렇게 이상한 생각이었어?"

-아니, 엄청 훌륭해. 단지 너무 상상 밖의 발상이라서, 쟤들도 그거 때문에 저러는 거야.

현자의 돌은 허탈한 목소리로 답했다.

이내.

-좋아. 모래알 단위로 연성하면 대가가 줄어들긴 하겠다. 거기다 혈청이니까, 모래알로도 효과가 있겠지.

계산이 끝난 것인지 답을 내리는 현자의 돌.

그에 시문은 망설임 없이 손을 들어 올렸다.

[요구치에 맞는 연성을 이루기에는 연성력이 부족합니다.]

[현자의 돌이 부족한 등가교환을 성립시키기 위해, 업적 포인트 5,000점을 요구합니다.]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5천이라. 꽤 세네.'

모래알 단위로 나누었는데도 5천이라니.

그래도 50만 점에 비하면 양반이니 시문은 망설임 없이 '예'를 선택했고.

웅.

부족한 등가를 채운 기운이 시문의 몸을 타고 손가락으로 모여들었다.

그것을 머금은 손가락을 튕기는 순간.

사륵.

곱다 못해 밀가루를 연상시킬 정도로 미세한 황금색의 입자가 시문의 손에 내려앉았다.

[크로노스의 모래]

등급 : 신화

소멸해 버린 시간의 신 크로노스의 모래시계의 핵심이 되는 시간의 모래.

사용할 수는 있지만, 어째서인지 힘이 실시간으로 소실되고 있다.

한 줌은커녕 눈에 보이지도 않는 수준의 모래.

특히나 모래시계가 아닌 모래만 연성해서 그런 걸까?

-오빠! 그거 빨리 안 쓰면 사라져!

크로노스의 모래는 실시간으로 그 힘을 잃고 있었다.

시문은 서둘러 변질된 혈청의 마개를 열고 크로노스의 모래를 흘려 넣었다.

그러자.

사아아아!

기이한 소리와 함께 진동하기 시작하는 변질된 혈청.

거무튀튀했던 색이 점차 맑아지기 시작했고.

응고되어 고체였던 형태는 끓는 물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액체로 변했다.

[지켜보던 성좌들이 일제히 탄식을 흘립니다.]

조용히 올라오는 메시지창.

그와 함께 혈청에 일어난 변화들이 차츰 가라앉았고, 시문은 혈청의 정보를 확인했다.

[티아메트의 피]

등급 : 신화

용신 티아메트의 피.

불완전한 시간 역행으로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으나, 곧 원상태로 돌아간다.

-제한 시간 59초.

"이럴 수가!"

경악이 절로 나온다.

그 보잘것없던 혈청이 용신의 피라는 것도 그렇지만.

"59초라고?!"

이젠 57초라고 해야겠지.

실시간으로 힘이 소실되던 크로노스의 모래 때문일까?

기껏 살려 놓은 변질된 혈청.

아니, 티아메트의 피 역시 시간이 제한되어 있었다.

'어쩌지?'

일단 되돌리긴 했는데.

이런 시간제한 시간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가뜩이나 피 형태의 재료 아이템 같은데 이걸 당장 어디에 쓴단 말인가?

그때.

출렁.

병 속에 있던 짙은 선홍색의 피가 출렁거리더니.

"어어!"

입구로 주르륵 흘러나왔다.

시문은 얼른 손을 받쳐 들려 했으나.

탱클.

일종의 슬라임처럼 탱탱하게 뭉쳐지는 티아메트의 피.

그중 머리로 추정되는 윗부분이 죽 늘어나더니, 무언가를 찾듯 휙휙 돌려가며 주변을 둘러봤고.

시문을 보곤 뚝 멈췄다.

이어.

츄아악.

갑자기 쭈욱 늘어나며 시문의 가슴팍으로 파고들었다.

"이런!"

시문은 서둘러 가슴을 더듬었지만.

젖은 느낌이나 탱탱한 질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내.

쿠웅!

"컥!"

어마어마한 격통과 열기가 시문의 전신을 두드렸다.

['티아메트의 피'가 동화를 시작합니다.]

눈앞으로 떠오르는 한줄기의 메시지.

"크으읍!"

그러나 어마어마한 격통과 열기에 시문은 제대로 된 신음도 내지 못하고.

땀을 뻘뻘 흘리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뜨, 뜨거워...!'

마치 온몸의 핏물이 고온으로 들끓는 느낌.

특히나 가슴 정중앙에 위치한 현자의 돌은 당장 터지기 직전까지 가동되는 엔진처럼 쉬지 않고 박동했다.

그렇게 얼마가 지난 것일까.

[특성 '성흔'이 '티아메트의 피'에 반응합니다.]

[조건이 만족하지 하지 않아, 특성 '성흔'이 비활성화됩니다.]

['티아메트의 피'가 다른 방향을 모색합니다.]

한줄기의 메시지가 고통에 깜깜해진 눈앞으로 떠올랐고.

-어우 씨! 갑자기 덤벼서 깜짝 놀랐네. 누가 티아메트 아니랄까 봐 피까지 지X이야! 야! 너 이리 와봐!

앙칼진 현자의 돌의 목소리와 함께.

시문의 시야가 암전되었다.

제55화

55화. 용족 (2)

크롸롸롸롸!

거대한 울부짖음.

전생에서 들었던 수많은 울음 중 단연코 잊지 못할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이 소리는!'

정신을 차린 시문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획 들었다.

그럴 수밖에.

가장 많은 플레이어의 목숨을 잃게 만들었던 울음소리를 어찌 잊겠는가?

'드래곤?!'

드래곤.

이종족 중 최강이라는 용족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종.

압도적인 육체는 물론이요.

그 육체를 기반으로 쏟아지는 고수준의 마법은 그야말로 살아 움직이는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세상에....'

당황스러운 눈으로 정면을 바라본 시문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이유는 다름 아니었다.

울음소리의 원인은 드래곤이 아니었으니까.

물론 전체적으로 비슷하기는 했다.

원래 알고 있던 드래곤보다 더 거대하고, 더 화려했으며, 더 위압적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시문은 저것의 존재를 잘 알고 있었다.

'용제가 어떻게 여길!'

그것도 한둘이 아니다.

무려 다섯이나 되는 거대한 드래곤.

아니, 용제들이 한데 모여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눈에 다 담기지 않는 용제들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중압감을 선사했다.

그때.

'잠깐.'

놀란 눈으로 무려 다섯이나 되는 용제를 보던 시문이 잠시 멈칫한다.

'용제가 다섯이나 있으면 난 숨도 제대로 못 쉴 텐데? 그러고 보니 나, 목소리도 안 나오잖아?'

그러나 시문이 현 상황을 눈치챌 틈도 없이.

쿵.

다섯 용제들 중 가장 거대한 이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휘감은 거대한 드래곤.

마치 태양을 통째로 조각해 놓은 듯한 형체.

그의 입에선 겉모습과 같이 검붉은 불길이 넘실거리며 흘러나왔다.

"여기까집니다, 아버지."

욱신.

분명 눈앞의 이 거대한 용제와 자신은 어떤 관련도 없을 터인데.

아버지란 말에 왜 이렇게 가슴이 아리단 말인가.

그러나 시문은 어떠한 답도 할 수 없었다.

단순히 가슴을 아리는 정체 모를 통증 때문만은 아니었다.

'입이... 안 움직여!'

근육과 신경이 무너져 내려 아예 기능을 상실해 버린 느낌이랄까?

비단 느낌뿐만은 아니었다.

'잠깐. 뭐야, 이거?'

자신을 내려다보는 다섯 용제의 시선.

그와 함께 자신의 몸을 내려다본 시문은 보고야 말았다.

'내 몸은 또 왜 이래?!'

눈앞의 검붉은 용제.

용제들 중 가장 큰 그 용제조차 반도 채 되지 않을 만큼 거대한 몸체를 말이다.

저 용제들을 거산이라고 칭한다면.

시문의 몸은 그것들로 이루어진 산맥이라 말할 수 있었다.

비록 처절하게 박살 나, 제대로 된 형체는커녕 핏물이 대다수였지만 말이다.

이어.

-그러느냐....

꿈쩍도 하지 않던 시문의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용제들보다 거대해서일까?

그 목소리는 묘한 이명이 섞여 이 세상의 것이 아니게 느껴졌다.

그래.

꼭 필멸의 그것을 초월한 느낌이었다.

"끝까지 모든 것을 안다는 것처럼! 정녕 모르시겠습니까? 아버지, 당신은 패배한 겁니다!"

-운명이란 그런 것이지. 내 경우엔 잔혹했을 뿐. 너 역시 이 자리에 오르면 알게 될 것이다.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일까.

자신을 아버지라 불렀던 검붉은 용제의 얼굴이 확 일그러진다.

흡사 폭발 직전의 태양을 보는 듯한 그 모습은 무척이나 두려워야 했는데.

"아니, 그럴 일 없을 것입니다."

이 갑작스러운 빙의 때문일까?

시문은 공포심이 1도 들지 않았다.

그저.

-안타깝구나. 네가 거절한다 하여, 피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거늘.

안타깝고 후회스러운 마음뿐이었다.

"아니, 전 용신이 되지 않을 겁니다. 당신처럼 나약해질 순 없는 노릇이지요."

검붉은 용제가 뒤편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러자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4명의 용제.

검푸른색, 검분홍색, 회갈색, 그리고 녹색의 눈동자를 지닌 용제들이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중 녹색의 눈동자와 시선을 맞춘 시문은.

'읏!'

다시 한번 가슴이 미어지는 걸 느꼈다.

"당신을 소멸시키고 용신이 되어 봐야 결국 우리 중 하나, 그건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 게냐.

"말 그대로입니다."

쿵.

아버지라 부른 검붉은 용제가 다시 한번 걸음을 내디딘다.

"용족은 이 우주의 그 어느 종족보다도 우월합니다. 우리가 바로 그 증거지요."

어느새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민 그는 제 몸과 같은 검붉은 눈동자를 번들거리며 말했다.

"한데 고작 하나의 자리만으로 만족하라? 그게 가당키나 한 말입니까?"

-크루아흐, 그건....

"개소리는 이제 그만! 아버지,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이건 다 우리 용족의 우월함을 경계하는 버러지들의 수작이란 말입니다!"

저 막대한 육체에 휘감긴 불길 때문일까.

-크루아흐, 그건 오만이다.

"오만? 우린 수많은 차원에서 신령한 존재, 혹은 신으로 추앙되어 왔습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부정의 여지가 없지요."

아니면 속에 가득 담긴 욕망 때문일까.

"게다가."

크루아흐라 불린 검붉은 용제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뒤편의 용제들을 하나하나 훑으며 말했다.

"우리 모두 상위 서열 성좌의 위치에 오를 '자격'도 있지 않습니까?"

-헛소리! '자격'이 있어도 용계에 허락된 '자리'는 하나다. 그게 법칙이야!

"그것이 웃기는 점이지요. 그렇다면 저편은 그 넷은 뭐란 말입니까? 그곳을 지배하는 그 존재는요!"

-그곳은 예외다. 규격 외의 세계란 말이다!

"크핫! 그렇겠지요. 어디에나 예외는 있으니."

크루아흐가 이글거리는 팔을 들어 올린다.

그의 손아귀엔 하나의 구체가 떠올랐다.

"해서, 저도 예외를 찾았습니다."

'저, 저건!'

그것을 본 시문은 경악을 토했다.

검붉은 구체.

그 안에 파충류의 그것처럼 길게 찢어진 동공.

시문이 회귀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 눈동자였다.

"생각보다 쉽게 말해 주더군요. 저편이 어떻게 여러 자리를 얻었는지."

-네 이놈! 제정신이냐! 저편은 늘 경계하라 일렀거늘! 특히 네가 손잡은 그자는....

"아버지, 아직도 모르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은.

"저와 우리 용족에게 당신의 가르침은 더 이상 필요가 없다는 것을."

콰직!

시문의 가슴으로.

정확히는 빙의하고 있는 이 거대한 존재의 가슴 속에 처박혔다.

"저편에 대해선 제가 알아서 합니다. 당신은 그저...."

달아오르던 몸의 열기가 더더욱 뜨거워진다.

"이대로 사라지시면 됩니다. 당신이 가진 그것들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고 말이죠."

온몸이 달구어진 칼날로 조각조각 나뉘는 고통이 엄습하고.

"우리 용계는 용신이 탄생하지 않은 그때로 다시 돌아갈 겁니다. 그리고...."

그러한 고통마저 사방으로 빨려 나가는 허무감이 밀려든다.

잘못 느낀 것이 아니다.

콰드득.

실제로 만신창이가 되어 버린 거대한 육신과 핏물은 다섯 용제에게로 빨려들고 있었으니까.

이어.

"'자격'조차 아까운 미개한 것들에게서. 우리가 마땅히 받았어야 할 '자리'를 쟁취할 겁니다."

오만을 넘은 광기.

육체를 나뉘어 가진 용제들이 각자 어마어마한 기세를 내뿜었고.

['티아메트의 피'가 현자의 돌과 성공적으로 동화되었습니다.]

한줄기의 메시지가 떠오르며 시문의 시야가 암전되었다.

* * *

"허억!"

오랫동안 물속 깊은 곳에서 잠들어 있었던 것처럼.

깨어난 정신이 몸의 감각을 확 일깨운다.

가장 먼저 든 감각은 다름 아닌.

"으윽."

어지러움.

그 강렬한 두통에 이마를 짚은 시문은 숨을 고르며 어지러움을 가라앉혔다.

'용족 놈들... 저런 계획이 있었을 줄이야.'

소용돌이치던 머릿속이 점차 가라앉자, 아까 보았던 환상들도 빠르게 정리되었다.

'이제야 감이 잡혀. 왜 유독 중국이 아웃브레이크에 피해를 입지 않았는지.'

같은 2강인 미국도 아웃브레이크에.

특히나 고위험군이던 용족 관련 아웃브레이크에서 자유롭지 못했거늘.

'대륙성 뒤에 용족이 있는 거야.'

그게 아니고서야.

유난히도 중국이 용족들에게서만큼은 큰 피해를 받지 않았던 이유가 설명이 되질 않는다.

애당초 유럽을 필두로 멸망한 모든 나라의 플레이어를 모두 흡수한 미국과 아시아권만 겨우 흡수한 중국이 비빌 수 있었던 것도.

고위험군인 용족 관련 아웃브레이크가 기이할 정도로 중국만 비껴갔기 때문이 아니던가?

문제는.

'놈들이 왜 그렇게 시혁이를 죽이고 싶어 했냐는 건데....'

김시혁이 아무리 망국의 하이랭커라도 중국에 귀화한 이상, 그 나라를 지켜 주는 존재다.

심지어 시혁이는 종리추와 함께 아시아의 양대 수호신으로 불렸고.

미국보다 플레이어의 숫자는 달릴지언정.

개개인의 전투력은 중국이 훨씬 뛰어나다는 평가까지 만든 요소가 아니던가.

한데도 중국은 그렇게나 동생 녀석을 죽이려고 안달을 냈었다.

지금까진 창왕 종리추의 추한 열등감이 주라고 생각했지만.

방금의 환상, 티아메트의 기억을 보곤 생각이 좀 달라졌다.

'용족이 관여했을 가능성이 높아. 아마 크루아흐가 말했던 자리와 자격이라는 것 때문이겠지.'

자격에 대해선 대충 감히 잡히는 부분은 있었다.

전생엔 동생 김시혁만.

그리고 이번 생엔 자신까지도 지니고 있는 특성이 있지 않은가?

'성흔. 그 특성 때문에 내게 암살을 시도한 거라면?'

물론 아닐 수도 있지만.

적어도 '용족이 대륙성에 암살을 의뢰했다.'

라는 아귀 정도는 들어맞는 느낌이 들었다.

"후우.... 이것도 결국 다 추측에 불과하지만."

시문은 한숨을 내쉬며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뭐든 당장 확신하기엔 일러.'

이 전제가 성립하려면.

우선 중국이 용족과 진짜 관련이 있냐는 것부터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건 운이 좋게도 마침 밑 작업을 해 둔 상태다.

'숙부라면 알아낼 테지.'

우리의 뛰어나신 숙부 김무열 씨께서.

데스페라도의 암살 의뢰를 미국과 중국 중 어느 나라에서 했는지만 알아내면.

모든 게 명확해질 터.

'결과가 나오면 그때 다시 생각하고. 우선 몸 상태부터 체크하자.'

생각을 정리하자 잊고 있었던 메시지들이 눈에 들어왔다.

['티아메트의 피'의 영향으로 특성 '오딘의 눈'에 사안(蛇眼)이 추가됩니다.]

['티아메트의 피'의 영향으로 현자의 돌에 귀속된 '옵시디언 태블릿'이 반응합니다.]

[현자의 돌의 특성에 용체화(龍體化)가 추가됩니다.]

'사안? 용체화? 이게 다 뭐야?'

하나 눈에 들어온 메시지를 다 읽을 틈도 없이.

[창의적인 연금술로 신화적인 아이템을 복구하였습니다.]

[연성력이 10 상승합니다.]

[칭호 '연금술의 선구자'의 옵션이 성장합니다.]

[현자의 돌에 용신의 인자가 완벽하게 자리 잡았습니다.]

[현자의 돌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스탯 용력이 연성력의 귀속 스탯으로 추가됩니다.]

또다시 메시지의 파도가 범람했다.

'뭐가 어마어마하게 많구만.'

하나 방금 겪었던 환상을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었기에.

시문은 바닥에서 일어나 차분히 몸을 살폈다.

'특별히 이상한 점은 없네.'

어마어마했던 열기와 통증.

그것들이 줬던 악랄한 고통과 달리 몸 자체는 멀쩡했다.

시문은 가슴 정중앙을 내려다봤다.

"현자의 돌, 있어?"

-으으... 살아는 있어....

탈진감이 물씬 묻어 나오는 목소리.

실제로 가슴 중앙에 있는 현자의 돌은 열받은 기계처럼 따끈따끈했다.

-근데 어떻게 된 거야? 오빠 막 기절해서도 움찔움찔하던데. 악몽이라도 꿨어?

"기절? 아."

기절한 상태였구나.

하나 아까 누군가에게 빙의된 떠올려 보면 충분히 이해가 갔었다.

"그럼 넌 못 봤겠네?"

-응? 보긴 뭘?

"그게... 아니다. 나중에 차차 설명해 줄게."

-말하다 끊으니까 무척이나 불편하긴 한데, 오빠 말대로 나중에 듣는 게 좋겠어. 꼴에 신의 피라고, 안정시키느라 아주 진땀을 뺐거든.

메시지들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대충 감을 잡은 시문이었기에.

"고생했어. 그래도 등급이 올랐으니까 기쁘네."

시문은 가슴 중앙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헤헤! 그건 그래. 꼴에 신이라고 피 주제에 대단하긴 하더라. 강해진 느낌이 팍팍 들어!

"그렇지?"

-응. 근데 오빠는 괜찮아?

"나?"

고개를 갸웃하는 시문.

그는 가볍게 팔다리를 털며 몸을 슥 훑고는 답했다.

"음. 괜찮은 듯?"

-괜찮다고?

"어. 뭐... 몸이 더 가벼워진 느낌이 들긴 해."

실제로 두꺼운 옷으로 꽁꽁 싸매고 있다가 벗어 버린 느낌.

그 정도로 몸이 가볍고 자유로운 느낌이었다.

-...그래? 신기하네. 우리 오빠가 아무리 잘났기로서니, 신의 인자를 동화시켰는데 페널티는커녕 가벼워....

"응? 뭐라고?"

-아, 아니야! 좋으면 된 거지! 오빠, 나 엄청 피곤하거든? 좀만 잘게.

말끝을 흐리더니 아예 얼버무리는 현자의 돌.

그러나 녀석이 자신에게 독이 될 짓을 할 리는 없었기에.

"그래, 고생했어. 푹 쉬어."

시문은 부드럽게 웃으며 녀석을 보내 주었다.

곧바로 숙면에 든 것일까?

뜨겁던 현자의 돌이 온도가 차츰 내려간다.

시문은 줄줄이 떠오른 메시지창들을 다시 읽어 나갔다.

'이러면 용체화는 나중에 확인해 봐야겠네.'

옵시디언 태블릿처럼 현자의 돌의 특성으로 추가된 용체화.

현자의 돌이 잠들어 버린 지금, 용체화를 확인하긴 어려웠다.

'뭐, 굳이 급한 것도 아니니까.'

어깨를 으쓱한 시문은 곧바로.

"상태창."

상태창을 열었다.

제56화

56화. 용족 (3)

[상태창]

칭호 : 연금술의 선구자 (외 3)

계통 : 마법계

레벨 : 42

소속 : 대한민국

힘 : 11 (+4)

민첩 : 11 (+4)

체력 : 17 (+4)

연성력 : 52 (+4)

-마기 : 28

-용력 : 28

잔여 스탯 : 12

보유 특성 – 현자의 돌 (D), 성흔, 오딘의 눈

업적 포인트 – 7,500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스탯.

42에서 방금 10이 증가해 42에서 52가 된 연성력과.

'그러고 보니 잔여 스탯을 투자 안 했구나.'

아래 12개나 남아 있는 잔여 스탯이 시문의 눈길을 끌었다.

'나도 참. 12업이나 해 놓고 이걸 안 올리고 있었네.'

다른 플레이어가 봤다면 기가 찰 광경이겠지.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상태창을 확인할 여유가 없었으니까.'

폭탄 테러에 테러리스트 제거, 협회로의 소환과 갑작스러운 내 집 마련까지.

저번 아레나를 끝낸 이후, 상태창을 열 여유가 있는 상황이 아니었지 않은가?

시문은 연성력에 잔여 스탯 12를 모두 투자했다.

"이러면 연성력이 64인가?"

분명 레벨은 42인데.

주력 스탯이 64가 되는 상황.

1레벨 최고 스탯인 10에서 시작했음을 고려해 봐도, 무려 54스탯이나 되었다.

거기에다 이번에 칭호 '왕들의 픽'에 추가된 오딘 덕분에 +3이던 스탯은 +4가 되었으니.

총 연성력은 68.

그 괴랄한 수치에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시문은 상태창을 향했다.

"음. 용력이라."

새로 추가된 스탯인 용력.

전생에 용족들과 치가 떨리게 싸웠던 시문은 이 용력을 잘 알고 있었다.

"이건 용족 고유의 기운일 텐데?"

마족의 마기와 천족의 성력처럼 용족만의 독자적인 기운인 용력.

물론 마기나 성력은 직업에 따라 플레이어들 역시 사용이 가능했지만.

시문이 아는 한 용력은 어떤 플레이어도 사용하지 못했었다.

적어도 지금까진 말이다.

'뭐, 티아메트는 용신이니까 크게 이상할 것도 없지.'

용신의 피를 흡수한 자신이 용력을 사용하지 못한다면 그것도 우스운 일이리라.

가볍게 코웃음을 친 시문은 칭호창을 열어 '연금술의 선구자'를 확인했다.

[연금술의 선구자] - 성장형

연금술의 신화적인 산물을 모두 연성한 연금술사에게 주어지는 칭호.

-연성 관련에 아주 작은 보너스를 받는다.

-연성에 소모되는 연성력이 15% 감소한다.

"흐음. 연성력 소모도가 10%에서 15%로 성장했네."

10%일 때도 나름대로 체감이 되었는데 15%라니?

비록 '연성 관련'이라는 제한이 붙기는 하지만, 연성이 주력인 시문에겐 무척이나 달가운 소식이었다.

시문은 인벤토리에서 작은 조각 하나를 꺼냈다.

'이 정도면 특수 아레나를 진행해도 되겠어.'

히든 보스 '미쳐 버린 초목지기 뮤리에'를 처리하고 얻었던 입장 아이템.

망가진 세계수의 씨앗 조각.

저번 아레나에서의 12레벨 폭업과 이번 티아마트의 피로 인한 성장까지 했으니.

이만하면 갓 골드에 입성한 자신이라도.

골드 랭크 제한의 특수 아레나는 무난히 클리어가 가능하리라.

'사실 지금의 성장이 없더라도 깰 수야 있었겠지만 말이지.'

연금술사라면 가질 수밖에 없는 일종의 강박증이랄까?

성공률 100%를 선호하는 시문은 만족스러운 미소로 [망가진 세계수의 씨앗 조각]을 만지작거렸다.

그때.

띵.

테이블 위에 둔 핸드폰이 작게 울렸다.

화면을 확인하자.

[박진욱 : 시문 씨, 마력경화증 치료제 판매가 방금 막 완료되었습니다.]

시문의 미소는 한결 더 짙어졌다.

* * *

치이이.

달궈진 팬 위로 떨어지는 고기들이 으레 그렇듯.

맛있는 소리가 묵직한 고기 냄새를 타고 귀와 코를 간질였다.

하나.

"아이 씨! 이 새낀 산 거야? 뒤진 거야?"

불판 앞의 여성은 신경질적으로 미간을 찌푸릴 뿐이었다.

그녀는 노련한 수공업자처럼.

엄청난 속도로 폰 화면을 두들겼다.

당연했다.

농담 안 하고 이 짓만 수백 번은 했으니까.

이젠 눈 감고도 누를 수 있는 터치가 빠르게 이어지자, 화면 위로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고말숙 : 어떻게 된 거야? 테러라니? 너 괜찮은 거지? ㅇㅇ?]

[고말숙 : 야! 뭐라 말 좀 해 봐. 주소가 네가 보낸 곳이랑 똑같은데. 아니지? 그치?]

[고말숙 : 아오 ㅆㅂ! 뭐라 답 좀 해! 살아 있냐고!]

[고말숙 : 무조건 살아 있어라. 너 죽기만 해! 진짜 가만....]

[고말....]

총 50여 개에 달하는 메시지.

귓속말로 교환했던 번호가 맞긴 한 건지.

수많은 메시지에도 한 번의 답도 오질 않았다.

고말숙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설마 진짜 죽은 건 아니겠지? 아, 아니야! 아직 조사 중이랬잖아.'

TV로 테러 보도를 접한 이후.

많은 인터넷 기사들이 신림의 테러 사건을 다뤘고.

고말숙은 그녀답지 않게 그것들을 줄줄이 정독하지 않았던가?

'망할 기레기 새끼들! 뭐 하나 제대로 아는 것도 없으면서 기사만 줄줄 늘어놔서는!'

많은 기사들에 일관되게 서술되어 있는 '아직 조사 중'과 '협회의 입장 발표를 기다려....' 등.

이번 신림의 테러 사건은 뭐 하나 제대로 알려지는 게 없었다.

이해 못 할 것은 아니었다.

애당초 저들 역시 보도하는 입장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인명 피해가 있는지 없는지는 나와야 되는 거잖아!'

심지어 멀지 않은 곳에서 또 다른 폭발이 일어나고, 각성자들의 전투까지 포착된 상황.

그 바람에 협회가 수사에 들어갔지만, 그 과정에서 정확한 피해 내용은 보도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김시문은 아예 연락이 두절되었으니.

"으아! X발! 속이 탄다, 타!"

고말숙으로선 그저 가슴을 쿵쿵 두드릴 수밖에.

그리고 그런 그녀의 머리통이.

"아이구! 내 속도 탄다, 타! 요것아!"

빠악.

"악!"

경쾌한 소리와 함께 휘청거렸다.

"X! 어떤...."

그에 고말숙은 눈을 치켜뜨고 감히 자신의 머리통을 후린 원인을 노려봤고.

정갈한 검은색 수녀복.

머리에 길게 늘어진 특유의 베일 아래로 주름진 괄괄한 얼굴을 확인한 고말숙은.

"크, 크흠!"

스윽.

어느새 새까맣게 타 버린 고기를 팬에서 치우며 눈 역시 슬그머니 돌렸다.

"요것아! 내가 고기를 구우라고 했지, 태우라고 했냐?"

"아, 고기야 다시 구우면 되잖아."

"다시 구워서 어느 천년에 시간 맞출래? 애들 배고파서 손가락만 빨고 있잖아."

"그러게 반찬 좀 맛있게 담지 그랬어? 할매 반찬이 얼마나 맛없으...."

"요년이!"

빡.

다시 한번 이어지는 경쾌한 소리.

그에 뒤통수를 움켜쥔 고말숙은 소리쳤다.

"아씨! 자꾸 왜 때려!"

"맞을 만하니까! 흰소리하지 말고 얼른 고기나 구워. 또 태우면 너도 같이 콱! 태워 버리려니까!"

"아, 알았어...."

서슬 퍼런 노수녀의 말에 입을 삐쭉 내민 고말숙은 집게를 들었다.

그때.

띠링.

옆에 놓아둔 폰이 울렸고.

고말숙은 얼른 그것을 낚아채 화면을 터치했다.

[김시문 : 미안. 그동안 바빠서 폰을 제대로 못 봤네.]

기다렸던 답장이 날아오자 기분이 확 밝아졌으나 거기까지.

'폰을 못 봤다고? 이게 진짜!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하는 거야?'

뭐 얼마나 바쁘길래 요즘 세상에 폰을 확인하지 못한단 말인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답에 열이 차올랐지만.

[김시문 : 네 말이 맞음. 폭발이 일어난 건 내 자취방임. 근데 이건 협회 쪽에서 아직 조사 중이라, 비밀로 해 줘.]

이어지는 메시지에 뜨거웠던 속은 금방 식어 버렸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고말숙은 재차 자판을 두드렸다.

[고말숙 : 알았어. 다친 데는 없고?]

[김시문 : ㅇㅇ. 근데 메시지 엄청 보냈네. 걱정해 준 거냐? 왠지 고마운데.]

아까까지만 해도 속에서 차오르던 열기가 이번엔 얼굴로 확 퍼진다.

하나 보내는 메시지의 내용은 정반대였다.

[고말숙 : ㅈㄹ ㄴㄴ. 어이 X나 없네 ㅋㅋ. 내가 니 걱정을 왜함? 걍 그 기술을 못 배울까 봐 쫄려서 그런 거지.]

[김시문 : 아... 하긴, 네가 그렇지.]

'뭐지 이 반응은? 내가 뭐 어때서?'

시문의 답장에 한쪽 눈썹이 슥 올라가는 고말숙.

이 뺀질이에게 자신의 이미지가 대체 어떻단 말인가?

[김시문 : 걱정 ㄴ. 기술은 꼭 알려 줌. 얼마 전에 새집 구했거든? 정리 끝나면 부름.]

[고말숙 : 오냐. 뒤지지 말고 몸조심해라.]

[김시문 : ㅇㅇㅅㄱ.]

ㅇㅇㅅㄱ.

분명 자신도 자주 쓰는 문구인데.

'...왜 이렇게 거슬리지?'

왜 입술과 눈썹이 빼쭉 올라가는 걸까?

이내.

"흘흘. 요년 봐라?"

"히꺄아악!"

귓가에 속삭이는 마귀할멈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는 고말숙.

"아씨! 놀랐잖아!"

"고기라면 환장하는 년이 웬일로 고기를 다 태우나 했더니... 남자 때문이었어?"

말끝이 흐려지며 음흉하게 웃는 노수녀.

그에 고말숙은 팔짱을 끼며 눈을 흘겼다.

"그런 거 아니거든? 괜히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요즘 맨날 폰에 빠져 있는 이유가 있구먼. 어디 사는 애야?"

"아! 진짜, 아니라니까! 이 할매가 오늘 왜 이래!"

이젠 몸까지 홱 돌리는 고말숙.

그러나 고랭크의 암살계 플레이어처럼.

이미 핸드폰 속 내용을 다 확인한 노수녀는 여전히 미소를 유지하며 물었다.

"저번에 뜬금없이 서울 간다고 한 것도 그 애 때문이야?"

"아니 그... 마, 맞긴 맞는데! 할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김시문이라. 고놈 참 이름도 마음에 드는구먼."

"할매애액!"

기어이 터져 버리는 고말숙.

하나 서슬 퍼런 그녀의 기세에도 노수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뭐 하는 앤데? 잘생겼어? 어깨는? 능력은 있고?"

"아... 말을 말자."

고개를 푹 숙이고 이마를 쓸어 올리는 고말숙.

그녀는 보이지 않는 귀마개를 쑤셔박곤 집게를 들었다.

치이익.

듣기 좋은 소리가 보이지 않는 귀마개를 뚫고 들려온다.

그 사이로.

"서울 갈 거면 언능 올라가 가. 어차피 남는 게 시간이잖니."

노수녀의 목소리 역시 파고들었다.

고말숙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계속 집게를 움직였다.

아니, 움직이려 했다.

"겸사겸사 아비 얼굴도 좀 보고."

노수녀의 마지막 말이 들리기 전까진 말이다.

"...할매, 그 얘기가 여기서 왜 나와?"

"몰라서 묻냐? 할미가 제 새끼한테 부모 좀 보라는 게 못할 말이라도 되냐?"

"그런 뜻이 아니잖아!"

결국 몸을 돌려 노수녀를 바라보는 고말숙.

"이미 끝난 사이야. 몰라?"

"에이구, 인석아. 부모와 자식의 연이라는 게, 그리 쉽게 끊어지는 게 아니여."

"웃겨! 그래서 그 인간은 뭐 하는데? 어? 할매 혼자 여기 두고 지는 뭐 하냐고!"

"적어도 자기 할 도리는 다 하고 있다."

그 말에.

"...그게 무슨 말이야?"

고말숙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

"할매, 설마 그 인간한테 돈 받아?"

"계집애가! 아비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말 돌리지 말고 대답이나 해! 돈 받아? 그래?!"

굳어 갈수록 올라가는 고말숙의 언성.

결국 노수녀 역시 언성을 높였다.

"그래, 이년아! 받았다! 왜!"

"미쳤어? 그걸 왜 받아!"

"그럼 안 받고 어찌 사냐? 응? 고아원 운영비는? 저 애들은 다 어쩌고!"

노수녀의 말에 고말숙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내가 더 벌게. 그러면 되잖아. 나도 각성자야."

"네가 고생하는 거 안다. 그 나이에 그만하면 됐어. 뭐 더 하려 하지 말고, 아레난지 뭔지 벌어서 주는 것도 이제 그만 혀."

"할매!"

"할미 말 들어."

짧게 한숨을 내쉰 노수녀는 고말숙의 손을 부드럽게 보듬었다.

"말숙아, 이제 그만하고 네 인생 살어. 여기는 할미 혼자서도 충분해."

"할매 나이가 몇인데 혼자서도 충분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사람 쓰면 된다."

"웃겨. 사람은 돈 아냐?"

"부족하면 네 아비한테 더 뜯으면 돼. 그리고 그 돈이 내 돈이지 니 돈이냐? 왜 니가 지X이야?"

장난스럽게 웃는 노수녀.

그에 헛웃음을 흘린 고말숙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으나 그뿐.

더 이상 아까와 같은 화는 내지 않았다.

"마귀할멈답네. 독해, 아주."

"그 나이에 여기 뒷바라지하는 너도 마찬가지야, 이것아."

"할매, 나 할매 핏줄이거든?"

"쓰읍! 흰소리 말고, 가서 수저 좀 놔. 요즘 수저통 여는 것만 해도 아주 뼈마디가 쑤셔."

"알았어."

피식 웃은 고말숙이 부엌을 나선다.

그녀의 등 뒤로 노수녀의 목소리가 다가왔다.

"말숙아, 서울 올라갈 거지?"

"가야지. 근데 그 인간 보러 가는 건 아냐."

"그러면 잠은 어디서 자고?"

"내가 애야? 알아서 해."

"그 김시문인가 뭔가 하는 남자애 집에서 자려고?"

"왜 이야기가 또 그렇게 돼?"

풀렸던 고말숙의 눈가가 다시 샐쭉해진다.

"하이고! 딸년 키워 봐야 소용없다더니... 그냥 어디서 자나 물어봤다."

"아니 왜 말을 이상하게! 아니다. 그래! 걔 집에서 잘 거다. 왜!"

"오냐, 잘 생각했다. 이 할미는 보기보다 열려 있어."

"이 할망구가 또 뭔 말을 하려고?"

"요즘 세상 좋잖니? 약이든 기구든, 혼인 전에 애만 안 배면 이 할미는 신경...."

"할매애애액!!"

결국 빼액 소리치는 고말숙.

"내가 못 살아, 정말!"

그녀는 씩씩거리며 부엌을 나섰고.

"쯧쯧. 누굴 닮아서 성격이 저리도 지X 맞는지."

노수녀는 혀를 차며 불판 앞으로 움직였다.

치이이.

"망할 것. 귀한 고기를 또 태웠네."

시커멓게 타는 고기를 치우는 노수녀.

그녀의 입가엔 따스한 미소가 가득했다.

제57화

57화. 데뷔전 (1)

"하여간에...."

서울 시내의 야경을 한눈에 담고 있는 고급스러운 창문.

그곳에 기대고 있던 김시문은 폰을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솔직하지 못한 건 여전하다니까."

일명 츤데레라고 하지?

테러 사건 이후 짧은 기간 동안.

고말숙이 보내온 50여 개의 메시지를 찬찬히 읽던 시문의 입가엔 절로 미소가 서렸다.

'이거, 옛날 느낌이 물씬 나네.'

폰이 사라지기 전까지.

그리고 폰이 사라진 이후에도, 말숙이는 늘 이런 식이었다.

거친 겉과 다르게 무척이나 속이 깊고 상대를 챙기는 그런 타입.

'덕분에 목숨도 몇 번 건졌었지.'

1레벨의 마력불능 연금술사.

자신이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많은 노력과 운도 있었지만.

말숙이와 같은 지인들의 도움도 있었다.

"일단 말숙이가 오면 천마와 바로 이어 줘야지."

그럼 자연스레 천마의 픽은 전생처럼 말숙이가 될 테고.

자신은 천마가 준 퀘스트의 보상으로 천마신공 2성을 공짜로 얻을 수 있겠지.

그야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다.

'스펙업도 상당하겠지.'

당장 천마신공 1성만으로도 동 랭크대에서 어마어마한 위력을 발휘하지 않는가?

물론 급이 높아지는 만큼 요구되는 마기의 양도 높겠지만.

이미 총 연성력이 68인 이상, 천마신공 2성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더불어 새로 추가된 용체화와 사안까지 있지 않나?

단지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었다.

'용체화야 현자의 돌이 깨어나면 바로 사용이 가능하겠는데... 사안은 대체 뭐지?'

이번에 새로 얻은 두 기술 용체화와 사안.

그중 오딘의 눈에 귀속된 사안은 도무지 사용 방식을 알 수 없었다.

뚜벅.

널따란 복도를 가로질러 거울 앞에선 시문은 연성력을 끌어올려, 왼쪽 눈에 집중시켰다.

키잉.

특유의 이명과 함께 활성화되는 오딘의 눈.

황금색의 마법진이 겹겹이 눈앞으로 떠오른다.

그것은 이전까지와 어떤 차이점도 없었으나.

스륵.

황금빛의 눈동자 정중앙을 가르고 나타나는 동공은 달랐다.

그래.

회귀 전 자신을 죽이려 들었던 그 검붉은 거대 눈알처럼.

파충류의 그것으로 변해 버린 눈 모양은 당당하게 그 존재감을 나타내고 있었다.

"도무지 사용법을 모르겠단 말이지."

시문의 고개가 옆으로 슬쩍 기울고.

사인이 활성화된 오딘의 눈 역시 기우뚱 기울었다.

'아티팩트가 아니고서야, 보통 획득된 특성이나 능력은 자동으로 사용할 수 있기 마련인데....'

마치 누가 알려 주지 않아도 몸을 움직이고 호흡을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능력의 사용법을 알아야 정상이었거늘.

이놈의 사안은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뭐, 어떻게든 알게 되겠지."

작은 숨을 내쉰 시문은 오딘의 눈을 비활성화했다.

"그나저나...."

그러곤 창밖의 화려한 야경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골드 데뷔전이라니. 깜빡하고 있었네."

눈앞으로 둥실 떠 있는 메시지창이라고 해야겠지.

[누적 데이터를 기반, 플레이어 김시문의 다음 아레나는 '골드 데뷔전'으로 매칭됩니다.]

골드 데뷔전.

골드 랭크에 막 들어선 플레이어들이 치르는 첫 아레나에 한정해 매칭되는 아레나.

하나 아무나 매칭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MMR기준으로 상위 500명만 뽑혔었지?'

그게 배치고사건, 승급전을 치르고 올라온 사람이건 상관없다.

오로지 MMR기준으로 상위 500명을 뽑았고, 뽑힌 이들은 이렇게.

[데뷔전까지 남은 시간 22시 27분.]

데뷔전까지 별도의 아레나 진행 없이 대기해야만 했다.

물론 500명이 모두 매칭되지 않았다고.

대기 시간이 늘어나는 경우는 없었다.

애당초 나라마다.

그리고 승급한 플레이어들에 따라, 참가 인원이 매번 달랐으니까.

'플래티넘의 데뷔전은 국가 단위라 보통 풀매칭이 되는 편이지만, 한국은 보통 100명 선이었지?'

플래티넘부터는 전 세계 매칭이 이루어지니, 매칭 인원은 매번 풀.

반면 한국은 평균적으로 100여 명 정도의 인원으로 이루어졌다.

문제는.

'대부분이 3인 파티로 나오겠지.'

이상하게도 갤럭시 아레나는 이 데뷔전을 최대 3인파티까지 허용해 주었고.

덕분에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듀오나 트리오.

즉 2인이나 3인 파티 이상으로 데뷔전을 참가한다는 것이다.

덕분에 사이가 앙숙인 플레이어나 길드가 서로 파티를 하는 진풍경도 볼 수 있었다.

"뭐, 크게 상관은 없지."

시문은 무심하게 메시지창들을 한쪽으로 치웠다.

이전에도 플래티넘급의 활약을 했던 자신이다.

이번 아레나로 12렙업이라는 폭업에 티아메트의 피로 한층 더 스펙업까지 하지 않았나?

오만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파티들이 그다지 무섭지는 않았다.

골드 최상위권이 와도 자신을 어쩌진 못할 테니까.

단지 좀 아쉬웠다.

'말숙이도 같이 데뷔전을 돌렸으면 좋았을 텐데.'

이제 마력불능도 회복되었는데.

옛 친우와 함께 싸울 수 없다는 게 말이다.

'좋게 생각하자. 어차피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니까.'

전생에 고말숙은 천마신공을 익힌 후, 다이아까지 1등을 놓치지 않았다.

따라서 천마와 이어만 주면 금방 자신의 랭크까지 따라올 터.

"읏차! 데뷔전까지 연구실이나 마저 세팅하자."

힘껏 기지개를 편 시문은 연구실로 걸음을 옮겼다.

* * *

늦은 시각.

밤에도 기업의 건물에 불이 켜져 있는 게, 대한민국에선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으나.

그것이 대한민국에서 손에 꼽히는 대길드.

특히나 성삼 다음이라고 손꼽히는 신화 길드의 건물 최상층의 불빛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후...."

깊은 한숨.

8 대 2의 포마드라는 고전적인 헤어스타일이지만.

"멤버는 이게 끝인가?"

중년의 나이임에도 날렵하게 뻗은 눈매에 콧대, 턱선이 더해진 남성은 촌스럽다는 말 대신.

미중년이라는 단어가 절로 튀어나오게 만들었다.

그런 남성의 고풍스러운 책상 앞으로.

"예, 이번 데뷔전의 참가 멤버는 보신바 2명이 끝입니다."

깔끔한 정장 차림의 남성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키가 커서일까?

고개 숙인 남성의 눈엔 [신화 길드 마스터 고창진]이라는 명패만이 보였다.

다시 고개를 들자.

"흠."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린 채, 검지로 보고서를 톡톡 두드리는 길마 고창진의 모습이 보였다.

보고를 하는 남성은 본능적으로 손아귀에 땀이 배는 걸 느꼈다.

단순히 눈앞의 미중년이 1세대 플레이어이자, 다이아 랭크의 실력자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기분이 많이 안 좋으시군.'

그 역시 1세대 플레이어로서.

오랜 세월 모셔 온 이의 기분이 무척이나 좋지 않다는 걸 눈치챈 것이다.

"하광일."

"예."

"최진수는? 보고서에 보이질 않는데."

왜 보고서에 기재되어 있지 않은지는 뻔히 알 텐데.

굳이 되묻는 고창진에 하광일은 목울대를 꿀렁였다.

"그것이...."

이내.

"길드 가입 결정을 보류했다고 합니다."

"보류해?"

힘겹게 답한 하광일에 고창진의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일전의 아레나가 요인이었나 봅니다."

"일전의 아레나? 아, 그 하수도의 서바이벌 말이로군."

"예."

고창진의 기분이 좋지 않아서일까?

하광일은 고작 실버 랭크의 아레나를 저 철혈의 사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에 의문을 품지 못했다.

"사실상 2등으로 골드 승급은 치렀다곤 하나, 스스로의 부족함을 많이 느꼈다는군요. 해서 수련에 더 집중하겠다고 합니다,"

"수련이라?"

플래티넘도 아닌 고작 실버.

이제야 겨우 골드로 승급한 애송이 주제에 수련을 논하다니?

1세대임에도 현역을 뛰는 플레이어의 입장에선 분명 같잖은 말에 불과할 텐데.

고창진의 눈빛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참고로 저희쪽 지원 조건이 딱 저번 아레나까지라, 길드 차원에서의 지원은 만료되었습니다."

"마음에 드는군.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아."

"예?"

"최진수의 지원을 1년 더 연장해라. 이번 데뷔전을 우리 쪽 유망주들과 함께한다는 조건으로."

"하지만 길드 마스터님, 1년은 지출이 너무 큽니다! 애당초 길드원도 아닌데, 지금까지 유망주급의 지원을 해 주는 것만으로도 과한 처사가!"

하광일이 다급하게 말을 이었으나 그뿐.

"그럼 용병이라도 쓰자는 건가? 데뷔전에 용병으로 쓰일 놈은 있고?"

이 철혈의 사내는 젊은 시절부터 한결같은 면이 있었고.

"그건...! 알겠습니다."

밑바닥부터 신화 길드를 함께 일으킨 하광일은 그런 고창진의 면모를 잘 알았기에.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하지만 용병으로 쓸 인물이 아예 없진 않습니다."

마냥 동의하지만은 않았다.

1년치 유망주급의 지원은 큰 지출을 각오해야 했으니까.

"누구지?"

"이번 서바이벌에서 일대일로 최진수를 꺾은 플레이어입니다."

이제 막 하광일의 품에서 관련 서류가 나오고 있건만.

"아아, 김시문 말이로군."

고창진은 이미 서류의 내용을 아는 눈치였다.

그에 하광일은 눈을 끔뻑였다.

"아는 플레이어입니까?"

"아마 '알았던 플레이어'라고 해야겠지. 나름 유명했으니까."

"유명했다고요?"

하광일의 얼굴에 의문이 더해진다.

그럴 수밖에.

비록 길드장 고창진보다 실력이 뒤처진다곤 하나.

그 역시 1세대의 다이아 랭크 플레이어 아닌가?

"자네는 모를 수 있겠군. 하긴, 애당초 상류층에서도 쉬쉬하던 내용이니."

고창진의 의자가 슬쩍 돌아간다.

그는 어둑한 밤하늘 아래로 반짝거리는 야경을 내려다봤다.

"자네, 전대 협회장을 기억하나?"

"못할 수 없지요. 그는 최강의 플레이어였으니까요."

감히 길드 마스터를 앞에 두고 다른 이를 최고로 칭하다니.

오랜 동료의 당돌함에 고창진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래, 강하기는 더럽게 강했지. 그리고 그 핏줄도 마찬가지야."

"김시혁을 말하는 거라면... 어? 잠깐. 김시혁? 김시문?!"

하광일의 눈이 부릅떠진다.

"자네 생각이 맞아. 김시문, 이자도 전대 협회장의 아들이지."

"하, 하지만. 전대 협회장의 아들은 김시혁 하나이지 않습니까? 거기에다 나이는 김시문이 더 많습니다만."

"뻔하지. 결혼도 하기 전에 애를 만든 것 아니겠나?"

그 말에 하광일의 입이 쩍 벌어진다.

누가 들어도 놀랄 비사이건만.

"이상할 것도 없지. 능력도, 얼굴도 부족함이 없는 사내다. 젊은 날의 혈기를 주체할 이유가 무엇이 있나?"

"그, 그 말씀은 김시문 플레이어가 전대 협회장의 사생아라는...."

"그렇지."

고창진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정말 각성이 혈연과 연관이 있는지는 몰라도, 그 김시문이라는 사생아는 상당한 초기 스탯을 타고났거든."

"초기 스탯이요?"

"그래. 마법계에다 마력 스탯이 무려 10이었지."

"세상에!"

하광일의 얼굴에 경악이 깃든다.

그럴 수밖에.

"지금도 최대 스탯인 10스탯으로 각성하는 이들이 드문데...."

귀하다는 마법계.

그것도 마법계의 핵심 스탯인 마력을 최대치로 각성하다니?

"엄청나군요. 혹시 특성은 뭐였는지 아십니까?"

"아니, 특성은 알려지지 않았다."

"예? 혹시 사생아라서입니까?"

"그것도 있겠지만... 뭐랄까. 다들 알아보기도 전에 망가져 버렸거든."

"망가졌다고요?"

"자네도 알겠지. 10년 전 벌어진 그 테러 사건 말일세. 그 후로 마력불능에 걸렸다더군."

"아."

하광일이 짧게 탄식한다.

마력불능.

현존하는 아레나 질병 중 가장 최악의 질병으로 전 세계를 통틀어도 몇 없는 희귀병.

하필이면 사기적인 각성을 하고, 그런 지독한 병에 걸렸단 말인가!

탄식하던 하광일의 얼굴이 빠르게 굳었다.

"잠깐. 그 말씀은?"

"그래, 저렇게 활동한다는 건 마력불능을 회복했단 거겠지. 그리고 그건."

야경을 바라보던 고창진의 시선이 하광일을 향했다.

"이번 암시장에 풀린 마력경화증 치료제와도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지."

김시문의 활동과 마력경화증 치료제의 등장 시간이 너무나 공교로우니까.

하광일 역시 그 부분을 눈치채고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김시문을 영입해 봐야겠군요. 그럼 치료제에 대한 정보도...."

"관두게. 그냥 최진수에게만 집중하도록."

"어째서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이미 승급전때 신호는 보내지 않았나? 보아하니 답도 오지 않은 거 같은데."

"서, 설마! 김시문의 방송을 직접 보신 겁니까?"

고창진의 입에선 어떤 대답도 나오지 않았지만.

이미 대답을 들은 것과 다름이 없는 하광일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손에 쥔 서류를 내려다봤다.

'창진 형님이 고작 실버의 아레나 따위를 보신다고?'

분명 현 국내의 실버 중에선 김시문이 가장 잘나기는 했다.

자신 말고도 해외의 길드들이 후원으로 접선해 올 정도로.

아마 성삼을 비롯한 몇몇 길드들은 진작에 김시문과 접촉했을 가능성이 높겠지.

하지만.

'세상을 넓고 실력자는 많아.'

이미 플레이어들끼리도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는 시점에서, 김시문이라는 플레이어는 빛이 나지만 그뿐.

1세대를 풍미하고 신화 길드라는 거대 길드를 일궈 낸 저 사내가 직접 눈독을 들일 만한 인물은 아니라고.

그렇게 판단했었는데.

'김시문에 대한 평가를 전면 수정해야겠군.'

랭커급이 아니면 굳이 아레나 방송을 챙겨 보지도 않는 고창진이다.

그런 그가 고작 실버의 방송을 봤다는 건, 결코 쉽게 넘길 사안이 아니었다.

급작스레 생각에 빠진 하광일을 보며.

고창진은 앞에 놓여 있는 보고서를 흘낏했다.

"이번 데뷔전에서 우리 쪽과 경쟁할 만한 이들이 있나?"

"현재까지는 전갈 길드밖에 없습니다. 성삼의 경우, 이번 기수들이 그리 잘나지 못하더군요."

"전갈 길드라... 김종준, 그놈이 주제에 비해 참 인복을 타고났어."

"앞뒤 가리지 않고 받으니, 그럴 확률도 높은 것 아니겠습니까?"

"그도 그렇군."

전갈 길드의 부길드 마스터를 뉘 집 개처럼 부르는 고창진.

이내.

"아마 김시문도 이번 골드 데뷔전에 참가할 거다."

두 손으로 턱을 괸 고창진은 진중한 얼굴로 말을 이었고.

"장지수와 차현우만으론 놈에게서 버티지도 못할 거다. 최소한 순위권 방어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최진수를 합류시키도록."

"죄송합니다만, 김시문 플레이어가 아무리 강해도 최진수까지 가미된 저희 라인업을 이길 순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광일 역시 같은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당연했다.

당장 전갈 길드를 제외하곤.

이번 데뷔전에서 신화 길드에 위협이 될 만한 기수는 없었다.

그나마 전갈 길드의 기수들은 위협적이긴 했으나 그뿐.

개개인의 무력은 물론, 직업 밸런스까지 맞춰진 이번 신화 길드의 기수를 상대로는 어림없었다.

하나.

"그런가?"

저 철혈의 사내는 생각이 다른 것일까?

"그럼 광일이, 오랜만에 나와 내기나 하겠나?"

한쪽 눈썹을 슬쩍 치켜올린 고창진은 슬쩍 웃었다.

"내가 진다면, 자네가 그토록 권했던 그 유치한 길드 홍보 영상에 출현하도록 하지."

"좋습니다, 형님. 제가 지면 올해 사회 기부금을 두 배로 늘리겠습니다."

"두 배라. 후회할 텐데?"

"형님과 달리, 전 부길마로서 우리 자식들을 믿습니다.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하광일이 방을 나선다.

후우.

어느새 담배를 빼어 문 고창진은 자욱한 연기를 뿜어내며 의자에 몸을 턱하니 기댔다.

'우리 자식이라... 건방진 녀석. 확 길드 마스터를 넘기고 좀 쉬어버려야 정신을 차리지.'

금세 흩어지는 담배 연기.

그 사이로 멍하니 있던 고창진의 시야에 한 사진이 들어왔다.

지금보다 젊은 시절의 자신.

그리고 그 품에 안겨 환하게 웃고 있는 날렵한 눈매를 지닌 소녀.

그것을 가만 보던 고창진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제58화

58화. 데뷔전 (2)

[한국의 골드 랭크 데뷔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참가자 소환 중.]

국내의 온갖 유망주들이 참전하는 골드 데뷔전.

앞으로 갤럭시 아레나를 이끌 인재들이 자신을 선보이는 자리이기도 했다.

덕분에.

-드디어 골드 랭크 데뷔전이 시작되는군요!

-맞습니다! 드디어 이날이 왔어요!

데뷔전은 대한민국에서 최고 시청률을 자랑하는 국가대표 아레나.

통칭 '국아'의 메인 코너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이번 데뷔전에도 꽤 많은 유망주들이 있다죠?

-그렇습니다. 저번 골드 랭크 데뷔전보다 많은 플레이어들이 포진되어 있습니다.

-아. 방금 참가 인원수가 들어왔는데요. 우리 송 해설님 말씀대로, 참가 인원은 총 110명. 평균을 넘은 인원수입니다!

한국의 유명 MC이자 국아의 메인 MC로 자리 잡은 최강엽.

과연 그 자리를 독차지할 만큼.

최강엽은 강약을 조절해 가며 매끄러운 어조로 시청자들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그럼 이번 데뷔전의 참가자들을 안 살펴볼 수 없는데요, 송 해설님?

-이거 말씀드리기가 조심스럽습니다만... 다들 4년 전의 골드 데뷔전을 기억하시겠죠?

-기억하다마다요! 대한민국에서 역대 최대의 랭커들을 배출해 낸 데뷔전 아닙니까?

-맞습니다. 참가자만 200명이 넘은, 소위 별의 세대라고 불렸지요.

별의 세대.

평균 100명대를 오가는 대한민국의 골드 랭크 데뷔전에서 무려 200명을 넘긴 세대.

애당초 데뷔전이라는 게 최상위권만 참가할 수 있는 아레나임을 고려해 보면.

가장 뛰어난 플레이어가 많았던 세대임을 알 수 있었다.

-이거 우리 송 해설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으신지 감이 잡히는데요?

-역시 최MC! 눈치 빠른 분은 못 속이겠군요. 맞습니다. 별의 세대만큼이나, 이번 골드 랭크 데뷔전의 참가자들의 수준이 높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허어! 우리 송 해설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정도면 다들 아주 핫한 모양이군요.

최강엽이 강한 리액션을 취하자, 송 해설은 곧장 자료 화면을 띄웠다.

화면엔 각 길드의 로고들이 순서에 따라 나누어져 있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현 골드 데뷔전을 치르는 길드 중 가장 저력이 강력한 곳은 두 곳입니다.

송 해설은 로고들 중 가장 위쪽에 위치한 두 길드를 짚었다.

하나는 전갈의 형태이고, 다른 하나는 방패 뒤로 검 2개가 꽂힌 형태였다.

-바로 전갈 길드와 신화 길드죠.

-오오! 저도 들은 적 있습니다. 전갈 길드에는 마법계의 떠오르는 샛별인 유아연, 유아준 플레이어가. 신화 길드는 최진수를 필두로 장지수, 차현우 플레이어가 있다죠?

-맞습니다. 언급하신 선수들 모두 유망주들 중 최고로 평가받고 있는데요. 다만,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게 뭐죠? 송 해설님?

미소는 짓고 있지만, 최강엽은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되물었다.

그 얼굴이 꼭.

'송재경, 너 뭐 하는 짓이야? 왜 대본에도 없는 소릴 해?'

라는 표정이었다.

-마법계의 떠오르는 샛별로 유아연, 유아준 플레이어를 언급하셨는데... 사실 떠오르는 샛별은 따로 있거든요.

하나 안타깝게도.

방송 경력이 아닌 플레이어 경력으로 해설이 된 송재경은 말주변은 있을지언정.

눈치는 그리 좋지 않았다.

정확히는 모른다고 봐야겠지.

플레이어 출신인 그로선.

제작이나 출연진 등 방송에 영향력을 끼치는 거대 길드들과의 복잡한 관계를 알 리가 없을 테니까.

-왜 이 선수가 자료 화면에 없는지 다소 의문입니다만, 요즘 마법계 출신의 유망주로 다들 눈여겨보는 선수는 따로 있습니다.

-그, 그렇군요. 아마 최근에 등장한 플레이어다 보니 자료가 없는 거 아닐까요?

-아! 그럴 수 있겠네요. 그는 어디에 속하지도 않은 솔랭 전사니까요. 바로 김시문이라는 플레이어입니다.

기어코 이름까지 언급해 버리는 송재경.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쉰 최강엽은 프로답게.

-아아! 저도 누군지 압니다. 최근에 심해 방송으로 화제가 된 분이시죠?

-맞습니다. 그가 보여 준 무력은 정말 경이로웠지요.

빠르게 표정을 관리하며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대체 무슨 특성을 지니고 있는지는 몰라도, 손가락을 튕길 때마다 펼쳐지는 이능이 아주 기가 막히거든요. 거기에다 전투는 또 좀 잘합니까?

-동감합니다. 그가 마법계이길 먼저 밝히기 전까진 다들 전투계인 줄 알았다죠?

-맞습니다. 플래티넘인 저 역시도 그가 격투계 쪽인 줄 알았거든요.

그리 신이 나는 걸까.

옆에서 썩어 가는 최강엽의 속도 모르고.

송재경 해설은 눈을 반짝이며 언성을 높였다.

-그런데 마법계라니? 거기에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1등을 놓치지 않았죠. 실제로 저번 승급전을 기점으로 수많은 길드들의 러브콜까지 받았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이번 관전 포인트에는 언급하신 김시문 플레이어도 들어가겠네요.

-당연합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기대되는 플레이어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간의 행보도 그렇고. 길드도 없으니, 아마 단독으로 참가할 거 같거든요.

-오오! 1인 참가자라? 그 부분은 확실히 기대가 됩니다. 하지만 자료가 준비되지 않은 관계로, 우선 자료가 준비된 길드의 유망주들부터 보시겠....

자연스럽게 송 해설의 말에 호응하며 주제를 돌려 버리는 최강엽.

그리고 그런 국아를 보던 한 남성은.

"X발, 어이가 없네."

욕설과 함께 인상을 찌푸렸다.

"넌 왜 벌써부터 짜증이니? 아레나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그런 남성의 뒤로 다소 높은 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성별만 다를 뿐.

남성과 똑 닮은 얼굴의 여성이 시큰둥하게 말을 뱉은 것이다.

"누나, 방금 국아 못 봤어? 우리 말고 마법계에 떠오르는 유망주가 따로 있다잖아!"

"이번 데뷔전 해설은 송재경 아냐? 1세대면서 플래티넘에서 허우적대다 은퇴한 인간 말을 왜 들어?"

"나야 안 듣지! 저걸 보는 멍청한 시청자들이 문제지!"

"아준아~ 아준아. 넌 여론을 그렇게 모르니?"

한숨을 푹 내쉰 여성.

유아연은 동생 유아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대중은 눈에 보이는 거밖에 몰라. 그게 신경 쓰이면 네가 보여 주면 되는 거고."

"나도 알거든? 그냥 저런 말에 괜히 길드에서 말이 나올까 봐 하는 소리지."

"푸훕! 야, 이번에 골드 이하 유망주들 길드에서 대대적으로 싹 치워 버린 거 모르냐? 우리만 유망주로 남겨 둔 이유를 모르겠냐고."

"알아. 그리고 우리 전갈 길드의 유망주를 싹 갈아 치운 새끼가, 이번에 참가한다는 것도 알지."

불만스러운 얼굴로 툭 말을 내뱉는 유아준.

그에 유아연의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아아~ 이제 알겠다. 우리 동생, 쫄았구나?"

"쪼, 쫄긴 누가! 개소리하지 마!"

"어이구, 그러셔?"

평소 같았으면 좀 더 놀려 먹겠지만.

점점 눈꼬리가 사나워지는 남동생에 유아연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데뷔전이 코앞인데 괜히 컨디션 조지면 곤란하지.'

그녀 역시 긴장이 안 되는 건 아니었으나, 결국 유망주인 입장이다.

길드 차원에서 가능성을 입증받고 대대적인 지원을 받았으니.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보여 줘야 하는 것이다.

"아준아, 그 김시문인가 뭔가 하는 놈의 대처법은 길드에서 이미 다 준비해 줬잖아. 기억 안 나?"

찬찬히 달래는 어조로 말하는 유아연.

그녀는 여유롭게 손목의 팔찌를 흔들었고.

"...그렇기는 하지."

유아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봤다.

그의 손목엔 누이와 똑같은 모양의 팔찌가 착용되어 있었다.

"거기에다 걔 솔로큐로 참여할 거라며? 우린 듬직한 고기방패까지 있는 풀 파틴데 뭐가 문제야?"

곁에서 말없이 서 있는 판금의 덩치를 퉁퉁 두드리는 유아연.

그에 일그러졌던 유아준의 입가가 부드럽게 풀렸다.

"하긴. 제까짓 게 아무리 잘났어도, 우리의 연계 마법을 어찌할 순 없겠지."

"그래. 그러니까 그런 애는 신경 쓰지 말고, 신화 길드 쪽이나 신경 써."

"거긴 그 최진순가 뭔가 하는 무식한 짐승만 조심하면 되잖아."

"다른 둘은 노답인 줄 아니? 궁수에다가 힐러잖아. 우리도 이제 골드야. 직업 조합도 신경 써야 한다고."

"알았어. 잔소리는."

티격태격 말을 나누는 남매의 머리 위로.

[참가자가 모두 소환되었습니다.]

[골드 랭크 데뷔전을 시작합니다.]

일련의 메시지창이 떠올랐고.

솨아아아아.

밀려드는 물소리와 함께 주변이 일변했다.

* * *

들려오는 소리만큼이나 시원한 바람.

그 속에 섞인 청량함과 짭짤함이 지속적으로 코를 간질인다.

어딜 보아도 푸르고 드넓은 바다가 가득한.

마치 휴양지를 연상시키는 절경에 감탄이라도 해야 했건만.

"바다 맵이라...."

시문의 얼굴은 시큰둥하기만 했다.

-ㅋㅋㅋㅋㅋㅋ 맵 보소.

-와, 데뷔전에 바다라니. 이거 처음 있는 일 아님?

-ㄴㄴ. 미국은 몇 년 전에 바다 맵으로 데뷔전 치른 적 있음. 물론 그 뒤론 없지만.

-더 충격인 건, 이분 솔로큐로 참여했다는 거임.

-그럼 소속 길드도 없는데 당연한 거 아님?

-뭐래. 이 사람 정도면 대길드들도 용병으로 쓰려고 기를 쓸 텐데. 너 플레이어 아니지?

-ㄹㅇ ㅋㅋㅋ. 저번에 길드들 후원 열차가 그냥 영입 목적만 있는 줄 아나.

-일반인 검거 완료!

채팅창의 반응도 시문과 비슷했다.

당연했다.

바다는 플레이어들이 가장 꺼리는 맵 중 하나였으니까.

'그나마 다행이라면 육지가 꽤 많다는 건데.'

바다 맵치고 꽤 즐비한 섬들이 그나마 안정을 준다고나 할까?

물론 그렇다고 기뻐하는 플레이어들은 없을 것이다.

'섬들 사이 간격이 좀 멀어.'

섬들 사이의 거리는 단순 수영으로는 시간이 좀 걸릴 수 있을 만한 수준이니.

특별한 수영 능력이 없다면, 결국 바다 맵에서 갖는 페널티는 여전했다.

그때.

-그래도 오빠한테 맵은 별 의미가 없잖아?

가슴 정중앙에서 뚜렷한 이명이 들려왔다.

데뷔전 직전, 잠에서 깨어난 현자의 돌이었다.

-수중 장비들을 연성해도 되고, 아님 인체 연성을 해도 되잖아.

'그렇긴 하지.'

현자의 돌의 말대로.

연금술부터 인체 연성까지.

어지간히 기이한 맵이 아니고서야, 맵으로 받는 페널티는 사실상 없는 시문이었다.

-근데 오빠, 데뷔전이면 보상이 꽤 좋지 않아? 다른 차원의 아레나들은 그렇던데.

'그렇지. 꽤가 아니라 상당히 좋아.'

오직 해당 구간의 최상위권 플레이어들만 단발로 참여할 수 있는 데뷔전.

당연히 그 보상은 일반적으로 얻기 힘든 것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특히나 이번 데뷔전의 1등 보상은 시문으로서도 그냥 넘길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번 데뷔전의 종목은 서바이벌이고, 참가 인원은 110명입니다.]

[지역은 '떠오른 군도'입니다.]

[다른 플레이어를 모두 처치하거나, 제한 시간까지 살아남으세요.]

'전력을 다해야겠지.'

따악.

알림창이 사라질 틈도 없이 곧바로 튕겨지는 손가락.

-오오! 이 형 움직인다!

-뿌뿌~ 살인전차 나가요!

-병X아, 전차가 아니라 잠수함이겠지~.

-위에 둘, 개쌉노잼.

-22. 검은 염소 누님! 노잼 드립들 채금 좀 부탁드려요!

그와 함께 시문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풍덩!

바닷속으로 몸을 던졌다.

* * *

"빌어먹을! 하필이면 바다 맵이 처걸려선!"

거친 어조로 짜증을 내뱉는 갑옷의 남성.

물속이라서 그런 걸까?

남성의 목소리는 이질적으로 왕왕 울렸다.

그에 곁에 활을 메고 있던 여성이 입을 열었다.

"야, 우리는 그래도 사정이 나은 편이야. 마법사가 있잖아."

"그, 그렇기는 하지만...."

여성의 말에 대번에 수긍하는 남성.

이어 팀의 가장 선두에 있던 로브의 여성이 말했다.

"답답하겠지만 조금만 참아. 지금 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잘 알잖아?"

그녀의 말대로.

지금 수영이나 잠수와 관련된 능력이 없는 이들은, 육지인 섬을 차지하려고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서바이벌의 기본적인 전략도 없이 그저 소모전만 치르고 있지. 이대로 존버했다가, 전투가 끝나가는 쪽부터 치는 게 맞아."

"나도 언니 말에 동의해. 어차피 유망주들끼리 매칭된 거잖아? 무조건 컨디션 차이로 승패가 갈릴 거야."

고개를 끄덕인 로브의 여성은 물 위로 가장 가까운 섬을 바라봤다.

물속임에도.

쿠그그.

섬에선 폭음과 진동이 끊이질 않았다.

"보아하니 싸움이 길어질 거 같은데. 조금만 더 기다리자. 어차피 내 특성은 물 관련이라, 방울 마법을 유지하는 데 마력도 안 들어."

그럼 이쪽은 풀 컨디션을 유지한 상태로.

이제 막 싸움이 끝나 지칠 때로 지쳐 있는 팀을 별다른 피해 없이 쓸어버릴 수 있으리라.

"알았어, 누나. 그럼 도핑은 미리 해 둘까?"

"그게 좋겠네. 물약도 미리 마셔두자. 어차피 이 방울 안은 물 위랑 다름없...."

그렇게 3명의 남녀가 물약을 꺼내 마시려던 그때.

꾸르르르.

물살을 가르며 거품이 이는 소리가 들려왔고.

"언니! 뒤!"

궁수라 감각이 예민한 것일까?

어느새 활을 빼어 든 여성이 시위를 당기며, 로브의 여성에게 소리쳤다.

하나.

빠각.

수중임에도 묵직하게 들려오는 타격음.

그와 함께 로브의 여성이 죽은 생선처럼 배를 뒤집으며 물 위로 떠올랐다.

즉사한 것이다.

당연히 로브의 여성이 유지하던 마법은 사라졌고.

"커, 커헉!"

"으읍!"

두 남녀는 갑작스레 들이닥치는 물에 코와 목을 쥐었다.

그러나.

부그르르르!

이곳은 각 길드의 유망주들이 한데 모인 데뷔전.

두 남녀는 허연 거품을 줄줄 내뿜으면서도.

악에 받친 눈으로 의문의 기습자를 파악했다.

회색 후드티를 눌러쓴 남성이었다.

'미친! 장비도 없이 혼자서 덤빈 거야? 잠깐.'

'건방진! 죽여 버리겠... 어라? 저, 저 사람 설마!'

그리고 의문의 기습자가 누군지 알아차린 순간.

따악.

물속임에도 손가락이 튕기는 소리가 선명히 들려왔고.

그것이.

빠각!

그들의 마지막 기억이 되었다.

제59화

59화. 데뷔전 (3)

한국의 골드 랭크 데뷔전.

그것을 중계하는 1번 채널 국아의 화면은 시시각각 변화했다.

-기나긴 접전 끝에 11번 섬의 승자가 결정되었습니다! 하지만 1명이 중상인 상황인데요!

-7번 섬에서 다시 한번 전투가 일어납니다!

어떨 땐 2분할, 또는 4분할로.

결정적인 순간이거나 강렬한 전투가 벌어질 땐 화면 통째로.

국아의 인기 콘텐츠인 만큼, 화면의 전환은 매끄러우면서도 재빨랐고.

그에 맞춰 MC와 해설 역시 쉬지 않고 멘트를 이어 갔다.

특히나.

-아! 이렇게 한성 길드가 무너집니다!

-신화 길드 강합니다. 너무 강해요!

-이게 말이 되는 전투력인가요?

국아의 화면은 대부분.

사실상 전부라고 봐도 무방할 만큼, 유수 길드 출신들에 한해서만 송출되고 있었다.

당연했다.

애당초 이 데뷔전에 참가할 수 있는 플레이어 자체가 길드의 유망주 시스템을 거친 이들뿐이었으니까.

물론 무소속 플레이어가 송출되는 예외가 있기도 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아아! 김시문 플레이어, 또 한 팀을 몰살했습니다!

-제가 시작부터 누누이 말씀드렸죠? 이번 데뷔전에서 가장 포인트가 될 사람은 바로 김시문이라고 말이죠!

바닷속에서 존버 중이던 3인 파티를 쓸어버리는 시문.

-김시문 플레이어는 무슨 인어라도 되는 걸까요? 물속에서도 어마어마한 움직임을 보입니다.

-귓가에 아가미 같은 게 보이는데. 아마 아티팩트나 관련 능력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아! 마무리까지 너무 완벽해요! 저게 정말 갓 골드에 오른 플레이어가 맞습니까?

그 광경에 송 해설은 침까지 튀겨 가며 말을 멈추지 않았고.

-그, 그렇군요. 확실히 대단한 활약을 보이는 김시문 플레이어입니다.

MC인 최강엽은 앞에 있는 스태프들의 눈치를 보며 멘트를 이어 갔다.

-최 MC님 기억하십니까? 당장 4년 전의 별들의 세대에서도 데뷔전에 저런 모습을 보여 준 플레이어가 있었죠!

-모를 수가 없지요. 지난 국가대표 선발전 이후, 검성의 칭호까지 받은 김시혁 님 아닙니까?

지난 국가대표 선발전 이후.

검성의 칭호를 받은 김시혁.

그 역시도 데뷔전에서 무소속으로 파티를 몰살하는 맹활약을 펼쳤었다.

-뭐라 선뜻 말씀드리기가 무섭습니다만, 개인적으로 당시의 김시혁 님보다 지금의 김시문 플레이어가 더 대단하다고 생각됩니다.

-워우! 송 해설님, 너무 위험한 발언 아닌가요?

장난스럽게 멘트를 까는 최강엽.

그러나 그의 두 눈엔 진심으로 놀란 감정이 가득했다.

그럴 수밖에.

현재 검성 김시혁의 위상은 1세대의 쟁쟁한 플레이어들마저 앞질러 버린 상태 아닌가?

말의 옳고 그름을 떠나 김시혁의 팬들까지 생각한다면.

방송에서 이런 멘트는 상당히 위험하다고 볼 수 있었다.

-아! 오해는 없으셨으면 합니다. 골드 당시의 김시혁 님에 한해서니까요.

송 해설도 그런 위험성을 아는 것일까?

-아주 간단합니다. 아시겠지만 당시 김시혁 님께선 무소속이긴 해도 엄연히 파티를 맺지 않았습니까?

사례를 들어가며 찬찬히 말을 이었고.

-당시 최 MC께서 직접 중계하셨으니 아시겠지만, 김시혁 님은 이유정 님과 파티를 맺으셨죠.

-아... 기억이 납니다. 데뷔전 최초로 2인 듀오로 참여하셔서 화제가 되었죠. 물론 2인으로 우승이라는 기록 역시 만드셨고요.

MC 최강엽은 앞에 포진된 스태프들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맞습니다. 하지만 지금 김시문 플레이어를 보십쇼. 김시혁 님과 같은 무소속이지만, 데뷔전의 유일한 솔로 참가자이지 않습니까?

-그, 그렇군요. 이렇게 놓고 보니 확실히 납득이 가긴 합니다.

송 해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이었으니까.

애당초 이건 갤럭시 아레나에 대해 아냐 모르냐를 떠난 문제다.

조금의 머리만 있어도.

1인 참가와 파티 참가는 그 격이 다르다는 걸 모를 수 없으니까.

하지만.

-아! 전갈 길드의 활약도 어마어마하군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무언의 압박을 보내는 PD의 시선과.

절묘한 화면 전환에 최강엽은 식은땀을 흘리며 관심을 돌렸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렇습니다! 전갈 길드 역시 만만치 않죠. 특히 유아연, 유아준 남매의 연계는 세계로 나가도 손색이 없다고 볼 수 있지요!

방송 경험이 이번 해설 자리가 처음이어서일까?

송 해설은 별다른 의심 없이 또 다른 인재들의 활약에 목청을 높여 준다는 거였다.

그제야 풀리는 PD의 얼굴에.

-하하! 그 말씀을 들으니 이번 기수들이 펼칠 플래티넘 데뷔전이 무척이나 기대되는데요?

최강엽은 다시 본래의 페이스를 찾으며, 미소와 함께 멘트를 이어 나갔다.

* * *

"음... 생각보다 킬이 빡세네."

허공을 보던 시문의 눈매가 슬쩍 찌푸려진다.

그에.

"이 망할 놈이!"

"앞에 사람을 두고 뭘 보는 거야!"

성난 목소리의 두 남성이 날아들었다.

양쪽에서 목과 가슴을 노리며 파고드는 칼날.

좌우에다 서로 다른 급소를 노리는 치명적인 합공이었지만.

스륵.

시문은 물 흐르듯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피해 냈다.

언뜻 보면 타격 부위를 움직여 피해를 최소화하는 고급 기술 '흘리기'와 다름없는 모습.

물론 진짜 흘리기는 아니었다.

영약 섭취로 얻은 스탯 증가와 천마신공이라는 신공절학.

그리고 인체 연성까지 더해져, 그야말로 무식할 정도로 높은 스펙이 이루어 낸 회피였다.

하나.

"무, 무슨!"

"흘리기라고?!"

아무리 데뷔전에 참가하는 유망주라도 갓 골드인 플레이어가 그것을 구별할 리는 없을 터.

'설령 구별할 수 있다 한들, 달라지는 건 없지.'

시문은 무심한 얼굴로 두 검사의 빈틈을 타 주먹을 박아 넣었다.

쿠웅.

묵직한 쇳덩어리가 박히는 소리가 들려온다.

시문은 허공을 나는 두 검사에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쐐애액.

고개를 젖혀 날아드는 화살을 피하곤.

화살 방향으로 손가락을 튕겼다.

드드득.

순식간에 연성되며 솟아나는 돌가시.

"어림없어!"

그러나 궁수들이 으레 그렇듯이.

예민한 감각으로 솟구치는 돌가시를 피해 낸 그녀는 공중에서 회전하며 시위를 당겼다.

"어, 어느 틈에!"

기다렸다는 듯.

어느새 궁수의 눈앞으로 날아든 시문의 다리가 그녀의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우득.

힘없이 꺾이는 궁수의 목.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시문은 힘없이 떨어지는 궁수의 시체를 걷어차며, 다시 한번 공중으로 도약했고.

"큭...!"

"으윽!"

검을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키는 두 검사를 향해 날아들었다.

우웅.

천마신공의 구결에 따라.

현자의 돌로부터 시작된 저돌적인 마기는 이명을 토하며, 시문의 두 다리로 뻗어 나갔고.

천마신공(天魔神功).

격(擊) 패황쇄(覇皇碎).

콰아아아앙!

자칫 이 작은 섬이 내려앉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강렬한 폭음을 터뜨렸다.

몇 초가 흘렀을까.

자욱한 흙먼지가 걷히며 운석이라도 충돌한 것처럼 거대한 크레이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

-와... X발!

-저 기술은 진짜 볼 때마다 경이롭네.

-저거 주먹만으로 쓰는 기술이 아니었어?

-ㄴㄴ. 일종의 초식 같은데, 저런 건 응용하기 나름임.

-요즘 골드는 초식 응용도 할 줄 앎?

-님 눈엔 저게 골드로 보입니까?

잠시간의 정적을 겪고 우르르 올라오는 채팅창.

-님들 혹시 착각할까 봐 짚어 드립니다. 이분 마법곕니다. 전투계 아니에요.

-아 참 그랬지? 그걸 깜빡했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골드에서 허우적거리는 전투계는 그저 웁니다.

-여기 플래도 추가 좀요. ㅠㅠ.

하나같이 천마신공의 위력에 감탄하는 내용뿐이었지만.

정작 이 괴랄한 크레이터의 창조자의 얼굴은 그다지 밝지 못했다.

'마기 소모가 여전히 커.'

지난 일들로 연성력이 증가하며, 마기 스탯 역시 상당량 증가한 상태.

그럼에도 천마신공의 초식인 패황쇄는 제법 부담스러운 코스트로 다가왔다.

'아마 내가 연금술사인 것도 있겠지만... 성취도가 1성인 게 가장 크겠지.'

무공은 성취도가 올라갈수록 요구 마기량도 커지지만.

반대로 위력만 조절한다면, 높아진 성취와 더해져 소모량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었다.

'주소도 보내 놨으니까, 말숙이만 도착하면 다 해결될 문제긴 한데....'

턱을 톡톡 두드리던 시문은 아레나 보드를 열었다.

1위 – 유아연, 유아준, 강철민 15킬.

2위 – 최진수, 장지수, 차현우 12킬.

3위 – 김시문 9킬.

4위....

....

'여전히 3등인가.'

110명의 인원수를 고려해 보면 높았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무력이 있음을 고려해 보면 분명 이치에 맞지 않는 등수였다.

이유야 간단했다.

'한 손으로 열 손은 못 따라간다는 거겠지.'

1인 솔로큐.

아무리 강해도 결국 혼자라는 요소는 다른 파티를 이룬 이들보다 마이너스가 될 수밖에 없었다.

'다들 유망주라 그런가. 처리하는 데 시간을 잡아먹는 게 제일 큰 문제야.'

이곳이 데뷔전임을 고려해 보면 당연한 사실이었다.

해서 패황쇄와 같은 강력한 기술로 빠르게 처리하는 것이 베스트인데.

마기 소모도가 워낙 크니, 킬 수가 밀리는 것이다.

무엇보다 급한 건.

'참가자가 얼마 남지 않았어.'

당장 1등에서 3등까지의 킬 수만 따져도 36킬이다.

나머지 등수의 킬 수들까지 더하면, 벌써 참가자의 절반 이상이 사라진 상태.

고로 우승을 차지하려면 다른 이들이 남은 킬 수를 차지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쓸어버려야 했다.

'결국 업적 포인트 난사밖에 없나?'

뭐, 아깝지는 않았다.

애당초 전력을 다하려던 아레나였으니까.

단지 피 같은 업적 포인트를 소모전으로 사용하자니 아쉬울 뿐.

그때.

[열심히 응원봉을 흔들던 성좌들이 저들끼리 수군거립니다.]

[4명의 성좌들이 당신에게 미션을 겁니다.]

[미션]

-상위 서열의 네 성좌들은 각 차원의 정점에 있습니다. 그들은 당신 역시 그러기를 바랍니다.

이번 아레나인 '골드 랭크 데뷔전'에서 1등을 달성하십시오.

보상 : 업적 포인트 5,000

4명의 성좌들이 보란 듯이 미션을 걸었다.

미션을 확인한 시문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미션을 받았다.

'이러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시문은 곧장 손을 들어 올리곤, 현 상황에 맞는 연성물을 떠올렸다.

섬, 바다, 그리고 남은 킬을 독식할 수 있는 효율성까지.

마침 이 조건에 해당하는 연성물이 있었고.

-오빠답네. 이거면 여긴 확실히 쓸어버릴 수 있겠어. 준비할게.

아직 뭐라 말하지도 않았는데.

현자의 돌은 알아서 답을 하며 신호를 보내왔다.

[요구치에 맞는 연성을 이루기에는 연성력이 부족합니다.]

[현자의 돌이 부족한 등가교환을 성립시키기 위해, 업적 포인트 2,000점을 요구합니다.]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익숙한 메시지창이 눈앞으로 떠올랐다.

시문은 고개를 갸웃했다.

'2천 점이라고?'

아스트라페도 500점인데 이게 2,000점이나 든다니?

그런 시문의 의문을 예상했다는 듯.

-어쩔 수 없어. 원래는 아스트라페랑 동급이라 500점이면 되는데, 오빠는 여기 있는 섬들 전체를 노리잖아?

'그래서 저번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처럼 일시적으로 위력을 높였다?'

-응. 업적 포인트 대비론 비효율적이지만, 오빠가 원하는 위력을 맞출 순 있으니까.

현자의 돌은 조잘거리며 말을 이었고.

-이것도 사방이 바다라 엄청 싸게 먹히는 거야. 여기 섬 하나당, 아스트라페 한 자루씩 날린다고 생각해 봐.

'그렇게 말하니 확 와닿네.'

-그렇지?

시문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2천 점이 비싼 값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 값으로 섬 전체를 휩쓸 수 있다는 게 다행이지.

이내.

우웅.

'예'를 터치한 시문의 손끝으로 업적 포인트가 치환된 기운이 몰려들었고.

따악.

그것을 머금은 손가락을 튕기자.

솨아아아아.

시문이 있는 섬 주변의 바닷물이 요동쳤다.

그것은 고운 실크로 짜 낸 커튼처럼.

사방으로 펄럭거리며 섬을 집어삼키기 시작했고.

시문이 서 있는 땅마저 삼켜 버리며, 점점 높게 치솟았다.

한 가지 특이한 게 있다면 이 출렁이는 바닷물 위에서도.

시문은 여전히 바닥을 딛고 있는 것처럼 멀쩡히 서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시문의 앞으로.

스으으.

미스릴과 사파이어로 벼려 낸 듯한 막대가 솟아올랐다.

아스트라페와 같이 본래의 모습에서 다소 퇴보된 형태.

그러나 끝부분이 세 갈래로 갈라진 그것은 아스트라페와는 다른 존재감을 분명하게 표출했다.

그래.

마치 삼지창처럼 말이다.

[성좌 제우스가 흐뭇한 미소를 짓습니다.]

[성좌 포세이돈이 당신과 주변의 성좌들을 보며,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입니다.]

떠오르는 메시지들을 무시한 채.

시문은 세 갈래의 뾰족한 날 부분을 바다로 쑤셔 박곤 읊조렸다.

"전부 뒤엎어라, 트리아이나."

그러자.

쿠르르르르르르!

바다가 요동쳤다.

제60화

60화. 데뷔전 (4)

-아! 조현우 플레이어! 왼팔에 부상을 입었습니다!

-하지만 힐러인 장지수가 살아 있는 한 금방 복구될 테죠. 중요한 건 전방입니다. 이 전투의 구도는 최진수가 무너지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거든요!

-그렇겠네요. 2번 섬의 결말이 기대됩니다! 1위와 2위를 다투는 두 팀이니 말이죠!

현 1위인 전갈 길드의 유망주 팀과 2위인 신화 길드의 유망주 팀.

그 등수에 맞게 2번 섬에서 만난 두 팀은 치열한 접전을 펼치고 있었다.

-아! 또다시 마법을 시전하는 유아준!

-회복한 조현우가 견제 화살을 날려 보지만, 어림없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막아 내는 유아연!

-유아연의 센스가 무척이나 돋보입니다. 최진수와 맞붙는 탱커를 지원하면서, 유아준의 캐스팅까지 케어해 주고 있어요!

-이대로 유아준의 마법이 발현되면 전투 구도가 무너질 수도 있겠는데요?

-맞습니다! 슬슬 장지수 플레이어의 성력이 고갈 날 때가 되었거든요!

국아의 송출 화면엔 1, 2위를 다투는 두 팀의 전투가 쉬지 않고 이어지고 있었다.

그때.

쿠그그그그.

잦은 떨림과 함께 송출 화면이 떨려 오기 시작했다.

-뭐, 뭐죠? 갑자기 화면이 흔들립니다!

데뷔전을 중계하던 MC 최강엽과 해설 송재경은 서둘러 정면의 스태프들을 바라봤다.

혹여나 방송 사고인지를 체크한 것이다.

하나 어리둥절해하는 스태프들과 PD를 보아, 방송적인 문제는 아닌 모양.

그때.

송출되던 화면이 2, 4, 6 등 점차 나누어지더니, 얼마 가지 않아 데뷔전 지역인 떠오른 군도 전체를 비추었고.

-이럴 수가!

-해, 해일입니다! 사방에서 엄청 큰 해일이 다가오고 있어요!

똬리를 튼 뱀처럼.

떠오른 군도 전체를 휘감으며, 거대한 해일이 다가오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당연히.

-송 해설님,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원래 떠오른 군도에 이런 해일이 출현했던가요?

-저, 저도 처음 보는 광경입니다! 물론 맵마다 재해 같은 이벤트들이 있기는 해도, 떠오른 군도가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1세대 플레이어인 송재경 해설도 겪어 본 적이 없던 현상.

-아! 7번 섬에 이어 4번 섬까지! 군도 전체가 해일에 집어삼켜지고 있습니다!

-섬을 차지한 팀들이 허무하게 쓸려나갑니다. 속수무책이에요!

-이대로라면 전투 중인 2번 섬까지 집어삼킬 기세인데요?

그에 중계진은 패닉에 빠져 정신없이 진행 멘트만을 내뱉을 뿐이었다.

그리고.

-아! 결국 2번 섬까지 해일이 다가왔습니다! 원샷으로 보니 정말 어마어마하게 거대한데요?

-현명하게도 두 팀 모두 전투를 중지하고 빠지는 모습! 하지만 모두가 살 수는 없어 보입니다!

1, 2위를 다투던 두 팀의 무대.

2번 섬까지 해일이 다가왔다.

* * *

"이런 미친!"

거대한 해일.

그 갑작스러운 재앙을 맞이한 유아연이 처음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지금의 이 자리에 오기까지.

어떤 일에도 당황 없이 처리해 오던 유아연에겐 무척이나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냉혈'이라 불리는 그녀의 별명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니라는 듯.

"운디네! 운다인!"

그녀는 재빨리 물의 하급, 중급 정령인 운디네와 운다인을 소환했다.

"아, 아연 님! 저 좀 도와주십시오!"

최진수를 상대하던 아군 탱커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하나 유아연은 남동생인 유아준의 손을 잡고는 정령들 품에서 몸을 웅크릴 뿐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우리 둘만 살기도 빠듯해.'

상급 정령 엔다이론을 소환할 수 있었다면 모를까.

중급 정령으로 저 거대한 해일에서 살아남는 건, 자신을 포함한 2명이 한계였다.

더불어.

'저 해일이 여길 덮치면, 쟨 짐만 될 뿐이야.'

애당초 전갈 길드에서도 자신 남매를 서포트하기 위해 욱여넣은 탱커에 불과하다.

심지어 자신의 정령 마법이 없다면, 수중에선 그저 가라앉기만 하는 쇳덩이.

효율을 추구하는 유아연의 입장에서 그런 모험을 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심지어.

"지수야!"

"아, 안 돼! 성력이!"

"망할! 진수 형님! 여기 좀, 으아아아!"

멤버를 잃어버리는 건 이쪽만이 아니지 않나?

유아연은 차가운 눈으로 해일 속으로 사라지는 신화 길드 팀을 노려봤다.

'최진수 하나쯤이야. 해일만 버텨 내고 나면 끝장낼 수 있어.'

* * *

군도를 통째로 집어삼킨 거대한 해일.

그 강대한 재해 속에서 실시간으로 관람하던 시문은 살아남은 이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아연과 유아준, 그리고 최진수로군.'

데뷔전 이전부터 꾸준히 언급되어 오던 유망주들.

확실히 그 명성에 맞게 세 유망주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해일 속에서 살아남았다.

'최진수의 수중 생물 변신은 예상했다지만... 유아연은 의외네.'

시문은 하체가 흐릿한 푸른 여성에 안긴 유씨 남매를 바라봤다.

'이제 갓 골드로 승급했을 텐데, 운다인이라니?'

중급 정령 운다인.

계약 자체야 데뷔전에 참가할 수준이면 어렵진 않겠지만.

제대로 컨트롤하는 것은 골드 상위권쯤 접어들어야 가능한 일일 텐데.

유아연은 운디네까지 이용한 다중 컨트롤로 트리아이나의 해일에서 살아남았다.

이는 그녀의 정령 컨트롤이 골드 상위권에 이른다는 말이 된다.

'하긴, 명색에 골드 데뷔전인데 이 정도는 보여 줘야지.'

장차 대한민국의 미래가 될 플레이어들 아닌가?

그중에서도 유달리 거론되는 이들이니, 이만한 저력은 보여 줘야 했다.

'그럼 슬슬 끝내 볼까?'

따악.

시문이 손가락을 튕기자, 귀 뒤에 붙어 있던 살색 아가미가 한결 더 깊어졌다.

전신의 근육들 역시 일제히 부풀었다가 가라앉았다.

플래티넘 랭크에서나 등장하는 바다 몬스터.

[샤크로돈의 신체조직]이 전신에 연성된 것이다.

그것은 무려 26%의 완성도를 자랑이라도 하듯.

촤르르르!

한 마리의 날렵한 상어처럼.

수장되어 버린 군도를 질주케 만들었다.

"야! 정신 차려!"

물의 중급 정령 운다인 덕분일까?

시문의 움직임을 눈치챈 유아연은 서둘러 제 남동생 유아준을 흔들었다.

그에 수장되어 버린 일대를 멍하니 보던 유아준은 세차게 고개를 젓고.

누나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봤다.

"회색 후드티? 설마! 김시문?"

"그래. 이거 전부 저 인간 작품이 분명해."

"그 거대한 해일을 저놈이 일으켰다고? 잠깐 누나. 그렇다는 건...."

유아준의 얼굴이 무섭게 굳었다.

'우리한테 승산이 없다는 거잖아?'

당장 아레나 보드를 열어 보아도.

1등이던 자신들은 2등이.

그리고 3등이던 김시문은 27킬로 압도적인 1위가 되어 있었다.

9킬이었던 것이 27킬이 된 걸 보면.

아마 방금의 해일로 자신들을 제외한 모든 참가자 전원이 쓸려 나갔단 뜻이겠지.

그런 괴물을 어떻게 상대한단 말인가?

그때.

빡!

"야, 유아준! 정신 안 차려?!"

뒤통수를 강타한 아릿한 통증과 함께 누나 유아연의 성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싸우기도 전에 쫄아? 너, 길드에서 준비해 준 거 잊었니?"

"하, 하지만 누나! 저놈이 한 짓을 보라고! 한 방에 20킬 가까이한 놈을 우리가 어떻게 이겨!"

동생의 호소에 잠시 이마를 짚는 유아연.

"운다인, 최대한 방해해!"

그녀는 운다인을 시문에게 보내고는 불안감에 가득 찬 동생을 바라봤다.

"생각이란 걸 해라, 이 멍청아. 지금 이 상황이 김시문의 작품은 맞지만, 그거뿐이잖아?"

"누나, 그게 무슨 소리?"

"생각을 하라고 했지! 쟤가 왜 아까 같은 힘을 더 사용 안 하고 저렇게 근접을 해 오겠냐?"

"그건... 어? 설마!"

유아준의 눈에 생기가 감돈다.

유아연은 그런 동생을 보며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미친 해일을 두 번이나 쓸 여유는 안 된다 이거지."

"그, 그렇네! 우리도 우리 수준을 넘는 마법을 쓰면 후유증이 심하니까!"

"그래. 그러니 제발 정신 좀 차리고 아티팩트부터 써. 으윽!"

"누나!"

갑자기 비틀거리는 유아연.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운다인의 가슴을 꿰뚫고 있는 시문의 모습이 보였다.

"신경 끄고 빨리 아티팩트나 써!"

"으, 응!"

유아연의 외침에 유아준이 얼른 오른쪽 손목을 내밀었다.

그러자 유아연 역시 왼쪽 손목을 내밀어 남동생의 손목을.

정확히는 두 사람의 손목에 걸린 팔찌를 교차시켰고.

동시에 시동어를 읊었다.

"얼어붙은 근원."

"얼어붙은 근원."

그러자.

사아아아.

2개의 팔찌에서 음습하고 시커먼 기운이 일렁거렸다.

그것은 끈적한 액체처럼 두 사람의 팔찌에서 뚝뚝 흘러내렸고.

키아아!

기분 나쁜 이명을 토하며 씻은 듯 사라져 버렸다.

"서, 성공한 거야?"

유아준이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지만, 유아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읍!"

꾸르륵.

어느새 운다인을 처리하고 다가오던 시문의 움직임이 뚝 멈춘 것이다.

입에서 허연 거품을 내뿜으면서 말이다.

"퉤!"

그 모습에 유아연은 운다인의 역소환으로 인한 핏물을 내뱉곤.

"아준아! 준비해!"

"알았어!"

하급 정령 운디네를 데리고 캐스팅에 들어갔다.

유아준 역시 바쁘게 손을 움직이며, 허공에 무언가를 그려 나가기 시작했다.

한편.

'뭐지? 왜 갑자기 인체 연성이 풀린 거야?'

[샤크로돈의 신체조직]이 사라져 버린 시문은 당황스러운 얼굴로 연성력을 끌어올리려 애썼다.

하나 연성력은 전혀 움직이려는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 나... 이상....

'현자의 돌? 현자의 돌!'

맛이 간 라디오처럼.

뚝뚝 끊어지며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현자의 돌의 목소리까지.

가슴 속에 자리한 현자의 돌이 사슬에 꽁꽁 묶여 버린 느낌을 받은 시문은 깨달았다.

'저주구나. 그것도 주력 기운을 완전히 봉인해 버리는 타입이야.'

저주.

조건이나 발동이 무척 까다롭지만.

당하는 입장에선 무시무시한 경험을 하게 만드는 흑마법의 한 종류.

'아까 두 사람이 팔을 맞댔었지. 그럼 아이템으로 인한 발동인가?'

저주의 원인을 눈치챈 시문은 침착하게 호흡을 멈추며 몸에서 힘을 풀었다.

이유야 간단했다.

'현자의 돌, 그거 사용하자.'

연성력이 막혔어도, 이 저주에 크게 구애받지 않을 방법이 있었으니까.

-알... 어!

뚝뚝 끊어지며 들려오는 현자의 돌의 답.

그와 함께.

우웅.

멈춰 버린 현자의 돌에서 무언가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연성력이 아닌 그것은 다름 아닌 용력.

용력은 현자의 돌과 일체가 된 시문의 전신으로 힘차게 뻗어 나갔고.

'우선 호흡부터 챙기자.'

가장 먼저 목을 타고 머리로 도달한 용력은 목을 중심으로, 시문의 호흡기 전반으로 안착했다.

그러자.

"후우!"

뽀글.

인간의 코와 입.

이 두 가지로 물속에서 호흡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우드득.

팔다리를 포함한 전신에서 괴상한 뼈 소리가 들려왔고.

옷 밖으로 노출된 손과 목의 피부 군데군데가 희미한 금색의 비늘들로 덮이기 시작했다.

용체화(龍體化).

용신 티아메트의 피를 흡수하고.

옵시디언 태블릿의 영향을 받아, 현자의 돌의 특성으로 등록된 능력이었다.

이름에서 그 뜻이 보이듯.

"와... 이거 미쳤는데?"

갤럭시 아레나에서 최상위 종족으로 손꼽히는 용족의 육체를 얻은 시문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팔다리를 휘휘 저었다.

'엄청 가볍잖아? 거기에다 뭔가 묵직해.'

서로 공존할 수 없는 두 단어가 절로 튀어나온다.

그만큼 용족의 몸은 민첩하면서도, 강인한 근력을 체감케 해 주었다.

오싹.

몸에 생겨난 금색 비늘들이 오소소 솟는다.

시문은 용체가 전해 오는 경고에 따라.

키잉.

본능적으로 오딘의 눈을 활성화했다.

이내.

'하....'

정면에서 급속도로 활성화되는 마력 소용돌이를 보곤, 저도 모르게 실소를 흘렸다.

이유야 간단했다.

'마력의 움직임까지 볼 수 있을 줄이야.'

본래 오딘의 눈으로도 마법의 흐름은 볼 수 있었다.

하나 마력의 흐름은 다르다.

마법은 본디 마력이나 마기 등 특정한 기운으로 만들어진 일종의 창조물.

그것의 흐름을 보는 것과 그 마법을 구성하는 기운의 흐름을 보는 것은 엄연히 달랐다.

'과연 용족은 다르다 이건가?'

그리고 이 우월한 용체로 인해, 마력의 흐름이 보이는 지금.

'캐스팅이 거의 끝났나 보군.'

시문은 저 두 마법계의 남매가 다음에 어떤 짓을 할지도 훤히 꿰뚫을 수 있었다.

'동생 유아준이 마법을 발현하면, 누나 유아연이 정령술로 위력과 효과를 보조하는 거로군.'

여차하면 정령술 특유의 이점으로 마법의 잔재를 이용해, 추가타까지 유도할 수 있고 말이다.

과연 차기 마법계의 신성으로 평가될 만한 연계.

특히나 누나 유아연 쪽의 컨트롤과 센스는 손뼉 쳐 줄 만한 수준이었다.

이어.

"아이스 트위스터!"

누나의 정령이 물속성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주변이 물 천지여서일까.

발현된 유아준의 아이스 트위스터는 본래 5성급의 수준을 한참 넘은 위력을 선보였다.

콰츠츠츠측!

얼음으로 이루어진 회오리바람이 송곳 같은 하체를 앞세우며 날아든다.

일전에 히든 보스였던 하프 드래고니안 사르쿠가 펼친 반6성급의 얼음 마법만큼은 아니었으나.

가히 시문으로서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의 위력.

'그때는 아스트라페를 때려 박아 힘으로 상쇄했지만....'

맹렬하게 날아드는 아이스 트위스터를 바라보던 시문이 희미하게 웃는다.

이내.

스륵.

피하려는 모습은커녕, 역으로 얼음 회오리를 향해 파고드는 시문.

'잡았다!'

'멍청한 놈! 저게 그냥 5성급 마법인 줄 아나!'

그에 남매의 입가엔 회심의 미소가 지어졌다.

물론 오래가지는 못했다.

"아, 아니!"

"이런 미친!"

운디네로 인해 한층 더 강력해진 아이스 트위스터.

시문은 그 얼음 회오리 속을.

"마법을 딛고 달린다고?!"

'역주행'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잘 가라."

드래고니안의 그것처럼 날카롭게 자란 손톱이 목으로 파고드는 것이.

콰득.

"컥!"

"끄륵!"

이번 기수 마법계의 유망주인 유씨 남매의 마지막이 되었다.

제61화

61화. 왕의 눈 (1)

"하...."

헛웃음이 절로 나온다.

최진수는 멍하니 입을 벌린 채, 그 원인을 바라봤다.

유아준이 펼친 아이스 트위스트.

거기에 물의 정령술이 더해져, 얼음 마법이 가지는 디버프와 범위, 위력까지 전부 상향된 상태다.

그런 같은 수준의 힘으로 받아친 것도 아니고.

'마법 속을 역으로 내달리다니....'

차라리 조심스레 걷기라도 했으면 말이라도 안 하겠다.

저 김시문이라는 괴물은 증폭된 얼음 회오리 줄기를 딛고 역으로 달려드는 기행을 벌였다.

흡사 롤러코스터의 주행로를 질주하는 모습.

놀란 건 최진수만이 아니었다.

-미친! 마법을 딛고 달린다고? 그게 가능해?

-가능하긴 함. 다이아들 중에 중위권에 있는 플레이어들이 저러는 거 본 적 있음.

-그쵸... 가능한 일이긴 한데... 이분 갓 골드시잖아요....

-근데 이 형은 했잖아?

-ㅆㅂ! 그니까 다 반응이 똑같잖아! 저게 말이 되냐고!

-매니저님, 저 애 욕했어요. 벤 좀.

시문의 송출 화면으로.

증폭된 5성 마법 아이스 트위스터 속을 내달리는 모습을 직접 관람한 시청자들은 더한 반응을 보였다.

그럴 수밖에.

비록 심해라 불리는 랭크의 방송이라 해도.

시문의 방송만큼은 저랭크를 넘어, 고랭크들도 다수 시청하는 상황.

-저런 건 마법 구조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스펙도 해당 마법보다 훨씬 높아야 함. 고로 이건 말이 안 된다.

-이것도 특성임? 이번엔 손가락 튕긴 것도 없는데?

-특성 같음. 손가락 튕기는 거 없이 몸이 좀 변했잖아.

-ㅇㅇ. 최진수랑 뭐 비슷한 능력 같은데?

-설마 특성이 2개인 거야?

-차라리 2개라고 해 줘. 플래티넘 입장에서 저걸 컨트롤로 해냈다곤 믿고 싶지 않다.

-개쌉ㅇㅈ. 저게 순수 컨이다? 플래티넘 마법계들 바로 한강각임.

고랭크로 보이는 플레이어들이 전문적인 발언을 내어 버리니, 채팅창에 불이 붙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그리고.

"또 보네요."

이런 뜨거운 상황을 만들어 낸 시문의 시선이 마지막 남은 생존자.

최진수를 향했다.

그런 시문과 눈이 마주친 순간.

움찔.

'뭐, 뭐지?'

최진수는 전신의 근육이 바짝 굳어 가는 걸 느꼈다.

단순히 지금껏 보여 준 압도적인 무위 때문이 아니었다.

'저 모습, 뭔가... 뭔가 위험해.'

SS급 특성 야수화를 지닌 최진수는 이러한 공포감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금세 알아차렸다.

'포식자!'

그래.

마치 자신보다 상위의 포식자를 눈앞에 둔 야수들이 이러한 공포를 느꼈다.

'왜지? 난 분명 샤크로돈으로 변신했는데....'

플래티넘에서나 등장하는 악명 높은 바다 몬스터 샤크로돈.

비록 갓 골드에 입성한 만큼 그 반도 안 되는 수준이었으나.

상어처럼 뾰족하게 솟은 이빨과 주둥이, 손목에 달린 칼날 같은 지느러미는 분명 샤크로돈의 그것이었다.

당연히 이 바닷속에서 포식자로 군림해야 정상이었거늘.

왜 공포를 느낀단 말인가?

'빌어먹을! 차라리 변신하지 않았다면!'

애당초 변신을 하지 않았으면 물속에서 이렇게 살아 숨 쉴 수조차 없었겠지만.

마주하는 것만으로 얼어붙었다는 치욕감은 최진수로 하여금, 제대로 된 사고를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크, 크륵!"

본능을 짓누르는 공포감.

최진수는 이를 빠득 갈며, 어떻게든 몸을 움직이려 애를 썼다.

이젠 시뻘건 핏줄마저 서 버린 최진수의 눈앞으로.

"아예 포기한 겁니까? 끈질기게 달려들던 저번이랑은 많이 달라졌네요."

어느새 시문이 다가왔다.

최진수는 그게 아니라고.

달라진 건 내가 아니라 너라고.

그렇게 외치고 싶었으나.

'모, 몸이... 안 움직여!'

눈앞까지 다가와서일까?

꽉 깨물던 이빨마저 제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뭐, 어느 쪽이건 상관없죠. 개인적으로 당신을 꽤 리스펙하는 입장이라서요."

삐걱대는 고개를 든 최진수는 간신히 시문의 얼굴을 마주하고 나서야.

이 정체 모를 공포의 원인을 깨달았다.

'눈! 저 눈 때문이야!'

찬란한 황금빛의 마법진이 겹겹이 맞물려 있는 왼쪽 눈.

그 한가운데 세로로 길게 찢어진 심연 같은 동공이, 바로 자신을 옴짝달싹도 못 하게 한 원인이라는 것을 말이다.

하나 당사자는 그것을 모르는지.

"고통은 없을 겁니다. 최진수씨. 수고하셨어요."

시문은 무심히 날카로운 손톱을 내질렀다.

콰득.

단숨에 심장을 관통해 버리는 시문의 손.

불완전하더라도 명색의 샤크로돈의 가죽인데.

그것을 꿰뚫어 버린 손은 꿰뚫은 만큼이나 쉽게.

푸화악!

피 분수를 만들며 제자리를 찾아갔다.

[최후의 생존자가 되었습니다.]

[골드 랭크 데뷔전의 우승자가 결정되었습니다.]

시문의 위로 데뷔전의 끝을 알리는 시스템창이 떠오른다.

[네 성좌들의 미션을 완수하였습니다.]

[업적 포인트 5,000점을 획득합니다.]

미션 완료를 알리는 개인 메시지창까지 눈앞으로 떠올랐다.

그에 시문이 용체화를 해제하려던 찰나.

[특수 조건이 만족되었습니다.]

[마지막 섬이 부상을 시작합니다.]

일련의 시스템창이 추가로 떠오르며.

쿠르르르르르르!

바다가 진동했다.

* * *

부글거리는 거품들이 쉴 새 없이 올라온다.

그와 함께 떠오르는 한 섬은 트리아이나로 수장되었던 섬들보다도 거대했다.

'무슨 조건이 만족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게 그 마지막 섬이라는 건가?'

멀지 않은 곳에서 부상하는 마지막 섬을 바라보던 시문은 곧장 그곳으로 다가갔다.

부드럽게 나아가는 신형.

용체화에 따로 수영 기능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용체화 자체가 가지는 강력한 스펙 덕분일까.

'뭐야, 이거. 샤크로돈의 신체조직을 연성했을 때보다 더 빠른데?'

시문은 앞서 [샤크로돈의 신체조직]을 연성했을 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나아갔다.

이윽고.

촤아아아.

섬에 도착한 시문은 섬과 함께 바다 위로 부상했다.

섬 위로 바다 특유의 강한 햇살이 비춰지자.

수중에서 보았던 것보다 더 거대한 섬의 일대가 눈에 들어왔다.

'건물도 있잖아?'

시문은 섬 한가운데에 자리한 묘한 건축물을 바라봤다.

고대 그리스의 양식과 비슷한, 그러나 페르시아풍의 느낌이 강하게 섞인 듯한 석조 건축물.

군데군데 이끼와 해조류, 따개비들이 즐비했으나, 건축물이 지닌 고풍스러운 미는 숨기지 못했다.

시문은 자연스레 섬의 중앙에 위치한 건축물로 다가갔다.

그때.

키잉.

"음?"

시문의 왼쪽 눈.

오딘의 눈과 용체화된 육체의 비늘들이 싸한 감각을 전해 온다.

유씨 남매의 마법을 경고할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

그에 시문은 본능적으로 연성력을 오딘의 왼쪽 눈으로 부여했고.

볼 수 있었다.

'안에 뭔가 있는데?'

일종의 열화상 카메라라고 할까?

건축물 안에서 생명체로 보이는 무언가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게 보였다.

그것들이 건축물 밖으로 나오는 순간.

"저, 저건!"

시문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시문만이 아니었다.

-거, 거짓말이지? 지금 내가 잘못 보고 있는 거지?

-님들, 이거 맞음? 이거 맞아?

-저게 뭔데요? 님들만 알지 말고 같이 좀 압시다.

-갑자기 튀어나온 섬만 해도 궁금해 미치겠는데 이 사람들 다 왜 저래.

시청자는 물론이었고.

[성좌 제우스와 천마가 불편한 기색을 비칩니다.]

[성좌 검은 염소가 입술을 질겅질겅 씹습니다.]

[성좌 오딘이 작은 한숨을 내쉽니다.]

조용하던 성좌들마저 반응을 보였다.

성좌들의 반응은 다소 의외이긴 했으나, 영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왜냐하면.

"쉬르르, 인간이로군."

"인간? 그런 거치곤 비늘이 있는데?"

"쉬륵. 잡종은 용족에게도 있는데 육지 놈들이라고 없겠나?"

"그도 그렇지만, 설마 저 잡종이 그 신의 힘을 휘두른 건 아니겠지?"

눈앞의 두 용족은 그럴 만한 존재들이었으니까.

"나가라니...!"

나가.

뱀의 하반신에 인간의 상반신을 지닌, 소위 말하는 반인반사(半人半蛇)의 용족이자.

-미친! 여기 다이아 랭크도 아닌데, 최상급 용족이 왜 나오는 거임?

-설마 싸우라고 나온 건 아니겠지?

-에이, 그냥 이벤트겠지. 애당초 이 섬도 생전 처음 보는 거잖아.

-근데 이벤트라기엔 당장 창이라도 찌를 기센데?

드래고니안과 같이 최상급 용족이었으니까.

'그나마 다행이라면 둘 다 전사 쪽인 같은데....'

하나 두 나가 모두 전사계열이라 한들.

마냥 안심할 수는 없었다.

"쉬르르. 죽여서 시체를 뒤져 보면 뭐라도 나오겠지."

쿠우우웅.

고작 땅을 박찼을 뿐인데.

움푹 파이다 못해 쩍쩍 갈라지는 대지.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전사계열이라 해도.

최상급 용족의 육체는 그 자체만으로도, 어지간한 공격 마법을 상회하는 것이다.

콰앙!

"쉬륵! 피해? 육지 놈치고 제법 날래구나."

거대한 삼지창으로 땅을 박살 낸 나가.

그는 잽싸게 피해 낸 시문을 보고는 독사 같은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이내.

"크핫! 이런 것도 재밌겠지. 좋다, 어디 도망쳐 봐라!"

광소를 터뜨린 나가는 기다란 하반신을 움직였다.

샤아악!

'빨라!'

뱀의 하체를 지닌 거구라는 사실이 무색하게.

나가는 엄청난 속도로 바닥을 기며, 시문의 움직임을 따라잡았다.

"쉬륵! 잡았다!"

후우웅.

매서운 파공음을 휘감고 오른쪽으로 파고드는 삼지창.

동시에.

"크큭! 사지를 잘라주마!"

어느새 뒤편에서 날아드는 또 다른 나가의 삼지창까지.

최상급 용족답게.

두 나가는 일말의 상의도 없이 깔끔한 협공을 가해오는 것이다.

하나.

'둘 다는 못 피해.'

협공에 당황치 않고.

시문은 즉시 연성력을 끌어올렸다.

본디 다이아 랭크에서나 등장하는 나가들이다.

단순히 위치를 점하고 휘두르는 행위만으로도, 상대적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기본적인 스펙 차이가 있으니까.

그러니.

'이쪽에서 먼저 친다!'

따악.

도리어 앞으로 전진하며 손가락을 튕기는 시문.

짜작.

시문의 앞으로 한줄기의 벼락이 떨어져 내렸고.

자연스레 그 벼락을 거머쥐며 전방의 나가를 노려보는 순간.

멈칫.

"쉬, 쉬륵?!"

나가의 샛노란 눈이 휘둥그레진다.

동시에 삼지창을 내지르던 행위까지 뚝 멈춰 버렸고.

'기회다!'

시문은 눈을 번뜩이며 아스트라페를 두툼한 나가의 대흉근에 박아 넣었다.

콰자자자작!

강렬한 굉음이 귀청을 때린다.

최상급 용족도 정통으로 틀어박히는 아스트라페는 어찌할 수 없는지.

치이이.

나가는 비명 하나 남기지 못하고.

노릿한 냄새와 함께 바닥으로 쓰러졌다.

시문은 그런 나가의 최후는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고.

시커멓게 타 버린 나가를 딛고는 허공으로 치솟았다.

이어.

"네노오옴!!"

후웅!

뒤에서 거센 파공음과 함께 파고드는 노성.

동료의 죽음에 분통을 터뜨린 나가는 즉시 몸을 웅크렸다.

뱀의 똬리처럼 돌돌 감기는 하반신.

그러곤 스프링의 그것을 연상시키듯.

파앙.

"죽여 버리겠다!!"

순식간에 시문과 거리를 좁히는 나가.

그에.

스윽.

어느새 고점에 달한 시문의 몸이 역으로 아래를 향한다.

손에는 아직 스파크를 내뿜는 아스트라페가 쥐어져 있었다.

'연성력 소모가 너무 심해서 천마신공까지 곁들이는 건 무리지만....'

아직 힘이 남아 있는 아스트라페만으로도 공격력은 충분하리라.

그렇게 아래서 솟아오르는 나가와 위에서 낙하하는 시문의 시선이 맞물리는 순간.

움찔.

"그, 그 눈은!"

솟아오르던 나가 역시.

앞선 나가처럼 화들짝 놀라며 몸이 굳어 버렸고.

그 빈틈을 놓치지 않은 시문은 낙하하는 힘을 실어 아스트라페를 내리찍었다.

콰자자자작!

비늘 덮인 머리통으로 작렬하는 뇌전.

쿠웅.

머리통을 잃어버린 새까만 거구가 허연 연기를 휘감고 바닥으로 처박힌다.

시문은 날렵한 움직임으로 공중제비를 돌며, 처박힌 나가의 시체를 딛고 안전하게 착지했다.

'후. 죽을 뻔했네.'

갤럭시 아레나에 참전하고 꽤 많은 위협을 겪었지만.

저 나가 둘의 합공만큼 등골을 서늘하게 만든 위협은 없었다.

숨을 고른 시문이 제대로 서는 순간.

키이이잉!

오딘의 눈이 강렬한 이명을 토했다.

동시에.

-참으로 놀랍구나.

무섭도록 아름다우면서도 황홀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고.

[예정에 없던 특수 상황으로 모든 중계와 방송이 일시적으로 차단됩니다.]

[해당 상황이 끝나기 전까지, 어떠한 송출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갑작스러운 메시지창이 시문의 앞을 가렸다.

-뭐, 뭐야? 갑자기 화면이 꺼졌어!

-ㅅㅂ! 아레니아 서버 나갔냐? 이거 뭔데!

-하필 여기서 끊어. 돌았나!

-이거 국아 채널도 검은 화면인 거 보니 걍 막혔나 본데?

순식간에 혼란의 도가니가 되어 버리는 채팅창.

그러나 방송 자체가 차단되어 버린 시문은 채팅창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럴 여유도 없었고.

-왕의 눈을 지녔거늘, 포세이돈의 트리아이나도 모자라 제우스의 무구까지 다루다니.

영혼까지 떨리게 만드는 목소리.

그러나 오딘의 눈과 용체화 덕분인지.

제정신을 유지한 시문은 서서히 이 이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몸을 돌렸고.

"미친...."

저도 모르게 육성으로 욕을 내뱉었다.

비단 앞선 나가들보다 더 거대한 체구를 지닌 나가라서가 아니었다.

본디 나가란 종족은 팔의 개수에 따라 그 급이 나뉜다.

팔의 개수는 2배수씩 증가하며, 당연히 그에 따라 나가의 힘은 천차만별.

방금 시문이 처리했던 두 나가는 가장 약하다고 할 수 있는 2개의 팔을 지녔지만.

"팔이 8개라니...."

눈앞의 저 나가는 무려 8개의 팔을 지니고 있었다.

전생의 경험에 비춰 보았을 때.

이는 다이아를 넘어 랭커급의 플레이어들이나 되어야 대적이 가능한 수준이었다.

즉.

-호오, 팔의 개수를 논하다니? 그대는 우리에 대해 잘 아는 모양이로구나.

지금의 시문으로선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존재란 말이다.

다행히도.

-볼수록 흥미롭군. 이거 아주....

저 절대적인 존재는 적대감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재밌게 되었어.

호감을 표했다.

제62화

62화. 왕의 눈 (2)

얼굴이 굳어 버린 시문.

그럴 수밖에.

탈골드급 스펙에 용체화, 오딘의 눈까지 지녔음에도.

자신을 쉽게 눌러 죽일 만큼, 눈앞의 나가는 압도적인 존재였으니까.

그런 시문의 경계를 눈치챈 것일까.

-후후. 너무 긴장하지 말거라. 난 그대와 손을 섞을 생각이 없으니.

나가는 시문을 안심시키려는 듯.

미형의 매끈한 입가를 찢으며, 부드럽게 몸짓했다.

물론.

입술 사이로 보이는 뾰족한 이빨과 날카롭게 번뜩이는 눈은 전혀 그런 느낌을 주지 않았지만 말이다.

하나.

'진심... 이군.'

시문은 신기하게도 저 나가의 말이 진심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마치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온 동반자처럼.

눈빛만 봐도 거짓이 아니라는 것이 절로 느껴지는 것이다.

그런 시문을 바라보던 나가의 미소가 한결 짙어졌다.

-놀랄 것 없다. 그대가 본녀의 진심을 알아차리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니.

'당연한 일?'

고개를 갸웃하는 시문.

이내 눈앞의 나가가 말하는 '왕의 눈'이 어떤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설마 사안 때문인가?'

용신 티아메트의 피를 흡수한 이후.

오딘의 눈에 추가된 사안.

앞선 나가들이 갑작스러운 마비 증세를 보였던 것도.

돌이켜 보면 전부 자신의 눈과, 정확히는 사안과 눈을 마주친 순간부터였다.

'어떻게 쓰는지 전혀 감이 잡히질 않았는데... 이런 식으로 쓰일 줄이야.'

고작 2개의 팔로 나가 중 가장 하위급이라곤 하나, 나가는 엄연한 최상급 용족이다.

다이아도 아닌 시문이 그런 최상급 용족을 마비시키게 만든다?

이는 사안이 어마어마한 급의 능력이라는 말이 된다.

하나.

'저 나가한테는 안 통하는 느낌이야.'

어째서인지 저 나가에겐.

마비 능력이 통하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런 시문의 속내를 읽은 것일까?

-후후, 당돌한지고. 아무리 왕의 눈을 지녔다곤 하나 완벽하지 않을진대, 감히 본녀를 넘보다니.

말하는 내용만 보면 불쾌감을 느껴야 할 텐데.

겉으로나 속으로나.

눈앞의 나가는 순수한 호의만을 내보였다.

시문은 조금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당신도 내 속을 읽을 수 있는 건가?"

-정확히는 공감이라고 해야겠지. 아무리 본녀라도 왕의 눈을 지닌 자를 들여다볼 수 없으니.

그 말은 즉.

'내가 원하면 저 공감을 차단할 수도 있는 걸까?'

듣자 하니 이 사안이 용족에 한해서 '어떤 우위'를 지니고 있는 것 같으니 말이다.

'한번 해 보자.'

속으로 그런 마음을 품고.

왼쪽 눈에 집중시키며 의지를 보내자.

-놀라운지고.

눈앞의 나가는 놀라운 얼굴로 시문을 바라봤다.

-그 잠깐의 말로 거기까지 깨달을 줄이야.

그에 시문은 직감했다.

상대가 자신의 감정에 공감하는 걸 성공적으로 차단했다고 말이다.

나가의 날카로운 시선이 시문의 주변과 그 위를 향했다.

-과연. 어째서 그대가 왕의 눈을 지니고도, 올림포스의 힘을 다루는지 알겠어.

'어... 그건 좀 다른 이윤데.'

굳이 순서를 따지자면 아스트라페가 먼저, 사안이 나중이었지만.

시문은 굳이 나가의 생각을 정정해 주진 않았다.

-이런.

허공을 보던 나가의 눈매가 슬쩍 찌푸려진다.

-그렇군. 이곳은 아레나였나? 그렇다면 그대는 플레이어겠구나.

시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갤럭시 아레나 측에서 뭐라고 했나 봐?"

-눈치도 빠르노라. 그렇다. 혹여 본녀가 무슨 말이라도 잘못할까 봐 똥마려운 땅개처럼 벌벌거리는구나.

갤럭시 아레나를 대차게 까는 나가.

잔혹한 입꼬리를 더욱 끌어 올린 그녀는 작게 웃고는 시문을 바라봤다.

-왕의 눈을 지닌 자여. 본녀가 그대의 이름을 물어도 되겠는가?

"김시문."

-김시문? 아아, 그렇군. 바로 그대로구나.

이름을 들은 나가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 콧대 높은 용제들을 두 번이나 물 먹인 것이.

'두 번이나 물을 먹여?'

나가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는 시문.

이내.

'설마 마르넬의 일을 말하는 건가?'

그녀가 무엇을 말하는지 눈치챈 시문은 담담히 나가를 바라봤다.

-보아하니 그대도 아는 모양이군. 그래, 드워프의 운명선을 뒤틀어 버린 일이지. 그 일로 검은 제련소가 상당한 타격을 받았느니라.

'운명선? 검은 제련소?'

알 수 없는 단어들이 줄줄 나왔으나.

시문은 나가의 말을 끊지 않았다.

-혹여 우리도 일찍이 그대를 만났더라면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이 든 일이었지. 어찌 그만한 세월이 흘렀음에도 본녀는 아직도....

감미로운 목소리에 원인 모를 회환과 후회가 묻어난다.

한동안 진지한 얼굴로 침묵에 빠지던 그녀는.

-뭐, 이미 쏟아진 물 아니던가.

가벼운 헛웃음과 함께 고개를 들었다.

-그대가 벌인 일 덕분에 5용제가 움직였다. 그의 전령인 데피나라는 드래곤이 나섰지.

"드, 드래곤이라고?"

용제라는 말보다 드래곤이라는 말이 더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그럴 수밖에.

용제를 제외하면.

최악으로 꼽히는 용족이 드래곤이라는 걸, 전생을 겪은 시문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니까.

'드래곤이 떴다 하면 도시 하나는 그냥 날아갔지.'

그것도 플레이어들이 득실거리는 도시가 말이다.

자연스레 인상이 찌푸려지는 시문.

그런 시문을 다른 쪽으로 오해한 것일까?

-반응을 보니, 이미 그년의 수작에 당한 모양이구나. 그럼에도 이렇게 멀쩡하다니... 하긴, 괜히 왕의 눈을 지닌 것이 아닌 게지.

나가는 멋대로 해석을 해 버렸고.

그 말에 시문은 한 가지 확신을 얻었다.

'중국 놈들, 용족과 손을 잡은 게 확실하네.'

대충 짐작만 하고 있었던 중국과 용족의 관계.

비록 자신이 지닌 성흔을 알아차리고, 암살자를 보낸 건 아닌 것 같다만.

'용족의 입김으로 중국이 데스페라도에게 의뢰한 건 확실해.'

결국 이유가 다를 뿐.

그 의도와 과정은 자신의 예상과 같았다.

-하나 방심하진 말거라. 데피나는 본녀도 인정하는 드래곤. 아무리 그대라도 상대하기 어려울 게다.

"그렇겠지."

시문은 당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곤을 상대하려면 기본적으로 다이아급 파티가 나서야 한다.

한데 눈앞의 나가가 인정할 정도면.

최소 랭커급 파티가 나서야 할 수준이겠지.

거기다 암계 역시 뛰어날 터.

이렇게 타 차원에 개입해 암살 시도를 해 온다는 것부터가 그 증거 아니던가?

-으음. 의회의 간섭이 점점 심해지는군.

치직.

눈살을 찌푸리는 나가.

동시에 정체 모를 스파크가 그녀의 전신에서 튀어 올랐다.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만... 이만해야겠구나. 어서 꺼지라고 이리도 발광을 하니.

그녀는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시문에게 다가갔다.

거대한 육체를 떠나.

다가오는 존재감만으로도 몸이 절로 경직될 법했으나.

사안의 능력 덕분인지 시문은 평온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나가는 시문의 왼쪽 손등 위로 입을 맞추었다.

[나가 공주 아샤즈가 나가 왕족의 인자를 부여합니다.]

[용체화의 수중 능력이 강화됩니다.]

[나가에게 끼치는 사안의 영향력이 증가합니다.]

주르륵 떠오르는 메시지창.

시문의 눈이 휘둥그레지자, 나가의 눈매가 부드럽게 찢어졌다.

-미래의 왕께 바치는 본녀 아샤즈의 성의이니라. 고로 다음에는 그대의 진실된 이름을 알았으면 하는구나.

"이름이라면 아까...."

-내가 말하는 건 그대의 진명이니라. 고위 용족은 비로소 진명으로 완성되는 존재이니.

그 진명이 무엇이냐고 물을 틈은 없었다.

치지직.

스파크가 점점 강해지며 나가 공주 아샤즈의 육체가 점점 흐릿해지는 탓이었다.

꼭 특수 아레나를 끝낸 시문이 역소환될 때와 같은 모습이었다.

-아. 한 가지 꼭 기억했으면 하는 것이 있다.

이젠 그 곱던 목소리마저 희미해질 때쯤.

-그대의 사안을 목도한 용족은 단 하나도 살려 두지 말거라.

아샤즈는 섬뜩한 살기가 담긴 목소리를 남기곤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와 함께.

[특수 상황이 종료됩니다.]

[골드 랭크 데뷔전이 마무리됩니다.]

시문 역시 빛무리에 감겨 모습을 감추었다.

* * *

한때의 계절별 올림픽만큼이나 핫한 골드 랭크 데뷔전.

갤럭시 아레나가 등장하고 스포츠의 관심이 줄어든 것까지 고려하면.

사실상 각성자, 비각성자 할 것 없이 대한민국 모두가 관심을 보인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실제로도 그랬다.

[대망의 골드 랭크 데뷔전! 그 결과는?]

[충격! 골드 랭크 데뷔전 우승자는 사실 솔로 플레이어?]

[떠오른 군도 최초의 이벤트와 다이아급 몬스터의 등장까지!]

[강력한 차기 랭커 후보의 등장. 어쩌면 별의 세대를 뛰어넘을지도?!]

[갓 승급한 골드가 다이아를 잡다? 상위 유저들의 경악!]

[다음 플래티넘의 데뷔전이....]

쉬지 않고 쏟아지는 자극적인 헤드라인의 기사들.

인터넷과 TV뉴스, 갤럭시 아레나 관련 프로그램까지.

골드 데뷔전이 끝난 후.

수많은 플랫폼에서 이번 골드 랭크 데뷔전의 내용을 다루었다.

당연히 국민들의 관심은 시간이 지날수록 뜨거워졌고.

이는 국내 최대 길드인 성삼 역시 다르지 않았다.

"아가씨, 정말 이대로 두실 겁니까?"

성삼 길드의 인사 과장 박민철.

담당하는 업무들을 보면 사실상 부길드 마스터나 마찬가지인 그는 대담하게도.

탕!

"뭐라 말이라도 해 주십쇼!"

길드 마스터의 책상을 치며 언성을 높이는 용기를 보였다.

"김시문 플레이어 건은 전적으로 아가씨께서 알아서 처리한다 하시지 않았습니까?"

하나 그런 박민철 과장의 태도에도.

"...."

청순함이 물씬 묻어나는 미녀.

이유정은 그저 멍한 눈으로 앞에 놓인 모니터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단지 미약하게 까딱거리는 검지만이 그녀가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다는 신호를 주었고.

그것이 깊은 생각이 빠질 때 나오는 습관이라는 걸 잘 아는 박민철은 한 걸음 물러나 침묵을 지켰다.

이유정은 초점 없는 눈으로 실시간 업로드되는 기사들을 바라봤다.

'오라버니가 강하신 줄은 알고 있었지만....'

갤럭시 아고라에서 시문을 만난 이후.

그의 방송을 빠짐없이 챙겨 본 이유정이었다.

랭커인 만큼.

시문이 이미 실버 때부터 플래티넘급의 플레이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김시혁 역시 같은 입장이었다.

둘이서 만나면 가장 먼저 하는 이야기가 바로 시문의 방송이었으니까.

하나.

'설마 이 정도로 강하실 줄이야.'

이건 과해도 너무 과했다.

이번 골드 데뷔전의 우승자는 정해져 있었다.

애당초 데뷔전이라는 것이 그랬다.

거대 길드의 온갖 지원을 다 받는 유망주들.

당연히 승자는 시작하기도 전에 정해져 있기 마련이었고.

이번 데뷔전의 승자는 전갈 길드의 유씨 남매나 신화 길드의 최진수로 확정 나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다.

모두가 3인 풀 파티로 참여하는 데뷔전에서 홀로 참가해 1등.

대한민국에서 역대급 재능러라는 그녀와 김시혁조차, 저 시절에 2인 듀오를 맺어 우승을 하지 않았던가?

더군다나.

'골드가 나가를 그렇게 쉽게 잡다니, 말이 안 돼.'

그냥 골드도 아니고 갓 승급한 골드다.

골드 랭크의 아레나를 치른 적도 없으니, 따지자면 실버나 마찬가지.

한데 플래티넘도 아니고 다이아에서나 등장하는 최상급 용족.

나가를 잡아내다니?

'오라버니의 스펙이 아무리 높아도 이건... 아니면 데뷔전 전에 뭔가 성장을 하신 건가?'

시문과의 관계를 싹 빼고, 딱 객관적으로 바라봤을 때.

그녀가 지금껏 방송으로만 봐 왔던 수준으로 나가를 상대하는 건 불가능이었다.

갤럭시 아레나의 상태창과 스탯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이미 기본 스탯부터 압도적으로 깔리고 들어가는데.

아무리 좋은 특성이나 직업이라도, 그 격차를 좁힐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시문은 해냈다.

'물론 나가들의 움직임도 좀 이상하긴 했어.'

분명 골드 수준에 맞게 너프를 당한 움직임은 아니었다.

그녀가 아레나를 돌리면 만나는 팔 2개의 나가와 같은 움직임이었으니까.

이유정이 집중하는 건 시문과 나가가 격돌하던 때였다.

'분명 순간적으로 움직임이 멈췄었지?'

워낙 찰나이긴 해도.

랭커쯤 되는 플레이어들은 모두 알아차렸을 것이다.

시문과 격돌하기 전.

무슨 마비독이라도 당한 듯, 멈춰 버리던 나가들의 움직임을 말이다.

'거기에다 그 뇌속성 마법도 볼 때마다 범상치 않고.'

아무리 팔이 2개긴 해도.

전사 계열 나가를 한 방에 절명시켜 버리다니?

갓 골드로 승급한 플레이어가 내기엔 과해도 너무 과한 공격력이었다.

또 해일을 일으키던 기다란 포크 같은 것도 눈앞에 아른거리니.

'으아아! 궁금해 미치겠네! 진짜!'

강렬한 호기심이 그녀의 손발을 간지럽혔다.

아마 시문의 성격상.

그녀가 물어보면 가르쳐 줄 것이다.

하지만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함부로 능력을 묻는 건, 실례되는 행동이기도 하니 그건 또 싫었다.

'알고 싶다... 오라버니에 대한 건 전부 다.'

더 가까워지고 싶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도 있었고.

아레나 질병인 마력불능이 회복된 작은 단서라도 잡고 싶은 것도 있었다.

어쩌면 어머니의 치료에 진전이라도 생길지 모르니까.

이유정은 답지 않게 머리를 쥐며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다가, 고개를 홱 돌려 폰을 내려다봤다.

'맞아! 그러고 보니 진욱 선배가 오라버니를 만나러 간다고 했었지?'

분명 사업적인 이야기라고 했었다.

'그럼 김시혁 그 녀석도 따라올 거고.'

반드시 따라붙을 거다.

자신처럼 이번 데뷔전을 챙겨 봤을 테니 말이다.

'거기서 이리저리 이야기 나누다 보면, 진욱 선배가 먼저 오라버니에게 이야기를 꺼낼 수도 있어.'

밤사냥꾼이라는 차가운 별칭과 달리.

박진욱이란 사람은 호기심을 잘 참는 스타일이 아니었으니까.

이유정은 즉시 폰 화면을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김시문 플레이어는 제가 직접 만나 볼 테니, 박 과장님은 걱정하지 말고 다른 업무 보세요."

"예? 하지만... 후, 알겠습니다."

오랜 침묵 끝에 튀어나온 답에 잠시 놀란 박민철 과장.

이내 고개를 숙인 그는 조용히 물러났고.

이유정은 박진욱의 답장을 확인한 즉시 외투를 챙겼다.

제63화

63화. 치료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