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화
42화. 기반 (4)
저녁 퇴근길이라 그런 걸까?
학생과 직장인들을 포함해 길거리에는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세상에! 시혁 오빠!"
"아니, 거기서 등은 왜 보이는 거야?!"
"김종준이 김시혁을 잡을 줄이야...."
"아악! 내 배팅!"
그리고 일제히 내뱉는 탄식.
모두가 얼굴을 찌푸리며 아쉬움을 표했지만, 단 한 사람만은 예외였다.
'녀석, 말을 해 줘도....'
뚜렷한 이목구비의 미남.
김시문은 피식 웃으며 폰 화면을 바라봤다.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모두의 예상을 제치고 김종준 선수가 김시혁 선수를 상대로 1경기를 따냅니다!
-이건 김시혁 선수가 못 했다기보단 김종준 선수가 너무 잘 했는데요? 어떻게 김시혁의 검격을 피한 거죠?
주변 사람들과 똑같은 목소리로 탄식하는 진행자와 해설들.
이어폰으로 그 목소리를 들으며 시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나 내가 알려 준 정보 때문에 미래가 바뀔까 살짝 걱정했는데....'
정말 괜한 걱정이었다.
요 건방진 동생 녀석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다.
물론 전혀 듣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나름 의식은 하고 있었나 보네. 무영참까지 쓰고.'
무영참(無影斬).
검성 김시혁의 주력기 중 하나로 오러를 입혀도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무시무시한 기술이다.
동시에 이번 국대 선발전에서 녀석에게 검성이라는 별명을 얻게 해 주는 주역이었다.
전생에선 그런 주력기를 1경기부터 쓰는 일이 없었다.
'그냥 기본기로 가지고 놀았었는데 말이지.'
타인에게 큰 관심이 없는 시혁이지만.
녀석이 아레나에서의 비매너를 굉장히 싫어한다는 건 잘 안다.
또 무슨 마찰이라도 있었는지.
전갈 길드의 해체 당시, 앞서서 녀석들을 쓸어버린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김종준은 이번에도 검붉은 기운이네.'
김종준의 전신에 잠시 일렁거렸던 검붉은 기운.
그 이후로 어마어마하게 빨라진 속도 덕분에 전생의 김시혁은 치명적인 일격을 허용해 패배했었다.
물론 이번 회차에도 마찬가지였다.
'전생에는 잘 몰랐지만, 이렇게 보니까 어딘가 낯이 익단 말이지.'
전생에선 마력불능의 1레벨이었고, 지금은 아니어서일까?
버프로 추정되는 김종준의 검붉은 기운은 묘하게 낯익은 느낌이 들었다.
-아! 김시혁 선수, 굉장히 당황한 모습입니다!
-솔직히 본인 스스로도 확신하고 있었을 거예요. 김종준 선수를 상대로 단 한 경기도 내주지 않을 거라고 말이죠.
-맞습니다! 김종준 선수가 베테랑 플레이어긴 하나 랭커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 차이는 상당하죠.
진행자들의 멘트와 함께.
폰 화면 속엔 대기실로 리젠 된 동생 녀석의 멍한 얼굴이 보였다.
'녀석, 꽤 놀랐나 보네.'
녀석의 성격상 김종준에게 당해서 때문은 아닐 것이다.
'아마 내 말 그대로 1경기를 졌다는 충격 때문이겠지.'
'아무리 시혁이 너라도 3 대 0으로 전승은 못 할걸? 첫 경기 정도는 질 거다.'
지금쯤 동생의 머릿속엔 자신이 했던 말이 맴돌고 있을 터였다.
원래부터 저런 녀석이었다.
공부를 필두로 뭐든 곧잘 하는 놈이었지만.
자신이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면, 그 충격이 꽤 오래가는 타입.
'10년 전 그 사건 때도 그랬었지.'
10년 전.
자신에게 마력불능을 선물했던 그 사건.
당시 전신의 혈관이 타들어 가는 듯한 그 악랄한 기억 속에서도.
지금처럼 멍하니 얼어 버렸던 어린 동생의 얼굴은 잊히지가 않았다.
짝.
"후! 쓸데없는 생각 말자. 이미 다 끝난 일이야."
시문은 양손으로 볼을 두드리며, 암울했던 기억을 털어 냈다.
"당장 돈 복사부터 해야지."
시문은 국대 선발전을 한쪽 화면으로 줄여 두고 토토앱을 열었다.
어차피 이 뒤는 자세히 볼 필요도 없다.
'이젠 시혁이도 전력을 다할 거고, 그게 아니더라도 천무지체 때문에 질 수 없을 테니까.'
김시혁의 세 특성 중 하나인 SSS급 특성 천무지체(天武肢體).
무기술부터 각종 기술, 심하게는 특성까지.
무과 관련된 모든 것들의 근원과 형을 이해, 해석해 버리는 미친 특성.
거기에 동생 녀석의 우월한 재능이 더해져, 그야말로 환상의 시너지를 낸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한번 당한 술수를 두 번 당하진 않지.'
전생의 검성 김시혁이 최강의 플레이어로 불릴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였다.
'말숙이도 이 부분만큼은 인정했으니까.'
창왕 종리추와 함께 김시혁에게 대항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존재인 천마 고말숙.
'나도 남 거 보고 베끼는 건 안 꿇리는데, 네 동생은 그걸 넘어섰어. 저 새낀 진심 인간이 아니야.'
콧대 높은 그녀조차 김시혁을 인정하지 않았던가?
지금쯤이면 이 괴물 같은 동생 놈은 1경기에 당했던 김종준의 모든 것을 다 파악해 뒀을 것이다.
그리고 회귀 전처럼.
남은 경기를 3연승으로 압살해 버리며, 개인전의 우승자와 MVP를 거머쥐게 되겠지.
아니나 다를까.
-아아! 김종준 선수! 이번엔 4등분으로 갈라집니다!
-압도적입니다. 역시 김시혁! 김종준의 벼락같은 공격이 조금도 통하질 않습니다!
-그렇죠. 마치 다 보고 있다는 움직임입니다. 아... 이렇게 1세대의 거산이 무너지나요?!
어느새 두 경기를 연달아 끝내 버리고.
마지막 경기까지 깔끔하게 마무리 짓고 있는 김시혁이었다.
시문은 동생의 활약에 자랑스러움을 느끼며.
아니.
"어디 보자."
동생이 벌어다 줄 돈에 흐뭇하게 웃으며 아예 국대 선발전을 꺼 버리고.
아레나 토토앱을 훑었다.
'내가 환전했던 AP가 175,000점이니까....'
당장 마력경화증 치료제의 판매금이 들어오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의 여유 자금은 있었다.
바로 그간의 방송들로 얻은 AP(Arena Point)였다.
현재까지 모인 AP는 대략 180,000점.
거기서 결승전 토토로 사용한 AP는 175,000점.
달러와 일대일 환율임을 고려해 보면 한화로 약 2억이 넘는 금액이 된다.
그렇게 마련한 자금을 김시혁의 3 대 1 승리로 배팅했고.
그마저 1경기 패배라는 정확한 패배 라운드까지 맞힌 상태.
'역시 시혁이의 전승에 배팅이 많구나.'
기대감을 품고 토토앱에 배당된 통계들을 훑던 시문의 눈이 살짝 커졌다.
'뭐야? 생각보다 3 대 1에 배당한 사람들도 꽤 있잖아?'
물론 20%도 되지 않는 수치였지만.
한 자릿수도 되지 않을 거란 시문의 생각과는 전혀 달랐다.
'그렇군. 역배들인가?'
일명 역배충.
무지성으로 역배당을 하는 이들이 꽤 붙은 것이다.
왜 있지 않은가?
현실적인 자료와 팩트를 떠나.
그저 높은 배당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도박 수를 던지는 이들.
'으음. 역배충을 고려해도... 대충 23배 정도는 되네?'
절로 입꼬리가 올라간다.
약 2억의 금액을 23배로 뻥튀기한다면?
오우 쉣.
"현자의 돌, 원하는 재료 있으면 말해. 오늘만 내가 쏜다."
-꺄흥! 정말? 나 우리 도련님이 준 애들로도 행복한데!
잭팟.
이 한 단어 말고는 설명이 필요 없었다.
* * *
"흐흐흥~."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그럴 수밖에.
'총 46억라니! 이 정도면 넓은 평수로의 이사는 걱정도 없겠어!'
어디 이사뿐이던가?
아레나 질병 치료제를 비롯해, 여러 작업에 필요한 넓은 연구실을 구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터였다.
'부족하거나 귀한 재료들도 편하게 살 수 있겠지!'
시문은 흥겨운 걸음으로 자취방의 문을 열었다.
"여기도 이제 작별할 땐가."
5평 정도의 좁은 원룸.
사실 이 월세방도 힘겹게 얻었거늘.
'복이 들어올 땐 한 번에 들어온다더니....'
이보다 더 넓고 좋은 곳으로 이사 갈 수 있는 위치가 되었다는 게 아직도 잘 실감 나지 않았다.
-오빠? 돈 많이 벌어서 벅찬 마음은 이해하는데, 우리 슬슬 확인해야지?
"맞다! 이럴 때가 아니지."
잠시 감상에 빠졌던 시문은 현자의 돌의 말에 고개를 휘휘 젓고는.
곧장 자취방 구석에 마련된 작업 테이블로 다가갔다.
그곳엔 초록빛을 반짝이는 숙성기가 있었다.
영약의 숙성이 끝났음을 알리는 것이다.
시문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숙성기를 열고 영약들을 꺼냈다.
-오빠, 얘네들 숙성이 아주 잘됐는데?
"그렇지?"
-얼른 확인해 보자! 숙성기도 업적 포인트를 써서 연성했잖아.
"녀석. 기다려 봐."
시문은 숙성기에 넣어 놓은 영약들을 조심히 꺼냈다.
숙성에 들어간 영약은 총 3개.
단의 형태가 1개, 포션 형태가 2개였다.
시문은 그중 보라색 모찌가 연상되는 단을 먼저 집어 들었다.
[월암단]
등급 : B+
-복용 시 민첩 스탯이 영구적 4 상승.
-첫 복용 시 유연성이 미세하게 증가합니다.
달빛 암석가루와 그늘초를 섞어 만들어진 영약.
고수준의 연금술과 숙성으로 영약의 효능을 한층 더 높였다.
"좋네."
B+ 등급.
완벽한 제조 과정 덕분에 +가 붙은 것은 물론.
'영약 숙성 덕분에 추가 옵션이 확정으로 붙었나 본데?'
보통 C등급에선 '낮은 확률', B등급에선 '높은 확률'이라는 불확정적인 옵션이 붙는다.
예를 들어 [월암단]의 두 번째 옵션의 경우.
완벽한 제조에 영약 숙성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첫 복용 시 유연성이 미세하게 증가합니다.
라는 옵션이 아니라.
-첫 복용 시 '높은 확률'로 유연성이 미세하게 증가합니다.
와 같은 식으로 옵션이 붙는 것이다.
시문은 만족스러운 눈으로 월암단의 두 번째 옵션을 바라봤다.
'스탯이 아니라 유연성을 올려 주네. 이러면 혈화단보다 스탯을 적게 올려 줘도 만족이지.'
전에 만들었던 영약인 [혈화단]의 등급은 C.
그러나 히든 보스의 부산물로 만들어서인지 힘민체를 총 2씩 올려 줬었다.
그보다 등급이 더 높은 월암단의 경우.
민첩 4 증가로 혈화단보다 전체적인 스탯 향상치는 낮았지만.
고등급 영약의 특징인 '첫 복용 시 유연성 증가'라는 추가 옵션이 붙어 있었다.
"다른 것들도 비슷하겠지?"
시문은 기대가 찬 눈으로 포션 타입의 두 영약도 확인했다.
[난폭한 폭력의 영약]
등급 : B+
-복용 시 힘 스탯이 영구적 5 상승.
-첫 복용 시 체력 스탯이 영구적으로 1 상승.
오우거와 트롤, 각종 야수들의 심장으로 만들어진 영약.
고수준의 연금술과 숙성으로 영약의 효능을 한층 더 높였다.
[금강수]
등급 : A
-복용 시 체력 스탯이 영구적 7 상승.
-첫 복용 시 체력 스탯이 영구적 2 상승.
-첫 복용 시 자연 회복력이 미세하게 증가합니다.
복용 가능하게 정제한 미스릴을 베이스로 만들어진 영약.
고수준의 연금술과 숙성으로 영약의 단계가 높아졌다.
예상대로 스탯과 함께 두 번째 추가 옵션이 붙은 영약들.
"세상에...."
그중에서도 시문의 입이 떡 벌어지게 만드는 영약은 [금강수]였다.
-오빠, 금강수 이건 등급 자체가 올랐는데?
"어. 안 그래도 보고 있었다."
본래 금강수의 등급은 다른 두 영약과 마찬가지로 B+등급이어야 했다.
하나 지금 눈앞에 있는 금강수는 어떠한가?
무려 A등급의 영약이었다.
시문은 어렵지 않게 이유를 추측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금강수에 들어간 미스릴로 한 영향이 큰 거 같아."
-하긴. 애당초 미스릴을 복용 가능하게 정제한다는 거부터가 말이 안 됐지. 나 그때 진짜 깜짝 놀랐잖아.
이전 아레나를 시작하기 전에.
박진욱이 마력경화증 치료제 제작을 위해 건넸던 재료 중 남은 재료로 영약을 만든 시문.
그때 금강수에 들어갈 특수 금속 재료가 부족해.
특수 아레나 '열띤 광산의 악몽'의 보상으로 얻었던 미스릴을 대신 사용했었다.
-난 인간이 미스릴을 거기까지 정제할 수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 했어.
그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현자의 돌은 감탄과 경악을 쉬지 않고 오갔었다.
-오빠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그건 마력에 뛰어난 종족들도 쉽게 할 수 없는 일이거든.
"그런가? 뭐, 처음 정제했을 땐 나름 고생이 많긴 했어."
-나름이라니! 오빠, 그건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정제 기술이 아냐! 솔직히 난 아직도 의심된다고.
"의심?"
-그래. 혹시 오빠가 연금술 말고 다른 꼼수를 쓴 게 아닌가! 하는 거지.
"녀석, 의심할 게 따로 있지."
연금술밖에 하지 못하는 자신이 무슨 술수를 부릴 수 있단 말인가?
거기에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만약 그랬다면 현자의 돌, 네가 몰랐을 리 없잖아."
신화적 연성물인 현자의 돌이 그걸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그건 그렇지만....
어지간히도 믿기지 않는 것일까?
현자의 돌은 여전히 말끝을 흐렸다.
"네 의심은 자유지만, 엘릭서의 레시피를 떠올려 보면 너도 이해가 갈 거다."
엘릭서에 들어가는 재료 중 하나가 바로 미스릴이다.
그걸 복용 가능하게 정제할 줄 모르면, 애당초 엘릭서 제작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당연히 현자의 돌도 이 사실을 알고 있고.
-맞아, 엘릭서! 거기에 다량의 미스릴이 들어갔었지?
"그래. 이제 의심이 좀 사라지냐."
심지어 그걸 1레벨에 만들어 낸 시문이니, 납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거 생각해 보니 서운하네? 우리 현자의 돌이 날 다 의심하고."
-에? 아, 아니아니아니!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현자의 돌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높고 잘게 흔들린다.
-난 오빠가 워낙 고난도의 정제를 쉽게 하니까... 그, 그래! 어~~엄청 놀랐다 이거지!
"하여간에, 말은 잘해요."
-아잉! 오빠 내 맘 알자너~ 웅?
"그만해라. 역하다."
-오빠아악! 씨잉! 됐고, 그것들 얼른 복용하자. 오빠 골드 빨리 가야 한다며?
이쯤에서 넘어가 주기로 할까.
"녀석."
피식 웃은 시문은 가장 등급이 높은 영약인 금강수를 열었다.
현자의 돌의 말대로.
'빨리 골드 랭크로 올라가서 [망가진 세계수의 씨앗 조각]을 사용해야지.'
특수 아레나의 달달함은 이미 한 차례 맛보지 않았던가?
"그럼 스펙업 좀 해 볼까?"
퐁.
포션 마개가 열리는 맑은 소리와 함께.
꿀꺽.
시문은 금강수를 주저 없이 들이켰다.
제43화
43화. 승급전 (1)
[영약의 효력으로 힘이 5 증가합니다.]
[영약의 효력으로 민첩이 4 증가합니다.]
[영약의 효력으로 체력이 10 증가합니다.]
[영약의 효력으로 유연성이 미세하게 증가합니다.]
[영약의 효력으로 자연 회복력이 미세하게 증가합니다.]
눈을 즐겁게 어지럽히는 문구들.
한 번에 증가되는 스탯이 많아서일까?
"건강해진 느낌이 팍 드는데."
시문은 전신에 힘이 도는 걸 몸소 체감했다.
"체력 위주의 성분 배합을 한 보람이 있네."
그 결과가 총 체력 스탯 10 상승.
더불어 육체적인 유연성과 회복력이 증가해서인지.
마치 방금 자고 일어난 것처럼 전신이 개운했다.
'이러면 인체 연성의 부담도 꽤 적겠지.'
기본적으로 인체 연성은 연성력을 베이스로 사용하지만.
결국 그 연성된 능력을 버텨 내는 것은 스스로의 육체다.
연성력이 연료라면.
육체는 그걸 담아내는 그릇인 것이다.
그런 그릇을 강화했으니, 앞으로 인체 연성으로 인한 육체의 피로도는 줄어들 터.
"이거 얼른 확인해 보고 싶네."
시문이 만족스럽게 웃던 그때.
[향상된 영약을 제작, 섭취하였습니다.]
[연성력이 1 증가합니다.]
[현자의 돌의 레벨이 1 증가합니다.]
예상치 못한 메시지들이 눈앞으로 떠올랐다.
'호오? 연성력에 현자의 돌까지 렙업을 해?'
총 44였던 연성력은 45로.
24레벨이었던 현자의 돌은 25레벨로 오른 것이다.
특히나 현자의 돌의 레벨이 오른 건 무척이나 반가운 일이었다.
'이걸로 경험치 좀 굳었네.'
자신과 성장 경험치를 공유하는 현자의 돌의 경우.
뛰어난 성능만큼 가져가는 경험치량이 적지 않았기에, 1레벨이라도 무척이나 반가운 시문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연성물의 본래 등급에서 한 단계 높은 등급으로 상승시키셨습니다.]
[업적 '내 연성물만 레벨업'을 달성하였습니다.]
[업적 포인트 1,000점을 획득합니다.]
[칭호 '연금술의 선구자'의 옵션이 성장합니다.]
"업적 포인트에 칭호까지?"
업적 포인트 1,000점과 성장형 칭호의 성장까지.
시문은 즉시 칭호란을 열어 확인했다.
[연금술의 선구자] - 성장형
연금술의 신화적인 산물을 모두 연성한 연금술사에게 주어지는 칭호.
-연성 관련에 아주 작은 보너스를 받는다.
-연성에 소모되는 연성력이 10% 감소한다.
'두 번째 옵션이 10%로 상승했네.'
본래 두 번째 옵션의 옵션은 소모 연성력 5% 감소.
하나 이번 성장을 기점으로 총 10%까지 성장해 있었다.
"아, 달다!"
시문은 입 안이 절로 달콤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이왕 이렇게 된 거, 단맛 좀 제대로 느껴 봐야지."
아레나 접속기기를 집어 들었다.
* * *
[갤럭시 아레나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번 아레나의 종목은 '서바이벌'이고, 참가 인원은 100명입니다.]
[인원이 모두 보이면 아레나가 시작됩니다.]
아무것도 없는 검은 공간.
일명 대기실로 들어온 시문은 허공에 뜬 문구를 확인했다.
-시하~.
-형, 나 방송 쥰나 기다렸... 어 뭐야? 국종이네?
-오올! 국종이다!
-진짜네? 김시문의 국민 종목이라니, 이거 못 막습니다.
-알림 뜨자마자 왔는데. 개꿀 ㅋㅋㅋ.
함께 켠 아레니아로 접속한 시청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국민 종목이라. 잘됐네.'
100인으로 이루어진 서바이벌.
일명 '국민 종목'으로 불리는 이 아레나는 플레이어와 시청자 모두가 만족하는 인기 종목이었다.
그럴 수밖에.
종목 특징답게 어지간해선 큰 변수 없이 순수 실력만으로 진행되는 데다.
랭크대와 맵, 조건에 따라 매번 새로운 느낌이 드니까.
-맵 어디일까?
-어디든 핑거에몽은 답을 찾아용!
-답을 찾는 게 아니라 만드는 거지 ㅋㅋㅋ.
-앙! 쌉가능!
채팅을 확인한 시문 역시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스펙업을 확인하기에도 딱 좋겠어.'
힘민체는 아직 1 스탯도 크게 느껴지는 초반대의 스탯 아니던가?
서바이벌만큼 확인하기 좋은 맵도 없으리라.
"반갑습니다, 여러분. 서바이벌은 처음이라 많이 떨리네요."
-떨린데 ㅋㅋ 누가? 적이?
-아 처음이지 고럼! 니들이랑 처음이라구!
-이분 서바이벌 한 번도 안 해 보셨나 보네요. 신기하다. 잘 나오는 종목인데.
-그러게. 처음이라니까 더 기대되자넝 \(>o<)/!!
-시문 님. 이번에도 1등 가시죵?
"하하! 노리고는 있는데 잘 모르겠네요. 저번에도 그렇고. 요즘 아레나 매칭이 빡세지는 걸 느낍니다."
시문은 기대감이 섞인 눈으로 시청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매칭 인원을 기다렸다.
그런 시문의 앞으로.
[플레이어 김시문에 한해, 이번 아레나를 승급전으로 적용합니다.]
의외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어? 승급전?"
-으잉? 승급전? 형 이거 승급전임?
-ㅁㅊ ㅋㅋㅋ. 승급전이었어? 형! 빨리 방제라도 바꿔. 시청자 엄청 빨 듯.
-승급전이라서 국종이로 매칭 잡힌 거였나?
-개꿀잼각이네. 나 커뮤에 글 때리고 오겠음 ㅋㅋ.
-치킨각이다. 다들 시켜!
-오기도 전에 끝낼 듯 ㅋㅋㅋ.
승급전이라는 한마디에 곧장 난리가 나는 채팅창.
안 그래도 승급이라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레는 마당인데.
대부분이 좋아하는 100인 서바이벌로 이루어지니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시문 속내는 채팅창의 반응과 조금 달랐다.
당연했다.
'승급전을 이렇게 언질도 없이 준다고?'
시청자들이야 개인 메시지를 볼 수 없으니 시문이 승급전임을 알고 들어온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시문으로선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왜지?'
보통 승급전은 저번 성흔을 얻었을 때처럼.
다음 '아레나 참가 시 승급전이....' 어쩌고저쩌고하며 미리 언질을 주기 마련이다.
한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통보를 하다니?
물론.
[실버 랭크에서 김시문 플레이어는 더 이상 MMR로도 조절할 수 없기에, TOP 10인을 달성하시면 자동 골드 랭크로 승급됩니다.]
[승급 실패 시 상태창에 페널티가 주어집니다.]
이어지는 메시지를 보자, 현 상황을 납득할 수 있었다.
'내 스펙이 너무 높아져서구나.'
MMR시스템 자체가 보유하고 있는 스탯과 특성, 장비와 전적으로 나뉘지 않는가?
'하긴, 내가 실버라는 게 말이 안 되긴 하지.'
애당초 배치고사를 끝나고 랭크를 배정받을 때부터.
갤럭시 아레나는 자신이 골드 랭크로 가길 원했다.
단지 입장 아이템 [도리아의 미스릴 광석]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실버라는 선택지를 만들었을 뿐.
'그마저도 30%의 클리어 보상 감소라는 페널티를 부여했지.'
물론 매번 클리어 성적이 최고점이라, 감소 페널티는 별 체감도 들지 않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젠 특수 아레나도 끝났고.
저번 아레나에도 보스 원킬과 히든 보스 킬이라는 압도적인 결과를 냈으니.
이 이상 자신이 실버 랭크에 거주하는 건 이치에 맞지 않았다.
'거기에다 또 스탯 성장을 해 버렸으니....'
이번 세 영약의 복용으로 힘민체 스탯까지 확 오른 상태.
갤럭시 아레나의 입장에선 더는 두고 볼 수 없었으리라.
'뭐, 나야 좋지.'
어차피 골드를 빨리 가야 하는 상황 아닌가?
어깨를 으쓱거린 시문은 허공을 바라봤다.
인원이 모두 모인 것이다.
[인원이 모두 매칭되었습니다.]
[지역은 '으슥한 하수로'입니다.]
이어지는 메시지와 함께 주변의 공간이 일그러진다.
검었던 대기 공간과 별 차이가 없는 느낌이었으나.
"윽."
은은한 악취와 비릿한 물 냄새, 텁텁한 공기가 한데 어우러져 코를 찔렀다.
-ㅋㅋㅋ 이 형 인상 찡그리는 거 봐. 냄새 오지나 본데?
-장난 아님. 냄새도 냄샌데. 뭔가 습해서 묘하게 기분 더러움.
-ㄹㅇ. 원래 방구도 축축한 게 더 엿같자너~.
-그건 방구가 아닌데?
-으으... 나 저기 어제 매칭됐었는데, PTSD오네.
맵이 실현되자 주르륵 올라오는 반응들.
구불구불한 길에 폐광 맵처럼 중간중간 존재하는 다크존까지.
'으슥한 하수도'는 사람이라면 어디 하나 좋아할 만한 구석이 없는 맵이었다.
하나.
'맵 자체는 그다지 문제되지 않아.'
시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사항이었다.
인체 연성이 존재하는 한, 어지간한 맵엔 상성을 타지 않으니까.
단지.
'스탯이 올라서 그런가? 환경이 상당히 불쾌하게 느껴지네.'
스탯이 올라서인지.
악취는 그렇다 쳐도, 묘한 습기와 텁텁한 공기가 굉장히 거슬렸다.
[아레나를 시작합니다.]
[다른 플레이어를 처치하세요.]
시스템의 알림이 뜨자마자.
'얼른 끝내 버려야겠어.'
따악.
시문은 즉시 손가락을 튕겨 [블랙팬서의 신체조직]과 [문아울의 신체조직]을 연성했다.
* * *
"제길! 더럽게 어둡네."
"병X아, 입 다물어!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아... 미안."
어두컴컴해 윤곽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 공간.
소위 말하는 다크존에 위치한 두 남자는 한껏 자세를 낮추고 있었다.
그중 윽박을 지른 남자가 조심히 걸음을 내디뎠다.
"넌 조용히 내 뒤만 따라와. 내가 빡리딩 해 줄 테니까."
"부럽다! 나도 시야 관련 능력이 있었으면 이따위...."
"쉿! 목소리 좀 줄이라고!"
다시 한번 으름장을 놓는 남자.
그는 단검을 고쳐 쥐곤 주변을 살폈다.
"일단 다크존이니까 여기서 최대한 킬 빨아먹고, 사람 좀 줄면 나가자."
"순위 방어만 하자는 거지?"
"그거라도 해야지. 아레나 보드 순위 안 봤냐? 하필 괴물 새끼가 둘이나 매칭되어서는!"
뒤따르던 남자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아레나 보드엔 압도적인 성적을 내는 플레이어가 둘이나 있었다.
당연히 그 둘이 1, 2위를 차지하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고.
"근데 이렇게 대놓고 티밍해도 괜찮아? 혹시 이름 좀 있는 길드를 만나기라도 하면...."
"여기 다크존이야. 우리가 티밍인지도 모르고 뒤질걸?"
애당초 다크존이 존재하는 맵들은 티밍이 없을 수 없었다.
형체도 볼 수 없는 다크존에 숨어 함께 공격하는데.
관련 능력이 없고서야 티밍을 알아차릴 방법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저쪽이 먼저 보면 어쩌게?"
"병X아, 여기 코너라서 먼저 존버한 쪽이 무조건 유리해."
"하긴...."
"그러니까 넌 닥치고 내가 단검 던진 쪽으로만 마법 갈겨. 그럼 무조건 꽁킬이니까."
"아, 알았어."
소심하게 답하는 남자는 귀하디 귀한 마법계.
이곳이 실버 랭크인 만큼, 마법 저항력이나 대응 방식은 무척이나 암울했기에.
선공권만 잡을 수 있다면 사실상 무적이나 다름없었다.
그래.
선공권만 잡을 수 있다면 말이다.
타앗.
"응?"
정체불명의 작은 소리.
스쳐 지나가는 바람 소리라 해도 믿을 정도로 작은 소리였으나.
고요한 밤과 같은 다크존에서 이런 미세한 소리가 이유 없이 들릴 리는 없을뿐더러.
시야 관련 특성에다 암살계인 플레이어의 기감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하나.
"저기 뭔가 온...."
실버라는 한계 때문일까.
아니면 상대가 너무 좋지 않았던 것일까.
우득.
단검을 든 남자는 어떻게 대처도 못 해 보고 목이 꺾였다.
"재, 재현아!"
곁에 있던 남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다크존에 울려 퍼진다.
아무리 마법계라도 뼈가 부러지는 소리를 모를 수는 없는 노릇.
"이 자식!"
마법계 플레이어는 돌아오지 않는 친구의 목소리에 즉시 마력을 끌어올렸다.
어둑한 다크존을 밝히는 작은 불씨가 그의 손바닥 위로 피어오른다.
그리고 그것이 형체를 갖추기도 전에.
빠각.
화염 마법을 준비하던 그의 가슴이 움푹 패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단절되는 하수도의 악취.
시야마저 잿빛으로 변하고 나서야.
'나 설마 죽은 거야?'
마법계 플레이어는 자신의 죽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대체 뭐였지? 몬스터? 하수도 맵이면 리자드맨들이 자주 등장하긴 하는데... 그래도 이렇게 빠른....'
그때.
그 흐려지는 시야 사이로.
손에서 꺼져 가던 불꽃이 기습자의 얼굴을 언뜻 비추었다.
'사람? 사람이라고?!'
어둑한 환경 때문일까?
아리따운 이목구비를 마지막으로, 마법계 플레이어의 시야는 암전되었다.
털썩.
로브 특유의 펄럭임이 바닥을 두드렸다.
-와... ㅅㅂ. 이게 사람인가.
-미친. 다크존에 있는 거 어떻게 알았음?
-아까 이름 부르는 거 보니까 티밍하는 새끼들이었나 본데?
-응. 핑거에몽 앞에선 아무 의미 없어.
-이건 핑거도 아님. 걍 패죽였잖아 ㅋㅋ.
순식간에 쓰러진 두 플레이어의 시체를 탐탁지 않은 눈으로 내려다보는 남성.
-폐광 런 시즌 2. 하수도 런 개막이요.
-ㄹㅇ. 이분 저번에 폐광 맵에서도 다크존 뛰어다녔음. 관련 특성 있는 듯.
-아니 그럼 대체 없는 게 뭐임?
-날 못 가졌잖아.
-Xㅋㅋㅋ 진짜 어이가 없네. 위에 넌 꼭 뒤졌으면 좋겠다.
자신의 활약으로 불타는 채팅창의 반응과 다르게.
시문의 기분은 그리 좋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1위 – 최진수 13킬.
2위 – 김시문 10킬.
....
현 아레나의 상황을 보여 주는 아레나 보드.
'설마 내가 1등을 뺏길 줄은 몰랐는데.'
그 상단엔 자신의 이름이 아닌 다른 이의 이름이 올라와 있는 거였다.
'최진수라... 왜 이렇게 낯익지?'
묘하게 익숙한 이름에 습관적으로 턱을 톡톡 두드리던 시문.
얼마 가지 않아.
"아!"
저도 모르게 육성을 내질렀다.
'야수왕 최진수!'
야수왕 최진수.
성삼 다음으로 국내 2위에 빛내는 신화 길드의 하이랭커.
더 정확히는.
'이맘때쯤엔 실버였나 보구나. 하긴, 최진수도 말숙이처럼 슬로우 스타터니까.'
앞으로 하이랭커가 '될' 자라고 해야겠지.
'그럼 저 성적도 납득이 가지. 야수화 특성으로 하수도를 아주 휩쓸고 다니나 본데....'
어떤 야수로든 변할 수 있는 SS급 특성인 야수화.
인체 연성과도 제법 비슷한 면이 있는 특성이었다.
'거기에다 각성 이전엔 UFC를 뛰던 헤비급 선수였지.'
아시안 출신 격투 선수으로 꽤 이름을 날리던 최진수다.
당연히 전투 센스 역시 일반적인 플레이어와 차원이 다르겠지.
'쯧. 스탯 늘어난 걸 좀 즐겨 보려고 했더니.'
혀를 찬 시문은 인체 연성만으론 1등을 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현자의 돌.'
-응, 오빠.
'이거 견적 하나만 내 줘.'
현 상황에 어울리는 연성물의 이미지를 현자의 돌에게 전달했다.
-호오? 확실히 이만한 게 없긴 하지. 과하다 느껴질 정도로.
'얼마 정도 들겠어?'
-음. 일단 이건 케이스가 좀 특이해. 급하면 아스트라페처럼 단발성으로도 연성이 가능한 연성물이거든.
묘한 현자의 돌의 말투.
시문은 금방 녀석이 말한 의미를 눈치챘다.
'그 말은 영구제로도 연성이 가능하다?'
-그렇지. 이 연성물에 한해선 그편이 효율적이기도 하고.
'그런데 굳이 단발성을 묻어본 건, 비용 때문이야?'
-맞아. 상위 서열의 성좌 거라 첫 연성 기준으로 만 점은 줘야 하거든.
'만 점이라....'
옵시디언 태블릿과 비슷한 대가.
시문은 상태창을 열어 업적 포인트를 확인했다.
'어디보자. 현재 업적 포인트는 10,500점이니까. 만 점을 털어도 아스트라페 한 자루는 쓸 수 있겠네.'
비상용 포인트도 남아 있겠다.
시문은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진행해."
-오케잉!
[현자의 돌이 부족한 등가교환을 성립시키기 위해, 업적 포인트 10,000점을 요구합니다.]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기다렸다는 듯 떠오르는 메시지.
시문은 즉시 '예'를 터치했고.
웅.
업적 포인트가 부족한 등가를 채우는 익숙한 기운이 손가락 끝으로 모여들었다.
그것을 그대로 튕기자.
두 줄기의 빛이 회전하며 시문의 손 위로 모여들었고.
이내 황금색의 둥그런 형태로 변했다.
그것을 손에 쥐자.
[성좌 토르가 갑작스러운 왕의 눈의 등장에 관심을 보입니다.]
[성좌 헤임달이 갑작스러운....]
[성좌 로키가....]
일련의 문구들이 우수수 떠올랐다.
제44화
44화. 승급전 (2)
앞서 아스트라페의 연성이 그랬듯이.
아스가르드 성좌들의 관심이 줄줄 쏟아졌다.
그리고 그때와 똑같이.
[아르가르드의 성좌들이 당신에게 남은 흔적에 경악합니다.]
[아르가르드의 성좌들이 급히 거리를 물립니다.]
[오직 3명의 성좌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중 아스가르드의 지배자, 성좌 오딘이 당신과 주변의 성좌들에게 큰 관심을 보입니다.]
아스가르드의 성좌들 역시 칭호 '저편의 시선을 받는 자'의 영향을 받고 물러났다.
[성좌 오딘이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구나. 엄청 기다렸다구!' 눈을 반짝입니다.]
[성좌 제우스가 '쯧, 귀찮게 되었군.' 혀를 찹니다.]
[성좌 검은 염소가 '야 빌어먹을 꼬맹이, 안 꺼져?' 눈살을 찌푸립니다.]
[성좌 오딘이 '이미 상위 서열 사이에서 소문이 자자한데, 내가 미쳤냐?' 코웃음을 칩니다.]
시문은 채팅창처럼 올라오는 성좌들의 메시지에 고개를 갸웃했다.
'상위 서열 사이에 소문이 자자하다고?'
불과 성좌 천마를 만날 때까지만 해도 이러한 말은 없었는데.
그 의문을 해결하듯.
[성좌 오딘이 '과연... 저편의 미친년까지 관심을 보이는 이유가 있네.' 당신을 주시합니다.]
[성좌 검은 염소가 '꺼지랬지? 껍데기만 꼬맹이인 새끼야! 여기 나만 있는 거 아니거든?' 언성을 높입니다.]
[성좌 오딘이 '알아. 정규 아레나도 아닌데 상위 서열 성좌가 셋이나 붙고, 그 답답한 의회가 결정을 번복할 정도면 말 다 했지.' 작은 입가를 이죽거립니다.]
성좌 오딘의 메시지가 이어졌다.
'그렇군. 성흔이랑 상위 서열 성좌 셋의 관심 때문인가.'
지금껏 보아 온 바로는 성좌들끼리는 서로 아는 사이 같던데.
그런 덕분인지 몇몇 성좌들 사이에서 자신의 이야기가 떠도는 모양이었다.
'뭐, 어떤 쪽이건 좋은 일이지.'
플레이어로서 상위 서열 성좌의 관심은 어지간해선 이득이 되고.
'왕들의 픽'이라는 칭호가 있는 자신에겐 올 스탯 +1이라는 기적이 되어 돌아오니까.
성좌들의 메시지가 더 이어지지 않자.
시문은 연성된 둥근 황금 구슬의 정보창을 살폈다.
[오딘의 눈]
등급 – 모조품 (10%)
아스가르드의 지배자 성좌 오딘의 눈.
사용할 수는 있지만, 어째서인지 제힘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한다.
'예상대로네.'
앞선 상위 서열 성좌들의 무구와 마찬가지로 완성도 10%대의 연성물.
사실 오딘은 성좌들 중에서 다양한 무구들을 가지고 있기로 유명했다.
'하이랭커 쌍창의 파비안 볼프가 그랬지.'
독일의 하이랭커인 쌍창의 파비안 볼프.
오딘이 후원자인 그의 주력 무구는 무려 궁니르와 간반테인 두 가지로.
중국의 하이랭커인 창왕 종리추와도 상극을 겨룰 정도로 창의 귀재로 불렸다.
'사실 장비빨이긴 하지만.'
까놓고 말해서 기본적인 실력이나 전투 센스 자체는 창왕 종리추에게 밀렸다.
하나 절대 빗나가지 않는 창 궁니르와 무효화의 지팡이 간반테인의 콤보는 그야말로 무적.
공수를 완벽하게 이루는 2개의 장비는 파비안의 부족한 실력을 완전히 메꾸고.
창왕 종리추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만들어 주었다.
시문이 그런 대단한 두 무구를 두고.
'오딘의 눈'을 연성한 이유는 다름 아니었다.
쌍창이라는 별칭에 맞지 않게.
파비안 볼프는 딱 한 번, 자신의 시그니처인 궁니르와 간반테인을 내려놓은 적이 있었다.
'유럽에 용제가 강림했을 때였지.'
하루 만에 유럽을 반파하여 전 세계를 경악시켰던 용제.
그로 인해 유럽이 완전히 붕괴하기 직전.
"보인다! 저기가 약점이야!"
오딘의 눈을 사용한 파비안의 오더로 용제를 패퇴시켰다.
정확히는 강림의 원동력을 제거해, 되돌려 보냈다는 말이 더 적절하겠지만.
뭐, 어느 쪽이건.
'이 상황에서 최고의 아이템임은 확실하지.'
눈이라는 형태와 당시 용제의 약점과 공략법을 파악했던 파비안의 활약만 봐도.
오딘의 눈이 이 상황에 적절한 아이템이라는 건 확실했다.
"아마 왼쪽이었었지?"
파비안의 방송에서 보았던 기억을 되살려.
시문이 오딘의 눈을 왼쪽 눈으로 가져가자.
웅.
작게 울리는 오딘의 눈.
이내.
콰직!
강력한 자력에 의해 끌리는 금속처럼.
쏜살같이 시문의 왼쪽 눈으로 들이박히는 오딘의 눈.
-으아악! 내 눈!
-ㅁㅊ! 개놀랬네!
-이 형 대체 뭘 만든 거야? X나 범상치 않아 보이는데 갑자기 왜 공격을 해?
-공격이 아니라 장착한 거 아님? 동그란 게 눈처럼 보이던데.
-님아, 어느 아이템이 눈깔에 장착됩니까. 너 각성자 아니지?
갑작스러운 오딘의 눈의 돌진에.
아레니아로 보던 시청자들이 일제히 경악과 우려를 표했다.
물론.
[성좌 오딘이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좌 검은 염소가 '망할 꼬맹이. 이렇게 침을 발라 버리다니.' 불만스러운 시선을 보냅니다.]
[성좌 천마가 '아예 육체와 융합한 자네가 할 소린 아니지 않나.' 헛웃음을 흘립니다.]
[성좌 검은 염소가 '그러는 너도 1인 전승의 원칙을 깼잖아?' 이를 갑니다.]
[성좌 제우스가 '허허... 나만....' 어깨를 축 늘어뜨립니다.]
이 광경을 바라보던 상위 서열의 성좌들과.
"후."
당사자인 시문의 입장은 전혀 달랐다.
"깜짝 놀랐네."
왼쪽 눈에 황금 구슬이 처박혔다곤 볼 수 없을 정도로 말끔하게 일어나는 시문.
실제로 어떤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만약 고통이 느껴졌다면 현자의 돌이 당장 이놈을 죽이네 마네, 하며 펄펄 날뛰었을 터.
하지만 현자의 돌은 그런 반응이 아닌.
[오딘의 눈이 귀속을 요청합니다.]
-오빠, 이거 받을 거지?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물어 올 뿐이었다.
'당연하지.'
시문이 고개를 끄덕이자.
[오딘의 눈이 플레이어 김시문에게 귀속됩니다.]
알림과 함께 살짝 달아오르는 왼쪽 눈.
물론 뜨겁다기보다는 따뜻한 수건을 가져다 댄 듯 포근한 느낌이었기에.
"전 괜찮습니다, 여러분."
-진짜?
-괜찮은 거 맞죠?
-핑거에몽, 대체 뭘 만든 거냐?!
-형, 애꾸 돼도 난 가능해.
시문은 부드럽게 웃으며 알림에 불이 날 정도로 난리가 난 채팅창을 달랬다.
얼마 가지 않아.
[오딘의 눈이 완전히 귀속됩니다.]
[특성 현자의 돌과 연동되어, 특성으로 등록됩니다.]
[특성 오딘의 눈을 획득합니다.]
오딘의 눈은 특성이 되어 자리를 잡았다.
시문 역시 성흔을 얻었을 때와 달리, 특성의 추가로 확 달라진 느낌을 받았다.
'시야가 더 맑아졌어.'
정말이었다.
오딘의 눈이 귀속되며 눈에 연성해 두었던 [문아울의 신체조직]은 완전히 사라진 상태.
그럼에도 다크존의 어두컴컴한 주변이 어둡지만 뚜렷하게 보였다.
그래.
마치 밤눈이 밝아진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지.'
현자의 돌과 연동되어서일까?
시문은 특성의 획득과 함께 자연스럽게 새겨진 오딘의 눈의 사용법을 떠올렸다.
'연성력을 사용해서 이렇게....'
연성력을 끌어올려 오딘의 눈이 깃든 왼쪽 눈으로 흘려보내자.
화아아.
시문의 왼쪽 눈은 기이한 마법진과 함께 은은한 황금빛을 뿜어냈다.
-어? 이 형, 눈에 빛이 나!
-황금색 간지 보소 ㄷㄷ....
-눈 모양도 좀 달라진 거 같은데요?
-이젠 눈알도 만드냐 ㅋㅋㅋㅋㅋ.
-오빠. 렌즈 뭐예영??
채팅창에선 그저 외형에 대해서만 떠들어 댔지만.
오딘의 눈을 직접 사용한 시문의 눈에는 그것들이 들어오지 않았다.
단지.
'이거... 미쳤잖아?'
왜 오딘의 후원자였던 파비안이 오딘의 눈을 딱 한 번밖에 사용하지 못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용제를 공략했는지에 대해 아주 깊이 납득되어 버릴 따름이었다.
* * *
쿵.
"커헉!"
방패가 박살 나며 허공을 나는 갑옷의 남성.
"이거 완전 사기...."
그는 말도 제대로 끝내지 못한 채.
콰득!
명치가 꿰뚫리며 잿빛으로 물들었다.
"고작 스트레이트 한 방에 엄살은."
거구의 남성.
최진수는 그에 어울리는 목소리를 흘리며 시체를 꿰뚫은 팔을 뽑아냈다.
푸화악!
뜨끈한 핏물이 확 솟구친다.
"쯧. 쓸데없는 부분까지 리얼하긴."
최진수는 신경질적으로 전신에 튄 피를 슥슥 닦아 냈다.
그러다.
"윽!"
작은 신음을 토했다.
그의 두툼한 대흉근 위로 4개의 혈선이 그어진 것이다.
피를 닦던 최진수의 팔이 낸 사고였다.
"이 빌어먹을 놈의 특성은 도무지 적응이 안 되는군."
다행히 깊은 상처는 아니었는지.
최진수는 날카로운 손톱이 자라난 자신의 오른손을 조심히 몸에서 떨어뜨렸다.
손뿐만이 아니었다.
손톱에 걸맞은 뻣뻣한 털과 굵직한 팔은 도무지 인간의 것이라고 볼 수 없었다.
그래.
사람을 찢는다는 곰의 팔이 딱 이러할 것이다.
우드득.
그러한 팔이 기이한 각도로 뒤틀린다.
이내.
"이걸로 이 주변은 완전 클리어군."
흉흉하게 자리하던 손톱과 털은 온데간데없고.
살로 이루어진 인간의 팔이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팔에 꽉 들어찬 근육과 흉터, 숭숭한 털을 보자면.
마냥 인간의 팔이라고 부르기도 애매모호했지만 말이다.
남자는 되돌아온 팔을 스트레칭하며 주변을 살폈다.
"대충 15킬 정도 했나?"
아마 계산이 틀리진 않았을 것이다.
아레나 시작부터 지금까지 단 1분도 쉰 적이 없으니까.
'역시 아레나는 개인전이 편하다니까.'
각성 전 선수 시절.
UFC를 한창 뛸 때도 그랬다.
본래 싸움이라는 것은 혼자 하는 것.
던전이나 공성전, 협력 조건 등으로 주먹도 제대로 쓸 줄 모르는 놈들과 합을 맞추는 건.
최진수로선 무척이나 짜증이 나는 일이었다.
'이대로라면 이번 아레나도 1등이겠군.'
얼굴에 묻은 피까지 대충 닦아 낸 최진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레나 보드를 열어 보기 전까진 말이다.
"아니! 이게 뭐야?!"
1위 – 김시문 24킬.
2위 – 최진수 15킬.
....
최진수는 자신의 두 눈을 강하게 비볐다.
그러나 허공에 뜬 아레나 보드의 내용이 바뀌는 일은 없었다.
"그사이에 24킬이라고?"
분명 마지막으로 순위를 확인했을 땐 자신이 13킬로 1위.
저 김시문이라는 플레이어는 10킬로 2위를 달리고 있었는데?
그러나 놀람도 잠시.
"싸울 줄 아는 놈인가 보군."
최진수는 각진 턱을 씰룩거렸다.
그의 얼굴은 즐거움으로 가득했다.
이만한 실력자라면 반드시 만나게 될 터.
"이왕이면 전투계였으면 좋겠는데."
그것도 무투계로 말이다.
기대감을 담고 최진수가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따악.
음습하고 축축한 통로에 맑은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우득.
늑대의 그것처럼 순식간에 역으로 뒤틀리는 최진수의 다리.
생각 따위는 할 필요도 없었다.
최진수는 발바닥으로 전해지는 미세한 진동에 즉시 바닥을 박찼고.
드드득.
서 있었던 바닥은 어느새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변해 버린 발바닥을 뒤따랐다.
이어.
따악.
또 한 번의 소리가 들려온다.
그에 어느새 짐승처럼 뾰족하게 솟아난 귀가 쫑긋거렸다.
'꽤 멀다.'
소리가 울리는 하수도의 구조 덕분일까.
소리 강도를 보아 제법 멀리서 메아리쳐 오는 것이 느껴졌다.
콰르르.
"쳇."
박진욱은 천장에서 내리꽂히는 흙가시들을 피하며.
'마법계인가? 귀찮게 됐군.'
어느새 양팔까지 늑대의 그것으로 변한 최진수는 네발로 하수도를 내달렸다.
따악. 따악.
정체불명의 맑은 소리가 쉼 없이 들려온다.
그럴 때마다.
파가각.
촤아아!
흙을 비롯한 물 등 온갖 곳에서 공격들이 이어졌다.
'대체 어디냐! 어디에 숨어 있지?'
야수 특유의 날랜 움직임으로 그것들을 피해 내는 최진수.
그는 야수처럼 뾰족해진 코를 연신 킁킁거리며 공격자의 냄새를 찾으려 했지만.
돌아오는 건 한결 더 지독해진 하수구의 악취와.
콰가각.
드득!
사방에서 쏟아지는 공격들뿐이었다.
'이놈, 하나하나가 내 움직임을 정확히 예측하고 있어.'
거기에다 급소만 집요하게 노려 오고 있다.
최진수는 명치를 향해 날아드는 돌주먹을 박살 내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 김시문이라는 놈이 분명하겠지.'
확실했다.
24킬로 1등이라는 등수도 그렇고.
이 구간대에서 이토록 정밀하고 까다로운 공격을 감행하는 자는 만나 본 적이 없으니까.
"마법계라 아쉽지만, 이것도 이거대로 재밌지."
뚜둑.
늑대상이었던 최진수의 얼굴이 뒤틀린다.
귀는 좀 더 높이.
반면 뾰족 튀어나온 주둥이와 코는 조금씩 밀려들었다.
박쥐.
딱 그것을 떠올리게 만드는 최진수의 얼굴이 입을 쩍 벌렸고.
~~~~~.
박쥐에게만 허락되는 비명이 하수도를 타고 메아리쳤다.
이내.
~~~~!
'거기냐!'
되돌아오는 초음파가 기습자의 위치를 정확히 알려 주자.
타다닥.
최진수는 박쥐의 얼굴을 그대로 유지한 채, 네발로 하수도를 내질렀다.
그리하여.
'찾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한 손을 들고 있는 남자의 뒤통수를 포착할 수 있었다.
'김시문, 넌 이제 끝이다!'
타닥.
엄청난 속도로 달리던 최진수는 힘껏 하수도의 벽면을 박찼다.
신기하게도 이리 빠른 속도로 달려왔고 지금도 달려가고 있건만.
최진수에게선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치 은밀한 기습을 가하는 야수처럼 말이다.
단지 딱 하나.
두둑.
순식간에 박쥐에서 늑대의 상으로 탈태하는 소리만 들릴 뿐.
그걸 들은 것일까.
김시문의 몸이 서서히 뒤로 돌았지만.
"크릉! 알아차려도 이미 늦었다!"
최진수가 거대해진 아가리를 쫙 벌리며.
서슬 퍼렇게 자란 송곳니로 훤히 드러난 남자의 목을 물어뜯었다.
정확히는 뜯으려고 했다.
따악.
지금껏 들어 왔던 맑은 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퍼펑.
"캥!"
쩍 벌린 아가리 속에서 불똥이 튀는 고통이 작렬한다.
갑작스러운 입 속의 폭발에 바닥을 나뒹구는 최진수.
그런 그의 귓가로.
"이거 진짜 미쳤네. 가까울수록 더 잘 보이잖아?"
등을 보이고 있던 남자가 서서히 몸을 돌렸다.
"무, 무슨?!"
그의 얼굴을 본 최진수가 경악을 토했다.
재수 없을 정도로 수려한 외모는 고사하고.
"아직 사용이 어색한데도 이 정도라니...."
남자의 왼쪽 눈앞으로 황금색의 정밀하고 세련된 마법진이 펼쳐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마법진들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스르륵 돌아갔다.
그래.
"이거 나중이 기대되는데?"
마치 최첨단 현미경으로 사물의 구석구석을 관측하듯 말이다.
제45화
45화. 승급전 (3)
콰르르!
터져 나가는 바닥.
점프로 그것을 피한 최진수는 곧장 야수화로 인해 변이된 팔을 내질렀다.
그러나.
빡.
기다렸다는 듯 아래에서 솟아오르는 돌주먹은 정확히 그의 팔꿈치를 노려 제재를 가했다.
"이 빌어먹을 마법!"
그것을 신경질적으로 박살 낸 최진수는 급히 백 스텝을 밞으며 몸을 물렸다.
이내.
쾅!
다시 한번 터져 나가는 바닥.
이번엔 돌주먹이 아닌 호리호리한 남성의 주먹이 처박혀 있었다.
하나 그 언밸런스한 광경보다.
'뭐지? 대체 무슨 능력인 거야?!'
최진수는 아까부터 계속 자신의 공격이 완벽히 봉쇄되어 버리는 이 상황에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매번 내 공격을 막아 내는 거지?'
야수화와 직업 드루이드의 연계를 통해 변신의 제약에서 완전히 벗어난 최진수.
거기에 과거 UFC 헤비급 선수이던 경험이 더해진 전투력은 분명 심해 플레이어의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한데.
저 김시문이라는 자는 그런 자신의 공격을 너무나도 쉽게 막아 낸다.
사실 막아 낸다는 표현 자체가 웃겼다.
'내 움직임을 완벽하게 읽고 있다.'
격투기에 다년간 종사한 경력이 있어서일까?
최진수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체구에 맞지 않는 괴력으로 돌아오는 반격은 그 위력을 논하기 이전에.
상대는 자신의 움직임을 꿰뚫고, 완벽한 타이밍에 차단한다는 걸.
따악.
또 한 번 튕겨지는 김시문의 손가락.
'이번엔 또 뭐냐!'
이미 수차례의 공수 교환으로 저 핑거 스냅이 어떤 행위인지는 뼈저리게 경험한 상태.
'정면!'
최진수는 정면의 털들이 바짝 서는 감각에 곧장 등을 내보였다.
우드득.
순식간에 단단한 등딱지가 최진수의 널따란 등을 뒤덮었다.
쿠웅!
"큽!"
등 전체로 묵직하게 전해져 오는 충격.
그러나 SS특성 야수화와 프로 격투가로 살아온 정신은 그것을 깡그리 씹어 먹게 해 주었고.
터업.
"잡았다! 요놈!"
드디어 저 요망한 놈을 잡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네가 김시문이지? 퉤!"
머금고 있던 핏물을 거칠게 뱉고 오른팔을 들어 올리는 최진수.
"쥐새끼처럼 숨어서 갈긴 덕분에 고생 좀 했다. 그러니...."
우드득.
늑대처럼 날렵했던 그의 팔은 더 두텁고 거대하게 변하기 시작했고.
당연히 김시문을 붙잡은 왼팔 역시 아까보다 더 강력한 구속력을 선사했다.
"이제 뒈져라."
지금까지 처맞기만 했던 울분을 토하듯.
최진수의 곰과 같은 팔이 흉흉한 기세로 내리꽂혔다.
하나.
턱.
너무나 쉽게 잡혀 버리는 최진수의 팔.
마치 단단한 바위 사이에 끼인 나뭇가지처럼.
그의 거대한 곰 발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익!"
순수 근력으로 막힌 것은 처음인 걸까?
아니면 곰의 팔과 정반대인 늘씬하고 하얀 손에 잡혀서일까?
최진수는 뾰족한 송곳니로 곧장 연계를 이어 가는 대신.
"이런 비실한 팔 따위로!"
꾸우욱.
잡혀 버린 팔에 더욱 힘을 주며 내리눌렀다.
일종의 자존심 싸움인 것이다.
그러나 그 팔을 막고 있는 시문의 얼굴은 지나치게 평온했다.
웅.
희미한 이명이 시문의 왼쪽 눈에서 흘러나왔다.
그에 따라 눈앞으로 자리한 기이한 마법진이 회전했다.
그걸 보고 나서야 최진수는 알 수 있었다.
마법진이 아니라, 마법진'들'이었다는 걸.
스르륵.
맞물리는 톱니바퀴처럼 서로 겹친 채 돌아가는 황금색의 마법진들.
특성 야수화로 인한 동물적인 직감이 강하게 경고해 왔다.
'저건 위험해!'
온몸이 발가벗겨지는 기분 나쁜 시선.
연신 경종을 울려오는 직감에 최진수는 내세우던 자존심을 빠르게 접고, 곧장 아가리를 벌렸다.
쩌억.
"크앙!"
* * *
허공을 가르며 날아드는 송곳니.
당장 서로의 팔을 붙잡고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상당히 위협적인 공격이었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시문의 눈빛은 무척이나 평온했다.
그럴 수밖에.
'보인다.'
정면에서 날아드는 서슬 퍼런 송곳니.
당장 목을 물어뜯을 기세이나, 시문의 시선에선 무척이나 느리게 느껴졌으니까.
'왼쪽, 아니 오른쪽이군.'
멈춘 세상 속에서 억지로 움직이는 왼쪽 시야의 최진수.
성난 야수의 모습 그대로 득달같이 날아드는 오른쪽 시야의 최진수.
신기하게도 정반대로 나누어진 시야는 반반씩 따로 놀 거라는 예상과 달리.
너무나도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날아드는 공격 궤도를 보여 주고 있었다.
잠시나마 오딘의 눈을 사용해 본 결과.
'상대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그리고 시야에 있냐 없냐에 따라 들어오는 정보가 천차만별이야.'
찰랑이는 털과 송곳니 사이에서 흩날리는 침방울까지.
시문은 최진수와 대면한 시점부터 그의 모든 움직임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가까이 마주했을 때에는.
우웅.
작은 이명이 울리며, 마주하고 있는 최진수의 전신이 옅은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정확히는 시문의 왼쪽 시야에 그렇게 보였다는 말이 맞겠지.
이내.
-오빠, 분석 끝났어. 약점을 표시할게.
현자의 돌의 목소리와 함께 최진수의 전신에 맴돌던 옅은 황금빛이 그의 명치로 스르륵 모여들었다.
'저기구나. 수고했어.'
-헤헤! 난 별로 한 것도 없는걸.
그 말에 시문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현자의 돌의 말대로.
특성화 된 오딘의 눈을 가동하는 건 전부 자신의 연성력이긴 했다.
그러나 특성화되며 새겨진 오딘의 눈 사용법은 평범한 사람이 사용하기엔 굉장히 난해했다.
아마 현자의 돌과 연동되지 않았다면 시문 역시 고생 꽤나 했을 터.
"그럼...."
느려진 세상 속에서.
시문의 머리와 몸은 여유롭게 아래로 숙여졌다.
따닥!
시문의 정수리를 스치며 울리는 딱딱한 소리.
최진수의 서슬 퍼런 입이 다물리는 소리였다.
"잘 가세요. 최진수 씨."
어느새 시커먼 기운으로 휘감긴 시문의 주먹.
그는 주저 없이 오딘의 눈이 포착한 최진수의 약점, 명치를 향해 뻗었고.
천마신공(天魔神功).
격(擊) 패황쇄(覇皇碎).
절세무공의 묘리를 담은 마기가 노도처럼 파고들었다.
쿠아아아앙!
주먹과 명치가 맞닿았다고 하기엔 믿을 수 없는 폭음이 일어났다.
털 덮인 팔다리, 머리와 다르게 상체는 거북이의 단단한 등딱지를 둘렀던 최진수.
비록 등 부위만큼은 아니었으나.
앞쪽 역시 어지간한 방어구 부럽지 않은 단단함을 자랑했건만.
"...커헉!"
최진수는 명치가 뻥 뚫린 채 핏물을 한 됫박 토해 낼 뿐이었다.
"빌어... 먹을...."
털썩.
설마 일격에 죽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한 것일까?
최진수는 경악에 찬 얼굴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그러면서도 그의 시선은 시문의 얼굴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과연 야수왕. 이때도 여전했네.'
마치 너를 반드시 기억하겠다는 듯한 최진수의 최후에.
시문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대한민국 멸망 후.
중국에서도 터프한 활약과 승부욕을 보여 주었던 야수왕 아닌가.
'기분이 좀 묘하긴 해. 그 대단한 하이랭커를 내 손으로 쓰러뜨리다니....'
물론 지금은 하이랭커는커녕 고작 실버대의 플레이어에 불과했지만.
저 야수같은 사내의 미래를 아는 시문으로선, 감회가 새로웠다.
[성좌 오딘의 '벌써 약점 포착을 사용하다니....' 두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성좌 검은 염소가 오딘의 눈을 묘한 눈빛으로 바라봅니다.]
그런 시문의 감성을 성좌들이 일깨운다.
정신을 차린 시문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활성화되었던 연성력을 거두어들였다.
그러자.
스으으.
희미해지더니 아예 사라져 버리는 황금색의 마법진.
시문이 다시 눈을 떴을 땐.
황금색으로 빛나던 눈동자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후. 성능만큼이나 연성력 소모가 크구나.'
보이지 않는 곳을 머릿속에 입체화하여 보는 것.
일종의 레이더, 맵핵에 가까운 형태로 사용하는 것도 그렇지만.
이렇게 상대를 본 시야에 두고 분석하여 약점을 포착하는 건.
천마신공의 초식인 패황쇄에 버금가는 연성력을 소모했다.
'육체적인 부담도 생기고 말이지.'
아마 영약 섭취로 인한 스탯 증가와 연성력 올인, 관련 칭호가 아니었다면 탈진을 했으리라.
시문은 약간 얼얼한 왼쪽 눈을 가볍게 문질렀다.
손바닥의 온기가 전해져서일까.
얼얼했던 느낌이 빠르게 가셨다.
잠시 숨을 고르고 페이스를 되찾자, 시야 한쪽에 어마어마하게 반짝이는 빛이 보였다.
채팅 알림이었다.
-미친... 일방적으로 딜교만 하네.
-저 사람 최진수 아님? 현 한국 실버 매칭대에선 최강자 아니었나?
-ㅇㅇ. 야수화 쓰는 거 보니까 맞는 듯. 신화 길드에서 계속 러브콜을 보낸다고 들었음.
-와 신화 길드라고? 찌라시 아님?
-맞아요. 얼마 전에 신화 길드 유망주 발라 버렸잖아요.
-어지간한 길드 유망주들도 꼼짝을 못 하는 플레이언데. 한 방에 발라 버리네 ㅋㅋ.
채팅창을 열자 우수수 쏟아지는 채팅들.
상당히 빠른 속도라 각성자인 시문도 눈으로 좇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엄마! 난 커서 김시문이 될래요! 엄마! 난 커서 김시문이 될래요!
-명존쎄보소! 손가락만 사기가 아니었네.
-그래 봐야 실버 새낀데 왜 이렇게 빨아댐? 개꼴뵈기 싫네 ㅋㅋㅋ.
-싫으면 나가 이 새끼야!
[심해학살자 님이 AP 100을 후원하셨습니다.]
=이게 마법계라니! 아레나 참 어질어질하죠?
[실번데요 님이 AP 500을 후원하셨습니다.]
=실버의 영웅! 골드 가즈아아아아~!!
도배인 채팅도 있었으나, 워낙 채팅 수가 많아 도배가 묻히는 상황.
거기에다 후원까지 계속 터지며, 채팅창은 그야말로 혼란의 도가니였다.
"후원과 응원 감사합니다. 나중에 방종할 때 제대로 인사드릴게요. 도배 자제해 주시고 매너 채팅 부탁드립니다."
시문은 간단한 멘트로 채팅창을 정리하곤 매니저 채팅창을 열었다.
이유야 간단했다.
-김시문: 혹시 가능하시면 도배나 욕설, 분탕치는 사람들 있으면 채금 좀 부탁드립니다.
-성좌 검은 염소: 고작 채금? 걍 목을 치면 안 될까?
-김시문: 안 됩니다. 강퇴는 심한 욕설이나 선을 넘는 분들만 해 주세요.
-성좌 검은 염소: 아쉽지만 ㅇㅋ! 내가 다 처리함. 늙은이들은 가만히 있도록.
-성좌 제우스: 웃기는군. 제일 늙은 게 누군데?
-성좌 검은 염소: ...내가 진짜 조만간에 올림포스 한번 찾아간다, 이 개X끼야!
채팅창만큼이나 뜨거워지는 매니저 채팅.
그러나 다행히도 성좌는 성좌인 것인지.
[매니저 '성좌 검은 염소'가 전문어그로 님을 강퇴하였습니다.]
[매니저 '성좌 검은 염소'가 djrmfhwhgdk 님을 강퇴하였습니다.]
[매니저 '성좌 검은 염소'가....]
-오오! 염소 눈나 돌아왔구나!
-도배충 싹 다 쳐 내!
검은 염소는 매니저 채팅으로 열을 올리면서도, 본방 채팅창을 학살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 모습에 시문은 볼을 슬쩍 긁었다.
'이거 참. 믿음직스럽기는 한데....'
내심 성좌한테 이런 걸 시켜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키야! 깨끗해진 거 봐.
-ㅋㅋㅋ. 채팅창 바로 1급수 전환되어 버렸죠?
-성능 확실하네. 역시 분탕 학살자 킹갓 염소!
-미친 어그로 도살자! 검은 염소!
[성좌 검은 염소가 채팅창을 보며 굉장히 만족스러워합니다.]
채팅창과 검은 염소의 반응을 보며 그런 걱정을 털어 버렸다.
'뭐, 본인이 좋으면 됐지.'
어깨를 으쓱한 시문은 아레나 보드를 열었다.
방금 최진수를 처리하고 총 26킬로 1등.
그 아래론 5킬이 2등을 이어 가고 있었다.
'오딘의 눈을 연성하지 않았으면 26킬은 불가능했겠지.'
이 복잡하고 어두운 하수도를 맵핵처럼 볼 수 있었던 오딘의 눈이 아니었다면.
최진수는커녕 주변 플레이어를 찾는 데도 전전긍긍했을 것이다.
시문은 양팔을 쭉 뻗으며 몸을 풀었다.
"읏차! 이로써 1등은 확정이니 회복도 할 겸, 좀 쉴까."
현자의 돌과 사기적인 스탯 덕분에 이 순간에도 연성력이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지만.
오딘의 눈 때문에 정신적으론 피로한 상태니까.
시문은 팔짱을 낀 채, 통로 벽면에 편히 등을 기대곤 눈을 감았다.
그때.
둥, 둥.
등을 기댄 벽면에서 미세한 진동이 전해졌다.
'누가 근처에서 싸우고 있나? 진동을 보아하니 위력이 좀 있어 보이는데... 마법계인가?'
실버 랭크임에도 진동을 일으킬 정도의 공격이라.
눈을 감은 채 팔꿈치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는 시문.
'마법계면 혹시 모를 변수가 생길 수 있으니까, 미리 처리해 두는 게 좋겠지?'
쉬는 건 언제든지 할 수 있다.
혹시나 하나는 변수를 사전에 차단할 겸, 시문은 기댔던 몸을 일으켰다.
이내.
"음?"
진동 방향으로 몸을 돌린 시문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둥, 둥.
'벽 안쪽에서 나잖아?'
마법계의 소행으로 생각했던 진동이 방금 자신이 기대었던 벽면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다.
시문은 벽면에 귀를 가져다 대고.
따악.
인체 연성으로 전신의 감각을 날카롭게 벼려 냈다.
그러자.
쿵! 쿵!
...!
'무슨 말소리도 들리는 거 같은데?'
진동은 한결 강하게 느껴졌고.
말소리로 추정되는 희미한 음성 역시 들려왔다.
'제대로 확인해 봐야겠어.'
시문은 거의 다 회복된 연성력을 끌어올렸다.
목표는 왼쪽 눈.
키이잉.
황금빛과 함께 눈앞으로 떠오르는 마법진들.
발동된 오딘의 눈은 어둑한 하수도의 벽면을 뚫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내.
[플레이어의 접근이 불가한 영역입니다.]
[이 이상의 간섭은 아레나 탈락 등, 불이익으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일련의 경고문들이 시문의 눈앞으로 떠올랐다.
'접근 불가의 영역이라고?'
대체 저 벽 너머에 뭐가 있길래 갤럭시 아레나가 친히 경고를 보내온단 말인가?
뭐든 간에.
'어쩔 수 없지.'
갤럭시 아레나가 직접 경고해 오는 거라면 이유가 있을 터.
거기에다 오딘의 눈으로 스캔해서 알 수 있었다.
벽 너머로 쳐진 모종의 결계는 결코 자신의 힘으로 뚫어 낼 수 없다는 걸.
시문은 깔끔히 포기하고 아레나 참가자를 찾아 눈을 돌리려 했다.
우웅.
"음?"
인벤토리에서 희미한 이명이 울리기 전까진 말이다.
"이건...."
순백에 가까운 아름다운 백은괴.
미스릴이었다.
그걸 꺼내 들자.
['도리아산 미스릴괴' 소유 확인. 접근 자격 검토 중....]
[검토 완료. 접근 자격을 부여합니다.]
시스템의 알림과 함께 벽 너머에 쳐진 결계가 조금 옅어지는 것이 보였다.
'이젠 넘어갈 수 있나 보군.'
시문은 즉시 손가락을 튕겼다.
정확히는 튕기려 했다.
콰아아아앙!
"우왓!"
갑작스레 벽이 터져버리기 전까진 말이다.
우수수 떨어져 나오는 잔해들.
그 속에는 이전에 한 번 본 적이 있는 생명체가 섞여 있었다.
"이건... 드라칸?"
비정상적으로 발달한 상체와 그에 비해 다소 비루한 하체, 그리고 멍청해 보이는 얼굴까지.
피투성이가 된 저 생명체는 분명 최하급 용족인 드라칸이었다.
하나 시문은 마냥 놀라고만 있을 순 없었다.
저벅.
"아코! 또 힘 조절을 못 했네."
무너진 벽면.
그곳에서 소녀로 추정되는 목소리가 흘러나온 것이다.
시문의 금빛 눈은 빠르게 무너진 벽 속의 인물을 훑었다.
양 갈래로 무릎까지 길게 땋아 내린 머리.
큼직한 두 눈과 자신의 허리쯤 오는 작은 키까지.
그러나 그런 체구와 달리.
'망치?'
야수왕 최진수에게나 어울릴 법한 거대한 망치는 소녀의 앙증맞음과 완전 상반되는 분위기를 자아냈다.
무엇보다.
"또 하수도 부쉈다고 마쿠르 삼촌한테 혼나... 어라? 어라라라?!"
이 정체 모를 소녀는.
"은인!!"
자신을 잘 아는 눈치였다.
제46화
46화. 의외의 재회 (1)
"꺄하하! 은인!"
해맑은 웃음과 함께 공중으로 붕 떠서.
덥석.
품으로 폭 안기는 소녀.
아니, 폭이 아니라.
"컥!"
'퍽'이라고 해야겠지.
등에 메고 있는 거대한 해머 때문인지.
아니면 타고난 완력 때문인지 몰라도 소녀가 가해 오는 압박감은 상당했다.
본인도 그걸 깨달은 것일까.
"아차차! 내 정신 좀 봐!"
소녀는 후다닥 시문의 품에서 떨어졌다.
"정말 죄송해요! 안 그래도 요즘 힘 조절 때문에 혼났는데... 너무 반가운 나머지 제가 실수를 저질렀어요!"
"아, 아니요. 근데 누구...."
되묻던 시문의 말이 뚝 끊어진다.
양 갈래로 땋은 머리에 큼직한 눈망울, 작은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완력과 거대한 해머까지.
다시 한번 소녀의 외형을 살피자, 대번에 한 종족이 연상되었고.
"서, 설마!"
한 아이가 떠올랐다.
"마르넬?"
시문의 물음에 얼굴이 환해지는 소녀.
"맞아요! 기억하고 계셨군요!"
그리도 기쁜지 폴짝폴짝 뛰는 마르넬.
그녀가 뛸 때마다 바닥이 쩍쩍 갈라졌으나, 시문은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이유야 간단했다.
'마르넬이 여기 왜 있는 거지?'
이전 [도리아의 미스릴 광석]으로 입장했던 특수 아레나 '열띤 광산의 악몽'.
그곳에서 만났던 드워프 소녀 마르넬은 그냥 특수 아레나에서만 등장하는 인물로 생각했다.
실제로 상위 랭크의 특수 아레나는 플레이어를 도와주는 인물들이 자주 등장했으니까.
하지만 이번은 경우가 달랐다.
'여긴 100인 서바이벌인데... 어떻게 된 거지?'
이곳은 특수 아레나는커녕, 끽해야 몬스터 정도나 등장하는 100인 서바이벌.
거기에다 드워프와 관련된 맵도 아닌데 어떻게 마르넬이 벽 뒤에서 튀어나온단 말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잠깐."
시문의 머릿속에 한 가지 가설이 스쳤다.
'만약 여기가 드워프와 관련이 있는 맵이라면?'
예컨대 이 하수도의 건설자가 드워프라면 어떨까.
이젠 사라져 버린 폐광 맵처럼.
하수도 맵 역시 드워프와 관련이 있다면 마르넬의 등장도 나름 납득이 되었다.
무엇보다.
'원래라면 마르넬은 열띤 광산의 악몽에서 죽었어야 하는 운명이었지.'
플래티넘에 육박하는 스펙으로 드라칸을 학살했던 시문.
압도적인 전투력으로 특수 아레나를 빠르게 진행해, 마르넬이 죽기 전에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플래티넘급 힐러가 와도 치료가 불가능한 마르넬을 살려 냈지.
'그 여파가 아레나에 뭔가 변화를 준 건가?'
당시의 반응만 봐도 그랬다.
갤럭시 아레나의 침묵이 그렇게 길었던 건 처음이었다.
더불어 시스템도 분명 운명이 크게 바뀐다고 했었지.
뭐가 되었든 간에.
"미안. 그때랑 달라져서 못 알아봤어. 많이 컸네?"
"정말요? 정말 저 많이 컸어요?"
"그래."
시문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마르넬은 다시 폴짝폴짝 뛰며 환호했다.
"꺄하하! 컸대! 나보고 엄청 컸대!"
"어... 저기 마르넬?"
온갖 액션을 다 취하며 기쁨을 표출하는 마르넬.
'말이 들리지도 않나 보네.'
컸다는 말이 그렇게 기쁜 걸까.
시문은 기쁨을 주체 못 해 주변을 박살 내고 있는 마르넬을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이내.
'여긴 또 왜 이래?'
쉴 새 없이 알림이 반짝거리는 채팅창으로 가는 시선.
그곳엔.
-드워프? 갑자기 드워프라고?
-드워프는 플래티넘 상위권에서나 나오는 거 아님?
-ㅇㅇ. 수인족이랑 같이 플래티넘 아레나에서나 나오는 종족인데....
-하수도 맵에 원래 드워프가 있었음? 끽해야 랫맨이나 리자드맨 정도 아냐?
-벽 부수고 나온 거 보니까 무슨 비밀 통로 같던데.
-아까 이 형 벽을 막 살폈잖아. 관련 정보 같은 거 있는 듯?
갑작스러운 드워프의 등장으로 수많은 의문이 범람하고 있었다.
하나 저들끼리 논해 봐야 실버 아레나에서 드워프가 등장하는 이유를 알 턱이 없었다.
그리하여.
-근데 이분 저 드워프랑 아는 눈친데?
-분명히 은인이라고 했었음.
-드워프랑 은인이라니 ㅋㅋ. 나중 가면 무슨 수인이랑도 은인 관계 하겠누.
-ㄹㅇ ㅋㅋㅋㅋ. 근데 수인족이 워낙 지X 맞아서 그렇지, 드워프도 어지간히 적대적이지 않나?
-맞음. 나 플랜데, 얼마 전에 던전에서 드워프 무리 만나고 몰살당함 ㅋㅋㅋ.
자연스레 채팅창의 반응은 시문과 마르넬의 친분으로 이어졌다.
-여기 유입 개많네. 저 드워프 저번 특수 아레나 때 구해 준 걔잖아.
-어? 진짜네? 마르넬. 기억난다. 많이 컸네?
-그러게. 애가 좀 커서 못 알아봄 ㅋㅋ. 진짜 걔 맞잖아?
-ㅁㅊ! 그 앤 그냥 NPC 같은 거 아니었음? 여기서 또 나온다고?
처음엔 시문처럼 확 성장한 모습 덕분에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점차 특수 아레나 '열띤 광산의 악몽'에서 구해 준 드워프 소녀임을 알아차리는 채팅창들.
당연히 시문이 떠올렸던 의문처럼.
마르넬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다들 혼란에 빠져, 저마다 추측을 뿌려 댔다.
[업적 '시청자 50,000명 돌파하기'를 달성하셨습니다.]
[업적 포인트 5,000점을 획득합니다.]
또 다른 갑작스러운 소식에 눈이 휘둥그레지는 시문.
그 시선은 자연스레 채팅창 옆 시청자 수를 향했다.
[51,271명 시청 중.]
'뭐야. 언제 5만이 넘은 거야?'
얼이 빠질 정도로 갑작스러웠으나, 시문은 곧바로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사실 예상이 그리 어려울 것도 없었다.
'승급전이랑 드워프 등장 때문인가.'
이미 심해 방송치고 1만에 가까운 고정 시청자를 지니고 있는 상태.
여기서 원래부터 핫한 콘텐츠인 승급전과 고랭크에서나 나오는 드워프의 등장까지 더해졌으니.
그 시너지로 5만 이상의 시청자를 확보한 것이다.
'어쩐지 평소보다 유독 채팅이 많다 했어.'
각성자의 눈으로 좇기도 힘들 정도로 빠르게 올라가는 채팅 아니던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성좌 오딘이 '호오, 의회 놈들이 성흔 하나로만 시끄러웠던 게 아니었잖아?' 마르넬을 보며 눈을 반짝입니다.]
[성좌 천마가 '그대는 저 때 일을 직접 못 봐서 아쉽겠구려. 그런 김에 얼른 꺼져 주는 게 어떠한지?' 안타깝게 웃습니다.]
[성좌 제우스와 검은 염소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입니다.]
[성좌 오딘이 '싫지롱~. 거기에다 이미 소문나서 기다리는 녀석들도 많다고.' 능글맞게 웃습니다.]
주르륵 올라오는 성좌들의 반응.
그에 시문은 확신했다.
'마르넬이 살아난 게 무슨 변화를 주긴 줬나 보네.'
그런 시문의 귓가로.
"아차! 내 정신 좀 봐! 삼촌이 제발 정신 좀 놓지 말랬는데! 죄송해요, 은인!"
어느새 하수도 파괴를 멈춘 마르넬이 허리를 반으로 접으며 연신 사과를 건넸다.
앞선 파괴 행각을 본 시문으로선 참 어색한 모습이었으나.
"아니야. 나도 잠시 생각할 게 있었거든."
내색하지 않는 현명한 판단을 내렸다.
"헤헤! 감사해요. 근데...."
연신 헤실헤실하던 마르넬의 웃음기가 누그러든다.
그녀는 말끝을 흐리며 부수고 나온 벽면을 힐끗거렸다.
"은인을 이렇게 만나 뵙게 된 건 너무 기쁜데요... 저 일 때문에 이만 가 봐야 할 거 같아요."
"일?"
고개를 갸웃하는 시문.
이내 그 시선은 무너진 벽 잔해 속에 파묻힌 드라칸을 향했다.
"용족 때문이야?"
"예? 그걸 어떻게! 아... 그렇지 참."
화들짝 놀라는 마르넬이었으나, 시문의 시선이 드라칸을 향한 것을 보곤 어깨를 늘어뜨렸다.
"저번에 은인의 도움으로 목숨도 건지고 용족도 몰아냈지만... 결국 도리아는 지킬 수 없더라고요."
미소의 주축인 올라간 입꼬리는 그대로였지만.
마르넬의 큼지막한 두 눈은 어느새 촉촉이 젖어 가고 있었다.
"그래도 살아남은 동족들이랑 북쪽의 하수 시설에서 은닉하고 있었는데... 또 놈들이 들이닥쳐선!"
꽉 쥐어지는 마르넬의 두 손.
그에 시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경청해 주었다.
"하지만 괜찮아요! 망치 쓰는 법도 제대로 배웠고, 도주로도 많이 파 뒀거든요. 또... 은인 말대로 저 많이 컸으니까. 헤헤!"
눈가를 빠르게 닦고는 불끈 쥔 두 주먹으로 힘차게 답하는 마르넬.
그녀를 바라보는 시문의 앞으로.
[성좌 오딘이 당신에게 미션을 겁니다.]
미션창이 떠올랐다.
[미션]
-성좌 오딘과 그가 속한 '아스가르드'는 드워프의 안정을 원합니다.
드워프 마르넬을 도와 습격자들을 처리하십시오.
보상 : 업적 포인트 5,000
미션 내용을 슥 읽은 시문은 마르넬을 바라봤다.
"그러니 은인, 아쉽지만 얼른 가 봐야 해서요. 이만 작별을...."
"마르넬, 내가 도와줄게."
"에?"
눈을 끔벅이는 마르넬.
그러나 시문은 대답 대신 무너진 벽으로 걸음을 옮겼다.
단순히 오딘이 걸어 준 미션 때문이 아니었다.
물론 미션 보상으로 주는 업적 포인트 5천 점은 시문 입장에서 매력적인 보상이었다.
앞서 시청자 업적 달성으로 얻은 것까지 합치면 오딘의 눈을 연성한 값을 그대로 복구할 수 있지 않나?
하지만.
"은인? 잠시만요. 전 정말 괜찮아요! 용족 정도는 저 혼자서도...."
"마르넬."
오딘이 건 미션의 보상을 논하기 이전에.
"내가 도와주고 싶어서 그래."
그냥 도와주고 싶었다.
그저 특수 아레나 한 번으로 끝날 줄 알았던 인연이었다.
하나 이렇게 다시 만나 해후를 나누고 있는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앞으로 마르넬은 계속 만나게 될 거야.'
어쩌면 플래티넘 랭크에 도달해서 또 만날지도 모르지.
플래티넘 구간부터 이종족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니 말이다.
'어차피 정규 아레나로 진입하면 이종족과의 만남은 필수적이지.'
이미 전생에서 한차례 정규 아레나를 경험한 시문은 안다.
아레나에 등장하는 종족들이 단순 갤럭시 아레나가 만들어 낸 가상의 존재들이 아니라는 걸.
아웃브레이크라고 무조건 몬스터들만 쏟아져 나오는 게 아니니까.
거기에다.
'마르넬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찝찝하니까.'
나쁜 아이도 아닐뿐더러, 함께 특수 아레나라는 난관을 헤쳐 나오지 않았던가.
외적으로도, 내적으로도.
시문은 마르넬을 진심으로 돕고 싶었다.
그런 진심이 전해진 것일까.
"은인...."
눈가와 몸을 살짝 떠는 마르넬.
이내.
"좋아요! 은인 같은 강자가 도와주신다는데, 저야 좋죠! 사실 혼자선 좀 버겁던 참이었거든요. 헤헤!"
평소의 활기찬 모습으로 돌아온 마르넬은 얼른 시문의 앞으로 섰다.
"가시죠! 제가 안내할게요."
"그래."
그에 피식 웃은 시문은 마르넬의 뒤를 따랐고.
[이곳으로 입장하시면 진행하고 있던 아레나에서 제외됩니다.]
[해당 아레나의 보상은 현재 기록 중인 성적으로 결정됩니다.]
[입장하시겠습니까?]
'남은 생존자도 적고 최진수도 처리했으니, 이대로 가도 1등은 문제없겠네.'
떠오르는 시스템창에 아레나 보드를 잠시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 아레나를 이탈합니다.]
[아레나 '북쪽 하수 시설'로 이동합니다.]
[특별 상황으로, 방송으로 나가는 모든 대화는 음소거됩니다.]
* * *
"이런 멍청한!"
뻐억.
매섭게 터져 나오는 타격음.
"쿠아악!"
짧은 비명과 함께 두툼한 드라칸의 상체가 바닥으로 내리꽂혔다.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나! 분명 동시에 습격하라 하지 않았나!"
"쿠, 쿠륵...."
분노 섞인 고함까지 이어지자, 드라칸은 파르르 공포에 질려 몸을 떨었다.
비단 상대가 배나 큰 덩치를 지녀서는 아니었다.
"그만하면 되었다."
나지막이 들려오는 목소리.
앞선 고함보다 훨씬 더 선명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 때문이었다.
"쿠륵! 나 다시 간다. 땅꼬마들을 다시...."
그리고 드라칸의 불안감은 그대로 적중했다.
"다시? 누가 다시 기회를 준다 하더냐."
콰직.
곧장 터져 버리는 드라칸의 머리.
고함을 외치던 거구는 잠시 이마를 짚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무릎을 꿇었다.
"직접 손을 쓰시게 만들어 죄송합니다, 사르쿠 님."
그곳엔 푸른 비늘이 곳곳에 덮여 있는 남성이 팔짱을 낀 채, 짝다리를 짚고 있었다.
"넌 항상 드라칸에게 많은 것을 바라는구나. 드라칸의 지능을 모르느냐?"
"알고 있습니다. 다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참 신기해. 너는 드라칸치고 이토록 뛰어난 지능을 지니고 있는데 다른 놈들은... 하긴, 괜히 변이종이 아닌 게지."
동물원의 원숭이를 보듯, 호기심이 담긴 시선.
분명한 무례임에도.
"칭찬 감사합니다."
근 6미터에 달하는 거구의 드라칸은 저보다 작은 이에게 그저 고개를 숙일 따름이었다.
"쯧. 하프인 내가 할 소리도 아니겠구나."
그 모습에 푸른 비늘의 남성은 혀를 차고는 허공에 손을 저었다.
복잡하게 얽힌 푸른 기운이 순식간에 무언가를 그려 나간다.
"천한 땅꼬마들의 땅굴이다. 도착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탐지 마법으로 만들었으니, 오류는 없을 거다."
"과연 드래고니안이십니다."
"흥. 천한 것들의 머리를 믿지 않았을 뿐이지."
항상 붙던 하프라는 수식어가 없어서일까?
푸른 비늘의 남성은 대답과 달리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허공에 그린 지도를 내밀었다.
"가져가서 모조리 잡아 오거라. 그리하면 너 역시도 사르가스 님의 눈에 들 수 있을 거다."
그 말에 거대한 드라칸의 눈이 반짝였다.
불패의 사르가스.
그는 위계질서와 혈통을 중시하는 용족 사회에서 능력을 우선으로 보는 몇 안 되는 용족이었고.
거대한 드라칸이 지금의 임무를 자처한 이유이기도 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는 거대한 드라칸.
그때.
키잉.
하프 드래고니안이 건넨 마력 지도에서 불쾌한 이명이 들려왔다.
원인은 마력 지도에 표시된 붉은 두 점이었다.
"호오? 이리도 가까이 있는데 이제야 포착되다니."
그것을 본 하프 드래고니안은 눈썹을 샐쭉 치켜올렸다.
"드워프 주제에, 탐지 마법을 피하는 아티팩트라도 지니고 있었나 보군."
"당장 가서 처리하겠습니다."
"죽이지는 말거라. 검은 제련소에서 쓰일 녀석들이니까."
"예. 사지 정도만 박살 내겠습니다."
거대한 드라칸은 곧장 몸을 돌려, 마력 지도가 표기한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제47화
47화. 의외의 재회 (2)
'하수도보다 깨끗해서 좋네.'
냄새나고 습했던 하수도와 달리 잘 닦여 있는 통로.
심플하게 건축된 것 같은데도 그 단조로움이 하나의 미를 자아냈다.
공기 역시 어딘가 환풍구가 있는 것인지, 지하 특유의 텁텁한 공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하나.
-와, 개미쳤네 진짜.
-ㅋㅋㅋㅋ. 이게 사람인가?
-사람 아니잖아.
-맞다, 그랬지.
시청자들은 통로 정중앙에서 벌어지는 일에만 열을 올릴 따름이었다.
당연했다.
애초에 시청하는 입장에서 이곳 환경의 디테일을 느낄 수도 없을뿐더러.
"대!"
빡.
"가!"
빠각.
"리!"
콰직.
마치 두더지 잡기 게임처럼.
한 마리당 하나씩 드라칸의 머리통을 박살 내 버리는 소녀의 학살극은 상당한 시선을 끌었으니까.
-갑자기 음소거라 말은 안 들리는데, 마르넬 근력은 진짜 미쳤네 ㅋㅋㅋ.
-드라칸은 골드 상위권에 등장하는 애들 아님? 그것도 힘이랑 몸빵 특화로.
-ㅇㅇ. 그나마 머리가 약점이긴 한데. 둔기로 저렇게 박살 내는 건 플래티넘 아니면 힘들지.
-그러니까 플래티넘 랭크부터 드워프가 나오잖아 ㅋㅋ.
마르넬의 활약에 한껏 들끓는 채팅창.
시문 역시 같은 마음이었다.
'역시 드워프. 근력이 어마어마하구나.'
드워프 종족의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성별의 차이 없이 강력한 근력을 자랑한다는 것이다.
물론 겉만 보면 남성 드워프는 울퉁불퉁한 체격을.
여성 드워프들은 전체적으로 약간의 윤곽이 잡힐 정도일 뿐이었으나.
시문을 포함한 플래티넘 이상 급의 플레이어들은 알고 있었다.
'저게 다 실압근이지.'
오크와 팔씨름을 해도 이기는 것이 여성 드워프들이라는 걸 말이다.
단지 한 가지 의아한 점이 있다면.
'마르넬은 아직 어리지 않나? 저런 수준의 근력은 좀 과한 거 같은데.'
마르넬의 힘이 드워프치고도 너무나 세다는 것.
물론 어린 나이 때부터 괴력을 발휘하는 게 드워프라지만.
"콩콩콩!"
빠바박.
명색의 용족인 드라칸의 머리통을 저렇게 쉽게 박살 낸다는 건 납득이 되질 않았다.
뭐든 간에.
'나도 놀고만 있을 순 없지.'
후웅.
시문은 자연스럽게 허리를 숙여 뒤에서 날아드는 도끼를 피한 뒤.
뻐억!
그대로 팔꿈치를 올려, 뒤를 노리던 드라칸의 명치에 쑤셔 박았다.
주르륵.
침을.
아니, 핏물을 질질 흘리며 쓰러지는 드라칸.
[오우거의 신체조직]과 [블랙팬서의 신체조직]의 급소 공격으로 인한 '즉사'였다.
시문의 움직임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따악.
몸을 뒤로 돌림과 동시에 튕겨지는 손가락.
그에 호응하듯.
드드드득.
"케에엑!"
"쿠루우욱!"
천장, 벽면, 그리고 바닥까지.
사방팔방에서 연성된 돌가시들이 뒤따라 달려들던 드라칸들의 몸을 무참히 꿰뚫었다.
단 3초.
그 짧은 시간에 10여 마리의 드라칸이 죽어 버린 것이다.
이건 마르넬의 학살과 또 다른 충격을 선사했다.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아니 ㅅㅂ. 저게 말이 되나? 드라칸을 한 방 컷 낸다고?
-ㄹㅇㅋㅋㅋ. 보는 내가 어이가 없네. 난 저거 잡는데 캐스팅 3번은 땡겨야 하는데....
-왜케들 놀라세요. 애당초 시문 님이 스스로 마법계라고 하셨잖아요.
-그니까 놀라는 거임. 마법곈데 방금 그 격투술 못 봄?
마르넬의 학살 때보다 다 격하게 반응하는 시청자들.
-이 형은 저번 특수 아레나 때도 이랬는데. 유입이 많긴 해.
-다 가졌다, 다 가졌어. 잠깐. 그러고 보니 이 형 얼굴도....
-그만! 다들 키보드에서 손 떼!
[가능충 님이 AP 300을 후원하셨습니다.]
=형... 압도적으로 가능해!
드문드문 후원 메시지도 이어졌으나, 시문은 거기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쐐애액.
공기를 가르는 섬뜩한 소리가 포착된 것이다.
"음."
가볍게 몸을 비트는 시문.
그런 시문의 옆으로 기다란 무언가가 빠른 속도로 스쳐 지나갔다.
화살이었다.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확인한 시문은 조금 놀랐다.
"드라코? 드라코도 있었어?"
드라코.
드라칸과 마찬가지로 골드 상위권부터 등장하는 최하급 용족.
드라칸과 정반대로 날씬한 체형을 지닌 드라코는 드라칸보다 근력과 체력이 밀리지만.
날렵한 몸놀림에 원거리와 암습을 즐겨, 드라칸보다 더 귀찮은 녀석이었다.
"케르르! 쏴라!"
피핑.
일제히 날아드는 대여섯 발의 화살들.
최하급이라도 명색의 용족인 만큼, 드라코들이 쏘는 화살은 단창 수준으로 굵직했다.
시문은 즉시 오딘의 눈을 활성화했다.
'일제 사격이라... 현명하네. 근데 방향이 좀 미묘한데?'
아니나 다를까.
드라코들의 화살은 시문이 아닌, 마르넬을 타깃으로 하고 있었다.
아마 상대적으로 약한 마르넬부터 먼저 처리하자는 판단을 내린 거겠지.
'이래서 지능이 높은 것들은 귀찮다니까.'
영악한 드라코의 판단에 혀를 찬 시문은 곧장 마르넬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따악.
쿠르르.
작은 진동이 일며 마르넬의 사방으로 솟아오르는 벽.
벽의 구성을 무작정 단단하게가 아닌, 진흙과 같이 질척하게 만들어 혹여나 뚫릴 불상사를 완전히 차단했다.
이어.
우웅.
시문의 왼눈이 황금색으로 물든다.
'여섯이 아니라 아홉이었군.'
대여섯 발의 화살로 계산했던 드라코의 숫자는 총 여섯.
계산 자체는 틀리지 않았으나, 그 주변으로 단검을 쥔 드라코가 세 마리 더 잠복하고 있었다.
아마 궁수 여섯을 미끼로 덤벼드는 상대의 허를 찌르려는 거겠지.
'하여간에 아주 교활해요.'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시문은 그곳을 향해 손가락을 내밀었다.
"케륵! 마법이다!"
"쏴라! 캐스팅 못 하게 막아!"
멍청하게 달려들기만 했던 드라칸과 달리.
시문의 연성 자세를 캐치한 드라코들은 서둘러 화살을 갈겨 댔다.
하나.
'다 보여.'
활성화된 오딘의 눈은 무질서하게 난사되는 화살의 궤적을 완벽하게 읽어 주고 있었다.
시문은 튕기려던 손가락을 멈추고.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그것들을 피해 내며 드라코들을 향해 나아갔다.
원래라면 아까 드라칸 때처럼 주변 환경을 연성해 싹 쓸어버리려 했지만.
'오딘의 눈 가동률을 좀 줄였는데도... 연성력 소모가 너무 커.'
오딘의 눈과 동시 인체 연성, 그리고 드라칸 몰살에 마르넬을 위한 보호벽까지.
제아무리 압도적인 스펙과 회복 속도를 지닌 시문이라도.
연성력의 소모가 상당한 것이다.
다행히도.
빠각.
"케르! 어, 어떻게 알았지?!"
"무슨 힘이!"
"케륵! 빠르다!"
아예 방책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이럴 때를 대비한 것이 인체 연성과 천마신공 아닌가?
시문은 매복한 세 드라코의 급소를 깔끔하게 두들겼다.
드라칸도 버티지 못한 시문의 권각을 어찌 드라코가 버티겠나.
순식간에 세 드라코를 쓸어버린 시문은 곧장 남아 있는 궁수진을 향해 파고들었고.
퍼퍽!
"케르르!"
"마, 막...."
천마신공의 묘리를 담은 움직임으로 드라코들의 숨통을 모조리 끊어 버렸다.
'쉽네.'
용족을 상대로 한 실버 입에서 나올 소리는 아니었지만.
정말로 쉽게 전투를 끝낸 시문은 가볍게 손목을 털었다.
그때.
"읏."
왼쪽 눈에 작게 흐르는 경련.
이미 특성이 된 오딘의 눈이기에.
시문은 그것이 단순한 경련이 아님을 깨닫고, 곧장 몸을 옆으로 던졌다.
후우우웅!
옆을 스치는 강렬한 파공음.
그것은 처음부터 네가 목적이 아니었다는 듯, 곧장 마르넬이 있는 곳까지 날아갔다.
"마르넬!"
"에?"
마침 마지막 드라칸을 처리하고 몸을 돌리던 마르넬.
영리하게도.
"읏차!"
시문이 세워 두었던 보호벽 뒤로 재빨리 몸을 숨긴 뒤.
"하아아압!"
콰앙!
보호벽으로 한결 약해진 투사체를 그대로 쳐 내 버리는 마르넬.
덕분에 거대한 투사체는 힘을 잃고 허공을 날았다.
정확히는.
날아왔던 곳으로 되돌아간다고 봐야겠지.
단순히 마르넬의 센스와 괴력만으로 일어난 일은 아니었다.
'뭔가가 도끼를 끌어당기고 있어.'
정체불명의 희미한 기운이 저 길쭉한 날의 투사체, 도끼라 불러야 할 것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리고 도끼가 제 주인의 손에 쥐어지자.
"세상에...."
시문과 마르넬의 눈은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오메... 저게 뭐임?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개크네 ㄷㄷ....
어림잡아도 6미터.
어쩌면 그 이상으로도 보이는 거구의 드라칸이 통로를 꽉 채우고 서 있었으니까.
체형에 어울리는 살벌한 눈빛이 작은 소녀를 향한다.
"너로구나. 사르가스 님께서 친히 언급한 아레나의 참가자가."
'뭐?'
마르넬을 향해 홱 돌아가는 시문의 고개.
그도 그럴 것이.
'아레나 참가자라고?'
특수 아레나에 잠깐 등장했던 드워프인 줄만 알았는데.
아레나 참가자라니?
이내 시문의 눈이 차분해졌다.
'그렇군. 그래서 저렇게 강한 거였어.'
마르넬 역시 자신처럼 상태창을 지닌 플레이어라면.
아직 성년이 아님에도 드라칸을 학살하던 마르넬의 무력 역시 납득이 갔으니까.
'그래서 그런 알림이 떴던 거구나.'
이곳에 입장하기 전 보았던 시스템창.
[아레나 '북쪽 하수 시설'로 이동합니다.]
[특별 상황으로 방송으로 나가는 모든 대화는 음소거됩니다.]
그 내용을 떠올린 시문은 피식 웃음이 흘렀다.
'지구는 아직 정규 아레나가 아니니까. 방송 송출을 막은 거야.'
정확히는 대화 내용일 뿐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굳이 시스템이 이곳을 '북쪽 하수 시설'이라고 맵처럼 언급한 이유는.
'이곳은 마르넬의 아레나였나 보군.'
지구의 아레나에서 드워프의 아레나로 접촉.
그것 때문에 시스템이 결계를 쳐두고도 경고문을 보내왔던 것이다.
'이거 참... 아귀가 맞아도 이렇게 맞게 되네.'
만약 지난 특수 아레나에서 도리아의 미스릴괴를 요구하지 않았다면?
혹은 팔아 버리거나 모두 사용해 버렸다면?
이렇게 드워프의 아레나까지 넘어와, 마르넬을 만나게 될 일은 없었겠지.
그야말로 운에 운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뭐, 어떻든 간에.
'일단 저놈부터 처리해야겠지.'
느낌상 보스 격으로 보이는 저 드라칸만 처리한다면 이 아레나는 끝이 나리라.
'보아하니 드라칸 쪽의 변이종 같은데. 연성력 분배만 잘해 두면....'
그렇게 생각한 시문이 걸음을 내딛는 순간.
타탁.
작은 발소리와 함께 시문의 앞으로 양 갈래의 머리칼이 팔랑거렸다.
어느새 변이종 드라칸의 눈앞까지 달려 나간 마르넬.
그녀는 제 몸보다 더 큰 해머를 불끈 쥔 채, 허공에서 몸을 한 바퀴 돌렸다.
이어.
"히아아압!"
두우우웅!
묵직하게 울리는 진동.
이곳으로 진입하기 전.
하수도 벽면에서 느꼈던 그 진동과 똑같은 형태였다.
'강렬한 진동이라... 마르넬의 특성인가?'
시문은 강렬한 진동에 바닥을 나뒹구는 변이종 드라칸을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봤다.
'변이종 드라칸을 한 방에 나뒹굴게 만들 정도면 최소 S급 이상이겠군.'
드라코들의 기습이 문제였지.
드라칸들을 학살하던 아까의 모습도 그렇고.
굳이 마르넬의 전투에 나설 필요는 없어 보였다.
...라고 생각했다.
키잉!
"읏!"
오딘의 눈이 다시 한번 경고성 자극을 보내오기 전까진 말이다.
이번엔 이명까지 보내오는 오딘의 눈에, 시문은 급히 전신의 연성력을 끌어올리며.
"마르넬! 숙여!"
따악.
일갈과 함께 손가락을 튕겼다.
드드드득.
천장과 바닥, 양쪽 벽면 등 사방에서 우수수 연성되는 벽.
그것은 해머와 함께 재빨리 몸을 숙이는 마르넬의 전방을 가로막았다.
쩌저적!
순식간에 허연 성에로 뒤덮이는 벽.
이어.
쩡!
유리처럼 깨져 버린 벽 사이로 시퍼런 창 하나가 파고들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정확히 몸을 숙인 마르넬의 등을 스쳐 바닥에 처박혔다.
"앗, 차거!"
바닥과 부딪쳐 부서지긴 했으나, 품은 냉기는 여전했던 걸까.
엉덩이와 허리를 부여잡은 마르넬은 폴짝 뛰며 시문의 곁으로 물러났다.
"와... 은인 아니었으면 저 냉동 꼬치가 됐겠어요. 헤헤!"
방금 죽음의 기로에 섰음에도.
조금의 두려움도 없이 여전하게 헤실거리는 마르넬.
본래라면 그 당돌한 너스레에 헛웃음이라도 흘려줘야 했으나.
"조심해."
시문은 굳은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특수 조건 만족으로 히든 보스 '하프 드래고니안 사르쿠'가 등장합니다.]
-세상에! 또 히든 보스임?
-이분 히든 보스 자석인 듯 ㅋㅋㅋㅋ.
-실버에서 히든 보스를 보는 것도 놀라운데, 2연속 히든 보스라니....
-대체 무슨 아레난데 맵 이동에 히든 보스까지 나오냐!
'히든 보스라....'
무슨 조건을 만족했다고 갑자기 히든 보스가 등장한단 말인가?
의외로 그 의문은 히든 보스가 직접 풀어 주었다.
"땅꼬마들이 언제부터 이런 수준의 연금술을 사용하나 했더니...."
전신에 드문드문 푸른 비늘이 섞인 남성.
하프 드래고니안 사르쿠는 파충류 특유의 꼬리를 살랑거리며 변이종 드라칸의 앞으로 걸어 나왔다.
"설마 인간이라니. 상상도 못 했구나."
"못난 모습을 보였습니다. 생각보다 드워프의 힘이 강했던지라...."
"아아, 알고 있다. 저건 플레이어이니 너에겐 버거울 수도 있지."
"버겁지는 않습니다."
그냥 바닥을 나뒹굴었을 뿐인 걸까.
벌떡 일어난 변이종 드라칸은 아무렇지 않게 해머가 꽂힌 턱을 슥 닦고는 목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저 암컷 드워프는 제가 확실히 처리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난...."
말끝을 흐린 하프 드래고니안 사르쿠의 시선이 시문을 향했다.
"이 정체불명의 침입자를 살펴봐야겠구나."
사르쿠의 말이 끝나자마자.
파츠츠츠.
시퍼런 서릿발이 시문을 엄습했다.
제48화
48화. 의외의 재회 (3)
상어의 이빨.
그것도 수십 마리가 아가리를 쩍 벌리고 날아드는 듯한 착각이 든다.
시문은 이 날카로운 마법에 작게 감탄을 흘리며 백 스텝을 밟았다.
'과연 하프라도 드래고니안이라 이건가.'
드래고니안.
용족 중 최상급으로 분류되는 마법과 전투 모든 부분에서 우월한 이들.
심지어 날개와 마법으로 전투 비행까지 가능해 다이아 랭크에서나 등장하는 용족이었다.
물론 저 사르쿠라는 드래고니안은 하프답게 날개도 없고 체격도 왜소한 편이었지만.
파스스!
뻗어 오는 냉기는 얕잡아 볼 수준이 아니었다.
하지만.
'보인다.'
황금색으로 빛나는 왼쪽 눈.
오딘의 눈은 마법의 흐름까지도 읽어 내고 있었다.
시문은 손쉽게 수십 마리의 상어 떼를 연상시키는 서릿발 사이를 역으로 파고들었다.
"음?"
그에 푸른 비늘의 남성.
하프 드래고니안 사르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인간 주제에 혹한의 서릿발을 피한다고?'
용족의 마법은 타 종족이 펼쳐 내는 마법들과는 수준이 다르다.
용족만 다룰 수 있는 힘인 용력이 섞여들어 가니, 전체적인 위력부터가 남다른 것이다.
'내가 아무리 하프라지만... 이건 말이 안 돼.'
한데 저 인간은 약해 빠진 육체로 용족의 마법을 피하는 걸 넘어 역으로 파고들고 있다.
이는 제법 우수종인 엘프들도 쉬이 시도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단순한 연금술사인 줄 알았더니, 제법 잔재주는 있나 보구나."
사르쿠의 시선은 서릿발 사이사이를 누비며, 전진하는 시문의 왼쪽 눈을 향했다.
"그래 봐야 인간."
입꼬리를 비죽 끌어 올리는 사르쿠.
동시에 그의 몸이 흐릿해졌다.
정확히는 앞으로 쏠려 나갔다는 게 맞는 표현이리라.
"얼마나 천한 종인지 친히 새겨 주마!"
드라코들의 날랬던 움직임조차 비교하기 미안해지는 속도.
그야말로 쏜살처럼 날아든 사르쿠는 시문의 머리통을 향해 손을 뻗었다.
푸른빛이 감도는 손톱이 활짝 펼쳐지는 것이, 꼭 먹이를 물어뜯을 짐승의 아가리처럼 보였다.
하나.
터억.
허무하게 잡혀 버리는 사르쿠의 손목.
믿기 힘든 현실에 사르쿠의 눈이 부릅떠졌으나 그뿐.
중급 용족답게 얼른 잡힌 손으로 용력이 실린 냉기를 터뜨렸다.
파스스스.
허연 서리가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자연스레 시문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사르쿠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백 스텝을 밟았다.
'방금 그건 뭐였지?'
처음엔 인간치곤 제법인 움직임.
그러나 우월한 용족 앞에선 한없이 느린 움직임이었거늘.
'갑자기 빨라졌다.'
어떤 보조 마법이나 아티팩트의 마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말 그대로 자신의 손아귀에 머리통이 잡히기 전, 급속도로 빨라진 것이다.
예측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하나는 저 인간 놈 역시 아레나의 참가자라는 것.'
참가자에게만 주어지는 특별한 능력인 특성.
그것이라면 저 갑작스러운 움직임도 납득이 된다.
거기에다 드워프의 영역에 뜬금없이 나타난 개연성까지도 설명이 가능하지.
'다른 하나는 처음부터 저만한 속도를 지니고 있다는 건데....'
예컨대 자신의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 전력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라거나.
그런 이유라면 방금의 움직임도 충분히 납득이 갔다.
이내.
"하."
짧게 헛웃음을 흘린 사르쿠는 슬쩍 고개를 저었다.
"고작 인간 따위에게 너무 많은 생각을 하는군."
어느 종이건 뛰어난 이들은 존재한다.
저 인간 역시 그런 종류일 터.
그리고 이런 종류의 이들을 처리하는 방법을 이미 숱하게 경험해 온 사르쿠였다.
"대적하지도 못할 힘으로 짓눌러 버리면 그뿐이지."
휘오오오.
분명 지하 속의 통로이거늘.
심상치 않은 바람이 사르쿠의 손아귀로 모여들었다.
그것은 점차 크기를 키우며 푸른빛을 띠기 시작했고.
육각형의 정돈된 형태로 얼어붙었다.
"이 몸의 전력을 받는 걸 영광으로 알거라, 인간."
용족 특유의 오만함.
그것을 한껏 내비친 사르쿠는 육각형의 얼음 덩어리를 앞으로 내밀었다.
사아아아.
천장과 바닥, 벽면을 막론하고 사방천지가 얼어붙는다.
육각형의 얼음 덩어리에서 불규칙하게 쏘아지는 시퍼런 광선들이 만들어 내는 현상이었다.
만개한 꽃처럼 활짝 핀 얼음 덩어리가 통로 자체를 얼려 버리며, 점차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현자의 돌이 시문에게 속삭였다.
-오빠, 어쩔래. 물러날 거야?
"뭐?"
아직 얼어붙지 않은 벽들을 연성해 마법의 전진을 막으려던 시문은 움직임을 멈췄다.
이내 피식 웃은 시문이 답했다.
"그럴 리가. 이 아레나가 어떤 의미인진 너도 잘 알잖아."
-그렇긴 하지.
정규 아레나도 아닌 상황에서 타 종족의 아레나로 난입해 버렸다.
그도 모자라 뭘 건드렸는지, 히든 보스마저 등장해 버렸지.
플레이어로선 무척이나 위험한 상황이고 대부분이 물러날 생각을 하겠지만.
시문은 아니었다.
왜냐고?
'여기서 히든 보스까지 잡으면 보상이 얼마나 될까?'
그렇다.
갤럭시 아레나의 몇 안 되는 장점이 정당한 리스크와 리턴이다.
당연히 사르쿠를 잡았을 때의 보상은 상당하겠지.
심지어 정규 아레나도 아니니, 혹여나 여기서 실패한다고 목숨이 날아갈 위험도 없다.
기회만 된다면 몸소 힘든 아레나들을 찾아다녀야 하는 상황이란 말이다.
더불어.
'마르넬도 도와주고 말이지.'
저 멀리서 변이종 드라칸과 접전을 펼치는 마르넬을 힐끔한 시문은 벽면을 연성해.
끼기긱.
얼음 덩어리의 전진을 지연했다.
-하여간에. 반(半)6성급 마법을 눈앞에 두고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오빠밖에 없을 거야.
"6성? 저게 6성의 마법이라고?"
휘둥그레지는 시문의 눈.
-오빠. '반'6성급이라고. 분명하게 따지고 들면 6성의 마법은 절대 아니야.
그러나 이어지는 현자의 돌의 말에 시문의 눈은 다시 차분해졌다.
'하긴. 6성이었다면 이 통로가 진즉 내려앉았겠지.'
마법은 보통 1에서 10으로 정의한다.
그중 6성은 속성이나 여러 요인에 따라 위력이 갈리겠지만.
보편적으론 미사일급의 파괴력을 자아낸다.
생각해 보라.
하수도와 연결된 이 지하 통로에서 미사일이 터진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지만 저 얼음 덩어리는 통로를 서서히 장악할 뿐.
진짜 6성급 마법처럼 완전히 무너뜨리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럼 근본적인 수준 자체는 5성 수준이라는 거네?"
-그렇지. 하지만 마법의 시전자가 우리가 아는 5성의 마법사가 아니잖아?
까드득.
두텁게 연성했던 벽들을 손쉽게 와해하며 서서히 전진해 오는 얼음 덩어리.
분명 6성급 마법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5성급으로 분류하기엔 위력이 너무 강했다.
시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전자가 용족이라서구나."
-그렇지. 오빠도 알잖아? 용족은 마법을 마력만으로 쓰지 않는다는 거.
마족의 마기처럼.
용족 역시 최상위에 존재하는 종족으로 용력이라는 자체적인 기운을 사용한다.
더군다나 마법에 능한 종인 드래고니안이라면.
마법에 용력을 섞는 것쯤은 숨 쉬는 것보다 쉬울 터.
헛웃음을 흘린 시문은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현자의 돌이 왜 물러날 거냐고 물어본 건지 깨달은 것이다.
"지금 내 스펙으론 저 마법에 대항할 수 없구나?"
-정확해. 오빠가 강하긴 하지만, 결국 실버 랭크 내에서잖아?
"따지고 들면 플래티넘 초입도 털 수 있어."
-키킥! 그럼, 그럼. 우리 오빠가 얼마나 센데. 내가 말을 잘못했네!
슬쩍 입술을 삐쭉거리는 시문에 까르르 웃는 현자의 돌.
이내.
사아아아!
어느새 가까워진 얼음 덩어리에 녀석은 진지한 목소리로 물어 왔다.
-보아하니 저 마법에 힘을 꽤 쓴 모양이거든? 마법이 소강될 때까지 빠졌다 싸우자. 그럼 오빠가 무조건 이겨.
"도망을 쳐라?"
-이왕이면 작전상 후퇴라고 하자. 실제로도 그게 맞잖아.
그 말에 잠시 고민에 빠진 시문.
그러나.
두웅.
둥.
뒤편에서 연달아 울리는 진동을 느끼곤 정면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에 현자의 돌이 작게 투덜거렸다.
-쯧. 내 이럴 줄 알았어.
"어쩔 수 없잖아. 여기서 물러나면 마르넬이 위험해."
-핑계도 좋다. 저 드워프 계집애가 신경 쓰여서만은 아니잖아?
현자의 돌의 물음에 시문의 입가에 피식, 미소가 서렸다.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닌데, 이대로 물러나는 건 폼이 안 살잖아."
-하여간에, 예나 지금이나 남자들 속은 모르겠다니까.
예나 지금이나?
묘한 말투였지만 시문은 굳이 캐묻지 않았다.
사실 그럴 여유가 없다고 봐야 하겠지.
사아아아!
어느새 호흡까지 불편할 정도로.
가까워진 냉기를 느끼며 시문은 외쳤다.
"현자의 돌!"
-응, 준비됐어~.
눈앞에 떠오르는 익숙한 문구.
'예'를 터치한 시문은 곧장 손가락을 튕겼고.
쿠르릉.
지하와는 어울리지 않는 천둥소리가 통로를 울렸다.
시문은 앞에 내리꽂힌 벼락을 움켜쥐고는 곧장 정면을 향해 집어 던졌다.
"울어라, 아스트라페."
콰자자자작!
수십 줄기의 벼락.
갈기갈기 뻗어 나온 벼락 줄기를 휘감은 아스트라페가 얼음 덩어리와 마주하는 순간.
쿠르르르.
통로가 크게 진동하며 굉음이 일었다.
이능끼리 붙으면 흔히 일어나는 현상.
일종의 힘 겨루기였다.
당연히 결과는 뻔했다.
짜자작!
열화판이더라도 무려 상위 서열 성좌의 벼락이다.
대포알 같은 얼음 덩어리를 꿰뚫은 아스트라페.
하얀 몸체를 휘감은 벼락 줄기들은 얼음 덩어리가 남긴 냉기의 잔해마저 찢어발기며.
시전자인 사르쿠를 향해 날아들었다.
"이, 이 힘은!"
그런 아스트라페를 경악 어린 눈초리로 바라보는 사르쿠.
그러나 반쪽짜리라도 드래고니안은 드래고니안인 걸까.
"이익! 아이스 스피어!"
양손을 모은 사르쿠는 또 다른 마법을 시전해, 냉기가 풀풀 흐르는 창을 쏘아 상쇄를 노리는 한편.
"프로즌 배리어!"
용력을 최대한으로 짜내 단단한 얼음 보호막마저 둘렀다.
크츠측.
보호막 앞까지 도달했는지.
하얀 섬광과 함께 격하게 흔들리는 프로즌 배리어.
하지만 거기까지.
보호막에 금이 가긴 했으나, 더 이상의 위협적인 기세는 느껴지지 않았다.
'인간이 어떻게 아스트라페를 불러냈는지 모르겠지만....'
결국 인간이라는 종의 한계 때문일까?
진짜 아스트라페의 위력을 재현하지는 못했다.
뚫리지 않은 프로즌 배리어와 멀쩡한 자신이 그 증거다.
진짜 아스트라페였다면 자신 같은 반쪽짜리는 그 여파만으로도 소멸해 버릴 테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으득.
'고작 인간 하나에 이 무슨 망신이란 말인가!'
목구멍까지 치미는 치욕감에 이가 절로 갈렸다.
사르쿠는 즉시 웅크렸던 몸을 일으키며 프로즌 배리어를 거두었다.
첫눈처럼 사르륵 녹아 버리는 배리어.
동시에 시커멓게 타 버린 주변과 정면의 인간이 시야에 들어왔다.
'저만한 힘을 사용했으면 놈도 온전한 상태는 아닐 테지. 아주 갈기갈기 찢어 주겠노라!'
사르쿠가 남은 용력을 모조리 쥐어짜 마법을 시전하는 순간.
따악.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청천벽력이 맞았다.
"어, 어떻게 아스트라페가 또!"
방금 전까지 목숨을 위협했던 하얀 막대가 또다시 인간의 손에 쥐어져 있었으니까.
"아, 이거?"
그에 천하다 여겼던 인간은 약이라도 올리듯.
어깨를 으쓱하며 입꼬리를 슥 끌어 올렸다.
"난 조건부 무제한으로 사용이 가능하거든."
"그게 무슨 개소...."
사르쿠의 의문이 풀릴 틈도 없이.
"울어라, 아스트라페."
두 번째 아스트라페가 날아들었다.
* * *
하얗게 서렸던 성에는 온데간데없다.
치이이.
시커멓게 타 버린 통로는 오로지 후끈한 열기와 허연 김만을 풀풀 흘릴 따름이었다.
[히든 업적 '히든 보스 잡기 (3/?)'를 달성하셨습니다.]
[히든 보스 '하프 드래고니안 사르쿠'를 단신으로 처치하였습니다.]
[보상으로 업적 포인트를 총 2,000점을 획득합니다.]
사르쿠의 죽음을 알리는 메시지가 올라온다.
시문은 사르쿠가 존재했던 방향을 바라봤다.
'후. 졸지에 아스트라페를 두 번이나 연성했네.'
반쪽짜리라도 과연 최상급 용족 드래고니안이라는 걸까.
아스트라페 한 방으로 끝낼 수 있을 거란 시문의 예상과 달리.
사르쿠는 아스트라페를 두 번이나 사용하게끔 만들었다.
사실 첫 번째 아스트라페 이후, 천마신공을 이용한 근접전으로 처리해도 되었지만.
'갈기는 맛이 있단 말이지.'
아스트라페의 어마어마한 화력은 뇌속성 특유의 화려함과 더해져 묘한 중독성을 선사했다.
'그래도 뭐, 업적 포인트를 2,000점이나 땡겼으니까.'
아스트라페 두 자루 분을 제외해도 업적 포인트는 1,000점 이득이었다.
거기에다.
[성좌 오딘의 미션을 완수하였습니다.]
[업적 포인트 5,000점을 획득합니다.]
오딘의 미션을 완료하며 추가로 5,000점까지.
앞서 얻은 것들까지 합치면 업적 포인트는 총 11,500점이 되었다.
"달다, 달아."
순식간에 채워진 업적 포인트에 흐뭇하게 웃는 시문.
"은인!"
그런 시문의 귓가로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피떡이 된 변이종 드라칸을 뒤로한 채, 총총 달려오는 마르넬이 보였다.
생채기 하나 없이 멀쩡한 마르넬의 모습에 시문의 눈이 살짝 커졌다.
'변이종 드라칸을 상처도 없이 잡았어?'
대충 견적을 뽑아 봐도.
이 정도면 능히 플래티넘 랭크에 들어갈 만한 수준이었다.
"대박! 엄청났어요!! 방금 그건 무슨 마법이에요?"
그런 시문의 놀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갑자기 천둥소리가 쿠르릉! 들려서 얼마나 놀랐던지. 하마터면 망치로 제 발등을 찍을 뻔했지 뭐예요? 히히!"
마르넬은 잔뜩 신이 난 얼굴로 물어 올 따름이었다.
그에 시문이 뭐라 답할 틈도 없이.
[아레나 '북쪽 하수 시설'을 클리어하였습니다.]
[잠시 후, 대기실로 돌아갑니다.]
시스템창이 떠오르며 시문의 몸이 흐릿해졌다.
"어엇! 으, 은인!"
당황스럽게 외치는 마르넬.
하나 이전 특수 아레나에서도 있었던 일이었기에.
"아... 본래 세계로 돌아가시는 거군요."
마르넬은 시문을 붙잡는 대신, 아쉬운 얼굴로 손을 꼼지락거렸다.
"아까 전투를 힐끔힐끔 봤는데, 역시 은인께서도 갤럭시 아레나의 참가자이신 거죠?"
"어. 나도 마르넬 네가 아레나의 플레이어인진 몰랐네."
"모르시는 게 당연해요. 전 참가 자격을 얻은 지 얼마 되지 않았거든요. 헤헤!"
"그래? 그런 것치곤 잘 싸우던데. 이럴 줄 알았으면 용족들의 마무리는 넘겨줄 걸 그랬어."
"엥? 마무리요?"
"그래야 네 보상이 늘어나잖아. 난 히든 보스랑 클리어만으로 충분해서."
"은인? 뭔가 착각하신 거 같은데, 여긴 제 아레나가 아니에요."
"...뭐?"
네 아레나가 아니라고?
순식간에 얼이 빠지는 시문.
그러나 듣지 못한 것일까?
마르넬은 그저 고개를 푹 숙이며 인사를 건넬 따름이었다.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설마 드래고니안까지 있을 줄은 몰라서... 은인이 아니었다면 전 죽었을 거예요."
"잠...."
시문의 몸과 함께 목소리마저 점차 희미해진다.
그에 마르넬은 서둘러 말을 이었다.
"마쿠르 삼촌이 그러셨어요! 아레나에 참가한 이들은 언젠가 서로 만날 수 있다고요! 그러니 은인을 만나게 되면 꼭...."
아쉽게도.
시문의 물음도, 마르넬의 말도 서로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파앗.
완전히 희미해진 시문이 빛에 휘감겨 사라진 것이다.
마르넬은 한동안 우두커니 서서, 시문이 있던 자리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이내.
철컥.
그녀는 해머를 등에 메며 못다 한 말을 읊조렸다.
"꼭... 이 은혜를 갚을게요, 은인."
제49화
49화. 불청객 (1)
경건함과 고풍스러움이 절로 느껴지는 건축 양식의 석조 건축물.
중앙에는 5개의 왕좌가 원을 그리며 놓여 있었고.
"또인가?"
걸걸한 음성과 함께 빈 왕좌에서 검푸른색의 구체가 떠올랐다.
검푸른색의 구체가 잘게 떨리더니, 중앙으로 길고 날카로운 선이 그어졌다.
"브리트라, 아레나 의회 쪽은 네 소관이 아니었나?"
눈알.
파충류 특유의 눈이 된 그것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맞은편의 빈 왕좌를 노려봤다.
그러자.
"어머~ 멍청한 우리 5용제님과 다르게, 제 소관을 인지할 정도의 머리는 있답니다?"
빈 왕좌에 나타난 검분홍색의 눈알이 요사스러움을 가득 담은 목소리 흘렸다.
"지금 장난하자는 거냐?"
"장난이 아니라 농담인데? 참~ 네 아랫것들은 불쌍하겠어. 섬기는 용제가 이런 것도 구별 못 해서야."
"너...."
"그만."
차분히 울리는 목소리.
그와 함께 또 다른 빈 왕좌에 회갈색의 눈동자가 나타났다.
"진정해라, 니드호그."
회갈색 눈동자가 검푸른색 눈동자를 향하자.
브리트라로 불린 검분홍색 눈동자가 가늘게 휘었다.
"그래그래. 우리 3용제님 말대로 진정 좀 하렴, 막내야."
"감히! 누구보고 막내라는 거냐!"
"제일 마지막에 용제가 됐으니 막내지, 그럼 뭐겠니?"
"네년! 정말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오호호! 그럴 능력은 있고?"
순식간에 높아지는 언성.
쿠르르르.
동시에 왕좌를 포함한 건축물 전체가 뒤흔들렸으나.
"시답지 않은 일로 그만 싸워라. 브리트라, 넌 입 좀 다물도록."
회갈색 눈동자의 제지에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브리트라의 눈이 중재자를 흘겼다.
"가재는 게 편이라더니. 같은 수컷이라고 감싸 주는 거야? 뭐, 그것도 야릇하니 좋네."
"쯧. 한결같이 천박하구나. 브리트라."
"여자에게 한결같다는 건 칭찬인데?"
"그렇게 여유로운 척해 봐야, 네 속이 애타게 타고 있는 게 훤히 보인다."
"흐응. 우리 3용제 아포피스께서 언제부터 여심을 그렇게 잘 아셨나 몰라?"
간드러지게 깔리는 브리트라의 목소리.
가장 우월하다 자칭하는 용족들조차 혼백이 쏙 빠질 정도로 아름다운 목소리였건만.
3용제 아포피스라 불린 회갈색 눈동자는 무덤덤하게 자신의 말을 이을 뿐이었다.
"그저 네가 뻔할 정도로 단순했을 뿐이다."
"뭐야?!"
"스스로도 알지 않나? 니드호그의 말대로 아레나 의회는 네 소관이다. 한데 운명선이 두 번씩이나 바뀔 동안 넌 아무것도 알지 못했지."
"그,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내가 선을 댄 놈들은 죄다 하의원일뿐더러, 그건 아레나 의회에서도 예측 못 한 일이었다고!"
브리트라의 목소리가 앙칼지게 올라간다.
그에 가만 듣고 있던 검푸른색 눈동자, 제 5용제 니드호그가 비웃음을 머금었다.
"거참 무능한 발언이군. 성좌도 홀린다고 호언장담하고 다니던 년이, 뭐? 고작 하의원?"
"물자나 생산하는 빌어먹을 애송이 주제에! 아레나 의원이 쉬워 보여?"
"발작하는 걸 보니 확실히 제 무능이 부끄러운 줄은 아나 보군."
"이 망할 새끼가!"
요사스러웠던 목소리가 대번에 칼날처럼 날카로워진다.
"그런 너는 뭘 잘했는데? 네 영역에서 일어난 일은 네가 알아서 하겠다며 큰소리 땅땅 쳤잖아!"
"그 부분은 나 역시 묻고 싶구나. 니드호그, 어찌 된 일이냐? 왜 두 번째 운명선이 뒤틀린 거지?"
제 3용제 아포피스의 물음까지 더해지자, 니드호그는 브리트라의 말을 들이박는 대신.
"흥. 이미 데피나를 보내 두었다."
대답을 선택했다.
"어쩜. 갓 태어난 해츨링도 아니고 맨날 데피나만 찾는지. 걔 없으면 너 어쩔 뻔했니?"
"브리트라."
톡 쏘는 브리트라에게 나지막이 읊조리는 아포피스.
"알았다고. 그래서? 그렇게 신뢰하는 전령을 보낸 결과가, 운명선이 또 뒤틀리는 일이니?"
"데피나가 만난 건 사르가스다. 일 처리를 똑바로 못 한 건 사르가스겠지."
"설마... 사르가스가 실패했다는 거야? 불패의 사르가스가?"
그 말에 브리트라의 시선이 회갈색 눈동자, 아포피스를 향했고.
"아니, 사르가스의 존재감은 멀쩡히 느껴진다. 녀석은 살아 있다."
아포피스의 눈은 담담히 양쪽으로 움직였다.
"뭐야. 그럼 사르가스가 직접 움직인 건 아니라는 거네?"
"그렇겠지. 아마 사르가스의 부하가 실패한 모양이군."
"흐응, 그럼 됐어. 걘 한 번도 실수한 적이 없으니까. 다음엔 자신이 직접 나서겠지."
스쿠아마 원이면서 3용제 아포피스의 지지자이기도 한 사르가스.
불패라는 이명을 지는 그는 용제들도 인정하는 용족이었다.
"니드호그? 너도 괜히 사르가스한테 가서 지X하지 말고~."
"내게 명령하지 마라, 브리트라. 어차피 그럴 생각도 없으니까."
브리트라에게 한번 으르렁거린 니드호그는 불만스러운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사르가스만 접선한 게 아니다. 또 다른 작업을 더 해 두었다."
"또 다른 작업?"
"데피나의 보고론, 운명선을 뒤튼 존재의 차원을 찾아냈다더군."
"어머나! 역시 데피나네. 일 처리가 너무 꼼꼼해. 그래서? 거기가 어딘데?"
"지구라는 곳이더군."
"지구? 지구라... 어? 잠깐."
브리트라의 시선이 한쪽의 빈 왕좌를 향했다.
"지구면 요즘 1용제가 한창 작업 중인 곳이잖아?"
"그렇다. 데피나의 보고론 1용제가 선을 댄 세력과 접촉했다더군."
"흐응~ 넌 몰라도 데피나는 믿음직스러운 아이지. 그만큼 했으면 곧 좋은 소식이 오겠네."
"음."
브리트라는 물론, 아포피스 역시 만족스러운 눈빛을 띠었다.
데피나도 데피나지만.
1용제가 작업 중인 차원이라는 내용이 꽤나 큰 신뢰감을 주는 것이다.
"그래도 검은 제련소가 멈추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니드호그."
"물론이다, 아포피스. 당장 다른 미개한 종족들을 갈아 넣고 있지. 놈들이 멸종하지 않는 한, 보급에는 지장이 없을 거다."
"그거면 충분하겠군. 브리트라? 넌 아레나 의회의 영향력을 더 넓힐 필요가 있다."
"알아. 안 그래도 본격적으로 움직일 생각이었어."
"좋다. 그럼 데피나의 보고가 들어오면 다시 모이지."
제 3용제 아포피스의 말을 끝으로.
왕좌에 떠올라 있던 3개의 눈동자는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 * *
익숙하게 펼쳐지는 검은 공간.
대기실로 소환된 시문은 심각한 표정으로 턱을 괴었다.
'아까 거기가 마르넬의 아레나가 아니었다고?'
하지만 시스템창은 분명 '아레나 북쪽 하수 시설'이라고 명시하지 않았던가?
한데 어찌 마르넬은 아레나가 아니라고 말한단 말인가.
의문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렇군. 나에게만 아레나로 적용된 건가?'
북쪽 하수 시설이라는 곳이 100인 서바이벌 하수도 맵과 연관이 있고.
인벤토리에 든 [도리아산 미스릴괴]가 반응했었으니까.
아마 갤럭시 아레나 측에서 급히 개인 아레나로 돌려 버렸을 가능성이 높았다.
실제로 철저하던 시스템은 종목조차 알려 주지 않고, 그저 아레나라고만 언급하지 않았나?
'일단 이번 일로 알 수 있는 건 하나네.'
무슨 연유에선지 용족이 드워프를 지속적으로 노리고 있다는 것.
더불어.
'왜 드워프들이 용족과 함께 지구를 공격해 왔는지 알겠어.'
정규 아레나가 시작되며 본격적으로 일어난 아웃브레이크와 게이트.
그중 유난히도 용족과 드워프가 함께 다녔던 이유가 이제야 감이 좀 잡혔다.
'어쩌면 드워프들이 용족의 하위 계층으로 흡수된 걸지도 모르겠어.'
아니, 그게 맞을 것이다.
당시의 기억을 돌이켜 봐도 드워프들은 모두 용족의 일원처럼 행동했었으니까.
'그럼 내가 진행했던 특수 아레나와 이번 일로 뭔가 변화를 줄 수도 있을까?'
그때.
-방금 그 기술은 뭐였음?
-보니까 하프드래고니안이 아는 눈치던데. ㅅㅂ! 대화가 안 들리니까 개답답하네.
대기실로 돌아온 시문이 생각을 마저 정리할 틈도 없이.
-그니까. 아오 킹받네! 대화만 들었어도!
-실버에서 용족이 왜 나오는데? 그 전에 맵 이동은 또 뭐고?
-난 그것보다 드워프 여자애가 뭐라 했는지가 더 궁금함.
-22. 마르넬찡! 알려달라능!
우수수 쏟아지는 채팅을 눈앞을 가려 왔다.
대기실로 돌아오며 닫아 두었던 채팅창이 자동으로 열린 것이다.
-이 사람은 걍 전투 센스부터가 말이 안 되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체력이랑 마력 분배가 너무 노련함.
-ㄹㅇ 전투를 한두 번 겪어본 솜씨가 아님. 이게 실버라고?
-그것도 그건데. 저런 수준의 뇌속성 마법을 두 번 연속으로 갈겼다는 게 중요하지.
-진심 이게 핵심임. 아까 멀쩡하던 컨디션 보니까 연속 세 번도 가능할 거 같은데?
-여, 연속 세 번? ㅗㅜㅑ.
-위의 분은 제발 숨을 멈춰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특수 상황으로 대화 전체가 검열당한 채 시청해야 했던 시청자들.
온갖 폭음과 괴성은 다 들리는데 딱 대화만 차단되는 게 보통 답답한 것이 아니었는지.
질문을 포함한 수많은 의혹이 채팅창에 범람했고, 시문은 차분히 그것들을 정리해 나갔다.
"자자, 다들 진정하세요. 스킬은 죄송하지만 밝히기가 어렵고, 드워프 소녀는 지난 특수 아레나에서 본...."
"...입니다. 아레나의 내용은 시스템이 막은 거라 제가 함부로 이야기하긴 어려워요. 지금도 언급하지 말라는 경고문이 떠 있거든요."
물론 아레나의 경고문은 새빨간 구라였으나.
자신이 아레나 내용을 언급하려 하면 분명 경고창을 보내올 것이 분명했기에.
시문은 조금의 지체도 없이 아레나 내용에 대한 것은 함구했다.
이어.
[나는야골드 님이 AP 500을 후원하셨습니다.]
=그래. 다들 언급 그만하고 축하나 해 주자구! 형, 골드 ㅊㅋ!
[실번데요 님이 AP 1,000을 후원하셨습니다.]
=심해의 희망! 시문 님, 골드 가서도 전부 쓸어 주세요!
[심해학살자 님이 AP....]
후원들 역시 시문의 말에 힘을 보태며 여론을 바꿔 주는 한편.
승급전임을 고려한 축하와 응원도 줄줄이 이어졌다.
"아이고! 다들 후원 감사드립니다!"
시문이 이어지는 후원들에 감사를 표하고 있을 때.
갑자기 꽤 높은 숫자의 후원들이 등장했다.
[신화 길드 님이 AP 50,000을 후원하셨습니다.]
=골드 승급 축하드립니다. 시문 님, 따로 한번 만나 뵙고 싶습니다만. 친추라도 괜찮으실지요.
[백호 길드 님이 AP 30,000을 후원하셨습니다.]
=이번 아레나 무척이나 감명 깊게 보았습니다! 좋은 제안이 있는데 귀한 시간 내주실 수 있으실까요?
[버팔로 길드 님이....]
달러 환율과 AP가 일대일 교환임을 따져 보면 최소 천만 원 단위로 시작하는 후원들.
단순 만남을 요청하는 메시지를 담았음에도 꽤 큰 액수였다.
당연했다.
-와...! 개레전드다.
-액수 보소 ㅋㅋㅋ.
-길드 스카우트도 들어올 때 됐지. 이 형 이제 골드잖아.
-대길드 아니면 중견 길드 이상급만 들어오네. ㄷㄷ.
-시문 님 수준이면 당연하죠. 제가 볼 때 이분 차기 랭커급이에요.
-ㅇㅈ합니다.
-랭커는 좀... 어디 개 이름도 아니고 ㅋㅋ;;
후원을 보내온 이들 모두가 한 번쯤은 들어 본 적이 있는 길드의 이름들이었으니까.
'신화에 백호, 버팔로는 미국 길든데? 하긴, 랭크도 골드로 올랐겠다. 슬슬 손을 뻗을 때가 됐지.'
미국의 중견 길드까지 후원을 보내온 건 좀 놀랍지만.
이번 아레나가 승급전임이 다 알려진 마당이니, 내심 길드들의 스카우트 제안이 쏟아질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물론.
'액수까지는 예상 못 했지만 말이지.'
고작 미팅 잡는 데 천만 원 단위로 태울지 누가 알았겠나?
이런 고액 후원의 의도는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돈 자랑 한번 빡세게 하네.'
우리 길드는 '고작 골드와의 미팅에도 이 정도 금액을 태울 정도로 능력이 있다!'
라는 걸 과시하기 위한 후원인 것이다.
어찌 보면 치기 어린 자존심 겨루기 같아 웃음이 나왔지만.
"후원 감사드리고, 미팅 관련은 제 쪽에서 따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시문은 웃음을 감춘 채, 방송을 마무리했다.
"그럼 여러분, 시청해 주셔서 감사하고 다음 방송에 다시 만나요."
-시바~.
-승급 축하드려요!
-대화 안 들리는 건 답답했어도 오늘 방송 알찼다!
-ㅅㄱ~.
* * *
"후아!"
자취방으로 돌아온 시문은 고글을 벗으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한 번의 입장으로 2개의 아레나를 진행한 건 처음이라, 피곤함이 몰려오는 것이다.
그러나 당장 침대로 몸을 던지진 않았다.
제일 중요한 게 남아 있었으니까.
"어디 보상 좀 확인해 볼까."
시문은 미뤄 두었던 보상창을 열었다.
[아레나 '하수도'를 1등으로 클리어하셨습니다.]
[활약에 따라 클리어 보상이 증가합니다.]
[귀속된 특성 '현자의 돌'이 일정량의 경험치를 분배받습니다.]
[레벨이 4 올랐습니다.]
[현자의 돌 레벨이 4 상승했습니다.]
"역시 보상은 짜네."
승급전이어서일까?
아이템 미지급에 경험치마저 짰다.
물론 현자의 돌과 경험치를 나눴음에도.
4업이나 해 버린 걸 고려해 보면 상당한 수치긴 했다.
아마 압도적인 킬 수로 1등을 기록한 것이 큰 영향을 끼쳤을 테지.
'뭐, 상관없지.'
시문은 어깨를 으쓱했다.
승급전이 보상이 적다는 건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
'애당초 골드가 되는 게 목표였으니까.'
[플레이어 김시문의 랭크가 골드로 배정됩니다.]
[업적 '골드 랭크 플레이어'를 달성하셨습니다.]
[보상으로 업적 포인트 1,000점을 획득합니다.]
[이제부터 업적 상점 이용이 가능합니다.]
'업적 상점이라... 거기에다 세계수의 씨앗도 사용이 가능하겠네.'
그것만으로 큰 성과이리라.
거기에다 받아야 할 보상이 한 번 더 있지 않나?
시문은 곧장 다음 보상을 열었다.
[아레나 '북쪽 하수 시설'을 완벽하게 클리어하셨습니다.]
[활약에 따라 클리어 보상이 증가합니다.]
[귀속된 특성 '현자의 돌'이 일정량의 경험치를 분배받습니다.]
[레벨이 8 올랐습니다.]
[현자의 돌 레벨이 7 상승했습니다.]
[보상으로 '변질된 혈청'이 지급됩니다.]
"크! 역시 이게 진짜였어."
자신은 8레벨, 현자의 돌은 7레벨이라는 어마어마한 폭업.
더불어.
[성좌 오딘이 칭호 '왕들의 픽'에 등록됩니다.]
[칭호 '왕들의 픽'의 조건이 갱신되었습니다.]
앞선 성좌들이 그랬듯이 성좌 오딘의 미션을 클리어해서일까?
오딘은 칭호 '왕들의 픽'의 성좌로 등록되었다.
"이러면 올 스탯이 +4지?"
시문은 부푸는 기대감에 즉시 상태창을 열려 했다.
째깍째깍.
"응?"
묘한 초침 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진 말이다.
시문의 시선은 자연스레 초침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향했다.
곱게 좁힌 종이학.
그뿐만 아니다.
토끼부터 거북이, 개 등 갖가지 형태로 접힌 종이들이 작업 테이블을 중심으로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째깍.
기이하게도 그것들 모두 초침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 이건!"
째각.
난데없는 종이 동물들과 초침 소리.
그에 시문의 눈이 부릅떠진다.
이어.
콰아아아아앙!
강렬한 폭음이 자취방을 엄습했다.
제50화
50화. 불청객 (2)
자욱하게 일어나는 먼지구름.
"꺄아아악!"
"가, 갑자기 무슨 폭발이!"
"누가 119 좀 불러요! 빨리!"
"아주머니! 위험하니까 이리로 와요!"
그리고 이어지는 사람들의 비명과 소란이 일대를 가득 채웠다.
멀지 않은 건물 옥상에서 그 아비규환을 지켜보던 선글라스의 남자가 작게 키득거렸다.
"키핫! 역시 폭발은 늘 즐겁다니까."
코에 걸쳐진 선글라스 뒤로 보이는 푸른 눈.
바람에 날리는 옅은 갈색 머리칼을 슥 넘긴 그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난리 통을 바라봤다.
"죽었겠지?"
폭발을 일으킨 주범이 그임을 돌이켜 보면 분명 상대의 죽음을 노렸을 텐데.
이상하게도 백인 남자는 입맛을 다시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쯧. 제법 싹이 있는 실버라던데, 이 정도 폭발에 죽어 버려서야 영 싱겁잖아?"
하긴, 실버가 괜히 실버겠어.
어깨를 으쓱한 남자는 몸을 돌렸다.
"그러게 중국 놈들은 왜 건드리는 거야, 같은 인종이면서. 참 아시아 놈들은 이해를 할 수 없다니까."
품속에서 담배를 한 대 꺼내 무는 남자.
그가 물고 있는 담배 끝을 바라보자.
퐁.
작은 폭발이 일며 불이 붙었다.
남자의 푸른 눈은 한동안 멍하니, 담배 끝에 일렁이는 불꽃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담배에 불을 붙이던 그 작은 폭발이라고 해야겠지.
"아, 안에! 안에 내 강아지가 있다고!"
"119는 대체 언제 오는 거야!"
"신고한 거 맞아요?! 왜 이렇게 안 와!"
후욱.
이 소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폭발의 영역이 이 일대 전체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쉽군."
저 혼자만의 여운에 젖은 남성이 한 걸음 옮기던 찰나.
"일대 전체라고? 그랬으면 조직에서 영구 제명을 당할 텐데."
뚜렷하면서도 맑게 들리는 목소리.
그에 백인 남자는 즉시 뒤로 돌아, 소매에서 하얀색의 무언가를 날렸다.
사락.
반듯하게 접힌 종이비행기.
이 갑작스러운 폭발 현장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물체였으나.
"두 번은 안 통해."
따악.
뚜렷한 이목구비의 미남은 싸늘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튕길 따름이었다.
* * *
능히 일어났어야 할 폭발은 온데간데없다.
휘이이.
바람에 휘말린 종이비행기는 그저 힘없이 어딘가로 날아갈 뿐.
선글라스의 백인은 멍한 눈으로 멀어지는 종이비행기를 바라보다.
"너...."
시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어떻게 된 거지?"
"뭐가?"
이내.
"어떻게 저 폭발 속에서 살아남았냐고! 아니, 그 전에."
멍했던 백인 남자의 눈이 날카롭게 벼려졌다.
"방금 손가락을 튕긴 그건 뭐지? 왜 내 특성이 발동하지 않은 거야!"
서양인 특유의 성숙함을 따져 보아도 이제 막 20대나 되었을 젊은 외모이거늘.
그는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하며 물어 왔다.
"질문도 많다. 날 폭사시키려던 놈에게, 내가 그걸 말해 줘야 할 이유가 있나?"
시문의 답에 한쪽 눈썹이 샐쭉 올라가는 백인 남자.
"맞는 말이긴 하군."
이내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다른 걸 묻지. 너, 날 아냐?"
물어 오는 백인 남자의 눈빛은 한결 더 살벌해졌다.
당연했다.
암살 목표인 김시문.
저 아시아계의 남자는 분명.
"방금 넌 내게 영구 제명이라는 말을 했었지."
"오. 영구 제명이라는 말도 알아? 한국어 잘하네."
"머리를 좀 타고나서."
"에이, 양심이 있어야지. 타고난 머리가 아니라, 네 동료의 특성 덕분이잖아?"
"...."
아무 답도 못 하는 백인 남자를 보며 시문은 확신했다.
'종이 인형들을 보고 설마 했는데....'
무척이나 정교하게 접혀 있던 종이 인형들.
그리고 그곳에서 들려오던 초침 소리와 폭발까지.
전생의 경험에 비추어 보아, 이 모든 것들과 연관이 있는 사람은 딱 1명뿐이었다.
시문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으며 눈앞의 백인을 바라봤다.
"왜 갑자기 말이 없어? 내가 정곡을 찔렀나? 제이스 클라크."
"너...."
이름까지 말해 버리는 시문에 한층 더 가라앉는 백인 남성의 얼굴.
당장 해가 중천에 뜬 대낮임에도.
그의 얼굴 위로 시커먼 그림자가 드리운 착각마저 들 정도로 어두웠다.
"어떻게 내 이름을 아는 거지? 아니지, 질문이 잘못되었네."
제이스는 얼굴만큼이나 차가워진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에 대해 어디까지 아는 거지?"
"글쎄. 목표 이외에 다른 일을 벌이면, 큰 처벌을 내리는 조직이라는 건 알고 있지."
"그래? 말해 줄 의사가 전혀 없다 이거로군."
시문의 너스레에 비릿하게 웃은 제이스는 양팔을 활짝 펼쳤다.
어느새 그의 양손과 기다란 코트 사이로 수십 개의 종이 새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뭐, 상관없지. 죽여 버리면 그뿐이니까."
"패기는 좋네. 근데 괜찮겠어? 그거 다 터뜨리면 정말 영구 제명...이 될 텐데?"
영구 제명이라는 말을 묘하게 흐리는 시문.
그도 그럴 것이 저 조직에서의 '영구 제명'은 그저 말로만 제명당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시문이 뭘 말하는지 눈치챈 것일까.
제이스의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걱정 마라. 조직의 정체를 아는 놈을 처리했다고 하면, 오히려 상이 내려올 테니까."
"상? 아아. 네가 그토록 존경하는 폭탄마 모가담 빈 압둘라가 주는 상인가?"
아랍권 남자의 이름.
그것이 약점이라도 되는 것일까.
"너 이 자식! 잘도 그분의 이름을!"
비웃음이 가득하던 제이스의 얼굴이 악귀같이 일그러졌고.
파라라락.
수십 장의 종이 새들이 시문을 향해 날아들었다.
시문은 즉시 오딘의 눈을 발동시켰다.
키잉.
옅은 황금색 마법진이 왼쪽 눈 위로 떠오른다.
그러자 날아드는 종이 새들의 움직임이 느려 보이는 것은 물론.
'역시, 아까처럼 기폭제는 전부 중심부에 그려져 있군.'
정확히는 종이를 잘 접어서 숨겼다고 해야겠지.
반듯하게 접힌 종이 새 내부에서 독특한 문양을 확인한 시문은 손을 내밀었다.
따악.
그러곤 튕겨지는 손가락.
겉보기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으나, 오딘의 눈엔 분명하게 보였다.
치직.
기폭제로 보이던 문양이 새겨진 부분이 전부 백지로 변하는 것을 말이다.
결국 수십 장의 종이 새들은 아까의 종이비행기처럼.
사라락.
당연하게 시문의 곁을 스쳐 사방으로 흩날렸다.
그에.
"이, 이게 무슨!"
제이스의 눈이 부릅떠졌다.
"노란 원숭이 주제에! 대체 무슨 개수작을 부린 거냐!"
그럴 수밖에.
제이스 클라크의 A급 특성.
종이 폭발은 여태껏 단 한 번의 불발도 일어나지 않은 특성이었다.
단적인 예로.
물 관련 특성을 지닌 암살 목표가 종이를 모두 물로 적셔 버리는 잔재주를 부렸음에도.
정상적인 폭발로 그의 육체를 흔적도 없이 터뜨려 버렸거늘!
"설명해 줄 의무는 없고. 그냥 상성 차이라고만 해 두지."
"개소리 마라! 내게 상성을 논할 수 있는 분은 이 세상에 오로지 한 분뿐이다!"
성난 고함과 함께 다시 한번 코트 자락을 펄럭이는 제이스.
아티팩트라도 사용한 것인지.
제이스의 몸은 허공으로 둥실 떠오른 상태였다.
덕분에.
사라라라!
제이스의 품에서 다양한 형태의 종이 인형들이.
재깍재깍.
빗소리와 같은 초침 소리를 동반하며 흡사 억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가진 물량을 다 쏟아붓는 모양이네.'
하나하나가 수류탄 이상의 위력을 자랑하는 종이 인형.
그게 무려 백 단위로 쏟아지고 있었으나, 시문은 그저 차분한 눈으로 응시할 뿐이었다.
당연했다.
제아무리 유명한 각성 범죄자 조직.
일명 빌런 조직인 데스페라도(Desperado)의 유망주가 펼치는 전력 공세라 해도.
따악.
시문 정도의 연금술사 앞에선 그저 종이 인형에 불과했으니까.
"이럴 수가...."
일전의 공격들처럼 허무하게 시문의 곁으로 흩어지는 종이 인형들.
제이스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그것을 내려다봤다.
시문은 황금색이 섞인 눈으로 그런 제이스를 보며 싱긋 웃었다.
"쉽네."
진심이었다.
데스페라도의 유망주인 제이스 클라크는 결코 인정하지 못하겠지만.
기본적으로 물질을 원하는 형태로 변환하는 것은 기초 연금술의 종류 중 하나.
등가교환만 만족한다면 어느 연금술사든 해낼 수 있는 일이었다.
결국.
"웃기지 마! 웃기지 말란 말이다!"
사락, 사라락.
종이라는 물질에 기폭제를 새겨 폭발시키는 종이 폭탄의 특성상.
'기폭제가 새겨진 부분'을 다시 '백지로 연성'해 버리는 시문은 그야말로 최악의 상성이었다.
심지어.
"거참, 소용없다니까."
따악.
연성진을 비롯해 어떤 사전 준비도 없이.
그저 손가락을 튕기는 것만으로 모든 연성을 끝내 버린다면 더더욱 말이다.
"이익!"
지니고 있던 종이 인형을 모두 사용한 것일까.
"이젠 알겠지? 넌 나한테 안 된다는 거."
"...그래, 인정하겠다. 무슨 수작인지는 모르겠지만, 너에겐 내 특성이 아무 쓸모도 없군."
제이스는 더 이상 종이 인형을 뿌리지 못하고, 분에 찬 얼굴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의 멘토인 유명 빌런 폭탄마 모가담 빈 압둘라마저.
이런 식으로 그의 폭발을 무마시킨 적은 없었는데.
'고작 아시아 놈 따위에게 이토록 무기력하게...!'
으득.
분에 찬 깨물림 탓일까.
아릿한 통증과 비릿한 피 맛이 제이스의 입 속으로 파고들었다.
"하... 적어도 다이아급은 만나야 사용할 거라 생각했는데."
허탈하게 웃은 제이스는 코트를 벗어 던졌다.
정확히는.
펄럭.
코트가 종이접기처럼 접히고 있다고 봐야겠지.
특별한 인챈트라도 된 것인지.
코트는 순식간에 종이비행기의 형태로 접혔고.
"데스페라도는 결코 임무를 실패하지 않는다!"
코트 위에 올라탄 제이스는 곧장 시문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에 시문은 또다시 앞으로 손을 들었다.
하나.
'저건....'
제이스의 셔츠.
왼쪽 가슴 부분에 새겨진 룬을 본 시문의 왼쪽 눈이 꿈틀했다.
'마법 이뮨?'
이뮨(immune).
일종의 완전 면역으로 특정 공격이나 상태이상을 완전히 무시해 버리는 힘.
그중 마법을 중점으로 둔 이뮨이 제이스의 셔츠 왼쪽에 새겨져 있는 것이다.
'저 정도 마력이면 최소 B급 이상인데... 쯧, 더럽게 비싼 걸 입고 다니는군.'
시문의 시선은 자연스레 제이스의 셔츠 오른쪽을 향했다.
그곳엔 앞서 종이 인형들에 새겨져 있던 A급 특성 종이 폭발의 기폭제가 새겨져 있었다.
'그렇군. 자폭하려는 건가?'
세계 최고의 빌런 조직인 데스페라도.
과연 그 악명 높은 곳의 유망주답게, 장비뿐만 아니라 정신 무장마저도 남달랐다.
시문의 눈매가 슬쩍 굳는 걸 확인한 것일까.
"크하핫! 눈치챘나? 하지만 늦었어!"
제이스는 광소를 터뜨리며 속도를 높였다.
치이익!
오른쪽 셔츠의 기폭제 문양이 금세라도 터질 듯 벌겋게 달아오른다.
"키힛! 함께 지옥으로 가자고! 망할 원숭아!"
코트를 탄 그가 시문의 눈앞까지 날아든 순간.
"미안하지만, 혼자 가라."
따악.
시문의 손가락이 튕겨지며, 그의 양팔과 다리의 근육이 눈에 띄게 도드라졌다.
이어.
천마신공(天魔神功).
격(擊) 패황쇄(覇皇碎).
힘껏 뻗은 시문의 주먹에서 시커먼 기운이 폭사했고.
콰아아아앙!
날아들던 제이스를 휘감곤 거대한 폭음으로 산화했다.
* * *
쿠르르르르!
일전의 갑작스러운 폭발처럼.
"뭐, 뭐야?! 또 폭발이 일어난 거야?"
"테러 아냐? 경찰은 대체 뭐 하는 거야!"
"경찰로 되겠어? 딱 봐도 각성 범죄 같은데 각성 전담 부대가 와야지!"
또다시 일어나는 폭발에 신림 일대가 혼란에 빠졌다.
"후우...."
두 번째 폭발의 장본인.
시문은 숨을 고르며 어깨를 이리저리 풀었다.
"자칫 일 날 뻔했네."
멀지 않은 곳에 툭 떨어지는 제이스의 다리 한 짝.
시문은 그것을 보곤 작게 고개를 저었다.
"설마 자폭까지 시도할 줄이야."
천마신공의 초식인 패황쇄.
[오우거의 신체조직]까지 더해 펼친 절세의 무공이 아니었다면 자신 역시 저런 꼴이 되었겠지.
"정말 미친놈들이라니까."
-내 말이! 그나저나 오빠는 괜찮은 거지?
"어. 연성력을 다 써 버린 거 말곤 별거 없어."
시문이 패황쇄를 펼친 어깨를 두드리자, 현자의 돌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 자폭은 그냥 피하지 그랬어. 그러면 이런 고생 안 해도 되잖아.
"그렇긴 한데...."
말끝을 흐리는 시문.
그의 시선은 아래쪽을 향했고.
그곳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소리에, 현자의 돌은 다소 힘이 빠진 목소리로 답했다.
-하긴, 이게 우리 오빠지. 미안, 방금 한 말은 잊어 줘.
"네가 미안할 게 뭐가 있어. 틀린 말도 아니었는데."
격한 전투를 치렀음에도.
현자의 돌의 걱정에 절로 미소가 흘러나왔다.
-그나저나 오빠, 이제 어쩔 거야? 듣자 하니 주변에서 신고를 했나 본데?
"아아. 나도 들었어."
안 그래도 멀지 않은 곳에서 사이렌 소리들이 울려오는 참이다.
'경찰차에 소방차, 그리고 각성 전담 부대인가.'
사이렌 차량들을 확인한 시문은 후드를 깊게 쓴 채, [블랙팬서의 신체조직]을 연성했다.
이어 옥상을 박차며 폰을 귀에 가져다 대었다.
"어 시혁아, 난데, 너 지금 바쁘냐?"
제51화
51화. 불청객 (3)
"네. 그렇게 결론 내 주시고 언론은...."
주절주절 들려오는 동생 녀석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
'새끼, 벌긴 많이 버는구나.'
시문은 호화롭기 그지없는 내부를 둘러봤다.
'안 그래도 강남인데. 펜트하우스라니....'
강남, 그리고 펜트하우스.
이 두 가지 단어가 주는 이미지 그대로 동생 김시혁의 집은 어마어마했다.
당연했다.
일명 랭커팰리스라 불리는 이곳은 랭커급 플레이어들이나 그에 준하는 이들이 주로 사는 곳.
심지어 동생 녀석은 전 각성자 협회장의 아들이자, 대한민국의 랭커 중 하나 아닌가?
저 둘 중 하나만 있어도 이런 곳에서 사는 게 어렵지 않은데.
요 잘난 동생 녀석은 두 가지를 전부 지니고 있으니, 이 정도 집이 없다는 게 더 이상하리라.
시문은 척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소파의 팔걸이를 꾹꾹 누르다가.
보안 마법으로 떡칠이 되어 있는 럭셔리한 문을 바라봤다.
'참. 그러고 보니 유정이도 여기에 살았지?'
이유정.
성삼의 독녀인 그녀 역시 시혁이와 마찬가지로 집안부터 능력까지 다 타고난 아이였다.
"예, 그럼 그렇게 부탁드립니다. 협회 쪽은 제가 알아서 처리하죠."
연락이 끝난 것일까.
김시혁이 통화를 끊으며 다가왔다.
"형, 정말 병원 안 가 봐도 괜찮겠어?"
걱정스럽게 물어 오는 동생 녀석.
"그만 좀 해라, 요놈아. 무슨 매크로 쓰냐? 너 그 말만 벌써 일곱 번째야."
그런 녀석의 뒤로 큰 덩치의 사내가 투덜거렸다.
밤사냥꾼 박진욱이었다.
"내가 네 형님이었으면, 네 번째 물을 때 바로 주먹 날렸다."
"선배."
박진욱은 낮게 으르렁거리는 시혁이 녀석을 무시하곤.
"자자, 우리 VVIP 고객님. 귀한 거 한잔 드시고 내 집이다~ 생각하고 편안히 계십쇼."
연두색의 음료가 담긴 잔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음?"
음료를 확인한 시문의 눈이 조금 커졌다.
"이거 엘븐티네요?"
"하하! 역시 수준급의 연금술사답게 한눈에 알아차리시네요. 맞습니다."
엘븐티.
플래티넘 상위권부터 등장하는 이종족 엘프들에게서 가끔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만든 차.
지구에 없는 귀한 맛도 맛이지만.
복용 시 능력치를 미세하게 올려 주는 일종의 영약이기도 했다.
당연하게도.
"이런 귀한 걸 주셔도 되는 거예요?"
어지간한 부자들도 쉽게 마실 수 없는 것이었다.
애당초 획득 루트 자체가 부유할 수밖에 없는 고랭크 플레이어들밖에 없으니.
맛과 스탯까지 챙길 수 있는 엘븐티가 시중으로 돌기란 상당히 어려웠으니까.
그런 귀한 차를 내놓고도.
"뭐 어떻습니까?"
박진욱은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제 것도 아닌데요, 뭘."
"선배, 그게 주인 앞에서 할 말이에요?"
"이 새끼 봐라? 그럼 넌 네 형님이 먹는 게 아깝다 이거냐?"
"아니,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좀처럼 언성을 높이지 않는 동생 녀석이 흥분한 것에 시문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후. 선배는 나중에 봐요."
그에 김시혁은 박진욱을 흘낏하고는 시문의 맞은편에 앉았다.
"형.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뭐가?"
"뭐긴, 당연히 폭발 테러지! 형 연락받았을 때 정말 깜짝 놀랐다고!"
"그건 나도 궁금하긴 하네. 시문 씨,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박진욱 역시 호기심을 보이며 시혁이 녀석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에 시문은 엘븐티를 한 모금 마시며 목을 축였다.
[영약의 효력으로 민첩이 1 상승합니다.]
앞서 높은 수준의 영약들을 줄지어 복용한 덕분일까.
적지만 올라가는 민첩 스탯에 슬쩍 미소를 지은 시문은 말했다.
"그게...."
정확히는.
콰앙!
"야! 김시혁! 오라버니는 어디에... 어?"
말하려고 했다.
럭셔리했던 입구 쪽에서 거친 굉음이 일어나기 전까진 말이다.
* * *
끊어진 테이프처럼.
무참히 뜯겨져 나간 고수준의 보안 마법들.
김시혁은 이마에 솟은 핏대를 꾹꾹 누르며 엉망이 된 문을 닫았다.
덜그럭.
그러나 여는 힘이 너무 강했던 탓일까.
보안 마법 이전에 찌그러진 문은 제대로 닫히지조차 않았고.
"아... 이유정, 너 진짜!"
김시혁의 얼굴엔 짜증이 가득 서렸다.
"미안하다니까. 그리고 문 좀 좋은 거 써. 살짝 밀었다고 그게 그렇게 망가지니."
"뭐래! 이거 너희 집 문이랑 똑같은 거거든?"
"그랬었나? 헤헤. 어쨌든 미안."
"야! 하나도 안 미안해 보이거든!"
얄밉게 헤실거리는 이유정과 드물게 미소 외의 감정을 모두 드러내는 김시혁.
그런 두 동생들 사이를 익숙하게 파고든 시문이 소파를 가리켰다.
"너희는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이러고 있냐? 그만들 하고 가서 앉아."
동시에 문 쪽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따악.
드드득.
시간이 되감기듯, 본래의 형태를 되찾는 문.
시문은 순식간에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간 문을 잘 닫고.
"뭐 해. 안 앉아?"
멍하니 보고 있는 두 동생들에게 턱짓했다.
"어? 아, 응."
"네. 오라버니."
얌전히 소파로 가는 두 동생에 시문은 작게 한숨을 쉬며 소파에 털썩 앉았다.
"유정아, 내 걱정 해 준 건 고마운데. 그렇다고 문을 막 부수는 건 잘못된 거야. 알지?"
"...네."
"망가진 보안 마법들은 유정이 네가 새로 고쳐 놔."
이런 곳에서 사는 동생 녀석이 보안 마법을 다시 설치할 돈이 없겠냐만은.
"이건 돈 이전의 문제야.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인간관계의 기본적인 문제였기에.
시문은 이 부분을 분명하게 짚고 정리했다.
"네. 오라버니."
이유정이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이자, 시문은 김시혁을 바라봤다.
"시혁이 너도 유정이가 고의로 그런 것도 아니니까, 너무 그러지 마."
"응, 형. 난 괜찮아. 쟨 원래 저렇게 다 부수고 다녔거든. 지가 오우거야 뭐야."
"하! 어이가 없어서. 야, 김시혁. 근력 스탯이 높은 거거든!"
"네. 다음 오우거."
"저게 진짜!"
김시혁의 능청에, 눈에 불이 붙는 이유정.
"쓰읍! 이것들이, 내 말이 우습지?"
그에 시문의 눈매가 날카로워지자.
"크흠! 이유정. 내 계좌 알지? 보내 놔라."
"...아, 알았어."
김시혁과 이유정이 슬쩍 시선을 피하며 상황을 종료했다.
그리고 이 모든 모습을 보던 박진욱은.
"허 참, 살다 살다 이런 광경을 다 보게 될 줄이야...."
믿기 힘든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럴 수밖에.
'저 지X 맞은 두 괴물이 꼼짝 못 하는 모습이라니.'
아마 다이아 랭크 이상의 플레이어들에게 이 일을 말하면.
아레나 질병의 후유증으로 미쳐 버린 거냐고 비웃음이나 사겠지.
애당초.
저 두 괴물이 누군가의 눈치를 저렇게 본다는 것부터가 현실성이 없는 일이었으니까.
'협회장이나 성삼의 회장의 눈치도 보지 않는 녀석들인데....'
새삼 시문이라는 존재에 대해 짙은 호기심과 경외심이 드는 박진욱.
그렇게 펜트하우스 내의 분위기가 안정되자.
"근데 오라버니,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테러라니요?"
이유정은 곧장 시문을 돌아보며 본론을 꺼냈고.
김시혁과 박진욱 역시 가만히 시문만을 바라봤다.
"그게 말이지...."
시문은 갑작스러운 폭발 테러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긴 했으나.
"뭐, 뭐라고요?!"
"데스페라도?"
"시문 씨, 그게 정말입니까?"
암살자가 데스페라도 소속 유망주인 것까지 이야기해 주었다.
이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데스페라도라... 이거 좀 알아봐야겠군요."
"다영 언니, 저예요."
이런 뒤 세계 쪽으로 밝은 밤사냥꾼과 성삼 길드의 정보력을 빌리고 싶은 거였고.
다른 하나는.
"...."
시문은 입술을 앙다문 채, 가라앉은 눈빛의 김시혁을 바라봤다.
'녀석, 짐작 가는 게 있나 보네.'
세계 최악의 빌런 조직인 데스페라도.
전원이 다이아 이상 급의 강자로 이루어진 범죄 조직이었으나.
오로지 강함만으로 조직을 유지하기엔 세상이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전생의 지구를 경험해 본 시문은 알고 있었다.
이런 범죄 집단이 얼마나 대단한 뒷배를 두어야 존속할 수 있는지 말이다.
'크게는 미국과 중국이 있지.'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상상도 못 할 범법 행위들을 더러 데스페라도에 의뢰했었다.
최후의 2강으로 남은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작게는.
'우리 잘나신 각성자 협회장이 계시지.'
삼촌, 숙부, 혹은 작은 아버지.
첩의 자식인 자신이 그자를 이리 불러도 되는지.
아니, 이리 부르기조차 싫었지만.
족보상 분명 현 각성자 협회장은 자신의 숙부였고, 이는 시혁이도 마찬가지였다.
덤덤하면서도 묘한 시문의 시선.
그에 확신을 얻은 것일까.
"형, 설마...!"
"시혁아, 거기까지. 아직 확정 난 건 아무것도 없다."
뭐라 말하려는 시혁이를 제지한 시문이 물었다.
"협회 쪽에선 뭐래? 목격자도 많고 단순 폭발 사고가 아니라는 건 이미 조사로 다 나왔을 텐데."
"안 그래도 말하더라. 형이 협회에 와서 진술은 해야 한다고."
1세대 플레이어이자 초대 협회장이셨던 아버지.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2대가 된 숙부, 곧 3대가 될 가능성이 유력한 시혁이까지.
사실상 각성자 협회를 주무르는 김씨 가문이기에.
협회 내에서 시혁이의 위치는 상당했다.
그런 동생 녀석의 힘으로도 이번 사고는 덮기가 힘든 것이다.
당연했다.
무려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일어난 폭파 사건이다.
아무리 차기 협회장인 시혁이라 해도 쉬이 덮을 수 있는 일이 아니란 말이다.
물론 그 전에.
'역시, 숙부는 그냥 넘길 생각이 없나 보네.'
숙부 김무열.
빌어먹을 그 양반이 물고 늘어지고 있는 거겠지.
아까 시혁이 녀석이 통화하면서 그러지 않았던가?
'협회 쪽은 제가 알아서 처리하죠.'라고.
"형, 굳이 안 가도 돼. 나 이제 랭커잖아. 내가 어떻게든 막아 볼 수 있어."
시문의 침묵이 길어서일까.
김시혁은 손을 저으며 말했지만.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시문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냥 청부업자도 아니고 데스페라도를 보냈는데, 가만히 있을 순 없지.'
어차피 자신을 암살하려던 배후를 알아보려던 참이었고.
마침 그 후보 중 하나가 친히 자신을 불러 주는데 내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협회에 연락해. 지금 가겠다고."
* * *
각성자 협회.
2015년 갤럭시 아레나와 각성자들의 등장 이후.
세계 각성자 협회를 중심으로 일종의 지점처럼 각 나라마다 존재하는 기관이다.
한국의 경우엔 강남에 위치해 있어, 랭커팰리스에서도 그리 멀지 않았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지하 주차장에서 내린 시문은 주변을 살폈다.
'기자들은 없네.'
무려 현 대한민국에서 가장 핫인 플레이어 중 하나인 김시혁의 행차인데도.
모기떼처럼 따라다니던 기자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지금의 행차가 비밀리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거겠지.
이유야 간단했다.
"시혁아, 고맙다."
"어?"
"네 덕에 신림 테러 사건 주인공의 얼굴이 안 알려졌잖냐."
"그건 당연한 거야, 형. 그런 일로 얼굴 알려져 봐야 좋을 거 하나도 없다고."
초대 협회장의 아들이자 현 협회장의 조카, 그리고 랭커인 우리 동생님이 힘을 거하게 써 주신 것이다.
언론과 대중의 관심이 어떤 것인지 늘 체험하고 있기 때문일까?
굳이 부탁하지 않았는데도.
요 잘난 동생 녀석이 알아서 배려를 해 준 거였다.
"이쪽 엘리베...."
"됐습니다. 여기서부턴 저희가 알아서 가죠."
"알겠습니다, 시혁 님.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안내 직원을 떼어 내는 김시혁.
그렇게 엘리베이터 내로 둘만 타게 되자 녀석이 입을 열었다.
"근데 형, 정말 괜찮겠어?"
"뭐가."
시문이 무심하게 답하자, 김시혁은 잠시 우물쭈물하더니 답했다.
"그... 형은 숙부를 껄끄러워했잖아."
"새끼, 좀 컸다고 언어 순화도 할 줄 아네. 그냥 속 시원하게 박아. 너 그 인간 무서워했잖아! 하고."
"혀, 형!"
화들짝 놀라는 김시혁.
그런 동생의 반응을 본 시문은 희미하게 웃었다.
'확실히, 이맘때 난 숙부를 두려워했었지.'
그 날카로운 인상도 인상이지만.
어린 시절 자신에게 유독 지독하게 굴었던 이가 숙부였으니까.
'그때는 몰랐지.'
오히려 자신을 보듬으면 보듬어 줬어야 할 숙부가 왜 그리도 모질게 굴었는지 말이다.
'하지만 이젠 아냐.'
무려 인생 2회 차다.
그간의 세월과 경험으로 어릴 때 보던 시선과는 많이 달라졌고, 당연히 숙부의 속내도 훤히 보였다.
그리고 원인을 알게 된 두려움은 더 이상 두려움이 되지 못했다.
띵.
"도련님, 오셨습니까."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범상치 않은 기세의 남성이 시혁이를 향해 고개를 푹 숙였다.
그에 시문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여전하네.'
분명 옆에 있는 자신을 보았음에도 오로지 시혁이에게만 예를 차리는 모습.
당연했다.
저 숙부의 최측근은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없는 듯 대해 왔으니까.
하나 그런 행위에 주눅만 들던 김시문은 이제 없었으니.
"우리 최창욱 비서장님은 여전히 깍듯하시네요. 협회장님은 안에 계십니까?"
시문은 조금의 위축도 없이 되레 여유로운 미소로 말을 걸었고.
"...예. 기다리고 계십니다."
골렘 같은 눈매를 움찔한 최창욱은 의문스러운 눈초리로 시문을 힐끗하곤 문을 열었다.
'음?'
짙은 나무 향이 코 속을 훅 찔러 왔다.
숙부의 특성을 생각해 보면 당연했다.
단지 신기한 것은.
'방향제라도 쓰나? 묘하게 비린데?'
나무 향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비린내가 섞여 있다는 것이다.
그런 시문의 귓속으로.
"왔군."
중저음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제52화
52화. 불청객 (4)
한국 각성자 협회장 김무열.
그 휘황찬란한 명패 뒤로, 각이 졌지만 날렵한 선의 중년 남자가 앉아있었다.
눈부터 입까지 전체적으로 날카로운 인상은 세월의 주름이 섞였음에도 느슨해지기는커녕.
잘 보관된 오랜 검처럼 날카로웠다.
그 칼날 같은 눈썹 한쪽이 슬쩍 올라갔다.
"난 2명을 부른 기억이 없는데."
그렇게 읊조린 김무열의 시선은 정면에 서 있는 시문이 아닌 뒤편을 향했고.
"그렇습니까? 평소에 하도 협회에서 잘 찾길래 저도 오라는 줄 알았죠."
김시혁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하나 그뿐.
분명한 축객령이었음에도.
김시혁의 두 다리는 뿌리처럼 바닥에 박혀 있었다.
"도련님, 잠...."
그에 잠시 눈치를 보던 비서장 최창욱이 김시혁에게로 다가가려던 찰나.
"되었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었으니, 그럴 수도 있지."
김무열은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슬쩍 저으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아니.
끌어 올리려 했다.
"역시 같은 처지라 그런가? 이해심이 남다르시네요, 숙부."
맑고 뚜렷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 말이다.
그 말에 김시혁과 김무열은 물론.
"...."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가려던 비서장 최창욱 역시 움직임을 뚝 멈췄다.
특히나 최창욱은 김시혁처럼 눈이 휘둥그레졌으나 그뿐.
"...실례하겠습니다."
골렘이라는 별칭답게 금세 감정을 회복한 최창욱은 각진 인사로 물러났다.
문이 닫히자.
"취미가 많이 변하셨네요. 분재 같은 건 안 키우셨잖아요?"
맑고 뚜렷한 목소리가 이어진다.
어느새 창가로 걸어간 시문이 줄줄이 놓여 있는 분재들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시문의 전신으로.
"지금 뭐 하자는 거지?"
오싹한 압박감이 조여 왔다.
단순히 기분 때문이 아니었다.
실제로 다이아 랭크의 플레이어인 만큼, 서늘한 기세가 시문을 압박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기운을 현대 사회는.
'우리 잘나신 숙부가 어지간히도 당황스럽나 보군.'
살기라고 불렀다.
"참, 이런 걸 보면 예나 지금이나 숙부는 여전하시네요."
예전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을 숙부의 살기.
"모처럼 가족끼리 모였는데 날 좀 접으시죠. 이제 나이도 있으시잖아요?"
그것을 한껏 즐기며 입꼬리까지 끌어 올리는 시문에.
"...너, 미친 건가?"
김무열의 눈매는 한결 더 날카로워졌다.
물론.
화아악!
전신을 압박해 오던 살기는 말할 것도 없었고 말이다.
"혀, 형!"
설마 진심으로 살기를 내뿜을 줄은 몰랐던 걸까.
깜짝 놀란 시혁이가 김무열을 제지하려 했으나.
시문은 손을 들어 동생 녀석을 만류했다.
그에 눈을 꿈틀한 김무열은 더욱 강한 살기를 뿜었지만.
따악.
손가락을 튕긴 시문은 여유로운 미소로 김무열을 응시할 뿐이었다.
"...쯧."
짜증을 표한 김무열은 한동안 시문의 손가락을 바라보다가 살기를 거두어들였다.
이어.
꾸득.
딱딱한 무언가가 꺾이는 소리가 들려왔고.
시문의 목덜미의 솜털이 바짝 솟아올랐다.
시문은 본능이 경고하는 대로 몸을 틀었고.
스악.
날카로운 바람 한 줄기가 시문의 목을 스쳤다.
그 모습에 협회장 김무열의 눈빛이 한결 깊어졌다.
"소문이 사실이었군."
"저도 모르는 소문이 있나 보군요? 근데 확인 방식이 좀 거칩니다?"
"원래 당사자가 모르는 게 소문이지."
"하하. 맞는 말이네요."
갑작스러운 기습에도 시문은 미소를 잃지 않은 채.
목 부근까지 뻗은 분재의 가지를 손으로 슥 눌렀다.
"쯧."
혀를 차른 차는 김무열.
꾸득.
그와 함께 가시처럼 뾰족하게 자라났던 분재의 가지는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어떻게 능력을 되찾았지? 아니."
분재의 가지를 거두어들인 김무열은 차갑게 물었다.
"어떻게 마력불능을 회복한 거냐?"
권위적인 색이 물씬 묻어나는 목소리.
그럼에도 무척이나 어울리는 모습을 보자니,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권위적인 그 모습에 압도되어서가 아니었다.
'어지간히도 힘을 준단 말이지. 하긴, 숙부의 배경을 보면 그럴 수밖에 없지.'
김무열의 과거를 아는 시문으로선.
그저 강해 보이려는 허세로밖에 보이지 않았으니까.
"뭐, 운이 좋았죠."
"운?"
시문의 묘한 미소와 대답에 미간이 찌푸려지는 김무열.
단순히 시답지 않은 답 때문만은 아니었다.
"마력불능을 회복하더니, 제 주제를 망각했나 보군."
과거와는 전혀 다른 시문의 태도.
특히나.
이곳에 들어선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묘하게 대화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저 행태가 무척이나 불쾌했다.
그런고로.
"김시혁이면 몰라도, 넌 혼외에서 난 자식이다. 그것도 적통보다 먼저 태어난, 가문의 수치라는 말이지."
다시 제 위치를 상기시켜 주어야 했다.
"내게 시건방을 떨 수 있는 위치가 아니라는 걸 기억해 두도록."
"숙부!"
김무열의 비소에 곧장 반응하는 김시혁.
하나.
"하하! 그래도 제가 숙부보다 나은 부분이 있네요."
시문은 쾌활하게 웃을 뿐이었다.
도리어.
"같은 첩의 자식이지만, 전 적통보다 먼저 태어나지 않았습니까?"
한 걸음 다가가 역으로 비수를 꽂아 넣었다.
"숙부께서도 저처럼 먼저 태어나셨다면... 이리 힘들게 그 자리에 오르진 않으셨을 텐데 말이죠."
따악.
말이 끝남과 동시에 튕겨지는 시문의 손가락.
전신으로 인체 연성을 한 이유는 다름 아니었다.
"네놈!"
쾅!
곧장 자리를 박차고 날아드는 숙부를 예상한 탓이었다.
물론.
까강.
"숙부, 미치셨습니까?"
믿는 구석도 있었고 말이다.
"...김시혁, 지금 미친 게 누구로 보이느냐?"
잘 벼려진 칼 같던 모습과 달리.
일그러지다 못해 시뻘게진 얼굴로 으르렁거리는 김무열.
그와 뻗어 나온 분재들의 날카로운 가지를 검 한 자루로 막아선 김시혁은 흔들림 없이 답했다.
"굳이 집어서 말해야 압니까?"
"비켜라."
"못 비킵니다."
까득.
꼼짝하지 않는 김시혁에 이를 가는 김무열.
"후."
잠시 숨을 고른 그는 이마를 쓸어 올리며 몸을 물렸고.
꾸득.
날카롭게 자라났던 분재의 가지들 역시 서서히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시문은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휘이. 아직 젊으시네요, 숙부."
감정 주체도 못 하는 어린애 같네.
그러한 속말을 못 알아들을 리 없는 김무열은 주먹을 불끈 쥐었으나.
'빌어먹을 새끼가...!'
자신보다 새파랗게 어린 조카 놈에게 휘둘리고 있다는 걸 느끼곤 들끓는 감정을 가라앉혔다.
본래의 얼굴로 돌아온 김무열은 작게 한숨을 쉬며 박살 난 책상과 의자로 손을 저었다.
꾸드득.
고급 원목으로 이루어진 책상과 의자가 순식간에 복구된다.
김무열이 털썩 자리에 앉자.
스릉.
김시혁 역시 검을 거두며 물러났다.
물론 아까처럼 입구 쪽에 서 있는 것이 아닌, 시문의 뒤편으로 자리했다.
그런 동생의 배려를 힐끗한 시문은 제 숙부를 바라봤다.
"가족 사이의 덕담은 이만하면 됐고.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저 꽤 바쁘거든요."
"누가 보면 네놈이 협회장인 줄 알겠구나."
"하하! 그럴 리가요. 이 녀석이라면 모를까."
장난스럽게 뒤편의 김시혁을 턱짓하는 시문.
그에 김무열의 눈매가 다시 한번 꿈틀했으나, 이 이상의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역시 숙부답네. 두 번은 안 당한다 이건가.'
최대한 흔들어 놓고 싶었는데 말이지.
속으로 입맛을 다신 시문은 말을 이었다.
"절 협회로 소환한 이유는 아마 테러 사건 때문이겠죠?"
"그걸 말이라고 하나?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벌어진 일이다. 그것도 각성 범죄로."
제이스 클라크의 특성상.
그와의 전투는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각성자 협회의 관여도 피할 수 없었겠지.
"해서 묻겠다. 대체 무슨 짓거릴 한 거지?"
"무슨 짓거리라...."
말끝을 흐린 시문은 칼날처럼 날카롭게 쏘아보는 숙부의 눈을 응시했다.
"발뺌할 생각은 버려라. 이미 보고로 다 들었다. 20대의 백인 남성이 종이인형을 쉬지 않고 뿌렸다더군."
"역시 협회네요. 벌써 거기까지 보고가...."
"쓸데없는 말은 집어치우고 답이나 해라."
의문이 가득 배어 있는 김무열의 눈빛.
그걸 본 시문은 한 가지를 확신할 수 있었다.
"네놈, 데스페라도와 무슨 관계냐?"
'숙부가 놈들에게 의뢰한 건 아니군.'
마력불능의 회복이니, 데스페라도의 관계니 하는 질문도 그렇지만.
애당초 숙부가 자신의 암살을 의뢰했다면.
암살자는 제이스 클라크 하나만으로 끝날 리 없었다.
'만일을 대비해 비서장 최창욱을 포함한 다이아급 플레이어들도 보냈겠지.'
그뿐만 아니다.
자취방이 있는 신림 일대를 아예 봉쇄해 버렸을 터.
각성자 협회장에게 그 정도 권력은 있었고.
저 치밀한 인간은 이런 방식으로 권력을 사용하는 데 익숙한 자니까.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이렇게 직접 겪어보니 숙부는 분명 의뢰자가 아니었다.
'그럼 다른 쪽이라는 건데....'
이 시기에 데스페라도를 지원했던 세력은 총 셋.
한국의 협회장과 미국, 중국이다.
여기서 숙부가 의뢰자가 아니라면 미국과 중국 둘만이 남는데.
'내가 미국이랑 중국을 상대로 마찰을 일으킨 적이 있었나?'
전생에야 고가치 재료들 때문에 국가 단위로 마찰을 빚긴 했지만.
그건 전생의 일이지 지금의 일이 아니지 않은가?
시문의 침묵이 길어져서일까.
"입을 닫는다고 다 해결될 것 같으냐?"
김무열의 언성은 한결 높아졌다.
그에 시문은 한 가지 더 눈치챘다.
'그렇군. 숙부도 데스페라도의 의뢰자를 알고 싶은 거구나.'
어떤 마음에선지는 이해가 갔다.
'자신 말고 또 어떤 자들이 데스페라도에 선을 대고 있는지 궁금한 거야.'
시문과 의도는 다르지만 원하는 바는 같다.
그렇다면.
"제가 묻고 싶은 말이네요. 숙부께선 어떻게 데스페라도를 아십니까?"
이 상황을 이용하면 된다.
아무래도 뒷배 하나 없는 골드 랭크보단.
한국 각성자 협회의 협회장이 할 수 있는 게 더 많을 테니.
"지금 나와 장난하자는 게냐? 각성자 협회장인 내가 유명 빌런 조직도 모를 것 같나?"
"하긴, 그것도 그렇네요."
"건방지게 능청 떨지 말아라. 인명 사고가 없어 이 정도지, 아니었다면 네놈은 벌써 구속되었을 거다."
"저도 그 부분은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심이다.
자신으로 인해 타인이 다치거나 죽는 일은 찝찝할뿐더러.
인명 피해가 나면 아무리 대단한 인맥이 있어도 빠져나가기 힘들다.
현 사회에서 각성자 범죄는 결코 우습게 넘어갈 항목이 아니었으니까.
"너, 아까부터 계속 말을 빙빙 돌리는데...."
"미국 쪽은 알아보셨습니까?"
"뭐?"
"아니면 중국은요?"
"...그게 무슨 뜻이지?"
진한 의문을 표하는 김무열.
그를 보는 시문의 머릿속은 빠르게 돌아갔다.
'역시, 아직 데스페라도의 뒷배에 두 강국이 있다는 건 모르는구나.'
하긴.
전생에서도 몇 나라가 남지 않고서야 알려진 사실인데.
지금 시점에서 그것이 알려질 리가 없겠지.
설마 제 이익을 위해서 국가가 빌런 조직을 암암리에 봐주고 있다곤 생각하기 어려웠으니까.
'의문을 제기해도 결국 음모론으로 끝날 문제고.'
갤럭시 아레나의 등장 이전에도 흔히 있던 일 아니던가?
국가 단위의 음모론은 말이다.
"김시문, 내가 한 번만 더 네놈에게 질문하게 만들면, 그땐 네 동생도 널 지켜 주진 못할 거다."
시문은 으르렁거리며 열렬한 관심을 표하는 숙부를 보며 싱긋 웃었다.
"말 그대롭니다. 미국과 중국 쪽은 알아보고 제게 묻냐는 거죠."
"내 말이 이해가 안 가나? 갑자기 왜 여기서 그 두 나라가 나오냐는 거다."
"에이, 숙부 정도 되는 분이시면 이미 알지 않습니까? 뭘 그리 되물어요."
시문의 너스레에 김무열의 미간이 좁혀진다.
그럴 수밖에.
저만한 위치에 있는 이들에겐 음모론과 진실을 구분할 시야 정도는 주어졌고.
저 칼날 같은 사내는 그걸 구별할 능력을 충분히 지니고 있었으니까.
"네놈, 그게 얼마나 위험한 발언인지는 알고 있겠지? 만일 네놈의 말이 거짓이라면...."
"그럼 숙부께선 좋겠죠. 협회장에게 거짓말과 국가음해까지 했으니, 잡아넣기 딱 좋지 않습니까?"
태연하게 답하는 시문.
결국 데스페라도를 은연중에 후원하고 있을 우리의 협회장께서는.
"...좋다. 아닐 경우 각오하도록."
시문이 내민 미끼를 물 수밖에 없었다.
* * *
"형, 정말 괜찮겠어? 혹여나 그 두 나라가 관여하지 않았다면...."
"관여했어."
그에 질문자 김시혁은 잠시 눈을 깜빡였다.
이내.
"그래? 알았어."
덤덤히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
시문은 되묻지 않고 그대로 믿어 버리는 동생의 모습에 물었다.
"반응이 왜 이렇게 싱겁냐. 아니면 어쩌려고?"
"형이 맞는다고 하면 맞을 테니까."
"고맙긴 한데, 너무 믿는 거 아니냐?"
"아니, 숙부를 그렇게 몰아세우는 걸 보고 확신이 섰어. 나 처음 봤거든, 숙부가 그렇게 흔들리는 거."
통쾌한 얼굴로 눈을 찡긋하는 동생에 시문은 너털대며 웃었다.
"나도 숙부가 그렇게까지 흔들릴 줄은 몰랐다."
"앞으로 협회 갈 땐 형이랑 같이 갈까 봐."
"녀석."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며 펜트하우스 입구에 도착한 두 사람.
달칵.
문이 열리자.
"오라버니, 다녀오셨어요?"
미리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펜트하우스 안쪽에서 이유정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왔다.
"유정이? 네가 왜 여기에...?"
갑작스러운 이유정의 출현에 시문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해서 눈치채지 못했다.
"...."
"...."
뒤따라 들어오던 김시혁과 은밀히 시선을 교환하는 이유정을.
이내.
"오라버니가 걱정돼서 그랬죠. 협회장님과는... 이전부터 사이가 안 좋으셨잖아요."
걱정스레 말하는 이유정에 시문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 유정이도 모를 수가 없겠네.'
어릴 적부터 늘 붙어 다녔으니.
아무리 어리더라도 영민한 그녀가 자신과 숙부의 관계를 모를 리 없으리라.
오히려 배려해 주려고 그간 티 내지 않은 거겠지.
그때.
"아니,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나 오늘 깜짝 놀랐거든."
뒤에 있던 김시혁이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야. 나 숙부가 그렇게 흔들리는 거 처음 봤거든."
"협회장님이... 흔들렸다고?"
그 말과 함께 흔들리는 눈동자로 시문을 보는 이유정.
이내 감정을 추스른 그녀는.
"호호! 이거 제가 귀한 장면을 놓쳤나 보네요. 오라버니, 차를 우려 놨는데 우선 한잔하시면서 이야기 좀 해 주세요."
활짝 웃으며 소파로 안내했다.
시문이 자리에 앉아 차를 한 모금 마시자, 이유정의 시선은 김시혁을 향했다.
"아니다, 오라버니 피곤하실 텐데. 시혁아? 네가 말해 봐.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협회장께서 흔들렸다니?"
"그게...."
시혁이의 설명에 실시간으로 다양한 반응을 토하는 이유정.
"에에?! 진짜? 그분이 진짜로 그랬어?"
"그랬다니까! 거기에다 형이...."
한참을 조잘거리며 협회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
시문은 그것을 BGM 삼아 소파에 몸을 파묻고 차를 음미했다.
그렇게 찻잔이 다 비어 갈 때쯤.
이야기가 끝난 것일까?
갑작스러운 침묵과 함께 눈빛을 교환하는 두 사람.
이내.
"근데 형."
동생 김시혁이 조심히 입을 열었다.
"이제 집은 어쩔 거야?"
제53화
53화. 새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