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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 - 3

21화. 천마신공 (3)

-돈킹 우짬? 이거 다 환불해야 함?

-미친 ㅋㅋㅋㅋ. 천만 원씩 도합 3천만 원인데?

-심해새끼한테 개털렸엌ㅋㅋㅋ!

-심해 왔다가 현지인 돼 버린 수준 ㅋㅋㅋ.

스트리머가 죽어 검은 화면이 되었음에도.

채팅창의 열기는 좀처럼 식지 않았다.

당연했다.

같은 버스 기사들끼리 경쟁이 붙었다면 모를까.

-심해는 무슨. 아까 권기 쓰는 거 못 봄? 딱 봐도 현지인 아니구만.

-근데 권기는 아닌 거 같던데?

-ㄹㅇ 내가 돈킹방송 개국공신인데 돈킹의 권기랑은 뭔가 좀 달랐음.

-난 김시문이라는 이름 자체를 못 들어 봄.

-당연한 소릴 함? 어떤 변태가 심해 현지인 방송을 찾아본다고.

상대는 본 적도 없는 무명의 플레이어인데, 돈킹을 잡아 버렸다?

그것도 다이아를 노렸던 격투계가 주먹으로 졌다는 점에서.

돈킹의 채팅창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활발한 채팅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하... X발.'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돈킹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목구멍까지 욕설이 치솟았지만.

아직 방송 중이고 마무리할 것도 남아 있었기에.

"자자, 여러분. 이미 끝난 아레나니 다들 진정하세요."

돈킹은 멘탈을 다잡으며 상황을 정리했다.

"어떻게 된 건진 모르겠지만, 제 경험상 일단 저쪽도 이 구간대 랭크는 아닌 게 확실합니다."

-ㄹㅇ. 심해에서 권기는 선 넘었음.

-맞아, 맞아. 권기가 아니라 해도 그 위력은 말이 안 됐어. 이 구간 사람 아닌 듯.

본디 버스 방송 자체가 충성도 높은 시청자들로 이루어진 만큼.

-그럼 뭐 핵이라도 썼나?

-핵이랰ㅋㅋㅋ 아만보 수듄ㅋㅋ

-아레나에 핵이 어딨음? 제발 말이 되는 소릴 하셈.

-ㄹㅇㅋㅋ. 저 애는 진짜 심해 플레이어인 듯.

-내 말은 아티팩트나 다른 무언가가 있냐 이런 뜻이지. 말귀를 못 알아듣네.

-네다심.

돈킹의 시청자들은 돈킹의 의견에 동조하기 바빴다.

사실 시청자들 역시 실제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기에.

채팅창의 분위기는 돈킹의 의견으로 쉽게 기울었다.

"최우선은 손님분들에게 사과를 드려야겠죠."

여론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돈킹은 본론을 꺼냈다.

"본래 규정상 100% 환불은 없지만, 이번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라서요. 전액 환불해 드리겠습니다."

-오오! 역시 돈킹!

-오이오이, 믿고 있었다구?

-진짜 버스 기사에 진심인 새끼네 ㅋㅋ.

채팅창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자.

"그럼 전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오늘 방송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돈킹은 방종각을 잡고 자연스레 방송을 종료했다.

방송이 완전히 꺼지자.

"제기랄!"

빡.

신형 아레나 접속기기.

그중에서도 가벼운 형태인 고글형 접속기기가 바닥에 처박혔다.

앞면 유리가 박살 난 것을 보아 분명 고장일 테지만.

"저랭크에서 권기라니! 이게 말이나 돼?!"

돈킹에게 그것까지 돌볼 여유는 존재하지 않았다.

"분명 뭔가 있어! 아티팩트든 뭐든 분명 내가 모르는 개수작을...."

숨소리만큼이나 거친 목소리가 흘러나왔으나 그도 잠시.

"...그래,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돈킹은 한결 차분해진 호흡으로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나름 플래티넘 랭크를 달리며 다이아까지 노렸던 자신이다.

아무리 패작으로 랭크를 낮춰 온갖 페널티를 받았다곤 하나.

'내가 잘못 봤을 리 없어.'

수작을 부린 공격과 권기가 실린 공격을 구분 못 할 만큼 바닥으로 떨어지진 않았다.

'그건 분명 권기였어.'

그 김시문이라는 플레이어의 주먹에 휘감겨 있던 건 분명한 권기.

시커먼 색이 의아하긴 했으나, 사용자에 따라 오러 색이 달라지는 건 흔한 일이다.

"후."

돈킹은 감았던 눈을 떴다.

성에 가득 찼던 눈동자는 어느새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그럼 그놈이 권기를 사용할 정도로 강자라는 건데....'

권기는 단순 계산만 따져도 최소 100레벨대의 스탯은 되어야 엿볼 수 있는 기술이지만.

말 그대로 단순 계산이자 평균값일 뿐.

그걸 만족하지 않고도 오러를 발현하는 이들은 제법 있었다.

'아무래도 스탯보단 개인적인 재능에 영향을 많이 받으니까.'

당장 몇 년 전에 등장한 괴물 루키 김시혁과 이유정도 그렇고.

현 다이아 랭크에서도 상위권을 구가하는 실력자들이 그 증거였다.

그들은 스탯의 유무를 떠나, 저랭크 때부터 오러를 사용했으니까.

꼭 100레벨치의 스탯값이 만족하지 않는다 해도, 기의 발현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점이 있었다.

'그 정도 실력자라면 내가 몰랐을 리 없을 텐데....'

현재 돈킹이 버스를 운영하는 구간은 실버에서 골드 사이.

이 구간대의 유명한 유저들이나 버스 기사들은 모두 꿰뚫고 있는 돈킹이다.

하지만 김시문이라는 이름은 전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때.

"맞아!"

아까 시문의 말이 돈킹의 머릿속을 스쳤다.

'내 귀한 시청자께서 방금 미션을 걸어 주셔서.'

"그 자식! 분명 미션을 받았다고 했었지."

처음엔 단순한 자존심, 허세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당하고 나니 생각이 180도 달라졌다.

"방송! 방송이 있을 거야!"

돈킹은 서둘러 스마트폰을 켰다.

2015년 이후로 인류의 필수 요소가 된 갤럭시 아레나 전용 방송 플랫폼 '아레니아'.

돈킹은 아레니아를 켜고 서둘러 검색 기능을 사용했다.

'설마 비공개 방송은 아니겠지?'

갤럭시 아레나 측이 비각성자들도 시청할 수 있게 만든 방송 플랫폼이지만.

스트리머가 지정한 이들만 볼 수 있는 비공개 방송 기능도 있었다.

다행히도 비공개 방송은 아니었던 걸까?

"찾았다!"

기도에 기도를 거듭하던 돈킹은 김시문의 방송을 찾아냈다.

그러나.

[김시문 랭크 미지정(Unranked). 3명 시청 중.]

"어, 언랭? 언랭이라고?!"

돈킹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어디 유망주거나 자신과 같은 패작러라고 생각했는데.

아직 배치고사도 치르지 않은 뉴비라니?

"...."

뇌가 마비되는 기분.

그러나 그런 머리의 상태와는 다르게.

돈킹의 손가락은 곧장 화면을 터치해 시문의 방송에 입장했다.

들어오자마자 펼쳐지는 광경은 뻔했다.

"사, 살려 줘!"

"미친! 장비도 없는 놈이 뭐가 이리 세!"

학살.

돈킹과 같은 버스 기사는 더 없는 것일까.

방송 화면은 시문의 이동에 따라 어둑한 폐광의 통로가 훅훅 스쳐 지나가며.

"커헉!"

"보, 보호막이! 아악!"

권기도 실리지 않은 주먹질로 플레이어들은 쓸어버리고 있었다.

"미친...."

그 화려한 움직임에 돈킹의 입이 쩍 벌어진다.

'이 녀석, 무투 수준이 미쳤잖아?'

자신을 압도했던 시문의 실력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도 파악했다.

그럴 수밖에.

'방금 그 거리에서 돌려차기를 쓴다고?'

'여기서 팔꿈치로 이단 타격이 돼? 아니, 대체 스탯이 어떻게 되길래....'

'저건 또 무슨 심리전이야? 설마! 허수의 개념을 벌써 알고 있는 거야?'

이렇게 버스 기사 노릇을 하고 있지만, 한때 다이아를 노리던 격투계다.

그런 돈킹의 입장에서.

'동작 하나하나가 공방의 묘리, 그 이상의 상승 무리가 섞여 있어....'

시문이 내미는 주먹 하나, 내딛는 보폭 하나에 담긴 수준이 고스란히 보이는 것이다.

그 움직임은.

'대체 뭘 익힌 거지?'

나름 다이아 승급을 노리던 격투계인 돈킹도 이해하기 난해한.

아니지.

애당초 개념조차 꿰뚫기 힘든 무언가였다.

더군다나.

'이렇게 어두운데. 적은 또 왜 저렇게 잘 찾는 거야?'

폐광 맵은 일종의 개미굴처럼 복잡한 미로 형식을 갖추고 있었고.

중간중간 횃불조차 없는 절대 암전.

일명 블랙존이 존재했다.

한데 시문의 방송 화면은 블랙존에서도 쉬지 않고 계속 움직였다.

보이지도 않는데 그걸 어떻게 아냐고?

"컥! 어, 어떻게 여길!"

어두운 곳에 유리한 특성을 지닌 플레이어들의 비명이 계속 터져 나왔으니까.

'심지어 블랙존에 진입하고도 움직임이 느려지질 않아....'

그래.

마치 꼭 이 시커먼 폐광 속이 훤히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이게 언랭이라고?'

아직 배치고사도 보지 않은 언랭.

다른 말론 아레나를 10판도 채 돌지 않은 유저라는 말이 되는데.

'거짓말이지? 이게 가능이나 한 일이야?'

차라리 인생 2회 차인 플레이어라고 해라.

그게 더 신빙성이 있겠다.

그렇게 헛웃음을 흘리던 돈킹은 의아함을 느꼈다.

"잠깐. 그러고 보니...."

분명 입장 전에 시청 중인 시청자가 3명이라고 적혀 있던 거 같은데.

"왜 아무도 채팅을 안 치지?"

고개를 갸웃한 돈킹은 한동안 채팅창을 응시했다.

방금 등 뒤의 기습을 귀신같이 받아친 반격은 같은 격투가인 돈킹이 봐도 감탄사가 절로 흘러나왔으나.

-....

채팅창엔 어떤 채팅도 올라오지 않았다.

"뭐, 김시문 자체도 채팅창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눈치긴 한데...."

미션까지 걸어 줄 시청자면 뭐 어떻게든 존재감을 보여 볼 법도 하거늘.

채팅창은 왜 이리 조용하단 말인가?

잠시 고요한 채팅창을 더 지켜보던 돈킹은 손가락을 움직였다.

-저기요, 아무도 없습니까?

황량한 채팅창에 첫 줄을 올린 돈킹.

이어.

-오오, 돈킹 아닌가? 안 그래도 할 말이 있었는데, 연이 이렇게 닿는군.

한 줄의 채팅이 올라왔다.

"엇? 이 사람은!"

익숙한 아이디를 확인한 돈킹은 서둘러 채팅을 쳤다.

-후연룡 님 아니십니까?

-반갑네. 방종을 너무 빨리해 말할 타이밍을 놓쳤는데, 잘됐군.

-아! 환불이라면 오늘 안에 계좌로 해 드릴 예정입니다.

-환불은 필요 없네. 용건은 개인 DM으로 보내 놨으니 나중에 확인만 해 주게나.

-아이고! 역시 후연룡 님이십니다. 꼭 확인하겠습니다!

환불을 거절하는 후연룡에 가슴을 쓸어내리는 돈킹.

그는 시청자 수를 다시 확인했고 자신을 포함해 5명임을 알 수 있었다.

'잠깐. 그럼 내가 입장하고 좀 있다가 후연룡 님이 입장했다는 말인데?'

그럼 여전히 앞에 접속해 있던 3명은 채팅창을 쓰지 않고 있다는 말 아닌가?

그때.

-성좌 제우스: 시끄럽군.

-성좌 천마: 그러게 말일세.

범상치 않은 닉네임의 채팅들이 올라왔다.

당연히 돈킹은.

-?

물음표를 칠 수밖에 없었다.

-허참... 이런 콘셉트는 또 처음 보는구먼.

이어지는 후연룡의 채팅 역시 어이없는 감정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

당연했다.

애당초 채팅에 이름이 붙어 나오는 건 해당 방송의 매니저들뿐이었으니까.

또한 시청자가 적은 방송인들 특성상.

몇 없는 시청자라도 잡기 위해 매니저라는 직분을 쉽게 던져 준다.

돈킹 역시도 방송 초반부엔 그렇게 고정 시청자들을 모았다.

하지만.

"이거 완전 또라이였잖아? 무슨 매니저 이름에 성좌를 써 붙여 놔?"

매니저들의 닉네임을 모두 성좌로 써 두다니.

이건 좀 아니지 않은가?

이 어처구니없는 마음을 그대로 담아.

-님들, 닉이 다 왜 그럽니까?

돈킹은 채팅을 쳤다.

-혹시 어그롭니까? 무슨 닉을 성좌인 양 써 두세요?

-성좌 제우스: ?

-성좌 천마: ?

잇달아 물음표가 올라왔지만,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은가?

당장 성좌의 선택을 받은 플레이어들은 랭크를 막론하고, 어마어마한 시청자 수를 몰고 다닌다.

한데 매니저란 자들이 성좌라는 닉네임을 버젓이 달고 있다니?

"모르는 척이라니. 하! 이거 진짜 개악질이잖아?"

누가 봐도 어리숙한 시청자들을 낚으려는 수작질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비록 스스로도 버스 기사를 하는 입장이지만.

성좌 사칭은 정말 도를 넘었다.

그렇게 생각한 돈킹은 열심히 손가락을 놀렸다.

-모른 척 지리네 진짜 ㅋㅋ. 채팅 멈춘 거 보니 양심은 있나 보죠?

여전히 묵묵부답인 채팅창.

-좀 있으면 제 시청자들도 몰려올 텐데, 이런 짓을 하다....

그에 계획적인 어그로임을 확신한 돈킹이 뭐라 채팅을 더 이어 가려 할 때.

-성좌 검은 염소: 뭐 X발아?

그동안 아무 말 없던 마지막 시청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 * *

"크헉!"

비명과 함께 쓰러지는 갑옷의 남성.

그 두꺼운 갑옷의 가슴 부분엔 주먹의 형태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정확히는 박혀 있다고 해야겠지.

"이걸로 마지막인가."

그 원인인 남자, 시문은 주먹을 가볍게 털며 아레나 보드를 열었다.

1위 – 김시문 20킬.

2위 – 박세찬 3킬.

3위 – 최....

"20킬이라...."

킬 수를 확인한 시문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여유 좀 부려도 1등이 뒤집힐 참사는 없겠어."

어차피 남은 생존자들은 20명도 되지 않으니.

지금부터 가만 손 놓고 있어도 등수를 강탈하지 못하리라.

'이러면 천마도 만족하려나?'

시문은 미션창을 열어, 아레나 초반부에 성좌 천마가 건 미션을 확인했다.

[미션]

-성좌 천마는 천마신공을 익힌 당신의 패도를 보고 싶어 합니다.

이번 서바이벌에서 천마신공으로 '물러섬 없는 패도'를 보여 주세요.

보상 : 업적 포인트 500

굉장히 심플한 내용의 미션.

1등을 하라는 것도, 압도적인 킬 수를 달성하라는 것도 아니었으나.

시문에겐 그런 조건의 미션들보다 더 어렵게 다가왔다.

'원래 객관식보단 주관식이 더 어려운 법이니까.'

누가 무인 아니랄까 봐.

참으로 추상적인 미션에 시문은 한숨을 내쉬었다.

'뭐, 마냥 어렵게 고민할 미션은 아니지.'

'패도'라는 단어를 썼지만.

결국 김시문이라는 존재가 지닌 능력을 보여 달라는 이야기일 터.

'지금까지 보여 준 거로 만족하겠지.'

양학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킬 수와 1등.

더불어 이 구간대의 강자인 버스 기사 돈킹까지 물러섬 없이 잡아냈으니, 보여 줄 건 다 보여 줬다.

더군다나 시문은 무림인이 아닌 연금술사 아닌가?

이만하면 미션 완료가 될 것이다.

라고 생각했지만.

"쩝. 아직 부족하다 이건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메시지창에 시문은 입맛을 다셨다.

'뭐, 아레나가 끝날 땐 완료가 되겠지.'

그때.

"음?"

멀지 않은 곳에서 작은 반짝임이 시문의 시야에 포착되었다.

'저게 뭐지?'

지금 이곳은 폐광 맵에 유명 지역인 블랙존.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운 곳이었으나.

시문에게는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문아울의 신체조직]

완성도 : 13%

연성된 문아울의 신체조직.

문아울의 신체 능력을 재현할 수 있다.

바로 올빼미류의 몬스터인 문아울.

인체 연성을 통해 문아울의 신체조직을 눈에 연성한 것이다.

덕분에 색상을 구분하기는 다소 힘들어도.

야간 투시경처럼 어두운 곳도 훤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 시야에 유독 저곳만이 반짝이고 있는 것이다.

'가 볼까.'

[블랙팬서의 신체조직]을 연성해 단번에 그곳까지 가뿐히 도달한 시문은 반짝이는 물체를 확인했다.

"어디 보자... 은색이 드문드문 있는 걸 보면 은광석인가?"

-오, 오빠?

물체를 살피던 와중 익숙한 이명이 잘게 떨려 왔다.

-이거 설마... 그거 아냐?

현자의 돌이었다.

"그거?"

-그, 그거 있잖아! 그거!

한껏 달아오른 현자의 돌의 목소리에 고개를 갸웃하는 시문.

이내 은치고 지나치게 밝고 깔끔한 모습에 정신이 번뜩였다.

"아!"

무언가 떠오른 것일까.

시문은 서둘러 반짝이는 물체를 파냈다.

여타 광석들이 그렇듯.

여러 불순물이 섞여 있는 은광석이다.

하나 선명하다 못해 환한 은색은 분명 시문이 알고 있는 '그 광물'이었다.

시문은 침을 꿀꺽이며 정보창부터 확인하려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거 만약 정보창을 지닌 물건이면....'

지구로 가져 나갈 수 있다.

맵의 구성 요소가 아닌 획득이 가능한 아이템으로 치부되니까.

아니나 다를까.

스륵.

시문의 눈앞으로 떠오르는 정보창.

-오빠, 어때? 맞아? 응?

'그래, 맞아.'

-꺄흥! 웬일이래니! 오빠, 얼른 챙겨!

시문은 조심스레 그것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폐광에서 이걸 얻을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나도나도! 이딴 폐광에 이런 귀한 녀석이 잠들어 있을 줄이야! 오빠? 빨리 쓸어버리고 나가서 제대로 확인하자.

'그래.'

졸지에 얻은 득템에 기분 좋게 몸을 돌리던 시문의 시야에.

'음?'

또 다른 빛이 반짝였다.

이번엔 폐광에서 나는 빛이 아니었다.

시야 한쪽 구석에서 유난히 반짝이는 붉은 점.

'저건....'

회귀 전에도 방송 경험이 없는 시문이었으나.

저것이 채팅창의 알림이라는 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맞아, 나 방송을 켜 뒀었지.'

스트리머 돈킹을 처리한 이후.

혹시나 미션 클리어가 될까 싶어, 채팅창을 통해 천마의 반응을 슬쩍 확인했던 시문이었다.

그 과정에서 세 성좌에게 매니저 권한을 쥐여 준 건 덤이었고.

이유는 별거 아니었다.

'왕들의 픽 조건은 유지해야지.'

고작 매니저 권한으로 성좌의 마음을 흔들 수나 있겠냐마는.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단 뭐라도 하는 게 낫지 않는가?

해서 세 성좌 모두에게 권한을 쥐여 준 것이었는데.

-ㅅㅂ! 보내려면 보내 봐라! 이 성좌 코스프레충들아!

-내 말이! 강퇴로 우리 털어 봐야 어차피 욕먹는 건 너희들이야!

-내가 진짜 별의별 방송은 다 봤지만, 성좌 코스프레하는 또라이들은 처음 본다!

-쳐내 봐! 해 보라고!

시문의 채팅창은 어느새 지옥으로 변해 있었다.

"이, 이게 뭐야?"

생전 처음 보는 채팅창의 열기에 시문의 입이 쩍 벌어진다.

하나 그가 놀랄 틈도 없이.

-성좌 검은 염소: 오냐, 이 불경한 개잡것들아! 싹 다 쳐 내 주마!

[매니저 '성좌 검은 염소'가 dlrjfcuqhrpTdj 님을 강퇴하였습니다.]

[매니저 '성좌 검은 염소'가 tjfakdkslwl 님을 강퇴하였습니다.]

[매니저 '성좌 검은 염소'가....]

-성좌 제우스: 미친년답게 시원하군. 이런 부분은 마음에 들어.

이 지옥에 어울리는 학살극이 펼쳐지고 있었다.

제22화

22화. 수소문 (1)

"후...."

깊은 한숨.

그 주인인 시문은 이마를 짚으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식혔다.

성좌 3명이었던 시청자는 시문도 모르는 사이에 3천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심지어 검은 염소의 학살 이전에는 4천 명대를 달리고 있었단다.

"그러니까."

시문은 기가 차는 현 상황에 잠시 송출 보이스를 끄고 말했다.

"저랑 붙었던 돈킹이라는 사람이 와서 먼저 무례를 범했고, 후연룡이란 사람이 그에 동조했다는 거죠?"

[성좌 제우스가 근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래도 무시하려 했는데, 뒤에 돈킹의 시청자들이 몰려오면서 비난의 수위가 높아졌고?"

[성좌 검은 염소가 입술을 삐쭉 내밀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성좌 검은 염소가 업적 포인트 바치면 '돈킹'을 조져 버리겠다고 이를 갑니다.]

검은 염소의 의견에 시문은 즉시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됩니다."

설마 성좌가 매니저로 있으리라고 생각 못 한 것도 있겠지만.

정규 아레나가 시작되기 전에 성좌가 개입하면 갤럭시 아레나 측에서 가만있을 리가 없었다.

심지어 개입의 원동력이 자신이 건넨 업적 포인트라면 더더욱.

'그렇다고 검은 염소의 불만을 마냥 무시하면 왕들의 픽 스탯이 날아가겠지.'

올 스탯 +3이 +2가 되어 버릴지도 모르는 노릇.

힘민체에 연성력까지 무려 4레벨 치의 스탯이었기에.

"자자, 검은 염소님. 우리 조금만 숨을 돌려 봐요."

시문은 부드러운 어조로 검은 염소를 달랬다.

"어떤 상황인지 잘 알았으니까, 매니저 권한이랑 채팅은 다시 열게요. 앞으론 그런 채팅이 더 이어져도,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성좌 검은 염소가 자신은 인간들 따위에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럼요, 그럼요. 그래도 제게 신경 써 주시니 늘 감사한걸요."

연신 부드럽게 웃으며 달래는 시문.

다행히 효과가 있었는지.

[성좌 검은 염소가 당신의 말에 슬쩍 볼이 붉어집니다.]

[성좌 검은 염소가 수줍게 고개를 슬쩍 끄덕입니다.]

[성좌 제우스와 성좌 천마가 헛웃음을 흘립니다.]

'후, 다행히 넘겼군.'

이미 고말숙이라는 괄괄한 여성을 경험해 본 덕일까.

이런 타입을 다루는 데 나름 익숙한 시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방금 짜낸 대본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전 아직 여러분의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성좌의 관심을 받는 이는 이맘때도.

그리고 전생에서도 엄청난 가치를 지닌다.

물론 그 마지막은 좋지 않게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게 가질 수 없다면 부숴 버리겠다! 가 있지.'

성좌의 선택을 받은 플레이어 하나로 국력까지 평가하는 세상이다.

당연히 성좌의 피후원자들을 향한 온갖 협잡부터 회유, 암살까지 펼쳐졌고.

이제 랭크를 배정받는 시점에서 그것들을 버텨 내는 것은 명백한 무리다.

해서.

"그래서 말인데요. 대층 이런 식으로...."

다른 건 몰라도 성좌 건에 관해서는 무조건 숨겨야 했다.

다행히도.

[성좌들이 당신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인간사의 복잡한 관계를 잘 알고 있는지.

세 성좌는 시문이 짜 놓은 시나리오에 모두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럼 세 분 다 부탁드릴게요. 방송 화면 다시 켜겠습니다."

한숨 돌린 시문은 아까 박탈했던 성좌들의 매니저 자격과 멈추었던 방송 화면을 다시 켰다.

그러자.

-뭐야. 화면 어디 갔어?

-지금 매니저들 참교육하고 있나 본대?

-잉? 이거 방장이 매니저들한테 시킨 거 아니었음?

-그럼 그런 심각한 얼굴로 화면을 껐겠냐? 매니저들이 독단으로 저지른 짓이겠지.

-역시 어딜 가나 빠들이 문젠가.

-엇! 켜졌다!

저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는 채팅이 우르르 올라왔다.

"시청자 여러분, 잠시 착오가 있었던 거 같습니다."

시문은 채팅창 슬로우 모드를 켜고.

"매니저분들이 노잼인 절 위해서 나름 준비해 주신 거였는데... 이리 꼬였네요. 사과드립니다."

가상의 시나리오를 써 가며 깔끔하게 사과로 마무리했다.

그에.

-아아, 역대급 어그로긴 했어. 나름 재밌기도 했고.

-재미는 무슨. 성좌로 어그로 끄는 게 재밌음?

-나도 재밌는데? 신입에 심해 방송러면 이런 어그로도 있어야지.

-떡밥 하난 지렸음. 쌈빡했다, 매니저들아.

채팅창의 여론은 빠르게 호감으로 변했다.

물론 소수지만, 부정적인 여론도 분명히 있었다.

-ㅈㄹ! 이런 또라이 방송이 어디 있음?

-어그로로 흥해 봐야 잠시뿐이지. 뭐 얼마나 대단하다고 ㅋㅋ.

-이런 어그로 방송 특) 심해에서 못 벗어남. ㄹㅇ임.

하나.

-심해 못 벗어난다는 건 또 무슨 개소리냐? 얘가 돈킹 개바른 거 모름?

-이거보다 더한 새끼들도 천진데. 또 머법관님들 엄중해지시죠?

-ㄹㅇㅋㅋ. 다른 방송 보면 범죄자 새끼들 천진데. 꼴랑 어그로 좀 돌렸다고 불났누 ㅋㅋ.

-찐들이라 그럼. 농담을 농담으로 못 받음.

-매니저들아, 난 개꿀잼이었음!

-캬! 이걸 매니저라고 안고 가네. 인성 합격!

-하앙~! 염소 눈나, 나도 쳐 내줭!

보통 논란이 일어나면 과감하게 당사자들을 쳐 내며, 선을 그어 버리는 타 플레이어들과 달리.

자신의 사람을 끌고 가는 시문의 모습에 크게 감명받았는지.

부정적인 여론은 순식간에 압살당했다.

이어.

-이런 어그로라도 난 기쁘다. 버스충 말고 진짜 심해의 실력자를 발견해서.

-ㅇㅈ. 앞으로 시문 님 방송 보면서 많이 배우겠슴돠!

-나 심해 현지인인데 이번 아레나 보고 크게 감명받음.

[나는야골드 님이 AP 100을 후원하셨습니다.]

=형, 앞으로 방송 자주 켜! 나도 충성충성함!

처음 받아 보는 AP 후원까지.

[업적 '첫 후원'을 달성하셨습니다.]

[업적 포인트 100점을 획득합니다.]

잇따라 업적 알림까지 눈앞으로 떠오르자.

"나는야골드 님, 후원 감사드립니다."

시문은 부드럽게 웃으며 깊은 감사를 표했다.

물론 감사하는 마음은 진심이었다.

'벌써부터 방송 후원이라니!'

성좌의 후원도 분명 대단한 것이나.

장기적으로 볼 때, 일반 시청자들의 후원과 관심이 절대적이었다.

전생의 김시혁과 고말숙의 업적 포인트의 주 벌이 수단이 바로 방송 아니던가?

그 증거로.

[업적 '시청자 5,000명 돌파하기'를 달성하셨습니다.]

[업적 포인트 500점을 획득합니다.]

어느새 시청자가 5천이 훌쩍 넘었다는 업적창이 떠올랐다.

'좋아. 앞으로 방송만 커지면 업적 포인트는 주기적으로 벌겠어.'

일종의 월급이랄까?

앞으로 펼쳐질 안정적인 업적 포인트 벌이에 시문은 절로 흐뭇해졌다.

-엄훠. 저 미소 뭐야?

-근데 이 형. 인제 보니 존잘러였네?

-그러게. 살살 웃는데 나도 실실 쪼개고 있음.

-기만자쉑이지만 난 가능.

-앙! 나도 쌉가능!

시문의 미소에 곧장 반응하는 채팅창.

더불어.

[성좌 검은 염소가 다수의 채팅에 불편함을 표합니다.]

잠잠해진 성좌 검은 염소가 다시 난입할 기세를 보이자.

"이런! 아직 아레나가 끝나지 않았으니, 전 경기에 집중하겠습니다."

시문은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제가 아직 방송 초보라 채팅창은 꺼 둘게요. 다들 매너 채팅 부탁드려요."

자연스레 채팅창까지 꺼 버린 시문은.

따악.

손가락을 튕겨 [문아울의 신체조직]을 눈에 연성하곤 남은 생존자를 찾아 신속히 움직였다.

* * *

마지막 남은 플레이어를 처리하고 집으로 돌아오자.

[아레나 '식어 버린 폐광'을 성공적으로 클리어하셨습니다.]

[최후의 1인에 25킬이라는 압도적인 성적을 거두셨습니다.]

[활약에 따라 클리어 보상이 증가합니다.]

[성좌 천마의 미션을 완수하였습니다.]

[업적 포인트 500점을 획득합니다.]

반가운 시스템창이 시문을 반겼다.

[귀속된 특성 '현자의 돌'이 일정량의 경험치를 분배받습니다.]

[레벨이 5 올랐습니다.]

[현자의 돌 레벨이 3 상승했습니다.]

[클리어 보상으로 '힘을 잃은 광산핵'을 획득합니다.]

'히야! 보상 한번 어마어마하군.'

고작 배치고사인데도 5레벨업이라니?

거기에다 현자의 돌이 3레벨이나 올랐다는 걸 고려해 보면, 대략 8레벨 치의 경험치를 얻은 것이다.

더불어 천마의 미션 성공과 귀한 재료템까지.

하지만 시문은 당장 축배를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잉? 화면 다시 꺼졌네.

-아레나가 끝난 거지 뭐. 아까 그 애가 마지막이었는 듯?

-난 폐광을 이렇게 질주하는 플레이어는 처음 봤음. 앞이 보이나?

-ㄹㅇ 폐광런이라 불러야 함. 개지림.

방송은 아직 켜져 있는 탓이다.

플레이어의 사생활을 위해서일까.

아레니아의 방송 화면은 지구로 귀환하는 즉시 화면 송출은 중단되기에.

-근데 이 형, 대기화면 커미션 같은 거 안 했나 보네.

-그러게. 짤도 없나 봄.

다행히도 자취방의 위치가 알려지는 일은 없었다.

줄줄이 이어지는 채팅을 본 시문은 아차 했다.

'그러고 보니 방송 대기화면에 들어갈 만한 게 없구나.'

화면이 송출되지 않을 때 보여 주는 또 다른 화면.

방송은 처음인 만큼, 이런 부분들은 아직 세팅이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시청자들에겐 검은 배경에 시문만 동동 떠 있는 상황이었다.

"제가 방송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요. 대기화면은 조만간에 준비해서 설정해 두겠습니다."

-시문 님. 일러 같은 거 말구, 걍 셀카만 올리셔도 될 거 같아요.

-맞아. 형 셀카 고자라도 그냥 올려. 그거대로 재밌을 듯.

-혹시라도 구하기 힘드시면 메일 주세영. 부족하지만 열심히 만들어 드릴게용!

-앙! 쌉가능!

아레나가 끝났어도 5천 명이라는 숫자는 줄어들지 않아서일까.

채팅창은 쉬지 않고 올라왔다.

그 모습에 시문은 뭔가 가슴이 뭉클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아 본 건 처음인데....'

중간중간 뾰족한 채팅들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호의가 가득한 채팅들.

마력불능에 평생을 1레벨로 살았던 시문은 결코 누릴 수 없던 상황이었다.

'그땐 내가 저런 시청자들 중 하나였지.'

그래서 더 감명을 받은 건지도 모른다.

그 진심을 그대로 담아.

"다들 부족한 방송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더 나은 모습으로 돌아올게요!"

-오빠! 그렇게 웃으면서 방종하면 오또케!

-기만자 쉑!! 얼굴 모자이크해라!

-앙! 쌉가능!

싱긋 웃은 시문은 그대로 방송을 종료했다.

고작 채팅창 하나 사라졌을 뿐인데.

"...."

일순 고요함이 찾아왔다.

그에 시문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거, 자칫 중독되겠는데."

-너무 중독되지는 마. 오빠는 내 거니까.

채팅창만 보던 것이 불만이었던 것일까.

새초롬한 현자의 돌의 목소리에.

"녀석."

시문은 녀석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이내.

'참. 시스템창을 마저 확인해야지.'

한쪽으로 치워 버린 시스템창을 다시 띄웠다.

[앞선 공지대로 플레이어 김시문의 랭크 배치 구간이 종료됩니다.]

[MMR 기준으론 플래티넘 랭크가 적합. 하지만 레벨과 스탯을 고려해 추가 조정이 이루어집니다.]

[조정 중....]

'다행히 플래티넘 직행은 아니네.'

아무리 압도적인 성적을 매 판마다 기록했다지만 고작 3판.

플래티넘 랭크의 평균 레벨을 따져 보면.

지금 이 상태로 플래티넘 랭크에 배정되는 것은 상식적으로 맞지 않았다.

다행히 갤럭시 아레나 측도 그걸 알고 있는지.

조정 중이라는 문구는 꽤 오랜 시간 지속되었다.

그렇게 10분쯤 지났을까?

[조정 완료.]

[플레이어 김시문에게 두 가지 선택 항목이 주어집니다.]

[1. 골드 랭크에 배정. 이후 플래티넘 랭크 승급전까지 10% 추가 경험치와 보상을 적용합니다.]

[2. 실버 랭크에 배정. 이후 골드 랭크 승급전까지 30% 감소한 경험치와 보상을 적용합니다.]

[선택해 주십시오. (1 / 2)]

예상치 못한 조건에 시문은 고개를 갸웃했다.

"선택 항목이라고?"

애당초 '두 가지 선택 항목'이라는 것 자체가 무의미했다.

누가 봐도 1번을 택하고.

최대한 빨리 플래티넘 랭크에 오르는 것이 현명했으니까.

하지만.

'왜 굳이 항목을 두 가지로 나눈 걸까?'

이미 전생을 겪어 본 시문은 이 시스템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갤럭시 아레나 측은 내가 최대한 빨리 플래티넘에 오르길 바라고 있어.'

1번의 '10% 추가 경험치와 보상'이라는 조건을 보면 분명했다.

한데.

'왜 굳이 2번 같은 걸 만든 거지?'

누가 봐도 페널티뿐인 선택 아니던가?

시문이 아는 시스템은 이런 비효율적인 짓을 하지 않는다.

지난 아레나들이 그 증거다.

매칭되는 이들의 인성이나 고의 트롤 같은 건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MMR이라는 객관적인 자료만 가지고 매칭하지 않는가?

그런 시스템이라면 이렇게 선택 항목을 나눌 필요 없이.

'딱 1번에 해당하는 조건을 던져 주면 그뿐인데 말이지.'

심하면 지금 12레벨인 이 상태로 플래티넘 랭크에 던져 버릴 수도 있었다.

그러고 시스템은.

축하합니다~.

플레이어 최초로 12레벨에 플래티넘 랭크가 된 업적을 달성하셨습니다~.

'라고 하겠지.'

정말 그러고도 남는 것이 시스템이었다.

한데 왜 굳이 2번 항목을 만들어 둔 것이란 말인가?

시문은 2번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일단 2번을 선택한다 해도 내게 엄청난 손해는 아니야.'

30% 감소된 경험치와 보상이라 해도.

어차피 아이템에 큰 구애를 받지 않는 시문의 특성상, 보상에 목을 맬 필요는 없었다.

물론 경험치를 공유하는 현자의 돌 덕분에 경험치 부분이 제법 아프게 느껴질 수 있으나.

'그마저도 지금처럼 아레나 성적을 잘 거두면 그뿐이지.'

30% 감소해 봐야.

겨우 남들이 받는 보상 수준과 비슷해질 뿐.

지금과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결국 내겐 페널티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그걸 이 망할 시스템이 모를 리 없단 말이지.

그럼에도 왜 굳이 이런 선택 항목을 내놓았단 말인가.

그렇게 고민하던 시문의 귓가로.

-오빠, 뭘 그렇게 멀뚱거리고 있어? 그거 빨리 확인해야지!

현자의 돌의 보채는 목소리가 들려왔고.

"아!"

그에 시문의 머릿속엔 한 가지 가능성이 스쳤다.

'만약 시스템이 날 실버에 둘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는 거라면?'

그 칼 같은 시스템이 이번 아레나를 시작할 때와 달리.

어쩔 수 없이 자신을 실버에 배정해야 하는 '이유'가 생긴 것이라면?

"설마?"

지금 상황에서 예상 가는 변수는 단 하나뿐이었다.

"인벤토리!"

시문은 황급히 인벤토리에 열었다.

그 손에 딸려 나온 것은 은광석이라기엔 지나치게 밝은 광석.

폐광이 아닌 외부이기 때문일까?

은광석이 품고 있는 이채는 범상치 않아 보였다.

당연했다.

이 광물은 다름 아닌.

[미스릴 광석]

등급 : S

가벼움에 비해 강도는 강철을 뛰어넘는 금속.

마력 전도율이 높다.

무려 S급의 재료 아이템인 미스릴이었으니까.

미스릴은 생산계만이 아니라 마법계들의 기술에도 간혹 쓰일 정도로 귀한 광물이다.

당연히 연금술사에게도 더없이 귀중한 재료였지만.

-어머! 순도도 꽤 높네? 이 정도면 어지간한 곳엔 다....

"현자의 돌, 이거 감정 좀 하자."

시문은 흔들림이 없었다.

-웅? 이미 정보창이 다 떠 있는데 굳이 힘 뺄 필요가 있어?

"확인할 게 있어서 그래."

-우웅, 알았어. 근데 함유량이 적긴 해도 꼴에 미스릴 광석이라 연성력은 꽤 먹을 거야.

"괜찮아. 어서 해 봐."

미스릴은 연금술과도 굉장히 연관이 깊은 물질.

덕분에 미스릴의 감정이 가능한 현자의 돌은 곧장 감정을 시작했고.

우웅.

연성력이 쭉 빠져나가는 느낌과 함께 미스릴 광석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이내.

[도리아의 미스릴 광석]

귀속 여부 : 김시문

등급 : X

한때 드워프들의 성지였던 도리아 산맥의 미스릴 광석.

-아레나 매칭 때 사용 시 '열띤 광산의 악몽'으로 입장합니다.

-제한 인원 1인.

달라진 미스릴 광석의 정보창을 보며.

"역시...."

시문은 조심스레 거머쥔, 달라진 미스릴 광석을 내려다봤다.

"이거 때문이었구나."

제23화

23화. 수소문 (2)

현자의 돌도 달라진 미스릴 광석의 정보를 알아본 것일까.

-오, 오빠. 이게 입장 아이템인 건 어떻게 안 거야?

녀석의 목소리는 희미하게 떨려 왔다.

그럴 수밖에.

[도리아의 미스릴 광석]

귀속 여부 : 김시문

등급 : X

한때 드워프들의 성지였던 도리아 산맥의 미스릴 광석.

-아레나 매칭 때 사용 시, '열띤 광산의 악몽'으로 입장합니다.

-제한 인원 1인.

단순 미스릴 광석인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나도 처음엔 몰랐어."

설마 특수 아레나의 입장 아이템이었는지 누가 알았겠는가?

'그냥 미스릴만 해도 대박인데, 입장 아이템이라니. 아주 초대박을 쳤군.'

입장 아이템.

갤럭시 아레나가 정해 놓은 매칭 이외의 특수 아레나로 입장하게 해 주는 아이템.

당연히 그 클리어 보상은 일반 아레나와는 차원이 달랐다.

시문은 눈앞에 둥실 떠올라 있는 2개의 선택 항목을 바라봤다.

'이래서 2번을 만든 거구나.'

만약 시스템이 2번을 넣어 두지 않았다면 의심조차 하지 않았겠지만.

이미 전생의 경험이 있는 시문에게 딱 걸려든 것이다.

'거기에다....'

시문은 다시금 [도리아의 미스릴 광석]을 바라봤다.

'X등급이라니. 이게 이 당시에도 등장하는 줄 몰랐네.'

X등급.

세상은 흔히 SSS까지가 최고의 등급으로 알고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성좌들이 내려 주는 신화급 무구가 아니고서야.

당장 현존하는 최고의 등급은 SSS니까.

하지만 전생의 기준으로, 앞으로 대략 2, 3년 후면 X등급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X등급과 SSS급의 차이는 단 하나.

'X등급은 일종의 고유 등급. 즉, 딱 하나뿐인 아이템이라는 증거지.'

고유 스탯과 똑같이.

X등급이 붙은 아이템은 말 그대로 고유, 딱 하나뿐이었다.

그런 등급이 입장 아이템에 붙어 있다는 것은.

'입장한 특수 아레나의 난도가 상당할 거라는 말이겠지.'

하지만 그리 크게 문제될 부분은 아니었다.

배치고사 구간에서 드롭된 이상, 고랭크대의 난이도는 아닐 것이고.

'지금 내 수준도 골드 랭크 이상이니까.'

이미 시문의 수준은 동레벨의 플레이어보다 한 단계 이상은 앞선다.

거기에다 배치고사도 끝났겠다, 이제 최대한 아레나를 돌려 레벨업을 하면 어려울 건 없을 터.

문제는.

'입장이 불가능해지는 조건인데....'

정보창에 나타나진 않았으나 대충 감이 잡혔다.

시스템이 굳이 2번에 '실버 랭크 배정'이라는 조건을 달아 놓은 것을 고려해 보면.

이 [도리아의 미스릴 광석]은 실버 랭크를 넘어가는 순간, 사용이 불가해지겠지.

시문은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단순 무력만을 필요로 하는 아레나라면, 막말로 아스트라페를 다발로 쏟아 내면 돼.'

신화급 무구의 난사를 이 구간대에서 누가 막아 내겠는가?

업적 포인트의 낭비는 꽤 있겠으나.

X등급의 입장 아이템이 주는 보상을 계산해 보면 아까울 것도 없었다.

'하지만 특수 아레나가 그렇게 단순할 리는 없겠지.'

전생의 기억들을 돌이켜 보면.

특수 아레나는 아레나 종목으로 최소 두 가지 이상이 섞여 있을 터였다.

'일단 최대한 스펙을 키우고, 골드로 승급하기 전에 입장하는 게 베스트겠지만....'

반대로 입장 아이템의 보상을 진즉부터 얻어.

보다 나아진 스펙으로 실버 랭크를 빠르게 밀어 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더불어.

'방송적인 측면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래.'

무릇 특수 아레나 방송이란 없어서 못 보는 콘텐츠다.

특히나 심해 구간에서 특수 아레나를 진행한다면 방송적으로도 여러 이점이 있을 터.

그렇게 한동안 고심하던 시문은.

"후. 좋아."

한결 차분해진 눈으로 [도리아의 미스릴 광석]을 인벤토리에 갈무리했다.

그러곤 고개를 들어.

눈앞에 떠 있는 시스템 창에서 2번을 선택했다.

[2번을 선택하셨습니다.]

[플레이어 김시문의 랭크가 실버로 배정됩니다.]

[측정 MMR관계상, 페널티로 경험치와 보상이 30% 감소합니다. 해당 페널티는 '실버' 랭크에서만 적용됩니다.]

[업적 '랭크 배정'을 완료하였습니다.]

[업적 포인트 500점을 획득합니다.]

* * *

허름한 사무실과 어울리지 않는 최신형 TV.

그 속에는 유명 MC 최강엽와 함께 해설 전문 플레이어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하다니, 정말 대단하네요?

-그렇죠. 올해 졸업 예정인 아카데미의 기수들이 하나같이 어마어마하잖아요?

-맞습니다. 그중 2명은 10년 넘게 아레나를 지배하던 플레이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랭커가 되지 않았습니까?

-우리나라의 큰 복이지요. 다음 국가대항전이 무척이나 기대됩니다.

-맞습니다. 다들 한국의 국가 랭킹이 달라지리라 전망하고 있지요. 다가오는 국대선발전에서 모든 것이 증명되겠죠!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시청률을 자랑하는 TV 프로그램 '국가대표 아레나'.

통칭 '국아'는 갤럭시 아레나의 등장 이후.

지역을 불문하고 1번 채널을 차지하며, 국민 프로그램으로 등극했다.

-얼마 전 레이드 보스를 혼자서 토벌해 버렸던 김시혁 군의 방송은 정말 압도적이었죠.

-그렇습니다! 갤튜브의 조회 수만 벌써 5억이 넘었다죠.

-5억이요? 방송이 며칠 전일 텐데 벌써 5억이 넘었습니까?

-김시혁 군은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랭커니까요! 다행히도 전 이 장면을 생방으로 봤었습니다.

-으아! 정말 부럽습니다! 제가 스케줄만 없었어도....

이어지는 MC 최강엽의 리액션.

그걸 보던 험상궂은 남성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야야, 국아에 또 네 이야기 나온다."

"선배, 굳이 안 집어 주셔도 다 듣고 있어요."

청량하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외모.

그와 똑 닮은 목소리가 힘없이 들려왔다.

"새끼, 이젠 얼굴색 하나 안 변하네."

그에 험상궂은 남성이 익살맞게 웃자.

"하아."

청량한 외모의 주인은 한숨을 쉬었다.

"선배, 제 몇 안 되는 휴식 시간이에요. 방해하지 말아 주세요."

"내가 할 말이다, 인마."

험상궂은 남성은 들고 있던 술잔을 테이블 위로 놓으며.

싸구려 소파 위를 제 침대인 양 척하니 누워 있는 청량한 미청년을 노려봤다.

"왜 내 사무실에서 네 휴식 시간을 찾냐?"

"저 선배의 고객입니다."

"어이쿠, 우리 김시혁이 갑질도 할 줄 아네. 야, 인마! 고객이면 다냐? 앙?"

"헤헤, 좀 봐줘요. 저 여기 아니면 쉴 곳도 없단 말이에요."

다 큰 남자라지만.

저런 맑은 얼굴로 헤실거리면 같은 남자라도 마음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단순히 외모 때문만이 아니었다.

"하긴... 너도 참 X랄 맞은 삶이긴 하지."

아카데미의 선배로서.

또 친한 형으로서 김시혁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잘 알고 있기에 일어나는 현상.

험상궂은 남자, 박진욱은 헤실거리는 김시혁의 앞으로 커피 한 잔을 내밀었다.

그것을 슥 보던 김시혁은 말했다.

"이왕 주실 거면 선배가 마시는 거랑 같은 거로 주지 그래요?"

"내가 왜?"

"저 아까까지만 해도 눈 감고 있었거든요? 커피가 말이 돼요?"

"그래서 주는 거다, 새끼야. 빨리 잠 깨서 꺼지라고."

한쪽 입꼬리를 비죽 끌어 올리는 박진욱.

선이 굵은 얼굴형에 더해지자 위협이 넘치는 느낌이었지만.

"힛! 그럼 안 마시고 더 자면 되죠."

김시혁은 특유의 청량한 미소를 지을 따름이었다.

애당초 외적인 부분을 떠나서.

플레이어로서의 차이만 따져 봐도 박진욱은 김시혁에게 위협이 될 수 없었다.

그걸 본인도 아는 것인지.

"이 새끼가? 요즘 잘 나간다고 선배가 우습지?"

박진욱은 험상궂은 외모에 어울리지 않게 삐진 애처럼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네. 선배랑 있으면 항상 웃음이 나와요."

"이런 X!"

싱글거리는 김시혁의 모습에 주먹을 꽉 움켜쥐는 박진욱.

'아오 X발! 진짜 눈 딱 감고 한 대 갈겨?'

주먹을 타고 어깨 근육까지 힘이 들어갔으나, 이내 박진욱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쯧, 됐다. 날린다고 피할 새끼도 아니고.'

오히려 처맞고 깽값이니 뭐니 하면서 더 눌어붙을 가능성이 높았다.

상대는 나름 다이아 랭크인 자신의 주먹을 그저 '맞아 주는 척'할 수 있는 괴물이니까.

그렇기에 박진욱은 분노를 표출하는 대신.

이 뺀질한 괴물 후배 놈을 쫓아낼 효율적인 무기를 꺼내기로 했다.

"옛다."

담배 하나를 빼물며, 김시혁의 앞으로 무언가를 툭 던지는 박진욱.

"이게 뭐예요?"

"뭐긴, 네가 전에 부탁한 거지."

어디 사무실에서나 평범하게 볼 수 있는 서류 봉투.

하지만 그걸 본 김시혁의 눈빛은 그렇지 않았다.

"이걸 벌써 알아봤어요?"

"내가 말이다, 웬 뺀질한 랭커 새끼한테 개 취급당하고 있어도 이쪽으론 나름 날리는 놈이거든?"

후욱.

뿌연 담배 연기가 허름한 사무실의 천장으로 퍼져 나간다.

굵직한 외모에 더해져, 흡사 느와르 영화에 나오는 한 장면과도 같았으나.

"에이,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제가 언제 밤사냥꾼 박진욱을 개 취급했다고."

"그럼 인마! 부탁 말고 의뢰를 해! 의뢰를!"

이 뺀질이 후배 놈에겐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새끼가 돈도 많으면서... 하여간에 있는 것들이 더하다니까."

"그렇게 말하면 저 섭섭해요? 저번에 의뢰비 전부 AP로 정산해 드렸잖아요."

"몰라서 묻냐?"

재떨이에 담배를 짓이기며 얼룩진 창문 밖을 바라보는 박진욱.

"난 AP보다 현찰을 선호한다. AP가 좋았으면 아레나 계속 뛰었겠지, 이 짓거리 안 하고."

아직 1월이라 그런 걸까.

아니면 호흡이 조금 거칠어져서일까.

어느새 박진욱의 앞의 창문엔 하얀 김이 서렸다.

"...."

그를 가만히 지켜보던 김시혁이 말했다.

"선배.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제 조건은 아직 유효해요."

"아서라. 나 같은 새끼랑 함께 해봐야, 네 이미지만 조진다."

"선배."

"그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인마."

그 말에 맑았던 김시혁의 눈빛이 살짝 가라앉았다.

"...말이 나오는 사람이 있으면 치워 버리면 되잖아요."

피식.

"뭐, 대한민국 협회를 쓸어버리기라도 하게?"

김시혁의 말에 실소를 흘리는 박진욱.

"새끼, 생긴 거랑 다르게 성격 하나는 여전...."

하나 그 실소도 찰나일 뿐.

박진욱의 얼굴은 순식간에 굳어 갔다.

그의 시선에 비친 청량한 미청년.

김시혁의 눈빛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것이다.

"야, 너 설마...."

"뭘 그렇게 놀라요? 원래 제 자리였던 걸 되찾으려는 것뿐인데."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를 으쓱하는 김시혁.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니, 옳은 말이었다.

그걸 잘 알았기에.

"...."

박진욱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락.

어느새 건네받은 서류를 살피는 김시혁.

아까보다는 나아진 얼굴이었지만, 박진욱은 알고 있었다.

저렇게 그린 듯 자연스러운 미소를 걸치고 있을 때야말로.

김시혁이 가장 위험한 순간이라는 걸.

그걸 증명하듯.

"선배, 이거밖에 못 알아냈어요?"

"그래."

"하. 그래도 생각지 못한 월척이 잡히긴 했네요."

박진욱의 손에는 습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단순한 기분 탓이 아니다.

다이아 랭크 최상위권.

소위 말하는 '랭커'에 접어든 존재는 역시 다른 것일까.

'이 자식... 진짜 협회를 상대로 해 볼 생각이야.'

단순한 기세만으로도 다이아 플레이어인 박진욱의 손에 땀을 쥐게 만들었다.

아마 일반인이었다면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으리라.

"뒤에 삼촌이 있다는 건 알았는데... 성삼이라?"

헛기침을 한 박진욱은 오러를 운용해 긴장감을 털어 버리며 말을 이었다.

"커흠! 성삼답게 워낙 뒤처리가 깔끔해서 더 이상 조사하긴 힘들더라."

"무능하네요. 그렇게 단서를 줬는데 성삼이 관련되어 있다, 이 한 줄밖에 안 나와요?"

야, 이 개X끼야! 네가 해 봐!

라는 말 대신.

"나 정도 되니까 그거라도 알아낸 거다. 말했잖냐, 뒤처리가 깔끔하다고."

라고 간신히 답한 박진욱은 잔에 있는 테킬라를 원샷했다.

"그래도 성삼 관련이니까, 유정이한테 물어보면 뭐라도 나오지 않겠냐?"

"걘 아무것도 몰라요."

한겨울의 샘물처럼.

맑지만 차갑게 흘러나오는 김시혁의 대답.

"예나 지금이나."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만, 유정이 성격상 뭐라도 뒷조사를 하고 있을 거 같은데?"

"그렇겠죠. 그런데도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걸 보면."

정보가 담긴 서류를 건들건들 흔드는 김시혁.

"그 사건에 성삼이 관련됐다는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다는 뜻이죠."

그의 얼굴은 미묘한 짜증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해서 이번 '아레니아의 이런 일에'의 첫 소식은... 와! 이거 사실인가요?

-저도 눈으로 보고 믿기지 않네요. 성좌 사칭 방송이라뇨?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방송 매니저들이 3명의 성좌를 사칭했다고 하는데요. 자료화면 함께 보시죠.

프로그램 국아가 알리는 성좌 사칭 방송이라는 어이없는 소식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김시혁은 서류를 무심하게 테이블로 던졌고.

박진욱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거참. 너희 언제부터 그렇게 사이가 안 좋았냐?"

"글쎄요. 원래 이랬던 거 같은데요?"

그때.

스윽.

김시혁의 얼굴이 굳으며, 뒤편으로 돌아갔다.

"형, 오늘 미팅 약속 있어요?"

"뭐래. 네가 하도 노출을 꺼려서 네가 오는 날은 항상 휴무일로... 음?"

고개를 젓던 박진욱의 얼굴 역시 대번에 굳는다.

그의 감각에 무언가 느껴진 것이다.

"이거 아무래도 천하의 밤사냥꾼께서 뒤를 밟혔나 본데요?"

작은 비소와 함께 문 옆으로 몸을 밀착시키는 김시혁.

고작 벽에 기대었을 뿐이거늘.

'이 자식, 저번보다 더 기척을 잘 숨기잖아?'

시각을 제외하곤 김시혁의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특히나 박진욱 역시 다이아 랭크의 암살계임을 고려해 보면 정말 소름이 돋는 수준의 은신이었다.

'이게 랭커급 플레이어인가....'

격이 다르다.

정말 이만큼 현 상황에 알맞은 말은 없으리라.

끼익.

"계십니까?"

어느새 열리는 문.

"여기가 박진욱 씨 사무실 맞죠?"

물음과 함께 들어오는 남성에 박진욱은 특유의 미소를 걸쳤다.

"죄송합니다만, 고객님. 저희 오늘 휴무일입니다."

"아! 그렇군요. 쉬는 날을 생각 못 했네요."

정말 몰랐다는 듯.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적이는 남성.

그에 박진욱의 눈초리는 한결 더 서늘해졌다.

'표정 관리가 수준급이군. 누구지? 성삼 쪽 추적자? 아니면 암살자?'

감히 밤사냥꾼이라 불리는 자신의 뒤를 밟고도 이렇게 태연할 수 있다니.

정체 모를 남성을 향한 의심은 더욱 깊어졌고.

스릉.

테이블 밑으로 여유롭게 늘어뜨린 박진욱의 양손에는 어느새 날카로운 암기들이 잡혀 있었다.

"죄송한데 이왕 여기까지 온 거, 의뢰 하나만 받아 주시면 안 될까요?"

"의뢰?"

"예, 간단한 일입니다. 사람 1명을 찾고 있거든요."

사람을 찾는다?

보나마나 김시혁이 분명할 터.

'적이 확실하군. 일단 사지부터 끊어서....'

남성의 말에 박진욱의 의심은 확신으로 변했다.

그렇게 암기를 쥔 박진욱의 팔이 움직이려던 순간.

박진욱은 저도 모르게 얼어붙었다.

그럴 수밖에.

"이럴 수가...!"

언제나 특유의 청량한 미소와 여유만을 보이던 김시혁이.

저렇게 놀라는 건 난생처음 봤으니까.

하나 박진욱의 경악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혀, 형?"

"김시혁? 네가 여기에 왜 있냐?"

제24화

24화. 수소문 (3)

"드시죠."

"감사합니다."

고소하면서도 화사한 향.

냄새만 맡아도 고급스러운 커피였다. 시문은 그것을 한 모금 머금으며.

"그래, 의뢰 때문에 절 찾아오셨다는 말이죠?"

"그렇습니다."

이 고급스러운 커피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오히려 테킬라를 연상시키는 굵직한 사내, 박진욱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 하나를 찾고 있거든요."

"사람이라... 제대로 찾아오긴 하셨습니다. 저희가 그런 쪽으론 또 확실하거든요."

한쪽 입꼬리를 씨익 끌어 올리는 박진욱.

누가 봐도 암흑가를 누비는 조폭과도 같았으나.

시문은 박진욱의 말에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밤사냥꾼에게 사람 하나 찾는 건 문제도 아니겠지.'

밤사냥꾼 박진욱.

조폭을 연상시키는 거친 외모와 달리, 그는 암살계의 상당한 실력자였다.

그가 가진 SS급 특성인 '밤의 가호'는 암살 계열에 최적화된 특성이었으니까.

또한 여타 암살계들이 그렇듯, 암살만이 아니라 첩보나 정보 수집에도 유용했다.

해서 박진욱을 찾아온 것인데....

'이놈은 여기에 왜 있는 거야?'

시문은 죄지은 아이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손을 꼼지락거리는 건너편의 미청년을 바라봤다.

그 시선을 느낀 것일까.

고개를 숙이고 있던 김시혁의 머리는 더욱 내려갔다.

시문은 작게 한숨을 쉬곤 입을 열었다.

"야. 너 뭐 하냐?"

"으, 응?"

"뭐 하냐고, 인마. 누가 보면 내가 잡아먹으려는 줄 알겠다. 고개 좀 들어."

그도 그럴 것이.

"그...래도 돼?"

이 잘난 동생 놈이 무슨 죄인처럼 풀이 죽어 있지 않은가?

현재까지 알려진 김시혁의 이미지.

동시에 시문이 알고 있는 밝고 청량한 이미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사실은.

"새끼, 그럼 뭐 안 되겠냐?"

시문도 동생 녀석이 왜 이런 모습을 보이는지는 짐작하고 있었다.

'아마 10년 전 그 사건 때문이겠지.'

갤럭시 아고라에서 만난 유정이처럼.

자신에게 마력불능을 선사했던 그 사건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리라.

아이러니한 것은.

전생에 대한민국이 멸망하고 처음 시혁이 녀석을 만났을 때도.

녀석은 지금과 똑같은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다.

그랬기에.

"누가 보면 오해하겠다. 그만 고개 들어."

시문은 저렇게 풀 죽어 있는 동생 녀석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이런 반응은 유정이 하나로 충분하거든."

아고라에서 이유정을 만났을 때도 했던 말이지만.

그때로 돌아가도 자신은 똑같은 선택을 했을 테니까.

말이 효과가 있는 것일까?

"유정이?"

풀이 죽어 있던 시혁이의 눈이 처음으로 반짝였다.

"그래. 얼마 전에 아고라에서 만났다. 유정이가 말 안 하더냐?"

"어. 난 아무 말도 못 들었는데... 잠깐. 아고라를 형이 왜 가?"

"왜 가긴, 템 팔러 갔지 인마. 근데 무슨 취조 하냐?"

"그, 그런 게 아니라... 근데 유정이를 왜 만난 거야? 연락 안 하던 거 아니었어?"

"성삼 상점 들렀다가 우연치 않게 만났다."

"성삼?!"

반짝임을 넘어 번들거린다고 해야 하나?

어느새 목소리도 한 톤 높아진 김시혁은 다소 날카로워진 눈빛으로 물었다.

"형! 괜찮아? 무슨 일 없었어?"

"왜 갑자기 급발진이야? 사람 놀라게."

"미, 미안."

"미안할 거까지야. 그리고 딱히 일이라고 할 건...."

아! 하나 있긴 했다.

[홉고블린의 전투 도끼]을 처분하려다 사기꾼으로 몰릴 뻔했었지.

그것도 성삼의 상점에서 말이다.

하나 딱히 큰일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11년 후엔 흔한 아이템이라 회귀한 내가 생각 짧게 움직였어.'

라고 말할 순 없었기에.

"없었어."

시문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그렇구나. 알았어."

잠시 턱을 괴더니 고개를 끄덕이는 김시혁.

어딘가 묘하게 취조당하는 기분이었으나.

"그나저나 시혁이 너."

시문은 캐묻는 대신 다른 질문을 택했다.

"여기 박진욱 씨랑 아는 사이냐?"

이유는 간단했다.

'밤사냥꾼 박진욱이 시혁이와 동료가 되는 건 대한민국이 멸망하고 나서인데?'

전생의 기억으론 이 시기의 김시혁과 박진욱은 함께하는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응? 아! 어음... 그게...."

자연스럽게 걸려 있는 청량한 미소.

하나 그 위로 맑은 두 눈동자는 바쁘게 움직였다.

모로 봐도 의심스러운 모습이었으나.

"하하! 시혁이는 아카데미 선후배 사이기도 하지만, 제 주 고객 중 한 분이십니다."

옆에서 들려오는 굵직한 목소리에 시문은 의심을 거두었다.

"고객이요?"

"예. 아무래도 시혁이가 랭커다 보니, 이리저리 불편한 일들이 많지 않습니까?"

"아아!"

박진욱의 말에 시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랭커.

모든 플레이어가 바라는 꿈 같은 위치였으나.

그만큼 잃는 것도 많은 자리였다.

'사실상 연예인과 다를 바가 없지.'

그 탓에 개인 방송을 하지 않아도 타 플레이어로 인해 신상이 노출되어 버리기 일쑤다.

특히나 거대 세력에 의탁하지 않은 랭커들은 사생활부터 여러모로 불편한 것이 많았다.

'이맘때의 시혁이는 길드도 없었지.'

나중에야 개인 길드를 창설하는 시혁이 녀석에겐 많이 불편할 시기였다.

시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됩니다. 그나저나 두 분이 선후배 사이인 줄은 몰랐네요. 많이 친하시겠어요?"

"아뇨. 철천지원수 사이입니다."

"예?"

"랭커라는 입지 덕분에 어쩔 수 없이 제가 수발을 들어 주는 상태입니다. 노예처럼."

싱긋.

험악한 얼굴을 한껏 펴며 웃는 박진욱.

"하아... 선배."

그리고 이마를 턱 짚는 김시혁의 모습은 뭔가 사연이 있어 보였지만.

씨익.

"그것참, 힘들겠네요."

시문은 동생 녀석을 변호하는 대신, 박진욱과 같은 미소를 선택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이 녀석이 사람을 귀찮게 하는 구석이 있거든요."

"혀, 형?!"

"과연 형님 되는 분이라 그런지 잘 아시는군요."

"별말씀을. 그래도 막 모난 놈은 아닙니다. 좋게 봐주세요."

"크하하핫! 이거 모처럼 마음에 드는 의뢰인을 만났군요!"

뭐가 그리 좋은지 박장대소를 터뜨리며 묵직한 손을 건네는 박진욱.

그에 시문이 악수를 받자, 썩어 들어가는 김시혁의 얼굴을 한껏 음미한 박진욱이 말했다.

"그래, 사람을 찾으신다고요? 혹시 해외 쪽일까요?"

"아뇨. 국내에 있는 사람입니다."

"다행이군요. 국내면 해결률이 확 오르거든요."

자신의 테이블에서 패드를 가져온 박진욱은 펜을 들고 물었다.

"찾는 이의 인상착의나 정보가 있을까요? 최대한 자세할수록 좋습니다."

"이름은 고말숙, 부산에 거주 중이고 24살입니다."

"우리 망할 후배님과 동갑이군요. 보아하니 여성분 같은데... 아시는 사이신지?"

"예에...니오, 딱히 그렇지는 않습니다."

저도 모르게 '예'라고 답하려던 시문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알아봐야 회귀 전이지, 지금은 아니니까.'

다행히 자연스러웠는지.

"아는 사이가 아니라면 주소 정도만 알려 드리면 되겠군요."

박진욱은 별 물음 없이 말을 이어 갔다.

"예. 찾을 수 있을까요?"

"하하! 이 정도 정보로 못 찾으면 이쪽 일 접어야죠."

"어? 그럼 선배, 당장 은퇴하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시문이 오기 전 건넨 서류를 팔랑거리는 김시혁.

청량한 미소 위로는 방금의 복수를 하겠다는 의지가 그득한 눈빛이 반짝였으나.

"며칠 걸리긴 합니다만,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박진욱은 모처럼 망할 후배 놈의 말을 깔끔히 씹어 버렸다.

평소 같으면 자기 말을 씹냐며, 하늘 같은 선배에게 주먹을 내지르는 하극상이 벌어질 텐데.

까득.

제 형 앞이라 그런 걸까.

그저 이만 빠득 가는 김시혁의 모습은 퍽이나 속이 시원했다.

"다행이군요. 듣기론 현금만 받으신다고 하던데, 의뢰비는 얼마면 될는지요?"

"시문 씨께서 워낙 주신 정보가 많은지라, 또 그리 어려운 의뢰도 아니고...."

즐거운 얼굴로 아이패드를 툭툭 두드리던 박진욱.

그는 제 형의 뒤편에서 잔뜩 골이 난 김시혁을 힐끔하곤 말했다.

"첫 의뢰에다가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시기도 하니, 이번 일은 무료로 해 드리겠습니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무료라니요. 그럴 순 없죠."

시문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무려 다이아 랭크시지 않습니까? 그런 고급 인력을 무료로 이용할 수는 없죠."

"크핫! 이거 참! 볼수록 동생분과 딴판이시군요. 더더욱 무료로 해 드리고 싶군요."

가볍게 웃은 박진욱은 김시혁 쪽을 바라봤다.

"정 신경 쓰이시면 이 망할 후배님에게 받도록 하겠습니다. 어떠냐?"

"...얼마든지."

그럴 줄 알았다.

하는 눈빛으로 씨익 웃는 박진욱.

하나 형인 시문은 그렇지 않은 것일까.

"아닙니다. 제 의뢰인데 동생이 내게 할 순 없죠."

"형, 괜찮아. 나 돈은...."

"내가 안 괜찮아, 인마. 그리고 이건 돈의 문제가 아니다."

만류하는 김시혁을 가볍게 쳐 낸 시문은 말을 이었다.

"관계의 문제지."

"호오? 이제 보니 단발성 의뢰인이 아니시군요?"

"맞습니다. 전 밤사냥꾼과의 관계를 길게 이어 가고 싶거든요."

"그래서 무료 의뢰는 거절하겠다라.... 이거 정말이지, 같은 핏줄이 맞나 싶을 정도네요."

그 말에 시문은 물론 김시혁 역시 몸을 움찔했으나 그뿐.

너무나 미세했기에.

아무리 밤사냥꾼 박진욱이라도 그걸 눈치채지는 못했다.

시문은 자연스럽게 미소를 띠며 말했다.

"해서 다른 조건으로 의뢰비를 충당하면 어떨까 하는데요."

"다른 조건?"

고개를 갸웃하는 박진욱.

시문은 김시혁과 비슷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듣기로는 최근에 꽤 고등급의 재료들을 매입하신다던데...."

그 말에 박진욱의 얼굴이 대번에 굳었고.

'역시.'

시문은 박진욱의 반응에 전생의 기억이 맞았음을 확신했다.

"오해는 마세요, 나쁜 의도로 말한 건 아니니까. 단지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거 같아서요."

"도움을 주신다고요?"

"예."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이는 시문에 박진욱의 한쪽 눈썹이 쭉 올라간다.

험상궂은 외형에 더해져 퍽이나 위협이 넘쳤지만.

시문은 그저 미소 지을 따름이었다.

'밤사냥꾼 박진욱. 다이아급 실력자임에도 돌연히 아레나를 은퇴해, 현재는 현금만 받는 사업을 하고 있지.'

일종의 흥신소 같은 일을 말이다.

그토록 대단한 실력자가 왜 이런 일을 하고 있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분명 마력경화증이라고 했었지?'

대한민국이 멸망한 이후.

박진욱이 김시혁의 길드에 합류하고 알게 된 사실인데.

이 당시 박진욱이 돌연히 아레나를 은퇴한 이유는 다름 아닌 마력경화증 때문이었다고 한다.

아레나 질병의 일종으로 마력이 조금씩 경화, 즉 굳어 가는 병이었다.

'마력경화증의 치료제 레시피는 앞으로 약 5년 후에 등장하지.'

생각보다 별거 없는 재료들이었고.

당연하게도 그 레시피는 머릿속에 잘 들어와 있다.

에메랄드 태블릿을 얻기 전.

마력불능을 치료하기 위해 온갖 치료법을 다 뒤졌으니까.

더군다나.

'박진욱의 합류가 빨라지면 시혁이 녀석에게도 나쁠 건 없겠지.'

시혁이가 종리추의 손에 죽는 그날까지 녀석의 옆을 지켰던 게 박진욱이다.

앞으로 동생 놈이 만들 길드의 핵심 인물이자 핵심 동료 중 하나란 말이다.

고로 박진욱이라는 인물이 시혁이 녀석에게 빨리 붙으면.

협회를 비롯한 한국의 내부적 문제부터, 대륙성까지도 어느 정도는 억제가 되리라.

생각을 정리한 시문은 가볍게 운을 띄웠다.

"대충 재료 목록을 보아하니 마력경화증 같던데... 맞죠?"

"뭐?! 선배! 아레나 질병에 걸렸어요?"

옆에서 눈만 끔뻑이고 있던 김시혁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턱을 괸 박진욱은 무서운 눈초리로 시문을 노려볼 뿐이었다.

"재료 목록까지? 하! 암시장도 다됐군요. 감히 남의 거래 내역까지 흘리다니."

"암시장이 원래 그렇죠. 돈 말곤 아무것도 없는 곳 아닙니까?"

시문은 가볍게 이 모든 걸 암시장의 탓으로 돌렸다.

밤사냥꾼 박진욱이 암시장의 단골인 건 익히 아는 사실이고.

실제로 아고라가 아닌 암시장에서의 거래는 정말 돈 말고 믿을 것이 없었으니까.

"...후, 그렇긴 하죠."

한숨을 쉰 박진욱은 이마를 거칠게 쓸어 올렸다.

시문이 어떻게 이런 정보를 알아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사실 시문에게 어떻게 알아냈냐고 따질 수 없다는 말이 더 적합하겠지.

애당초 암시장을 이용한 그의 잘못도 있을뿐더러.

'시혁이 놈의 형을 건들 순 없는 노릇이니까.'

그렇다면.

'챙길 수 있는 건 챙겨야지.'

박진욱은 감정을 가라앉히고 물었다.

"그래서, 제 마력경화증에 그쪽이 어떤 도움을 주실 수 있습니까?"

"간단합니다. 그 재료들을 저한테 주시면, 마력경화증의 치료제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예?"

돌아온 시문의 답에 박진욱은 고사하고.

"혀, 형? 그게 무슨 말이야? 치료제라니?"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김시혁마저 경악했다.

"죄송합니다만... 하시는 모든 말씀이 믿기지가 않습니다. 현 다이아급 연금술사들도 아레나 질병 치료제는 만들지 못하고 있는데 어떻게...."

"거기까지는 말씀드릴 이유가 없죠. 확실한 건."

식어 버린 커피를 한 모금 마시는 시문.

그는 여유롭게 잔을 내려놓고는 말을 이었다.

"마력경화증 치료제는 제가 확실히 만들어 드릴 수 있다는 겁니다. 내키지 않으시면 제안을 안 받으셔도 상관없고요."

"...."

박진욱의 입이 꽉 다물린다.

당연했다.

'이런 말을 듣고 누가 거절하겠냐고!'

아레나 질병은 공식적으로 불치병이다.

당연히 치료제가 없는 병인 줄 알았는데 치료제가 있다니?

'이건 설령 거짓말이라도 믿을 수밖에 없다.'

애당초 김시혁의 형님 되는 사람이 이런 거짓말을 할 리도 없겠지만.

이미 마력경화증으로 아레나까지 잠정적으로 은퇴한 상황이다.

박진욱으로선 감히 거절할 수 있는 제안이 아니었다.

"시문 씨. 한 가지만 묻고 싶습니다."

"말씀하시죠."

"왜 굳이 이런 제안을 하시는 겁니까? 의뢰라면 무료로도 가능했잖습니까."

박진욱의 물음에 시문은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

"글쎄요...."

그것은.

"그냥 시원시원하신 게 마음에 들어서?"

망할 후배 녀석과 같은, 속을 알 수 없는 미소였다.

"어쩌시겠습니까?"

"...하, 제게 달리 선택권이 있겠습니까."

피는 못 속이는 건가.

그렇게 생각한 박진욱은 마른세수를 하곤 손을 내밀었다.

"부디 치료제를 부탁드립니다. 아까 말씀하신 대로 제가 구입한 재료는 모두 건네드리죠."

"현명한 선택이십니다. 아, 걱정은 마세요."

그 손을 마주 잡은 시문은 한쪽 눈을 찡긋했다.

"재료 떼먹는 일은 아마 없을 테니."

제25화

25화. 준비

"그럼 재료는 그쪽으로 보내 주세요. 치료제는 완성되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예, 들어가십시오!"

문 앞까지 나와 90도로 인사하는 박진욱.

멀리서 보면 어느 조직의 도련님을 보좌하는 조폭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이내 사무실의 문이 닫히자, 시문은 뒤를 돌아봤다.

"넌 안 들어가냐?"

내내 침묵 중이던 동생 김시혁이었다.

"형, 난 이해가 안 가."

"뭐? 내가 마력경화증 치료제를 만들 수 있다는 거?"

"그것도 그렇지만, 갑자기 왜... 사람을 찾는 거야? 혹시 형도 10년 전의 일을 조사, 윽!"

불안한 표정으로 말하던 김시혁의 머리가 휘청한다.

정확히는 일부러 휘청거렸다고 해야겠지.

왜냐하면.

"혀, 형?"

"새끼, 엄살은."

하늘 같은 형님이 딱밤을 갈겼으니까.

랭커 된 입장에선 느리다 못해 하품이 나오는 속도였지만.

감히 형의 손을 피할 생각도 못 하는 김시혁이었다.

뭐, 어릴 적의 그리움을 회상하는 작은 어리광이기도 했고.

그런 동생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가 말했지, 그 일은 사고였다고."

시문은 이마를 부여잡고 있는 동생 놈을 보곤 피식 웃음을 흘렸다.

"사고...."

"그래, 사고! 용의자들도 유명한 각성 범죄자들이었잖아? 그냥 또라이들한테 물린 것뿐이야. 무엇보다."

어느새 진지해진 시문은 동생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미 지나간 일이고."

"형...."

"그러니까 시혁이 너도 유정이도, 그 일은 이제 그만 생각했으면 좋겠어.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일이잖아."

사실 이렇게 말은 하면서도.

'참, 내가 이런 말 하는 것도 웃기네.'

시문은 속으로 스스로를 비웃었다.

회귀 전 이 당시의 자신은 여전히 동생들과 연락을 끊고 있지 않았던가?

유정이를 만났을 때도 그랬지만.

어쩌면 마음속 아주 작은 한구석엔.

저도 모르게 동생들을 탓하는 마음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특히나 아직 젊었던 이맘때는 더더욱 말이다.

하지만.

'이젠 아니야.'

그때의 일은 전생의 시혁이와 이야기를 나누며 모두 털어 버렸다.

아니.

그전부터 진작에 생각을 바로잡은 상태였다.

10년이 넘게 단절된 세월은 지난날의 자신을 고찰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으니까.

"지나간 일은 그만 생각하고, 앞으로를 봐라."

"이런 말 하면 기분 나쁠지도 모르겠지만... 난 형이 이렇게 말해 줄지는 상상도 못 했어."

"그래. 나도 놀랍다, 인마."

다가올 미래를 바꾸려면 과거에 얽매여 있어선 안 된다.

이미 마력불능을 회복하고 달라진 길을 걷는 자신이 대표적인 성공 사례 아닌가?

그러니.

"지나간 일은 털고 앞만 봐. 넌 앞길 창창하잖냐."

이 잘난 동생 놈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특히나 지구의 희망이 될 녀석이니 더더욱 말이다.

"랭커를 보유한 숫자에 따라 국력 갈리는 건 알고 있지? 너한테 거는 기대가 크다."

"...형이 이렇게 애국심이 투철한지는 몰랐네."

"새끼가. 투철하지 않거든? 그냥 소속을 잃을까 걱정되는 거지."

"소속?"

"상태창에 있잖아."

"아아."

작게 긍정을 표하는 김시혁.

이내 녀석은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소속이 뭔가 의미가 있어? 내가 알기론 상태창에서 유일하게 쓸모없는 항목인데."

김시혁의 물음에 시문은 잠시 눈을 깜빡였다.

소속을 잃고 난민의 신분으로 살아 본 시문은 소속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안다.

[해당 카테고리의 소실로 비활성화됩니다.]

이 망할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업적 상점을 비롯해 여러 기능들에서 페널티를 받게 되고.

결국 성장의 정체라는 플레이어에게 가장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지니까.

하지만.

'이 시기엔 소속의 중요성을 모르지.'

정규 아레나가 아니니 소속을 잃을 일 자체가 없다.

시문은 자연스레 눈을 굴리며 말을 이어 갔다.

"소속에 대해 얻은 정보가 좀 있어서."

"정보?"

그에 시혁이 녀석은 더욱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아까 선배의 거래 내역을 확인한 것도 그렇고. 형 되게 좋은 정보원이라도 있나 봐?"

지나가는 사람이 보면 정말 순진무구, 청렴이라는 단어가 딱 어울리는 모습이었으나.

"이상하다. 그렇게 좋은 정보원이 있으면 굳이 선배한테 의뢰를 맡길 필요도 없지 않나?"

슬쩍 올라간 동생 녀석의 한쪽 눈썹은 분명한 의심을 담고 있었다.

'새끼. 하여간에 눈치 하나는 여전하네.'

저 순수한 외모와 달리.

이 잘난 동생 놈은 어릴 적부터 눈치가 빨랐다.

그러나.

"쓰읍. 이건 아무리 너라도 말 안 해 주려고 했는데...."

이미 어릴 적부터 동생 놈의 비범함을 꿰뚫고 있던 시문.

그는 일말의 흔들림도 없이 미리 준비해둔 답을 꺼냈다.

"이 형님이 선심 한번 써 준다. 인벤토리."

시문의 손에 잡혀 나온 것은 다름 아닌.

"이건 광석? 이게 왜?"

"잔말 말고 정보나 확인해 봐."

정보창을 확인해 본 것일까.

"혀, 형! 이거!"

김시혁은 두 눈을 부릅떴다.

"맞아. 입장 아이템이다. 운 좋게 얻었지."

"세상에! 입장 아이템은 나도 몇 번 못 먹어 본 건데! 잠깐. 이걸 얻었다는 건...."

"그래, 나 마력불능 회복했다. 얼마 전에 랭크 배치 끝냈고."

"아."

이미 탈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 랭커, 김시혁이 힘없이 바닥으로 주저앉는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놀랄 일이었지만.

김시혁에겐 아주 당연한 반응이었다.

'형의 마력불능이... 회복됐다고?'

자신과 이유정 때문에 얻었던 아레나 질병.

그것도 마력 스탯 10이라는 창창한 미래를 앗아 간 마력불능이다.

어린 시절부터 유일하게 의지했던 존재의 미래를 망쳤다는 죄책감은 감히 설명조차 할 수 없으리라.

한데 그 병이 회복되었다니?

그런 김시혁의 마음을 아는 것일까.

"쯧. 새끼가, 했던 말 또 하게 만드네."

시문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동생을 일으켰다.

그는 무심하게 동생의 옷을 툭툭 털어주었다.

"내가 말했지? 옛날 일은 이제 신경 끄라고."

"하, 하지만 형!"

"어쭈? 많이 컸다? 형한테 대꾸도 다 하고."

그 말에 입이 꾹 다물리는 김시혁.

하나 물기와 함께 힘이 잔뜩 들어간 녀석의 눈은 온갖 질문으로 가득해 보였다.

시문은 그것을 가볍게 무시하곤 말했다.

"어쨌건 소속에 대한 정보는, 그 입장 아이템을 얻으면서 알게 된 거다. 그렇게 알아둬."

옛일은 더 언급하기 싫다는 형의 뜻을 알아차린 것일까.

김시혁은 더 이상 마력불능과 관련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그렇구나.... 그럼 이 입장 아이템을 얻으면서 알게 된 거네?"

"어. 보면 알겠지만 X등급이라고 처음 보는 등급이잖냐. 딱 봐도 심상치 않지?"

"그러네. 나 X등급은 처음 봐."

보통 입장 아이템을 획득하는 과정이 '퀘스트'임을 떠올려 보면.

시문이 소속 항목에 대한 정보를 알았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녀석. 그걸 또 그대로 믿네.'

일말의 의심조차 하지 않는 동생 녀석의 모습에 양심의 가책을 조금 느꼈으나 그뿐.

시문은 입장 아이템인 [도리아의 미스릴 광석]을 인벤토리로 갈무리했다.

"자세한 건 입장해 봐야 알겠지만, 일단 소속을 잃어서 좋을 건 없다더라고."

"확실히... 입장 아이템 연관이면 확실하겠지. 특수 아레나는 늘 좋은 정보들을 주니까."

"그래. 보니까 소속은 나중에라도 중요할 거 같으니, 미리 신경 쓰자 뭐 그런 의미였어. 넌 랭커잖냐."

"알았어. 정보 고마워."

뭐, 사실 신경 쓸 것도 없긴 했다.

이미 다 알려진 사실이지만.

뭔 짓을 해도 한번 정해진 소속은 바뀌지 않으니까.

"하여튼, 난 아레나 준비도 해야 해서 이만 간다. 일 있으면 연락하고."

"응. 아! 형."

설렁설렁 손을 흔들며 떠나는 시문.

그를 붙잡은 김시혁은 조심스레 말했다.

"배치를 끝냈다고 해서 하는 말인데, 형 특수 아레나도 입장하고 하니까...."

"쩔 같은 소리 하면 죽는다. 쩔 받으면 성장 제대로 안 되는 거 모르냐?"

그에 움찔한 김시혁은 조심스레 말했다.

"...아니, 난 그냥 템이나 좀 줄까 해서. 형 마법계라면서? 마법계 장비는 초반에 구하기 힘들잖아."

"정확히는 연금술사라고 했지. 근데 딱히 필요 없어."

장비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 연금술사라서가 아니다.

템빨은 누구보다 잘 받는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무려 신화급 무기를 다루지 않나?

단지.

'당장은 아이템이 없는 편이 좋아.'

안 그래도 매칭 MMR이 말이 안 되는 수준이다.

여기서 장비까지 좋아지면 어떤 매칭이 기다릴지 상상이 가지 않았기에.

시문에게 당장은 장비가 없는 편이 좋았다.

그로 인한 상대의 방심 유도는 덤이고 말이다.

"뭔가 형답네. 알았어."

"나답긴 무슨, 그럼 난 간다. 연락해라."

"어. 조심해서 가."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김시혁.

그에 몸을 돌리려던 시문은 우뚝 멈췄다.

"잠깐. 시혁아."

"왜?"

"너 아레나에서 얻은 재료템은 어떻게 처분하냐?"

"재료템? 놔뒀다가 아고라 갈 때 다 처분해. 아니면 버리든가. 그다지 필요가 없거든."

역시.

'랭커쯤 되면 현찰 거래가 주인 재료 아이템은 신경을 잘 안 쓰지.'

랭커이니 나름 질 좋은 재료템들이 떨어지긴 하겠지만.

기본적으로 미스릴같은 고가치의 재료가 아니라면, 처분에 큰 관심을 두지 않으리라.

랭커 정도 되는 이들에게 재료템이란 그야말로 잡템에 불과하니까.

씨익 웃은 시문은 말했다.

"시혁아, 잘 생각해 보니까 네가 이 형한테 줄 게 있긴 있다."

* * *

끼익.

문이 닫힌다.

터덜터덜 걸어온 청량한 미청년은 소파에 털썩 몸을 던졌다.

"뭐야, 너 안 갔냐?"

"제가 왜 가요? 모처럼 쉬는 날인데."

"있잖아. 네 형님의 반이라도 배우면 안 되겠냐?"

"불가. 전 절대 형처럼은 못 됩니다."

"개X끼."

"진짠데...."

진심으로 중얼거리는 가증스러운 후배 놈의 모습에 박진욱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서, 이제 어쩔 거냐?"

"뭐가요?"

"네 형님 말이다. 쩔이라도 해 줄 거냐?"

박진욱이 아는 김시혁은 결코 쩔 같은 짓을 할 인물이 아니었지만.

'보니까 아주 각별히 여기던데.'

아까 김시문을 대하던 후배 놈의 모습을 보면, 그깟 쩔쯤이야 못 해 줄 것도 없어 보였다.

"안 받는데요."

"안 받는데요? 말이 좀 이상하다?"

"말 그대로예요. 형이 쩔은 안 받는다더라고요."

새 담배를 꺼내 물던 박진욱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렇지 않은가?

"진짜냐? 네가 해 주는 쩔을 안 받는다고?"

다른 누구도 아닌 랭커의 쩔이다.

물론 복잡한 사전 작업과 온갖 페널티들도 받겠지만.

이제 배치를 끝낸 뉴비 입장에선 거절하기 힘들 제의일 텐데.

"쩔 받으면 성장이 제대로 안 된다고 거절하더라고요."

"잉? 크, 크하하핫!"

갑자기 대소를 터뜨리는 박진욱.

그는 우렁찬 목소리로 한동안 웃어 젖히더니, 눈가에 찔끔 흐른 눈물을 닦았다.

"히야! 이거 보면 볼수록 호감이시네. 이제 배치를 끝낸 사람이 그런 것도 알아?"

"원래 우리 형이 좀 뛰어나요. 어릴 때부터 그랬죠."

"하긴, 아까 날 상대로 간 보던 것도 그렇고, 평범한 사람은 아니더라."

천하의 밤사냥꾼을 상대로 이렇게 들었다 놨다 한 사람이 있었던가?

장담컨대.

박진욱이 오늘처럼 감정 기복이 심했던 날은 마력경화증이 걸린 이후로 처음일 것이다.

'이래저래 달라 보여도 피는 못 속이나 보군.'

박진욱은 쓰게 웃으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럼 장비 지원은? 그것도 안 받는데?"

"예. 연금술사는 필요 없다더라고요. 대신 재료템을 주기로 했어요."

"재료라... 현명하네. 연금술사들은 템빨 오지게 안 받기로 유명하니까."

이렇게 현명한 사람이 왜 하필 연금술사를 택했을까? 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만한 사람이면 다 생각이 있겠지.'

저렙 주제에 감히 다이아 앞에서 밀당을 하던 인간이다.

심지어 세상 어디에도 없는 마력경화증의 치료제를 거론하기까지 했으니.

'여러모로 기대가 되는군.'

촉이 온달까?

다이아급 암살계의 예민한 감각이 계속 알려 온다.

김시문이라는 플레이어는 뭔가 있다고 말이다.

박진욱은 모처럼 느껴지는 기대감에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럼 내 치료제를 주실 귀~하신 고객님을 위해, 의뢰는 빨리 처리해 드려야겠군."

"참. 말이 나와서 말인데요."

그때.

소파에 늘어져 있던 김시혁이 고개를 들었다.

"그 여자, 이름이 고말숙이라고 했던가요?"

"그랬지. 왜?"

"자세히 좀 조사를 해 주세요."

"난 일 맡은 이상 대충 안 한... 잠깐. 설마 네 형님의 의뢰랑 별개로 조사해 달란 말이냐?"

"네. 그녀의 신상부터 과거, 플레이어라면 관련 특성까지 전부 다요."

"이 새끼, 그렇게 안 봤는데. 그런 취향이었냐? 형 여자를 뺏는...."

"선배, 저 오늘 아레나 안 뛰어서 팔팔하거든요?"

청량한 미소와 달리 꽉 쥐어지는 김시혁의 주먹.

그 위로 떠오르는 선명한 핏줄은 다이아급 암살계마저도 침을 꿀꺽 삼키게 만들었다.

"커흠! 거 웃자고 한 소리지. 그나저나, 왜 굳이 따로 조사하란 거냐?"

얼른 화제를 돌리는 박진욱을 잠시 노려보는 김시혁.

이내 작게 한숨을 쉬며 천장을 올려다봤다.

"형이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거 같아서요."

"숨겨? 설마! 치료제 그거 구라냐?"

"아뇨,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제가 모르는 뭔가가 더 있는 거 같아서요."

"그럼 굳이 네가 캘 필요도 없지 않을까? 말하기 싫다는 거잖아."

"그렇긴 한데...."

천장을 바라보던 김시혁의 눈가가 슬쩍 가늘어졌다.

"10년 전 그때랑 비슷한 느낌이 들어서요."

"비슷한 느낌?"

"예. '너흰 아무 걱정 말고, 거기에 얌전히 숨어 있어.'라고 하던 그때랑 똑같은 느낌이요."

낮게 읊조리는 김시혁.

이 후배 녀석이 10년 전 그 사건만 언급되면 얼마나 무서워지는지 잘 알기에.

박진욱은 말없이 담배를 태울 뿐이었다.

흰 담배 연기가 천장을 보는 김시혁의 눈앞을 스친다.

평소라면 이쪽으로 연기를 뿜지 말라고 한 소리 했을 테지만.

"이젠 싫거든요."

김시혁은 도리어 그것을 폐부 깊숙이 들이마셨다.

"누군가의 뒤에서 보호받기만 하는 거."

제26화

26화. 특수 아레나 (1)

"흐흥!"

한껏 고취된 기분이 잔뜩 담긴 콧노래.

박진욱의 사무실에서 자취방으로 돌아올 때까지.

시문은 이 흥얼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그에 가슴 한가운데서 간지러운 이명이 울렸다.

-오빠, 그렇게 좋아?

"당연하지. 의외의 수확이 있었잖냐."

단순히 천마의 퀘스트 [제자를 찾아라]를 해결하기 위해 박진욱을 찾아갔을 뿐인데.

박진욱의 회복을 앞당겨 동생 놈에게 힘을 실어 줌은 물론.

'재료템을 꽁으로 수급하게 될 줄이야!'

어디 그뿐이랴?

마력경화증의 치료제를 구실로 밤사냥꾼 박진욱이 모아 온 재료들도 싹 받을 수 있을 테니.

'한동안 영약 재료는 걱정도 없겠다!'

영약 섭취는 가장 빠른 스탯 증진법이었지만.

그만한 재료가 들어간다는 것이 유일한 단점이었다.

한데 그것이 해결되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하여간에 우리 오빠, 맹해 보여도 은근 약은 구석이 있다니까?

"칭찬으로 들을게."

-칭찬 맞아. 그래서 걱정이야. 오빠랑 다르게 우리 잘생긴 도련님은 진짜 맹해 보이던데. 어디서 사기라도 당하면 어쩌냐?

김시혁의 실물을 영접한 이후로 줄곧 도련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현자의 돌.

시문은 그 행태를 지적하는 대신, 다른 부분을 꼬집었다.

"맹하긴 개뿔. 그놈이 얼마나 약삭빠른 놈인데."

그러나.

-어머나? 오빠, 지금 질투하는 거야? 걱정 마, 난 오빠뿐이야. 이래 봬도 순정이 있는 애라고.

"됐다. 말을 말자."

만만치 않은 현자의 돌의 반격에 시문은 대꾸를 포기했다.

뭐, 기본적으로 내 동생을 좋게 봐 주는 건 나쁜 게 아니기도 했고 말이다.

'일단 영약은 그렇다 치고....'

시문은 자취방 한쪽 구석.

다소 허름하지만 깔끔하게 마련된 연금술 도구들로 고개를 돌렸다.

'마력경화증 치료제, 이거 잘 굴리면 큰돈이 될 텐데.'

밤사냥꾼 박진욱이 그렇듯.

아레나 질병은 랭크를 가리지 않기에, 고통받는 사람 역시 많았다.

특히나 박진욱과 같이 상위 랭크에 있는 플레이어일수록.

아레나 질병의 치유에 대한 갈망은 어마어마했다.

'딱히 병자를 돈으로 보는 건 아니지만....'

치료제가 돈이 될 수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연금술을 위한 연구실부터 앞으로의 활동에 쓰일 자금까지 고려한다면.

'지속적인 돈벌이는 필수적이야.'

물론 잘나가는 플레이어들이 그렇듯.

방송만 잘 꾸려도 유수의 길드를 비롯한 각 기업들과 스폰서, 광고 등 쏟아지겠지만.

'내 목적은 그런 게 아니니까.'

동생을 죽이고 지구를 멸망시키는 주역들.

종리추와 대륙성, 그리고 그 정체불명의 눈알이 목적이었다.

'특히나 시혁이는 반드시 살아야 해.'

시문은 회귀 전 시스템이 보냈던 메시지를 떠올렸다.

[성좌의 자격 보유자 사망 확인.]

[더 이상 NO. 274 지구에서 아레나를 진행할 이유가 없습니다.]

[NO. 274 지구의 아레나를 완전히 종료합니다.]

[갤럭시 아레나 종료에 따라 NO. 274 지구의 보호권을 철회합니다.]

'분명 시혁이 녀석의 그 특성과 관련 있겠지.'

그리고 그 특성이 아레나 종료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도 대충 감이 잡히지만.

'아직 추측에 불과하니까.'

물론 섣부른 판단을 내릴 순 없었다.

고로 지금 가장 우선적으로 할 일은 하나.

특수 아레나를 대비한 스펙업이었다.

"현자의 돌? 연성 시작하자."

-히히! 그 말만 기다렸다구!

경쾌한 목소리와 함께 가슴 정중앙에서 연성력이 노도처럼 쏟아진다.

그것은 곧장 시문의 오른팔을 타고 손가락 끝으로 몰려들었고.

[요구치에 맞는 연성을 이루기에는 연성력이 부족합니다.]

[현자의 돌이 부족한 등가교환을 성립시키기 위해, 업적 포인트 10,000점을 요구합니다.]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눈앞에 익숙한 시스템창을 띄웠다.

시문은 상태창을 띄워 보유 업적 포인트를 확인했다.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업적 포인트는 10,450점.'

지난 방송과 천마의 미션, 후원으로 만 포인트는 넘어선 상황.

'본래라면 만일을 대비해 1,000점 정도의 여유분을 남길 생각이었지만....'

이번 연성으로 오르는 옵시디언 태블릿의 성장치가 어마어마했다.

무려 20%.

지금도 20%의 완성도로 이만한 효율을 내는데.

그 두 배인 40%가 된다면 얼마나 강해지겠는가?

잔여 포인트를 따질 때가 아닌 것이다.

'어디 보자. 만 포인트를 쓰면 450점이 남네.'

아스트라페를 연성하기 위해선 50점 부족한 점수이긴 해도.

'진행하다 보면 50점 정도는 어떻게든 채울 수 있겠지.'

거기에다 옵시디언 태블릿으로 인한 인체 연성 능력이 2배로 향상되지 않는가?

'설령 50점을 못 얻어도 큰 문제는 없어. 내 인체 연성 능력이 지금보다 약 두 배나 증가하니까.'

너프당했기는 했으나, 인체 연성만으로 무려 홉고블린을 쓰러뜨린 시문이다.

여기서 두 배면 애당초 보험 자체가 필요 없을 수준이 될 터.

시문은 망설임 없이 눈앞에 있는 메시지에서 '예'를 선택했고.

파츠측!

업적 포인트가 소모되며 연성 특유의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스아아아아.

익숙한 검보라색의 비석.

옵시디언 태블릿이 검은 연기를 풀풀 풍기며, 시문의 손 위로 내려앉았다.

[성좌 검은 염소가 기특함과 환호를 담은 시선을 보냅니다.]

[성좌 제우스와 천마가 입맛을 다십니다.]

[성좌 검은 염소가 업적 포인트 500점을 후원합니다.]

=봤지? 변태 영감들아. 얜 내 거얌. ㅎㅎ!

반가운 후원도 함께 말이다.

업적 포인트 50점을 계산한 것이 무색하게, 순식간에 500점을 벌어버린 시문.

그러나 업적 포인트보단 눈앞의 메시지에 더욱 눈길이 갔다.

'성좌도 후원 메시지를 쓸 수 있었구나.'

생전 처음 보는 성좌의 후원 메시지에 시문은 헛웃음을 흘렸다.

* * *

[갤럭시 아레나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입장 아이템으로 인한 특수 아레나로, '열띤 광산의 악몽'으로 입장합니다.]

[아레나 입장 시, 입장 아이템 [도리아의 미스릴 광석]이 소모됩니다.]

[특수 아레나의 규정상, 대기 시간이 무제한으로 주어집니다.]

아무것도 없는 검은 공간.

평범한 사람이라면 자칫 공황장애를 일으킬 정도로 어두웠다.

그러나.

"호오. 특수 아레나는 대기 시간도 주네?"

이곳의 입장자인 뚜렷한 이목구비의 미청년.

김시문은 그저 눈을 반짝이며 주변을 살필 뿐이다.

이내.

"뭐, 딱히 별건 없네."

시문의 눈은 순식간에 흥미를 잃었다.

그에.

-당연하지. 여긴 단발적인 아공간에 불과하잖아. 그나저나, 진짜 지금 특수 아레나에 입장할 거야? 급할 건 없잖아.

낭랑한 목소리가 가슴에서 울렸다.

현자의 돌이었다.

"그래. 애초부터 옵시디언 태블릿의 완성도를 40%로 맞추면 입장할 생각이었어."

-하긴, 인체 연성이 두 배나 강해졌으니. 충분하긴 하겠네.

"거기에다 업적 포인트도 거진 두 배가 되었고."

450점이던 업적 포인트는 검은 염소의 후원으로 인해 950점이 되었다.

현자의 돌의 페이백까지 계산하면 아스트라페 두 자루는 거뜬히 만들 점수였다.

'이 정도면 실버 랭크대의 특수 아레나는 충분할 거야.'

사실 차고 넘치는 수준이지.

피식 웃은 시문은 허공으로 손을 뻗어, 기능을 하나 활성화했다.

아레니아, 즉 방송이었다.

'으음. 이번엔 방제를 쓰는 게 좋으려나?'

실버 혹은 심해와 특수 아레나라는 키워드만 섞으면 어떻게든 어그로가 끌릴 터.

하지만.

'아니다. 그냥 하던 대로 하자.'

시문은 방제를 따로 설정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전에 성좌 어그로가 너무 컸어.'

물론 성좌 코스프레가 아닌 진짜 성좌들이었지만.

진실이야 어쨌든, 해당 사건은 단순한 심해 방송의 어그로로 끝난 시점이다.

여기서 또 방송 어그로를 끌다간, 괜한 부스럼을 만들 가능성이 높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자신은 아직 저랭크에 무소속인 상황이니까.

'뭐... 어느 정도 시청자를 확보하기도 했고.'

저번 방종 때에 시청자 수가 5천여 명인 적도 있었지.

그 반의반만 와도 일단 천여 명 이상의 시청자는 확보된 셈이었다.

그런 시문의 예상이 적중하듯.

-오오! 방송 켰다!

-시문쨩. 기다렸다능!

-방금 아레나 끝냈는데. 치맥각이네 ㅋㅋ.

순식간에 들어차는 시청자들.

저번 성좌 코스프레 사건이 확실히 임팩트가 있긴 했던 것일까?

-성좌 코스프레 한다는 어그로가 이 사람임?

-다 해명했잖음. 유입 티를 내네 ㅋㅋ

-얘 버스 기사를 발랐다매? ㄹㅇ임?

-모르겠고. 성좌 코스프레 다시 해 주셈. 나 못 봄!

신규로 보이는 시청자들도 급속히 증가했다.

실시간으로 올라가는 시청자 수를 확인한 시문의 눈이 조금 커졌다.

'1,500명이라? 여기까지는 생각 못 했는데.'

심지어 그 숫자는 계속 올라갔고.

2천여 명에 달하고 나서야 증가하는 속도가 확연하게 줄었다.

'후. 방제 어그로는 안 끌어서 다행이야.'

자신의 현명한 처사에 안도를 표한 시문은.

-이봐, 방장! 빨리 문 열어!

-쾅쾅!

-얼른 열어! 여긴 너무 어둡다고.

-ㄹㅇ 암 것도 안 들림 ㅋㅋ. 마이크라도 켜!

-문 열어. ㅁㅇㅇ! ㅁㅇㅇ!

빨리 방송 대기화면과 BGM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방송을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반갑습니다!"

고저 없이 편안하게 들리는 목소리.

그와 함께 검은 화면에 시문의 모습이 둥둥 떠올랐다.

-오! 왔다!

-얘임? 개쌉 기만자였네?

-앙! 가능!

기다렸다는 듯 우르르 쏟아지는 채팅들.

"하하! 죄송하지만 전 불가능합니다. 다들 어서 오세요."

시문은 가볍게 웃으며 적당히 받아 주곤, 본론으로 들어갔다.

"자! 여러분들. 오늘은 일반 아레나가 아닌 특수 아레나를 진행할 겁니다."

-에?

-뭐지. 내가 잘못 들었나?

-ㄹㅇ? 진짜 특수 아레나임?

-님 실버 아니에요?

-설마 저번 아레나의 블랙존에서 꼼지락거리던 게 그거였나?

무수하게 올라오는 의문들.

당연했다.

플레이어들도,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입장 아이템을 모르지 않는다.

또한 그 대부분이 고랭크에서만 등장한다는 것도.

시문은 따로 입장 아이템에 대한 설명을 하지는 않았다.

왜냐고?

"해서 아레나 도중 채팅을 못 보더라도 양해 부탁드리고 시작할게요."

애초에 특수 아레나는 입장 아이템이 없다면 입장조차 불가하니까.

따라서.

"아레나를 시작한다."

입장하는 모습을 그냥 보여 주면 되었다.

[지역은 '열띤 광산의 악몽'입니다.]

[광산의 악몽 속에서 살아남으세요.]

평온했던 호수에 돌을 던진 것처럼.

검었던 대기 장소가 일렁이며 순식간에 광산의 형태를 띤다.

눈 깜짝할 사이에 광산 속 어딘가로 이동해 버린 시문은 폐부로 파고드는 지하 특유의 공기를 마시며.

[아레나를 시작합니다.]

엄습하는 현실감에 곧바로 적응했다.

-오오! 따로 매칭 없이 바로 시작하네?

-ㅇㅇ. 1인용 입장 아이템인 듯.

-그럼 얘 망한 거 아님? 실버가 특수 아레나를 혼자 깨는 건 개에반데.

-돈킹 바른 사람이잖아. 실버 수준은 절대 아님.

역시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게 더 났다고.

의문과 묘한 불신을 표하던 채팅창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달라졌다.

그런 채팅창을 뒤로하고, 시문은 주변을 살피며 걸음을 옮겼다.

'광산의 악몽 속에서 살아남으라니. 생존 종목이라 보기엔 좀 애매한데... 역시 특수 아레난가?'

특수 아레나, 달리 스토리형 아레나라 불리는 것들의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이거다.

바로 뚜렷한 목적을 주지 않는다는 것.

추상적인 힌트만을 줄 뿐.

결코 적을 섬멸해라, 또는 무언가를 지켜라! 와 같이 클리어 조건을 콕 집어 주지 않았다.

그러나 단점만 있는 건 아니었다.

'딱히 몰라도 상관은 없지만, 조건을 잘 알아내면 클리어 보상도 커지니까.'

당연히 이런 난도에 걸맞게.

아레나의 내용을 잘 이해하고 그에 어울리는 공략을 할수록, 클리어 보상도 덩달아 커졌다.

그러니 다들 입장 아이템에 그토록 목을 매는 것이다.

뚜벅.

시문은 조각처럼 잘 다듬어진 광산의 벽면을 슥 쓸며 걸어 나갔다.

마력에 민감한 마법계 특유의 감각이 벽면을 쓸며 내부를 훑어 나갔다.

'일단 벽면이나 공기 중엔 어떤 마력도 느껴지지 않아.'

그렇다면 '광산의 악몽'은 아레나에서 흔히 악몽 키워드로 비유되는 환영이나 속임수와 같은 부류는 아닐 터.

'아마 악몽과도 같은 일이 이 광산에서 벌어졌다, 뭐 그런 뜻 같은데....'

광산에서 벌어질 악몽 같은 일이 뭐가 있을까?

'광산이 와르르 무너지는 거?'

신빙성 있는 가설이다.

하나 그렇다고 하기엔.

"광산이 너무 튼튼한데?"

바닥, 천장, 벽면까지.

광산이라 부르기 미안할 정도로, 이곳은 매우 정교한 건축술로 다듬어져 있었다.

어지간한 폭발이나 지진 따위는 걱정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그럼 악몽을 일으킬 만한 어떤 존재가 있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을 곱씹으며 통로의 코너를 돈 순간.

"쿠룩."

인간이나 짐승의 것도 아닌 울음소리와 함께 비린내 섞인 악취가 콧잔등을 때렸다.

따악.

시문은 상대를 확인하지도 않고, 손가락을 튕기며 바닥을 박찼다.

판단은 현명했다.

쿠웅!

묵직한 충격음이 방금 서 있던 자리로 처박혔으니까.

하나 [블랙팬서의 신체조직]으로 이미 천장까지 도달한 시문.

그는 박쥐처럼 침착히 천장을 디디며 기습자의 모습을 확인했다.

'역시, 악몽은 특정 존재를 의미하는 거였나.'

3미터가 넘는 거구.

괴랄하게 큰 상체와 달리, 빈약하다 부를 수 있을 만큼 짧은 하반신까지.

'드라칸이라니.'

골드 상위권에서나 간간이 등장하는 최하위 용족 드라칸이라면.

실버 구간인 이곳에선 가히 악몽이라 불릴 만했다.

-미친! 실화임? 드라칸? 아무리 특수 아레나라지만 이건 선 넘는데.

-이분 실버라고 안 했음? 근데 용족이 왜 나와?

-ㅅㅂ! ㅋㅋㅋㅋㅋ. 갤럭시 아레나가 드디어 미쳤나 보네.

-갤아야, 이거 맞아? 맞냐고!

기습자의 정체를 알아본 채팅창은 뜨겁게 달아올랐지만.

시문의 눈길을 끄는 건 다른 부분이었다.

[성좌 천마가 눈살을 찌푸립니다.]

[성좌 제우스가 불쾌감을 표합니다.]

[성좌 검은 염소가 이를 으득 갈며 짜증을 냅니다.]

바로 시문에게 관심을 두던 성좌들.

한둘도 아니고 셋 모두가 부정적인 반응을 내비친 탓이었다.

'뭐 때문인지는 모르겠다만....'

시문이 취해야 할 행동은 명확했다.

"쿠룩, 인간!"

후웅.

빈약한 하반신을 돕는 두툼한 꼬리가 득달같이 날아든다.

그에 시문은 몸을 끌어당기는 중력에 안기듯, 디딘 천장을 힘껏 박차며.

팔 근육 사이로 순식간에 차오르는 오우거의 거력을 그대로 담아.

콰직!

제 몸통만 한 드라칸의 꼬리를 내려찍었다.

제27화

27화. 특수 아레나 (2)

"쿠라아악!"

중저음의 괴성이 높게 터져 나온다.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었다.

오크와 트롤 사이쯤에 자리하는 거대한 상체.

그에 어울리는 두툼한 꼬리가 찌그러진 쇠파이프처럼 되어 버렸으니까.

하나.

"크루룩! 너!"

최하위라도 엄연한 용족인 드라칸에게 못 참을 고통은 아니었다.

"죽인다!"

분에 찬 함성과 함께 바닥에 처박혀 있던 드라칸의 양날 도끼가 솟구친다.

시문은 무심한 얼굴로 손가락을 튕겼다.

따악.

척추를 중심으로 전신에 퍼져나가는 블랙팬서의 예민한 감각.

그것에 몸을 맡긴 시문은 그대로 몸을 움직였다.

"쿠룩?!"

드라칸의 눈이 부릅떠진다.

그 멍청한 망막 위론 허공을 베는 양날 도끼와.

연체동물을 연상케 할 정도로 유연하게 허리를 접어 버린 시문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다.

솟아오르는 도끼날에 맞춰, 저 인간은 자신의 허리를 반으로 접어 피해 버린 것이다.

어떻게 인간이 수인족이나 보일 법한 유연성을 선보이는지 의문을 품을 틈도 없이.

따악.

또 한 번의 손가락이 튕기는 소리와 함께 반으로 접혔던 시문이 몸이 원상태로 돌아온다.

정확히는 튕겨 나왔다고 해야겠지.

팽팽히 당겨졌던 고무줄처럼 말이다.

그 움직임을 포착할 틈도 없이.

콰직!!

다리로 추정되는 기다란 무언가가 드라칸의 머리통을 내리찍었다.

'아프다!'

골통을 뒤흔드는 고통이 드라칸의 전신으로 뻗어나간다.

동시에.

'죽여 버릴 거다. 갈가리 찢는다!'

고통만큼이나 격렬한 분노가 치밀었다.

당장 자신의 머리를 찍은 인간의 다리를 잡고 바닥에 처박은 다음.

산 채로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리라.

그렇게 마음먹은 드라칸이 움직이려던 찰나.

"쿠...."

그의 고개가 갸웃한다.

흡사 고위 환영 마법처럼 세상이 나뉘어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세상은 급속도로 무너지고 있었다.

'이건 또 무슨....'

이 인간이 고귀한 상위 용족만큼이나 뛰어난 마법 능력을 지니고 있단 말인가?

그러나 바닥을 똑바로 디딘 인간의 다리를 보고야 알 수 있었다.

나뉘고 무너지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쿠웅.

자신이었다는 걸.

* * *

묵직한 울림이 발바닥을 스친다.

비정상적으로 상체가 발달한 드라칸의 거구에 어울리는 진동이었다.

시문은 반쯤 쪼개진 생선 대가리처럼.

양 눈알이 돌출된 채 널브러진 드라칸의 머리통을 바라봤다.

'한 방에 죽을지는 몰랐는데.'

시문은 드라칸의 머리통을 내려찍은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봤다.

그곳엔 [블랙팬서의 신체조직]과 [오우거의 신체조직]의 정보창이 나란히 떠올라 있었다.

'동시 인체 연성이 좋긴 하구나.'

동시 인체 연성.

[옵시디언 태블릿]의 완성도가 40%를 달성하고 얻은 인체 연성 능력.

말 그대로 한 부위에, 동시에 여러 가지의 인체 연성이 가능한 능력이었다.

'확실히 다중 연성과는 차이가 있단 말이지.'

예전이라면 방금과 같은 공격을 해내려면 두 번의 인체 연성을 거쳐야 했다.

빠른 속도와 정확성을 얻기 위해 [블랙팬서의 신체조직]으로 각도를 잡은 다음.

연성을 취소하고 [오우거의 신체조직]을 새로 연성하는 식으로 말이다.

하나 동시 인체 연성은 그런 수고를 덜어 주었고.

나아가 두 이점을 동시에 담은 탈인간급의 위력을 보여 주었다.

'위력 증가 체감은 진짜 확 느껴지네.'

시문은 두 인체 연성의 정보창에 떠 있는 완성도를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블랙팬서의 인체 연성]은 기존 12%에서 24%로.

[오우거의 인체연성]은 기존 15%에서 30%로.

예상했던 대로 두 배씩 강해진 것이다.

이게 아니었다면.

아무리 탈실버급의 그라도 일격에 드라칸을 박살 내 버리는 것은 불가능했으리라.

그리고 드라칸의 죽음에 놀란 것은 시문만이 아니었다.

-? 지금 드라칸 한 방에 뒤진 거?

-드라칸을 한 방 컷 ㅋㅋㅋㅋㅋㅋ. 돌았나 진짜.

-지금 골드 상위권 중에 드라칸 원킬 내는 애들이 얼마 된다고....

-이게 실버라고? 이 새끼 백퍼 패작러임.

시문의 채팅창.

그곳에선 한창 시문에 대한 갑론을박이 펼쳐지고 있었다.

-패작 같은 소리 하네.

-돈킹 잡을 때도 권기 썼던 분임. 패작 아닙니다.

-패작 아님 뭔데? 방금은 권기를 쓴 것도 아니잖음.

-레알로 ㅋㅋㅋ. 이 사람 장비도 없잖아요. 걍 맨발로 내리찍어서 원킬 내는 게 말이 되나.

-그니까. 지가 무슨 오우거냐고 ㅋㅋ.

패작이 아니라는 이전 방송의 시청자들의 말에도 불구하고.

시문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은 가라앉질 않았다.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었다.

오러나 장비도 없는 맨몸으로 드라칸의 머리통을 한 방에 부숴 버렸으니까.

하나.

-보니까 전투 중에 손가락 계속 튕기던데. 무슨 특성이랑 연관이 있는 거겠지.

-22. 백퍼 특성임. 특성 언급 1도 없는 거 보니까 일반인이 대다수인 듯.

-ㄹㅇ ㅋㅋ. 최소 SS급 이상 특성일 듯?

-킹반인들 또 나대지. 유명 랭커들은 저랭크때도 권기 썼거든? 걍 이 사람이 잘난 거임.

현 플레이어로 보이는 이들이 한마디씩 던지자, 채팅창의 분위기는 다시 반전되었다.

물론 시문은 이런 채팅창을 보지 못했다.

분명 시야 한편에선 채팅 알림이 반짝이긴 했지만.

[성좌 천마가 미미한 미소를 짓습니다.]

[성좌 제우스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입니다.]

[성좌 검은 염소가 깔깔댑니다.]

성좌들의 반응이 더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세 명의 성좌가 서로 귓속말을 속삭입니다.]

[세 명의 성좌가 도합 1,000점의 업적 포인트를 후원합니다.]

예상 못 한 후원창이 시문의 눈앞에 떠올랐다.

'오호!'

후원을 확인한 시문은 눈을 반짝였다.

'고작 드라칸 하나 잡았다고 1,000점이나 후원할 줄이야.'

이미 앞선 성좌들의 반응으로 그들이 드라칸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눈치챈 시문이었지만.

그렇다고 1,000점이나 후원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이다.

'아니, 고작 드라칸이 아니야.'

성좌 정도 되는 이들이 최하위 용족인 드라칸 따위를 안중에 둘리는 없을 터.

'보아하니 용족 자체를 싫어하는 거 같은데?'

왤까?

라고 의문을 품기엔 대충 짐작이 가는 부분이 있었다.

'용제. 그들과 마찰이 있었나 보군.'

용제.

전생의 독일에서 일어난 거대 아웃브레이크로 처음 지구에 모습을 드러낸 존재들.

그 강하다는 드래곤마저 고개를 숙이던 이 미지의 존재는 강림했던 독일을 넘어.

유럽 전체를 하루 만에 반파시켜 세계인들의 뇌리에 새겨진 존재였다.

시문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이유야 모르겠지만 성좌들이 용족을 싫어하는 건 내겐 호재야.'

용족은 아레나에서 보스류로 자주 등장한다.

앞으로를 따져 보면 이 관계 덕분에 후원과 같은 득을 볼 일이 많으리라.

시문은 허공에 슬쩍 고개를 끄덕여 감사를 표하곤 걸음을 옮겼다.

얼마 가지 않아.

둥, 둥.

북을 두드리는 것 같은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시문은 즉시 몸을 낮추며 감각을 끌어올렸다.

"크루룩!"

"크룩!"

작은 왼쪽 통로에서 좀 전과 같은 괴성이 들려왔다.

'드라칸이군.'

시문은 더욱 몸을 낮췄다.

드라칸 자체는 별문제가 아니지만.

'함부로 움직이다간 괜히 상황만 어려워질 수도 있어.'

그게 수십 마리가 되거나, 혹시 모를 숨겨진 아레나 조건에 영향이 가면 곤란했기에.

시문은 최대한 신중히 살피며 움직이려고 했다.

"아악!"

'비명?'

누군가의 비명이 들려오기 전까지 말이다.

따악.

시문의 손가락이 튕겨진다.

가슴 중앙에서 흘러나온 연성력은 순식간에 [블랙팬서의 신체조직]이 되어 시문의 하체를 달궜고.

타다닥!

시문은 빠르게 비명이 들려온 통로를 질주했다.

불과 몇 초 지나지도 않아.

"쿠룩! 이걸로, 마지막."

"쿠룩! 재밌다!"

통로를 가득 채우는 세 마리의 드라칸이 눈에 들어왔다.

그중 하나는 피 묻은 양날 도끼를 높이 치켜든 상태였다.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주변에 낭자한 핏물로 보아, 도끼의 목표는 방금 비명을 지른 이일 테니까.

"음."

시문의 인상이 슬쩍 찌푸려진다.

24%의 완성도를 지닌 [블랙팬서의 신체조직]이라곤 하나.

드라칸의 도끼가 떨어지기 전에 저곳까지 도달한다는 건 무리였다.

'그렇다면....'

따악.

또 한 번 튕겨지는 손가락.

그에 호응하듯.

깔끔하게 다듬어진 바닥이 연성 특유의 스파크를 머금으며 솟아올랐고.

푸욱.

도끼를 높이 치켜든 드라칸의 가슴을 관통했다.

"쿠, 쿠룩?!"

"무슨!"

옆에서 낄낄거리던 두 드라칸이 화들짝 놀란다.

이어.

콰득.

오른편에 있던 드라칸의 머리통이 섬뜩한 소리와 함께 버려진 캔처럼 일그러졌다.

천장에서 연성된 돌기둥이 머리통을 내려찍은 것이다.

"이, 인간!"

홀로 남겨진 드라칸이 이제야 상황을 눈치채고는 급히 도끼를 휘둘렀다.

과연 오크를 뛰어넘는 완력의 소유자인 만큼, 큼직한 양날 도끼가 쏜살같이 날아들었지만.

터억.

"쿠룩?!"

바위에 가로막힌 듯 꼼짝도 하지 않는 양날 도끼.

아니, 움직이긴 했다.

"이, 이게...."

정확히는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칭해야겠지.

제 팔에 3분의 1도 되지 않는 앙상한 팔에 가로막힌 채 말이다.

"역시 드라칸이라 이건가? 좀 흔들리는 감이 있네."

도끼 자루를 쥐고 있는 인간은 여유롭게 씨익 웃고는.

따악.

반대편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꾸드득.

"키아아악!"

어마어마한 통증이 드라칸의 팔을 옥죄어 온다.

시선을 돌리자.

어느새 구렁이처럼 변해 버린 도끼 자루가 드라칸의 두터운 팔뚝을 쥐어짜 내고 있었다.

그 위론 독이 바짝 오른 뱀 대가리인 양 머리를 치켜든 도끼날이 보였고.

"잘 가라."

콰직.

그게 드라칸이 본 마지막 장면이었다.

[지속적인 고난도의 다중 연성을 성공시켰습니다.]

[연성력이 1 증가합니다.]

반가운 메시지창을 확인한 시문은 머리가 쪼개진 드라칸을 내려다봤다.

'꼴에 특수 아레나라고, 저번 홉고블린 때처럼 몬스터의 능력치 너프는 없는 모양이네.'

최하급 용족인 드라칸인데도.

두 배나 강해진 인체 연성을 상대로 힘겨루기를 할 줄이야.

거기에다 지난 레벨업으로 얻은 잔여 스탯 5를 몽땅 연성력에 투자한 상태인데 말이다.

"과연 용족은 용족인가."

시문도 천마신공까진 운용하지 않아, 전력을 쏟은 것은 아니라지만.

드라칸의 완력은 확실히 인정해 줄 만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감탄은 시문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와... 미친! 이거 실화임?

-이 사람 전투계 아니었어? 마법계야?

-보니까 또 손가락 튕기던데. 특성 아닐까요?

-바닥이랑 무기 변하는 거 못 봄? 대체 어느 특성이 저런 능력을 보여 줌?

-ㅇㅇ. 저건 무조건 마법임.

불타오르는 채팅창.

무리도 아니었다.

지난 돈킹과의 전투부터 지금까지.

시문은 오로지 육체만을 사용해 싸워 왔으니까.

특히나.

-진심 아까 지형이랑 무기 변하는 건 마법이랑 아무 연관 없음.

-동감. 나 골드 마법곈데, 저거 마법이라 부르기도 좀 이상한 형태임.

-ㄹㅇ. 근데 캐스팅이나 시동어도 없는 걸 보면, 마법으로 보는 것 자체가 무리임.

-아마 정령술 같은 부류겠죠. 그쪽은 캐스팅 안 하잖아요.

플레이어로 보이는 이들의 채팅창이 우수수 올라오며, 저마다 토론을 이어 갔다.

'뭐야? 채팅창 불났네.'

이번엔 채팅창을 확인할 여유가 있었던 시문.

그는 빠르게 채팅창을 훑었다.

'음. 나올 수 있는 의문들이긴 한데....'

-방구석 다이아들 입 개터네.

-니들이 뭐 아냐?

-마법이 아니란다 ㅋㅋㅋ. Xㅋㅋ 기가 차서 진짜.

엄청난 속도로 올라가는 채팅창은 점점 열기를 띠며 거친 말들로 점철되어갔다.

시문은 이 뜨거운 채팅창을 어느 정도 관리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하지만 관리할 매니저가... 아니다. 이런 건 내가 직접 식혀야겠어.'

세 성좌를 떠올린 시문은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여러분. 저 전투계 아니고 마법계입니다."

-레알?

-거봐, 정령술 맞네.

"정령술은 아닙니다."

-아니라는데?

-그럼 대체 뭐임? 님 캐스팅도 없이 마법 썼잖아요!

-님 특성이 뭐예요?

-이분 버그 같은 거 쓰는 거 아님?

하지만 역효과였는지.

채팅창은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물론 오래가지는 않았다.

-왜 말해 줘도 지X임? 손가락 튕기는 게 캐스팅 관련 특성일 수도 있잖음?

-어이가 없네. 니들은 누가 특성 까라 하면 쉽게 까냐?

-입 터는 애들 중에 각성자 몇이나 될라나.

-버그란다 ㅋㅋㅋ. 각성 안 해 본 티 풀풀 나쥬?

-다른 건 참겠는데 버그무새는 좀 역겹네. 한강 ㄱ.

각성자들 사이에서는 지인이나 길드가 아니면서 정보를 요구하는 건 엄연한 무례.

그것을 아는 플레이어들이 성을 낸 것이다.

결국 플레이어가 우선시되는 세상인 만큼.

채팅창에서도 플레이어들의 목소리가 더 클 수밖에 없었고.

-아니면 아니지, 왜케 예민함?

-좀 물을 수도 있지 ㅅㅂ. 차별 X나 하네.

-각성 우월주의 오짐 ㅋㅋ.

비각성자인 이들은 숙일 수밖에 없었다.

각성 여부도 그렇지만, 일단 전문성부터 진짜 플레이어보다 밀리니까.

[나는야골드 님이 AP 500을 후원하셨습니다.]

=다들 매너 채팅합시다. 각성 여부를 떠나서 개인 정보 묻는 건 실례잖아요.

후원까지 겹쳐지자 불타던 채팅창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시문은 채팅창의 분위기가 어색하지 않도록.

"자자, 다들 진정하시고. 특성까지 밝힐 순 없지만, 계통은 확실히 말씀드릴게요. 저 마법계 맞습니다."

-이걸 답해 줘? 개스윗하네.

-굳이 답 안 해 주셔도 되는데... 그래도 궁금증 풀어 줘서 꺼마워영!

-ㄱㅅㄱㅅ.

"하하! 아닙니다. 충분히 궁금해할 수 있는 상황이잖아요."

부드럽게 웃으며 대충 분위기를 마무리 지었다.

[가능충 님이 AP 100을 후원하셨습니다.]

=세상에 마법계래! 나 진짜 가능해, 형!

물론 마지막 후원에는 답하지 않았다.

"그럼 계속 진행하겠습니다."

한숨 돌린 시문은 드라칸들이 공격하던 생존자를 향해 다가갔다.

오기 전부터 드라칸들의 소행이 시작되었던 것일까?

주변엔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피와 살점이 낭자해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 사이에서.

"으...."

'이자는!'

신음을 흘리는 생존자를 확인하곤 눈을 부릅떴다.

제28화

28화. 특수 아레나 (3)

"드워프?"

몇 년 후에나 등장하는 이종족인 드워프.

그것도 꽤 어려 보이는 드워프가 피투성이로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입장 아이템에....'

입장 아이템인 [도리아의 미스릴 광석]엔 분명 드워프들의 성지라는 정보가 적혀 있었다.

'드워프와 광산, 그리고 용족이라?'

시문은 본능적으로 이 드워프가 이번 특수 아레나의 핵심이라는 걸 깨달았다.

시문은 급히 다가가 어린 드워프의 상태를 살폈다.

"지독하군."

일반적으로 성질이 포악한 용족들답게.

죽기 전 최대한의 고통을 주려 했던 걸까?

어린 드워프의 상태는 말 그대로 엉망진창이었다.

'팔다리는 부러지고 전신에 자상, 왼쪽의 갈비뼈들은 전부 골절이야.'

현자의 돌 역시 드워프의 상태를 꿰뚫어 봤는지.

-오빠, 이건 당장 숨이 끊어져도 이상할 게 없는데? 그냥 다른 생존자를 찾는 게 어때?

부정적인 목소리를 내었다.

하나.

"그럴 순 없어."

시문은 고개를 저었다.

어쭙잖은 동정심 때문이 아니었다.

물론 그런 감정이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걸 빼놓고 보더라도.

'지금까지의 정황상, 이 드워프의 생존이 아레나에 큰 영향을 끼칠 확률이 높아.'

결코 회귀자라는 자만심에서 하는 말이 아니다.

현실적으로 실버 랭크에서 자신 정도 되는 플레이어가 아니라면.

아레나 시작 이후 이렇게 빨리 이곳까지 도달하기란 불가능했다.

그 말은 즉.

'본래 이 드워프는 입장한 플레이어를 만나기 전에 죽었어야 하는 인물이란 말이 돼.'

본래라면 주변의 형체 모를 시체들처럼.

자신은 이미 도륙 난 어린 드워프의 시체를 만나야 했을 거다.

이는 뒤집어서 보면.

'절대 살아서 플레이어를 만나선 안 되는 인물이란 뜻이지.'

그 생각을 증명하듯.

[성좌 제우스가 눈을 반짝입니다.]

[성좌 천마가 기대 어린 시선을 보냅니다.]

[성좌 검은 염소가 달뜬 호흡을 내뱉습니다.]

세 성좌들의 관심이 줄줄이 이어지지 않는가?

더 생각할 것도 없다.

시문은 황급히 인벤토리를 열어 일전에 아고라에서 사 둔 재료들을 꺼냈다.

-그걸로 어쩌게? 연금 도구들은 다 두고 왔잖아.

'만들면 되지. 나 연금술사잖아. 잊었냐?'

-아 맞다, 그랬지 참. 요즘 인체 연성에만 신경 쓰길래 잊은 줄 알았지.

현자의 돌의 새침한 말투에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 시문.

그러나 녀석이 연금술에서 존재 의의를 느낀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앞으론 연금술에도 신경 쓸게. 그러니 지금은 여기에 집중하자.'

-진짜지? 약속이야? 검은 염소 그 앙큼한 년한테 넘어가면 안 돼!

'그, 그래.'

검은 염소는 또 왜 경계하는지 이해가 안 갔지만.

시문은 현자의 돌을 가볍게 달래 주며 어린 드워프에 집중했다.

"으으...."

검붉은 핏물과 함께 흘러나오는 힘없는 신음.

그에 시문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 정도면 당장 버틸 체력도 없겠는데...."

포션 제조 도구부터 연성해야 하는 상황이다.

도구를 연성하고 또 포션 제조를 하는 동안, 이 어린 드워프가 생존할 가능성이 과연 얼마나 될까?

'방향을 바꿔야겠어.'

이대론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그렇게 판단을 내린 시문은 재료들을 다시 집어넣고 연성력을 끌어올렸다.

'현자의 돌, 연성 하나만 하자.'

-이 앨 치료할 거로 말이지? 하지만 오빠, 부상이 너무 심각해서 어지간한 연성물론 무리야.

'알아. 그러니 업적 포인트를 사용할 생각이야.'

만일을 대비해 아껴 놓은 업적 포인트.

아까 성좌들의 후원으로 1,000점을 추가로 획득했기에.

시문은 업적 포인트 사용에 거리낌이 없었다.

-그럼 이야기가 다르지. 뭐로 할까?

'일단 외상이 심하니까, 그쪽 관련으로 찾아야겠어.'

시문의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한다.

이내 어렵지 않게.

시문은 현 상황에 알맞은 연성물을 떠올릴 수 있었다.

'존윅. 그의 지팡이면 되겠어.'

버프까지 만능이던 성녀만큼은 아니지만.

힐량만큼은 압도적이던 전생의 힐러 랭킹 2위 존윅의 주력기.

정확히는 그를 후원하는 성좌 아스클레피오스의 무구였으나 어느 쪽이건.

존윅을 세계 힐러 랭킹 2위에 오르게 한 치료 아이템임은 틀림없었다.

시문은 즉시 연성력을 일깨우며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현자의 돌?'

-웅! 준비됐어. 그럼 바로 시작할게.

따악.

튕겨지는 시문의 손가락.

이어.

[요구치에 맞는 연성을 이루기에는 연성력이 부족합니다.]

[현자의 돌이 부족한 등가교환을 성립시키기 위해, 업적 포인트 500점을 요구합니다.]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익숙한 메시지창이 눈앞으로 떠오른다.

시문은 요구 업적 포인트를 보곤 입맛을 다셨다.

'제우스보다 하위 성좌일 텐데, 아스트라페와 같은 값이네.'

그런 시문의 아쉬움을 달래듯.

-원래는 오빠 예상대로 아스트라페보단 싼 값이긴 해. 한 300점 정도면 충분하거든.

현자의 돌이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그걸론 이 드워프를 살릴 수가 없어.

'즉, 위력을 높이기 위해서 업적 포인트를 더 썼다는 말이지?'

-응. 사실 이런 거 굉장히 비효율적인 방법인데, 굳이 쓴 이유는... 알잖아?

저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눈치챈 시문은 쓰게 웃었다.

'현재 내 수준으론 정당한 값을 지불하고도, 저 아일 치료할 정도의 완성도는 구현하지 못한다?'

-정확해. 그래서 내가 임의로 값을 좀 조정했어. 다행히도 아주 약간 모자라서 500점이면 되더라고.

'다행이라면 다행인 부분이네.'

본래 연금술사의 수준을 넘는 연성물을 만들어 내려면.

등가교환의 값은 천정부지로 솟기 마련이니까.

'하긴.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직 난 12레벨에 불과하니까.'

압도적인 1등을 놓친 적이 없으며, 플래티넘에서 내려온 버스 기사까지 잡았다.

더불어 이렇게 특수 아레나까지 진행 중이지만, 결국 시문은 12레벨의 플레이어.

일반적인 범주에선 아직 랭크 배치도 끝내지 못한 레벨인 것이다.

그나마 레벨업으로 얻은 잔여 포인트를 모조리 연성력에 몰빵하고.

연성력 관련 보너스들을 지녔기에, 이렇게 500점 선에서 연성이 가능한 것이리라.

'뭐,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지. 지금만 해도 충분히 대단한 성장 속도니까.'

마력불능을 앓던 전생에선 상상도 못 할 상황이다.

문뜩 떠오르는 전생에 피식 웃은 시문은 선택지의 '예'를 터치했다.

파츠측.

소모된 업적 포인트가 부족한 연성력을 더하며 연성 스파크를 튀겨 댔다.

그렇게 1초 정도 지났을까?

우웅.

튕겨진 손가락 위로 아스트라페를 연상시키는 작은 막대가 떠올랐다.

아스트라페와 다른 점이 있다면 하나.

얇은 실과 같은 형태의 뱀이 넝쿨처럼 막대 전체를 휘감고 있다는 것.

시문은 연성물의 정보를 확인했다.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

등급 – 모조품 (33%)

성좌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

죽은 자도 살린다지만, 어째서인지 제힘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한다.

'33%라. 생각보다 완성도가 높네?'

-당연하지. 업적 포인트를 200점이나 더 땡겼잖아. 원래는 25%야.

'25%였다고? 그것도 높은데?'

500점을 소모한 아스트라페의 완성도가 10% 아닌가.

그에 비하면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는 확실히 완성도 자체가 높은 편이었다.

'역시 성좌의 급이 완성도에도 큰 영향을 끼치는 거구나.'

-정확해. 근데 오빠, 그 말은 입 밖으로 꺼내면 안 된다?

현자의 돌이 목소리를 바짝 낮춘다.

시문은 어렵지 않게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성좌 아스클레피오스가 갑작스러운 창조물의 등장에 관심을 보입니다.]

지팡이의 본주인인 성좌 아스클레피오스의 관심이 끌린 탓이었다.

아무리 성좌들 사이에 서열이 존재한다 해도.

그걸 눈앞에서 들어버리면 기분이 상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성좌 아스클레피오스가 쓰러진 환자를 눈여겨봅니다.]

[당신을 인지한 성좌 아스클레피오스의 두 눈이 반짝입니다.]

환자를 치료하기 위한 목적의 연성이기 때문일까?

아스클레피오스는 짙은 관심을 표했다.

'혹시 멋대로 연성했다고 시끄러워질까 했는데, 다행이군.'

그에 시문이 안도를 표하려던 순간.

[성좌 검은 염소가 '눈 깔아라, 아폴론의 애새끼야.' 눈살을 찌푸립니다.]

검은 염소가 불쾌감을 표했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성좌 천마가 '흠흠, 자네가 낄 자리는 없네만... 제우스?' 헛기침을 합니다.]

[성좌 제우스가 '한 번 더?' 아스트라페를 만지작거립니다.]

천마와 제우스 역시 왜인지 어딘가 이상한 반응을 보였고.

[성좌 아스클레피오스가 주변의 성좌들을 보고 화들짝 놀랍니다.]

[성좌 아스클레피오스가 번쩍이는 아스트라페를 보고 황급히 달아납니다.]

아스클레피오스의 관심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뭐야? 방금 아스클레피오스를 내쫓은 거야?'

성좌가 성좌를 내쫓다니?

이 어이없는 상황에 시문은 잠시 눈을 끔벅였지만.

-캬캬! 역시 서열이 벼슬이야. 잘됐네. 앞으로 어지간한 성좌 새끼들은 눈치 안 보고 연성해도 되겠어.

현자의 돌은 낄낄댈 따름이었다.

-자! 오빠? 저런 잡신 따윈 신경 쓰지 말고, 언능 치료나 하자. 애 숨넘어가겠어.

'자, 잡신이라니....'

무려 힐러 랭킹 2위를 만들어 낸 성좌가 아스클레피오스거늘.

그러나 실제로 달아나는 모습을 봐 버린 시문이었기에.

"크흠."

멋쩍은 헛기침을 하며 어린 드워프를 향해 다가갔다.

우웅.

환자에 가까워져서일까.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는 맑은 이명을 내며 반응했다.

특히나 휘감은 뱀 형상은 살아 있는 듯.

지팡이를 계속 휘감으며 이명을 토했고.

화아아아!

보조계들이 사용하는 성력과도 같은 밝은 빛을 내뿜었다.

그러자.

'부상이 말끔히 사라지고 있어.'

드라칸의 도끼에 유린당했던 전신이 빠르게 아물고.

뚜두둑.

부러졌던 팔다리가 순식간에 제자리를 찾으며 아물어 간다.

피투성이였던 어린 드워프가 어느새 안정을 되찾자.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는 작은 입자가 되어 사라졌다.

'경이롭군.'

이보다 더 완벽한 표현이 있을까.

'방송으로 보던 것보다 훨씬 더 경이로워.'

시문은 회귀 전 존윅의 방송에서 보았던 장면을 회상하며 감탄을 숨기지 않았다.

다만.

'페이백이 되지 않는 건 좀 아쉽네.'

비효율적으로 완성도를 높여서일까.

업적 포인트의 반환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런 시문의 아쉬운 속마음과는 다르게.

-미친... 힐도 한다고?

-아니, 주먹 쓰다 마법 쓰다 이젠 힐까지 해?

-보조계님들, 어서 입장해 주세요.

채팅창은 눈앞에서 일어난 놀라운 치유력에 후끈 달아올랐다.

이전과 다른 부분이 있다면.

-대체 저 손가락에 뭐가 있는 거임?

-시문 님, 이쯤 되면 손가락 좀 나눔하시죠.

-무슨 도라에몽이냐고 ㅋㅋ.

-나도 좀 도와줘요! 핑거에몽!

-핑거에몽이랰ㅋㅋㅋ.

이번엔 의심이 아닌 갖은 드립과 웃음뿐이라는 것이다.

예측이 불가능한 시문의 능력에 일종의 해탈을 해 버린 거였다.

안타깝게도.

시문은 그런 채팅창의 반응을 확인할 수 없었다.

"정신이 들어?"

어린 드워프가 정신을 차렸으니까.

"으... 여, 여긴...."

신음을 흘리며 힘겹게 몸을 일으키는 어린 드워프.

시문은 부드럽게 웃으며, 어린 드워프의 등을 쓸어 주었다.

그에 어린 드워프는 놀란 고양이처럼 화들짝 놀랐다.

"으앗! 이, 인간이 여긴 어떻게... 마, 맞아! 드라칸! 드라칸이 쳐들어왔어요!"

"진정해. 지금은 안전하니까."

"예? 그게 무슨...."

대답 대신 뒤편을 턱짓하는 시문.

그에 뒤편에 널브러진 드라칸들을 확인한 드워프는 입을 쩍 벌렸다.

"다, 당신이 다 해치우신 건가요?"

"그래. 이제 안전하니까 일단 진정하고 이야길... 엇!"

와락.

갑작스레 시문의 품으로 파고드는 어린 드워프.

녀석은 시문이 뭐라 말할 틈도 없이.

"제발! 제발 저희 좀 도와주세요!!"

눈물을 글썽이며 외쳤다.

* * *

콰득.

섬뜩한 파육음.

그와 함께 드라칸의 몸이 힘을 잃고 쓰러졌지만.

스륵.

흡사 어린아이가 인형을 가지고 놀 듯.

한 인간 남성은 제 몸보다 몇 배는 큰 거구를 여유롭게 집어 들었다.

따악.

남자가 손가락을 튕기자 통로 벽면이 쩍 벌어졌고.

"읏차."

드라칸의 시체를 벽면 속으로 집어던진 남성은 다시 한번 손가락을 튕겨 감쪽같이 벽면을 덮었다.

그 일련의 과정을 벌써 몇 번이나 봐 왔음에도.

'세상에....'

마르넬은 그저 입을 쩍 벌리며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이내.

"마르넬, 이쪽 맞아?"

"네? 아! 네! 거의 다 왔어요!"

시문의 부름에 정신을 차린 마르넬은 양 갈래 머리를 살랑거리며 총총 뛰어나갔다.

시문은 앞서나가는 마르넬의 어깨를 붙잡았다.

이유는 다름 아니었다.

"마르넬, 길을 잘못 든 거 같은데? 막혀 있잖아."

마치 고의로 뚝 끊어 놓은 것처럼.

앞은 막다른 길이었다.

마르넬은 천진난만한 웃음을 머금었다.

"헤헤! 옛말에 '현명한 드워프는 9개의 굴을 파 놓는다.'라는 말이 있거든요."

그러면서 벽면을 더듬거리는 마르넬.

얼마 가지 않아.

"찾았다!"

그녀가 벽면의 무언가를 누르고, 집어 당기자.

철컥.

금속음과 함께 통로가 미세하게 떨렸다.

"비밀통로?"

"네. 사실 장로급이 아니면 사용해선 안 되는 통로지만, 지금은 비상사태잖아요?"

"하긴. 정문으로 가려면 엄청 오래 걸린다고 했지."

"맞아요. 거기에다 지금은 용족이 쫙 깔렸을 테니... 장로님들도 이해해 주실 거예요!"

목숨의 위협을 받았던 것이 불과 몇십 분 전이건만.

당찬 마르넬의 모습에 시문은 작은 미소를 지었다.

'참 밝고 씩씩한 아이야.'

그런 잔혹한 일을 겪었다면 응당 트라우마라도 생길 법한데.

마르넬은 조금도 겁을 내지 않고 도리어 시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부디 저 아이의 희망이 유지되었으면 좋겠는데....'

마르넬이 요청한 도움은 다름 아닌 광산 핵심부로의 진입.

드워프들은 거주지만이 아니라, 광산에도 방어 시스템을 구축해 두는데.

그 모든 동력을 담당하는 것이 바로 광산의 핵심부라는 이유에서였다.

당연히.

'특수 아레나의 클리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겠지.'

드르륵.

점점 벽면이 열리며 어느새 문이 되어 버린 벽.

"열렸다! 이제 방어 시스템만 재가동하면 드라칸 놈들도 함부로 설치지 못할 거예요."

마르넬은 밝은 목소리로 광산 핵심부를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하나.

"그럼 강철 모루의 지원군을 기다리기만 하면 돼요. 어쩌면 소식을 들은 예민 귀쟁이들도...."

밝고 명랑했던 마르넬의 목소리가 점차 사그라든다.

그럴 수밖에.

"아...."

온갖 굵고 짧은 파이프들을 연결하고 있는 중앙의 구조물.

누가 봐도 이곳의 핵심으로 보이는 거대 구조물이 반쯤 부서져 있는 것이다.

"아, 안 돼!"

마르넬은 다급히 다가가 반파된 구조물을 살폈다.

정확히는.

"제발 핵은! 핵만이라도 무사해야!"

부서진 구조물을 파내고 있다고 해야겠지.

파내다 못해 구조물 속으로 파묻히던 마르넬의 움직임이 뚝 멈춘다.

이내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털썩 주저앉았다.

"핵이...."

'저게 핵인가?'

그녀의 손에는 핵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돌 조각이 쥐어져 있었다.

'저 정도면 복구도 어렵겠어. 역시 쉽게 가는 법은 없네.'

그것을 가만 보던 시문은 고개를 갸웃했고.

'잠깐. 묘하게 낯이 익은 형탠데... 아!'

무언가가 떠오른 듯.

급히 인벤토리를 열었다.

그러곤.

"다 틀렸어... 이제 우린 다 죽을 거야! 우린 다...."

"마르넬. 그 핵이라는 거, 혹시 이거야?"

망연자실한 마르넬의 앞으로 지난 아레나에서 얻은 클리어 보상.

[힘을 잃은 광산핵]을 내밀었고.

"어? 어어어어억?!!"

죽어 가던 마르넬의 눈과 목소리가 찢어질 듯 커졌다.

제29화

29화. 특수 아레나 (4)

'설마 [힘을 잃은 광산핵]이 이곳에서 쓰일 줄이야.'

힘을 잃은 광산핵.

상황이 이렇게 맞아떨어져서 특별해 보일 뿐.

-아니, 저게 여기서 쓰이는 아이템이었어?

-ㅅㅂ! 나 저거 얻는 족족 다 버렸는데!

사실 힘을 잃은 광산핵은 흔하디흔한 재료템.

즉, 잡템으로 치부되는 아이템이었다.

-여기니까 쓰이는 거죠. 우리한텐 의미가 없어요.

-ㅇㅇ. 애당초 여기 입장 아이템을 먹어야 사용이 되는 거임.

-ㄹㅇ. 근데 이분은 어쩜 이렇게 아다리가 딱딱 맞냐?

-걍 운빨이지 뭐. 갤럭시 아레나가 이러는 거 하루 이틀도 아니고.

시문은 채팅창을 흘낏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건 정말 내 운이 좋았던 거지.'

힘을 잃은 광산핵.

이름 그대로 힘을 잃었기에.

특별한 공정을 거치지 않으면 F급 재료 아이템보다 못한 잡템이 광산핵이었다.

반대로 시문과 같이 특별한 공정이 가능한 이들은 쓰려면 쓸 수 있는 아이템이기도 했다.

굳이 분류하자면 마력석에 속하니까.

'그래서 나중에 쓰려고 처분하지 않았던 건데....'

그게 특수 아레나에 쓰이는 아이템이었을 줄이야.

시문은 작은 두 손으로 [힘을 잃은 광산핵]을 꼭 쥐고 있는 마르넬을 바라봤다.

그녀는 연신 광산핵을 주물럭거리며 살피더니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은인, 핵심부에 쓰이는 광산핵과 이상할 정도로 유사하지만... 이건 쓸 수가 없겠네요."

시문은 그 이유가 짐작이 간다는 말투로 답했다.

"광산핵에 마력이 없어서지?"

"맞아요. 정확히는 마력이 아닌 지력(地力)이에요. 광산핵은 지력의 결정체거든요."

"호오? 그래?"

그건 또 처음 알았다.

보통 [힘을 잃은 광산핵]은 마력 보충을 베이스로 정제하기 마련인데.

'지력이라? 그럼 땅과 관련된 기운을 부여하면 진짜 광산핵의 능력을 알 수 있겠네.'

-ㅁㅊ! 마력이 아니라 지력이었음?

-대박! 한동안 가격 폭등하겠네 ㅋㅋ.

-시문좌... 이런 걸 그냥 알려 줘도 됩니까!

시청자들 역시 놀랐는지 채팅 알림이 멈추지 않고 반짝였다.

하지만 시문은 광산핵의 정보가 알려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전혀 없었다.

'내가 얻는 게 더 많으니까.'

특수 아레나 방송이 인기가 많은 이유가 바로 이런 정보들 때문이 아니던가?

시문은 시청자 수를 힐끗했다.

[8,546명 시청 중]

방송 시작 당시 2천 명이었던 시청자는 어느새 8천이 넘어가는 상태.

더불어 몇 초마다 수십 명의 시청자들이 유입되고 있는 상황이다.

'정보가 공유되는 대신 방송에서 오는 여러 수익과 업적을 클리어할 수 있으니.'

더불어 회귀 전 자신이 저 시청자들의 입장이었던 만큼.

어지간한 특수 아레나발 정보들은 대부분 꿰고 있는 시문이었다.

즉.

'나로선 잃을 게 없지.'

작게 웃은 시문은 슬슬 날아올 후원을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나는야골드 님이 AP 2,000을 후원하셨습니다.]

=시문좌... 정보 풀어 주셔서 감사하무니다. ㅜㅜ

[심해학살자 님이 AP 10,000을 후원하셨습니다.]

=장갑 맞추려던 거 그냥 다 후원함! 정보 ㄱㅅ!

[가능충 님이 AP 500을 후원하셨습니다.]

=형! 나 진짜 가능해졌어!

[dlrjfclrpTdj 님이 AP 700을 후원....]

줄줄이 이어지는 후원들.

1만 AP부터 100AP까지.

다양한 액수의 후원들이 밀려들었다.

아마 결산해 보면 상당한 양이 될 터.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생산계협회 님이 AP 100,000을 후원하셨습니다.]

=재료 아이템의 정보를 공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제 협회 한번 방문해 주세요!

이러한 상황에 꼭 등장해, 후원과 방문 메시지를 날리는 대표적인 세력.

생산계협회가 후원을 보낸 것이다.

액수를 확인한 시문의 눈이 조금 커졌다.

'10만 AP라니? 생각보다 큰데?'

이들의 후원을 진즉 예상하고 있던 시문이었으나.

10만 AP라는 액수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광산핵이 이만한 가치가 있나?'

보통 [힘을 잃은 광산핵]은 정제를 거쳐도 E급 마력석 대용으로밖에 쓰지 못하는 아이템이거늘.

지금까지 누적된 생산계협회의 후원 행보를 돌아보면.

10만 AP는 최소 C급 이상의 재료 아이템에 해당하는 정보여야 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그렇구나.'

시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방송을 생산계협회의 누군가가 실시간으로 보면서 바로 확인해 본 거야.'

그리고 힘을 잃은 마력핵은 C급의 아이템으로 변해 생산계협회에 알렸겠지.

[업적 '100,000AP 후원받기'를 달성하셨습니다.]

[업적 포인트 500점을 획득합니다.]

[업적 '시청자 10,000명 돌파하기' 달성하셨습니다.]

[업적 포인트 1,000점을 획득합니다.]

일련의 업적창들이 줄지어 시문의 눈앞으로 떠오른다.

그중 시청자 '10,000명'이라는 문구에 시문은 놀란 눈으로 시청자 수를 확인했다.

[11,846명 시청 중.]

'뭐야? 벌써 만 명이 넘었네?'

힘을 잃은 광산핵의 정보 때문일까?

어느새 시청자는 만 명을 가뿐히 넘어가고 있었다.

'과연, 특수 아레나가 대단하긴 하네.'

자꾸 올라가는 시청자 수는 마치 급등하는 주식처럼 눈을 떼기가 힘들었다.

'정신 차리자, 김시문! 아직 아레나 중이야.'

시문은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풀이 죽어 있는 마르넬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곤 마르넬이 쥐고 있는 힘을 잃은 광산핵 위로 손을 올렸다.

"은인?"

"마르넬, 아직 기회는 있어."

"하지만 은인! 이 광산핵으론...."

"그건 내가 충분히 정상화할 수 있어. 걱정하지 마."

"그, 그게 정말이세요?"

마르넬은 놀란 토끼 눈으로 시문을 바라봤다.

힘을 잃은 광산핵을 정상화시킬 수 있다니?

하지만 시문은 별다른 설명 없이.

"그래. 그러니 넌 저걸 맡아 줄래? 광산핵을 쓰려면 결국 저 장치가 필요한 거잖아."

부서진 구조물을 가리킬 뿐이었다.

그에 마르넬은 글썽이는 눈으로 부서진 구조물과 시문을 번갈아 보더니.

"조, 좋아요! 지력 엔진이 완전히 부서진 것도 아니니까, 수리 정도는 할 수 있어요!"

어느새 본래의 밝은 모습으로 돌아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땅!땅!

마르넬이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망치와 도구들로 지력 엔진을 수리하는 사이.

'현자의 돌.'

시문은 현자의 돌에게 물었다.

'넌 알고 있었지? 힘을 잃은 광산핵이 마력이 아니라 지력으로 작동한다는 거.'

-웅웅! 당연하지. 참고로 왜 말 안 했냐고 하지 마. 난 오빠가 그거 쓸 때 알려 주려고 했다?

'탓하려는 게 아냐. 그냥 왠지 너라면 알고 있었을 거 같아서 물어본 거야.'

연성물에 관해선 모르는 것이 없는 현자의 돌.

그러나 이따금 녀석이 하는 말들을 들어 보면 연성 외에도 아는 지식들이 많아 보였다.

-헤헤! 내가 말했잖아. 나 지적인 여자라고.

'그래그래. 어쨌든, 이거 복구 가능한 거지?'

-물론이지! 연성력으로 지력을 연성해서 충전해 주면 금세 본 모습을 되찾을 거야.

'연성력으로 기운을 연성해서? 그런 것도 가능해?'

-모든 기운을 연성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지력 같은 흔한 기운은 가능해.

그 말에 시문은 헛웃음을 흘렸다.

이거 어쩌면.

'핑거에몽이라는 드립이 진짜가 될 수도 있겠는데.'

실없는 생각에 고개를 저은 시문은 연성력을 끌어올렸다.

'그럼 시작하자.'

-웅! 지력의 구조는 되게 단순하거든? 오빠라면 금방 캐치할 거야. 자!

본래 알고 있었던 것처럼.

시문은 머릿속으로 흘러드는 지력의 구조에 작게 탄식했다.

'정말 땅 그 자체의 기운이구나.'

기운이라 그런 것일까?

뭐라 콕 집어 형용할 순 없었으나, 지력에 대한 이해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 느낌을 따라 연성력을 운용하자.

우우웅.

손에 들린 힘을 잃은 광산핵이 작은 이명을 토하기 시작했다.

지력이 차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점차 노란빛을 머금더니, 잘 익은 과일처럼 진한 색을 띠고 나서야 울림이 멈췄다.

시문은 곧바로 정보창을 확인했다.

[광산핵]

등급 : C

지력의 결정체. 드워프들의 기술로 자체 회복 능력을 지녔다.

-주변 광물량에 따라 소모된 기운을 회복한다.

'자체 회복이라... 이래서 동력원으로 쓰는 거구나.'

드워프들의 영역에서 광물이란 곧 식수원과 같으니.

굉장히 효율적인 동력원이었다.

시문은 되살아난 광산핵을 들고 마르넬에게 다가갔다.

어린 나이 때문에 일반적인 드워프보다도 더 조그마했지만.

투다다닥!

"흐럇!"

드워프라는 것을 증명하듯.

그녀의 손보다 두 배나 큰 망치를 장난감인 양 다루고 있었다.

"어라? 은인, 제가 도와드릴 게 있나요?"

시문을 발견한 마르넬은 이마의 땀을 슥 훔쳤다.

시문은 대답 대신 노랗게 빛나는 광산핵을 들어 올렸다.

"벌써 해결하셨군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에 얼굴이 확 밝아진 마르넬의 움직임은 더욱 빨라졌다.

이윽고.

콰쾅!

"저도 끝! 이제 광산핵을 넣기만 하면 돼요!"

폭음과 함께 수리를 마친 마르넬은 온전해진 지력 엔진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그를 본 시문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런 근력이면 드라칸도 상대 안 될 거 같은데...."

"네?"

"아, 아니야. 광산핵은 어디에 넣을까?"

"저기 중앙에 홈 보이시죠? 그쪽에 넣으면 엔진 중심부까지 알아서 들어갈 거예요."

고개를 끄덕인 시문은 곧바로 지력 엔진의 중앙에 광산핵을 넣었다.

데구루루.

내부는 경사로 이루어져 있는지 돌 굴러가는 소리가 들려왔고.

지력 엔진이 점점 떨리기 시작하더니, 끓는 주전자처럼 덜컹거리기 시작했다.

이내.

치이익!

엔진 상층부에서 허연 김이 힘차게 뿜어진다.

그를 본 마르넬은 반짝이는 눈으로 폴짝폴짝 뛰었다.

"다행이다! 제대로 작동하나 봐요!"

그 말과 함께.

쿠르르르르르.

이곳을 기점으로 거대한 떨림이 이어졌다.

떨리는 강도로 보아 아마 광산 전체가 떨리고 있으리라.

이어.

철컥.

정문으로 보이는 곳과 사방의 벽면이 움직이며, 금속 물체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저건...."

그걸 본 시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포?"

"정확히는 경계 포탑이라고 하죠. 여긴 지력 엔진이 있는 중요한 곳이니까요."

"하지만 톱날 같은 것도 보이는데...."

"포탑으로 해결되지 않는 침입자들을 처리하기 위한 근접 절단 기기예요. 포탑과 한 쌍으로 늘 설치해 두는 녀석이죠."

제 발명품을 만난 공돌이, 혹은 공순이가 떠오른다면 착각일까.

"그리고 저건 초고열 칼날이에요! 그 질긴 트롤도 저거 한 방이면...."

마르넬은 굳이 묻지도 않은 방어 시스템과 기술들을 줄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녀의 톤이 높아질수록, 지력 엔진이 내는 진동은 더욱 커져 갔고.

"...해서 이곳의 방어 시스템이 모두 가동되면! 광산 역시 방어 시스템이 가동되고!"

마르넬은 밝고 명랑한 얼굴로 마무리하듯.

짝.

"등록되지 않은 이들을 공격하게 된답니다?"

박수를 치며 설명을 끝마쳤다.

그녀의 말대로 방어 시스템이 성공적으로 작동하는 걸까?

끄아아악!

크르륵!

용족의 것으로 예상되는 비명이 사방 천지에 메아리쳤다.

아마 광산 통로 곳곳에 설치된 저 포탑과 칼날들이 침입자를 해체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 비명을 피날레 삼아.

[특수 아레나 '열띤 광산의 악몽'을 상상치도 못한 형태로 클리어하셨습니다.]

[이번 아레나의 클리어로 결정된 운명이 크게 뒤바뀝니다.]

[해당 클리어의 여파로, 모든 아레나에서 '폐광' 관련 맵이 삭제됩니다.]

아레나의 클리어를 알리는 시스템창이 눈앞으로 주르륵 올라왔다.

그중 가장 시선을 끄는 내용은 바로 맵 삭제였다.

'폐광 맵이 삭제된다고?'

당연했다.

지구의 멸망까지 살았던 시문이었지만.

맵의 삭제는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으니까.

아니, 딱 한 번 있긴 했다.

'시혁이가 숲 관련 특수 아레나를 클리어했을 때였지?'

악명 높은 맵인 '저물어 버린 숲'.

거대한 숲으로 이루어진 이곳은 상식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변덕스러운 기후는 물론.

타락해 버린 정령부터 야수, 엘프 등 강력한 몬스터들까지 더해진 최악의 맵 중 하나였다.

'보통 매칭되면 죽었다 봐야 하는 맵 중 하나였지.'

그러나 최고 플레이어 중 하나인 동생 놈은 결국 메인 목표인 용족과 그 근원을 처리함으로써.

'저물어 버린 숲'이라는 맵을 아예 없애 버린 적이 있었다.

하나 이는 정규 아레나가 시작되고도 몇 년이나 지난 후의 일.

지금은 정규 아레나마저 시작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런데 벌써부터 맵 삭제라니... 이거 좀 싸한데?'

시문은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고.

[갤럭시 아레나가 긴급회의를 소집합니다.]

[의회에서 이번 일을 빌미로 그간 이어진 플레이어 김시문의 안건에 종지부를 요청합니다.]

[과반수 이상의 의원이 동의를 합니다.]

[다음 아레나 클리어 시, 그간의 논의에 대한 결과가 공표됩니다.]

시스템은 불안감만 더해지는 문구들을 늘어놓았다.

그뿐만 아니었다.

[성좌 검은 염소가 '캬하핫! 드디어 내 아가가 일을 냈네? 그 망할 파충류들이 거품을 물겠어!' 대소를 터뜨립니다.]

[성좌 천마가 '마냥 기뻐할 일은 아닐세. 놈들이 움직이면 어쩌려고?' 걱정을 표합니다.]

[성좌 검은 염소가 '그 겁 많은 놈들이? 퍽이나!' 빈정거립니다.]

[성좌 제우스가 '하긴, 반칙만 써 대는 버러지들에게 그럴 용기는 없겠지.' 고개를 끄덕입니다.]

세 명의 상위 서열 성좌들이 이번 클리어로 심상치 않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성좌 검은 염소가 '난 제발 용기 좀 내줬으면 좋겠어. 그럼 우리에게 인과가 부여될 테니.' 섬뜩한 미소를 짓습니다.]

[성좌 제우스와 천마가 '그럼 그날이 용계의 마지막이 되겠지.' '그렇군. 허헛! 부디 놈들이 미치길 빌어야겠구먼!' 잔혹하게 웃습니다.]

'인과? 용계?'

이해할 수 없는 단어들에 시문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대충 두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번 일로 내가 용제의 타깃이 될 수도 있다는 거군.'

그리고 인과라는 것 때문인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것도 말이다.

그렇다고 싸한 느낌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거기까지.

'어차피 대륙성과 그 검붉은 눈알과 싸울 마음을 먹은 상태야.'

이미 거대한 적들을 목표로 둔 상태이기에.

용제 하나 더해지는 것이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성좌 검은 염소가 '이번 일로 확실해졌어. 이 아인 가능성이 있어.' 당신을 보며 입술을 적십니다.]

[성좌 천마가 '동감일세. 허헛! 무르익을 때가 기대되는군.' 당신을 보며 만족스럽게 웃습니다.]

[세 명의 성좌가 당신의 활약에 굉장한 만족감을 표합니다.]

[세 명의 성좌가 업적 포인트를 5,000점을 후원합니다.]

'5, 5,000점!'

금융 치료.

아니지.

업포 치료라 불러야 할 성좌들의 후원은 작은 긴장감마저 날려 버렸다.

그때.

"은인!!"

흐뭇해하는 시문의 귓가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르넬이었다.

"어, 어떻게 된 거예요? 은인의 몸이!"

그녀는 울상인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고.

시문은 대번에 상황을 파악했다.

'아레나가 끝나도 상황이 멈추지 않은 거로군.'

특수 아레나라 그런 것일까?

기존의 아레나와 다르게 아레나가 끝나고도 상황은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시문은 차분히 답했다.

"별거 아냐.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는 거지."

"그런...! 아니, 아니지. 이게 맞긴 하겠네요."

마르넬은 자조적인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용족의 기습만큼이나 갑작스러웠던 것이 은인의 등장이다.

그가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하지만.

'난 드워프야. 드워프는 은혜를 잊지 않아!'

드워프의 핏줄에 새겨진 정신은 마르넬의 입을 움직였다.

"그래도 은인, 부디 이름만이라도 알려 주세요."

그에 시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시문. 김시문이라고 해."

"김시문...."

"그럼 마르넬, 잘 지내."

이젠 형체마저 흐릿해진 시문은 마지막 인사와 함께 사라졌다.

철컥, 덜컹!

방어 시스템의 요란한 기계음만 맴돈다.

차갑고 딱딱한 철만이 가득한 이곳에서.

"김시문... 김시문...."

양 갈래 머리의 소녀는 몇 번이고 같은 말을 곱씹었다.

제30화

30화. 기미 (1)

"그럼 여러분들, 전 이만 방종하겠습니다!"

-앙대! 가지 망!

-오늘 방송 개알찼음!

-시문 님. 정보 너무 감사해요.

-시바~ 욕 아님. 작별 인사임.

수많은 채팅들을 뒤로하고.

"후아!"

고글을 벗은 김시문은 깊은 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시청자가 많으니까 하나하나 반응하는 게 힘들긴 하네.'

과거 시청자였던 입장이었기에.

저도 모르게 시청자들의 인사 하나하나 호응해 준 것이다.

'왜 시청자가 많을수록 채팅창을 많이 신경 쓰지 않는지 알겠어.'

어그로나 분탕들쯤이야.

이미 산전수전을 다 겪은 시문에게 큰 타격을 주지 못했다.

하지만 이 많은 채팅을 하나하나 반응하는 건, 확실히 쉽지 않은 일이었다.

뭐, 어쩔 수 없었다.

'최대 시청자 수가 18,000명이나 나올 줄 누가 알았겠냐고....'

아레나를 클리어하고 시청자 수를 봤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아무리 특수 아레나라도 아직 심해 랭크의 방송이고.

[힘을 잃은 광산핵]의 정보도 후반부에나 풀린 걸 고려하면, 정말이지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하나.

'오히려 채팅 하나하나에 반응해서 더 몰려드는 느낌인데....'

이상과 현실은 늘 다르다.

아레나를 끝낸 후.

그렇게 많은 시청자들을 일일이 상대해 주는 건 상당히 버거운 일이었다.

고로.

'아쉽지만 앞으로 좀 자중해야겠어. 방종 BGM이랑 배경도 빨리 준비하고.'

그렇게 다짐한 시문은 얼른 시야 한편에 밀어 놓은 시스템창을 열었다.

[특수 아레나 '열띤 광산의 악몽'을 상상치도 못한 형태로 클리어하셨습니다.]

[업적 '특수 아레나 최초 클리어'를 달성하셨습니다.]

[업적 포인트 1,000점을 획득합니다.]

[정해진 클리어가 아닌 새로운 형태로 클리어했기에, 그에 걸맞은 보상을 새로 조정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내용을 확인한 시문의 눈가가 슬쩍 처진다.

업적 클리어 보상을 제외하곤.

어떤 보상도 들어오지 않은 것이다.

그래도 보상을 안 주는 것도 아니기에.

'상상치도 못한 형태라?'

시문은 차분히 시스템창을 살폈다.

'저 말은 지력 엔진을 복구하는 걸 아예 예상하지 못했다는 말인데....'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던 시문의 입가가 호선을 그린다.

'역시, 마르넬을 살리는 건 제대로 된 선택지였나 보군.'

특수 아레나는 안배해 놓은 클리어 조건들을 달성할수록 보상이 커지는 구조다.

하지만 아무리 잘난 갤럭시 아레나라도.

실버 랭크가 이렇게 빠르게 드라칸들을 처리할지는 몰랐을 것이고.

당연히 마르넬이라는 드워프가 살아남는다는 시나리오는 예상하지 못했겠지.

'애당초 마르넬이 살아나지 않았다면, 지력 엔진이 있다는 것 자체를 몰랐을 테니까.'

입장한 플레이어가 방금 죽은 따끈한 시체를 만나 충격을 받는 것.

그것이 갤럭시 아레나가 바랐던 그림이었으리라.

아니면.

'특수 아레나는 일반 아레나처럼 자기들이 멋대로 조정할 수 없는 분야거나.'

상당히 신빙성이 있는 추측이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행했던 클리어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일반 아레나에서 가끔 행해 온 '개입'을 했었을 테니 말이다.

그런 시문의 마음을 느낀 것일까.

-참 나. 오빠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각이 부족하단 말이지.

가슴에서 낭랑한 이명이 울렸다.

현자의 돌이었다.

"무슨 뜻이야?"

-생각해 봐. 이번 아레나에서 오빠는 정해진 결과가 아니라, 아예 새로운 클리어 결과를 도출해 버렸잖아.

"그런데?"

-어머! 이 오빠 봐라? 그런데라니! 오빠는 이번 클리어를 대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거야?

"그냥 뭐... 창의적인 클리어다, 정도?"

-거봐. 오빠는 역시 자각이 부족해.

기가 차는 걸까.

현자의 돌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에 시문은 대번에 눈치를 챘다.

"현자의 돌, 너 이번 아레나에 관해서 뭔가 알고 있구나?"

-당연하지. 참고로 말해 주지는 못해.

"뭐? 왜?"

-그게 인과랑 관련돼서 좀 복잡한데... 아잇! 그냥 쉽게 말하자면, 이걸 언급하는 순간 저쪽에서 이득을 보는 구조라 보면 돼.

참으로 어이없는 답.

하지만.

'그러고 보니 성좌들도 인과를 거론했었지.'

아까 성좌들의 대화를 기억하고 있는 시문은 별다른 물음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아직 보상은 못 받았지?

"그래. 조정 중이란다."

-있잖아. 오빠 생각보다 이번 클리어는 꽤 큰일이거든? 그래서 말인데....

말끝을 흐리는 현자의 돌.

녀석은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빠가 먼저 보상을 요구해 보는 건 어때?

"내가 먼저?"

시문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럴 수밖에.

갤럭시 아레나 측에 보상을 먼저 요구해 본다는 발상은 아예 해 본 적이 없는 것이다.

아마 저~기 위에 노는 천상계 플레이어들도 마찬가지일 거다.

-응. 평소라면 불가능할지 몰라도, 지금은 이룬 게 있잖아?

"네 말을 듣고 보니...."

꽤나 그럴싸한데?

갤럭시 아레나가 이렇게 요란 떠는 모습은 분명 전생에도 본 적이 없었다.

-일단 말이나 던져 봐. 아마 좋다고 달려들걸?

"그럴까?"

-그럼! 지금쯤이면 '이걸 주면 너무 적나? 이건 너무 과하나?' 이러고 있을 게 뻔해. 보기보다 쫌생이 새끼들이거든.

현자의 돌의 말에 시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보상에 고민이 크다면 내가 요구한 걸 들어줄 수도 있겠네.'

새로운 시각에 눈을 뜬 시문은 당장이라도 갤럭시 아레나 측에 요구하고 싶었지만.

"으음...."

턱을 괴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뭘 요구해야 하지?"

일단 특수 아레나의 본래 보상조차 알지 못하는 시문이다.

더불어 특수 아레나라곤 하나 결국 실버 랭크대의 아레나.

욕심을 부려도 얼마나, 어느 정도까지 부려야 할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때.

-고민할 거 없어. 그거 있잖아, 그거.

"그거?"

고개를 갸웃하는 시문.

이어.

-마침 광산이기도 하고, 원래 우리가 써야 했던 거 있잖아.

"아!"

현자의 돌의 설명에 무언가 떠오른 듯.

시문은 손뼉을 딱, 쳤다.

'그러고 보니 그게 있었구나.'

고민할 필요도 없다.

연금술사의 입장에서 두루두루 쓸 수 있는 만능 아이템이니까.

시문은 즉시 눈앞의 시스템창을 보고 말했다.

"아직 보상이 정해지지 않았다면 따로 원하는 보상을 요구하고 싶습니다."

[조정이 잠시 멈춥니다.]

기다렸다는 듯 반응하는 시스템창.

'역시, 현자의 돌 말대로 어지간히 고민 중이었나 보군.'

그에 작은 미소를 머금은 시문은 곧바로 답했다.

"보상으로 미스릴을 원합니다. 마침 광산 맵이기도 하고, 입장 아이템이기도 했잖아요?"

잠깐의 침묵이 내려앉는다.

몇 초가 지났을까.

[플레이어 김시문의 요구를 받아들입니다.]

예상대로의 답변이 나왔다.

하나.

[이번 특수 아레나의 보상으로....]

"단."

시문은 그에 그치지 않았다.

"지급되는 미스릴은 광석이 아닌 제련된 형태로 주셨으면 합니다. 기왕이면 바의 형태가 좋겠네요."

[요구를 받아들입니다.]

'깔끔하네.'

사실 제련 미스릴의 요구는 약간 도박성이었다.

기본적으로 미스릴 광석과 같은 특수 광석의 제련 과정은 무척이나 까다롭다.

그 과정에서 순수 미스릴이 소모되는 일은 당연히 비일비재.

고로 안정적인 제련 과정을 거쳐야 했고, 그 비용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뭐, 나한테야 그리 어렵지 않지만.'

엘릭서의 재료 중 하나였던 터라.

1레벨의 마력불능이었던 전생에서 홀로 미스릴을 정제했던 시문이었다.

지금은 현자의 돌까지 있으니, 여차하면 업적 포인트까지 털면 되었다.

[특수 아레나 '열띤 광산의 악몽'의 보상을 지급합니다.]

[귀속된 특성 '현자의 돌'이 일정량의 경험치를 분배받습니다.]

[레벨이 10 올랐습니다.]

[현자의 돌 레벨이 8 상승했습니다.]

[클리어 보상으로 '미스릴 바'를 획득합니다.]

[클리어 보상으로 '용혈'을 획득합니다.]

주르륵 올라오는 메시지창들.

그걸 확인한 시문은 입을 떡 벌렸다.

'내 레벨이 낮긴 해도 한 번에 10업이나 할 줄이야....'

심지어 현자의 돌과 경험치를 나눈 것 아니던가?

'일반적인 플레이어였으면 최소 18레벨, 거의 20렙업 가까이 했겠어.'

특수 아레나임을 고려하더라도 어마어마한 수치.

전생을 통틀어 이렇게 폭업을 한 플레이어는 정말 한 손에 꼽을 것이다.

거기에다.

'용혈이라니!'

미스릴만큼은 아니더라도.

마력 전도율이 좋은 재료 아이템인 용혈까지 덤으로 얻을 줄이야.

"흐흐!"

만족스러운 보상에 흐뭇하게 웃는 시문.

그런 시문의 귓가로.

-오빠! 미스릴 바 언능 확인해야지! 이 새끼들 순도로 장난쳤을지 어떻게 알아? 응?!

현자의 돌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시문의 눈이 슬쩍 가늘어졌다.

"현자의 돌 너, 네가 쓰고 싶어서 미스릴 받으라고 한 거 아냐?"

-으, 응? 오호홋! 오빠도 참! 설마 내가 그러겠어?

"정말? 난 당장 미스릴을 쓸 일은 없는데."

-아이참! 다 미래를 위해서지! 자자, 들어 봐.

현자의 돌은 알까?

-미스릴이 얼마나 범용성이 좋아? 연금술 보조부터 도구, 부스팅에 플래티넘부턴 골렘까지! 쓰려면 어디든 쓸 수 있다고!

시문의 가슴 속에 자리한 이상, 작은 떨림도 시문에게 전부 느껴진다는 걸.

고로 현자의 돌의 속내가 훤히 보였지만.

"하긴, 연금술에서 미스릴이 만능이긴 하지."

-그, 그렇지? 그렇다니까! 두고 봐. 내 말 들은 걸 절대 후회할 일은 없을 거야.

"그래그래."

시문은 별말 없이 넘어가 주기로 했다.

어차피 딱히 받을 만한 보상이 생각나지도 않았을뿐더러.

'날 위해 준 거니까.'

미스릴에 대한 집착도, 결국 시문 자신을 위하는 일이지 않은가?

-오메! 이 때깔 좀 보소! 순도 100% 맞네, 100% 맞아!

라고.

-어후! 내가 혀만 있었어도 아주 그냥 마르고 닳을 때까지 핥....

인벤토리에서 미스릴 바를 꺼낸 시문은 애써 마인드를 컨트롤했다.

* * *

"그게 무슨 말이냐? 갑자기 사라지다니?"

호랑이의 그것처럼.

듣는 것만으로도 근육이 경직되는 굵직한 목소리가 낮게 울린다.

그 목소리에는 위협이 가득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

-그것이... 정말 저희도 원인을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작업하던 드워프들 중 절반이 증발....

쾅.

거대한 구슬.

정확히는 이곳 하층인 제련소와의 통신구를 박살 내 버린 남성이 거친 숨을 내쉬었다.

후드득.

거구에 어울리는 거친 숨결에, 박살 난 통신구의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성질 같아선 어디로든 주먹 몇 방을 더 갈겨야 했지만.

"어머나~ 사르가스, 성격은 여전하네."

불쾌하게 끈적거리는 목소리에 사르가스는 주먹 대신 예를 취했다.

"...누추한 곳엔 어쩐 일이십니까, 데피나 님."

말과 달리.

사르가스는 불편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데피나라 부른 여성을 바라봤다.

근육질의 거구에 험상궂은 얼굴을 고려한다면.

어지간한 여성은 겁을 집어먹을 상황이었지만.

"후후, 그다지 환영하는 눈치는 아니네? 하긴, 문제가 생겼으니 당연한 건가?"

데피나는 여유롭게 웃을 따름이었다.

"귀하신 분께서 신경 쓰실 일은 아닙니다."

"어머나, 신경 쓸 일이 아니라니. 방금 그 보고, 검은 제련소의 일 아니었어?"

"데피나 님. 검은 제련소는 제 관할이고, 전 3용제님을 섬깁니다."

"그리고 검은 제련소는 우리 니드호그 님의 소유지. 잊었니?"

그 말에 사르가스의 각진 턱이 꽉 다물렸다.

데피나는 검은 머리칼을 찰랑거리며 손을 저었다.

"너무 날 세우지 마. 나라고 좋아서 여기 왔겠어?"

사르가스의 강직한 눈매가 꿈틀한다.

그녀의 말대로.

'저 요망한 년이 이유 없이 여길 찾아올 리 없지.'

데피나가 제 5용제 니드호그의 전령이라는 것을 떠올려 보면 더더욱 그렇다.

그녀가 드래곤이라는 고귀한 신분 이전에.

용제의 뜻을 전하는 전령은 결코 이유 없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으니까.

그렇다는 건.

"설마! 용제들께선 이미...."

"그래. 검은 제련소의 문제를 다 알고 계시지."

사르가스의 눈이 부릅떠진다.

아마 안대를 한 다른 한쪽 눈도 마찬가지이리라.

그럴 수밖에.

'드워프들이 사라진 건 방금 보고받은 일인데....'

어찌 용제들께선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전령을 보냈단 말인가?

"사르가스. 넌 스쿠아마 원(Squama One)이면서 아직도 그분들을 모르니?"

경악하는 사르가스의 얼굴을 즐기듯.

싱글거리던 데피나는 바닥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스스슥.

시간이 되감기는 것처럼.

가루가 되어 휘날리던 통신구의 파편들이 순식간에 본래의 모습을 이루었다.

"용제들께선 모르시는 것이 없다. 신의 영역에 도달하신 분들이니 당연한 이야기지."

사르가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미래를 예지하고 있지 않다면.

검은 제련소의 주인인 니드호그의 전령이 이 타이밍에 도착할 리는 없을 테니까.

"용제들께선 현 상황을 불편해하신다. 특히나 니드호그 님께선 본인의 소유 영역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을 몹시도 불쾌해하시지."

사르가스의 단단한 목울대가 꿀렁인다.

용제 니드호그의 성격을 안다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후후, 뭘 쫄고 그래? 이번 일에 너의 잘못은 조금도 없잖니."

달리 듣자면.

앞으로 일어날 일에선 자신의 책임을 묻겠다는 말.

일그러지는 사르가스의 얼굴을 비웃으며.

데피나는 복구된 통신구를 사르가스의 앞으로 던졌다.

"너무 인상 쓰지 마. 이번 일의 근원은 다른 이가 처리하기로 했어. 너에겐 다행인 일이지."

"다른 이?"

"그래. 그러니 관리소장인 넌, 비어 버린 드워프들을 다시 충당하기만 하면 돼."

데피나는 품속에서 작은 구슬을 하나 꺼냈다.

구슬 속엔 축소해 놓은 듯한 지형이 가득했다.

"여기, 사라진 드워프들이 있을 만한 리스트야."

사르가스는 작은 구슬을 살피며 인상을 찌푸렸다.

"생각보다 많군요."

"어쩌겠어? 온갖 곳에다 도망칠 구멍을 파 놓는 게 땅꼬마들의 특징인 것을."

"그래도 데피나 님께서 이렇게 집어 주신 이상,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그래야지. 추가 병력이 필요하면 따로 요구하도록."

할 말을 다 전했는지.

데피나는 설렁설렁 손을 흔들며 몸을 돌렸다.

"데피나 님께선 함께 가시지 않는 겁니까?"

"왜, 헤어지기 아쉽니? 그래도 어쩔 수 없어. 너 말고도 만나야 할 자들이 더 있거든."

"아까 말한 다른 이 말입니까?"

"그래. 이 사태의 근원이 마침 작업 중인 지구의 소속이더라고."

데피나는 붉은 입술을 슬쩍 핥았다.

"졸지에 일이 아주 잘 풀리겠어."

제31화

31화. 기미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