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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 - 4

31화. 기미 (2)

또옥, 또옥.

투명한 플라스크 속으로.

푸르스름한 물방울이 한 방울씩 떨어진다.

증류(蒸餾).

끓는점의 차이를 이용하여 액체 상태의 혼합물을 분리하는 방법.

특정한 화학 반응 없이.

혼합물의 물리적인 분리가 이루는 작업으로 인류가 오래전부터 사용해 온 기술 중 하나다.

물론 여기에 연금술이 곁들여지고.

흔한 증류의 대명사인 알코올이 아닌, 마력 기반의 재료들이 곁들어지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조금... 조금만 더...."

갤럭시 아레나가 등장하고 15년이 지난 지금에도.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에너지원이 바로 마력이었다.

뭐라 딱 특정할 수 없는 에너지원.

그런 마력의 공통적인 특징 중 하나가 이런 증류 상태에선 무척이나 '민감한 상태라는 것'이고.

그 말은 즉.

"여기에 딱 세 방울만 더...."

지금까지의 제조 과정 중 가장 위험한 과정이라는 말이 된다.

더 쉽게 보자면.

파측.

"헛!"

연금술사들이 가장 폭발을 많이 일으키는 구간이라고 봐야겠지.

하나.

-오빠!

"알아. 안정제 준비해 뒀어."

1레벨로 수많은 아웃브레이크와 범죄 빌런들이 범람하는 세계에서 살아남고.

희대의 연성물인 현자의 돌까지 함께하는 시문에게 마력 폭발은 0%에 수렴한다고 볼 수 있었다.

츠즈즉.

플라스크 안으로 안정제가 투여되자.

푸른 용액에서 일어나던 스파크가 급속이 잦아든다.

단순히 안정제를 들이부은 것처럼 보이겠지만.

고랭크의 연금술사가 본다면 기함을 토할 광경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역시 울옵이야. 타이밍도, 투입량도 완벽해!

마치 기계를 연상시킬 정도로.

방금 시문이 투여한 안정제의 타이밍과 양은 완벽했던 것이다.

이는 요리에서 눈대중으로 넣은 조미료 양이 계량기로 잰 듯 완벽한 것과 같은 수준이었지만.

"1레벨로 그 세상에서 살아남았는데, 이 정도야 뭐."

실제로 시문에겐 그다지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

날로 허약해지는 육체는 사소한 마력 폭발에도 중상을 입을 수 있으니.

자연스레 체득될 수밖에 없는 기술이었다.

-또또! 내가 말했지? 오빠는 자각이 부족하다고. 이럴 땐 그냥 나 잘났다~! 하는 거야.

"...그래. 나 잘났다, 됐냐?"

-웅웅! 참 잘했어용!

"녀석."

안정제 정량을 맞추는 게 그렇게도 좋은 걸까.

기분이 확 고조된 현자의 돌에 시문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내.

쪼르륵.

증류가 끝난 액체를 미리 준비해 둔 특수 용기.

일명 포션병에 담은 시문은 미리 정제해 둔 재료 아이템.

'분명 두 방울이었지?'

[정제된 바실리스크의 독액]을 두 방울 떨어뜨렸다.

치이이이이.

탄산이 터지는.

혹은 불판의 기름이 튀는 소리가 쉬지 않고 들려온다.

그에 맞춰 푸른 용액량보다 많은 거품이 일어났으나, 잠시일 뿐.

거품은 생겨난 속도처럼 빠르게 사그라들었고.

"이제 섞어 주기만 하면...."

시문은 숙련된 바텐더를 연상시키듯.

포션병의 목 부분을 잡고 자연스럽게 회전시켰다.

그러자 푸른색이던 용액이 남색으로 변하며 안정 상태에 들어섰다.

뾱.

시문은 준비했던 특수 마개로 포션병의 입구를 막았다.

-히야! 색깔 봐라! 오빠, 이거 완전 잘 만들어졌는데?

"그렇지?"

연금술사에게 창조물은 제 자식과도 같은 것.

시문은 흐뭇하게 웃으며 만들어 낸 포션의 정보를 살폈다.

[이름 미지정]

등급 : B+

-복용 시 신체에 남아 있는 마력경화 증상을 제거한다.

다양한 마력을 지닌 재료를 베이스로, 특별하게 정제된 독을 이용한 치료제.

고수준의 연금술로 효과를 극대화했다.

"음. 좋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시문.

아이템 설명에도 따로 내용이 붙지만.

기본적으로 제작 물품들은 완벽한 제작 과정을 거쳤을 때, 등급에 +가 붙게 된다.

그 효능은 당연히 일반적인 등급보다 훨씬 높다.

확률적인 효능이라면 거의 100%로 만들어 버리고.

부작용이 있다면 거의 없애버릴 정도다.

'뭐, 이번엔 굳이 + 등급이 붙을 필요는 없긴 하지만....'

마력경화증 치료제 같은 경우.

확률 옵션이 붙어 있지도 않고.

마력경화증의 치료 말고는 다른 효능도 없어 굳이 + 등급에 집착할 필요는 없었다.

단지.

'자존심의 영역이라 그렇지.'

지금의 만족감은 나름 연금술에 평생을 바친 자로서의 자존심 때문이었다.

특히나 치료제 제작의 핵심 재료인 [바실리스크의 독액]은 굉장히 다루기 까다롭기로 유명하지 않나?

마비, 경화의 성질을 지닌 독을 정반대의 효능으로 정제하는 건 정말 고수준의 숙련도를 요구했으니까.

시문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작업대 한편에 놓인 녹색 병과 여러 재료들을 바라봤다.

'다른 영약 만들기에도 부족함이 없겠어.'

과연 다이아 랭크의 플레이어답달까?

박진욱이 보내 준 재료들은, 품질은 물론이고 그 양도 풍족했다.

그만큼 마력경화증 치료에 대한 갈망이 절실했던 거겠지.

시문은 쭉 기지개를 켜며, 치료제를 제조하느라 경직된 허리를 스트레칭했다.

"읏차! 다른 영약은 차차 만들고. 우선 이름을 지어야겠지."

당연하게도 이 시기에 마력경화증 치료제는 존재하지 않았기에.

치료제의 이름은 아직 미정이었다.

시문은 치료제 정보창의 이름을 터치하곤 '마력경화증 치료제'라는 문구를 입력했다.

띠링.

[최초로 아이템을 제작하셨습니다.]

[업적 '내가 원조!'를 달성하셨습니다.]

[업적 포인트 500점을 획득합니다.]

평소와 달리 맑은 효과음과 함께 시스템창이 주르륵 올라왔다.

'그러고 보니 최초 제작 업적이 있었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플레이어가 사용할 수 있는 아이템을 만들어 내면, 최초 제작의 업적을 달성하게 된다.

'거기에다 중복도 가능했던 거 같은데....'

회귀 전 유명 생산계 플레이어의 방송에서 듣기로.

최초 제작 업적은 한 번이 아니라 중복 적용된다는 정보를 얼핏 들었던 기억이 난다.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아레나 질병 치료제들만 해도 꽤 많지.'

업적 포인트 500점이라면 아스트라페 한 자루.

그걸 최초 제작 업적을 달성할 때마다 얻는다면 꽤 쏠쏠한 벌이가 되리라.

'기회가 된다면 틈틈이 만들어야겠어.'

마력경화증 자체가 다소 가벼운 아레나 질병이라 그렇지.

대부분의 아레나 질병의 치료제는 귀한 재료를 하마처럼 먹어 댔다.

앞으로 자금줄이 되어 줄 사업이기도 하니, 틈틈이 기회를 노려 제작하리라.

우선은.

'밤사냥꾼에게 치료제부터 전달해 줘야지.'

시문은 치료제를 챙기곤 나갈 채비를 했다.

-잉? 오빠, 바로 전해 주려고?

"어. 아까 치료제 제조 중일 때 연락이 왔거든."

겉옷까지 입은 시문은 핸드폰을 켰다.

그곳엔.

[김시혁 : 형! 나 방송 봤어! 실버 맞아? 진짜 개쩔던데? 딜힐이 다 되는....]

[이유정 : 오라버니, 방송 잘 봤어요! 역시 오라버....]

'얘들은 또 언제 보냈대?'

두 동생의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

[김시문 : ㅇㅇ. ㄱㅅㄱㅅ.]

시문은 두 동생에게 대충 이모티콘이 섞은 답장을 보내곤, 아까 확인한 메시지를 펼쳤다.

[박진욱 : 시문 씨, 의뢰 대상을 찾았습니다.]

* * *

성삼의 로고가 걸린 널찍한 사무실.

"박 과장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국내 대길드 중 하나인 성삼의 인사부는 오늘도 평소 같은 일과를 보내고 있었다.

"뭐 어때. 둘뿐이잖아."

"과장님."

"그만. 연이야, 누가 들으면 내가 뭔 짓이라도 하는 줄 알겠다. 고작 손만 잡은 건데."

"그러니 아가씨에게 걸렸잖습니까!"

"그게 내 잘못이냐? 노크도 없이 문을...."

그때.

벌컥!

"어이, 박 과장."

우연희의 손을 만지작거리던 박 과장의 말을 자르고.

사무실의 문이 열렸다.

"뭐야, 우 대리도 있었어? 오랜만이야."

"오랜만입니다, 안 과장님."

과연 다이아와 플래티넘 랭크의 플레이어답달까.

어느새 서로 거리를 벌린 박민철과 우연희는 서로의 손 대신.

두툼한 서류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안호진, 네가 여긴 웬일이냐."

박민철의 목소리가 낮게 으르렁거린다.

그에 안호진은 깊게 벗어진 머리를 슥 쓸며 웃었다.

"거 오랜만에 동기를 만났는데 너무 날 세우는 거 아니냐?"

넉넉한 볼살이 더해져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시답지 않은 소리 말고, 대답이나 해."

박민철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울 따름이었다.

"새끼, 여전하구만."

하나 안호진은 흐트러짐 하나 없이 터덜터덜 걸어와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의 시선은 우연희를 향했다.

"이봐, 우 대리. 손님이 왔는데 커피 한 잔 정도는 내줘야지."

"이 새끼가...."

"준비하겠습니다."

박민철이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우연희가 고개를 숙이곤 탕비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던 안호진의 입가가 더욱 깊어졌다.

"캬! 여전히 잘빠졌다니까? 나도 각성했으면 몸매 죽이는...."

"안호진."

"흐핫! 칭찬이야, 칭찬. 각성은 우리 일반인들의 꿈 아니냐?"

속으론 벌써 몇 번이고 저 재수 없는 면상에 주먹을 박아 넣었지만.

'역겨운 새끼.'

그런 감정 표출이야말로 안호진이 노리는 수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기에.

박민철은 참을 '인' 자를 몇 번이나 되뇌며 주먹을 쥐었다 펼 뿐이었다.

그의 대처가 현명했던 것일까.

"쯧. 다이아 랭크 되더니 사람이 영 재미가 없어졌다?"

능글거리던 안호진의 면상에 아쉬움이 떠올랐다.

"헛소리 말고 용건이나 말해."

"급하긴."

안호진은 서류 하나를 제 앞으로 턱 던져 놓았다.

박민철의 앞이 아닌 자신의 바로 앞.

이게 뭘 의미하는지 잘 알기에.

'곱게 갈 생각은 없나 보군. 개자식.'

박민철은 입술을 씹으며, 안호진의 맞은편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자리에 앉은 그는 안호진의 서류를 집기도 전에.

"경위서?"

서류 위쪽에 큼지막이 쓰인 '경위서'라는 단어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왜 놀라? 켕기는 게 전혀 없나 봐?"

"당연하지. 이거 네 거 아니냐?"

"크하핫!"

대소를 터뜨리는 안호진.

그는 어느새 커피를 내온 우연희에게 눈을 찡긋하더니, 여유롭게 한 모금 머금었다.

"미인이 타서 그런가? 커피 맛이 달라."

"개소리 말고. 이게 뭐냐고."

"뭐긴 뭐냐. 보는 대로 경위서지."

"안호진."

"알았다, 인마. 그만 노려봐. 그러다 사람 잡겠다. 나 일반인이야~."

그러면서 커피를 더 홀짝이는 모습은 더럽게 얄미웠으나.

박민철은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를 노려볼 뿐이었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감사부 소속 아니냐."

안호진의 말에 처음으로 박민철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감사부 소속이라....'

틀린 말은 아니다.

저 빌어먹을 동기는 분명 감사부의 과장이긴 했다.

단지.

"감사부는 무슨. 그냥 회장님 똥개지."

성삼의 회장.

이순철의 온갖 뒤처리를 다 해 주는 게 본업일 뿐.

"어허, 이 친구가? 네 경위네 경위서 들고 온 사람이 나야."

박민철의 말이 제법 치욕스러울 법한데도.

"이제 대충 감 잡았겠지만, 이거 회장님께서 보내는 메시지야. 바로 너한테."

안호진은 여전히 능글맞은 미소를 지을 따름이었다.

"나한테? 난 회장님께 밉보일 짓 한 적이 없는데."

"몰라서 묻냐? 최근에 시끄러운 루키 하나 있잖아."

그에 박민철의 눈가가 슬쩍 꿈틀거렸다.

분명 일반인일 텐데.

"역시, 우리 박과장도 알고 있었나 봐?"

안호진은 그 작은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그럼 이야기가 쉬워지겠네. 왜 영입 안 했냐?"

"그거 따지는 경위서냐? 미안하지만, 우린 그렇게 일 안 한다."

"우리? 재밌는 소릴 한다?"

안호진은 두툼한 손가락을 깍지 끼며 말했다.

"새끼가. 성삼 길드에 몸담고 있으면서 성삼의 주인이 누군지도 몰라? 어?!"

"성삼 길드의 인사 권한은 전적으로 이유정 아가씨께 있다. 회장님께서 직접 일임하신 일이야."

"미친놈. 아가씨가 저 꿀단지를 그냥 두라고 명령이라도...."

"그래."

"...뭐?"

안호진의 미소가 처음으로 깨진다.

그는 얼이 빠진 얼굴로 박민철을 바라봤다.

"박민철, 너 지금 뭐라고 했냐?"

"귀 먹었어? 김시문 플레이어는 이유정 아가씨께서 그냥 두라고 지시하셨다고."

"하!"

헛웃음을 흘리는 안호진.

그도 그럴 것이 명목상 대외적으로 이유정이 길드의 인사를 담당할 뿐.

사실상 내부 일 처리를 모두 박민철이 해결한다는 걸 모르는 이가 없었다.

'이유정 아가씨라....'

이건 예상 못 했는데.

그런 표정이 가득한 안호진을 보며, 박민철은 경위서를 도로 던졌다.

"이야기 끝났으면 빨리 꺼져라. 나 바쁘니까."

"어허, 이 친구가! 아무리 아가씨의 명령이라도 회사에 누가 되면 네가 말렸어야지."

"회사가 아니라 길드다."

"그거나, 그거나! 회장님께서 널 그 자리에 앉힌 이유를 몰라서 하는 소리냐? 아가씨 이제 24살이셔!"

"여긴 내 능력으로 앉은 자리고, 언제든 나보다 잘난 놈이 오면 비켜 줄 의향이 있다. 그게 성삼 길드의 기조야."

더 상대할 것도 없다는 듯.

박민철이 몸을 일으키자, 안호진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짜 일 처리 이따위로 할 거야?! 보니까 가족도 없는 고아 새끼더구먼!"

"세 번째 말한다. 이건 아가씨께서 직접 지시하신 일이야."

"그러니까! 대체 아가씨의 의견 따위를 왜 듣는 거냐고! 이제 24살이잖아! 아직 애라고, 새끼야!"

"길드는 일반 기업과 달라. 힘의 논리가 적용되고. 이유정 아가씨는 우리 길드에서 가장 강력한 플레이어다."

박민철은 어느새 목소리가 높아진 안호진의 어깨를 짚었다.

멀리서 보면 친한 남자들끼리의 흔한 행동으로 보이겠지만.

"꼬우면 안호진, 네가 아가씨 밟으면 되잖아? 시끄럽게 남의 사무실에서 언성 높이지 말고."

"이익!"

다이아 플레이어의 완력을 어깨로 받은 안호진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단순히 어깨를 누르는 완력 때문만은 아니리라.

"이, 이러고도 무사할 거 같아? 머리 좀 컸다고 성삼의 주인이 누군지 잊은 거냐고?!"

"알고 있지. 하지만 넌 회장님이 아니잖아?"

그런 안호진을 비웃고는, 몸을 돌리는 박민철.

"그래도 온 성의가 있으니 경위서는 놓고 가라. 써 줄...."

쾅!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사무실을 나가 버리는 안호진.

그에 지금껏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우연희가 입을 열었다.

"괜찮겠습니까? 안 과장님 성격상 이대로 물러나진 않을 텐데요."

"뭐, 회장님께 일러바치고 김시문 플레이어를 찾아가겠지."

"그러니 묻는 겁니다. 강다영 비서님의 말로는 김시문 플레이어가 아가씨와 꽤 각별한 사이 같다던데...."

"저놈이 움직였다는 게 무슨 뜻이겠냐? 어차피 우리 선에선 못 막아."

박민철은 테이블에 덩그러니 놓은 경위서를 흘낏하곤 가볍게 손을 저었다.

그러자.

화륵.

경위서의 모서리에서 작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왜 태웁니까? 경위서 써 준다면서요?"

"써 봐야 필요 없어질 게 뻔하잖아."

어깨를 으쓱한 박민철이 핸드폰을 꺼내자.

"하긴. 그렇겠네요."

우연희는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댄 박민철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말했다.

"예, 아가씨. 접니다."

제32화

32화. 기미 (3)

"아! 시문 씨, 오셨습니까."

선이 굵직한 사내.

박진욱이 비즈니스 미소를 걸치며 다가온다.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습니까."

그에 시문 역시 반가운 미소를 띠며 답했다.

"하핫!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일전에 방송도 너무 잘 봤고요."

"제 방송을 보셨어요?"

"VIP시니까요."

고작 사람 하나 찾는 의뢰로 무슨 VIP가 돼?

라는 물음은 하지 않았다.

'아마 시혁이 녀석 때문이겠지.'

애당초 동생과 선후배 사이인 것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전 세계에서 랭커급 플레이어가 가지는 위상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당연히 박진욱의 입장에서도 그런 랭커의 가족을 쉬이 볼 수는 없을 터.

그런 시문의 마음을 눈치챈 것일까.

"참고로 시문 씨를 VIP로 지정한 건 어제부텁니다."

박진욱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어제요?"

"네. 어제 시문 씨의 방송을 보고 확신이 섰거든요. 이 사람, 크게 되겠구나 하고 말이죠."

그 말에 시문은 뒤통수를 긁적였다.

"이거 부끄럽네요. 다이아 랭크의 눈엔 많이 부족했을 텐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박진욱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물론 브실골대의 플레이를 보면 좀... 불편한 부분이 있기는 합니다만, 어제 제가 본 시문 님은 최소 플래티넘 구간이었습니다."

"그렇게 봐 주시니 감사하네요."

"빈말이 아닙니다. 특히나 실버신데 드라칸을 그렇게 쉽게 잡는 걸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뭔가 기본적인 스탯 자체가 남다르신 거 같은데...."

박진욱은 묘한 어조로 말끝을 흐렸지만.

"하하. 제 스탯이 좀 유별나기는 하죠."

별말 없이 웃으며 인정하는 시문에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상태창에 관해서는 입을 열지 않겠다는 시문의 뜻을 눈치챈 것이다.

"여하튼, 이 정도의 실력자시면 치료제를 만들어 주겠다는 말은 확실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예? 알고 승낙하신 거 아니었어요?"

"물론 믿고야 있었지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아주 작은 의심은 남아 있었습니다."

곤란하게 웃는 박진욱에 시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레나 질병은 현대식으로 풀이하면 불치병이다.

그걸 저레벨의 플레이어가 갑자기 고쳐 주겠다고 하는데.

무려 다이아급 플레이어가 그 말을 덥석 믿겠는가?

아마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또한 김시혁의 형 되는 사람의 말이니 속는 셈 치고 믿어 본 거겠지.

'근데 어쩌나. 이미 만들어 버렸는데.'

시문은 인벤토리 속에 고이 잠들어 있는 치료제를 떠올리며 빙긋 웃었다.

그걸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것일까?

"아! 제가 말이 길었네요. 여기 의뢰하신 정보입니다."

박진욱은 품속에서 작은 쪽지 하나를 건넸다.

시문이 그것을 빤히 보자, 박진욱은 앞에 놓은 제 핸드폰을 슬쩍 건드렸다.

"원하신다면 메시지 발송도 가능합니다만... 아날로그긴 해도 이쪽이 제일 확실해서요."

"확실히 그렇겠네요. 메시지는 괜찮습니다."

핸드폰은 혹시 모를 누출이 있을 수 있지만.

쪽지는 읽고 태워 버리면 그뿐이니까 말이다.

시문은 쪽지를 펼쳤다.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

쪽지엔 고말숙의 주소뿐만 아니라, 그녀의 현 상황과 각성 여부 등.

의뢰하지 않은 내용들도 다수 담겨 있었다.

시문이 의아한 눈빛으로 고개를 들자.

"서비스입니다. 보아하니 찾아가실 거 같은데, 아무래도 그쪽 사정을 알아야 여러모로 곤란한 일이 덜 생기지 않겠습니까?"

박진욱은 사람 좋게 웃을 따름이었다.

'과연 프로긴 프로구나.'

이내.

"참고로 그... 플레이어긴 합니다만, 이리저리 유명하더군요."

"예. 그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조금 껄끄러운 듯한 박진욱의 말투에 시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배려 감사드립니다."

화륵.

망설임 없이 손가락을 튕겨 쪽지를 불태웠다.

"에? 바로 태우십니까?"

"제가 기억력 하나는 자신 있거든요."

물론 제 기억력만이 아니라.

'현자의 돌, 다 외웠지?'

-물론이징! 나 지적인 여자라니까.

현자의 돌이라는 최고의 동료를 믿고 한 행동이기도 했다.

그 모습에 박진욱은 흥미로운 눈길을 보냈다.

"과연 신기하군요. 캐스팅이나 시동어도 없이, 손가락만으로 능력을 발현하다니."

"진욱 씨는 제가 연금술사인 거 아시잖아요."

"그러니 더 놀라운 거죠. 보셨을지 모르겠지만, 그때 채팅창이 난리도 아니었어요. 마법계들이 그렇게 거품 무는 모습은 처음 봤습니다."

그 콧대 높은 마법계들이 서로 침을 튀겨 가며 흥분하는 모습이라니?

시문의 직업을 아는 박진욱의 시점에선 무척이나 즐거운 상황이었다.

"크흠! 시문 씨, 이왕 말이 나와서 말입니다."

박진욱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연금술사이기만 한 겁니까?"

"예?"

"더블 클래스라든가, 뭐 그런 거 있지 않습니까? 실제로 아레나에서 연금술사를 몇 번 만난 적이 있는데, 시문 씨처럼 연성하는 건 못 봤거든요."

그게 그렇게나 궁금했던 걸까.

시문은 피식 웃으며 답해 주었다.

"더블 클래스는 아니고 그냥 특성 관련이라고 말해 두죠."

"역시! 특성이었군요. 아마 고등급이겠지요. 부럽습니다."

SS급 특성 '밤의 가호'를 지닌 사람이 할 말이겠냐만은.

'우리 현자의 돌이 우월하기는 하지.'

마력불능의 치료, 회귀와 더불어 신화급 무구까지 연성하는 현자의 돌을 떠올리니.

절로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물론.

-아이! 오빠도 참! 그렇게 말하면 나 빨개져?

곧바로 반응하는 녀석의 말은 못 들은 척했다.

"그나저나, 이렇게 제 의뢰를 신경 써 주시니 저도 만족스럽게 드릴 수 있겠네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눈을 끔뻑이는 박진욱.

시문은 인벤토리를 열고.

그런 박진욱의 앞으로 남색의 액체가 담긴 포션병을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직접 확인해 보시죠."

박진욱은 의아한 얼굴로 포션을 받아 들었고.

"...."

그대로 굳어 버렸다.

충격이 꽤 큰 것일까.

박진욱의 침묵은 생각보다 길었다.

3분? 5분?

그러나 시문은 별다른 말 없이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불치병 환자가 치료제를 만났을 때의 기분은... 내가 잘 아니까.'

애당초 치료제로 갑질하려고 온 것도 아니다.

밤사냥꾼 박진욱은 동생의 최측근이 될 인물이었으며.

나아가.

'좋은 사업 파트너가 될 수도 있겠지.'

회귀 전.

시혁이 길드의 주요 업무를 전반적으로 관리하던 것이 박진욱이라는 건 익히 알고 있는 사실.

시문은 그 탁월한 능력을 미리부터 좀 빌릴 생각이었다.

"후...."

깊은 한숨을 내쉬는 박진욱.

건달을 연상시키는 외형 때문일까.

그의 한숨은 뿌연 담배 연기를 내뱉는 그 모습과 다름없었다.

"이거 참... 뭐라고 말을 해야...."

좀처럼 말을 잇지 못하는 박진욱.

[마력경화증 치료제]를 쥐고 있는 그의 손은.

다이아 랭크의 플레이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덜덜 떨리고 있었다.

박진욱은 그런 제 손을 꽉 감싸 쥐고는 몇 번 심호흡한 후에야 고개를 들었다.

"우선 죄송하다는 말씀부터 드려야겠군요. 이리 귀한 것을 주셨는데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습니다."

"그런 말씀 마세요. 애초에 우린 거래를 한 거잖아요."

"거래... 말씀이십니까?"

"그래요, 거래. 그쪽은 제 의뢰를 들어주고, 전 그 대가로 치료제를 만들고. 그렇게 딜했잖아요?"

"허허."

박진욱의 입에서 힘없는 웃음이 흘러나온다.

이 말끔한 남자는 알까?

지금 건넨 이 치료제가 얼마나 큰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를.

거대 세력의 정보도.

누군가의 암살도 아닌, 고작 사람 하나 찾는 대가로 정말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 그건 아니겠지.'

박진욱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가 본 김시문이라는 인물은 결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그 망할 후배 놈을 꼼짝도 못 하게 하는 것만 봐도 확실하지.'

그렇다면 굳이.

당장 암시장에 던져 놓아도 큰돈을 만질 수 있을 이 치료제를 의뢰의 대가로 지불한 이유는 뭘까?

박진욱은 아무 말 않고, 조용히 기다려 주는 시문을 바라봤다.

"일단 시문 씨가 제게 호감이 있으시다는 건 알겠습니다."

아마 제 동생과 선후배 하는 사이이니 좋게 보는 거겠지.

하지만.

"하나 그것만으론 설명이 되지 않죠. 그럼 제가 도출해 낼 수 있는 답은 하나. 제게 바라는 게 있으신 걸로 보입니다만?"

"역시 밤사냥꾼은 허명이 아니네요."

시문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박진욱이라는 사람을 좋게 보는 것도 있지만, 결국 바라는 게 있어서긴 하죠."

"무엇인지 여쭈어봐도 될는지요?"

안 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는 박진욱.

실제로 그의 세상 진지한 표정을 보고 있노라면.

'당장 내가 누구 하나 묻어 달라고 해도 그럴 기세야.'

역시 사람을 잘 골랐어.

그렇게 생각한 시문은 만족스러운 뉘앙스로 답했다.

"박진욱 씨. 혹시 저랑 사업 하나 해 보실 생각 없습니까?"

"사업... 말씀입니까?"

"예. 정확히는 대리, 혹은 위탁 판매라고 봐야겠지요."

"그게 무슨... 헛!"

시문이 뭘 말하는지 깨달은 것일까.

"서, 설마!"

박진욱의 눈은 찢어질 듯 커졌다.

* * *

해 질 녘의 골목 계단.

불규칙하고 조잡한 계단을 오르는 남자의 발걸음이 무척이나 경쾌했다.

-오빠, 그렇게 좋아?

"당연하지."

가슴 정중앙에서 울리는 현자의 돌의 말에.

시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의 결정이니 뭐라 하진 않았는데, 솔직히 난 그 박진욱이란 사람 못 믿겠어.

하나 현자의 돌의 목소리는 주인처럼 밝지 못했다.

-밤 능력을 쓰는 것도 모자라서 생긴 거까지 건달 같잖아. 혹시 뒤로 딴 주머니라도 차면 어쩌게?

'그냥 생긴 게 마음에 안 드는 거 아니고?'

-꼬,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이잇! 솔직히 험상궂게 생기긴 했잖아! 난 관상이라는 걸 믿는 편이라구!

정곡이 찔린 것일까.

순식간에 톤이 높아지는 녀석의 목소리에 시문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하여간에 이 얼빠 녀석.

'걱정 마. 굉장히 능력 있고 믿음직한 사람이니까.'

현자의 돌은 험상궂은 외모를 지적하지만.

반대로 박진욱이 저런 외모에 어울리게 심지도 굳고, 의리도 강철 같다는 걸 시문은 모르지 않았다.

그는 시혁이 녀석 옆에 있으면 언젠가 대륙성의 손에 죽을 거란 걸 알면서도.

끝까지 동생 곁을 지켰던 사나이니까.

'그러니 걱정 말고 최대한 치료제를 제조할 수 있는 환경에만 집중하자. 많이 만들어야 좋은 연구실을 얻지.'

-응! 알았어.

그렇게 시문이 마지막 계단을 오르자.

"엇! 드디어 오셨군요!"

자취방 입구에서 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소 벗어진 머리에 통통한 살집, 그리고 능글맞은 미소까지.

시문은 생전 처음 보는 중년인에 고개를 갸웃했다.

"누구세요?"

"이런. 너무 반가워서 소개도 못 했군요."

그는 얼른 안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명함을 받아 든 시문의 눈은 조금 커졌다.

"성삼?"

"맞습니다. 성삼의 안호진 과장이라고 합니다."

"성삼에서 제게 무슨 볼일이신지?"

"하하! 스카우터들 마음이야 뻔하지요. 떠오르는 슈퍼 루키 아니십니까? 좋은 기회를 드리고자 이리 찾아왔습니다."

그 말에 시문의 눈가가 살짝 꿈틀했다.

성삼 길드의 스카우터라니?

'성삼 길드의 인사 권한은 유정이가 꽉 잡고 있을 텐데?'

그런 성삼 길드에서 자신을 영입하려 한다면.

이런 스카우터가 아닌 유정이 본인이 직접 움직였을 것이다.

아니, 설령 그녀가 직접 오지 않더라도.

'최소한 내게 연락은 했을 텐데....'

유정이의 성격상 이렇게 사람만 불쑥 보낼 리가 없었다.

거기에다.

'내가 아는 성삼 길드의 인물 중 안호진이라는 사람은 없어.'

소개와 명함에서 과장 직급이라고 말하는 것도 그렇다.

성삼 길드에서 과장 직급은 다이아 랭크의 플레이어인 박민철 말고는 없다.

'심지어 명함엔 어느 부서인지도 적혀 있질 않아.'

물론 사기꾼은 아닐 것이다.

한국에서 이렇게 대놓고 성삼을 사칭할 미친놈은 없을 테니까.

그렇다는 건.

'성삼 그룹에 속하되, 성삼 길드의 관계자는 아닐 가능성이 높겠군.'

성삼 길드의 인물이 아니면서 성삼에 속한 자.

마침 이 상황에 딱 맞는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회귀 전.

'형. 지금껏 내 인생에 후회되는 게 딱 두 가지가 있어. 하나는 그날, 형의 뒤에 숨어만 있었다는 거고....'

언젠가 중국에서 시혁이 녀석과 술자리에서 나눴던 이야기가 말이다.

'다른 하나는 유정이를 도와주지 못했다는 거야. 그 녀석, 길드 문제로 나한테 몇 번 연락이 왔었거든.'

시문 자신에게라면 몰라도.

동갑인 탓인지, 동생 시혁이 녀석에겐 뭐 하나 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유정이다.

그런 그녀가 시혁이에게 '몇 번이나' 도움을 구했다는 건 무척이나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나와 삼촌과의 전쟁을 떠나서, 그때 내가 한 번이라도 유정이를 도울 수 있었다면... 그 앤 여전히 우리 곁에 있었을까?'

한국의 고위 인사들을 포함해.

그녀의 할아버지인 이순철 회장의 목까지 베어 죽여 버리고, 이유정 자신도 목숨을 끊은 사건.

'어쩌면 유정이가 그렇게 극단적인 일을 벌였던 것도....'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촉이 왔다.

'이 사람, 이순철 회장과 관련이 있는 거야. 그리고 유정이가 벌인 그 일과도 관련이 있겠지.'

그러나.

"미, 믿기지가 않네요! 성삼에서 절 찾아올 줄이야!"

그걸 겉으로 드러내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거대 길드의 제의를 받은 브실골의 플레이어처럼 반응했다.

"하핫! 시문 씨의 반응을 보아하니 좋은 이야기 나눌 수 있겠네요."

무릇 스카우터들이란.

아주 작은 감정 변화에도 민감한 이들이 대부분이니까.

"시문 씨. 여기서 이러지 말고, 커피라도 한잔하면서 이야기 나누시는 게 어떠실지요?"

시문은 되레 어리숙하고 밝아 보이게 웃었다.

"좋아요! 마침 근처에 커피 맛있는 곳이 있거든요. 그리로 가시죠."

제33화

33화. 기미 (4)

"키야! 커피 맛이 정말 좋습니다."

"그렇죠?"

싱긋 웃는 시문.

그러나 그의 속은.

정확히 가슴 정중앙은 그렇지 못했다.

-저 몸에 어떻게 단 거가 맛이 없겠어?

투덜거리는 현자의 돌.

이번엔 그런 녀석을 크게 제지하지 않았다.

'뭐, 노린 거긴 하니까.'

안호진은 분명 통통한 편이긴 하지만, 중년 남자치고 흔한 체중이다.

단지 그런 것을 고려하더라도 지나치게 나온 배와 볼살로 보아.

'술과 담배, 그리고 달거나 자극적인 맛을 즐긴다는 건 뻔하지.'

그의 취향을 쉽게 파악하고 단맛이 가장 강한 커피를 시킨 것이다.

"바닐란지 헤이즐넛인지 구별이 안 갈 정도로 오묘한 이 맛이라니!"

"입에 맞으신 거 같아 다행이네요."

시문은 시럽 짬뽕인 커피에 연신 탄성하는 안호진을 보며 드립 커피를 홀짝였다.

이내.

"안 과장님."

순진무구한 눈으로 무장한 채 입을 열었다.

"제게 영입 제안으로 오신 게 맞은 거죠?"

"에? 아! 이거 커피가 너무 맛있어 결례를 범했군요."

얼른 입가를 닦은 안호진은 가방에서 서류 한 뭉치를 꺼냈다.

"여기, 저희 성삼의 계약서입니다."

'성삼 길드가 아니라 성삼이라?'

다시 한번 속으로 그 부분을 되짚은 시문은 찬찬히 계약서를 읽었다.

"아마 모르시는 것이 꽤 많을 겁니다. 제가 천천히...."

"죄송하지만, 제가 한번 읽어 보고 물어봐도 될까요?"

시문의 말에 계약 조건을 설명하려던 안호진이 눈을 끔뻑인다.

그도 잠시.

"하핫! 당연히 그러셔야지요! 계약서는 뭐든 꼼꼼히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안호진은 능글맞게 웃으며 다시 커피를 입으로 가져다 댔다.

물론 그러는 동안에도 그의 시선은 시문에게 꽂혀 있었다.

네까짓 게 보면 뭐, 얼마나 알겠어?

딱 이러한 눈빛.

당연했다.

20대에 막 데뷔한 심해 랭크 플레이어, 거기에다 순진한 얼굴까지.

'호구도 아주 상호구야.'

안호진의 입장에선 이만한 호구도 없어 보일 테니까.

'박민철 이 병X 새끼. 이런 호구를 진작 영입했으면 특수 아레나 방송부터 꿀을 빨았을 텐데!'

이 일이 끝나고 이 회장님께 보고가 들어가면 그 재수 없는 동기 놈은 어떻게 될까?

그전에.

이 영입을 성공시키면 자신에게 어떤 콩고물이 떨어질까?

'일단 내게 성삼 길드의 과장 자리 정도는 주시겠지. 성과를 내면 그만큼 우대해주시는 분이니까.'

그럼 그 콧대 높은 각성자들도 비각성자의 명령에 복종해야겠지.

'그럼 우 대리도? 크흐흐!'

그런 상상에 저 혼자 히죽거리는 안호진.

물론.

-오빠, 그냥 저 기분 나쁜 아저씨 죽빵이나 치고 집으로 가면 안 돼? 우리 준비할 것도 많잖아.

'조금만 참아. 헤실거리는 걸 보니 거의 넘어온 거 같으니까.'

시문은 안호진의 속내를 훤히 꿰뚫고 있었다.

당연했다.

애당초 이 상황 자체를 시문이 유도한 것이니까.

시문은 계약서를 빠르게 훑었다.

계약서 내용을 함께 본 현자의 돌은 탄식을 내뱉었다.

-히야! 오빠. 내가 이쪽 계약 조건은 잘 모르지만, 이건 아무리 봐도 호구 취급하는 거 같은 내용이 많은데?

'그래. 딱 봐도 독소 조항이 천지네.'

많아도 너무 많다.

거의 절반 이상이랄까?

'보통 길드는 3년 계약이 기본인데 6년 계약이야. 거기에다 매년 활동 지원금이 2천만 원도 안 되는데. 이조차 성과제로 묶어서....'

계약서를 읽어 나가는 시문의 입이 점점 벌어졌다.

'무구는 계약 끝까지 대여고, 각종 소비품은 활동 포인트로 성삼의 상점에서 구매 가능, 주간 최소 5회 이상 아레나 진행에다가....'

보면 볼수록 심각한 내용들.

시문은 정말 가까스로 순진무구라는 가면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 정도로 안호진 과장이 내민 영입 계약서는.

아니지.

노예 계약서는 보기만 해도 정신이 나갈 수준이었다.

말만 번지르르하게 쓰여 있지.

'이건 호구도 아니야. 그냥 가축 취급하겠다는 거지.'

아무리 심해 플레이어라 해도.

이 계약서의 조건대로 아레나 활동을 한다면 연봉으로 환산해도 최소 5천만 원 이상 번다.

거기에다 운이 좋아 득템이나 여타 보상 증가를 얻으면 목돈이 훅 들어온다.

한데 그런 득템조차 '성과제'가 있다는 이유로 보상 아이템의 절반을 수수료로 뜯어 가다니?

그걸 또 성삼에서만 이용할 수 있는 포인트로 환산해 준다는 조항을 달아, 성삼 상점만 이용하게 만들어 두었다.

'도저히 성삼의 이름이 들어갔다고는 믿을 수 없는 계약서군.'

그 지독하다는 전갈 길드도 영입 계약서를 이따위로 쓰진 않으리라.

시문은 몇 번이고 계약서에 찍힌 성삼의 날인을 확인했다.

'잠깐. 그러고 보니....'

그런 시문의 눈에 성삼의 날인 옆에 있는 문구가 잡혔다.

'이건 그냥 성삼이잖아?'

성삼 길드는 말 그대로 어떤 상황에서도 반드시 '성삼 길드'라는 말을 붙인다.

그게 성삼 그룹과는 다른 노선을 탄다는 건지.

성삼 그룹의 영향을 받지 않겠다는 건지는 몰라도.

성삼 길드는 모든 공식 석상에서 반드시 길드라는 단어를 붙였다.

한데 지금 안호진 과장이 내민 계약서는 오로지 '성삼'이라는 단어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가면을 쓴 시문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아까 성삼이라고 말했던 것도 그렇고. 일단 이걸로 확실해졌군.'

안호진 과장.

예상대로 이 사람은 성삼 길드 소속이 아니었고.

'이순철 회장과 확실히 관련이 있어. 거기에다....'

미래의 유정이가 그런 짓을 하게 된 원인.

또는 그와 관련된 인물 중 하나가 분명했다.

"헤헤, 시문 씨. 이해 안 가시는 부분이 있으신지요?"

어느새 커피를 비워 버린 안호진이 손바닥을 비비며 히죽거렸다.

마음 같아선 대답도 없이 주먹을 박아 넣고 싶었지만.

"예. 개인적으로 궁금한 게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알아야 할 것이 있었기에.

시문은 애써 본능을 가라앉혔다.

"아무렴요! 뭐든 물어보십시오."

"성삼의 과장님이시니, 이유정 님과도 친분이 좀 있으시죠?"

이유정.

그 이름에 처음으로 능글거리던 안호진의 입가가 흔들렸다.

그러나 그것은 찰나.

괜히 스카우터로 온 것이 아닌지.

"하하하! 유정 아가씨 말이죠! 있고말고요."

안호진은 금세 본래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다행이네요! 사실 제가 이유정 님의 광팬이거든요!"

"그러... 셨군요."

"네! 솔직히 어느 플레이어라고 팬이 아니겠어요? 성격도 실력도 좋으시고, 또... 그 이, 이쁘기까지 하시니까."

슬쩍 고개를 숙이며 수줍음까지 표현하는 시문.

-웩!

그에 격한 반응이 들려왔지만.

그것을 가볍게 무시한 시문은 반짝이는 눈으로 두 손을 모았다.

"이런 부탁드리기 좀 그렇지만... 혹시 이유정 님의 싸인 좀 받아 주실 수 있나요?"

"아. 저 그것이, 아시다시피 아가씨께선 그런 걸 잘 안 해 주시기도 하고... 또 길드 마스터시다 보니 워낙 바쁜 일정을...."

"그럼 신입인 저는 아예 만나지도 못한다는 거잖아요! 제발 좀 부탁드려요!"

시문의 애원에 머리를 긁적이는 안호진.

분명 미소는 그대로고 약간의 곤란함만 내비치고 있었으나.

시문은 알 수 있었다.

'속이 타겠지.'

시문은 현재 본인의 가치를 잘 알고 있다.

최소 다이아급의 유망주.

스스로의 입으로 말하기 그렇지만.

저번 방송까지의 시청자 수와 그간의 활약만 보더라도 차후 상위권 플레이어가 될 잎새였다.

못해도 그에 준하는 플레이어는 되겠지.

스카우터로 나선 이가 그 정도 셈을 못 할 리는 없을 터.

거기에다.

'난 계약서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았지.'

아직 사회생활을 접하지 못한 젊은 각성자들에게 종종 있는 일이다.

저레벨 때 계약이라는 족쇄를 잘못 차서 플레이어 인생의 첫 단추를 잘못 끼우는 경우.

지금의 시문처럼 계약 내용 자체를 아예 안 물어보는 이들이 이런 부류에 속한다.

그렇기에.

"커, 커흠!"

안호진이 자신을 호구 잡으려는 것이 목적이라면, 결코 이 제의를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 그가 할 수 있는 선택은 하나.

'제안은 받아들이되, 일단 시간을 벌려고 하겠지.'

어차피 이유정의 사인은 계약서에 명시되어 있지 않은 일.

일단 도장만 찍게 하면 나중엔 오리발을 내밀어도 이쪽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아니나 다를까.

"좋습니다."

빈 잔을 홀짝이던 안호진은 큰마음 먹은 사람처럼 어깨를 활짝 폈다.

"유정 아가씨의 사인은 제가 어떻게든 받아 보겠습니다."

"와! 정말요?"

"물론입니다. 단, 아가씨께선 아레나 말고도 성삼 그룹 내의 업무까지 보셔서 다소 시일이 걸릴 수 있습니다."

"역시, 그렇군요."

이로써 확실해졌다.

어떤 이유에선지는 몰라도.

'이순철 회장은 성삼 길드를 두고 또 다른 세력을 만들려는 게 분명해.'

그것도 플레이어로 이루어진 세력 말이다.

"그렇죠! 하하! 그럼 여기 계약서 아래쪽에...."

이미 다 넘어왔다고 생각한 것일까.

안호진은 아예 대놓고 식어 버린 시문의 눈을 확인하지 못하고.

싱글벙글하며 계약서를 들이밀었다.

-오빠. 이제 알아낼 거 다 알아낸 거 같은데, 그냥 확! 죽여 버리면 안 돼?

'현자의 돌, 농담이라도 그런 말 쉽게 하지 마.'

-히히! 반쯤은 진담이긴 한데. 뭐, 이쪽 세상은 살인에 민감한 거 같으니까. 그냥 적당히 두들겨 패 주기라도 하자. 응?

현자의 돌의 살벌한 제안에 잠깐 피식한 시문은 계약서를 내려다봤다.

'정보야 다 알아냈다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쳐 낼 필요는 없어. 다른 활용 방법이 있으니까.'

-이 사람을 역으로 이용하자, 이거야?

'그래.'

결국 계약을 하지 않는 이상, 주도권은 자신에게 있다.

그러니 이걸 잘 굴려서 안호진 과장이 이런 짓을 하는 이유를 알아내면.

'이순철 회장이 왜 플레이어로 세력을 만들려는지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시문이 입을 열려던 찰나.

"어머!"

"헉!"

카페 입구 쪽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물론 시문이나 안호진이나, 그쪽으로 시선을 주지는 않았다.

그 소란의 주체가.

"안 과장!"

탕!

자신들의 테이블을 내려치기 전까지는 말이다.

누군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청순, 청아라는 단어 하나로 모든 것이 설명 가능한 외모.

더불어.

"세상에! 진짜야?"

"자기야, 이거 실화 맞지?"

"이런 곳에서 랭커를 보게 될 줄이야...."

주변 사람들의 경악까지.

시문은 저도 모르게 등장인물의 이름을 불렀다.

"이유정?"

그에 시문을 흘낏한 그녀는 시문의 예상과 달리.

휙.

'엥?'

어떤 인사도 건네지 않은 채, 안호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리가 자리인지라 이유정의 고운 뒤통수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아, 아, 아가씨!"

능글맞던 미소를 잃고.

새파랗게 질린 안호진의 얼굴을 보니 대충 어떤 상황인지 짐작이 갔다.

"안 과장님. 제 허락도 없이 이게 무슨 짓이죠? 박 과장님이 분명...."

이유정의 청아한 목소리가 흐려진다.

이유는 다름 아니었다.

사락.

"으앗! 아가씨! 그, 그건!"

반쯤 금이 간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

어느새 그걸 집은 이유정의 시선이 빠르게 그 내용을 훑고 있는 탓이었다.

이내.

"하...!"

꽉 움켜쥔 종이만큼이나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

장담컨대.

'제대로 화났구나. 10년 전 그때처럼.'

시문은 지금 이유정이 폭발 직전의 수준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마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언성을 높이며, 감정이란 감정은 모조리 표출하겠지.

그러나 10년이란 세월이 무색하지 않은 것일까.

시문을 또다시 힐끔한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는.

까득.

"...안 과장, 따라 나와요. 당장."

뭔가가 갈리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컥! 아, 아가씨! 잠시만요! 제가 다 설명을!"

안호진의 멱살을 쥐어 올리곤 곧장 카페를 나가 버렸다.

"...."

"...."

폭풍이 지나간 것처럼.

작은 카페에 침묵이 내려앉는다.

"바, 방금 이유정 맞지?"

"아까 얼굴 봤니? 나 깜짝 놀랐어! 이유정이 저런 무서운 표정을 지을 줄은...."

"결국 다 이미지 관리였던 건가. 현실은 진짜 다르네."

"애초에 랭커가 이런 곳을 왜 온 거야?"

굳이 아는 척하지 않고 곧바로 자리를 뜬 유정이의 배려를 모르지 않았기에.

시문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갤럭시 아레나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번 아레나의 종목은 던전이고, 참가 인원은 50명입니다.]

[조건 '협력'이 추가됩니다.]

[참가자 모두 5인으로 팀이 맺어집니다.]

[인원이 모두 보이면 아레나가 시작됩니다.]

작은 빛과 함께 나타난 시문은.

-시하!

-시하!

-알림 보고 바로 달려왔어요!

"반갑습니다, 여러분."

시문은 우수수 올라오는 채팅창에 가볍게 인사를 표하곤 주변을 둘러보았다.

'숲이네.'

우거진 숲.

하지만 튜토리얼 때와 달리 나무만 우거진 것이 아니라.

따스하게 비치는 햇살과 이름 모를 풀과 꽃들 역시 가득했다.

자연을 좋아하지 않는 이들이라도 감탄할 정도로 아름다운 광경이었지만.

'이거 안 좋은데....'

시문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못했고.

-뭐야. 외부 맵이네?

-하필 던전인데 외부 ㅋㅋ.

-그래도 핑거에몽이라면 문제없겠지.

-ㄹㅇ. 형 손가락 튕겨서 여기 숲 싹 태워 버리자. 나 여기만 보면 정신병 걸릴 거 같애!

시청자들의 반응 역시 마찬가지였다.

던전 아레나는 크게 외부와 내부, 두 가지의 형태로 나뉘는데.

외부 맵의 경우.

날씨부터 길 찾기 등 내부보다 짜증 나는 요소들이 많아 플레이어들이 기피했다.

하나 시문은 금방 표정을 풀었다.

'아니다. 오히려 잘됐어.'

유정이가 안 과장과 함께 사라진 후.

시문은 집으로 이동해 영약을 제조했었다.

물론 이전처럼 제작 후에 바로 먹는 영약이 아니었다.

'제조한 영약을 전부 숙성기에 재어 두고 왔으니.'

-그러게. 숙성 시간도 그리 길게 잡지 않았잖아. 이 아레나가 끝날 때쯤이면 50% 이상은 숙성되겠네.

영약 숙성.

영약의 성능을 조금 더 높일 때 들어가는 공정.

영약을 숙성시키는 만큼 무척이나 까다로운 공정을 거쳐야 했다.

물론 시문과 현자의 돌에게는 문제도 아니었다.

정확히는 문제가 되면 안 된다고 봐야겠지.

왜냐하면.

'숙성기 만들자고 업적 포인트를 500점이나 썼으니....'

1아스트라페급의 업적 포인트까지 들여 연성한 영약 숙성기니까.

본래라면 그냥 영약을 섭취하고 아레나를 시작할 생각이었으나.

'당장 스탯이 급하진 않으니까.'

이미 보유한 스펙은 탈실버급이니.

조금이라도 영약의 효율을 높이는 쪽을 택한 거였다.

"그나저나, 아무도 안 오나?"

시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에? 던전이라고?"

"아씨! 외부 맵이잖아!"

"망할! 탐지 특성자가 있으면 좋겠는데...."

3명의 남녀가 우수수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모두 장비에 치타 문양을 지니고 있었다.

'같은 길드인가 보군.'

3인 길드 파티에 그다지 좋은 기억이 없는 시문인지라.

뚜렷한 눈가가 살짝 굳었지만.

파앗.

마지막 매칭 인원을 확인했을 땐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시문뿐만이 아니었다.

"엇!"

"저 사람은!"

-헐? 쟤, 그 애 아님?

-그 애가 누군데?

-ㄴㄱ? 유명한 사람이야?

매칭된 사람들과 채팅창 역시 경악에 빠졌다.

그럴 수밖에.

"아, X발. 외부 맵이가?"

고양이와 여우 사이 어딘가인 눈매.

날카로운 콧날과 턱선, 도발적인 입술과 체형까지.

분명 전체적으로 섹시함이 다분한 외모였지만.

"뭐고? 초면부터 야리고 있노. 눈 깔아라, 잡아 지기기 전에."

거친 언사와 강한 억양의 사투리, 그리고 껄렁한 몸짓은 섹시함 대신 뒷골목의 건달을 연상시켰다.

-엌ㅋㅋㅋㅋㅋㅋ 시문좌, 이번 아레나 망했네 ㅋㅋ.

-뭔데? 왜? 저 여자 누구임?

-저거 심해에서 유명한 미친년임. 이번 아레나 조건 5인 협력이던데, 끝났네.

-이 형 개쇼크받은 듯. 표정 봐 ㅋㅋㅋ.

-아무리 핑거에몽이라도 네임드 트롤끼곤 답 없지!

-시문 님... 힘내요!

시문의 반응을 본 채팅창이 들썩인다.

하나 시문이 놀란 이유는 저 여성의 충격적인 행태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놀란 이유는 단 하나.

'마, 말숙이? 네가 거기서 왜 나와?'

상상도 못 한 옛 친구와의 재회 때문이었다.

제34화

34화. 고말숙 (1)

"마, 말...."

가슴이 북받친다고 할까?

저도 모르게 '말숙아!'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시문이었으나.

"하아! 저기요. 말 좀 곱게 하시죠?"

다행히도 앞서 매칭된 3인의 길드 파티가 먼저 말을 내뱉었다.

"지X하고 자빠짔네. 니 뭔데?"

"뭐긴 뭐예요. 님 팀원이지! 시스템창 못 보셨어요?"

허공을 가리키는 길드원.

그에 시선을 들어 시스템창을 확인한 도발적인 여성, 고말숙은 팔짱을 끼고 혀를 찼다.

"뭐고, 협동이네. 엿같구로."

"이제 아시겠어요? 같이 클리어할 파티원인데 무례한 언사는 그만두세요."

"하아...."

그 말에 고개를 푹 숙이는 고말숙.

꽉 낀 팔짱과 쉼 없이 깔딱거리는 발끝을 보면 어김없는 양아치의 모습이었지만.

"글네. 미안타."

그녀의 입에서 나온 건 의외의 답이었다.

"에?"

따지던 길드원 역시 예상치 못한 답안이었을까.

그를 포함한 뒤의 2인은 벙찐 표정으로 서로를 힐끔거렸다.

"내가 쏘리하다고. 두 번 말해야긋나?"

당당하게 사과하는 고말숙.

물론 그녀의 얼굴에는 미안하다는 감정은 일말도 보이지 않았다.

-역시 ㅋㅋㅋ. 당당하다 고말숙!

-나 만난 적 있는데. PTSD 올 거 같음.

-저게 진짜 미친 거임. 그냥 화만 내면 콘셉트라고 하겠는데.

-ㄹㅇㅋㅋ. 보통 또라이들은 걍 들이박는데. 쟨 또 숙일 땐 숙이더라고.

-종잡을 수가 없음 ㅋㅋ.

우르르 올라가는 채팅창.

가장 많은 플레이어가 분포한 랭크대가 브실골이기 때문일까.

채팅창은 고말숙이란 주제로 어느 때보다 시끄럽게 들썩였다.

반면.

'우리 말숙이, 이때도 여전했구나.'

시문은 전생의 친우를 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차, 참 나! 무슨 사과하는 사람 얼굴이 그렇게 당당하게 해요?"

"정말 미안하긴 한 거예요?"

사과를 받은 길드원들은 날카로운 눈으로 따지고 들었다.

말숙이의 사과는 상당히 당당했기에.

진심으로 사과하지 않는다고 여긴 것이다.

"그라모? 미안하니까 사과하지. 내가 대가리 총 맞았다고 이카고 있긋나?"

"당신 정말 끝까지! 됐습니다."

리더 격으로 보이던 남성은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딴 사과 받을 마음도 없으니, 저흰 그쪽과 따로 움직이겠습니다."

"뭐, 그라든지."

이미 수차례 겪었던 일인 걸까.

남자의 엄포에도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는 고말숙.

그와 함께.

[참가 인원이 모두 매칭되었습니다.]

허공에 새로운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아레나를 시작합니다.]

[던전 '상록숲'의 중심부까지 진출하세요.]

[최대 4팀만이 상록숲의 중심부까지 입장할 수 있습니다.]

아레나가 시작된 것이다.

3인 파티는 시문에게 다가왔다.

"김시문 플레이어 맞으시죠?"

"절 아세요?"

"당연하죠. 저희 다 저번 시문 님의 방송을 봤거든요."

"아."

실버 랭크대의 특수 아레나가 확실히 특별하긴 한 것일까.

시문은 설마 이들이 자신을 알고 있을 것이라곤 예상 못 했다.

-ㅋㅋㅋㅋ. 저 사람 눈치 개빠르네.

-ㄹㅇ 에이스 바로 알아봄.

-근데 이 형 자기가 유명한 거 모르는 눈친데?

-설마. 심해 방송으로 시청자 수천 찍는 방송 여기뿐인데.

안타깝게도.

'내, 내가 유명했었나?'

채팅창의 반응에 시문은 진심으로 당황했다.

하나 내색은 하지 않은 채.

"길게 말할 거 없죠. 저희랑 함께 가시죠."

남자의 제안을 잠자코 들었다.

남자는 뒤편을 힐끔하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보아하니 저 여자 잘 모르시는 거 같은데. 고말숙이라고 브실골에선 유명한 트롤럽니다."

"맞아요. 괜히 사람들이 미친년이라 부르는 게 아니라니까요?"

"아까 사과하는 거 보셨죠? 근데 그건 문제도 아닙니다. 진짜 문제는 전투에 들어가면 완전 돌아 버린다는 거예요."

시문이라는 에이스를 놓치기 싫다는 것 이전에.

치타 길드 3인방은 진심으로 고말숙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아군적군 구별 없이 공격한다느니.

피에 미친년이라느니.

사이코패스가 맞는다느니.

하나같이 비정상적인 이야기들뿐이었다.

정말 놀랍게도.

"예. 저도 잘 압니다."

시문은 이들이 말하는 고말숙을 무척이나 잘 알고 있었다.

'전부 사실이긴 하지.'

회귀 전 당사자에게 직접 들었던 리얼한 이야기가 있지 않나?

물론 이 흉흉한 소문들에 대한 이유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알고 계셨군요! 그럼 이야기가 쉽겠네요."

"저희랑 함께 가요. 저분이랑 같이 움직이면 피만 보실 거예요."

"저희가 합은 오래 맞춰서 나름 쓸 만합니다!"

치타 3인방의 얼굴이 확 밝아진다.

시문이 자신들과 합류하리라 생각한 것이다.

"죄송하지만 저는 저분과 가야겠습니다."

"예?"

"대체 왜요?"

예상치 못한 시문의 답에 의문을 표하는 3인방.

-?

-시문 님?

-형 제정신이야?

-아무리 형이라도 저런 애 데리고 못 이겨.

-형... 혹시 그런 취향이었어?

채팅창 역시 무수한 물음표를 포함한 의문들이 올라왔지만.

시문은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이유야 간단했다.

'안 그래도 어떻게 찾아가나 했는데, 만난 김에 안면이라도 터 놔야지. 천마 퀘스트도 깨야 하고.'

말숙이와 유일하게 친한 사이였다곤 하나 어디까지나 전생의 이야기.

현시점에서 고말숙이라는 인간과의 연결 고리는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런 와중에 박진욱에게서 얻은 정보로 그녀를 찾아간다면 어찌 될까?

'말숙이 성격상, 발부터 날아오겠지.'

당연했다.

생판 이름도 모르는 남자가 갑자기 찾아와.

'말숙아! 나야!' 이러면 어느 여자가 '어맛! 오랜만이야!' 하겠는가?

'자칫하면 칼까지 맞을 수도 있어.'

칼찌까지 염두에 두어야 할 수준.

그러니 이렇게 매칭되었을 때, 그녀와 조금이라도 안면을 터 두어야 했다.

또한.

'슬슬 입질이 올 텐데....'

시문이 노리는 부분은 하나 더 있었다.

[성좌 천마가 '크하핫! 이 여아가 딱이다! 딱이야!' 몹시도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립니다.]

[성좌 검은 염소가 호감 있는 눈빛으로 플레이어 고말숙을 바라봅니다.]

바로 천마의 관심.

물론.

'근데 검은 염소는 왜?'

검은 염소까지 관심을 보일 줄 몰라 고개를 갸웃했으나 그뿐.

[매니저 천마 님이 AP 100,000을 후원하셨습니다.]

=저 여아랑 ㄱ.

무려 10만 AP라는 후원을 박아 버리는 천마에 감탄을 터뜨렸다.

'끽해야 말숙이랑 이번 아레나를 클리어하라는 미션 정도만 걸지 알았는데.'

설마 이런 대형 후원을 박아 버릴 줄이야.

'하긴, 무리도 아니지.'

전생의 말숙이와 가장 많이 대화했던 것이 바로 성좌 천마에 대한 것이었다.

'천마가 어지간히도 말숙이를 아꼈었지.'

말숙이야 늘 변태 영감이니 뭐니 하며 욕을 해 댔지만.

수많은 성좌 후원자들을 보며, 성좌가 어떤 존재인지 잘 아는 시문의 입장에선.

말숙이는 분명 천마의 애정을 듬뿍 받는 플레이어였다.

그 증거가 바로 지금의 저 격렬한 반응 아닌가?

전생이나 이번 생이나.

고말숙이라는 인물은 천마의 원픽이었다.

-오메! 10만 실화냐?

-와! ㅅㅂ! 실버 플레이어한테 10만이 터지냐 ㅋㅋ.

-역시. 저 매니저 개금수저였네.

-저 사람임? 그 성좌 사칭범이?

-아 10만AP는 못 참지 ㅋㅋ.

천마의 후원에 채팅창의 여론 역시 순식간에 돌아선다.

보통 AP는 달러로 환산하니 현금으로 따져도 약 1억 2천만 원대.

시청자들 입장에선 당연히 넘어갈 수밖에 없는 액수였다.

'저번 방송에서 받은 AP도 다 정산 못 했는데.'

이번 방송의 AP까지 잘 정리하면 그 좁은 자취방에서 벗어나.

좀 더 큰 집으로 이사할 수 있으리라.

"제 시청자 한 분이 저분과 함께하라고 10만 AP를 후원해 주셔서요."

"10, 10만이요?"

"에엑?!"

눈이 휘둥그레지는 치타 3인방.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럴 수가!"

"하긴, 10만이면 1억이 넘으니까...."

"1억은 좀...."

돈 앞엔 장사가 없는 것을.

* * *

우거질 정도로 자란 초목 때문일까?

사락.

솜이불처럼 폭신폭신한 촉감이 걸을 때마다 발바닥을 밀었다.

그러나.

'언제 튀어나오려나.'

언제고 이 폭신함이 순식간에 날카로워진다는 것을 잘 알기에.

시문은 적당한 긴장감을 가지며 걸음을 옮겼다.

정확히는.

"아, X나게 쫄쫄 따라오네."

무척이나 도발적인 옛 친우의 뒤라고 해야겠지.

"마. 니 왜 따라오는데?"

"말했잖아, 미션 때문이라고."

"하!"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리는 고말숙.

이 푸르고 아름다운 자연 경관과 맞지 않게.

그녀의 고운 이마는 짜증으로 찌그러져 있었다.

"낸 분명히 경고했다. 난중에 내한테 맞아 뒤져도 지X하지 마라. 알았나?"

그녀는 잔뜩 위협을 담아 으르렁거렸으나.

"응. 알았어."

"...X발."

씨알도 먹히지 않는 시문의 모습에 결국 깊은 한숨을 푹 쉬었다.

물론.

-ㄷㄷ. 누님 깡 보소.

-개무섭네 ㅋㅋㅋ.

-근데 진짜 무서운 사람이긴 함. 나 저번에 만나 봤는데 맨손으로 막 사람을 찢어....

-ㅁㅊ ㅋㅋ. 무슨 곰이냨ㅋㅋ!

-웅녀였음? ㅋㅋ

채팅창은 난리였다.

시문이야 이런 말숙이가 익숙하기도 하고.

그녀의 특성과 본 성격을 잘 알기에 싱긋 웃으며 넘기는 것이지.

일반적인 플레이어라면 저 정체 모를 살벌함에 죄다 학을 떼고 달아났으리라.

그때.

-오빠.

'어. 나도 느꼈어.'

현자의 돌의 목소리와 함께 시문의 기감에 작은 기척이 잡혔다.

'실버 랭크의 상록숲이니까, 아마 초목지기들이겠지.'

시문의 예상대로.

사락.

"어라라? 인간이잖아?"

가벼운 발소리만큼이나 얇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초목지기들이었다.

"어라라! 자연에 해악만 끼치는 존재가 여길 어떻게?"

"뭘 놀래. 얼른 청소하면 되잖아."

자그마한 몸집에 투명할 정도로 얇은 날개.

흡사 팅커벨을 연상키기는 초목지기들은 너무나 사랑스럽고 귀여운 존재였지만.

'초목지기가 넷이라... 이거 좀 위험하겠는데.'

초목지기를 한 번이라도 겪어 본 이들이라면 결코 녀석들을 작고 사랑스러운 존재로 볼 수 없었다.

왜냐고?

"얘들아, 청소 시간이야!"

"오염될 수도 있으니까 살점 하나 남기면 안 된다?"

녀석들은 까다롭기로 유명한 마법형 몬스터.

심지어 식물형 몬스터까지 소환하는, 그야말로 악랄한 놈들이었으니까.

꾸드득.

"츠르륵!"

주변의 초목들이 꼬이고 뒤엉키며 괴상한 울음을 토한다.

초목지기들이 소환한 식물 몬스터, 뾰족 넝쿨들이었다.

'초목지기당 2마리씩 소환하니까 뾰족 넝쿨만 8마리. 거기에 초목지기까지 합치면 총 12마리인가.'

소환몹 자체는 그리 까다롭지 않지만.

"히힛! 나무야, 공격해!"

"풀잎아, 저 더러운 살점을 베어 버려!"

소환물인 뾰족 넝쿨을 앞세우고, 자연 마법을 사용하는 녀석들의 콤비는 그야말로 살인적이다.

당연히.

"아악!"

전투가 시작된 지 10초도 되지 않아, 고말숙은 피투성이가 되어 바닥을 뒹굴었다.

-으아! 망했다!

-초목지기 4마리 ㅋㅋㅋ. 이건 핑거에몽도 못 막습니다.

-형! 얼른 뭐라도 해 봐! 저러다 죽겠어.

-쟤 유명한 트롤이라며? 뒤지는 게 더 좋지 않겠냐.

시문은 불붙는 채팅창을 잠시 꺼두었다.

하나 고말숙을 돕지는 않았다.

그저 얌전히 팔짱을 끼며 뒤로 물러날 뿐.

그녀가 아까 했던 경고나, 유명한 트롤러라서가 아니었다.

'슬슬 발동이 걸릴 텐데.'

무덤덤하게 두들겨 맞는 고말숙을 바라보는 시문.

그에 화답하듯.

스윽.

연신 몸을 웅크리며 공격을 받아 내던 고말숙의 자세가 풀렸다.

"츠츠측!"

"히힛! 피가 철철나네?"

"곧 쓰레기 하나 치우겠다!"

그 빈틈을 노린 뾰족 넝쿨과 초목지기의 합공이 날아들었다.

그때.

터억.

"츠륵?"

파고들던 뾰족 넝쿨의 날카로운 잎사귀가 피 묻은 손에 잡힌다.

본래라면 아무런 장비도 없는 저 손은 가차 없이 베이는 게 정상이었으나.

그런 상식이 무색하게.

푸득.

뾰족 넝쿨의 칼날 같은 잎사귀가 인간의 손아귀에 무른 과일처럼 터져 나갔다.

이어.

콰직!

뾰족 넝쿨의 머리통에 해당하는 꽃 부분이 처참하게 꿰뚫렸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쓰러지는 뾰족 넝쿨.

"무, 무슨!"

그에 초목지기들이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까드득.

"아악!"

순식간에 날아든 고말숙이 초목지기 하나를 잡아 으스러뜨렸다.

그것을 신호탄으로.

뚜둑.

푸화아악!

공포 영화에 나오는 정체 모를 괴물처럼.

"으아악!"

"사, 살려!"

"츠르...."

초목지기들과 뾰족 넝쿨 사이를 종횡무진하는 고말숙.

그녀는 엄청난 속도로 손에 잡히는 족족 몬스터들을 찢어발기고 으스러뜨리기를 반복했다.

-미친....

-우웩! 저 체액 좀 봐!

-으아아! 저 귀요미들 찢겨 죽는 거 못 보겠어 ㅜㅜ.

-겪어 본 입장에서 귀요미는 모르겠지만... 마음만은 공감합니다.

-사, 사람이 몬스터를 찢어!

그녀의 충격적인 전투력에 기함을 토하는 시청자들.

오로지.

'음. 싸우는 건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격하네.'

시문만이 이 고어하고 섬뜩한 상황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끼아아아아!!"

귀곡성에 버금가는 비명을 내지르는 고말숙.

그녀는 어느새 초목지기 하나와 뾰족 넝쿨 2마리만을 남겨 두고 있었다.

그때.

"으, 으아아! 어서 막아! 저 괴물을 막으라고!"

"츠르르."

소환한 뾰족 넝쿨 2마리를 고말숙에게 던지고 달아나는 초목지기.

위험한 순간에 처한, 일정 수준의 지능을 지닌 몬스터들의 특징 중 하나였다.

저렇게 달아나서 추후 기습을 노리거나, 동료들을 더 불러오겠지.

'그럴 순 없지.'

여기서 전투가 더 길어지는 건 곤란했다.

'특성 때문에 버티는 거지, 전투가 끝나면 말숙이는 곧 쓰러질 거야.'

내내 관전 중이던 시문의 팔짱이 드디어 풀린다.

가슴 중앙에 위치한 연성력이 익숙하게 시문의 손끝으로 몰려들었고.

따악.

가벼운 핑거 스냅과 함께.

푸욱.

"켁!"

바닥에서 솟아난 뾰족한 돌가시가 초목지기의 몸을 꿰뚫었다.

"크륵?"

어느새 뾰족 넝쿨을 다 찢어버리고, 꼬치가 된 초목지기를 멍하니 바라보는 고말숙.

그녀의 고개는 서서히 시문 쪽으로 움직였고.

"크르르...."

핏물처럼 시뻘겋게 물든 눈동자에 시문을 담고 있었다.

"하아. 결국 이렇게 되냐."

시문은 당황하지 않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뭐,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으니까.'

동생 김시혁, 이유정과 같이 SSS급 특성 중 최상위권이자.

'빌어먹을 천살성(天殺星)의 단점은 말이지.'

최악인 특성을.

제35화

35화. 고말숙 (2)

차가운 겨울바람이 얼굴을 정면으로 때리는 기분.

SSS급 특성인 천살성(天殺星)을 정면으로 마주한 시문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게 천살성의 살기구나.'

아직 천살성을 제대로 발휘하기는커녕.

역으로 휘둘리는 수준임이 틀림없음에도, 고말숙의 기세는 상당한 압박감을 선사했다.

특히나.

시문이 골드 랭크 상위 몬스터인 드라칸도 쉽게 때려잡는다는 걸 고려해 보면.

그에게 이런 기세를 느끼게 한다는 것부터가, 천살성이 얼마나 위력적인 특성인지를 알려 주었다.

동시에 이 살벌한 기세와 정반대의 따뜻한 기분도 들었다.

'그동안 말숙이가 날 정말 많이 배려해 줬구나.'

전생에 1레벨이었던 자신.

그조차 마력불능으로 스탯을 죄다 깎아 먹어, 사실상 일반 병자보다도 못한 수준의 체력을 지니고 있었다.

오크와 같은 그린 스킨들의 포효나.

다른 몬스터들의 흉성에 몸이 얼어붙어 꼼짝도 못 할 정도로 말이다.

그럼에도 말숙이와 있을 때.

또 그녀의 무력으로 도움을 받을 땐, 단 한 번도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이 없었다.

단지.

'이래서 말숙이와 마주한 적들이 그렇게 떨어 대던 거였어.'

그녀와 마주한 이들의 덜덜 떨던 모습으로 천살성의 살기를 어렴풋이 짐작했을 뿐.

'생물의 원초적인 공포를 자극하는 살기다. 정확히는 생존 욕구라고 해야겠지.'

말 그대로 '죽는다'라는 공포를 느끼게 하는 것.

그것이 천살성이 뿜어내는 기세의 근간이었다.

-오빠?

그때.

-미안한데 지금 천살성에 대한 감상을 읊고 있을 때가 아닌 거 같거든?

가슴 정중앙에서 명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자의 돌이었다.

'아, 미안. 말숙이의 천살성을 직접 느껴 본 건 처음이라서.'

-으이구! 누가 연금술사 아니랄까 봐 호기심은! 그나저나, 이제 어쩔 거야?

'뭘?'

-뭐긴 뭐야!

녀석의 외침과 함께.

"캬아아악!"

피 붙은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달려드는 고말숙.

-저 미친... 아니, 인간도 아니지. 저 미친개 말이야!

'별걸 다 걱정한다.'

그에 피식 웃은 시문은 여유롭게 고개를 옆으로 젖혔다.

후웅.

파공음과 함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는 고말숙의 손.

"호오?"

이거 장난이 아닌데?

시문은 감탄이 섞인 눈으로 손을 내지른 고말숙을 바라봤다.

'내 기본 스탯이 이 구간대에선 그리 꿀리지 않을 텐데.'

그것만으론 천살성이 발동된 고말숙은 버겁다.

그렇게 판단을 내린 시문은 곧장 손가락을 튕겼다.

따악.

몸의 코어 근육을 중심으로 순식간에 전신으로 연성되는 [블랙팬서의 신체조직].

그것은 시문의 반사 신경을 포함해, 전반적인 육체 능력을 수인의 그것처럼 향상시켰고.

"크르?"

이어지는 말숙의 또 다른 팔을 잡아채곤, 곧장 엎어치기로 이어졌다.

후웅.

블랙팬서의 육체 능력이 뛰어났던 것일까.

아니면 연속 공격을 이어 가던 고말숙의 힘이 강했던 것일까.

쿵.

제법 묵직한 진동과 함께 저 멀리 바닥에 처박히는 고말숙.

충격이 상당했는지.

그녀는 작은 경련을 일으키며 좀처럼 일어나지 못했다.

'하여간에, 과하게 저돌적이라니까.'

시문은 그런 그녀를 보며 차분하게 걸음을 옮겼다.

물론 [블랙팬서의 신체조직]이 전신에 연성되어 있는 만큼.

시문의 걸음걸이는 고양잇과 특유의 그것처럼 유연하고 여유로웠다.

"크, 크윽!"

작게 신음하는 고말숙.

그러나 핏발 선 눈동자엔 아직도 희미한 붉은 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오빠. 이거 아직 천살성 안 풀린 거 같은데. 조심해야 하지 않겠어?

그에 현자의 돌이 우려의 목소리를 냈지만.

'걱정 마. 저 상태론 내 털끝도 못 건드려. 그나저나, 우거진 풀 덕에 충격은 덜 했나 보네? 다행이야.'

시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고말숙의 상태를 살폈다.

"음. 최소 20군데 이상의 자상. 다수의 손가락과 갈비뼈 골절에 과다출혈까지."

일반적인 실버 랭크대의 플레이어였다면.

진즉 죽고도 남았을 수준의 부상으로 저렇게 다시 일어나다니.

'정말 독기 하나는 대단하다, 말숙아.'

아무리 천살성이 대단한 특성이라 해도, 고통까지 지워 주진 않다는 걸 잘 안다.

천살성의 보유자였던 전생의 말숙이가 직접 이야기해 준 정보니까.

한데 이렇게.

"캬악!"

"어허."

다 부러진 손으로 아직도 자신을 노린단 말인가?

"얌전히 있어."

시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런 말숙의 팔을 잡아챈 다음.

뚝.

"끄르륵!"

말숙의 팔을 그대로 꺾어 버렸다.

-ㄷㄷㄷ.

-무자비한 시문좌. 이렇게 보니 고말숙에 밀리지 않네.

-이 형 세상 천사처럼 보이더니, 은근 칼 같구나.

-그럼 자기 죽이려 드는데. 가만히 있어야 함?

-ㄹㅇ. 고말숙이랑 매칭 안 돼 본 사람들은 모르지. 쟨 진짜 사지 다 끊어 놓아도 이빨로 덤빌 애임.

채팅창의 반응은 정확했다.

실제로 천살성은 누군가를 죽이려 들 때 극한의 성능을 발휘한다.

이렇게 제 몸이야 어떻게 되든, 남을 죽이는 데에만 집착하게 되니까.

'어휴, 정규 아레나가 시작되기 전에 천마를 만나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천마 고말숙이라는 절세의 하이랭커는 세상에 나타나지 못했으리라.

[성좌 천마가 '설마 죽일 생각은 아니겠지?' 슬쩍 미간을 찌푸립니다.]

한숨을 쉬는 시문의 눈앞으로 천마의 메시지가 떠오른다.

'그럴 리가.'

시문은 천마의 반응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당연히 살려야지. 나라고 좋아서 팔을 부러뜨린 게 아니라고.'

눈동자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천살성.

그걸 조금 더 꺾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옛 친구의 팔을 부러뜨린 것이다.

진짜다.

'일단 천살성이 아예 꺼져 버리면 안 되니까, 이쯤에서 치료해야겠어.'

현 고말숙은 천살성으로 간신히 목숨을 부여잡고 있는 상태니까.

"크으으...."

신음을 흘릴 뿐.

얌전해진 말숙이를 보며 시문은 인벤토리에 손을 집어넣었다.

이내.

-잠깐. 오빠, 설마 포션으로 치료하려는 건 아니지?

'맞는데.'

-그거 남은 재료로 만든 거라 E급밖에 안 되잖아. 얠 어떻게 살리려고.

'아차. 그랬지 참.'

늘 S급 이상의 포션들로 인벤토리를 가득 채워 놓았던 탓에 잠시 착각한 시문.

그는 입맛을 다시며 인벤토리를 닫았다.

"이러면 답은 하나뿐인가."

굳이 포션이 아니더라도.

자신에겐 육체적인 치료에 관련해선 압도적인 위력을 보이는 연성물이 있지 않은가?

시문은 즉시 연성력을 끌어올렸다.

'업적 포인트가 좀 들긴 하겠지만.'

아깝지 않다.

옛 친우를 치료한다는 것 이전에.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말숙이에겐 늘 과분할 정도로 많은 것들을 받았으니까.

'그러고 보니, 요 까칠한 녀석이 나는 나름 잘 챙겨 줬단 말이지.'

남자가 봐도 잘난 동생 김시혁.

녀석의 사소한 부탁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말숙이었건만.

어디 약초나 재료를 구해 달라는 자신의 부탁은 투덜거리면서도 곧잘 들어줬었다.

'뭐, 하이랭커한테 재료템은 인벤 잡아먹는 쓰레기기도 하니까.'

대충 남는 걸 던져줬겠지.

그렇게 어깨를 으쓱한 시문은 손가락을 튕겼다.

[현자의 돌이 부족한 등가교환을 성립시키기 위해, 업적 포인트 300점을 요구합니다.]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드워프 소녀 마르넬 때보다는 덜한 부상인 걸까.

그때와 달리 연성에 드는 업적 포인트는 300점밖에 되지 않았다.

'현자의 돌, 원래 이게 정상적인 등가교환이라 했었지.'

-맞아. 성좌 아스클레피오스의 격을 따져 보면 이게 정상가야.

정상가라니.

무슨 성좌의 무구를 상품처럼 평하는 현자의 돌에 헛웃음을 흘린 시문은 '예'를 택했다.

우웅.

맑은 이명과 함께 아스트라페를 연상시키는 작은 막대가 떠오른다.

막대기 주변으론 얇은 실과 같은 형태의 뱀이 넝쿨처럼 막대 전체를 휘감고 있었다.

-와... 개영롱하네.

-저게 뭐임?

-유입들 저번 방송 못 봤나 보네 ㅋㅋ.

-모를 만하지. 이 형 개인 채널은 따로 운영 안 하더만.

-다시 보고 싶은 거 많은데 아쉽긴 해.

시문의 별다른 명령 없이도.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는 알아서 쓰러진 고말숙의 위로 자리 잡았다.

이내 저번 아레나에서 드워프 소녀 마르넬을 치료했던 것처럼.

화아아아.

성력과 같이 성스럽고도 따스한 기운을 내뿜었고.

뚜두둑.

부러진 뼈와 무수한 자상 등.

[현자의 돌이 리바운드를 최소화합니다.]

[현자의 돌의 등급과 레벨에 비례해, 소모되었던 업적 포인트 50점을 돌려받습니다.]

'이번엔 50점으로 돌려주네.'

만신창이이던 고말숙의 육체는 현자의 돌의 페이백과 함께 빠르게 아물어 갔다.

-아니, 지금 힐하는 거임?

-ㅅㅂ! 저게 말이 되나? 저 부상은 플래급 힐러가 와도 빡세겠구만.

-무슨 S급 아티팩트라도 되는 거임?

-유입들 놀라는 거 보소 ㅋㅋㅋ.

-난 지금 봐도 놀라움. 역시 핑거에몽.

-핑거에몽! 내 얼굴도 치료해 줘요! ㅠㅠ.

-고것은 핑거에몽도 쌉불가능한 부분이에요!

-이 X발! 너 어디 사냐?

그 경이로운 광경에 채팅창이 술렁였으나.

이미 채팅창을 접어 둔 시문의 눈에는 다른 부분이 들어왔다.

'천살성의 기운이 옅어지고 있잖아?'

저 지경이 되고도 정신을 놓지 않은 고말숙.

덕분에 핏발 선 그녀의 눈동자는 여전히 뜨여 있었고.

그 눈동자에 서렸던 붉은 기운.

천살성의 기운은 상처가 치유됨에 따라 조금씩 옅어지고 있었다.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는 육체적인 부상만 치료할 텐데?'

그 기현상에 고개를 갸웃하는 시문.

이내.

-오빠, 그냥 천살성의 발동 이유가 희미해져서 아냐?

'그럴 수도 있겠네.'

현자의 돌의 의견에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천살성의 자가적 발동 조건은 주로 살의를 지니거나, 보유자의 목숨이 위협받을 때니까.'

그렇다는 건.

저렇게 풀 컨디션으로 회복되거나, 적이 없다고 판단되면 자동으로 꺼져 버릴 수도 있었다.

그 증거로.

"뭐, 뭐야! 이거 어떻게...?!"

어느새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말숙이가 깜짝 놀란 얼굴로 제 몸을 더듬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피로 얼룩지고 잔뜩 헤어진 티셔츠와 청바지는 그대로였기에.

말숙이를 바라보던 시문의 표정은 조금 굳었다.

'아무래도 말숙이와 천마를 빨리 이어 줘야겠어.'

* * *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니지.

경우에 따라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결국 좀 연습하면 해낼 수 있는 것이 바로 핑거 스냅.

손가락 튕기기다.

분명 그만큼 흔하디흔한 행동이었건만.

따악.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도망... 아악!"

"츠륵!"

그 흔한 튕김 한 번에 주변 자연이 무기가 되어 적을 찢고.

빠악.

뚜둑.

어떨 땐 전투계보다도 훌륭한 움직임으로 적을 박살 낸다.

오는 길에 마주쳤던 야수형 몬스터들과 초목지기, 그들의 식물형 소환수까지.

"끄아아아!"

"도, 도망가! 괴물이다!"

"츠르르륵!"

저 남자가 손가락을 튕길 때마다, 몬스터들은 정말 다양한 방법으로 죽어 나갔다.

"미친...."

설마 남에게 이 말을 내뱉는 날이 오게 될 줄이야.

고말숙은 거침없이 적을 쓸어 나가는 김시문의 뒷모습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저게 마법계야, 전투계야?'

흙이나 바위, 나무 등이 제멋대로 변형되어 공격하는 것도 그렇지만.

'주먹 쓰는 꼴을 보니 나랑 붙어도 전혀 안 밀리겠는데....'

일대일로 붙으면 아마 손도 제대로 못 써 보고 처발리겠지.

실제로 천살성이 발동되었을 때.

시문에게 제압당하고 치료까지 받았다는 걸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고말숙이었으나.

'아니야! 그땐 12마리나 처리한다고 몸 상태가 구려서 그래!'

그녀의 가슴속 깊숙한 곳에 남아 있는 마지막 자존심은 차마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난 약하지 않아....'

인정하지 못한다고 봐야겠지.

그렇게 또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는 순간.

그나마 찾은 이 플레이어 짓도 못 하게 되어 버릴 테니까.

그럼 풀리지 않은 욕구가 현실에서 드러날 것이고.

결국은 또다시 가장 가까운....

짝.

"그만!"

있는 힘껏 두 뺨을 치자, 얼얼하고 알싸한 통증이 정신을 일깨웠다.

이를 빠득 간 고말숙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X발! 나 고말숙이야. 줘 패는 건 어디 가서 안 꿇린다고!"

어느새 의식적으로 하던 사투리조차 내뱉지 않고 있었지만.

이를 인식하지 못한 고말숙은 주먹을 움켜쥐고, 근처에 있던 곰 몬스터를 향해 달려갔다.

'대충 보고 따라 하면 돼. 주먹질이 뭐 그리 어려운 거라고!'

사실 머릿속으론 따라 하는 것조차 X나게 어렵다고 말하고 있으나.

그녀의 몸은 늘 그래 왔듯.

만나 왔던 강자들의 움직임을 최대한 분석하고.

그에 맞춰 움직였다.

'여기서, 이렇게....'

앞서서 적을 쓸어버리던 김시문의 주먹.

단순한 그 움직임을 그대로 담아 눈앞의 곰탱이를 후려치는 순간.

뻐걱!

"크허...."

그녀보다 두 배는 거대한 곰의 머리통이 터져 나갔다.

"하, X발!"

아무런 장비도 없는 맨주먹임을 고려해 보면 무척이나 고무적인 결과였건만.

'아씨! 이 느낌이 아닌데... 으아! X나 난해하네!'

고말숙의 얼굴은 불만으로 가득했다.

그런 그녀의 곁으로.

"제법이네."

이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편안하고 친근함이 담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멀끔한 면상을 지닌 남자.

김시문이었다.

"뭐, 뭐야. 너 언제 왔어!"

"얼마 안 됐어. 그나저나...."

복잡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김시문은 뒤편을 턱짓했다.

"아무래도 우리 둘만 중심부로 들어가야 할 것 같네."

그곳엔.

"그게 무슨 개소... 저건!"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3명의 남녀가 보였다.

"치타 길드 3인방?"

"왜 이렇게 몬스터 숫자가 많나 했더니, 스킵런을 했나 봐."

"아아."

그 말에 고말숙은 고개를 끄덕였다.

스킵런.

공략 도중 만나는 몬스터들을 잡지 않고.

그냥 다음 지점까지 달려 버리는 행위.

'아무리 중심부 입구라 해도 왜 몬스터가 20마리를 훌쩍 넘어가나 했더니.'

저 3인방이 스킵런으로 여기까지 달려온 탓에, 오는 길에 그렇게 많은 몬스터들이 몰려있던 거였다.

사실 이 김시문이라는 괴물이 죄다 쓸어버려서 그렇지.

20마리가 넘는 몬스터는 결코 만만한 숫자가 아니었다.

또 초목지기의 소환까지 고려해 보면, 실질적으론 1.5배를 더해야겠지.

'멍청하긴. 잘난 척하더니 스킵런은 왜 때려? 능력 없으면 걍 우릴 기다리든가.'

그럼 같이 중심부 입장 정도는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씁쓸한 미소를 짓던 고말숙의 귓가로.

파츠츠측.

거친 스파크 소리가 들려온다.

상록숲의 중심부로 향하는 결계가 열리는 소리였다.

"말숙아, 일단 들어가자. 팀원 숫자가 어떻든 1등은 먹어야지."

시문은 곧장 스파크를 튀기며 뻥 뚫린 결계를 향해 걸어간다.

그에 씁쓸한 얼굴로 치타 3인방의 시체를 바라보던 고말숙은.

"엉? 앗! 같이 가, 인마!"

퍼뜩 정신을 차리고 시문의 뒤를 따랐다.

제36화

36화. 고말숙 (3)

[10팀 중 최초로 '상록숲의 중심부'에 입장하셨습니다.]

[아레나 클리어 시 보상이 증가합니다.]

최초.

그 달가운 문구가 시문을 반겼다.

"다행히 최초 입장이구나."

혹여나 매칭이 잘된 다른 팀이 먼저 입장했을까 했던 걱정이 싹 사라졌다.

그런 시문의 반응과 별개로.

-? 다행이라니?

-이분 설마 자기가 최초 입장 못 할 거라고 생각했던 거임?

-표정 보니 진짜 같은데....

-허허... 이 형, 겉만 아니라 속까지 기만자네?

[나는야골드 님이 AP 500을 후원하셨습니다.]

=우리 같은 심해 플레이어와는 사고방식 자체가 다릅니다.

채팅창은 후원 메시지까지 이어지며 난리가 났다.

당연했다.

상록숲은 외부 맵이면서 마법계인 초목지기가 등장하는 악명 높은 던전.

그런 상록숲을.

-거 형씨,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오? 여기까지 혼자서 밀어 놓고!

-이 형 혼자 죽인 숫자만 수십인데 ㅋㅋㅋ.

-ㄹㅇ. 거기에다 고말숙도 혼자서 몇 마리 찢었자너.

-내가 다른 방송 같이 켜 두고 있는데, 거긴 지금 초목지기 셋에 놀아나는 중임 ㅋㅋ.

고작 둘이서 상록숲을 돌파해 놓고 최초 입장을 걱정하다니?

그러나 아레나 중 채팅창을 자주 확인하지 않는 시문이고.

시청자들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진정해, 얘들아. 애초에 상식이 통하는 방송이 아니잖아.

-22. 그냥 그러려니 해. 난 이분 첫 방송 때부터 봐 왔는데 걍 해탈했음.

-진심 어디 길드 유망주일 거다. 정보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없음.

-난 고말숙 저 애도 개궁금한데? 대체 특성이 뭐길래 맨손으로 몬스터를 찢어?

저들끼리 타오르고 식기를 반복했다.

그런 채팅창의 상황도 모른 채.

'음. 여기가 실버 랭크대니까... 보스는 역시 그 녀석이겠지?'

시문은 손가락으로 턱을 톡톡 두드리며 주변을 살폈다.

어느 동화 속의 한 장면처럼.

듣기 좋은 새의 지저귐과 형형색색의 꽃과 풀들이 가득한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그중 두 가지 독특한 게 있었는데.

하나는 들판 한쪽에 위치한, 지나칠 정도로 맑고 푸른 물웅덩이였고.

다른 하나는.

'잿빛에 삐쩍 마르고 뾰족한 나무. 틀림없네.'

그 반대편에 우뚝 솟은 잿빛 거목이었다.

그렇게 주변을 살피던 시문의 귓가로.

사박.

풍성한 풀을 밟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에 시문은 황급히 외쳤다.

"고말숙! 잠깐!"

어느새 고말숙이 시문보다 앞서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하필이면 누가 봐도 수상한 잿빛 나무 쪽으로.

"뭐? 1등 하자메. 빨랑 보스 잡아서 패야지."

뾰로통한 표정으로 돌아보는 고말숙.

그런 그녀의 머리 위로.

부아앙!

엄청난 파공음의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쿠우웅.

대번에 바닥에 처박히며 묵직한 진동을 울리는 무언가.

자욱한 흙먼지와 꽃잎, 풀잎들이 흩어지고 나서야 무언가의 형체가 보였다.

그것은.

그그극.

아까 보았던 잿빛 거목이었다.

"퉤퉤! 아X! 뭔데 이건!"

용케도 잿빛 거목의 기습을 피한 걸까?

먼지투성이가 된 고말숙은 연신 흙을 뱉으며 몸을 털어 냈다.

그녀의 귓가로 한숨 섞인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뭐긴 뭐야. 여기 보스지."

"보스?"

"그래."

그 말에 고말숙은 고개를 돌려.

쿠르르르.

진동과 함께 '일어나고' 있는 잿빛 거목을 바라봤다.

"X나 크네...."

"메마른 껍질이라고, 상록숲의 보스 중 하나야."

삐쩍 마른 몸체 중앙에 날카롭게 자리한 눈매와 입.

메마른 껍질은 방금 내려친 팔마저 회수하고 나서야 똑바로 일어섰다.

어림잡아 30미터는 넘어 보이는 크기.

"여하튼 주변에 있으면 위험하니까 일정 거리는 유지해. 저건 애당초 공략을 지키지 않으면...."

시문은 끝까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이유야 간단했다.

"덩치는 산만 한 새끼가 비겁하게 기습을 해? 넌 뒤졌어!"

고말숙이 어느새 잿빛 거목, 메마른 껍질에게 달려가고 있었으니까.

"하아."

절로 쉬어지는 한숨.

'제 입으로 천마를 만나기 전까진 나름 독고다이의 삶을 살았다고 하긴 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그러나 시문의 한숨은 곧 미소로 변했다.

'그래도 한결같아서 좋네.'

회귀 전, 고말숙을 처음 만났을 때도 딱 저랬었지.

한데 이 당시에도 저렇다는 건.

고말숙이라는 사람 자체가 한결같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그 말은 즉.

"내가 말려 봤자 소용없다는 거지."

시문은 주변의 평평한 바위에 앉았다.

-오빠, 안 나서게? 아무리 천살성이라도 타락한 나무 정령은 무리일 텐데?

'알고 있어. 나서긴 할 거야.'

당장이 아닐 뿐.

시문이 여유롭게 고말숙과 메마른 껍질의 전투를 관람했다.

사실 전투랄 것도 없었다.

'메마른 껍질은 물리적인 공격엔 내성이 상당하지.'

물론 고레벨의 플레이어.

대충 골드 최상위권에서 플래티넘 구간의 스펙을 지닌 전투계들이 패면 충분히 타격이 갈 것이다.

'그 구간대 플레이어라면 대부분 기의 형상화가 가능할 테니까.'

하지만 이곳은 실버 랭크고.

아무리 천살성이라도 해도 기운의 형상화를 이룰 정도는 아니었다.

고로 답은 하나.

'철저하게 공략을 따라야 하는데....'

애당초 메마른 껍질은 실버 랭크대의 수준과 맞지 않는 스펙의 보스였다.

일반적으로 기의 형상화를 할 줄 모르는 실버대에서.

저 막강한 물리 내성을 뚫어 낼 방법은 마법이나 그에 준하는 아이템밖에 없는데.

그런 능력을 지닌 아이템이나 스크롤의 값은 실버가 감당하긴 힘들었다.

결국 마법계 플레이어와 매칭되지 않는 이상.

정규 공략법 말곤 답이 없는 것이다.

'괜히 마법계가 귀족 취급받는 게 아니지.'

그래서 갤럭시 아레나는 뚜렷한 공략법을 내놓았다.

그것은 바로.

"비... 켜라...."

"이 개자식이! 서! 안 서?!"

"목... 마르다...."

메마른 껍질의 이동 동선이 정해져 있다는 것.

시문은 고말숙의 주먹질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묵묵히 물웅덩이로 걸어가는 메마른 껍질을 바라봤다.

'메마른 껍질은 깨어나면 반드시 저 물웅덩이에 들어가지.'

그리고 저 맑은 물을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한다.

하지만.

'놈은 타락한 나무 정령이지.'

고로 저 맑은 물은 독이 되어.

언데드나 마족을 정화하듯, 저 잿빛 거목의 곳곳을 본래의 모습으로 정화해 버린다.

그 압도적인 물리 내성도 함께 말이다.

바로 그곳을 공격하는 게, 메마른 껍질의 정석적인 공략법이었다.

'보아하니 물웅덩이엔 금방 도달하겠네.'

말숙이의 눈이 시뻘건 것을 보아, 천살성이 발동된 모양이지만.

퍽, 퍽!

천살성의 기운이 서린 주먹으로도 메마른 껍질에겐 조금의 타격도 주지 못했다.

그나마 아까와 다르게 작은 부스러기라도 흐른다는 게 고무적인 변화긴 했으나.

'저걸론 어림없지.'

결국 기의 형상화나 마법과 같은 이능의 힘이 아니라면.

물 마시기 전의 메마른 껍질에겐 타격을 줄 수 없다.

그래.

분명 그래야 할진대.

"캬아아아아! 서라고 X발!"

쿵!

걸쭉한 욕설과 함께 휘청이는 메마른 껍질.

-? 방금 뭐임?

-미친! 맨주먹으로 메마른 껍질을 휘청거리게 한 거야?

-맨주먹은 아닌 듯. 눈 빨간 거 보면 광폭화나 뭐 그런 특성인 거 같음.

-광폭화는 물리 공격 아니냐 ㅋㅋㅋ. 기의 형상화 못 하면 결국 똑같은데 무슨.

-놔둬. 심해라 모르는갑지.

채팅창이 들썩이는 건 고사하고.

방금의 일격을 지켜본 시문의 두 눈은 휘둥그레졌다.

그럴 수밖에.

'방금 그거 천마신공 아냐?'

방금 고말숙이 갈긴 주먹엔 분명 천마신공의 묘리가 희미하게 배어 있었다.

'아니면 메마른 껍질이 휘청인 게 말이 되질 않는데....'

시문의 예상은 완벽히 적중했다.

[성좌 천마가 공간이 울릴 정도로 쩌렁쩌렁한 광소를 터뜨립니다.]

[성좌 천마가 퀘스트 '제자를 찾아라'의 조건을 '플레이어 고말숙'으로 수정합니다.]

[성좌 천마가 '난 저 여아 아니면 안 되는 몸이 되어 버렸네. 연자여! 부탁하네!' 간곡히 요청합니다.]

천마가 열렬한 반응을 보내오는 것이다.

'설마 퀘스트 내용까지 수정할 줄이야.'

뭐, 어차피 무슨 조건을 달든 말숙이를 그의 제자로 넣을 생각이긴 했다.

"그나저나...."

천마의 메시지를 옆으로 치운 시문은 정면을 바라봤다.

"말숙이의 공격이 먹힐 줄은 몰랐는데...."

본래라면 물을 마시고 약점이 드러난 놈과 약 1분 정도 전투를 벌이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쯤에 전투에 참여하려 한 것인데.

'이거 일 났군.'

따악.

시문은 즉시 [블랙팬서의 신체조직]을 전신에 연성하곤 들판을 내달렸다.

이유야 간단했다.

"물...."

공략법이기도 한 메마른 껍질의 동선.

그것이 틀어지는 유일한 상황이 바로.

"못 마... 시게 해?"

메마른 껍질이 물을 마시기 전.

타격으로 인정되는 수준의 공격을 받는 거니까.

"너...."

잿빛 거목의 상단부가 화난 얼굴처럼 일그러졌다.

눈으로 추정되는 부분에 붉은 안광이 어리는 순간.

"죽인다."

콰앙!

귀청을 때리는 폭음.

집채만 한 메마른 껍질의 팔이 아까와는 차원이 다른 속도로 내리꽂힌 것이다.

하나.

"아슬아슬했네."

피떡이 된 고말숙 대신 뚜렷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말숙의 목덜미를 낚아챈 시문이 내리꽂힌 메마른 껍질의 팔 옆에 서 있었다.

"뭐, 뭐야? 너 언제!"

"저리 빠져 있어. 이젠 너라도 어쩔 수 있는 상황이 아니야."

"캬악! 뭐래! 저 새끼가 내 주먹에 휘청거리는 거 못 봤냐!"

"그래?"

한쪽 눈썹을 슬쩍 치켜올리는 시문.

이내.

"그럼 어쩔 수 없지. 죽지만 마라."

고양잇과 특유의 움직임으로 가볍게 물러났다.

"그게 무슨 소리...."

그에 고말숙이 뭐라 의문을 표할 틈도 없이.

뻐걱!

그녀의 옆구리로 거대한 잿빛의 뿌리 뭉텅이가 처박혔다.

메마른 껍질이 발차기를 날린 것이다.

비명 하나 남기지 못하고 허공을 나는 고말숙.

시문은 그런 그녀를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천살성이 발동된 상태니 죽지는 않겠지.'

어쩔 수 없다.

말숙이의 고집도 고집이지만.

애당초 천살성은 자신의 목숨을 불태우더라도 오로지 살의만을 추구하는 특성.

아까처럼 느긋하게 천살성을 달래 줄 수는 없었다.

따악.

손가락을 튕기자.

우수수.

푹신하게 연성된 풀과 흙더미가 떨어지는 고말숙을 조심스럽게 받아 냈다.

-오빠, 얘 살아 있어. 팔이 부러지긴 했지만.

'알아.'

찰나의 순간이었으나.

우월한 스탯과 전체적으로 [블랙팬서의 신체조직]을 연성한 시문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설마 그 찰나에 방어 태세를 갖출지는 몰랐어.'

기습적으로 파고드는 메마른 껍질의 발에 맞춰.

양팔로 가드를 올리며 몸을 뒤로 빼, 충격을 최소화한 말숙이를.

"야 이... 개X...."

충격 요법이 효과가 있는 것일까.

천살성 특유의 으르렁거림 대신 숨 가쁜 욕설이 들려왔다.

'다시 정신이 들었나 보네.'

그에 피식 웃음을 흘린 시문은 즉시 바닥을 박찼다.

쾅!

그 아래로 강렬한 충격음이 터져 나온다.

메마른 껍질의 걸음이었다.

'메마른 껍질은 선공자에게 확정 어그로가 끌리는 보스지.'

본디 지능이 높은 보스라면 확정 어그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실버 랭크에다 타락으로 제정신이 아닌 메마른 껍질의 어그로는 설정상, 무조건 선공자에게만 집중되었다.

'다행히 높은 물리 내성 덕에, 놈의 체력 자체는 그리 높지 않아.'

어그로는 자신을 향하지 않고.

비물리적인 공격만 가능하다면 너무나 쉬운 보스.

고로.

'이건 기회다.'

"너... 죽인다...!"

눈앞까지 뛰어오른 시문은 아랑곳하지 않고.

멀리 쓰러진 고말숙만을 향하는 메마른 껍질.

그에 시문은 주먹을 말아쥐었다.

"말숙아, 잘 봐 둬라."

힘차게 끓어오르는 연성력.

그것은 순식간에 전신으로 퍼져 나가며 감각을 일깨웠고.

따악.

핑거 스냅과 함께 [오우거의 신체조직]이 [블랙팬서의 신체조직]과 동시 인체 연성을 이룬다.

"아까 그 주먹은...."

우웅.

인간의 그것과는 비교가 불가한 이종족의 신체 능력과.

필멸의 존재를 성좌라는 위치에 오르게 한 절세의 무공.

그리고 지난 특수 아레나에서의 10레벨업으로 총 연성력 33과 18에 달하는 마기 스탯까지.

"이렇게 쓰는 거다."

그 모든 것을 한 손에 움켜쥐고 뻗어 내는 순간.

천마신공(天魔神功).

격(擊) 패황쇄(覇皇碎).

잿빛의 거대한 나무가.

콰즈즈즈측!

바스러졌다.

제37화

37화. 고말숙 (4)

공연 피날레에 내리는 꽃가루.

혹은 첫눈의 탈을 쓴 화산재처럼.

스으으으.

잿빛의 가루가 아름다운 들판 위로 흩날린다.

시간이 멈춰 버리기라도 한 것일까.

-....

-?

뜨겁게 달아오르던 채팅창 역시 잠시간 침묵이 이어졌다.

물론.

-메마른 껍질이 한 방...?

-미쳤다... ㄹㅇ 개미쳤어!

-거짓말이지? 지금 몰카 찍는 거지?

-템도 없이 주먹 하나로 메마른 껍질을 원킬 낸다고?!

-정신나갈거같애 정신나갈거같애 정신나갈거같애 정신나갈거....

그런 채팅창이 달아오르는 건 정말이지 한순간이었다.

특히나.

-방금 그거 권기 아니었음?

-이 사람 실버잖아! 권기를 어케 써?

-신규 유입분들 많으시네. 이분 이전에도 권기 썼습니다.

-ㅇㅇ. 실버 때 기의 형상화하는 사람 꽤 있음. 지금 최상위권 플레이어들도 대부분 그랬잖아.

-아니, 아무리 권기라도 보스 원킬은 개에반데? 얜 마법계에다 무기도 없잖아!

-메마른 껍질은 물리 내성이 지X이라 그렇지, 체력 자체는 그리 안 높은 보스예요.

-ㄹㅇ. 플래만 가도 호구 취급당하는데. 지금 중요한 건 이분이 마법계라는 거임.

비각성자가 아닌 진짜 각성자들.

그중에서도 현역을 뛰는 플레이어들의 대화는 무척이나 활발했다.

-저 손가락이랑 관련된 특성이 분명함. 끼고 있는 무구도 없잖음.

-아니 ㅅㅂ. 님 특성이 무슨 만능인 줄 아세요? SSS급 들고 있어도 이 구간에서 보스 원킬은 불가능해요.

-ㅈㄹ하네. 님이 SSS급 특성 보유자임? 어케암?

-SS급 보유잔데요? 말투 엿같네. 님 티어가 어디신데요?

-플래 상위권인데? 왜. 함 치시게? 말하는 거 보니까 특성빨로 올라온 거 같은데 자신 있음?

-ㅋㅋㅋㅋㅋㅋㅋ. 나도 플래 상위권인뎈ㅋㅋ. 어이가 없네. 님 어디 사시죠?

-현 화랑 길드 소속 다이아 플레이어입니다. 채팅창 님들만 있는 거 아닌데 적당히 하시죠.

-진심ㅋㅋㅋ. 다이아들이 가만있는데. 플래 새끼들이 왜 이렇게 시끄럽지?

브실골.

흔히 말하는 심해 랭크의 플레이어들은 감히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

갤럭시 아레나에서 흔히 상위권으로 분류되는 플래티넘 랭크.

그 이상으로 보이는 플레이어들이 줄줄이 등장한 것이다.

참고로 비각성자면 몰라도.

각성자는 갤럭시 아레나와 연동되는 아레니아에서 개인의 정보를 숨길 수 없었기에.

-ㄷㄷ... 천상계 형님들 진정하세요.

-심해 방송에 무슨 상위권 플레이어들이 이렇게 많냐 ㅋㅋㅋ.

-뭐가 많음? 꼴랑 10명도 안 되는 거 같은데.

-어휴, 한심한 새끼. 바로 열등감 폭발시키네. 실버 방송에 상위권 10명이 그럼 적냐?

-내말이. 열등감은 진짜 ㅋㅋ 레전드네.

일반적인 플레이어들과 비각성 시청자들은 쉽게 의견을 내지 못했다.

당연했다.

-대체 무슨 마법이지? 강화계인가? 아무리 그래도 이런 육체 능력은 말이 안 되는데?

-더블 클래스가 아닐까요?

-더블 클래스면 초반은 더 구리죠. 올려야 할 능력치랑 경험치가 거의 두 밴데.

-이분 저번 방송에서 자기가 마법계라고 못 박았어요. 더블 클래스는 아닐 듯.

-그럼 진짜 마법계란 말인데. 아니, 이때까지 움직임만 봐도 플래급 전투계랑 맞먹는데....

-혼란하다 혼란해.

상위권 플레이어로 보이는 채팅들이 줄줄 올라오니 기가 눌려 버린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정작 방송의 주인인 시문은 현 채팅창의 상황을 확인할 수 없었다.

단순히 채팅창을 닫아 두어서가 아니었다.

[보스 몬스터를 일격에 처치하였습니다.]

[업적 '원펀맨'을 달성하셨습니다.]

[업적 포인트 500점을 획득합니다.]

메마른 껍질의 죽음과 함께 업적창이 올라온 것이다.

특히나.

[메마른 껍질이 '정화의 샘물'을 마시지 못하고 일격에 쓰러졌습니다.]

[특수 조건 만족으로 히든 보스 '미쳐 버린 초목지기 뮤리에'가 등장합니다.]

뒤이어 떠오르는 시스템창은 시문의 두 눈을 휘둥그러지게 했다.

"히든 보스라고?"

-히든 보스? 여기서 히든 보스가 나와? 실번데?

-플레이어 8년 찬데 이런 건 처음 봅니다.

-지금까지 누구도 만족 못 한 특수 조건을 만족했겠죠. 뭔지는 대충 짐작 갑니다.

-하긴, 실버 랭크대에서 메마른 껍질 원킬 낸 거부터가 불가능한 일이긴 하지.

히든 보스.

종종 해당 랭크대의 수준을 벗어나는 힘을 가진 괴랄한 존재들.

지난 아레나인 [잠식된 고블린 교두보]에서 등장한 홉고블린이 그러한 존재였으나.

당시의 홉고블린과 지금의 히든 보스는 엄연한 차이가 있었다.

'그땐 억지로 히든 보스를 집어넣은 느낌이 없잖아 있었지.'

그 증거가 바로 '이름'이다.

히든 보스라면 독자적인 이름까지 지니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당연히 보스 몬스터 중에서 네임드 몬스터라는 뜻이기에, 그 강력함은 설명할 필요도 없지.

그렇기에 저번 아레나에서 등장한 홉고블린은 제대로 된 히든 보스라 부르기 힘든 거였다.

'스펙 너프를 따지기 이전에 이름조차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엔 달라.'

지금 나타나는 히든 보스는 뮤리에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지 않나?

시문은 조금이지만 긴장을 담은 눈으로 정면을 바라봤다.

촤르르르.

맑고 푸른 물웅덩이가 용오름 치며 솟아오른다.

이내.

"꺄하하!"

어린아이의 웃음소리.

그러나 그에 어울리지 않는 살벌함과 음산함이 뒤섞인 웃음소리가 아름다운 들판 위로 퍼진다.

"키쟁이 아저씨 죽었구나! 드디어 죽어 버렸어!"

솟아오르던 물속에서 나타난 목소리의 주인은 이름 그대로 초목지기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단지 앞서 등장한 초목지기들과 달리.

작고 귀엽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좋겠다! 너무 부러워!"

한껏 달아오른 금속처럼 시뻘건 피부.

그 위로 우수수 돋아난 것은 다름 아닌.

"비늘?"

비늘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요정의 그것을 연상시키던 날개는 낡고 헤진 피막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날카롭게 찢어진 입과 눈매 위로는 쑤셔 넣은 듯한 뿔이 어색하게 박혀 있었다.

그 모습은 꼭.

'용족 같잖아?'

시문의 생각이 틀리지 않은 것일까?

[성좌 제우스가 불쾌감을 토합니다.]

[성좌 천마가 눈살을 찌푸립니다.]

[성좌 검은 염소가 살기 어린 미소를 짓습니다.]

아레나 내내 잠자코 있던 성좌들이 일제히 불쾌감을 토했다.

'그러고 보니 성좌들은 용족을 좋아하지 않는 눈치였지.'

적어도 자신에게 관심을 주는 세 성좌는 그러했다.

'그럼 저 히든 보스도 용족과 연관이 있는 걸까?'

가능성은 굉장히 높았다.

일단 파충류를 연상시키는 저 모습부터가 너무 적나라하지 않은가?

"나 다 봤어! 너너너! 키다리 아저씨를 한 방에 편하게 해 준 녀석!"

뮤리에의 시선이 시문을 향한다.

이내.

"너무 고마워! 답례로 너도 편하게 해 줄게! 키히힛!"

뮤리에의 날카로운 눈에 붉은 기가 일렁인다.

메마른 껍질의 그것과 비슷한 색의 안광이었다.

동시에.

슈아악!

왼쪽 귓가로 파고드는 파공음.

시문은 얼굴 옆을 스친 날카로운 뿌리를 흘낏했다.

뮤리에의 자연 마법이었다.

'위험할 뻔했군.'

[블랙팬서의 신체조직]이 전신에 연성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면.

반응도 할 수 없는 공격이었으리라.

"어라라? 너 좀 빠르네?"

고개를 갸웃하는 뮤리에.

'마법형 히든 보스라... 이거 전투가 길어지면 성가시겠는데.'

타앗.

시문은 곧장 바닥을 박차며 곧장 뮤리에를 향해 파고들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키히힛!"

뮤리에의 죽 찢어지는 눈매와 입가.

동시에 녀석의 주변으론 붉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그대로 뚫어 줄게!"

이어 득달같이 마주 달려오는 뮤리에.

그 속도는 잔상이 남을 정도로 빨랐다.

하지만.

따악.

시문의 손가락이 튕겨짐과 동시에.

드드득.

뮤리에의 밑에서 날카로운 흙가시가 솟아올랐다.

"어라라?"

잔상이 남을 정도로 엄청났던 속도가 무색하게.

스윽.

무척이나 여유롭게 흙가시를 피해내는 뮤리에.

녀석의 날카로운 눈가는 일순 둥글게 변했다.

"너 자연 마법도 쓰는구나? 너도 우리 친구였어?"

'친구?'

무슨 말일까?

물론 시문이 되묻는 상황은 나오지 못했다.

"키힛. 그럼 더더욱 죽여 줘야겠네!"

성난 벌처럼.

뮤리에는 피막 날개를 펄럭이며 순식간에 시문의 앞으로 날아들었으니까.

스아악!

붉은 잔상이 살벌한 속도로 시문의 목을 스친다.

녀석의 비늘 덮인 팔이 횡으로 그어진 것이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키히히! 뮤리에는 착하니까!"

녀석은 히든 보스라는 이름에 걸맞게.

"친구를 꼭 편하게 해 줄 거야! 나처럼 되지 않게!"

슈아악!

비행이라는 이점을 이용해, 사방팔방에서 살벌한 공격을 가했다.

시문 역시 인체 연성으로 얻은 우월한 신체 능력과 천마신공의 묘리를 담은 권각으로 반격을 가했지만.

'너무 빨라.'

뮤리에의 속도는 그것만으로 따라잡기는 조금 버거웠다.

특히 돌진 공격 사이사이에.

"얘들아! 우리 친구를 죽여줘!"

츄아아악!

쐐애액.

풀과 꽃들.

심지어 바람조차 날카로운 날붙이가 되어 날아드는데, 이게 여간 성가신 것이 아니었다.

'역시 마법형이라 까다롭군.'

내디딘 발밑에서 힘차게 솟아오르는 날카로운 풀잎.

인체 연성한 팔로 그것을 쳐 낸 시문은 곧장 뒤로 물러났다.

'내가 마법계가 아니었다면 진즉에 끝난 싸움이겠어.'

일반적으로 마법계는 통상적으로 다른 계통의 플레이어들보다 이능적인 감각이 뛰어나다.

덕분에 저 어마어마한 속도의 돌진과 괴랄한 자연 마법의 연계를 버텨 내는 것이다.

그 양상은 자그마치 5분이나 넘게 이어졌다.

-움직임 실환가?

-마법계라도 마법 눈치 까고 피하는 건 어려운데. 저 속도의 돌진을 피하는 게 더 레전드네.

-ㅋㅋㅋ. 이젠 그냥 웃음밖에 안 나옴.

-저 플래티넘 승급 앞두고 있는데. 이분 이길 자신이 없어요....

-이쯤 되면 진짜 이 사람 상태창이 너무 궁금해지는데.

히든 보스를 상대로 일대일을 넘어.

말도 안 되는 움직임으로 뮤리에의 공격을 피하는 시문의 모습은 경이 그 자체였지만.

시문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 내 스펙으론 저 반격은 무리야.'

사방에서 날아드는 자연 마법이야 마법계 특유의 기감으로 피하고.

"키힛! 우리 친구, 잘 피하네!"

저 잔상이 남을 정도의 돌진은 인체 연성으로 받아 낸다지만 그뿐.

"키히히! 안 맞았지롱~ 친구야, 너 너무 느려!"

반격까진 해내지 못하는 시문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히든 보스의 스펙으로 돌진과 자연 마법을 뒤섞는 뮤리에는 보통 까다로운 게 아니었으니까.

'이대로 가면 내가 먼저 지친다.'

이렇게 소모전으로 이어 가면 결국 공격을 받아 내기만 하는 쪽이 불리해지기 마련.

그러니.

'그 전에 승부를 내야 해.'

어떻게?

라는 의문은 들지 않았다.

전생에서 수많은 강자들의 방송과 전투를 보고 겪어 온 시문이기에.

'저 속도로도 아예 피할 수 없게, 광범위로 터뜨려 버리면 돼.'

속도가 빠른 이들을 상대로 보편적으로 어떤 대처법들이 있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현자의 돌.'

-히힝! 이미 준비하고 있었지롱~. 오빠 맘은 내가 다~ 안다구?

전투 중임을 잊게 만드는 녀석의 밝고 들뜬 목소리.

무언가를 연성한다는 게 즐거운 것이리라.

[현자의 돌이 부족한 등가교환을 성립시키기 위해, 업적 포인트 500점을 요구합니다.]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팝업 되는 시스템창에 시문은 곧장 '예'를 선택했고.

소모된 업적 포인트가 부족한 인과를 충당하며 손가락 끝으로 모여들었다.

그대로 손가락을 튕기자.

콰르릉.

이 아름다운 들판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뿐만이 아니었다.

짜작!

한줄기의 섬광이 시문의 앞으로 내리꽂혔고.

"꺄앗!"

시문의 정면으로 돌진하던 뮤리에를 후려갈겼다.

정확히는.

"이걸 피할 줄은 몰랐는데."

녀석의 날개 끝부분이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타격이 꽤 큰 것일까?

"키, 키힛!"

뮤리에는 신음을 흘리며 다시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녀석은 다소 힘겨운 날갯짓을 하며, 시문의 앞으로 내리꽂힌 섬광의 정체를 확인했다.

"짜릿짜릿해. 번개야?"

"맞아."

긍정을 표하는 시문.

그와 함께 떠오른 하얀 막대.

흡사 독이 오른 뱀처럼.

하얀 막대는 쉬지 않고 스파크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이상하다? 우리 친구면 번개는 다룰 수 없을 텐데."

"그것도 맞지."

또다시 고개를 끄덕이는 시문.

그러면서 하얀 막대를 쥐는 시문의 모습에 뮤리에의 눈가가 날카롭게 찢어졌다.

"알았다! 키히히! 날 속였구나! 날 속인 거야! 너! 죽여 버릴...."

이어 살기 어린 외침이 터져 나왔으나.

완전하게 끝맺지는 못했다.

어느새 하얀 막대를 쥔 시문이 힘껏 몸을 비틀며, 그것을 내지르고 있었으니까.

그 모양새가 꼭.

'아까 키다리 아저씨한테 했던 거랑 비슷한데?'

뮤리에가 그 자세를 인지하는 순간.

천마신공(天魔神功).

격(擊) 패황쇄(覇皇碎) - 아스트라페.

차마 들을 수 없는 굉음과 눈도 뜨기 힘든 섬광이 뮤리에를 덮쳤다.

* * *

[히든 업적 '히든 보스 잡기 (2/?)'를 달성하셨습니다.]

[히든 보스 '미쳐 버린 초목지기 뮤리에'를 단신으로 처치하였습니다.]

[보상으로 업적 포인트를 총 1,000점을 획득합니다.]

떠오르는 메시지들이 히든 보스 뮤리에의 죽음을 알려 온다.

그러나 시문은.

아니.

-....

"...."

시문을 비롯해 지금 이 '상록숲의 중심부'를 보고 있는 모든 이들이 일제히 침묵에 빠졌다.

당연했다.

방금 일어난 재앙의 여파를 증명하듯.

파츠측.

치직!

새까맣게 타 버린 들판 위로는 하얗고 푸른 전류들이 여전히 춤을 추고 있었으니까.

대충 봐도 반경 30미터는 거뜬히 넘어 보였다.

본래 이곳의 보스인 메마른 껍질만 한 크기란 말이다.

'너, 너무 셌나...?'

밀려오는 탈진감 이전에.

스스로도 당황스러운 위력인지, 좀처럼 움직이지 못하는 시문.

이 압도적인 침묵 속에서.

[성좌 제우스가 '나의 벼락으로 이런 일을 벌일 줄이야....' 입을 떡 벌립니다.]

[성좌 천마가 '허허... 이런 걸 지구 말론 콜라보라고 하던가? 졸지에 자네와 손을 잡았군.' 헛웃음을 흘립니다.]

[성좌 검은 염소가 '알록달록하니 짜증 났는데 시원하네! 아가야? 몇 번 더 갈겨!' 걸쭉하게 외칩니다.]

오로지 시문을 지켜보던 성좌들만이 떠들 뿐이었다.

제38화

38화. 이게 여기서 왜 나와?

상록숲 중심부.

그곳에 들이닥친 갑작스러운 재앙에 잠시간이 침묵이 있었으나 그뿐.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와 X발! 방금 저거 뭐임?

-아니, 번쩍하더니 히든 보스 삭제됐어 ㅋㅋㅋㅋㅋ.

-형... 나 이건 불가능해....

이 말도 안 되는 광경을 시청하던 만 단위의 시청자들은.

-대체 무슨 마법이었죠?

-최소 플래티넘 이상급 마법일 듯.

-위력만 놓고 보면 플래티넘 상위권이랑도 비빌걸요. 발출 형태를 보면 광역 마법 같은데.

-광역 마법인데도 히든 보스를 흔적도 없어 지워 버리는 딜이 나오나?

-히든 보스가 마법계였잖아. 체력은 약하겠지.

-ㅇㅇ 실버 랭크라 그런지 보호 마법은 하나도 안 썼음.

일제히 저마다의 감정을 토해 냈다.

그러나 결국 간접적 관람인 방송으로 보는 이들이.

이 재앙과도 같은 현실을 '직관'해 버린 이와 같은 감정을 지닐 순 없으리라.

"미쳤다...."

정말 이 한 마디 말고는 현 상황을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적어도 고말숙이 아는 표현법 안에선 그랬다.

하나 그뿐.

빠르게 정신을 차린 고말숙은 미세하게 몸을 떨며 숨을 헐떡이는 시문을 바라봤다.

'아까 그 마법, 분명 메마른 껍질을 박살 냈던 때랑 느낌이 같았어.'

번개로 단조된 것 같은 하얀 막대를 휘두르긴 했지만.

결국 도구가 쥐어져 있었다는 것뿐이지.

방금 시문이 날린 일격은 메마른 껍질을 한 방에 박살 냈던 그 일격과 다름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잠깐. 그럼 방금 그게 마법이 아니라....'

고말숙의 눈동자엔 희미한 붉은 기가 서렸다.

'기, 기술이었던 거야?'

절로 활성화된 천살성이 귓가에 속삭인다.

그게 아니면 말이 안 된다고.

실제로 그녀가 본 현실도 그러했다.

저게 마법이었다면 준비 과정이나 전개 시간 같은 것이 필요했겠지만.

'저 녀석은 손가락 하나 튕기는 거로 끝이었지.'

그마저도 마법이 아닌 뇌기의 집약체인 하얀 막대를 소환했을 뿐.

자신의 직감과 천살성의 빌어먹을 감각은 분명.

방금의 대규모 뇌속성 공격은 마법이 아닌 '기술'이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나도... 따라 할 수 있을까?'

심해의 유명 트롤부터 실버의 미친년까지.

한국의 아레나에서 좋지 않은 낙인이 찍혔다는 건 스스로도 잘 안다.

그럼에도 랭크의 하락을 막고 실버에서 버틸 수 있었던 건 다름 아닌 카피였다.

자신보다 강한 플레이어.

즉, 위로 올라갈 실력자들의 기술부터 작은 행동, 호흡까지 하나하나 체크하고 외웠으며.

그것을 어떻게든 따라 해 냈다.

힘민체 모두 10이라는 우월한 초기 각성 스탯.

더불어 SSS급 특성인 천살성에 타고난 눈썰미는 충분히 그것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많은 실력자들을 카피해 온 그녀로서도.

'아니, 저건 불가능해.'

방금 시문의 일격은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그녀가 마법과 같은 이능을 쓸 수 없어서는 아니었다.

그것을 논하기 이전에.

'쫄몹 잡던 그 움직임도 따라 할 수 없었는데....'

그보다 한층 더 차원이 높은 저 일격은 작은 느낌조차 오지 않았다.

그저 평범한 일격 하나에 무수히 많은 묘리가 섞여 있다는 짐작만 어렴풋이 잡힐 뿐.

그래.

마치 알파벳 하나 배운 적 없던 사람이 영어 서적을 보는 느낌이었다.

"후우. 끝났네."

방금의 재앙과도 같은 일격을 실현한 인물이라곤 생각하기도 힘든 맑은 목소리.

히든 보스를 처치와 관련된 시스템창을 확인하는 것일까?

어느새 시문은 허공을 가볍게 터치하며 다가왔다.

그런 시문을 보며 고말숙은 아랫입술을 슬쩍 깨물었다.

'뭐라고 해야 하지?'

캐리해 줘서 고맙다?

덕분에 버스 잘 탔다?

아니면 그 일격 어떻게 한 건지 좀 가르쳐 달라고?

뭐라 말할지 정할 틈도 없이.

"말숙아. 아깐 미안했어."

맑고 뚜렷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좀 아팠지? 이거 마셔라."

고말숙의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럴 수밖에.

'미안하다고? 포션은 또 왜 주는데?'

고말숙이 아무 말 없이 내민 포션을 바라보기만 하자.

"어음... 그거 아니면 방법이 없었어. 알잖아, 너 그 상태일 때 말이야."

시문은 조금 곤란한 표정으로 볼을 긁었다.

"하...."

그에 고말숙은 헛웃음을 흘렸다.

"너, 나한테 할 말이 그거뿐이냐?"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엿 같다느니, 미친년이라느니, 이럴 거면 그냥 아레나 돌지 말라느니! 그런 말 안 나오냐고!"

고말숙은 스스로를 잘 안다.

이곳에 오기 전.

그녀의 평판만으로 아레나 시작부터 불화를 일으켰고.

실제로 그녀 역시 자존심을 내세우며 물러서지 않았다.

그 탓에 5인으로 매칭된 팀은 깨졌고.

이곳으로 오는 와중에 천살성에 취해, 시문을 공격하기도 했었다.

천살성의 엿같은 단점이라고 변명해 봐도.

결국 자신이 공격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텐데.

히든 보스는커녕 기존 보스의 공략에도 기여한 바가 1도 없는데....

대체 왜.

"뭐야, 그거 때문이었어? 네 특성 때문이었잖아. 어쩔 수 없었다는 거 잘 알아."

왜 이 남자는 이토록 친근하게 자신을 대하는 것일까.

그것도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던 사이처럼 말이다.

더 기가 차는 건.

'...그게 싫지가 않아.'

뚜렷하고 날렵한 눈매.

적당히 짙은 눈썹에 날카롭게 솟은 코와 턱선, 몸매까지.

전체적으로 날렵하고 뚜렷한 시문의 외형은 분명 그녀의 취향이긴 했으나.

그렇다고 처음 보는 남자가 이토록 친근하게 구는데, 마음이 편안했던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X. 내가 미친년이 맞긴 한가 보네."

스스로가 생각해도 웃긴지.

헛웃음을 흘린 그녀는 시문이 내민 포션을 낚아챘다.

꿀꺽꿀꺽.

순식간에 원샷을 때리는 고말숙.

본래라면 다친 부위에도 어느 정도 부어야 했지만.

'이쯤이야 금방 붙지.'

우월한 초기 스탯과 SSS급 특성인 천살성이 선사하는 회복력은 어마어마했다.

"후."

고통이 좀 가신 것인지.

고말숙은 한결 나아진 얼굴로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리며 말했다.

"근데 있잖아. 하나만 물어보자."

"뭔데?"

"너, 나 아냐?"

"어?"

"난 어디 가서 내 특성 말한 적이 없거든. 근데 아는 눈치길래."

그 말에 시문은 눈을 끔벅였다.

'얘가 이렇게 날카로운 질문을 할 줄은 몰랐는데....'

말숙이에겐 정말 미안한 말이나.

설마 그녀가 이런 것을 물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가 천살성에 대해 안다는 걸 눈치챘구나.'

실수라면 실수였다.

평범한 광폭화류 특성은 강렬한 타격이나 목숨의 위협을 받으면 더욱 광기에 불타오르지.

천살성처럼 중간중간 정신을 차리며, 사고할 틈을 주지 않는다.

한데 그걸 아는 듯 말했으니.

아무리 둔한 말숙이라도 뭔가 낌새를 느낀 것이리라.

그렇다고 당황하지는 않았다.

시문에겐 상태창을 공개하지 않은 이상, 무적의 치트키가 있었으니까.

"어.... 내 특성이야."

"특성? 상대방의 특성을 알아내는 것도 있어?"

"좀 비슷해. 다르긴 하지만."

오묘한 시문의 대답.

그러나.

"X발. 어쩐지."

우리의 고말숙 여사님은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래서 초반부터 그랬던 거구나. 내 천살성을 진작에... 앗!"

황급히 제 입을 틀어막는 고말숙.

시문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 방송은 아까 종료했으니까."

"아까? 아."

아까 허공을 이리저리 터치하던 시문이 떠오르자.

고말숙은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X. 진작 말해 주지. 개쫄았잖아."

남들이 보면 꼴랑 심해 플레이어의 특성이 뭐 그리 대수냐고 하겠지만.

현재 고말숙이라는 플레이어의 평판을 고려해 보면.

천살성이라는 특성은 최대한 알려지지 않는 편이 좋았다.

"근데 너 왜 아직 남아 있는 거냐? 아레나 끝났잖아. 얼른 보상 뜯으러 가야지."

"그래야지. 근데 그 전에 할 일이 있어서."

"할 일?"

고말숙이 고개를 갸웃하자, 시문은 허공에 무언가를 터치하더니 슥 밀었다.

[플레이어 김시문이 '친구 추가'를 보내셨습니다.]

눈앞으로 떠오르는 알림.

그에 고말숙은 말없이 시문을 바라봤고.

"너, 방금 내가 쓴 일격 알고 싶어 했잖아. 메마른 껍질을 잡을 때도 그렇고."

"그, 그건!"

정곡을 찔린 것일까.

그녀의 눈이 이리저리 굴렀다.

이내.

"망할.... 어떻게 알았냐?"

붉어진 얼굴로 답했다.

"모르고 싶었다."

"그럼 모르면 되잖아."

"네가 알게 하잖아. 아레나 내도록 날 뚫어져라 보는데. 그걸 누가 모르겠냐?"

"이...!"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차마 대답도 못 하고 고개를 푹 숙이는 고말숙.

어지간히도 부끄러운 걸까?

허리 양쪽에 붙은 두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에 피식 웃은 시문이 말했다.

"친추 받아. 그럼 알려 줄 테니까."

"저, 정말?"

홱 들리는 고말숙의 머리.

이미 시뻘게진 얼굴과 떨리는 몸은 어지간히도 불편해 보였지만.

힘을 갈구하는 눈빛은 전생의 천마 고말숙처럼 이글거렸다.

"지, 진짜지? 진짜 알려 주는 거지?"

"그래. 대신 내가 아닌 제대로 된 분이 알려 줄 거야."

"뭐?! 갑자기 맘 바꾼 거냐!"

"뭐래. 내 스승이나 마찬가지인 분이 알려 줄 거니까, 걱정 말고 친추나 받아, 인마."

"스, 스승? 알았어! 바로 받는다!"

얼굴이 확 밝아지는 고말숙.

'참 알기 쉬운 녀석이라니까.'

그런 그녀의 모습에 피식 웃은 시문은 허공을 흘낏했다.

그러자.

[성좌 천마가 '아레나의 시스템으로는 불가. 본좌가 직접 만나야 한다네.' 고개를 젓습니다.]

천마의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직접 만나야 한다고? 왜죠?'

시문이 고개를 갸웃하자.

[성좌 천마가 '이곳은 아직 정규 아레나가 아니라, 후원자에게 미리 접근하는 건 꽤 많은 대가를 소모하거든.' 아쉬운 표정을 짓습니다.]

다시 천마의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호오? 그런 제약도 있었어?'

메시지를 확인한 시문의 눈이 반짝였다.

정규 아레나가 시작되지 않은 현시점에서도 성좌가 후원자가 된 플레이어들이 꽤 있는데.

'그럼 지금까지 성좌를 만난 플레이어들은 전부 성좌가 피해를 감수했다는 말이잖아?'

뭐, 납득은 갔다.

기본적으로 성좌들은 실력이나 가능성이 뛰어난 플레이어들을 선호했고.

정규 아레나가 시작되면 성좌들끼리도 후원자 쟁취를 위한 경쟁을 펼쳐야 할 터.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미리 침 발라 두는 건, 그리 나쁜 장사가 아닐 거였다.

[플레이어 고말숙이 '친구 추가'를 받아들였습니다.]

"야, 받았다."

고말숙의 목소리와 함께 알림이 눈앞으로 떠오른다.

고개를 끄덕인 시문은 몸을 돌렸다.

"확인. 그럼 나중에 연락처 보낼 테니 찾아와라."

"에? 찾아오라고?"

"어. 이건 직접 만나야 알려 줄 수 있는 거거든."

그 말에 고말숙은 코웃음을 쳤다.

"새끼. 너도 결국 남자다 이거구나?"

"뭐?"

"미안하지만, 이 누나는 그리 쉬운 사람 아니다."

씨익 입꼬리를 끌어 올리는 고말숙.

"하아, 말숙아 미안한데."

그런 그녀를 잠시간 보던 시문은 짧은 한숨을 쉬곤 돌아섰다.

"넌 내 취향 아니야."

파앗.

그 말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지는 시문

당연히.

"이... 이 X새끼가!"

고말숙의 눈엔 불똥이 튀었다.

* * *

[고말숙 - 야 이 개X끼야! 뭐? 내 취향이 아니야? 에라이! 야! 나도 아니거든?!]

[고말숙 – 와! 생각할수록 빡치네. 너 X! 진짜 만나기만 해라!]

[고말숙 – 그 망할 마법 같은 거 쓰기도 전에 내가 그 손가락을 @!#!@....]

[고말숙 – 야! 대답 안 해?!]

우수수 올라오는 분노의 메시지들.

[김시문 – 그러든가. ㅋ]

그에 답장을 보낸 시문은 곧장 수신 거부와 함께 메시지창들을 한쪽으로 치워 버렸다.

그러자.

[아레나 '상록숲'을 성공적으로 클리어하셨습니다.]

[5인 협력 조건에서 홀로 보스 메마른 껍질을 처치하였습니다.]

[활약에 따라 클리어 보상이 증가합니다.]

이번 아레나의 보상들이 줄줄 올라왔다.

[귀속된 특성 '현자의 돌'이 일정량의 경험치를 분배받습니다.]

[레벨이 8 올랐습니다.]

[현자의 돌 레벨이 6 상승했습니다.]

[클리어 보상으로 '상록숲 중심부의 샘물'을 획득합니다.]

[히든 보스 미쳐 버린 초목지기 뮤리에를 혼자 처치하였습니다.]

[보상으로 '오염된 씨앗 조각'이 지급됩니다.]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주르륵 올라오는 보상들.

'상록숲 중심부의 샘물은 아는 거고. 오염된 씨앗 조각은 뭐지?'

히든 보스를 잡고 나온 아이템이거늘.

저번에 얻었던 [홉고블린의 전투 도끼]와 달리.

회귀의 경험이 있는 시문도 처음 보는 아이템이었다.

"뭐, 확인해 보면 되니까."

시문이 보상 [오염된 씨앗 조각]을 확인해 보려던 찰나.

[공지대로, 그간 갤럭시 아레나에서 논의해 온 플레이어 김시문에 대한 결과가 전달됩니다.]

[특성 '성흔'을 획득합니다.]

또 다른 시스템창이 올라왔다.

"이, 이건!"

시문의 두 눈이 찢어질 기세로 커졌다.

그도 그럴 것이.

갤럭시 아레나가 전달한 특성은.

"시혁이의 세 번째 특성이잖아?"

훗날 최강의 플레이어가 되는 동생 김시혁의 특성이었으니까.

제39화

39화. 기반 (1)

시문은 곧장 상태창을 열었다.

[상태창]

칭호 : 연금술의 선구자 (외 3)

계통 : 마법계

레벨 : 30

소속 : 대한민국

힘 : 6 (+3)

민첩 : 6 (+3)

체력 : 7 (+3)

연성력 : 33 (+3)

-마기 : 18

잔여 스탯 : 8

보유 특성 – 현자의 돌 (E), 성흔

업적 포인트 – 9,500

매번 압도적인 아레나 클리어 덕에 벌써 30레벨에 도달했지만.

시문의 시선은 한 곳만을 향했다.

"진짜 성흔이잖아...."

특성에 버젓이 존재하는 성흔.

분명 동생 시혁이 녀석의 상태창에서 보았던 그것과 똑같았다.

하나 놀란 건 시문만이 아니었다.

-뭐? 성흔? 성흔이라고?

가슴 정중앙에서 왕왕 울리는 목소리.

상당히 흥분했는지.

현자의 돌은 목소리뿐만 아니라, 가슴에 위치한 본체도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어디! 어디 좀 봐! 하... 진짜잖아?

이어지는 허탈한 목소리까지.

-이 망할 놈들.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현자의 돌은 상당히 혼란스러운 듯 보였고.

그에 시문은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현자의 돌, 너 이 일에 대해 아는 눈치다?"

-아니, 나도 갤럭시 아레나의 속은 잘 몰라. 근데 대뜸 성흔을 이렇게 줘 버리니... 그냥 뭔가 꿍꿍이가 있구나 싶은 거지.

"음. 확실히 나도 그 부분은 좀 의문스러워."

시문은 영약 숙성이 한창인 작업 테이블을 보며 턱을 괴었다.

"내가 알기로 성흔은 고유 등급의 특성일 텐데 말이지."

-맞아. 자세한 건 제약 때문에 말해 줄 수 없는데, 본래 이 세계에 하나밖에 없어야 하는 거야.

"그렇지?"

근데 그런 고유 특성을 2개나 푼 저의가 무엇일까?

'그러고 보니, 전부터 의회니 회의니 하는 말이 많기는 했지.'

갤럭시 아레나가 자신에 대한 논의를 한다는 사실은 앞서 몇 번이고 꾸준히 알려 주었었다.

'개인적으론 내 능력에 대한 제재가 들어올 거라 생각했는데....'

스스로 이런 말 하는 것도 우습지만.

신화급 무구를 연성하고.

손가락만으로 대부분의 연성을 이루어 내는 이 능력은 시문 스스로가 보아도 굉장히 사기적이었다.

물론 완성도나 업적 포인트 등, 이리저리 따져 보면 제약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 포텐셜만큼은 어느 특성에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한데.

'제재가 아니라 특성을 하나 더 줘? 그것도 고유 등급을?'

본인들의 내부 규정을 엄격하게 관리하는 갤럭시 아레나가.

단 하나밖에 없다는 고유 등급의 가치를 깨고 성흔을 부여하다니?

뭐, 여기까지도 어떻게든 이해할 수 있다.

지금까지 자신이 아레나에서 보여 준 행보는 분명 이레귤러적인 면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현자의 돌, 한 가지만 답해 줄 수 있어?"

한 가지만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뭔데? 들어 봐야 알아.

"이 특성 성흔이라는 거, 성좌의 자격이라는 거랑 관련이 있는 거지?"

시문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회귀 전.

갤럭시 아레나의 보호가 철회되던 그날.

[성좌의 자격 보유자 사망 확인.]

[더 이상 NO. 274 지구에서 아레나를 진행할 이유가 없습니다.]

[NO. 274 지구의 아레나를 완전히 종료합니다.]

시스템은 분명 이러한 문구를 보내왔다.

말숙이의 말도 그렇고 아마 지구에 남아 있는 모든 플레이어들에게 보낸 메시지겠지.

-응, 맞... 아우! 아주 지X들을 하네. 지들이 줘 놓고 말도 못 하게 해!

갑자기 버럭 화를 내는 현자의 돌.

-미안, 오빠. 답은 못 해 주겠어. 그래도 이건 말해 줄 수 있겠네. 성흔이 있으면 다른 성좌의 피후원자가 되는 건 불가능해.

그 말에 시문은 작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거면 충분해."

저 대답만으로 이미 답은 얻었으니까.

다만.

'회귀 전, 그 검붉은 눈깔의 일까지 고려해 보면. 성흔은 분명 종리추 그놈이 그토록 원하는 특성이었겠지.'

성좌가 될 자격을 부여하는 특성.

종리추가 그토록 동생 시혁이를 죽이려 들었던 걸 돌이켜 보면.

아마 성좌가 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일 가능성이 높았다.

앞서 현자의 돌이 말했던.

'본래 이 세계에 하나밖에 없어야 하는 거야.' 라는 말을 떠올려 보면 틀림없었다.

그럼에도 갤럭시 아레나가 심사숙고 끝에 자신에게 성흔을 부여했다는 건.

'아레나측에선 내가 시혁이와 경쟁하기를 바라는 건가?'

이내 시문은 실없는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지. 만약 내가 성좌가 되지 않기를 바라면 아무 의미 없어지니까.'

반대로도 마찬가지다.

만약 시혁이 녀석에게 '야, 형 성좌할 거다. 비켜라.' 하면.

녀석은 대번에 '응! 형이 해. 내가 뭐 도와줄 건 없고?'라고 답하겠지.

어느 쪽이건.

'성좌는 1명밖에 탄생하지 않아.'

한데 왜 굳이.

그토록 엄격했던 규정을 깨어 가면서까지 성흔을 부여한 것일까?

'설마 어디 다른 세계라도 가서 그곳의 성좌가 되라, 이런 건가?'

에이, 설마.

헛웃음이 절로 나온다.

정규 아레나가 시작되어도.

아레나 이외의 일로 타 차원으로 이동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거늘.

"하도 어이가 없으니 별 미친 생각이 다 드네."

-그러게 말이야. 이 미친놈들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이건 그쪽에서도 엄청 위쪽의 결제가 있어야 가능한 일인데....

믿기지가 않는지 말끝이 흐려지는 현자의 돌.

시문 역시 고개를 절레 젓고는 말했다.

"현자의 돌, 혹시 성흔으로 얻는 불이익 같은 건 없어?"

-있지. 아까 말한 성좌의 피후원자가 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거.

"그거야 뭐...."

일반적인 플레이어의 입장에선 명백한 불이익이겠지만.

'나한텐 아니지.'

이미 신화급 무구를 연성할 수 있음은 물론.

칭호 [왕들의 픽]까지 얻은 시점에서 특성 성좌에게 속한다는 건 무조건적인 손해였다.

"됐다. 이건 나중에 생각하자."

시문은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갤럭시 아레나에서도 대놓고 입막음하는 마당이니, 고민해 봐야 나만 손해야.'

언젠가 때가 되면 알게 되겠지.

지난 30여 년의 세월을 살아온 시문은 이 삶의 법칙을 잘 알고 있었다.

"보상이나 정리하자."

시문은 지금껏 해 왔던 대로.

상태창의 잔여 스탯 8을 모두 연성력에 투자했다.

'이걸로 순수 연성력은 41인가.'

거기에 칭호 [왕들의 픽]으로 인해 +3이 더해져 총 연성력은 44.

마기는 연성력의 귀속값으로 그의 절반인 22.

단순 연성력만 계산해도 총 44레벨치의 스탯이었고.

마기까지 합치면 총 66레벨에 해당하는 스탯이었다.

그것도 다른 스탯은 1도 투자하지 않고 오로지 두 스탯만 투자한 기준으로 말이다.

"진짜 미치긴 미쳤네...."

이러니 히든 보스가 원킬이 나지.

물론 아스트라페와 천마신공의 위상이 상당했겠지만.

그것들 역시도 강력한 스탯이 기반이 되니, 그만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거였다.

"이 정도면 중위권의 플래티넘들과도 비비겠어."

현자의 돌로 인한 사기적인 부분들을 제외하더라도.

오로지 주력 스탯에만 올인한 공격력은 가히 어마어마할 터.

여기에 부족한 힘민체를 인체 연성으로 메꾸어 버리니.

진실로 플래티넘 플레이어들을 상대해도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일단 이걸로 스탯은 정리됐고."

상태창을 닫은 시문은 즉시 인벤토리를 열었다.

"이게 히든 보스 보상이란 말이지?"

[오염된 씨앗 조각]

등급 : F

무언가에 오염된 씨앗의 조각.

이름 그대로 검고 작은 씨앗 조각의 아이템은 히든 보스를 잡고 나왔다고 하기엔.

너무나 허접했다.

그랬기에.

'수상해.'

그때.

-어머, 요것 봐라? 재밌는 걸 받았네?

현자의 돌의 명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이거 누군가가 계획적으로 조져 놓은 거야.

"조져 놔? 망가뜨렸다는 거야?"

-응. 보아하니 보통 씨앗은 아닌 거 같은데... 일단 망가뜨린 힘이 뭔지는 알겠어.

"뭔데?"

-용력. 그것도 굉장한 수준의 용력으로 박살 내고 정제하고... 여튼! 박살을 내놓은 거야.

용력.

흔히들 쓰는 마력처럼 기운의 일종이었다.

단지.

'용족만 쓸 수 있는 기운이라는 게 문제지.'

용족은 지난 특수 아레나에서도 그렇고.

성좌들 역시 어째서인지 싫어하는 종족이었다.

고로.

'냄새가 난다. 수상한 냄새가 아주 진하게 나.'

그리고 이런 직감은 보통 틀린 적이 없었다.

시문은 망설임 없이 그것을 가슴께로 가져다 댔다.

"현자의 돌, 이거 감정할 수 있겠어?"

-잠시만.

일련의 연성력이 팔을 타고 씨앗으로 모여든다.

이내.

-응, 가능해. 온갖 종류의 방법으로 망가뜨린 모양인데. 다행히 그중에 연금술도 있거든.

반가운 답변이 들려왔다.

"부탁할게."

-맡겨 두라궁~!

힘찬 답과 함께 훅하고 빠져나가는 연성력.

어느새 금속에 어린 녹을 벗겨 내듯.

검었던 씨앗 조각의 표면이 점차 흑갈색으로 변해 갔다.

이어.

씨앗 조각 위로 달라진 정보창이 떠올랐다.

[망가진 세계수의 씨앗 조각]

등급 : X

설명

-아레나 매칭 때 사용 시 '자연의 몰락'으로 입장합니다.

-제한 인원 1인.

-골드 랭크만 입장이 가능합니다.

"이건!"

정보창을 확인한 시문의 눈이 부릅떠진다.

단순히 그 귀하다는 특수 아레나 입장 아이템을 두 번이나 얻어서가 아니었다.

"세계수라고?!"

전생에 등장했던 이종족 엘프.

아름다운 외모 이면에 걸쳐진 그들의 잔혹성은 역사의 광신도들을 방불케 했다.

그 광신의 원인이 바로 세계수 아니던가?

무슨 일을 하든 세계수를 입에 담아.

당시 '세계수무새'라는 별칭을 얻게 된 건 코미디 아닌 코미디였다.

그리고 그 세계수의 씨앗이.

'입장 아이템이라니?'

수상했던 냄새는 감정 과정을 거치고 더욱 진해졌다.

"현자의 돌. 너 분명 이 씨앗 조각이 용력으로 망가졌다고 했었지?"

-맞아.

짧게 돌아오는 현자의 돌의 대답.

그에 시문의 눈이 살짝 반짝였다.

"자세한 건 갤럭시 아레나 때문에 이야기할 수 없을 테고."

-응, 역시 오빠야. 눈치 하난 지린다니까.

지린다니.

대체 그런 표현은 또 어디서 배운 거란 말인가?

시문은 짧게 한숨을 쉬고는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후. 일단 나중에 생각하자. 어차피 입장을 해 봐야 알 수 있는 일이니까."

지금 시점에서 주목해야 할 옵션은 하나다.

입장 제한이 골드 랭크라는 것.

'골드 승급을 서둘러야겠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시문은 [망가진 세계수의 씨앗 조각]을 인벤토리에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장 아레나를 뛰기 이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으니까.

* * *

"정말 이러실 겁니까? 밤사냥꾼께서 저희를 이렇게 우습게 보실 줄은 몰랐습니다."

"우습게 보는 건 내가 아니라 그쪽이겠지. 내가 몇 번이고 말했을 텐데?"

굵은 선에 다소 험상궂은 얼굴.

그래.

딱 조폭이라고 지칭할 수 있는 얼굴과 덩치의 표본인 남성.

박진욱은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말해 줄 의무는 없으니 꺼지라고."

"옛정을 생각해서라도 한 가지만 알려 달라는 겁니다. 혹시 랭커 김시혁이... 헙!"

"X발 놈이 진짜."

순식간에 일그러지는 박진욱의 얼굴.

그러나 앞의 남자가 놀란 이유는 단순히 그의 외모 때문이 아니었다.

"한동안 활동 좀 안 했다고 내 말이 X으로 들리냐? 꺼지라고, 이 새끼야!"

화아아아!

그의 기세와 함께 쏟아져나오는 시커먼 기운 때문이었다.

"저, 정말이었어... 정말 마력경화증을 회복한 거야!"

SS급 특성인 밤의 가호.

그 특유의 으슬으슬한 기운을 느낀 남성은 서둘러 사무실을 떠났다.

예전 같았으면 저 망할 뒤통수에 주먹이라도 박아 넣었겠지만.

"하아... 더럽게 귀찮군."

저 남자의 배경이 전갈 길드라는 걸 아는 박진욱은 그저 한숨을 쉬며 화를 달랠 따름이었다.

"전갈 길드와 옛정이라니? 선배, 옛날엔 제법 구리게 놀았나 봐요?"

더불어.

"옛정은 지X! 그냥 마력경화증 회복에 대한 정보를 알고 싶으니, 온갖 개소리 흘려 대는 거지."

사무실 소파 위를 제 침대인 양 누워 있는 잘생긴 후배 놈을 보고 있자니.

진짜 아까 그놈의 뒤통수에 주먹이라도 시원하게 박아 넣을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드는 박진욱이었다.

"거기에다 전갈 길드가 처음부터 저랬던 건 아냐."

"그래요?"

"뭐냐? 그 의미심장한 눈빛은. 나 거짓말은 안 해. 지금은 저래도 전대 길드장이 뒤지기 전까진 나름 괜찮은 길드였어."

그 말에 김시혁은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박진욱의 말대로.

그는 결코 거짓말을 하는 타입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니 내가 가까이 지내는 거지.'

피식 웃은 김시혁은 잔에 양주를 따르는 박진욱을 바라봤다.

"선배. 대낮부터 술이에요? 영업 시간이잖아요."

"이제 이 일 접는다고 몇 번을 말해? 그리고 능력도 온전해진 마당에, 이런 거 좀 마신다고 취하겠냐?"

하긴.

무려 다이아 플레이어다.

아레나의 부산물로 만든 술이 아니고서야, 어지간해선 취하기 힘들었다.

아까 전갈 길드의 간부를 위협하던 밤의 가호 특유의 기운도 그렇고.

"선배, 진짜 회복되긴 했네요."

김시혁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박진욱을 훑었다.

"새끼가. 제일 먼저 알고 있던 놈이 새삼스레 무슨."

"전 솔직히 마력경화증이 완벽하게 회복되리라곤 생각 못 했거든요. 왜, 후유증 같은 거 있잖아요."

"그 말은 네 하늘 같은 형님의 능력을 의심했다, 뭐 그런 거냐?"

"아! 그런 게 아니라요!"

대번에 언성이 높아지는 김시혁.

그 생소한 반응에 눈이 동그래지는 것도 잠시.

"그게 아니면 뭔데? 왜 생각 못 한 건데?"

박진욱의 눈매는 장난스럽게 찢어졌다.

"이 새끼, 말만 형님형님 하지, 사실은 아래로 보고 있었구나?"

"선배."

"맞구만! 하긴, 역대급 초신성으로 랭커까지 찍었는데. 아무리 형님이라도 브실골이면 좀 그렇지."

"선배? 그러다 진짜 죽어요."

오싹.

등허리를 타고 올라오는 오싹한 기분.

순식간에 냉랭해진 후배 놈의 태도에 박진욱은 멋쩍은 듯 볼을 긁었다.

"거, 농담도 못 하나."

"목숨 건 거면 하실 수는 있죠. 선배 목숨인데."

"새끼, 빡빡하게 굴긴."

한 걸음 물러서는 박진욱.

그러나 기죽은 기색은 아니었다.

'이 새끼, 우리 VVIP가 진짜 약점이긴 하구나.'

완벽, 기계라는 단어에 가장 어울리는 천하의 김시혁이 이토록 다양한 반응을 보일 줄이야.

흐흐!

'앞으로 뺀질뺀질 까불면 자주 써먹어야겠어.'

후배 놈의 반응을 보아 적당히 선은 타야겠지만.

잘만 이용한다면 저 뺀질이 괴물 놈에게 한 방 먹일 유일한 무기가 되리라.

"왜 기분 나쁘게 헤실거려요?"

"이 새끼가. 내 사무실에서 내 맘대로도 못 웃냐?"

"기분 나쁘니까 그렇죠. 그나저나, 정말이죠?"

"망할 새끼. 뭐가?"

"형이 준 치료제 단 한 병으로 완치됐다는 거."

"인마, 넌 여태 보고도 모르겠냐?"

박진욱은 보란 듯이 양팔을 벌렸다.

스아아아아.

창을 타고 쨍쨍한 햇볕이 들어오고 있는데도.

그의 주변만은 밤처럼 어둑했다.

밤사냥꾼 박진욱.

다이아 랭크의 암살계 실력자로 활동하던 그때의 모습 그대로 돌아온 것이다.

"정말이네요. 역시... 우리 형이야."

그 모습에 밝게 웃는 김시혁.

그의 미소엔 뿌듯함과 자랑스러움이 가득했다.

"네 형님이 만들었지, 네가 만들었냐? 웬 대리 만족이야."

"대리 만족이 아니라, 가족이 대단한 일을 해냈으면 당연히 기쁜 거예요."

"얼씨구? 네가 언제부터 남의 일에 감명을...."

"선배."

그리고 거짓말처럼 싸해지는 김시혁의 얼굴에.

박진욱은 애써 뒷말을 삼킬 따름이었다.

'X새끼. 진짜 내 더러워서 랭커 찍든가 해야지.'

어쩌겠는가.

플레이어에겐 사실상 힘이 전부인 것을.

그때.

획!

살기가 가득하던 김시혁의 얼굴이 순식간에 돌아간다.

그렇게 몇 초 후.

"엇!"

박진욱의 얼굴 역시 밝아지더니 같은 방향을 향했다.

사무실의 입구였다.

스아아.

스멀스멀한 검은 기운이 입구에서 솟아오르더니 박진욱으로 변한다.

SS급 특성 밤의 가호로 이동한 것이다.

그는 아주 정중히 사무실 문을 열고, 허리를 깊이 굽히며.

"어서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라? 제가 오는지 알고 있었어요?"

"우리 VVIP께서 오시는데 나라를 털어서라도 알아내야지요. 자자! 어서 들어오시죠."

"에? 언제 V가 하나 더 붙은 겁니까?"

이젠 VVIP 고객인 김시문을 맞이했다.

제40화

40화. 기반 (2)

"고객이 아니라 파트너라니까요."

"으하핫! 큰 은혜까지 입었는데 파트너라고 말해 주시니 이 박진욱,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맞아, 형. 선배는 그냥 머슴으로 쓰면 돼."

"저 X... 후우. 저기요, 망할 후배님? 제가 지금 VVIP 고객님과 상담 중이잖습니까?"

시문의 앞에 탁, 하고 커피를 내려놓는 박진욱.

그는 평소와 다르게 살벌한 눈빛으로 김시혁을 노려봤다.

그 배경엔 뒤에서 멀뚱멀뚱 바라보는 형이 있음을 잘 알기에.

"쯧."

김시혁은 대꾸하는 대신 침묵을 택했다.

어지간히도 만족스러운 결과인지.

"흐흐! 한데 시문 씨, 여긴 어쩐 일로 오셨는지요?"

박진욱은 모처럼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시문은 인벤토리를 열어 남색의 액체가 담긴 포션 10병을 꺼냈다.

"저번에 사업 이야기 나눴던 거 기억하시죠?"

"그럼요. 아주 달달 외우고 있습... 헙! 그럼 이, 이게 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시문.

그에 박진욱은 찢어질 듯 커다래진 눈으로 시문이 올려놓은 남색 액체의 포션.

[마력경화증 치료제]를 빠르게 훑었다.

"그새 이렇게 많이 만드셨습니까?"

"원래 제작 자체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요. 단지 들어가는 재료 중에 좀 귀찮은 정제를 요구하는 게 있을 뿐이죠."

"허허...."

박진욱은 힘없는 웃음을 흘렸다.

그도 그럴 것이.

'실버 랭크가 벌써 재료를 정제한다고?'

재료의 정제나 특수 가공은 생산계에서 상위급의 실력이 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일반적인 랭크로 기준을 나누자면, 플래티넘급 이상의 수준이어야 가능한 일이란 말이다.

한데 아레나에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실버가 벌써부터 정제를 하다니?

거기에다.

'말이야 귀찮은 정제라고 했겠지만... 방송으로 봤던 실력을 고려해 보면 분명 고수준의 정제겠지.'

특히나 이전 방송에서 봤던 그 어마어마한 뇌속성 일격.

그런 공격을 해낼 수준의 연금술사가 '귀찮다'라고 표현할 정도면 당연히 보통 정제 수준은 아닐 터였다.

"여하튼 진욱 씨. 저번에 이야기했던 대로 이것들을 대리로 판매 좀 해 주셨으면 합니다."

"물론이지요! 암시장을 거치면 가격도 꽤 크게 받을 수 있을 겁니다. 한데...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요?"

"예. 그게... 아시다시피 제가 시문 씨의 치료제 덕에 회복하지 않았습니까?"

"아."

시문은 박진욱이 뭘 말하려는지 대번에 알아차렸다.

"치료제의 출처 때문이군요."

"역시 눈치가 빠르십니다. 덕분에 요즘 방문객이 끊이질 않습니다. 하나같이 치료제의 출처를 묻더군요."

박진욱의 말에 시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레나 질병 치료제의 가치는 이미 치료제를 만들기 전부터 예상하고 있었다.

기적적인 확률로 자연 회복을 하지 않는 이상 치료가 불가능한 것이 아레나 질병이거늘.

한때 다이아 랭크에서 이름을 날리던 실력자가 멀쩡히 회복해 버렸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뭐, 그래서 박진욱에게 대리 판매 이야기를 꺼낸 거지만.'

전생에서 보여 줬던 뛰어난 일 처리 능력 이전에.

박진욱은 험상궂은 외형만큼이나 대단한 실력을 지닌 이다.

특히나 암살계의 실력자인 만큼, 기습이나 납치 같은 극단적인 방법도 어려운 존재 아닌가?

고로 치료제의 출처 때문에 위협도 받지 않을 사람이었다.

'역시 사람을 잘 골랐어.'

이러나저러나, 치료제 대리 판매에 제격인 사람.

시문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정확히는 말하려고 했다.

"형, 그거 내가 도와줄 수 있어."

청량한 미성이 들려오기 전까진 말이다.

"시혁이 네가?"

"선배가 먹었다는 치료제, 그냥 내가 줬다고 하면 다 해결되는 거잖아?"

"그러면 베스트긴 한데. 괜찮겠냐?"

"응."

시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동생 녀석을 가만 바라봤다.

"시혁아. 알겠지만 이거 사실상 고기 방패 되는 거나 마찬가지야. 자칫 위험해질 수도 있고."

"글쎄? 날 위험하게 만들 사람은 세상에 그리 많지 않을걸?"

와, X나 재수 없다.

라고 말하기엔 이 잘난 동생 놈의 말은 틀린 구석이 없었다.

잠자코 있던 박진욱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저 괴물 같은 후배 놈이라면 감히 어떻게 얻었냐는 질문조차 제대로 못 할 겁니다."

"선배, 묘하게 욕처럼 들리는데요?"

"욕 맞는데?"

빠직.

순간 김시혁의 하얀 이마에 작은 핏줄이 솟았으나.

"후... 선배도 참! 짓궂은 면이 있다니까."

금방 특유의 청량한 미소를 지으며 웃을 뿐이었다.

단지.

뚜둑.

김시혁의 손에서 희미하게 뼈 소리가 들려올 뿐.

그에 박진욱의 거구가 시문 쪽으로 슬쩍 기울었다.

"커흠! 여하튼, 랭커가 치료제의 출처가 된다면 판매에는 전혀 지장이 없을 겁니다."

그말에 잠시 턱을 괴던 시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이런 상황엔 랭커만 한 게 없긴 했으니까.

"그럼 시혁아, 부탁 좀 하자."

"형, 이런 건 부탁도 아니야. 부탁은 이런 거지."

어느새 다가온 김시혁은 인벤토리를 열었다.

후두두둑.

테이블 위로 순식간에 쌓이는 재료 아이템들.

마력경화증 치료제에 필요한 바실리스크의 독액을 시작으로.

'뱀뿌리 버섯에 요정 가루, 비전 다면체까지!'

그 외에도 최소 C급 이상의 재료들이 즐비했다.

재료 아이템이 대부분 현금으로 거래되는 것을 고려해 보면.

단순 계산으로도 수천만 원이 훌쩍 넘는 값어치였다.

"저번에 형이 부탁했던 재료템들이야. 안 그래도 슬슬 인벤토리 부족해져서 한번 찾아가려고 했었거든."

"시, 시혁아... 너!"

형의 눈이 돌아가는 것을 본 김시혁은 뿌듯하게 웃었다.

"어때? 이 정도면 부탁 잘 들은 거지?"

"당연하지! 요 복덩이 녀석!"

"헤헤."

시문은 경쾌하게 동생 놈의 머리를 헝클어 주고는 후다닥 재료 아이템을 인벤토리에 쓸어 담았다.

그러곤.

"아 참, 시혁아."

"응?"

"이거 장기적 부탁인 거 알지? 인벤토리 다 차면 또 형한테 와라."

중요 멘트 또한 잊지 않았다.

* * *

"그래, 알고 있네. 안 그래도 요즘 시끄럽더군."

깊게 팬 주름에 노쇠한 목소리.

그러나 세월의 풍파는 사람을 무너뜨리기만 하는 것은 아닌지.

통화를 하는 노인은 새하얀 머리칼만 아니었다면, 흡사 50대라 해도 믿을 정도로 젊었다.

"그건 그쪽의 전문 분야 아니던가? 내게 손 벌리는 이유를 모르겠군."

그리고.

"건방지군. 자네가 아무리 각성자라 하여도 내게 잘잘못을 따질 위치는 아니라네. 굳이 상기시켜 줘야겠나?"

젊은이 못지않게 뜨거웠다.

"사고를 가장하든 암살이든 네놈들 일은 네놈들 알아서 처리하고, 이번 분기의 완성품이나 보내도록."

통화를 끊어 버리는 노인.

이내.

빠각.

"고작 각성 하나로 팔자 고친 놈이 감히! 이래서 중국 놈들은 안 돼!"

고풍스러운 벽에 처박힌 휴대폰은 반파되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찾아오는 고요함은 느와르 영화의 침묵처럼 숨 막혔지만.

"어쩜, 그 나이가 되셔도 거치시네요. 요즘 그런 발언은 높은 분일수록 위험한 거 몰라요?"

청아한 목소리의 등장에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노인은 화가 식지 않은 눈으로 목소리의 주체를 노려봤다.

"유정아, 내가 널 그리 예의 없게 가르쳤더냐?"

"노크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전 이미 했는걸요?"

어지간한 사람은 몸을 움츠릴 정도로 서슬 퍼런 눈빛.

그러나 그런 눈빛도 익숙해질 수 있는 것인지.

"할아버지가 못 들으셨을 뿐이에요."

이유정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며 고급스러운 문을 턱짓할 뿐이었다.

"그러게 성질 좀 죽이시라니까. 이제 나이도 있으시잖아요?"

"후."

짧게 한숨을 쉬는 노인.

이순철 회장은 하얗게 센 머리를 쓸어 올리며 말했다.

"평소엔 코빼기도 보이지 않더니, 무슨 일로 찾아온 게냐."

"몰라서 물으세요?"

평소에도 그랬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날이 서 있는 손녀의 목소리에 이순철 회장은 헛웃음을 흘렸다.

"쯧. 개X끼는 이래서 개X끼밖에 안 된다니까. 그깟 일 하나 제대로 처리 못 해서야."

"개는 주인을 닮는다죠. 그런 병X 머저리 같은 새끼를 왜 밑에 두셨는지 모르겠네요."

그 말에 이순철 회장의 고집스러운 눈썹이 들썩였다.

"이유정, 네가 겁을 상실했구나."

"상실할 수밖에요. 길드 관련 인사는 전부 제게 일임하지 않으셨나요? 애당초 그러자고 했던 거래일 텐데요?"

"넌 내 하나뿐인 손녀다. 거래고 자시고를 따질 것도 없어. 네가 랭커가 아니었다 해도, 각성자인 이상 성삼 길드는 네 몫이었다."

"재밌는 말씀을 하시네요. 그런 분이 하나뿐인 딸의 목숨을 가지고 손녀와 거래를 하셨나요?"

탕!

이순철 회장이 거칠게 책상을 내려친다.

그가 대한민국 최고의 기업인 성삼의 회장임을 돌이켜 본다면.

어지간한 사람은 목울대를 꿀렁일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물론.

이유정의 경우엔 다른 의미로 위협적이었다.

"조잘조잘 토 달지 말아라. 지금 네 어리광에 맞춰 줄 여유가 없으니. 네 어미 약을 구해 주는 게 누군지 잊지 말도록."

"...길게 말씀드리지 않겠어요."

이유정은 쥐고 있던 서류를 던졌다.

그녀와 이순철 회장의 책상 거리가 무색할 만큼.

"이전부터 뭘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이상 성삼 길드의 이름을 팔아 이중 계약서 같은 건 쓰지 마세요."

턱.

서류는 손쉽게 이순철 회장의 책상 위로 떨어졌다.

"성삼 길드는 제 길드예요."

"지금 이 할아비를 협박하는 게냐?"

"공과 사는 분명하게 구별하라고 가르치지 않으셨나요? 회.장.님?"

유난히도 끝말을 강조하는 이유정.

그런 손녀의 버르장머리 없는 태도에 한 소리 할 법도 하건만.

이순철은 목소릴 높이는 대신.

치익.

후욱.

담배 한 대를 태울 따름이었다.

이유정의 고운 아미가 슬쩍 찌푸려졌다.

"가진 게 아까워서라도 담배 안 피우시겠다면서요?"

"갤럭시 아레나의 재료로 만든 거라더구나. 발암은커녕 도리어 정신을 맑게 해 주지."

"참 나... 흡연자들의 사상은 도통 이해할 수가 없네요."

아무리 잡템이라도 쓰지 못할 수준이 아닌 이상.

지구의 자원과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비쌀 텐데, 그걸로 담배 따위를 만들다니?

그런 손녀의 코웃음을 무시한 채.

담배를 한 모금 더 내뱉은 이순철이 말했다.

"김시문 그놈, 그런 능력을 지녔는지 알고 있었더냐?"

"몰랐어요. 아시다시피 오라버니는 그 사건 이후로 마력불능이었잖아요."

"그랬지. 한데 어떻게 내 귀에 들어올 정도로 시끄러운 게지? 마력불능을 회복이라도 했단 말이냐?"

"그렇다던데요."

"...그래? 회복을 했다고?"

이순철 회장의 목소리가 묘하게 달라졌다면 착각일까?

하나 그의 목소리를 눈치채기엔.

지금 이유정의 머릿속은 무척이나 복잡했다.

'망할 영감탱이.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왜 갑자기 오라버니에게 관심을 가지는 거지?'

어쩔 수 없었다.

현재 그녀를 뒤흔드는 유이한 사람 중 하나에 관한 이야기였으니까.

'뭔지 몰라도 저 영감과 오라버니를 붙여 놓아선 안 돼.'

혈육이라 해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지독한 할아버지의 방식은 이미 질리도록 경험했다.

보나 마나 이제 빛을 보기 시작한 오라버니에게 족쇄 채워, 짐승처럼 부려 대겠지.

어쩌면.

'날 향한 견제일 수도 있고.'

어머니와 오라버니.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두 사람이 모두 할아버지의 손아귀에 넘어가게 된다.

그럼 아무리 랭커의 위치에 선 그녀라도.

지금처럼 할아버지를 거스를 수는 없을 테니까.

하나 그런 그녀의 생각과 다르게.

"그놈, 네 길드에는 들어갈 생각이 없다더냐?"

지독한 할아버지의 입에선 예상과 다른 말이 흘러나왔다.

그에 이유정의 눈이 동그래졌으나 그도 잠시.

"없을걸요. 저 역시도 채용할 마음이 없고요."

이유정은 금세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어째서지?"

"마법계이긴 하나, 그보다 뛰어난 마법계는 이미 길드에 넘쳐요."

"차기 랭커로 거론될 행보를 보인다던데. 이미 여러 길드들이 눈독 들이고 있다 들었다."

"뭐, 그래서 다른 길드들이 스카우터를 보낸다면 저도 맞춰 보낼 생각이긴 했어요."

이유정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다.

"누가 제 길드의 이미지를 박살 내 놓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에요."

"내 탓을 하기엔 이유가 빈약하구나. 네가 진심으로 영입하고 싶었다면, 진작 움직였겠지."

그리고 그놈도 너의 제안이라면 거절하지 못할 테고.

그러한 이순철 회장의 눈빛에 이유정의 입이 잠시 다물렸다.

이내.

"그건 오해...."

그녀가 뭐라 답하기도 전에.

"되었다."

이순철은 가볍게 손을 저었다.

"나가 보거라."

"회장님."

"더는 네 길드의 이름으로 영입은 하지 않으마. 물론 더는 그놈에게 부하를 보내지 않겠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믿어 보죠."

다소 의아한 결과이긴 했으나.

목적을 달성한 이유정은 즉시 몸을 돌렸다.

한시라도 이 망할 곳을 떠나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문을 닫는 그녀의 귓가로.

"쯧.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확실히 할 것을...."

이순철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탁.

'무슨 뜻이지?'

문을 닫은 이유정의 눈가가 가늘어진다.

그녀는 플레이어 중에서도 정점인 랭커.

따라서 현실에서의 제약이 있다 해도.

평범한 이들과는 비교되지 않는 우월한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니 결코 잘못 들은 것은 아닐 터.

더불어.

'오라버니와 할아버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

마지막의 그 읊조림은 분명 오라버니인 김시문을 향한 말이었다.

붉은 입술을 잘근 씹은 이유정은 곧바로 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다영 언니, 최근에 조사 막힌 구간 있다고 했죠?"

제41화

41화. 기반 (3)

타다다닥.

노트북의 작은 키보드가 바쁘게 두들겨진다.

"그러니까 당장 치료제의 대량 생산은 힘드시다는 거죠?"

"예. 말씀드렸다시피 제작에 귀찮은 과정이 좀 있어서. 따로 시설이 필요하거든요."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이번 치료제의 판매금으로 시설을 마련하실 생각일 테고요?"

시문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진욱 씨네요. 맞습니다. 대신 가격은 아까 말씀드린 대로 상한가를 둬 주세요."

불치병의 치료제.

상한가를 두지 않으면 분명 큰돈이 될 테지만.

아레나 질병으로 인한 고통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뿐더러.

'정상적인 플레이어가 최대한 많아야, 정규 아레나가 시작되고도 타격이 적어져.'

아레나 질병 환자들이 줄어야.

미래에 펼쳐질 정규 아레나에서의 피해를 최대한 줄일 수 있다.

"알겠습니다. 그럼 경매의 흐름을 보고 상한가를 정하도록 하겠습니다. 판매 방식은 경매, 어지간해선 암시장을 이용하고...."

박진욱은 그동안 이야기 나눈 내용을 깔끔하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미 신뢰 관계상 구두 계약도 문제없었으나.

성격인지 굳이 문서화 해 두는 박진욱이었다.

시문은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소파에 늘어진 채 TV를 보고 있는 동생 김시혁이 보였다.

시문의 시선은 자연스레 TV의 화면을 향했고.

-이번 국대 선발전에 대한 기대와 관심이 역대급이라죠?

-그렇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랭커가 참여한다는 소식이 있었으니까요! 관심이 남다를 수밖에 없지요.

-해외의 관심도 상당하다고 하는데요. 당장 해외의....

국내 유명 MC 최강엽과 해설 전문 플레이어들이 진행하는 국민 아레나 프로그램.

시문은 통칭 '국아'를 보곤 작게 탄식했다.

'그러고 보니 이맘때쯤이 국대 선발 기간이었지.'

1월 중순.

늦어도 2월 전에 시작되는 국대 선발전은 갤럭시 아레나가 등장한 이후.

설날만큼이나 바쁜 기간이었다.

그리고.

"시혁아, 너 이번 국대 선발에 참가하지?"

동생 시혁이가 검성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는 시점이기도 했다.

"응. 근데 내가 형한테 그 이야길 했던가?"

"국아를 그렇게 뚫어져라 보는데 모를 수가 있냐."

"아. 내가 그랬어?"

멋쩍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는 김시혁.

그에 피식 웃은 시문은 미지근한 커피를 홀짝였다.

"짜식. 그래서 뭐, 따로 준비 같은 건 하고 있냐?"

"따로 준비는 안 하고 있어. 솔직히 할 마음도 없고."

"왜? 참가자들은 다 정해졌잖아."

국대 선발전은 전 세계적으로 이루어진다.

당연히 선발전이 시작되기 몇 주 전부터 어지간한 내용은 결정되기 마련이었고.

가장 중요한 참가자의 유무는 말할 것도 없었다.

"뭐, 그냥 하던 대로 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거지."

"그냥 억지로 참가하는 거라 대충하는 건 아니고?"

"역시 형이야. 내가 억지로 참여한 건 또 어떻게 알았어?"

"글쎄?"

전생의 기억이 있는 회귀자라서?

동생의 물음에 시문은 그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을 따름이었다.

"하아. 난 원래 관심 없었는데... 누가 여우 아니랄까 봐, 유정이 녀석이 진즉 선수를 쳐 놨더라고."

김시혁은 입술을 슬쩍 비틀며 볼멘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형도 알겠지만, 난 유정이랑 달리 길드도 없잖아."

"그렇지."

차후에 대한민국 최고의 길드인 싸울아비를 탄생시키는 김시혁.

당연히 지금 시점에선 소속 길드가 없었다.

'어떻게 보면 대단한 거지.'

길드도, 지원도 없이 홀로 랭커를 찍은 실력자.

그 대단한 업적을 칭송하기 이전에.

이 녀석이 지금의 위치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이들이 견제했겠는가?

새삼 그런 동생 녀석이 자랑스러우면서도.

'난 이때 마력불능에 허우적대기 바빴는데....'

형으로서 미안함이 교차했다.

그런 시문의 귓가로 볼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건 거대 길드가 있는 더 유정이가 어울리는데, 이미 불참 선언을 해 버렸으니, 나라도 꼭 좀 참여해 달라더라고."

하긴.

국민 프로그램인 '국아'에서도 언급했지만.

랭커인 김시혁과 이유정을 향한 국민들의 관심은 상당히 뜨거웠다.

외모부터 나이, 그리고 실력까지 뭐 하나 빠지는 게 없었으니까.

개최 측에선 어떻게든 두 사람 중 하나는 참가시켜야 했으리라.

"그럼 개인전에다 단체전까지 전부 용병으로 뛰겠네?"

"어. 그럴 거 같아."

웃기게도.

개인전은 상관없으나, 단체전은 어지간해선 길드 단위로 이루어졌다.

국가적인 행사임에도 거대 길드들의 알력이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국가대표가 된 것만으로도 한 나라의 최고라는 걸 대변하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여기서 내가 몇 가지만 좀 알려 주면, 이번 국대 선발전에서 이 녀석이 완전 영웅이 될 텐데.'

고로 개인전은 몰라도.

단체전에선 용병 신분으로 활약에 한계가 있었다.

아레나에서도 자주 있듯이.

유명한 길드들이 활약할 여지를 주지 않으려 할 테니까.

그러나 미래를 알고 있는 자신의 조언이라면 충분히 개인, 단체전 모두에서 MVP가 될 수 있었다.

하나.

'하지 않는 게 좋겠지.'

저 불만이 가득한 동생의 얼굴을 보라.

애당초 청량한 외향과 달리 꽤 낯을 가리는 녀석이다.

개인 방송조차 채팅창을 끈 채 일방적인 송출만 할 정도로.

결국 저 잘난 동생에겐 국가대표니 MVP니, 전부 귀찮은 일에 불과한 것이다.

그럼 방법을 바꿔서.

"시혁아."

"어."

"너 혹시 토토도 하냐?"

시혁이와 자신 둘 모두 다른 방향으로 이득을 취하는 편이 좋았다.

그리고 의외로.

"정말 형은 못 속이겠다니까. 어떻게 내가 말하지도 않은 걸 그렇게 속속들이 아는 거야?"

순진한 줄만 알았던 동생은 이미 이득을 취하고 있었다.

"다른 경기까지 생각하면 복잡해져서 내 경기만 조금 걸었어."

"이 자식. 귀찮은 척은 다 하더니, 뒤로는 할 거 다 하고 있었잖아?"

"헤헤. 돈이 돈을 버는 세상이잖아. 벌 수 있는 기회는 잡아야지."

특유의 청량한 미소를 짓는 김시혁.

분명 자신이 알고 있는 순진무구한 동생의 모습이건만.

'완전 능구렁이였어.'

괜한 신경을 썼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시문은 입을 열었다.

"배팅은 어떻게 걸었냐?"

"전승으로 걸었어."

개인, 단체전 할 것 없이 결승전은 5판 3선승으로 이루어진다.

그걸 고려해 봤을 때 전승이라면.

"설마 네가 3 대 0 전승으로 이긴다고 건 거야?"

"당연하지. 여기 참가자들 중에 날 일대일로 이길 사람은 없거든."

이 새끼 봐라?

청량한 미소 사이로 이젠 확연하게 느껴지는 오만함에 시문은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런 시문의 옆자리로.

"크! 이제 우리 VVIP께서도 망할 후배 놈의 본성을 눈치채셨군요."

어느새 서류 정리를 마친 박진욱이 양주를 한 잔 들고 풀썩 앉았다.

"뭐, 사실 저도 후배 놈과 똑같이 배팅을 했습니다. 김시혁 홀로 3 대 0 전승으로요."

"0 대 3 전패로 안 걸고요?"

그간의 관계를 보면 충분히 그럴 만한데.

시문의 말에 박진욱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핫! 시혁이 놈이 뺀질거리긴 해도, 실력 하나는 확실하지 않습니까? 아마 4경기는 가지도 않을 겁니다."

그 말에 김시혁의 주변에 어린 묘한 기세가 한풀 꺾였다면 착각일까.

선배, 하며 습관처럼 위협하던 말이 쏙 들어간 걸 보아 틀림없겠지.

'녀석. 칭찬에 만족하고 있군.'

동생의 속내를 쉽게 읽어낸 시문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뿐만이 아닙니다. 시문 씨. 아마 개인전에 한에선 상위 플레이어들도 죄다 저처럼 배팅을 했을 겁니다."

"호오. 상위 플레이어들도요?"

"예. 다들 아레나에서 저 후배놈을 한 번쯤은 겪어 본 사람들이니까요."

"하긴."

랭커라 불려도 같은 다이아 랭크 소속이라 함께 매칭되는 경우가 왕왕 있어서일까?

김시혁의 무력을 대한 상위 플레이어들의 신뢰는 꽤나 두터운 듯했다.

근데 어쩌나?

자신이 아는 결과는 저들의 확신과 다른데.

'이거 일이 재밌게 돌아가는데?'

시문이 묘하게 웃자, 김시혁은 슬쩍 볼을 긁으며 말을 꺼냈다.

"어... 형? 자랑하는 게 아니라, 토토할 생각이면 나한테 걸어. 내가 꼭 따게 해 줄게."

형이 걸어 주면 힘도 더 날 거야.

그렇게 말하는 녀석을 보며.

"글쎄...."

시문은 한쪽 입꼬리를 죽 끌어 올렸다.

"내 생각은 좀 다른데?"

* * *

국대 선발전 당일.

"정말이었군. 밤사냥꾼이 돌아왔어."

"이거 한동안 다이아 랭크가 시끄러워지겠는데?"

"웃기는 소리 하네. 제깟 게 뭐라고? 길드도 없는 놈인데."

"길드는 없어도 김시혁이랑 친분이 있잖아. 둘이 듀오 한창 돌렸던 거 기억 안 나?"

"맞아. 저기 봐, 지금도 딱 붙어 있잖아."

어수선한 주변.

다이아급 플레이어의 감각엔 대놓고 욕하는 목소리도 포착되었지만.

정작 당사자인 박진욱은 관심도 없었다.

정확히는.

"어이, 김시혁. 너 배팅 바꿨냐?"

관심을 주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봐야겠지.

"아뇨. 안 바꿨어요."

"이 새끼. 하늘같이 모시던 형님의 말씀을 싹 무시했네?"

"그러는 선배는요? 하늘 같은 VVIP의 말씀을 들었어요?"

"...아니. 나도 이번만큼은 우리 VVIP 고객님을 외면했다."

담배 한 대를 꺼내던 박진욱은 옆에서 쏟아지는 안내 요원의 눈빛 세례에 헛기침을 하곤 담뱃갑을 집어넣었다.

"크흠! 시문 씨가 대단한 건 분명하지만, 도무지 네가 진다는 그림은 그려지지 않더라고."

"그렇죠?"

김시혁 역시 동의하는지.

모처럼 박진욱의 말에 동조했다.

"그래, 인마! 거기에다 상대가 다른 놈도 아니고 전갈 길드의 부길마잖아."

"뭐, 거기 나름 실력제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랭커인 네가 1세대의 퇴물한테 진다는 게 말이 되냐?"

"선배, 잘못 들으면 제가 전패하는 줄 알겠어요. 형은 제가 1패만 한다고 말한 거예요."

"나도 알아. 인마."

김시혁의 옆자리에 털썩 앉는 박진욱.

본래 참가자가 아니면 대기실의 출입은 엄격하게 통제되지만.

관계자들 중 아무도 박진욱에게 제약을 걸지 않았다.

역으로 무언가 거슬리는 게 있을까 눈치를 보기 바빴다.

그가 한때 이름을 날리던 암살계 플레이어라는 것 이전에.

현 대한민국에서 가장 핫한 두 랭커 의 지인이었으니까.

그걸 본인도 아는 것인지.

"3 대 1. 그것도 1경기만 네가 패배하는 걸로 말이지. 근데 내가 김종준 저 인간을 좀 아는데, 너 지고 싶어도 못 져."

박진욱은 제 할 말만 이어 갈 뿐이었다.

"보아하니 아는 사이 같은데,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에요? 저분도 다이아예요."

"저분은 지X. 전갈 길드원 만나면 목부터 쳐 버리는 놈이."

"선배, 말 좀 이쁘게 써요."

"어쭈, 이게? 야! 너 뭐 잘못 먹...."

그에 욱하던 박진욱의 몸이 멈칫한다.

사방에 설치된 방송 카메라들을 포착한 것이다.

"와! 하여간에 이 와중에 이미지 관리라니. 지독한 이중인격자 새끼."

"선배."

"능구렁이 같은 녀석. 어쨌건 계통 상성만 따져도 널 못 이겨. 저 사람 암살계거든."

"호오, 암살계였군요."

"그래도 다이아 랭크라며 변호하더니, 그것도 몰랐냐?"

"만난 적이 없으니까요."

어깨를 으쓱하는 김시혁.

이내 불이 깜빡이며 움직이는 카메라에 특유의 청량한 미소를 지어 주곤 몸을 일으켰다.

"국가대표 선발전! 대망의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아아!!"

사회자의 열기 띤 목소리와 함께 관계자들이 김시혁에게 손짓한 것이다.

"선배, 다녀올게요."

"봐주지 마. 하늘 같은 형님은 네가 1경기 진다고 하셨으니까."

"알아요."

청량한 미소를 머금은 김시혁이 곧 경기장을 오른다.

그러자 경기장 주변으로 플레이어, 관계자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당연했다.

"김시혁, 오랜만에 보네."

"난 저번 아레나에 같이 매칭됐었어. 진짜 괴물이더라. 혼자 상급 용족을 쓸어버리던데."

"김종준도 1세대 플레이어로 잔뼈가 굵겠지만... 아무래도 랭커는 힘들겠지."

신규 랭커인 김시혁과 1세대 플레이어 김종준.

국대 선발 결승전에 참으로 어울리는 매치업이었으니까.

다소 마른 인상의 중년인.

"김시혁, 이렇게 겨루는 건 처음이군."

"그러게요. 신기하게 아레나에서 만난 적이 없었네요."

"짧은 기간에 그 자리까지 올랐으니 그럴 만도 하지."

김종준은 묘한 뉘앙스로 말했다.

짧은 아레나 경력.

다시 말해 애송이.

그런 의미를 담은 도발인 것이다.

하나 김시혁은 대답 대신 청량한 미소를 지을 따름이었다.

김종준의 시답지 않은 도발에 넘어간 것이 아니었다.

'내가 저 사람한테 진다는 말이지?'

세상 누구보다 믿고 따르는 형.

그런 형이 한 말을 속으로 곱씹고 있는 것이다.

"답도 하지 않겠다는 건가? 어린놈이 건방지군."

그러나 이번만큼은.

'형, 아무래도 이번엔 형이 틀린 거 같아.'

형 김시문의 말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김종준을 무시해서가 아니다.

비매너로 유명한 전갈 길드의 부길마에 앉아 있다는 건.

그로 인한 수많은 보복을 상대로 버텨 낼 저력이 있다는 거니까.

단지.

'1세대 플레이어인데, 아직도 다이아인 사람한테 내가 질 리가 없잖아.'

오랜 시간 동안 다이아 이상의 벽을 넘지 못하는 자.

랭커인 자신에겐 딱 그 정도 가치밖에 되지 않을 뿐이었다.

"그럼 1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심판의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스릉.

김시혁의 허리춤에 걸려 있는 검이 자연스레 뽑혀 나왔다.

김종준 역시 버프 스킬인지 검붉은 기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하나.

착.

허공을 한 번 긋더니 다시 검집으로 돌아오는 김시혁의 검.

그저 검을 뽑아서 휘두르고 되돌린 것뿐이었으나.

"미친...."

"끝났네."

"대체 어떻게 저런 검격을 날리는 거지?"

"말이 안 나오는군."

"직접 당해 봐. 더 말이 안 나와."

관람 중이던 다이아급 플레이어들은 일제히 탄식을 터뜨렸다.

이어.

서걱.

김종준의 주변에 자리하던 카메라와 방송기기, 안전장치가 일제히 반 토막 난다.

김시혁은 그것들이 바닥으로 떨어지기도 전에 몸을 돌렸다.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결과는 뻔할 테니까.

'미안해, 형. 그래도 형이 잃은 돈은 내가....'

어딘가에서 보고 있을 형에게 사과의 마음을 보내던 찰나.

오싹.

"헛!"

오랜만에 느끼는 오싹함에 즉시 몸을 틀며 머리를 뒤로 빼냈다.

스아악.

뺨과 턱을 스치는 날카로운 무언가.

김시혁이 그것을 포착하기도 전에.

푸욱.

회피하던 김시혁의 가슴에 4줄기의 클로가 틀어박혔다.

"이래서 애송이는 안 되는 거다."

김종운의 비웃음과 함께 뽑혀 나오는 클로.

스륵.

가슴이 꿰뚫린 김시혁은 전신이 잿빛으로 변해 쓰러졌다.

'이게 무슨....'

그의 머릿속은 김종준이 어떻게 자신의 검격을 피해 반격까지 했는지에 대한 의문보다.

'아무리 시혁이 너라도 3 대 0으로 전승은 못 할걸? 첫 경기 정도는 질 거다.'

경기 전.

형 김시문이 했던 목소리가 끊임없이 맴돌았다.

제42화

42화. 기반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