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1화. 기적
솨아아.
굵직한 빗줄기가 억수같이 쏟아진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이 넓은 광야를 두드리는 빗줄기들이 한 곳만큼은 접근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한 사람이라고 해야겠지.
파앙.
파공음과 함께 빗줄기를 가르며 일직선으로 날아가는 여성.
"달아난다!"
"놓치지 마라!"
그녀의 뒤로 갖가지 무장을 한 이들이 쫓으려 했으나.
"그만 되었다."
서늘한 인상의 중년인의 제지에 거짓말처럼 움직임을 멈췄다.
이들 대부분이 콧대 높은 중국의 랭커들임을 고려해 보면 믿기 힘든 광경이었지만.
"쫓아 봐야 쓸데없는 피만 볼 뿐이다. 의식이 먼저야."
중국의 유일한 길드인 대륙성의 마스터.
창왕 종리추에겐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바닥을 뒹구는 머리통 하나를 바라봤다.
"김시혁...."
이내.
종리추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소국 놈치고 제법 대단했으나 그뿐. 감히 망국의 영웅 따위가 감히 넘볼 자리는 아닌 게지."
그는 김시혁의 머리통에서 시선을 돌려.
보조계 길드원들이 준비해 둔 간이 제단을 향했다.
"나 종리추야말로 신에 걸맞은 인물 아니겠는가? 크하핫!"
대소를 터뜨리는 종리추.
그에 호응하듯 길드원들이 하나같이 무릎을 꿇고는 예를 표했다.
그래.
흡사 과거, 제국의 황제를 알현하던 신하들처럼 말이다.
종리추는 양팔을 활짝 펼치며 빗물을 쏟아 내는 하늘을 바라봤다.
"보셨소? 나 종리추는 당신과의 약속을 지켰소!"
쿠르릉.
다 듣고 있다는 듯.
하늘에 번뜩이는 검붉은 벼락에 종리추의 얼굴엔 환희가 떠올랐다.
그러곤.
뚝.
쏟아지던 빗물이 거짓말처럼 멈춘다.
그친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멈춰' 버린 것이다.
스으으.
아까 도주했던 여성의 주변이 그랬듯이.
시야를 빼곡히 채우던 빗줄기가 커튼처럼 갈라진다.
콰즉. 까드득!
그 사이로는 검붉은 벼락들이 얽히고설키며 하나의 형체를 이루어 갔다.
눈알이었다.
시야를 가득 채울 만큼 아주 큼직한 눈알.
그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날카로운 동공이 종리추를 향했다.
-그래. 해냈구나, 종리추.
스산하다는 말로는 표현이 불가능한 목소리.
듣기만 해도 심장이 내려앉는 눈알의 목소리는 실제로도 그러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커, 커헉!"
털썩.
제단과 가장 멀리 위치한 이들.
속된 말로 저렙인 길드원들부터 하나둘씩 바닥으로 고꾸라지는 것이다.
하나 종리추의 눈에는 그들이 보이지 않았다.
"이젠 당신이 지킬 차례요."
환희로 가득했던 그의 얼굴은 어느새 광기마저 비쳤다.
"나 종리추를 지구의 성좌, 이른바 창신으로 승천시켜 주시오!"
-좋다.
검붉은 눈이 잘게 진동한다.
눈알 주변으로 시커먼 연기가 흘러나오며 종리추를 휘감았고.
그의 앞으로 일련의 문구들이 떠올랐다.
[성좌 ???가 NO. 274 지구의 성좌 탄생을 요청합니다.]
[상황 분석 중....]
"드디어!"
종리추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걸린다.
그럴 수밖에.
이날을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던가?
하나.
[해당 대상은 자격이 없습니다.]
[탐색 확장 중....]
"뭣?"
종리추의 표정이 굳어지는 건 그야말로 찰나.
그의 몸을 휘감던 암운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이내.
[성좌의 자격 보유자 사망 확인.]
[더 이상 NO. 274 지구에서 아레나를 진행할 이유가 없습니다.]
[NO. 274 지구의 아레나를 완전히 종료합니다.]
[갤럭시 아레나 종료에 따라 NO. 274 지구의 보호권을 철회합니다.]
잘려 버린 김시혁의 머리통 주변을 맴돌던 암운은 메시지창과 함께 모습을 감췄다.
파앗.
순간 하늘이 온갖 색으로 점철된 오로라로 반짝였다.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하늘을 가득 채우던 무지갯빛은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사라졌고.
"이, 이게 대체...."
종리추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주변을 살폈다.
그건 부복해 있던 대륙성의 길드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들 고수준의 랭커인 만큼.
지금 지구에 어떤 변화가 생겼다는 걸 느낀 것이다.
아마 시스템이 말한 보호권 철회와 어떤 관련이 있을 터.
이들의 당황은 오래가지 않았다.
멍청이가 아니고서야.
-이런. 종리추, 너에게 자격이 없다는구나.
작금의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는 뻔했으니까.
"네놈! 감히 나를 속인...."
종리추는 곧장 핏대를 세우며 화를 냈으나.
-종리추. 나는 너를 속인 적이 없다.
"커헉!"
어느새 눈알에서 날아든 벼락 줄기가 종리추의 어깨를 강타했다.
종리추뿐만이 아니었다.
"사, 살려...."
"끄아아!"
주변에 있던 대륙성의 길드원들.
그들 모두가 눈알에서 뻗어 나온 벼락 줄기에 관통당한 것이다.
그나마 김시혁과 함께 최강을 다투던 종리추였기에, 어깨를 관통당한 것에 그친 거였다.
-너의 염원대로 나는 너의 승천을 요구했다. 그저....
종리추는 어깨를 관통한 검붉은 벼락 줄기.
아니.
핏줄과도 같은 무언가를 잘라 내며 거리를 벌렸다.
-너에게 자격이 없었을 뿐.
"개소리! 네놈이 그러지 않았나! 김시혁을 죽이면 내가 성좌로 승천...을?"
씹어 먹을 듯 내뱉던 종리추의 말이 멈춘다.
그의 속을 훤히 꿰뚫어 보는 걸까?
-그래. '나는' 분명 그렇게 말했지.
검붉은 눈알이 곡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자격 보유자인 김시혁이 죽으면 네가 지구의 성좌가 되지 '않겠느냐'고 말이다.
마치 비웃는 것처럼 말이다.
-아아! 이 순간은 항상 즐겁군. 늘 새로워.
"네노오옴!!"
-너의 세계는 잘 먹어 주겠다, 종리추.
* * *
쾅.
"야, 누님 왔다."
거칠게 열리는 문.
허름한 판잣집답게 열린 문은 거의 부서질 지경이었지만.
여성은 신경도 쓰지 않고 터덜터덜 들어와 내부를 살폈다.
온갖 서적과 플라스크, 그리고 혈관처럼 이어져 있는 파이프들까지.
그러나 여성이 찾는 집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이 새끼, 뭘 또 만들고 있는 거야?"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능숙하게 좁은 집 안을 가로질렀다.
집주인이 있을 곳이야 뻔했으니까.
몇 걸음 가지도 않았다.
낡은 방문을 열자, 심상치 않은 마력 파동과 함께 한 남자가 보였다.
"야! 또 뭐 만드냐?"
"왔어?"
빈민국의 기아를 떠올릴 정도로 앙상하게 마른 몸.
그녀는 비쩍 마른 남자의 앞에 그려진 복잡한 문양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김시문, 넌 세상이 엿되는데도 이런 걸 붙잡고 있냐? 이게 재밌어?"
"연금술사가 연성을 하는데 재미있고 없고가 어딨어."
더 그릴 공간도 없어 보이는데.
김시문은 연신 바닥의 연성진을 채워나갔다.
그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여성은 김시문의 옆으로 작은 가방을 툭 던졌다.
"자, 받아라."
"이게 뭐야?"
"선물."
"선물이라고?"
"그래. 영광으로 알아. 내가 남자한테 선물해 본 건 이번이 처음이니까."
그렇게 말한 여성은 낡은 소파로 몸을 던졌다.
가방을 열어 본 시문의 표정이 굳었다.
"...어떻게 된 거야?"
"보면 모르냐? 네 예상대로 종리추, 그 개X끼가 네 동생 뒤통수 씨게 쳤지."
"그런데도 시혁이는 이걸 안 썼고?"
"나도 쓸 줄 알았어. 근데 길드원들 다 죽고 나니까 내 쪽으로 던지더라고?"
"그랬냐."
시문은 복잡한 눈으로 가방 속을 내려다봤다.
그걸 힐끔한 여성은 물었다.
"그... 뭐라 안 하냐?"
"뭘?"
"네 동생 안 돕고 그거만 딸랑 들고 온 거."
그 말에 피식 웃은 시문은 다시 연성진을 그려 나갔다.
"안 해."
"진짜로? 내가 도왔으면 종리추 그 새끼를 죽였을지도 모르는데?"
"주변에 대륙성의 랭커들이 빼곡할 텐데 그럴 리가. 그러니까 시혁이도 이걸 넘긴 거겠지."
"...저렙 주제에 상황 보는 눈은 있다니까."
시문은 가방을 갈무리하며 천장을 바라봤다.
꽤나 큰 틈새 덕에 어둑한 밤하늘이 보였지만, 억수 같은 빗물이 안으로 들이닥치진 못했다.
당연했다.
비록 판잣집이긴 해도.
김시문의 연금술이 곳곳에 묻어 있었으니까.
"말숙아."
"아이 X발! 내가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말랬지?"
"사람을 이름으로 안 부르면 어떻게 부르냐?"
"세상이 부르는 이름 있잖아. 천, 마."
"풉."
터져 나오는 시문의 웃음.
"어쭈? 웃어?"
다른 사람이었다면 진즉 머리통을 박살 내 놓았겠지만.
아쉽게도 천마 고말숙에게 김시문이란 그럴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망할 새끼."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빼 문 그녀는 뿌연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어쨌건 이걸로 너한테 진 빚은 다 갚은 거다."
"빚?"
고개를 갸웃하는 시문.
이내 시문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아. 너 그걸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었어?"
"그거라니! 어떻게 보면 내 복수 때문에 네 동생이...."
"그건 아냐."
딱 잘라 버리는 시문.
"네 복수는 정당했고, 그 사람들은 벌을 받아야 했어. 네 복수와 대륙성은 별개의 문제고."
"...하여간에, 너도 참 대단한 녀석이야."
머리를 벅벅 긁으며 일어나는 고말숙.
그러나 시문의 답이 마음에 든 것일까.
그녀의 입가엔 작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응? 오자마자 어디 가?"
"발악하러. 튈 때 봤는데 종리추 그 새끼, 아주 어메이징한 걸 소환했더라고."
그 검붉은 거대 눈동자는 거칠 것 없던 하이랭커.
천마인 그녀조차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 만큼 강렬한 존재감을 내뿜었다.
"말숙이 네가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정말 무시무시한 건가 보네."
"엉. 너도 아까 시스템이 알리는 거 봤지? 보호권이니 뭐니 철회됐다는 거."
"응. 갑작스럽게 떠서 놀랐어."
시문은 슬쩍 입술을 깨물었다.
'분명 시스템은 성좌의 자격 보유자가 사망했다고 했지.'
필시 그 자격의 보유자는 동생인 시혁이 놈이었을 터다.
김시문은 검성 김시혁의 상태창을 아는 유일한 존재였으니까.
"그게 뭘 의미하는지는 몰라도 일단 제대로 엿된 거 같아."
고말숙은 제 머리를 거칠게 헝클었다.
"그 알림 이후로 주변 잡몹들만 두 배 가까이 세졌더라. 아웃브레이크도 갑자기 몇 개나 더 생기는 걸 봤고."
"그렇게 짧은 시간에?"
"그래. 아마 여기도 안전하진 않겠지. 너 이번에야말로 뒤질걸?"
담배를 문 고말숙의 입가가 삐딱하니 올라갔다.
시문은 피식 웃으며 물었다.
"그런데 넌 도망을 안 가냐?"
"튀는 건 이 고말숙이 스타일이 아니라서. 뭐, 이제 더 살 이유도 없고."
어느새 다 타 버린 꽁초를 튕긴 그녀는 휘적휘적 입구로 걸어 나갔다.
"너, 그거 버리지 말고 꼭 마셔라. 그 잘난 검성이 지 목숨까지 버리고 양보한 거잖냐."
"미안한데 원래 내 거였다."
"아, 그러셔? 그런데 왜 지금껏 네 동생 놈이 들고 있었을까?"
그렇게 대꾸한 고말숙은 문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이내.
"...."
끼익.
작은 읊조림과 함께 낡은 문을 닫고 나서는 고말숙.
밖에서 내리는 장대비를 생각해 보면 들리기 힘든 소리였지만.
제 영역에 있는 시문에게는 선명하게 들렸다.
'...그동안 고마웠다.'
라고.
시문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참 나. 사람은 죽을 때가 되면 바뀐다더니, 옛말 틀린 거 하나 없네."
세계 3대 미친년.
천마 고말숙답지 않은 말이었다.
미소를 털어 낸 시문은 다시 연성진을 그려 나갔다.
그리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고말숙이 오기 전부터 이미 95% 이상 완성된 상태였으니까.
"이제 연성에 쓰일 에너지원만 있으면 되는데... 어쩜 이렇게 딱 맞춰 왔는지."
김시문은 고말숙이 넘긴 가방을 열었다.
찰랑.
은은한 무지갯빛을 머금은 백색의 액체가 작은 유리병 속에서 출렁인다.
그것을 더 유심히 바라보자, 시문의 시야엔 익숙한 창이 떠올랐다.
[엘릭서]
등급 - ?
연금술의 신화적인 산물.
신에게도 효력을 보인다는 만능약.
시문의 인생에서 가장 큰 업적이라 부를 수 있는 엘릭서.
동생 김시혁과 천마 고말숙이 가져다준 온갖 재료들과 더불어.
각성 이후 모든 시간을 갈아 넣은 집합체였다.
'이마저도 에메랄드 태블릿을 얻지 못했다면 꿈도 못 꿨겠지만....'
씁쓸한 눈빛으로 그것을 바라보던 시문은 입을 열었다.
"상태창."
칭호 :
계통 : 마법계
레벨 : 1
소속 : 대한민국
힘 : 1
민첩 : 1
체력 : 3
마력 : 0
보유 특성 – 마력불능
업적 포인트 - 5,000
절망.
딱 이 한 단어로 모든 설명이 가능한 상태창.
솔직히 이런 상태창을 지니고 지금까지 살아남았다는 게 기적이었다.
본래라면 정규 아레나가 시작되자마자 죽었어야 할 수준이었으니까.
'운이 좋았지.'
조국이 멸망했음에도 세계 최강을 논하던 플레이어 김시혁.
그 잘난 동생 놈의 도움과 개인적인 운.
그리고 고말숙 같은 지인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죽었을 것이다.
특히나 마력불능은 단순히 마력 사용만 불능이 아니라, 이렇게 육체마저도 갉아먹었다.
그나마 남은 것이 독기여서일까?
정신만은 무너지지 않았고, 이렇게 연금술의 끝이라는 엘릭서까지 만들게 되었으나....
"이젠 다 부질없지."
기본 능력치는 1레벨의 반도 못 미치는 상태.
물론 엘릭서라는 기적의 영약이 스탯 증진에도 효과가 있을 수 있으나 결국 1레벨이다.
'애써 엘릭서를 먹고 마력불능을 치료해 봐야 결국 개죽음뿐이겠지.'
지나가던 잡몹이 후 불면 그대로 바스러질 수준이란 말이다.
"새끼, 그냥 먹고 너라도 더 살지 그랬냐."
쓰게 웃은 김시문.
뭐, 이걸 넘긴 동생 놈의 마음은 이해한다.
그걸 여기까지 가져온 말숙이의 마음도.
어차피 정규 아레나 이후 박살 난 세상이니.
죽기 전에 자신의 염원이라도 이루어 주고 싶은 거겠지.
"거참, 이제 와서 이런 게 무슨 소용이라고... 아니, 아예 소용없는 건 아니겠네."
시문은 엘릭서의 마개를 뽑았다.
언어로는 형용할 수 없는 향기가 코 속으로 스며든다.
그것만으로도 몸의 전신에 활력이 돋았으나, 시문은 그것을 복용하지 않았다.
"너희들 덕분에 인생의 목표였던 두 가지를 다 이루고 간다."
마력불능의 마법계인 자신이 유일하게 다룰 수 있었던 힘인 연금술.
덕분에 정말 죽을 듯이 연금술에 달려들었고.
에메랄드 태블릿에 기록된 신화적인 두 개의 산물 중 하나.
엘릭서마저 연성해 냈다.
그러니 이제 남은 산물은 하나뿐이었다.
"예전 연구실도 아니고, 이런 환경에서 성공할지는 모르겠다만."
쪼르륵.
그 대단하신 성좌에게도 효과를 보인다는 엘릭서가 바닥으로 쏟아진다.
정확히는 연성진 중앙에 위치한 에메랄드 태블릿이었다.
'엘릭서를 연성할 때 반파됐으니. 이번 연성으론 아예 박살이 나겠지?'
몸을 치료해 줄 유일한 열쇠라며 금이야 옥이야 다루었던 에메랄드 태블릿.
그것을 스스로의 손으로 부수게 되는 날이 올 줄은 정말 몰랐다.
하나 멸망을 앞두고 있다는 마음 때문일까?
미련은커녕 마음이 한결 홀가분했다.
"읏차."
엘릭서를 다 부은 시문은 연성진의 외곽으로 나가 양손을 짚었다.
빌어먹을 마력불능 덕분에 마력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으나, 상관없었다.
어차피 연금술의 근본은 등가교환.
마법계라는 계통과 어떤 식으로든 등가교환만 만족시켜 주면 얼마든지 사용이 가능했으니까.
파측.
연성진 위로 작은 스파크가 튄다.
이내 그것은 거센 폭풍우를 떠올리게 만들 정도로 강렬한 뇌전으로 승화했고.
번쩍!
방 안 전체를 점멸시켰다.
이윽고.
하얀빛이 천천히 사그라들며, 빼곡하던 연성진 대신 낡은 방바닥이 모습을 드러냈다.
"성공...했구나."
연성의 성공 여부를 알리는 연성진의 소멸과.
[신화적인 산물을 연성하였습니다.]
[업적 포인트 5,000을 획득합니다.]
[해당 카테고리의 소실로 비활성화됩니다.]
익숙한 메시지의 등장은 엘릭서를 만들었을 때와 다름없었다.
다만 그때와 다른 것이 있다면.
[연금술의 신화적인 산물 두 가지 모두를 제작하였습니다.]
[칭호 '연금술의 선구자'를 획득합니다.]
[첫 칭호를 얻었습니다.]
[업적 포인트 500을 획득합니다.]
[해당 카테고리의 소실로 비활성화됩니다.]
"호오? 이젠 칭호까지 주네."
피식 웃은 시문은 연성진 중앙으로 걸음을 옮겼다.
바스락.
빛바랜 조각들이 발에 밟힌다.
아마 연성에 쓰인 에메랄드 태블릿의 파편일 터였다.
그 속에서.
시문은 무채색의 굴곡 하나 없이 둥근 돌을 주웠다.
"이거구나."
엘릭서와 함께 연금술로 창조해 낼 수 있는 신화적인 산물.
[현자의 돌]
귀속 여부 :
등급 : ?
연금술의 신화적인 산물.
등가교환만 성립하면 무엇이든 연성이 가능하다.
"완벽하게 성공했네."
두 번 만들 자신은 없는 귀한 엘릭서를 에너지원으로 썼다.
고로 당연한 결과였지만.
"입은 쓰네."
분명 신화적인 산물을 만들어 냈음에도.
엘릭서를 만들어 냈을 때의 그 환희는 찾아오지 않았다.
어쩌면 엘릭서와 달리.
에메랄드 태블릿에 어떤 정보도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일 수도 있었다.
그래.
그래서일 거다.
그렇게 마음을 달랜 시문은 다시 한번 현자의 돌의 정보를 살폈다.
"귀속템이라...."
귀속 절차야 어려울 게 없지.
시문은 곧장 작은 단검을 꺼냈다.
그러곤 손가락 끝을 가볍게 베어 피 한 방울을 현자의 돌 위로 떨어뜨렸다.
또옥.
맑은 물에 붉은 물감을 풀어 낸 것처럼.
무채색의 현자의 돌은 시문의 피로 물들며, 귀속 여부에 김시문이라는 이름이 새겨졌다.
이내.
스륵.
"엇?!"
시문의 손바닥으로 녹아드는 현자의 돌.
둥근 돌이 팔을 타고 가슴으로 흘러드는 이물감은 굉장히 기이했다.
그렇게 흡수된 현자의 돌은 정확히 시문의 가슴 한가운데에 위치했고.
두근.
살아 있는 심장처럼 박동하며, 얇은 무언가가 전신으로 뻗기 시작했다.
"윽!"
털썩.
무릎이 절로 꿇린다.
통증 때문이 아니었다.
그런 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일종의 혈관처럼.
전신으로 뻗어 나가는 현자의 돌에 몸의 움직임이 어색해진 것이다.
그때.
콰아앙!!
강렬한 폭음이 귓가를 때렸다.
그와 함께 데구루루 굴러오는 무언가.
그것의 정체를 알아차리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방금까지 멀쩡히 이야기를 나누던 천마.
고말숙의 머리통이었으니까.
'참... 퍽이나 너답다.'
분노나 경악보단 헛웃음이 먼저 흘러나왔다.
그럴 수밖에.
덩그러니 남겨진 머리통엔 호쾌한 미소가 걸려 있었으니까.
그런 그녀의 머리통을 뒤따라.
-호오라?
듣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철렁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힘겹게 고개를 들자.
-현자의 돌이라니? 직접 보고도 믿기지가 않는구나.
숨통을 조여오는 어마어마한 압박감과 함께.
어느새 뻥 뚫린 천장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검붉은 눈동자가 보였다.
종리추가 불러냈다는 그 검붉은 눈동자였다.
심상치 않은 존재감으로 보아, 필시 성좌이거나 그에 필적하는 존재겠지.
-역시 성좌 탄생의 가능성을 지닌 세상이라 이건가? 이거 상상치도 못한 수확이군.
'뭐?'
어느새 머리까지 뻗어 온 현자의 돌 덕분에 말도 나오지 않았으나.
놈을 바라보던 시문의 눈동자는 화등잔 만하게 커졌다.
이어.
종리추가 소환했다는 고말숙의 말을 시작으로 일련의 생각들이 빠르게 머릿속을 스쳤고.
한 가지 결론을 도출했다.
'전부 저놈 때문이구나.'
갤럭시 아레나의 보호권이 철회된 것도.
종리추가 그토록 동생 김시혁을 죽이려 든 것도.
성좌 탄생을 논하는 저 거대 파충류 눈알의 소행일 가능성이 높았다.
시문의 시선이 여전히 웃고 있는 고말숙의 머리통을 향했다.
'망할....'
빠득.
이가 갈렸다.
1레벨의 수준조차 되지 않는 몸으로도 절로 화가 치밀었다.
'마력불능만 없었어도!'
이 강대한 존재를 이길 거라고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동생과 친구를 죽인 놈에게 주먹 한번 휘두를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에 화가 나는 것이다.
그때.
[동기화 완료. 현자의 돌이 완벽히 자리합니다.]
[스탯 마력과 체력이 고유 스탯인 연성력으로 변환됩니다.]
[업적 '고유 스탯 획득'을 달성하셨습니다.]
[업적 포인트 1,000을 획득합니다.]
[해당 카테고리의 소실로 비활성화됩니다.]
'고유 스탯?'
놀랄 틈도 없었다.
굳었던 몸이 다시 자유를 되찾은 것이다.
동시에.
우웅.
가슴 정중앙에선 맑은 이명이 울렸다.
인간의 언어는 아니었으나, 김시문은 현자의 돌의 말을 분명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정확히는 교감으로 인한 의사 전달이라고 해야겠지.
'원하는 모든 걸... 연성하라고?'
연성으로 태어난 존재라서 그런 것일까?
현자의 돌의 뜻은 뜬금없었지만, 깊게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지금 자신이 원하는 것.
'저 개자식에게 한 방 먹이는 것.'
동시에.
'마력불능 따위가 없는 삶을 살아 보는 것.'
그런 연성물이 있을까?
라는 물음은 할 필요도 없었다.
그것들을 떠올리자마자.
우우우웅!
가슴을 울리던 이명은 더없이 무서울 정도로 그 크기를 키웠고.
[소유자가 보유한 카테고리에서 적합한 대상을 탐색 중....]
[탐색 불가. 연성력을 소모해 독자적으로 탐색 영역을 확장합니다.]
"크악!"
오우거의 손으로 쥐어짜는 듯한 통증이 머리와 가슴에서부터 퍼져 나갔다.
하나 고통은 찰나였다.
[탐색 완료. 가장 적합한 대상은 XXXX의 서입니다.]
[등가교환에 연성력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소유자의 현 상태에 따라 현자의 돌의 자체 연성력을 사용.]
[독자적인 연성을 시작합니다.]
강렬했던 고통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시문은 제 의지와 상관없이 검붉은 눈동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곤.
따악.
손가락을 튕김으로써.
파츠츠츠측!
어마어마한 백색의 빛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왔고.
순식간에 하나의 형태를 이루었다.
그것은 책.
아니.
우주를 담아낸 비석에 가까운 무언가였다.
[창조한 적 없는 신물의 탄생에 원 주인인 XXXX의 감긴 눈꺼풀이 꿈틀거립니다.]
[그의 관심이 플레이어 김시문을 향합니다.]
-이, 이럴 수가!!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건 말도 안 된다! 어찌 인간이 우둔한 아버지의 신물을!
[처음으로 성좌의 관심을 받았습니다.]
[업적 포인트 1,000을 획득합니다.]
[갤럭시 아레나에 등록되지 않은 성좌, XXXX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성좌조차 해내지 못한 업적에 갤럭시 아레나가 찬사를 보냅니다.]
[업적 포인트 1,000,000을 획득합니다.]
[해당 카테고리의 소실로 비활성화됩니다.]
[칭호 '저편의 시선을 받는 자'를 획득합니다.]
[해당 카테고리의 소실로 비활성화됩....]
인간의 감각 중 청각이 가장 마지막에 소실된다고 하던가?
검붉은 파충류 눈동자의 경악과 함께 메시지창이 범람했지만.
시문은 메시지창을 확인할 수 없었다.
연성이 끝난 시점부터 시각을 비롯한 감각들이 전부 날아가 버린 탓이었다.
-아, 안 됩니다! 아버지! 이곳은 저의....
연신 눈알 놈의 경악이 들려왔으나, 이젠 그마저도 끊어져 버리고.
'뭐가 어찌 된 건지는 모르겠다만.'
마치 영혼마저 짓뭉개듯.
전신을 엄습하는 피로감에.
'일단 놈에게 한 방 먹인 건 확실하네.'
시문은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의식의 끈을 놓았다.
제2화
2화. 제자리로
무저갱에 떨어지는 것처럼 아득해지던 감각들.
그것들이 하나둘씩 돌아오기 시작한다.
이내.
"으음."
김시문의 감긴 눈꺼풀이 꿈틀거렸다.
"여기는...."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다소 바랜 천장.
익숙한 방 안의 모습은 다시는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내 자취방이잖아?!"
벌떡.
이불을 박차고 일어난 시문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주변을 훑었다.
그 검붉은 눈알이 환영 같은 수작이라도 부린 걸까?
그렇다고 하기엔 죽음처럼 느껴지던 그 아득한 감각이 아직도 잊히지 않았다.
그럼 예측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저승인가?'
그때.
드르르르륵.
침대맡에 놓인 폰이 요란하게 진동한다.
그것을 본 시문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폰? 폰이라고?'
중국과 미국.
최종 두 국가가 남고 나서부터 폰은 작동을 하지 못했는데?
TV나 컴퓨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것들을 유지할 기반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미국과 중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가 멸망했고.
그 두 나라마저 무정부였던 세상이 자신이 알고있던 세상이다.
그 때문에 폰은 버린 지 오래였는데.
"설마...."
시문은 귀신에 홀린 듯.
진동하는 폰을 들어 화면을 켰다.
[2030년 1월 17일. 오전 7시 20분.]
그 화면을 확인하는 순간.
"아."
툭.
폰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 * *
21세기를 살아가는 모든 인간들은 말한다.
2015년 1월 1일은 지구에서 가장 역사적인 순간이라고.
당연했다.
[축하합니다. 자격 만족으로 지구는 갤럭시 아레나에 초대됩니다.]
[정규 아레나로 승급되기 전까지, 갤럭시 아레나의 보호를 받습니다.]
갑작스러운 이 두 메시지의 등장은 2015년의 지구를 완전히 뒤바꿔 놓았으니까.
당시 13살이었던 김시문은 그때의 메시지창이 아직도 생생했다.
2015년 1월은 지구의 역사상, 그 어떤 때보다 거대한 변화를 겪었고.
인류는 늘 그렇듯.
이 변화에 빠르게 적응했다.
"정확히 11년 전인가?"
한국이 멸망한 뒤로 굳이 나이를 세어 보진 않았으나.
곧 마흔으로 꺾인다는 말숙이의 한탄과 이 자취방을 떠올려 보면.
"28살로 회귀라니... 하. 이렇게 겪고도 믿기지 않네."
자신은 2041년에서 11년 전인 2030년으로 회귀한 것이 분명했다.
<39살에서 28살로 회귀한 건에 대하여>
책 하나 뚝딱하기 아주 좋은 소재다.
그게 자신이 아닌 가상 인물일 때의 이야기겠지만.
물론.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진 것에 대해 짐작 가는 바는 있었다.
'그때, 현자의 돌이 멋대로 내 몸을 움직여 무언가를 연성했었지.'
오우거에게 산 채로 쥐어짜이는 듯한 기분은 아직도 잊히지 않았다.
'시각이 사라져서 결과물을 직접 확인하지 못했지만.'
어마어마한 존재감이었던 검붉은 눈알이 경악한 것으로 보아, 범상치 않은 것임은 분명할 터.
"잠깐. 그러고 보니...."
생각에 잠겼던 시문은 놀란 눈으로 자신의 양손을 내려다봤다.
'뭔가 이전과 느낌이 달라.'
비록 28살로 11년이나 되돌아왔다곤 하나.
이 시기의 자신은 '그 사고'로 얻은 마력불능 때문에 한창 힘들 때였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속이 꽉 막힌 것 같았던 그 답답한 느낌이 전혀 없어.'
또한 연금술을 익히기 전인 이 당시엔 안경을 썼었다.
시문의 시선이 침대맡 선반을 향한다.
검은 뿔테 안경은 여전히 선반엔 자리하고 있건만.
"잘 보이잖아?"
주변의 모든 것들이 안경을 쓰고 있던 것처럼 말끔히 보였다.
'시각뿐만이 아니야.'
싸구려 이불에서 오는 거칠거칠한 촉감과 환기되지 않은 특유의 텁텁한 공기.
그리고 닫힌 창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흔한 도시 소음까지.
"모든 감각이 선명해졌어."
정확히는 원래대로 돌아왔다고 해야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김시문의 시선은 자연스레 자신의 가슴 정중앙을 향했다.
그러곤 아주 조심스레.
그곳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뭐, 뭐야! 아무것도 없어?"
분명 회귀를 했다면 현자의 돌이 자리해야 하는데!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으나, 어찌 보면 납득이 되기도 했다.
다른 것도 아닌 무려 11년의 회귀다.
거기에다 한결 선명해진 감각으로 추측건대.
평생의 낙인이던 마력불능도 고쳐졌을 것이다.
애당초 자신이 현자의 돌에게 원했던 요구는 두 가지.
눈알에게 한 방 먹이는 것과 마력불능이 없는 삶이었으니까.
'그럼 내 염원을 이룬 탓에 현자의 돌이 사라진 건가?'
연금술의 근본은 등가교환.
무언가를 연성하려면 반드시 그에 걸맞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 파충류 눈깔에게 한 방 먹이는 것과 마력불능의 회복에 더해 11년 전으로 회귀까지 이루었다면.
현자의 돌이 소멸했다 하여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이럴 게 아니지. 확실히 알아보면 돼.'
현자의 돌은 분명 귀속 아이템이었으니까.
시문은 곧장 상태창을 열었다.
칭호 : 연금술의 선구자 (외 1)
계통 : 마법계
레벨 : 1
소속 : 대한민국
힘 : 4
민첩 : 4
체력 : 5
연성력 : 10
보유 특성 – 현자의 돌 (불안정)
업적 포인트 – 1,012,500
상태창을 본 시문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럴 수밖에.
"역시... 사라졌구나."
당장 한평생의 발목을 붙잡았던 마력불능.
그 족쇄와도 같던 문구는 온데간데없고, 대신 '현자의 돌'이라는 문구가 자리했으니까.
보아하니 현자의 돌은 귀속 과정을 거치며 특성으로 변한 듯했다.
"후. 맨정신으론 도저히 안 되겠다."
잠시 눈을 감고 북받치는 감정을 다스린 시문은 걸음을 옮겼다.
"뭐라도 마셔야겠어."
낡은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낸 시문은 곧장 들이켰다.
맥주 특유의 맛과 청량감이 목을 타고 속을 일깨운다.
"캬아!"
잠에서 깨자마자 맥주를 때려 부어서인지 속이 그리 좋진 않았으나.
덕분에 정신을 번쩍 든 시문은 차분히 상태창을 살폈다.
'회귀 전 내 스탯은 힘1, 민첩1, 체력3, 마력0이었지.'
마력불능이 주는 페널티.
그것은 단순히 플레이어의 마력만 막는 것만이 아닌, 육체적 쇠약까지 가져올 만큼 악랄했다.
한데 지금은 어떤가?
'내가 처음 각성했을 때의 수치와 똑같아.'
물론 그래 봐야 고작 1레벨이고.
평균적으로 대부분의 1레벨이 모든 스탯을 5에서 시작한다는 걸 따져 보면, 힘과 민첩은 평균보다 1씩 부족했다.
하지만 반대로.
슈퍼 루키들이나 지닌다는 무려 10짜리의 스탯도 보유하고 있었다.
바로 마력스탯.
"잠깐. 마력이 아니라 연성력이라고? 아!"
고개를 갸웃하던 시문은 손뼉을 마주쳤다.
현자의 돌이 완전히 자리하고 나서 얻었던 스탯.
[스탯 마력과 체력이 '고유 스탯'인 연성력으로 변환됩니다.]
당시 시스템은 분명 그것을 '고유 스탯'이라고 칭했다.
'미친! 그럼 내가 고유 스탯의 보유자가 된 거야? 그것도 1레벨부터?'
성력, 마기 등 일정 조건을 만족하면 얻을 수 있는 스탯과 달리.
고유 스탯은 한 사람밖에 얻지 못하는 스탯이었다.
당연히 고유 스탯을 얻은 플레이어는 전생에도 그리 많지 않았고.
그들 중 다수가 하이랭커급의 위치에 올랐었다.
대표적으로.
'시혁이 녀석이나 종리추가 그랬지.'
중국의 양대 산맥으로 불렸던 김시혁과 종리추.
두 사람 모두 고유 스탯을 보유한 하이랭커였다.
물론 말이 양대 산맥이지.
전생의 김시혁은 종리추라는 인물을 치켜세우기 위한 조연에 지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소속, 즉 국가를 잃은 플레이어에게 미래는 없으니까.'
이 빌어먹을 게임의 진정한 시작인 '정규 아레나'로 승급되기 전까지.
상태창의 소속인 국가를 잃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누구도 몰랐다.
알았다면 어마어마한 부와 지위를 주더라도.
플레이어들이 함부로 국가를 옮기는 일은 없었겠지.
"하. 사람 일은 아무도 모른다더니...."
헛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맥주 한 모금을 더 마신 시문은 유독 숫자를 과시하고 있는 상태창의 하단을 바라봤다.
"그나저나 업적 포인트가 1,012,500점이라니? 이건 또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분명 자신이 지니고 있었던 업적 포인트는 엘릭서 연성으로 얻은 5,000점.
거기에다 같은 급인 현자의 돌도 연성했고 첫 칭호 획득으로 500점을 더해서.
도합 10,500점이어야 정상이었다.
한데 100만이 넘는 이 얼토당토않은 숫자는 대체 뭐란 말인가?
"이 정도의 업적 포인트를 대체 어디서 얻은 거지?"
설마 최초 회귀 보너스로 막 주고 그런 건가?
"정신 차리자, 김시문."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시문은 헛웃음을 머금었다.
"그런 게 있었으면 일어나자마자 시스템이 알려 줬겠지."
뭐가 어떻든 간에.
중요한 건 이 괴랄한 양의 업적 포인트는 후반에 굉장한 도움을 줄 거라는 것이다.
'분명 업적 상점에서 스탯이 구매 가능하다고 했었지?'
하이랭커인 시혁이와 말숙이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있다.
바로 업적 상점에선 스탯도 판매를 한다는 것.
물론 아무나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스탯 판매엔 등장 조건이 있다고 했었으니까.'
본디 대다수의 플레이어들은 업적 상점을 거의 이용하지 않았다.
이유야 간단했다.
길드 관련을 제외하곤 크게 구매할 게 없으니까.
그럼에도 김시혁과 고말숙이 업적 상점에서 스탯을 구매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
'높은 수준의 업적량 보유.'
당연했다.
업적 상점은 단어 그대로 플레이어의 '업적'에 걸맞은 물건을 판매하는 곳이니까.
시문의 시선은 자연스레 상태창의 최상단을 향했다.
'분명 업적보다 칭호의 숫자가 영향이 더 크다고 했었지?'
칭호는 여러 옵션이 붙긴 하나 아이템에 비해 상당히 짠 편이고.
그마저도 획득 루트가 극악이거나 희귀해서 랭커들조차 보유한 이들이 많지 않았다.
'반면 하이랭커인 시혁이와 말숙이는 칭호를 꽤 많이 지니고 있었어.'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한 가지 가설이 머릿속을 스쳤다.
'어쩌면 칭호의 숫자가 하이랭커와 일반 랭커를 가르는 척도일지도 모르겠네.'
더불어 스탯을 판매할 수준이면 다른 판매품들도 어마어마할 터.
진화한 업적 상점은 성장에서 무조건 유리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일단 이건 업적 상점이 열리면 다시 고민하는 걸로 하고."
시문은 시선을 들어 칭호 카테고리를 터치했다.
그리고 펼쳐지는 세부 정보를 보곤.
[연금술의 선구자] - 성장형
연금술의 신화적인 산물을 모두 연성한 연금술사에게 주어지는 칭호.
-연성 관련에 아주 작은 보너스를 받는다.
"미친!"
저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왔다.
당연했다.
대부분의 칭호가 보조적인 옵션에 그치거나 그마저도 없는 경우가 다수거늘.
"지, 직업 관련 칭호라고? 그것도 성장형?!"
이게 얼마나 대단한 칭호인지는 천마 고말숙을 보면 대번에 알 수 있다.
하이랭커 중 비교적 후발 주자라 볼 수 있는 고말숙.
그럼에도 그녀가 하이랭커로 군림할 수 있었던 건.
성좌 천마에게서 얻은 사기적인 칭호 때문이었다.
자연스레 언젠가 병나발을 불며 제 성좌 천마를 욕하던 고말숙이 떠올랐다.
'있잖아, 변태 영감한테 처음 칭호를 받았을 땐 존X 짜증 났거든?'
'어떻게 지 이름인 천! 마! 같은 칭호를 주냐고! 쪽팔리게!'
'근데 써 보니까 아니더라. 내 바로 영감한테 대가리 박았잖냐.'
성장형 칭호 '천마.'
정확한 옵션은 모르지만.
분명 말숙이는 하이랭커가 되는 데 칭호가 큰 도움을 주었다고 했었다.
"그런 걸 나도 얻게 될 줄이야...."
이거 또 맥주가 마려워지네.
'참자. 정신 차리려는 거지, 취하려고 마신 게 아니잖아.'
그 욕구를 간신히 진정한 시문은 다른 칭호로 시선을 돌렸다.
[저편의 시선을 받는 자]
스스로가 저편이라 칭할 수 있는 존재의 시선을 받은 자에게 주어지는 칭호.
행운인지 불행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지만.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일이라는 건 확실하다.
"이런 건 또 언제 얻었대?"
저편의 시선이라니.
애당초 저편이 뭔데?
시문의 미간이 깊게 파였다.
'그냥 똥옵션인가.'
칭호에 능력치가 붙지 않는 건 심심치 않게 벌어지는 일이다.
"뭐, 없는 거보다야 낫겠지."
업적 상점의 격을 높이려면 일단 칭호가 많을수록 좋으니까.
"으아! 어지럽다!"
시문은 침대로 몸을 던졌다.
그냥 눈 한번 감았다 떴을 뿐인데.
한 번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다.
"일단 제일 중요한 건, 내 마력불능이 회복되었다는 거지."
제 입으로 이런 소리 하기가 좀 그렇지만.
1레벨의 마력 스탯이 10이라는 건, 마법계의 내로라하는 유망주들도 비비기 어려운 스펙이었다.
단지 그게 연성력으로 변했을 뿐.
'한번 시험해 볼까?'
시문은 오른손을 들어 올리곤 연성력을 집중했다.
마력을 다루지 못한 지는 꽤 오래되었으나.
마력불능이 회복된 지금, 기운 운용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사아아.
혈관에 피가 아닌 무언가가 주입된 것처럼.
정체 모를 기운이 팔을 타고 손바닥으로 모여들었다.
'역시 마력과는 느낌부터가 달라.'
시문은 손바닥에 모여든 연성력을 꼼지락거렸다.
'다루기도 엄청 편하네.'
현자의 돌 때문일까?
자세히 집중하지 않으면 이게 기운인지, 아닌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연성력은 시문의 뜻대로 움직여 주었다.
'이 정도면 마력 없이 마법도 사용이 가능하려나? 안 될 거 같긴 한데....'
연성력을 꼼지락거리던 시문은 몸을 일으켰다.
'한번 해 보자. 일단 발화 공식을 분해해서....'
연금술에서 사용하던 발화 공식을 분해, 재수정하여 마법에 적합한 형태로 바꾼다.
아무리 연금술이 천대당해도 결국 마법 계통으로 근본은 같았기에.
기초 마법인 발화 공식 정도는 어렵지 않게 준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연성력을 주입하자.
피이이.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아무런 현상도 일어나지 않았다.
"쯧. 예상대로구나."
정령력으로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것처럼.
아무리 같은 마법계라도 연성력으로 마법 사용은 불가했다.
굳이 궁수가 아니더라도.
숙달만 되면 화살에도 오러를 부여할 수 있는 전투계와는 분명 다른 부분이었다.
하지만 시문은 실망하지 않았다.
마법을 사용하지 못할 정도의 페널티를 준 만큼.
'연성에 큰 리턴이 붙을 테니까.'
괜히 연성력이라는 고유 스탯으로 분류되었겠는가?
시문은 낡은 책상의 서랍을 열었다.
28살의 자신이라면 이미 절망적인 현실을 인정하고 연금술을 접한 시점.
"역시 있네."
연성용 분필.
그것을 꺼낸 시문은 곧장 바닥에 엎드려 연성진을 그렸다.
아니.
그리려 했다.
멈칫.
몸이 저절로 멈추기 전까지는 말이다.
'뭐, 뭐지?'
몸을 숙이려는 자세 그대로 굳어 버린 시문.
어떤 초자연적인 요소 때문이 아니었다.
'몸이... 거부하고 있어?'
땅에 엎드리는 행위 자체를 육체가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더 정확히는.
'연성진을 그리는 걸 거부하고 있는 거야.'
왜지?
연성력이라는 고유 스탯에 연금술의 선구자라는 칭호까지 지니고 있지 않은가?
전생에서도 반평생을 연금술에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텐데.
대체 왜 연성진을 그리는 걸 거부한단 말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우웅.
가슴에서 희미한 이명이 울렸다.
수명이 다 된 전구처럼 희미하고 불규칙했지만.
시문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건 현자의 돌?'
이내 깨달았다.
순간적으로 연성에 거부감을 느낀 것은 현자의 돌 때문이라는 걸.
회귀 전의 현자의 돌을 떠올리면 더없이 희미한 이명이었으나.
현자의 돌은 분명하게 제 의사를 전달하고 있었다.
'미개하고, 야만적이라고?'
현자의 돌은 몸을 숙여 연성진을 그리는 이 행위 자체를 혐오하고 있었다.
대체 왜 이런 '비효율적인 방법'을 사용하냐는 듯.
그 귀족적이고 오만한 감정에 왠지 모르게 동화되어 버린 시문은 자연스레 몸을 일으켰고.
'그러고 보니 나, 현자의 돌을 얻고 나서 어떻게 연성을 했었지?'
그때.
검붉은 눈알을 눈앞에 두고 순식간에 연성했던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쳤다.
동시에.
스윽.
원래부터 지니고 있던 오랜 습관처럼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곤 저도 모르게 연성의 구상 단계로 빠져들었다.
'지금 내가 연성하고자 하는 것.'
지금 자신의 연성 능력을 확인할 수 있는 산물.
'모양은... 창. 그래, 종리추 그 자식이 썼던 것처럼 창의 형태가 좋겠어.'
심상으로 원하는 연성을 도안화하고.
'특수 능력이나 추가 옵션은 강하면 강할수록 더 좋고.'
그것을 보다 구체화한 다음.
'연성에 지불할 대가는 내가 지닌 연성력.'
따악.
등가교환의 법칙을 성립시키고 손가락을 튕기자.
키이이잉!
"끄아악!"
가슴 정중앙.
그 속에 자리한 현자의 돌을 중심으로 격렬한 통증이 전신으로 뻗어 나갔다.
이유는 간단했다.
[요구치에 맞는 연성을 이루기엔 연성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연성할 수 있는 수준에 비해.
지닌 연성력이 턱없이 부족한 것이다.
'마, 망할!'
아프다.
마력불능이 회복되고 보다 선명해진 감각 때문인지.
아파도 정말 혼이 나갈 정도로 아팠다.
이 와중에.
우웅.
가슴 속에 자리한 현자의 돌에선 희미한 이명이 울렸다.
그것에 담긴 감정은 불쾌감.
녀석은 '연성을 하지 못한다는 것'에 굉장한 불쾌감을 내비쳤다.
[현자의 돌(불안정)이 다른 방향을 모색합니다.]
[소유자가 보유 재화에서 해결책을 찾았습니다.]
[현자의 돌이 자신의 '불안정' 상태 회복을 위해 업적 포인트 1,000,000점을 요구합니다.]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떠오르는 메시지창에 시문의 눈이 부릅떠졌다.
'뭐?! 100만 점이나 달라고?'
무슨 상태를 회복하는 데 업적 포인트를 100만이나 소모한단 말인가?
하지만 막상 따져 보면 납득이 가기도 했다.
'엘릭서나 치료할 수 있다는 마력불능에, 11년 전으로 회귀까지 시켜 줬지.'
이건 애당초 업적 포인트로 살 수 있는 범주가 아니었다.
'좋아. 넌 이미 가치를 증명했으니 믿는다, 현자의 돌.'
스윽.
시문의 손이 망설임 없이 '예'를 향했다.
[업적 포인트 1,000,000점이 소모됩니다.]
[현자의 돌이 '불안정' 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납니다.]
메시지창과 함께 엄습하던 고통이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동시에 소화불량을 앓다 회복된 것처럼.
편안하고 시원한 감각이 전신으로 뻗어 나갔다.
비단 느낌 때문만은 아니리라.
'연금술의 운용이 한결 더 편해졌어. 그럼 이젠 되겠지?'
시문은 다시 한번 손을 들어 올렸다.
대신 최대치를 구상했던 아까와 달리.
'그냥 지금 내가 해낼 수 있는 수준으로만 하자.'
현재 자신의 연성력에 맞춰 연성을 재구상했다.
그러곤 연성력을 담아 손가락을 튕겼다.
따악.
[요구치에 맞는 연성을 이루기에는 연성력이 부족합니다.]
"또야?"
이번엔 통증이 동반되지 않았으나, 조금 짜증이 솟았다.
대체 뭐 그리 대단한 걸 요구했다고?
심지어 지금은 연성 조건을 축소하지 않았는가?
"좀 열받는데."
시문의 입술이 슬쩍 튀어나왔다.
마력불능이라는 절망적인 조건 속에서도 신화적인 산물을 연성한 자신이거늘.
고작 이능 좀 섞인 창 하나 연성하지 못한단 말인가?
"무려 100만 점이나 투자해서 불안정을 고치고, 연성 수준까지 낮췄어. 나도 이 이상은 못 물러나."
우웅.
그러한 오기가 마음에 든다는 듯.
그에 현자의 돌이 희미한 이명을 토했다.
이내 시문의 눈앞에 또다시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현자의 돌이 부족한 등가교환을 성립시키기 위해, 업적 포인트 500점을 요구합니다.]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하! 업적 포인트 100만 점으로 부족하다 이거야?"
물론 현자의 돌에 쓰인 100만 점은 불안정 상태를 회복하기 위해서였지.
지금 하는 연성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단지 1레벨이라도 유망주 취급을 받을 10짜리 스탯을 지녔는데.
이리 까이는 게 자존심이 상했을 뿐.
"좋아! 100만 점도 털었는데 그깟 500점이 뭐 어렵다고!"
어차피 100만 점을 쓰고도, 업적 포인트는 아직 12,500점이나 남아 있었다.
주저 없이 '예'를 선택한 시문은 곧장 손을 들어 올렸고.
"부디 투자한 가치가 있기를 빈다."
따악.
연성력을 담아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쿠르르르릉!
엄청난 뇌성과 함께.
한 줄기의 벼락이 창문을 뚫고.
"우, 우왓!"
파지직!
시문의 앞으로 내리꽂혔다.
제3화
3화. 튜토리얼 (1)
파츠측.
쉴 새 없이 튀어오르는 스파크.
바닥에 박힌 하얀 막대에서 흘러나온 스파크는 한순간에 자취방 내부를 어지럽혔다.
그러나 시문은 갑작스러운 이 막대의 등장에 놀라지 못했다.
정확히는 그럴 틈이 없었다는 말이 맞겠지.
왜냐고?
[성좌 헤르메스가 갑작스런 올림푸스의 번개의 등장에 관심을 보입니다.]
[성좌 아테네가 갑작스런 올림푸스의....]
[성좌 아레스가 갑작....]
상상도 못 한 문구들이 우수수 떠올랐으니까.
'서, 성좌라고?'
시문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성좌들이 갑자기 왜 나한테 관심을 보이는 거지?'
문제는 이게 끝이 아니라는 거다.
[올림푸스의 성좌들이 당신에게 남은 흔적에 경악합니다.]
[올림푸스의 성좌들이 급히 거리를 물립니다.]
[오직 세 명의 왕만이 덤덤히 자리를 지킵니다.]
[그중 올림푸스의 지배자, 성좌 제우스가 당신에게 큰 관심을 보입니다.]
연달아 등장한 메시지창은 시문으로선 경악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었다.
당연했다.
성좌란 본디 정규 아레나의 편입되고 나서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하는 이들.
그전엔 오로지 소수의 플레이어만이 성좌의 관심을 받을 뿐이었다.
거기에다.
'올림푸스의 성좌들이 내게 남은 흔적에 물러난다고?'
시문은 성좌들의 반응에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올림푸스 자체가 나름 급이 높은 성좌들로 구성되어 있거늘.
이내.
'설마! 그 칭호 때문인가?'
칭호 '저편의 시선을 받는 자'가 무슨 영향을 끼친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칭호는 성좌들을 경악케 하고 물러나게 했을 뿐.
정작 올림푸스의 시선을 끈 이유는 따로 있었다.
파츠측!
발치에서 강렬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는 막대.
연성과 함께 나타난 저 번개 막대가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이었다.
'대체 저게 뭐길래 이 난리야?'
유명 영화의 CG처럼.
푸르고 하얀 번개가 쉴 새 없이 튀어오른다.
그러나 시문은 겁먹지 않았다.
거센 스파크는 얼마 없는 가구를 박살 내고 있지만.
시문에게만큼은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았으니까.
시문은 곧장 다가가 번개 막대를 잡았다.
파직.
"읏."
막대를 집자 짜릿함이 팔을 타고 흘러든다.
하나 통증이 아닌, 굉장히 미묘한 짜릿함이었다.
'이래서 SM에 그런 플레이가... 아, 아니야! 이상한 생각 말자.'
고개를 세차게 저은 시문은 손에 들린 하얀 막대를 주시했다.
그리고 떠오르는 정보에.
[아스트라페]
등급 – 모조품 (10%)
올림푸스의 지배자 제우스의 창.
번개를 다룰 수 있지만, 어째서인지 제힘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한다.
"미, 미친! 아스트라페라고?!"
경악을 토했다.
당연했다.
성좌 제우스의 무기인 아스트라페.
이는 정규전이 시작되고, 고말숙처럼 후발 주자로 하이랭커에 진입했던 그리스의 유망주.
뇌제 알렉산더의 주력 무기 아닌가?
'물론 그리스가 멸망하고 미국으로 망명하긴 했지만....'
뇌제 알렉산더는 천마 고말숙과 마찬가지로.
소속을 잃고도 하이랭커의 위치를 유지하던 강자였다.
'특히 공격력 하나는 엄청났지.'
창을 다루는 전투계임에도.
제우스가 그에게 허락한 신화급의 무구인 아스트라페를 장착하면.
마법계 랭커의 뇌속성 마법과 맞먹는 공격력을 자랑했다.
그런 무구가.
"이걸 내가 연성했다고?"
지금 시문의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이다.
물론 진짜 아스트라페는 아니었다.
시문은 방송으로 보았던 뇌제 알렉산더의 아스트라페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단순히 장착한 것만으로도 주변의 모든 걸 지져 버렸지.'
랭커 수준이 아니라면 마주할 수조차 없는 뇌기.
진짜 아스트라페는 그런 뇌기를 단순히 존재하는 것만으로 쉴 틈 없이 뿜어냈었다.
파직.
시문은 그에 비해 초라한 스파크를 내뿜는 모조품을 바라봤다.
"결국 등급대로 모조품이라 이건가."
당장 제우스도 관심만 보일 뿐.
자신을 후원한다는 제안은 하지 않고 있지 않나?
'뭐, 이상할 것도 없지.'
아스트라페는 무려 성좌가 사용하는 신화급 무구.
아무리 현자의 돌로 연성했다 해도, 진품을 완벽히 만들어 낼 수는 없을 터였다.
"잠깐."
모조품을 만지작거리던 시문이 움직임을 뚝 멈췄다.
'난 분명 내 수준에 맞게 연성법을 축소시켰어.'
거기에다 현자의 돌과 부족한 연성력을 위해 업적 포인트 500점까지 소모한 상태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한 가지 가능성이 머릿속을 스쳤다.
'분명 시스템이 연성이 안 된다는 말은 하지 않았잖아?'
연성을 시도했을 때 시야에 떠올랐던 가장 첫 메시지창은 분명.
[요구치에 맞는 연성을 이루기엔 연성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였다.
연성이 '불가능한 대상'이라는 언급은 전혀 없었단 말이다.
거기에다 모조품 옆에는 10%라는 수치가 붙어 있지 않나?
'그럼 그 엄청났던 고통은 리바운드였구나.'
혼이 빠져나갈 정도로 악랄했던 고통.
불안정 상태였던 현자의 돌과 수준에 맞지 않는 연성을 시도했기에 나타난 반발 작용.
연금술에서 흔히 나타나는 리바운드가 분명했다.
그 말은 반대로.
연성 요구치를 제대로 맞춰 주기만 한다면.
'진짜 아스트라페를 연성할 수도 있겠어.'
생각해 보니 안 될 것도 없었다.
연금술의 기본은 등가교환.
1레벨의 마력불능을 지닌 자신이 엘릭서와 현자의 돌을 만들 수 있던 것도.
다 이 등가교환의 성립 때문이 아니던가?
"하, 하하...."
저도 모르게 다리의 힘이 풀렸다.
마력불능이 회복되고 11년 전으로 회귀한 것도 놀라운데.
이젠 등가교환만 성립시키면 신화급 무구까지 연성할 수 있다고?
"연금술, 이거 진짜 미친 능력이잖아!"
포션따리, 수리충, 마법계의 유일한 함정 등.
수많은 부정적 수식어를 아우르는 연금술이 이런 가능성을 지니고 있을 줄이야.
하지만 시문의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파측.
"어?"
아스트라페의 무게가 가벼워진 것이다.
시선을 내리자 입자로 서서히 분해되는 아스트라페가 보였다.
연성물이 이런 반응을 보일 때는 한 가지뿐이었다.
"그렇군. 연성물의 리바운드인가."
리바운드는 연성자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었다.
온전한 연성이나 등가교환이 이루어지지 않아.
연성물 자체도 리바운드가 일어나 소멸되거나 폭발할 수 있었다.
하급 포션을 만들 때도 벌어지는 흔한 일이었기에.
나름 경력 있는 연금술사라면 누구나 가볍게 넘어갈 수 있어야 했지만.
"잠깐! 그럼 내 업적 포인트는?"
업적 포인트를 500이나 박은 김시문에겐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생각보다 업적 포인트 500점은 그리 많은 것이 아니었으나.
고작 1레벨.
심지어 아직 아레나 랭크도 배정받지 못한 시문에겐 큰 포인트였다.
그러나 매정하게도.
츠스스.
아스트라페는 조금의 지체도 없이 빛무리가 되어 사라졌다.
"...아까 말은 취소다."
연금술.
이건 다른 의미로 미친 능력이다.
허탈감이 몰려오던 그때.
[현자의 돌이 리바운드를 최소화합니다.]
[현자의 돌의 등급과 레벨에 비례해, 소모되었던 업적 포인트 50점을 돌려받습니다.]
무슨 페이백도 아니고.
'연성물의 업적 포인트를 되돌려 준다고?'
곱게 넘길 수 없는 메시지창이 시문의 눈앞에 떠올랐다.
시문은 황급히 상태창을 열고, 보유 특성의 현자의 돌을 터치했다.
[현자의 돌]
귀속 여부 : 김시문
레벨 : 1
등급 : F
연금술의 신화적인 산물.
등가교환만 성립하면 무엇이든 연성이 가능하다.
-연금술과 관련된 모든 부분에서 절대적인 보정을 받는다.
전생에 현자의 돌을 연성했을 때.
초기 상태창엔 분명히 레벨이 없었고, 등급은 '?'로만 나와 있었는데.
뭐, 이유야 대충 짐작이 갔다.
"귀속의 유무와 회귀 때문인가...."
웅.
그 말에 반응하듯.
희미한 이명이 가슴 속에서 울렸다.
"현자의 돌, 두 가지만 물어보자."
시문은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게 귀속으로 일어난 변화라면, 네 성장은 나의 영향을 받는 거겠네?"
웅.
긍정의 의사가 울린다.
이 말은 즉.
이른바 성장형 아이템처럼 시문의 성장에 따라 현자의 돌 역시 강해진다는 말이 된다.
시문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단 말이지?"
즉시 태세전환.
마냥 연금술을 욕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았다.
* * *
따악.
손가락이 튕기는 소리.
그것과 함께.
화륵.
자취방 내부에 작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이 발화의 주인공.
김시문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연성진을 그리지 않고 연성하는 게 이렇게 효율적일 줄이야.'
왜 현자의 돌이 연성진을 그리는 걸 그토록 미개하게 여겼는지 이해가 간다.
'연성진으로 연성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라.'
시문은 마치 불을 처음 발견한 인류와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이건 연금술, 아니 마법계의 혁신이야.'
마법계들이 가지는 단점 중 하나가 바로 캐스팅이다.
배틀 메이지나 정령사와 같은 예외들이 있긴 했으나.
대다수의 마법계 플레이어들은 반드시 캐스팅을 거쳤다.
당장 연금술사만 해도 연성진과 연성을 위한 재료가 필수적이지 않는가?
한데.
'이렇게 손가락 한번 튕기는 거로 연성을 끝내 버리면 말이 다르지.'
시문은 어느새 말끔해진 방을 둘러봤다.
꼴에 아스트라페의 모조품이라고.
번개 막대에서 발산된 스파크들은 책상이나 의자, 벽지 등.
안 그래도 얼마 없는 가구들을 아주 제대로 박살 내 놓았다.
그리고.
"덕분에 새로운 연성법을 제대로 연습했지."
연금술은 수리충이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물건 복구에는 일가견이 있는 분야.
물론 이능이 없는 단순한 물건에 한해서였지만.
가구나 벽지 복구 정도야, 시문에게 아주 쉬운 일이었다.
말끔해진 자취방 내부를 보며 시문은 흐뭇하게 웃었다.
"이 정도 연금술이면 튜토리얼은 문제없겠어."
이렇게 연성법을 연습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었다.
"분명 오늘 오후 5시였지?"
날짜는 물론 시간까지 정확히 외우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2030년 1월 17일. 오후 5시.
진정한 아레나 플레이어로서 인정되는 튜토리얼의 첫 소환을 받는 날이었으니까.
'아이러니하네.'
하필 회귀한 당일이 튜토리얼의 소환이 이루어지는 날이라니.
"튜토리얼 종목은 아마... 점령전이었지?"
일정 지역을 점령하면 승리하는 점령전.
보통 튜토리얼은 일정 목표를 뚫어내는 오펜스나, 방어하는 디펜스.
그리고 일정 순위 안에 드는 서바이벌 등이 주를 이루었지만.
안타깝게도 김시문은 아레나 랭크로 골드 이상만 매칭되는 점령전으로 잡혔다.
이유는 간단했다.
'내 마력 스탯 10 때문이겠지.'
갤럭시 아레나는 게임에서 흔히 말하는 MMR(Matchmaking Rating).
그것을 이용해 최대한 비슷한 수준의 플레이어들끼리 매칭을 시켜 주었으니까.
당연히 전생의 시문의 경우.
마력 스탯 10을 보유했어도 마력불능 지닌 상태였기에, 칼같이 탈락했었다.
'점령지엔 발도 담그지 못하고 화살에 머리가 뚫렸지.'
마력을 쓰지 못하는 마력계는 사실상 일반인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뭐, 장비라도 좋았다면 또 모르겠지만.'
이 시절의 자신에겐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하지만 이젠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기대가 되었다.
'내겐 연금술이 있으니까.'
자신 있게 웃은 시문은 폰을 집어 들었다.
[2030년 1월 17일. 오후 4시 40분]
[김시혁 : 미확인 메시지 +99]
시간 아래 주르륵 떠오르는 알림창에 호선을 그리던 입가가 굳는다.
'그래. 따지고 보면 시혁이 넌 이때부터....'
지구에서 폰이 사라지는 그날까지.
이 잘난 동생 녀석은 하루도 빠짐없이 연락을 보내왔었다.
결국 다시 만나 마력불능의 치료제인 엘릭서까지 건네주는 사이가 되었지만, 이맘때 자신은 아니었지.
"이렇게 보니 좀 쪽팔리네. 명색이 형인데."
그 사건에 동생 놈은 아무런 잘못이 없었는데 말이다.
시문은 김시혁의 메시지를 열었다.
[김시혁 : 나 각성 아카데미에 들어갔음! ㅋㅋ]
[김시혁 : 다이아 랭크가 되고 특성이 하나가 더 생겼어. 이제 특성만 무려 3개다? 근데 이건 어떻게 쓰는 건지 모르겠어.]
[....]
[김시혁 : 형 해돋이 보러 갔음? 난 이제 졸업반이라 어디 다니기도 힘들어.]
[김시혁 : 오늘 반 배정됐는데, 유정이랑 같은 반이야. 개싫어하더라? 나도 싫은....]
"새끼, 많이도 보냈네."
여전히 밝고 유쾌하다.
타고난 능력 때문이 아니다.
김시혁이란 놈 자체가 이렇게 밝은 녀석이었다.
그렇기에 알지 못했다.
이 밝았던 녀석의 속이 얼마나 곪아 가고 있었는지.
하지만.
'이젠 아니지.'
녀석의 상태창을 본 자신은 안다.
갤럭시 아레나의 목표가 바로 이 밝고 순진한, 속된 말로 멍청한 동생 놈 때문이라는 걸.
'지금부터 바꾸면 돼.'
우선은 녀석과의 관계 개선이 먼저겠지.
시문은 폰에 손가락을 올렸다.
그러곤 한동안 얼어붙었다.
'근데 뭐라고 보내지? 할 말이 없는데.'
형제들끼리 메시지 나눌 일이 있겠냐는 걸 따지기 이전에.
지난 몇 년간 연락 두절이 이 당시의 상황이었다.
시문은 굉장한 고민에 빠졌다.
이내.
"쯧. 이게 뭐라고 고민까지 해야 하나? 귀찮게."
혀를 찬 시문은 지금의 이 마음을 그대로 담아.
[김시문 : ㅇㅇ. ㅊㅋ]
답장을 날리곤 김시혁의 메시지창을 닫았다.
그러자 그 밑으로.
김시혁과 똑같은 메시지 숫자가 보였다.
이름을 확인한 시문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었다.
[이유정 : 미확인 메시지 +99]
"그래. 이때라면 너도 살아 있을 때구나."
이유정.
그 이름을 보고 있을수록 폰을 쥔 손이 살짝 떨렸다.
"후...."
입술을 질끈 깨문 시문은 잠시 핸드폰을 덮었다.
"진정하자.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야."
그래.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니.
"내가 바꾸면 돼."
아니.
반드시 바꿔야 한다.
이유정의 운명만큼은 반드시 바꿔야 했다.
또다시 소속을 잃고 난민이 될 수는 없으니까.
그렇게 다짐한 순간.
[축하합니다. 아레나 튜토리얼에 선발되셨습니다.]
[잠시 후, 튜토리얼로 소환될 예정이니 준비하십시오.]
[소환까지 09:59초.]
[아레나 접속기기가 있다면, 장비를 장착 후 이용하셔야 합니다.]
시간이 된 것일까.
시문은 눈앞에 떠오르는 메시지창들을 노려봤다.
"이번에야말로...."
비참했던 마력불능자의 인생도.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모든 불운도.
'모조리 뜯어고쳐 주겠어.'
벌떡 일어난 시문은 허공에 대고 외쳤다.
"조기 입장을 신청한다."
[조기 입장을 신청하셨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승인 완료. 튜토리얼로 소환됩니다.]
새하얀 빛이 시문의 몸을 감싸더니.
번쩍!
한 번의 번뜩임과 함께 모습을 감췄다.
* * *
[튜토리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번 튜토리얼의 종목은 '점령전'이고, 참가 인원은 100명입니다.]
후덥지근한 습기가 전신을 적셔 온다.
몸은 움직여지지 않았지만, 고개 정도는 돌릴 수 있었기에.
시문은 찬찬히 주변을 훑었다.
"역시, 그때랑 똑같이 정글 맵이야."
열대 정글 특유의 습기와 열기, 그리고 앞을 가리는 울창한 숲까지.
'새삼 회귀했다는 사실이 실감되네.'
자신이 처음 접했던 튜토리얼과 똑같은 환경.
이를 다시 겪는 기분은 무척이나 묘했다.
[점령지에서 포인트를 얻거나, 다른 플레이어를 처치하세요.]
메시지창과 함께 조금 먼 곳에 네모난 윤곽선이 표시되었다.
점령지의 영역 표시였다.
[튜토리얼이 시작됩니다.]
"아레나 참여는 진짜 오랜만인데."
1레벨에 마력 불능이라고 실전을 아예 안 겪어 본 것은 아니었다.
정식 아레나의 리스크로 수많은 아웃브레이크가 일어났으니까.
1레벨이고 마력불능이고 간에.
싸우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세상이었다.
'일단 적당히 사리면서 순위권만 노려 보자.'
그래도 아레나 참여 자체는 전생에서도 튜토리얼과 초반 몇 판이 전부였기에.
김시문은 천천히 튜토리얼을 해 나가려 했다.
[당신을 주시하는 성좌 제우스의 시선이 더욱 짙어집니다.]
[성좌 제우스가 당신에게 미션을 겁니다.]
눈앞에 떠오르는 창만 아니라면 말이다.
[미션창이 활성화됩니다.]
[후원창이 활성화됩니다.]
'미션이라고?'
본래 튜토리얼을 통과해야 활성화되는 미션과 후원이 벌써 열리다니?
시문은 미션창을 열어 제우스가 건 미션을 확인했다.
[미션]
-성좌 제우스는 '그'의 시선을 받은 당신에게 짙은 호기심을 표합니다.
이번 튜토리얼 '점령전'에서 1등을 달성하십시오.
보상 : 업적 포인트 1,000
'누가 올림푸스의 지배자 아니랄까 봐.'
1등 아니면 취급도 안 한다 이건가?
그래도 불합리한 미션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꼴랑 튜토리얼인데. 업적 포인트를 1,000이나 주다니.'
전생의 기억으론 튜토리얼 완료 보상도 고작 업적 포인트 50에 불과하지 않은가?
'이건 무조건해야 돼.'
신화급 무구의 모조품 연성을 위해선 업적 포인트가 필수였다.
거기에다 후반에 업적 상점에서 열릴 스탯 구매까지 하려면 아주 등골이 휘겠지.
'1등, 반드시 한다!'
의욕을 불태우던 시문은 잠시 멈칫하더니, 하늘을 슬쩍 쳐다봤다.
"근데 제우스 님? 100포인트만 더 얹어 주시면 더 재미...."
쿠르릉!
"하하! 웃자고 해 본 소립니다. 쓰읍."
너털웃음을 지은 시문은 입맛을 다셨다.
명색의 올림푸스의 지배자라면서.
'생각보다 짠돌이네.'
제4화
4화. 튜토리얼 (2)
"컥!"
작은 단말마.
제대로 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갑옷의 남자가 힘없이 쓰러진다.
"히히. 역시 꽁킬은 달달~해."
160은 되었을까.
작은 체구의 남자, 김민형은 시시덕거리며 시체의 목에 박힌 화살을 뽑아냈다.
"괜히 대기업이 아니라니까. 이런 소모품마저 질이 다르다니."
분명 방금 플레이어의 목을 꿰뚫었음에도 화살촉이 시퍼렇게 살아 있다.
대충 보아도 최소 골드 랭크 이상의 생활계 플레이어가 제작한 수준이었다.
화살촉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들고 있는 단궁부터 허리에 차고 있는 쌍검, 전신을 감싸는 가죽 갑옷까지.
이제 막 튜토리얼에 초대된 1레벨에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장비였다.
"길드에선 살아서만 나오라고 했지만...."
김민형은 결코 그럴 마음이 없었다.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길드 중 하나인 성삼.
B급 특성 '재빠른 몸놀림'으로 성삼에 스카우트된 김민형은 성삼 길드의 생리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성삼 길드뿐만이 아니다.
대부분의 대길드들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바로 철저한 실력제.
잘나면 잘날수록 불합리하다 느껴질 정도의 지원이 들어온다.
대표적인 것이 유망주 시스템이다.
튜토리얼에서 10위권 안에 들게 되면 길드의 유망주로 지정되는데.
유망주가 되면 받는 지원이 가히 독보적이다.
물론 MMR이 높은 이 튜토리얼에서 생존하는 것만으로도 성삼의 지원은 받겠지만.
'그 정도론 만족 못 하지.'
김민형은 이를 까득 깨물었다.
'내가 어떻게 그 엿 같은 아카데미에서 퇴학당했는데? 고작 일반 길드원으로 남을 순 없지.'
자신을 스카우트한 성삼 길드는 실력만 받쳐 준다면.
어지간한 문제는 길드 차원에서 케어를 해 주었다.
실제로 얼마 전 성삼 길드원이 벌인 일반인 폭행 사건도 그대로 묻히지 않았나?
김민형은 결코 그 위세를 놓을 마음이 없었다.
'나 같은 인재를 버린 걸 후회하게 해 주겠어!'
눈에 불을 켠 김민형은 화살을 수습하곤 몸을 일으켰다.
'이쪽은 야생동물이 많으니 없을 테지. 저기쯤에 매복하고 있으면 되겠군.'
이름 있는 길드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튜토리얼 공략법.
일명 족보.
그것을 되새긴 김민형은 다음 지점으로 이동하려 했다.
사륵.
청바지에 회색 후드티를 입은 멍청이가 나타나기 전까지 말이다.
'히야~. 이 매칭대에 장비도 없는 참가자라니. 이게 웬 꿀이냐!'
김민형은 번들거리는 눈으로 곧장 활시위에 화살을 메겼다.
상대가 하다못해 낡은 검 한 자루라도 들고 있었더라면.
최소 A급 이상의 특성 보유자라 생각하고 경계라도 했겠으나.
'템도 없는 새끼가 특성 좀 좋아 봤자지.'
청바지에 후드티, 무기까지 없는 건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다.
더군다나 이렇게 기습으로 화살까지 날린다면?
"꽁킬 고맙다."
* * *
'분명 여기쯤이었던 거 같은데.'
시문은 감각에 한껏 날을 세우며 수풀을 헤치며 나아갔다.
얼마 가지 않아.
'찾았다.'
졸졸 흐르는 시냇물을 발견한 시문.
이어.
터엉.
시위가 풀리는 소리가 들렸고.
따악.
시문은 기다렸다는 듯, 연성력을 일으켜 손가락을 튕겼다.
촤아아악.
발밑에 있던 시냇물이 치솟는다.
그것은 순식간에 날카로운 절단면을 이루며, 시문의 앞을 가로질렀고.
파각.
날아든 무언가는 그대로 두 동강 나 바닥으로 떨어졌다.
'역시.'
그것이 화살임을 확인한 시문은 곧장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손가락을 튕겼다.
펑.
작은 폭발.
그러나 사람 하나 끌어내리기엔 충분했다.
"망할! 마법계였나!"
폭발이 일어난 거목에선 욕설과 함께 작은 체구의 남성이 떨어졌다.
제법 실력이 있는 전투계일까?
"이거나 먹어라!"
그는 물 흐르듯 낙법을 하며, 재차 화살을 메겨 시위를 당겼다.
하지만.
따악.
시문의 손가락이 또 한 번 튕기자.
펑.
"아악!"
작은 체구의 남자, 김민형은 바닥을 나뒹굴었다.
'움직임이 제법인데?'
시문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방금의 공간폭발은 머리를 노린 거였는데.
아직 손가락으로 펼치는 연성이 익숙지 않은 것도 있겠지만.
저 플레이어는 장비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실력도 제법인 듯싶었다.
"과연. 이만한 사람한테 죽었다니 뭔가 만족스럽네."
"뭐라고 지껄이는 거냐!"
스릉.
어느새 허리춤에 차고 있던 쌍검을 뽑아 달려오는 김민형.
시문은 그 매끄러운 움직임을 보곤 대번에 상대의 특성을 파악했다.
"B급 특성. 재빠른 몸놀림인가."
"뭣? 너, 그걸 어떻게...."
특성을 간파당한 김민형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럴 수밖에.
자신과 저자는 생전 처음 보는 사이 아니던가?
그리고 그 찰나의 빈틈에.
"그래도 당황하는 걸 보면 1렙은 1렙이네."
따악.
사형 선고와 같은 핑거 스냅이 들려오며.
"끄헉!"
어느새 바닥에서 솟아난 날카로운 흙가시가 김민형의 복부를 꿰뚫었다.
충격이 상당한 걸까.
파르르 몸을 떨던 김민형은 핏발이 선 눈으로 피를 토하며 말을 이었다.
"쿨럭! 너... 카데미...."
"음? 아! 각성자 아카데미 출신이냐고?"
그의 말을 알아들은 시문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런 곳에서 날 받아 줄 리 없잖아."
따악.
* * *
바위에 걸터앉아 쉬던 시문은 가라앉은 눈빛으로 널브러진 김민형의 시체를 바라봤다.
'정규 아레나였다면 저대로 죽었겠지.'
정규 아레나에서의 탈락은 곧 죽음.
지금처럼 현실로 아웃되는 개념이 아닌, 현실에서도 진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정규 아레나는 탈락자들의 죽음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클리어하지 못한 아레나가 해당 소속 국가의 아웃브레이크로 일어나지.'
던전이나 레이드라면 잡지 못한 몬스터가 그대로 지구에 풀려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정규 아레나 이후로 랭커들의 보유 숫자는 곧 국력이 되었다.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은 '그 사건' 이후.
앞서 사라진 약소국들처럼 아웃브레이크를 막지 못해 멸망했지만.
"후,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야. 일단 지금만 신경 쓰자."
옷을 털고 일어난 시문은 입자화되어 사라지는 김민형의 장비들을 훑었다.
대충 봐도 최소 C급을 넘기는 장비들.
'장비가 빵빵한 걸 보니. 어디 유명한 길드의 신입인가 보네.'
하긴.
튜토리얼이 점령전으로 잡히는 MMR대에 어중간한 이들이 어디 있겠나?
거기에다 유명 길드의 신입이라면 성능 좋은 접속기기를 사용하고 있을 테니.
방금의 전투로 인한 현실적인 쇼크는 거의 없을 터였다.
"그러고 보니 난 접속기기가 아예 없이 참가했구나."
현재의 갤럭시 아레나는 일종의 가상현실 게임이나 마찬가지다.
당연히 감각 동화율 조절과 같은 기능은 필수였으나, 시문은 다른 기능에 더 관심을 두었다.
바로 방송 기능.
'시혁이랑 말숙이가 그랬지. 방송으로 버는 업적 포인트가 은근 효자라고.'
둘 다 사람의 관심을 꺼리는 녀석들이었다.
그럼에도 방송 매체들이 사라지기 전까지.
녀석들이 꾸준히 방송을 이어 갔던 건, 순전히 업적 포인트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른 하이랭커들도 그렇게 방송을 오래한 거구나.'
한때 하이랭커들은 왜 하나같이 관심을 받고 싶어 안달일까?
했던 의문이 자연스레 풀렸다.
시문은 힘차게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읏차! 연성력도 다 회복됐으니 슬슬 움직여 볼까."
현자의 돌의 영향인지.
아니면 연성력이라는 고유 스탯 자체의 능력인지는 몰라도.
연성력이 회복되는 속도는 기이할 정도로 빨랐다.
'따로 명상을 거치지 않아도 연성력이 회복된다는 게 진짜 편하네.'
핑거 스냅으로 준비 과정 없이 연성하는 것도 그렇고.
지금의 자신은 마법계가 가지는 단점이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일단 돌아가는 상황 좀 보자.'
시문은 아레나 보드를 열었다.
1위 – 강호영 2킬. [점령 포인트 4%]
2위 – 이세윤 1킬. [점령 포인트 4%]
3위 – 김시문 1킬.
4위 – 박호철 1킬.
5위 – 김재원 0킬.
....
"어?"
아레나 보드를 본 시문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뭐야? 킬 수가 왜 이렇게 적어?"
튜토리얼이 시작하고 꽤 시간이 흘렀다.
자신이야 장비부터 특성, 실력까지 겸비한 김민형이란 플레이어를 만나 1킬이라지만.
3위인 자신의 위로 고작 1킬.
4위 아래론 0킬이 수두룩하다니?
이건 말이 되지 않았다.
"아. 그렇군."
이내 시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초반부니까 다들 존버 중인가?"
이해 못 할 것도 없었다.
튜토리얼임에도 골드 종목인 점령전이 잡히는 MMR이다.
보유 특성이나 스탯, 장비 등 1레벨치고 수준 높은 이들이 매칭되었을 터.
'가진 게 많을수록 잃는 게 무섭긴 하지.'
어지간해선 유수 세력들의 스카우트를 받았을 테니.
대부분이 어떻게든 생존해서 반만이라도 가자, 라는 마인드일 터.
시문은 2위 이세윤이라는 항목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킬 수 옆에 있는 점령 포인트였다.
'벌써 점령지에 들어간 사람도 있네. 점령 포인트가 4%면 들어선 지는 얼마 안 됐고.'
점령 포인트는 점령지에 발을 들인 시간만큼 오른다.
현재 1위와 2위의 점령 포인트가 똑같다는 건.
점령지에서 그만한 혈전이 벌어지고 있다는 의미일 터.
'종목이 종목이니, 1등을 하려면 킬보단 점령 포인트가 우선이긴 한데....'
그런 마음과 달리.
시문의 시선은 점령지로 표시된 파란색 윤곽선이 아닌, 반대쪽 정글을 향했다.
'일단 킬 좀 더 하자.'
아무리 점령 포인트를 많이 먹어도 죽으면 결국 0킬 존버들보다 못하다.
그렇기에 점령지는 전투가 끊이질 않고, 특히나 하이에나들이.
즉 어부지리를 노리는 이들이 많았기에.
점령지에 들어서기 전, 사람 수를 줄여 놓는 게 안전했다.
물론 이는 부가적인 이유였고.
'우선은 이 연성법에 더 익숙해져야겠어.'
주된 이유는 새로운 연성법 때문이었다.
물론 방금 김민형이란 실력자를 압도적으로 이기긴 했어도.
'연성력을 너무 비효율적으로 소모했어.'
정규 아레나가 시작된 전생에서.
무려 1레벨로 살아남던 시문에겐 썩 만족스러운 승리는 아니었다.
'말숙이 말대로 숙련도는 실전만이 답이겠지.'
숙련도 향상은 실전밖에 없다던 하이랭커 말숙이의 고견을 벗 삼아.
"일단 존버하는 인원부터 싹 쓸어 담자."
시문은 점령지 주변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허억! 허억!"
거친 숨소리가 쉼 없이 들려온다.
절그럭.
꽤 잘 제련된 판금 갑옷을 걸치고 있건만.
어지간한 야생동물 만큼이나 빠르게 달려 나가는 남자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미, 미쳤어! 정말 미쳤...."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떨리는 목소리로 연신 중얼거리던 남자는.
따악.
"헛!"
손가락이 튕기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옆으로 힘껏 몸을 던졌다.
이미 앞선 경험으로 저 소리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결과를 만들어 내는지 아는 탓이다.
하지만.
"이, 이쪽이었다고?!"
남자의 움직임을 훤히 예측했다는 듯.
콰직.
몸을 던진 곳에서 솟아나는 날카로운 흙가시에 남자는 그대로 목이 꿰뚫렸다.
즉사.
비명도 남기지 못한 남자의 몸이 축 늘어지자.
뒤편에선 캐주얼한 차림에 후드를 쓴 이가 걸어 나왔다.
"판금 갑옷인데도 엄청 빠르네. 이 사람도 속도 관련 특성의 소유자인가."
축 늘어진 판금 갑옷의 남성을 바라보던 시문은 이마의 땀을 슥 닦았다.
"먼저 안 덤벼들었으면 놓쳤겠어."
김민형을 처리하며 1킬을 달성한 이후.
시문은 점령전에 참여하지 않고 존버하는 플레이어들을 처리했다.
저 판금 갑옷의 남자는 그런 시문과 존버 플레이어들의 전투 소리를 듣고.
어부지리를 노리려고 온 하이에나였다.
물론.
일방적으로 학살하는 시문을 보곤 곧장 도주를 택했지만 말이다.
[반복적인 연성으로 연성력이 1 상승합니다.]
[현자의 돌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어?"
갑작스레 눈앞에 떠오르는 메시지창.
시문은 눈을 반짝이며, 상태창을 확인했다.
"정말 올랐잖아?"
10이던 연성력은 11로.
'레벨 : 1'이던 현자의 돌은 '레벨 : 2'로 바뀌어 있었다.
'스탯 상승이야 저렙 때 자주 나타난다지만, 현자의 돌 레벨이 오를 줄이야.'
시문은 흐뭇한 얼굴로 가슴 중앙을 매만지고는 고개를 들었다.
"좋아. 이쯤 처리했으면 뒤통수 맞을 일은 없겠지?"
시문이 존버 플레이어들을 털고 다닌 건 다름이 아니었다.
점령전에서 점령지는 가장 치열한 장소.
앞의 적들을 상대하기도 바쁜데 뒤치기까지 당하면 얼마나 위험하겠는가?
잠시 앉아 숨을 고른 시문은 멀지 않은 곳에 보이는 파란 윤곽선을 바라봤다.
"마침 점령지도 가깝네. 슬슬 들어갈까."
지금까지 총 10킬.
방금의 플레이어까지 합해 도합 11킬을 했으니, 어지간해선 이쪽의 뒤치기는 없을 터였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시문은 점령지로 걸어갔다.
하나 오래 걸을 수는 없었다.
왜냐고?
'이게 뭐야.'
주변에 시체가 즐비했으니까.
'점령지 내부도 아닌데 왜 이렇게 많이들 죽어 있어?'
마치 선이라도 그어 둔 것처럼.
일정한 라인으로 누워 있는 시체들을 보며, 시문은 자연스레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시문은 곧장 아레나 보드를 열었고.
1위 – 강호영 7킬. [점령 포인트 60%]
2위 – 이세윤 5킬. [점령 포인트 60%]
3위 – 박호철 5킬. [점령 포인트 59%]
4위 – 김재원 3킬. [점령 포인트 59%]
5위 – 김시문 11킬.
....
'이건....'
펼쳐지는 스코어에 눈을 부릅떴다.
11킬이나 한 자신이 고작 5위라서가 아니었다.
압도적인 킬을 달성하긴 했으나, 결국 튜토리얼의 종목은 점령전.
점령 포인트가 없다면 등수에 한계가 있었으니까.
문제는.
'1위부터 4위까지 상위권의 점령 포인트가 거의 똑같잖아?'
본디 점령지는 실력에 자신 있는 강자들과 그 틈을 노리는 하이에나들로 가장 치열한 곳이다.
차후 랭커가 확실시될 정도의 실력자가 아니고서야.
튜토리얼 시작부터 지금까지 발을 들일 수 있는 곳이 아니란 말이다.
그런 곳에서 점령 포인트가 60%가 다 되어 가도록 생존을 한다?
그것도 사이좋게 4명씩이나?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거기에다.
'1위부터 4위까지. 저 사람들 전부 튜토리얼 초반부터 순위권에 있던 사람들이야.'
그렇다는 건.
"티밍(Teaming)인가...."
개인전임에도 서로 암묵적으로 팀을 맺고 협력하는 행위.
이는 명백한 룰 위반이었지만.
정규 아레나가 아니라서 그런 것일까?
이 시기의 갤럭시 아레나는 티밍에 큰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하! 아무리 순위권이 되고 싶어도 그렇지. 튜토리얼에서 티밍이라니.'
아니.
오히려 튜토리얼이라서 그럴 수도 있겠다.
첫 단추가 중요한 만큼, 다들 길드의 유망주로 자리 잡고 싶을 테니까.
시문은 고개를 슬쩍 내밀어 점령지의 상황을 확인했다.
예상대로.
'아예 점령지 내부에 자리를 잡았군.'
방패를 든 탱커 하나에 궁수 하나.
그리고 검을 쓰는 전사 둘까지.
귀하다는 마법계만 없을 뿐, 저 4명의 파티 구성은 완벽했다.
'전방에 탱커와 후방에 궁수, 양쪽으로 전사들까지. 저러면 하이에나 짓 하기도 힘들겠어.'
하이에나라 해도 결국 개인.
혼자서 진형을 갖춘 4인의 티밍을 어찌하진 못할 터였다.
하지만.
"쯧."
인간사에는 늘 예외가 있었다.
"미션 보상이 반으로 줄어드는 거라 최대한 아끼려고 했는데...."
점령지를 바라보는 시문의 얼굴이 서늘하게 식었다.
"너희들이 이딴 식으로 나온다면."
그땐 나도 깡패가 되는 수밖에.
시문이 오른손을 꿈틀거리자.
파직!
작은 스파크가 튀었다.
제5화
5화. 튜토리얼 (3)
튜토리얼의 점령지.
점령전이 펼쳐지는 아레나에서 가장 치열하다는 이곳은 지금 더없이 평화로웠다.
그럴 수밖에.
"이제 오는 놈은 더 없는 거 같은데?"
껌을 질겅질겅 씹는 여성.
이세윤은 팔짱을 끼며 푸르스름한 눈으로 점령지 주변을 훑었다.
그에 옆에 방패를 들고 있는 중갑의 남성이 히죽거렸다.
"오러가 고갈돼서 눈깔 힘 빠진 건 아니고?"
"야, 김재원. 내 천리안은 오러가 아니라 마력으로 움직이거덩?"
"크핫! 그랬지 참. 아주 좋~겠다. 남아도는 오러로 쏙쏙 킬 먹어서."
김재원이 웃음을 터뜨리자, 이세윤은 눈을 샐쭉거리며 말했다.
"네 킬 수 후달리는 걸 왜 나한테 X랄이야?"
"짜증이 나는 걸 어쩌라고? 너희 다 5킬 이상이잖아!"
"웃겨. 그러게 누가 탱커하래?"
"이 X! 특성이 이렇게 나온 걸 어쩌라고!"
"나도 특성이 이런 걸 으쯔라고요?"
"저년이!"
이세윤의 빈정거림에 김재원이 눈에 불을 켠다.
하지만.
"그만."
검을 든 사내.
강호영의 제지에 두 사람 다 합죽이가 되었다.
"이제 점령 포인트도 60%가 넘었으니 김재원, 네 킬은 지금부터 챙겨 주마."
"정말이지? 나 형님만 믿수!"
강호영의 말에 김재원의 표정이 활짝 핀다.
그를 슬쩍 흘기던 이세윤은 팔짱을 낀 채, 강호영에게 다가갔다.
"오빠, 점령 포인트도 60%가 넘었는데 슬슬 점령지 밖으로 나가면 안 돼?"
"밖으로?"
"응. 참가자도 많이 줄었잖아. 점령지에만 처박혀 있는 거 갑갑하단 말이야."
몸을 비비 꼬며 지루함을 표하는 이세윤.
그에 강호영은 물끄러미 허공을 주시했다.
무시하는 듯한 그 행동에 짜증을 낼 법도 했건만.
이세윤은 잠자코 있을 뿐이었다.
그녀도 아는 것이다.
강호영의 행동은 자신의 말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빠, 그 김시문이라는 새끼가 신경 쓰여서 그래?"
아레나 보드를 보고 있다는 걸 말이다.
"걱정하지 마. 내가 어지간한 길드 신입들은 훤히 꿰뚫고 있는데, 김시문이라는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어."
"그래서 더 문제인 거다. 이름도 모르는 자가 11킬이나 했다는 게."
"하긴."
이세윤 역시 아레나 보드를 펼쳐 5위에 위치한 김시문의 정보를 살폈다.
하지만 그뿐.
"그래도 쫄 거 없다고 봐. 알잖아? 이번에 매칭된 새끼들 죄다 병X인 거."
이세윤은 주변에 널린 시체들을 보며 입가를 비죽거렸다.
"김시문인지 뭔지도 하이에나로 킬을 퍼먹은 거뿐이야. 지가 그리 잘났으면 진즉 점령지로 오지 않았겠어?"
"음."
강호영이 턱을 괴자, 이세윤은 조르듯 말을 이었다.
"정 신경 쓰이면 진형은 유지하면서 주변만 돌자. 응? 우리 훈련도 빡세게 했잖아."
실제로 저번 튜토리얼에서 4명 모두 탈락한 이후.
이를 갈며 훈련하지 않았던가?
그 모습에 소속 길드인 전갈 길드가 친히 장비까지 지원해 줄 정도로 말이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의 성적이다.
4인 도합 20킬에 점령 포인트 60%.
비록 티밍이 주된 원인이긴 했어도.
점령지 주변에 널린 20구의 시체들은 4인조의 실력을 충분히 증명했다.
"오빠. 자신감 가져. 티밍까지 한 마당에 듣지도 보지도 못한 새끼 하나에...."
타이르는 듯한 이세윤의 말이 멈춘다.
그녀의 눈동자에 푸르스름한 기운이 일렁거렸고.
"거기냐!"
쐐애액.
깔끔한 회전과 함께 메겨진 화살이 이세윤의 손을 떠난다.
그러나.
따악.
손가락이 튕기는 소리와 함께.
드드득.
순식간에 솟아난 흙벽이 화살을 가로막았다.
"마, 마법?"
"마법계야?!"
부랴부랴 방패를 들며 뛰어오는 김재원.
그의 뒤론 어느새 검을 뽑아 든 또 다른 팀원, 박호철이 붙어 있었다.
"나름 숨는다고 숨었는데. B급 특성 천리안인가?"
그 말에 연달아 시위를 당기려던 이세윤의 눈이 부릅뜨인다.
"그걸 어떻게!"
생전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특성을 꿰뚫어 본단 말인가.
스스스.
흙벽의 윗부분이 무너진다.
그 뒤론 회색 후드를 쓴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아아, 사연이 있어서 특성 공부를 좀 많이 했거든."
"그러셔? 어디 대가리 안 뚫리는 공부도 했는지 볼까?!"
멈칫했던 이세윤의 시위가 다시 팽팽히 당긴다.
그녀가 시위를 놓으려던 그때.
"잠깐."
리더인 강호영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는 검을 쥔 채, 탱커인 김재원의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쪽이 김시문인가?"
"그러는 그쪽은?"
"강호영."
"아. 1등인 걸 보아하니 그쪽이 리더인가 보지?"
"그렇다."
고개를 끄덕인 강호영은 검을 쥐지 않은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긴말하지 않겠다. 김시문. 우리 쪽으로 합류해라."
"오빠?"
"혀, 형님! 미쳤수? 저 새끼가 뒤통수칠지 어떻게 알고?"
뒤편에서 팀원들의 격렬한 반대가 쏟아졌지만.
강호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김시문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니.
"특별한 장비도 없이 11킬. 필시 S급 이상의 특성을 지닌 마법계겠지."
값진 상품을 보는 것처럼 시문의 전신을 찬찬히 훑었다.
"너의 순위권은 보장해 주겠다. 원한다면 1등이 되도록 킬도 몰아주지."
"잠깐, 호영 오빠.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야?"
어느새 다가온 이세윤이 강호영의 어깨를 강하게 잡아당겼다.
강호영은 그대로 시선을 돌려 이세윤을 바라봤다.
"세윤아."
"오빠. 저 새끼 마법계야. 자칫 뒤통수라도 치면 우리 전부 골로 간다고!"
"저 정도 마법계와 티밍을 맺는 건 위험보다 이득이 더 많다."
"뭐?"
"생각해 봐라."
강호영은 옆에 있는 김재원과 박호철에게도 들으라는 듯 눈짓했다.
"마법계는 보조계보다 더 귀하다. 우리 전갈 길드도 다르지 않아."
연금술사 같은 최하위 직종이 아니고서야.
아니, 연금술사여도 손해는 아니다.
포션만 찍어 내게 해도 무조건 이득이니까.
더군다나.
"무려 11킬이다. 아무리 하이에나 짓을 잘해도 저 킬 수는 말이 안 돼."
"오빠, 하지만...."
"길게 봐라, 이세윤. 이런 마법계와 연이 있으면, 길드 내에서의 우리 입지도 올라가."
"그러니까 적당히 챙겨 주고 생색 좀 내자?"
"어차피 합류한 시점부터 놈은 우리 사거리 안이다. 딴마음을 품는다면...."
강호영이 조용히 속삭이자, 이세윤은 만족스러운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생각까지 있다면야. 좋아! 난 찬성."
"뭐... 우리도 좋수. 형님 말 들어서 손해 본 적 없으니."
김재원과 박호철마저 고개를 끄덕이자.
강호영은 즉시 몸을 돌려 김시문을 바라봤다.
"들었겠지? 아까 말했던 대로 순위권과 킬은 확실히...."
"참 나, 이거 웃긴 녀석들이네."
헛웃음을 흘린 시문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강호영이라 했던가? 내가 왜 당신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해?"
"뭐?"
"그렇잖아. 그쪽 말투부터 내가 당연히 합류할 거라는 걸 가정하고 있잖아?"
그 말에 강호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여간에 마법계란. 그게 마음에 안 들었나? 좋다. 그 부분은 사과하...."
"마법계들의 오만은 나도 잘 아는데, 난 그런 쪽은 아니야."
"그럼 뭐가 문젠가?"
"티밍."
짧은 시문의 답에 강호영의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티밍? 그게 뭐가 어떻다는 거지?"
"몰라서 묻냐? 티밍은 엄연한 룰 위반이야. 튜토리얼에서 방송이 가능했으면 당신 지금 욕 오지게 먹었다고."
"상관없다. 어차피 제재도 없는데 세간의 눈치 따위를 왜 봐야 하지?"
"히야! 정말 볼수록 대단한 마인드네."
시문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이봐 강호영 씨. 장비를 보아하니 꽤 이름도 있는 길드 같은데. 뒷감당은 어쩌려고? 자신 있어?"
"우리 전갈 길드는 실속만 따진다. 결과만 좋다면 뭐든 상관하지 않아."
"전갈? 당신들 전갈 길드였어?"
시문은 이들의 티밍이 순식간에 납득이 되었다.
실속, 실리주의라는 이름 아래 제 잇속만 챙기는 머저리들.
그렇게 성장세를 불리던 전갈 길드는 정규 아레나가 시작된 이후에도 멈추지 않았고.
정규 아레나까지 지속되었지.
그 결과는?
트롤(trawl) 길드로 낙인찍혀, 거대 길드들에 의해 완전히 와해되었다.
'뭐, 좋게 말해서 와해지.'
완전히 숙청이나 다름없었지만 말이다.
그런 미래를 아는지 모르는지.
강호영은 자신만만하게 어깨를 폈다.
"전갈 길드를 잘 아나 보군. 그럼 선택권이 없다는 것도 알겠지."
"글쎄. 잘 모르겠는데?"
"하. 버러지들 좀 잡았다고 기가 하늘을 찌르는군."
강호영이 손을 들자.
끼익.
스릉.
뒤에 있던 파티원 3명이 즉각적으로 무기를 들었다.
"이쪽은 합을 맞춰 온 4인이다. 네가 잡아 온 병X들과는 질적으로 달라."
와우! 같은 튜토리얼 참가자들에게 병X들이라? 자신감 한번 엄청나네.
라고 비꼬기엔.
'확실히 실력이 없진 않겠네.'
주변에 널브러진 20구의 시체들이 강호영의 자신감을 증명했다.
"곱게 합류해라, 김시문. 이대로 탈락하면 너만 손해야. 11킬이 아깝지 않나?"
묵묵했던 강호영의 입가가 슬며시 올라갔다.
그럴 수밖에.
'거절할 수 없을 거다.'
11킬이나 할 정도면 분명 실력은 있다.
거기에다 귀하신 마법계이니, 이대로 탈락하는 건 절대 용납하지 못하겠지.
마법계 특유의 자존심을 고려해 보면.
이러한 협박은 그다지 좋은 방법은 아니었지만.
'아무리 마법계라도 너무 건방지다. 기를 좀 꺾어 둬야 해.'
마법계 특유의 시건방짐을 받아 줄 만큼 숙일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칼자루를 쥐고 있는 건 이쪽이니까.
라고.
"전갈 길드답네. 더는 대화할 가치도 없겠어."
강호영은 생각했다.
"이보세요. 강호영 씨. 남 걱정 말고."
따악.
시문이 손가락을 튕기기 전까진 말이다.
"네 걱정이나 하세요."
쿠르릉.
하늘이 울린다.
정글 맵에 응당 어울리는 천둥소리였지만.
짜자작!
시문의 옆에 내리꽂힌 번개는 그렇지 않았다.
"저, 저게 뭐야?!"
"막...대기?"
갑작스러운 낙뢰에 김재원과 박호철의 눈이 끔뻑인다.
낙뢰가 처박힌 곳에선 하얗고 푸른빛으로 이루어진 막대가 쉴 새 없이 스파크를 튀겼다.
그리고 그것은 중력을 거스르며 서서히.
"어차피 1등은 내 건데. 내가 뭐 하러 더럽게 티밍 같은 짓을 하냐?"
시문의 손아귀로 빨려들었다.
그에.
스릉.
"협상 결렬이군."
순식간에 눈빛이 바뀌며 쇄도하는 강호영.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외쳤다.
"이세윤!"
"안다고!"
앙칼진 외침과 함께 텅!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세윤의 활에서 화살이 떠나는 소리였다.
하나 시문은 묵묵히 손에 쥔 하얀 막대를 앞으로 내밀 뿐이었다.
그러곤.
"울어라."
전생에 알렉산더의 방송에서 들었던 말을 그대로 읊조렸다.
"아스트라페."
콰자자작!
앙상하게 마른 나뭇가지처럼.
새하얀 번개 다발이 허공을 짓이기며 뻗어 나간다.
흔히들 알고 있는 번개가 그렇듯.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강호영 파티의 진형으로 들이닥치는 벼락 줄기들.
"크, 크아악!"
그것은 가장 선두에 서 있던 탱커 김재원의 갑옷을 갈기갈기 찢어발겼고.
"컥!"
"꺄아아악!"
이어 곁에 있던 박호철과 뒤편에 있던 이세윤마저 집어삼켰다.
단 1초.
그 짧은 찰나에 튜토리얼 최상위권을 구가하던 플레이어들이 쓸려나간 것이다.
시문은 조금 커진 눈으로 손에 잡힌 아스트라페를 바라봤다.
'이게 고작 10%의 위력이란 말이지.'
비록 모조품 10%의 성능이었으나.
고작 그 10%만으로도 튜토리얼의 제왕으로 군림하기엔 충분했다.
하지만 시문은 이 강대한 위력에 취해 긴장의 끈을 놓진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노옴!!"
아직 1명이 남아 있었으니까.
"용케도 피했네."
시문의 아스트라페가 곧장 오른편에서 파고드는 강호영을 향한다.
그러나.
스륵.
강호영의 외침과 함께 그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정확히는 그림자 속으로 빨려들었다는 표현이 맞겠지.
그것을 본 시문의 눈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A급 특성 그림자 이동이군. 저걸로 아스트라페의 벼락을 피한 건가.'
그림자에서 그림자로 이동이 가능한 A급 특성.
'과연, A급 특성이면 리더를 맡을 만하네.'
하나 그 사기적인 이동 능력을 지니고도.
그림자 이동이 A급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죽어라!"
시문의 뒤편에서 강호영의 살기 어린 외침이 들려온다.
그러나 시문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아스트라페를 쥐지 않은 왼손을 튕겼다.
따악.
"컥!"
순식간에 솟아나는 흙가시.
시문의 그림자에서 튀어나오던 강호영은 솟아나는 흙가시에 고스란히 복부를 내줄 수밖에 없었다.
"이, 이럴 수가...."
복부를 꿰뚫어 버린 흙가시 때문에 꼼짝도 못 하게 된 강호영.
그는 떨리는 눈동자로 김시문을 바라보며 힘겹게 물었다.
"그만한 뇌속성 마법을... 쓰고도 어떻게 마력이...."
"아. 이거?"
시문은 어느새 리바운드가 진행되고 있는 아스트라페를 흔들거렸다.
"이건 좀 다른 게 들어가거든."
"그게 무슨...."
"그런 게 있어. 이런, 벌써 이렇게 됐네."
시문은 얼른 반쯤 분해된 아스트라페를 강호영을 향해 내밀었다.
"그럼 강호영 씨? 아까우니까 얼른 가자?"
* * *
톡. 톡.
"얼마 안 남았네."
아레나 보드에서 제한 시간을 보던 시문은 볼을 두드리던 손가락을 멈췄다.
이내.
[점령 포인트를 100% 달성하셨습니다.]
[점령지의 주인이 정해졌습니다. 튜토리얼을 종료합니다.]
이 모든 것이 꿈이었던 것처럼.
일련의 문구가 떠오르며, 몸을 괴롭히던 숲의 습기와 열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주변에 쓰러진 시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끝났구나."
열어 두었던 아레나 보드가 자동으로 닫히고.
하늘에 더 큰 형태로 아레나 보드가 나타났다.
1위 – 김시문 15킬. [점령 포인트 100%]
2위 – 정서연 2킬.
....
4명이서 20킬이나 하던 강호영 일행을 싹 쓸어버리고.
김시문 혼자서 15킬을 달성한 것이다.
아레나 보드를 보던 시문은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되게 지루했네. 설마 점령지로 단 1명도 안 올 줄이야."
따져 보면 이상할 것은 없었다.
애당초 강호영 일행의 점령 포인트가 60%가 넘어간 시점부터.
티밍을 눈치채고 점령을 포기한 이들이 대부분인 데다.
시문이 홀로 그들을 처리하고 15킬을 달성하자, 더욱 점령지를 기피하게 된 것이다.
괜히 가서 순위권의 티밍러를 쓸어버린 괴물에게 죽는 것보다.
버티고 버텨서 생존 등수라도 먹는 게 이득이었으니까.
시문도 큰 아쉬움을 토로하진 않았다.
왜냐하면.
[튜토리얼에서 1위를 달성했습니다.]
[칭호 '튜토리얼의 지배자'를 획득합니다.]
[업적 포인트 100점을 획득합니다.]
[성좌 제우스의 미션을 완수하였습니다.]
[업적 포인트 1,000점을 획득합니다.]
제우스의 미션은 물론.
생각지도 못한 칭호까지 줄줄이 보상으로 올라왔기 때문이다.
'쓰읍. 아스트라페만 안 썼어도 업적 포인트 1,000점을 다 먹는 건데.'
그래도 우리의 효자 현자의 돌이 50점을 페이백해주긴 했지만.
'아쉽긴 하네.'
현 시점에서 업적 포인트 450점은 작은 숫자는 아니었기에.
시문은 메시지창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그때.
[성좌 제우스가 당신의 활약에 굉장한 만족감을 보입니다.]
[추가로 업적 포인트 100점을 획득합니다.]
"오오!"
떠오르는 일련의 메시지창에 시문의 눈이 반짝였다.
설마 제우스가 업적 포인트를 더 쓸 줄이야.
'이러면 업적 포인트만 총 750점을 얻은 건가.'
그뿐만 아니라 현실 세계로 돌아가면 아레나 클리어 보상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잠시 후, 본래의 장소로 귀환합니다.]
시문은 귀환을 알리는 메시지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제6화
6화. 또 다른 연성 (1)
후우.
메마른 입술에서 뿌연 연기가 뿜어진다.
담배를 재떨이에 비빈 중년의 남성은 나지막이 읊조렸다.
"4명이서 티밍을 맺고도 졌다라...."
그저 오랜 흡연으로 목소리가 좀 걸걸해진.
흔한 중년 남성의 목소리에 불과했건만.
그의 앞에 서 있는 4명은 고양이 앞의 쥐처럼 꼼짝도 하지 못했다.
"이봐, 강호영이."
"예, 부길마님."
"넌 이게 말이 되는 소리라 생각하나?"
부길마라 불린 중년의 남성은 자신의 앞에 놓인 서류를 설렁설렁 흔들었다.
"하이에나를 당한 것도 아니고, 같은 티밍러를 만난 것도 아니고. 장비 하나 없는 놈에게 전면전으로 졌다?"
그것도 4 대 1로.
혼자 있는 마법계 하나에?
그렇게 묻는 부길마의 얼굴에는 불신이 가득했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하!"
서류를 책상 위로 턱 던진 부길마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알겠지만 난 실력적으로 패배한 것은 탓하지 않는다. 그건 아무리 돈을 처발라도 해결이 힘드니까."
"...."
"하지만 말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부길마는 강호영의 앞에 섰다.
옆에 서 있던 팀원들은 슬쩍 몸을 떨며 고개를 숙였다.
이어.
짜악.
살과 살이 맞붙는 소리와 함께 강호영의 얼굴이 돌아갔다.
"티밍까지 해 놓고 탈락하는 건! 도저히 질책하지 않을 수가 없어!"
부길마는 서슬 퍼런 눈으로 강호영을 노려봤다.
"티밍은 기본적으로 평판을 버리고 행하는 짓이다. 이게 뭘 의미하는지 아나!"
"결국 입소문을 타고 알려질 수밖에 없는 행위이기에... 지속될수록 여러 방면에서 손해를 보게 됩니다."
던전이나 레이드와 같은 협력이 필요한 종목이 대표적이었다.
특히나 트롤 행위에 직접적으로 피해를 받았던 플레이어와 협력 종목으로 매칭이 되면?
그야말로 업보 청산의 시간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전갈 길드는 그걸 용인한다. 왤까?"
"그로 인해 얻는 불이익보다, 성공했을 때 얻는 이익이 훨씬 더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부길마는 말에 맞춰 강호영의 이마를 툭툭 밀었다.
"바로, 그, 이점, 때문에, 허용하는 거다. 한데 너흰 어떤가?"
부길마의 시선이 강호영을 비롯한 3명을 훑었다.
"아레나도 탈락해! 튜토리얼도 통과 못 해! 하... 그런데 망할 페널티는 죄다 받게 생겼지."
부길마의 으르렁거림에 누구도 답하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강호영 일행이 매칭된 튜토리얼은 1레벨 중 최상위권 MMR이다.
당연히 국내의 내로라하는 길드의 신입들이 참가했을 것이고.
자연스레 아레나 보드에 등록된 이름들을 조사하게 되겠지.
결국 티밍 4인방이 전갈 길드의 신입이라는 건, 하루도 지나지 않아 밝혀질 일이었다.
"길드의 계약서에는 아레나 내에서 행한 어떤 플레이든, 길드 차원에서 보호해 준다는 항목이 있지."
"...결과를 냈을 경우에 한해서 말이지요."
"정확히 기억하고 있군. 이렇게 똑똑한 놈이 왜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는지 모르겠어."
부길마는 자리에서 서류를 꺼내 내밀었다.
그것을 본 강호영의 눈동자가 철렁였다.
"이, 이건...."
"청구서다. 길드의 전폭적인 지원에도 튜토리얼을 통과하기는커녕, 민폐만 끼치는 놈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
부길마는 다른 세 사람에게도 청구서를 던졌다.
"앞으로 10년간 너희가 획득하는 모든 보상을 전갈 길드로 양도한다는 내용이다. 서명해라."
"저...."
청구서를 읽던 탱커, 김재원이 조심히 손을 들었다.
"만약... 그... 서명하지 않으면 어떻게...."
대답할 가치도 없는 것일까.
부길마의 오른팔이 흐릿해졌다.
동시에.
"커, 커헉!"
숨을 헐떡이며 허공으로 떠오르는 김재원.
눈 깜짝할 사이에 부길마가 그의 목을 쥐어 올린 것이다.
랭커인 부길마에게 1레벨의 목을 쥐어 올리는 것은 더없이 쉬운 일이었다.
"멍청하면 몸이 고생하는 법이지. 정말 알고 싶나?"
그 모습을 본 강호영과 일행은 묵묵히 서명했다.
* * *
"으음. 믿기지가 않는군요."
안경을 쓴 남자의 말에 작은 체구의 남자는 더욱 고개를 숙였다.
곁에 있던 두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안경을 쓴 남자는 서둘러 손을 저었다.
"아, 여러분을 탓하는 게 아닙니다. 그냥 너무... 믿기 힘든 이야기라서요."
그 말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작은 체구의 남자.
김민형이 입을 열었다.
"저도 그렇습니다. 캐스팅도 없이 그렇게 마법을 난사한 것도 놀라운데, 설마 15킬이나 했을 줄은...."
"그것도 혼자 한 거예요. 순위권에 있던 티밍러 4명을 싹 쓸어버렸거든요."
"맞아요! 제가 아레나 보드를 켜 두고 있어서 실시간으로 확인했습니다!"
튜토리얼 참가자들의 말에 안경을 쓴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자세한 건 보고서로 해결할 테니, 여러분들은 이만 가 보셔도 됩니다."
"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압니다. 걱정 마세요. 저희 성삼 길드는 튜토리얼에서 탈락했다고 불이익을 주진 않으니까요."
안경 쓴 남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다음에 또 잘 하시면 되잖아요?"
"아! 옙!"
김민형을 비롯한 두 사람의 얼굴이 환해진다.
참가자들은 꾸벅 인사를 하고는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히자.
안경을 쓴 남자는 보고서를 훑었다.
"4인의 티밍을 혼자 깼다라...."
그는 뒤편에 조용히 서 있는 여직원을 바라봤다.
"연희야, 알아냈어?"
"박 과장님, 여기 직장입니다."
"그렇다고 우 대리라고 부르면 삐질 거잖아."
그 말에 뒤편에 서 있던 여성.
우연희의 이마에 작은 핏줄이 섰다.
"안 삐집니다."
탁.
테이블 위로 강하게 서류를 내려놓는 우연희.
그에.
"칫, 삐질 거면서...."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 아니야, 우 대리."
작게 속삭이던 박민철은 서둘러 그녀가 내려놓은 서류를 체크했다.
"역시, 티밍은 전갈 길드네?"
"예. 그것도 B급 특성이 3명, A급 특성이 1명이더군요."
"캬! 초호화 파티네. 영화로 따지면 아주 할리우드급이야."
박민철 과장은 감탄을 숨기지 않았다.
당장 성삼의 이번 기수의 최대 기대주는 B급 특성을 지닌 김민형 하나였는데.
그런 김민형과 맞먹는 특성 3명에 A급 특성도 1명이나 있다니.
물론 무조건 특성의 등급이 높다고 좋은 것은 아니었기에.
실전에선 어느 정도 등급과 다른 부분이 있겠지.
하나 4명이서 도합 20킬을 해낼 정도라면, 전투적인 실력도 제법 있는 이들일 터였다.
'대체 어떻게 비매너로 유명한 전갈 길드가 그런 인재들을 끌어모았을까?'
하는 의문을 떠올리기 이전에.
더 큰 의문이 떠올랐다.
"대체 어떻게 그 정도 수준의 티밍러들을 혼자서 쓸어버린 걸까?"
"마법계지 않습니까. 특유의 화력으로 쓸어버렸겠죠."
"1레벨이 그렇게 큰 화력을? 설령 가능하더라도 그만한 캐스팅 시간이 필요했을 거야."
"보고로는 손가락을 튕기는 것만으로 마법을 발현했다고 했으니, 아마 특성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최소 S급 이상으로."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 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달라, 우 대리."
우연희도 플래티넘 랭크에 속하는 실력자였지만.
다이아 랭크의 플레이어인 박민철은 알 수 있었다.
"아무리 특성이 좋아도 1레벨론 한계가 있어. 다른 뭔가가 더 있는 거야."
"...이를테면 성좌 같은 것 말입니까?"
"그래, 성좌. 그런 급의 변수라면 말이 되지."
소수만 받을 수 있다는 그들의 선택을 받았다면, 이 말도 안 되는 결과도 납득이 된다.
성좌의 선택을 받은 이들은 하나같이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었으니까.
하지만 이조차 결국 추측에 불과했다.
"과장님, 그는 이제 튜토리얼을 치른 1레벨입니다. 성좌의 후원이 있을 수 없어요."
2015년 갤럭시 아레나의 등장 이후.
성좌들은 다이아 랭크 이상에서만 나타날 뿐, 결코 그 아래 랭크에선 나타난 적이 없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박민철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럼 이레귤러겠지. 아니면 성좌가 아닌 다른 게 있거나. 뭐! 어찌 됐건."
박민철의 시선이 튜토리얼 보고서를 향했다.
"반드시 영입해야 하는 인물이라는 건 확실하네."
"다른 길드들도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우 대리가 더 고생 좀 해 줘야지."
그렇게 답한 박민철은 안경을 치켜올리며 벽면을 바라봤다.
"안 그렇습니까? 길마님?"
그러자 벽면이 일렁거리더니.
"여기가 사내라 해도 둘뿐인데. 편하게 아가씨로 부르세요."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성이 나타났다.
박민철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면 괴롭히실 거잖습니까."
"어머나. 누가 들으면 권위 내세워서 직원 괴롭히는 철부지인 줄 알겠어요."
"그럼 아니십니까?"
"과, 과장님!"
깜짝 놀라는 우연희.
그러나 박민철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갑자기 나타난 여성을 응시했다.
"우리 박 과장님이 뭔갈 착각하고 계시네요."
여성은 청순한 외모에 걸맞은 미소를 걸쳤다.
"전 제 권위를 내세운 적은 한 번도 없어요. 그냥...."
그녀는 뒤편의 우연희를 힐끗하고는 말을 이었다.
"우리 그룹 규정상 사내 연애는 금지라는 걸 박 과장님께 한 번씩 짚어 드렸을 뿐이죠."
박민철은 곧장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하아... 그 말이 그 말이지 않습니까?"
"히힛! 엄연히 다르거든요?"
까르륵 웃은 그녀가 물었다.
"근데 언제부터 아셨어요? 이거 A급 은신 아티팩트인데."
"처음엔 몰랐습니다. 김시문 플레이어를 이야기할 때, 갑작스레 기척이 느껴지더군요."
여성의 몸이 순간적으로 움찔했다면 착각이었을까.
다이아 랭크인 만큼.
평소의 박민철이라면 그런 변화를 눈치챘겠지만.
안타깝게도 사내 연애를 담보 잡힌 그에게 그 정도의 여유는 없었다.
박민철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서 이런 악취미적인 잠입을 행하신 이유가 뭡니까?"
"악취미라니요. 박 과장님 보고 싶어서 온 건데. 그렇게 말하면 저 상처받아요?"
"그것도 악취미입니다. 전 임자가 있는 몸이라고요."
"과, 과장님!"
그 말에 우연희가 박민철의 어깨를 툭 쳤다.
물론 그녀의 볼은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박민철은 헛기침을 하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커흠! 어쨌든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이제 졸업반이시지 않습니까?"
"심심해서요. 어차피 아카데미는 저한테 별 의미도 없고."
"그렇긴 합니다만...."
"세상이 이렇게 변했는데도. 대학은 꼭~ 나와야 한다는 어떤 꼰대 때문에 저만 고생이라니까요?"
"유, 유정 아가씨!"
혹여나 누군가가 들을까.
박민철이 안절부절못하며 손사래를 쳤다.
"괜찮아요. 내가 자기 뒷담화하는 거, 할아버지도 다 아는데 뭐."
"하아... 정 심심하시면 이러지 말고 아레나라도 뛰시죠."
"한판 뛰고 온 거예요. 제 방송 안 보셨어요?"
"아, 죄송합니다. 예상외의 보고가 있어서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할 거까지야."
어깨를 으쓱한 여성.
이유정은 긴 머리칼을 비비 꼬며 책상 위에 놓인 보고서를 바라봤다.
그러곤.
"이거예요? 우리 박 과장님을 놀라게 한 보고가?"
순식간에 낚아채는 이유정.
"유, 유정 아가씨!"
미처 대응하지 못한 박민철은 서둘러 보고서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그건 길드 기밀이란 말입니다!"
"뭐 어때요. 어차피 길드 주인은 전데."
솜씨도 좋게 박민철의 손을 요리조리 회피하는 이유정.
둘 다 최상위권의 플레이어이기 때문일까.
사사삭!
둘의 움직임은 영화 속 한 장면을 방불케 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어...?"
이유정의 시선은 보고서에서 떠나질 않았다.
특히나 '김시문'이라는 이름을 몇 번이고 다시 확인했다.
* * *
현실로 돌아온 시문이 가장 먼저 맞이한 것은 일련의 메시지창이었다.
[튜토리얼 1등 보상으로 추가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귀속된 특성 '현자의 돌'이 일정량의 경험치를 분배받습니다.]
[레벨이 2 상승했습니다.]
[현자의 돌 레벨이 1 상승했습니다.]
시문은 차분한 눈으로 메시지창을 훑었다.
"대충 보니 현자의 돌이 없었다면 3레벨 정도 올랐겠네."
꽤 큰 차이긴 했으나, 시문은 조금의 아쉬움도 들지 않았다.
왜냐고?
'내 레벨은 낮고, 현자의 돌 레벨이 높을수록 아레나에서 유리하니까.'
아주 간단한 상식이다.
모두가 같은 3레벨이지만.
나만 또 다른 레벨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타고난 스탯보다 더욱 훌륭한 스펙이었다.
"어디 확인 좀 해 볼까?"
시문은 기쁜 마음으로 상태창을 열었다.
[상태창]
칭호 : 연금술의 선구자 (외 2)
계통 : 마법계
레벨 : 3
소속 : 대한민국
힘 : 4
민첩 : 4
체력 : 5
연성력 : 11
잔여 스탯 : 2
보유 특성 – 현자의 돌 (F)
업적 포인트 – 12,300
시문은 칭호창을 열고.
성장형 칭호인 '연금술의 선구자'의 옵션을 확인했다.
'칭호는 그대로구나.'
[연성 관련에 아주 작은 보너스를 받는다.]
라는 설명은 그대로였다.
'하긴. 말숙이도 칭호 성장시킬 때 고생 많이 했다고 했었지.'
칭호의 느린 성장 속도를 욕하던 고말숙의 모습이 떠오른다.
피식 웃은 시문의 시선은 새로 얻은 칭호를 향했다.
그러곤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튜토리얼의 지배자]
튜토리얼에서 압도적인 성적으로 1등을 기록한 자.
갤럭시 아레나는 유망주를 우대한다.
"뭐야. 다른 옵션은 없는 건가?"
몇 번을 다시 봐도 다른 옵션 같은 건 부여되어 있지 않았다.
시문은 아쉽게 입맛을 다셨다.
"뭐, 이게 칭호의 일반적인 모습이긴 하지."
괜히 전생에도 칭호가 천대받았던 것이 아닌 것이다.
처음부터 성장형 칭호를 얻은 자신이 이상한 거지.
그래도 손해라 말할 순 없었다.
'칭호가 늘면 업적 상점의 격이 오를 테니까.'
골드 랭크 이상부터 열리는 업적 상점.
그곳의 스탯 구매를 하기 위해선, 이러한 칭호들의 수집이 필수적이었으니까.
시문은 마지막으로 잔여 스탯 2를 바라봤다.
'지금으로선 잔여 스탯을 전부 연성력에 투자하는 게 이상적이려나?'
비록 모조품이지만, 신화급 장비를 연성한다.
고로 연성력이 올라가면 사용되는 업적 포인트가 줄어들던가.
모조품의 완성도 수치가 더 올라갈 가능성이 높았다.
'현자의 돌이 사기적이긴 하지만, 연금술의 근본인 등가교환을 해결해 주진 않으니까.'
당장 업적 포인트를 요구하는 것이 그 증거 아닌가?
이걸 해결하려면 연성력이 높아야 했다.
애당초 연성에 특화된 고유 스탯이 연성력이다.
당연히 연성력이 높을수록.
등가교환부터 연금술의 전반적인 능력까지 상승할 터.
'아, 이거 고민되는데....'
연금술의 가치만 두고 보자면 분명 연성력 올인이 답이었지만.
'육체적 수준도 무시해서는 안 돼.'
시문은 알고 있다.
실력 있는 마법계들은 대부분 육체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것을.
물론 따로 힘민체에 잔여 스탯까지 투자하지는 않고.
오로지 수련만으로 얻으려 했다.
이유야 간단했다.
'정규 아레나부턴 실제 목숨이 날아가 버리니까, 살고 싶으면 뭐라도 해야 했지.'
결국 그러한 스탯작이 마법계의 랭커에 들어서느냐 마느냐를 판가름하기도 했다.
그만큼 힘민체라는 스탯은 마법계에겐 중요했고.
시문은 안 그래도 스탯 1에 체감이 큰 저렙 구간이니, 더욱 고민이 되는 것이다.
'일단 각성 평균치인 5정도만 맞춰 두고 따로 스탯작을....'
그때.
"잠깐."
팔짱을 낀 채.
한동안 잔여 스탯을 보며 고민하던 시문의 눈이 번쩍 뜨였다.
'굳이 단련만으로 스탯작을 할 필요는 없잖아?'
전생에 얻었던 에메랄드 태블릿.
그것엔 엘릭서와 현자의 돌.
이 두 가지의 제작법만 담겨 있는 건 아니었다.
당시엔 마력불능의 회복에만 미쳐, 그냥 넘겼던 내용이었지만.
"현자의 돌, 뭐 하나만 물어보자."
이젠 아니었다.
"넌 등가교환만 가능하면 뭐든 연성할 수 있지?"
웅.
가슴 중앙에서 기분 좋게 울리는 이명.
그러나.
"그럼 인체 연성도 가능해?"
이어지는 시문의 물음에 그 이명은 뚝 끊어졌다.
제7화
7화. 또 다른 연성 (2)
좁은 자취방.
숨 막히는 적막감이 감돈다.
'아무 말도 없네.'
이쯤 되면 먼저 입을 열어 볼 법도 하건만.
시문은 어떤 말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자신의 가슴 정중앙.
침묵을 지키는 현자의 돌을 묵묵히 바라보기만 했다.
'하긴, 고민되겠지.'
현자의 돌과 한 몸이 된 건 불과 하루 정도.
하지만 그 짧은 기간에.
시문은 현자의 돌이 상당한 지성을 지니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고.
그렇기에 현자의 돌이 왜 이토록 긴 침묵을 유지하는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연금술에서 인체 연성은 금기에 해당하니까.'
연금술의 지식들이 수록되어 있는 에메랄드 태블릿.
대다수의 내용이 엘릭서와 현자의 돌의 연성을 위한 지식들이었지만.
번외로 일종의 금기를 경고하는 내용들도 수록되어있었다.
'처음 에메랄드 태블릿을 얻었을 땐, 이런 경고문은 그저 우습기만 했지.'
세계가 정규 아레나로 들어선 초기에도.
목숨을 잃는다는 리스크만 생겼을 뿐.
대다수의 플레이어들이 여전히 갤럭시 아레나를 일종의 게임처럼 취급했었다.
시문 역시 그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에메랄드 태블릿에서 경고하던 인체 연성 역시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라들이 하나둘씩 망해 갈 무렵엔, 엘릭서 제작에 몰두하느라 아예 잊고 살았지.
하지만.
'이젠 아니야.'
인체 연성의 대표적인 결과물이 키메라라는 건 잘 안다.
그것들이 아레나에서 종종 몬스터로 등장했다는 것도.
아마 현자의 돌은 그런 부분을 경계해, 이렇게 침묵을 지키고 있는 거겠지.
하나.
'그건 현대 과학도 같은 의미로 적용시킬 수 있어.'
과학을 오로지 살인 도구로만 생각해 보라.
이만큼이나 창의적으로 훌륭한 살인 도구는 없을 것이다.
인체 연성 역시 마찬가지다.
사용자인 자신이 이로운 쪽으로만 사용한다면?
과학이 21세기의 지구를 이만큼이나 발전시킨 것처럼.
얼마든지 이롭게 사용이 가능했다.
그런 시문의 마음을 읽은 것일까?
우웅.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현자의 돌이 의사를 전달해 왔다.
"정말 이롭게만 사용할 거냐고?"
그 물음에 시문은 묵묵히 답했다.
"그럴 생각이야. 어디까지나 내가 강해질 용도로 쓰려는 거니까. 하지만."
뻔하고 달콤한 말만 해도 될 텐데.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온다면 나도 장담은 못 해. 내겐 해내야 할 목표가 있으니까."
시문은 속내를 조금의 숨김도 없이 말했다.
어쭙잖은 양심의 가책 때문에?
아니면 현자의 돌이 자신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거 같아서?
둘 다 아니었다.
"현자의 돌, 넌 내 회귀를 아는 유일한 존재야."
회귀가 마냥 사기적이고 행복한 것은 아니다.
아무리 현재에 없는 정보를 알고, 그에 걸맞은 경험이 있다곤 하나.
나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그걸 직접 해나가야 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니까.
"그런 의미에서 넌, 내가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유일한 동료나 마찬가지야."
그러니.
적어도 현자의 돌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너도 날 이해는 하리라 믿어. 우린 그 미래를 함께 겪었으니까."
우웅.
현자의 돌의 이명이 불안정하게 흔들린다.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시문은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안된다고 하면 어쩔 수 없지. 방법이 인체 연성에만 있는 건 아니니까.'
어디까지나 빠른 성장을 위한 하나의 길일 뿐.
인체 연성이 없어도 힘민체를 커버하는 수련법쯤은 얼마든지 알고 있었다.
전생에 알려진 수련법들은 모두 꿰고 있으니 말이다.
길지 않은 침묵이 이어졌고.
웅.
마침내 기다리던 답이 찾아왔다.
시문은 가슴에서 전해져 오는 맑은 이명에 미소를 지었다.
"이해해 줘서 고맙다."
우웅.
"알아. 인체 연성의 위험성은 이미 충분히 인지하고 있어."
비록 겉핥기식으로 넘어갔을지언정.
인체 연성이 흑마법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쯤은 숙지해 놓은 상태다.
그러나.
"뭐? 그런 게 아니라고?"
현자의 돌이 경고하는 것은 전혀 다른 부분이었다.
우우웅.
"에메랄드 태블릿의 반대되는 물건? 그게 무슨 말이야?"
우웅.
"그러니까, 에메랄드 태블릿처럼 그쪽 지식이 집약된 물건이 있다고?"
웅.
긍정의 의사를 전하는 현자의 돌.
그에 시문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상할 것도 없지. 에메랄드 태블릿엔 인체 연성과 관련된 건 없었으니까.'
에메랄드 태블릿에는 그저 인체 연성에 관한 경고만 쓰여 있지 않았나?
시문은 턱을 괴었다.
'처음 에메랄드 태블릿을 얻었을 당시, 자격시험을 받았었지.'
에메랄드 태블릿을 쥐자마자 떠오르던 메시지창.
[에메랄드 태블릿의 소유 자격을 시험합니다.]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고작 아이템이 소유 자격을 시험해서가 아니었다.
실제로 고등급 아이템의 경우.
대상자의 자격을 시험하는 경우가 꽤 많았으니까.
그럼에도 시문이 당시를 잊지 못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었다.
[자격 확인. 에메랄드 태블릿이 당신을 소유자로 인정합니다.]
정전기처럼 조금의 따끔함이 느껴졌을 뿐.
소유자가 된 이후로 에메랄드 태블릿은 어떤 현상도 일으키지 않고.
매끈한 표면 위로 소유자만이 볼 수 있는 엘릭서와 현자의 돌 제조법을 비춰 주었다.
'덕분에 도난도 당하지 않았지.'
1레벨인 시문이 에메랄드 태블릿을 온전히 소유할 수 있었던 이유.
그것은 한국 최강의 플레이어인 김시혁이나 고말숙과의 인맥이 아닌.
시문 외에는 누구도 쓸 수 없는 귀속 여부와 도난자를 '태워' 버리는 도난 방지 기능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소유 자격이 없는 자를 죽여 버리는 거였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다소 섬뜩한 일이다.
만약 재수가 없어 소유 자격이 미달이었다면.
시문 역시 도난자들처럼 새까맣게 타 죽었을 테니까.
그야말로 천운인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현자의 돌의 걱정거리도 감이 잡혔다.
"현자의 돌, 넌 내가 그 연성물에 자격이 없을 경우를 걱정하는 거구나."
웅.
짧게 전해져 오는 긍정.
시문은 심각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하긴, 연금술에 대한 지식만 담고 있던 에메랄드 태블릿도 그런 기능이 있는데.'
인체 연성의 지식이 수록된 물건이 자격을 따지지 않을 리 없었다.
'쓰읍. 그냥 걸러야 하나?'
굳이 타 스탯에 목숨을 걸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효율적인 수련법을 다소 알고 있으니.
저레벨인 지금부터 열심히 달린다면 충분히 갖출 수 있었다.
그때.
웅웅.
현자의 돌이 재차 말을 걸어왔다.
"뭐? 네가 자격 미달의 페널티를 어느 정도는 막을 수 있다고?"
현자의 돌에 그런 기능도 있었나?
'하긴, 리바운드도 최소화하는 마당에 이상할 것도 없겠군.'
잠시 고민하던 시문은 입을 열었다.
"이것만 확실히 말해 줘. 죽음까지는 막을 수 있는 거지?"
웅.
"좋아."
현자의 돌의 긍정 의사에 시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난 이제 정식 플레이어니까, 죽지만 않는다면 어떻게든 회복할 수 있어."
튜토리얼도 거쳤으니.
플레이어 전용 병원도 이용할 수 있었다.
그곳이라면 갓 튜토리얼을 끝낸 플레이어쯤은 얼마든지 회복시킬 수 있을 터.
'정 안되면 시혁이 놈한테 부탁하지 뭐.'
자신은 비록 이런 자취방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3레벨의 연금술사지만.
이 시기의 동생 놈은 최상위권을 휩쓰는 능력자 아닌가?
거기에다 자신과 다르게 김씨 가문의 적통이니, 의료수준도 차원이 다를 것이다.
'나도 참 많이 변했구나.'
사람은 죽을 위기를 거치면 변한다더니.
예전 같았으면 꿈도 꾸지 않았을 동생 놈의 도움을 떠올리고 있다.
시문은 장롱 옆에 있는 다소 얼룩진 거울을 바라봤다.
'지금 와서 보면 참 어리석었네.'
가끔은 가족에게 기대어도 되었을 텐데.
그런 게 가족 아니던가?
한데 왜 그렇게 혼자서 이를 악물고 살았을까.
21세기에 사생아라는 희귀 태생이라서?
아니면 하락선만 타던 나보다 상승선만 타던 동생 놈이 보기 힘들어서?
'아마 전부 다...겠지.'
사실 마흔을 바라보던 전생에서야,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던 것이지.
지금 이 시기.
28세의 자신에겐 떠올리는 것조차 괴로운 것들이다.
하나.
"이젠 아니니까."
그때는 그때일 뿐.
이미 지나간 일일뿐더러, 젊은 시기라면 누구나 겪을 만한 고뇌일 뿐이다.
시문은 피식 웃으며 감정을 정리하곤, 상태창을 열었다.
"어디 보자. 우선 잔여 스탯을 전부 연성력에 투자하고...."
조금이라도 연성력이 높아야 연성에서 이득을 볼 테지.
시문은 11이었던 연성력을 13으로 만들곤 상태창을 닫았다.
그러곤 물었다.
"현자의 돌, 연성물의 대략적인 이미지 좀 알려 줄 수 있어?"
우웅.
"에메랄드 태블릿에서 색깔만 다르다고? 알았어."
시문은 곧장 연녹색의 비석을 떠올렸다.
마치 최신식의 폰 화면처럼.
비석을 액정 삼아 원하는 지식을 편리하게 열람할 수 있었던 에메랄드 태블릿.
그 익숙한 이미지와 구조를 떠올리고.
'색깔은 연녹색 대신 검보라색.'
현자의 돌이 알려 준 색깔로 세부적으로 구상한다.
이어 가슴 정중앙에서 흘러나오는 연성력을 끌어올려 손가락을 튕기면.
따악.
[요구치에 맞는 연성을 이루기에는 연성력이 부족합니다.]
기다렸다는 듯 올라오는 메시지창.
하지만.
'이미 예상하고 있었어.'
이미 에메랄드 태블릿과 동급이상인 것을 알고 있던 시문은 차분히 다음 메시지를 기다렸다.
[현자의 돌이 부족한 등가교환을 성립시키기 위해, 업적 포인트 10,000점을 요구합니다.]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아스트라페를 연성했던 것처럼.
현자의 돌이 자연스럽게 등가교환을 위한 업적 포인트를 요구했다.
자신 있게 '예'를 향해 손을 뻗던 시문은 움찔했다.
"잠깐. 만 점이라고?"
시문은 눈을 몇 번 깜빡거리더니 세게 비비기까지 했다.
하지만 메시지창은 여전했다.
"만 점? 현자의 돌, 이거 진짜 만 점이나 들어?"
웅.
"이것도 싼 거라고?"
아스트라페는 500점인데?
현자의 돌의 긍정에 시문은 헛웃음을 흘렸다.
기껏 12,300점으로 만들어 뒀더니, 거하게 출혈하게 생겼다.
"후. 어쩔 수 없지."
리스크 없인 얻는 것도 없으니까.
애당초 안정성을 고려했다면.
인체 연성이라는 방향 자체를 바라보지 않았을 것이다.
마음을 결정한 시문은 '예'를 선택했다.
[업적 포인트 10,000점이 차감됩니다.]
업적 포인트가 차감되고.
부족한 연성력을 대체하는 익숙한 기운이 손끝에 모여든다.
그 기운 그대로 손가락을 튕기자.
스아아아.
어디선가 나타난 검보랏빛 기운이 시문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그것은 똬리를 틀듯.
스산한 움직임으로 시문의 손을 휘감았고.
꾸드득.
살점, 혹은 그에 준하는 무언가가 으스러지는 소리를 자아냈다.
그 괴이한 소리는 점점 커지더니, 마침내 하나의 네모난 형태로 변했다.
"이거...."
색을 제외하면.
에메랄드 태블릿과 조금도 다름없는 형태의 비석.
아니, 다른 게 딱 하나 있긴 했다.
"살아 있잖아?"
생물의 핏줄, 혹은 그 심장처럼 연신 꿈틀거리는 비석.
형태만 비석일 뿐.
눈앞의 연성물은 살아 있는 생명이라 해도 이상할 것이 아니었다.
그때.
[등록되지 않은 신화적인 산물을 제작하였습니다.]
[업적 포인트 5,000을 획득합니다.]
[칭호 '연금술의 선구자'의 옵션이 성장합니다.]
[칭호 '연금술의 선구자'에 새로운 옵션이 추가됩니다.]
일련의 메시지창들이 시문의 시야에 떠올랐다.
'칭호가 성장했다고?'
15킬에 점령 포인트 100%.
그 압도적인 성적에도 꼼짝하지 않던 연금술의 선구자가 성장하다니.
시문은 즉시 칭호창을 열어 '연금술의 선구자'를 확인했다.
[연금술의 선구자] - 성장형
연금술의 신화적인 산물을 모두 연성한 연금술사에게 주어지는 칭호.
-연성 관련에 아주 작은 보너스를 받는다.
-연성에 소모되는 연성력이 5% 감소한다.
"호오."
탄성이 절로 나온다.
연성력 5% 감소.
한 자리 숫자라 작아 보일 수 있겠으나.
고레벨로 갈수록 퍼센티지의 효율이 높아지는 것은 물론이요.
앞으로 칭호가 성장한다면 저 수치도 점점 상승할 터.
결국 '연성력 소모도 감소'라는 옵션을 얻은 것에 중점을 두면 명백한 사기 옵션이었다.
'말숙이가 괜히 성장형 칭호를 언급한 게 아니었어.'
흐뭇하게 웃는 시문.
그의 앞으로.
[창조한 적 없던 신물의 탄생에 저편의 성좌 검은 염소가 크게 노합니다.]
[성좌 검은 염소가 당신에게 묻은 흔적에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성좌 검은 염소가 진노 대신 짙은 관심을 표합니다.]
갑작스러운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검은 염소? 처음 듣는 성좐데.'
성좌 검은 염소.
정규 아레나가 시작되었던 전생에서도 들어 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그나마 이해를 해 보자면.
'저편의 성좌라... 설마 그 칭호 때문인가.'
자신도 모르게 얻었던 칭호 '저편의 시선을 받는 자'.
올림푸스의 성좌들이 보인 반응도 그렇고.
칭호에 따로 옵션은 없었으나, 마냥 아무 능력 없는 칭호는 아닌 듯했다.
'어찌 됐든 다행이야. 성좌의 분노는 꽤 위험하니까.'
아직 정규 아레나가 아니라 큰 피해는 없겠지만.
시문은 성좌가 신에 버금가는 이들인 걸 안다.
그렇기에 굳이 성좌와 척을 질 필요는 없었다.
[갤럭시 아레나에 등록되지 않은 성좌, 검은 염소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연달아 이어지는 믿을 수 없는 업적에 갤럭시 아레나에서 플레이어 김시문에 대한 논의가 들어갑니다.]
이어지는 메시지창에 시문의 눈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연달아라... 그 말은 내가 이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는 건데?'
아스트라페는 아닐 것이다.
당시 올림푸스의 성좌들이 관심은 표했으나, 이러한 문구는 뜨지 않았으니까.
'그럼 전생에 마지막으로 연성했던 연성물 때문이겠군.'
회귀와 마력불능의 회복.
두 가지 요구 조건에 맞춰, 자신의 감각까지 뺏어 가며 현자의 돌이 연성했던 그것.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연성의 여파로 감각을 잃은 게 아닌 거 같아.'
바로 자신의 목숨.
애당초 현자의 돌은 본래 힘과 더불어, 자신의 목숨마저 연성의 등가교환에 사용한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업적 포인트를 100만 점이나 받을 정도로 대단한 것이겠지.
하나.
"지금 중요한 건 이거지."
그간의 의문이 풀리긴 했으나 결국 지나간 일.
시문은 눈앞에서 연신 꿈틀거리는 검보라색 비석을 바라봤다.
그러자 눈앞으로 비석의 정보가 떠올랐고.
"이건...."
정보를 확인한 시문의 두 눈은 휘둥그레졌다.
제8화
8화. 또 다른 연성 (3)
"이건...."
시문은 휘둥그런 눈으로 정보를 살폈다.
[옵시디언 태블릿]
등급 – 모조품 (20%)
인체 연성의 집합체.
인체 연성을 포함한 여러 지식들이 담겨 있지만.
어째서인지 제힘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한다.
에메랄드 태블릿의 정보와 큰 차이가 없는 설명.
하나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이것도 모조품이야?"
시문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은 것은 다름 아닌 '모조품 (20%)'.
"아니, 업적 포인트를 만 점이나 넣었는데 고작 20%라고?"
그 아스트라페마저 500점에 10%의 완성도를 지녔거늘.
일순 허탈한 마음이 밀려들었지만 그때뿐이었다.
허탈했던 시문의 표정은 한결 단단해졌다.
'뭔가 더 있어.'
그간 겪어 온 현자의 돌은 이런 비효율적인 연성을 펼칠 존재가 아니었다.
가만히 옵시디언 태블릿을 바라보던 시문은 손뼉을 쳤다.
"그렇군. 이번엔 연성물의 리바운드가 없는 거구나?"
웅.
가슴에서 울려오는 긍정의 의사.
시문의 눈이 곡선을 그렸다.
그럴 수밖에.
등급이 모조품임에도 리바운드가 없다는 것.
그 말은 다시 말해.
'영구 지속이란 말이잖아!'
앞선 아스트라페의 모조품처럼.
일정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럼 대충 업적 포인트 만 점에 20%씩만 오른다고 가정해도....'
앞으로 네 번.
업적 포인트 4만 점만 있으면.
신화급 아이템을 소유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대박이다!'
시문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옵시디언 태블릿을 향해 손을 뻗었다.
우우.
벌써 자신의 경고를 잊었냐는 듯.
현자의 돌의 불안정한 이명이 가슴을 간지럽힌다.
시문은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 자격 미달 시 생길 페널티에 대해선 준비해뒀어."
마음 같아선 적당한 수준의 마비 포션이라도 만들고 싶었지만.
당장 재료를 구할 상황이 아니었기에, 폰에 시혁이의 번호를 띄워두었다.
터치 한 번이면 즉시 동생 녀석에게 연락이 가리라.
'그러고 보니 나, 고통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구나.'
누가 그러던가?
인간에게 고통은 절대 익숙해질 수 없는 것이라고.
한데도 시문은 고통에 너무나 익숙했다.
'마력불능이 깎아 먹는 건, 상태창의 숫자만이 아니었으니까.'
힘민체의 스탯들이 낮아지면.
그를 따라 육체에도 큰 고통이 따랐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첫 스탯 하락이 이루어졌을 땐, 그저 몸이 조금 피곤한 정도에서 그쳤으니까.
하지만.
'정규 아레나가 시작되고 확 달라졌지.'
정규 아레나에서의 죽음만이 아니라.
스탯의 하락 역시 실질적인 육체 쇠락으로 이어졌다.
당연하게도.
'나 같은 아레나 질병 환자들에겐 악몽의 시작이었지.'
이유도, 예고도 없이.
근육 경련이 오거나, 강렬한 신경통이 전신을 지배했다.
진통제나 마비 포션, 또는 그에 준하는 마약이 아니라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통증이 말이다.
그나마 시문의 경우.
손수 마비 포션을 제작해 버텼지만.
마비 포션이 없을 때는 정말 악으로만 버텨내야 했다.
'그런 고통을 평생 동안 달고 살았지.'
정말 지긋지긋할 정도로 아팠다.
오죽하면 전생의 고말숙이 살아있는 언데드라고 놀려 댔겠는가.
'뭐, 내가 생각해도 언데드 같긴 하네.'
생기나 없이 삐쩍 마른 몸으로 예고 없이 발작과 비명을 일으킨다.
어딜 봐도 언데드와 다름없는 모습이었지.
우웅.
"응? 아, 무서워서 그런 거 아냐."
잠시 전생의 감성에 젖는 것이 두려워한다고 느낀 것일까.
현자의 돌이 걱정스러운 이명을 토했지만.
"그냥 잠깐 옛날 생각이 나서"
시문은 작은 미소를 걸치고는 고개를 저었다.
"어쨌건 너무 걱정하지 마. 나 생각보다 아픈 거 잘 참거든."
우웅.
"알아, 얼마나 고통스러울지는 모르지. 그래도 죽음은 막아 준다며? 그거면 됐어."
라고 말이야 했지만.
'역시 아픈 건 싫단 말이지.'
고통에 익숙한 거지, 결코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시문이 크게 걱정하지 않는 것은 다름 아니었다.
'일단 내 예상이 맞는다면, 페널티 같은 건 전혀 없을 거야.'
애당초 소유 자격 여부를 묻지조차 않을 거다.
시문은 자신 있게 옵시디언 태블릿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끝에 부드럽고 따뜻한, 살점 특유의 느낌이 닿는 순간.
츄아아악.
꽃이 만개하듯.
비석 모양이 풀어지며, 촉수를 뻗어 오는 옵시디언 태블릿.
그러나 시문은 어떤 당황이나 두려움을 내비치지 않은 채.
그저 가만히 자리를 지킬 따름이었다.
츄르륵.
순식간에 시문의 전신을 휘감은 촉수가 먹이를 감싼 뱀처럼 서서히 조여 오기 시작했다.
'역시.'
놀랍게도.
이렇게 전신을 감아 오는데 어떤 통증이나 압박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심지어 숨 쉬는 것조차 자유로웠다.
시문의 예상대로인 것이다.
'본래의 주인인 성좌 검은 염소가 내게 짙은 관심을 표하는데, 그 신물이 해를 끼칠 리 없지.'
비록 모조품이라 해도 그 성능만큼은 진짜니까.
괜히 제우스나 검은 염소가 관심을 표하는 게 아니었다.
뭉클.
"뭔가 귀엽네."
시문은 애완동물들에게 둘러싸인 듯.
뭉클거리며 몸을 비벼 오는 촉수들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하나.
[옵시디언 태블릿(모조품)이 현자의 돌에게 '융합'을 요구합니다.]
"응?"
모든 일이 예상대로만 굴러가진 않았다.
츄르륵.
"으윽!"
몸을 감싸던 촉수들이 어느새 시문의 가슴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기 시작했고.
웅!
[현자의 돌의 옵시디언 태블릿(모조품)의 요구를 받아들입니다.]
"자, 잠깐! 이게 무슨...."
시문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스르르.
전신을 휘감던 촉수 무더기가 시문의 가슴 정중앙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으, 으앗!"
시문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그럴 수밖에.
'촉수가... 전신으로 퍼지고 있어!'
단순히 가슴 중앙으로 파고들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현자의 돌이 처음 자신에게 귀속되었을 때처럼.
혈관을 타고 시문의 전신으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아, 안 돼! 이대론 촉수에 온몸이...!'
정확히는 현자의 돌이 뚫어 놓은 길을 따라 발을 들이는 거라고 해야겠지.
"흐아아앗!"
익숙한 고통이 아닌.
전혀 익숙지 않은 간질간질한 감각이 전신을 내달리며 시문의 몸에 자리했고.
"그, 그만! 이런 건... 아앗!"
점점 쾌락을 닮아 가는 간지러움에 전신이 뜨겁게 달아오를 때쯤.
[옵시디언 태블릿(모조품)이 성공적으로 현자의 돌과 융합합니다.]
[현자의 돌에 작은 변화가 생깁니다.]
[현자의 돌에 새로운 옵션이 추가됩니다.]
[현자의 돌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현자의 돌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현자의 돌의 레벨이....]
시문은 범람하는 메시지창을 모두 확인도 못한 채로 정신을 잃었다.
* * *
[갤럭시 아레나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번 아레나의 종목은 '오펜스'이고, 참가 인원은 50명입니다.]
[조건 '협력'이 추가됩니다.]
[참가자 모두 5인으로 팀이 맺어집니다.]
[인원이 모두 보이면 아레나가 시작됩니다.]
허공에서 떠오르는 메시지와 함께 나타난 작은 체구의 남성.
김민형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제 막 튜토리얼을 끝냈는데 오펜스 종목이라고? 그것도 조건 협력까지 붙어?'
오펜스.
그가 겪었던 튜토리얼 점령전보다는 한 단계 아래 랭크인 실버부터 등장하는 종목.
이제야 튜토리얼을 마친 김민형에게는 전혀 적합하지 않은 종목이었다.
심지어.
'난 첫 튜토리얼에서 바로 탈락했는데....'
그전에 킬을 좀 챙기긴 했으나.
김시문이라는 괴물에게 순식간에 탈락한 그에겐 납득이 가지 않는 매칭이었다.
'아직 배치고사 구간일 텐데. 실버 랭크의 종목이 매칭될 줄이야.'
김민형의 실눈은 더욱 가느다래졌다.
짐작할 수 있는 건 두 가지.
하나는 자신의 B급 특성 재빠른 몸놀림과 성삼에서 지원받은 장비 덕에 아직도 높은 MMR대를 유지한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날 광탈시킨 그 김시문이라는 자가 튜토리얼에서 괴랄한 성적을 거둔 덕이겠지.'
물론 김민형이 둔 가능성은 후자였다.
왜냐고?
'분명 15킬이라고 했었지?'
튜토리얼이 끝나고 인사부 과장인 박민철 과장에게 보고하던 그날.
자신보다 오래 살아남았던 신입 길드원의 보고를 함께 들었으니까.
'그만한 자에게 탈락한 거라면 당연히 MMR의 하락도 적을 수밖에.'
이런 부분에선 공명정대한 갤럭시 아레나 아닌가?
길을 걷다 갑자기 8톤 트럭에 치인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자신의 MMR 하락폭도 굉장히 적은 것이리라.
'어찌 되었든 이건 기회야!'
김민형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비록 두 번의 튜토리얼을 거쳐, 유망주의 기회를 잃어버렸다곤 하나.
그건 김시문이라는 트럭을 만난 다른 신입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후의 튜토리얼에선 순위권에 달하는 성적을 얻었으니.
이번 오펜스에서도 성적을 낸다면, 다시 유망주의 자리를 노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라고.
생각했다.
웅.
"뭐야, 오펜스야?"
"하! 재수가 없으려니까. 왜 디펜스가 아니고 오펜스야?"
"내 MMR 때문이겠지. 이 형님이 튜토리얼 때부터 순위권 아니었냐."
"망할 새끼, 지금 웃음이 나와? 너 때문에 어렵게 가는 거잖아!"
"걱정 마. 새꺄. 이번에도 빡캐리 해 줄 테니까."
새로 등장한 3명의 인원을 확인하기 전까지 말이다.
'저 문양은!'
김민형의 좁은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세 남성의 갑옷에 새겨진 전갈 모양의 문양.
유수길드의 일원이라면.
아니.
아레나 좀 했다 하면 모를 수 없는 문양이었다.
'전갈 길드 새끼들이잖아!'
김민형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어느 랭크의 아레나든 유명한 트롤러나 쓰레기들이 존재했지만.
전갈 길드는 궤를 달리했다.
일단 무시할 수 없는 거대 집단을 이뤘다는 점과.
놈들의 비매너엔 나름의 철학과 논리가 담겨 있다는 것.
'뭐라더라, 승리를 위한 철저한 실리주의라고 하던가?'
본래 신념을 지닌 병X은 무섭다하지 않는가?
그래서 더 위험한 놈들이었다.
'심지어 파티로 보이는데....'
파티는 배치고사가 끝난 시점부터 허용한다.
그런 의미에서 저 3명은 이미 랭크를 배정받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김민형은 암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하! 유망주 도전은 물 건너갔네.'
이번 배치고사를 잘 치러서 어떻게든 유망주를 어필해 보려 했건만.
시작부터 전갈 길드의 파티를 만나다니.
'평범한 트롤러면 그냥 처리하고 움직이기라도 하지.'
협력 인원이 5인에서 4인으로 줄어들긴 하겠지만.
나름 각성 아카데미에서 교육도 받았었고.
B급 특성에 이 정도 장비면 혼자서 2인분을 해낼 자신이 있는 김민형이었거늘.
3인 파티는 도무지 답이 없었다.
'이제 슬슬 시비를 걸겠지.'
김민형은 암울한 기색으로 전갈 길드 3인을 바라봤다.
마침 3인방도 주변을 둘러보다 김민형을 발견하곤 다가왔다.
"뭐야, 5인이라더니 얘 하나뿐이네?"
"아직 매칭이 안 됐겠지."
"뭐 얼마나 잘난 새끼를 붙여 주려고 이러나~."
그중 짧은 머리칼의 남자가 김민형을 훑더니 눈매를 꿈틀했다.
김민형의 견갑에 그려진 파란 문양을 발견한 것이다.
"이거 성삼 마크 아냐? 너 성삼 쪽 사람이었냐?"
"뭐? 성삼이라고?"
"야, 최기열. 진짜냐?"
짧은 머리의 남자, 최기열의 말에 뒤에 서 있던 두 길드원이 호들갑을 떨며 다가왔다.
국내 길드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성삼이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어이, 성삼맨. 이름이 뭐야?"
"기, 김민형이다."
"김민형? 김민형이라...."
최기열이라 불린 남자는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얼굴도 그렇고, 전혀 들어 본 적 없는 이름인데."
아무리 제 잇속을 챙기는 전갈 길드라도 가릴 땐 가린다.
대표적인 이들이 바로 성삼과 같은 국내의 강대 세력이었다.
특히 성삼은 갤럭시 아레나가 등장하기 전부터 한국의 주춧돌이던 기업 아닌가?
정계와 재계에도 힘이 있었기에.
전갈 길드에서도 어지간하면 마찰을 줄이라고 권장하는 길드 중 하나였다.
'덕분에 성삼 쪽 플레이어들은 거의 외우고 있는데 말이지....'
작은 체구에 실눈, 성삼치곤 최고급이라고 부르긴 좀 모호한 장비까지.
이만한 특징이면 모르기도 어려운데....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아아~ 알겠다."
최기열이 입가를 히죽거렸다.
"우리 성삼맨, 이제 막 튜토리얼 통과한 뉴비구나?"
"뭐? 진짜?"
"그래, 새끼야. 봐 봐."
최기열은 김민형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손가락으로 슥 훑었다.
"여기가 아무리 심해라지만, 성삼이 지 길드원한테 C급밖에 안 되는 장비를 지급하진 않잖아."
"그렇긴 하지."
"대기업 부심이 있으니까."
아무리 플레이어의 시대가 왔다지만, 성삼 그룹의 힘은 누구나가 인정한다.
갤럭시 아레나의 등장 이전부터 세계적으로 놀던 기업답게.
갤럭시 아레나가 등장한 초반부터 값비쌌던 시중의 장비들을 쓸어 담은 것은 물론이요.
생활계 플레이어들을 대거 영입, 양성한 덕분에.
지금은 장비를 자체 보급하는 단계까지 도달한 상태였으니까.
당연히 하위 랭크.
속된 말로 '심해'라 불리는 플레이어들도 B급 이상의 장비를 줄줄 도배하고 다녔다.
그게 현 성삼 길드의 위상이었다.
한데 이 김민형이라는 플레이어는 어떤가?
"튜토리얼 성적 좋으면 A급 장비도 밀어 준다던데. 우리 김민형 씨, 순위권에는 못 들었나 봐?"
"이!"
"왜 팩트에 빡쳤냐? 빡치면 치시든가~. 난 쿨해서 그런 거 신경 안 쓰거든. 물론... 우리 민형 씨 배치고사는 신경 쓸지도 모르겠지만. 카햣!"
'이 개X끼가!'
김민형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다.
그러나 히죽거리며 긁어 대는 최기열의 말에 반박하진 못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나보다 강하다....'
김민형 역시 동레벨대에서 빠지는 스펙은 아니지만.
이미 배치고사를 끝낸 최기열 쪽이 레벨이나 장비 등, 모든 부분에서 우월한 탓이었다.
더군다나 저쪽은 3인 아닌가.
괜히 혼자서 덤벼들다 배치고사 구간에서 죽어 버리기라도 하면?
'나만 손해야.'
눈을 질끈 감은 김민형은 말없이 시선을 돌렸고.
"역시 우리 민형 씨, 괜히 대기업에 들어간 게 아니야. 눈치 하난 X나 빠르네."
"원래 작은 새끼들이 눈치 하난 빠르잖냐."
"누구? 너처럼?"
"뭐 인마?"
"미안. 정곡을 찔렀냐? 키핫!"
3인방은 그런 김민형을 보며, 저들끼리 낄낄댔다.
사전에 찍어누르고 서열을 정해 두려는 것이다.
저들 역시 성삼의 길드원을 건드려서 좋을 게 없었으나.
그렇다고 갓 튜토리얼을 치른 뉴비에게 숙일 이유도 없었으니까.
오히려 뉴비라는 애매한 포지션인 지금이야말로.
그 잘난 성삼 길드에 갑질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럼 민형 씨. 우리가 클리어는 확실히 책임져 줄 테니까. 시키는 대로만 잘하자고?"
어깨에 손을 척 감아 오는 최기열의 행동에.
김민형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보상은 지들끼리 다 해 먹겠다 이거겠지? 개자식들.'
더럽고 치사하지만 어쩔 수 없다.
배치고사라는 약점을 지닌 건 자신이니까.
억울하면 그 역시 얼른 랭크를 배정받고 파티를 하는 수밖에.
그때.
스슷.
작은 빛과 함께 한 남자가 나타났다.
"헉!"
그를 본 김민형은 헛숨을 들이켰다.
남자가 아무런 장비도 없이 회색의 후드티만 입고 나타나서가 아니었다.
'저, 저자가 여긴 왜!'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어느 유명한 히어로 영화의 그분처럼.
고작 핑거 스냅 하나로 자신을 광탈시킨 괴물을 말이다.
"히야~ 이거 골 때리네."
최기열의 웃음기가 가득한 목소리가 울린다.
그러나 김민형은 알 수 있었다.
그 속에 어마어마한 불쾌감이 차 있음을.
동시에 기뻤다.
"아레나 매칭이 참 대단하긴 해? 우리에 성삼맨까지 있다고 이런 개날먹충을 다 끼워 주다니."
"개날먹충? 설마 나 말하는 겁니까?"
"그럼 X발, 너 말고 누가 있는데요. 응?"
신은 아직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제9화
9화. 배치고사 (1)
"X발? 지금 저한테 욕한 겁니까?"
"그래, 이 X발 놈아. 그럼 뭐라고 할까? 개X끼라고 하냐? 엉?"
고압적인 분위기로 연신 욕을 내뱉는 짧은 머리의 남성.
그에 김시문은 헛웃음을 흘렸다.
'오자마자 이건 또 무슨....'
아레나에 입장하자마자 욕이라니?
보아하니 협동 조건의 오펜스 같은데.
시작부터 시비를 틀고 있으니 이건 뭐 답이 없었다.
문제는.
-뭐 X발? 아스팔트에 수차례 갈린 존못이 누구보고 X발이래!
저 남자의 시비만이 아니라는 거다.
-오빠! 당장 손가락 들어 봐!
가슴 정중앙에서 거친 이명과 함께 쏟아지는 음성.
다소 여린 소녀의 목소리였지만, 그녀가 쏟아 내는 말은 그렇지 않았다.
-내 저 존못의 면상을 아주 갈가리 찢어서 그대로 튀겨....
'자자, 진정해.'
시문은 머리를 쓰다듬듯.
가슴을 부드럽게 쓸었다.
-아잉~! 다정하게 만져 버리면 나 어쩌라궁! 웅?!
분명 쓸어 준 것은 가슴이건만.
속이 쓰려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아, 이럴 줄 알았으면 옵시디언 태블릿의 융합은 어떻게든 막았을 텐데....'
목소리와 어울리지 않는 거친 어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현자의 돌.
옵시디언 태블릿과 융합하며 달라진 건, 현자의 돌의 등급과 레벨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현자의 돌에 작은 변화가 생깁니다.]
'그 작은 문구가 이렇게 무서운 것이었을 줄이야.'
그렇다.
옵시디언 태블릿과 융합하며 현자의 돌은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흐으응! 존잘의 손길! 넘모 좋앙!
다소... 난해한 형태로 말이다.
하나 어쩌겠는가.
이미 일은 벌어진 것을.
-후욱! 더! 더 만져 줭!!
연달아 이어지는 현자의 돌의 해괴한 목소리.
시문은 곧장 제 가슴에서 손을 떼고, 잠시 눈을 감으며 혼미해지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게 겁을 먹은 거라고 판단한 것일까?
"꼴에 주제는 아나 보네. 야, 쫄았냐? 어?"
눈을 희번덕거리며 뜨는 최기열.
그러나 여전히 눈을 뜨지 않는 시문의 모습에.
"기열아, 물어볼 게 뭐가 있냐? 딱 봐도 개쫄아 있구만!"
"푸핫! 장비를 보니 길드도 없는 놈 같은데?"
뒤에 있던 최기열의 파티원들도 한마디씩 보태며 비웃음을 걸쳤다.
"지금까지 마음 약한 호구들 만나서, 장비도 없이 버스 좀 탔는지 모르겠는데, 이 최기열님은 호구가 아니거든?"
"그거 때문이었습니까?"
어느새 눈을 뜬 시문이 흔들림 눈빛으로 최기열을 바라봤다.
"장비 때문이라면 오해입니다."
"오해?"
"애당초 장비는...."
쿵.
강렬한 폭음과 함께 자욱한 흙먼지가 피어오른다.
시문에게.
정확히는 시문이 있던 자리에 처박힌 둔기, 모닝스타에서 파생된 흙먼지였다.
"이 새끼가 진짜 돌았나."
모닝스타를 내려찍은 최기열은 시퍼런 눈으로 백스텝을 밟은 시문을 노려봤다.
"오해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지금 누굴 병X으로 보냐?"
으르렁거리는 최기열.
그에 시문은 잠시 그를 응시하더니 말했다.
"...최기열이라고 했습니까? 당신, 재밌네요."
"웃어? 장비도 안 끼고 아레나에 온 날먹 새끼가!"
시문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 구간은 보통 브론즈, 이번 종목을 따져 보면 높아 봐야 실버 수준 아닙니까?"
"그거랑 네가 장비도 안 낀 날먹충이라는 게 뭔 상관인데?"
"이 랭크대의 마법계나 보조계라면 장비가 없는 경우가 많죠. 보아하니 아레나 좀 뛰신 거 같은데, 그것도 모릅니까?"
"...."
시문의 말에 최기열은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사실이었으니까.
마법계나 보조계의 경우 그 장비값이 전투계에 비해 상당히 비싸다.
특히 마법계는 타 계통을 통틀어 가장 낮은 인구 비율을 자랑한다.
당연히 마법계 장비는 귀했고.
이 랭크대의 마법계들에겐 어지간한 지원 없인 꿈도 못 꾸는 게 마법계 장비였다.
물론 튜토리얼부터 나름 승승장구해 온 최기열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글쎄."
최기열은 노려보는 눈 그대로 입가를 비죽 끌어 올렸다.
"난 잘 모르겠는데?"
"역시. 애당초 제 장비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군요."
"세상 좋다? 장비도 없는 새끼가 캐리맨 앞에서 따박따박 주둥이나 놀리고."
그런데도 장비를 트집 잡으며 이토록 공격적으로 나오는 이유는 뻔했다.
시문은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최기열을 바라봤다.
'아레나 보상을 독차지할 속셈이구나.'
이번 아레나는 높은 MMR 덕에 실버부터 나오는 오펜스 종목이다.
더불어 5인 협력으로 50명의 제한을 붙인 거라면.
그 난이도는 일반적인 실버 랭크의 오펜스와는 비교가 불가능하다는 뜻.
반대로 그만큼 클리어했을 때의 보상이 높다는 뜻이 된다.
'날 처리해서 아예 보상을 나눌 팀원을 줄이고 싶은 거야.'
협력 종목의 특징 중 하나가 클리어 구성원이 적을수록 그 보상이 높아진다는 것.
정확히는 탈락한 구성원의 보상을 클리어 인원에게 몰아주는 식이었다.
물론 생존자가 많을수록 보상이 커지는 경우도 제법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쯧. 들어오자마자 귀찮게 됐네.'
시문은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보통 마법계나 보조계가 팀원으로 매칭되면 쌍수를 들고 환영한다.
귀한 계통인 만큼 아레나의 클리어 난이도를 확 낮춰 주니까.
반대로 이렇게 경계하는 경우도 있었다.
'내가 킬을 쓸어 갈까 봐 그런 거겠지.'
점령전과 달리.
오펜스는 킬을 제외한 공헌도 수급이 거의 없다.
최기열은 그런 상황에서의 광역 마법을 경계하는 것이다.
킬을 쓸어 담기 딱 좋은 기술이니까.
'여기까지 볼 줄 아는 놈이면, 아레나를 제법 굴러먹었다는 건데....'
최기열을 훑던 시문의 시선이 그의 갑옷에서 멈췄다.
"당신, 전갈 길드였군."
"이것 봐라. 이젠 말도 짧아진다?"
"인간도 아닌 놈한테 끝까지 대우해 주는 머저린 아니라서."
그 말에 최기열의 얼굴이 대번에 굳는다.
뒤에 있던 두 길드원도 마찬가지였다.
"저, 저 새끼가 지금 뭐라고!"
"날먹충 주제에, 지금 아가리가 열려?!"
그런 3인방을 보며 시문은 미간을 찌푸렸다.
"날로 먹는다는 억지 프레임 씌우고 보상 독식하려는 거, 너무 저급하지 않나?"
"날먹충 주제에 X랄을...."
어느새 한 발 내디딘 최기열이 모닝스타를 치켜들었다.
"해라!"
민첩이 꽤 높은 걸까?
둔기라는 무기의 특징에 맞지 않게.
최기열의 모닝스타는 빠른 속도로 시문의 머리를 노렸다.
순간 시문의 가슴에서 현자의 돌의 말이 울렸다.
-오빠, 설마 이대로 맞아 줄 건 아니지?
'그럴 리가. 준비나 해.'
-히히! 그럴 줄 알았어. 난 또 생긴 만큼 마음도 너그러우면 어쩌지 싶었자넝!
현자의 돌의 넉살에 시문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착해 빠진 동생 녀석이라면 모를까.
'난 아냐.'
시문의 시선이 날아드는 모닝스타를 향한다.
시문의 오른손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어.
따악.
왼손의 손가락이 튕겨지는 순간.
터억!
모닝스타의 몸체가 시문의 손에 붙잡혔다.
"무, 무슨!"
최기열의 눈이 부릅떠진다.
마법계인 시문이 자신의 모닝스타를 맨손으로 막아 내서가 아니었다.
물론 그것도 굉장히 놀라운 부분이긴 했으나.
진짜는 따로 있었다.
'이럴 수가....'
최기열은 자신의 눈과 마찬가지로 부들부들 떨리는 모닝스타를 바라봤다.
튜토리얼부터 매번 순위권을 기록해 오던 최기열이었다.
A급 특성인 '근력'은 지금껏 단 한 번도 그를 배신한 적이 없었거늘.
'내가... 힘에서 밀린다고?'
처음으로 A급 특성 근력에게 배신을 당했다.
'고작 이딴 비실한 놈한테?'
아직 장비조차 구비 못 한 마법계.
보나 마나 아레나도 몇 판 해 보지 못한 뉴비에 불과할 텐데.
분명 그럴 텐데!
"이익!"
빠득.
최기열의 목 위로 핏대가 치솟는다.
목뿐만이 아니었다.
손등부터 팔, 관자놀이까지.
피부가 드러난 모든 부분은 핏대들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A급 근력과 그간 찍어 온 스탯이 최대로 발휘되는 것이다.
하나.
"속도 때문에 민첩이 높은 줄 알았는데."
어린아이가 바위를 미는 것처럼.
"힘이 주력이었나 봐? 아니면 특성 때문인가."
모닝스타를 쥔 김시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이 자식, 미동조차 없어!'
전신을 부들거리며 힘을 쏟는 최기열과 달리.
시문은 작은 흔들림조차 없었다.
"기, 기열아!"
"저 새끼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것일까?
뒤에 있던 두 길드원이 무기를 고쳐 쥐며 눈에 불을 켰다.
그때.
콰득!
달려들던 한 녀석의 목에 칼이 틀어박힌다.
뒤에서 조용히 상황을 주시하던 작은 체구의 남성, 김민형의 칼이었다.
"상빈아! 이 개자식이!"
그에 또 다른 길드원이 몸을 돌려 김민형을 노렸으나.
따악.
"커헉!"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와 함께 그대로 가슴이 관통당하는 남자.
김민형을 노리다 시문이 연성한 흙가시에 고스란히 등을 내준 것이다.
길드원들이 순식간에 쓰러졌지만.
"이 새끼!"
최기열의 관심은 거기까지 닿지 못했다.
신경을 쓰지 못했다는 말이 더 적절하겠지.
A급 특성인 근력에 힘, 민첩 위주의 스탯 분배, 그리고 B급 이상의 장비들까지.
이 모든 것이 고작 한 손에 막힌 상태다.
"대체 어떻게 이런 힘을 내는 거냐고!!"
최기열로선 울부짖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글쎄...."
그런 최기열을 바라보던 시문의 한쪽 입가가 슬쩍 올라갔다.
"난 잘 모르겠는데?"
"뭐...?"
벙찌는 최기열.
어딘가 익숙한 말인 것이다.
이내.
"이 개자식이이!!"
자신이 방금 시문에게 했던 말과 똑같다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직 소리칠 기운이 있나 봐?"
꾸드득.
곡선을 그리는 시문의 입가와 함께 곡선을 그리는 모닝스타.
"...."
최기열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입을 뻥긋거리며, 뚝 부러진 꽃처럼 꺾여 버린 모닝스타를 멍하니 바라봤다.
"이제야 좀 마음에 드는 얼굴이네. 아, 너무 억울해하진 마라?"
그리고 그것을 무심히 들어 올리는 시문의 모습이.
"먼저 덤빈 건 너니까."
콰직!
이번 아레나에서 최기열에게 허락된 마지막 장면이었다.
* * *
뜨거웠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그럴 수밖에.
열기의 원인이었던 3인방이 모조리 죽어 버리지 않았나.
"음."
시문은 머리통에 모닝스타가 박힌 최기열의 시체를 한번 보고는 자신의 오른팔을 내려다봤다.
그러자 작은 정보창이 떠올랐다.
[오우거의 신체조직]
완성도 : 15%
연성된 오우거의 신체조직.
오우거의 신체 능력을 재현할 수 있다.
하얗고.
다소 말랐다고 볼 수 있는 팔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내용.
하나 두툼한 모닝스타를 우그러뜨린 위력은 여전히 정보창과 함께 오른팔에 서려 있었다.
'이게 고작 15%란 말이지?'
-그렇다니까!
가슴 정중앙에서 웅웅거리는 이명.
-거기에다, 본래라면 오빠 팔은 오우거처럼 우락부락 커져야 했어. 내가 그래서 오빠의 인체 연성을 엄청 반대한 거라고.
현자의 돌은 연신 신이 난 목소리로 떠들어 댔다.
-자격 보유에 대한 위험도도 그렇지만, 이런 존잘의 팔이 오우거처럼 되면... 우웩! 옵시디언 태블릿이 외형 유지를 조건을 내밀지 않았으면, 융합 요청은 받지도... 헙!
뚝 끊어지는 현자의 돌의 목소리.
그러나 비밀을 들킨 아이처럼 콩닥거리는 박동 소리는 고스란히 시문에게 전해졌다.
시문은 작게 웃으며 속삭였다.
'괜찮아. 나도 그 부분은 마음에 드니까.'
인체 연성을 한 부분만 괴상하게 변해 버리면 시문의 입장에서도 곤란했다.
덕지덕지 이어 붙인 키메라와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중요한 건 옵시디언 태블릿을 현자의 돌과 융합한 덕분에.
인체 연성에 대한 어떤 부작용도 겪지 않는다는 거였다.
"슬슬 피곤하네."
전신으로 조금씩 피로가 밀려든다.
연성력 고갈 현상이었다.
시문은 오른팔에 지속적으로 주입하던 연성력을 차단했다.
그러자 작은 경련과 함께 오른팔에 연성된 [오우거의 신체조직]과 정보창이 사라졌다.
'참, 있다 없어지니까 뭔가 어색한데.'
마치 방금 자다 일어난 것처럼.
뭔가 팔이 찌뿌둥하고 힘이 들어가지 않는 느낌이었다.
인간으로서 오우거의 근력을 소유했던 일종의 후유증이겠지.
아쉬운 마음으로 손을 몇 번 접었다 편 시문은 고개를 들었다.
"헛!"
앞에 있던 작은 체구의 남자와 눈을 마주치자, 그가 흠칫하며 몸을 움츠렸다.
그에 시문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쪽이 마지막 팀원이죠?"
"예! 맞습니다!"
끄덕끄덕.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남성.
그에 시문은 차분한 눈빛으로 되물었다.
"인사 이전에 한 가지만 물어볼게요. 왜 절 도우셨습니까?"
모닝스타를 우그러뜨리기 전의 상황을 기준으로 보자면.
분명 시문보단 전갈 길드 3인방에게 붙는 것이 현명했다.
장비부터 인원수까지.
모든 부분에서 최기열 일행이 유리했으니까.
잠시 침묵하던 김민형은 조심히 입을 열었다.
"저놈들은 그쪽이 오기 전에 저한테도 똑같이 행동했었습니다. 전갈 길드가 좀 유명하지 않습니까?"
"아아, 그럼 저와 같은 처지였... 음?"
그를 보던 시문의 눈초리가 살짝 가늘어졌다.
"근데 우리, 어디서 만난 적이 있던가요? 어딘가 낯이 익는데."
남자는 연신 시문의 눈치를 보며 말을 흐렸다.
"저 그게... 튜, 튜토리얼에서...."
"튜토리얼? 아!"
시문은 손뼉을 치며 남자를 가리켰다.
"냇가에서 저와 싸우신 분이군요."
"그, 그렇습니다!"
90도로 넙죽 고개를 숙이는 김민형.
다소 과장된 몸짓에 시문은 잠시 당황했으나 그뿐.
곧 작은 미소를 띠었다.
'눈치가 빠른 사람이네.'
시문은 이제야 전갈 3인방을 친 김민형의 행동이 납득되었다.
튜토리얼에서 이미 자신을 만나 봤다면.
저 3인방에게 붙을 생각은 들지 않을 테니까.
'그러고 보니 이 사람, 실력도 제법이었지.'
B급 특성인 재빠른 몸놀림의 소유자.
하지만 특성을 제외하고도.
김민형의 전투 센스는 튜토리얼에서 만난 이들 중, 티밍러 강호영을 제외하면 최고였다.
다른 참가자들은 자신을 상대로 일격도 버티지 못했으니까.
김민형은 다시 한번 고개를 푹 숙였다.
"성삼 길드의 김민형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성삼 길드요?"
시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성삼의 이름 때문이 아니었다.
'성삼이면 유정이의....'
비록 15살 때의 모습이었지만.
어린 나이에도 청순한 외모로 또래 남자애들은 물론, 어른들에게도 사랑받던 한 소녀가 떠올렸다.
동시에.
그녀가 저질렀던 일도.
"저, 저기...."
시문의 표정이 어두워져서일까.
김민형은 안절부절못하며 연신 시문의 눈치를 봤다.
"혹시 제가 뭔가 말실수라도...."
"아닙니다. 잠시 딴생각이 들어서."
털털하게 웃은 시문은 손을 내밀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둘이서 잘해 보죠."
"예? 둘이서요? 하지만 이번 종목은 5인 협력인데...."
"저 셋은 매칭된 후에 죽었으니, 새로 매칭해 주진 않을 거예요."
"그, 그럴 수가!"
경악하는 김민형.
그러나 무심하게도.
[참가 인원이 모두 매칭되었습니다.]
시스템은 시문의 말대로 움직였다.
[아레나를 시작합니다.]
[제한 시간은 30분입니다.]
숲 특유의 습기와 귀뚜라미 소리, 바람 등이 갑작스레 느껴진다.
주변 환경이 현실화된 것이다.
"그럼 얼른 출발하죠. 다른 팀보다 숫자도 부족하니."
"네, 넵...."
시문은 즉시 윤곽이 표시된 목표 지역으로 걸음을 옮겼고.
다소 풀이 죽은 김민형이 서둘러 그 뒤를 따랐다.
그때.
[성좌 제우스가 당신을 주시합니다.]
[성좌 검은 염소가 당신의 행동에 짙은 만족감을 표합니다.]
'응?'
아레나가 시작되어서일까?
성좌들의 갑작스러운 관심에 시문은 고개를 갸웃했다.
'제우스가 아직도 날 주시한다고? 거기에다 검은 염소까지?'
전생의 기억으론.
성좌들은 자신들이 후원하는 플레이어도 매번 주시하지 않았다.
한데 왜 고랭크도 아니고 고작 배치고사를 치르는 자신에게 왜 두 성좌가 관심을 보인단 말인가?
물론 그 이유를 알아차리는 데엔.
[목표 지역은 '잠식된 고블린의 교두보'입니다.]
[제한 시간 내에 어떤 식으로든 목표 지역을 뚫어 내십시오.]
[제한 시간 29:59]
"잠깐. 교두보라고?!"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제10화
10화. 배치고사 (2)
'교두보라니... 거짓말이지?'
허공에 떠오른 정보창에 시문의 눈가가 가늘게 떨렸다.
교두보.
흔히 '검문소'라 부르는 이 교두보는 맵에 따라 환경이나 모양이 조금씩 다를 뿐.
기본적으로 다리 위의 진지라는 형태를 지녔다.
디펜스라면 교두보에 소환된 플레이어들의 다리를 넘으려는 적을 막아 내고.
오펜스라면 역으로 교두보를 뚫고 다리를 넘어야 하는 입장.
시문 역시 수많은 플레이어들의 방송과 김시혁, 고말숙의 경험담으로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문제는.
'이게 왜 여기서 나와?'
검문소 형태는 최소 플래티넘 이상의 랭크에서 등장한다는 것이다.
브론즈, 끽해야 실버 랭크 수준에 나타날 맵이 아니란 말이다.
'설마 내 MMR 때문인가?'
그렇게 고민하던 시문은 결국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너무 과한 비약이야.'
아무리 MMR 시스템이 공명정대하다지만.
한 사람 때문에 아레나 난이도를 확 높여 버리는 미친 짓은 하지 않았다.
하려면 적어도 플래티넘 랭크 이상의 플레이어들과 매칭시켰....
'잠깐.'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시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맞아, 매칭!"
"예?"
뒤를 따라 걷던 김민형이 의문을 표했지만.
시문의 신경은 차마 거기까지 쓰이지 못했다.
'따지고 보면 이상할 것도 없잖아?'
아레나의 진행 인원을 총 50명으로 뽑아 5인 협력이란 조건이 걸렸을 뿐.
애당초 5인씩 맺어진 팀끼리 클리어 시간을 다투라는 내용은 없었다.
즉, 먼저 클리어한다고 순위를 세우진 않는다는 것.
거기에다 보자마자 시비를 털어서 그렇지.
'애당초 전갈 3인방은 배치고사 구간에 매칭될 수준이 아니었어.'
당장 리더 격인 최기열만 따져도 여기 수준이 아니었다.
김시문이라는 8톤 트럭을 만나서 그렇지.
수준만 따진다면 무조건 더 높은 랭크로 올라갈 인재란 말이다.
'김민형 씨도 그렇고, 이 팀의 전체적인 수준 자체는 배치고사 수준을 넘어섰어.'
만약 다른 팀들도 목표 지역이 [잠식된 고블린의 교두보]라면.
이쪽 팀이 무조건 1등일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시문은 이마를 턱 짚었다.
'다른 매칭팀들의 목표 지역은 [잠식된 고블린의 교두보]가 아닐 수도 있어.'
그러니 이런 팀 매치에서 흔하게 나오는 선 클리어 순위가 없는 것이다.
"하... 진짜 공명정대한 매칭이긴 하네."
너무 공명정대해서 짜증이 날 정도다.
물론 그렇다고 전갈 길드 3인방을 처리한 것에 미련을 가지진 않았다.
가질 필요도 없었다.
'그런 팀원은 없는 편이 더 나으니까.'
어느새 가까워진 다리 초입.
그 너머로 드문드문 달린 횃불과.
"키킥!"
"키랏."
고블린 특유의 괴상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시문은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대신 보상 하나는 확실하겠지.'
매칭의 공명정대함은 보상으로도 이어진다.
타 팀들보다 어려운 조건이라면 클리어 보상도 타 팀들보다 높겠지.
'오히려 좋아.'
레벨만 낮을 뿐이지.
이미 심해에 있을 종자가 아닌 시문에겐 오히려 성장을 장려하는 상황이다.
실제로 갤럭시 아레나 역시 자신이 얼른 이 구간을 벗어나길 바라고 있겠지.
'싹 쓸어버리고 킬 보상까지 전부....'
"아."
잠시 탄식한 시문은 고개를 돌렸다.
"저기, 김민형 씨?"
"예."
뒤에서 가만히 대기하던 김민형이 고개를 들었다.
"혹시 킬 욕심이 있으신가요?"
"킬이요?"
눈을 끔뻑하는 김민형.
이내 다리 너머를 슥 훑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제 막 튜토리얼을 통과한 몸으로 고블린은 무리죠. 안전하게 클리어 보상만 챙겼으면 합니다."
김민형은 알까.
"다행이네요. 그럼 거기에 맞춰 공략을 짜 보죠."
방금 8톤 트럭이 잠시 그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는 걸.
* * *
키킥.
기분 나쁜 웃음소리.
정확히는 고블린 특유의 비음이 섞인 소리였다.
"키킥! 교대 시간이다!"
"킥, 신난다!"
경계를 서던 두 고블린이 환호를 지르며 감시탑을 내려간다.
"킥, 경계 싫다. 지루하다."
"멍청한 소리! 여기가 났다. 지금 대장, 킥! 기분 안 좋다."
"맞다. 바보들. 혼나겠다. 키킥."
교대한 고블린들은 저 멀리 진지로 복귀하는 동족들을 보며 비웃음을 걸쳤다.
이내 몸을 돌려, 각자의 위치로 자리를 잡으려던 그때.
휘이이.
"킥?"
갑작스런 산들바람에 두 고블린은 고개를 갸웃했고.
우드득.
순식간에 목을 휘감아 온 무언가에 그대로 즉사했다.
"읏차."
분명 빠른 속도로 낙하하며 두 고블린의 목을 꺾었을 텐데.
기습자인 시문의 발바닥에선 어떤 소음도 일어나지 않았다.
"후."
시문은 양팔에 고블린 머리통을 낀 채, 제 다리를 내려다봤다.
[블랙팬서의 신체조직]
완성도 : 12%
연성된 블랙팬서의 신체조직.
블랙팬서의 신체 능력을 재현할 수 있다.
두 다리 위로 선명하게 떠오르는 정보창.
플래티넘 랭크부터나 등장한다는 종족.
수인족 중에서도 은밀하기로 소문난 블랙팬서의 신체조직이었다.
오우거보다 상위 종족이라 그런지 완성도 자체는 3%나 떨어졌지만.
워낙 종이 우수하다 보니 완성도가 부족해도 신체 능력은 상당했다.
그 결과가 바로 이것 아니던가.
'설마 그 예민한 고블린이 아예 눈치조차 못 챌 줄은 몰랐어.'
흔히 고블린하면 누구나 때려 팰 수 있는 종족으로 오인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아예 틀린 것은 아니었다.
많이 쳐 줘야 10~13살 정도에 불과한 키.
빼빼 말라 근육이 드러나는 체구는, 실제로 일반인도 무기만 든다면 충분히 처리할 수 있다.
정규 아레나가 시작된 전생에서도 모두 확인된 사실 아니던가?
하지만 고블린 특유의 예민한 감각과 혈독이 곁들어지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특히 소리 하나는 기똥차게 듣던 놈들인데.'
엘프처럼 기다란 귀 때문일까.
뛰어난 청력을 지닌 고블린들은 상상 이상으로 예민해, 어지간한 기습은 통하지도 않았다.
물론.
'블랙팬서의 은밀함에 비빌 수준은 아니었나보군.'
오우거마저 뛰어넘는 종의 차이를 고작 고블린이 어찌할 순 없는 노릇이겠지.
시문은 양팔에 낀 두 고블린의 사체를 조심히 놓았다.
"확실히 다중 인체 연성은 아직 빡세네."
현재 시문은 다리에 [블랙팬서의 신체조직]만 연성해 둔 것이 아니었다.
양팔을 들어 올리자, 그 위로 [오우거의 신체조직]의 정보창이 떠올랐다.
시문은 그곳에 표기된 '완성도 : 7%'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완성도를 7%까지 줄였는데도 유지가 이렇게 힘들 줄이야."
그러자 명랑한 목소리가 가슴에서 울렸다.
-오빠, 다중 인체 연성을 성공했다는 것 자체에 대한 놀람은 없는 거야?
현자의 돌이었다.
"아레나 참가하기 전부터 연습했잖아."
-인체 연성은 연습 안 했잖아.
"뭐 그거나 이거나. 어차피 오른손으로 쓰던 걸 왼손으로 쓰는 차이밖에 없잖아."
별거 아니라는 듯 고개를 으쓱하는 시문.
-....
그에 현자의 돌은 침묵에 빠졌다.
정확히는 얼굴이 보이지 않아서 그렇지.
'이 오빠 진짜 미친 거 아냐?'
얼이 빠진 거였다.
'아무리 나랑 옵시디언 태블릿의 영향이 있다 해도, 결국 연성을 돕는 수단에 불과한데....'
아무리 연성에 절대적인 이점을 주는 현자의 돌이라 해도 결국 도구.
그것을 쥐고 연성하는 사용자의 능력에 따를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예전부터 느꼈지만 이 오빠, 자신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어.'
다중 연성은 다중 영창과 같은 맥락이다.
오른손으로 원을 그리고, 왼손으로 세모를 그리듯.
처음 시도해 보는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실수를 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연습 없이는 쉽게 다루기 힘든 것이 다중 영창이었고, 평생 해내지 못하는 이들도 많았다.
당연히 다중 인체 연성도 마찬가지.
'야, 옵타. 너 아무래도 주인을 제대로 만난 거 같다.'
현자의 돌은 자신과 하나가 된 옵시디언 태블릿에게 한마디 읊고는 말했다.
-그래서, 지금부터 이렇게 움직일 거야? 기습 위주로?
"아니. 벌써 연성력의 반이나 털어서 그건 불가능해."
시문은 팔과 다리의 인체 연성을 해제하곤 고블린들의 시체를 하나씩 세웠다.
이어.
따악.
푸욱.
감시탑의 바닥을 연성해 고블린들의 시체를 꼬챙이 꽂듯 세웠다.
멀리서 본다면 가만히 경계를 서고 있는 모습으로 보이리라.
"김민형 씨, 이제 오면 됩니다."
감시탑의 정리를 끝낸 시문이 밖으로 손짓하자.
"헙!"
박제된 두 고블린에 기겁한 김민형이 입을 틀어막으며 들어왔다.
"소, 소음도 없이 처리하셨군요."
"예. 아! 바닥의 피는 밟지 마세요. 착용 장비가 C급이시긴 해도 혹시 모르니까요."
"옙."
김민형은 조심스럽게, 여전히 경악이 담긴 눈초리로 시문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러곤 물었다.
"한데... 정말 될까요?"
불안감이 가득 찬 김민형의 물음에 시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기습하기 전에 대충 훑어봤는데, 놈들의 무장은 돌과 독침이 전부더군요."
앞서 블랙팬서의 신체 능력을 연성한 시문은 이미 교두보의 정찰을 끝낸 상황이었다.
"그걸로는 민형 씨의 갑옷을 뚫을 수 없으니, 작전대로 하시면 됩니다."
자신감 있는 시문의 목소리에 김민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가죽 재질이긴 해도.
C등급 제작 갑옷은 고작 돌과 독침에 뚫릴 정도는 아니었다.
"그럼 가시죠."
"저...."
달려 나가려던 김민형이 몸을 멈칫했다.
"근데 혼자서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김민형이 주춤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바로 시문이 짠 작전 때문이었다.
시문이 세운 작전은 간단했다.
김민형이 최대한 어그로를 끌어 고블린들을 불러모으면.
시문이 알아서 전부 처리하는 것.
"예. 괜찮습니다."
"하, 하지만! 제가 고작 2레벨밖에 되지 않아도, 손이 하나 더 있는 게...."
김민형의 얼굴엔 불안감과 미안함이 가득했다.
당연했다.
이미 튜토리얼에서 시문의 힘을 겪기는 했으나.
결국 이제 막 튜토리얼을 끝낸 같은 처지의 플레이어 아닌가?
"어그로만 잘 끌어 주면 충분합니다. 민형 씨에게 어그로가 분산될수록 저도 안전해지니까요."
"...알겠습니다. 혹여나 시간이 되시면 꼭 성삼에 방문해 주세요. 반드시 사례하겠습니다."
"그러죠."
가볍게 웃으며 답하는 시문.
당연히 성삼 길드에 갈 일은 없을 터였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김민형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곤 곧장 뛰쳐나갔다.
그러곤.
"우아아아아악!!!"
어둑한 저녁.
해가 거의 다 저물어 가는 다리 위로 우렁찬 함성이 울렸다.
홀로 함성을 지르며 질주하는 인간은 당연히 어마어마한 눈길을 끌었고.
댕댕댕!
"키킥!"
"인간! 인간이다!"
"인간이 쳐들어왔다!!"
시끄러운 종소리와 함께 고약한 말소리가 밀려들었다.
"저기다!"
"키킥! 혼자? 혼자다!"
"인간, 미쳤다! 쏴라!"
기다란 끈으로 만들어진 슬링과 새총에서 다듬어진 돌멩이가 날아들고.
기다란 대롱에선 작은 독침들이 쏟아진다.
물경 50에 달하는 고블린들이 사방에서 공격하는 것이다.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돌멩이와 독침들.
하나.
타다다닥.
C급 갑옷과 맞닿은 그것들은 그저 콩 볶는 소리만 낼 뿐이었다.
"으아아아아!! 이것밖에 안 되냐! 머저리들아!"
김민형은 그것을 온몸으로 받아 내며, 저 앞에 표시된 목표 지역을 향해 달려 나갔다.
이어.
"키키킥! 막아라!"
"킥! 인간. 못 지나간다!"
조잡한 나무 갑옷을 입은 10여 마리의 고블린들이 죽창을 꼬나쥐고 김민형의 앞을 가로막는다.
"인간 갇혔다!"
"죽여라! 킥!"
뒤와 옆, 그리고 앞까지.
순식간에 60마리의 고블린들에게 둘러싸인 김민형.
B급 특성인 재빠른 몸놀림과 높은 민첩 덕분에 날래게 피하고는 있었지만.
타다다다닥!
'으으으! 이젠 슬슬 힘든데....'
김민형의 움직임은 점차 느려졌다.
당연했다.
결국 2레벨에 불과한 그가 무려 60마리의 고블린들의 공격 세례를 버티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애당초 그의 직업계통 자체가 방어보단 공격에 치중되어 있지 않는가?
결국.
빡.
"아악!"
갑옷이 미처 지켜 주지 못하는 목덜미에 돌멩이가 파고들었다.
그러나 김민형은 이를 악물고.
최대한 목 윗부분을 감싸고 회피하며 전방으로 돌진했다.
"키킥!"
"죽는다! 인간!"
그런 김민형 앞에 일자로 진형을 잡은 고블린들이 죽창을 치켜세운다.
B급 특성이 곁들어진 속도라면 그대로 꼬챙이가 될 상황.
그런데도 김민형은 성난 황소처럼 질주했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더... 더!'
곧 다가올 8톤 트럭의 파괴력.
그것을 몸소 경험해 본 김민형이었기에, 온몸을 내던지는 것이다.
"지금입니다아아아!!"
그 믿음에 화답하듯.
쿠르르릉!
하늘이 진동했다.
"키, 키킥?"
갑작스러운 천둥소리에 고개를 드는 고블린들.
그런 그들의 시야에, 허공을 가르는 작고 하얀 막대가 잡혔다.
이어.
"내리쳐라."
맑은 목소리가 그 뒤를 따랐고.
"아스트라페."
하얀 막대는 수십 줄기의 벼락이 되어.
콰자자자작!!
메마른 대지를 적셨다.
제11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