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1화 각성
200X년 *월 **일.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한 20년 전쯤이다.
어느 누구도 인지하지 못한 순간 세계 곳곳에서 훗날 게이트(Gate)라 불리게 된 검은 구멍, 균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각국 정부는 균열에 대한 일체의 정보를 통제하기 시작했지만 세상에 영원한 비밀이 어디 있겠는가?
인터넷을 통해 음모설의 일종으로 조금씩 알려질 때쯤 시내 중심가에 균열이 출현하면서 결국 언론에 의해 그 정체가 까발려지게 되었다.
"자네 그 얘기 들었나? 화곡사거리 전화국 뒤에 검은색 구멍이 생겼대."
"검은...색 구멍?"
"그래. 케이큰가, 뭔가 하는 거?"
"이 친구야. 케이크는 먹는 거고 게이트 말이야. 게! 이! 트!"
"아! 게이트."
"그래."
남자가 주변을 살피며 나직이 말했다.
"내가 친한 친구에게 들었는데 외계인이 만든 거래."
"그래? 난 정부의 비밀 실험장이라고 들었는데."
게이트에 대한 온갖 유언비어가 난무했지만 정작 주인공인 게이트는 조용하기만 했다.
대신 국가가 움직였다.
각국은 특수부대를 중심으로 팀을 구성해 게이트에 들어가려는 시도를 펼쳤다.
하지만 결과부터 말하면 모두 실패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한 막이 그들의 출입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한 달여쯤 지났을까?
게이트에 대한 관심이 처음에 비해 조금 지지부진해지고 있을 때 천지가 개벽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후일 게이트 브레이크라 명명되는 사건이 터진 것이다.
"저, 저게 뭐야?"
"으악! 괴, 괴물이다."
"모두 피해!"
"으아악!!"
소설과 같은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몬스터가 게이트에서 쏟아져 나와 사람들을 도륙했다.
경찰이 출동했고 군대가 움직였지만 괴물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우리나라에서만 수만 명이 죽고 수십만 명이 부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나는 인터넷을 통해 그 참혹했던 현장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었는데 후에 들어 보니 북한이라는 특수성, 즉 육군 병력이 비정상적으로 많았던 덕에 다른 나라에 비해 우리나라는 피해를 적게 입었다고 했다.
TV에 나온 과학자들이 말하길 현대의 무기 체계로 몬스터를 상대하는 데에는 명확한 한계가 있다고 했다.
패널 중 한 사람이 핵을 사용하자고 했지만 그것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했다.
사람이 없는 오지(奧地)라면 모를까, 도심 한복판에 핵을 터트릴 순 없는 법이니까.
각설하고 게이트의 출현으로 인해 세상은 빠르게 무너져 갔고 설상가상으로 본디 인적이 드문 아마존 밀림 같은 곳은 아예 인간의 출입 자체가 불가능한 지역이 되어 버렸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사람들이 인류의 종말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할 무렵,
거짓말처럼 희망이라는 단어가 세상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각성자, 일명 헌터라 불리는 이들이 세계 곳곳에서 나타난 것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평범했던 사람이 갑자기 각성을 하면서 몬스터를 사냥하기 시작했고 곧 인류의 구원자로 등극했다.
수십 발의 총알에도 끄덕하지 않던 몬스터가 각성자의 칼날에 썰려 나갔고 그들의 마법에 박살 났다.
게이트 브레이크가 일어나고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수억 명의 인구가 줄었지만 인류는 각성자의 등장으로 인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고 게이트에 대한 정보 역시 각성자들에 의해 조금씩 알려지게 되었다.
세상은 곧 각성자를 중심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게이트]
1. 게이트 혹은 던전이라 불리는 검은색 구멍이다.
2. 게이트 안에는 몬스터가 존재한다.
3. 몬스터를 사냥하면 종종 마석을 얻을 수 있다.
4. 마석은 인류의 새로운 에너지원이다.
5. 정기적으로 몬스터를 소탕하지 않으면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난다.
6. 극악의 확률로 보스 몬스터가 출현할 때가 있다.
7. 보스 몬스터를 잡으면 해당 게이트가 소멸된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헌터의 출현에 맞물려 사람들은 점차 게이트의 출현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바로 마석 때문이다.
일례로 손바닥 크기의 A급 마석에서 중급 도시가 사용할 수 있는 한 달 치 전력을 뽑아냈다고 하니 두말하면 잔소리다.
가장 먼저 움직인 곳은 당연히 기업이었다.
성삼, 대현, 지엘 그룹을 선두로 기업들이 헌터를 포섭해 마석을 선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업에 비해 한발 늦었지만 정부 역시 병역 혜택, 공무원 임용 등과 같은 정책을 바탕으로 헌터를 포섭하기 시작했다.
이제 국력의 척도는 첨단 무기나 군인의 숫자와 상관없이 해당 국가가 보유한 각성자의 숫자에 따라 민감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물론 군인과 경찰이 사라졌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게이트 발생 이전과 같이 각자의 위치에서 예전처럼 사회의 안전과 치안을 담당했다. 각성자의 숫자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헌터넷에 따르면 전 세계 인구의 0.1%, 약 5백만 명 정도가 각성자라고 밝혔는데 이들 전원이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헌터기 아니다.
그것은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각성 스킬이 요리나 그림 혹은 음악이나 조각과 같은 비전투 계열이라면 그는 몬스터를 사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참고로 헌터를 등급으로 나누면 이렇게 구분한다.
S급 : 마스터 레벨 500 이상
A급 : 최상급 헌터 레벨 300-500
B급 : 상급 헌턴 레벨 200-300
C급 : 중급 헌터 레벨 100-200
D급 : 하급 헌터 레벨 30-100
E급/F급 : 최하급 헌터 레벨 1-30
위에서 언급한 레벨은 그저 수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정한 것일 뿐 절대적 기준이 아니다. 특별한 스킬을 보유했다거나 아이템을 소유했다면 강함의 척도가 달라질 수 있었다.
한편 전 세계 수많은 학자들이 각성에 대해 조사하고 연구했지만 안타깝게도 각성의 조건을 알아내지 못했다. 그저 마나의 선택을 받았다는 어느 학자의 가설이 가장 신빙성이 있어 학계의 정설이 되었다.
얼마 전,
정확히 말하면 여느 날처럼 학교 화장실에서 모닝 응가를 보고 있던 중이었다.
육체와 정신이 쾌변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순간 예상치도 못하게 내게 각성의 시간이 찾아왔다.
-[당신은 마나의 선택을 받았습니다.]
"어, 어... 어?!!"
-[당신은 각성했습니다.]
-[블링크 스킬을 얻었습니다.]
-[레벨이 생성되었습니다. 상태 창이 활성화됩니다.]
"내가 각성을... 했다고?"
각성자만이 들을 수 있다는 시스템의 음성이 귓가에 들려왔고 다음 순간 마치 게임 속 캐릭터처럼 나에 관한 정보가 수치화되어 눈앞에 나타났다.
<상태 창>
이름 : 최선우
레벨 : 1
생명력 : 130/130 마력 : 10/10
힘 : 11 체력 : 13 민첩 : 14
지혜 : 10 지능 : 12 행운 : 5
<보유 스킬>
블링크(D)
"저, 정말 상태 창이잖아!"
나는 쉬는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화장실에서 나오지 못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다음 순간 들려온 또 하나의 메시지 때문이다.
-[고유 특성 분신을 얻었습니다.]
고유 특성이라니, 이게 뭐지?
난 떨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서둘러 스킬을 살펴보았다.
<고유 특성 정보>
이름 : 분신(分身)
등급 : U(Unique)
숙련도 : 1(0%)
설명 : 나와 똑같은 분신을 만들어 서로가 얻은 모든 경험을 공유한다.
사용 시간 : 30분
재사용 시간 : 24시간
*현재 사용자의 숙련도가 낮아 사용 시간은 30분으로 제한된다.
헐, 이거 완전 대박인데!!
유니크 등급의 고유 특성이라니, 이런 건 난생처음 봤다.
어째서 이런 것이 알려지지 않은 거지?
'설마?!'
각성자 세계에서도 경쟁자끼리 우위를 점하기 위해 진짜배기 정보들을 숨기고 있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사실인 것 같았다.
그로부터 얼마 후,
교실이 발칵, 그 후에 학교가 발칵, 그리고 담임 쌤의 연락을 받은 우리 가족이 발칵 뒤집어졌다.
당연한 일이다.
평범하던 친구가, 존재감 없던 제자가, 사랑하는 아들이 로또 1등보다 어렵다는 각성자가 되었으니까 말이다.
"진짜야?"
"그래 선우가 화장실에서 각성했대."
"에이, 설마...."
"아니겠지."
"미친! 뻥이지? 장난치지 마."
"사실이래. 지금 선생님들도 난리 났어."
"선우는 어디 있어?"
"담임이랑 교장실에 갔대."
"...!!"
"대박."
교실에는 잠시 동안 정적이 흘렀다.
그제야 선우가 각성을 했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한 모양이다.
"선우가 뭘로 각성했대? 탱커, 힐러 아니면 딜러?"
"내가 어떻게 아냐? 당연히 본인만 알겠지."
"마법사나 힐러가 되면 대박이겠지?"
"당연하지. 그건 귀족 직업이잖아. 대신에 스킬이 중요하지만 말이야."
"맞아. 스킬이 중요해. 이따 어떤 스킬을 받았는지 선우에게 물어볼까?"
"이 바보야."
"왜?"
"너라면 가르쳐 주겠냐?"
"하...긴."
인터넷에 떠도는 각성자 지침이 있다.
거기에 적힌 내용 중 가장 첫 번째 지침이 바로 자신의 능력을 100% 공개하지 말라는 것이다. 더욱이 몇 년 전 하급 헌터 한 명이 중급 헌터의 스킬 정보를 알아낸 후, 그들을 무참히 살해한 사건이 발생한 이후 헌터의 개인 정보는 철저하게 보호되고 있었다.
"혹시 전투 계열 스킬을 얻었을까?"
"만약 전투 계열이라면 대박 중의 초대박이겠지?"
"당연하지."
"야! 야! 오버들 하지 마. 선우가 미술이나 요리사 같은 비전투 계열로 각성했을지도 모르잖아."
"그래도... 각성한 게 어디냐?"
"하긴! 비전투 계열이라도 돈만 많이 벌더라. TV에 나오는 백중원 아저씨만 봐도 그렇잖아. 암튼 졸라 부럽다."
"나두."
* * *
<서울 국립 헌터 아카데미>
최초로 설립된 헌터 교육 시설 중 하나이자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6대(서울, 경기, 충청, 경상, 전라, 제주) 국립 헌터 교육 시설 중 하나로 20세 이전에 각성한 사람은 무료로 다닐 수 있다. 시설이나 교육 수준이 사립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고 정평이 나 있다.
"하암~."
벌써 아침인가?
창문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에 눈이 부시다.
난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침대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러곤 한쪽 벽면에 자리한 커다란 브로마이드를 향해 경례를 올렸다.
"충성~~!"
브로마이드 속의 인물은 평범하게 생긴 중년 남자다.
하지만 그의 정체를 알면 누구도 그를 평범하다고 말하지 못한다.
남자의 이름은 정주휘, 한국이 보유(?)하고 있는 유일한 S급 헌터다.
참고로 전 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500만 명의 각성자 중에 일명 국가급이라 불리는 마스터가 있다. 이들은 게이트가 등장하고 가장 먼저 S급에 오른 여덟 명의 헌터를 가리키는데 그들의 면면은 이렇다.
-조나단 케네디(미국)
-메리 엘리자베스(영국)
-하인리히 슐츠(독일)
-바바리안 콜(러시아)
-왕웨이(중국)
-고바야시 히로(일본)
-바네사(인도)
-정주휘(한국)
헌터넷에 따르면 저들 8인 외에도 극소수의 마스터가 존재한다고 하는데 공식적으로 밝혀진 바가 없다. 이는 마스터 한 명이 전술핵 이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언젠간 나도 브로마이드 속 저 형님처럼(사실은 아버지와 비슷한 연배지만)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는 헌터가 되고 싶었다.
돈과 명예 그리고 미모의 여자 친구~~♡♡
난 옷걸이에 걸려 있는 교복을 만지작거리며 잠시 즐거운 상상을 떠올렸다.
암튼 찬란한 미래를 위해선 열심히 해야겠지? 헤헤헤!
"선우야, 일어났니?"
"네."
"어서 나와, 아침 먹어."
"나가요."
교복을 입고 거실로 나가자 식탁 위에 푸짐한 아침이 차려져 있다.
역시 우리 엄마, 모양은 없지만 손이 빠르고 무엇보다 맛있다.
곧이어 아버지와 여동생도 식탁에 다가와 앉았다.
"오늘이지?"
"네."
"기분이 어때, 긴장은 안 돼?"
"제가 어린앤가요. 긴장을 하게? 흐흐!"
"오~ 그래? 역시 날 닮아서 배짱이 아주 두둑해."
"아이고! 아니거든요. 선우는 날 닮았거든요. 어서 밥이나 드시죠."
"이 사람이~ 아들은 원래 아빠를 닮는 법이야."
"이보세용. 최규용 씨. 어디 가서 그런 구한말 시대 같은 얘기는 하지 마세용."
"구, 구한말 시대?"
"네엥~."
이때 가만히 지켜보던 여동생이 한마디 던졌다.
"아침부터 또 시작이야. 그만들 좀 하세요."
나는 투정 부리는 여동생을 내버려 두고 실실 웃으며 부모님을 향해 말했다.
"두 분 다 닮았거든요. 그만하시고 밥이나 드세요."
"흐흐흐, 그럴까?"
"암튼 좀만 기다리세요. 아카데미 졸업하면 내가 두 분 다 호강시켜 드릴게."
"오빠, 나는?"
"오! 나의 사랑하는 동생아. 너는... 하는 것 봐서."
"뭐래! 짜증 나."
"큭~."
오늘은 국립 헌터 고등학교에 편입하는 날이다.
마침내 내가 공식적으로 헌터 세계에 첫발을 내딛는 날인 것이다.
1492년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의 마음이 이러했을까?
나는 한껏 부풀어 오른 마음을 숨긴 채, 집을 나섰다.
"여긴가?"
국립 헌터 아카데미는 고등학교임에도 불구하고 웬만한 대학교는 명함도 내놓지 못할 만큼 컸다.
"저... 편입하러 왔는데요."
"아! 편입생?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어요."
아카데미 직원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처음 보는 앤데?"
"신입생?"
"신입생이자 편입생이겠지. 한 달 전에 학기 시작했잖아."
내 또래와 비슷한 남녀 학생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등급이 뭘까?"
"당연히 F겠지. 대부분 F부터 시작하잖아."
"중요한 건 스킬이나 특성이지."
"하긴~~."
그렇다.
각성자의 대부분이 F급으로 각성한다.
그 후 수련과 사냥을 통해 등급이 상승하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각성자의 스킬과 특성일 것이다.
"...."
나는 아카데미 직원을 따라 교실 문턱을 밟았다.
곧바로 들려오는 아이들의 목소리와 시선.
나는 태연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편입생이다."
"생긴 건...."
"여자애들 말고 남자애들에게 인기 있게 생겼네."
"큭! 동감."
"...."
이런! 유쾌한 놈들 같으니!
제2화
2화 악연
"반가워. 난 안선환이라고 해."
서글서글한 인상의 남학생이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내 이름은 최선우야. 만나서 반갑다."
"오오 그래. 최선우, 넌 등급이 뭐야?"
"F급."
"오호! 더욱 반가운데, 나도 F급이거든."
"대부분 F급 아닌가?"
"그건 그렇지. 근데 여긴 전국에서 모이는 곳이잖아. 이번에 들어온 1학년 중엔 E급도 몇 명 있다고 들었어."
"E급?"
"응. 걔들은 뭐 안 봐도 비디오지. 1, 2, 3등 확정."
"...."
안선환의 말은 반만 맞고 반은 틀렸다.
일반인의 관점에서 보면 E급 헌터만 돼도 사람의 머리를 두부처럼 으깨 버릴 수 있어서 헌터로 인정받았지만 정작 헌터 세계에선 짐꾼 역할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최하 D급은 돼야 한 사람의 헌터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F급과 E급은 헌터 개개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혹은 가지고 있는 스킬에 따라 얼마든지 역전이 가능했다.
국립 헌터 아카데미는 일반 학교와 커리큘럼이 완전 다르다.
기초 학력 수업이 있지만 이건 말 그대로 기초 수업이다.
예를 들면 몬스터를 사냥하는 헌터가 수학자가 될 것도 아닌데 사인, 코사인, 루트, 파이와 같은 걸 알아서 무엇에 쓰겠나!
그냥 사는 데 지장이 없을 만큼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 정도 할 줄 알면 수학은 패스였다.
-[하나, 둘! 하나, 둘! 앞으로 다섯 바퀴 남았다. 전력 질주!]
-[고블린은 약하지만 지능을 가지고 있다. 독을 쓰며 무리를 지어 생활하기에 결코 쉽게 봐서는 안 된다.]
운동장 구보를 시작으로 오전에는 몬스터의 종류와 그에 따른 공략방법을 배웠고 오후에는 기초 무술과 기초 마법으로 나뉘어 수업이 진행되었다.
나는 전투 계열을 선택했기에 기초 무술 수업을 듣게 되었다.
-[창(槍)은 장병기이며 백병기 중 왕이라 했다.]
-[검(劍)은 단병기이며 백병기 중 군자라 했다. 그 움직임은 구름을 헤치는 용과 같고 수풀을 헤치는 호랑이와 같아....]
-[도(刀)는 단병기이며 용맹쾌속함을 위주로 하며 맹호의 기세로 본다. 강한 순발력을 바탕으로 쪼개고, 자르고, 찌르는 등 다양한 기술을 쓰며....]
담당 교관은 십팔반무예(궁, 노, 창, 도, 검, 모, 순, 부, 월, 극, 편, 간, 과, 수, 차, 파, 투색, 백타)의 달인이었고 우리는 각자의 성향에 따라 무기를 선택한 후 가르침을 받았다. 참고로 전투 계열을 선택했더라도 기초 마법 수업을 들어야 했는데 이는 헌터라는 직업의 특수성 때문이었다.
헌터는 선두에서 몬스터와 싸우는 자들이다. 늘 예상치 못한 상황에 대비해야 했다.
이는 마법 계열 학생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들 역시 최소한의 자기 방어를 위해 기초 무술 수업을 이수해야 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1학년 때는 무엇이 되고 싶든, 무엇을 하고 싶든 간에 일단 폭넓은 경험을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길은 결국 하나로 귀결되니까요."
만류귀종(灣流歸宗).
모든 물줄기는 그 끝에 다다라 결국 바다에서 하나가 된다는 뜻이다.
정학수 교관의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국립 헌터 아카데미에 들어오길 잘한 것 같았다.
"점심시간이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그래. 선우야. 너도 같이 가자."
"오케이."
권성일과 한명신.
안선환을 통해 알게 된 동갑내기 친구들이다.
이놈들 얘기를 들어 보니 국립 헌터 아카데미 식당이 믿거나 말거나 5성급 호텔 뷔페와 용호상박이라고 했다. 나는 아직 경험해 보지 못했으니 일단은 녀석들을 따라 그저 조용하게 식당으로 이동할 뿐이다.
"어, 황기택이다."
"황기택?"
"어. 쟤가 바로 E급이래."
"오!!"
"쟤가 그 소문의 E급이었구나."
"야! 됐어. E급이면 뭐 해, 성격이 개차반이래."
"진짜?"
"그래. 오죽하면 미친 Dog라고 하더라고. 소문이 아주 자자해."
황기택은 친구인지 아니면 똘마니인지 모를 애들을 좌우에 대동한 채 명백하게 존재하고 있는 줄을 무시하고 새치기를 했다.
그것도 바로 내 앞으로 말이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뭐가?"
"여기 줄 서 있는 것 안 보여? 뒤로 가."
황기택이 묘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너. 내가 누군지 모르냐?"
"모르겠는데, 네가 누군데?"
"...."
황기택이 어이없어하자 좌우에 시립해 있던 녀석들이 성을 내기 시작했다.
"야! 꺼져."
"뭐?"
"못 들었어? 꺼지라고!"
이 녀석들은 황기택의 똘마니가 분명했다.
아주 잠깐 정적이 흘렀다.
이때 선환이 내 옆구리를 슬쩍 건드렸다.
첫날부터 일을 크게 벌이지 말라는 무언의 눈빛을 보였다.
왜 이러지?
녀석이 E급이라서?
왠지 그 이유만이 아닌 것 같았지만 이대로 물러나기엔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날 것 같았다.
"야! 야! 야! 알았어. 우리가 양보할 테니 너희들 먼저 먹어."
그때 선환이 내 팔을 잡아당기며 앞으로 나섰다.
"넌 누구냐?"
"나? 난 안선환."
"넌 좀 눈치가 있는 것 같네."
황기택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이봐. 넌 이름이 뭐냐?"
"최선우."
"최...선우. 좋아. 간만에 재밌는 놈을 봤네. 조만간 또 보자. 최. 선. 우."
녀석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걸어갔다.
"선우야. 참아.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그러니까 네가 참아라."
"그래. 참자. 참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하잖아!"
권성일과 한명신도 선환을 거들었다.
그래.
좋은 게 좋은 거다.
난 괜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조용히 식판을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난 이때까지만 해도 황기택과의 악연이 이어질 줄 몰랐었다.
* * *
"국립 헌터 아카데미 학생 여러분 반갑습니다."
정학수 교관이 칠판 앞에 서서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여러분들을 위해 깜짝 시험을 준비했습니다."
"헉!"
"아악!"
"안~~~ 돼!!"
몇몇 학생의 표정이 어두워지며 소리를 질렀지만 정학수 교관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학생들의 반응을 즐기며 싱글벙글 웃었다.
"직접 경험하지 못한 지식은 죽은 지식일 수 있습니다. 몇 달 동안 이론만 주야장천 배웠으니 오늘은 실전을 한번 경험해 봅시다."
"시, 실전요?"
"네. 하지만 실제 몬스터가 나오는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럼?"
"네, 홀로그램입니다."
"휴우."
일부 학생들 사이에서 작은 안도의 한숨이 들렸다.
하지만 홀로그램이라고 해서 절대로 가볍게 보면 안 된다. 기계가 뇌파에 연결되어 있어서 통증을 생생히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교관님. 질문이 있습니다."
"네, 말해 보세요."
"혹시 어떤 몬스터가 나오는지 알 수 있을까요?"
"하하하! 그걸 미리 말해 주면 재미가 없겠죠. 다만 한 가지 힌트를 준다면 F급과 E급 몬스터가 랜덤으로 나올 겁니다."
교수의 말에 우왕좌왕하는 친구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F급과 E급이라도 그 종류가 꽤 많았으니까 말이다.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지만 이번 시험은 말이 시험이지 앞으로 우리가 걸어가야 할 숙명을 미리 맛보게 해 주는 일종의 이벤트와 같았다.
"그럼 진행하겠습니다. 순서는 출석부 순입니다."
얼마 후,
정학수 교수의 평가가 나왔다.
"김성철 학생은 렛맨을 상대했군요."
"네."
"음! 결과부터 말하면 렛맨을 상대로 승리했어요.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사실 위력의 차이만 있을 뿐, 맞기는 누구나 공평하게 맞았다.
"하지만 다섯 번의 망설임이 있었어요. 그리고 절호의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는데 그걸 놓쳤네요. 만약 성철 군이...."
"조세린 양은 민첩 수치가 높아 보이는데, 사냥법에 문제가 있어 보이는군요. 민첩이 높을 경우 정면 승부보단 측면과 후면을 이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황기택의 차례가 왔다.
"황기택 군은 몬스터를 완전히 도륙했군요."
"네. 몬스터는 인류의 적이니까요."
-웅성웅성!
"몬스터를 도륙해? 쟤 누구야?"
"쟤 몰라? 쟤가 바로 황기택이잖아. E급!"
"아!"
황기택이 고블린 두 마리를 완전히 도륙해 버렸다는 말에 놀랍다는 반응이 튀어나왔다.
"황기택 학생은 E...급인가요?"
"네."
이때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나와 녀석의 눈빛이 마주쳤다.
왠지 비웃는 느낌이다.
"그렇군요. 그럼 황기택 군은 지금 마나가 얼마 남았죠?"
그런데 반전이 일어났다.
"마나가 바닥났죠? 고블린 두 마리를 상대하면서 그렇게 스킬을 남발했으니까 말이에요."
"...!!"
"고블린은 무리 생활을 하는 몬스터예요. 만약 한 마리가 더 있었다면 황기택 군은 큰 낭패를 당했을 겁니다. 명심하세요. 스킬을 쓸 땐 마나의 양을 늘 체크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마나 플로 상태에 빠질 수 있어요. 알았나요?"
정학수 교관은 듣기 좋게 좋은 말로 포장했지만 속뜻을 찾아보면 그를 돌려 깐 것과 마찬가지다. 필요 이상의 화려한 공격은 독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네."
황기택은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지만 그렇다고 아카데미 교관에게 대들 만큼 멍청하진 않았다.
"다음은... 최선우 군."
"네, 교수님."
마침내 내 차례가 왔다.
그런데 교관의 반응이.
"이건 나쁘지 않군요. 아니. 좋아요."
정학수 교관은 내 전투 홀로그램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좋다고 말했다.
공교롭게도 내가 상대한 몬스터 역시 고블린 두 마리였는데 간결하고 깔끔한 방식의 교과서적인 사냥에 호평을 받은 것이었다.
"황기택 군. 최선우 군의 사냥이 정석입니다. 참고하세요."
"...네."
녀석은 대답과 함께 굳은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 * *
"선우야, 같이 가자."
뒤쪽에서 들려오는 외침에 고개를 돌리자 선환이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오늘따라 웬일로 일찍 일어났냐?"
"꿈 때문에."
"꿈?"
"어! 꿈에 귀신이 나오는 바람에 잠을 설쳤더니 저절로 눈이 떠졌다."
"큭! 지금 몇 살인데 귀신 꿈을 꾸냐?"
"그러게 말이야. 참! 선우야. 너 성적표 받았어?"
"응."
"몇 등이야?"
"12등."
"헐! 대박! 성적이 또 올랐네? 대체 어떻게 공부하는 거야? 나도 좀 알려 주라."
"대박은 무슨, 그냥 열심히 하면 돼."
후후후! 선환의 반응은 이미 예상했던 바다.
사실 국립 헌터 아카데미에 들어왔을 당시 내 성적은 당연히 하위권에 랭크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게 시간이 갈수록 눈에 띌 정도로 뒤집히기 시작한 것이다.
어디까지나 내 생각에 불과하지만 이런 성장세라면 졸업할 때쯤엔 수석을 노려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이유는 다들 알다시피 내가 가진 고유 특성 때문이다.
<고유 특성 정보>
이름 : 분신
등급 : U(Unique)
숙련도 : 20%
설명 : 나와 같은 또 하나의 나를 만들어 서로가 얻은 모든 경험을 공유한다.
사용 시간 : 720분
재사용 시간 : 48시간
처음 특성을 얻었을 때만 해도 숙련도 1에 소환 가능 시간이 10분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소환 가능 시간이 12시간, 즉 720분까지 늘어났고 이틀에 한 번씩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즉 나는 이틀에 48시간이 아닌 60시간을 썼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남들에 비해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여 줘야 하지 않겠는가.
"넌 몇 등이야?"
"헤헤, 난 104등."
선환인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반타작은 했어."
"그래도 열심히 했네. 104등이면 저번에 비해 10등은 올랐지?"
"응."
"잘했다. 하지만 졸업 후에 좋은 길드에 들어가려면 좀 더 열심히 해야겠다. 50등 안에는 들어야지."
"그러게 말이야."
우리는 자잘한 수다를 나누며 서둘러 야외 수련장으로 이동했다.
오늘은 홀로그램이 아닌 첫 실전이 있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제3화
3화 첫 실전에서 일어난 일
"4조! 최선우, 안선환, 김수진, 조은지 그리고 황기택."
아! 젠장.
막판에 황기택의 이름이 호명되었다.
"다들 무기는 챙겼나?"
"네."
"준비했습니다."
"넵~."
"모두 챙겼습니다."
무기를 확인한 교수가 입을 열었다.
"이곳은 우리 국립 헌터 아카데미가 관리하고 있는 게이트다. 첫 실전이라 떨리겠지만 그동안 너희들이 훈련받은 대로 임하면 어렵지 않게 클리어할 수 있을 것이다."
역시 국립 헌터 아카데미답다.
최하급 게이트지만 이곳을 관리하고 있다는 말은 소유하고 있다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다들 알겠나?"
"예."
"목소리가 작다. 다들 알겠나?"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넵. 알겠습니다."
우렁찬 대답과 함께 우리들은 게이트에 진입했다.
-우우우웅!
"뭐, 뭐야?"
"와!"
"이곳이 던전 안인가?"
어느새 주위의 풍경이 바뀌어 있었다.
'정말 다른 세상이란 말이야?'
처음이라 그런지 실감이 나지 않았지만 나는 아카데미에서 배운 것처럼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커다란 동굴이 보이고 처음 보는 종류의 기괴한 식물과 암석이 눈에 들어왔다.
"기분이 좀 으스스한데."
"동굴이니까 그렇지. 하지만 긴장을 늦추면 안 돼. 여긴 게이트 내부니까."
"그래."
나와 선환의 대화에 불청객이 참여했다.
"푸하하핫. 웃기고 있네."
황기택이다.
녀석은 껄렁한 표정을 보이며 앞으로 나섰다.
"X신. 고작 F급 게이트에 쫄아 가지곤."
녀석은 한심하기 짝이 없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쟤는 뭐야?"
"수진아, 너 쟤 몰라? 쟤가 걔잖아."
"걔가 누군데?"
"E급 그리고 대화 그룹 3세."
"...!!"
대화 그룹이라면 연 매출이 수십조에 달하는 대기업으로 그룹 산하에 대형 길드까지 보유하고 있는 대기업이다.
동기생 중에 금수저 몇이 있다고 들었지만 하필이면 저 녀석이 그중 하나일 줄 몰랐다.
지금도 봐라.
여자애들의 반응에 우쭐하고 있는 표정을 말이다.
아오! 귀싸대기를 한 대 날려 주고 싶다.
"야! F급이야. F급. 이 정돈 나 혼자서도 쓸어버릴 수 있다고! 그러니까 나만 믿고 따라와. X신아. 최단시간에 돌파하게 해 줄 테니까!"
"오오~ 자신감이 대단한데!"
이때 조은지가 갑자기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녀는 마치 둘도 없는 기회를 잡았다는 표정으로 재빨리 자리를 이동해 황기택 옆에 섰다.
"그럼 기택아. 내가 네 옆자리에 있어도 되지?"
그러자 황기택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야!"
"응?"
"뒤로 가."
"뭐?"
조은지는 무슨 말이냐는 듯이 의아한 눈길로 보다가 곧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뒤로 가라고. 못생긴 게 주제도 모르고 어디서 나대!"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을 만큼 X팔린 것 같았다.
하지만 대화 그룹 3세의 힘인가?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자리를 이동했다.
"수진아. 너 김수진 맞지?"
"그런데?"
"너는 내 옆에 서도 돼. 쟤들 옆에 있는 것보단, 내 옆이 제일 안전할 테니."
"...어?"
황기택은 김수진의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그녀의 손을 잡고 누가 말릴 새도 없이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자 시야가 조금씩 확보되었다.
"어, 저기?"
슬라임 한 마리가 보인다.
자타가 공인하는 가장 만만한 상대다.
"첫 제물이군. 시작해 볼까?"
황기택은 폼이란 폼은 다 잡으며 검을 휘둘렀다.
"배시(Bash)!"
"...."
그런데 생각지도 못했던 결과가 나왔다.
슬라임이 그의 공격을 피한 것이다.
하긴 저렇게 대놓고 검을 휘두르는데 슬라임이 허수아비가 아닌 이상 그냥 맞아 주겠는가?
'...X신.'
슬라임 따위에게 죽을 일은 없을 테니, 난 황기택을 상관하지 않고 몸을 움직였다.
-서걱!
"음!"
사냥에 성공하자 소량의 경험치, EXP가 몸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슬라임 자체가 최하급 몬스터라 단 하나의 아이템도 남겨 주지 않았다.
"블레이드 윙!"
-서걱!
"이따위 슬라임쯤은~~ 후후후!"
"와아! 역시 대단하다."
"큭! 뭐 이쯤은 가볍지. 나만 믿으라고."
여자 앞이라 폼을 잡는 건가?
내색하지 않았지만 솔직히 겁나 철이 없어 보였다.
이때 서늘한 바람이 동굴 안에서 불어왔다.
'이 냄새는?'
나는 고블린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바람에 섞여 있음을 느끼고 재빨리 외쳤다.
"모두들 조심해. 고블린이야."
"고블린? 후후! 좋아. 모두 내게 맡겨."
"...!"
황기택이 또다시 앞장섰다.
하는 짓이 영 재수 없어 웬만하면 참견하고 싶지 않았지만 슬라임을 사냥하며 스킬을 난발했기에 마력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그건 다시 말해 위험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황기택, 여기서부턴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
"뭐 인마?"
"선우야!"
선환이 날 보며 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왜 나섰냐는 눈치다.
"문제 일으키기 싫어 가만히 내버려 두니까 아주 뵈는 게 없냐?"
황기택이 입술 가장자리를 살짝 치켜올리며 말했다.
"됐고. 나도 너랑 싸우기 싫다."
"근데 왜 나서 이 X신아. 그냥 입 닥치고 따라오기나 해."
"...!"
놈은 더 이상 아무것도 듣기 싫다는 듯, 앞으로 뛰쳐나갔다.
'저런 망할 X끼. 마력도 떨어진 주제에! 고블린이 슬라임과 같은 줄 아나?'
슬라임은 최약체 몬스터다. 하지만 고블린은 다르다.
놈들은 무리 생활을 하며 머리를 쓸 줄 안다.
아카데미에서도 배우지 않았는가?
방심은 죽음과 직결된다고 말이다.
"선우야, 괜찮아?"
"응... 괜찮아."
뚜껑이 열릴 뻔했지만 선환의 얼굴을 봐서 가까스로 참았다.
"갈까?"
"그래."
나는 크게 한 번 호흡하며 선환과 함께 이동했다.
고블린이 출현한 이상 더 이상의 여유는 없다.
나는 주변을 유심히 살피며 걸어갔다.
"모두 피해!"
나는 아찔한 감각을 느끼며 엎드렸다.
바로 그 순간 고블린 독침이 날아왔다.
-피슉!
"5시 방향, 고블린이다."
고블린 무리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숫자는 모두 다섯 마리!
격전이 펼쳐졌다.
그리고 결과를 말하자면 비록 우리가 승리했지만 참담했다.
상처뿐인 승리인 것이다.
마력이 떨어진 황기택이 독침에 당했는데 내가 만약 순간 이동 스킬을 사용해 고블린의 목에 단검을 쑤셔 넣지 않았다면 큰 사달이 났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더 큰 문제는 그 이후에 일어난 일이었다.
황기택은 마비가 풀리자마자 어금니를 질끈 깨물더니 몸을 와락 일으키며 소리쳤다.
"X발. 왜 나서?"
"뭐?"
"내가 해결할 수 있었는데, 왜 나섰냐고?"
"...!"
어이가 없었다.
내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최소 중상 어쩌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기껏 살려 줬더니 이게 무슨 4가지 없는 행동인가?
"최선우, 너 이 새끼야. 앞으로 내 허락 없이 절대 끼어들지 마, 알았어?"
"뭐...라고?"
"못 들었어? 귀 먹었냐?"
"...!!"
지가 대화 그룹 3세면 3세지, 이게 뭔 짓인가?
더 이상은 못 참겠다.
"야. 이 개XX야."
게이트 공략은 이미 물 건너갔다.
나는 녀석의 멱살을 붙잡고 개싸움을 펼쳤다.
하지만 싸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모두 최선우 탓입니다."
"그게 사실입니까?"
"네."
무엇보다 황당한 것은 황기택의 태도였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황기택은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감추기 위해 마치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니면서 공략에 실패할 뻔한 것이 모두 내 탓이라 주장했다.
"맞아요."
"기택이의 말이... 맞는 것 같아요."
더욱 웃긴 건 여자들의 태도였다.
다행히 선환이 나선 덕에 일단 넘어갔지만 기분이 참으로 더러웠다.
그런데 여기에 우리가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우리가 들어간 게이트에 곳곳에 국립 아카데미 측에서 설치한 캠이 숨겨져 있었다는 사실이 말이다.
다음 날 오후,
영상을 확인한 정학수 교수가 움직였다.
그는 학생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황기택의 행동을 크게 지적했다.
"이 되어먹지 못한 행동은 뭐야?"
황기택을 바라보는 정학수 교수의 눈이 매우 차가웠다.
"황기택 학생!"
"네, 교관님."
"자넨 최선우가 아니었으면 죽을 수도 있었어. 그런데 고맙다는 인사는 못 할망정 책임을 전가해? 어디서 배워 먹은 행동이야? 조은지, 김수진. 너희들도 마찬가지야."
"교, 교수님."
"죄송해요. 저희가 잘못했어요."
"왜 나에게 사과하지? 사과를 받아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닌데?"
정학수 교수가 나를 향해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최선우 학생."
"네, 교수님."
"잘했다. 정석대로 행동했어. 그리고 앞으로 저렇게 행동하는 녀석이 있으면 그냥 죽게 내버려 둬. 그게 너와 네 동료를 살릴 거야."
정학수 교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황기택의 눈에서 불길이 솟구쳤다.
"정학수 교수님!"
황기택이 살벌한 눈빛을 보이며 교수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정학수 교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국립 헌터 아카데미에서 초빙한 A급 헌터였기 때문이다.
"왜?"
정학수 교수는 가소롭다는 표정을 보이며 황기택을 향해 기세를 끌어 올렸다.
-우우우웅!!
"불만 있나?"
"윽!"
기세 싸움에서 밀린 황기택의 고개가 서서히 밑으로 숙여졌다.
하지만 난 알 수 있었다.
녀석이 얼마나 화가 났는지 말이다.
내 귓가로 '으드득' 하며 이빨 갈리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기 때문이다.
"최선우, 씨X 놈아. 이게 다 너 때문이다."
"뭐 인마?"
"X허접 X끼. 이게 다 너 때문이라고! 넌 내가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거야. 알았냐? 이 씨XX아."
"그래. 알았다. 알았어. 근데 입 냄새 나니까 부탁인데 그 주둥이 좀 닥쳐라."
"뭐!"
황기택의 폭언이 폭발했지만 나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 태연히 귓구멍을 후벼 주며 유유히 사라져 주었다.
그 이후,
녀석은 시간이 날 때마다 똘마니들을 데리고 내 앞에 나타났다.
"이봐. X선우, 잠깐 나 좀 보고 갈까?"
"꺼져."
"X선우. 오늘 한판 붙자."
"꺼져."
"오늘은 아예 자근자근 밟아 주마."
"Mi친놈."
내가 지지 않고 받아치자 황기택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그리고 옆에서 지켜보던 선환이 나를 향해 난감한 시선을 보냈다.
"기택아. 이젠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냐?"
"아니, 넌 내게 모욕감을 줬어. 이제 시작이야."
"하아."
한숨이 나왔다.
이렇게 끈질긴 녀석인 줄 알았다면 그때 그냥 한번 숙여 줄 걸 그랬나?
한번은 선환을 통해 중재안을 보내기도 했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데?"
"영상을 찍어서 보내래."
"무슨 영상?"
"네가 무릎을 꿇고 잘못했다고, 용서해 달라고 빌며 애원하래."
"됐다고 해!"
역시 대꾸할 가치도 상대할 가치도 없었다.
내가 돈이 없지 자존심이 없나!
대가리에 총을 맞은 것도 아니고 말이다.
해결책은 의외로 간단했다.
헌터가 곧 힘이고 법인 세상이다.
지가 아무리 재벌 3세라고 해도 아카데미에 있는 이상, 날 건드릴 수 없다.
고로 내가 강해지면 되는 것이다.
만약 내가 전도유망한 헌터가 아니었다면 이러한 선택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처음엔 하위권이었지만 분신 스킬로 인해 전교 상위권에 올라왔고 교수들의 평가까지 좋았다.
제4화
4화 차원 이동
오늘은 국립 마석 연구소에 견학을 가게 되었다.
연구소 견학은 일종의 수학여행과 비슷한 성격으로 특별한 재미는 없지만 필수로 참여해야 하는 그런 것이다. 하지만 이날은 내게 있어 매우 중요한 날이 되었다.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으니 말이다.
"예비 헌터들은 다들 모였습니까?"
"네."
"식사는 했습니까?"
"아니요."
"그럴 줄 알았습니다."
오늘 안내를 담당한 현동철 교수가 언제나 그렇듯 시크한 표정으로 말했다.
"여러분들을 위해 간식을 준비했습니다. 한 개씩 전달해 주십시오."
현 교수의 말에 나 역시 빵과 우유를 받아 챙겼다.
"못 받은 사람 없죠?"
"...."
무언은 곧 긍정이다.
"좋습니다. 그럼 이제 국립 마석 연구소로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버스가 힘찬 엔진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다섯 시간 후,
우리들은 도심에서 꽤나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국립 마석 연구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국립 마석 연구소>>
"어서 오세요. 반갑습니다. 이곳 국립 마석 연구소는 전국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헌터들이 사냥한 괴수들의 사체와 그 사체에서 나온 마석을 분해, 분석, 연구하는 곳으로 새로운...."
"...."
"...?!"
우리들은 가이드를 따라 연구소를 관람하기 시작했다.
"윽!"
그런데 그 순간이다.
눈앞이 깜깜해졌다.
아침에 먹은 우유 때문인가?
연구소에 도착했을 무렵부터 아랫배가 살살 아파 왔는데 갑자기 폭풍처럼 고통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서, 설마... 1년에 한 번 온다는 그분인가?'
주위를 둘러봤는데 화장실이 보이지 않았다.
"자! 이곳이 바로 제3연구실입니다. 이곳에서는 괴수의 사체를 연구하고 헌터들을 위한 장비를 만들어 내죠. 저쪽을 보시면...."
가이드의 설명이 쉴 새 없이 이어졌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그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들리지 않았다.
아니!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장이 꼬일 대로 꼬이며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난 초인과 같은 의지를 발휘해 괄약근에 불끈 힘을 주었다.
만약 조금의 틈이라도 생긴다면, 잠시라도 긴장의 끈을 놓친다면 그야말로 엄청난 사태가 일어날 것이다.
'아니야. 괜찮아. 조금만 있으면 움직일 수 있는 기회가 올 거야. 그래. 선우야. 넌 할 수 있어. 조금만! 조금만 더 참자.'
자책감이 들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무조건 화장실에 갔어야 했다.
한 시간, 아니 10분만이라도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이렇게 스스로 자책하고 있는데 하얀 가운을 입은 한 떼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연구원 같은데, 모두들 상기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어디론가 빠르게 이동하고 있었다.
'뭐지?'
저들이 풍기는 묘한 분위기에 의문이 들었지만 그건 1초도 지나지 않아 안드로메다를 향해 훨훨 날아갔다.
마치 벼락이 떨어지는 것 같은 끔찍한 고통이 몰아쳤기 때문이다.
하나님, 부처님, 알라시여.
아! 누구라도 좋으니까 제발...요.
"이번에 우리 국립 마석 연구소가 자랑하는 제2연구실로 이동해 보겠습니다. 절 따라오세요."
모두가 가이드를 따라 이동한다.
그리고 그 순간 마치 거짓말처럼 내게 평화가 찾아왔다.
내 기도를 들어주신 건가?
그렇게 집 밖으로 나오길 원했던 그분께서 집 안으로 쑥 하고 들어간 것이다.
하지만 난 알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폭풍 전의 고요라는 것을 말이다.
이렇게 기회가 왔을 때 서둘러 움직여야 했다.
마침 적당한 기회도 찾아왔겠다.
나는 즉시 카메라가 없는 사각지대로 이동해 분신 스킬을 펼쳤다.
"분신!"
-우우웅!!
바로 그 순간 또 하나의 내가 나타났다.
'알지?'
'그럼 알지.'
우리는 모종의 눈빛을 교환한 후,
나는 화장실을 찾기 위해 재빨리 움직였고 또 다른 나는 친구들이 걸어간 곳을 향해 슬그머니 뒤따라갔다.
이와 같은 시각,
마석 연구소 메인 연구실.
"여섯 번째 조각입니다."
수석 연구원의 말에 이윤성 소장의 눈에 흥분감이 엿보였다.
금속 구조물의 중심이 되는 여섯 번째 조각을 찾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어쩌면 스타게이트에 대한 수수께끼가 풀릴지 모른다.
"어서, 어서 맞춰 보게."
소장의 말에 수석 연구원은 그가 들고 있는 조각을 정체불명의 금속 구조물에 끼워 넣었다.
-달칵!
-우우우웅!!
여섯 번째 조각이 구조물에 정확히 끼워지자 중앙에 위치한 A급 마석이 서서히 작동하기 시작했다.
"작, 작동하고 있습니다."
"스타게이트가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출력 35%]
[...출력 57%]
[출력 65%]
스피커를 통해 인공지능 컴퓨터의 음성이 들려왔다.
"빠른 속도로 출력이 올라가고 있습니다."
[출력 79%]
[출력 81%]
[출력 88%]
[...90%]
90%를 넘기는 순간, 금속 구조물에 얽혀 있던 괴상한 문자가 묘한 규칙을 보이며 모종의 순서대로 나열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언어 해독 스킬을 가지고 있는 비전투 각성자 김현 연구원의 입술이 떨려 왔다.
"...지상으로 떨어진... 봉인이... 되어... 차원...에... 묻혔다.... 문을... 여는... 자여... 향할지... 아니면.... 여신이... 그대와 함께하기를."
[출력 97%, 98%, 99%... 100%]
-철컥! 스르릉!
-우우우웅!!
그의 해석이 끝나기 무섭게 A급 마석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출력... 110%... 128%... 177%....]
-삐삐삐삐!!
A급 마석으로 제어가 불가능한 것인가?
아니면 스타게이트 자체에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
"멈춰야 해. 이대로 가다간 폭발하겠어."
"소, 소장님, 제어가 되지 않습니다."
제어가 되지 않는다는 대답에 연구소장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뭐라고?!!"
"마석에 과부하가 걸린 것 같습니다. 전원을 내려도 소용이 없어요. 아예 먹통입니다."
"폭발까지 남은 시간은?"
"짧...으면 5분, 길어야 10분입니다."
"당장 1급 비상벨을 울리고 사람들을 대피시켜."
"방공호로 말입니까?"
"그래. 어서 서두르게."
"네, 소장님."
-위이잉!!
연구소 내부의 요소요소에 위치한 경고등에 적색등이 켜졌다.
[1급 상황입니다. 각 지역에 지정된 방공호로 대피해 주십시오.]
[1급 상황입니다. 각 지역에 지정된 방공호로 대피해 주십시오.]
[...지정된 방공호로 대피해 주십시오.]
그로부터 정확히 10분 후,
연구소 내부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지정된 방공호로 피신했다.
이제 연구소에 남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 한 사람만 빼고 말이다.
이와 같은 시각.
시원하게 볼일을 보고 나왔더니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어, 이게 뭔 소리야?"
-위이잉! 위이잉! 위이잉!!
사이렌 소리만 들릴 뿐,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들 어디 간 거지? 선환아, 성일아, 명신아!"
하지만 상황을 파악하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저, 저게 뭐야?!!"
불길한 빛을 뿜어내고 있는 이상하게 생긴 금속 구조물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게...이트?"
저런 형태의 게이트가 있었나?
형태는 게이트와 흡사한데 금속 구조물이 장식되어 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저것이 스타게이트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스타게이트에 대한 정보는 극소수를 제외하고 감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우우우우웅!!
이때 정체불명의 게이트가 폭발할 듯 팽창하기 시작했다.
"어, 어어?!"
그 순간 내가 느낀 감정은 거의 공포에 가까웠다.
마나의 선택을 받아 각성을 했고 몇 년 후면 헌터 아카데미를 졸업해 성공 가도를 내달릴 준비가 되었는데, 칼 한 번 제대로 휘둘러 보지 못하고 폭발에 휘말려 생을 마감하게 생겼으니 이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심장을 짓누르는 공포가 강렬해질수록 살고 싶다는 욕망 역시 강력하게 솟구치기 시작했다.
난 아직 하고 싶은 게 많았다.
막말로 총각 딱지도 떼 보지 못하고 허무하게 갈 순 없었다.
"혹시?!!"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머릿속에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이대로 있으면 개죽음을 당할 뿐이야. 하지만 게이트 안으로 들어간다면!'
그렇다.
예비 헌터에 불과하지만 나는 각성자다.
더욱이 얼마 전에 F급 게이트에서 사냥을 경험하기도 했다.
문제는 정체불명의 게이트가 급이 높다면 십중팔구 뒈질 거란 것이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면 모험을 하는 것이 정답이다.
그리고 바로 그때 더 이상 생각하지 말라는 계시를 받았다.
게이트에서 자그만 불꽃이 일어나는 것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나는 그 즉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게이트를 향해 최선의 힘을 다해 달렸다.
-파지지직!!
늦은 것인가?
아니! 이렇게 끝날 수 없다.
"블링크!!"
순간 이동 스킬을 펼치는 순간 귀청을 울리는 폭음과 함께 정신을 잃고 말았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광!!
-[국립 마나 연구소에 원인을 알 수 없는 폭발이 일어났습니다.]
-[방공호로 대피한 다수의 생존자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
* * *
한 떼의 무리가 빠른 걸음으로 산비탈을 타고 이동하고 있다.
그들은 언뜻 장사치로 보였는데, 사방을 경계하는 눈초리가 사뭇 심상치 않았다.
"대형(大兄)."
"쉿! 공자님이 주무신다."
"죄, 죄송합니다."
중년인의 말에 남자가 급하게 허리를 조아리며 소리 죽여 말했다.
"무슨... 일이지?"
"벌써 해가 지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더 이상 이동은 힘들 것 같습니다."
"그런가?"
"숲속의 밤은 생각보다 일찍 찾아오는 법입니다. 송구하오나 이곳에서 잠시 노숙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군. 그럼 준비해 주게."
"네."
한 자루의 검과 같은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중년인이 머리를 끄덕이며 허락하자 다른 이들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문득 중년인의 시선이 그의 품을 향했다.
"...."
고작 다섯 살 정도 되었을까?
어린아이가 이불보에 싸여 잠을 자고 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귀한 태(態)가 흐르고 있는 것을 보아 그 신분이 실로 범상치 않아 보였다.
잠시 후,
해가 완전히 지고 짙은 어둠이 숲에 찾아왔다.
-와지직.
-타닥, 타닥, 타타닥!
불꽃이 튀는 소리와 함께 모닥불이 타오르자 차디차게 얼어붙었던 대지와 칼날처럼 불어오던 북풍도 견딜 만하다.
이들은 각자가 지정된 자리에 앉아 몸을 녹였다.
따뜻하게 데운 물을 마시자 어느새 긴장했던 몸과 마음이 조금은 풀리는 것 같다.
바로 이때 초대하지 않은 불청객이 나타났다.
"어이쿠! 불빛이 보여 와 봤는데 역시나 사람이 있었군요."
한눈에 봐도 앙상하게 마른 세 남자가 다가왔다.
"지나가던 과객인데, 괜찮으시다면 불 좀 빌려도 되겠습니까?"
"그건 좀 곤란합니다만...."
가장 몸이 마른 남자가 인자한 음성으로 물었다.
"사해는 동도라 하지 않습니까? 사정 좀 봐주십시오."
"날이 밝으면 즉시 떠날 테니 잠시만이라도 몸을 녹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상대방이 예의를 갖춰 청하자 거절할 수 있는 명분이 없다.
"그쪽으로 앉으십시오."
"하하하~ 감사합니다."
세 남자는 자리를 잡고 앉더니 이내 모주를 꺼내 목을 축였다.
주향(酒香)이 코끝을 자극한다.
"형님, 듣자 하니 요새 북경이 아주 소란하다고 합니다."
"현 황제의 병세가 나날이 심각해지니 그렇지, 눈을 뜨고 있는 시간보다 감고 있는 시간이 많다고 하더군."
"그게 정말입니까?"
갈의를 입은 사내가 되물었다.
"그래. 둘째야. 나도 들었는데 현재 자금성의 차기 주인을 놓고 눈에 보이지 않는 치열한 암투가 시작되었다고 하더구나."
세 남자의 대화에 상인들의 표정이 급격히 냉랭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들의 대화에 함부로 끼어들지는 않았다.
제5화
5화 우연에 우연이 겹치면(1)
남자는 목이 마른지 자기 앞에 높여 있는 술잔을 들어 단번에 마셔 버리곤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못난 황제 밑에 못난 아들이 있기 마련이지. 이참에 세상이 확 바뀌어야 해."
"호오! 일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형님이 보시기에 자금성의 다음 주인이 누가 될까요? 황제의 못난 아들 중에 하나일까요? 아니면 황제의 동생일까요?"
"그건 나도 모르지. 일단 황제가 뒈지는 게 먼저가 아닌가? 그래야 지들끼리 북 치고 장구 치고 하겠지."
"아하~ 그렇군요."
상인들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
서로가 서로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더니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몇 명은 병장기에 슬그머니 손을 가져다 댄 자도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게 있어."
"그게 뭐죠?"
"막내 황자는 아니야."
"왜요, 아버지가 황제요, 어머니가 장군부의 딸이 아닙니까?"
"그래. 네 말대로 배경 하나는 끝내주지. 하지만 그래도 안 돼."
그는 누런 이빨을 보이며 단언하듯 말했다.
"아주 간단한 이치야. 황자는 오늘 죽을 운명이니까."
"...?"
"...!!"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상인들의 안색이 변했다.
"네놈들은 누구냐?"
-스르릉!
상인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거의 동시에 병장기를 꺼내 손에 쥐었다.
순간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장사치로 보였던 이들에게서 범이 으르렁대듯 날카로운 기운이 흘러나왔다.
자칫 이와 같은 무형의 기운만으로도 사람을 상하게 만들 것 같았으나 세 남자는 여전히 미소를 띤 얼굴이다.
"누구냐고 물었다."
"후후후, 우리가 누군지 궁금한가?"
강자는 강자를 알아보는 법.
상인은 저들이 보이고 있는 태도에 어금니를 질끈 깨물었다.
그것은 결코 평범한 자들이 보일 수 있는 행동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서 말해라."
"크하하하!"
일촉즉발의 상황이 이어지는 가운데 흑의를 입은 사내가 껄껄대며 웃음을 토해 냈다.
"금의위 영반 오신범. 우리가 누군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자네가 호위하고 있는 인물이 중요한 것이지. 그렇지 않은가? 그동안 쥐새끼처럼 잘도 피해 다녔어. 놀랍군. 아주 놀라워! 비록 적이지만 박수라도 쳐 주고 싶은 마음이야. 똑같은 인원이 열 개 조로 나뉘어 중원 전역을 향해 흩어진 건 묘수였어. 덕분에 이쪽은 개고생을 했지만 말이야."
핏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얼굴, 마치 오래된 나무처럼 메말라 버린 앙상한 팔과 다리가 금의위 영반 오신범의 눈썰미를 자극했다.
이제야 놈들의 정체를 파악한 것이다.
"너희들 고목삼괴로군."
"호오~ 역시 금의위 영반답게 눈썰미가 있어. 하지만 어떻게 하지? 이미 늦었는데 말이야."
-휘익!!
고목삼괴가 긴 호성을 내자 저 멀리 수십에 이르는 횃불이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금의위 영반 오신범의 안색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고목삼괴라는 별호에서 알 수 있는 저들 삼형제는 고목마공을 익혔고 각각의 형제가 모두 절정에 이르렀다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저들의 속해 있는 단체였다.
"십만대산(十萬大山)에서 왔는가?"
"호오, 역시 금의위 영반답군. 그래. 우린 교주님의 명을 받고 산에서 내려왔다. 끌끌끌! 막내 황자만 넘긴다면 너희들은 고이 보내 주겠다고 약속하지."
"고이 보내 주겠다고?"
"그래. 너희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그냥 갈 길만 가면 되는 거야. 후후후."
고목삼괴의 말에 금의위 영반 오신범이 허리를 곧게 세우더니 당당하게 말했다.
"오히려 내가 해 주고 싶은 말이군. 우리는 황제 폐하의 밀명을 받은 금의위다. 너희들이 어디에서 왔건 간에 우리의 앞을 막은 것 자체가 반역이지. 어서 물러가라. 지금이라도 물러간다면 나 역시 이번 일을 문제 삼지 않겠다."
"반역?! 하하하! 뭐가 반역이란 말인가!"
고목삼괴의 둘째가 광소하며 외쳤다.
"우리 역시 곧 황제 폐하가 되실 분의 명을 받고 이 자리에 섰다."
"뭐라고?"
"단지 너희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네놈들은 썩은 동아줄을 잡았고 우리는 황금 동아줄을 잡고 있다는 점이지."
"이, 이놈들이!!"
금의위 영반 오신범이 분노를 참지 못해 기세를 일으켰다.
"조현, 조범."
"네, 영반님."
"너희들이 지금부터 황자 전하를 모신다."
"영반님?!"
"질문은 허용하지 않겠다."
강보에 싸인 어린 황자가 조현, 조범에게 인계되었다.
"어서 가라, 여긴 우리가 맡겠다."
"알겠...습니다."
"명을 받듭니다."
이때 고목삼괴의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휘유, 멍청한 놈들 같으니. 권주를 마다하고 꼭 저렇게 벌주를 마신다니까."
"어떻게 할까요? 형님."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모두 죽이면 되지."
"알겠습니다. 형님!"
"후후후, 간만에 피 맛 좀 보겠네요."
다음 순간,
고목삼괴의 입에서 살기 어린 음성이 터져 나왔다.
이와 동시에 금의위 영반 오신범의 입에서도 사자후가 터져 나왔다.
"죽여라."
"적을 쳐라."
곧이어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무기와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며 불꽃이 어지럽게 튀었다.
-펑!
-파파팡!!
불나방이 휘날리는 가운데 피비린내가 풍겨 오기 시작했다.
"진을 펼쳐라. 방(防)."
"방(防)!!"
금의위 영반 오신범은 금의위 십대고수로 꼽히는 무사다.
그가 작정하고 방어에만 몰입하자 고목삼괴의 발걸음이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이곳은 내가 맡을 테니 둘째와 셋째는 삼조를 데리고 황자를 잡아."
"알겠습니다, 형님."
고목삼괴 첫째의 명에 둘째와 셋째는 서둘러 황자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비익출동(飛翼出洞)!"
금위의 영반 오신범이 번개 같은 바쁘기로 고목삼괴의 앞가슴을 찔렀다.
그러나 그는 비쩍 마른 손을 들어 오신범의 검끝을 잡아 버렸다.
오신범은 고목삼괴의 손바닥에서 검을 빼내기 위해 힘을 주었다.
그러나 그가 힘을 더하면 더할수록 고목삼괴 역시 검을 따라 몸을 움직였다.
"야압!"
공력을 극성까지 끌어 올려 비장의 한 수를 펼친다.
이것은 오신범이 익힌 검술 중에서도 가장 절묘한 초식이다.
-쾅!!
굉음과 함께 고목삼괴가 뒤로 세 걸음 물러났다.
그의 팔에는 한 줄기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웃고 있었다.
그와 반대로 오신범의 안색은 어두웠다.
-쩌저적!
오신범의 검이 두 토막으로 분질러지고 말았다.
"양의검? 금위의 영반이 무당의 제자였군. 이거 하마터면 크게 당할 뻔했어."
-우우웅!!
"이제부터 전력을 다해 상대해 주마. 고목신공."
"유운장법!"
오신범이 사력을 다해 방어했지만 고목삼괴의 팔이 순간 길게 늘어나더니 그의 오른쪽 어깨를 가격했다.
-뚝!
피 분수와 함께 오신범의 오른팔이 떨어져 나갔다.
이와 같은 시각,
고목삼괴의 둘째와 셋째는 황자의 뒤를 따라잡는 데 성공했다.
"거기까지."
"거기서 멈춘다면 세 사람 모두 편하게 보내 주겠다. 내 제안이 어떤가?"
"...."
조현과 조범의 눈에 안타까움이 나타났다.
눈앞에 놓인 다리만 건너면 살 수 있는데 마지막에 이렇게 막다른 상황에 몰린 것이다.
고개를 들어 사방을 살펴보니 이미 다수의 무인들이 거미줄과 같은 그물을 펼치고 있었다.
"다리를 건너고 싶은가? 그럼 한번 시도해 봐."
"켈켈켈! 본좌도 궁금하군. 너희가 빠를지 다리가 무너지는 게 빠를지 말이야."
"...!"
조현과 조범이 결연한 표정으로 눈빛을 교환한다.
'현아, 먼저 가거라.'
'형님.'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이곳에서 살아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
'전하는 살려야지.'
'내가 남겠소. 형님이 가시오.'
'후후후, 이 녀석아. 네가 나보다 발이 빠르잖아. 어서 가.'
'혀, 형님.'
'셋을 세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뛰어. 알겠지?'
'...!'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되었다.
모두들 생명을 도외시한, 죽음 앞에 의연한 모습이었다.
'하나, 둘, 셋.'
"셋!"
조범이 검을 흔들며 적을 향해 달려들자 강보를 둘러맨 조현이 다리를 향해 전력을 다해 뛰기 시작했다.
-휘이익!!
"안 돼!"
"황자를 잡아라."
조범은 자신의 생명을 도외시하며 질풍같이 돌격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의 공방이 끝나는 순간 어느새 고목삼괴의 손이 그의 가슴을 후벼 팠다.
조범은 그렇게 차디찬 땅바닥에 쓰러졌다.
"형님, 어떻게 할까요?"
저 빌어먹을 놈 때문에 황자는 이미 다리를 절반 가까이 건너고 있었다.
지금 쫓아간다 해도 반대쪽에 먼저 도달하는 것은 황자.
운이 좋으면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자신이 없다.
오히려 자칫하다간 천장애 밑으로 떨어져 죽을 것이 자명했다.
"줄을 끊어. 지금 당장!"
"네. 형님."
-댕강!
줄이 끊어지기 무섭게 황자와 황자를 품에 안은 조현이 무서운 속도로 떨어졌고 몇 초 지나지 않아 그들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형님, 이제 어떻게 하죠?"
"천애의 낭떠러지에서 떨어졌으니 놈들은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일단 형님과 합류한다."
* * *
조현은 금위의 무사로 살아오면서 숱한 풍랑을 겪은 사내다.
생사를 넘는 경계를 경험했기에 어지간한 위기에 처해도 당황하지 않았다.
더욱이 그의 품에는 그가 지켜야 할 어린 황자가 있지 않은가?
칼날 같은 바람에 베이며 지상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떨어지고 있었지만 그는 결코 희망의 끈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마치 기적처럼 절벽 군데군데 솟아 있는 나뭇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나뭇가지를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그러나 떨어지는 중력의 힘이 워낙 강했기에 때문에 나뭇가지가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부러지고 말았다.
몇 번의 실패. 하지만 덕분에 떨어지는 속도가 완만해졌고 가까스로 마지막 가지 하나를 잡을 수 있었다.
그는 강보에 싸여 있는 어린 황자부터 확인했다.
의식을 잃은 상황이었지만 그나마 다행이다.
미약하지만 황자의 심장이 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음."
하지만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다.
그의 오른쪽 어깨가 완전히 탈골되었고 갈비뼈가 부러졌는지 호흡이 곤란했다.
그는 필사적으로 주변을 살폈다.
전, 후, 좌, 우를 번갈아 가며 살폈지만 지독한 운무에 가려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두두둑!
"이런!!"
운이 좋았지만 그것도 여기까진 것 같다.
나뭇가지가 휘어지는 폼이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았다.
"정녕 끝인가?"
더 이상은 버티기가 힘들어 보였다.
그가 자조적인 미소를 보이며 어린 황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다.
'파지직' 소리와 함께 그의 시야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안력을 집중해서 살피자,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동...굴?"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안개가 짙은 탓에 저것의 정체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었지만 반원 형태의 그것은 마치 동굴의 입구처럼 느껴졌다.
순간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저곳에 갈 수 없다.'
애석하지만 정확한 판단이다.
거리도 거리지만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상태에서 저곳까지 날아갈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하지만 강보에 싸인 황자라면 달랐다.
조현은 무언가를 결심했는지 강보를 단단히 잡았다.
"하늘이시여, 간절히 원하오니 제게 마지막 힘을 허락해 주소서."
그는 마지막 한 방울까지 내력을 쥐어짜며 동굴을 향해 강보를 던졌다.
"으아아!!"
하늘이 그의 소망을 들어준 것일까?
황자가 검은색 구멍 속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한 조현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그리고 그의 몸이 수직으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위태위태하던 나뭇가지가 부러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마치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마무리했다는 듯 평온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색 구멍이 뇌전 소리와 함께 점점 그 세를 크게 확장하기 시작하더니 이내 공간을 완전히 찢어 버리고 무언가를 내뱉었다.
그러고는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마치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이.
제6화
6화 우연에 우연이 겹치면(2)
날이 밝아 오자 전날의 처참했던 현장이 눈에 들어왔다.
땅바닥에 뿌려진 피가 어느새 차갑게 굳어 있고 다수의 시체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목이 잘리고 허리가 토막이 난 사람, 내장 부스러기를 보이고 나무에 기대어 죽어 있는 사람을 보며 무당의 제자들은 심란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저들의 모습이 당시의 참혹했던 상황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여기 신분패가 있습니다. 금의위 무사들이 분명합니다."
"발길이 천장애로 이어진 것 같습니다."
"어서 생존자를 찾아라."
"네."
무당파의 도사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이와 같은 시각,
남경 왕부에 전서구 한 마리가 날아왔다.
"왕야, 전서구가 도착했습니다."
"결과는?"
"차선의 결과를 냈지만 성공했다고 합니다."
"시신은?"
"...죄송합니다."
수하의 말에 주윤문의 인상이 구겨졌다.
"시신을 확보하지 못했는데, 성공했다고? 그게 무슨 말이지?"
"마지막 순간 금의위 무사가 주선우 황자를 품에 안고 천장애에서 뛰어내렸다고 합니다."
"천장애에서?"
"네. 왕야."
수하의 대답에 주윤문은 멍하니 잠시 창밖을 바라볼 뿐이다.
"천려일실이라고 했다. 수색을 했었어야지."
"그렇지 않아도 날이 밝는 대로 수색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무당파의 도사들이 나타나 모습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도사들이?"
"네. 왕야."
"그곳이 무당의 영역이었나?"
"정확히는 아니지만 지형상 호북성 경계로 무당파의 활동 영역과 가깝습니다."
수하의 말이 이어졌다.
"왕야. 천장 높이의 절벽에서 떨어졌다고 합니다. 절정에 이른 고수라도 그곳에서 떨어지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심려치 마소서."
"...알겠다."
현 황제의 하나밖에 없는 친동생이자 남경 왕부의 주인인 주윤문은 황자의 시신을 찾지 못했다는 말에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지만 결국 수하의 말에 수긍했는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X발.'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공간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여기가 어딘가! 천국인가 아니면 지옥인가.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은 폭발하는 게이트를 향해 몸을 던진 것이다.
그런데 눈을 뜨니 어두운 공간만 헤매고 있었다.
"아무도 없어요?"
"...."
"여기에 사람이 있어요."
"...."
"내 말 안 들려요?"
하지만 곧 소리치는 것을 멈췄다.
눈앞에 누군가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 애는 뭐야?'
이제 한 다섯 살쯤 되었을까?
어린아이가 바닥에 웅크린 채 앉아 있었다.
"얘, 꼬마야. 넌 누구니? 여긴 어디야?"
"...!!"
"형 말 안 들리니?"
중국식 복장을 입은 소년이 잠시 동안 나를 쳐다보더니 곧 그 조막만 한 손을 내밀었다.
뭐야. 나와 지금 악수를 하자는 건가?
뭔가 뜬금없었지만 일단 손을 뻗어 아이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머릿속으로 소년의 음성으로 추정되는 앳된 음성이 들려왔다.
-[형. 고마워요. 그리고 부탁해요.]
-[...?]
엥! 이게 무슨 소린가?
뭐라도 대꾸를 하려는데 그 순간 아이의 몸이 '스르르' 사라지며 나와 하나가 되는 것을 느꼈다.
'으허억!'
다음 순간,
머리가 하얗게 비워지며 정신을 잃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나는 지독한 고통 속에 서서히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희미한 기척만이 보였지만 시간이 지나자 점점 또렷한 형상을 만들어 갔다.
'여긴 어디지? 내가 얼마 동안 정신을 잃은 걸까?'
눈을 뜬 순간 처음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목재로 만들어진 천장이다.
그 뒤를 이어 코를 찌르는 한약재 냄새가 풍겨 왔다.
그런데 왠지 한의원이라 보기엔 뭔가가 이상하다.
무엇보다 인테리어가 굉장히 낯설었기 때문이다.
필사의 힘을 다해 고개를 돌리니 몇몇 사람들이 부산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때 누군가가 나를 향해 소리치는 모습이 보였다.
"쏼라쏼라쏼라쏼라(황자님이 깨어나셨다)!"
'응?'
생소하진 않지만 내가 사용할 수 없는 언어, 중국어가 귓가에 들려왔다.
"쏼라쏼**라쏼#라@%쏼라(정신이 드십니까)?"
"쏼@#줘우선우쏼라쏼라(주선우 황자 전하가 맞으신지요)?"
'줘우선우?'
언뜻 내 이름이 들리는 것 같다.
'최선우? 설마 내 이름을 묻는 건가?'
난 가슴에 손을 대고 저들의 질문에 답했다.
"ㅊ...선...우.... 윽!!"
이런 젠장!
고작 몇 마디를 내뱉었을 뿐인데 전신에서 감당할 수 없는 통증이 밀려온다.
그런데 고통을 말할 수 있는 시간이 없다.
그 순간 다시 의식을 잃었으니 말이다.
"쏼$%라쏼**라(황자님이시다)!"
"쏼#라쏼**라쏼라*쏼$%라(황자님이 맞다)!"
"사형. 황자께서 다시 의식을 잃으셨습니다."
"...아무래도 고통 때문일 거야. 그래도 이렇게 깨어나신 것 자체가 기적이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깨어 있는 시간보다 여전히 의식을 잃는 시간이 많다. 또한 의식이 깨어날 때마다 감당할 수 없는 통증이 느껴졌다.
뭐! 처음과 비교하면 현저히 줄어들었지만 말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여긴 진통제도 안 쓰나? 잠깐, 뭔가 이상한데?'
어느 정도 고통에 익숙해졌을 무렵,
나는 내 모습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지? 내 손이 왜 이렇게 작아?'
나는 나 자신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 거울을 찾았다.
"허억!"
거울 속에는 꼬마 아이가 깜짝 놀란 모습으로 서 있었고 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순간 누군가의 기억이 내 머릿속으로 밀고 들어왔다.
"...!!"
나는 한참을 망가진 태엽 인형처럼 누워 있었다.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게이트, 분신, 폭발, 차원 이동 그리고 영혼의 합일.
아무래도 위에 열거한 상황들이 복합적으로 엮이며 이러한 결과를 도출한 것 같다.
나는 크게 한 번 숨을 내쉰 후,
내가 처한 상황을 천천히 그리고 하나둘씩 정리해 보았다.
첫째, 이 얼굴의 주인공은 주선우, 현 황제의 막내아들이다.
둘째, 이곳은 무림이라 불리는 강호다.
셋째, 내가 현재 있는 곳은 무림의 양대 산맥이라 불리는 무당파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마지막 넷째, 내가 보유하고 있는 고유 특성 분신(Unique)에 문제가 생긴 것 같다.
<상태 창>
이름 : 최선우
레벨 : 4
고유 특성 : 분신(Unique) *시스템 오류로 사용 불가
생명력 : 90/150 마력 : 40/40
힘 : 13 체력 : 15 민첩 : 15
지혜 : 12 지능 : 15 행운 : 5
보너스 스탯 : 0
상세한 설명을 읽어 보니 차원 이동으로 인해 시스템에 오류가 발생하여 현재 사용할 수 없다고 적혀 있었다.
이 말은 곧 시스템 오류를 해결하지 않으면 지구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로 인해 또다시 혼란에 빠졌지만 내가 내린 결론은 일단은 살아남자는 것이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을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정보!
그렇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 세상에 대한 정보를 모아야 했다.
가만있어 보자.
그럼 어떻게 할까?
"오케이!"
적당한 시나리오가 떠올랐다.
기억상실이다.
드라마를 봐도 그렇지 않은가?
비록 어린 황자 주선우의 기억을 흡수했지만 고작 다섯 살 아이의 단편적인 기억이다. 기억상실증만큼 좋은 방법이 없었고 우연인지 필연인지 절벽에서 떨어진 상황도 내게 도움이 됐다.
"쏼라@#&쏼라@@쏼라."
"쏼#$@라쏼**라@@쏼***라."
도사들이 건네준 약을 꿀꺽꿀꺽 마셨다.
한동안 내가 한 일이라곤 이렇게 약을 먹고 침을 맞고 잠을 자는 것이었다.
한약의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것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현재 주어진 환경에서 치료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가장 옳은 선택이니까.
그로부터 보름 후,
이날도 여느 때처럼 치료에 매진하고 있었는데 푸른 도포를 입은 청수하게 생긴 도인이 나를 찾아왔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주변의 분위기를 보아하니 이곳의 대장 같았다.
"황자 전하, 이제 좀 정신이 드시나요?"
"...."
도인은 하얀 수염을 매만지며 인자한 미소와 함께 질문을 던졌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
몸 상태를 물어보는 눈치였지만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노도인은 그런 나를 잠시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다 옆에 있는 도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청수 사제, 전하의 상태가 어떤가?"
"아무래도 기억상실증인 것 같습니다."
"기억상실증!"
"천장애에서 떨어지면서 뇌가 충격을 받았고 그로 인해 기억에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그럼 완치는 가능한가?"
"꾸준하게 치료를 받으신다면 기억이 돌아올 가능성이 있지만 완치에 대한 확답을 드릴 순 없습니다."
"허어! 보아하니 말도 잊어버린 것 같은데, 이 일을 대체 어찌할꼬."
"장문 사형. 말이야 다시 배우면 되는 겁니다. 크게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천장애에서 떨어졌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건강하게 살아나셨으니 원시천존께서 돌보신 겁니다. 그리고 어쩌면 기억을 잃은 것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도움?"
"네."
청수 진인이 침착하게 말했다.
"기억상실증에 대한 치료의 일환으로 황자 전하께 언어부터 가르치다 보면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잃어버린 기억이 떠오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장서각에 남겨진 의서를 보면 이러한 사례가 적지 않게 나와 있죠."
"그런가?"
"네. 그러니 크게 심려하지 마십시오."
"그렇군. 잘 알겠네. 청수 사제, 자네가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그럼 수고해 주게."
"알겠습니다, 사형."
청명 진인이 짧은 도호를 외친 후, 방에서 나갔다.
대략 한 달쯤 지났을까?
아직은 간단한 단어에 불과하지만 중국어를 조금씩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우선 주선우 황자의 기억이 도움이 되었고 무당의 젊은 도사가 하루 종일 내 옆에서 중국어를 나불댄 까닭이다. 이러니 귀와 입이 열리지 않을 도리가 있겠는가?
"오늘은 날이 좋네요. 오늘 점심은 뭐죠?"
"야채가 신선해서 좋네요."
"삼겹살이 먹고 싶은데, 삽겹살이 뭐냐고요?"
"아! 그런 게 있어요. 네. 네. 황실에서 먹는 고급 요리예요. 이건 뭐... 넘어가죠."
오늘도 이처럼 중국어 수업이 이어지고 있다.
조금 무식한 방법이지만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먹고 자고 싸는 시간을 제외하고 중국어로만 주야장천 대화를 하니 효과가 확실했다.
그리고 이때 전혀 예상치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띠링.
-[스킬 고대 중국어를 익히셨습니다.]
응?
이게 무슨 소린가?
재빨리 스킬 창을 열었더니 중국어 스킬이 형성되어 있었다.
<패시브 스킬>
이름 : 고대 중국어
등급 : 하급
설명 : 고대 중국어를 사용한다.
순간 뒤통수를 아주 강하게 한 대 맞은 것 같은 충격이 들었다.
설마 내가 이곳에서 무언가를 익히면 스킬로 변환되는 걸까?
"마, 맙소사!!"
만약 내 생각이 맞는다면 이건 대박 중의 대박이었다.
이곳이 어딘가?
중원 무학의 양대 산맥으로 알려진 무당파가 아닌가.
예부터 서양에 마법이 있다면 동양에는 무공이 있다고 했다.
왜 이런 말을 하냐고?
지금부터 잘 들어 봐라.
소위 말해 상위권에 있는 헌터들을 보면 같은 헌터라도 내공심법과 무공을 익힌 헌터가 그렇지 않은 헌터에 비해 강하다. 아니! 월등히 강하다.
이것은 마법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보다 상위에 있는 마나 심법을 익히면 중단전의 고리가 더욱 굵고 단단해지며 같은 서클이라고 해도 위력이 달랐다.
다음 순간 내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난 무당의 무공을 배울 것이다.
제7화
7화 무당파의 제자, 청운(靑雲)
"무당파에 들어오고 싶다는 말입니까?"
청명 진인이 놀랐다는 표정을 짓는다.
"네. 정확히 말하면 황제 폐하를 대신해 무당의 제자가 되고 싶습니다."
"화, 황제 폐하를 대신해서요? 혹시 기억이 돌아오신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만."
난 짐짓 태연한 척하며 다섯 살 소년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최대한 발산했다.
"모든 기억이 돌아온 건 아니지만 이것 하나는 분명 기억이 나요."
"그게 무엇입니까?"
"용좌에 앉으신 분의 목소리요."
"목소리요?"
"네.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이 가지 않지만...."
청명 진인의 질문에 나는 확신에 찬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그분이 제게 말했어요. 무당의 조사이신 삼풍 진인을 깊이 존경한다고요. 만약 본인이 자유로운 몸이었다면 기꺼이 무당의 제자가 되었을 거라고요."
"그, 그게 정말입니까?"
"네."
내 대답이 꽤나 마음에 든 모양이다.
청명 진인을 포함해 그를 중심으로 포진해 있던 늙다리 도사들이 감탄과 경탄의 빛을 떠올렸다. 하긴 중원의 주인이자 하늘의 아들이라 불리는 천자가 저렇게 말했다고 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절호의 기회가 왔음을 깨닫고 곧바로 도사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절 무당의 제자로 받아 주세요."
"화, 황자 전하!!"
좌중에 모인 모든 도사들이 내 모습에 크게 당황했다.
현 황제의 아들이 무릎을 꿇었는데 어찌 당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서 일어나십시오."
"싫어요. 승낙하시기 전엔 일어날 수 없어요."
"허... 허허."
좌중엔 조용한 긴장감이 흘렀다.
잔잔한 호수 같던 무당파에 커다란 돌덩이를 던졌다.
잠시 후.
청명 진인이 입을 열었다.
"황자 전하께서는 황제 폐하를 대신해 무당파의 제자가 되길 원하니 이는 본문의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천하의 주인이신 황제 폐하를 대신하는 신분인 만큼 저는 감히 황자 전하의 사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작고하신 선사를 대신해 황자 전하를 무당의 제자로 거두려 합니다."
"네?!"
저게 무슨 소린가?
내가 예상한 최대치는 청명, 청수, 청혜 진인 중 한 명의 제자가 되는 것이었는데, 그의 대답은 내 예상을 훨씬 뛰어넘어 버렸다. 아마 황자라는 위치와 황제를 대신한다는 것이 이러한 결과를 가져온 것 같았다.
"이제부터 황자 전하는 본도의 막내 사제이며 도명은 청운(靑雲)입니다. 무당파의 도사들 중에 '청' 자 항렬에 드는 사람은 본도를 포함해 청수, 청혜밖에 없습니다."
엄마야~~!
기대한 것 이상의 결과에 나는 크게 소리치며 포효하고 싶었지만 자리가 자리인 만큼 꾹 참았다.
아껴 뒀다 나중에 해야지. 흐흐흐.
그로부터 며칠 후,
나는 공식적으로 무당의 제자가 되었다.
"...적게 가지는 것은 소유다. 많이 가지는 것은 혼란이다. 과도한 욕망보다 큰 참가는 없다. 불만족보다 큰 죄는 없다. 그리고 탐욕보다 큰 재앙은 없다. 행복을 탐욕스럽게 좇지 말며, 두려워하지 마라."
무당파 대전에 청명 진인의 목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옆 사람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가운데 고요함과 경건함만이 가득했다.
-댕, 댕, 댕, 댕... 댕!
이어 아홉 번의 종소리가 울리고 청명 진인의 선언이 이어졌다.
"...이렇게 해서 선사(先師)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사제의 법명은 청운입니다. 원시천존."
"원시천존."
"원시천존~."
"원시천존!"
"일어나세요. 이제 황자께서는 무당파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청명 진인의 선언에 뭇 도사들이 일제히 도호를 외쳤고 나는 이날을 기해 공식적으로 무당파의 제자가 되었다.
"청운 사제."
"네, 장문 사형."
"사제에 대한 일을 자금성에 알려야 하지만 당분간은 알리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형."
주선우 황자를 노렸던 이들이 있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숙부가 가장 유력했지만 장담할 수 없다.
형제 중에 한 명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누가 아군인지 누가 적군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자금성에 전해진다면 어떻게 될까?
위험을 자초할 필요는 없다.
더욱이 고유 특성인 분신 스킬이 복구되면 나는 언젠가 돌아갈 사람이다.
"풀을 두들겨 뱀을 놀라게 할 필요는 없겠죠."
"선재로군, 선재야."
며칠이 지났다.
나는 그동안 무당파 경내를 돌아다니며 뭇 도사들과 인사를 나눴다.
나름 친분을 쌓기 위한 작업이다.
그런데 내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바로 무당파 '청' 자 배의 위용이다.
'현' 자 항렬을 가진 중장년의 도사들이 나를 보면 사숙이라 부르며 인사했고 '운' 자 항렬의 도사들은 나를 향해 사숙조라 부르며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내 또래로 보이는 무당의 도동들은 나를 향해 태사숙조라 부르며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처음에는 이런 상황이 적응되지 않아 곤란하고 난처했지만 인간이라는 동물 자체가 원래 적응의 동물인지라 이제는 편안함을 넘어 순간순간이 재밌다.
요즘은 오히려 표정을 관리하느라 힘이 들 정도였다.
"사숙을 뵙습니다."
"오! 그래. 자네도 잘 지냈는가?"
"네, 청운 사숙."
"사숙조를 뵙습니다. 밤새 안녕하셨는지요."
"어. 잘 잤어. 고마워."
"태사숙조를...."
"어~ 그래. 됐어. 일들 봐. 험험!"
'청' 자 항렬 체면이 있지 웃음이 헤프면 되겠는가?
이제 어느 정도 시간도 지났겠다.
나는 부푼 기대를 가지고 장서각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장서각은 총 3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무당파의 진산절학은 물론 그 외에도 다양한 종류의 비급과 도가의 심오한 사상이 담긴 보물급 경전들이 있다고 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무당파의 역사가 깊은 만큼 대략 만 권에 이르는 방대한 양의 서적을 보유하고 있었다.
"여긴가?"
입구에서부터 서책의 향기가 물씬 느껴진다.
나는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지려고 애를 썼다.
"청운 사숙조를 뵈옵니다."
"태사숙조를 뵈옵니다."
"반가워."
장서각의 입구는 늘 철통같은 경호가 이루어지고 있고 어느 누구든 사사로이 입장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은 일부 제자들의 경우일 뿐이다.
난 '청' 자 항렬이라는 프리 패스 통행증을 가지고 있었다.
"장서각을 구경하고 싶은데, 괜찮을까?"
"물론이죠."
"서책을 외부로 반출하지만 않으면 됩니다."
만면에 미소를 보이는 운발, 아니 운경...인가?
얼굴은 한두 번 본 것 같은데, 이름을 잘 모르겠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무당파에는 현재 수백 명의 도사들이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에 짧은 시간 내에 저들의 이름을 모두 외운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 알았어. 고마워."
나는 일부러 어린아이 티를 내며 천천히 장서각에 입장했다.
이곳이 무당의 장서각인가?
순간 무당파의 무공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모두가 알다시피 무당은 소림과 함께 중원 무학의 양대 산맥으로 불리며 무협 소설과 무협 영화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이다. 그것도 주인공으로 말이다.
내가 만약 무당파의 신공이라 불리는 무공을 익힌다면 훗날 지구로 돌아갔을 때 최고의 헌터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고작 다섯 살 나이에 불과했지만 나는 피가 펄펄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마치 이 땅에 오게 된 것이 일종의 숙명 같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호기롭게 시작했던 마음이 첫술에 무너질 줄은 미처 몰랐다.
-[띠링, 해석할 수 없습니다.]
"뭐라고?"
-[띠링, 습득이 불가능합니다.]
젠장!
서책을 완독했는데도 불구하고 습득이 불가능하다니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이봐, 시스템, 도대체 왜 익힐 수 없다는 거야!'
시스템의 도움을 간절히 바랐지만 애석하게도 돌아오는 답이 없다.
이런 불친절한 시스템 같으니, 아무래도 스스로의 힘으로 알아내야 할 것 같다.
나는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러자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다.
그래!
이 바보, 멍청이 같으니.
몬스터를 사냥해 아이템을 얻었다고 치자. 그런데 이 아이템을 자세히 살펴보면 등급이 높을수록 일종의 착용 제한이 걸려 있을 확률이 높다.
예를 들어 힘 100 이상, 민첩 200 이상이라는 옵션이 결려 있으면 해당 스탯을 올리기 전까지 무용지물이라는 말이다.
스킬 역시 마찬가지다.
몬스터를 사냥하고 대박이 터져 스킬 북이 나와도 어떤 것은 레벨 제한이 붙어 있고 또 어떤 것은 직업에 제한이 붙은 것이 있었다.
"하아!"
어느 정도 의문이 풀렸지만 짙은 아쉬움에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손만 내밀면 먹을 수 있는 산해진미가 눈앞에 펼쳐졌는데 그저 바라만 봐야 하는 마음이다.
[눈물이 흘러 이별인 걸 알았어. 힘없이 돌아서던....]
옛날 가수의 노랫말처럼 정말 눈물이 나올 뻔했다.
"청운 사제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장서각 내부에 계십니다. 제가 불러올까요?"
"아니다. 내가 가 보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갑자기 눈앞에서 누군가의 신형이 번쩍이더니 코앞으로 다가왔다.
청혜 사형이다.
그리고 정말 대단한 경신술이다.
"사형."
"청운 사제."
"방금 어떻게 하신 거예요?"
"응?"
"번쩍하던 순간 제 앞에 나타나셨잖아요."
초롱초롱 반짝이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사형이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하, 이건 무당이 자랑하는 제운종이란 경신법이란다."
"제운종요?"
"그래."
"우와~~."
나는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내 우울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막내 사제, 웬 한숨인가. 혹여 무슨 근심이라도 있는 건가?"
"그게.... 아, 아니에요. 사형."
"그러지 말고 어서 이 사형에게 말해 주게."
"정말 아무것도 아니에요."
"허허, 아무것도 아니긴, 한숨 소리가 아주 크던데."
사형의 걱정 어린 음성에 나는 힘을 살짝 빼고 속마음을 얘기했다.
"무당의 무공이 궁금해서 서책을 한번 읽어 봤는데, 당최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하하하, 그렇군. 그래서 우리 막내 사제가 한숨 소리를 그리도 크게 낸 것이었군."
내 말을 들은 청혜 사형의 눈이 빛났다.
청혜 사형은 그의 하얀 수염을 몇 번 쓰다듬더니 내게 물었다.
"청운 사제는 무공에 관심이 많은가?"
"네."
"이곳 장서각에서 무엇을 느꼈는가?"
"음! 일단 책이... 정말 많았어요."
"뭐? 하, 하하! 하하하하~~."
청혜 사형이 박장대소했다.
어린아이다운 답이 그를 웃게 한 것 같다.
'후후후! 잘 대답했다. 최선우. 잘했어.'
내가 만약 무공에 대해 이리저리 주절댔다면 사형의 의심을 받았을 것이다.
제8화
8화 무공 입문
"사제는 혹시 무공을 익혔는가?"
"무공요?"
사형의 이어진 질문에 나는 재빨리 생각을 정리했다.
일단 나는 각성자라 마력을 가지고 있다.
생각하기에 각성자의 마력이 무림 세계의 내공과 비슷한 취급을 받을 것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난 그에게 기본 심법을 익혔다고 대답하기로 결정했다.
더욱이 나를 치료하면서 내 몸 구석구석을 살펴보았음이 분명할 텐데 괜히 거짓말을 했다 들통이 나면 잃는 것이 많을 것이다.
"선명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황실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내공심법을 익힌 것 같아요."
"그렇군. 어쩐지 좀 특이했어."
"네? 그게 무슨?"
"오해는 말게. 사제가 정신을 잃고 의각에 머물고 있을 때 치료를 위해 사제의 몸에 내공을 주입한 적이 있었지. 그때 사제의 신체 내부에 특이한 형태의 내공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네."
"아~ 네."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그 점에 대해선 지금이라도 사과하겠네. 미안하네, 청운 사제."
"아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오히려 치료해 주셔서 감사하죠. 제 생명을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청혜 사형."
"허허허~."
내 대답이 맘에 들었는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청혜 사형의 표정이 아까보다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럼 내가 사제를 위해 자그만 조언을 하나 해 줄까?"
"네?"
청혜 사형의 말이 이어졌다.
"배움에는 단계가 있는 법이야. 우리 무당의 무공은 내가기공이 근본이지만 신체적인 단련도 해야 하지. 즉 외공과 내공의 조화가 필요하다는 뜻이야.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 무당의 고차원적인 무공을 익히려면 도가 사상에 대해 공부를 해야 하네."
"도가 사상요?!"
"그래. 무당의 무공이 도가 사상에서 출발했기 때문이지. 예를 들어 평범한 사람과 불도에 대해 이해가 깊은 스님이 불가의 무공을 익힌다면 어떻게 될까? 그 위력이 같을까? 아니면 서로 다를까?"
"아!!"
청혜 사형의 말에 한 줄기 빛이 뇌리를 관통했다.
그것은 일종의 깨달음이다.
조금 전 내가 장서각에서 보인 행동은 마치 처음으로 자전거를 타 보는 아이에게 두발자전거를 건네주며 타 보라고 한 격이다.
그것도 네발이나 세발자전거가 아닌 두발자전거다.
아직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좀 더 쉽게 설명해 보겠다.
이제 막 덧셈 뺄셈을 배운 아이에게 425×82×557을 계산해 보라고 한 꼴이었다.
내가 읽은 무공이 무엇인가?
길거리에 널린 무공인가? 아니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무당파의 고차원적 무학이다.
청혜 사형의 말처럼 도가 사상에 무지한 내가 그저 읽기만 한다고 익힐 수 있을까?
아니, 단언컨대 그럴 수 없다!
고대 중국어 스킬만 봐도 그렇다.
다섯 살 주선우의 기억에 몇 달 동안 끊임없이 익힌 상황이 더해지자 나온 결과였다.
내 생각이 짧았다.
일단 한 발, 아니 몇 발 후퇴해야겠다.
그렇다고 무당의 무공을 포기한다는 것이 아니다.
난 고작 다섯 살에 불과했고 아직 내겐 시간이 많았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내가 일반적인 다섯 살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감사합니다, 청혜 사형."
생각을 정리하자마자 사형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내 말을 이해...했는가?"
"음. 어느 정도는요."
"선재(仙才)로군. 선재야. 원시천존."
"원시천존. 헤헤~."
나는 그날 이후,
청혜 사형의 조언대로 일단 체력 훈련을 병행하며 무공의 기초를 쌓기로 했다.
비록 극악의 효율을 자랑하지만 내 나이에 맞게 안전성만큼은 최고로 치는 삼재심법을 선택했고 도가 사상에 대한 공부도 시작했다.
대신 누구에게도 무공을 가르쳐 달라고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청운이라는 도호(道號) 때문이다.
적어도 날 가르치려면 청혜, 청수 또는 무당파의 장문인인 청명 사형이 직접 나서야 하는데 이 세 분이 한가한 사람들도 아니고 고작 입문 무공을 익히는 걸 도와 달라고 부탁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 겨우 다섯 살이다.
인생 길다.
독학이지만 오히려 완벽하게 무공을 익히는 모습을 보여 주면 어떻게 될까?
그것도 가끔씩 천재적인 모습을 보여 주면서 말이다. 후후후!
* * *
[무당파 자소궁]
청수 진인과 청혜 진인이 청명 진인의 거처인 자소궁을 찾았다.
"청운 사제가 무공에 관심이 높다고?"
"네, 장문 사형."
청혜 도장은 장서각을 나서던 막내 사제의 모습을 떠올렸다.
"요즘 매일같이 체력 훈련에 열심입니다. 오후에는 장서각에 올라 무공 비급을 읽고 도가 사상에 대한 공부까지 병행하면서요."
"도가 사상까지 말인가?"
"네."
"우리 막내 사제가 무공에 관심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긴 그럴 나이지 않습니까?"
"...."
청혜, 청수 그리고 청명 진인이 한자리에 모이게 된 이유는 바로 청운 때문이다.
신분도 신분이었지만 사형, 사형 하며 자신을 부르는 손자뻘 어린 사제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어떤 무공을 익히고 있는가?"
"언뜻 지켜보았더니 입문 무공이라 할 수 있는 삼재심법을 익히고 있습니다."
"삼재심법이라, 그 나이에 보면 나쁘지 않군."
"하지만 가르쳐 주는 스승이 없으니 한계가 분명하겠지요."
청혜 도장이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음!"
순간 조용한 침묵이 찾아왔고 한참 동안 이어졌다.
결국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무당의 장문인 청명이었다.
"사제들이 뜻하는 바를 짐작하겠네. 하지만 막내 사제는 언젠가 무당을 떠날 사람이야. 그래서 나나 자네들이 아닌 선사의 제자로 받아들인 것일세."
"사형의 고매한 뜻을 저 역시 이해합니다. 하지만 사형,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형의 말씀은 가정에 불과합니다. 내일 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죠."
"청혜 사제의 말에 저도 동의합니다. 훗날 청운 사제가 장문 사형의 말씀처럼 무당을 떠나게 된다 해도 지금은 우리 무당의 제자입니다. 저의 작은 생각일지 모르겠으나 무당의 제자가 무당의 무공을 모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허허허.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 좋은 의견이 있다면 말해 주게."
"그럼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청혜 도장이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 귀여운 막내 사제입니다. 괜찮으시다면 일주일에 한 번씩 봐주는 게 어떻겠습니까?"
"일주일에 한 번씩? 우리 셋이 말인가?"
"아니요. 허락만 해 주신다면 저와 청수 사형이 막내 사제의 교육을 전담하겠습니다."
"자네들 둘이서?"
"네."
청혜 도장이 청수 도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청수 사형, 사형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사제의 말이 합당하네. 그렇지 않아도 격무(激務)에 시달리고 있는 장문 사형께 부담을 드릴 순 없지. 그렇게 하세."
세 사람은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
앞으로 청운에게 어떤 무공을 가르칠지에 대해 상의했다.
"삼재심법, 소청심법, 태청심법, 양의심법, 분심공, 태극신공."
"칠성검법, 소청검법, 태청검법, 태극검, 양의검, 오행검, 구궁검법, 현천검법, 태극혜검."
"삼재권, 적양권, 칠성권, 태극권, 무당면장, 진천철장, 건천태을지, 태청산수."
"호종보, 유운신법, 제운종."
두 사형제의 입에서 무당의 절학들이 번갈아 가며 흘러나왔다.
작게는 심신을 보호하고 대성(大成)하면 능히 산을 허물 수 있지만 범인(凡人)은 평생을 연마해도 그 끝에 도달할 수 없다고 알려져 있다.
마치 소림이 자랑하는 칠십이종절예처럼 말이다.
"그걸 모두 가르칠 생각인가?"
"설마요. 일단 막내 사제의 성취에 따라 가르침을 전할 생각입니다. 그런데...."
순간 청혜 도장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그래. 나도 알고 있네. 청운 사제의 근골 때문이지?"
"...네."
무당의 무공을 재대로 익히려면 뛰어난 무재(武才)가 있어야 한다.
여기에는 오성(悟性)과 근골(筋骨)이 포함된다.
문제는 청운의 근골이 평범했다는 점이다.
소위 구파일방, 오대세가라 불리는 명문 정파는 아무나 제자로 받지 않는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흔히 말해 검증되고 싹수가 보이는 이들만이 제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들이 한 가지 착각하고 있는 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무공이란 것이 무재가 있는 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오성과 근골이 뛰어난 사람이 고수가 될 확률이 높은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천년의 무림사를 봐도 그렇고 말이다. 허나 과거 대종사라 불렸던 이들 중에는 평범한 근골을 지닌 자들도 있었다.
무당파를 개파한 삼풍 진인과 그의 스승이었던 소림의 각원 대사의 경우만 봐도 그렇다.
두 사람은 범재(凡才)에 가까웠지 결코 천재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것은 오성(悟性) 역시 그러하다.
실례로 한 연구 기관에서 노벨상을 받은 과학자들의 지능지수를 조사한 적이 있었는데 의외의 결과가 나온 바 있다.
천재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노벨상을 수상한 과학자들의 다수의 아이큐가 125 이하로 판명되었기 때문이었다.
"저는 막내 사제에게 태극검을 알려 주고 싶습니다."
"태극검?"
"네."
청수 도장의 말에 청혜 도장의 입이 열렸다.
"흐음! 그럼 전 사제에게 태극권을 가르치겠습니다."
청수, 청혜 도장의 말에 청명 진인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태극권과 태극검은 무당의 절학 중에서 상당히 애매한 위치에 자리 잡혀 있는 무공이다. 입문하기가 쉬워 많은 제자들이 배우지만 어느 정도 익히고 나면 다른 무공으로 갈아타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무공의 단계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심각하게 난해해져 무당의 개파 조사인 삼풍 진인만이 그 끝을 보았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무당의 절학이 분명하지만 위와 같은 이유로 제자들에게 외면을 받았다.
"태극권과 태극검이라."
청명 진인이 두 사제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삼재심법을 통해 적절한 토양을 단전에 마련하는 동시에 태극권과 태극검을 익힌다. 막내 사제의 나이를 생각하면 매우 적절했다.
태극권과 태극검을 얼마만큼 익힐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훗날 태청심법을 익힌다면 궁합이 잘 맞을 것 같았다.
청명 진인은 두 사제의 의견을 존중해 주기로 했다.
그리고 한편으론 괜히 미안해졌다.
막내 사제에게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는데, 대사형이라는 자가 바쁘다는 핑계로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한 것 같아서 미안했다.
"청수 사제, 청혜 사제."
"네. 장문 사형."
"대사형인 내가 먼저 막내 사제에게 신경을 써야 했는데, 사제들을 보기가 미안하군."
"아닙니다, 사형."
"그렇지 않습니다, 사형."
세 사람은 일제히 일어나 서로를 향해 은은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잠시 후,
청수 진인과 청혜 진인이 물러가자 방 안에 청명 진인만 홀로 남았다.
무공은 두 사제가 도와주기로 했지만 자신도 손주 같은 막내 사제에게 뭔가 도움을 주고 싶었다.
"그래, 그게 좋겠어."
제9화
9화 태청단과 진기도인
무공을 익힌다면 누구나 어느 정도의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수준을 말할 때 통상 삼류를 떠올린다. 헌터로 말하면 F급과 E급이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허나 꾸준히 무공을 익힌다면 그는 이류에 오를 수 있고 여기에 뛰어난 무공을 소유했다면 일류에 도달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일류 다음의 경지인 절정에 이르려면 노력만 가지고는 불가능하다. 일종의 무재, 즉 뛰어난 오성과 그에 적합한 근골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평생을 노력해도 그것을 받쳐 줄 무재가 없다면 절정에 오르기란 요원하다.
그런데 정작 더 큰 문제는 그다음에 있다.
이제는 고차원적인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깨달음이다.
깨달음이 없다면 절정 그 이상의 단계, 즉 화경(化境)에 이를 수 없다.
그런데 정말 웃긴 건 이 깨달음이란 녀석이다.
이 녀석은 말이나 구결로 설명하거나 알려 줄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그로 인해 누군가는 그것을 벽이라 표현하고 누군가는 바다라 표현하며 또 누군가는 절망이라 말하기도 한다.
혹시 누군가 내게 무공의 경지에 대해 어떻게 이렇게까지 자세히 아냐고 묻는다면 무협 영화 마니아를 아버지로 둔 덕이라고 말하겠다.
나 역시 아버지의 영향으로 인해 어렸을 적부터 무협 영화를 많이 접했기에 이 분야에 있어서 나름 빠삭했다.
그리고 내겐 남들이 모르는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바로 시스템이다.
정확히 말하면 시스템을 통한 무공의 스킬화였다.
-[띠링, 삼재심법을 익히셨습니다.]
<스킬 정보>
이름 : 삼재심법(패시브)
등급 : F급
숙련도 : 10%
설명 : 심신을 굳건케 하고 숙련도에 따라 생명력과 내공을 소폭 상승시킨다.
소위 말해 신공이라 부를 수 있는 무공을 아직 익혀 보지 못해 섣불리 판단할 수 없지만 예감이 좋았다. 시스템이 인정할 만큼 무공을 익히면 이렇게 스킬로 만들어지는 것이 확실해 보였다.
"청운 사제, 안에 있는가?"
어? 이 목소리는 장문 사형의 목소리다.
"네, 사형."
서둘러 밖으로 나가자 청명 사형이 나를 향해 생긋이 웃고 있었다.
"늦은 시간에 어쩐 일이신가요? 일이 있으면 부르시지요."
"허허허! 그리 멀리 있지도 않은데, 산보도 할 겸 겸사겸사 왔네."
나는 사형을 방으로 모셨다.
"듣자 하니 도가 사상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어때! 공부는 잘되고 있는가?"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한다! 하하하~ 우문에 현답이로군."
"우문에 현답이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아니야. 현답이 맞네. 조그만 개울이 결국 바다가 되지 않는가?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배움에 있어서 무엇보다 성실하게 임하는 자세가 것이 가장 중요한 거야. 지금 사제의 모습처럼 말이지."
"부끄럽습니다, 장문 사형."
"허허허~."
날 바라보는 청명 사형의 눈빛에 꿀이 떨어지는 것 같다.
만약 사형이 결혼을 했다면 나만 한 손자가 있지 않았을까. 흐흐흐!
"내가 사제를 찾은 것은...."
청명 사형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얼굴에 걸어 놓고 본론을 꺼냈다.
"바로 이것 때문일세."
"이게 뭔가요?"
청명 사형은 품에서 자그만 옥합을 꺼내 보였다.
'저게 뭐지?'
정교하게 세공된 옥합을 보니 뭔가 귀한 것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사제에게 주는 선물이네."
"서, 선물요?"
선물이란 말에 난 두 눈을 초롱초롱하게 떴다.
"한번 열어 보게."
열어 보라는 사형의 말에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한 번 삼킨 후, 옥합을 열어 보았다.
-달칵!
옥합 안에 자그만 단약이 있었는데, 개봉을 하는 순간 향긋한 내음이 풍겼다.
"이게 뭔가요?"
"무당의 태청단이네."
"태청단요?"
"우리 무당이 자랑하는 영약 중에 하나로 무공을 익히는 데 있어서 도움이 될 거야."
"사, 사형."
태청단이라면 나 역시 들어 본 적이 있다.
소림의 대환단, 화산의 자소단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태청단 역시 굉장한 효능을 자랑하는 영약이었다.
그런데 사형의 반응이 묘하다.
마치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표정이었다.
"지금 즉시 태청단을 복용하게."
"네, 지금요?"
"그래. 사형이 진기도인을 해 주겠네."
태청단에 이어 진기도인까지 해 준다니, 감동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어서 태청단을 복용하고 삼재심법을 운용하게."
"네. 사형."
나는 사형의 말에 따라 즉시 태청단을 삼키며 가부좌를 하고 앉았다.
청량감과 함께 태청단이 스르르 녹아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순간 청명 사형의 따뜻한 손길이 등 뒤에서 느껴졌다.
"정신을 집중하게. 그리고 이제부턴 절대 입을 열면 안 돼. 알겠지?"
"네, 사형!"
청명 사형이 진기도인을 시작하자 태청단의 기운이 혈맥을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에 호응하듯 삼재심법의 내력이 단전에서 일어났다.
나는 조용히 내력의 흐름을 관조했다.
마치 젤리처럼 찐득하게 뭉쳐져 있던 혈맥에 뜨거운 온수가 흘러 들어와 길을 만들어 내듯 천천히 그 세력을 넓혀 갔다.
-우우웅!
작은 물줄기가 점점 더 그 세를 불려 나가더니 단전을 중심으로 막힘없이 흐르기 시작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렇게 세 번의 왕복이 끝났을 때, 나는 귓가를 울리는 시스템의 청아한 종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띠링, 태청단을 완벽하게 흡수했습니다. 레벨이 오릅니다.]
-[띠링, 체력이 올랐습니다.]
-[띠링, 민첩이 올랐습니다.]
-[띠링, 소주천에 성공했습니다. 레벨이 오릅니다.]
-[띠링, 삼재심법의 숙련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띠링, 삼재심법을 마스터했습니다. 레벨이 오릅니다.]
그리고 그 순간,
내 등 뒤에 찰떡처럼 달라붙어 있던 청명 사형의 손이 떨어졌다.
"...!"
헐! 전신에 힘이 넘쳐 났다.
당장에라도 주먹을 날리면 단번에 바위라도 부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고양된 기분을 감추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사, 사형!"
감사의 인사를 하려 했는데, 사형의 얼굴에 피로가 한가득하다.
거짓말을 조금 보태면 몇 년은 늙어 보일 정도였다.
"청운 사제, 난 괜찮아."
"...."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진기도인이 이렇게까지 힘든 것이었는지 상상도 못 했다.
하긴 몇 시간 동안 진기도인을 펼쳤으니 어쩌면 저런 모습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허허허, 정말 괜찮다니까."
"...네."
나는 장문 사형의 초췌해진 모습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진심으로 미안하고 죄송하고 그리고 감사했다.
"소주천에 성공했으니 이제부터 시작이야. 앞으로도 계속 정진해서 훗날 우리 무당의 동량(棟梁)이 되어 주게."
"네. 사형.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청운 사제."
"네, 사형."
"조만간 청수 사제와 청혜 사제가 찾아올 거야."
"저를요?"
"그래."
"왜요?"
"그건 사제들이 찾아오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야."
"...네."
내심 궁금했지만 조만간 알 수 있다는 말에 깊이 생각지 않고 수긍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청명 사형을 향해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사형은 그런 모습에 만족했는지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후, 발걸음을 옮겼다.
모두가 잠든 시각,
나는 조용히 상태 창을 열어 보았다.
<상태 창>
이름 : 최선우
레벨 : 4 → 15
고유 특성 : 분신(Unique) *사용 불가
생명력 : 220/220 마력 : 180/180
힘 : 21 체력 : 22 민첩 : 21
지혜 : 15 지능 : 18 행운 : 5
보너스 스탯 : 55
'이런 횡재가...!'
짜르르한 쾌감이 온몸에 느껴졌다.
태청단과 진기도인의 효과로 인해 4였던 레벨이 폭렙하여 단숨에 15레벨이 되었고 55 포인트의 보너스 스탯을 얻었다.
"크하하하!"
나는 입이 귀밑까지 찢어지도록 웃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영약, 영약, 영약을 달라고 노래를 하는구나.
무협 영화를 볼 때마다 영약 하나에 수많은 무림 고수들이 왜들 그렇게 목을 맸는지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더욱이 몬스터가 존재하지 않는 이곳에서 어떻게 레벨을 올려야할지 고민을 했었는데, 생각지도 않게 답을 얻어 기분이 무지 좋았다.
각설하고 그간의 고민이 눈 녹듯이 사라지며 부푼 기대감에 한껏 고양되었다.
* * *
악취가 진동하고 있다.
쉴 새 없이 밀려오는 구정물은 마치 뼛속까지 파고들 정도로 더럽고 추잡했다.
하지만 나는 묵묵히 걸어갔다.
오물을 피하기 위해 시선을 돌리거나 코를 막지 않았다.
오히려 잘 단련된 사냥개 같은 눈빛으로 주위를 살폈다.
방심은 곧 죽음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7시 방향이다.'
나는 슬라임을 발견하자마자 단번에 걸음을 멈췄다.
몸을 오수에 담그고 주변을 경계했다.
동료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검을 빼어 들고 놈을 향해 뛰쳐나갔다.
"크륵!"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슬라임의 몸이 두 쪽으로 갈라졌다.
-[극소량의 경험치가 증가합니다.]
난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곳은 지하수도 던전이다.
국가에서 관리하는 최하급 게이트지만 누구나 회피하는 던전이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이곳에서 십 년 이상 활동한 헌터가 얼마 전 시커멓게 썩은 얼굴로 유명을 달리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모르긴 몰라도 절반은 사실인 것 같다.
이 오물 천지인 오수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피부가 괴사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이곳을 벗어날 수 없었다.
모두가 기피하는 곳이었기에 나 같은 F급 헌터가 솔로잉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죽어라!"
-쐐액!
-[극소량의 경험치가 증가합니다.]
'젠장, 도무지 답이 없네. 하지만 이곳이 아니면 다른 곳이 없으니 포기할 수도 없고!'
아쉽지만 오늘 사냥은 여기까지인 것 같다.
무려 10시간을 쉬지 않고 사냥했더니 체력이 고갈된 느낌이 들었다.
"...오늘은 영 꽝이군."
슬라임 녀석은 최하급 몬스터답게 아이템이라 부를 수 있는 부산물을 주지 않았다. 소량의 경험치와 고작 낡은 동전 몇 개뿐이다.
"고블린을 만났으면 좋았을 텐데."
가끔이지만 운이 좋으면 지하수도에서 고블린과 조우할 수 있다.
뭐 열 번 중에 한 번 정도지만 그런 날은 운수가 좋은 날이다.
-[지하수도 게이트 관리소]
"여기 4만 3천 원요."
"...네."
관리소에 붙어 있는 헌터 마켓에 들러 사냥하고 얻은 동전을 교환했더니 현금 43,000원을 쥐여 줬다.
젠장! 시간당 4,300원을 벌었다.
이건 최저 시급에도 미치지 못하는 소액이었다.
"후우!"
잠시 손에 쥐어진 43,000원을 허탈하게 바라보았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미래가 기대되는 인재에서 한순간 나락으로 떨어졌다.
생각해 보면 그날이다.
국립 마석 연구소에 견학을 간 이후로 내 삶이 송두리째 바뀌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폭발에 휘말리며 또 다른 내가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고유 특성 분신이 강제적으로 봉인되었고 또 다른 나는 몇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생사조차 알 수 없다.
암튼 그 후 내 인생은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톱을 바라보던 성적이 하강 곡선을 그리기 시작하더니 황기택의 방해에 밑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나마 순간 이동 스킬이 아니었다면 졸업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고유 특성 정보>
이름 : 분신
등급 : U(Unique)
숙련도 : 31%
설명 : 나와 같은 또 하나의 나를 만들어 서로가 얻은 모든 경험을 공유한다.
사용 시간 : 720분
재사용 시간 : 시스템 오류
*현재 ****으로 인한 오류로 사용할 수 없음
특성을 확인하면 그저 답답할 뿐이다.
시스템 오류라니, 이런 건 난생처음 보는 것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헌터넷에 글을 올려 보았지만 만족스러운 답을 얻지 못했다.
대다수의 헌터들 역시 이와 같은 현상에 대해 알지 못했으며 그중 일부는 나를 관심 종자 혹은 거짓말쟁이로 취급했기 때문이다.
제10화
10화 촉망받는 헌터에서 나락으로 떨어진(1)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시스템 오류에 대해 아시나요?
↳시스템 오류요?
↳시스템에 오류가 나요?
↳네, 주작 오지네요.
-스킬에 오류가 발생해 사용이 불가능한데 혹시 해결책이 있나요?
↳지금 농담하시는 거죠?
↳그럼 스킬 사용이 불가능하다는 말인데,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립니까?
-시스템 오류에 대해 아시는 분이 계시면 답 달아 주세요.
↳행운의 편지를 100통 보내 보세요. 그럼 또 알아요? 오류가 풀릴지~~
↳그거 오류동에 가면 치료할 수 있어요.
-시스템 오류에 대해 아시나요?
↳ㅇㅇ 알죠.
↳해결책이 있나요?
↳그럼요. 먼저 시스템을 깨끗하게 미시고 윈도우를 다시 깔아 보세요.
↳큭큭큭!
↳큭큭큭!
헌터넷에 댓글이 달렸기에 서둘러 확인했는데 역시... 기대를 저버린다.
나는 허탈한 마음을 감추며 상태 창을 열었다.
<상태 창>
이름 : 최선우
레벨 : 8
특성 : 분신(Unique) *사용 불가
생명력 : 200/200 마력 : 180/180
힘 : 20 체력 : 20 민첩 : 20
지혜 : 12 지능 : 18 행운 : 5
보너스 스탯 : 5
"하아...!"
한숨이 절로 나온다.
고작 8레벨 최하급 헌터. 이것이 현재 내 위치다.
노력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단언컨대 남들보다 배 이상으로 노력했다.
고유 특성을 사용할 수 없어 성장이 더딘 것이 사실이지만 정작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빌...어먹을!"
이건 나중에 얘기하도록 하자.
생각만으로 울화통이 터질 것 같으니까.
어느새 시간이 새벽 2시를 가리키고 있다.
사냥하느라 저녁을 건너뛴 탓에 불이 켜져 있는 편의점을 찾았다.
"컵라면 하나, 삼각 김밥 두 개, 음료수 하나. 4,700원입니다."
"여기요."
의자에 앉아 허기를 채우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친구 선환이다.
"오냐, 형님이다."
-큭! 지랄한다. 전화받는 걸 보니 사냥은 잘 다녀왔냐?
"응."
-뭐 좀 건졌어?
"아니. 완전 거지야. 10시간 동안 슬라임만 사냥했다."
-쩝.
"근데 무슨 일이야, 이 늦은 시간에."
-헌터넷에 뉴비 공고 떴더라.
"진짜?"
-응.
"오! 고마워. 나중에 통화하자."
-야, 야....
난 통화를 끊자마자 헌터넷에 접속했다.
길드나 소규모 파티에서 가끔 뉴비를 구하는 글이 오는데, 선환이가 그걸 보고 연락을 준 것 같았다.
나는 게시판에 올라온 글을 쭉 검색해 보았다.
'찾았다.'
선환의 말대로 강남 소재 중형 길드에서 신입 길드원을 모집한다는 글이 올라와 있었다.
시간과 장소를 확인한 후, '톡톡톡' 친구에게 문자를 남겼다.
-[마이 브로! 확인했다. 고마워. 붙으면 모두 네 덕이다.]
-[이번엔 확실히 붙을 거다. 마이 브로.]
다음 날,
나는 강남역에서 내렸다.
목적지는 7번 출구 앞에 위치한 고층 건물이다.
'여기가 면접장인가?'
빌딩 전면에 [블랙이글사]라는 사명이 번쩍였다.
오랜만의 면접이라 그런지 선뜻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돌아갈 마음은 더더욱 없었다.
난 크게 심호흡을 하고 빌딩 안으로 들어섰다.
"어떻게 오셨나요?"
안내 데스크에 앉아 있던 여직원이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지극히 사무적인 말투로 물었다.
"면접을 보러 왔는데요."
"면접요?"
"네, 헌터 면접요."
헌터 면접을 보러 왔다는 말에 여직원의 건조했던 눈에 잠시 이채가 흘렀다.
"아~ 헌터세요?"
"네."
"그럼 15층에 있는 그랜드 볼륨으로 가시면 돼요."
여직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3시 방향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가리켰다.
앉아 있을 땐 몰랐는데, 이렇게 일어나니 몸매가 모델 뺨치게 좋았다.
"오른쪽으로 가시면 엘리베이터가 있습니다. 행운을 빌게요."
"가, 감사합니다."
헌터라는 말에 대접이 이렇게 달라지다니,
나는 주먹을 한 번 불끈 쥐고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길 기다렸다.
이번엔 꼭 붙고 싶었다.
15층에 올라가자 그랜드 볼륨에는 이미 사람들로 꽉꽉 들어차 있었다.
대체로 가벼운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었지만 의외로 근사한 양복을 빼입은 사람들도 보였다.
'헐, 많이 왔네.'
적어도 1,000명은 되어 보인다.
헌터넷에 뜬 공지에 따르면 이번에 신입으로 10명 내외를 뽑는다고 알려졌으니 100:1의 경쟁률이다.
'이번에는 꼭 붙는다.'
나는 스스로에게 파이팅을 외치며 지정된 좌석에 앉았다.
"모두들 반갑습니다. 저는 블랙이글의 부길드장 박현우 헌터입니다. 저희 길드에 지원해 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요란한 박수 소리가 뒤를 이었다.
"그럼 지금부터 다섯 분씩 면접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호명되시는 분들은 안쪽으로 들어오시면 됩니다."
잠시 후,
내 번호가 호명되었다.
"581번부터 585번까지 들어오세요."
면접장 내부로 들어가자 먼저 반원형의 테이블과 세팅되어 있는 의자가 보이고 블랙이글 길드의 간부로 보이는 세 명의 면접관이 앉아 있었다.
면접관의 질문이 시작되었다.
"최선우 헌터, 자네는 국립 헌터 아카데미를 졸업했군."
"네."
"그런데 아카데미 성적이 왜 이래? 1학년 때는 괜찮았는데 말이야."
'시스템에 오류가 생겨서요.'라고 말할 순 없다.
이럴 땐 어설픈 변명보다 정면 돌파가 나을 수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시절이었습니다. 기회를 주신다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
면접관의 표정에는 어떠한 감정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내 정보가 담긴 서류를 한 장씩 넘겨 가며 무미건조하게 읽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짧은 순간 호감의 빛이 나타났다 사라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왠지 운수 좋은 날이 될 것 같았다.
"순간 이동 스킬에 검술을 익혔군. 조합이 나쁘지 않은데?"
"그러게요. 레벨이 낮지만 가능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수색대원이나 공격용 딜러로 활용할 수 있고요."
"음! 길드에서 지원해 주면 무난하게 성장할 친구 같군."
분위기가 나쁘지 않다.
이번에는 정말 붙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때 한 통의 전화벨이 울렸다.
"미안하네, 이건 받아야 하는 전화라서 말이야."
남자는 동료 면접관에게 양해를 구하더니 이내 전화를 받았다.
"네, 전화받았습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공손히 전화를 받는 폼을 보아하니 높은 양반에게 전화가 걸려 온 모양이다.
잠시 후,
형식적인 질문을 끝으로 면접이 끝났다.
"수고했습니다."
"합격하신 분에게 개별적으로 연락이 갈 겁니다."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난 내심 합격을 기대하고 있었다.
좋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긴장이 풀렸는지 안도의 한숨을 몇 번 내쉬자 문득 화장실이 가고 싶었다.
그렇게 면접을 끝내고 들른 화장실.
나는 그곳에서 익숙한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바로 조금 전 내게 질문을 던졌던 면접관의 음성이었다.
"팀장님, 그럼 그 친구는 떨어뜨리는 겁니까?"
"응."
"아쉽네요. 그 친구 순간 이동 스킬을 가졌던데 말입니다."
"그러게 말이야. 잘만 키운다면 성장 가능성이 보였는데, 어쩔 수 없지. 우리가 무슨 힘이 있어? 위에서 까라면 까는 거지."
순간 이동 스킬?!
설마 내 얘기를 하는 건 아니겠지?
나는 호흡마저 멈춘 채 그들이 나누는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이때 면접관의 전화벨이 울렸다.
"네, 전화받았습니다."
-....
"예. 말씀하신 것처럼 최하점을 매겼습니다. 그럼요. 최선우 그 친구는 100% 불합격입니다."
-....
"뭘요. 제가 더 감사하죠."
-....
"네~ 알겠습니다. 조만간 한번 뵙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그럼 들어가십시오."
면접관의 짤막한 통화가 끝났다.
"팀장님, 누군데 전화를 그렇게 받으세요?"
"...대화 그룹."
"대화 그룹요?"
"응."
"오! 대박. 그럼 대화에서 그 친구를 떨어뜨리라고 한 거예요?"
"그래. 동현아. 참고로 이거 비밀이다."
"아유~ 팀장님도 참! 저도 눈치가 있습니다. 흐흐흐."
"오케이. 그럼 됐어."
"근데 팀장님. 고작 F급 헌터에게 무슨 감정이 있어서 그런 전화가 온 걸까요?"
"그건 나도 모르지."
"혹시 재벌가의 사생아, 뭐 이런 거 아닐까요?"
"너 이 새끼, 드라마 많이 봤구나. 암튼 우연이라도 알려고 하지 마.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꼭 몰라도 되는 걸 알았다가 죽잖아. 너 그러다 죽는다."
"아이고 왜 겁을 주세요? 장난이에요. 전 아무것도 못 봤고 아무것도 못 들었습니다."
"오~ 그런 자세, 좋아."
"...."
나는 두 사람이 나가고 나서도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다.
이제야 내가 처한 상황이 이해가 된 것이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가슴속에서 분노가 폭발했다.
사실 순간 이동 스킬이면 나쁘지 않다.
아니, 막말로 누구나 바라는 매력적인 스킬 중에 하나다.
그런데 왜 항상 면접에서 물을 먹었나 했더니 황기택! 그 빌어먹을 자식이 수를 부리고 있었다.
놈은 이렇게 비겁한 방식으로 여전히 내 목을 조이고 있었다.
'그래. 맞아. 협회 사람들이 과민하게 반응한 것도 녀석 때문이었어.'
"황기택! 이 개X식아. 그런다고 내가 포기할 것 같아?"
세상은 상상 이상으로 치사하다.
고로 사람들에게 얕보이면 살아갈 수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무늬만 더불어 사는 세상이지 돈이 없거나 힘이 없으면 정글과 다름이 없었다.
난 여기서 무너질 수 없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 놈에게 복수하고야 말리라 다짐했다.
그동안 사회생활을 하며 배운 것이 있다면 이것 하나뿐이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세상이 아니야. 끝까지 살아남은 자가 강한 거지. 어디 두고 보자, 황기택!"
* * *
우주의 관점에서 보면 지구는 그야말로 먼지 티끌밖에 안 되는 존재다.
수많은 종족과 족속이 서로 다른 세계, 다른 차원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지구의 상황은 어떤가?"
어둠 가운데 홀연히 들려온 음성.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벨벳으로 치장한 남자가 그 음성을 향해 공손히 답했다.
"현재 게이트를 꾸준히 열고 있습니다."
"게이트의 활성화 수치는?"
"30%입니다."
"...30%."
"네. 하지만 지구 차원의 간섭력이 점차 약해지고 있으니 활성화 수치가 지속적으로 올라갈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후후후. 그렇군. 간섭력이 약해지고 있다는 건 아주 좋은 일이야."
"시간은 우리 편입니다."
"하하하! 그래."
어둠 속의 음성이 웃음을 토해 냈다.
"지구 침략 계획에 변수는 없나?"
"아틀란티스 대륙과 *&*$@@@**한 것 같으나 한발 늦었습니다. 큰 변수가 없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아틀란티스... X%@...#$$... 차원**#... $@^&...이다."
"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후후후. 좋아. 계속 수고하게."
어둠 속에 울리던 음성이 심연 속으로 사라졌다.
제11화
11화 촉망받는 헌터에서 나락으로 떨어진(2)
강원도 태백,
인적이 드문 고산지대 폐광 앞에 위치한 F-7게이트.
"최선우 헌터, 확인되었습니다. 준비되셨으면 들어가십시오."
"네."
게이트 관리자의 허가가 떨어지기 무섭게 나는 게이트를 향해 한 발짝 발걸음을 옮겼다. 아직 들어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불쾌한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 같다.
"후우우우...."
나도 모르게 숨을 한 번 깊게 들이마신 후, F-7게이트에 들어갔다.
[지하수도 게이트]
[F등급]
[규모 - 중소형]
시스템의 메시지와 함께 지하수도에 들어오자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오늘따라 유독 그 냄새가 심해 머리까지 어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오랜만이다. 이 지긋지긋한 놈아."
나는 오수 위에서 유영하듯 떠다니고 있는 배설물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만약 누가 이 같은 모습을 봤다면 나를 향해 미친놈이라 손가락질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랴!
눈에 보이는 것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오물 덩어리뿐인데.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즐기는 것이 정답이 아니겠는가!
나는 다시 한번 가방을 둘러메고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툭, 툭!
지하수로에 입장한 지 몇 분이 지나지 않았는데, 작은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강원도 태백까지 장거리 사냥을 왔는데 오늘은 좀 재수가 있으려나?
난 순간 호흡을 멈추고 오수에 몸을 담갔다.
'...저기군.'
시야에 렛맨의 형체가 들어왔다.
이게 얼마 만에 보는 렛맨이냐?
마수걸이가 슬라임이 아니라니 오늘은 왠지 운이 좋을 것 같았다.
나는 가빠지는 호흡을 참으며 조금 더 렛맨을 기다렸다.
그리고 놈이 내 영역에 확실히 들어온 순간 입을 꽉 다문 채 블링크 스킬을 펼쳤다. 예전에 무턱대고 입을 열었다가 오물이 튀며 입안으로 들어간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블링크!"
내 모습이 번쩍이며 사라지는 동시에 마치 유령처럼 렛맨의 등 뒤에 나타났다.
나는 주저 없이 놈의 목에 검을 쑤셔 넣었다.
"켁!"
-덜...덜덜.
놈은 마치 학질에 걸린 것처럼 몇 번 경련을 일으키더니 이내 축 늘어지고 말았다.
몇 시간 후,
아무래도 몬스터 버프를 받은 모양이다.
-[띠링, 아이템 고대 금화를 얻었습니다.]
이야호~
고대 금화다. 최소 350만 원 득!
역시 살다 보면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고 이렇게 안 좋은 날이 있으면 저렇게 좋은 날도 있는 것 같다.
무려 3시간 만에 아이템을 3개나 얻은 것이다.
물 들어올 때 달리라는 말이 있다.
오늘은 발바닥에 땀이 날 정도로 빡시게 달리리라 다짐했다.
'어라? 이건 무슨 냄새지?'
그러던 때였다.
갑자기 맞은편 전방에서 바람을 타고 강렬한 악취가 느껴졌다.
천천히 그리고 벽에 기대어 은밀하게 이동했다.
12시 전방, 한 쌍의 붉은 빛이 보인다.
고블린, 그런데 일반 고블린보다 적어도 2배 이상 커 보이는 녀석이다.
'저놈은?!'
붉은 눈의 정체는 평범한 고블린이 아닌 고블린 전사였다.
F급 게이트에 한 1,000번 정도는 들어와야 만날 수 있다고 알려진 보스 몬스터가 눈앞에 나타났다.
대박이다.
내가 만약 경험이 없는 초짜 헌터였다면 도와줄 파티원도 없어 굉장히 위험했겠지만 다행히도 난 초짜가 아니었다. 순수 경험만 따지면 D급이라 봐도 무방했다.
저 녀석을 사냥하는 데 상공한다면 다량의 경험치와 함께 꽤 좋은 아이템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았다.
일단 놈의 좌우에 있는 일반 고블린 두 놈을 먼저 처리해야 했다.
나는 재빨리 남은 마력을 계산했다.
아슬아슬하지만 가능할 것 같았다.
그렇다면 선공이 필승이다.
자연스레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일단 놈들의 시선부터 돌리자.
나는 가방에서 유리구슬 조각을 잔뜩 붙인 쇠붙이를 꺼냈다.
이것은 반짝이는 쇠붙이를 병적으로 좋아하는 고블린들의 본성을 이용한 유인책이었다.
-슥, 슥... 슥! 슥!
고요한 가운데 서서히 다가오는 고블린의 발자국 소리.
나는 오물을 박차면서 뛰어올랐다.
"케에엑!"
지하수로에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메아리쳤다.
맹렬한 기세로 쇄도해 오는 두 마리의 고블린.
나는 지체 없이 순간 이동 스킬을 사용해 놈들의 후미에 나타났다.
-슉, 슉슉!
나는 번개처럼 고블린의 목을 그어 버렸다.
보스를 사냥할 때, 초보들이 간과하는 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부하를 먼저 정리하고 마지막에 보스를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보스를 먼저 공격했다가 실패하면 협공을 당하기 때문이다.
"켁."
빙고!
고블린 두 마리를 처치하는 데 성공했다.
이제 보스만 상대하면 된다.
지금부터는 정신을 더욱 똑바로 차려야 한다.
-휙! 휙! 휘익!
놈이 움직일 때마다 바람을 가르며 철퇴가 날아왔다.
하지만 나는 몇 년 동안 지하수도에서 수많은 전투를 치러 왔고 그로 인해 실전 경험이 충분했다. 놈의 공격을 피하는 동시에 투기를 끌어 올렸다.
남은 마력을 계산해 보니 예상한 대로 블링크 스킬을 딱 한 번 쓸 양이 남았다.
나는 기회를 엿보는 한편 놈과 치열한 공방을 주고받았다.
-쾅! 쾅! 쾅!
뜻대로 되지 않아 화가 났는지 이제는 마구잡이식으로 이곳저곳을 향해 철퇴를 휘둘렀다.
위험한 순간도 있었다.
어느새 내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지, 지금이다.'
나는 녀석이 철퇴를 횡으로 크게 휘두른 그때 순간 이동 스킬을 펼쳤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힘을 짜내어 놈의 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크아아!"
강렬한 외침이 터져 나오며 놈의 얼굴이 몸통에서 분리되었다.
"빌어먹을 고블린 쉐끼! 게임 오버다. 하하하하!"
다음 순간,
시스템의 기분 좋은 안내음이 들려왔다.
-[띠링, 경험치가 크게 오릅니다.]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띠링, 검술 숙련도가 상승합니다. 기초 검술(E)이 하급 검술(D)이 되었습니다.]
기분 좋은 알림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고블린 전사의 사체가 있던 자리에 밝게 빛나는 책 한 권이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스킬 북이다.'
저건 스킬 북이 분명했다.
난 떨리는 손으로 책을 집어 들었다.
-[띠링, 스킬 북을 얻었습니다.]
나는 서둘러 스킬 창을 띄워 보았다.
<스킬 정보>
이름 : 실드(액티브)
등급 : C급
숙련도 : 1%
설명 : 적의 공격을 방어한다. 마력 소모 100
쿨 타임 : 24시간
C급 스킬. 그것도 무려 실드 스킬이다.
짜르르한 쾌감이 느껴지는 동시에 그간의 고생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실드 스킬을 익히시겠습니까? Y / N]
당연하지.
마력 소모가 컸지만 이것은 여벌의 생명을 얻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우울한 날은 가고 하늘 높이 비상할 일만 남은 것인가?
나는 미친 사람처럼 웃으며 Y를 눌렀다.
다음 순간,
시스템의 무심한 음성이 귓가에 들려왔다.
-[실드 스킬을 익히셨습니다.]
* * *
**은행. 태백 지점.
"웁!"
"어머, 이게 대체 무슨 냄새야?"
은행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모두 지하수도 게이트의 여파다.
게이트 관리소에 마련된 간이 시설에서 몸을 빡빡 씻었지만 적어도 며칠은 고생해야 한다.
"누가 똥 싼 것 아냐?"
"에이 X발."
사람들은 무슨 세균을 보는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지만 대놓고 시비를 거는 사람은 없다.
"야! 조용히 해. 들리겠다."
"왜? 내가 틀린 말 했어?"
"저 사람 헌터야, 헌터."
"헌터?"
"그래. 보아하니 지하수도에 다녀온 모양이네."
"...쳇!"
오늘은 기분이 무척이나 좋은 날이다.
평소와 같은 날이었다면 살벌한 분위기를 연출했겠지만 말이다.
나는 산뜻한 미소와 함께 허리께에 달린 80cm의 검을 슬쩍 보여 주었다.
"으음!"
"...!"
"험...험!"
역시 모두가 고개를 돌리며 딴청을 부린다.
오죽하면 청원 경찰마저 내게서 시선을 돌릴 정도였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송금 좀 하려고요."
"네."
난 지금 기분이 무척이나 좋았다.
실드 스킬을 제외하고도 이번 사냥을 통해 1,000만 원에 가까운 수익을 얻었기 때문이다.
"여기 400만 원입니다."
나는 비상금으로 100만 원만 남겨 두고 어머니께 900만 원을 보냈다.
은행원은 내가 내민 액수와 계좌 번호를 확인한 후, 자판을 두들겼다.
"송금 완료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은행에서 나오자마자 엄마에게 문자를 보냈다.
-[중전마마, 용돈 보내 드립니다. 아들~♡]
-[띠링, 옴마야~ 아들. 이게 웬 돈이야?]
-[별것 아니에요. 용돈 쓰시라고요.]
-[띠링, 우리 아들 막 위험한 데 다니는 건 아니지?]
-[아이고~ 아닙니다. 어마마마. 안전이 최우선이죠. 안전제일주의! F급 게이트에 들어갔다가 운이 좋았어요.]
-[띠링, 호호호~ 수고했어. 오늘 소고기 파티 하자. 아빠랑 혜진이에겐 내가 일찍 들어오라고 연락할 테니 너도 빨리 와.]
-[네, 지금 출발하면 2시간 정도 걸릴 거예요. 제가 제일 먼저 도착할 것 같네요. 이따 봐요. 엄마.]
-[띠링, 오케이~]
용돈이라는 명목으로 드렸지만 나는 알고 있다.
어머니가 저 돈을 어떻게 쓸지.
우리 아버지는 작지만 알차게 운영하던 중소기업의 대표였다.
순수익으로 월 천만 원 이상을 가지고 오셨으니 수입 역시 괜찮았다.
그런데 3년 전 아버지 회사가 망했다.
배임 및 횡령으로 검찰에 소환되었는데 다행히 무죄 판결을 받으셨다. 하지만 그사이 거래처에서 일방적으로 거래 중지를 통보해 왔고 은행 대출이 막히면서 결국 회사가 문을 닫게 되었다.
우리는 양천구 목동에 위치한 50평대 프리미엄 아파트에서 한순간에 김포 고촌에 위치한 23평 빌라, 그것도 전세로 이사를 했다.
아버지는 지금 택시 일을 하신다.
하루에 10시간 이상 서울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고 계시는데 삶은 여전히 팍팍하다.
빛이 있기 때문이다.
그 탓에 처녀 시절을 제외하고 사회생활을 하지 않으셨던 어머니도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 현재 대형 마트 캐셔 일을 하고 계신다.
우리는 어머니의 선택을 극구 만류했지만 어머니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올해 서울 소재 명문 사립 대학 미술과에 합격한 여동생 때문이다.
아버지와 나의 수입만으론 생활비와 사채를 갚기에도 빠듯했기 때문이다.
여동생의 미래를 위해선 어머니의 도움이 필요했다.
-엄마가 손이 없니, 발이 없니?
-그래도요.
-며칠 일해 봤는데, 힘들지 않아. 그러니까 엄마 말 들어. 집에만 있으니까 좀이 쑤셔서 그래.
-알겠어요. 대신 힘드시면 바로 그만두시는 거예요.
-그래. 알았어.
어머니는 월급을 여동생의 이름으로 만든 계좌에 전부 넣었다.
그 돈은 여동생의 학비로 전액 사용될 예정이었다.
"오빠, 오빠."
누군가 흔들어 깨우는 소리에 나는 부스스 눈을 떴다.
잠깐 쉰다고 눈을 감았는데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일어나, 오빠. 밥 먹자."
"어? 지금 몇 시야?"
"저녁 8시. 엄마랑 아빠도 들어오셨어."
문틈 사이로 고기 굽는 향이 들어와 코끝을 자극했다.
"오빠가 엄마 용돈 줬다면서?"
"누가? 내가?"
"헤헤헤. 왜 그러셔?"
실눈을 뜬 채 눈웃음을 치는 여동생 혜진이다.
"오빠가 용돈 보내 줘서 오늘 소고기 파티 한다고 엄마가 그러던데?"
"큭! 그렇게 좋으냐?"
"그럼 당연히 좋지. 소고기가 대체 얼마 만이야? 헤헤헤. 소고기야, 넌 오늘 죽었어."
나는 완전 좋아라 하고 있는 여동생의 손을 잡고 말했다.
"고마해라. 많이 묵었다 아이가."
"어우! 하나도 안 비슷해."
"진짜 안 비슷해?"
"응. 완전!"
"...."
나는 딴청을 부리며 괜스레 애꿎은 머리만 긁적였다.
"얘들아, 선우야, 혜진아. 고기 먹자."
"네. 나가요."
"빨리 나와. 고기 탄다."
여동생은 고기가 탄다는 말에 마치 100미터 달리기 선수처럼 뛰쳐나갔다.
"오빠~ 빨리 와. 늦으면 고기 없어."
"아, 알았어."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비록 우리 집이 가난해졌지만 그 이상으로 가족 간의 우애가 깊어진 것 같았다.
제12화
12화 천재 코스프레와 벽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며 사는 곳은 원래부터 소문이 빠르다.
하지만 늘 한적한 곳에서 수련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무당의 제자들은 사형들이 내게 무공을 전수해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무학의 뿌리는...."
청수 사형의 가르침이 시작되었다.
첫 수업은 무학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구하는 설명으로 시작했다.
"...무릇 동물의 형상을 기초로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무공은 크게 외가기공과 내가기공으로 나뉘는데 우리 무당의 무공은 내가기공을 중심으로...."
청수 사형과 청혜 사형은 일주일에 한 번씩 번갈아 가며 내게 가르침을 베풀어 주었는데 며칠이 지나지 않아 본격적인 무공 수련에 들어갔다.
그리고 나 역시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예부터 뛰어난 제자를 가르치는 기쁨이 크다고 했다.
이미 지구에서 고등교육을 받았고 몬스터와 실전을 경험했다.
그렇다.
이제부턴 천재 코스프레다.
"오늘 청운 사제에게 전할 것은 우리 무당이 자랑하는 태극권이야."
"태극권요?"
"그래. 그런데 우리 무당의 태극권은 민간에 전해진 태극권과 달라."
"무엇이 다른데요?"
"민간 세상에 뿌려진 태극권은 보양을 위한 기공에 가깝지만 우리 무당의 태극권은 이정제동(以靜制動), 후발제인(後發制人)의 묘리를 담았기 때문이지."
"이정제동, 후발제인!"
"그뿐만이 아니야. 내려오는 전설에 따르면 음양과 오행을 담았고 태극권이 궁극에 이르면 능히 우주의 기운을 담을 수 있다고 전해져 내려오지."
"우주의 기운을요?"
"그래."
다음 순간,
청혜 사형이 입으로 구결을 외우며 태극권을 직접 펼쳐 보였다.
사형의 손과 발은 기본적으로 동심원을 그려 가는 가운데 태극의 형상을 완성하고 있었다.
나는 잠시도 눈을 떼지 않고 집중해서 관찰하였다.
처음에는 사형이 내게 보여 주기 위해 일부러 느리게 연출하는 줄만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보너스 스탯을 사용한 덕에 전에는 보이지 않던 후발선제(後發先制)의 묘리가 느껴졌다.
청혜 사형은 산처럼 무겁게 느껴지면서도 때때로 깃털과 같은 가벼움을 보이며 점차 자신만의 태극을 만들어 갔다.
-꿀꺽!
나도 모르게 침이 넘어간다.
믿기지 않았지만 사람의 동작이 이처럼 부드럽고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에 그저 놀랄 뿐이었다.
"와아. 청혜 사형, 대단해요."
태극권 시범이 끝나자마자 나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이것은 진심으로 감탄했기 때문이다.
"청운 사제, 무엇이 대단하다는 거지? 혹시 이 사형에게 설명해 줄 수 있을까?"
"네. 사형의 움직임에 한없는 부드러움이 보였어요."
"한...없는... 부드러움?"
"네. 그건 끊임없는 얼굴이에요."
"끊임없는 얼굴, 그게 대체 무얼까?"
"얼굴은 동그랗게 생겼잖아요. 원은 처음과 끝이 없어요. 마치 태극처럼 한없이 이어지죠."
"그, 그래서?"
어쩌다 보니 무공을 넘어 무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청운 사제, 그럼 기는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음. 기(氣)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늘 우리의 주변에 있는 거예요. 만물을 만들어 내고 생동케 하며 자연을 이루는 기초가 바로 기라는 친구죠. 지금 이 순간에도 저와 사형의 곁에 친구가 함께하고 있고요."
"기라는 친구가 함께 있다고?"
"네. 기라는 친구는 바깥에도 있지만 제 안에도 있어요. 아! 그러니까 곧 제 안에도 우주가 있는 거네요. 소우주."
"왜 그렇게 생각하지?"
"오장(五臟)의 심장, 콩팥, 간, 폐, 비장이 각기 화, 수, 목, 금, 토의 오행에 배당되어 있잖아요. 결국 오장이 곧 오행이라 볼 수 있는 것과 같아요. 내공이 단전에서 시작해 혈맥을 타고 흐른 뒤 다시 단전으로 모이게 되어 있는데 그걸 크게 나누어 소주천과 대주천으로 구분하고."
조용한 정적만이 흐르는 가운데 나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남송 시대 성리학자 주희에 의해 완성된 이론을 이황 선생의 표현을 빌려 결론을 지었다.
"기는 우주적 실체로부터 존재한다. 스스로 작용하는 것은 오로지 기(氣)뿐이다. 이와 기는 우주와 인간의 존재, 생성 근원이며 이기지묘(理氣之妙)다."
"헉!!"
얼마나 크게 놀랐는지 청혜 사형의 입이 떡 하고 벌어졌다.
아이고! 얼른 닫으세요. 그러다 입에 파리가 들어가겠어요. 흐흐!
하긴 내가 생각해도 탄성을 토해 낼 만했다.
"지, 지금 뭐라고 했지? 청운 사제. 한 번만 더 말해 볼래?"
"네, 사형."
나는 이황의 주리론을 다시 한번 차근차근 설명했다.
주희의 책을 읽었다면 그의 이론을 읊조릴 수 있다. 물론 이것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나는 여기에 한술 더 떠 퇴계 이황 선생의 이론을 마치 내가 생각해 낸 것처럼 설명한 것이다.
청혜 사형의 표정이 가관이다.
이제는 하얗게 질려 얼굴이 창백한 수준이었다.
'너무 오버했나? 설마 나를 외계인 취급하는 것은 아니겠지?'
참고로 그 후 난리도 아니었다.
청혜 사형의 말에 청수 사형까지 합세해서 나를 테스트하고는 입이 딱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 입은 한참 동안 다물어지지 않았다.
"막내 사제가 이걸 생각했다고?"
"네, 사형."
"...!!"
청수 사형이 말을 잇지 못하고 있을 때,
난 지그시 웃으며 청수 사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옆에 있던 청혜 사형은 뭔가 그리 흡족한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원시천존을 찾고 있었다.
"청혜 사제의 말이... 사실이었군."
아직까지 놀란 눈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있는 청수 사형.
설마 내가 너무 튀었나?
그건 아니다.
기왕지사 천재 코스프레(Cospre)를 하기로 한 이상, 눈도장을 찍으려면 보여 줄 때 확실하게 보여 줘야지 어설프게 하려면 하지 않는 것이 정답이다.
어쨌든 두 사형이 내린 결론은 장문 사형을 제외하고 내 능력에 대해 함구하기로 한 것이다. 지나친 관심이 독이 될 수 있다는 의견을 조심스럽게 나누면서 말이다.
'그렇지. 영재라고 소문나서 방송 탔다가 망가진 애들이 한둘이야?'
나 역시 사형의 의견에 적극 동조했다.
"그럼 이번엔 우리 막내 사제가 태극권을 한번 펼쳐 볼 수 있을까?"
"네, 사형."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태극권의 기수식을 잡았다.
참고로 후에 들은 얘긴데,
한동안 청수, 청혜 사형이 만나는 제자마다 오장과 오행 그리고 단전과 소우주의 관계에 대해 물어보았다고 한다. 아마도 이날 받은 정신적 충격이 대단했던 모양이다. 흐흐흐.
* * *
오늘은 청수 사형의 수업이 있는 날이다.
사형은 먼저 태극검의 구결(口訣)을 설명한 후,
땅바닥에 있는 나무토막을 주워 들고 직접 시범을 보여 주었다.
"자! 그럼 내가 먼저 태극검을 펼쳐 보일 테니, 한번 지켜보렴."
"네."
'휴, 역시 쉽지가 않구나.'
머리를 쓰고 말로 대화를 나누는 이론 수업은 문제가 없다.
오히려 천재 코스프레가 제대로 통했다. 하지만 검을 들고 행동으로 옮기는 수련에는 한계가 있었다.
일단 어린아이의 신체적 한계다.
또래에 비해 월등한 차이를 보여 주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또래에 비해서다.
헌터 짬이 있는데 이것도 못하면 접시 물에 코를 박고 죽어야지.
"청수 사형, 혹시 단기간에 강해지는 방법은 없나요?"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없진 않지. 하지만 그것은 대부분 순리에 따르지 않는 방법이야. 그리고 순리에 역행하면 반드시 탈이 나기 마련이란다."
"혹시 사파나 마교의 무공이 그런 건가요?"
"그래. 막내 사제도 알고 있었구나."
"네. 책에서 읽었어요."
"하하하. 그래."
사형은 흡족한 표정을 보이며 말을 이어 갔다.
"사파와 마교의 무공이 대부분 그렇다고 알려져 있단다. 순리에 역행하기 때문에 빠르게 강해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주화입마와 같은 부작용이 만만치 않지. 한계도 있고 말이야."
"한계요?"
"그래. 이것도 일종의 부작용이라 볼 수 있는데 사파의 무공은 일류까지 빠르게 오를 수 있으나 절정 이상의 경지에 오르기가 힘이 든다고 알려져 있다."
"사형, 아까 대부분이라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사파나 마교의 무공 중에도 순리에 역행하지 않는 무공이 있나요?"
"있지. 일명 신공절학이라 불리는 무공이다."
"신공절학!"
돌이켜 생각해 보면 참 재밌다.
우리가 무협 영화나 무협 소설에서 보고 읽은 것들이 대부분 실재하고 있다는 점이 말이다.
작가들은 이 시대를 살아 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찌 이러한 것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각설하고 그로부터 시간이 꽤 흘렀다.
두 분 사형에게 꾸준히 배운 결과 일단 겉으로 보기에는 태극권과 태극검의 외형(外形)을 완성한 것처럼 보였다. 정작 문제는 내형(內形)이었다.
이론적으로 완벽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이것은 내 머릿속에서만 통용되는 죽은 지식이다.
직설적으로 얘기하면 단순한 흉내 내기, 그것에 불과했다.
불이 뜨겁다는 것을 이론적으로만 알고 있는 사람과 실제 불을 보고 그 뜨거움을 경험한 사람은 분명 차이가 있다.
나는 거울 속에 비친 스스로의 모습에 답답하고 짜증이 날 정도였다.
"하아."
연신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내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마치 커다란 성벽이 날 둘러싼 느낌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날이 반복되었다.
"청운 사제가 조급함을 느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조급함?"
"네. 장문 사형."
"설마 벽을... 만난 것인가?"
"벌써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사형."
"아니, 난 가능성이 있다고 보네. 막내 사제를 보면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꼈네. 자네들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음!!"
"...으... 으음!!"
"쉽게 예단할 수 없지만 그저 불가능한 일로 치부할 것이 아니네."
"청명 사형의 말이 합당한 것 같습니다."
청명, 청수, 청혜는 그들의 막내 사제를 위해 심도 있는 논의를 거듭했다.
"잠시 수련의 방향을 무공에서 심공으로 바꾸는 것이 어떤가?"
"역시 사형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음! 그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다음 날부터 수련의 방향이 바뀌기 시작했다.
나는 청수, 청혜 사형의 가르침 아래 명상과 참선 그리고 관조라 불리는 마음의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천하난사필작어이, 천하대사필작어세. 천하의 모든 어려운 일은 반드시 쉬운 일에서 시작된다. 이로 인해 성인은 끝내 크게 되려고 하지 않음으로 크게 될 수 있다."
"조급함은 금물이야. 본성을 잃으면 심마(心魔)에 사로잡히는 것이야."
"고정관념이 가득한 마음을 비워야 해. 나 자신도 모르게 쌓여 있는 사념을 버려 물상의 관조를 이루는 동시에 몰아의 합일을 이루는 것이지."
"...!!"
와! 미치겠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뭔가 떠오를 것 같은데 잡히지 않고 내 한계만 절실히 깨달았다.
천재 코스프레의 대가인가?
사형들이 실망할까 내색지 않았지만 이대로는 답답함에 내가 먼저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나는 결국 모종의 결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제13화
13화 선재(仙才)
어쩌면 내 생각이 틀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천재는 99%의 노력과 1%의 영감으로 만들어진다고 했다.
고로 내게 부족한 그 1%의 영감을 얻기 위해 나는 그동안 모아 놨던 보너스 스탯을 지혜에 올인했다.
"가즈아!"
-[...18... 31... 40....]
-[띠링, 지혜가 50이 되었습니다.]
지혜가 50이 되자 머릿속이 시원해지는 느낌이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았다.
-[띠링, 칭호 지혜로운 자를 얻었습니다.]
<상태 창>
이름 : 최선우
레벨 : 15
특성 : 분신(Unique) *현재 사용 불가
칭호 : 지혜로운 자
생명력 : 280/280 마력 : 180/180
힘 : 24 체력 : 28 민첩 : 21
지혜 : 50 지능 : 18 행운 : 5
보너스 스탯 : 20
상태 창에 칭호란이 생겼고 <지혜로운 자>라는 타이틀이 붙었다.
이날부터 나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시야를 가리던 안개가 걷히며 머릿속에서 막연하게 느껴졌던 것들이 명확해졌다.
흐느적거리는 손짓 하나에도 의미가 있다는 것이 이해되었다.
그동안 나는 사형이 펼치는 태극권을 그저 똑같이 따라 하려고만 했다.
그런데 사형과 많은 부분이 달랐다.
우선 몸의 크기가 달랐고 밀고 당기기의 강약이 달랐으며 호흡과 호흡 간의 간극마저 차이가 있었다.
나는 나인 것이다.
태극권의 본질을 파악하고 내 것으로 만들어 그것을 재창조해야 했었는데....
씨익!
참으로 오랜만에 미소를 떠올릴 수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조급해하지 않았다.
'한번 펼쳐 볼까?'
나는 호흡과 동작을 일치시키며 태극권을 펼치기 시작했다.
-우우웅!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아지랑이처럼 옅은 기운이 나를 중심으로 이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넘치는 힘을 사용하면 안 돼. 끊임없이 원을 그리며 태극을 그려 가야 해.'
나는 아득해지는 정신 속에서도 끊임없이 태극을 그려 갔다.
왼쪽에 태극이 하나, 오른쪽에 태극이 하나. 각각의 태극이 하나로 교차되는 순간 마치 장강의 물결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또 하나의 태극이 그려졌다.
이 감각은 이제 어느 순간에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태극권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태극권이 아닌 나만의 태극권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시스템의 청아한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띠링, 무당의 태극권을 익혔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태극권에 이어 태극검마저 내 것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띠링, 무당의 태극검을 익혔습니다.]
후후후!
당연한 일이지만 시스템 덕에 두 무공 역시 스킬화되었고 난 로또를 경험하게 되었다.
<스킬 정보>
이름 : 태극권(액티브)
등급 : S급
숙련도 : 최하급
특징 : 성장형 스킬
<스킬 정보>
이름 : 태극검(액티브)
등급 : S급
숙련도 : 최하급
특징 : 성장형 스킬
무려 S급에, 그것도 성장형 스킬이다.
아직 숙련도가 최하급에 불과했지만 이건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암튼 각설하고 어쩌면 무당의 모든 무공이 태극권과 태극검에서 시작되었다는 말이 사실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몇 번의 계절이 바뀌는 동안 어리광 부리던 아이는 자라서 청년이 되었다.
나는 조용히 두 손을 모아 허리를 숙인 다음 태극권을 그려 내기 시작했다.
청혜, 청수 사형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내 동작 하나하나를 뚫어지게 지켜보았는데 스킬화로 인해 태극검을 펼치겠다는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몸이 자동으로 움직였다.
"오오, 이렇게 수려한 태극권을 본 적이 대체 언제였는지 모르겠군."
"감사합니다."
"하지만 자만은 금물이야. 알고 있지?"
"물론이죠. 계속 정진하겠습니다."
"허허허. 그래, 그래야지."
청혜 사형은 태극권 시연에 만족했는지 빙긋이 웃었다.
"자! 그럼 이번엔 태극검을 한번 구경해 볼까?"
"네, 청수 사형."
청수 사형의 말에 검을 손에 쥐고 곧바로 태극검을 시연했다.
부드러운 봄바람이 나를 중심으로 겹겹이 쌓이면서 사방으로 태극검의 검기가 뻗어 나왔다.
-파파파파팟!
"검기상인!"
"허허허, 대단하군. 약관이 되기 전에 일류의 경지에 이르렀어. 청혜 사제, 사제는 어떻게 보았나?"
"말이 필요 없는 것 같습니다. 그저 막내 사제의 성취가 놀라울 뿐입니다."
먼지가 가라앉은 후, 고개를 드니 청수 사형이 정감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청운 사제."
"네, 청수 사형."
"놀라운 성취를 얻었구나. 그동안 수고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아직 멀었어. 태극검의 완성은 무초식에 있다. 삼풍 조사의 말에 의하면 태극검의 초식을 자르고, 자르고 계속해서 자른다면 후에 초식이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고 하셨다. 초식이 없다는 말은 반대로 모든 동작이 초식이 된다는 말과 같지."
"...?!"
청수 사형이 은은한 미소를 보이며 청혜 사형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청수 사형의 말이 맞다. 그리고 이것은 태극권에도 통용되지. 두 무공의 초식이 완전히 사라지면 결국 구결만이 남을 것이고 그 구결을 통해 새로운 경지가 열릴 거야. 그러니 앞으로도 정진하길 바라네."
"감사해요, 청혜 사형. 감사합니다, 청수 사형."
"그래. 막내 사제, 축하해."
"허허허, 정말 수고했다."
순간 사형들의 진심 어린 조언과 칭찬에 울컥 눈물이 터져 나올 뻔했지만 꾹 참으며 미소를 보였다.
지난 몇 년간의 노력을 인정받는 느낌이 들었다.
"허허... 왠지 몇 년 후면 자네가 나보다 뛰어난 태극권의 고수가 될 것 같군."
"이하 동문일세, 사제."
"아직 부족한 게 많습니다. 많이 가르쳐 주세요."
"그래."
일류의 경지에 오른 이상, 이제 두 사형의 공식적인 가르침이 끝났다.
물론 완전한 끝은 아니다.
두 분께서는 내가 도움을 요청하면 언제라도 가르침을 내려 주기로 약속했으니 말이다.
나는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이제 막 일류의 경지에 발을 들여놓았을 뿐이고 완숙한 경지로 올라가야 한다.
그러면 절정(絶頂)이라는 이름의 경지와 조우하게 될 것이다.
"청운 사제, 그럼 푹 쉬게."
"그래, 우린 이만 가 볼게."
"네. 감사합니다, 청수 사형, 청혜 사형. 푹 쉬세요."
나는 두 사형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자세를 유지하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날 밤.
청수, 청혜 도장이 자소궁을 찾았다.
"장문 사형."
"저희들이 왔습니다."
"어서 들어오게."
청명 진인은 친히 방문까지 열어 두 사제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동안 수고가 많았네."
청운이 일류의 경지에 올랐다는 말에 청명 진인이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했다.
"아닙니다, 사형."
"사형의 말이 맞습니다. 오히려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하하하! 알겠네, 알겠어. 우선 이쪽으로 앉지."
"네, 사형."
청명 진인은 막내 사제를 위해 오랫동안 헌신한 두 사제에게 감사한 마음을 담아 따뜻한 차를 건넸다.
"청운의 성취가 어떤가?"
"말로 표현하기가 힘들 정도로 태극권, 태극검에 대한 이해도가 뛰어납니다."
"몇 년 전, 정체기가 있었는데 어느 순간인지 그것을 뛰어넘었습니다."
"호오!"
"일단 외형(外形)만큼은 완벽에 가깝습니다. 화가를 불러 무공서로 만들고 싶을 정도니까요. 약관에 이르지도 못한 사제가 이런 성취를 보이다니 그저 놀라울 뿐입니다."
"태극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가르치면서 매번 느꼈지만 막내 사제의 오성이 정말로 뛰어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어쩌면 우리 막내 사제가 선재(仙才)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선재(仙才)?"
어찌나 놀랐는지 찻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달칵!
"조심하십시오, 사형."
"어이쿠, 고맙네."
청명 진인은 호흡을 진정시키며 재차 확인했다.
"선재라, 내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니겠지? 사제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가?"
"네.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디까지나 제 생각입니다만, 어쩌면 먼 훗날 우리 막내 사제가 태극권의 벽을 깨고 나와 대종사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허허허! 선재에 대종사라! 원시천존."
"원시천존! 청운 사제의 존재가 우리 무당의 홍복입니다. 장문 사형."
"원시천존."
"원시천존."
세 사람의 사형제는 연신 원시천존을 외치며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 *
[한국 대학교 석좌교수 조성하 박사 연구실]
조성하 박사는 게이트 관련 분야에서 세계 최고 권위를 가진 석학이다.
그는 몇 년 전 국립 마석 연구소에서 일어난 의문의 폭발 사건에 대해 조사를 진행했었다. 그리고 그 결과 일부분에 불과하지만 스타게이트에 감춰진 비밀을 엿볼 수 있었다.
"x² + y² = z², 유클리드 방정식. 이것은 모든 해들을 산출하는 공식이다. 여기에 버츠와 스위너톤-다이어 추측을 더해 타원 곡선을 유리수로 정의하고...."
아무도 없는 연구실에서 마치 누군가에게 설명을 하는 듯, 조성하 박사는 매우 즐거워하며 스스로에게 말했다.
"게이트는 자연적으로 생성된 것이 아니야. 누군가가 목적을 가지고 우리 세계로 보낸 것이 분명해."
조성하 박사는 기호학에 수학을 더해 수년 동안 연구에 매진했다.
"배열이 틀렸어. 그래서 폭발한 거지."
그는 이런 종류의 연구에 있어 한 글자, 한 글자가 얼마나 소중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하루에도 수십 번씩 연구를 진행하며 끊임없이 시뮬레이션을 돌리는 것이다.
우주의 관점에서 보면 지구는 그야말로 먼지와 같은 존재다.
그런 광활한 우주에 다른 생명체가 없을까?
과학의 발전에 따라 그동안 절대불변이라고 믿었던 법칙이 깨지기도 한다.
1차원, 2차원, 3차원 그리고 4차원.
저 광활한 우주에는 과연 4차원까지만 존재하는 것일까?
조성하 박사는 자신의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무슨 판타지 소설과 같은 가설을 만들어 갔다.
오래전 차원 전쟁이 있었고....
현재 우리만 모르고 있을 뿐, 지금 이 순간에도 우주 곳곳에서 차원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각성자의 존재는 차원 전쟁을 일으킨 침략자에게 주는 페널티인 동시에 지구인에게 준 일종의 어드밴티지다.
전 세계에서 불규칙적으로 생성되고 있는 게이트.
언제일지 모르지만 임계점에 도달하면 게이트는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만약 조성하 박사의 가설이 맞는다면 지구인은 차원 전쟁에 대해 대비를 해야 한다.
개인이나 국가의 문제가 아닌 지구 전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몇 시간 후,
굳은 표정의 조성하 박사가 청와대에 들어갔다.
마침 안보수석과 비서실장이 그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조 박사님, 어서 오십시오."
"오랜만입니다, 박사님."
"네. 오랜만이네요, 수석님, 실장님."
"비상 회의를 소집하셨다고 들었는데, 무슨 일입니까. 혹시 게이트에 관한 일인가요?"
"이 자리에서 할 얘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 회의실로 가시죠."
"네. 알겠습니다."
잠시 후,
대통령을 포함해 중요 인사들이 모두 모였다.
조성하 박사가 미리 준비한 자료를 돌렸다.
"차원 전쟁요?"
"네, 그렇습니다."
"지금 소설을 쓰시는 겁니까? 아니면 술이라도 드셨나요?"
"뭐라고요?"
"왜 듣기 불편하십니까? 그럼 이런 서류 같은 것 말고 확실한 증거를 가져오세요."
"이보세요.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박사님 덕분입니다."
"이 사람이 정말...!!"
치열한 다툼, 아니 일방적인 공세가 펼쳐졌다.
그러자 긴 침묵을 깨고 안보수석이 입을 열었다.
"박사님의 주장에 따르면 스타게이트에 관한 정보를 모두 공개해야 하는데 그건 불가합니다."
"안보수석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스타게이트에 관한 비밀은 우리뿐만이 아닌, 전 세계가 숨기고 있는 일급 기밀입니다. 더욱이 미국과 상의도 없이 독단적으로 발표했다간 감당할 수 없는 후폭풍이 몰아칠 겁니다."
사람들의 말에 조성하 박사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래프를 보십시오. 매년 게이트 브레이크의 발생 빈도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때 임계점이 폭발해 차원 전쟁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인류의 생존이 걸린 문제입니다. 전쟁에 이기기 위해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보를 모두 공개하고 헌터들을 규합해 나가야 합니다."
-쾅!
"말도 안 됩니다."
"이론에 불과합니다."
"증거를 가지고 오세요, 증거를!"
조성하 박사는 입을 꾹 다물었다.
자신이 어떤 말을 해도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최종 결정권자라 할 수 있는 대통령마저 그의 주장에 부정적인 안색을 내비치고 있었다.
'병X 새끼들.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 봐야 알 놈들 같으니!'
제14화
14화 태허무극심법
어느새 날이 밝은 모양이다.
창문을 열자 파란 하늘 위로 태양이 중천에 걸려 있었다.
"으아하아아아~~."
나는 의미를 알 수 없는 괴상한 언어를 나불대며 기지개를 켰다.
휴식의 법칙 하나.
장소에 상관없이 삼 일 동안 무조건 쉬자.
나는 내가 정한 휴식의 법칙에 의거해 삼 일 동안 처소에서 나가지 않았다.
"이제 일어나 볼까?"
삼 일의 시간이 지났겠다.
침상을 정리한 후, 자신만만한 발걸음으로 처소를 나섰다.
내 발길이 향한 곳은 바로 무당의 장서각이다.
"청운 사숙!"
바로 그때 전방 10미터쯤 한 무리의 제자들이 나타나더니 이쪽으로 달려왔다.
"어, 오랜만이야. 현양 사질."
"오랜만에 뵙습니다."
"청운 사숙조를 뵈옵니다."
이번엔 현양 사질 옆에 있는 젊은 도사다.
"어~ 그래. 반가워. 운...."
"운...암입니다."
"어! 그래. 운암이었구나."
"전 운영입니다."
"알아. 거기 마지막에 있는 사람은 운경이고."
"네, 맞습니다."
"다들 반가워. 잘 지내지?"
"네!"
구파일방이라는 위치에 걸맞게 무당파는 약 1,000명의 제자가 있다.
이 중에 삼분지 일은 개봉에 위치한 무림맹에 매년 교대로 머물며 외부 활동에 치중하고 있고 나머지 삼분지 일은 속가제자라 밥 먹듯이 무당파를 들락날락하고 있다. 그러므로 실제 경내에서 생활하고 있는 인원은 대략 300~400명 내외라 볼 수 있다. 물론 무당의 제자가 된 지 벌써 십 년이 됐으니 제자들의 이름을 외워야 함이 당연하다.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난 여태 그리하지 못했다.
변명을 하자면 한정된 생활 반경과 똑같은 행동 패턴 때문이다.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매일 무공을 익히는 나날이 반복되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내 생활 반경 안에 있는 제자들만 알게 되었다. 심지어 한 번도 보지 못한 제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배분이 깡패라고 내게 이런 이유로 시비를 거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막말로 사단장이 일개 병사의 이름을 모른다고 해서 문제가 될 일이 어디 있겠는가.
"청운 사숙조를 뵙습니다."
"청운 태사숙조를 뵙습니다."
"태사숙조를 뵙습니다."
"어, 그래."
"청운 사숙을 뵙습니다. 날씨가 무척 좋습니다."
"어, 고마워. 자네도 잘 지내지?"
해가 중천에 걸린 시간에 나온 탓에 길목을 지날 때마다 이름도 모르는 제자들이 등장하는 바람에 내심 곤혹스러웠다.
-[장서각]
"후후, 이 냄새 참 오랜만이네."
서책의 냄새를 맡으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차분해진다.
나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상층부를 향해 계단을 올라갔다.
장서각에 들어올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나는 무당의 책 보존력에 감탄했다.
수백 년이 넘었는데 이렇게 온전하게 보존될 수 있다니!
어떤 책은 거의 천 년 가까이 된 것도 있었는데 무슨 보존 마법이라도 걸려 있는 것처럼 보관이 아주 잘되어 있었다.
잠시 후,
탁자 위로 몇 권의 서책을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삼 일의 시간 동안 고심했던 비급들이다.
"좋아! 그럼 시작해 볼까?"
나는 가장 먼저 <태극신공>이라 적힌 서책을 펼쳤다.
문득문득 책장을 넘기던 손이 내 의도와는 다르게 자꾸 멈춘다.
세월의 흔적만큼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고문자에 뜬구름 잡는 비유까지 섞여 있어서 해석에 상당한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단순히 읽는 것만으로 무공을 익힐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게이트에서 얻은 스킬처럼 바로 익힐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말이다.
아무튼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렇게 투덜대는 것이 전부였다.
-[띠링, 습득이 불가능합니다.]
하루 반나절을 투자했지만 결국 해석을 하지 못했다.
'쩝!'
아무래도 욕심이 살짝 과했나 보다.
일단 태극신공은 패스하는 걸로!
나는 허탈함이 섞인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땅거미가 내려와 있었다.
우린 내일 다시 보자.
다음 날 아침.
무당이 자랑하는 경신법, <제운종>을 꺼내 한 글자 한 글자 조용히 정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 장을 넘겼을 무렵, 시스템의 친절한(?) 음성이 들려왔다.
-[띠링, 해석이 불가능합니다.]
-[띠링, 습득이 불가능합니다.]
"알았어. 알았다고!"
젠장, 오늘도 실패다.
여전히 신공절학의 벽은 높은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결코 낙담하지 않았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했다.
고작 두 번의 실패로 포기하기엔 내게 주어진 시간이 많았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났다.
-[띠링, 해석이 불가능합니다.]
-[띠링, 습득이 가능합니다.]
-[띠링, 해석이 불가능합니다.]
-[띠링, 습득이 불가능합니다.]
-[띠링, 해석이 가능합니다.]
-[띠링, 습득이 ...합니다.]
이런 X발!
설마 이러다 하나도 못 익히는 것은 아니겠지?
계속된 실패에 나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왔다.
오죽했으면 무공의 급을 낮춰 볼 생각까지 했다.
'아니! 기왕 시작한 것, 이쪽 책장까지만 도전해 보자. 안 되면 그때 가서....'
아직 읽지 않은 일부 서책이 책장에 남아 있었기에 이렇게 결심했다.
그리고 얼마 후,
그토록 기다렸던 종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띠링....]
이 무공을 찾아낸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장서각 오른쪽 책장 구석, 책자와 책자 사이에 뭔가가 말려 들어가 있었는데 매일같이 책장에서 책을 빼고 넣지 않았다면 나 역시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양피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양 끝에 달린 나무는 이미 부식되어 그런 것이 있었다는 형태만 남아 있었다.
"근데 이게 대체... 무슨 글자야?"
세월의 풍파만큼 변색된 관계로 제목조차 희미해 알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하지 않는가?
왠지 강한 촉이 왔고 도전 의식이 충만하게 차올랐다.
나는 정신을 집중해 양피지에 적힌 글자를 해석하기 시작했다.
"이게 '고' 자인가? '현' 자인가?"
양피지에 적힌 글자는 흔히 갑골문자라 불리는 은허 시대의 문자였다.
"그래. 이건 '전' 자고 이건 '진' 자가 맞아."
이것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할애했는지 모르겠다.
고어에 능통한 사질들의 도움을 받아 가며 계절이 바뀌기 직전까지 한 글자, 한 글자를 분석한 결과 양피지에 적힌 81자의 구결을 모두 해석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시스템의 청아한 음성이 귓가에 연달아 들려왔다.
-[81자 구결 해독]
-[도가 사상에 대한 이해도 중급. 최소 요건 충족.]
-[지혜 수치 50. 최소 요건 충족.]
-[띠링! 태허무극심법을 익히시겠습니까?]
태허무극심법?!
무당파에 이런 이름을 가진 무공이 있었나?
나는 서둘러 태허무극심법에 대해 살펴보았다.
<스킬 정보>
이름 : 태허무극심법(패시브)
등급 : SSS급(성장형)
설명 : 지금은 사라져 전설 속에 남은 현문정종 전진교의 내공심법.
가히 신공절학이라 말할 수 있으며 총 9단계로 이루어진 내공심법이다.
각 단계마다 신비한 힘을 내재하고 있다.
"전진교?!"
맙소사!
전진교라면 오래전 그 맥이 끊겼다고 알려진 전설의 문파가 아닌가?
더욱이 현문정종의 내공심법이면 무인의 심신을 맑게 해 주는 동시에 요사한 사술(邪術)에 걸리지 않게 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이는 곧 헌터 세계의 언어로 치환했을 때 정신 마법 계열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는 무기를 얻었다는 뜻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황금빛이 선명하게 박힌 저 알파벳을 봐라.
무려 SSS급에 성장형이라고 적혀 있다.
그야말로 대박 중의 대박이다.
이런 건 들어 보지도 못했다. 당연히 처음 봤고 말이다.
나는 떨리는 가슴을 가까스로 진정시키며 태허무극심법의 각 단계를 살펴보았다.
1단계 인(人)의 단계 : 인간이란
2단계 지(地)의 단계 : 땅을 밟고 서서
3단계 천(天)의 단계 : 하늘을 바라보고
4단계 합(合)의 단계 : 화경에 이르면
5단계 향(香)의 단계 : 강기가 모든 것을 소멸하고
6단계 광(光)의 단계 : 상단전이 열리면
7단계 성(成)의 단계 : 현묘한 기운이 일어나니
8단계 극(極)의 단계 : 인세에 적수를 찾기 어려운 현묘한 경지는
9단계 태허(太虛)의 단계 : 생과 사를 주관하고
10단계 무극(無極)의 단계 : 우주의 근원인 태극으로 돌아간다.
"...!!"
역시 예상했던 것처럼 비유적인 표현이 많다.
하지만 반대로 태허무극심법이 말하는 경지가 범상치 않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띠링, 태허무극심법을 익히시겠습니까?]
"당연하지. 당연히 익혀야지! 무조건 고!"
난 미친놈처럼 사방에 대고 소리 질렀다.
-[띠링, 태허무극심법을 익히셨습니다.]
태허무극심법을 익혔다는 음성이 들리는 순간 나는 곧바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심법을 운용해 보았다. 이미 스킬화가 되었기에 그저 의식하는 것만으로 태허무극심법의 기운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태허무극심법을 운용합니다.]
단전에서부터 시작된 현묘한 기운은 특이하게도 상부와 하부로 나눠지더니 하나는 관원, 기해, 음교를 거쳐 유문과 거궐혈을 타고 올라간 후에 다시 단전으로 내려왔고 다른 하나는 중극, 혈해, 양구, 족삼리, 삼음교, 태충혈을 돌아 단전으로 올라왔다. 태허무극심법이 스킬화가 된 덕에 나는 이와 같은 움직임을 제3자의 입장에서 선명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나는 끊임없이 심법을 운용하였고 어느새 시간마저 잊었다.
모든 생명(生命)들이 깨어나는 시간,
싱그러운 바람과 함께 무당산에 아침이 찾아온 모양이다.
"짹짹! 짹-짹! 푸드드득-!"
나는 지저귀는 새소리에 심상의 세계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곧바로 눈을 뜬다거나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았다.
그 자세 그대로 좀 더 명상에 잠겼다.
명상은 그 후로도 상당히 오랫동안 계속되었는데 몇 가지 중요한 것을 알게 되었다.
일단 태허무극심법의 현묘한 기운이 혈맥과 세맥(細脈)을 확장시키며 단전을 탄탄하게 만들어 주는 동시에 중단전을 형성시켰다.
처음에는 깜짝 놀랐다.
내공이 사라진 줄 알았기 때문이다.
한참 동안을 관찰하고 나서야 내공이 사라진 것이 아닌 중단전에 흡수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마치 보조 배터리를 얻은 느낌이었다.
두 번째는 태허무극심법이 패시브 스킬로 등록된 덕분에 나는 이제부터 굳이 심법을 운용하지 않아도 하루 종일 내공을 모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막말로 내가 화장실에서 큰일을 볼 때도 말이다.
이것은 정녕 엄청난 효능(效能)이 아닐 수 없었다.
"흐흐흐흐~~."
얼마나 기뻤는지 흘러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다.
내 인생의 첫 번째 터닝 포인트가 각성이었다면 두 번째 포인트는 무림 세계로 들어온 것이고 세 번째 포인트는 바로 태허무극심법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고작 1단계에 불과하지만 태허무극심법의 단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또 다른 효능이 숨겨져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정작 날 가장 크게 놀라게 한 것은 그동안 꿈쩍도 하지 않던 분신 스킬에 변화가 찾아온 것이었다.
-[현문정종(SSS급) 내공심법의 영향으로 분신 스킬이 복구되기 시작합니다.]
심...봤다!!
제15화
15화 바뀐 일상 새로운 시작
분신 스킬이 복구를 시작했다?
-두근두근!
심장이 터질 것 같다.
-쿵쾅쿵쾅!
이제 지구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일까?
그럼 이곳은 어떻게 되는 거지, 다신 돌아오지 못하는 걸까?
난 떨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조용히 스킬 창을 확인해 보았다.
[0.000000001%]
[0.000000002%]
[....]
[....]
[0.000189029%]
[...0.00038294682%]
[...0.000903721%]
[0.001000001%]
[0.001000002%]
[....]
[....]
어!
이게 뭐지? 예상치 못한 난관이다.
소수점이 왜 9개까지 있는 것인가!
이게 무슨 비트코인도 아니고 말이다. 그렇다고 복구 속도가 빠른 것도 아니었다.
느렸다. 그것도 아주 오지게!
"쩝!"
뜨겁게 달궈졌던 마음이 한순간에 식어 버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100% 낙심하진 않았다.
이제라도 복구를 시작한 것이 어딘가!
한편으로 안도하는 마음도 있었다.
만약 지금 당장 지구로 돌아갔다면 뭔가 아쉽고 섭섭하고... 슬펐을 것 같다.
나도 모르는 사이 무당에 꽤 정이 든 것 같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알겠지만 태허무극심법의 단계가 오르면 오를수록 분신 스킬의 복구 속도 역시 빨라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오늘도 해가 뜨기 시작할 무렵, 거처에서 나왔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한적한 곳을 찾았고 태극권을 펼침으로 수련을 시작했다.
내 일상은 이렇게 왕성한 수련의 반복이었다.
* * *
이와 같은 시간, 지구.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조용히 옷을 챙겨 입은 뒤 전투화를 신고 밖으로 나왔다.
"후우."
먼저 크게 한 번 심호흡하자 기도를 통해 차가운 새벽 공기가 들어와 육체와 정신을 깨우는 기분이다.
자! 오늘부터 시작이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이제부턴 강해질 수 있다.
나는 저 멀리 불빛을 보이며 정류장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첫차를 바라보았다.
몇 시간 후,
나는 강원도에 위치한 D급 게이트에 입장했다.
"쿠오오오오!!"
엄청난 포효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오크다!"
"모두 전투태세를 갖춰."
파티원의 고함에 나는 재빨리 단검을 꺼내 손에 쥐었다.
-꿀꺽!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단단한 근육질에 무시무시한 손도끼를 손에 쥔 오크 무리가 포효를 지르는 것이 보였다.
"취이익, 인간이다."
"모두 죽여라."
"취익! 공격하라."
놈들이 미친 듯 달려오기 시작했다.
"다섯, 아니 열?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제기랄. 우리 뒤를 쫓아온 거야."
"설마.... 분명 흔적을 지우면서 이동했어."
"이봐! 그딴 소린 전투가 끝난 후에 해. 지금은 공격할 때야."
법사 계열 헌터가 지팡이를 들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활활 타오르는 화염이여, 내 눈앞의 적을 소멸하소서. 파이어 토네이도."
-퍼엉!
"케에엑!"
"취익, 켁!"
화염 마법이 작렬하며 몇몇 오크가 회오리에 휩싸였다.
하지만 상황이 무척이나 위험했다.
한 무리를 이룬 오크가 저지선을 뚫고 난입했기 때문이다.
"꾸어어!! 죽어라."
오크가 커다란 손도끼를 휘둘렀다.
근육질의 덩치와는 어울리지 않는 엄청난 빠르기였기에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내게 들릴 정도였다.
"탱커, 앞으로."
파티장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탱커를 맡고 있던 전사가 방패를 들고 나왔다.
-쾅!
굉음과 함께 날 선 공방이 이어졌다.
상황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객관적인 전력에서 우리가 열세였기 때문이다.
"취이익."
"죽어랏, 인간."
-쾅쾅쾅!!
"저, 저걸...."
"어떡해!"
전황을 살피며 싸웠지만 수적으로 열세이다 보니 우리 측이 계속해서 밀리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모두 오크의 손에 갈가리 찢기고 말 것이다.
D급 게이트에 짐꾼을 맡기로 하고 들어왔지만 나 역시 헌터다.
오크들의 움직임을 살펴보며 필사적으로 놈들의 빈틈을 찾았다.
그리고 기회가 포착된 순간 움직였다.
"이봐, 짐꾼! 지금 뭐 하는 거야?"
후방 지원을 맡고 있던 파티원의 당혹스러운 음성이 들려왔지만 나는 주저하지 않고 앞으로 쓱 나갔다.
"블링크!"
-슉슉슉!!
곧이어 세 번의 칼질이 이어졌다.
"뭐, 뭐야?!"
사람들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허공에서 갑자기 나타나 오크의 등을 쑤신 세 번의 칼질을 말이다.
"케엑!"
오크는 신음성과 함께 몸을 크게 휘청거렸다.
그때 파이어볼이 날아와 놈의 얼굴을 폭파시켰다.
"이봐! 어서 뒤로 빠져!"
마법사의 고함에 나는 맹렬하게 땅을 박차 몸을 피했다.
하지만 반 박자 느린 것 같다.
급히 몸을 웅크리는 동시에 타워 방패를 들었다.
-쾅!
"큭!"
고작 일격을 막았을 뿐인데, 팔이 부러질 듯 뻐근하다.
만약 한 번 더 공격이 이어진다면 방패로 막는다 해도 뼈가 부서질 것 같았다.
"모두 이쪽으로 와."
"어서 대열을 정비해."
하지만 내가 공격을 막은 덕에 길이 뚫린 것 같다.
나 역시 대열에 합류하기 위해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어이, 조심해!"
헌터의 고성에 고개를 돌려 보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새로운 오크가 전장에 난입한 것이다.
놈은 나를 향해 허벅지만 한 손도끼를 강하게 휘둘렀다.
누가 봐도 피하기엔 늦어 보였다.
"피해."
"아, 안 돼!"
사람들의 안타까운 고성이 들려왔다.
그들은 곧 허리가 잘려 나간 짐꾼의 최후를 예상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쿠웅!!
"실드?"
그제야 상황을 짐작한 사람들이 놀란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한가롭게 설명할 시간이 없어 그냥 고개만 한 번 끄덕인 후 순간 이동 스킬을 펼쳤다. 내게 손도끼를 휘두른 녀석이 당황해하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쌔애액!
있는 힘껏 녀석의 심장에 단검을 박았더니 기괴한 신음과 함께 놈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마나가 바닥을 보이며 고갈되기 직전까지 갔지만 다행히 이후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했다. 생각지도 못한 짐꾼의 활약이 파티에게 가장 필요한 시간을 벌어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조금만 더 버텨."
"좋아. 한 놈 더 잡았어."
그리고 끝까지 버티는 데 성공했다.
"덕분에 살았군."
"도움을 받았어. 고맙다."
짐꾼이라 무시하던 분위기가 180도 바뀌었다.
"순간 이동 스킬에 실드 스킬까지! 이건 도저히 F급이 아닌데요?"
"이봐요, 최선우 씨. 당신 정체가 뭐죠? 그 실력으로 왜 짐꾼을 하는 거예요?"
"야! 야! 정체가 뭐냐니? 은인한데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헌터들이 내게 몰려들었다.
"괜찮습니다. 마음에 담아 두지 않아도 됩니다."
"일단 인사부터 제대로 하자. 도와줘서 고맙습니다, 최선우 씨."
"운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특별한 정체 같은 건 없습니다. F급 헌터가 맞고요. 얼마 전에 운이 좋아 실드 스킬을 얻었습니다."
"근데 왜 아직 F급이죠?"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아직 승급 시험을 보지 못했습니다."
"아...!"
그들은 내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최선우 씨, 오늘의 도움을 절대 잊지 않겠소. 그리고 파티장의 권한으로 오늘 수입은 정확히 1/N을 하려고 하는데, 다들 어떻게 생각해?"
"좋아요."
"저는 찬성이에요."
"나도 찬성."
"자, 그럼 이제 전리품을 살펴볼까?"
지금까지 수십에 이르는 몬스터를 사냥했다.
우리들은 몬스터가 떨군 전리품들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곧 실망의 기색이 번졌다.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 생각만큼 좋은 아이템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X망할."
"...XX 같으니."
두툼한 가죽 몇 개와 롱 소드 한 자루가 나왔다.
그나마 마지막에 D급 마석을 건지지 못했다면 나 역시 걸쭉하게 욕설을 내뱉었을지도 몰랐다.
-[그레이 오크의 가죽(재료)]
그레이족 오크의 질긴 가죽, 어지간한 도검을 막아 낼 정도로 단단하다.
그냥은 쓸 수 없지만 잘 가공하면 뛰어난 품질의 갑옷을 만들 수 있다.
-[낡은 롱 소드]
누군가 사용한 한 손 검.
날카로움이 살아 있지만 그렇게 뛰어나진 않다.
"가죽은 괜찮은데 검은 별로군. 어떻게 할까?"
"생각할 게 뭐 있어. 그냥 마석이랑 함께 팔아 버리자."
"그럴까?"
"응."
우리는 게이트에서 나온 직후,
인근에 위치한 고깃집으로 향했다.
"이모님~."
"네."
"여기 삼겹이 좀 주세요."
"얼마나 드릴까요?"
"일단 10인분. 30분 후에 추가 주문 예약~~."
"네에. 호호호호."
달궈진 불판에 삼겹살이 올라오자 곧바로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맛나게 익어 갔다.
우걱우걱.
후루룩 쩝쩝!
우리는 곧바로 전투 모드에 들어갔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고기가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미친 듯이 먹었다.
어느 정도 배가 찼을 무렵,
파티장을 맡았던 헌터 김유승이 나를 불렀다.
"선우 씨."
"네, 파티장님."
"오늘 정말 수고했어요. 도움도 많이 받았고요."
나는 그의 인사에 대답 대신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기회가 되면 다음에도 함께하고 싶은데, 어떠세요? 대신 통상 짐꾼보다 두 배를 드리겠습니다. 오늘 같은 일이 생기면 공평하게 분배해 드리고요."
"...!"
짐꾼인데, 통상 임금의 두 배.
여기에 오늘 같은 일이 벌어지면 1/N을 해 준다고 한다.
이보다 좋은 조건은 없을 것 같았다.
"저야, 불러 주시면 언제라도 감사하죠."
"하하하. 좋습니다. 그럼 앞으로 저희와 함께하시죠."
"네. 감사합니다."
처음에는 짐꾼, F급 헌터라는 것으로 말미암아 무시당하는 존재였지만 이제는 상당히 친해진 상태였다. 김유승 팀장은 내가 정식으로 D급 헌터가 되면 팀원으로 받아 주겠다는 약속까지 했다.
조만간 여윳돈이 생기면 그동안 미뤄 왔던 등급 심사부터 봐야겠다.
"그럼 들어가세요."
"수고하셨습니다."
"잘 들어가요."
이들과 헤어진 후,
나는 깊은 숨을 몰아쉬었다.
긴장감이 한꺼번에 풀리며 이제야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 실감 났다.
문득 앞머리에 신경이 간다.
"그러고 보니 머리가 제법 많이 자랐네. 어떻게 하지?"
신경에 거슬렸지만 고기 냄새도 장난 아니게 나고....
지금은 일단 한시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 쉬고 싶었다.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시내로 들어가는 길이 꽤나 혼잡하다.
평소 같으면 대중교통을 이용했겠지만 오늘 같은 날에는 자그만 사치를 부려도 괜찮을 것 같아 택시를 탔는데 이게 패착이었다.
강변북로가 이렇게 막힐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