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화
55화 통곡의 벽으로 가는 길(2)
"혹시 커피 드시겠어요?"
"와우! 물론이죠. 마침 달달한 게 당겼는데 고마워요."
소은정이 표정을 활짝 펴며 대답했고 난 그녀에게 믹스 커피 4개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고마워요."
"저도요."
"잘 마실게요."
커피 한 잔에 불과했지만 휴식과 여유를 회복하는 특효약처럼 보였다.
"안데라스 산맥에 혼자 계시다니, 보기보다 꽤 실력자신가 봐요."
"그냥 제 한 몸 지킬 정도예요."
다들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것이 원래부터 친구들인 것 같았다.
"네 분 모두 친구 사이인 것 같네요."
"맞아요. 눈썰미가 있으시네요. 어렸을 때부터 한동네 살던 친구들이에요."
"그렇군요."
우리는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청운 씨는 직업이 어떻게 돼요?"
"은정아. 대검을 가지고 계시잖아. 딱 봐도 검사시네. 직업은 아마도 용병? 맞죠?"
"네. 맞아요."
이때 유정욱이 나를 불렀다.
"청운 씨, 혹시 이 근처에서 사냥하실 생각입니까?"
"그런데요."
궁극적인 목표는 산맥을 넘어 통곡의 벽에 가는 거지만 그 여정 안에 당연히 사냥도 포함된다.
"그럼 저희와 함께 사냥하지 않을래요?"
"오오! 그래요. 우리 용병대에 들어오세요."
"용병대요?"
"네. 저희도 안데라스 산맥 주변에서 사냥할 계획이거든요. 청운 씨만 괜찮다면 함께하시죠. 어떠세요?"
그렇지 않아도 꽤나 오랫동안 혼자여서 심심하던 차였다.
"그럼 며칠만 함께해도 될까요? 사실 산맥을 넘을 생각이거든요."
"뭐, 문제 될 건 없죠. 함께 사냥하다 길이 달라지면 그때 각자 길을 가면 되니까요."
"그럼 좋습니다."
다음 순간.
시스템의 음성이 들려왔다.
-[띠링, 한남동 용병대의 가입 권유를 받았습니다. 가입하시겠습니까?]
'한남동 용병대?'
어렸을 때부터 한동네에 살던 친구들이라더니, 용병대 이름을 아예 동네 이름으로 만들었다. 여기서 한남동을 아는 척했다가 쓸데없는 질문이 이어질지 몰라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 태연하게 가입을 수락했다.
참고로 용병대는 전투가 벌어질 시, 각자의 공헌도에 따라 경험치를 자동으로 분배받는데 다만 개인이 100% 대미지로 몬스터 사냥에 성공한 경우에는 경험치와 아이템을 독식한다.
-[가입할게. 레벨, 직업, 등급을 공개해 줘. 참! 용병 등급은 B급으로 하고.]
-[알겠습니다.]
S급 용병패와 함께 B급 용병패도 지니고 있었기에 이렇게 표시했다.
"청운 씨가 가세하셔서 그런지 왠지 든든하네요."
"뭐야, 소은정. 지금 그 말은 우리를 못 믿었다는 거야?"
"아니. 그걸 왜 그렇게 받아들여?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했잖아. 넷보다 다섯이 낫다는 얘기지."
"그래. 그건 은정이 말이 맞다. 현태야. 네가 오버했어."
"그른가?"
"그래. 흐흐흐."
[한남동 파티]
용병대장 : 유정욱
직업 : 자유 기사
등급 : B급 용병
레벨 : 176
용병대 부대장 : 조안
직업 : 마법사
등급 : B급 용병
레벨 : 163
용병대원 : 김현태
직업 : 광전사
등급 : B급 용병
레벨 : 162
용병대원 : 소은정
직업 : 궁사/도적
등급 : B급 용병
레벨 : 159
용병대원 : 청운
직업 : 검사/권사
등급 : B급 용병
레벨 : 162
용병대 가입이 완료되자 각 대원의 이름과 직업, 레벨이 떴다.
안데라스 산맥을 찾았을 때부터 예상했지만 이들은 전원 B급으로 이루어진 용병대였다. 하긴 최소 B급은 되니 안데라스 산맥에 왔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지만 이들은 비상사태를 대비해 포션은 물론 귀환석 역시 보유하고 있을 것 같았다.
"어?! 저 친구 나랑 레벨이 같네."
광전사 김현태의 얼굴에 의외라는 빛이 떠올랐다.
"그러게. 호호호~."
"뭐 발목을 잡진 않겠다."
"이봐요. 김현태 씨."
"왜?"
"너나 잘하세요."
"큭!"
"호호호! 은정이 말이 맞다. 현태야. 너나 잘해."
"쳇~."
말하는 본새를 보면 김현태는 광전사라는 특징을 가진 것처럼 성격이 급하고 까칠한 것 같았는데 조안과 소은정이 분위기를 적절히 조절하는 것 같았다.
"얘들아. 밤도 늦었는데 이만하고 다들 쉬자! 내일 동이 트면 바로 출발할 거야. 오케이?"
"그래."
"알았어."
"조안, 알람 마법 좀 부탁할게."
"오케이."
유정욱의 말에 조안이 알람 마법을 설치했고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짧게나마 휴식을 취했다.
몇 시간 후,
우리는 동이 트자마자 서둘러 자리를 정리하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자, 갑시다."
유정욱이 선두에 섰다.
한남동 용병대는 험한 길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빠른 속도로 이동했는데 나 역시 저들에게 늦춰지지 않기 위해 보조를 맞췄다.
"상당히 편해 보이네요."
"편해요?"
내 옆에서 걷던 마법사 조안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길이 험한데도 불구하고 마치 평지처럼 걷는 것 같아 보여서요."
"아! 그건 제가 등산을 자주 다녀서 그런 것 같네요. 지난 몇 년 동안 거의 매일 산에 올랐거든요."
"아!"
이것은 거짓이 아니다.
지구의 나는 아니지만 무림의 나는 몇 년 동안 주야장천 무당산을 올랐었다.
그녀는 그제야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날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순간 강한 맞바람이 우리를 향해 불어왔고 그 덕에 어깨에 걸친 그녀의 후드가 뒤로 완전히 넘어가 버렸다.
"...!!"
윤기가 흐르는 검은 머리카락에 수정처럼 반짝이는 눈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녀는 재빨리 움직여 뒤로 날아간 후드를 단단히 고정시켰는데 이미 붉어질 대로 붉어진 얼굴을 완전히 숨기지 못했다.
'훗! 귀여운데?'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더니 그녀가 대뜸 물었다.
"왜요?"
"네?"
"왜 웃냐고요."
"그냥요."
"쳇!"
그녀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새침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근데요.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물어봐도 돼요?"
"뭔...데요?"
"예쁜 얼굴을 왜 가리고 다녀요?"
"...!"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나?
그녀는 내 물음에 꽤나 당황한 모습을 보였는데, 그 순간이었다.
"전방에 몬스터다!"
몬스터의 정체는 반인반우(半人半牛), 인간의 몸에 황소의 머리와 꼬리를 가진 미노타우로스다. 녀석은 무려 4미터가 넘는 엄청난 크기에 역동적인 근육으로 뒤덮여 있었다.
"크르르!"
놈이 기세 좋게 피어를 뿜어내며 천천히 달려왔다.
육중한 무게 때문인지 이동할 때마다 바닥에 깊은 발자국이 만들어졌다.
"전투준비. 제가 선두에서 놈의 시선을 끌 테니 청운 씨는 현태와 대미지 딜러를 맡아 주세요. 은정이랑 조안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어!"
"당근이지."
각자의 포지션에서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이 정석이었으므로 그의 판단은 적절하다고 할 수 있었다.
나는 한남동 용병대의 실력을 살펴볼 겸, 무극 대검을 손에 쥔 채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우웅!
놈이 휘두르는 창이 바람을 찢으며 날아오자 유정욱이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쾅!
폭발 소리와 함께 김현태, 소은정, 조안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라이트닝 볼트!"
"더블 샷!"
그사이 마법을 완성한 조안의 공격이 미노타우로스에게 날아갔다.
지지직! 파팟!
어지러운 시야를 틈타 대미지 딜러인 광전사 김현태가 공격을 감행했다.
"받아랏!"
그는 용수철처럼 튀어 나가 미노타우로스의 가슴 어름을 베어 갔다.
그러나 미노타우로스 역시 만만치 않았다.
한 박자 늦었지만 김현태의 공격이 성공한 순간 무지막지한 힘을 이용해 창을 그대로 회전시킨 것이다.
까까까까깡!
요란한 금속성과 함께 피를 본 미로타우로스가 미친 소처럼 광분하기 시작했을 때 내가 움직였다.
-서걱!
검, 도끼, 마법 공격이 어우러져 있는 소음의 틈바구니 속에서 화살처럼 꽂히는 깨끗한 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 거짓말처럼 미노타우로스의 동작이 멈췄다.
푸화학!
미노타우로스의 몸통이 수편으로 갈라지며 폭발하듯 뜨거운 피가 흘러나왔다.
-[띠링, 소량의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띠링, 미노타우로스의 뿔을 획득했습니다.]
-[띠링, 미노타우로스의 고환을 얻었습니다.]
-[띠링, 5골드 35실버를 획득했습니다.]
"...!"
"...!"
"...!"
"...!"
나름 수위를 조절한다고 했는데, 조금 셌나?
묘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는 한남동 용병대의 모습에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침을 뗐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더니, 이 자식 이거 생각보다 쉽게 썰리네요."
용병대는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지만 별말 없이 넘어갔다.
햇볕이 가장 강렬해진 시간을 지나 황혼이 내려오기 시작했을 무렵,
우리는 넓은 잎사귀가 무성한 나무 그늘 밑에 자리를 잡고 휴식을 취했다.
"술 한잔할래요? 간단히."
"좋죠."
"잠시만요."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아공간에 손을 집어넣어 맥주, 그것도 한국산 맥주 6캔들이 한 묶음을 꺼냈다.
'아공간이네. 유정욱이라고 했지? 어쩌면 대단한 신분일지도 모르겠군.'
"맥주는 차갑게 마셔야 제맛이죠. 안 그래요?"
"동감입니다."
유정욱이 웃으며 조안을 불렀다.
"조안. 이것 좀 차갑게 해 줘. 부탁할게."
그의 부탁에 조안이 가볍게 피식하며 맥주를 받아 들었다.
"아이스."
역시 마법사!
그녀의 아이스 마법 덕에 미지근하던 맥주가 금세 차가워졌다.
우리는 각각 캔 맥주를 손에 들고 건배를 외쳤다.
동료가 있다는 것은 혼자서 사냥할 때와 달리 뭐랄까, 든든한 느낌이 들고 마음이 푸근해지는 느낌이었다.
-꿀꺽!
-꿀꺽, 꿀꺽, 꿀꺽!
차가운 맥주가 식도를 타고 내려오자 가슴 속까지 시원해지는 기분이다.
"아까 사냥하는 걸 봤는데, 대단하더군요."
사위가 조용한 가운데 술도 한 모금씩 들어갔겠다, 유정욱이 내게 질문을 던졌다.
"대단하긴요."
"에이, 겸손하시네요. 저 역시 미노타우로스랑 검을 나눠 봤잖아요. 아까 보니 땀 한 방울도 흘리지 않은 것 같던데."
"아하...하하. 아니에요.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여러분께 하고픈 말이네요. 다들 한 솜씨 하시던데요. 개개인은 물론 팀워크 또한 대단했습니다. 특히 은정 씨의 활 솜씨에 감명받았습니다."
"어머, 감명까지요?"
"네."
"호호호호~ 제가 뭐 한 화살 하죠."
나는 적당히 화제를 돌리는 동시에 상대를 칭찬하는 스킬을 발휘해 분위기를 한층 더 훈훈하게 만들었다.
"청운 씨는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나이요?"
"네. 저희는 모두 23살인데...."
"저도 23살이에요."
"어, 정말요?"
"우리랑 동갑이네요. 그럼 이것도 인연인데 우리 친구 할까요? 이참에 말도 편하게 하고요. 어때요?"
지금까지 본모습이라면 친분을 나눠도 괜찮을 것 같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흔쾌히 답했다.
"그래요."
"좋아. 그럼 이제부터 말 놓는다."
"그러자."
용병대 이름도 그렇고 하는 행동도 그렇고 이들은 왠지 평범한 헌터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꿀린 건 전혀 없었다.
"정욱아. 술 더 없어?"
"미안. 그게 마지막이었어."
"내가 있어."
이번엔 김현태다.
녀석 역시 허공에 손을 넣더니 이내 맥주를 잔뜩 꺼내 들었다.
"오예~~ 다들 꺼내 봐. 아주 제대로 마시자고."
그 모습에 소은정이 크게 웃으며 즐거워한다.
우리는 달빛 아래서 분위기에 취해 술을 마셨지만 사실 어느 누구도 취하지 않았다.
그냥 기분 좋게 이 시간을 즐겼을 뿐이다.
초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고작 맥주를 마시고 취한다면 고추를 떼야지. 그렇지 않은가?
"5개월 동안 이곳에 있었더니 집밥이 그립다."
잠시 뜸을 들이던 소은정이 조안에게 물었다.
"조안. 넌 어때? 계속 사냥할 거야?"
"아니. 5개월 보냈으면 충분한 것 같아. 이번 사냥이 끝나면 귀환할래."
"오! 오! 그래. 그럼 나랑 같이 귀환하자. 그 전에 레벨 업을 꼭 해야지. 대박 아이템이 나와야 하는데 말이야."
유정욱과 김현태 역시 조안, 소은정과 마찬가지로 조만간, 아마 며칠 이내로 사냥을 정리하고 귀환할 듯했다.
"청운. 넌 어때?"
"난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맞다. 산맥을 넘는다고 했지?"
"응."
비록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함께 몬스터를 사냥한 덕인지 아니면 같은 나이여서 그런 건지 친근하게 느껴졌다.
만약 이 인연이 지속적으로 이어진다면 서로 간에 신뢰가 형성되리라 생각됐다.
다만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첫인상과 다르지 않았으면 하는 작은 소망이 있었다.
제56화
56화 신위를 드러내다
우리가 막 협곡에 들어섰을 때였다.
사람들의 비명이 들려와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
"오크야. 오크다."
물경 천에 가까운 오크들이 한 무리의 상행을 습격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상행을 호위하던 이들이 전력을 다해 막고 있었지만 병력의 차이가 확연해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만약 우리가 저들보다 한발 앞서 협곡으로 들어갔다면 지금 싸우고 있는 사람은 저들이 아닌 우리였을 것이다.
"숫자가 꽤 많은데... 괜찮을까?"
"후방에서 지원하면 가능할 것 같아. 너희들 생각은 어때?"
"다수결로 결정하자. 난 도와주는 데 찬성."
"나도 찬성."
"난 좀 위험할 것 같은데? 반대."
"찬성."
이미 4:1로 결판이 났지만 내가 조용히 있자 대답을 종용하는 눈빛이다.
나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찬성에 한 표를 행사했다.
"찬성."
다음 순간,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협곡을 향해 달려갔고 소은정과 조안은 후미에서 공격을 준비했다.
"멀티 샷!"
"파이어볼!"
한 번에 십여 개의 화살과 함께 조안의 마법이 오크 무리를 향해 날아갔다.
쾅...!!
"취익! 적이다."
"케륵, 인간이 나타났다. 모두 대비하라. 취이익!"
이와 반대로 상단 측에서 기쁨 섞인 고성이 터져 나왔다.
"지원군이다. 지원군이 왔다."
"우와아!!"
순간 바닥을 치던 사기가 치솟아 올랐다.
"누구십니까?"
"한남동 용병대입니다. 지나가던 길에 위급한 상황 같아서요. 도와주러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인사는 오크부터 처리하고 나누죠."
"네, 그럽시다."
유정욱을 비롯해 광전사 김현태가 오크를 향해 달려갔는데 나는 전장 전체를 파악하기 위해 하늘 위로 뛰어올랐다.
그러곤 기감을 넓게 펼쳤다.
일반 오크에 비해 확연하게 다른 기운을 가진 놈들, 이 정도 규모의 병력이라면 지휘하는 녀석이 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오크, 오크, 오크, 오크 전사, 오크 투사.
오크 주술사. 오크 대전사 그리고 오크 족장!!
'저기다.'
위치를 파악하자마자 나는 순간 이동 스킬을 펼쳐 전장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곧 다양한 공격이 날아왔다.
'잔챙이는 버리자.'
난 태극권의 방자결을 펼쳤다.
눈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둥그런 막이 형성되었고 오크들의 공격은 방어막을 뚫지 못했다.
나는 더욱 빠른 속도로 경공술을 사용해서 지휘부에 접근해 갔다.
'한 놈... 두 놈... 그리고 세 놈....'
그중에 지팡이를 든 상태에서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는 오크 주술사가 있었다.
적을 칠 땐 마법사, 주술사, 사제를 가장 먼저 없애는 것이 기본이다.
난 놈이 주문을 완성할 시간도 없이 곧장 검기 다발을 날렸다.
퍼퍼퍼퍼펑!
폭음과 함께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다.
"취이익, 놈이 안 보인다."
"인간, 어디에 있지? 취익!"
나는 놈들의 등 뒤로 소리 없이 나타나 각각의 머리통에 주먹을 한 방씩 찔러 주었었다.
한편 한남동 용병대 역시 상단의 주력을 보호하는 동시에 기습 공격의 효과를 잘 살리고 있었다.
"7시 방향에 오크 투사, 세 놈이야."
"내가 맡을게."
광전사 김현태는 압도적인 힘을 바탕으로 오크 투사를 향해 도끼를 휘둘렀고 유정욱은 빠른 스피드와 검술을 무기로 오크들을 쥐 잡듯 잡았다.
"저, 저게 뭐지?"
상단 호위 무사로 보이는 이가 하늘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켰다.
"와, 와이번이다. 모두 조심해."
피 냄새로 인해 비룡(飛龍)이라 불리는 와이번이 나타난 것이다.
놈들은 인간과 오크를 가리지 않고 낚아채 하늘로 데리고 갔다.
"으아악!"
"취이...익."
"나 좀... 살려 줘!"
땅에는 오크가, 하늘에는 와이번이 꾸역꾸역 밀려들어 오자 싸움의 양상이 혼잡해졌다. 태생이 호전적인 오크는 와이번의 출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인간을 공격했다. 옆에 있던 동료가 잡혀갔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시간을 지체했다간 큰 피해를 입을 것 같았다.
지휘부와의 거리는 대략 200미터, 와이번의 출현에 정신이 흐트러진 지금이 기회다.
난 무극 대검을 빼어 들고 놈들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1시 방향에 인간이다."
"취이익! 멍청한 인간이다."
우연인가?
무극 대검에 시리도록 푸른 기운이 일렁이기 시작했을 때, 오크 족장과 눈이 마주쳤다.
"취익! 마나의 흐름이 이상하다."
오크 족장의 눈에 경악의 빛이 떠오르기 무섭게 무극 대검에서 생성된 유형의 기운이 쏜살같이 날아갔다.
"태극검 탄(彈), 하나의 탄환처럼 날아가."
순간 시리도록 푸른 강기 다발이 탄환의 형태로 놈을 향해 무섭게 날아갔기 때문이다.
"오, 오러 블레이드다!"
"족장님을 지켜라. 실드!"
"배리어."
놈들의 고성이 터져 나오는 순간,
주변 일대를 진동시키는 폭음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태극검 파(破), 내 앞을 가로막은 모든 것을 무너뜨린다."
-콰콰콰콰콰콰쾅!!
강기에 휩쓸린 대가는 컸다.
이 일대가 초토화됐기 때문이다.
-[띠링, 오크 주술사의 허리띠를 얻었습니다.]
-[띠링, 오크 전사의 어금니를 얻었습니다.]
-[띠링, 오크 주술사의 미약 주머니를 얻었습니다.]
-[띠링, 오크 족장 요타베일의 왕관을 얻었습니다.]
-[띠링, 중량의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띠링, 레벨이 오릅니다.]
시스템의 아름다운 음성이 노래처럼 들려올 때,
가까스로 살아남은 오크 전사 하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모, 모두 후... 후퇴하라! 취이익!"
그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살아남은 오크들이 물러나기 시작했다.
"취익! 모두 후퇴하라."
"모두 퇴각하라. 취익!"
오크들이 퇴각하기 시작하자 사람들의 사기가 치솟았다.
한편 공중의 제왕이라 불리는 와이번 무리 역시 내게 발톱을 드러냈다가 검강 한 번에 사지가 도륙당하자 알 수 없는 괴성을 지르며 이내 하늘 위로 날아가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세상에!"
이와 같은 광경에 마법사 조안이 감탄을 토해 냈다.
"마스터다!"
"와아아! 우리에게 마스터가 있다."
"와아~~."
승리의 환호성이 협곡을 울리는 동시에 입을 함지박만 하게 벌린 한남동 용병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헐! 이 와이번 좀 봐."
광전사 김현태의 입이 쩍 벌어졌다.
"대체 이게...!!"
"머리통이 날아갔군."
"얘는 날개부터 허리까지 완전히 두 동강 났어."
"오크 족장은 어떻고?"
"완전... 개박살 났네."
"내가 장담하지만 이건 스킬 같은 게 아니야."
"맞아. 나도 처음부터 범상치 않다고 생각했었어."
그들의 눈에서는 숨길 수 없는 감탄의 빛이 새어 나왔다.
"청운. 대체 레벨이 몇이야?"
"야! 지금 레벨이 문제냐, 청운 님. 아까 그거 오러 블레이드 맞죠?"
"...?"
"...!!"
"...?!"
소은정의 입에서 오러 블레이드란 말이 나오자 모두들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슬그머니 내 눈치만 보고 있다.
"혹시 S급 헌터신데 일부러 정체를 감췄다거나... 뭐... 음...."
머뭇머뭇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실소를 토했다.
"오러 블레이드 맞아. 얼마 전에 마스터에 올랐거든."
"아!"
"...역시!!"
"음!"
다들 뭔가를 깨달은 표정이다.
내가 동료도 없이 홀로 안데라스 산맥에 있던 그 자신감을 말이다.
잠시 동안이었지만 다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만약 제페토 상단에서 감사의 인사를 전하지 않았다면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을지도 몰랐겠다.
"생명을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 상단의 은인이십니다."
자신을 제페토라 소개한 이는 허리가 땅에 닿을 듯 몇 번이나 숙이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고귀하신 분께서 여러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어 하는데 괜찮으시다면 저와 함께 가 주시겠습니까?"
"그러죠."
제페토는 우리를 호화롭게 치장된 마차로 안내했다.
"저희를 도와준 한남동 용병대와 마스터이십니다."
"반갑습니다. 전 케일락이라고 합니다."
부드러운 인상을 지닌 노인이 악수를 청했다.
"여러분께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특히 마스터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행동마다 자연스레 기품이 넘치는 것이 케일락이란 이름을 가진 저 노인은 지체 높은 귀족이 분명해 보였다. 더욱이 호위 기사로 보이는 네 명의 사내가 노인의 좌우에 시립해 있었는데 풍기는 기운으로 보아 팔라딘이 분명했다.
'하긴 안데라스 산맥을 넘는다는 것부터 평범하지 않지.'
난 앞으로 한 발 나서서 그의 인사를 받았다.
의도치 않았지만 마스터의 위용을 보인 덕에 용병대를 대표하게 된 것이다.
"도울 수 있어서 다행이죠. 전 한남동 용병대의 마스터 청운입니다. 이쪽은 제 동료이자 친구들인 유정욱, 김현태, 소은정, 조안이고요."
케일락은 신분이 높은 귀족임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숙였다.
신분제 사회에서 귀족으로 추정되는 이가 한낱 용병에게 저런 자세를 보인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마스터란 존재가 그것을 가능케 했다.
하긴 마스터가 귀화하면 보통 백작 위를 받는다고 들었으니 그의 행동 역시 무리가 아닐 것이다.
"이쪽은 제 손녀와 손자입니다. 너희들도 마스터께 인사드려라."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귀엽게 생긴 소녀와 그녀의 동생으로 보이는 소년이 다가왔다.
"프리실라예요.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 타일론입니다.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아이는 총총한 눈빛을 보이며 나와 눈을 마주쳤다.
"만나서 반가워, 난 청운이라고 해."
"이건 약소하지만 저희를 도와주신 것에 대한 작은 성의입니다."
케일락은 작은 성의라고 하기에는 상당한 무게가 느껴지는 주머니를 건넸다.
"대가를 바라고 도운 것이 아니지만, 어쨌든 감사합니다."
"실례지만 한남동 용병대는 지금 의뢰를 수행하는 중인가요?"
"그건 아니지만...."
"그럼 혹시 의뢰를 받을 수 있나요?"
"...."
제페토 상단은 우리에게 랜섬 협곡 내부까지 호위를 부탁했다.
현 위치에서 협곡 내부까진 약 20km정도 떨어진 곳이었는데 가격은 일인당 2,000골드, 총 10,000골드짜리 의뢰였다.
"만 골드?"
유정욱이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20km면 하루. 늦어도 이틀이면 갈 수 있는 거리잖아. 그런데 가격이 너무 후한데?"
"청운 때문인가?"
"자칫 귀찮은 일에 휘말릴 수 있어. 귀족이 있잖아."
그러면서 유정욱은 케일락을 가리켰다.
"그럼 어떻게 할래?"
"늘 그래 왔듯이 다수결로 하자. 난 아직 레벨 업을 못 했어. 협곡으로 이동하는 동안 운이 좋으면 가능할 것 같아. 고로 난 찬성."
"나는 청운이 찬성하면 무조건 찬성이야. 마스터가 하자는 대로 해야지."
"그러네. 나도 청운이 고하면 고!"
"미 투!"
"...!"
순간 모두가 내게 책임을 떠넘기는 분위기다.
나는 순간 약초꾼에게 받은 지도를 머릿속에 떠올려 보았다.
랜섬 협곡으로 간다면... 내가 생각한 최단거리에서 벗어나지만 그렇다고 크게 돌아가는 것도 아니다. 내가 생각한 예정보다 며칠 늦어질 뿐이다.
그 정도면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을 것 같아 흔쾌히 의뢰를 수락했다.
사실 시간이나 돈 때문이 아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어린 남매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너희들의 뜻이 그렇다면 나도 좋아."
선명하게 칠해진 붉은 표시가 살짝 마음에 걸렸지만 좋은 첫인상의 케일락과 반짝이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프리실라, 타일론 남매의 기대를 외면하기 힘들었다.
제57화
57화 프리실라와 타일론 남매
제페토 상단에 합류한 지 하루 하고도 반나절이 흘렀다.
협곡 내부로 들어가면서 우리는 몬스터 무리와 지속적으로 조우하게 되었는데 그때마다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졌다. 하피, 놀, 붉은 개미와 같은 몬스터가 출현했을 경우 주로 상단 소속 용병들이 상대했고 트롤, 오우거, 와이번와 같이 고위험군 몬스터가 출현하면 한남동 용병대가 전투에 참여했다.
난 넓은 시야로 전투의 모든 상황을 주시하며 혹시라도 직접 나서야 하는 상황이 오면 속전속결, 강공(强攻)으로 몬스터를 상대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시간이 지체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허...억!"
"트, 트윈 헤드 오우거다!"
강력한 몬스터의 등장에 사람들이 침음을 내뱉었다.
상대를 질식시키기에 충분할 정도의 밀도 높은 살기를 뿜어냈기 때문이다.
흡사 늪에 빠진 것처럼 사람들이 허우적대고 있을 때 나는 진기를 실어 일갈을 내뱉었다.
"갈!"
태허무극심법의 현묘한 기운이 섞인 외침이 터져 나오자 이를 들은 사람들이 정신을 다잡았다.
나는 그 모습을 확인하는 즉시 트윈 헤드 오우거를 향해 쇄도했다.
"태극권 절강(絶剛), 내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이 끊어지다."
태극권의 강력한 와류에 휩쓸린 트윈 헤드 오우거의 내부가 한순간에 난자당하며 녀석의 얼굴이 노랗게 변했다.
"그륵?!"
다음 순간 수박 터지는 소리와 함께 트윈 헤드 오우거의 전신이 터져 나가고 말았다.
"미치겠다."
"저거 실화냐?"
"주먹질 한 방에 트윈 헤드 오우거가 작살났어."
주위를 살피자 나를 경악에 찬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이 들어왔다.
하긴 A급 이상으로 추정되는 트윈 헤드 오우거를 일격에 쓰러뜨렸으니 그럴 만했다.
-[띠링, 78골드를 획득했습니다.]
-[띠링, 트윈 헤드 오우거의 심줄을 얻었습니다.]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오오! 레벨 업!
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모른 척하며 그들이 전열을 정비하는 사이 상태 창을 열어 보았다.
<상태 창>
이름 : 최선우
레벨 : 165
고유 특성 : 분신(Unique) *사용 불가
칭호 : 현자, 오크 살육자, 소드 마스터
생명력 : 6,850/7,280 마력 : 5,250/7,280
힘 : 308 체력 : 348 민첩 : 333
지혜 : 198 지능 : 256 행운 : 15
명성 : 5,050 악명 : 10 매력 : 30
보너스 스탯 : 210
"후후후~."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부른 기분이 들었다.
이때 제페토의 음성이 들려왔다.
"황혼이 내려오고 있는데 어떻게 할까요?"
그의 말대로 하늘을 올려다보자 어느새 황혼이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다.
작정하고 서두른다면 좀 더 거리를 줄일 수 있었지만 어린아이도 있는데 그렇게까지 무리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늦은 것, 하루, 이틀 정도 더 늦는다고 무슨 일이 있겠는가?
"정리만 끝나는 즉시 야영지로 이동하시죠."
"알겠습니다. 그리고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는 내가 배려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듯 감사한 눈빛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서둘러 정리하고 야영지로 이동한다."
"알겠습니다."
제페토의 말에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우리는 적당한 야영지를 찾아 재빠르게 휴식을 취할 수 있었는데 상단 사람들 중에 5성급 호텔 요리사가 있는 모양이다.
"으음~~."
"오!!"
"크으, 바로 이 맛이야."
상단에서 제공한 수프를 맛본 조안이 눈빛을 몽롱하게 지으며 감탄사를 토해 냈다.
음식은 수프와 빵, 그리고 고기였지만 다들 입맛에 맞는 것 같았다.
"이건 완전 콘티넨탈 호텔급인데?"
"맞아. 가짓수는 적지만 맛이 뛰어나."
"확실히 이 정도는 되어야 음식이라고 말할 수 있지."
"내 생각도 그래."
식사를 마친 후,
간단한 티타임을 끝으로 우리는 각자 휴식을 취했다.
참고로 내가 한남동 용병대의 정식 대장이 되었다.
굳이 이유를 말하자면 단순하다.
내가 마스터라는 것과 사람들이 나를 용병대장으로 오해하고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렇게 밤이 지나고 동이 틀 무렵,
어느새 사람들이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데이븐 대장, 모두 정리했습니다."
"보급품은?"
"식량과 식수 모두 충분합니다."
"모포도 다 챙겼나?"
"네."
제페토 상단의 호위를 맡은 데이븐 대장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청운 님, 저희는 준비가 끝났는데 어떻게 할까요?"
"데이븐 대장. 우리도 다 됐습니다."
"오! 그것참 잘됐네요. 그럼 바로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그래요."
그렇게 협곡 내부를 향해 한참을 걷고 있을 때,
마차 창문이 열리며 꼬마 숙녀 프리실라의 음성이 들려왔다.
"아저씨, 청운 마스터 아저씨."
"꼬마 숙녀님, 절 부르시는 겁니까?"
"네."
뭔가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이다.
"아저씨가 트윈 헤드 오우거를 한 방에 없앴다고 들었는데 정말이에요?"
"글쎄요. 누가 그래요?"
"기사 아저씨들이 하는 말을 들었어요. 그리고...."
"그리고?"
"한남동 용병대 전원이 이방인이라는 말도 들었어요. 근데 이방인이라는 게 정말 사실이에요?"
"이방인이요? 흐음! 호위 기사분들이 그런 얘기를 할 리가 없는데 그것참 이상하군요. 혹시 몰래 들은 것이 아닌가요?"
"그, 그게...."
큭! 역시 8살짜리 꼬마 숙녀답다.
그냥 한번 찔러본 말에 프리실라의 얼굴색이 홍당무로 변했다.
"하하하! 농담이에요. 귀여운 프리실라 님."
이방인의 존재는 이미 이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귀족가에서 자란 꼬마 숙녀라면 이방인에 대한 얘기만 들었지 직접 만난 적이 없었을 것이다.
난 프리실라의 호기심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맞아요. 저희는 이방인이에요."
이방인이라는 것이 절대적으로 지켜야 할 비밀도 아니고 난 시원하게 인정했다.
"아!"
내 대답에 관심 없는 척하던 꼬마 도령 타일론마저 눈빛을 반짝였다.
두 사람은 뭔가 기대에 찬 눈빛으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신기한 세상이라 들었어요. 커다란 기계가 사람을 태우고 다닌다고 하던데 정말이에요?"
"자동차나 비행기를 말하는 것 같은데, 맞아요. 수백 명을 태우고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기차가 있고 와이번처럼 하늘을 나는 비행기가 있죠."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남매의 입이 크게 벌어져 갔다.
"어린이를 위한 축복받은 땅이 있다고 들었어요."
"어린이를 위한 축복받은 땅? 아! 혹시 에버XX?"
"네. 맞아요. 에버XX."
"하하하~."
아이들은 흥미가 동하자 표정 관리에 완전히 실패했다.
케일락은 손주들의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외면치 못해 내게 마차에 탑승하길 권했고 나는 그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아기 상어~~ 할아버지 상어~~~."
나는 남매의 호기심을 풀어 주는 동시에 전 세계 아이들을 사로잡았던 동요들을 가르쳐 주었다.
"프리실라 누나, 이번엔 누나가 해 봐."
"그럴까? 아기 상어~~ 뚜루루루루. 꺄르르르~."
분위기가 무르익자 이번엔 곡을 바꿨다.
"이번엔 이걸 한번 해 보자. 자! 들어 봐. 곰 네 마리가 한 집에 있어. 아빠 곰. 엄마 곰, 프리실라 곰, 타일론 곰."
타일론, 프리실라 남매는 가사에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무척이나 재밌었는지 입까지 크게 벌리며 깔깔 웃었다.
"하하하하~ 그것참 재밌는 노래로군요."
"그럼 케일락 님도 한번 불러 보시죠. 함께 부르면 더 재밌습니다."
"그런가요?"
"그래요. 할아버지도 같이 불러요."
"그럴까?"
"네~ 할아버지."
아이들의 즐거운 노랫소리에 나 역시 무척이나 기분이 좋아져 아공간을 열었다.
"자! 선물이야."
"어? 그게 뭐예요?"
"막대 사탕이란 건데, 아주 맛있고 달콤하단다."
"저도요. 저도 주세요."
오색찬란한 막대 사탕은 단번에 아이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래. 여기 있다."
"이야~."
"와!!"
프리실라 남매는 달콤하고 짭조름하게, 매우 행복한 표정을 보이며 사탕을 먹었다.
"그렇게 맛있니?"
"네. 아아주 아아주 조오오아요."
"말 시키지 마세요. 먹는 데 방해돼요."
"험... 험! 타일론. 너 그렇게 먹으면 이빨이 썩을 텐데, 괜찮겠니?"
"괜찮아요. 신전에 가면 돼요."
"신전?"
"동생 말이 맞아요. 아플 땐 사제님이 치료해 주시거든요."
"아!"
하긴 이곳에선 신전이 병원이다.
그것도 거의 만능에 가까운 병원!
각설하고 이날은 아이들의 노랫소리 덕인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 *
한남동 용병대 막사.
남자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 소은정과 조안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때?"
"뭐가?"
"청운."
"...?"
"보면 볼수록 괜찮은 것 같지 않아?"
소은정의 말에 조안은 본인이 손에 쥐고 있던 찻잔을 슬며시 내려놓았다.
"아이들과 놀아 주는 것을 보니까, 왠지 가정적일 것 같아. 딱 내 스타일이야."
"가정적이어서 네 스타일이라고? 설마 나보고 그 말을 믿으라는 소리야?"
여자로서의 본능이 움직였다.
사실을 말하라는 조안의 눈빛에 소은정이 입술을 한 번 삐죽 내밀어 보이더니 결국 본심을 실토했다.
"에휴. 알았어. 사실 얼굴도 저 정도면 괜찮고 무엇보다 실력이 뛰어나잖아. 분명 머지않아 최강의 남자가 될 거야."
"그래서?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내가 찍었다고."
"찍어?"
"응."
"청운이 나무니, 찍는다고 넘어가겠어?"
"그건 나도 인정. 하지만 넘어갈 때까지 찍어 보면 언젠가는 넘어가지 않을까?"
소은정의 손이 자연스럽게 움직이며 보일 듯 말 듯 속옷을 드러냈다.
"여자는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여자가 있지만 남자는 여자가 열 번 찍으면 넘어간다구. 게다가 이 정도 미모면 어디 가서 빠지지 않잖아? 호호호~."
소은정의 행동에 조안이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오래된 친구라 그런지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네 말은...."
"그래. 이 계집애야. 이제 시치미 좀 그만 떼. 내가 널 모르니? 너도 청운에게 관심 있잖아."
조안의 귀에는 소은정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들리지가 않았다.
어느 순간 그녀의 시선이 청운을 좇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를 처음 보았을 땐 그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래서 어떻게 하자고?"
"향기 나는 꽃에 벌들이 꼬이듯 매력적인 사내 앞에 여자들이 꼬이기 마련이야. 그러니까 내 말은 적어도 우리 둘은 페어플레이 하자는 말이야. 공동의 적이 나타나면 같이 상대하고 말이야. 어때?"
조안은 소은정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조... 좋아."
"오케이! 그럼 지금부터 페어플레이다."
"응."
제58화
58화 아르코 제국의 청색 기사단(1)
안데라스 산맥 랜섬 협곡에 아침이 찾아왔다.
하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안개가 자욱하게 퍼져 소수 인원이라면 모를까 다수의 인원이 움직이기엔 힘들었다.
"뭔 안개가 이렇게 심해?"
"이거 움직일 수 있겠어?"
"해가 뜨면 걷히겠지. 조금만 기다려 보자. 이런 시야(視野)에 마차를 함부로 움직였다간 사달이 날 수 있어."
"그래, 그러자고."
그렇다고 넋 놓고 기다릴 수만은 없어 우리는 천천히 이동했다.
"서울에 살아?"
"부모님은 뭐 하셔?"
"가족은 어떻게 돼? 형이나 누나 혹은 동생이 있어?"
"이번에 귀환하면 등급 심사 받아 봐. 분명 S급이 나올 거야. 확실해."
이 아가씨들이 아침부터 뭘 잘못 먹었나?
소은정과 조안이 마치 경쟁하듯 질문을 쏟아 냈다. 물론 처음부터 상황이 이런 것은 아니었는데 이번 사태의 포문을 연 것은 소은정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십 분 전,
"청운, 뭐 해?"
"그냥."
"뭘 보고 있었어?"
"아무것도 안 봐. 일종의 멍 때리기?"
"꺄르르르~."
"...?"
그냥 해 본 말에 입술에 손까지 얹고 웃어 보인다.
"바쁘지 않으면 이것 좀 봐 줄래?"
"뭔데?"
막상 들어 보니 별것도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대화를 나눌수록 은근 추파를 던지는 느낌이다.
그녀의 신체가, 정확히 말하면 그녀의 가슴이 내 팔에 착 하고 달라붙었기 때문이다.
"음... 음!"
뭉클한 촉감에 얼굴이 달아오를 무렵 조안의 음성이 등 뒤에서 들려왔다.
"저, 저기!"
그녀는 나와 은정을 번갈아 가며 보더니 이내 입술을 꽉 깨물고 다가왔다.
"청운. 혹시 라면 좋아해?"
"라면?"
"응. 난 XX라면을 좋아하는데 언제 같이 먹지 않을래? 오, 오해는 하지 마. 그러니까... 음! 뭐라고 해야 하지? 동료, 친구. 그래... 맞아... 우리는... 친구잖아. 그러니까 식사를 같이할 수 있고...."
"...."
얘는 또 왜 이러는 걸까?
횡설수설하며 말을 던지는 것을 보아하니 진정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암튼 이렇게 시작된 질문이 가족 사항을 포함해 개인적인 취향에 이르기까지 경쟁적인 공세로 이어졌다.
난감하기 짝이 없는 상황,
유정욱과 김현태 역시 갑작스러운 질문 세례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상단주님. 제페토 상단주님."
마침 수색을 나갔던 데이븐 대장의 음성이 들려왔다.
다급함이 느껴지는 그의 음성에 일순 질문 공세가 멈췄다.
"데이븐 대장, 무슨 일인가?"
"적입니다."
"적?"
적이라니!
단어 선택이 이상하다.
상대가 몬스터가 아닌 인간이란 말인가?
"규모가 얼마나 되지?"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지만 수십 명은 되어 보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들고 있는 깃발을 확인했는데, 아무래도 아르코 제국의 청색 기사단 같았습니다."
'청색 기사단?'
나는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병력을 쪼갰는데도 뒤를 밟혔단 말인가?"
"그래도 청색 기사단만 보이니, 최악의 상황은 아닐 듯합니다."
"음...!"
청색 기사단이 나타났다는 말에 제페토 상단주와 케일락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난 더 이상 궁금함을 참을 수 없어 대화에 끼어들었다.
"케일락 님, 무슨 일인가요?"
내 질문에 케일락이 잠시 고개를 주억거리며 곧 입술을 열었다.
"실은...."
그의 입에서 놀랄 만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케일락은 프란시스코 공국의 하나뿐인 후작이며 프리실라, 타일론 남매가 공국의 후계자라는 것이었다.
"아르코 제국에서...."
아르코 제국은 북부 대륙의 패자라 불리며 교황이 다스리는 신성 제국, 오스만 제국과 함께 대륙 3강으로 불리는 나라인데 프란시스코 공국을 차지하기 위해 공왕의 자녀이자 적법한 후계자인 프리실라, 타일론 남매를 노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공왕 부부가 불의의 사고로 명운을 달리하자 그 후 몇 차례의 납치 시도가 있었는데 고심 끝에 제국의 마수를 피하기 위해 랜섬 협곡으로 가고 있다고 밝혔다.
"케일락 후작님. 프란시스코 공국과 아르코 제국은 무슨 관계인가요?"
"아르코 제국과 프란시스코 공국은 그 뿌리가 같다네. 아주 오래전 제국의 황제께서 전쟁 영웅이자 소드 마스터에 오른 아우에게 대공직을 하사하시고 프란시스코 영지에 공국의 건설을 허락하셨지. 하지만 수백 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지금은 그저 형식적인 관계로 전락하고 말았다네. 공왕 전화 부부가 살아 있었다면 저들이 마수를 뻗치지 않았을 것이나 불의한 사고로 유명을 달리하시는 바람에...."
"...!"
순간 가슴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오래전 나와 하나가 된 주선우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골육상잔, 황위 찬탈!
"빌어먹을 놈들 같으니."
가만히 보면 이쪽 세계나 저쪽 세계나 있는 놈들이 더하다.
많이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만족을 모르는 것이다.
"미안하네. 청운 경. 자네를 속일 의도는 없었네.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계약을 파기해도 좋네."
"계약 파기요?"
"그래."
이 할아버지 보면 볼수록 사람이 괜찮다.
첫인상은 물론 여태껏 사람을 대하는 태도도 그렇고 말이다.
"다들 어떻게 할래?"
유정욱, 김현태, 소은정, 조안은 난감한 기색이었다.
기사단이라는 이름이 가지고 있는 무게감 때문에 누구도 섣불리 대답하지 않았다.
결국 한남동 용병단의 의중이 내게 쏠렸다.
"청운, 넌 어떻게 생각해?"
유정욱의 물음에 난 양손을 허리에 떡하니 올린 채, 당당히 말했다.
"피하기엔 이미 늦은 감이 있어."
객관적으로 봤을 때 우리, 아니 내가 없다면 케일락 후작은 이 자리에서 최후를 맞이할 것이 분명해 보였다. 이 말은 즉 프리실라와 타일론 남매 역시 저들에게 잡힐 확률이 높다는 것을 뜻했고 말이다. 운이 좋아 빠져나가면 뭐 하나, 사방이 몬스터 천지인데 오히려 잡히는 것이 나을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싸워야지."
난 애초부터 싸우기로 마음을 먹은 상태였다.
"상대는 기사단인데, 괜찮을까?"
조안이 내게 물었다.
평소 조용하기로 유명한 그녀의 질문에 한남동 용병대가 나와 그녀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난 한 사람, 한 사람과 눈을 마주친 후, 조안의 질문에 단호히 답했다.
"붙어 봐야겠지만 난 패할 생각이 없어."
"...!"
"...!!"
확신에 찬 대답에 모두의 표정이 밝아졌다.
"좋아. 그럼 난 찬성."
"오케이. 나도 고(Go)!"
"쩝. 알았어. 하지만 난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도망칠 거야. 귀환 탄다."
현실주의자 김현태의 말이다.
차라리 이렇게 대놓고 말하는 게 좋다.
적어도 뒤통수를 칠 염려는 없으니까 말이다.
"걱정 마. 그럴 일은 없을 거야."
나는 케일락 후작에게 다가갔다.
"후작님. 계약 파기를 논하기엔 이미 늦은 것 같네요. 프리실라, 타일론 남매에게 고마워하십시오. 아이들을 두고 가기엔 이미 정이 꽤 들었거든요. 먼저 출발하십시오. 저희는 인사 좀 나누고 합류하겠습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뒤얽혀서 멍한 표정으로 있던 후작이 그제야 깜짝 놀라서는 황급히 말했지만 우리의 신형은 기사단이 있는 방향을 향해 사라지고 있었다.
일각쯤 지났을까,
빠르게 이동한 덕에 기사단이 시야에 잡혔다.
"청운. 저기 봐. 기사단이야. 이제 어떻게 할까?"
"지금부터 당당히 걸어가자. 그리고 내가 부탁하기 전까진 나서지 말아 줘."
"알았어."
"그렇게 할게."
이때 저쪽에서 우리를 발견한 기사단이 다가왔다.
"응? 너희들은 누구냐?"
너무나도 태연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걸어오자 당황한 것은 기사단이었다.
"이봐, 너희들 누구냐고?"
기사단원 하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용병인 것 같은데 저 새끼가 미쳤나?"
보통의 경우 용병이 기사단과 조우하면 웬만한 떨거지들은 알아서 고개를 숙이거나 줄행랑치기 때문이다.
"야 이 새끼야. 너는 누구...?"
당장에라도 욕설을 날리려던 그의 언어가 멈췄다.
콰앙!
굉음과 함께 녀석이 뒤로 날아가 나무에 처박혀 버렸기 때문이다.
"적이다."
"모두 검을 들어."
선두에 있던 몇몇 기사들이 검을 빼어 들고 달려들었다.
나는 무극 대검을 뽑아 들고 강대한 힘을 바탕으로 검을 휘둘렀다.
진기를 잔뜩 머금은 대검이 기사들의 방패를 꿰뚫고 지나가 그들에게 막대한 타격을 안겼다.
"크악!"
"아악!"
기세등등했던 녀석들의 표정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동시에 믿지 못할 것을 봤다는 듯 두 눈이 툭 튀어나왔다.
유형의 검강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오, 오러 블레이드. 마... 맙소사...."
그들은 놀란 가슴에 말을 더듬으며 그대로 얼어 버렸다.
"마, 마스터십니까?"
"보면 몰라? 1분 줄게. 책임자 데려와."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떨리는 가슴을 가까스로 진정시킨 기사단원 한 명이 후방으로 서둘러 이동했다.
몇 분이 지나지 않아 화려한 갑주를 입은 중년인 두 사람이 나타났다.
풍기는 기세를 보니 기사단을 이끄는 단장과 부단장으로 보였다.
"귀하께서 소드 마스터십니까?"
상대가 예의를 갖춰 말하면 그에 걸맞게 행동하는 것이 인지상정, 나 역시 예의를 갖춰 답했다.
"그렇소."
"안데라스 산맥에 소드 마스터라니, 한데 무슨 일로 날 보자 하셨소?"
"아르코 제국의 청색 기사단이 맞으시오?"
"그렇습니다만."
"피를 보시겠소 아니면 여기서 물러나시겠소?"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기사단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장고(長考) 끝에 악수를 두는 법이오. 기회를 줄 때 물러가는 게 어떻겠소?"
"마스터께선 프란시스코 공국과 연관이 있는 거요?"
"그렇소."
"...!"
기사단장의 눈에 당혹해하는 빛이 서리자 나는 살기를 뿜어내며 그를 압박했다.
"그...럴 순 없소. 나는 제국의 녹을 먹는 기사, 맡은 임무를 완수해야 하오."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마시겠다니, 어쩔 수 없군. 좋소. 그럼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한번 놀아 봅시다."
나는 두 주먹을 움켜진 채 태극권을 펼쳐 냈다.
순간 헤아릴 수 없는 빛 무리가 그들을 향해 쏟아졌다.
"오, 오러 피스트?"
파파파파파팍!
엄청난 기세로 날아오는 주먹에 선두에 선 기사들의 안색이 순식간에 노래져 버렸다. 나는 들개 무리들 가운데 뛰어든 한 마리의 호랑이처럼 포효하며 날아다녔다.
"크윽."
"끄악!"
연이어 터져 나오는 둔중한 타격음.
주먹 한 방에 은색 플레이트가 송두리째 날아가 버렸고 어떤 것은 박살이 났다.
눈 깜짝할 사이, 세 명의 기사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이들 중에는 상급에 이른 기사도 있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상대는 마스터다. 청색 기사단은 서둘러 개진(開陣)하라."
뒤이어 청색 기사단장의 고함이 터져 나왔다.
말이 끝나자마자 기사들의 검기가 몰려온다.
나는 그들의 검기를 쓸어버릴 요량으로 권강을 날렸다.
그러나 우리의 공격이 마주치는 찰나 나는 3, 4보 뒤로 밀리는 것을 느끼면서 팔이 뻣뻣하게 마비됨을 느꼈다.
!!
난 내심 크게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검기가 강기를 막아 내고 심지어 뒤로 밀려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난 그 즉시 기사단을 경시했던 마음을 버리고 신중하게 태극권을 펼치는 한편 유심히 그들의 공격을 관찰하였다.
제59화
59화 아르코 제국의 청색 기사단(2)
청색 기사단의 검이 '8'자 형태로 물결치듯 이어지는 순간, 거대한 기류가 쏟아지는 것을 느꼈다.
방금 전까지 내가 서 있던 자리에 32개의 검기가 스쳐 지나갔다.
만약 순간 이동 스킬을 펼쳐 몸을 피하지 않았다면 바람 소리조차 나지 않은 공격에 일격을 허용했을 것이다.
'저게 대체 뭐지?'
마치 내 정신이 지독한 폭풍 속으로 떨어져 내린 느낌이다.
주위를 찬찬히 둘러봤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끊임없이 요동치듯 움직이는 기사단의 물결뿐이다.
순간 저들에게 끌려가기보다 주도해야 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먼저 저들의 질서를 깨뜨려야 했다.
"태극검 흡(吸), 부드러운 바람은 회오리가 되어."
태극권의 흡(吸)자결을 펼치면 강력한 회오리가 발생해 그 영향력에 아래 있는 모든 것을 끌어당긴다.
"우웃!"
"모, 몸이 끌려갑니다."
"당황하지 말고 버텨라."
기사단장의 진중한 음성이 들리는 순간,
"출! 개합(開合), 여럿이 모여 하나가 되다."
검기+검기+검기+검기+검기...+...검기+검기+검기+검기+검기.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한 명의 검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합체를 시작했다.
그것도 역순으로 말이다.
"출! 산개(散開), 각개로 흩어져 나간다."
"태극검 벽(壁), 단단한 태극은 벽이 되어 지키리."
-퍼퍼퍼퍼펑!
수십의 검기가 각기 다른 방향에서 튀어나와 공격했지만 벽자결에 의해 가로막혔다.
"역시 마스터, 명불허전이오."
기사단장이 놀란 표정을 보였고 나 역시 의외의 공격에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이하...동문이오. 아르코 제국의 명성이 허언이 아니었음을 깨달았소."
"마스터의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청운"
"청운?!"
기사단장이 깜짝 놀라며 내 이름을 되새긴다.
"날 아시오?"
"근래 말탄 왕국에 새롭게 나타난 마스터가 있다고 들었소만 마스터께선 무슨 이유로 케일락 후작의 편을 드는 것이오?"
"멍청한 질문이군. 내가 누군지 알았으면 내가 용병인 것도 알았을 텐데 말이오."
부하들 앞에서 무안을 당했다고 여겼는지 그의 눈빛에 순간 노기가 서렸다 사라졌다.
"마스터께서 받은 의뢰비의 두 배, 세 배, 아니 열 배를 지불하겠소. 지금이라도 후작의 의뢰를 취소하고...."
"아니! 그건 곤란하오."
난 손을 흔들며 그의 말을 중간에 잘랐다.
돈 때문에 의뢰를 취소할 생각도 없었지만 무엇보다.
"아이들과 정이 들었거든."
"...!"
내 대답이 의외였던가?
청색 기사단의 단장은 꽤나 복잡해 보이는 눈빛을 보였다.
'기사단장은 최상급에 가깝고 상급이....'
총 50명으로 이루어진 청색 기사단.
나는 기사단장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은밀히 기감을 펼쳐 저들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최상급 팔라딘 1명에 상급 팔라딘 6명, 중급 팔라딘 17명, 하급 23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더욱이 놀라운 것은 검진을 이룬 것이 50명 전원이 아닌 32명이라는 것이었다.
"고작 정... 때문에 제국과 적이 되겠다는 것이오?"
기사단장이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난 오히려 저자의 행태를 이해할 수 없었다.
"말을 함부로 하는군."
"내가 말이오?"
"약자를 존중하고 보호하고 관대하라. 약속에 절대 거짓말을 하거나 퇴보하지 말라."
!!
기사도의 10계명을 말하자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지 아시오? 바로 정 때문에 사는 거요. 이 정이란 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사실 무서운 거거든."
"...."
"더욱이 난 용병의 본분에 따라 의뢰인과의 약속을 충실히 수행한 것에 불과한데 그것 때문에 제국과 적이 된다면 기꺼이 받아들이겠소. 당신 역시 당신이 지금 행하고 있는 일이 당당하다면 어디 한번 말해 보시오. 그렇다면 나 역시 용병 길드에 이번 일에 대해 적극 알릴 테니까."
"아니, 내 말은...."
용병 길드에 알리겠다는 말에 꽤나 당황한 얼굴이다.
"자! 어떻게 하시겠소. 나와 계속 칼을 맞대겠소? 아니면 물러가겠소?"
나는 그에게 질문을 던지는 동시에 등 뒤에 걸린 무극 대검을 쥐어 잡았다.
-[무극 대검의 효과로 공격력이 20% 상승합니다.]
태극권을 펼칠 때와 비교해 20%의 공격력이 상승했다는 음성이 들렸다.
한편 청색 기사단 단장의 동공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내 제안에 심히 고민하는 눈치다.
저들의 목표는 프리실라, 타일론 남매를 붙잡는 것이 분명할 텐데 나로 인해 아무 성과 없이 돌아가자니 후환이 두렵고! 그렇다고 나와 싸우자니 상대가 만만치 않은 것이다. 본인들의 목숨을 걸어야 하기 때문에 섣불리 결정을 내리기 어려웠다.
나는 그의 결정에 도움을 주기 위해 일부러 허세를 부렸다.
"이보시오. 단장. 한 가지 간과하는 게 있는 것 같은데? 내 동료들이 안 보이시나?"
내 눈길이 뒤쪽에 있는 한남동 용병대를 가리키자 그는 순간 당혹한 표정을 보였다.
저자는 기사단이라는 한 단체를 이끄는 수장이다.
적어도 감정에 치우쳐서 대세를 그르칠 인물이 아니라는 뜻이다.
결국 기사단장이 긴 탄식을 토했다.
"하...아!"
그의 한숨에는 무척이나 깊은 상심과 실망이 서려 있었는데 나라는 존재가 있는 이상, 길보다 흉이 많다는 것을 깨달은 판단이었다.
"우리가... 물러가겠소."
결국 기사단장이 백기를 들었다.
"마스터 청운, 오늘 일은 잊지 않겠소. 청색 기사단은 철수한다."
"충!"
기사단장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삽시간에 도열해 퇴각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일순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세상은 정말 넓구나.'
일사불란한 모습은 차치하더라도 마스터를 상대하는 합벽진은 나 역시 처음 경험하는 것이었다.
* * *
[대한민국 청와대]
"다들 오신 것 같으니 시작하겠습니다."
모두가 잠든 새벽 1시.
청와대 국가안보 회의에 VIP를 비롯해 국가안보수석, 국정원장, 국방장관, 합창의장, 게이트 관리청장 등이 속속히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부터 약 1시간 전, 한국 시간으로 자정을 기해 미국 정부가 스타게이트에 대한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안보수석에게 바통을 넘겨받은 게이트 관리청장이 상황을 설명했다.
미국 정부가 그동안 소문으로만 무성했던 스타게이트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밝히며 인정했다는 말에 사람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어디까지 밝혔다는 겁니까?"
"아틀란티스 대륙의 존재와 유사 인류 그리고 이종족의 존재에 대해 밝혔습니다."
"모두 까발렸군요."
"그, 그렇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긴요, 독박 쓰지 않으려면 우리도 공개해야죠. 다른 나라들도 지금쯤 보도 자료를 준비하고 있을 겁니다."
"근데 미국 놈들이 갑자기 왜 저럴까요?"
"방금 전에 들어온 정보에 의하면 샌프란시스코 한복판에 스타게이트가 생성되었다고 합니다. 미처 대처할 틈이 없었다고 하네요."
"아...!!"
"흐음! 그랬군요."
수백만이 살고 있는 대도시 한복판에 스타게이트가 생성되었다는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같은 상황이었다면 한국 정부 역시 비슷한 선택을 했을 것이기에.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헌터 협회장을 불러 공동으로 브리핑을 준비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민관 협동으로 가는 것이 그림도 좋고요."
"그게 좋겠네요. 그럼 정보 공개는 어디까지 생각하십니까?"
"미국 정부에서 발표한 내용에 살만 조금 붙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다만...."
"다만?"
173cm 정도의 키에 마른 몸, 까만 머리에 뿔테 안경을 착용한 안보수석이 준비한 시나리오를 이야기했다.
"적당히 양념을 쳐야겠죠. 아틀란티스 대륙은 말 그대로 미지의 세계였고 대한민국 정부는 국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민관 합동으로 연구와 조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뭐!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일부 몬스터 영상을 공개하는 겁니다. 사람들에게 혐오와 공포를 줄 수 있는 몬스터 위주로요."
"좋은데요?"
"그 뒤엔 얼굴마담용으로 몇몇 헌터를 섭외해 방송에 출연시키는 거죠. 시사나 다큐 프로그램도 제작하고 말이죠. 뭐 일부 야당 의원들이 꼬투리를 잡겠다고 설레발을 치겠지만 언론을 이용해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겁니다. 국가는 국민들의 안전에 대해 어느 정도 자신이 생겼으므로 이렇게 정보를 공개한다고 말입니다."
"불규칙 게이트에 대해 언급하는 건 어떻습니까? 겸사겸사 정부가 빠져나갈 구멍도 만들어 놓고요."
"좋은 생각이십니다. 기왕이면 국정원에서 모은 정보를 이용해 여배우 스캔들도 좀 터트리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뭐 비디오 같은 게 있지 않겠습니까?"
"물타기도 하자는 겁니까?"
"할 수 있는 건 모두 해야죠. 총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의견을 경청하던 VIP가 나섰다.
"흠! 안보수석 의견이 나쁘지 않군. 그럼 자네가 맡아서 할 수 있겠나?"
"예. 맡겨만 주십시오."
"그래. 그럼 다들 안보수석을 도와줘. 그리고 박준혁 실장."
"네. 대통령님."
"자네가 헌터 협회장과 직접 만나 이번 일을 잘 조율하도록 하게. 어차피 공개된 마당이니 잡음이 나면 좋지 않아."
"알겠습니다. 대통령님."
"혹시 다른 특이 사항이 있나?"
VIP의 말에 헌터 관리청장이 손을 들었다.
"특이 사항은 아니지만 국가안보에 관한 관련자분들이 모두 모이셨으니 신규 각성자 등록 현황에 대해 보고를 드려도 괜찮을까요?"
"물론이네. 보고하게."
대통령의 허락에 헌터 관리청장이 간략하게 보고했다.
"금년 상반기까지 헌터 학교 졸업생을 포함해 총 411명이 신규 각성자로 등록했습니다. 이중 비전투 계열을 제외하고 헌터로 활동할 수 있는 각성자는 357명으로 약 87%에 이르는데 신규 각성자 중 291명은 정부 소속 헌터로 계약을 완료했습니다."
"계약 조건은요?"
"첨부한 자료를 보시면 알겠지만 F급은 9급, E급은 8급, D급은 7급 공무원으로 계약했습니다. 참고로 C급 헌터부터 5급 공무원입니다."
"나머지 65명은 어떻게 됐나요?"
"65명 중 55명은 성삼, 지엘, 대현, KS 그룹을 위시해 협회 소속 길드에 가입한 것으로 확인되었고 이들을 제외한 10명은 독자적으로 활동한다고 보고받았습니다. 군 미필자에 대한 병역 특례와 각종 세금 감면 혜택으로 인해 전년 대비 정부 소속 헌터가 많아졌습니다."
"허허허. 청장이 수고했군. 신규 각성자도 중요하지만 고등급 헌터를 정부에 영입할 수 있도록 좀 더 신경 써 주게."
"네. 대통령님."
"그럼 이상으로 각성자 현황 보고를 마치고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로부터 5시간 후,
사람들은 아침부터 쏟아지는 뉴스 특보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뉴스를 알려 드립니다.]
-[헌터 관리청장의 말에 따르면 금일 새벽....]
-[미국 정부는....]
그동안 음모설이라 치부하고 수면 아래에 감춰졌던 스타게이트에 대한 사실이 공개되었기 때문이다.
"와! 대박."
"설진아. 뉴스 봤어?"
"어."
"스타게이트가 진짜 있었어."
"거봐. 내가 찌라시에서 봤다고 했잖아. 찌라시가 다 거짓말이 아니라니까."
"그러게."
대한민국이 발칵 뒤집혔다.
언론에서는 연일 스타게이트에 대해 대서특필하며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제60화
60화 골드 드래곤 아르제니아(1)
양쪽의 곡벽이 급경사를 이뤄 폭이 좁고 그만큼 깊은 골짜기가 시야에 들어왔다.
"저기가 랜섬 협곡이로군."
우리가 협곡에 당도했을 때, 케일락 후작과 일행은 이미 입구 앞쪽에 포진하고 있었다.
"케일락 후작님."
"청운 경, 정말 고맙네. 자네 덕에 위기를 모면했어."
"별말씀을요.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아저씨."
"청운 아저씨."
이때 프리실라와 타일론이 마차에서 뛰어나와 내게 안겼다.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아저씨가 최고예요."
난 아이들의 말에 빙그레 웃음을 보였다.
* * *
"지도를 가져와라."
그러자 뒤쪽에 서 있던 팔라딘 중의 한 명이 재빨리 큰 종이 뭉치를 꺼내어 활짝 폈다. 후작은 그걸 보면서 손으로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렇다면 제국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일행을 나눈 겁니까?"
"그렇다네. 나는 공국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병력을 다섯 개로 나눴었지. 놈들에게 혼란을 주기 위해서 서로 다른 루트를 탔다네. 랜섬 협곡에서 모이자고 했지만...."
"...."
애석하게도 네 개의 병력은 아르코 제국의 포위망을 빠져나가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문득 의문이 일었다.
하필이면 안데라스 산맥, 그것도 왜 굳이 랜섬 협곡인가!
이곳에 무엇이 있어서 그렇게 필사적으로 행동한 것인지 궁금했다.
당최 이해가 되지 않아 물었더니 케일락 후작의 시선이 프리실라, 타일론 남매에게 향했다. 마치 내게 그 이유를 말해 줘도 되겠냐고 허락을 구하는 눈빛이다.
"말씀해 주세요."
프리실라가 승낙하자 케일락 후작의 입이 열렸다.
"랜섬 협곡 안에는 제국으로부터 프란시스코 공국을 지켜 줄 존재가 있네."
뭐라고?
협곡 안에 북부 대륙의 패자라 불리는 아르코 제국으로부터 공국을 지켜 줄 존재가 있다니 무슨 핵무기라도 숨겨 놓은 것인가?!
재차 질문을 던지기 전 케일락 후작의 부연 설명이 이어졌다.
"그 존재는 바로 드래곤일세."
"드래곤이요?"
"그래. 드래곤."
후작의 말에 의하면 아주 오래전 프란시스코 공국을 세운 초대 공왕이 아직 공왕이 되기 전에 궁에서 몰래 나와 떠돌이 용병 생활을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때마침 인간 세상에 유희를 나온 드래곤과 동료가 되었고 훗날 드래곤의 유희가 끝났을 무렵 그는 공왕에게 자신의 목걸이를 건네며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맹약했다고 한다.
헐, 드래곤이라니!
이거 왠지 스케일이 점점 커지는 것 같았다.
나는 후작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프리실라를 바라보았다.
'후작님의 말이 사실이니?'
'네.'
무언의 질문에 프리실라가 커다란 눈동자를 깜빡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할까?"
협곡 안에 도착한 순간 의뢰가 완수됐다.
하지만 저 안에 드래곤이 있단다. 저 얘기가 사실이라면 우리는 지구인 최초로 드래곤을 만날 수 있었다.
한남동 용병대 역시 짙은 호기심과 함께 긴장감이 역력한 얼굴이다.
"다수결?"
이와 같은 시각,
청색 기사단을 이끌고 있는 팔로우 단장이 숙영지에 설치한 마법 수정구를 통해 아까 있었던 일을 보고하고 있었다.
-쾅!
"눈앞에서 놈들을 놓쳤다고? 팔로우 단장!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수정구에서 들려온 음성은 크게 분노하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조디악 공작 각하."
청색 기사단을 이끌고 있는 팔로우 단장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후...우."
팔로우 기사단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발생했습니다."
"변수? 그게 뭔데! 마른하늘에서 마스터라도 떨어졌다는 말인가?"
"그,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무, 뭐라고?!"
팔로우 단장은 자신이 겪은 일을 얘기했다.
"케일락 후작을 도운 마스터가 바로 말탄 왕국에 나타난 이방인이었습니다. 합벽진을 사용했음에도 별다른 이득을 볼 수 없었고요. 더욱이 그의 동료들이 함께 있어...."
"그만! 그만하게. 과정이 어떻든지 간에 결국 아르코 제국의 기사단이 적을 앞에 두고 꽁지 빠지게 도망쳤다는 말이 아닌가!"
"그, 그게...."
"왜! 내 말이 틀렸나?"
"아닙니다. 공작 각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팔로우 단장은 억울했다.
이건 도망친 게 아니다. 단지 후퇴를 했을 뿐이지.
"청운이란 마스터가 합벽진을 견뎌 냈다고 했나?"
"그렇습니다. 공작 각하."
"그렇다면 새로운 마스터의 출현이 거짓이 아니었군."
"...."
"놈들은 어디로 향했나?"
"지금쯤이면 랜섬 협곡 내부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젠장! 프란시스코 공국에 내려오는 전설이... 부디 거짓이었으면 좋겠군."
수정구 속 조디악 공작의 얼굴에 불안한 마음이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 * *
독수리가 날개를 활짝 펼친 모양의 협곡의 내부는 그 웅장함을 자랑했다.
"여기가 랜섬 협곡인가?"
"캬아! 공기가 상쾌하군."
우리가 협곡 중심에 들어섰을 때였다.
-[드래곤의 영역에 들어왔습니다. 최초 발견에 대한 보상으로 파티원 각각의 명성이 100씩 상승합니다.]
"...어?"
"...!"
"옴마야!"
"흐흐흐!"
협곡 중심에 도착하자 시스템의 음성과 함께 이곳이 드래곤의 영역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나왔다.
더불어 보너스로 명성을 얻기까지! 쿄호호호!
우리는 긴장과 흥분이 공존하는 얼굴로 경계 태세를 유지하며 천천히 이동했다.
"개미 새끼 한 마리 없군요."
"몬스터들도 이곳이 드래곤 영역이라는 것을 아는 것 같습니다."
"그러게요."
케일락 후작의 말에 나 역시 동의하는 바다.
"후작님. 저쪽입니다. 저쪽에 입구가 있습니다."
우리는 발걸음을 재촉해 입구로 추정되는 곳에 다가갔다.
거대한 석벽 한가운데 무척 고풍스러운 문양이 음각되어 있었는데 지도를 확인한 케일락 후작이 그것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곳이 맞는 것 같군요."
석벽과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그 자태가 점점 더 선명하게 드러났는데 수풀에 가려진 부분을 치우니 크고 웅장한 문양이 완전하게 나타났다.
이를 조각한 자는 인간이 아닌 것 같았다.
"드디어 도착했는가!"
용병들이 힘을 모으자 곧 석벽이 열렸다.
"우리의 목적은 사냥이 아니니 갈림길이 나오기 전까지만 정찰하고 오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케일락 후작은 수색대를 보냈고 그로부터 약 30분 후, 수색대원들이 이상 징후가 없다는 사실을 알려 왔다.
"일단 육안으로 보기에 위험한 것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하로 이어지는 길이 있었습니다."
"지하?"
"네, 그곳이 레어로 들어가는 길인 것 같았습니다. 가디언 역시 지하에 있는 것으로 판단되고요."
"그렇군."
케일락 후작은 이미 어느 정도 예상한 바였는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더 이상 생각할 것이 없다는 듯 이동을 명했고 우린 경계 태세를 유지하며 레어로 추정되는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뚜벅, 뚜벅... 뚜벅!
수십 명의 사람들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한 발씩 한 발씩 나아갔다.
나 역시 소설이나 영화에서 본 드래곤을 직접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심장이 떨려 왔다.
사방으로 훤히 터진 공터.
그렇게 어느 정도 이동했을 때 갑자기 사방에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슈우욱, 쾅!
"화염 정령이다."
"이거... 숫자가 엄청 많은데? 잠시 후퇴해야 하는 거 아냐?"
옆에 있던 소은정이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을 정도로 불덩이들이 날아왔다.
"으악!"
몸에 불이 붙은 용병이 기성을 지르며 발악했지만 이미 전신에 불이 붙어 그대로 허물어졌다.
나는 화염 정령이 일으킨 불덩이를 반으로 가르며 전방을 향해 날아갔다.
"태극검 흡(吸)!!"
무극 대검에서 생성된 거대한 흡입력이 불덩이들을 끌어당기자 난 그것들을 한쪽 벽면으로 인도해 폭파시켰다.
콰콰콰콰쾅!
왼쪽과 오른쪽 그리고 전방으로 도약하며 한칼에 화염 정령의 몸을 두 토막 내 버렸다.
"개 쩐다. 진짜...."
"이야... 어떻게 저렇게 움직일 수 있는 거지?"
"과연 마스터! 정말 대단해."
"헐! 저렇게 무거운 대검을 가지고 저리 빠르게 검술을 구사할 수 있다니...."
무극 대검에서 섬광이 번쩍일 때마다 예외 없이 화염 정령이 쓰러졌다.
"서둘러."
"저 녀석 아직 불꽃이 살아 있다."
화염 정령은 심장에 있는 정수를 파괴하지 않는 한 다시 살아나곤 했는데 간혹 그럴 기미가 보이면 용병들이 벌 떼처럼 달려들어 창칼을 휘둘렀다.
"자! 계속 갑시다."
우리는 계속해서 전진했다.
어느 정도 이동했다 싶으면 어김없이 몬스터가 나와 덤볐지만 내가 선두를 맡은 덕에 큰 피해 없이 내부 깊숙이 들어갈 수 있었다.
-[띠링, 소량의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띠링, 화염의 정수 아이템을 얻었습니다.]
-[띠링, 소량의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
-[....]
-[그린 트롤의 피를 얻었습니다.]
-[아이언 트롤의 발톱을 얻었습니다.]
-[띠링, 소량의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그렇게 얼마를 전진했을까?
전면을 주시하던 조안의 입에서 당혹성이 터져 나왔다.
"저, 저게 뭐지?"
"뭐가?"
"저기...."
조안의 말이 채 끝나지 못했다.
황금으로 조각된 석상이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몸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고, 골렘?"
조안의 당황해하는 넋두리가 끝나기 무섭게 장장 5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골렘이 위용을 드러냈다.
"너...희...는... 누...구...냐?"
헛!!
생김새부터 범상치 않았지만 말하는 골렘이라니!
이건 단순한 골렘이 아닌 드래곤의 레어를 지키는 가디언으로 보였다.
"우리는 적이 아닙니다. 안데라스 산맥의 주인이신 아르제니아 님을 만나기 위해 프란시스코 공국에서 왔습니다."
케일락 후작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인지 재빨리 앞으로 나와 큰 소리로 외쳤다.
"이...곳...은... 주...인...님...의... 안...식...처.... 허...락...받...지... 않...은... 자...는... 들...어...올... 수... 없...다."
"아니요. 우린 적이 아닙니다. 아르제니아 님을 만나기 위해 왔습니다."
"이...곳...은... 주...인...님...의... 안...식...처.... 허...락...받...지... 않...은... 자...는... 들...어...올... 수... 없...다."
후작이 품에서 범상치 않게 생긴 목걸이를 꺼내 보였다.
"여기! 아르제니아 님이 주신 맹약의 징표가 있습니다."
"이...곳...은... 주...인...님...의... 안...식...처.... 허...락...받...지... 않...은... 자...는... 들...어...올... 수... 없...다."
"아니요. 저희는 그러니까...."
"이...곳...은... 주...인...님...의... 안...식...처.... 허...락...받...지... 않...은... 자...는... 들...어...올... 수... 없...다."
저놈의 돌덩이 새끼는 사람 말을 들을 생각이 없는 건가?
아까부터 앵무새처럼 같은 대답만 반복하고 있었다.
제61화
61화 골드 드래곤 아르제니아(2)
"여기! 아르제니아 님이 주신 맹약의 징표가 있습니다."
"이...곳...은... 주...인...님...의... 안...식...처.... 허...락...받...지... 않...은... 자...는... 들...어...올... 수... 없...다."
"아니. 그러니까 저희는...."
"이...곳...은... 주...인...님...의... 안...식...처.... 허...락...받...지... 않...은... 자...는... 들...어...올... 수... 없...다."
"...."
아무래도 안 되겠다.
말로 해선 끝이 날 것 같지 않았다.
"후작님."
케일락 후작에게 내가 나서도 되겠냐는 눈빛을 보내자 잠시 고민하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봐. 골렘 친구. 한 가지 질문이 있어. 허락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해?"
"날... 이...기...면... 된...다."
"간단해서 좋네. 그럼 시간 끌 것 없이 나와 한판 뜨는 게 어때?"
"음... 좋...다."
녀석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무극 대검이 뽑혔다.
상대는 레어를 지키는 가디언, 나는 처음부터 강공(强攻)으로 나갈 생각이었다.
태극검 흡자결을 펼치자 저 거대한 골렘이 강기의 회오리 속에 말려 들어갔다.
"부스터 업, 파워 블래스트!"
골렘의 관절이 용틀임 치듯 두둑거리며 주먹으로 검강을 후려쳤다.
-쾅!
강기를 주먹으로 막아 내다니....
아니다. 안력을 집중했더니 골렘의 주먹에 황금빛 안개 같은 것이 뻗어 나오고 있었다.
'권강인가?'
내심 적잖이 놀랐으나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어느새 녀석의 권강이 근처까지 다가왔기 때문이다.
"부스터 업, 스피드 블래스트!"
"태극권 탄(彈), 하나의 탄환처럼 날아가!"
콰콰쾅!
강기와 강기의 격돌.
골렘이 만들어 낸 권강과 태극검이 만들어 낸 검강이 부딪치며 엄청난 굉음이 울려 퍼졌다.
'과연 가디언이란 건가!'
녀석은 붉은 눈빛을 이글거리며 또다시 공격을 준비했고 나 역시 무극 대검을 다시 한번 고쳐 잡았다.
끊어질 듯, 이어질 듯, 무극 대검을 사용해 태극을 그리기 시작한다.
-우우웅!
허공에 태극이 나타날 때마다 부드러운 바람과 함께 무시할 수 없는 파동이 주위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위...험...하...다.... 좋...지... 않...은... 기...운...이... 느...껴...진...다."
본능적으로 위험하다는 것을 느꼈는가?
녀석은 뒤로 물러나는 동시에 연달아 권강을 펼쳤다.
-콰콰콰콰쾅!
내가 펼친 것은 태극검의 파(破)자결. 그것도 10성의 공력이다.
이전보다 더욱 크고 위력적인 강기가 녀석을 덮쳤다.
콰콰콰콰콰콰쾅!
폭음과 함께 녀석의 권강을 뚫자 눈동자가 부릅떠졌다.
그 순간 녀석은 자욱한 먼지를 일으키며 뒤로 튕겨 나갔다.
하지만 난 알 수 있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얕았다?'
그 순간 먼지 사이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지며 수십 개의 얼음덩어리가 쏟아져 나왔다.
이런 젠장, 마법이다.
골렘이 마법까지 사용하다니!
나는 급히 몸을 틀면서 순간 이동 스킬을 펼쳐 녀석의 코앞에 나타났다.
상대의 허를 찌르는 수법, 후방으로 물러나리란 예상 대신 근접전을 택한 것이다.
"태극권 흡(吸), 부드러운 바람은 회오리가 되어."
"태극권 탄(彈), 하나의 탄환처럼 날아가."
"태극권 파(破), 내 앞을 가로막은 모든 것을 무너뜨린다."
녀석의 얼굴을 타격하고 내부를 진탕시키고 하체를 쓸어 갔다.
한 초식 한 초식이 근접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공격이라 매우 위험했으나 이 같은 공격이 가능했던 이유는 무당의 제운종 덕이었다.
만약 제운종이 아니었다면 나 역시 손해를 입었을 것이다.
-콰콰콰쾅!
태극권의 권강이 벼락처럼 쏟아지자 불꽃이 튕기며 크게 휘청거렸다.
녀석의 입에서 고통에 찬 신음성이 흘러나오는 순간 난 승기를 잡았음을 확신했다.
"이제 끝내자."
우우우우웅!
진기를 끌어 올리며 마지막 일격을 가할 찰나,
누군가의 음성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거기까지!
"...!!"
언제부터 저 자리에 있었던 것일까?
황금색 머리카락을 지닌 장년의 남성과 그를 호위하듯 시립해 있는 적색, 보라색 골렘이 보였다. 문득 저자의 눈이 내 전신(全身)을 스캔하듯 훑어보고 있다는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꽤 요란하게 싸웠군. 골드를 이렇게까지 몰아세우다니, 넌 누구지?"
"...!!"
꿀꺽!
그와 눈을 마주한 순간 나도 모르게 삼켰다.
머릿속이 하얗다.
마스터에 오른 후, 처음으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다음 순간 태허무극심법이 폭발적으로 반응하며 내 안의 모든 세포를 깨우는 느낌을 받았다.
"호오, 재밌는 기운을 가지고 있군."
남자의 눈에 호기심이란 감정이 나타나는 순간,
케일락 후작이 급하게 튀어나와 남자를 향해 허리 숙였다.
"미천한 인간이 조율자이자 안데라스 산맥의 주인을 뵈옵니다. 전 프란시스코 공국의 케일락 후작이라고 합니다."
"프란시스코 공국?"
"그렇습니다. 위대한 존재시여."
그 순간 사람들을 짓누르고 있던 무형의 압력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발타쟈의 후예로군."
"그렇사옵니다. 위대한 존재시여."
"발타쟈는 어떻게 됐지?"
"공국을 건설하신 공왕께서는 300년 전 대지의 품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렇군. 벌써 시간이 그렇게 흘렀어."
드래곤은 뭔가 무심한 듯 아니면 초월한 것 같은 표정으로 허공을 잠시 바라보았다.
"무슨 일로 날 찾았지?"
"이분은 프란시스코 공국의 적법한 후계자이며 발타쟈 전하의 피를 이은 프리실라 공녀님과 타일론 공자님입니다."
"발타쟈의 후예가 이곳에 왔다는 것은 그에게 약속한 맹약을 이행해 달라는 얘긴가?"
"그, 그렇습니다. 위대한 존재시여."
"운이 좋군. 때를 잘 맞춰 왔어."
그 후 케일락 후작은 아르코 제국 어쩌고저쩌고 하더니 현재 프란시스코 공국이 처한 상황을 실감 나게 설명했다.
"...그렇게 된 것입니다."
케일락 후작의 얘기가 끝나자 드래곤의 입에서 딱딱한 음성이 튀어나왔다.
"간단한 일이군. 아크로 제국의 통신 좌표를 알려 주게."
"제국의 통신 좌표는 X187, Y256, Z94입니다."
우우웅!
눈 깜짝할 사이에 통신용 마법진이 만들어졌다.
목표는 아르코 제국의 황성이다.
"아, 아! 들리냐? 들리면 통신구를 열어라."
-누, 누구신가요?
곧이어 수정 구슬을 통해 상대방의 음성이 들려왔는데 제국의 통신 담당 마법사로 추정되는 남자의 음성에서 매우 당황한 기색이 느껴졌다.
통신용 마법진의 경우 접속 암호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좌표만 가지곤 단번에 연결될 수 없었는데 그걸 너무 쉽게 해결해 버린 것이다. 예를 들면 국가의 통신망을 해킹한 것과 비슷했다.
"나는 골드 드래곤 아르제니아, 안데라스 산맥의 지배자이자 맹약에 의해 프란시스코 공국을 수호하는 존재다."
-...!
순간 정적이 흘렀다.
위대한 존재의 등장에 제국의 마법사가 할 말을 잃은 것이다.
"아르코 제국의 황제를 불러와라. 난 꽤 친절하니까, 정확히 10분을 주지."
-시, 십 분 말입니까?
"어. 1분 늦을 때마다 제국 수도를 향해 메테오 한 방씩 날려 줄게. 지금부터 시작."
-케켁! 자,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후다닥 하는 소리와 함께 동료를 향해 소리치는 마법사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로부터 정확히 9분 40초 후,
아르코 제국의 황제와 대신들이 수정구를 통해 모습을 드러냈다.
대체적으로 의관이 정제된 모습이었으나 몇몇은 급하게 연락을 받고 뛰어온 티가 났다.
-안데라스 산맥의 지배자이자 세상을 조율하는 위대한 존재께 인사를 드립니다. 아르코 제국의 19대 황제 율리시스 델 라 드미트리입니다.
"반갑군. 난 안데라스 산맥에 터를 잡고 있는 골드 일족의 아르제니아다."
아르제니아의 시선이 케일락 후작에게 향하자 후작이 수정구 앞으로 다가가 공손히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율리시스 황제 폐하."
-그대는 프란시스코 공국의 케...일락 후작이로군.
"그렇사옵니다. 폐하."
-자...네도 안녕한가?
"예. 페하. 안녕하고말고요. 신경 써 주신 덕분에 아르제니아 님도 만났지 뭡니까."
간덩이가 부은 것일까? 아니면 믿는 구석이 생긴 탓일까!
각설하고 서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사이답게 케일락 후작이 제국의 황제를 향해 일격을 날렸다.
-그...렇군. 늦었지만 축하하네.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모두 영명하신 율리시스 폐하 덕입니다."
케일락 후작은 아르코 제국 율리시스 황제에게 골드 드래곤 아르제니아가 그들에게 약속한 맹약을 전했다.
제국의 황제는 짐짓 태연한 표정을 보였지만 후작의 말이 이어질수록 딱딱하게 표정이 굳어 갔다.
-100년인가?
100년이라는 말에 율리시스 황제가 확인하듯 재차 물었다.
"그렇습니다. 율리시스 황제 폐하."
황제가 보위에 오르면 평균 30년을 재위한다.
10년 이하의 짧은 기간도 있지만 가끔 50년 이상 재위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30년을 얘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100년의 시간이라고 한다.
이는 곧 황제가 세 번 바뀔 때쯤에야 제국에서 공국을 도모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알...겠네.
입술이 꾹 닫힌 얼굴, 떨리듯 내뱉은 침울한 음성.
분위기를 보니 이번 일에 관련된 이들의 입에서 머지않아 곡소리가 터져 나올 것이 분명했다.
"그럼 이만 끊겠습니다."
아르코 제국과의 마법 통신이 끝나자 드래곤이 확인하듯 후작과 그의 일행을 향해 말했다.
"발타쟈의 후예는 들어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국가의 생성과 소멸은 자연의 이치라 할 수 있다. 허나 드래곤의 약속 또한 신성한 것. 프란시스코 공국의 프리실라, 타일론 남매는 공국의 적법한 후계자이며 동시에 지금 이 시간 이후 100년 동안 골드 드래곤 아르제니아에 의해 지켜질 것이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위대한 존재시여."
케일락 후작은 홀가분한 표정으로 골드 드래곤 아르제니아의 둥지를 나섰다. 아르코 제국에게 프란시스코 공국 뒤에 드래곤이 있다는 것을 알렸으니 이제는 공국으로 돌아가 내실을 다져야 했기 때문이다.
"청운 경, 프란시스코 공국은 결코 당신의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이오. 훗날 기회가 되면 꼭 우리를 찾아 주시오."
"물론이죠. 저도 꽤 정이 들었거든요."
이별의 시간이 다가오자 프리실라, 타일론 남매는 침울한 안색이었다.
나는 남매에게 다가가 조용히 속삭였다.
"프리실라 공주님, 타일론 왕자님. 이별은 끝이 아닙니다. 새로운 시작이죠."
"...?!"
"...!!"
갑작스러운 존대에 놀랐는가?
날 바라보는 프리실라, 타일론의 눈빛이 달라졌다.
"부디 백성을 사랑하고 아껴 주는 멋진 왕이 되십시오."
비록 나이가 어렸지만 그들 역시 왕관의 무게를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이내 단단해진 눈빛을 보이며 내게 고개를 숙였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청운 경."
"몸조심하세요. 그리고 꼭 저희를 보러 오셔야 해요. 청운 경. 아니 청운 삼촌."
형언할 수 없는 신색을 끝으로 두 사람은 몸을 돌렸다.
나는 그들이 멀어지는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로부터 얼마 후,
골드 드래곤 아르제니아가 우리를 향해 묘한 눈빛을 보였다.
"거기 인간들. 날 따라오도록."
우리는 아르제니아를 따라 커다란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와...."
"...!!"
"대박!"
그의 방은 매우 거대하면서도 정교한 예술 작품을 보듯 아름다웠는데.
"어때, 예쁘지? 드워프 놈들을 닦달해서 만들었다고. 후후후!"
제62화
62화 어쩌다 보니 드래곤의 제자가 되었다
"...그럼 스타게이트를 통해 아틀란티스 대륙으로 넘어왔다는 건가?"
골드 일족의 드래곤 아르제니아가 묘한 반응을 보였다.
"예. 그렇습니다."
"던전, 균열 그리고 스타게이트라."
아르제니아의 눈빛에 매서운 냉기가 흘렀다.
"빌어먹을 놈들이 차원 전쟁을 시작했군."
"차원 전쟁이요? 그게 무슨 말인지요?"
"간단히 말해 너희 세계를 차지하기 위해 다른 차원에서 침공했다는 말이야."
"몬스터가 지구를 차지하기 위해 침공했다는 건가요?"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몬스터는 하수인에 불과해."
"하수인이라면?"
"그래. 너희들도 이미 알고 있잖아. 몬스터들이 본능에 충실하다는 것을 말이야."
아르제니아는 감정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표정으로 말했다.
"너희들이 싸워야 할 주체는 저급한 몬스터 따위가 아니야. 인간을 유린하고 사육하고 때로는 그 존재 자체를 말살시키는 종족이지. 놈들은 인간의 피와 심장을 먹고 그 영혼을 수집해. 희로애락(喜怒哀樂), 오욕칠정(五慾七情)과 같은 다양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야말로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먹이니까 말이야."
"그, 그들이 누군가요?"
"마족."
"마족?!"
"오호라! 그래. 너희에겐 마족이라는 이름보다 악마라는 이름이 친숙하겠지."
"마, 말도 안 돼."
차원 전쟁의 주체가 악마라는 말에 소은정이 입을 딱 벌렸다.
아니, 나를 포함해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문득 내 머릿속에 고대 부서진 석판이 떠올랐다.
'서, 설마?'
순간 숨이 콱 멎는 것을 느꼈다.
"아르제니아 님, 저희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어떻게 하긴? 죽기 싫으면 인류가 힘을 모아 싸워야지."
골드 드래곤 아르제니아가 설명하듯 말했다.
"스타게이트의 존재와 각성은 지구 차원의 신이 너희 인간들에게 준비할 시간을 준 거야. 마족 입장에서 보면 일종의 페널티를 받은 거지.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두 차원의 결계가 약해져 결국 마족이 지구에 강림하고 말 거야."
"늦지 않았을까요?"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적기라는 말이 있지. 그래도 희망적인 얘기를 한 가지 해 주자면 아틀란티스 대륙에 마족이 넘어오기까지 무려 100년이란 시간이 걸렸어. 지구에 게이트가 생성된 지 고작 30~40년밖에 지나지 않았다고 했으니 아직 준비할 시간이 있을 거야. 어쩌면 마족이 강림하기까지 수십 년이 걸릴지 모르지. 하지만 그렇다고 안심 따윈 하지 마. 절대적인 법칙은 없으니까. 세상엔 변수라는 것이 존재하잖아? 그러니 방심하지 말고 부지런히 준비해야 할 거야."
조안이 조심스레 물어봤다.
"혹시 위대한 존재께선 지구를 도와주실 수 있나요?"
"마족을 상대한다면 당연히 도와줄 수 있지. 하지만 애석하게도 내가 도울 수 있는 곳은 아틀란티스 대륙뿐이야. 난 지구를 도와줄 수 없어."
"왜죠?"
"나는 이 세계의 관조자이자 조율자야. 다른 차원의 일은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았어."
"그, 그런!"
"음!!"
믿기 힘들었지만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가 바로 드래곤이기 때문이다.
"얘들아."
조안의 눈에서는 강렬한 안광이 번뜩였다.
"미안한데 난 이번 여행이 여기까지인 것 같아. 레벨 업도 했고 의뢰 역시 완수했으니까. 너희는 어떻게 할래?"
"지구로 가야지."
"동감이야."
"나도 지구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아. 청운 넌 어때?"
"난 좀 더 있어야 할 것 같아. 해야 할 일이 있거든."
"그렇구나."
아쉬워하는 눈빛을 뒤로하고 우리는 다음을 기약했다.
"청운, 꼭 연락해."
"알았어."
"다음에도 함께 여행하자."
"너희들이라면 언제라도 콜이지."
"먼저 갈게."
유정욱, 김현태, 소은정, 조안이 휴대폰 번호가 적힌 종이를 건네주었고 한남동 용병대는 자연스레 해산되었다.
* * *
골드 드래곤 아르제니아의 레어에서 한 청년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머리카락에서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남자는 근처 바위에 아무렇게나 털썩 주저앉았다.
눈치챘겠지만 이 남자의 정체는 바로 나다.
"제게 가장 부족한 게 뭘까요? 어떻게 하면 지금보다 강해질 수 있을까요?"
골드 드래곤의 대답은 간단하고 명확했다.
"경험."
"경...험?"
"그래. 실전과 같은 경험. 생사가 달린 전투라 할까."
"!!!"
설명을 마친 드래곤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어때, 네가 원한다면 도와줄 수 있는데 말이야, 라는 눈빛으로 말이다.
'젠장맞을!! 벌써 한 달이 훌쩍 지났네. 그래도 남자가 자존심이 있지 이대로 포기할 수 없어. 스승님께 한 방 먹여 줘야지.'
한 달이 지난 시간, 어쩌다 보니 난 드래곤의 제자가 되어 있었다.
문득 고개를 들었더니 하늘이 참 맑다.
마치 도화지에 그려 놓은 풍경처럼 절로 미소 짓게 만들 만큼 아름다운 하늘이었다.
-[제자야. 쉬었으면 들어와라. 한판 더 붙어야지.]
이때 뇌리를 울리는 스승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난 투덜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스승님. 갑니다. 가요."
스승님은 5,000년 이상을 살아온 에인션트 드래곤.
난 내가 알고 있고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스승님을 상대했다.
-퍼퍼퍽, 퍼퍽!
경쾌한 타격 소리와 함께 마치 모든 공격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스승님의 몸이 충격을 받은 듯 들썩거렸다. 하지만 그것은 허상에 불과했다.
어느샌가 스승님의 잔상이 허물어지며 내 뒤에서 나타나 발목을 걷어찼기 때문이다.
"엌!"
호신강기 덕에 뼈가 부러지지 않았지만 균형을 잃었고 스승님은 그때를 놓치지 않았다.
빠박!!
나는 대갈빡이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뒤로 벌렁 자빠졌다
어느새 내 목 위로 스승님의 손이 다가와 있었다.
"체크메이트!"
젠장! 이번에도 나의 패배다.
"난 138전 138승. 넌 138전 138패. 어때, 계속할까?"
"네. 부...탁드립니다."
나는 이를 지그시 악문 상태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에는 다를 겁니다."
"후후, 과연 그럴까?"
"태극권 흡(吸), 부드러운 바람은 회오리가 되어."
"처음엔 꽤 재밌었지만 이젠 좀 지겹다. 백팔연환무!"
백팔연환무라고 했나?
대략 800년 전쯤 빌어먹을 스승님께서 동방의 무사와 유희를 즐기며 만든 실전권법이라고 한다. 백팔연환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 권법은 108개의 초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대성하게 되면 초식의 형태가 없어진다고 한다.
각설하고 스승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온몸(머리, 어깨, 팔, 손, 다리)이 하나의 흉기가 되어 날아왔다.
-파파파팍.
"태극검 방(防), 견고한 태극은 적의 공격을 막아 내고."
"태극검 벽(壁), 단단한 태극은 벽이 되어 지키리."
방(防)자결에 이어 벽(壁)자결을 연이어 펼쳤지만 전략폭격기에서 포탄이 떨어지듯, 무차별적인 연환공격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갔다.
"이, 이런...."
빠박!!
대갈빡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여지없이 뒤로 날아가고 말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시간이 지나면 점차 나아질 거다. 흠! 휴식을 취하는 게 좋겠군. 적당한 휴식 역시 훈련의 일환이니까."
의식이 저편으로 넘어가는 찰나 스승님의 환청 같은 음성이 들려왔다.
"겨우 138번 만에 내 양손을 쓰게 만들다니, 놀랍군."
몇 시간 후,
나는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한 상태로 잠에서 깨어났다.
모두 스승님의 마법 덕이다.
"몸은 괜찮나?"
"예. 덕분에요. 감사합니다."
드래곤 할배, 싸울 땐 인정사정 봐주지 않으면서 알고 보면 은근 츤데레다.
"제자야, 오늘은 컨디션이 어떠냐?"
"아주 좋습니다. 스승님."
"고뤠?"
"네. 이번엔 분명 제가 이길 겁니다."
"크하하! 성격 급한 레드 드래곤이 골방에 틀어 앉아 바느질하는 소리하고 있구나."
"쳇! 두고 보십시오."
"아무렴~."
스승님은 이 세계의 관조자이자 조율자다.
무려 석 달 동안 가까운 시간을 동고동락하면서 나는 어느새 스승님에게 마음의 문을 열게 되었고 내가 겪은 일에 대해 빠짐없이 말하게 되었다.
수천 년의 시간 동안 귀족, 평민, 용병, 도적, 기사, 상인, 마법사 등등 다양한 모습으로 유희를 즐기며 다양한 인간 군상의 모습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편했다.
"무림이란 곳으로 이동하기까지 얼마나 남았다고?"
"정확히 보름 남았습니다. 스승님."
"그렇구나! 그럼 보름 동안 마지막 스퍼트를 올려 볼까?"
"마, 마지막 스퍼트요?"
"그래. 명색이 내 제잔데 어디 가서 맞고 다니면 되겠니?"
"...."
스승님의 제자가 된 후,
소위 말해 자고 먹고 싸는 시간을 제외하곤 늘 생과 사를 오가는 대련을 펼쳤다.
하지만 혹독한 수련 덕에 얻는 것이 많았다.
-[띠링, 태극권의 숙련도가 큰 폭으로 상승했습니다.]
-[띠링, 태극검의 숙련도가 큰 폭으로 상승했습니다.]
-[띠링, 태극권/태극검의 등급이 오릅니다.]
-[띠링, 살이 찢기고 뼈가 부서지는 대련을 통해 패시브 스킬 강골을 얻었습니다]
-[띠링, 생사의 갈림길에서 깊은 깨달음을 얻습니다.]
실전과 같은 혈투를 벌였으니 이렇게 달달한 과실을 얻은 것이다.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그동안 몇 번이나 삼도천을 건널 뻔했다.
만약 스승님의 무소불위한 마법이 아니었다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 후,
그날은 여느 날과 마찬가지였다.
내가 의식하지 않은 순간 깨달음이 찾아왔다.
마치 개와 늑대의 시간처럼 말이다.
1단계 인(人)의 단계 : 인간이란
2단계 지(地)의 단계 : 땅을 밟고 서서
3단계 천(天)의 단계 : 하늘을 바라보고
4단계 합(合)의 단계 : 화경에 이르면
5단계 향(香)의 단계 : 강기가 모든 것을 소멸하고
6단계 광(光)의 단계 : 상단전이 열리면
7단계 성(成)의 단계 : 현묘한 기운이 일어나니
8단계 극(極)의 단계 : 인세에 적수를 찾기 어려운 현묘한 경지는
9단계 태허(太虛)의 단계 : 생과 사를 주관하고
10단계 무극(無極)의 단계 : 우주의 근원인 태극으로 돌아간다.
태허무극심법이 한 단계 오르자 알게 되었다.
스승님의 오러 블레이드와 내 오러 블레이드의 차이를 말이다.
"그...런 것이었나?!"
그동안의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반격은커녕 피하기에 급급했던 첫째 날.
십 초 안에 패했지만 싸움닭처럼 달려들던 첫째 주.
오십 초를 버티는 데 성공했지만 피똥을 싼 한 달째 날.
백 초를 넘겼다는 기쁨도 잠시 삼도천을 건너기 직전 스승님의 회복 마법으로 되살아났던 80일째 날. 하지만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호오, 성취가 있었구나."
"모두 스승님 덕분입니다."
나는 이날 처음으로 스승님에게 밀리지 않고 대등한 위력을 선보였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오백 초가 넘어도 승부가 나지 않자 스승님이 본인의 공격 패턴을 180도 바꿔 버렸다.
"매직 애로우, 오러."
"헛."
화살은 화살인데, 오러 블레이드를 품은 화살이다.
나는 전력을 다해 마법 화살을 피했지만 화살의 주인은 집요할 정도로 나를 몰아붙였고 결국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치사해요."
"뭐가 치사해?"
"마법이요."
"마법이 어때서? 마족 애들도 써."
"그, 그래도...."
"잡소리 그만하고 막아 봐."
"네."
어휴!
100일 만에 겨우 대등한 승부를 펼치기 시작했는데 마법이라니!
하지만 스승님의 지적이 옳았다.
"매직 미사일, 오러!"
젠장!!
역시 마법의 조종(祖宗)이다.
단지 시동어를 말하는 것에 불과한데 강력한 마법이 펼쳐졌다.
나는 재빨리 제운종을 펼쳐 신형을 이동시킨 다음 태극검을 휘둘렀다.
콰콰콰쾅!
엄청난 열기를 동반한 검강이 마법과 조우하며 폭발했다.
"좋구나. 그럼 이것도 한번 막아 보아라. 미티어 스윔."
순식간에 사위가 어두워졌다.
구름 한 점 없던 쾌청한 하늘이 검게 물들더니 뭔가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후두두둑!
그것의 정체는 바로 유성우였다.
뜨거운 화염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저기에 휘말린다면 '아차' 하는 사이에 통구이가 되어 버릴 것이다.
나는 급히 강기로 호신강기를 만드는 동시에 얼마 전 깨달은 태극검의 새로운 구결을 떠올렸다. 완벽하지 않지만 다른 방법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태극검 반강(半剛), 탄환은 곧 반월(半月)이 되어."
반(半)자결이 초현(初顯)되었다.
-콰콰콰콰콰쾅!
지축을 울리는 굉음과 함께 자욱한 연기가 피어났다.
스승님의 미티어 스윔이 십자로 양단되어 폭발했지만 그 여파로 인해 내 몸은 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이 뿌듯했다.
어쨌거나 스승님의 마법을 소멸시켰기 때문이다.
"호오! 그건 처음 보는 수법인데?"
"얼마 전에 깨달은 구결입니다. 맨날 질 순 없잖아요."
"크크크크~ 그 말도 맞네. 칭찬해 주마. 제자야. 아주 좋았어."
"쿄쿄쿄쿄! 명색이 위대한 드래곤의 제잔데, 이 정도는 해야죠."
"그래. 맞다. 내 제자라면 그 정도는 해야지. 캬캬캬캬~."
스승님은 칭찬과 동시에 왠지 모를 불길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자! 그럼 7서클을 통과했으니 이젠 8서클을 한번 막아 봐."
"네?"
"막아 보라고. 캬캬캬캬~."
"...?!!"
이런 망할 스승... 놈 같으니....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마나의 재배열 과정에서 전달되고 있는 미증유의 힘이 마법사가 아닌 나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파동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넋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우리 스승님께서는 절대 봐주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나는 태허무극심법의 기운을 최고조로 끌어 올리며 스승님을 향해 강기를 날렸다. 그러곤 다음 순간 한 다발의 붉은 피를 토하며 뒤로 내팽개쳐졌다.
젠장!
차가운 바닥과 조우한 나는 그렇게 정신을 잃었다.
순간 검은색 도포를 입은 분이 언뜻 나를 향해 손짓하는 것이 보였다.
제63화
63화 무림 귀환
조안은 세종시에 위치한 스타게이트로 귀환하자마자 누군가에게 서둘러 전화를 걸었다.
"할아버지. 저예요."
-오. 우리 손녀. 돌아왔구나. 이번 여행은....
"할아버지. 드릴 말씀이 있어요. 제가 바로 갈게요."
조안과 같이 귀환한 유정욱 역시 어디론가 연락을 넣더니 잠시 후 어디에선가 날아온 헬기에 탑승했다.
"근처에 내려 줄게. 타."
"고마워."
조안을 비롯해 김현태와 소은정은 유정욱이 부른 헬기에 탑승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대한민국에 긴급 속보가 전해졌다.
-[긴급 속보. 각성자의 스타게이트 입장 전면 허용]
-[조명환 대통령은 오늘 아침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며 미등록 각성자에 대한 자진 신고를 요청하였습니다. 또한 대한민국 국적의 만 19세 남성은 앞으로 병무청 신체검사를 받을 때 각성자 테스트를 의무적으로 받게 되었습니다. 병역 미필자가 정부 소속 헌터로 계약하게 되면 등급에 따라 9급, 7급, 5급 공무원으로 계약했던 현행 수준을 각각 8급, 6급, 4급으로 상향한다는 발표가 있었습니다. 조명환 대통령은 다가오는 게이트 시대에 국민의 안정을 위해 더욱 노력하겠다고 밝히며 현재 가장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각성자 스타게이트 입장을 전면적으로 허용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두 번째 뉴스 속보를 전해 드리겠습니다. 정부는 게이트 브레이크와 같은 긴급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민간인에게도 마석으로 만든 총기를 소유할 수 있게 한다는 방침을 전했습니다. 금일 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특별한 범죄 전적이나 정신병력이 없는 18세 이상의 성인에 한해 마탄을 이용한 총기를 허가제로 운용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배포한 보도 자료에 따르면 마족이나 악마와 같은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한민국을 이끌어 가고 있는 수뇌부는 그들에 대해 인지하기 시작했고 이와 같은 정보는 대한민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주요국에 전해졌다.
정보의 출처를 놓고 논란이 있었지만 세계 헌터 협회를 위시해 각국 정부는 마족에 관한 정보와 증거를 얻기 위해 서로 긴밀하게 공조하기로 약속했다.
* * *
오늘도 여느 날처럼 명상에 잠겨 있었는데 머릿속에서 잡힐 듯 말 듯 안개처럼 희미하던 구결들이 어느 순간 번쩍하고 선명하게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엄청난 충격을 받고 앞으로 피를 한 사발이나 토해 냈다.
테허무극심법 5단계가 단단해지는 느낌과 함께 6단계에 대한 실마리가 보였다.
"...깨달음을 얻은 모양이군."
이것을 옆에서 보고 있던 스승님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난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스승님에게 고개를 숙였다.
따지고 보면 스승님 덕이기 때문이다.
"궁금하네. 얼마나 얻었는지 말이야."
"자...신이 없네요. 실망시켜 드릴 자신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공동으로 걸어갔다.
그러곤 새롭게 깨달은 절기들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반(半), 절(絶), 통(通), 풍(風), 뇌(雷) 그리고 혼원(混元), 파황(破皇), 무극(無極)을 말이다.
"태극검 반강(半剛), 탄환은 곧 반월이 되어."
순간 무극에서 생성된 강기가 반월(半月) 형태가 되어 전방에 위치한 석벽을 향해 맹렬한 기세로 날아갔다.
"태극검 절강(絶剛), 내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이 끊어지다."
태극검의 반강과 절강은 각각 '탄'구결과 '파'구결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라 볼 수 있다.
"태극검 통강(通剛), 꿰뚫는 강기!"
이번에는 강기 속에 숨겨진 강기다.
이것은 상대의 방어막을 관통한 후, 한 번 더 공격하는 일종의 벙커 버스터다.
한 번을 막았다고 방심하는 순간, 상대는 두 번째 강기에 목숨을 잃을 것이다.
"태극검 풍강(風剛), 바람은 한없이 자유롭고!"
바람은 자유롭다.
그 형태가 일정치 않아 그 궤적을 가늠하기 어렵다.
풍강은 야구로 치면 일종의 너클볼과 같아 예상치 못한 순간 상대의 숨통을 조일 것이다.
"태극검 뇌강(雷剛)! 벼락은 요사한 기운을 태운다."
벼락은 강력하다.
그리고 사특한 기운을 없애는 데 탁월하다.
악마를 상대하는 데 있어서 최강의 무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콰콰콰콰콰콰쾅!!
천지를 울리는 폭음과 함께 지하 공동 한편이 초토화되었다.
"정말 대단하군! 지크프리트 이후, 이렇게 강력한 강기를 본 것은 처음이야."
"스승님, 지크프리트가 누군가요?"
"그랜드 마스터. 이천 년 전에 활동하던 인간."
"아!"
"혼원(混元), 파황(破皇) 그리고 무극(無極)이라고 했지. 그것도 보여 줘."
"그건 펼치지 못해요."
"왜?"
"그게 이론적으로만 구상했거든요. 보여 줄 순 없지만 대신 말로 설명이 가능해요."
"오! 오! 그럼 어서 말해 봐."
"네. 먼저 혼원(混元)은...."
위대한 스승님께서는 내 말을 경청한 후, 조용히 눈을 감았다.
마치 상상의 나래를 펼쳐 혼원, 파황, 무극의 위력을 가늠해 보는 것 같았다.
"혼원, 파황 그리고 무극이라...."
다음 순간,
스승님의 눈이 번쩍이며 감탄성을 토해 냈다
"검에 마음을 담고 자연을 담고 우주를 담았구나. 정말 대단해. 정말 대단해!!"
스승님의 극찬에 나는 서둘러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가고자 하는 목표지만 아직은 실체가 없는 이론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아직 이론에 불과합니다."
"아니! 그렇지 않아. 신은 인간을 나약하게 만들었지만 그 대신 무한한 가능성을 줬거든. 더욱이 네가 말했잖아. 무림이라는 곳엔 신이 된 인간이 있다고 말이야. 언젠가 기회가 오면 그 무림이라는 곳에 꼭 한번 가 보고 싶군."
"...!"
스승님의 표정을 보아하니 왠지 그냥 던져 보는 말이 아닌 듯싶다.
당장 내일부터라도 차원 이동에 대한 자료들을 구해 연구할 것만 같았다.
다음 날 오후.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에 대지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를 무렵 환한 빛과 함께 내 안에서 또 하나의 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그저 바라보면 음~
마음속에 있다는 걸.
위의 글은 XX파이 CM송에 나오는 가산데, 우리의 마음이 이러했다.
<상태 창>
이름 : 최선우(지구)
레벨 : 180
고유 특성 : 분신(Unique)
칭호 : 현자, 오크 살육자, 소드 마스터
생명력 : 7,430/7,430 마력 : 7,430/7,430
힘 : 323 체력 : 363 민첩 : 348
지혜 : 213 지능 : 271 행운 : 15
명성 : 5,050 악명 : 10 매력 : 30
보너스 스탯 : 285
+
<상태 창>
이름 : 주선우(무림)
레벨 : 180
고유 특성 : 분신(Unique)
칭호 : 현자, 오크 살육자, 소드 마스터
생명력 : 7,430/7,430 마력 : 7,430/7,430
힘 : 323 체력 : 363 민첩 : 348
지혜 : 213 지능 : 271 행운 : 15
명성 : 5,050 악명 : 10 매력 : 30
보너스 스탯 : 285
"무운을 빌게. 검마에게 꼭 이겨라."
"흐흐흐. 이 능력 갖고 지면 바보겠지."
"하긴~."
우리는 서로를 향해 주먹을 불끈 쥐며 승리를 빌었다.
"지구의 일은 네게 맡길게. 다음에 만날 때까지 무운을 빈다."
"그래. 너도 무운을 빈다!"
이번엔 스승님을 향해 고개를 숙여 작별을 고했다.
"스승님.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제자야. 잘 다녀오너라. 참! 술법에 관련된 책이 있으면 모조리 구해 오도록. 알았지?"
"넵."
다음 순간 주선우의 모습이 희미해지기 시작하면서 점차 사라졌다.
-[띠링, 주선우가 무림 세계로 귀환합니다.]
시스템의 음성을 끝으로 방금 전까지 주선우가 서 있던 자리에 원래부터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선우야."
"네. 스승님."
스승님이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넌 안 가니?"
"...."
* * *
눈앞이 번쩍이는 순간 야차와 같은 얼굴로 자신의 검을 하늘 높이 들고 있는 검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멈춰 있던 시계추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애송이 놈! 죽어라."
검마의 검신 전체가 화염처럼 활활 타오르며 여러 개의 강기 다발을 쏟아 냈다.
"태극검 벽(壁), 단단한 태극은 벽이 되어 지키리."
-콰콰쾅!
검마의 강기 세례가 밀물처럼 닥쳐왔지만 이전과 다르게 어떠한 피해도 주지 못했다. 오히려 벽(壁)자결에 의해 검마가 뒤로 물러났다.
"이게 대체...!!"
그가 순간 믿을 수 없다는 듯 연신 고개를 흔들었다.
[레벨이 깡패다]라는 격언이 있다.
이것은 헌터 세계에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말이다.
물론 레벨이 강함의 절대적 기준이 될 순 없지만 대개의 경우 맞는 말이다.
80레벨의 나와 180레벨의 나는 차원이 달랐다.
아니, 달라도 너~~~무 달랐다.
게다가 레벨뿐인가?
내 무공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태허무극심법 역시 5단계를 찍은 결과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검마의 경지가 눈에 훤히 들어왔다.
그가 화경에 이른 고수인 것이 확실하나 이제 막 출입문을 열고 한 걸음 들어온 그 위치였다. 아틀란티스 대륙의 표현을 빌리자면 걸음마를 뗀 최하급 마스터란 소리다.
"빌어먹을 놈 같으니! 받아라!"
검마가 몸을 뒤로 틀면서 검을 아래로 찍어 내리자 다시 한번 그의 검에서 검강이 뿜어져 나왔다.
나는 무극을 쥔 상태 그대로 검을 일(一)자로 가로 그었다.
-쿠콰콰콰콰콰!
강기와 강기의 충돌에 무시무시한 기운이 터져 나왔다.
허나 승부의 여신은 나를 향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무엇보다 강기의 질이 달랐기 때문이다.
덕분에 새롭게 깨달은 구결을 차치하고 기존의 탄(彈), 흡(吸), 방(防), 벽(壁), 파(破)자결에 강기를 섞은 것만으로 그를 완벽히 압도했다.
"으아악!!"
안다. 나도 안다.
그렇게 소리 지르지 않아도 알고 있다.
지금 당신이 느끼고 있을 당혹과 경악 그리고 분노를 말이다.
아마도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겠지. 흐흐흐!
"정말 놀랍군요. 검마 숙부가 밀리고 있어요."
"미, 믿을 수 없습니다."
백골귀마가 보다 못해 옆에서 참견을 했다.
"소교주, 설마 실력을 숨긴 걸까요?"
"아무래도 그런 것 같네요."
"...!!"
검마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얼굴은 무척이나 심각했다.
제64화
64화 지구 귀환
"이노...옴!!"
검마는 이성을 잃은 사람처럼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방금(?) 전까지 패색 짙던 내가 그를 압도하는 것을 인정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하긴 내가 그의 입장이었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어쨌거나 분명한 것은 전세가 역전되었다는 것이고 그로 인해 마교가 술렁이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저것 봐... 검마께서 밀리고 있어."
"어, 어떻게 저런 일이...."
무거운 침묵 속에서 힘겹게 튀어나온 말이다.
심각한 표정들의 사람들 가운데 한쪽에서 관전하던 북해빙궁의 반응 역시 감탄을 금치 못했다.
"무당의 무공이 이렇게 강력할 줄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중원 무학의 양대산맥이라더니 역시 명불허전이군요."
"강호에 신성(新星)이 나타났어요."
북해빙궁의 무사 소연이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대체 어떤 수련을 쌓으면 저 나이에 저 정도의 고수가 될 수 있는 거죠?"
"그야 알 도리가 없지."
몇 번의 공격이 이어졌다.
검마는 사력을 다해 방어했지만 크고 작은 자상이 점점 더해지며 좌중엔 묘한 긴장감과 기대가 어리기 시작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이제 단 하나.
검마의 명성에 어울리는 최후를 선사해 주는 것뿐이다.
고오오오...!!
의지가 일어나자 검에서 막강한 강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다.
검마 역시 뭔가를 예감했는지 두 손으로 검을 부여잡고 큰 소리로 외쳤다.
"십이마검 최후의 초식! 마왕강림(魔王降臨). 이 땅에 마왕이 강림한다."
"태극검, 통강(通剛), 꿰뚫는 강기!"
-쿠콰콰콰콰콰....
경천동지할 굉음과 함께 반경 십 장이 완전히 박살 났다.
시야를 가리던 자욱한 먼지가 사라지자 붉은 혈선이 사선 형태로 그려진 검마의 모습이 나타났다.
첫 번째 강기가 검마의 십이마검에 상쇄됐지만 강기 속에 숨겨진 두 번째 강기, 즉 꿰뚫는 강기를 막아 내지 못한 것이다.
"이... 이것... 역시... 무...당의 검인...가?"
"그렇소."
"또...다...시 무당의 검에 패.... 컥!"
애석하게도 검마는 말을 끝내지 못한 채 무너졌다.
-[띠링, 강대한 적을 쓰러뜨렸습니다.]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시스템의 음성과 함께 그의 몸뚱이를 잡고 있던 마지막 내력이 고갈되자 검마의 몸이 그대로 터져 버렸다.
그 광경을 고스란히 지켜본 마교 무리들이 경악했다.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몇몇 무인들이 나를 향해 당장에라도 달려들 기세다.
이때 마교 소교주 북리소소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모두 물러나라."
"소교주님."
"검마께서는 정당한 비무에서 패한 것이다."
"하...지만."
"그만! 마교의 약속은 가볍지 않다."
"...!!"
그녀의 말에 폭발할 것 같던 마교도들의 기세가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를 바라보고 있는 저들의 눈빛에는 사나운 불길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겠다면 계속 상대해 주지. 누가 나서겠는가?"
"...!!"
강기가 난무하는 접전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여유가 넘치는 모습에 소교주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그녀는 내색치 않았지만 꽤나 놀란 것 같았다.
"감히 우리를 도발하는 것이오?"
"도발이 아니라, 승부에 불복하겠다면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는 거요."
"이이익!"
마교 수뇌부가 노기를 참지 못해 저마다 외쳤다.
"천황 흑풍대를 무시하지 마시오."
"전체적인 병력은 우리가 여전히...."
"흥! 우리를 무시하다니, 기어코 피를 봐야겠구나."
특히 백골귀마는 손에 피가 맺힐 정도로 강하게 주먹을 쥐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북리소소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세 분 모두 물러나세요."
"소교주!"
"우리가 졌습니다."
"하지만...."
"그만! 그만하세요."
"...."
그녀의 싸늘한 눈빛에 결국 수뇌부가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청운 도장이라 하셨죠? 참으로 대단하신 분이군요. 제가 한 수 배웠습니다."
그녀는 나를 향해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비웃음이 아닌 진심이 담긴 어조라 나 역시 간단히 포권하며 답했다.
"나 역시 마교의 힘을 보았소. 듣던 대로 명불허전이었소."
"약속한 대로 저희는 이만 물러가도록 하죠. 하지만 다음엔 다를 겁니다. 마교도는 명을 받아라. 교주님을 대신해 북리소소가 명하니 천황흑풍대는 기수를 돌려라. 우리는 무당을 떠난다."
"존명!"
그녀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마교도들이 퇴각을 시작했다.
* * *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는 말이 있다.
"이봐, 자네 소문 들었나?"
"무슨 소문?"
주루에서 거하게 걸치던 삼류무사 백경운이 절친 조한석에게 장안의 화제가 된 일을 말해 주고 있었다.
"이보게. 마교가 무당을 공격했는데, 무당이 이겼다는군."
"그게 정말이야?"
"그래. 마교가 조용히 물러갔대. 내가 말이야. 전에 말했잖아. 무림맹에 아주 친한 친구가 있다고 말이야. 자네만 알고 있게. 내가 그 친구에게 들었는데 백골귀마 오청양이...."
쑥덕쑥덕!
콩덕콩덕!
"경신술 대결에서 패한 소수마녀가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쳤대."
"이야! 정말 대단한데."
"친구야. 아직 놀라긴 일러."
"왜, 또 뭐가 남았는데?"
"자네 검마 알지?"
"검마?"
"그래. 화경에 이르렀다는 마교의 절대고수 검마! 그 검마가 청운 도장의 일검에 목이 날아갔데그려."
"뭐, 모, 목이?!"
삼류무사 조한석이 자신도 모르게 경악성을 질렀다.
"아우, 조용히 해. 이게 끝이 아니라고!"
"또 뭐가 있는데?"
"자네! 청운 도장의 나이가 몇인 줄 아나?"
"청 자 배분이면 적어도 오십은 됐겠지?"
"아니! 이제 고작 약관에 불과하다더군."
"약관? 그게 참말인가?"
"그래. 나도 아주 깜짝 놀랐다고."
"무당파에 엄청난 고수가 나왔구만."
"그르니까 말이야."
객잔과 주점 등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면 어디든 간에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검제? 검선이 아니고?"
"그래. 이 사람아. 검선이 아니고 검제라고, 태극검제! 그분이 그 무시무시한 검마를 단칼에 죽였대."
"헐! 대박! 그럼 검제라는 자도 화경의 고수란 말이지?"
"검마에게 이겼으니 당연히 화경의 고수지. 화경의 고수가 새롭게 강호에 등장한 거라고."
"검선에 이어 검제라니! 역시 무당이네. 역시 무당이야."
하루가 지나기 전,
무당파가 마교의 습격을 막아 냈다는 소문이 중원 전역으로 퍼졌다.
* * *
우우웅!
귀환석을 사용하자 순간적으로 사람 한 명이 통과할 만한 검은색 구멍이 생성되었는데 재빨리 그 안으로 들어가자 잠시 후, 지구로 돌아오게 되었다.
"여긴 월미도로군."
먼저 블랙마켓이 소유하고 있는 환전소에 들렀다.
이곳은 경매장을 겸하고 있었기에 헌터들이 애용하는 곳이었다.
"오늘 골드 시세가 어떻게 되죠?"
"네, 손님. 1골드에 15만 원입니다. 수수료는 20%고요."
"금값이 많이 올랐네요."
"요즘 수요가 많아서요."
"그렇군요."
아이템은 계약에 의거해 지나의 상점에 넘겨야 하지만 골드는 상관없었다.
나는 일단 아공간에서 10골드를 꺼냈다.
"10골드 환전해 주세요."
"네. 손님."
잠시 기다리는 동안 내 시선을 잡아끄는 것이 있다.
"총도 파나요?"
"네. 두 달 전부터 판매가 허용되었습니다. 헌터는 물론 이젠 민간인들도 구입할 수 있게 됐죠."
직원은 몬스터용으로 개량된 M16을 꺼내 보여 주었다.
"이건 경찰 특공대와 군부대에서 사용하는 총입니다. 마석을 이용해 만든 총알을 사용하기 때문에 이놈만 있으면 고블린과 같은 몬스터를 아예 박살 낼 수 있죠."
"오크도 상대할 수 있습니까?"
"음... 상대하지 못할 이유가 없지만 솔직히 말해 1:1이면 무리입니다. 헌터시니까 잘 아시잖아요? 오크의 그 두꺼운 근육 말입니다. M16을 사용한다면 최소 수십에서 수백 발은 맞혀야 숨통이 끊어질 겁니다. 만약 오크와 같은 몬스터를 상대하실 거면 베렛 M82를 추천하겠습니다. 저격용이지만 이놈이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죠."
직원은 수다쟁이였다.
내가 먼저 끊지 않으면 해가 저물 때까지 설명할 분위기였다.
"흠,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친절한 설명 감사드립니다."
"뭘요. 참! 저희 환전소는 경매장도 겸하고 있는데요. 혹시 아이템이 있으시면 저희에게...."
"아이템은 서울 쪽에 따로 거래하는 곳이 있어서요."
"아~ 그러시군요. 알겠습니다. 여기 수수료를 제외하고 120만 원입니다.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사냥엔 천 골드, 아니 만 골드 대박 나십시오. 손님."
"...네."
내가 10골드만 환전해서 그런 걸까?
문득 궁금해졌다.
저 직원은 내 아공간에 스승님이 용돈이라고 준 금괴 100톤과 드워프가 세공한 각종 보석들이 잔뜩 쌓여 있다는 사실을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말이다.
지구로 귀환하기 몇 시간 전,
스승님이 내게 깜짝 선물을 건넸다.
"그동안 수고했어. 자! 받아."
"이게 뭔가요?"
"선물."
"선물이요?"
"그래. 선물. 내 제자라면 품위가 있어야지. 어디서 그런 저급한 아공간을...."
"헤헤헤."
"용돈이랑 뭐 이것저것 넣었으니 필요할 때 꺼내 써."
"헤헤헤~ 용돈이면 얼마나?"
"조금 넣었어. 100...."
"에계! 겨우 100골드요?"
"100도 맞고 정체가 골드인 것도 맞는데 무게가 달라."
"무게요?"
"응. 100톤이거든."
"...!!"
헐! 금이 100톤이란다.
현재 시세로 따지면 15조에 달하는 천문학적 금액이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충성!"
"쉬어~."
"넵!"
스승님은 정말로 좋은 분이다.
엄청난 양의 골드 때문이 아니라... 솔직히 고백하면 돈의 영향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만큼의 가르침을 주셨다는 점이다.
생과 사를 넘나들었던 수천 번의 대련과 그 끝에 얻은 깨달음은 스승님이 아니었다면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내가 필히 해야 할 복수에 대해 조언도 해 주셨다.
"한번은 내가 왕국의 병졸이 되어 유희를 할 때였어. 훈련소에 입소한 첫날 조교가 내게 와서 이렇게 말했지."
조교 : 훈련소에서는 '다나까'로 대답합니다. 알았습니까?
나(드래곤) : 알았다.
조교 : 뭐? 다시 한번 말해 봐.
나(드래곤) : 알았다니까!
조교 : 하아! 그럴 땐 '다, 까'를 쓰면 안 된다. 알았나?
나(드래곤) : 정말 그래도 되나?
조교 : 이 새끼가 돌았나?
나(드래곤) : 왜 때리나 왜 때리나!
"조교 새끼는 계속해서 날 때렸고 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지.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하셨는데요?"
"후후후! 놈의 껍질을 홀랑 벗긴 후 소금을 뿌려 연병장에 던져 줬어. 그 후 본체로 현신해 왕성으로 날아가 브레스를 날려 줬지. 어설픈 건 나쁘거든. 할 거면 제대로 하는 게 맞잖아. 안 그래?"
"그, 그렇죠."
"대신에 난 연좌제는 싫더라. 복수가 복수를 낳고 그 복수가 대대손손 이어져 인생 자체가 불행해지는 걸 많이 봤거든. 그럴 거면 차라리 멸족을 하는 게 좋아. 그게 깔끔하지."
"...?"
이게 무슨 소리지?
복수는 싫고 하려면 제대로 하고 연좌제는 싫다면서 무고한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는 왕성을 소멸시킨 분이... 뭔가 상당히 이율배반적이다.
대화의 요점이 뭔지 모르겠다.
"표정이 왜 그래? 내가 틀린 말 했어?"
"아닙니다."
"그럼 여기가 안이지 밖이야?"
"켁!"
"케케케~ 농담이야. 재밌지? 내가 군 생활을 하면서 유일하게 얻은 것이 있다면 바로 이 농담이야. 칼빈이라는 선임이 가르쳐 준 건데 말이야."
"...."
만약 스승님에게 아재 개그를 가르쳐 준 칼빈이 내 눈앞에 있었다면 당장 잡아다가 그 주둥이에 주먹을 날렸을 것이다.
"암튼 너도 할 거면 멋지게 해봐. 어차피 네가 감당해야 할 일이니까."
"...네."
스승님의 말은 결국 X 꼴린 대로 하라는 얘기였다.
대신 헬 게이트가 열리기 전, 복수를 마무리해야 했다.
악마가 지구에 강림하면 복수고 나발이고 후순위로 밀릴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옛 생각에 잠긴 사이,
어느덧 나를 태운 택시가 동대문에 도착했다.
제65화
65화 복수를 위한 첫걸음(1)
딸랑.
종소리와 함께 상점으로 들어가자 동양인 얼굴에 서양인 몸매를 가진 지나가 한눈에 들어왔다.
"지나."
"어머! 청운~."
내 모습을 확인한 지나가 환한 미소로 달려와 반긴다.
"언제 돌아온 거야?"
"오늘."
"헐! 뭐야? 그럼 반년이나 머물렀단 거잖아. 첫 경험을 아주 제대로 했네."
"넌 언제 왔는데?"
"두 달 전에."
"그렇구나."
"암튼 무사 생환을 축하해. 근데 무슨 일 있었어?"
"뭐가?"
"말로 설명하기 애매한데, 뭔가 분위기가 달라진 것 같아서."
지나는 뭔가 미심쩍어하는 표정으로 내 전신을 스캔했다.
역시 눈썰미가 남다르다.
아마도 그녀가 타고난 본성일 것이다.
"설마~ 오랜만에 봐서 그런 것 아닌가?"
"그런...가?"
나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과 함께 어깨를 한 번 으쓱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재빨리 화제를 바꾸기 위해 아공간을 열었다.
-촤르르르르!!
엄청난 양의 물건이 쏟아지기 시작하자 역시나 나에 대한 관심이 안드로메다로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하나씩 하나씩 아이템을 살펴보았다.
나는 그녀가 아이템을 분류하고 감정하는 동안 스마트폰을 통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찾아보았다.
어디 보자.
성삼 전자 반도체값이 떨어졌고 어디 회사 주가가 폭등했고 세계 헌터 연합에서....
쯧쯧쯧! 유명 정치인의 성추행 사건과 5살짜리 의붓아들을 여행 가방에 넣어 죽인 계모 사건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호오!"
내 시선을 사로잡는 뉴스를 발견했다.
게이트 브레이크 탐지율이 획기적으로 높아졌다는 것과 미국 주도로 세계 헌터 연합 기구가 탄생했다는 소식이다.
그리고 가장 놀라운 사실은 바로 스타게이트에 대한 것이었다.
각국 정부에서 스타게이트의 존재를 공식으로 인정했으며 전면적으로 개방을 허용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스타게이트 전면 허용? 이게 뭐야?"
"아! 오늘 귀환했다고 했지. 나도 이번에 귀환하고 나서야 알았는데 각국에서 스타게이트의 존재를 공식으로 인정한 거야. 하긴 대도시 한복판에 스타게이트가 생성되었으니 그럴 수밖에."
"자세히 좀 말해 봐."
"이게 그러니까 몇 달 전에 일어난 일인데, 미국 대도시 한복판에 스타게이트가 생성됐지 뭐야. 장소도 그렇고 마침 출근 시간이라 정부에서 막을 새도 없이 기자들이 벌 떼처럼 달려들었지 뭐야. 그 결과 보시다시피 이렇게 세상에 공개되고 말았지."
"그런 일이 있었구나."
"덕분에 국가나 헌터 협회에서 인정한 헌터라면 누구나 스타게이트에 입장할 수 있게 됐어. 범죄자만 빼고 말이야. 암튼 덕분에 우리만 힘들어졌어."
"그...렇겠네."
"쳇! 그래도 죽을 정도는 아니니까 그렇게 걱정해 주지 않아도 돼. 다행히 정부에서 헛발질을 제대로 날려 줬거든."
"헛발질?"
"응. 스타게이트를 모든 헌터에게 허용하는 대신 세금을 엄청 매겼거든."
"몇 %인데?"
"50%."
"헐!"
"엄청 높지? 이건 칼만 안 들었지 완전 도둑놈들이라니까."
지나는 입에 침까지 튀겨 가며 정부의 세금 정책을 비판했다.
"이놈의 대한민국에서 태어나니 주민세, 피 땀 흘려 일했더니 갑근세, 힘들어서 한 대 물었더니 담배세, 퇴근하고 한잔했더니 주류세, 여기에 황당하게 붙은 교육세는 뭐야! 어디 이뿐이야? 아끼고 저축하면 재산세, 북한 놈들 땜에 내는 방위세, 월급 받고 살아 보려니 소득세, 장사하려고 차 사면 취득세, 차 사서 번호 다니 등록세, 껌 하나 사도 소비세,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어 집에만 있었더니 전기세, 수도세, 배 좀 아파 똥 좀 눴더니 환경세, 결국 죽어나는 건 우리들이지! 왓 더 X, 씨X새!"
"와우! 라임 죽이는데?"
나는 그녀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참에 가수 한번 해 보는 건 어때?"
"호호호! 그럴까?"
"진심이야. 도움이 필요하다면 적극 도와줄게."
"오케이,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쿄쿄쿄."
내 말에 기분이 좋아진 지나가 노트북 화면을 앞으로 내밀었다.
"이것저것 수수료까지 빼고 69억이야."
"생각보다 가격이 적네. 최소 100억은 남을 줄 알았는데."
"몇 달 전이라면 맞아. 근데 스타게이트 덕에 요즘 시장에 물건이 넘쳐 나거든. 오죽하면 꿈쩍하지 않던 포션 가격마저 하락하는 추세라고."
"그렇구나."
참고로 포션은 정말 비싸다.
특히 상급 이상의 포션은 아틀란티스 대륙에서조차 구하기 쉽지 않아 그야말로 부르는 게 값이었다.
"어떻게 할래?"
"계좌로 넣어 줘. 참! 금값이 많이 올랐다며?"
"응. 완전 올랐어. 왜, 환전하려고? 양이 얼마나 되는데?"
"좀 많은데, 가능할까?"
"아이고, 금이 없어서 문제지. 어서 꺼내 봐. 잘 쳐줄게."
다음 순간,
아공간에서 5kg짜리 금괴를 꺼내 하나씩 쌓기 시작하자 지나가 기쁨의 비명을 내질렀다.
"꺄악! 청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설마 왕궁이라도 턴 거야?"
"왕궁은 아니고 드래곤의 보고를 털었어."
"꺄하하하~."
내 대답에 그녀가 박장대소했다.
"드래곤의 보고라니! 너 안 본 사이에 농담이 꽤 늘었다. 인정!"
"...."
때론 진실을 얘기해도 이렇게 농담 취급을 받을 수 있다.
뭐,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기에 난 미소를 보이며 그녀에게 한 가지 부탁했다.
"혹시 주변에 실력 좋은 변호사가 있을까?"
"당연히 있지. 전관으로 한 명 소개시켜 줄까?"
"아니, 소송 쪽이 아니고 그냥 투자 회사 하나 만들어 보려고."
"투자 회사?"
"응."
각성자의 등장으로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뀌지 않은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세상을 움직이는 힘, 머니(Money)다.
누군가 무전유죄 유전무죄라 외쳤던 녀석은 여전히 우리네 세상을 움직이고 있었다.
"기왕이면 재벌과 반대 성향이면 좋겠어. 노동 변호사 출신이거나 아니면 인권 변호사도 괜찮고."
"그런 사람이라면...."
지나는 약간 궁리를 하더니 이내 적당한 사람이 떠올랐는지 입을 열었다.
"생각났어. 이 사람이 딱이야."
그녀는 내게 <차강민 변호사 010-5***-34**>이라 적힌 명함 한 장을 건넸다.
노동 전문 변호사 출신으로 꽤 실력 있는 변호사라고 했다.
"차강민?"
"응. 전화해 놓을 테니 찾아가 봐."
"오케이. 고마워."
나는 명함에 적힌 주소로 이동했다.
서울 양천구 신월동에 위치한 오래된 빌딩이다.
2층 내부로 들어서자 전형적인 변호사 사무실이 나를 맞이했다.
"무슨 일이시죠?"
정장 차림의 여성 직원이 물었다.
"친구 소개로 차강민 변호사님을 뵈러 왔는데요."
"예약하셨나요?"
"네. 오후 3시에 약속을 잡았다고 들었습니다."
"아! 그럼 혹시 동대문...."
"네. 그런 것 같네요."
곧이어 50대 초반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하세요. 청운입니다."
"아! 오셨습니까? 안 그래도 귀한 분이 오신다고 연락받았습니다. 변호사 차강민입니다."
우리는 가볍게 악수하며 서로를 향해 미소를 건넸다.
"실력이 매우 뛰어난 헌터라고 들었는데, 꽤 젊으시네요. 솔직히 놀랐습니다."
"지나가 과장되게 소개를 했나 보네요."
"하하하! 그런가요?"
"네."
우리는 여비서가 가지고 온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눴다.
"투자 회사를 설립하시겠다고 들었습니다만."
"네. 정확히 말하면 사모 펀드 회사입니다."
"사모 펀드요?"
"네. 본사는 미국 뉴욕에 설립하고 서울에 한국 지사를 설립할 계획입니다."
"그 말씀은 조세 피난처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말씀인가요?"
"네. 개인적으로 편법을 좋아하지 않아서요."
편법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답에 차강민 변호사의 눈빛에 흥미가 나타났다.
"생각보다 재밌는 분이신 것 같네요."
"양파 같은 사람입니다. 까면 깔수록 맛과 재미를 보장해 드리죠."
나는 일등석 비행기표를 그에게 건넸다.
"그 맛이 궁금하네요. 출발은 일주일 후, 목적지는 뉴욕입니다. 수임료는 업계 최고로 대우해 드리겠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차강민 변호사는 단도직입적인 일 처리에 놀란 표정이었지만 진심 흥미로운 표정이었다.
"하하하! 고객님이 원하시면 사막이라도 가야죠."
"좋습니다. 그리고 말입니다. 출발하기 전에 한 가지 해 주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아직 내가 전면에 나설 수 없었기에 차강민 변호사에게 우리 가족에 대한 일을 조용히 부탁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미스 서! 일주일 후에 장기 출장을 갈 것 같으니 스케줄 조정 부탁해."
"네. 변호사님."
* * *
서울 강남구 학동의 어느 거리.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끼었고 주위가 어둠에 휩싸였다.
시간은 벌써 밤 12시를 지나 새벽으로 접어드는 시점이었다.
"SH 길드, 저기 있군."
신축 건물로 보이는 10층짜리 건물 앞에 서서 고개를 들었다.
SH 길드는 대화 그룹이 소유하고 있는 길드 중에 하나로 길드원은 대략 120명이다.
인원만 보면 중형급 길드인데 내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SH 길드의 수장이 바로 안선환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게임을 시작해 볼까?"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암시장에서 구입한 스크롤을 꺼냈다.
이건 전격 마법이 결려 있는 마법 스크롤이다.
"여기서 터트리면 전자기펄스가 발생해 반경 10m 내에 있는 전자 기기가 작동 불능이 되지."
전격 마법에 걸려 있는 EMP 효과로 인해 핸드폰은 물론 건물 곳곳에 위치한 CCTV 역시 무용지물이 될 것이다.
사실 검강 덩어리를 날려 건물 자체를 무너뜨릴 수도 있었지만 그 씹어 먹을 놈을 그렇게 죽일 순 없었다.
그렇게 보내 버린다면 지난날 내가 겪은 고생이 얼마나 억울할까?
나는 녀석을 최대한 잔인하게 죽일 요량이었다.
복수는 그렇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후우."
차가운 밤공기가 왠지 상쾌하게 다가오는 순간,
난 마법 스크롤을 찢고 건물로 들어갔다.
"뭐야?"
"정전인가! 이거 왜 이래? 휴대폰도 먹통이야."
사람들이 당황하는 사이 엘리베이터 앞으로 다가가 주먹을 날렸다.
쾅, 콰앙!
두 대의 엘리베이터가 사이좋게 박살 났다.
이제 건물 위층에서 아래층으로 내려오려면 계단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무, 뭐야?"
"거기. 너. 누구야?"
SH 길드 소속으로 보이는 헌터 셋이 앞을 막으며 외쳤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그저 '씨익' 웃어 주었다.
그러곤 주먹이 작렬!
콰앙!!
벼락이 내려쳤다.
이와 같은 시각.
건물 최상층에서 회의를 주재하고 있던 안선환은 정전에 이어 폭발 소리가 들려오자 본능적으로 위화감을 느꼈다.
"이게 무슨 소리야? 당장 알아봐!"
그가 부하들을 향해 포효했다.
제66화
66화 복수를 위한 첫걸음(2)
"저기다."
"저기 놈이 있다."
"적은 하나야. 어서 죽여."
투타타타타!
몇몇 헌터가 내게 총을 쏘았다.
진동이 느껴지는 것을 보니 몬스터를 상대하기 위해 만든 헌터용 자동화기다.
허나 하급 몬스터를 상대하기 위해 만든 총기에서 발사된 총알 따위는 내 몸에 생채기 하나 만들어 내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총알이 전혀 통하지 않자 곧이어 불덩이, 화살, 비도와 같은 공격이 날아왔다.
쿠아앙!!
허리에 찬 무극을 지그시 움켜쥔 채 그대로 일자로 뻗자 시리도록 푸른 한 줄기 빛이 전방을 향해 날아갔다.
"으악!"
"...욱!"
추풍낙엽처럼 흩어지며 떨어져 나갔다.
"커헉!"
"앜!!"
나는 즐거웠다.
적들이 나타나면 나타날수록, 놈들이 쓰러지면 쓰러질수록 즐거움이 배가되었다.
지금 이 순간, 난 이곳에서 어느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무적(無敵)의 헌터였고 놈들은 의식을 잃고 허물어졌다.
저벅, 저벅, 저벅!
나는 마치 산보하는 듯한 걸음으로 복도를 걸었다.
"으아아, 살려 주세요."
"살려는 드릴게."
이처럼 살려 달라 하며 애원할 땐, 자비를 베풀었다.
나는 살육을 즐기는 살인마가 아니었으니까.
대신 섭섭하지 않게, 나자빠진 동료에 대한 의리가 있으니 복부에 권격을 박아 넣었다.
일상생활에는 지장이 없지만 앞으로 헌터 생활은 접어야 할 것이다.
-삐용삐용삐용.
"아뿔싸!"
분위기에 너무 취한 것 같다.
이곳은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 그것도 강남이다.
조금 있으면 경찰들이 쏟아지듯 몰려올 것이고 다수의 헌터들 역시 출동할 가능성이 있었다.
좀 서둘러야겠다.
난 기감을 넓게 퍼트려 옛 친구의 기운을 추적했고 곧 익숙한 기운이 찾을 수 있었다.
"건물 8층에 있군."
난 속도를 올렸다.
사무실 안쪽에는 검은색 양복을 걸친 세 명의 사내들이 있다.
그 뒤에 험악한 얼굴에 담배를 피우고 있는 녀석이 보였다.
긴장을 했음인가? 바닥에다가 계속해서 침을 뱉어 대고 있다.
"네놈은 뭐야?"
헌터 세 놈이 앞을 가로막으며 공격을 날렸다.
"배때기를 쑤셔 주마."
앞쪽 놈은 마법을, 양옆의 두 놈은 검을 빼어 들며 덤벼들었다.
그러나 날카로운 파공음이 터지면서 녀석들의 공격이 허공을 갈랐다.
그와 동시에 녀석들의 신형이 거짓말처럼 회오리 속에 말려 들어갔다.
"이럴 수가.... 모두들 조심...해...."
안선환의 다급한 신음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녀석들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당신...은 누구시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하긴 나 혼자서 건물 안에 있던 60~70명의 헌터를 모조리 쓸어버렸는데 쫄리지 않으면 거짓말이겠지.
"대전사 결투, 뉴먼 백작가, 기억 안 나?"
"서, 설마?"
"그래. 나야."
"여긴... 왜 오셨소?"
"왜! 내가 못 올 곳을 왔나? 그동안 날 꽤나 찾아다닌 걸로 아는데, 안 그래?"
"...."
정체를 밝히기 전과 지금의 표정이 극명하게 갈리고 있었다.
"그건 내가 지시한 게 아니라...."
눈알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다.
순간적으로 녀석의 눈깔을 파내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당황하면 눈알을 굴리는 버릇, 여전하구나."
"...??"
나는 녀석을 향해 비릿한 미소를 보인 후, 가면을 벗었다.
순간 녀석의 동공이 지진을 만난 듯 흔들리며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최...선우?"
"더러운 입으로 내 이름을 부르면 안 되지."
"마, 말도 안 돼. 최선우. 넌 이미 죽었는데."
"내 이름 부르지 말라고."
나는 녀석의 멱살을 움켜쥔 채 그대로 들어 올렸다.
태허무극심법의 막대한 진기가 녀석을 옭아매고 있었기에 바둥거릴 뿐 옴짝달싹 못 했다.
"일단 자자."
난 녀석의 수혈을 짚은 다음 옥상으로 향했다.
수십 명의 경찰이 계단을 통해 올라오고 있었는데 난장판을 만들어 놓은 덕에 시간은 충분했다.
"타이밍 죽이네."
난 안선환을 등에 업은 채, 맞은편 건물을 향해 순간 이동 스킬을 세 번이나 연속해서 펼쳤다.
"블링크, 블링크, 블링크!"
그러곤 미리 주차해 놓은 차량에 녀석을 밀어 넣고 시동을 걸었다.
부르릉!
묵직한 엔진 소리와 함께 나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유유히 사라졌다.
-남양주 소재 천마산.
천마산은 높이 812m의 산으로 산세가 험하고 복잡해 예로부터 소박맞은 산이라 불린다.
아틀란티스 대륙으로 이동하기 전,
난 이곳 천마산에 비밀 가옥을 만들었었다.
아무도 모르게 그것도 혼자 비밀 가옥을 만들어야 했기에 생노가다를 했지만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
참고로 비밀 가옥은 40피트 컨테이너 4개로 만들어졌고 천마산 북동쪽 지하에 있었는데 이곳은 특히 산세가 험해 사람의 인적이 없었다.
"선환아, 이제 그만 일어나라."
"...."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이러면 안 되지. 자는 척하는 거 다 아니까 눈 떠."
녀석은 내가 툭툭 칠 때마다 짧게 경련했다.
난 그 모습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지금쯤이면 대가리를 충분히 굴렸을 테니 일단 가볍게 시작해 볼까? 네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까 궁금하네."
분근착골(分筋錯骨)이란 것이 있다.
근육이 끊어지고 뼈가 갈라지는 고통을 주는 기술인데, 혹자는 이렇게 얘기한다.
인간이 견딜 수 없는 최강의 고문이라고 말이다.
"으아아...악!"
"컥, 커...헉!"
"끄아악!"
그로부터 정확히 일주일 뒤.
나는 천마산 비밀 가옥에서 나와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내 옛 친구는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
그러나 살아도 산 것이 아니다.
말도 되지 않는 변명을 할 때마다 녀석의 신체 일부를 절단했기 때문이다.
처음은 녀석의 오른팔이었다.
살려 달라며 같지도 않은 변명을 늘어놓을 때마다, 내가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을 때마다 녀석의 신체를 하나씩 절단했더니 다리 하나, 눈알 하나 그리고 혓바닥이 뿌리째 뽑혀 버렸다.
계속된 분근착골로 인해 녀석은 살아 있는 송장이 되어 버렸다.
온몸의 뼈와 근육이 뒤틀려 단전이 개박살 난 것은 덤이고 말이다.
어쨌든 내가 원하는 정보를 모두 얻었다.
대화 그룹이 차명으로 소유하고 있는 길드와 그들이 관리하고 있는 던전들에 대해서 말이다.
"짧으면 한 달, 길면 두 달쯤 출장 다녀올 거야. 저쪽에 웅덩이 보이지?"
땅을 파서 만들 때 생긴 웅덩이다.
그곳엔 각종 곤충과 벌레들이 바글바글 기어 다니고 있었다.
"네가 선택해. 굶어 죽든 아니면 그냥 뒈지든."
난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이며 밖으로 나갔다.
녀석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미국에 다녀와서도 녀석이 살아 있다면 그때 단칼에 죽일 생각이다. 이것이 한때나마 친구였던 녀석을 위해 내가 베풀어 줄 수 있는 최고의 호의일 것이다.
천마산에서 빠져나온 직후,
근처에 위치한 찜질방을 찾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씻고 나서 새 옷으로 갈아입고 공항으로 향했다.
평일 저녁임에도 불구하고 출국장은 사람들로 붐비는 모습이었는데 약속한 시간이 되자 차강민 변호사의 모습이 보였다.
"여깁니다."
내가 다가가자 그가 나를 발견하곤 손을 들었다.
"오래 기다리셨나요?"
"아닙니다. 저도 방금 왔습니다."
"짐이 간소하시네요."
"짐이 많으면 불편하니까요. 필요한 건 거기서 구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맞는 말씀입니다."
"그럼 들어가실까요?"
"그러시죠."
나는 차강민 변호사와 함께 뉴욕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전에는 뉴욕까지 14시간 이상 걸렸으나 게이트 출현 이후, 마석을 이용한 기술이 발전하면서 비행시간이 7시간으로 줄어들었다.
만약 무리를 한다면 5시간 안에도 주파가 가능했으나 연료의 효율적인 측면을 고려한 결과 7시간이 최적이라고 했다.
"와인 한잔하시겠습니까?"
어여쁜 스튜어디스가 다가와 와인을 권했다.
"뭐가 준비되어 있죠?"
"샤토 리우섹(Rieussec)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좋네요. 그걸로 주세요."
"전 조니워커 블루로 하겠습니다."
옆에 있던 차강민 변호사는 위스키를 주문했다.
우리는 술잔을 마주치며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누었고 뉴욕 JFK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최상의 서비스를 만끽하며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뉴욕, JP 뱅크]
우리는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미국 최대 은행 중에 하나로 꼽히는 JP 뱅크를 찾았다.
"사모 펀드를 설립하고 싶은데 가능합니까?"
"물론입니다. 돈만 있으면 가능하죠."
은행 직원의 농담 섞인 말에 10억 달러가 들어 있는 블랙마켓 계좌를 내밀자 금액을 확인한 직원이 깜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헉!"
여담이지만 금괴를 전부 현금화한 덕에 각각 10억 달러씩 예치된 블랙마켓 계좌가 총 15개 있었다.
그로부터 정확히 3분 후,
우리는 JP 뱅크의 베이커 은행장을 만날 수 있었다.
사실 이익을 극대화하려면 뉴욕이 아닌 조세 피난처에 법인을 만들고 사모 펀드 회사를 설립하는 것이 맞지만 차강민 변호사에게도 밝혔듯 애초부터 그런 생각을 접었다. 앞으로 미국의 힘을 이용하려면 정당하게 세금을 내는 것이 여러모로 좋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펀드 이름은 뭘로 할까요?"
"킬리만자로."
"...알겠습니다. 킬리만자로 펀드!"
150억 달러를 확인한 JP 뱅크 측의 적극적인 일 처리와 차강민 변호사의 능력이 시너지를 발휘하자 사모 펀드 설립에 관한 일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나는 차강민 변호사에게 나머지 일 처리를 맡기고 다음 행보를 이어 가기 위해 뉴욕에 위치한 미국 헌터 관리국 산하의 각성 센터를 찾았다.
"등급 검사를 받으러 왔는데요."
"신검이세요?"
"아니요. 재검입니다."
"현재 등급이 어떻게 되시죠?"
"에프(F)요."
"...."
F급이라는 말에 직원의 눈빛에 언뜻 비웃음이 서렸지만 상관치 않았다.
잠시 후면 저자의 얼굴에 나타난 조소가 경악으로 바뀔 것이 분명했으니까.
"재검사 비용은 개인이 부담하셔야 합니다만."
"알고 있습니다."
"가격은 만 달러입니다. 여기 서류 받으시고 접수처에 가서 접수하세요. 다음 분!"
그는 내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지극히 사무적인 어조로 빠르게 설명을 마쳤다.
측정장에 들어가자 사람들이 꽤 많이 모여 있다.
사람들은 각각 A라인과 B라인이라 적혀 있는 줄에 서 있었는데 이는 신규 각성 검사와 재검사를 뜻하는 줄이다. 이곳 말고 한 층 올라가면 C라인이 있는데 이곳은 헌터 학교를 졸업한 이들을 위한 곳으로 졸업과 동시에 얻은 등급증을 제출하면 별다른 측정이나 검사 없이 헌터증을 즉시 발급받을 수 있다.
"요! 왓 썹~."
"왓 썹~!"
"좋은 꿈 좀 꿨냐?"
"당연하지. 오늘 내가 여기 씹어 먹고 원 톱 찍는다."
"지랄 크크크~."
A라인은 누가 봐도 신규 각성 검사를 기다리는 줄이다.
그에 비해 B라인은 상대적으로 조용한 침묵이 흐르고 있다.
'완전 애기들이구나. 나도 저런 때가 있었지.'
요즘은 헌터 학교에 들어가기보단 헌터증을 받고 길드에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학교에 들어가면 4년을 공부해야 하는데 길드는 3개월의 의무 교육을 이수하면 실전에 투입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스타게이트를 공개한 이후 이와 같은 현상이 더욱 늘어났다고 한다.
제67화
67화 헌터 등급 재심사
"마이클 스티어 씨. 준비됐으면 시작하세요."
"네."
바벨을 연상시키는 기구.
겉보기에는 가벼워 보이지만 던전 부산물로 만들어 무게가 상당하다.
아마 최대 1,000kg이었나?
처음 등급을 받은 예비 헌터들은 기구를 들고 힘을 측정하게 되는데 일단 두 손으로 바벨을 들어 올린 상태 그대로 스쿼트 10회를 해내야 한다.
그 후 다음 단계로 무게를 올릴 수 있는데 200kg은 F급, 500kg E급, 800kg D급, 1,000kg을 올리면 C급을 받는다.
참고로 체력 측정과 민첩 측정도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스티어 씨. D급입니다."
"예스~ 감사합니다."
"오. 저분 평균 찍었네."
"그러게. 부럽다."
"야! D급인데 뭐가 부러워?"
"D급만 되면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잖아."
"쳇! 그래도 남자라면 톱을 노려 봐야지."
"큭! 너나 계속 노려 봐. 난 우리 아들이 대학 가기 전에 D급만 돼도 좋겠어."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음성 속에 직원의 호명이 이어졌다.
"접수번호 261번, 에브린 맥코드 씨."
"네, 접니다."
"E급입니다."
"...!!"
한눈에 봐도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백인이 E급 자격증을 받고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와! 저 아저씨 E급이래."
"저 나이에 E급이라니. 평생 짐꾼 각이네."
"쩝! 불쌍하다."
"그러게."
누군가는 자신의 등급에 기뻐하고 누군가는 절망했다.
그러던 중 B라인에서 소란이 일었다.
시뮬레이터 측정 결과 B등급이 나왔기 때문이다.
"질리언 진저 양, 축하드립니다. B등급입니다."
"우와~."
"짝짝짝짝!!"
환호성과 함께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직업에 따라 다르지만 마법사의 경우 B급이면 4서클이란 말이고 검사라면 검기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나이마저 어려 보이는데....
사람들은 부러움과 질투가 섞인 눈빛으로 센터를 빠져나가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관리국을 나가는 즉시 각 길드 소속 매니저들이 벌 때처럼 달라붙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몇몇 사람들이 등급을 측정한 후, 이윽고 내 차례가 됐다.
"B라인, 접수 번호 275번 분."
"여기요."
"시뮬레이터 측정기 안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나는 직원의 말에 따라 측정기 안으로 들어갔다.
위이잉....
내가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내 몸을 울리는 진동이었다.
그 뒤를 이어 내부 스피커를 통해 직원의 음성이 들려왔다.
"홀로그램 몬스터를 잡으시면 됩니다."
쉽게 말하면 홀로그램 몬스터를 잡는 동안 센터의 측정기가 내가 가지고 있는 전투력을 종합적으로 평가해서 등급을 매긴다는 얘기다.
"준비됐으면 시작하겠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어둠으로 가득했던 눈앞이 갑자기 환해졌다. 그리고 홀연히 나타난 빛의 입자들이 모여 하나의 영상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익숙함을 넘어 이제는 친숙하기까지 한 몬스터, 오크다.
"취이익!"
"어! 우리 오크 왔구나."
나는 반가운 마음에 미소까지 지어 보이며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이와 같은 시각,
센터 소속 직원들이 모니터를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요즘은 대형 헌터가 없네."
"그러게. 대부분 고만고만해. 어이. 토미! 신검 쪽 분위기는 어때?"
"마찬가지야. 헌터 학교 출신이 아니면 대부분 최하급이지."
"초반 각성이 C급만 나와도 대박인데."
"에이~ 첫 각성이 C급이면 가도 너무 갔다."
"하긴 C급이면 로또지. 그게 가능은 해? D급만 돼도 에이스잖아."
이때 반백의 남성이 저들의 대화에 참여했다.
"그런 일이 없는 건 아니야. 내가 여기서 20년 근무했는데, 초기 각성으로 C급! 딱 한 번 봤거든."
"헐! 팀장님, 그게 정말이에요? 그게 누군데요?"
"제시카 케네디."
"아!"
"음!!"
그의 말에 사람들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시카 케네디는 미국이 자랑하는 S급 헌터 조나단 케네디의 딸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그녀는 현재 더블 A급 헌터에 랭크되어 있었다.
"더블 A라고요?"
"응."
이전과 달리 요즘은 헌터 등급이 예전과 비교해 좀 더 세분화되었다.
참고로 최하급 헌터는 F급과 E급이다.
하급 헌터는 D급과 더블 D급, 중급 헌터는 C급과 더블 C급, 상급 헌터는 B급과 더블 B급으로 나뉘는데 일명 헌터의 꽃으로 불리는 최상급 헌터는 A급, 더블 A급 그리고 트리플 A급이 있다.
무엇이든 나누길 좋아하고 평가하길 좋아하는 이들은 마스터 등급 역시 구분을 해 놨는데 기존의 마스터 S급과 그랜드 마스터라 불리는 SS급 그리고 불가해의 영역으로 SSS급을 만들어 놓았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S급에 오른 8인을 두고 SS급, 그랜드 마스터라 부르는 이들이 있지만 공식적으로 확인된 바가 없다.
"그런 역사적인 장면을 어떻게 보셨어요?"
"흐흐흐~ 그날은 내가 정말 운이 좋았지."
남자는 커피를 마시며 모니터를 주시했다.
"재검 쪽 분위기는 어때?"
"조금 전에 B급이 하나 나왔습니다."
"B급?"
"응."
"나이가 몇인데?"
"27세요."
"오! 27세에 B급이면 대박인데?"
"안 그래도 이미 난리 났어요. 얼굴까지 예쁘거든요. 저기 입구 쪽 CCTV 좀 보세요."
"...!"
그의 말처럼 센터 입구에는 그녀를 영입하기 위해 사방에서 몰려온 길드 관계자들로 북적이고 있었는데 이건 뭐 연예인이 따로 없다.
마치 할리우드의 톱스타가 레드 카펫에 등장한 것 같았다.
하긴 스포츠, 영화, 예능은 물론 CF에서도 이미 헌터가 대세를 이루고 있었으니 어찌 보면 시대의 흐름에 따른 수순일 것이다.
"저 여자는 어디 길드에 갈까?"
"어쩌면 정부 소속 헌터가 될 수도 있겠지?"
"미모가 대단하니 영화배우가 될지도 모르지."
"혹시 남자 친구가 있을까?"
"없어도 넌 안 돼."
"왜?"
"네 얼굴부터 보고 와라."
"흑!"
"암튼 인생이 고속도로 위에 올라탔네. 아우 부럽다."
CCTV를 보며 한참 조잘대던 토미는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왠지 아까부터 혼자만 떠드는 기분??
고개를 돌리자 모두의 시선이 재검사 측정 모니터에 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B라인 측정기에 들어간 지 한참이 된 것 같은데 여전히 측정 중이었다.
"5, 5스테이지?"
"...?!!"
"대, 대박이다."
"헐! 이번엔 바실리스크다. 바실리스크가 나왔어."
"저걸 어째!"
"진짜 F급이 맞아?"
상황실에 있던 직원들의 시선이 모두 B라인에 집중되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실은 각성 센터의 센터장과 헌터 관리국 고위 관계자에게 실시간으로 전달되었다.
"뭐, F급 헌터가 5스테이지? 그게 정말이야?"
"네, 사실입니다. 방금 6번째 스테이지에 들어갔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간만에 괴...물이 나왔군."
센터의 연락을 받은 헌터 관리국 국장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어디 가시려고요?"
"직접 가서 봐야지. 옥상에 헬기 대기시켜."
"네, 국장님."
헌터 관리국의 국장이 검사장에 도착했을 무렵,
각성 센터는 난리법석이었다.
특히 B라인 앞은 도가니탕 속에 들어온 것 같은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저 미친 새끼는 뭐야, 대체 뭔데 저런 새끼가 다 있어!"
"우와와와아아아!"
B라인에 있던 각성자들이 침을 튀기며 외치고 있었고 A라인 역시 진즉에 측정이 멈춘 상황이었다.
"끄아아! 9스테이지를 깼어."
"이제 10스테이지야. 처음 본다. 10스테이지는!"
"나도 처음 봐."
참고로 측정기 밖에 있는 사람들은 전투 장면을 볼 수 없다.
이것은 담당 공무원들 역시 마찬가지로 헌터 스킬 노출에 따른 비밀 유지 협약 때문이다. 대신 그들이 확인할 수 있는 건 스테이지 넘버와 출현 몬스터의 이름뿐이었는데 사실 사람들이 모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측정기에 출현한 몬스터가 실제 지구에 출현했던 몬스터를 시뮬레이션한 것이라는 점이다.
* * *
-쐐액!
드레이크의 머리와 목이 검강에 의해 깨끗이 분리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피까지 구현한 걸 보면 기술의 발달이 참으로 빠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축하합니다. 9번째 스테이지를 통과했습니다.]
"그래. 고마워. 근데 몬스터의 비린내까지 구현할 필요가 있을까?"
대답을 기대하고 던진 말이 아니다.
그냥 혼잣말처럼 불만을 토로한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누군지 몰라도 시스템을 개발한 이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진짜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처럼 실감이 났기 때문이다.
나는 바닥에 앉아 다음 스테이지를 기다리는 동안 검신에 묻은 몬스터의 피를 털어 냈다.
-[이제 마지막 스테이지가 남았습니다.]
엥? 마지막 스테이지? 벌써?!
정신없이 사냥에 집중한 탓에 어느덧 마지막 스테이지에 도달한 것도 몰랐다.
-[앞으로 10분 후, 데스 나이트 노드락이 이끄는 언데드 군단이 출현합니다. 모조리 소탕하십시오.]
"언데드 군단?"
몬스터 군단을 상대하라니, 과연 마지막 스테이지인가!
하긴 생각해 보니 그럴 만도 하다.
소드 마스터는 일인 군단이라 불리기 때문이다.
나는 짧은 시간이지만 가부좌를 틀고 앉아 마나를 회복하는 데 주력했다.
그리고 정확히 10분 후,
AI가 말한 것처럼 저주받은 생명체들이 눈앞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언데드 군단이 출현합니다.]
좀비와 스켈레톤을 선두로, 그 뒤로 구울과 듀라한이 보인다.
종종 스펙터, 리퍼와 같은 특수형 몬스터도 눈에 띄었는데 무리의 중심에 검은색 갑주를 입은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데스 나이트 노드락인가?"
그나마 다행인 것은 리치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만약 저들 중에 마법을 사용하는 리치가 있었다면 상대하기 꽤나 곤란했을 것이다.
"그럼 시작해 볼까?"
나는 무극 대검을 어깨에 걸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순간 이동 스킬과 제운종을 적절히 펼쳐 놈에게 빠르게 다가갔다.
무극 대검을 휘두를 때마다 은은한 서기가 스쳐 지나간다.
태허무극심법이 지닌 현묘한 기운이 언데드를 상대하자 뭉게구름처럼 일어났다.
마치 신성력이 반응하는 것처럼 말이다.
"태극검 흡(吸), 부드러운 바람은 회오리가 되어."
난 흡자결을 통해 언데드를 한껏 끌어들인 다음 반자결을 펼쳤다.
"태극검 반강(半剛), 탄환은 곧 반월(半月)이 되어."
반월의 강기가 전방을 향해 사자와 같은 포효를 터트렸다.
-콰콰콰콰콰쾅!!
신성력이란 원래 사악한 힘을 상대하면 할수록 공격력이 강해지는 것!
태극검의 반강(半剛) 한 번에 물경 수백에 이르는 언데드가 쓸려 나가자 데스 나이트에게 향하는 길이 단숨에 열려 버렸다.
"가, 가, 가, 가, 강대한 적이여. 여, 여, 여기까지다."
"마, 마, 마, 마, 말더듬이! 자, 자, 자, 자, 잔말 말고 한판 붙자."
자신이 놀림받았다는 것을 안 것인가?
데스 나이트 노드락이 나를 향해 흉성을 터뜨렸다.
"이, 이, 이, 인간! 주, 죽인다!"
우리는 서로를 향해 검을 날렸다.
콰르르릉!
두 개의 강기가 부딪치니 엄청난 후폭풍이 발생했다.
주변마저 휩쓸어 버리는 거대한 강기 폭풍에 땅이 흔들리고 돌멩이가 부서져 나갔다.
난 녀석을 향해 이빨을 드러내며 매서운 공세를 이어 갔는데 유령마의 귀신같은 움직임 덕에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다.
놈을 처치하려면 유령마부터 처리해야 했다.
붕붕붕!!
나는 무극 대검을 바람개비처럼 휘두르며 놈을 구석으로 몰았다.
"태극검 풍강(風剛), 바람은 한없이 자유롭고!"
바람이 일렁이는 순간 눈에 보이지 않아 무한한 자유와 궤적을 가진 바람이 강기를 품은 비수가 되어 놈의 숨통을 조였다.
"다크 스탠딩, 아우커!"
어둠의 기운이 일어나 수십 개의 칼날로 변해 눈으로 감지할 수 없는 풍강의 기운을 쳐 냈지만 이는 내가 계획한 바다. 나는 순간 몸을 틀면서 순간적으로 얻은 탄력을 이용해 녀석이 타고 있는 유령마를 공격했다.
-콰콰쾅!
무자비한 폭음과 함께 날아간 강기 덩어리가 유령마를 찢어발겼다.
"이, 이, 이, 이, 이게...."
간발의 차이로 몸을 빼냈지만 적잖이 당황한 모습이다.
허나 기동력이 사라졌으니 이젠 절대 피할 수 없다.
"자! 이제 그만 끝내자. 태극검 절강(絶剛), 내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이 끊어지다."
"다크 디맨션, 어셈블리!"
다음 순간 무시무시한 검강이 무극 대검에서 일어나 녀석을 덮쳤다.
눈 깜짝할 사이에 공격을 허용한 노드락이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갑주가 터지며 사이사이마다 검은 연기가 주르르 흘러나왔다.
"...."
일순 전장이 고요해지며 내가 마치 히어로 영화 속 주인공이 된 느낌이 들었다.
스스스스스스....
땅 위에 한 줄기 바람이 불어오자 전장에 남아 있던 언데드가 모두 사라지기 시작했고 잠시 후 AI의 음성이 귓가에 들려왔다.
-[마지막 스테이지가 끝났습니다. 지금부터 각성자의 마력을 스캔하겠습니다. 마력을 운용해 주십시오.]
곧이어 측정기에서 대량의 마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마나의 바다에서 홀로 유영(遊泳)하는 기분이었는데 감정에 취한 나머지 대놓고 태허무극심법의 기운을 끌어 올려 버렸다.
-[삐삐삐삐, 삐삐삐삐....]
1단계 인(人)의 단계 : 인간이란
2단계 지(地)의 단계 : 땅을 밟고 서서
3단계 천(天)의 단계 : 하늘을 바라보고
4단계 합(合)의 단계 : 화경에 이르면
5단계 향(香)의 단계 : 강기가 모든 것을 소멸하고
6단계 광(光)의 단계 : 상단전이 열리면
7단계 성(成)의 단계 : 현묘한 기운이 일어나니
8단계 극(極)의 단계 : 인세에 적수를 찾기 어려운 현묘한 경지는
9단계 태허(太虛)의 단계 : 생과 사를 주관하고
10단계 무극(無極)의 단계 : 우주의 근원인 태극으로 돌아간다.
이때 생각지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태허무극심법이 4단계에서 5단계로 넘어갈 찰나, 측정기 내부가 갑자기 터질 듯 팽창한 것이다.
-[삐삐삐삐, 오류 발생, 삐삐삐삐, 오류 발생, 삐삐삐삐.]
-[삐삐삐----익, 등급 측정 불가능.]
나는 '아차' 하며 재빨리 기운을 끌어 내렸다.
그러자 AI 시스템이 곧바로 안정화되기 시작했다.
-[삐삐삐, 오류 수정, 오류 수정....]
-[삐삐삐삐, 시스템 재부팅 시작.]
-[위이잉. 시스템 재부팅 완료, 재측정 결과....]
나는 숨을 죽인 채, 시스템의 판정을 기다렸다.
제68화
68화 S급 헌터
-[삐삐삐, 오류 수정, 오류 수정....]
-[삐삐삐삐, 시스템 재부팅 시작.]
-[위이잉. 시스템 재부팅 완료, 재측정 결과....]
나는 숨을 죽인 채, 시스템의 판정을 기다렸다.
그리고 들려오는 소리!
-[축하합니다. 대상자의 등급은 S급입니다.]
이와 같은 시간,
사람들의 환호성에 각성 센터가 뒤집어졌다.
"우와아아!!"
"S급! 저, 저거 실화야?"
"설마 가짜겠냐?"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지금 몰래카메라 찍는 것 아니지? 나 좀 꼬집어 봐."
"앜!"
그들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을 보이는 동시에 출입구를 향해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어엇! 문이 열린다."
"우와아~~."
"저... 저기 저 사람이야."
측정기에서 밖으로 나오는 순간 나를 향한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하나같이 놀람, 감탄 그리고 경악한 눈빛이다.
재밌는 것은 시기나 질투 따위의 감정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긴 시기나 질투도 뭔가 상대할 가능성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 서로 간의 차이가 극명하면 동경하게 된다.
이해가 안 간다고?
생각해 보자. 예를 들어 1억을 가진 A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10억을 가진 B를 보고 배가 아플 수 있다. 시기와 질투 역시 가능하다. 하지만 10억을 가진 A가 조 단위의 재산을 가진 C를 만나면 시기, 질투라는 감정 대신 그를 동경하게 된다는 것이다.
각설하고 이후의 상황 역시 꽤나 재밌게 흘러갔다.
측정기에서 한 발을 때자마자 마치 홍해가 갈라지듯 나를 기준으로 A라인과 B라인이 나뉘었고 내가 한 걸음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마치 개선장군에게 환호를 보내는 로마 시민들처럼 건물이 떠나가라 박수와 환호성을 보냈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내가 어떤 방식으로 몬스터를 상대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내가 누구와 대결을 펼쳤고 그들을 상대로 승리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그레이트(Great)!"
"휘이익~!"
짝짝짝짝!
"최고요. 당신 덕에 평생 기억에 남을 추억을 얻었소."
사람들의 열광적인 환호 속에서 센터 직원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헌터님, 이쪽으로 오시겠습니까?"
"그러죠."
나 역시 주위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직원을 따라갔다. 내가 향한 곳은 센터 최상층에 위치한 VIP 휴게실이었다.
"안녕하세요. 최선우입니다."
"반갑습니다. 저는 센터를 책임지고 있는 제임스 말론입니다. 제 옆에 계신 분은 미국 헌터 관리국을 담당하고 계신 그랜트 국장님이십니다."
"그랜트입니다. 먼저 S급을 받으신 것에 대해 미국 정부를 대신해 축하의 인사를 전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하하하! 부탁이라뇨. 그건 제가 드리고 싶은 말입니다."
우리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몇 차례 가벼운 덕담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본격적인 대화가 이어졌다.
"한국인이라고 들었습니다만."
"네. 그렇습니다."
"오! 오! 아시다시피 한국과 미국은 매우 가까운 사이입니다. 6.25 전쟁 때부터 피를 나눈 나눈 혈맹이자 동맹국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옳으신 말입니다."
나는 그의 말에 은은한 미소를 유지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몇 마디 형식적인 덕담을 나눈 후,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했는데 포문을 연 것은 그랜트 국장이었다.
"한국에도 각성자 센터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마스터께서 굳이 미국에 와서 검사를 받은 이유가 있을까요? 혹시 제 질문이 무례했다면 용서하십시오."
"그건 아닙니다."
이 아저씨 꽤 단도직입적이다.
하긴 여자와 밀당하는 것도 아닌데, 나 역시 질질 끌고 돌려 말하는 건 딱 질색이었다. 오히려 상대방이 대놓고 판을 깔아 줬으니 내가 원하는 패를 말해 주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이다.
"그랜트 국장님. 이중국적 가능합니까?"
"...!"
난 마스터다.
미국이 날 얻고 싶다면 그만한 대가를 주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고...."
나는 미국 정부에 몇 가지 요구 사항을 밝혔다.
그것도 아주 당당하게.
그로부터 얼마 뒤,
굳게 닫혀 있던 그랜트 국장의 입술이 열렸다.
"제가 순간 착각했습니다."
"착각이요?"
"네. 스캇 보라스와 만난 줄 알았거든요."
보라스는 협상의 달인이라 불리는 스포츠 에이전시인데 말하는 본새를 보아하니 이건 100% 미국식 농담이 분명했다.
"말씀하신 요구 사항을 적극적으로 검토한 후 연락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일어나도 될까요?"
"그럼요."
"좋은 만남이었습니다."
나는 관리국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VIP가 이용하는 비밀 통로를 통해 조용히 센터에서 빠져나갈 수 있었다.
"자! 모두 모이세요. 여기 계신 분들은 한 분도 빠짐없이 비밀 유지 서약서를 작성해 주시길 바랍니다. 미합중국의 국익을 위한 일입니다."
"언제까지 비밀을 지켜야 합니까?"
"오늘부터 정확히 한 달입니다. 그보다 줄어들 수도 있고요. 후에 공식 발표가 있을 겁니다."
"그럼 발표 이후에는 괜찮다는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공식 발표 전에 오늘 일을 발설할 시에는 법적인 책임을 지게 될 겁니다. 협조 부탁드립니다."
나에 대한 정보는 관리국에 의해 철저하게 감춰졌지만 S급 헌터가 등장했다는 소문이 암암리에 퍼져 나갔다.
이와 같은 시각 한국,
황기택은 지독한 악몽에 잠을 깼다.
"으아악! 하아, 하아... 하아."
한두 번은 그럴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다섯 살짜리 애도 아닌데 이 빌어먹을 악몽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정체 모를 뉴먼 백작가의 대전사 그리고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매서운 칼날.
너무나도 생생한 기억에 잠에서 깼음에도 불구하고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황기택은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향했다.
그러곤 탁자 위에 놓인 양주를 병째로 들고 마셨다.
꿀꺽, 꿀꺽!
모두 이 빌어먹을 악몽 때문에 잠이 달아난 탓이다....
그는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한강을 바라보며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들었다.
수십 번의 전화는 물론 메시지도 확인하지 않았다.
"이 새끼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얼마 전,
SH 빌딩이 습격을 받아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사건이 있었다.
생존자의 말에 따르면 적은 단 한 놈이라고 했는데 무려 70명에 이르는 헌터들이 모두 당한 것이다.
더 큰 문제는 길드의 수장 안선환마저 행방불명되었다는 점이다.
CCTV를 비롯해 각종 전자 기기가 모두 망가져 땅으로 꺼졌는지 하늘 위로 날아갔는지 도무지 알 도리조차 없었다.
황기택은 알 수 없는 위화감에 사로잡혀 또다시 술을 들이켰다.
서서히 취기가 올라왔지만 심란한 마음이 도통 진정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안 되겠군."
그는 이 더러운 기분을 털어 버리기 위해 서랍을 열고 담배를 찾았다.
잠시 후,
그는 한숨과 함께 하얀 연기를 뿜어내더니 이내 어느 정도 여유를 찾은 모습을 보였다.
"어, 나야."
황기택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래. 그때 말한 걔. 기상 캐스터. 어. 그래. 알았어. 돈은 상관없으니까 당장 섭외해서 데리고 와."
통화를 끝낸 황기택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기분 풀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술과 여자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