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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6 - 6

* * *

뉴욕, 플라자 호텔.

"아이고 선우야...!"

어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내 얼굴을 감싸더니 대성통곡하기 시작했다.

차 변호사를 통해 언질을 받았지만 죽은 줄 알았던 자식이 이렇게 살아 돌아왔으니 어머니의 심정이 어땠을까!

"어디 아프거나 다친 데는 없니?"

어머니는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도 내 안위부터 물으셨다.

"네. 없어요. 엄마. 괜찮아요."

"저, 정말 오빠야?"

"그래 인마. 넌 그새 오빠 얼굴도 잊어먹었냐?"

"오...빠, 오빠. 흑흑흑!"

분위기를 바꿔 보려 농담조로 말을 던졌으나 실패했다.

여동생이 날 바라보며 몇 번 울먹이더니 그대로 뛰어와서 내게 안긴 것이다.

"으아앙! 오빠!"

"아이고, 그만 울어. 이러다 못난이가 더 못난이 되겠네."

"으아...앙."

평소라면 못난이란 말에 발끈하며 달려들었을 텐데 오늘만큼은 전혀 통하지 않았다.

"흑...흑...흑. 대체 어디 있다 온 거야."

"그래. 선우야. 그동안 대체 어디에 있었던 거니?"

"엄마. 죄송해요. 혜진아. 오빠가 미안해. 그런데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어. 그래서 연락할 수 없었어."

"여보. 살아 있으면 된 거지. 우리 가족이 다시 모였잖아. 이렇게 기쁜 날에 웃어야지 울면 되겠어?"

"그래요. 당신 말이 맞네. 이렇게 기쁜 날 울면 안 되지. 혜진아. 우리 이제 그만 울자."

"...네. 엄마. 끅. 알겠어요.... 끅."

말을 그렇게 했지만 어머니와 여동생은 날 부둥켜안고 한동안 그렇게 있었다.

그리고 차 한잔 마실 시간이 지나자 어머니와 여동생이 감정을 추슬렀다.

"그런데 선우야."

"네. 엄마."

"엄마가 궁금한 게 하나 있네."

"뭔데요?"

"저 양반은 알고 있었지?"

"네?"

이래서 여자의 육감이 무섭다고 하는 건가?

"이제야 뭔가 퍼즐이 맞춰지는 것 같아서 말이야. 돌이켜 생각해 보면 네 아빠 몇 달 전부터 꽤 냉정했거든."

"맞아. 맞아. 아빠 그랬어. 나도 기억해."

순간 아버지를 향해 어머니의 매서운 눈초리가 날아갔다.

"여보. 당신은 알고 있었죠?"

"내가 뭘?"

"날 속일 생각 하지 마요. 우리가 살아온 세월이 얼만데, 다 티 나거든요."

"아니, 여보. 그게... 나는 말이지."

"어서 말 안 해요?"

아버지는 허둥지둥하며 나를 향해 도움의 눈길을 보냈고 난 그 눈길을 애써 외면하고 말았다.

"여보. 일단 내 얘기부터 들어 봐."

"됐고요. 잠깐 나 좀 봐요."

"아들. 아들아. 선우야!"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와 같은 모습이다.

"맞아. 이건 아빠가 100% 잘못했어. 나도 아빠에게 실망이야."

"...."

쩝!

사실 아버지는 아무 잘못이 없다.

모두 내가 부탁한 일이니까 말이다.

나는 서둘러 어머니를 향해 아버지가 왜 그래야만 했는지,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왜 숨겨야만 했는지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

"...!!"

A라는 동창의 괴롭힘, 최하급 헌터 생활, 믿었던 친구 B의 배신 그리고 살인미수.

충격에 대비해 나름 각색을 했는데 또 다른 내가 무림이라는 곳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도 숨겼다.

어쨌든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방 안의 분위기가 한층 더 무거워졌다.

"서, 선우야."

"엄마. 저 괜찮아요. 놈들 덕분에 이만큼 강해졌거든요. 이젠 그 누구도 절 건드릴 수 없어요. 우리 가족도요."

"오...빠."

당당하고 확신에 찬 말이 믿음을 주었을까?

어머니와 동생은 그제야 굳어진 표정을 풀며 고개를 끄덕였고 이날 우리 가족은 밀린 얘기를 하느라 쉽게 잠들지 못했다.

제69화

69화 뉴욕의 하루

오늘은 가족을 위한 깜짝 이벤트가 있는 날이다.

난 준비가 끝났다는 연락을 받자마자 부모님과 동생을 차에 태웠다.

"어딜 가는 건데?"

"가 보면 알아."

부모님과 다르게 성질 급한 여동생이 아침부터 어디를 가냐며 질문 세례를 쏟아냈지만 답해 주지 않았다.

"그만 조용히 하고 따라오지 그래?"

"쳇~."

우리를 태운 차가 호텔에서 빠져나와 맨해튼 중심가로 들어갔다.

"와~ 엄마, 저기 집들 좀 봐. 완전 좋아."

"그러네. 아이고! 예쁘기도 해라."

"동네 자체가 부촌인 것 같아."

나는 여동생과 어머니의 대화를 들으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잠시 후,

우리는 아름답게 지어진 저택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자! 다 왔어. 내려. 엄마, 아빠도 내리세요."

"여긴 누구 집이니?"

"선우야, 혹시 초대받은 거야? 그럼 미리 말을 하지. 빈손으로 왔잖아."

"그런 거 아니에요. 일단 들어가요."

6층으로 이루어진 저택에 들어갔다.

유럽풍으로 지어진 덕에 외관부터 고풍스러운 아름다움을 뽐냈지만 저택 내부는 더욱더 세련되고 아름다웠다. 특히 어머니와 여동생은 거실과 부엌을 보고 한동안 말을 잃었을 정도다.

"짜짠~ 앞으로 우리 가족이 살 집이에요."

"뭐?"

"헐, 대박!"

나는 부모님 이름이 적힌 주택 매매계약서를 꺼내 보여 주었다.

"싸우지 마시라고 아부지랑 어무니 이름으로 계약했어요."

두 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이게 대체 얼마야?"

"3천만 불이요."

"3, 3... 3천...만 불...."

"여보, 그 입 좀 닫아요. 그러다 파리 들어가겠어."

"어, 어...어."

맨해튼 중심에 위치한 최고급 펜트하우스.

매매가격에 적힌 3천만 달러라는 천문학적 가격에 아버지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하지만 여동생은 비명인지 환호인지, 의미 모를 괴성을 지르며 집 안 곳곳을 방방 뛰어다녔다.

"꺄악~ 오빠, 너무 멋지다."

"사랑하는 동생아. 어떠냐, 맘에 드니? 아침부터 나올 만했지?"

"존경하는 오라버니, 오라버니의 말씀이 지당하십니다. 소녀, 너무너무 마음에 듭니다."

"엄마는 어때요?"

"그래. 정말... 멋지구나."

펜트하우스인 관계로 내부는 물론 옥상 공간에도 럭셔리한 정원과 테라스를 가지고 있었는데 마치 전망 좋은 곳에 위치한 야외 카페 같았다. 더욱이 반경 5km 내에 헌터 관리국을 비롯한 각종 길드 사무소가 산재해 있어 최고의 치안마저 자랑했다.

부동산 중개인의 말에 따르면 이 집은 본래 언론 재벌이 소유한 펜트하우스라고 했다. 몇 달 전 그가 유명을 달리하자 본처와 내연녀 그리고 3명의 자녀들이 그가 남긴 재산을 놓고 소송을 벌이는 과정에서 이 집이 매물로 나오자 평소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던 중개인이 뒤도 보지 않고 잡았다고 했다.

나름 힘 좀 쓴다는 사람들이 이 집을 매수하기 위해 중개인을 찾았으나 마스터가 관심을 보인다는 말에 모두들 조용히 물러났다고 한다.

게이트가 나타난 이후,

세상은 많이 변했지만 돌아보면 우리의 삶은 사실 예전과 비해 다를 것이 없다.

과거 황제, 귀족, 양반 계급이 누리던 권력은 현재 위정자, 권력자들이 소유하고 있다. 과학의 발전에 따라 세상이 바뀌었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여전히 계급이 존재하고 있고 게이트 시대를 맞이해 최상급 계급에 헌터라는 이들이 새롭게 합류한 것뿐이다.

누군가 반론을 할 수 있다.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계급 타령이냐고 말이다.

그런데 말이다.

21세기에도 불구하고 계급은 존재한다.

-어디 대학 다녀?

-연봉이 얼마야?

-쟤는 나와 '급'이 달라.

-부모님은 뭐 하시니?

-쟤는 주X아파트 살아. 놀지 마.

-우리는 노는 '물'이 달라.

-유전무죄 무전유죄.

무언가 느껴지는 것이 없는가?

물론 모든 사람이 이렇다는 것이 아니다.

다수의 사람들은 서로를 존중하고 살아가고 있고 권력자, 위정자 중에도 존경할 만한, 마땅히 존경받아야 할 사람들이 있다.

그렇기에 우리 사회가 이렇게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힘이 있다고, 가진 것이 많다고 약자를 착취하고 억압하는 마음보다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마음이 세상에 많이 뿌려지길 바란다.

'이...런....'

야외 테라스에 앉아 주변 경관을 감상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잠시 감상(感傷)에 빠진 것 같다.

아직도 집 구경 중인가?

소파에서 일어나 집 안으로 들어갔다.

"엄마, 방에 놓인 침대 봤어?"

"체크 문양 침대?"

"응."

"그게 왜?"

"엄마~~ 그거 해스X스야. 세계 최고의 명품 침대 해스X스."

"그래?"

"최소 1억은 할걸. 여기 봐 봐. 이게...."

??

아직도 끝이 나지 않은 것 같다.

벽돌이 어쩌고 바닥이 어쩌고.... 각설하고 오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만약 배고프다고 외친 아버지의 투정이 아니었다면 아침에 이어 점심마저 거를 뻔했으니 말이다.

"가까운 곳에 맛있는 식당이 있어요. 거기로 가요."

"오오! 역시 우리 아들이야. 예약해 놨구나."

"네? 아... 네."

후후후! 사실 예약은 안 했다.

하지만 난 자신 있게 가족을 대동하고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며칠 전,

거액을 유치시켜 준 선물로 존 베이커 은행장이 가져다준 선물 덕이다.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블랙 카드입니다.

-호오! 이게 바로 상위 0.01%만 발급이 가능하다고 알려진 아멕스 블랙 카드군요.

-네. 제가 특별히 준비했습니다.

-혜택이야 당연히 좋겠지만 디자인과 색깔이 마음에 드네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베이커 은행장님.

예약을 했냐는 매니저의 질문에 블랙 카드를 '쓰윽' 하고 보여 줬더니 좌석으로 안내해 준다.

역시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블랙 카드!!

최소 한 달 전에 예약하지 않으면 입장이 불가능하다고 알려진 유명 레스토랑을 프리 패스했다.

"어머머, 고기에서 우유 맛이 나."

"대박! 진짜 맛있다."

"여보. 이 빵 좀 먹어 봐. 진짜 고소해."

나는 블랙 카드를 소유한 덕에 부모님의 자랑스러운 아들이자 여동생의 존경을 받는 위대한 오라버니로 거듭날 수 있었다.

그런데 말이다.

이벤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식사를 마친 후, 발걸음을 백화점으로 옮겼다.

쇼핑을 할 겸 소화도 시키고 말이다.

"와! 구X다."

"어머머! 페라X모, 샤X, 프X다도 있네."

"엄마, 우리 매장에 들어가서 봐요."

"그래. 어서 가자."

여동생의 반응은 익히 예상하고 있었지만 어머니까지 저렇게 좋아하실 줄 몰랐다.

그때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아버지가 나를 불렀다.

"아들아."

"네, 아버지."

"엄마도 네 엄마이기 전에 여자다."

"...!"

아! 역시 우리 아버지다.

나와 같은 남자인 동시에 인생의 선배! 앞서간 선구자.

존경심이 무럭무럭... 올랐다.

"아빠가 올라오면서 봤는데 저쪽에 파X 필립 매장이 있더구나. 아빠는 다른 건 괜찮은데 말이야, 시계가 오래돼서 말이다. 이참에 시계나 하나...."

"네. 그러세요."

쇼핑이 꼭 여자만의 전유물은 아닌 것 같다.

분명 다른 건 괜찮다고 하신 것 같은데 이번엔 이태리 명품 수제 양복점에 들어가셨다.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아하니 타임 리미트를 정해 주지 않으면 백화점 폐장 시간까지 쇼핑할 생각인 것 같았다.

"현재 시간이 오후 2시니까 6시까지 쇼핑하고 보는 걸로 하죠. 어때요?"

"4시간이면 좀 부족할 것 같은데."

"동생아, 오늘만 날이 아니란다. 그리고 저녁 안 먹을 거야?"

"아하~ 그렇지. 내일도 있지. 모레도 있고 말이야. 호호호."

난 여동생의 넉살에 헛웃음을 친 후,

백화점 매니저에게 가족의 쇼핑을 부탁했다.

블랙 카드로 첫 결제를 하자마자 어디선가 바람처럼 나타나 퍼스널 쇼퍼 역할을 자처하고 있었으니 내가 없더라도 가족이 쇼핑하는 데 문제 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럼 6시에 봐요."

[Joe's Coffee]

커피 한 잔 주문하고 거리를 걷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무슨 생각을 하며 저리 바삐 걷는 걸까.

삶의 여유가 없을 땐 보이지 않던 풍경이 커피 한 잔 덕인가 아니면 마스터에 이른 덕인가!

사람 구경이 이렇게 재밌는 일인지 전엔 미처 몰랐다.

그렇게 한참 사람 구경에 빠져 있을 때, 반대편 횡단보도에 서 있는 차강민 변호사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한 손에 서류 가방을 든 채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많이 늦었죠?"

"아니요. 저도 조금 전에 왔습니다. 커피?"

"괜찮습니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세 잔이나 마셨거든요."

"많이 드셨네요."

"네, 흐흐."

그는 웨이터가 다가오자 커피 대신 홍차를 한 잔 주문했다.

"제가 요청한 일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말씀하신 대로 깔끔하게 처리했습니다."

"그것참 좋은 소식이군요."

"베이커 은행을 뚫은 덕에 크게 어려울 것도 없었습니다."

차 변호사가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보이며 대답했다.

"그래도 수고하셨습니다."

"뭘요, 제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하하하! 맞습니다. 할 일을 하셨습니다. 근데 말입니다. 세상에는 해야 할 일을 못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사람이 어떤 위치에 있다면 그 위치에 맞는 일을 해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것이 문제죠."

"위치라...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네요."

차 변호사의 눈이 갑자기 빛났다.

"주제...넘지만 제가 조언 한 말씀 드려도 될까요?"

"물론이죠. 편하게 하십시오."

허락이 떨어지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대표님은 돈을 가졌습니다. 그것도 조금 가진 게 아니라 셀 수 없을 만큼의 천문학적 금액을 가졌습니다. 위치로 따지면 지상계에 살다가 천상계로 올라간 격이죠. 힘없는 자가 보물을 가지면 죄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습지만 그저 웃음으로 넘기기엔 가볍지 않은 말이죠. 실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으니까요."

그는 내가 마스터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난 조용히 그의 말을 경청했다.

"죄송하지만 이제 대표님은 평범하지 않습니다. 지킬 힘이 없으면 함부로 돌아다니셔도 안 됩니다. 평범한 일상과 이별이란 뜻입니다."

차 변호사는 찻잔을 들어 입술을 축인 후, 말을 이어 갔다.

"혹시 빌 게이츠나 워렌 버핏과 같은 세계적 부호들이 길거리를 활보하며 일견하기에 평범한 생활을 하는 사진을 본 적이 있으신가요?"

"네.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무슨 배짱일까요? 그러다 납치라도 당한다면 끝인데요. 물론 눈에 보이지 않는 경호원이 있겠죠. 분명 있을 겁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그들은 알고 있는 겁니다. 자신을 섣불리 건드렸다간 X 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평범한 일상을 원하신다면 감추지 마십시오. 오히려 유명해지십시오. 그러면 다시 평범한 일상을 누릴 수 있습니다. 아무도 못 건드리니까요. 간혹 정신 나간 놈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땐 본보기를 삼으시면 됩니다."

"...."

나는 그가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이것은 내가 그에게 시킨 일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때가 아니라 날 숨기고 있었지만 평생 숨길 생각은 없다. 대화 그룹을 조지는 과정에서 밝혀질 것이다.

각설하고 맥을 잘못 짚었지만 차 변호사의 말은 날 생각해서 하는 말이 분명했다.

그가 욕심이 났다.

능력 있는 변호사답게 짧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요청한 일을 깔끔하게 처리한 것도 그렇고 말이다.

"차강민 변호사님."

"네, 대표님."

"조언에 감사드립니다."

"기분 나쁘지 않으셨다면... 다행이죠."

"진심입니다."

내가 눈빛에 진심을 담아 고개를 숙이자 그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바뀌었다.

그 역시 내가 한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느낀 모양이다.

"차 변호사님, 이참에 제게 오시죠. 연봉 20억. 어떠십니까?"

"네?"

"아시잖아요. 저희 회사 자본금만 100억 달러입니다. 원하시면 사무실 직원들 전부 데리고 와도 됩니다. 저와 함께하시죠."

"휴! 사람을 놀라게 하는 데 재주가 있으시네요."

표정을 보니 이미 반쯤 넘어온 얼굴이다.

"준비하시는 데 한 달이면 될까요?"

"한 달이면 충분하겠네요.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대표님."

그는 내가 내민 손을 붙잡았다.

그런데 그는 알까?

아직 놀랄 일이 남았다는 것을 말이다.

'이제 내 사람이 됐으니 말해 줘야겠지.'

나는 그를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70화

70화 레드핑크 은수

"차 변호사님, 혹시 그거 아십니까?"

"네?"

앞뒤 잘라 버리고 그걸 아냐고 묻자 차 변호사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곧 언론에 알려지겠지만 얼마 전 미국에 S급 헌터가 새롭게 등장했다고 합니다."

"S급 헌터가요?"

"네. 그런데 그자가 한국인이라고 하더군요."

"와...우!"

새롭게 등장한 S급 헌터가 한국인이란 말에 차 변호사가 뿌듯한 듯 환하게 웃었다.

"대표님 말씀이 사실이면 정말 좋겠네요."

"사실이에요. 이건 아직 비밀인데 그 사람이 바로 저거든요."

"네? 하하, 하하, 하하하하!"

차 변호사는 내 속삭임에 순간 어리둥절해했지만 이내 긴 웃음을 토해 냈다.

내 말을 농담으로 생각한 모양이다.

난 그의 눈앞에 손바닥을 가져다 댄 후 진기를 모았다.

말하는 것보다 보여 주는 것이 직방이기 때문이다.

-우우웅!

미묘한 공기의 진동과 함께 손바닥에서 유형의 기운이 솟구쳤다.

강기, 그것도 손으로 펼친 수강이었다.

"...!!"

차 변호사의 눈이 놀란 토끼처럼 동그랗게 변하는 동시에 떡 하고 입이 벌어졌다.

"그... 그... 그...."

어찌나 놀랐는지 안색마저 새하얗게 변했다.

"마스터 청운. 제가 사용하는 이름입니다. 당분간 마스크를 쓰고 활동할 생각이고요. 하지만 오래 숨길 생각은 없습니다. 이번 일이 끝나면 변호사님의 말씀처럼 공개해야죠."

"하...하하...하."

S급 헌터인 줄 모르고 지킬 힘이 없다면 유명해지라고 조언한 것이 떠올랐는지 난감한 표정이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고쳐 잡았다.

역시 내가 사람 선택을 잘한 것 같다.

"같이 일을 하려면 돈도 중요하지만 같은 곳을 보고 함께 동행을 하려면 신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차 변호사는 마치 뭔가에 홀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흥분으로 그의 심장이 세차게 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걱정 마십시오. 차질 없이 준비하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제 선물입니다. 혜진 양이 좋아한다고 들어서요."

"아이고, 뭘 이런 걸 다...."

"비싼 것도 아닌데요. 그냥 자그만 성의입니다. 그럼 한국에서 뵙겠습니다."

"네. 조심히 가십시오. 한국에서 봅시다."

차강민 변호사가 떠나고 조금 뒤 한 무리의 한국인이 거리에 나타났다.

여러 개의 카메라와 조명 판, 스태프로 보이는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아하니 무슨 촬영이 있나 보다.

"이쪽이랑 거기에 카메라 설치해. 그리고 형식아."

"네, 감독님."

"애들 시켜서 지금부터 사람들 통제해라. 관계자 외에는 못 들어오게 하고. 알았지?"

"넵! 알겠습니다."

"자! 자! 모두 주목하세요. 뉴욕 시청에서 딱 3시간만 촬영을 허락해 줬으니까 빨리빨리 움직여야 합니다. 다들 아셨죠?"

"네. 감독님."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가운데 일명 연예인 밴이라 불리는 쉐보레 익스프레스 밴이 나타났다.

"앗! 레드핑크다."

"우와아!! 꺄아악!"

"언니~~ 사인해 줘요."

차 문이 열리며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들이 밖으로 나오자 그들을 알아본 사람들이 함성을 지르며 벌 떼처럼 모여들었는데 그들 중 한 명의 낯이 익다.

"저 여자는?"

리자드맨 킹을 상대할 때 만났던 음유시인이다.

뉴욕에서 보니 느낌이 색다른데?

혹시라도 날 알아볼까? 아무래도 못 알아보겠지?

그날도 마스크를 쓰고 있었으니 알아보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제인~ 제인~ 은수~ 은수!"

"형식아! 사람들 차단선 안으로 못 들어오게 막아."

"네, 감독님."

"로즈! 로즈! 로즈!"

"은수! 은수!"

"차단선 뒤로 물러나세요. 거기요. 물러나세요."

"엘사! 엘사!"

"은수! 은수! 은수!"

몰려드는 사람들로 인해 난장판이 될 뻔했지만 스태프들의 빠른 대처로 인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흐음!'

K-POP이 대세라는 것을 알았지만 뉴욕에서까지 이렇게 인기가 많은 줄 몰랐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 여동생이 레드핑크 팬클럽 회원이라며 자랑한 것이 떠올랐다.

"자, 그렇죠. 표정 좋습니다."

"파티에 왔어요. 축제예요. 그 기분을 떠올려 보세요."

"더. 더. 좀 더... 그렇죠."

"와우! 지금 표정 좋았어요. 첫사랑을 떠올려 보세요."

감독의 지휘 아래 멤버들은 각각 그리고 함께 어울리며 다채로운 모습을 찍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요상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야! 그 새끼 어디래?"

"벼, 병원에 있다고 합니다."

"병원은 왜?"

"급성 장염이래요."

"이런 젠장! 어제 저녁에 뭘 처먹은 거야."

촬영하기로 한 남자 배우에게 문제가 생긴 것이다.

"야! 조연출."

"네, 감독님."

"시청에 전화해서 시간 연장 부탁해. 아니다. 네가 직접 가서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연장해 와. 알겠지?"

"네, 넵. 알겠습니다."

남자 배우의 부재로 촬영이 중단되고 말았다.

그리고 잠시 후, 여리여리한 그림자 하나가 내게 다가왔다.

"저기요. 혹시 한국 분이세요?"

반짝반짝 눈빛을 빛내고 있는 여인, 바로 레드핑크의 은수였다.

"그거 쉐즈 X도 맞죠?"

그녀의 시선이 차 변호사가 주고 간 선물에 정확히 꽂혀 있었다.

"매니저 언니가 갔었는데 솔드 아웃이라고 하더라고요. 정말로 먹고 싶었는데 말이죠. 그래서 말인데 그거 저 주시면 안 돼요?"

레드핑크의 은수가 고양이 눈을 하며 내게 부탁했다.

그녀는 정말 예뻤는데 우선 청순미를 느낄 수 있었고 아직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섹시함까지 은근히 풍기는 분위기였다.

아니! 마카롱 따위가 뭐라고 세계적인 한류 스타가 부탁을 하는 걸까?

의아한 마음이 들었지만 동시에 재밌게 느껴졌다.

난 그녀의 부탁을 들어줄 것처럼, 그녀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지만 거절의 뜻을 밝혔다.

"네. 안 돼요."

"감사해.... 에? 뭐라고요?"

"못 준다고요."

순간 그녀의 입술이 세로로 벌어졌다.

"아니! 두 상자나 갖고 계시잖아요. 설마 저한테 하나 주는 게 아까우신 거예요?"

"당연히 아깝죠. 더욱이 우린 오늘 처음 본 사이잖아요. 막말로 저 아세요? 제 이름이 뭔지, 제가 어디 사는지 알아요?"

"그건 그렇지만."

그녀는 살며시 입술을 깨물었는데 그 모습이 무척이나 귀여웠다.

"에이~~ 그러지 말고 하나만 주세요. 파셔도 되고요. 네? 제발~~요."

"싫거든요."

나는 마카롱 하나를 상자에서 빼내어 입에 물었다.

"앜!"

예상치 못한 행동에 깜짝 놀랐는지 그녀의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저 조그만 얼굴이 큼지막하게 변해 버린 눈에 가릴 정도다.

'쿄쿄쿄! 왜 이렇게 재밌지?'

아까도 느꼈지만 이거 정말 무지하게 재밌었다.

"왜요, 그렇게 먹고 싶은 거였어요? 그럼 이거라도 먹을래요?"

한 입 베어 먹어 반쯤 남은 마카롱을 권하자 그녀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화가 난 것일까?

순간 그녀가 마카롱 상자를 향해 잽싸게 손을 뻗었다.

'호오! 꽤 노력한 건가?'

마카롱 상자를 손에 넣을 거라고 예상했는지 그녀는 득의 어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감히 나를 상대로 상자를 손에 넣을 수 있었겠는가?

어림도 없지.

그녀의 손은 애꿎게도 허공을 가르고 말았다.

"지금 체조하는 거야?"

"네?"

"아니, 갑자기 손을 흔들어서 말이야."

내가 태연한 표정으로 마카롱 상자를 흔들어 보이자 승부욕을 자극한 모양이다.

"에잇! 에잇! 에...잇!"

그녀는 마카롱을 향해 계속해서 손을 뻗었다.

하지만 결코 잡을 수 없었고 그렇게 몇 번 더 시도했다가 결국 포기했는지 털썩하고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억울한 표정과 함께 그 큰 눈망울을 내게 향했다.

'어, 어?'

이런 왠지 울음이 터질 것 같은 분위기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오히려 당황한 것은 나였다.

반갑기도 하고 가볍게 장난을 쳤을 뿐인데 눈물까지 보이다니 미안한 기분마저 들었다. 아무래도 일이 더 이상 커지기 전에 수습해야겠다.

"레드핑크 은수 맞죠?"

"왜요?"

"제 여동생이 그쪽 팬이라고 하더군요."

붉어진 눈망울에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지기 직전 마카롱 상자를 내밀자 거짓말처럼 분위기가 스르르 풀렸다.

"사인 한 장 해 줄래요?"

그녀는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펜을 들었다.

"뭐라고 쓰면 돼요?"

"존경하는 선우 오빠의 하나뿐인 여동생 최혜진 양에게. 레드핑크 은수가!"

"오...빠요?"

그녀의 물음에 나는 느긋한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21살이라고 들었는데, 그럼 내가 오빠 맞아요."

이번에는 그녀가 나를 흘겨보았다.

"왜요? 마카롱 먹기 싫어요? 그럼 뭐."

"아니에요, 오빠. 저 마카롱 먹고 싶어요."

마카롱 상자를 뒤로 빼려 하자 그녀의 입에서 오빠라는 호칭이 찰싹 달라붙었다.

그러곤 내가 불러 준 그대로 종이에 적었다.

"자, 여기요."

"그래요. 고마워요."

나는 마카롱 상자와 사인을 교환했다.

"호호호호~~."

아이고! 뭐가 그리 신이 났는지 마카롱 상자 하나에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우웅! 아들. 어디야? 아버지는 쇼핑 다 끝났다.]

마침 아버지에게 문자가 왔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어느새 5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덕분에 무료하던 시간을 재밌게 보낸 것 같았다.

나는 마카롱을 입에 넣으며 행복한 미소를 보이고 있는 은수를 슬쩍 바라본 후,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나 출구를 향해 걸어갔다.

"저기요."

"...."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나를 향해 묘한 눈빛을 보내고 있는 그녀가 보였다.

'저기가 아니고 오빠라고.'

나는 말을 내뱉지 않고 이렇게 입 모양을 선보였다.

"풉!"

그녀는 입 모양을 이해한 듯, 가볍게 실소했고 난 그녀를 향해 기분 좋은 미소를 보이며 유유히 사라졌다.

그날 밤.

핸드백이며 구두며 물건을 잔뜩 사 온 여동생이 마치 패션쇼에 나가는 모델처럼 벌써 두 시간째 자체 품평 중이다.

아니, 죄다 입어 보고 신어 보고 결정한 후에 샀으면서 왜들 저럴까?

"좋냐?"

"응. 너무 좋아. 오빠~ 이것도 예쁘지? 호호호."

"그래. 예쁘다. 예쁘니까 이제 그만하면 안 될까?"

"안 되거등요~~."

"...."

여동생이 입술을 비쭉 내밀며 거부하자 난 조용히 비밀 병기를 꺼내 들었다.

"참! 그거 알아? 오늘 뉴욕에 레드핑크가 왔더라고."

나는 태연하게 말을 이어 갔다.

"아까 낮에 은수라고, 레드핑크 멤버를 우연히 만났는데 날 보고 아주 반가워하더라."

"풉! 지금 그 거짓말을 나보고 믿으라고?"

"거짓말?"

난 은수의 사인이 적힌 종이를 슬쩍 들어 보였다.

"너 주려고 사인까지 받아 왔는데?"

"??"

여동생은 놀란 토끼처럼 동그래진 눈동자로 사인이 적힌 종이와 나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못 믿으면 어쩔 수 없지. 그냥 버려야겠다."

"앜! 오빠야. 아니! 오라버니. 부디 소녀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패션쇼를 그만하겠는가?"

"물론이옵니다, 오라버니."

잠시 후,

은수의 사인을 획득한 여동생의 질문 공세가 시작되었다.

내가 오른쪽으로 가면 오른쪽으로 따라오고 내가 왼쪽으로 움직이면 쪼르르 왼쪽으로 달려왔다.

"오빠, 은수 언니랑 무슨 관계야?"

"뭐가?"

"아니! 어떻게 은수 언니랑 아냐고?"

"친한 동생이라니까."

"진짜? 정말 두 사람이 사적으로 아는 사이야? 아앙! 제발 말 좀 해 줘. 대체 무슨 사이냐고!"

"음! 그건... 말이야...."

나는 여동생의 질문에 묘한 미소를 보였다.

"이건 너만 알아야 해. 아무한테도 얘기하면 안 된다고. 약속할 수 있어?"

"응. 할 수 있어."

-꿀꺽!

나는 주변을 살피며 은밀하게 귓속말을 했다.

"비...."

"...비?"

"...밀."

"비...밀? 아이 씨! 오~빠!!"

왜 이럴까?

여동생만 보면 꼭 이렇게 골려 주고 싶었다.

"오빠. 오빠, 오~빠아아아! 아잉! 진짜 궁금하단 말이야. 오빠! 오빠~~~."

은수와의 관계를 말해 달라며 졸래졸래 따라오는 여동생을 향해 나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유행했던 90년대 노래를 소환했다.

X정화 누나와 X누션이 부릅니다.

"나에게 말해 줘. 사실을 말해 줘."

"앜!!"

제71화

71화 마스터 최(1)

<은수의 일기>

오늘은 화보와 CF 촬영이 있는 날이었다.

3집 출시를 앞두고 극강의 다이어트를 하고 있었기에 말하지 않았지만 무척이나 예민한 날이기도 했다. 그런데 안 좋은 일은 연속으로 닥친다는 말처럼 쉐즈 X도 마카롱이 모두 팔렸다는 매니저 언니의 문자를 받았다. 그건 절망이었다.

장염에 걸린 남자 배우 덕에 촬영도 멈춰 기분 전환을 할 겸 카페에 들어갔는데 마침 한국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사실 그가 보였다는 말보단 그가 가지고 있던 쉐즈 도도 마카롱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는 말이 맞았다.

처음엔 가벼운 마음이었다.

그런데 그는 달랐다.

미모도, 애교도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퉁명했다.

그런 남자는 처음이었다.

왠지 화가 나 나도 모르게 능력을 사용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었다.

그리고....

오빠라니! 돌이켜 생각해 보니 어이가 없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솔직히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PS. 처음 본 사람이 분명한데 왠지 어디선가 꼭 만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 * *

이와 같은 시각,

CIA 브람스 국장과 헌터 관리국 그랜트 국장이 White House에 도착했다.

"최선우 헌터에 대한 정보입니다."

브람스 국장은 커다란 화면을 띄워 놓고 최선우에 대한 보고를 시작했다.

그가 언제 어디서 태어났고 어떻게 살았는지 그의 일생이 세세하게 그려졌다.

"국립 헌터 아카데미에 입학한 후, 성적이 상승 곡선을 그렸지만 연구소를 다녀온 후 문제가 발생합니다."

"연구소?"

"네, 대한민국 소재, 국립 마석 연구소입니다."

앞에 보고가 애피타이저였다면 이제부터 메인 요리가 시작되었다.

"연구소 폭파 사건 이후, 최선우의 학업 성적이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교우 관계 역시 틀어졌고요.... (중략)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 F급 헌터로 활동했었는데 몇 년 전 던전에서 실종...."

CIA는 브람스 국장의 진두지휘 아래 최선우에 관한 다양한 정보들을 취합하여 그가 왜 한국이 아닌 미국에서 검사를 받은 것인지에 대해 분석하였고 그중 가장 높은 확률의 결론을 도출하였다.

"복수?"

"그렇습니다."

브람스 국장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의 실종에 황기택이 관련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로 인해 복수의 대상이 대화 그룹까지 확대될 가능성이 크고요."

"그렇게 판단하는 이유는?"

"얼마 전 뉴욕 월가에 최선우의 이름으로 거대 자본의 사모 펀드 회사가 설립되었습니다. 뭔가 공교롭게도 말입니다."

"흐음!"

"만약 그가 단순히 무력을 통해 복수하려 했다면 일을 이렇게 복잡하게 만들지 않았을 겁니다."

"일리가 있군. 우리가 취해야 할 스탠스는?"

"그가 미국을 선택했으니 당연히 도와줘야죠."

맥더프 대통령이 물었다.

"완벽한 미국인이 될 가능성은 없나?"

"이중국적을 허용해 달라고 한 것을 보면 한국을 버릴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그건 한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그 특유의 민족성으로 파악됩니다."

"한국인들의 민족성이야 유명하지."

"가장 좋은 방법은 미국인과 혈연관계로 묶이는 거죠. 현재까지 사귀는 사람이 없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차후 우리에게 등을 돌릴 가능성이 있는가?"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성향을 판단해 볼 때, 우리가 먼저 그를 배반하지 않는 한 3% 미만이라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럼 가능성이 거의 없겠군. S급 헌터를 우리가 왜 배신하겠나! 후후후!"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들이 나누고 있는 대화는 진실에 거의 근접해 있었는데 우리는 어째서 미국이 왜 세계 최강국인지 알 수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나이 X, 성별 X, 이름 X의 새로운 S급 헌터가 미국에 등장했다는 소식이 은밀히 각국 정보부에 퍼지기 시작했다.

[중국]

"F급 헌터가 S급을 받았다고? 그게 정말이야?"

"네, 국무부 고위 관료를 통해 알아냈는데 사실이라고 확인해 주었습니다."

"맙소사! 그의 이름은, 나이는?"

"이름, 나이, 성별, 모든 것이 베일에 가려져 있습니다."

"젠장! 왜 하필이면 미국이야!!"

[영국]

"그럼 그자에 대한 정보가 전무하다는 건가요?"

"그건 아닙니다. 일단 그를 지칭하는 이름을 알아 왔습니다."

영국 정보부 소속 특급 요원이 라 적힌 이름을 내밀었다.

"마스터 쵸이. 동양인인가?"

"그 이름이 사실이라면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군."

[일본]

"칙쇼! S급, S급이라니!"

"진정하시지요. 그래도 중국이나 한국이 아닌 것이 어딥니까?"

"야마도리 대좌의 말이 맞네. 그만 진정하게."

일본 내각의 총책임자 모리요시 총리는 관방대신이자 친구인 마사오 장관의 말에 냉정을 되찾았다.

"야마도리 대좌!"

"하이!"

"지금 이 시간 후로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정보원을 미국에 뿌려 그자에 대한 정보를 알아 오게. 돈이라면 얼마를 뿌려도 좋아. 대일본 제국의 미래를 위해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보인다면 그자를 반드시 우리 측으로 회유해야 하네. 알겠나?"

"네, 총리대신 각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사람들은 혜성처럼 나타난 S급 헌터에 관심을 보였다.

그가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무슨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말이다.

이와 같은 시각,

헌터 관리국의 그랜트 국장이 짙은 선글라스를 착용한 여인과 함께 나타났다.

"반갑습니다, 마스터 최."

"오랜만입니다, 그랜트 국장님."

"이분은 미합중국 올리비아 국무장관이십니다. 저희 관리국을 책임지고 계시죠."

올리비아 국무장관이라, 그녀는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포스를 풍기고 있었다.

"그렇군요. 만나 뵙게 되게 반갑습니다, 올리비아 장관님."

"저도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S급 헌터를 직접 뵈니 영광이군요."

가까이에서 직접 대화를 나눠 보니 확실하게 알겠다.

이 여자 각성자다.

한데 일반적인 헌터에 비해 뭔가 특이한 마나 감응이 느껴졌다.

'정신 마법인가?'

태허무극심법의 현묘한 기운이 교묘하게 뇌리를 파고들고 있는 마나 감응에 방어했다.

한편으론 이해가 됐다.

각성자, 그중에서도 특히 헌터를 관리하는 이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헌터들의 성격이 개차반에 가깝다고 말이다. 물론 모든 헌터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힘에 취해 각종 범죄를 저지르는 헌터, 즉 빌런(Villein)도 있다.

무심코 던진 돌멩이에 개구리가 맞아 죽는다는 말처럼 헌터가 돌멩이를 던지면 그 돌에 맞은 일반인은 십중팔구 죽는다.

이로 인해 헌터 관련 법률이 제정되고 공권력의 힘이 강력해졌지만 작금의 세계는 힘의 논리가 우위에 있는 세상, 명백한 범죄가 아닌 이상 헌터에게 중형이 내려지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막말로 민간인을 죽여도 몬스터 토벌 중에 일어난 불가항력적인 일이었다고 하면 빌런이 아닌 이상 명백한 증거가 없다면 처벌을 받지 않았다. 다수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소수의 희생을 용인하는 것이다.

일부 정치인과 시민 단체가 이를 문제 삼았지만 힘없는 메아리에 불과했다.

"말씀하신 서류입니다."

올리비아 장관이 내게 다가와 서류를 내밀었다.

난 그것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한 장 한 장 서류를 넘길 때마다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내가 요구한 모든 사항이 수용됐기 때문이다.

몇 가지 자잘한 조항은 차치하고 먼저 나를 포함해 우리 가족에게 미국 시민권과 함께 이중국적이 허용되었다. 그리고 여동생이 원한다면 미국 아이비리그에 속해 있는 대학에 언제라도 입학할 수 있게끔 조치를 취해 주었다.

물론 일방적으로 받기만 한 것은 아니다.

나 역시 게이트 브레이크와 같이 감당할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할 시 개입을 약속했다. 참고로 내가 계약서에 사인을 끝내자마자 맥더프 대통령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심지어 내가 응하기만 하면 내일 아침 플라자 호텔로 직접 찾아오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건 부담이 되어 정중하게 거절했다.

사실 내가 현 미국의 대통령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스터 최!

"네, 미스터 프레지던트."

-미합중국의 시민이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미스터 최의 업적은 미합중국과 대한민국의 영광이며...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마스터 최를 조만간 백악관 만찬에 초대하겠습니다. 꼭 참석해 주십시오.

"예! 알겠습니다. 전화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세계 최강국의 대통령이다.

나는 최대한 예의를 다해 답했다.

-그리고 이건 여담이지만 말입니다. 혹시라도 누군가를 혼내 줄 생각이라면 언제라도 연락 주십시오. 우리 미합중국은 언제나 당신의 편입니다.

"...!!"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지만 역시 미국이다.

그 짧은 시간에 나와 누군가의 관계를 추정해 낸 것 같았다.

"제안은 고맙지만 그건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물론 도움이 필요할 일이 생긴다면 연락드리겠습니다."

-하하하! 네. 옳은 말씀입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맥더프 대통령과 통화를 끝낸 직후,

난 올리비아 장관을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올리비아 장관님. 오늘은 처음이라 봐 드리겠지만 이제 그만하시죠."

그 순간 끊임없이 공격을 시도하던 정신 감응이 멈췄다.

!!

잠시 정적이 오갔다.

그랜트 국장의 어리둥절한 표정이 보인다. 그와 반대로 올리비아 장관은 애써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이 조잡한 마력, 안 치울 겁니까?"

의지가 일어나자 태허무극심법의 기운이 그녀의 정신 마법을 단번에 소멸시켰다.

"헉!"

사실 그녀의 기운이 어찌나 은밀했는지 태허무극심법의 현묘한 기운이 아니었다면 나 역시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죄, 죄송합니다."

그제야 올리비아 장관이 허리를 숙여 사과했다.

"명백한 제 잘못입니다. 단지 마스터 최의 성향을 알아보려 했는데....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기분이 가히 좋지 않았지만 내 입으로 봐주겠다고 했으니 이쯤에서 끝내기로 했다.

대신 궁금한 점을 물어봐야겠다.

"지금까지 몇 명이나 실패했습니까?"

"제가 만나 본 헌터들 중에 S급 헌터는 모두 실패했습니다. 트리플 A급은 반반이었고요."

"몇 명이나 만나 보셨는데요?"

"최선우 마스터를 포함해 세 명입니다."

"죽지 않은 게 다행이네요. 아니면 그들이 눈치채지 못했든가."

"...!!"

올리비아 장관은 지나가듯 흘린 말에 마치 정곡을 찔렸다는 눈빛을 보였다.

아마도 그녀의 스킬은 상대방의 능력치와 성향을 파악하는 종류인 것 같다.

"정보 계통에선 꽤 유용하겠네요."

나는 무표정을 유지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좀 쉬고 싶네요."

"아,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제72화

72화 마스터 최(2)

세계 유명 도시에는 차이나타운이 있다.

미국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뉴욕에도 로어 맨해튼이란 곳에 차이나타운이 자리 잡고 있고 말이다. 그런데 뉴욕 퀸즈 플러싱에 차이나타운보다 더 차이나타운 같은 곳이 있다. 본래는 코리아타운이었는데 언제부턴지 중국인들이 몰려들어 이제는 완전 중국화된 곳이다.

올리비아 장관, 그랜트 국장과의 미팅 후,

난 퀸즈 플러싱을 찾았다.

이곳에 세계 최대의 블랙마켓 경매장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 좀 보라, 헤."

"물건 좋다. 헤~."

"우리 꼬치 맛있다. 헤~~."

왁자지껄, 시장 바닥과 같이 붐비는 거리를 지나 허름해 보이는 건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3, 4, 5층을 함께 누르라고 했지?'

우우웅!

지나가 가르쳐 준 대로 버튼을 누르자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3, 4, 5층이 아닌 버튼에 존재하지 않는 건물 지하로 말이다.

'땡'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마치 예술품 경매장의 양대 산맥이라 불리는 크리스티 경매장에 온 것과 같은 첫인상을 받았다.

"오~ 멋진데!"

나는 복도를 따라 걸어가며 예술품을 감상하는 척, 태연하게 주변을 살폈다.

지하 공동에 마련된 블랙마켓 경매장, 입구부터 주변을 경계하는 눈동자들이 있다.

검은색 정장을 빼입고 무선 이어폰을 착용한 자들, 경매장이란 특성상 가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헌터들이다.

경매장에 모인 사람들에게서 마나의 향기가 느껴졌다.

하급, 중급, 간혹 상급 헌터의 기운도 느껴졌는데 일반인보다 그 숫자가 훨씬 많았다.

'아! 그렇구나.'

생각해 보니 일반인들의 숫자가 적은 것이 당연했다.

블랙마켓의 특성상 판매자나 구매자가 헌터일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나는 실제 경매가 이루어지는 경매장 내부로 들어가기 위해 주최 측에서 제공하는 가면을 착용했다.

내가 선택한 것은 늑대가 그려진 베네치아풍 가면이었다.

"오늘 꽤 좋은 물건들이 들어왔다고 하던데?"

"맞습니다, 회장님. VIP룸으로 제가 모시겠습니다."

VIP 룸이라,

좋은 물건이 들어왔다는 말에 나 역시 흥미가 동해 저들이 사라진 방향으로 걸어갔다.

[VIP 경매장]

헌터로 보이는 두 명의 사내가 경매장의 입구를 막고 있다.

호오! 느껴지는 기운이 사뭇 다르다.

이건 최소 상급(B급) 헌터다.

"초대장이 있으신가요?"

"초대장이요?"

내가 반문하자 그가 다시 물었다.

"혹시 판매자십니까?"

"그건 아닌데요."

"죄송하지만 그럼 입장이 불가능합니다."

"왜죠?"

"이곳은 VIP를 위한 프라이빗 경매장입니다. 판매자가 아닌 이상 초대장이 없으면 입장이 불가능합니다. 1층으로 가시면 일반 경매장이 있습니다."

"...."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헌터증을 내밀었다.

헌터 관리국에서 공인한 마스터 헌터증이면 VVIP는 되지 않을까!

"이걸로 안 될까요?"

"헉! 마, 마... 마스터."

순간 S급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찍힌 헌터증이 지갑에서 나오자 두 사람의 얼굴이 굳어졌다. 특히 내게 입장이 불가능하다고 말한 당사자는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드, 들어가셔도 됩니다. 아니! 제가 직접 룸 넘버 09로 모시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룸 넘버 09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알지 못했다.

"30억. 30억이 나왔습니다. 또 없습니까? 그럼 카운트 들어가겠습니다. 하나, 둘, 셋!"

탕탕탕!

"네~ 30억에 낙찰되었습니다."

방에 들어가자 가장 먼저 정면으로 펼쳐진 무대가 눈에 들어왔다.

사회자로 보이는 남성이 무대 중앙에 서서 경매에 나온 물건을 소개하며 가격을 올리고 있었는데 방과 방 사이엔 칸막이가 있어 개인적인 프라이버시(Privacy)가 보장되었다.

"5분간 휴식을 취하고 다음 물건을 소개해...."

방금 팔린 물품이 내려가고 새로운 물품이 무대 위로 등장한다.

다음 경매를 준비하는 것이다.

"이번에 출품된 물품은.... 오! 이런!! 9번 룸에 불이 들어왔군요. 귀한 손님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웅성웅성!

9번 룸에 불이 들어왔다는 사회자의 말에 잠시 소란이 일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나를 향했기 때문이다.

나는 뜻하지 않게 관심을 받자 떨떠름한 마음에 경매장 직원을 호출했다.

"헤헤. 무슨 용무가 있으십니까?"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용무를 밝혔다.

"방 번호에 특별한 뜻이 있나?"

"네?"

"사회자의 말도 그렇고, 사람들이 날 주목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아, 그, 그건...."

직원은 내 질문에 당황했지만 이내 침착함을 되찾고 답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이곳 경매장에는 총 99개의 방이 있는데 10번부터 99번은 사실 큰 의미가 없다고 했다.

그런데 룸 넘버 1번부터 9번은 그 사정이 달랐다.

전 세계를 상대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만이 사용할 수 있는 방이라는 것이다. 즉 세상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부자나 강력한 힘을 가진 헌터만이 사용할 수 있다고 했다.

바로 S급 헌터인 나처럼 말이다.

그제야 비로소 S급 헌터증을 제시했기에 벌어진 사달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군."

"다른 필요한 것이 있으신지요?"

"경매 물품이 나온 브로슈어와 시원한 콜라 한 잔 부탁하지."

"알겠습니다."

나는 직원이 가지고 온 브로슈어를 살펴보며 경매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사회자의 자연스러운 진행 아래 각종 아이템을 비롯해 마법이 부여된 장신구가 경매에 나왔다. 그리고 얼마 뒤 내 흥미를 자극하는 품목이 나왔다.

그것은 바로 마법 처리된 계약서와 다양한 종류의 스킬 북이었다.

"이것은 오스만 제국에서 만들어진 마법 계약서입니다. 저주 마법이 걸려 있어 상대방이 계약을 어길 경우 평생 고통을 받게 됩니다. 사업체를 운용하시는 분들에게 있어서 아주 유용한 아이템이라 할 수 있죠. 시작 가격은 깔끔하게 장당 1억. 저희가 준비한 물량은 총 100장으로 10장씩 묶어서 판매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시선 고정하십시오. 지금 바로 시작합니다."

이와 같은 시각,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최규용의 집에 들어왔다.

"자! 시작해!"

"네!"

"종이 하나, 수건 하나 버리지 말고 그대로 챙겨."

"알겠습니다."

그들은 명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어? 이봐요. 당신들 누구요?"

푸른 눈을 가진 사람들이 주인 없는 집에 몰려와 짐을 싸고 있었으니 누가 봐도 이상한 광경이다.

"지금 주인도 없는 집에서 뭐 하는 겁니까?"

호기심을 참지 못해 이웃 주민이 물었다.

"보시다시피 이삿짐을 싸고 있습니다."

"이삿짐이요?"

"네. 집주인이 최규용 씨 맞죠?"

"이름은 맞는데."

"최규용 씨를 포함해 가족 모두가 미국으로 이민을 가셨습니다."

"미국으로 이민이요?"

"네."

택시 운전하던 사람이 가족과 함께 이민을 떠났다고 한다.

그것도 미국으로 말이다!

김상식 씨는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집에 돌아오자마자 경찰에 신고했다.

이민이라니, 더욱이 동남아도 아니고 미국으로 말이다.

"거기 경찰서죠?"

-....

"네, 네. 아무래도 수상해서요. 빨리 순찰차 좀 보내 주세요. 여기 주소가...."

얼마 후,

신고를 받고 순찰차 한 대가 출동했다. 하지만 경찰관은 푸른 눈의 남자와 잠시 대화를 나눈 직후 그를 향해 경례하며 다시 순찰차에 탑승했다.

"선배님, 저 사람들이 누군데 경례까지 하셨어요?"

"쟤들, 미국 대사관 소속이야."

"대사관이요?"

"그래."

"근데 쟤들이 왜 이삿짐을 싸요?"

"그건 나도 모르지. 그냥 쟤들 하는 일에는 신경 쓰지 않는 게 상책이야. 괜히 다친다."

"네, 선배님."

* * *

"13번 방, 낙찰!"

"5번 방, 낙찰!"

"44번 방, 낙찰!"

"89번 방, 낙찰!"

마법 계약서, 일견 흥미가 동한 물건이었으나 구매하지 않았다.

내가 아틀란티스 대륙에서 직접 구하면 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계약서에는 쇠약과 부패와 같은 하급 저주 마법이 걸려 있었다.

원가를 따지면 한 장에 천만 원쯤 할 것 같은데 저걸 장당 1억에 살 이유가 없는 것이다.

대신 빈손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난 블랙마켓 경매장에 출품된 물품 중 실드 스킬에 관련된 것을 모조리 구매했다.

"저희가 사용하는 계좌입니다. 대금은 이곳으로 보내 주시면 됩니다."

"그러죠."

계좌 이체를 완료하자 경매장 직원이 내가 구매한 물건을 가지고 왔다.

나는 수십 개에 이르는 실드 스킬을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손님, 혹시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으신지요."

직원이 방에서 나가려는 나를 붙잡았다.

"무슨 일이죠?"

"대표님께서 손님과 인사를 나누고 싶어 하십니다."

"대표님이라면?"

"미국 블랙마켓을 총괄하는 분입니다."

"...!"

블랙마켓은 크게 미국, 유럽, 아시아 마켓으로 구분되어 있고 각각의 대륙을 담당하는 3인의 체제로 이루어져 있다고 들었다. 듣자 하니 이들 3인은 모두 베일 속에 가려져 있어 누구도 그 정체를 알지 못한다고 했는데 이들 중에 한 사람이 날 보고 싶다고 한다.

하지만.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 힘들 것 같군요. 다음에 보도록 하죠."

"...?!"

선약이 있냐고? 아니다. 사실 뻥이다.

왜 뻥을 쳤냐고?

지가 블랙마켓 대표면 대표지, 어디서 오라 가라냐!

S급 헌터가 그렇게 쉬운 존재인가?

솔직하게 말해 쉽게 보이기 싫어서 선약이 있다고 구라를 쳤다.

"아... 네...."

직원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지만 내가 선약이 있다는데 어쩌겠는가?

"다음에 또 들를 테니 그때 보자고 하죠."

"알겠습니다."

나는 다음을 기약하고 방에서 나왔다.

순간 나를 향한 사람들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 9번방을 차지한 사람에 대해 꽤나 궁금한 모양이다.

세상을 움직일 만한 돈을 가진 회장인지 아니면 힘을 가진 헌터인지 말이다.

정체를 알려 줄 생각이 없었지만 날파리가 꼬이는 건 더 싫다.

우우웅!

조용히 기세를 일으키자 내게 말을 붙이고 싶어 다가오던 이들의 발걸음이 멈췄다.

"이게 무슨!"

"...헠!"

"으허헉!"

또한 반경 3미터 내에서 알짱거리던 날파리들 역시 사라지고 말았다.

난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유유히 블랙마켓을 빠져나갔다.

경매장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온 직후,

아공간에서 실드 스킬이 적힌 마법서를 꺼내 두 손으로 찢었다.

-[띠링, 실드 스킬을 익힙니다.]

-[...흡수됩니다.]

-[띠링, 실드 스킬을 익힙니다.]

-[...흡수됩니다.]

-[띠링, 실드 스킬을 익힙니다.]

-[...Master에 흡수됩니다.]

-[띠링, 실드 스킬을 익힙니다.]

-[...흡수됩니다.]

-[띠링, 실드 스킬을 익힙니다.]

-[...흡수됩니다.]

-[띠링, 실드 스킬이 태허무극심법의 영향을 받아 A급으로 진화합니다.]

<스킬 정보>

이름 : 반탄지기(反彈之氣)

등급 : A급

설명 : 5서클 이하의 마법과 팔라딘의 검기를 방어한다.

-[띠링, 실드 스킬을 익힙니다.]

-[...흡수됩니다.]

-[띠링, 실드 스킬을 익힙니다.]

-[...흡수됩니다.]

-[띠링, 실드 스킬을 익힙니다.]

-[...흡수됩니다.]

수십 번에 이르자 마침내 기다리던 메시지가 들려왔다.

-[띠링, 실드 스킬이 S급으로 진화합니다.]

<스킬 정보>

이름 : 호신강기(護身剛氣)

등급 : S급

숙련도 : Lv. 1

설명 : 신체를 보호하는 강기의 일종. 호신강기를 파괴하는 전문적 무공이나 신병이기가 아니면 어지간해서 깨지지 않는다.

이와 같은 시각.

부하의 보고에 블랙마켓의 총수 로자니아가 눈썹을 치켜들었다.

"뭐? 내 초대를 거부했다고?"

"그, 그게 선약이 있다고 해서 말입니다."

"개소리하네. 없던 약속을 막 만들어 낸 것 아냐?"

"그건 저도 모르지요. 그래도 다음에 또 오겠다고 했습니다. 그땐 시간을 내기로 약속했고요."

"쳇."

로자니아는 마음에 들지 않는지 미간을 찌푸렸지만 곧 표정을 회복했다.

"좋아. 선약이 있었다니 어쩌겠어. 다음을 기약해야지, 뭐."

그녀가 수하에게 말했다.

"그자가 실드 스킬을 사 갔다고 했지?"

"네, 총수님."

"혹시 모르니까 대량으로 확보해 놔."

"알겠습니다."

제73화

73화 마스터 최(3)

[미국 헌터 관리국 VIP 대기실]

마스터 최, 코드 네임 청운.

새롭게 등장한 미국의 S급 헌터.

나는 가만히 서서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을 바라보았다.

푸른색 구름이 새겨진 마스크를 착용한 탓인가?

마치 히어로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과 비슷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똑똑똑!

이때 관리국 직원의 음성이 들려왔다.

"마스터 청운, 준비되셨나요?"

"네, 준비됐습니다."

내가 마스크를 착용한 이유는 정체를 감추기 위해서다.

언젠가 복수의 화살이 과녁에 도달했을 때 마스크를 벗을 생각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점은 미국 정부와 사전에 교감한 내용이었다.

"사람들이 많이 왔나요?"

"물론입니다. 아주 엄청나게 모였습니다."

"그렇군요."

기자회견장으로 발길을 떼려는 순간 관리국 직원이 내게 뜻밖의 부탁을 했다.

S급 헌터를 만난 것이 일생일대의 영광이라며 평생의 추억으로 간직하고 싶다고 했고 난 그의 부탁을 흔쾌히 수락했다.

"고작 악수 가지고 되겠어요?"

"네?!!"

"핸드폰 있으면 꺼내세요. 기념으로 사진도 한 방 찍죠."

"가, 감사합니다."

나는 관리국 직원의 극진한 안내를 받고 회견장으로 향했다.

'워워~ 대체 얼마나 온 거야?'

전 세계에서 몰려온 기자들 덕분에 회견장은 이미 발 들일 틈이 없었다.

"마, 마스터 청운이다."

"어디? 어디?"

"저기 봐."

"와아! 미국의 영웅!"

"저자가 바로 새로운 S급 헌터다."

연단으로 올라갈 때 주변에 포진된 기자들이 자지러지는 소리를 지르는 동시에 미친 듯이 카메라 셔터를 눌러 댔다.

-파파밧! 파파파밧!

"마스크를 쓰신 이유가 있나요?"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사생활 보호 차원이죠."

"청운이 본명입니까?"

"닉네임입니다."

"본명을 밝힐 수 있나요?"

"나중에요."

"꽤 젊다고 들었습니다만 나이가 어떻게 되시나요?"

"20대 초반입니다."

-웅성웅성!

순간 기자석이 크게 들썩였다.

20대 마스터의 등장은 그만큼 대단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마스터 청운께 질문하겠습니다. 세간에는 당신의 실력에 대해 의구심을 표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혹시 들어 보셨습니까?"

"표현의 자유가 있는 법이니까요."

"그렇다면 그런 의혹을 없애기 위해 당신의 힘을 보여 주실 수 있을까요?"

"지금 여기서요?"

"네."

기자회견이 순조롭게 진행되던 중 발언권을 얻은 기자가 시청자들을 위해 힘을 보여 달라고 요청했다.

"음. 나쁘진 않은 생각인데, 지금 이 자리는 적당한 장소가 아닌 것 같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보여 드리죠."

"설마 피하시는 겁니까? 자신이 없다면 뭐 어쩔 수 없지만 이해가 되진 않네요."

"뭐라고요?"

기자는 비릿한 미소와 함께 도전적인 시선을 보냈다.

"마스터가 꽁지를 빼다니!"

나직이 말했지만 저건 나 들으라고 한 말이다.

더욱이 지금 인터뷰는 전 세계에 생방송으로 진행되고 있었는데 만약 여기서 꼬리를 내린다면 한마디로 국제적인 병*이 되는 거였다.

-기자의 도발!

-용감한 거야, 무모한 거야?

-근데 기자 말도 일리가 있음. 나도 궁금함.

-기자회견장에서 어떻게 보여 줘?

-싸워라. 싸워라. 이기는 편 우리 편.

-미쳤다. ㅋㅋㅋㅋ

-오! 꿀잼.

당연하게도 채팅 창에 불이 붙어 버렸다.

'호오, 그런 건가?'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이렇게 대놓고, 그것도 기자회견장에서 도발을 감행할 줄은 몰랐다.

좋다.

저렇게 대놓고 부탁하는데 그렇다면 기꺼이 응해 줘야지.

나는 기자인 척 가장하고 있는 이들 중에서 나를 향해 거친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세 명을 확인했다.

"좋습니다. 그럼 시간 낭비하지 말고 한 번에 가죠. B27번, D16번 그리고 F31번."

"네? 지금 그게 무슨...."

난 당황해하는 기자를 향해 싸늘해진 음성으로 반문했다.

"설마 내 말뜻을 몰라서 묻는 겁니까?"

"...!!"

"어쭙잖은 변명 따윈 듣기 싫고, 어떻게 할 겁니까? 붙어 아님 말아?"

의외의 사태에 일순 회견장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장내에 모인 기자들은 숨을 죽인 채 B27, D16, 그리고 F31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고 대번에 상황을 짐작한 모양이다.

눈치는 빨라 가지고~

스윽!

사람들의 시선이 몰리자 B27을 선두로 D16과 F31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판을 깔아 줬으니 한번 놀아 볼까요?"

"마스터가 원하신다니 어울려 드려야죠."

처음 의도와는 다르게 S급 헌터의 실력을 확인하는 장으로 변질되자 오히려 시청률이 급상승하기 시작했다.

-헐! 대박!

-자신감 오지고요.

-어!! B27의 남자. 나 저 남자 알아. 벌목꾼 칼 말론이 분명해.

⤷What??

⤷벌목꾼 칼 말론이면 더블 A급 헌터 아니에요?

⤷맞아요.

실시간 생중계 덕에 시청자들의 댓글이 빠르게 치고 올라왔다.

-님아, 언제 적 벌목꾼을 얘기하는 겁니까? 칼 말론은 트리플 A예요.

-좌측에 있는 동양인 남자, 오소드 마한드라입니다.

⤷그림자 사냥꾼!

-와우, 저 야시시한 옷을 입은 미녀는 누구죠?

⤷대박! 홍염의 마녀예요.

⤷홍염의 마녀요?

⤷네. 홍염의 마녀 고바야시 요시코요.

누구는 조용히 모자를 벗었고 누구는 아공간에서 마법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이 광경을 고스란히 목격한 기자들은 댓글을 빠르게 확인하며 마치 스포츠 중계를 하듯 카메라를 향해 경쟁적으로 이야기를 토해 내기 시작했다.

"벌목꾼이라 불리는 칼 말론은 현재 트리플 A급 헌터로 알려져 있으며...."

"홍염의 마녀는...."

"방금 들어온 소식입니다. 단검을 손에 쥔 헌터는 인도 빈민가 출신의 더블 A급 헌터 오소드 마한드라로 확인되었습니다."

시청률 올라가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다.

나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마치 산보하듯 회견장을 나섰다.

목적지는 대련을 위해 급조하게 마련된 야외 연무장이다.

"어서 서둘러."

"카메라 뭐 해? 어서 뛰어. 좋은 자리 맡아야지."

마치 전투를 앞둔 병사의 마음이다.

기자들은 한 장면도 놓치지 않겠다는 비장한 눈빛을 보이며 야외 연무장을 향해 뛰었다.

잠시 후,

120명의 기자와 40대의 카메라가 연무장 주변에 배치되었다.

혹시 모를 충격에 대비해 충분한 거리를 두었으며 특수하게 제작된 보호대까지 설치했다.

"일일이 상대하기 귀찮으니 셋 다 덤벼."

"우리 셋을 동시에 상대하겠다고?"

"정...말인가요?"

"내가 농담할 사람으로 보이나? 잔말 말고 시작하지!"

-일일이 상대하기 귀찮으니 셋 다 덤벼! 이야! 자신감 오지고요.

⤷명색이 S급인데 당연한 것 아녜요?

⤷님이 한번 상대해 보삼!

-어서 빨리 붙어라.

-형아. 화장실 급한데 참고 있다.

⤷님, 싸고 오세요.

⤷큰 거예요. 시간 걸려요.

⤷아하!

⤷큭! 난 아까 싸고 왔지. 아공~ 시원하다.

-이기는 편 우리 편!

그야말로 채팅 창이 터져 버렸다.

내가 비록 마스터라고 하지만 저들 세 명 역시 나름의 명성을 지닌 헌터였기 때문이다.

"기분이 별로 좋진 않군."

칼 말론이라고 했나?

그가 나를 향해 살벌한 눈빛을 건넸다.

"그건 내가 할 소리 같은데?"

나는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무극 대검을 꺼내 들었다.

-우와! 저 검 좀 봐요.

-한눈에 봐도 무게가 장난 아닐 듯.

-저게 검이냐? 청룡언월도 아니야?

-이걸로 확실해졌다. 마스터 청운은 관운장의 화신이다. 중국인 인정.

⤷지랄!

-엑스칼리버로 보임. 우리 영국인이 확실함.

⤷지랄X2

"준비됐으면 시작하지."

세 사람의 눈빛이 교차되는 순간 저들의 신형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킬 내려찍기!"

"홍염의 불꽃!"

"그림자 감추기!"

한순간 짙은 연기가 튀어 올랐다.

어디선가 불러온 열기가 코끝을 스치는 순간 나는 진각을 밞고 날아올랐다.

-콰앙!

공간을 찢고 나타난 시퍼런 검기 다발이 녀석들의 공격을 무위로 돌렸다.

하지만 남들이 보기에 꽤나 살벌한 공격이 오갔다.

연무장을 보면 알 수 있다.

마치 폭탄이 떨어진 것처럼 이곳저곳이 깊게 파이고 째지고 부서졌다.

하지만 어떤 공격이든 상대를 가격해야 소용이 있는 법.

"느리네."

결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내뱉은 일성과 함께 그들을 향해 빙긋 웃어 주자 저들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

"...!!"

하나같이 잔뜩 긴장한 모습.

난 그 사이로 터덜터덜 들어가 무극 대검을 휘둘렀다.

-퍼엉!

"윽!"

풍선 터지는 폭음과 함께 은실술을 펼친 그림자 사냥꾼 마한드라의 신형이 나타나더니 그대로 바닥에 처박혀 버렸다.

"마, 맙소사!"

여기저기서 기자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마한드라가 정신을 차리며 바닥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그의 얼굴 한쪽이 이미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젠장! 포메이션 대형!"

"좋아."

"알았어."

벌목꾼 칼 말론의 외침에 홍염의 마녀와 마한드라가 호응했다.

선두에 전사가 위치하고 센터에 암살자가 서며 후방에 마법사가 자리를 잡는다.

꽤나 귀찮은 조합이지만 지난 몇 달 동안 매일매일 죽음을 경험하게 해 준 스승님에 비하면 발톱에 낀 때만도 못했다.

나는 멋진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일부러 템포를 조절했고 녀석들은 그러한 사실도 모른 채 잔뜩 투기를 일으켰다.

벌목꾼 칼 말론이라고 했나?

트리플 A급이라는 명성처럼 셋 중에 제일 낫다.

그가 양날 도끼를 손에 쥐고 나를 향해 휘둘렀는데 도낏자루를 얼마나 세게 잡았는지 '콰득' 하는 소리가 사방에 울릴 지경이었다.

'장비야?'

생김새도 그렇고 마치 장판교에 서 있는 장비 같다.

근데 어쩌지?

미안하지만 난 조조 따위가 아니다.

관우와 유비, 거기에 여포가 와도 막을 수 없었다.

콰앙!

눈 한 번 깜짝할 사이,

굉음과 함께 벌목꾼 칼 말론의 도끼가 내 허리를 잘랐다.

"으악!"

"뭐, 뭐야? S급이라더니 허풍이었나?"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는데 이상하게도 피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벤 내 몸통이 흐물흐물 흔들리며 사라지고 말았다.

"어?"

"어, 어!!"

그 순간 벌목꾼 칼 말론의 눈이 크게 떠졌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칼, 뒤를 봐!"

홍염의 마녀의 고함 소리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벌목꾼이 서둘러 몸을 움직였지만 일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무극 대검을 쥔 오른손이 아닌 왼손에 말이다.

-퍼억!

원 펀치!

남들이 보기엔 그냥 가볍게 날린 주먹 한 방이었는데.

"어, 어?"

"저게 뭐야?"

"저렇게까지 날아간다고?"

채팅 창이 또다시 폭발했다.

-대박!

⤷미치겠다.

⤷무슨 백보신권이냐?

-그냥 가볍게 툭 친 것 같은데, 저거 실화예요?

⤷마치 무협 영화 보는 것 같아요.

⤷동감

⤷동감2

⤷동감3

-진짜 S급은 다른 듯.

⤷그러게요.

-저희 집 TV UHD인데 땀 한 방울도 보이지 않아요.

-시종일관 여유! 과연 S급

⤷A급 헌터 세 명과 싸우는데 전혀 밀리지 않음.

⤷나 오늘부터 마스터 청운 팬

⤷내가 1호 팬이거든요.

⤷크하하하! 난 이미 마스터 청운 팬클럽 만들었음.

⤷님아, 주소 링크 좀!

⤷저도 가입하겠습니다.

⤷청운 오빠, 날 가져요~~~

사람들이 놀란 이유는 단순하다.

가벼운 주먹질 한 방에 칼 말론이 10미터 이상 밀려 날아갔기 때문이다.

왜 무협 영화를 보면 그런 장면이 있지 않은가!

발은 땅에 붙어 있는데 몸이 뒤로 밀려 나가는 장면.

몸이 공중으로 날아가는 것보다 이렇게 밀려 날아가는 게 시각적인 효과를 따져 봤을 때 훨씬 더 극적이었다.

"섀도우 댄싱!"

"파이어 레인, 하늘에서 불비가 내린다."

마한드라와 마녀의 협공이다.

하늘에서 여러 개의 불덩이가 비처럼 떨어졌고 동시에 그림자에서 소리 소문 없이 돋아난 칼날이 솟구쳤다.

"태극검 벽(壁), 단단한 태극은 벽이 되어 지키리."

파파파팟!

퍼어어어어엉!

지축을 울리는 폭음과 함께 자욱한 먼지가 일어나 시야를 가렸다.

그리고 불과 몇 초 후,

현장을 생중계하고 있던 기자들의 가슴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1미터 50센티미터의 무극 대검을 손에 쥐고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당당히 서 있는 누군가의 모습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제74화

74화 마스터 최(4)

'쯧쯧쯧! 힘이 있으면 뭐 하나, 눈이 없는데!'

파괴력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것뿐이다. 저들은 파괴력에 의지해, 단지 스킬에 의한 공격에 익숙할 뿐이다.

저런 방식의 공격은 진짜배기 실력자를 만났을 경우 필패(必敗)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들의 실력이 반푼이에 불과했기에 꽤 스릴 넘치는 장면을 연출할 수 있었다.

슬슬 끝내 볼까?

이쯤이면 시청자들을 위한 영상도 충분히 뽑았을 것이다.

마침 체력을 회복한 벌목꾼 칼 말론이 공격에 합류했으니 끝장을 보기에도 적당했다.

"12연발, 나무 깨기!"

"홍염의 불꽃."

"그림자 분신술, 가랏!"

각기 세 방향에서 쏟아지는 공격 속에서 짧게 숨을 한 번 내쉬며 무게중심을 이동했다.

"태극검 흡(吸), 방(防) 부드러운 바람은 회오리가 되고 견고한 태극은 적의 공격을 막아 낸다."

순간 강력한 회오리가 발생해 그들의 공격을 한 곳으로 끌어당겨 무위로 만들었다.

"헉?"

"이게 대체!"

"마, 말도 안 돼."

놀람의 순간도 잠시,

다음 순간 검명 소리와 함께 시리도록 푸른 강기가 무극 대검에서 솟구쳤다.

"오, 오러 블레이드!"

경악에 찬 음성이 들려오는 순간,

저들 역시 마지막 기회라고 느꼈는지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한 공격을 날렸다.

"하늘 가르기!!"

"붉게 타오르는 홍염이여, 내 앞의 적을 섬멸하라. 파이널 이펙트!"

"어둠 속에서 날아드는 한 줄기 비수!"

-콰콰콰콰콰콰쾅!

귀청을 울리는 굉음과 함께 자욱한 먼지가 터져 나와 사람들의 시야를 가렸다.

"어, 어떻게 된 거지?"

"보여?"

"저기! 저기 봐!"

-웅성웅성!

먼지가 가라앉자 기자들의 눈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홍염의 마녀와 그림자 사냥꾼은 이미 의식을 잃고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마스터와 겨뤄 보다니...."

칼 말론이 처음과 180도 다른 공손한 눈빛을 보이며 힘겹게 입술을 뗐다.

"정...말... 영광...입니다. 큭!"

그 말을 끝으로 그는 가까스로 붙잡고 있던 정신을 놓고야 말았다.

"의료진! 서둘러."

칼 말론마저 꼬꾸라지자 의료진이 그들을 향해 뛰어갔고 S급 헌터의 위력을 눈앞에서 목도한 좌중은 깊은 침묵에 휩싸였다.

"...."

"...."

"...."

무슨 말로 이와 같은 강함을 평가할 수 있을까?

오죽하면 불이 난 듯 쉴 새 없이 올라오던 채팅 창마저 잠잠했다.

스윽!

나는 오연한 눈빛으로 좌중을 한 번 훑어본 다음 무극 대검을 조용히 들어 올려 등 뒤에 착용했다. 이때를 기점으로 하나둘씩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짝!

짝...짜작.

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

"와아~~."

짝짝짝!

"최고다."

짝짝짝짝!

"역시 S급 헌터다. 마스터 청운 만세!"

생방송으로 진행된 대련이 끝나고 난 후, 방송국 게시판이 터져 버렸다.

S급 헌터가 보여 준 극강의 무위에 사람들이 열광한 것이다.

그리고 내 전화기 역시 불이 났다.

쉴 새 없이 울리는 전화벨 소리. 아예 전원을 꺼 놨더니 한 무더기의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청운아. 철승이 형이다. TV에서 봤는데... 너 맞지?

-지금 미국이지? 연락 줘.

-청운 헌터. 맞죠? 저 XXX이에요.

-방송 봤어요. 맞...죠?

이철승 형님을 위시해 청운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는 이들에게서 온 연락과 메시지였다.

-축하해. 미국에 있네. (유정욱)

-한국에 언제 와? 우리 한번 보자. (소은정)

-아틀란티스에서 언제 나온 거야? (김현태)

-청운. 우리 할아버지가.... (조안)

내 실력을 알고 있던 한남동 용병대는 청운이 나라는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긴 마스터의 위용을 보여 줬는데 모르면 바보겠지.

여담이지만 새로운 S급 헌터의 등장에 마치 들풀에 번진 불처럼 나를 추종하는 카페가 만들어졌고 고작 하루 만에 무려 백만 명의 회원이 가입했다는 기사가 터져 나왔다.

호기심이 동한 나는 컴퓨터를 켜고 카페에 들어가 보았다.

"오오!!"

첫 화면부터 관리자의 정성이 느껴진다.

여러 각도에서 찍은 수백 장의 사진과 비무 영상이 멋지게 나와 있었는데 어떤 부분은 마치 장인의 편집 솜씨를 보는 듯 관록이 느껴져 감동을 받았다.

-[마스터 청운 사진 모음]

-[마스터 청운 비무 영상]

-[그것이 알고 싶다. Who is the Master Choungun?]

-[마스터 청운 게시판]

나와 안면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이런 정성이라니! 나는 감사한 마음을 담아 게시판에 글을 올렸다.

그런데 이 일로 인해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당신이 마스터 청운이라고?

⤷네에. 주작 오지고요.

⤷큭! 네가 마스터 청운이면 난 마스터 케네디다.

⤷거짓말~

⤷관리자님, 주작하지 마세요.

⤷그런데 진짜 마스터 청운이면 대박!

⤷여기서 이러지들 맙시다.

⤷....

⤷....

⤷....

⤷진짜면 증거를 대라.

⤷이 카페 관리자 개판이다.

⤷게시판을 폭파하자.

게시판이 난장판이 된 것이다.

선의로 한 행동이 예상치 못하게 피해를 준 것 같다.

그랜트 국장에게 이 상황을 얘기하자 헌터 관리국이 나서서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카페 관리자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관리국 명의로 내가 단 댓글을 인증해 준 것이다.

그 후 이 카페는 내 팬이라면 누구나 한 번씩 들러야 하는 성지가 되었고 게시판에는 수많은 질문이 쏟아졌다.

내가 들렀다는 사실만으로.

-마스터 청운, 동양인이겠죠?

⤷당연하죠. 머리색 하며 눈동자를 보세요.

-청운이란 이름을 보면 중국인이 확실합니다.

⤷가능성이 있습니다.

⤷일단 한국은 아니다. 한국에는 '청' 씨가 없습니다.

⤷청운이 예명일 수 있잖아.

⤷위에 분 말이 맞음. 섣부른 판단은 금물.

-청운은 조선족이다.

-헌터국 고위 관리자의 말에 따르면 청운은 이름이 아니랍니다. 닉네임이래요.

-청운은 한국인입니다.

⤷맞아요. 저랑 아틀란티스 대륙에서 함께 사냥했어요.

⤷뻥 오지고요.

⤷박청운?

⤷아니! 최청운.

⤷놉! 이청운이 맞아요.

⤷구라 인정!

⤷나도 어제 청운 님과 같이 사냥했다.

⤷사실입니다. 그는 한남동 용병대 대장입니다.

⤷큭큭큭! 한남동.

⤷왜 청담동이라 하지?

-모두가 틀렸다. 마스터 청운은 중동인이다.

⤷님! 희망 사항은 희망 사항으로 끝냅시다.

⤷어이가 없네요.

⤷중동인이 맞다. 그는 칼라프의 현신이다. 인샬라~

⤷왜! 아예 아프리카 흑인이라고 하지. 큭큭큭!

가장 논쟁이 된 것은 바로 내 국적이었다.

이름을 보면 동양인인 것 같은데 대체 어느 국가 출신인지 무척이나 궁금해했다. 특히 청운이라는 이름 덕에 중국과 일본 네티즌 간에 치열한 설전이 오고 갔는데 이후 양국 네티즌들은 험악할 정도로 서로에 대한 비방을 이어 갔다고 한다.

양측의 분위기가 이토록 험악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단순한 헌터가 아닌 전략적 핵무기 취급을 받는 S급 헌터의 존재 때문이었다.

각설하고 상황이 이토록 치열하게 번지자 미국 헌터 관리국에서 내 동의하에 공식적인 답변을 남겼다.

-[마스터 청운은 한국인입니다. -헌터 관리국]

⤷한국?

⤷한국 배 아프겠다.

⤷동감

⤷동감(X2)

⤷동감(X3)

⤷동감(X4)

-대박!! 한국이라니!!

⤷정확히 말하면 한국계 미국인이겠죠.

⤷이분 말이 맞음.

공식적인 입장이 발표되자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나를 두고 중국인, 일본인이라 설쳤던 중국과 일본 네티즌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고 대신 한국인들이 환호했다.

-내가 그럴 줄 알았다.

-자랑스러운 한국인!

⤷오 마이 갓~~~

-대한민국 정주휘 헌터에 이어 두 번째 S급 헌터 청운

⤷쪽발이 Go Home!

⤷짱꼴라 Go Home!

-이 편지는 영국에서 최초로 시작되어 일 년에 지구 한 바퀴를....

⤷꺼져.

⤷아이구, 너 같은 놈도 자식이라고. 네 엄마는 미역국 먹었겠지.

-청운 헌터, 사랑합니다.

-한국인이면 군대 가나요?

⤷너라면 가겠냐?

⤷바보들아. 한국계 미국인이야.

⤷그럼 이중국적인가요?

⤷아마도!

참고로 내가 기자회견장에 쓰고 나온 마스크가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어느새 이미지를 벤치마킹한 업체들이 비슷한 모양의 마스크를 대량으로 생산해 상점에 뿌렸다는 것이다. 들어보니 동네 꼬마들에게 아주 인기라고 했다.

쳇! 재주는 내가 부렸는데 돈은 지들이 쓸어 담고 있구먼.

이와 같은 시각,

주미 한국 대사가 비공식적으로 미국 국무부를 찾았다.

마스터 청운 때문이다.

"안녕하십니까, 올리비아 장관님."

"어서 오십시오, 장관님. 그동안 격조했습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가운데 의례적인 덕담을 몇 마디 주고받더니 유정해 대사가 본론을 꺼냈다.

"사실 장관님을 찾은 이유는 마스터 청운 때문입니다."

새롭게 등장한 마스터.

그런데 그가 한국인이라고?

그가 한국인인 이상 어떻게든 연결 고리를 만들어야 했다.

"그렇군요."

올리비아 장관은 유정해 대사의 발언을 예상했는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마스터 청운이 한국인이라 들었습니다. 그가 한국인인 이상 대한민국 정부는 마스터 청운에 대한 정보를 공식적으로 요청하는 바입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그렇겠죠. 하지만 이번 사항은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무엇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건가요?"

"마스터 청운은 한국인인 동시에 미국인이기도 하니까요. 미안하지만 미국인의 개인 정보를 함부로 드릴 수 없습니다."

"...!!"

올리비아 장관의 거절에 유정해 대사의 표정이 잠시 굳어졌다.

하지만 상대가 거절했다고 해서 포기할 수 없었다.

"장관님께서 방금 전에 말씀하셨죠. 한국인인 동시에 미국인이라고요."

"그런데요?"

"그 얘기는 다시 말해 마스터 청운이 한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포기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요. 그렇지 않습니까? 많은 걸 원하지 않습니다. 한번 만나서 얘기라도 나눌 수 있게 해 주십시오."

"...!!"

유정해 대사의 말에 올리비아 장관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제안은... 한번 해 보도록 하죠. 하지만 마스터 청운이 거절하면 강제할 수 없습니다. 그건 아시겠죠?"

"감사합니다, 장관님."

-[일본, 총리대신 관저]

"칙쇼! 하필 조선인이라니."

야소 총리의 얼굴이 보기 흉할 정도로 구겨졌다.

"게임은 끝나기 전까지 끝난 것이 아닙니다."

"맞습니다. 조선인이면 어떻고 또 중국인이면 어떻습니까? 결과적으로 우리 일본 제국이 품에 안으면 되는 거죠."

"그게 가능할까?"

"언론에 따르면 마스터 청운이 이중국적자로 확인되었습니다. 총리님, 생각해 보십시오. 한국인이 왜 미국에 가서 검사를 받았겠습니까? 미국 국적을 취득하면서까지 말입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

"저는 마스터 청운이 한국과 사이가 좋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믿어 주십시오. 기회를 주신다면 그를 삼중국적자로라도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알겠네. 돈은 얼마가 들어도 좋아. 내 자네만 믿겠네."

"하이!"

제75화

75화 엄마의 자존심

이웃사촌이란 말이 있다.

먼 곳에 사는 친척보다 가깝게 사는 이웃이 낫다는 말이다.

뭐 이것도 이제는 옛말이 되어 버렸지만.

아버지에겐 미국에 살고 있는 사촌 형이 한 분 계신다.

내가 초등학교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가신 덕에 가끔 소식을 듣는 정도의 친척이 되었는데 세상이 참 재밌는 것이 그 넒은 미국 땅에서 우연히 만난 것이다.

"어후, 동생. 동생 맞지?"

전신에 모피를 휘두른 아줌마가 반가운 기색을 보이며 다가왔다.

"형님?"

"그래. 나야, 나. 이게 대체 얼마 만이니. 얼굴은 또 왜 이렇게 상했어?"

"...."

수다쟁이 큰엄마.

겉으로는 걱정하는 척, 생각해 주는 척하지만 돌려 까기 선수다.

거의 십 년 만에 봤는데 첫마디가 얼굴 타령이다.

"안녕하세요, 큰엄마."

"어, 그래. 네가 혜진이구나. 많이 컸네. 넌 선우고. 맞지?"

"네."

여동생의 똥 씹은 표정을 봐라.

쟤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엔 언제 왔어? 가족 여행 온 거야?"

"얼마 안 됐어요. 여행은 아니고 이민 왔고요."

"어머머! 이민이라니, 성공했네. 성공했어. 선우 아빠가 무슨 기술이라도 익혔나 보네."

"기술이요?"

"아니, 전에 얼핏 들었는데 사업 말아먹고 택시 운전한다며. 호호호! 뭐 아니면 아닌 거지. 한국보다야 미국이 백번 낫지. 암튼 잘 왔어. 열심히 일하면 우리처럼 돈도 많이 벌 수 있을 거야. 호호호."

"...."

저 말본새 봐라.

아, 벌써부터 피곤해지는 느낌이다.

"그나저나 애들이 대학생이지? 그럼 고생 좀 하겠다. 미국이 학비가 비싸거든."

"네...에."

"공부 못하면 아예 초장부터 때려치우고 기술을 가르치는 것도 좋아. 용접공이나 배관공이 돈도 잘 벌고 말이야."

"...."

이건 걱정을 해 주는 건지 아니면 염장을 지르는 건지.

어머니는 내색지 않았지만 굳어진 표정만 봐도 기분이 다운됐음을 알 수 있었다.

"아! 내가 얘기했나? 우리 첫째 알지?"

"첫째라면... 명태요?"

"그래, 명태. 걔가 이번에 공무원 됐잖아. 아메리카 공무원. 호호호! 게다가 우리 둘째는 미국 명문대에 재학 중이잖니. 동생은 혹시 미시건 주립대라고 들어 봤을까?"

"예... 들어 본 것도 같네요. 암튼 축하드려요, 형님."

"축하는 뭘~ 이제 우리 현아만 남았어. 고등학교 잘 다니고 내년에 명문대 들어가면 할 일 끝이지."

큰엄마는 한껏 높아진 콧대를 뽐냈다.

"참! 동생은 지금 어디 살아? 우린 뉴저지에 살고 있는데, 뉴저지는 여기서 금방이야. 다리 하나만 건너면 뉴욕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러시군요. 저흰 요기 근처에 살고 있어요."

"요기 근처라면 설마 맨해튼에 살아?"

"...네."

"어머머머! 맨해튼 월세가 얼마나 비싼데 여기서 살아? 설마 지하 원룸 같은 데서 네 식구가 사는 것 아냐?"

"그건 아니고요."

아이, XX.

아무리 친척이라지만 듣다 보니 짜증이 나서 도저히 못 참겠다.

저 콧대를 꺾어 줘야지.

"엄마, 오랜만에 큰엄마랑 현아도 만났는데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집으로 가는 게 어떨까요? 차라도 한잔 대접해야 예의죠."

"나도 오빠 말에 동의."

오랜만에 남매의 의견이 일치됐다.

"그래, 동생. 이대로 헤어지기 너무 아쉽다. 마침 우리도 프리(Free)하니까 동생네 하우스 구경도 할 겸 가 보자."

"그러실래요?"

남매의 의견에 엄마의 의견까지 일치됐다.

얼마 후,

맨해튼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최고급 저택 펜트하우스에 들어오자 큰엄마는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

"여, 여기가 동생 집이라고?"

"네, 형님."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태연히 말했다.

"여기 월세가...."

"그냥 구입했어요. 잠깐 소파에 앉아서 쉬고 계세요, 형님. 제가 과일이랑 음료수 좀 가지고 올게요."

"어, 어. 그... 그래. 딸꾹!"

갑작스럽게 터진 큰엄마의 딸꾹질.

큰엄마는 마치 누구에게 크게 한 방 맞은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리고 이때 분위기 파악 못 한 사촌 여동생이 자살골을 마구 날려 주었다.

"우와! 엄마. 여기 바닥 좀 봐. 리스토네 조X다노야."

"뭐? 리조또?"

"아니. 리조또는 이태리 음식이고. 리스토네 조X다노. 이태리 최고급 원목. 이것 좀 봐 봐. 이게 원목 마루의 끝판왕이라고. 평당 천 불이 넘을걸."

"펴, 평당 천 불?!!"

사촌 여동생 현아는 집 안 곳곳을 구경하며 연신 조잘대기 시작했다.

"꺄악! 이 침대는 해스X스잖아~~."

이건 뭐고 이건 또 뭐고 가격이 어떻고 최고급이 어떻고....

나는 이름조차 생소한 브랜드 이름들을 모두 알고 있는 현아가 더 신기했다.

"어, 이건 뭐지?"

티타임을 위해 거실에 모였는데 탁자 밑에 어지럽게 놓인 서류들을 보고 현아가 별안간 소리쳤다.

"우와!! 이거 아이비리그잖아."

큰엄마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서류로 향했다.

아이비리그는 미국 북동부에 있는 8개의 명문 사립대학을 가리키는 말로 하버드, 예일, 펜실베니아, 프린스턴, 컬럼비아, 브라운, 다트머스, 코넬 대학을 통틀어 부르는 말인데 아이비리그에 속한 8개 대학에서 합격 통지서가 날아온 것이었다.

"엄마. 이것 좀 봐 봐. 혜진 언니가 아이비리그에 합격했어, 그것도 8개 학교 전부 다."

"딸꾹!"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혜진을 바라보고 있는 사촌 동생.

당황하다 못해 이젠 경악한 표정을 보이고 있는 큰엄마.

그리고 묘하게 뿌듯해 보이는 엄마의 얼굴.

"저기, 동생."

"네, 형님."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말이야. 어떻게 이 집을 샀어? 혹시 로또라도 된 거야?"

"아유 로또라뇨. 형님도 참~ 대한민국에서 로또 1등 돼 봤자 그게 그거죠. 이 집을 사려면 1등에 수십 번은 당첨돼야 해요."

"그. 그렇지? 그럼 선우 아빠가 대박이라도 났나?"

"호호호. 그것도 아니에요."

"그럼 대체 어디서 돈이 난 거야?"

엄마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선우?"

큰엄마의 눈동자가 좌우로 심하게 움직였다.

뭔가 짐작한 모양이나 애석하게도 짐작만으로 해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확인이 필요한 부분.

큰엄마는 주저했다. 마치 결과를 알기 두렵다는 표정이다.

하지만 묻지 않을 수 없다.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기 때문이다.

"선우야."

"네, 큰엄마."

"혹시 네가 집을 샀니?"

"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너 뭐 하는데?"

"저요? 헌터예요."

"헌터!!"

큰엄마는 마치 둔기에 얻어맞은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아니, F급 헌터라고 하지 않았어?'

마치 이렇게 묻는 것 같았다.

"등급이 어떻게 되는...."

"죄송하지만 그건 국가 기밀이라서 알려 드릴 수가 없어요."

"그, 그렇구나."

"그리고 부업으로 자그만 사업도 하고 있어요."

"자그만 사업?"

"네. 자본금이 얼마 안 되는 사업이에요. 그냥 열심히 돈이나 굴리는 거죠."

나는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면서 일부러 카드 한 장을 떨어뜨렸다.

"어머?"

역시 현아가 카드의 정체를 알아보고 소리쳤다.

"저건 아멕스 블랙 카드!!"

사촌 여동생은 나를 무슨 만수르 형을 보듯 선망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도, 동생. 우린 이제 그만 가 볼게."

큰엄마는 밀려드는 패배감 속에서,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지금 가시려고요? 조금 있으면 선우 아빠도 올 텐데 조금만 더 계시다 가세요."

"아, 아냐. 시간도 늦었는데 가서 애 아빠 밥해 줘야지."

엄마는 서둘러 떠나려는 큰엄마를 보며 아쉬워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조만간 애들 아빠랑 해서 같이 한번 봬요. 아무래도 저희가 찾아뵙는 게 좋겠죠? 형님 집 주소 알려 주시면 날짜랑 시간 잡을게요."

"아니야. 번거롭게 뭘 찾아와. 그냥 시내에서 만나자."

"아이~ 그래도 찾아뵙는 게 예의죠."

"아냐, 됐다니까. 미국에서 한국식 예의를 왜 따져! 그냥 요기 한인 타운에서 만나자. 거기서 간단히 밥 먹고 차 마시고 그러면 되지."

"그래도 될까요?"

"그, 그럼~."

또다시 엄마의 얼굴에 묘하게 뿌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여담이지만 이날 저녁 오늘 일(?)의 일등 공신이라 할 수 있는 사촌 여동생 현아에게 스마트폰을 이용해 용돈을 보냈다.

-[10,000$, 현아야, 오랜만에 봐서 반가웠다. 다음에 또 보자. 선우 오빠가.]

이후에 벌어질 일은 안 봐도 비디오다.

그동안 쌓였던 체증이 모두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쿄쿄쿄쿄!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번호를 확인해 보니 올리비아 국무장관이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무슨 일로 전화를 주셨는지요?"

-그게 말입니다. 주미 한국 대사가....

다음 날 오전,

맨해튼 중심가에 위치한 플라자 호텔에서 유정해 대사와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비록 한 시간 남짓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몇몇 얘기는 차치하고 나는 그에게 두 가지를 약속했다. 첫째는 한국이 먼저 내가 취득한 이중국적에 대해 법적인 제제를 가하지 않는다면 나 역시 그 어떤 제안이 들어와도 한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조만간 한국으로 들어가 대통령을 직접 만나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유정해 대사님."

유정해 대사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는 듯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호텔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며칠 뒤.

차강민 변호사에게서 기다리던 연락이 왔다.

"아버지, 어머니. 잘 다녀올게요."

"그래. 도착하자마자 전화해라."

"네. 알겠어요."

"혜진아, 넌 오빠 말 잘 듣고."

"네, 엄마."

나는 여동생과 함께 뉴욕에 위치한 JFK 공항에 도착했다.

사실 혼자 다녀오려고 했는데 나 때문에 친구들과 인사도 제대로 못 하고 끌려왔다는 여동생의 강력한 협박(?)에 결국 동행하게 되었다.

-Ladies and gentleman....

안내 방송과 함께 비행기가 이륙을 시작했다.

나는 경고등이 꺼지자 가방에서 책을 꺼냈지만 전날 늦게까지 친구들 줄 선물을 산다고 쇼핑에 집중했는지 여동생은 좌석에 앉자마자 꿈나라로 향했다.

"필요한 게 있으신가요?"

"아니요. 괜찮아요."

"네, 레드 와인으로 부탁해요."

1등석답게 서비스가 매우 좋다.

좌석 역시 두 다리를 쫙 벌려도 여유가 있을 만큼 크고 말이다.

소설을 보면 이럴 때 성추행하는 국회의원이나 재벌 3세 또는 승무원에게 갑질하는 여자들이 등장하는데 인천 공항에 도착하기 전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기대감이 컸었나?

오히려 뭔가 아쉬운 느낌마저 들었는데 아무래도 내가 그런 종류의 소설을 너무 많이 봤나 싶다.

왓에버(Whatever)!

제76화

76화 화목란

무림맹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교의 기습적인 공격에 뒤통수를 제대로 맞았지만 저력이 있는 만큼 계속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먼저 오대세가와 연합해 마교의 병력을 묶는 동시에 무력 부대를 움직였다. 또한 각 대문파에 밀서를 보냈다.

개방도가 가지고 온 서신에 따르면 마교에 의해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봉문을 선언한 곤륜파에 도움을 주라는 것이다.

"무당의 검제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하하하! 무당이라면 믿을 수 있죠. 검마를 잡았다고 들었습니다."

"사실입니다. 이미 강호에 소문이 자자합니다. 풍각 선사의 제자라 하더군요."

"무당의 큰어른께서 중원 무림에 큰 선물을 주고 가셨군요. 과연 무당입니다."

"중원 무림의 홍복입니다."

"그렇고말고요. 하하하!"

혜성처럼 등장한 화경의 고수가 곤륜에 가겠다는 뜻을 전하자 무림맹은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그들은 자파의 영약을 비밀리에 무당으로 전했고 그 결과 소림의 소환단 3알, 무당의 태청단 3알, 개방의 취화단 5알, 화산의 화소단 3알, 아미의 연화단 3알, 청성의 구화단 3알 등 도합 20알의 영약이 무림맹주가 친필로 작성한 편지와 함께 내 수중에 있었다.

호북성을 떠난 지 열흘이 지났다.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관도를 벗어난 덕에 눈앞에 펼쳐진 것은 험준한 산맥뿐이지만 그 덕에 이동 중에도 수련에 임할 수 있는 여유를 얻었다.

이 넓은 중원에서 강기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인물은 몇 명 없다.

구파일방을 비롯해 정사마를 합쳐도 10명이 안 될 것이다.

물론 은거기인을 제외하고 말이다.

나 역시 드래곤 스승님의 훈련을 빙자한 생사투(生死鬪)로 인해 태허무극심법이 5단계에 올라 화경의 경지에 도달했지만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선 술(術)과 예(藝)의 단계를 지나 도(道)의 경지에 들어가야 했다.

그래야만이 6단계인 광(光)을 이뤄 상단전이 열릴 것이다.

조그만 개울이 바다가 된다는 말이 있다.

나는 화경에 오른 후 도가 사상을 탐닉하기 시작했다.

한 가지 사상에도 수많은 해석이 나올 수 있기 때문에 관련된 서적과 주해서를 꺼내어 읽고 또 읽었다.

이전이었다면 내 생각과 다르다고 버렸을 것이나 이제는 개의치 않고 한 글자 한 글자에 담긴 뜻을 찾아내어 곱씹었다.

확인할 수 없지만 확신할 수 있다.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있다고 말이다.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낙심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언젠가 그 임계점에 다다르면 쾅 하고 폭발하며 한 단계 더 높은 경지로 인도할 것이 분명하니까.

"...."

문득 명상을 깨우는 누군가의 살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그 기운은 점점 더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헉... 허억... 헉!"

거친 숨소리의 주인공이 시야에 들어왔다.

전신에 큰 상처를 입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사내. 그는 여인이라고 말하기에 아직 앳되어 보이는 소녀를 대동한 채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켈켈켈. 드디어 꼬리가 잡혔군."

뒤이어 핏빛의 검붉은 복장을 한 자들이 그림자처럼 모습을 드러내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 이런!"

"이제 그만 포기하지 그래."

놈들은 살기를 풀풀 풍기며 검을 뽑아 들더니 어슬렁거리며 다가왔다.

"어라? 선객이 있었네. 하필이면 우릴 만나다니 재수가 없군."

"그러게 말이야. 하지만 원망은 말게. 어차피 누구나 가야하는 길, 남들보다 좀 더 빨리 간다고 생각하라고. 케케케."

삼류 무인쯤으로 치부했던지 사내들은 내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뉘신지 모르겠으나 어서 피하시오."

'염치가 있는 자군.'

오히려 중상을 입은 남자가 놈들의 말에 흠칫 놀라 내게 피하라 했다.

하지만 그는 극렬한 통증이 찾아왔는지 얼굴을 찡그리며 선혈을 토했다.

우웩!

조각난 내장 부스러기가 피에 섞여 나온 것을 보니 대라 신선이 현신하면 모를까, 곧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아, 아가씨... 전 여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끝까지 모시지 못...해 죄송...합니다. 부디...."

남자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더니 숨을 거두고야 말았다.

"아저씨, 아저씨."

소녀의 울음 섞인 비명을 뒤로하고 남자의 죽음을 조소하는 음성이 신경을 거슬리게 한다.

"지금까지 잘도 도망쳤지만 결국 뒈졌군."

"켈켈켈. 네년도 여기까지다. 어서 물건을 내놓아라."

내가 신이 아닌 이상 돌아가는 사정을 알 수 없지만 저들이 나쁜 놈인 것은 확실하다.

나는 남자에게 다가가 그의 눈을 감겨 줬다.

소녀의 얼굴에는 불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는데 난 그런 소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얘, 넌 이름이 뭐니?"

소녀는 당황하는 눈빛을 보였으나 곧 침착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목란, 화목란."

"화목란. 좋은 이름이구나."

나는 안심하라는 뜻으로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저들이 원하는 걸 네가 가지고 있니?"

"...."

소녀는 입술을 깨물며 잠시 주저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신호하면 눈을 감고 천천히 마음속으로 일부터 십까지 세 줄래?"

"...네."

난 입가에 인자한 미소를 보이며 나직이 속삭였다.

"자! 지금부터 시작."

화목한이 눈을 감는 순간,

무극 대검이 '쐐애액' 하는 소리와 함께 검집에서 빠져나와 공기를 갈랐다.

-서걱, 서걱, 서걱!

눈앞에서 번쩍이는 푸른 섬광.

멍하게 서 있던 동료들의 신형이 무너지자 당혹감이 섞인 음성이 튀어나왔다.

"고, 고수다. 놈을 쳐라."

그의 말이 끊어지기 무섭게 검붉은 옷을 입은 이들이 달려들었다.

요란하게 부딪치는 병장기의 소음 속에서 튀어나온 누군가의 다급한 신음 소리.

채챙챙챙!!

"이럴 수가.... 모두들 조심해라. 저것은 검...."

남자의 음성이 더 이상 이어지지 못하며 주변이 고요해졌다.

그 어떤 소리도, 심지어 누군가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어지럽게 토막 난 병장기가 흩어져 있었는데 핏빛 복장을 입은 이들의 눈은 죽는 그 순간까지 경악과 불신을 말하고 있었다.

나는 무극 대검에 묻은 붉은 핏방울을 털어 내며 검집에 집어 넣었다.

타닥타닥!

나뭇조각 타는 소리가 고요한 적막을 깨우고 있을 때, 따뜻하게 데운 유유를 건넸다.

"목란이라 했지? 마실래?"

"...감사합니다."

소녀는 주위 풍경이 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당황하지 않았고 어린 나이에도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다. 이는 평범한 일이 아니다.

어렸을 때부터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무가의 자식이 분명했다.

"무슨 일로 쫓긴 거지? 말하기 곤란하면 하지 않아도 돼."

"...."

목란은 잠시 주저하는 눈빛을 보였지만 이내 밝아진 표정이다.

내 질문에 숨은 뜻을 깨달은 모양이다.

'역시 똘똘하네.'

"저는 화씨세가의 화목란이라고 해요. 그리고 이건 상황보패고요."

"상황보패?"

"네."

상황보패는 나라를 구한 충신에게 황제가 내리는 커다란 상으로 역모를 제외하고 그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용서해 준다는 보패다.

"혹시 북부대장군가라고 들어 보셨나요?"

"...!"

순간 머리를 망치로 맞은 것 같다.

머릿속에서 주선우와 관련된 기억 한 토막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황제의 세 번째 부인이었던 그의 어머니는 '화'씨 성의 북부대장군가 출신이었다.

"북부...대장군가."

난 마치 혼잣말을 지껄이듯 읊조렸다.

어쩌면 화목란이 나와 인척 관계일 확률이 높았다.

"은인께서는 무림인이죠?"

"응."

"혹시 무당파 도인이세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머리에 쓴 관이 특이해서요. 그런 형태는 주로 무당파 도인들이 쓴다고 들었거든요."

"그래. 맞아. 너 정말 똑똑하구나."

내가 무당파 도사라고 인정하자 화목란의 눈빛이 한결 편해진 느낌이다.

아마 무당이라는 이름이 가지고 있는 명성 때문일 것이다.

밤은 길고 시간은 많다.

나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대화를 이어 갔다.

"보패를 어디로 전달해야 하니?"

"옥문관이요. 할아버지에게 가져다 드려야 하거든요."

"할아버지라면?"

"서북부 방면을 지키시는 대장군이시죠."

"그렇구나. 당연한 질문을 했어."

"헤헤헤~."

화목란은 내 질문에 자신이 아는 바를 숨김없이 답해 주었는데 그녀의 얘기를 듣다 보니 팽팽하게 대치하던 저울의 추가 연왕 쪽으로 기울어진 것 같았다.

그동안 황태자를 지지하던 영왕, 부왕, 진왕이 백만 대군을 앞세운 연왕의 압박에 중립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림 세력이 연왕을 돕고 있다고 하니 황태자가 진퇴양난에 빠진 모양이다.

나는 머릿속으로 중원의 지도를 떠올려 보았다.

곤륜에 가야 하는 임무가 있지만 그것은 3개월 안에 해결하면 되는 것. 더욱이 관도가 아닌 산맥을 넘고 있었기에 시간 역시 부족하지 않았다.

나는 경로를 수정했다.

그리고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우리는 난주에 들어설 수 있었다.

<감숙성, 난주>

난주는 감숙성의 성도로 황하강이 동서로 나뉘어 도시를 가로지르는 기형적인 곳이다. 허나 기련산맥을 품고 있어 천연의 도시로 불리며 서역으로 나가려면 필히 거쳐야 하는 군사적 요충지다.

"부르셨습니까요, 나리."

"빈방 있나?"

"물론입죠."

"식사도 가능하지?"

"네, 근데 식사는 식당에서 하셔야 합니다."

"알겠네. 일단 방부터 잡아 주게."

"네~."

방을 잡기에 약간 이른 시간이지만 지금 움직인다면 오늘도 노숙을 해야 할 것이 뻔했으므로 여관을 잡았다. 사실 며칠째 이어진 강행군의 여파로 화목란의 피로가 누적된 상태라는 점도 한몫했고 말이다.

"이보게, 소고기와 우육면 그리고 볶음밥이랑 만두를 주게나."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잠시 상념에 빠졌다.

황자 주선우의 영혼과 하나가 되었기에 마음속 깊숙이 복잡 미묘한 감정이 샘솟았기 때문이다.

'내 얼굴을 알아보실까? 할아버지를 만나면 뭐라고 말해야 하지?'

이 같은 감정을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

복잡 미묘한 감정에 휩싸여 있는데 사내 한 명이 탁자에 부딪치며 넘어졌다.

"어이쿠!"

꽤나 요란스럽게 소리를 질렀기에 주변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이런 씨X! 어떤 새끼가 발을 걸었어?"

"...."

화목란이 황당한 표정을 숨기지 못한다.

"이봐, 장삼. 괜찮나?"

"야! 네 눈깔엔 이게 괜찮아 보여?"

"쩝. 그러게. 많이 아파 보인다."

"이보게, 장심. 이런 건 그냥 넘어가면 안 돼. 적어도 치료비는 받아야지."

"암! 그렇고말고!"

사내의 반응에 동료로 보이는 이들이 천연덕스럽게 호응했다.

자해 공갈단?

이 병신들은 뭐지?

느껴지는 기운을 보아하니 쥐꼬리만 한 내공에 하는 짓이 양아치다.

특히 저 장삼이란 이름의 사내를 보라.

회심의 미소를 보이더니 이내 호구를 잡았다는 표정으로 혀를 삐쭉 내밀고 있다.

"이봐. 너희들...."

퍼억!

사람들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장삼이 시야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난 쇠로 만들어진 젓가락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 가볍게 조각내어 줬다.

딱- 딱, 딱-!

"허억!"

"헙!"

젓가락에서 작은 불꽃이 일어나며 토막이 나자 녀석들의 안색이 시커멓게 변했다.

특히 장삼 옆에서 추임새를 넣던 녀석들은 식은땀마저 흘리기 시작했다.

"장삼 저 자식은 지가 발을 헛디뎌서 실수해 놓고 애먼 분께 실수를 하네."

"그러게. 이제 보니 저 친구 잘못이었어."

그러면서 슬그머니 내빼려 한다.

"이봐."

"헤헤헤. 공자님, 부르셨습니까?"

"쟤는?"

"아! 네. 저희가 데리고 가겠습니다."

"그럼 계산은?"

"아우~ 당연히 저희가 해 드려야죠."

녀석은 부르르 떨리는 손으로 점원에게 돈주머니를 건넸다.

"니들 앞으로는 그렇게 살지 마라. 그러다 걸리면 피똥 싼다. 알았지?"

"...네."

"알겠습니다."

"넵. 명심하겠습니다."

"좋아. 그럼 꺼져."

그들은 그길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줄행랑쳤다.

제77화

77화 현명이노(1)

다음 날 아침,

간단하게 요기를 마치고 일찌감치 길을 나섰다.

산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갔더니 반대편에서 사람들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두목님! 바로 저 녀석입니다. 저 녀석이라고요."

"분명 돈이 많다고 했지?"

"물론이죠. 제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그런데 말씀드렸듯이 남자 녀석이 무공을 익혔어요."

"예끼 놈! 내가 누구냐?"

"대벽산을 다스리는 녹림의 영웅이시죠."

"그래. 이놈아. 그러니 나만 믿어라."

"넵. 반드시 없애 주십시오, 두목님."

병장기를 손에 쥔 수십 명의 사람들이 우리를 포위하기 시작했는데 어쩌면 하나같이 얼굴에 '나 산적이오.'라고 이름표를 단 것 같다.

그런데 어제 객잔에서 시비가 붙었다가 꽁지 빠지게 도망친 녀석들도 보였다.

"형님, 쟤는 얼굴이 반반해 보이는데요? 이대로 몇 년 지나면 아주 인기가 많을 것 같습니다. 쟤는 죽이는 대신 비싸게 받고 홍루에 넘는 게 어떨까요?"

"고뤠? 크크크, 좋은 생각이구나. 얘들아! 남자 놈은 없애 버리고 여자아이는...."

나는 한숨을 쉬면서 나직이 말했다.

"목란아, 잠시 눈 좀 감을래?"

"열까지 셀까요?"

"그러렴."

역시 똑똑하다.

나는 화목란이 눈을 감자 산적들을 향해 인정사정없이 대검을 휘둘렀다.

"헉! 가, 강기!!"

대경실색한 산적 두목이 동쪽을 향해 정신없이 도망친다.

그 뒤를 이어 산적 놈들 역시 앞다투어 달아났다.

살아남기 위해 사방으로 흩어지며 이목을 분산시켰다.

하지만 무정하게도 놈들은 몇 걸음 움직이지도 못했다.

무극 대검에서 발생한 회오리 때문이다.

"모, 몸이...."

"으아악!"

"내 몸이 끌려가고 있어."

다음 순간,

강기에 의해 놈들의 신형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말았다.

이와 같은 시각 남경.

화려하게 꾸며진 방에 용포를 입은 사내가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다.

평범하게 생긴 얼굴이지만 사내의 진면목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백이면 백 그를 두려워하고 있다.

이때 홀연히 복면을 쓴 자가 나타나 사내 앞에 부복했다.

"왕야를 뵈옵니다."

"보패는 회수했는가?"

"죄송하지만 놓쳤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놓쳐?"

"네. 예상치 못한 조력자가 나타나 저희의 행사를 방해한 것 같습니다."

"조력자라."

복면 사내는 그들이 조사한 바를 상세히 설명했다.

조력자는 한 명이나 무공의 경지가 예사롭지 않다는 점까지 말이다.

"그들의 행방은?"

"감숙성 난주를 지난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기련산을 넘어 옥문관으로 향하는 것인가?"

"그럴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게 가장 빠른 경로니까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현명이노(玄冥二老)께서 저들의 뒤를 쫓고 있으니 옥문관에 도착하기 전 보패를 회수할 수 있을 겁니다."

현명이노(玄冥二老)는 무려 이십 년 전 활동했던 전대 고수의 명호다.

두 사람은 각각 초절정의 고수로 알려져 있지만 이들의 협공이 강호 일절이라 화경의 고수를 상대할 수 있다고 전해진다.

"현명이노라면 확실하겠군."

수하의 보고에 연왕 주윤문이 만족했다는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들었다.

* * *

꼬르륵.

화목란의 배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나는 '아차' 했다.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해 끼니를 거른 것이다.

생각해 보니 아침 일찍 조식을 먹은 후, 해가 중천에 떴음에도 불구하고 여태까지 아무것도 먹은 것이 없었다.

나는 괜찮았지만 화목란은 달랐다.

아마 심한 허기를 느끼고 있을 것이다.

'녀석, 배가 고프면 고프다고 말을 할 것이지.'

나는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 말을 꺼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그러고 보니 출출한데~."

다행히 근처에 개울이 있었다.

나는 재빨리 그곳에 자리를 잡고 봇짐에서 뭔가를 꺼냈다.

사실 꺼내는 척만 했을 뿐 실제론 아공간에서 간단히 그리고 빠르게 먹을 수 있는 것을 고르고 있었다.

그래! 이게 좋겠다.

내가 선택한 것은 짜장 라면이다.

야채와 고기가 있었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 없겠지만 뭐 없어도 괜찮다.

마법의 수프를 넣으면 3분 안에 완성이니까.

"룰루랄라~ 일단 물부터 끓이고."

앗! 실수.

이대로 불을 피웠다가 연기를 보고 불청객이 찾아올 수 있다.

나는 할 수 없이 냄비에 양손을 가져다 댄 후, 내공을 이용해 물을 끓였다.

"이얍!"

삼매진화를 이용한 물 끓이기.

보글보글 물이 끓기 시작하자 라면을 냄비에 투하한다.

화목란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느껴졌다.

"이게 뭐예요?"

"짜장면."

"짜장면?"

"응."

짜장 라면이라고 하려다 혹시 라면이 뭐냐고 물어보면 답할 길이 없어 그냥 짜장면이라고 했다.

"저 멀리 동쪽에 코레아라는 나라가 있는데 그곳에서 만든 음식이야. 아주 맛있어."

나는 면이 적당히 불자 남은 물을 바닥에 버리고 마법의 수프를 개봉했다.

"어머?"

검은색 가루가 특이한 모양이다.

"오른손으로 비비고 왼손으로 비비고~~."

이렇게 몇 번 비비다 보니 얼추 잘 버무려진 것 같다.

"자! 한번 먹어 봐."

"이, 이걸 먹으라고요?"

흥미가 동한다는 눈빛이지만 동시에 뭔가 망설이는 표정이다.

하긴 검은색 면을 처음 봤으니 그럴 만도 하다.

"이게 얼마나 맛있다고."

이럴 땐 먼저 먹어 주는 게 예의!

나는 젓가락을 이용해 면발을 집어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오물오물!

내가 시범을 보이자 화목란은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냄비를 끌어당겼다.

"응?"

화목란의 눈이 놀란 토끼 눈이 되었다.

"이거 이름이 뭐라고 했죠?"

"후후후, 짜장면. 어때 맛있지?"

"네. 이런 맛은 처음이에요."

후후후!

이게 바로 단짠의 매력이지.

혹시 몰라 2개를 끓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냄비가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제야 짜장면의 매력에서 벗어났는지 슬그머니 내 눈치를 본다.

난 아무 말 없이 그저 조용히 손바닥을 들어 입을 닦으라고 눈치를 줬다.

"엄마야!"

개울가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놀란 모양이다.

하긴 짜장면 소스로 입술이 뒤범벅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그녀는 서둘러 입과 입술 주변을 닦았고 난 그사이 주변을 정리했다.

"목란아, 공격해 봐."

"네, 도사님."

화목란은 평범한 소녀가 아니다.

군부의 자식답게 그녀 역시 무공을 익혔다. 다만 그 무재(武才)가 뛰어난 편이 아니었는데 주로 군부 쪽 무공을 익혔기에 그 속도가 더뎠다.

굳이 실력을 평가하자면 삼류 어디쯤 위치해 있었다.

나는 간간이 틈이 날 때마다 그녀의 무공을 손봐 주는 동시에 은근슬쩍 무당의 무공을 전수해 주었다.

"구궁검법."

목란이 내가 가르쳐 준 검술을 펼치기 시작했다.

무당의 여러 가지 검술 중에 목란과 가장 어울려 보여 가르쳤는데 생각보다 궁합이 맞았는지 실력이 빠르게 늘고 있었다.

"얍! 얍! 얍!"

목란이 아홉 방위를 순서대로 밟으며 차례차례 목검을 휘두른다.

목란이 들고 있는 검은 도처에 널려 있는 나뭇가지를 대충 잘라 만들었는데 강도가 제법 단단했다.

휙! 휘익 휙휙!

나는 살짝살짝 몸을 틀어 목란의 공격을 피했다가 어느 순간 빈틈이 보이면 그때마다 목검을 빈틈에 쑤셔 넣었다.

"악"

목란이 짧은 신음성과 함께 목검을 놓쳤다.

그렇다고 다쳤다는 것은 아니다. 단 1푼의 내공도 사용하지 않았기에 그녀가 다칠 확률은 거의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고통까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확실히 늘었는데?"

"모두 도사님 덕이죠. 정말 고맙습니다, 청운 도사님."

"됐고! 고마우면 더 노력해."

"뉍!"

옥문관에 도착할 때면 삼류 그 어디쯤이 아닌 확실한 이류에 도달할 것 같았다.

어느새 저녁 어스름이 깔려 오기 시작했다.

"청운 도사님, 날이 벌써 어두워지고 있어요."

"그렇구나. 그럼 좀 서두를까?"

"네."

산의 어둠은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오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서둘러 야영지를 찾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금세 어둠에 물들 것이다.

나는 재빨리 주변을 살폈고 얼마 후 노숙하기에 적당한 곳을 찾았다.

"여기가 좋겠다."

별안간 찌릿하고 느껴지는 감각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검은색 장포를 입은 뚱뚱한 노인과 회색 장삼을 걸친 홀쭉한 노인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이건!'

느껴지는 기운이 심상치 않았으므로 잔뜩 경계를 유지했다.

"여자, 찾았다."

이때 뚱뚱한 노인이 반색하며 말했다.

"사제, 거봐. 내 말이 맞았지?"

"헤헤헤. 역시 사형의 말이 맞았다. 대체 어떻게 찾았지?"

"사람은 누구나 잠을 자야 해. 그렇지?"

"맞아, 사형. 나도 매일 잠을 자."

"그래. 사제 말이 맞아. 그런데 사제, 이렇게 야외에서 잠을 잘 때엔 잠자리가 아주 중요하잖아? 그러니까 잠을 자기에 적당한 장소를 살피다 보면 이렇게 찾을 수 있을 줄 알았지."

"와~ 역시 사형이야. 사형이 세상에서 제일 똑똑해."

저 노인들은 대체 누군가.

그리고 저 뚱뚱한 노인은 뭐라고 해야 할까, 조금 모자라 보였다.

이때 뚱뚱한 노인이 화목란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키며 말했다.

"너, 여자애. 네가 화목란이지? 이야호! 놀란 눈을 보니 화목란이 맞다."

뚱뚱한 노인은 손뼉까지 치며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사형. 쟤가 화목란이야. 화목란이 맞아. 내 말이 맞다고, 정말 맞다니까."

"헐헐헐, 그래. 우리 사제 말이 맞은 것 같네."

순간 허를 찔린 느낌이다.

나는 화목란을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방금까지 놀란 표정이던 목란 역시 어느새 차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봐, 화 소저. 우리 늙은이들은 평화주의자야. 물건만 건네주면 고이 보내 주도록 약속하지. 어떤가?"

"사형, 진짜 고이 보내 줄 거야?"

"왜?"

"나 쟤 맘에 드는데?"

"저 아이가 마음에 든다고?"

"응. 색시 삼고 싶어."

"색...시?"

"응. 섹시 삼으면 안 돼?"

"...."

홀쭉한 노인이 대답이 없자 뚱뚱한 노인이 그새를 참지 못해 크게 외쳤다.

"지난번에도 고이 보내 준다고 해 놓고 죽여 버렸잖아. 이번엔 안 돼."

"아...하...하. 사제, 그건 말이지."

"몰라, 몰라. 이번엔 안 돼. 죽일 거면 남자만 죽여. 쟤는 내가 색시 삼고 싶단 말이야."

"흐...음."

사제의 애원(?)에 홀쭉이 노인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뭐 조금 곤란하겠지만... 사제가 원한다면 그렇게 해 줄게."

"진짜?"

"그럼~."

"와아! 우리 사형 최고."

이런 미친 늙은이들 같으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화목란의 정체를 아는 것을 보니 십중팔구 연왕이 보낸 자들이 분명했지만 저따위 해괴한 말을 지껄이다니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제78화

78화 현명이노(2)

"갈!"

내공을 담아 소리치자 순간 두 노인의 어깨가 들썩였다.

"아이, 깜짝이야! 나 간 떨어질 뻔했잖아. 왜 갑자기 소릴 질러?"

"이건...."

그런데 두 사람의 반응이 사뭇 다르다.

뚱뚱한 노인이 소리에 깜짝 놀란 얼굴이라면 홀쭉이 노인은 날 바라보는 눈빛 자체가 달라진 것이다.

"말코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설마 무당인가?"

"그렇다면?"

"고작 약관의 나이에 이런 기운이라니 과연 중원 무학의 양대 산맥다워. 그런데 말이야. 존장을 대하는 태도가 시정잡배와 다름이 없어. 버릇이 없군."

"당신이 왜 존장이야? 백번 양보해서 노형쯤 되겠구만. 후후후!"

"노형? 그럼 우리 사형이 형이란 말이야?"

나는 뚱뚱이 노인의 말에 실소를 금치 못했다.

"이봐, 모지리. 당신은 좀 빠지지 그래."

"모지리? 모지리가 뭐야?"

"이게 좀 떨어지는 사람. 나사가 빠진 사람, 뭔가 항상 조금씩 부족한 사람. 바로 당신 같은 사람."

설명이 충분했는가?

용케도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뚱뚱한 노인의 얼굴이 붉어지며 무시무시한 살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홀쭉한 노인 역시 살기 섞인 광소를 토해 냈다.

"크하하하! 이것 참 재밌군. 감히 현명이노를 상대로 그런 망발을 내뱉는 놈이 있다니 말이야. 우리가 너무 오랫동안 강호에 나타나지 않았던 모양이군."

"...?!"

현명이노?

현명이노라면 전대의 고수로 사황 단목지양에게 패한 후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고 알려진 이들이다.

"사형 말이 맞다. 저놈이 나쁘다. 그리고 나는 모지리가 아니다."

"사제, 진정해. 곧 뒈질 놈이 무슨 말을 못 하겠어."

"아니다, 사형. 저놈을 죽여야 한다. 어떻게 죽여야 잘 죽였다고 할까?"

"일단 곱게 죽이면 안 되겠지. 우리 사형제를 모욕했으니까."

"사형. 가죽을 통째로 벗기고 뼈까지 씹어 먹는 게 어때?"

"그럴까?"

현명이노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나는 화목란을 멀찌감치 물러나도록 조치했다.

그러곤 태허무극심법을 끌어 올리며 놈들을 도발하기 시작했다.

"사황에게 패해 도망친 주제에. 겁나 말 많네."

"뭐,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늙은이가 귀까지 먹었나? 못 들었어? 다시 말해 줄까?"

"뭐시랏!"

표정을 보아하니 역린을 건드린 것 같다.

난 '씩' 웃어 보이는 동시에 손바닥을 들어 까딱까딱 연타를 날렸다.

"잔소리 그만하고 드루와."

"이런 빌어먹을...."

"크아악!"

노기에 찬 괴성을 지르는 순간, 무극 대검을 크게 휘둘렀다.

시리도록 푸른 빛이 일렁이자 흠칫 놀란 현명이노가 재빨리 손을 뻗었지만 워낙 움직임이 빨랐기 때문에 손해를 보는 것을 모면할 수 없었다.

주르르!

현명이노는 각각 세 걸음과 다섯 걸음 뒤로 밀려났는데 현노가 경악해서 외쳤다.

"눈에 보일 정도의 유형(有形)이라니, 검강(劍剛)이 분명하구나."

약관의 도사가 검강을 펼쳐 냈으니 얼마나 놀랐을까?

하지만 전대의 고수답게 전신에 불꽃 모양의 강기를 뽑아내기 시작했다.

그 짧은 시간에 마음을 진정시키고 반격을 가하는 것이다.

"현현신공, 태초부터 존재하는 어둠."

"명명신공, 어둠 속에 타오르는 불꽃."

뒤이어 명노 역시 강기를 펼쳐 냈다.

"태극검 탄강(彈剛), 하나의 탄환처럼 날아가."

세 개의 강기가 격돌하자 엄청난 굉음이 터져 나왔다.

"현현신공, 바다의 깊고 깊은 아래 심연."

"명명신공, 심연 또한 짙은 어둠."

이번에는 전번보다 더욱 큰 강기가 이글거리며 날아왔다.

"태극검 반강(半剛), 탄환은 곧 반월(半月)이 되어."

콰콰콰쾅!!

더욱 강력해진 폭발에 천지사방으로 폭음이 일어나며 파편이 튕겨 나갔다.

우리는 찌르고 가르고 서로를 향해 강기를 날리며 순식간에 십여 초를 교환했는데 가까이에 있던 바위가 깨지고 나무가 뿌리째 뽑혀 나가 그 위력을 짐작게 했다.

난 내색지 않았지만 내심 동요하고 있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각각 화경의 경지에 반쯤 발을 걸쳐 놓은 초절정 고수였기 때문이다. 직접 겨뤄 본 경험에 따르면 각각의 개인이 검마에 비해 떨어지는 감이 있었지만 현현신공, 명명신공이라 했던가! 두 사람의 협공은 그것을 상쇄시키고도 남았다.

나는 애써 잡은 선공을 뺏기지 않기 위해 또다시 강기를 날렸다.

"태극검 통강(通剛), 꿰뚫는 강기!"

"명명신공, 어둠 그 자체에 드러나는."

"현현신공, 어둠 속에 어둠 그 깊은 곳의 어둠."

콰콰콰콰쾅!!

강력한 반탄력에 의해 우리는 각기 3장(약 6미터)씩 뒤로 날아갔다.

"...!"

"...!!"

현명이노는 크게 동요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그중에서도 현노의 놀라움이 컸다.

"넌 대체 누구지, 도호를 밝혀라."

"청운."

"청운? 설마 검제?"

내 명호를 곱씹던 그의 눈이 빛났다.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더군."

"네놈이 바로 소문의 주인공이었구나. 말하기를 좋아하는 호사가들의 농이라 치부했는데 사실이었군."

"사형, 상관없어. 저놈은 반드시 죽을 거야."

명노의 눈동자에 광기가 번들거렸다.

순간 응축(凝縮)되어 숨겨진 흉측한 진기가 포효하듯 발산되었고 나도 모르게 무극 대검을 꽉 쥐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몸속의 모든 세포들이 폭발적으로 반응하기 시작했다.

"태극검 풍강(風剛), 바람은 한없이 자유롭고!"

나는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 풍강을 펼쳤다.

바람에 실려 날아오는 강기를 보자 현명이노의 눈이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현현신공, 기공합일!"

"명명신공, 기공합일!"

현명이노는 열십자 방향으로 사정없이 검을 휘둘렀다.

퍼퍼퍼펑!

폭음이 터지는 가운데 상황은 만만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이전의 공격이 각각으로 나뉜 공격이었다면 지금까지와는 달리 두 개의 기운이 하나로 완벽하게 합쳐졌기 때문이다.

'곧 반격이 들어오겠지?'

재빨리 공격에 대비하는데 내 예상이 빗나가 버렸다.

거리를 좁히는 것이 아닌, 거리를 넓혔으니 말이다.

우리는 긴장감을 유지한 채 서로를 직시했다.

"사, 사형. 쟤 강하다. 어, 어떻게 하지?"

"...."

말하는 것을 보면 분명 모지리가 맞는 것 같은데....

무공에 관해선 그렇지 않다.

현명이노가 협공하면 능히 화경의 고수를 상대할 수 있다는 강호의 말이 사실로 판명되었으니 말이다. 물론 내게는 숨겨 둔 수가 있었지만 나만 숨기라는 법이 없으니 방심은 금물이다.

"정말 놀랍군. 무당이 괴물을 키워 냈어."

현노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리며 묘한 대치를 이뤘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는 게 어떤가? 끝장을 보자면 서로 피해가 만만치 않을 것 같은데...."

현노의 시선이 언뜻 화목란을 스치고 돌아온다.

약삭빠른 늙은이가 같으니.

"...좋으실 대로."

"좋아. 그럼 다음에 보자고. 그땐 쉽게 물러나지 않을 거야. 사제, 그만 가자."

"응. 사형."

명노는 뭔가가 아쉬운 듯 화목란을 향해 외쳤다.

"다음에 보자. 색시야."

다음 순간,

현명이노는 자신들이 온 곳을 향해 쏜살같이 질주했다.

난 저 두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잠시 후,

화목란이 참았던 호흡을 내뱉으며 쓰러지듯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충분한 거리를 두었지만 심적인 타격을 받은 것이다.

"목란아, 내가 호법을 설 것이니 운기조식을 통해 심신을 안정시켜라."

"...네, 도사님."

화목란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진기를 끌어 올렸다.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며 조용히 상태 창을 소환했다.

그리고 남아 있는 스탯 중에 197포인트를 힘, 체력, 민첩, 지능에 골고루 분배했다.

이는 레벨로 치면 거의 40레벨이 상승한 것과 비슷한 수치였다.

<상태 창>

이름 : 주선우(무림)

레벨 : 181

고유 특성 : 분신(Unique)

칭호 : 현자, 오크 살육자, 소드 마스터, 태극검제

생명력 : 8,210/8,210 마력 : 8,130/8,130

힘 : 324 → 400 체력 : 364 → 400 민첩 : 349 → 400

지혜 : 214 → 220 지능 : 272 → 300 행운 : 15

명성 : 5,050 악명 : 10 매력 : 30

보너스 스탯 : 93

한 시진쯤 지났을까?

운기조식을 마친 화목란이 눈을 뜨자 우리는 부지런히 발걸음을 움직였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흐음, 이상하네."

"뭐가?"

"도사님, 이게 진짜 좀 이상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뭐가?"

화목란이 주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처음엔 몰랐는데 자고 일어나면 항상 풍경이 좀 다른 것 같아서요."

"풍경이 다르다고?"

"네."

"뭐가 달라? 난 똑같은 것 같은데."

내심 뜨금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척 반문했다.

사실 풍경이 다르다는 그녀의 지적이 맞다.

매일 밤 새벽 3시가 되면 난 조용히 일어나 목란의 수혈을 점한 후 스킬을 펼쳤다. 길이 없더라도 만들어 낼 수 있는, 즉 공간을 뛰어넘는 순간 이동 스킬을 말이다.

이것은 혹시 모를 추적에 따라잡히지 않으려는 최상의 방법이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시간,

현명이노는 누군가를 노려보고 있었다.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이야?"

"그, 그게 저...."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상황에 추종술(追從術)의 대가라 자신하던 노백이 혼비백산했다.

"여기 있을 거라 했잖아."

"그러니까 분명 이쪽으로 흔적이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

"그런데 어디 있냐고?"

현명이노가 화를 내자 노백은 극도의 불안감에 사로잡혀 머뭇거렸다.

"그러니까... 그게 말입니다.... 그게...."

"이런 망할!"

홀쭉이 현노의 화가 폭발했다.

"네 눈엔 저게 안 보여? 그럼 하늘로 날아갔단 말이야? 이게 대체 몇 번째야?"

벌써 며칠째 자칭 추종술의 대가라는 저놈의 말만 믿고 가라면 가고 서라면 섰다.

회에 속한 절정 고수 열을 데리고 오느라 자존심이 상할 만큼 상했는데 개고생까지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결국 화가 폭발했다.

회주는 물론 소왕야에게까지 큰소리를 쳤는데 화목란을 놓쳤다고 어떻게 말한단 말인가!

"사제."

"응, 사형."

"일단 저놈을 죽지 않을 만큼만 때려."

"알았다, 사형."

명노 역시 화가 치밀어 오른 상태, 그가 노백을 향해 누런 이빨을 내밀었다.

"넌 거짓말쟁이다. 거짓말쟁이는 맞아야 해."

퍽, 퍽퍽!

"사, 사람 살려. 악!!"

노백은 그렇게 정말 죽지 않을 만큼만 두들겨 맞기 시작했다.

한편 현노는 이대로 가다간 흔적을 찾을 수 없다는 생각에 다시 한번 사방을 주의 깊게 살폈다.

'노백의 말이 틀리지 않아. 흔적으로 봐선 분명 여기에 있었어. 그런데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정녕 새가 되어 날아갔단 말인가?'

그의 눈앞엔 가파른 절벽만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무정하게 침묵하고 있었다.

제79화

79화 나의 외할아버지

옥문관.

고대 왕조의 흥망성쇠를 간직한 곳 옥문관.

수천 년의 역사를 보면 이 땅에선 셀 수 없이 많은 전쟁이 있었다.

오랑캐가 중원을 차지하기 위해 준동하면 가장 먼저 그들과 전쟁을 치르는 곳이 바로 옥문관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예로부터 중원을 차지한 황제는 사시사철 옥문관을 철통같이 방어할 수 있는 강력한 무력 집단이 필요했고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북부대장군가다. 사람이 살아가기에 참으로 척박한 땅이었지만 북부대장군가와 그들이 이끄는 10만의 병력 때문에 이곳은 항상 사람들로 북적였다.

군인의 신분적 특성상 이들은 생산자가 아닌 절대적인 소비자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곳은 서역과의 교역을 위한 첫 관문이지 않은가!

상인들은 병사들을 먹이고 입히고 그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시장을 열었고 상점을 만들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처럼 거대한 도시가 형성된 것이다.

돌이켜 보면 수십 년 동안 북부대장군가의 권력은 철옹성과 같았지만 화무십일홍이란 말처럼 작금에 와서는 곳곳에서 균열이 발생했다.

첫 번째 균열은 황제의 세 번째 부인으로 황실에 들어갔던 화소유의 죽음이다.

황자이자 대장군의 외손자 주선우의 생사는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두 번째 균열은 연왕의 존재다.

북부대장군가가 중립을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세력을 규합하는 데 성공한 연왕의 본격적인 압박이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그동안은 북부 전선이 심상치 않다는 이유를 들어 연왕의 요청에 불응했지만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는데 오랜 회의 끝에 나온 결론이 바로 상황보패를 이용한 것이었다.

'그때 모두 함께 북부로 왔어야 했어.'

후회해 봤자 늦었지만 북경에 위치한 장군부에 보패를 남겨 두는 것이 아니었다.

북부대장군가의 가주 화진옥의 얼굴이 펴질 줄 몰랐다.

* * *

새벽 여명과 함께 또 하루가 시작되었다.

우리는 힘차게 걸었는데 마치 강물처럼 도도하게 흐르는 누런 빛깔의 모래사장을 넘어 성벽이 보였다. 그리고 모래사장 건너편에는 북부군을 상징하는 깃발과 함께 일단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옥문관이다.'

화목란 역시 옥문관에 도착했음을 확인한 모양이다.

그녀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처, 청운 도사님."

"그래. 마침내 도착했구나."

나는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관문을 바라보았다.

어찌 보면 일개 관문에 불과할진대 이처럼 끝없이 뻗어 있는 성벽의 웅장함에 호기마저 일어났다.

'아, 외적을 방비하기 위해 이토록 엄청난 공사를 벌였다니 진짜 대단하네.'

나는 내심 탄복하며 화목란과 함께 바람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성문 앞에는 도시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줄이 길게 늘어져 있었지만 상황이 급했기에 미안하지만 그들을 무시하고 성문 앞으로 다가갔다.

"네놈은 저 줄이 보이지 않느냐?"

성문을 경비하던 병졸들이 눈을 부라렸다.

"급한 일이 있어서 그렇소."

"급한 일? 보아하니 도사 같은데, 배운 사람이 왜 그래? 여기 급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어? 잔말 말고 뒤로 돌아가."

"미안하지만 정말 급한 일이오."

"정말 급한 일이라면 좋아, 그럼 사정을 봐줄 수 있지. 성의만 보여 준다면 말이야."

"...."

노골적으로 손을 내미는 병졸을 보며 살짝 당황했다.

중국인이 뇌물을 좋아한다는 말은 들었지만 벌건 대낮에 그것도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이렇게 노골적으로 요구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뭐, 달란다고 줄 생각도 없었지만 말이다.

"목란아. 네가 나서야 할 것 같은데?"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화목란이 자신의 신분을 증명하는 패를 병사의 손에 살포시 내려놓았다.

"여기요."

"이게 뭐...!!"

돈이 아님을 알아본 병졸이 눈살을 찌푸렸으나 이내 패의 정체를 알아보곤 순간 부동자세를 취했다.

"추, 충성!"

병졸은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녀석이 보기엔 참으로 고약한 표정이었겠지만 난 뇌물을 요구한 병졸을 향해 불쌍한 눈빛으로 물었다.

"성의라면 얼마를 드리면 될까요? 보시다시피 제가 도사라 가진 게 별로 없어서요."

"아, 아닙니다. 성의라뇨. 뭔가 오해가...."

병졸은 크게 당황했는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난 사람 좋아 보이는 인자한 미소를 보이며 병졸들을 향해 나직이 말했다.

"자넨 가서 담당자를 불러오고 넌... 일단 대가리부터 박아."

"넵!"

명을 받은 병졸은 어디론가 잽싸게 달려갔고 뇌물을 요구한 병졸은 그대로 머리를 땅에 박았다. 북부대장군가의 직계가족을 증명하는 패라면 옥문관에선 왕족과 마찬가지였기에 어느 누구도 나서는 이가 없었다.

잠시 후,

우리는 헐레벌떡 뛰어온 군관의 극진한 호위를 받으며 북부대장군가가 위치한 내성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여담이지만 뇌물을 요구한 병졸들은 수비대장이 직접 데리고 나가 밤새도록 뺑뺑이를 돌렸다고 한다.

내성에 들어오고 얼마 후,

규모가 꽤 커 보이는 저택에 당도하자 나는 군관을 따라 그가 마련해 준 처소에서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흐음~.'

옥문관에서 왕과 같은 권력을 가졌다고 들었지만 군인이라는 본분에 맞게 검소함과 절제감이 집 안 곳곳에서 느껴졌다.

"시장하시죠?"

"조금요."

"목욕물을 준비했으니 일단 목욕부터 하고 나오십시오."

"감사합니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는 욕조를 보자마자 피로가 풀리는 느낌이다.

나는 즉시 옷을 벗고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 시원~~하다."

적당히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자 그동안 쌓였던 피로가 가시는 기분이다.

목욕을 마무리할 때쯤 밖에서 부산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대장군께서 오찬(午餐)을 함께하자고 하시는데 어떠십니까?"

"좋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나는 의관을 정제한 후, 밖으로 나갔다.

거처를 안내해 주었던 군관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도사께서는 잘 쉬셨는지요?"

"덕분에 개운하네요. 감사합니다."

"하하하! 아닙니다."

군관은 손을 저으며 겸양을 표했다.

"대장군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어서 가시죠. 제가 모시겠습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는 그를 따라 저택 내원으로 들어갔다.

이제 곧 전장의 지배자, 북부군의 살아 있는 전설이라 불리는 화진옥 대장군을 만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뛰었다.

북부대장군가의 내원,

상당히 많은 인물이 모여 있는 와중에 순백의 수염이 명치까지 내려온 노인이 상석에 앉아 있다. 나도 모르게 심장 한쪽이 두근거리며 격동을 금치 못했다.

'저분이 나의 외할아버지인가?'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기세를 보이고 있는 노인과 그를 필두로 다수의 남녀가 시립해 있고 화목란의 모습도 보였다.

'그럼 저분들이 외삼촌과 이모겠지.'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감정이다.

내 영혼과 하나가 된 주선우 때문인지 마음이 한결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설레는 마음을 숨긴 채 한 걸음 나아가 공손히 인사했다.

"무당의 청운이 화진옥 대장군을 뵙습니다."

"댁이 청운이라는 도사로군."

'...!'

말투에서 왠지 모를 퉁명함이 느껴진다.

그러고 보니 화진옥 대장군은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능히 그러고도 남을 매서운 눈길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당혹감을 느꼈다.

대장군이 왜 저러한 눈빛을 보이는 것인가? 그것도 다짜고짜!

오만 가지 생각이 떠올랐지만 나는 꿀릴 것이 없었기에 당당히 시선을 마주했다.

따지고 보면 신분 역시 내가 높지 않은가!

-파지지직!

우리가 워낙 뚫어지게 바라보며 눈빛을 교환한 탓에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외할아버지는 한평생을 전장에서 살아온 군인인 만큼 눈빛에 담긴 기세가 사뭇 대단했다. 하지만 나는 화경에 이른 고수, 단언컨대 외할아버지는 내 기운을 감당할 수 없다.

결국 내 예상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기세를 풀고 말았다.

"으음! 그렇게 사나운 눈으로 쳐다보면 어떡합니까?"

'아차!'

적당히 배려할 생각이었는데 나도 모르게 조금 과했나 보다.

상대방을 완전히 이겨 버렸다.

난 급히 두 손을 모아 사과하려 했는데....

외할아버지의 행동이 한 박자 빨랐다.

"손녀에게 모두 들었소. 검제의 도움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바외다."

외할아버지는 묵직하지만 부드러운 음성으로 내게 합장을 했다.

"...연이 닿아 도왔을 뿐입니다."

나는 그제야 그가 날 시험했다는 것을 깨닫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공손히 인사를 건넸다. 이는 사문의 존장이나 집안의 어른을 보았을 때 보이는 극진한 공경의 표현이었다.

"어...어?"

화진옥 대장군의 눈에 의아한 빛이 떠오를 때,

그리고 그를 비롯한 모든 이들의 눈빛에 의문을 들기 시작했을 때, 바깥에서 요란스러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 무슨 소란이냐?"

뒤이어 군관의 음성이 들려왔다.

"대장군께 아룁니다. 연왕의 사절단(使節團)이 문밖에서 난동을 부리고 있습니다."

"사절단이?"

"네, 대장군을 뵙지 못한다면 큰 싸움이 벌어질 것 같습니다."

"얼마나 몰려왔더냐?"

"병사 500명을 대동하였습니다."

"...!!"

고작 500명이다.

하지만 저들은 연왕의 사절단, 아무런 이유 없이 연왕의 병사를 공격한다면 그 순간 반역도당이 되는 것이다.

"연왕의 병사들은 현재 도성 밖에 대기시켜 놓았으나 오래 버티기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흥! 이놈들이 작정을 했나 보군."

군관의 이어진 보고에 외숙부 화경찬 장군이 묵직한 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상방보검에 이어 상황보패가 있습니다. 더 이상 저들을 피할 필요가 없습니다."

"형님의 말이 맞습니다."

"너희들이 말이 맞다. 보패가 도착한 이상 이제는 와병(臥病)을 핑계로 피할 이유가 없지. 감 별장."

"네, 대장군."

"가서 대전으로 모셔라."

"알겠습니다. 충!"

화진옥 대장군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밖에서 '후우웅' 하고 호각 부는 소리가 들렸다. 호각 소리는 맑고 깨끗한 음향으로 들려왔는데 다시 귀를 기울이니 소리에 은근히 살기가 서려 있어 누군가를 도발하는 것 같았다.

화경찬 장군이 노기를 띠며 말했다.

"아버지, 놈들이 허락도 구하지 않고 들어온 모양입니다."

"그런 것 같구나. 그래도 손님이 왔으니 경거망동하면 안 된다. 너희들도 마찬가지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아버지."

잠시 후,

호각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며 지척에 도달했다.

"흥! 아무리 북부대장군가라 하지만 연왕의 사절단이 왔는데 코빼기도 보이지 않다니 무례하군요."

"그러게 말이야. 멍청한 늙은이의 발악이지."

다른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그동안 꾀병이 아니었을까요?"

"그건 모르지. 하지만 한평생 변방을 지키며 헌신했으니 우리 자비로운 연왕 전하께서 마지막 기회를 주는 것이 아닌가?"

"대장군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떡할까요?"

"죽이는 것은 너무나 손쉬운 일이니 천민으로 강등시켜 각처에 있는 사람들에게 구경시켜 주는 게 어떨까?"

"오호라, 그것참 좋은 생각이군요."

"...!"

저들의 대화 소리는 일부러 들으라는 듯, 똑똑히 전해 왔다.

북부대장군가 사람들은 저들의 모욕적인 언사를 듣자마자 분노가 치밀어 올라 마치 눈에서 불을 뿜어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모두 알고 있었다.

저것이 적의 격장지계(激將之計)라는 것을 말이다.

"치졸한 수법이군."

"그러게 말입니다, 아버님."

"문을 열어 손님을 맞이해라."

"네."

화진옥 대장군의 말에 화경찬 장군이 문을 열며 낭랑하게 외쳤다.

"어서들 오시오. 먼 길에 노고가 많으셨소."

그러자 한 떼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 수가 족히 삼, 사십 명은 되는 것 같았다.

"북부대장군가에 오신 걸 환영하는 바요."

제8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