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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 - 3

* * *

레드핑크 은수는 SW 엔터테인먼트 소속 걸 그룹 출신 아이돌이다.

국내에 수많은 팬을 가진 그녀는 얼마 전 출연한 드라마와 영화가 연달아 대박을 터트린 덕분에 이제는 연기력까지 인정받아 차세대 K-POP 스타로 거듭나게 되었다. 하지만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부와 명예, 인기를 손에 쥔 대신 그녀의 하루는 24시간이 모자랄 지경이다.

몇 번이나 휴가를 요청했지만 소속사 대표는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한다며 그녀를 애써 만류했다.

"쉬고 싶어. 놀고 싶어. 휴가가 필요해."

"안 돼."

"쉬고 싶단 말이에요. 휴가 좀 주시죠, 대표님."

"은수야, 인기 그까이 꺼 잠깐이다. 네 선배들 봐라. 우리 물 들어올 때 노 젓자. 약속할게. 딱 요번 작품만 한 번 더 해라. 그담에 일주일 휴가 줄게. 어때? 오케이?"

"쳇! 알았어요."

구시렁구시렁 불평이 흘러나왔지만 따지고 보면 대표의 말이 틀리지 않다.

영원할 것 같던 인기를 누리던 몇몇 선배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린 것을 그녀 역시 목도하지 않았던가.

"지영아, 오늘 스케줄 뭐야?"

"네, 언니. 낮 11시에 매거진 M에서 인터뷰 있고요. 오후 2시부터 광고 촬영이 있어요."

"광고 촬영?"

"네. 인천 공항 면세점에 들어갈 사진요."

면세점 광고.

한류 스타로 공인받은 이들만 찍을 수 있다는 그 면세점 광고다.

"장소가 어디야?"

"마운틴 호텔 카지노 객장이에요."

"오케이."

은수는 그녀만이 가지고 있는 루틴을 돌리며 외출을 준비했다.

"언니, 차 도착했대요. 지금 출발하시면 될 것 같은데...."

"그래, 가자~."

은수는 차가 도착했다는 말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후,

은수와 지영을 태운 최고급 밴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시각,

마운틴 호텔 카지노는 새롭게 오픈할 준비에 분주하다.

"레드핑크 은수 씨는?"

"좀 전에 출발했다고 연락받았습니다."

이제 출발했다니 그럼 대략 30분 후에 도착할 것이다.

"자! 조금 있으면 레드핑크 은수 씨가 촬영장에 도착한답니다. 마지막으로 세트 점검만 한 번 더 하죠."

"네."

"알겠습니다."

카메라 감독의 말에 스태프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얼마 후,

은수가 카지노에 도착했고 그녀를 위한 광고 촬영이 시작되었다.

"그렇지. 좋습니다. 아주 좋습니다."

"좀 더 환하게, 미소~ 미소~~!! 더, 좀 더."

-찰칵! 찰칵!

"은수 씨, 고개 좀 더 위로 올려 주세요. 그렇죠. 지금 좋아요."

"이번엔 도발적으로!!"

"오케이! 바로 그거예요."

-철컥! 그륵! 철컥!!

그 순간 조감독 이영찬이 이상한 소리에 고개를 갸웃했다.

'방금 무슨 소리지, 셔터 소리를 잘못 들었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변을 살펴봤지만 다들 촬영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이다.

'뭔가 동물의 소리 같았는데.... 설마, 아니겠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애써 외면했다.

서울 외곽에 위치해 있지만 그래도 서울에서 손에 꼽히는 특급 호텔이다.

이곳에서 동물의 울음소리가 들릴 일이 어디 있겠는가?

더욱이 지금은 카지노 재개장 준비가 한창이라 손님도 없는데 말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말하면 이영찬의 감이 맞았다.

어린이 대공원이 위치한 아차산에 불규칙 게이트가 나타나 게이트 브레이크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륵, 그륵, 그르륵!

"거기 누구야?"

촬영 감독의 성난 음성이 터져 나왔다.

"촬영 중에 누가 이상한 소릴 내는 거야?"

감독 역시 정체를 알 수 없는 울음소리를 들은 모양이다.

터벅, 터벅... 터벅.

청각을 자극하는 발자국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한곳을 향했다.

어둠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누군가의 실루엣.

"어?"

"저, 저게 뭐야?"

긴 꼬리에 날카로운 발톱, 파충류 특유의 눈이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몬스터의 등장에 뇌까지 활동을 멈춘 것인가!

첫 번째 희생자가 나오기까지 어느 한 사람도 움직이지 않았다.

우두둑!

산 채로 들린 채 등뼈가 아작 났다.

사람들은 너무 놀라 입을 벌린 채 망부석이 되어 버렸다.

"꺄악!"

하지만 누군가의 비명을 시작으로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괴성을 지르며 출구를 향해 도망쳤는데 애석하게도 카지노 밖은 이미 살육의 초침이 움직이고 있었다.

"사, 살려 줘."

두 번째 희생자가 나왔다.

조명 기구에 발이 걸려 넘어진 스태프 앞에 리자드맨이 빠르게 다가와 남자의 오른팔을 그대로 물어뜯은 것이다.

"으아악!"

산 채로 물어뜯기는 고통, 가히 상상이 가지 않았다.

* * *

"응?"

희한한 광경이 들어왔다.

다수의 사람들이 다짜고짜 강변북로로 뛰어든 것이다.

빠르게 움직이던 차량들이 사람들의 난입에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미친 듯이 경적을 울렸다.

그러나 잠시 후, 경적 소리 또한 일시에 멎었다.

"크아아아!"

포효성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리자드맨 때문이다.

저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다.

근처에 위치한 게이트가 브레이크를 일으킨 것이 틀림없었다.

"으악, 몬스터다."

"살려 줘."

"어서 피해. 도망쳐."

나는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마운틴 호텔 방향이군."

리자드맨이 등장한 방향으로 검붉은 아지랑이가 올라오는 것을 확인했다.

게이트의 위치를 확인했으니 일단 이곳부터 정리해야겠다.

나는 오토바이를 내버려 두고 곧장 몬스터를 향해 몸을 날렸다.

"으아악."

중년 남자의 허리를 베어 가던 리자드맨의 칼을 막아 냈다.

단순히 막아 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부드럽게 검을 흔들며 반격을 가했다.

-서걱, 서걱! 서걱!

검기가 비산하며 리자드맨을 덮쳤다.

속전속결(速戰速決), 정면에서 베고 사선에서 베고 검광이 번쩍일 때마다 리자드맨이 쓰러졌다.

"헌터다."

"와아! 헌터가 왔다."

일부 눈치 빠른 사람들이 내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그들도 알고 있는 것이다.

강자 옆이 가장 안전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보게, 나 좀 살려 주게."

그때 날 부르는 누군가의 다급한 음성이 들려왔다.

덩치는 산만 한 주제에 차 뒤에 숨어 벌벌 떨고 있는 사내였다.

"그래, 여기! 어서 이쪽으로 오라고. 이익! 나 국회의원이야."

그는 자신의 신분을 내세우며 구해 달라고 악을 썼다.

나는 그를 무시(사실 다른 이들에 비해 크게 위험해 보이지도 않았다)하고 어린아이와 함께 있는 가족을 향해 몸을 날렸다.

가장으로 보이는 남성이 부인과 아이를 뒤에 놓고 오크와 대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피가 튀고 살이 찢기는 광경에 겁을 집어먹었는지 손과 발을 부들거리며 떨고 있었지만 가족을 지키겠다는 사명감 때문인지 결코 뒤로 물러서지 않고 있었다.

-쉬익!

단검 한 자루가 섬광처럼 빠르게 날아가 녀석의 옆구리에 박히는 순간 나는 녀석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케엑!"

"취엑!"

낡고 녹슨 도끼 하나를 머리 위까지 쳐든 오크와 2미터는 족히 되는 거대한 낫을 들고 휘두르는 리자드맨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태극검!"

어디선가 바람 소리가 들린다 싶으면 한 놈이 쓰러지거나 심각한 상처를 입었다.

"으악!"

반대쪽에서 누군가의 비명이 들려왔다.

나는 즉시 비명이 터져 나온 곳으로 몸을 날렸다.

비록 모두를 구할 순 없었지만 생명이 경각에 달린 사람들이 보일 때면 최선을 다해 그들을 보호했다.

"괜찮으세요?"

"네? 네.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때 리자드맨 하나가 번개같이 나타나 나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키릿! 주, 죽...어라!"

반파된 자동차를 엄폐물로 삼고 나타난 덕에 놈과의 거리가 무척이나 짧았다.

"조, 조심하세요. 아악, 안 돼!!"

리자드맨의 칼이 나를... 베었다.

아니다. 정정하겠다.

놈의 칼은 날 베지 못했다.

스스륵!

놈이 벤 것은 순간 이동 스킬로 인해 만들어진 내 잔상이었다.

"극, 그륵?"

리자드맨이 당황한 눈빛을 보이며 나를 향해 재차 공격을 감행했지만 애석하게도 태극검에 얼굴과 몸통이 분리되고 있었다.

-서걱! 털썩.

그로부터 얼마 뒤,

주변을 살피자 두 발을 딛고 있는 몬스터가 보이지 않았다.

"휴우."

싸울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끝이 나니, 어느새 식은땀이 흥건하게 솟았다.

내 옷이 몬스터의 피로 젖어 버린 건 당연한 일이었고 말이다.

'젠장, 또 버려야겠군.'

몬스터의 피로 뒤범벅이 되면 세제 한 통을 모두 써도 그 피비린내가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이, 이보게. 나 좀 보게. 나 국회의원이야. 국회의원이라고! 돈이 필요한가? 그래, 얼마면 되겠나? 날 여기서 데리고 나가 줘. 그럼 자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아까 그 국회의원이다.

저런 모습을 보면 참 한심하다.

위급한 상황에서 무엇이 우선인지 정말 모르는 것인가?

그것도 국회의원이라는 사람이 말이다.

이래서 사람을 잘 뽑아야 하는 것이다.

나는 그를 무시한 채 살아남은 사람들을 향해 나직이 외쳤다.

"게이트 관리청에 신고하세요."

그리고 다음 순간,

마운트 호텔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몇 명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멋지다!"

"최고야!"

제29화

29화 리자드맨 킹

레드핑크 은수의 손과 발이 후들후들 떨려 왔다.

공포심의 근원은 촬영장에 나타난 몬스터다.

우걱우걱!

방금 전까지 촬영을 주도했던 감독은 지금 놈들의 위장에 들어가고 있었다.

'제발... 신이시여.'

죽음의 공포 앞에선 누구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평소 자신만 믿으라며 호언장담하던 로드 매니저가 가장 먼저 줄행랑쳤고 간이라도 빼 줄 것처럼 옆에서 조잘대던 스태프들 역시 뒤도 보지 않고 카지노를 빠져나갔다.

그러고 보니 삶이 참 웃기다.

이만큼 성공했으면 됐지, 무슨 영화(榮華)를 보겠다고 그렇게 발버둥 쳤는지 허탈했다.

'연애도 한 번 못 해 봤는데.'

가장 억울한 건 바로 이것이었다.

이때 그녀의 눈에 한 소녀가 들어왔다.

부모가 어디에 갔는지 모르겠지만 곰돌이 인형을 품에 안고 겁에 질려 있는 어린 소녀였다. 그리고 그런 소녀의 앞에 리자드맨이 혀를 날름거리며 다가가고 있었다.

"아, 안 돼. 안 돼!"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던 것일까?

그녀가 번개같이 움직여 소녀의 앞에 섰다.

파충류 특유의 노란 눈깔이 그녀를 향하기 시작했다.

"그륵?"

그런데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그녀가 느닷없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평화의 노래를 말이다.

<상태 창>

이름 : 은수(본명 심은수)

레벨 : 18

고유 특성 : 음유시인

칭호 : 한류 스타, K-POP 스타

생명력 : 180/180 마력 : 100/100

힘 : 9 체력 : 16 민첩 : 14

지혜 : 23 지능 : 21 행운 : 10 매력 : 60

보너스 스탯 : 0

<스킬 창>

이름 : 치유의 노래 부르기 F급 숙련도 2%

이름 : 기쁨의 노래 부르기 B급 숙련도 70%

이름 : 위로의 노래 부르기 C급 숙련도 98%

이름 : 평화의 노래 부르기 E급 숙련도 10%

설명: 음유시인 특유의 스킬.

듣는 이에게 각각 치유, 활력, 위로, 평화를 가져다준다.

어느 누구도,

심지어 기획사 대표도 모르고 있었지만 그녀는 각성자였다.

* * *

나는 마운틴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입구부터 정리하기 시작했다.

검을 수평으로 휘두르자 시퍼런 빛의 검기가 눈에 보이는 족족 몬스터에게 날아가 놈들을 쓸어버렸다.

그로 인해 마나가 쭉쭉 빠져나갔지만 한 명이라도 더 살리려면 이것이 최선이었다.

-서걱!

낫을 휘두르던 리자드맨의 손목이 잘려 나간다.

전투의 함성을 내지르던 오크의 두개골이 부서지며 하얀 뇌수가 흘러내렸다.

"저, 저 먼 거리를...?"

"고렙이다. 고렙의 헌터가 왔어."

겨우 정신을 차린 사람들의 입에서 숨길 수 없는 감탄성이 터져 나왔다.

"몬스터가 있습니까?"

"안에요. 안으로 들어갔어요."

"그렇군요. 혹시 모르니 피하세요."

"네. 감사합니다."

나는 재빨리 호텔로 들어갔다.

두 가지 갈림길이 나왔다.

한쪽은 위층으로, 다른 한쪽은 아래층으로 향하는 길이다.

어디로 갈까 고민하고 있을 때 문득 아래쪽에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저게 뭐지?"

그 순간 내 신형이 아래층에 위치한 카지노 객장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카지노 내부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동시에 시스템의 음성이 귓가에 들려왔다.

-[띠링, 음유시인이 부르는 평화의 노래를 들었습니다. 10%의 마력이 회복됩니다.]

'음유시인?'

나는 노련한 사냥꾼답게 흘러가는 상황을 금세 파악할 수 있었다.

저기 노래를 부르고 있는 여인이 음유시인이고 그녀가 부르고 있는 노래가 평화의 노래며 그녀의 노래 덕에 몬스터들이 저렇게 잠잠히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문득 여인의 얼굴이 낯이 익었지만 이건 중요치 않다.

오히려 그녀의 등 뒤에 몸을 숨기고 있는 작은 소녀의 존재가 더 중요했다.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은데?'

나는 재빨리 여인에게 눈치를 보냈다.

음유시인의 노래는 어찌 보면 마법사의 마법과 같은 것이다.

마법을 펼치는 중에 작은 충격을 받거나 혹은 누군가의 방해로 마법이 깨지면 마나가 역류해 다칠 수 있다.

심하면 불구가 되거나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그런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눈치를 줬다.

"...!!"

다행히 내 의도를 알아먹은 것 같다.

나는 손바닥을 활짝 펼친 다음 일 초에 하나씩 손가락을 접었다.

그렇게 마지막 손가락이 접히는 순간,

그녀의 입술이 닫히는 동시에 광량한 음성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으아아아!!"

몬스터들의 시선이 모두 나를 향한다.

그들은 붉은 눈빛을 번뜩이며 몬스터 특유의 살기를 흘려 내기 시작했다.

"인간이다. 죽여라."

"주, 죽여라."

다행이다.

주위를 끄는 데 성공했다.

나는 한 손에 검을 쥔 채 단전을 활짝 열었다.

어디선가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오는가 싶더니 쐐액!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이 공기를 가른다. 곧이어 강력한 회오리가 생성되어 놈들을 덮쳤다.

-콰아앙!

강력한 와류에 휩쓸려 테이블이 날아가고 엎어졌고 벽에 붙어 있던 타일이 완전 박살 나 우수수 떨어졌다.

주변에 있던 몬스터 역시 무사하지 못했다.

삽시간에 찢기고 잘리고 부서졌다.

"컥!"

외마디 비명이 터졌다.

나는 놈들이 당황해하는 틈을 놓치지 않고 놈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놈들이 쓰러졌다.

그때였다.

마치 시위를 놓는 화살처럼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나는 땅을 박차고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쾅!

그 순간 테이블이 두 동강으로 쪼개지며 마치 폭탄이 떨어진 듯,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땅바닥이 움푹 파였다.

온몸에 솜털이 곤두섰다.

"리자드맨 킹?!"

내 앞에 나타난 녀석은 평범한 리자드맨이 아니다.

녀석은 3미터는 가뿐히 넘어 보이는 키에 반질거리는 은빛 비늘로 온몸이 빼곡히 뒤덮여 있었다. 다른 녀석들 역시 비정상적으로 삐죽하게 주둥이가 튀어나와 있었지만 놈은 그 정도가 더욱 눈에 띄었다.

"그르르르!"

"우워워!!"

리자드맨들이 놈을 향해 무너지듯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마치 왕에게 충성 어린 경배를 보내는 신하처럼 말이다.

리자드맨 킹이 낫을 든 채 나를 향해 강렬한 투기를 뿜어냈다.

나 역시 지지 않고 놈을 응시했다.

"그륵, 넌 누...구...냐?"

리자드맨 킹이 세로로 길게 찢어진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어눌한 발음으로 물었다.

일부 영장류 몬스터 중에 인간과 대화가 가능한 몬스터가 있다고 들었는데 직접 보니 꽤 놀라웠다. 하지만 나는 놈의 질문에 태연히 답하는 동시에 놈을 도발하기까지 했다.

"보시다시피 인간이지. 멍청한 질문이군."

내 말에 기분이 나빴는지 놈이 적의가 담긴 포효를 질렀다.

"크아아아! 죽고 싶은가 잉...간."

"잉간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그러는 넌 누구지?"

"내 이름은 요하네스 폰 그루지아 넥타 시빌리온 3세다. 위대한 리자드맨 일족의 왕이며 위대한 지도자다."

"요하네스 뭐?"

"요하네스 폰 그루지아 넥타 시빌리온 3세."

"...푸훕!"

나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뭐래, 한낱 도마뱀 새끼 주제에 이름이 너무 웃기잖아."

"너, 잉간. 주, 죽...인다."

더 이상 상호 간에 말이 필요치 않다.

우리는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빠르게 간격을 좁혔고 서로를 죽이기 위해 검을 휘둘렀다.

-슈욱!

짧은 순간 가슴이 뛰었다.

'공간 단축?'

놈의 낫에서 시뻘건 기운이 벼락처럼 떨어진 것이다.

나는 순간 이동을 펼쳐 놈의 공격을 피했다.

"놈! 잔재주가 있구나."

리자드맨 킹은 곧장 낫의 방향을 틀어 공격을 이어 갔다.

커다란 덩치와 다르게 무지막지한 스피드를 보인다.

하지만 나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어느새 태허무극심법의 기운을 끝까지 끌어 올려 태극검을 뿌렸다.

까앙!

기세 좋게 달려드는 거대한 몸집의 리자드맨 킹과 홀로 오롯이 받아 내는 인간.

거대한 낫이 튕겨 나가며 본격적인 격돌이 시작되었다.

불꽃과 먼지가 눈앞에서 요란하게 움직이며 날카로운 섬광이 일렁인다.

나는 태극검의 검끝을 리자드맨 킹의 얼굴을 향해 들었다.

하지만 이것은 거짓이다.

내가 진정으로 노리고 있는 곳은 놈의 발등이었다.

까앙!

또다시 불똥이 튀었다.

계속해서 자신의 공격이 막히자 리자드맨 킹이 광소와 함께 파충류 특유의 노란 눈빛을 번뜩이며 낫을 횡에서 종으로 휘둘렀다.

순간 나는 놈의 힘을 이용하기 위해 반원을 그리며 낫을 향해 몸을 날렸다.

낫의 기둥을 타고 미끄러지듯 그대로 떨어지자 불꽃이 일어나며 놈의 발등을 찍는 데 성공했다.

"으악!"

깜짝 놀란 리자드맨 킹이 재빨리 발을 빼며 뒤로 물러났지만 애석하게도 이것은 일반적인 공격이 아니었다.

피육을 상하게 하는 것을 넘어 그 내부까지 파괴하는 내가기공이었다.

리자드맨 킹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상처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륵! 놈을 죽여라."

순간 사방에서 리자드맨이 나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도마뱀 새끼. 꼴에 왕이라고 떠들더니 명예도 모르는 놈이었군."

"죽여라. 어서 놈을 죽이란 말이야."

나는 순간 이동 스킬을 펼쳐 리자드맨과 거리를 벌리는 동시에 아공간을 열고 왼손을 그 안에 넣었다.

"받아라!"

-슈슈슈슈슉!

왼손을 쭉 뻗자 비수가 앞으로 날아갔다.

이게 끝이 아니다.

한 번에 다섯 개씩 리자드맨을 향해 아공간에 수납해 놨던 수십 개의 비수를 모조리 던졌다.

정확성이 떨어졌지만 내력을 담긴 비수였기에 그 위력이 만만치 않았다.

-퍼퍼퍼퍼펑!!

가죽 북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리자드맨들이 우수수 쓰러졌다.

누구는 머리에, 누구는 가슴에, 또 누구는 배에 구멍이 뚫린 채로 말이다.

"크허허허헝!"

리자드맨 킹의 입에서 분노에 찬 괴성이 터져 나왔다.

놈은 마구잡이식으로 거대한 낫을 휘둘렀다.

놈의 일격에 '쾅' 하고 객장이 박살 났고 '펑' 하고 바닥이 터져 나갔다.

그러나 기동력을 잃은 몬스터의 공격은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었다.

나는 지그재그로 달리며 놈의 시선을 교란하며 순간 이동 스킬을 펼쳤고 다음 순간 놈의 정수리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끝이다."

나는 역수로 검을 잡은 그 상태로 머리를 내리찍었다.

더욱이 회전력을 가미했기에 위력 역시 배가되었다.

-꽈앙!

거대한 폭음과 함께 검끝이 정수리를 관통해 턱까지 뚫고 나왔다.

놈은 자신의 최후를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을 마지막으로 '쿵' 소리와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아이템 리자드맨 킹의 거대한 낫을 얻었습니다.]

-[5천 골드를 얻었습니다.]

-[아만타움 광석 × 40개를 얻었습니다.]

-[아이템...권을... 얻었습니다.]

-[미스릴 광석 × 82개를 얻었습니다.]

후후!

네임드를 잡은 덕에 아이템 풍년이다.

확인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

"괜찮으세요?"

"네, 덕분에요."

여자의 말에 내 시선이 잠깐 여자의 얼굴에 머물렀다.

단아함과 함께 음유시인 특유의 신비함이 섞여 있다.

'엄청난 미인이네.'

더욱이 쉽게 볼 수 없는 기품마저 느껴졌다.

"아이는요?"

내 질문에 여인이 대뜸 아이를 확인하더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도 괜찮은 것 같아요. 고마워요."

"그것참 다행이네요. 운이 좋았어요."

"네?"

"위로 갈까, 아래로 갈까 고민하던 차에 노랫소리를 들었거든요. 음유시인 맞죠?"

"네."

그녀는 잠시 고민하는 모습이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다.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지만 확실히 내가 알고 있는 누군가와 비슷해 보였다.

"저기요, 혹시...."

이때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헌터들이 도착한 모양이다.

"헌터들이 도착한 모양이네요. 그럼 전 이만."

"저기요, 잠깐만요."

"네?"

"제 이름은 은수예요. 심은수."

'은수?'

아!!

어쩐지 낯이 익다 하더라니.

그녀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핫한 스타였다.

최고의 K-POP, 한류 스타를 꼽을 때 늘 첫손에 꼽히는 그녀를 나 역시 알고 있었다.

'화면이 실물을 따라가지 못하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내게 묘한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1조와 2조는 위로, 3조는 나와 함께 지하로 간다."

"...!"

이젠 정말 가야 할 시간이다.

나는 레드핑크 은수를 향해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며 작별을 고했다.

"그럼 이만."

"저... 저기요...."

다음 순간.

나는 순간 이동 스킬을 연달아 펼쳐 내 카지노를 빠져나갔다.

제30화

30화 미군

"왜 그러십니까?"

"방금 뭔가 움직이지 않았나?"

"방금요?"

헌터 관리청 소속 유경원 팀장의 말에 이상현 헌터가 주변을 살폈지만 움직이는 것은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데요."

'에어컨 바람이었나?'

유경원 팀장은 고개를 한 번 갸웃하더니 말했다.

"내가 착각한 것 같군. 어서 들어가지."

"네. 팀장님."

"1조와 2조는 경계를 늦추지 말고 3조는 현장을 수습해."

"네."

"알겠습니다."

관리청 소속 헌터들이 도착하자 참혹했던 현장이 속속 정리되기 시작했다.

* * *

이와 같은 시각,

나는 사건 현장에서 무사히 빠져나온 직후 오토바이를 몰고 한강 공원 쪽으로 빠졌다. 뭐라도 간단하게 먹기 위해서다.

각성자가 초인임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먹지 않고 살 수 없다.

연이은 싸움에 체력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공원 주차장에 오토바이를 세워 놓고 이동식 포차를 향해 걸어갔다.

주말인 데다 저녁 시간이니 연인과 가족 단위의 사람들이 꽤 많이 나와 있었다.

"스테이크 하나 주세요. 콜라도 주시고요."

"네, 손님."

"얼마죠?"

"17,000원입니다."

"여기요."

오호~

나직한 감탄이 흘러나왔다.

길거리 음식이지만 여느 레스토랑 못지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자리에 앉아 바람에 일렁이는 한강을 바라보며 큐브 스테이크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공원에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늘고 있었다.

그중에는 머리카락을 짧게 자른 외국인들의 모습도 보였는데 훈련을 받은 흔적을 풍기는 것으로 보아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인 것 같았다.

그런데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 것은 그들이 보이고 있는 행동이다.

"같이 한잔하자니까. 왜 빼고 그래."

"우리 미군이야. 미군이라고! 아메리칸 솔저,"

그들은 얼굴과 몸매가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는 한국 여자들에게 접근해 치근덕대고 있었다.

"자! 같이 놀자. 내가 홍콩 보내 줄게."

"이보세요, 싫다고 말했잖아요."

"에이~~ 왜 자꾸 빼. 선수끼리."

"이 손 놔요. 자꾸 이러면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

"하하하! Cute once you go black you never go back."

"헐! 이 새끼, 지금 뭐라는 거야? 미친 거 아냐?"

흑인의 말에 한 여성이 크게 분노했다.

"왜, 지금 뭐라고 한 건데?"

"흑인에게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

이건 성적 비하가 담긴 말이었다.

"이런 미ㅊ ㅅㄲ...!!"

다음 순간 일이 터졌다.

몇 번 실랑이를 벌이다 폭행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

"#$^^*&$#%^**#"

"%^$&****##%^$**"

퍼억!

"꺄아악!"

쿵!

여자들이 바닥에 쓰러졌다.

한 명은 고통스러워하며 몸을 꿈틀대고 있었지만 다른 한 명은 의식을 잃었는지 미동조차 없다. 게다가 의식을 잃은 여인의 머리에서 피가 흘러나와 바닥을 붉게 물들였다.

"아악!"

"사, 사람이 쓰러졌다."

"119, 119!!"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특히 어린아이와 함께 산책을 나온 부모들은 재빨리 아이들의 눈과 귀를 가리기에 분주했다.

"조엘, 빨리 튀자. 부대로 귀환하면 돼. 그럼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저번에도 그랬잖아."

"그래, 제임스. 네 말이 맞아. 어서 도망치자."

놈들 역시 일이 크게 벌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잽싸게 도망치기 시작했다.

목격자가 있었지만 부대로 복귀할 수만 있다면 자신들은 무사하리라 생각한 것이다.

"어? 어!! 놈들이 도망쳐요."

"저 새끼들 잡아요!"

놈들이 도로를 향해 뛰어들었다.

끼이이익!!

달려오던 차량들이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왕복 4차선이 엉망으로 변했지만 놈들은 무사히 도망치는 듯했다.

내가 없었으면 말이다.

한순간 공간이 일그러지며 날아든 발길을 피할 수 없었다.

놈들은 공중에서 튕기듯이 날아가 차량 유리창에 처박혔다.

"시X, 뭐야."

비틀거리며 유리창에서 기어 나온 놈들은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며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삐딱하게 서 있는 나와 마주쳤다.

"넌 누구야?"

"갓 X! 당장 저리 안 비켜!"

녀석들의 눈은 광기로 가득 차 있었다.

하긴 지금 녀석들의 머릿속에는 이곳에서 서둘러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눈썹을 살짝 찡그리는 동시에 가운뎃손가락을 올려 주었다.

순간 어린아이 머리통만 한 주먹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오자 나는 녀석의 주먹을 툭 하고 잡아채는 동시에 아래로 가볍게 꺾어 줬다.

우두둑!

"으악!"

놈의 팔이 기형적으로 꺾이며 쓰러졌다.

다음은 저 녀석 차례다.

나는 녀석의 멱살을 틀어잡아 하늘 위로 들어 올렸다.

"놔! 놓으라고!!"

그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멱살을 잡힌 것뿐인데 전혀 힘을 쓸 수가 없었으니 그의 두려움이 이해됐다.

하지만 내려 달라고 해서 그냥 내려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 무릎이 번개처럼 솟아올라 녀석의 복부를 올려쳤다.

"크헉!"

이는 모두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도로 한복판에 큰 대자로 뻗어 버린 녀석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녀석들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한 놈은 내가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필사적으로 주먹을 휘두르기까지 했다.

"오지 마. 다가오지 마."

이때 순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숨은 붙여 주마!"

나는 번개처럼 손을 움직여 녀석들의 혈도를 찍었다.

"으헉!"

"아악!"

끔찍한 고통에 한 놈은 입에서 거품을 물었고 다른 한 놈은 아예 정신을 놓아 버렸다.

웬만하면 경찰에 넘길 생각도 했지만 녀석들의 대화를 들어 봤을 때, 이런 일이 전에도 있던 것 같았다.

즉 참작할 여지조차 없었다.

나는 순간 이동 스킬을 펼쳐 사람들의 시야에서 빠르게 사라졌다.

* * *

[호텔 사계 스위트룸]

황기택과 안선환이 소파에 앉아 TV를 시청하고 있다.

[MSC TV]

-오늘의 뉴스를 알려 드립니다. 요즘 들어 게이트 브레이크가 끊이지 않고 있는데요. 오늘 오후에도 브레이크가 일어났다는 소식입니다. 윤상현 기자.

-네, 윤상현 기자입니다. 저는 지금 마운틴 호텔 로비에 있습니다. 오늘 오후....

[SBC TV]

-각성자 범죄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폭력, 강간 그리고 살인, 점점 그 수위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권력의 힘은 미약할 뿐입니다. 국회에서 각성자 법을 개정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결국 부결되었습니다. 조은아 기자.

-네, 조은아입니다.

[KCC TV]

-방금 들어온 소식입니다. 한강 공원에서 한국인 여성 두 명이 술에 취한 미군에게 폭행을 당해 치료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국회 TV]

-대한민국이 강대국이 된 것은 모두 헌터 덕분입니다.

-저 역시 헌터들의 공로를 인정합니다. 하지만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해야 합니다.

-이보세요, 박 의원님. 일부 범죄를 가지고 전체를 판단하는 우를 범하면 안 됩니다.

-네, 현 의원님. 의원님이 말씀이 옳습니다. 대다수의 헌터는 영웅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부에 불과해도 범죄는 범죄입니다. 범죄를 저질렀으면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합니다.

-각성자 기본법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만으론 부족합니다.

-이보세요, 박연수 의원님. 자꾸 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하시는데, 그러다 헌터들이 한국을 떠나면 어떻게 할 겁니까? 당신이 책임질 겁니까? 본인이 책임지지 못하겠으면 그만하세요.

"X신들, 웃기고 자빠졌네."

황기택이 TV를 보며 비아냥거렸다.

"헌터를 처벌하겠다고? 박연수 미X 새끼. 저런 X끼가 국회의원이라니! 아예 오크 밥으로 줘야 하는데, 안 그러냐?"

"에이~ 오크 밥도 아깝다. 차라리 고블린 밥이 어때?"

"고블린 밥?"

"흐흐. 그래. 고블린 밥!"

"그럼 완전 X밥이네. 큭큭큭~."

황기택은 뭐가 그리 웃기는지 배꼽까지 잡으며 웃음을 뿜어냈다.

"협회와 길드에서도 반대하는 법안이야. 기택아, 신경 쓰지 말자."

"개돼지 같은 놈들. 쟤들은 누구 때문에 지들이 등 따시게 살고 있는지를 몰라."

황기택은 담배 한 모금 깊게 빨고 음미하듯 천천히 내뱉었다.

"참! 선환아, 그 집은 어떻게 됐어?"

"그 집, 무슨 집?"

"최선우. 지금쯤이면 완전히 망하지 않았어? 별 소식이 없네."

"...아!"

다음 순간 안선환의 미간이 한 번 움질거렸다.

황기택 역시 선환을 바라보고 있던 터라 뭔가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음을 알게 되었다.

"왜, 무슨 일인데?"

"안 그래도 내가 얼마 전에 알아봤는데."

안선환이 그간의 일을 나직한 음성으로 설명했다.

"뭐, 로또?"

"응."

"그게 정말이야?"

"내가 우연인 척 가장하고 그 새끼 아빠를 만났는데, X발. 빚을 갚았다는 거야."

"뭐야, 1등이라도 됐대?"

"으... 응. 그런 것 같아."

"이런 미친!"

황기택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미리 보고했어야 했는데, 내가 깜박했어. 미안하다. 기택아. 어떻게 할까? 지금이라도...."

"됐어."

"응?"

황기택이 말없이 시선을 하늘로 던졌다.

"...로또라! 그 아저씨 말년에 운 한번 겁나게 좋네. 됐어. 재미도 없다. 이미 그 새끼도 죽었는데 심력을 쏟아 봤자 시간 낭비겠지. 선환아, 술이나 한잔 빨러 가자."

"그, 그럴까?"

안선환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와 같은 시각,

평택 미군 기지가 발칵 뒤집혔다.

"그래서 두 병사의 상태가 어떻다는 것인가?"

"그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뭐가 말인가?"

군의관 토렌스 소령의 답변에 허셀 호프 대령이 반문했다.

"상처 부위는 의외로 간단합니다. 조엘은 팔이 부러졌고 제임스는 복부가 파열되었습니다. 뭐 좌우 갈비뼈가 조금씩 나갔지만 모두 치료를 받으면 완치가 가능하죠."

"그래. 그럼 치료를 받으면 되는 것이 아닌가? 대체 뭘 이해할 수 없다는 거지?"

"문제는 혈관입니다."

"혈관?"

"네."

"자세히 말해 보게."

"혈관이 마치 아이들 혈관 크기로 줄어들었습니다."

"뭐?!!"

혈관은 혈액을 온몸으로 순환시키는 통로다.

사람의 혈관을 일직선으로 연결하면 약 10만 km에 달하며 이는 지구를 두 바퀴 반 정도 도는 거리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 혈관이 좁아지면 곧 혈액의 공급이 부족해져 심장의 움직임을 둔화시켜 협심증이나 심근경색 등을 일으켜 환자를 사망에 이르게 한다. 즉 혈관에 문제가 생기면 반드시 관상동맥우회술과 같은 수술이나 스텐트 시술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건가?"

"소용이 없었습니다."

"뭐?"

"말씀드린 그대롭니다. 이미 스텐트 시술을 시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차도가 없었습니다. 다시 좁아졌어요. 혈관이 좁아지는 원인을 알아야 치료가 가능한데 원인 자체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호프 대령의 안색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다만 그들과 싸웠던 자가 어떤 이상한 방법을 사용한 것이 아닌지 추정할 뿐입니다."

"이상한 방법?"

"네."

호프 대령의 눈에 심난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의 부하들이 남은 일생 동안 시한폭탄을 심장에 두고 살아가야하기 때문이다.

"알겠네. 그래도 최선을 다해 치료에 전념해 주게, 토렌스 소령."

"알겠습니다, 대령님."

허셀 대령은 토렌스 소령이 나가자 인터폰으로 부관을 호출했다.

곧 그의 부관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조엘과 제임스가 아무래도 헌터에게 당한 것 같네. 미 정부와 대사관에 연락해 치료 스킬을 가진 헌터를 찾아 주게."

"알겠습니다, 대령님."

제31화

31화 스타게이트(1)

"스타게이트 입장권?"

이럴 수가!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정보를 확인했다.

<아이템 정보>

이름 : 스타게이트 입장권(사용 시 귀속)

등급 : 무(無)

설명 : 입장권이 있어야 스타게이트에 들어갈 수 있다.

스타게이트라니!

국가에서 관리하는 비밀 게이트가 있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단 말인가?

음! 아무래도 믿을 수 있는 정보가 필요했다.

마침 적당한 곳이 생각났고 말이다.

나는 서둘러 외출을 준비했다.

* * *

딸랑!

잠깐 외출했나?

문이 열려 있는데,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가만히 앉아 있기가 썰렁해 진열장의 한쪽에 가지런히 나열해 놓은 아이템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저번에 왔을 때와 아이템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응?"

문득 내 시선을 끄는 녀석이 있다.

녀석은 일말의 광택도 없어서 마치 한 토막의 검은 나무와 같은 느낌이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길이 150cm, 폭 30cm.

그야말로 무지막지하게 큰 대검(大劍)이다.

더욱이 검의 형태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그 끝이 뭉툭하다.

'검이 아니라 도인가?'

녀석에게서 풍기는 범상치 않은 기운에 나도 모르게 손으로 녀석을 움켜잡았다.

손에 착 하고 감기는 느낌이 오랜 친구와 조우한 것 같은 느낌이다.

"음!"

그런데 이게 뭐지?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훨씬 더 무겁다.

족히 100근(60kg)은 나갈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역시 보는 눈이 있군요."

익숙한 음성에 뒤를 돌아보자 지나가 상점 안으로 막 들어오고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청운 씨."

"그러게요. 잘 지냈나요, 지나 씨?"

"호호호~ 저야 늘 같은 일상의 반복이죠. 청운 씨는 어떻게 지냈어요?"

"저도 항상 비슷하죠."

나는 검을 들고 가격을 물어보았다.

"이 검은 얼마죠?"

"멋진 대검이죠?"

굳이 저 질문에 답할 필요가 없다.

멋지다고 했다가 가격이 오를지도 모르니까.

"딱 여섯 장만 주세요."

"6천?"

"풉! 지금 농담하시는 거죠?"

"그럼 6억?"

"아뇨."

그녀는 6억이냐는 질문에도 단칼에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젠장!'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다.

그래도 검인지 도인지 모를 병장기 하나에 60억은 너무했다.

"너무 비싸네요."

난 조용히 대검을 내려놓았다.

"비싸긴요. 오우거의 뼈에 아만티움을 녹여 만든 거라고요. 크기가 애매해서 그렇지 사실 60억이란 금액도 청운 씨가 VIP 고객이라 싸게 드리는 거예요."

"오우거의 뼈에 아만티움이 섞였다고요?"

"네. 이런 물건은 자주 들어오지 않는다고요."

"...!"

오우거의 뼈에 아만티움이 섞였다면 재료값만 해도 족히 몇억이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60억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과했다.

"지금 비싸다고 생각했죠?"

'헐! 눈치가 귀신같네.'

그녀가 마치 타이르듯 말했다.

"아니에요. 절대 비싸지 않아요. 사실 청운 씨가 들고 있는 검은 드워프가 만든 거라고요."

"드워프요?"

"네. 블라인드 처리해 놓은 정보를 풀어 드릴게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

-우우웅.

[이름 없는 검]

등급 : *급

내용 : 드워프 대장장이 *****이 만든 도검. 검과 도의 특징을 지닌 대검(大劍).

착용 제한 : 힘 150, 체력 150 이상. 각인 시 귀속

특징 1 : 오우거의 뼈와 아만티움이 섞여 소유자의 ***을 *** 상승시킨다.

특징 2 : ???

"음...."

검의 정보를 확인하자 내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이게 뭘 상승시킨다는 거죠?"

"그게 바로 문제예요."

"네?"

지나 씨가 투덜대며 말했다.

"정확한 옵션을 알려면 각인 작업을 진행해야 하는데 그러면 귀속이 되잖아요. 저희는 장사꾼이지 도박꾼이 아니니까요."

"아...!"

착용 시 귀속이란 옵션 때문에 각인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좋은 옵션이 붙었다면 수백억이 나갈 수 있어요."

"옵션이 쓰레기면 그 반대가 될 수도 있죠. 더욱이 착용 제한이 걸려 있잖아요. 힘 150 이상이면 쓸 수 있는 사람도 별로 없을 것 같은데 말이죠."

"그건... 그렇지만...."

지나 씨는 살짝 눈치를 보더니 체념하듯 말했다.

"55억!"

"40억."

"53억."

"45억."

"에잇! 50억. 이 가격 밑으론 절대 안 돼요."

"...."

어떻게 할까?

정보가 풀리지 않은 아이템을 구입한 경우 열에 아홉은 쪽박이다.

하지만 손에 착 하고 감기던 그 서늘한 느낌을 잊을 수가 없었다.

만약 오늘 대검을 구입하지 못한다면 계속해서 미련이 남을 것 같았다.

그래! 돈이야 벌면 되지.

그동안 번 돈을 생각하면 얼추 계산이 맞을 것 같았다.

나는 결국 저질러 버렸다.

"제가 사죠."

"감사합니다, 손님~."

순식간에 그녀의 말투가 달라졌다.

생긴 건 아버지와 완전 다르지만 상술만큼은 판박이다.

"일단 제 물건부터 판매하고 계산하는 걸로 하죠. 괜찮죠?"

"물론이죠, 손님~."

난 아공간을 가득 채운 아이템을 차곡차곡 꺼내 놓기 시작했다.

"어머! 리자드맨을 잡으셨나 봐요. 사신의 낫 종류는 구하기 힘든 건데."

"운이 좋았습니다."

"호호호 운이라니요, 그만큼 청운 씨의 실력이 뛰어난 거겠죠."

"그건 아니고...."

"이야~~ 우리 청운 씨, 역시 능력자시다."

그녀는 잠시 아이템에서 눈을 떼더니 가슴을 활짝 펴고 내 얼굴을 직시했다.

마치 가슴이 날 좀 봐 달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험험!!

묘한 열기에 내가 먼저 시선을 돌렸는데 문득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어린 것 같았다.

"정확히 14억 9천만 원이에요. 여기서 50억 계산하면 마이너스 35억 1천만 원. 계산하기 편하게 천만 원은 에누리해 드릴게요. 35억만 주세요."

그녀의 말에 암시장에서 발급한 카드를 내밀었다.

"혹시 정보도 파나요?"

"당연하죠. 여기 암시장이에요. 없는 것 빼곤 다 있죠. 어떤 정보를 원하세요?"

"특별한 게이트."

"특별한 게이트요?"

"네. 정부에서 관리한다고 알려진, 스타게이트요."

"...!"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나는 이미 어느 정도 정보를 쥐고 있다는 얼굴로 태연히 서 있었다.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요?"

"가격만 맞는다면 못 구할 이유가 없죠. 어떻게 할까요?"

그녀의 말에 나는 빙긋 웃어 보였다.

이는 곧 관심이 있다는 것을 표명하는 증거였다.

"차 한 잔 마시고 계세요."

그녀는 바람을 일으키듯 밖으로 나갔다.

잠시 혼자 있게 된 나는 검을 손에 쥐고 상태 창을 열었다.

-[띠링, 이 검은 귀속 아이템입니다. 사용자에게 각인하겠습니까?]

"각인한다."

-[이름 없는 대검의 이름을 지어 주세요.]

"이름이라...."

문득 내가 익힌 태허무극심법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무극, 무극이라 할게."

-[띠링, 각성자 최선우에게 무극 대검이 귀속됩니다.]

손끝에서 느껴지기 시작하는 미약한 진동과 함께 나무토막 같던 검신에 소용돌이무늬가 나타났다.

드워프 장인이 수도 없이 접어 치기를 한 것인지 검신에 자연스레 새겨져 있다.

나는 복권을 긁는 마음으로 무극의 정보 창을 열었다.

[무극]

등급 : A급

내용 : 비밀을 지닌 드워프 대장장이 바리세우스가 만든 명품 대검.

대검을 쥐었을 때 시전자의 공격력을 20% 상승시킨다.

특징 : 각인 시 귀속

숨겨진 특성 :

대장장이 바리세우스가 만든 이름 없는 무구를 모으세요.

대장장이 바리세우스의 무구를 완성시키면 무구가 진화합니다.

-대장장이 바리세우스 검(O)

-대장장이 바리세우스의 장갑(X)

-대장장이 바리세우스의 장화(X)

-대장장이 바리세우스의 망토(X)

"...!!"

헐! 대박이다.

대검을 쥐었을 때 공격력이 증가하는데 그게 플러스(+)가 아니라 퍼센트(%)다.

여기에 세트 피스로 구성되어 있어 무구를 모두 모으면 진화를 한다고 적혀 있었다.

진화하는 무기라!

이런 건 난생처음 봤다.

"어? 각인하셨어요?"

"네."

"옵션이 어때요, 좋아요?"

"뭐, 나쁘진 않네요. 딱 예상했던 정도?"

"호오~~."

과하지 않게 두리뭉실하게 대답했지만 그녀는 이미 뭔가를 눈치챘는지 묘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대박이죠?'

'노코멘트.'

'에이~ 그러지 말고 얘기해 봐요.'

'이미 계산 끝났습니다. 노코멘트.'

'쳇~.'

나는 얼른 화제를 바꿨다.

"정보료가 얼마죠?"

"5억이에요."

쩝! 이젠 뭐만 얘기하면 억이란다.

정보 하나로 5억이나 받아먹다니, 내심 속이 쓰려 왔지만 무극을 떠올리니 마음이 바다처럼 넓어졌다.

"네. 같이 계산해 주세요."

오늘 쇼핑으로 55억을 썼다.

잔고를 확인해 보니 정확히 계좌에 47,000원이 남았다.

"수고하세요, 지나 씨."

"감사해요. 청운 씨, 다음에 또 오세요."

나는 무극 대검을 등에 메고 상점을 빠져나왔다.

얼굴을 가릴 수 있는 후드가 달린 망토에 150cm 대검을 등에 착용했지만 사람들은 내게 별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저기를 봐라.

가죽 방어구에, 판금 갑옷에, 누구는 슈퍼히어로 복장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 중 태반이 진짜 헌터다.

가끔 헌터가 되고 싶어 저런 옷을 입고 다니는 일반인도 있지만 말이다.

나는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컴퓨터를 켜고 USB를 꽂았다.

-[스타게이트에 관한 정보]

-[전 세계에 분포된 스타게이트 추정 위치]

USB 안에는 두 개의 폴더가 있었는데 제목만 봐도 내게 필요한 정보가 분명해 보였다.

나는 재빨리 자료를 살펴보았다.

"호오!"

탄성이 절로 나온다.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헌터넷에 떠돌던 음모설이 일정 부분 사실이었고 내 상상을 상회했다.

[스타게이트]

1. 스타게이트는 게이트와 유사하나 분명히 다른 존재다.

2. 스타게이트는 알 수 없는 문자가 새겨진 금속이 게이트 외형을 두르고 있다.

3. 스타게이트는 다른 차원의 세계로 갈 수 있는 일종의 출입구다.

4. 스타게이트에는 유사 인류가 존재하며 신분 사회를 이루고 있다.

5. 그곳은 기사, 마법사가 존재하는 판타지 세계다.

6. 일부 지구의 물건은 스타게이트에서 사용할 수 없다.

7.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일반 게이트처럼 총기류와 같이 저쪽 세상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문물은 사용이 불가능하다고 결론지었다.

8. 반대로 스타게이트에서 얻은 물건은 지구로 가지고 올 수 있다.

9. 스타게이트는 입장권을 얻어야 들어갈 수 있다.

10. 스타게이트는 일반적인 게이트와 달리 국가 1급 기밀로 지정되어 있어 극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정보와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

"후우!"

확실히 돈을 쓴 값어치가 있었다.

나는 첫 번째 폴더에 있는 내용을 숙지한 후, 곧바로 두 번째 폴더를 열었다.

"여기에 있었네."

두 번째 폴더에 나온 정보에 의하면 현재까지 12개의 스타게이트가 지구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중 9개의 스타게이트는 게이트가 발생한 지역을 소유한 각각의 국가에서 엄격하게 관리하고 있는데 재밌는 사실은 한국에도 스타게이트가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정부와 대형 길드 중심으로 이루어진 헌터 협회에서 정보를 통제하고 있으며 스타게이트 주변 일대를 군사 지역으로 만들어 일반인의 출입을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다고 했다.

"쳇! 반경 10km까지 군사 지역으로 묶어 놨으니, 접근하는 것조차 쉽지 않겠네."

사실 어느 정도 예상한 바였다.

만약 내가 정부 산하 헌터가 되거나 대형 길드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간다면, 입장권을 얻은 만큼 정상적인 루트를 통해 스타게이트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복수를 꿈꾸고 있는 현재의 상태로는 불가능한 방법이다.

결국 나는 국가에서 관리하지 않고 있는 스타게이트를 찾아야 했다.

-남미 아마존 밀림

-동남아시아 보르네오섬

-아프리카 콩고 밀림

위에 언급한 곳은 지정학적 이유로 초기 던전 브레이크에 대응하지 못해 지금은 몬스터 랜드가 되어 버린 곳이다.

재밌는 사실은 전 세계 암시장으로 흘러 들어오는 아이템 중에 70% 이상이 위에 언급된 저 지역들에서 흘러 들어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역시 부를 향한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는 것 같다.

각설하고 막대한 부를 원하는 자, 끝없는 강함을 원하는 자 그리고 범죄를 저지른 자들은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아마존과 보르네오섬 그리고 콩고 밀림으로 향했다.

나는 밤을 새워 가며 암시장에서 얻은 USB를 분석했고 그 결과 한 곳을 선택했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섬으로 말레이제도의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섬.

브루나이 왕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가 한 섬에 공존하고 있고 휴양지로 각광을 받았지만 이제는 몬스터 랜드가 되어 사람의 인적이 끊긴 곳.

바로 보르네오섬이다.

제32화

32화 스타게이트(2)

이제 필요한 정보도 모았겠다.

나는 아공간에서 스타게이트 입장권을 꺼내 들었다.

-[띠링, 스타게이트 입장권은 귀속 아이템입니다. 사용하시겠습니까?]

"사용한다."

-[스타게이트 입장권이 각성자 최선우에게 귀속됩니다.]

시스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초대권이 사라지며 내 오른쪽 손등 위에 조그만 문신이 새겨졌다. 평소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상태지만 마나를 주입하면 도형인지, 기호인지 모를 예의 도형이 나타났다.

다음 날,

아침이 밝아 오자마자 다시 암시장을 찾았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동대문 시장은 그 입구에서부터 사람들이 미어터지고 있었다.

"지나 씨?"

워낙 미모가 출중한 덕에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그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녀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전화를 하는 사람, 흥정을 하는 사람, 커피를 들고 마시는 사람. 저마다 각각 다른 행동을 연출하고 있었지만 이들의 시선은 그녀를 좇고 있었다.

'뭐지, 미행인가?'

나는 급히 저들의 뒤를 따랐다.

어쩌면 내 생각이 틀릴지도 모르지만 그냥 놔두기엔 뭔가 찜찜했다.

그때였다.

놈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품속에서 손이 들어가는 것으로 보아 무기를 꺼내려는 것 같았다.

나는 더 이상 가만히 지켜볼 수 없었다.

"지나 씨, 조심해요!"

고성을 지르며 가장 가까이에 있던 놈을 향해 움직였다.

오른팔을 돌려 녀석의 덜미를 잡아채고는 허리를 돌리며 그 큰 덩치를 어깨 너머로 넘겼다.

내 딴에는 그녀를 도와주기 위한 행동이었다.

콰당!

완벽한 엎어치기 한판이다.

어깨 너머로 휘둘리듯 넘어와 땅바닥에 제대로 메다꽂힌 것이다.

"어엇!"

"저... 저~!"

'콰당' 소리가 워낙 요란했던 탓에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는데....

'아차!'

고개를 드는 순간 의외의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지나 씨에게 집중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지지직!!

"흐억!"

"악!"

"끄아악!"

뭔가 살이 타고 지져지는 소리와 함께 세 놈이 자지러지듯 쓰러졌다.

헐! 지나 씨가 각성자, 그것도 뇌전 계열의 마법사였다니!

정작 놀란 사람은 나였다.

하긴 암시장을 운영하는 사람이 평범할 리 없지.

"청운 씨."

"괘, 괜찮아요?"

"네. 괜찮아요. 방금 저 도와주시려고 외치신 거죠?"

"아, 아... 네."

난 어정쩡한 자세를 바로 했다.

그녀는 내 반응이 무척이나 재밌었는지 하얀 이빨을 보이며 큰 소리로 웃었다.

"호호호호~ 아! 미안해요. 당황하신 모습이 꽤 재밌어서요."

바닥에 넘어졌던 녀석들이 일어나려는 순간,

그녀의 손에서 다시 한번 전격 마법이 펼쳐졌다.

-지지직!

"윽!"

"컥!"

"켁!"

음!

아마 내가 나서지 않았어도 그녀는 무사(?)했을 것 같다.

더욱이 웃긴 건 주변 사람들이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보 같은 놈들."

"뭐야? 큭큭! 마법사를. 죽으려고 환장했군."

그냥 저마다 한 번 피식거리며 원래의 관심사로 시선을 돌리거나 이렇게 한마디 던져 놓고 제 갈 길을 갔을 뿐이다.

잠시 후,

그녀가 내게 다가왔다.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청운 씨. 어쩌면 절 구해 주신 것과 다름없는데, 제가 어떻게 보답하면 될까요?"

허어!

이 여자가 또 이러네.

아무 예고 없이 그렇게 가슴을 들이대면 총각 심장이 깜짝깜짝 놀란다고요.

"제가 보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던데요."

나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두 손까지 활짝 편 채 보답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나를 보며 깔깔 웃어 댔다.

"근데 저 사람들, 아는 자들인가요?"

"신경 쓸 것 없어요. 허접한 놈들이니까요."

저들이 누군지 알고 있는 눈치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암튼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헤헤, 고마워요. 청운 씨."

그녀는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혹시 저희 상점에 가시는 길이었나요?"

"네."

"그럼 같이 가요. 고마움의 표시로 제가 가는 길에 아이스크림 하나 살게요."

"그, 그래요."

아이스크림을 손에 쥔 채,

우리는 자연스레 대화를 나누며 상점을 향해 걸어갔다.

"어제도 오셨는데, 오늘은 무슨 일로 오셨어요?"

"좀 알아볼 게 있어서요."

내 말에 그녀의 눈빛이 묘하게 일렁였다.

"흐음, 거긴 위치를 안다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닌데."

헐!

고작 한마디 꺼냈을 뿐인데 이미 내가 원하는 걸 짐작한 모양이다.

"맞아요. 위치를 안다고 들어갈 순 없겠죠."

"그건 암시장에서도 구하기 힘들어요. 물량이 턱없이 부족하거든요."

"누군가가 수량을 조절하고 있는 거겠죠."

"맞아요. 뭐 가끔 암시장에 풀리긴 하지만 정상적인 루트가 아니니 가격이 최소 100억 이상이에요."

"...!"

갑자기 웃고 싶어졌다.

아니, 정말로 실소가 흘러나왔다.

최소 100억짜리 입장권이 손등 위에 새겨져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자 날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이 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설마... 입장권을 얻은 건가요?"

나는 그녀의 질문에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사실을 말해 주었다.

앞으로도 그녀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네."

"파실 거예요?"

그녀는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아니요."

판매하지 않겠다는 말에 급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상관하지 않았다.

저 표정에 속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미 귀속되었기에 수백억을 준다 해도 팔 수 없었다.

나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였다.

"이미 사용해서 팔 수 없어요."

"아!!"

그녀는 새초롬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렇군요. 청운 씨가 직접 들어갈 생각이죠?"

"네. 맞아요."

"하긴 청운 씨의 실력이라면 가능하겠네요. 좋아요, 그럼 자세한 이야기는 상점에서 할까요?"

"그러죠."

잠시 후,

상점에 도착한 나는 그녀가 스타게이트에서 활동하고 있는 헌터라는 사실과 함께 몇 가지 정보를 더 얻을 수 있었다.

1. 그들은 신탁을 통해 각성자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다.

2. 우리는 그들에게 모험자 혹은 이방인이라 불린다.

3. 귀환석을 얻으면 지구로 돌아올 수 있다.

4. 두 세계의 시간이 다르다. 그곳의 1년은 지구의 한 달 정도다.

"그럼 귀환석은 어떻게 구해?"

"일반적으로 사냥을 통해서 얻을 수 있지만 경매장에서 구입도 가능해."

"호오~."

우리는 어느새 자연스럽게 말을 트기 시작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무엇보다 그녀가 먼저 말을 놓았기 때문이다.

남자가 가오가 있지, 여자가 반말하는데 나만 존대할 수 없지 않은가!

"경매장이 있어?"

"응. 마법이 존재하는 세계니까. 가끔 운이 좋으면 경매장을 통해 귀환석을 구입할 수 있어."

진짜 영화나 소설 속에 나오는 판타지 세계와 비슷했다.

"너 방금 판타지 영화 생각했지?"

"...!"

매번 느끼는 거지만 얘는 진짜 눈치가 빠르다.

"응."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인정하자 그녀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호호호~ 스타게이트에 관한 내용은 국가마다 특급 비밀로 지정되어 있어서 정보가 한정적이야.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사실도 여기까지야. 그럼 이제 계약을 진행해 볼까?"

"그래."

내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그녀는 마법 처리된 계약서를 내밀었다.

-[갑(지나의 상점)과 을(청운)은 상호 계약을 맺는다.]

-[....]

-[....]

다른 것은 차치하고 가장 중요한 요점은 나를 보르네오 스타게이트에 데려다준다는 것이다. 그 대신 나는 스타게이트에서 얻은 아이템을 판매할 경우 오직 지나의 상점을 통해서 판매하겠다는 일종의 동업자 계약을 맺었다.

"이봐, 청운. 계약도 맺었는데, 이참에 저녁이나 같이할까?"

계약서에 사인하자마자 갑자기 목소리를 은근하게 바꾼다.

'얘는 또 왜 이래?'

하지만 묘하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다.

저 눈빛을 보고 있노라면 나를 유혹한다는 착각이 드는 것 같기도 했다.

만약 내가 헌터가 아니었다면, 거부할 수 없는 제안에 100% 넘어갔을 것이다.

잠시 고민했지만 결론은 아니라고 내 마음이 말해 왔다.

그녀는 충분히 매력적이지만 지금은 누구를 만날 때가 아니었고 내가 근본적으로 추구하는 스타일에서도 살짝 벗어났다.

문득 얼마 전에 만났던 레드핑크 은수가 뇌리에 떠올랐다.

"왜 시간이 없어?"

"어? 어."

나는 그녀의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미안. 오늘 저녁은 선약이 있어서 힘들 것 같아. 대신 다음에 하자."

"그래?"

뭔가 아쉬워하는 눈빛이지만 선약이 있다는 말에 수긍했다.

그로부터 정확히 사흘 후,

나는 보르네오섬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 * *

[평택, 미군 병원]

"환자가 깨어나려는 것 같은데요?"

조엘은 어렴풋이 들려오는 간호사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하지만 곧 전신을 휘감은 무력감에 절로 신음을 흘렸다.

"으으...."

"조엘 씨, 제 말이 들리십니까? 몇 가지 검사를 할 텐데 참기 힘들면 말씀하세요."

의사는 조엘의 눈꺼풀을 벌리고 입안을 살피며 차트에 뭔가를 적어 갔다.

"특별한 이상은 없지만 일단 경과를 지켜보도록 하죠."

선고하듯 결정을 내린 의사가 나가자 잠시 후,

검은색 정장을 입은 남자가 병실에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조금 전 의사가 작성한 차트가 들려 있었다.

그날 저녁,

미군 평택 기지의 호프 대령이 병원을 찾았다.

"상처를 확인하셨습니까?"

"네. 모두 확인했습니다."

호프 대령의 질문에 미 대사관 소속 헌터 마이클 콜린이 대답했다.

"헌터에게 당한 상처가 분명합니다."

"역시 그랬군요. 우리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럼 치료가 가능할까요?"

"아니요. 제 능력으론 불가능합니다."

헌터 콜린의 대답에 호프 대령의 얼굴이 심하게 찌푸려졌다.

"어째서요, 콜린 씨는 치료 능력자시지 않습니까?"

"이런 상처는 저 역시 처음이기 때문입니다. 치료를 해도 차도를 보이는 건 그때뿐이었습니다. 혹시나 해서 사제 계열 헌터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차도가 없었습니다."

"사제요?"

"네. 제가 치료를 해도 자꾸 재발하는 것이 마치 네크로맨서 계열의 저주 마법을 보는 것 같았거든요."

"아!!"

"뭐, 물론 제 판단이 틀렸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것은 과격한 움직임을 금하고 요양하듯 조용히 지낸다면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을 거란 겁니다."

"그럼 군인 생활은?"

"당연히 그만둬야죠. 빨리 뛰는 것도 환자에게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 그렇군요."

앞길이 창창한 부하가 이제부터 요양하듯 지내야 한다는 말에 호프 대령은 씁쓸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는 곧 우울한 기분을 털어 버렸다.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조취를 취했기 때문이다. 단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조엘과 제임스를 폭행한 헌터에 대한 수사가 아무런 진전도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사건은 여전히 오리무중에 빠져 있었다.

제33화

33화 무당파를 찾은 귀한 손님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아침,

제비가 울면 손님이 찾아온다더니, 정말로 무당파에 귀한 손님이 찾아왔다.

노년의 도사와 젊은 남녀다.

그들의 옷에는 정교한 매화 문양이 수놓아져 있었다.

"도우께서는 어디서 오셨습니까?"

"예. 저희는 화산(華山)에서 왔습니다."

"화산의 도우셨군요. 안에 전갈을 했으니 곧 사람이 나올 것입니다. 우선 방명록에 성함을 남겨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화산의 제자라 밝힌 이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먼저 선두에 있던 젊은 남녀는 화산검룡(華山劍龍) 이정진과 매봉(梅鳳) 이지은이다. 두 사람은 사사로이 사촌 관계며 현재 무림 후학 중 가장 뛰어나다고 알려진 오룡사봉(五龍四鳳)의 일원이다. 참고로 매봉 이지은은 화산파 장문인의 금지옥엽이기도 하다. 그리고 두 사람의 뒤에서 무당의 전경을 조용히 감상하고 있는 노인은 화산파의 수석장로이자 무림에서 그 명성이 높은 매화구검 육청양이었다.

잠시 후,

푸른 도포를 입은 무당의 제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당의 운학이 매화구검께 인사드립니다."

"무림 말학 운허, 화산의 매화구검께 인사드립니다."

"오랜만이군. 그래, 잘들 있었는가? 재작년이었나. 무림맹에서 본 후로 처음인 것 같은데."

"정확하십니다."

"허허허. 그래. 장문인은 안에 계신가?"

"네, 안 그래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운허가 앞으로 나서자 매화구검 육청양이 화산검룡 이정진과 매봉 이지은에게 시선을 돌렸다.

"난 청명 진인과 만나야 하니 나중에 보도록 하자꾸나. 시간이 걸릴 테니 그동안 무당파를 구경하며 견문을 넓히도록 하여라."

"네, 장로님."

매화구검이 운허의 안내를 받으며 자리를 뜨자 장내에는 운학이 남았다.

"운학 형, 오랜만에 뵙습니다."

화산검룡 이정진이 운학 도사에게 알은체하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동안 격조했습니다, 이 형."

"안녕하세요, 운학 도장님."

화사하게 핀 꽃처럼 아름다운 여인이다.

"안녕하십니까, 소저. 이 형, 옆에 계신 소저는 누구신가요?"

"아! 소개가 늦었군요. 이쪽은 제 사매 이지은이라고 합니다."

운학이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림에 명성이 자자한 매봉 소저시군요. 이렇게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제가 오늘 개안을 했습니다."

"호호호, 명성이 높다니요,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운학의 말에 그녀는 왠지 신바람이 난 표정이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거처도 안내해 드리고 겸사겸사 우리 무당파를 구경시켜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운학 형."

두 사람은 운학의 안내에 따라 무당파 곳곳을 구경했다.

"이곳은 오룡궁입니다."

"규모가 어마어마하네요."

"진무대제의 점토상과 청동상이 있죠. 자! 다음에 보실 곳은 옥허궁입니다."

세 겹의 벽에 감싸여 있는 무당에서 가장 화려한 건축물이 나왔다.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그리고 또 하루가 지났다.

"오빠, 장로님은 오늘도 감감무소식인가요?"

"응. 오늘도."

"히잉~."

"왜?"

"왜긴요, 심심해서 그러죠. 오빠도 삼 일째 건물만 구경해 봐요."

"난 괜찮던데?"

"어이구, 내가 말을 말아야지."

무당의 분위기에 취한 것도 이틀이 지나자 흥미가 떨어진 모양이다.

하긴 매봉 이지은은 방년의 여인이니 지겨울 만도 했다.

각설하고 화산검룡 이정진은 사촌 동생의 투정에 슬그머니 기분 좋은(?) 소식을 전했다.

"내일쯤이면 결정이 날 것 같던데."

"정말요?"

"아까 운학을 만났는데 그렇게 말해 주더군."

"그것참 불감청고소원이네요. 호호호."

여자의 마음은 갈대와 같다더니, 기분이 급 좋아진 그녀가 말했다.

"오빠, 우리 나가요."

"어딜?"

"오늘은 무당파 경내에서 벗어나는 게 어때요?"

"그럴까?"

경내에서 벗어난다 하더라도 그래 봤자 결국 무당이다.

화산검룡 이정진은 사촌 동생의 제안에 동의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특별한 목적지 없이 발길 닿는 대로 걸으며 주변의 풍광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시간쯤 흘렀을까?

매봉 이지은의 눈에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곳엔 아주 예쁜 암자가 하나 있었는데 무당의 도복을 입은 젊은 도동이 마당을 쓸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무당의 삼대제자인가?"

이지은은 도동의 출현에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 * *

인기척에 고개를 돌리자 젊은 남녀가 보였다.

"저들은 누구지?"

도복을 입고 있었지만 그 생김새가 무당의 것과 사뭇 달랐다.

곤륜, 화산, 아미파가 떠올랐으나 아미에는 남자 제자가 없으니 일단 패스하고 다시 한번 안력을 집중했다.

"화산파로군."

옷소매에 언뜻언뜻 매화 자수가 보인다.

저들의 정체를 파악하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잠시 후,

화산파 제자로 보이는 남녀가 내 앞에 당도했다.

"안녕하십니까."

건장한 체격의 남성이 다가와 먼저 인사한다.

나 역시 두 손을 포개며 살짝 허리를 숙였다.

"네, 안녕하세요."

"저는 화산파의 이정진이라고 합니다."

"전 이지은이에요."

나는 두 사람의 예의 있는 행동을 보고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아! 화산파의 도우시군요. 저는 무당의...."

문득 장난기가 발휘됐다.

청운이라는 도명을 말했다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안 봐도 뻔했기 때문이다.

"워, 월정이라고 합니다."

내가 선택한 이름은 오다가다 몇 번 본 적이 있는 무당파 하바리 제자의 도명이다.

군대로 치면 이병 계급!

"아~ 월정 도사님이군요."

이지은이라 밝힌 여자가 나를 향해 빙그레 웃어 보였는데 가만히 보니 내가 아는 누군가와 꽤 닮은 것 같다.

"아이윤?"

"네, 방금 뭐라고 했나요?"

"아, 아닙니다. 꽃가루 때문에 기침이 나왔습니다. 이이유~운! 아이유~운!"

그녀는 잠시 뭔가 이상하다는 눈빛을 보였지만 금방 사라졌다.

"이곳 풍경이 정말 아름답네요. 혹시 어느 도사님이 머무는 곳인가요?"

"이곳은 문파의 어르신들이 오셔서 종종 무공을 수련하는 곳입니다. 전 이곳을 관리하고 있고요."

"아, 그렇군요."

그녀는 뭔가 마음이 동했는지 눈빛을 반짝였다.

"그럼 지금은 아무도 계시지 않나요?"

"네. 지금은 저 빼고는 아무도 없는...데요."

갑자기 그녀가 검을 빼어 들었다.

"사매!"

이정진의 입에서 다급한 헛바람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는 무척이나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치 지금 뭐 하냐는 눈빛이다.

그러나 그녀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미소를 지으며 반문했다.

"사형, 이곳 경치가 너무 아름답지 않아요?"

"경치는 아름답지. 그런데 그게 왜?"

"헤헤헷~."

그녀는 이미 기수식을 잡고 출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사매, 여긴 무당파야."

"뭐 어때요? 아무도 없잖아요. 월정 도사님, 괜찮죠?"

아무래도 풍광에 취해 무공을 펼쳐 보이고 싶은 모양이다.

하지만 여자 앞에선, 아니! 미녀 앞에선 언제나 관대한 신사가 되고 싶었다.

더욱이 아이윤과 꼭 닮은 여성의 부탁에 난 단 1초의 고민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화산파의 무공을 구경할 수 있다면 삼생의 영광이죠."

"호호호~ 사형, 거봐요. 월정 도사님도 그렇다고 하잖아요."

"그, 그래도!"

"야압~~!"

더 이상 어떤 말도 듣지 않겠다는 듯,

그녀는 신바람이 난 표정으로 검술을 펼치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검술이라 생소했지만 공격과 방어가 매끄럽게 이어지는 것을 보아하니 화산이 자랑하는 검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슉슉슉, 슈육!

그렇게 얼마 지나자 그녀의 검술이 바뀌기 시작했다.

전과 비교해 한층 더 심오하고 고차원적인 검술이다.

'이, 이게 웬 떡이냐?'

하나둘씩 허공에 수를 놓기 시작하는 매화.

저것은 화산파가 자랑하는 무공절예(武功絶藝),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手梅花劍法)이 틀림없었다.

"...!"

순간 얼굴색이 변한 이정진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 역시 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그의 입장이었으면 똑같은 시선을 보냈을 것이다.

화산파의 절기를 외지인 앞에서 가감 없이 펼쳐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 어리바리하게 보고 있자 그는 곧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신색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마치 '무당의 하바리 제자가 화산의 절기를 본다고 무슨 일이 있겠는가?'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사실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그의 생각이 옳다.

일반적으로 봤을 때는 말이다.

-쉭! 쉬쉬쉭!

아무래도 아이윤을 꼭 닮은 화산의 여검사가 필을 제대로 받은 것 같다.

그녀는 이십사수매화검법을 순서대로 펼친 후에도 시연을 끝내지 않고 이번엔 역순으로 펼쳐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도 연속으로 말이다.

나는 그 덕에 총 24개의 초식으로 이루어진 매화검법을 처음부터 끝까지 아주 자세하게 지켜볼 수 있었다. 이따금씩 이정진의 눈초리가 매섭게 빛났지만 나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순간,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띠링, 고차원의 검술을 처음부터 끝까지 반복해서 관람하였습니다. 검술에 대한 안목과 이해가 높아집니다. 지능이 5 상승합니다.]

시스템의 음성이 들려오며 이십사수매화검법의 검로가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아주 신선하면서도 처음 맛보는 감정이었다.

"그렇군. 너무 형식에만 치우쳐 있어. 매화를 그려 내고 싶어 하는 욕심은 알겠는데 그로 인해 검술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오의를 깨닫지 못하고 있잖아. 무릇 검술이란 단지 초식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닌, 초식이 가지고 있는 뜻을 이해하고 부드럽게 연결시켜야 하는데."

"뭐, 뭐라고요?"

"어?"

이런 젠장!

두 사람의 시선이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나를 향해 있다.

머릿속으로 생각한 말이 부지불식간에 입 밖으로 터져 나온 것이다.

생경한 감정에 나도 모르게 실수를 했다.

"당신, 지금 뭐라고 했죠?"

"어... 그... 그게...."

"넌 누구지? 정체를 밝혀라."

화산검룡이라 불리는 이정진 역시 굳어진 표정을 보이며 검을 빼어 들었다.

하아!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까?

지금이라도 월정이 아니고 청운이라고 밝혀야 하나?

아니다. 그럴 거라면 애초부터 밝혔어야 했다.

더욱이 이런 상황에서 진실을 말한다 해도 믿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이놈! 당장 정체를 밝히지 못하겠느냐?"

"...."

그래! 결정했다.

적절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을 땐, 36계 줄행랑이 최고다.

"내가 누군지 묻는다면, 가르쳐 드리는 게 인지상정. 내 이름은.... 엇! 저것은 전설의 신수 봉황?!"

"뭐?"

"보, 봉황?"

때는 이때다.

두 사람의 시선이 오른쪽을 향하는 순간, 나는 잽싸게 흙먼지를 일으키며 동시에 순간 이동 스킬을 펼쳤다.

"엇? 뭐야!"

"오빠, 그가 사라졌어요."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간발의 차이로 성공했다.

두 사람이 당황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세 번 연속 순간 이동 스킬을 펼친 덕에 이미 그들의 시야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었다.

"휴, 자칫했으면 개망신당할 뻔했네."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도 은근 기분이 좋다.

의외의 소득을 얻었기 때문이다.

<상태 창>

이름 : 주선우

레벨 : 80

고유 특성 : 분신(Unique) *사용 불가

칭호 : 현자, 오크 살육자

생명력 : 5,000/5,000 마력 : 3,000/3,000

힘 : 150 체력 : 170 민첩 : 150

지혜 : 130 지능 : 135 행운 : 10 매력 : 20

보너스 스탯 : 105

상태 창을 확인한 후,

어디로 갈 것인지 고민했다.

일단 래미원은 패스다. 그리고 무당파 역시... 패스다.

혹시라도 저들을 만나기라도 하면 난감한 상황이 생길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기왕 이렇게 된 것 간만에 사람 구경도 할 겸, 겸사겸사 기름진 음식도 먹을 겸. 그래, 좋아."

나는 하산을 결정했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요 근래 풀때기만 주야장천 먹다보니 입에서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제34화

34화 새외사세(塞外四勢), 북해빙궁(北海氷宮)(1)

도성 안은 행정과 상업의 중심지라 그런지 사람들로 번잡했다.

하긴 성안에만 수십만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으니 당연한 일일 것이다.

"여기요, 여기 맛난 과자가 있어요."

"손님~ 저희 객잔에서 쉬다 가세요. 어여쁜 아가씨들이 많답니다."

"빙당호로 사세요.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빙당호로예요."

"꽃 사세요. 여기 아주 예쁜 꽃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호객 소리를 리듬 삼아 부지런히 발을 놀려 예전부터 점찍은 객잔에 도착했다. 그런데 객잔 앞은 이미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오늘 왜 이렇게 사람들이 많아."

"시간이 점심시간이잖아. 분위기를 보니까 오래 기다려야 할 것 같은데, 우리 다른 곳으로 갈까?"

"천하객잔은 어때?"

"거긴 음식 맛이 별론데."

"이보게. 한 끼만 후딱 먹고 갈 건데, 까다롭게 굴지 말고 그리 가세. 그래도 소면은 괜찮아."

"쩝! 알겠네. 천하 객잔으로 가세."

줄을 서서 대기하던 상인들의 대화다.

나 역시 붐비는 곳을 피해 한적한 곳으로 이동할까 생각했지만 이내 생각을 바꿨다. 사람이 몰리는 집이 곧 맛집이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내려왔는데 한 끼를 먹더라도 기왕이면 맛있는 집에서 먹어야지.'

한 사람 자리 정도는 있으리라 믿으며 객잔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이보게."

나는 기대와 설렘으로 점원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요, 나리."

"혹시 빈자리가 있나?"

"혼자 오셨나요?"

"응. 나 싱글이야."

"네?"

"아~ 농담이야. 혼자 왔네."

"죄송하지만 보시다시피 일 층은 만석인데요. 한 자리면 이 층에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래?"

점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는 서둘러 2층으로 올라갔다.

마침 계단 앞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또 다른 점소이가 보였다.

"이보게, 나 혼자 왔는데 혹시 빈자리가 있을까?"

"잠시만요."

점원이 주위를 재빨리 스캔했다.

"보시다시피 빈 탁자는 없는뎁쇼. 합석은 어떠세요?"

"난 상관없네. 잘 좀 부탁하네."

"네~ 손님."

동전 하나를 손에 쥐여 주자 점원은 재빠르게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합석이 가능한지 물었다.

그리고 잠시 후,

점원이 밝은 표정을 보이며 내게 다가왔다.

"이쪽으로 오시지오, 나리."

"고맙네."

내가 합석한 자리는 4인용 식탁이고 그곳에는 마침 세 명의 남녀가 앉아 있었다.

"자리를 양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해가 동도라 하지 않았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닌데, 어서 앉으시오."

내가 인사를 건네자 가장 연장자인 노년의 남자가 미소를 보이며 답했다.

세 사람 모두 병장기를 휴대하고 있는 것을 보니 무공을 익힌 것 같았다.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점원에게 음식을 주문했다.

"여기 만두와 소채, 고기가 들어간 탕면이랑 오리구이 하나요."

"전부 혼자 드시려고요?"

"네. 좀 적죠?"

"...!"

"일단 먹어 보고 부족하면 더 시킬게요. 후후후~."

"네... 손님."

점원은 동그랗게 변한 눈동자를 뒤로하고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문한 요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음~~!!

국물을 입에 넣은 순간 세상이 따뜻해지는 느낌이다.

오랜만에 맛보는 기름진 음식에 난 허겁지겁 음식을 흡입하기 시작했다.

누군가 말했다.

먹는 즐거움이야말로 최고의 즐거움이라고 말이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격하게 동의한다.

"허허, 젊은 친구가 배가 많이 고팠나 보군."

"네, 오랜만에 기름진 음식을 먹어서요."

"허허허~ 산에서 도라도 닦고 왔나 보군. 천천히 드시게. 그러다 채하겠네."

"...."

이때 아래층에서 소란스러운 음성이 들리더니 한 떼의 사내들이 계단을 올라오기 시작했다.

"크하하하! 역시 경치는 이 층이 죽인다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형님."

한눈에 봐도 삼류 양아치 냄새를 물씬 풍기는 놈들이다.

"손님, 죄송하지만 이 층에 자리가 없습니다."

"자리가 없어?"

"네."

"없으면 만들면 되지. 안 그래?"

"암요, 형님."

"그렇죠. 형님의 말씀이 지당하십니다."

그러자 미안함이 가득한 음성으로 점원이 다시 한번 간곡하게 말했다.

"한두 분이면 합석이라도 알아볼 수 있지만 다섯 분은 자리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예끼 이 녀석아. 자리는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넌 신경 꺼."

산적 두목처럼 생긴 녀석이 낄낄거리며 점원에게 말했다.

"소, 손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뭐?"

녀석은 가당치도 않다는 표정을 지으며 아주 매서운 눈초리로 점원을 노려봤다.

"이 새끼가 죽고 싶어 환장을 했나, 오늘 초상 한번 치를까! 창자를 확 꺼내서 젓갈을 담가 버릴 테니까 다시 한번 말해 봐. 뭐라고?"

산적 두목의 거친 욕설에 점원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아, 아니요. 그... 그게 아니라...."

"냉큼 꺼지고 술이나 가져와."

"네. 아, 알겠습니다."

점원이 사라지자 녀석이 한껏 거드름을 피우더니 이내 눈빛을 밝혔다.

"오~ 형님, 저쪽 창가에 적당한 자리가 있는 것 같은데요."

녀석은 선객이 차지하고 있는 탁자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 시비를 걸었다.

"이봐, 너희들. 좋은 말로 할 때 우리에게...."

다음 순간 녀석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형님, 여기 좀 보세요."

"왜?"

"면상을 가린 여자들인데, 오우~ 몸매가 아주 예술입니다. 그것도 전부 다~~."

"그러게. 어제 품은 천월루의 향단이보다 뛰어난 것 같구나."

"캬하하하~ 우리 형님, 어젯밤에 좋은 꿈을 꾸셨나 봅니다."

"크흐흐, 어디 꿈만 꿨을까?"

형님이라는 놈이 순간 기마 자세를 취하더니 이내 허리를 앞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요렇게, 요렇게 하면서 별도 달도 따 줬지. 캬하하~."

"와우!"

"역시 형님이십니다."

"...!"

젠장!

방심하다 당했다.

저 녀석의 더러운 행동을 보고야 말았다.

밥맛이 그만 뚝 하고 떨어졌다.

"형님, 이 자세는 어떻습니까?"

"오!! 완전 빠른데?"

"속도! 밤을 지배하는 건 속도가 아니겠습니까?"

"근데 말이다, 너 그러다 토끼 된다. 크하하하!"

"케케케케~."

"크허허허허허~."

녀석들은 저 더러운 대화가 아주 재밌어 죽겠다는 듯 누런 이빨까지 내보이며 광소했다. 저들을 제외하고 객잔에 있던 사람들의 안색이 바뀌었다.

"얘들아, 잘 봐라. 이 형님이 실력을 보여 줄 테니까 말이야."

우두머리로 보이는 양아치가 면사녀에게 다가갔다.

"이봐. 면사 언니들. 안녕."

"...."

"하하하, 대답이 없네. 좋아. 그럼 이 오빠가 재미난 얘기 하나 해 줄게. 이 세상에는 소중한 세 가지 금이 있어. 한 개는 황금. 또 한 개는 소금. 나머지 한 개는 뭘까? 바로... 너희들과 함께하는 지금."

"캬하~."

"형님, 이빨 죽이는데요?"

"대박! 완전 짱!"

"크흐흐흐! 얘들아, 오늘 관아에서 사슴이 탈출했다던데."

"진짜요?"

"여기 있었네. 꽃사슴~~ 하하하하하!"

"우와~~."

"캬캬캬캬캬!"

하지만 여자들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했다.

면사를 착용한 탓에 표정을 확인하지 못했지만 우리는 눈빛만으로 상대의 기분을 알아차릴 수 있다.

그것은 마치 벌레를 보는 눈빛과 같았다.

그러자 양아치 역시 미간을 찌푸렸다.

이때 큰형님의 기분을 눈치챘는지, 산적 두목 같은 놈이 거칠게 말했다.

"야 이년들아! 우리 형님 말씀 안 들려?"

"대만아."

"네, 형님."

"이년이 뭐야 이년이! 형님이 지금 대화하고 있잖아. 그런데 이 무슨 실례야?"

"아이고 형님, 죄송합니다. 소제가 죽을죄를 저질렀습니다."

남자는 짐짓 호방한 척, 누가 봐도 짜고 치는 연기를 선보였다.

"됐어, 인마. 일단 좀 물러나 줄래? 꽃사슴 소저들이 겁내시는 것 같다."

"네, 형님."

"에헴! 소저들, 본인을 소개하자면 천하일절이라 불리는 섬서오웅의 맏형으로...."

"가라."

"뭐?"

"조용히 말할 때 가라고."

"허! 조용히 말할 때 가라고?"

"그래."

왠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흐, 흐흐. 흐흐흐흐!"

놈은 애써 웃어 보였지만 금방이라도 사달이 날 분위기였다.

"일단 내가 누군지...."

"꺼지라고!"

"...!!"

서릿발 같은 음성에 장내에는 순간 침묵이 찾아왔다.

양아치들의 눈은 하나같이 경악과 불신을 말하고 있었다.

"이 미X년이, 예의 있게 상대해 줬더니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구나."

"형님 말이 맞습니다. 죄다 미X년이 분명합니다."

"상황 파악을 못 하네."

"쯧쯧쯧! 젊은 나이에 맛이 간 거지. 불쌍해서 어째!"

저러다 크게 경을 칠 것 같다.

누가, 여자가? 아니, 남자가!

난 아까 전부터 여인들이 풍기고 있는 저 살벌한 기세를 느끼고 있었고 반대로 양아치 무리들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삼류다.

"이봐,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를 줄게. 이 오빠는 말이야, 아주 관대한 사람이거든. 그러니까 예쁘면 봐줄게. 면사부터 풀어 봐."

"...."

일촉즉발의 상황.

녹의를 입은 여인이 입을 열었다.

"아가씨, 누가 객잔에 개를 풀어놓았나 봐요. '멍멍멍' 하고 개 짖는 소리에 귀가 아플 지경이에요."

"네 말이 맞다."

"호호호! 근데요, 아가씨. 중원 개는 참 웃기네요. 지들이 아주 사람인 줄 알아요. 이름도 있더라고요."

"이름?"

"네. 섬서오견."

"...!!"

바보가 아닌 이상 저들이 말하는 개가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알 것이다.

"뭣이! 이런 미X년들을 봤나! 형님, 제가 당장 저년들의 혓바닥을 꺼내...."

아쉽게도 놈의 헛소리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대신 '빠각' 하는 소리와 함께 단말마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악!"

산적 두목처럼 생긴 녀석의 신형이 뒤로 날아가자 양아치 패거리들은 각자 가지고 있는 무기들을 뽑았다.

"이것들이 미쳤나!"

"다 덤벼! 확 눈깔을 뽑아 버릴 테니."

"조용! 다들 조용히 해."

"네, 형님."

우두머리 양아치가 손을 들어 그의 아우들을 제지했다.

단 한 수에 불과했지만 녹의녀가 보인 경지가 가볍지 않음을 느낀 모양이다.

"난 섬서오웅의 맏형이자 임씨세가 소가주 임재청이라 하오. 소저의 존성대명을 알 수 있을까요?"

녀석은 아까와는 달리 진중한 얼굴이다.

하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자 다시 한번 강하게 물었다.

"사마외도가 아니라면 어서 정체를 밝히시오."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이어지는 가운데 옥구슬과 같은 음성이 들려왔다.

"추잡하기 이를 데 없는 놈이 섬서의 영웅이라니 어이가 없군. 하여튼 중원 놈들의 허풍이란."

"그러게 말입니다, 아가씨."

"뭣이, 이것들이 진짜 죽고 싶어 환장을 했나!"

더 이상은 참지 못하겠던지 임재청이 직접 움직였다.

하지만 그는 한 발짝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발걸음을 멈춰야 했다.

"비, 빙공?"

-스스스스스스!!

그의 시선은 탁자 위에 서린 하얀 얼음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 조심...."

번쩍!

비명을 질렀지만 이미 그의 동생들은 면사녀의 공격에 두들겨 맞고 있었다.

-짜악!

-짝짝짝, 짝!

"아악!"

"으헥!"

"아이고, 나 죽는다."

자칭 섬서오웅의 첫째를 제외하고 모두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때 객잔에 있던 누군가가 크게 외쳤다.

"북해빙궁!"

"새외...사세!"

순간 장내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사람들 역시 북해빙궁의 이름을 잘 알고 있었기에 어느 누구도 나서는 이가 없었다. 더욱이 남자들이 먼저 수작을 부렸지 않은가!

제35화

35화 새외사세(塞外四勢), 북해빙궁(北海氷宮)(2)

쯧쯧쯧!

그러게 왜 시비를 걸어!

생각해 봐.

평범한 여자라면 이 험한 강호를 자기들끼리 여행할 수 있겠어?

그만큼 실력에 자신이 있으니 저렇게 돌아다니는 거잖아.

면사를 쓴 폼만 봐도 그래.

아까 형이 그랬잖아. 심상치 않은 냄새가 풍긴다고 말이야.

만약 쟤들이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면 니들은 벌써 황천을 건넜을 거다.

"소궁주, 어떻게 할까요?"

"...."

소궁주가 양아치들의 면면을 살피자 그들은 애써 시선을 회피했다.

기세가 완전히 꺾인 것이다.

"임씨세가의 소가주, 임재청이라고 했나?"

"네? 네. 그, 그렇습니다."

"내가 누군지 설명이 필요할까?"

"아니요, 아닙니다."

임재청은 덜덜 떨리는 목소리를 숨기지 못했다.

임씨세가 따위가 무슨 오대세가도 아닌데 감히 북해빙궁과 맞설 수 없다.

"이곳이 중원임을 다행으로 생각해라."

소궁주의 말에 시비로 보이는 여인이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

"뭐 해? 우리 아가씨 말 못 들었어? 살고 싶으면 동생들 데리고 당장 꺼져."

"가, 감사합니다."

"어서 꺼지라고."

"...네... 네."

-후다다닥!!

임재청과 그의 아우들은 발바닥에 불이 날 정도로 빠르게 사라졌다.

"섬서오웅? 흥! 저따위 놈들이 섬서의 다섯 영웅이라니! 아가씨, 중원도 생각보다 별거 아닌 것 같아요."

녹의를 입은 면사녀의 말에 소궁주가 답했다.

"소연아, 아버지가 말씀하셨잖니. 중원의 힘을 결코 얕보면 안 된다고 말이야.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야."

소궁주의 말에 소연의 표정이 바뀌었다.

"아가씨의 말이 맞아요. 제가 실수할 뻔했어요."

"실수라고 할 것까진 아니야. 그저 방심하지 말라는 뜻이지."

"호호호, 네, 아가씨."

소궁주의 말에 소연이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소궁주님,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래. 그럼 일어날까?"

"네."

"네, 소궁주님."

잠시 후,

북해빙궁 무리가 객잔을 떠나자 객잔에 있던 사람들은 그제야 긴 침묵의 터널에서 빠져나왔다.

"휘유."

"이제야 갔네."

"할아버지, 저들이 정말 북해빙궁 사람들이 맞을까요?"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구나. 저 소궁주라는 여인이 펼친 무공을 봤지?"

"빙공을 말씀하시는 거죠?"

"그래. 중원에는 빙공을 익힌 자가 드물어. 아니!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지. 그런데 저 탁자를 보렴."

나 역시 무의식적으로 탁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오늘같이 따뜻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저 얼음을 보렴. 아직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지 않니?"

"아!!"

과연 노인의 말대로다.

"저 정도 위력의 빙공이라면 오직 북해빙궁의 무공밖에 없다고 단언할 수 있지."

"그렇군요."

노인의 설명에 젊은 남녀의 눈에서 숨길 수 없는 감탄의 빛이 새어 나왔다.

"할아버지, 그런데 북해빙궁 사람들이 왜 이곳에 왔을까요? 설마 중원을 유람하기 위해 온 건 아니겠죠?"

고소원이나 불감청이다.

나는 저들의 대화를 조용히 경청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음! 한 가지 추측해 볼 순 있을 것 같다."

"그게 뭔데요?"

노인은 손녀의 질문에 답을 하는 대신 오히려 질문을 던졌다.

"순화야,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디지?"

"호북성요."

"그래, 호북성이야. 호북성엔 무엇이 있을까?"

"음! 일단 가장 유명한 황학루가 있고 무한동호, 신농가, 장강삼협 등이 있어요."

소녀는 호북성의 유명한 관광지와 명승지를 열거했고 노인은 그 모습을 보며 미소를 보였다.

"그래. 호북성에는 유명한 곳이 참 많지. 그런데 새외 무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관심을 가질 만한 곳이 어디에 있을까?"

"설마 무당파?"

"그래. 호북성엔 중원 무림의 양대 산맥으로 불리는 무당파가 있지."

"...!"

벌떡!

노인의 말을 듣는 순간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수 없었다.

나는 계산을 마치고 서둘러 도성을 빠져나왔다.

[무당파]

내가 무당파에 도착했을 무렵,

면사를 입은 여인들이 무당의 제자들과 옥신각신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역시 북해빙궁 인물들이다. 무슨 일로 본문을 찾은 것일까?'

난 기척을 숨긴 채 은밀하게 접근했다.

"장문인을 만나게 해 주세요."

"말씀드렸지 않았습니까! 장문인은 현재 자리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럼 지금 어디에 계시죠?"

"그것은 본문의 일입니다. 알려 드릴 수 없습니다."

"설마 우리가 북해에서 왔다고 무시하는 겁니까?"

"무시라뇨,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묻고 싶군요. 사전에 약속을 하셨습니까?"

"...!"

좌중을 짓누르는 긴장감이 무당파를 감돌고 있었다.

마침 저기에 무당의 어린 도동 두 명이 서성이는 것이 보였다.

나는 재빨리 두 사람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월정, 월명, 너희들은 나를 알아보겠느냐?"

두 도동은 내가 나타나자 깜짝 놀랐다.

"누, 누구세요?"

어디서 본 듯은 했지만 금방 식별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다.

하긴 수백 명이나 되는 무당의 제자들 사이에서 내 모습을 본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아! 혹시 청운 태사숙조가 아니십니까?"

"그래. 월정, 네가 용케 기억했구나."

월정이 웃으며 말했다.

"장서각 앞을 청소하다가 먼발치에서 뵌 적이 있습니다."

"그래, 그래. 근데 말이야."

나는 월정을 통해 청명 사형이 오늘 아침 일찍 화산의 매화구검과 함께 무림맹으로 떠났다는 사실을 들을 수 있었다. 그 뒤를 이어 청수 사형도 제자들을 이끌고 아미파로 향했고 말이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왠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나는 일단 월정, 월명을 돌려보냈다.

"그렇다면 청수 도장이라도 만나게 해 주세요."

"청수 사백 역시 경내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럼 청혜 도장은요? 설마 청혜 도장께서도 부재중이신가요?"

"그건 아니지만 현재 수련 중에 계십니다."

"수련요?"

"그렇습니다."

"좋아요. 그럼 언제쯤 청혜 도장의 수련이 끝나나요?"

"오늘이 될 수도 있고 내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확답을 드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분명 시급을 다투는 일이라고 말했는데요. 계속 우리를 무시할 겁니까?"

"누가 누구를 무시한다는 말입니까? 다짜고짜 찾아와 이렇게 막무가내 행동을 보이신 건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이런! 말이 전혀 통하지 않네요. 그렇다면 실력을 보여 주는 수밖에!"

북해빙궁 소궁주의 눈초리가 달라진다.

"소연!"

"네, 아가씨."

순간 녹의를 입은 여인이 섬전과 같은 속도로 뛰어나와 부복했다.

객잔에서 보았던 그 여인이다.

"네가 무당의 실력을 확인해 보렴."

"알겠습니다."

소궁주의 명에 그녀가 앞으로 나섰다.

"어느 분이 가르침을 주시겠습니까?"

그녀는 누가 제지할 틈도 없이 허리에서 채찍을 풀어냈다.

촤악!!

그녀의 채찍에서 새하얀 냉기가 뿜어져 나오며 팽팽한 긴장감이 솟구쳤다.

"설마 중원 무림의 양대 산맥이라는 무당파에 겁쟁이들만 모여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감히!"

무당운룡 운학이 그녀의 도발에 참지 못해 앞으로 나섰고 다음 순간 두 사람이 격돌했다.

"빙하유설(빙하 속에 얼음 꽃이 피면)."

"유운일섬(구름 속을 가르는 한 줄기 빛)."

-꽝!

소연의 채찍은 초식의 이름과 달리 마치 살아 있는 한 마리의 뱀처럼 기괴한 움직임을 보이며 운학의 요혈을 향해 날아갔다. 그러나 운학의 방어 역시 범상치 않았다.

그렇게 몇 번의 공방이 이어졌다.

"빙하매장(빙하의 무덤 속에 갇혀)."

"유운비룡(구름 위로 모습을 드러내는 한 마리의 용이여)."

"빙하만개(빙하는 만개의 얼음이 된다)."

"유운적하(구름이 핏빛으로 변한다)."

-콰콰콰콰쾅!

백중세(伯仲勢)!

북해빙궁 무리들과 무당파 제자들은 서로 대놓고 표현하지 않았지만 상대의 무공에 감탄하고 있었다.

"과연 새외사세인가?"

"저것이 바로 무당의 무공이군요."

나 역시 두 사람의 대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일류 무인의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소연, 멈춰라."

"네, 아가씨."

북해빙궁 소궁주의 말에 소연이 채찍을 거두자 운학 역시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되었다.

"과연 천하일절이라 불리는 북해빙궁이군요. 덕분에 개안했습니다."

"저야말로 한 수 배웠습니다. 제 이름은 경소연이라고 합니다. 도장의 명호를 알 수 있을까요?"

"운학이라 합니다."

"운학이라면, 아! 무당운룡이 바로 당신이었군요."

"과분한 명호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탄복한 듯, 허리를 살짝 숙이며 읍했다.

그때 북해빙궁의 소궁주가 앞으로 나섰다.

"북해빙궁 소궁주 은설연이라고 합니다. 이번엔 제가 무당의 무공을 견식하고 싶군요."

빙궁의 소궁주가 나서겠다는 말에 무당 제자들이 잠시 당황하고 있는 사이,

무당운룡 운학이 다시 한번 검을 고쳐 잡았다.

"원하신다면 제가 상대해 드리죠."

"운학 도장께서요?"

"네."

은설연은 묘한 미소를 보이더니 이내 그렇게 하라고 말했다.

"좋아요. 그럼 한번 받아 보시죠."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거센 냉기가 쏟아져 들어왔다.

-꽝!

운학이 재빨리 땅을 박차고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러나 그녀의 공격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그녀의 양손이 마치 천수관음의 손과 같은 형상을 보이며 움직이더니 이내 푸르스름한 기운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맙소사! 저게 냉기인 것인가?"

눈에 보일 정도의 냉기라니!

대체 위력이 어느 정도란 말인가?

시리도록 하얀 냉기는 공기를 가르며 날아갔다.

그것은 마치 북극의 얼음 물결을 마주하는 환상을 보여 주었다.

순간 운학 역시 폭발하듯 일장을 내려쳤다.

무당이 자랑하는 내가장법 무당면장이다.

-콰콰콰쾅!

굉음이 연속적으로 터져 나오는 동시에 하늘에서 꽃송이가 떨어졌다.

얼음으로 만들어진 꽃송이가.

-휘이이잉!

운학은 자신의 손에서 느껴지는 냉기에 눈을 부릅떴다.

하얀 서리가 어느새 손등에 올라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넋을 놓고 있을 수 없다.

은설연이 두 번째 공격을 예고했기 때문이다.

"과연 무당이군요. 이번에도 막을 수 있을지 궁금하네요. 빙백신장!"

-우우우웅!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대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북풍한설의 매서운 기운이 무당에 강림한 것이다.

마치 무당산에 한겨울이 찾아온 것 같았다.

"북해빙궁의 고수께서 무당에 왕림해 주셨군요."

이때 청혜 사형의 중후한 음성이 공중에서 들려왔다.

사람들은 허공에서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깜짝 놀라며 주위를 살폈다.

"청혜 사숙을 뵈옵니다."

"장로님을 뵈옵니다."

"청혜 사숙조를 뵈옵니다."

청혜 사형의 출현에 무당의 모든 제자들이 허리를 숙였다.

제36화

36화 형이 꼭 복수해 줄게

청혜 사형이 경내에서 벌어진 소란에 수련을 멈추고 나온 것 같았다.

"청혜 진인이시군요. 제 이름은 은설연입니다."

"은설연? 그럼 빙제께서...."

"네, 제 아버님 되십니다."

"오호라, 그렇군요. 빙제께서는 무탈하신가요?"

"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때 은설연이 품에서 단약 하나를 꺼내 사형에게 건넸다.

"이게 뭐죠?"

"본 궁의 화양단입니다. 운학 도사께 도움이 될 겁니다."

"그렇군요. 감사히 받겠습니다."

청혜 사형은 화양단을 받는 즉시 운학에게 단약을 건넸다.

"귀궁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별말씀을요."

운학은 화양단을 복용하자 한결 편해진 얼굴이다.

팔뚝까지 올라온 서리도 금세 사라졌고 말이다.

"북해빙궁에서 무슨 일로 무당을 찾았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버님이 무당에 전한 서찰입니다."

청혜 사형은 빙궁의 소궁주가 건넨 서찰을 그 자리에서 개봉했다.

"음!!"

하지만 다음 순간,

청혜 사형의 안색이 진중하게 변했다.

"이 자리에서 결정하긴 힘들 것 같군요. 허나 빙제의 뜻을 알았으니 조만간 답을 내어 드리겠습니다. 일단 그때까지 무당에 머무는 게 어떻겠습니까?"

연배를 보거나 배분을 따져 봐도 두 사람의 위치는 완전 다르다.

하지만 북해빙궁을 대표하는 위치로 무당을 찾았기에 사형은 그녀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존대했다.

"도장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은설연 역시 차분한 반응을 보이며 사형에게 읍했다.

"현영아."

"네, 스승님."

"손님들이 편히 쉴 수 있도록 네가 모시어라."

"알겠습니다, 스승님."

잠시 후,

빙궁 사람들이 사라지자 제자들 역시 각자의 목적지로 발길을 돌렸다.

나는 자연스레 혼자 남게 되었는데 호기심에 못 이겨 사형의 거처로 향했다.

평소라면 신경을 쓰지 않았겠지만 청명, 청수 사형이 없어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나 역시 무당의 제자가 아닌가!

그것도 '청' 자 배의 제자.

"사형, 안에 계신가요?"

"청운 사제인가?"

"네, 사형."

"들어오시게."

들어오라는 허락이 떨어지자 방문을 열고 사형의 처소로 들어갔다.

"사형을 뵈옵니다."

방 안에 들어서자 먼저 아담한 내부가 보인다.

청혜 사형의 소탈한 성품에 맞게 한쪽 벽면에 위치한 서가에 서책이 가득했고 그 외에 책상 하나, 걸상 하나 그리고 등불이 단출하게 놓여 있었다.

"자네도 차 한 잔 줄까?"

마침 차를 마시고 있던 청혜 사형이 내게 차를 권했다.

"네, 주세요."

"허허허, 그래."

쪼르륵!

나는 보이차 맛을 음미하며 천천히 한 모금 넘겼다.

"검선 사백께 많이 배웠는가?"

"뭐~ 얼마 전에 조그만 성취를 보았습니다."

"허허허~ 그것참 축하하네."

"헤헤헤~ 감사해요, 사형."

겸손이 미덕이라고 하지만 가끔은 이렇게 사실대로 얘기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태허무극심법이 3단계에 오른 후, 내 성취는 하루가 다르게 늘고 있었다.

분신 스킬의 복구 속도도 그렇고 말이다.

-[...9.234129903%... 9.234129940%... 9.234130001%....]

0.000000001%로 시작했던 수치가 어느새 9%를 넘어 10%를 바라보고 있었다.

각설하고 사형이 마시던 차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그래. 그런데 기별도 없이 무슨 일로 이 사형을 찾았는가?"

"사실 아까 빙궁과의 일을 보았습니다."

"그 자리에 사제도 있었군."

"네."

나는 조곤조곤 말을 이어 갔다.

"월정에게 오늘 아침 장문 사형과 청수 사형이 무당의 산문을 나섰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공교롭게도 빙궁에서 무당을 찾아오고 말입니다. 혹시 우리 무당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이 아닌가, 궁금해서 사형을 찾았습니다."

내 말에 청혜 사형이 은은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특유의 부드러운 어조로 내게 말했다.

"빙궁에서 무당에 보낸 서찰이네. 사제가 한번 읽어 보게."

"제가 읽어 봐도 될까요?"

"사제 역시 우리 무당의 제자가 아닌가! 더욱이 '청' 자 배분이면 충분히 읽을 자격이 있네. 자!"

나는 사형이 건넨 서찰을 받았다.

그냥 인사치레로 하는 몇 마디 덕담을 빼고 서찰에 적힌 목적을 얘기하자면.

-[북해빙궁과 무당파의 협정서]

1. 이 협정서는 무당파의 장문인, 북해빙궁의 궁주가 바뀌기 전까지 유효하다.

2. 무당파는 북해빙궁과 협정을 맺는다.

3. 협정을 맺으면 상호 간에 공격을 가하지 않는다.

4. 공동의 적이 생기면 상호 간에 즉각적인 도움을 준다.

5. 무당파는 무림맹과 북해빙궁이 상호 협정을 맺을 수 있게 노력한다.

6. 북해빙궁은 새외사세가 무림맹과 협정을 맺을 수 있도록 노력한다.

북해빙궁은 무당과 협정을 맺기를 원하고 있었다.

"이것은?"

"그래. 우리와 협정을 맺자고 하더군."

"말이 좋아 협정이지, 일종의 동맹을 맺자는 소리와 같은데요?"

"사제의 말이 맞아. 정확히 봤어. 빙궁은 우리 무당을 시작으로 무림맹과 협약을 맺기를 원하고 있네."

"음."

"사제는 빙궁의 제안을 어떻게 생각하나?"

"북해빙궁은 정사지간에 위치해 있으니 큰 틀에서 보면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나는 청혜 사형을 보며 내 생각을 말했다.

"그래. 확실히 나쁜 제안이 아니야. 하지만 쉽게 결론을 낼 문제도 아니지."

"네?"

청혜 사형은 내게 현 무림의 심상치 않은 정세에 대해 말해 주었다.

"그게 정말이에요?"

"그래."

십 년이란 세월, 그동안의 평화가 지루했던 것일까?

청혜 사형의 말에 따르면 십만대산의 주인인 마교가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는 것이다. 사실 이미 수년 전부터 중원에 들어와 은밀히 활동하고 있었는데 얼마 전 공개적으로 마교의 대외적인 활동을 재개하겠다는 선언을 했다고 한다.

이는 즉 마교가 준동한 것이었고 위와 같은 이유로 청명 사형과 청수 사형이 아침 일찍 산문을 벗어난 것이라 했다.

청명 사형은 화산의 무인과 함께 무림맹에 다이렉트로 향했고 청수 사형 역시 아미파에 들른 후, 그쪽 분들과 함께 합류하기로 했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새외사세가요?"

"그래. 이것도 마저 읽어 보게. 개방에서 보내온 서찰이야. 마교가 새외사세와 비밀리에 접촉했다는 정보를 보내왔어."

"...!"

개방이 보낸 서찰에 나 역시 얼떨떨할 수밖에 없었다.

마교에서 새외사세 모두에게 사신을 보냈고 무언가 말이 오갔다는 것이다.

개방의 정보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론 정황증거만 있을 뿐이지 밀약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없었다.

하지만 청혜 사형의 걱정이 이해됐다.

만에 하나라는 말이 있듯 새외사세 중에 누군가가 마교와 손을 잡았는데 무림맹과 동맹을 맺는다면 큰일인 것이다.

내부의 적이 외부의 적보다 무서운 법이니까!

하지만 이 문제를 두고 깊게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사형의 이어진 말 때문이다.

"사제는 혹여 어렸을 적의 기억이 돌아왔는가?"

"아니요, 온전히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순간 청혜 사형이 뭔가 망설이는 표정을 보였다.

나는 영문을 알 수 없어 그저 눈만 껌뻑거리고 있었는데 문득 내 머릿속에서 조각난 상태로 떠돌던 기억의 편린(片鱗)들이 떠올랐다.

최선우가 아닌 주선우의 기억이다.

"혹시 마교가 저와 관련이 있나요?"

"...."

"사형, 저와 관계가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전 이제 어린애가 아니잖아요."

"...!!"

내 말에 청혜 사형이 뭔가 깨달은 눈빛이다.

"그렇군. 내가 어리석었어. 어렸을 때부터 사제를 봐서 그런지 여태껏 어린아이인 줄만 알았어. 이렇게 믿음직한 성인이 되었는데 말이야."

사형의 설명이 이어졌다.

"사제는 혹시 남경 왕부에 대해 알고 있나?"

"남경 왕부요?"

"그래. 남경 왕부."

여기서 왜 남경 왕부의 얘기가 나오는가?

그때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설마?"

"그래. 남경 왕부가 마교와 손을 잡고 일을 꾸몄어. 그 시발점이 바로 사제였고 말이야."

청혜 사형은 그동안 숨겨 왔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사제의 건강이 회복되면 자금성에 알릴 생각이었네. 황제를 대신해 무당의 제자가 된 황자의 존재를 말이야.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흘러가는 사태가 심상치 않더군. 청수 사형이 직접 나서서 지난 몇 년 동안 사제와 관련된 일을 조사했네. 그리고 그 결과 병마에 쓰러져 혼수상태에 빠진 황제를 두고 권좌를 차지하려는 암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네. 그래서 우리는 사제의 존재를 감추기로 판단했지."

"어린 핏덩이에 불과했습니다. 어린 제가 숙부에게 무슨 위험이 될 수 있었나요? 왜 절 죽이려 했죠?"

"사제의 외가 때문이지."

"제 외가요?"

"그래. 북부대장군가."

"...!!"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100세에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브라함까지는 아니지만 69세의 황제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황자를 만들어 낸 것이다. 더욱이 마지막 황자의 외가는 북부대장군가, 북부에서만큼은 대적할 자가 없는 막강한 군벌 가문이었다.

숙부는 갑작스럽게 나타난 변수를 없애기 위해 마교와 손을 잡고 차도살인지계를 펼친 것이다.

천하에 산재한 영약을 통해 하루하루를 겨우 버티고 있는 황제.

하지만 그것도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고 남경 왕부와 황태자 간의 암투 역시 극한의 대립으로 치닫고 있다고 했다.

터벅터벅!

사형의 거처를 나오는 발걸음이 꽤나 무거웠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나도 모르게 윤동주 시인의 <자화상>을 읊조렸다.

어린 황자 주선우의 삶이 어느새 커다란 돌덩이가 되어 내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를 통해 새 삶을 얻었고

그로 인해 무당의 제자가 되었고

그로 인해 무공을 배웠으며

그로 인해 복수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런데 빌어먹을 나란 녀석은 여태껏 주선우가 아닌 최선우의 인생만 생각했다.

"선우야, 형이 꼭 복수해 줄게."

하늘에 떠 있는 달을 향해 굳센 의지를 담아 복수를 맹세하자 마음을 짓누르던 무게가 거짓말처럼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

[고마워요, 형.]

"...?!!"

환청이 들려온 것일까?

뺨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 속에서 주선우의 음성이 들려온 것 같다.

나는 잠시 동안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오늘따라 저 달이 유난히도 밝게 빛나고 있었다.

제37화

37화 그녀의 오해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뭐!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

어라, 이게 무슨 일인가?

화산검룡 이정진과 매봉 이지은이 날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오늘 아침 일찍 매화구검이 장문 사형과 함께 떠났다고 들었는데 설마 얘들은 이곳에서 날 기다렸단 말인가, 그것도 하루 종일?!

이건 예상치 못한 만남이었다.

"흥! 이제야 돌아왔군요. 낮에는 왜 도망갔죠?"

"그야...."

잠깐만!

문득 기분이 좋지 않았다.

말투가 마치 범인을 취조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대답해야 할 의무가 있나?"

"뭐라고요?"

"그리고 도망친 게 아니야. 아주 급한 볼일이 있었다고."

"급한 볼일이라고요? 그게 뭐였죠?"

"우리 무당의 일을 외인에게 말해야 할 이유가 있나?"

"이봐! 지금 그걸 말이라고...."

"사형, 제 일이에요. 제가 해결하기로 했잖아요."

"알...았어, 사매."

이지은이라고 했나?

그녀가 앞으로 나서는 동시에 내게 목검 한 자루를 던졌다.

-휘익!

"제 검술에 대한 품평, 아주 잘 들었어요."

조곤조곤하게 말하지만 왠지 '아주 건방진'이라는 눈빛으로 날 쏘아보고 있다.

"그래서?"

"한 수 가르침을 받고 싶어 지금까지 당신을 기다렸어요."

"...!"

내가 바본가?

저 말을 곧이곧대로 믿게!

속뜻을 풀어 보면 '내가 너를 혼내 줄 거야.'라는 뜻이다.

"내게 한 수 가르침을 받겠다고?"

"네."

"...큭!"

순간 나도 모르게 실소가 터져 나왔다.

나름 화가 났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그게 너무 귀여웠기 때문이다.

심장에 대고 맹세해도 좋다. 정말 귀여웠다.

"그 웃음의 의미는 뭐죠?"

"가, 갑자기 사레가 걸려서. 콜록! 콜록!"

"...."

어설프기 짝이 없는 변명이었다.

"설마 절 놀리는 건가요?"

"놀리다니, 설마."

붉게 물든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다.

더 이상 시간을 끌면 왠지 사달이 날 것 같다.

난 서둘러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가르침을 원한다니 좋아! 그럼 한 수 가르쳐 주지."

"저기요, 그런데 왜 자꾸 반말이에요?"

"가르쳐 달라며!"

"네?"

"생각해 봐. 가르침을 베푸는 사람이 존대를 해야 하나? 왜! 화산에선 그렇게 가르치나 보지?"

"그, 그건 아니지만."

"됐고, 선공은 양보할게. 드루와 봐."

그녀는 내 말에 분했는지 씩씩거렸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그녀는 애꿎은 입술만 깨물며 검을 들었다.

-슈욱!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내 신형 역시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었다.

"매화낙락(매화가 떨어지고 떨어지니)."

"매화적상(매화가 노을 위로 오른다)."

매화이십사수의 궤도가 다채롭게 변화하며 빈틈을 노리고 들어왔지만 나는 구름을 밟듯 보법을 전개해 그녀의 공격을 흘려 보냈다.

"이, 이게 뭐야?"

나는 매화이십사수의 구결은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녀의 검술을 몇 번이나 지켜봤기에 그녀의 실력에 대해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다. 교과서적인 검식에 절로 탄식이 나왔다.

정말이지 정직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애석하게도 내 옷자락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나는 큰 틀에서 그녀의 검술이 깨지지 않게 그녀의 방식을 고쳐 주기 시작했다.

가르침을 주기로 했으니 줄 거면 확실히 줘야지 않겠나.

"시야는 정면이 아닌 전체를! 허리를 곧게 펴야지! 검술이 너무 정직해."

"치잇!"

인정하는 표정이 아니다.

오히려 심통이 가득한 얼굴로 쉴 새 없이 공격을 쏟아 냈다.

"환검의 중심은 변화야. 중심이 굳건하지 않으면 검술 역시 흔들리는 법."

"...!"

하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고정적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녀의 검술은 마치 물이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나를 제대로 타격하지 못했다.

"낮에도 말했지만 너는 지나치게 형식에만 치우쳐 있어. 그건 곧 검술이 지니고 있는 진정한 오의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야. 초식은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니야. 넌 이미 완벽하게 초식을 익히고 있어. 그럼 껍데기를 깨고 나와야지."

나는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기세를 가다듬고 내력을 담아 외쳤다.

"형식이 아닌 그 안에 가지고 있는 뜻을 생각해 봐. 너를 감싼 껍데기를 부숴 버려!"

-우우웅!

나는 그 순간 태극검의 기수식을 펼쳤다.

이전까지 그녀의 공격을 피하는 데 급급했다면 이제는 피하는 것이 아닌 검술을 통해 가르침을 내려 주려 했다.

둥글게, 둥글게. 둥글게, 둥글게.

상대의 검술에 따라 공방을 맞춰야 하지만 나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다.

오직 하나! 그저 끊임없이 이어지는 원을 마음에 담았고 태극의 형상을 그려 내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언뜻 보면 불규칙한 선의 연속이지만 이는 사실 하나로 연결되어 태극을 완성시키고 있었다.

"태, 태극검?"

눈이 빠져라 비무를 구경하던 화산검룡 이정진이 자신도 모르게 감탄성을 토해 냈다.

"저것은 무당의 태극검이다."

자식, 화산검룡이라더니 보는 눈이 있는 것 같다.

이정진은 넋을 잃은 채, 내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설마 반로환동한 고수인가?"

'...푸헐!'

반로환동이라니, 대체 무슨 상상을 하는 걸까?

한순간 태극이 끊어질 뻔했지만 다행히 원을 이어 갈 수 있었다.

무릇 무공을 연마할 때 스승 없이 혼자 수련하는 것은 뭔가를 이루기에 몇 배는 힘들다. 제자의 수준을 정확히 판단해 주고 부족한 것을 채워 주는 것이 바로 스승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도 예외가 있다.

스승이라고 해서 모두가 좋은 스승이 아니기 때문이다.

합(合) 혹은 궁합(宮合)이라는 말이 있다.

남녀 사이에만 궁합이 있는 것이 아니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도 합이 있다.

만약 그녀와 나 사이에 합이 있다면, 그래서 나를 통해 그녀가 무언가 하나라도 얻는다면 그것은 그녀의 복일 것이다.

"초식과 초식은 부드럽게 연결해야 하고 명상과 사색을 통해 초식이 가지고 있는 본질을 이해해야 해."

나는 여전히 헛발질을 하고 있는 이지은을 향해 태허무극심법의 내력을 담아 크게 외쳤다.

"하나에 하나를 더하면 둘이 되는 것을 알았으면 다음에는 하나에 둘을 더해 보고 넷에 아홉도 더해 봐야지. 그렇게 하나에 하나만 주야장천 펼치면 어떡해!! 깨달음은 바로 그런 것이야. 매년 화산에 수많은 매화가 피지만 그 매화는 그 생김새가 전부 달라. 향기 또한 다르지. 편협한 생각은 그만 버리고 네가 가지고 있는 매화를 마음속에 그려 봐. 무당의 검이 곧 태극이듯, 화산의 검이 곧 매화니까."

-쿠웅!!

나의 외침이 그녀의 심령에 닿았을까?

맹렬하게 움직이던 그녀의 검이 갑자기 멈춰졌다.

깨달음의 시간이 이처럼 불현듯 찾아온 것이다.

다음 순간 화산검룡 이정진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눈으로 말했고 그 역시 지금의 상황을 이해했는지 입술을 꼭 다문 채,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무공을 처음 익히면 먼저 체력을 연마하고 초식을 익힌다.

여기까지가 이류의 경지다.

이후에는 고차원적인 수련에 임해야 한다.

바로 명상과 사색 그리고 검술에 대한 이해와 연구가 필수인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 후,

매봉 이지은이 눈을 떴다.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기도는 전과 비교해 확연히 달랐다.

그동안 이류의 끝자락과 일류의 초입 사이에 자리하고 있었다면 이제는 완벽하게 일류라 말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른 것이 확실했다.

더욱이 그녀는 화산파의 제자다.

차후 본인의 노력에 따라 절정 어쩌면 그 이상의 경지에 도달할지도 모른다.

이제 분위기가 완전 바뀌었다.

멍하니 서서 날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의 표정이 가관도 아니다.

나는 그녀에게 몇 걸음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가 던져 준 목검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이때 우리 두 사람의 간격은 너무 가까웠던 것 같다.

아름다운 얼굴과 함께 하얀 피부에 붉게 물든 홍조가 눈에 띄었다.

"다, 당신은 누구세요?"

"...."

나는 그녀의 물음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당의 어느 고인이신지요? 혹시 반로환동을 하신 건가요?"

그저 은은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신 신비감을 고취시켰다.

두 사람은 뭔가 내게 할 말이 있다는 듯 머뭇거렸지만 분위기에 압도된 나머지 그저 우두커니 서서 내가 방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 * *

이른 아침부터 무림맹이 북적이기 시작한다.

무림맹이 위치하고 있는 개봉에 구파일방의 핵심 인물들이 속속히 나타났기 때문이다.

"구파일방의 무림 동도들을 모신 까닭은 중대한 변고가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각 문파를 대표하는 이들이 원탁에 모두 착석하자 회의를 주재한 개방 방주 취걸개가 입을 열었다.

"마교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취걸개의 말에 좌중에 있던 모든 이들이 크게 놀랐다.

그들 역시 20년 전 벌어졌던 정마대전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말씀이 정녕 사실입니까?"

종남파 장문인 천수검객이 도전적인 어조로 물었다.

"네, 사실입니다."

"그럼 대체 곤륜은 무얼 했답니까? 마교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으면 미리 전갈을 했어야죠."

"...."

천수검객의 투정 어린 말에 취걸개의 충격적인 대답이 이어졌다.

"곤륜이 봉문을 선언했습니다."

"보, 봉문을요?"

"네. 멸문을 피하기 위해 태청 진인이 마교의 주구 앞에서 스스로 내공을 파했고 일대제자들 역시 스스로 근맥을 잘랐다고 들었습니다."

"...헙!"

"그게 사실입니까?"

"네, 사실입니다."

"마, 맙소사!"

"이런!"

취걸개의 말에 좌중이 깊은 충격에 빠졌다.

그렇지 않아도 무림맹의 소집 요청에도 불구하고 곤륜파 제자들이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아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쾅!

"그 빌어먹을 놈들이 지금 어디 있습니까?"

화가 치밀어 오른 천수검객이 탁자를 치며 물었다.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보시는 게 빠르겠죠."

취걸개가 중원 전역이 그려져 있는 지도를 탁자 위에 활짝 펼쳤다.

-촤악!

"우리 개방이 파악한 저들의 이동 경로입니다."

"음?"

"이, 이것은!"

"신강에서 내려온 마교의 무리들이 중원을 넘기 위한 첫 관문인 곤륜을 친 후, 그곳에서 병력을 나누었고 현재 각각의 지역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각각의 지역이라면?"

"워낙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어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있지만 현재 확인된 것은 사천과 호북 그리고 무림맹이 있는 개봉입니다."

취걸개의 설명에 좌중이 크게 술렁였다.

"저들의 수가 얼마나 됩니까?"

"최소 수천에서 최대 만 명 이상의 병력이 움직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 만 명요? 말도 안 됩니다."

"그렇습니다. 그 정도의 병력이 움직이는데 관(官)에서 가만히 보고만 있었답니까?"

"네. 가만히 보고만 있었답니다. 여러분들도 황궁의 사정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런!!"

좌중에 모인 이들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제38화

38화 보르네오섬

만마전에 마교의 수뇌부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곤륜을 봉문시킨 일만 명의 무사들이 현재 병력을 나누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개방 거지들을 통해 정파 놈들 역시 곤륜의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하하하! 놈들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겠군요."

"놈들이 화들짝 놀란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크하하하!"

마교의 장로 소면인마가 좌중을 향해 말했다.

"이제 놈들은 무림맹에서 섣불리 병력을 움직이지 못할 겁니다."

"그렇습니다. 마뇌의 계략이 기가 막히게 들어맞았습니다."

좌중의 시선이 마뇌 혁련후에게 향했다.

"지금까지는 다행히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저들의 피해는?"

"예상치 못한 변수가 끼어들지 않는 한 최소 이 할에서 최대 오 할의 피해를 입힐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크하하하!"

좌중은 이미 축제 분위기였다.

"오 할의 피해면 이참에 아예 무림을 쓸어버려도 되겠습니다."

"그렇겠죠. 오 할이면 말입니다."

"현재 관의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대규모의 병력이 움직였지만 남경 왕부의 도움을 받아 아직 조용합니다. 그래도 조심하는 것이 좋겠지요."

"네, 알겠습니다."

일만 명의 침공.

단순히 인원수만 따지면 무림맹 무인들의 숫자가 이보다 많다.

하지만 무림맹은 중원을 차지하고 있는 만큼 지킬 곳이 많았다.

마교의 두뇌라 할 수 있는 마뇌 혁련후는 바로 이와 같은 점을 이용해 성동격서의 계략을 꾸몄고 남경 왕부와 손을 잡아 일을 진행시켰다.

"참! 사황성의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포달랍궁과 만독궁이 병력을 이동한 덕에 쉽게 움직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참 좋은 소식이군요. 새외사세 중에 다른 두 곳은 어떻습니까?"

"소뇌음사는 중립을 선언했습니다."

"쳇! 재수 없는 밀교 녀석들. 어차피 큰 기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북해빙궁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빙궁은 동맹을 거부했습니다."

"거부요?"

"네. 그렇습니다."

소면인마의 말이 이어졌다.

"빙궁에 심어 놓은 간자에 의하면 우리 측 사절단이 떠난 직후, 빙제의 딸이 움직였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중원으로 들어간 것 같은데 혹시 변수가 생길까요?"

"빙제가 직접 움직인 것도 아닌데, 변수라고 할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다만?"

마뇌(魔腦) 혁련후가 서늘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얼음밖에 없는 땅이라 욕심을 내지 않았는데, 조만간 정리를 해야겠군요."

"명을 내리시면 당장이라도 쓸어버리겠습니다."

"아닙니다. 지금은 빙궁을 상대할 시간이 아닙니다. 뭐! 조만간 기회가 오겠죠. 아시다시피 우리의 목표는 바로 중원 무림이니까요."

마뇌의 말에 좌중에 모인 이들의 눈에 숨길 수 없는 갈망과 욕망의 빛이 떠올랐다.

이미 곤륜은 봉문을 선언했고 여기에 구파일방에 커다란 피해를 입힌다면 그만큼 중원 일통에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그럼 모두들 맡은 바 소임을 다해 주십시오. 전 교주님을 만나 뵈러 가겠습니다."

마뇌 혁련후가 장로들을 향해 읍했다.

* * *

인천을 떠난 지 12시간 후,

보르네오섬이 마침내 눈앞에 나타났다.

"저기 보이네요, 형님. 드디어 도착했습니다."

"하하하, 그러게 말이야."

헌터 김준동의 말에 헌터 유상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자연의 냄새, 죽이지 않아?"

"흐흐흐~ 자연의 냄새라뇨, 열대우림의 뜨거운 냄새겠죠."

"큭큭큭! 그래. 네 말이 맞다."

보르네오섬을 마주한 헌터들의 눈에서 묘한 열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보르네오섬을 지척에 두고 저마다 마음속에 품고 있던 계획을 다시 한번 다짐했다.

누군가는 성공을, 누군가는 대박을, 누군가는 강함을 말이다.

"다행히 주변에 몬스터들이 없어 보이네요."

"당연하죠. 그 덕에 이쪽 루트를 알아내기까지 엄청난 희생이 있었어요."

선장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자! 도착했으니 이제 모두 하선하시오."

선장의 말에 우리는 배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한 명, 한 명, 한 명, 마지막 한 명이 배에서 내릴 때까지 우리는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하다.

이곳이 몬스터 랜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스타게이트에 들어가기 전까지 일종의 파티를 맺었는데 이 중에는 막 사춘기에 들어선 것 같은 나이의 앳된 소녀도 있었다.

"그럼 행운을 빌겠소."

선장은 행운을 빈다는 말을 끝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이제 그는 앞으로 3개월 후에나 이곳에 다시 올 것이다.

"청운, 준비됐어?"

암적색 망토에 로브를 깊게 눌러쓴 지나가 내게 물었다.

"물론이지."

"넌?"

"나도 준비됐어."

이때 파티장을 맡은 유상현 헌터가 우리를 향해 말했다.

"장비부터 점검한 후에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그는 보르네오섬을 통해 스타게이트에 입장해 본 사람들 중에 가장 연장자여서 자연스럽게 파티장이 되었다.

"저 아저씨 딜러 겸 탱커야."

"딜러 겸 탱커?"

"응. 꽤 실력자야."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니 호기심이 들었다.

"근데 청운, 너 그 대검을 등에 메고 달릴 거야? 무겁지 않을까?"

"응. 전혀."

"워~ 보기보다 장사네 장사야."

"...."

난 그녀의 말에 그저 미소만 보였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유상현 헌터가 앞장서서 이동하기 시작했다.

빠르지 않지만 그렇다고 결코 느린 것도 아닌, 그야말로 적절한 속도다.

역시 베테랑 헌터답다.

우리는 주변을 경계하며 조심스럽게 그의 뒤를 따랐다.

"후우, 후우."

"으! 완전 푹푹 찌네."

"조금만 더 참아."

밀림 안으로 들어서자 이제는 몬스터 랜드로 변해 버린 보르네오섬이 우리를 격하게 반겼다.

창검이 들어가지 않을 만큼 빽빽한 넝쿨과 숨쉬기조차 힘들 정도의 뜨거운 공기로 말이다.

자연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다.

자연은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의 것이다. 그렇기에 결코 파괴해선 안 되며 후손들을 위해 지키고 보존해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의 발길이 사라진 보르네오섬은 자연이 가진 엄청난 생명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어쩌면 인간이 지구에 있어서 해충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건?'

내 눈이 한 곳을 향했다.

가까이 다가가자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잔뜩 녹이 슨 무기들과 방어구들이 한쪽에 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이전에 보르네오섬을 찾았던 헌터들의 물건들이었겠지.

저렇게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는 것을 보아하니 스타게이트에 들어가지 못한 것 같다.

"저렇게들 되지 않게 조심하자고."

"네, 형님."

운이 좋은 걸까?

한참을 이동했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거짓말처럼 단 한 번도 몬스터와 조우하지 않았다. 하지만 폭풍이 닥쳐오기 전은 언제나 고요한 법이다.

"주변이 이상할 정도로 조용한데요?"

"조금 전부터 야생동물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순간 선두에 있던 유상현 헌터가 멈칫하며 손을 들었다.

이때 침엽수로 가득한 밀림 저편에서 엄청난 포효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우우우우, 크와앙!!"

일행 중에 가장 어린 17세 헌터 노아가 사색이 되어 외쳤다.

"오우거예요."

"오우거?"

"네. 노움이 알려 줬어요."

땅의 정령이 알려 줬다는 말에 유상현의 안색이 심하게 구겨졌다.

"이런 젠장, 처음 조우한 몬스터가 오우거라니!"

"어쩐지 그 흔한 고블린이 코빼기도 안 보이더라. 다 이유가 있었어."

일행들의 얼굴이 사뭇 심각해졌다.

오우거는 A급 몬스터였기 때문이다.

"다들 바람을 등지고 앉아!"

선두 쪽에서 유상현이 낮게 말했고 우리는 즉시 바람을 등지고 앉았다.

운이 좋으면 다른 곳으로 향할 것이고 운이 나쁘면....

"우오오오오!!"

젠장!

운이 나쁜 것 같다.

오우거의 포효성이 점점 더 우리 쪽을 향해 가까워지고 있었다.

"모두 전투준비."

유상현이 다급하게 외쳤다.

"내가 탱커를 맡을 테니 딜러들은 기습을 준비해. 일단 포메이션 A로 간다."

유상현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우리는 최적의 자리를 찾아 몸을 은폐했다.

잠시 후,

몸을 낮춘 상태에서 조심히 고개를 드니 한 마리가 아닌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두 마리의 오우거를 볼 수 있었다. 유심히 지켜보니 두 마리는 외피 색깔이 달랐다. 한 놈은 자신이 있는 검붉은 색이었고, 다른 한 놈은 암청색이었다.

"제기랄! 한 마리가 더 있어. 암수 두 마리야."

옆에 있던 지나가 나직이 욕설을 내뱉었다.

이때 유상현이 나를 곁눈질하며 심상치 않은 눈빛을 보였다.

"플랜 B로 갑니다. 가능하겠습니까?"

플랜 B는 감당하기 힘든 몬스터가 나타날 경우,

발 빠른 헌터가 미끼가 되어 일부 몬스터를 유인하고 남은 이들이 사냥에 집중하자는 계획이다.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플랜 B가 실행될 경우 내가 미끼 역할을 맡기로 자청했기 때문이다.

"야, 인마."

"그륵?"

나를 발견한 오우거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눈빛을 반짝였다.

마치 오랜만에 별미를 발견했다는 눈빛이다.

"형이랑 술래잡기할래? 형이 지금부터 도망갈 거야. 그러니까 어디 한번 따라올 테면 따라와 봐, 알겠지? 하하하하~."

말이 통할 리 없겠지만 내가 몸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하자 한 놈이 소름 끼치는 괴성을 토해 내며 나를 쫓기 시작했다.

나는 속도를 조절해 가며 놈을 유인하기 시작했다.

단순한 미끼 역할이 아니다.

내가 미끼 역할을 자청한 것은 다 계획이 있어서였다.

-쿵! 쿵! 쿵! 쿵!

지축을 울리는 발자국 소리.

이따금씩 바람을 가르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등 뒤로 구역질 가득한 냄새가 올라왔지만 그때마다 기감을 이용해 녀석과의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

-쾅!

"아이고, 거기 아니거든요."

"꾸어억!"

"나 잡아 봐라."

잡힐 듯 잡히지 않게 놈의 성질을 적절하게 건드리자 놈은 물불가리지 않고 내게 달라붙었다.

어느 정도 거리를 벌렸으니 이쯤이면 시작해도 될 것 같았다.

채앵!

무극 대검을 빼어 들고 오우거를 향해 외쳤다.

"다른 건 다 참겠는데, 그 입 냄새는 더 이상 못 참겠다. 이 쉐끼야."

내가 오우거를 향해 날아가자 오우거 역시 흉성을 폭발시키며 나를 향해 날아왔다.

-콰앙!

지축을 흔드는 굉음과 함께 수풀이 크게 들썩였다.

인간과 오우거의 격돌에 숲이 천둥소리와 같은 비명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뿌연 먼지가 솟구치며 나뭇잎 아래 몸을 숨기고 있던 새들이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된다. 들어간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단단한 것에 걸려 멈추고 말았다.

역시 오우거인가?

지상의 제왕답게 놈의 가죽은 무극 대검을 튕겨 낼 만큼 질겼다.

"좋아. 그렇다면 아주 난도질을 해 주지!"

나는 긴장을 늦추지 않고 대검에 내력을 불어 넣기 시작했다.

순간 무극 대검에서 시퍼런 검광이 일어났다.

"이 쉐끼, 넌 이제 죽었어."

제39화

39화 이 구역의 왕은 나

무극을 중심으로 강력한 회오리가 생성되자 녀석이 신중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은연중 인간을 무시하던 눈빛이 달라진 느낌이다.

'야생의 본능이 검기의 위력을 짐작한 모양이겠지.'

하지만 몬스터는 결국 몬스터다.

녀석은 마치 화가 났다는 듯 괴성을 터뜨렸다. 핏발 선 눈동자에서 분노의 빛이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고 이내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듯 주먹을 휘둘렀다.

꽈앙! 꽝!

나는 순간 이동 스킬을 적절하게 펼쳐 놈과의 거리를 조절하는 동시에 틈이 보이는 순간 녀석에게 무극 대검을 날렸다.

오우거의 피부는 어지간한 무기가 통하지 않을 만큼 질겼지만 무극에 서린 검기가 녀석의 살갗을 그야말로 거침없이 갈라 버렸다.

"크악!"

놈이 고통을 호소했다.

팔과 다리에서 핏줄기가 흘러나오자 핏발 선 오우거의 눈동자가 광기로 물들어 갔다. 놈은 곧 앞뒤 가릴 것 없이 달려들었다.

쾅!

솥뚜껑만 한 오우거의 주먹이 바위를 정통으로 강타하자 폭발음과 함께 바윗덩어리가 처참하게 찌그러진다.

나는 오우거의 위력을 실감하고 긴장감을 늦추지 않았다.

한순간의 방심이 큰 화를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우우우우웅!

나는 태허무극심법의 내력을 극성으로 끌어 올리며 무극 대검을 통해 태극을 그려 나가기 시작했다. 크기도 그렇고 무게도 엄청났지만 전혀 문제 되지 않았다.

"워워어어억!"

오우거 역시 완전히 폭주해 버렸다.

시뻘겋게 변한 눈동자에서 살기가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나는 이제 이 싸움을 끝낼 시간이 왔음을 깨닫고 묵직한 음성으로 외쳤다.

"태초에 혼돈이 있어 낮과 밤이 만나 하루가 되었고 건과 곤이 만나 하나가 되니 이것이 바로 태극이라."

-콰콰콰콰쾅!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듯, 무극이 녀석의 몸을 사선으로 갈랐다.

단단한 가죽으로 둘러싸인 놈의 몸이 그대로 쓰러졌고 녀석의 붉은 눈에 가득했던 생명의 빛이 사라졌다.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오우거의 심줄, 오우거의 뼈를 획득했습니다.]

-[A급 마석을 얻었습니다.]

놈이 숨을 거두자 나 역시 긴장감이 한꺼번에 풀리며 피로감이 몰려왔다.

거친 숨을 몇 번 토해 낸 후 나는 천천히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그렇게 차 한잔 마실 시간이 지났을까?

파티원들이 달려오는 모습이 시야에 잡혔다.

몇몇에게서 자잘한 상처가 보였지만 그뿐이다.

"청운! 괜찮아?"

가장 먼저 지나가 안부를 물었다.

"괜찮아."

"오우거는 어디 있소?"

헌터 김준동이 오우거의 행방을 물었다.

"저쪽에."

손가락을 들고 한쪽을 가리키자 사람들의 눈이 일제히 그곳을 향했다.

"헙!"

"으음!!"

땅바닥에 대자로 뻗어 있는 오우거의 모습을 보고 저마다 놀란 기색이 역력하다.

"이, 이게 말이 돼?"

"뭐가?"

"B급 헌터라며? 어떻게 B급이 오우거를 혼자 잡을 수 있지?"

"여길 좀 봐. 오우거가 사선으로 잘렸어. 오우거의 가죽을 단번에 자른 것이 분명해."

"저 대검으로 말이야? 휘두르기도 힘들 것 같은데?"

"정말... 대단하군."

몇몇은 마치 괴물이라도 보는 양 이상한 눈길로 날 쳐다보았다.

이때 김준동이 나섰다.

"이봐, 청운. 중급 헌터라 들었는데 정말 혼자 잡은 게 맞아?"

그는 도저히 믿기 어렵다는 눈빛이다.

이 자식 봐라.

왜 다짜고짜 반말이지?

순간적으로 불쾌함이 올라왔다.

파티를 위해 가장 위험한 미끼 역할을 수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의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그래도 같은 팀이니 한 번쯤은 기회를 주기로 했다.

"혹시 우리가 모르는 동료가 있는 게 아냐?"

"...."

뭐라는 거야?

너 지금 소설 쓰냐?

난 피식하며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세상에는 똥인지 된장인지 꼭 먹어 봐야 아는 놈이 있지."

"뭐, 너 이 자식! 지금 뭐라고 했어?"

"왜 쫄려?"

순간 김준동의 얼굴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그런데 한 가지 재밌는 건 녀석의 시선이 지나를 훑고 지나갔다는 것이다.

'그런 거였나?'

어쩐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지나를 쳐다본다 했다.

오해에 불과했지만 상당히 친해 보이는 내가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난 녀석을 향해 마치 악수를 청하듯 손을 내밀었다.

"자신 있으면 직접 시험해 보시든가!"

"이 자식이!"

김준동은 나를 노려보더니 이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내 손을 맞잡았다.

헐!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 봐야 아는 놈이 있었다니 이래서 세상이 재밌는 것 같다.

"손모가지를 부숴 주지."

"누가 할 소리."

두 손을 맞잡은 직후,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손에 힘을 가했다.

-우두두~둑!

다음 순간 불신으로 가득한 녀석의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녀석의 손마디가 서로 압착되며 비명을 내질렀기 때문이다.

나는 암암리에 크게 한 번 숨을 쉬고 진기를 움직였다.

이 정도 힘이면 돌덩이마저 으깨어질 정도의 힘이었다.

'힘이여, 솟아라.'

-우두두~~둑!

김준동은 오기로라도 악착같이 버티는 모습이지만 불행히도 오래가지 못했다.

그의 얼굴은 어느새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고 어쩔 수 없는 고통의 기색이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급기야 이와 같은 상황을 지켜보던 사람들의 표정 역시 심각해졌다.

상황이 정도를 넘어 위험해질 수 있다는 판단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저기 이제 그만하시죠."

"그래, 청운. 그러다 저 사람 죽겠어."

진기를 거두어들인 것은 그 순간이었다.

나는 어느새 창백할 정도로 하얗게 변해 버린 녀석의 얼굴을 무덤덤하게 바라보았다.

"...."

녀석은 비 맞은 강아지처럼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그러니까 그냥 가만히 있었으면 중간이라도 가지, 꼭 이렇게 나대는 녀석들이 있다니까.

"그만 갈까요?"

"그, 그러지.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면 몬스터들이 몰려올지 모르니까."

유상현 헌터가 멋쩍게 웃더니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자! 다들 이동합시다."

우리는 즉시 전열을 가다듬고 스타게이트를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청운 씨! 아까 정말 놀랐습니다."

팀을 이끌고 있던 유상현 헌터가 내게 다가와 슬그머니 말을 열었다.

말투는 물론 그가 보이는 행동은 이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뭐가 말입니까?"

"오우거 말이오. 내가 헌터 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광경을 봤는데 오우거를 저렇게 사냥한 헌터는 처음 봤소. B급이라 들었는데, 사실 A급이죠? 싱글 A, 더블 A?"

"...."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빙긋이 웃어 주었다.

그는 한층 더 은근해진 어조로 말을 건네는 동시에 명함을 주었다.

"기회가 되면 나중에 술이나 한잔합시다. 여기 내 연락처요."

"네, 그러시죠."

날짜와 장소 그리고 시간을 정하지 않는 한, 이런 종류의 약속은 이루어지기 쉽지 않다. 하지만 게이트에 들어가면 서로가 언제 그리고 어떻게 귀환할지 모르니 원래부터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렇게 번호를 주는 수밖에 없었다.

이후로 우리는 몇몇 몬스터와 조우했고 그때마다 큰 피해 없이 사냥에 성공했으나 애석하게도 동료 하나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하늘의 제왕이라 불리는 와이번이 나타나 순식간에 그를 낚아챘기에 구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일행들은 그것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헌터는 언제나 죽음에 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잠시나마 동료였던 그를 위해 묵념함으로써 짧게나마 애도를 표했다.

"이제 거의 다 왔습니다."

"저 언덕만 넘으면 스타게이트가 있어요."

그리고 얼마 후,

우리의 눈앞에 스타게이트가 나타났다.

"처음 들어가면 시작의 광장으로 이동하게 돼."

"시작의 광장?"

"응. 중소 규모의 마을이야. 일종의 스타팅 포인트라 볼 수 있지. 그런데 장소가 랜덤이거든. 그래서 어디로 갈지 몰라."

"그렇군."

"일단 광장에 도착하면 용병 길드부터 찾아. 그리고 신분부터 등록해. 그래야 의뢰를 받거나 다른 도시로 이동할 때 편하거든. 뭐! 자질구레한 건 직접 부딪치면 알게 될 거야."

"그래. 고마워."

"참고로 난 시슬리 왕국에 있어. 혹시라도 네가 시슬리 왕국에서 시작하게 된다면 연락해. 그럼 행운을 빌어."

"그래. 지나! 너도 행운을 빌어."

지나는 그 말을 끝으로 스타게이트에 들어갔고 그 뒤를 이어 나 역시 스타게이트 앞에 섰다.

-[스타게이트에 입장하시겠습니까?]

"그래."

다음 순간,

눈앞에서 별들의 향연이 펼쳐졌다.

시간과 공간, 우주를 관통하는 느낌을 받는 순간, 시스템의 음성이 들려왔다.

-[아틀란티스 대륙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첫 입장에 따라 당신의 스타팅 포인트는 말탄 왕국 시작의 광장입니다.]

-[재입장 시 마지막 귀환 포인트로 입장합니다.]

-[이곳에서 얻은 아이템은 지구로 가지고 갈 수 있습니다.]

-[살인자 수치가 쌓이면 악명이 오르고 눈동자의 색깔이 붉게 변합니다.]

-[악명이 높으면 도시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일정 이상의 공적을 쌓거나 명성이 오르면 작위를 받을 수 있습니다.]

-[....]

-[....]

-[당신이 이 땅에 온 이유가 있습니다. 행운의 여신께서 당신과 함께합니다.]

마지막 안내가 끝나자마자 생경한 도시의 풍경이 눈앞에 나타났다.

내가 서 있는 곳은 어느 정도 규모가 있어 보이는 마을의 광장이었는데 각양각색의 복장을 입은 사람들이 저마다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정말 다른 세상이로군.'

단순히 시각적인 것만이 아니다.

사람들의 대화 소리와 지금 이 순간 내 귓가를 스치는 바람이 그렇다.

어디선가 풍겨 오는 음식 냄새 역시 내가 서 있는 이곳이 분명한 현실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었다.

난 먼저 상태 창을 열고 컨디션을 확인했다.

<상태 창>

이름 : 최선우

레벨 : 111

고유 특성 : 분신(Unique) *사용 불가

칭호 : 지혜로운 자, 오크 살육자

생명력 : 2,500/2,500 마력 : 1,500/1,500

힘 : 220 체력 : 250 민첩 : 220

지혜 : 100 지능 : 105 행운 : 10 매력 : 20

명성 : 0 악명 : 0

보너스 스탯 : 140

시스템의 설명처럼 명성과 악명이 생성되었다.

자! 그럼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일단 지나가 말한 것처럼 용병 길드를 찾아 등록부터 해야겠지?

좋아. 그럼 용병 길드가 어디에 있는지부터 알아보자.

나는 주변을 살피다 인상이 좋아 보이는 노인을 발견하곤 그에게 다가갔다.

제4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