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화
40화 아틀란티스 대륙
"할아버지, 잠시 실례해도 될까요?"
"실례는 이미 한 것 같은데."
"하...하하. 네. 죄송합니다."
"풉! 농담일세. 자네, 이방인이지?"
노인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는 듯 말했다.
"어떻게 아셨죠?"
"매번 새로운 이방인들이 나타날 때마다 자네와 똑같은 표정으로 이리저리 사방을 둘러보는데, 어찌 모를 수 있을까? 근데 등에 멘 대검이 자네 무긴가?"
"네."
"보기와 다르게 힘이 엄청난 것 같군."
"아, 네.... 하하하."
"일단 우리 말탄 왕국에 온 걸 환영하네. 이곳은 엔조 테이 남작께서 다스리는 프리지아 영지에 있는 마을이고 내 이름은 헤르만일세. 말이 길면 지루한 법이니까 우선 이것부터 받게."
자신을 헤르만이라 밝힌 노인은 내게 [이방인을 위한 안내서]라 적힌 얇은 책자를 내밀었다.
"읽어 보면 알겠지만 그리 복잡할 것 없네. 이곳 역시 사람 사는 세상이니까 말이야."
"그, 그렇군요."
"다만 두 가지만 조심하게."
"두 가지요?"
"몬스터와 귀족. 책자에도 나와 있지만 이곳은 신분 사회야. 실력에 자신이 있다면 모를까, 어설픈 실력을 가지고 함부로 나대지 말라는 소릴세. 지금은 사정이 많이 나아졌지만 초창기엔 주제도 모르고 덤벼들었다가 목숨을 잃은 이방인들이 많았어. 자네가 온 세계에서 자네의 신분이 어떻든 간에 이곳에 왔으면 이곳의 법을 따라야 하는 것이 맞는 거야. 안 그런가?"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고 했다.
노인의 말에 100% 동의했다.
"조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노인에게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하하하, 예의를 아는 친구군."
"저 한 가지 여쭤봐도 될까요?"
"물론이지."
"용병 길드를 찾고 싶은데, 혹시 어디에 있는지 알고 계시나요?"
"오~~~ 좋은 질문이야. 자네! 기본이 됐군."
헤르만 노인이 손을 이리저리 흔들며 설명했다.
"먼저 이 길을 따라 쭉 직진하게. 그러다 큰 사거리가 나오면 오른쪽으로 꺾어지고 말이야. 그렇게 한 10분 걸어가면 상점가가 나오는데 거기서 길을 따라 조금만 더 가면 돼."
"감사합니다."
나는 헤르만이 건넨 책자를 손에 쥐고 용병 길드를 찾아 나섰다.
그의 말처럼 쭉 직진하다 큰 사거리에서 우회전을 했다.
곧 상점가가 나왔고 술집과 여관을 지나자 마침내 용병 길드라 적힌 건물이 나타났다.
"어서 오셔. 무슨 일로 오셨소?"
"여기가 용병 길드 맞나요?"
"그렇소만."
낯선 이의 등장인가!
남자의 눈빛에 경계의 눈초리가 엿보였다.
"용병 등록을 하려고 왔는데요."
"오~ 용병 등록."
길드를 찾은 이유를 밝히자 남자의 눈빛이 한결 누그러졌다.
"이 근방에서 처음 보는 분인 것 같은데, 혹시 이방인이쇼?"
"네. 그렇습니다."
"이방인이라면 적어도 기본은 하겠군."
그는 마치 독백하듯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름이 뭐요?"
"청운입니다."
"소드 유저시오?"
"소드 유저요?"
"마나를 제어하여 무기에 응축시킬 수 있는 경지를 말하는 것이오. 소드 유저는 돼야 어디 가서 칼 밥 좀 먹어 봤다고 말할 수 있지."
마나를 무기에 응축한다니 그럼 검기를 말하는 건가?
"혹시 이것을 말하는 것이오?"
나는 무극 대검을 뽑아 들고 내력을 불어 넣었다.
-우우우웅!
"오, 오러!"
용병 길드 직원의 눈이 갑자기 툭 튀어나왔다.
엥?! 저 격한 반응은 뭐지?
아무래도 내가 뭔가 오해를 한 것 같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저자가 말한 소드 유저는 검에다 마나를! 그것도 아주 단순하게 씌우는 수준을 말한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씌우는 것을 넘어 아예 유형의 오러를 발휘한 것이다.
"파, 팔라딘이었습니까?"
"팔라딘요?"
"네. 팔라딘. 다른 말로는 소드 익스퍼트라고 하죠."
용병 길드 직원의 말투가 갑자기 공손해졌다.
뭔가 일이 커졌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미 검기를 보여 준 이상, 그냥 시원하게 인정해 줬다.
"검기를 발현하는 경지를 팔라딘이라고 한다면, 뭐 팔라딘이 맞는 것 같네요."
"오오! 이것 참 근래에 보기 힘든 실력자가 오셨군요."
"그런가요?"
"물론입니다. 제가 소드 유저만 돼도 이런 말을 안 합니다. 옛날엔 안 그랬는데 요즘은 실력도 쥐뿔 없으면서 용병을 하겠다고 허접한 놈들이 몰려온다니까요."
"거기에 이방인도 포함되는 겁니까?"
"지금 이방인 위주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나는 그를 통해 실력이 부족한 헌터들이 스타게이트를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아마 금수저들이겠지.'
허탈하면서도 한편으론 씁쓸한 냉소가 흘러나왔다.
"제 권한으로 C급 용병패까지 드릴 수 있지만 음... 팔라딘이시니까, 지부장님을 한번 만나 뵙는 게 어떨까요? B급 이상은 지부장님 소관이거든요."
"그러죠."
"그럼 절 따라오십시오."
나는 직원을 따라 휘적휘적 내실로 들어갔다.
-덜컥.
문이 열리자 나이가 지긋한 중년인 하나가 우리를 맞았다.
그가 용병 길드의 지부장인 것 같다.
"무슨 일이야, 한센?"
"헤헤헤~ 지부장님. 오랜만에 실력 있는 이방인이 오셨습니다."
"실력 있는 이방인?"
"네, 팔라딘급입니다. 오러를 아무렇지도 않게 만들어 내시더라고요."
"오러를!!"
한센의 말에 의자에 반쯤 기대어 앉아 있던 지부장이 순간 벌떡 일어났다.
"크하하~ 이방인 친구, 우리 용병 길드에 온 걸 환영하네. 내 이름은 마크라고 해. 프리지아 마을 용병 지부장이지. 우리 지부로 말할 것 같으면 말이야."
마크 지부장은 마치 오래된 지인을 만난 듯, 거침없이 이빨을 털어 댔다.
"내가 초보 용병이었을 때, 일격에 산을 가른다는 용병왕 하멜 님이 개선식을 하는 장면을 먼발치에서 봤는데 말이야. 여자들이 그냥 속옷을 막 벗어 던지는데 말이야. 으아아아아~."
그래서 뭐, 언제까지 지 자랑을 들어야 할까?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다.
"지부장님, 이제 그만 말씀하시고 본론이나 말해 주세요."
점점 굳어 가는 내 표정을 봤는지 용병 한센이 나섰다.
"어? 험험. 내가 말이 좀 많았나?"
"네. 완전!"
"흠흠흠. 내가 실례했군. 오랜만에 옛 기억이 떠올라서 실수했네. 하하하! 자! 그럼 이제부터 본론을 말해 볼까?"
그의 설명에 따르면 용병은 이렇게 등급을 나눈다고 한다.
-F급 : 초보 용병(목패)
-D급 : 숙련 용병(철패) : 소드 유저
-C급 : 하급 용병(동패) : 소드 익스퍼트 하급(팔라딘 하급)
-B급 : 중급 용병(은패) : 소드 익스퍼트 중급(팔라딘 중급)
-A급 : 상급 용병(금패) : 소드 익스퍼트 상급(팔라딘 상급)
-AA, AAA급 : 최상급 용병패(백금) :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팔라딘 최상급)
-S급 : 마스터 용병(미스릴) : 마스터
-SS급 : ???
마크 지부장이 C급 용병패를 꺼내 보였다.
"일단 자네에게 줄 수 있는 등급은 C급이네. 사실 소드 익스퍼트 경지에 오른 팔라딘이라면 B급 용병패를 줘야 하지만 자네가 길드의 의뢰를 수행한 경력이 없어서 지금은 불가능하네."
참고로 마크 지부장 역시 B급 용병이라고 했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통상 B급 용병이 되면 공식적으로 용병대를 조직할 수 있고 최상급 용병이라 불리는 A급 용병이 되면 용병단을 창설할 수 있다고 했다.
"자네도 이방인이니 잘 알겠군. 광휘의 기사라 불리는 조나단 케네디, 붉은 머리 마법사 메리 엘리자베스 그리고 광전사 하인리히 슐츠를 말이야. 근데 나는 개인적으로 바바리안 콜이나 정주휘 단장 같은 분이 좋아. 왜냐고? 이분들은 우리와 같은 용병이잖아. 아직 한 번도 뵌 적이 없지만 큰 관점에서 보면 우린 같은 식구라는 말이지. 같! 은! 식! 구!"
그의 입에서 익숙한 이름들이 흘러나왔다.
지구를 구한 영웅들은 이미 스타게이트를 통해 지구와 아틀란티스 대륙을 오가며 활발한 활동을 영위하고 있었다.
"B급 용병패를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의뢰를 수행하면 되네."
"제가 수행할 만한 의뢰가 있을까요?"
"당연히 있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열 개만 해 주게. 그럼 내 권한으로 B급 용병패를 마련해 주겠네. 어떤가?"
"일단 길드에 있는 의뢰서부터 보죠."
"그럼. 당연히 그래야지."
마크 지부장은 프리지아 마을에 들어온 의뢰서를 꺼내 활짝 펼쳐 보였다.
1. 잡화상점 주인 니만의 의뢰 : 잡화 100개 판매하기
2. 대장장이 크레이의 의뢰 : 철광석 50개 구해 오기
3. 주점 주인 폴락의 의뢰 : 오크통을 100개 옮기기
4. 토시의 의뢰 : 토시가 잃어버린 고양이 찾아 주기
5. 주점 주인 폴락의 의뢰 : 창고에 쥐가 나타났다. 쥐를 잡아 줘.
....
....
....
13. 치안대장 호가든의 고민 : 치안대장 호가든이 고민에 빠졌다. 그를 만나 보자.
14. 남작가의 의뢰 : 몬스터 소탕(각종 몬스터 500마리)
슬쩍하고 봤는데, 대부분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의뢰로 보인다.
물론 13번 <치안대장 호가든>의 고민과 같은, 눈이 가는 의뢰도 있었지만 말이다.
나는 의뢰서를 '쫙' 하고 찢어 품에 넣었다.
"1번부터 14번까지, 제가 모두 하죠."
"정말인가?"
"네."
소싯적 수많은 RPG 게임을 경험해 본 바에 의하면 이렇게 한꺼번에 의뢰를 수행하는 것이 좋다. 의뢰를 수행하다 보면 꼭 중복되는 의뢰가 있기 때문이다.
"아주 화끈하고만. 상남자야, 상남자! 내가 지금까지 수많은 이방인을 겪어 봤지만 자네만큼 화끈한 사람은 처음일세. 이 마크 진정 감동했네."
"하하하! 감동까지야."
"한번 진하게 안아 줘도 되겠나?"
"그건 격렬하게 사양하겠습니다. 전 여자가 좋거든요."
"캬캬캬! 농담일세. 나도 여자가 좋네. 그것도 아주 말이야."
마크 지부장은 길드가 떠나가라 웃음을 내질렀다.
"자! 우선 이것부터 받게. C급 용병패네."
"감사합니다. 곧 다시 뵙도록 하죠."
"좋아. 그럼 행운을 빌겠네."
나는 마크 지부장이 건네는 C급 용병패를 품에 넣고 용병 길드에서 나왔다.
마을 지리도 익힐 겸,
일단 이곳에서 해결할 수 있는 자질구레한 의뢰부터 처리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사냥이 아닌 일종의 심부름 같은 의뢰다.
-[띠링, 토레스의 음식 배달 의뢰를 완수했습니다. 소량의 경험치를 얻습니다.]
-[띠링, 야곱의 청소 의뢰를 완수했습니다. 소량의 경험치를 얻습니다.]
-[띠링, 그리스만의 의뢰를 완수했습니다. 소량의 경험치를 얻습니다. 명성 10이 오릅니다.]
의뢰를 완수했다는 시스템의 음성과 함께 소량의 경험치와 명성이 올랐다.
내가 예상대로 시스템과 의뢰는 상호 간에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문득 어쩌면 시스템이 신과 같은 존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직까진 어떠한 증명도 할 수 없다.
'뭐 차차 알게 되겠지.'
참고로 의뢰를 통해 이곳에서 사용할 수 있는 화폐도 얻었다.
1실버 30쿠퍼다.
100쿠퍼는 1실버, 10실버는 1골드, 100골드는 백금 주화 1개와 같다.
일반적으로 평민 4인 가족의 한 달 생활비가 10골드라고 하니 심부름값에 불과한 의뢰비를 얻은 것 같다.
뭐! 난이도가 높아지면 의뢰비 역시 상승하겠지?
나름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다음 의뢰를 수행하기 위해 이동했다.
마을 밖에 나갈 생각이었기에 치안대장 호가든을 찾았다.
"못 보던 얼굴인데, 용병 길드에서 왔다고?"
그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네, C급 용병 청운이라고 합니다."
"C급?!"
C급 용병이란 말에 치안대장 호가든이 반가운 기색을 보였다.
"안 그래도 소식이 없어 궁금하던 차였는데 C급 용병을 보내 주다니, 마트 그 친구가 신경을 써 준 모양이군. 좋아. 아주 잘 왔네."
"고민이 있다고 들었는데, 의뢰 내용이 정확히 뭔가요?"
호가든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얼마 전 마을 외곽에서 큰 지진이 일어났는데 그 여파로 전에 없던 동굴이 나타났다네. 원칙대로라면 우리가 조사를 해야 하는데, 추수철이라 인력이 부족한 점이 문제인거지."
"동굴이 깊나요?"
"자세히는 모르겠네. 초입까지 들어가 봤는데 미로처럼 꼬여 있어서 금방 나왔거든. 그러니 자네가 동굴에 들어가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알려 주게. 그게 이번 의뢰의 내용이야. 어떤가?"
이때, 시스템의 음성이 들려왔다.
-[띠링, 치안대장 호가든의 고민이 완료되었습니다. 소량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의뢰가 갱신되었습니다. 수상한 동굴을 조사해라.]
'호오?'
의뢰가 갱신되었다.
게임으로 치면 일종의 연계 퀘스트가 뜬 것과 같았다.
뭔가 단순한 의뢰가 아닐 것 같다는 강한 촉이 왔다.
"알겠습니다. 받아들이죠."
"오오! 고맙네."
내가 자신감을 드러내며 당당하게 말하자 호가든 대장이 기뻐했다.
"C급 용병이면 믿을 수 있지. 잘 부탁하네."
"네, 저만 믿으십시오."
내가 누구던가!
과거 미로처럼 엮인 F-7지하수로 게이트를 내 집처럼 들락날락했던 사람이다.
"준비가 끝나면 치안대로 찾아오게. 길잡이 병사를 붙여 주겠네."
"감사합니다."
치안대에서 나오자마자 잡화점에 들러 필요한 물건을 구입했다.
채찍, 횃불, 밧줄 등과 같은 물품들이다.
마치 인디아나 존스가 된 기분이었다.
제41화
41화 고대의 석판
내가 안내된 곳은 도시 외곽의, 그것도 관도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깊은 산속이었다.
"여기요."
동굴의 입구는 성인 두세 명이 한 번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동료들은 어디에 있소?"
치안대 병사 가츠돈이 내게 물었다.
"저 혼잡니다."
"엥? 동굴 내부는 미로처럼 되어 있고 몬스터를 봤다는 사냥꾼의 신고가 있었는데 정말 혼자 들어갈 생각이오?"
"네."
"용병들이란. 쩝!"
"...."
가츠돈은 못마땅한 눈길로 나를 한번 훑어보더니 자세를 돌렸다.
"입구까지 안내했으니 내 할 일은 끝난 것 같은데, 그럼 행운을 비오."
"감사합니다."
"그럼 수고하쇼."
길잡이 역할을 한 가츠돈이 사라지자 나는 동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럼 조사를 시작해 볼까?"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동굴 안은 무척 어두컴컴했다.
입구부터 왠지 귀기까지 감도는 것이 어지간히 담이 큰 자라도 혼자서는 들어갈 수 없어 보였다.
'이러니까 의뢰를 했겠지.'
나는 잡화점에서 구입한 횃불을 배낭에서 꺼내 안으로 들어갔다.
시각과 청각 그리고 후각을 열어 동굴을 살폈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오! 생각보다 좋은데?'
태허무극심법의 기감을 펼치자마자 나를 중심으로 반경 10미터까지 그 효과가 나타났다. 마치 적외선 레이더를 켠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나는 일종의 치트 키가 생긴 덕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손쉽게 동굴을 탐색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이동했을 무렵,
뭔가 이질적인 것이 레이더에 느껴졌다.
'뭔가가 다가오고 있다.'
십중팔구 몬스터일 것이 분명했다.
나는 느긋한 표정으로 놈을 기다렸고 곧 곡괭이를 쥔 코볼트 무리들이 나타났다.
그나마 위협적으로 보이는 것은 곡괭이뿐?
"킁킁! 이게 무슨 냄새야."
"인간이다. 야들야들한 고기."
놈들은 나를 맛있는 먹잇감으로 판단했는지 침까지 질질 흘리며 빠른 속도로 달려들었다.
"커헝!"
국어사전에 보면 '함부로 때리고 치다'라는 뜻의 '개 패듯'이 있다.
나는 녀석들을 개 패듯 후려 갈겨 주었다.
"깨갱!"
"깨개갱!"
"깽!"
"깨갱!"
아틀란티스 대륙에 복날이 도래했다.
개들은, 아니, 코볼트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에 누웠다.
-[철광석을 얻었습니다.]
-[주괴를 얻었습니다. ×2]
-[화강석을 얻었습니다.]
-[철광석을 얻었습니다. ×5]
-[띠링, 철광석을 모두 모았습니다. 의뢰를 완수했습니다.]
오예~
덕분에 대장장이 크레이의 의뢰를 완수했다는 메시지가 들려왔다.
철광석 50개를 모두 모은 것이다.
동굴에 들어온 것이 일석이조, 어쩌면 일석삼조나 일석사조가 될 것 같다.
"못 먹어도 고!"
나는 동굴 내부로 계속 들어갔다.
가끔 함정을 만났지만 가진 능력이 워낙 출중한 덕에 무리 없이 중심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정작 중심부에 도착했을 무렵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번데기 같은 고치 수백 개가 천장에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
그리고 들려오는 불길한 소리.
맞은편 저 멀리에서 하나의 점이 나타났다.
만약 기감을 펼친 상황이 아니었다면 결코 알아채지 못했을 만큼 은밀한 기척이었다.
나는 안력을 집중했다.
조금씩 커지는 점! 그것은 매우 빠른 속도로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는데 잠시 후 조금씩 커지던 점이 형체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거미?!"
그것도 한 마리가 아니었다.
끊임없이 줄을 지어 하나의 점처럼 보였던 것이다,
거미 지옥. 이곳은 거미 지옥이었다.
나는 무극 대검을 뽑아 들며 손을 치켜들었다.
시간을 끄느니 속전속결이 좋겠다는 판단에 힘을 집중하여 거미들에게 큰 타격을 입히려는 것이었다.
시퍼런 빛과 함께 무극에서 수십 개의 검광이 폭발하듯 쏘아져 나가 거미들을 난도질했다.
-슈슈슈슉!
검광이 번쩍일 때마다 물결이 갈라지는 모습과 함께 연쇄 폭발이 일어났다.
펑! 펑! 퍼엉!
마치 춤을 추듯 부드러운 몸.
무극이 지나간 곳에는 거미의 사체만 남았다.
그리고 마지막 한 마리가 남았다.
바로 동굴의 주인인 여왕 거미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녀석은 다른 거미보다 몸집이 세 배 이상 컸는데 다짜고짜 나를 향해 독액을 내뱉었다.
-푸쉬시식!
대검의 두꺼운 검면에 연기가 솟구친다.
'엄청난 독이구나.'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재수 없게 한 방울이라도 튀었다면 살이 그대로 녹아 버렸을 것이다.
"쐐애액! 칙! 치익!"
여왕 거미가 또다시 맹독을 내뿜는 순간 무극 대검을 빠르게 회전시켰다.
붕붕붕...붕붕!
대검의 회전력에 의해 여왕 거미의 독액이 반대편으로 날아가자 재빨리 왼발을 내밀며 미끄러지듯 여왕 거미에게 접근했다.
기회다!
"태극검! 비산하는 검기!"
폭발하듯 뻗어 나간 푸른 검기가 여왕 거미의 복부를 가르자 녹색 핏물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여덟 개의 다리 역시 사선으로 쩌억 갈라지며 몸통과 분리되었다.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여왕 거미를 처리했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는 동굴 천장에 매달린 고치까지 모조리 정리한 후, 상태 창을 열었다.
<상태 창>
이름 : 최선우
레벨 : 112
고유 특성 : 분신(Unique) *사용 불가
칭호 : 지혜로운 자, 오크 살육자
생명력 : 2,500/2,500 마력 : 1,500/1,500
힘 : 220 체력 : 250 민첩 : 220
지혜 : 100 지능 : 105 행운 : 10 매력 : 20
명성 : 10 악명 : 0
보너스 스탯 : 145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부르는 느낌이다.
나는 주변에 널려 있는 전리품을 수거했다.
-[아이템 여왕 거미의 심장을 얻었습니다.]
-[C급 마석을 획득했습니다.]
-[아이템 여왕 거미의 독주머니를 획득했습니다.]
-[C급 마석을 획득했습니다.]
-[최하급 거미줄을 얻었습니다.]
이때 여왕 거미 사체 아래 이상하게 생긴 돌덩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저게 뭐지?'
아이템은 아닌 것 같은데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보인다.
난 천천히 다가가 돌덩이를 살펴보았다.
[고대의 부서진 석판 No. 7]
등급 : 신화
내용 : 아틀란티스 대륙의 비밀이 숨겨져 있는 석판
특징 : 부서진 조각을 찾아 석판을 완성해라.
석판을 확인하는 순간,
마치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환상이 펼쳐졌다.
-...#@@*... 과거... 평화로운....
...##$**...*$#... 마족... #@*&**@***....
...전쟁... **@#$*%@... 차원....
...게이트....
....
어째서... &***@...@#@*...못하는가!
....
....
...##$... 시작이다. 그러므로....
...마족....
...*@#...***...***... 남기노라.
하찮아 보이는 돌덩이가 신화 등급의 석판이란다.
더욱이 그 안에 적혀 있는 내용은 심상치가 않았다.
뭔가 이 세계의 감춰진 비밀을 엿본 것 같았다.
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서둘러 아공간에 석판을 넣었다.
넘버링이 있단 말이지?
이걸 다 모으면 어떻게 될까?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었다.
어둠이 내려오기 시작했을 무렵 나는 프리지아 마을에 돌아왔다.
누군가를 만나기엔 시간이 늦었으므로 처음부터 발걸음을 여관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험악한 인상의 두 사내가 거리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딱 봐도 건달, 양아치, 깡패였다.
두 사람의 등장은 그렇지 않아도 어둡던 거리의 분위기를 더욱 어둡게 만들고 있었다.
"쌍칼 형제야."
"저 미친놈들이 나왔군. 또 누가 걸려들지. 쯧쯧쯧!"
"쉿! 목소리 낮춰. 그러다 들어."
거리에서 노점을 꾸리던 일부 상인들이 몸을 숨길 무렵, 우연인지 필연인지 날 바라보는 묘한 눈길이 느껴졌다.
쌍칼 형제라 불리는 두 남자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무슨 일이지?"
둘 중에 가죽옷을 입은 사내가 불문곡직하고 어깨로 몸을 부딪쳐 왔다.
퍽.
몸에 힘을 주지 않은 상태였지만 놈은 마치 자해 공갈단처럼 밀쳐진 듯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더니 허리께의 검을 뽑아 들고 고함을 질렀다.
"이놈! 감히 날 밀치다니...."
"형! 괜찮아?"
"다행히 몸은 괜찮아, 하지만 이렇게 모욕을 받은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이봐, 너! 검을 뽑아라."
잘 만들어진 대본처럼 두 녀석이 북 치고 장구를 친다.
"형! 형! 참아. 그러다 또 한 놈 병신 만들라. 얼마 전에도 한 놈 불구가 됐잖아."
동생으로 보이는 놈이 날 힐끔 쳐다보며 바람을 잡았다.
"어이, 이봐. 당신."
"...."
"사람을 쳤으면 사과를 해야지. 그리고 사죄의 표시도 좀 하고 말이야."
놈은 제법 서슬이 퍼렇게 으르렁거렸다.
물론 거기에는 겁을 주며 돈을 내놓게 만들 심산이 다분했지만 말이다.
풍기는 기세를 보아 제법 검을 잡아 본 듯 보였지만 삼류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내 눈에는 영락없는 풋내기에 불과했다.
"풋!"
하도 기가 막혀 나도 모르게 실소가 튀어나왔다.
"웃어? 지금 웃은 거야?"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오네."
"이놈! 당장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빌지 않는다면 넌 오늘 이곳에서 살아날 수 없다."
칼을 빼어 들고 기세 좋게 고함을 질렀지만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저런 양아치 놈들에게 특효약은 오로지 몽둥이찜질이다.
"시베리아 벌판에서 얼어 죽을 놈들 같으니, 옘병에 땀병, 속병, 똥병, 갈아 버릴 십장생들아."
"저, 저게 무슨 소리지?"
"왠지... 욕 같은데요. 형님!"
예상치 못한 욕설 탓일까?
놈들은 찜찜한 표정이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물러설 수 없었기에 곧 칼과 도끼를 손에 쥐었다.
"결투다. 이것은 서로 합의하에 이루어지는 결투이므로 어느 한쪽이 죽더라도 처벌받지 않는다. 너도 알고 있겠지?"
"그럼 알지."
난 목을 좌우로 한 번씩 갸웃거리며 등 뒤에 멘 무극 대검을 꺼내 들었다.
우리 주변에는 이미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럼 이제 시...."
공격을 가하려던 사내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그것은 무극 대검에서 흘러나온 시리도록 푸른 빛 무리를 보고 난 후의 일이었다.
"오, 오러?"
"흐걱! 파, 팔라딘."
놈들은 말을 마치지도 못하고 다리를 달달 떨기 시작했다.
150cm 대검을 등에 멨지만 그저 장식용으로 차고 다니는 허접한 용병으로 착각한 모양이다.
"파, 팔라딘이셨나요?"
"그게 중요해?"
"그, 그건 아니지만...."
"어? 저게 뭐지?"
"...?"
쌍칼 형제가 놀란 표정을 짓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더니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 살려."
"저리 비켜. 나 죽는다."
그사이 놈들은 비명을 지르며 잽싸게 도망치고 있었다.
제42화
42화 영주의 의뢰
와! 저 자식들 보소!
꽁지가 빠지게 도망치는 모습에 허탈했지만 솔직히 말해 웃겼다.
마음만 먹으면 단번에 날아가 놈들의 멱을 딸 수 있었지만 내가 무슨 살인귀도 아니고 저것도 녀석들의 운이라면 운이다.
나는 무극 대검에서 슬며시 오러를 풀며 주위를 향해 말했다.
"근처에 숙식이 가능한 여관이 있나요?"
이미 시간이 꽤 늦어 뭔가 일을 보기엔 늦었다.
차라리 내일 아침부터 일을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가급적이면 음식이 맛있었으면 좋겠는데~."
"달빛이 최고예요."
한 10살 되었을까?
허름한 옷을 입은 소년이 자신 있다는 듯 외쳤다.
"달빛?"
"네. 사거리에서 왼쪽으로 가면 자그만 광장이 나오는데 그 광장 분수대 쪽으로 한 30미터 쭉 걸어가면 [달빛이 머무는 곳]이 있어요."
"그렇구나. 혹시 네가 길잡이를 해 줄 수 있을까? 물론 수고비를 줄게."
"무, 물론이죠."
소년은 지체 없이 앞장서며 발길을 인도했다.
잠시 후,
나는 여관 앞에서 은화 한 닢을 꺼내 소년에게 주었다.
"감사합니다, 기사님."
"하하하. 난 기사가 아니고 떠돌이 용병이란다. 수고했고 이만 가 보렴."
"네. 감사합니다, 용병님."
나는 곧 [달빛이 머무는 곳]에 들어갔다.
무척 젊어 보이는 점원이 나를 발견하곤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숙식이 가능할까?"
"물론이죠. 단기신가요 아니면 장기신가요?"
"오늘 하루. 요리는 뭐가 맛있지?"
"슈바인 학센이 최고입니다요."
"슈바인 학센?"
"네, 돼지 발목을 구운 음식인데 감자와 절인 배추가 함께 나옵니다. 맛이 아주 그만이죠."
"오! 맛있겠군. 맥주도 되나?"
"물론입니다요."
"좋아. 그럼 그렇게 하지. 준비되면 방으로 가져다주게. 모두 얼만가?"
"숙박비 포함해서 총 15실버입니다, 손님~."
"여기 있네."
돈을 내밀자 점원이 기다렸다는 듯 열쇠를 넘겨주었다.
잠시 후,
식사가 배달되었다.
나는 먼저 맥주를 한 모금 시원하게 들이켰다.
꿀꺽, 꿀꺽!
식도를 넘어가는 그 짜릿함에 근육이 탁 하고 풀리는 느낌이다.
자! 이번엔 슈바인 학센을 시식해 볼까?
향신료 냄새가 약간 강했지만 육질이 부드러워 입맛에 맞았다.
돼지 족에 맥주, 여기에 이국적인 풍경이 더해지니 나름 중세 유럽으로 여행을 온 기분이 들었다.
침대에 누워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두 개의 달과 함께 하늘을 수놓은 저 수많은 별들이 쏟아질 것만 같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왠지 오늘밤은 꿀잠을 잘 것 같다.
"...Z...zz...z."
그리고 내가 잠든 사이,
어느덧 분신 스킬의 복구율이 10%를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9.881678210%....]
-[9.881678212%]
-[...9.881678212%....]
-[...9.884156039%]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지저귀는 새소리에 눈을 떴다.
나는 수프와 빵으로 아침을 간단히 해결하고 여관을 나섰다.
"아니, 자넨!"
치안대 건물 입구에서 낯익은 얼굴을 만났다.
그는 날 안내했던 병사 가츠돈이었다.
"그렇군. 역시 돌아온 건가? 잘 생각했네. 혼자서는 무리지."
그는 내가 의뢰를 완수하지 않고 도중에 돌아왔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의뢰를 완수했습니다."
"그, 그게 정말인가?"
가츠돈이 놀란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자네, 거짓말을 하는 거라면 크게 경을 칠 거야."
"운이 좋았습니다. 지금 바로 호가든 대장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이리로 따라...오게."
몸을 돌린 그를 따라 휘적휘적 내실로 들어갔다.
-덜컥.
나는 문이 열리자 호가든 치안대장을 만날 수 있었다.
내 얼굴을 본 그의 눈빛에 탐탁지 않은 표정이 떠올랐지만 여왕 거미의 거미줄을 내놓자 그의 반응이 돌변했다.
"이건 거미 여왕의 거미줄이군."
그가 눈을 불쑥 튀어나올 정도로 크게 뜨며 놀랐다.
"네. 동굴 내부에 커다란 공동이 있었습니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동굴 전체가 놈들의 소굴이 될 뻔했습니다. 다행히 알이 부화하기 전 일을 끝낼 수 있었죠."
"...!!"
나는 전투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며 내가 그린 동굴 내부 지도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사실 수백 마리 이상의 거미를 도륙해 버렸지만 괜한 오해를 사기 싫어 그저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
호가든 치안대장은 설명을 듣는 내내 눈을 빛내며 나를 주시했다.
"청운이라고 했나? 역시 B급 용병답군. 실력도 있고 일 처리도 깔끔했어."
"B, B급 용병요?"
내가 B급 용병이라는 말에 옆에 있던 병사 가츠돈이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
난 그를 보고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아직 C급입니다. 그리고 운이 좋았죠."
"허허. 이미 마크 지부장에게 다 들었네. 겸손하긴!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까 말이야. 그 운이라는 녀석도 알고 보면 다 실력이더라고. 그러니 겸손해할 필요 없네. 자! 여기서 잔금이네."
"감사합니다."
치안대 문을 열고 나가려는 순간,
발걸음을 붙잡는 호가든 대장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이보게, 청운."
"네."
"자네에게 추가로 의뢰할 게 있을 것 같은데, 언제까지 프리지아 마을에 있을 예정인가?"
"오늘 오후에 떠날 생각입니다."
"오늘 오후에?"
"네. 용병 길드에 들른 후, 바로 떠날 예정입니다만."
"미안하네만 마을을 떠나기 전에 다시 한번 볼 수 있을까?"
"...."
분위기를 보니 뭔가 의뢰할 게 있는 것 같다.
"그렇게 하죠."
"좋아. 그럼 이따 보자고."
나는 그에게 인사를 하며 치안대를 나왔다.
그리고 용병 길드에 들르기 전, 프리지아 마을에 하나뿐인 잡화상점을 먼저 찾았다.
-딸랑. 딸랑.
문이 열리며 맑은 종소리가 울린다.
진열대에 온갖 잡다한 물건들이 걸려 있는 가운데 푸근한 인상의 중년인이 모습을 나타냈다.
"어서 오세요. 구입하러 오셨나요, 아니면 판매하러 오셨나요?"
"판매도 하고 매입도 할 생각입니다만."
나는 지구에서 판매할 몇몇 아이템을 제외하고 이번 사냥을 통해 얻은 아이템을 모두 꺼냈다.
* * *
"호오!"
엔조 테이 남작은 치안대장 호가든의 설명에 탄성을 토해 냈다.
"C급 용병이 홀로 수백 마리의 거미를 사냥했다는 말인가?"
"네, 영주님. 믿기 힘들지만 혼자서 여왕 거미를 잡아 왔습니다."
"엄청난 실력자로군."
"팔라딘이 분명합니다. 용병 길드의 마크 지부장 역시 그의 실력을 보증해 주었고요."
"그럼 중급 용병이란 말이지?"
"네, 영주님."
"아니야. 거미 여왕 소굴을 단독으로 소탕했으니 어쩌면 그 이상의 실력자일지도 몰라."
엔조 남작은 뭔가를 골몰히 생각하듯 눈을 감고 상념에 빠졌다.
그리고 잠시 후,
엔조 남작의 입술이 열렸다.
"그 이방인의 이름이 청운이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남작님."
"오후에 보기로 했지?"
"네, 그렇습니다."
엔조 남작이 은은한 미소를 보였다.
"그가 찾아오면 즉시 내게 데려오게. 어쩌면 큰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어."
"알겠습니다. 충!"
문을 나서는 치안대장을 바라보며 남작은 뜻하지 않은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왔음을 직감했다. 그의 본능이 강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실력자가 분명하다면 결코 그자를 놓쳐서는 안 돼.'
* * *
이와 같은 시각,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용병 길드로 들어갔다.
"하하하! 반가운 사람이 돌아왔군."
마크 지부장은 마치 집 나간 가족이 돌아온 듯 반갑게 맞이했다.
"제가 늦은 건 아닌가요?"
"무슨 소리! 이미 의뢰를 완수했다는 소문을 들었네."
그는 연신 입가에 미소를 띠며 폭풍 같은 칭찬을 토해 냈다.
"용병들이 자네처럼 성실해야 하는데 말이야. 요즘 애들은 근성이 없어, 근성이! 우리 땐 안 그랬는데 말이야."
"네.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용병패를 주시는 거죠?"
"물론이지. 난 약속을 어길 만큼 치사한 사람이 아니라네. 미리 준비를 해 두었지."
마크 지부장이 B급 용병패를 꺼내 보였다.
"B급 용병은 말이야 제국, 왕국, 공국, 성국 등 어디에도 출입이 가능하며 성기사, 소드 익스퍼트, 팔라딘 등 각 나라마다 명칭이 조금씩 다르지만 암튼 준귀족 취급을 받는 기사와 동급의 대우를 받을 수 있다네. 그리고 자네만의 용병대를 조직할 수 있지."
그는 이렇게 한참을 시끄럽게 떠들고 나서야 마법 처리가 된 은빛 용병패를 건네주었다.
"이제 의뢰도 없는데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가? 당분간 마을에 머물 생각인가?"
"오후에 호가든 대장을 만나기로 했습니다."
"호가든 대장을?"
"네. 개인적으로 의뢰가 있는 것 같더군요."
넌지시 말하자 마크 지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런가 보군. 종종 그런 일이 있지. 만약 도시 밖으로 나갈 생각이라면 호가든 대장의 의뢰를 받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물론 길드를 통한 의뢰가 아니니 의뢰금도 많이 받을 수 있고 말이야. 단 귀족이 연관되어 있을 수 있으니 항상 조심하게."
"네. 알겠습니다."
나는 마크 지부장의 방에서 나온 후,
호가든 대장을 만나기 위해 영주성으로 향했다.
"케이먼 상단에서 가져온 작설차입니다."
"최고 가격 매입, 최저 가격 판매! 파티마의 상점으로 오세요."
"툴렌 지역으로 갑니다. D급 용병 필요하신 분, 연락 주세요."
내성에 가까워질수록 길목마다 인파가 넘쳤고 그에 따라 생생한 활기마저 느껴졌다.
"거기, 누구요?"
"호가든 치안대장과 약속이 있어서 왔소."
나는 가슴에서 용병패를 꺼내 들어 신분을 확인시켜 주었다.
은빛 용병패가 햇빛에 반사되어 번쩍인다.
"B급 용병이시군요."
용병패를 확인한 병사가 급 공손해진 말투로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몇 분이 지나지 않아 호가든 대장이 직접 나와 반갑게 맞이했다.
"일은 잘 봤나?"
"네. 덕분에요."
"자네의 활약을 영주님께 말씀드렸더니 아주 좋아하셨네. 자네를 보고 직접 치하하겠다고 하시더군."
"남작님이 직접요?"
"그래."
신분 사회인 이곳에서 평민이 귀족과 독대하는 것은 무척이나 어렵다고 들었는데 운이 좋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그만큼 중요한 의뢰가 있는 걸까!
아무래도 후자겠지?
각설하고 나는 호가든 대장의 안내에 따라 남작이 머물고 있는 영주관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인가?"
마침 집무실에서 나오던 중년 기사가 우리를 발견하고 물었다.
그는 판금 갑옷을 착용하고 있었는데 한눈에 봐도 그가 기사임을 알 수 있었다.
"제임스 기사님, 치안대장 호가든입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나야 늘 같지."
제임스 기사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저자는 누구지? 처음 보는 얼굴 같은데?"
"B급 용병 청운입니다."
"B급 용병?"
B급 용병이라는 말에 기사 제임스의 눈빛에 이채가 서렸다.
"네. 엔조 테이 남작님께서 직접 부르셨습니다."
"그...렇군. 여기서 잠시 기다리게. 내가 영주님께 알리겠네."
"그렇게 하십시오."
그는 영주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모습을 나타내며 우리에게 들어오라 했다.
제43화
43화 마교 출현
아침부터 귀찮은 불청객이 찾아왔다.
"저기요, 정말 무당의 제자가 맞으세요?"
"월정이란 도명이 진짜예요?"
"혹시 반로환동을 하셨나요?"
동그란 눈망울로 고개를 갸웃하며 연신 질문을 던지는 모습이 방송에서 보던 아이윤과 똑같다.
내심 박장대소하며 크게 웃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그냥 내가 꾹 하고 참는 수밖에.
"대답해 주시면 안 돼요?"
청운이라는 도명을 밝히면 해결될 문제지만 그걸 지금 밝히고 싶지 않았다.
지금 상황이 너무 재밌었기 때문이다.
"내가 꼭 답해야 하는 건가?"
"그, 그건 아니지만."
"그럼 그냥 선배님이라고 불러."
"그래도 돼요?"
내 대답에 매봉 이지은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반문했다.
"어차피 같은 문파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야?"
사실 오빠라 부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건 내가 생각해 봐도 무리였다.
"그럼 저도 선배님이라 불러도 될까요?"
이때 화산검룡 이정진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렇게 해."
나는 무심한 듯 시크하게 답했다.
그가 선배님이라 칭하면 그녀 역시 자연스럽게 호칭을 정리할 테니까.
"그건 그렇고 뭐 깨달음은 좀 얻었나?"
"네, 서... 선배님."
"축하해."
"송구하지만 괜찮으시다면 보여... 드려도 될까요?"
"와이 낫(Why not)!"
"와이 낫요?"
"물론이란 말이야. 그러니까 아주 멀리... 어, 어... 그래. 서역의 언어지."
"아! 그렇군요. 와이 낫, 와이 낫... 와이 낫."
이지은이 뭔가 중요한 것을 알았다는 듯, 매우 흥분해 와이 낫을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무심한 표정이 순간 깨질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는 데 성공했다.
"저, 저쪽에서 한번 펼쳐 봐."
나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으로 공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여기서 지켜볼게."
나는 무심한 표정을 유지한 채 편한 자세를 취했다.
그녀는 나를 향해 간단한 예를 취한 후 화산의 이십사수매화검법을 그려 내기 시작했다.
"매화검화."
"매화노방."
"매화토염."
"매화분분."
하얗고 때론 붉기도 한 매화 한 송이가 허공에 나타났다.
매화는 검술의 변화에 순응해 꽃망울을 활짝 열었다.
그런데 전과 다른 것이 환검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그 불규칙성이 도드라지게 나타났다는 점이다.
특히 매화분분을 펼쳤을 땐 매화 가루가 사뭇 위력적으로 사방에 흩날렸다.
잠시 후,
매화이십사수가 끝이 나자 주변에 휘날리던 매화가 사라졌다.
"멋지네."
단순했지만 진심을 담아 그녀의 성장을 축하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모두 선배님 덕이에요."
"사매! 정말 축하해."
화산검룡 이정진 역시 그의 사촌 동생이기도 한 그녀의 성장에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그런데 자네들, 식사는 했는가?"
"아뇨."
"저, 저도 아직."
아침 일찍부터 찾아왔으니 그럴 줄 알았다.
"그럼 함께 밥이나 먹을까?"
나는 저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자연스레 부엌으로 이동했다.
자고로 친분을 나누려면 함께 식사를 하거나 술을 마시는 것만큼 좋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화산파 제자니까?
오늘의 메뉴는 야채볶음밥이다.
먼저 커다란 팬에 기름을 두르고....
땡땡땡땡!!
이런! 아무래도 식사는 다음으로 미뤄야겠다.
초대하지 않은 불청객이 무당파에 찾아왔다는 불길한 종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저게 무슨 소리죠?"
"식사는... 다음으로 미뤄야겠군."
순간 나는 경공을 펼쳐 무당파로 날아갔다.
"선배님, 선배님 기다려요."
화산검룡 이정진과 매봉 이지은 역시 경공을 전개하여 쫓아왔다.
* * *
"클클클~ 냄새나는 말코 도사 놈아, 잘 있었냐?"
"백골귀마 오청양?"
"그래, 나다. 오랜만이지."
그 순간 섬뜩한 기운이 풍겨 오기 시작했다.
시커먼 장포를 두른 거대한 남성을 선두로 검은색 갑주를 걸친 무사들이 속속히 나타났기 때문이다.
"흑풍대다. 흑풍대가 왔어."
저들의 정식 명칭은 천황흑풍대, 마교가 자랑하는 삼대 무력 부대 중 하나로 그 인원만 물경 오백에 이른다.
순간 청혜 도장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청혜 말코, 오랜만이네. 정확히는 8년 만인가?"
"그렇군."
"청명, 청수는 어디에 있지?"
그는 오른팔을 들어 주변을 확인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마치 약을 올리는 행동과 비슷하다.
"성동격서인가?"
"후후후! 역시 말코 도사답지 않게 눈치가 빠르단 말이야. 하지만 이제 와서 어떻게 하겠어? 속은 놈이 바보지. 안 그런가?"
백골귀마 오청양은 득의만만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갔다.
"모두 마뇌의 계획이야. 덕분에 청명, 청수의 발이 개봉으로 향하게 됐지. 무당의 제자들과 말이야.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사실 그동안 너무 조용했잖아. 이제 다시 움직일 때도 됐지. 북해빙궁이 우리 제안을 거절한 것은 예상치 못했지만 말이야."
그의 시선이 아주 잠깐 북해빙궁 무리에게 향했다가 돌아왔다.
"십만대산의 주인이자 마교의 주인이신 교주님의 말씀을 전하겠다."
다음 순간,
백골귀마 오청양이 품속에서 두루마리를 꺼내 들어 보이자 수백 명에 달하는 마교도들이 모두 무릎을 꿇었다.
청혜 도장은 저들의 기세등등한 모습에 길보다 흉이 많을 것임을 깨달고 안색이 어두워졌다.
"본좌는 (중략)... 쓸데없는 피를 흘리지 않기 위해 무당에게 명예로운 기회를 주고자 한다."
"...!!"
천마의 제안은 간단했다.
봉문이냐, 멸문이냐. 양자택일하라는 것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양측이 비무를 벌여 무당파가 승리하면 마교는 물러갈 것이고 반대로 무당파가 패하면 30년간 봉문을 선언하라는 것이었다.
만약 마교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즉시 전면전을 벌이겠다고 말했다.
"부디 현명하게 판단할 것이라 생각하네."
"지금 우리 무당을 협박하는 것인가?"
"협박이라니, 내가 무슨 시정잡배도 아니고 무슨 말을 그렇게 험악하게 하시나? 제안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전면전을 선택하시게."
백골귀마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히죽거리며 대화를 이어 갔다.
"이대로 전면전을 펼치겠는가?"
"생각...할 시간을 주게."
"오래 주진 못해. 정확히 일각(一刻) 주지."
"...!!"
일각이면 한 시간의 1/4, 곧 15분이다.
한 문파의 존망을 좌지우지하기에 매우 짧은 시간이었지만 선택의 요지는 없었다.
"자리를 마련하라."
"충!"
백골귀마의 명령에 갑주를 입은 무사가 다섯 개의 의자를 가지고 나와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백골귀마를 포함해 다섯 명의 사람이 자연스레 의자에 착석했다.
그들의 면면을 자세히 살펴보면 세 명의 남자와 면사를 착용한 두 명의 여인이었는데 풍기는 기세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
'백골귀마는 마교 서열 20위에 올라 있는 자다. 그렇다면 의자에 앉은 이들 역시 최소한 그와 동급이거나 그보다 높은 고수일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뿐만이 아니었다.
마교가 자랑하는 무력부대인 천황흑풍대가 내뿜고 있는 마기(魔氣) 역시 매우 강렬했다. 청명, 청수 사형을 비롯해 무당의 주요 전력이 빠져나간 상황이다.
만약 양측이 전면전을 펼친다면 무당이 입을 피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외통수다.
외통수에 빠졌다.
저들의 계략에 의해 비무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고약한 상황에 빠져 버렸다.
* * *
내가 도착했을 무렵,
이미 무당을 중심으로 검은색 갑주를 입은 시커먼 놈들이 천라지망을 펼치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아공간에서 마스크를 꺼내 착용하고 무당파의 어린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무당 제자 특유의 도사 복장을 하고 있어서 별다른 주의를 끌지 않은 것 같았다.
"정확히 일각(一刻) 주지."
"...!!"
저게 뭐라고 하는 거지?
말투에서부터 우리 무당을 깔보고 있다는 것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괜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저 노인네가!'
난 화를 참으며 조용히 물었다.
마침 안면이 있는 사대제자가 옆에 자리하고 있었다.
"월정."
"누, 누구세요?"
"나야."
마스크를 살짝 내리자 꼬마 도사 월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청운 태...사...."
"쉿!"
나는 급히 조용히 하라는 눈치를 주며 월정의 입을 막았다.
"저들은 누구지, 대체 무슨 일이야?"
"그게...."
월정의 말문이 막히며 동시에 얼굴이 점점 굳어져 갔다.
어디서 어떻게 무엇부터 설명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월정.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이 여섯 가지 원칙에 따라 천천히 설명해 봐."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요?!"
"그래."
월정에게 육하원칙에 입각해 말하라고 하자 그는 한결 편해진 얼굴로 천천히 그리고 또박또박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얘기해 주었다.
"마교가 조금 전에 우리 무당파에 쳐들어와서 비무를 권했어요. 비무에 응하지 않으면 전면전을 펼쳐 모두 죽이겠다고 협박을 했고요."
"그렇구나. 고마워."
나는 월정의 어깨를 수고했다는 의미로 가볍게 토닥여 준 후, 청혜 사형을 바라보았다. 나는 사형이 어떠한 선택을 하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예상대로 비무가 시작되었다.
"후후후! 현명한 결정이야. 오랜만에 손맛을 볼 수 있겠어. 자! 그럼 누가 먼저 나설까?"
백골귀마 오청양의 외침에 흑색 갑주를 입은 사내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귀마 장로님, 제가 선봉을 맡아도 되겠습니까?"
"오! 흑풍대주. 자네라면 믿고 맡길 수 있지. 자네도 어지간히 심심했나 보군."
"그동안 싸움다운 싸움을 하지 못해서 말입니다. 몸이 근질근질하군요."
"하하하~ 그랬군. 그럼 어디 한번 실컷 놀아 보게나."
"감사합니다."
흑풍대주가 앞으로 나서자 백골귀마 오청양이 자연스레 뒤로 물러났다.
"무당의 영웅들이여! 누가 내게 가르침을 주겠는가?"
흑풍대주가 무당을 향해 크게 외친다.
동시에 그의 몸에서 넘쳐 나는 내력으로 인해 '두두둑' 하는 폭발 소리가 끊임없이 발출됐다.
"헉?!"
"으으음!!"
기세가 보통이 아니다.
과연 마교가 자랑하는 무력부대의 수장다웠다.
"스승님, 허락하신다면 제가 선봉에 서고 싶습니다."
"현양,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네, 스승님."
청혜 사형의 직속제자인 현양 사질이다.
평소 호방한 성격을 자랑하는 현양이 선봉으로 나서자 청혜 사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당의 현양이라 하오."
"천황흑풍대주 막문청이오."
서로를 향해 포권(包拳)을 취한 후,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번개처럼 몸을 날렸고 '펑' 소리와 함께 일장을 교환했다.
"호오, 과연 무당의 이름이 허명이 아니군."
"제가 하고 싶은 말이군요."
흑풍대주가 피식거리며 허리께에서 흑룡쌍도를 꺼내 들자 분위기가 한층 더 무겁게 바뀌었다.
"흑룡쌍도에는 눈이 없으니 조심하시오."
톱니바퀴가 달린 쌍도가 무서운 바람을 일으키며 현양의 머리를 노렸다.
하지만 현양 사질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의 백련검이 하늘을 갈랐다.
-채채챙! 쉭쉭쉭!
병장기가 부딪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손놀림이 빨라졌다.
상대방에게 타격을 주는 것도 아니요, 후퇴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내 눈에는 현양 사질이 점차 밀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사질의 공격 반경이 점점 더 좁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운신법!"
현양 사질의 신형이 구름처럼 일어나 반대편으로 움직였다.
상황의 반전을 꾀하려는 모양이다.
하지만 흑풍대주의 공세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승기를 잡았다는 듯 더욱더 거세게 몰아치기 시작했다.
"흑룡혈삭!"
그리고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흑풍대주의 쌍도에서 살벌한 검기가 수십 개나 튀어나오며 현양 사질을 덮쳤다.
"흑룡진천하!"
콰콰콰콰쾅....
현양 사질은 더 이상 버틸 수 없다. 운이 나쁘면 생명을 잃을 것이다.
판단이 떨어지자 더 이상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었다.
나는 즉시 제운종을 펼쳐 전장을 향해 날아갔다.
제44화
44화 반로환동의 고수
"웬 놈이냐?"
나는 흑풍대주의 질문을 무시하며 현양 사질의 상세부터 살폈다.
-타다닥!
"괜찮은가?"
"사... 사...."
"괜찮아. 아무 말 말게."
혈도를 막아 급한 대로 응급처치를 했지만 아무래도 내장까지 상한 것 같다.
적어도 반년은 요양해야 일상생활이 가능할 것 같았다.
"누구냐고 물었다."
"보면 몰라? 무당의 제자다."
"이런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을 봤나! 감히 비무 중에 난입하다니. 무례하구나."
흑풍대주가 나를 향해 혀를 끌끌 차며 크게 외쳤다.
"당신 말처럼 비무에 난입한 건 사과하오. 허나 승패가 이미 정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공격을 이어 나간 당신의 손속 역시 과했소."
"뭐라고?"
흑풍대주가 적이 당황하는 눈치다.
이때 백골귀마 오청양이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놈이 승패를 판단하는 눈이 제법이구나. 이보게, 흑풍대주. 저 녀석의 말처럼 승패가 결정되었으니 자네가 참게."
"흐음!"
흑풍대주는 못마땅한 기색을 보였으나 계속 버티고 있으면 속이 좁은 사람이 된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네 녀석도 이만 물러나라."
"미안하지만 그럴 생각이 없다."
"뭣이?"
"무당이 내 집인데 집을 놔두고 어디로 가란 말인가?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조금 전에 나보고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라고 했나?"
"그런데?"
"당신! 바보로군."
"뭐?"
"대가리에 피가 마르면 죽어. 당신은 그것도 모르나?"
"헐! 이런 X친놈이!"
-웅성웅성.
백골귀마의 안색이 시뻘게졌다.
"이봐, 청혜. 이 어린 녀석이 지금 대체 뭐라고 나불대는 건가? 무당은 존장에 대한 예우도 가르치지 않는 것인가?"
청혜 사형은 지금의 사태를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었고 내가 누군지 단번에 파악하고 있었다.
나는 사형에게 나서지 말라는 눈치를 주며 백골귀마를 향해 외쳤다.
"어린 녀석이라니, 내 나이가 몇인지 당신이 알아?"
"네 이놈!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풉! 어떻게 죽여 줄 건데? 자신 있으면 나랑 한판 붙자. 어때? 아니! 그런 비리비리한 몸뚱이로 상대나 할 수 있을까?"
웃는 낯짝으로 히죽이며 그를 도발하자 그의 얼굴이 더할 나위 없을 정도로 참혹하게 구겨졌다. 하지만 다음 순간 모두가 깜짝 놀랄 일이 일어났다.
쿠웅!
그저 한 걸음 발을 내려놓았을 뿐인데 놀라울 정도로 청아하고 큰 소리가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지, 진각(震脚)!"
백골귀마의 표정이 급변했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기 때문이다.
몇몇은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입을 벌린 채 충격에 휩싸인 모습이었다.
-[사제, 그는 절정의 고수야.]
청혜 사형의 전음이 들려왔다.
-[불초한 사제가 얼마 전 자그만 성취를 얻었습니다.]
-[그렇군. 그럼 부탁하겠네.]
-[이유극강(以柔克剛)의 태극입니다. 저자는 목불식정(目不識丁)일 뿐이죠.]
"누구냐, 너!"
백골귀마가 얼음처럼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이기면 가르쳐 주지."
"허, 허... 허허허!"
"정체가 뭔지 모르겠지만 미친놈이 확실한 것 같군. 죽기를 원한다면 죽여 주는 수밖에. 이봐, 청혜! 일단 이것부터 확실히 하자. 저놈이 무당의 두 번째 주자인...."
"거 영감탱이 겁나 말 많네."
"...개자식! 내 오늘 진정한 살계를 열리라!"
백골귀마의 입에서 끔찍한 기성이 터져 나왔다.
"구음백골조!"
그저 가볍게 손을 떨쳐 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손가락 마디마디마다 그의 내공이 가득하게 들어찬 악랄한 조법이다.
나 역시 태허무극심법의 내력이 가득 담긴 태극권을 뻗었다.
-깡!
뼈와 살로 이루어진 주먹인데, 요란한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자가 방금 귀마 장로님의 구음백골조를 막은 거야?"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저 젊은 도사가 절정에 이른 고수란 말이야?"
"말도 안 돼. 설마...."
나와 일수를 교환한 백골귀마의 얼굴이 굳어 갔다.
"역시 선배님이야."
"그러게요, 사형. 정말 대단한 실력이 아닐 수 없어요. 역시 반로환동을 한 고수가 맞겠죠?"
"응. 그렇지 않고서야 도저히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아."
두 사람의 대화 소리가 제법 컸는지 순간 마교 진영이 극도로 혼란에 빠졌다.
한낱 무당의 제자인 줄 알았던 자가 백골귀마와 손속을 나누고 있는 것도 놀랄 만한 일인데 반로환동의 고수라니! 몇몇은 자신도 모르는 새 침샘을 꿀꺽 삼키기도 했다.
"태극권 흡(吸), 부드러운 바람은 회오리가 되어."
순간 내부에서 강렬한 회전력이 발생하며 주위의 공기를 빨아들였다.
우~~~웅!!
내공이 실린 소리에 귀가 멍멍해지자 내공이 약한 자들은 귀를 틀어막았고 일부는 아예 자리를 깔고 운기요상(運氣療傷)을 취하는 자들도 있었다.
"탄(彈), 하나의 탄환처럼 날아가."
강력한 회전력에 반발력이 더해져 외부로 튕겨 나갔다.
콰앙!
두 개의 기운이 굉음을 내며 폭발했다.
송이버섯 같은 먼지구름이 부풀어 오르며 뿌연 먼지가 하늘 위로 솟구쳤다.
이 같은 모습에 모두가 놀라 입을 벌렸고 매봉 이지은은 소리까지 질렀다.
"정말 대단해요."
다음 순간 백골귀마의 팔이 수십 개의 주먹으로 늘어나며 연달아 장력을 격출(擊出)하기 시작했다.
"백골귀마의 십팔연환장이다."
"선배님, 조심하세요."
그녀의 걱정 어린 외침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피어났다.
"태극권 벽(壁), 단단한 태극은 벽이 되어 지키리."
"기, 기막?!"
백골귀마 오청양이 깜짝 놀랐다는 얼굴이다.
하지만 그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한순간이라도 지체하다간 선공을 뺏길 수 있기 때문이다.
-파파파파파파...파파파팡!
18번의 연환장이 폭풍처럼 밀려들어 왔지만 태극의 기운이 만들어 낸 방벽을 뚫지 못했다. 이제 내 차례다.
"이얍, 받아라. 태극권 탄(彈)!"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커다란 회오리 속에서 태극의 형상이 만들어지더니 이내 백골귀마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크아아!!"
백골귀마 역시 독이 바짝 오른 얼굴로 괴성을 지르며 진기를 끌어 올렸다.
"백골귀마장!"
"태극권 파(破), 내 앞을 가로막은 모든 것을 무너뜨린다."
콰콰콰콰쾅!
"으악!"
순간 엄청난 굉음과 함께 백골귀마의 신형이 뒤로 날아갔다.
"마, 말도 안 돼."
"귀마 장로님이 패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반로환동의 고수가 맞았어."
마교 진영에서 일대 소동이 벌어지고 말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당의 젊은 도사가 마교 서열 20위의 백골귀마를! 그것도 그의 장기라 할 수 있는 주먹으로 패퇴시켰으니 저러한 반응이 나오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이제 일대일이군."
"무...당파의 태극권이 이처럼 신묘할 줄이야. 오청양이 오늘 개안했소."
의식을 잃고 쓰러진 줄 알았는데 백골귀마가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선혈을 한 사발이나 토했는지 입가가 온통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지만 내게 다가오는 모습을 보아하니 역시 마교의 고수다웠다.
"검선께서 반로환동을 하신 모양이군요. 경하드립니다. 하지만 참으로 고약하시군요. 괴팍한 성격을 익히 들었지만 이렇게 후배를 놀리시다니 말입니다."
응, 지금 뭐라고 한 거지?
설마 날 검선 사백으로 오해하고 있는 건가?
백골귀마의 뜬금없는 말에 내심 당황했지만 짐짓 태연한 척했다.
반대편에 몰려 있던 마교도들이 그의 말에 크게 놀랐기 때문이다.
"검선?"
-웅성웅성!
"맙소사!"
"저자가 무당의 검선이란 말인가?"
호오!
착각은 자유라지만 백골귀마 덕에 재미난 생각이 떠올랐다.
전장의 승패를 좌우하는 것 중에 기세(氣勢)라는 것이 있다.
기세가 꺾이면 병력이 우세하더라도 열세인 상대에게 패할 수 있다.
이것은 수많은 역사에서 증명된 것이다.
저들이 날 풍양 사백으로 오해한다면 그렇게 생각하도록 가만히 놔두는 것이 좋은 분위기를 이어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마! 너는 내가 누군지 알았는데 그렇게 뻣뻣이 말하는 것이냐."
"네?"
"마! 내가 느그 교주하고 옛날에 같이 밥도 먹고 마! 싸움도 하고 마!"
"...!!"
순간 오청양의 얼굴이 기괴하게 구겨지며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후, 후배가 졌으니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는 더 이상 나와 그 어떠한 대화도 나누기 싫다는 듯 서둘러 물러났다.
후후후! 저들의 오해에서 비롯됐지만 검선이라는 이름은 분위기를 바꿔 놓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나는 꽤나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좌중을 둘러보며 외쳤다.
"다음은 누가 나서겠느냐?"
"...."
"...."
나는 느긋하게 서 있는 것에서 아예 한 손을 뒷짐 지기까지 했다.
이 모습을 보고 약이 오르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그때였다.
"호호호~ 검선께서 무당에 계셨다니, 이거 한 방 먹었네요."
간드러지는 교성과 함께 아름다운 미부(美婦)가 허공을 날아왔다.
그런데 일부러 보라고 저렇게 파인 옷을 입은 것인가?
나는 그녀의 자태를 대놓고 쳐다보았다.
내가 알고 있는 사백의 성정이라면 나보다 더하면 더했지 부족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말이다. 확실하다. 믿...어... 달라.
"호오~ 자네, 아주 멋진 가슴을 가졌군. 자연산이 확실해."
"자연산요? 그게 무슨 말인가요?"
"어? 그게...."
난 재빨리 이야기의 주제를 바꿨다.
"하하하하! 농담이야 신경 쓸 것 없어."
"...?"
언뜻 그녀의 눈동자에 이색의 빛이 나타났지만 곧 사라졌다.
"과연 검선이시군요. 소녀 조소희가 인사를 드리옵니다."
"조소희?"
청혜 사형의 전음이 들려왔다.
-[사제, 그녀가 바로 마교의 소수마녀라네.]
-[소수마녀?!]
"에이 X! 눈 버렸네."
조소희라는 이름은 모르지만 소수마녀라면 들어 본 적 있다.
환갑이 넘었지만 주안술을 통해 아직까지 젊음을 유지하고 있다는 마교의 할머니.
저 누나의 겉모습은 모두 거짓이었다.
"이봐. 동생. 네가 왜 소녀야, 나이가 육십이 넘었으면 할망구지. 안 그래?"
순간 조소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눈가에 짙은 살기마저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감히 어느 누가 소수마녀의 면전에서 그녀에게 할망구라고 말할 수 있을까!
만약 나를 검선으로 오해하지 않았다면 당장에라도 칼부림이 났을 것이다.
"실없는 소리는 때려치우고 대결이나 시작하지, 어때?"
"좋...아요. 하지만 저는 치고받는 것이 아닌 다른 것으로 자웅을 겨뤄 보고 싶습니다."
"다른 것?"
"네."
조소희는 좌중을 한번 돌아보더니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경신법을 겨뤄 보는 것이 어떻습니까?"
"경신법?"
"네. 설마 천하의 검선께서 자신이 없으신 건가요?"
헛! 설마 날 도발하는 건가?
게다가 경신법이라니, 큭큭큭큭! 오히려 바라는 바였다.
"그랬구나. 우리 소희, 원하는 대로 해."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 주는 것 같은 말투에 일부 사람들이 웃음을 참지 못했다.
"풉!"
"큭큭큭큭!"
"크흡!"
만약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최소 몇 명은 지금 당장 뒈졌을 것이다.
제45화
45화 청운 VS 검마(1)
"어떤 방식으로 겨뤄 볼까?"
-쉬잇!
그녀가 갑자기 몸을 날렸다.
"나뭇잎을 잡아 보는 게 어떤가요?"
"나뭇잎?"
"네."
그녀의 시선이 가리키고 있는 곳에 아름드리 느티나무 두 그루가 사이좋게 서 있었다.
"좋은 생각 같군."
"호호호. 그럼 이렇게 하죠. 먼저...."
그녀가 설명한 대결 방식은 매우 단순했다.
느티나무를 가격해 나뭇잎이 떨어지면 그것이 땅에 떨어지기 전에 잡는 것이다.
시간제한은 정확히 60초, 즉 1분 안에 상대보다 많은 수의 나뭇잎을 잡으면 승리한다.
"공정을 기하기 위해 북해빙궁에서 수고를 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조소희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북해빙궁 무인들이 순간 당황한 기색을 보였지만 이내 그녀의 제안을 수용했다.
"제가 도와 드리죠. 누가 먼저 하시겠습니까?"
북해빙궁 소궁주 은설연이 직접 나섰다.
"후배의 입장에서 당연히 제가 먼저 해야겠죠."
"그래. 우리 소희 좋을 대로 해."
순간 조소희의 쌍심지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그 모습에 내심 찔끔했지만 이왕 시작했으니 끝까지 가 봐야 하지 않겠는가.
다행히 빙궁의 소궁주 덕에 위기의 순간을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의 우수에서 일장이 뿜어져 나왔다.
-쿠웅!
굉음과 함께 나뭇잎이 하늘을 향해 비산하자 조소희의 신형이 번쩍이더니 나뭇잎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비익신법(날개를 펴고 날아오른다)."
-쉭! 쉭쉭, 쉬쉬쉭!
그녀는 새가 날갯짓을 하듯 몸을 틀어 가며 하늘 위로 떠다니는 나뭇잎을 쓸어 담았다. 비록 적이지만 그녀의 움직임은 마치 한 마리의 제비와 같아 찬탄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이백두 개."
"백여든 개."
"백일흔아홉 개."
"이백열네 개."
"...총 칠백일흔다섯 개입니다."
그녀는 1초에 10개 이상, 정확히 계산해 초당 12.9개의 나뭇잎을 잡아냈다.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이건 내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이제 검선의 차례군요."
소수마녀 조소희 역시 만면에 득의만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렇군."
나는 태연하게 답하는 동시에 재빨리 상태 창을 열었다.
그리고 보너스 스탯을 사용해 민첩 수치를 크게 올렸다.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상태 창>
이름 : 주선우
레벨 : 80
고유 특성 : 분신(Unique) *사용 불가
칭호 : 현자, 오크 살육자
생명력 : 5,000/5,000 마력 : 3,000/3,000
힘 : 150 체력 : 170 민첩 : 150 → 200
지혜 : 135 지능 : 135 행운 : 10 매력 : 20
보너스 스탯 : 55
-[띠링, 민첩 수치가 대폭 상승했습니다. SS급 경공술 제운종이 크게 상승합니다.]
시스템의 청아한 음성이 들려오자 심적으로 안심이 됐다.
그 순간 청혜 사형의 전음이 들려왔다.
-[사제.]
-[네, 사형]
전음을 나누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지 않게 시선을 정면에 고정했다.
-[자신이 있는가?]
-[자신이... 없네요.]
-[그....]
사형의 음성이 침중해지려는 찰나,
-[질 자신이요.]
-[...?!!]
환한 미소로 멍한 표정의 사형을 바라보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하겠습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쿵' 소리와 함께 나뭇잎이 하늘 높이 비산했다.
그 순간 나는 구름을 밟기 시작했다.
마치 바람에 구름이 흘러가듯, 내 몸을 바람의 움직임에 실었다.
"제, 제운종?"
"저것은 무당의 제운종이다."
역시 민첩을 올린 보람이 있다.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그 작은 움직임까지 눈에 들어온 것이다.
그것도 아주 느릿하게!
역설적이지만 그 덕에 나뭇잎을 향해 뻗는 손놀림이 비약적으로 빨라졌다.
"저것은 극에 이른 제운종이다."
"우와와와!"
이 정도면 얼추 비슷한 것 같은데, 뭔가 100% 완벽하게 이겼다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렇다면 마지막 쐐기를 박아 줘야겠지.
나는 고작 몇 초를 남겨 둔 상황에서 순간 이동 스킬을 펼쳤다.
"이형환위?"
이 같은 광경에 사람들의 눈이 뒤집혔다.
이형환위가 어떤 신법인가?
마교의 천마군림보(天魔君臨步), 불가의 능공허도(凌空虛度)와 비견되는 최고의 경신법이 아니던가?
내 몸이 흐릿하게 보이다가 확연하게 드러나며 좌에서 번쩍 우에서 번쩍 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는 아예 모습 전체가 사라져 버렸다가 반대편에서 나타났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소수마녀 조소희의 눈이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그리고 자신의 패배를 예감했는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백서른두 개."
"이백아흔 개."
"이백여든아홉 개."
"이백쉰네 개. 도합 일천예순다섯 개입니다."
북해빙궁 무인들의 말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우와아아아!!"
"우리가 이겼다."
"우리 무당의 승리다. 와아아~~~!"
반대로 마교 진영의 분위기는 한층 더 무거워졌다.
"결과에 승복하겠는가?"
내 질문에 그녀가 살며시 입술을 깨물었다.
매우 분하다는 표정이다.
하지만 누가 봐도 확연한 결과에 그녀는 승복할 수밖에 없었다.
"네. 제가 졌어요."
"좋아. 깔끔하게 인정해 줘서 고맙군. 자! 이제 누가 나서겠는가?"
두 번을 이겼기에 이번만 이기면 무당의 승리다.
나는 잔뜩 달아오른 기세를 그대로 유지한 채 마교도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이상하군."
이때 의자에 앉아 있던 중년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구냐? 넌."
"내가 누구...."
"검선이 맞긴 한가?"
남자의 말에 내심 뜨끔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풍양 사백과 인연이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젠장! X 된 것 아냐?'
나는 태연한 척, 반문했다.
"내가 당신의 질문에 답해야 하나?"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어차피 겨뤄 보면 정체가 드러날 테니까."
그는 천천히 걸어 나오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난 늘 궁금했어. 왜 내 이름 앞에 검선의 이름이 놓여 있는지 말이야."
"응?"
-[사제, 저자는 검마네.]
-[...!!]
사형의 전음에 한순간 멍한 느낌을 받았다.
저자가 바로 검마였다니 이건 예상치 못한 변수였다.
순간 검마의 몸이 대지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쐐액!
"젠장...!"
나는 꽤나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검마라는 자가 설마 아무런 예고도 없이 선공을 가할 줄 몰랐고 뭔가가 다가온다고 느낀 순간 그의 공격이 코앞까지 닥쳤기 때문이다.
난 간발의 차로 순간 이동 스킬을 펼쳐 그의 공격을 피해 냈다.
쾅!
그의 검에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무려 두 자나 박혔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나무에 박힌 검이 순간 빛을 발하더니 내부에서 균열을 일으키며 폭발한 것이다.
"검폭(劍爆)?!"
수백 년을 산 나무가 너무나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검마는 곧바로 나를 향해 재차 공격을 펼쳤고 나 역시 극도로 조심하며 태극검을 펼쳤다.
"받아라!"
이형환위를 펼치며 어느새 검마의 배후로 접근했다.
그러나 내 움직임을 예상했는지 검마 역시 곧바로 검술을 펼쳤다.
내가 그의 배후에 나타나고 그가 그 공간을 찌른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콰앙!
두 기운이 부딪치며 주변 공기가 진동했다.
나는 무극을 힘차게 휘둘러 그와 또다시 격돌했다.
쾅! 쾅! 쾅!!
수 초가 지나고 거짓말처럼 검마의 공격이 멈췄다.
"하하하! 정말로 요상하구나."
"무엇이 요상하단 말이오?"
"우선 너는 검선이 아니야. 나를 상대하는 동안 태극혜검을 단 한 번도 펼치지 않았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무당의 제자임은 분명해. 그러니까 요상할 수밖에! 어때, 내 말이 틀렸나?"
그의 논리적인 말에 나는 더 이상 속일 수 없음을 깨달았다.
"맞소. 난 검선이 아니오."
"그럼 반로환동도?"
"당연히 하지 않았지."
내가 순순히 인정하자 검마는 그저 싸늘한 눈길만을 던질 뿐 특별한 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검선으로 착각했던 백골귀마와 소수마녀 등이 욕설을 내뱉었다.
"뭐야!"
"너 이 자식, 감히 우리를 속이다니!"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이 버럭 성을 냈다.
아까 전과 같은 후배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봐, 말은 바르게 하자고. 당신들이 멋대로 오해한 거잖아. 안 그래?"
"이 녀석이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백골귀마와 소수마녀가 사납게 노려보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않았다.
지들이 오해를 했지 내가 먼저 검선이라 칭한 적이 없었다.
"왜! 나랑 다시 붙으려고?"
나는 오히려 빙글빙글 웃으며 그들에게 반문하는 동시에 검마를 향해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였다.
이봐! 검마. 지금 쟤들이 하는 행동 좀 봐라.
보시다시피 난 지금 너와 대결 중인데 말이야.
예의가 없네.
게다가 쟤들은 이미 졌잖아.
지금 널 무시하는 게 맞지?
검마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물러나게."
"네?"
"저자가 누군들 이제 와서 무슨 상관인가!"
"아, 그게...."
"듣고 싶지 않네."
"알...겠습니다."
검마의 단호한 말에 백골귀마와 소수마녀의 기세가 단번에 꺾였다.
만약 검마가 그들보다 직위가 낮거나 약했더라면 이야기가 살짝 달라졌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검마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
"무엇이든지."
이미 들통이 났는데 더 이상 숨길 것도 없다.
"반로환동을 하지 않았다면 고작 약관에 불과해 보이는데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군. 넌 대체 누구지?"
"내 이름은 청운."
"청운?!"
"풍각 선사(先師)의 제자이자 무당의 제자다."
"풍...각?"
-웅성웅성!
"그렇군. 풍백이 아닌 풍각의 제자였어."
그는 자조적인 냉소와 함께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하긴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 보면 나라는 존재 자체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존재 같았으니 십분(十分) 이해할 수 있었다.
"청운 사제, 그만하면 되었네. 이제 내가 나서겠네."
청혜 사형이 쐐기를 박듯 내 도명을 부르며 앞으로 나섰다.
"아니요. 사형. 아직 승패가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검마는 초절정에 이른 고수야. 어쩌면...."
"사형, 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지금은 제게 맡겨 주세요. 날씨를 가리면 산에 오를 수 없는 법이잖아요."
"응?"
청혜 사형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사제, 설마 초식을 잊었는가?"
"이미 절반 이상은 잊어버렸는데 지금은 거의 다 잊었습니다."
"...!"
그러자 매봉 이지은이 화산검룡 이정진에게 소리쳤다.
"초식을 잊었다니 큰일이에요. 어떻게 하죠?"
"그러게. 큰일이군, 큰일이야."
두 사람은 어쩔 줄 모르며 몹시 걱정하는 기색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검마의 안색이 진중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방금 초식을 잊었다고 했나?"
"네."
"그게 정말인가?"
"제가 거짓말할 이유가 있을까요?"
"그렇군. 어리석은 질문이었어. 그럼 본격적으로 놀아 볼까?"
"그러죠."
그리고 다음 순간,
우리는 두 번째로 충돌했다.
제46화
46화 청운 VS 검마(2)
"십이마검!"
-우우웅!
"태극권 흡(吸), 부드러운 바람은 회오리가 되어."
곧이어 강대한 와류(渦流)가 무극을 통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저게 대체 무슨 검법이지?"
"대단한 회오리야. 뚫고 들어가기가 쉽지 않겠어."
"헹! 검마님의 검은 어떻고!"
검마의 검에서 십여 가닥의 검기가 뇌전처럼 뿜어져 나왔다.
지독히도 빠른 쾌검이다.
-타다다다다닥!
무시무시한 검기와 회오리가 조우하자 요란한 불꽃을 튀겨냈다.
우리는 한 번의 격돌 후 뒤로 물러섰다.
"오오오오!"
"엄청나다!"
구경하던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때 검마가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
"십이마검, 이검."
검기가 쭉 하고 창처럼 늘어나 굉음을 토해 냈다.
"태극검 탄(彈), 하나의 탄환처럼 날아가."
나는 회오리를 이용해 그의 공세를 한 곳으로 끌어당기며 탄자결을 펼쳤다.
순간 강렬한 반탄력이 발생해 검마의 공격을 무위로 되돌렸다.
"십이마검!"
"태극검!"
콰콰콰콰쾅!!
두 기운이 격돌하자 폭음이 진동하며 그 중심에 위치해 있던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밑동까지 터져 버렸다.
"마, 말도 안 돼."
"엄청나다."
누군가가 그 광경에 경악성을 토해 냈다.
"정말 무초식이 맞군."
검마가 독배하듯 나지막이 물었다.
"태극검인가?"
"그렇소."
"태극을 완성했는가?"
"무학에 완성이 어디 있겠소? 그저 잠시 태극을 봤을 뿐이오."
"태극을 봤다. 묘(妙)하군 묘해."
그와 동시에 검마로부터 엄청난 기운이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불길한 기운의 보라색 빛이 나를 향해 날카로운 이빨을 번뜩였고 사람들은 모두 숨을 죽이며 관전했다.
-콰앙!
"강기, 저것은 강기다."
"이럴 수가. 검마가 화경에 이르렀던가?"
순간 식은땀이 흘렀다.
회오리를 뚫고 들어온 검마의 강기 때문이다.
순간 이동을 펼친 덕에 간발의 차로 공세를 피할 수 있었지만 격돌이 거듭될수록 무극이 점점 뒤로 물러났다.
"놈! 정말 쥐새끼처럼 잘도 피해 내는구나."
극마의 경지!
검마의 실력은 내 예상을 상회하고 있었다.
경험이나 내공에서 나를 확실히 앞지르고 있었다.
-쾅! 쾅! 쾅! 쾅!
나는 이때부터 밀리기 시작했지만 기회가 날 때마다 공격을 펼쳤다.
"놈! 이것도 받아 보아라. 십이마검 칠검 뇌우(雷雨). 벼락이 비처럼 떨어진다."
검강이 벼락처럼 떨어졌다.
"꺄아악!"
"으악! 안 돼!"
"저걸 어째!"
고성이 들려오는 가운데,
나는 당황치 않고 회오리 내부에 또 다른 회오리를 만들어 냈다.
"태극검 방(防), 견고한 태극은 적의 공격을 막아 내고."
쿵! 쩌저쩍!!
검마의 공세에 세 걸음이나 뒤로 물러났지만 가까스로 강기를 막아 내는 데 성공했다.
"강기가 뚫지 못하는 소용돌이라니 대단하군."
"대단한 건 극마에 오른 당신이겠죠."
"후후후, 내 얼굴에 금칠을 하는군. 칭찬받아야 할 사람은 자넨데 말이야."
"네?"
"모르는 척하긴, 도사 주제에 음흉하구나."
무인에겐 무인만의 감이라는 것이 있었다.
"보셨소?"
"그래. 보았지."
빌어먹을 노인네 같으니.
실력에 맞게 눈초리 역시 빨랐다.
"청운이라고 했지? 지금이라도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나는 것이 어떻겠나?"
"쓸데없는 소리."
"아직 여물지 못한 널 죽이고 싶지 않다."
"태극검을 뚫을 수 있을 것 같소?"
"왜, 뚫지 못할 것 같은가? 이미 꽤 지친 것 같은데."
"...."
나는 그의 말에 즉시 상태 창을 열어 나머지 스탯 전부를 지능에 찍어 버렸다.
<상태 창>
이름 : 주선우
레벨 : 80
고유 특성 : 분신(Unique) *사용 불가
칭호 : 현자, 오크 살육자
생명력 : 5,000/5,000 마력 : 2,900/5,500
힘 : 150 체력 : 170 민첩 : 200
지혜 : 135 지능 : 190 행운 : 10 매력 : 20
보너스 스탯 : 0
순간 마나 통이 크게 늘어나는 동시에 손실되었던 내공이 절반 이상 회복되었다.
나는 곧바로 무극을 손에 고쳐 잡으며 그를 향해 말했다.
"3차전, 시작하시죠."
검마의 얼굴 근육이 마세하게 꿈틀거렸다.
"힘을... 숨기고 있었나?"
어라?
아니, 그건 아닌데!
순간 팍! 소리가 나면서 검마의 검이 하늘 위로 솟구쳤다.
"십이마검 팔검, 귀곡(鬼哭). 귀신의 울음소리가 들리니."
-낄낄낄낄! 케케케케케! 호호호호호!!
귀를 찌르는 소리가 검마의 검에서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귀신의 울음소리와 흡사했는데 가만히 듣고 있으면 마치 혼백이 달아나는 느낌이었다.
"어, 어어? 어!"
"으... 으으... 으아아아!"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귀곡성에 사람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십이마검 구검, 귀천(歸泉). 죽음으로 돌아간다."
귀신의 형상이 나타나 주위 일대를 뒤덮었다.
손으로 귀를 막아도 100% 막을 수 없다.
내력이 약한 무인들의 동공이 흔들리며 땅바닥에 쓰러지기 시작했다.
매봉 이지은 역시 크게 소리쳤다.
"그만해요. 더 이상 못 참겠어요."
그러나 그녀의 고함은 검마의 귀곡성에 완전히 눌려서 들리지 않았다.
-[띠링, 태허무극심법의 현묘한 힘이 정신 공격에 대항합니다.]
나 역시 태허무극심법이 아니었다면 검마의 귀곡성에 낭패를 당했을 것이다.
'혹시 이렇게 하면 될까?'
문득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소림에 사자후가 있듯, 음공에는 음공으로 대항하는 것이다.
나는 태허무극심법의 기운을 횡경막에 모으고 입을 활짝 폈다.
그리고 곧 커다란 소리를 길게 뽑아냈다.
"아~~~~~~!!"
한 줄기의 맑고 따뜻한 장소(長嘯)가 장내에 퍼지더니 귀곡성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차, 창룡후?!"
누군가의 경탄성이 터져 나오는 가운데 사람들의 심신이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귓전을 울리는 귀신의 울음소리가 여전히 미친 듯 요동쳤지만 이제는 견디지 못할 정도가 아니었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검마의 눈동자가 복잡하게 흔들렸다.
"이 기운은 대체?!!"
검마의 눈빛이 의구심으로 가득했지만 곧 뭔가 확신에 찬 눈빛으로 변했다.
"현문정종? 그렇구나. 현문정종의 무공을 익힌 것이 틀림없어."
순간 음습하고 불길한 기운이 나의 몸을 빠르게 감아 왔다.
나를 바라보는 검마의 눈동자가 한 마리 거대한 뱀이 혓바닥을 내밀고 있는 느낌이다. 그 모습이 너무나 소름 끼치게 오싹했다.
-[띠링, 태허무극심법의 현묘한 기운이 마기에 대항합니다.]
마기?
저것이 바로 마기란 말인가?
이때 시스템의 음성이 내 의식을 차갑게 깨웠다.
그리고 단전에서 일어난 현묘한 기운이 마기에 대항해 일종의 투지마저 일으켰다.
"현문정종의 후예여, 죽어라. 십이마검 십검, 광폭(狂暴). 사납고 미친."
이런 젠장!
그의 말이 끝나기 이전과 다르게 마기를 잔뜩 품은 강기 덩어리가 날아왔다.
나 역시 태허무극심법을 최고조로 끌어 올리며 태극검을 펼쳤다.
"태극검 파(破), 내 앞을 가로막은 모든 것을 무너뜨린다."
-콰콰콰콰쾅!
"크악!"
"악!"
폭음과 함께 주변이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바닥 돌이 산산조각으로 박살 나 가까운 곳에서 대결을 관람하던 이들 중 일부가 폭발에 휘말리고 말았다.
그리고 나 역시 무사하지만은 않았다.
큰 부상을 입은 것은 아니었지만 분명 대미지가 있었다.
억지로 짜내어 만든 강기는 극마에 이른 강기에 비해 손색이 있기 때문이다.
"퉷!!"
울혈(鬱血)을 토해 내자 대번 시원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내 심장이 무섭게 박동하며 마기의 기운에 대항해 전신의 세포가 일제히 깨어나 활동하는 듯 기이한 자극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순간 검마가 다시 한 번 땅을 박차 뛰어올라 강기를 뿌렸다.
"십이마검, 실입검 칠흑(漆黑), 세상이 어둠에 잠기니!"
태양이 구름 뒤로 모습을 감추며 장내에 검은 구름이 피어올랐다.
나는 황급히 태극검의 구결을 연속적으로 펼쳐 냈다.
"태극검 흡(吸), 탄(彈) 파(破)! 부드러운 바람은 회오리가 되어 하나의 탄환처럼 날아가 내 앞을 가로막은 모든 것을 무너뜨린다."
한 줄기 회오리 속에서 푸른빛을 띤 검광이 번쩍이며 마치 어둠을 가르는 한 줄기 빛처럼, 한 줄기 탄환처럼 하늘을 향해 올라갔다.
그러곤 검은색 도화지에 뿌려진 한 줄기 푸른 선이 되어 폭발했다.
"십이마검 팔방(八方), 사방과 사우의 모든 방위에."
검마의 강기 다발이 살아 있는 뱀처럼 천지사방으로 유연하게 휘어지며 찔러 왔다.
나는 온 신경을 집중하며 순간 이동 스킬을 연달아 펼쳤다.
조금만 방심해도, 살짝 스치기만 해도 그대로 두 쪽으로 쪼개질 것이기 때문이다.
"블링크, 블링크, 블링크!"
순간 내 몸이 마치 양옆으로 쭈욱 늘어나듯 좌우로 흔들리며 검마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목표물이 사라지자 뱀처럼 휘어지던 마기 역시 허공을 배회하다 사라졌다.
"그렇지."
"우와아아아!"
나는 다음 순간 검마의 뒤를 잡았다.
그리고 남아 있는 내공을 쥐어짜 혼신의 일격을 날렸다.
"태극검 파(破), 내 앞을 가로막은 모든 것을 무너뜨린다."
무극에서 솟구친 한 줄기 검강이 놈을 향해 날아가는 순간 나는 그의 당황한 눈빛을 볼 수 있었다.
됐다.
난 그 순간 승리를 확신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아주 냉정하고 차가운 눈빛이 당황해하고 있는 그의 눈빛 속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함정?!
뭔가 잘못됐다고 느낀 순간 전신에서 솜털이 곤두섰다.
"쥐새끼 같은 놈. 마침내 잡았다."
무저갱 속에서 들려오는 마귀의 음성이 내 심령을 뒤흔들었다.
한순간 검마의 신형이 뒤로 쑤욱 빠지며 마기를 품은 거대한 강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십이마검...."
그 기운을 정면에서 대면하는 것만으로 몸이 갈가리 찢겨 나가는 것 같았다.
"놈! 이제 끝이다."
검마는 야차와 같은 모습으로 강기를 펼쳐 냈고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모든 이들이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빌어먹을!"
최후를 직감하자 나도 모르게 욕설이 흘러나왔다.
용기와 만용을 구분했어야 했는데, 내가 무모했던 모양이다.
"아, 안 돼!"
"청운 사제!!"
사람들 역시 참혹한 최후를 직감한 것인가?
청혜 사형의 피를 토하는 고성이 귓가에 들려왔다.
젠장, 내공마저 바닥을 보였기 때문에 아무리 용을 써 봐도 검마의 공격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아무래도 여기까지인 것 같았다.
-[9.999999995%]
-[9.999999996%]
-[9.999999997%]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마치 거짓말처럼 한 줄기 구원의 빛이 내게 내려왔다.
-[9.999999998%]
-[9.999999999%]
-[10%. 분신 스킬 복구가 10%를 달성했습니다.]
-[10% 달성 특전으로 합일이 가능합니다. 지금 합일하시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시스템의 음성이었다.
제47화
47화 악연의 연속(1)
한적한 오후,
말탄 왕국의 신흥 귀족으로 떠오른 골드먼 자작가의 저택 모처에 남녀의 은밀한 신음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기택아! 험험!"
그 역시 몇 번 본 적이 있는 메이드다. 황기택은 방문을 열고 들어온 친구를 보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되물었다.
"무슨 일이야?"
"미, 미안. 내가 방해했네. 이따 올게."
"됐어. 헐레벌떡 뛰어온 걸 보면 급한 일 같은데, 말해!"
황기택은 무심한 얼굴로 선환을 재촉했다.
"빅뉴스가 있어."
"빅뉴스?"
"응. 뉴먼 백작가랑 대전사 결투를 벌이기로 했대."
"대전사 결투라!"
안선환의 말에 황기택의 눈빛이 단숨에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그 역시 이번 일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룹을 이끄는, 아니! 골드먼 가문을 이끄는 아버지는 현재 이번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엄청난 공을 들이고 있었는데 만약 이번 대전사 결투에서 승리한다면 귀족파의 비호 아래 골드먼 자작가의 기반이 더욱 철저하게 다져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번 승리를 통해 백작가로 올라설지도 몰랐다.
그런 중요한 일에 차남인 그가 크게 일조한다면? 후후후!
친형인 황진택을 제치고 그룹 후계자에 한 걸음 더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창대한 미래를 떠올리자 순간 이성이 되돌아왔다.
지금은 한가하게 여인이나 희롱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탈리. 나가봐."
"네... 주인님."
황기택이 대충 옷을 걸치고 의자에 앉았다.
"시간과 장소는?"
"앞으로 열흘 후, 장소는 갈라파고스 광산 지역."
"몇 명이 출전해?"
"확실하지 않은데 일단 10명 내외로 들었어."
"출전자들이 정해진 거야?"
"안 그래도 오늘 저녁에 그 문제를 두고 가주님이 회의를 한다고 하더라."
"그렇군."
황기택의 눈빛이 기회를 포착한 포식자의 눈빛으로 변했다.
* * *
-[엔조 테이 남작의 영주성]
저 노인이 엔조 테이 남작인가?
깡마른 몸매에 백발이 성성한 귀족이 상석에 앉아 있었다.
비록 나이가 들어 육신이 노쇠해 보이나 눈빛만큼은 젊은이 못지않게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프리지아 영지의 주인이신 엔조 테이 남작님을 뵈옵니다."
"남작님을 뵈옵니다."
"고개를 들게. 자네가 거미 소굴을 퇴치한 용병인가?"
"그렇습니다. 남작님."
"홀로 의뢰를 수행했다고 들었는데, 대단하군."
"과찬이십니다. 그냥 운이 좀 좋았을 뿐입니다."
"하하하! 여왕 거미까지 격퇴했다고 들었는데 그게 어찌 운이겠는가!"
"...."
엔조 남작은 흡족한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가까이서 본 그는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인상의 노인이었다.
주름진 피부에 적당한 길이의 턱수염, 백발 사이에 가끔 보이는 갈색의 머리카락.
각설하고 난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조용히 서 있었다.
이 세계에서 귀족이란 존재를 처음 만났고 더욱이 그가 나를 불렀기 때문이다.
"이런! 내가 정신이 없었군. 손님을 불러 놓고 질문만 해 댔어. 예의 없게 말이야. 자! 일단 차부터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는 게 어떤가?"
"좋지요."
"혹시 원하는 차가 있나?"
"음! 작설차가 있으면 주십시오. 기왕이면 차가운 물로 우려낸.... 혹시 없으면 아무 차나 주셔도 됩니다."
"차가운 물에 우려낸 작설차라니, 자네 차에 대해 좀 아는군."
남작은 눈을 껌뻑이며 나를 쳐다보았는데 처음과 비교해 호감의 빛이 더해졌다.
"그리 많이 알진 못합니다."
"하하하. 겸양이 과하군."
함께 차를 나누는 동안 몇 마디 덕담이 오고 갔고 슬슬 남작의 입에서 나를 찾은 이유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대전사요?"
"그렇네. 날 도와줄 수 있겠나?"
엔조 남작은 내게 대전사가 되어 달라고 요청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얼마 전 그가 주군으로 모시고 있는 변경백 뉴먼 백작가와 신흥 귀족으로 떠오른 골드먼 자작가 사이에 분쟁이 발생했다고 했다.
공작(公爵), 후작(侯爵), 백작(伯爵), 자작(子爵), 남작(男爵)의 오등작으로 보면 백작가 그것도 변경백인 뉴먼 백작가가 당연히 우세할 것 같았는데 말하는 본새를 보아하니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은 것 같았다.
"골드먼 자작은 신흥 귀족으로 엄청난 부자라네. 거대한 상단으로 시작해서 막대한 부와 지금의 권력을 얻었지. 같은 파벌이면 쉽게 끝날 수 있는 문제였는데 정치적인 문제가 겹치는 바람에 일이 커지고 말았네."
"정치적인 문제요?"
"뉴먼 백작가는 왕을 지지하는 전통적인 왕당파고 골드먼 자작가는 귀족파일세."
"아!"
왕당파와 귀족파의 대립.
어디를 가나 빠지지 않는 클리셰(Cliche)다.
우리네 역사를 봐도 그렇지 않은가?
"최악의 경우 양쪽 가문의 존폐를 건 영지전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가까스로 대전사 전투로 합의를 보았네."
"전 용병에 불과합니다만."
"허허허. 용병이라도 팔라딘이라면 얘기가 다르지. 안 그런가? 자네에게 정식으로 의뢰하겠네. 여기 있는 제임스 경과 함께 엔조 남작가를 대표해 대전사로 참가해 줄 수 있겠나?"
"...."
일부러 시간을 끌 생각은 아니지만 대전사 결투라니, 쉽게 결정할 만한 것도 아니다.
그사이 엔조 남작이 입을 열었다.
"신중한 친구군. 아! 내 말을 오해하지 말게. 신중하다는 것은 좋다는 의미니까 말이야."
난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좋습니다. 의뢰를 받아들이죠."
몇 가지 이유가 있지만 내가 남작의 의뢰를 받아들인 가장 큰 이유는 그에 대한 사람들의 평판 때문이다.
불과 며칠밖에 되지 않았지만 몇몇 의뢰를 수행한 결과 마을 사람들은 그들의 영주인 엔조 남작을 존경했고 그의 치세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며 그럭저럭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 선해 보이는 엔조 남작에게 힘을 실어 주고 싶었다.
"근데요. 의뢰금이 얼만가요?"
그래도 받을 건 받아야겠지?
공은 공이고 사는 사니까!
"선수금으로 5천 골드를 내겠네. 그리고 이번 일이 마무리되면 5천 골드를 더 주지."
1만 골드.
한화로 환산하면 무려 1억짜리 의뢰다.
"감사합니다. 고갱님. 아니! 엔조 남작님."
의뢰를 수락하자 자연스레 대화가 종료되었다.
"그럼 숙소를 내어 줄 테니 잠시 쉬고 있게나. 준비가 끝나면 부르겠네. 호가든 대장이 수고 좀 해 주게."
"아닙니다. 남작님. 청운 경, 나와 같이 가세나."
"그러시죠."
나는 치안대장의 안내에 따라 엔조 남작이 마련해 준 숙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남작님."
"무슨 일인가, 제임스 경."
"청운이란 용병이 과연 실력이 있을까요?"
"왜, 실력이 부족해 보이나?"
"그건 아니지만...."
"호가든 치안대장이 확인하지 않았나? 마크 지부장 역시 저자의 실력을 확인해 주었고 말이야."
"그렇지만... 제 눈으로 확인하지 못해서 말입니다."
엔조 남작이 희미한 미소와 함께 탁자 위에 놓인 찻잔을 조용히 들었다.
"제임스 경."
"네, 남작님."
"저 친구의 눈빛을 보았는가?"
"눈빛이요?"
"그래. 아주 좋은 눈빛이더군. 자신에 대한 믿음과 신념 그리고 그것을 지켜 낼 수 있는 힘이 느껴졌어. 나와 30년을 함께했으니 말이야. 자네도 알지 않나? 평민으로 태어난 내가 어떻게 이 자리에 올라올 수 있었는지 말이야. 물론 운도 좋았지. 열심히도 했고 말이야. 하지만 내가 이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만들어 준 가장 큰 무기를 얘기한다면 단언컨대 그것은 바로 안목이었네. 그리고 말이야. 지금 내 안목이 저자를 잡으라고 하더군. 아주 강력하게 말이야."
"...!!"
이와 같은 시각,
말탄 왕국의 수도 반다호프.
거대한 왕성을 중심으로 졸본강이 흐르고 도시 내의 경치가 특히 아름다워 대륙에서도 그 명성이 자자한 곳이다.
상업 중심지인 샹들리에 광장에는 명품을 판매하는 상점과 수많은 상단이 경쟁적으로 들어서 광장을 중심으로 눈을 서쪽으로 돌리면 왕국의 고위 귀족들이 거주하는 저택들이 나온다. 광장 남쪽에는 경매장이 마련되어 있어 항상 사람들로 인해 늘 분주하다. 하지만 광장 동쪽 방향은 그 사정이 사뭇 다르다.
내부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거대한 빈민가가 형성되어 있어 말탄 왕국의 어두운 이면을 보여 주었다.
-두두두~ 두두~
"이놈들! 어서 비켜랏!"
화려한 사두마차가 맹렬한 속도로 관도에 나타나자 앞에서 걸어가던 행인들이 순식간에 좌우로 흩어졌다.
"어이쿠!"
"다들 조심해."
갈라진 행인들 사이로 호화롭게 꾸며진 마차들이 재빠른 속도로 연이어 지나갔다.
"저런 몹쓸 놈들을 봤나!"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도 불구하고 저렇게 빠른 속도로 달리다니!"
"그러게 말이야. 저러다 사고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러지?"
요셉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남자가 이미 멀리 사라져 가고 있는 마차를 가리키며 말했다.
"쳇! 빌어먹을 골드먼 자작가 놈들이군."
"골드먼 자작가? 정말 그 가문이 틀림없나?"
"그래. 틀림없어. 황금 독수리가 그려진 깃발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단 말이야."
"헐! 얼마 전에도 관도에서 사람을 치어 죽였다고 하던데."
"맞아. 나도 그 소문 들었어."
"에잉. 언데드는 뭐 하나 몰라. 저런 놈들이나 잡아갈 것이지 말이야."
"그러게 말이야."
사람들은 골드먼 귀족가의 행태에 눈살을 찌푸렸다.
* * *
-[엔조 남작의 연무장]
새벽녘,
나는 발을 가지런히 어깨 넓이로 벌리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체 무극 대검을 들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양손을 사용하더라도 드는 것조차 힘든 무게지만 난 대검을 한 손에 쥐고 가볍게 휘두르고 있었다.
붕, 붕붕... 부웅!
가로 베기, 세로 베기 그리고 사선 베기.
처음에는 빠르게, 쾌검이 부럽지 않을 속도로 움직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움직임이 느려졌다.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그 미세한 움직임을 확인할 수 없었는데 종래엔 마치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숙련(熟練)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능숙하게 익힌다는 뜻이다.
4kg의 장검을 사용하다 무려 15배 이상 무게가 증가된 대검으로 바꿨으니 당연히 손에 익어야 하는 것이다.
숙련도를 높이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빠른 방법은 결국 훈련밖에 없다. 물론 무림 세계에 존재하고 있을 또 다른 나와 합일한다면 엄청난 변화가 예상됐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쪽팔리고 싶지 않았다.
"후우, 후우."
이제 어느 정도 손에 익숙해졌다.
나는 서서히 태극검의 기수식을 잡아갔다.
그리고 태극검의 초식을 처음부터 끝까지 반복했다.
한 번은 매우 빠르게 또 한 번은 매우 느리게 태극검을 순서대로 펼친 다음 이번에는 역순으로 펼쳐 냈다.
뚝, 뚜...뚜둑!
지금 흘리는 한 방울의 땀이 웅덩이를 이룰 때까지 나는 무극 대검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그로부터 얼마 후,
완연한 아침이 되자 부산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전군, 이동 준비."
팔라딘 제임스의 외침에 남작가의 병사들이 오와 열을 맞춰 움직이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붉은빛이 감도는 가죽에 강철판을 덧댄 방어구로 전신을 빈틈없이 무장하고 있었는데 오우거의 살벌한 얼굴이 양각되어 있는 타원형 방패를 하나씩 꿰차고 있는 모습을 보니 꽤나 강도 높은 훈련을 받은 정예병으로 보였다.
"우린 지금부터 갈라파고스 고원으로 이동한다."
제48화
48화 악연의 연속(2)
사사삭!
정찰대의 수신호를 받은 병사들이 반달 모양처럼 넓게 퍼지며 몬스터 무리에게 접근해 갔다. 언뜻 봐도 날카로워 보이는 꼬챙이를 쥐고 어슬렁거리던 놀은 그제야 접근하는 병사들을 발견하고 소리를 질렀다.
"끼에악!"
공기를 찢는 괴성.
놈들은 이미 포위되어 있는 줄도 모르고 부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엔조 남작이 고개를 끄덕이자 팔라딘 제임스가 곧바로 지시를 내렸다.
"타하하하앗!"
"죽어라."
"이얏!"
병사들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놈들의 지척에 이르자 힘차게 기합을 내지르며 창을 내밀었다. 누구는 방패를 들어 놀의 반격에 대비했고 또 다른 누구는 있는 힘껏 도끼를 휘둘렀다.
"끼에에엑!"
주위를 찢어발기듯 쏘아지는 난폭한 공격에 놀 무리가 난도질당하기 시작했다.
수적 우위와 함께 행해진 포위 전술로 인해 이렇게 전투가 끝나는 듯했는데 고함 소리와 함께 11시 방향에서 새로운 몬스터가 나타났다.
"아우우우!"
"적이다."
"11시 방향이야."
새롭게 나타난 몬스터는 일명 늑대 인간으로 불리는 몬스터다.
"라이칸스로프?"
놈들은 갈대밭을 엄폐물로 삼아 두어 번 숨을 내쉴 짧은 시간에 바로 코앞으로 들이닥쳤다.
"아앗! 위험해. 마차를 지켜라."
"남작님을 지켜라."
선두에서 놀 무리를 도륙하던 팔라딘 제임스의 쩌렁쩌렁한 외침이 귀청을 파고드는 순간 나는 무극 대검을 머리 뒤쪽까지 올렸다가 앞으로 내렸다.
그 순간 무극 대검에서 폭발하는 굉음과 함께 검기 덩어리가 날아갔다.
-쾅!
"쿠오오오오!"
온몸에 상처를 입고 광분하던 라이칸스로프가 포효하며 재차 접근을 시도했으나 무극 대검에서 푸른 잔상이 생겨나는 순간 다량의 검기가 놈들을 베고 지나갔다.
그제야 살아남은 라이칸스로프들마저 고개를 떨어트리고 쓰러졌다.
"...!!"
"...!!"
위력을 확인한 탓인가!
날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졌다.
특히 팔라딘 제임스와 엔조 남작의 눈빛은 짙은 흥분으로 물들었다.
굳이 실력을 내보인 것은 바로 이러한 점 때문이다.
실력에 대해 자화자찬하는 것보다 적당한 기회가 왔을 때 이렇게 직접 보여 주는 것이 효과가 훨씬 뛰어나기 때문이다.
"특별히 주문한 수제 육포라네. 하나 먹어 보겠나?"
"네, 감사합니다."
덕분에 팔라딘 제임스는 이후부터 한층 친근해진 행동을 보였다.
손수 먹을 것도 건네주고 말이다....
그로부터 이틀 뒤,
우리는 갈라파고스 고원에 도착했다.
"주군을 뵈옵니다."
"어서 오게. 엔조 남작. 먼 길에 노고가 많았군."
우리가 도착했다는 말에 엔조 남작이 주군으로 모시는 뉴먼 백작이 친히 모습을 보였는데 그는 푸른 눈에 탐스러운 금발 머리를 지닌 백인으로 전형적인 유럽인이었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뉴먼 백작님."
"팔라딘 제임스. 반갑네. 날 위해 대전사로 출전해 주다니 그저 고맙다는 인사밖에 할 수 없군."
"아닙니다. 백작님. 엔조 남작님을 대신해 백작님을 도울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팔라딘 제임스가 앞으로 나서며 호기롭게 외쳤다.
"뉴먼 백작가의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하하하! 고맙네. 고마워."
이번엔 뉴먼 백작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뉴먼 백작님. 대전사로 참가하게 된 용병 청운이라고 합니다."
나는 얼굴에 미소를 띤 채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예를 취했다.
"용병 청운?"
뉴먼 백작이 고개를 갸웃하자 엔조 남작이 대화에 참여했다.
"팔라딘급 용병입니다. 대전사가 되기에 충분한 실력자죠."
"오오! 그렇군. 청운 경. 함께해 주셔서 고맙소."
"별말씀을요."
팔라딘급 용병이라는 말에 뉴먼 백작이 한층 환해진 표정으로 나를 예우해 주었다.
"제임스, 오랜만이네."
"클락? 자넨가?"
"그래. 이 친구야. 오랜만에 봐서 얼굴도 잊어버렸나?"
"하하하! 이게 대체 몇 년 만인가?"
"골드먼 자작가의 대전사로 누가 나올까?"
"고작 상인 집단인데 신경 쓸 필요가 있을까?"
"그래도 뭔가 이상해."
"저 친구는 누구지? 대전사라고 하던데."
"대검을 사용하나 보군. 무게가 상당하겠는데?"
"저걸 휘두른다고? 혹시 사기꾼 아니야?"
"이봐. 자네! 지금 엔조 남작의 눈을 의심하는 건가?"
"아니. 나이가 꽤 어려 보여서 말이야. 저 나이에 팔라딘급이라니 믿을 수가 있어야지."
"흠! 자네 말도 일리가 있군. 내가 이따 제임스 경에게 슬쩍 물어보겠네."
남자들이 조용하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는 말처럼 남자들의 수다 역시 엄청났다.
나는 아무것도 못 들은 척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며 뉴먼 백작의 대전사들을 살펴보았다.
그때 뉴먼 백작이 한 걸음 나서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먼 길에 노고가 많았소. 대전사 결투는 내일 낮에 시작될 예정이니 오늘은 마음껏 먹고 푹 쉬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백작님."
"감사합니다. 백작님."
변경백이 준비한 음식이라 그런지 규모부터 남다르다.
마침 시장이 반찬이라 배가 고팠는데 푸짐한 음식을 보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 어느덧 결전의 날이 다가왔다.
뉴먼 백작은 휘하 귀족과 그가 모은 대전사를 대동하고 이번 분쟁의 시발점인 갈라파고스 광산으로 향했다.
나 역시 백작의 뒤를 따랐는데 마치 관광을 나온 사람처럼 산보하듯 주변의 경관을 감상하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저자는 아주 여유 만만하군."
"흥! 실력에 자신이 있나 보지. 그래 봤자 용병이야. 그 실력이 어디 가겠어?"
"우리 발목이나 잡지 않았으면 좋겠네."
"이봐. 내가 제임스 경에게 물어봤는데, 진짜배기 실력자라고 얘기하더군."
"진짜?"
"그래. 사실이네."
"흠! 뭐 두고 보면 알겠지."
갈라파고스 광산이 눈앞에 나타나자 나에 대한 관심은 곧 사라지고 말았다.
대신 결투를 앞둔 대전사들의 얼굴에 비장한 눈빛이 서리기 시작했다.
"하하하. 어서 오십시오. 뉴먼 백작님."
"골드먼 자작. 자네가 먼저 도착했군. 오래 기다렸는가?"
"아닙니다. 저희도 조금 전에 왔습니다."
뉴먼 백작과 대화를 나누는 자가 골드먼 자작일 것이다.
양측이 사전에 약속했는지 병사들의 숫자마저 같았는데 이때 화려한 옷을 입고 콧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귀족이 말탄 왕국의 왕실을 상징하는 낙타 문양이 새겨진 금빛 플레이트를 착용한 기사들과 함께 걸어 나왔다.
"뉴먼 백작님, 골드먼 자작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반갑소, 파멜라 자작."
"반갑습니다. 파멜라 자작."
그는 이번 대전사 결투에 왕실을 대표해 공증인 자격으로 참석한 파멜라 자작이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간단한 목례로 인사를 대신한 파멜라 자작이 주위를 한 번 살펴보더니 골드먼 자작을 향해 물었다.
"골드먼 자작. 저들이 귀 영지에서 내세운 대전사인가요?"
"그렇습니다. 우리 골드먼 자작가의 주장이 합당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명예로운 전투에 나선 기사들이죠."
골드먼 자작의 소개가 끝나기 무섭게 열 명의 인물들이 천천히 앞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꿈에서조차 잊지 않았던 얼굴들이 저들 사이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선환, 황기택! 저... 저 새끼들이 어떻게 여기에!'
설마 골드먼 자작가가 대화 그룹이었단 말인가?
순간 오만 가지 생각과 함께 골드먼 자작가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골드먼 자작가]
1. 상인 가문으로 시작한 신흥 귀족(신빙성 97%)
2. 귀족파의 거두 아리스텔 후작가와 연관(신빙성 64%)
3. 현재 뉴먼 백작가와 갈라파고스 광산을 두고 대치 중(신빙성 99%)
4. 동대륙 출신이라는 소문이 있음(신빙성 37%)
5. 고리대금, 매점매석, 노예 매매 등의 소문이 있음(신빙성 51%)
6. 이방인일 가능성(신빙성 99%)
그러고 보니 대화 그룹 회장의 이름이 황금산이다.
골드먼 자작가는 그의 이름에서 따와 만든 것이 분명했다.
나는 재빨리 아공간에서 마스크를 꺼내 착용했다.
혹시라도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지구에 있는 가족이 위험했기 때문이다.
'개X끼들. 잘 만났다.'
처음엔 가볍게 생각한 의뢰였지만 이제는 꼭 이겨야 하는 필사적 승부가 되어 버렸다.
"비겁한 놈들 같으니."
"이 땅은 백작님의 영지가 분명한데 교묘하게 광산 주변을 매입했습니다."
"속이 빤히 보이는 수작질이군요."
뉴먼 백작 휘하의 귀족들이 골드먼 자작의 수작에 분통을 터뜨렸지만 뉴먼 백작이 주위를 환기시켰다.
"진정들 하게. 왕실이 허락한 이상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지 않나?"
"네. 잘 알고 있죠. 그래서 더욱 화가 납니다. 귀족파 놈들의 더러운 수작에 놀아나는 것 같아서요."
귀족들은 저마다 심란한 마음을 토로했지만 결국 그뿐이다.
왕실의 중재로 인해 대전사 결투로 판결이 났고 결론은 승자가 독식하는 것이다.
뉴먼 백작을 비롯해 지휘부는 대전사 순번을 짜느라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시작했고 난 오로지 한 가지만 원하고 있었다.
'선환아. 기택아. 날 만나기 전까지 제발 패하지 말아 다오. 부탁이다.'
잠시 후,
마침내 결전의 시간이 다가왔다.
모두가 결연한 표정으로 대진표를 바라보고 있었다.
"뉴먼 백작가의 대전사 콜트게이지 경, 골드먼 자작가의 대전사 벨홉 경."
파멜라 자작의 입에서 이름이 호명되는 순서대로 양 진영의 대전사들이 공터로 나아갔다.
"뉴먼 백작가의 대전사 제임스 경, 골드먼 자작가의 대전사 크라운 경."
"뉴먼 백작가의 대전사 스미스 경, 골드먼 자작가의 대전사 브라운 경."
"뉴먼 백작가의 대전사 청운 경, 골드먼 자작가의 대전사 코제트 경."
"뉴먼 백작가의 대전사 조슈아 경, 골드먼 자작가의 대전사 스콜세지 경."
대전사들의 이름이 호명되자 병사들 사이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는 법, 하물며 1,000명의 병사들이 모인 곳에서 응원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할 것이다.
"우와와와!! 스콜세지 경이다."
"철혈 기사! 철혈 기사 콜트케이지 경이다."
"기세가 대단한걸~."
"근데 청운은 누구지?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인데?"
"뭐 뻔하지. 대충 인원수나 맞추려고 나온 거겠지."
잠시 후,
나팔 소리와 함께 대전사들의 결투가 시작되었다.
"골드먼 자작가의 코제트다."
"뉴먼 백작가의 청운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향해 짧은 인사를 나눴다.
"보아하니 용병 같은데 몸 성히 돌아가고 싶으면 기권하는 게 어떤가?"
은근히 하수 취급하는 말투에 신경이 거슬렸지만 그저 조용히 웃어 주었다.
내게 겁을 주려는지 잔뜩 기세를 끌어 올린 모양인데 느껴지는 기운이 기껏해야 이류, 잘해 봐야 일류 무사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심판을 맡은 말탄 왕국의 기사가 깃발을 들어 올렸고 대전사 결투가 시작되었다.
"흥! 내 검을 원망하지 말도록!"
기사 코제트가 앞으로 팡 하고 튀어나와 기습적으로 검을 휘두르...려는데 미간을 구겼다.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는 순간 자신의 목이 돌아갔다는 것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쩌억!
바위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무너졌다.
"이, 이게...."
도무지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없는 상황.
뉴먼 백작가의 깃발이 올라가는 것을 끝으로 그는 결국 정신을 잃고 말았다.
사실 그가 잘못한 것은 없다.
만약 내가 일반적인 수준의 무인이었다면 이렇게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내겐 태극권이 있었다.
상대의 기습적인 선공은 좋았으나 태극권의 흡자결과 교묘하게 맞물리면서 그대로 끝이 난 것이었다.
"뉴먼 백작가의 청운 경, 승!"
원체 관심을 받지 못한 경기였기에 지켜보던 사람이 없었지만 결투가 시작된 지 불과 몇 초 만에 승부가 나자 소란(?)이 일어났다.
"뭐, 뭐야?"
"지금 어떻게 된 거야. 자네 봤어?"
"아니. 못 봤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맙소사! 검을 뽑지도 않았잖아?"
다만 가까이에 있던 병사가 결투를 목격한 모양이다.
"내가 봤는데...."
"봤는데?"
"그냥 주먹을 쥐고 앞으로 쓰윽...."
"앞으로 쓰윽?"
"그러고 끝이야. 그냥 그렇게 끝났어."
"뭐여! 그럼 코제트 경이 상대의 주먹으로 뛰어들었단 말이야? 왜?"
"그건 나도 모르지."
"코제트 새끼. 저거 그냥 무늬만 기사 아니야?"
하지만 격렬하게 이어지고 있는 대전사 전투에 방금 전의 일은 병사들의 뇌리에서 새까맣게 잊히고 말았다.
제49화
49화 악연의 연속(3)
두 번의 결투가 치러지는 동안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았다.
-[띠링, 아이버넌 검술을 경험했습니다. 소량의 경험치를 얻습니다.]
-[띠링, 포가든 검술을 경험했습니다. 소량의 경험치를 얻습니다. 검술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도가 높아집니다.]
"흐흐흐, 시스템아. 고맙다."
혼자서 키득대는 모습에 사람들이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그뿐이다.
어느 누구도 내게 다가오지 않았고 함부로 말을 건네지도 않았다.
그것은 바로 4강에 올랐기 때문이었다.
대전사 결투가 진행되는 동안 뉴먼 백작 진영의 표정은 점차 구겨지고 있었다.
승자보다 패자가 다수 발생했기 때문이다.
믿었던 대전사의 패배로 인해 망연자실한 표정이던 뉴먼 백작의 얼굴이 바뀌게 된 것은 바로 나 때문이었다.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던 용병 출신의 대전사가 무식한 크기의 대검을 들고 골드먼 자작가의 대전사를 상대로 연전연승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10분간 휴식을 취한 후, 결투를 속행하겠소."
왕실 공증인 파멜라 자작의 휴식 선언에 최후까지 살아남은 4명의 대전사들이 서로의 진영으로 돌아가 짧은 휴식을 취했다.
이때 붕대를 칭칭 감은 제임스 경이 내게 다가왔다.
"청운 경. 고맙네. 자네가 엔조 남작님의 명예를 지켜 줬어."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그는 바로 직전 경기에서 분투했으나 아쉽게도 패했다.
"염치없지만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리라 믿네. 이번 대결도 자신 있겠지?"
그가 뜨거운 눈빛을 보이며 묻자 나는 눈빛을 흔들며 힘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죄송하지만 이번에는 자신이 없네요."
"그, 그래?"
안타까워하는 제임스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질 자신이!"
"뭐? 하, 하하! 하하하하!!"
다시 얼굴이 펴진 팔라딘 제임스가 명랑한 웃음을 토해 냈다.
"알겠네. 난 자네만 믿겠네."
"믿으셔도 됩니다. 아니 절 믿으셔야 합니다."
난 내 승리가 당연하다는 듯 확언했다.
그것은 바로 이번 상대가 황기택이었기 때문이다.
안선환은 운이 좋았다. 전 경기에서 뉴먼 백작가의 기사에게 패했기 때문이다.
뭐 다음 기회가 있겠지.
잠시 후,
나팔 소리를 필두로 결투가 재개되었다.
"뉴먼 백작가의 청운 경, 골드먼 자작가의 크라운 경."
황기택이 당당하게 걸어 나왔다.
"이름이 청운이라. 엔조 남작가 출신이라 들었는데 이방인인가?"
"그런데?"
"말이 짧네."
"불만이면 너도 짧게 하면 되잖아."
"뭐?"
"너도 이방인 아니야? 서로 같은 처지에 내가 굳이 존댓말을 해야 하나?"
"...."
녀석의 눈썹이 휘어져 올라가는 것을 보아하니 기분이 상당히 언짢은 듯하다.
그런데 놈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흘러나왔다.
"두 배."
"뭐?"
"엔조 남작이 주기로 한 돈에서 정확히 두 배를 주지. 내가 이길 거지만 괜히 힘 빼기 싫거든. 다음 경기를 위해서 말이야. 어때?"
"거절하지."
"세 배."
"싫어."
"네 배. 아니! 다섯 배 주지. 참고로 이게 마지막 제안이야."
나는 녀석을 도발하기 위해 속삭이듯 말했다.
"X 까! 돈이면 다 되는 줄 아냐?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거야. 넌 그것도 모르냐? 이 병신아."
비웃음 섞인 욕설에 녀석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무, 뭐라고?"
"못 들었어? 다시 한번 말해 줄까? 이 병신아."
"이...런 개자식. 너 이 새끼 가만두지...."
-파지지직!
황기택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본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 줄기 무극 대검에서 시퍼런 빛이 솟구쳤기 때문이다.
"개소리 그만하고 덤벼."
"으...익! 죽여 버리겠다."
황기택의 검에서 강렬한 살광과 함께 날카로운 검기가 솟구쳤다.
그 살기가 어찌나 강력했는지 근처에 있던 말이 놀라 투레질을 했을 정도였는데 녀석의 검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무극 대검과 부딪쳤다.
-꽈꽈꽝!
황기택이 고함을 지르며 앞으로 뛰쳐나갔다.
"죽어라!"
녀석의 검에서 튀어나온 하나의 검기가 갑자기 여섯 개로 분열되며 상체와 하체를 파고들었다.
"허억!"
"위, 위험하다."
녀석의 입가에 승리의 미소가 번지는 찰나 요란하게 튕기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투다다다다당!
그것은 마치 총알이 철판을 때리는 소리와 같았는데 짧은 순간 60kg이나 되는 무극 대검을 이리저리 흔들며 여섯 방위로 날아오는 검기를 모조리 막아 낸 것이었다.
"우와아! 막아 냈다."
"마, 말도 안 돼. 엄청난 힘이야."
결투를 관람하던 사람들이 감탄을 토해 냈고 녀석 역시 크게 당황한 모습이다.
"재밌네. 또 없어?"
황기택은 내 질문에 어떤 대답도 없이 그저 미친 듯 검을 휘두르며 재차 스킬을 발동시켰다. 이따금씩 예상을 상회하는 마법이 섞여 나왔지만 애석하게도 나를 압도하기에 부족한 실력이었다.
"이게 끝이야? 점점 지루해지려는데?"
"아니... 이제 시작이다."
황기택은 내 질문에 살기 어린 눈빛을 보이더니 곧 뭔가를 결심한 듯 입술을 꽉 깨물었다. 뒤이어 녀석의 등 뒤로 암청색을 띤, 기분 나쁜 기운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응?!"
심장이 저릿저릿한 이 느낌.
사람들은 알 수 없었지만 현문정종의 무공을 익힌 나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황기택이 펼치는 것은 마공(魔功)이 분명했다.
"적하하마(赤霞蝦蟆), 핏빛 노을 속에 두꺼비."
순간 암청색 검기가 화살처럼 날아와 빗줄기처럼 퍼부어 댔다.
나는 제운종을 펼치는 동시에 무극 대검을 수평으로 세워 길게 휘둘렀다.
-쾅!
두 개의 검기가 중간에서 정확히 만나자 폭음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합마신공, 하마화개(蝦蟆花開)!"
개뿔!
100% 마공이 확실한데, 신공이란다.
아직 마공의 경지가 깊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가볍게 볼 수 없었다.
그것은 마공이 가지고 있는 그 특유의 성질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마공은 다른 무공에 비해 익히기 쉽고 위력 역시 배가된다.
하지만 그만큼 상위 경지로 올라가기 힘들고 주화입마에 빠지기 십상이어서 지구에서는 공식적으로 판매가 금지된 무공이었다.
"반권반장(半拳半掌)."
"태허무극심법, 태극검(太極劍)."
"뇌동하마(雷動蝦蟆)!!"
놈이 어떤 경로로 마공을 얻었는지 모르겠지만 태허무극심법 앞에선 무용지물이다.
-콰쾅!
"제길!"
황기택의 마공이 태허무극심법과 부딪치기 무섭게 녀석의 몸이 크게 한 번 휘청거리며 의지와 상관없이 뒤로 물러났다.
녀석의 표정이 굳어졌다. 본인 역시 느낀 것이다.
"잠하잠귀(潛蝦潛鬼)."
"태극검(太極劍)."
마기와 선기, 검기와 검기가 서로 얽히고설키며 대지를 사납게 찢어발겼다.
황기택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이리저리 날뛰었지만 애석하게도 상황을 반전시키지 못했다.
"큭!"
"읔!"
"...악!"
그때였다.
황기택의 눈빛이 달라졌다.
난 녀석이 승부수를 던지려 한다는 생각을 정확하게 읽어 냈다.
"합마공! 하마낙일(蝦蟆落日) 두꺼비가 해를 떨군다."
순간 황기택의 머리 위로 두꺼비 형상을 띤 암청색 기운이 모습을 드러냈고 나 역시 무극 대검을 하늘 위로 들어 올렸다.
"양(陽)은 태양(太陽), 소음(小陰)으로 나누어지고 음(陰)은 소양(小陽), 태음(太陰)으로 나누어진다. 그 네 가지를 사상(四象)이라 한다. 사상은 곧 건과 곤이요, 건과 곤이 곧 태극이다."
-콰콰콰쾅!!
거대한 폭음과 함께 황기택의 신형이 뒤로 날아갔다.
뒤이어 골드먼 자작의 괴성이 들려왔다.
"기택아. 기택아. 정신 차려. 정신 차려라. 구스만! 구스만! 어디 있는가!"
"네. 자작님."
골드먼 자작의 고성에 로브를 뒤집어쓴 사내가 나타났다.
"구스만, 내 아들을 치료해 주게. 어서!!"
"알겠습니다. 자작님."
골드먼 자작이 상급 포션을 건네자 구스만이 황기택의 입에 한 병을 통째로 부었고 다른 한 병은 태극검에 의해 난자된 황기택의 상처 부위에 골고루 뿌렸다.
-부글부글!
"힐(Heal), 힐(Heal)! 그레이트 힐(Great Heal)!"
포션을 이용한 마법사의 치료에 황기택의 혈색이 눈에 띄게 좋아지기 시작했다.
상급 포션은 부르는 게 값이라고 들었는데, 그것도 두 병이나 가지고 있을 줄 몰랐다.
각설하고 녀석을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순간 허탈했다.
놈을 단번에 끝장내기엔 아무래도 힘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골드먼 자작님. 위험한 고비를 넘겼습니다. 하지만 상처가 워낙 커서 적어도 한 달은 요양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한 달이나? 상급 포션을 사용했음에도 말인가?"
"죄송합니다."
"알...겠네. 그리고 수고했네."
마법사가 뒤로 물러가자 골드먼 자작이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나를 노려봤다.
"감히 내 아들을 이렇게 만들다니! 네놈은 누구냐?"
"보시다시피 뉴먼 백작님의 대전사."
"이놈! 내가 묻는 것이 그게 아님을 알고 있을 텐데!"
"잘 알지. 근데 뭐! 어쩌라고?"
"이놈!!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그따위 망발이냐!"
골드먼 자작이 노기를 참지 못해 고함을 내지르자 뉴먼 백작이 나섰다.
그는 노인네 특유의 느물거리는 말투로 자작의 성질을 살살 긁었다.
"골드먼 자작. 지금 뭐 하는 짓인가? 미천한 상인 가문 출신이라 그런 것인가? 자작은 귀족으로서의 자각이 부족한 것 같군. 생사가 오고 가는 신성한 대전사 결투에서 승자에게 경의를 표하지 못할망정 자식이 패했다고 이렇게 겁박하다니 말이야. 그렇지 않은가요, 파멜라 자작?"
뉴먼 백작의 말에 파멜라 자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백작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으이익!"
골드먼 자작의 얼굴이 괴물처럼 구겨졌지만 상황이 이러하니 어떠한 대답도 하지 못했다. 대신 이번 일의 원흉이라 할 수 있는 내게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보아하니 이방인 같은데 오늘의 수모를 결코 잊지 않겠다. 내가 가진 힘을 다해 네놈이 누군지 알아낸 후 네놈을 찾아 살과 뼈를 가르고...."
"개소리하고 자빠졌네."
더는 들어 줄 이유가 없어 가운뎃손가락을 조용히 들어 주었다.
골드먼 자작, 아니 대화 그룹의 주인이 언제 이런 대접을 받아 봤을까?
"끄아아아!!"
나는 분노에 찬 그의 괴성을 뒤로하고 뉴먼 백작가의 진영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어 병사들의 우레와 같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준결승전에서 골드먼 자작 측에게 승리를 거둔 것은 물론 그의 차남을 완전히 박살 내 버렸기 때문이다.
뉴먼 백작과 엔조 남작이 다가와 격렬한 축하를 표했다.
그들은 감격에 찬 표정으로 다가와 예상치 못한 이방인의 승리에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했다. 특히 이번 대전사 결투의 당사자라 할 수 있는 뉴먼 백작은 결승전과 상관없이 내 선전에 감동해 가문의 보물 창고를 열어 주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제50화
50화 두 번째 귀환
이제 마지막 결승전이다.
파멜라 자작의 소개에 골드먼 자작가의 마지막 대전사가 앞으로 나왔다.
"뉴먼 백작가의 청운 경과 골드먼 자작가의 슈라이언 경은 앞으로 나오시오."
슈라이언 경이 앞으로 나왔다.
얼굴 전체를 가리고 있는 투구만 아니라면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눈빛이다.
솔직히 말해 무공이 높아 보이지 않았다.
곳곳이 허점투성이다. 하지만 안력을 집중해 보니 어느 순간부터 그에게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알 수 있었다.
슈라이언, 저자는 강자가 분명했다.
"자네, 이방인 맞지? 이전의 결투를 지켜봤는데 꽤 흥미롭더군."
목소리를 들어 보니 그는 40대 남성으로 추정되었다.
"뭐가 말입니까?"
"응. 검도 검이지만 주먹도 잘 쓰는 것 같아서 말이야. 두 번째 결투에서 사용한 건 자네 세계의 권술(拳術)이었나?"
정확히 말하자면 무림의 무공이었지만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다.
"뭐, 비슷합니다만."
"그렇군. 굉장히 인상적이었네."
그는 퍽이나 궁금한 게 많아 보였다.
"계속 말만 할 건가요?"
"하하하! 이것 참 미안하군. 궁금한 게 있다 보니 내가 말이 많았어. 그럼 지금이라도 시작해 볼까?"
"그러시죠."
"좋아, 그럼 첫 공격은 주먹으로 시작하겠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주먹이 날아왔다.
'뭐야? 이 미친 속도는....'
나는 왼편으로 몸을 틀어 그의 주먹을 피하면서 몸을 180도로 회전해 그의 등판을 후려쳤다. 아니! 후려칠 뻔했다.
그의 신형이 번쩍하며 움직이는 동시에 내 왼쪽 가슴을 향해 섬전과 같은 일초가 날아오지 않았다면 말이다.
퍽! 퍽! 퍼퍼퍽!
순간 주먹과 주먹이 요란하게 부딪치며 공기주머니가 찢어지는 소리를 토해 냈다.
"훌륭해! 매우 훌륭한 권술이야."
그가 감탄하며 칭찬했지만 나 역시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비록 초식에 있어서는 내가 앞섰지만 끊임없이 용솟음쳐 오르는 힘이 날 압도했기 때문이다.
아틀란티스 대륙에 도착한 이래 오늘에야 처음으로 강적을 만난 것 같다.
"역시 대단하군. 이제 몸풀기는 끝난 것 같으니 본격적으로 놀아 볼까?"
슈라이어의 기세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의 몸에서 쉬쉬거리는 소리와 함께 '뚜두뚝' 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더니 몸 주위의 공기마저 미세하게 진동했다.
난 한 치의 방심도 없이 태극권을 끌어냈다.
순식간에 10여 합이 지나갔고 어느새 양 손바닥에 식은땀이 맺혔다.
"태극권, 금계독립(金鷄獨立)."
"댄싱 나이트!"
"태극권, 수휘비파(手揮琵琶)."
순간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슈라이어의 몸이 태극권 특유의 와류에 휩쓸려 찰나에 불과하지만 중심을 잃은 것이다.
나는 재빨리 주먹을 날렸다.
퍼억!
태극권에 일격을 허용한 그가 거의 5미터 가까이 뒤로 날아갔다.
하지만 그의 몸은 땅에 철퍼덕 뻗자마자 마치 스프링처럼 튕겨 올랐다.
"제길!"
그 순간 공격에 성공했지만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태극권에 가격당하는 순간 절묘하게 상체를 뒤로 움직여 충격을 감소시킨 것이다.
하지만 성과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태극권의 권경에 그의 투구가 반파되어 서양인 특유의 오뚝한 콧날이 드러나고 말았다.
"그렇군. 역시 주먹으론 무린가? 대신 이제부턴 검으로 놀아 볼까 하는데. 어떤가?"
그는 여유가 넘치는 모습으로 내게 말했다.
"선공을 양보하지."
"사...양치 않겠습니다."
나는 숨을 고르며 무극 대검을 손에 잡았다.
그리고 낭랑한 기합성과 함께 앞으로 검을 날렸다.
"태극검!"
무극 대검에서 발생한 부드러운 미풍이 폭풍 같은 기세로 변하며 전방을 쓸어 나갔다.
"좋구나."
감탄 섞인 음성과 함께 슈라이어의 반격이 이어졌다.
그의 검은 무질서하면서도 광포하게 움직였다.
"월광야수검!"
콰앙!
공기를 가르며 오가는 검광 속에서 두 개의 검이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열기는 전장을 뜨겁게 달궜고 날 흥분케 했다.
그의 검은 정교했고 또 날카로웠다.
"하하하하! 어디 이번에도 막아 낼 수 있는지 볼까!"
기분 좋게 웃던 그의 웃음이 끝나는 순간 은은하게 빛나던 검기가 야수와 같은 흉포한 모습으로 전신을 향해 날아들었다.
"대단하다."
"저자는 대체 누구지?"
각각의 검기마다 커다란 위력이 담겨 있었으므로 하나라도 놓치면 안 될 것 같았다. 나는 서둘러 무극 대검을 꽉 부여잡고 풍차처럼 맹렬히 회전시켰다.
붕붕붕붕붕! 퍼퍼퍼퍼퍼퍼펑!
무극 대검에서 검막이 생성되자 포탄 터지는 소리와 함께 슈라이어의 검기가 우수수 밑으로 떨어졌다.
월광(月光紫白), 달빛이 꽃비처럼 떨어져 내리는 모습이 실로 가관이었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곧 패배로 이어질 것 같아 나 역시 온 힘을 다해 반격했다.
슈라이어가 신이 나서 소리쳤다.
"훌륭해! 훌륭한 검술이야."
적으로 만났지만 그의 무공은 진짜배기였다.
빈틈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순간적으로 빈틈을 만들어 내는 실력은 가히 일절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검기와 검기의 위력이 미치는 범위가 점점 넓어지자 사람들은 한 발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뉴먼 백작의 노성이 터져 나왔다.
"멈추시오."
백작은 노기 서린 목소리로 좌중을 향해 외쳤다.
"대결을 멈추시오. 이 결투는 무효요."
파멜라 자작이 흠칫하더니 급히 물었다.
"결투가 무효라뇨,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파멜라 자작은 저 얼굴이 안 보이시오?"
"얼굴이요?"
"그렇소."
-웅성웅성!!
격렬한 결투 탓인가?
슈라이어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투구가 완전히 벗겨져 있다.
"그는 바로 패터 슈라이어 자작이오."
"뭐, 패터 슈라이어 자작?"
"어? 마, 맞네."
"그러게. 저 얼굴은 패터 슈라이어 자작이 분명해."
"이런 젠장! 저자가 여기에 왜 있어?"
잠시 결투가 중지되었다.
"이보시오. 골드먼 자작, 이것은 당신과 나의 결투요. 신성한 결투에 어찌 아리스텔 후작가의 패터 슈라이어 자작이 나올 수 있단 말이오?"
생각지도 못한 인물의 등장에 뉴먼 백작이 울분을 토해 냈다.
"패터 슈라이어 자작이 누구죠?"
"아리스텔 후작가의 기사단장이네."
"후작가의 기사단장?"
"그래. 그리고 슈라이어 자작은 소드 마스터에 근접했다고 알려진 최상급 팔라딘이고."
"아!"
나는 그제야 뉴먼 백작의 분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번 영지전은 어디까지나 뉴먼 백작가와 골드먼 자작가의 싸움이다.
그런데 아리스텔 후작가의 기사단장이 나서는 것은 명백한 위반이었기 때문이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왕실 공증인인 파멜라 자작 역시 골드먼 자작에게 해명을 요구했다.
"인정하오. 그는 패터 슈라이어 자작이 맞소. 하지만 그는 본 영주의 사위기도 하오. 즉 우리는 가족이란 말이오. 여기 혼인증명서요. 직계 가족의 출전은 괜찮은 걸로 알고 있는데, 그렇지 않소?"
골드먼 자작은 득의만만한 표정으로 혼인 증명서를 내놨고 증명서를 확인한 뉴먼 백작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상식적으로 왕국의 귀족이 소리 소문 없이 결혼한다는 것이 이해되는가?
이것은 저 여우 같은 골드먼 자작과 귀족파의 거두 아리스텔 후작이 내통한 것이 틀림없었다.
"이, 이런!!"
양 진영의 온도 차가 확실했다.
누가 봐도 억지가 분명했지만 증명서의 존재로 인해 법적인 문제가 없었다.
뜻하지 않았지만 잠시 소강상태가 이어지며 뉴먼 백작이 체념한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청운 경, 미안하네. 일이 이렇게 된 것은 자네 잘못이 아니니 원한다면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나도 되네."
"...!"
엔조 테이 남작도 그랬지만 이 할아버지도 참 괜찮은 사람이다.
젠장! 그래서 오히려 난감했다.
저 재수 없는 황기택 일가의 계획에 고춧가루를 뿌려 주고 싶었으니까 말이다.
어찌할 바 갈피를 못 잡는 순간, 예상치 못한 음성이 귓가에 들려왔다.
-[띠링, 분신 스킬의 복구율이 10%를 달성하였습니다. 지금 합일하시겠습니까?]
방금 해결책이 생겼다.
* * *
'오랜만이네.'
'응. 오랜만이야.'
'많이 컸는데?'
'당연하지. 벌써 몇 년이 지났다고~.'
'하긴 무림과 이쪽은 시간의 흐름이 다르니까. 어때 그동안 많이 발전했어?'
'후후후! 그건 내가 할 소린데?'
서로가 서로를 향해 미소 짓는 순간 우리는 하나가 되었다.
<상태 창>
이름 : 최선우(지구)
레벨 : 112
고유 특성 : 분신(Unique)
칭호 : 지혜로운 자, 오크 살육자
생명력 : 2,500/2,500 마력 : 1,500/1,500
힘 : 220 체력 : 250 민첩 : 220
지혜 : 100 지능 : 105 행운 : 10
명성 : 50 악명 : 0 매력 : 20
보너스 스탯 : 145
+
<상태 창>
이름 : 주선우
레벨 : 80
고유 특성 : 분신(Unique) *사용 불가
칭호 : 현자, 오크 살육자
생명력 : 5,000/5,000 마력 : 5,500/5,500
힘 : 150 체력 : 170 민첩 : 200
지혜 : 135 지능 : 190 행운 : 10 매력 : 20
보너스 스탯 : 0
서로의 기억과,
서로의 경험과,
서로의 상태 창이 기가 막히게 합쳐졌다.
<상태 창>
이름 : 최선우
레벨 : 152(112+40)
고유 특성 : 분신(Unique) *사용 불가
칭호 : 현자, 오크 살육자
생명력 : 6,250/6,250(5,000+1,250)
마력 : 6,250/6,250(5,500+750)
힘 : 295(220+75) 체력 : 335(250+85)
민첩 : 320(220+100) 지혜 : 185(135+50)
지능 : 243(190+53) 행운 : 15(10+5)
명성 : 50 악명 : 0 매력 : 30(20+10)
보너스 스탯 : 145
이거야. 바로 이 맛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숫자의 향연인가!
레벨만 보면 C급이지만 A급 헌터와 대등한 스탯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추정에 불과하지만 만약 S급 헌터와 겨루게 된다고 해도 일방적으로 밀리지 않을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그리고 놀랄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위의 변화가 외적인 성장이었다면 이번엔 내적인 성장이다.
지구의 나와 무림의 내가 합쳐지면서 태극권과 태극검의 탄(彈), 흡(吸), 방(防), 벽(壁), 파(破) 구결과 제운종(梯雲從)을 얻었음은 물론 각각의 경험과 깨달음이 더해져 태허무극심법 역시 한 단계 성장해 버린 것이다.
-[띠링, 태허무극심법이 4단계에 올랐습니다.]
1단계 인(人)의 단계 : 인간이란
2단계 지(地)의 단계 : 땅을 밟고 서서
3단계 천(天)의 단계 : 하늘을 바라보고
4단계 합(合)의 단계 : 화경에 이르면
5단계 향(香)의 단계 : 강기가 모든 것을 소멸하고
6단계 광(光)의 단계 : 상단전이 열리면
7단계 성(成)의 단계 : 현묘한 기운이 일어나니
8단계 극(極)의 단계 : 인세에 적수를 찾기 어려운 현묘한 경지는
9단계 태허(太虛)의 단계 : 생과 사를 주관하고
10단계 무극(無極)의 단계 : 우주의 근원인 태극으로 돌아간다.
그로 인해....
-[띠링, 칭호 화경의 고수를 얻었습니다.]
-[띠링, 레벨이 오릅니다.]
-[띠링, 레벨이 오릅니다.]
-[띠링, 레벨이 오릅니다.]
-[띠링, 레벨이 오릅니다.]
-[띠링, 레벨이 오릅니다.]
-[띠링, 레벨이 오릅니다.]
-[띠링, 레벨이 오릅니다.]
-[띠링, 레벨이 오릅니다.]
-[띠링, 레벨이 오릅니다.]
-[띠링, 레벨이 오릅니다.]
크하하하!
나도 모르게 기쁨의 괴성이 터져 나왔다.
"청운 경, 무슨 일인가?"
마차 밖에 있던 제임스 경이 웃음소리에 놀라 물었다.
나는 재빨리 괜찮다고 답했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볼일은 다 봤는가?"
"네. 지금 나갑니다."
나는 태연한 모습으로 마차에서 걸어 나왔다.
제51화
51화 소드 마스터의 탄생
"골드먼 자작님. 제가 방금 알아왔는데 저 청운이라는 자는 엔조 남작이 데리고 온 B급 용병이라 합니다."
"B급 용병?"
"젊은 놈이 생각 이상의 실력을 지녔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패터 슈라이어 자작께서는 최상급 팔라딘입니다. 겨우 B급 따위 용병에게 패할 리가 없습니다."
"맞습니다. 자작님."
골드먼 자작은 수하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엔조 남작이 구해 온 이방인 용병이 예상외의 실력을 가졌지만 결국 슈라이어 자작이 승리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가슴속에서 피어나고 있는 이 불안감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이때 그의 상념을 깨는 음성이 들려왔다.
"양측의 합의에 따라 뉴먼 백작가와 골드먼 자작가의 결승전을 다시 시작하도록 하겠소."
그것은 결투를 재개한다는 파멜라 자작의 선언이었고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동시에 검을 날렸다.
콰콰쾅!
"허?"
"슈라이어 자작의 공격을 막아 내?"
단숨에 박살 날 것이란 예상을 뒤엎고 격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무극 대검에서 기이한 흡입력이 발생해 슈라이어의 검을 쑥 하고 빨아 당기자 그가 깜짝 놀라서 급히 방향을 틀었다.
세상에는 기이한 검술이 종종 있었지만 이렇게 강력한 흡입력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방금 그건 무슨 검술이지?"
"태극검, 흡자결이오."
"흡(吸)...자결이라, 여태껏 들어 본 적이 없는 검술이군."
나는 그의 말에 희미한 미소를 보이며 답했다.
"무려 천 년을 이어 온 검술이오."
"...!!"
나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태극검의 흡(吸), 탄(彈), 방(防), 벽(壁), 파(破) 구결을 확인해 보듯 펼쳐 보이기 시작했다.
"태극검 흡(吸), 부드러운 바람은 회오리가 되어."
"월광야수검, 달빛에 서린 야수의 포효."
"태극검 탄(彈), 하나의 탄환처럼 날아가."
"이익. 월광야수검 오의(奧義), 달빛을 먹은 야수."
"태극검 방(防), 견고한 태극은 적의 공격을 막아 내고."
-콰콰콰콰쾅!
"퉤!"
슈라이어 자작이 가슴의 탁한 기운을 뱉어 냈다.
사람들은 그가 뱉어 낸 덩어리에서 검붉은 피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저게 어떻게 된 일이지?"
"슈라이어 자작이 밀리는 것 같은데?"
"말도 안 돼."
"용병 따위가 저렇게 강할 리 없어."
바야흐로 대결의 양상이 사람들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자 골드먼 자작가에 커다란 동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훌륭하군. 방금 그건 이름이 뭔가?"
"태극검 방(防)자결이었습니다. 조심하십시오. 이번에는 파(破)자결입니다."
우우우웅!
무극 대검이 긴 검명을 토해 내며 한 줄기 시퍼런 빛 무리가 나타나 무극을 휘감았다. 슈라이어 자작은 그 모습에 위기감을 느꼈는지 심각한 얼굴로 검을 고쳐 잡았다.
"태극검 파(破), 내 앞을 가로막은 모든 것을 무너뜨린다."
"월광야수검 극의(極意), 달빛이여 현신하라."
-콰콰콰콰콰콰쾅!
천지가 터져 나갈 폭음과 함께 시리도록 푸른 유형의 기운이 솟구쳐 패터 슈라이어 자작을 강타했다. 순간적으로 검을 쥐고 있던 슈라이어 자작의 손이 팔목은 물론 어깨까지 터져 나갔고 이와 같은 광경에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오, 오러 블레이드."
슈라이어 자작이 불안한 자세를 힘겹게 버티며 물었다.
"소, 소드 마스...터...였소?"
"그렇소."
"마스터(Master)와 겨뤄 보다니 영...광. 컥!"
슈라이어 자작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한 채 그 자리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마지막 일격에 손속에 인정을 두지 않았다면 슈라이어 자작은 그의 좌수가 아니라 몸통이 두 동강 났을 것이다.
비록 적이지만 그의 성정이 그를 살린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이럴 순 없어...."
골드먼 자작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큰 충격을 받은 모습으로 전신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소드 마스터가 어떤 존재인가?
전장을 지배하는 일인 군단이자 인간의 경지를 넘은 절대자다.
말탄 왕국은 물론 저 강대하다고 알려진 제국에서도 양손에 꼽을 정도였다.
나는 오연한 자세로 좌중을 쓸어 본 후, 손에서 서서히 무극 대검을 내려놓았다.
-[띠링, 아리스텔 후작가의 기사단장 패터 슈라이어에게 승리했습니다.]
-[대량의 명성을 얻었습니다.]
다음 순간,
뉴먼 백작가 진영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우와아아! 우리가 이겼다."
"청운 경이 이겼다. 새로운 마스터의 출현이다."
"뉴먼 백작가의 승리다. 만세!"
"만세! 만세! 뉴먼 백작가 만세~!"
* * *
골드먼 자작가의 분위기는 완전히 초상집 분위기였다.
기사들의 패배도 믿어지지 않았지만 최상급 팔라딘인 슈라이어 경마저 패배하자 아주 기가 찬 표정이었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치료가 효과가 있었나 보다.
어느새 정신을 차린 황기택이 골드먼 자작에게 다가와 고개를 푹 숙였다.
골드먼 자작은 머리를 조아리는 그의 아들을 보며 나직이 말했다.
"몸은... 좀 어떠냐?"
"이제 괜찮습니다."
"그럼 됐다. 자책할 필요 없어. 이번 일은 네 탓이 아니야.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에게 잘못이 있다."
골드먼 자작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을 이어 나갔다.
"소드 마스터의 출현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으니까 말이야."
"그렇지만...."
황기택 역시 아버지의 말이 옳다는 것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패배로 인해 골드먼 가문이 큰 피해를 보았다는 사실에 누구보다 화가 났다.
"그것보다 소드 마스터면 S급 헌터가 분명한데, 대체 누굴까?"
"당장 알아보겠습니다."
"어떻게?"
"우선 미행을 붙이겠습니다. 그리고 돈이 얼마가 들더라도 정보상인에게 의뢰해 기필코 알아내고야 말겠습니다."
"아니, 그건 쓸데없는 짓이야. 그런 실력자에게 함부로 미행을 붙였다가 들키기라도 한다면 완전히 적이 될 수 있어."
"그 말씀은?"
"이번 일은 단지 뉴먼 백작의 운이 좋았을 뿐이야. 비록 첫 만남이 악연으로 시작됐지만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되는 세상이야. 관계는 늘 변하기 마련이지."
"그럼 어떻게 할까요?"
"이번 대전사 결투로 인해 말탄 왕국에 새로운 마스터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진동할 것이야. 그럼 어중이떠중이들이 그를 영입하기 위해 몰려들 거고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결국 그에 대한 정보가 조금씩 풀릴 거야. 일단 동선(動線)만 확인하는 선에서 의뢰를 넣고 상황을 좀 더 지켜보도록 하자."
"알겠습니다. 아버지."
이와 같은 시각,
나는 뉴먼 백작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그의 영지로 돌아왔다.
이미 골드먼 자작가와의 결투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이 영지 곳곳에 전해져 사람들이 거리를 가득 채운 상태였다.
"와! 영주님이시다."
"승리의 나팔을 울려라."
-빠빰~ 빠빰! 빠빰! 빠~빠암~~~~!!
나팔 소리를 시작으로 사람들의 환호성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기사님~~ 사랑해요."
"오빠~."
"기사님, 저와 결혼해 주세요."
"이봐요. 아저씨는 남자잖아요."
"험험! 장난일세. 너무 기분이 좋아서 말이야."
"꺄악! 기사님이 날 봤어."
"이년아. 날 본 거거든."
천지 사방에서 들려오는 환호성.
이 맛에 고대부터 전투에서 승전한 군인들이 승전 퍼레이드를 하는 것 같았다.
나를 비롯해 대전사 결투에 참여했던 병사들까지 모두 가슴을 떡 하고 세우며 행진했다.
뉴먼 백작 역시 이번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앞으로 일주일 동안 축제를 열겠다고 선포했고 이에 사람들이 더욱 크게 열광했다.
-두두두두두!!
화려하게 치장된 마차가 뉴먼 백작가를 향해 맹렬히 질주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저런 마차가 한두 대가 아니라는 점이다.
십여 대에 이르는 마차들이 관도를 내달리고 있었다.
뉴먼 백작가의 승리를 자축하는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말탄 왕국의 귀족들이 떼로 몰려오는 것이었다.
"이게 뭐야! 음식 맛이 왜 이래?"
"죄, 죄송합니다."
"내가 그렇게 조심하라고 했건만 완전 엉망이잖아. 백작님의 명예를 떨어뜨릴 생각이야? 빨리 다시 만들어."
"예, 주방장님. 다시 하겠습니다."
상대 남자는 굽실거리면서 그 자리를 떠났다.
"에이! 이놈이나 저놈이나 제대로 하는 놈이 없군."
이때 주방의 문에 열리면서 한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남색으로 장식된 옷을 입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집사님."
"오늘 저녁 연회 준비는 잘돼 가나?"
"네, 차질 없이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래야지, 절대 실수가 있어선 안 돼! 자네가 직접 체크하도록 하게."
"예, 완벽하게 일을 마무리하겠습니다."
대전사 결투의 승리를 축하하는 연회다.
수십 명의 귀족이, 그들과 동행하는 이들까지 포함하면 최소 수백 명의 사람들이 참석하는 파티였기에 집사는 더욱 신경을 썼다.
그리고 이날 저녁,
뉴먼 백작가에서 주최하는 파티에 수많은 고위 귀족들과 유력 인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빰빰빰~~ 빠빠빰~~
흥이 깨질세라 악대는 끊임없이 음악을 연주했고 각각의 테이블에는 맛있는 음식과 음료가 쉴 새 없이 나왔다.
"와인입니다."
"여기 뉴먼 백작령이 자랑하는 롤랑입니다. 맛을 보시면 깜짝 놀라실 겁니다."
사람들이 음악에 취해 그리고 음식에 취해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는 사이 몇몇 귀족들이 내게 다가왔다.
"청운 경, 반갑소이다. 나는...."
"듣기로 아직 총각이라던데 혹시 내 딸과...."
"용병 출신이라 들었는데 소드 마스터라니, 정말 대단하오."
"나는 돈텔만 뷰익 자작이오. 이쪽은 내 둘째 딸이오. 자! 청운 경에게 인사하거라."
"네. 아버님. 안녕하세요. 전 코스코 뷰익이에요."
특히 딸을 가진 귀족들은 내 의사에 상관없이 다짜고짜 딸을 들이밀었다.
젊은 남자, 더욱이 가문이 없는 용병 출신의 소드 마스터가 출현했기 때문이다.
나를 사위로 맞이한다면 로또에 당첨되는 것과 같았기에 딸을 가진 귀족들이 너도나도 달려들었다.
"아, 네. 그렇군요."
"네. 네.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다음에 또 뵙죠.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식은땀이 났다.
차라리 검을 들고 싸우는 게 나을 것 같다.
내 취향과는 전혀 반대인 여인들이 대놓고 들이대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곤욕이었다. 오히려 저쪽에서 귀족의 시중을 들고 있는 하녀들이 21C 사고를 가지고 있는 내 취향에 맞았다.
언제쯤이면 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렇게 파티가 무르익을 무렵, 문지기가 소리쳤다.
그것은 왕국의 고위 귀족이 도착했음을 알리는 외침이었다.
"아리스텔 후작님과 셋째 영애께서 도착하셨습니다."
귀족파를 이끌고 있는 3인방 중 한 명이자 7서클 마도사인 아리스텔 후작이 입장하자 소란스럽던 연회장이 일순 조용해졌다.
'흐음! 저자가 바로 꼼수를 부려 골드먼 자작에게 휘하 기사단장을 보낸 자로군.'
나도 모르게 후작에게 시선을 향했다.
이때 상석에 있던 뉴먼 백작이 후작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십시오. 아리스텔 후작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러게 말이오. 뉴면 백작은 잘 지내셨소?"
"네, 신경 써 주신 덕에 잘 지냈습니다."
"골드먼 자작과의 분쟁이 잘 해결되었다고 들었소. 승리를 축하하오."
"감사합니다. 한데 후작님의...."
"혹시 슈라이어 경 얘기를 하려는 것이오?"
"...네."
"그 문제라면 나도 들었소. 부디 오해가 없었으면 좋겠소."
"네, 네. 물론 그렇겠죠."
"...."
"...."
서로가 서로를 향해 웃고 있지만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것 같다.
"뉴먼 백작, 혹시 저자가 소문의 마스터요?"
"그렇습니다. 후작님."
아리스텔 후작의 시선이 나를 향했을 때,
또다시 문지기의 커다란 외침이 들려왔다.
"말탄 왕국의 마르쿠스 공작님이 도착하셨습니다."
마르쿠스 공작이 연회장에 나타나자 다수의 귀족들이 그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마르쿠스 공작 각하, 인사드립니다. 한센 자작입니다."
"오! 한센 자작 오랜만이군."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작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자넨 퓨리 남작이로군. 잘 있었나?"
"공작 각하, 절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하하하! 당연하지. 자네와 함께 전장을 누비며 아스란 사막을 가로지르던 날이 새록새록 떠오르는군."
"벌써 10년도 더 된 일인데, 그걸 기억하고 계셨군요."
퓨리 남작의 눈가에 감동의 빛이 서렸다.
제52화
52화 연회장에서 생긴 일
"마르쿠스 공작님. 어서 오십시오. 소인의 누추한 집에 두 분께서 직접 왕림해 주시다니, 무한한 영광입니다."
"뉴먼 백작의 파티에 내가 빠질 수 없지. 더욱이 짜릿한 승리를 거두지 않았는가? 당연히 축하를 해 줘야지. 안 그런가? 하하하하!"
마르쿠스 공작이 기분이 좋다는 듯, 호탕하게 웃어 댔다.
이익은 둘째 치고 자신과 같은 파벌에 속해 있는 뉴먼 백작이 귀족파의 콧대를 완전히 꺾어 놨기 때문이다.
"소문의 주인공은 어디에 있는가?"
"저쪽에 있습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뉴먼 백작이 마르쿠스 공작을 대동하고 내게 다가왔다.
"청운 경. 인사드리게. 말탄 왕국이 자랑하는 소드 마스터 마르쿠스 공작님일세."
나는 간단하게 예를 차리며 인사했다.
"마르쿠스 공작님을 뵙습니다. 용병 청운입니다."
"하하하! 자네가 바로 혜성처럼 나타난 소문의 주인공이로군. 나 역시 반갑네."
마르쿠스 공작이 호의가 가득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외형상 50대로 보였는데 마스터의 경지에 올라 육체가 재구성된 것 같았다.
"내가 비록 일국의 공작이나 나 역시 검의 길을 걷고 있는 한 사람의 무인이네. 자네를 보니 가까운 시일 내에 검을 나누고 싶군."
"제가 어찌 공작님의 상대가 될 수 있겠습니까."
겸손하게 대답했지만 나 역시 그가 풍겨 내고 있는 심상치 않은 기세에 호승심을 느끼고 있었다. 만약 이곳이 연회장이 아닌 연무장이었다면 우리는 지금 검을 나누고 있을지도 몰랐다.
"청운 경은 혹시 귀화할 생각이 있는가? 아니! 결혼은 했는가?"
"결혼이요?"
어찌 된 게 만나는 귀족마다 결혼이라는 카드를 꺼내 드는 걸까?
인재를 원하는 공작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지만 사랑이 없는 결혼은 사양한다.
"하긴 자네 정도 실력자라면 결혼을 했어도 상관없네. 귀족 사회에서 일부다처제는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첩만 아니면 되지. 언제 시간 한번 내주게. 우리 집에 초대하지. 내게 말이야 아주 예쁜 손녀가 하나 있는데 말이야. 이름은 에밀리아 에스테반 마르쿠스라네. 성격이 좀 왈가닥이지만 날 닮아 아주 예쁘지."
"아, 아... 네."
저 사자 같은 마르쿠스 공작의 외모를 닮았다니 그나마 남아 있던 관심조차 사라졌다.
"네. 기회가 되면 공작님의 초대에 응하겠습니다."
난 영혼 없이 대답하며 일단 위기를 모면했다.
이때 검은 벨벳의 정장을 입은 귀족이 다가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마르쿠스 공작님."
"그래. 오랜만이군. 아리스텔 후작."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남자.
귀족파의 거두 아리스텔 후작이 한 여인과 함께 등장했다.
"마르쿠스 공작님께 인사드립니다."
175cm 이상의 키에 오뚝한 콧날, 서양인 특유의 조막만 한 얼굴에 손가락만 대도 터질 듯 풍만한 가슴을 가진 여인이 공작에게 인사했다.
"사교계의 백합이라 불리는 포스포네 영애로군. 잘 있었소?"
"걱정해 주신 덕분에요."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여인, 그녀는 아리스텔 후작의 딸이었다.
"청운 경. 만나서 반갑소. 나는 로이드 폰 아리스텔 후작이오. 이쪽은 내 셋째 딸 포스포네."
"안녕하세요."
"아리스텔 후작님과 포스포네 영애시군요.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숙녀에 대한 예의로 오른손을 가슴에 대고 고개를 살짝 숙이자 포스포네 양이 미소를 지었다.
내가 두 사람과 인사를 나누자 마르쿠스 공작이 쓴웃음을 지었다.
"에잉! 어쩐지 나도 손녀와 함께 오고 싶더라니!"
이때 포스포네 영애가 나를 향해 불쑥 손을 내밀었다.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이자 그녀가 설명하듯 말했다.
"숙녀의 손을 부끄럽게 하실 건가요?"
순간 당황했지만 음악이 왈츠풍으로 바뀐 것을 확인하고 그제야 그녀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내게 춤을 추자고 요청한 것이다.
음!
골드먼 자작과 아리스텔 후작가의 관계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연관되어 있는지 몰라 살짝 찜찜한 마음이 있었지만 우리가 누구?
배달의 민족, 단군의 자손이 아닌가!
여자의 요청을 거절하는 것은 동방예의지국 사람이 할 예의가 아니다.
절대 그녀의 터질 것 같은 풍만한 가슴 때문에 춤을 추는 것이 아님을 이 자리에서 강력하게 밝힌다.
'근데 왈츠는 어떻게 추는 거지?'
곧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아얏!"
"미안해요."
"윽!"
"아! 죄, 죄송합니다."
"아흑!"
"...."
"엄마야."
처음 춰 보는 왈츠.
당연히 실수를 연발할 수밖에 없었고 음악이 이어질수록 천사 같던 여인의 얼굴이 악귀처럼 구겨졌다.
"큭큭큭."
"저게 뭐야? 쿄쿄쿄!"
"풉!"
이, 이게 아니었는데.
몇몇 귀족들이 웃음을 참지 못해 실소를 토해 냈고 몇 시간 같던 몇 분이 끝났다.
다시 한번 사과하려 했는데.
"저...."
"이익!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포스포네 영애는 누가 말릴 새도 없이 차가운 냉기를 풀풀 날리며 자리를 떠났다.
-[띠링, 최악의 춤 실력으로 인해 악명이 10 증가합니다.]
설상가상 시스템의 냉랭한 음성마저 들려왔다.
"험험! 자네는 춤이 많이 서툴...군."
아리스텔 후작 역시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네, 용병 출신이라 한 번도 배워 본 적이 없어서요. 포스포네 영애에겐 미안하다고 전해 주십시오."
"그러지. 대신 다음에는 기대해도 되겠나?"
"네. 노력해 보겠습니다."
노력하겠다고 했지만 사실 포스포네 양에게 다음은 없다.
물론 내가 실수했지만 그것과 별개로 드레스 안에 감춰진 그녀의 하체 때문이었다.
내가 살다 살다 그런 하체는 처음 봤다.
만약 그녀와 춤을 추지 않았다면 완전히 속을 뻔했다.
아니! 어떻게 사람의 하체가 저럴 수 있을까! 이건 숫제 코끼리였다.
"아리스텔 후작, 이제 그만 청운 경을 놔주지 않겠나?"
"제가 방해가 되었나요?"
"그건 아니지만 청운 경은 엄연히 뉴먼 백작의 손님이자 오늘 파티의 주인공이라네. 다른 이들에게도 기회를 줘야지."
마르쿠스 공작은 내가 뉴먼 백작의 손님이란 부분을 유난히 강조했다.
하긴 이 자리는 뉴먼 백작가의 승리를 자축하는 파티, 더욱이 댄스 타임마저 끝난 상황에서 후작은 더 이상 나를 잡아 둘 명분이 없었다.
"그렇...군요."
말탄 왕국 7서클 마도사 아리스텔 후작은 끝까지 사람 좋은 미소를 보이며 자리를 비켜 주었고 나는 그 후 마르쿠스 공작를 비롯해 왕당파 귀족들에게 붙들려 끊임없는 귀화 요청을 받았다.
"저는 누군가의 명령에 의해 죽고 살아야 하는 귀족의 삶보다 자유롭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용병이 좋습니다."
"하지만 용병은 제대로 된 취급을 받지 못하네. 자네가 그걸 모르진 않을 것 같은데?"
"네, 대다수의 용병은 그렇죠.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유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가치입니다."
"그건 그렇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가치만으로 살아갈 수 없네."
"공작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다면 다르지 않겠습니까? 어느 누가 마스터를 홀대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마르쿠스 공작이 백기를 들며 항복했다.
"휘유. 알겠네."
나는 힘없이 대답하는 공작을 보며 한 가지 여지를 남겨 주었다.
친구란 존재는 많을수록 좋기 때문이다.
특히 공작과 같이 도움이 되는 친구라면 말이다.
"제가 신이 아닌 이상 마음이 바뀔 수도 있겠죠. 대신 그런 순간이 오면 공작님을 잊지 않겠습니다."
일종의 우선순위를 준다는 말에 마르쿠스 공작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래. 그거면 됐네. 하하하하!"
우리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술잔을 기울였고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얼마 후,
나는 시녀장의 안내에 숙소에 도착했다.
"혹시 필요하신 게 있으신가요?"
"아뇨. 쉬어야죠. 좀 피곤하네요."
"아! 그럼 목욕물을 준비해 드릴까요?"
"목욕이요?"
"네."
오호라. 목욕이라,
이거야말로 눈이 번쩍일 정도로 좋은 생각이다.
뜨거운 물에 몸이 담근다는 상상만으로 피로가 풀리는 느낌이었다.
"네. 그렇게 해 주세요."
나는 시녀장이 방에서 나가는 것을 쳐다보며 소파에 앉았다.
<상태 창>
이름 : 최선우
레벨 : 162
고유 특성 : 분신(Unique) *사용 불가
칭호 : 현자, 오크 살육자, 소드 마스터
생명력 : 7,250/7,250 마력 : 7,250/7,250
힘 : 305 체력 : 345 민첩 : 330
지혜 : 195 지능 : 253 행운 : 15
명성 : 5,050 악명 : 10 매력 : 30
보너스 스탯 : 195
<특성 정보>
이름 : 분신
등급 : U(Unique)
설명 : 나와 같은 또 하나의 나를 만들어 서로가 얻은 모든 경험을 공유한다.
*앞으로 100일 후 접속이 해체된다. 현재 99일 남음.
하하하!
다시 봐도 대박이다.
이때 목욕물이 준비됐다는 시녀장의 음성이 들려와 소파에서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터덜터덜 욕실로 향했다.
"후아~."
문을 열자마자 뜨거운 열기와 함께 자욱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와 나도 모르게 호흡을 한 번 내뱉었다.
음~ 굿!
적당하게 데워진 온수에 전신을 담그자 황홀할 만큼 기분이 좋다.
"캬햐~ 바로 이 맛이지. 아우, 시원하다."
"시원해요?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엥?"
이제 막 욕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두 명의 여인이다.
"청운 님, 혹시 물이 차가우면 좀 더 데워 드릴까요?"
"아, 아니. 괜찮아요."
이것은 문화적 차이로 일어난 일이다.
왜 우리네 어른들이 뜨거운 물에 들어가면 시원하다고 말하지 않는가?
나도 그런 의미로다가.... 아! 아! 암튼 이게 중요한 게 아니다.
보아하니 시중을 들러 온 것 같은데 문제는 저들의 옷차림이었다.
천조가리 하나 걸친 것 같은, 이건 뭐 거의 알몸에 가까웠다.
그렇지 않아도 남성호르몬이 넘쳐 나고 있는 시기에 서양인 특유의 풍만한 가슴과 굴곡진 몸매가 눈앞에서 아른거리니 퍽이나 곤혹스러운 상황이 연출되고 말았다.
'야야야! 아니야. 이러지 마. 형이야. 형이 아직 준비가 안 됐잖아. 너 이 녀석. 그러면 안 돼. 어서 수그려! 아, 안 되겠다.'
나는 부모님을 떠올려 보기도 하고 심지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가을 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 없이.... 이 기상과 이 마음으로 충성을 다하여....
애국가를 4절까지 불러 보기도 했다.
하지만 내 몸을 쓰다듬는 여인네의 손길 한 방에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EXID가 부릅니다.
위-아래 위 위-아래, 위-아래 위 위-아래.
제53화
53화 뉴먼 백작가의 보물 창고
아침부터 보슬비가 촉촉이 내리는 날,
뉴먼 백작이 사전에 아무 연락도 없이 날 찾아왔다.
"어제는 잘 쉬었나?"
"어제...요?"
난 제풀에 놀란 사람처럼 되물었다.
"그래. 왜? 무슨 일이라도 있었는가?"
지금 뭘 알고 묻는 건가?
은근슬쩍 눈치를 살폈지만 다행히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이다.
"아, 아닙니다. 덕분에 편히 쉬었습니다."
"하하하! 그랬군. 자네가 편히 쉬었다니 다행이야."
나는 주위를 환기시키며 물었다.
"그런데 이렇게 아침 일찍 무슨 일로 찾으셨습니까?"
"무슨 일은~ 약속했던 선물을 주러 왔네."
"...!"
오호라! 이거야말로 불감청 고소원이다.
나는 뉴먼 백작을 따라 그의 서재로 들어갔다.
휘장을 젖히자 백작의 선조로 추정되는 이의 초상화가 벽면에 걸려 있었다.
"이분은 누구신가요?"
"내 할아버지의 할아버질세. 뉴먼 백작가를 세우신 분이지."
백작이 초상화에 그려진 선조의 오른쪽 눈을 누르자 순간 서재 한쪽 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타났다.
"나를 따라오게."
"네, 백작님."
나는 뉴먼 백작을 따라 계단을 내려갔는데 얼마 뒤 화려하게 장식된 석문이 눈앞에 나타났다.
뉴먼 백작은 송곳을 이용해 자신의 손끝을 살짝 찔렀다.
뚝!
한 방울의 붉은 핏방울이 석문 중앙에 위치한 구멍으로 떨어지자 석문에 새겨진 음각(陰刻)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과연 백작 가문의 보물 창고답게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이곳은 가문의 선조들이 말탄 왕국에 자리를 잡으시며 만든 보고일세. 각종 병장기는 물론 용도를 알 수 없는 골동품들이 모여 있지."
그는 내게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백작님은 안 들어가나요?"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나? 내가 있으면 오히려 불편하지. 편안하게 둘러보고 원하는 아이템이 있으면 가지고 나오게. 대신 한 개만 가지고 나올 수 있네."
"알겠습니다."
나는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보물 창고 안으로 들어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럼 어떤 물건들이 있는지, 살펴볼까?"
아틀란티스 대륙에서 아이템을 얻는 방법은 통상 세 가지다.
첫째는 몬스터를 사냥하거나 던전에 들어가서 직접 구하는 것이다.
둘째는 마법사, 연금술사, 대장장이와 같은 이들이 만든 아이템을 상점이나 경매장을 통해 구입하는 것이다.
셋째는 의뢰를 수행하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아이템을 얻는 것이다.
-[은빛 향기 대검]
무의식적으로 칼자루를 잡았다.
손에 감기는 느낌이 훌륭하다. 허나 무극에 비하면 뭔가 아쉬운 점이 느껴졌다.
-[은빛 늑대의 방패]
-[달빛 조각사의 조각칼]
-[광전사의 대검]
-[....]
-[....]
-[메이지의 요술 채찍]
-[오색 완드]
뉴먼 백작의 말처럼 보고 안에는 무구 외에도 보석이나 장신구, 서책이 있었다.
-[에례미아 공주의 목걸이]
-[무두셀라의 반지]
-[대하소설 묵향]
-[멀록의 황색 귀걸이 한 쌍]
-[검가백서]
-[단묵심법]
-[트윈 엑스칼리버]
-[대하소설 다크 메이지]
-[디즈니악의 마법 총론]
-[눈물의 티아라]
음!
증조부 때부터 모아서 그런지 이름만 보면 꽤 그럴듯해 보이는 아이템이 많다.
그런데 아주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이곳에 있는 아이템의 대다수가 정보가 해금되지 않은 물건이라는 것이었다.
이름만 보고 골랐다간 꽝이 뽑힐 수 있었다.
'쳇! 빛 좋은 개살구인가?'
뉴먼 백작이 가문의 보물 창고를 이토록 쉽게 열어 준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둘러보고 있을 무렵 등 뒤에 달려 있던 무극에서 은은한 진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응?'
이게 무슨 일이지?
마치 무극이 나를 이끄는 느낌이다.
나는 그 미세한 진동을 따라 걸어갔고 그곳에서 한쪽 벽에서 내 시야를 사로잡는 물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름 없는 낡은 장화]
등급: **
내용: 이름 없는 가죽 장화.
특징: 허물 벗은 ****의 ****과 ********을 섞어 만들었다.
**자의 ******, ****, *****을 **한다.
"이름 없는 낡은 장화... 설마?!"
난 이름 없는 낡은 장화를 손에 들고 보물 창고를 나섰다.
"그걸 고른 건가?"
뉴먼 백작은 내 선택에 의외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마도 그가 보기에 내가 고른 장화가 그리 가치가 있어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하긴 나 역시 무극 대검이 아니었다면 무심코 넘겼을 것이 분명했다.
"내 생각에 그것 하나로는 부족할 것 같군. 기왕 보고에 들어왔는데 하나 더 골라 보게."
"그게 정말입니까?"
"청운 경이 내 영지와 명예를 지켜 주었는데 나도 그 값을 해야지."
이야~~
이 아저씨 진짜 사람 다룰 줄 안다.
나는 뉴먼 백작의 친절에 고개를 숙여 보이는 것으로 감사의 인사를 대신했다.
그리고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한 마리의 하이에나가 되어,
슬픈 도시를 비추는 한 마리 낭만 고양이가 되어,
그의 보물 창고를 다시 한번 스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물건을 구석에서 발견하게 되었다.
'어! 이게 여기에 있다고?'
그것은 바로 아틀란티스 대륙의 비밀이 숨겨져 있는 석판이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석판을 손에 쥐었다.
[고대의 부서진 석판 No.3]
-#$**...*$#...마족...#@*&**@***....
...전쟁...**@#$*%@...차원....
...균열... 게이트....
...악...마... 깨어난....
어째서... &***@...@#@*... 못하는가!
....
...아마...겟....
...##$...시작이....
"응?"
뉴먼 백작이 놀란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며 나와 석판을 번갈아 보았다.
기껏 기회를 주었는데 왜 또 쓸모없는 것을 골랐냐는 표정이다.
"이것으로 하겠습니다."
"이, 이보게. 청운 경. 정말 그걸로 할 건가?"
"네, 백작님."
뉴먼 백작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확신에 찬 내 표정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뉴먼 백작님, 혹시 이 석판을 어디에서 얻었는지 알 수 있을까요?"
"...."
그는 머뭇거리다가 잠시 기다려 달라는 말을 하며 한눈에 봐도 꽤나 오래되어 보이는 서책 한 권을 꺼냈다.
"음. 석판, 석판... 석판이라, 그래. 여기에 적혀 있군."
뉴먼 백작이 말했다.
"그건 내 증조부께서 가지고 온 물건인데 통곡의 벽에서 발견했다고 하네."
"통곡의 벽이요?"
"그래. 통곡의 벽."
"그렇군요."
다음 행선지가 결정되었다.
물론 그 전에 이곳에서 할 일이 하나 남았지만 말이다.
* * *
쿠아아앙!
"으악! 피해!"
"땅이 갈라진다."
"모두 뒤로 물러나. 검기 덩어리들이 날아오고 있어."
마르쿠스 공작이 데리고 온 기사단원들이 순간 혼란에 빠졌다.
"이게 대체...."
특히 그의 수석 기사 고든 경은 망연자실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뉴먼 백작가의 연무장이 마치 폭풍이 할퀴고 지나간 것 같은 형상으로 처참하게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시작은 검에 대한 진솔한 대화에서 시작되었다.
"자네는 검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검은 그저 검이죠."
"그렇군."
"굳이 말한다면 손의 연장이겠죠."
"그래. 검이란 그런 거지. 그냥 손이 좀 더 길어진 것에 불과할 뿐이지. 그럼 이제 자네의 실력을 보고 싶은데, 어떤가?"
"저야 영광이죠."
"하하하. 그건 내가 할 소리 같은데."
마르쿠스 공작이 그의 휘하 기사들을 향해 말했다.
"다들 바깥에서 구경하는 게 좋겠군."
"알겠습니다. 충!"
나는 천천히 마르쿠스 공작의 뒤를 따라 연무장 한가운데 섰다.
공작이 천천히 검을 뽑으며 말했다.
"그럼 시작해 볼까?"
나 역시 검을 뽑은 후 태극검의 기수식을 잡으며 말했다.
"네. 한번 즐겨 보죠."
그와 동시에 강맹한 초식이 펼쳐졌고 불꽃이 튕겼다.
"검류 치엘로마르(CieloMar), 하늘과 바다!"
공작의 검에서 두 개의 강기가 생성되었다.
하나는 양강(陽剛)의 기운이고 다른 하나는 음유(陰柔)했는데 마치 바다에서 일어난 해일처럼 덮쳐 왔다.
"태극검 벽(壁), 단단한 태극은 벽이 되어 지키리."
내 몸을 중심으로 태극 문양의 푸른색 구름이 뻗어 나와 겹겹이 나를 감싸기 시작했다.
-퍼퍼퍼펑!
공작의 강기가 방벽과 부딪치며 불꽃을 토해 냈지만 결코 뚫리지 않았다.
"오러 블레이드를 그런 방식으로 사용하다니 과연 대단하군. 그런 것은 본 적이 없어. 그게 바로 자네의 검인가?"
"네. 태극검 방(防)자결 입니다. 수비에 효과적이죠. 이번엔 제가 먼저 가겠습니다."
"후후후! 기다리겠네."
나는 우렁찬 목소리로 기합을 토했다.
"태극검 흡(吸), 부드러운 바람은 회오리가 되어!"
무극이 웅웅거리는 소리와 함께 강력한 회오리가 발생하자 마르쿠스 공작은 허공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부욱! 부욱!
공기주머니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태극검의 흡입력에 저항한 것이다.
허나 공작의 몸이 한순간 휘청거렸고 난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태극검 탄(彈), 하나의 탄환처럼 날아가."
흡입력의 중심에서 탄환 모양의 강기가 하나의 점이 되어 공작을 향해 날아갔다. 회오리의 반탄력이 첨가됐기에 그 빠르기가 가공할 만큼 빨랐다.
"검류 테라모토(Terramoto), 지진이여 일어나라!"
일순 지진이 일어난 듯, 땅이 크게 요동치며 대지가 일어섰다.
"맙소사!"
"세, 세상에...."
소위 어디 가서 검 좀 다룬다는 기사들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순식간에 몇 번의 공방이 지나갔다.
"검류 템페스타(Tempesta), 폭풍우여 나타나라!"
다음 순간 대기가 찢어지듯 요동치며 폭풍우가 몰아쳤다.
"검류 블루 드래곤(Blue Dragon), 용이여, 현신하라!"
거센 비바람과 함께 몰려온 폭풍우를 향해 나타나는 푸른색 용.
이것은 환상이 분명했지만 느껴지는 위력만큼은 진실이었다.
나 역시 태허무극심법의 기운을 잔뜩 끌어 올리며 외쳤다.
"태극검 파(破), 내 앞을 가로막은 모든 것을 무너뜨린다."
-우르르르르, 콰콰콰콰콰콰쾅!
하늘이 찢어지고 땅이 갈라졌다.
경지가 낮은 기사들은 서둘러 뒤로 물러났는데 그중 몇몇은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역시 마스터인가? 아틀란티스 대륙에서 만났던 사람 중 이 노인네가 가장 강하다. 정말로 승부를 가리려면 전력을 다해야 하는데 그럴 경우 누군가는 죽거나 부상을 당하게 되겠지.'
이쯤에서 끝내는 것이 좋겠다 싶었다.
과하긴 했지만 이것은 대련이지 생사결이 아니었다.
나는 무극 대검을 거두고 몸을 숙여 말했다.
"마르쿠스 공작님. 정말 감탄했습니다. 제가 졌습니다."
그러자 공작이 황급히 말했다.
"잠깐. 잠깐! 자네가 졌다니 그게 무슨 소린가?"
그는 연신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오히려 내가 자네에게 한 수 배웠네. 정말 대단하군."
마르쿠스 공작 역시 검을 거두었다.
사실 뉴먼 백작가의 연무장은 이미 초토화되었고 더 이상의 비무는 의미가 없어 보였다.
"아닙니다. 공작님 덕분에 안계(眼界)를 넓혔습니다. 공작님의 검은 마치 자연을 담은 것 같더군요. 정말로 대단한 검술이었습니다."
"호오! 그걸 보았는가?"
마르쿠스 공작이 기뻐하는 얼굴로 말했다.
"부족하지만 나는 하늘과 바다 그리고 땅을 검에 담아내고 싶었지."
"과연 그랬군요."
"자네의 검 역시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던데, 무엇을 담았는가?"
"인간과 자연 그리고 우주입니다."
"인간과 자연 그리고 우주라!"
마르쿠스 공작은 과연 그랬다는 듯,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하하하! 역시 그랬었군. 과연 그랬어. 그래, 그럼 자네는 얼마나 담았는가?"
"하나도 담지 못했습니다."
"예끼, 이 사람. 여전히 겸손하군. 자네가 그렇게 말하면 나 역시 자네와 별반 다르지 않네. 다만 지금도 자연을 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할 뿐이지. 그렇지 않은가?"
"네, 공작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친해지는 데 몇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중 가장 빨리 친해지는 방법은 함께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땀을 흘리는 것이다.
나는 위에 언급된 세 가지를 모두 했다.
공작과 연회장에서 술을 마셨고 함께 식사했으며 이렇게 검을 나눈 것이다.
정말로 그와 한결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제54화
54화 통곡의 벽으로 가는 길(1)
"너무 서둘러 떠나는 것이 아닌가? 성에 조금 더 머물면 어떻겠나?"
"충분히 쉬었습니다. 대접도 잘 받았고요."
"이대로 보내기가 아쉬워서 그렇지. 아직 파티도 끝나지 않았고 말이야."
뭔 놈의 파티가 사흘째 이어지는 걸까?
시종에게 얘기를 들어 보니 보름 동안 파티가 열린 적도 있다고 했다.
"아닙니다. 이젠 가 봐야 할 시간입니다."
완곡한 거절에 뉴먼 백작은 더 이상 나를 붙잡지 못했다.
"청운 경, 말했던 대로 우리 말탄 왕국은 언제나 열려 있네. 언제라도 좋으니 마음이 내킨다면 자유롭게 오시게."
"기회가 되면 그리하겠습니다. 마르쿠스 공작님. 그럼 다들 안녕히 계시길."
나는 공작과 백작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한 후, 용병 길드를 찾았다.
"오, 오셨습니까?"
마크 지부장은 내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는데 어느새 말투마저 존칭으로 바뀌어 있었다.
"네. 오랜만에 봬요. 마크 지부장님."
"아이고, 말씀 낮추십시오."
"전 이게 편한데...."
"네? 네... 그럼 편한 대로 하십시오."
"네. 지부장님도 전처럼 편하게 하세요."
"아닙니다. 저는 원래부터 이렇게 말하는 게 편합니다."
편하다고 하면서 왜 식은땀을 흘리는 건지.
나는 지부장의 모습에 내심 실소했다.
"용병패, 가능하죠?"
"그럼요. 이미 준비해 놨습니다."
마크 지부장은 미스릴로 만들어진 S급 용병패를 내밀었다.
이 영지의 주인인 뉴먼 백작을 비롯해 말탄 왕국의 소드 마스터 마르쿠스 공작이 직접 확인했는데 어느 누가 시비를 걸 수 있을까?
지부장은 공손한 표정으로 용병패를 건넸다.
"고마워요."
"아이고, 고맙긴요. 별말씀을요. 오히려 제가 영광입니다."
원래대로라면 내가 가지고 있는 B급 용병패를 반납해야 하지만 왠지 쓸모가 있을 것 같아 반납하지 않았다.
마크 지부장 역시 이에 대해 별말을 하지 않았는데 뭔가 다른 용무가 있다는 듯,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저... 청운 님."
"네."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여기에 사인 한 장만 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한눈에 봐도 고급 재질로 만든 파피루스다.
그는 반짝반짝 기대가 가득한 눈빛으로 애원하는 말했다.
"당연히 해 드려야죠."
나는 그가 내민 파피루스를 받았다.
"뭐라고 쓸까요?"
"그, 그게... '나의 절친한 친구 마크 지부장에게'라고 써 주실 수 있을까요?"
그는 말을 하면서 슬그머니 내 눈치를 살폈다
"훗! 그럼요."
그가 손뼉을 치며 좋아하는 사이 나는 그가 원하는 대로 써 주었다.
[나의 절친한 친구 마크 지부장에게. 마스터 청운]
"우워어!! 감사합니다."
마크 지부장은 진정 기쁜지 사인이 적힌 파피루스를 부여잡고 전율하고 있었다.
"그럼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봐요."
"네, 넵! 안녕히 가십시오."
나는 용병 길드에서 나와 숲이 우거진 서북쪽 방면으로 길을 잡았다.
관도를 이용하는 것보다 안데라스 산맥을 가로지르면 길이 짧아져 시간이 단축되기 때문이다. 덤으로 몬스터를 사냥해 레벨을 올릴 수도 있고!
뉴먼 백작령을 떠난 지 열흘이 되는 날,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하늘 아래 마침내 안데라스 산맥이 모습을 드러냈다.
입구에서부터 이름 모를 풀이 지천에 깔려 있었는데 종류가 뭔지는 몰라도 제법 단단하고 날카로워 보였다.
'공기부터 다르군.'
안데라스 산맥은 자그마치 5,000km에 달하는 길이를 가진 거대한 산맥이다.
산맥 중심으로 들어갈수록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희귀 약초가 자랐고 각종 광석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어 광물의 바다로 불린다. 하지만 이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인적이 드물다. 그것은 산맥 내부로 들어갈수록 강력한 몬스터가 출현하기 때문이다. 혹자의 말에 따르면 안데라스 산맥이 품고 있는 생명력 때문이라고 하는데 예를 들면 같은 오크라도 산맥에서 활동하는 오크가 훨씬 크고 힘도 강력하다고 알려져 있다.
쿠쿠쿵.
그때 귓가를 울리는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제운종을 펼쳐 나무 위로 올라갔더니 송아지만 한 덩치를 가진 붉은 갈기 오크들이 눈에 들어왔다. 녀석들은 흙먼지를 만들며 빠른 속도로 인간을 쫓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꽤나 위압적이었다.
"약초꾼인가? 저러다 잡히겠는데."
천근추를 이용해 다리에 힘을 주자 나뭇가지가 크게 휘어졌다.
다리에 힘을 빼자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전방으로 날아갔다.
슈웅!
다리에 힘을 빼자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전방으로 날아갔다.
"취이익. 뭐, 뭐냐?"
"하늘을 나는 인간이다."
하늘에서 뚝 하고 떨어진 덕에 오크들이 눈을 치켜떴다.
"크르르르. 살이 야들야들해 보이는 것이 맛나게 보인다. 취익."
"동의한다. 취이익."
나는 검집에서 무극 대검을 뽑았다.
"취익. 인간이 무기를 들었다."
"버릇없는 놈이다. 취익. 죽이자."
"취익! 저놈은 내가 먹...."
놈들의 말이 끝나기 전, 나는 무극 대검을 횡으로 쫙 그었다.
소 잡는 칼로 닭을 잡는 모양새지만 처음부터 강공(强攻)으로 나갈 생각이었다.
!!
눈앞이 번쩍이고 녀석들의 신체가 분리되며 땅바닥에 우수수 떨어졌다.
단말마조차 남기지 못하며 생을 마감한 것이다.
땅바닥에 꼬꾸라지는 눈빛은 하나같이 경악과 불신을 말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들의 죽음을 믿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극소량의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오래된 손도끼를 획득했습니다.]
-[극소량의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극소량의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
-....
-[오크 카리크의 어금니를 얻었습니다.]
-[극소량의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의외다.
극소량이지만 경험치가 들어온 것이다.
안데라스 산맥의 영향인가!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약초꾼으로 보이는 두 사내가 허리를 숙이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두 분. 괜찮습니까?"
"네. 기사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기사님."
"어, 전 기사가 아닙니다."
"그럼?"
"보시다시피 용병입니다."
"아! 그러시군요. 용병님 덕분에 목숨을 구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남자는 다시 한번 황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혼자서 안데라스 산맥을 넘는다고요?"
"...."
내가 안데라스 산맥을 넘을 거라는 말에 두 사람은 당황한 표정으로 날 만류했다.
"청운 님. 안데라스 산맥은 오크를 비롯해 트롤과 오우거가 출몰하는 곳입니다. 하늘의 제왕이라 불리는 와이번도 있고요."
"이 친구 말이 맞습니다. 더욱이 산맥 내부로 들어가면 더욱 강력한 몬스터가 살고 있습니다. 동료분들도 없이 어찌 혼자서 그렇게 위험한 곳을 넘으시려고 하십니까?"
두 사람의 눈빛은 마치 자살행위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니, 이봐요. 아저씨들.
전 보통 용병이 아니에요. 조금 강한 용병도 아니고요.
아주 강한 용병이에요. S급 용병! 소드 마스터라고요.
각설하고 결론부터 말하면 내가 그들을 구해 준 것은 정말 잘한 일이었다.
"이쪽 길이 비교적 안전한 길인데 오늘 같은 일은 약초꾼 생활 20년 만에 처음이었습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오늘 탈레반꽃을 캤다고 좋아했는데 결국 운이 없었죠. 청운 님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오크 밥이 되었을 겁니다."
그들의 생명을 구해 준 대가로 한 장의 지도를 받았는데 그것은 안데라스 산맥의 지형이 그려진 지도였다.
"안데라스 산맥은 보시다시피 엄청 넓습니다. 저희가 가진 지도는 일부분에 불과하니 그 점을 유념하십시오. 여기 붉은색으로 표시된 곳은 저희도 들어가 보지 못한 곳을 나타냅니다."
"녹색은요?"
"그곳은 그나마 안전한 곳이죠. 저희 약초꾼들이 자주 애용하는 길입니다.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녹색길로 다니시면 위험한 몬스터를 만날 확률이 적을 겁니다."
"그렇군요."
숲의 밤은 생각보다 일찍 찾아온다.
때문에 편안한 밤을 보내려면 황혼이 내려오기 전에 서둘러 움직여야 하는데 약초꾼에게 얻은 지도 덕에 비교적 빨리 야영지를 찾을 수 있었다.
나는 금세 모닥불을 피웠고 편하게 앉아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운데 물이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들리자 아공간에서 봉지 커피 하나를 꺼냈다.
"커피는 역시 X심이지."
나는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며 나직이 앞으로의 계획과 각오를 되새겼다.
지구의 나와 무림의 내가 두 번째 합일을 이루면서 나는 소드 마스터가 되었다.
이는 무림으로 치환하면 곧 화경에 이른 고수가 되었다는 뜻이다.
무림으로 귀환하는 순간 검마와의 결투가 이어질 것이 분명했지만 이제는 그가 전혀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그와의 대결이 기대되었다.
<상태 창>
이름 : 최선우
레벨 : 162
고유 특성 : 분신(Unique) *사용 불가
칭호 : 현자, 오크 살육자, 소드 마스터
생명력 : 7,250/7,250 마력 : 7,250/7,250
힘 : 305 체력 : 345 민첩 : 330
지혜 : 195 지능 : 253 행운 : 15
명성 : 5,050 악명 : 10 매력 : 30
보너스 스탯 : 195
상태 창을 보면 알 수 있듯 현재 내 레벨은 162이지만 재밌는 것은 이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헌터의 강함을 판단할 때 레벨이나 등급을 보고 판단하지만 이것은 그야말로 일반적인 기준이지 절대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막 마스터가 됐지만 S급 헌터와 대등할 것이라는 요상(?)한 자신감마저 들었다.
크으~
커피 맛, 죽인다.
그렇게 한 시간쯤 지났을까?
눈을 감고 조용히 명상에 잠겨 있었는데, 낯선 생명체의 기운(氣運)이 느껴졌다.
그로부터 얼마 후,
부스럭 하는 발소리와 함께 인간의 형체가 나타났다.
"실례합니다."
모두 네 명의 남녀.
모닥불 덕에 상대방의 얼굴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네 명의 남녀는 모두 이십 대 초반으로 보였는데 옷차림과 행색을 보아하니 딜러, 탱커, 마법사 조합의 전형적 파티로 구성되어 있었다. 특히 두 명의 여성은 얼핏 봐도 상당한 미모에 몸매도 무척이나 착해 보이는 것이 남자들에게 인기가 아주 많을 것 같았다.
"지나가던 사람인데 불빛을 보고 왔습니다."
선두에 있던 젊은 남자가 반가운 기색이 느껴지는 음성으로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불을 좀 빌려 써도 될까요?"
"불은 나누어 쓰면 되니 그렇게 하시죠."
선해 보이는 인상과 공손한 어조에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내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들은 곧장 불가로 다가와 앉았다.
"어? 그거 혹시 커피 믹스예요?"
"네."
단번에 커피 믹스를 알아보는 것을 보아하니 그들 역시 나와 같은 이방인이었다.
"그럼 혹시 이방인?"
"네, 맞아요."
"반가워요. 저희도 이방인이에요."
"반갑습니다. 청운입니다."
"호호호. 저도 반가워요. 전 소은정이고 얘는 조안이라고 해요."
"전 유정욱이라고 합니다."
"김현태요."
소은정이 물었다.
"그런데 동료분들은 어디에 있어요?"
"혼잔데요."
"혼자라고요?"
"네. 싱글이에요."
"...!!"
순간 정적이 흘렀다.
"풉!"
"그거 영화 대사죠? 큭큭큭."
"저도 그 영화 봤어요."
에휴!
자칫 썰렁할 뻔했는데, 다행히 웃음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