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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 - 2

"손님, 다 왔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었더니 어느새 집 앞에 이르렀다.

나는 카드로 계산한 후, 택시에서 내렸다.

"어이, 최선우."

"마침 집 앞에서 만났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검은 정장을 입은 이들이 다가왔다.

녀석은 내게 차용증을 내밀었다.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는 사채 권리증이다.

"오늘이 그날인가?"

"응. 정확히."

"내일까지 보내 주마."

"뭐라고? 이 새끼가 어디서 약을 팔아...."

흔해 빠진 레퍼토리다.

사채업자의 말 따위 더는 듣기 싫어 게이트 관리자에게 받은 서류를 녀석에게 던졌다.

-휘이익!

"이건 뭐야?"

"몬스터 사냥 확인증."

"...!!"

놈은 서류를 살펴보더니 그 냄새나는 입을 닫았다.

"내일이면 정산받을 거니까, 바로 넣어 줄게."

"좋아. 이번...은 넘어가 주지."

놈의 말에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때 전화벨이 울렸다.

-[선우니?]

"네, 아버지. 몸은 좀 어떠세요?"

얼마 전,

택시 운전을 하시다 추돌 사고가 났는데 하필이면 뼈가 골절돼 한동안 쉬셔야 했다.

-[아빤 괜찮아. 넌 어때? 통화가 되는 것 보니까, 게이트에서 나왔구나.]

"네. 무사 귀환했습니다. 지금 집 앞이에요."

-[그래. 잘했다. 어서 가서 쉬어.]

"아버지는요, 치료는 잘 받고 계세요?"

-[그럼. 심심해서 문제지.]

"참! 아버지. 이번 달 이자는 제가 냈어요. 그러니까 걱정 마세요."

-[...아빠가 미안하다.]

"뭐가 미안해요? 이래 봬도 아부지 아들이 헌터예요.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제가 꼭 성공해서 우리 아부지랑 어무이 호강시켜 드릴게."

-[....]

"아셨죠?"

-[그래, 알았다. 우리 아들, 밥은 먹었니?]

"그럼요. 먹고 들어왔어요."

-[그래, 그래. 집 앞이라고 했지. 어서 들어가서 쉬어.]

"아버지. 내일 시간 봐서 엄마랑 찾아뵐게요. 혜진이도요."

-[그래. 알았다.]

"그럼 주무세요."

-[OK.]

통화를 끝내고 집으로 향한다.

문을 열자마자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 집이라는 포근함이 느껴진다.

"엄마~."

"선우니?"

"네."

제16화

16화 검선(劍仙), 신승(神僧) 그리고 사황(邪皇)

누군가 내게 물었다.

수련을 통해서 강해질 수 있냐고.

솔직히 말한다면 자신이 없다.

강해지지 않을 자신이 말이다.

하루에 몇 시간씩 헬스장에서 미친 듯 운동하는 사람에게 물었다.

당신에게 운동은 무엇이냐고.

그가 답했다. 운동은 마약과 같다.

처음이 힘들지 고비를 넘기면 중독 수준에 이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루에 한 시간이라도 운동을 하지 않으면 몸이 안다고 했다.

나 역시 그 말에 동의하는 바다.

나는 무공에 중독되었다.

하루가 다르게 강해지고 있다는 것은 내게 무한한 희열을 선물해 줬다.

나태해질 시간이 없다.

오늘도 어제처럼 수련의 연속이다.

나는 이른 아침부터 한적한 곳을 찾아 태극권을 펼쳤다.

-쿠웅!

땅을 박차고 바람을 거스르고 두 손으로 태극을 그린다.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치며 태극의 무한한 세계를 두 손으로 펼쳐 보았다.

신체 곳곳에 숨어 있는 노쇠한 세포들이 태허무극심법의 영향으로 소멸하기 시작했고 그 자리를 대신해 새로운 적혈구와 백혈구가 생성되어 신체 구석구석으로 스며들어 갔다. 마치 고속도로를 달리듯 혈관이 뻥 하고 뚫리며 심장이 힘차게 역동하는 느낌이다.

누군가 들었다면 미쳤다고 하겠지만 분명한 사실이다.

명상과 관조를 통해 내가 직접 확인했으니까 말이다.

괜한 생각에 피식거리며 웃는데,

"태극권의 선(線)은 부드러운 것이지. 둥글둥글한 모양에 부드러운 움직임. 그게 태극의 본질이야."

"...!"

아이고, 깜짝이야.

저 할배는 누구야?

어떤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언제부터, 아니!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는 듯 고리눈의 노도사가 묘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세요?"

옷차림을 보아하니 도사인 것 같은데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이다.

게다가 뭔가 살짝 비웃고 있는 느낌이 드는데, 나 혼자만의 착각일까?

하지만 노도사에게서 풍기는 기도가 왠지 예사롭지 않아 인사하는 척하며 슬그머니 내가 누군지에 대해 말했다.

"전 무당의 청운이라 합니다만 도인께서는 뉘신지요?"

"허허! 녀석."

한쪽 입꼬리가 확연하게 올라가는 폼을 보아하니 대번에 내 의도를 파악한 것 같다. 하지만 노도사는 내 질문에 조금도 개의치 않고 오히려 반문했다.

"태극권은 제대로 배운 것 같군. 혹시 태극검도 익혔나?"

'뭐 이런 도사가 다 있지? 내가 누군지 밝혔는데도 계속 반말을 하네. 혹시 무당의 제자가 아닌가?'

내심 궁금증이 솟구쳤지만 나는 동방예의지국 출신의 건장한 남아. 더욱이 노인과 아이를 조심하라는 무림의 오래된 격언이 떠올라 노도사의 질문에 공손히 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흐흐흐. 말코 도사 놈들이 간만에 제대로 가르쳤군."

'말코 도사 놈들?'

'말코 도사'라는 말은 무당파 도사들을 비꼴 때 쓰는 단어로 무당파 도사들이 쓴 특이한 관과 이 관을 당기면 도사들의 안면이 구겨지면서 말 머리 형상이 되기 때문에 지어졌다고 한다. 스님을 땡중이라 부르며 비하하는 것과 비슷하다.

어이가 없다.

감히 무당의 제자 앞에서, 그것도 내가 존경하는 사형들을 향해 말코 도사라니!

저 도인이 나이가 많지만 이건 가만히 놔둘 수 없었다.

"이보세...."

노도사를 향해 따끔하게 말하려는 순간 거짓말처럼 입술이 닫혔다. 곧바로 들려온 노도사의 혼잣말 때문이다.

"청명은 아닌 것 같고, 청수나 청혜에게 배웠겠군."

"...!"

꿀꺽!

사형들의 이름을 저렇게 부르는 것을 보니 사문의 존장이 틀림없었다.

"누, 누구세...요?"

"본도의 이름은 풍양이라 한다. 들어 봤느냐?"

"풍...양?"

"왜, 못 들어 봤어?"

풍양이라면... 아!!

오래전 은거에 들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른다던 그분이 틀림없다.

검선이라 불리는 괴짜 도사 풍양 사백.

나는 기겁하며 펄쩍 뛰듯이 자세를 바로 하고 허리를 90도 가까이 숙였다.

"청운이 검선 사백을 뵙습니다."

"인사는 됐다."

그 순간 풍양 사백의 신형이 흔들렸다.

이어 갑자기 확대되는 사백의 모습에 나는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저 조용히 친우를 만나고 가려고 했는데, 네 녀석의 재주가 발목을 잡았구나. 계획이 틀어졌어. 쳇!"

"...?"

이게 무슨 소린가?

앞뒤 맥락 없이 말하니 당최 뭔 소리를 하는 건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럴 땐 내 경험상 가만히 있는 것이 좋다.

그럼 중간이라도 가니까.

"흠! 녀석. 눈치도 있는 것 같군. 넌 나중에 따로 시간을 갖자꾸나. 그리고 오늘 이곳에서 본 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거라. 알겠느냐?"

"네, 알겠습니다."

이때 풍양 사백의 눈길이 반대편을 향했다.

"오셨는가?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네."

'응? 지금 이곳엔 사백과 나밖에 없는데 오긴 누가 왔다고 허공을 향해 인사를 하는 거지?'

사방을 둘러봐도 보이는 건 수풀밖에 없다.

그러나 사백의 말에 대답하듯 허공에서 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오랜만일세, 검선."

저 멀리서 가사를 입은 노승이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스님?"

축지법을 쓰는 것일까?

노승이 한 걸음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거리가 확연히 좁혀 들었다.

"하하하. 내가 가장 늦은 모양이군. 미안하네."

"...?!"

대체 무슨 날인가?

이번엔 노승의 반대편에서 화려한 비단옷을 입은 노인이 한참 앳되어 보이는 소녀와 함께 모습을 나타냈다.

"다들 오랜만이군. 이게 얼마 만인가?"

"오 년은 된 것 같군. 그동안 잘들 지냈나?"

"하하하. 벌써 그렇게 됐나? 시간이 참 빨라."

"그 아이는 누군가?"

"내 손녀일세.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동행하게 됐지. 미리 말하지 못해 미안하네."

"괜찮네."

"검선, 자네 옆에 있는...."

"내 사질이네."

"사질?"

비단옷을 입은 노인이 의아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자네의 사질이라면 설마 '청' 자 항렬이란 말인가?"

"흠, 흠. 그렇지."

"청명, 청수, 청혜 도장 외에 다른 이가 있는 줄 몰랐군."

"뭐 그렇게 됐네."

풍양 사백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사백의 친우들은 그렇지 않은 표정이다. 날 바라보는 두 분의 눈에 가벼운 이채(異彩)가 떠올라 있었다.

나는 두 노인을 향해 포권을 취하며 인사를 올렸다.

"무당의 청운이라고 합니다."

"반갑네, 난 소림의 소현이네."

"나는 단목지양이라고 한다."

'소현? 단목지양?'

둘 다 많이 들어 본 이름인데, 저 두 사람이 누군지 생각할 틈이 없다.

자신을 단목지양이라 밝힌 노인의 눈에서 날카로운 빛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과 함께 무시무시한 기세가 해일처럼 덮쳐 왔다.

'헉! 이런 젠장!'

S급 몬스터와 조우하면 이런 느낌일까?

그런데 더욱 짜증 나는 건 사백이라는 노인네가 보인 행태였다.

풍양 사백은 이 상황이 재미있는지 아무것도 못 본 척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한술 더 떠 고리눈까지 밝히며 이 상황 자체를 즐기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으악! 이거 정말 미치겠네.'

내심 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단목지양이 내뿜고 있는 저 살벌한 기세에 본능적인 위협을 느낀 것인지 한 줄기 현묘한 기운이 단전에서부터 홀연히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태허무극심법의 기운이었다.

-우우우우웅!!

한 줄기의 현묘한 기운이 선명하게 생겨나더니 이내 나를 겹겹이 감싸기 시작하자 들끓던 내기가 진정되는 동시에 호흡 역시 급속하게 안정되었다.

"이것 참 놀랍군. 과연 무당인가?"

단목지양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리고 이런 X!

한층 더 강력해진 기운이 포효하는 야수처럼 날아왔다.

패도(覇道)의 경지가 있다면 이런 것일까?

조금의 빈틈이라도 보인다면 단숨에 달려와 저 무시무시한 이빨을 들이밀어 내 목줄기를 물어뜯을 것 같았다.

'제길, 모르겠다.'

아니! 그래도 하나는 알고 있다.

여기서 물러서면 그야말로 X 된다는 것이다.

이제는 기호지세(騎虎之勢), 이판사판이었다.

나 역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태허무극심법을 최대한 운용해 그의 기운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파지직! 파지직! 파지지지직!

단목지양의 무자비한 기운이 주변을 집어삼키고 있었지만 역설적이게도 태허무극심법의 현묘한 기운을 완벽하게 제압하지 못하자 나를 바라보는 단목 노인의 눈에 강한 이채가 서렸다.

"녀석. 정말 대단하구나. 그럼 어디 이것도 한번 막아 보아라. 사황신공!"

악! 이건 반칙이다.

뭔 노인네의 힘이 이렇게 세?

유유상종이라고 하더니 역시 검선 사백의 친우인가?

밀려오는 강도가 방금 전보다 배가(倍加)되자 나는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다.

결국 항복을 선언하려 했는데 어디선가 부드러운 봄바람이 불어와 내 입술을 막았다.

"그만하면 충분히 시험한 것 같은데, 이제 그만하는 게 어떤가?"

순간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던 두 개의 기운 사이에 어딘가 모르게 익숙한 기운이 비집고 들어왔다.

이건 분명 무당의 기운이다.

'고약한 할배 같으니. 나서려면 좀 더 일찍 나서 주지.'

다음 순간.

야수처럼 울부짖던 패도적인 기운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기 시작했다.

"후우."

나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흘리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어느새 흥건한 땀이 이마에 배어 있었다.

"청운이라 했지? 자네, 나이가 어떻게 되는가?"

"16세입니다."

"십육 세!"

단목지양의 무표정한 얼굴에 금이 갔다.

그는 마치 혼잣말하듯 내 나이를 한 번 더 읊조렸다.

순간적이었지만 나는 그의 눈빛이 크게 출렁거리는 것을 보았다.

"허허허허!"

이때, 노승의 입에서 푸근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정녕 놀랍군. 고작 십육 세의 나이에 지금의 경지를 이루었단 말인가!"

"과찬이십니다."

내가 머쓱해하며 대답했다.

그리고 옆에서 이것을 지켜보던 풍양 사백은 뭐가 그리 좋은지, 나를 향해 누런 이빨을 내보이며 낄낄대고 있었다.

* * *

'이게... 말이 되나?'

사황은 내색지 않았지만 현재 무척이나 놀란 상황이었다.

고작 십육 세의 소년이 보여 준 놀라운 실력 때문이다.

처음엔 그냥 재미 삼아 시작한 일이었다.

청운이라는 도명을 받은 것도 퍽이나 궁금했기 때문에 말이다.

그런데 이것 봐라?

삼류 수준에서 이류 수준으로 그리고 이류 수준에서 일류 수준의 기세를 흘려 보냈는데 견뎌 내는 것이 아닌가!

비록 찰나에 불과했지만 풍양이 끼어들기 전 자신은 절정의 기세를 뿜어냈고 저 소년은 그것을 막아 냈다.

사황은 자신도 모르게 소스라치게 놀라고 있었다.

무당은 어떻게 저런 괴물을 키워 낸 것일까?

이와 같은 시각.

소림 신승 소현 대사 역시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무당에 잠룡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 누구도 청운의 존재에 대해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조차 일언반구도 없었다니 왠지 검선의 고리눈이 오늘따라 치사하게 보였다.

제17화

17화 단목린

"축하하네, 검선. 저 아인 무당의 홍복이야."

"축하라니, 아직 부족한 아일세. 배울 게 많아."

"허허허. 이 사람아, 부족하긴 뭐가 부족한가. 저 나이에 저 정도 실력이면 오히려 과하네, 과해. 무당은 물론 앞으로 중원 무림의 큰 동량이 될 인재야. 안 그런가, 사황?"

"신승의 말이 맞네."

"...??"

세 사람은 각각 자신만의 개성이 담긴 털털한, 대견한, 꿀이 떨어지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러나 내 마음은 바짝 얼어붙은 상태였다.

방금 전의 대화를 통해 두 노인의 정체를 확실하게 인지했기 때문이다.

소림 신승과 사황 단목지양!

가슴이 두근두근 세차게 방망이질 치고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꿀꺽!

두 다리는 왜 또 이리도 후들거리는가?

아마도 두 노인네가, 아니! 두 분께서 내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거 괜한 힘 자랑 한번 해 보려다 모양새만 이상하게 되었군. 청운이라 했던가? 내가 자네에게 실례를 범했네."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나는 바짝 언 상태로 괜찮다고 답했다.

이때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검선 사백과 신승의 조합은 이해할 수 있다. 무당과 소림의 조합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사황과의 조합은 많이 이상했다.

그는 사파지존이 아닌가?

이때 귀신같은 눈치를 지닌 풍양 사백의 전음이 들려왔다.

-[이놈아, 표정에 다 보인다.]

-[...!]

-[정(正)과 사(邪)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중요한 건 겉이 아니라 알맹이지. 사황은 그런 인물이다. 적어도 남을 속이는 소인배 따위가 아니다.]

풍양 사백의 말에 내심을 들킨 것 같아 흠칫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사백의 말이 옳았다.

예를 들면 검찰과 경찰을 봐라.

물론 대다수 검사와 경찰은 정의를 구현하려 애쓰고 있다. 하지만 그중에는 범죄와 비리를 저지르는 부정한 이들도 있다. 다시 말해 옳은 일을 하는 조직이라도 모두 의로운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하하하. 모두들 용서하게. 오랜만에 친구들을 불러 놓고 내가 추태를 부린 것 같군."

풍양 사백이 예의 그 털털한 모습으로 분위기를 한번 환기시켰다.

"추태라니, 오히려 좋은 구경을 했네."

"나 역시 마찬가지네."

신승은 마치 흰 옷 입은 켄터키-닭 할아버지처럼 인자한 미소를 보이고 있었고 사황 역시 은은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역시 높은 명성만큼 통이 크고 대범하다고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좋게 봐 줘서 고맙네. 저쪽에 가면 정자가 하나 있는데, 그리로 가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어떤가?"

"그렇게 하지."

"나 역시 좋네."

세 사람이 자리를 이동하자 나와 꼬마 소녀만 얼떨결에 남게 되었다.

원래대로라면 사황이 그의 손녀와 함께 이동했겠지만 나라는 존재로 인해 얼떨결에 보모가 되었다.

"얘, 넌 이름이 뭐니?"

한 7~8세쯤 되었을까?

꼬마 소녀는 꽤나 귀여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이름, 내 이름은 왜?"

새초롬하게 반문하는 게 꽤나 당차다.

하긴 사파지존이 할아버진데!

나는 미소를 지르며 말했다.

"그냥. 귀여워서."

"뭐, 뭐라고?"

내 말이 잘못됐나?

꼬마 소녀는 꽤나 당황한 표정이다.

"못 들었니? 너 말이야. 너! 꽤 귀엽다고~ 하하하."

"왜 웃는 거야."

내 웃음이 맘에 들지 않았는지 큰 소리로 외친다.

어느새 양 볼이 새빨개진 그 모습이 엄청 귀엽다.

"흐흐흐흐~."

"아니, 왜 계속 웃어요?"

아이고, 화내는 모습마저 귀엽다.

마치 어렸을 적 여동생을 보는 것 같아 동심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웃은 건 미안해요. 내가 실례했어요."

난 이런 마음을 내색지 않고 잘못을 인정하는 동시에 짐짓 태연한 얼굴로 반문했다.

"그런데 숙녀의 이름을 물어본 게 잘못된 건가요? 좀 전에 봤잖아요. 할아버지들의 관계를 말이에요."

"그, 그건."

소녀는 할아버지라는 말이 나오자 잠시 당황하더니 냉큼 이야기의 주제를 바꿨다.

요 녀석! 귀여운 줄만 알았는데 눈치가 빠르고 머리도 좋은 것 같다.

"단목린."

"단목린?"

"응."

"예쁜 이름이네."

"오빤 이름이 뭐야?"

"청운."

"청운?"

"응."

순간 단목린의 눈동자가 반짝하고 빛을 발했다.

"푸른 구름이라, 오빠도 예쁜 이름이네."

"컥!"

이런! 되로 주고 말로 받았다.

"참! 아까 어떻게 한 거야?"

"뭐가?"

"우리 할아버지 눈을 똑바로 쳐다봤잖아."

"그게 왜?"

"이상해서."

"뭐가 이상한데?"

"보통 우리 할아버지가 쳐다보면 다들 고개를 숙이거든. 근데 오빠는 우리 할아버지의 눈빛을 끝까지 피하지 않았잖아. 오히려 칭찬까지 받았고! 설마 풍양 할아버지 때문에 우리 할아버지가 봐주신 건가?"

"에이~ 그건 아니지."

"뭐가 아닌데?"

"이 오빠가 그만큼 강한 거야. 그래서 인정을 받은 거란 말씀."

"정말?"

단목린의 눈에 짙은 호기심이 솟아났다.

"그럼 나랑 한번 겨뤄 봐."

"엥? 지금 무공을 겨뤄 보자는 거야?"

"응. 맞아."

난데없이 무공을 겨루자니, 얘가 지금 뭐라는 거니?

단목린의 말에 오히려 내가 당황했다.

"왜 자신이 없어, 내게 질 것 같아?"

허허허!

이런, 이런, 저런 새침한 얼굴로 도발을 하다니.

그럼 거절할 수가 없잖아.

"나와 대련을 하고 싶다면 상대해 주는 것이 인지상정."

순간 무슨 생각이 들었던 걸까?

단목린 덕에 나 역시 동심으로 돌아간 걸까?

오래전 TV에서 본 로켓단의 명대사를 읊으며 멋들어진 자세까지 취했다.

"이 세계의 파괴를 막기 위해! 이 세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사랑과 진실, 정의를 뿌리고 다니는 내 이름은 청운! 너에게 선공을 양보하겠다."

"...!!"

다행히 단목린은 내 행동에 아무것도 묻지 않고 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쉿, 쉬릭!

공격이 이어질 때마다 바람을 가르는 매서운 파공성이 귓가를 울린다.

사황의 손녀답게 상당한 수련을 한 모양이었다.

"단전퇴, 선유각(몸을 회전시켜 발을 뻗는다)!"

단목린의 상체가 반회전하며 매서운 발 차기가 연속적으로 날아왔다.

나는 손을 들어 가볍게 원을 그렸다.

-팍, 팍, 파파파팍!

단목린이 아무리 공격을 시도해도 통하지 않았다.

소녀는 자신이 태극권의 영향력에 들어온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십여 차례의 공방을 주고받았는데 나는 오직 방어만 했을 뿐이다.

"에잇! 에잇!!"

단목린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쉴 새 없이 덤벼들었지만 후발제인, 유능제강의 묘리를 적절히 이용해 공격이 들어오면 한 걸음 뒤로 물러났고 왼쪽으로 공격이 들어오면 오른쪽으로 몸을 비틀었다.

'이제 나도 슬슬 공격해 볼까?'

오해하지 말자.

진짜 공격을 한다는 말이 아니다.

내가 아동 학대를 하는 쓰레기도 아닌데, 어디를 공격한다는 말인가?

"머리."

"...!"

"등."

"...!"

단목린은 조그만 발을 요리조리 움직여 가며 나를 떼어 내려고 했다.

하지만 마치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거리를 주지 않자 점점 당황스럽게 변해 갔다.

"팔."

"악! 저리 안 비켜?"

"이런, 이런, 곳곳에 빈틈이 많잖아. 이번엔 다리."

"엌! 어, 어느 틈에?"

단목린이 당황하며 급히 자세를 바로잡으려 했지만 이미 내게 뒤를 잡혔다.

나는 재빠르게 단목린의 중심을 무너뜨렸다.

-콰당!

"으아아아~."

중심이 무너지자 자연스레 바닥에 넘어졌고 단목린은 잠시 억울하다는 표정을 보이더니 급기야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어, 어라?"

단목린의 울음에 당황한 것은 오히려 나였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할까?

쩝! 이래서 여자의 눈물이 최고의 무기라고 하는 걸까?

과정이야 어떻든 간에 어린애를 울렸으니 무조건 내가 잘못한 것이다.

오만 가지 생각이 떠오르는 와중에 마침 좋은 방법이 생각났다.

"오빠가 장난이 심했지?"

"...."

"미안해. 대신 오빠가 재밌는 마술을 보여 줄게."

"...마...술?"

오! 다행이다.

일단 반응을 보였다.

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일종의 썰을 신나게 풀기 시작했다.

"자~~~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닙니다. 지리산에서 3년, 봉래산에서 2년, 한라산에서 4년을 갈고닦아 완성한 마술을 오늘 여러분들 앞에 소개하도록...."

당연히 갑작스럽게 지어낸 급조된 마술이었지만, 진짜 공연을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좌중(아무도 없었는데)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이는 능청을 보여 줬다.

손가락을 이용한 눈속임,

자그만 돌멩이를 이용한 움직임이 시작됐다.

기초 마술에 불과했지만 현란한 손기술에 구수한 입담이 더해지자 어느새 단목린에게선 눈물이 사라지고 깨알 같은 웃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깔깔깔깔~~~."

이런, 울다가 웃으면 똥X에 털 나는데.

암튼 마술 덕에 기분이 완전히 풀렸는지 단목린이 환한 미소를 보여 주었다.

"청운 오빠."

"응?"

"근데 지리산, 봉래산, 한라산은 어디에 있는 산이야?"

"어?"

"처음 들어 본 산이라서 궁금해."

"어, 어. 그게 저쪽, 그러니까... 음! 신선들이 살고 있다고 알려진 전설의 산이야."

"오~~ 혹시 다른 마술도 있어?"

"당연히 있지. 또 보여 줄까?"

"응. 보여 줘, 보여 줘."

"오케이. 이번에 보여 줄 마술은 데이비드 카퍼XX라는 이름을 가진 신선께서 개발하신...."

그러기를 한참 후,

단목린은 찹쌀떡처럼 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 웃음을 터트렸다.

이건 뭐 처음이 어려웠지, 이젠 뭐만 해도 웃음보가 터졌다.

"린아, 너 혹시 방귀 냄새 없애는 법 알아?"

"엥? 그런 게 있어?"

"친구들 앞에서 이렇게 해 봐."

나는 마치 내가 단목린 또래의 어린이가 된 것처럼 연기를 시작했다.

"얘들아, 어디서 맛있는 냄새가 나는 것 같지 않니? 그러면 주위에 있던 애들이 관심을 보일 거야. 그때 냄새를 맡는 척하는 거지. 이렇게 좌우로 움직이면서 말이야. 킁! 킁! 킁! 킁!!"

"꺄하하! 대박~~."

그때 사황의 음성이 들려왔다.

"린아의 웃음소리가 진동하는구나. 대체 무엇이 그리 재밌을까?"

그가 소림 신승 그리고 검선 사백과 나란히 걸어 나오자 단목린이 사황에게 날아가듯 안겼다.

"할아버지~."

"뭐가 그리 재밌었느냐?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더구나."

"그게 청운 오빠가요."

"청운 오빠?"

단목지양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나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이 오빠 동생 하기로 한 것이냐?"

"네. 그렇습니다."

사황 단목지양이 단목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린아에게 멋진 오빠가 생겼구나."

"그쵸?"

단목린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제18화

18화 반쪽짜리 귀환(1)

오랜만에 늘어지게 자고 있는데,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번호를 확인해 보니 친구 선환이다.

-선우야.

"어, 선환아."

-어디야?

"어디긴, 집이지."

-게이트는... 클리어했냐?

"당연하지."

-풋! 하긴 그러니까 내 전화를 받았겠지?

선환은 실소하며 말했다.

-어쨌든 D급 게이트 데뷔를 축하한다, 마이 브로(Bro).

"고맙다, 브로."

-나와. 축하하는 의미로 형이 한잔 살게.

"미친놈. 누가 형이래?"

-소고기 어때?

"선환 형님, 지금 어디십니까?"

-후후후! 그래. 지금 너네 집 앞이다. 그러니까 얼른 튀어나와라.

"넵, 형님. 바로 튀어가겠습니다."

소고기를 사 준다는 말에 나는 번개처럼 움직였다.

잠시 후,

선환과 나는 대로변에 위치한 고깃집에 들어갔다.

"한 잔 받아라."

"그래. 고맙다."

불판 위에서 소고기가 지글지글 익어 가고 있다.

"야! 뭐 해? 빨리 먹어. 소고기는 이렇게 살짝 익었을 때, 먹는 거야."

"맞네. 맨날 돼지만 먹다가 오랜만에 소고기 먹으려니 까먹었다. 큭!"

내 말에 선환이 가볍게 피식거리며 웃었다.

그리고 우리가 어느 정도 배를 채웠을 무렵,

선환의 입에서 생각지 못한 뜻밖의 제안이 튀어나왔다.

"C급? 지금 C급에 들어가자고 했어?"

"응."

"나 아직 F급인데, 그게 가능해?"

헌터는 일반적으로 자신의 등급과 같은 게이트에 들어가지만 보다 더 큰 이익을 얻기 위해 파티나 그보다 규모가 큰 단을 만들고 높은 등급의 게이트에 들어간다.

"원래는 안 되지. C급에 들어가려면 최소 D급은 돼야 하니까. 근데 이 형님이 누구냐. 내가 이미 다 얘기해 놨다."

"음! 그래도 C급은 무리가 아닐까? 괜히 나 때문에 네가 무리하는 것도 싫고 말이야."

"무리는 개뿔. 그건 됐고! 일단 잘 생각해 봐. 이런 기회 자주 없다. 그리고 막말로 네 실력이면 D급이나 마찬가지잖아. 그건 내가 너보다 더 잘 안다, 인마. 이참에 돈도 좀 벌고 그 돈으로 심사도 다시 받는 게 어때? 이미 팀원들에게 얘기도 했어. 인건비 1,000만 원에 인센티브로 부산물의 10%!"

"음."

"야! 진짜 흔치 않다."

인건비 1,000만 원에 10% 인센티브라니,

선환의 말처럼 이런 기회는 정말로 흔치 않았다.

"야, 인마. 최선우! 이 형님 화내기 전에 빨리 대답해라. 어떻게 할 거야, 갈이 가는 거지?"

"...."

"아무 말 없으면 같이 가는 거다. 오케이?"

선환은 마치 확인하듯 나를 쳐다보았다.

고마운 녀석 같으니, 나는 엄지와 검지를 사용해 동그라미를 만들어 냈다.

"오케이!"

"오케이~~."

우리는 술잔을 들며 건배를 외쳤다.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맥주 맛이 그렇게 짜릿할 수 없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알 수 없었다.

알쏭달쏭한 미소를 머금은 채 날 바라보고 있는 내 친구의 눈빛을 말이다.

며칠 후,

나는 선환과 함께 C급 던전으로 알려진 개화산 게이트에 들어갔다.

선환이 대원들을 불러 모아 인사를 시켰다.

"자, 이미 말했지만 여기는 내 친구 최선우. 다들 인사들 나눠."

"난 강혁이야. 팀의 리더를 맡고 있어. 만나서 반갑다."

반말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지만 개의치 않았다.

한눈에 봐도 나이가 많아 보였고 팀의 대장이었으니까.

"난 김경수라고 해요. 나이는 스물이죠. 3서클 마법사예요."

"최만식. 직업은 검사요. 나이는...."

잠시 서로에 대한 소개가 오갔고 이후 우리는 본격적인 사냥에 들어갔다.

"자, 이제 출발하자. 각오들 단단히 하라고."

"오케이! 알았어, 대장."

"이번에야말로 대박을 터트리겠어."

"나두~."

"다들 고고~~."

나는 맨 마지막에 서서 일행의 뒤를 쫓았다.

한 사람의 헌터지만 동시에 짐꾼이기 때문이다.

C급 게이트라 그런지 던전 내부는 꽤 컸다.

산과 산 그리고 넓게 펼쳐진 숲에는 관목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는데 척후를 맡은 선환이 앞쪽을 주도면밀하게 살피며 우리를 이끌었다.

난 이때까지도 알 수 없었다.

* * *

"실드 스킬이라니, 큭큭큭! 믿는 구석이 있었군."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아파서가 아니다. 믿었던 친구에게 당한 배신 탓이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의심 가는 것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모두가 떠났지만 혼자 남은 것도 그렇고 툭하면 얼굴이나 보자는 핑계로 이것저것 묻던 것도 그렇고 말이다.

"그러게 말이야. 어쩐지 F급 따위가 D급에서 활약을 했다고 들었을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어쩌지? 꽃이 피기도 전에 뒈지게 생겼는데, 큭큭큭큭!"

"하하하하~."

황기택과 안선환은 뭐가 그리 재밌는지 가슴에서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우리는 성공적인 사냥을 자축하고 있었다.

"최선우 헌터를 정식으로 영입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선환의 말에 사람들이 자유롭게 답했다.

"찬성입니다."

"레벨과 등급이 좀 달리는 것이 흠이지만 능력은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레벨이야 우리가 버스를 태워 주면 되지. 순간 이동 스킬에 실드 스킬까지 갖고 있으니 나도 찬성."

"...."

팀의 리더인 강혁까지 찬성하자 선환의 얼굴이 환해졌다.

"선우야, 축하한다."

"고마워, 선환아. 다 네 덕이다."

"너도 이제 우리 팀원이니까, 소감 한마디 해."

"음... 앞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흐흐! 나도 잘 부탁해요."

"그럼 일단 몇 가지 사항만 점검하고 돌아가죠."

그런데 그때 문제가 발생했다.

최만식과 김경수가 내게 달려들어 양팔을 꺾은 것이다.

"악!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걸까?

방금 전까지 훈훈하게 웃던 사람들의 얼굴에 싸늘한 냉기가 흐르고 있었다.

난 본능적으로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선환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내가 알고 있던 친구의 모습이 아니었다.

선환은 나를 향해 섬뜩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선환아, 지금 뭐 하는 거야. 장난하는 거지?"

"...."

내 질문에 대한 답은 뒤에서 들려왔다.

"안녕, 최선우."

"화, 황기택?"

"그래. 우리 오랜만이지?"

"...!!"

황기택은 한 자루의 잘 벼려진 칼로 내 몸을 난도질했다.

양팔이 꺾인 상태였으므로 놈의 칼침에 어떠한 반항조차 할 수 없었다.

-푹, 푹. 푸욱!

젠장!

그동안 무얼 위해서 그렇게 발악하듯 살았을까?

순간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흐... 흐... 흐흐."

"엥? 이 새끼 봐라. 선환아, 얘 지금 웃는 거야?"

"그런 것 같은데?"

"이봐, 최선우. 뭐가 그리 우습지?"

"그냥, 허탈해서."

"뭐, 허탈?"

"응."

"크크큭! 하긴 그동안 그렇게 개고생을 하다가 기껏 좋은 스킬을 얻었는데 이렇게 가게 됐으니 내 생각에도 허탈할 것 같다. 흐흐흐~."

"그래. 황기택, 네 말이 맞다. 큭큭큭."

황기택은 자신의 말에 동의하며 웃는 내가 신기한 모양이었다.

"선환아, 얘 좀 봐 봐. 이 새끼 진짜 미친 것 아냐?"

황기택의 말에 벽에 기대어 있던 선환이 내 앞에 다가와 쪼그려 앉는다.

그러더니 날 유심히 관찰했다.

나는 거듭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삶에 대한 미련을 버리자 내가 처한 상황이 한 편의 코미디 같아서 도저히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두 사람의 눈에 나란히 실망감이 스쳐 지나갔다.

상대가 꿈틀거리고 발악을 해야 재밌는데, 이렇게 달관하는 자세는 영 재미가 없는 것이다.

"최선우, 뭐가 그리 우스워?"

"그냥. 내 인생도 불쌍하지만 네 인생도 만만치 않은 것 같아서."

"...!"

내 말이 녀석을 자극한 모양이다.

선환이 날이 잔뜩 선 칼을 내 뺨에 대고 살살 자극했다.

"닥쳐, 이 새끼야."

"큭... 큭... 큭큭."

녀석은 당장에라도 날 죽일 듯 노려봤다.

그런데도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지금 죽으나 조금 이따가 죽으나 어차피 죽는 건 마찬가지 아닌가?

"최선우, 내가 재밌는 얘기 하나 해 줄까?"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황기택이 입을 열었다.

"재밌는 얘기? 아직도 그런 얘기가 남았어?"

"응. 아직 하나가 남았네."

놈은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너 박진웅이라고 알지?"

"박진...웅. 진웅 아저씨?"

"그래. 네 아버지 친구."

황기택의 얼굴엔 자부심이 잔뜩 묻어 있었다.

"그 사람 보증 섰다가 너네 집이 쫄딱 망했잖아."

"설마?"

"그래. 큭큭큭! 그것도 내 작품이야."

"...!!"

놈은 득의양양하게 웃으며 그 구린 입을 내 얼굴에 가져다 댔다.

"박진웅은 잘 살고 있어. 그냥 네 아버지 앞에서만 없는 척, 불쌍한 척하며 연기하고 있지."

"쿨럭!"

녀석의 말이 끝나는 순간 기침과 함께 한 움큼의 선혈이 흘러나왔다.

"선우야, 들어 봐. 넌 여기서 죽으면 모든 게 끝이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아니야. 이게 끝이 아니라고. 일단 네가 없어지면 어떻게 될까? 네 아버지 택시 일. 큭큭. 내가 가만히 놔둘 것 같아? 조금씩 아주 조금씩 망하게 해 줄 거야. 그럼 사채 빚이 점점 더 늘어나겠지? 너도 사채업자 새끼들이 얼마나 지저분한지 잘 알잖아. 뻔하지 않아? 안 봐도 비디오야. 일단 네 여동생부터 시작할게. 한적한 섬으로 팔아 버리는 거야. 이상한 주사도 맞고 비디오도 찍고 말이야. 아! 온갖 잡놈들에게 비참한 꼴을 당하게 만들어 줄게. 스스로 죽고 싶을 정도로 말이야."

"...!!"

놈은 잔뜩 흥분한 채, 속사포처럼 목소리를 토해 냈다.

"큭큭큭!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 아직 내 얘기 안 끝났거든. 그래도 우린 아카데미 동기였잖아? 네 여동생이 정신 줄을 놓게 되면 내가 친히 움직여 줄게. 섬에서 데리고 나와 너희 집에 데려다줄 거야. 아들은 게이트에서 죽고 집안은 폭삭 망했고 하나 남은 딸마저 정신 줄을 놓은 채 돌아온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다음 날 이런 기사가 나오지 않을까? 삶에 비관한 일가족 자살하다. 캬~ 어때, 내 얘기 재밌지?"

"으아아아! 개X끼. 죽여 버릴 테다."

나는 악에 받쳐 소리쳤다.

분노가 극에 달해 내 심장을 시뻘겋게 태웠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저 시뻘건 선혈을 또 한 번 토해 냈을 뿐이다.

"으아아... 쿨럭, 쿨럭!"

이번엔 내장 부스러기가 피에 섞여 나왔다.

정말이지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아이쿠! 이게 뭐야? 선환아, 이 새끼 내장 조각 좀 봐라. 이제 진짜 가겠다."

"...."

"선우야. 그러니까 기회가 있었을 때, 내게 용서를 구했어야지. 살려 달라고 개처럼 엎드려서 기었어야 했어. 안 그래?"

"...X...자...식!"

더 이상 말할 힘도 없다.

그저 모든 분노를 담아 녀석을 저주하며 노려보았다.

"어쭈! 선환아. 이 새끼 눈 좀 봐라. 쏼아 있네."

비록 입으로는 놀랍다는 말을 하고 있었지만 눈빛에는 비웃음이 가득했다.

"아이고 무서워라. 그러다 날 잡아먹겠다, 잡아먹겠어."

-촤아악!

"악!"

그 순간 내 눈에 벼락이 쳤다.

선환이 내 눈을 그대로 그어 버린 것이다.

"굿~ 굿 잡, 선환."

"기택아, 내가 마무리할까?"

"아니, 그냥 내버려 둬."

"응?"

"마지막 가는 길인데, 편하게 보내 주면 되겠어? 그건 아니지."

"그럼 어떡해?"

"후후후. 피 냄새가 진동하고 있잖아. 조금 있으면 몬스터들이 떼로 몰려올 거야."

"...!"

"그러면 최선우는 산 채로 몬스터에게 뜯어 먹히는 거지. 어때, 꽤 재밌을 것 같지 않아? 왜, 재미없어 보여?"

"아, 아니. 네 말이 맞아. 재밌을 것 같아."

"그렇지? 후후후!"

황기택은 비릿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어이, 최선우. 그럼 우린 이만 가 볼게. 행운을 빈다. 굿 럭!"

잠시 후.

놈들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다이어 울프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우~~."

"...아우~~~."

"아우~!"

다이어 울프의 하울링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난 마지막으로 애원했다.

악마라도 좋다.

복수만 할 수 있다면 내 영혼까지 팔 수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거짓말처럼 내 귓가에 시스템의 음성이 들려왔다.

-[고유 특성 분신의 복구를 시작합니다.]

-[삐익! 시스템 에러(Error), 사용자의 생명이 위태합....]

-[삐익! 시스템 에러(Error), 에러(Error), 시스템 에러(Error)]

-[...고유 특성의 긴급 사용 요청....]

....

....

....

....

....

....

....

....

-[승인]

제19화

19화 반쪽짜리 귀환(2)

새벽 두 시.

지독한 악몽에 잠에서 깨어났다.

차라리 나 혼자만의 고통이었다면 모르겠지만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이 화염에 휩싸여 비명을 지르는 모습은 최악이었다.

그런데 꿈에서 깨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다.

이대로는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아 결국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명상에 잠겼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삐익! 시스템 에러(Error), 에러(Error)]

-[고유 특성의 긴급 사용 요청]

-[분신과 합체를 진행하겠습니까? Y / N]

분신과의 합체를 묻는 시스템의 메시지가 난데없이 뜬 것이다.

현재 1%도 복구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설마 그래서 그런 지독한 악몽을 꾼 것인가?

나는 즉시 [Y]를 선택했고 그 순간 내 몸은 하얀 빛에 휩싸였다.

-우우우우웅!

눈을 떠 본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널브러져 있는 형상 하나가 보인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를 인형, 그건 바로 나였다.

"누... 누...구...."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만약 내 선택이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어쩌면 나는 차디찬 시체와 조우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대답할 시간조차 아까워 전력을 다해 움직였다.

1일... 47일... 115일... 730일... 1,730일... 4,000일....

각각의 인격체로 지내 왔던 십 년 이상의 시간이 어제의 기억처럼 떠오르더니 마침내 하나로 합쳐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심상치 않은 변화가 일어났다.

<상태 창>

이름 : 주선우(무림)

레벨 : 15 │ 레벨 : 10

고유 특성 : 분신(Unique)

칭호 : 지혜로운 자

생명력 : 280/280 마력 : 180/180

힘 : 24 체력 : 28 민첩 : 21

지혜 : 50 지능 : 18 행운 : 5

보너스 스탯 : 20

<상태 창>

이름 : 최선우(지구)

레벨 : 10

고유 특성 : 분신(Unique)

칭호 : 없음

생명력 : 4/200 마력 : 3/180

힘 : 28 체력 : 20 민첩 : 26

지혜 : 12 지능 : 18 행운 : 5

보너스 스탯 : 0

-우두둑!

부서진 뼈들이 제자리를 찾아갔고 신체가 치료를 시작했다.

입안 가득 고인 피들이 어느새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흡수되었으며 부러진 뼈와 내장 역시 느리지만 완벽하게 복구되었다.

<상태 창>

이름 : 최선우

레벨 : 20(15+5)

고유 특성 : 분신(Unique) *비정상적 실행

칭호 : 지혜로운 자

생명력 : 144/380(280+100) 마력 : 270(180+90)

힘: 38(24+14) 체력 : 38(28+10) 민첩 : 34(21+13)

지혜 : 56(50+6) 지능 : 27(18+9) 행운 : 8(5+3)

보너스 스탯 : 20

먼저 상태 창을 확인해 보았다.

레벨과 스탯의 수치가 큰 폭으로 상승한 가운데 내 분신이 보유하고 있던 경험치의 50%를 얻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몸 상태를 확인하자마자 내공을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우선 눈앞에 펼쳐진 문제를 해결해야 했기 때문이다.

"크르르릉!"

어느새 피 냄새를 맡고 달려온 다이어 울프 무리가 전방과 후방에 자리 잡고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흉포한 이빨을 내밀고 있다. 만약 조금 전의 나였다면 지금쯤 녀석의 위장에 들어가 분해되고 있었겠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나는 혀를 삐쭉 내밀고 입술을 한 번 핥았다.

태허무극심법의 영향 때문인지 이상하리만큼 평정심이 유지됐다.

"뭐 해, 덤벼!"

순간 다이어 울프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녀석들은 각각의 방향에서 날아왔는데 나는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은 채 두 손을 들고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마력으로 치환된 내공이 내 손길을 따라 부드럽게 휘어지는 동시에 끊임없이 이어지더니 이내 건과 곤을 만들어 냈다.

무당파 조사 삼풍 진인의 태극권이 이 땅에 현신했다.

-파파파파팡!!

"깨갱!"

"깨-앵!"

다이어 울프들의 비명성이 터져 나왔다.

태극권의 영향력 안에 휘말리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곧장 날아가 벽을 후려쳤다.

현란한 움직임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부드러움만큼은 진짜배기였다.

다이어 울프는 일반적으로 특유의 유연한 몸과 동물 특유의 날쌘 동작 때문에 상대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그것은 이제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가 되었다.

오히려 놈들의 공격이 너무도 선명하게 눈에 보이는지라 내심 우습기만 했다.

"크아앙!"

다이어 울프의 반격에 몸을 살짝 뒤로 물리며 녀석의 발이 내 몸을 스쳐 지나가게 내버려 두었다가 번개같이 움직여 손바닥을 이용해 녀석의 허리를 가볍게 내리쳐 주었다.

-콰직!

녀석의 뼈가 부서지는 소리였을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등뼈가 박살 나자 놈은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크... 크으으...."

"크륵... 크...르륵."

상황이 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다이어 울프 무리는 여전히 흉포한 이빨을 드러내며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기세와는 달리 녀석의 눈빛에는 조금씩 두려움이 묻어나고 있었다.

분위기가 역전된 것이다.

이때 발밑에 번쩍이는 날붙이가 눈에 들어왔다.

황기택이 내 몸을 쑤셔 댔던 단검이다.

길이가 좀 짧은 느낌이 들었지만 태극검을 펼치기에는 무리가 없어 보였다.

난 손을 뻗어 단검을 쥐었다.

태극권을 초연했으니 태극검 역시 펼쳐 줘야겠다.

안 그럼 극검이가 삐질지도 모르니까.

다음 순간,

내 손에 쥐어진 단검이 내 의지에 따라 부드럽게 반원을 그리더니 그대로 허공을 가로질러 다이어 울프의 목덜미를 그었다.

-서걱!

다이어 울프의 얼굴이 몸통과 분리되었다.

그것은 단발마의 비명조차 나오지 않은 허무한 죽음이었다.

예상치 못한 일격에 다이어 울프 무리가 일견 당황해하는 것 같았지만 이내 흉측한 이빨을 드러내며 나를 향해 날아왔다.

"태극검!"

공중을 향해 태극의 형상을 그린 검이 각기 다른 각도로 움직이며 허공을 갈랐다.

-서걱!

"켕!"

"케엑!"

-서걱! 서걱!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짧은 소리.

다이어 울프들이 바닥에 고꾸라지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싸웠을까?

다이어 울프가 쏟아 낸 피비린내 때문에 주변에 있던 몬스터들이 죄다 몰려온 모양이다. 하지만 결과는 변하지 않았다.

내 손에 의해 모조리 도륙당했다.

-[띠링, 레벨이 오릅니다.]

-[띠링, 레벨이 오릅니다.]

-[띠링, 레벨이 오릅니다.]

-[띠링, 레벨이 오릅니다.]

-[띠링, 레벨이 오릅니다.]

내 시야가 닿는 곳에는 더 이상 숨을 쉬고 있는 몬스터가 없었다.

나는 조용히 상태 창을 열었다.

<상태 창>

이름 : 최선우

레벨 : 25

고유 특성 : 분신(Unique)

칭호 : 지혜로운 자

생명력 : 104/380 마력 : 53/270

힘 : 38 체력 : 38 민첩 : 34

지혜 : 56 지능 : 27 행운 : 8

보너스 스탯 : 45

고작 몇 시간을 사냥했는데 5레벨이 상승했다.

지난 수년간의 개고생을 생각하면 허무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습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나는 스킬 창도 오픈해 보았다.

[패시브 스킬] :

태허무극심법(SSS), 태극권(S), 태극검(S), 고대 중국어(M)

[액티브 스킬] :

블링크(E), 실드(D)

지구에서 익혔던 기초 검술이 사라져 있었는데 아마도 상위 스킬에 흡수된 것 같았다. 그런데 문제는 고유 특성인 분신이었다.

<고유 특성 정보>

이름 : 분신

등급 : U(Unique)

숙련도 : 43%

설명 : 나와 같은 또 하나의 나를 만들어 서로가 얻은 모든 경험을 공유한다.

*현재 사용자의 비정상적인 접속으로 72시간 이후 접속이 해제된다.

위에 나온 설명에 따르면 앞으로 72시간 후, 비정상적인 접속이 해제된다고 나와 있었는데 이 말은 즉 72시간 후에 내가 다시 무림 세계로 돌아간다는 뜻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나는 다이어 울프의 사체 더미 위에 앉아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앞으로 72시간, 아니! 몬스터를 사냥하느라 2시간을 썼으니 이제 정확히 70시간 남은 상황이다.

자! 그럼 이제 어떻게 할까?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게이트에서 빠져나가 놈들을 찾고 싶었다.

그래서 갈기갈기 도륙하고 싶었다.

하지만 용기와 만용은 구별해야 한다.

현재의 나로선 복수라는 이름을 실행하기 위해 뭔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우선 황기택이다.

놈은 현재 C급 헌터라고 들었다.

대화 그룹 3세답게 집안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얼마 전 C급에 올랐다고 했다.

녀석의 집안이 대형 길드마저 소유하고 있었으니 아카데미 졸업 후, 저러한 급성장이 가능했을 것이다.

황기택, 안선환, 강혁, 김경수, 최만식, 박진웅....

난 냉정하게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내가 내린 결론은 결국 시간이었다.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걸려도 늦지 않는다는 격언을 떠올리며 내 위치를 정확히 판단했다.

난 전진교의 전설적인 내공심법인 태허무극심법을 익혔고 중원 무학의 양대 산맥이라 불리는 무당파의 무공을 배웠다. 내실을 따져 보면 더욱 놀랍다.

무려 SSS급의 내공심법과 S급 성장형 무공이기 때문이다.

내가 위에서 언급한 무공들을 완성한다면 한국 최강, 아니 지구 최강의 헌터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럼 게임 오버겠지."

나는 일단 정체를 숨기기로 했다.

암중에 숨어 있는 적만큼 무서운 적은 없으니까, 놈들을 상대할 수 있는 힘을 기를 때까지 스스로 은둔자가 되기로 했다.

만약 내가 처한 상황이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놈들에 대한 복수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10년은커녕 100년이 지나도 이룰 수 없는 미몽에 불과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렇지 않았다.

마음에 결심이 서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사냥을 시작해 볼까?"

헌터가 강해질 수 있는 가장 최고의 방법은 사냥이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F급 헌터 한 명을 조용히 담그기 위해 C급 게이트에 데려왔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고마웠다.

나는 게이트 중심부를 향해 빠르게 이동하면서 눈에 보이는 몬스터를 모조리 사냥하기 시작했다.

제20화

20화 나를 숨겨라

강호에 내려오는 격언 중 이런 말이 있다.

-진짜 고수는 겉보기에 평범해 보여. 그리고 싸움이 벌어지면 가장 먼저 도망가지. 웃기지? 근데 사실이야. 만약 도망치지 못했다면? 그럼 어쩔 수 없이 싸워야지. 근데 그것도 마지막까지 버티다가 실력을 드러낼 거야. 왠지 알아? 싸우기가 싫거든. 전부 급소만 보이는데 어딜 때리겠어? 조금만 잘못 때려도 그대로 죽어 자빠질 텐데.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무당의 무공은 외가기공이 아닌 내가기공으로 신체 내부를 공격하는 무공이다.

태극권의 영향력 안에 들어온 이상 겉보기에 멀쩡해 보일지 몰라도 한 번이라도 가격당하면 오장육부가 파괴되는 것이다.

봐라. 벌 떼처럼 달려드는 놀 따위는 이렇게 가벼운 손짓 한 번에도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퍽!

"케액!"

그로부터 6시간 후,

나는 마치 그동안의 서러움을 보상이라도 받듯 각종 아이템을 쓸어 담았다.

물론 몇 번의 레벨 업도 경험했고 말이다.

[오크의 낡은 가죽 방어구(세트)]

등급 : D

내용 : 흉갑, 장갑, 벨트, 부츠, 신발

오크의 가죽으로 만든 방어구 세트.

각각 힘 +1, 민첩 +1, 체력 +1 효과가 있다.

옵션 : 올 세트 착용 시 힘 +5, 민첩 +5, 체력 +5

오크의 낡은 가죽 방어구 세트를 완성했고 여기에 더해 특이한 아이템을 하나 얻었다.

[마스크]

등급 : D

내용 : 괴짜 재봉장이가 만든 마스크

미세 먼지 방어에 탁월하며 정체를 숨기기에 적당하다.

특징 : 빨아서 쓸 수 있다. 영구 지속형

옵션 : 매력 +10

당분간 정체를 가려야 하는 지금 시점에서 어쩌면 가장 필요한 아이템을 얻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상태 창>

이름 : 최선우

레벨 : 29

특성 : 분신(Unique)

칭호 : 지혜로운 자

생명력 : 440/480 마력 : 93/300

힘 : 50(40+10) 체력 : 48(38+10) 민첩 : 44(34+10)

지혜 : 60 지능 : 30 행운 : 10 매력 : 10

보너스 스탯 :65

낡은 오크 가죽 세트와 마스크를 착용하니 힘, 체력, 민첩 모두 총 10씩 30의 추가 포인트와 함께 매력 창이 새롭게 생성되었다.

나는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기 위해 20포인트만 남겨 놓고 나머지 포인트를 각각의 스탯에 골고루 배분했다.

어느새 어둠이 찾아왔고 밤하늘에 두 개의 달 트윈문(Twin-Moon)이 떴다.

트윈문 옆에는 처음 보는 형태의 별자리들이 아름답게 빛나며 주위를 밝히고 있었는데 새삼스럽게 저 하늘만 봐도 이곳이 지구와 전혀 다른 세계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모닥불을 피운 후,

다음 사냥을 위해 조용히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오기 전까지 말이다.

"불빛이다."

"저기! 저쪽에 누군가 있어요."

조용히 눈을 뜨니 13시 방향에서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불빛을 본 모양이다.

잠시 후,

남성 셋에 여성 두 명이 눈앞에 나타났다.

복장을 보아하니 남자들은 전사나 탱커 쪽이고 여자들은 로브를 입은 것이 마법 계통으로 보였다. 전형적인 파티 구조다.

"실례 좀 해도 될까요?"

단단한 체구를 가진 남자가 내게 말을 걸었다.

"야영할 장소를 찾다가 불빛을 보고 왔는데 괜찮다면 잠시 불을 좀 나눠 쓸 수 있을까요?"

"...."

행색이나 첫인상으로 위험성을 판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나쁜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아 자리를 허락했다. 그리고 나쁜 사람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저들 모두를 상대할 자신이 있었으니까.

"그러시죠."

내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그들은 환한 표정을 지으며 불가에 둘러앉았다.

"자리를 내줘서 고맙소. 난 구성 길드의 이철승이오."

"조동철이오."

"헌터 마준호입니다."

"헤헤. 자리 고마워요. 전 김수연이에요. 이쪽은 제...."

"조미진이에요."

모두가 이름을 밝히자 나도 가만히만 있을 수 없었다.

가만있어 보자. 다음 순간 나는 최선우라는 본명 대신 무당파의 도명을 마치 내 진짜 이름인 양 말했다. 내 정체를 숨겨야 하기 때문에 본명을 사용하는 것에 순간적으로 거부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청운입니다."

"동료들이 보이지 않는데 설마... 혼자 오셨소?"

"네."

혼자 왔다는 말에 이철승을 비롯한 그의 팀원들이 무척 놀란 듯했다.

'아차!'

무심결에 대답해 놓고 나서야, 실수를 깨달았다.

저들이 놀랐다는 표정을 보이며 나를 향해 시선을 집중했기 때문이다.

"C급 게이트에 혼자 왔다니 그럼 최소 B급 헌터라는 말인데."

"저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상당한 실력자가 분명하겠군."

"형님, 거짓말 같지 않아요?"

"그러게요. 마스크를 써서 확신할 수 없지만 나이도 어려 보이는데 말입니다."

몇몇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철승을 향해 의문을 표했지만 나는 마치 아무것도 듣지 못한 양, 그저 태연히 내 할 일을 했다.

"어허!"

"죄, 죄송합니다, 형님."

그래도 이철승이란 사람, 경우가 있는 것 같다.

그가 흘깃 눈치를 주자 조동철, 마준호의 입이 단번에 조용해졌다.

이후 우리 사이에 특별한 대화는 없었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고 천천히 명상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한참이 지나자 내가 잠이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여자들이 조잘대기 시작했다.

"언니, 자?"

"아니. 왜?"

"그냥. 오늘도 꽝이었잖아."

"그러게 말이야."

"언니, 근데 그거 진짜 믿을 만한 정보야?"

"뭐가?"

"게이트에서 스타...."

"쉿!"

"앗. 미안."

'흠! 무슨 얘기를 하는 거지? 대화하는 폼이 예사롭지 않아 보이는데?'

문득 호기심이 동했다.

"확실치 않지만 분명 그렇게 들었어."

"언니 말이 맞으면 진짜 로또다. 로또!"

"그렇겠지."

"언니, 그러지 말고 그냥 마켓에서 찾아보는 게 어떨까?"

"얘. 그게 마켓에 풀리겠니?"

"블랙마켓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블랙마켓이라면 그럴 수 있지. 하지만 설상 나온다 해도 경쟁이 엄청날걸."

"하긴."

"일단 내일 하루만 더 사냥해 보자. 어때?"

"알았어, 언니."

말하는 본새를 보아하니 영락없는 부잣집 따님들이다.

그런데 솔직히 궁금하다.

저들이 말하는 것이 대체 무엇일까?

"언니."

"또 왜~."

"아니, 저 남자 말이야."

"누구?"

"마스크 쓴 사람. 이름이 청운이라고 했나?"

"저 사람이 왜?"

"대체 정체가 뭘까?"

"뭐가 그리 궁금한 건데?"

"아니! 일단 장비 수준이 별로잖아. 언니는 못 봤어? 게다가 마스크도 썼고. 혹시 범죄자가 아닐까?"

"범죄자?"

"응."

'참 나! 내가 범죄자라고?'

"얘! 목소리 낮춰. 그러다 깨겠다."

이것들아!

이미 깨어 있다. 아니! 애당초 잠이 들지도 않았다.

"미진아, 언니가 얘기했지. 헌터는 겉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고! 내가 몇 번이나 말하니? 게다가 저 사람은 우리에게 불과 자리를 빌려줬어. 도움을 준 사람을 그런 식으로 말하면 되겠니?"

"미안. 내가 실수했어."

"알았으면 됐어. 어서 빨리 잠이나 자. 내일 또 달려야지."

그 후 두 여인은 별다른 대화 없이 곧 조용해졌다.

모닥불 옆에서 그대로 잠이 든 것 같다.

코골이까지 하는 것을 보니 꽤나 피곤했던 모양이다.

암튼 조미진이라고 했던가?

그야말로 세상 물정을 모르는 철부지 아가씨다.

반면에 김수연은 남을 배려할 줄 알고 사려가 깊어 보였다.

기분이 상당히 불쾌해질 뻔했지만 김수연 덕에 소리 없이 실소하며 넘겼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고요한 침묵 속에서 먼동이 트기 시작함을 느끼고 조용히 눈을 떴다.

그리고 스킬 창을 통해 남은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정확히 59시간 남았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떠날 채비를 했다.

"...벌써 가시오?"

헌터 이철승이다.

눈을 감고 있길래 잠을 자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는 깨어 있었다.

아마도 저게 베테랑 헌터의 경험이겠지.

"네, 부지런히 움직여야죠."

이철승이 묘한 눈길로 나를 쳐다보더니, 뜻밖의 제안을 내놓았다.

"혼자 움직이면 위험할 텐데, 괜찮다면 우리와 동행하지 않겠소?"

"동행요?"

"그렇소."

그의 눈빛에서 일종의 호의가 느껴졌지만 난 고개를 저으며 정중히 거절했다.

"제안은 고맙지만 괜찮습니다. 혼자가 편해서요."

내가 거절할 줄 예상하지 못했는지 그의 눈에서 언뜻 이채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이내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이더니 입을 열었다.

"뭐 본인이 싫다면 어쩔 수 없지. 그럼 행운을 빌겠소."

"그쪽도요."

이철승 헌터와 인사를 나눈 후,

나는 곧바로 북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나는 마치 정글과 같은 울창한 숲과 조우하게 되었다.

생전 처음 보는 풀들이 지천에 깔려 있었는데 대부분 성인 무릎 위를 넘는 크기로 종류가 어떤 것인지는 몰라도 잎사귀가 꽤 단단하고 날카로운 것이 상당히 질기고 거칠게 보였다.

정글에 발을 들여놓기 무섭게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좀 전과 비교해 공기부터 달랐기 때문이다.

나는 눈과 귀를 열어 사방을 주도면밀하게 살피며 앞으로 나아갔고 얼마 뒤 거대한 덩치를 가진 갈색 오크 다섯 마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정찰병인가?"

녀석들은 주변을 이리저리 살피며 마치 정해진 루트를 따라 이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바람을 등진 채, 녀석들을 뒤따라갔다.

그리고 적당한 공간이 나타났을 무렵 놈들을 향해 번개같이 쇄도했다.

"태극검!"

-서걱! 서걱!

순식간에 두 놈의 머리통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남은 세 마리의 오크가 짤막한 괴성을 지르며 나를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역시 호전적인 성격을 가진 오크답다.

나는 재빨리 한 발짝 뒤로 물러서 녀석들의 공격을 피했다.

-쾅! 꽈직!

녀석들이 휘두른 철퇴와 도끼는 애꿎게도 아무 죄가 없는 나무를 후려치고 말았다.

"취이익!"

"케레렉?"

"크륵!"

놈들은 당황한 가운데에도 재빠르게 무기를 회수해 재차 공격을 감행하려 했지만 나는 그 짧은 틈을 놓치지 않았다.

-슈슈슉!

순식간이었다.

태극검의 강력한 힘이 실린 날카로운 검끝이 한 녀석의 미간을 관통하는 순간 태극권의 기운이 실린 왼손이 다른 오크 녀석들의 몸통을 미처 어떻게 방비할 틈도 없이 타격한 것이다. 그 속도가 마치 빛살같이 빨라 녀석들은 제대로 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는데 다만 그중에 가장 덩치가 큰 놈만이 유일하게 비명 같지 않은 비명을 지르며 생을 마감했다.

쿠에엑!!

그것은 돼지 멱따는 소리와 똑같았다.

확신하건대 오크의 조상은 돼지가 분명했다.

각설하고 이제부터 사냥의 시간이 돌아왔다.

나는 검을 손에 쥔 채 놈들이 다니는 길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기 시작했다.

제21화

21화 저주받은 마법사 리치

'읍! 이건?'

오크 특유의 악취가 코끝을 자극했다.

나는 여차하면 언제라도 튀어 나갈 수 있는 태세를 유지하며 얼른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취익! 취익!

이번에도 갈색 오크 무리였다.

그런데 아까와 다르게 이놈들은 흉갑을 착용하고 있었다.

한 단계 급이 높아 보였다.

안력을 집중해 주변을 살폈는데 운이 좋았는지 이놈들뿐이다.

나는 즉시 놈들을 향해 날아갔다.

"취익! 이, 인간이다."

"춰어어. 죽여라."

-서걱!

-서걱! 서걱! 서걱! 서걱!

이후에도 몇 번이나 오크 무리와 조우했지만 특별한 이벤트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 놈들을 도륙했고 그 덕에 마력(경험치)이 올랐을 뿐이다.

나는 현재 이상하게 생긴 건축물을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언뜻 보면 일종의 사원(寺院) 같아 보였는데 정글과도 같은 울창한 숲속에 이러한 건축물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상당히 수상해 보였기 때문이다. 또한 이곳까지 오면서 사냥한 오크들의 위치를 곰곰이 생각해 봤더니 아무래도 저 건축물을 중심으로 일종의 경계를 서고 있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럼 당연히 가 봐야지."

나는 수상한 냄새를 물씬 풍기고 있는 사원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제야 내 앞에 있는 통로가 일종의 뒷문인 것을 깨달았다.

하긴 절벽 방향에 정문이 있다는 건 말이 안 됐다.

처음에 사냥한 오크 정찰병의 이동 경로를 따라 움직이며 사냥했더니 얼떨결에 이쪽 방면으로 오게 된 것 같았다.

뭐 정문이면 어떻고 뒷문이면 어떤가?

모로 가도 서울로 가면 되지 않겠는가!

사원의 내부는 미로처럼 복잡한 길이 얽혀 있어 방향을 분간하기가 쉽지 않았다.

쪽팔리지만 몇십 분째 길을 잃고 해매는 중이었다.

"취이익! 정찰 나간 3조는 어디에 있지?"

"취익!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것들이... 취익! 빠져 가지고 취이익. 저번처럼 어디서 자빠져 자고 있는 것 아니야. 4조는?"

"취이익! 4조도 소식이 없습니다."

"취익! 으아!! 이것들이!! 오늘 전부 집합한다. 알겠나? 취익!"

"...네. 취익!"

저들이 나누는 대화에 한편으론 어이가 없었지만 진심 반가웠다.

이 지긋지긋한 미로와 이제 이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헤어진 연인을 만나러 가듯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날아가듯 달려갔다.

"어이, 돼지들. 만나서 반가워~~."

"취익?"

"취이익??"

그 후로 일사천리다.

순식간에 녀석들을 정리해 준 뒤 일부러 한 놈만 살려 줬다.

즉 퇴로를 열어 준 것이다.

내 예상이 적중했다.

놈은 나를 피해서 동료들이 있는 곳을 향해 도망쳤고 그 결과 내 눈앞에 뻥 뚫린 대로가 나타났다.

후후후! 이 길의 끝에 과연 무엇이 있을까?

혹시 사원의 주인, 즉 게이트의 보스가 살고 있지 않을까?

나는 오크가 남긴 흔적을 따라 유유히 그 길에 들어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크들이 내지르는 함성을 들을 수 있었다.

뭐지?

이상한 예감에 발걸음을 서두르자 곧 내 눈앞에 커다란 공동이 나타났고 동시에 그곳에서 격렬하게 전투를 벌이고 있는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얼추 백 마리는 되어 보이는 오크들이 마치 잘 조련된 병사들처럼 움직이고 있었는데 그 사이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저들은?"

이철승 헌터와 그의 일행들이다.

"취이익, 인간을 죽여라."

"취익, 여자 인간의 살은 야들야들하다. 여자 인간만 빼고 죽여라."

"그렇다. 여자는 쓸데가 많다. 남자만 죽이자. 취익!"

"취익! 투루카가 3년 만에 옳은 말을 했다. 그렇게 하자. 취이익."

오크 녀석들은 황당한 소리를 지껄이며 달려들었는데 이철승의 파티 역시 만만치 않았다. 먼저 이철승 본인이 선두에 버티고 서서 탱커를 맡고 있었고 조동철과 마준호가 그의 좌우에서, 조미진과 김수연이 후방에 자리를 잡고 열심히 공격을 날리고 있었다.

"동철아! 3시 방향 지원."

"네, 형님."

"수연아, 마법!"

"네, 준비됐어요. 파이어 레인!"

-과과광!

"계속 위치를 사수해. 조금만 더 버텨."

"네!"

이철승.

역시 베테랑 헌터다운 솜씨다.

특별한 변수가 발생하지 않는 한 버텨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갑자기 제단으로 보이는 곳에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콰쾅!

깜짝 놀란 사람들이 일제히 제단 쪽을 쳐다보았다.

시커먼 인영 하나가 마치 원래부터 그 자리에서 있었다는 듯 몸을 일으키자 오크들이 모두 엎드려 그를 향해 경배를 올렸다.

"...?"

난데없이 나타난 놈은 시커먼 로브를 걸치고 있어 인간인지 오크인지 구분할 수 없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눈이 있어야 하는 곳에서 시퍼런 광망을 내뿜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의 정체를 가장 먼저 알아차린 것은 바로 마법사였다.

"리...치! 리치예요."

"세, 세상에 말도 안 돼."

조미진의 말에 사람들은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악마에게 영혼을 바치는 대신 영생을 얻은 리치가 C급 게이트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고위 마법사의 대명사이자 최소 A급 이상의 게이트에만 출현한다는 리치가 이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다니....

"비켜!"

고함 소리와 함께 한 줄기 빛이 허공에서 생겨나 리치를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퍼엉!

김수연의 기습적인 공격이 리치를 가격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먼지가 사라지자 리치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전혀 피해를 입히지 못한 것이다.

"조잡한 신성 마법이군."

리치의 입술이 열리며 유부에서나 울려 퍼질 법한 음성이 튀어나왔다.

"알더바인."

"부르셨습니까? 취익!"

알더바인? 저놈은 또 누군가!

리치의 호명에 핏빛 망토를 걸친 오크가 걸어 나왔다.

"저 계집은 제물로 바칠 것이니 저년을 제외하고 모두 죽여라."

"알겠습니다. 취익!"

핏빛 망토를 입은 오크 알더바인은 100kg은 족히 되어 보이는 핼버드를 어깨에 메고 마치 피서 가듯 느릿한 걸음으로 이동했다.

그 모습에 이철승을 제외하고 모두 질린 기색이 역력했다.

심지어 조미진은 몸을 부들부들 떨기까지 했다.

"여긴 내가 맡는다. 모두 도망쳐."

"대, 대장!"

"삼촌!"

"미진아, 수연아. 잘 들어. 뒤를 돌아보지 않고 달리는 거야. 알겠니? 동철아, 준호야. 조카들을 부탁한다."

"안 돼요, 형님. 저희랑 같이 가요."

"그래요, 형님."

"잔말 말고 빨리 가! 인마!"

이철승은 그 말을 끝으로 알더바인을 향해 앞으로 달려 나갔다.

-슈캉!

알더바인의 핼버드와 이철승의 대검이 부딪치는 순간 불꽃이 튀더니 급기야 사방으로 튀었다.

"크윽!"

이철승의 신음성이 새어 나오는 순간 조동철이 먼저 출구를 향해 움직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입에서 고통 어린 비명이 터져 나왔다.

출입문이 마치 철벽처럼 단단하게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큭큭큭! 멍청한 놈들."

리치의 비웃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출구는 봉쇄되었다. 내가 죽기 전엔 아무도 이곳에서 나갈 수 없다."

이쯤 되자 나 역시 이 상황을 두고만 볼 수 없었다.

"그럼 널 죽이면 되겠군."

"응?"

다음 순간 빛이 일렁이더니 오크의 몸통이 반으로 갈라지며 마치 분수처럼 폭발했다.

-콰앙!

놈들의 시선이 한쪽으로 쏠리는 사이 태극검의 기운을 품은 강력한 힘이 시퍼런 광채를 뿜어내며 빛살 같은 빠르기로 쏟아져 나왔다.

미처 방비할 틈도 없이 리치의 주변에 도열해 있던 오크들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다, 당신은?!!"

나와 눈이 마주친 조미진의 입이 쩍 하고 벌어졌다.

"내가 놈을 상대할 테니, 당신들은 알더바인을 상대하시오."

나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다음 순간 리치를 향해 몸을 날렸는데 이때 조미진의 감탄성이 귓가에 들려왔다.

"언니 말이 맞아. 저 남자 굉장한 실력자였어."

'훗~.'

내 앞을 막아서는 오크 워리어 두 마리를 가차 없이 베어 버린 후, 리치를 향해 검을 크게 휘둘렀다.

-쾅!

그러나 보호막에 의해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자 리치가 날 보며 냉소했다.

이번엔 태극검의 기운을 잔뜩 밀어 넣고 검을 휘둘렀다.

"가소로운 인간. 그깟 검에 어둠의 장막이 뚫릴 것 같으.... 헉!"

리치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성기사는 아닌데, 이게 무슨 기운이지? 인간, 넌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리치가 나를 사납게 쏘아보며 외쳤다.

"너 바보냐?"

"뭐?"

"네가 방금 네 입으로 말했잖아."

"...?"

"이거 진짜 바보네."

난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나보고 누구냐며? 보면 몰라. 내가 인간이지. 무슨 동물이냐?"

"이, 이런!!"

도발이 성공한 것 같다.

검은색 로브를 뒤집어쓴 리치가 벼락같은 고함을 질렀다.

"감히 나를 농락하다니, 네놈을 지옥으로 데려가 주마."

"X 까!"

곧 리치를 중심으로 무시무시한 마나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그것은 거대한 마나의 흐름이었는데 리치는 그 상태로 마법의 캐스팅에 들어갔다.

"어둠의 권능으로 저주를 실현한다. 소울 포이즌(Soul Poison), 다크 번(Dark burn)."

-화르르르!

눈앞에서 갑자기 맹렬한 화염이 솟구쳤다.

사방으로 검은 연기와 역한 냄새를 풍겨 내며 말이다.

나는 재빨리 검을 풍차처럼 회전시켜 인위적으로 바람을 일으켜 화염의 방향을 바꿨다.

"피에스타! 다크 애로우!"

뒤를 이어 섬광과 함께 눈부신 빛줄기들이 쏘아졌다.

주변 일대를 초토화시키는 대규모 마법 공격이다.

"블링크!"

-콰콰콰콰!

제때에 순간 이동 스킬을 펼친 덕에 폭발 지점에서 무사히 벗어날 수 있었다.

어둠의 마력을 사용하는 리치는 그 이름에 걸맞게 전율할 정도의 위력을 보여 주었다.

"쥐새끼 같은 놈. 네놈의 발부터 묶어야겠구나. 혹한의 계절이여, 부름에 응답하라. 인베르노(Inverno)."

-콰콰콰콰.

엄청난 폭음과 함께 북풍한설의 냉기가 터져 나왔다.

그 차가운 기운이 사방으로 번져 나가 부근에 있던 오크들이 여기저기서 픽픽 쓰러지고 말았다.

살과 뼈가 꽁꽁 얼어붙은 후, 터져 버려 그들의 피와 살점 조각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허!"

나도 모르게 탄성 소리가 새어 나왔다.

불안한 느낌에 거리를 충분히 벌렸음에도 불구하고 시리도록 차가운 냉기가 느껴졌다. 만약 1초만 늦게 움직였다면 이미 냉동 인간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이건 내가 예상하지 못한 강력함이었다.

단순히 C급 게이트의 보스라고 생각했던 것이 오판이었다.

혹시 만용을 부린 것이 아닐까?

이대로 패배하는 것이 아닐까?

지옥에 끌려가 영원토록 고통받는 것이 아닐까?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내 머릿속을 휘젓는 순간 한 줄기 현묘한 기운이 솟아올랐다.

-우우웅!!

바로 현문정종 태허무극심법의 기운이다.

마치 파도처럼 흔들리던 정신이 그로 인해 단단한 흙바닥처럼 굳어지며 부정적인 기운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그렇다.

내 마음속에 스며들어 부정적인 생각을 자리 잡게 한 것.

그것은 리치가 가장 먼저 펼친 정신 마법 소울 포이즌이었다.

콰앙!

내부에서 진중한 떨림이 느껴지며 태산과 같은 기세가 노도처럼 일어났다.

소울 포이즌은 소멸했고 난 내가 처한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다.

내 눈앞에 있는 적은 난생처음 만나는 호적수다.

하지만 이미 판은 벌어졌고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어야 한다.

"받아라, 태극검!"

-주르르륵! 콰앙!

검기와 마법이 조우해 폭발을 일으켰다.

"음!"

그 여파로 균형을 잠시 잃었지만 곧장 자세를 다시 잡았다.

하지만 리치 역시 타격을 입었는지 볼썽사납게 상체를 비틀거렸다.

"이잌! 놈! 받아라."

-슈우우욱 쾅! 쾅! 쾅!

놈은 자신의 정신 마법이 깨졌다는 것을 알았는지 적잖이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그 증거로 여기저기 불덩어리를 난사해 버렸는데 그 덕에 자신의 편이라 할 수 있는 오크 무리에게까지 불덩이가 날아가 불길에 휘말려 버렸다.

제22화

22화 저주받은 리치의 최후

나는 검으로 불덩이를 반으로 가른 후,

빠른 속도로 달려가 놈과의 거리를 좁혀 들어갔다.

"마, 막아라. 놈을 막아!"

리치의 명령에 오크 두 마리가 달려왔지만 달려오던 자세 그대로 허물어졌다.

순간 이동 스킬을 연달아 펼친 덕이다.

나는 적들 사이를 질풍처럼 누비며 계속해서 리치를 향해 쇄도했고 눈 깜짝할 사이에 열 걸음 안까지 접근하는 데 성공했다.

지금이다!

-쉬익! 쐐애액!

나는 리치를 향해 검기를 날리는 동시에 1초라는 시간 차를 이용해 검을 던졌다.

마치 비수처럼 말이다.

"다크 배리어!"

-퍼엉! 퍼엉!!

첫 번째 검기를 이용한 공격이 배리어에 막혔다.

두 번째 검을 날린 공격 역시 배리어를 뚫지 못했다.

하지만!

"크헉!"

그 두 번의 공격이 놈의 시선을 사로잡는 사이 태허무극심법의 현묘한 기운이 잔뜩 담긴 태극권이 어느새 리치의 심장을 가격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 이럴... 수가...."

순식간이었다.

리치는 마지막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온갖 사기를 소멸시키는 태허무극심법의 기운이 살아 있는 생물처럼 움직여 리치의 몸 안에 숨겨져 있던 라이프 베슬을 부숴 버렸기 때문이다.

푸석, 푸석.

푸스스스스스....

리치는 한 줄기 모래바람이 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 순간 시스템의 음성이 들려왔다.

-[강대한 적, 마계의 사악한 존재 리치를 소멸시켰습니다.]

-[띠링, 태허무극심법 2단계를 이루었습니다.]

1단계 인(人)의 단계 : 인간이란

2단계 지(地)의 단계 : 땅을 밟고 서서

3단계 천(天)의 단계 : 하늘을 바라보고

4단계 합(合)의 단계 : 화경에 이르면

....

....

....

10단계 무극(無極)의 단계 : 우주의 근원인 태극으로 돌아간다.

시스템의 환성적인 메시지가 귓가에 들려왔지만 아직 축배를 들긴 이르다.

다른 한쪽은 여전히 전투가 진행 중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기세가 오를 대로 오른 나는 이철승 파티를 돕기 위해 그쪽 전장으로 난입했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오크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슈슈슈슈슉!

-꽈앙!

강력한 힘이 실린 검끝에 시퍼런 광채가 흘렀고, 그 속도는 가히 빛살처럼 빨랐다. '펑', '쾅', '쿵' 폭발하는 검기 속에 놈들의 대형이 짓이겨졌고 갈색 오크들의 운명은 죽음으로 가는 길밖에 보이지 않았다.

참고로 네임드 오크 알더바인의 최후는 이철승의 몫으로 남겨 주었다.

물론 검기를 이용해 오크 놈의 아킬레스건을 끊어 주었지만 말이다.

그로부터 몇 분 뒤,

치열했던 전장이 거짓말처럼 정리되었다.

그리고 시스템의 정산이 시작되었다.

-[갈색 오크 정찰병 49, 갈색 오크 전사 37, 갈색 오크 투사....]

-[띠링, 칭호 오크 살육자를 얻었습니다.]

-[띠링, 아이...템...을 얻었습니다. 아이템 최하급 아공간을 얻었습니다.]

-[....]

-[태극권과 태극검의 숙련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띠링, 태극권과 태극검의 등급이 한 단계 성장했습니다.]

-[....]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

-[띠링, 특수 게이트 숨겨진 사원의 비밀, B+급 게이트를 클리어했습니다.]

특수 게이트라니,

역시 이곳은 C급 게이트가 아니었다.

그보다 몇 단계 위, 정확히 말하면 무려 네 단계(C+, B-, B, B+)나 높은 B+급 게이트였다. 그 덕에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지만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

먼저 태허무극심법이 2단계를 이루었고 태극권과 태극검이 S급에서 SS급으로 상승했다. 물론 광렙과 같은 레벨 업도 이루었다.

그 외에도 골드와 아이템을 얻었는데 이건 나중에 조용히 확인해 봐야겠다. 흐흐!

"도와줘서 고맙소."

이철승 헌터가 다가왔다.

그는 가볍지 않은 부상을 입고 있었지만 치료보다 감사가 먼저라는 듯 나를 향해 허리 숙여 인사를 올렸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저래야지.

역시 괜찮은 사람이다. 구해 준 보람이 있었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나 역시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고, 고맙습니다."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발 늦었지만 다른 이들 역시 내게 다가와 저마다 감사의 인사를 전했고 짧지만 각자 재정비의 시간을 가졌다.

나는 조용히 상태 창을 열어 보았다.

<상태 창>

이름 : 최선우

레벨 : 41

고유 특성 : 분신(Unique)

칭호 : 지혜로운 자

생명력 : 290/780 마력 : 317/400

힘 : 60 체력 : 78 민첩 : 56

지혜 : 70 지능 : 40 행운 : 10 매력 : 10

보너스 스탯 : 80

휘유~~~

어느 정도 예상을 했지만 레벨이 무려 12 계단이나 올랐다.

아무도 없었다면 벌거벗고 깨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다. 캬하하하!

"흠, 흠!"

나는 두 번째로 이번 사냥을 통해 얻은 부산물을 확인해 보았다.

수천 골드는 일단 제외하고 아이템 위주로 살펴보았는데 아이언 소드, D급 마석, 트르크의 양손 도끼... 그중에 백미는 바로 아공간이었다.

"헐~!!"

[최하급 아공간]

등급 : 레어

설명 : 아공간(최하급). 가로 1m × 세로 1m의 공간에 무엇이든 넣을 수 있다.

제한 : 살아 있는 생명체를 넣을 수 없다.

아공간은 돈이 있다고 해서 살 수 있는 아이템이 아니다.

제작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오직 게이트에서만 구할 수 있는 아이템이었고 그래서 무지 비싸게 팔리는 물건이었다.

각설하고 재정비가 끝나자마자 우리는 자연스레 출구까지 동행하게 되었다.

"휴우. 이제 집으로 가는구나."

"그러게. 오늘 진짜 죽을 뻔했다. 난 내일 교회 가서 감사 헌금 할 거야."

"감사 헌금?"

"죽을 뻔했지만 그 덕에 미친 듯 사냥했잖아. 확인해 봐."

"어, 그러네. 경험치도 많이 올랐어."

"난 레벨 업 했다. 그것도 두 번이나."

"나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이제야 긴장이 풀렸는지 이철승 파티가 나직한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발생했다.

나를 향한 뜨거운 시선이다.

남자들은 그나마 가끔씩 힐끔거리는 수준에 그쳤지만 조미진과 김수연은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

이거 계속 모른 척하고 있자니 은근 불편하다.

그래서 나도 그녀들을 쳐다보았다.

할 말 있으면 해 보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자 김수연이 기다렸다는 듯 포문을 열었다.

"저...기요.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괜찮으시다면 밖에 나가서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은데 어떠세요?"

"...."

목소리가 왜 은근하게 들리는 것일까?

이때 조미진이 내 옆으로 다가와 만류할 틈도 없이 한쪽 팔을 잡아당겼다.

"그래요. 우리 같이 가요. 부담 같은 건 느끼지 마시고요. 같이 가 주시면 정말 좋겠어요. 네? 네?"

'얘는 또 왜 이래?'

그러자 이번엔 다시 김수연이다.

여인들끼리의 묘한 경쟁심이 발동했는지 그녀가 내 오른팔에 팔짱을 끼어 버린 것이다.

"어?"

다음 순간,

조미진 역시 질 수 없다는 듯 팔짱을 꼈고 졸지에 두 여자 사이에 자리하게 되었다.

"호호호! 저희랑 같이 가요. 네?"

"뭐 좋아하세요? 한식, 중식, 일식 아님 양식?"

"...."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고 하더니, 강인한 헌터에서 한순간에 꼬리가 아홉 달린 여우로 변했다. 하긴 저들의 눈에 비친 나는 제법 괜찮은, 아니! 당첨이 확실한 초대박 로또일 것이다.

'흐흐흐! 기분은 좋네.'

여자들에게 대시를 받으니 기분이 좋았지만 애석하게도 둘 다 내 스타일은 아니다.

못생겼다는 게 아니다.

어디 가도 꿀리지 않을 정도의 외모를 가졌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꿀리지 않을 정도일 뿐이다!

처음으로 밝히는 거지만 난 여자를 볼 때 외모를 굉장히 따졌다.

내 기준에 있어서 미안하지만 저들은 탈락이다.

대신 친구로는 OK.

난 그녀들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 * *

이철승이 내게 명함을 건넸다.

-[구성 길드 길드장 이철승 010-XXXX-XXXX]

구성 길드는 열 명 정도의 헌터가 속해 있는 소규모 길드라고 했다.

"언제든지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 주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최선을 다하겠네."

"함께 식사를 못 하게 돼서 아쉽지만 다음 기회가 있겠죠? 시간 될 때 연락 한번 주세요."

"저도요."

-[김수연 010-XXXX-XXXX]

-[조미진 010-XXXX-XXXX]

-[구성 길드 헌터 조동철 010-XXXX-XXXX]

-[구성 길드 헌터 마준호 010-XXXX-XXXX]

김수연, 조미진에 이어 조동철과 마준호 역시 내게 슬쩍 연락처를 건넸다.

엄청난 강자로 추정되는 헌터가 눈앞에 나타났고 그와 인연을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생겼는데 그 기회를 놓친다면... 가수 싸2가 나타나 당신을 위해 노래를 불러 줄 것이다. 나 완전히 새 됐어!

"이쯤에서 마지막 인사를 나눌까요?"

"그럴까요?"

"네, 제가 넘어가자마자 바로 이동을 해야 해서요. 인사를 나누지 못할 것 같네요."

"그렇군요. 그럼...."

이철승 헌터가 내게 악수를 청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다시 봅시다. 청운 헌터, 꼭 연락 주십시오."

"네. 그렇게 할게요."

다음 순간,

우리는 환한 빛줄기를 맞으며 게이트에서 빠져나왔다.

* * *

나비효과(Butterfly Effect)라는 말이 있다.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지구 반대편에선 태풍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이론이다.

나는 게이트에서 빠져나온 직후 빠르게 주변을 확인했다.

다행히 주변은 어두웠고 게이트를 관리하는 공무원들 역시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이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완벽하게 클리어했다고요?"

"보스가 나타났고 그걸 잡았다는 말씀이시죠?"

"네."

나는 이철승 파티가 시선을 끌어 주는 동안 그 틈을 이용해 관리소를 빠져나갔다.

사실 게이트에서 빠져나오기 직전 이철승과 그의 일행에게 한 가지를 부탁했다.

내가 조용히 사라지게끔 도와 달라고 말이다.

그들은 흔쾌히 내 요청을 들어주기로 약속했고 그 결과 나는 조용히 관리소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휴우."

이쯤이면 된 것 같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귀환까지 앞으로 41시간 정도 남았다.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지만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바로 사냥을 통해 얻은 부산물을 처분하는 것이다.

만약 헌터넷을 통해 정상적으로 판매한다면 제값을 받을 수 있지만 이 방법은 시간이 오래 걸린다. 더욱이 판매하는 과정에서 정체가 드러날 수 있었기에 나는 블랙마켓, 일명 암시장이라 불리는 곳을 찾기로 했다.

수수료가 비싼 것이 흠이지만 대신에 거래자의 신분을 드러내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암시장에는 온갖 불법적인 루트로 얻은 물건들이 모여들었다.

생필품부터 시작해 각종 장물과 아이템은 물론 심지어 여자까지도.

제23화

23화 동대문 블랙마켓

-[서울, 동대문]

쇼핑의 메카라 불리는 동대문.

암시장의 위치는 동대문 시장 그 깊숙한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올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암시장의 규모와 다양한 물건에 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지금도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라.

날카롭게 벼려진 검과 도 그리고 창이 마치 시장 좌판에서 팔고 있는 나물처럼 도처에 널려 있지 않은가.

그중에서도 가장 의외인 것은....

"멋진 오빠~~ 여기 좀 봐요."

"쉬었다 가세요."

"오빠, 오빠~~~ 한 타임에 10만 원."

야시시한 옷을 입은 여자들이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울 한복판에서 말이다.

하긴 몬스터가 출몰하는 판인데....

각성자의 출현으로 치안이 좋아졌지만 소수에 불과한 헌터가 대한민국 전체를 커버할 수는 없다. 사람들은 늘 죽음이란 단어를 생각하며 살아가야 했고 그 결과 아이러니하게도 도박, 매춘과 같은 업종이 대호황을 누리게 되었다.

나는 서둘러 마스크를 꺼내 썼다.

'좀 튀나?'

아니, 오히려 무난하다.

암시장의 특성상 가면을 써 얼굴 전체를 가리고 다니는 이들도 꽤 많았기 때문이다.

저길 봐라.

저 사람은 심지어 해골 가면을 착용했다.

일부 헌터들은 히어로 영화에서처럼 자신만의 개성적인 가면을 만들어 트레이드마크로 활용해 돈을 벌기도 했다.

가면을 쓰고 CF를 찍고 굿즈 상품을 판매해서 말이다.

그 결과 다수의 일반인들 역시 가면을 쓰고 다녔다.

일종의 유행이 되었다고나 할까?

각설하고 암시장을 돌아다니다가 [지나의 상점]이라는 곳에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그녀를 보는 순간 '헉' 소리가 나올 뻔했으나 간신히 참았다.

우락부락한 남성을 예상한 건 아니었지만 모델 같은 8등신의 미녀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뭘 찾으세요?"

"그게...."

"구입 아니면 판매?"

"음! 둘 다요."

"판매부터 하실 거면 안쪽으로 들어가시면 돼요."

"네, 감사합니다."

그녀의 안내에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자 또 하나의 방이 나왔다.

그곳에는 거래를 위한 용도인 듯 기다란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는데.

"어서 오십시오."

날카로운 눈빛을 가지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푸근한 인상을 가진 중년 남성이 내게 인사를 건넸다.

"무엇을 판매하시겠습니까?"

"아이템을 포함해 이것저젓요."

"좋습니다. 물건부터 볼 수 있을까요?"

"그럼요."

나는 아공간에서 차근차근 아이템을 꺼내어 나열하기 시작했다.

"오! 아공간을 가지고 계시군요. 등급이 상당히 높으신가 봐요?"

그가 나를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바로잡을 필요는 없었다.

난 그저 알쏭달쏭한 미소를 입가에 보인 후 묵묵히 아이템을 꺼내 보였다.

"낡은 오크 방어구 세트에 아이언 소드. 어이쿠, 이건 네임드 무기네요."

그는 아공간에서 나온 아이템들을 천천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붉은 머리 투르크의 도끼]

등급 : 레어

설명 : 오크 로드의 13번째 아들 투르크가 애용하던 도끼.

옵션 : 힘 +7, 체력 +5

"판매하실 것은 이게 전부입니까?"

"아니요. 마석도 있어요."

아이템에 이어 마석까지 나오자 그 기다란 테이블을 점령하다시피 했다.

"양이 많아서 감정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은데요?"

"네. 천천히 하세요."

"감사합니다."

나는 감정에 집중하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상점 안에 비치되어 있는 다양한 종류의 물건들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차 한 잔 드릴까요?"

이때, 좀 전에 만났던 예의 그 미녀가 들어왔다.

"주시면 좋죠. 커피 있나요?"

"그럼요. 따아, 아니면 아아?"

"따아로 주세요."

"네."

여자는 테이블 위를 점령한 아이템들을 힐끔 쳐다보더니 곧 머신에서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제 이름은 지나예요."

"지나요?"

그렇지 않아도 상호 때문에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네. 그리고 눈치채셨는지 모르겠지만 저쪽에 계신 분은 제 아버지고요."

"아~ 네. 전 청운이라고 합니다."

"청운 씨는 꽤 능력 있는 헌터신가 봐요."

"뭐 그건...."

그녀는 자연스럽게 나를 응시하며 커피를 건넸다.

"여기 따뜻한 아메리카노."

"고맙습니다."

그녀가 건넨 커피를 마시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부 선반에는 비교적 크기가 작은 무기류가 놓여 있었고 벽과 같은 곳에는 대체로 크기가 큰 도검류와 방어구가 걸려 있다.

"물건들이 참 좋아 보이네요."

"호호호. 그렇죠? 역시 보는 눈이 있으시네요."

그냥 의례적인 말을 건넸을 뿐인데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가끔 가격이 비싸다고 투덜대는 손님이 있는데, 한번 사용하고 나면 다들 태도가 달라져요. 그런데 청운 씨는 레벨이나 등급이 어떻게 되세요?"

"네?"

"얼핏 봤는데 아이템 숫자도 그렇고 등급이 높은 마석도 보이던데요~."

"아, 그건...."

그녀의 말에 뭐라고 설명을 하려다 멈추었다.

순간적으로 경계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화법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정보를 토설하게 만드는 화법이었다.

난 커피 잔을 선반 위에 올려놓으며 대화의 주제를 바꿨다.

"감정은 아직...인가요?"

그녀는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화제를 돌리자 눈동자가 살짝 굳더니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듯 화사한 미소를 보이며 대답했다.

"지금쯤이면 거의 끝났을 거예요."

이때 상점주의 음성이 들려왔다.

"F급 마석이 37개, E급 마석이 29개, D급 마석이 11개, C급 마석 2개입니다. 괜찮다면 저희 쪽에서 일괄 매입하고 싶은데, 어떤가요?"

"모두 합하면 가격이 얼마죠?"

"블랙마켓 수수료 40%를 제하고 아이템까지 모두 합해 총 16억 9천 7백 45만 원인데... 에잇! 까짓것 첫 거래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17억 드리겠습니다. 어떠세요?"

이미 계산까지 끝냈는지 한 치의 주저도 없이 가격을 제시했다.

"좋습니다. 거래하도록 하죠. 하지만 그 전에 구매부터 하고 싶은데요."

"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선택이네요. 보시다시피 저희 가게에는 없는 것이 없죠. 말씀만 하세요."

"혹시 헌터 신분증을 구할 수 있을까요?"

"헌터 신분증요?"

"네."

암시장에서 헌터 신분증을 구해 달라?

남자는 암시장 상인답게 내 뜻을 금방 알아차렸다.

이런 종류의 일이 아마도 익숙한 탓이다.

"물론이죠. 등급에 따라 가격이 다르지만... 일단 물건부터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는 노트북 자판을 빠르게 치더니 잠시 후, 입을 열었다.

"E급 4개, D급 2개... 오! 운이 좋군요. 마침 B급이 하나 들어왔네요."

"B급요?"

"네."

"가격이 얼마죠?"

"E급은 5천, D급은 1억...."

"B급은요?"

"B급이면 수수료 포함해 10억입니다."

"10억요?"

"네. 아시다시피 D급까지는 일반적으로 정해진 시세가 있지만 C급 이상은 시세가 없어서요. 그래도 이 정도면 양심적인 가격입니다."

"...."

신분증 하나에 10억이라고 하면서 양심적인 가격이라니.

태연자약한 얼굴에 가운뎃손가락을 보여 주고 싶었지만 B급 헌터증이라면 내게 꼭 필요했다. 저것이 있으면 B급은 물론 A급 게이트에도 입장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어떻게 할까요?"

"구매하겠습니다."

"신분증에 기재할 이름은?"

"청운."

"네, 알겠습니다. 그동안 구경 좀 하고 계세요. 아 윌 비 백(I will be back)."

저 아저씨 아놀드 아저씨의 팬인가?

터미네이터와 같은 포즈로 그의 명대사를 읊으며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10분이 지나지 않아 돌아왔다.

"깨끗하게 세탁된 따끈따끈한 B급 헌터 신분증, 여기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7억 남았습니다. 어떻게 해 드릴까요?"

"여기서 블랙마켓 계좌를 만들 수 있죠?"

"그럼요. 두말하면 잔소리죠. 전 세계 어디에서나 쓸 수 있습니다."

"그럼 지금 만들어 주세요."

"당연히 B급 헌터 청운의 이름이겠죠?"

이 아저씨 눈치가 참 빠르다.

"네."

"그럼 나머지 잔액 7억을 계좌에 넣어 드리겠습니다. 여기에 8~12자리로 된 비밀번호를 설정해 주세요."

나는 알파벳과 숫자와 특수문자를 조합해 12자리 비밀번호를 설정했다.

-***A**&****@

"확인한 번 더 해 주세요."

-***A**&****@

"다 됐습니다. 여기 통장과 카드."

"감사합니다."

"자! 그리고 이건 서비스~."

그는 가죽으로 만든 검집을 내밀었다.

"오우거 가죽으로 만든 겁니다."

"이걸 왜?"

"제 감이 손님을 잡으라고 해서요."

훗~

이 아저씨, 다시 한번 느끼는 것이지만 아무래도 타고난 상인이 맞았다.

나는 그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단골이 되겠네요."

"하하하!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네, 수고하세요."

나는 한결 홀가분해진 심정으로 상점을 나섰다.

그리고 공중전화 박스에 들어가 익숙한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연락을 받은 택시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바로 우리 아버지의 택시다.

"어디로 모실까요?"

"인천 월미도로 갑시다."

변조한 음성에 마스크까지 착용한 덕에 아버지는 날 알아보지 못하신 것 같다.

그리고 얼마 후 아버지의 택시가 시내를 벗어나 고속도로에 올라타자 조용히 메모지를 건넸다.

-[아버지, 저 선우예요. 아무 말도 하지 마시고 계속 운전하세요.]

나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우선 종이로 대화를 나눴다.

-[제가 게이트에서 죽었거나 혹은 실종되었다고 들으셨죠?]

-[다 거짓말이에요. 그 얘기는 조금 후에 자세히 설명해 드릴게요.]

-[어머니랑 동생은 잘 지내죠?]

-[참! 식사는 하셨어요?]

몇 시간 후,

나와 아버지는 월미도에 도착했고 그곳에서도 후미지고 한적한 곳에 위치한 조그만 식당에 들어갔다.

"그날은 아카데미에서 첫 실전이 있는 날이었어요."

난 아카데미에서의 악연을 시작으로 게이트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림으로의 차원 이동과 진웅 아저씨 사기 사건과 같은 몇몇 이야기는 일부러 함구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내 이야기가 끝난 후에도 한참 동안 말문을 열지 못했다. 너무 아프면 신음조차 내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저 주먹을 불끈 쥔 채 분노에 몸을 떨고 계셨다.

한 잔, 두 잔, 석 잔.

우리 부자는 잠시 동안 아무 말 없이 그저 술잔만 나눴다.

"어떻게 할 생각이니, 네가 원한다면 이민이라도 갈까?"

긴 침묵을 끊고 아버지의 입이 열렸다.

난 조용히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절 죽이려고 했던 놈들이에요. 이 나라를 떠난다고 해결되지 않아요. 오히려 제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제 입을 막으려 할 거예요. 아버지, 어머니, 혜진이도 위험할 수 있고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니?"

"답은 간단해요."

"간단하다고?"

"아버지도 아시잖아요. 법 위에 헌터가 있다는 사실 말이에요."

"...!!"

인류의 역사는 과학의 발전과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해 왔다.

약육강식의 동물적인 본성을 억누르고 합리적이며 이성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온 것이다.

이와 같은 노력은 분명히 성과가 있었다.

표면적이지만 적어도 누구에게나 평등한 법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육강식의 법칙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게이트 시대에 들어오면서 역설적으로 이와 같은 법칙이 더욱 강해지고 말았다.

"간단해요. 놈들이 건드릴 수 없을 만큼, 아니! 어느 누구도 우리 가족을 건드릴 수 없을 만큼 강해지면 돼요."

"...!"

제24화

24화 폭렙을 위하여

"금일 발생한 게이트 브레이크에 총 158명의 피해자가 발생했습니다. 이 중 사망 46명, 중상 64명, 경상 48명입니다."

"생각보다 피해가 크지 않군."

"시외에서 발생해 생각보다 적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래. 하지만 언론에는...."

"네, 이미 피해 사실을 1/3 줄여서 발표하기로 각 언론사와 조율했습니다."

"잘했네."

* * *

나는 아버지와 헤어진 후,

서울 시내에 자리한 한 대형 서점에 들어갔다.

"혹시 도가 사상과 관련된 책이 있나요?"

"네, 인문학 계열, 철학 파트에 가시면 돼요."

"죄송한데 안내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럼요. 따라오세요."

나는 여직원의 안내에 따라 도가 사상(노자, 장자, 도덕경, 춘추, 제자백가, 선불진전 등등)을 비롯해 그와 관련된 다양한 주해서까지 모두 구입했다.

그 양이 물경 100여 권에 달했다.

"다 사시려고요?"

"네."

"10권 이상 구매하시면 무료 배송이 가능한데, 배달해 드릴까요?"

"아니요, 그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 일단 계산부터 해 주세요."

"네, 손님."

여직원은 알아서 하겠다는 말에 고개를 한 번 갸웃했지만 이내 바코드를 찍기 시작했다. 양이 있는 만큼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고 그 탓에 내 뒤로 줄이 늘어섰다.

"총 237만 4천 원입니다."

"여기요."

"할부로 할까요, 아니면 일시불로 할까요?"

"일시불로 해 주세요."

"네. 손님."

계산을 끝낸 직후,

나는 마음속으로 아공간을 떠올렸다.

그러자 마치 홀로그램처럼 아공간이 눈앞에 나타났고 나는 책을 그 속에 차곡차곡 집어넣었다.

-쑥, 쑥! 쑥! 쑥!!

늘어지게 줄을 서 있던 사람들의 입에서 헛바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수십억이 있어도 구하기 힘든 아공간을 목격했으니 저런 반응이 당연할 것이다.

"저, 저게 뭐야?"

"오빠, 저것 좀 봐. 저 사람 지금 마술하는 거야?"

"아, 아공간?!"

책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어느 누구도 계산대에 다가오지 않았다.

"저, 저기요. 손님."

"네?"

"여기 영수증요."

"아! 괜찮아요."

"아니에요. 받아 주세요. 꼭 받아 주셔야 해요."

뭔가 강렬한 염원이 달린 눈빛이다.

[김미주, 010-33**-***1]

"훗~."

실소가 터져 나왔다.

미안하지만 내 취향이 아닌 관계로 영수증은 쓰레기통에 들어가고 말았다.

서점에서 빠져나온 직후, 남은 시간을 확인해 보았다.

이제 귀환까지 정확히 27시간 남았다.

"여보세요, 이철승 길드장님이시죠?"

아무도 찾지 않는 새벽녘,

나는 경기도 양평에 위치한 용문산 입구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곳은 새벽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도깨비 시장이 열린 듯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바로 용문산 일대에 다수의 게이트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팀 구해요."

"초짜 헌터 같은데 등급이 어떻게 됩니까?"

"E급인데요?"

"큭! 짐꾼 역할을 하면 딱이겠네."

"2,000만 원에 용병 뜁니다. 네고 사절합니다."

"2천? 이보시오, 등급이 뭡니까?"

"C급입니다."

"오! 중급 헌터!"

"이 친구는 제 마법사 계열로 D급 헌터입니다."

"D급이라도 마법사라면 괜찮지. 가격이 얼마요?"

"1,000만 원입니다. 저와 함께 뛰면 2,500만 원에 모시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계약합시다."

이미 팀을 이룬 사람들, 지금 팀을 구성하는 사람들 그리고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언제나 나타나는 상인들이 있었다.

"따끈한 라면 있습니다. 커피도 팔아요."

"이리들 오세요. 금강산도 식후경입니다."

"최고 가격 매입, 최저 가격 판매! 골드버그 노점상입니다. 많이 이용해 주세요."

그로부터 얼마 후,

나는 이철승, 조미진, 김수연과 함께 관리소에 도착했다.

"예약하셨죠?"

게이트 관리자가 지극히 사무적인 어조로 물었다.

"길드 이름이?"

"구성 길드입니다."

"구성 길드라... 여기 있네요. 헌터증 확인하겠습니다."

이철승 헌터를 위시해 우리는 각자 헌터증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구성 길드 이철승 헌터, 조미진 헌터, 김수연 헌터, 청운 헌터. 입장하십시오."

관리자의 허가가 떨어지기 무섭게 우리는 용문산 게이트 C-8, 일명 붉은 바위산 게이트에 입장하게 되었다.

-우우우웅!!

게이트에 들어오니 이곳은 한낮이다.

"와우! 더워."

작렬하는 태양 아래 붉은 대지가 펼쳐져 있다.

"저곳이 붉은 바위산 던전이군."

어림짐작으로 이곳에서 바위산까지 거리는 대략 40km.

일반인이라면 꽤나 먼 거리지만 우리는 다르다.

체력 안배를 하면서 이동한다 해도 1시간에 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준비됐으면 출발하겠습니다."

헌터는 실력이 우선이라며 이철승 헌터가 내게 대장 자리를 넘긴 탓에 파티를 이끌게 되었다.

"나도 준비됐소."

"저도요."

"그럼 출발~~."

사방이 탁 트인 관계로 우리는 자연스레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그럼 청운 씨도 22살이네요."

"...네."

무림에서 보낸 시간을 합치면 30대 그것도 후반이 맞겠지만 아무튼 현재 나이는 22살이 맞다.

"그럼 우리 나이도 같은데, 편하게 친구 하는 게 어때요?"

그녀의 제안에 잠시 생각에 잠겼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뭐, 그러죠."

"오~~! 그럼 난 오빠라고 부르면 되겠네. 괜찮죠, 청운 오빠~."

조미진의 말을 들은 김수연의 동공이 순간 크게 확장되었다.

'아니, 이년이!'

'내가 뭘?'

잠시 둘 사이에 뭔가 뜨거운 대화가 오고 간 것 같다.

난 짐짓 아무것도 보지 못한 척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래요."

"에이~ 동생에게 웬 존댓말. 암튼 반가워요, 청운 오빠. 헤헤헤~."

"그래, 미진아. 나도 반갑다."

각설하고 수연과 친구가 되고 미진이 동생이 되자 자연스레 철승과의 호칭도 정리되었다.

"아! 그럼 철승 형님이 진짜 외삼촌이었구나."

"응."

"네, 오빠."

그 결과 이철승 헌터와는 호형호제하기로 했다.

이때 느닷없이 굵은 빗방울이 하늘에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

"엥? 갑자기 웬 비?"

"빗방울이 꽤 굵은데?"

"철승 형님, 지나가는 소나기 같지만 바위산 지척에 도착했으니 이렇게 된 것 잠시 쉬었다 가죠."

"그러자."

우리는 잠시 휴식을 가지기로 했다.

시원하게 쏟아지고 있는 빗줄기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수연이 다가왔다.

"청운, 질문 하나 해도 돼?"

"뭔데?"

"혹시 얼굴에 상처 같은 거 있어?"

"상처? 그게 무슨 말이야?"

"아니~ 볼 때마다 마스크를 쓰고 다녀서."

"아! 이건...."

언젠가 이런 질문을 받을 줄 알고 미리 적당한 답을 준비해 놨었다.

"이거 아이템이야."

"아이템?! 역시 그랬구나."

"오빠~."

"응, 미진아."

"오늘 이렇게 언니랑 친구도 되고 나랑은 오빠 동생 하기로 했는데 원판 정도는 보여 줘야 되는 것 아닌가?"

"그런가?"

"그럼. 당연하지."

"나도 미진이 의견에 찬성. 친구 얼굴도 모르는 건 예의가 아닌 듯!"

얼굴 한 번 보여 주는 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고 나는 마스크를 벗었다.

그리고 마스크를 벗는 순간,

"...!"

"...!!"

김수연과 조미진은 헛숨을 삼킨 채 침묵을 유지했다.

대답이 들려온 건 의외로 철승 형님이었다.

"이야~ 완전 잘생겼네."

호수와 같은 눈빛, 오뚝한 콧날, 뚜렷한 이목구비와 완벽하리만큼 고운 피부.

철승 형님의 말처럼 같은 남자가 봐도 인정할 만큼 잘생겼다.

사실 이 자리에서 처음 밝히는 건데, 내가 원래부터 이 정도 수준은 아니었다.

무림의 최선우가 주선우와 합일된 덕에 결과적으로 좋은 영향을 받은 것이다.

"왜, 오빠 얼굴이 이상해?"

"아니! 그럴 리가!"

'훗~.'

문득 장난기가 발동했다.

나는 김수연에게 얼굴을 들이대며 물었다.

"수연아, 봐 봐! 이제 됐지?"

"으... 응."

김수연은 내 시선을 회피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모습은 덤이었다.

그 모습에 조미진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잠시 후,

거짓말처럼 비가 그치고 파란 하늘이 모습을 드러내자 나는 마스크를 다시 착용했다.

"자! 비도 그쳤으니 다시 움직이죠."

우리는 곧 붉은 바위산에 당도할 수 있었다.

"여기서부터 스톤 골렘의 영역이야. 긴장 유지하자."

우리는 경계를 유지하며 바위산 내부로 들어갔다.

-쾅!

철승 형님이 휘두른 대검에 스톤 골렘 하나가 충격음과 함께 튕겨 나갔다.

그 뒤를 이어 수연과 미진의 마법이 작렬했다.

"매직 미사일!"

"파이어볼."

나 역시 골렘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검을 들고 돌덩어리를 상대하면 검날이 상할 것 같아 일부러 주먹을 선택했는데 최선의 선택이었다.

-쾅!

무당이 자랑하는 내가기공답게 태극권 한 방에 스톤 골렘 내부에 숨겨져 있던 핵이 깨져 버린 것이다.

"하하하~ 너 잘 만났다."

그야말로 내 스타일에 딱 맞는 골렘.

나는 미친 듯이 움직이며 태극권을 마음껏 펼쳐 냈다.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십타육피!

열 번을 때려 여섯 놈이 쓰러졌다.

"오오! 나 레벨 업 했어."

"나도~~~ 흐흐흐."

수연과 미진의 환호 속에 나 역시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무자비한 사냥 속도에 걸맞은 막대한 양의 경험치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띠링, 레벨이....]

-[띠링, 레벨이....]

-[띠링, 레벨이....]

-....

-....

-[...레벨이 올랐습니다.]

몇 시간 후,

더 이상 바위산에 존재하는 골렘은 없었다.

"다들 수고했다. 특히 청운! 역시 대단해."

"형님이 잘 이끌어 주셔서 그렇죠."

"겸손하긴~ 암튼 네 덕을 봤다. 역시 B급은 달라."

"그니까요! 청운 오빠. 다음에도 우리 같이 사냥하는 거다. 오케이?"

미진 역시 초롱초롱한 눈빛을 빛내며 은근슬쩍 대답을 강요했다.

모두가 '예스'를 원할 때, 나만 '노'라고 하면 영웅 혹은 역적이 될 수 있다.

오늘의 대답은 '예스'다.

"오케이."

"와! 약속한 거다, 오빠."

"그래. 서로 시간이 맞으면 다음에도 함께하자."

"헤헤헤~."

미진은 뭐가 그리 좋은지 미소를 활짝 지어 보였다.

이때 철승 형님이 다가왔다.

"E급 마석 13개, D급 마석 3개, 대검 1개, 최하급 마법 지팡이 1개, 112골드 그리고 자잘한 재료 아이템 110개."

이번 사냥을 통해 얻은 부산물이다.

아쉽게도 내게 필요한 아이템이 나오지 않았다.

"청운아, 아이템은 헌터넷을 통해 판매하고 1/N 해서 계좌에 넣어 줄게."

"네, 형님. 고생하셨습니다."

"네가 고생했지. 다음 사냥이 잡히면 연락할게."

"네."

"청운, 푹 쉬어~."

"그래. 수연아, 고생했다. 너도 푹 쉬어."

"응~."

"오빠, 수고했엉."

"그래, 미진아. 너도 수고했다."

우리는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이제 귀환까지 정확히 1시간 남았다.

제25화

25화 다시 무림으로

...10, 9, 8, 7, 6, 5, 4, 3, 2, 1, 0.

-우우우웅!!

마침내 시간이 0을 가리키자 자동으로 분신 스킬이 펼쳐지며 또 다른 내가 모습을 나타냈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눈빛을 교환하며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각각의 상태 창을 오픈해 보았다.

<상태 창>

이름 : 최선우(지구)

레벨 : 53

특성 : 분신(Unique)

칭호 : 지혜로운 자, 오크 살육자

생명력 : 780/780 마력 : 400/400

힘 : 60 체력 : 78 민첩 : 56

지혜 : 70 지능 : 40 행운 : 10 매력 : 10

보너스 스탯 : 140

<상태 창>

이름 : 주선우(무림)

레벨 : 53

특성 : 분신(Unique)

칭호 : 지혜로운 자, 오크 살육자

생명력 : 780/780 마력 : 400/400

힘 : 60 체력 : 78 민첩 : 56

지혜 : 70 지능 : 40 행운 : 10 매력 : 10

보너스 스탯 : 140

후후후!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보너스 스탯을 사용하지 않은 것이 어쩌면 신의 한 수가 될 것 같았다.

"머리가 제법 많이 자랐네."

무림의 내가 지구의 나를 향해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앞머리가 눈을 덮을 정도로 길게 자랐다.

"거긴 미용실이 없어서 묶는 게 편하겠다."

"그렇겠네."

때로는 열 마디 말보다 눈빛으로 마음을 전하는 것이 더한 의미가 있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서로의 머리를 묶어 주었고 다음 순간 환한 빛과 함께 시스템의 무심한 음성이 귓가에 들려왔다.

-[띠링, 무림 차원으로 귀환합니다.]

또 다른 나는 차원의 문을 넘어 무림으로 돌아갔다.

* * *

아주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는 방.

눈을 뜨자 마치 방금 전에 꿈에서 깬 것처럼 내가 마지막에 머물렀던 그 장소로 돌아와 있다.

그런데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다.

무려 사흘(72시간) 만에 돌아왔는데도 불구하고 탁자에 그 흔한 먼지 하나 보이지 않았다.

나는 방문을 열고 나가 가장 먼저 보인 무당 제자 하나를 붙잡고 다짜고짜 날짜를 물어보았다.

"이봐!"

"청운 사숙조를 뵈옵니다."

"어, 그래. 그보다 오늘이 며칠이지?"

"오늘요?"

"응."

"오늘이라면...."

"...!!"

헐! 그랬다.

내가 지구로 돌아간 뒤,

이곳의 시간이 단 일 초도 흐르지 않았다.

음! 이것을 보면 두 세계 사이에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종의 시간적 괴리가 존재하는 것이 분명했다. 하긴 내가 이곳에 있는 것부터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어쨌든 또 다른 내가 활동하고 있는 지구의 시간이 멈추지 않고 진행되는 반면에 무림의 시간은 멈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현상은 내게 있어서 좋은 일이 분명했다.

나는 마치 꿈과 같았던 지난 며칠을 떠올린 후 아공간을 열었다.

이것 역시 확인할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책 100권 입출고 가능]

-[핸드폰 입출고 불가능]

-[권총 입출고 불가능]

-[골드 입출고 가능]

-[삼각 김밥 입출고 가능]

-[전자 기기 입출고 불가능]

혹시나 했는데 내 생각이 옳았다.

누가, 어떠한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전자 기기나 권총과 같은 무기는 사용할 수 없었다. 즉 이쪽 세계에 큰 변화를 불러올 수 있는 물건은 아예 출고 자체가 불가능하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하긴 그래야 말이 되지.

그나마 다행인 것은 100권에 달하는 서책을 건졌다는 점이다.

나는 시험 삼아 도가 사상과 관련된 주해서를 한 권 꺼내 정독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귀환 첫날이 지났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단목린이 사황 단목지양과 함께 날 찾았다.

"청운 오빠, 나중에 린이 보러 올 거지?"

"그럼. 오빠가 나중에 보러 갈게. 린이도 오빠가 보고 싶으면 무당파로 놀러 와. 그때 신기한 마술과 재밌는 얘기를 또 해 줄게."

"정말?"

"그럼 정말이지."

"그럼 손가락 걸고 약속해 줘."

"그래~."

단목린은 나와의 이별이 무척이나 슬펐는지 닭똥 같은 눈물을 펑펑 흘리기까지 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꽤 정이 들었던 것 같다.

나는 풍양 사백과 함께 사황과 단목린을 무당산 아래까지 배웅했다.

두 사람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던 풍양 사백의 말했다.

"청운아."

"네, 사백님."

"나를 따라오너라."

나를 바라보는 사백의 눈빛이 빛나고 있었다.

풍양 사백을 따라 한참을 이동하자 작은 암자가 눈에 들어왔다.

"이곳은 내가 예전에 사용했던 거처였는데 풍광이 좋고 조용해서 무공을 수련하기에 아주 좋은 장소라 할 수 있지."

"오!"

나도 모르게 탄성을 흘려 냈다.

사백의 말처럼 주변 풍광이 무척이나 아름다워 마음마저 넉넉해지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만약 이곳에서 무공을 수련한다면 괜히 수련이 잘될 것만 같았다.

"좋지?"

풍양 사백은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듯, 씩 하고 웃으며 말했다.

"원한다면 이곳을 사용해도 좋다."

"정말요?"

"그래, 이 녀석아. 대신 내가 종종 찾아올지도 모른다. 이곳 경치가 술 한잔 걸치기에 아주 그만이거든."

"술이 떨어지지 않게 준비해 놓겠습니다."

"크하하! 정말로 마음에 든 모양이구나."

"헤헤헤~."

"일단 안으로 들어오너라."

-휘이이.

차가운 공기가 감도는 방 안.

오랫동안 관리를 하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

풍양 사백이 자그만 목합을 내밀었다.

"이게 뭔가요?"

"사황이 네게 주라고 하더구나."

목합 자체만 봐도 은은한 분위기를 뿜어내는 것이 상당히 값진 것으로 보인다.

"단목린과 잘 놀아 준 값이라고 하더군."

"놀아 준 값요?"

"후후후, 미리 약을 쳐 놓겠다는 심보겠지. 암튼 열어 보아라."

풍양 사백의 말에 나는 목합을 천천히 열어 보았다.

순간 안쪽에서 강렬한 향이 흘러나왔다.

"이것은?"

"동자삼이다. 족히 오백 년은 묵은 놈이지."

"...!!"

언뜻 인삼처럼 생겼지만 자세히 보면 다르다.

동자삼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머리, 목, 어깨, 몸통에 이어 팔과 다리의 형태를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다.

"지금부터 복용 방법을 알려 주마. 일단 화기가 닿으면 안 되니 생으로 씹어 먹어야 한다. 순서는 뿌리부터 시작해 머리와 잎사귀 그리고 씨앗이라도 빼먹지 말고 꼭꼭 씹어 먹어야 한다."

"씨앗까지요?"

"그래, 이놈아. 씨앗까지 말이다. 알겠느냐?"

"네, 사백님."

나는 동자삼을 손에 쥐고 뿌리부터 씹어 먹기 시작했다.

오물오물, 우걱우걱, 동자삼을 씹으며 속으로 노래를 불렀다.

-수박을 먹을 땐, X 발라 먹어.

-생선을 먹을 땐 가X 발라 먹어.

-하지만 동자삼 먹을 땐 씨까지 먹어.

"동자삼은 특이하게도 극음의 기운을 가지고 있다. 이제부터 차디찬 냉기가 뒤따를 것이다. 하지만 내가 도울 테니 지금 즉시 운기조식을 시작하여라."

나는 풍양 사백의 말에 즉시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았다.

이미 태허무극심법이 운용되고 있었지만 그것을 알 수 없을 사백을 위해 일부러 심법을 운기하는 시늉을 했다.

-스르르르르!

잠시 후,

풍양 사백의 내공이 등을 통해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혹시 이것이 태극신공의 기운인가?

나는 재빨리 관찰자 시점으로 변환해 신체 내부를 관조(觀照)했다.

'위장에서 뻗어 나오고 있는 기운은 동자삼이 지닌 극음의 기운일 것이고 단전에서 시작된 기운은 태허무극심법의 기운이니까, 요 녀석이 태극신공의 기운이구나.'

극음의 기운이 현묘한 기운과 만나는 과정에서 조화의 태극이 함께 어우러지며 막혀 있던 혈도를 하나씩 뚫어 가자 나도 모르는 사이 점차 희열을 느끼기 시작했다.

마약을 경험해 본 바가 없지만,

아니, 기회가 있어도 경험해 볼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중독자들이 마약이 주는 쾌락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을 보면 내가 지금 느끼는 희열 역시 최소한 그 정도는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일주천, 이주천, 삼주천.

마지막 십이주천(十二周天)이 운행되는 순간 신체 내부에서 화려한 충돌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바로 임독이맥을 뚫기 위한 폭발이었다.

'쾅!'

충돌이 일어날 때마다 엄청난 고통이 동반되었다.

어느 정도 예상을 했지만 이건 정말 상상을 뛰어넘는 고통이었다.

'쾅! 쾅! 쾅!'

비릿한 핏물이 목구멍까지 밀고 올라왔고 당장이라도 비명을 토해 내고 싶었지만 운기조식 중에 절대로 입을 열면 안 된다는 당부가 떠올라 필사적으로 고통을 참아 냈다.

'X발, 아...악! 더... 더 이상은....'

하지만 이제는 무리다.

머릿속에서 뭔가가 '펑' 하고 터지는 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피를 토해 내며 정신을 잃어버렸다.

"우웩!"

그 순간 내 등에 자석처럼 달라붙어 있던 풍양 사백의 손이 떨어지는 것도 모른 채 말이다.

-[띠링, 사용자의 신체가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띠링, 레벨 업 하셨습니다.]

-[띠링, 레벨....]

-[띠링, 힘, 체력, 민첩이 상승합니다.]

-[띠링, 레벨....]

눈을 뜨자 온몸이 새처럼 날아갈 것 같은 느낌이다.

동시에 주체할 수 없는 힘이 전신에 흘러넘쳤다.

"음."

작은 돌멩이를 가볍게 쥐었는데도 내공을 주입한 덕에 '팍' 하는 소리와 함께 우수수 부서졌다.

<상태 창>

이름 : 주선우

레벨 : 70

고유 특성 : 분신(Unique) *사용 불가

칭호 : 지혜로운 자, 오크 살육자

생명력 : 1,000/1,000 마력 : 1,500/1,500

힘 : 80 체력 : 89 민첩 : 66

지혜 : 70 지능 : 40 행운 : 10 매력 : 10

보너스 스탯 : 225

맙소사!

이 스탯 좀 봐라.

동자삼을 완벽하게 흡수한 덕에 마력이 1,500을 찍었고 17레벨이 상승했다.

"흐흐흐흐! 하하하하! 우헤헤헤헤헤!!"

나는 미친놈처럼 사방을 향해 고함을 질러 댔는데 그 순간 어디선가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우욱! 냄새! 서, 설마?!!"

냄새의 출처는 바로 나다.

그러자 본능적으로 머릿속에 떠오른 한 단어.

바로 환골탈태다.

무한한 기쁨을 느꼈지만 이율배반적으로 인상을 쓴 채 코를 부여잡고야 말았다.

"아 X발. 내 몸에서 나는 냄새지만 진짜 토할 것 같아."

지금 이 순간 내게 필요한 것은 뭐?

답은 바로 샤워!!

난 계곡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갔다.

풍덩!

제26화

26화 검선의 가르침

[무당파 자소궁]

"검선께 인사드립니다."

현 무당파의 장문인 청명 진인은 오랜만에 자신을 찾은 사문의 존장을 향해 인사를 올렸다.

"청명 사질, 그동안 잘 지냈나?"

"네, 잘 지내고 있습니다. 풍양 사백께서도 그동안 강녕하셨는지요?"

"나야 뭐 늘 똑같지."

그는 누런 이빨을 보이며 소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야심한 시각인데 어인 일로 자소궁을 찾으셨습니까?"

"막내 사질 문제로 자네를 찾았네."

"막내라면 청운 사제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돌려 말하는 것은 검선의 성격이 아니다.

그는 직접적으로 원하는 바를 말했다.

"그 아이, 보기와 다르게 재능이 있더군."

"네. 저 역시 막내 사제 때문에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말이야. 내가 종종 봐주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백님께서 직접요?"

"그래."

청운은 오늘 환골탈태를 했다.

아직 약관에 이르지도 않은 나이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이 같은 사실을 밝히지 않았지만 풍양은 내심 놀랍고 즐겁고 또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뭐라고 할까, 왠지 지켜보는 맛이 있다고나 할까?

특히 동자삼의 기운을 녹일 당시 청운에게서 느껴졌던 그 현묘한 기운이 그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현존하는 무당 최고의 고수이자 검선이라 불리는 이 괴짜 도사는 자신만의 비밀스러운 유희(遊戱)를 즐긴다고 생각하고 청명 진인을 찾은 것이었다.

"허허허! 검선의 가르침이라니! 이는 청운 사제의 홍복입니다. 사백의 뜻대로 하십시오."

풍양의 제안에 청명 진인은 단 일 초의 고민도 하지 않고 답했다.

"고맙네. 그럼 청운을 앞으로 경내가 아닌 내가 사용하던 래미원에 거하도록 하고 싶은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네. 그렇게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하하하, 고맙네."

* * *

이와 같은 시각,

나는 즐거운 상상에 빠져 있었다.

200이 넘는 포인트를 어디에 사용할지에 대한 상상이다.

힘, 체력, 민첩, 지혜, 지능, 마력.

살펴보면 무엇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게 없다.

그래! 어차피 다 필요하다.

-[띠링, 힘이 100이 되었습니다. 공격력이 크게 증가합니다.]

-[띠링, 체력이 100이 되었습니다. 생명력이 크게 증가합니다.]

-[....]

-[띠링, 지능이 100이 되었습니다. 마력이 크게 증가합니다.]

-[띠링, 지혜가 100이 되었습니다. 지능과 지혜가 100을 달성해 칭호 현자를 얻으셨습니다.]

[칭호 : 현자]

제한 : 지혜 100 이상

설명 : 지극히 뛰어난 오성(悟性)을 갖는다.

옵션 : 지혜 +10, 지능 +10, 매력 +10

오호! 새로운 칭호의 획득이다.

더욱이 부가 효과까지 가지고 있었다.

난 칭호를 적용한 후, 다시 한번 상태 창을 확인해 보았다.

<상태 창>

이름 : 주선우

레벨 : 70

고유 특성 : 분신(Unique) *사용 불가

칭호 : 현자, 오크 살육자

생명력 : 1,100/1,100 마력 : 2,200/2,200

힘 : 100 체력 : 100 민첩 : 100

지혜 : 110 지능 : 110 행운 : 10 매력 : 20

보너스 스탯 : 70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기 위해 70 포인트를 남겨 둔 채, 오늘의 쇼핑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 * *

강호의 오래된 격언 중에 오랫동안 살고 싶으면 실력을 숨기라는 말이 있다.

나 역시 그 말에 100% 동감하는 바이다.

여태까지 그래 왔고 말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예외로 두어야 할 것 같다.

동자삼을 흡수하며 환골탈태하는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던 검선 사백의 눈길을 피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래미원에서 보내는 한 달 동안,

나는 풍양 사백과 태허무극심법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호오! 그게 바로 전진교의 내공심법이었구나."

풍양 사백이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과연 현문정종이군."

81자로 된 태허무극심법의 구결을 살펴본 풍양 사백이 감탄을 토해 냈다.

그는 태허무극심법을 통해 내가 이미 단단한 기반을 쌓았으니 다른 심법은 불필요하다고 했다. 평생을 익혀도 완성할지 모를 내공을 배웠는데 이것저것 요란하게 배울 바에 하나를 배워도 제대로 배우라는 것이 사백의 요지였다.

수련의 날이 이어졌다.

내 기준에서 보면 전에 비해 크게 바뀐 것이 없는 것 같다만 일단 거처가 바뀌었고 청수, 청혜 사형 대신 풍양 사백이 종종 무공에 대해 조언해 준다는 것이 변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다.

"집을 지을 때 가장 먼저 무엇을 살펴야 할까?"

"땅입니다."

"그래, 맞다. 땅이다. 반석과 같은 땅 위에 집을 지어야 비바람과 모진 풍파에도 무너지지 않고 천년을 버틸 수 있는 것이다. 자! 이제 네 육체를 집이라 생각해 봐라. 넌 이미 아주 좋은 목재와 집 안을 꾸미기 위한 각종 재료들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아니! 오히려 분에 넘칠 정도지."

풍양 사백의 말이 끝나자마자 또 다른 질문이 이어졌다.

"자! 이번엔 무공이다. 무공이 절정 이상의 경지에 이르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깨달음입니다."

"네 말이 옳다. 깨달음이 가장 중요한 것이지. 그렇다면 다시 묻겠다. 지금 이 순간 네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깨달음일까?"

"...."

사백이 내던진 질문의 의도가 무엇일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사백이 원하는 답은 깨달음이 아닌 것 같다는 것이었다.

"자, 잘 모르겠습니다."

"솔직하게 말해 주었구나."

"가르침을 주십시오."

가르침을 달라는 요청에 풍양 사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순간 심령을 뒤흔드는 사백의 진중한 음성이 마음에 새겨졌다.

"지금 네게 필요한 것은 깨달음이 아니라 바로 균형이다. 정(精), 기(氣), 신(身)이 균형을 이뤄야지 한쪽에 치우치면 결코 높은 경지에 들 수 없다는 것을 왜 모르는 것이냐!"

"정기신?!"

"그래, 이 녀석아. 정(精), 기(氣) 신(身). 태극이 무엇이더냐! 또 태허는 무엇이더냐!"

순간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띵했다.

풍양 사백의 말이 옳다.

난 환골탈태(換骨奪胎)라는 성취에 취해 그동안 가장 중요한 기초를 놓치고 있었다.

-[다음에 보자. 登山.]

풍양 사백은 내게 등산(登山)이라는 화두를 던져두고 조용히 자취를 감추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무당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무려 72개의 봉우리를 오르는 동안 내공을 일절 사용하지 않았다. 괴이한 봉우리와 굽이쳐 흐르는 계곡 때문에 어떨 때는 꼬박 한나절을 올라가야 정상에 오를 수 있었지만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불균형적으로 성장해 있던 정신과 기력과 신체가 서로 간에 균형을 이루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산에 오른 지 반년이 지났을 무렵,

나는 그에 맞춰 수련의 강도를 점차 높여 갔다.

왜 영화에서 보면 그런 것이 있지 않은가?

몸에 철근을 주렁주렁 매달고 수련하는.

얼마 전,

하산하는 제자에게 부탁해 철환(鐵環)을 주문했고 오늘 아침 물건을 전달받았다.

"대장장이가 전달하길 한 개에 이십 근 정도 나간답니다."

한 개에 20근이면 약 12kg의 무게다.

나는 운암에게 철환(鐵環) 한 쌍을 건네받았다.

봄, 만물이 생동하는 시절이 찾아왔다.

엄동설한에 잠들어 있던 갖가지 화초가 잠에서 깨어나 나와 함께 기지개를 켰다.

여름, 한낮에 찌는 더위가 야속하지만 길가에 만개한 꽃이 더위를 잠시 잊게 해 준다.

가을, 하늘은 높고 말이 살찌는 계절이다. 뺨을 스치는 바람과 함께 가족의 얼굴이 떠올랐다. 오늘 밤은 왠지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다.

그리고 겨울, 무당산에 겨울이 다시 찾아왔다.

"후우, 후우. 후우."

비 오듯이 흘러내리는 땀방울.

호흡을 할 때마다 하얀 입김이 허공에 수를 놓는다.

계절이 몇 번 지나는 사이 한 쌍의 철환이 이제 열 쌍의 철환이 되었다.

그동안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어디선가 웃고 있을 황기택과 안선환의 얼굴을 떠올리며 견딜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무당산 천무봉에 올라 드높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때 문득 어떤 생각이 번쩍 떠오름을 느꼈고 그와 동시에 엄청난 충격을 받아 한 움큼의 피를 토해 냈다.

-[띠링, 태허무극심법이 3단계에 오릅니다.]

1단계 인(人)의 단계 : 인간이란

2단계 지(地)의 단계 : 땅을 밟고 서서

3단계 천(天)의 단계 : 하늘을 바라보고

4단계 합(合)의 단계 : 화경에 이르면

5단계 향(香)의 단계 : 강기가 모든 것을 소멸하고

6단계 광(光)의 단계 : 상단전이 열리면

7단계 성(成)의 단계 : 현묘한 기운이 일어나니

8단계 극(極)의 단계 : 인세에 적수를 찾기 어려운 현묘한 경지는

9단계 태허(太虛)의 단계 : 생과 사를 주관하고

10단계 무극(無極)의 단계 : 우주의 근원인 태극으로 돌아간다.

-[띠링, 레벨이 오릅니다.]

-[띠링, 레벨이 오릅니다.]

-[띠링, 레벨이 오릅니다.]

-[띠링, 레벨이 오릅니다.]

깨달음은 이렇듯 예고 없이 찾아왔다.

그리고.

-[태허무극심법의 숨겨진 구결이 나타납니다.]

-[띠링, 흡(吸), 탄(彈), 방(防), 벽(壁), 파(破)를 깨달았습니다.]

흡(吸), 탄(彈), 방(防), 벽(壁), 파(破)라니!!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 * *

[게이트 관리청]

이곳은 대한민국 전역에 존재하고 있는 게이트를 관리 감독하는 중앙 부처다.

"아이고 죽겠다."

"선배님, 졸리시죠?"

"그래. 졸려 죽겠다."

"그럼 담배나 한 대 피우러 갈까요?"

"오~ 좋지."

한국 최고의 과학자들이 만들어 낸 게이트 탐지기 앞에서 푸념을 늘어놓은 두 사람은 곧 외부에 마련된 흡연실을 향해 이동했다.

담배를 한 모급 흡입한 최경철이 그제야 살겠다는 듯 기지개를 켰다.

"선배님, 요즘 계속 야근이라 힘드시죠?"

"뭐 그렇지. 근데 어쩔 수가 없잖아. 빌어먹을 브레이크 때문에...."

"그러니까요. 요즘 들어 왜 이렇게 불규칙 던전이 자주 발생하는지 모르겠어요."

"내 말이! 그거 때문에 우리만 이렇게 욕을 얻어먹고 있잖아."

"그러게 말이에요."

-[이번 달에 발생한 브레이크로 인해 경기도 시민 370명 사망]

-[게이트 브레이크, 벌써 세 번째]

-[게이트 관리청의 안일한 태도, 안전 불감증]

일명 구라청이라는 곳이 있다.

사실 이곳의 원래 이름은 기상청이지만 예측이 맞는 날보다 틀리는 날이 많아 구라청이라 불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기상청을 향해 돌을 던지지는 않는다. 날씨가 틀렸다고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일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게이트 관리청의 사정은 달랐다.

대한민국 전역에서 생성된 불규칙 게이트와 함께 몇몇에서 브레이크가 발생하는 바람에 게이트 관리청에 날벼락이 떨어진 것이다.

-<청와대 집무실>

"법을 바꿔야 합니다."

"청장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국민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바꾸자는 겁니까?"

"현행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꾸는 겁니다."

"신고제요?"

"네."

-웅성웅성!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꾸자는 말에 가벼운 소요가 일어났다.

"청장님, 그럼 F급 헌터라도 본인이 원한다면 A급 게이트에 들어가게 놔두자는 말씀입니까? 거기 들어가면 그냥 죽어요."

"이보세요, 안보수석님. F급 헌터가 바보입니까?"

"뭐요?"

"아니,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바보가 아닌데, A급 게이트에 왜 들어갑니까? 뭐! 자살이라도 하려고 들어가는 거면 또 모르겠네요."

"음! 허험!"

게이트 관리청장의 말이 이어졌다.

"지금 보시는 것은 미국과 유럽의 상황입니다. 화면을 보시면 알겠지만 보시다시피 현재 전 세계적으로 브레이크 사태가 발생하고 있고 이는 석 달 전과 비교해 30% 상승한 결과입니다. 미국은 이미 사흘 전부터 자국 내에 발생하는 모든 게이트에 헌터들의 입장을 전면적으로 허용하기 시작했고 유럽 역시 오늘 아침 전면 허용 방침을 발표했습니다. 지금 광화문에 모인 시위대를 보십시오."

게이트 관리청장은 채널을 바꿔 사람들에게 뉴스를 보여 주었다.

"이러다 자칫하면 정권이 바뀔 수 있습니다."

정권이 바뀔 수 있다는 말에 대통령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그날 저녁,

모든 언론에 대한민국 정부의 특보가 전해졌다.

-[게이트 관리청, 게이트 입장을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꾸겠다]

-[선조치 후보고]

-[헌터들의 게이트 입장, 사실상 전면적 허용]

그동안 높은 등급의 게이트를 거의 독식하다시피 한 대형 길드에서 정부를 향해 불만을 토로했지만 연이어 발생한 게이트 브레이크 사태로 인해 결국은 그들 역시 정부의 결정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제27화

27화 흡(吸), 탄(彈), 방(防), 벽(壁), 파(破)

지지배배, 지지배배.

귀한 손님이 오려나?

이른 아침부터 산새들의 노랫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이 기운은?!'

순간 등 뒤에서 누군가의 희미한 기척이 느껴졌다.

이것은 분명 느껴 본 적이 있는 기운, 풍양 사백이 확실하다.

사백은 기척을 숨긴 채 나를 향해 은밀히 다가오고 있었는데 나는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 태연스레 주변 풍경을 감상했다.

그리고 그렇게 지척에 다가왔을 무렵.

-휘익!

"어이쿠, 땅바닥에 웬 동전이?"

순간 허리를 수그린 덕에 풍양 사백의 공격이 무위로 돌아갔다.

"푸, 풍양 사백님?"

"...."

"언제 오셨어요?"

"어, 방금."

멋쩍어하는 사백의 모습을 뒤로하고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젊은 놈이 눈치만 늘어 가지고. 쳇!"

"헤헷~~."

"그동안 잘 있었느냐? 풍기는 기세를 보아하니 꽤 신경을 쓴 것 같구나."

"모두 사백님 덕분입니다."

"좋아. 그럼 간만에 실력 좀 보자."

"네."

나는 풍양 사백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태극권을 펼치기 시작했다.

준비 동작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마음이 동하는 순간 수발이 자유로운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우우우웅!

눈으로 형상을 좇지 않고 마음으로 태극을 그린다.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바람이 멈추면 멈추는 대로.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얼굴도 모르는 삼풍 조사를 떠올려 보았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태극을 그려 냈는지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보았다.

구름이 밀려오면 구름의 형상을 통해 태극을 만들어 보았고 비가 오면 비와 함께 춤을 췄다.

그러자 전에는 볼 수 없던 태극이 모습을 나타내었다.

"...!!"

검선 사백, 아직 놀라지 마세요.

이게 끝이 아니랍니다. 이제 시작입이다.

나는 태극권을 통해 얼마 전 깨달은 흡(吸), 탄(彈), 방(防), 벽(壁), 파(破)의 무리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태극권 탄(彈), 하나의 탄환처럼 날아가."

태극권의 기운이 나를 중심으로 반경 3장 이내의 주변을 모조리 장악함과 동시에 내 몸에서 강렬한 반탄력이 발생해 외부로 튕겨 나와 1장(약 3.03m) 안에 있던 낙엽을 허공으로 비산시켰다.

"태극권 흡(吸), 부드러운 바람이 한 줄기 회오리가 되어."

이번에는 엄청난 흡입력, 즉 와류(渦流)가 발생해 허공을 향해 비산했던 낙엽들을 마치 거짓말처럼 모조리 끌어당겼다.

"태극권 방(防), 견고한 태극은 적의 공격을 막아 내고."

하나로 뭉친 낙엽이 태극 모양의 방패를 형성한다.

그 모습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풍양 사백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감탄을 토해 냈다.

"허어, 좋구나!"

나는 계속해서 태극권을 펼쳐 갔다.

3단계에 오른 태허무극심법이 요동치며 전신에 힘을 불어 넣었다.

"태극권 벽(壁), 단단한 태극은 벽이 되어 지키리."

주변에 무시무시한 진동이 울려 퍼지며 일종의 방벽을 만들어 냈다.

"태극권 파(破), 내 앞을 가로막은 모든 것을 무너뜨린다."

다음 순간 마치 거칠게 토해 내는 비명처럼 커다란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찢어졌다.

-과과과광!!

주위가 고요한 가운데 풍양 사백의 음성이 홀연히 들려왔다.

"건과 곤의 현묘한 기운이 구름처럼 일어나 태극을 이룬다."

땅을 향해 고개를 숙이니 나를 중심으로 선명한 태극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날 바라보는 풍양 사백의 시선이 바뀌어 있었다.

"태극의 원이 몇 개지?"

"사백께서는 태극을 본 적이 있습니까? 형상이란 모두 내 안에 있을 뿐이죠."

"사질은 금시조의 발톱을 보았는가?"

"금시조를 봐야 발톱을 볼 수 있는 법입니다."

"깨달음이란 무엇이지?"

"마른 똥 막대기입니다."

"깨달음에 무게가 있나?"

"세 근입니다."

"그럼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

"산은 산이고 물은 물입니다."

밤새 뜬구름 잡는 선문답이 이어졌지만 우리는 무엇이 그리 좋은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선문답을 이어 갔다.

"손으로 펼치면 그것이 태극권이요, 검을 들면 그것이 태극검이요, 도를 들면 그것이 바로 태극도가 되겠지요. 도구가 달라질 뿐. 본질은 오직 하나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사질은 태극을 완성했는가?"

태극을 완성했냐는 질문에 나는 잠시 뜸을 들였다.

"완성했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차선의 답은 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럼 차선의 답은 무엇인가?"

"태극을 보았습니다."

"태극을 보았다. 태극을 보았다? 하하하! 선재로다. 과연 선재로다."

풍양 사백은 뭐가 그리 기쁜지 주위가 떠나갈 듯 큰 소리로 웃어 젖혔다.

참고로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풍양 사백의 말투가 변해 있었는데 이는 곧 나를 한 사람의 무인으로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사질이 만들어 갈 태극이 어디까지인지, 그 끝을 보고 싶군."

"마부작침(磨斧作針)이라 했습니다. 처음이 어려울 뿐이죠. 이미 태극을 보았는데 언젠간 완성하지 않겠습니까?"

"옳거니~."

밤이 깊어 가는 동안 우리는 계속해서 대화의 꽃을 이어 나갔다.

"강기(剛氣)요?"

"그래. 강기! 도문에서 최고로 여기는 무공이 바로 강기야. 흔히 무공의 경지를 구분할 때 삼류와 이류, 일류를 나누고 그 후 절정과 초절정을 논하지만 사실 무인들이 바라는 경지는 결국 삼경(三境)이야."

"삼경이라면?"

"화경과 현경 그리고 생사경이지."

"아!!"

풍양 사백의 설명이 이어졌다.

"삼경의 첫째인 화경에 이르면 능히 한 지역의 패자가 될 수 있어."

"그럼 현경의 고수는요?"

"하하하! 현경의 고수라면 천하제일을 논할 수 있지."

"오! 그럼 마지막 경지라 불리는 생사경은요?"

"그건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운 경지야. 혹자는 말하기를 이론적으로 존재하는 경지라고 했지."

"그럼 생사경에 오른 사람이 아무도 없나요?"

"확인할 수 없지만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소림의 달마 조사, 무당의 삼풍 조사 그리고 마교의 천마가 생사경에 올랐다는 설이 있어. 하지만 목격한 사람이 없으니 쉬이 믿을 수 없는 이야기지."

"...."

나는 문득 호기심이 일었다.

"그럼 풍양 사백님은 강기를 펼칠 수 있으세요?"

내 말에 답을 하듯 풍양 사백이 검을 뽑아 들자 순간 사백의 송문고검에서 한 줄기 푸르른 강기가 솟구쳤다.

"우와!!"

하지만 이어진 사백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이것은 진정한 강기가 아니야."

"진정한 강기가 아니라고요?"

"그래. 잘 봐. 그리고 느껴 보렴. 이건 검기를 응축하고 또 응축해서 만든 인위적인 강기야. 그래서 내력의 소모가 많고 정순하지 않지. 초절정에 이른 고수라면 이러한 형태의 강기를 펼칠 수 있어."

풍양 사백의 설명을 듣고 다시 한번 자세히 관찰해 보니 사백의 말대로다.

마치 야생마 한 마리가 거칠게 날뛰는 느낌을 받았다.

"휘유! 그래도 위력이 엄청날 것 같아요."

"그건 그렇지. 이러한 형태라도 강기는 강기니까. 하지만...."

풍양 사백이 내 손을 잡아 송문고검으로 이끌었다.

그 순간 전과는 다른 느낌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거칠게 날뛰던 패도(覇道)의 기질이 순양(純陽)으로 바뀌는 것 같았다.

"...!"

"강기를 봐.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닌 마음으로."

꿀꺽!

나는 풍양 사백의 말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진정한 강기를 보기 위해 마음의 눈을 열었다.

-우우우우웅!

"그렇지, 그렇게 보는 거야. 눈을 감고 마음으로 말이야. 화경의 경지에 오르면 강기는 정순해지는 법이야. 그리고 이렇게 강기의 수발이 자연스러워지지. 검을 잡으면 검강이 될 것이요, 도를 잡으면 도강이 될 것이요, 이렇게 손을 뻗으면 수강이 되는 것이야."

"아!!"

분명 눈을 감고 있었는데, 송문고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강과 도강 그리고 수강이 두 눈에 각인되는 듯 뇌리에 새겨졌다.

'저것이 바로 진정한 강기인가?'

나도 모르게 눈이 번쩍 뜨였다.

그와 동시에 개념적으로 구상하고 있었던 '통', '절', '강'에 대한 깨달음이 불현듯 찾아왔다. 어디까지나 내 생각에 불과하지만 '통', '절', '강'을 태극검에 녹여 낼 수 있다면 화경의 경지가 열릴 것 같았다.

"풍양 사백님, 혹시 별호에 황(皇)이나 제(帝), 성(星)과 같은 단어가 들어가 있으면 모두 삼경에 이른 고수인가요?"

"흐음!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별호만 듣고 판단해선 안 돼."

"왜요?"

"도산검림(刀山劍林)의 강호에서 스스로 삼경에 올랐다고 말하고 다니는 이가 몇이나 있을까? 삼 할의 실력을 숨기는 곳이 강호. 네 눈으로 확인하지 않는 이상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야."

"아!"

사백의 말이 맞다.

내 생각이 짧았다.

나는 다음 질문을 던졌다.

"혹시 명호에 왕(王) 자가 붙은 사람들은 어떤가요? 황(皇)이나 제(帝)에 비해 실력이 떨어지는 건가요?"

"아니, 꼭 그렇지만은 않아. 대개의 경우 배분이나 나이 때문에 그런 것이니 별호만 듣고 실력을 판단해선 안 된다."

"사백님! 아까 삼경(三境)의 경지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혹시 마인들의 경우에도 삼경의 경지가 있나요?"

"당연히 있지. 마인들은 화경의 경지를 극마(極魔)라 말하며 현경의 경지를 탈마(脫魔)라 칭한다."

"탈마의 상위 경지는 없나요?"

"그것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생사경이라 하지."

밤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질문 역시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풍양 사백은 마치 손주의 질문에 답해 주는 자상한 할아버지처럼 조곤조곤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그렇게 지났는지 우리는 동이 트는 장관을 볼 수 있었다.

"청운아."

"네, 사백님."

"내가 보니 아직 무당의 경신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 같던데, 맞느냐?"

"부끄럽지만 그렇습니다."

"하하하. 좋아. 그럼 내가 도움을 줄 수 있겠군. 나를 따라오너라."

풍양 사백이 나를 데리고 공터로 이동했다.

공터의 크기는 약 20장, 미터로 환산하면 대략 60미터 정도다.

"우리 무당이 자랑하는 무공 중에 절세의 경신법이 하나 있는데 이는 천하에 산재해 있는 경신법 가운데 능히 으뜸이라고 할 수 있지."

"...!!"

원래 무공 구결이란 비유가 많고 마치 뜬구름 잡듯 추상적인 방법으로 빙빙 돌려놓았기에 제대로 된 스승이 없다면 이해하기가 무척이나 어렵다. 그런데 검선이라 불리는 풍양 사백이 수십 년을 수련하면서 깨달은 바를 내게 아낌없이 전해 주니 그동안 베일에 감춰져 있던 녀석이 내게 모습을 드러내 주고 말았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 구름을 쫓듯 걷고 별 그림자를 따른다. 제운종을 창안한 삼풍 조사께서 제운종을 초연했을 때 그 광경을 지켜보던 제자들이 이렇게 말했다고 해. 아! 스승님께서 구름을 이끌고 걷고 계시는구나."

-[띠링, 제운종을 익히셨습니다.]

<스킬 정보>

이름 : 제운종(액티브)

등급 : SS급 경신법

숙련도 : 최하급 4%

설명 : 무당파가 자랑하는 절세의 경신법.

민첩 수치에 따라 위력에 차이가 있다.

나는 이날 풍양 사백에게 무당의 제운종(梯雲從)을 전수받았다.

제28화

28화 던전 브레이크

샤벨 타이거의 피로 설원이 붉게 물이 들었을 무렵,

시스템의 기분 좋은 메시지가 들려왔다.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나는 샤벨 타이거가 남긴 부산물을 아공간에 넣은 후, 상태 창을 확인해 보았다.

<상태 창>

이름 : 최선우

레벨 : 99

고유 특성 : 분신(Unique) *사용 불가

칭호 : 지혜로운 자, 오크 살육자

생명력 : 2,000/2,000 마력 : 1,000/1,000

힘 : 200 체력 : 200 민첩 : 200

지혜 : 100 지능 : 100 행운 : 10 매력 : 20

보너스 스탯 : 80

후후~

감탄성이 절로 나온다.

레벨과 각종 스탯의 수치들을 봐라.

순수하게 레벨만 봐도 D급인데 여기에 각 항목의 스탯을 살펴보면 상급 헌터인 C급, 아니 최상급 헌터라 불리는 B급에 육박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

[3.000000001%]

[3.000000002%]

[....]

[....]

[...3.456890219%... 3.838294682%]

[5.118903121%]

[...906....]

[...8.734129903%]

전과 비교해 분신 스킬의 복구 속도가 빨라진 것이다.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왠지 무림 세계에 있는 주선우에게 좋은 일이 생긴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태허무극심법의 단계가 오른 것이 아닐까?'

요즘 들어 드는 생각이지만 마치 초월적인 존재가 나를 도와주고 있는 것 같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