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화
6. 제6화
"생각보다 거리가 좀 있었네."
숲속에 숨겨진 무기.
애초에, 회귀 전의 세운이 그것을 찾을 수 있었던 건 자의가 아니었다.
몬스터 웨이브 도중, 몬스터에게 쫓겨 숲에 들어갔다가 헤매던 와중에 여정의 지침표가 발동한 덕에 우연히 찾아냈을 뿐이다.
잠시 과거를 회상하던 세운의 표정이 살짝 찌그러졌다.
"그러고 보니, 그놈이 있었지."
자신을 고기 방패로 내세웠던 놈. 아니, 자신뿐만 아니라 나이가 있는 노인이나 전력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들을 고기 방패로 내세웠던 악질.
이제는 세운을 고기 방패로 내세우지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녀석이 올바르게 행동하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뭐, 그놈 덕분에 '여정의 지침표'가 가진 힘을 알게 되긴 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결과론일 뿐. 녀석이 약한 사람들을 앞으로 내세워 죽음으로 몰아간 것만은 분명하다.
세운이 성인군자까지는 아니더라도, 의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고기 방패로 내세울 정도는 아니었다.
"뭐, 그건 돌아가서 처리하고."
지금은 무기를 확보하는 게 우선이다.
'놀의 들창코'가 깃든 코에서 다양한 냄새가 느껴졌다.
진한 풀 내음이나 야생 늑대 특유의 꼬릿한 냄새, 썩어가는 동물의 사체 냄새까지.
그중에서, 유독 숲과 어울리지 않는 냄새가 하나 있었다.
바로, 녹슨 쇠 냄새.
여정의 지침표를 사용할 수는 없었지만, 그 냄새의 주인공은 세운이 찾고 있는 무기가 분명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뱃가죽이 등에 붙었다며 징징대기 시작합니다.
'뭔가, 성좌가 아니라 돼지를 한 마리 기르는 느낌인데.'
아마, 폭식의 마신이 내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면 늑대 사체를 뜯어 먹던 이빨이 자신을 향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하던 중, 흐릿하던 쇠 냄새가 짙어지고, 수풀 사이로 회색의 갈기가 보였다.
'그레이 울프.'
언뜻 보기에도 지금까지 보아온 브라운 울프보다 두 배는 더 커 보이는 녀석.
회색의 털이 전신을 뒤덮고, 특히 목 주변에는 사자처럼 무성한 갈기가 올라와 있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메인 디쉬의 등장에 포크를 집어 듭니다.
"크릉...."
나름 숨는다고 숨었는데, 늑대의 시선이 바로 세운에게로 꽂혔다.
세운이 후각을 이용해 무기의 위치를 알아낸 것처럼, 녀석 역시 후각을 통해 위치를 알아낸 모양이다.
'회귀 전에는 도망치느라 정신없었지만.'
지금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수풀에서 나와 녀석의 앞에 당당히 나섰다.
다른 맹수였다면 먹잇감의 등장에 곧바로 발톱을 휘둘렀을 텐데, 녀석은 늑대 특유의 경계심을 잔뜩 드러내며 세운의 주위를 슬금슬금 맴돌았다.
'생각보다 작네.'
세운의 기억 속에 있는 그레이 울프의 존재는 이것보다 두 배는 더 크고 포악했다.
아마, 당시에는 아직 탑과 튜토리얼에 적응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 녀석을 마주쳤기에 공포심에 의해 기억이 부풀어진 듯했다.
그리고 그레이 울프는 방금 말한 것처럼 '생각보다' 작을 뿐. 네 발을 딛고 있는데도 그 덩치는 늑대가 아니라 호랑이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거대했다.
"크앙!"
더 이상 경계할 이유를 못 느꼈는지, 녀석이 곧바로 송곳니를 보이며 달려왔다.
덩치만 큰 게 아니라, 속도도 브라운 울프 이상이다.
슥.
녀석이 노리는 위치는 정확하게 목.
단숨에 급소를 비틀어 일격에 세운의 목숨을 끊으려는 모양이다.
그러나, 세운이 한쪽 다리를 크게 내뻗는 것만으로 녀석의 공격 범위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십로담퇴.
소림파의 각법은 단순히 적을 차는 방법뿐 아니라, 다리를 움직여 적의 공격을 피하고 다가가는 보법까지 포함하고 있다.
빠악!
바로 이어서, 세운의 오른발이 늑대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공격이 빗나간 빈틈을 노린 일격이었지만, 통증을 느끼고 물러선 건 늑대가 아닌 세운이었다.
"젠장, 뭐 이리 딴딴해?"
"크릉!"
분명 갈비뼈가 보호하지 못하는 복부 쪽을 제대로 걷어찼는데. 근육과 가죽에 가로막혀, 타격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세운의 다리가 얼얼하게 아파왔다.
기술이 아무리 좋아도, 능력치가 워낙 낮은 탓이다.
폭식의 권능 덕에 이제 가까스로 일반인 수준을 넘어서긴 했지만, 이걸로 그레이 울프를 상대하기는 턱도 없었다.
스악!
녀석의 날카로운 발톱이 세운의 가슴팍을 스쳐 지나간다.
다급하게 몸을 빼지 않았으면, 살갗이 베이는 것은 물론이고 갈비뼈가 으스러졌을 것이다.
힘과 속도.
그 어느 것 하나 녀석을 뛰어넘을 수 있는 게 없다.
십로담퇴의 보법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피투성이가 되어 녀석의 아가리에 먹히고 있었겠지.
"크아앙!"
빠각!
"불러 봤자 소용없어. 이 주위 늑대들은 이미 마신의 배 속으로 들어갔으니까."
-성좌, '배고픈 왕자'가 그건 이미 소화된 지 오래라며, 얼른 메인 디쉬를 내놓으라며 재촉합니다.
코앞까지 다가온 아가리를 힘차게 올려 차며 뒤로 빠졌다.
세운의 공격이 그리 강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늑대의 공격이 더욱 거세졌다. 맞아 봤자 간지럽다는 듯이, 세운의 공격을 무시하고 아가리를 들이민다.
그에 따라 세운은 십로담퇴의 보법을 밟으며 다급하게 움직였다.
턱.
세운의 다리에 무언가가 걸렸다.
뒤를 돌아보니 마치 무덤처럼 땅이 봉긋하게 솟아올라 있었다.
"크앙!"
"크르릉!"
여기까지 찾아오며 덤벼드는 늑대는 모조리 죽였다고 생각했는데.
그레이 울프의 하울링을 듣고 찾아왔는지, 브라운 울프 두 마리가 세운의 양옆에서 성큼성큼 다가왔다.
세 마리의 늑대와 무덤에 사방이 완전히 막혔다.
"크르르...."
그레이 울프가 이제 어쩔 거냐는 듯이 여유롭게 발을 옮긴다.
벌써 세운의 머리가 입 안에 들어오기라도 한 것처럼 입맛을 다시며 침을 뚝뚝 흘린다.
"크앙!"
먹잇감을 대령하라는 그레이 울프의 외침에, 양옆의 늑대가 세운의 급소를 노리고 달려든다.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상황에.
석, 서걱-
세운에게 달려들던 두 늑대의 목이 거짓말처럼 갈라진다.
두 몸체가 바닥에 떨어지고 나서야, 주인의 죽음을 깨달은 혈관이 혈액을 토해낸다.
"내가 괜히 여기까지 물러난 줄 알았어?"
세운의 손에는 세월의 풍파를 한껏 맞아 붉게 녹슬어 있는 검이 들려 있었다.
이번 여정의 목표였던 무기. 무덤에 꽂혀 있던 검이다.
이렇게나 녹슬어 있는데도, 날은 아직 날카로움을 유지하고 있어 늑대의 몸을 베는 데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하멜가 장검술 ]
- 그라드 제국의 검술 명가인 하멜가에서 직계자손에게만 전수한다고 알려진 기본 장검술.
하멜가 장검술.
세운이 창고의 수많은 보물 중에서도 굳이 이것을 고른 이유는 복잡하지 않다.
회귀 전에, 탑에서 검제(劍帝)의 이름으로 군림하던 랭커. 프랜시스 하멜. 그의 이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탑에서 검제의 자리까지 오른 이가 배운 검술이니, 하멜가 장검술이 가진 잠재력은 이미 보증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외에도 태극검결이나 벽사검법 같은 상승 무공서나 판테라가의 대천검술 등, 이보다 강한 무공서는 얼마든지 있었지만, 세운은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지금의 몸으로는 기본부터 차근차근 쌓아가며 성장해 나가는 게 가장 중요하다.
그런 의미로, 하멜가 장검술은 탑의 랭커가 보증한 기본 무기술이니만큼 세운에게 가장 적절해 보였다.
"지금부터는 좀 다를 거다."
"크앙!"
카강!
그레이 울프의 발톱과 세운의 검이 부딪혔다.
검을 들기 전까지는 부딪힐 엄두도 나지 않았던 공격이지만, 지금은 다르다.
녀석의 발톱을 흘려보내자마자, 그대로 오른발을 앞으로 내디디며 검을 횡으로 휘두른다.
스걱-
그토록 단단하던 녀석의 가죽이 거짓말처럼 가볍게 썰려 나간다.
당황한 녀석은 빠르게 땅을 박차며 뒤로 물러난다.
"역시, 좋은 검이란 말이야."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묘한 눈빛으로 당신의 검을 바라봅니다.
얼핏 보기에는 심하게 녹슬어 제구실도 못 할 것 같은 검이지만, 휘두르자마자 느낄 수 있었다.
이 검은 적어도 튜토리얼에서 구할 수 있는 검 중에서는 최상품에 속한다는 것을.
승기를 잡은 이상, 이전처럼 뒤로 물러날 이유는 없다.
타앗!
세운이 땅을 박차고 녀석을 향해 달려든다.
이어지는 공격은 정직한 가로 베기와 세로 베기, 찌르기.
그 유명한 하멜가의 장검술이라고 하기에는, 조금의 화려함도 담겨 있지 않은 공격이었다.
직선적인 움직임이 특징이라는 소림파의 기본 무공인 '십로담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저게 무슨 검술 명가의 비전이냐'라며 혀를 찼겠지만, 아는 사람이 보았다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완벽한 베기와 찌르기.
검을 수만 번, 수십 번 이상 휘두른 자가 아니라면 결코 보여줄 수 없는 깔끔한 움직임.
거기에는 하멜가 특유의 묵직한 힘과 날카로운 예기가 담겨 있었다.
단순히 마몬의 창고에서 검법을 꺼내 쓴 것만으로도, 이러한 하멜가의 묘리가 완벽하게 움직임에 깃들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더 이상 못 참겠다며 식탁을 내려칩니다.
하멜가의 묘리를 더 만끽하고 싶었지만, 참을성 없는 성좌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세운 역시 두 번째 웨이브가 시작되기 전에 캠프로 돌아가 봐야 했기에, 끝을 내기 위해 자세를 바로잡았다.
"크앙!"
그레이 울프가 움직인다.
강인한 네 다리를 이용해 지그재그로 몸을 빠르게 움직이며 시선을 교란시킨다.
절대 방심하지 않겠다는 듯이 시선을 세운에게 집중하며, 아가리를 벌린다.
그 순간.
푸욱!
세운이 가볍게 오른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덩달아 어깨 위로 꼬아 쥐고 있던 검을 쭉 내밀었다.
그러자, 쩍 벌어진 그레이 울프의 아가리 속으로 세운의 검이 쑥 들어간다.
굳이 힘을 줄 필요도 없었다.
최후의 순간, 그레이 울프 역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세운의 검이 손잡이만 보일 정도로 깊이 들어가고 나서야, 늑대의 움직임이 멈추었고, 녀석의 눈이 뒤집히며, 전투가 끝났음을 알려 주었다.
-늑대 숲의 보스 몬스터, '무덤을 지키는 늑대'를 처치하였습니다.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개인 공적치가 500point 상승합니다.
-'회색 늑대의 가죽'을 획득하였습니다.
이번 여정의 목표는 무기 말고도 하나가 더 있었다.
바로, 개인 공적치.
공적치를 올리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정석적으로 몬스터 레이드와 같은 튜토리얼에서 활약하는 게 첫 번째 방법이고.
두 번째 방법으로 지금처럼 따로 몬스터를 찾아가 무찌를 수도 있다.
세 번째 방법은.
'다른 플레이어를 무찌르는 것.'
사실, 굳이 몬스터를 찾아 무찌르는 것보다는 세 번째 방법이 주로 쓰이는 편이다.
그편이 몬스터를 상대하기보다 더욱 쉽고 간편하게 높은 공적치를 획득할 수 있었으니까.
지금은 아니지만, 튜토리얼이 끝에 다다를수록 칼을 들이미는 플레이어의 수가 늘어날 것이다.
"조금 늦으려나."
[ 튜토리얼 첫 번째 장 – 적응 ]
-두 번째 몬스터 웨이브까지 남은 시간 12분.
다음 웨이브까지 남은 시간 12분.
조금은 서둘러야 할 것 같았다.
제 7화
7. 제7화
-'무덤을 지키는 늑대'를 포식하였습니다.
-양분을 흡수하여 근력이 3, 민첩이 5, 체력이 2 상승합니다.
캠프로 돌아가기 전, 포식의 권능을 사용하여 베엘제붑의 배를 채워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보스 몬스터한테서는 더 많은 능력치를 흡수할 수 있다는 건가."
이번에 상승한 능력치는 총 10.
브라운 울프를 처음 포식했을 때 상승한 능력치가 3이었던 것과 비교했을 때, 세 배가 넘어가는 수치였다.
이것으로 모든 능력치가 10이 넘은 것은 물론, 민첩은 20에 다다르고 있다.
처음 확인했던 형편없던 능력치에 비하면 꽤 플레이어다운 능력치였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역시 고기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 씹는 맛이 있다며 만족합니다.
베엘세붑 역시 만족하는 듯하니, 썩 만족스러운 첫 여정이었다.
'도착하기 전에 아이템부터 확인해 볼까.'
무덤에서 뽑아 든 검과 그레이 울프를 사냥하고 얻은 가죽.
가죽은 그저 소재형 아이템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바로 장비가 가능한 아이템이었다.
[ 잊혀진 영웅의 검 ]
분류 : 장검
등급 : D-
설명 : 지금은 잊혀진, 오래전에 사라진 영웅을 기리기 위한 검. 세월의 풍파를 받아들여 낡고 녹슬어 있다.
능력 : 1. 쇳독 – 검으로 낸 상처의 회복을 더디게 한다.
2. 영웅의 흔적 – 몬스터를 대상으로 한 공격력이 10% 상승한다.
[ 회색 늑대의 가죽 ]
분류 : 망토
등급 : D-
설명 : 늑대 숲에서 브라운 울프들을 다스리고 있던 그레이 울프의 가죽. 아직까지 생전의 위엄이 깃들어 있다.
능력 : 1. 위압감 – 리더의 자격으로 아군에게는 카리스마를, 적에게는 공포를 부여한다.
2. 바람의 축복 – 이동 속도가 5% 상승한다.
어쩐지.
녹슨 것에 비해 날이 잘 든다 싶었더니, 공격력 상승 옵션 덕분에 그렇게 느껴졌던 듯하다.
본래 낡고 녹슨 무기는 붙어 있는 능력도 약해지기 마련인데, 이 검은 오히려 '쇳독'이라는 긍정적 능력까지 생겨나 있었다.
회색 늑대의 가죽도 마찬가지.
녀석을 상대할 때 느꼈던 질긴 가죽이 그대로 적용되어 방어력도 쓸 만하고, 붙어 있는 능력도 꽤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도.
"둘 다 제대로 관리하기 전에도 이 정도란 말이지."
검에 붙은 녹은 제거하면 되고, 낡아서 무뎌진 날은 숫돌로 갈아 주면 된다. 회색 늑대의 가죽 역시 무두질을 거치면 지금보다 더 쓸 만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둘 다 최소 D+ 등급까지는 상승할 것이다.
튜토리얼 초반에 얻을 수 있는 아이템의 등급이 대부분 F 언저리인 것을 생각해 보면, 시작부터 엄청난 소득이었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당신의 검을 내려보며 영 쓰레기는 아닌 것 같다며 무심한 눈길을 보냅니다.
고개를 숙인 까마귀.
처음 창고를 이용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반응도 거의 없더니, 탐욕의 마왕답게, 세운이 아이템을 확인하자마자 관심을 내비친다.
검을 손에 들고, 망토를 어깨에 대충 둘러멘 후, 숲을 거의 빠져나올 때쯤,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 튜토리얼 첫 번째 장 – 적응 ]
-두 번째 웨이브가 시작됩니다.
-몬스터 웨이브를 막아 내고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십시오.
예상대로, 세운이 도착하기 전에 웨이브가 먼저 시작되었다.
웨이브 전까지 돌아온다는 유서아와의 약속이 떠올랐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의 반응을 확인해 볼 좋은 기회다.
세운이 바라는 것은 의지를 지닌 사람들을 데려가는 것.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민폐만 끼치는 이를 데려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스륵.
세운이 자세를 숙이며 마지막 수풀을 벌리자.
"꺄아악!"
"젠장, 늑대에 이어서 멧돼지라니!"
"돼지가 이렇게 강한 동물이었어? 크헉!"
"하, 할 수 있어! 얼른 막아!"
-성좌, '배고픈 왕자'가 고기를 우물거리던 와중에, 눈앞의 장면을 바라보며 군침을 줄줄 흘립니다.
수십의 멧돼지들과 처절한 사투를 벌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 * *
"막아! 막으라고!"
"꿰에엑!"
첫 번째 웨이브 때와 똑같았다.
시스템 메시지가 가리키는 숫자가 0이 되는 순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몬스터가 나타났다.
다른 점이라면, 적이 늑대가 아닌 멧돼지라는 것과 숲이 아닌 언덕 쪽에서 나타났다는 점 정도랄까.
게다가, 적의 전술 역시 첫 번째 웨이브의 늑대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늑대들이 주위를 넓게 둘러싸며 포위 진형을 이루고 차근차근 숨통을 조여왔다면, 멧돼지들은 나타나자마자 다짜고짜 뭉툭한 어금니를 드러내며 사람들에게 돌진해 왔다.
뻑!
"크헉!"
"젠장, 무슨 힘이!"
현대인이 멧돼지를 직접 마주할 일이 얼마나 있을까?
직접 마주한 멧돼지라는 '맹수'의 힘은 그들의 예상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돌진을 막아 낸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고, 피한다고 몸을 움직여도 녀석들은 돼지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빠르게 방향을 비틀었다.
'이거라도 안 들고 있었다면 나도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을 거야!'
그사이, 숲에서 구한 두꺼운 막대기를 든 유서아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사람들과의 의논? 처음에는 잘 진행되는가 싶었지만, 몇몇 사람들로 인해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바로, 저기 뒤에서 약자를 내세운 채 숨어 있는 이들 때문에 말이다.
"막아! 피하지 말고 막으라고!"
"뭣 하나! 자네, 우리 기업에 다닌다고 했잖나! 잘리기 싫으면 제대로 싸우게!"
특히, 헤진 정장을 입고 머리가 반쯤 벗겨져 있는 중년 남성.
"내 돌아가면 톡톡히 사례하겠네! 뭐? 내가 누군지 아나? 내가 이래 봬도 토운 기업 사장이야! 사람 인생 하나 망치는 것쯤이야...."
그는 능숙하게 당근과 채찍을 휘두르며 의지가 약한 사람들을 현혹시켰다.
약한 자들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고, 혹시 지구로 돌아갔을 때를 걱정한 자들 역시 고개를 숙였다.
당장 달려가 그의 횡포를 막고 싶었지만, 유서아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큭!"
멧돼지의 어금니가 그녀의 허벅지를 스쳐 지나갔다.
피한다고 생각했는데, 바지가 어금니에 걸려 쭉 찢어지며 그 안으로 기다란 상처가 생겨난다.
나무막대기를 휘둘러 보았지만, 제대로 된 타격을 주기는 힘들었다.
남을 도와주는 것도 결국 힘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
어째서일까?
이런 다급한 상황에서, 한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의논 따위는 불필요하다며, 숲속으로 들어갔던 남자. 결국, 숲속에서 늑대에게 물리기라도 한 것인지 웨이브가 시작했음에도 나타나지 않는 남자.
그가 떠날 때 툭 던진 말이, 메아리처럼 맴돌았다.
'이대로는....'
암울한 생각이 머릿속을 침범하자, 그녀는 양손으로 자신의 뺨을 짝 때렸다.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차린 그녀는, 다시금 멧돼지를 향해 나무막대기를 집어 들었다.
"꾸에엑!"
그때, 뒤쪽에서 또 다른 멧돼지의 괴성이 들려왔다.
어디로 검을 겨눌지 몰라 당황하는 순간.
서걱!
"...당신은?"
목덜미가 베이며 땅바닥을 나뒹구는 멧돼지의 사체 위로, 세운이 모습을 드러냈다.
* * *
'생각보다 잘 싸우네.'
멧돼지와 싸우고 있는 사람들을 지켜본 내 소감이다.
물론, 전투력을 말하는 게 아니다.
의지.
아직 소수의 사람은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지만, 꽤 많은 사람이 최선을 다해 멧돼지를 막아 내고 있었다.
특히.
'강한철, 유서아.'
둘의 실력이 유독 눈에 띄었다.
강한철은 큰 덩치와 거력을 이용해 멧돼지와 힘 싸움을 벌이고 있었고, 유서아는 빠른 몸놀림과 무기를 이용해 멧돼지를 상대하고 있었다.
둘의 손에 쓰러진 멧돼지의 수도 벌써 네 마리를 넘어갔다.
제대로 된 장비 하나 없는 상황에서 저 정도라니, 과연 잠재력이 높은 자들이었다.
'슬슬 나서볼까.'
타앗!
세운이 몸을 일으켰다.
힘이 빠진 건지, 집중력이 떨어진 것인지 두 마리의 멧돼지 사이에서 경직되어 있는 유서아의 뒤로 달려들었다.
서걱!
하멜가 장검술.
아직 힘이 받쳐주지 않아 목을 통째로 베지는 못하겠지만, 뼈가 지켜주지 않는 목덜미를 베어내는 것 정도는 충분했다.
순식간에 급소를 베인 멧돼지는 관성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을 굴렀다.
다만, 반작용 때문에 손목이 얼얼한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당신은?"
유서아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열었지만, 동료의 죽음을 본 멧돼지들이 더욱 열을 올리며 발을 구르고 있었다.
"일단은 저놈들부터."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하이 오크의 힘줄 ]
- 태생적으로 힘이 강하고, 투기가 강한 종족인 하이 오크의 힘줄은 오크 특유의 질긴 생명력을 가득 담고 있다.
꽈악!
검을 쥔 손에 힘이 제대로 들어갔다.
검 손잡이를 둘러싼 가죽이 비틀리며 손에 착 감겨왔다.
마몬의 창고에 있는 보물로 능력치 그 자체를 올릴 수는 없지만, 이렇게 신체를 보완하는 것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다.
물론, 이것도 몸이 감당할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사용할 수 있지만 말이다.
"꿰에엑!"
십로담퇴 특유의 움직임을 살려 멧돼지의 공격을 사뿐히 피하며, 옆구리를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손에서 녀석의 두꺼운 근육이 필사적으로 꿈틀거리는 게 선명하게 느껴졌다.
마치,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이 근육이 검을 꽉 붙잡는다.
하지만.
꽈드득!
"꾸엑!"
방금 사용한 '하이 오크의 힘줄' 덕분일까? 평소보다 강해진 힘으로 검을 회전시키며, 검을 붙들어 맨 녀석의 근육을 파열시킬 수 있었다.
'아니, 힘이 강해졌다기보다는 힘을 감당하기 수월해진 거지.'
인간의 근육은 스스로의 자멸을 막기 위해 평소에 낼 수 있는 출력이 제한되어 있다.
거기에 하이 오크의 힘줄이라는 훌륭한 부품이 추가되어 근육이 낼 수 있는 출력이 상승한 것이다.
검을 뽑아내자, 녀석은 옆구리에 뚫린 구멍을 통해 피를 왈칵 쏟아냈다.
석- 서걱!
쿠당탕!
자기 세상처럼 날뛰던 멧돼지들이 하나둘, 빠르게 정리되기 시작했다.
녀석들의 기세에 밀려 몸을 움츠리던 사람들도 세운의 등장에 기세를 올렸다.
그러던 중, 한창 전투에 집중하고 있는 세운의 어깨에, 누군가의 손이 턱 올라왔다.
척!
"자, 잠깐!"
반사적으로 검을 휘두르다가, 상대가 멧돼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검이 상대의 목에 도달하기 직전에 움직임을 멈추었다.
머리가 반쯤 벗겨진 채로 축축한 손수건을 꺼내 이마의 식은땀을 닦아 내고 있는 중년의 남성.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자네, 정말 잘 싸우는구만! 저기 저 쓸모없는 것들이랑은 차원이 달라!"
그가 짚은 어깨에서 땀이 축축하게 묻어 나왔다.
이에 세운이 인상을 더욱 크게 찌푸렸음에도, 남자는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자네, 내 전담 경호원이 되지 않겠나? 내가 이래 봬도 토운 기업의 사장이라네! 이름 정도는 들어봤겠지?"
기억이 날 리가 없었다.
몸은 방금 막 탑에 넘어왔다고는 하나, 세운의 정신은 탑에서 구를 대로 구른 베테랑이었으니까.
지구에 있던 기억은 대부분 추억 속에 잊혀졌다. 그게 아니더라도, 저런 기업 이름까지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돌아가게 된다면, 내 사례는 톡톡히 하겠네! 얼마를 원하나?"
연속된 질문에도, 세운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주변에는 새로운 멧돼지들이 계속 몰려들었다. 세운의 검에 묻은 동료의 피 냄새를 맡은 것이다.
위험을 느낀 것인지, 남자의 말이 더욱 빨라졌다.
"아, 원한다면 우리 기업의 실장 자리를 주도록 하지! 어지간한 대기업보다 대우가 훨씬 좋을 거야!"
그는 알고 있을까?
대기업이니, 실장이니. 탑에 들어온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을.
탑은 오로지 일방통행이다. 이미 튜토리얼에 진입한 이상, 지구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남자의 제안을 듣고 있던 세운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잘됐네."
"하하! 그럴 줄 알았네! 현명한 선택이야! 나만 제대로 지켜주면, 내가 평생...."
"마침, 적당한 고기 방패가 하나 필요했거든."
"그래, 고기 방... 뭐? 지금 뭐라고...."
툭.
세운이 남자의 배를 발로 가볍게 밀어냈다.
각법을 사용할 필요도 없이, 아주 살짝 힘을 주는 것만으로도 남자는 자신의 체중을 못 이겨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덩치도 있으니까 네 마리만 맡고 있어."
"무, 무슨!"
"꿰에에엑!"
세운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남자의 주위로 네 마리의 멧돼지가 모여들었다.
남자가 다급하게 도망가려 하였지만, 두꺼운 뱃살 때문인지 바로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었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당신의 성향을 파악하며 씨익 미소를 짓습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저런 맛없는 놈은 버려두고 얼른 맛있는 고기를 갖다 달라며 징징댑니다.
남자가 비명을 질러보았지만, 그를 구해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제 8화
8. 제8화
[ 튜토리얼 첫 번째 장 – 적응 ]
-두 번째 웨이브를 성공적으로 통과하였습니다.
-웨이브에 참여한 모든 인원에게 50point를 제공합니다.
세운의 등장 덕분에, 웨이브는 빠르게 끝이 났다.
중년 남성과 함께 약자를 앞으로 내세우던 이들이 눈에 걸렸으나, 남자가 세운에게 떠밀려 멧돼지들에게 밟히는 것을 확인한 이들은 곧바로 태세를 전환했다.
몇몇 이들이 다가와 감사 인사를 하려 했지만, 세운은 손을 내저었다. 애초에 그의 행동은 이들을 위한 게 아니었으니까.
-개인 공적치 집계 중....
[ 1위 : 정세운 1,080point ]
[ 2위 : 강한철 180point ]
[ 3위 : 유서아 100point ]
…
개인 공적치의 집계 결과는 당연하게도 세운이 1등이었다.
이번 웨이브를 통해 들어온 포인트도 있었지만, 늑대 숲에 들어가 그레이 울프를 사냥한 덕이 컸다.
실제로 지금 보이는 포인트의 절반 이상이 늑대 숲에서 얻은 포인트니까.
-'브라운 보어'를 포식하였습니다.
-양분을 흡수하여 근력이 1, 체력이 2 상승합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며 고기를 허겁지겁 물어뜯습니다.
세운은 자신이 상대한 멧돼지 대부분에 폭식의 권능을 사용하였다.
남은 멧돼지 사체는 단 하나.
세운이 굳이 능력치 상승까지 포기하며 이 하나를 남겨둔 이유는 간단했다.
'늑대 고기보다는 멧돼지 고기가 낫겠지.'
바로, 식사.
당연하게도 튜토리얼 도중에 먹을 식량은 알아서 구해야만 한다.
회귀 전에 늑대 고기를 먹으며 육식 동물이 얼마나 맛없는지 깨달았던 그였기에, 굳이 멧돼지 사체를 남겨둔 것이다.
멧돼지라고 해도 이런 야생에서는 육식도 서슴지 않을 게 분명하지만, 적어도 늑대 고기보다는 맛있을 거다.
스걱.
세운은 망설임 없이 멧돼지의 배를 갈랐다.
검에 묻은 녹이 신경 쓰였지만, 이런 것까지 신경 쓰고 있을 수는 없다.
갈라진 뱃가죽 사이로 피와 내장이 왈칵 쏟아졌다.
기본적인 도축법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여기서 본격적인 도축을 할 생각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세운 자신이 먹을 한 끼 식량만 획득하면 그만이었으니까.
그때.
"저기...."
누군가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 자리에는 갈색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여성이 세운을 바라보며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빠르게 그녀의 모습을 관찰하며, 세운은 그녀의 직업을 유추할 수 있었다.
'요리사인가?'
작은 칼자국과 화상이 가득하고, 이곳저곳 성한 데 없어 보이는 손가락.
자연스레, 그녀가 찾아온 이유도 알 수 있었다.
"제, 제가 도와도 될까요? 저, 작지만 식당을 운영하고 있어서, 고기도 어느 정도는 손질할 줄 알거든요!"
용기가 필요했던 것인지, 과도할 정도로 목소리를 키운 그녀를 보며 세운이 작게 미소 지었다.
중년 남성을 멧돼지 사이로 밀어 넣고, 거침없이 칼을 휘두르며 피를 튀기던 세운.
사람들은 그런 세운에게 섣불리 말을 걸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공포를 뚫고 먼저 다가와 자신의 일을 찾다니. 세운으로서는 아주 바람직한 행동이라고 생각되었다.
"물론이지."
"아, 감사합니다!"
일을 받았을 뿐인데, 뭐가 그리 감사한지. 그녀는 고개까지 숙이며 세운에게서 검을 받아 들었다.
심각하게 녹슬어 있는 검을 바라보며 잠깐 멈칫했지만, 작게 심호흡을 하더니 곧바로 도축을 시작했다.
석, 서걱.
가죽을 벗겨내고, 내장을 빼낸다.
먹을 수 있는 곳을 부위별로 썰어 정리하고, 뼈의 틈새로 검을 들이밀어 고기를 알차게 발라낸다.
도축용 검도 아니고, 요리사라고 해도 방금 죽은 멧돼지를 도축해 본 적도 없었을 텐데, 생각보다 훌륭하게 고기가 도축되고 있었다.
"물 좀 떠왔는데, 혹시 필요하세요?"
"와! 감사합니다! 마침 목말라 죽는 줄 알았거든요!"
"바위산 옆쪽에 작은 시냇물이 있더라고요. 원하시면 더 떠 드릴게요."
"그럼 부탁드릴게요! 아무래도 칼 상태가 조금 불안해서 고기를 한번 씻어 내고 싶었거든요."
"네!"
그녀의 활약을 지켜보며 자극이라도 받은 것일까?
땅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던 사람들도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냇물을 떠 오기도 하고, 숲에서 나뭇가지를 가져와 식사 준비까지 마쳤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자, 나뭇잎을 넓게 깔아 잠자리를 준비하는 이들도 있었다.
"끝났어요! 이 정도면 저희가 먹기에는 충분할 거예요."
"장작 모아왔어요. 고기 굽기에 적당해 보이는 평평한 돌도 가져와 봤는데, 괜찮을까요?"
"물론이죠! 고생하셨어요. 그런데...."
구워 먹을 고기는 물론 구울 준비까지 끝났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바로, 불.
"혹시 누구 라이터 가지고 계신 사람 안 계신가요?"
"눈을 뜨니까 옷 말고는 전부 사라져서...."
"저도요."
탑에 입장할 때, 간단한 복장을 제외한 소지품은 지니고 올 수 없다. 일부 종족들이 아티펙트나 스크롤 등을 소지하고 들어와 형평성을 깨트릴 수 있다는 게 그 이유다.
당연하게도, 라이터를 제외한 그 어떤 도구도 존재하지 않았다.
"음, 불피우는 방법을 본 것 같기는 한데. 한번 해 볼까요?"
"불은 제가 피우겠습니다."
"네? 뭐 방법이라도...."
세운이 앞으로 나섰다.
누가 했는지, 바로 요리를 할 수 있도록 장작과 돌판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카샤의 불씨 ]
- 불의 하급 정령, 카사가 지닌 불시. 미약하지만, 정령의 힘이 깃들어 쉽게 꺼지지 않는다.
"오오!"
몸에서 무형의 기운이 쑤욱 빠져나가는 기분과 함께, 세운의 손끝에서 불길이 뿜어져 나왔다.
아직 마나가 없다 보니, 마나 대신 정신력이 소모된 듯했다.
'마나도 얼른 쌓아둬야 하는데.'
처음에는 몸을 움직이는 것만으로 대부분의 몬스터를 상대할 수 있다지만, 나중에는 달랐다.
아니, 나중이라고 할 것도 없다. 튜토리얼의 중반 이상만 넘어가도 마나가 없이는 몬스터를 제대로 상대하기 힘들었다.
세운은 여유가 생기자마자 마나를 익혀야겠다고 생각하며 불꽃을 장작을 향해 내밀었다.
화륵!
마른 장작을 구하기 힘들었는지, 장작의 상태가 영 좋지 않았지만, 카샤의 불씨는 거리낌 없이 좋지 않은 장작에도 자리를 잡았다.
과연, 정령의 불씨.
곧 매캐한 연기와 함께, 장작이 뜨거운 불길로 뒤덮였다.
"어떻게 하신 거예요? 마법 같았어요!"
"마법이라.... 비슷합니다."
"네?"
"나중에 상태창을 한번 열어 보세요. 어쩌면, 재능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상태창이요?"
"그것보다, 다들 고기만 보고 있는데."
"아! 금방 구워 드릴게요! 다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치이익!
돌판 위에 고기가 올라가자, 기분 좋은 소리와 함께 캠프 주위에 고기 굽는 냄새가 퍼져 나갔다.
튜토리얼이 시작된 후, 사람들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미소가 피어나고 있었다.
* * *
우적-
세운이 들고 있던 고기를 크게 베어 물었다.
놀라울 정도로 육즙이 가득 터져 나오며, 입술이 기름으로 촉촉하게 물들었다.
조미료 하나 사용하지 않았는데, 신기하게 잡내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세운은 자신이 회귀 전에 처음 먹었던 늑대 구이의 끔찍한 맛을 떠올리며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역시 요리를 하던 사람이 만드니까 다르긴 다르네.'
가장 인기가 많은 건 돌판 위에 구워진 삼겹살이었지만, 세운은 잘 구워진 꼬치구이를 하나 들고 구석에 자리 잡았다.
사람들의 경계심이 많이 줄었다고는 해도, 아직 세운을 무서워하는 이들이 꽤 있었기 때문이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맛있는 냄새에 입맛을 다십니다.
'나도 먹고살아야지.'
베엘제붑의 요구를 맞춰 주려면 온종일 몬스터를 사냥하고 요리를 반복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성좌라고 해도, 적당히 무시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고기를 다 먹어갈 때쯤, 누군가 나뭇잎을 접어 만든 물컵을 세운의 앞으로 내밀었다.
"마셔요."
유서아.
세운이 회귀하기 전의 탑에서 '선풍'이라 불리던 여자다.
꿀꺽, 꿀꺽.
고맙다는 의미로 고개를 살짝 끄덕인 후, 나뭇잎에 담긴 물을 시원하게 들이켰다.
알게 모르게 누적되어 있던 갈증이 해소되며 몸에 기운이 차오르는 기분이다.
이후에 찾아온 짧은 정적.
먼저 입을 연 건 유서아였다.
"그 검, 숲에서 찾은 거예요?"
"운이 좋았지."
그녀가 부러운 듯이 세운의 옆에 놓인 검을 쳐다보았다.
'하긴, 스킬이나 재능 이전에 유서아는 원래부터 검을 배웠다고 했었지.'
회귀 전의 기억이 잠시 떠올랐다.
검 대신 나무막대기를 사용하고 있는 모양인데, 저걸로는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하기 어려울 거다.
강한철에 비해 포인트가 상대적으로 적었던 것도 그 이유 때문이리라.
"위에 떠 있는 시스템 메시지, 보여?"
"네. 그래도 쉴 시간은 준다는 건지, 다음 레이드까지는 여유가 있네요."
"그것 말고, 아래에 공적치."
"100point.... 이게 왜요?"
"그 정도면 검 하나 정도는 살 수 있을 거야. 상태는 안 좋겠지만."
"네? 어떻게요?"
"포인트에 집중하면, 상점 메뉴가 떠오를 거야."
튜토리얼에서 얻은 공적치는 다양한 방법으로 사용할 수 있다.
각종 포션이나 기초 장비는 물론, 비싸긴 하지만 탑에서도 구하기 힘든 최상급 아이템도 존재한다.
물론, 상위권으로 튜토리얼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공적치를 최대한 아껴야 하지만,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건, 당장 사용할 수 있는 무기다.
"우와, 무슨 게임 같네요."
"비슷하지. 아까도 말했듯이, 여기서 생존하려면 시스템에 빨리 적응하는 게 좋을 거야."
집중을 하고 있는 것인지 유서아가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아이템을 고르려 손가락을 휘휘 움직이더니, 큰 결심이라도 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툭.
"우왓!"
유서아의 앞으로 검 한 자루가 생겨났다.
숏소드.
길이도 그리 길지 않고, 얼마나 낡았는지 날도 빠져 있었다.
녹만 슬지 않았지, 세운의 '잊혀진 영웅의 검'보다 상태가 심각해 보였다.
포인트로 구매할 수 있는 상점의 검 중에서 가장 하급품.
아쉽긴 하겠지만, 100point로 구입할 수 있는 검 중에서는 저게 최선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검은 검이니 나무막대기를 휘두르는 것보다는 훨씬 도움이 될 것이다.
그 증거로, 유서아는 새로 생겨난 검을 들고서는 입까지 벌리며 감탄하고 있었다.
"대단해요! 이런 건 대체 어떻게 알아낸 거예요?"
"그냥, 상황에 빨리 납득한 거지."
"저도 나름 빨리 적응했다고 생각했는데. 세운 씨는 못 따라가겠네요."
"내가 이름을 말했던가?"
"시스템에 익숙해지라고, 누가 알려주더라구요."
유서아가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라 있는 허공을 가리켰다.
개인 공적치 랭킹.
1등 자리에 대놓고 세운의 이름이 적혀 있으니, 조금만 관심을 가진다면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런데... 꼭, 그래야만 했나요?"
잠시 들떠 있던 그녀가 다시금 처진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목적어가 없었지만, 무엇을 말하는지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지구에서의 직위를 내세우며 사람들을 내세우던 중년 남성에 대해 말하는 것이리라.
"이래서 의논이 소용없다고 한 거야."
"그래도 어쩌면 다른 방법이...."
"그러다가 그 남자 앞에 강제로 세워진 사람들이 다쳤다면, 그들은 누가 책임질 수 있지?"
유서아가 대답 대신 숏소드로 바닥을 쿡쿡 찔렀다.
적응이 빠른 그녀였으니, 말은 저렇게 해도 머리로는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이곳에서 적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무엇인지.
"이거, 알려줘서 고마워요."
"별말씀을."
유서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속으로 무언가 다짐한 듯이 목소리에서 작은 결심이 느껴졌다.
"그리고,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회귀 후, 튜토리얼의 첫날 밤.
세운은 적당한 나무 기둥에 기댄 채로, 선잠에 빠져들었다.
제 9화
9. 제9화
다음 날.
세 번째 몬스터 웨이브까지는 약 한 시간이 남아 있었다.
"다들 준비됐죠?"
"저희는 어떻게...."
"숲속에서 던질 만한 돌 좀 모아주시겠어요? 뒤에서 견제만 해 주셔도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아, 알겠습니다!"
"남은 음식들은 상하지 않도록 보관해 두었어요! 훈제까지는 아니지만, 하루 이틀은 걱정 없을 거예요!"
"거기까지는 생각 못 했는데, 고생하셨어요!"
"헤헤, 음식 쪽은 제게 맡겨 주세요!"
첫날과 비교하자면, 사람들의 행동은 백팔십도 달라져 있었다.
몬스터 웨이브를 대비하여 전투 준비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물을 떠 오거나 갖가지 소재를 수급하는 등, 저마다 자신의 역할을 찾아가고 있었다.
물론,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람들도 남아 있지만 말이다.
'전과는 확실히 달라졌네.'
내가 회귀하기 전.
본래 세 번째 몬스터 웨이브 전에는, 사상자는 물론 부상자가 많아 여전히 공포에 떨고 있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그나마 생존을 위해 어두운 표정으로 몸을 움직이는 사람도 있었지만, 지금처럼 활기가 느껴질 정도는 아니었다.
'유서아 때문이겠지.'
활발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중심에는 유서아가 서 있었다.
어제 있었던 여러 일과 세운과의 대화 때문일까? 그녀는 소극적인 자세를 완전히 버리고, 당당하게 사람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사람들도 그녀를 잘 따르고 있었으니, 암묵적으로 캠프의 리더가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잘됐지.'
세운도 캠프를 이끌어 갈 마음은 있었지만, 리더가 될 생각은 없었다.
무엇보다 자신은 몬스터 웨이브 때를 제외하고는 캠프 바깥을 돌아다니며 갖가지 히든 피스를 찾아다녀야 하니까.
그런 의미로 다른 사람도 아닌 유서아가 리더 자리를 맡아 주는 건 그로서는 매우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다들 알아서 제 할 일을 해 주니, 세운은 안심하고 개인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블루 마나 서클 ]
- 제국의 칠대 마탑 중 하나인 청색의 마탑에서 마나 친화력이 극도로 뛰어난 마법사에게만 전수된다는 비전 수련법.
마나 서클.
마법사가 마법을 구현하기 위해 갖추어야 하는 가장 기초적인 요소다.
어젯밤에 사용한 '카사의 불꽃'과 같은 힘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빨리 마나 서클을 단련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세운이 고른 마나 서클 수련법은, 안정성이 높은 대신 마나를 모으는 효율성은 칠대 마탑 중에서 가장 떨어진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도 세운이 이것을 선택한 이유는.
'어차피 수련법은 얼마든지 있다.'
창고에 쌓여 있는 수많은 보물과 그것들을 전부 수용할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일단은 청탑의 수련법으로 기반을 닦은 후, 단단한 기반 위로, 더욱 뛰어난 수련법을 사용해 기둥을 세운다.
그 주위의 벽과 지붕 역시, 세운은 자신이 구상한 최고의 방법을 이용하여 마나를 쌓아 갈 생각이다.
'단전도 빠트릴 수는 없지.'
마나 서클을 통해 마나를 모을 수는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마법을 사용하기 위한 수련법일 뿐이다.
마나를 내공으로 전환하여 몸의 움직임을 빠르게 하고 무공을 사용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니, 여유가 생기는 데로 마나 서클뿐만 아니라 단전까지 다듬어 갈 생각이다.
"후우...."
강이 흐르듯이 부드럽게. 마몬의 보물을 통해 깨달은 청탑의 묘리를 곱씹으며, 숨을 다스린다.
눈을 감고, 자리에 편하게 앉은 채로 숨을 가볍게 내뱉는다.
공백이 되어 버린 허파 속으로 숨을 가득 채운다. 배와 가슴이 눈에 띄게 부풀어 오르고, 아주 잠시 동안 숨을 멈춘다.
우웅-
느껴진다.
마나, 또는 내공이라고도 불리는 무형의 기운에 숨을 통해 세운의 몸속에 머물러 있었다.
일반인이라면 이 기운을 느끼는 데에 빠르면 몇 주, 늦으면 수년이 걸린다는 기운을, 세운은 단 한 번에 느낀 것이다.
전투에 특화된 능력을 갖췄던 건 아니었지만, 세운은 회귀 전에 탑의 92층까지 도달한 최후의 생존자다.
그러니 마나 정도야, 숨 쉬듯이 자연스럽게 다룰 수 있었다.
익숙지 않은 몸이라도, 마나를 다루는 것도 아닌 '느끼는' 것 정도는 가뿐하다.
'문제는 이다음부터지.'
허파 속에 갇힌 기운을 살살 구슬리며 말을 걸어본다.
이곳에 머물지 않겠냐고.
나와 함께하지 않겠냐고.
작은 기운 중에서도 아주 미량의 기운이, 세운의 구슬림에 현혹되며 고개를 끄덕인다.
"후우...."
기운을 구슬리는 데 성공하자마자, 다시 한번 숨을 길게 내뱉는다.
세운의 제안을 거절한 기운은 모두 내보내고, 수락한 기운은 심장을 향해 이동시킨다.
세운의 인도에 따라, 극소량의 마나가 세운의 심장 주위를 맴돌기 시작한다.
-청탑의 수련법을 통해 첫 번째 마나 서클(Mana circle)을 생성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서클이 생성되어 마나를 모으고 마법을 사용하는 게 가능해졌습니다.
-마나 서클의 수준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의 수준이나 위력, 속도 등이 상승합니다.
-뛰어난 업적을 달성하였습니다.
-보상으로 1,000point를 획득하였습니다.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한 시간. 아니, 삼십 분도 걸리지 않아 마나 서클 한 개를 생성하고 마나를 받아들였다.
회귀 전의 기억과 '청탑의 수련법'의 도움을 받은 것이긴 하지만, 마법을 조금이라도 아는 자가 보았다면 입을 쩍 벌리고 놀랐을 것이다.
제아무리 천재라고 하더라도, 마나를 느끼고 받아들이는 데는 최소 수일이 걸리기 마련이니까.
그것을 증명하듯, 세운의 앞으로 새로운 메시지들이 떠올랐다.
-성좌, '등을 맞댄 세 자매'가 눈을 크게 뜨며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좌, '천상의 성모'가 당신에게 크게 감탄하며 탄성을 흘립니다.
-성좌, '아는 자'가....
마법과 연관이 있거나, 관련된 힘을 가지고 있는 신 여럿이 세운에게 관심을 드러냈다.
주술의 신, 헤카테부터 시작해 이시스나 배이내뫼이넨 등.
세운이 아는 성좌의 이명도 있었지만, 처음 들어보는 이명도 많았다.
그러나.
'어차피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지.'
세운에게는 이미 탐욕의 마신 '마몬'과 폭식의 마신 '베엘제붑'이 붙어 있었다.
딱히 그들의 사도가 된 건 아니지만, 무얼 따져보아도 두 마신이 지금 떠오른 성좌들보다 격이 월등히 높았다.
그것을 증명하듯.
-성좌, '배고픈 왕자'가 식객이 많아졌다며 울상을 보입니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인상을 찌푸리며 창고의 보물 하나를 꺼내 듭니다.
-성좌, '험악한 백발노인'이....
뚝.
연달아 나타나던 성좌들의 메시지가 거짓말처럼 끊겼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자신보다 격이 낮은 성좌들의 통신을 전부 차단하였습니다.
'미친....'
통신을 차단하다니.
물론, 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세운이 직접 두 눈으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아무리 격이 높은 존재라고 하여도, 이렇게 시스템에 간섭하는 데에는 큰 힘이 소모된다고 알고 있었으니까.
마몬이 사용했다는 '보물'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시스템에 간섭이 가능할 만큼 강력한 보물이었을 것이다.
'다들 난리 났겠네.'
아무리 선신과 악신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막무가내로 통신을 차단하는 것은 예의를 넘어선 것 이상으로 무례한 일이었다.
지금쯤, 통신이 차단된 성좌들 전부 머리끝까지 화가 차올랐을 것이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사라진 식객을 바라보며 안심합니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조용히 당신을 지켜봅니다.
물론, 정작 두 마신은 다른 성좌들의 생각 따위 신경도 쓰지 않는 듯하지만 말이다.
한바탕 해프닝이 지나간 후, 세운은 다시 마나 서클을 회전시키며 신중하게 숨을 들이쉬었다.
청탑의 수련법답게 효율이 높지는 않았지만, 땅이 다져지듯 서클이 마나로 단단하게 자리를 잡아가는 게 선명하게 느껴졌다.
집중력이 높아지자, 주변에 들려오던 유서아의 목소리나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완전히 사라졌다.
인식되는 건 오로지 하나.
신중한 호흡 속에 스며들고 있는 한 줄기의 기운, 마나뿐이었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마나 서클을 돌리는 데 집중하던 중, 눈치도 없이 세운을 깨우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님! 잡니까? 무슨, 사람이 앉은 상태로 자고 있네."
[ 튜토리얼 첫 번째 장 – 적응 ]
-세 번째 몬스터 웨이브까지 남은 시간 12분.
혹시나 몬스터 웨이브가 시작되어 그런 건가 하고 바로 고개를 들어 올렸지만, 아직 시간은 남아 있었다.
이 캠프에서 세운에게 당당하게 찾아와 말을 걸 만한 인물은 많지 않을 텐데.
뭔가 하고 고개를 돌리니, 짧은 머리의 남성이 세운의 눈앞에 서 있었다.
'이놈이 왜?'
험악해 보이는 인상에, 크고 작은 상처들. 걷어 올린 소매 사이로는 뱀으로 보이는 문신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같은 캠프라도 오래까지 살아남아 랭커가 된 이들이 아니면 자세하게 기억나지 않는 세운이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남자는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나쁜 쪽으로 말이다.
"오, 일어났네! 한 시간 동안 여기에 앉아서 안 움직이고 있길래 죽은 거 아닌가 싶었습니다. 하핫!"
"무슨 일이지?"
"거, 너무 쌀쌀맞으시네. 다 비슷한 신세인데, 친하게 지내면 좀 좋습니까?"
박정필.
이 녀석이다.
회귀 전, 세운을 괴롭혔던 존재.
다들 혼란에 빠져 있을 때 자신의 힘을 과시하며 약한 자를 앞에 내세우고, 젊은 사람이 살아야 하지 않겠냐며 노인을 앞으로 내세우며, 식량을 빼앗던 녀석이다.
'상황이 바뀌어서 그런가?'
첫 번째 레이드 때는 나설 틈이 없었다고 치고. 두 번째 레이드 때도, 녀석은 딱히 문제 될 행위를 벌이지 않았다.
녀석의 성격을 떠올리던 세운은 곧 녀석이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하긴, 원래 이런 놈이지.'
회귀 전, 녀석은 강한철의 뒤에 숨어 힘을 휘둘렀다.
당시에는 리더도 확립되지 않은 상황이었고, 강한철은 오로지 자신밖에 신경 쓰지 않았기에 녀석은 마음 놓고 날뛸 수 있었다.
여유토강(茹柔吐剛).
전형적으로 약한 자에게 강하고, 강한 자에게 약한 타입.
회귀 전에야 강한철이 제일 강했다지만, 지금은 누가 뭐래도 세운이 가장 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었기에 이쪽으로 찾아온 것이리라.
"그냥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보아하니 아직 친한 사람도 없어 보이는구만. 서로 상부상조하면 얼마나 좋아?"
녀석 때문에 고생한 순간들이 아직까지 기억 속에 선명하다.
강제로 맨몸으로 몬스터를 상대하고, 심지어는 정찰이라는 이유로 숲속에 떠밀리기까지 했다.
덕분에 '여정의 지침표'가 가진 힘을 깨달을 수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결과론일 뿐이다.
당장에라도 녀석을 내치고 싶었지만, '내가 회귀하기 전에 나를 괴롭혔었지!'라는 이유를 댈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때.
'뭐, 어차피 먼저 찾아와 주었으니.'
씨익.
세운의 얼굴에 사악한 미소가 드리웠다.
이에 박정필이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끼며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너, 다리는 좀 빠르지?"
"다리? 갑자기 무슨 소립니까."
다리라.
몬스터 웨이브 직전에, 다리가 빠르냐는 질문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를 생각하던 박정필은 얼마 가지 않아 그 의미를 깨닫고는 얼굴이 창백하게 물들었다.
"느, 느립니다! 제가 동네에서 다리 느리기로 소문이 나 가지고. 대산동의 거북이라고 들어봤는지 모르겠네! 하하!"
필사적으로 변명을 해 보았지만, 이미 늦었다.
"너, 미끼 좀 돼 줘야겠다."
제 10화
10. 제10화
[ 튜토리얼 첫 번째 장 – 적응 ]
-세 번째 웨이브가 시작됩니다.
-몬스터 웨이브를 막아 내고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십시오.
남은 시간이 0이 되자 당연하게도 새로운 몬스터가 나타났다.
첫 번째, 두 번째 웨이브 때는 다들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이 컸지만, 지금은 다르다. 모두가 굳은 눈빛으로 몬스터의 공격을 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간에는.
"다들 마음 단단히 먹어요! 계획대로만 하면, 아무도 다치지 않을 거예요!"
캠프의 암묵적인 리더가 된 유서아가 존재했다.
그녀의 외침에, 사람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의기투합하며 각자 손에 쥔 무기를 꽉 붙잡았다.
"끽! 끼긱, 끽!"
"워, 원숭이?"
세 번째 몬스터 웨이브의 주역, 브라운 몽키.
바위산 방향에서 모습을 드러낸 녀석들은 1m 정도 되는 작은 덩치를 가졌지만, 각자 손에 무언가를 단단히 쥐고 있었다.
돌을 쪼개어 날카롭게 만든 뗀석기부터 시작해, 막대기에 돌을 연결해 만들어 낸 돌도끼나 끝을 날카롭게 갈아 만든 창까지.
녀석들은 마치 인간이라도 되는 것처럼 당당하게 무기를 휘두르고 있었다.
"다들 당황하지 마세요! 계획대로만 움직이면 충분히 할 수 있어요!"
유서아가 사람들을 다독임과 함께,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원숭이들이 무기를 휘두르고, 전열의 사람들이 두꺼운 나무막대기로 공격을 막아 냈다.
후열의 사람들은, 미리 준비해 둔 나무창을 내지른다.
푸북!
"우끼익!"
방패와 창.
고전적인 수법에다가 장비의 상태도 좋지 않았지만, 사람이 아닌 몬스터를 상대할 때 이보다 좋은 방법은 없었다.
첫 공격에 원숭이 네댓 마리가 쓰러져 나가자, 사람들의 얼굴에 자신감이 차올랐다.
그러나.
"우끽!"
"우끼이익!"
"끼익!"
"저, 저 녀석들 수가 너무 많습니다!"
첫 번째, 두 번째 웨이브에 비해 적의 수가 대폭 늘어났다.
당장 눈에 보이는 원숭이의 수만 해도 삼십 마리를 가뿐히 넘어가는 것 같은데 바위산 너머로 새로운 원숭이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적의 수가 많아지자, 자연스레 진형이 조금씩 불안정해졌다.
그리고 바로 지금이.
"시작해."
세운이 활약할 차례였다.
"혀, 형님. 이거 진짜 맞는 겁니까? 저, 다리 겁나 느리다니까요!"
툭.
"으악, 미친!"
어디서 구해 왔는지 샛노란 바나나를 들고 있는 박정필.
필사적으로 거부하는 녀석의 등을 힘차게 떠밀었다.
바나나를 든 박정필이 원숭이들 사이에 던져지자, 즉각 원숭이들의 반응이 나타났다.
"끽?"
"욱끽?"
'저 녀석들, 바나나라면 환장을 하지.'
회귀 전의 기억으로 알고 있는 내용이다.
육식을 하기도 하지만, 녀석들이 가장 좋아하는 먹이는 역시 숲속에 열리는 바나나다.
평소에는 숲의 늑대들 때문에 쉽게 먹지 못하는 열매. 그런 열매를 마찬가지로 먹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이 들고 나타났으니.
"끼이익!"
"우끽! 우끼릭!"
원숭이들이 신나서 박정필을 잡으러 달려왔다.
녀석들의 시선이 분산된 덕에, 힘겹게 전투를 벌이던 사람들의 상황이 한결 나아졌다.
"으아아악!"
곧이어, 박정필은 계획대로 원숭이들을 유인하며 필사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아니, 저 상태라면 이미 계획 따위는 잊었을 테지만 말이다.
'생각보다 빠르네.'
적어도 몇 대쯤은 맞고 있을 줄 알았는데.
'대산동의 거북이'라는 말을 방증하듯, 박정필의 다리는 그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미 그의 뒤로 붙은 원숭이의 수만 스무 마리가 넘어갔다.
"형니임! 살려주십쇼! 이제 더 못 도망쳐요!"
"이쪽으로 와라."
"이미 가고 있습니다아아!"
"우끼익!"
"끽! 끽! 끽!"
스무 마리. 아니, 이제 서른 마리에 달하는 원숭이를 달고 달려오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피리 부는 사나이가 연상되었다.
우웅!
세운의 심장을 둘러싸고 있는 마나 서클이 빠르게 회전하였다.
몬스터 웨이브가 시작되기 전에 생성해 둔 마나 서클을 사용할 차례다.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파이어 볼(Fire ball) ]
- 적탑(赤塔)의 숙련 마법사 '데이린 메이챌트'의 장기 마법. 개량을 통해 서클과 상관없이 사용할 수 있으며 불어 넣은 마나의 양에 따라 파괴력이 크게 달라진다.
화륵!
세운의 손 앞으로 불씨가 생겨났다.
서클이 빠르게 회전하며, 웨이브 전까지 쌓아 둔 모든 마나를 불씨 속으로 불어 넣었다.
어젯밤에 사용한 카샤의 불씨와는 완전히 달랐다.
화구의 크기는 이미 주먹 크기를 넘어, 세운의 상반신에 비견될 정도로 커다래졌다.
1 서클이라고는 하지만, 가지고 있는 마나를 모조리 쏟아부었으니.
"정필아, 알아서 피해라."
"네? 아니, 무슨! 으아아악!"
세운이 야구공을 던지듯이, 화구를 힘차게 내던졌다.
박정필이 비명을 내지르며 옆으로 몸을 던지자, 자연스럽게 그의 뒤를 따라오던 원숭이들이 표적이 되었다.
"...우끽?"
바나나에 눈이 팔려 있던 녀석들이, 그제야 화구의 존재를 확인했지만.
피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콰아아앙!!
화구가 첫 번째 원숭이에게 닿는 순간, 거친 폭발이 일어났다.
본래 파이어 볼이 이런 위력을 보일 리가 없지만, 세운이 사용한 건 평범한 파이어 볼이 아니었다.
마몬의 창고에 있던, 누군가의 개조식.
덕분에 서른 마리에 달하던 원숭이들이 전부 화염 속에 녹아들었다.
최중심부에 있던 녀석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거리가 있던 녀석들도 털에 화염이 옮겨붙어 비명을 내질렀다.
다급하게 바닥을 뒹굴어 보았지만, 일반적인 불이 아닌 마법으로 일으킨 불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렇게,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서른 마리가량의 원숭이들이 전멸했다.
"...혀, 형님. 이거 뭡니까? 마법? 이거, 마법 맞죠? 미친!"
놀란 것은 박정필뿐만이 아니었다. 원숭이들을 상대하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도 전부 세운을 향하고 있었다.
"마법이라고?"
"무슨 판타지 소설도 아니고...."
"하긴. 저 시스템 메시지라는 것도 그렇고 몬스터 웨이브도 그렇고. 이미 판타지 소설이랑 다를 게 없으니까."
"그럼 혹시 우리도 사용할 수 있는 건가? 마법?"
"그, 그럴지도?"
적의 수가 단번에 절반 이상 줄어들자, 사람들의 전투는 수월하게 흘러갔다.
마나를 전부 사용했다고는 하지만, 애초에 세운의 주 전투 스타일은 근접전이었다.
당장 세운이 전투에 합류하면, 몇 분도 걸리지 않아 웨이브가 끝날 것 같았다.
하지만.
'저 정도는 알아서 처리할 수 있겠지.'
세운은 굳이 나서지 않았다.
지금 세운이 나서서 몬스터를 처리해 봤자, 사람들이 경험을 쌓을 기회를 빼앗을 뿐이다. 게다가 계속해서 나서다가는 자신에게 지나치게 의존할 수도 있다.
포인트를 획득할 기회이긴 하지만, 세운은 그러지 않았다.
'어차피, 포인트는 바깥에서 쌓으면 되니까.'
히든 피스는 늑대 숲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멧돼지들이 뛰쳐나온 언덕이나, 원숭이들이 나타난 바위산에도 비슷한 히든 피스가 존재할 게 분명하다.
지금은 그것들을 먼저 해결하는 게 급선무다.
-'브라운 몽키'를 포식하였습니다.
-양분을 흡수하여 민첩이 3 상승합니다.
-양분을 흡수하여 민첩이 0.3 상승합니다.
…
-성좌, '배고픈 왕자'가 먹이가 아주 바싹하게 잘 익었다며 크게 만족합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원숭이 구이를 한 입 베어 물자마자 환호성을 크게 내지릅니다!
폭식의 권능을 잊지 않고 사용한 세운이 등을 돌렸다.
당장 발을 옮기려는 순간, 정신을 차린 박정필이 말을 걸어왔다.
"혀, 형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이야, 마법이라니! 저, 형님을 따르길 잘한 것 같습니다!"
"그래?"
"그렇고 말고요! 저, 박정필! 평생 형님을 보좌하겠습니다!"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해."
"물론입니다! 앞으로도 필요한 일이 있으면 전부 저에게 맡겨 주십쇼!"
"잘됐네. 못 하겠다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바나나는 네가 먹어 둬. 다음 웨이브 때도 많이 뛰어야 할 테니까."
"넵! 제가 많이 뛰어야.... 예?"
대화는 끝났다는 듯이, 세운이 언덕을 향해 발을 옮겼다.
그리고 그 뒤로는.
"또 뛰라구요...?"
바나나를 든 박정필이 처량한 눈으로 세운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 * *
[ 튜토리얼 첫 번째 장 – 적응 ]
-세 번째 웨이브를 성공적으로 통과하였습니다.
-웨이브에 참여한 모든 인원에게 50point를 제공합니다.
세운이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웨이브는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생각보다 빨리 끝났네.'
원숭이의 수를 크게 줄여두었다고는 하나, 그래도 십 분은 넘게 걸릴 줄 알았는데, 오 분도 지나지 않아 적을 다 물리쳤다.
그만큼 사람들의 마음가짐이 달라졌다는 뜻이리라.
곧이어, 개인 공적치 역시 집계가 완료되었다.
[ 1위 : 정세운 2,480point ]
[ 2위 : 유서아 340point ]
[ 3위 : 강한철 320point ]
"오호."
자신의 공적치는 그렇다 치고, 2위와 3위, 유서아와 강한철의 순위가 변동되었다.
"하긴, 싸구려라고는 해도 제대로 된 무기가 쥐어졌으니까."
회귀 전에는 '선풍'이라 불리며 랭커 반열까지 올라간 그녀다.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는, 지구에서 검을 배우고 있다고 했었지.
강한철의 피지컬은 인정해도, 검을 든 무술인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꾸익?"
"꿰에엑!"
언덕 위로 올라가자, 생각보다 많은 멧돼지가 세운의 눈에 들어왔다.
뭘 찾는 것인지, 땅에 머리를 처박고 있던 녀석들이 세운의 존재를 파악하자마자 힘차게 달려온다.
그야말로 저돌맹진(猪突猛進).
일반인이 보았다면 기겁하며 달아날 정도로 위협적인 돌진이지만.
서걱-
일반적인 브라운 보어 따위, 이미 세운에게 상대가 될 수준이 아니다.
십로담퇴의 보법으로 돌진을 피해내며, 하멜가 장검술을 응용하여 검을 휘두르자 멧돼지들이 허수아비처럼 쓰러져 나갔다.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언덕을 절반쯤 돌파했을 때, 세운의 몸이 잠깐 번쩍였다.
제한된 몬스터만을 상대하는 튜토리얼 특성상, 본래는 다섯 번째 웨이브쯤은 되어야 1레벨이 상승하는 게 보통인데, 세운은 고작 세 번째 웨이브만에 벌써 3레벨을 달성하였다.
거기에 포식의 권능까지 더해지니, 능력치는 이미 초심자의 것을 가볍게 벗어나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언덕에서 날뛰던 멧돼지들이 빠르게 정리되며, 가장 높은 언덕에 도착하자 세운이 찾아다니던 목표가 모습을 드러냈다.
"꿰에엑!"
"시간 아까우니까 빨리 끝내자."
세운의 키보다 큰 덩치에 두꺼운 가죽으로도 감춰지지 않은 단단한 근육.
멧돼지 언덕을 지배하는 보스 몬스터, '언덕을 파헤치는 멧돼지'가 두꺼운 어금니를 드러내며 콧김을 내뿜었다.
제 11화
11. 제11화
멧돼지를 상대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큰 덩치답게 돌진 한 번으로 바위를 무너트릴 정도로 강한 녀석이지만, 돌진만 잘 피해낸다면 빈틈투성이니까.
물론, 어지간한 공격으로는 녀석의 두꺼운 가죽과 근육을 꿰뚫기 힘들지만....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샤프니스(Sharpness) ]
- 무색의 마탑에서 개발한 마법으로써 마나를 소모해 무기의 예기를 극대화한다.
몬스터를 상대로 공격력이 10% 증가하는 잊혀진 영웅의 검 위로 마나까지 덧씌우니, 두꺼운 가죽으로도 세운의 검을 막을 수 없었다.
결국, 녀석은 심장이 꿰뚫리며 세운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멧돼지 언덕의 보스 몬스터, '언덕을 파헤치는 멧돼지'를 처치하였습니다.
-개인 공적치가 500point 상승합니다.
-'거대한 멧돼지의 어금니'을 획득하였습니다.
"어금니라...."
망토처럼 두르고 있는 '회색 늑대의 가죽'과는 달리, 이번 아이템은 완전히 소재성 아이템이었다.
가공하지 않으면 사용할 수 없는 것 같았다.
"하긴, 검이랑 가죽도 관리해야 하니까."
좋은 장비는 능력치를 올리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지금만 하더라도 검을 갈아 두었다면 훨씬 수월하게 멧돼지를 상대할 수 있었을 테니까.
회색 늑대의 가죽도 처음에는 괜찮았으나, 계속 착용하고 있으니 손질되지 않은 거친 털이 피부에 닿아 영 거슬렸다.
게다가, 전리품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저걸 찾고 있던 건가?"
언덕을 파헤치는 멧돼지라는 이름이 괜히 지어진 게 아니었다.
언덕에는 녀석이 파헤친 수많은 구덩이가 있었는데, 제일 가까운 구덩이의 중앙에 거친 표면의 돌조각이 움푹 튀어나와 있었다.
[ 잊혀진 영웅의 도구 ]
분류 : 소재
등급 : D-
설명 : 지금은 잊혀진, 오래전에 사라진 영웅이 검을 관리할 때 사용하던 도구.
능력 : -
도구라고 해 봤자,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평범한 돌 그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자마자 세운은 돌의 용도를 알 수 있었다.
'설마, 잊혀진 영웅의 검이랑 연결된 건가.'
잠시, 그렇게 생각한 세운이 미소를 살짝 지으며 도구를 품에 집어넣었다.
바로 이어서, 세운이 쓰러트린 멧돼지를 향해 손을 뻗었다. 폭식의 권능을 사용하고, 바로 캠프로 돌아가기 위함이다.
그런데.
-'언덕을 파헤치는 멧돼지'를 포식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응?"
베엘제붑의 식성을 증명하듯, 언제나 망설임 없이 사체를 집어삼키던 이빨들이 생겨나지 않았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기에, 세운은 어리둥절해 할 수밖에 없었다.
늑대 숲에서 사냥한 '무덤을 지키는 늑대' 때를 생각해 보면 분명 침을 줄줄 흘리며 기다리고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그렇다고 이대로 사체를 버려두고 가기는 너무 아깝다고 생각하던 중, 다행히도 베엘제붑의 반응이 들려왔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바삭한 원숭이 고기를 잊지 못하고 당신에게 새로운 주문을 요구합니다.
"설마...."
-성좌, '배고픈 왕자'가 노릇노릇한 멧돼지 통구이를 떠올리며 침을 줄줄 흘립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고기를 구워 주지 않으면 자신의 권능을 허락하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아까 파이어 볼로 타들어 간 원숭이들에게 폭식의 권능을 사용했을 때, 평소 이상으로 과한 반응을 보인다 싶더니, 아무래도 입이 고급스러워진 것 같았다.
'요리를 해 봤자 능력치가 더 올라가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곤란하다.
지금 한 번 구워 주는 것 정도는 상관없지만, 이대로 입맛이 고급스러워지다 보면 모든 사체를 구워 달라고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무래도 협상이 필요한 순간 같았다.
일단은.
화륵!
지글지글-
-성좌, '배고픈 왕자'가 멧돼지 고기에서 뚝뚝 흘러내리는 기름을 보며 침을 쓱 닦습니다.
먼저, 베엘제붑의 요구에 맞춰 요리를 시작한다.
다른 사람이 보았다면 협상을 한다면서 왜 요구를 바로 들어주냐며 의아해하겠지만, 협상에는 상대를 현혹할 만한 훌륭한 제안이 필요한 법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노릇노릇한 멧돼지 바비큐가 완성되었지만, 세운은 폭식의 권능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식어가는 바비큐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이러다 고기가 다 식겠다며 안절부절못합니다!
거듭된 재촉에도, 세운은 반응하지 않았다.
베엘세붑의 다급함이 초조함을 넘어 절규에 가까운 수준이 되어서야, 세운이 입을 열었다.
"요리를 해 주는 건 하루에 한 번. 그 이상은 안 됩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얼른 고기를 달라고 외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무리한 요구나 과도한 재촉은 금지입니다. 질린다면서 같은 음식은 거절하는 경우도 있던데, 그것도 금지입니다."
이렇게 된 거 세운은 지금까지 거슬렸던 모든 사항을 제안에 집어넣었다.
평소라면 그럴 수는 없다며 거부할 만한 제안도 몇 있었지만, 잘 구워진 바비큐 앞에서 베엘제붑은 이미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세운이 모든 제안의 수락을 받아낸 후에야, 폭식의 권능을 사용하여 베엘제붑에게 고기를 넘겨주었다.
-'언덕을 파헤치는 멧돼지'를 포식하였습니다.
-양분을 흡수하여 근력이 5, 체력이 5 상승합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바비큐가 도착하자마자 다급하게 얼굴을 파묻습니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고개를 내저으며 휘어진 식탁을 바라봅니다.
폭식의 마신, 베엘제붑.
생각 이상으로 다루기 쉬운 성좌였다.
* * *
"형님, 오셨습니까!"
"별일은 없었나?"
"형님이 놈들을 싹 불태워 주신 덕분에, 빨리 끝났죠! 지금은 다들 원숭이 사체 치우기 바쁩니다."
"너는 왜 안 치우는데?"
"저는 형님의 오른팔 아니겠습니까? 언제든지 형님을 보좌할 수 있게 딱 기다리고 있...."
"다음 웨이브 때 몬스터랑 같이 불타고 싶지 않으면 얼른 가서 도와라. 게으름 피운 것까지 합쳐서 두 배로 열심히."
"...넵!"
박정필. 예상대로 세운의 위세를 빌려 캠프에서 이인자로 군림하고 싶었나 보다.
하지만, 세운이 그 꼴을 가만히 보고 있을 리 없었다. 아무리 싹싹하게 굴어도, 녀석이 어떤 성질을 지니고 있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회귀 전의 기억으로 괜히 괴롭힐 생각은 없지만, 가만히 둘 생각도 없었다.
'생각 이상으로 잘하고 있네.'
유서아의 지휘도 지휘지만, 다른 사람들 모두 열정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었다.
회귀 전과 비교하면, 극명하게 다른 분위기.
솔직히 제대로 된 분위기를 갖추려면 부상자나 사상자가 더 생겨나 어느 정도 위기감 정도는 생겨나야 할 줄 알았는데. 시간도 최소 며칠은 더 지나야 할 줄 알았는데.
세운의 생각 이상으로, 사람들이 잘 움직여 주고 있었다.
'저기가 좋겠네.'
적당한 장소를 찾아낸 세운이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입고 있던 늑대 가죽과 검, 어금니를 포함해 지금까지 획득한 소재를 전부 펼쳐 두었다.
'일단은 검부터.'
세운이 멧돼지를 사냥하고 얻은 '잊혀진 영웅의 도구'를 집어 들었다.
손으로 대충 쓸어 보니 거친 표면이 그대로 느껴진다.
영웅이 검을 관리하기 위해 사용하던 도구. 즉, 이 돌은 '숫돌'이었다.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검은 바위 대장간의 입문서 ]
- 최고의 장인이라 불리는 드워프들로 이루어진 검은 바위 부족의 대장간에서 처음 대장질에 입문하는 이에게 알려주는 비법.
슥, 스윽-
세운이 '잊혀진 영웅의 검'을 갈기 시작했다.
피를 닦고 기름칠을 한 적은 있어도, 일반적인 플레이어였던 세운이 직접 숫돌질을 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도 지금 세운은 그 누구보다 안정적으로 검을 갈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팔을 쭉 뻗고, 하체의 힘을 이용해 상체를 가볍게 움직인다.
검을 둘러싸고 있는 녹이 조금씩 벗겨져 나간다.
볼 때마다 거슬렸던 녹이 벗겨지며 검에 광택이 돌아오기 시작하자, 속이 다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때.
"오오, 제법 뛰어난 실력이군."
앞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해를 받은 세운이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지만, 노인은 신경도 쓰지 않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요즘은 다 연마기를 사용해서 이렇게 몸으로 칼을 갈 줄 아는 대장장이는 거의 없을 텐데. 놀라울 정도로 정확해."
"숫돌질을 할 줄 아십니까?"
"당연하지! 내가 쇳밥을 몇십 년 동안 먹고 살았는데."
캠프에 이런 사람도 있었나?
세운이 회귀 전의 기억을 되짚어 보았지만, 그 속에 무기를 관리할 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아마도.
'원래라면 이미 죽었을 사람이었겠지.'
회귀 전에는 세운이 기억할 틈도 없이 몬스터에 당해 쓰러진 사람인 듯하다.
"숫돌의 상태도 훌륭하군. 이런 야생에서 이 정도 품질의 숫돌은 어디서 구한 건가?"
캠프의 사람들 대부분은 세운을 무서워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노인은 무서움이 없는 것인지, 검에 정신이 팔려 무서움을 잊은 것인지 세운의 반응 따위 신경도 쓰지 않는 듯했다.
'한번 맡겨볼까?'
세운으로서는 나쁠 게 없었다.
지금이야 직접 검을 갈고 있지만, 앞으로도 계속 검을 직접 관리하고 개조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아까웠으니까.
캠프에 장비를 관리할 줄 아는 사람이 한 명 있는 건 두 팔 벌리고 환영할 만한 일이다. 탑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제대로 된 대장장이를 만나기가 불가능하니 말이다.
"괜찮으시면, 대신해 주시겠습니까?"
"오오! 정말인가? 나야 환영이지. 이곳에서는 다시는 쇠를 만질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말이야!"
세운이 자리를 비켜주며 노인에게 검을 건네주었다.
마음에 안 들면 다시 직접 나설 생각이지만, 실력을 지켜보는 건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노인은 검을 받아 들자마자 입을 벌리며 감탄성을 내뱉었다.
"좋은 검이구먼. 오래돼서 낡고 녹슬긴 했지만, 무게 중심도 잘 잡혀 있고 날도 그리 많이 상하지 않았어.".
말하는 것을 보니 생각보다 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노인은 처음부터 제 자리였던 것처럼 숫돌 앞에 앉아 거침없이 검을 갈기 시작했다.
'확실히 정교하다.'
과감해 보이지만, 한없이 부드럽고 섬세하다.
녹부터 확실하게 제거하고, 신중한 손길로 날을 하나하나 어루만진다. 단순히 숫돌질을 하는 것뿐인데도 장인의 손길이 느껴진다.
검은 바위 대장간의 입문서를 통한 지식으로 바라보아도, 그의 실력에 아쉬울 점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잠시 후.
얼마나 집중했는지 노인은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 간만에 집중했구먼. 자, 여기 한번 들어보게."
세운이 검을 받아 들었다.
휙, 휙!
허공을 향해 검을 몇 번 휘두르자마자, 달라진 점을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예기가 얼마나 좋아졌는지 검을 휘두를 때마다 바람이 갈라지며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려온다.
어떻게 한 것인지 무게 중심도 좋아져 동작이 전보다 훨씬 깔끔해졌다.
[ 잊혀진 영웅의 검 ]
분류 : 장검
등급 : D+
설명 : 지금은 잊혀진, 오래전에 사라진 영웅을 기리기 위한 검. 훌륭한 장인의 손길 덕분에 이전의 예기를 되찾게 되었다.
능력 : 1. 장인의 손길 – 절삭률이 20% 상승한다.
2. 영웅의 흔적 – 몬스터를 대상으로 한 공격력이 15% 상승한다.
시스템 역시 남자의 숫돌질을 인정해 주었다.
기존에 있던 '쇳독' 대신 '장인의 손길'이라는 능력이 붙어 있었는데, 절삭률 20% 상승이라면 세운이 언덕에서 사용했던 샤프니스 마법과 비견될 정도였다.
두 번째 능력인 '영웅의 흔적' 역시 효과가 5%나 상승해 있었다.
"좋네요."
"그렇지? 검이라는 게 단순해 보여도 세상 그 누구보다 예민한 애들이거든. 오랜만에 쇠질을 했더니 속이 다 시원하구만."
"그럼, 이것도 부탁드려도 될까요?"
"오, 이것도 상당히 좋은 가죽이군. 이건, 어금니인가? 잘만 다듬으면 제법 쓸 만한 걸 만들 수 있겠어."
검 때와 마찬가지로 가죽과 어금니를 든 노인의 눈이 반짝거렸다.
이미 몰두하기 시작했는지, 그는 대답도 하지 않은 채로 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세운으로서는 시간도 빼앗기지 않고, 더 나은 결과물을 기대할 수 있으니 이렇게 좋은 상황이 또 없었다.
그때.
-성좌, '금관을 쓴 병사'가 플레이어 '고창석'에게 관심을 가집니다.
노인의 머리 위로 떠 오른 메시지를 확인한 세운의 눈이 크게 떠졌다.
제 12화
12. 제12화
금관을 쓴 병사. 칠죄종을 상징하는 일곱 마신의 바로 아래에 군림하는 72 마왕 중 하나.
서열 28위의 마왕, 베리스였다.
'베리스라고?'
세운은 마몬의 창고를 찾기 위해 조사하며 악의 성좌에 대해 빠삭하게 알게 되었다. 그러니 베리스에 대해 모르고 있을 리가 없었다.
'26개의 군단을 지휘하는 지옥의 공작.'
당연하게도 마신과 격을 비할 바는 아니지만, 72 마왕 중에서 28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그 자체로도 엄청난 격을 상징하고 있었다.
그런 성좌가 눈앞의 노인, '고창석'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하긴, 베리스라면 관심을 가질 법도 하지.'
붉은 말을 탄 병사의 모습에 베리스를 전투광으로 생각하는 자들도 많았지만, 베리스의 진짜 힘은 연금술에 있다.
현존하는 거의 모든 금속을 황금으로 바꿀 수 있을 정도로 연금술에 능하다고 알려져 있는데, 특히 쇠를 다루는 기술은 올림포스 12신 중 하나라는 헤파이스토스와 비견될 정도라고 들었다.
'아니, 무기에 관해서는 그 이상이지.'
헤파이스토스가 전체적인 벨런스와 아름다운 외관 등을 신경 쓴다면 베리스는 '파괴' 그 자체에 힘을 기울인다.
수단과 목적을 가리지 않고 오로지 힘에 중점을 두고 그가 만들어낸 장비들은 선신들마저 탐낼 정도라고 들었다.
마침 가죽을 무두질하기 시작하려던 고창석도 메시지를 확인했는지 고개를 기울였다.
"뭐야, 이건?"
"성좌입니다."
"성좌? 그게 뭔가?"
"말 그대로 신적인 존재입니다. 탑의 꼭대기에 거주하는, 초월자들이죠."
"신이 왜 나한테 관심을 가지는 겐가? 어지간히도 할 짓이 없는 모양이군. 그리고 자네는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게야?"
"저도 다른 성좌의 관심을 받고 있거든요."
이걸로 설명은 되었겠지.
그렇게 생각한 세운이 머리를 굴렸다.
고창석의 솜씨가 뛰어나긴 했지만, 그렇다고 숫돌질 한 번으로 성좌의 관심을 끌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베리스가 나타났다는 건.
-성좌, '배고픈 왕자'가 먹지도 못하는 거 그만 만지고 새로운 먹잇감을 찾아 나서길 원합니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무심한 눈빛으로 아래를 내려봅니다.
-두 마신의 시선에 따라, 72 마왕이 해당 캠프에 관심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된 거였군.'
세운과 함께하고 있는 두 마신, 마몬과 베엘제붑의 영향을 받아 다른 악신들의 시선도 이쪽으로 쏠리고 있는 듯했다.
하긴, 그럴 만도 하다.
본래 마신 정도 되는 성좌는 아무에게나 쉽게 관심을 가지는 존재가 아니다.
그런 마신이 하나도 아니고 둘이서 세운을 바라보고 있으니, 마왕들의 입장에서는 호기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뭐, 어떻게 해야 해? 재롱이라도 떨어줘야 하나?"
"그냥 하던 대로 하시면 됩니다. 해가 되는 존재는 아니니까요. 아니, 오히려 관심이 더 커지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큰 도움?"
"제가 불길을 다뤘던 것처럼 말입니다."
"호오, 그건 좀 끌리는구만."
세간에는 악신들에 관해 안 좋은 시선들이 있었다.
선신들과는 달리 사도로서 계약하거나 힘을 내려받게 되면 영혼을 빼앗기고 의지와 목적을 잃게 된다나?
하지만, 세운이 악신들을 열심히 조사해 본 결과, 그것들은 전부 악마의 인식에서 빚어진 오해들이었다.
악신이라고 하여도 선신들과 다를 게 없다. 플레이어에게 관심을 가지고, 마음에 들면 힘을 부여한다.
물론, 큰 힘을 받을수록 제약이 생기게 마련이지만 그건 선신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플레이어로서 성좌의 관심을 받고 못 받고의 차이는 엄청나다.
세운에게도, 고창석에게도 그에 대한 베리스의 관심은 전혀 나쁜 것이 아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걱정하지 말게. 몬스터한테 나무막대기를 휘두르는 것보다는 이쪽이 훨씬 자신 있으니."
고개를 짧게 숙인 세운이 자리를 떠났다.
전문가가 장비를 만져준다니, 세운으로서는 대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아직 확신할 수는 없지만, 고창석이 베리스와 계약까지 마친다면.
'적어도 장비에 관련해서는 걱정이 없어지겠지.'
고창석의 실력이 늘어날수록 탑에서 만나는 어지간한 대장장이의 수준은 가볍게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이다.
성좌의 힘이란 그만큼이나 대단한 것이었다.
[ 튜토리얼 첫 번째 장 – 적응 ]
-네 번째 몬스터 웨이브까지 남은 시간 3시간 21분.
이제 세운이 할 일은 다음 웨이브 전까지의 시간을 최대한 알차게 보내는 것이었다.
* * *
미리 세워 두었던 계획대로, 세운은 남은 시간 동안 단전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마법은 마나 서클로 해결이지만, 검을 다루거나 몸을 움직이거나 할 때는 단전을 통한 내공이 가장 효율적이니까.
단전을 개방하기만 하여도, 지금까지 사용했던 체술의 위력이 크게 증가할 게 분명하다.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삼재공(三才功) ]
- 우주의 세 가지 근원인 천(天), 지(地), 인(人)을 따라 삼라만상(森羅萬象)을 바라보는 삼재의 관법(觀法).
삼재공.
거창한 설명과는 달리, 여러 내가기공 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무공이라고 불리는 심법이다.
제일 안전하다고 불리는 기예로써 틀을 다지는 데는 좋지만, 효율은 다른 심법에 비해 극심하게 떨어진다.
마나 서클을 생성할 때 사용했던 청탑의 수련법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당연하게도 많고 많은 심법 중에서 삼재공을 고른 이유 역시 청탑의 수련법과 같았다. 삼재공으로 틀을 닦은 후, 다른 심법을 사용하여 단전을 효율적으로 키워 나갈 생각이다.
"후우...."
삼재공의 묘리를 곱씹으며 숨을 다스린다.
지향하는 방향이 비슷하기 때문일까? 삼재공의 묘리 중에는 청탑의 수련법과 겹치는 부분이 상당히 많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마나를 심장이 아닌 아랫배의 단전을 향해 인도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서클처럼 무언가를 생성하는 게 아니라 딱딱하게 굳어 있는 단전을 '개방'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쿵!
세운의 인도에 따라 움직이던 마나. 아니, 내공이 단전에 도착해 문을 두들긴다. 반응을 보이지 않자 더욱 강하게, 더욱 빠르게 문에 부딪힌다.
생각보다 딱딱하게 굳어 있는 단전에 세운이 차분하게 숨을 고르고는 내공을 단단히 뭉쳐 공성추처럼 강하게 부딪힌다.
쾅!!
곧이어 몸이 부르르 떨릴 정도의 충격과 함께.
-삼재공을 통해 단전(丹田)을 개방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단전이 개방되며 몸속의 내공을 다루는 게 가능해졌습니다.
-내공의 수치에 따라 사용하는 모든 무공의 효율이 증가합니다.
-뛰어난 업적을 달성하였습니다.
-보상으로 1,000point를 획득하였습니다.
세운의 단전이 활짝 개방되었다.
두 시간도 되지 않아 단전을 개방하는 데 성공한 세운이 식은땀을 가볍게 닦아냈다.
어떻게 알았는지, 세운의 내공을 느낀 성좌들이 다시 한번 몰려들기 시작했다.
-성좌, '화려한 갑옷을 입은 장수'가 당신의 과격함에 놀라워합니다!
-성좌, '험악한 백발노인'이 이건 과격함이 아니라 뛰어난 지혜의 영역이라며 놀라워합니다.
-성좌, '역귀를 쫓는 대장군'이....
당연하다.
마나 서클과 마찬가지로, 단전 역시 개방하기 위해서는 못해도 몇 달은 걸린다고 알려져 있었으니까.
천재라 불리는 이들 역시, 수 주는 걸리는 편이고 짧아도 며칠은 필요하게 마련이다.
세운처럼 두 시간도 되지 않아 단전을 깨우치는 경우는, 강제로 단전에 충격을 가하는 경우가 아닌 이상 불가능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이 사실을 아는 성좌들이 몰려와 너도나도 세운에게 말을 걸어 보았지만.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내려두었던 보물을 다시 한번 들어 올립니다.
-성좌, '험악한 백발노인'이 잠시만 기다리라며....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자신보다 격이 낮은 성좌들의 통신을 전부 차단하였습니다.
이번에 역시 마찬가지. 마몬의 행동으로 인해 성좌들의 메시지가 전부 차단되었다.
물론, 아무리 마몬이라 하더라도 자신과 격이 비슷한 성좌의 통신까지 차단할 수는 없겠지만.
악신 중에서도 주신급의 격을 가지고 있는 그였기에 어지간한 신격으로는 세운에게 다가올 수 없을 게 분명하다.
고개를 들어보니 남은 시간은 대략 한 시간.
바위산을 향하기는 시간이 영 애매했기에 마나나 더 쌓을 생각으로 눈을 다시 감으려던 찰나.
툭.
세운의 눈앞으로 세 개의 물건이 놓였다.
어떻게 다듬은 것인지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회색 망토와 그 위에 놓인 투박한 백색의 단검.
세운이 고창석에게 맡겼던 물건들이다.
"생각보다 빨리 끝났네요."
"마음 같아서는 쓸 만한 연마제라도 찾고 싶었는데, 여기서 그런 걸 구할 수가 있어야지.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무두질 끝내고 입을 수 있는 형태로 다듬어 놨네."
"이 단검은...."
"그냥 갈아서 날을 세웠을 뿐이네. 재료는 쓸 만한데, 마땅한 도구가 없어서 숫돌로 무식하게 갈아서 만드느라 꽤 힘들었어."
힘들었다는 말과 달리, 고창석의 얼굴은 매우 밝아 보였다.
새로운 세상으로 넘어와 몬스터를 상대하느라 혼란스러운 와중에, 잠시 본업으로 돌아오게 되어 즐거웠던 것이겠지.
세운은 당장 눈앞의 아이템들을 향해 감정을 사용해 보았다.
[ 회색 늑대 망토 ]
분류 : 망토
등급 : D
설명 : 늑대 숲에서 브라운 울프들을 다스리고 있던 그레이 울프의 가죽. 숙련된 장인이 깔끔하게 가공하여 본래의 힘을 최대한 살려 두었다.
능력 : 1. 위압감 – 리더의 자격으로서 아군에게는 카리스마를, 적에게는 공포를 부여한다.
2. 바람의 축복 – 이동 속도가 10% 상승한다.
첫 번째, 망토.
달라진 능력이라고는 이동 속도가 조금 더 상승한 게 끝이었지만, 세운은 알 수 있었다. 무두질을 거치며 가죽이 단단해진 것은 물론 움직임에 거슬리지 않도록 깔끔하게 가공되었다는 것을.
이것만으로도 방어력이 높아지는 것은 물론, 움직임마저 한층 더 부드러워질 것이다.
[ 어금니 단검 ]
분류 : 단검
등급 : D+
설명 : 언덕 위에 군림하던 '무덤을 파헤치는 멧돼지'의 어금니. 오로지 숫돌질로만 날을 세우고 형태를 잡아, 지닌 힘을 극도로 끌어냈다.
능력 : 1. 저돌맹진 – 찌르기에 한해 공격력과 절삭력이 20%까지 상승한다.
2. 튼튼함 – 생전의 힘을 이어받아 내구력이 대폭 상승했다.
"어때, 마음에 드나?"
"네, 정말로요."
"간만에 힘을 썼더니 어깨가 다 뻐근하구만."
고창석은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빙빙 돌렸다.
그러는 중에도, 세운의 눈은 단검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아무런 도구도 없이 등급을 D+까지 끌어올리다니.'
보스 몬스터의 소재라고는 하나, 대장간은커녕 기본적인 장비도 없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세운도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있었는데, 이건 기대를 몇 단계나 뛰어넘는 결과였다.
아무리 그에게 맡긴 숫돌이 보스 몬스터를 통해 얻은 뛰어난 성능의 소재라고 해도 말이다.
베리스가 고창석에게 괜히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게 아니었다.
"이건 남는 가죽으로 대충 만들어 본 거라네. 무기 두 개를 계속 들고 다닐 수는 없을 테니."
"감사합니다."
고창석이 세운에게 가죽으로 된 벨트 하나를 건네주었다.
안 그래도 무기를 어떻게 들고 다녀야 하나 생각하고 걱정했는데, 이 정도면 당분간은 걱정이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전투에 직접 나서는 대신 캠프의 장비를 관리해 주셨으면 합니다."
"...괜찮은가? 전력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을 텐데."
"아뇨. 어르신이 좋은 장비를 만들어 주시는 편이, 훨씬 더 큰 도움이 될 겁니다."
"크흠. 물론, 나야 원래 하던 일이니 좋기야 하다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어르신이 장비를 만들어 주신 만큼, 제가 더 전력을 낼 테니까요."
"자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믿음직스럽긴 하구만."
아직 조금 망설이고 있지만, 거절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도 몬스터와 싸우는 것보다는, 장비를 만지는 편이 더욱 좋을 테니까.
세운은 고창석의 새로운 역할을 의논하기 위해 유서아를 찾았다.
굳이 고창석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말하고 싶은 게 하나 더 있었다.
네 번째 웨이브까지 대략 한 시간.
이번 전투는 앞선 세 차례의 웨이브와는 난이도 자체가 달라질 것이다.
제 13화
13. 제13화
네 번째 웨이브까지 약 십 분.
오늘 아침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모두 웨이브를 대비하여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여유.
세 번째 웨이브를 생각보다 손쉽게 막아 낸 덕분인지, 긴장감이 줄어들어 있었다.
"이제 곧 시작이에요! 다들 준비해 주세요!"
"이번에도 멧돼지가 나왔으면 좋겠는데. 식량은 많을수록 좋잖아?"
"소 같은 건 안 나오나?"
"와, 소고기! 지구에서도 배부르게 못 먹어봤는데, 나오면 진짜 좋겠다!"
유서아의 외침에도, 사람들은 대화를 멈추지 않았다. 긴장감이 얼마나 사라졌는지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유서아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다들 집중해 주세요! 세운 씨의 말에 의하면, 이번 웨이브는 특히 위험할 거라고 했으니까요!"
"위험해 봤자 우리 정도면 충분하잖아요?"
"그리고 그분이라면 뭐가 나와도 충분히 막아 낼 수 있을 텐데, 뭐가 걱정이에요?"
"하긴, 그 불꽃은 정말 대단했지?"
유서아가 재차 외쳐보았지만, 사람들은 이번에도 그녀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몇몇 사람들은 유서아의 마음을 알고 표정을 굳히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람들 대다수는 그러지 않았다.
심지어는 아직 시간이 남았다며 무기를 바닥에 내려 둔 이도 있었다.
그럴수록 유서아는 혼자서 불안함을 곱씹어야만 했다.
'불안해....'
짧은 시간이지만 그녀가 보아온 세운은 결코 가벼운 사람이 아니었다.
웨이브가 시작하기 직전, 굳이 그녀에게 다가와 조심하라고 할 정도라면 웨이브의 난이도가 생각 이상으로 위험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집중을 못 하고 있었다.
훌륭한 리더이긴 하지만, 카리스마가 부족한 탓인지 상황을 바로잡기 어려웠다.
그때.
쾅!!
전열의 가장 앞에서 귀를 울리는 폭음과 함께 뿌연 흙먼지가 일었다.
깜짝 놀란 사람들이 말을 멈추고, 시선을 집중했다.
그 자리에는 2m가 넘어가는 거한의 남자, 강한철이 표정을 딱딱하게 굳힌 채로 흙이 묻은 주먹을 탈탈 털고 있었다.
"시끄럽다."
단 한 마디. 그 묵직한 목소리에 사람들이 정신을 되찾았다.
주위가 순식간에 고요해지고, 긴장감에 침을 삼키는 소리만 드문드문 들려왔다.
"이제 일 분 남았어요!"
침묵을 처음 깨트린 건 유서아의 낭랑한 목소리였다.
정신을 차리기 시작한 사람들은 저마다 무기를 쥐고, 전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강한철 씨라고 했죠? 고마워요."
유서아가 가까이 다가가 말을 걸었지만, 강한철에게서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저 묵묵하게 전투를 대비할 뿐이었다.
지금까지 그 어떤 일이 벌어져도 자기 일에만 몰두하며 주위에 신경 쓰지 않던 이였는데, 어쩐 일인지 그런 그가 자신을 위해서 나서주었다.
이에 유서아는 믿음직한 동료가 생긴 것처럼 든든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 튜토리얼 첫 번째 장 – 적응 ]
-네 번째 웨이브가 시작됩니다.
-몬스터 웨이브를 막아 내고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십시오.
기다리던 네 번째 웨이브가 시작되고.
"크르릉...."
"또 늑대?"
"저, 저것들 뭐야! 뭐 저렇게 커!"
"미친...."
첫 번째 웨이브 때 나타났던 브라운 울프보다 한층 커진 크기의 상위 몬스터. 그레이 울프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 * *
"나왔네."
"혀, 형님! 이거, 괜찮은 겁니까? 저것들 덩치가 장난 아닌데요?"
늑대 숲에 있던 늑대들은 세운이 대부분 정리를 끝냈다. 그런데도 숲에서는 새로운 늑대들이 등장했다.
그것도 브라운 울프의 두 배는 될 법한 크기를 가진 늑대들이 말이다.
"그럼 양이나 염소라도 나올 줄 알았나?"
"그건 아니더라도, 저건 인간이 상대할 수준이 아니잖습니까! 총도 없이 저런 걸 어떻게 상대하라고!"
다른 사람들의 반응도 세운의 옆에서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박정필과 마찬가지였다.
'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이 순식간에 '저건 무리야!'라는 좌절감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하긴, 나도 예전에는 저랬으니까.'
지구에서 평화로운 삶을 보내던 사람으로서, 눈앞에 저런 크기의 맹수를 마주하게 되면 누구든지 좌절감에 물들게 마련이다.
그것도 한 마리가 아닌 수십 마리의 늑대 한 무리이니 말이다.
다만, 그중에서도 유일하게 정신을 차리고 있는 이가 둘 있었다.
유서아와 강한철.
둘만은 그레이 울프를 눈앞에 두고서도, 주먹을 꽉 쥐고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그만 떠들고 몰이 시작해라."
"네? 아니, 형님! 지금은 원숭이 때랑은 다르잖습니까! 늑대라고요, 늑대! 그것도 산만 한 늑대!"
"그럼 지금이라도 저 사람들 사이로 끼어 들어가든지."
세운이 유서아를 중심으로 뭉쳐 있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분명 저 사이로 들어가면 어떻게든 버텨낼 수 있겠지만, 애초에 세운은 저들과 정 반대편에 위치하고 있었다.
저곳까지 달려가는 것 자체가 이미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
그보다는 차라리 세운을 믿는 게 더 생존 가능성이 크리라.
"젠장!"
거기까지 생각한 박정필은 욕설을 내뱉으며 다리를 움직였다.
"내가 진짜 더러워서!"
"뭐?"
"더럽게 행복하다고요! 으아아악!"
박정필이 달리기 시작하자, 자연스레 늑대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뭉쳐서 경계하고 있어도 모자랄 마당에, 먹잇감이 소리를 내지르며 눈앞을 뛰어가고 있으니, 아무리 경계심이 높은 늑대라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놈보다는 작네.'
세운은 늑대 숲의 깊은 곳, 무덤 앞에서 상대했던 '무덤을 지키는 늑대'를 떠올렸다.
같은 그레이 울프지만, 자신이 상대했던 늑대는 일종의 보스 몬스터. 그레이 울프 중에서도 특히 거대하고 강력한 종이었다.
'하긴, 그런 놈이 무리로 등장했으면 튜토리얼을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겠지.'
튜토리얼.
누가 고안해 낸 것인지는 몰라도, 정말 악랄하다 싶었다.
혼란에 빠진 플레이어들에게 세 번째 레이드까지 '이 정도는 할 수 있겠지?'라며 살살 구슬릴 때는 언제고.
조금 적응이 된 듯하자 이런 식으로 난이도를 괴랄하게 올려 버리니 말이다.
"형니이이임!"
"수가 좀 적은데?"
"미친, 더는 무리라고요! 애초에 사람이 늑대를 상대로 어떻게 도망칩니까!"
얼마 지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박정필이 금방 세운에게로 돌아오고 있었다.
뒤를 보니, 유인해 온 늑대의 수는 대략 스무 마리.
원숭이 때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적은 수지만, 사실 이 정도만 해도 대단한 수준이다.
방금 박정필이 말한 것처럼, 그레이 울프는 브라운 몽키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재빠른 몬스터니까.
적당히 거리가 가까워지자, 세운은 원숭이를 상대했었을 때처럼 손을 들어 박정필을, 아니 늑대들을 향해 불꽃을 피웠다.
"파이어 볼."
"으아악! 이제는 신호도 안 주시는 겁니까아!"
콰르륵!
-성좌, '배고픈 왕자'가 잘 익고 있는 먹이를 보며 재빨리 식기를 집어 듭니다.
다급하게 몸을 내던진 박정필을 스쳐 지나가며, 화구가 늑대 무리를 덮쳤다.
마찬가지로 서클의 마나를 모두 쏟아낸 덕분에, 1 서클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큰 폭발이 일어났다.
폭발이 일어난 중앙을 기점으로, 뜨거운 불길이 크게 휘몰아쳤다.
그러나.
"으아악! 형님, 살려주십쇼!"
그 결과는 원숭이들 때와 달랐다.
폭발의 중앙에 있던 늑대들은 새까맣게 타들어 갔지만, 중앙에 있지 않던 늑대들은 재빠르게 범위를 벗어났다.
물론, 완전히 피해 낸 것은 아니었기에 화상을 입거나 털에 불이 옮겨붙은 놈들도 있었지만, 절반가량이 세운의 공격에서 살아남아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고 있었다.
"알아서 내 뒤에 숨어 있어라."
"넵!"
어차피 이 정도는 예상했다.
원숭이들처럼 한 방에 그레이 울프들을 모두 처치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세운은 고창석이 마련해 준 벨트에서 잊혀진 영웅의 검을 꺼내 들었다.
단검도 있었지만, 길이가 짧은 검은 늑대들을 상대로 어울리지 않다.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혈랑검법(血狼劍法) ]
- 무당파(武當派)의 고수였던 조공자(趙空子)가 속세의 연을 끊고 산에 들어가 범을 상대하며 창시했다고 알려진 고유 무공.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늑대들이 이빨을 드러낸다면, 더욱 포악한 송곳니를 꺼내면 될 뿐이다.
하멜가 장검술을 숙달한 지 아직 하루밖에 되지 않았지만, 세운은 이미 검의 토대를 완벽하게 쌓은 상태였다.
게다가 웨이브가 시작되기 직전에 삼재공을 통해 단전까지 개방하였으니, 본격적인 검술을 사용하기 위한 준비는 이미 충분했다.
타앗!
이전과는 달리 세운이 먼저 늑대를 향해 뛰쳐나갔다.
아직까지 이글거리는 화염을 눈앞에 두고 슬금슬금 물러나던 늑대들이 화들짝 놀라며 반격에 나섰다.
그러나.
서걱!
세운의 공격은 반격 따위 가뿐히 무시한 채, 늑대의 몸을 난폭하게 갈라냈다.
마치, 맹수가 휘두른 손톱처럼 말이다.
혈랑검법 제일 초식, 혈랑조(血狼爪).
핏빛 늑대의 손톱이라는 초식명처럼 날카롭고 잔혹한 일격이었다.
애초에 반격이라는 행위 자체가 용납되지 않았다.
혈랑조는 늑대의 아가리부터 시작해 몸통까지 잔혹하게 갈라냈으니까.
이에 화상을 입은 늑대는 물론이고, 불꽃을 보고 지원을 나온 늑대들까지 세운에게 달려들었다.
열 마리를 가볍게 넘어가는 수.
사각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에 세운은 단전에 미약하게 쌓여 있는 내공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공을 사용하는 중 신체 능력이 상승합니다.
순간적으로 몸이 가볍게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근육은 평소보다 더욱 강렬하게 꿈틀거리며 자신의 힘을 과시했다.
극도로 미약한 내공이기에 지속시간은 길지 않겠지만, 당장 눈앞의 늑대들을 정리하기에는 충분했다.
그그극!
내공이 집중되며, 세운의 허벅지가 부풀어 올랐다.
검을 쥔 손의 힘줄도 과도하게 피어오르며, 당장에라도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세운의 코앞까지 다가온 늑대들이 아가리를 벌려오는 순간.
-내공을 통해 혈랑검법의 제이 초식, 혈랑아(血狼牙)가 강화됩니다.
세운을 둘러싼 내공이 혈랑의 형상을 이루고, 검은 혈랑의 날카로운 송곳니가 되었다.
콰드드득!
늑대가 울부짖는 듯한 기세가 뿜어져 나오며, 세운을 향해 달려오던 늑대들이 모조리 갈려 나간다.
그 사체는 하나같이 늑대에게 씹힌 것처럼 잔혹하게 헤집어져 있었다.
"...형님, 저랑 같은 사람 맞습니까?"
세운의 뒤에서 숨어 있던 박정필이 얼빠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제 14화
14. 제14화
-성좌, '배고픈 왕자'가 먹이가 식겠다며 안절부절못합니다.
박정필이 몰아온 늑대들이 세운의 손에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서른 마리가량이 쓰러져 있으니, 남은 수는 절반도 채 되지 않는다.
엄청난 활약이지만, 아직 서른 마리에 가까운 수의 늑대들이 사람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레이 울프'를 포식하였습니다.
-양분을 흡수하여 근력이 1, 민첩이 3 상승합니다.
-양분을 흡수하여 근력이 0.1, 민첩이 0.3 상승합니다.
…
-성좌, '배고픈 왕자'가 입을 크게 벌립니다.
세운은 그쪽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여유롭게 폭식의 권능을 사용하며 늑대들의 사체를 수습하였다.
"이야, 형님! 진짜 대단했습니다! 지구에서 뭐, 특전사 출신이기라도 했습니까? 아니, 특전사고 뭐고 이런 건 불가능할 겁니다!"
세운의 활약에 박정필은 마치 자기 일인 것처럼 방방 뛰며 즐거워했다.
도중에 은근히 '형님, 제가 녀석들을 기똥차게 유인해 왔다는 거 잊으시면 안 됩니다!'라며 자기 공로를 어필하기까지 했다.
'쓸 만하긴 하네.'
처음에는 옆에 두고 감시할 겸, 허튼 생각 못 하게 굴릴 겸 박정필을 미끼로 내세웠던 것인데, 그의 능력은 생각보다 쓸 만했다.
맹수를 뒤에 두어 필사적이었던 것도 있겠지만, 처음에 자신을 '대산동의 거북이'라고 소개했던 것과는 달리 그는 그레이 울프를 데려올 정도로 빨랐으니 말이다.
생존 본능이라는 이유를 두더라도, 이 정도면 충분히 일반인의 수준을 벗어났다. 아마, 자신도 모르게 플레이어로서의 힘을 발휘하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형님, 저쪽 안 도와줘도 되겠습니까?"
박정필이 아직까지 필사적으로 늑대의 공격을 막아 내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원숭이 때와는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그레이 울프는 브라운 울프를 상대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방패를 내밀어 봤자, 녀석들은 교활하게 방패를 물고 잡아당겨 전열을 무너트렸고, 치고 빠지기 전략으로 사람들의 체력을 서서히 갉아먹었다.
벌써 절반가량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고 허덕이는 중이었다.
'둘도 고전 중이네.'
가장 눈에 띄었던 유서아나 강한철 역시 마찬가지.
아무리 그 둘이라고 해도, 늑대의 공격을 전부 막아 낼 수는 없었다. 가까스로 중상은 피하고 있지만, 확실한 대처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강한철은 더욱 심했다.
키가 큰 탓인지, 속도가 부족한 것인지, 재빠르고 교활하게 달려드는 늑대를 잡지 못해 고전하는 모습이다.
반면에 유서아는 착실하게 늑대들의 공격 패턴을 분석하며, 민첩하게 공격을 내지르고 있었다.
"저거, 안 도와주면 위험할 것 같은데."
"그렇게 불안하면, 네가 가서 도와주든지."
"에이, 전 형님의 오른팔 아니겠습니까! 팔은 몸통에 찰싹 붙어 있어야죠!"
자신의 처지를 가장 신경 쓰는 박정필이라 해도, 사람들의 상태가 걱정되긴 하는가 보다.
그런데도 세운이 사람들을 도와주지 않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내가 이 이상 나서서 도와줘 봤자, 의존도만 높아질 뿐이다.'
레이드가 시작하기 직전의 상황을 떠올려 보았다.
유서아가 아무리 소리를 쳐 봤자, 사람들은 어차피 세운이 나서줄 것이라며 긴장감을 내려놓고 있었다.
'저렇게 강한 사람이 있는데 뭐 문제 있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말이다.
게다가, 세운이 이 이상 나선다면 오히려 사람들의 성장을 가로막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실제로 지금까지 몬스터 웨이브의 적 중 절반가량을 세운 혼자서 쓰러트렸다.
당연하게도 절반에 해당하는 경험치는 모두 세운에게로 들어올 것이다.
이대로라면 사람들의 레벨 업 속도는 한없이 뒤처질 것이고, 세운이 바라던 강한 캠프의 모습이 아닌, 오로지 세운 한 명만을 바라보는 짐 덩이가 되고 말 것이다.
"사, 살려 줘!"
"거기! 정리 끝났으면 이쪽도 좀 도와주세요!"
사람들이 소리쳐 보았지만, 세운은 그들의 목소리를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오히려 옆에 있는 박정필만 좌불안석이 되어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그, 형님. 저거 그대로 두면 진짜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짐 덩이를 들고 갈 생각은 없어."
"크흠...."
세운의 말을 완벽하게 이해한 박정필이 숨을 삼켰다.
역시, 눈치가 빠른 녀석이다. 아마 지금쯤 속으로 세운이라는 사람에 대해 정립을 끝냈을 것이다.
자신도 쓸모가 없어지면, 세운이라는 사람은 무신경하게 자신을 내칠 거라는 것 역시 깨달았겠지.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냐!"
"혼자만 살겠다고! 젠장!"
"이대로 죽을까 보냐!"
세운이 나서지 않을 거라는 것을 인지한 사람들이 발악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세운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네.'
이대로 첫날처럼 공포에 휩싸여 주저앉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그리고 그 순간, 고창석에 이어, 또 한 번 세운을 놀라게 하는 메시지 하나가 그들의 위로 떠 올랐다.
-성좌, '왕관을 쓴 거미'가 플레이어 '유서아'의 검술을 흥미롭게 바라봅니다.
가장 앞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는 유서아를 향한 성좌의 관심.
고창석을 통해 성좌의 관심을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이명을 읽고 그 정체를 파악하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바알.'
72 마왕 중에서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서열 1위의 대마왕.
동쪽의 군세를 이끄는 지옥의 대공작.
바알.
마신의 격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마신의 바로 아래 군림하는 마왕 중의 마왕이었다.
66개의 악마 군단을 이끄는 용맹한 지휘관이자, 검술의 달인으로도 알려진 바알이었기에, 유서아에게 관심을 가지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유서아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성좌는 바알이 끝이 아니었다.
-성좌, '황야를 울리는 전차'가 전차를 멈추고 '유서아'의 검술에 관심을 가집니다.
-성좌, '불만스러운 파괴자'가 '유서아'를 향해 불길을 이글거립니다.
서열 52위의 마왕, 알로케스.
서열 63위의 마왕, 안드라스 등.
검이나 전투와 관련된 마왕들의 관심이 유서아에게 쏟아졌다.
'하긴, 내가 회귀하기 전에도 유서아는 여러 성좌들에게 주목을 받았으니까.'
세운 덕분에 악신들의 시선이 집중되어 그 시기가 빨라졌을 뿐, 유서아에게 성좌의 관심이 몰리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의 메시지를 제외한 모든 메시지가 사라졌다.
-성좌, '왕관을 쓴 거미'가 눈살을 찌푸리며 독니를 드러냅니다.
그 어떤 마왕이라 하더라도 서열 1위의 대마왕, 바알을 거스를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리고.
-성좌, '왕관을 쓴 거미'가 '유서아'의 그릇을 확인하고자 합니다.
그 순간부터, 유서아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석, 서거걱!
늑대를 향해 휘두르던 검이 바로 직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졌다. 단 하나의 검을 들고 있을 뿐인데, 마치 여러 개의 검을 동시에 휘두르는 듯했다.
그 모습이 마치 여덟 개의 다리를 가진 거미의 모습을 연상케 하였다.
'바알의 힘이군.'
굳이 그녀의 위에 떠올라 있는 메시지를 보지 않더라도 알 수 있었다.
유서아가 자신의 힘을 받아들일 만한지 확인하기 위해 바알이 그녀에게 힘을 선사한 것이다.
정작, 유서아의 표정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대마왕이 내린 힘을, 원래 자신의 것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다루었다.
무아지경에 빠진 것처럼 오직 검과 늑대에게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푹, 서걱!
그녀의 검이 늑대 사이를 거침없이 파고든다.
단순히 속도만 빨라진 게 아니라, 위력도 크게 늘어났다.
그녀의 검이 파고든 자리는, 검이 아닌 독니가 박힌 것처럼 잔혹한 상처가 생겨났다.
"하, 할 수 있다!"
"이때다! 얼른 정리해!"
그녀의 모습에 사람들의 얼굴에도 승기가 감돌았다.
유서아의 갑작스러운 활약에 주춤하던 늑대들을 향해 사람들이 각자의 무기를 들이밀었다.
-성좌, '왕관을 쓴 거미'가 앞다리를 들어 올리며 크게 즐거워합니다.
바알의 힘은 단순히 '검술'만이 아니었다. 용맹한 지휘관이라고 불렸던 바알은, 지휘에 관해서도 큰 힘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증명하듯, 사람들의 사기가 올라가며 무기를 쥔 손에도 힘이 잔뜩 들어갔다.
"크아앙!"
"크릉!"
늑대들이 최후의 발악을 해 보았지만, 이미 승기는 크게 기울었다.
사람들의 빈틈을 노리려 해도, 유서아가 귀신같이 나타나 늑대의 급소를 내질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위태로워 보이던 전투가 순식간에 끝이 났다.
[ 튜토리얼 첫 번째 장 – 적응 ]
-네 번째 웨이브를 성공적으로 통과하였습니다.
-웨이브에 참여한 모든 인원에게 100point를 제공합니다.
-개인 공적치 집계 중....
[ 1위 : 정세운 4,920point ]
[ 2위 : 유서아 900point ]
[ 3위 : 강한철 580point ]
"헉, 헉...."
늑대가 모두 쓰러지고 나서야, 유서아는 거친 숨을 허덕이면서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몸과 검까지 퍼져 있는 뜨거운 기운과 눈앞에 떠올라 있는 성좌의 메시지.
어느 것 하나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잘 다뤘다고는 하나 바알의 힘은 아직 그녀가 감당하기에 벅찼던 것일까?
스륵-
힘이 사라지자마자, 그녀는 정신을 잃고 바닥에 쓰러져 갔다.
다른 사람이 '어, 어!' 하며 당황하던 중.
툭.
"고생했다."
그들의 정 반대편에 있던 세운이 어느샌가 다가와 그녀의 등과 머리를 받쳐주었다.
* * *
"크윽, 내 다리!"
"어, 어쩌지? 일단 물로 씻고.... 누구 의사 없어요? 아니면 간호사나!"
"응급처치법 정도는 알고 있지만, 아무런 도구가 없어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습니다...."
유서아의 활약 덕분에 웨이브가 생각보다 일찍 끝났다고는 하지만, 이번 웨이브는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부상자를 발생시켰다.
대충 둘러보아도 상처가 아예 없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 지경이었다.
심한 사람은 다리가 크게 베여 아직까지 피가 흘러내리거나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있는 이도 있었다.
"저 사람이 도와주기만 했어도...."
몇몇 사람들은 세운을 떠올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늑대 무리의 절반을 단숨에 해치울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자신들을 도와주지 않은 세운을.
그리고 마침, 유서아를 자리에 눕힌 세운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지만.
목소리를 높여 대드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 전부가 세운이 가진 힘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위를 둘러보던 세운은 상태가 가장 심각해 보이는 중상자의 앞에서 손을 들어 올렸다.
"무, 무슨 짓을 하려는 겁니까! 도와주지도 않았으면서!"
"비켜."
세운의 차가운 눈빛에 앞을 가로막았던 자가 움찔거리며 저도 모르게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곧이어, 세운의 손에서 찬란한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큐어 라이트(Cure light) ]
- 백탑의 가장 기초적인 치료 마법으로써 출혈을 멈추고 통증을 가라앉힌다.
스르르-
"어? 상처가...."
빛에 닿은 환자의 상처가 조금씩 아물어 갔다.
제 15화
15. 제15화
큐어 라이트.
마나로 구현할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회복 마법이다.
그렇다고 해서 일순간에 모든 상처가 낫는 극단적인 효과는 아니지만.
세운의 마법이 빛을 발하자 이대로라면 출혈로 죽거나 다리를 잘라내야 했을지도 몰랐던 환자의 상태가 확실히 좋아졌다.
"이, 이쪽도 좀 부탁드려요!"
"많이는 사용하지 못한다."
"네! 치료가 꼭 필요한 환자들만 추려내면 되겠죠?"
세운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투가 끝나자마자 서클을 돌리며 마나를 회복하긴 했지만, 시간도 얼마 없었고 아직 1 서클 수준의 세운이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횟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당장 상태가 위중해 보이는 환자들만을 골라냈다.
"가, 감사합니다!"
"마나가 회복되면 한 차례 정도는 더 사용할 수 있으니 일단은 되는대로 응급처치만 하고 있어."
"네!"
유서아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처럼, 유독 환자들의 치료에 앞장서고 있던 여성이 기운차게 대답하며 자리를 떠난다.
'이 정도면 충분히 기대 이상이다.'
최악의 경우 사상자가 발생하는 것도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사망자가 한 명도 없는 것은 물론, 상처가 심각한 이들도 세운의 마법이 닿자 상태가 꽤 많이 나아졌다.
스스로 자각은 못 하고 있을 테지만, 이들 모두 이미 어엿한 '플레이어'.
오늘 밤만 잘 쉰다면, 자잘한 상처쯤이야 금세 아물 것이다.
'일단은 마나부터 회복하고....'
세운이 환자들을 치료하느라 바쁜 중앙에서 벗어나 외곽의 나무 기둥에 등을 기댔다.
마나를 다 채우고 한 번만 더 돌면, 부상자들은 전부 치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세운의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세운의 눈앞에 유서아와 함께 최전방에서 주먹을 휘두르던 남자, 강한철이 서 있었다.
"무슨 일이지?"
유서아와 함께 최전방에서 주먹을 휘둘렀던 만큼, 그의 몸에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상처가 존재했다.
그러나 그 많은 상처는 전부 작은 찰과상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유서아처럼 늑대의 공격을 잘 피해내거나 한 게 아니었다.
'늑대들이 저 근육을 못 뚫은 것이겠지.'
찢어진 옷 사이로 보이는 두꺼운 근육.
지구에서도 대단했겠지만, 이곳으로 넘어오며 플레이어가 된 그의 근육은 일반적인 사람의 것과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단단해졌다.
뭐, 그렇다고 해도 늑대들이 제대로 달려들면 어쩔 수 없었겠지만.
늑대들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강한철의 묵직한 손바닥에 잡히면 어떤 꼴을 당하게 될지 말이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제대로 된 공격을 하지 못하고 빠르게 치고 빠지는 식으로 강한철을 공략해 나갔을 것이다.
저 수많은 찰과상이 바로 그 증거였다.
'그렇다고 해도 체력이 꽤 빠졌을 텐데.'
강한철이라면 남들보다 회복도 빠를 테지만, 상처가 많은 만큼 남들과 비슷하게 휴식을 취해야 한다.
그런데 어째서 세운을 찾아온 것일까?
잠시 묵묵하게 세운을 바라보던 강한철은 생각을 마친 듯 서서히 입을 열었다.
"싸우자."
웨이브가 끝나자마자 찾아오더니, 밑도 끝도 없이 처음으로 내뱉은 말이 '싸우자'라니.
그야말로 어처구니없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강한철답네.'
세운은 강한철의 그런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다른 사람은 이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세운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회귀 전에 이미 강한철이라는 플레이어와 함께 튜토리얼을 공략한 게 바로 세운이었으니까.
"좋아."
마나를 회복하려던 것을 멈추고, 세운이 강한철의 앞에 섰다.
녀석과 대화하기 위해서는 일단 원하는 대로 주먹을 부딪치며 한 번 꺾어줄 필요가 있다.
"무기를 들어라. 마법이란 것도."
"필요 없어."
빠직.
강한철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표정이라는 게 드러났다.
장비가 없었던 첫 웨이브를 제외하고는 늘 주력으로 검과 마법을 사용하였던 세운이었기에 검을 사용하지 않는 세운이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강한철이 대놓고 인상을 써도 세운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무기를 들게 하려면, 맨몸으로 나를 꺾으면 되잖아?"
"...알겠다."
타앗!
말을 마치자마자, 강한철이 세운에게로 달려들었다.
몬스터를 상대로 싸우는 세운의 압도적인 모습을 보았을 텐데도 강한철에게서는 조금의 주저함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신체에 대한 자신감.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이 가득해 보였다.
부웅!
강한철의 주먹이 허리를 숙인 세운의 바로 위로 스쳐 지나갔다.
주먹도 크고, 힘도 세서 그런지 공기가 밀려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만.
'빈틈이 너무 커.'
저런 힘을 가지고 있다면, 가볍게 잽을 날리는 것만으로도 큰 위력을 낼 수 있었을 텐데, 강한철의 움직임에서는 절제나 기교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말도 안 되게 뛰어난 하드웨어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을 다루는 소프트웨어가 그야말로 형편없었다.
'아마 지금까지 기술의 필요성을 못 느끼고 살아온 탓이겠지.'
태어날 때부터 소유한 강인한 신체.
제아무리 무술을 배웠다며 날고 기던 사람들도 강한철의 괴물 같은 몸 앞에서는 꼼짝없이 주저앉고 말았으리라.
퍽!
세운이 허리를 숙인 자세 그대로 몸을 빙 돌려 강한철의 발목을 걷어찼다.
보통 사람이라면 발목이 부러졌을 법한 일격. 폭식의 권능을 통해 빠르게 상승한 세운의 능력치는 이미 일반인의 수준을 아득히 벗어나 있었다.
그러나.
'하드웨어 하나는 끝내주네.'
발목을 정통으로 가격당한 강한철이 넘어지기는커녕, 오히려 발목을 걷어찬 세운의 다리가 얼얼하게 아파왔다.
빈틈을 정확하게 찔렀는데도, 데미지가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오히려.
부웅!
세운의 머리 위로, 강한철의 팔이 우악스럽게 덮쳐왔다.
아마 이게 바로 그의 전투 스타일인 듯했다. 빈틈을 내주더라도, 공격을 버티고 상대를 붙잡는 것.
세운이라고 하더라도 그의 손아귀에 붙잡힌다면 결코 쉽게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다.
다행히 이미 공격을 예측한 세운이 다리를 회수하며 빠르게 거리를 벌려 나갔다.
"이래도 무기를 안 들 건가?"
"말했잖아, 무기를 들게 하려면 일단 나를 꺾어 보라고."
"그러지."
방금의 공격으로 깨달았다. 플레이어가 되면서 더욱 단단하고 강해진 강한철의 몸은 지금의 세운이 맨몸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급소를 노린다고 해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으리라.
그렇다면.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태극권(太極拳) ]
- 중국 남파(南派)에서 발전한 무술 유파로 소림권과 함께 중국의 양대 권법을 이루고 있는 대표적인 무공.
강한철의 힘을 이용하면 될 뿐이다.
스르륵-
강한철의 움직임에 따라 세운이 두 팔을 펼쳐 느긋하게 원을 그리며 회전시켰다.
거북이가 기어가듯이 느린 움직임.
이에 강한철이 아무런 걱정 없이 주먹을 휘두른다.
척!
그러나 그 주먹은 세운에게 닿지 못했다.
느긋하게 움직이던 세운의 손이 강한철의 소매를 붙잡아 힘과 속도를 그대로 유지한 채 반대편으로 내던졌다.
콰앙!
강한철과 부딪친 나무가 위태롭게 흔들린다. 진동이 나무 기둥을 타고 올라가 나뭇잎 수십 장을 떨어트린다.
태극권.
힘을 중시하는 외가권과는 달리, 내공을 중시하는 대표적인 내가권으로 그 묘미는 자신의 힘뿐만 아니라 주변의 힘을 다루는 것에 있었다.
두 팔로 태극을 그리며, 주변의 힘을 뜻대로 다스린다.
그게 바로 태극권의 진정한 묘리다.
"...아직이다."
나무가 흔들릴 정도 강한 충격이었건만, 강한철은 아무렇지도 않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찌지직!
입고 있던 상의를 거칠게 찢더니 바닥에 집어 던진다.
조금 전, 세운에게 소매를 잡힌 것을 떠올리며 머리를 굴린 것이다.
타닷!
강한철이 공격법을 바꾸었다. 다시는 잡혀주지 않겠다는 듯이, 스스로의 손목을 꽉 붙잡고 오른 어깨를 앞으로 내민다.
숄더 태클.
달려오는 기세 그대로, 세운을 짓밟을 것만 같았다.
그 모습이 꼭 언덕 위에서 상대했던 '언덕을 파헤치는 멧돼지'의 저돌맹진을 보는 듯했다.
하지만, 세운은 피하지 않았다.
다리를 넓게 벌리고, 여전히 느릿느릿하게 팔을 회전시킬 뿐이었다.
강한철이 코앞까지 다가오자, 세운의 팔이 멈추었다.
아니, 멈춘 게 아니었다. 눈으로 확인하기 어려울 정도로 느리게 팔을 움직이고 있었다.
극도의 섬세함.
단순히 몸을 느리게 움직이는 게 아니라, 주변의 시간마저 느리게 만들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안에 강한철이 들어오는 순간.
부우웅!
세운의 몸이 바람에 밀려난 종이처럼 가볍게 움직였다.
회전하던 팔이 강한철의 반대편 어깨에 닿더니,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 방향을 정반대로 비틀었다.
강한철은 괴이하게 꺾여가는 자신의 움직임을 다스리지도 못한 채.
콰아앙!!
다시 한번, 나무에 처박히고 말았다.
우드드득-
처음 한 번으로도 불안한 소리를 내며 나뭇잎을 홀려 보냈던 나무가 이번에는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결국 부러지고 말았다.
그 두꺼운 나무 기둥이 찢어지듯 벌어지며 쓰러져 가는 모습은 가히 놀라워 보였다.
강한철도 이번에는 꽤 충격을 받은 것인지 쉽게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크윽...."
그의 입에서 처음으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오른 어깨를 붙들고 괴로워하는 게, 탈구가 일어난 듯했다.
갑옷같이 튼튼한 근육을 지니고 있음에도 견디지 못하고 뼈가 빠지다니. 방금의 충격이 얼마나 강했는지 알려주는 모습이었다.
고통스러워하는 강한철의 앞으로 세운이 다가갔다.
"내가 졌...."
"조금 아플 거야."
뿌득!
"크악!"
세운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강한철의 빠진 어깨를 끼워 넣었다.
강한철이 지금까지 숨겨 왔던 우렁찬 목소리를 드러내자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이쪽으로 집중되었다.
충격이 컸던 건지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그의 위로 세운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렇게 조급해할 필요 없어. 그러지 않아도, 너는 충분히 강하니까."
"...."
조급함. 이게 바로 강한철이 세운을 찾아온 이유였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누군가의 아래에 서 본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그의 위로 세운이라는 존재가 나타났다.
세운을 따라가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과가 보이기는커녕 자신의 위로 유서아라는 새로운 존재가 올라섰다.
그 때문에 조급함이 일어난 것이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뒤처짐'을 몇 번이나 느끼게 되었으니까.
"하루에 두 번."
"...?"
"하루에 두 번, 여기서 나와 대련한다."
"그게 무슨...."
"가르쳐 줄 생각은 없어. 직접 보고, 경험하면서 알아서 배워라."
세운이 부러진 나무 기둥 아래 주저앉아 있는 강한철에게 손을 내밀었다.
캠프의 동료들이 스스로 의지를 갖추고 성장하는 것을 지향하는 세운이었지만, 강한철과의 대련은 그로서도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다.
게다가 유서아와 함께 캠프의 최대 전력이라 할 수 있는 강한철이 더욱 강해진다면 세운으로서도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캠프가 강해질수록 세운이 자유롭게 히든 피스를 찾아다닐 시간이 늘어나게 되니까.
척.
"...알겠다."
강한철이 세운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성좌 하나가 관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성좌, '악어를 탄 노인'이 플레이어 '강한철'을 지그시 내려봅니다.
악어를 탄 노인.
72 마왕 중에서 유일하게 바알과 어깨를 견줄 만한 지옥의 대공작. 서열 2위의 대마왕, '아가레스'였다.
제 16화
16. 제16화
[ 튜토리얼 첫 번째 장 – 적응 ]
-다섯 번째 웨이브가 시작됩니다.
-몬스터 웨이브를 막아 내고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십시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어진 다섯 번째 웨이브.
이제 막 상처가 나았는데, 곧바로 이어진 전투 탓에 사람들의 얼굴에서는 긴장감이 한껏 묻어나왔다.
바로 직전의 네 번째 웨이브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
유서아가 뭐라 외치지 않아도, 저마다 무기를 꽉 쥐고 몬스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꿰에에엑!"
늑대, 멧돼지, 원숭이. 그 순서에 맞게, 이번에는 진한 회색 털을 한 멧돼지들이 뛰쳐나왔다.
그레이 울프와 마찬가지로 녀석들도 브라운 보어에 비해 더 큰 덩치와 힘을 가지고 있었다.
"형님, 저 준비 끝났습니다! 바로 뛸까요?"
"아니, 이번에는 됐다."
"넵?"
이제 어느 정도 적응이 된 듯, 세운이 뭐라 하지 않아도 제 발로 뛰쳐나가려던 박정필을 막아섰다.
지금까지는 사람들의 수준에 맞추기 위해 숫자를 맞춰 주었지만, 세운의 생각이 맞다면,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을 것이다.
"놈들이 돌진해 옵니다! 하나, 둘, 셋!"
"산개!"
지금까지의 전투 방식은 조잡한 방패로 전방을 막아서고 뒤에서 날카롭게 깎은 나무막대기를 내지르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순서에 따라 멧돼지가 나올 것이라 예상한 유서아가 새로운 계획을 짠 것이다.
평소와 같은 캠프 중앙이 아닌 늑대 숲을 등지고 있다가 멧돼지가 달려오는 순간 재빠르게 뒤로 빠진다.
콰앙!
그러자 멧돼지들이 돌진을 멈추지 못하고 나무 기둥에 머리를 처박았다.
곧이어, 사람들의 공격이 이어진다. 나무에 박아 정신을 못 차리는 멧돼지들을 향해 일방적인 공격을 퍼붓는다.
장애물이 많은 숲에서는, 멧돼지를 상대하기가 훨씬 수월해진다.
게다가.
콰직!
쾅, 콰앙!
-성좌, '악어를 탄 노인'이 악어의 우둘투둘한 가죽을 쓰다듬으며 아래를 내다봅니다.
다른 누구보다 강한철의 활약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두 번째 웨이브 때는 멧돼지가 달려들어도 일단은 부딪친 후에 힘 대결을 벌이던 그였는데, 지금은 아니다.
멧돼지가 달려오는 힘을 이용해 어금니를 붙잡고 반대편으로 집어 던진다.
'태극권을 응용한 건가.'
분명하다. 세운과의 대련에서 배운 것을 써 먹고 있었다.
그사이에 아가레스와 계약을 마친 것인지, 근력도 더욱 강해져 그레이 보어를 아이 다루듯이 가볍게 들어 올리고 있었다.
'이 정도면 내가 굳이 안 나서도 되겠지.'
투기를 불태우며 치열하게 전투 중인 사람들을 보며, 세운이 등을 돌렸다.
웨이브를 통해 공적치과 경험치를 쌓지 못하니, 그 대신 히든 피스를 찾아낼 생각이다. 사실, 이편이 웨이브보다 더 많은 포인트를 쌓을 수 있기도 했으니 말이다.
"형님, 어디 가십니까? 그럼 저도...."
"필요 없어."
"그게 무슨 섭섭한 말씀입니까! 저는 누가 뭐래도 형님의 든든한 오른팔 아니겠습니까!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
"저 바위산을 올라갈 건데?"
"헤헤, 잘 다녀오십쇼! 전 형님이 없는 사이에 캠프를 지키고 있겠습니다!"
어지간히도 태세 전환이 빠른 녀석이다.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적이는 박정필을 뒤로 하고, 본격적으로 발을 움직였다.
세 번째 웨이브 때, 원숭이들이 나왔던 바위산.
"우끽!"
당연하게도 초입부를 벗어났다고 생각되자마자 원숭이들이 세운의 주위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동료를 불러 모은 것인지, 녀석들의 수는 순식간에 두 자릿수로 늘어났다.
수를 믿고 있는 것인지, 녀석들은 무기를 붕붕 휘두르며 자신감 있게 세운에게 다가온다.
물론, 그 결과는 지금까지의 다른 몬스터들과 똑같았다.
-내공을 통해 혈랑검법의 제이 초식, 혈랑아(血狼牙)가 강화됩니다.
콰지직!
이번에 새롭게 배운 혈랑검법.
늑대를 상대하기 위해 배웠던 무공이지만, 내공이 깃든 혈랑검법은 적을 가리지 않았다.
원숭이들이 들고 있던 무기와 함께 갈가리 찢어지며 바위를 피로 적셨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바비큐 파티를 기대했는데 이걸로는 배가 안 찬다며 중얼거립니다.
"과도한 재촉은 금지라고 약속하지 않았나요?"
-성좌, '배고픈 왕자'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며 딴청을 피웁니다.
"그리고 이 산꼭대기에 멧돼지보다 더 맛있는 게 있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당신을 믿고 있다며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립니다.
베엘제붑을 달래고 있으니 정말 어린 아이 하나를 데리고 다니는 기분이다. 아니, 어린아이보다는 굶주린 애완견이 더 어울리는 표현이려나?
폭식의 권능을 이용해 원숭이들을 정리한 세운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이곳의 난점은 원숭이가 아니지.'
처음에는 바위산보다는 바위 언덕이 더 어울릴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초입부를 지나자 지형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거의 직각이네."
그야말로 깎아내린 듯한 절벽.
바위산이 아니라, 바위 절벽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리는 곳이었다.
잡을 곳도 마땅치 않아 오랜 풍파로 갈라진 작은 틈새나 뭉툭하게 튀어나와 잡기도 어려워 보이는 돌출부가 전부였다.
이러한 지형 덕분에 세운이 회귀 전 '여정의 지침표'의 도움을 받아도 탐험하지 못했던 지형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지."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발라탄 절벽의 개코원숭이 ]
- 사방이 바위로 이루어진 산과 절벽으로 가득한 발라탄 절벽에서 살아가는 최상위 포식자.
아무리 잡을 곳이 마땅치 않고, 경사가 극심하다고 해도 결국은 원숭이들이 살아가는 터전이다.
그런 이상 이 힘을 사용한다면 인간이라고 오르지 못할 이유도 없다.
턱.
세운이 절벽의 틈새에 손가락을 넣었다. 틈의 크기가 어찌나 좁던지, 손가락 두 개를 밀어 넣는 게 고작이다.
그런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세운은 반대쪽 손을 머리 위로 올렸다. 오로지 두 손가락만으로 체중을 버티면서 말이다.
턱, 턱.
한 팔, 한 팔 내뻗을 때마다 손이 부들부들 떨려온다.
잘 짚었다고 생각한 순간에도, 세운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틈새가 부서져 나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세운은 어느새 아득히 멀어진 지상을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켜야만 했다.
'마몬의 보물이 아니면 이미 떨어졌겠지.'
이 작은 틈새만을 이용해 몸을 지탱할 수 있는 것도, 불어오는 바람에 버티며 절벽에 딱 붙어 있을 수 있는 것도, 전부, 마몬의 보물이 부여해 준 힘 덕분이었다.
어디를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 바람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절벽 한가운데에서 어떻게 휴식해야 하는지.
절벽 가에서 평생을 살아온 원숭이의 경험과 노하우가 세운의 몸에 깃들어 있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이런 곳에 먹을 게 어디 있냐며 의문을 표합니다.
확실히, 절벽을 오른 후 몬스터는커녕 바위산의 주인인 원숭이조차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잠시 숨을 고르며 고개를 들어보았지만, 바위산의 끝은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슬슬 조급함이 차오르기 시작할 무렵. 마침내 단단한 회색 바위가 아닌, 새로운 광경이 세운의 눈에 들어왔다.
'원숭이들이다.'
바위만이 가득했던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저 위는 정체 모를 나뭇가지들이 사방에 돋아나 있었다.
원숭이들은 그 나뭇가지 위에서 움직이거나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게다가, 절벽 사이로 원숭이 몸만 한 구멍이 파여 있는 게 세운의 눈에 들어왔다.
'설마, 저놈들의 입구가 따로 있는 건가?'
충분히 합당한 의심이었다.
아무리 원숭이들이 능력이 좋다고 해도, 이 정도의 절벽은 쉽게 올라올 만한 곳이 아니었으니까.
안정성만이 아니라 편의성까지 고려한다면, 저 구멍이 아래 어딘가로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뭐, 그렇다고 해도 구멍은 원숭이들만 간신히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작아 보였지만 말이다.
"우끽?"
최대한 조심스럽게 움직였는데, 가장 가까이 있던 원숭이 하나가 세운을 발견하고 말았다.
"끼이익!"
"우끽?"
"끽! 우끽!"
놀란 눈으로 주변에 침입자의 존재를 알리는 녀석.
아무런 걱정도 없이 태평하게 쉬다가, 세운을 발견하니 다들 어지간히도 놀란 모양이다.
하긴, 이곳은 바닥도 잘 보이지 않는 절벽의 한복판. 이런 천혜의 요새에 적이 침입한다는 건 녀석들로서 상상도 하기 힘든 상황이겠지.
'일단은 저기까지 올라간다!'
몸에 깃든 보물의 힘으로 여기까지 올라오긴 했지만, 절벽을 기어오르며 전투까지 감행하는 것은 세운으로서도 어려운 행동이다.
원숭이들이 나뭇가지를 타고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처럼, 원숭이의 힘이 깃든 세운 역시 저기까지만 올라가면 제약이 많이 풀릴 것이다.
"우끼익!"
더 이상 올라오는 것을 용납 못 한다는 듯이, 녀석들이 세운을 향해 돌을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대체 어디서 구한 것인지 굵직한 게 제법 위협적이었다.
녀석들의 돌이 세운에게 닿기 직전.
화륵!
세운의 머리 위로 새빨간 불덩이가 하나 만들어졌다.
마나 서클이 맹렬히 회전하며 화구의 크기가 점차 커졌고, 날아들던 돌덩이를 집어삼킨 채로, 거침없이 솟아오른다.
콰르륵!
"끼이익!"
녀석들이 절벽 위에서 갑자기 불덩이를 마주하게 되자 기겁하며 더욱 위로 도망간다.
그 틈에 세운은 단전에 잠들어 있는 내공을 일깨우며, 팔과 다리에 힘을 집중시켰다.
바위 틈새에 끼워 넣은 손가락이 붉게 달아오르고, 힘을 받은 틈새가 '드득'거리며 애처로운 신음을 흘려보낸다.
스프링을 압축하듯 느리고, 강하게 최대한 힘을 끌어모은 후, 더 이상 지지대가 힘을 견디지 못하겠다 싶은 순간.
타앗!
세운의 몸이 수직으로 날아올랐다.
다행히도 원숭이들은 파이어 볼의 화력을 피하고자 높은 곳으로 대피한 상태.
세운은 가장 가까운 나뭇가지를 잡기 위해 힘차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부족하다!'
바람을 생각하지 못했다.
하필이면 아래로 불어닥친 바람에 의해, 세운의 속도가 줄어들었다.
이대로라면 꼼짝없이 추락하고 말리라.
그때, 세운은 차분하게 허리춤의 검을 꺼내 들었다. 평소의 장검이 아닌, 고창석이 만들어 준 '어금니 단검'을.
콱!
'좋아!'
세운이 아무리 빨리 성장하고 있다 해도, 바위에 검을 쑤셔 박는 건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이 어금니 단검에는 찌르기에 한해 공격력과 절삭력을 높여주는 '저돌맹진'이라는 능력이 붙어 있었다.
무공을 끌어올려 단검을 내지르니, 충분히 힘을 실을 정도로 검이 박혀 들어갔다.
타앗!
그 힘을 이용해 다시 한번 도약한다.
침입자를 거부하는 듯한 바람이 세운을 거칠게 밀어내려 하였지만, 이번에는 통하지 않았다.
'까딱하면 진짜 위험할 뻔했네.'
생각보다 튼튼한 나뭇가지 위에 올라선 세운이 손목을 가볍게 털었다.
고개를 드니, 원숭이들이 입을 떡 벌린 채 세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원숭이보다도 더 원숭이 같은 모습에 놀란 것이리라.
간만에 양손의 자유를 얻은 세운은 가볍게 몸을 풀고 원숭이들을 향해 검을 꺼내 들었다.
"자, 어디 히든 피스를 찾아보실까?"
얼마 지나지 않아 절벽 아래로 원숭이들의 사체가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제 17화
17. 제17화
절벽 사이의 튀어나온 나뭇가지 위에서의 전투.
자칫 떨어지기라도 하면, 바로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지만, 세운의 움직임에는 막힘이 없었다.
마치 진짜 원숭이라도 된 것처럼 자연스럽게 나뭇가지 사이를 뛰어다닌다.
한 손으로는 나뭇가지를 잡고, 한 손으로는 검을 휘두른다.
그렇게도 감당이 안 되면, 마법을 사용해 쓸어 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다 보니 어느샌가 눈앞의 원숭이들이 모두 사라져 있었다. 모두 세운에게 당해 절벽 아래로 떨어지거나, 굴속으로 대피한 모양이다.
착.
세운이 검에 묻은 피를 털고 허리춤에 꽂는 순간, 몬스터 웨이브의 종료를 알리는 메시지가 눈앞에 떠올랐다.
[ 튜토리얼 첫 번째 장 – 적응 ]
-다섯 번째 웨이브를 성공적으로 통과하였습니다.
-웨이브에 참여한 모든 인원에게 100point를 제공합니다.
조금 늦게 끝난 것 같긴 하지만, 세운의 도움 하나 없이 웨이브를 끝낸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했다.
부상자가 얼마나 생겼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지간한 수준은 세운이 치료 마법을 통해 회복시킬 수 있으니 걱정은 없었다.
곧이어 올라온 개인 공적치 집계.
[ 1위 : 정세운 5,220point ]
[ 2위 : 유서아 1,150point ]
[ 3위 : 강한철 1,110point ]
바로 전까지만 해도 강한철의 유서아에 비해 공적치가 많이 밀리는 느낌이었는데, 서열 2위의 대마왕, 아가레스와 계약을 한 덕분인지 이번 웨이브에서 제법 활약을 했나 보다.
'하긴, 이번에는 숲에서 싸웠으니.'
멧돼지의 돌진을 무력화시키기 위함이라고는 하지만, 숲은 유서아에게도 불리한 장소였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주변의 지형과 나무를 신경 써야 하고, 검을 휘두르는 반경에도 제약이 생기기 마련이니까.
강한철이 이번에 특히 확약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겠지.
'그럼 나도 공적치 좀 챙기러 가 볼까?'
이번 여정을 통해, 웨이브에 참여하지 못한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공적치를 쌓아야만 한다.
압도적인 차이로 내가 공적치 집계 1위를 달리고 있지만, 튜토리얼의 첫 번째 장이 끝나고 두 번째 장이 열리는 순간, 캠프만이 아닌 튜토리얼 전체 순위로 합산되며 순위에 큰 변동이 일어날 게 분명하니까.
"네가 우두머리냐?"
바위산의 꼭대기.
지금까지 보아왔던 작은 바위굴이 아닌, 사람 서너 명은 거뜬히 들어갈 정도로 넓은 동굴.
그곳까지 올라가니, 마침내 보스 몬스터가 눈에 띄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씹는 맛이 있어 보이는 먹이라며 눈을 반짝입니다.
바위와 같은 회색 털을 한 원숭이.
1m나 될까 싶었던 일반 원숭이들과는 달리 세운과 비슷한 키에, 손에는 조잡한 무기가 아닌 깔끔하게 다듬어진 무기가 들려 있었다.
"봉이라니. 손오공도 아니고."
바위산의 원숭이. 마치, 성좌 중 하나인 '제천대성'을 떠올리게 하는 몬스터다.
하지만, 겨우 튜토리얼의 초입부에서 제천대성의 흔적이 남아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제천대성과 전혀 상관없는 녀석일까? 그건 또 아니다.
세운의 예상이 맞다면, 녀석은 튜토리얼을 완성하기 위해 탑과 시스템이 제천대성을 모방한 모습일 것이다.
물론, 그 힘은 제천대성과 비교가 불가할 정도겠지만 말이다.
캉!!
"그래도 더 이상 그 우끽 거리는 지겨운 소리는 안 들어서 좋네."
원숭이 녀석이 세운에게 달려들었다.
입을 꾹 닫은 채로, 손에 들린 석봉(石棒)을 휘두른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도 알 수 있었다. 녀석은 숲이나 언덕에 있던 보스 몬스터와는 차원이 다른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좀 전투 같네."
튜토리얼에서 만난 늑대와 멧돼지들. 녀석들을 상대할 때마다 세운은 전투가 아닌 사냥을 하는 기분을 맛봐야만 했다.
원숭이를 상대할 때도 마찬가지.
녀석들이 아무리 무기를 휘두른다고 해도, 움직임은 고블린보다 못했다.
심지어 다른 보스 몬스터를 사냥할 때도 공략이 아닌 사냥을 한다는 마음가짐이 더 강했는데.
지금, 처음으로 누군가와 전투를 한다는 기분이 들었다.
캉, 카앙!
녀석은 튜토리얼의 보스 몬스터 주제에 제법 훌륭한 무기술을 펼쳐 보이고 있었다.
세운이 사용하는 무공의 흔적은 보이지 않지만, 제법 숙달된 무인처럼 자연스럽게 봉을 휘두른다.
'이대로 막기만 하면 내가 불리하다.'
돌로 이루어진 봉은 단단하고 무거워 부딪치는 것만으로도 검의 날을 상하게 할 위험성이 있다.
고창석이 신경 써준 덕에 쉽게 이가 나가지는 않겠지만, 한 번 상한 날은 다시 되돌리기 힘들다.
그 이후부터 세운의 전투 스타일이 완벽하게 바뀌었다.
"...!"
공격을 받아치기보다는, 십로담퇴의 보법으로 녀석의 공격을 최대한 피해낸다.
한 번, 두 번.
공격이 빗나갈 때마다 녀석이 당황하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
자신도 모르게 조급해진 녀석이 침착함을 읽고 세운의 빈틈을 찌르려던 순간.
척!
녀석의 봉이 세운에게 붙잡혔다.
태극권(太極拳).
상대의 공격을 받아치는 그 묘리를 이용하여 무기를 붙잡은 것이다.
손아귀의 힘이 어찌나 강한지 무기를 뺏기기는커녕 두 손으로 꽉 붙드는 것으로 겨우 현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세운의 선택은.
퍽!
각법이었다.
손에 쥔 봉을 중심으로 삼아 녀석의 복부와 안면에 다리를 내뻗는다.
녀석이 무기를 놓치지 않으려 악착같이 힘을 주어보지만, 그럴수록 무방비하게 세운에게 발길질을 당할 뿐이었다.
"더럽게 단단하네."
그렇게 몇 차례 각법을 이어가던 세운이 혀를 찼다.
정강이와 발바닥을 통해 느껴지는 이 묵직한 촉감. 강한철을 상대했을 때와 느꼈던 것과 비슷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얼마 가지 않았다.
빠각!
"끼엑!"
세운이 봉을 잡은 채로, 두 발을 모아 녀석의 얼굴을 걷어찼다.
녀석이 처음으로 원숭이다운 소리를 내며 뒤로 나자빠졌다.
물론, 녀석의 손에 들려 있던 석봉은 어느새 세운의 손에 들어와 있었다.
"생각보다 무겁네."
세운이 석봉을 들었다 놨다 움직이며 무게를 느껴보았다.
돌로 만들어진 탓인지 무게도 무겁고, 유연성도 최악이었다.
이대로라면 아무리 단단하다고 해도 중앙에 제대로 타격만 주면 금방 뚝 하고 부러질 것 같았다.
아마, 시스템의 보정 때문에 내구력이 상승한 상태겠지.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타구봉법(打狗棒法) ]
- 개방(開放)의 독문 비전으로써 거지가 동냥할 때 가장 위협적이라는 미친개를 쫓기 위해 만들어진 봉법.
세운이 봉을 고쳐 잡았다.
단단하기만 하고 쓸데없이 무겁고 탄성도 엉망인 봉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무기를 잃은 원숭이를 잡기에는 충분했다.
"끼익...!"
원숭이의 눈이 크게 떠졌다. 세운이 자신의 무기를 사용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한 모양이다.
그 이후의 전투는 안쓰러울 만큼이나 일방적이었다.
퍽, 퍼억!
빠각!
그야말로 매타작.
미친개를 쫓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타구봉법의 이름 그대로, 일방적인 구타가 이어졌다.
이미 무기를 잃은 순간부터 녀석은 보스 몬스터로서의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녀석은 결코 자리에서 도망치지 않았다.
'뭔가 있군.'
그 행동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녀석은 단순히 보스 몬스터라서 이 꼭대기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던 게 아니었다. 자신의 부하가 세운의 손에 썰리고 있을 때도 모습을 비추지 않은 건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서임이 분명했다.
'저거다.'
원숭이가 필사적으로 막아선 공간을 유심히 지켜보던 세운이 눈을 빛냈다.
녀석의 뒤쪽으로 유난히 입체적으로 튀어나온 바위가 하나 있었다. 그 옆으로, 무언가 끌린 듯한 자국이 보였다.
저 바위를 움직여 무언가를 가로막고 있는 게 분명했다.
여기까지 알아낸 이상, 더 이상 이 원숭이를 상대할 필요가 없어졌다.
빠각!
묵직한 석봉이 원숭이의 정수리를 강타했다.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굴 안을 욍욍 울리더니, 녀석은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원숭이 바위산의 보스 몬스터, '절벽을 오르는 원숭이'를 처치하였습니다.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개인 공적치가 1,000point 상승합니다.
-'원숭이 바위산의 개암석(塏巖石)'을 획득하였습니다.
이전의 두 보스 몬스터는 공적치 500point를 줬던 거에 비해, 이 녀석은 무려 그 두 배에 해당하는 공적치가 지급되었다.
다른 몬스터보다 녀석이 더욱 강하다는 세운의 생각이 착각이 아니었다는 증거다.
파스스-
세운의 손에 들려 있던 석봉이 모래처럼 흩어졌다.
역시, 돌로 만들어졌음에도 제대로 된 성능을 내고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시스템의 인정 덕분이었던 듯했다.
그 대신 얻은 소재인 '원숭이 바위산의 개암석'.
'이건 나중에 어르신한테 넘겨 드려야지.'
이것 역시 소재형 아이템으로써 장비를 만들 때 사용하면 꽤 훌륭한 재료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라도, 플레이어로서 고창석의 실력을 올리기 위해서라도 앞으로는 세운이 직접 장비를 다루는 대신, 전부 고창석에게 일을 맡길 생각이었다.
-'절벽을 오르는 원숭이'를 포식하였습니다.
-양분을 흡수하여 민첩이 5, 지력이 5 상승합니다.
폭식의 권능을 사용하니 보스 몬스터답게 능력치가 생각 이상으로 많이 상승했다.
총합 10의 능력치.
탐욕의 권능도 엄청나지만, 보면 볼수록 이 폭식의 권능 역시 심각할 정도로 좋은 능력인 것 같았다.
둘 중 하나만 가지고 있어도 탑의 랭커까지 올라가는 건 정해진 수순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그런 권능을 두 개나 가지고 있다니.
의도한 건 아니지만, 이 상태라면 랭커 그 이상을 바라보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자, 다음은...."
폭식의 권능을 통해 깔끔하게 사라진 원숭이의 사체 바로 뒤, 주위의 배경과 교묘하게 어울려 있는 바위 위에 손을 얹어 힘껏 밀었다.
그러나 바위는 움직이는 것을 거부하며 조금의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원숭이가 필사적으로 지키려 했던 모습이나, 바위 옆에 쓸린 자국이 아니었다면 별것 아닌 줄 알고 넘어갔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진실을 깨달은 세운의 행동에는 거침이 없었다.
드드드득!
단전을 활성화하며 다리에 내공을 불어넣었다.
잔여 포인트를 모두 근력에 투자한 후, 다시 힘차게 밀어붙이자 바위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1cm, 2cm.
서서히 움직이던 바위에 가속도가 붙는 순간, 세운이 기합을 내지르며 전신의 힘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쿵!
무언가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바위가 완전히 열렸다.
그리고 그 사이로.
-히든 던전, '잊혀진 영웅의 수행처'를 발견하였습니다.
-놀라운 업적을 달성하였습니다.
-보상으로 1,000point를 획득하였습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통로가 드러났다.
제 18화
18. 제18화
"설마 튜토리얼 첫 번째 장에 던전이 있었다니."
히든 던전, '잊혀진 영웅의 수행처'.
세운으로서도 전혀 생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던전이 무엇인가?
일반 필드에 비해 많은 경험치를 주는 몬스터들이 가득하며, 공략에 성공하면 필드와는 차원이 다른 보상이 주어지는 곳이다.
특히, 던전을 최초로 공략하게 되면 그 보상은 기존의 몇 배 이상으로 뛰어나다.
그 때문에 절반가량의 던전은 첫 공략 완료와 함께 사라지는 게 대다수로 알려져 있다.
그런 던전을 지금 세운이 찾아낸 것이다.
터벅, 터벅.
여기까지 와서 머뭇거릴 이유는 없었다.
캠프로 돌아가도 바위산의 꼭대기에 다시 오를 수 있는 건 세운뿐이며, 따로 챙길 만한 아이템도 없었으니 세운은 당당하게 어둠 속으로 발을 옮겼다.
'조명은 따로 없나 보네.'
수행처라는 이름을 보고 인위적인 장소일 줄 알았는데, 입구에 발을 내밀자마자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말 그대로 동굴.
지면은 울퉁불퉁했으며, 벽과 천장 역시 고르지 않았다.
심지어 바닥과 천장 곳곳에 석순과 종유석이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다만,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도 딱 여기까지.
몇 걸음 더 내밀자, 입구를 비추던 빛이 사라지며 새까만 어둠이 시야를 침식했다.
파닥, 파닥!
끼이익-
시야가 꺼지자 예민해진 청각으로 다양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무언가의 날갯짓과 날카로운 괴성.
보통 사람이라면 여기서 이미 공포를 느끼고 뒷걸음질을 쳤을 테지.
시각이란 오감 중에서도 사람이 가장 의존하는 감각 중 하나이기에, 그것의 상실은 곧 공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작은 횃불이라도 없으면 진행할 수 없는 상태.
그러나, 세운에게는 횃불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도구가 존재했다.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밤 올빼미의 눈 ]
- 야생에서 밤의 포식자라 불리는 야행성 맹금류, 올빼미의 눈. 암전 속에서도 빛을 끌어모아 시야를 밝힌다.
새까만 어둠 속에서, 세운의 눈이 반짝였다.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동굴 이곳저곳에 흩어진 미약한 빛을 모아 담으며 동공이 샛노랗게 빛나고 있었다.
'신기하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동굴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아쉬운 점이라면 흑백사진처럼 색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
하지만 어차피 이곳은 동굴 속이기에 색을 관찰할 필요는 없었을 거다.
횃불을 드느라 한 손을 못 쓰게 되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인 방법이다.
'대책 없이 나아갔다가는 몬스터를 만나기도 전에 몸이 꿰뚫릴 뻔했어.'
입구에 간간이 보였던 석순과 종유석들.
어느 정도 깊숙이 들어오자, 석순은 마치 함정처럼 곳곳에서 침입자의 몸을 노리고 있었다.
바닥과 천장만이 아닌 벽에서도 삐쭉 솟아나 있지를 않나, 뜬금없이 움푹 파인 구덩이 안에도 날카로운 석순이 가득했다.
인위적으로 만든 흔적은 보이지 않았지만, 바위산과 마찬가지로 천연의 요새로 보이는 곳이었다.
다행히도 길을 헤맬 걱정은 없었다. 동굴은 오로지 한 길뿐이었으니까.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드디어 계속해서 들려오던 괴음의 정체가 드러났다.
"끼에에!"
파닥, 파닥!
천장을 가득 채우고 있던 종유석에 붙어 있던 박쥐들이 날개를 펼쳤다.
처음에는 조금씩 들려오던 게, 얼마 지나지 않아 귀를 울릴 정도로 시끄러워졌다.
'밤 올빼미의 눈'을 통해 바라본 녀석들의 수는 못 해도 수십 마리 이상.
게다가 녀석들은 평범한 박쥐가 아니었다.
'뱀파이어 배트.'
흔히 흡혈박쥐라고 불리는 몬스터.
자신들이 평범한 동물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날개를 펼친 녀석들의 크기는 1m에 다다랐다.
조금씩 넓어지고 있던 동굴이 녀석들로 가득 채워졌다.
'이 정도쯤이야.'
녀석들은 그리 강한 몬스터가 아니다.
단순히 강함의 정도로만 따지자면, 첫 번째 웨이브 대 상대했던 늑대들과 비슷한 수준.
녀석들의 강점은 어디까지나 암전 속에 있다.
상대가 앞을 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철저하게 상대의 빈틈을 찌르는 공격들 말이다.
횃불을 들고 있더라도, 녀석들의 공격에 휘말리다 보면 금세 횃불을 놓치고 불이 꺼지게 되어 있다.
물론, 세운에게는 전혀 해당 사항이 없는 얘기다.
화륵!
세운이 손을 펼치자, 화염의 구가 일렁거렸다.
박쥐 떼가 몰려오기 직전까지 몸을 키워 나가던 화구는 세운의 지시에 따라 동굴을 밝혀 나갔고, 그 크기가 천장에 닿을 정도로 커졌을 때쯤.
콰르륵!
"키에에엑!"
박쥐들을 집어삼키며 앞으로 나아갔다.
아무리 민첩한 놈들이라고 해도, 동굴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이렇게나 커진 불꽃을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세운의 시야를 가득 가리던 박쥐들이 순식간에 검게 타들어 가 바닥에 떨어졌다.
-'뱀파이어 배트'를 포식하였습니다.
-양분을 흡수하여 민첩이 2 상승합니다.
…
-성좌, '배고픈 왕자'가 잘 구워진 날개 맛이 일품이라며 환호합니다.
생각 이상으로 완벽한 효과.
다만, 크나큰 부작용이 하나 있었다.
우수수-
"생각보다 튼튼한 곳은 아니네."
그저 마법 한 번 사용했을 뿐인데 동굴이 불안하게 흔들리며, 머리 위로 종유석이 소나기처럼 쏟아진다.
그 이후로도 오 분 정도 흔들림이 멈추지 않고 돌가루가 스르륵 떨어져 내렸다.
이대로 마법을 사용해대면 종유석에 몸이 꿰뚫릴 뿐만 아니라 동굴이 폭삭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게다가.
'환기도 제대로 안 되는 모양이고.'
박쥐 탄내가 한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피부에 느껴지는 미세한 바람이 공기의 순환을 알려주고 있었지만, 그 풍력은 극도로 미세했다.
불 마법을 또 사용했다가는 산소가 모조리 타들어 갈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갈림길인가."
처음으로 길이 나누어졌다.
당장 눈을 감고 몸을 한 바퀴 돌리면 걸어온 길도 착각할 정도로 똑같은 길들.
이런 경우에 선택하는 방법은 보통 한쪽 벽을 따라가는 것이다.
벽을 잡고 따라가면, 길고 험난한 여정이 되더라도 결국 던전의 끝에 도착하는 것은 물론 입구까지 돌아가는 길도 헤매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세운이 누구인가?
고유 스킬, '여정의 지침표'의 도움을 받았다지만, 탑의 92층에 도달할 때까지 수많은 필드와 던전을 탐험해 왔다.
어지간한 던전의 특징이나 공략법 정도는 머릿속에 완벽하게 새겨 있었다.
"후우...."
그런 세운이 처음으로 행한 건, 눈을 감는 것이었다.
밤 올빼미의 눈을 통해 밝혀진 시야를 포기한 것이다.
그다음은, 시야를 제외한 모든 감각을 총동원하여 동굴의 흐름을 파악한다.
스으으-
솜털이 미세하게 흔들릴 정도로 미약한 바람.
끼에엑-
뱀파이어 배트와는 다른, 조금 더 날카롭고 높은 몬스터의 괴성.
우웅-
들이마신 숨을 통해 들어오는 미약한 마나의 방향. 그 모든 것이 한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쪽이네."
굳이 새로운 보물을 꺼낼 필요도 없이 세운은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망설임 없이 선택한 방향으로 발을 옮겼다.
그렇게 조금 더 나아가다 보니, 갈림길에서 들었던 괴성의 정체가 눈에 들어왔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저 날개는 씹는 맛이 있을 것 같다며 입맛을 다십니다.
칼날 박쥐.
어느덧 어지간한 복도만큼이나 넓어진 동굴 내부를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박쥐가 나타났는데 그 날개가 칼날처럼 날카로워 붙은 이름이다.
날개를 파닥거릴 때마다 공기가 스걱 하고 베이는 듯했다.
그런 몬스터가.
"끼엑-"
흡혈박쥐 때와 마찬가지로 떼를 지어 천장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녀석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세운을 발견하였고, 특유의 고성을 내뿜으며 날카로운 날개를 드러냈다.
화륵!
세운이 다시 한번 화염구를 일으켰다.
동굴에 충격을 주지 않도록 위력을 최대한 조절하여 박쥐들에게 쏘아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이전과 조금 달랐다.
서걱-
"튜토리얼 첫 번째 장에서 마법을 베어내는 몬스터라니."
녀석들의 날카로운 날개가 화염을 베어내며 세운에게 똑바로 달려들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녀석들의 날개에 희미하게나마 마나가 스며들어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저 정도로 마법을 베어내는 건 무리겠지만, 수십 마리의 칼날 박쥐가 칼날을 휘두르니 세운의 마법이 버티지 못한 모양이다.
캉!
카가강!
수십 개의 칼날이 세운의 검과 부딪쳤다.
하나하나의 공격은 그리 강하지 않았지만, 그 수가 워낙 많은 탓에 공격을 막거나 피하기가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다행인 점은 보이는 것처럼 방어력은 형편없던 탓에.
푹!
가볍게 검을 내지르는 것만으로도 칼날 박쥐를 사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너무 많은데.'
이대로라면 녀석들을 모두 사냥하기 이전에 세운의 체력이 바닥날 것 같았다.
회색 늑대 망토가 훌륭하게 칼날을 막아주고 있었지만, 녀석들은 망토가 덮어주지 못하는 빈틈을 집요하게 노리고 있었다.
스앗-
마침내, 칼날 박쥐 하나가 망토를 뚫고 들어와 세운의 피부에 상처를 만들었다.
정말 칼에 베인 듯이 길고 날카로운 자상에서 붉은 피가 맺힌다.
인상을 구긴 세운은 망설이지 않고 탐욕의 권능을 발동시킨다.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리자드맨의 비늘 ]
- 파충류의 힘을 이어받은 수인족, 리자드맨의 비늘. 어지간한 공격은 완벽하게 막아 내고, 마나를 깨달으면 마법까지도 막아 낼 수 있다고 한다.
괜히 권능을 아끼다가 이런 몬스터들을 상대로 곤경을 겪을 필요는 없었다.
사용한다고 닳는 것도 아니니, 상대가 고작 칼날 박쥐라 하더라도 아낄 필요는 없었다.
티잉!
"끼엑-?"
다시 한번 세운의 품을 파고들었던 칼날 박쥐가 날개에서 느껴지는 단단한 감촉에 의문을 가졌다.
권능의 사용과 동시에, 망토로 가려지지 못한 세운의 피부에는 파충류 특유의 번들거리는 비늘이 자라나 있었다.
진짜 형체는 아니고, 마나로 구현화 된 일종의 방어막에 가까운 형태.
아직 1 서클에 불과한 세운이기에 넓은 범위에 비늘을 형성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세운이 막아야 할 곳은 망토로 가려지지 않는 일부의 범위뿐.
망토와 비늘이 전신을 가리는 순간, 이미 승패는 결정이 났다.
푹, 콰직!
"키에엑-"
일방적인 학살.
녀석들이 발악을 해 보았지만, 결국 세운의 몸에 작은 상처도 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였다.
재빠르게 날아다니는 녀석들을 검으로 맞추는 게 그리 쉽지는 않았지만, 이미 하멜가의 장검술을 포함한 혈랑검법의 묘리까지 얻은 세운에게는 문제 될 게 없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와득거리는 소리를 내며 칼날 박쥐의 날개를 씹어 먹습니다.
폭식의 권능을 사용해 녀석들의 사체를 정리한 후, 발걸음을 계속 옮겼다.
이후로도 가벼운 함정이나 몬스터의 공격이 이어졌지만, '밤 올빼미의 눈'과 '리자드맨의 비늘'을 얻은 세운에게 위협적인 요소는 없었다.
갈림길 역시 회귀 전의 지식을 통해 망설임 없이 길을 선택하였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후웅-
지금까지의 미약한 공기의 흐름과는 달리, 숨통이 턱 트일 정도로 시원한 바람이 느껴졌다.
미약한 마나 역시 서클이 진동할 정도로 강해졌다.
"이게 진짜 수행처였네."
동굴이 끝나고, 탁 트인 공동이 나타났다.
밤 올빼미의 눈이 활성화되지 않아도, 천장에 난 작은 틈 사이로 희미한 불빛이 스며들어 공동을 옅게 빛내고 있었다.
잊혀진 영웅의 수행처. 그 끝에 도달한 것이다.
제 19화
19. 제19화
"바위산의 하단부인가."
바위산의 꼭대기에서 던전에 진입한 후, 동굴의 바닥은 쭉 내리막길이었다.
바위산 내부에 만들어진 던전이고 그 꼭대기에서 진입했으니 당연히 아래로 향할 것이라는 건 예상했지만, 설마 그 심부에 이런 공동이 존재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공동의 크기를 보아하니, 절벽의 모습을 한 외벽을 제외하고는 내부는 전부 던전인 듯했다.
"게다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곳이다."
동굴은 몰라도 이런 공동이 자연적으로 만들어졌을 리 없다.
던전의 이름을 보았을 때 '잊혀진 영웅'이라는 자가 만들었을 가능성이 가장 클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곳은 영웅 한 명이 만들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하긴, 던전에서 상식을 바라면 안 되겠지.'
탑의 내부에 존재하는 수십, 수백 개의 던전들. 그중에는 지금 보이는 공동처럼 인간의 상식을 아득히 초월하는 형태를 지닌 곳들이 많았다.
예를 들자면, 하늘을 떠다니는 고대 던전이었던 '천공 섬'이나 죽은 용의 배 속에 형성된 '고룡의 심연'처럼 말이다.
"그나저나, 이것들은...."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묘한 눈빛으로 공동을 내려봅니다.
공동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바닥과 벽에 칼자국으로 보이는 자국이 가득했다. 베이거나, 찔리거나, 심지어는 무언가 터져 나간 듯이 움푹 파인 자국까지 존재했다.
이 모든 흉터를 낸 게 '검'이라니. 어지간한 검으로 돌을 공격했다가는 금방 이가 나가 버리고 말 텐데 말이다.
그 증거로 공동의 바닥에는 수많은 종류의 도검이 박혀 있었다.
멀쩡한 것도 있었지만, 그 대부분이 날이 상해 있었다. 마치 도검의 무덤을 보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공동의 중앙.
홀로 천장을 떠받치고 있는 것처럼 굳건히 세워져 있는 기둥이 하나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순간, 세운은 이곳의 목적을 알 수 있었다.
"역시 일종의 연계 퀘스트였구나."
기둥의 중앙에 뚫려 있는 작은 구멍.
공동에 존재하는 모든 기운이 저 구멍의 중심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구멍은.
푹.
세운이 들고 있던 '잊혀진 영웅의 검'에 딱 들어맞았다.
열쇠 구멍에 열쇠를 끼워 넣은 것처럼 검이 가볍게 밀려 들어갔다.
-잊혀진 영웅에게 도전할 자격을 획득하였습니다.
드드드득-
공동에 가득하던 마나가 집약되며 바닥의 돌이 뭉치고 뭉쳐 인영의 형태를 이루었다.
자연스럽게 바닥의 검을 빼 드는 녀석을 보고 세운 역시 기둥에 박아 넣은 검을 빼내려 하였지만, 그토록 가볍게 들어가던 검은 기둥과 한 몸이라도 된 듯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세운의 표정이 찌푸려지자, 시스템이 친절하게 현재 상황을 알려주었다.
-잊혀진 영웅의 시험이 시작되었습니다.
-공동에 존재하는 '부서진 검'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무기도 사용할 수 없습니다.
-공동의 마나가 마법의 사용을 방해하기 시작합니다.
-'부서진 검'을 쥐는 순간, 잊혀진 영웅과의 대련이 시작됩니다.
마법도, 기존의 장비도 사용하지 않고 잊혀진 영웅을 상대하라니.
부서진 검이라 하면, 이름 그대로 주변에 보이는 다 부러져 가는 무기들을 말하는 게 분명했다.
그래도 최소한의 배려는 해 준다는 것일까?
-1분 동안 '부서진 검'을 쥐지 않으면 대련 자격이 취소됩니다.
-대련 자격이 취소될 시, '잊혀진 영웅의 검'이 회수되며 던전 입장 자격이 박탈당합니다.
자신이 없는 자는 언제든지 도망칠 수 있게 설정되어 있었다. 물론, 도망친다면 던전의 첫 발견 혜택이나 '잊혀진 영웅의 검'도 빼앗기게 되겠지만 말이다.
당연하게도 세운은 이대로 물러날 생각 따위는 없었다.
주변을 넓게 둘러본 후, 그나마 상태가 좋아 보이는 장검 하나를 빼 들었다.
이가 두 군데쯤 나가 있었지만, 공동의 검 중에서는 상태가 좋은 편이었다.
-잊혀진 영웅과의 대련이 시작됩니다.
챙!!
세련이 검을 쥐는 순간, 대각선으로 검을 내리고 있던 영웅이 재빠르게 달려들었다.
곧바로 검을 내려치지 않았다면, 일격에 중상을 입고 말았을 것이다.
"간만의 도전자로군."
돌로 이루어진 회색의 영웅이 입을 열었다. 단순히 보스 몬스터로 설정된 적인 줄만 알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아마도 녀석의 정체는, 영웅의 잔재.
이 공동에서 수련하던 영웅의 정념이 뭉쳐서 만들어진 존재겠지.
"간만이라면, 저 말고도 도전자가 있었나 봅니다?"
"아주 오래전에 한 명 있었지."
"당신이 살아 있는 걸 보면 그 도전자들은 전부 실패했겠네요."
"정답이다."
횡으로 휘둘러 오는 영웅의 검.
실체도 아닌 잔재 따위가 이 정도 힘을 가지고 있다니, '영웅'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은 움직임이었다.
세운이 검을 정면으로 막아보았지만, 곧이어 들려오는 소리에 몸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째앵!
세운의 검이 부러졌다.
아무리 '부서진 검'이라 하여도 영웅이 들고 있는 검 역시 마찬가지였기에 부서져도 같이 부서질 줄 알았는데.
그런 예상은 가뿐히 빗나갔다.
세운의 검을 부러트렸음에도, 영웅이 들고 있는 검은 조금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몸을 한 바퀴 굴린 세운이 자리에서 일어나 바로 옆의 부서진 검을 집어 들었다.
곧바로 세운을 향해 따라오는 영웅을 보고 있자니, 검의 상태를 확인할 시간도 없었다.
"반응은 나쁘지 않지만, 움직임은 그리 빠르지 않군. 이상해."
캉, 카앙!
쨍!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고작 검을 두 번 받아쳤을 뿐인데, 세운의 검이 부러지며 날이 튕겨 오른다.
"재능의 영역보다는 경험으로 내 공격을 알아채고 있어. 하지만, 몸의 움직임은 경험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어."
세운의 눈이 반짝였다.
고작 검을 몇 번 섞었을 뿐인데, 영웅은 세운의 실력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숙련된 경험을 따라가지 못하는 나약한 몸뚱어리.
지금의 세운에 대한 완벽한 해석이었다.
"튜토리얼의 첫 번째 장에서 검기를 사용하다니. 애초에 시험을 통과시킬 생각이 있긴 한 겁니까?"
"호오, 검기를 알아챈 건가?"
영웅의 검이 부러지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검기(劍氣).
검을 매개체 삼아 내공을 불어넣어 눈에 보일 정도로 기를 발산하는 것을 의미한다.
검기를 불어넣는 순간 검의 절삭력과 내구도가 대폭 상승하기에 검기를 다루는 자의 손에 막대기만 들려도 훌륭한 살상 무기가 된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 만큼 검에 통달한 고수가 아니면 결코 사용할 수 없는 게 바로 '검기'였다.
그런 검기를 튜토리얼의 첫 번째 장에서 선보이다니. 지금까지 아무도 통과하지 못한 이유가 있었다.
아니, 애초에 위치부터가 말도 안 되긴 했다.
바위산의 절벽을 맨몸으로 오를 수 있는 신체 능력과 던전을 찾아낼 정도의 탐지 능력이 없는 자라면 이곳에 도착하지도 못했을 테니까.
"그리고 이것도 통과하지 못하는 자라면 차라리 통과하지 않는 게 나을 테니까."
"이곳에 그 정도의 가치가 있는 겁니까?"
"그건 나를 먼저 쓰러트리면 알 수 있을 거라네."
타앗!
영웅의 공격은 한결같았다.
오로지 공격.
실력의 차이를 확실히 알고 있기에 행할 수 있는 움직임이었다.
막아 볼 테면 막아 보아라, 피할 수 있으면 피해 보아라, 반격할 수 있으면 반격해 보아라.
자신의 검술에 대한 자신이 있기에 가능한 공격이었다.
이에 세운이 선택할 수 있는 건 회피밖에 없었다.
십로담퇴의 보법을 살려 최대한 공격을 피해내며, 상대의 검술을 지켜본다.
하지만, 영웅은 검술은 물론 능력치까지도 전부 세운을 뛰어넘고 있었다. 피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고, 어쩔 수 없을 때마다 검을 희생시키며 몸을 사려야 했다.
"계속 피하기만 할 텐가? 몬스터도 아니고, 얌전히 공격 패턴을 파악 당할 생각은 없다만."
과연, 그 말 그대로였다.
일반적인 보스 몬스터라면 일정한 공격 패턴이 보이고, 그에 따른 공략을 준비하기 마련이지만, 영웅의 공격은 수십, 수백 가지의 변수를 낳고 있었다.
같은 상황, 같은 자세에서도 때마다 다른 공격이 날아왔기에 공격을 어림짐작하다가는 오히려 더 큰 피해를 입을 것 같았다.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다면.'
세운이 하나의 무공을 떠올린다.
태극권.
그 묘리를 이용한다면, 충분히 영웅의 검을 흘려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다가오는 영웅의 검에 또 하나의 검을 희생시킨 후, 세운은 눈빛을 바로잡으며 탐욕의 권능을 발동시켰다.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태극검(太極劍) ]
- 무당파의 기초검법으로써 태극권과 마찬가지로 태극의 묘리를 갖추고 있다.
마몬의 보물이 있는 이상, 태극권의 묘리를 검으로 가져오기 위해 고민을 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보물창고를 개방하는 것만으로도, 태극검의 묘리가 머릿속에 스며든다.
"눈빛이 달라졌군. 이제 조금 기대해도 되겠지?"
영웅이 어김없이 세운에게로 도약해 온다.
태극권과 마찬가지로, 세운이 검을 느릿하게 회전시킨다.
두 눈은 '밤 올빼미의 눈'까지 발동되며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영웅의 움직임을 관찰한다.
그렇게 검이 다가오기 직전.
'사선 올려 베기!'
영웅의 검 끝이 아래로 기울어지며, 오른발이 앞으로 나아가는 게 포착되었다.
멈춘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느리게 회전하던 세운의 검이 영웅의 검을 따라 움직인다.
"호오?"
츠츠츠츳!
단순히 검을 받아치던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영웅의 검결을 따라 움직이며, 아주 천천히 그 방향을 다른 곳으로 인도한다.
이것이 바로 태극검의 묘리.
검을 밀어붙여도, 급격하게 방향을 비틀어도, 다급하게 검을 빼내어도 허점이 생기고 만다.
다만, 상대는 이대로 당황하여 허점을 드러낼 자가 아니다.
검기를 발현할 정도의 실력자답게, 전혀 예상치 못한 곳으로 왼발을 내뻗어 세운이 그리던 태극의 범위에서 완전히 빠져나간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움직임인데, 영웅은 이에 그치지 않고 반대로 세운의 검을 휘감아 온다.
궤도가 비틀어지며, 손목이 이를 견디지 못하고 검을 놓치고 만다.
"좋은 한 수였다만, 그것만으로는...."
여유롭게 조언을 내뱉으려던 영웅이 순간 입을 다물고 말았다.
분명 이대로 한발 물러서 재정비에 나서리라 생각했던 세운이, 되레 자신에게 달려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권법이나 각법을 사용하려는 것일까?
하지만, 이 정도 대련했으면 그게 자살 행위라는 것을 모를 수 없을 것이다.
영웅이 가볍게 한 발을 빼며 검을 휘두르는 순간, 세운의 몸은 두 동강 나고 말 테니까.
그리고 영웅은 볼 수 있었다. 세운의 반대쪽 손에 들린 부서진 검을 말이다.
"어느새!"
-내공을 통해 혈랑검법의 제삼 초식, 혈랑습격(血狼襲擊)이 강화됩니다.
세운의 내공이 거칠게 휘몰아쳤다.
부서진 검에 내공이 둘러싸이며 붉은 송곳니가 되었다. 검기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기에 이번 공격으로 검이 부러지고 말 테지만, 상관없었다.
오로지 한 방. 한 번의 공격이면 충분하다.
콰아앙!!
세운이 검을 휘두르는 순간, 공동에 늑대의 울부짖음이 가득 차올랐다.
제 20화
20. 제20화
"놀랍군."
혈랑의 어금니는 확실히 영웅의 목에 다다랐다.
하지만, 세운의 모든 힘을 담은 그 공격에도 영웅의 몸을 꿰뚫지는 못했다.
검기. 아니, 권기가 일렁거리는 영웅의 손에 검이 막혔기 때문이다.
맨손으로 검을 막다니. 아무리 권기를 이용했다고 하더라도 뛰어난 반사신경과 정확한 반응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행동이다.
파스스-
감당하기 어려운 힘을 견뎌낸 부서진 검은 이름 그대로 가루가 되어 부서져 내렸다.
모든 것을 담은 일격이었기에, 검마저 사라진 지금 세운의 몸은 빈틈투성이였다.
당장 영웅이 검을 회수하기만 해도, 세운은 반응도 하지 못한 채로 두 동강 나고 말 것이다.
하지만, 영웅은 그러지 않았다.
"정말 놀라워. 힘을 숨기고 있었던 건가? 유검(柔劍)을 배운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는데."
그가 의문을 가지는 것도 당연하다.
그의 말대로, 세운은 유검을 배운 적이 없었으니까. 마몬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여 꺼내 든 '태극검'을 통해 그 묘리를 습득했을 뿐.
탐욕의 권능을 모르는 이가 보았다면, '힘을 숨기고 있었다.'고 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더 놀라운 건 다음 공격이야. 두 수 앞을 내다보고 있었다니. 그런 공격은 수많은 경험을 겪지 않는 이상 불가능할 것인데."
세운은 그의 말에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크로노스의 모래시계를 사용했다는 진실을 말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재미있다는 듯이 말을 이어가던 그의 입이 멈출 때쯤에야, 세운의 입이 열렸다.
"시험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물론, 합격이라네. 이 정도의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면, 최소한 어디 가서 검을 빼앗기고 다니지는 않을 테니 말일세."
영웅이 껄껄 웃으며 공동의 기둥을 향해 나아갔다.
그를 뒤따라가던 세운의 눈이 묘하게 반짝거렸다. 기둥에 꽂아 넣은 검의 칼자루가 금색으로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쥐어보게나."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기억을 되짚으며 검의 정체를 예측하려 합니다.
그 과묵하던 마몬이 반응을 해 왔다.
그게 아니더라도, 세운은 칼자루를 보자마자 검의 상태가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 이것이 바로 '잊혀진 영웅의 수행처'의 보상.
잊혀진 영웅의 잔재가 자신의 시험에 합격하는 자에게 넘겨주기 위해 지켜온 힘이겠지.
척.
세운이 칼자루를 꼬나쥐었다.
바로 검을 빼내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칼자루를 통해서 세운의 힘이 검에게로 빠져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전의 내공, 서클의 마나. 근섬유가 머금고 있던 활력까지 가리지 않고 전부.
놀란 마음에 검을 놓으려던 찰나, 잊혀진 영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버티게. 검이 주인을 인식하는 과정이니."
주인을 인식하는 검이라.
탑에서 그러한 힘을 가진 검은 대부분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못 해도 A급 이상.
튜토리얼 단계에서 A급의 무기를 지니게 된다면, 앞으로의 계획을 훨씬 쉽고 빠르게 당길 수 있었다.
꽈악!
세운이 이를 악물며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단전이 텅텅 비고, 서클의 회전이 멈추며 근육에 힘이 빠져나가도 악으로 버텼다.
악. 제대로 된 공격 능력 하나 없이, 오로지 '여정의 지침표'라는 고유 스킬 하나로 탑의 92층까지 오른 세운에게 가장 자신 있는 힘이었다.
이를 어찌나 꽉 물었는지, 잇몸에서 붉은 핏물이 주룩 흘러나왔다.
팔과 다리가 부들부들 떨려온다. 활력에 이어 정신력까지 빼가는 것인지, 아찔한 두통과 함께 눈앞이 흐릿해진다.
드득!
기둥과 한 몸이 된 것처럼 묵직하던 칼자루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황금색 칼자루에 이어, 시퍼렇게 날이 선 칼날이 모습을 드러낸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낡고 녹슬어 있던 모습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아직은 힘이 부족한 듯하지만, 자네라면 금방 힘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겠지."
아득해지는 정신 속으로, 잊혀진 영웅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손에 쥔 검에 온 정신을 집중하느라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작게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부디, 나에게 더 높은 곳을 보여주길 바라네."
스스슷-
잊혀진 영웅의 형체가 부서지듯 녹아내렸다.
형체를 구성하고 있던 공동의 마나가 검을 향해 스며들어 간다.
그 순간.
채앵!
마침내 기둥에서 검이 빠지며 그 찬란한 몸체가 드러났다.
금색의 칼자루에는 성스러울 만큼이나 고급스러운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검은 다가오는 공기마저 가를 것처럼 날카로웠다.
-히든 던전, '잊혀진 영웅의 수행처'를 완벽하게 공략하였습니다.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역사적인 업적을 달성하였습니다.
-보상으로 개인 공적치가 20,000point 상승합니다.
-잊혀진 영웅의 검, '바위를 쪼갠 검, 뒤랑달'을 획득하였습니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섭니다.
탐스럽게 반짝이는 검, 뒤랑달을 바라보며 세운이 자리에서 쓰러졌다.
* * *
[ 튜토리얼 첫 번째 장 – 적응 ]
-여섯 번째 웨이브가 시작됩니다.
-몬스터 웨이브를 막아 내고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십시오.
세운이 바위산을 올랐지만, 몬스터 웨이브는 세운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정해진 시간에 맞춰, 이번에도 역시 몬스터들이 캠프에 들이닥쳤다.
바위산 방향에서 튀어나온 회색의 원숭이들. 녀석들은 '브라운 몽키'에 비해 키나 덩치가 더 큰 것은 물론이고, 손에는 제법 그럴듯한 무기가 들려 있었다.
원숭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눈빛이 한층 더 깊어졌다.
"다들 진형을 지켜 주세요! 진형도, 무기도 저희가 더 우위예요! 무서워할 것 없어요!"
유서아가 능숙하게 사람들을 지시했다.
어려운 것도 처음 한 번뿐이지, 상황이 반복되다 보니 그녀의 통솔력도 점차 발전하고 있었다.
서거걱-
사람들의 진형과는 별개로 유서아와 강한철은 원숭이들의 좌우를 찔러 들어갔다.
유서아의 검이 돌풍이 되어 원숭이들을 휩쓸고, 강한철의 주먹이 원숭이들을 짓뭉갰다.
그 모습이 마치 항상 별도로 몬스터를 상대하던 세운을 보는 듯했다.
"우끼익!"
"끼엑!"
세운의 도움이 없는데도 캠프는 훌륭하게 웨이브를 상대하고 있었다.
처음 이 세계에 도착해서 벌벌 떨기만 하던 모습과 비교하자면 그야말로 장족의 발전이었다.
몬스터가 대부분 정리되자 강한철에게 다가온 유서아가 불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세운 씨가 아직 안 돌아왔어요.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닐까요?"
"...."
정세운.
항상 무심한 눈초리로 캠프를 바라보며, 감정이 메마른 것처럼 차가운 말을 내뱉던 남자.
하지만, 그가 없었다면 캠프는 이미 처참하게 무너졌을 것이다.
게다가 그가 아니었다면 유서아는 아직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을 거다.
스스로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유서아의 걱정은 더욱 커졌다.
"안 되겠어요. 세운 씨를 찾으러 가 봐야겠어요. 이번 웨이브가 끝나면 저와 함께 가주시지 않겠어요?"
"됐다."
"...당신은 걱정도 되지 않나요? 세운 씨가 없다면 저희는 이미...."
"우리가 걱정할 정도로, 그는 약하지 않다."
강한철이 원숭이 한 마리를 거칠게 휘두르며 대답했다.
동방을 다스리는 지옥의 귀공자, 아가레스의 축복이 깃든 그의 힘은 이미 인간의 수준을 벗어나 있었다.
"하지만...."
강한철의 대답에도, 유서아는 불안함을 감출 수 없었다.
만약, 이대로 정세운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이번 웨이브는 무사히 막아 냈지만, 다음 웨이브도 막아 낼 수 있을까?
만약 네 번째 웨이브 때처럼, 세 종류의 몬스터가 한 차례씩 돌아갈수록 더욱 강해진다면 과연, 그들만으로 일곱 번째 웨이브를 막아 낼 수 있을까?
그런 불안감이 머릿속을 채워 나갔다.
강한철은 그런 그녀를 슬쩍 내려보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며 허공을 가리켰다.
"위를 봐라."
"...위요?"
갑자기 위를 보라니.
무슨 말인가 싶어 고개를 들어보니, 늘 떠올라 있던 웨이브에 관련된 시스템 메시지들이 떠올라 있었다.
그중에서도 강한철이 가리킨 것은 개인 공적치 랭킹이었다.
정리가 끝나간다지만, 아직 웨이브가 완전히 끝난 건 아니었기에 변동이 생기지는 않았을 텐데.
의문을 가지던 그녀는 금방 단 하나의 변동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세운 씨의 점수가...!"
[ 1위 : 정세운 28,660point ]
[ 2위 : 유서아 1,680point ]
[ 3위 : 강한철 1,600point ]
이만팔천육백육십.
애초에 세운의 점수가 자신들이 넘볼 수 없을 정도로 높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유서아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던 세운의 공적치는 대략 7,000point. 즉, 그들이 웨이브를 벌이는 사이 갑작스럽게 공적치가 네 배 가까이 뛰었다는 말이다.
그 말은 즉.
"분명 어디선가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짓을 벌이고 있을 테지."
강한철이 무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나 그의 굳은 얼굴 속에서는 경쟁심인지 질투심인지 모를 묘한 투쟁심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니 우리는 그가 도착하기 전까지 웨이브를 막아 내며 최대한 힘을 키우는 데만 집중하면 된다."
"...네!"
콰앙!!
강한철이 숨이 끊긴 원숭이를 대포알처럼 내던지자, 마지막 발악을 위해 무기를 휘두르던 원숭이들의 진형이 와르르 무너져 갔다.
* * *
"크윽...."
세운은 눈을 뜨자마자 극심한 고통을 느껴야만 했다.
공복감. 배가 고픈 게 아닌, 마나에 대한 공복감이었다.
그도 그럴 게 던전의 최종 보상을 획득하기 위해 마나와 내공, 활력까지 전부 검에 밀어 넣어야 했었다.
정신을 잃고 있는 동안 최소한의 기운은 차렸지만, 아직 단전과 서클은 텅텅 비어 있었다.
당장 검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일단은 몸부터 회복하는 게 우선이었다.
우웅!
힘을 다한 근육이 움직임을 거부했지만, 이대로 누워 있어 봤자 회복에는 한계가 있다.
세운은 몸을 일으키며 가부좌 자세로 앉아 천천히 숨을 골랐다.
외부의 작용에 초점이 맞춰진 서클과 달리 내부의 기운을 다스리는 힘이 강한 단전을 채우는 게 우선이었다.
삼재공의 묘리에 따라 주변의 기운이 세운에게 흡수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우웅!
우우웅!
흡수되는 기운의 양이 심상치 않았다.
현존하는 모든 심법 중에서도 내공을 쌓는 속도가 가장 느리다고 알려진 삼재공을 사용하고 있는데, 내공이 흡수되는 속도가 캠프 때의 5배. 아니, 10배에 가까웠다.
"이게 무슨...."
단전의 내공이 급속도로 차오르고, 몸을 조금 회복하자마자 세운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이 사태의 중심을 파악할 수 있었다.
기둥의 중심.
뒤랑달이 박혀 있던 자리에서부터, 농후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용맥인가?"
용맥(龍脈).
풍수설에서 산의 정기가 흐르는 산줄기, 또는 그 정기가 모인 장소를 말한다.
탑에서는 이 의미가 '정기'가 아닌 '마나'의 의미로 통용된다.
그리고 이 장소는 단전과 서클을 단련하기 최적의 장소로도 알려져 있었다.
씨익-
세운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전설의 검, 뒤랑달을 얻은 것만으로도 생각 이상의 수확을 얻은 셈인데, 아무래도 히든 던전의 보상은 이게 끝이 아닌가 보다.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파극심공(破極心功) ]
- 마가(魔家)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비전의 심법. 마가의 비전인 만큼 익히기가 극도로 어려워 마가에서도 익힌 자가 극히 드물다고 알려져 있다.
후우우웅!
세운의 주위를 둘러싼 기운이 거친 바람처럼 빠르게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제 21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