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reads / FDKFG / Chapter 7 - 7

Chapter 7 - 7

제 96화

96. 제96화

타뷸라의 늑대를 색출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그의 정체는 알지 못하지만, 그가 선대 플레이어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 증거로, 디아블로 클랜의 거점에 무려 천 마리가량의 늑대도 보냈었다.

그러니 선대 플레이어를 미끼로 내세우면 범인의 정체를 쉽게 밝힐 수 있을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생각보다 쉽게 수긍하시네요."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놈을 상상하는 순간 머리가 마비될 정도로 공포스러웠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어쩐지, 머릿속이 밝아진 기분입니다."

공포라....

아마도, 사티로스의 성흔으로 그의 공포를 포식한 효과인 듯했다.

"계획은 오늘 저녁입니다. 거점을 빠져나와서 모습을 드러내 주기만 하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혹시 모르니 호위도 붙여드리겠습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이미 놈들을 피해 일 년간 도망 다닌 몸입니다. 제 한 몸 정도는 지킬 수 있습니다."

"괜찮겠습니까?"

"놈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한 명이라도 더 필요하시지 않겠습니까? 저는 걱정하지 마시고, 놈을 처리해 주십시오. 그건 제 복수이기도 하니 말입니다."

"그러죠."

그리하여, 선대 플레이어라는 미끼를 내세운 후, 세운은 촌장댁으로 숨어들었다.

킬케르데식 은신술을 사용하고, 클리어 슬라임의 땀샘으로 냄새까지 감추었다.

그리고 몇 시간.

해가 지고, 달이 떠오를 때까지 지루한 인내의 시간을 견뎌냈다.

그리고 마침내.

"놈이 헛소리하기 전에 성대를 끊어놔라. 뒤처리는 내가 직접 하지."

"그르릉...."

촌장이 타뷸라의 늑대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기지개를 켜며 보인 늑대 인간의 특징까지, 모든 게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다.

"누구냐!"

쉭!

늑대의 본능이란 것일까?

이렇게나 기척을 숨기고 있는데도, 촌장은 어떻게 알았는지 세운을 향해 정확하게 손톱을 날렸다.

조금만 움직임이 늦었어도 가슴이 베일 뻔했지만, 세운은 촌장의 어깨가 꿈틀거리는 순간 본능적으로 자세를 낮추고 반대편으로 몸을 움직인 상태였다.

곧이어, 고창석에게 받은 무기 중 하나인 단검을 꺼내 들었고.

"역시, 네놈이었구나."

푹!

"커헉!"

촌장의 목덜미에 단검을 박아넣었다.

킬케르가식 기술을 활용하여 정확하게 급소를 내지르는 정교한 암살술. 단검이 놈의 경추의 사이를 끊고 들어가 척수를 가르는 게 선명하게 느껴졌다.

털썩.

늑대 인간을 상대하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 중 하나. 바로, 늑대 인간의 형태로 변신하기 전에 일격으로 숨통을 끊는 것이다.

어설프게 심장을 찔러봤자 늑대 인간 특유의 재생력 때문에 일격에 끝내지 못할 확률이 있었다.

몬스터에 대한 세운의 지식과 킬케르가식 암살술이라는 마몬의 보물. 둘의 힘이 더해진 결과였다.

그런데....

꿈틀!

바닥에 퍼질러 있던 촌장의 몸이 움직였다.

순간, 불안감이 엄습한 세운이 즉시 뒤랑달을 꺼내며 놈에게 달렸지만, 그보다 촌장의 몸이 변하는 게 먼저였다.

우득, 뿌드득!

검갈색의 털이 자라나고, 골격이 기이하게 비틀어진다.

근육이 부풀어 오르며 덩치가 기형적으로 커지고, 주둥이가 툭 튀어나오며 날카로운 송곳니가 뻗쳐 나온다.

완벽한 늑대 인간의 형상.

세운이 뚫었던 목덜미는 어느새 완전히 아물어 있었다.

"아우우우-!!"

뒤랑달을 휘두르기 직전,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웅장한 하울링이 풍압으로 변하여 세운의 몸을 뒤로 밀쳐냈다.

고개를 돌린 놈이 안 그래도 포악해 보이는 인상을 더욱 구기며 세운을 내려보았다.

'분명 경추를 끊어놨는데.'

제아무리 늑대인간이라 하여도 신경은 쉽게 재생하지 못한다.

말초신경계도 아니고, 중추신경계인 척수를 끊어놨는데도 저렇게 멀쩡하게 움직이다니.

'빌어먹을 탑 놈들.'

아무리 히든 피스라고 하여도, 이곳은 1층이다.

그런 곳에 늑대 인간을 심어 두는 것도 비정상적인데, 중추신경계를 끊어놓아도 멀쩡하게 움직이는 늑대 인간을 심어 두다니.

어떻게든 한 달 안에 플레이어들을 모두 올려 보내려는 탑의 의지가 느껴졌다.

"그르르.... 네놈, 언제부터 숨어든 거지?"

"글쎄. 네가 하도 악취를 뿌려대길래 말이지."

풍압에 밀려난 세운이 금세 자세를 다잡았다.

일격에 마무리를 짓지는 못했지만, 숨이 고르지 못한 것을 보니 데미지는 확실하게 들어갔다.

게다가, 지금은 반월(半月)이 떠 있는 상태.

아무리 보스 몬스터 격의 늑대 인간이라 하더라도 100% 힘을 발휘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시기의 눈초리가 '타뷸라의 늑대'를 응시하기 시작합니다.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세운은 놈에게 질투의 권능을 사용한 참이었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것일까? 놈이 자세를 낮게 숙이더니, 곧바로 세운을 향해 달려들었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게 들킨 이상 네놈은 이제 끝이다!"

카앙!

순식간에 길게 늘어난 놈의 손톱에 뒤랑달과 부딪혔다.

덩치에 걸맞게 강력한 힘.

이대로 맞부딪히는 건 어리석다는 걸 깨달은 세운이 검을 기울이며 태극검의 묘리를 일으켰다.

놈의 손톱이 거친 마찰임을 일으키며 미끄러졌고, 반대쪽 손톱의 경로를 방해했다.

그리고 그 즉시, 세운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내공을 통해 태산십팔반검의 제이 초식, 태산이격(泰山二格)이 강화됩니다.

쾅!!

"크륵...."

태산의 힘을 지닌 검격이 놈을 강타했다.

놈이 다급하게 손톱을 올려 막아보았지만, 세운의 내공은 무려 일 갑자에 도달한 상태.

그것도 가장 공격적인 내공이라는 파극심공의 묘리가 담긴 공격이었다.

거기에 강검이라는 특성까지 합쳐지니, 놈은 버티지 못하고 팔을 벌리고 말았다.

위험을 느끼고 바로 발을 빼려 하였지만, 이미 놈의 품 안으로 세운이 파고들어 와 있었다.

-내공을 통해 혈랑검법의 제삼 초식, 혈랑습격(血狼襲擊)이 강화됩니다.

콰과과괏!

내공으로 구현된 붉은 늑대 형상이 놈의 가슴을 흉포하게 물어뜯었다.

질긴 가죽이 갈라지고, 두꺼운 근육이 터져 나간다.

갈비뼈 두어 개가 베어질 때쯤에야, 가까스로 몸을 비틀며 세운의 검격을 회피하였다.

"크윽, 빌어먹을 놈이...."

놈이 부러진 갈비뼈를 붙잡으며 세운을 노려보았다.

생각보다 쉬운 전투에 세운이 의아함을 느낄 때쯤, 놈의 눈이 은빛으로 번뜩였다.

"아우우우-!!"

-타뷸라의 늑대가 하울링을 내지릅니다.

-흉포한 맹수의 포효로 인해 압도적인 공포가 침식해 옵니다.

아까보다 더욱 강한 풍압을 일으키며 세운을 덮쳐온 하울링.

씨 드레이크를 상대할 때 느꼈던 드래곤 피어와 마찬가지로, 그의 하울링에도 공포가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이전에도 그랬듯이, 놈의 공포는 세운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였다.

-'사티로스의 성흔'이 타뷸라의 공포를 집어삼킵니다.

사티로스의 성흔. 공포를 집어삼킬수록 그 힘은 오히려 더욱 강해질 뿐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게 아니었다.

'저건....'

머리 위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기운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반월의 옆으로 은빛 기운이 스멀스멀 차오르고 있는 게 보였다.

늑대 인간 중에서도 뛰어난 혈통을 지닌 이만이 사용할 수 있다는 힘.

마나를 이용하여 강제로 보름달을 만들어 내는 고유 의식, 만월식(滿月式)이었다.

드드드득!

보름달이 차오름과 동시에, 놈의 가슴에 나 있던 상처가 완전히 아물었다.

안 그래도 위협적이던 근육이 더욱 크게 부풀었고, 송곳니는 턱을 가릴 정도로 길게 내려왔다.

"크흐흐. 여기서 이 힘을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감히 순수혈통의 늑대 인간에게 대든 벌은 내려줘야겠지."

"크르릉."

"크릉...."

세운의 주위로 수십 마리의 늑대가 몰려들었다.

아무래도 놈의 하울링을 듣고 몰려든 것 같았는데, 보름달 때문인지 늑대들의 상태도 평범하지 않았다.

눈이 붉게 충혈되어 침을 질질 흘리는 게, 광견병이라도 걸린 것 같았다.

"이제 곧 나의 충실한 수하들도 몰려들 것이다. 네놈이 과연, 수백의 늑대를 뚫고 내 발톱에 닿을 수나 있을까?"

놈의 말뜻은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만월식을 이용하여 강제로 만들어 낸 보름달이지만, 보름달이 떠오른 이상 거주민들 역시 늑대의 형상으로 변했을 것이다.

거기에 놈의 하울링까지 들었으니, 거주민들 전부 세운을 공격하기 위해 이곳으로 달려올 게 분명하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늑대 인간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 대신, 아래의 마을에서 시끄러운 소음이 들려왔다.

"무슨...!"

"혹시 몰라서 대비 정도는 하고 있었거든."

이곳으로 오기 전, 세운은 박정필을 시켜 미리 마을의 플레이어들을 모두 대피시켜 두었다.

바비큐 파티를 가장하여 마을 밖으로 불러냈으니 모두 즐거워하며 디아블로 클랜의 거점 앞으로 모여 있었다.

다음으로, 디아블로 클랜은 저마다 거주민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들이 늑대 인간으로 변하면 즉시 제압할 수 있도록.

"이 간악한 놈이!"

"칭찬 고맙다."

"공격해라! 얼른 저 잡놈의 목을 물어뜯어 내 앞으로 가져와라!"

"아우우-!"

세운을 둘러싸고 있던 늑대들이 혀를 내빼며 달려들었다.

그러나, 세운은 저런 자잘한 늑대들을 상대하고 있을 생각이 없었다.

이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사티로스의 성흔을 밝히며 선두에서 내달리던 늑대의 몸을 이등분했다.

그 순간.

-사티로스의 성흔이 혈랑전설의 설화에 반응합니다.

-성흔의 첫 번째 능력, '공포'가 깨어납니다.

이등분된 늑대의 사체가 피를 흩뿌리며, 주위로 감당키 어려운 공포의 힘이 퍼져 나갔다.

단순한 스킬의 개념이 아니었다. 신의 격, 그 자체가 깃들어 있는 성흔으로 일으킨 공포.

미친 듯이 달려오던 늑대들이 다급하게 움직임을 멈추었다.

"깨, 깨앵!"

"뭐, 뭣들 하는 것이냐! 얼른 저놈을 물어뜯어라!"

붉게 충혈되었던 늑대들의 눈빛이 하얗게 가라앉더니 공포에 질린 듯이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도망칠 이성도 잃고 땅에 고개를 파묻거나, 오줌을 지리는 늑대도 있었다.

압도적인 공포.

이명과 성흔이 시너지를 일으키며 생겨난 공포는, 늑대의 이성을 모조리 마비시켰다.

-성좌, '시기를 둘러싼 뱀'이 벌써부터 '격'을 자유자재로 다루기 시작하는 당신의 모습에 더욱 큰 기대를 가집니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순수혈통을 타고난 늑대 인간의 혈액을 원합니다.

다만, 공포에 질린 것은 늑대들뿐. 정작 세운의 목표인 늑대 인간은 타격을 입은 것 같지 않았다.

그래도 공포의 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는지, 전신의 털을 바짝 일으킨 채 경계의 눈초리로 세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늑대 인간이라면 역시....'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진은(眞銀) ]

- 진은, 또는 미스릴이라고도 불리며 강한 은의 성질과 뛰어난 마나 전도력을 품고 있는 희귀 광석이다.

드드득.

세운이 뒤랑들을 검집으로 돌려 넣고 고창석이 만들어 주었던 '용아검'을 꺼내 들었다.

검붉은 빛이 특징이었던 용아검의 검날이 은빛으로 물들었다.

늑대 인간의 약점 중 하나라는 은. 그중에서도 진은이라 불리는 미스릴이라면 놈의 재생 능력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오지 않을 거면, 내가 먼저 가지."

타앗!

세운이 발을 도약하며, 용아검이 달빛에 반사되어 은빛 궤적을 일으켰다.

제 97화

97. 제97화

-내공을 통해 혈랑검법의 제이 초식, 혈랑아(血狼牙)가 강화됩니다.

콰직!

"크아아악!"

핏빛 늑대의 형상으로 변한 세운의 은빛 검이 늑대 인간을 물어뜯었다.

과연, 진은의 힘. 인조적이라지만, 만월이 떠올라 있음에도 놈은 상처를 제대로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만월이 떠오른 만큼 놈의 힘이 크게 강해졌지만, 놈에게는 패착이 하나 있었다.

-시기의 눈초리가 '타뷸라의 늑대'의 야성을 질투합니다.

-근력을 앗아옵니다.

-민첩을 앗아옵니다.

-재생력을 앗아옵니다.

그것은 바로, 시간을 너무 오래 끌었다는 것.

만월이 떠 신체 능력이 강화됐지만, 질투의 권능과 맞물려 힘이 서서히 약해지고 있었다.

반대로 세운은 놈의 힘을 앗아오기 시작했으니, 전투는 세운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진은으로 된 무기까지 준비해 오다니! 언제부터 내 존재를 알아챈 것이냐!"

"글쎄, 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안 나네."

"그럴 리가 없다! 1층의 생존자는 분명 한 놈뿐이었을 터!"

놈이 세운과 거리를 벌리며 바락바락 소리 질렀다.

이미 어깨 한쪽은 너덜너덜한 상태.

압박이 이어질수록, 사티로스의 성흔이 더욱 빛을 발하고 있었다.

겉으로 티는 나지 않았지만, 세운에 대한 공포감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으리라.

"이럴 수는 없다! 조금만 더 있으면! 제물을 조금만 더 바치면, 이 답답한 1층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

"...그게 무슨 말이지?"

1층을 벗어나다니?

회귀를 거치며 방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세운으로서도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다.

플레이어가 아닌 거주민은 기본적으로 자신이 소속된 층을 벗어날 수 없었으니까.

"모르는 것이냐! 네놈은! 이 빌어먹을!"

-탑의 관리자가 '타뷸라의 늑대'의 언행을 억압합니다.

"크아아아악!"

관리자의 개입.

회귀 전에는 소문으로만 들었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튜토리얼의 관리자부터 시작해서, 벌써 두 번째로 마주하는 관리자의 개입이었다.

관리자의 개입 때문인지 놈은 이빨이 부서질 정도로 입이 콱 부딪히더니, 분노의 포효를 내질렀다.

세운의 공포와 놈의 공포가 부딪히며, 주위의 늑대들이 이성을 잃고 자리에서 쓰러졌다.

"여기서 끝낼 수는 없다! 내 혈통이 타락하더라도, 이대로 끝낼 수는 없다!"

콰직!

무슨 짓을 하나 싶었더니, 놈이 바로 옆에 있던 늑대 하나를 들어 올려 목을 베어 물었다.

정신은 잃었지만, 늑대는 아직 살아 있는 상태였다.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아찔한 충격에 눈을 뜬 늑대가 깨갱거리며 비명을 질렀지만, 놈은 늑대를 놔줄 생각이 없었다.

잔혹하게 뜯겨나간 목덜미에서 선혈이 흘러나오고, 놈이 아가리를 크게 벌리며 선혈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위험해.'

타앗!

늑대 인간에게 동족 포식의 개념이 있었던가?

아니다.

적어도, 세운이 알기로 늑대 인간은 동족을 끔찍이도 사랑하는 종족이었다. 늑대 인간만이 아니라, 자신들과 의지를 공유하는 늑대 역시 마찬가지.

세운의 은빛 궤적을 그리며 놈에게 다다랐을 때, 입가에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놈의 눈이 붉게 타오르는 게 보였다.

까앙!

"크, 크륵...."

붉게 변한 손톱이 세운의 검을 막아냈다.

손톱을 내려친 검을 통해서, 아찔한 반동이 타고 내려와 손목에서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

-'타뷸라의 늑대'가 동족을 포식하였습니다.

-늑대 인간의 혈통이 타락하며, 광폭화 상태에 돌입합니다.

'이런 거였나.'

단 한 번 공격을 부딪쳤을 뿐이지만, 바로 직전에 비해 놈의 힘이 놀랍도록 강해진 게 느껴졌다.

스산한 기운에 머리를 들어보니, 채워진 만월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동족 포식.

세운이 모르고 있던 이유는, 아마 이것이 늑대 인간들 사이에서도 금기된 일이기 때문이리라.

"아우-"

"아우우-"

만월이 붉게 물들자, 아래에서 늑대 인간들의 하울링이 들려왔다.

아무래도 광폭화되기 시작한 건 눈앞의 늑대 인간만이 아닌 듯했다.

'이거 빨리 끝내야겠는데.'

클랜원들에게는 되도록 거주민들을 해치지 말라고 지시를 해 두었다.

그들은 자신이 늑대 인간이라고 자각하지도 못한 채, 타뷸라의 늑대에게 조종당할 뿐이었으니까. 무의미한 피해는 최대한 줄이고 싶었다.

다만, 강한 적을 제압하는 건 죽이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늑대 인간들이 더욱 강해졌다면, 클랜원들도 고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크르르...."

타뷸라의 늑대. 놈이 쩍 벌어진 아가리 사이에서 피인지 침인지 모를 액체를 뚝뚝 흘리며 세운을 노려보았다.

이미 놈의 눈에서 이성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한 마리의 맹수.

철저하게 본능으로 도배된 굶주린 늑대의 모습이었다.

"크아앙!"

놈이 포식을 마친 늑대를 내팽개치고 세운에게로 달려들었다.

압도적인 속도.

속도가 얼마나 빨라졌는지 눈으로 따라가기 힘들 지경이었다.

캉!

가까스로 공격을 막아내자, 진은의 힘으로 강화된 용아검이 웅웅거리며 비명을 토해냈다.

이후로도 놈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 상처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오로지 공격만을 반복한다.

질투의 권능으로 놈의 능력치가 세운에게 흡수되고 있었지만, 이대로는 시간을 버는 것조차 무리였다.

까앙!

내공을 최대한 끌어 올려 내지른 한 방으로 놈의 공격을 막아내고 미약한 빈틈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 즉시, 세운은 검에서 한 손을 떼어내어 놈을 가리켰다.

-흑탑의 묘리에 따라 '다크 플레어'의 위력이 강화됩니다.

콰르르륵!

"크아아아악!"

5 서클에 도달하며 더욱 강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세운이지만. 다급한 상황 때문에 당장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마법을 사용하였다.

3 서클의 공격 마법이지만, 마나를 있는 대로 퍼부었으니 절대 약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럼에도 놈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막아낼 수는 없었다.

놈은 검은 불꽃에 몸이 타들어 가고 있음에도, 붉은 눈을 번뜩이며 앞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그 찰나의 순간, 세운은 탐욕의 권능을 발현하여 미리 생각해 두었던 보물을 꺼내 들었다.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성왕의 검, 로베라 ]

- 가장 위대한 왕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성왕 페르난도 3세의 검. 늑대잡이라는 이름을 가진 전설의 낭살검(狼殺劍).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골라둔 보물.

지금의 힘으로 충분히 상대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이대로 시간을 끌었다가는 피해가 너무 클 것이다.

그러니, 보물을 사용하더라도 최대한 빨리 놈을 끝내는 게 좋아 보였다.

"크아아아악!"

놈이 최후의 포효를 내지르며 앞으로 내달렸다.

이제는 완전히 본능에 장악당한 듯이, 앞발까지 땅을 딛으며 네발로 달리기 시작했다.

놈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세운을 물어뜯을 생각밖에 없어 보였다.

스윽.

세운이 오른발을 앞으로 내밀며, 발검의 자세를 취했다.

진은의 힘과 전설의 명검 로베라의 힘.

두 가지 보물이 깃든 용아검은 당장에라도 터져 나갈 듯이 떨려대고 있었다.

어지간한 검이라면 두 가지 보물 중 한 가지도 버티지 못하고 부서졌을 텐데. 과연, 고창석이 만들어 낸 검다웠다.

세운의 손에 힘이 쥐어지자, 용아검은 자신의 최후를 느끼고 순간적으로 진동을 멈추었다.

정신이 극한까지 고양되며, 한순간 세상이 멈춘 듯한 착각이 일어났다.

차분하게 숨을 고르며 눈을 뜨자, 바로 앞으로 붉게 타오르는 놈의 동공이 보였다.

그 순간.

서걱-

세운의 검이 움직이며 은빛 궤적이 만월의 형태를 그리며 퍼져 나갔다.

하늘 위에 떠올라 있는 붉은 만월보다 더욱 진짜 같은 만월.

제 역할을 끝내고 찬찬히 용아검이 서서히 부서져 내리자, 그와 함께 정지된 세상이 서서히 시간을 되찾아갔다.

털썩.

정확하게 반으로 갈라진 놈의 시체가 세운의 양옆으로 미끄러지듯 떨어진다.

세운을 비추던 붉은 조명이 사라지고, 달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1층의 히든 보스 몬스터, '타뷸라의 늑대'를 처치하였습니다.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개인 공적치가 100,000point 상승합니다.

-'타락한 늑대 인간의 혈액'을 획득하였습니다.

-'타락한 늑대 인간의 눈동자'를 획득하셨습니다.

-1층의 히든 퀘스트, '타뷸라의 늑대'를 완료하였습니다.

-보상으로 100,000point를 획득하였습니다.

-1층의 히든 퀘스트, '타뷸라의 타락'을 완료하였습니다.

-보상으로 100,000point를 획득하였습니다.

-타뷸라의 늑대에게 조종받는 거주민을 단 한 명도 죽이지 않고 퀘스트를 완료하여 추가로 100,000point를 획득하였습니다.

-탑의 거주민들에게 '디아블로 클랜'의 명성이 퍼져 나갑니다.

-1층의 시련 통과 자격을 획득하였습니다. 원할 때 언제든지 다음 층으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세운의 눈앞으로 시스템 메시지가 쉴 새 없이 떠올랐다.

요약하자면, 2레벨의 상승과 40만 포인트의 획득. 디아블로 클랜의 명성과 1층의 시련 통과에 대한 메시지였다.

"후우...."

세운이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렸다.

마지막 순간, 무공이나 마법을 사용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발검술(拔劍術).

그런데 그 순간, 세상이 멈춘 듯했다.

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얘기였지만, 세운의 모든 감각은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과부하된 근육으로 인해, 들어 올린 손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각이 느껴졌다.

세운은 그 감각을 잃지 않으려는 듯이 주먹을 꽉 쥐었다. 아마, 이것이 검사들이 말하는 깨달음이리라.

회귀 전, 다양한 무기를 사용하였지만 세운은 그저 모험가였을 뿐. 한 무기에 정통한 적은 없었다.

그때 얻지 못한 깨달음을, 회귀를 하고 새롭게 탑을 오르기 시작하는 지금에서야 느낀 것이다.

'일단은....'

-'타뷸라의 늑대'를 포식하였습니다.

-양분을 흡수하여 근력이 20, 민첩이 20 상승합니다.

-혈랑전설의 설화에 늑대 사냥이 기록됩니다.

-설화에 기록된 공포의 힘이 크게 상승합니다.

이명을 얻기가 어려운 것을 넘어, 이명에 관련된 설화를 개척해나가는 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탑의 상층까지 오른 랭커들도 기록된 설화가 열 줄이 넘어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까.

그런 설화를, 세운은 겨우 1층에서 써 내려가고 있었다.

솔직히, 40만 포인트를 획득한 것이나 총 40에 가까운 능력치가 상승한 것보다 설화가 갱신된 게 더욱 놀라울 정도였다.

"세운 씨! 괜찮으세요?"

"어. 거주민들은?"

"달이 돌아오자마자 제 모습으로 돌아오더니 바로 정신을 잃었어요. 상처도 회복된 상태여서 전부 집에 눕혀주고 오는 길이에요."

"수고했어. 제압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세운 씨에 비하면 별거 아니죠. 들려오는 소리나 기운만으로도 알 수 있었어요. 세운 씨가 상대한 적이 얼마나 강했는지."

다급하게 달려온 유서아가 마을의 상태에 관해 설명해 주었다.

미리부터 준비를 해 두었기 때문인지 거주민들의 상처도 별로 없었고, 건물의 피해도 거의 없다고 하였다.

붉은 달이 떠올랐을 때 몇 마리의 늑대 인간이 포박을 벗어던지고 폭주했다고 했지만, 강한철과 유서아 등의 활약으로 금방 진압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메시지는 무슨 말인가요? 명성이라든가, 시련이라든가...."

"자세한 얘기는 거점에서 해 줄게. 나도 조금 쉬고 싶거든."

"아! 물론이죠. 얼른 돌아가요."

유서아가 부축을 해 주려 하였지만, 세운이 손을 내밀어 거절하였다. 다리가 약간 떨리긴 했지만, 혼자 못 걸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나저나, 이번에 얻은 건....'

세운이 타뷸라의 늑대를 사냥하고 얻은 전리품을 확인해 보았다.

완제품은 없었고, 전부 늑대 인간과 관련된 소재뿐이었다.

마지막에 동족 포식으로 인한 타락 때문인지, 소재들 대부분은 '타락한'이라는 형용사가 붙은 채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미 고창석을 통해 장비를 대부분 맞춘 상태였기에 이것들을 어디에 써야 할지 고민하던 중.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당신에게 거래를 제안합니다.

탐욕의 마신, 마몬이 기다렸다는 듯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제 98화

98. 제98화

디아블로 클랜의 거점에서 화려한 파티가 벌어졌다.

이번에는 클랜원들끼리만 하는 간소한 파티가 아닌, 주위의 플레이어들까지 불러 벌인 대형 파티였다.

그 시초는 늑대인간을 사냥하기 위해 마을에서 플레이어를 빼내는 아이디어에 있었다.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고, 거짓말을 할 수도 없으니 실제로 파티를 열었던 것이다.

사냥을 끝낸 세운과 클랜원들도 뒤늦게 참여하여, 파티는 졸지에 사냥 성공 축하 파티가 되었다.

물론, 함께 웃고 떠드는 외부의 플레이어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지만 말이다.

"제발 받아주시면 안 됩니까? 저만 살자고 그러는 게 아니라, 저희 클랜 전부요!"

"클랜의 인원은 50명을 못 넘기는 거, 아시잖아요."

"그럼 산하 클랜으로 받아주십쇼! 이래 봬도 저희 다들 랭킹 백 위권 플레이어들만 모인 정예 클랜입니다!"

"굳이 그렇게까지...."

거점의 중앙에서는 헤드릭이 유서아를 붙잡고 열심히 자기 클랜에 대해 어필하는 중이었다.

혼자 들어갈 수는 없으니, 클랜을 전부 받아주라는 것이었다.

'산하 클랜이라....'

솔직히, 길드도 아니고 클랜의 아래에 산하 클랜으로 들어가는 건 아무런 메리트도 없었다.

그러나, 받아주는 입장에서는 문제 될 게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이득이었다.

산하 클랜이라면 딱히 무언가 해 줄 필요도 없고, 도움이 필요할 때 편하게 요청할 수도 있었으니까.

단지, '디아블로 클랜'이라는 이름을 빌려주는 것만으로.

그렇게 생각한 세운이 마시던 음료를 내려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받아줘."

"그렇지만, 괜찮을까요?"

"저렇게 원하는데, 어쩔 수 있나."

"저, 정말이십니까? 우왓! 약속하신 겁니다? 저 지금 바로 저희 클랜장한테 가서 보고합니다? 야호! 클랜장! 어이, 클랜장!"

얼마 안 가 세운의 눈앞에 '레드 이글' 클랜이 산하로 들어왔다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헤드릭만 난리 쳤던 게 아니라, 그쪽 클랜에서도 꽤 기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세운 씨, 다음 층은 언제 가실 거예요?"

"한 달은 다 채우고 가야지."

"의외네요. 히든 피스를 찾았으니 바로 올라가자고 할 줄 알았는데."

"어르신이랑 약속한 게 있거든."

"아, 대장간 말이죠?"

층을 오르기 시작하면 마을의 대장간과 같이 제대로 된 제련 시설을 찾기 힘들어진다.

다음 쉼터에 도착하여도, 대장간을 빌릴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러니, 일단은 대장간과 계약한 한 달은 다 채우고 이동할 생각이었다.

그편이 디아블로 클랜의 생존 확률도 더욱 올라갈 테니 말이다.

"형님, 여기 계셨군요! 한참 찾았잖습니까! 얼른 저랑 가시죠. 제가 형님을 위해서 옆 클랜 미인들을 꽉 붙잡아놨습니다!"

그렇게 유서아와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박정필이 나타났다.

오늘 하루만은 음주를 허용한다고 했더니, 세운의 교육은 까맣게 잊은 듯이, 벌써부터 거나하게 취한 듯하다.

그런 녀석을 바라보고 세운이 고개를 젓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서아, 쟤 좀 부탁해."

"네? 제가요?"

"아니다. 강한철!"

"아, 아니 형님! 갑자기 그놈은 왜 부릅니까!"

"불렀나?"

"히이이익!"

강한철에게 박정필을 떠넘기는 것으로 귀찮은 상황을 면할 수 있었다.

세운이 유서아에게 인사를 남기고 거점의 외각으로 이동하였다. 주위가 살짝 시끄럽긴 하지만, 지켜보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어떤 거래를 원하시는 거죠?"

세운이 허공을 향해 읊조렸다.

늑대인간 사냥을 마치고 거점으로 돌아가던 중, 마몬이 남긴 메시지를 떠올리며.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곧바로 마몬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늑대인간의 소재를 언급합니다.

"이거 말입니까?"

세운이 이번에 얻은 소재 몇 개를 꺼내 들었다.

타락한 늑대 인간의 눈동자와 혈액 등.

타뷸라의 늑대에게서 얻은 소재들인데, 세운으로서도 사용처를 파악하기 힘든 것들이었다.

본래 늑대인간의 소재는 손톱이나 이빨 말고는 그리 큰 가치가 없다고 알고 있었으니까.

아공간 주머니 덕분인지, 시간이 지났음에도 생생한 소재들을 보며 마몬이 메시지를 이어갔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고개를 끄덕입니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그것들을 바친다면 창고의 최하급 보물의 이용권을 유지해 주겠다며 약속합니다.

'흐음....'

마몬의 보물창고. 즉, 탐욕(眞)의 보물창고의 개방권.

이전에 그것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뒤랑달을 빌려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당연하게도 뒤랑달을 돌려받은 지금, 그 권한은 사라진 상태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개방권을 영구히 제공해 주겠단다.

최하급 보물 중에서는 쓸 만한 게 별로 없다고는 해도, 세운으로서는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애초에 지금 들고 있는 소재들의 사용처조차 모르고 있는 실정이니까.

한참을 고민하던 세운이 제안을 수락하기 직전, 새로운 성좌가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성좌, '시기를 둘러싼 뱀'이 저 까마귀에게 속지 말라며 조언합니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끼어들지 말라며 날개를 크게 펼칩니다.

'응?'

질투의 마신, 레비아탄의 조언. 그것을 보는 순간 세운은 알아챌 수 있었다.

어쩌면, 이 소재들의 가치가 자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일지도 모르겠다고.

-성좌, '시기를 둘러싼 뱀'이 늑대인간의 타락은 탑의 역사 속에서도 극히 보기 드문 현상이라며 읊조립니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조용히 하라며 시끄럽게 울어댑니다.

-성좌, '시기를 둘러싼 뱀'이 때문에 타락한 늑대인간의 소재는 희귀성으로만 따진다면 그 어떤 보석보다 뛰어나다며....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뱀의 메시지를 가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날개를 펼칩니다.

'그런 거였나.'

레비아탄의 조언 덕분에, 세운은 상황을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회귀 전, 세운이 그토록 다양한 지식을 탐구했음에도 늑대인간의 타락에 대해 알지 못했던 이유.

그것은 늑대인간들이 기본적으로 지닌 자긍심 때문이었다.

목숨이 끊어지더라도, 동료를 다치게 하지 않겠다는 신념.

심지어 무리에서 쫓겨난 늑대인간도, 그 신념은 굽히지 않았다.

그런데 타뷸라의 늑대는 그 신념을 깨부수고, 동족을 포식하며 타락의 길을 택한 것이다.

소재의 효과는 알지 못하지만, 레비아탄의 말대로 희귀성 하나로는 엄청나게 귀한 소재였다.

"흠, 그런 거군요."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이마를 부여잡고 한숨을 크게 내쉽니다.

-성좌, '시기를 둘러싼 뱀'이 누구 앞에서 사기를 치려 하냐며 머리를 높게 치켜듭니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그렇다고 해도, 당신에게 절대 나쁘지 않은 거래라며 제안을 반복합니다.

확실히, 나쁘지 않은 제약이었다. 눈앞의 소재가 희귀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렇다고 하여도 세운으로서는 사용할 방법이 없었으니까.

가만히 들고 있는 것보다야 마몬과의 거래를 통해 창고를 조금이라도 이용하는 게 더 이득이었다.

그러나.

"거래 조건을 조금 바꿔야 할 것 같은데요."

가치를 파악한 이상, 거래의 수준을 끌어 올릴 필요는 있었다.

"최하급 말고, 하급 보물들도 이용할 수 있게 해 주시죠."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인상을 찌푸립니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그것들의 가치가 그 정도로 크지는 않다며 단언합니다.

-성좌, '시기를 둘러싼 뱀'이 거짓말하지 말라며 반박합니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잠시 멈칫하더니 그렇다고 해도 하급 보물을 모두 제공하는 건 수지타산이 안 맞는다며 고개를 젓습니다.

"소모품은 여유분이 있는 것만 사용하겠습니다. 컬렉션을 망칠 생각은 없거든요."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안 될 일이라며 고개를 젓습니다.

"다른 물건들은 '대여' 방식으로 사용하겠습니다. 제가 뒤랑달을 빌려드렸던 것처럼요."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자신의 보물에 먼지가 묻을 생각을 하니 끔찍하다고 외칩니다.

"그런가요? 그럼 뭐, 이것들의 가치를 알아봐 줄 이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야죠."

세운이 타락한 늑대인간의 눈동자를 들어 올렸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지금 보니 동공이 영롱하게 빛나는 모습이 꽤 아름다워 보였다.

굳이 희귀도 때문이 아니더라도, 정말 보석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한 것은, 비단 세운만이 아니었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근심을 흘리며 고민에 빠져듭니다.

걸려들었다.

사실, 세운이 이 소재의 가치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면 금방 이루어질 거래였지만, 레비아탄을 통해 세운이 소재의 가치를 알아챈 무렵부터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마몬은 스스로가 먼저 이 소재에 대한 욕심을 드러냈고, 소재의 소유자인 세운이 갑이 될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저도 허용선은 지키겠습니다. 최하급 보물을 개방하셨을 때도, 제가 함부로 사용하진 않았잖습니까?"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입니다.

세운이 여유롭게 마몬의 대답을 기다렸다.

인제 와서 마몬이 시간을 끄는 것은 거래의 여부에 대한 고민 때문이 아니었다.

저 소재라면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며, 스스로를 세뇌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었다.

시원한 밤바람을 느끼며 기다리고 있으니, 곧 마몬의 대답이 들려왔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알겠다며 당신의 제안을 승낙합니다.

-성좌, '시기를 둘러싼 뱀'이 나쁘지 않은 거래라며 중재를 마칩니다.

슥.

세운이 뒤랑달의 날로 검지 끝을 살짝 베었다.

아무리 튜토리얼을 함께 해 온 성좌라고 해도, 단순히 믿음만으로 거래를 이룰 생각은 없었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의 털끝에서 혈액이 흘러나옵니다.

-성좌, '시기를 둘러싼 뱀'이 계약법을 알려주려다가, 당신의 행동에 놀라움을 표합니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와의 계약이 성사되었습니다.

-성좌와의 계약을 통해, 앞으로 '마몬의 보물창고' 일부분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계약이 성립됨과 함께, 세운이 들고 있던 타뷸라의 소재들이 전부 사라졌다.

조금 아깝긴 했지만, 세운으로서 이번 거래는 별다른 손해 하나 없이 전투력을 강화한 훌륭한 거래였다.

가치를 알아볼 이를 찾겠다며 허세를 부렸지만, 그런 이를 쉽게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곧이어.

-탐욕(眞)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촤르륵-

세운의 눈앞으로 보물창고의 새로운 목록이 펼쳐졌다.

최하급에서 하급으로 한 단계 올라갔을 뿐인데, 목록의 수가 수백을 넘어 천 가지에 달할 지경이었다.

'천천히 구경해 볼까?'

아무래도, 오늘 밤은 보물을 둘러보다 시간이 다 갈 것 같았다.

제 99화

99. 제99화

디아블로 클랜이 거점에서 머문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다.

원래 같았으면 한 달이 지났으니 당장 다음 시련에 도전하라는 시스템의 조언이 떠올랐겠지만, 한 달이 지나도 해당 메시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타뷸라의 늑대가 사라졌으니까.'

아무리 시스템이라 하여도, 게임처럼 사라진 NPC를 복구하는 능력은 없었다.

세운이 기억하는 탑이라면 플레이어들을 이대로 놔둘 것 같지는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이제 슬슬 다음 층으로 이동할 생각이었으니 말이다.

"이야, 몸에 딱 들어맞는데?"

"역시 어르신 장비는 기가 막힌다니까."

"이거, 무슨 재질로 만들어진 거야? 엄청 가벼운데."

다음 층으로 떠나기 전, 클랜원들은 저마다 고창석에게 건네받은 장비를 착용하고 있었다.

신기한 점은, 클랜원이 착용 중인 장비들이 저마다 조금씩 다르다는 점이었다.

"허허, 어차피 어디 팔려고 만든 것도 아니고. 누가 쓸지 훤히 아는데, 기왕이면 자기한테 딱 맞는 거로 만들어 줘야지."

"하나하나 따로 만들기 귀찮으셨을 텐데요."

"귀찮긴! 멀쩡한 대장간이 있을 때 제대로 만들어 놔야지. 오히려 요 한 달이 지구에 있을 때보다 훨씬 생기 넘쳤다네!"

바로, 고창석이 저마다의 특성에 맞게 모든 장비를 맞춤형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왼손잡이 전사에게는, 왼손 형 장검을. 민첩함이 장점인 전사에게는 가벼운 경갑옷을.

사이즈는 물론, 그립 형태나 날의 모양까지 완벽하게 맞춰주었다. 거기에 모두 C-등급 이상으로 성능마저 확실하다.

만약 저런 맞춤형 장비를 대장간에서 돈 주고 맞췄다면, 생각 이상으로 많은 공적치가 빠져나갔을 것이다.

아니, 세운 정도가 아니라면 애초에 구입할 공적치가 부족했겠지.

"저희도 준비 끝났어요!"

"이 능력 진짜 편하다, 그렇지?"

-성좌, '검은 새'가 당연한 일이라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성좌, '거대한 새'가 잊은 건 없는지 다시 한번 확인해 보라며 주위를 살펴봅니다.

거점의 정리도 끝났다.

아직 거점을 떠나지 않은 플레이어들이 찾아와 작별 인사를 건네주었다.

지난 파티 이후로 꽤 친해졌던 이들이었기에, 다음에 또 보자며 훈훈한 광경이 벌어졌다.

그러는 중에, 정리를 마친 유서아가 세운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런데 원래 1층의 시련은 어떤 거였을까요?"

세운의 활약 덕분에, 디아블로 클랜은 '1층 시련 통과 자격'을 획득하였다. 시련을 확인하지도 못하고 2층으로 올라가게 된 것이다.

첫 시련인 만큼, 궁금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녀의 질문에, 세운이 가볍게 대답하였다.

"웨이브 같은 게 아니었을까."

"그럴 수도 있겠네요. 솔직히, 시련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기도 하구요."

짐작에 가까운 대답이었지만, 이건 세운의 경험에 근거한 사실이었다.

1층의 첫 번째 시련. 그것은 튜토리얼의 첫 번째 장과 마찬가지로 몬스터 웨이브에서 살아남는 것이었다.

문제는 클랜 전체가 아닌 플레이어 개개인으로서 시련을 받게 된다는 점이다.

'실력 없이 운 좋게 튜토리얼을 통과한 걸러내기 위한 시련이었지.'

이게 바로 세운이 튜토리얼 당시 클랜원을 강하게 밀어붙였던 이유이기도 했다.

힘없고 약한 사람들을 아무리 열심히 지켜봤자, 그런 이들은 이 첫 번째 시련에서 떨어지게 마련이니까.

'지금이라면, 이런 게 아니었어도 모두 붙었겠지.'

디아블로 클랜은 튜토리얼을 1위로 통과한 것답게 매우 강력했다.

세운의 활약이 컸다고는 하지만, 그게 아니라도 클랜원 개개인의 힘은 어지간한 1층의 플레이어 이상으로 강했다.

전투계가 아닌 고창석이었어도 첫 번째 시련 정도는 가볍게 통과할 수 있었을 테지.

솔직히 실력이 좋지 않아도, 고창석의 장비 정도면 어지간한 전투는 이길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다들 이거 하나씩 받아 가세요! 이건 외상약이고, 이건 해독약이에요."

"감사합니다!"

"잘 쓸게요. 하늘 씨."

이하늘이 사람들에게 약품을 배급하였다.

세운이 반짝이는 동산에서 구해 온 약초로 만들어낸 약병이었다.

이전에 직접 사용해 보았는데, 어지간한 포션의 성능을 따라갈 정도로 훌륭했다.

"혹시 무슨 일 있으면 클랜챗으로 연락주세요!"

클랜챗. 클랜 채팅의 줄임말이었다.

세운이 따로 포인트를 지불하며 개방한 클랜의 기능이었는데, 거리가 떨어져 있어도 대화가 가능한 기능이었다.

무조건 같은 클랜이어야만 한다는 제한이 있었지만, 그것만 뺀다면 세운이 만들어 낸 통신석보다 뛰어난 기능이었다.

대충 정리가 끝나자, 자연스레 사람들의 시선이 유서아에게 몰렸다.

세운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목소리를 높였다.

"다들 아시다시피, 저희가 지금까지 겪어온 건 말 그대로 '튜토리얼'이었어요. 탑에 들어온 지금, 시련은 전보다 더 어려워질 테죠."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힘든 튜토리얼을 통과해 왔기에, 모두의 표정에서는 긴장과 함께 자신감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지금까지와 달리 혼자서 시련을 도전하거나, 전혀 예상치 못한 시련이 닥쳐올지도 몰라요."

이는 세운과의 대화를 이용한 일종의 조언이었다.

다들 튜토리얼에서 단체로 행동하는 것이 익숙해져 있을 테지만, 탑의 시련은 그렇지 않았다.

단체로 도전하는 층도 있지만, 혼자서, 또는 두 명이서 도전하는 등. 다양한 인원수로 갈라지는 곳도 많았다.

그 경각심을 새겨주기 위해, 그녀가 지금의 대사를 연설에 포함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하지만, 저희는 할 수 있어요."

진지하던 그녀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한껏 긴장하고 있던 사람들의 얼굴도 그녀를 따라 밝아졌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저희는 잘 헤쳐나갈 수 있을 거예요."

"휘유! 멋지다!"

"가자아!"

튜토리얼에서 많은 여정을 거치며 힘들어했던 그녀였지만, 이제는 완전한 리더로 거듭나 있었다.

사람들의 환호가 멈춰갈 때쯤, 세운이 그녀의 앞으로 나섰다.

이제 슬슬 쉼터를 떠날 시간이다.

"다들 지금처럼만 해 주시길 바랍니다."

"오오, 클랜장!"

"혈랑! 혈랑!"

"형님, 저랑 같이 가요오!"

이제는 저 혈랑 소리도 익숙하게 느껴진다.

그렇게 생각하며, 세운은 가장 먼저 시련 통과권을 사용하였다.

-뛰어난 업적을 통해 1층의 시련을 통과합니다.

-곧바로 2층의 시련에 입장합니다.

파아앗!

밝은 빛과 함께, 세운의 몸이 사라져갔다.

곧이어 유서아를 포함한 클랜원들 역시 빛에 휩싸이며, 디아블로 클랜이 거점에서 완전히 몸을 감추었다.

* * *

"이걸 승급이라고 해야 하나...."

튜토리얼의 총책임자 튜닝. 그가 거울을 보고 넥타이를 바로잡으며 중얼거렸다.

세운이 튜토리얼을 통과한 이후, 그는 쉴 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굶주린 오우거의 수장, '크락 카틀락'이 소환된 것은 물론 황금성이 함락되고 다라칸이 성벽 근처도 오지 못하고 쓰러진 것까지.

하나만 해도 입이 떡 벌어질 만한 사건들을 한데 묶어 탑에 보고해야 했으니 말이다.

그 결과....

-현 시간부로 플레이어 '정세운'을 탑의 이레귤러로 지정한다.

-이에 튜토리얼 총책임자 '튜닝'을 특별 전담팀 팀장으로 임명한다.

탑은 튜닝에게 직위 이동을 권하였다.

솔직히, 말이 권한 거지 강제 이동이나 다름없었다. 공적치 랭킹 보상에 관련하여 책임이 있는 튜닝이었기에 거절은 불가능했으니까.

헛기침을 하며 목을 다듬은 튜닝이 탑의 관리소로 첫발을 내밀었다.

잘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직위상으로만 본다면 튜토리얼의 책임자보다는 탑의 팀장급이 더 높은 직위임이 분명했다.

관리소에 들어가자, 다크 서클이 눈 아래로 길게 내려온 남자가 그를 반겨주고 있었다.

"아... 누구지?"

"튜닝입니다. 오늘부로 플레이어 '정세운'의 특별 전담팀 팀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아... 아! 정세운! 그 빌어먹을!"

"네?"

"아니, 아니네. 그래, 자네가 그놈. 아니, 그 플레이어의 전담이란 말이지."

세운의 이름을 듣고 욕설을 퍼붓던 남자의 표정이 돌연 밝아졌다.

그러고는 책상 위에 가득하던 서류를 다급하게 쌓기 시작하더니, 그것들을 한데 모아 튜닝에게 건네주었다.

튜닝으로서는 영문도 모른 채 서류를 받아 들 수밖에 없었다.

"이게 무슨...."

"그 플레이어가 1층에 와서 저지른 것들이라네."

"네?"

"반짝이는 동산의 해충을 제거하고, 5 서클에 달성했다네."

"여기서도 히든 피스를 찾아낸 모양이군요. 게다가, 5 서클이라니."

튜닝이 혀를 내둘렀다. 예상은 했지만, 과연 튜토리얼 때와 마찬가지로 탑에서도 큰일을 저지르고 다니는 모양이다.

그런데 그걸로 넘어가기에는 서류의 양이 너무 많았다.

이에 남자가 한숨을 내쉬더니 다음 사건을 소개해 주었다.

"자른 자잘한 것들도 많지만. 가장 중요한 건, 그 플레이어가 타뷸라의 늑대를 사냥했다는 거네."

"타뷸라의 늑대 말입니까? 그건 분명!"

"그래, 플레이어들이 쉼터에서 머무르지 않고 시련에 도전하게 하기 위한 강제 요소였지."

"그럼 지금 쉼터의 플레이어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당연히 아직까지 멀쩡히 남아 있네. 안 그래도 이것 때문에 상부에 올라갔다 오는 길이네. 얼른 새로운 강제 요소를 만들라더군."

"...고생하십니다."

"하하! 고생은 무슨! 괜찮다네. 그보다...."

남자가 조용히 다가와 튜닝의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이에, 튜닝은 다른 감정보다 소름이 끼칠 정도의 불길함이 가장 먼저 느껴졌다.

"자네가 더 고생이지. 딱 봐도, 그 플레이어가 벌일 일이 한두 개가 아닐 것 같은데 말이야."

"하하, 저 나름 튜토리얼 총책임자 출신입니다. 업무는 자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혼자서 그 많은 일을 처리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네? 혼자라니요. 전담팀에 직원들이...."

"자네, 몰랐나? 특별 전담팀은 일인으로 구성되어 있다네."

철렁.

남자의 말을 들은 튜닝의 가슴이 크게 내려앉았다.

이럴 수가.

어쩐지, 공적치 랭킹 보상을 초과 지급한 건에 대해서 아무런 얘기도 없더니.

"크흠. 말이 좋아 팀장이지, 혼자서 한 팀이 할 일을 전부 떠맡은 거나 다름없지."

자신을 전담팀에 혼자 배정한 것 자체가 어지간한 벌 이상으로 강한 형별이었다.

튜닝이 정신을 못 차리고 있자, 남자가 튜닝이 들고 있던 서류 위에 한 더미의 서류를 더 올리며 등을 다독여주었다.

"힘내게. 듣기로는 생각 이상으로 많은 성좌분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다니까 말이야."

남자가 튜닝이 든 서류 더미 위로 커피 한 캔을 조용히 올려두었다.

제 100화

100. 제100화

-2층의 시련에 도전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주제 : 강 건너기

-시간 제한 : 5시간

솨아아-

빛이 사라지자, 눈앞에 시원한 강줄기가 드러났다.

서른 명이 넘는 클랜원들이 전부 보이지 않았음에도 세운은 당황하지 않았다.

'전이랑 똑같네.'

반대편 땅이 간신히 보일 정도로 폭이 넓은 강. 그 사이로 크고 작은 돌다리가 듬성듬성 드러나 있었다.

주제에 적힌 것처럼, 2층의 시련은 그저 이 강을 건너 반대편에 도착하기만 하면 되는 아주 간단한 것이었다.

'가 볼까.'

시련의 내용에 대해 알고 있으니, 세운은 망설임 없이 첫 번째 돌다리에 발을 디뎠다.

물기 때문에 제법 미끄러웠지만, 단단하게 박혀 있는지 흔들림이 없어 꽤 안정적인 바위였다.

탓, 탓.

보법을 활용할 필요도 없이 가볍게 발을 옮겼다.

안쪽으로 이동할수록 강의 물줄기가 빠르게 느껴졌다.

물줄기가 빨라지니, 물결이 바위와 부딪히며 시원한 물보라를 일으켰다.

'슬슬 나올 때가 됐는데.'

세운이 경쾌한 발걸음을 멈추고 뒤랑달을 뽑아 들자, 거친 물결 사이로 생명체 하나가 뛰어올랐다.

피라냐를 닮아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물고기였는데, 실제 피라냐의 2배에 달하는 크기였다.

크기가 커진 만큼 이빨 역시 더욱 컸기에, 그 모습은 꽤나 위협적이었지만.

서걱-

세운이 가볍게 휘두른 검에, 쩍 벌린 입을 닫지도 못한 채 반으로 썰려 나갔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신선한 물고기는 언제든 환영이라며 피라냐를 뼈째로 오독오독 씹어 삼킵니다.

단지 이것만이라면 너무 쉬운 시련이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이건 맛보기일 뿐이었다.

파바바밧!

순간, 한없이 푸르던 물길이 어두워지며 수십 마리의 피라냐가 뛰어올랐다.

그리 빠른 속도는 아니었지만, 지금 서 있는 곳은 좁은 돌다리 위였다. 피하기도 어렵고, 공격 자세를 잡기도 어려웠다.

이게 바로 2층 시련의 진정한 위험성.

세운은 이미 알고 있었기에 곧바로 반응했지만, 다른 플레이어들은 갑작스레 들이닥친 피라냐의 습격에 당황하고 말 것이다.

서거거걱-

수십 마리의 피라냐가 닥쳐옴에도, 세운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가만히 선 그대로 검을 휘두를 뿐.

그 당당한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강의 흐름을 역행하면서까지 닥쳐온 피라냐들이 세운의 등 뒤를 노렸다.

검이 아무리 빠르다고 하여도, 그것들을 모두 한 번에 막아낼 수는 없는 노릇.

그 순간, 잠잠하던 세운의 서클이 팽팽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흑탑의 묘리에 따라 '라이트닝 웨이브'의 위력이 강화됩니다.

파지지직!

검은빛의 뇌전이 세운을 중심으로 퍼져 나갔다.

피라냐들은 몸에 물기를 듬뿍 묻힌 상태였기에, 전기에 대한 피해가 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놈들이 위협적인 점은 무리를 지어 다닌다는 점과 지형적인 이점일 뿐. 각각의 전투력은 그리 크지 않은 편이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후두두둑-

전기에 감전당한 피라냐들이 입을 벌린 그대로 타들어 가며 물속으로 떨어졌다.

녀석들이 흘러가기 전에, 세운이 팔을 내뻗어 폭식의 권능을 일으켰다.

-'샤프 피라냐'를 포식하였습니다.

-양분을 흡수하여 민첩이 2 상승합니다.

-양분을 흡수하여 민첩이 0.2 상승합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잘 구워진 피라냐를 한입에 물더니 살만 발라낸 채 뼈만 쏙 빼냅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특히 이 눈알이 별미라며 맛을 깊이 음미합니다.

라이트닝 웨이브는 광역기인만큼 주변의 피라냐들을 한 번에 휩쓸었다.

적이 사라지자, 검을 돌려 넣은 세운이 클랜챗을 열어 짧은 글을 적어넣었다.

[20번째 돌다리 부근에서 피라냐 출현. 주의 바람.]

마음 같아서는 미리 알려주고 싶었지만, 회귀를 밝히지 않는 이상 너무 일찍 밝힐 수는 없었다.

그러니 일부러 피라냐들에게 당하고 난 뒤에야 채팅을 입력한 것이다.

세운이 뒤이어 돌다리를 빠르게 건너던 중, 잠잠했던 클랜챗이 활발하게 흘러갔다.

[백현 : 아, 조금만 더 늦게 봤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한아름 : 혈랑 오빠, 고마워요!]

[한다운 : 와, 임시벽 미리 안 만들어 놨으면 위험할 뻔!]

[박정필 : 형니이이이임!]

저마다 방식은 달라도, 어떻게든 이겨내고 있는 모양이다.

하긴, 세운의 활약 때문에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지 다들 어엿한 플레이어였으니까.

고작 2층의 시련에서 무너질 리가 없었다.

-흑탑의 묘리에 따라 '라이트닝 웨이브'의 위력이 강화됩니다.

파지지직!

그 뒤로도 몇 차례나 피라냐의 기습이 일어났지만, 세운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동족의 죽음에 위협을 느낀 것인지 피라냐의 기습이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생각보다 긴 돌다리를 빠르게 건너던 중, 세운이 돌연 움직임을 멈추었다.

'이쯤이었나.'

회귀 전의 세운 역시 같은 시련을 도전하며, 여정의 지침표가 발동했던 적이 있었다. 물론, 당시에는 피라냐의 기습에 쫓겨 도망치느라 바빠 미처 확인도 하지 못했었지.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세운이 당시의 기억을 최대한 떠올리며 돌다리를 하나하나 관찰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던 중.

"찾았다."

여정의 지침표가 반응했을 때에 밟았던 돌다리를 찾아낼 수 있었다.

숨 가쁘게 도망치던 사이에 겪은 찰나의 히든 피스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냐고?

간단했다. 여정의 지침표가 가리켰던 바위는 다른 바위들과 달리 불안정한 바위였기 때문이다.

고작 사람 하나가 올라탔을 뿐인데 휘청일 정도로.

다만, 문제는 이게 어떤 히든 피스인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파지직!

주변에 전류를 흘려 보았지만, 특별한 반응은 나타나지 않았다.

정신을 집중해 보거나, 서칭 마법을 사용해 보아도 별다른 이상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 기억이 잘못된 건가 의심해 봤지만, 피라냐를 피해 달리다 돌다리 하나가 휘청였던 기억은 머릿속에 선명했다.

그 휘청임 때문에, 당시에는 생사의 갈림길을 겪었으니까.

고민을 이어가던 세운의 머릿속에 속담 하나가 떠올랐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라였던가.'

지금의 상황과 어울리는 속담은 아니지만, 뭐 어떤가? 일단 시도하면 될 일이다.

어차피 이전에 사용했던 '인어의 아가미' 덕분에 물속에서도 숨을 쉴 수 있으니, 정 안 되면 물에 들어가 확인해 보면 된다.

물살이 빠르긴 하지만, '머맨의 지느러미'까지 사용하면 충분히 견딜 수 있어 보였다.

'이거면 되겠지.'

세운이 아공간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무기 중 하나를 꺼내 들었다.

망치. 아니, 일반적인 망치보다 훨씬 위협적으로 생긴 배틀 해머였다.

다른 무기였다면 마몬의 보물 중에서 망치의 사용법과 관계된 무공서라도 찾아봤겠지만, 지금은 그런 기술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망치를 머리 뒤로 넘기며, 숨을 들이마신 후.

"흡!"

힘껏 내려치면 그만이다.

까아아앙!

바위를 내려찍자마자, 망치 머리에서 일어난 진동이 손잡이를 타고 흘러들어 왔다.

충격이 꽤 컸는지, 손바닥이 얼얼해 올 지경이다.

그러나, 충격이 큰 건 세운만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휘청이던 바위는 큰 충격을 견뎌내지 못하고 위태로울 정도로 흔들리고 있었다.

세운이 다급하게 뛰어올라 앞의 돌다리로 이동하였다.

'이게 아닌가?'

역시 강바닥으로 잠수를 해야 하는지 고민할 무렵. 바위의 흔들림과의 별개로, 바위의 옆에서 거대한 파동이 일어났다.

콰아아아!

물보라가 높이 일어나며, 거대한 생명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물고기 특유의 비늘 하나 없이 매끄러워 보이는 피부와 입가에 달린 두 쌍의 수염, 옆으로 찢어진 큰 입까지.

몬스터의 형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세운은 놈과 비슷한 동물을 지구에서 본 적이 있었다.

"메기?"

주로 저수지나 호수 등에서 서식한다고 알려진 대형 어류인 메기.

지구와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상상 이상으로 덩치가 거대했다는 것이다.

쩍 벌린 입이 얼마나 커다란지 돌다리 하나쯤은 가뿐히 삼킬 수 있어 보일 정도였는데.

"꿔어어어!"

"미친."

타앗!

놈은 이 어처구니없는 상상을 지켜내며, 세운이 서 있던 돌다리를 한입에 꿀꺽 삼켰다.

조금만 늦게 움직였다면, 돌다리와 함께 메기의 배 속으로 들어갈 뻔했다.

-흑탑의 묘리에 따라 '라이트닝 스피어'의 위력이 강화됩니다.

녀석이 과거에 여정의 지침표가 가리켰던 히든 피스라는 것을 깨달은 세운이 즉시 마법을 일으켰다.

상대해 본 적이 없는 몬스터였지만, 물에 사는 몬스터들은 기본적으로 전기 마법에 약하다.

그 커다란 돌다리를 삼켜놓고 아무렇지 않은 듯 머리를 드러내는 놈을 향해 뇌창을 내던졌다.

파직!

치지익....

"꿔어어어?"

그러나 결과는 세운의 예상과 달랐다.

라이트닝 스피어가 녀석의 머리에 닿자마자 검은 피부를 타고 흐르더니 주변으로 흘러나간 것이다.

피해가 분산된 건 그렇다 쳐도, 당장 뇌창을 이마에 직격으로 맞은 녀석은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세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기가 안 통해?"

"꿔어어!"

물고기가 원래 저런 소리를 내던가?

녀석이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세운이 올라 있는 돌다리를 처박았다.

그 단단하던 돌다리가 단숨에 휘청이며 강가로 기울어졌다.

'이거, 잠수했으면 조금 위험했겠는데.'

녀석은 이 거친 물살에도 멀쩡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반면에, 세운이라고 하여도 이 물살 속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전기도 통하지 않았으니, 싸울 생각이면 불편하더라도 돌다리 위에서 싸우는 게 정답이었다.

"꿔어어!"

녀석이 다시 한번 크게 뛰어오르며 입을 쩍 벌렸다. 세운과 함께 돌다리를 집어삼킬 생각이었다.

이에 세운은 피하지 않고 뒤랑달을 꺼내 쥐었다.

'전기가 통하지 않는다면.'

검으로 베어내면 그만이다.

-내공을 통해 혈랑검법의 제이 초식, 혈랑아(血狼牙)가 강화됩니다.

-파극심공의 묘리에 따라 무공의 위력이 강화됩니다.

서걱!

녀석과 부딪히기 직전,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뒤로 점프하며 검을 횡으로 휘두른다.

뇌창을 맞고도 그을음 하나 나지 않았던 녀석의 매끄러운 가죽이 부드럽게 갈라진다.

피부가 얼마나 두꺼운지 큰 상처를 입힌 것 같지는 않았지만, 이것으로 녀석의 약점을 확실히 알아낼 수 있었다.

"꿔어, 어어어!"

다만, 놈이 멍청해 보이긴 해도 완전히 바보는 아니었다.

세운의 검이 위협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녀석이 멀찍이 자리를 벌리더니 입을 크게 벌렸다.

곧이어.

꿀렁!

"진짜 별 공격을 다 하네."

입에서 갈색의 진흙더미를 내뱉었다.

집어삼킨 바위를 이용하여 만들어낸 진흙 같은데, 도저히 원리를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러나 원리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녀석이 뱉어낸 진흙의 양이 얼마나 많은지 태양을 다 가릴 정도였으니까.

세운이 다급하게 돌다리를 몇 개나 이동하고서야, 간신히 진흙의 범위를 피해 낼 수 있었다.

"꿔어어어!"

놈이 어류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거슬리게 울어댔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앞으로도 가까이 다가오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럼 거기 있든가."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윈드 커터(Wind cutter) ]

- 날카로운 바람의 칼날을 만들어 내는 녹탑의 공격 마법. 그 절삭력은 동급의 모든 마법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다.

"...꿔?"

세운의 손끝에서 녹색 바람이 압축되기 시작했다.

제 101화

101. 제101화

-흑탑의 묘리에 따라 '윈드 커터'의 위력이 강화됩니다.

쐐애액!

날카롭게 벼려진 검은 바람이 날아간다.

바람 마법답게 속도도 매우 빨라, 메기 모습의 몬스터는 피하지도 못하고 멍한 모습으로 공격에 적중당했다.

뒤랑달로 베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녀석의 몸에 기다란 자상이 생겨났고, 당황한 듯 다급하게 물속으로 숨어든다.

'역시 5 서클인가.'

3 서클일 때 마법을 사용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감각이었다.

저서클의 마법을 사용하더라도 속도나 위력, 범위 등 모든 게 강해졌다.

그리고 깨달은 점이 하나 있었다.

'위력이 강화되긴 했어도 흑탑의 묘리와 바람 마법은 상성이 별로 안 좋다.'

위력을 강화해 주는 뛰어난 특성 탓에, 세운은 대부분의 마법에 흑탑의 묘리를 적용하는 편이다.

그러나 본격적인 바람 속성 공격 마법을 사용하니 생각이 달라졌다.

바람 마법은 속도나 절삭력 말고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엄청난 강점이 있다. 그런데 흑탑의 묘리가 적용되니, 바람이 검은빛을 띠며 그 장점이 사라진 것이다.

마법에 따라, 적용하는 묘리 역시 달라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부르륵!

수면 위로 공기 방울이 한차례 떠 오르더니, 거친 물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녀석이 물속에서 진흙 대신 물을 쏘아낸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세운이 서 있던 돌다리를 머리로 박아 무너트렸다.

덕분에 세운은 별다른 공격도 하지 못한 채 몇 번이나 돌다리를 옮겨야만 했다.

'나올 생각이 없는 모양인데.'

근거리도, 원거리도 위험함을 깨닫고는 아예 수면 아래에서만 공격을 이어갈 생각인가 보다.

멍청해 보이는 얼굴과는 다르게, 꽤 현명한 선택이었다.

다른 플레이어라면 더 이상은 무리라며 내뺐겠지만, 세운은 달랐다.

'이렇게 된 거, 마법이나 실컷 사용해 봐야지.'

안 그래도 5 서클을 달성한 이후 마법을 제대로 사용해 본 적이 없어서 근질근질한 참이었다.

마법의 특성상, 타뷸라의 늑대를 상대할 때는 사용하기가 애매했으니까.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아쿠아 필러(Aqua pillar) ]

- 청탑의 수류계 마법으로써 물로 이루어진 거대한 원기둥을 소환한다. 매개체가 있으면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방어 마법인 아쿠아 월과는 다르게, 적의 발아래에 물의 원기둥을 치솟게 하는 공격 마법인 아쿠아 필러.

세운의 손에서 푸른 마나가 모여들며 사용 준비가 끝났다.

남은 건 녀석의 위치.

'속도 자체는 그리 빠르지 않아.'

정신을 집중한다.

아까는 느끼지 못했지만, 녀석이 활동을 시작한 지금은 그 기척이 선명하게 느껴진다.

강바닥을 느긋하게 오가던 녀석이 다시 한번 물줄기를 뿜어내기 위해 자리에서 멈추는 순간, 세운의 손에서 대기 중이던 푸른 마나가 강으로 빠져들었다.

콰아아앗!

"꿔어어어?"

세운에게 뿜어낼 물줄기를 한껏 들이켰던 녀석이 볼록한 배를 자랑하며 수면 위로 떠 오른다.

물기둥이 얼마나 강력했던지, 강바닥에서부터 녀석을 수면 위로 들어 올린 것이다.

세운이 아무리 5 서클에 도달했다고는 하나, 생각 이상으로 강한 이유는 지형적 이점 때문이다.

'물가에서 물 속성 마법사랑 싸우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다지.'

세운은 탐욕의 권능 덕분에 다양한 속성의 마법을 구사하고 있다지만, 마법사는 대부분 한두 개의 주 속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속성에 걸맞은 필드에서 싸울수록 위력이 강해진다.

물 속성 마법사는 강과 바다.

불 속성 마법사는 사막과 화산.

땅 속성 마법사는 황야나 바위산.

그 때문에, 세운이 사용한 아쿠아 필러의 위력 역시 강이라는 매개체의 힘을 이어받아 이만한 힘을 발휘한 것이다.

녀석이 버둥거리며 물기둥 위에서 탈출하려는 찰나, 세운이 물기둥을 유지하며 반대쪽 손을 들어 올렸다.

-녹탑의 묘리에 따라 '윈드 커터'의 속도가 빨라집니다.

서거걱!

"꿔억!"

조금 전에 깨달은 점을 바로 떠올리며, 바람 마법에 녹탑의 묘리를 적용했다.

그러자 투명한 바람이 날카로운 절삭음을 자랑하며 날아간다.

바람 마법에 녹탑의 묘리.

같은 속성의 묘리를 적용한 덕분인지, 그 위력은 흑탑의 묘리를 적용했을 때에 못지않게 강력했다.

'그래도 공격력 자체가 그리 강하진 않으니....'

녀석은 뒤랑달로 베었을 때도 치명상을 받지 않을 정도로 피부가 두꺼웠다.

윈드 커터가 예리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뒤랑달보다 깊은 상처를 내지는 못했다.

그 때문에 세운이 계획을 바꾸었다.

-청탑의 묘리에 따라 '아쿠아 필러'의 안정성이 강화됩니다.

안정성이 높아진다는 의미는 그만큼 마법의 활용도를 높일 수 있다는 뜻이었다.

세운이 물기둥을 향해 뻗었던 손을 몸쪽으로 끌어당겼다. 마치 물기둥을 잡아당기듯이.

그러자 수직으로 솟구치던 물기둥이 부드럽게 휘어지며 위에서 첨벙이던 메기를 세운의 방향으로 밀쳐냈다.

"꿔어, 어어어!"

허공에 떠 오른 놈이 온 힘을 다해 몸을 파닥인다.

그러나 물고기가 지느러미를 아무리 열심히 파닥여도 하늘을 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세운은 날아오는 녀석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자세를 낮게 기울였고.

최후의 발악인 듯이 입을 크게 벌리며 떨어지는 녀석을 향해.

-내공을 통해 혈랑검법의 제삼 초식, 혈랑습격(血狼襲擊)이 강화됩니다.

-파극심공의 묘리에 따라 무공의 위력이 강화됩니다.

서거걱-!

피의 늑대가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전투가 끝이 났다.

* * *

-히든 퀘스트, '강바닥 메기'를 완료하였습니다.

-시련 '강 건너기'에 추가 점수가 부여됩니다.

-보상으로 '질퍽한 진흙'을 획득하였습니다.

튜토리얼과 마찬가지로 탑의 시련 역시 층마다 랭킹이 존재한다.

다만, 튜토리얼이 해당 참가자들 사이에서 이뤄지는 랭킹이었다면 탑의 랭킹은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를 포함한다.

그렇다면, 그 점수는 어떻게 매겨질까?

간단하다.

기본적인 시련을 얼마나 잘, 얼마나 빨리 성공하느냐. 또한, 시련에 숨겨진 요소를 얼마나 찾아냈느냐.

그 두 가지에 달려 있다.

그러니....

'일단은 얼른 건너가 볼까.'

히든 퀘스트를 완료한 지금, 최대한 빨리 강을 건너야만 했다.

물론, 맹수에게 물어뜯긴 것처럼 거친 상처를 입고 강바닥으로 잠긴 메기에게 폭식의 권능을 사용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강바닥 메기'를 포식하였습니다.

-양분을 흡수하여 체력이 8 상승합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여름에는 이만한 보양식이 또 없다며 입을 크게 벌립니다.

권능을 사용할 때마다 신나하는 베엘제붑을 보고 있자니 이제는 귀엽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세운은 무공까지 사용하며 돌다리를 빠르게 뛰어다녔다.

중간중간 피라냐들이 무리 지어 이빨을 드러냈지만, 2층의 시련에서 라이트닝 웨이브를 버텨내는 피라냐는 존재하지 않았다.

애초에 여기까지 속도를 내지 않았던 건 히든 피스를 찾아내기 위함이었다.

메기 사냥에 성공한 지금, 속도를 늦출 필요는 없었다.

바람이 세운의 머리칼을 휘날리며, 물살이 점점 약해졌다.

그 먼 거리가 순식간에 줄어들며,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반대편 땅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2층의 시련 '강 건너기'를 훌륭하게 완수하였습니다.

-공적치 집계 중....

-남은 시간 : 4시간 33분

-사냥한 피라냐의 수 211 마리.

-히든 퀘스트 '강바닥 메기' 완료.

-총 누적 공적치 200,200point

-축하드립니다! 2층의 시련을 랭킹 1위로 통과하였습니다.

-보상으로 100,000point를 획득하였습니다.

'다행이네.'

예상대로 랭킹 1위를 획득할 수 있었다.

27분이나 걸리긴 했지만, 아무래도 히든 퀘스트의 가산점이 생각 이상으로 컸나 보다.

이런 초반부의 시련에서 제대로 된 힌트도 없는 히든 퀘스트를 찾아내는 플레이어는 없다시피 했으니까.

잠시 숨을 돌리며 랭킹 순위를 확인해 보자, 2위와의 공적치 차이는 불과 200point.

피라냐 몇 마리를 놓쳤다면 2등으로 그칠 뻔했다.

랭킹을 쭉 내리다 보니, 4위에 익숙한 이름이 보였다.

'리엘 리프레인.'

쉼터에서 모습이 안 보인다 싶었더니, 휴식도 없이 바로 다음 시련에 도전했나 보다.

그녀의 능력을 생각해 봤을 때 빠른 속도는 물론 피라냐들도 쉽게 쓰러트렸겠지만... 히든 퀘스트의 가산점이 너무 컸다.

뭐, 그래도 세운이 1등을 차지하지 않았다면 3위였을 테니까 나쁜 순위는 아니다.

탑에 존재하는 수많은 괴물 같은 플레이어들의 업적 사이에서 3위에 이름을 올린 건 분명 대단한 일이니까.

'다른 사람들은....'

클랜챗이 조용한 것을 보니 아직 아무도 도착하지 못한 듯했다.

하긴, 세운이야 메기를 사냥하고서도 27분밖에 안 걸렸다지만 다른 사람들은 피라냐를 상대하기도 벅찰 것이다.

그리 생각하며 세운은 메기에게 얻은 아이템을 확인해 보았다.

[ 질퍽한 진흙 ]

분류 : 소모품

등급 : C-

설명 : 강바닥 메기가 오랜 시간 동안 머금고 있던 진흙.

능력 : 1. 1회에 한해 무기의 내구도 소모를 0으로 한다.

"오?"

기대하지 않았는데, 생각 이상으로 쓸 만한 보상이었다.

물론, 다른 플레이어였다면 이런 걸 어디에 쓰냐며 고개를 저었겠지만, 세운은 탐욕의 권능을 사용하며 벌써 열 개에 달하는 무리를 소모해왔다.

그런 세운에게 내구도 소모의 억제 능력은 무척이나 쓸 만해 보였다.

이에 감탄하는 사이, 클랜챗이 반짝이는 게 보였다.

[유서아 : 혹시 도착하신 분 계신가요?]

과연, 유서아.

이제 겨우 40분 정도밖에 안 지났는데, 벌써 2층의 시련을 통과한 모양이다.

'하긴, 유서아라면 피라냐를 피하기도 쉬웠을 테니까.'

세운을 제외하면 클랜에서 가장 빠른 속도와 현란한 보법을 자랑하는 그녀였으니 '강 건너기'는 그리 어려운 시련이 아니었을 거다.

[강한철 : 도착했다.]

[박정필 : 아니, 이것들은 무슨 눈이 벌게져 가지고 끝까지 쫓아오네! 뒤질 뻔했잖아!]

[한아름 : 엥? 난 안 그랬는데.]

[김소희 : 식재료를 모으느라 조금 늦었어요! 다음에 모이면 생선구이를 해 드릴게요. 분명 맛있을 거예요!]

'다음이라....'

탑의 1층이 굳이 쉼터의 모습인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일단 시련을 시작하면, 멈추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쉼터는 10층마다 존재하고, 그전에는 하나의 테마가 끝나야만 모이는 게 가능하다.

그마저도 클랜이나 길드가 있을 때만 해당 구역으로 이동하는 게 가능한 수준이다.

물론, 탑을 오르다 보면 소모 아이템을 구입하여 직전의 쉼터로 되돌아갈 수 있지만, 이제야 2층의 시련을 완료한 세운과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한 얘기였다.

'탈락자는 없나 보네.'

쌍둥이 자매나 고창석처럼 전투계가 아닌 이들을 조금 걱정했지만, 생각보다 쉽게 시련을 통과하고 있었다.

튜토리얼 때 강하게 나간 보람이 느껴졌다.

'그럼 바로 이동해 볼까.'

짧은 휴식을 마친 세운이 바로 다음 층을 선택하였다.

-3층의 시련에 도전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러자 반짝이는 빛과 함께 강 반대편에 희미하게 보였던 거대한 산맥이 더욱 선명해졌다.

제 102화

102. 제102화

-3층의 시련에 도전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주제 : 산 오르기

-시간 제한 : 8시간

탑의 시련은 여러 개의 테마로 구성되어 있었다.

예를 들면 2층에서 강을 건너고, 3층에서 산을 오르는 것처럼 필드가 이어지는 것처럼.

쉼터와 쉼터 사이에 열 개의 시련이 있는데, 층마다 테마가 떨어져 있는 곳도 있었고 테마가 이어져 있는 층도 있었다.

게다가 몇몇 층은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기로가 갈리기도 한다.

그 때문에 시련이 단순히 탑의 내부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닌 다른 차원과 연결된 게 아니냐는 말도 있었다.

물론, 그 진위는 시스템만이 알고 있겠지만 말이다.

타앗!

시련이 시작되자마자, 세운이 빠르게 발을 옮겼다.

3층의 시련, 산 오르기.

플레이어의 지구력과 인내력, 위기 판단 능력 등. 튜토리얼에서 얻은 힘과 경험, 지식을 모두 활용하여야만 공략할 수 있는 시련이었다.

'회귀 전에는 그냥 오르기만으로도 숨이 벅찼었지.'

45도에 달하는 경사.

단순히 등반할 생각으로 걷기만 하더라도 시간 제한을 생각하면 숨이 턱 막히는 곳이었다.

게다가 이전의 시련과 마찬가지로 3층의 시련 역시 플레이어를 안전하게 놔두지 않았다.

"쿠오오!"

집채만 한 곰이 나타나 앞발을 휘두르기도 하고.

"크르릉!"

수풀 속에 숨어 있던 맹수가 갑작스레 튀어나와 기습을 해 오기도 한다.

물론....

-내공을 통해 혈랑검법의 제이 초식, 혈랑아(血狼牙)가 강화됩니다.

서걱-

세운에게는 큰 위협이 되지 않았다.

튜토리얼을 지나친 시점에서, 세운의 무력은 이미 탑의 하층 수준을 가뿐하게 뛰어넘었으니까.

그나마 상대할 맛도 안 나는 몬스터를 처치하며 가는 이유는 공적치와 더불어 베엘제붑의 배를 채워주기 위함이었다.

다만, 이번에도 세운은 평범하게 산을 오르지 않았다.

회귀 전, 몬스터를 피해 산을 오르며 여정의 지침표를 통해 발견한 히든 피스인 '나무'를 찾아내야 했으니까.

"찾았다."

세운이 조그만 나무 앞에 다가섰다.

나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게, 1m 남짓한 크기에 두께도 앙상해서 툭 치면 부러질 것만 같았다.

회귀 전에 여정의 지침표로 이 나무를 발견하고도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던 기억났다.

하지만, 지금은 알 수 있었다.

마나 서칭을 사용하자 주위의 마나 흐름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마나가 필요한 거였구나.'

이 나무는 주변의 마나를 흡수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변의 마나가 너무나도 미약한 탓에, 제대로 성장하지 못해 이런 모습인 거였다.

즉, 마나만 제대로 공급해 준다면 나무는 본연의 모습으로 성장할 것이다.

우우웅!

세운이 마나를 밀어 넣자, 나무의 앙상한 가지가 바들바들 떨려왔다.

시작은 천천히.

나무의 진동이 가라앉을수록, 더욱 많은 양의 마나를 밀어 넣었다.

뿌리가 넓어지는 것인지 아래에서 '뿌득'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곧이어 눈에 보이는 부분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우드득!

나무 기둥이 굵어지고, 더욱 많은 가지가 자라난다.

공허하던 나뭇가지의 표면에서 푸른 나뭇잎이 자라나자, 어느덧 세운의 키보다 커진 나무가 세운의 머리 위로 그늘을 만들어 냈다.

'소모된 마나는... 대략 2 서클 수준인가.'

3층의 시련에서 2 서클 수준의 마나를 요하는 히든 퀘스트라니.

뭐, 그래도 아예 성공할 수 없는 퀘스트는 아니었다.

마나가 적더라도 시간을 들여 마나를 회복하고 공급하기를 반복한다면 충분히 나무를 성장시킬 수 있을 테니까.

게다가, 플레이어 중에서는 엘프나 요정처럼 마나에게 축복받은 이들도 여럿 존재한다. 그들이라면 2 서클에 도달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나무를 성장시킬 수 있었을 거다.

다만, 의아한 점이 하나 있었다.

'이거, 언제 멈춰야 하는 거야?'

분명 성장은 끝난 것 같은데, 나무는 여전히 세운의 마나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이대로 멈춰야 하나 고민하던 중, 나뭇잎 사이로 작은 열매 하나가 보였다.

'저건?'

평범한 열매가 아니었다. 마나를 밀어 넣을수록, 열매의 크기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어쩌면 저게 이 히든 퀘스트의 보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끝까지 해 봐야지.'

세운이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마나를 나무에 밀어 넣었다.

다섯 개의 서클이 팽팽히 회전하자, 주위의 마나가 반응하여 함께 일렁였다.

길고 긴 탑의 역사 속에서도 3층의 시련에 5 서클 마법사가 등장한 적은 없었다.

엘프나 요정이라 하여도 이 정도의 마나를 밀어 넣을 수는 없을 터.

끝없이 밀려오는 마나의 파도에, 나무가 기쁜 듯이 나뭇잎을 살랑였다.

'설마 5 서클의 마나로도 부족한 건가?'

벌써 네 번째 서클의 마나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열매가 어느 정도 성장하긴 했지만, 푸른빛이 도는 게 아직 완벽하게 익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탐욕(眞)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세계수의 이슬 ]

- 한 달에 한 번, 안개가 가장 자욱해진 날에만 맺힌다는 세계수의 이슬. 방대한 양의 마나를 머금고 있어 엘프의 성인식에 사용된다.

세운이 다급하게 탐욕의 권능을 개방하였다.

얼마 전의 계약으로 허락된 마몬이 소유하고 있는 보물이었다.

꿀꺽, 꿀꺽!

마나가 끊기기 전에, 세계수의 이슬을 한입에 들이켰다.

지금까지 마셔온 청량감 넘치는 포션들과는 달리, 목에 들러붙는 듯한 진한 이물감이 느껴졌다.

이슬에 농축된 마나가 그만큼이나 진하다는 증거였다.

우우웅!

이슬을 마시자마자, 텅 비어 가던 서클에 새로운 마나가 빠르게 차올랐다.

차오른 마나는 다시금 나무에게 흡수되었다.

그러길 얼마나 지났을까?

다섯 개의 서클은 물론, 세계수의 이슬로 회복되던 마나 역시 모두 바닥을 보였고, 심지어 단전의 내공마저 마나로 변환하여 나무에 모두 투자했다.

몸에 마나가 텅텅 비어 현기증이 일어날 무렵에야....

-히든 퀘스트, '메마른 나무'를 완료하였습니다.

-시련 '산 오르기'에 추가 점수가 부여됩니다.

-보상으로 '농익은 나무 열매'를 획득하였습니다.

마침내, 과실이 붉게 물들며 히든 퀘스트에 끝이 났다.

털썩.

"하...."

세운은 아득한 현기증을 느끼며 자리에서 쓰러졌다.

이게 대체 무슨 생각으로 만든 퀘스트란 말인가?

5 서클의 마나와 일 갑자에 해당하는 내공, 거기에 탐욕의 권능까지 사용하여 회복한 마나까지....

그 모든 걸 바치고 나서야 과실이 농익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적인 퀘스트가 아니었다.

솔직히 마나의 축복을 받은 존재라는 드래곤이나, 프레이야와 계약하여 풍요의 축복을 받은 리엘이 아니라면 불가능해 보이는 퀘스트였다.

"시간이고 뭐고, 좀 쉬다가 가야겠네."

급격한 마나 소모로 인한 현기증.

그나마 청탑의 수련법이나 삼재공이 가진 뛰어난 안정성 덕분에 마나 역류를 억제할 수 있었다.

산중의 맑은 공기를 들이쉬며, 보상으로 얻은 열매를 확인해 보았다.

[ 농익은 나무 열매 ]

분류 : 영약

등급 : C+

설명 : 정체 모를 나무가 엄청난 양의 마나를 극도로 농축시켜 만들어 낸 열매.

능력 : 1. 마나의 정수 – 섭취 시, 마나의 흡수량이 대폭 상승한다.

'또 영약이라니.'

설명만 다를 뿐, 열매의 능력은 쉼터에서 얻었던 '반짝이는 열매'와 같았다.

그러나 과정 자체에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반짝이는 동산에서 얻은 열매는 나무가 동산의 마나를 오랜 시간 동안 흡수하여 얻은 결정체.

즉, 수많은 플레이어 중에서도 그 퀘스트를 발견한 한 명만이 얻을 수 있는 보상이었다.

반대로 이 나무 열매는 개별 시련에서 발견한 퀘스트였기에, 능력만 된다면 누구나 획득할 수 있었다.

물론....

'어지간한 플레이어는 알면서도 못 얻을 테지만.'

회귀 전의 세운이 그랬던 것처럼, 이 정도의 열매를 획득한 플레이어는 없다시피 하겠지만 말이다.

'이건 나중에 단전을 쌓을 때 써야겠어.'

무공과 마법을 동시에 사용하는 세운이었기에, 단전과 서클의 수준을 맞출 필요가 있었다.

한쪽이 지나치게 강하거나 약하면 다른 한쪽을 찍어 눌러 흡수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 갑자의 내공은 분명 대단한 수치지만, 심장을 둘러싼 다섯 개의 서클에 비하면 균형이 맞지 않는 수치였다.

이번 테마가 끝나고 휴식 시간을 가지게 되면 심법을 수련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 다시 가 볼까?"

적당히 기운을 회복하자마자 세운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차피 휴식은 시련이 끝나고 해도 충분하다.

움직일 수 있는 최소한의 기력만 남아 있으면, 우선 시련부터 끝내는 게 정답이다.

* * *

타앗!

산에 올라갈수록 장애물이 많아졌다.

각종 짐승 형 몬스터의 공격이 이어지고, 까마득한 절벽이 길을 막아섰다.

하지만, 세운은 굳이 길을 돌아가지 않았다. 몬스터야 별 위협이 되지 않았고, 절벽을 등반하는 것 정도야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으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내공이 차오른 덕에, 지치기는커녕 오히려 산을 오를수록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3층의 시련 '산 오르기'를 훌륭하게 완수하였습니다.

-공적치 집계 중....

-남은 시간 : 7시간 02분

-사냥한 몬스터의 수 29 마리.

-히든 퀘스트 '메마른 나무' 완료.

-총 누적 공적치 195,100point

-축하드립니다! 3층의 시련을 랭킹 3위로 통과하였습니다.

-보상으로 30,000point를 획득하였습니다.

최종 목적지인 동굴의 입구에 도착하며, 3층의 시련을 끝낼 수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랭킹 1위를 달성하는 데는 실패했다.

이번 히든 퀘스트는 가산점이 생각 이상으로 높을 거라 생각했는데.

대체 누가 자신의 위에 있는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3층의 랭킹을 열람해 보았다.

-3층 시련 랭킹

[ 1위 : 카샬락카스 211,050point ]

[ 2위 : 리엘 리프레인 208,700point ]

[ 3위 : 정세운 195,100point ]

익숙한 이름 두 개가 떠올랐다.

'리엘.'

리엘이 높은 순위를 차지하는 것 정도는 예상하였다.

그녀는 마나 친화력이 높기로 유명한 엘프 종족이면서, 프레이야에게 풍요의 축복까지 내려받았으니까.

아마 나무의 열매를 가뿐하게 수확하고, 빠르게 산을 올랐을 것이다.

문제는 그 위에 적힌 이름.

'카샬락카스라니....'

워낙 유명했기에 알 수밖에 없는 이름이었다.

그녀는 용종(龍種)으로 탑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플레이어의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은 존재였으니까.

탑의 1층부터 시작해, 한 달도 되지 않아 상층까지 막힘없이 올라 랭커의 자리에 오른 그녀의 얘기는 모르는 플레이어가 없을 지경이었다.

'하긴, 드래곤이라면 당연한 일이지.'

마나의 축복을 받은 드래곤이니 마나의 흐름을 보고 메마른 나무를 찾아 열매를 수확하는 것도, 날개를 펼쳐 정상에 도착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아쉽긴 하지만, 이번 결과는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마나부터 다 회복하고 올라갈까.'

세운이 동굴 앞에서 자세를 잡고 눈을 감았다.

4층의 시련이라 해도 그리 어려울 건 없지만, 기왕이면 완벽한 컨디션으로 도전하는 게 좋았다.

세운의 목적은 단순히 탑을 오르는 게 아니라 해당 층의 히든 피스를 찾아내고 높은 랭킹을 달성하는 것이었으니까.

산의 시원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단전과 서클을 모두 채웠을 때쯤.

[박정필 : 형니이이임! 보고 싶습니다아!]

[이하늘 : 다치신 분은 안 계신가요? 이번에도 모이지 못하고 바로 다음 시련에 들어가나 보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약을 더 만들어 드리는 건데....]

도착한 사람들의 클랜챗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번에 역시 큰 어려움을 겪은 이는 없어 보였다.

시련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디아블로 클랜의 수준이 높은 덕이었다.

'다음 시련이 아마....'

다음 층에 오르기 전, 세운이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1층과 2, 3층이 실력 없이 남의 도움에 의해 탑에 오른 어중이떠중이들을 솎아내기 위해 개인 과제였다면, 다음 층부터는 실력을 인정받은 플레이어 두 명이 함께 진행하는 합동 과제였으니까.

'누가 걸리려나.'

부디 박정필만 걸리지 않길 바라며, 세운이 다음 시련을 향해 나아갔다.

제 103화

103. 제103화

-4층의 시련에 도전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주제 : 동굴 지나기

-시간 제한 : 10시간

-산을 오르는 도중 한 명의 동료와 마주쳤습니다.

-현재 '디아블로 클랜'에 소속 중입니다. 마주친 동료는 클랜 내에서 무작위로 정해집니다.

산을 오르다 마주친 동료. 이건 일종의 스토리다.

어째서 이런 구조로 이뤄져 있는 건지는 몰라도, 탑을 오르다 보면 이러한 스토리를 내주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은 단순히 동료를 마주쳤다 정도지만, 층에 따라서는 시련과 직접적인 관계를 지닌 다양한 스토리를 내주기도 한다.

예를 들면 누군가에게 협력하라든가, 동료를 모으라든가 하는 것들 말이다.

'아마 이 동굴이 산의 정상으로 향하는 유일한 통로라는 설정이었지.'

아무리 험난한 절벽이 나타난다고 하여도 곧장 산의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세운이 알기로 이번 시련에 분기점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물며 종족에 따라 날개가 있는 플레이어라도 네 번째 층에서는 무조건 동굴을 통과해야 할 것이다.

문제는 누가 동료로 걸리느냐인데....

솔직히 시련이야 혼자 해결할 수 있으니 박정필이 걸려서 시끄럽게 굴지만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동굴에 발을 디디자 쨍쨍한 태양이 사라지고, 순식간에 어둠이 들이닥쳤다.

그와 동시에,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거 반갑구먼."

"어르신."

"무작위로 선택된 동료가 자네라니, 나도 운이 꽤 좋은 모양이야."

세운의 옆에서 나타난 플레이어는 바로 디아블로 클랜의 대장장이, 고창석이었다.

이전에 강한철에게 주었던 황금 갑주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풀 플레이트 아머를 착용하고 있었다.

단단해 보이는 전신 갑주와 꼭 필요한 구멍만 뚫려 있는 투구, 섬세하게 만들어진 철제 신발.

손에는 세운이 돌다리를 찍었을 때 사용한 것과 비슷해 보이는 배틀 해머가 들려 있었는데, 방금 막 손질을 끝낸 것인지 표면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허허, 그렇게 빤히 쳐다보니 좀 민망하구먼. 언젠가 스스로 싸워야 할 일도 있을 것 같아서 준비해 둔 장비라네."

"잘 어울리십니다. 올라오시는 데 힘들진 않으셨어요?"

"조금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상대할 만하더군. 오히려 날이 더운 게 가장 힘들 정도였다네."

하긴, 그가 전투 경험은 그리 많지 않더라도 대장장이 일을 하며 근력과 체력은 어지간한 플레이어 이상이었을 거다.

그런 몸으로 저런 장비를 전신에 둘렀으니, 어지간한 몬스터는 그의 몸에 상처도 내기 힘들었을 테지.

저 살벌한 배틀 해머에 당하면 급소고 뭐고 당한 부위가 완전히 찌그러졌을 테니까.

"그나저나, 생각보다 어둡구먼. 조금만 더 들어가면 아예 시야가 안 잡히겠어."

아직 입구 쪽이라 그런지 빛이 조금 흘러들어 오고 있지만, 안쪽은 벽의 윤곽이 전혀 안 보일 지경이었다.

세운이야 '밤 올빼미의 눈'을 통해 시야를 확보하고 있다지만, 다른 플레이어라면 꽤 곤란을 겪을 만한 상황이었다.

이에 작게 고개를 끄덕인 세운이 새로운 마법을 준비하였다.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라이트(Light) ]

- 백탑의 가장 기초적인 빛 마법으로써 출력에 따라 주변의 시야를 밝히거나 적의 시야를 방해하는 응용법이 존재한다.

"오오."

세운의 손에서 하얀 빛무리가 떠올랐다.

1 서클 마법답게 마나도 거의 소모하지 않고, 위치만 지정해 두면 손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어 효율성이 좋은 마법이었다.

빛은 세운의 마나 운용에 따라 머리 위로 떠올라 앞으로 조금 더 나아간 자리에서 멈추었다.

지금부터는 저 빛이 전방에서 먼저 시야를 밝혀 줄 것이다.

"그 마법이라는 건 언제 보아도 신기하구먼."

"앞으로 나아가죠."

"굳이 지켜 주려고 안 해도 된다네. 내 몸 정도는 내가 지킬 수 있으니 말이야."

고창석이 배틀 해머를 꽉 붙들고 세운의 뒤를 따라왔다.

하긴, 하층에 존재하는 몬스터의 공격으로는 그에게 작은 상처도 내기 힘들어 보였다.

기습으로 손톱을 휘둘러봤자, 저 갑옷을 뚫기는커녕 손톱이 부러져 나가고 말 테니까.

"횃불이 있긴 하구먼. 하나 챙길까?"

"횃불보다는 이게 더 효율이 좋으니까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허허, 정말 여러모로 편리해 보인단 말이지. 나도 하나쯤 배워 보고 싶어."

어둠을 뚫고 나가다 급격히 꺾어지는 커브를 돌자 보이는 횃불 하나.

본래라면 벽을 더듬으며 여기까지 이동한 후에 횃불을 들고 이동하는 게 이번 시련의 기본이었다.

그러다 자칫 횃불이 꺼지기라도 하면, 시련의 난이도는 극악으로 치닫는다.

그것이 2층 시련의 도전 인원이 두 명으로 설정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혼자 횃불을 들고 있으면 시련을 진행하는 데 제약이 너무 클 테니 말이다.

"아직 조용하구먼. 앞에 두 시련을 생각하면 여기도 조용히 넘어갈 것 같지는 않은데."

"츠츠츠츳-"

"저놈들도 양반은 아닌 모양이네요."

"음?"

"저기요."

다른 플레이어보다 청각이 강화된 세운에게만 들려오는 소음.

세운의 반응에 고창석이 의아해하자, 라이트를 앞으로 더 이동시키며 밝기를 높였다.

그러자 무언가의 매끄러운 갑각이 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으, 징그럽구먼."

"벌레는 안 좋아하시나요?"

"그런 건 아닌데, 저렇게 큰 노래기를 앞에 두면 전부 같은 반응일 걸세. 자네만 빼고 말이야."

대충 빛에 노출된 다리만 해도 수십 개가 넘어가는 절지동물.

지네와 비슷하지만, 평평한 갑각의 지네와 달리 반원형의 갑각을 토대로 한 둥글둥글한 모습이 특징이었다.

지구에서의 노래기는 그리 공격적인 벌레가 아니겠지만....

"츠츠츠츳-!"

"조심...!"

푹.

이곳에서는 아니다.

세운을 발견하자마자 번들거리는 다리를 뽐내며 빠르게 바닥을 기어 오는 놈의 갑각 사이에 뒤랑달을 꽂아 넣었다.

갑각이 제아무리 두껍다고 해도, 그 사이는 연약한 연부조직일 뿐이다.

길이만 2m가 넘어가는 노래기의 머리가 끊어졌다.

머리가 사라졌음에도 놀란 듯이 꿈틀거리는 놈의 몸통을 외각으로 차 버렸다.

"...괜한 걱정이었구먼. 이거 내가 도울 필요도 없겠어."

"아뇨, 조금 도와주셔야겠는데요?"

"무슨 소리인가?"

"방금 그놈 한 마리가 다는 아닌 것 같거든요."

"츠츠츳-"

"츠츠츠츳-"

수백 개의 다리가 바닥을 기는 스산한 소리와 함께, 수십 마리의 몬스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매끈거리는 놈들의 갑각이 빛에 번들거리는 장면이 꽤 징그러웠다.

이에 고창석은 질색을 하면서도 투구의 안면을 내려쓰고 배틀 해머를 꽉 붙잡았다.

"기껏 손질해 놨더니, 또 더러워지겠구먼."

"츠츠츳-!"

지네들이 딱딱한 갑각을 내세우며 달려들었다.

본래 놈들의 목표는 빛. 즉, 횃불을 들고 있는 플레이어다.

때문에 횃불을 지키기 위해 앞의 플레이어가 다른 플레이어를 지켜야 하는 구조가 정상이었다.

그러나 지금 세운은 횃불 대신 마법을 이용하여 시야를 밝히고 있었다.

그러니 놈들의 공격은 자연스레 가장 앞에 서 있는 세운을 향하였고.

푹.

서걱-

놈들은 세운의 공격 범위에 들어오는 순간,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머리가 잘려 나갔다.

딱히 무공을 사용할 필요도 없었다.

단단한 갑각이라고는 하나, 조준이 조금 빗나가도 뒤랑달은 노래기의 갑각 따위는 가뿐히 꿰뚫었으니까.

수가 워낙 많은 터라 몇 마리를 놓쳤지만, 이 역시 상관없었다.

콰직!

"으, 이거 진득한 게 닦아내려면 고생 좀 해야겠어."

고창석이 해머를 휘두를 때마다, 몬스터의 몸이 거칠게 터져 나갔다.

횃불을 공격하는 것에 이어 단단한 갑각에 어지간한 날붙이가 통하지 않아 꽤 까다로운 몬스터로 불리는 놈들인데, 세운과 고창석의 앞에서는 평범한 벌레나 다름없었다.

그러던 중... 뒤쪽에 있던 몬스터 하나의 배가 불룩거리더니 입으로 무언가를 뱉어냈다.

콰아아!

입에서 뱉어지자마자 안개처럼 퍼져나가는 황색 기체.

멀리서도 고약한 냄새가 풍겨온다.

회귀 전에 당해 본 공격이었기에 그 정체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것은 물론, 최루탄처럼 눈을 뜨기 힘들게 만들고 숨을 들이쉬면 기도가 따끔거리기까지 하는 공격이다.

때문에, 기체가 더 이상 밀려오기 전에 세운이 반대쪽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녹탑의 묘리에 따라 '브리즈'의 속도가 빨라집니다.

뒤에서부터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황색 기체를 밀어냈다.

갑작스러운 바람에 놀란 놈이 다시 한번 악취를 토해내려 했지만, 그보다 세운의 검이 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푹.

결국, 놈의 악취는 목에 걸린 채로 빠져나오지 못했고, 이를 마지막으로 짧았던 전투가 끝났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닦아내고 싶구먼. 손질하는 데 시간이 꽤 걸리겠어."

"일단은 시련부터 끝내죠."

"알고 있네. 시간을 최대한 아껴야 그 공적치라는 걸 더 얻을 수 있을 테니 말이야."

고창석이 배틀 해머에 붙은 끈적한 체액을 불쾌한 듯이 쳐다보았다.

그가 장비를 아끼는 마음은 알고 있지만, 몬스터를 상대할 때마다 장비를 손질하며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벌레류는 역시 이 깊고 진한 체액이 일품이라며 맛을 음미합니다.

폭식의 권능을 사용한 후, 다시 길을 나아가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동굴은 한동안 외길이 유지되었다.

방금 나왔던 노린재 모습의 몬스터를 포함한 다양한 몬스터들이 기습을 해 왔지만, 별 위협은 되지 않았다.

그렇게 앞으로 쭉쭉 나아가다 보니 처음으로 갈림길이 나타났다.

"흐음, 갈림길이라.... 길을 알겠나? 난 길 찾는 데는 영 재능이 없어서 말이네."

갈림길의 중간에 선 세운이 눈을 감고 감각에 집중하였다.

청각, 후각, 촉각 등. 각종 보물로 강화된 감각이 주위의 사소한 흔적이나 변화를 모두 잡아낸다.

"아마, 이쪽이 출구겠네요."

"오오, 대단하구먼. 나는 아무것도 안 느껴지는데 말이야."

세운이 오른쪽 길을 가리켰다.

미약한 온도의 차이나 바람의 흐름으로 보았을 때, 왼쪽은 막힌 길이었다.

고창석이 기분 좋게 오른쪽 길로 향하려 했지만, 세운이 그를 막아섰다.

"반대쪽으로 가죠."

"음? 어째서인가? 자네라면 최단 시간으로 동굴을 빠져나가려고 할 줄 알았는데."

맞는 말이다.

높은 랭킹을 통한 공적치 획득은 세운으로서도 목표로 삼고 있는 점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랭킹은 단순히 '속도'로만 정해지는 게 아니었다.

"저쪽에 뭔가 있을 것 같거든요."

회귀 전에 찾아냈던 히든 피스.

그때는 열지 못했던 문을 지금이라면 열 수 있을 것 같았다.

제 104화

104. 제104화

결국 세운의 말대로 왼쪽 갈림길을 향해 나아갔다.

고창석이 의아해하긴 했지만, 지금까지 세운이 걸어온 길을 알고 있던 터라 말없이 그 선택에 따라주었다.

"어째 몬스터가 점점 줄어드는 것 같구먼. 혹시 제대로 가고 있는 거 아닌가?"

"그럼 그것대로 나쁘지 않죠. 시련을 일찍 끝마칠 수 있으니까요."

"흐음, 말은 그렇게 해도 출구가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는 모양이구먼."

갈림길 이전에는 죽자고 달려들던 몬스터 무리가 거의 나타나지 않고, 그저 어두운 통로가 지루하게 이어질 뿐이었다.

몬스터가 안 나타나자 고창석이 자연스럽게 주변을 둘러보며 관찰하였다. 그러다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동굴, 조금 이상하구먼."

"뭐가요?"

"그냥 평범한 동굴인 줄 알았는데, 볼수록 부자연스러운 점이 많이 보여서 말이네."

고창석이 동굴의 천장을 가리켰다.

누가 다듬은 듯이 매끈해 보이는 천장.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저게 뭐가 이상하냐며 고개를 갸웃거렸을 테지만, 세운은 얼마 안 가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동굴이라면 무릇 종유석이나 석순 같은 게 있게 마련인데, 여기는 아무것도 없지 않나."

"그렇긴 하죠."

"만약 물이 아닌 바람이나 침식 작용으로 만들어진 동굴이라고 해도, 뭔가 영 어색하단 말이지."

"동굴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시네요."

"허허, 밖에 있을 때 내 대장간 앞에 작은 동굴이 하나 있었다네. 그런 의미로, 여긴 뭔가 어색하다네."

그의 말에 공감은 가지만, 세운 역시 이에 대해서는 아는 점이 없었다.

이 길의 끝에 히든 피스가 존재하긴 하지만, 고창석이 말하는 것과 지금의 히든 피스는 큰 관련이 없는 것 같았으니까.

"예를 들면 뭔가의 굴이라던가.... 크흠, 아니라네. 이건 너무 간 것 같구먼."

"굴이라....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네요."

세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탑에는 다양한 몬스터가 존재하고, 이 동굴에서 나타나는 몬스터 대부분은 벌레 형 몬스터다.

그러니 어쩌면 이 동굴이 어떤 몬스터가 만든 굴일 수도 있었다.

다만, 그렇다고 해도 세운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몬스터는 없었다.

이 길의 끝에 있는 녀석도 이런 굴을 팔 만한 몬스터는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주위를 경계하면서 나아가던 중.

세운이 걸음을 멈추고 고창석에게 신호를 주었다.

"...뭔가 있나? 내 눈에는 아무것도 안 보인다만."

"여기, 자세히 봐보세요."

"그렇게 말해도 아무것도.... 음?"

마법의 불빛에 비춰, 전방에서 무언가가 반짝였다.

가느다란 실. 두께가 어찌나 얇은지 빛을 비추어도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발견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이건 거미줄 아닌가?"

"그런 것 같네요."

지금부터가 진짜다.

회귀 전의 세운은 여정의 지침표를 따라 이곳까지 왔다가 멋도 모르고 거미줄을 건드렸다가 이후 나타난 몬스터에게 쫓겨 다녔으니까.

그러다가 '그것'을 발견했지만, 몬스터 때문에 열 시도도 못 해 보고 도망치고 말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지금이라면 몬스터를 상대할 자신도, 그것을 열 자신도 있었다.

"어떻게 할 텐가? 촘촘한 게, 전부 피하면서 나아갈 수는 없어 보이는데."

"저희가 굳이 귀찮게 거미줄을 피하면서 갈 필요는 없죠."

"허면?"

화륵!

세운의 손 위에서 붉은 불씨가 일렁였다.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인페르노 ]

- '화염방사기'라고도 불리는 화탑의 마법으로써 일직선으로 고온의 화염을 분사한다.

"저쪽에서 먼저 마중 나오게 하면 되죠."

화르르륵!

붉은 불꽃이 전방을 휩쓸었다.

거미줄이 아무리 질기고 튼튼해 봤자, 4 서클의 불 마법 앞에서는 볼품없이 타들어 갈 뿐이었다.

동굴이라는 밀폐된 공간에서 화염 마법을 사용하는 건 자제할 생각이었지만, 괜히 여기서 시간을 끌긴 싫었다.

만약 산소가 부족해지면 마법을 통해 뒤에서 산소를 조달해 오면 그만이다.

무모한 방법이지만, 뛰어난 실력만 뒤받쳐 준다면.

"키에에엑-!!"

그 어떤 방법보다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화염이 거미줄을 불태우며 거침없이 나아가자, 동굴의 안쪽에서 기이한 비명이 들려왔다.

앞서 등장했던 몬스터들의 하찮은 위협과는 달리, 피부에 소름이 오소소 돋을 정도로 기괴한 비명이었다.

곧이어, 바닥에서부터 쿵쿵거리는 진동이 느껴졌다.

"옵니다."

"키에에엑!"

어찌나 빠르게 달려왔는지, 비명이 들린 지 몇 초도 되지 않아 녀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영화 속에 들어오기라도 한 기분이구먼."

여덟 개의 다리로 벽을 타고 기어 온 녀석이 여덟 개의 홑눈을 빛낸다.

잔털에 남은 잔불이 아직도 타오르고 있었지만, 외피에 마법 저항력이라도 있는 것인지 큰 상처를 입은 것 같진 않았다.

녀석은 감히 자신의 거미줄에 불을 저지른 침입자에게 곧바로 독니를 내보였다.

이미 세운과 고창석이 적이라는 것을 인지하였기에, 대치 시간 따위는 없었다.

쿵!

"공격은 내가 막겠네!"

고창석은 어느새 배틀 해머를 집어넣고, 등에 매달고 있던 타워 실드를 꺼내 들었다.

거미를 보는 순간 자신의 힘으로는 타격을 입히기 힘들다고 생각한 것이다.

빠른 판단 능력. 저 정도라면 어지간한 전사계 플레이어 이상이었다.

"감사합니다."

세운은 그 찰나의 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거미가 이빨이 막히며 주춤거리는 사이에 재빠르게 꺼내 든 뒤랑달을 첫 번째 다리에 휘두른다.

푹!

단번에 썰려 나갈 줄 알았는데, 외피가 어찌나 단단한지 검이 절반쯤 박히는 데 그쳤다.

이것만으로도 다리가 제 기능은 못 하겠지만, 세운은 이대로 그칠 생각이 없었다.

-내공을 통해 혈랑검법의 제일 초식, 혈랑조(血狼爪)가 강화됩니다.

서걱!

"키이에엑!"

뒤랑달에 붉은 기운이 일렁이며 거미의 다리가 깔끔하게 베어졌다.

거미가 당황한 듯 뒤로 물러나며 여덟 개의 눈을 굴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거미줄을 불태운 침입자에게 분노하여 달려왔지만,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막았는데도 손이 얼얼하구먼. 튜토리얼 때 봤던 보스 몬스터란 것들보다 강한 것 같은데?"

"튜토리얼은 어디까지나 튜토리얼이었으니까요."

거미가 고민을 마쳤는지 숨을 들이마시듯 머리를 들어 올렸다.

아랫배가 순식간에 부풀어 오르더니, 이내 입에서 하얀 거미줄이 뭉텅이로 뿜어져 나왔다.

이에 세운이 뒤랑달을 한 손에 쥐고, 다른 한 손으로 마법을 발현하였다.

-흑탑의 묘리에 따라 '인페르노'의 위력이 강화됩니다.

콰르륵!

흑탑의 묘리까지 적용되어 검붉게 타오르는 불꽃.

외양만 본다면 흑마법인 '다크 플레어'와 비슷해 보이지만, 고서클인 마법인 만큼 그보다 훨씬 강력한 화력을 자랑했다.

거미가 내뱉은 거미줄 따위는 인페르노의 먹이가 될 뿐이었다.

그사이....

"키에엑!"

화염을 뚫고, 거미가 세운에게 달려들었다.

거미줄이 타오를 것 정도야 이미 예상했다는 듯한 움직임.

아무래도 동굴의 안쪽에서 이미 마법에 당한 상태였기에 세운의 공격을 예측한 모양이다.

불꽃 정도야, 외피로 충분히 막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그때랑은 다를 텐데?"

거미가 기억하는 불꽃은 세운의 손에서 멀리 떨어져 화력이 약해진 상태였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거리가 가까워 온도는 최대 화력을 유지하고 있었고, 흑탑의 묘리까지 가미되어 화력이 크게 뛰어올라 있었다.

치이익-

거침없이 달려들던 거미의 털이 모조리 타올랐다.

불꽃은 그에 그치지 않고 거미의 몸 전체를 갉아 먹기 시작했다.

다리가 녹아내리고, 두꺼운 몸통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며 쪼그라들었다.

거미와 세운의 거리는 불과 5m.

녀석으로서는 다리를 몇 번만 움직이면 닿을 법한 짧은 거리였지만....

"키이이-"

녀석은 기다란 앞다리를 내뻗은 채, 결국 세운에게 닿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였다.

마법의 여파로 동굴의 온도가 순식간에 후끈 달아올랐다.

같이 다니던 동료가 고창석이 아니었다면, 이 열기 속에서 숨을 들이마시는 것도 힘들어했으리라.

"엄청난 열기구먼. 대장간의 불꽃보다 더 뜨거운 것 같아."

전투가 생각보다 너무 일찍 끝났다.

그래도 회귀 전에 마주쳤을 때는 어지간한 무기로 상처하나 낼 수 없었을 정도로 강한 몬스터였는데.

'하긴, 5 서클이라면 중층에서도 나름 인정받는 실력일 테니까.'

그런 마법을 고작 4층의 시련에서 사용했으니, 제아무리 강한 몬스터라고 해도, 세운에게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동굴 왕거미'를 포식하였습니다.

-양분을 흡수하여 지혜가 8, 민첩이 3 상승합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먹이가 바싹바싹 잘 익었다며 만족해합니다.

세운은 열기도 식힐 겸, 불도 끌 겸 하여 앞으로 바람을 끌어왔다.

대충 주변이 정리되자, 바로 길을 따라 나아갔다.

불꽃 때문에 동굴의 벽면이 까맣게 그을려 있었지만, 움직이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그러다 도착한 동굴의 끝에는.

"아무래도 아까 그 거미의 집이었나 보구먼."

"그러네요."

녹아내린 거미줄의 흔적과 뼈만 남은 몬스터의 사체가 가득했다.

문제는 더 이상 길이 없다는 것.

"흐음, 아쉽지만 이번에는 자네 선택이 틀렸나 보구먼. 얼른 돌아가지."

"잠시만요."

우웅!

세운이 서칭을 사용하여 주변의 마나를 감지하였다.

회귀 전에는 여정의 지침표를 따라가면 될 뿐이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으니까.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상한 지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음? 자네 뭐 하는...."

쾅!

세운이 2층의 시련에서 돌다리를 내려찍었던 해머를 꺼내, 벽면을 강타했다.

검은 그을음이 벗겨지고, 천장에서 돌가루가 떨어져 내렸다.

지나온 길을 제외하고는 삼방이 막힌 곳이었기에, 충격음이 귀를 왕왕 울렸다.

"자, 잠깐 그러다가 동굴이 무너지면!"

쾅!

고창석이 말려보려 하였으나, 세운은 다시 한번 과감하게 망치를 휘둘렀다.

타격점을 중심으로 생겨난 금이 거미줄처럼 넓게 퍼져나갔다.

슬슬 다 돼간다고 생각한 세운이 망치에 내공까지 실어 마지막 힘을 쏟아부었다.

쩌저적 거리는 소리와 함께 균열이 더욱 심해지더니, 이내 돌조각들이 버티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떨어졌다.

고창석은 동굴이 무너지는 줄 알고 기겁을 하였으나, 걱정했던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저건?"

"제대로 찾아왔나 보네요."

부서진 벽면 사이로.

-히든 퀘스트, '숨겨진 문'을 완료하였습니다.

-시련 '동굴 지나기'에 추가 점수가 부여됩니다.

문처럼 보이는 매끈한 벽면이 나타났다.

문은 동굴의 벽 안에 숨겨져 있던 거로도 모자라, 침입을 거절하겠다는 듯이 굳건한 자물쇠로 봉인되어 있었다.

황금색 딱정벌레 문양이 그려진 자물쇠였는데, 무언가 거대한 힘이 느껴졌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 세운도 찾지 못했던 숨겨진 히든 피스로 열쇠가 숨겨져 있었던 걸까? 아니면, 애초에 여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곳일까?

뒤랑달로 자물쇠를 내려쳐 보았지만, 자물쇠는 금빛으로 빛나며 세운의 공격을 튕겨냈다.

그 어떠한 접촉도 거부하는 완벽한 봉인.

다른 플레이어라면 여기서 포기하고 물러났을 게 분명하다. 여기서 아쉬워해 봤자, 결국 문을 열 방법이 없으니까.

그러나, 세운은 달랐다.

'드디어 이걸 확인해 볼 수 있겠네.'

아공간 주머니에서 아름다운 열쇠 하나가 나타났다.

세운이 튜토리얼 공적치 랭킹 1위 보상으로 획득한 '작은 열쇠'였다.

아이템 정보 확인으로는 그 어떤 정보도 공개되지 않았던 열쇠.

그 능력을 시험해 볼 기회가 드디어 생겼다.

제 105화

105. 제105화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관심을 가집니다.

사실, 반쯤은 도박이었다.

세운이 아무리 회귀자라고 해도 마스터키에 관한 건 소문으로만 떠돌던 아이템이었으니까.

어떻게 생겼는지는커녕, 실제로 마스터키라는 게 존재하는 지도 확신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지금. 드디어 '작은 열쇠'의 정체를 확인해 볼 때가 되었다.

"아름다운 열쇠구먼. 그런데 크기가 전혀 안 맞는 것 같지 않나?"

자물쇠의 크기는 성인 남성의 머리만 했다. 그에 비해, 세운이 들고 있는 열쇠는 작은 열쇠라는 이름에 걸맞게 새끼손가락만 한 크기였다.

열쇠의 원리를 생각하자면, 상식적으로 맞지 않는 크기다.

그런데도 세운은 자물쇠의 열쇠 구멍에 열쇠를 끼워 넣었다.

그리고.

씨익-

세운의 얼굴에 웃음이 지어졌다.

열쇠를 넣는 순간, 이렇게 크기가 차이가 남에도 열쇠가 딱 들어맞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즉시 손목을 움직이자, 철컥! 하고 무언가 맞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오, 신기하구먼!"

당연하다는 듯이 자물쇠가 열렸다.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닫혀 있었는지, 문을 열자 땅과 천장의 이음새가 긁히며 기기긱 하는 거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눈을 크게 뜹니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그 열쇠라면 탑에 잠들어 있는 수많은 금고를 털 수 있겠다고 외칩니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열쇠의 사용처를 떠올리기 시작합니다.

문이 열리자, 라이트 마법이 아닌 불그스름한 빛이 흘러나왔다.

안을 들여다보니 벽에 걸린 몇 개의 횃불이 일렁이며 공간을 밝혀주고 있었다.

문의 상태로 보았을 때 관리가 안 된 지 오래된 것 같았는데, 그런데도 횃불이 켜져 있는 걸 보면, 아마 저것도 무언가 마법적인 처리가 되어 있는 것 같았다.

"안에 몬스터가 나올 수도 있지 않나?"

"아마 그런 건 없을 거예요."

회귀 전, 세운은 유명한 탐험가답게 수많은 숨겨진 공간을 찾아냈다.

대충 둘러보는 것만으로, 이 방이 누군가의 거주지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보통, 거주지에 함정이나 파수견을 배치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때문에 세운은 최소한의 경계심만 가진 채 망설임 없이 문 안으로 발을 내밀었다.

'여긴....'

대체 어떤 사람이 거주하던 곳이었을까?

주위를 둘러보니 나비의 날개나 딱정벌레의 갑각 등, 다양한 벌레의 표본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실험대로 보이는 곳 위에는 몬스터의 사체가 썩어 있었고, 책장에는 알아보기 힘든 단어로 적힌 서적이 가득했다.

"오! 광석들이구먼! 설마 저게 보상인가?"

고창석이 방의 구석에 쌓여 있는 광석을 보고 눈을 반짝였다.

층에 맞지 않는 훌륭한 광석이었지만, 세운이 보기엔 그것이 보상은 아닐 것 같았다.

일단 가장 먼저 서적을 빼 들어보았지만, 세운의 지식으로도 해석하기 어려운 언어였다.

탑에 존재하는 어지간한 언어는 마스터한 세운이었기에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때, 열쇠에 관심을 보이던 마몬이 메시지를 보였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베르헬 대륙의 언어는 오랜만에 본다며 숨죽여 웃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보물이 아닌 이상 관심을 가지지 않던 게 바로 마몬이었는데, 어째서인지 아무런 대가도 없이 세운에게 힌트를 알려주었다.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지금 세운으로서는 감사히 힌트를 받아 챙길 뿐이었다.

'베르헬 대륙?'

회귀 전의 기억에는 없는 이름이다.

그러나, 회귀 후에는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어째서냐고?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베르헬 대륙의 역사 ]

- 한때 그 어느 곳보다 아름다운 곳이었으나, 대전쟁으로 인해 몰락해 버린 베르헬 대륙의 역사서.

필요한 상황에 필요한 보물을 사용하기 위해 밤마다 둘러보았던 창고의 보물 목록. 그중에 베르헬 대륙의 이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게 왜 마몬의 보물창고에 들어 있는지는 몰라도, 세운은 바로 그것을 사용해 보았다.

그러자 이미 몰락해 버린 대륙의 지식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자연과 함께하는 12 종족. 그들이 숭배하던 마신과 천신. 갈등으로 인한 전쟁의 확산 등.

'마신이라면 마몬?'

다양한 지식이 떠올랐지만, 세운은 곧 고개를 내저었다.

역사서를 사용하긴 했지만, 지금 필요한 건 알지도 못하는 대륙의 역사가 아니었다.

'보인다.'

바로, 베르헬 대륙의 언어.

예상대로 보물을 사용하자마자 서적에 적힌 난해한 글자가 조금씩 해석되기 시작했다.

[ 악충 사육법 ]

[ 성장촉진제 ]

[ 군집의 우두머리에 관하여 ]

[ 떠오르는 태양신 ]

대부분 벌레에 관한 내용이었다.

굳이 책의 내용을 펼쳐보지 않아도, 이곳에 거주하던 자의 직업을 알 수 있었다.

벌레 사육사.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곳에서 다양한 벌레를 채집하고 사육하고 있었던 듯했다.

그렇게 서적 몇 개를 꺼내다 보니, 책장 아래에 조그마한 서랍이 보였다.

그 역시 자그마한 열쇠 구멍이 보였으나.

철컥.

이미 마스터키의 힘을 드러낸 세운의 열쇠 앞에선 아무런 저항도 없이 가볍게 열렸다.

"이건...."

[ 돌 피리 ]

분류 : 악기

등급 : B-

설명 : 무언가를 불러들이기 위해 특별히 제작된 악기(5층의 시련에서 사용 가능)

능력 : ??

돌로 만들어진 악기라니.

이런 걸 어디에 사용하나 싶었지만, 아이템 설명을 읽는 순간 바로 파악할 수 있었다.

'퀘스트 아이템이다.'

시련을 해결하는 중에 극히 드물게 이러한 퀘스트 아이템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것을 잘 이용하면 다른 플레이어보다 월등히 높은 보상을 획득하거나 특별한 분기점을 통과하게 된다.

거주자의 직업이나 서적을 보았을 때, 돌 피리가 부른다는 무언가는 벌레의 한 종류일 것이다. 아마 5층의 숨겨진 보스 몬스터가 아닌가 싶었다.

"뭐라도 찾았나?"

"아, 네. 어르신은요?"

"허허, 제법 쓸 만한 광석들을 찾았다네. 얼른 이걸로 새 작품을 만들고 싶어서 벌써 몸이 근질근질해."

"그럼 슬슬 나가죠."

히든 피스를 찾아냈으니, 더 이상 이곳에 머물 이유는 없었다.

세운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돌피리를 아공간 주머니에 집어넣은 후, 고창석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 * *

어차피 출구의 위치를 알고 있었기에, 숨겨진 방을 빼져 나온 이후로는 어려울 게 없었다.

몬스터의 공격이 이어지긴 했지만, 세운과 고창석에게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심지어 세운이 마나와 내공을 아끼지 않고 퍼부으며 일직선으로 내달렸으니.

얼마 걸리지 않아, 동굴의 끝에 도착할 수 있었다.

-4층의 시련 '동굴 지나기'를 훌륭하게 완수하였습니다.

-공적치 집계 중....

-남은 시간 : 7시간 52분

-사냥한 몬스터의 수 103 마리.

-히든 퀘스트 '숨겨진 문' 완료.

-활약에 따라 획득한 공적치가 나눠집니다.

-총 누적 공적치 254,500point

-축하드립니다! 4층의 시련을 랭킹 1위로 통과하였습니다.

-보상으로 100,000point를 획득하였습니다.

과연, 지금까지 숨겨진 문을 발견한 플레이어는 있어도 문을 열고 들어간 플레이어는 없었던 모양이다.

생각 이상으로 높은 공적치를 획득하며 이번 층에서도 당당하게 랭킹 1위를 획득할 수 있었다.

"허허, 1위라니. 대단하구먼."

"어르신은요?"

"자네처럼 순위권은 아니지만, 나도 공적치를 넉넉하게 받았네. 솔직히 난 한 것도 별로 없지 않나. 신경 안 써도 된다네."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주세요. 제가 지원해 드릴 테니까요."

"허허, 말이라도 구맙구먼."

동굴의 끝.

다음 층에 오르기 전에, 자세를 다잡고 단전과 서클을 동시에 활성화하였다.

느긋하게 마나를 모두 회복한 후, 고개를 돌려보니 고창석이 장비를 손질하고 있었다.

망치는 물론 방패와 갑옷 모두에 벌레의 진액이 묻어 있어 시간이 조금 걸리는 듯했다.

"자네 것도 이리 주게. 이런 건 빨리 닦아주지 않으면 내구도가 금방 상해."

"아, 제건 제가 할게요."

"이 늙은이의 유일한 낙을 빼앗을 셈인가?"

"하하.... 그럼, 좀 부탁드릴게요."

"호오. 전에도 생각했지만, 정말이지 훌륭한 무기란 말이지."

고창석이 뒤랑달을 받아 들자마자 눈을 반짝거렸다.

그가 장비를 손질하는 사이, 세운은 클랜챗을 열어보았다.

시간이 지나자 슬슬 시련에 통과한 이들의 메시지가 보이고 있었다.

[박정필 : 형니이이이이임!]

[한아름 : 아, 이 오빠 때문에 죽을 뻔했어요! 자기만 따라오라고 앞서가다가 거미줄을 건들더니 거미가 나오자마자 자기만 도망치고!]

[박정필 : 아니, 그건 그게 아니라....]

[한아름 :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제가 길 안 막았으면 둘 다 죽을 뻔했는데!]

[박정필 : 죄송함다....]

[한다운 : 그 거미 나도 봤어!]

[한아름 : 언니도 길 막았어?]

[한다운 : 아니, 한철 오빠가 벌레 밟듯이 그냥 패 죽이던데?]

[한아름 : 아, 동료 차이!]

이번 시련은 3층에 비해 난이도가 더욱 올라 있었다.

길을 제대로 찾았다면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길을 잘못 찾으면 꼼짝없이 거미를 만나야만 했으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갈림길은 처음 한곳이 끝이 아니었다.

세운이 감각을 통해 길을 잘 찾아냈을 뿐이지, 그 이후로도 세 곳이 넘는 갈림길이 나왔었다.

회귀 전의 기억으로는, 그곳들에도 거미만큼은 아니라도 꽤 강력한 적이나 함정이 존재했다.

때문에 어느 정도의 피해가 생겨나지 않을까 싶었는데.

[이일중 : 약이 없었으면 정말 위험할 뻔했습니다. 하늘 씨, 정말 감사합니다.]

[장도영 : 저도 약 덕분에 살았습니다!]

[이하늘 : 다행이에요! 다음부터는 조금 더 여유 있게 만들어 둬야겠어요.]

이하늘이 나눠줬던 약품 덕분일까? 어려움을 토로하는 이는 있어도, 큰 상처를 입은 이는 없어 보였다.

다만, 점점 어려워지는 시련 때문에 다음 시련을 걱정하는 이는 있었다.

'하긴, 실제로도 다음 시련의 난이도가 크게 뛰긴 하니까.'

세운이야 굳이 강한 몬스터를 찾아서 상대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시련은 어디까지나 강을 건너고, 산을 오르며, 동굴을 통과하는 것이었기에 강한 몬스터를 마주해도 도망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다음 시련은 달랐다.

시련 자체가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이었기에, 무섭더라도 무기를 들어야 했다.

그런 의미로 사람들이 다음 시련을 걱정하며 긴장하는 건 좋은 반응이었다.

최소한 아직 할 만하다며 여유를 부리다 당하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자, 끝났네! 진액이 굳어서 생각보다 시간이 좀 걸렸구먼."

"새것 같은데요?"

"허허, 이 정도는 되어야지."

고창석에게 건네받은 뒤랑달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단순히 진액이 묻은 부분만 손질한 게 아니라 칼날이나 손잡이 등도 모두 손질하여 처음보다 새것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가볍게 한 번 휘둘러보니,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전보다 검이 가볍게 느껴졌다.

"바로 갈겐가?"

"네. 휴식은 다음 시련까지 끝내고 하죠."

"나야 상관없지. 자네를 따라다니기만 한 게 다라서 별로 힘들지도 않거든."

"그럼 바로 가죠."

"그러세. 얼른 올라가서 아까 얻은 광석들 좀 만져보고 싶구먼."

세운과 고창석이 동시에 다음 층을 선택하였다.

다음 층은 이번 테마의 마지막 층.

5층의 시련만 끝내면, 클랜원들과 함께 제대로 된 휴식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제 106화

106. 제106화

-5층의 시련에 도전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주제 : 산의 주인

-시간 제한 : 10시간

-산의 주인을 처치하고 가장 높은 곳에 오르십시오.

5층의 시련이 시작되고, 동굴을 빠져나가니 가장 먼저 푸른 하늘이 보였다.

이곳이 바로 동굴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산의 정상. 산을 주제로 한 첫 테마의 마지막 시련이다.

"후. 공기 좋구먼. 나도 이 공기를 마시기 위해서 산을 자주 올랐었지."

고창석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높은 곳 특유의 시원한 공기가 가슴을 가득 채웠다.

아무래도 공기가 잘 통하지 않는 동굴 속에 있다 보니 공기가 더욱 시원하게 느껴지는 듯했다.

세운이 차분하게 주위를 둘러보더니, 앞장서서 전방의 길을 따라갔다.

만들어진 길이라기보다는 덩치 큰 무언가가 지나가며 자연스럽게 생겨난 듯한 길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련의 주체인 '산의 주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놈인가?"

"그런 것 같네요."

정상으로 향하는 길목을 막은 채로 대자로 뻗어 있는 몬스터.

고창석은 처음 보는 몬스터겠지만, 세운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몬스터였다.

회귀 전은 물론이고, 튜토리얼 때도 보았던 몬스터였으니까.

"그르렁...."

-성좌, '배고픈 왕자'가 쫄깃한 힘줄의 식감을 생각하며 군침을 줄줄 흘립니다.

오우거.

'힘'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몬스터다.

덩치를 보아하니 완전한 성체는 아닌 것 같았지만, 그래도 오우거는 오우거. 그 힘은 주먹만으로도 바위를 박살 내 버릴 정도로 강력하다.

'회귀 전에는 상대가 저놈이라는 걸 알자마자 기겁했었지.'

튜토리얼을 통과했다지만, 겨우 두 명의 플레이어에게 오우거를 상대하라는 시련을 내주다니. 정말이지 어이가 없는 난이도였다.

세운이야 튜토리얼 때 굶주린 오우거를 상대한 전력이 있지만, 그 역시 원래는 잡으라고 나온 몬스터가 아니었다.

다만, 탑도 플레이어들에게 완전히 불가능한 시련을 내려주지는 않는다.

정상에서 굴러 떨어트리기 딱 좋아 보이는 바위나 곳곳에 자라난 독초, 풀숲으로 가려진 낭떠러지 등.

플레이어는 오우거가 자는 틈에 주변을 탐색하고 공략법을 찾아내야만 했다.

당황하지 않고 차분히 계획을 실행한다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시련이었다.

회귀 전의 세운 역시 그런 식으로 5층을 공략했고 말이다.

"어쩔 건가? 바로 공격할 텐가?"

그러나 지금의 세운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미 튜토리얼의 굶주린 오우거는 물론 그 수장인 '크락카틀락'도 상대한 마당에 아성체의 오우거 따위는 위협이 되지 않는다.

고창석 역시 이를 알고 있기에 별다른 계획을 제안하지 않았다.

"음...."

다만, 세운의 머릿속은 오우거 대신 다른 것으로 채워져 있었다.

이전 층에서 획득한 퀘스트 아이템, 돌 피리.

5층에서 사용한다고만 적혀 있을 뿐, 오우거를 상대하기 전에 사용하는 건지, 전투를 끝낸 후에 상대하는 건지 자세한 내용은 전혀 적혀 있지 않았다.

그 때문에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민은 곧 끝났다.

'뭐, 때마다 다 사용해 보면 되지.'

지금 불어서 특별한 일도 안 생기고, 오우거가 깨어나 버린다? 깨어난 그대로 오우거를 때려눕히면 그만이었다.

혹시 모르니 전투 중간에도 사용해 보고 전투가 끝난 후에도 사용해 보면 된다.

무력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기에 가능한 방법이었다.

고민을 마친 세운이 아공간 주머니에서 돌 피리를 꺼내 들었다.

마몬의 창고에서 피리의 악보라도 하나 꺼낼까 생각했지만, 세운에게는 이전에 '요정을 닮은 악기'를 연주하기 위해 사용했던 보물인 '거친 바다의 악보'에 대한 지식이 있었다.

군가의 악보가 돌 피리와는 어울릴 것 같지는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어떠한 노래를 연주하라는 말은 없었으니까.

부우-

세운이 돌 피리를 불자 묵직한 중저음이 흘러나왔다.

흔히 알고 있는 피리음과는 전혀 다른 소리에 고창석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돌 피리의 중저음은 생각보다 거친 바다의 악보와 잘 어울렸고, 그 연주는 산 전체에 퍼져나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엉...?"

대자로 퍼져 있던 오우거가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운이 연주를 멈추지 않았기에, 녀석은 곧 세운과 고창석을 발견할 수 있었다.

녀석은 잠이 덜 깼는지 잠시 멍하게 세운을 바라보다가, 곧 정신을 차리고는 침을 흘리며 옆의 무기를 주워 들었다.

"밥시간이다. 먹이 도착했다!"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자네는 계속하고 있게! 내가 어떻게든 막아보지!"

여기서 돌 피리의 두 번째 문제점이 드러났다.

시기는 물론 피리를 얼마나 불어야 하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도 최소한 악보를 한 번은 완주해야겠다는 생각에 세운이 피리를 부는 그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쿵!

"먹이, 단단하다! 하지만 나, 강하다!"

"오래는 못 버틸 것 같구먼!"

고창석의 힘은 어지간한 전사계 플레이어 이상으로 강하다.

그 증거로 타워 실드를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오우거의 공격을 완벽하게 막아내고 있었다.

다행인 점이라면 오우거의 지능?

무식하게 무기를 휘두르는 것보다 방패를 뺐거나 큰 덩치로 짓누르는 등 다양한 공격법이 있을 텐데.

녀석은 힘자랑하듯이 방패를 향해 조잡한 나무 몽둥이를 연신 휘두를 뿐이었다.

오우거의 강한 힘 때문에 고창석이 조금씩 뒤로 밀려났지만, 장비의 우월한 방어력 덕분에 큰 피해는 입지 않고 있었다.

'이게 아닌가?'

그러나 세운에게는 방패에 몸을 기댄 채 힘들어하는 고창석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지금이라도 피리를 놓고 그를 도와줘야 하는지 고민이 되었다.

그 순간....

드드드드-

땅바닥에서부터 미미한 진동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오우거의 공격 때문에 일어난 진동인 줄 알았지만, 그것과는 전혀 달랐다.

마치, 땅속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듯한 감각이었다.

그 진동은 연주가 끝을 향해 달려갈수록 더욱 거세졌고, 오우거도 강해진 진동을 느꼈는지 공격을 멈추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정답임을 확신한 세운이 힘차게 돌 피리를 불며 클라이맥스에 다다르자.

-돌 피리의 연주로 인해 스톤 라바(Stone larva)가 깨어났습니다.

-시련의 장소가 본 터인 '잠곤산(潛昆山)'으로 전환됩니다.

-시련의 주제가 '산의 주인'에서 '산의 지배자'로 변경되었습니다.

-산의 지배자, 스톤 라바를 처치하고 가장 높은 곳에 오르십시오.

"우엉?"

콰아아아!

오우거의 발밑에서 뿌연 흙먼지가 뿜어져 나왔다.

고창석이 다급하게 몸을 뒤로 빼고, 세운 역시 돌 피리를 입에서 떼고 전방을 바라보았다.

흙먼지 사이로 무언가의 기다란 그림자가 보였다.

이대로 기다릴 생각이 없었던 세운은 브리즈 마법으로 바람을 일으켜 먼지를 날려 보냈다.

"자네, 대체 뭘 불러낸 겐가?"

먼지가 사라지자 드러난 것은 커다란 바위였다.

크고 작은 바위가 뭉치고 뭉쳐, 기다란 형체를 이루었는데 그것은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놈이 고개를 크게 흔들며 오우거를 날려 보내자.

-성좌, '배고픈 왕자'가 터져 나가는 자신의 간식거리를 바라보며 비명을 지릅니다.

오우거가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벽에 부딪혀 터져 나갔다.

아무리 아성체라고 해도 오우거는 오우거. 그런 오우거를 한 방에 죽인 순간, 놈이 얼마나 강한 몬스터인지 증명되었다.

"혹시 해서 물어보는 건데, 아군은...."

"카아아아-!!"

"...아닌 것 같구먼."

놈이 돌로 이어진 입을 쩌억 벌리더니 거친 포효를 내질렀다.

포효에 섞인 돌가루가 고창석의 방패에 부딪혔는데, 그 위력이 꽤 강력했던지 튕겨 나가는 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스톤 라바...."

실제로 본 건 처음이지만, 살아남기 위해 다양한 몬스터 도감을 읽어보았던 세운이었기에 놈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스톤 라바.

보이는 것처럼 전신이 바위로 이루어진 애벌레 형태의 몬스터였다.

나이에 따라 그 크기가 달라지는데, 10m는 가뿐히 넘어가는 길이를 보니 라바로서 완전히 성장한 개체로 보였다.

'저런 몬스터가 5층에 있었다고?'

전신이 바위로 이루어져 공격도 잘 안 통하고, 힘도 강하긴 하지만, 놈의 위험성은 그 성장 단계에 있었다.

지금은 가장 어린 단계인 라바 급이지만, 번데기를 거쳐 최종 형태로 변태하면 그 힘은 가히 드래곤에 가깝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런 놈이 겨우 5층에서 등장했으니, 세운이 놀라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상대할 수 있겠나?"

"안 돼도 해야죠."

-시기의 눈초리가 '라바 스톤'을 응시하기 시작합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성체라고는 해도 아직 애벌레 형태라는 점이다.

만약 놈이 완전한 형태로 우화를 끝냈다면, 세운이라 하여도 상대할 방법이 없었다.

애벌레 형태라도 놈이 강하다는 사실은 변함없지만, 승리의 가능성은 존재했다.

"그럼 나도...."

"아뇨, 어르신은 뒤에 숨어 계세요."

"...미안하구먼. 도움이 되지 못해서."

"제 장비 대부분이 어르신의 작품인걸요. 이미 충분히 큰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힘내게. 장비라면 내 얼마든지 수리해 줄 테니."

"네."

고창석이 아무리 플레이어 중에서 강한 편이라고 해도, 스톤 라바의 공격을 막아내기는 무리다.

세운 역시 그를 지키면서까지 스톤 라바를 상대하는 건 무리였다.

고창석이 뒤로 빠지는 사이, 세운이 달려드는 스톤 라바를 향해 손을 뻗었다.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스톤 월(Stone wall) ]

- 황탑의 방어 마법으로써 바위로 이루어진 벽을 만들어 적의 공격을 막아낸다.

쿠구구구!

바닥에서 바위가 솟아올라 놈의 돌진을 막아냈다.

다만, 그것도 한 번뿐. 고작 한 번의 충돌로, 눈에 보일 정도로 선명한 균열이 생겨났다.

스톤 월은 황탑의 마법답게 모든 마법 중에서 가장 높은 방어력을 자랑하는 마법인데, 그런 마법이 상성의 차이도 아닌 그저 박치기 한 방으로 저 지경이 되었다.

아마 직접 부딪힌다면, 갑옷이고 방어력이고 할 것 없이 한 방에 몸이 터져 버릴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세운은 놈에게 무기를 휘두르는 대신 지속해서 거리를 벌리며 석벽을 일으켰다.

-황탑의 묘리에 따라 '스톤 월'이 더욱 견고해집니다.

쿠쿵!

어차피 지금 당장 부딪혀 봤자 제대로 된 타격을 입히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마몬의 보구를 이용한 무기 공격?

전설의 무기들이 얼마나 강한지는 알고 있지만, 그마저도 놈의 압도적인 방어력을 한 방에 뚫기는 힘들어 보였다.

여태껏 다양한 무기의 힘을 사용해 본 세운이었기에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피해 다닐 수만은 없는 노릇 아니냐고?

아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렇겠지만, 세운에게는 다른 플레이어에게 없는 힘이 있었다.

바로, '질투의 권능'.

-시기의 눈초리가 '스톤 라바'의 견고함을 질투합니다.

-방어력을 앗아옵니다.

-민첩성을 앗아옵니다.

질투의 권능에 의해 놈은 지속해서 힘을 빼앗길 것이고, 반대로 세운의 힘은 증가하게 된다.

일단은 시간을 끌어 놈의 힘을 최대한 앗아온 후, 놈에게서 빈틈이 드러났을 때.

'한 방.'

놈이 세운의 힘을 눈치채고 대처하거나 도망칠 틈도 주지 않고, 한 방에 목숨을 끊어야만 한다.

제 107화

107. 제107화

놈의 힘은 세운의 상상 이상으로 강력했다.

황탑의 묘리까지 적용되어 더욱 단단해진 스톤 월을 두 방에 부수는 거에 이어, 조금 지나니 꼬리를 이용해 벽을 한 방에 부수기 시작했으니까.

이게 끝이 아니다.

세운이 지루한 대치전을 이어가려 하자, 놈은 벽을 건드리지 않고 땅굴을 파고들었다.

땅속에서 스톤 월을 제치고, 세운의 땅 아래에서의 공격을 시작했다.

놈의 지능이 결코 무시하지 못할 수준이라는 증거였다.

-흑탑의 묘리에 따라 '그라운드 웨이브'의 위력이 강화됩니다.

땅을 짚은 세운의 손바닥을 중심으로 검은 파장이 일렁였다.

그라운드 웨이브는 땅을 울리는 마법답게 땅속에 있는 적에게 가장 뛰어난 위력을 보여준다.

물론, 전신이 바위로 이루어진 놈에게 큰 타격을 주지 못하겠지만.

쿠웅!

"카아아아!"

최소한, 땅에서 나오게 하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시기의 눈초리가 '스톤 라바'의 견고함을 질투합니다.

-방어력을 앗아옵니다.

-민첩성을 앗아옵니다.

처음에는 놈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도, 속도를 따라가는 것도 힘들었는데, 질투의 권능 덕분에 시간이 지날수록 놈을 상대하는 게 편해졌다.

방어력을 앗아온 덕분인지 놈이 공격할 때마다 터져 나오던 돌가루는 더 이상 세운에게 피해를 주지 못했다.

고창석의 타워 실드에 부딪혔을 때처럼 볼품없이 튕겨 나갈 뿐이었다.

'분명 약점이 있을 텐데....'

물론, 세운이 무작정 질투의 권능만 믿고 피하기만 하는 건 아니었다.

공격을 버텨내면서도 눈을 크게 뜨고 놈을 차분하게 관찰한다.

서적에 따르면, 스톤 라바는 성체에 다다를수록 몸을 잇는 바위와 바위 사이에 틈이 어긋나기 시작한다고 되어 있었다.

그 틈 중에서도 가장 큰 틈.

그게 바로 놈의 유일한 약점이었다.

쿠구궁!

놈이 꼬리를 휘두르자, 크고 작은 바위가 대포알처럼 빠르게 날아 왔다.

스톤 월을 세워 간신히 막아냈지만, 세운은 심장에서 무언가가 쥐어짜지는 듯한 통증을 느껴야만 했다.

'마법은 이제 한계인가.'

놈과 대치하는 동안 순수하게 마법만으로 공격을 버텨왔다.

아무리 5 서클에 다다른 세운이라고 해도, 놈의 공격을 막아낼 정도로 강한 마법을 연신 발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순식간에 마나가 동나며, 지금의 상황이 되었다.

마몬의 창고를 빌려 마나 회복과 관련 있는 보물을 꺼낼까 생각했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카아악-!"

처음에 비해 작지만 날카로워진 포효.

질투의 권능에 의해 힘이 빠지고, 악에 받쳐 지르는 외침이었다.

지금이라면 충분히 반격할 수 있어 보였다.

게다가....

-시기의 눈초리가 질투심을 감춥니다.

-성좌, '시기를 둘러싼 뱀'이 지금 당신에게 주어진 권능으로 앗아갈 수 있는 힘은 이게 한계라고 읊조립니다.

질투의 권능으로 놈에게서 앗아오던 힘이 멈추었다.

이제 더 이상은 시간을 끌어 봤자 세운의 체력만 떨어질 뿐,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러니.

철컥.

처음으로, 세운이 먼저 놈에게 달려들었다.

뽑아 든 무기는 검.

전신이 바위로 이루어진 녀석이었기에 검보다는 둔기가 더욱 어울리겠지만, 세운의 검이라면 달랐다.

뒤랑달.

바위를 쪼갠 검이라는 이명답게, 이 검은 상대가 바위라고 할지라도 전혀 불리하지 않으니까.

오히려 녀석의 약점인 바위 사이의 틈을 노려야 하는 세운으로서는 둔기보다 더욱 어울리는 무기였다.

-내공을 통해 니추공의 움직임이 더욱 빨라집니다.

세운이 더 이상 바위벽을 일으킬 힘이 없다는 걸 눈치챈 것일까?

스톤 라바가 지금까지보다 더욱 크고 많은 바위를 날려대기 시작했다.

그 수가 어찌나 많은지 산의 정상에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쿵, 쿠궁!

미꾸라지의 모습을 본떠 만들어졌다는 회피 보법인 니추공.

그 힘을 완벽하게 이해한 세운이, 말 그대로 미꾸라지처럼 대지 위를 유영하며 떨어지는 바위를 피해 냈다.

놈은 이미 다 잡은 사냥감이라 생각한 것인지, 바위를 피하며 달려오는 세운을 향해 위협적으로 포효를 내질렀다.

콰앙!

드디어 둘의 육탄전이 시작되었다.

"카아아!"

오우거를 단 한 방에 터트려 버린 놈이다.

그 괴력에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은 분명 미친 짓이지만, 질투의 권능 덕분에 놈의 힘은 떨어지고 세운의 힘은 올라 있었다.

태극검의 묘리를 활용하여 적절하게 검을 휘두르자.

가가각!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놈의 피부라 할 수 있는 바위의 겉면에 기다란 상처가 생겨났다.

검으로 바위를 가르다니.

다른 검이라면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바위를 쪼갠 검이라는 이명을 가진 뒤랑달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내공을 통해 태산십팔반검의 제삼 초식, 태산삼격(泰山三格)이 강화됩니다.

콰과광!

예상치 못한 상처에 당황하던 놈에게 세운이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다.

가장 익숙한 검법이라면 역시 혈랑검법이지만, 놈을 상대로는 그보다 힘에 중시하여 파괴력이 높은 태산십팔반검이 더욱 어울렸다.

그 증거로 태산삼격이 휘둘러지자 놈의 몸에 붙어 있던 바위 하나가 떨어져 나가고, 놈에게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들려왔다.

'지금이다.'

아마도 저게 놈의 2 페이즈.

분노가 극에 달하여 움직임이 커지며, 자연스럽게 빈틈 역시 크게 드러날 것이다.

대신 이 순간을 어영부영 넘기게 되면, 놈이 위협을 느끼고 도망가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지금 마지막 한 방을 날려야만 한다.

스륵-

세운이 2층의 시련에서 얻은 '질퍽한 진흙'을 뒤랑달 위에 펴 발랐다.

보구의 힘을 극대화하기 위해, 이번에는 뒤랑달을 이용하여 탐욕의 권능을 사용할 생각이었다.

진흙의 능력은 1회에 한해 무기의 내구도 소모를 0으로 하는 것.

그것과 뒤랑달의 조합이라면, 내구도 소모 없이 보구의 힘을 최대한 끌어낼 수 있었다.

'게다가 실험도 해 볼 수 있지.'

한 번 사용하면 부서지는 너무나도 강력한 힘 때문에, 세운은 아직 보구의 힘을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가장 기본적인 궁금증이라면, 무기가 보구의 힘을 버텼을 때 그 힘이 영구적으로 무기에 남아 있는가? 아니면 시간이 지나면 보구의 힘만 사라지는가.

이런 점 말이다.

진흙의 힘을 빌리면,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혹시나 보구의 힘이 영구적으로 남는다고 해도.

'마몬의 보물들은 뒤랑달에 못지않은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

무기의 힘에 플러스가 되면 됐지, 마이너스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뒤랑달에 발라진 진흙이 뒤랑달에 흡수되듯이 사라져 갔다.

타앗!

세운이 분노한 스톤 라바를 향해 달려들었다.

놈 역시 세운에게 포효를 내지르며 상체를 크게 들어 올렸다.

단순한 내려찍기지만 놈의 덩치가 워낙 거대하기도 하고, 장소도 워낙 협소하여 피할 공간도 없었다. 그런데도 세운은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끝까지 놈의 공격을 지켜보았다.

다리는 언제든지 뛰어오를 수 있도록 눌린 용수철처럼 힘을 응축하고 있었다.

콰앙!!

마침내 녀석의 몸체가 지면을 강타하고, 사방에 크고 작은 돌가루가 수류탄 파편처럼 튀어 올랐다.

먼지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현장에는, 생물은커녕 무생물조차 본래의 모습을 남기지 못하고 으깨져 있었다.

뒤에서 숨을 삼키며 이를 지켜보고 있던 고창석이 비명을 지르기 직전.

타앗!

먼지 사이에서 세운의 신형이 나타났다.

조금 전에 놈의 몸에서 떨어트린 바위 하나.

그 때문에 생겨난 아주 작은 빈틈으로 몸을 던져 공격을 회피한 것이다.

세운은 뒤랑달을 낮게 기울인 채로 스톤 라바의 몸을 밟고 빠르게 달렸다.

감각이 둔한 놈이었지만, 자신의 몸을 밟고 달리는 존재에 대해서 모를 리가 없었다.

"카아아아-!!"

놈의 포효가 하늘을 뒤덮었다.

그 소리가 어찌나 날카로운지 고창석이 귀를 막은 채 인상을 찌푸려야만 했다.

놈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몸을 크게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런데도 세운의 발은 놈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습득한 보법을 최대한 활용하여, 무공까지 더해 끈질기게 놈의 몸 위에서 내달렸다.

순식간에 8m가량을 달린 세운의 눈에 목적지가 나타났다.

'저기다.'

성체로 성장하며 몸의 연결부에 생겨난 빈틈.

드래곤으로 치면 역린(逆鱗)에 가까운 약점이었다.

-내공을 통해 태산십팔반검의 제오 초식, 태산압정(泰山壓頂)이 강화됩니다.

-파극심공의 묘리에 따라 무공의 위력이 강화됩니다.

쿠구구구!

세운이 일 갑자에 달하는 내공을 모조리 검에 쏟아부었다.

태산을 눌러 찌그러트린다는 뜻에 걸맞게, 검의 주위로 무형의 압력이 들이닥쳤다.

최후의 발악을 하듯 꿈틀거리던 스톤 라바 역시 그 압력에 짓눌려 한순간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리고 대망의 순간.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승리의 검, 엑스칼리버 ]

- 아서왕의 삼종신기 중 하나로써 왕이 될 자만이 뽑을 수 있다는 영웅의 성검.

뒤랑달에 엑스칼리버의 힘이 깃들며 검면이 하얗게 물들었다.

눈이 멀어 버릴 듯한 광채에 스톤 라바가 고개를 돌리고, 고창석 역시 눈을 감았다.

승리의 검, 또는 영광의 검이라 불리는 엑스칼리버가 태산의 힘을 담은 채 스톤 라바의 약점에 박혀 들어가는 순간.

푸욱.

세상을 하얗게 물들이던 광채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엑스칼리버는 왕이 선택하기 전 바위에 꽂혀 있던 그 모습 그대로 스톤 라바의 빈틈에 박혀 손잡이만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자리가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일까?

곧 검이 박힌 중심부로부터 하얀 균열이 일어나며.

"카아아아-!!"

쩌엉!!

최후의 비명만을 남긴 채, 스톤 라바의 몸이 깨져 나갔다.

* * *

쩌엉!!

스톤 라바의 몸이 유리처럼 깨져나가는 순간, 이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던 세운의 특별 전담관, 튜닝 역시 입을 쩍 벌렸다.

스톤 라바가 무엇인가?

두 번의 변태를 거쳐 최종 형태가 되면 드래곤과 비슷한 힘을 가지게 되는 몬스터였다.

그런 만큼, 미성숙 개체라고는 해도 라바의 형태일 때 역시 그 힘은 무척이나 강력했다.

마법을 쓰지 못할 뿐이지, 전투력 자체만 놓고 보면 용의 새끼를 뜻하는 해츨링과 비견될 정도였다.

그런 몬스터를 방금, 세운이 처치한 것이다.

그것도 혼자만의 힘으로.

"저놈은 탑에 들어가더니 더 괴물이 됐잖아?"

튜닝이 그 모습에 치를 떨었다.

탑의 하층이야 세운에게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으니 그저 빠르게 치고 올라갈 줄만 알았는데, 쉼터에서 타뷸라의 늑대를 처치한 걸로도 모자라, 층마다 히든 피스를 찾아내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에게 받아 간 열쇠를 활용하여 돌 피리를 획득해 기어코 스톤 라바를 불러내다니.

튜닝이 대체 어떻게 보고서를 작성해야 할지 머리를 싸매고 있을 때쯤, 따르릉거리는 클래식한 벨 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십니까. 정세운 플레이어 특별 전담...."

-미친X아!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들려오는 욕설.

하지만, 그런데도 튜닝은 반박하지 못했다.

소개는 없었지만, 그 번호가 5층 시련 담당관의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스톤 라바가 어떤 몬스터인지 알아?

"...죄송합니다."

-죄송한 게 아니라! 그 스톤 라바, '태양을 굴리는 자'께서 지켜보던 몬스터란 말이다!

"태양을 굴리는 자라면, 설마 일출의 신 말씀입니까?"

-그래! 케프리 님께서 애지중지하던 몬스터란 말이다! 곧 번데기가 된다고 기미가 보이면 바로 알려달라며 나에게 언급까지 하셨는데!

순간, 튜닝은 일이 심각하게 꼬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강한 몬스터를 사냥하긴 했어도, 시련에 큰 지장은 없어 보여 안심하고 있었는데.

스톤 라바가 신 중에서도 강한 힘을 지녔다는 일출의 신께서 지켜보던 몬스터였다니.

-이 잠곤산도 그 대가로 빌린 필드란 말이야! 어떻게 할 거야! 이게 다 네가 말도 안 되게 튜토리얼 보상으로 마스터키를 떠넘겨서 그런 거잖아!

"일단 진정하시고...."

-진정? 지금 진정이라는 말이 나와? 아니면 네가 직접 케프리 님께 스톤 라바가 죽었다고 보고할래?

일반적인 시련이었으면 이런 말이 나올 리가 없었다.

하지만, 돌 피리를 부는 순간 세운의 시련 장소는 시련을 위해 플레이어에게 제공되는 다중 공간이 아닌 실제 잠곤산이었다.

즉, 죽어 버린 스톤 라바를 되살릴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한 해결책이 생각나지 않았다.

애초에 플레이어에게 대놓고 관여를 할 수도 없는 자신이 그걸 어떻게 막느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이에 튜닝은....

"...죄송합니다."

-@#%^#^$!!

이어지는 신랄한 욕설을 들으며 담당관의 화가 삭여지길 기다릴 뿐이었다.

제 108화

108. 제108화

"자네! 괜찮은가?"

스톤 라바가 쓰러지자마자 고창석이 다급하게 달려왔다.

가진 내공과 마나를 모두 소모한 탓에, 세운은 딱딱한 바닥 위에 대자로 쓰러져 있었다.

그런 세운을 보더니, 그가 품에서 약병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하늘이 하나씩 나눠준 약병.

개인당 한 병밖에 없었기에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한 제2에 생명이라 할 수 있는 약이었는데, 그는 망설임 없이 그 뚜껑을 따고 세운의 입에 물려주었다.

"전 괜찮... 웁."

"누가 봐도 괜찮은 꼴이 아니라네. 일단 들이켜."

이하늘이 제조한 약품이 훌륭하다지만, 지금 세운의 상태는 일종의 마나 탈수 증상에 가까웠다.

상처를 치료하는 약을 먹어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러나 고창석의 눈빛이 하도 진지했기에 세운은 군말 없이 약을 모두 들이켰다.

약초 특유의 씁쓸한 맛이 느껴지며, 알게 모르게 쌓여 있던 상처가 조금씩 회복되는 기분이 들었다.

"자네가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저런 괴물을 일격에 쓰러트리다니! 정말 놀랐다네."

"하하...."

"다른 사람들도 저놈을 상대하는 건가? 아무리 그래도 저놈은 자네가 아니라면 무리일 텐데...."

"아뇨. 다른 사람들은 처음 보았던 오우거만 상대하면 될 거예요."

"그렇겠지? 역시 저놈은 자네가 일부러 부른 모양이구먼."

"그렇죠."

솔직히 세운이라 하여도 스톤 라바가 등장할 줄은 생각하지 못했지만, 뭐 어떤가?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어떻게든 놈을 물리칠 수 있었다.

저런 괴랄한 놈을 처치했으니, 시련의 보상도 높아질 게 분명하다.

'검은....'

세운이 고개를 내려 뒤랑달을 바라보았다.

엑스칼리버의 힘이 스며들었을 때 뿜어져 나오던 광채는 사라지고, 그 대신 마른 진흙이 떨어져 나와 있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 직접 사용하던 것과 달리 장비에 적용되는 보구의 힘은 시간이나 힘의 제한이 있는 모양이다.

'그럼 만약 뒤랑달의 봉인이 전부 풀리면?'

지금은 봉인이 덜 풀려 B급의 성능을 자랑하는 뒤랑달이지만, 봉인만 풀리면 지금보다 강한 내구도를 지니게 될 것이다.

그러면 보구의 힘도 충분히 견디지 않을까?

그렇게만 된다면 검과 관련된 보구라면 내구도 걱정 없이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입을 크게 벌린 채 침을 줄줄 흘립니다.

그러던 중, 베엘제붑이 세운이 폭식의 권능을 사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스톤 라바의 파편들이 정상으로 가는 길목을 막고 있어 어차피 치워야 했던 터라, 세운이 망설임 없이 권능을 발현하였다.

콰득, 콰득!

날카로운 이빨들이 나타나더니, 평소와는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그도 그럴 게 스톤 라바의 피부는 바위로 이루어져 있었으니까.

그래도 이빨들은 포기하지 않고 바위를 잘게 부수어 꿀꺽 삼켜 넘겼다.

크기가 그리 크지 않은 바위는 씹지도 않고 삼키기도 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빠각빠각한 식감이 아주 일품이라며 행복해합니다.

바삭바삭도 아닌 빠각빠각한 식감이라니.

아마 저런 표현을 사용하는 건 베엘제붑이 유일하지 않을까 싶었다.

스톤 라바의 덩치나, 단단한 몸체 때문에 생각보다 권능이 마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저 이빨들은 볼 때마다 신기하구먼."

고창석이 멍하게 이빨들을 감탄할 때쯤, 마침내 정상을 가리고 있던 스톤 라바의 잔해가 전부 사라졌다.

-'스톤 라바'를 포식하였습니다.

-양분을 흡수하여 '스톤 스킨'을 획득합니다.

"어?"

드드드득!

당연히 평소처럼 능력치가 올라갈 줄 알았는데 예상을 깨고, 전혀 새로운 무언가가 세운의 몸에 흡수되었다.

피부에서 회색빛이 일렁이듯이 바위처럼 딱딱하게 굳어갔다.

손을 들어 올리니 돌이 갈리는 듯한 소리를 냈었는데, 다행히 시간이 지나며 본래의 피부색을 되찾아갔다.

스톤 스킨.

스킬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신체 강화 같은 개념으로 보였다.

가만히만 있어도 방어력이 대폭 상상하는, 능력치 상승에 비할 바가 못 되게 좋은 힘이었다.

"방금 무엇이었나? 자네 피부가 돌처럼 굳어 가던데."

"저놈을 잡은 보상인가 봐요."

"호오, 그거 신기하구먼."

사실 보상은 아니었다.

폭식의 권능을 가지고 있는 세운이 아니었다면 그 누구도 얻지 못했을 힘이었으니까.

그렇게 단단해진 피부에 만족하던 중, 전혀 예상치 못한 성좌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성좌, '태양을 굴리는 자'가 뒤늦게 자신의 죽은 애완벌레를 확인하고 비명을 지릅니다.

-성좌, '태양을 굴리는 자'가 애완벌레의 사체라도 찾기 위해 당신의 주위를 빠르게 탐색합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꺼억- 하고 트림을 내뱉습니다.

-성좌, '태양을 굴리는 자'가 태양이 흔들릴 정도로 크게 비명을 내지릅니다.

'태양을 굴리는 자?'

세운의 기억 속에 있는 신좌였다. 그도 그럴 게, 그는 이집트를 상징하는 세 태양신 한 명이었으니까.

정오의 태양신이라 불리는 '라'보다 격이 떨어진다지만, 그렇다 하여도 그의 격은 주신급에 달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런 성좌가, 갑자기 애완벌레를 운운하며 나타났다.

깊게 고민하지 않아도, 해답을 알 수 있었다.

'스톤 라바가 케프리의 애완벌레였다고?'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세운이 눈을 껌뻑였다.

저렇게 발작을 일으킬 정도로 소중한 애완벌레를 어째서 이런 곳에 숨겨 두었단 말인가?

그 순간, 돌 피리를 발견한 문에 걸려 있던 자물쇠가 떠올랐다.

'여정의 지침표로도 그곳의 열쇠는 찾을 수 없었지.'

여는 게 불가능하도록 만들어진 방. 그리고 그곳에 숨겨진 돌 피리. 마지막으로 시련의 장소가 전환되며 본 터라 불리는 '잠곤산'으로 바뀐 것까지.

그 모든 것들이 머릿속에서 연결되었다.

'케프리가 스톤 라바를 성장시키려고 이곳에 두었던 건가?'

이렇게 해석하면 말이 되었다.

이에 방에서 서적을 해석하기 위해 사용했던 '베르헬 대륙의 역사' 속 지식을 떠올려 보았다.

'역시.'

역사서에 적힌 천신과 마신의 이름은 각각 일출의 신 '케프리'와....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역시 저 딱정벌레의 것이었냐며 비웃음을 내보입니다.

-성좌, '태양을 굴리는 자'가 까마귀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네놈이 어떻게 이곳을 알았냐며 경악을 내지릅니다.

탐욕의 마신, 마몬이었다.

'그래서 힌트를 알려준 거였나.'

방에서 세운에게 서적의 언어가 베르헬 대륙의 것이라고 알려준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나 보다.

역사서의 지식을 이해할수록 더욱 확신이 갔다.

하지만 어쩔 수 있나?

이미 죽어 버린 스톤 라바를 살려낼 수도 없으니, 세운으로서는 둘의 신경전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성좌, '태양을 굴리는 자'가 이번 일은 결코 가만히 넘어가지 않겠다며 복수를 다짐합니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벌레가 발악해 봤자 벌레일 뿐이라며 비웃음을 유지합니다.

'아니....'

마몬의 반응에 절로 한숨이 튀어나왔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케프리가 직접 만마전에 찾아가 마몬에게 복수할 것 같지는 않았다.

아마, 그 대신 모종의 방법을 이용하여 세운을 괴롭히려 하겠지.

자신의 사도를 이용하거나 신도들을 이용해서 말이다.

'하긴, 알고 있었다고 해서 살려두진 않았을 테니까.'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했던가?

세운이 당당하게 고개를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둘의 말싸움이 끝났는지 케프리의 메시지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덕분에 재밌었다며 당신의 행동을 칭찬합니다.

"다음부터는 미리 언질이라도 해 주시죠."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좋은 게 좋은 것 아니겠냐며 부리를 까딱거립니다.

마몬의 무책임한 대답에 작게 한숨을 내쉬던 세운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련의 본 터인 잠곤산에 도착했으니 히든 피스가 추가로 숨겨져 있을 수도 있었지만, 여정의 지침표도 없는 지금, 괜히 시간을 끈다고 무언가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스톤 라바는 케프리의 애완벌레였던 만큼 보상 공적치가 엄청날 것이다.

이 정도면 랭킹 1위를 놓칠 리 없겠다고 판단한 세운이 잠곤산의 정상을 향해 올랐다.

"장소가 변경됐다더니, 확실히 티가 나는구먼."

"그러게요. 풍경부터가 다르네요."

"그러게 말일세. 아까는 무슨 안개 낀 것처럼 흐릿해 보였는데, 지금은 장관이 따로 없어."

산의 정상에서 내려본 풍경에 세운과 고창석이 감탄하였다.

왼쪽으로는 들쑥날쑥한 산맥으로 이루어진 지평선이, 오른쪽으로는 바다로 이루어진 수평선이 이어져 있었다.

지구 사람들이 왜 등산을 했는지 이해가 가는 장관이었다.

'조금 더 높은가?'

회귀 전에 올랐던 산의 정상.

너무 오래된 탓에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어쩐지 지금이 그때보다 높은 듯한 기분이었다.

더 이상 오를 곳 없는 최정상의 바위에 서자 시원한 바람이 땀을 식혀줬다.

그리고....

-5층의 시련 '산의 지배자'를 훌륭하게 완수하였습니다.

-공적치 집계 중....

-남은 시간 : 8시간 47분

-히든 퀘스트 '돌 피리' 완료.

-히든 몬스터 '스톤 라바' 처치 완료.

-총 누적 공적치 400,000point

-축하드립니다! 5층의 시련을 랭킹 1위로 통과하였습니다.

-보상으로 100,000point를 획득하였습니다.

-놀라운 업적을 달성하여 보상으로 100,000point를 획득하였습니다.

"허허, 자네 덕분에 십만 단위의 공적치도 얻어 보는구먼."

이번 시련으로 획득한 공적치는 어지간한 다른 시련의 두 배가량 높았다.

게다가 1위 보상에 합쳐 업적 보상까지 합쳐졌으니, 세운의 공적치가 순식간에 200만을 뛰어넘었다.

시련이 끝나자, 평소와 같이 다음 시련을 향해 나아가는 선택 창이 떠올랐다.

"휴식 시간은 없나 보구먼. 내심 기대했는데 말일세."

탑에서의 쉼터는 10층마다 하나씩 존재한다. 그전까지는 고창석이 말한 것처럼 시련과 시련의 반복이었다.

하지만, 클랜에 소속되어 있는 플레이어에 한해 한데 모여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었다.

대부분 혼자서 행동하던 회귀 전의 세운으로서는 탑의 중층에 오르고서야 알 수 있었던 클랜의 혜택 중 하나였다.

'클랜 업그레이드.'

[ 클랜 최대 인원 증가 ]

[ 클랜 공격력 증가 ]

[ 클랜 방어력 증가 ]

세운이 클랜장으로서 시스템 메뉴를 떠올리자, 다양한 항목이 눈앞에 떠올랐다.

최소 5층을 정복한 이후에야 떠올릴 수 있는 메뉴였다.

제법 끌리는 항목이 많이 보였지만, 지금 찾는 건 이게 아니었다.

'여기 있다.'

[ 클랜 전용 거주지 생성 ]

클랜 전용 거주지.

플레이어가 어디에 있던지 상관없이 출입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물론, 하나의 테마가 끝나야만 입장할 수 있는 등의 제약이 존재하긴 하지만 클랜 거주지는 그것들을 감안할 만큼의 성능이 있었다.

문제라면 그 가격.

-클랜 전용 거주지 생성을 선택하였습니다. 1,000,000point를 소모합니다. 괜찮겠습니까?

무려 100만 포인트.

세운으로서도 가진 공적치의 절반가량을 투자해야 하는 수준이었다.

다른 플레이어라면 5층에 다다른 시점에서 절대 구입할 수 없는 가격이지만....

"물론."

-클랜 전용 거주지가 생성됩니다.

세운에게는 크게 곤란할 것 없는 가격이었다.

망설임 없이 거주지를 생성하자, 백만 포인트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5층 시련이 끝나면, 바로 시스템 메뉴에서 클랜 전용 거주지 이동을 선택할 것.]

클랜챗으로 짧은 메시지를 남긴 후, 세운은 고창석과 함께 클랜 거주지에 입장하였다.

제 109화

109. 제109화

"오, 여기가 우리 거주지인가?"

"네, 조건만 맞으면 언제든지 이동할 수 있을 거예요."

"여러모로 편리하구먼. 그런데 서야 양이 처음 클랜장을 맡았을 때는 별다른 기능이 없다고 했던 것 같은데."

"5층 이상부터 개방된 기능이에요. 가격도 꽤 비싸서 다른 플레이어들은 알아도 구입하기 어렵겠지만요."

6층의 시련 대신 세운과 고창석이 이동한 곳은 메마른 황야였다. 나무는커녕 풀 한 포기 보이지 않는 황량한 평야.

그나마 저 멀리 물길이 보이는 게 다행이라 생각될 정도였다.

"가격? 얼마인데 그러나?"

"백만 포인트요."

"배, 백만이라고 했나? 그걸 자네 혼자?"

"포인트야 탑을 오르다 보면 자연스레 쌓일 테니까요. 어차피 백만 포인트야 제가 가진 포인트의 반도 안 되는 수치였고."

"아직 백만 포인트가 넘게 있다는 뜻이구먼. 허허, 자네는 알면 알수록 놀랍단 말이지."

고창석이 크게 뜬눈으로 세운을 바라보았다.

하긴, 지금 세운이 가지고 있는 공적치는 누가 보아도 비정상적인 수치였다.

이 무렵 평범한 플레이어가 획득하는 공적치라 해 봤자 간신히 몇십만을 넘는 수준이었으니까.

실제로 이 거주지는 세운처럼 클랜장이 독단으로 구입하는 게 아닌, 클랜원의 포인트를 모아 사들이는 게 정석이었다.

그편이 아니면 100만 포인트는 구입이 불가능할 정도의 가격이었다.

"우리 자리가 생긴 건 좋지만, 너무 아무것도 없구먼."

"일단 그 두 명이 오기까지는 기다려야죠."

"그 꼬맹이들 말이구먼. 허허, 둘이라면 믿을 만하지."

세운으로서도 이 황야에서 재료도 없이 거주지를 건축할 수는 없었다.

만약 그럴 수 있다고 해도, 효율이 너무 떨어진다.

때문에 5층에서 스톤 라바를 상대하느라 고갈된 마나를 채우기 위해 자리에 앉았다.

조금 쉬었다고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몸을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최소한의 휴식이었을 뿐이었다.

"장비는 이리 주게! 내 새것같이 수리해 주지."

"괜찮습니다. 4층에서도 이미 손질해 주셨고...."

"무슨 말인가! 가능하다면 장비는 전투가 끝날 때마다 손질하는 게 최선이라네. 그리고 보게. 많이 더러워졌지 않나?"

세운이 갑옷을 내려보았다.

스톤 라바의 움직임이 워낙 컸던 터라 온갖 흙먼지가 묻어 있는 것은 물론 자잘한 흠집이 꽤 많이 보였다.

5층에서의 싸움이 얼마나 격렬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였다.

이에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던 세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고창석에게 장비를 벗어주었다.

어르신에게 일을 떠넘기는 거 같아 죄송하지만, 그는 오히려 장비를 주지 않으면 화내겠다는 듯이 손을 내밀고 있었으니까.

"그 검도 줘보게. 그 돌덩이를 갈라냈으니, 날을 좀 갈아둬야 하지 않겠나?"

"아, 이 검은...."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할 말이 있으니 검은 가지고 있으라며 부리를 기분 좋게 흔듭니다.

'음?'

뜬금없는 마몬의 메시지.

유난히 기분 좋아 보이는 걸 보니, 케프리의 애완벌레인 스톤 라바를 잡은 게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나 보다.

검은 왜 가지고 있으라는 건지 이해가 안 됐지만, 손해 볼 제안은 아닌 것 같아 마몬의 말을 따르기로 하였다.

"검은 괜찮아요. 방어구만 좀 부탁드릴게요."

"그러겠나? 흠, 하긴. 대충 보니 날도 멀쩡하구먼. 그 돌덩어리를 가르고도 멀쩡하다니, 명검이라는 말로 넘어가기 힘든 검이야."

뒤랑달에 미련이 남은 것인지 그가 조금 주춤했지만, 곧 미련을 버리고 장비 손질을 준비하였다.

늘 그렇듯이, 장비를 바라보는 그의 눈이 한없이 초롱초롱했다.

그사이, 세운은 그와 잠시 거리를 벌리고 뒤랑달을 꺼내 들었다.

고창석의 말대로, 바위를 갈랐음에도 날 하나 상하지 않았다.

'질퍽한 진흙'으로 인해 내구도 소모를 막았다지만, 도저히 B급 아이템으로 보기 어려운 성능이었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기꺼운 마음으로 당신에게 보상을 하사하려 합니다.

'보상?'

굳이 바라지도 않았는데 보상을 주려 한다니. 그것도 탐욕의 마신인 마몬이.

케프리라는 신을 방해한 게 어지간히도 기분이 좋은가 보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바닥에 검을 꽂아 넣으라고 지시합니다.

푹.

지시를 듣자마자 세운이 망설임 없이 검을 땅바닥에 내려찍었다.

큰 힘을 주지 않고 가볍게 찍었음에도, 검신의 절반 이상이 땅속으로 박혀 들어갔다.

황야인 만큼 대지도 단단한 편이었는데, 뒤랑달의 예기는 이미 그것을 뛰어넘고 있었다.

그 직후.

우우웅-

뒤랑달의 검신이 보랏빛으로 물들어 갔다.

세운이 무슨 일인지 이해되지 않아 눈을 껌뻑거리자, 마몬이 친절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뒤랑달을 복제하는 과정에서 그 안에 담긴 힘의 일부를 밝혀낼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오?'

튜토리얼 때 마몬에게 빌려줬던 뒤랑달.

그저 복제에만 매진하는 줄 알았는데, 그사이 무언가 발견한 게 있나 보다.

의문만이 가득하던 세운의 눈에 기대감이 차올랐다.

저 말은 즉, 뒤랑달의 봉인을 풀어주겠다는 말이니 말이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봉인을 완벽하게 푸는 건 안 되겠지만, 한 단계 정도는 문제없을 것이라며 고개를 치켜듭니다.

우웅!

뒤랑달을 둘러싼 보랏빛이 스펀지에 빨려 들어가듯, 검에 빨려 들어갔다.

아직 땅에 박혀 있는데도, 이전보다 선명해진 황금빛 문양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검을 빼 드니 '스릉' 하는 기분 좋은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검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 바위를 쪼갠 검, 뒤랑달(봉인) ]

분류 : 장검

등급 : A

설명 : 전설의 영웅들이 사용해 온 전설의 검. 아직 주인의 힘을 완벽하게 인정받지 못해 잠재력이 일부 봉인되어 있다.

능력 : 1. 영웅의 검 – 절삭률이 50% 상승한다.

2. 영웅의 자격 – 몬스터를 대상으로 한 공격력이 30% 상승한다.

3. 바위를 쪼갠 검 – 그 어떤 상황에서도 칼날이 무뎌지거나 이가 빠지지 않는다.

4. 부서지지 않는 검 – 그 어떤 공격으로도 내구도가 소모되지 않는다.

5. (봉인)

검을 잡은 세운이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을 꽉 주었다.

B급이었던 뒤랑달이 A급이 된 걸로도 모자라, 봉인되었던 네 번째 능력이 개방되었다.

부서지지 않는 검.

어차피 바위도 쪼갤 만큼 튼튼함 검이었기에 다른 플레이어라면 대충 넘어갈 능력이었지만, 세운에게는 달랐다.

'이거라면 보구를 사용하는 데 무리가 없겠어.'

스톤 라바를 상대할 때 깨달았던 점.

검의 성능이 뛰어난 만큼 보구의 힘을 100%에 가까이 발현할 수 있고, 검의 내구도가 받쳐주는 만큼 보구의 힘을 견뎌낼 수 있었다.

그런데 매개체가 되는 검이 A급의 명검이라면?

게다가, 그 내구도가 절대 소모되지 않는다면?

마음 놓고 마몬의 보구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검 형태의 보구에 한정된 얘기지만 앞으로 무기가 망가질 걱정을 안 해도 된다는 것부터가 크나큰 장점이었다.

"감사합니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앞으로 벌레 녀석이 귀찮게 할지도 모르니, 그에 대한 보상일 뿐이라며 날개를 파닥입니다.

성좌, '태양을 굴리는 자'. 일출의 신, 케프리.

주신급에 가까운 성좌의 복수라지만, 그렇게 걱정되는 사항은 아니었다.

어차피 성좌가 탑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고, 그의 신도들은 대부분 탑의 중층 이상에 존재했으니까.

세운이 그들을 마주칠 때쯤에는....

'그렇게 강한 세력은 아니었으니까.'

아마, 그들의 전력을 아득히 초월했으리라.

누군가 자만심이라 부를지 모르겠지만, 현재 자신의 성장 속도와 케프리의 신도들이 가진 전력을 알고 있는 세운이었기에 가질 수 있는 자신감이었다.

'얼른 써 보고 싶은데.'

능력에는 따로 적혀 있지 않았지만, 등급이 상승한 만큼 검의 예리도 역시 상승해 있었다.

검을 휘두르자 공기가 잘려 나가듯 한 절삭음이 들려온다.

짧은 검무를 펼치며 그 기분 좋은 절삭음을 감상하던 중, 뒤쪽에서 새로운 기척이 느껴졌다.

"우와! 여기 뭐예요? 신기하다! 진짜 우리 땅이야?"

익숙하게 들려오는 활발한 목소리.

'아름.... 아니, 다운이었나?'

미묘한 억양 차이로 간신히 알아낼 수 있었다.

쌍둥이 자매는 쌍둥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었으니까.

둘이 작정하고 속이면, 클랜 내에서도 유서아를 제외하고는 둘을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와! 혈랑 오빠!"

"일찍 왔네."

"한철 오빠가 쾅! 쾅! 하더니 바로 눕혀 버렸거든요! 4층의 시련도 그렇고, 진짜 믿음직하다니까요?"

세운을 발견하자마자 활기차게 다가오는 한다운의 옆에 강한철이 서 있었다.

거친 전투를 증명하듯, 그의 갑옷에는 오우거의 피가 흥건하게 묻어 있었다.

하긴, 튜토리얼에서 세운과 함께 굶주린 오우거를 사냥하고 다녔던 강한철이었으니. 다 자라지도 않은 오우거 정도야 그리 어렵지 않았을 거다.

"그보다, 여기 진짜 우리 땅이죠? 여기에 마음 놓고 건물 지어도 되는 거죠?"

"응. 안 그래도 그거 부탁하려고 기다리고 있었어."

"와아! 그럼 이제 이동형으로 안 지어도 되는 거죠? 완전히 설치형으로 지어도 되죠?"

"물론이지."

"야호! 기대하세요! 저희가 진짜 멋지게 만들어 줄 테니까! 아, 아름이는 아직 안 왔나?"

"우리 다음으로는 너희가 처음이야."

"흠, 하긴. 아름이는 정필 오빠랑 붙었다고 했으니까 조금 걸릴 거예요."

한아름과 박정필의 조합이라.

둘 다 제대로 된 전투계 플레이어가 아니라서 조금 걱정되긴 했다.

박정필이야 어떻게든 살아남을 것 같지만, 한아름은 어르신보다도 전투력이 떨어지는 게 사실이니까.

"그럼 일단 저 먼저 도면이라도 짜고 있을게요! 아, 할아버지!"

"오, 우리 다운이 왔구나."

"저랑 같이 도면 짜요!"

"음? 일단은 갑옷 손질부터 끝낸 다음에...."

"그러지 말고 같이 해요! 네? 네?"

"...허허, 그러자꾸나."

어차피 인제 와서 도와줄 방법도 없었다.

세운은 다들 멀쩡하게 올라오길 바라며, 자리에 앉아 비어 버린 단전과 서클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 * *

그 시각.

"으아아아악!"

세운이 우려하던 박정필과 한아름이 오우거를 상대하고 있었다.

아니, 이걸 상대한다고 표현할 수 있을까?

오우거는 장난감 쫓듯이 박정필을 따라가고 있었고, 박정필은 온 힘을 다해 도망치고 있었다.

한아름은 산의 높은 곳에서 공성 병기를 꺼내 오우거를 조준하고 있었지만.

"아, 좀 가만히 있어 봐요!"

"오우거라고! 오우거! 가만히 있으면 나 뒤진다고오!"

활도 아니고, 조준에 시간이 걸리는 공성 병기로는 오우거를 제대로 조준할 수 없었다.

한참 애를 쓰던 한아름이 신경질을 내며 조준을 포기하였다.

'그러게, 처음에 허세만 안 부렸어도!'

처음 5층의 시련에 도전했을 때 오우거는 둘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하고 단잠에 빠져 있었다.

그것을 본 한아름이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며 이 자리에 올라서서 공성 병기를 설치하였다.

아무리 오우거라도, 수면 중에 급소를 당한다면 살아남기 힘들 테니까. 그것도 일반적인 짱돌이나 화살이 아닌, 제대로 된 공성 병기라면 말이다.

그러나 그 계획은 박정필에 의해 산산이 깨져 버렸다.

'야, 자냐?'

'으헤헤, 이놈 곧 죽을 줄도 모르고 세상 편하게 자고 있네.'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놈이지만, 내가 봐줬다! 자고 있을 때 고통도 못 느끼고 죽게 해 주마!'

한아름이 열심히 공성 병기를 설치할 무렵, 박정필이 자고 있는 오우거의 옆에서 헛소리를 하며 연신 깐죽거렸다.

병기의 설치에 집중하느라 한아름이 이를 말릴 새도 없이.

'크어어어어!'

오우거가 깨어나고 말았다.

그다음이 바로 지금의 상황이었다.

박정필은 오우거를 피해 도망치고, 한아름은 조준을 포기했다. 도저히 답이 안 나오는 상황이었다.

다행인 점이라면.

'난 안 노리네.'

어째서인지 오우거가 박정필의 뒤만 졸졸 따라다닌다는 것이다.

종종 조준에 실수하더라도 도박 반으로 공성 병기를 작동시켰는데, 위협적임을 깨달았음에도 오우거의 표적은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이대로는 승산이 없었다.

아무리 도망친다고 하여도 박정필의 체력은 한계가 있다.

그사이, 한아름이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아, 그래!'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디아블로 클랜의 클랜장, 세운이 자주 쓰던 방법.

공성 병기를 전방으로 조준한 한아름이 아직까지 술래잡기를 하고 있는 박정필을 향해 외쳤다.

"오빠! 이쪽으로 달려요!"

"내가 지금 방향 보고 도망치고 있는 것 같냐! 그 높은 곳까지 어떻게 달려!"

"아, 쫌! 그냥 닥치고 달려요!"

"으아아아악!"

박정필이 바닥을 구르며 오우거가 휘두르는 몽둥이를 가까스로 피해 냈다.

곧이어 그 짧은 틈을 이용해 방향을 바꿔 한아름이 있는 방향으로 달렸다.

경사 때문에 달리기가 거의 불가능한 지경으로 속도가 점차 떨어졌다.

그에 반해 오우거는 무식한 힘으로 속도를 유지하며 박정필을 따라왔다.

"빨리 어떻게 좀 해 봐! 아이고 나 죽네에에!"

우렁찬 비명이 들려왔지만, 그와 반대로 한아름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지어졌다.

박정필이라는 장애물이 있지만, 이로써 정면으로 달려오는 오우거는 공성 병기의 직선 범위에 들어와 있었다.

이에 그녀가 망설임 없이 공성 병기를 작동시켰다.

"알아서 피해요!"

"뭐?"

투웅!

박정필. 아니, 오우거를 향해 발사되는 탄환.

한아름의 계획대로 오우거는 박정필에게 신경 쓰느라 날아오는 탄환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눈앞으로 빠르게 날아오는 탄환을 바라보며.

"으아아아악!"

어쩐지, 데자뷔가 떠오르는 박정필이었다.

제 110화

110. 제110화

거주지에 한아름이 도착하자마자 건설 작업이 빠르게 이루어졌다.

지금까지처럼 이동할 걱정 없는 터전을 꾸리는 일이어서 그런지, 사람들 역시 활기차게 쌍둥이 자매를 도왔다.

5층의 시련을 마치고 오느라 피곤할 텐데도 말이다.

"탈락자가 한 명도 없다니. 이건 의외인데."

"제가 중간에 클랜챗으로 공략법을 몇 개 알렸거든요."

"음...."

"...그랬으면 안 되는 거였나요?"

세운의 애매한 반응에 혹시 자기도 모르게 실수를 한 건지 당황하는 유서아.

세운이 5층의 공략법을 사람들에게 알려주지 않은 건 다 이유가 있었다.

5층의 시련은 어려워 보이지만, 곳곳에 수많은 공략법이 존재하여 플레이어의 냉철함과 전투력을 확실히 끌어 올릴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니 거기서만큼은 스스로의 판단으로 시련을 통과하길 바랐던 것이다.

튜토리얼 때와 마찬가지로, 세운은 클랜원들이 강하게 성장하길 바라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제 공략법을 본 사람은 절반도 되지 않아요. 대부분 이미 저마다의 방법을 찾아서 도전하고 있더라구요."

"뭐, 괜찮겠지."

세운이 클랜장을 맡고 있다지만, 실질적으로 사람들을 이끌고 있는 건 유서아였다.

그 책임감까지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았을 뿐이니까.

그렇게 한창 거주지가 지어질 때쯤, 저 멀리에서 혼자 고분 고투하고 있는 고창석의 모습이 보였다.

평범한 건축물은 아닌 것 같아 관심이 생긴 세운이 그쪽으로 다가갔다.

"어르신, 이건 혹시...."

"아, 자네인가. 허허, 터전도 잡았겠다. 제대로 된 대장간을 지어보고 싶어서 말일세."

풀무나 모루, 각종 연장 등. 대장간에 필요한 각종 도구는 물론 화로까지 기본적인 틀은 대부분 준비되어 있었다.

짧은 시간에 이 정도 디테일이라니.

아무래도 거주지에 도착하기 이전부터 진작에 대장간의 구조를 생각해 둔 것 같았다.

아마, 쉼터에서의 대장간을 기본으로 하여 설계를 했겠지.

대충 보기에도 그곳과 흡사한 점이 많아 보였다.

"잘 지으신 것 같은데, 뭐 문제라도 있으신가요?"

"그게 말이네...."

고창석이 곤란한 얼굴로 화로를 바라보았다.

무기는 물론 두꺼운 갑옷 등도 달궈야 했기에, 화로의 크기가 상당했다.

그런데도 열이 최대한 빠져나가지 않도록 신경을 쓴 게 엿보였다.

그 시선으로, 세운은 이 대장간에서 부족한 점을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불이 문제군요."

"그렇다네. 여기는 장작으로 쓸 나무도 없어 보이고, 그렇다고 공적치로 장작을 구입하긴 영 아쉬워서 말일세."

"공적치를 그렇게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깝죠."

"다음 시련에서 나무가 보인다 해도, 내가 들고나올 수 있는 양은 한계가 있잖나. 나도 그 마법이란 걸 쓸 수 있으면 좋겠구먼. 허허."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고 해도, 화로용으로는 안 어울릴 거예요. 마법에도 마나라는 장작이 필요하니까요."

"크흠, 그런가."

이러한 문제 때문에 클랜 전용 거주지에 대장간을 설치하는 건 매우 어려웠다.

방법이라면, 10층마다 존재하는 쉼터에서 대량의 장작을 조달해 두는 것 정도.

그 때문에 어지간한 대형 길드가 아니고서는 전용 대장간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가만히 두기에는 아쉬워하는 고창석의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뭔가 방법이....'

세운이 머리를 굴려 보았다.

마나석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지만, 이 역시 마나를 지속해서 조달해 줘야 한다.

마몬의 보물 중에서 흑련 가루와 같은 게 있지만, 그것 역시 순간적으로 불길을 키워낼 뿐 대장간에 필요한 지속적인 불길과는 맞지 않았다.

그러던 중.

'아, 그게 있었지.'

화륵!

세운이 화로의 안에 불씨를 만들어 냈다.

가장 처음 배운 마법이라 할 수 있는 '카샤의 불씨'.

화력은 약하지만, 정령의 힘이 깃들어 쉽게 꺼지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렇다고 아예 꺼지지 않는다는 건 아니라 결국 제한이 있었지만....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선지자의 불씨 ]

-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을 위해 훔쳐 온 하늘의 불꽃. 신의 힘이 깃들어 있어 절대 꺼지지 않는다.

이렇게 하면 말이 달라진다.

성냥불처럼 초라하던 카샤의 불씨에 신의 힘이 깃들어 은은한 금빛을 흘리며 몸집을 키워나갔다.

"흐음, 고맙지만 자네도 아까 말했지 않나. 마나가 없으면 마법으로도 오래 유지할 수 없다고 말일세."

"이건 다를 겁니다."

"...정말인가?"

솔직히, 반은 도박이었다. 이 힘 역시 무기에 깃든 보구의 힘처럼 사라져 버릴 수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이대로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 순간.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특별히 인심을 써주겠다며 자신의 창고에서 '선지자의 불꽃'을 꺼내옵니다.

화르륵!

마몬의 메시지와 함께 눈앞의 불씨가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이제는 불씨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열기를 키운 불꽃 덕분에 대장간 안이 순식간에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거라면....'

카샤의 불씨에 세운이 지닌 탐욕의 권능, 거기에 레플리카라고는 하지만 실제에 가까운 힘을 발휘하는 마몬의 보물까지.

이 정도라면 영원히 꺼지지 않는 신의 불이라는 힘을 계속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장작은 필요 없고, 풀무질만 잘하시면 화력을 쉽게 조절할 수 있을 겁니다."

"오오! 정말 고맙네! 자네, 정말 다재다능하구먼!"

-성좌, '금관을 쓴 병사'가 마신께 깊이 고개를 숙입니다.

-성좌, '금관을 쓴 병사'가 이 은혜는 뛰어난 결과물로 보이겠다며 감사를 표합니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자신은 숟가락을 거들었을 뿐이라며 당신에게 공을 떠넘깁니다.

평소라면 저렇게 넘어갈 마몬이 아닌데, 케프리에게 한 방 먹인 여운이 아직 남아 있나 보다.

"이거, 얼른 써 보고 싶구먼! 당장 뭐라도 만들어 봐야겠어!"

뜨겁게 타오르는 화로 덕분에, 쌀쌀하던 거주지에 따뜻한 온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 * *

거주지는 생각보다 일찍 완성되었다.

그만큼 쌍둥이 자매의 건설 실력이 뛰어났고, 클랜원의 열정 역시 뛰어난 덕분이었다.

특히, 쌍둥이 자매가 '바로 이거야!'라며 만들어 낸 목욕탕은 세운으로서도 감탄할 정도였다.

대장간의 화로와 수로를 연결하여 만든 것이었는데, 덕분에 탑에서 하리라고 생각도 못 한 온수 목욕을 즐길 수 있었다.

콰앙!!

"...졌다."

"움직임이 많이 빨라졌는데? 태을섬수공이 몸에 꽤 익은 것 같아."

"5층의 시련까지 일부러 태을섬수공만 사용해서 올라왔다."

"그래도 아직 일 초식이 한계지? 익숙해졌다고 하려면, 최소한 삼 초식까지는 사용할 수 있어야 할 거야."

"알고 있다. 다음 대련까지는 꼭 이 초식을 숙달하도록 하지."

세운과의 대련을 마친 강한철이 가볍게 주먹을 털며 대답했다.

세운이야 탐욕의 권능을 이용한 덕분에 순식간에 익힐 수 있었다고 해도, 강한철은 달랐다.

따로 지도를 받는 것도 아니고, 대련 시간에 부딪히며 눈으로 보고 몸으로 익힌 게 전부인데, 그것만으로도 벌써 일 초식을 완벽히 익혔다.

놀라울 정도의 성장 속도.

마치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는 듯한 습득력이었다.

대련할 때마다 성장하는 게 눈에 보이니 세운으로서도 키우는 재미가 느껴질 정도였다.

"유서아, 너도 움직임이 많이 좋아졌던데?"

"층을 오르면서 깨달은 게 있었거든요. 아, 그리고...."

"그리고?"

"제 잠재력에 대해 조금은 알 것 같아요."

유서아의 잠재력, 지배.

탑에 존재하는 수많은 잠재력 중에서도 극히 드문 잠재력이었고, 이해하기에 따라 천차만별의 힘을 발휘하는 잠재력이기도 했다.

그녀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자신만의 사용법을 깨달은 듯했다.

역시 정석적인 사용법을 안 알려주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랬다면, 지금처럼 자신만의 사용법을 알아내지 못했을 테니까.

'그것보다, 이놈은 또 안 보이네.'

박정필을 찾던 세운이 한숨을 내쉬었다.

거주지에 도착하자마자 한아름이 달려와 투정을 부렸던 게 기억났기 때문이다.

박정필이 와서 극구 부인했지만, 세운의 성격을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세운이었기에 상황을 금세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최소한의 전투법이라도 알려줄 생각이었는데. 대체 어디로 숨었는지,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 이곳에서 완전히 거주해도 되지 않냐는 말이 돌고 있어요."

"당연히 거주.... 아, 그 말인가."

이곳이 전용 거주지라고 말하려던 세운이 유서아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내색은 하지 않아도 모두 몬스터의 전투나 정착하지 못하는 생활에 힘들어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더 이상 시련에 도전하지 않고 이곳에서 살면 어떠냐는 말이겠지.

'나도 그러고 싶었던 적이 있었지.'

솔직히, 현재 디아블로 클랜의 경우는 그 어떤 클랜보다 시작이 잘 풀린 케이스였다.

아마 세운이 아니었다면 클랜의 절반 이상이 목숨을 일었을 것이다. 남은 사람들 역시, 폐인에 가까운 상태가 되었겠지.

회귀 전 지옥 같은 삶을 살아왔던 세운이었기에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세운은 알고 있었다.

탑을 오르지 않으면, 결국 죽게 될 거라는 걸.

"보다시피 여기는 아무것도 없어. 기껏 해 봐야 흙이랑 물. 두 가지뿐이지."

"식물을 재배하거나 동물을 키우자는 말도...."

"이 땅, 죽은 땅이야. 식물을 키워봤자 자라지도 않을 거고, 그러면 당연히 먹이가 없으니 동물을 키우는 것도 불가능하겠지."

테이머로 각성한 플레이어가 동물이나 몬스터를 클랜 전용 거주지로 데리고 오는 경우는 있었다. 하지만, 가축을 키우는 건 불가능하다.

만약 키운다고 해도 먹이를 계속 사 와야 하는데, 그래봤자 밖에서 식량을 사 오는 것과 다를 게 없다.

"공적치로 식량을 구입할 수는 있지만, 공적치가 다 떨어지면? 결국 시련에 도전하는 수밖에 없어."

"...그렇겠죠."

"게다가, 그쯤에는 이미 전투 감각이 다 떨어져 있겠지. 너도 경험했다시피, 어설픈 마음으로 탑을 올랐다가는 죽음밖에 없어."

유서아가 꺼낸 말을 그 누구보다 오래, 또 진지하게 고민해 본 세운이었기에 할 수 있는 대답이었다.

탑은 플레이어가 정체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제자리에 멈춘 플레이어를 기다리고 있는 건, 결국 죽음뿐이다.

'그리고....'

아직 시간이 꽤 남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또다시 아우터들이 나타날 것이다.

미래를 바꾸지 않는다면, 세운이 겪은 탑의 멸망이 다시 한번 반복될 거다.

물론, 이것에 대해서는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저도 머리로는 알고 있었어요. 다만, 본 터가 생기니까 저도 마음이 조금 약해졌나 봐요."

"이해해. 그러니까 다음 층에 오르기 전까지는 충분히 휴식할 생각이야."

"세운 씨는 참 신기해요. 이럴 때 보면, 미래에서 오기라도 한 것 같아요."

"...."

세운은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사실, 이전부터 생각하던 사항이다. 그녀에게라면 회귀에 대한 사실을 밝혀도 되지 않을까...라고.

만약 그녀가 이해해 준다면, 앞으로의 계획을 짜고 클랜을 이끌기가 더욱 수월해질 테니까.

그리고 사실.

"하늘, 엄청 깨끗하네요. 그렇죠?"

탑의 멸망을 막는다는 거대한 사명감을 함께 짊어질 동료가 필요하기도 했다. 그 무게를 혼자 짊어지기에는 너무나도 힘들었으니까.

늘 강한 척하며 가시밭길을 걷고 있었지만, 세운 역시 한 명의 인간이었으니까.

제 111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