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6화
66. 제66화
타닷!
세운이 빠른 속도로 몬스터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몬스터들이 나아가는 방향과 완전히 역행이었지만, 그 어떤 몬스터도 세운과 부딪히기는커녕 지느러미 하나 닿지 못했다.
바로, 세운이 새로 배운 보법인 니추공 때문이었다.
그 걸음은 정말 미꾸라지가 된 것처럼, 몬스터 사이를 유연하게 빠져나올 수 있게 해 줬다.
게다가, 거기에 '킬케르가식 은신술'까지 활용하니 어지간한 몬스터는 자신의 다리 사이를 스쳐 지나가는 세운의 존재조차 알아채지 못하였다.
물론, 그중에서도 감각에 좋은 놈들은 세운의 움직임을 포착할 수 있었지만.
"키엑?"
세운의 정체까지 알아챌 수는 없었다.
지금 세운은 수많은 몬스터를 사냥하며 피와 비늘이 튀어 비린내가 가득해진 망토를 푹 눌러쓰고 있었으니까.
이 난잡한 전장에서, 그런 세운을 확인할 만한 몬스터는 흔치 않았다. 아마, 모습을 본다고 하더라도 '길도 모르는 멍청한 털게' 따위로 생각하지 않을까.
그러던 중.
"무어, 무웅?"
기다란 수염을 가진 메기 모습의 몬스터 한 마리가 세운의 정체를 알아차린 듯 눈을 크게 뜨며 아가미를 뻐끔거렸다.
잘은 몰라도, 다른 몬스터보다 감지력이 특화된 놈인 듯했다.
놈이 세운의 정체를 알리기 위해 입을 크게 벌렸지만.
푹.
놈의 입에서는 아무런 목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어느샌가 다가온 세운이 놈의 목구멍에 칼을 쑤셔 넣었기 때문이다.
털썩.
동료가 바닥에 쓰러졌지만, 워낙 대군이 질서 없이 움직이고 있었던 터라 놈에게 관심을 가지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덕분에 세운은 체력을 보존하며 편하게 적 진형의 깊숙이까지 침투할 수 있었다.
'슬슬 위치 좀 확인해 볼까.'
세운이라고 해도 보스 몬스터가 출현하는 정확한 위치는 알지 못한다.
회귀 전의 세운은 찰스의 클랜원들에게 부려 먹히며 다섯 번째 장의 몬스터를 간신히 막아 내고 있었으니까.
지금 아는 정보라고는, 보스 몬스터가 절벽가에 나타났을 거라는 것뿐이다.
타앗!
몬스터 사이를 거닐던 세운이 가장 높아 보이는 바위 위로 몸을 날렸다.
몇몇 몬스터가 '저 털게는 저길 왜 오르는 거야?'라는 눈빛으로 세운을 이상하게 쳐다보았지만, 수상하게 여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바위의 끝으로 올라가니, 절벽에서 올라오는 몬스터의 대군이 눈에 훤히 들어왔다.
'성벽 위에서 봤을 때보다 장관이네.'
꽤 많이 물리쳤다고 생각했는데, 절벽에서는 계속해서 수백 수천의 몬스터가 끊임없이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높이 서서 바라보니, 그 모습이 꼭 벌레 무리 같아 징그러울 지경이다.
'놀의 들창코'를 통해 느껴지는 비린내를 꾹 참으며, 절벽가를 크게 둘러보았다.
그러던 중, 드디어 놈들의 보스 몬스터를 발견할 수 있었다.
"크오오오오-!!"
분노한 바다의 폭군. 씨 드레이크, 다라칸.
녀석이 그 거대한 몸으로 절벽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등에 용종(龍種) 특유의 날개가 자리 잡고 있었지만, 앞발로 힘겹게 절벽가에 발을 걸치고 포효를 내지르는 모습을 보니 비행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도 그럴 게, 녀석은 비행 능력이 퇴화하였다는 용종인 '드레이크'였다.
드래곤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비행, 마법, 지능 등 그 어떤 것도 드래곤을 따라가지 못하는 하위호환형 몬스터였다.
게다가 놈은 '씨 드레이크'.
날개는 비행보다는 일종의 지느러미로써 헤엄을 위해 발달해 있어, 지상에서는 아무런 쓸모도 없었다.
다만, 그렇다고 해도 놈을 무시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더럽게 크네.'
비행과 마법, 지능을 제외하더라도 드래곤 특유의 육체적 힘은 그대로 남아 있으니까.
결정적으로, 놈은 마나를 다루지 못한다고 해도 용종의 고유 능력 중 하나인 '브레스'를 사용할 수 있었다.
그 두 가지만으로도, 놈은 충분히 위협적인 몬스터다.
쿠르르, 쿵!
"크오오오오-!!"
절벽이 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지만, 놈은 필사적으로 사족을 휘저으며 절벽 위로 올라오는 데 성공했다.
놈의 울부짖음을 들은 몬스터들이 고개를 수그리며 길을 비켜주었다. 그렇지 않으면, 폭군이 자신들을 짓밟고 앞으로 나아갈 것을 인지한 것이다.
'회귀 전에는, 저놈을 잡기 전에 성의 절반 이상이 무너졌었지.'
다섯 번째 장에 '성'의 존재가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성을 이용해 공격을 막아 내고, 모두가 힘을 합쳐 놈들을 공격하는, 일종의 레이드 몬스터인 셈이다.
당장 세 번째 장에서는 플레이어들끼리의 전투를 강요하더니, 이제 와서 협력이라니. 웃음도 안 나오는 목표지만,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세운은 그런 몬스터를 혼자서 사냥할 생각이었다. 놈이 성에 도착하기 전에 말이다.
'마몬의 보물을 사용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딱 보아도 알 수 있다.
지금까지처럼 마몬의 보물을 하나 꺼내서 휘두르는 것만으로는 놈을 죽일 수 없었다.
아깝긴 하지만, 지금 가지고 있는 아이템 대부분을 소모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놈은 그만큼의 가치가 있는 몬스터니까.'
놈을 사냥하면 얻게 되는 것이라면, 첫 번째가 바로 공적치다.
수많은 사람이 힘을 모아 처치하여도 개인마다 엄청난 양의 공적치를 안겨주던 녀석인데, 그런 녀석을 혼자 사냥한다면?
안 그래도 벌어진 공적치 차이가 압도적으로 벌어지게 될 것이다.
둘째로, 놈에게서 얻을 수 있는 아이템.
소문으로는, 놈을 죽인 플레이어에게 엄청난 가치를 지닌 장신구가 지급된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놈에게서 얻을 수 있는 소재는 전부 용종의 것으로 엄청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 외에도 경험치나 폭식의 권능으로 얻을 수 있는 힘 등. 놈을 사냥해야 할 이유는 차고 넘칠 정도로 충분했다.
'문제는 저 몬스터들인데....'
세운이라 하여도 보스 몬스터와 함께 저 많은 몬스터들을 동시에 상대할 수는 없었다.
때문에 무언가 방법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던 중.
"키에엑!"
"크헥!"
화륵!
콰과광!!
절벽가와의 반대편.
저 멀리서, 몬스터들의 비명과 함께 각종 원소가 터져 나가고 있는 게 보였다.
날카로운 바람이 몬스터의 사지를 베어 나가고, 불꽃이 살결을 불태운다. 대지가 쩍쩍 갈라지고, 비가 화살처럼 쏟아져 내린다.
세운이 마법을 난사할 때보다 훨씬 화려하고 강력하다.
천재지변이라는 말이 그 무엇보다 잘 어울려 보였다.
굳이 '제왕 독수리의 척안'을 활성화하지 않아도, 세운은 저곳에서 일어나는 천재지변의 정체를 잘 알고 있었다.
'리엘 리프레인.'
그녀였다.
사대 속성의 정령을 다루며, 자연에게 사랑받는 자로 알려진, 세운이 아니었다면, 본래 튜토리얼의 공적치 랭킹 1위를 차지했을 플레이어.
그런 그녀가, 네 정령을 앞세운 채로 보스 몬스터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리엘이 원래 보스 몬스터를 찾아 나섰던가?'
아니다.
세운의 기억이 맞다면, 그녀도 수성전이라는 목표에 집중하여 성을 방어하고 있었다.
보스 몬스터가 등장하며, 사람들과 협력하여 마지막 일격을 날린 그녀였지만, 자선하여 보스 몬스터를 찾으러 움직이지는 않았다.
어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씨익-
'기왕 이렇게 된 거, 잘 써먹어 줘야지.'
그녀를 이용한다면, 편하게 보스 몬스터를 대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 *
리엘 리프레인.
그녀는 엘프 특유의 나뭇잎을 닮은 길고 날카로운 귀를 가지고 있었다.
엘프. 자연의 사랑을 받는 존재로, 이미 멸망한 세계에서 건너온 세계수의 마지막 씨앗이었다.
지금 그녀는, 네 정령과 함께 몬스터가 들끓는 전장을 누비고 있었다.
"나쁜 아이들!"
"물을 더럽혔어."
"그럼 불태워 버려야지!"
"묻어도 돼?"
그녀의 정령들은 강력했다.
하나하나가 어지간한 마법사 한 명과 비슷한 힘을 내며 불과 바람, 물과 대지를 다스렸다.
게다가, 네 정령이 힘을 합치자 그 시너지는 마법의 기본적인 상식을 벗어나고 있었다.
본래라면 정령이 사용하는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정령사가 먼저 탈진되어 자리에서 쓰러졌겠지만, 그녀는 쓰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큰 힘을 불어넣으며 정령들을 지원해 주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성좌, '다섯 번째 날'이 너무 무리하는 것 아니냐며 당신을 안쓰럽게 바라봅니다.
성좌, 다섯 번째 날.
사랑과 미의 여신, 프레이야에게서 받은 축복 덕분이었다.
풍요의 축복.
프레이야는 사랑과 미의 여신이자, 풍요의 여신이기도 했다.
그런 여신이 내려 준 풍요의 권능은, 리엘로 하여금 무한에 가까운 마나의 축복을 안겨 주었다.
물론, 신의 권능이라 하여도 플레이어가 사용할 수 있는 영역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튜토리얼 수준의 플레이어에게 프레이야의 축복은 마르지 않는 샘물과도 같았다.
"어쩔 수 없어요. 1등을 되찾기 위해서는 저 보스 몬스터라는 놈을 꼭 잡아야 해요."
-성좌, '다섯 번째 날'이 그렇게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며 당신을 걱정합니다.
"아뇨. 가야 해요. 저를 위해서도. 일족을 위해서도. 세계수님을 위해서도. 그리고, 저를 선택해 주신 여신님을 위해서라도."
-성좌, '다섯 번째 날'이 어쩐지 안쓰러운 눈빛으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튜토리얼의 네 번째 장이 시작된 후, 곧바로 개인 공적치 랭킹을 확인한 그녀는, 충격을 받아야만 했다.
정세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 이름을 가진 플레이어가 자신을 제치고 랭킹 1위에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슬아슬한 차이가 아니라 무려 30만에 가까운 차이로 말이다.
'이대로 1등을 빼앗길 수는 없어.'
그녀의 목적은 탑에 존재한다는 '영원의 화원'에 올라 세계수의 씨앗을 심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누구보다 강해져야 한다. 누구에게도 굴하지 않게,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게.
그래야만 세계수의 씨앗을 심고 일족을 되살릴 수 있다.
-성좌, '다섯 번째 날'이 당신은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다며 위로합니다.
"...그렇지만, 여신께서도 그 플레이어를 눈여겨 보고 계시잖아요."
-성좌, '다섯 번째 날'이 당신이 질투하는 모습을 귀여워하며 작게 미소를 짓습니다.
그렇게 차근차근 보스 몬스터를 향해 나아가던 리엘이었지만, 그녀의 걸음은 조금씩 더뎌지고 있었다.
아무리 마나가 끊임없이 차오른다고 하지만, 적의 수가 너무 많았다. 쓰러트리고 쓰러트려도, 적이 끊임없이 차올랐다.
'혼자서는 무리인 건가...?'
그녀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랭킹 1위를 쟁탈하기 위해서는 보스 몬스터를 사냥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혼자서는 한계가 있었다.
기껏 용기를 내어 성을 빠져나와 여기까지 달려왔는데,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분했다.
그 순간.
솨아아-
너무나도 익숙한, 너무나도 그리운 기운이 리엘의 피부를 스쳐 지나갔다.
착각인가 싶었지만, 그녀의 정령들 역시 그 기운을 알아채고 있었다.
"시원해!"
"따뜻해!"
"누구야?"
"누구지?"
기운의 근원지를 따라가니, 웬 인간 하나가 몬스터 사이를 걸어 나왔다.
세계수의 마지막 씨앗으로 불리는 그녀였기에, 남자의 몸에서 풍겨오는 기운의 정체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인간이 어떻게 엘프의 마법을 사용하는 거죠?"
자연의 숨결. 엘프의 고유 마법으로, 숲에 생기를 되찾거나 정령에게 활기를 북돋아 주는 마법이었다.
그런 마법을 평범한 인간이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남자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것보다 저놈들을 뚫는 게 더 중요하지 않나?"
확실히, 그의 말이 맞았다. 자연의 숨결 덕분에 힘을 되찾은 정령들은 전보다 더욱 강하게 몬스터들을 압박하고 있었다.
저 인간의 힘이라면, 보스 몬스터에게 가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을 듯했다.
"지금은 일단 힘을 합치지."
"...좋아요."
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일단 힘을 합치는 게 우선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의 정령들에게 더욱 많은 마나를 불어넣었다.
그 남자의 정체가....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자연의 숨결 ]
- 엘프의 고유 마법. 숲을 정화하여 생기를 불어넣거나, 정령들에게 활기를 불어넣는 힘이다.
자신이 그토록 넘으려 하는 공적치 랭킹 1위의 주인, 세운이라는 것을 모른 채로 말이다.
제 67화
67. 제67화
세운과 리엘이 손을 잡은 후, 그들의 전진 속도는 이전의 두 배 이상으로 빨라졌다.
그 이유에는 세운이 사용하고 있는 엘프의 고유 마법 '자연의 숨결'의 힘만 있었던 게 아니다.
후웅!
정령의 불꽃에 바람을 불어 넣어 불길을 더욱 크게 일으키고.
드드득!
정령의 바람에 날카로운 돌조각을 넣어 위력을 더욱 강화시켰다.
이런 식으로, 적재적소에 마법을 지원하니 정령들의 공격이 한층 더 강해지며 몬스터가 바르게 스러져 나가고 있었다.
"우와!"
"내가 더 강해졌어!"
"아냐, 저 아이 덕분이야."
"신기해!"
덕분에 자연스럽게 정령들이 세운에게 관심을 가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리엘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누구지?'
목적을 위해 손을 잡긴 했지만, 처음부터 조금 이상했다.
인간 주제에 엘프의 고유 마법을 사용한 것에 이어, 지금은 정령들에게 관심까지 받고 있었으니까.
정령이란 본디 자연 그 자체에 가까운 생령으로, 그 경계심이 엄청나다.
엘프처럼 자연의 축복을 받은 존재가 아니라면, 대화를 나누긴커녕 눈으로 보는 것조차 어렵다.
그 때문에 인간 중에서 정령사의 숫자는 손에 꼽을 정도로 희귀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지금 정령들이 저 인간에 대해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게다가.
-성좌, '다섯 번째 날'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보입니다.
어째서인지 그토록 자신을 걱정해 주던 여신께서 더 이상 걱정을 하지 않고 여유롭게 상황을 지켜보고 계셨다.
하지만, 상황을 깊게 판단하기에는 상황이 너무 급박했다.
착실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지만, 몬스터의 수는 여전히 엄청나게 많았으니까.
"집중하지. 이제 거의 다 왔다."
"알고 있어요."
차가운 말투였지만, 세운은 리엘의 전투에 감탄하고 있었다.
평범한 정령사라면 두 속성의 정령과 계약하는 것도 어렵다고 들었는데, 그런 사대 정령과 모두 계약을 하다니.
회귀를 하기 전, 그녀가 당당하게 공적치 랭킹 1위를 차지한 이유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게다가.
'리엘이 프레이야의 계약자였나.'
그녀의 위에 떠 오른 성좌의 메시지가 세운의 눈에 들어왔다.
성좌, 다섯 번째 날.
얼마 전, 세 번째 서클을 개방하였을 때 마몬의 견제를 뚫고 세운에게 관심을 가졌던 여신이었다.
프레이야라고 하면 오딘과 함께 아스가르드를 다스리는 주신 중 하나다.
그 힘은 사대 정령을 다루는 그녀에게 부스터를 붙여주는 꼴이 되었으니, 세운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이번 생에서도 분명 랭킹 1위를 달성했을 것이다.
'그래도 이대로 보스 몬스터를 양보할 수는 없지.'
지켜본 바에 의하면 아무리 그녀라고 해도 보스 몬스터를 혼자서 사냥하는 건 무리다.
탑의 뛰어난 전력으로 성장할 그녀가 여기서 죽는 건 원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보스 몬스터를 양보할 생각도 없다.
그러니 그녀와 손을 잡고 함께 보스 몬스터를 처치한다.
그러면 공적치가 균등하게 분배되어 세운의 랭킹은 유지될 것이고, 그녀를 지키는 것도 성공하게 된다.
"시이잇-"
"쿠륵, 꾸륵."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던 중, 드디어 다섯 번째 장의 보스 몬스터, 씨 드레이크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위압감 때문인지 자잘한 몬스터들은 대부분 거리를 벌리고 있었지만, 준 보스 몬스터급의 대형 몬스터들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마치, 보스 몬스터를 호위하는 듯이 말이다.
놈들을 확인한 순간, 세운은 빠르게 발을 도약하며 자리에서 이탈하였다.
"시간 좀 버텨줘."
"네? 어디 가시는 거예요!"
대답할 시간도 아까웠다.
어차피 그녀가 도망갈 리는 없다고 생각했기에, 세운은 그녀의 외침을 무시하고 보스 몬스터 주위를 빙 돌았다.
그러는 중, 보스라는 자리에 걸맞게 여유로운 걸음걸이를 보이던 시 드레이크와 눈이 마주쳤다.
"크오오오-!"
-분노한 바다의 폭군, 다라칸이 드래곤 피어를 내지릅니다.
-분노한 용의 포효로 인해 압도적인 공포가 침식해 옵니다.
용의 권능 중 하나인 드래곤 피어.
마력이 담긴 포효를 내질러 육체와 정신을 뒤흔들어 공포에 잠기게 하는 힘이었다.
드레이크의 포효에는 마나가 담겨 있지 않았지만, 그 포효는 전장의 모든 생명체를 공포에 떨게 하기 충분했다.
"큭...."
이는 세운도 피할 수 없었다.
공포를 몰아내기 위해 이를 악물었지만, 드래곤 피어는 단순히 의지만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빠르게 움직이던 다리가 멈추고, 손발이 덜덜 떨려온다.
그나마 세운이 아니었다면, 당장 바닥에 주저앉아 이성을 잃고 말았으리라.
쿵, 쿵!
자리에서 멈춘 세운을 향해, 다라칸이 여유롭게 다가왔다.
감히 눈앞의 먹잇감이 자신을 피해 도망가리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그 순간.
-사티로스의 성흔(봉인)이 압도적인 공포에 의해 일부 해방됩니다.
-성흔의 첫 번째 능력, '공포'가 깨어납니다.
세운의 오른 손등에 새겨져 있던 성흔이 스산한 검갈빛을 내뿜었다.
산양의 뿔 모양이 선명하게 드러나며, 정신을 침식하고 있던 공포를 몰아내기 시작했다.
-'사티로스의 성흔'으로 인해 모든 종류의 공포를 집어삼킵니다.
-더욱 강한 공포를 집어삼킬수록, 사티로스의 성흔이 더욱 강해집니다.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공포를 극복하였다. 떨리던 손발에 힘이 들어가고,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크오오-!"
턱!
다라칸이 느긋하게 입을 다물어 보았지만, 그 자리에 세운은 존재하지 않았다.
공포 따위는 털어 버리고, 성흔 때문인지 전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그 주위를 내달렸다.
이를 지켜보던 리엘은 입을 벌린 채 놀라고 있었다.
'대체 무슨 짓을 벌인 거지?'
드래곤 피어에 당한 건 세운 혼자가 아니었다. 리엘과 사대 정령들 역시 그 압도적인 위압감에 전신이 경직되어 위기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세운에게서 검갈빛이 뿜어나옴과 동시에 공포 상태가 해지되었다.
다라칸 역시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서웠어!"
"이제는 안 무서워!"
"저 용이 그런 거야?"
"나쁜 용!"
정령들은 방금까지 경직되어 있던 것도 잊은 채 리엘의 주위를 신나게 맴돌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세운의 행동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뭘 하려는 거야?'
싸울 생각은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그저, 다라칸의 주위로 원을 그리며 돌고 있을 뿐이었다.
"크오오오오!"
다라칸이 울부짖자, 그 주위에 있던 몬스터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원래는 같은 팀임에도 두려움에 떨며 다가오지 않던 몬스터들이었는데, 아무래도 감히 자신 앞에서 두려움에 떨지 않는 이들을 정리하라는 명령이 떨어진 듯했다.
"너무... 많아!"
그녀의 정령들이 힘을 내주고 있지만, 수백 수천의 몬스터를 혼자서 막아 낼 수는 없었다.
꼼짝없는 포위 상황.
어쩔 수 없이, 바람의 정령의 힘을 빌려 혼자라도 자리를 떠날까 생각하던 중.
"수고했어."
"네?"
다라칸의 주위를 한 바퀴 돌고 돌아온 세운이 리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그 순간.
-다라칸의 주위로 '카르멜더식 방어마법진'이 펼쳐집니다.
우우웅!
다라칸의 중심으로, 세운이 내달렸던 길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카르멜더식 방어마법진.
이전에, 클랜을 지키기 위해 사용했었던 마법진이었다.
"이게 뭔가요?"
"보다시피, 결계 같은 거야. 가지고 있는 마나석을 모두 사용했으니까, 당분간은 외부 공격 걱정 안 해도 될 거야."
"마나석이라니, 설마 저게 다?"
리엘이 빛을 내뿜고 있는 마나석을 둘러보았다.
대충 둘러보아도, 백 개는 가뿐히 넘어가는 숫자.
'튜토리얼에서 저 많은 마나석을 어떻게 구한 거지?'
그 어떤 플레이어라도, 드래곤이라고 하여도, 튜토리얼에는 아무런 아이템도 가지고 올 수 없었다.
즉, 저 많은 마나석은 전부 튜토리얼에서 구한 아이템이란 거다.
과연, 그게 가능한 일일까?
도저히 믿기 힘들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크오오오오-!!"
결계를 알아챈 다라칸이 분노하며 또다시 드래곤 피어를 내질렀다.
하지만, 사티로스의 성흔이 활성화 중인 세운에게는 아무런 효과도 내지 못했다.
오히려, 결계 바깥에서 당황하고 있던 몬스터들만이 패닉에 빠져나갈 뿐이었다.
"안 싸울 거야?"
타앗!
먼저 앞으로 나선 건 역시 세운이었다.
세운은 이전에 성주에게 빼앗은 무기인 '노움의 압축 광물'을 꺼내, 다라칸을 향해 빠르게 달렸다.
"잠깐만요! 일단은 계획부터 세워야 할 거 아니에요!"
쿠우우-
다라칸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그 이후에 벌어질 것은 안 보아도 뻔했다.
브레스(Breath).
고유의 속성을 한계까지 응축하여 내뱉는 용종의 고유 능력.
상대가 제아무리 마나를 다루지 못하는 드레이크라도, 브레스에 당한다면 꼼짝없이 당하고 말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세운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다리에 내공을 실어 속도를 더욱 올려 다라칸의 머리를 향해 내달렸다.
그 모습에 리엘이 이를 악물었다.
저런 막무가내식 공격은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방법이었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를 도울 수밖에 없었다.
"실프!"
"응!"
"저 인간의 등을 밀어줘!"
"알겠어. 알겠어!"
후웅!
바람의 정령, 실프가 순풍을 일으켜 세운의 움직임을 도왔다.
정령의 바람에 의해, 세운의 속도는 평소의 1.5배 이상 빨라졌고, 순식간에 다라칸의 코앞에 도착하였다.
다라칸도 세운이 이렇게 일찍 도착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크게 당황하며 미처 완성되지 못한 브레스를 내뿜었다.
하지만, 놈이 브레스를 내뱉는 것보다 세운이 둔기를 휘두르는 게 더 빨랐다.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헤라클레스의 놋쇠 곤봉 ]
- 헤라클레스가 12 과업을 수행하기 전, 제우스가 신들에게 부탁하여 헤파이스토스가 만들어 낸 몽둥이.
으드드득!
세운의 둔기가 황색으로 물들며 놋쇠 곤봉의 힘을 이어받았다.
헤라클레스의 손에서 수많은 괴물을 짓이기고, 성문마저 한 방에 때려 부쉈다는 신의 무기.
그 무기가 다라칸의 콧등을 내려찍었다.
콰직!
단순히 팔뚝만 한 둔기를 휘둘렀을 뿐인데, 10m가 넘어가는 괴수의 코뼈가 완전히 찌그러졌다.
다만, 문제는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놋쇠 곤봉의 강렬한 충격이 코를 강타하자, 다라칸은 자연스럽게 입을 닫게 되었고.
콰아아아앙!!!
다급하게 준비하였던 브레스가 발동을 멈추지 못한 채, 좁은 입 안에서 터져 나갔다.
제 68화
68. 제68화
부스스-
과연, 헤라클레스의 무기.
방금 휘둘렀던 둔기는 나름 C급 무기였기에 한 번 정도는 버티지 않을까 싶었는데.
단 한 번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놋쇠 곤봉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노움의 압축 광물'이 가루가 되어 사라져갔다.
그래도 후회는 없었다.
이걸로 제대로 된 한 방을 먹인 것은 물론, 브레스를 내부에서 터트려 이차 피해까지 입히는 데 성공했으니 말이다.
"어떻게 한 거예요? 브레스를 막아 내다니...."
"설명은 나중에. 일단 저놈부터 쓰러트리고."
전투는 이제 막 시작일 뿐이다.
그것을 증명하듯, 자욱한 먼지를 뚫고 다라칸의 머리가 위로 떠올랐다.
반쯤 찌그러진 놈의 콧구멍에서 하얀 수증기가 스팀처럼 뿜어져 나왔다.
'거 더럽게 단단하네.'
이번 일격으로 알 수 있었다.
아무리 마몬의 보물창고를 개방한다고 해도, 막무가내로 공격을 퍼부어 봤자 놈을 죽이기는 힘들다는 것을.
만약, 죽인다고 해도 가지고 있는 무기를 전부 소모해야 할 것이다.
애초에, C급 무기로 구현해 낼 수 있는 보물의 힘에는 한계가 있었다.
"크오오오오-!!"
놈의 포효 한 번에, 주위에 자욱하던 먼지가 깡그리 날아갔다.
엄청난 위압감이 담긴 포효였지만, 성흔이 빛나고 있는 세운에게는 여전히 통하지 않았다.
성흔의 힘은 리엘과 정령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다만, 몬스터에게는 달랐다.
"키에에에엑!"
"꾸릉! 꾸릉!"
"카앗! 카아아앗!"
결계 밖에서 폭군의 분노에 떨고 있던 몬스터들의 반응이 달라졌다.
몸을 떠는 것을 멈추고, 눈이 벌겋게 물들며 세운이 세워둔 결계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이빨이 떨어지고, 지느러미가 찢어지고, 비늘이 벗겨져도 신경 쓰지 않는다.
버서커(Berserker).
다라칸의 포효로 인해 광폭하에 걸린 것이다.
'생각보다 시간이 별로 없겠는데.'
마나석을 모조리 투자했다지만, 몬스터의 수가 너무 많았다.
이대로라면 길어봤자 5분. 아니, 3분도 못 버틸지도 모른다.
가능하다면, 그 안에 저놈을 쓰러트려야만 한다. 그러지 못하면 몬스터의 파도에 휩쓸려 버릴 테니 말이다.
'그래도 첫 타는 제대로 먹였으니.'
방금 제대로 일격을 먹일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놈이 방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면, 다시 이런 기회는 생기지 않는다.
때문에 시작부터 마몬의 보물창고까지 개방하여 일격을 날린 것이다.
쿵, 쿵, 쿵!
다라칸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세운과 리엘에게 다가온다.
거대한 덩치 때문에, 놈이 발을 내디딜 때마다 지진이라도 난 듯이 땅이 떨려온다.
"계획 있어요?"
"역린을 찾아봐야지."
"...아무 생각 없는 줄 알았는데, 용종의 약점을 잘 알고 있네요."
"내가 앞에서 어떻게든 비벼볼 테니까, 뒤에서 보조 좀 부탁해."
"알겠어요."
"맡겨줘!"
"도와줄게!"
"힘내!"
"나쁜 용! 내가 혼내 줄 거야!"
손잡이만 남은 둔기를 버리고, 새로운 무기를 꺼내 들었다.
아직 마몬에게 뒤랑달을 돌려받지 못한 지금, 세운이 가진 무기 중 가장 강력한 무기라면.
철컥.
황금성의 성주, 골드 가든을 쓰러트리고 얻은 무기. '골든 할버드'였다.
튜토리얼에서 얻은 무기답지 않게, 무려 B급의 성능을 가지고 있는 무기.
이거라면, 다라칸의 공격을 받아내거나 상처를 입히는 게 가능할 것이다.
'사용하기 어렵겠는데.'
할버드.
도끼창이라고도 부르는 이 무기는, 창의 모습에 도끼날이 달려 있는 무기다.
폴암의 일종으로 '투구를 쪼개기 위한 도끼'라 불리는 만큼 강력한 힘을 자랑하는데, 파괴력이 강력한 만큼 단점도 존재했다.
길이가 길어 일반적인 도끼보다 다루기 어렵고, 무거운 도끼날에 의해 일반적인 창처럼 빠르게 다루기도 힘들었다.
성주, 골드 가든이 할버드를 자유자재로 사용한 건 강한 근력이 뒤를 받쳐 주고 뛰어난 실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세운은 폭식의 권능 덕분에 할버드를 다룰 만한 근력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하나.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그라드 제국식 부창술(斧槍術) ]
- 그라드 제국의 기사들이 할버드를 다루기 위해 배웠던 제국의 고유 부창술. 오랜 전쟁을 통해 발전한 창술은 방어구를 무시한 채 적을 압도한다.
실력뿐이었다.
붕, 부우웅!
세운의 손에서 골든 할버드가 빠르게 회전한다.
도끼날이 공기를 살벌하게 갈라내며, 파공음이 주위로 퍼져 나간다.
깡!!
시야를 뒤덮으며 다가오는 다라칸의 손톱을 쳐냈다.
폭식의 권능으로 강해진 근력과 그라드 제국식 부창술, 그리고 회전의 가속도가 가득 담긴 공격. 그 일격에 그 거대한 다라칸의 손톱이 거짓말처럼 휘어지며 세운을 비켜나갔다.
"크르르-!"
다만, 정작 훌륭하게 공격을 쳐낸 세운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생각보다 너무 강한데.'
할버드를 쥐고 있는 손이 얼얼하게 아파왔다.
정면으로 공격을 막은 것도 아니고, 태극검의 묘리까지 활용하여 공격을 흘려보낸 것인데. 그것만으로도 손바닥이 쓸려 붉게 물들었다.
게다가, 골든 할버드 역시 아직까지 충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웅웅 떨려대고 있었다.
'하긴, 애초에 한두 명이 잡을 수 있게 나온 몬스터가 아니니까.'
분노한 바다의 폭군, 다라칸.
본래 다섯 번째 장에 참가하는 플레이어 전체가 합심하여 공략해야만 하는 몬스터다.
놈은 어지간한 성벽쯤이야 두세 번 부딪히는 것만으로 부서트리는 괴물이니까.
그런 놈을 단 두 명이서 공략하고 있는 것 자체가 비정상적이었다.
그렇다면.
'더 강하게 나가는 수밖에.'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전장의 패도, 방천화극(方天畵戟) ]
- 후한 말의 군벌, 당대 최강의 무장으로 알려진 여포 봉선(呂布 奉先)이 사용했다고 알려진 패도의 무기.
골든 할버드에 보물의 힘이 깃들었다.
방천화극. 삼국시대 최고의 맹장이라 알려진 여포 봉선의 무기.
세운이 여태껏 사용해 왔던 신의 무기들과 비교하자면, 격이 조금 떨어질지는 몰라도.
'오히려 좋아.'
그런 만큼, 그 힘을 견디거나 발현하기에는 다른 무기들보다 훨씬 수월하다.
게다가, 방천화극의 힘이 깃든 무기는 세운이 가진 무기 중에서도 가장 등급이 높은 무기인 골든 할버드.
그러니 최소한 다른 무기들처럼 한 번 사용하고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리엘!"
"제 이름은 어떻게...."
"계속 보조 부탁해! 3분 안에 놈의 역린을 찾아내야 하니까!"
"...알겠어요!"
세운의 목소리에서 다급함을 느낀 리엘이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등을 밀어주던 바람의 정령 말고도 사대 속성의 힘이 깃들어왔다.
"태워 버려!"
화륵!
불의 정령이 할버드에 깃들며, 불 속성 특유의 공격성이 생겨났고.
"내가 버텨 줄게!"
꽈득!
대지의 정령이 몸에 깃들며, 몸이 바위처럼 단단해지는 듯했다.
"힘내!"
츄르륵.
마지막으로, 물의 정령이 세운의 몸과 무기를 크게 감싸 안으며 푸른 기운이 생겨났다.
움직임이 한결 부드러워진 것은 물론이고, 정신까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일종의 정령빙의(精靈憑依). 아니, 아직 그 정도 수준에는 미치지 못해 보이니 스피릿 인챈트(Spirit enchant)에 가까운 기술이었다.
'이거라면.'
타앗!
포효도 통하지 않고, 브레스에 실패하고, 근접 공격까지 실패하자 다라칸이 크게 격분하며 세운을 죽을 듯이 노려보았다.
그런 놈을 향해, 세운이 도약하였다.
안 그래도 높은 민첩에 보법, 정령의 힘까지 실리니 그 움직임은 말 그대로 바람과 같았다.
콰앙!!
세운과 다라칸이 충돌하였다.
사티로스의 성흔과 드래곤 피어가 흩어지며 몬스터들이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공포에 떨었다.
'가능하다.'
이번 충돌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정령들과 방천화극의 힘이 더해지자, 다라칸의 공격도 충분히 버틸 만했다.
이제 남은 건, 역린을 찾는 것뿐.
쾅, 콰과광!!
밀리지 않겠다는 확신이 서자, 세운은 더 이상 다라칸의 공격을 피해지 않고 정면으로 맞섰다.
물론, 단순무식하게 돌진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라드 제국식 부창술에 태극검의 묘리를 섞어 공격을 흘려보내거나, 너무 강한 공격이라면 니추공을 이용해 교묘하게 공격 범위를 피해간다.
한 차례 강한 공격이 지나간 후, 그 빈틈을 향해 빠르게 달려가 한 손을 놈에게 뻗는다.
-흑탑의 묘리에 따라 '파이어 버스트'의 위력이 강화됩니다.
데미지를 입히는 것까지는 기대도 하지 않는다.
시야를 가리기 위한 마법.
하지만, 세운에게는 예상치 못한 지원군이 하나 붙어 있었다.
"내가 도와줄게!"
화르륵!
불의 정령이 힘을 보태 주자, 폭발의 위력이 크게 올라갔다. 거의, 한 서클 위의 마법을 사용하는 수준이다.
덕분에 다라칸은 화끈한 충격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고, 그사이 세운이 놈의 품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내공을 통해 그라드 제국식 부창술의 제이 초식, 박격부(搏擊斧)가 강화됩니다.
쿠웅!!
폭발의 여파로 정신을 못 차리던 아래턱에 세운의 할버드가 박혀 들어갔다.
이미 '헤라클레스의 놋쇠 곤봉'으로 코뼈가 내려앉은 상태에서 아래턱에 가해진 충격.
다라칸은 그 거대한 충격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고 고개가 높이 들어 올려졌다.
그 순간, 빠르게 눈을 움직이던 세운이 마침내 목표를 발견해 냈다.
'저기다.'
목과 가슴이 연결되어 있는 그사이에 비늘 하나가, 유난히 번들거리고 있었다.
역린. 용의 몸에 있는 비늘 중에서 딱 하나, 거꾸로 붙어 있는 비늘로 모든 것에 완벽하다 알려진 용의 유일한 급소이기도 했다.
어쩐지 코뼈가 내려앉았을 때도, 포효를 내지를 때도 고개만은 절대 안 올린다 싶더니, 그게 다 급소를 보호하기 위함이었나 보다.
목표를 확인한 세운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새로운 마법을 펼쳤다.
-흑탑의 묘리에 따라 '그라운드 웨이브'의 위력이 강화됩니다.
"나쁜 용!"
쿠구구구!
이번에도 역시 대지의 정령이 세운과 합을 맞춰 주었다.
삼 서클인 세운으로서는, 다라칸이 딛고 있는 대지의 절반을 울리는 게 고작이었지만, 정령이 도와주자, 놈의 뒷발까지 진동이 이어지며 바닥이 쩍쩍 갈라졌다.
쿠웅!
다라칸이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내리며 다리에 힘을 주는 순간. 그라운드 웨이브에 의해 갈라진 대지가 그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좋았어!'
이것으로 놈의 사지를 묶는 데 성공했다.
남은 건, 이대로 다시 한번 놈의 머리를 쳐올리며 역린을 공략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여기서 세운이 예상하지 못한 점이 하나 있었다.
"크와아아악!!"
콰과과과괏!!
고개를 들어 올린 순간부터 준비하였던 걸까?
고개를 내린 다라칸의 입에서는, 푸른 물길이 대포처럼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쿵!
몸을 굴려 간신히 피했지만, 세운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다만.
"지켜 줄게!"
대지의 정령이 힘을 내보이며 충격이 크게 흡수되었다.
덕분에 갑옷이 조금 찢어지는 것 정도로 다라칸의 브레스를 피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다라칸의 브레스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사방에 쭉쭉 뻗어 나갔다.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리엘은 금방 공격을 눈치채고 몸을 피했지만, 결계는 그렇지 못했다.
카르멜더식 방어마법진의 특성상 내부에까지 공격이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지만.
쿠구구구궁!
결계를 지탱하고 있던 마나석은 그렇지 못했다.
브레스에 직격당한 자리의 마나석이 1/4 넘게 부서져 나가며, 결계가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사라져 갔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시이잇-"
"쿼륵! 쿽!"
수백의 몬스터가 감히 자신들의 주군을 공격하는 두 인간을 몰아내기 위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제 69화
69. 제69화
'이건 예상 못 했는데.'
상대가 드레이크라고 지능을 너무 무시했나 보다. 이런 식으로 결계를 깨부수다니.
노린 것이든, 계획한 것이든. 이것으로 승기가 다라칸에게로 크게 기울었다.
"어, 어쩌죠?"
꽈악.
세운이 할버드를 강하게 쥐었다.
이대로 몬스터들이 전투에 끼어든다면, 가진 보물을 쏟아낸다고 해도 이길 확률이 적었다.
이대로 도망치기에는, 지금까지 사용한 보물이 너무 아까웠다. 그게 아니더라도,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이 막막한 상황 속에서, 세운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생겨났다.
갑자기 먹구름이라도 생겨난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며 머리를 든 세운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거인을 목격할 수 있었다.
-플레이어 강한철이 '개전(開戰)'을 사용합니다.
콰아앙!!
세운과 리엘을 포위하며 다가오던 몬스터들이 모두 자리에서 쓰러졌다.
지진이라도 난 듯이 울렁거리는 지면 덕분이었다.
얼마나 높이서 떨어진 것인지, 개전의 위력과 범위는 평소의 두 배에 가까울 정도로 강력했다.
"강한철?"
"탈 것이 너무 비실거려서 조금 늦었다."
"탈 것?"
적랑을 말하는 것일까?
하지만, 적랑을 타고 왔다면 강한철이 하늘에서 떨어진 게 이해되지 않는다.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세운이 '탈 것'의 정체를 깨닫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푸북.
"크오오-!"
"만티코어?"
독수리처럼 하늘에서 직각으로 하강한 만티코어가 다라칸에게 꼬리의 독침을 박아 넣었다. 그것도 세운이 놈과 할버드를 맞댈 때 벗겨진 비늘 사이로 정확하게.
튜토리얼 영역에서 만티코어의 등장이라니.
그 주인은 세운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백현?"
"비실거린 게 아닙니다! 오히려 강한철 씨를 태우고 비행한 것 자체가 대단한 겁니다!"
백현이 만티코어를 일으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것도 세운이 생각하던 스켈레톤이 아닌, 그보다 두 단계나 높은 단계인 구울의 형태로 말이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되살아난 것처럼 움직이는 만티코어의 사체를 바라보며 크게 감탄합니다.
-성좌, '죽음을 짓밟는 말'이 최선을 다해 만들어 낸 걸작이라며 마신에게 고개를 조아립니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자신의 보물을 더욱 완벽하게 세공시킨 대후작의 실력을 인정합니다.
'그렇다는 말은?'
강한철과 백현이 등장했으니, 자연스레 다른 사람도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몬스터 무리를 뚫고 붉은 뼈로 된 늑대 한 마리가 높이 뛰어올랐다.
"형니이이임!"
적랑을 타고 등장한 박정필.
그리고 그 뒤에 타고 있던 유서아가 전장을 살펴보고는 적랑이 착지하기도 전에 뛰어내려 쌍검을 꺼내 들었다.
-플레이어 유서아가 '타란튤라의 세 번째 다리'를 사용합니다.
서거거걱!
그녀가 착지하는 순간, 주위에 있던 열 마리의 몬스터가 피 분수를 흩뿌리며 쓰러졌다.
강한철과 백현, 박정필과 유서아.
네 명이 미리 짜기라도 한 듯이 세운의 네 방향에서 몬스터와 대적하였다.
"몬스터들을 막고 있으면 되겠죠?"
"할 수 있겠어?"
"물론이다."
"안 돼도 해야죠. 지금까지 늘 그래 왔잖아요?"
"골든 라이트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제법인데?"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네 명의 모습에, 리엘만이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네 명 다 최소 랭킹 100위권 이상이야. 이런 이들이 전부 저 남자를 따른다고?'
튜토리얼의 랭킹은 결코 올리기 쉬운 게 아니었다.
당장 리엘부터가 1위를 차지하기 위해 그토록 안간힘을 썼음에도, 세운이라는 자에 의해 2위에 자리 잡고 있었으니까.
그런 랭커들이 이렇게 많이 등장하다니. 대체 저 남자의 정체가 무엇일까?
그렇게 생각하던 중, 드디어 그녀의 귀로 남자의 이름이 들려왔다.
"많이는 못 버틸 거예요. 세운 씨."
"십 초만 버텨줘. 그걸로 충분해."
"...잠깐, 세운이라구요?"
"간다."
"잠깐!"
타앗!
세운은 리엘의 질문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세운이라니. 자신을 누르고 랭킹 1위를 차지하고 있는 플레이어의 이름 아니던가?
머리가 혼란스러웠지만, 지금은 묻고 따질 시간이 없었다.
마지막이라는 것을 깨달은 그녀가 가진 마나를 모두 쥐어짜 내어 정령들을 활성화시켰다.
"가자!"
"태워 버려!"
"우리가 도와줄게!"
"나쁜 용!"
"크아아아아-!"
결계가 무너졌음에도 당돌하게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세운을 보며 다라칸이 더욱 크게 포효를 내질렀다.
공포가 통하지 않는다지만, 그 포효에는 풍압만으로도 몸을 밀려나게 하는 힘이 담겨 있었다.
다만, 바람의 정령이 기류를 휘게 하여 움직임을 보좌해 준 덕에 세운은 조금의 저항도 없이 앞으로 내달렸다.
다라칸은 그런 세운을 향해 손톱을 내질렀지만.
척.
세운은 무기를 휘두르지 않았다.
그저 다라칸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다음 공격을 위해 힘을 집중하였다.
[믿는다.]
"응!"
콰앙!
고창석이 만들어 준 장비와 정령의 힘을 믿었다.
손톱이 몸에 닿는 순간 강력한 충격이 느껴졌지만, 세운은 오히려 그 기세를 타고 더욱 빠르게 다리를 움직였다.
체력이 한계까지 떨어졌지만, 이걸로 충분했다.
-내공을 통해 그라드 제국식 부창술의 제이 초식, 박격부(搏擊斧)가 강화됩니다.
쿵!
할버드가 다시 한번 다라칸의 아래턱을 강타했다.
하지만 놈은 같은 공격에 두 번 당하지 않겠다는 듯이 이를 악물고 공격을 버텨내었다.
그 자신도 알고 있는 것이다. 역린만 드러내지 않는다면, 세운이 자신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그 순간, 세운이 도끼를 바꿔 잡으며 자세를 바꾸었다.
-내공을 통해 그라드 제국식 부창술의 제사 초식, 난격부(亂擊斧)가 강화됩니다.
콰과과광!!
"크억, 커어어!"
할버드가 빠르게 휘둘러졌다.
장병기에다가 도끼날까지 달려 속도가 느린 게 특징인 할버드였지만, 지금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할버드. 아니, 지금은 방천화극에 더욱 가까워진 무기가 어지럽도록 빠르게 휘둘러졌고, 어지러울 정도로 맹렬한 기세에, 다라칸이 굴복하며 턱을 들어 올리고 말았다.
척.
'지금이다.'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다는 듯이, 세운이 자세를 바꾸었다.
손잡이가 으스러질 정도로 손에 힘을 꽉 주고, 훤히 드러난 다라칸의 턱을 올려 쳤다.
-내공을 통해 그라드 제국식 부창술의 제오 초식, 타격부(打擊斧)가 강화됩니다.
콰아앙!!
그 위력이 어찌나 강력했던지, 다라칸의 머리는 물론 앞다리까지 일순간 바닥에서 떨어졌다.
목적을 완수한 골든 헬버드가 힘을 다하고 금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아깝긴 하지만, 방천화극의 힘을 머금고도 이렇게나 힘을 발휘해 준 것만으로도 기대 이상의 활약이었다.
역린이 드러난 것을 깨달은 다라칸이 급히 자세를 고치려던 순간, 세운이 황금성의 고유 능력을 외쳤다.
"골든 라이트."
저 멀리서 보이지도 않는 황금성에서부터 황금빛이 쏘아졌다.
골든 라이트.
하루에 한 번, 적의 움직임을 일제히 멈추게 하는 황금성의 고유 능력. 황금성의 성주라면, 위치를 가리지 않고 능력을 사용하는 게 가능했다.
촤아앗!
황금빛이 닿자마자, 다라칸의 몸이 앞다리가 떨어진 채로 멈추었다.
오직 눈동자만이 거칠게 떨리며 세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야 튜토리얼 끝인가."
터벅, 터벅.
세운이 새로운 무기를 꺼내며 놈의 역린을 향해 느긋하게 다가갔다.
마지막 일격인 만큼, 일말의 여지도 주지 않기 위해 놈에게 가장 효과적인 보물을 꺼내었다.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용살검, 아스칼론 ]
- 성 게오르기우스가 드래곤을 쓰러트릴 때 사용한 명검. 악에 맞서 싸우는 승리의 무기.
푸욱.
세운의 검이 다라칸의 역린 사이를 비집고 박혀 들어갔다.
그 단단하던 비늘과 육질에 비교하면, 두부를 찌르는 듯이 부드러운 촉감이었다.
이에 확신을 느낀 세운이 힘을 주어 역린을 잘라내자.
서걱-
분노한 바다의 폭군. 씨 드레이크, 다라칸의 목이 허무하게 잘려 나가며....
-튜토리얼의 최종 보스 몬스터, '분노한 바다의 폭군, 다라칸'을 처치하였습니다.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
-개인 공적치가 300,000point 상승합니다.
-'씨 드레이크의 비늘'을 획득하였습니다.
-'씨 드레이크의 송곳니'를 획득하셨습니다.
…
-'바다의 분노'를 획득하셨습니다.
튜토리얼의 막이 내렸다.
* * *
[ 튜토리얼 다섯 번째 장 – 방어 ]
-과제를 완벽하게 수행하였습니다!
-놀랍도록 위대한 업적을 남겨 보스 몬스터 주위의 플레이어들에게 추가로 150,000point를 제공합니다.
-수성전에서 살아남은 모든 인원에게 50,000point를 제공합니다.
-축하드립니다! 튜토리얼 다섯 번째 장을 훌륭하게 끝마쳤습니다!
-최종 집계를 위해 탑의 입구를 향해 이동해 주십시오.
드디어 튜토리얼의 다섯 장이 모두 끝났다.
이 모든 과정에서 살아남은 플레이어만이 탑에 들어가 본격적인 등반을 시작할 수 있다.
"끝...이라."
"고생하셨어요. 세운 씨."
"형니이임! 믿고 있었습니다아!"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튜토리얼이 끝나며, 세운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몬스터들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긴, 자신들의 왕이 쓰러졌으니.
더 이상 싸울 의지를 잃어버리는 게 당연했다.
"좀 피곤한 것 말고는, 괜찮아."
사실, 조금 수준이 아니었다.
지금은 빛이 꺼졌지만, 성흔이 활성화되는 중에는 몸에서 기운이 쭉쭉 빠져나가는 듯했으니까.
마나도, 내공도 아닌 생명력 그 자체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마나나 내공이 충분하다는 건 아니었다. 마지막 일격을 위해 가지고 있는 모든 마나와 내공을 모두 소모하였으니까.
보물창고를 열어 포션 한 병을 마시니, 떨리던 손이 조금은 진정되는 듯했다.
"넌 뭐야?"
"비키세요."
"뭐? 내가 누군지 알아? 이 몸이 바로 형님의 오른팔, 컥!"
리엘 리프레인. 그녀가 박정필을 가볍게 밀쳐내고 세운에게로 다가왔다.
'리엘의 성격이라면, 어지간히도 분해하고 있겠지.'
회귀 전에 리엘의 행보는 세운에게도 들릴 정도로 유명했다.
1등을 놓치지 않기 위해 갖은 노력과 수련을 반복하며 탑을 올랐다고 했었지.
실제로, 꽤 많은 층에서 1위를 쟁탈했다고 들었다. 어느 순간부터 소식이 완전히 끊겨 버리긴 했지만 말이다.
세운의 앞에서 잠시 멈춰 서 있던 그녀가 생각을 마친 듯 첫 질문을 하였다.
"어째서 정체를 숨긴 거죠?"
바꿔 말하면, 어째서 자신을 속인 것이냐는 뜻이겠지.
눈빛만 보아도, 그녀의 기분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게, 1위를 쟁탈할 마지막 수단이었던 보스 몬스터를 결국 세운이 쓰러트리게 되었으니까.
전투에 참여한 만큼 꽤 많은 공적치를 배분받았겠지만, 결국 튜토리얼 1위는 세운의 차지가 되었다.
"대답할 게 있나? 나도 1위를 원했으니까. 그게 다야."
거짓말할 필요도, 그럴 생각도 없었다.
아무리 1등에 집착하는 리엘이라 하여도, 실력 차이로 벌어진 일에 괜한 복수심을 드러내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세운의 대답에 대꾸하려던 중.
쿠구구구-
절벽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튜토리얼이 끝나며, 남은 대지마저 바닷속으로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움직이죠. 세운 씨, 저기 타세요."
"너! 내가 용서하지 않을 거야! 헤헤, 형님! 이쪽으로 오시죠!"
"...돌아가면, 꼭 제대로 해명해야 할 거예요."
다들 이동할 준비를 하고 있을 때쯤. 체력이 적당히 회복된 세운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곧장 절벽을 향해 걸어갔다.
"세운 씨? 어디로 가시는...."
"클랜, 잘 부탁해."
"네?"
"일단 1층으로 올라가 있어. 입구에서 기다리는 것보다는 그게 더 안전할 테니까."
"무슨 말이에요! 당연히 세운 씨도 같이 가셔야죠!"
"나는...."
세운이 드넓은 바다의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고민은 길었지만, 선택까지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폭식의 마신과 탐욕의 마신. 두 마신의 권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탑에는 이조차도 뛰어넘을 정도로 강력한 플레이어와 괴물들이 득실거린다.
그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더욱 강한 힘이 필요하다.
"아직 여기에 할 일이 남아서 말이야."
"그게 무슨...!"
타앗!
누군가 말릴 틈도 없이, 세운이 절벽의 아래로 몸을 던져 넣었다.
튜토리얼의 무너진 바닷속에 잠들어 있는 질투의 마신. 레비아탄을 만나기 위해서.
제 70화
70. 제70화
-'분노한 바다의 폭군, 다라칸'을 포식하였습니다.
-양분을 흡수하여 모든 능력치가 10 상승합니다.
절벽에서 뛰어내리기 전, 세운은 다라칸을 향해 잊지 않고 폭식의 권능을 사용하였다.
애초에 용종이면서도 마나를 다루지 못하는 게 드레이크였기에 마나는 흡수할 수 없었지만, 모든 능력치 10. 총 40에 해당하는 능력치를 올릴 수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기란 말이야.'
단순히 레벨로만 따지면 한 번에 13에 해당하는 레벨이 오른 것이나 다름없는 능력치 상승이었다.
그런 능력치를 이런 식으로 올려주다니, 과연 마신의 권능다운 힘이었다.
거기다, 탐욕의 권능 덕분에 전투력도 급상승하여 몬스터를 잡는 것 역시 수월했으니.
두 권능의 시너지 덕분에, 지금의 세운은 어지간한 탑의 하층민보다 월등히 강해진 상태였다.
아마, 탑에 들어간 이후로도 하층 구역은 막힘없이 오를 수 있으리라.
-성좌, '배고픈 왕자'가 깊은 맛이 조금 떨어지긴 하지만, 육질이 쫄깃한 게 식감이 매우 훌륭하다며 식사를 음미합니다.
베엘제붑도 드레이크 고기가 마음에 들어 하는 듯했다.
최근 제대로 권능을 사용하지 않아 불평불만이 가득했었는데, 다섯 번째 장을 통해 식탁이 휘어질 정도의 음식을 제공해 주었으니, 한동안은 조용할 것이다.
풍덩!
절벽이 높았던 탓인지, 생각이 길었던 탓인지. 생각보다 길게 느껴졌던 추락이 끝나고, 차가운 파도가 피부를 덮쳐왔다.
다라칸과 싸우느라 달아올랐던 피부가 식으며 몸에 한기가 닥쳐온다.
그것보다 문제는, 호흡이었다.
높은 절벽 위에서 떨어진 만큼 세운은 바다 깊이까지 빠져들었고, 수면으로부터 빠르게 멀어지고 있었다.
수압이 높아질수록, 폐가 짓눌리며 담아두었던 공기가 빠져나가고 싶어 하였다.
'이건 여정의 지침표가 있었더라도 절대 못 살아남았겠네.'
회귀 전의 모습을 떠올리던 세운이 짧게 미소 지으며, 탐욕의 권능을 개방하였다.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머메이드의 아가미 ]
- 상반신은 사람의 몸을, 하반신은 물고기의 꼬리를 한 반인반어. 여성의 모습을 한 몬스터로, 그 수려한 모습에 수많은 전설이 탄생하였다고 한다.
빠직!
으드드득.
세운의 목 언저리에서 균열이 일어났다. 목 양쪽에 세 가닥의 실선이 일더니, 구멍이 점점 크게 벌어진다.
"흐읍."
손으로 목을 더듬어 아가미의 존재를 확인한 후에야, 세운이 조심스럽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자 어느덧 크게 벌어진 아가미 사이로 바닷물이 빨려들어 오며, 가슴에 시원한 충족감이 스며들어왔다.
"후우우...."
성공이다.
마몬의 보물창고에 아가미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가능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과연, 마몬의 보물.
인간의 몸으로 바다에서 숨을 쉬는 게 가능하다니.
폭식의 권능과 비교해도 절대 꿇리지 않는 능력이었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자신의 보물과 돼지를 비교하는 것에 불쾌감을 느낍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돼지가 어디 있냐며, 자기한테도 좀 나눠달라며 군침을 흘립니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듭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맛있는 돼지를 혼자 먹으려는 것이냐며, 당장 자신에게도 나눠 달라며 위엄 있는 표정을 짓습니다.
세운은 두 성좌의 대화를 무시하고 바닷속을 넓게 관찰하였다.
'일단 방향부터 정해야 하는데....'
회귀 전이었다면 '여정의 지침표'를 사용하여 따라가면 그만이었겠지만, 아쉽게도 지금의 세운에게 그런 스킬은 존재하지 않았다.
마몬의 보물창고를 뒤져보았지만, 마신에게 안내해 주는 형편 좋은 보물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솨아앗-
"꾸륵, 구르륵."
"시잇-"
수백 마리의 몬스터가 멈춰 있는 세운을 지나쳐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본래라면 보스 몬스터가 쓰러지기 전에 이 몬스터들이 대부분 쓰러지는 게 수순인데.
세운이 절벽까지 찾아와 보스 몬스터를 무찌른 덕분에, 살아남은 몬스터의 수가 생각보다 많았다.
그러나, 그들은 세운을 공격하지 않았다.
공기 취급. 아니, 바다 취급하며 자신들의 길만 가기 바쁠 뿐이다. 마치, 세운에게만 보이지 않는 '길'이 존재하는 듯했다.
'그렇다면, 따라가 줘야지.'
본능적으로, 놈들이 움직이는 곳에 무언가가 있을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 * *
"샥스 님. 방금 막 튜토리얼이 끝났다고 합니다."
"벌써? 다라칸이 올라간 지 몇 시간도 안 지났다고 아는데."
"몇 명의 플레이어가 다라칸이 성에 도착하기 이전에 사냥에 성공했다고 합니다."
"신기하군. 비록 힘을 감당하지 못해 이성을 잃었다고는 해도, 나름대로 심해의 정기를 이어받은 놈이건만."
탑의 외곽.
튜토리얼이 진행되던 대지가 무너지고 생겨난 바다의 저 끝.
그 깊은 바닷속에서 두 명의 어인(魚人)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무릎을 꿇고 있는 이는 가재처럼 단단한 갑각을 전신에 두르고 있었고, 이를 내려다보는 샥스라 불린 어인은 등과 팔목에 윤기 나는 상어의 지느러미와 톱날처럼 날카로운 이빨이 인상적이었다.
"그럼, 살아남은 놈들의 수도 꽤 많겠군."
"거의 절반에 가까운 놈들이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절반이라.... 곤란하게 되었군."
"그대로 놔두면 번식 속도가 도를 넘을 테니, 수일 내로 정리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알고 있다."
상어 모습의 어인이 생각에 잠겼다.
본래는 튜토리얼 후 살아남은 몬스터라 해 봤자 몇백 마리 정도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튜토리얼의 플레이어들이 바다의 괴물들을 상대하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절반에 가까운 몬스터가 살아남다니?
'튜토리얼 역사상 이런 적이 있었던가?'
튜토리얼을 빠르게 끝낸 적은 몇 번이고 있었다. 플레이어 중에는 들어올 때부터 이미 다른 이들과 궤를 달리하는 괴물들이 존재해 왔으니까.
하지만, 그중에서도 이렇게 빨리 튜토리얼을 끝낸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 여자 이후로는, 처음이겠지.'
상어 모습의 어인이 한 여인의 모습을 떠올렸다.
인간의 모습이었지만, 용의 힘을 다루던 여인.
그녀를 만난 것도 벌써 수십 년이 지났으니, 지금쯤이면 아마 탑의 꽤 높은 곳까지 올라갔으리라.
그가 추억을 회상하던 중, 저 뒤에서 정어리를 닮은 물고기 몇 마리가 빠르게 헤엄쳐오더니, 갑각을 두른 어인에게 무언가를 보고해 왔다.
보고를 들은 어인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꿈틀거렸다.
"무슨 일인가?"
"몬스터 사이에 인간 하나가 섞여 들어왔다고 합니다."
"인간? 그게 무슨 문제인가. 아마, 도망치는 물고기들의 사이에 섞여 떨어진 것이겠지."
"저도 그런 줄 알았습니다만. 인간이 물고기들을 따라가고 있다고 합니다."
"인간이라면, 바닷속에서 숨 쉬는 것조차 불가능할 텐데?"
"보고 내용으로는, 인간의 목에 아가미가 달려 있다고 합니다."
"아가미? 그럴 리가."
인간은 무척이나 약하고 여린 종족이다. 오크보다 약한 신체 능력에, 하늘을 날지도 못하고 물속에서 숨도 쉬지 못한다.
심지어, 수명마저 100년도 채 안 된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래서일까? 그 어떤 종족보다 수많은 업적을 남겨왔다.
마치, 한순간 맹렬하게 불타오르고 사라지는 성냥불처럼 말이다.
그 증거로, 탑의 랭커 중 절반가량이 인간으로 알려져 있을 정도였다.
"설마, 그분의 정체를 알고 있는 건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확인은 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어차피 놈들도 정리해야 하니, 지금 바로 움직이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갑각을 두른 어인의 지시에, 아래에 무릎 꿇고 있던 이들이 빠르게 전투를 준비하였다.
안전을 위해서라도, 다음 튜토리얼을 위해서라도, 물고기들의 개체 수를 조절해 둘 필요가 있다.
전투를 준비하는 어인들의 눈빛이 평소보다 더욱 단단해 보였다.
최근 몇십 년을 예로 들어도, 적의 수가 이토록 많았던 적은 극히 드물었기 때문이다.
무장을 마치고 진형을 꾸린 후, 가장 앞에 상어 모습의 어인이 서서 두 갈래로 나눠진 이지창(二枝槍)을 쥐어 높이 들어 올렸다.
"진군."
척!
바닷속의 군세가 몸을 움직였다.
그러는 중.
'인간이라. 지상의 지성체를 마주하는 건 꽤 오랜만이군.'
상어 모습의 어인. 샥스가 세운을 떠올리며 불안한 심정을 눌러 담았다.
* * *
'대체 어디로 가는 거지?'
튜토리얼의 몬스터.
단순히 탑의 관리자에 의해 생성되는 것들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듯했다. 만약 그런 거였다면, 튜토리얼이 끝나며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게 정상이니까.
놈들이 이동하는 곳은 아마....
'보금자리.'
놈들이 태어나고 자라온 고향이겠지.
이 많은 몬스터를 수용할 수 있는 보금자리라니, 그 크기가 얼마나 클지 기대되었다.
'아이템이나 확인해 볼까.'
보스 몬스터, 다라칸을 통해 얻은 아이템들.
대부분이 소재성 아이템이었지만, 그중 딱 하나. 장신구 형태의 장비가 있었다.
세운은 품에서 '바다의 분노'라 이름 붙은 푸른 보석의 목걸이를 꺼내 들었다.
[ 바다의 분노 ]
분류 : 목걸이
등급 : A
설명 : 하급 용종(龍種)이 심해의 정기를 흡수하여 응축되어 만들어진 보석.
능력 : 1. 심해의 축복 – 모든 능력치가 10% 상승한다.
2. 심해의 물결 – 물 속성 친화도 및 저항력이 상승하며, 물속에서의 제약이 대폭 사라진다.
3. 심해의 흐름 – 적으로부터 받는 데미지가 10% 감소한다.
4. 심해의 공포 – 공포에 대한 저항력이 대폭 상승하고, 공포를 활용한 모든 능력의 효율이 대폭 증가한다.
과연, 탑에서도 소문이 돌만큼 뛰어난 장비였다.
A급이라는 등급에 비해, 다른 아이템보다 능력치 상승 폭이 작지 않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장신구'다.
기본적인 무기와 방어구처럼 착용에 제한이 있는 장비와 달리, 얼마든지 추가 및 중복 착용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때문에 장신구형 아이템은 하나의 능력치를 5%만 올려주어도 엄청난 값어치를 자랑한다.
그럴 일은 거의 없겠지만, 예를 들어 이런 능력을 가진 반지를 열 손가락에 끼기만 해도 엄청난 효율을 자랑하게 되니까.
그보다.
'공포라....'
고창석이 만들어 준 장비와 사티로스의 성흔. 거기에 분노의 보석에 붙은 심해의 공포까지.
어쩐지 공포와 관련된 능력을 많이 얻게 되는 것 같았다.
지금은 공포의 주체로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지만, 회귀 전의 세운은 그 반대였다.
공포의 피식자.
별다른 전투 능력 하나 없어, 항상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발버둥을 쳐왔던 게 바로 세운이었으니까.
수많은 공포를 이겨낸 만큼, 이번 생에서 공포를 다루는 데에도 익숙했던 것이리라.
확인을 마치고 '바다의 분노'를 착용한 후 앞을 내다보니 거대한 산호초를 기점으로 몬스터들이 급격하게 하강하고 있었다.
피부로 느껴지는 해류 역시, 몬스터들을 빨아들이는 듯이 아래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다리를 휘저어 앞으로 나아간 세운은.
-히든 던전, '심해의 산란장'을 발견하였습니다.
-놀라운 업적을 달성하였습니다.
-보상으로 10,000point를 획득하였습니다.
마침내, 몬스터들의 목적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제 71화
71. 제71화
"장난 아닌데."
해저에서 보는 보금자리의 광경은 실로 엄청났다.
철벽 요새처럼 사방에 높게 솟아 있는 절벽. 중앙에는 길고 가느다란 기둥이 외로이 천장을 지탱하고 있었다.
가느다랗다고는 해도, 절벽에 비해서 그렇다는 것뿐, 실제로는 절벽에서 상대했던 시 드레이크, 다라칸보다 몇 배는 더 두꺼웠지만 말이다.
그 아래 튜토리얼의 다섯 번째 장을 책임지던 수백의 몬스터들이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그중 절반 이상은 몸이 성하지 않아 신음을 내며 서로의 상처를 핥는 중이었다.
'레비아탄과는 상관없어 보이는데.'
절벽의 사이에 숨어, 제왕 독수리의 척안을 활성화하여 보금자리를 샅샅이 훑어보았지만, 세운이 찾던 건 보이지 않았다.
정말 말 그대로 몬스터의 보금자리.
아쉽지만, 레비아탄의 단서는 따로 찾아내야 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여기를 무시하고 지나칠 수는 없지.'
히든 던전.
이미 공적치 랭킹 1위는 확정이라고 해도, 히든 던전을 공략하면 그에게 걸맞은 보상이 주어지게 마련이다.
물론, 세운 혼자서 이 많은 몬스터를 상대해 던전을 완벽하게 공략하기는 불가능하다.
부상을 입은 몬스터가 많다고 해도, 놈들은 애초에 수중형 몬스터이기에 물 밖에서 싸우던 것과는 전투력 차이가 두 배 이상 날 것이다.
그러나.
'굳이 정공법을 지향할 필요는 없지.'
회귀 전, 모험가로서 전투를 최대한 회피하며 온갖 던전을 탐험하였던 세운은 애초에 '정공법'과 거리가 있는 타입이었다.
오히려, 폭탄이나 함정 등. 누군가 보았다면 '치사하다'라고 생각할 법할 편법을 더욱 활용하는, 그런 타입이었다.
회귀 전의 세운은 전투력이 그리 강하지 않은 편이었으니까.
이번 튜토리얼에서 몬스터들을 정면에서 상대했던 건 어디까지나 권능을 활용하고 힘을 키우기 위함이었다.
그런 세운이었기에 히든 던전, 심해의 산란장을 보는 순간 이를 어떻게 공략해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스륵.
세운이 등에 메어 두었던 거궁을 꺼내 들었다.
활대를 꽉 붙잡자 '끼긱-' 하는 소리가 나는 걸 보아 내구력이 꽤 닳은 듯했다.
'하긴. 직접적으로 보물을 사용하진 않았지만, 피에 굶주린 마창이라고 불리는 루인의 반동을 겪었으니까.'
성주의 무기가 아닌 일반적인 창고의 활이었다면, 진작에 부러졌을 테지.
아니, 애초에 루인의 힘을 못 견디고 화살을 쏴보기도 전에 부러졌을지도 모른다.
-내공을 통해 '그라드 제국의 사법'이 강화됩니다.
-일시적으로 '거대한 사냥꾼'의 탄성과 내구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저번과 마찬가지로, 내공을 불어넣어 내구력을 강화시킨다. 조금 위태롭긴 하지만, 이걸로 한 발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그다음으로 세운이 꺼낸 것은 기다란 봉(棒)이었다.
이 역시 네 번째 장에서 성주의 무기를 훔친 것으로, 무게가 무겁긴 하지만 단단하고 탄력이 좋아 꽤 쓸 만한 무기였다.
다만, 두께가 너무 두꺼워 사용하기가 불편해 보여 사용하지 않고 있던 무기다.
그래도 타구봉법을 익힌 세운이었기에 그 누구보다 이 봉을 잘 다룰 자신이 있었지만, 지금은 놈들 사이에 뛰어내려 봉을 휘두를 생각은 없었다.
끼리릭-
활시위를 당겨 그 중앙에 봉을 걸쳤다.
다만, 저번에 단창을 걸었던 때와는 달랐다. 봉의 길이도 길이지만, 생각보다 두꺼운 탓에 제대로 걸쳐지지 않았다.
때문에, 세운은 즉시 생각해 두었던 보물을 사용하였다.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바다의 추, 여의금고봉 ]
- 제천대성 손오공이 사용하던 무기로, 사용자가 원하는 대로 늘어나고 줄어드는 봉. 본래는 무기가 아닌 바다의 깊이를 재는 용도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줄어들어라."
스르륵.
길이만 2m에 다다르고, 두께는 주먹만 하던 봉이 작게 줄어들었다.
길이와 두께 모두, 딱 세운이 바라던 만큼 줄어들어 거궁에 딱 알맞은 화살의 크기가 되었다.
드드드득!
활시위를 힘껏 잡아당겨 입술에 붙이자, 거궁이 자신의 마지막 존재감을 뿜어냈다.
목표는, 던전의 중앙. 천장을 바치고 있는 기둥.
제왕 독수리의 척안으로 과녁을 지정하고, 그라드 제국의 사법으로 목표를 정확하게 겨냥한 세운이 손을 놓자.
피유웅!
화살 크기로 변한 여의봉이 물길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힘이 워낙 강했던 탓인지, 공기가 아닌 바다의 특성 탓인지, 여의봉은 화살 특유의 곡선이 아닌 일직선의 형태를 띠며 날아갔다.
절벽과 기둥 사이에 침입자를 거부하는 거센 해류가 존재했지만, 여의봉은 해류를 가뿐히 무시했다.
곧이어.
푹.
여의봉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기둥 사이로 박혀 들어갔다.
힘이 어찌나 강했는지, 손잡이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게 박혔다.
그러나, 기둥은 이런 공격 따위 간지럽지도 않다는 듯이 굳건하게 서 있었다.
그 순간, 세운이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힘을 다해 부러진 활대를 손에서 놓았다.
그러고는 아직까지 의식이 이어져 있는 여의봉을 향해 읊조렸다.
"커져라. 여의금고봉."
* * *
"샥스 님. 이제 곧 도착입니다."
"몬스터들은?"
"복귀를 마치고 전부 보금자리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고 합니다."
"좋아. 절반가량이 살아남았다고 했으니, 최소한 구할 이상은 죽여 두어야겠군."
귀찮다고 모든 몬스터를 정리할 수는 없었다. 놈들은 일 년 후에, 다시 한번 수를 불려 튜토리얼의 마지막 장을 책임져 줘야 했으니까.
그분과 샥스. 그리고 그 뒤의 어인들이 탑 외의 지역인 이곳에서 거주할 수 있었던 조건.
그것은 탑의 관리자와 나눈 계약 내용 중 하나였다.
"보이는군."
"전투를 준비시키겠습니다."
"지금까지의 전투보다 힘들 것이다. 그분의 권능을 빌릴 생각이니, 다들 철저하게 준비하도록 해라."
"권능을... 괜찮으시겠습니까?"
"병사들을 다치게 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샥스가 손에 든 이지창을 꽉 붙잡았다.
대규모 전투가 코앞에 닥친 지금, 그의 머릿속에서 세운의 존재는 이미 까맣게 사라져 있었다.
해류가 점점 거칠어지며, 몬스터들의 보금자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거대한 절벽과 그 위에 덮인 버섯 모양의 천장.
몬스터들이 돌아온 것을 증명하듯, 해류를 타고 몬스터들의 기괴한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모두, 전투 준비!"
"전투 준비!"
샥스의 뒤를 따라오던 어인들이 무장 점검을 마치고, 창과 방패를 꽉 붙잡았다.
따로 지시하지 않아도 모두들 느끼고 있었다. 이번 전투는, 지금까지 일 년에 한 번씩 치러왔던 '정리' 작업과는 다르다는 것을.
얼마 지나지 않아, 저 산란장에서 엄청난 수의 몬스터가 쏟아질 것이다.
다들 긴장한 눈빛으로 산란장을 바라보던 그때.
쿠구구구!!
"무슨 일이지?"
산란장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거칠게 떨려오더니, 해류가 요동쳐 온다.
"샥스 님! 산란장의 천장이!"
콰광!
버섯 모양의 기둥. 아니, 수천 년의 시간 동안 뭉치고 굳어 강철보다 단단해진 산호초가 쩍쩍 갈라지고 있었다.
거칠어진 해류로 인해 산호초가 무너지는 속도는 더욱 빨라졌고, 그 잔해가 절벽으로 가두어진 산란장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키에엑!"
"크엑...."
지상과 비교하자면, 잔해가 떨어지는 속도가 그리 빠르진 않았다.
하지만, 산호초의 크기가 워낙 엄청났고 사방이 절벽으로 막혀 있었기에 몬스터들이 피할 공간이 너무 협소했다.
천연의 요새가, 생매장 감옥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산란장의 산호초가 왜...."
"샥스 님, 저건...!"
산호초의 잔해와 먼지가 요동치며 뿌옇게 변한 산란장.
그 사이로, 불쑥 튀어나온 무언가가 있었다. 끝부분에 금으로 된 문양이 새겨진 기둥.
정체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산호초를 부순 원흉이 바로 저것이리라.
이 당황스러운 사건에 모두가 넋을 놓고 있을 때,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샥스가 다급하게 병사들을 지휘했다.
"정신 차려라! 당장 진군한다!"
"알겠습니다! 모두 도망치는 놈들을 척살하라!"
"척살하라!"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다!"
"부서진 산호초라면, 지금 당장 어찌할 수 있는 게...."
"여왕!"
"...아!"
"놈들이 다 죽더라도, 여왕만은 살려두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샥스의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해졌다. 이건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그럴 리 없지만, 만약 산란장의 여왕이 죽는 순간....
'막아야 한다!'
탑과의 계약이 깨지고, 그분의 쉼터를 잃게 된다.
솨아앗!
다급해진 샥스가 병사들을 뒤로한 채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 * *
여의금고봉을 이용한 테러.
그 위력은 상상 이상으로 훌륭했다.
세운의 지시에 여의금고봉이 산란장의 천장을 뚫고 올라올 정도로 커졌고, 그에 따라 천장이 산산조각이 나 부서졌으니 말이다.
스스스-
천장을 뚫고 나왔던 여의금고봉이 잠시나마 금빛 무늬를 자랑하더니 빠르게 사라져갔다.
봉을 쏘느라 거궁도 부러졌으니, 이번 공격으로 두 개의 무기가 부서진 셈이다.
그래도 세운은 아쉬워하지 않았다.
'C급 아이템이라 해도 쓰기에 따라 낼 수 있는 힘이 다르단 거지.'
세운이 직접 봉을 잡고 휘둘렀어도 저 기둥을 부술 수 있었을까?
그럴 리가.
아무리 빠르게 성장한 세운이라고 해도, 저런 힘을 버틸 수는 없다.
활로 여의봉을 쏘아 기둥에 박아넣은 후에 발동시키는 창의적인 활용법 덕분에 저 기둥을 부술 수 있었던 것이다.
-폭식의 권능으로 '심해의 산란장' 전체를 지정하였습니다.
-폭식의 어금니가 몬스터를 덮쳐옵니다!
당연하게도, 절벽에 깔려 죽은 몬스터 역시 세운이 죽인 것으로 취급되었다.
한꺼번에 수백의 먹잇감이 들어오자, 베엘제붑은 연신 만족스럽다는 메시지를 띄워 보냈다.
대부분이 지상에서 죽인 적이 있는 몬스터였기에 능력치는 그리 많이 오르지 않았지만....
-내공과 마나가 대폭 흡수되고 있습니다.
티끌 같은 기운이 모이고 모여, 눈에 띄는 효과를 만들어 냈다.
이대로라면 1 갑자의 내공을 채우고, 3 서클의 마나를 채우는 것도 멀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던전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보스 몬스터를 사냥해야 하는 법.
몬스터들이 잔해를 피하느라 바쁜 사이에, 보스 몬스터를 찾아내야 한다.
절벽 위에서 차분하게 아래를 지켜보던 세운은 잔해가 무너지는 와중에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몬스터 몇몇을 볼 수 있었다.
쿵, 쿠웅!
두꺼운 갑각을 두른 대형 몬스터가 잔해를 몸으로 막아 낸다.
씨 서펜트로 보이는 몬스터 역시 꼬리를 휘두르며 떨어져 내리는 잔해를 쳐낸다.
그 와중에 잔해에 짓눌려 감각이 터지거나 꼬리가 으스러져도, 놈들은 결코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것을 지켜보며 회귀 전에 탐험가로서 이름을 떨쳤던 세운의 감이, 사라진 여정의 지침표 대신 목적지를 알려주었다.
'저기다.'
슈르륵!
하얀 거품만을 남긴 채, 세운이 빠른 속도로 목적지를 향해 나아갔다.
제 72화
72. 제72화
사방에서 천장의 잔해가 무너져 내린다.
절벽 위에서 감상할 때는 그저 장관이었지만, 그 속으로 파고드니 잔해의 위협은 압도적이었다.
보스 몬스터고 뭐고. 자칫 방심하면, 세운 자신이 만들어 낸 잔해에 자신이 깔려 버릴 판이었다.
그래서 곧바로 탐욕의 권능을 일으켰다.
어차피 한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런 건 미리미리 써두는 게 최고니까.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머맨의 지느러미 ]
- 상반신은 사람의 몸을, 하반신은 물고기의 꼬리를 한 반인반어. 남성의 모습을 한 몬스터로, 추악한 모습을 하고 머메이드를 지키는 강인한 전사이다.
뿌득!
뿌드드득!
세운의 손가락 사이에서 피부가 뜯어지더니 투명한 막이 생겨났다.
팔목의 가장자리에는 상어의 그것과 닮은 지느러미가 돋아났는데, 푸른빛이 바다와 무척 잘 어울렸다.
머메이드의 아가미와 머맨의 지느러미.
두 가지의 보물이 적용되며, 세운의 몸은 어엿한 인어(人魚)의 형체가 되어 있었다.
'인어의 소재를 이런 식으로 쓰게 될 줄이야.'
머메이드는 단순한 몬스터가 아니었다.
세운이 탑을 오르기 시작할 때쯤에는 이미 멸종했다고 알려진 종족.
그들이 멸종한 이유가 바로 이 소재 때문이었다.
탑을 오르다 보면 층 전체가 바다로 이루어진 구역도 존재한다.
그때 인어의 소재를 적절하게 가공하면 지금의 세운처럼 물에서의 움직임과 호흡에서 자유로워질 수가 있었다.
그 때문에, 수많은 인어가 목숨을 잃었고. 덕분에 탑에서 인어의 소재로 만들어진 장비는 황금보다 더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 소재를, 장비로 가공하는 것도 아닌 힘 자체를 흡수하게 된 것이다.
'그럼, 가 볼까?'
솨아아!
지느러미가 자라나는 동안,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던 천장의 잔해를 부드럽게 피해 낸 세운이 무언가의 입구를 향해 헤엄쳤다.
세운 역시 바다로 이루어진 층을 공략해 보았기에 수영 실력에 자신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결국 인간.
하지만, 탐욕의 권능은 인간으로 도달할 수 있는 한계 영역을 가뿐히 극복하게 해 주었다. 오히려, 잔해를 피해 도망치고 있는 몬스터보다 더욱 빠르고 부드러운 움직임이었다.
마치, 깃털과 같은 움직임.
잔해더미로 인해 소용돌이치는 해류에 적절하게 몸을 맡기며, 잔해를 피함과 동시에 앞으로 나아간다.
그 와중에 그 어떤 몬스터도, 세운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다.
-내공을 통해 '킬케르가식 은신술'이 강화됩니다.
잔해 사이로 몸을 숨기며 몬스터들의 사각을 집요하게 노린다.
킬케르가식 은신술은 바다에서 사용하는 기술이 아니었기에 본래 이런 사용은 불가능했지만.
세운은 이미 킬케르가식 은신술에 익숙해진 것은 물론, 응용할 수 있는 수준까지 나아갔다.
거기에 머맨의 지느러미까지 더해지자, 이런 활용이 가능해진 것이다.
"케르르륵-"
어느덧 산란장의 바닥 가까이 도착한 세운의 눈앞에 입구를 지키는 대형 몬스터들이 보였다.
집게가 하나 떨어져 있거나, 한 면의 비늘이 통째로 벗겨진 등. 다들 떨어지는 잔해를 막느라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
'남은 무기가....'
세운이 가지고 있는 무기를 떠올려 보았다.
오우거의 수장 '크락 카틀락'을 무찌르고 얻은 쌍도끼나 황금성의 성주 '골드 가든'을 쓰러트리고 얻은 할버드.
거기에 세운이 평소에 사용하던 어금니 단검과 성주에게서 훔친 다섯 개의 무기 중 세 개가 부서졌다.
탐욕의 권능.
강대한 힘을 지닌 만큼, 그 힘을 발휘하려면 질 좋은 무기들이 필요했다.
그마저도 C급 무기로 낼 수 있는 보물의 힘에는 한계가 있었으니.
덕분에 세운에게 남은 쓸 만한 무기는....
'세 개 정도인가.'
성주에게서 훔친 무기 두 개와 회귀 전의 악연 '찰스 맥그리거'에게서 강탈한 무기 하나.
그게 전부였다.
세운은 그중에서도 지금의 상황에 가장 적절해 보이는 무기를 하나 집어 들었다.
[ 흑요석 장창 ]
분류 : 창
등급 : C
설명 : 날카로운 흑요석 창날이 달린 장창. 창대는 질 좋은 나무로 만들어져 있어 탄력이 대단하다.
능력 : 1. 흑요석 창날 – 절삭률이 50% 상승한다.
2. 탄력 있는 창대 – 공격, 방어 시 받는 충격을 20% 감소한다.
3. 검은 유리 – 공격력이 30% 상승하는 대신 내구도가 50% 더 빠르게 감소한다.(수리 불가)
바닷속에서는 물의 저항력 때문에 검이나 둔기를 휘두르는 것보다는 창을 내지르는 게 더 유리했다.
특히, 흑요석 장창의 능력. 날카롭긴 하지만 내구도가 낮은 흑요석답게, 꽤나 공격적인 능력이 붙어 있었다.
내구도가 낮은 만큼, 단단한 갑각이나 바위에 부딪히기라도 하면 당장에라도 깨져 나갈 것만 같았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그것만 조심하면, 어지간한 건 다 뚫어 버릴 수 있다는 거지.'
이곳의 몬스터들은 대부분 전투나 무너진 잔해로 인한 상처를 지니고 있다.
그게 아니더라도, 놈들 중에 제대로 된 방어구를 착용하고 있는 놈은 거의 없었다.
갑각이나 비늘만 조금 조심한다면, 충분한 위력을 낼 수 있다는 소리다.
솨앗!
세운이 떨어지는 잔해를 박차고 빠르게 쏘아지듯 헤엄쳤다.
그 모습이 꼭, 어뢰가 발사되는 모습을 보는 듯했다.
"쿠웩!"
한창 열심히 잔해를 막아 내던 몬스터 한 마리가 세운의 모습을 발견하였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푸우욱!
가재 모습을 한 몬스터의 떨어진 갑각 사이로, 세운의 몸이 파고들었다.
내부를 헤집는 잔혹한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반작이는 흑요석 창날을 선두로 세운의 몸이 빠져나왔다.
즉사.
단단한 갑각과 날카로운 집게를 내세워 상위 개체로 군림하던 몬스터 하나가 일 초도 되지 않아 목숨을 잃었다.
"시이잇!"
동료의 죽음을 깨달은 몬스터들이 연이어 덤벼왔다.
하지만, 가볍게 잔해를 피해 내는 세운과 달리 녀석들은 입구를 지키기 위해 잔해를 막아 내야 하는 상태.
그 제약 속에서, 세운은 말 그대로 물고기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푹!
푸부북!
씨 서펜트의 입에 들어가 내장을 헤집고 꼬리를 뚫고 나온다.
대왕오징어의 촉수를 피해, 머리통을 꿰뚫는다.
공격을 반복할수록 공격이 더욱 익숙해지며 이제는 회전력까지 이용해 대형 몬스터 사이를 날뛰었다.
'전기 마법을 못 쓰는 게 조금 아쉽지만.'
바닷속이라고 전기 마법이 만능이라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바닷물은 분명 전기가 잘 통하지만, 사방이 바닷물이기에 전기 마법을 사용하면 대상 지정이 되지 않고 사방으로 전류가 퍼져 나간다.
어지간한 수준의 고전류가 아니면, 전류가 분산되어 적에게 제대로 된 데미지를 주지 못한다.
게다가, 컨트롤을 조금만 실수해도 시전자인 세운에게 역으로 전류가 닥칠 수도 있다.
그렇다고 물속에서 효율이 높은 물 마법을 사용하자니, 적 몬스터 역시 물 속성 저항력이 높았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창을 쥐고 물리전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푹.
-흑탑의 묘리에 따라 '라이트닝 웨이브'의 위력이 강화됩니다.
파지지직!
"끄르르륵-"
이 역시, 사용하기 나름이다.
광범위 공격은 어려웠지만, 적의 몸에 창을 찔러넣고 전류를 흘려보내는 것 정도는 충분했다.
수중계 몬스터인 놈들은 전기 저항력이 낮은 만큼, 이러한 공격은 놀라울 정도로 훌륭한 결과를 자아냈다.
그 결과, 폭식의 권능을 통한 지속적인 기운의 흡수로, 세운은 드디어 목표하던 바를 하나 더 이룰 수 있었다.
-파극심공을 통해 단전에 일 갑자의 내공을 쌓았습니다.
-무공을 사용하지 않을 때도 내공이 혈맥을 순환하며 기본적인 신체 능력이 상승합니다.
-상승한 내공의 수치에 따라 사용하는 모든 무공의 효율이 증가합니다.
-파극심공의 묘리에 따라 사용하는 무공의 파괴력이 더욱 상승합니다.
-놀라운 업적을 달성하였습니다.
-보상으로 10,000point를 획득하였습니다.
-탑의 역사를 갱신하였습니다.
-믿기 힘들 정도로 놀라운 업적을 달성하였습니다.
-보상으로 100,000point가 상승하였습니다.
드디어, 일 갑자의 내공을 쌓는 데 성공했다.
무공의 진수는 바로 일 갑자의 내공을 쌓는 데부터 시작한다.
지금까지 세운이 사용하던 무공들은 따지고 보면 반쪽짜리에 불가했다는 뜻이다.
세 번째 마나 서클도 만들었으니, 어쩌면 탑에 진입하기 전에 일 갑자의 내공을 쌓는 것도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싶었는데.
정말 그 목표를 이루고 말았다.
-성좌, '다섯 번째 날'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당신의 업적을 축하합니다.
성좌, 다섯 번째 날. 프레이야의 축복이 눈앞에 떠올랐다.
당장 튜토리얼에서 리엘 리프레인과 계약을 했으면서, 어째서 자신에게 관심을 두는지 의문이었지만 딱히 곤란한 건 없었기에 메시지를 가볍게 넘겼다.
'이제 들어가 볼까?'
한바탕 날뛰다 보니 입구를 지키던 대형 몬스터들이 전부 쓰러져 있었다.
입구에 들어가 보니 거대한 동굴이 나타났다.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건 아닌 것 같고, 몬스터들이 벽을 파내어 만든 곳 같았다.
빛이 잘 들어오지 않아 어두웠지만, 걱정 없었다. '밤 올빼미의 눈' 덕분에 동굴의 미약한 빛이 모여 세운의 시야를 밝혀주고 있었으니 말이다.
'몬스터는 더 없는 것 같은데.'
던전의 형태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보스 몬스터의 주위에는 강한 몬스터들이 자리 잡고 있게 마련이다.
입구를 지키던 몬스터들도 충분히 강했지만, 세운이 예상한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던 중.
'빛이다.'
동굴 안쪽에서 초록빛이 스며 나왔다.
보스 몬스터가 가까워졌음을 알아챈 세운이 전투태세를 다잡았다.
천장의 잔해가 모두 떨어지면 몬스터들이 알아채고 들어올지도 모르니, 무기를 또 하나 잃게 되더라도 새로운 보물을 사용하여 보스 몬스터를 빠르게 정리해야 한다.
그렇게 동굴을 빠져나온 후, 세운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산란장이라더니, 이런 거였나."
-성좌, '배고픈 왕자'가 이 정도 양이면 신선한 알탕을 질리도록 먹을 수 있겠다며 크게 환호합니다.
수백, 수천 개의 알이었다.
그것들은 모두 제각기 다른 크기와 모양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같이 초록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마치 야광 물질이라도 듬뿍 발린 것처럼 말이다.
덕분에 공동에는 햇빛 한 점 들어오지 않았음에도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럼, 다섯 번째 웨이브의 몬스터가 다 여기서 태어난 건가?'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크기도, 종류도 다른 개체의 몬스터들이 이곳에서 모두 태어났다니.
그렇다면, 누군가 이 알들을 낳고 관리한다는 말인가?
그런 고민은 발을 몇 걸음 내딛지 않아, 금방 확인할 수 있었다.
두근! 두근!
공동의 중앙. 투명한 막 안에, 수백 개의 알을 품고 있는 존재.
막은 심장처럼 규칙적으로 수축하며, 안에 연결된 알들에게 에너지를 공급해 주고 있었다.
그 안쪽에서.
"인간...이신가요?"
성숙하면서도 기괴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 73화
73. 제73화
'아이들이... 돌아왔나 보구나.'
심해의 산란장.
그 가장 깊은 곳에서, 한 여인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그녀를 여인이라고 지칭할 수 있을까? 탐스럽던 머리칼은 모두 빠져 있었고, 매끈거리던 피부는 시커멓게 말라붙었다.
누군가 보았다면, 미라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빼빼 마른 몰골.
오직, 수백 개의 알이 두근거리고 있는 산란막만이, 그녀가 '여왕'이었던 시절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대체 몇 년째지?'
탑에 존재했을 시절. 그녀는 결코 이런 몰골의 괴물이 아니었다.
탑의 바다. 그 하나의 층 전체를 지배하던 여왕.
층의 모든 몬스터는 물론, 층을 오르기 위해 도전했던 플레이어들 모두 그녀의 앞에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어야만 했다.
그래.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그X 때문에...!'
하나의 층을 다스리게 됐을 때쯤. 그녀는 층 하나로 만족하지 못하고, 성좌의 자리를 넘보았다.
자신의 층에서 다른 성좌를 믿는 종족에게 자신을 믿을 것을 강요하고, 그렇지 않은 종족은 깡그리 말살하였다.
신도가 생겨나고, 격이 쌓이며 초월에 다다랐을 때쯤. 어인들이 믿던 성좌가 그녀의 층에 직접 강림하였다.
레비아탄.
그 존재의 극히 일부만 강림하였을 뿐인데, 그녀는 찰나의 시간도 버티지 못하고 격을 모두 잃어버렸다.
단 한 번의 공격.
그녀에게 너무나도 익숙하던 잔잔한 파도가, 질투의 권능을 실은 해일이 되는 순간, 모든 힘이 사라졌다.
덕분에 레비아탄은 탑에서 추방되었지만, 그녀 역시 레비아탄과 함께 탑에서 추방되고 말았다.
힘을 모두 잃고, 작별 인사라며 마중 나온 색욕의 마신에게 저주까지 받은 채로.
결국 그녀는 평생 산란의 저주를 받아야 했고, 그녀의 아이들은 자신의 어미를 어미로 보지 않았다.
그저, 본능에 충실히 따르며 자신을 지킬 뿐. 아니, 가두고 있을 뿐이었다.
자신들 역시 탑에 이용당할 뿐이라는 것도 모른 채로 말이다.
그렇게 지금까지 길고 긴 시간을, 이곳에서 고통받아야만 했다.
그러던 중.
"...산란장이라더니, 이런 거였나."
'누구지?'
입구 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쩐지, 바깥이 소란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공격을 받고 있는 듯했다.
대체 누가? 어떻게 이곳에?
갖가지 의문이 떠올랐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드디어 이 저주를 끝낼 때가 되었구나...!'
저 인간을 이용하여 이 길고 긴 저주를 끝내고 성좌를 이끈 어인족을 말살하고, 끝내 자신을 이곳으로 떨어트린 질투의 성좌.
레비아탄을 짓밟을 때가 되었다.
저 인간을 이용해 저주를 풀고, 숨겨두었던 보옥을 사용한다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인간...이신가요?"
계획을 마치자마자 지금까지 모으고 또 모은 힘을 쥐어짜 내며, 그녀의 입에서 괴기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 *
목소리가 들린 것은 알을 품고 있던 산란막이 이어진 안쪽이었다.
목소리를 향해 자리를 옮겨보니, 미라처럼 말라비틀어진 몬스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네가 말을 건 건가?"
"맞습니다. 그렇게 뚫어져라 보지 마시지요. 모습이 흉측하여, 부끄럽습니다."
기괴스러운 목소리와 달리, 그녀의 말투는 몹시 부드러웠다.
하지만, 세운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정체가 뭐지?"
"...성격이 급하시군요."
"할 말 없으면, 이대로 끝내고."
세운이 창을 다시 꽉 쥐었다.
상대는 어디까지나 이 던전의 보스 몬스터.
회귀 전에 탑을 오르며 수많은 보스 몬스터를 상대해 온 세운이었기에 알 수 있었다.
'몬스터를 믿으면 안 된다.'라는 것을.
게다가, 세운은 방금 막 던전의 천장을 무너트리고 수많은 몬스터를 학살하고 왔다. 보스 몬스터라면, 이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자신의 몬스터를, 그것도 자신이 낳은 자식을 죽인 이에게 이런 식으로 말을 건다? 무언가 노리는 게 있는 것이다.
"잠깐만 기다려 주시지요."
"재미없으면 바로 찌를 테니까, 잘 말하는 게 좋을 거야."
세운이 그녀의 두개골을 향해 창을 갖다 댔다.
의심을 하면서도 창을 내지르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
'무언가 단서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몰라.'
당장 막혀 버린, 레비아탄을 찾을 단서 때문이었다. 뭐, 그게 아니더라도 그녀가 제법 괜찮은 보상을 내걸면 들어줄 생각 정도는 있었다.
쓸 만한 장비라면, 항상 부족했으니까.
그렇게 귀를 기울이던 세운은, 그녀의 첫 마디부터 움찔하고 말았다.
"악마가 절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악마.
아직, 그녀가 어떤 악마를 말하는지는 모른다. 그저 단순한 비유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위치와 회귀 전에 세운이 조사했던 서적 등. 다양한 정보가 합쳐져, 그녀가 말하는 악마가 '레비아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세운이 관심을 가지는 것을 눈치챈 그녀가 말을 계속 이어 나갔다.
"한때, 전 탑의 40층인 '광휘의 바다'를 다스리는 몸이었습니다."
이어진 얘기는 그녀가 이 꼴이 되기 전의 이야기였다.
자기 입으로 말하기 부끄럽지만, 수많은 몬스터를 거느리며 몬스터를 무작위로 학살하는 플레이어들에게서 보호하였고, 성좌의 무리한 요구나 모욕을 견디는 등.
마치, 하나의 소설과 같은 이야기였다.
문맥이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세운 자신도 모르게 이야기에 빠져들 뻔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거짓말이다.'
얼마 가지 않아 눈치챌 수 있었다.
아니,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다. 사실에 입각한 거짓.
그녀가 말하는 악마는 일반적인 플레이어들이 생각하는 만악의 근원이었지만, 세운은 알고 있었다.
악마라고 하여도 아무런 이유 없이 한 층의 지배자를 저주할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게다가, 회귀 전에 보았던 여러 역사서에서 그녀가 이야기하는 것과 비슷한 글을 떠올릴 수 있었다.
'흑해의 여왕, 에스트롯샤.'
데아 바칸델 에스트롯샤. 광휘의 바다를 피와 어둠으로 물들인 희대의 폭군.
결국, 바다를 지켜주던 성좌를 배신하고 그 자리를 넘보다 신의 저주를 받고 탑의 바깥으로 쫓겨난 여왕이다.
역사서를 100% 완벽하게 믿을 수는 없었지만, 최소한 지금 그녀가 내뱉는 멍청한 거짓말보다는 더욱 믿음직했다.
물 흐르듯이 거짓말을 내뱉는 그녀를 당장에라도 찌르고 싶었지만, 세운은 손에 힘을 주며 그것을 참아냈다.
최소한, 레비아탄의 위치에 대한 단서는 알아내야 했으니까.
"그래서 그 악마의 위치는?"
"도와주시려는 건가요? 당신은 정말 정의로운 용사시군요! 제가 지금까지 살아 있었던 건, 당신을 만나기 위함인 게 분명해요!"
"알겠으니까, 위치는."
"먼저 제 저주부터 풀어주시겠어요? 그럼 저와 함께...."
"아니, 위치부터 들어야겠어. 내 눈으로 직접 봐야 믿을 수 있을 것 같거든."
애초에, 그녀를 풀어줄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조금 망설이는 듯했지만, 어차피 마신의 저주에 의해 이 던전에 속박된 여왕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동쪽이에요. 동쪽으로 가면, 영혼을 팔아 타락한 어인들이 악마를 섬기고 있을 거예요."
씨익.
세운의 얼굴에 그녀에게 들키지 않을 정도로 작은 미소가 지어졌다.
기껏 몬스터를 따라왔더니 레비아탄이 아닌 몬스터의 보금자리가 나와 막막하던 참이었는데, 그녀 덕분에 목적지를 정할 수 있었다.
"나한테 뭐 줄 건 없어?"
"줄 거라니요...?"
"너를 위해 악마를 만나러 가는데, 쓸 만한 장비 정도는 있어야 할 거 아니야?"
"...부하들을 위한 장비가 뒤쪽 방에 보관되어 있긴 해요."
"그런 거 말고. 악마에게 대항할 만한 장비 말이야."
목적지의 위치를 알아냈으니, 더 이상 그녀에게 캐낼 건 없었다.
그러니 혹시 던전에 숨겨져 있을지 모를 아이템을 찾아내기 위해 그녀를 재촉했다.
하지만, 사뭇 편해진 세운의 반응에 수상함을 느낀 것일까?
그녀의 목소리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수, 숨겨진 방이 하나 있어요."
"오, 어딘데?"
"그 방은 저만이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있어요. 먼저, 제 저주부터 풀어주시면 제가 직접 최고의 장비를 선사해 드릴게요."
"그래? 저주는 어떻게 푸는데?"
세운의 질문에, 시체처럼 메말라 있던 그녀의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
"간단해요! 제 팔에 달린 수갑을 끊고, 제 손을 잡아주시면 돼요!"
세운이 고개를 돌려 그녀가 말한 수갑이란 걸 확인해 보았다.
재질을 알 수 없는, 푸른색의 수갑. 자세한 원리는 모르겠지만, 수갑을 통해 그녀의 생명력이 지속적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만약, 저 수갑을 풀고 그녀가 말한 대로 손을 맞잡으면.
'내 생명력을 모조리 흡수해 가겠지.'
그녀 대신, 세운이 이 자리에서 미라의 형상을 맡게 될 것이다.
이로써 더욱 확실해졌다.
그녀는 악마에게 당해 심해에 갇히게 된 비운의 여왕 같은 게 아니었다.
죄수.
그것도 마신에게 저주를 받아 산란장에 갇혀 영원한 저주를 내려받은 극악의 죄수였다.
"그건 됐고, 그 장비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나 말해 봐."
"마, 말했듯이 그곳은 저만이 열 수 있어요! 그러니 먼저 저주부터 풀어주시면...."
"아, 눈치챈 건가."
"...네?"
혹시나 했지만, 더 이상 스스로 정보를 내뱉을 것 같지는 않았다. 보아하니 걱정했던 경비원들도 나타나지 않을 것 같고.
그렇다면....
"너, 몸은 그래도 고통은 느낄 수 있지?"
"왜, 왜 그러시는 건가요?"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그라드 제국식 고문법 ]
- 적에게서 기밀을 빼내기 위해 정신적 압박이나 육체적 고통을 주는 고문법. 제국의 지하 감옥에서만 행해졌다는 수백 가지 방법이 기술되어 있다.
스륵.
세운이 들고 있던 창을 등 뒤에 걸었다.
지금부터는 창이 필요하지 않다.
부그르!
"생물이 가장 큰 고통을 느끼는 순간이 몸이 불타오를 때라지?"
세운의 손 위에서 물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물속에서 화염 마법을 사용할 수는 없으니, 그 방법을 응용하여 물의 온도를 극도로 올린 것이다.
불로 지지지는 못하더라도, 뜨거운 물로 피부를 익히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리라.
포옹!
"아니면, 물에 잠겨 숨을 못 쉴 때라거나. 아니, 넌 오히려 물이 없어야 숨을 못 쉬려나?"
세운의 손위에서 물이 소용돌이치더니, 말이 바뀌자마자 물이 싹 사라졌다.
바닷물이 사라진 자리에, 동그란 모양의 공기 방울이 두둥실 떠올랐다.
"요, 용사님. 그러지 마시고 저와 얘기를...."
"아, 걱정하지 마. 딱 봐도 네 몸 상태가 말이 아니니까, 이렇게 생명에 위협을 줄 만한 고문은 마지막에 해 줄게."
말을 마친 세운이 아공간 주머니에서 날카로운 가시 수십 개를 꺼내 들었다.
몬스터의 가시.
다섯 번째 장의 몬스터들을 상대하고 바로 바다에 들어온 탓에, 고창석에게 넘겨주지 못한 소재였다.
그런 소재를 이런 데서 사용하게 될 줄이야.
"아, 기왕이면 천천히 대답해 줘."
"그게 무슨...."
"이런 방법은 나도 처음이라서, 최대한 여러 가지 방법을 실험해 보고 싶거든."
"이, 이, 이런!"
"알겠지?"
푸욱!
"키아아아아악!!"
심해의 산란장에서 가장 깊은 곳.
그곳에서 여왕의 비명이 크게 울려 퍼졌지만, 잔해를 피하느라 난장판이 되어 버린 바깥의 몬스터들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제 74화
74. 제74화
"히든 던전이라고 기대했는데, 생각보다 별거 없네."
흑해의 여왕, 데아 바칸델 에스트롯샤.
심해에 갇힌 채로, 고통이란 걸 경험한 지 너무나도 오래되었기 때문일까?
'그라드 제국식 고문법'에 나열된 고문법의 반의반도 시도해 보지 못했는데, 그를 견디지 못한 그녀가 입을 열고 말았다.
덕분에 일반 몬스터들이 사용하는 대형 창고부터 시작해, 지금 서 있는 에스트롯샤의 고유 창고에까지 발을 디딜 수 있었다.
[ 여왕의 하사품 ]
분류 : 반지
등급 : C+
설명 : 흑해의 여왕, 데아 바칸델 에스트롯샤가 자신의 비늘을 이용하여 만들어 낸 반지. 자신의 수하에게만 하사하는 증표이다.
능력 : 1. 여왕의 비늘 – 물리 및 마법 방어력이 5% 상승한다.
2. 바다의 여왕 – 물 속성 친화도가 소폭 상승한다.
3. 흑해 증명 – 물속에서의 이동 속도가 5% 상승한다.
C+급 아이템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초라한 능력.
하지만, 상관없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장신구형 아이템이었으니까.
보기는 조금 흉할지 몰라도, 효율을 중시한다면 열 개까지도 착용이 가능한 게 바로 이 반지형 아이템이다.
물론, 너무 많은 장신구를 착용한다면 아이템의 능력이 감소하거나 움직임이 불편해지는 등. 다양한 부작용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잘그락.
그 외에도, 에스트롯샤의 고유 창고에는 수많은 장신구형 아이템이 존재하였다.
애초에 그녀에게 무기나 방어구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벽면에 C급의 무기 몇 개가 장식처럼 걸려 있어 아쉬운 김에 아공간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슬슬 창고를 다 둘러보았다고 여기며 발걸음을 돌리려던 중.
"이쪽인가?"
창고의 가장 안쪽에서, 어쩐지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기운을 따라 걷다 보니, 세운의 목에 걸린 목걸이 '바다의 분노'가 낮게 떨리며 공명하고 있었다.
앞으로 조금 나아가다 보니, 벽이 눈앞을 가로막았다.
처음에는 아이템들을 확인하느라 신경 쓰지 않던 곳이었는데, 지금 보니 주변이 조금 수상해 보였다.
"입구?"
거대한 원형의 바위.
세월이 지나 흔적이 거의 사라지긴 했지만, 바위의 아래로 끌린 자국이 미세하게 남아 있었다.
힘을 주어 밀어 보았지만, 바위는 자신이 문이라는 것을 부정하듯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내공을 불어 넣어도 마찬가지.
튜토리얼 첫 번째 장에서 발견한 바위산의 숨겨진 통로는 내공을 통해 어렵지 않게 열었었는데, 이 바위는 인간의 힘으로 열 수 있는 느낌이 아니었다.
그러나.
우웅-
'바다의 분노'가 공명하는 것을 보아하니, 바위 앞에 무언가 있는 것은 확실하다.
짧게 고민을 마친 세운이 창고에서 획득한 장신구 중 자신에게 가장 필요 없어 보이는 반지 하나를 끼고 탐욕의 권능을 개방하였다.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라우린의 반지 ]
- 난쟁이의 왕, 라우린이 착용하던 금반지. 이 반지를 착용하는 자는 12인분의 힘을 낼 수 있다고 전해진다.
우득-!
반지가 당장에라도 깨져 나갈 듯이 떨려왔다.
무기가 아닌 장신구에 마몬의 보물을 사용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조금 걱정하였지만, 이 역시 무기와 마찬가지.
아이템의 성능만 받쳐 준다면, 보물의 힘을 충분히 발현할 수 있어 보였다.
'오랜만에 힘 좀 써볼까?'
바위의 옆에 서서 자세를 잡아 보았다.
반지를 통해서 전해지는 기운 덕분에, 전신에서 힘이 끓어오르는 듯했다.
"흐읍!"
드드득-
힘을 주자마자, 바위가 놀라기라도 한 것처럼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라우린의 반지를 사용하지 않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 벽을 미는 것과 문을 미는 것의 차이로 느껴질 정도였다.
우웅!
'라우린의 반지'에 깃든 힘이 금 간 반지를 통해 느껴졌다.
자신은 얼마 버티지 못하니, 최대한 빨리 역할을 끝내 달라는 듯하다.
이에 세운은 전신에 내공을 활성화하며, 힘차게 바위를 밀어냈다.
압도적인 근력은 수중이라는 제한적인 환경에서도 바위를 서서히 밀어내고 있었다.
마치 등 뒤에서 열두 명의 사람들이 세운의 등을 밀어주는 것만 같았다.
일반인이 아닌, 세운과 같은 힘을 가진 이들이.
지금 현재 세운의 근력 수치는 150이 넘어가는 상태.
그러니 반지에 깃든 힘을 이에 곱한다면, 세운의 힘까지 합해 총 13인분의 힘. 2000에 가까운 근력 수치를 뽐내게 되는 셈이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세운의 근력이 어지간한 탑의 상위 계층 플레이어 이상으로 강력하다.
그그그극!
내공의 힘까지 더해지자, 세운의 힘이 갑절로 강해졌다.
그러자 서서히 움직이던 바위에 가속도가 더해지며 뒤에 가려져 있던 공간이 보이기 시작했다.
푸른색. 눈이 잠길 정도로 진푸른 빛이 흘러나왔다.
목걸이의 공명이 극에 달하고, 반지가 더는 무리라며 균열을 일으키는 순간.
콰앙!
세운이 남은 힘을 모두 끌어내어, 바위를 날려 보냈다.
그 거대하고 무거운 바위는 공처럼 튀어 나가며 바닥을 몇 바퀴나 굴러 벽에 박힌 후에야 움직임을 멈추었다.
쨍-
'라우린의 반지'가 가진 힘을 견디지 못하고 깨져 나갔다.
세운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푸른빛이 흘러나오는 방으로 들어갔다.
숨겨진 방이라고 하기에는 제법 넓은 공간.
동굴과 같은 지금까지의 지형과는 달리, 잘 깎아 만든 건축물처럼 매끈한 벽면으로 이루어진 방의 중간에....
"이건, 레비아탄의 보주(寶珠)?"
회귀하기 전, 세운이 칠대 마신을 조사하며 문헌으로 알게 되었던, 레비아탄의 보물이 보관되어 있었다.
[ 심해의 보석 ]
분류 : 보석
등급 : ??
설명 : ??
능력 : ??
보석이 가진 격의 차이 때문인지 그 정보가 확인되지 않았지만, 세운은 알 수 있었다.
"분명해. 문헌에서는 레비아탄이 40층에 강림했을 때 잃어버렸다고 적혀 있었는데."
아무래도, 잃어버린 게 아니라 에스트롯샤가 훔쳐둔 듯하다.
마신의 저주를 받고 탑에서 쫓겨난 주제에 어떻게 이것을 챙겨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 저주를 풀고 일어났을 때를 대비하여 이곳에 꼭꼭 숨겨 두었겠지.
때문에 그 고문 속에서도 이것의 위치는 끝까지 말하지 않았던 것이고.
'기대 이상의 수확이야.'
적당히 괜찮은 아이템만 좀 챙겨갈 생각이었는데, 상상도 못 한 아이템을 획득하였다.
마신의 힘이 담긴 성물인 만큼, 세운으로서 활용할 방법이 있는 아이템이 아니었지만.
'레비아탄과 만났을 때, 조건으로 내걸 수 있겠어.'
잘하면, 협상 카드로써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보주를 조심스럽게 집어 들어 아공간 주머니에 집어넣은 세운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등을 돌렸다.
"슬슬 정리할까?"
레비아탄의 위치는 물론, 제법 많은 장신구와 함께 레비아탄의 보주까지. 생각보다 얻은 게 많았다.
이제, 이 고마운 여왕의 목숨을 끝낼 차례다.
* * *
"대체 어째서 이런 일이 생긴 거지?"
어인들의 수장, 샥스.
그가 다른 어인들을 뒤로한 채로, 무너지는 산호초의 잔해 사이를 빠르게 헤엄쳐 나갔다.
길고 날카로운 상어 지느러미에서 하얀 실선이 흘러나오며, 그의 몸이 섬광처럼 빠르게 쏘아졌다.
잔해는 물론, 그 어떤 몬스터도 샥스에게 닿지 못했다. 심지어는, 몬스터의 시선마저도 샥스를 따라가지 못했다.
순식간에 잔해를 모두 뚫고 나간 샥스의 눈에, 여왕의 산란장 입구가 보였다.
그러나.
"설마!"
설마 했던 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말았다.
입구 앞에서 쓰러져 있는 대형 몬스터들.
상처를 훑어보니 잔해를 막으며 난 상처도 있었지만, 놈들이 목숨을 잃은 결정적인 상처는 따로 있었다.
가시. 아니, 상대는 인간이라 하였으니 창이 맞겠지.
날카로운 무언가로 인한 찌르기 공격으로 몬스터들이 모두 당한 것이었다.
'안 돼....'
손에 들린 이지창을 앞으로 내세우며, 샥스는 더욱 빠른 속도를 냈다.
여왕을 잃게 되면, 그나마 자신들의 터전을 제공해 주던 이 황폐한 바다마저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들이 이곳에서라도 남아 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탑과의 계약 덕분이었으니까.
'그분'의 힘이 약해진 지금, 이 바다에서도 쫓겨난다면 그들이 갈 수 있는 곳은 없었다.
슈르륵!
어뢰처럼 빠르게 나아가던 샥스의 눈에 은은한 초록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색욕의 마신, 리리스.
그녀의 저주가 깃든 산란장에서 나는 독특한 색이, 목적지에 다 와 감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헉, 헉...."
샥스는, 초록빛 알이 가득한 산란장 내부로 진입할 수 있었다.
여왕은 살아 있었다.
어찌 된 일인지, 몸에 구멍이 뚫려 있거나 벌겋게 부어오른 등 각종 상처가 나 있긴 하지만, 어쨌든 살아 있었다.
아직은.
"멈추어라!"
샥스가 다급하게 소리 질렀다. 부하들 앞에서 지키고 있었던 품위나 위엄 따위는 까맣게 잊은 채로.
여왕의 앞에서 끝장을 보려는 듯이 창을 들고 있는 인간 때문이었다.
우뚝!
정말이지, 간발의 차이.
조금만 늦었어도, 인간의 창이 여왕의 목숨을 끝낼 뻔했다. 그러나 당장 여왕의 두개골과 창이 맞닿아 있는 상태.
방심할 수는 없었다.
어떤 말로 인간을 회유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
"...인어?"
여왕 앞의 인간.
세운이 깊은 흥미를 보이며 샥스에게 관심을 내비쳤다.
* * *
"원하는 건 다 들어줬지 않느냐! 제발, 목숨만은 살려다오! 제발!"
"뭐, 더 남겨둔 거라도 있어?"
"내 전부를 다 가져가 놓고 그게 무슨 소리더냐!"
"그럼, 살려둘 가치가 없네."
"이, 이, 이런!"
미라처럼 말라비틀어진 피부. 거기에 몸 곳곳에 잔혹한 상처가 새겨진 여왕이 기괴한 목소리로 비명을 내질렀다.
자비를 베풀 생각 따위는 없었다. 어차피 그녀 역시 세운의 목숨을 희생하여 자신의 저주를 풀려고 했었으니까.
게다가, 그녀를 없애지 않으면 던전의 공략이 인정되지 않는다.
경험치를 위해서라도, 경험치를 위해서라도. 그녀를 죽일 이유는 충분했다.
창을 뽑아 들고, 망설임 없이 그녀에게 내지르려던 순간.
"멈추어라!"
'음?'
입구 쪽에서 누군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몬스터의 울부짖음이 아닌, 선명한 발음의 언어.
고개를 돌려보니, 산란장의 입구에 한 어인이 서 있었다.
사람처럼 이족보행을 하고 있지만, 예리하게 솟은 지느러미나 날카로운 송곳니 등은 상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인어?"
분명하다.
회귀 전, 세운이 탑을 오르기 시작할 때쯤에는 이미 멸종했다고 알려진 어인. 인어였다.
그런 인어가, 왜 이곳에 있는 것일까? 그리고 어째서 여왕을 죽이는 것을 막으려는 것일까?
많은 의문이 들었지만, 본능적으로 저 인어가 레비아탄과 무언가 관련이 있을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사, 살려다오! 제발! 이 인간은 미쳤어!"
게다가, 저 인어가 여왕의 목숨을 바라는 지금.
"자기소개부터 시작해 볼까?"
주도권은 세운이 쥔 상태다.
제 75화
75. 제75화
"샥스라고 한다."
"그게 끝?"
"...현재 어인들의 수장직을 맡고 있다."
"반가워. 난 튜토리얼의 플레이어, 정세운이라고 해."
역시, 어인이 맞았다.
문헌에는 자세히 나와 있지 않았는데, 어찌 된 일인지 멸종한 게 아니라 탑 바깥으로 추방되어 있던 듯하다. 아니, 어쩌면 추방이 아닌 스스로 빠져나와 이곳에 정착한 것일지도 모르지.
흑해의 여왕, 에스트롯샤가 층을 지배하던 시절에 어인들은 꽤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알려졌으니 말이다.
거기다 플레이어들의 마구잡이식 사냥까지.
어쩌면, 탑 바깥의 이 텅 빈 심해가 그들에게는 더욱 안전하고 편안한 곳일지도.
"일단, 창부터 내리고 말하지."
"내가 그래야 할 이유부터 알려주는 게 먼저가 아닐까?"
"그건...."
세운의 질문에, 샥스는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그의 입장에서 세운은 철저한 외부인이었기 때문이다.
자기소개를 했다고는 하지만, 그게 진짜인지도 모르고, 목적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현재 탑에서 어인족이 탑 바깥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다고 알려진 상황에서 샥스는 이미 세운을 살려 보낼 생각이 없었다.
혹여, 살려 보냈다가 탑에서 자신들의 존재를 알렸다가 플레이어들이 튜토리얼에 개입하여 그들을 찾으러 올 수도 있으니까.
물론, 그게 불가능하다는 건 잘 알고 있지만 플레이어에게 한계란 없다.
아주 만약의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자신들의 존재는 숨겨야만 했다.
때문에 당장의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던 중, 세운이 먼저 제안을 내걸었다.
"날 레비아탄에게 데려가 준다면, 죽이지 않도록 하지."
"...네가 그걸 어떻게?"
"이게 친절하게 알려주더라고."
세운이 에스트롯샤의 머리를 가볍게 쿡쿡 찌르며 말하였다.
순간 샥스의 날카로운 눈빛이 에스트롯샤에게 꽂혔지만, 그녀는 다급하게 변명을 늘어놓을 뿐이었다.
"내 꼴을 보아라! 이자가 날 이 꼴로 만들며 고문하였는데, 나보고 어쩌란 말인가?"
"후우...."
샥스가 고개를 내저었다.
애초에 그녀가 비밀을 지킬 거라 믿지는 않았지만, 그녀 때문에 자신들의 가장 중요한 비밀이 들켰으니 말이다.
다만, 확인할 게 하나 있었다.
"어째서 그분을 뵈려는 것이지?"
"음...."
뭐라고 설명하는 게 좋을까.
세운이 잠깐 동안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설명해 보아도 샥스의 경계심이 풀리지는 않을 것 같았다.
회귀 전과 후. 길고 긴 플레이어 생활을 돌이켜 본 결과, 역시 가장 좋은 방법은 눈으로 무언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푹.
"끼이이-"
철퍽.
"뭐 하는 짓이지?"
세운이 에스트롯샤에게 겨누었던 창을 돌려 가까이에 있던 알 하나를 찔렀다.
그 속에서, 아직 신체가 완전히 형성되지 못한 몬스터가 하찮은 신음을 흘리며 빠져나왔다.
알에서 나온 녀석은 단 몇 초도 버티지 못하고 시작도 못 한 삶을 마무리 지었다.
바로 이어서, 세운은 그 알을 향해 손을 가리키며 권능을 발현하였다.
-'심해의 알'을 포식하였습니다.
-양분이 극도로 미미하여 아무런 능력치도 흡수할 수 없습니다.
"이, 이건!"
꿀꺽!
평소와 같이 검은 아가리가 생겨나더니 세운이 방금 죽인 몬스터를 알과 함께 통째로 집어삼켰다.
능력치는 오르지 않았지만, 어차피 지금의 목적은 그게 아니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극도로 부드러운 식감이 마치 젤리와 같다며 더 많은 식사를 원합니다.
"레비아탄을 따르고 있다면, 이 힘이 뭔지 알고 있겠지?"
"폭식의 권능이라니...."
"아, 그리고."
세운이 연이어 새로운 권능을 사용하였다.
-탐욕(眞)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탐욕의 권능.
딱히 무언가를 꺼낼 필요도 없었다. 보물창고가 개방되는 이펙트만으로도, 샥스의 눈이 도저히 못 믿겠다는 듯이 반짝거렸으니 말이다.
"타, 탐욕의 권능까지."
"이걸로 설명은 됐을까?"
"두 마신께서 우리 성좌님을 만나려 하시는 건가? 하지만, 어째서? 성좌님께서 이곳에 떨어질 때도, 그분들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으셨는데!"
"미안하지만 너한테 설명해 줄 영역은 아닌지라."
"...그렇군."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당신의 행동에 뜻 모를 표정을 짓습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현기증이 난다며 얼른 식사를 부탁한다고 애원합니다.
혹시나 자신의 이름을 멋대로 팔아먹는 세운의 행동에 마신들이 화를 내면 어쩌나 싶었지만.
마몬은 암묵적으로 세운을 이해해 주는 눈치였고, 베엘제붑은 늘 그렇듯이 먹이에만 관심을 가질 뿐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샥스는, 곧 무언가 결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한 번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알겠다."
"성좌의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 있겠어?"
"물론이다. 나 샥스는 레비아탄 님의 이름에 대고 그대를 성소까지 안내하겠다고 약속하겠다."
"좋아."
성좌의 이름을 건 맹세. 이것은 단순히 말뿐인 맹세가 아니었다.
맹세를 어긴다면 자신의 성좌에게서 얻은 능력이 모두 사라지는 것은 물론, 다시는 해당 성좌와 계약하지 못하게 된다.
뭐, 탑에는 간덩이가 부어서 성좌의 이름을 걸고 사기를 치는 플레이어들도 있었지만, 보아하니 저 샥스란 어인은 레비아탄에 대한 충성도가 꽤 높은 것 같았다
그러니 레비아탄의 이름에 건 맹세는 가장 최적의 맹세라 볼 수 있었다.
그 맹세를 듣고 나서야 세운은 에스트롯샤의 머리에 대고 있던 창을 떼어 냈다.
그리고 마침내.
"그럼, 바로 가 볼까?"
질투의 마신. 레비아탄을 만나러 갈 때가 되었다.
* * *
쿠궁....
부서진 산호초의 잔해와 사방에 널린 몬스터의 시체들. 그리고 해류에 갇혀 물을 흐리게 만들고 있는 엄청난 양의 혈액.
그것들을 정리하느라 어인들은 한바탕 고생을 해야만 했다.
물론, 예상했던 치열한 전투가 아닌 단순한 뒤처리였기에 인명 피해가 발생하지는 않았지만, 현장을 정리하는 건 하루 이틀로 될 문제가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여왕인 에스트롯샤와 그녀의 알들이 대부분 무사하다는 것.
수복만 잘한다면, 다음 튜토리얼은 문제없어 보였다.
물론.
-성좌, '배고픈 왕자'가 이것 가지고는 감칠맛밖에 안 난다며 입맛을 다십니다.
베엘제붑을 만족시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백 개가량의 알을 사용하긴 했다.
그마저도 베엘제붑을 만족시키지는 못했지만.
뒤에서 안절부절못하면서도, 마신의 요구이기에 섣불리 세운을 막지 못하는 샥스를 보고 있자니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다른 어인들은 현장을 수습했고, 세운과 샥스는 먼저 던전을 빠져나왔다.
질투의 마신, 레비아탄을 만나기 위해서 말이다.
"속도를 맞출 테니 잘 따라오시지요."
세운이 두 마신의 계약자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까?
샥스는 처음과 다르게 공손한 태도로 세운을 대하고 있었다.
다만, 튜토리얼 진행 와중에 바다로 뛰어들었던 세운이기에 과도한 배려는 그리 반갑지 않았다.
레비아탄에 대한 흔적을 찾기 위해 던전을 공략했다지만, 여기서 낭비할 시간은 없었으니까.
"그냥 평상시처럼 가지. 아니, 평상시보다 빠르게."
"확실히 탐욕의 권능은 대단해 보이지만...."
샥스가 세운의 몸에 달린 아가미와 지느러미, 물갈퀴를 둘러보았다.
그 모습은 이미 인간보다는 어인에 더욱 가까워 보였고, 움직임 역시 물고기처럼 부드러웠다.
"저희 어인의 헤엄 실력은 모든 수중생물 중에서도 뛰어난 편입니다. 따라오긴 힘드실 겁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알겠습니다."
촤앗!
샥스가 하얀 물거품을 일으키며 빠르게 앞으로 쏘아졌다. 땅을 박찬 것처럼, 바닷물을 박차며 속도를 붙인 것이다.
그 속도를 보니, 지금까지 세운을 위해 어지간히도 배려하고 있었던 듯하다.
하지만, 물거품을 일으킨 건 세운 역시 마찬가지였다.
촤앗!
머메이드의 아가미와 머맨의 지느러미. 두 개의 보물을 사용한 세운은 이미 어인 그 자체였다.
탐욕의 권능은 단순히 외적인 변화만을 일으키는 게 아니라, 해당 보물이 가진 본연의 힘. 즉, 숙련도까지 올려주니 말이다.
물론 그 사용법이 몸에 익을 때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는 게 정상이지만, 지금까지 다양한 보물을 사용해 온 세운은 이미 보물의 적응에 익숙해졌고.
아가미와 지느러미. 두 개의 보물에 적응할 시간은 충분했다.
'정말 따라오고 있어...?'
샥스가 자신의 뒤를 바짝 따라오고 있는 세운을 뒤돌아보며 화들짝 놀랐다.
그도 그럴 게, 그는 어인들의 수장이다.
상어 형태인 어인 특유의 뛰어난 속도에, 길고 긴 시간 동안 노력해 온 실력. 거기에 마신의 사도가 되며 얻은 능력치까지.
장담하건대, 이 바다의 그 어떤 생물도 자신을 추월하기는 힘들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분명, 배려 따위는 집어치우고 최고의 속도로 헤엄치고 있음에도 세운은 그의 뒤를 딱 붙어 따라오고 있었다.
그러자.
'...질 수는 없지.'
샥스의 눈에서 경쟁심이 깃들었다.
상대는 인간. 자신은 어인.
다른 것도 아니고, 바다에서의 헤엄 실력으로 질 수는 없었다.
촤아앗!
샥스가 지느러미를 날카롭게 세우고 더욱 속도를 냈다.
단순히 육체적인 헤엄이 아니라, 마나를 이용하여 물의 저항을 낮추고 다리에 힘을 붙인다.
자세를 다잡은 그의 모습은, 어인이 아니라 온전한 한 마리의 상어를 보는 듯했다.
다만.
'이것까지 따라오다니?'
세운은 그런 샥스와 거리를 벌려주지 않았다.
튜토리얼의 다섯 번째 장에서 씨 드레이크 다라칸을 죽이고 얻은 장신구, '바다의 분노'.
거기에 붙은 옵션 중 하나인 '물속에서의 제약이 대폭 사라진다' 덕분이었다.
이에 초조함을 느끼던 샥스가 전방을 바라보고는, 정신을 차렸다.
"이 앞은 암초 구역입니다. 속도를 줄이셔야 할 겁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샥스는 속도를 전혀 줄이지 않았다. 지느러미를 미묘하게 움직이며, 몸의 방향을 급속도로 바꾸었다.
암초에 부딪힐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속도를 유지하다 보니 어느새 그의 시야에서 세운이 사라져 있었다.
'내가 너무 흥분했나.'
그제야 정신을 차린 샥스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리 빠르다고 해도, 상대는 어디까지나 인간. 암초 구역에서의 빠른 헤엄은 어인들 사이에서도 까다로운 영역이었다.
승리욕에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면, 어딘가 부상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암초 구역이 끝나면, 조금 기다려 드려야겠군.'
그렇게 생각하며 암초 구역을 빠져나온 순간, 샥스의 눈앞에 보인 것은....
"무사해서 다행이네, 이쪽 맞지?"
먼저 암초 구역을 빠져나와 샥스를 기다리고 있는 세운이었다.
길을 모르고 있으니, 먼저 암초 구역을 빠져나와도 앞서가지 못하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맞습니다."
촤아앗!
샥스가 입술을 질끈 깨물고 지느러미에 힘을 주었다.
일직선 헤엄에서부터, 암초 구역의 헤엄까지. 그 어느 것도 이기지 못했다.
이대로라면 어인으로서의 자긍심이 깨져 나갈 것만 같았다.
'마지막 구역에서 압도한다!'
어인들이 머무르고 있는 성소에 도착하기 전에는 레비아탄의 질투의 권능으로 이루어진 소용돌이를 지나가야만 한다.
해류가 뒤틀려 있어 헤엄치기가 어려운 것은 물론, 길을 잘못 찾으면 그대로 소용돌이에 빨려들어 가 버린다.
솔직히, 그곳에서는 헤엄이 문제가 아니었다.
조금 비겁한 감이 없지는 않았지만, 이대로 어인으로서의 자긍심이 깨지는 것보다는 나았다.
"잘 따라오시길 바랍니다!"
"저기만 지나면 되는 거지?"
"그렇습니다! 제 뒤만 따라오시면 문제는...."
샥스가 대답을 하고 있었지만, 세운은 그것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드득.
드드득!
몸에서 리자드맨의 비늘을 일으키더니, 등 뒤에 달려 있던 창을 앞으로 내세우며.
촤아아앗!
"무, 무슨 짓을!"
불나방이 횃불을 향해 날아드는 것처럼, 소용돌이를 향해 빠르게 쏘아져 나갔다.
제 76화
76. 제76화
샥스와 바다를 가르며 성소를 향해 나아가던 중. 세운은 지느러미를 바짝 세우고 마나를 일으키는 샥스를 보며 눈치챌 수 있었다.
'이 자식, 승부욕 돋았나 본데.'
속도를 내라고는 했지만, 딱 보아도 자신이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도를 내고 있는 듯하다.
다른 이었으면 천천히 가자며 말을 바꿨겠지만, 세운은 달랐다.
'재밌겠는데?'
천천히 바다 구경이라도 해야 하나 싶었는데. 경주라면, 성소에 도착할 때까지 제법 재밌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목에 걸린 장신구, 바다의 분노 덕분에 물속임에도 제약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게 빠르게 나아가다 보니, 암초 구역에서 마침내 샥스를 제칠 수 있었다.
"무사해서 다행이네, 이쪽 맞지?"
"...맞습니다."
자신이 졌다는 사실 때문일까? 차가운 바닷물 속에서, 샥스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 모습에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세운이 전방을 바라보았다.
솨아아아!
마치, 결계처럼 전방을 완벽하게 가로막고 있는 수십 갈래의 소용돌이.
그 주변의 해류는 다가오면 무엇이든 찢어 버리겠다는 듯이 거칠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 정도의 해류라면, 주변에 영향을 줄 법도 한데. 소용돌이를 조금만 벗어나면, 해류가 거짓말처럼 평온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 말은 즉.
'이 안이 목적지인가 보네.'
이 소용돌이가 레비아탄의 성소를 지키고 있다는 뜻이다.
"잘 따라오시길 바랍니다!"
"저기만 지나면 되는 거지?"
"그렇습니다! 제 뒤만 문제는 따라오시면...."
드득!
드드득!
세운은 샥스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소용돌이 속에서 몸을 보호하기 위해, '리자드맨의 비늘'을 일으켜 몸을 보호하였다.
물의 저항력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창을 앞으로 내세웠다.
촤아아앗!
세운의 몸이 소용돌이를 향해 쏘아졌다.
뒤에서 샥스의 당황스러운 외침이 들려오는 것 같았지만, 한 귀로 대충 흘려보냈다.
'기왕 시작한 거, 내가 이겨야지.'
승부욕은 샥스만 있는 게 아니었다.
세운은 암초 구역을 먼저 빠져나온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성소에 먼저 도착할 생각이었다.
콰아아아!
소용돌이 주변의 거친 해류가 갑옷을 때려온다. 그걸로도 모자라, 연약한 살점을 파내기 위해 갑옷 안의 속살까지 파고든다.
리자드맨의 비늘이 아니었으면, 소용돌이에 진입하기도 전에 살점이 떨어져 나갈 뻔했다.
푹!
거친 해류를 순식간에 통과한 직후, 창끝을 선두로 소용돌이 속으로 파고들었다.
눈을 뜨기 힘들 정도로 강력한 소용돌이에, 세운은 눈을 감은 채로 감에 방향을 맡긴 채 다리를 내저었다.
들어온 가속도가 있었기에, 소용돌이쯤이야 가뿐히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세운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경우의 수가 하나 있었다.
-질투의 권능이 사방에서 출렁입니다.
-질투의 권능으로 인해 순간적으로 근력이 5 감소합니다.
-민첩이 5 감소합니다.
-체력이 4 감소합니다.
-지혜가 4 감소합니다.
…
'질투의 권능?'
이 소용돌이. 그저 외부인을 막아주는 결계라고만 생각했는데, 레비아탄의 권능이 담겨 있었다.
질투의 권능이 어떤 힘을 가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근력이 3 감소합니다.
-민첩이 3 감소합니다.
…
중요한 점은, 지금 이 순간에도 능력치가 빠르게 감소하고 있다는 점이다.
단순히 눈에 보이는 시스템만 그런 게 아니라, 실제로 창을 쥐고 있는 손에서 힘이 점점 빠져나가고 있었다. 빠르게 나아가던 몸도 확실히 느려졌고.
비늘이 소용돌이의 거친 물결을 견디지 못하고 떨어져 나갔으며, 서클의 마나가 불안하게 일렁였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생각해 보니 이대로 당신이 죽으면 뒤랑달의 소유권은 자신의 것이 아니냐며 흥미롭게 상황을 지켜봅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남은 알을 아쉬운 듯이 천천히 깊고 감미롭게 음미합니다.
상황을 보아하니 두 마신에게 도움을 받는 건 무리였다.
이대로 모든 능력치가 내려가 힘이 빠지기 전에 소용돌이를 빠져나가야만 했다.
'그렇지만, 어떻게?'
이미 가속도는 완전히 사라졌다. 힘을 내려고 해도, 벌써 1/3 이상 내려간 능력치로는 속도를 내기가 어려웠다.
마법을 사용하려 하여도, 지혜가 떨어지며 제어력이 떨어진 서클로는 마법의 발현 자체가 어려웠다.
그렇다면.
'권능을 사용할 수밖에.'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황천의 뱀, 역천신모 ]
- 남송의 명장 악비가 사용했던 창. 악비가 물리친 역천동의 뱀 요괴가 창의 모습으로 둔갑한 형태라고 한다.
능력치가 낮아진 지금. 권능을 발현한다고 하여도 신체적, 마법적인 힘을 사용하기는 어려웠다.
그 때문에 선택한 것이 바로 이것. 무기에 '자아'를 심어주는 것이다.
꿈틀!
역천신모의 힘이 깃든 창대에서 매끈한 비늘이 느껴졌다.
단단하고 얇았던 창이 흐물거리며 크기를 불려 나갔고, 창끝은 날카로운 두 개의 송곳니가 되었다.
뱀.
악비가 물리쳤던 역천동의 뱀 요괴가 본연의 모습으로 변한 것이다.
"이곳에서 빠져나가!"
"샤아아-!"
세운의 명령을 알아들은 요괴가 몸을 앞으로 내뻗었다.
물뱀이 헤엄치듯이 몸을 양옆으로 구불거리니, 거친 소용돌이 속에서도 착실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세운은 그런 녀석에게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비늘을 힘껏 붙잡았다.
근력 수치가 1/2 이하로 내려가 손이 덜덜 떨려왔지만, 비늘을 놓치는 순간, 소용돌이에 잡아먹혀 갈가리 찢겨나갈 게 분명했기에 없는 힘도 쥐어짜 냈다.
슈르륵!
그러나, 애석하게도 부족한 근력은 정신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고 말았다.
-근력이 3 감소합니다.
-근력이 2 감소합니다.
…
이미 세운의 근력은 1/5 이하로 떨어진 상태.
거친 소용돌이 속에서 미끄러운 비늘을 붙잡고 있기에는 너무나도 약해졌고.
'젠장, 이제 다 와 가는데....'
하얗게 물거품을 일으키고 있는 소용돌이의 끝자락을 바라보며, 비늘을 놓칠 수밖에 없었다.
재빠르게 다음 수를 생각하던 중.
콱!
창끝처럼 날카로운 독니가 세운을 덮쳤다.
어미 짐승이 새끼를 물 듯이, 상처 나지 않게 조심히.
"샤아-"
역천신모.
뱀으로 변한 창이 세운이 떨어진 것을 깨닫고 급히 고개를 돌려 주인을 문 것이다.
그러고는, 급하게 머리를 돌려 소용돌이의 바깥으로 몸을 던졌다.
콰아앗!
거친 소용돌이가 뱀의 비늘을 마구잡이로 쥐어뜯고, 가죽을 찢어발겼다. 그런데도 녀석은 세운을 문 입을 끝까지 열지 않았다.
이걸 단순히 '무기'라고 볼 수 있을까?
소용돌이는 녀석의 비늘과 가죽에서 그치지 않고, 근육을 넘보기 시작했고, 녀석의 근육이 찢어지며 어쩔 수 없이 입이 벌어지는 순간.
솨앗.
거짓말처럼 소용돌이가 잠잠해졌다.
아니, 소용돌이가 잠잠해진 게 아니었다. 그 거친 소용돌이를 모두 통과한 것이다.
"...고맙다."
"샤아-"
세운이 만신창이가 되어 버린 녀석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단순히 역천신모라는 보물에 깃든 요괴일 뿐인데, 자신의 목숨을 걸고 주인을 보호해 주다니.
보물들을 단순히 '도구'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쩌면, 그 속에도 무언가의 의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천신모는 세운의 손길을 느끼며 혓바닥을 길게 날름거리더니, 창이었던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그마저도, 창으로 돌아오는 즉시 내구력이 바닥나며 거품으로 변해 사라져 갔다.
-질투의 권능으로부터 빠져나왔습니다.
-순간적으로 감소하였던 능력치가 빠르게 회복됩니다.
다행히도 질투의 권능으로 인한 능력치의 감소는 일시적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운의 모든 능력치가 회복되었고, 주먹을 쥐며 돌아온 능력치를 느낄 수 있었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멀쩡한 당신의 모습에 아쉬워합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이곳에는 먹을 게 없어 보인다며 아쉬워합니다.
그리고 고개를 들자.
"여기가 레비아탄의 성소인가."
마침내 목적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세운이 알고 있는 신전의 형태와는 전혀 다르게 생긴 성소.
거대한 몬스터의 해골이 입을 벌린 채 바닥에 반쯤 묻혀 있었다.
아마, 저 안이 샥스가 말한 성소겠지.
그의 앞에는 여성형으로 보이는 어인들이 눈을 크게 뜨며 세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간...?"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아가미나 지느러미가 나 있는데. 누구지?"
"그것보다, 저분 방금 소용돌이를 뚫고 나오지 않으셨나요?"
"소용돌이는 샥스 님도 뚫을 수 없을 텐데, 대체 어떻게...."
갑작스러운 외지인의 등장에 다들 당황하는 중이었다.
애초에 전투가 가능한 어인들은 대부분 산란장에 남아 현장을 복구하고 있었으니, 이곳의 어인들은 전투가 불가능한 이들.
남성형 어인들도 크기가 작거나 형태부터가 전투가 어려워 보였다. 그중에는 어린아이의 모습도 꽤 많이 있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망설이던 중....
저 멀리에서, 상어의 지느러미를 한 어인 하나가 빠르게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빨리 왔네?"
"갑자기 무슨 짓입니까! 질투의 권능이 깃든 소용돌이를 뚫고 들어가시다니!"
"생각보다 위험하더라고. 미리 말 좀 해 주지."
"그러니까 저만 따라오라고 했잖습니까! 아니, 그것보다 대체 어떻게 소용돌이를 뚫고 나오신 겁니까?"
샥스. 어찌나 급하게 도착했는지 목 양옆의 아가미로 숨을 가쁘게 내쉬고 있었다.
"권능을 사용했지. 질투의 권능이라고 해도, 나한테는 다른 마신의 권능이 두 개나 있으니까."
"...그렇군요. 무의식적으로 그대를 얕보았던 제가 후회스러울 지경입니다."
"그럼, 내가 이긴 거지?"
"제가 졌습니다. 분명 두 마신님의 계약자에 어울리는 힘이었습니다. 당신이라면, 분명 믿어도 되겠지요."
권능까지 사용하여 소용돌이를 지나쳤으니 레비아탄이 세운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세운의 앞에는 레비아탄의 메시지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샥스를 통해 금방 알 수 있었다.
"성소에 들어가면 성좌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을 겁니다. 탑 바깥으로 밀려난 탓에, 시스템의 간섭 범위가 한정적이거든요."
"그런 거였구나."
"피곤하시면 조금 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인간의 입맛은 잘 모르지만, 저희 요리는 탑에 있던 시절에도 진미로 뽑힐 정도였습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진미라는 단어에 반응하여 즉시 식기를 붙잡습니다.
"아니."
질투의 권능으로 내려간 능력치는 모두 돌아왔기에, 굳이 쉴 필요는 없었다.
얼른 레비아탄과 계약을 나눈 후에, 지상으로 올라가 튜토리얼을 마치고 탑에 들어가야만 했다.
튜토리얼이 끝났음에도 탑에 진입하지 않는 플레이어에게 탑의 시스템이, 그런 플레이어에게 어떤 처분을 내릴지 모르니까.
얼른 일을 해결하고 최대한 빨리 지상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바로 가지."
"후우.... 알겠습니다. 따라오시지요."
잠시 숨을 고른 샥스가 자세를 바로잡으며, 레비아탄의 성소를 향해 걸어 나갔다.
제 77화
77. 제77화
"그나저나, 어째서 이곳을 성소로 만든 거야?"
"혹시, 흑경(黑鯨)이라는 몬스터를 아십니까?"
"아니. 백경은 들어봤어도, 흑경은 처음 듣는데."
백경.
고래의 모습을 한 몬스터로, 그 크기만 해도 배 한두 척은 가볍게 집어삼킬 정도로 크다. 모든 것을 파괴할 뿐, 정복하지 않는 바다의 폭군이라 불리는 놈이다.
"그와 비슷한 몬스터였습니다. 아니, 포악한 심성이나 덩치는 백경보다 더할 정도였지요."
"그런 몬스터가 탑의 바깥에 있었다고?"
"탑의 바깥은 철저한 암흑지대였습니다. 시스템의 관리 바깥에서, 오로지 약육강식으로 흘러가는 지옥 같은 곳이었죠."
"그런 놈을 어떻게 잡은 거지?"
"성좌께서 직접 놈을 상대해 주셨습니다. 덕분에 흑경의 영역에서 저희가 머물 수 있게 되었고, 감사의 뜻을 담아 흑경의 시체를 그분의 성소로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된 거였나."
레비아탄.
마신이라는 지칭과 달리, 생각보다 착한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심해의 여왕에게 고통받던 어인들을 위해 여왕을 죽이고, 함께 탑에서 쫓겨난 것은 물론 직접 흑경을 사냥하고 살 곳을 정해 주었으니 말이다.
"샥스 님, 일찍 돌아오셨군요!"
"다른 어인들은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 같은데, 혹시 문제라도 생긴 겁니까?"
"그리고 그 인간은...."
성소의 입구에 도착하자 두 명의 어인이 창으로 바닥을 찧으며 샥스를 맞이하였다.
아무래도 성소를 지킬 최소 인원만은 남겨둔 듯했다.
"성좌님을 뵈러 온 손님이다."
"서, 성좌님을!"
"하지만... 괜찮겠습니까? 인간입니다! 샥스 님도 탑에 들어온 인간들이 한 짓들을 알지 않습니까?"
"알고 있다. 다만, 이건 성좌님을 위한 선택이다. 비키도록."
"...알겠습니다."
"샥스 님의 결정이라면, 이유가 있는 것이겠지요."
두 경비가 좌우로 한 발짝 물러나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질투의 성소. 즉, 죽은 흑경의 아가리에 들어오니 거짓말처럼 빛이 완전히 사라졌다.
"흑경은 빛을 삼키는 특성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죽어서도 마찬가지죠. 불안하시면 저를 잡고 따라오시면 됩니다."
"괜찮아."
밤 올빼미의 눈이 활성화되며, 성소 내부의 극히 드문 빛이 세운의 눈에 모여들었다.
샥스가 말한 흑경의 특성 때문인지 그마저도 무척이나 미약했지만, 바닥과 벽면의 희미한 윤곽선을 보일 정도는 되었다.
"...정말 대단하군요. 두 마신님께 선택을 받은 거로도 모자라, 권능을 이리도 잘 다스리시다니 말입니다."
"권능은 너도 사용할 수 있지 않아?"
"그렇긴 하지만 제가 다룰 수 있는 수준은 극히 미약합니다. 과하게 사용하면 되레 제가 질투의 권능에 당하게 되지요."
"하긴, 하급 신들의 권능과는 차원이 다르니까."
성좌의 권능이 가진 힘은 엄청나다. 사도로 임명된다고 하더라도, 권능을 제대로 다루기까지는 엄청나게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게 보통이니까.
그마저도 상급 신의 권능은 플레이어의 몸으로서 온전히 발휘하기가 불가능한 수준이다.
그에 비하면, 세운은 어떤가?
탐욕의 권능과 폭식의 권능. 두 권능을 자유자재로 다루고 있었다.
'뭐, 이건 살짝 다른 이유지만.'
세운이 사용하는 탐욕의 권능은 회귀 전의 세상에 남아 있던 주인을 잃은 권능이었다.
그 덕분에,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폭식의 권능은....
-성좌, '배고픈 왕자'가 흑경의 뼈를 푹 고아 먹으면 무슨 맛이 날지 궁금해합니다.
...어디까지나, 세운이 베엘제붑을 잘 대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마저도 그 힘을 백 퍼센트 완벽하게 다루고 있지는 못하지만 말이다.
"그럼, 이 안에 레비아탄의 본체가 있는 건가?"
"아닙니다. 그분의 크기는 대양을 모두 감쌀 정도로 거대한 탓에, 바다의 가장 깊은 곳에서 쉬고 계십니다."
"그 정도야? 그래도 성좌라면 신체의 크기를 줄이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을 텐데."
"크기를 줄이고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지속해서 힘의 소모가 요구되지요. 그분은 탑에서 나오며 많은 힘을 잃어버린 탓에, 본래의 모습으로 심해에 잠들어 계십니다."
레비아탄. 질투의 마신이자, 파멸의 뱀이라고도 불리는 성좌.
문헌에서 보기로, 그 크기는 가히 탑의 외곽을 한 바퀴 둘러 감을 정도로 거대하다고 하였다.
조금 과한 기록이 아닌가 싶었는데, 샥스의 표현대로라면 오히려 문헌에 적힌 내용이 과소평가였던 듯하다.
"그런가. 그럼 지금 가고 있는 곳은?"
"흑경의 심장입니다. 그분과 소통이 허락된 유일한 장소이죠."
"직접 찾아가는 건?"
"그분이 머무는 심해는 저희 어인들도 견디지 못할 정도로 깊은 곳입니다. 그분을 뵙기도 전에 수압으로 몸이 뭉개질 것입니다."
"...그 정도인가."
과연, 칠대 마신 중 하나. 탑에서 쫓겨나 힘 대부분을 잃었다고는 해도 성좌로서 가진 격은 어디 안 가나 보다.
그렇게 샥스와 대화를 나누며 한참을 걸었다.
이동할수록 미묘한 빛마저 사라져, 희미하던 윤곽선이 더욱 희미해졌다.
밖에서 바라본 것만큼, 흑경 내부의 크기는 어마어마했다.
극도로 희미하던 윤곽선마저 사라져 가, 샥스가 어떻게 길을 안내하는 중인지 의아한 마음이 들 때쯤.
"저곳입니다."
두근, 두근-
저 멀리, 어두운 곳에서 희미한 생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결코 들려서는 안 될 소리인 '심장 소리'가 들려오고, 가까이 다가갈수록 짙은 푸른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저게...."
"흑경의 심장. 성좌께서 살려두신, 흑경의 잔재입니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눈을 반짝입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싱싱한 고래의 염통에 침을 꿀꺽 삼킵니다.
그것은 단순한 심장의 모양이 아니었다. 마몬이 탐내는 이유를 알 만할 정도의 보물.
레비아탄의 힘이 깃들어 있으니, 어엿한 성물(聖物)이라고 할 수 있었다.
빛을 삼키는 흑경의 뼈조차도 심장에서 흘러나오는 푸른 빛만큼은 삼키지 못했다.
심장의 앞에 도달한 순간, 푸른 빛이 주위를 가득 삼키며, 마치 이곳이 흑경의 몸속이 아닌 어딘가 다른 공간인 것 같은 착각을 일게 하였다.
두근, 두근-
사람 머리만 한 크기의 심장.
본래 흑경의 크기를 생각하자면 말도 안 되게 작은 크기지만, 아마 레비아탄의 힘이 깃들어 성물화가 되며 크기가 줄어든 듯했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힘만은 조금도 작지 않았다. 오히려, 본래 흑경의 심장조차도 지금의 심장이 가진 힘을 따라오지 못할 것 같았다.
"아름답지 않습니까?"
"...그렇네."
아름답다. 딱 올바른 표현이었다.
본래라면 마몬이나 베엘제붑이 자신에게 성물을 바치라며 메시지라도 보내올 타이밍이었지만, 둘 다 이것이 레비아탄의 성물이라는 걸 알았기에, 탐을 낼 뿐 섣불리 무언가를 말하지는 않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심장의 위로 손을 올리면 됩니다."
두근, 두근!
샥스의 말에 따라 심장에 손을 올리자, 그 뜀박질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손을 올린 것뿐인데, 심장과 손이 연결되어 몸에 무언가가 흘러들어오는 기분이었다.
"다만, 최근 심장의 빛이 많이 줄어든 상태라 연락이 닿을지는...."
샥스가 불안함에 말을 이어갔지만, 세운에게 더 이상 샥스의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심장에서 타고 들어오는 푸른 기운. 그 기운이 말해 주고 있었다.
질투의 마신, 레비아탄의 존재를.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운의 뇌리에 장엄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의 권능을 뚫고 들어오다니. 제법 쓸 만한 인간이구나.
귀를 통해 들려오는 게 아니다. 목소리가 날카로운 무언가로 변해 측두엽을 쿡쿡 찔러오는 기분이다.
"큭...."
감당키 어려운 두통이 몰려왔다.
찔러 들어오는 두통만큼이나 날카로운 여인의 목소리.
처음 듣는 것이지만, 알 수 있었다. 이게 바로 질투의 마신, 레비아탄의 목소리라는 것을 말이다.
'견뎌야 한다.'
실체를 마주하는 것도 아니고, 힘을 잃은 성좌의 목소리를 듣는 것뿐인데도 이 정도의 타격이라니.
그야말로 '격의 차이'를 알게 해 주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앞으로의 계획을 이어가기 위해서라도, 레비아탄을 포섭하는 것은 꼭 필요한 수였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세운이 자세를 다잡는 순간.
화아앗!
세운의 오른손등에서 감갈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사티로스의 성흔(봉인)이 신의 격(格)에 반응합니다.
-성흔에 봉인되어 있던 성좌의 격이 일부 깨어나 외부의 격에 저항합니다.
-호오?
사티로스의 성흔.
능력 대부분이 봉인되어 있었기에 그 힘을 끌어내려면 최소한 탑의 중층 이상은 올라야 가능할 줄 알았는데, 성흔의 봉인이 생각보다 훨씬 일찍 깨어났다.
성흔에서 흘러나온 검갈빛이 세운의 몸을 감싸자, 심장에서 흘러나오던 푸른빛이 조금 약해지며 두통이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이제 고작해야 튜토리얼의 플레이어일 텐데, 성흔을 가지고 있다니. 과연, 그 까마귀와 돼지가 관심을 가진 이유가 있었구나.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뱀의 막말에 미간을 찌푸립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돼지가 어디 있냐며, 자신에게도 나눠주라며 침을 흘립니다.
레비아탄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음에도, 더 이상 두통은 생기지 않았다. 다만, 성흔을 통해 마나와 내공이 빠르게 빠져나가고 있었다.
이대로 견딜 수 있는 시간은 기껏해야 십분 안팎.
그 안에, 레비아탄과의 대화를 마쳐야만 했다.
"튜토리얼의 플레이어, 정세운이라고 합니다."
-나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을 테니, 소개는 필요 없겠지.
"네."
-그럼 말해 보아라, 굳이 무모한 도전까지 해 가며 나를 찾아온 이유가 무엇이지?
사설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어쩌면, 레비아탄도 세운과 마찬가지로 이렇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을 수도 있었다.
샥스의 말에 따르면, 레비아탄이 탑에서 쫓겨나며 힘이 약해질 대로 약해졌다고 했으니까.
그렇다고 해도, 성좌라는 이름답게 흑경을 가볍게 죽일 정도로 강한 존재지만 말이다.
"질투의 마신님께 협력을 요청하기 위해 왔습니다."
-협력이라. 그 말은, 나의 사도가 되겠다는 말인가?
"비슷합니다. 탑을 오르기 위해, 마신님의 권능을 얻고 싶습니다."
-비슷하다니, 건방지기 짝이 없구나. 저 두 멍청이는 제대로 된 계약도 없이 네놈에게 권능을 내려준 것 같지만, 나는 그렇게 멍청하지 않거든.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당장에라도 쪼아버릴 듯이 뱀을 노려봅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저 인간이 요리를 워낙 잘하는 탓에 어쩔 수 없었다며 변명합니다.
과연, 예상했던 반응이다.
솔직히, 정상적인 반응이다. 첫 만남에서 사도로서의 계약도 아닌, 그저 권능만 빌려달라니, 어이가 없을 정도로 당돌한 제안이었으니까.
아마 세운에게 두 마신이 붙어 있지 않았다면,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당장에라도 격을 끌어 올려 세운의 정신을 박살 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이미 예상한 상황이었다.
"대신."
세운이 아공간 주머니로부터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심해의 보석. 다른 말로, 레비아탄의 보주를 꺼내 들자 머릿속을 파고들던 레비아탄의 목소리에서 흔들림이 느껴졌다.
"마신님과 어인들을, 탑으로 돌려놓겠습니다."
"...!"
보주를 얻자마자 세운이 가장 먼저 떠올린 제안.
그 제안에, 샥스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대답이 들리지 않는 거로 보아 레비아탄 역시 마찬가지의 반응인 듯했다.
제 78화
78. 제78화
-...어디서 구한 거지?
침묵을 깨고 말문을 튼 건 질투의 마신, 레비아탄이었다.
아마 머릿속이 복잡할 것이다.
튜토리얼의 플레이어인 세운이 보주를 구할 길이라고 해 봤자, 이 심해와 튜토리얼 구역뿐이었으니까.
상황을 보아하니 에스트롯샤가 보주를 숨기고 있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던 것 같고 말이다.
"산란장의 밀실에서 얻었습니다."
-산란장이라. 분명 40층에 떨어트리고 온 줄 알았는데, 에스트롯샤, 그X이 숨기고 있었나 보구나.
"그, 그럴 리가! 산란장은 저희가 철저하게 탐색을 마쳤습니다!"
"침으로 몇 번 찔러주니 금방 불더라고. 뭐, 끝까지 보주가 숨겨진 방은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럼 제가 들어갔을 때 여왕의 몸에 나 있던 상처가...?"
"응. 내가 그런 거야."
"죄, 죄송합니다! 그런 것도 알아채지 못하다니! 감히 성좌님을 뵐 면목이 없습니다!"
-아이야. 그러지 말아라. 네가 성실한 아이라는 것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으니.
"...감사합니다."
샥스가 흑경의 심장 앞에서 머리를 조아렸다.
과연, 어인에 대한 레비아탄의 사랑은 세운의 상상 이상인 듯했다. 하긴, 그러니까 탑에서 나올 각오까지 하고 40층에 강림했던 것이겠지.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말하는 투를 보아하니, 내 보주의 사용법을 알고 있는가 보구나.
"이것으로 마신님의 신전을 세울 수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죠."
-튜토리얼의 플레이어가 알 만한 정보는 아닐 텐데. 그런 사실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이유는 별로 안 중요하지 않나요?"
"세운 님, 아무리 그래도 성좌님 앞에서 그런 태도는...!"
-괜찮다. 나의 아이여.
"...알겠습니다."
-상층의 플레이어도 나의 앞에서는 고개조차 못 들게 마련이거늘. 의지가 대단하구나.
그녀가 세운의 성흔이 아닌 의지를 칭찬한 이유는 간단했다. 시간이 흐르며, 어느덧 성흔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조금씩 희미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심장에서 전해져 오는 기세가 더욱 강렬하게 느껴졌고, 표정과 목소리를 유지한다고 해도, 다리는 본능에 못 이겨 조금씩 떨려오고 있었다.
-하긴. 저 돼지는 그렇다 쳐도, 깐깐한 까마귀 녀석이 자신의 권능을 내줄 정도면 평범한 플레이어는 아니라는 소리겠지.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뒤랑달을 뒤로 감추며 헛기침을 내뱉습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지루한 얘기에 꾸벅꾸벅 졸다가 돼지라는 말에 반응하여 침을 흘리며 일어납니다.
혹시 여기서 자세한 설명이라도 요구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레비아탄은 사소한 문제처럼 그것을 넘어갔다.
이제 슬슬 마무리를 지을 시간.
세운이 그녀에게 확실한 대답을 들으려 말을 내뱉으려던 중. 그보다 먼저, 그녀의 목소리가 뇌리에 박혀 들어왔다.
-알겠다.
생각보다 빠른 대답.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 온갖 선택지를 구상했던 것들이 민망해질 정도였다.
'하긴, 보주를 획득한 게 컸지.'
세운은 자신의 손에 들린 보주를 바라보았다.
에스트롯샤가 숨겨둔 심해의 보주.
산란장에서 이것을 얻지 않았다면, 제아무리 많은 선택지를 구상해 둔다고 하여도 아무런 의미도 없었을지 모른다.
그만큼이나, 이번 거래에서 보주의 역할은 매우 컸다.
-단, 조건이 있다.
"신전의 재건과 별개의 조건입니까?"
-그래. 네놈이라면, '루시퍼'의 존재도 알고 있겠지.
찌잉!
'큭....'
레비아탄이 그 이름을 입에 올리는 순간, 대뇌에 루시퍼라는 세글자가 인두에 지져지는 듯이 뜨겁게 새겨졌다.
사티로스의 성흔이 힘을 다한 것일까?
아니다.
그것과는 별개로, 레비아탄이 느끼는 루시퍼에 대한 감정의 크기가 워낙 거대했던 탓이리라.
"...알고 있습니다."
-저런, 나도 모르게 감정이 조금 격해졌나 보구나.
오만의 마신, 루시퍼.
마계에서 최고의 군세를 가지고 있다는 사탄과는 별개로, 개개인의 힘만은 칠대 마신 중 최고라 알려진 성좌.
세운이 이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이유는 비단 문헌으로 보았던 기록 때문만은 아니다.
'흑익(黑翼).'
탑에 존재하는 수많은 길드 중에서도 랭킹권에 들 정도로 거대한 힘을 가진 길드의 이름이다.
놈들이 따르는 성좌가 바로 루시퍼.
즉, 루시퍼는 칠대 마신 중에서 유일하게 플레이어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탑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마신이다.
그런 만큼, 회귀 전에 세운 역시 흑익 길드와 부딪히는 일이 있었다.
놈들을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쓰레기들이었지.'
흔히 말하는 '악당'이었다.
오만을 담당하는 루시퍼의 권능에 힘입어, 다른 플레이어들을 깔보는 자들이 모인 곳.
던전을 독점하거나, 자신들의 이념에 거부하는 플레이어를 척살하는 등, 소설에나 나올 법한 쓰레기들이었다.
선신과 악신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고 느끼는 세운이라도, 루시퍼만은 철저하게 '악한 신'으로 생각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런 루시퍼의 이름이 레비아탄의 입에서 나올 줄이야.
곧이어 그녀가 내뱉은 '조건'은.
-놈의 군세를 무너트려 주어라.
"군세라면, 길드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는 그런 이름으로 불렸지.
흑익 길드를 부수라는 것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같은 칠대 마신인데, 어째서 저런 부탁을 하는 것일까?
궁금증이 생겨났지만, 물어볼 시간은 없었다.
사티로스의 성흔에서 흘러나오던 빛이 극도로 희미해지며,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더 날카롭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군더더기가 없어 마음에 드는 대답이구나.
'마신의 길드를 무너트려 달라.'
흑익 길드는 이미 탑에 자리 잡고 있는 랭킹권의 길드다.
그런 길드를 무너트리라는 조건을, 고작 튜토리얼의 플레이어에게 내건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세운은 그리 나쁘게 보지 않았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다.'
애초에 세운이 탑을 오르며 해야 했던 계획 중에는, 흑익 길드와 부딪혀야 할 일도 있었으니까.
악의 진형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루시퍼 역시 만나야 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럼, 탑에 들어가자마자 보주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힘을 나누어 줘야겠지.
화아앗!
두근, 두근!
흑경의 심장 박동수가 빨라졌다.
그 안에서 진푸른 빛이 혈액처럼 끈적하게 흘러나오더니, 이내 세운의 왼쪽 가슴에 닿아 서서히 흡수되었다.
사티로스의 성흔이 새겨졌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충격.
이게 바로 마신의 힘.
질투의 권능이 세운의 심장에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질투의 마신, 레비아탄에게 인정받았습니다.
-'심해의 보석'에 레비아탄의 의지가 이어집니다.
-'심해의 보석'을 통해 플레이어의 상황이 레비아탄에게 전달되며, 메시지를 전달받을 수 있습니다.
-'심해의 보석'을 통해 '질투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질투의 권능.
이로써 세운은 칠대 마신 중 세 마신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조금 전까지 후들거리던 다리가 멈추고, 몸에서 미지의 힘이 넘쳐났다. 질투의 권능을 받으며 격이 상승해, 더 이상 그녀의 목소리에 떨지 않아도 되었다.
-오랜만에 힘을 사용했더니 조금 피곤하구나. 나의 아이야.
"네, 성좌님."
-슬슬 관리소의 놈들이 움직일 때가 되었으니, 저 인간을 얼른 지상으로 안내해 주어라.
"위대한 마신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리고, 인간아.
"네."
-부디... 우리 아이들을, 꼭 푸른 바다로 안내해 주거라.
"...알겠습니다."
스르륵-
흑경의 심장에서 흘러나오던 푸른빛이 점차 사그라들었다. 거친 심장 박동도 조금씩 멎어가더니, 이내 잠이라도 든 것처럼 조용해졌다.
"지상까지는, 제가 모시겠습니다."
"부탁할게."
이로써, 튜토리얼에서의 마지막 목표가 끝이 났다.
* * *
"젠장! 왜 아직도 안 나오는 거야! 뭐 알아낸 거 없어?"
"해안선을 전부 모니터링하고 있지만, 아직 안 보입니다!"
"탑의 입구에도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이놈은 마지막 장까지 잘 끝내놓고, 갑자기 왜 바닷속으로 뛰어든 거야?"
세운이 레비아탄을 만나기 위해 바다로 뛰어든 이후, 튜토리얼 관리소는 한바탕 난리가 났다.
그도 그럴 게, 현재 세운은 튜토리얼에서 가장 높은 공적치를 세운 랭커였다.
이미 수많은 성좌가 그에게 관심을 가졌는데, 갑자기 바다로 뛰어들다니!
덕분에 튜토리얼의 마무리도 막혀 버렸으니, 관리자들이 당황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바다를 수색하는 건 무리겠지?"
"무리입니다. 애초에, 바닷속은 시스템의 간섭이 제한되어 있잖습니까."
"나도 알지만, 이대로는 튜토리얼을 끝낼 수가 없잖아!"
그들의 업무는 단순히 모니터로 플레이어들을 지켜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튜토리얼이 진행되는 중에는 내부의 다양한 오류를 해결하고, 특이사항을 기록한다.
튜토리얼이 끝난 후에는 일 년 후에 새로운 튜토리얼이 진행될 수 있도록 필드를 재구축한다.
솔직히 튜토리얼이 진행 중일 때보다, 진행된 다음이 더욱 바쁜 게 현실이다.
그런 상황에서 세운이라는 이레귤러 때문에 업무가 모두 멈추게 된 것이다.
그 와중에... 불현듯, 튜닝의 머릿속에 근심이 하나 스쳐 지나갔다.
'설마, 질투의 마신에 대해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
질투의 마신, 레비아탄.
과거 시스템의 제약을 모두 무시하고 탑에 강림하여 난동을 부린 탓에, 그 죗값으로 탑에서 쫓겨난 성좌.
자신의 신도들을 지키기 위해 관리소와 계약하여 탑 바깥의 바다에서 튜토리얼의 다섯 번째 장을 맡고 있는 마신이다.
실제로 세운을 바라보고 있는 두 성좌 역시 마신이기에, 튜닝이 이런 걱정을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럴 리가 없어.'
그러나, 그는 곧 고개를 양쪽으로 저었다.
질투의 마신이 탑 바깥의 바다에 있다는 사실은 극소수의 인원만이 알고 있는 사실. 그런 기밀을, 고작 튜토리얼을 수행 중인 플레이어가 알고 있을 리 없었다.
제아무리 탈 플레이어급 강함을 보여주고 있는 랭킹 1위의 플레이어라 하여도 말이다.
"티, 팀장님. 보고는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젠장...."
사실상, 가장 문제는 이것이었다.
보고.
플레이어들이 튜토리얼을 마치고 탑에 들어갔으니, 탑의 관리소에 플레이어에 대한 정보를 넘겨주어야 한다.
숫자는 몇인지, 그들의 힘은 어떤지, 어떤 성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등.
하지만, 이대로라면 가장 중요한 인물인 세운에 대해서 보고할 수가 없게 된다.
그 책임은 당연히, 튜닝이 져야 할 것이다.
"내가 직접 간다!"
"설마 바다에 들어가시려는 겁니까?"
"그럼 그거 말고 다른 방법이라도 있어?"
"그건 아니지만, 너무 위험합니다! 아무리 팀장님이라고 해도 바다에서는 시스템의 보호를 받지 못합니다."
"알고 있어. 그래 봤자, 여기서 잘리는 거나 바다에서 익사하는 거나 다를 거 있냐?"
"팀장님, 저희 어머니가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했습니다."
"아, 이 새끼가! 사람이 좀 멋있게 가려는데! 아무튼, 내가 직접 간다!"
튜닝이 다급하게 외투를 챙겨입었다.
그야말로 최후의 후.
하지만, 그에게 있어 튜토리얼 관리소 총책임자의 직위는 목숨보다도 중요한 것이었다.
그걸 이렇게 허무하게 잃어버릴 수는 없었다.
"주기적으로 올라올 테니까 특이사항 있으면 전부 보고하고!"
그렇게 팀장이 관리소를 빠져나가기 직전.
"헉, 헉! 팀장님!"
별로 멀지도 않은 거리를 어찌나 힘차게 뛰어왔는지, 숨을 허덕거리며 달려온 부하 직원의 입에서 기다리고 기다리던 보고가 들려왔다.
"오, 올라왔습니다!"
"진짜냐? 어디?"
"저기! 27번 모니터 보십시오! 다라칸이 올라온 곳입니다!"
모니터 안에서는 절벽 위로 올라와 물을 털고 있는 세운의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듯이 평온한 모습으로.
그 모습에....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최고지! 오예!"
튜닝은 저도 모르게 두 팔을 힘껏 올리며 천장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제 79화
79. 제79화
"안내 고마워, 샥스."
"별말씀을. 저희를 위하여 탑을 오르려는 분에게, 이것밖에 해 드릴 게 없다는 사실이 죄송할 뿐입니다."
'어인을 위해서라....'
세운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인들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렇게 오해할 수 있는 사실이다.
실제로 세운이 레비아탄에게 요구한 것은 '질투의 권능'뿐이었으니까. 다른 어떤 보물이나 지원도 요청하지 않았다.
다만, 세운의 입장으로는 신마대전을 준비하기 위한 일 중 하나였기에 행한 일일 뿐. 좋게 말해서, 이해관계가 겹쳤을 뿐이었다.
"돌아가 봐. 여기서부터는 내가 알아서 갈 테니까."
"그럼, 탑 안에서 뵙기를 바라겠습니다."
풍덩!
샥스가 푸른 지느러미를 날카롭게 세우며 바닷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의 모습에서 세운에 대한 경계심은 보이지 않았다.
경계심보다는 오히려, 존경심에 가까운 모습.
레비아탄이 세운을 인정하고 권능을 하사한 뒤로는 그 모습이 더욱 선명해졌다.
"후...하...."
세운이 두 팔을 크게 벌리며 숨을 내쉬어 보았다.
바다를 빠져나오며 목덜미의 아가미는 물론 몸 곳곳의 지느러미와 물갈퀴가 사라진 상태였다.
아가미로 숨 쉬는 기분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역시 지상에서 들이쉬는 맑은 공기가 최고였다.
주위를 둘러보니, 예상대로 보이는 건 튜토리얼의 흔적뿐. 플레이어나 몬스터는 보이지 않았다.
"슬슬, 가 볼까?"
지금까지 튜토리얼에서 갖가지 히든 피스를 쓸어 담았던 보상. 드디어, 개인 공적치 랭킹 1위의 보상을 받으러 갈 때가 되었다.
* * *
튜토리얼이 끝난 지도 벌써 시간이 꽤 지났다.
다섯 번째 장을 훌륭하게 통과한 플레이어들은 모두 저마다의 보상을 획득하며 탑을 올랐다.
세운의 클랜 역시, 하룻밤을 기다리다가 유서아의 지휘하에 탑을 올랐다.
무턱대고 기다리는 것보다는, 그의 지시를 따르는 게 옳은 일이라며.
그렇게 모든 플레이어가 사라진 자리에.
"심심해!"
"리엘, 안 들어가?"
"안 들어가?"
"누구 기다려?"
한 명의 엘프가 나무에 기대 앉아 있었다.
풀잎을 닮은 은은한 초록색의 머리칼, 그 사이로 빛나는 에메랄드빛 눈동자.
이번 튜토리얼에서 개인 공적치 랭킹 2위를 달성하고, 성좌 '다섯 번째 날'과 계약한 엘프.
리엘 리프레인이었다.
"기억나? 드레이크를 상대할 때 만났던 인간."
"당연하지!"
"기억나!"
"좋은 향이 나는 인간이었어!"
"나쁜 용!"
"그 인간을 기다리고 있어."
정세운.
그 세글자의 이름이 선명하게 기억났지만, 그녀는 세운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자신이 그에 대해 신경 쓰고 있는 사실을 정령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자기 스스로 그것을 인정하기 싫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난 좋아!"
"나도 좋아!"
"리엘, 그 인간을 좋아하는 거야?"
"아니거든!"
"리엘, 화냈어!"
"화냈어!"
"귀여워!"
"으으, 나쁜 용!"
다행히도 정령들 역시 세운을 싫어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지금까지 인간만 나타나면 리엘의 뒤에 숨거나 적대감을 드러냈었는데, 이리도 호감을 드러내는 이는 처음이었다.
그녀로서는 참 애매한 상황이었다.
그도 그럴 게.
'탑을 오르기 전에, 승부를 내겠어.'
리엘이 이 자리에서 세운을 기다리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그와 칼을 맞대기 위함이었으니까.
자신의 것이라 생각했던 랭킹 1위의 자리. 그것을 빼앗은 게 바로 세운이었으니까.
세운은 튜토리얼이 끝나자마자 말을 나눌 틈도 없이 바다로 숨어버렸다.
세계수의 씨앗에 깃든 동족들의 힘을 입어, 언제나 최고의 자리를 지킬 것이라는 자신의 목표를 짓밟은 채로 말이다.
물론, 그저 탑의 입구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기다리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사이, 정령들과 교감하며 정령력을 높인 것은 물론 세운과의 대련을 위해 체술을 계속 단련하였다.
마나의 순도가 더욱 깨끗해지고, 정령 마법은 더욱 현란해졌다.
무엇보다....
'이게 있으면, 내가 질 리는 없어.'
그녀의 손에 잡힌 지팡이.
튜토리얼에서 랭킹 2위를 달성하며 얻은 보상인 '이그드라실의 가지' 덕분에, 그녀의 전투력은 이전보다 더욱 강력해져 있었다.
처음에는 그 힘을 다루기 위해 많은 고생을 했었지만, 지금은 이그드라실의 힘에 완전히 익숙해져 있었다.
-성좌, '다섯 번째 날'이 그를 굳이 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며 당신을 달랩니다.
"...감사해요. 여신님. 하지만, 꼭 한번 확인하고 싶어요. 정말 그가 저보다 강한지. 정말 랭킹 1위의 자격이 있는지 말이에요."
사실, 이성적으로는 이미 알고 있었다.
다섯 번째 장의 보스 몬스터. 씨 드레이크, 다라칸을 상대할 때 세운이 보였던 모습은 이미 튜토리얼의 플레이어로 보기 불가능한 수준의 실력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인정할 수 없었다. 아니, 인정하면 안 됐다.
멸망한 세계에서 동족들의 기대와 희망을 품고 넘어온 마지막 생존자로서.
시작부터 2등이라는 자리에 안주하며 넘어갈 수는 없었다.
오늘도 수련이 끝나고, 잠시 나무 기둥에 등을 대고 앉아 시원한 산들바람을 느끼던 중.
"뭐야, 아직 안 들어갔었어?"
"...기다리고 있었어요."
"나를?"
"네."
엘프의 예민한 귀를 속이고, 유령처럼 눈앞에 나타난 세운을 바라보며.
리엘 리프레인. 그녀가 조용히 지팡이를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나를 기다렸다고?'
시간도 꽤 지났겠다, 튜토리얼에 남은 플레이어는 당연히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탑의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나무 그늘 아래서 쉬고 있는 엘프가 보였다.
연한 초록빛의 머리칼이 산들바람에 흔들리며, 그림 같은 모습을 풍기던 그녀는 세운을 보자마자 태세가 완전히 역변하였다.
지팡이를 쥐고 있을 뿐인데도, 마치 한 명의 기사가 검을 겨누며 대련을 신청하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설마, 2등이 분해서 그런 건가?'
회귀 전에는 그녀와 부딪친 적이 별로 없었기에, 리엘이라는 플레이어에 대해 자세히는 알지 못한다.
그녀가 '영원의 화원'을 찾기 위해 탑을 오르고 있다는 것을 소문으로 들었을 뿐.
안타깝게도, 세운의 회귀 전에 그녀는 결국 영원의 화원을 찾지 못했다. 흉흉한 소문과 함께, 어느 순간부터 자취를 감추었을 뿐.
그러나, 다라칸과 맞서 싸우며 느꼈던 그녀의 성격상 세운을 기다릴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1등을 하지 못한 것.
경쟁심인지, 질투심인지는 몰라도 그 이유 때문일 것이다.
-성좌, '시기를 둘러싼 뱀'이 질투라고 하기에는 눈빛이 너무 맑다며 고개를 젓습니다.
시기를 둘러싼 뱀.
심해에서 계약을 나눈 성좌, 질투의 마신 '레비아탄'이었다.
본래 심해에서는 시스템의 도움을 받을 수 없어 이렇게 시야를 공유하거나 메시지를 날리는 게 불가능하지만.
레비아탄의 힘이 깃든 보주 덕분에, 한정적으로 시야 공유와 소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럼, 경쟁심이란 건가.'
일단은 자신을 걱정하고 있을 클랜원들을 최대한 빨리 보러 가려 했는데, 예상치 못한 난관이 생겨나고 말았다.
어떻게든 말로 타이를까도 생각해 봤지만, 그녀의 태도로 보았을 때 쉽게 물러날 것 같지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기다리기 위해 튜토리얼이 끝난 후 이곳에서 쭉 기다려 왔으니까.
"상황은 대충 알겠지만, 그래도 이유는 물어봐야겠지?"
세운이 허리춤에서 평범하게 생긴 검 하나를 꺼내며 물었다.
여러 번의 전투로 무기를 소모한 덕분에, 남아 있는 무기가 별로 없었다.
반면에, 그녀가 들고 있는 무기는 딱 보아도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어 보였다.
튜토리얼에서 저런 지팡이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 게다가, 다라칸을 상대할 때 그녀에게서는 본 적이 없는 지팡이다.
그 말은 즉.
'랭킹 2위의 보상이네.'
그녀는 이미 튜토리얼의 보상을 획득했다는 말이다.
하긴, 시간이 꽤 지났으니 당연한 일이다. 단순히 무기를 획득한 것에 이어, 사용법에도 익숙해져 있겠지.
"당신이 랭킹 1위의 자격이 있는지, 증명해 보여주세요."
"내가 왜?"
"당신은 저를 이용해서 보스 몬스터를 공략했으니까요."
"이용이라기보다는 협력이지. 너도 공적치는 배분받았잖아?"
"제가 혼자서 잡았다면 당신이 아니라 제가 랭킹 1위를 달성했을 거예요."
"과연 그럴까? 애초에, 혼자 잡을 수 있었을 것 같아?"
"그건...."
리엘의 말문이 막혔다.
그녀가 대답하지 않아도, 세운은 알고 있었다.
회귀 전, 그녀가 다라칸을 물리치고 랭킹 1위를 달성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때는 성벽을 방패 삼아 수많은 플레이어와 협력한 덕에 다라칸에게 일격을 먹일 수 있었으니까.
혼자였다면, 아무리 그녀라도 다라칸을 사냥하는 건 무리였다.
"그래, 뭐 상관없어."
그녀가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굳이 대련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세운 역시, 탑에 들어가기 전에 실험해 보고 싶은 힘이 있었으니까.
"대련 신청, 받아 줄 테니까."
"실프."
"응!"
그녀의 다리에 하얀 바람이 감돌았다.
세운 역시 익히 알고 있는 모습. 다라칸을 상대할 때 보았던 정령 빙의였다.
타앗!
그와 함께, 그녀가 재빠르게 앞으로 뛰어나왔다.
정령사인 그녀가 먼저 돌진해 오는 건 예상하지 못했지만, 뒤로 뺄 생각은 없었다.
세운 역시 당당하게 나아가 그녀의 지팡이를 검으로 막아냈다.
퍼엉!
"미안해!"
"놀자! 놀자!"
"오랜만이야!"
그러나, 그녀의 공격은 단순히 지팡이를 휘두르는 게 아니었다.
지팡이에 깃들어 있던 화염을 터트리며 세운을 덮쳐왔고, 그와 동시에, 대지의 정령에 의해 바닥이 무너져 내렸다.
발을 떼는 게 조금만 늦었어도 꼼짝없이 구멍에 떨어질 뻔했다.
"이거, 생각 이상인데."
다라칸을 상대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녀는 이렇게 강하지 않았다.
회귀 전의 지식을 통해 그녀의 잠재력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지금의 시점에서 그녀가 낼 만한 힘은 아니었다.
촤아아아!
세운의 주위로 물보라가 휘날리며 움직임과 시야를 방해했다. 그 사이로, 바위가 날카로운 송곳의 모양을 하고 사방에서 쏘아졌다.
단순히 쏘아진 게 아니라, 불의 정령의 폭발의 힘까지 빌린 것인지 엄청난 속도였다.
캉, 까앙!
세운이 능숙하게 검을 꺾어 그녀의 공격을 막아냈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바로, 무기.
정령의 힘이 깃든 바위를 막아내기에, 세운의 무기는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그렇다고 마몬의 창고를 열지는 않았다.
지금의 목표는 보구를 사용하여 그녀를 일격에 날려 버리는 게 아니라, 새로운 힘을 실험해 보는 것이니까.
"이건 못 막을 거예요!"
쿠구구구!
갑작스레 주위에 드리운 그림자 때문에 고개를 들어보니, 시야를 가득 채울 정도로 거대한 바위가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지금까지의 공격은 저 공격을 준비하기 위한 눈속임인 듯하다.
공격 범위를 벗어나자니, 주위에서는 아직까지 날카로운 바위가 날아들고 있었다.
바위를 쳐내고, 물보라를 빠져나가면 어김없이 그녀의 지팡이가 화염을 터트리며 날아들었다.
어찌할 틈도 없이 거대한 암석이 세운에게로 떨어져 내린 순간.
쩌어억-
"이건 너무 위험하잖아."
그 거대한 암석이 두 갈래로 벌어지며 날카로운 단면을 자랑했다.
느긋하게 먼지 속에서 빠져나온 세운의 손에는, 금으로 된 칼자루를 가진 검이 들려 있었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합니다.
바위를 쪼갠 검, 뒤랑달.
마침내 작업을 끝낸 마몬이 세운에게 뒤랑달을 돌려준 것이다.
"그 검은...."
"반칙이라고 하진 않겠지? 너도 그런 무기를 쓰고 있으니 말이야."
그렇게 말한 세운이 리엘을 향해 반대쪽 손을 내뻗었다.
그러자 품 안의 보주가 진동을 일으키며 세운의 손아귀에 푸른 기운이 몰려들었다.
-시기의 눈초리가 '리엘 리프레인'을 응시하기 시작합니다.
질투의 마신, 레비아탄의 권능.
지금부터가 본격적인 전투의 시작이다.
제 80화
80. 제80화
세운의 손에 뒤랑달이 쥐어진 후, 전투의 방향은 백팔십도로 달라져 있었다.
캉, 캉!
"저 검, 단단해!"
"엄청 튼튼해!"
그녀의 바위 따위는 더 이상 세운에게 위협이 되지 못했다.
칼날이 상하는 것을 무릅쓰고 간신히 받아치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바위를 쳐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쳐내는 것이 아니라, 바위를 완전히 절단하고 있었다.
바위를 쪼갠 검, 뒤랑달.
이름부터 바위를 쪼갠다는 말이 들어간 만큼, 이 정도로는 칼날이 조금도 상하지 않는다.
그나마 세운이 바위를 막아내는 틈을 이용하여 리엘이 지팡이를 휘둘러 보았지만....
카앙!
"큿!"
"아파!"
"위험해! 위험해!"
그녀는 뒤랑달과 일격을 교차한 이후로, 위험을 감지하며 크게 뒤로 물러섰다.
'저 검, 위험해.'
위그드라실의 가지.
그녀가 살던 곳의 세계수와는 다르지만, 위그드라실 역시 한 차원에 우뚝 서 있던 위대한 세계수였다.
그런 나무의 가지가, 단 한 번의 일격으로 몸을 크게 떨며 도망치려 하였다.
정령들이 보호해 주지 않았다면, 가지에 예리한 흠집이 났을지도 모른다.
"그 검, 튜토리얼의 보상으로 받은 건가요?"
"그럴 리가. 안 그래도 1등 보상으로 뭐가 나올지 한창 기대하던 참이었는데?"
"그렇다면, 성좌님께 받은 건가요? 튜토리얼에서 그런 검을 구할 수 있을 리가 없어요!"
"있던데?"
믿기지 않았다.
튜토리얼의 보상도 아니고, 성좌님께 하사받은 무기도 아니고, 튜토리얼의 진행 도중에 얻을 수 있는 무기 중에 저토록 강한 무기가 있었다니!
공적치를 모으기 위해 열심히 쏘다니며 히든 던전도 몇 개 찾아냈던 그녀였기에, 더욱 믿기 어려웠다.
하지만, 못 믿어도 어쩌랴? 당장 눈앞에서 세운의 검이 그녀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지금은 현실을 부정하기보다는, 현실에 순응할 때였다.
'그래도 내가 더 유리해!'
일격으로 한 번에 제압하는 첫수는 실패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첫수일 뿐이다.
실패했을 때의 대비책은 얼마든지 있다.
세운을 기다리며 입구에 머무르는 동안, 리엘은 세운과의 대련을 떠올리며 다양한 전략을 구상해 두었다.
덕분에 그녀는 망설임 없이 세운을 제압해 나갔다.
펑!
우수수- 콰득!
후우우웅!!
정령들이 본격적으로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비바람이 거세게 휘몰아치고, 부서진 대지의 틈새로 불꽃이 뿜어져 나온다.
그야말로 천재지변(天災地變).
그 안에서 세운은 뒤랑달을 휘두르며 위태로운 춤을 추고 있었다.
일반적인 플레이어라면 이런 공격을 쉴 새 없이 쏟아낸다면 일 분도 못 버티고 마나가 거덜 나 쓰러졌을 테지만, 그녀는 달랐다.
-풍요의 축복이 당신을 감쌉니다!
성좌, 다섯 번째 날. 미와 사랑의 여신이자, 풍요의 여신인 프레이야에게 하사받은 권능.
마치, 주변의 초목이나 바람과 같은 자연이 모두 모여 그녀에게 힘을 불어넣는 것 같았다.
덕분에 그녀의 몸에서는 마나가 끊임없이 솟아올랐고, 그 힘 덕분에 그녀는 이런 강력한 공격을 흔들림 없이 유지할 수 있었다.
축복도 축복이지만, 네 정령을 동시에 활용하면서도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는 그녀의 정신력은 정말이지 엄청났다.
동족의 바람을 등에 업은 책임감. 그 감정이 그녀의 정신력을 붙들어 주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어째서 쓰러지지 않는 거지?'
난폭한 천재지변 속에서도, 세운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게다가, 아까 전부터 알 수 없는 위화감이 그녀의 심장을 쿡쿡 찌르고 있었다.
착각인 걸까?
그렇게 위화감을 견디던 중, 의심을 확신으로 바꿔준 것은 그녀의 네 정령이었다.
"우우...."
"힘이 안 들어가."
"리엘, 나 너무 힘들어."
"졸려!"
육체가 없는 정령에게 체력이라는 게 존재할 리가 없었다.
그들은 자연 그 자체. 마나만 공급해 준다면, 밤새도록 힘을 발휘하여도 지치지 않는 존재들이었다.
실제로 리엘이 네 정령과 함께한 길고 긴 시간 중에서 '힘들다'라는 말을 들은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이변은 정령들의 불평으로 끝나지 않았다.
'위력이 약해졌어!'
거침없이 몰아치던 천재지변.
갈라지던 대지의 진동이 멎어가고, 불길이 사그라든다. 날카롭게 휘몰아치던 바람이 산들바람처럼 가볍게 살랑이고 소나기처럼 퍼붓던 비마저 가랑비처럼 가늘어진다.
이제는 '공격'이라고 말하기도 초라한 수준.
자연스레, 공격을 막아내던 세운 역시 검을 내리고 있었다.
"이제 내 차례지?"
그렇게 말하는 세운의 다리에는....
"말도 안 돼!"
정령사가 아니라면 절대 사용할 수 없는 힘, 실프의 바람이 휘날리고 있었다.
* * *
-시기의 눈초리가 '리엘 리프레인'을 응시하기 시작합니다.
질투의 권능을 사용했을 때, 처음에는 그 힘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폭식의 권능처럼 어금니가 나타나지도 않았고, 탐욕의 권능처럼 보물창고가 열리지도 않았으니까.
그저, 등골이 섬뜩할 정도의 '눈초리'가 느껴질 뿐,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 뭔가 있을 텐데.'
당장 리엘의 공격을 벗어나 그녀에게 검을 휘두를 수도 있지만, 그래서야 질투의 권능을 확인하려는 목표가 무산된다.
때문에 세운은 천재지변 속에서 묵묵하게 그녀의 공격을 받아냈다.
다행히, 뒤랑달이 쥐어진 덕분에 공격을 받아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오래간만에 잡아보는 뒤랑달의 그립감을 느껴보며 공격을 받아내던 중.
'공격이... 약해졌어?'
거칠게 휘몰아치던 그녀의 공격이 점차 약해지는 게 느껴졌다.
이것만 본다면 단순히 '리엘이 지친 건가'라며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변이 하나 더 있었다.
'이건 분명, 정령 빙의의 힘이야.'
세운이 자신의 몸에 깃들고 있는 힘을 바라보았다.
다리에서 미약하게 살랑거리고 있는 실프의 바람은 움직임을 빠르게 만들어 주었고, 갑옷 위로 드러난 노움의 힘은 천재지변을 막아주고 있었다.
그 외에도 뒤랑달에는 뜨거운 불길이, 몸의 주변으로는 투명한 물길이 출렁이며 세운의 움직임을 보조해 주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를 바라보며 세운은 질투의 권능에 대해 완벽하게 이해하였다.
-시기의 눈초리가 '리엘 리프레인'의 정령력을 질투합니다.
-불의 정령이 가진 힘을 앗아옵니다.
-물의 정령이 가진 힘을 앗아옵니다.
…
질투의 권능. 그것의 능력은 '적의 힘을 앗아오는 것'이었다.
확실한 설명도 없었고, 처음 사용하는 능력이었기에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남을 부러워하는 감정을 뜻하는 단어인 '질투'. 그 이름에 가장 걸맞은 형태의 능력이었다.
'역시 마신의 권능이란 건가.'
단순히 자신의 힘을 증가시키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힘을 앗아가는 힘. 버프와 디버프가 동시에 적용되는 힘이다.
이런 힘은 강적을 상대할수록 특히 강한 힘을 발할 것이다.
아쉬운 점이라면, 권능의 적용 대상이 한 명이라는 것이지만.
'폭식의 권능처럼, 이것도 사용할수록 발전할지도 모르지.'
마신의 권능의 한계가 이 정도일 리가 없었다.
폭식의 권능이 처음에 단일 개체에만 지정되었다가, 나중에는 영역 전부를 지정할 수 있었던 것처럼.
질투의 권능 역시 영역 전체를 대상으로 지정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적 한 명, 한 명에게 가해지는 디버프의 수준이 미미하더라도, 그 힘이 모이고 모여 세운에게 적용되는 버프의 수치는 엄청날 것이다.
-성좌, '시기를 둘러싼 뱀'이 자신의 권능을 알아보는 당신에게 옅은 미소를 지어 보입니다.
질투의 권능에 대해 분석을 마치는 순간, 지진이 난 것처럼 울리던 대지의 진동이 잦아들고, 폭풍우처럼 휘몰아치던 비바람이 잠잠해졌다.
시야가 걷히니,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는 리엘의 모습이 보였다.
아무래도 자신이 질투의 권능에 당한 사실을 눈치챈 모양이다.
"이제 내 차례지?"
"말도 안 돼!"
말이 되든 안 되든, 상관없었다. 이미 질투의 권능에 대해 파악했으니 그녀와의 대련을 더 진행할 필요는 없었다.
캉, 카앙!
비록 정령 빙의를 사용하고 있다지만, 애초에 근접전으로만 보자면 세운이 한 수 위였다.
게다가 지금 그녀의 정령술은 질투의 권능에 의해 크게 약해진 상태였고.
반대로 세운의 몸에는 그녀의 몸에 일렁거리는 것과 비슷한 정령 빙의가 스며들어 있었다.
그녀가 풍요의 축복으로 인해 넘치는 마나로 어떻게든 저항하기 위해 발악해 보았지만....
"이미 승부는 난 것 같은데?"
그래 봤자 처음의 몇 수가 고작이었다.
뒤랑달이 그녀의 목덜미에 닿으며 짧지만 알찼던 대련이 끝이 났다.
"...제가 졌어요."
"잘 생각했어."
지금까지 지켜본 결과, 그녀가 뒤통수를 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기에 세운은 뒤랑달을 허리춤에 꽂아 넣었다.
튜토리얼이 끝났음에도 세운을 기다리기 위해 탑에 들어가지 않은 그녀였기에 조금 더 격한 반응이 나올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빨리 현실을 수긍한 모습이었다.
"인정할게요. 당신이 저보다 더 강해요. ...1위를 가질 자격이 있어요."
처음에 그 당당하던 태도는 어디 가고,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먼저 싸우자고 해서 싸워준 것뿐인데, 저렇게 나오니 괜히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다음에는 지지 않을 거예요."
할 말을 마친 그녀가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렸다.
더 이상 이곳에 머물 이유가 없다는 말투다.
하지만, 세운의 생각은 달랐다. 처음에는 별생각 없었지만, 이번 대련을 통해 그녀에게서 무언가의 가능성을 알아본 것이다.
'리엘의 목표는 분명 세계수를 심는 거라고 했었지.'
세계수. 하늘과 지상, 그리고 뿌리를 통해 지하를 연결하는 거대한 나무. 위그드라실이나 건목, 신단수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는 성스러운 나무.
탑의 거의 모든 구역을 탐사한 세운으로서도 발견하지 못한 나무이기도 했다.
'만약, 탑에 세계수의 힘이 생겨난다면?'
세계수는 단순한 나무가 아니다.
생명수라고도 불리는 만큼 모든 우주의 기원과 삶의 근원의 상징이다.
그런 나무가 탑에서 자라난다는 것은, 단순한 의미가 아니었다.
세계수에서 흘러나오는 힘은 플레이어들을 강하게 만들어 줄 것이고, 그 힘은 성좌들에게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세계수의 신화를 기반으로 둔 성좌들은 특히나 더더욱.
신마대전을 막는 것에 이어, 아우터의 공격을 막아내야 하는 세운으로서는 매우 탐나는 존재였다.
그리고....
"잠깐."
"...왜 그러시죠?"
"너, '영원의 화원'을 찾으러 탑에 들어왔지?"
"그, 그걸 어떻게?"
회귀 전, 리엘 리프레인이 끝까지 찾아내지 못했던, 수많은 문헌에 전설처럼 기록되어 있는 '영원의 화원'은....
"거기까지 내가 안내해 줄 수도 있는데."
"...!"
세운이 모험가이자 탐험가로서 탑을 전전하던 시절, 영원의 화원은 여정의 지침표를 통해 찾아낸 숨겨진 영역 중 하나였다.
즉, 회귀 전과 회귀 후를 통틀어 플레이어 중에서 유일하게 '영원의 화원'의 위치를 알고 있는 자였다.
제 81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