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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6 - 6

제 81화

81. 제81화

"'영원의 화원'의 위치를... 알고 계시는 건가요?"

"모른다면 이런 제안을 했겠어?"

"하지만 어떻게.... '영원의 화원'의 존재는 세계수의 수호자에게만 대대로 내려오는 장소인데!"

"믿기 싫으면 말든가. 나도 믿음을 강요할 생각은 없으니까."

애초에 증거는 없었다. 그녀가 믿으면 믿는 거고, 안 믿으면 그걸로 끝이다.

이 말을 던져두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세운에게 되돌아오게 될 테니까.

탑에서 아무리 날고뛰어 봤자 '영원의 화원'의 위치에 대한 정보는 알 수 없으니 말이다.

'나도 여정의 지침표 덕분에 간신히 찾을 수 있었던 거니까.'

회귀 전의 세운은 전투 능력이 부족했지만, 여정의 지침표를 이용한 탐색은 플레이어 중 단연 최고였다.

그 덕에 다양한 히든 피스를 찾아낼 수 있었고 그것들을 이용해 전투력을 끌어 올려, 최후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으니까.

"...믿겠어요."

"응?"

리엘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그녀가 믿어주리라 기대하지는 않았는데.

"당신은 저를 이겼으니까요. 그리고, 당신이 거짓말을 할 것 같지는 않아요."

-성좌, '다섯 번째 날'이 한결 가까워진 둘의 모습을 바라보며 온화한 미소를 짓습니다.

"하지만...."

고개를 끄덕인 것도 잠시, 리엘이 다시금 표정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일단은, 저 나름대로 영원의 화원을 찾아보겠어요. 어떻게든 노력해 보고 난 후에, 제힘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었을 때, 당신을 찾아가겠어요."

"뭐, 그러든가."

"민폐는 되지 않겠어요. 당신을 찾아갈 때는 꼭,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가져가겠어요."

보아하니 단순한 자존심의 문제가 아닌 듯했다.

어깨에 짊어진 무거운 책임감 위에, 누군가의 빚을 더 얹어 두긴 싫은가 보다.

혹시나 그녀가 회귀 전의 소문처럼 화원을 찾는 도중에 사라지면 어쩌나 걱정되긴 했지만, 어차피 그건 탑의 중층을 넘어간 이후에 벌어질 일이다.

미래가 극도로 바뀌지 않는 이상, 당장은 걱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럼, 저 먼저 들어가 보겠어요."

"다음에 보자고."

"다음에는 절대로 지지 않을 거예요."

결의에 찬 리엘의 마지막 인사에 세운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인지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라이벌이 된 것 같았다.

"안녕!"

"또 봐!"

"또 놀자!"

"착한 사람!"

"안녕."

그녀의 등 뒤를 졸졸 따라가는 네 정령과 인사를 마치자, 탑의 입구에 들어선 그녀의 몸이 스르르 사라져 갔다.

어차피 세운도 탑에 들어갈 생각이었지만, 아직 받아야 할 게 남아 있었다.

'랭킹 1위의 보상이라.'

세운이 회귀 전에 받았던 보상은 정말이지 볼품없는 것이었다.

아이템명도 기억나지 않는 신발 한 켤레였는데, 바람의 힘이 깃들어 이동속도가 상승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

탑의 하층에서 나름대로 알차게 써먹긴 했지만, 구하자고 하면 어디서든 구할 수 있을 정도의 장비였다.

뭐, 그도 그럴 게 회귀 전에 세운이 모은 포인트는 고작해야 십만 포인트가 조금 넘을 정도였으니까.

랭킹도 너무 낮아 몇 위였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았다.

'들었다고 해도, 어차피 뭘 받았을지는 모르는 일이지.'

1위의 보상은 매년 똑같은 게 아니다. 플레이어의 성향이나 획득한 공적치에 따라 매번 다른 보상이 주어진다.

말하자면, 플레이어 맞춤형 보상이랄까?

무슨 보상이 주어질지 모르지만, 확실한 사실은 역대 튜토리얼 랭킹 1위들은 이 보상을 토대로 저마다 탑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겨왔다는 사실이다.

생각을 마친 세운이 탑의 입구를 향해 발을 옮겼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세가 압도당할 만큼 거대한 탑. 그 아래로, 안이 전혀 보이지 않는 새까만 입구가 보였다.

입구의 앞에 다가서자, 예상했던 메시지들이 세운의 앞에 떠올랐다.

-튜토리얼의 모든 시련을 통과하였습니다.

-튜토리얼의 모든 시련을 완벽하게 공략하여, 추가로 100,000point를 제공합니다.

-축하드립니다! 당신은 위대한 탑의 시련에 도전할 자격을 획득하였습니다.

-입구를 통해 탑의 1층에 진입할 수 있습니다.

추가 포인트의 획득.

이미 튜토리얼의 모든 시련을 통과하여 공적치는 이걸로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뭐, 어차피 세운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지금 추가로 공적치를 줘 봤자, 세운의 랭킹에는 변함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드디어, 세운이 기다리던 메시지가 떠올랐다.

-개인 공적치 랭킹을 집계합니다.

-플레이어 '정세운' : 1,520,080point

-축하드립니다! 튜토리얼의 개인 공적치 랭킹에서 1위를 달성하였습니다.

-플레이어에게 가장 걸맞은 보상 선택지를 구상 중입니다....

-개인 공적치가 1,000,000point를 뛰어넘어 보상의 수준이 한층 더 상승합니다.

-개인 공적치가 1,500,000point를 뛰어넘어 보상의 수준이 한층 더 상승합니다.

-역대급 가장 높은 개인 공적치를 획득하셨습니다. 보상의 수준이 한층 더 상승합니다.

수없이 떠 오르는 메시지들.

'이전에는 구상 시간 같은 것도 없었는데.'

보상의 수준이 연이어 상승하며 구상 중이라는 메시지가 길어지자 기분이 묘해졌다.

그도 그럴 게, 회귀 전에 신발 한 켤레를 받았을 때는 일 초도 되지 않아 즉시 보상이 나왔었기 때문이다.

세운이 기대감을 품고 가만히 메시지를 바라보았지만, 예상 이상으로 구상 시간이 길어졌다.

뭔가 문제라도 생긴 게 아닌가 싶었을 때쯤.

메시지의 로딩이 뚝 하고 멈추더니, 새로운 메시지가 나타났다.

-보상의 수준이 기존 사례에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높아져 자체 구상에 실패합니다.

-튜토리얼 관리자를 호출합니다.

"...튜토리얼 관리자?"

세운 역시 관리자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플레이어 대부분은 관리자의 존재도 모르고 있겠지만, 탑의 중층을 넘어가기 시작하면 그 존재를 서서히 인식하기 시작하니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관리자의 모습을 보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말이다.

물론, 세운 역시 관리자를 직접 마주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 관리자가 호출된다니.

'하긴, 공적치를 많이 쌓긴 했지.'

현재 세운의 공적치는 150만을 넘어가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튜토리얼의 플레이어가 모았다고 하기에는 말이 안 되는 수치. 유례없이 높은 공적치인 만큼, 시스템마저 당황하고 있는 듯하다.

시스템이 관리자를 호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메시지가 문처럼 쭉 늘어지며 그 안에서 사람의 형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하아.... 결국 나오게 되네. 아무리 개똥밭이 낫다지만, 이게 뭐야."

관리자의 모습이 제대로 보기 전에, 어쩐지 힘없는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세운이 들으라고 말한 건 아니고, 그냥 힘없이 혼자 중얼거린 것 같은데, 현재 세운에게 패시브 스킬처럼 발동되고 있는 '코볼트의 짝귀' 덕분에 작은 중얼거림조차도 선명하게 들려왔다.

"큼, 흠흠."

문을 빠져나오기 전, 잠시 목소리를 다듬고, 관리자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어쩐지 허름해 보이는 정장에 살짝 늘어진 넥타이, 헝클어진 머릿결. 철야를 마치고 새벽에 집으로 귀가 중인 회사원을 보는 듯했다.

그는 축 늘어진 다크 서클을 자랑하는 얼굴로 미소를 활짝 짓고 있었는데, 조금 전에 들려온 중얼거림을 생각하자면, 억지로 지은 미소임이 분명했다.

일종의 영업 미소랄까.

"반갑습니다! 정세운 플레이어."

관리자의 존재는 처음 보지만, 생각보다 평범한 모습이었다.

이에 세운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그의 눈 밑이 움찔거리는 것 같았지만, 곧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말을 계속 이어갔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튜토리얼에서 공적치 150만 포인트를 달성하다니! 이건 길고 긴 탑의 역사 속에서도 최초의 업적입니다!"

"그렇군요."

"...하하! 아직 실감이 안 나시는 모양입니다! 아무튼, 축하의 의미에서 튜토리얼의 관리자인 저 튜닝이 직접 보상을 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그가 활기차게 말을 이어나갔지만, 세운은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관리자에 대해 자세히는 알지 못했지만, 회귀 전에 겪은 다양한 일과 소문을 통해 한 가지 사실만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관리자는 믿을 만한 존재가 아니다.'

얼핏 보면 플레이어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탑'을 관리하는 사람들이지 '플레이어'를 관리해 주는 사람들이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플레이어보다는 성좌를 더 신경 쓰는 편이랬지.

그러니 저런 사탕발림 같은 소리에 집중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 플레이어님을 위해서 제가 특별히 최고의 보상을 준비해 왔습니다!"

촤르르!

관리자가 말을 마치며 엄지와 중지를 튕기는 순간.

딱, 소리와 함께 그가 나왔던 문에서 다양한 아이템들이 빠져나왔다.

그것들은 마치 패션쇼라도 하듯이 세운을 중심으로 자신의 모습을 뽐내며 원을 그리며 천천히 회전하였다.

검과 방패, 갑옷은 물론 온갖 장신구와 보석 등. 스무 개가량의 아이템들은 저마다의 특색을 뽐내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뛰어난 아이템들.

리엘이 쥐고 있던 지팡이와 비견될 만한, 아니, 그보다도 가치가 높아 보이는 아이템들이었다.

고작 튜토리얼의 보상인 주제에, 하나같이 탑에서도 쉽게 구할 수 없는 최상품들이다.

"먼저, 이것부터 추천해 드리겠습니다! 바로, '현무의 갑각'! 전설의 방패인 아이기스와 비견될 만한 방패로써 그 어떤 공격도 막아낼 수 있는 절세의 방패입니다!"

북쪽의 수호신이라 불리는 현무의 갑각.

저 정도면 분명 성물에 가까울 정도로 뛰어난 물건이다.

방패의 표면에는 물과 얼음의 기운까지 서려 있어 방어뿐만 아니라 공격에도 큰 힘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만, 세운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분위기를 파악한 관리자가 다급하게 다음 물품을 향해 손을 옮겼다.

"그렇다면 이건 어떻겠습니까? '드래곤 스케일 아머'! 순수하게 용의 소재만을 이용해 만들어진 최강의 갑옷입니다! 방어력은 물론 용종 특유의 마력까지 스며들어 있어...."

그 외에도 관리자의 추천은 계속되었다.

섭취하는 것만으로도 인간을 초월한 마나의 힘을 습득할 수 있다는 드래곤 하트.

이제는 모습을 감춘 탑의 전 랭커가 집필해 두었다는 무공서.

하급 신의 것이기는 하지만, 실제 성좌가 사용하던 성물까지.

아이템의 가치를 잘 모르는 플레이어가 보더라도 당장 혹할 만한 물건들이었지만....

'어차피, 저런 것들은 탐욕의 권능으로 충분히 커버할 수 있어.'

세운에게는 그리 탐나는 물건들이 아니었다.

실체가 없다고는 하지만, 당장 마몬의 보물창고에 있는 보물들의 수준이 저것들보다 더욱 뛰어났으니까.

물론, 저것들을 고른다면 당장의 전투력을 대폭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탐욕의 권능으로 대응 가능한 것들을 굳이 튜토리얼의 보상으로 획득하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저것들, 일반적인 랭킹 1위 보상들일 거야.'

전부는 아니지만, 세운은 회귀 전의 기억을 통해 튜토리얼 랭킹 1위의 보상이 어느 정도인지 대략적이나마 알고 있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아이템들이 딱 그 수준이었다.

분명 대단한 아이템들이지만, 시스템 메시지로 세 차례나 떠올랐던 '한층 더 상승한' 수준의 보상이 아니었다.

그 증거로, 관리자는 마치 홈쇼핑의 쇼호스트처럼 다급하게 아이템을 설명하고 있었다.

저건 세운에 대한 친절이 아니라, 어떻게든 저 물건들로 1위 보상을 넘기려는 수작질이었다.

"어떠십니까? 이 중에서 무엇을 고르더라도, 플레이어님은 순식간에 탑의 하이 랭커 수준까지 성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위를 떠도는 모든 아이템의 설명을 마친 그가 세운을 연신 띄워주었다.

그러나, 세운은 볼 수 있었다.

무표정한 세운의 반응에 움찔거리는 관리자의 입꼬리와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한 줄기의 식은땀을 말이다.

"혹시 마음에 드시는 게 없으십니까? 말만 하시면 제가 플레이어님께 맞는 최상의 보상을 선택해 드리겠습니다!"

"아뇨. 추천은 됐습니다."

"...네?"

이대로 추천을 받아봤자 결과는 똑같다.

그러니.

"제가 직접 선택하겠습니다. 보상으로 받을 수 있는 모든 항목을 보여주세요."

"보, 보상의 종류는 수백 가지가 넘습니다! 게다가 아직 탑 내부의 상황을 잘 모르는 플레이어님께 고르시는 것보다는...."

"아뇨, 제가 '직접' 고르겠습니다."

"하지만...."

조금 귀찮더라도, 세 단계나 상승한 수준의 보상을 직접 고르는 게 제일 나은 방법이었다.

제 82화

82. 제82화

촤르르륵-

세운의 앞으로 시스템 창이 기다랗게 펼쳐졌다.

그 안에는, 기존에 주위를 떠돌고 있던 스무 가지 아이템과는 비교도 안 되게 다양한 보상 목록이 기록되어 있었다.

'젠장, 저 플레이어. 대체 정체가 뭐야?'

그러한 목록을 보며, 한없이 무관심하던 조금 전과는 달리 눈을 반짝이고 있는 세운을 바라보며 튜닝이 입술을 물어뜯었다.

아무리 랭킹 1위를 달성했다고 해도 고작 튜토리얼의 플레이어. 시스템이나 탑에 대해 기본조차 모르는 이들이다.

그런데 세운은 어떠한가?

튜닝의 속마음을 잃기라도 한 듯이 그 뛰어난 보상들을 마다하고 직접 보상을 고른다고 하였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이미 탑을 오를 대로 오른 하이랭커인 줄 착각할 정도의 판단력이다.

'그리고 관리자인 내가 직접 나타났는데 조금은 놀라야 정상인 거 아냐?'

처음 세운이 튜토리얼의 완료하기 위해 탑의 입구에 섰을 때, 튜토리얼 관리소는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

총 공적치 150만 포인트.

길고 긴 탑의 역사를 뒤져보아도 단 한 번도 사례가 없는 최고 수치의 공적치다.

그런 만큼, 시스템이 혼란을 겪으며 관리자를 호출한 탓이다.

이 당황스러운 사건에 당연히 부하 직원들은 고개를 돌려 외면하였고, 튜닝이 직접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 솔직히 이 정도 일이면 부하 직원이 나선다고 하여도 보낼 수 없었을 것이다. 자칫 부하 직원이 실수라도 했다가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그런 일이, 지금 튜닝의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래 봤자, 내가 보여준 것 이상의 보상을 고르긴 어려울 거다.'

지금 세운이 보고 있는 보상 목록에는 약간의 꼼수가 들어가 있었다.

'모든 보상'.

말 그대로, 튜토리얼의 보상으로 받을 수 있는 모든 보상을 넣어 두었다.

아이템의 이름만 보고 그것들을 전부 확인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게다가....

'위험한 것들은 전부 아이템명을 수정해 뒀으니까.'

만약의 상황에 대한 대비책 역시 확실히 갖춰두었다.

잘해 봤자 아까 튜닝이 보여줬던 보상보다 조금 나은 걸 고르는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어째서일까?

'왜 이렇게 불안하지?'

어쩐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튜닝은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계속 물어뜯고 있었다.

* * *

'역시, 아까의 보상은 평범한 랭킹 1위의 보상이었어.'

눈앞의 보상 목록에는 수십, 아니, 수백 가지가 넘는 양의 보상 목록이 적혀 있었다.

보상을 직접 고르겠다는 게 마음에 안 들었던 건지 수준 낮은 보상도 섞여 있었지만, 세운에게는 별로 문제 되지 않았다.

회귀 전, 탑에서 구르고 또 굴렀던 세운이었기에.

[ 신속의 단검 ]

'B급 단검이었나. 쓸 만한 아이템이지만, 1위 보상으로는 한참 모자라지.'

[ 거염탑추(巨炎塔錘) ]

'이름만 거창하지 사용하기 불편하기로 유명한 놈이었어.'

어지간한 아이템은 이름만 보아도 대충 그 등급이나 가치에 대해 파악이 되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세운은 빠른 속도로 아이템들을 선별해 나갈 수 있었다.

목록을 읽어 내리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세운은 쓸 만한 보상 세 개를 골라두었다.

[ 굳은 신혈(神血) ]

[ 태조 무황제의 전포 ]

[ 검은 가시넝쿨 ]

세 개 모두 관리자가 처음 보여주었던 것보다 훨씬 큰 가치와 잠재력을 지닌 것들이었다.

실제로 세운이 이것들을 선별 목록으로 빼내자, 관리자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뿐만 아니라.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당신이 고른 보상을 바라보며 눈을 반짝입니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당신의 뛰어난 안목을 칭찬합니다.

탐욕의 마신, 마몬 역시 세운이 고른 보상을 인정하였다.

뒤랑달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아이템을 보아도 무관심하던 마몬이었기에, 자신의 선택에 더욱 확신이 들었다.

이대로도 꽤 마음에 들었지만, 보상 목록이 워낙 길었던 탓에, 세운은 느긋하게 남은 목록을 마저 살펴보았다.

어차피 시간제한도 없으니까.

"프, 플레이어님? 이제 슬슬 선택하시고 탑에 들어가시지 않겠습니까?"

"시간제한은 못 들었습니다만."

"시간제한은 없지만, 이러는 중에도 플레이어들은 빠르게 탑을 등반하고 있습니다!"

"그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쉬며 안절부절못하는 관리자를 보니, 더욱 확신이 들었다. 보상 목록 중에서, 지금 선별해 둔 것 이상의 가치를 지닌 아이템이 있을 거라고.

그렇게 유심히 목록을 내려가던 중.

유독 세운의 눈에 띄는 아이템이 하나 있었다.

[ 작은 열쇠 ]

'열쇠?'

아이템의 성능을 떠나 이름만은 화려하기 그지없던 지금까지의 보상들과는 다르게 너무나도 평범한 이름.

설명을 키워보았지만, 제대로 된 설명도, 사용처도 적혀 있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템의 이미지를 확인한 순간 세운의 눈빛이 달라졌다.

'이거, 보통 열쇠가 아니다.'

회귀 전, 모험가이자 탐험가였던 세운답게 다양한 열쇠와 자물쇠를 보아왔다.

그러나, 지금 보이는 열쇠는 그 수많은 열쇠 중에서도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열쇠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할 쉐어 라인이 존재하지 않았고, 열쇠치고는 과분할 정도의 소재인 최강의 금속.

신이 만든 금속이라 불리는 '오리하르콘'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그저 조금 특이한 '무지갯빛 열쇠'로 알고 넘어갔겠지만, 세운의 본능은 앞선 아이템들을 무시하고 눈앞의 열쇠를 선택하라 외치고 있었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열쇠의 정체를 알아보고 눈을 크게 뜹니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저 열쇠가 튜토리얼의 보상이라는 사실에 크게 의아해합니다.

마몬의 반응으로 확신할 수 있었다.

세운은 고민을 마치고, 눈앞의 열쇠를 선택하였다.

"이걸로 하겠습니다."

"저, 정말이십니까? 아니, 다른 거로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건 랭킹 1위의 보상으로 가져가기에는 너무 수준이 낮아 보이지 않습니까?"

"그런가요?"

"네! 용도도 알지 못하는 열쇠를 얻어 봤자, 탑에서 아무런 득도 보지 못합니다! 그보다는 앞서 고르셨던 신혈이나 전포가 훨씬 좋을 겁니다!"

"그렇군요. 수준이 훨씬 떨어지는 열쇠군요."

"네네! 관리자의 눈은 아주 정확합니다! 믿으셔도 좋습니다!"

관리자가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세운은 이미 확신을 가진 상태였다.

그런데 어째서 그의 말을 받아주고 있는 것이냐고? 바로 방금과 같은 '말실수'를 잡아내기 위함이었다.

"그럼, 다른 보상을 추가로 주시면 되겠네요."

"...네?"

"수준이 낮은 보상이라면서요. 그러니, 수준에 맞게 다른 보상을 추가로 주시면 되잖아요?"

"...하하! 농담도 잘하십니다. 튜토리얼의 랭킹 보상은 어디까지나 하나뿐입니다."

"그럼 튜토리얼의 관리자라는 분이 랭킹 1위 플레이어에게 '수준 낮은 보상'을 넘기는 거로 상황을 넘기려는 건가요?"

"그게 무슨!"

"실망이네요. 저야 힘없는 플레이어니 넘어갈 수밖에 없지만, 저를 바라보시는 성좌님들에게는 어떨지...."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당신의 탐욕에 비릿한 미소를 짓습니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당신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이번 일은 탑의 관리소에 정식으로 항의하겠다며 나섭니다.

"그, 그럴 수가!"

탑의 관리소는 플레이어에 대한 배려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하지만, 그 상대가 성좌라면 다르다.

세운도 아직 자세히는 모르지만, 성좌의 입김은 관리소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것도 상대가 어중간한 성좌가 아닌 '마신'이라면야 더더욱.

"하하! 제가 잘못 알았나 봅니다! 사실 그 열쇠는 엄청난 가치를 지닌...."

"설마, 가치 없는 보상이라고 속여서 못 고르게 하려던 건 아니겠죠? 튜토리얼 관리소 총책임자라는 분이."

"제가 총책임자라는 건 어떻게!"

"보고도 한 번 안 하고 보상에 관해 마음대로 말할 수 있는 존재라면 책임자가 아니면 불량 사원. 둘 중 하나겠죠."

"크흠...."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비틀어 오르는 입꼬리를 애써 누르며 관리자를 응시합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어떻게 보상에 먹을 거 하나 없을 수 있냐며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성좌, '시기를 둘러싼 뱀'이 오랜만에 보는 탑의 본모습에 인상을 와락 구깁니다.

세운이 이제 어쩔 거냐는 눈빛으로 관리자를 바라보았다.

괜히 아무것도 모르는 플레이어 한 명 속이려다가, 덤터기로 보상을 내줘야 하는 셈.

말을 바꾸기에는 무려 마신급의 성좌 셋이 세운을 지켜보고 있었다.

물론, 이 중에서 레비아탄은 탑 밖에 있는 몸이기에 영향력이 크지 않겠지만, 그녀를 빼더라도, 마신 두 명의 영향력은 엄청났다.

탑의 최상층부터 시작한 끝없는 내리 갈굼을 상상하던 관리자는 이내 고개를 푹 숙이며 낮게 중얼거렸다.

"하나 더...."

"그럼, 이걸로 주시죠."

"그건 안 됩니다! 두 번째 보상이니, 적어도 등급이 낮은!"

"아. 그럼 처음에는 일부러 저에게 '등급이 낮은' 보상을 지급하려 했던 건가요?"

"...알겠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보상 하나를 더 선택하는 세운을 바라보며, 관리자의 입에서 큰 한숨이 흘러나왔다.

* * *

[ 태조 무황제의 전포 ]

분류 : 망토

등급 : S-

설명 : 한나라의 마지막 승상이자 삼국시대 위나라 태조인 '조조'가 사용하던 전포.

능력 : 1. 만능의 영웅호걸(英雄豪傑) – 모든 능력치와 스킬의 효율이 10% 상승한다.

2. 친정중시(親征重視) – 군사의 선두에서 정벌에 나설 시, 군사의 전투력을 10% 상승시킨다.

3. 친족중시(親族重視) – 신뢰할 수 있는 군사의 전투력을 10% 상승시킨다. (최대 10명 지정 가능하며, 친정중시와 중첩 가능)

태조 무황제의 전포. 즉, 조조의 전포.

관리자가 처음 선보였던 A+급 아이템들의 등급을 한차례 뛰어넘은 S-급의 아이템이었다.

굳은 신혈이나 검은 가시넝쿨 역시 탐나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고, 이전의 세운이라면 당연히 그것들을 선택했겠지만.

'클랜을 끌고 가려면, 이게 낫겠지.'

지금의 세운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유서아와 강한철을 포함한 클랜원들을 이끌고 가기로 마음먹은 이상, 이러한 지휘형 아이템이 하나쯤은 필요했다.

게다가....

'이 능력들은 나한테도 전부 적용되니까.'

첫 번째 능력인 모든 능력치와 스킬 효율 10% 증가.

거기에 뒤에 있는 친정중시와 친족중시는 모두 중첩 적용이 가능했다.

즉, 전투에 나설 시 세운의 전투력은 30% 이상으로 치솟게 된다는 뜻이다. 검이나 갑옷도 아닌, 단지 망토를 하나 두르는 것만으로 말이다.

이것만으로도, '태조 무황제의 전포'가 S-급 성능을 지닐 자격은 충분했다.

스륵.

'착용감도 괜찮고.'

전포는 대체로 붉은색에 황제를 뜻하는 금빛 용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는데, 처음부터 세운의 것이었던 것처럼 잘 어울렸다.

본래 사용하고 있었던 '회색 늑대 망토'의 공포 능력을 포기하는 게 조금 아쉬웠지만, 이 전포는 그것을 포기할 만큼 뛰어난 성능을 지니고 있었다.

다음으로 튜토리얼의 본 보상이라 할 수 있는 '작은 열쇠'.

[ 작은 열쇠 ]

분류 : ??

등급 : ??

설명 : ??

능력 : ??

아쉽게도, 실물로 받아 정보를 확인했음에도 제대로 된 설명은 아무것도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세운은 이 열쇠에 대해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만능열쇠.'

다른 말로, 마스터키(Master key).

잠겨 있는, 또는 봉인되어 있는 모든 것을 열 수 있는 열쇠. 문헌 속에서만 보았던 전설의 열쇠다.

물론, 정보가 확인되지 않았기에 확신은 할 수 없었지만 그거야 탑에 들어가서 확인해 보면 그만이다.

만약 마스터키가 아니더라도, 오리하르콘이라는 소재는 충분히 1위 보상에 걸맞은 가치의 광석이었다.

"슬슬 들어가 볼까?"

고개를 돌려 지나온 길을 넓게 한 번 둘러보았다.

생각 이상으로 길게 느껴진 튜토리얼이었지만, 앞으로의 탑 등반을 생각해 보면 이건 맛보기에 불과하다.

그렇게 생각하며, 세운이 탑의 입구에 첫발을 내디뎠다.

제 83화

83. 제83화

탑에 들어가자마자 세운을 맞이해 준 것은 낮은 천장이 아닌, 튜토리얼 때보다 더욱 높게 느껴지는 하늘이었다.

하얀 구름이 느긋하게 유영하고, 밝은 태양이 망토에 비춰 금빛 자수를 빛낸다.

아무리 탑이 크다고는 해도,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곳이었다.

'이게 탑이었지.'

탑에서 상식이 통하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난센스다.

이곳은 말만 탑이지 한 층, 한 층이 좁게는 하나의 건물, 넓게는 작은 행성에 비견될 정도의 크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 안의 환경 역시 마찬가지.

환상 속에서나 존재한다는 신수들이 살아가는 층도 있었고, 사체가 일어나 꿈틀거리는 무덤도 존재한다.

그게 바로 탑.

그 모든 시련을 극복하고 탑을 오르는 이들이 바로 플레이어였다.

"후...."

탑에 진입하자마자 세운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분명 탑의 내부에 들어온 것인데, 어찌 된 일인지 바깥보다 더 깨끗하게 느껴지는 공기가 폐를 가득 채웠다.

추억을 회상하며 주위를 둘러보고 있을 무렵, 세운의 눈앞으로 탑의 진입을 환영하는 메시지들이 가득 떠올랐다.

-축하드립니다!

-튜토리얼의 모든 시련을 극복하고 탑에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탑의 첫 번째 층인 '쉼터'에 입장하였습니다.

-튜토리얼에서 획득하였던 개인 공적치가 모두 초기화됩니다.

-튜토리얼을 랭킹 1위로 통과하여 새롭게 기본 공적치 100,000point를 획득합니다.

개인 공적치의 초기화. 무려 150만이라는 놀라운 수치의 공적치를 쌓았던 세운이기에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정도면 남는 장사지.'

튜토리얼의 보상으로 마스터키로 짐작되는 열쇠와 함께 무려 S-급 아이템인 태조 무황제의 전포까지 획득하였다.

150만이라는 공적치가 아깝지 않은 보상이었다.

게다가, 시스템 메시지는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튜토리얼을 수행하며 행한 업적이 쌓이며 설화(說話)의 토대가 생겨납니다.

-설화명, '혈랑전설(血狼傳說)'.

-플레이어 '정세운'에게 또 다른 이름인 '혈랑(血狼)'이 생겨납니다.

-새로운 이명으로 인해 모든 능력치가 10 상승합니다.

-새로운 이명으로 인해 '공포(恐怖)'에 대한 잠재력이 생겨납니다.

'결국 이걸로 고정됐네.'

뭐, 예상은 하고 있었다. 세운이 튜토리얼 중에 행한 업적은 설화가 생겨나기에 충분한 것들이었으니까.

문제는 그 업적이 어떤 이명으로 발현되냐는 것이었는데.

이명의 존재조차 모르는 박정필이 멋대로 지어준 이명을 시스템이 인정해 버린 모양이다.

'뭐, 나쁘진 않네.'

이명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게 아니었다.

잠재력.

이명과 설화에는 무릇, 그에 따른 힘이 따르게 마련이다.

공포라는 잠재력을 가진 플레이어를 본 적은 없었지만, 이미 전장에서 몇 번이고 사용해 본 효과였다.

일대 다수의 전투를 주로 벌이는 세운의 전투 특성상, 다수의 의지를 무너트리는 공포의 효과가 매우 어울려 보였다.

게다가 모든 능력치가 열 개나 상승할 정도면 S급 이명인 게 확실했다.

그 증거로, 세운이 회귀 전 얻었던 이명은 민첩을 열 개 정도 올려주는 게 고작이었으니까.

'그나저나, 일단 클랜부터 찾아야 할 텐데.'

대충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야 하나 싶던 찰나, 누군가가 세운과 눈을 마주치며 앞으로 다가왔다.

우람한 덩치에 제법 잘 갖춰진 장비, 얼굴에 새겨진 상처가 험악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뭐야? 너, 설마 이제야 튜토리얼의 통과한 거냐? 늦게도 들어왔네. 뭐, 어디 구석에서 숨어 있기라도 했던 거냐?"

"누구지?"

"으하하하! 잘 물어봤다. 이 몸으로 말할 것 같으면 튜토리얼의 랭킹을 세 자릿수로 통과한 랭커! 헤드릭이라고 한다!"

소개를 듣는 순간, 알 수 있었다. 눈앞의 남자가 허세에 찌든 엑스트라 단역 같은 존재라는 것을.

만약 랭킹에 자신이 있었다면 '세 자릿수' 같은 게 아니라 제대로 된 랭킹을 소개했겠지.

말을 얼버무리는 것을 보아 대충 팔구백 위 정도로 생각되었다.

"비실비실한 게 장비는 제법 좋아 보이잖아? 좋아, 내 특별히 이 몸의 클랜에 받아주지. 운 좋은 줄 알아라."

가끔, 이런 놈들이 있었다. 어떻게든 클랜의 머릿수를 채우기 위해 탑의 입구에 진을 치고 앉아 있는 것들.

강한 플레이어에게는 굽신거리며 자신의 클랜에 들어와 주길 빌지만, 약한 플레이어에게는 지금처럼 강압적인 태도로 나온다.

아무리 약한 플레이어라도 잡일을 시키는 것만으로도 클랜에 꽤 유용하니까. 그도 아니면 전투에서 고기 방패로 내세우든가.

"싫다면?"

"으하하하! 네놈이 탑에 늦게 들어와서 아직 감각이 무딘가 본데, 여긴 그렇게 개념 없이 굴면서 살아남을 만한 곳이 아니야. 그래도 싫다면...."

자신을 헤드릭이라 소개한 남자가 세운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비웃음에 가깝던 미소가 순식간에 일그러지며 험악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큰 덩치와 더러운 인상, 거기에 얼굴에 난 상처까지. 그 모든 게 어우러져 제법 흉흉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신고식으로 이 몸한테 아이템 몇 개는 상납하고 들어와야 할 거야."

허리춤의 검집에 손을 올리며 위협을 가하는 녀석.

대충 훑어봤을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보니 제법 쓸 만해 보이는 검이었다. 물론, 뒤랑달과 비교할 만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창고의 보물을 사용하기 위한 일회성 무기 정도로는 사용할 수 있어 보였다.

그것을 확인하자, 딱딱하게 굳어 있던 세운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그건 내가 할 말 같은데?"

"그게 무슨...."

뻑!

"커헉!"

뒤랑달의 손잡이가 헤드릭의 복부를 강타했다.

분명 검의 위에 손을 올리고 있었던 건 녀석이었는데, 검을 뽑기도 전에 세운의 공격에 당한 것이다.

고작 손잡이로 한 방 맞았을 뿐인데, 그는 숨도 제대로 못 쉬며 엎어져 두 손으로 땅을 짚었다.

"컥, 이 새끼가 비겁하게!"

"비겁? 비겁해 보이면, 제대로 덤벼 보든가."

"아이템 믿고 그러는가 본데, 그래 봤자 세 자릿수의 랭커인 이 몸에 두 번은 통하지 않는다!"

조금 전까지 네발로 땅을 기었으면서. 그래도 나름 플레이어라는 것인지, 빠르게 숨을 고르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호기롭게 검을 뽑아 들고 달려드는 모습이 꽤 자신만만해 보였지만, 세운에게는 그저 한 마리의 불나방으로 보일 뿐이었다.

깡!

"미, 미친?"

세운이 뒤랑달을 꺼내 든 게 아니었다.

검을 꺼내 들 필요도 없다고 느껴 주먹으로 헤드릭의 검의 측면을 강타했다.

그러자 검날이 격하게 휘청이며 주인의 손에서 벗어나 바닥에 떨어졌다.

반동 때문인지 녀석은 오른 손목을 붙잡으며 통증을 참아내고 있었다.

'생각보다 약하네.'

꿀밤이라도 몇 대 먹여줄 생각이었는데, 저래서는 실수로 죽여 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방법을 바꿀 수밖에.

짝!

"커억! 자, 잠깐."

짝!

"머, 멈춰!"

짜악!

"죄, 죄송합니다!"

짜아악!

"살려주십쇼!!"

세운의 손바닥을 다섯 대도 견디지 못한 헤드릭이 고개를 숙이며 벌겋게 부어오른 뺨을 숨겼다.

나중에 안 사실이었는데, 세운의 예상대로 그는 랭킹 900위권의 랭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랭킹 998위의 플레이어였다.

* * *

"헤헤, 이쪽으로 오시지요. 튜토리얼을 끝내시느라 힘드셨을 텐데, 제가 마침 좋은 곳을 알고 있습니다!"

아주 살짝 어루만져줬을 뿐인데, 헤드릭의 모습은 처음 만났을 때와 백팔십도 달라져 있었다.

하긴, 벌겋게 달아오른 뺨이 아직도 가라앉지 않고 있으니.

나름대로 위력을 조절한다고 했는데, 생각보다 타격이 컸나 보다.

"됐고. 클랜 하나를 좀 찾으려는데."

"오, 클랜이 있으셨습니까? 진작 말을 하시지! 제가 이래 봬도 1층의 마당발입니다. 어지간한 클랜은 전부 알고 있습니다!"

"그래?"

"물론이죠! 클랜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이름은 모르고."

"네? 아니, 이름도 모르면서 무슨...."

"뭐?"

"아, 아닙니다! 이름 모를 수도 있죠! 하하하! 그럼 그, 무슨 특징 같은 거라도 있습니까? 유명한 플레이어라거나."

세운의 눈이 아주 조금 찌푸려지자마자 다급하게 말을 바꾸는 헤드릭.

녀석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박정필이 떠오르는 듯했다.

'특징이라....'

클랜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세운이 잠시 고민에 빠졌다.

아무래도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이라면 당연히 강한철일 텐데....

"강한철이라고, 너보다 덩치가 더 크고...."

"가, 강한철? 설마, 그 '폭력' 말씀하시는 겁니까?"

"...폭력?"

세운이 설명을 이어나가기도 전에, 헤드릭이 먼저 반응을 해 왔다.

강한철의 성격이라면 1층에서도 조용히 지냈을 것 같은데, 이렇게 바로 알아들을 줄은 몰랐다.

게다가, 폭력이라니? 1층에서 싸움이라도 일어났던 것일까?

"터질 듯한 힘! 폭력의 강한철을 모를 리가 없지 않습니까!"

"설마, 폭력이 그 폭력(爆力)이야?"

"당연하죠! 이야, 진짜 멋지지 않습니까? 저도 그런 이명을 가지고 싶습니다!"

폭력이라니. 강한철이 직접 저런 이명을 지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시스템이 강한철에게 저런 이름을 지어줬다고 생각하기에는 조금 부자연스러웠다.

그렇다면....

'박정필, 그놈 짓인가 보네.'

박정필의 짓이 분명했다. 세운에게 처음으로 혈랑이라는 이름을 지은 것도 놈이었으니까.

폭력과 비교하면, 혈랑이라는 이명은 백 배는 나을 지경이었다.

클랜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위로를 해 줘야겠다 싶었다.

"설마, 디아블로 클랜 소속이셨습니까?"

"...디아블로?"

"네! 튜토리얼의 최강자들이 모여 있다는 최강의 클랜이지 않습니까! 디아블로 클랜의 소속이셨다니. 그렇게 강하셨던 게 바로 이해됩니다!"

디아블로 클랜이라니. 이건 박정필의 작명 센스와는 조금 다른 것 같은데.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도, 강한철이 소속되어 있는 클랜이라면 세운의 클랜이 맞는 듯했다.

그 생각은 헤드릭의 이어진 설명으로 더욱 확실해졌다.

"수백의 몬스터를 도륙 내며 피바람을 일으킨다는 광풍의 유서아! 그 시체를 일으켜 죽음의 해일을 일으킨다는 시해의 백현!"

"...."

"아마, 저희 층에서 그 무용담을 모르는 플레이어는 한 명도 없을 겁니다! 아, 특히...!"

세운이 강한철에 이어 유서아와 백현에게 동정심 느낄 때쯤, 헤드릭이 말을 멈췄고, 본능적으로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보아하니 박정필이 1층을 쏘다니며 무용담을 퍼트리고 있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디아블로 클랜을 다스리는 고독한 피의 늑대! 혈랑군주(血狼君主)에 대해서는, 흡...!"

세운이 저도 모르게 헤드릭의 입을 막고 말았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예상하였는데, 이건 서두부터가 상상하던 선을 넘어 버렸다.

가까스로 세운의 손아귀를 벗어난 헤드릭은, 세운의 눈을 바라본 순간 열리던 입이 꾹 닫혔다.

세운의 눈에서 자신을 '교육'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살기가 일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내해."

"...넵!"

세운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며칠 안 봤다고 박정필에 대한 추억이 좋게 보정되어 있던 듯했다. 역시, 사람은 고쳐 쓸 수 없다는 말은 사실인가 보다.

클랜에 도착하자마자 박정필을 제대로 '교육'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세운의 발걸음이 디아블로 클랜을 향했다.

제 84화

84. 제84화

디아블로 클랜의 위치는 생각보다 멀었다.

쉼터라는 층의 이름답게 사람들이 몰려 있는 거주지에서도 한참이나 떨어진 곳.

헤드릭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헤맸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입니다! 이야, 못 본 사이에 훨씬 더 좋아졌네요! 임시 거주지고 뭐고, 하나의 마을이라고 해도 믿겠습니다!"

거점의 모습은 꽤 본격적이었다.

목책이라는 말이 아까울 정도로 제대로 세워진 울타리와 황금성의 성문을 본떠 만든 듯한 문. 최소 10m는 되어 보이는 높은 감시탑까지.

세운이 탑에 늦게 들어왔다고는 하나,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을 텐데.

그 시간을 생각했을 때, 놀랍도록 뛰어난 완성도의 거점이었다.

'그 둘 덕분이겠지.'

한아름과 한다운.

각각 38위의 마왕 할파스와 39위의 마왕 말파스와 계약을 나눈 쌍둥이 자매.

둘의 실력이 분명했다.

아마, 겉으로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울타리 안의 구조물도 뛰어날 것이다.

"이야, 제가 정식으로 디아블로 클랜에 와 보다니! 영광입니다! 말로만 듣던 그 랭커들을 실물로 볼 수 있다니!"

헤드릭이 이제 슬슬 가라앉기 시작한 볼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무슨 어린아이가 영웅을 만나기 직전처럼 설레는 모습이다.

박정필이 무용담을 얼마나 뿌리고 다녔으면 저런 반응일까?

세운이 다시 한번 녀석을 참교육시켜야겠다고 마음먹는 순간이었다.

"호, 혹시 저도 클랜에 들여보낼 줄 수 있으십니까?"

"지금 들어가려고 하잖아."

"그거 말고, 그, 입단 말입니다! 만약, 받아주시면 저 헤드릭!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너, 클랜 있다며?"

"디아블로 클랜에 들어올 수 있다면 당장 전부 버릴 수 있습니다!"

"탈락."

"네? 어, 어째서...."

"자기 클랜을 마음대로 버리는 놈을 어떻게 받아."

"그렇다고 안 버리면 애초에 못 들어오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탈락."

"...혹시 제가 마음에 안 드십니까?"

"...."

세운은 헤드릭의 눈빛을 애써 무시하며 문 앞에 다가섰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경비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높게 올라서 있던 감시탑에서 가장 먼저 손님의 존재를 알아보았다.

"문 앞에 플레이어 두 명 확인했습니다."

"이 시간에 들어올 사람이 없는데?"

"근데 조금 익숙한... 어, 어어?"

"뭐야, 왜 그래?"

감시탑까지 거리가 꽤 있었지만, '코볼트의 짝귀'로 청력이 높아진 세운의 귀에는 그 작은 목소리까지 전부 들려왔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세운의 정체를 알아챈 듯하다.

곧이어, 청력을 높이지 않아도 들릴 만큼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혀, 혈랑!"

"뭐?"

"혈랑입니다!"

"진짜지? 빨리 서아 씨한테 알려!"

"넵!"

감시탑 위의 플레이어 한 명이 다급하게 사다리를 타고 지상으로 내려갔다.

목소리가 워낙 컸던 탓에, 헤드릭 역시 그 단어를 알아듣고 입을 크게 벌리며 세운을 바라보았다.

"혀, 혈랑이라고요? 진짜 혈랑이십니까? 고독한 피의 늑대, 혈랑군주 정세운?!"

"하아...."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습니다.

-성좌, '시기를 둘러싼 뱀'이 안쓰러운 눈빛으로 당신을 위로합니다.

세운이 이마까지 짚으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작 며칠 정도 자리를 비웠다고 이런 소문이 퍼졌다니. 바로 옆에서 들으니까 손발이 다 오그라들 지경이었다.

"제가 그런 혈랑과 검을 섞었다니! 오오, 이 손! 아니, 이 뺨은 절대 안 씻겠습니다!"

"좀 닥쳐줄래."

"넵."

검을 섞인 무슨. 애초에 검 한 번 부딪친 적도 없는 주제에, 세운과의 전투 기억이 미화된 듯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꺼운 성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틈이 벌어지며 사람 하나가 들어갈 공간이 생겨났다 싶어 보이자마자.

쿵!

둔탁한 소음과 함께 문이 활짝 열리며, 그 안으로 듬직한 강한철의 모습이 보이고.

"세운 씨!"

유서아가 빠르게 달려와 세운을 껴안았다.

오랜만에 보아서 그런 것보다는, 이유도 안 알려주고 갑작스럽게 절벽 아래로 뛰어내린 세운에 대한 걱정 때문인 듯했다.

평소라면 바로 내뺐을 테지만, 이번만큼은 세운도 가만히 그녀의 포옹을 받아주었다.

그 뒤로 다가온 강한철이 멋쩍은 듯이 뺨을 긁었다.

"오랜만이야."

세운이 먼저 입을 떼고서야, 유서아가 정신을 차리고 거리를 벌렸다.

곧이어 활짝 열린 문안에서 수십 명의 클랜원이 빠져나와 세운을 반겨주었다.

"혈랑 오빠!"

"우리가 얼마나 기다렸다구!"

"특히 서아 언니가 엄청!"

"아, 아름아!"

"오랜만이다."

"그거 봐! 내가 꼭 돌아온다고 했잖아!"

조용하던 문 앞이 순식간에 시끄러워졌다.

뒤에서는 헤드릭이 눈과 입을 크게 벌리며 어찌할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일단은 들어가서 말하자."

"근데 저분은?"

"날 여기까지 안내해 줬어. 견학이라도 좀 시켜줘."

"영광입니다아!"

헤드릭이 우렁찬 대답과 함께, 클랜의 안으로 발을 내밀었다.

* * *

"와아, 이걸 고작 며칠 만에 다 지으신 겁니까? 진짜 대단합니다! 이 정도면 저기 마을이랑 비교해도 손색없을 정도잖아요?"

예상대로, 거점 안의 시설 역시 바깥 못지않게 훌륭했다.

전보다 훨씬 발전한 쌍둥이 자매의 실력에 세운이 놀라는 것은 물론 헤드릭은 대놓고 감탄사를 터트려댔다.

"엣헴! 저기, 배수로 보이죠? 건물만 제대로 지은 게 아니라 배치까지 완벽하게 신경 썼단 말씀!"

"야, 배치는 내가 다 계산한 거잖아!"

"에이, 언니는 쪼잔하게 그런 거로!"

"뭐? 쪼잔? 이게!"

-성좌, '검은 새'가 확실히 쪼잔하긴 하다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성좌, '거대한 새'가 검은 새의 입을 막으며 두 계약자를 말립니다.

덕분에 쌍둥이 자매의 어깨는 지칠 줄 모르고 으쓱거렸다. 가는 길에 열심히 설명을 늘어놓는 것을 보니 자부심이 대단한가 보다.

'하긴, 이전에는 제대로 된 도구가 없었으니까.'

튜토리얼에서는 공적치 상점에서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장비만으로 건물을 지어야 했다.

재료라고 해 봤자 대부분 나무나 돌이었고, 그것만으로 기본적인 시설들은 물론 투석기까지 만들어 낸 둘의 실력은 이미 놀라운 수준이었다.

'탑에 들어온 시점부터는, 어지간한 물품은 어떻게든 구할 수 있으니까.'

그 실력에, 좋은 재료까지 더해진 결과가 바로 이것이다.

보이다시피 1층만 해도 수집 가능한 재료가 다양한 것은 물론, 마을에서는 상인들이 다양한 물품들을 팔고 있었다.

탑에서 화폐의 개념을 대신하는 공적치만 충분하다면, 얼마든지 다양한 물품들을 구매할 수 있었다.

"오! 오오! 저건 설마, 말로만 듣던 시해 님의 언데드입니까?"

건물로 들어가기 전, 거점의 한구석에 몬스터의 사체가 쌓여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세운 역시 익숙한 몬스터들.

튜토리얼의 다섯 번째 장에서 성을 공격해 왔던 몬스터들의 사체였다.

물론 그중에서도 네임드 몬스터 격의 강한 몬스터들의 사체.

무언가 작업을 해 둔 것인지, 해양 몬스터 특유의 빠른 부패도 보이지 않고 지독한 악취도 느껴지지 않았다.

문어 형 몬스터의 빨판을 가르며 안경을 들썩이던 백현이 곧 세운의 존재를 깨닫고 고개를 돌렸다.

"아! 돌아오셨군요. 마중 못 나가서 죄송합니다. 제가 집중을 하면 주위가 눈에 잘 안 들어와서...."

"괜찮습니다. 이것들은?"

"부족한 실력이긴 하나, 언데드로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가져왔습니다."

"좋은 생각이군요."

"하하, 그렇죠? 만티코어 덕에 깨달은 사실인데, 이런 네임드 형 몬스터는 단순히 강한 것만 아니라 하급 언데드를 지휘할 수 있더군요! 물론, 이성적인 지휘라기보다는 본능적인 지휘일 뿐이라 개선점이 필요하긴 하지만...."

-성좌, '죽음을 짓밟는 말'이 계약자의 지식에 즐거운 듯이 투레질을 시작합니다.

화제가 언데드에게로 돌아가자 백현이 신난 듯이 말을 이어갔다.

평소에는 묵묵하게 자기 일만 하는 정적인 사람인데, 언데드에 관한 얘기만 나오면 말이 길어지는 것 같았다.

그를 지켜보고 있는 서열 4위의 마왕, 가미긴 역시 백현의 그런 반응을 마음에 들어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소질이 조금 있어 보여서 가미긴과 연결해 준 것뿐인데, 이렇게 보니 생각 이상으로 잘 맞아 보인다.

"뭐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 말하세요. 제가 도울 수 있으면 언제든 도와 드릴 테니까."

"아닙니다! 우혁 씨 덕분에 이렇게 클랜에서 제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는데요. 아, 그래도 혹시 괜찮으시면 나중에 만티코어의 독성에 대해서 한 번 토론할 수 있을까요? 생각보다 산성이 높아 고체까지도 녹일 수 있어 보이는...."

세운 역시 전직 모험가로서 흥미 있는 얘기였지만 유서아가 나서서 조심스럽게 백현의 말을 끊었다.

아무래도 일단은 세운의 얘기를 듣는 게 더 중요했으니까.

그제야 정신을 차린 백현이 멋쩍게 미소 지으며 자리를 비켜섰다.

그렇게 세운이 발걸음을 옮기자마자 그는 다시 문어 형 몬스터를 해부하기 시작했다.

그 외에도 요리를 하거나 전투를 연습하는 등. 거점에서는 다양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정말, 하나의 마을처럼 말이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헤드릭은 연신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잘하고 있었네. 고생했어."

"마지막에 저한테 말했잖아요. 클랜, 잘 부탁한다고."

누가 뭐래도, 클랜을 이끌고 탑에 들어와 거점을 꾸린 건 유서아였다.

이곳의 모두가 고생했지만, 그중에서도 유서아의 책임감은 다른 사람들의 이상이었다.

어쩐지 짐을 떠넘긴 기분에, 세운이 머쓱하게 뺨을 긁적였다.

"세운 씨가 부탁한 만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어요. 그리고 이제 이것도 익숙해지기도 했구요."

하긴, 세운이 클랜을 떠났던 게 한두 번인가?

튜토리얼의 첫 번째 장부터 바위산을 향한다며 자리를 비웠고, 그다음에도 히든 피스를 찾겠다며 틈만 나면 자리를 비웠다.

세 번째 장의 오우거 사냥 때도 그랬고, 네 번째 장에서 창고를 털고 다닐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고 보니 튜토리얼의 모든 장에서 자리를 비웠던 듯하다.

'유서아가 아니었으면, 클랜을 여기까지 이끌고 오진 못했겠지.'

아마, 기껏 해 봐야 열 명이나 스무 명 정도만이 간신히 따라왔지 않을까 싶다.

"여기예요."

"오, 근사한데?"

"서아 언니가 지낼 곳이니까 제일 크게 지었어요!"

"흐흐, 세운 오빠 방까지 같이 만들어 뒀지요!"

"바보야, 방은 하나만 만들었어야지!"

"앗!"

"...아름아, 다운아?"

"도망쳐어!"

"꺄아!"

쌍둥이 자매가 한바탕 요란을 피우더니 저 멀리 달아났다.

자리에 남은 건 강한철과 유서아뿐.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박정필은?"

거점에 도착하자마자 입구에서 달려 나올 줄 알았는데, 거점을 거의 다 둘러봤는데도, 박정필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세운이 그 이름을 꺼내자, 유서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아마, 술 마시러 갔을 거예요."

"...술?"

고개를 돌려보니 헤드릭이 되지도 않는 휘파람을 불며 딴청을 시작했다.

박정필이 소문을 어디서 퍼트리고 다녔나 했더니, 역시 술이 문제였다.

그래도 튜토리얼 때는 그나마 멀쩡했는데.

교육을 해 줘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났다.

"마을에서 술집을 발견한 이후로는 매일 출석하더라구요. 지금쯤이면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유서아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형니이이임!!"

거점의 정문 방향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박정필이 시뻘건 얼굴로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대낮부터 얼마나 마셔댔는지, 이 거리에서도 술 냄새가 느껴질 정도였다.

"드디어 나왔네."

"크으! 그렇게 절 기다리셨습니까? 형님의 오른팔인 저 박정필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염없이 형님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유서아, 미안한데 우리 얘기하기 전에 정필이랑 잠깐만 시간 좀 가져도 될까?"

당장에라도 세운의 얘기가 듣고 싶었던 유서아였기에 조금 망설이는 듯했지만, 세운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진득한 살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곧이어, 세운이 입꼬리를 올리며 박정필을 향해 다가갔다.

"혀, 형님? 근데 왜 주먹은 쥐고 그러십니까? 하하...."

"강한철, 잡아."

"알겠다."

"어, 어? 놔! 놔, 이거! 형님, 왜 그러십니까? 제가 형님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우리, 진득하게 대화 좀 나눠볼까?"

"자, 잘못했습니다! 형니이임!"

그 순간, 뒤에서 그 장면을 지켜보던 헤드릭은 깨달을 수 있었다.

만약 세운의 교육이 학교의 수업 같은 것이었다면, 자신이 당한 교육은 1교시 정도.

아니.

-성좌, '당나귀 머리의 날치기'가 내 그럴 줄 알았다며 박장대소를 터트립니다.

1교시도 시작하기 전인 조례 시간 같은 느낌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제 85화

85. 제85화

"크흑, 흑흑...."

유서아가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만큼, 교육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게다가 세운은 그저 단순하게 손길 질만 이용한 게 아니었다.

그라드 제국식 고문법.

심해에서 에스트롯샤에게서 정보를 빼내기 위해 사용하였던 고문법의 기술까지 이용한 철저한 정신 교육.

덕분에, 박정필은 자신의 잘못을 뼈저리게 파악한 채로 바닥에서 흐느끼고 있었다.

"그렇군요. 질투의 마신이라니...."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어째 거짓말이 점점 느는 것 같다며 비아냥거립니다.

-성좌, '시기를 둘러싼 뱀'이 당신의 거짓말을 재미있다는 듯이 받아들입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허기를 호소하며 신음을 흘립니다.

유서아에게 설명한 지금까지의 행보는 간단했다.

그녀를 지켜보고 있는 성좌인 서열 2위의 마왕, 바알과 마찬가지로 세운을 지켜보는 두 마신이 또 하나의 마신의 존재를 알려주었다.

때문에, 그 마신의 힘을 빌리기 위해 심해로 뛰어들었다.

뭐, 정보의 출처가 마신이 아니라 세운 자신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딱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지어낸 요소가 거의 없었기에, 유서아 역시 어색함을 느끼지 않고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세운의 질문할 차례.

"지금 클랜 관리는 어떻게 하고 있는 거야?"

이는 단순히 사람들을 관리하는 걸 물어보는 게 아니었다.

탑에 들어온 순간, 시스템은 클랜의 존재를 인정해 주며 다양한 혜택을 제공해 준다.

아마, 클랜의 이름을 지은 것도 그 이유이리라.

"일단은 제가 임시로 관리하고 있어요. 클랜장은 세운 씨에게 양도하려고 비워뒀구요."

"클랜장은 네가 더 어울리지 않겠어?"

"아뇨. 그저 이끄는 것만이라면 문제없지만, 저희 클랜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세운 씨가 클랜장을 맡는 게 좋다고 생각했어요."

"음...."

맞는 말이다. 세운은 탑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시련과 정보를 빠삭하게 파악하고 있으니까.

그 정보를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서는, 클랜장으로 활동하는 게 가장 효율적이었다.

'태조 무황제의 전포'가 가진 힘을 최대한 끌어내기 위해서도 말이다.

"그렇다면야. 좋아."

"그럼, 바로 클랜장 자리를 넘길게요."

-디아블로 클랜의 임시 클랜장 '유서아'가 당신에게 클랜장의 직위로 입단을 요청하였습니다. 받아들이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세운의 몸에 붉은빛이 감돌며 클랜과 관련된 시스템 메시지들이 떠올랐다.

-디아블로 클랜에 가입되었습니다.

-디아블로 클랜의 클랜장 직위를 획득하였습니다.

-디아블로 클랜의 관리 및 운용 권한을 획득하였습니다.

탑에서 클랜의 혜택은 사소하지 않았다.

회귀 전의 세운은 홀로 탑의 이곳저곳을 떠돌았기에 자세히는 알지 못하지만, 당장 알고 있는 것만 하더라도, 탑을 공략할 때 쓸 만한 혜택이 많았다.

예를 들자면.

-디아블로 클랜이 클랜장의 힘에 영향을 받습니다.

-클랜원의 모든 능력치가 5 상승합니다.

-'혈랑전설'의 설화로 인해 클랜원에게 공포에 대한 저항력이 생겨납니다.

이런 것처럼 말이다.

"혈랑전설?"

"...내 이명이 혈랑이래. 저 자식 때문에."

"얼마나 멋집니까, 형님! 혈랑전설이라니! 크으! 취한다!"

"한 번 더 교육받고 싶어?"

"죄송합니다!"

"그리고 일단 예의상 묻는 건데. 클랜 이름, 이것도 네가 지은 거지?"

"네? 아뇨, 그건 제가 지은 거 아닌데요?"

"그럼?"

"...내가 지었다."

박정필과 대화를 나누던 중, 전혀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한철.

그가 사뭇 붉어진 얼굴로 세운의 시선을 외면하고 있었다.

"네가 지었다고?"

"...별로인가?"

"설마, 폭력이라는 이명도 네가 직접 지은 거야?"

강한철이 '크흠' 하는 헛기침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당연히 박정필이 특유의 작명 센스로 멋대로 지어준 이명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강한철의 작명 센스 역시 박정필 만만치 않았다.

이에 세운이 한숨을 내쉬며 유서아를 바라보니, 그녀 역시 세운의 시선을 외면하고 있었다.

"저도 딱히 나쁘진 않은 것 같아서요...."

유서아까지 저런 반응이라니.

세운은 순간적으로 자신이 이상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니다. 클랜명이야 그리 중요한 건 아니니까. 그보다, 둘 다 잠재력은 뭐로 받았어? 능력치는?"

"나는 근력이 40 올랐다. 잠재력은 힘이라더군."

"저는 민첩이 40 올랐어요. 잠재력은 지배였구요. 음, 별로인 건가요?"

"아냐, 나랑 동급이야. 둘 다 이명 중에서도 최상위급이니까 걱정하지 마."

"휴...."

모든 능력치가 균등하게 10씩 오른 세운과 달리, 둘은 특성이 명확하게 갈려 있었다.

그중에서도 강한철의 특성은 세운이 회귀 전에 들었던 것과 같았는데, 수많은 잠재력 중에서도 원탑에 들어간다고 알려진 훌륭한 잠재력이었다.

힘.

단순하지만, 탑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였으니까.

같은 의미라도, 잠재력의 주인이 그 잠재력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다양하고 강력한 힘을 내는 힘이었다.

그에 반해, 유서아는.

'바뀌었어.'

회귀 전에 들었던 잠재력과 다른 능력이었다.

지배라니.

하긴, 그녀의 성좌 역시 지배의 힘과 관련되어 있었고 세운이 없을 때마다 클랜을 훌륭하게 관리해 왔으니까.

어찌 보면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잠재력이었다.

그녀가 지배라는 잠재력을 어떻게 활용할지는 모르겠지만, 뛰어난 잠재력이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박정필. 너는?"

"저는 아직 못 받았습니다!"

"그래?"

세운이 고개를 갸웃했다.

하는 짓이 영 마음에 안 들어서 혼내고는 있다지만, 박정필 정도는 충분히 이명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설화는 충분히 쌓았을 테고, 아마 아직까지 시스템이 녀석에게 걸맞은 이명을 짓지 못한 모양인데....

"제 이명은 형님이 직접 지어주시기로 하셨잖습니까!"

"...어?"

"그것만 기대하면서 지금까지 제 이명은 생각도 안 하고 있었습니다! 흐흐!"

그러고 보니, 그랬던 것 같았다.

박정필이 세운에게 '혈랑'이라는 이명을 지어줬을 때, 똑같은 창피를 주기 위해서 이명을 직접 지어준다고 했었지.

"흐음...."

뭐가 좋을까?

세운의 이명이 혈랑이었고, 강한철이 폭력, 유서아가 광풍, 백현이 시해의 이명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어울릴 만한 이명이라.

잠시 고민을 하던 세운의 입에서 미소가 지어졌다.

"악동(惡童), 어때?"

"넵? 하하, 형님. 그거 설마 제가 아는 악동입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것보단 멋진 이명이 얼마나 많은...."

띠링!

장난치지 말라는 듯이 손을 내젓던 박정필의 움직임이 뚝 멈추었다.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시스템이 고개를 끄덕이며 녀석의 이명을 확정한 것이리라.

"아, 아니! 잠깐! 나 이거 싫어! 싫다고! 바꿔줘!"

시스템 메시지를 향해 소리치는 것 같았지만, 그래 봤자 소용없다.

설화가 쌓이며 이명이 갱신될 수는 있다지만, 그렇다고 해도 처음의 틀에서 크게 바뀌지는 않으니까.

예를 들자면, 악동에서 대악동으로 바뀌는 정도랄까?

"안 돼! 흐윽, 악동이라니! 게다가 설화명 '악동 일기'라니! 동네 꼬맹이 방학 숙제도 아니고 이게 뭐냐고오!"

-성좌, '당나귀 머리의 날치기'가 이명이 이렇게나 어울릴 수 없다며 계약자를 손가락질합니다.

"으아아아악!"

박정필이 세운에게 교육을 당했을 때보다 더욱 비참하게 흐느꼈다.

그 모습을 보니,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뿌듯함이 솟아올랐다.

혹시 마음에 들어 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반응을 보아하니 이토록 시원할 수가 없었다.

"아, 세운 씨."

박정필이 흐느끼는 것도 잠시, 유서아가 그 모습을 외면하고 세운에게 말을 걸어왔다.

"혹시 앞으로의 계획은 생각해 뒀나요?"

"바로 탑을 오를 건가?"

강한철이 등반을 언급하는 걸 보니, 이들도 탑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는 들었나 보다.

플레이어는 다른 말로 '등반가'라고도 불린다.

저마다 다른 바람을 가지고 있지만, 대부분의 플레이어가 가진 목표는 탑의 꼭대기에 오르는 것이니까.

세운 역시 다양한 계획을 짜두었다.

다만, 세운이 짜둔 계획은 '탑을 최대한 빨리 오르는' 게 아니라, '탑의 히든 피스를 모조리 정복하는' 것이었다.

"아니."

"...그럼, 이곳에서 머무를 생각인가?"

"응. 아마 한 달 정도는 이곳에서 머물 생각이야."

"어째서지?"

"한 달 뒤에, 여기서 사건 하나가 일어날 거거든."

"사건?"

튜토리얼에 비하자면, 한없이 여유로워 보이는 1층.

튜토리얼에서 지친 플레이어들은 모든 걸 포기하고 이곳에서 정착을 바라기도 한다.

1층에는 다양한 자원이 풍족했고, 영 부족한 부분은 공적치 상점을 이용하면 해결됐으니까.

그러나, 탑은 플레이어들의 평온을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는다.

"1층을 보면서 조금 이상한 점 못 느꼈어?"

"이상한 점?"

"음, 하나 있었어요. 분명 튜토리얼은 매년 진행되고, 매년 새로운 플레이어들이 들어온다고 들었는데. 이곳에는 신규 플레이어밖에 보이지 않았어요."

"바로 그거야."

유서아가 핵심을 꼬집었다.

만약 이곳이 보이는 것처럼 평화롭기만 한 곳이었다면, 앞서 튜토리얼을 통과했던 선대 플레이어들이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는 신규 플레이어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플레이어들이 들어왔을 때 존재하던 마을에는, 플레이어가 아닌 평범한 사람들만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설마, 그 한 달이 1층에서의 유예기간인가요?"

"맞아. 한 달이 지나도록 시련에 도전하지 않는 이들은 이곳에서 사라지게 돼."

"그럴 수가...."

"어? 형님, 근데 저, 선대 플레이어라는 사람이 있다는 걸 들었는데요?"

대화를 나누던 중, 바닥에서 흐느끼고 있던 박정필이 어느덧 정신을 차리고 대화에 끼어들었다.

"위치도 들었어?"

"마을 바깥에서 숨어다닌다고 들었는데, 제정신이 아니래요. 저희 사이에서 그냥 미친X이라고 불리는 사람인데."

"오, 진짠가 본데?"

"제가 형님한테 거짓말을 왜 하겠습니까! ...그런 의미로, 이 이명이란 거 다시 못 바꿉니까?"

"응, 못 바꿔."

"흑...."

선대 플레이어.

계획의 설명을 마치는 대로 세운이 가장 먼저 찾아 나서려고 한 인물이었다.

생김새를 들어보니 세운이 찾던 인물이 맞는 듯했다.

맨날 술집에 쏘다닌다고 하더니, 그래도 영 헛짓거리는 아니었나 보다.

"근데 그걸 알면서 왜 한 달을 기다릴 생각인 거죠? 그것보다는 차라리 빠르게 시련을 통과해 탑에 올라가는 게...."

"빨리 올라가 봤자 아무런 소용도 없어."

"네?"

"어차피 탑은 정복되지 않았어. 빨리 올라가는 것보다는, 최대한 힘을 쌓고 모든 이점을 누리면서 올라가야 해."

"안 그러면...."

"안 그러면 어차피 자기 수준에 맞는 층에서 갇히게 될 뿐이야. 한곳에 머무르면서 힘을 키우기는 더더욱 어렵고."

"...그렇군요."

강한철이야 원래 그랬다지만, 유서아마저 세운에게 이런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 묻지 않았다.

아무래도 세운의 이런 행보에 익숙해진 듯하다.

말을 안 했을 뿐이지, 세운이 이런 행보를 보인 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어쩌면, 둘 다 무언가를 눈치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혹시, 한 달 후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알고 계신가요?"

"아니."

아무리 세운이라 해도 모든 것을 알고 있지는 못한다.

한 달이 다 되어가며 이 정보가 노출되었을 때쯤에는, 세운 역시 곧바로 시련에 도전하여 다음 층으로 넘어갔으니까.

탑을 오르면서도 시련에 도전하지 않고 1층의 '사건'을 목격했다는 플레이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단 한 명.

박정필이 말한 선대 플레이어가 유일한 힌트였다.

이렇게 제대로 된 정보도 없으면서 굳이 '사건'에 대해서 알아보는 이유는 바로, 회귀 전에 세운이 가졌던 고유 스킬 때문이었다.

'분명, 여정의 지침표가 반응했었어.'

한 달이 지나기 직전, 세운은 플레이어 중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시련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그 순간, 시련에 돌입하기 전, 아주 잠깐이지만 여정의 지침표가 무언가를 가리켰다.

그 정체가 무엇인지 확인은 못 했지만, 여정의 지침표는 회귀 전 세운에게 수많은 히든 피스를 안겨주었던 유일한 고유 스킬이었다.

때문에, 확신할 수 있었다. 그때, 그것 역시 1층에 숨겨진 가장 큰 히든 피스일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니까 나는 정보를 찾으러 다닐 거야. 그리고 나서는 바로 대비를 시작해야겠지."

"알겠어요. 그럼 저희도 바로 대비를 시작할게요."

"고마워. 뭐, 내가 정보를 찾아올 때까지 조금은 쉬어도 괜찮아. 다들 고생했으니까."

"그렇게 따지면 세운 씨가 먼저 쉬어야죠. 쉬지도 못하고 이제 막 탑에 들어온 참이잖아요?"

"난 괜찮...."

덜컥!

세운이 고개를 저으려던 중, 등 뒤의 방문이 거칠게 열렸다.

그와 함께 시원한 밤공기와 함께, 인위적으로 데워진 따뜻한 바람이 동시에 들이닥친다.

바람을 타고 들어온 건....

-성좌, '배고픈 왕자'가 침을 폭포수처럼 흘리며 크게 울부짖습니다.

"바비큐 준비 완료! 혈랑 오빠, 얼른 나와요!"

"얼른, 얼른! 오늘 밤은 파티라구!"

"파티?"

무슨 말인가 싶어 고개를 돌려보니, 유서아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미소 짓고 있었다.

"제가 부탁했어요. 오늘 하루만큼은 세운 씨도 푹 쉬어요."

"빨리 나와아!"

"다들 기다리고 있다구!"

쌍둥이 자매가 세운의 양팔을 붙잡았다.

끌려 나오듯이 문밖을 나오니, 어쩐지 조용하던 클랜원들이 바비큐 준비를 마치고 세운을 기다리고 있었다.

'...뭐, 가끔은 이런 것도 괜찮겠지.'

달콤한 향기가 넘쳐흐르며, 디아블로 클랜의 환영식이 시작되었다.

제 86화

86. 제86화

디아블로 클랜의 첫 파티가 성황리에 끝이 났다.

세운이 도착하며 긴장되어 있던 마음마저 싹 풀린 모양인지, 다들 튜토리얼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저마다의 성격이 드러난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유서아랑 강한철도 마찬가지였지.'

무뚝뚝하기만 하던 강한철.

무거운 책임감으로 미소 한 번 짓지 못하던 유서아.

어제의 파티로 인해 둘의 새로운 모습을 본 것 같아서 조금 신선한 기분이었다.

뭐, 그에 반해.

"형님, 바로 나가실 겁니까?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제가 또 마을 지리는 빠삭하게 익혔거든요!"

박정필은 튜토리얼 때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뭐, 어제는 세운으로 인해 '술 금지령'을 받아 알코올을 한 모금도 입에 못 댔기에 그랬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혈랑 님! 저, 혹시 여기에 조금만 더 있어도 되겠습니까?"

세운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헤드릭이 다급하게 달려왔다.

대충 견학만 시키고 보낼 생각이었는데, 끝까지 버티고 앉아, 파티까지 참여한 모양이다.

"너희 클랜에는 안 돌아가도 되냐?"

"저 어차피 거기서 왕따였습니다. 저 없어져도 아무도 신경 안 쓸걸요? 하핫!"

왕따라니. 진짜인지 거짓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어떻게든 여기에 남고 싶은 모양이다.

'뭐, 상관없으려나.'

처음 녀석에 세운을 정체를 모르고 클랜에 영입하려 했던 이유와 마찬가지로, 클랜의 인원은 많을수록 좋다.

물론, 믿을 만한 클랜원일 경우에 한해서다.

그런 의미로, 세운이 보기에 헤드릭은 너무나도 단순한 인물이었다.

처음부터 세운의 정체를 모르고 있었으니 무언가 흑심을 품고 접근했을 리도 없었고.

"알아서 해."

"감사합니다! 저, 최대한 열심히 하겠습니다!"

일단은 입단을 허락한 게 아니라 그저 거점에 조금 더 남아 있어도 된다는 뜻이었는데, 세운의 대답을 어떻게 인식했는지.

녀석이 두 팔까지 들어 올리며 신나서 자리로 돌아간다.

헤드릭이 돌아간 다음 순번을 기다렸다는 듯이 강한철이 찾아왔다.

"싸우자."

싸우자, 라니.

거두절미도 정도가 있지, 이 녀석은 직관적이어도 도가 지나치다.

'튜토리얼 때도 이랬었지.'

튜토리얼에서 첫 번째 장을 진행 중일 무렵, 강한철은 그때도 마찬가지로 세운에게 다가와 '싸우자'며 대련을 신청했었다.

그 이후로도 시간이 날 때마다 대련을 겨루었고 말이다.

'하긴, 그것도 제법 전이네.'

마지막으로 대련을 했을 때가 튜토리얼의 다섯 번째 장이 진행되기 전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던 세운이,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한 판만 붙고 가자."

"형님, 마을로 가려던 거 아니었습니까?"

"조금만 기다려. 아니면, 너도 같이 덤빌래?"

"심판 필요하지 않습니까? 제가 또 심판 기가 막히게 잘 봅니다!"

다급하게 자리에서 멀어지는 박정필을 보며, 세운은 그럴 줄 알았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앞을 바라보니 강한철이 어느덧 전투 준비를 마치고 세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멀쩡해 보이네.'

체력이 좋은 걸까?

어제저녁에 맥주를 통째로 들이마셨던 것 같은데, 술기운이나 후유증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체력이 좋을수록 간의 회복력이 빨라지긴 하지만, 음주의 내성은 별개였기에 플레이어라 하더라도 과음을 하면 취하는 게 당연한데, 아무래도 단순히 능력치뿐 아니라 내성 관련 스킬도 생겼나 보다.

전투 준비를 마친 그는 세운에게 받은 황금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색이 이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어르신이 색을 바꿔주셨다."

"잘 어울리는데?"

"화려한 색은 좋아하지 않는다."

검은색에 가까울 정도로 진한 녹색.

황금색일 때의 화려함은 사라졌지만, 그때보다 더욱 강한철에게 어울려 보였다.

게다가, 그의 손에는 못 보던 건틀렛이 끼워져 있었다.

"그건?"

"공적치 랭킹의 보상으로 받은 건틀렛이다. 괜찮겠지?"

"상관없어."

안 그래도 강력하던 강한철의 주먹에 건틀렛이 끼워졌다.

주먹이 얼마나 더 강력해졌을지는 안 봐도 뻔하다. 그럼에도, 세운은 검을 뽑지 않았다.

세운이 생각하는 강한철과의 대련은 어디까지나 '교육'이었으니까.

분위기를 읽었는지,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박정필이 손을 올리며 외쳤다.

"시작!"

쾅!

평소와 마찬가지로, 이번 대련 역시 강한철이 먼저 움직였다. 다만, 바닥에서 들려오는 도약음이 심상치 않았다.

바닥을 얼마나 힘껏 박찼는지, 강한철이 서 있던 자리의 땅이 움푹 파여 있었다.

'빨라졌다.'

민첩하다는 뜻과는 완전히 달랐다.

다리의 근력을 최대한 활용하여, 순간 도약력을 극도로 끌어내 힘을 속도로 전환한 것이다.

순식간에 세운의 코앞까지 다가온 강한철이 망설임 없이 주먹을 내뻗었다.

스륵-

하지만, 속도가 더 빨라졌다고 해서 세운이 당할 리가 없었다.

세운이 태극권의 묘리를 이용하여 팔을 회전시켜 강한철의 주먹을 휘감았다.

그때.

'위험하다!'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의 불길함이 느껴졌다.

일종의 육감이랄까?

세운은 자신의 육감을 믿고, 태극권을 포기한 채 몸을 뒤로 내뺐다.

콰앙!!

강한철이 내려찍은 주먹이 바닥을 찍자, 주먹을 중심으로 균열이 거미줄처럼 넓게 일어났다.

그 움직임을 지켜보며, 세운은 위화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아쉽군. 회심의 일격이었는데."

"강권에 태극권의 묘리를 섞은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적의 공격을 흘려보내거나 이용하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강한철의 말뜻은 간단하다.

본래,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는 데 특화된 태극권의 묘리.

그 뜻을 반대로 적응시켜, 자신의 강권을 상대가 역이용하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그 결과, 상대는 공격을 조금도 흡수하거나 흘려보내지 못하고 꼼짝없이 주먹에 당해야만 했다.

그야말로 강한철에게 가장 어울리는 권법이었다.

게다가.

"내공도 제법 익숙해졌나 보네."

"노력했다."

강한철의 주먹에서 초록색의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 진주언가권을 통해 내공을 담아 주먹을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세운이 자리를 비웠다고는 하나 튜토리얼이 끝나고 시간이 별로 지나지 않았는데.

그사이, 강한철은 놀랍도록 강해져 있었다.

"그리고, 이게 끝이 아니다."

"뭐?"

쿠구구!

강한철이 바닥을 찍고 있던 주먹에 더 큰 힘을 주었다.

균열이 더욱 크게 퍼져 나가며 정말 지진이 난 것처럼 땅이 덜덜 떨려왔다.

힘이 어찌나 강한지, 강한철의 주먹은 땅을 파고 들어가 팔꿈치까지 잠겨 있었고.

그 팔을 뽑아내는 순간.

콰아아아!

떨리던 대지가 폭탄처럼 터져 나갔다.

땅속에 잠겨 있던 크고 작은 돌덩이들이 흙먼지와 함께 튀어나오며 세운을 덮쳐왔다.

-청탑의 묘리에 따라 '와이드 실드'의 탄력이 증가합니다.

세운이 마법을 발현하여 돌덩이를 막아냈다.

물처럼 출렁이며 돌덩이를 튕겨내는 방어막을 보며, 강한철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지어졌다.

자신과의 대련 중에 세운이 마법을 사용한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으니 말이다.

쾅, 콰앙!

모래 먼지 속에서도 강한철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특유의 힘을 이용해 발을 강하게 내려찍으며 진동을 일으켜 세운의 움직임을 방해하고, 발을 내려찍으며 생긴 반동으로 주먹을 크게 내뻗는다.

세운과의 대련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고민했는지 보여주는 전투였다.

태극권이 통하지 않는 것을 깨달은 세운이 공격을 재빠르게 피해 냈지만, 모든 공격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내공을 통해 진주언가권의 제삼 초식, 비천야차(飛天夜叉)가 강화됩니다.

-성좌, '악어를 탄 노인'이 자신의 계약자를 위해 격진(激震)의 힘을 베풉니다.

-플레이어 '강한철'의 비천야차가 강화됩니다.

콰광-!!

처음으로, 둘의 주먹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거대한 충격으로 인해 시야를 가로막던 모래 먼지가 한순간에 사라지고, 돌덩이들도 대포알처럼 저 멀리까지 퍼져 나갔다.

덕분에 숙취로 고생하던 클랜원들이 정신을 차리고 다급하게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그그극-

힘겨루기가 시작되었다.

세운이 폭식의 권능으로 쌓아 올린 근력을 활용하여 강한철을 찍어 누르려 하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힘에서 밀리며 세운의 다리가 바닥에서 밀려 나갔다.

폭식의 권능 덕분에 세운의 능력치는 1층의 플레이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력했지만, 강한철 역시 서열 2위의 마왕, 아가레스에게 선택받은 플레이어다.

게다가 그의 이명인 폭력(爆力)은 힘에 대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아무리 세운이라고 해도 순수한 힘 싸움에서는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무기를 꺼내 들어야 하지 않겠나?"

강한철이 한층 더 강하게 주먹에 힘을 주며, 입을 열었다.

승리를 확신한 목소리. 그러나 고개를 들어 올린 세운의 표정은 조금도 다급해 보이지 않았다.

"내가 너한테 알려줬던 게, 유권(柔拳)이랑 강권(强拳)이었나?"

"뭐?"

"그럼, 이제 쾌권(快拳)을 알려줄 차례겠지?"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태을섬수공(太乙閃手功) ]

- 철저한 금욕생활을 강조하던 전진파의 무공으로써, 공격을 당한 후에야 알 수 있을 정도로 쾌속한 움직임을 구사하는 장법(掌法).

쉬익!

순간, 세운의 움직임이 급변하였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강한철과 주먹을 맞댄 채로 버티고 있었는데, 순식간에 신형이 사라져 버렸다.

세운의 위치를 찾기 위해 강한철이 고개를 돌리려던 찰나, 턱 아래에서 강렬한 충격이 느껴졌다.

뻐억!

범인이었다면 한 방에 뇌진탕을 일으키며 쓰러졌을 법한 일격이었지만, 강한철은 이를 악물며 정신을 다잡고 왼손을 앞으로 휘둘렀다.

세운이 속도전으로 돌입한 것을 깨닫고 어떻게든 몸을 붙잡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세운은 이미 자리에서 사라진 후였다.

태을섬수공.

그야말로 한 마리의 새처럼 번쩍이는 움직임을 가진 무공이었다.

게다가, 시간이 지나며 세운의 신형은 더욱 빨라졌다.

-내공을 통해 태을섬수공의 제일 초식, 비연경(飛燕警)이 강화됩니다.

파바바밧!

세운의 손바닥에 강한철의 전신을 강타한다.

한 마리의 제비가 비행하듯 빠르고 자유롭게.

다음 공격을 예측할 수도 없고, 신형을 따라잡을 수도 없었다.

강한철이 눈을 부릅뜨고 세운의 움직임을 따라가며 공격을 견뎌보았지만.

뻑-

결국, 뒤통수에 엄습한 충격을 견뎌내지 못하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간신히 고개를 치켜들자, 어느새 강한철의 앞으로 당도한 세운이 손을 내밀고 있었다.

"어때, 따라 할 수 있겠어?"

"...한 달이라고 했나? 그 안에, 완벽하게 습득하겠다."

"좋아."

-성좌, '악어를 탄 노인'이 성장한 계약자의 모습에 호탕하게 웃으며 오늘부터는 특훈을 진행할 것이라며 선언합니다!

깔끔하게 승부를 인정한 강한철이 주먹을 꽉 쥐며 대답하였고.

세운이 떠난 이후.

"으아아악!"

"한철 오빠, 이게 뭐예요!"

"거점 안에서 이러면 어떡해요! 기껏 지어둔 건물들이 엉망이 됐잖아요!"

"얼른 도와요! 이거 다 고칠 때까지 다른 일 전부 금지!"

-성좌, '거대한 새'가 계약자의 발언에 대마왕의 눈치를 보며 어쩔 줄 몰라 합니다.

-성좌, '검은 새'가 그래도 할 건 해야 한다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알겠다."

곧바로 수련을 시작하려던 강한철은, 쌍둥이 자매에게 잡힌 채 거점의 수리를 도맡아야 했다.

제 87화

87. 제87화

강한철과의 대련을 마친 후, 세운은 박정필을 데리고 거점을 나와 마을에 도착해 있었다.

선대 플레이어를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해야 할 게 있었기 때문이다.

"이쪽, 맞지?"

"제가 마을에서 구른 짬밥이 몇 갠데! 저만 믿으시면 됩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제법 많은 사람이 보인다.

플레이어와 거주민들. 복장만 눈여겨보아도 두 존재의 차이점을 알아볼 수 있었다.

플레이어들은 튜토리얼의 경계심이 남은 것인지 최소한의 방어구를 착용하고 있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단검 하나쯤은 가지고 다녔으니까.

그에 반해, 거주민들은 평상복을 입은 채 아무 걱정 없는 표정으로 흥얼거리며 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안전하다고 알려진 1층에 걸맞은 모습이었다.

'그러고 보니, 거주민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이곳의 거주민들은 게임에 나오는 npc같이 편리한 존재가 아니다.

말 그대로 거주민. 플레이어와 달리 시스템의 가호를 받을 수는 없지만, 엄연히 탑에서 살아가는 생명체였다.

한 달 후에 무언가 일이 일어난다면, 당연히 저들 역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너무 멀쩡해.'

당장 보이는 마을의 건물들은 너무나도 멀쩡해 보였다.

사람들 역시 온실 속의 화초처럼 아무런 걱정도 없어 보인다.

일 년에 한 번 1층의 플레이어들을 전멸시키는 재앙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저들 역시 피해 가기는 힘들 것이다.

"정필아. 정보 하나만 알아 와라."

"넵! 말만 하시죠!"

"사람들한테 여기서 일 년에 한 번 일어나는 특별한 일이 없냐고 물어봐. 플레이어가 들어오고 한 달 뒤에 일어나는 일."

"맡겨만 주시죠! 이미 친해진 아저씨들이 꽤 있으니까 얼마 안 걸릴 겁니다!"

"그래. 길은 내가 알아서 찾아갈게. 이쪽, 맞지?"

"넵!"

말을 마치자마자 박정필이 자리를 떠났다. 가끔 이상한 짓을 하는 것만 빼면, 역시 꽤 쓸 만한 녀석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길을 걷다 보니, 예민한 세운의 청각으로 날카로운 쇳소리가 들려왔다.

깡, 깡!

'거의 다 왔나 보네.'

망치로 쇠를 내려치는 금속음과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데도 느껴지는 후끈한 열기.

1층의 마을에 존재한다는 하나뿐인 대장간이었다.

하지만, 대장간이라고 해도 1층의 대장간에서 의뢰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었다.

애초에 1층은 평화로운 지역이라 대장간은 무기가 아닌 농기구나 잡기를 만드는 데 특화되어 있었고, 실력도 그리 뛰어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세운이 이곳을 찾은 이유는....

"어르신."

"오, 이게 누구인가! 이것 참, 오랜만이구먼!"

디아블로 클랜의 유일한 대장장이. 고창석을 만나기 위함이었다.

어제 거점을 둘러보며 고창석이 안 보인다 싶었는데, 유서아에게 물어보니 마을의 대장간에 머물고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하긴, 지금까지는 제대로 된 대장질이라고 하기 어려웠으니까.'

지금까지 그가 디아블로 클랜의 모든 장비를 책임져왔긴 하지만 쌍둥이 자매와 마찬가지로, 공적치로 산 기본적인 도구만을 이용한 편법일 뿐이었다.

불과 쇠를 다루는 제대로 된 대장질은 겪어오지 못했다.

그나마 28위의 마왕, 베리스와 계약하고 성좌의 힘에 익숙해지며 다양한 방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진짜 대장간에서 망치를 두드리는 것과는 다를 것이다.

"배웅하러 못 가서 미안하네! 여기도 사용 기간이 정해져 있어서, 시간이 조금 애매했거든."

"괜찮습니다. 그래도 파티는 참석하시지."

"젊은이들 노는 데 늙은이가 가서 뭐 하나. 이런 거라도 열심히 해야지."

"무슨 말이세요. 아름이랑 다운이가 어르신을 얼마나 찾았는데요."

"그런가? 허허! 그 둘을 보고 있으면 꼭 손녀딸을 보고 있는 것 같단 말이지."

고창석이 머쓱하게 미소 지으며 소매로 얼굴의 쇳가루를 대충 닦아냈다.

주위를 보니 이미 완성한 작품들이 쭉 나열되어 있었다.

대충 몇 개를 확인해 보니.

[ 가시 갑옷 ]

분류 : 갑옷

등급 : C-

설명 : 뛰어난 대장장이가 몬스터의 소재와 질 좋은 철광석을 이용하여 만들어 낸 가시 갑옷.

능력 : 1. 무쇠 – 기본적인 방어력 외에 방어력이 추가로 10% 상승한다.

2. 날카로운 뼈 가시 – 근접 공격을 막아낼 시, 데미지의 10%를 적에게 반사한다.

3. 흉터 – 공격력이 10% 상승한다.

대부분이 C급 아이템.

1층의 플레이어가 만든 아이템이 C급을 넘어가다니, 위층의 세력이 보았다면 침을 흘리며 영입 제안을 해 왔을 실력이다.

게다가, 모든 아이템에 공통적으로 들어 있는 능력인 '흉터'.

무기는 물론 방어구에도 공통적으로 붙어 있는 이 힘은, 고창석과 계약한 성좌의 상징이 분명했다.

"허허, 알아본 것 같구먼. 우리 성좌께서 주신 힘이라네."

-성좌, '금관을 쓴 병사'가 아직 조금 아쉽긴 하지만, 조금만 더 집중하면 금세 걸작을 만들어 낼 수 있겠다며 콧수염을 매만집니다.

과연 28위의 마왕, 베리스.

공격적인 무기를 만들어 내는 데에 한해서는 올림포스 최고의 대장장이인 헤파이스토스를 뛰어넘는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다.

그가 만들어 둔 장비를 착용한다면, 다른 건 몰라도 공격력 하나는 확실히 펌핑시킬 수 있으리라.

"아직 적응 중이라네. 불을 다루는 건 영 오랜만이라서 말이야."

"이것도 훌륭한데요."

"허허, 그렇게 안 띄워줘도 된다네. 그래 봤자 그 검을 따라가기는 한참 멀었으니까."

고창석이 세운의 허리춤에 달린 검을 바라보았다.

뒤랑달.

비록 아직 봉인이 덜 풀려 B급의 성능을 가지고 있다지만, 고창석은 뒤랑달이 가진 본연의 힘을 알아보고 있었다.

"인사나 나누려고 찾아온 건 아닐 테고. 뭐 때문에 왔나? 수리? 아니면 제작?"

"제작을 부탁드리려고 합니다."

"흠, 나도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 싶은데 조금 힘들 것 같구먼."

"어째서죠?"

"아직은 자네가 착용하고 있는 것보다 좋은 장비를 만들기 힘들다네. 재료도 부족하고."

아쉬운 듯이 고개를 흔드는 고창석.

아무래도 세운의 '뒤랑달'과 '태조 무황제의 전포'를 보고 그러는 듯하다.

확실히, 고창석의 실력이 아무리 좋아도 지금 상황에서 이런 네임드급 장비를 만들어 낼 수는 없겠지.

하지만, 세운의 목적은 처음부터 그게 아니었다.

"재료라면 있습니다."

"오, 이건?"

"씨 드레이크를 잡고 얻은 소재입니다. 그 외에도, 몬스터들의 소재를 되는대로 모아왔으니 마음껏 쓰셔도 됩니다."

"어째 우리 클랜이 모은 소재 전부랑 비교해도 더 많은 것 같구먼."

"씨 드레이크를 잡으러 가는 길에 잡은 몬스터가 꽤 많았거든요."

세운의 아공간 주머니에서 수많은 몬스터의 소재가 우르르 쏟아졌다.

대부분은 하급 소재였지만, 씨 드레이크를 통해 얻은 비늘이나 송곳니 등은 탑의 하층에서 쉽게 구할 수 없는 고급 소재였다.

"크흠, 괜찮겠나? 이렇게 귀한 소재라면, 조금 더 기다렸다가 더 실력 좋은 대장장이를 만나면 그때 부탁하는 게 나을 것 같네만."

"그런 대장장이를 언제 만날지도 모르고, 전 어르신의 실력을 믿거든요. 그리고...."

"그리고?"

"어르신도 탐나지 않으세요? 씨 드레이크의 소재로 장비를 제작할 기회."

"...크흠흠. 이거, 들켰구먼. 다른 소재들은 대부분 약해빠져서 조금만 잘못해도 부서져 버리거든."

튜토리얼 때부터 보아온 결과. 고창석은 뼛속부터 완벽한 대장장이였다.

그런 사람이 이런 고급 소재를 눈앞에 두고 가볍게 포기를 할 리가 없었다.

"알겠네. 내 최대한 노력해 보지."

"감사합니다."

"장비 유형은?"

"움직임이 편한 경갑옷 세트랑 각종 무기로 부탁드릴게요."

"각종 무기?"

"네.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사용하기 위함이니까 만들고 싶으신 거로 마음대로 만들어 주세요."

"허허, 그렇게 말하는 거 보면 모든 무기의 사용법을 알고 있다는 거구먼. 대단해."

사실, 상황에 따라 사용한다기보다는 마몬의 보물을 사용하기 위함이었다.

평소에는 뒤랑달을 사용하는 게 제일이지만, 순간적인 공격력을 극한까지 끌어 올리기 위해서는 무기를 희생하더라도 마몬의 보물을 사용하는 게 제일이었으니까.

"내구력만 좀 신경 써 주세요."

"걱정하지 말게. 전이었으면 몰라도, 이렇게 제대로 된 시설이 있으면 아주 튼튼하게 만들어 낼 수 있으니."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맡겨만 주게! 질 좋은 소재를 보니 장인의 피가 끓어오르는구먼!"

-성좌, '금관을 쓴 병사'가 이 정도 소재면 새로운 가공법을 사용해도 되겠다며 눈을 반짝입니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병사의 실력을 기대합니다.

-성좌, '금관을 쓴 병사'가 한 손으로 금관을 붙잡은 채 마신께 허리를 크게 숙입니다.

고창석에게 감사를 표한 후, 장비 제작을 위한 사이즈 측정을 마치고 대장간을 나오려던 중, 그가 처음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대장간의 사용 기간이 정해져 있다고 했었지?'

대장간을 대여하기란 쉽지 않다.

아마 고창석이 이 대장간을 대여할 수 있었던 이유도 1층이 평화로운 덕에 그랬겠지.

다른 층에서도 이런 대장간을 사용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

'거점에 임시 대장간이라도 만들어야겠는데.'

일단 임시 대장간은 나중 일로 두고, 지금은 그것보다 대여 기간을 늘리는 게 더 중요했다.

적어도 한 달 정도는 고창석이 여유롭게 대장질을 할 수 있도록 말이다.

대장간의 벽을 따라 조금 걷다 보니, 뒤쪽에서 광석을 정리 중인 사람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혹시, 이 대장간 주인이십니까?"

"그렇소만. 누구쇼?"

"대장간의 대여 기간을 좀 늘리고 싶어 왔습니다."

"그 늙은이의 아들놈인가?"

뼈가 앙상하게 보일 정도로 왜소한 체격의 남성.

손에 낀 두꺼운 장갑이나 얼굴에 묻은 쇳가루가 아니었다면, 대장장이인 줄도 몰랐을 모습이었다.

망치를 제대로 휘둘렀다면 어느 정도 근육은 붙어 있어야 정상일 텐데.

겉모습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형편없는 실력의 대장장이인지 알 수 있었다.

"한 달 정도만 좀 자유롭게 쓸 수 있으면 합니다. 광석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부탁드리고요."

"뭐유? 아니, 대장간 좀 빌려줬더니 누굴 호구로 아나. 나는 뭐 매일 노는 줄 아슈? 나도 최대한 짬 내서 겨우 빌려주고 있는 건디!"

짬을 내기는 무슨.

아까 들렀던 대장간의 안에는 고창석이 만든 작품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아이템을 보지 못했다.

애초에, 대장간에 일이 별로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고창석이 사용 기간을 언급했다는 건, 저 남자가 그만큼 비싼 가격을 불렀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탑에서의 모든 거래는 물물교환이나 공적치의 거래로 이루어진다.

"오천 포인트."

"뭐유? 지금 공적치 가지고 사람을...."

"한 달이 끝나는 시점에 오천 포인트를 추가로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광석은 사용하는 만큼 시세에 맞게 지불하겠습니다."

총 일만 포인트.

거기에 광석의 비용까지 지불하겠다는 말에, 남자의 눈이 커지며 허리가 곧게 펴졌다.

1층의 거주민인 그에게, 일만 포인트는 반년 치 수익에 가까웠다. 아니, 일거리가 줄어든 요즘이라면 일 년을 일해야 벌 수 있는 공적치였다.

그런데 거기에 광석값도 제대로 지불해 준다고 하니 눈이 커질 수밖에.

실제로 탑에 막 들어온 지금, 공적치가 초기화된 플레이어들은 대부분 쥐꼬리만 한 공적치만을 가지고 있었다.

랭킹 1위의 보상을 받은 세운이었기에 10만 포인트 중에서 일만 포인트를 간단하게 지불할 수 있었다.

짧은 고민을 마치고 세운이 큰손임을 이해한 남자는.

"마음껏 사용해 주십쇼! 광석은 얼마든지 캐 올 테니까, 부족한 거라도 있으면 바로 말해 주이소!"

곧바로 곡괭이와 안전모를 착용하며 세운에게 허리를 굽신거렸다.

제 88화

88. 제88화

마을을 대충 둘러보고 있으니 금방 박정필이 도착하였다.

아는 사람이 있어서 얼마 안 걸릴 거라더니, 시간을 확인해 보진 않았지만 대충 삼십 분도 안 걸린 것 같았다.

자신이 그만큼 노력했다는 것을 티 내듯 허덕이던 녀석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바로 보고를 시작했다.

"형님, 알아보고 왔습니다!"

"그래서, 뭐래?"

"아무 일도 없었답니다!"

"...뭐?"

세운이 인상을 찌푸렸다.

플레이어가 전멸할 정도의 사건이 벌어지는데, 거주민은 그걸 모르고 있었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말입니다! 플레이어가 들어오고 한 달 후쯤에 플레이어들이 전부 사라지긴 하는데, 자신들은 아는 게 없다던데요?"

"그럴 리가...."

"오히려 저한테 플레이어들끼리의 약속 같은 게 있는 거 아니었냐고 물어보더라구요. 한 달이라는 시간제한 같은 게 있는 거 아니냐고."

세운이 여전히 인상을 찌푸리고 있자, 녀석이 다급하게 말을 이어갔다.

"거주민 세 명한테 똑같은 대답을 들었으니 확실합니다! 아, 근데 사건은 아니고 조금 이상한 일은 있었다고 했습니다."

"뭔데?"

"플레이어들이 사라지고 난 다음 날에 보면 마을에 전투 흔적이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전투 흔적이라...."

"뭐, 땅이 파이고 핏자국이 묻어 있고. 그런? 그런데 거주민들은 아무것도 몰랐다고 합니다."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냐? 마을 안에서 전투가 벌어졌는데 아무것도 모를 리가 없잖아."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세 명이 다 똑같이 말하니, 저야 뭐 그러려니 했죠."

"음...."

아직 정보가 부족한 탓에 머리를 굴려 보아도 제대로 된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몇 가지 가설이 떠오르긴 했지만, 그마저도 정보가 없으니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역시, 생존자를 찾아내는 수밖에 없나.'

혹시나 단서를 찾을 수 있을까 싶었는데, 조금 아쉬웠다.

생각을 마친 세운이 고개를 돌렸다.

"선대 플레이어의 위치. 알고 있다고 했지?"

"넵! 안 그래도 아까 형님이 부탁하신 거 물어보는 김에, 그 사람 위치도 다시 물어보고 왔습니다!"

"그래, 바로 가자."

"저, 근데 형님."

"왜?"

"저희, 마을에 온 김에 배 좀 채우고 가면 안 되겠습니까?"

무슨 말을 하는가 했더니, 생존자 탐색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평소라면 박정필의 말을 가뿐히 무시했을 세운이었지만....

"...괜찮은 곳 있어?"

"제가 이 마을 맛집은 줄줄이 꿰고 있습니다! 저 박정필이만 믿으십쇼!"

어젯밤의 파티 때문일까? 세운 역시 조금은 긴장이 풀린 듯했다.

* * *

"흐흐, 형님. 어떠셨습니까?"

"괜찮네."

"그냥 괜찮은 것치고는 눈이 엄청 커지셨던데요?"

확실히, 박정필이 안내해 준 맛집의 수준은 뛰어났다.

고기 스튜와 마늘빵이 함께 나오는 것이었는데, 거점에서 먹던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으니 말이다.

특히, 부드럽게 익혀진 채소의 맛이 기가 막혔다.

아무래도 튜토리얼 중에는 채소보다 고기로 끼니를 때웠기에 채소의 식감이 더욱 새롭게 느껴졌나 보다.

그 아삭한 식감에 반한 덕에.

아삭!

세운은 지금도 꼬치 하나를 손에 쥐고 있었다.

고기는 물론 다양한 채소가 꽂혀 직화 구이로 익혀진 요리였는데, 고기도 고기지만 채소의 식감이 환상적이었다.

조만간 아공간 창고에 육회 말고 신선한 채소도 좀 채워 넣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님, 여깁니다!"

꿀꺽.

적당히 구워진 피망을 삼키는 것으로 꼬치구이를 다 먹은 세운의 앞으로 작은 골짜기가 보였다.

중앙으로는 작은 물줄기가 흐르고 있었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모든 게 바위로 이루어진 곳이었다.

"여기 어디?"

"그것까진 저도 모릅니다!"

"뭐?"

"애초에 숨어 사는 사람이라서, 이 주위에서 본 적이 있다는 소문 정도뿐이었거든요. 뭐, 대충 걷다 보면 보이지 않겠습니까?"

역시 박정필이랄까. 뭔가 잘해 오는 듯하면서도 2% 아쉬운 정보력이다.

잠시 한숨을 내쉬던 세운이 탐욕의 권능을 발현하였다.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서칭(searching) ]

- 무색의 마탑에서 개발한 마법으로 주위의 지형, 생물 등을 탐색할 수 있다.

우웅!

세운의 서클이 맹렬하게 회전하며, 주위로 마나를 퍼트려 나갔다.

마치 주변을 스캔하듯이 뻗어나간 마나는 지형을 더욱 입체적으로 띄어주었다.

"오오, 역시 형님이십니다! 이건 또 무슨 마법입니까?"

"쉿."

"흡!"

이전이었다면 세운이 마법을 사용한 것도 못 알아봤을 텐데, 그래도 딴에 탑의 플레이어라고, 세운이 마나를 퍼트리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다.

가르쳐 준 적도 없는데, 어떻게 마나 다루는 법을 깨달은 모양이다.

'음....'

지금 찾고 있는 건 지형의 형태가 아니었다.

세운은 마나를 더욱 섬세하게 다루며 주변의 '흔적'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주변에 새겨진 다양한 흔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자연스럽게 꺾인 나뭇가지나 딱딱하게 굳은 대변, 바위에 들러붙은 털 뭉치 등.

작은 물줄기만 있을 뿐 야생 동물이 살아가기는 어려운 곳이라 생각했는데, 꽤 많은 동물의 흔적이 존재했다.

아무래도 물을 마시기 위해 찾아온 동물들의 흔적인 듯했다.

'믿음직하진 못해도, 정보는 사실일 건데.'

아무래도 주변의 지형이 대부분 바위로 이루어져 있어 흔적을 찾아내기가 어려웠다.

바위 위에서는 가장 찾기 쉬운 흔적인 발자국을 발견하기가 힘들었으니까.

그러던 중....

우웅!

"찾았다."

"오오!"

서칭 마법의 마나 소모량이 생각보다 컸기에 슬슬 재정비하려던 중에 사람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물줄기 주변의 바위에 얕게 눌어붙어 있는 진흙.

흔적의 절반 이상이 벗겨져 있었지만, 길이나 보폭으로 보았을 때 분명히 사람의 신발 자국이었다.

"역시 형님이십니다!"

지금까지 서칭의 마나 소모량이 컸던 이유는 조사 범위가 넓었던 탓이다. 반대로 이미 찾은 흔적을 토대로 경로만을 살펴본다면, 마나 소모량이 그리 크지 않았다.

"집중해야 하니까 조용히 따라와."

"넵!"

세운과 박정필이 골짜기의 안쪽을 향하기 시작했다.

* * *

"형님, 여기 맞는 겁니까?"

"맞아. ...아마도."

"혀, 형님? 아마도라뇨?"

흔적을 따라 골짜기를 들어온 지도 시간이 꽤 지났다.

문제는, 애초에 처음 찾았던 흔적이 신발에 묻은 진흙 자국이었기에 이제 그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서칭 마법으로도 그럴싸한 흔적이 보이지 않아, 지금은 발자국의 방향과 감에 의존해 나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일단 돌아가는 게 어떻습니까? 클랜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넓게 수색하면 훨씬 빠를 것 같은데."

"그 사람, 숨어 지낸다며."

"그러니까 다 같이 찾으면...."

"이런 골짜기에 숨어지내고 있는데, 사람 수십 명이 골짜기를 들쑤시고 있으면 가만히 있겠냐?"

"아?"

게다가, 만약 상대가 신중한 성격이라면 누군가 골짜기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아채고 거주지를 옮길 수도 있었다.

그러니 웬만하면 오늘 안에 생존자를 찾아내는 게 좋았다.

'그래도 흔적이 너무 없는데....'

세운이 난항을 겪으며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던 중.

"크앙-"

두 갈래로 나누어진 골짜기의 왼쪽 길에서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박정필은 듣지 못할 정도로 미약한 소리.

이 소리가 생존자와 연관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골짜기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들려온 소리다.

"가자!"

"네, 넵!"

세운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보법까지 밟으며 바위와 바위 사위를 뛰어다니며, 마치 한 마리의 야수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그 와중에 대단한 건....

"형님, 좀만 천천히 갑시다!"

불평을 늘어놓으면서도, 박정필이 세운의 뒤를 바짝 쫓아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압도적인 민첩 수치에, 보법까지 밟고 있는 세운을 따라오다니. 아무리 발레포르와 계약을 했다고 해도, 생각 이상의 속도였다.

'그러고 보니 이놈이 싸우는 걸 본 적이 없네.'

가장 처음에 한 전투법이 미끼였기 때문일까?

그 이후로도 박정필은 몬스터를 도발한 후 유인하거나, 시간을 끌거나, 정찰을 하는 등, 한결같이 몰이꾼으로서 활동하고 있었다.

발레포르의 힘과 저 정도 속도라면 충분히 다른 방법으로 전투를 벌일 수 있을 텐데.

나중에 기회가 되면 대련이나 한번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속도를 올리고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늑대의 울부짖음이 가까이서 들려왔다.

그와 함께.

"으, 으윽!"

"크릉!"

늑대를 상대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마을의 사람들이 굳이 이런 골짜기 안쪽으로 들어올 리는 없기에, 저 사람이 세운이 찾던 생존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높은 바위 하나를 뛰어넘고, 남자를 둘러싸고 있는 스무 마리가량의 늑대를 발견하는 순간, 세운이 허공에서 뒤랑달을 뽑아 들었다.

-내공을 통해 혈랑검법의 제삼 초식, 혈랑습격(血狼襲擊)이 강화됩니다.

세운의 내공이 붉게 번들거리며 늑대의 형상을 이루었다.

1갑자를 달성한 세운의 내공 덕분에, 그 형상은 이전보다 더욱 선명하고 날카로워져 있었다.

늑대들이 살기를 느끼며 고개를 돌려보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콰과과과!!

"깨앵!"

세운이 바닥에 도착하자마자, 주변에 있던 열 마리의 늑대가 난도질당하며 붕 떠올랐다.

분명 검으로 벤 상처인데, 놈들의 몸에 난 상처는 꼭 맹수에게 물어뜯긴 것처럼 보였다.

곧바로 다음 공격을 준비하려던 중, 오른손등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사티로스의 성흔이 혈랑전설의 설화에 반응합니다.

-성흔의 첫 번째 능력, '공포'가 깨어납니다.

쿠구구구!

세운을 중심으로 붉은 기류가 일렁였다.

압도적인 살기.

이에 남은 늑대들은 동료의 복수도 하지 못하고, 도망도 치지 못한 채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감당할 수 없는 공포에 땅에 머리를 처박거나, 오줌을 지리는 놈들도 있었다.

'이명 덕분이구나.'

혈랑(血狼)의 이명이 생겨나며 얻게 된 잠재력인 공포. 거기에 사티로스의 성흔까지 힘을 발휘하여 시너지 효과가 일어는 듯하다.

단순히 겁에 질려 도망가게 하는 공포가 아닌, 생존 본능을 포함한 상대의 이지를 빼앗는 압도적인 공포.

회색 망토 늑대의 옵션으로 공포를 활용하던 이전보다 더욱 강력해진 모습이다.

"역시, 형님! 크으, 죽여줍니다!"

보아하니 아군은 대상으로 지정되지 않는 듯하다.

마무리를 짓기 위해 한 발을 내딛는 순간, 달아오르던 성흔이 거짓말처럼 차갑게 식었다.

'시간제한이 있는 건가?'

세운으로서도 익숙하지 않은 힘이었기에 생각보다 다루기가 어려웠다.

공포가 풀리자, 늑대들이 정신을 차리고는 다급하게 도망치기 시작했다.

성흔으로 인한 공포는 풀렸으나, 감히 세운에게 덤빌 생각은 못 하겠나 보다.

"형님, 안 따라갈 겁니까?"

"놔둬. 그보다...."

세운이 검을 다시 허리춤에 걸고, 몸 이곳저곳을 물어뜯겨 피투성이가 되어 버린 남자를 바라보았다.

장비가 워낙 해져 있긴 했지만, 회귀자인 세운의 감이 그가 플레이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찾았다.'

세운이 남자에게 손을 내뻗었다.

제 89화

89. 제89화

남자를 발견했을 때쯤에는, 그는 이미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옷은 걸레짝이 되어 있었고, 전신에는 늑대에게 물리고 할퀴어진 상처가 가득했다.

세운이 다급하게 회복 마법을 사용해 보았지만....

'생각보다 상처가 심하다.'

남자의 상태는 생각보다 좋지 않았다.

늑대에게 당한 상처야 세운이 어찌어찌 치료하였지만, 얼마나 오래 방치하였는지 곪을 대로 곪은 상처가 가득했다.

조금만 더 늦게 발견했으면, 분명 이미 늑대 밥이 되었으리라.

그 때문에, 세운은 남자를 등에 업은 채로 디아블로 클랜의 거점으로 달렸다.

탐욕의 권능을 사용할까 하였으나, 지금 남자에게 사용하기에는 애매한 것들뿐이었다.

뒤랑달을 돌려받는 것으로 마몬과의 계약은 끝났기에, 탐욕(眞)의 권능을 통해 포션 등을 꺼내올 수도 없었다.

'4 서클만 됐어도 어찌했겠는데.'

지금 세운의 마나 서클은 세 개.

튜토리얼에서 막 서클을 만들어 낸 1층의 플레이어치고는 말도 안 되게 높은 수치지만, 탑의 전체적인 수준으로 보았을 때는 평균에 살짝 못 미치는 정도였다.

'다음 전투 전에 서클부터 좀 높여둬야겠어.'

어차피 1층에서 한 달 정도는 여유 시간이 남는다.

폭식의 권능을 통해 서클의 마나는 거의 다 채웠으니, 한 달이라면 충분히 다음 서클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니 지금은 우선 남자를 거점에 데려가는 게 우선이었다.

'속도를 좀 내야 할 것 같은데.'

등 뒤에서 들려오는 남자의 숨소리가 갈수록 작아지고 있었다.

혼자 달릴 때는 몰랐는데, 등에 사람을 태우고 있으니 보법도 사용이 어렵고 바윗길이 영 불편해 속도가 나지 않았다.

짧게 고민은 마친 세운은, 곧바로 탐욕의 권능을 일으켰다.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극천산 산양의 발굽 ]

- 정상의 높이가 하늘을 찌를 정도로 높다고 알려진 극천산에 서식하는 산양의 단단한 발굽.

세운의 다리에 보물의 힘이 깃들었다.

산양 특유의 굵은 다리와 뾰족한 발끝이 겹쳐지며, 다리에서 힘이 샘솟았다.

산양의 힘을 느낀 것인지, 지금 상황에서 전혀 상관없는 성흔이 기뻐하듯 반짝이는 것 같았다.

탕!

바위를 박차는 소리와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다.

발이 아닌, 딱딱한 무언가로 바위를 박차는 느낌. 말 그대로 한 마리의 산양이 되어 딱딱한 발굽으로 바위를 박차는 기분이었다.

'이거면 늦지 않게 도착하겠어.'

산양의 다리는 산이나 바위, 절벽 등을 잘 이동하기 위해서 진화해 왔다. 그런 만큼, 등에 사람 하나를 업고 있음에도 세운의 속도는 오히려 이전보다 더욱 빨라졌다.

"형님! 같이 좀 갑시아다!"

뒤에서 들려오는 박정필의 투정을 무시한 채.

어느새 딱딱한 발굽을 이용한 달리기에 익숙해진 세운이 움직임에 더욱 속도를 붙였다.

* * *

"형님 오셨다! 얼른 문 열어!"

박정필의 외침과 함께, 감시탑에 서 있던 클랜원이 세운의 모습을 알아보고 문을 열어주었다.

세운은 멈추지 않고 달려가, 어제 거점을 소개받을 때 보았던 병동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넓은 테이블 위에서 무언가를 제조 중이던 이하늘이 화들짝 놀라며 세운을 바라보았다.

"클랜장?"

"환자다. 치료 좀 부탁해."

"클랜장도 회복 마법을 사용할 수 있지 않나요? 굳이 저한테 찾아올 필요는...."

"나로서는 무리다."

"네?"

설명보다는 직접 확인시키는 게 낫다고 생각한 세운이 남자를 침상 위로 눕혔다.

시체처럼 늘어진 남자는 귀를 가까이 가져다 대야 느껴질 정도로 미약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세운의 등위에서 생을 마감했으리라.

세운의 목소리에서 다급함을 느낀 이하늘이 재빠르게 남자의 상태를 확인하더니,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클랜장이 무리라고 한 이유를 알겠네요."

옷가지를 들춰보니, 곪은 수준을 넘어 썩어가는 상처가 보였다.

왼쪽 발바닥은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고, 오른쪽 무릎은 기형적으로 부풀어 있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상처가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심각한 건 복부였다.

야수의 것으로 보이는 선명한 발톱 자국 주위로, 인근이 보기 흉하게 썩어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일단은 치료부터 시작하겠어요."

이하늘이 이전에 보지 못했던 도구를 꺼내 들었다.

어지간한 검보다 더욱 날카로워 보이는 메스. 그녀는 그것으로 썩어 버린 남자의 상처를 거침없이 잘라냈다.

"크아아악!"

죽어가던 남자의 비명이 병동을 가득 채웠다.

감각이 살아 있다고는 생각하기 힘들 만큼 썩어 있던 상처였는데, 그 와중에 통증을 느끼는 감각만은 살아 있던 듯했다.

그러자, 이하늘이 메스를 들지 않은 반대쪽 손을 남자의 이마에 가져다 대었다.

"조금만 참아주세요."

"크윽... 크으으...."

조금씩 줄어드는 남자의 비명.

아무래도 성좌의 권능을 통해 일종의 마취를 한 것 같았다.

-성좌, '피투성이 사자'가 시간이 없다며 조금 더 과감하게 움직일 것을 권고합니다.

"알겠어요."

서걱, 서걱.

메스를 움직이는 이하늘의 행동에 망설임은 보이지 않았다.

튜토리얼을 진행하는 중 수많은 환자를 치료하던 그녀는 실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이미 훌륭한 치료사가 되어 있었다.

썩은 피부를 도려내고, 내부에 곪아 있는 장기의 일부까지 망설임 없이 절단하였다.

지구의 현대 의학으로도 살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심각한 상처.

그러나, 이곳에는 현대 의학을 뛰어넘을 정도로 뛰어난 힘이 존재했다.

우웅!

그녀의 손에서 붉은 기운이 일렁였다.

서열 5위의 마왕, 마르바스의 힘.

그 힘이 잘려 나간 남자의 상처를 빠르게 회복시키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하얗게 질린 채로 신음하던 남자의 상태 역시 빠르게 좋아졌다.

숨소리가 고르게 변하고, 신음이 사라져간다.

이내 치료를 마친 부위를 면포로 감싼 그녀가 이마의 땀을 닦아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급한 불은 껐어요. 다른 상처들도 심각하긴 한데, 생명이랑 연관될 정도는 아니어서 차차 치료하면 될 거예요."

"고생했다. 치료 실력 많이 발전했는데?"

"저도 가만히 놀고 있었던 건 아니니까요."

그녀의 치료는 단순히 마법 같은 힘이라고만 보기 어려웠다.

처음, 썩은 부위를 도려내던 그녀의 손길.

손에 피를 묻히기 싫어하는 탑의 치료사들에게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치료법이었다.

'아마, 현대 의학과 성좌의 힘을 섞은 거겠지.'

성좌의 힘이라고 해도 만능은 아니다.

썩은 부위를 가만히 둔 채로 치료 마법만 사용하면, 오히려 상처가 덧나거나 악화할 위험이 있었다.

그러한 단점을 현대 의학의 지식으로 메꾼 것이다.

"메스질, 꽤 익숙해 보이던데?"

"밖에서는 원래 간호사였어요. 수술실에 자주 들어간 덕분에 메스의 사용법 정도는 알고 있었거든요."

간호사라.

수술실에 있었다고 해도, 메스를 직접 잡아본 적은 없었을 것이다.

과거의 기억을 토대로, 많은 연습을 거친 덕분에 지금과 같은 치료가 가능해진 것이겠지.

과연, 마르바스가 마음에 들어할 만한 인재였다.

"회복은 언제 될 것 같아?"

"신체적인 회복은 이틀 안에 끝낼 수 있겠지만, 언제 깨어날지는 저도 장담할 수 없어요."

이하늘이 남자의 상처에 진득한 액체를 넓게 펴 바르며 대답했다.

포션은 아닌 것 같고, 아무래도 약초를 갈아 만든 일종의 바르는 약 같았다.

테이블에서 만들고 있던 게 바로 저것이겠지.

"하긴, 충격이 컸던 것 같으니까."

"어차피 지금은 전투도 없고, 환자도 없으니까 일어날 때까지 제가 보살피고 있을게요."

"고마워."

"아니에요. 환자가 없어서 갑자기 붕 뜬 기분이었거든요."

남자는 한 달 뒤에 일어날 일을 알고 있는 핵심 인물이다.

그만큼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운이 계속 지켜보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먼저 남자를 봐주고 있겠다니, 세운으로서는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뭐 필요한 거라도 있어? 약을 만들고 있던 것 같은데."

"아, 환자가 없다고 놀고 있기 좀 그래서 인근의 약초를 좀 찾아봤거든요. 괜찮으시면...."

"약초를 좀 구해 달라. 이거지?"

"네. 제가 모두의 뒤를 따라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니, 비상약을 만들어 두면 좋을 것 같아서요."

탐욕(眞)의 보물창고를 통해 마몬의 진짜 보물을 빌려오고 싶었지만, 그 계약은 뒤랑달을 돌려받는 것으로 끝났다.

그건 애초에 그런 계약이었으니까.

물론, 공적치 상점을 통해 포션을 구입할 수는 있지만, 공적치 상점의 포션은 생각보다 가격이 비싸다.

이곳은 게임이 아니었으니까.

포션은 제2의 생명이라 불릴 정도로 귀하고 값비싼 물건들이었다.

약초를 이용한 상비약이라면 포션에 비해 효과가 조금 떨어지긴 하겠지만, 곁에 치료사가 없을 때의 응급조치 정도는 충분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 언덕이라면 약초가 제법 많을 것 같은데.'

세운의 머릿속에 1층의 필드 중 한 구역이 떠올랐다.

회귀 전, 마지막 순간까지 1층에 머물렀던 그인 만큼 여정의 지침표를 통해 1층의 다양한 구역을 떠돌아다녔다.

지금 떠올린 곳 역시 그 구역 중 하나였다.

'거기라면 마나를 모으기도 훨씬 좋을 테고.'

네 번째 서클의 생성을 위해서는 뛰어난 수련법은 물론, 수련에 적합한 장소 역시 필요했다.

1 서클은 필요한 마나의 수치가 그리 높지 않았기에 대충 거점에서 진행했어도 됐겠지만, 지금 세운이 도전하려는 것은 무려 4 서클이었다.

잊혀진 영웅의 수행처처럼, 마나가 풍부한 장소가 있다면 수련의 성과가 기하수급적으로 상승한다.

그런 의미로, 세운이 떠올리는 곳은 1층에서 가장 뛰어난 수련 터라고도 할 수 있었다.

"좋아, 약초는 내가 캐 올게."

"정말요? 아, 혹시 모르니 사람들과 같이 가시는 게...."

"아냐. 혼자가 편해."

"음, 하긴. 클랜장의 힘은 저도 알고 있으니까요. 저희가 따라가도 방해가 되겠죠."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가서 할 일이 있거든."

"할 일이요?"

"그것까진 몰라도 돼. 아마, 빠르면 며칠. 늦으면 보름 정도 걸릴 거야."

"그렇게나 오래 걸려요?"

"거리가 멀다기보다는, 아까 말한 할 일 때문이야."

"아...."

세운이 가볍게 생각하고는 있지만, 4 서클은 절대 가벼운 수준이 아니었다.

마법에 재능이 없는 자라면 평생 수련해도 도달하지 못하고, 마법에 재능이 있는 자라도 정도에 따라 수십 년이 걸리기도 한다.

간혹 천재라 불리는 이들이 몇 년 만에 서클을 생성하고는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천재의 경우다.

지금 세운이 믿는 것은 단 세 가지였다.

마몬의 보물과 뛰어난 수련 터, 그리고 회귀 전에 살아남기 위해 평생 다루었던 마나의 컨트롤.

그 때문에 늦어도 보름이라는 말을 내뱉을 수 있었다.

"무슨 일 있으면 유서아한테 말해 줘. 여기서도 통신석은 사용이 가능하니까."

"알겠어요. 환자는 제가 책임지고 보고 있을게요."

"그럼, 잘 부탁해."

남자 하나를 등에 업고 다급하게 뛰어오느라 조금은 숨이 차올랐지만, 이하늘과 대화하는 사이, 세운의 호흡은 놀라울 정도로 안정되어 있었다.

그녀가 조금 쉬다 가라며 붙잡았지만, 세운은 그러지 않았다.

'한 달. 한 달 안에 전투력을 올리는 것은 물론, 1층의 히든 피스를 모조리 찾아낸다.'

한 달이라는 기간은, 세운에게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으니 말이다.

제 90화

90. 제90화

거점을 빠져나오자마자 세운은 마을과 반대 방향으로 내달렸다.

탑의 1층.

건물 안이라는 사실이 전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드넓은 필드였다.

하긴, 애초에 1층에 들어와 고개를 들었을 때부터 그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건물 안이라면, 끝없는 지평선과 푸른 하늘이 존재하는 것부터가 말이 되지 않았으니까.

탓, 타닷!

세운이 타고 있는 늑대의 흰색 골격, 스켈레톤 울프가 초원을 빠르게 질주했다.

박정필에게 적랑을 빌릴까 하다가, 계속 그러는 것도 아닌 것 같아서 백현을 통해 새롭게 만들어 낸 스켈레톤이었다.

그는 성좌와의 계약 덕분인지, 사체라면 무한에 가깝게 저장이 가능한 아공간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스스로 '강화'라 칭한 작업 덕분인지, 그에게 받은 스켈레톤은 기존의 늑대보다 훨씬 뛰어난 힘을 자랑하고 있었다.

'슬슬 다 와 가네.'

스켈레톤의 빠른 기동력 덕분에 해가 지기 직전에 원하던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 반짝이는 동산 ]

일반 필드 중에서도 이렇게 유독 이름이 정해진 구역이 있다.

그런 곳은, 히든 던전만큼은 아니더라도 무언가 가치가 있는 경우가 많았다.

히든 던전이 숨겨져 있거나, 특수한 아이템을 얻을 수 있다든가 그런 것들 말이다.

'처음 이곳을 발견했을 때는 잠시 넋이 나갈 뻔했지.'

반짝인다는 이름과는 달리 너무나도 평범해 보이는 동산.

그러나, 그 진가는 해가 지고 난 뒤에 보였다.

마침, 세운의 뒤로 해가 떨어지며 하늘이 붉어지자 눈앞의 동산에서 이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스르르-

동산을 가득 채운 풀과 꽃잎에서 푸른빛이 일렁인다.

그 사이에서 작은 불빛이 떨어져 나와 반딧불처럼 허공에 떠오른다.

불빛은 제각기 다른 움직임을 보여주며 허공에 다양한 자수를 수놓았고, 꽃들은 그에 미소를 짓는 것처럼 활짝 피어난다.

이게 바로 반짝이는 동산의 진정한 의미.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라 무덤덤한 줄 알았는데, 다시 보아도 그 몽환적인 분위기에 넋을 놓게 되었다.

'정령이 있다는 말은 그만큼 마나 분포도가 높다는 뜻이지.'

허공을 춤추고 있는 작은 불빛의 정체는 정령이었다.

정령이라고는 해도, 최하급 정령도 되지 못한 존재라 아직 이지를 갖추지 못한 존재이지만 말이다.

그런 정령들이 가득하다는 건 이곳 주위에 마나가 가득하다는 뜻이었고, 이는 마나를 쌓기 좋은 수련 터라는 뜻이기도 했다.

때문에 세운이 약초를 떠올리면서 굳이 이곳까지 달려온 것이다.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이나스의 식물도감 ]

- 한때 대륙 최고의 식물학자로 불리던 이나스의 식물도감. 단순히 찾아낸 식물의 종류뿐만 아니라 식물의 특성을 구분하는 법까지 상세히 적혀 있다.

세운이 이름 날리던 모험가이긴 했지만, 식물에 대해서는 아는 지식이 거의 없었다.

때문에 동산에 발을 디디는 순간 곧바로 탐욕의 권능을 사용하였다.

그러자, 식물에 관한 다양한 지식들이 머릿속에 스며들며 눈앞의 풍경이 한층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여기 빛나는 꽃들, 그냥 마나가 많다고 빛나는 게 아니었구나.'

지식이 없을 때는 그저 그러려니 하고 지나친 것들이었는데, 지식이 생겨나니 반짝거리는 꽃잎이 마나를 흡수하고 저장하는 기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옆에 자라난 작은 풀잎은, 봉오리처럼 작게 오므려 있었는데 정령들이 머물기 좋아 보였다.

그것들을 지켜보며 알 수 있었다.

이곳은 단순히 마나가 많은 곳이라기보다는, 식물들이 마나와 잘 공생을 하기에 더욱 빛나는 곳이라는 걸.

'잘만 정제하면 마나 포션을 만들어 낼 수도 있겠어.'

세운이 반짝이는 꽃들을 조심스럽게 채집하였다.

식물도감에 적힌 것은 식물의 종류나 구분법만이 아니라 채집법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뿌리가 상하지 않게 조심스럽게 땅을 파내는 세운의 모습은 마치 이름난 식물학자를 보는 것만 같았다.

'이건 지혈 성분이 있어 보이고. 이건... 독초로 보이는데, 챙겨가면 도움이 되겠지?'

동산을 망치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신중하게 식물을 골라 채집하였다.

마나 분포량이 많기 때문일까?

세운의 예상대로 이곳에는 다른 곳들보다 훨씬 다양하고 뛰어난 성능의 약초들이 존재했다.

반쯤 보이던 해가 저물며 하늘이 완전히 어두워졌지만, 반짝이는 꽃잎과 정령들 덕분에 '밤 올빼미의 눈'이 활성화되지 않아도 눈앞이 선명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찌뿌둥한 허리를 치켜들자, 어느덧 달이 머리 바로 위까지 올라와 있었다.

아공간을 확인해 보니 제법 많은 양의 약초들이 쌓여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어차피 시간은 한 달가량 남았다.

만약 이걸 가져다주고도 부족하다고 하면, 다시 한번 찾아오거나 위치를 알려주고 직접 채집하라고 해도 될 일이었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수련 터를 찾아볼까?'

동산의 마나 분포도가 대체적으로 높긴 하지만, 동산 안에서도 마나가 적은 곳이 있고 많은 곳이 있다.

그러니 기왕이면 동산 안에서도 마나 분포도가 가장 높은 곳을 찾는 게 가장 좋았다.

'서칭.'

우웅!

세운을 중심으로 마나의 파문이 퍼져 나간다.

선대 플레이어의 흔적을 찾기 위해 배운 탐지 마법, 서칭. 이는 마나를 이용하여 흔적을 찾는 만큼, 사용 방법에 따라 마나 분포도를 조사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렇게 보니 더 아름답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이곳을 가져올 수 있다면 자신의 창고에 보관하고 싶을 정도라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마몬마저 인정한 아름다운 경치.

이 동산의 풍경은 그야말로 하나의 보물이나 다름없었다.

세운은 무언가에 홀린 듯이 마나의 파장을 따라 동산 안을 걷기 시작했다.

그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동산의 가장 위를 향하고 있었다.

'역시 저긴가?'

-성좌, '시기를 둘러싼 뱀'이 너무나도 아름다운 지상의 풍경에 낮게 감탄합니다.

볼록 솟은 동산 위. 그곳에는 주변의 꽃잎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수려한 빛을 흘리고 있는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신수(神樹)가 아닐까 싶은 그 모습에, 레비아탄마저 감탄을 터트렸다.

그런데....

'상태가 조금 이상한데.'

나무에서 흘러나오는 빛에 듬성듬성 빈틈이 보였다.

누군가 사과를 파먹은 듯이 비정상적인 모습.

외관상으로는 아무런 문제도 없고, 오로지 마나만 비어 있었기에 회귀 전에는 못 알아봤나 보다.

그 흔적이 너무 교묘해서, 서칭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지금도 알아채지 못할 뻔했다.

가까이 다가가 확인하자, 상태는 더욱 심각했다.

'멀리서 볼 때는 몰랐는데, 시들어 가고 있었구나.'

마나가 빠져나간 부분이 검게 변색되어 있는 것은 물론, 뿌리 쪽도 메말라 있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풍성해 보이던 나뭇잎 사이로도 앙상한 가지만 남은 부분이 꽤 보였다.

나무의 상처들이 아름다운 빛에 가려져 있었던 것이다.

찬찬히 나무의 상태를 확인하던 중, 세운은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몬스터의 짓이다.'

탑에는 수많은 몬스터가 존재하고, 그중에서는 이것처럼 마나를 파먹고 사는 몬스터 역시 존재했다.

이 나무의 상처 역시 놈들의 짓이 분명했다.

마나 분포도가 가장 높은 이 자리에서 수련할 생각인 세운이었기에, 곧바로 몬스터를 정리할 방법을 떠올렸다.

유도제를 사용하여 몬스터를 유인하거나 몬스터들이 나타날 때까지 대기하는 수도 있었지만.

수련 장소에 도착한 지금, 괜히 귀찮게 시간을 낭비하기는 싫었다.

생각을 마친 세운의 손아귀에 검은 번개가 몰려들었다.

-흑탑의 묘리에 따라 '라이트닝 웨이브'의 위력이 강화됩니다.

손아귀의 번개를 신중하게 제어한다.

서칭 마법을 사용하여 마나의 파장을 퍼트렸을 때처럼, 섬세하게.

나무를 포함하여 주변의 자연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범위를 조절하였다.

당장에라도 빠져나가고 싶다는 전류를 간신히 제어한 후, 범위 설정을 마치고, 주먹을 움켜쥐자.

파지지직!

주위로 검은 번개가 넓게 퍼져 나갔다.

흑탑의 묘리 덕분에 위력이 강화되긴 했지만, 공격보다는 탐지에 가까운 사용법이었다.

그와 함께.

"그그극!"

극도로 미약한 신음이 귓속으로 들어왔다.

얼마나 미약했는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바람 소리에 겹쳐 듣지 못했을 정도다.

하지만, '코볼트의 짝귀'로 강화된 세운의 청각을 속일 수 없었다.

세운은 곧바로 검을 뽑아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검을 내질렀다.

푹-

이어지는 침묵.

땅속 깊이 박힌 검에서는 아무런 느낌도 전해지지 않았고, 몬스터의 신음 역시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이미 예상한 참이다.

저 나무의 흔적처럼 마나를 포식하며 살아가는 몬스터는 대부분 영체(靈體)의 모습을 띠고 있었으니까.

일반적인 물리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흑탑의 묘리에 따라 '체인 라이트닝'의 위력이 강화됩니다.

파지직!

"그윽! 치이잇-"

뒤랑달을 전도체 삼아, 땅속으로 전류를 흘려보냈다.

그러자 즉각 나타나는 몬스터의 반응.

땅속에서부터 몬스터의 희미한 형체가 유령처럼 떠올랐다.

"블러리 버그. 이놈들이었구나."

거대한 딱정벌레의 유령이라도 되는 듯한 모습.

세운에게 당한 공격 때문인지, 녀석의 왼쪽 갑각이 시꺼멓게 타들어 가 있었다.

게다가, 세운이 이놈이 아닌 '이놈들'이라고 한 이유는 간단했다.

애초에 블러리 버그들은 단독 생활이 아닌 무리를 지어 생활하는 몬스터였으니 말이다.

그 말을 증명하듯.

"칙-"

"틱, 티킥-"

바닥과 나무 안, 심지어 하늘 위에서 블러리 버그들이 연이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처음 보았던 딱정벌레 말고도 잠자리, 사마귀, 지네 등. 다양한 형상을 하고 있는 블러리 버그들.

'역시 탑이네.'

녀석들은 본래 탑의 1층에 존재할 리가 없는 몬스터였다.

물리 공격이 아예 통하지 않는 것들이니, 아직 마나를 다루는 플레이어가 별로 없는 1층에서는 무적에 가까운 몬스터였으니까.

그런 놈들을 이런 곳에 숨겨 놓다니.

아무리 히든 피스라고 하여도, 유저에 대한 배려 따위는 찾을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치잇!"

"드득, 드드듯-"

무리가 모두 모이자, 몬스터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세운에게 달려들었다.

감히 자신들의 동족을 상처 입히고, 서식처를 위협하는 침입자를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듯이.

여태껏 1층에서 그 누구도 자신들을 다치게 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녀석들의 눈에서는 조금의 무서움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상대를 잘못 골랐다.

-흑탑의 묘리에 따라 '다크 플레어'의 위력이 강화됩니다.

세운의 손 위에서 나타난 검은 불꽃이 불이라는 개념과는 상반되게 주변의 빛을 맹렬하게 흡수했다.

주위에 반짝이는 불빛이 가득하기 때문인지, 다크 플레이어는 유독 화려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수련 전에, 마나 좀 비우고 시작해 볼까?"

콰르르륵!

평소에는 심각한 마나 소모량 때문에 최대한 절제하며 사용했던 마법이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3 서클 마스터에 달하는 세운의 마나를 모조리 집어삼킨 검은 불꽃이 맹수처럼 흉악하게 크기를 키워 나갔다.

그제야 세운에게 달려오고 있던 벌레들이 주춤하며 거리를 벌리려 하였으나, 검은 불꽃은 이미 벌레들에게 시커먼 아귀를 벌린 채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제 91화

91. 제91화

치이익-

세운의 주위로 새까맣게 익은 벌레들이 배를 뒤집어 까고 있었다.

과연, 다크 플레어. 마나 소모량이 큰 만큼 위력만큼은 확실한 마법이다.

다리를 꿈틀거리며 경련을 일으키는 벌레도 있었지만, 검은 불꽃은 집요하게 생명력을 불태우며 모든 벌레의 생을 불살랐다.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본래 1층에 존재할 리가 없는 몬스터였기에 경험치 역시 상당했다.

튜토리얼에서 말도 안 되게 많이 레벨을 올렸던 세운이 한 번에 레벨이 올랐을 정도였으니까.

마나를 갈무리하던 세운은, 애타게 식사를 기다리고 있을 한 존재를 떠올리며 벌레들에게 손을 내뻗었다.

-폭식의 어금니가 먹이를 포식합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난 검은 이빨들. 그것들은 평소처럼 먹이를 씹지도 않고, 벌레들을 한입에 집어 물어 꿀꺽 삼켰다.

베엘제붑이 그만큼 배고팠다는 건지, 벌레들이 영체의 특성을 지니고 있어 씹기가 불가능해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주위의 벌레들이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블러리 버그'를 포식하였습니다.

-양분을 흡수하여 마나가 소폭 상승합니다.

-'브라운 울프'를 포식하였습니다.

-양분을 흡수하여 마나가 소폭 상승합니다.

'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능력치가 아닌 마나 그 자체가 흡수되었다.

물론 대량의 몬스터를 지정 포식할 때는 마나가 오르긴 했지만, 이렇게 몬스터 하나하나의 마나를 따로 흡수하는 건 처음이었다.

아마, 놈들이 그만큼 능력치보다는 마나에 특화된 존재이기 때문이겠지.

네 번째 서클을 만들 생각이었던 세운으로서는 무척이나 환영할 만한 상황이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비쩍 마른 몰골로 바닥을 기어 다니다 힘겹게 먹이를 집어삼킵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놀랍도록 신선한 맛이라며 크게 감탄합니다.

-성좌, '배고픈 왕자'의 비쩍 말랐던 몸이 빠르게 차오릅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물배를 채운 느낌이라 조금 아쉽긴 하지만, 훌륭한 식사였다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폭식의 권능을 사용한 게 오랜만이기 때문일까 베엘제붑의 반응이 유독 요란스러웠다.

'하긴, 폭식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는 건 내가 죽인 몬스터뿐이니까.'

전날에 파티를 벌였을 때도, 베엘제붑은 군침을 흘리며 세운의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렇게 보니 조금 안쓰럽긴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세운이라고 해도 베엘제붑을 위해 매일 같이 몬스터를 사냥하고 다닐 수는 없었으니까.

오히려 이렇게 적당히 먹이 간격을 벌리며 먹이 교육을 해 둘 필요가 있었다.

아마, 세운의 이런 생각을 읽었다면 아무리 베엘제붑이라 하여도 불같이 화를 냈으리라.

그래 봤자 맛있는 먹이를 하나 먹여주면 화가 싹 풀리겠지만 말이다.

스으으-

"응?"

벌레가 모두 사라지자 어쩐지 주위가 더욱 환해진 느낌이 들었다.

다크 플레어를 사용한 탓에 어두워진 빛이 돌아오는 건가 싶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벌레들로 인해 파먹혀 있던 나무에서 지금까지보다 더욱 찬란한 빛이 뿜어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반짝이는 동산의 나무가 악충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반짝이는 동산의 나무가 당신에게 감사의 인사를 표합니다.

-보상으로 '반짝이는 열매'를 획득합니다.

-반짝이는 동산의 나무가 악충으로부터 입은 상처를 회복하려 합니다.

-상처를 회복하는 동안, 나무의 주위로 마나 분포도가 더욱 상승합니다.

나무의 풍성한 나뭇잎 사이에서 빛나는 열매 하나가 천천히 떨어지더니, 세운의 손 위에 안착하였다.

빛이 그리 강하진 않았지만, 세운은 이 열매가 그만큼 뛰어난 마력을 압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반짝이는 열매 ]

분류 : 영약

등급 : C+

설명 : 반짝이는 동산의 나무가 악충에게 숨기며 오랜 시간 동안 품고 있었던 열매.

능력 : 1. 마나의 정수 – 섭취 시, 마나의 흡수량이 대폭 상승한다.

영약.

그것도 영약 중에서도 상당히 귀하다는 '마나를 상승시키는' 영약이었다.

'1층의 히든 피스는 전부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그건 세운의 오만이었던 듯하다.

회귀 전, 여정의 지침표로 여러 히든 피스를 찾아냈던 세운이었지만, 당시에는 그 히든 피스를 파헤칠 능력이 없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이 탑에는 아직 세운이 알지 못하는 히든 피스가 엄청나게 많을 것 같았다.

게다가.

'마나 분포도의 상승이라.'

나무의 상처가 회복되는 동안, 주위의 마나 분포량이 상승한다고 하였다.

거기에 영약까지 섭취한다면? 그야말로 마나를 수련하기 가장 이성적인 상황이었다.

꿀꺽.

나무 기둥에 등을 기댄 세운은, 작은 앵두 같은 열매를 한입에 삼키는 것으로 마나의 수련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 * *

현재까지 세운이 배운 마나 수련법은 두 가지였다.

청탑의 수련법과 흑탑의 수련법.

청탑의 수련법은 서클의 훌륭한 기반을 닦아주는 것은 물론, 마나의 유동성을 높여주어 섬세한 컨트롤이 가능하게 해 준다.

그에 반해 흑탑의 수련법은 어디까지나 공격에 치중되어 있었다.

본래는 3 서클을 다른 수련법을 이용하여 균형을 잡으려 하였으나, 3 서클을 생각보다 일찍 생성한 덕분에, 현재 세운의 서클은 균형이 깨져 있는 상태였다.

만약 이대로 네 번째 서클마저 다크 서클로 만들었다가는, 자칫 서클이 불안정해질 수도 있었다.

그 때문에 세운이 선택한 것이 바로 이것.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브라운 마나 서클 ]

- 제국의 칠대 마탑 중 하나인 황색의 마탑에서 간부 이상의 직계 제자에게만 전수된다고 알려진 수련법.

브라운 마나 서클. 황색 마탑의 수련법이었다.

대지 마법을 주로 사용하는 황탑은 마법의 특성과 마찬가지로 마나와 서클 역시 바위처럼 단단하다.

대지 마법만 아니라 실드 같은 물리계 마법도 단단하게 만들어 준다.

그뿐만 아니라, 브라운 마나 서클은 그 특유의 튼튼함으로 서클의 기둥이 되어 주기도 한다.

때문에, 황색의 마법사들은 전투 중에 서클이 깨지는 일이 가장 적은 마법사로도 알려져 있었다.

청색의 수련법으로 쌓은 바닥과 황색의 수련법으로 세운 기둥.

두 가지라면, 불안정한 서클을 확실히 바로잡을 수 있을 터였다.

"후우...."

숨을 깊게 내쉬며, 세운이 정신을 집중한다.

그러자 아래에서는 든든한 대지의 기운이, 등 뒤에서는 나무의 굳건한 기운이 느껴졌다.

균형을 맞추기 위해 선택한 수련법이지만, 반짝이는 동산이라는 지형은 황탑의 수련법과 가장 어울리는 장소이기도 했다.

우우웅!

풍만한 대지의 느낀 서클이 조금씩 회전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느리게,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바위가 굴러가듯 가속도가 생겨나며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그 속도가 얼마나 빨랐는지, 마나 분포도가 포화할 정도로 높아진 주위에서도 끌어 올 마나가 부족해질 지경이었다.

그때, 세운이 삼켰던 열매의 힘이 빛을 발했다.

-특정 수련법의 사용으로 '반짝이는 열매'의 마나 흡수율이 대폭 상승합니다.

본래, 영약이란 복용하는 방법에 따라서 그 흡수율이 달라지는 법이다. 그 때문에 대부분은 탕약으로 만들어 복용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세운은 달랐다.

열매를 가공하여 복용하는 대신, 극도로 뛰어난 수련법을 통해 영약의 흡수율을 상승시킨다.

반짝이는 열매에 깃들어 있던 마나의 정수가 빠르게 회전하는 서클 안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

"...?"

"...!"

갑작스레 일렁이는 마나의 파장에 이변을 느낀 정령들이 세운에게 모여들었다.

이지가 존재하지 않는다지만, 그들은 모두 마나에서 태어난 정령들. 그러니 마나 친화력이 높은 존재에게 관심을 가지게 마련이었다.

-정령들이 당신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합니다.

-정령이 모여듦에 따라, 주변의 마나 분포도가 더욱 상승합니다.

마나에서 태어난 정령들이 모여드니 마나 분포도가 상승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덧 동산 대부분의 정령들이 세운의 주위로 몰려들어 있었다.

전체적으로 밝은 빛을 은은하게 흘리고 있던 동산의 빛이 전부 세운에게 집중되었다.

그럴수록 세운의 서클은 멈추지 않고 더욱 빠르게 회전하였다.

높아진 마나 분포도와 영약, 그리고 정령의 힘이 겹치며 비정상적으로 순도 높은 마나가 빠르게 흡수되고 있었다.

드드드득!

세운이 가지고 있는 세 개의 서클 주변에, 모든 서클을 아우르는 크고 단단한 원이 생겨났다.

그것은 정말 기둥처럼 든든하게 다른 서클을 받쳐주었고 채 한 시간도 지나기 전에 기둥의 건설이 완료되었다.

-황탑의 수련법을 통해 네 번째 마나 서클(Mana circle)을 생성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새로운 서클의 생성에 따라 4 서클 마법의 사용이 가능해졌습니다.

-마나 서클의 수준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의 수준이나 위력, 속도 등이 상승합니다.

-황탑의 수련법이 가진 묘리에 따라 사용하는 마법이 이전보다 더욱 견고해집니다.

-놀라운 업적을 달성하였습니다.

-보상으로 100,000point를 획득하였습니다.

아무리 세 번째 마나 서클이 거의 다 차오른 상태였다고는 하나, 겨우 한 시간 만에 네 번째 서클을 완성하다니.

이것은 탑의 길고 긴 역사를 살펴보아도 존재하지 않는 일이었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아무리 자신의 권능을 사용했다고 하나 믿기지 않는 성장 속도라며 날개를 크게 펼칩니다.

-성좌, '시기를 둘러싼 뱀'이 경이로운 성장 속도에 감탄하며 당신과의 약속에 더 큰 신용을 느낍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이 속도라면 더 맛있는 먹이도 금방 먹을 수 있겠다며 침을 흘립니다.

-성좌, '다섯 번째 날'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입니다.

당연하게도 세운을 지켜보고 있던 성좌의 눈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다만,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네 번째 서클을 생성시킨 것도 모자라, 서클의 회전이 멈추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빨라졌다.

이전이 경사를 구르는 바위와 같았다면, 지금은 절벽에서 떨어진 바위처럼 맹렬한 속도로.

이것은 무턱대고 좋아할 일이 아니었다. 당장 마나를 흡수하고 있는 세운이 서클을 주체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으니까.

'이대로는 위험하다.'

세운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진 바위가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스스로의 힘과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깨지는 것처럼 자신의 서클 역시 이대로 한계를 돌파하면, 서클 자체가 깨져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그것을 인지하는 순간, 세운은 다급하게 탐욕의 권능을 발현하였고, 동산의 꼭대기로 녹색의 바람이 불어닥쳤다.

제 92화

92. 제92화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그린 마나 서클 ]

- 제국의 칠대 마탑 중 하나인 녹색의 마탑. 그곳의 3대 마탑주 리버스 제르엘린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비전 수련법.

세운이 선택한 해결 방법은 새로운 마나 수련법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이전에 잊혀진 영웅의 수련 터에서 폭주하는 마나를 단전과 서클 두 군데로 나눠 보내어 지정시켰던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흐름에 따르며, 바다와 같은 수용력을 가진 녹탑의 수련법이 폭주하는 마나를 두 갈래로 나눕니다.

이번에는 단전과 서클이 아닌, 마나를 두 개의 서클로 나누어 보낸다.

하나는 기존에 세워진 브라운 마나 서클에, 하나는 새로운 그린 마나 서클에.

물론, 이는 매우 위험한 행동이었다.

이제 막 네 번째 서클이 만들어진 상황에서, 무턱대고 다섯 번째 서클을 만들어내다니.

하지만, 세운은 확신할 수 있었다.

'충분하다.'

언덕의 나무와 영약의 힘, 거기에 정령의 힘까지 더해져 이곳의 마나 포화도는 어지간한 용맥(龍脈)보다 뛰어난 수준이었다.

흡수만 잘해 낸다면, 충분히 다섯 번째 서클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우웅-

예상대로, 두 개의 서클을 사용하자 팽팽하게 과열되던 네 번째 서클이 조금씩 진정되었다.

시원한 바람이 들이닥쳐 열기를 식혀주는 기분이었다.

실제로도, 세운의 주변으로는 시원한 산들바람이 몰려들고 있었다. 녹탑의 수련법에 반응하여, 바람의 마나가 일렁인 덕분이다.

휘이이-

황색의 서클이 기둥 같았다면, 녹색의 서클은 벽처럼 부드럽게 모든 서클을 휘감아 주었다.

두 개의 수련법을 동시에 사용하는 위험한 상황이었음에도, 서클의 균형이 잘 맞아떨어져 서서히 안정을 되찾아갔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마나가 차오르는 충만한 기분을 즐기며 시간의 개념을 잊고 말았다.

시원한 밤공기가 가라앉고, 촉촉한 아침 이슬이 살을 적셔왔다. 곧이어 나뭇잎 사이로 따사로운 아침 햇살이 비춰 들어올 때쯤에야....

-녹탑의 수련법을 통해 다섯 번째 마나 서클(Mana circle)을 생성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새로운 서클의 생성에 따라 5 서클 마법의 사용이 가능해졌습니다.

-마나 서클의 수준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의 수준이나 위력, 속도 등이 상승합니다.

-녹탑의 수련법이 가진 묘리에 따라 사용하는 마법의 속도가 이전보다 더욱 빨라집니다.

-위대한 업적을 달성하였습니다.

-보상으로 200,000point를 획득하였습니다.

세운의 심장에 다섯 번째 고리가 생겨나며, 주변의 모든 마나가 가라앉았다.

'아슬아슬했어.'

충분히 가능하리라 생각했지만, 네 번째 서클의 마나량은 생각 이상으로 엄청났다.

주변의 마나가 조금만 부족했어도, 네 번째 서클을 다 채우지 못할 뻔했다. 만약 그랬다면, 엉성한 기둥이 흔들리며 마나 역류가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멍한 표정으로 당신을 내려다봅니다.

-성좌, '시기를 둘러싼 뱀'이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성좌들이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애초에 탑 1층의 플레이어가 4 서클을 달성하는 것도 유례없을 정도로 놀라운 사건인데 그것을 뛰어넘어, 하룻밤 사이에 다섯 번째 서클을 생성하다니.

이는 단순히 탑의 플레이어만이 아니라, 성좌들 사이에서도 화제 될 법한 사건이었다.

그 증거로.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시끄러워지기 전에 미리 자신보다 격이 낮은 성좌들의 통신을 전부 차단하였습니다.

마몬이 튜토리얼 때 보였던 것처럼 다시 한번 세운에 대한 메시지를 차단하였다.

세운으로서도 괜히 귀찮은 상황이 안 벌어지게 되어서 긍정적인 일이었다.

'나무도 다 회복됐나 보네.'

고개를 돌려 서칭 마법을 사용해 보니, 벌레들에게 파먹혀 생긴 마나의 빈틈이 모두 매워져 있었다.

세운을 지켜보던 정령들은 해가 뜨니 뒤늦은 휴식을 취하러 풀잎에 숨어든 모양이었다.

생각보다 많은 마나를 흡수한 탓에 동산이 손상되었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오히려 과한 마나를 정리해 준 탓에, 전보다 안정된 모습이었다.

'답례는 하고 가야지.'

길면 보름까지도 걸릴 것으로 생각하였던 서클 생성이 고작 하룻밤으로 단축되었다.

그것을 넘어, 목표했던 4 서클을 뛰어넘는 5 서클의 경지를 달성하였다.

그 공로는, 누가 뭐래도 이 반짝이는 동산 덕분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세운이 심장을 둘러싼 다섯 개의 서클을 부드럽게 회전시켰다.

5 서클의 달성하고 처음 사용하는 마법이었다.

'레인 샤워.'

세운의 머리 위로 작은 먹구름이 생겨났다.

잠깐의 소나기를 쏟아붓는 저서클 마법인 레인 샤워.

그러나, 단순히 5서클을 달성한 것을 넘어 네 마탑의 묘리마저 깨우친 세운이었다.

쿠르르-

먹구름은 세운의 마나를 집어삼키며 크기를 키워가더니, 이내 드넓은 동산 위를 가득 덮었다.

저서클 마법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넓은 범위.

청탑의 묘리로 물 마법을 강화하고, 녹탑의 묘리로 바람을 일으켜 비구름을 퍼트린 결과였다.

곧이어.

스스스-

세운이 만족할 만큼 퍼져 나간 먹구름이 물줄기를 쏟아냈다.

소나기라는 이름과는 달리, 여우비를 닮은 얕은 이슬비.

이 역시 세운이 마나를 섬세하게 컨트롤하여 마법을 변화시킨 결과였다.

아침 여우비의 촉촉한 빗방울과 시원한 바람을 즐기며, 동산의 풀과 나무가 기분 좋게 흔들렸다.

* * *

그 시각, 디아블로 클랜의 거점 주위에서는 흉흉한 맹수의 으르렁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서아 씨, 어쩌죠? 계속 몰려오고 있습니다."

"음, 아무래도 우연은 아닌 듯하네요."

"네.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도 대놓고 공격을 준비 중인 것 같습니다."

거점을 둘러싸고 있는 수백 마리의 늑대들.

거점이 워낙 견고하기 때문인지 덤벼드는 늑대는 하나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숨거나 하지도 않았다.

대놓고 거점을 바라보며 적의를 드러내면서도, 수가 충분히 모일 때까지 공격을 해 오지 않는다.

마치, 누군가가 지휘를 내리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바로 공격할까요?"

"아뇨. 일단 다들 방어 준비만 해 주세요. 늑대들이 공격 범위 안으로 들어오면, 그때 일제 공격을 시작하겠습니다."

"네."

늑대들은 아슬아슬하게 화살 범위의 밖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그것도 무성한 나무의 뒤에 몸을 숨기며.

늑대가 아무리 똑똑하고 집단생활을 잘한다고 해도, 저런 모습은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다.

"튜토리얼에서 봤던 늑대들보다 강해 보이는군."

"탑이니까요. 세운 씨 말대로, 대부분의 몬스터가 튜토리얼 때보다는 강한 게 당연하겠죠."

"마침 잘 됐군. 몸을 풀 상대가 필요하던 참이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늑대들이 성벽 앞까지 도달하면, 같이 나가요."

"알겠다."

강한철이 건틀렛을 낀 양 주먹을 쿵 부딪치며 손목을 풀었다.

수십 마리도 아니고 수백 마리의 늑대가 거점을 노리고 있음에도, 공포에 떠는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튜토리얼을 통해 다들 이런 상황에 익숙해진 덕분이다.

게다가, 그들은 디아블로 클랜.

세운의 도움이 있었다지만, 누가 뭐래도 이번 튜토리얼을 통과한 이들 중 가장 강한 클랜이라 불리는 이들이었다.

상대가 아무리 많고 강하더라도, 자신감을 가질 이유는 충분했다.

"으르릉-"

"크릉-!"

그토록 평화롭던 탑의 1층 어디에서 몰려든 것인지, 늑대의 수는 천에 달할 정도로 늘어났다.

그러자 숲속을 일렁이던 늑대들이 본격적으로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다가왔다.

"모두, 공격 준비!"

유서아의 지시하에 사람들이 활시위를 힘껏 당겼다.

튜토리얼의 세 번째 장과 다섯 번째 장. 수성전은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적의 수도 많고, 세운이 존재하지 않아 힘겨운 전투가 될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우우우-!"

"크아앙!"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가 떨려오기 직전, 늑대 무리의 중심에서 우렁찬 하울링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숲의 늑대들이 일제히 달려왔다.

이에 유서아가 공격을 지시하려던 찰나, 늑대들의 사이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화륵!

콰과아앙!!

"깨앵!"

"크, 크릉!"

폭탄이 떨어진 듯이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고, 바로 이어서 검자줏빛 뇌전이 늑대 사이를 난폭하게 휩쓸었다.

순식간에 이백에 달하는 늑대가 검게 익은 채로 목숨을 잃어갔다.

이에 어리둥절한 사람들이 활시위에서 힘을 놓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이지만, 다들 알 수 있었다. 저 이변을 벌인 정체가 누구인지 말이다.

"사냥감을 전부 뺏길 수는 없지."

타앗!

강한철이 그렇게 말하며 문을 열고 늑대 무리로 달려 나갔다.

이에 유서아 역시 가볍게 미소 지으며 사람들에게 전체 공격 지시를 내렸다.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거점을 기준으로 방어를 펼치려던 것이었지만.

'세운 씨가 도착했다면.'

지금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디아블로 클랜이 늑대의 하울링에 지지 않을 정도로 우렁찬 함성을 내지르며 늑대 무리를 향해 내달렸다.

* * *

-흑탑의 묘리에 따라 '파이어 버스트'의 위력이 강화됩니다.

콰아앙!!

-녹탑의 묘리에 따라 '체인 라이트닝'의 속도가 빨라집니다.

파지지직!

5서클의 도달한 마법사가 강한 이유는, 단순히 5서클 마법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5서클에 도달하며 얻은 깨달음.

세운의 경우에는 지금까지 사용해 온 네 마탑의 묘리. 청탑과 흑탑, 황탑, 녹탑의 묘리를 마법에 적용시킬 수 있다는 게 핵심이었다.

각각 해당하는 속성에 묘리를 적용하면 위력이 상승하는 것은 당연하고.

다른 마법에 적용해도 청탑의 묘리는 안정성을, 흑탑의 묘리는 위력을, 황탑의 묘리는 강도를, 녹탑의 묘리는 속도를 올릴 수 있었다.

이를 잘만 사용하면 같은 마법이라도 전혀 새로운 형태로 사용이 가능했다.

지금, 세운이 사용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크앙!"

"크르릉!"

세운의 존재를 깨달은 늑대들이 거점 방향에서 몸을 돌려 세운을 향한다.

수백 마리의 늑대가 한 몸처럼 움직이는 것은, 꽤 공포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쯤에는 이미 세운의 손에서 새로운 마법이 준비되어 있었다.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토네이도(Tornado) ]

- 녹탑의 공격 마법으로써 거대한 회오리를 일으켜 적을 날려 보낸다.

세운의 손 위에 떠 오른 녹색의 작은 회오리.

이대로 날려 보내도 충분히 강력하겠지만, 세운은 이대로 끝낼 생각이 없었다.

-흑탑의 묘리에 따라 '토네이도'의 위력이 강화됩니다.

-녹탑의 묘리에 따라 '토네이도'의 속도가 강화됩니다.

후웅!

고유의 녹빛이 진해지며, 거기에 검은 마나가 깃든다.

검녹빛으로 변한 회오리가 당장에라도 퍼져 나갈 것처럼 불안하게 흔들린다.

과도한 힘에 의해 마법이 퍼져 나가려는 중이었다.

-청탑의 묘리에 따라 '토네이도'의 안정성이 강화됩니다.

그러나, 청탑의 묘리까지 깃들자 회오리는 금세 안정을 되찾았다. 위력이 약해진 건 아니었다.

이성을 잃고 날뛰려던 맹수가 찬물을 맞아 정신을 차리고, 풀숲에 숨어 적을 노려보는 듯했다.

이에 세운이 손을 내뻗는 순간.

콰아아아아-!!

난폭한 회오리가 전장을 휩쓸며, 수백 마리의 늑대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제 93화

93. 제93화

천 마리의 늑대가 덤벼든 것치고 전투는 금방 끝이 났다.

이전이었으면 몰라도, 5서클을 달성한 세운에게 양만 내세우는 적은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튜토리얼에 비하면 늑대들의 수준이 조금 더 강했으나, 세운의 마법을 한 번이라도 버티지 못하는 이상, 결과는 똑같았다.

'뭐, 보스 몬스터가 있어도 결과는 똑같았겠지만.'

세운의 수준은 5서클만이 아니었다. 무려 1갑자의 내공.

이 정도라면, 마법이 통하지 않는 몬스터가 나타나더라도 무공으로 충분히 가볍게 제압할 수 있었다.

거기에 강한철을 선두로 디아블로 클랜 역시 전투에 합세하였으니, 전투가 빨리 끝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폭식의 권능으로 '늑대 무리' 전체를 지정하였습니다.

-폭식의 어금니가 몬스터를 덮쳐옵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간만의 포식에 크게 즐거워합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만약을 대비하여 비상식량을 챙겨둬야겠다며 굳게 다짐합니다.

세운의 힘이 너무 강해진 탓인지, 늑대들이 너무 약했던 탓인지, 이렇게 많은 늑대에게 폭식의 권능을 사용했음에도 오르는 능력치는 그리 많지 않았다.

이제 막 5서클에 도달하여 텅 빈 다섯 번째 서클에 역시 미미한 마나가 흡수되었을 뿐이다.

지금까지는 기연을 통해 생각보다 빠르게 도달할 수 있었지만, 아무래도 다음 단계로 도달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았다.

'그보다, 어찌 된 일이지?'

세운이 폭식의 어금니에 삼켜지는 늑대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본래, 1층에는 몬스터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찾으라면야 찾을 수 있지만, 층이 이름부터가 '쉼터'인 이곳에, 갑작스레 늑대가 몰려든 것부터가 이상했다.

그것도 한두 마리가 아닌, 천 마리가.

게다가, 늑대들이 보인 움직임.

'분명, 조직적이었어.'

튜토리얼에 비해 늑대들의 신체적인 강함은 물론, 지능도 더욱 똑똑해졌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까 보았던 전략적인 움직임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누군가, 늑대들에게 체계적인 명령을 내린 게 분명하다.

문제는 그게 누구인지 전혀 짐작되지 않는다는 사실.

'잠깐.'

늑대들의 갑작스러운 공격.

그 원인이 될 요소를 고민하던 중, 세운은 한 가지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거점에서 가장 최근에 일어난 변화. 바로, 세운이 선대 플레이어를 데려온 것이었다.

"세운 씨, 일찍 오셨네요? 시간이 좀 걸릴 거라고 들었는데."

"유서아, 환자는 어디 있지?"

"환자라면 세운 씨가 데려오신 분을 말하는 건가요? 그분이라면 당연히 병동에...."

"여기 뒷수습 좀 부탁해. 난 환자 좀 확인하러 갈 테니까."

"네? 잠깐...."

세운이 다급하게 거점을 향해 내달렸다.

* * *

덜컥!

"클랜장?"

"환자는?"

"저쪽에 누워 있어요. 그런데 벌써 도착한 거예요? 아직 하루밖에 안 지났는데."

이하늘 역시 방금 전장에서 돌아온 듯이 무장을 벗고 있었다.

그녀가 자리를 비웠으니, 만약 그사이에 정신을 차린 선대 플레이어가 도망을 쳤을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한 세운이 다급하게 침상의 커튼을 걷었지만.

드르륵!

'후....'

선대 플레이어는 어제보다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침상 위에 누워 있었다.

다행히도 최악의 예상은 빗나간 듯하다.

"무슨 일이에요? 설마, 이분 때문에 중간에 돌아오신 거예요?"

"...아냐. 생각보다 일이 빨리 끝났거든."

"잘됐네요. 음, 보이는 대로 아직 정신은 못 차렸어요. 상태는 꽤 많이 호전되었지만, 아무래도 신체적인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세운이 먼저 물어보지 않았는데도, 그녀는 환자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세운이 남자에 대해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는 걸 알아챘기 때문이다.

뭐, 설명을 듣지 않아도 남자의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딱 보기에도 상처가 많이 아물어 있었으니까.

단 하룻밤이지만, 그녀가 얼마나 열심히 남자를 간호했는지를 증명해 주고 있었다.

"고마워. 아, 그리고 이거."

세운이 아공간 주머니에 들어 있던 약초를 쏟아냈다.

아공간 주머니 안에 있을 때는 체감이 안 됐는데, 밖으로 꺼내 보니 양이 생각 이상으로 많았다.

"와! 이렇게 많이 채집해 오신 거예요? 정말 감사해요!"

"최대한 쓸 만한 것들로 챙겨오긴 했는데, 부족하면 말해 줘."

"일단은 이 정도로 충분할 것 같아요. 정말 큰 도움이 됐어요!"

약초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동산에서 보았던 꽃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역시, 그녀는 천생 치료사인가 보다.

'일단은 지켜봐야 하나.'

세운이 침상 위의 남자를 내려보았다.

아직 의문점이 많았지만, 결국 남자가 일어나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는 것들이었다.

그때.

꼬르륵-

세운의 배에서 눈치 없이 배꼽시계의 알림이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어제 정오에 박정필과 식사를 한 이후로는 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수련이 끝나자마자 달려온 것은 물론, 도착하자마자 늑대를 상대해야 했으니까.

그 소리를 듣고 있던 이하늘이 가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싸울 때 보면 사람이 아닌 것 같았는데. 이럴 때 보면 사람은 사람이네요."

"...식당이 어디라고 했었지?"

"따라와요. 마을에서 새로운 식재료를 조달해 왔다고 하니까, 오늘 식사는 더 맛있을 거예요."

아무래도, 한동안 육포로는 만족하지 못할 것 같았다.

* * *

그 이후, 경계에 신경을 썼으나 늑대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흔적을 둘러보아도 이렇다 할 정보는 얻지 못한 터라, 세운은 선대 플레이어가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며칠, 회귀 전에 찾아낸 히든 피스를 찾으러 돌아다녀 보았지만 큰 소득은 없었다.

애초에, 1층은 이름 그대로 '쉼터' 였기에 별다른 히든 피스가 존재하지 않았던 탓이다.

'반짝이는 동산에 있던 벌레들도 전에는 알지 못했던 거니까.'

그렇다고 해도 기존에 목표였던 4 서클을 뛰어넘어, 5서클을 달성할 수 있었기에, 세운은 나름대로 느긋하게 일상을 즐겼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바로 이것.

챙!

"아직도 모르겠어?"

"죄송해요. 지배라고 해도, 바로 잡히는 이미지가 없어서...."

"나한테 미안할 게 뭐 있어."

"혹시, 뭔가 알고 계시면 조금이라도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

"안 돼."

"어째서...."

"잠재력이라는 건 누구나 똑같은 단순한 힘이 아니야. 같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저마다 드러내는 방식이 다르지."

"그래도 참고 정도는 할 수 있지 않나요?"

"스스로 깨닫는 게 제일 중요해. 괜히 남의 방식을 따라가다가는, 오히려 나중에 가서 뼈저리게 후회할 거야."

유서아와의 대련이었다.

그녀는 아직 광풍의 이명을 획득하며 얻은 잠재력인 '지배'를 다루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강한철이야 워낙 직관적인 잠재력이었기에 처음부터 곧잘 사용하긴 했지만, 유서아의 경우에는 제법 까다로운 잠재력이었으니까.

세운이 아는 정보가 몇 개 있긴 하지만,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잠재력의 사용법은 결국 자기 자신이 직접 터득하는 게 최선이었다.

"하지만 세운 씨나 한철 씨는 이미 이명을 활용하고 있잖아요?"

"조급해할 필요 없어. 이제 겨우 탑의 1층이니까. 잠재력은커녕, 이명도 얻지 못한 플레이어가 대부분이야."

"그래도...."

"그리고 잠재력을 못 사용할 뿐이지 움직임은 많이 좋아졌잖아?"

시간이 여유로웠기에 잦은 대련을 가진 덕분일까? 강한철은 물론이고, 유서아 역시 눈에 띄는 성장세를 보였다.

세운이 별다른 스킬을 사용하지 않고 순수하게 속도만 따진다면, 유서아가 조금 더 앞선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카밀식 쌍검술. 세운 씨가 알려준 검술이 생각보다 저랑 잘 맞더라구요."

"단검술은?"

"대상이 없어서 실전에서는 못 써 봤지만, 그것도 꽤 익숙해졌어요."

"좋아."

-성좌, '왕관을 쓴 거미'가 계약자의 현란한 움직임에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한 차례의 대련이 끝나고, 잠시 휴식 시간을 가졌다.

평소였다면 강한철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 대련을 신청했겠지만, 요즘은 이전에 알려준 '태을섬수공'을 수련하느라 바쁜 건지 거점 수련 터 한구석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었다.

"박정필은?"

"들은 건 없는데, 또 마을에 가지 않았을까요?"

"전투법이나 좀 알려줄까 했더니...."

"그래도 세운 씨 말은 잘 듣는 것 같더라구요. 마을에 내려가도 술은 안 마신다고 들었어요."

"당연히 그래야지. 또 마시면, '교육'의 강도를 더 높일 거라고 했으니까."

술도 안 마실 거면서 마을에는 왜 또 내려간 건지.

이 정도면 세운과의 대련을 피하고자 피신을 간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오랜만에 생긴 여유 시간.

반짝이는 동산으로 돌아가 마나라도 더 수련할까 싶던 중, 거점의 정문이 열리고 있었다.

'박정필이 돌아온 건가?'

그런 생각을 했지만, 곧 이어진 사람들의 반응으로 생각을 바꾸었다.

녀석이 돌아온 것이라면, 사람들이 저렇게 마중 나가러 달려 나갈 리가 없었으니까.

"와, 아저씨 왔다!"

"오랜만이에요!"

"아이고, 어르신. 올 거면 저희한테 언질이라도 해 주시지, 이 많은 걸 혼자 들고...."

"허허, 괜찮네. 오히려 밖에 있을 때보다 훨씬 쌩쌩해졌으니."

관심을 가지며 움직이니, 세운의 눈에 탄탄한 근육질의 노인이 눈에 들어왔다.

등 뒤에는 자기 몸짓만 한 보따리를 들고 있었는데, 그에 비해 당사자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있었다.

'하긴, 근력으로만 따지만 어지간한 플레이어 이상이실 테니까.'

고창석. 디아블로 클랜의 유일한 대장장이였다.

그런데 거점까지는 어쩐 일일까?

분명 마을의 대장간에서 놀이터라도 온 듯이 신나게 망치를 두드리고 계셨는데.

'설마, 그놈이?'

한 가지 가설이 떠올랐다.

대장간의 주인. 놈이 세운과의 계약을 어기고 고창석을 쫓아낸 게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당장 마을로 돌아가 박정필에게 했던 것 이상의 '교육'을 해 줘야 하리라.

그렇게 생각하던 중, 고개를 휙휙 돌리며 서성거리던 고창석이 세운을 발견하자마자 신나게 달려왔다.

어찌나 흥이 났는지, 등 뒤의 보따리가 연신 들썩거리며 금속음이 악기처럼 울려 퍼지고 있었다.

"오, 여기 있었구먼!"

"설마 쫓겨나신 겁니까? 그럼 제가 바로...."

"음? 쫓겨나다니 무슨 소리인가? 아, 대장간 일은 들었다네. 자네 덕분에 편하게 작업할 수 있었어."

반응을 보아하니 대장간 주인의 문제는 아닌가 보다.

그게 아니라면 어째서?

설마....

"허허, 갑자기 이명이라는 게 생겨나더니 작업이 훨씬 빨라지더군. 그 덕에 생각보다 일찍 자네 장비들을 만들어 낼 수 있었어."

"벌써요?"

"내 얼른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이렇게 바리바리 싸 들고 여기까지 달려왔다네."

어지간한 일에는 놀라지 않는 세운의 눈이 크게 떠졌다.

세운이 부탁했던 장비의 수는 한두 개가 아니었다.

기본적인 방어구 세트는 물론, 종류별로 다양한 무기를 만들어달라고 했으니 못해도 10가지 이상의 장비를 만들어야 했을 것이다.

그런 주문을 고작 며칠 사이에 완성하다니?

게다가.

'이명이라니....'

세운이나 강한철, 유서아 등의 전투계와 달리 그는 생산계의 일종인 대장장이다.

그런 생산계의 경우 전투계에 비해 이명을 얻기가 훨씬 힘들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고창석은 겨우 탑의 1층에서 이명을 획득하였다.

세운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그의 가능성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려주는 사안이었다.

"자, 얼른 확인해 보게!"

고창석이 보따리를 내려놓고는 신나게 매듭을 풀어헤쳤다.

곧이어.

-성좌, '금관을 쓴 병사'가 이 소재로 이 이상의 장비를 만들어 내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며 어깨를 크게 으쓱거립니다.

풀어진 보따리의 사이로, 고창석이 만들어 낸 장비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제 94화

94. 제94화

"일단은 무기부터 보여주지. 자네가 원한대로 다양한 무기들을 종류별로 만들어 봤네."

보따리를 펼치자 가장 먼저 검과 창, 도끼 같은 무기들이 보였다.

그것들에는 전부 파충류 특유의 비늘이 멋스럽게 박혀 있었는데, 색은 달라도 씨 드레이크의 비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허허, 색은 좀 어떤가? 자네랑 파란색은 영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서 좀 바꿔 보았다네."

"번거로우셨을 텐데."

"번거롭긴. 오히려, 다양한 무기들을 만들면서 머리가 깨어나는 기분이라 이토록 재미날 수가 없었네."

스릉.

세운이 검집 하나를 집어 들고 가볍게 발검을 해 보았다.

질 좋은 쇠를 사용한 것인지, 청명한 금속음이 귀를 간지럽혔다. 이 소리만으로, 검의 상태가 얼마나 좋은지 바로 파악되었다.

분명, 최소 C급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으리라.

[ 용아검(龍牙劍) ]

분류 : 장검

등급 : B-

설명 : 뛰어난 장인이 하급 용의 소재와 질 좋은 쇠를 이용하여 만들어낸 장검.

능력 : 1. 용의 송곳니 – 절삭률이 40% 상승한다.

2. 용의 비늘 – 무기의 내구도가 대폭 상승한다.

3. 용의 포효 – 공포와 관련된 능력의 효과가 대폭 상승한다.

4. 흉터 – 공격력이 20% 상승한다.

'B 등급이라고?'

정보를 확인하자마자 세운의 눈이 크게 떠졌다.

B- 등급이라니. 아무리 튜토리얼에서 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소재인 씨 드레이크의 부산물로 만들어 낸 무기라고 하여도, 믿기지 않는 등급이었다.

그도 그럴 게, 지금은 고작 탑의 1층이다.

제아무리 잘난 장인이 만든 아이템이라 하여도, C급도 간당간당한 수준인 게 이곳이었다.

히든 피스를 찾아낸다고 하여도, 이만한 무기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런 무기가.

"설마, 이것들 전부...."

"허허, 이번에 성좌께서 새로운 제련법을 하사해 주셨다네. 덕분에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었지."

다른 장비들을 확인해 본 세운의 눈이 더욱 크게 떠졌다.

장검, 단검, 활, 창, 메이스, 도끼 등. 열 가지가 넘어가는 무기들이 전부 B-등급을 가지고 있었다.

C+ 정도의 등급만 되어도 만족할 생각이었는데, 고창석은 세운의 생각 이상의 결과물을 가져와 주었다.

"이것도 한 번 입어보게나. 움직임에 방해되지 않도록 특별히 신경 쓰긴 했는데, 아무래도 직접 입어보는 게 제일이니 말일세."

"네, 바로 입어볼게요."

세운이 입고 있던 붉은 늑대 갑옷을 벗고, 새로운 갑옷을 입어보았다.

씨 드레이크의 가죽을 토대로 만들어진 가죽 갑옷.

거기에 드레이크의 비늘을 외갑으로 둘러싸고, 그사이에 쇠로 만들어진 정교한 이음부가 관절을 연결해 주고 있었다.

적진을 자유롭게 활보하는 세운의 전투 스타일을 고려하여,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방어력을 높인 갑옷이었다.

상갑과 하갑을 모두 착용하고 가볍게 몸을 움직여본 결과.

"...안 입은 것처럼 편하네요. 관절부도 자연스럽고, 움직임에 제약이 전혀 안 느껴져요."

"허허, 그거 다행이구만! 방어구는 내 특별히 더욱 신경 썼으니 말일세."

갑옷의 착용성은 놀랍도록 뛰어났다. 성능이 아니라 착용성만 생각하자면, 세운이 회귀 전에 입어본 높은 등급의 갑옷들과 비교해도 더 편할 지경이다.

"잘 어울리시네요."

언제부터 지켜봤는지, 세운의 모습을 지켜보던 유서아가 싱긋 미소 지었다.

그녀의 장비 역시 고창석이 만들어 준 것이지만, 아무래도 튜토리얼 때 만들어진 것이라 성능이 조금 떨어져 보였다.

이에 고창석에게 남은 소재가 있는지 물어보려던 중, 그가 보따리의 안쪽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 들었다.

"우리 리더 오셨구먼. 얼른 입어보게."

"제, 제 것도 있나요?"

"소재가 제법 많았거든. 특히 가죽은 양이 꽤 남아서 같이 만들어봤다네."

"감사합니다!"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지 유서아가 방긋 웃으며 달려와 가죽 갑옷을 건네받았다.

세운과 마찬가지로 바로 갑옷을 입어보는 그녀.

튜토리얼 때 미리 사이즈 측정을 해 두었기 때문인지, 그녀의 갑옷 역시 조금의 부자연스러움도 없이 피부처럼 딱 맞아 보였다.

쌍검까지 꺼내 들고 휘두르고 있는 모습을 보니, 갑옷이 꽤 마음에 든 모양이다.

"혹시 소재가 더 남았나요?"

"이제 얼마 안 남았다네. 대신, 자네가 말해 준 덕에 대장간 주인이 매일 질 좋은 광석들을 캐 오고 있다네."

"그럼 혹시 다른 사람들의 장비도...."

"안 그래도 그럴 참이네. 자네만 괜찮다면, 남은 소재들을 좀 이용해 보려고 하는데 괜찮을까?"

"물론이지요."

"허허, 이거 또 의욕이 생기는구먼!"

고창석이 소매를 크게 걷어 올렸다.

그러자 소매 안에 숨겨져 있던 구릿빛 근육이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에 보았던 왜소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

어느새 다가온 쌍둥이 자매가 대단하다며 고창석의 근육을 쿡쿡 찔러보고 있었다.

'좀 길들여 둘까.'

착용성이 뛰어나다지만, 아무래도 장비를 바꾸고 난 이질감이 존재했다. 이질감을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실전에서 굴려보는 것.

1층에서 상대할 만한 몬스터를 찾기는 힘드니 유서아나 강한철을 불러 대련을 해야겠다는 생각 중.

"클랜장!"

저 멀리서, 세운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얀 가운을 입고 다급하게 병동을 빠져나오고 있는 그녀. 디아블로 클랜의 치료사, 이하늘이었다.

평소에 늘 환자를 돌보거나 약초를 다루느라 병동에 틀어박혀 있는 그녀가 저렇게 다급하게 달려 나오며 세운을 부르는 이유는 하나였다.

"설마, 일어났어?"

"아뇨, 그건 아닌데...."

뭐야, 아니었구나.

세운의 얼굴에 눈에 띄게 실망감이 엿보일 때쯤.

"환자를 깨울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녀의 얼굴에서 자신만만한 미소가 지어졌다.

* * *

소식을 듣자마자 세운은 이하늘과 함께 병동으로 달려갔다.

장비를 길들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선대 플레이어가 가진 정보는 그 이상으로 중요했으니까.

"이게 그 각성제라는 거야?"

"네! 클랜장이 가져다준 약초로 만들어 냈어요. 마르바스 님께서 도움을 주셨거든요!"

-성좌, '피투성이 사자'가 기분 좋게 성대를 울리며 자신의 계약자를 대견한 듯이 바라봅니다.

지옥의 대의장, 마르바스의 도움을 받아 만들어 낸 각성제.

그 정도면, 아이템의 정보를 확인해 보지 않아도 충분히 신용 가능 포션이었다.

"지금 바로 사용해 보지."

"네! 저도 효과가 궁금했거든요."

커튼을 치우고, 침상 위에 누워 있는 선대 플레이어의 앞에 섰다.

각성제의 뚜껑이 폭- 하는 소리와 함께 따졌고, 비릿한 냄새가 병상을 가득 채웠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식욕이 팍 떨어지는 냄새라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섭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하지만 실제로 먹어보면 맛있을지도 모르겠다며 한 걸음 다가섭니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저 돼지는 하수구에 떨어져도 배부르게 먹고살 거라며 고개를 젓습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하수구에도 생각보다 별미가 많다며 경험담을 늘어놓습니다.

-성좌, '시기를 둘러싼 뱀'이 혓바닥을 집어넣으며 표정을 찌푸립니다.

정작 세운은 줄 생각도 없는데, 설레발을 치는 베엘제붑을 보고 있자니 절로 고개가 저어진다.

세운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하늘이 조심스럽게 각성제가 담긴 유리병을 기울인다.

주룩-

비릿한 냄새만큼이나 거부감이 느껴지는 걸쭉한 움직임, 피처럼 새빨간 빛깔.

대체 어떤 약초를 어떻게 섞었는지 의문이 들쯤, 그녀가 자랑스럽게 설명을 시작했다.

"세운 씨가 가져다준 약초 중에서 '피렐의 잎사귀'를 기반으로 만들어 봤어요!"

"...이름까지는 모르는데, 그거 혹시 독초 아니야?"

"맞아요! 생으로 먹으면 극심한 통증이 일어나는 독초인데, 그 통증이 말초신경계를 통해 중추신경계를 활성화할 수 있더라구요."

"그 말은 통증으로 정신을 깨운다는...."

"음, 나쁘게 말하면 그렇긴 한데. 어쨌든 결론은 중추신경계 활성화를 통한 각성제예요. 아마, 수면이나 마비 등의 상황에도 통할 거예요."

통증을 통한 강제 각성제라니. 생각하던 것 이상으로 잔인한 방법이었다.

저런 설명을 이어가면서 호기심에 반짝이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섬뜩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꾸물럭거리며 흘러내리던 각성제가 남자의 입에 담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의 몸에서 반응이 나타났다.

"커억!"

숨이 트인 것처럼 신음을 내뱉더니, 발작을 일으키는 남자.

각성제의 원리를 알고 있는 세운이기에 안쓰러움이 느껴졌지만, 이하늘은 초롱거리는 눈빛으로 관찰을 이어가고 있었다.

"위험한 건 아니겠지?"

"통증을 일으킬 뿐이지 부작용은 거의 없어요. ...아마도요."

"아마도?"

"임상실험을 하기 전까지는 부작용을 완벽하게 알아낼 수 없으니까요."

남자의 발작이 갈수록 심해졌다.

이하늘이 먼저 예상한 듯이 침상에 남자의 사지를 묶어 두지 않았으면, 침상에서 떨어졌을 게 분명했다.

기껏 살려낸 남자가 죽을까 봐 세운이 회복 마법을 사용하려 했지만, 그녀가 정상적인 반응이라며 세운을 막아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허억!"

여태껏 굳게 감게 있던 남자의 눈이 크게 떠졌다.

통증 때문인지 부작용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의 흰자에는 붉은 핏줄이 잔뜩 돋아 있었다.

곧이어, 눈을 뜬 남자가 처음으로 말을 내뱉었다.

"사, 살려줘! 으아아악! 제발! 제발!"

"...이거, 진통제라도 줘야 하는 거 아냐?"

"네? 아니에요. 통증은 중추신경계를 활성화하기 위한 첫 자극일 뿐이라 효과가 그리 길지 않아요."

"그럼, 이건 통증 때문이 아니라는 거야?"

"네. 각성제로 인한 부작용은 아닌 것 같은데...."

"도망쳐야 해! 느, 늑대! 늑대들로부터 도망가야 해!"

늑대라.

세운은 골짜기에서 마주쳤을 때 늑대들이 남자를 공격하던 장면을 떠올렸다.

아마 그게 트라우마가 된 게 아닐까 싶었는데, 곧 이어진 남자의 말로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느, 늑대 인간이라니! 다들 도망쳐! 어서! 으아아악!"

늑대 인간.

그 얘기를 듣자마자, 세운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역시, 남자는 한 달 후에 있을 사건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아마, 지금 남자는 일 년 전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동료가 모두 죽어 나가고, 늑대 인간으로부터 공격받던 순간. 그 순간이 끝없이 되풀이되며, 악몽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게 분명했다.

마몬의 창고에서 쓸 만한 게 있을까 고민하던 찰나, 오른 손등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이거라면....'

세운은 씨 드레이크가 드래곤 피어를 내질렀을 때를 떠올렸다.

사티로스의 성흔은 적에게 공포를 상기시킬 뿐만 아니라, 적의 공포를 포식하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 힘이라면, 남자의 악몽을 집어삼킬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한 세운이 즉시 남자의 이마에 손바닥을 올렸다.

그러자.

-'사티로스의 성흔'이 타뷸라의 공포를 집어삼킵니다.

"크아아아악!"

남자의 비명과 함께, 사티로스의 성흔이 타오르는 것처럼 강한 빛을 내뿜었다.

제 95화

95. 제95화

'타뷸라의 공포?'

시스템 메시지는 플레이어에게 생각 이상으로 많은 정보를 알려준다.

자칫 그렇구나, 하고 넘어갈 수는 있겠지만, 세운은 저 타뷸라라는 게 한 달 후에 있을 사건의 전모라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었다.

타뷸라의 공포와 늑대 인간.

떠오르는 게 하나 있긴 했다.

'보드게임이었나.'

탑에 들어오기 전. 너무나도 오래된 과거의 일이지만, 지구에는 타뷸라의 늑대라는 게임이 있었다.

아마 마을을 위협하는 늑대인간을 잡기 위해서 주민들이 대립한다는 내용의 보드게임이었지.

-'사티로스의 성흔'이 오랜 시간 숙성되며 부풀어진 공포를 집어삼키며 힘이 강화됩니다.

-공포를 포식하며 혈랑의 이명이 강화됩니다.

"크악! 크, 크으. 크으으...."

남자의 머리에서 흘러나온 검은 기운이 성흔으로 흡수되는 듯하자, 남자의 신음이 점차 줄어들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이하늘이 물수건을 가져와 남자의 식은땀을 닦아주었다.

점점 안정되기 시작하는 숨소리.

성흔이 만족한 듯이 빛을 꺼트리자, 남자의 상태가 완전히 진정되었다.

"신기하네요. 혹시, 그게 이명의 힘인가요?"

"이명의 힘만은 아니지만, 뭐 그런 셈이지."

"부럽네요. 저도 그 이명이라는 게 생긴다면 모두에게 훨씬 더 도움이 될 텐데."

"너라면 금방 시스템에게 인정받을 거야. 걱정하지 마."

"...감사해요. 음, 일단 물이라도 좀 가져올게요."

쑥스러운 듯이 뺨을 긁적이던 그녀가 작은 물병을 하나 가져왔다.

물병을 기울여 그의 입가에 물을 조금씩 흘리자, 남자가 아주 천천히 물을 삼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신들은...."

"일어나셨군요!"

마침내, 남자의 의식이 돌아왔다.

* * *

"그럼 그 늑대인간들이...."

"네. 일 년 전, 마을에 남아 있던 플레이어들을 학살한 몬스터입니다."

자신의 상처를 치료해 준 고마움을 느낀 것일까? 남자는 망설임 없이 자신이 겪은 일들을 설명해 주었다.

역시, 범인은 늑대 인간.

그것도.

"설마 마을 사람들이 늑대 인간이었다니...."

마을에 존재하는 거주민들이 범인이었다.

한 달이 지나고, 보름달이 뜨자마자 거주민들의 몸이 부풀며 늑대 인간이 되었고, 마을에 남아 있던 플레이어들은 꼼짝없이 그들에게 당하고 말았다.

"세운 씨,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아무래도 보름달이 뜨기 전에 먼저 공격을 하는 게...."

"나도 동감이야."

늑대 인간의 특성은 세운도 잘 알고 있었다.

늑대 인간이라 하여도 워낙 다양 분류로 나뉘어 있긴 하지만, 그들은 모두 보름달 아래에서 가장 강한 힘과 포악함을 드러낸다.

그러니, 그들을 상대하려면 보름달을 피하는 게 가장 중요했다.

'늑대들이 찾아온 것도 이것 때문이겠지.'

학살에서의 유일한 생존자.

선대 플레이어의 존재는, 늑대 인간들에게 꽤나 귀찮은 존재였을 것이다. 마침내 찾아냈지만, 세운으로 인해 죽이는 데 실패했다.

얼마 전에 천 마리의 늑대가 거점을 공격한 이유도 선대 플레이어를 노린 게 분명했다.

이로써, 히든 피스에 대한 정보 대부분이 드러났다.

하지만.

'이상해.'

무언가가 마음에 걸렸다.

그 이유는, 얼마 전 마을에 갔을 때 박정필이 구해 온 정보 때문이었다.

'거주민들은 분명 아무런 일도 없었다고 했었어.'

전투 흔적이 있긴 했지만, 자신들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했었다. 오히려, 플레이어들끼리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닌가 싶었다고 했으니 말이다.

단순히 거짓말을 한 것일까? 그렇다면, 너무나도 어리석은 거짓말이었다.

정체를 숨기고 싶었다면, 전투 흔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할 필요가 없지 않았을까?

굳이 말해야 했다면, 몬스터들이 공격해 왔다고 하는 게 더 말이 되지 않았을까?

그 순간, 세운의 머릿속에 하나의 가설이 번뜩였다.

"혹시, 늑대 인간들한테서 뭔가 이상한 건 못 느꼈습니까?"

"부끄럽지만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도망치던 중이라 놈들을 관찰하지는 못했습니다."

"사소한 거라도 괜찮습니다."

"음, 상태가 조금 이상하긴 했습니다."

"어떤 점이?"

"다들 움직임이 끊기는 것 같달까요? 짐승이라기보다는, 무언가에게 지시를 받는 인형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인형이라...."

"제가 마을에서 살아나올 수 있었던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제 동료를 죽이고, 잠시 넋 나간 듯이 멈춘 덕분에 도망칠 수 있었죠."

세운이 자신의 가설에 더욱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거주민들이 늑대 인간인 건 맞겠지만, 그들은 누군가에게 조종을 당하고 있었다.

'일 년 동안 선대 플레이어를 잡아내지 못한 이유도 그 때문이겠지.'

거주민들은 애초에 플레이어에 대한 적대감이 없었다.

그러니 정신이 돌아온 상태에서는 선대 플레이어를 찾아 나서려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로지 단 한 명. 늑대 인간을 조종하는 누군가가 늑대의 도움을 빌려 선대 플레이어를 찾고 있을 뿐이었다.

자신이 직접 나서지 못하고 늑대들을 부렸다는 건....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는 거겠지.'

범인 역시 마을 사람 중 하나일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정답은 하나다.

마을 사람 중에서, 늑대 인간을 조종하는 범인을 찾아내는 것.

'진짜 말 그대로 타뷸라의 늑대네.'

진짜 늑대 인간을 찾아내는 것.

아마, 그게 1층에 존재하는 진정한 시련일 게 분명하다.

* * *

사건을 파악하자마자, 세운은 가장 먼저 박정필을 찾았다.

평소에 온종일 마을을 돌아다니던 녀석이지만, 저녁 식사 전에는 꼭 돌아오는 녀석이었기에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세운의 호출을 들은 박정필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문 안으로 들어왔다.

"혀, 형님! 부르셨습니까! 하하!"

"또 어딜 돌아다니다가 이제 온 거야?"

"이게 다 형님을 위한 일 아니겠습니까! 형님이 좋아할 만한 맛집도 찾아다니고, 온갖 정보가 넘쳐나는 뒷세계에도 숨어들고!"

"그러니까, 술을 못 마시는 대신 도박을 하고 다녔다는 거지?"

"저는 정말 도박을 할 생각이 없었지만! 정보를 구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성좌, '당나귀 머리의 날치기'가 그럼 오늘 잃은 공적치가 전부 마을 아가씨들의 이상형 정보 값이었느냐며 킥킥거립니다.

"쉿! 쉬잇!"

기껏 금주 교육을 시켜놨더니, 바로 도박판을 찾아가다니. 아무래도 조만간 한 번 더 교육을 진행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다만.

'지금은 오히려 좋은 건가?'

박정필의 말대로, 도박판 같은 곳에서는 특히 밖에서 꺼내지 못하는 정보가 쉽게 오가게 마련이었다.

적어도, 플레이어 중에서는 박정필이 마을에 대한 가장 많은 정보를 알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그 아가씨들이 늑대 인간이었다는 건 들었고?"

"넵? 아니, 클라라 누님이 야성적이긴 한데 진짜 늑대 인간일 리가...."

"그런 거 말고. 진짜 늑대 인간이라고. 마을 사람들 전부."

"흐익?"

기겁하는 박정필에게 사건의 정보를 알려주었다.

녀석의 정보를 전부 듣고 판별하는 것보다는, 녀석이 직접 정보를 선별하는 게 더 편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얘기가 길어지면서 녀석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내 그럴 줄 알았다'라는 듯이 말이다.

"그러고 보니, 수상한 사람이 하나 있었습니다."

"누구?"

"마을 촌장이요."

"촌장이라...."

회귀 전과 후를 통틀어서, 단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는 인물이다. 솔직히, 저 작은 마을에 촌장이라는 직위가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여정의 지침표를 지니고 있던 회귀 전의 세운도, 보통은 마을 바깥을 돌아다니며 히든 피스를 찾아다녔으니까.

마을이 돌아가는 상황에는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었다.

"이상하게 다들 촌장 얘기를 꺼려하더라구요."

"이유는 물어봤어?"

"당연하죠! 근데 뭐, 제대로 된 대답은 없었어요. 그러면서도 칭찬은 엄청나게 하더라고요! 뭔가 부자연스러운 느낌이랄까?"

자세한 증거는 없었지만, 심증 정도로 충분했다.

만약 촌장이 범인이 아니더라도, 아직 세운에게는 보름이 넘는 시간이 남아 있었으니까.

"좋아, 첫 타깃은 촌장으로 하고."

"근데 확인할 방법은 있는 겁니까? 형님 말대로라면, 늑대인간이냐고 물어봐도 순순히 대답할 것 같지는 않은데."

"걱정 마. 우리한테는 좋은 미끼가 있잖아?"

"서, 설마 또 전 아니죠? 헉! 설마 절 촌장에게 먹잇감으로 던질 생각은...."

"만약 너를 던져둔다 해도 놈이 정체를 밝히진 않을 거야."

"휴우. 그럼 무슨 미끼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박정필의 질문에, 세운은 작게 미소 지으며 병동 쪽을 바라보았다.

선대 플레이어.

일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조금 미안하긴 하지만, 타뷸라의 늑대를 색출하기 위해서라도 그를 이용해야만 했다.

* * *

"달이 아주 아름답구나."

탑의 1층에 존재하는 평화로운 마을.

그곳에서 촌장의 직위를 맡고 마을을 관리하고 있는 남자가 고개를 들어 올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절반쯤 채워진 반달이 유난히 밝게 빛나고 있었다.

"보름 후가 기대되는군. 이번에는 튼튼해 보이는 이방인이 많은 것 같았으니 말이야."

어째서일까? 촌장은 보름 후를 떠올리며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르르...."

왼쪽의 풀숲이 흔들리더니 늑대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일부러 찾아다녀도 몬스터를 발견하기 힘든 탑의 1층에서, 마을 내부로 늑대가 침입하다니!

이는 가벼운 사건이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의 전투력은 대부분 제로에 가까웠기에, 자칫하면 큰 피해로 이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늑대의 출현을 알아봤음에도, 촌장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늑대 역시, 남자를 마주하는 순간 꼬리를 내리고 고개를 숙였다.

"그놈이 거점을 빠져나왔다고? 허허, 놈이 겁도 없이 제 발로 머리를 들이대는구나."

늑대랑 대화라도 하는 것일까? 촌장은 반달에 시선을 고정하면서, 기분 좋게 말을 내뱉었다.

"저 눈치 없는 이방인들이 무언가 알아낼 것 같지는 않지만, 보름달이 뜨기 전에 애피타이저를 즐기는 건 꽤 설레는 일이구나."

순간, 그의 눈빛이 붉게 물들었다.

이에 늑대가 고개를 더욱 깊게 숙이며 꼬리를 덜덜 떨었다.

"놈이 헛소리를 하기 전에 성대를 끊어놔라. 뒤처리는 내가 직접 하지."

"그르릉...."

촌장의 말에 대답하는 듯이 낮게 울더니 조용히 풀숲으로 들어갔다.

흔들의자에 앉아 있던 그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며 크게 기지개를 켰다.

"으으! 역시 이 몸은 너무 불편하단 말이야. 몸이 근질거려서 참을 수 없어."

기지개를 켜던 촌장의 몸이 순간적으로 크게 꿈틀거렸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야성적인 근육과 순간적으로 흘러나온 진득한 피 냄새.

입술 사이로는 이전에 보지 못한 날카로운 송곳니가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그 순간.

"누구냐!"

스걱!

촌장이 눈빛을 번뜩이며 뒤를 향해 손을 내질렀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날카로운 손톱이 길쭉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마치, 맹수의 손톱과 같은 손톱이.

그러나, 그가 내지른 곳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바람 때문인가?"

촌장이 홀로 중얼거리며 손톱을 거두었다.

아무래도 인간들 사이에 섞여 있다 보니 본능이 무뎌진 것 같다고 생각하며 문고리를 잡는 순간, 뒤에서 오싹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네놈이었구나."

등골을 타고 흐르는 섬뜩한 공포.

머릿속에 생존 본능이 종을 울리고 있었다. 당장 움직이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하다고.

하지만, 그가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킬케르가식 암살술 ]

- 한 때, 대륙의 귀족을 두려움에 빠트렸던 희대의 암살자, 킬케르가의 암살술.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죽음을 알아채지 못한다는 극의 암살술.

푹!

"커헉!"

차가운 금속의 감각이, 그의 목덜미를 꿰뚫었다.

제 96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