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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 - 2

제 21화

21. 제21화

파극심공(破極心功).

이는 마공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그 어떤 심공보다 빠르게 내공을 쌓을 수 있었다.

대신, 그 위험도 역시 그 어떤 심공보다 높았다.

열에 아홉. 아니, 백 명 중에 아흔아홉 명은 파극심공의 묘리를 견디지 못하고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지고 만다.

마법사로 치자면 마나 역류. 전신의 혈이 뒤틀리며, 다시는 내공을 사용하지 못하는 몸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파극심공은 이것을 넘어 주화입마가 닥치는 순간, 전신의 혈이 터지며 생을 마감하고 만다.

세운이 이런 위험한 심공을 고른 이유는 바로.

'삼재공이라면 가능하다.'

현재 단전을 탄탄하게 다듬어 둔 삼재공 때문이다.

그 어떤 심공보다 느리지만, 탄탄한 기반을 쌓도록 도와주는 삼재공과 함께라면 파극심공의 묘리도 견딜 수 있을 거라는 계산이었다.

쿵, 쿵!

심장이 뛰는 소리가 선명하게 느껴진다.

삼재공을 통해 내공을 쌓는 게 잔잔한 시냇물과 같다면 파극심공을 사용해 들어오는 내공은 파도와도 같았다.

단전의 강도나 크기 따위는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거칠게 흘러들어온다.

자연스럽게, 그 중앙을 가로막고 있던 혈들이 뻥뻥 뚫려 나간다.

주룩-

세운의 입가에서 검은 피가 왈칵 쏟아진다. 혈맥이 강제로 뚫려 나가며, 죽은 피가 배출된 것이다.

우우우웅!

삼재공으로 탄탄하게 단련된 단전이 거친 내공의 파도를 막아 낸다.

세운의 예상대로, 삼재공은 마치 방파제처럼 내공의 파도를 훌륭하게 막아 냈다.

그러나 한 가지 예상하지 못한 점이 있었다.

'기운이 너무 강하다.'

파극심공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주위에 파도를 만들 만큼 많은 내공이 필요하다.

게다가, 마지막 웨이브가 시작하기 전까지 공동의 기운을 전부 흡수하려면 극도의 효율을 추구하는 심공이 필요했다.

그래서 파극심공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하여 고른 것인데, 주변의 기운이 생각 이상으로 많았다.

단전으로 흘러드는 기운이 파도가 아닌, 해일이 되어 몰아쳤고 삼재공이라는 방파제마저 해일을 견디지 못하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안 된다.'

주화입마에 빠지는 순간, 그걸로 끝이다.

설사 목숨을 부지한다고 하더라도, 내공과 마나를 사용하지 못하는 몸으로는 탑을 오를 수 없다.

그 순간,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세운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잠깐만, 마나라면!'

생각은 신중하게, 행동은 빠르게.

세운은 내공의 해일을 견디는 와중에, 다급하게 탐욕의 권능을 개방하여 생각해 둔 보물을 선택하였다.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다크 마나 서클 ]

- 제국의 적이라 일컬어지는 흑마법사의 고향, 흑탑에서 직계 제자에게만 전수된다고 알려진 다크 마나 서클의 수련법.

흑탑의 수련법.

내공이냐, 마나이냐의 차이만이 있을 뿐. 그 원리는 파극심공의 것과 매우 흡사했다. 둘 다 강한 힘을 추구하기 위해 안정성을 배제한 수련법이니 말이다.

삼재공과 마찬가지로, 세운이 처음 서클을 생성할 때 사용했던 청탑의 수련법 역시 안정성에 그 뜻이 치중된 수련법이었다.

시기가 조금 빨랐지만,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우우웅!

우우우웅!

단전과 마나 서클.

마나를 담고 있는 두 가지 핵이 동시에 활성화되었다.

본래는 이 자체로도 주화입마와 마나 역류가 일어나 폐인이 되는 지름길이었지만.

-천지의 움직임에 순응하며, 무한한 조화를 추구하는 삼재공이 주화입마의 작용을 억누릅니다.

-자연의 흐름에 따르며, 바다와 같은 수용력을 가진 청탑의 수련법이 마나 역류의 작용을 억누릅니다.

세운의 예상이 맞아떨어졌다.

주화입마와 마나 역류의 역치가 아슬아슬한 수준을 유지한 채로, 단전과 서클에 동시에 흡수되었다.

본래 해일과 같이 몰아쳤던 기운이 두 갈래로 나누어지자, 착실하게 다져 두었던 기반으로 기운이 빠르게 스며들었다.

"후우...."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하였던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죽은 피를 내뱉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는데, 호흡이 안정권에 접어들자 조금씩 이성을 찾을 수 있었다.

파극심공과 흑탑의 수련법.

두 가지 일이 숨 쉬듯이 자연스러워지며, 다른 생각을 떠올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세운은 호흡을 그대로 유지한 채로 눈앞에 떠올라 있는 수많은 메시지를 차분하게 살펴보았다.

[ 튜토리얼 첫 번째 장 – 적응 ]

-여섯 번째 웨이브를 성공적으로 통과하였습니다.

-웨이브에 참여한 모든 인원에게 100point를 제공합니다.

[ 튜토리얼 첫 번째 장 – 적응 ]

-일곱 번째 웨이브를 성공적으로 통과하였습니다.

-웨이브에 참여한 모든 인원에게 200point를 제공합니다.

[ 튜토리얼 첫 번째 장 – 적응 ]

-여덟 번째 웨이브를 성공적으로 통과하였습니다.

-웨이브에 참여한 모든 인원에게 200point를 제공합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나 지났나.'

파극심공을 사용하기 전까지만 해도 여섯 번째 웨이브가 시작하기 전이었는데, 해일처럼 몰아치던 기운을 받아들이려 애쓰다 보니,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간 듯했다.

대충 시간을 계산해 보니 캠프를 떠나고 벌써 하루하고도 반나절이 지나 있었다.

'잘 막아 내서 다행이네.'

네 번째 웨이브 때, 같은 늑대라도 브라운 울프에서 그레이 울프로 몬스터의 수준이 한 단계 상승한 것처럼 일곱 번째 웨이브 역시, 그레이 울프에서 레드 울프로 몬스터의 수준이 또 한 단계 상승한다.

게다가 여덟 번째 웨이브라면 이미 레드 보어 무리까지 상대했을 테니, 어쩌면 캠프의 피해는 생각 이상으로 클지도 모른다.

'걱정 없이 여기까지 나와 히든 피스를 얻을 수 있었던 것도 그들 덕분이니까 한동안은 캠프에 머물러서 밥값 좀 해야겠군.'

몬스터 웨이브를 막아 내지 못한다고 해도 탑을 오르는 것은 가능하다. 대신, 캠프가 웨이브를 막아 내지 못하면 자동으로 개인 공적치 랭킹에서 제외되게 된다.

세운이 굳이 캠프에 신경을 쓰고 있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었다.

'게다가 이제 곧 열 번째 웨이브니.'

튜토리얼 첫 번째 장, 적응.

그 마지막이 바로 열 번째 웨이브다.

마지막 웨이브답게 등장하는 몬스터의 수준 역시 기존의 수준을 아득히 벗어난다.

지금까지는 잘 막아주고 있더라도, 열 번째 웨이브는 세운이 없으면 막아 내기 어려우리라.

-파극심공을 통해 단전에 반갑자의 내공을 쌓았습니다.

-무공을 사용하지 않을 때도 내공이 혈맥을 순환하며 기본적인 신체 능력이 상승합니다.

-상승한 내공의 수치에 따라 사용하는 모든 무공의 효율이 증가합니다.

파극심공의 묘리에 따라 사용하는 무공의 파괴력이 더욱 상승합니다.

-놀라운 업적을 달성하였습니다.

-보상으로 5,000point를 획득하였습니다.

반갑자.

일반적으로 심공을 터득한 플레이어가 30년 동안 쌓을 수 있는 수준의 내공을 말한다.

물론, 시간이 흐르며 심공의 효율이 발전하며 그 시간이 크게 줄긴 했지만.

세운은 당장 앉은 자리에서 이틀도 안 되는 시간에 반갑자에 해당하는 내공을 쌓았다.

만약 마몬이 성좌의 통신을 막고 있지 않았다면, 이번에도 다양한 성좌들이 기겁을 하며 세운에게 관심을 보였을 것이다.

아니, 이 정도의 업적이라면 족히 자신의 권속 아래 들어오라며 제안을 꺼냈을지도 모른다.

-흑탑의 수련법을 통해 두 번째 마나 서클(Mana circle)을 생성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새로운 서클의 생성에 따라 2 서클 마법의 사용이 가능해졌습니다.

-마나 서클의 수준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의 수준이나 위력, 속도 등이 상승합니다.

-흑탑의 수련법이 가진 묘리에 따라 사용하는 마법의 파괴력이 더욱 상승합니다.

-놀라운 업적을 달성하였습니다.

-보상으로 5,000point를 획득하였습니다.

마나 서클 역시 마찬가지.

천재라 불리는 이들도 최소 이삼 년은 수련해야 생성할 수 있다는 이 서클의 경지를 순식간에 달성하였다.

단순히 서클이 하나 더 생겼다고는 하지만, 이 서클은 단순히 일 서클의 두 배 같은 수준이 아니었다.

예를 들자면, 세운이 기존에 사용하던 파이어 볼을 네다섯 번은 더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마법을 사용하는 것 역시 가능하며, 흑탑의 수련법 덕에 그 위력도 크게 증가하였다.

고작 이틀도 안 되는 시간 안에, 세운의 무력이 놀랍도록 크게 상승하였다.

무엇보다도.

[ 바위를 쪼갠 검, 뒤랑달(봉인) ]

분류 : 장검

등급 : B

설명 : 전설의 영웅들이 사용해 온 전설의 검. 아직 주인의 힘을 완벽하게 인정받지 못해 잠재력이 크게 봉인되어 있다.

능력 : 1. 영웅의 검 – 절삭률이 50% 상승한다.

2. 영웅의 자격 – 몬스터를 대상으로 한 공격력이 30% 상승한다.

3. 바위를 쪼갠 검 – 그 어떤 상황에서도 칼날이 무뎌지거나 이가 빠지지 않는다.

4. (봉인)

5. (봉인)

"이게 튜토리얼의 첫 번째 장에 잠들어 있었다니."

뒤랑달.

트로이의 영웅인 헥토르가 사용한 검이자, 샤를마뉴 12기사의 수장 롤랑이 하사받았다고 알려진 명검.

그 위력은 닿는 모든 것을 동강 낼 정도로 강력하다고 알려져 있다.

세운이 회귀하기 전에도, 탑에서 발견되지 않은 희대의 명검 중 하나였다. 그런 무기를 이곳에서 발견할 줄이야, 상상도 하지 못했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진짜 뒤랑달의 광채에 감탄성을 흘립니다.

그러니 탐욕의 마신인 마몬이 감탄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세운이 회귀 전에 보았던 그의 창고에 있던 보물들은 진품의 힘을 간직하고 있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모조품일 뿐이었으니까.

촤악!

뒤랑달을 가볍게 휘두르자, 공기가 날카롭게 베어졌다.

마치, 검기를 두른 듯한 날카로움.

여기에 세운의 실력이 높아져 검기까지 두른다면, 어지간한 플레이어는 방어구와 함께 몸이 베이고 말 것이다.

"능력이 봉인된 게 이 정도라니."

심지어 이건 뒤랑달이 가진 힘의 일부에 불과했다.

아무래도 검을 빼내기 전 세운이 검에 불어 넣은 힘이 부족했기에 봉인이 덜 풀린 듯했다.

뭐, 그래도 그 위력은.

카강!!

바위마저 갈라낼 정도로 훌륭했지만.

이것만으로도 마나를 다루지 못하는 적이라면 세운의 공격을 절대 버티지 못할 것이다.

[ 튜토리얼 첫 번째 장 – 적응 ]

-아홉 번째 몬스터 웨이브까지 남은 시간 24분.

바위를 베었음에도 날이 전혀 상하지 않은 뒤랑달을 보며 세운이 미소를 지으며 납검을 하였다.

바위산의 보스 몬스터를 무찌르고, 최소한 일곱 번째 웨이브 전까지 복귀할 생각이었는데, 생각 이상으로 복귀가 늦어 버렸다.

캠프의 상황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자칫하다가는 세운의 생각 이상으로 피해가 심각할지도 모른다.

우웅!

단전을 가득 채운 듯한 내공의 충족감을 한껏 즐기며, 세운이 던전의 바깥으로 몸을 움직였다.

제 22화

22. 제22화

튜토리얼의 아홉 번째 웨이브가 시작되었다.

예상했던 대로, 일곱 번째 웨이브부터 몬스터의 수준이 또 한 단계 상승하였다.

피같이 새빨간 가죽을 가진 레드 울프와 레드 보어들. 그리고 지금 캠프의 사람들 앞에 찾아온 것 역시 붉은 털을 휘날리는 레드 몽키들이었다.

"막아, 막으라고!"

"뒤, 뒤에도 있어!"

녀석들은 단순히 신체 능력만 강화된 게 아니었다.

커진 덩치도 덩치지만, 들고 있는 무기 중에는 간간이 쇠로 된 무기도 존재했다.

지능도 높아진 듯 어엿한 전술을 구사하며 사람들을 농락하고 있었다.

"부상자들을 지켜!"

"젠장, 더 이상 부상자들까지 신경 쓸 여유가...."

붉은 털을 가진 몬스터들은 강력했다.

게다가 캠프에거 사장 강한 전력인 세운이 여섯 번째 웨이브 때부터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유서아와 강한철이 더 큰 활약을 해 주고 있었지만, 일곱 번째 웨이브부터 서서히 부상자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 상태로 여덟 번째 웨이브가 시작되었고, 사상자는 없었지만 여섯 명이 전투 불가 상태인 데다 다른 사람들도 크고 작은 부상을 입고 있었다.

그런 상황을 파악한 것일까? 레드 몽키 몇몇이 부상자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이대로라면 꼼짝없이 부상자들이 당하는 상황.

그때, 두 개의 검이 바람과 같이 날아들어 원숭이 무리를 휩쓸기 시작했다.

서거거걱-!!

세운이 보았다면 회귀 전에 그녀의 이명이었던 '선풍'을 떠올렸으리라. 아니, 지금의 모습은 선풍보다는 '광풍(狂風)'이 더 어울릴 듯했다.

두 개의 검을 쉴 새 없이 휘두르는 그녀의 검술은 마치 거미가 여덟 개의 다리를 움직이며 적 사이를 누비고 있는 듯했다.

-성좌, '왕관을 쓴 거미'가 아직 현란함 부족하다며 플레이어 '유서아'의 자세를 교정합니다.

그녀가 검을 휘두른 뒤로 두 개의 검이 잔상처럼 남아 있었다.

레드 몽키들의 눈에는 그녀가 네 개의 검을 휘두르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제대로 된 무기를 들고 있음에도, 그녀의 공격에는 버티지 못했다.

하지만.

"헉, 헉...."

유서아 역시 체력이 많이 빠져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힘을 내주고 있다지만, 캠프의 전투는 유서아와 강한철로 이루어진 2인 체제에 가까웠으니까.

그녀의 몸에는 이미 앞선 레드 울프와 레드 보어를 상대하며 입은 상처가 가득했다.

부상자가 많아지며, 사람들의 의존도가 강해진 덕에 지금 그녀의 체력은 한계에 가까웠다.

"우끼익!"

유서아가 지친 것을 알아챈 걸까? 기회를 노리고 모인 레드 몽키들이 그녀의 주위를 둘러쌌다.

다시 한번 검을 휘두르려 했지만, 덜덜 떨려오는 그녀의 손은 검을 쥐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한계였다.

바로 이어서 레드 몽키들이 무기를 휘두르려던 순간.

"흐읍!"

쾅!

쿠구구구-!!

우렁찬 기합과 함께, 녀석들 아래의 지면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중간중간 바위가 튀어 오르거나, 바닥이 꺼지며 절반에 가까운 레드 몽키들이 생을 마감했다.

-성좌, '악어를 탄 노인'이 기꺼운 눈빛으로 흔들리는 지면을 바라봅니다.

-성좌, '왕관을 쓴 거미'가 끼어들지 말라며 독니를 드러냅니다.

지진을 일으킨 남자는 캠프의 핵심 인물 중 하나인 강한철이었다.

지옥의 대공작, 아가레스와 계약한 그는 유서아와 마찬가지로 평범한 인간의 수준을 벗어난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다만.

"고마워요!"

"숨이라도 고르고 있어라."

"하지만, 부상자들이...."

"부상자를 지키다가 네가 쓰러지면 캠프 전체가 전멸이다."

그의 상태도 정상은 아니었다.

민첩한 움직임을 위주로 전투를 벌이는 유서아와 달리, 강한철은 타고난 신체로 공격을 버티며 더욱 강한 공격을 날리는 데 특화되어 있었다.

세운에게 배운 유술 덕분에 전투 스타일이 달라졌다고는 해도, 애초에 민첩이 그리 높지 않았기에 상처가 쌓일 수밖에 없었다.

찢어진 외투 사이로 보이는 상처의 수만 해도 수십 개.

사실, 이 캠프에서 가장 큰 부상을 입은 자는 강한철이 아닐까 싶었다.

"저희 둘이서 막을 수 있을까요?"

"해야만 한다."

여섯 번째 웨이브를 상처 하나 없이 막아 냈을 때만 하더라도 자신감이 있었는데, 지금은 앞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막막했다.

설령 이번 웨이브를 막아 낸다고 하더라도 다음 웨이브를 막아 내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이 순간, 유서아와 강한철의 머릿속에는 단 한 명의 남자가 떠올랐다.

정세운.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둘은 믿고 있었다. 그가 꼭 돌아오리라는 것을.

"으아아아악!"

그사이, 저 멀리에서 건들거리는 듯 보이는 남자 하나가 바나나를 품에 안은 채 레드 몽키들을 피해 달아나고 있었다.

박정필. 그가 원숭이 무리 일부를 유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유서아와 강한철이라 하더라도 이미 원숭이들의 집중 공격에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역시 이미 한계. 결국 바나나를 내던지고, 유서아와 강한철 사이에 쓰러져 숨을 헉헉거렸다.

"이제 한계! 더는 못 해!"

"고생했어요."

"형님은 대체 어디 간 거야? 저 공적치라는 게 계속 올라가는 걸 보면 죽지는 않은 것 같은데!"

"우끽! 끼에엑!"

"으아악!"

기존의 레드 몽키들에, 박정필이 유인하던 레드 몽키까지. 수십 마리의 몬스터가 셋을 둘러쌌다.

유서아와 강한철의 이마에서 절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과연, 이번 공격을 막아 낼 수 있을까?

떨리는 마음으로 주먹을 힘껏 쥐었다.

"끼에에엑!"

그렇게 승리를 확신한 원숭이 무리가 발을 떼는 순간.

-성좌, '왕관을 쓴 거미'가 마신에게 고개를 숙입니다.

-성좌, '악어를 탄 노인'이 마신에게 고개를 숙입니다.

파지지지직!!

한 줄기의 뇌전이 레드 몽키 사이에 퍼져 나갔다.

뇌전은 마치 한 마리의 뱀처럼 먹잇감을 집요하게 추적해 나갔다.

감전된 원숭이들은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한 채 전신이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그리고 그 순간, 뇌전의 발생지를 바라보며 박정필이 눈물을 그렁그렁 맺었다.

"형니이이임!!"

* * *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체인 라이트닝(Chain Lightning) ]

- 자탑(紫塔)의 고유 마법 중 하나로써 보랏빛 뇌전을 사슬처럼 이어 적진을 휩쓰는 번개 마법.

세운의 손을 빠져나온 보랏빛 뇌전이 적진을 휩쓸었다.

과연, 2 서클 마법답게 그 위력은 세운이 기존에 주력으로 사용하던 파이어 볼 이상이었다.

순식간에 이십 마리가량의 레드 몽키들이 시커멓게 타들어 갔고, 위력이 약해진 번개의 사슬을 맞은 녀석들도 흰자를 드러내며 정신을 잃었다.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하네.'

세운이 적절히 도착하지 않았더라면, 이대로 웨이브에 실패할 뻔했다.

대충 둘러보아도 전투 불능 급의 부상자 다수에, 남은 사람들의 상태도 정상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이 정도면 잘 버텨준 건가?'

부상자가 많다지만, 사상자는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한눈에 보기에도 유서아와 강한철의 성장세가 엄청났다.

이곳에 쓰러져 있는 레드 몽키 대다수가 둘의 손에 죽어 나갔을 게 분명하다.

아마, 이전의 웨이브들 역시 지금과 비슷하게 흘러갔으리라.

"형니이이임!!"

'저 녀석은 뭔데 저기 껴 있는지 모르겠지만.'

박정필.

옆에 두고 감시할 생각 반, 괴롭힐 생각 반으로 미끼 역할이나 시키던 녀석인데, 생각보다 제대로 활약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심지어.

-성좌, '당나귀 머리의 날치기'가 플레이어 '박정필'을 가리키며 낄낄거립니다.

'당나귀 머리라면, 발레포르?'

녀석이 성좌의 관심까지 받고 있었다.

당나귀 머리의 날치기, 발레포르.

서열 6위의 마왕이자 10개의 악마 군단을 다스리는 공작이었다.

발레포르에게는 이것과는 별개로 유명한 별명이 하나 있었는데.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바로, '도적의 공작'이었다.

서열 6위의 강력한 마왕이면서 전투에는 별로 도움도 될 것 같지 않은 도둑질이라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지.

그런 발레포르의 도움이라면 박정필이 그 재빠른 레드 몽키를 상대로 여태껏 도망쳐 왔던 게 이해가 간다.

"마, 마법! 설마!"

"왔다! 그가 왔어!"

"혈랑이다!"

보랏빛 뇌전이 워낙 화려했기에 사람들도 세운의 존재를 금방 알아챘다.

다들 갑작스럽게 사라진 세운을 원망하고 있었지만, 결국 이 상황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세운뿐이었으니 말이다.

그보다.

"혈랑?"

저건 또 무슨 말인가? 보아하니 세운을 두고 하는 말인 듯한데, 갑자기 혈랑이라니?

탑에 들어간 플레이어에게 이명이 붙여지는 경우가 있긴 해도, 튜토리얼에서 이명이 붙는다는 소식은 들은 적도 없다.

그때, 세운의 옆으로 박정필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형님, 마음에 드십니까?"

"...설마, 네가 지은 거냐?"

"흐흐, 어찌 아셨습니까? 형님이 걸치고 계신 늑대 가죽 망토에, 검을 휘두르고 마법을 날릴 때마다 퍼져 나가는 혈향! 딱 어울리지 않습니까?"

세운이 미간을 찌푸렸다.

플레이어에게 이명이란 이름보다 자주 불릴 정도로 중요한 것이었다.

그런 걸 자신의 허락도 없이 막 짓다니.

게다가 이미 다른 사람이 자신의 이명을 외칠 정도면 캠프의 사람들 대부분이 세운을 혈랑이라는 이명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말 아닌가?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을 불러놓고 '혈랑이라고 부르지 마세요.'라고 말하기도 뭣하다.

세운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네 이명은 꼭 내가 직접 지어주마."

"네? 저야 영광입죠!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형님!"

세운이 다짐했다. 박정필도 꼭 자신과 맞먹는 이명을 지어주겠다고.

'일단은....'

"우끼익!"

아홉 번째 몬스터 레이드.

그런 만큼 레드 몽키의 수는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다.

유서아와 강한철이 그렇게 많이 쓰러트리고, 방금 세운의 마법에도 수십 마리가 쓰러졌음에도 말이다.

방금 선보인 마법 때문인지 캠프 주위에 있던 레드 몽키들의 시선이 전부 세운을 향했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모두 지쳐 도움을 바랄 수도 없는 상황이지만.

'이래 주면 나야 환영이지.'

적이 하나이니 단체로 공격하면 될 거라 생각하며 모여든 듯한데, 역시, 아무리 똑똑해 봤자 원숭이는 원숭이인가 보다.

방금 세운이 사용했던 마법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흑탑의 묘리에 따라 '라이트닝 체인'의 위력이 강화됩니다.

이번에 공동해서 사용한 새로운 마나 수련법.

덕분에 생겨난 두 번째 서클은 흑탑의 묘리에 따라 검은빛을 띠고 있었다.

흑탑의 수련법이라 해도, 무작정 흑마법만 사용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다크 마나 서클은 특유의 파괴적인 마나를 내뿜으며 사용하는 마법의 파괴력을 증가시키는 데 그 의미가 있다.

파지지직!!

세운의 손에서 뻗어 나간 번개가 자줏빛을 넘어 시꺼멓게 물들었다.

번개 마법의 특성상, 애초에 회피나 방어 따위는 불가능했다.

마나를 다룰 수 있는 자라면 몰라도, 고작 레드 몽키들 따위는 세운의 마법에 거스를 수 없었다.

치이익-!

검은 번개가 스쳐 지나간 자리에는 검은 사체만이 남아 있었다.

위력이 강해지며 속도 역시 증가해 검은 번개는 순식간에 적진 전체를 휩쓸었다.

제 23화

23. 제23화

[ 튜토리얼 첫 번째 장 – 적응 ]

-아홉 번째 웨이브를 성공적으로 통과하였습니다.

-웨이브에 참여한 모든 인원에게 200point를 제공합니다.

[ 1위 : 정세운 41,660point ]

[ 2위 : 유서아 4,820point ]

[ 3위 : 강한철 4,760point ]

그렇게 아홉 번째 웨이브의 막이 내렸다.

평소 같았으면 몬스터를 조금 남겨두어 사람들이 상대하게 하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니 세운이 마무리를 지었다.

뒤랑달을 사용해 볼 생각에 설레고 있었는데, 사람들을 위해 마법으로 빠르게 몬스터를 정리하다 보니, 검을 꺼낼 타이밍을 놓쳤다.

아쉬운 마음에 뒤랑달의 손잡이를 매만지고 있으니, 세운의 앞으로 유서아와 강한철이 다가왔다.

"세운 씨!"

"돌아왔군."

무덤덤한 강한철과는 다르게 유서아는 얼굴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힐 정도였다.

아무래도 세운이 없는 동안 리더로서 캠프를 관리하며 어려움이 생각보다 컸나 보다.

"도대체 어디에 다녀오신 거예요?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다급하게 설움을 토해내는 그녀.

하지만, 잠시 주변을 살펴본 세운은 그녀의 말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설명은 나중에 하고. 일단 너는 할 일이 있는 것 같은데?"

"네? 아...."

유서아는 실질적인 캠프의 리더로서 자리 잡고 있었다.

세운으로 인해 웨이브를 막아 내긴 했지만, 캠프는 현재 만신창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시설이나 부상자, 식량 등. 그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중에 꼭 설명을 들을 거예요."

그 말을 남기고는 유서아는 자리를 떠났다.

세운으로서는 자기 대신 캠프를 관리해 주고 있는 그녀가 고마울 따름이다.

강한철이 말을 이어갔다.

"전보다 더 강해졌군."

"너도 많이 세졌던데?"

"...잠시 후에 부러진 나무 앞에서 보지."

"그래."

부러진 나무 앞.

세운이 약속한 대련을 뜻하는 말이었다.

여섯 번째 웨이브 이후로는 대련을 해 주지 않아서 그런지, 강한철의 얼굴에는 진한 기대감이 묻어나 있었다.

그렇게 둘을 보낸 세운이 이제는 익숙해진 이름을 불렀다.

"정필아."

"네, 형님!"

박정필.

회귀 전의 행동으로 인해 감시할 생각 반, 괴롭힐 생각 반으로 옆에 두고 있었는데, 나름대로 웨이브에 열정적으로 참여하고 있던 것은 물론, 무려 서열 6위의 마왕 발레포르의 관심까지 받고 있었다.

이걸 미운 정이라고 해야 하나?

이렇게 된 이상, 더욱 철저하게 이용하여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상황 보고."

"넵! 형님이 바위산으로 향한 뒤에 여섯 번째 웨이브는 피해 없이 끝났습니다! 다만 일곱 번째 웨이브부터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듯이 박정필의 보고가 술술 쏟아져 나왔다.

지금까지의 몬스터 웨이브에 관한 얘기, 전투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사람들, 전투가 끝나고 캠프의 식량 관리 등.

가만히 듣고 있긴 했지만, 세운은 속으로 살짝 놀라고 있었다.

'이놈한테 이런 재능이 있었나?'

회귀 전에는 강한철에게 붙어서 깐죽대던 기억밖에 없었는데.

역시 사람은 환경에 적응하는 동물이라는 것인지, 녀석은 회귀 전과 전혀 다르게 두각을 보이고 있었다.

"또 남는 시간에 쌍둥이를 필두로 캠프 주위에 목책을 설치하고...."

목책이라.

세운은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분명 세운이 떠날 때까지만 하더라도 대충 나뭇잎과 풀로 만들어 낸 간이 잠자리나 요리를 하기 위한 간단한 시설들이 전부였는데.

지금은 제법 그럴듯한 간이 오두막 같은 게 설치되어 있었다.

게다가 캠프 주위로 제법 두꺼운 목책도 형성되어 있었다.

날카로운 끝에 붉은 피가 묻어 있는 것을 보니, 웨이브 때도 제 역할을 톡톡히 한 듯했다.

"쌍둥이라고 했나? 그게 누구지?"

"아, 형님은 모르시겠네요. 이쪽으로 오시죠! 아마 지금도 바로 보수 작업에 착수했을 테니 말입니다."

세운이 박정필을 따라 조금 걸었다.

걷는다고 해도 캠프는 한눈에 딱 들어올 정도의 크기였기에 금방 현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조금 불안하다 싶더니, 역시 여기가 문제였네."

"그러게, 내가 더 튼튼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했잖아!"

"네 방식대로 했다가는 웨이브가 시작되기 전에 절대 완성하지 못했을걸?"

"윽! 일단 나무가 더 필요하겠지?"

"응, 근데 우리 둘이서는 다음 웨이브 때까지 시간을 못 맞출 텐데...."

부서진 목책을 눈앞에 두고 토론을 나누고 있는 두 여성.

쌍둥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똑 닮은 외모와 구불거리는 곱슬머리가 인상적이었다.

'이 둘이었구나.'

회귀 전의 기억에는 남지 않은 이들이었지만, 세운은 그 둘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전투에 부각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유난히 유서아의 지시에 잘 따르던 이들.

특히, 세 번째 웨이브 때부터였나? 누구보다도 열심히 몬스터를 막아 내던 모습이 인상 깊게 남아 있었다.

"어이, 둘 다 뭐 하고 있어? 우리 형님이 오셨는데 얼른 와서 인사도 안 하고!"

"어? 혈랑이다!"

"와, 혈랑이다!"

쌍둥이가 세운의 존재를 알아채고 가까이 다가왔다.

혈랑이라니.

회귀 전에는 전투보다 탐험 쪽으로 이름을 떨친 세운이었기에, 영 적응 안 되는 이명이었다.

그 때문에 가볍게 박정필을 노려보았지만, 녀석은 '예?'라며 의문을 표할 뿐이었다.

눈치를 못 챈 건지, 못 챈 척하는 건지.

세운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쌍둥이가 만들었다는 목책을 바라보았다.

"제법 잘 만들었네. 도구는 포인트로 구입한 건가?"

"네! 서아 언니가 알려줬거든요! 아, 그것도 혈랑 오빠가 알려준 거라면서요?"

"지금은 많이 부서졌지만, 빨간 늑대랑 멧돼지들 상대할 때는 꽤 활약했거든요!"

공적치 포인트로 살 수 있는 건 유서아가 구입한 검뿐만이 아니다.

간단한 기본 장비만 아니라, 이 둘이 손에 들고 있는 톱이나 망치 같은 것도 얼마든지 구입이 가능하다.

물론, 보통 저런 데 포인트를 지불하는 플레이어는 그리 많지 않긴 하지만.

둘의 실력을 보니, 충분히 지불한 포인트 이상의 득을 보고 있는 듯했다.

"이거라면 다음 웨이브 때도 쓸 만하겠는데."

"으으, 또 무슨 몬스터가 나올까요?"

"으으, 이번에 나온 빨간 애들도 무서웠는데. 역시 그보다 더 강한 몬스터겠죠?"

열 번째 웨이브 때 나오는 몬스터의 정체를 알고 있는 세운이었기에, 가볍게 웃음을 지으며 대답을 회피했다.

이들에게 자신이 회귀자라는 것을 설명할 게 아닌 이상, 너무 자세한 정보를 언급해 봤자 의심을 사게 될 뿐이다.

"듣자 하니 나무가 더 필요하다던데."

"앗, 들으셨어요?"

"원래는 여유 시간에 사람들의 힘을 빌렸는데, 이번에는 부상자도 많고 해서...."

건축 능력이라.

다른 때 같았으면, 세운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거다.

지금 애써 목책 같은 걸 만들어 봤자, 어지간한 목책은 열 번째 웨이브에서 별 도움도 못 되고 튜토리얼의 첫 번째 장이 끝나자마자 무쓸모가 되어 버리니까.

그런데도 세운이 이리도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하나였다.

-성좌, '검은 새'가 날카로운 창끝 위에 앉아 플레이어 '한아름'을 관찰합니다.

-성좌, '거대한 새'가 플레이어 '한다운'에게 날개를 활짝 펼쳐 보입니다.

검은 새와 거대한 새.

각각 서열 38위의 마왕 '할파스'와 서열 39위의 마왕 '말파스'였다.

여기서 할파스가 상징하는 것은 죽음과 파멸. 이 때문인지 좋아하는 것 역시 '전쟁'으로써 그 능력은 특이하게도 전쟁과 관련된 건축 능력에 맞춰 있었다.

때문에 '죽음의 새'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성좌이기도 했다.

바로 뒤에 붙어 있는 말파스는 '사기꾼의 총통'이라는 이명을 가지고 있지만 할파스와 비슷하게 축성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건축과 축성.

그 두 가지 힘이 합쳐진다면....

'어지간한 전투계 플레이어보다 큰 도움이 되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기에, 세운이 쌍둥이를 돕기 위해 나선 것이다.

"나무 정도야, 내가 구해 주지."

"정말요?"

"와아! 혈랑 오빠 최고!"

"...대신, 그 이명 좀 안 붙여줬으면 좋겠는데."

"왜요? 멋있지 않아요?"

"풉."

"...."

"야, 웃으면 어떡해! 혈랑 오빠 상처 받는다구!"

"푸흡! 그래도 웃긴 걸 어떡해!"

둘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다음에 꼭 박정필에게 혈랑과 걸맞은 이명을 지어주겠다고 다짐하며, 세운은 늑대 숲으로 향했다.

"필요한 목재의 종류나 크기 같은 건?"

"에이, 당장 몇 시간 후면 몬스터가 쳐들어오는데 그런 걸 신경 쓸 여유가 있나요?"

"그런 건 저희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냥 아무 나무나 최대한 많이 베어 주시면 돼요!"

아무 나무나 최대한 많이.

세운으로서는 이렇게 쉬운 주문이 또 없었다.

철컥.

'뒤랑달의 첫 활약이 벌목이 될 줄은 몰랐는데.'

세운이 뒤랑달을 빼 들었다.

목책이나 간이 오두막의 재료가 된 것인지, 늑대 숲의 초입은 이미 벌목이 꽤 진행된 상태.

그러나 장비가 부족했던 탓일까?

조금이라도 두껍다 싶은 나무들은 대부분 굳건히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제대로 된 도끼가 없는 이상. 아니, 도끼가 있더라도 강한철 정도가 아닌 이상 저런 나무를 벌목하는 건 힘드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세운은 당당하게 남들이 벌목을 포기한 두꺼운 나무 앞에 섰다.

"그걸로 베게요?"

"도끼라도 빌려올까요?"

"아니, 됐어."

뒤랑달의 첫 시연이 몬스터가 아니라는 건 아쉽지만, 이 정도 두께의 나무 기둥이라면 스스로의 힘과 뒤랑달의 능력을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어 보였다.

세운은 다리를 넓게 벌리며 '하멜가 장검술'의 기본 자세를 잡았다. 내공을 사용하지 않고, 순수한 힘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곧이어 검을 수평으로 기울인 세운이 하체에 힘을 주며.

"흡!"

나무 기둥을 향해 깔끔한 횡 베기를 날렸다.

서걱!

"와아!"

"진짜 세다!"

"역시 형님이십니다!"

뒤랑달이 나무 기둥의 절반가량 깊숙이 박혀 들어갔다.

당연하게도 뒤에서는 두 쌍둥이와 박정필의 감탄사가 들려왔다.

하지만, 정작 세운은 그리 만족스럽지 않아 보였다.

'뒤랑달이 아무리 날카로워도, 내공을 사용하지 않으면 이게 한계인가.'

'바위를 쪼갠 검'이라 불리는 뒤랑달이지만, 주인의 힘이 부족하면 지금처럼 나무 하나 제대로 베지 못한다.

두 마신의 권능과 각종 히든 피스를 얻으며 꽤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였다.

세운이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으며 뒤랑달을 꽉 쥐었다.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태산십팔반검(泰山十八盤劍) ]

- 대체로 크고 강한 체구를 타고나는 편이라 패도적인 무공이 발달한 황보세가(皇甫世家)의 고유 무공.

이제는 제법 몸에 익은 혈랑검법도 있지만, 지금 세운에게 필요한 것은 '힘'이다.

나무 기둥 따위는 단 일격에 베어낼 만큼 강한 힘을 낼 수 있는 무공이 필요했다.

때문에 선택한 것이 바로 이 황보세가의 무공이다.

태산의 힘을 지녔다고 알려진 '태산십팔반검'과 바위를 쪼갠 검 '뒤랑달'의 힘이라면, 나무 기둥 따위 더 이상 세운의 앞에 서 있지 못하리라.

그것을 증명하듯.

서걱-!

우드드득- 콰앙!

"와, 진짜 베었어!"

"검으로 저 두꺼운 나무를 두 번 만에!"

"이야, 형님! 멋지십니다!"

세운의 횡 베기가 나무 기둥을 깔끔하게 베어냈다.

제법 큰 나무 하나가 쓰러지자, 숲을 울리는 소음과 함께 캠프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집중되었다.

하지만, 세운의 벌목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내공을 통해 태산십팔반검의 제이 초식, 태산이격(泰山二格)이 강화됩니다.

서걱!

우드드득- 콰앙!

내공을 사용하기 시작한 이상, 세운의 일검을 버텨내는 나무 기둥은 존재하지 않았다.

캠프의 수많은 사람이 베기를 포기한 나무들이, 단 일격도 버텨내지 못하고 쓰러져 갔다.

그런데도 세운의 손에 들린 뒤랑달은 날이 조금도 무뎌지지 않았다.

우드드득!

쾅!

쾅, 콰앙!

순식간에 나무 수십 개가 쓰러져 나갔다.

늑대 숲 초입의 나무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러던 중 잠시 검을 멈춘 세운이, 뒤에서 입을 벌린 채 이 말도 안 되는 '벌목'의 장면을 지켜보던 두 쌍둥이를 보며 말했다.

"아, 목재를 옮기는 건 정필이가 맡아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넵, 형님! 이 정필이한테 맡겨.... 네? 잠깐만, 이거 전부요? 저 혼자서?"

"물론이지, '오른팔'."

-성좌, '당나귀 머리의 날치기'가 플레이어 '박정필'을 보며 도저히 웃음을 참지 못하겠다며 배꼽을 부여잡습니다.

졸지에 힘쓰는 팔이 되어 버린 박정필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어 갔다.

제 24화

24. 제24화

"크억! 형님, 저, 더 이상은...."

털썩.

"엄살은."

나무 기둥을 세 개째 나르던 박정필이 결국 바닥에 퍼지고 말았다.

엄살이라고 하긴 했지만, 솔직히 혼자서 저 두꺼운 걸 세 개나 옮겼으면 나름 대단한 수준이다.

뭐, 애초에 녀석에게 맡겼던 건 반농담이었으니 상관은 없었다. 본격적으로 나무를 옮겨줄 사람은 따로 있었으니까.

"그냥 옮기기만 하면 되나?"

"응. 저기 쌍둥이 좀 돕고 있어. 일 끝나면 바로 대련 시작할 테니까."

"알겠다."

강한철이 나무 기둥 하나를 붙잡더니 표정 하나 안 바뀌고 나무를 나르기 시작했다.

세운이 베어 낸 나무의 수는 대충 보아도 수십 개. 경악스러운 양이지만, 강한철이라면 나르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으리라.

실제로, 그는 양팔에 나무를 한 개씩 끼고 한 번에 두 개의 나무를 옮기고 있었다.

"와아, 한철 오빠 진짜 세다!"

"이게 다 몇 개야? 이거면 목책 보수가 아니라 증축도 가능하겠는데?"

덩달아 쌍둥이도 재료가 많아지자 벌써부터 뭘 어떻게 만들 건지 의논하며 신이 나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세운은 뒤랑달을 납검한 후 캠프 안으로 발을 옮겼다.

박정필의 보고를 들으며, 다음으로 갈 곳을 미리 생각해 두었다.

"크윽!"

"파, 팔에 감각이 없어요! 이거 설마, 아니죠? 제발...."

"으아악!"

쌍둥이가 만들어 둔 치료 병동.

병동이라 해 봤자, 바닥에 풀을 부드럽게 깔아두고 나무와 나뭇잎을 꼬아 만든 지붕으로 햇빛을 막은 게 전부였지만 말이다.

세운의 도움 없이 세 번의 웨이브를 견디며, 생각 이상으로 많은 부상자가 발생해 있었다.

그런데도 중상자나 사상자가 없는 건.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이분만 치료하고 금방 봐 드릴게요!"

다급하게 환자들 사이를 오가고 있는 저 여성 덕분이었다.

이전에 짧게나마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기에 세운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전에도 가장 앞장서서 환자들을 치료하고 있었지.'

치료라고 해 봤자 이곳에 누군가를 치료해 줄 만한 도구 따위는 없었다.

그런 상황임에도 그녀의 손에 닿은 사람들은 신음을 멈추고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금의 상황에서 저런 일이 가능한 이유는 두 가지 중 하나였다.

첫 번째는 치료와 관련된 고유 능력의 개방이나.

두 번째는.

'성좌의 선택을 받는 거지.'

-성좌, '피투성이 사자'가 낮게 그르렁거리며 플레이어 '이하늘'의 주변에 흩뿌려진 피를 핥습니다.

피투성이 사자.

서열 5위의 마왕, 마르바스였다.

지옥의 대의장이라 불리는 마르바스는 몸이 썩어나갈 정도의 질병을 유발함과 동시에, 반대로 질병이나 상처를 치료해 주는 능력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 증거로 그녀가 성좌의 힘을 빌려 손을 내미는 곳마다 사람들의 상처가 조금씩 아물어 가고 있었다.

'아직은 미숙해 보이지만, 곧 능력의 본질을 자각하게 되겠지.'

아직은 성좌의 힘을 거의 못 다루고 있는 듯했지만, 익숙해진다면 치료만 아니라 전투에도 큰 힘을 발휘할 게 분명했다.

대표적으로 적의 상처가 더욱 벌어지게 하거나 출혈을 악화시키는 등. 마르바스의 힘은 마왕 중에서도 잔혹한 힘을 자랑한다.

아직은 도움이 필요해 보이지만 말이다.

"역할을 분담하지."

"...당신은?"

"나는 외상이 심한 사람을 위주로 치료할 테니까, 너는 열이나 내상이 있는 환자를 맡아. 마르바스의 힘이라면, 그게 가장 효율이 좋을 테니까."

"그걸 어떻게.... 일단, 알겠어요."

세운이 가까운 환자를 찾아갔다.

이전에 마몬의 창고를 열어 배운 '큐어 라이트'가 있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벼운 상처 회복이나 지혈을 위한 1 서클 마법.

지금처럼 상처가 심한 사람들을 치료하기에는 부적절했다.

그러니.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힐(Heal) ]

- 백탑의 기본 치료 마법 중 하나로써 현장에서 가장 많이 사용될 정도로 보편적이며 뛰어난 치료 마법.

새로운 마법을 사용한다.

2 서클 마법인 힐이라면, 제법 깊은 상처라도 무리 없이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

우웅!

"끄윽! 으... 으으...."

마법이 빛을 발하자, 환자의 신음이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여성, 이하늘이 작게 감탄을 내뱉었다.

"실력이 더 느셨네요. 전에도 대단했지만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당연히 그렇게 느낄 수밖에.

힐은 2 서클 마법답게 1 서클 마법인 큐어 라이트와는 성능 자체가 달랐으니 말이다.

아쉬운 점이라면.

-치료 마법에는 흑탑의 묘리가 적용되지 않아 위력 강화 효과가 적용되지 않습니다.

체인 라이트닝과 달리, 힐은 다크 마나 서클의 영향을 받지 못한다는 점이다. 아니, 치료 효과가 낮아지지 않는 거로 만족해야 하나?

그마저도 첫 번째 마나 서클인 '블루 마나 서클' 덕분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정말 치료 효과가 낮아지거나 치료 마법 자체가 불발되었을지도 모른다.

"조금만 더 지나면 치료 자체는 네가 더 잘하게 될 거다."

"제가요?"

"피투성이 사자. 네가 계약한 성좌는 그만큼 강력하니까."

"당신처럼 치료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해 준다고 해서 계약한 것뿐인데...."

"마르바스라면 점잖은 편이니까, 잘해 봐."

-성좌, '피투성이 사자'가 인간에게 칭찬을 들으니 기분이 묘하다며 갈기를 긁적입니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지옥의 대의장에게 딱 알맞은 표현이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우웅-

부상자가 많았던 탓에 세운은 서클의 마나가 바닥날 때까지 힐을 사용해야만 했다.

그렇게 환자 병동을 한 바퀴 돌자, 환자들의 상태가 눈에 띄게 호전되어 있었다.

"고마워요."

"마나 서클이 채워지면 한 바퀴 더 돌 수 있으니까, 필요하면 불러."

"네!"

마르바스의 계약자라.

생각보다 캠프의 구성이 탄탄해지는 것 같았다.

바위산에 올라가 있는 동안 캠프를 전혀 이끌지 못했기에 큰 변화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말이다.

'다음은....'

세운이 다음 장소로 발을 옮겼다. 사실, 캠프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들르고 싶었던 곳을 향해서.

'유서아의 검, 꽤 쓸 만해 보였지.'

세운이 도착했을 때, 유서아가 휘두르던 쌍검은 예전에 포인트로 구입했던 싸구려 숏소드가 아니었다.

날카롭고 흉악한 기세를 내뿜는 상앗빛 검. 마치 유서아 전용으로 만들어진 듯한 무기였다.

'강한철도 마찬가지고.'

맨몸 공격을 주력으로 하는 강한철이지만, 그의 손은 더 이상 맨손이 아니었다.

늑대의 가죽으로 만든 듯한 새빨간 가죽 장갑. 거기에 날카로운 뼛조각이 박혀 있어서 주먹을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적의 살갗을 베는 게 가능해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발차기의 위력을 증가시켜 줄 각반까지 착용하고 있었으니.

도대체 어디서 그런 장비를 구했는지는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뻔했다.

"어르신."

"오, 자네 왔나."

금관을 쓴 병사.

서열 28위의 마왕, 베리스가 관심을 가졌던 이. 바로, 고창석이었다.

깡, 깡!

그는 지금도 쇠망치를 손에 든 채 무언가를 열심히 내려치고 있었다.

다만, 쇠를 내려치는 것하고는 소리가 달랐다.

조금 거친 소리랄까?

자세히 쳐다보니 그는 언제 구했는지 방금 사냥을 마친 레드 몽키의 뼈를 날카롭게 다듬고 있었다.

옆에 준비해 둔 기다란 나무막대기를 보아하니 뼈 창을 만들려던 모양이다.

"오오! 어떻게 된 건가? 그 검은!"

역시 대장장이랄까.

고창석은 세운의 허리춤에 꽂혀 있던 검의 변화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제련하던 도구도 손에서 놓고 다급하게 세운에게 다가와 검을 관찰하였다.

검이 뚫어질 듯한 관심에, 세운은 어쩔 수 없이 검을 들어 그에게 제대로 보여주었다.

그의 관심이 어디까지나 호기심일 뿐, 물욕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본질은 같지만 머금은 힘은 아예 다른 검이라고 해도 믿을 지경이구먼! 재질이 뭐기에 이렇게 단단한 거지?"

팅-

눈으로 관찰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손가락으로 검을 울리며 강도까지 확인하는 그.

이대로 두면 온종일 뒤랑달만 쳐다볼 것 같았기에, 세운은 짧게 헛기침을 하며 검을 다시 허리춤에 꽂아 넣었다.

"그러다 검 뚫어지겠습니다."

"크흠, 어디 갔나 싶었더니 그런 보검을 만들어 왔구먼."

"사람들이 끼고 있는 장비들, 어르신이 만드신 거죠? 전부 몬스터의 소재로 만들어졌던데."

"성좌라고 했었나? 나를 보고 있다는 그분이 이런 걸 좋아하시더구먼."

-성좌, '금관을 쓴 병사'가 당신이 든 검을 내려보며 크게 감탄합니다.

금관을 쓴 병사, 베리스.

마왕답게 평범한 금속보다는 몬스터의 소재를 다루는 데 더 능숙한 듯했다.

그렇다고 해도 아다만티움이나 오리하르콘 같이 희귀한 광석이라면 말이 달라지겠지만.

"그래서 무슨 일인가? 그 검은 따로 날을 갈아주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일단, 이것부터 좀 봐주시겠습니까."

세운이 소재 하나를 꺼내 들었다.

짙은 회색의 돌.

언뜻 보기에는 바위산에 굴러다니는 평범한 돌과 다를 바 없었지만, 고창석은 바로 돌의 가치를 알아보았다.

"호오, 특이한 광석이구만."

-성좌, '금관을 쓴 병사'가 제법 쓸 만해 보이는 소재라며 습관처럼 금관을 매만집니다.

세운이 꺼낸 광석은 바로 개암석.

바위산에서 보스 몬스터인 '절벽을 오르는 원숭이'를 사냥하고 얻은 광석이었다.

본격적으로 탑이 들어가게 되면 희귀하긴 해도 이보다 좋은 광석이 많지만, 적어도 튜토리얼에서 구할 수 있는 광석 중에서는 손꼽히게 좋은 광석이기도 했다.

"이걸 이용해서 방어구 좀 만들어 주셨으면 해서요."

"흐음, 방어구라. 그 망토로는 부족했나 보구먼."

"좋긴 한데, 망토로 방어할 수 있는 공격에는 한계가 있으니까요."

바위산에서 박쥐들을 상대할 때, 세운은 망토가 지켜주지 못하는 복부를 막기 위해 '리자드맨의 비늘'을 사용했었다.

물론, 비늘의 방어력은 꽤 괜찮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최후의 수다.

튜토리얼이라고 해도 특정 보스 몬스터나 네임드 몬스터의 공격은 비늘 정도야 가볍게 뚫고 들어올 것이다.

공격을 얌전히 맞아줄 세운이 아니지만,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여 보험을 준비할 생각이다.

"좋아. 캠프 사람들이 사용할 무기는 이미 다 만들었으니까, 바로 만들어 주지."

"다음 웨이브 전까지 가능하시겠습니까?"

"다음 웨이브 말인가? 그렇다면 남은 시간이...."

[ 튜토리얼 첫 번째 장 – 적응 ]

-열 번째 몬스터 웨이브까지 남은 시간 22시간 03분.

과연, 마지막 웨이브.

지금까지의 웨이브는 기껏 해 봐야 한나절 정도의 시간을 주는 게 전부였는데 이번에는 무려 하루의 시간을 제공해 주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장인이 제대로 된 장비를 만들어 내기에는 빠듯한 시간이다.

"크흠, 평소보다는 여유가 있다만. 그리 급한 이유라도 있는 건가?"

"네."

튜토리얼 첫 번째 장의 마지막 웨이브.

유서아와 강한철이 생각 이상으로 강해지긴 했지만, 마지막 웨이브에 맞서기는 무리다.

물론, 세운의 머릿속에 '실패'라는 단어는 없었지만.

"다음 웨이브에서는 좀 거칠게 뛰어다닐 생각이거든요."

"거기서 더 거칠게라니, 어지간히도 튼튼한 방어구를 만들어 줘야겠구먼."

캠프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어려운 전투가 될 것이다.

제 25화

25. 제25화

평소에 그토록 캠프에 무관심하던 세운이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누가 먼저 부탁하지 않아도, 직접 나서서 캠프의 일을 도왔다.

꽤 오래 자리를 비웠다지만, 박정필의 훌륭한 보고 덕분에 세운은 캠프의 상황을 단숨에 파악할 수 있었다.

그렇게 세운이 돌아다니기 시작하자, 캠프의 문제들이 빠르게 해결되었다.

몬스터의 사체가 정리되고, 환자들의 신음이 멈추며 캠프의 분위기가 많이 안정되었다.

그 직후.

퍽, 빠악!

"큭!"

"실력이 많이 늘었는데?"

"넌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군. 안 그래도 괴물 같았는데, 더 심한 괴물이 됐다."

세운은 부러진 나무 기둥 앞에서, 강한철과 대련을 펼치고 있었다.

세운의 지도 덕분일까? 아니면 세운이 없는 사이 성좌 '악어를 탄 노인'과 계약해 수많은 몬스터를 상대하며 경험을 쌓은 덕분일까?

강한철의 전투 능력은 물론, 전투 스타일까지 크게 바뀌어 있었다.

전처럼 단순히 힘으로 상대를 덮치는 게 아니라, 주변의 지형과 자신의 기술을 최대한 이용한다.

그 기술은 대체로.

"태극권, 생각보다 훌륭한데? 따로 가르쳐 준 적도 없는데 말이야."

"몸으로 배우는 거라면 자신 있다."

이전에 세운이 강한철을 상대할 때 보여주었던 태극권이었다.

아홉 번째 웨이브 때도 주먹질보다는 적을 잡거나 던지는 식의 공격법이 많았었지.

제대로 된 태극권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체형에 맞게 개조를 거친 듯한 모습이었다.

"잘하긴 했는데, 이래서야 네 장점을 못 살리는 꼴이야."

"내 장점?"

"그래, 네 장점."

타앗!

지금까지 세운과 강한철의 대련은 주로 강한철의 공격으로 이어져 왔다.

세운은 자리에 가만히 선 채로, 공격을 받아낼 뿐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세운이 먼저 땅을 박차고 강한철을 향해 내달렸다.

이에 강한철의 눈이 크게 떠졌다. 설마 세운이 먼저 달려들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탓이다.

그러나 점차 쌓이기 시작한 실전 경험 덕분인지 강한철은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세운에게 반응했다.

방어? 그따위는 강한철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오로지, 공격. 세운의 공격에, 공격으로 맞선다.

이게 바로 강한철의 스타일이었다.

그러면서도 다급하게 세운의 움직임을 살펴보았지만, 특이한 건 보이지 않았다.

세운 역시 허리를 비틀며 주먹을 준비하고 있었다.

다만, 강한철에게는 보이지 않는 게 하나 있었다.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진주언가권(晋州彦家拳) ]

- 오대세가의 일원으로서 맨몸을 다루는 데 특화된 권법이나 특유의 강시술로 유명한 진주언가의 대표 무공.

바로, 마몬의 보물창고.

진주언가의 고유 무공이 세운의 주먹에 스며들며, 내공이 시퍼렇게 물들었다. 칼날보다는 죽어가는 사체에 더 가까워 보이는 색이었다.

강한철 역시 공격 직전에 그 변화를 알아차렸지만,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곧, 두 주먹이 허공에서 충돌하였고.

콰아앙!!

그 충격이 얼마나 강했던지, 주위로 거대한 풍압이 퍼져 나갔다.

옆에서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유서아가 기겁을 하며 얼굴을 가렸다.

강한철이 지지 않으려 이를 악물고 버텨 보았지만.

-내공을 통해 진주언가권의 제일 초식, 강시권(僵尸拳)이 강화됩니다.

-파극심공의 묘리에 따라 무공의 위력이 강화됩니다.

떠엉!

"큭!"

결국, 세운의 주먹에 밀려나고 말았다.

단순히 팔심만이 아니라 전신의 힘을 쏟고 있었기 때문인지, 강한철은 몸 전체가 충격에 날아가는 경험을 겪어야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태극권이 아닌 힘과 힘의 대결에서는 세운이 압도적으로 불리했는데 이제는 힘 대 힘의 대결에서도 우위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뭐, 당연한 건가.'

솔직히 아직도 단순히 근력 수치만 보았을 때는 강한철에게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세운에게는 반갑자 가량의 내공이 있다. 거기에 파극심공의 묘리에 따라 무공의 위력까지 강해지니, 이런 파괴력을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강권(强拳). 네 힘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방법이다."

강한철의 신체 능력은 우월하다. 최고의 근력을 자랑한다는 오우거의 후예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강한 몬스터가 사방에 득실대는 탑에서 태극권 같은 유술은 큰 도움이 될 테지만, 그보다는 진주언가권 같은 강권이 강한철에게 더욱 잘 어울렸다.

그 때문에 세운이 선택한 무공이 바로 이것이다.

진주언가권.

강시처럼 단단한 몸으로, 강시처럼 겁 없이 적을 상대한다고 알려진 무공.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르면, 상대하는 이는 강시를 상대하는 듯한 공포로 사로잡혀 버리게 된다지.

이것 말고도 강한철에게 어울리는 권법은 얼마든지 있지만.

'무공서를 단번에 흡수할 수 있는 건 나뿐이니까.'

재능이 뛰어나다고 해도, 동시에 여러 기술을 단번에 배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방금 그 주먹은...."

"내공을 사용한 거야. 형(形)이 완성되면, 너한테도 심법을 알려줄게."

"...알겠다."

이런 기술을 어떻게 알게 되었고, 단번에 자신의 힘을 뛰어넘도록 강해진 방법은 무엇인지 궁금한 게 많을 텐데도, 강한철은 그 어떤 질문도 해 오지 않았다.

그저 묵묵하게 세운의 주먹을 받으며 눈과 몸에 익힐 뿐이다.

지금 세운으로서 펼칠 수 있는 진주언가권의 초식을 모두 보여준 후.

"이제 혼자 연습해라. 또 맞고 싶으면, 아니, 또 배우고 싶으면 다시 찾아오고."

"알겠다."

대련 시간은 세운으로서도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다.

무공의 지식이야 사용하는 순간 머릿속에 스며든다지만, 진주언가권 같은 강권으로 실전 경험을 쌓는 건 쉽지 않으니까.

가르쳐 준다는 명목이지만, 덕분에 세운 역시 진주언가권을 숙련할 수 있었다.

게다가, 현재까지 쌓은 능력치를 직접 체감할 수 있는 순간이기도 했다.

일종의 전투력 측정기랄까?

"아, 그래. 혼자 연습하기는 아무래도 힘들겠지?"

"상관없다."

"아냐, 나무만 치는 거랑 사람을 상대하는 건 다르지."

"다음으로 저 여자와 대련하려는 거 아니었나? 캠프에 내 상대를 할 만한 사람은 없을 텐데."

"아냐, 한 명 있어."

세운이 씨익 미소 지었다.

단 한 명.

그라면, 강한철의 공격을 받는 것은 못 하겠지만 피하는 건 충분히 가능할 테니까.

"정필아?"

"넵! 형님!"

이름을 부르자마자 어디선가 다급하게 뛰어오는 박정필.

다행히도 방금 강한철과 나눈 대사는 못 들었나 보다. 세운에게 뭔가 기대라도 하는 것인지, 눈을 초롱거리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지금 한가하지?"

"넵! 언제든지 형님의 부름에 응할 수 있도록, 시간 쫙 비워 놨습니다!"

"그럼 한철이랑 대련 좀 하고 있어라."

"...넵?"

순간적으로 몸이 경직되며, 강한철의 모습을 스캔하는 녀석.

강한철이 세운에게 '정말 괜찮겠나? 힘 조절은 자신 없다만.'이라며 말을 걸자, 녀석의 얼굴은 하얗게 물들어 갔다.

"하, 하핫. 형님, 저 사실 캠프에서 아주 중요한 일을...."

"맘대로 써."

"그럼, 사양하지 않겠다."

턱.

"으익?"

강한철의 두꺼운 손바닥이 박정필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녀석이 필사적으로 세운과 강한철을 설득해 보려 했지만, 이미 둘은 박정필의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고 있었다.

"잘 부탁한다. 박... 박정태."

"이름도 기억 못 하는 거냐! 안 돼, 형니이이임!"

-성좌, '당나귀 머리의 날치기'가 낄낄거리며 바닥을 구르다가 자신의 배꼽이 사라진 것을 발견합니다.

-성좌, '악어를 탄 노인'이 당신을 바라보고는 과연 두 마신에게 선택받은 인간이라며 고개를 주억거립니다.

* * *

"하압!"

챙!

강한철을 상대한 후, 세운은 곧바로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유서아를 상대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장점을 알고 있는 듯이, 회귀 전의 모습처럼 쌍검을 휘두르고 있는 유서아.

강한철을 상대할 때와는 전혀 느낌이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소프트웨어.

내공은 존재하지 않지만, 움직임의 형(形)만큼은 지적할 게 거의 없을 정도였다.

다만.

"기술은 좋은데, 힘이 너무 부족해."

"힘이요?"

"응. 약한 몬스터 여럿을 상대할 때라면 몰라도, 강한 몬스터가 하나라도 나오면 속도와 기술만으로는 타격을 입히기 힘들 거야."

-성좌, '왕관을 쓴 거미'가 찬성한다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이미 빨간 가죽의 몬스터들만 해도 충분히 힘들었는데...."

"너도 알고 있잖아. 다음 웨이브의 몬스터는 지금까지보다 더욱 강할 거라는걸."

"...."

유서아가 이를 악물었다.

지금 그녀에게 부족한 점은 힘과 체력.

실제로, 세운이 캠프에 막 도착했을 때도 유서아는 체력이 다 떨어져 숨을 허덕이고 있었다.

지금까지 강한철보다 미묘하게 공적치를 앞서고 있는 것도 저러한 전투 스타일 때문이겠지.

하지만, 열 번째 웨이브와는 어울리지 않은 전투 스타일이었다.

수상함을 들키지 않고 다음 웨이브를 설명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던 세운이, 생각을 마치고 다시금 입을 열었다.

"캠프를 나갔다 올 때마다 내가 뭘 했는지 알아?"

"드디어 말해 주시는 거예요? 그렇게 말하기 싫은 티를 내셨으면서."

"보스 몬스터를 상대하고 왔어."

"보스 몬스터?"

"응. 웨이브 때 등장하는 일반적인 몬스터가 아닌, 그보다 더욱 강한 몬스터."

"그럼 세운 씨가 이토록 급격하게 강해지신 이유도...."

"응. 그것 때문이야."

회귀에 관한 사실을 말할 수는 없으니, 세운이 말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였다.

그러나 이것으로도 유서아가 납득하기에는 충분했다. 지금 세운이 들고 있는 뒤랑달이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생각해 봤는데, 언제까지고 이런 식으로 같은 방식의 웨이브가 진행될 것 같지는 않거든."

"그럼, 다음 웨이브 때 세운 씨가 상대했다는 '보스 몬스터' 같은 게 나올 수도 있다는 건가요?"

"예상이지만, 가능성은 높게 보고 있어."

가능성이 아닌, 사실이다.

하지만, 세운이 그녀에게 설명할 수 있는 선은 딱 여기까지였다. 이 이상으로 아는 체를 하면 오히려 수상하게 보일 뿐이었다.

"그러니까, 너도 이걸 염두에 두고 사람들을 지휘해 줬으면 좋겠어."

"네. 아! 그리고, 예전부터 생각했는데요."

"뭘?"

"제가 나서고는 있지만, 저희 캠프의 실질적 리더는 세운 씨잖아요. 그러니까...."

"아냐, 그 자리는 네가 계속해 줘."

"하지만...."

"큰 흐름은 책임지겠지만, 나는 앞으로도 캠프 바깥에 나가 있을 일이 많을 거야. 리더가 계속 바깥에 있으면, 캠프의 분위기가 어떨 것 같아?"

"확실히 그렇겠네요."

"응. 그러니까, 계속 부탁해."

"...네."

이걸로 내가 할 말은 끝났다.

그녀도 세운의 말에 느낀 바가 있는 것인지 눈빛이 한층 더 굳건해졌다.

이에 세운 역시 든든함을 느끼며 그녀와의 대련을 계속 이어갔다.

이미 기술은 잘 잡혀 있었기에, 강한철처럼 무공을 알려주는 것보다는 부족한 점이나 강점을 알려주는 위주로 말이다.

그 이후부터는, 그녀가 혼자서 생각해야 하는 영역이다.

그렇게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유서아의 지시에 따라 사람들의 훈련 방식이 달라지고, 새로운 진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쌍둥이가 만들던 목책 역시 일반적인 웨이브만이 아닌 '보스 몬스터'를 대비한 형태가 만들어졌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고, 웨이브가 가깝게 다가올수록 캠프의 분위기가 한층 깊어져 갔다.

[ 튜토리얼 첫 번째 장 – 적응 ]

-열 번째 몬스터 웨이브까지 남은 시간 5분.

"걱정 마세요! 이번에도, 저희는 할 수 있어요!"

"이번에는 우리 형님도 와 있으니까!"

열 번째 웨이브 직전. 세운 역시 눈빛을 다잡으며 다가올 웨이브에 대비하여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던 중.

"자네, 여기 있었구만!"

누군가의 다급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제 26화

26. 제26화

고창석.

얼마나 다급하게 뛰어왔는지 이마에 땀이 주렁주렁 맺혀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세운이 원하던 게 들려 있었다.

"아슬아슬했구먼. 좋은 재료를 쓴 만큼 품질을 조금이라도 더 높이려다 보니 조금 늦었다네."

"늦긴요. 딱 맞춰주셨습니다."

"허허, 그거 다행이구먼."

세운은 고창석에게 건네받은 갑옷을 입어보았다.

체형에 맞게 제작한 것이기에, 조이거나 헐렁한 느낌 없이 딱 들어맞았다. 팔과 허리를 움직여 보아도, 불편한 기색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 붉은 늑대 갑옷 ]

분류 : 갑옷

등급 : C-

설명 : 레드 울프의 가죽에 원숭이 바위산의 개암석을 박아 넣어 만든 징갑옷. 방어력은 물론, 착용자의 움직임까지 고려하여 만들어진 작품이다.

능력 : 1. 붉은 늑대의 송곳니 – 공격력이 10% 상승한다.

2. 늑대의 위협 – 착용자보다 약한 몬스터에게 공포를 유발한다.

3. 바위산의 정수 – 방어력과 내구도가 대폭 상승한다.

아이템의 정보를 확인한 세운은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무려 C급 아이템.

마이너스가 붙어 있기도 하고, 원숭이 바위산의 개암석이라는 특별 소재를 사용했다고는 하지만, 튜토리얼에서 C급 아이템을 만들어 낸 대장장이라니, 세운으로서도 들어본 적이 없는 경우였다.

"어때, 좀 마음에 드나?"

"네, 기대 이상으로요."

"허허, 나도 이곳에 도착한 이후로 만든 것 중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녀석이라네."

게다가 갑옷에 붙은 능력 중 하나인 '붉은 늑대의 송곳니'는 정말 특별했다.

공격력 증가 능력이 방어구에 붙는 것은 정말 드문 경우였으니까.

대체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던 세운은, 곧 그 이유를 알아낼 수 있었다.

-성좌, '금관을 쓴 병사'가 미약하게나마 자신의 기술이 들어갔다며 갑옷의 성능을 보증합니다.

28위의 마왕, 베리스.

그의 기술이 깃들었다면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

'하긴, 튜토리얼에서 이 정도의 성좌와 계약하는 것 자체가 흔한 경우는 아니니까.'

성좌는 결코 가벼운 존재가 아니다.

튜토리얼을 거치며, 마음에 드는 플레이어를 눈여겨보다가 자신의 기대에 충족하는 자에게만 손을 내미는 게 성좌라는 존재였다.

때문에 튜토리얼 초창기에 성좌와 계약하는 건 쉽지 않다.

즉, 이 결과는 고창석의 뛰어난 실력과 세운을 지켜보는 두 마신 덕분에 덩달아 관심을 가지게 된 72 마왕 덕분이기도 했다.

'이거라면 어지간한 공격은 신경 안 써도 되겠는데.'

열 번째 웨이브의 난이도가 아무리 높다고 해도, 세운의 장비는 이미 그 어려운 난이도를 한참이나 초월한 수준이었다.

봉인되긴 했으나, 그럼에도 B급 아이템의 힘을 가지고 있는 뒤랑달이나, 보조로 사용할 D+급 단검, D급의 망토, C-급의 갑옷까지.

본래 F급 장비도 구하기 힘든 튜토리얼 첫 번째 장에서는, 그야말로 밸런스가 한참이나 어긋난 존재였다.

"어르신은 얼른 대장간에 대피해 있으시죠."

"에이, 그럴 수야 있나. 내 걸작이 활약하는 순간을 직관할 수 있는 기회인데 말일세!"

고창석의 눈이 초롱거렸다.

아래로 내려가는 시선을 보아하니 세운이 입은 갑옷만이 아니라, 뒤랑달의 성능도 보고 싶은 게 분명하다.

"그리고 자네가 어련히 잘 막아 줄 텐데 무슨 걱정인가!"

"그럼, 사람들 뒤에 잘 숨어 계세요."

"그러지. 얼마나 잘 사용하는지 기대하겠네."

고창석은 뒤랑달을 살펴보지 못한 게 아쉬운지 세운의 장비를 마지막으로 훑어본 후, 자리로 돌아갔다.

[ 튜토리얼 첫 번째 장 – 적응 ]

-마지막, 열 번째 웨이브가 시작됩니다.

-몬스터 웨이브를 막아 내고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십시오.

마침, 5분이라는 짧은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 마지막 웨이브가 시작되었다.

* * *

꿀꺽.

웨이브가 시작되자, 캠프는 정적에 빠졌다. 옆 사람이 침 삼키는 소리까지 다 들릴 정도.

그도 그럴 게, 이번 웨이브를 준비하며 유서아가 했던 말들 때문이다.

'보스 몬스터라니.'

'빨간 몬스터보다 더 강한 몬스터라니, 설마.'

'그래도 혈랑... 세운이라고 했나? 그 사람이 왔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보스 몬스터.

처음에는 '게임도 아니고, 그럴 리가.'라며 부정했지만 이 세계는 이미 지구에서의 상식을 가뿐히 초월하고 있었다.

당장 눈앞에 떠올라 있는 시스템 메시지만 보아도, 지구였다면 꿈이라 생각했을 정도로 말이 안 되는 현상이지 않은가?

다들 긴장하고 있는 와중에, 잠잠하던 늑대 숲의 수풀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크르릉...."

동물은 사는 지형에 어울리는 색을 가지는 게 보통이었다.

그래야만 자신이 살아가는 지형에서 모습을 감추며 은밀하게 적을 사냥하거나, 적으로부터 숨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 나타난 몬스터들은 달랐다.

피같이 새빨간 가죽을 두르고 검처럼 날카로운 송곳니를 번들거리는 몬스터.

레드 울프였다.

녀석들을 보는 순간, 사람들은 몸에서 긴장이 살짝 빠져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휴, 레드 울프잖아."

"그래, 저거보다 더 강한 몬스터라니. 말이 안 되잖아."

레드 울프.

분명 강한 몬스터였지만, 이미 일곱 번째 웨이브 때 상대했던 몬스터들이었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늑대를 상대할 때 사용하던 진형을 이루기 시작했다.

그때.

"저, 저기!"

"뭐 해? 얼른 진형을...."

"바위산! 바위산 쪽에!"

"바위산?"

무슨 소리인가 싶어 바위산을 향해 고개를 돌린 사람들의 표정이 크게 일그러졌다.

딱딱한 회색빛만이 가득하던 바위산이 붉은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레드 몽키다!"

"어, 어째서?"

"우끼익!"

아홉 번째 웨이브 때 보았던 몬스터.

세운이 극적으로 등장하지 않았다면, 캠프는 이미 무너지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큰 피해를 안겨주었던 상대였다.

지금까지 한 번에 한 곳에서만 몬스터가 나타나던 상식을 깡그리 무시하는 상황이었다.

"그, 그럼 설마!"

몇몇 사람들이 다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레드 울프에 레드 몽키까지 나온 이상, 아직 남은 종류가 하나 더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애석하게도 시스템은 그런 사람들의 불안 따위를 인식하지 않았고.

두두두두!

"젠장, 레드 보어까지 나타났어!"

"대체 어째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지, 진형은?"

"여러분! 모두 당황하지 마시고 목책 주변에 진형을 꾸려주세요! 수가 많긴 하지만, 이미 이겨본 적이 있는 몬스터들입니다!"

유서아가 다급하게 사람들을 진정시켰다.

마지막 웨이브.

세운이 경고를 해 주었고, 미리 준비까지 해 두었지만 그녀 역시 불안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세운 씨가 말한 보스 몬스터는....'

"아우우우-!!"

유서아가 불행 중 다행이라며 위안을 삼던 중, 그 기대를 가뿐하게 배반하며, 늑대 숲에서 고막을 울릴 정도로 크고 날카로운 하울링이 들려 왔다.

이에 늑대 숲에서 빠져나온 레드 울프들이 자리를 비키며 고개를 조아렸다.

곧이어 숲의 나무 사이로, 거대한 늑대 한 마리가 나타났다.

3m는 될 법한 크기, 전신에는 크고 작은 상처들이 가득했고 입을 다물고 있음에도 기다란 송곳니가 위협적으로 뻗어 나와 있었다.

-붉은 송곳니, 카닐이 등장하였습니다.

"보, 보스 몬스터!"

결국, 등장하고 말았다. 세운이 예견하였던 보스 몬스터가 말이다.

그 강력하던 레드 울프들이 모두 고개를 조아리는 것만 보아도, 카닐이라는 늑대가 얼마나 강력한지 알 수 있었다.

게다가, 문제는 이게 끝이 아니었다.

쿠구구구-!

"어, 언덕에서도!"

"우끽!"

"바위산에서도!"

-붉은 어금니, 파그가 등장하였습니다.

-붉은 손톱, 야샥이 등장하였습니다.

캠프의 양옆에서도 마찬가지로 '보스 몬스터'급 몬스터들이 등장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얼굴이 금세 공포로 물들어 갔다.

"트, 틀렸어."

"이건 말이 안 되잖아...."

"리, 리더. 우리 이제 어떻게 해야...."

"그, 그건...."

지금까지의 웨이브와는 차원이 달랐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유서아에게 몰려들었다.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도록, 어서 지시를 내려주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유서아는 그들에게 희망적인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생각 이상으로 압도적인 전력에 그녀조차도 기선제압을 당하고 만 것이다.

'세운 씨....'

그녀가 주먹을 꽉 쥐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이 리더라고는 하지만, 솔직히 캠프의 실질적인 리더는 세운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세운에게 조언을 구할 셈이었다.

미리 상황을 예측한 그라면, 분명 뾰족한 수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가 아무리 고개를 돌려보아도 세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바로 전에까지만 해도 이곳에 있었는데.

그녀를 포함한 사람들이 모두 당황하는 순간, 귀신처럼 사라져 버렸다.

"형니이임! 어디 있습니까아! 서, 설마 도망간 건가? 으악, 이 나쁜 놈!"

혹시나 하였는데, 아쉽게도 박정필 역시 세운의 행방은 모르는 듯했다.

이렇게 고민하는 중에도 몬스터들은 캠프를 조금씩 압박해 오고 있었다.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상황.

그 순간.

크와아앙-!!

늑대 숲의 앞에서, 늑대의 울부짖음과 함께 붉은 기운이 크게 넘실거렸다.

-내공을 통해 혈랑검법의 제삼 초식, 혈랑습격(血狼襲擊)이 강화됩니다.

-파극심공의 묘리에 따라 무공의 위력이 강화됩니다.

눈에 보일 정도로 진하게 형상화된 기운은 핏빛 늑대의 모습을 하고서 붉은 송곳니, 카닐의 옆구리를 잔혹하게 물어뜯었다.

카닐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지만, 대처가 너무 늦었다. 예상치 못한 일격에, 카닐의 복부가 크게 찢겨 나간 것이다.

가죽을 뚫은 것은 물론, 근육과 복막까지 베어간 잔혹한 일격은 그 안에 담긴 내장마저 흘러나오게 만들었다.

-'붉은 늑대 갑옷'의 능력 '늑대의 위협'으로 인해 인근의 레드 울프들이 공포에 빠져듭니다!

-'회색 늑대 망토'의 능력 '위압감'으로 인해 카리스마가 강화되며 적의 공포를 더욱 악화시킵니다!

자신들의 보스가 중상을 입고 몸을 휘청이자, 카닐을 지키고 있던 늑대들이 공포에 물들어 갔다.

그 당당하던 녀석들이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낑낑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와 반대로, 세운의 공격을 지켜보던 캠프 사람들은 한 줄기의 희망을 느끼고 눈을 반짝거렸다.

"유서아, 강한철."

"...."

"세운 씨!"

카닐을 공격했던 붉은 기운의 정체는 바로 세운이었다.

공격이 끝났음에도, 검 위로 흐르고 있는 내공은 아직 피가 부족하다는 듯이 꿀렁거리고 있었다.

세운은 평소와 같이 깊은 눈빛으로 캠프를 바라보며, 짧은 한마디를 내뱉었다.

큰 목소리를 내지 않았음에도, 그 목소리는 캠프 전체에 선명하게 들려왔다.

"정신 차려."

"알겠다."

"네!"

"크아아앙!!"

붉은 송곳니, 카닐.

녀석은 본능 깊숙이 찔러 들어오는 공포심을 이기기 위해, 복부의 상처조차도 잊고 온 힘을 다해 울부짖었다.

제 27화

27. 제27화

세운이 보스 몬스터에게 기습을 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기억 속의 튜토리얼에서 카닐의 등장은 그 어떤 기억보다 강렬했기 때문에 녀석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나타났는지. 그 모든 게 세운의 기억 속에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당시에 '여정의 지침표'를 제외한 그 어떤 전투 스킬도 없는 세운에게는 카닐의 등장이 악몽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때문에 미리 기억해 둔 카닐의 등장 위치에 조용히 숨어 있었던 것이다.

물론, 후각이 극도로 발달한 늑대를 상대로 몸을 숨기는 건 쉽지 않았지만.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클리어 슬라임의 땀샘 ]

- 야생에서 몬스터의 찌꺼기나 사체 등을 섭취하며 살아가는 최약체 몬스터, 클리어 슬라임이 포식자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사용하는 신체 기관.

클리어 슬라임.

세운도 익히 알고 있는 몬스터였다.

솔직히, 몬스터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민망한 생명체.

공격 능력은 전무하며, 설명란에 적힌 것처럼 각종 찌꺼기를 먹고 살아가는 미생물에 가까운 존재다.

다만, 클리어 슬라임의 땀은 플레이어 사이에서도 유명했다.

무색무취의 땀.

단순히 색이 없고 냄새가 없는 것만이 아니라, 사용자의 냄새를 지워 버리는 특이한 능력을 가진 액체였다.

그것을 사용한 덕에 세운은 카닐에게 들키지 않고 날카로운 일격을 먹일 수 있었다.

"크아아앙!!"

카닐이 울부짖었다.

다만, 그 울부짖음은 세운이 회귀 전에 들었던 것과는 크게 달랐다.

애써 두려움을 감추려는 듯한, 자기 최면에 가까운 울부짖음.

녀석을 제외한 다른 레드 울프들은 이미 공포에 축축하게 젖어 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었다.

'역시 기대 이상의 효율이야.'

-성좌, '금관을 쓴 병사'가 갑옷의 첫 시연에 박수를 치며 만족합니다.

붉은 늑대의 갑옷과 회색 늑대 망토.

둘 다 고창석의 손을 걸친 방어구였다.

거기에 붙어 있던 능력인 '늑대의 위협'과 '위압감' 스킬이 합을 이루어 이러한 상황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아무래도 공포 능력인 만큼 착용자의 행동에 영향을 받아 능력이 증폭되기도 하나 보다.

세운은 단지 보스 몬스터에게 기습을 날릴 생각뿐이었으니, 방어구의 뛰어난 능력 덕분에 일이 한층 더 쉬워졌다.

'그나저나, 저렇게 약했었나?'

"크르릉...."

붉은 송곳니, 카닐.

회귀 전에는 발톱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사람이 한 명씩 죽어 나가고, 그 이빨은 목책조차 씹어 부러트릴 지경이었다.

가죽도 어찌나 질긴지, F급 무기로는 공격 자체가 불가능할 지경이었지.

그런 녀석이, 단 한 번의 공격에 뱃가죽이 처참하게 터져 나갔다.

예상 이상의 위력에 세운 스스로도 놀랄 정도였다.

'아니, 내가 생각 이상으로 강해진 거겠지.'

무엇보다도 잊혀진 영웅의 수련처에서 뒤랑달과 그곳에서 흡수한 마나의 힘이 컸다.

B급 무기와 반갑자의 내공, 거기에 뛰어난 조건이 받쳐줘야만 체득이 가능한 파극심공까지.

이 모든 게, 적어도 튜토리얼이 끝나고 난 후부터 습득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들이니까.

"그럼 뭐, 걱정 없지."

세운이 손을 올리자, 검푸른 전류가 파직거렸다.

체인 라이트닝.

자탑의 마법에 흑탑의 묘리가 깃들며 위력이 극대화되고 있었다.

-흑탑의 묘리에 따라 '라이트닝 체인'의 위력이 강화됩니다.

파지지직!

검푸른 번개가 늑대 사이를 휩쓸었다.

본래 카닐이라면 이것도 빠른 민첩성으로 피해낼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내장이 흘러내릴 정도로 크게 다친 상황.

꼼짝없이 번개에 적중당해 고통에 울부짖었다.

-붉은 송곳니, 카닐이 버서커(Berserker) 상태에 돌입합니다.

'바로 버서커라니, 데미지 누적이 심하긴 했나 보네.'

눈앞의 보스 몬스터처럼 이름이 있는 몬스터를 흔히 '네임드 몬스터'라 부른다. 그리고 네임드 몬스터는 몬스터 주제에 플레이어처럼 스킬을 사용한다.

그중 가장 흔한 스킬이 바로 저 '버서커'.

체력이 일정 이하로 줄어들면, 방어를 포기하는 대신 공격력과 민첩성이 대폭 증가한다.

"크아아앙!"

녀석이 복부에서 피를 왈칵 흘리며 세운에게 달려든다.

늑대형 보스 몬스터에, 버서커까지.

그 속도는 저렇게 덩치가 큰데도 눈으로 따라가기 힘들 지경이었다.

3m에 달하는 거체가 순식간에 세운의 코앞까지 다가와 붉은 송곳니를 번들거리고 있었다.

'회귀 전에는 저 공격으로 캠프의 핵심 인력이 허무하게 목숨을 잃었었지.'

잠시 과거를 회상하던 세운이 작게 미소를 지으며 검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아주 느리게 검을 회전시켰다.

그 모습은 바람처럼 재빠른 카닐과 상반되어 시간이 멈춰가는 듯한 착각을 만들어 냈다.

스스스슷-

세운의 검과 카닐의 송곳니가 맞닿았다.

그러나, 누구나 예상한 거친 금속음이나 충격음은 들려오지 않았다. 마치, 검과 송곳니가 붙은 듯했다.

카닐이 이상함을 느끼는 순간에도, 세운이 느긋하게 움직이는 검에 따라 카닐의 거체가 따라왔다.

다른 장면을 다 떼어 놓고, 이 장면만 보았다면 반려동물과 놀아주는 모습이 아닐까 싶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생각 이상으로 처참했다.

드드드드득!

세운이 검을 털어내는 순간, 카닐의 몸이 돌진하던 힘을 견디지 못하고 앞으로 쭈욱 밀려났다.

자세도 잡지 못한 탓에, 우둘투둘한 땅 위로 거칠게 밀려나며 안 그래도 위험해 보이던 복부의 상처가 심각하게 벌어졌다.

그렇게 한참을 미끄러지던 중.

콰앙!!

전방의 나무 기둥에 머리를 박고 나서야 몸을 멈출 수 있었다.

다만, 녀석의 몸은 이미 만신창이였다. 버서커로 인해 고통에 면역이 생긴 덕에 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듯했지만, 복부의 출혈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있었다.

"끼잉...."

세운이 가까이 다가가니, 카닐이 떨리는 신음을 내뱉었다.

버서커 스킬의 효과로 인해 붉게 물들어 있는 녀석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려왔다.

통증뿐만 아니라 고통과 죽음의 공포까지 잊게 해 주는 게 버서커 스킬인데, 그것을 초월할 정도로 세운에게서 느껴지는 두려움이 큰 탓이다.

푹.

-네임드 몬스터, '붉은 송곳니, 카닐'을 처치하였습니다.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개인 공적치가 4,000point 상승합니다.

-네임드 몬스터를 혼자서 처치하여 개인 공적치가 추가로 4,000point 상승합니다.

-'카닐의 송곳니'를 획득하였습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카닐의 심장에 세운의 검이 박혔다.

동정심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녀석은 어디까지나 튜토리얼을 위해 만들어진 존재일 뿐이고, 회귀 전의 기억으로 녀석이 얼마나 잔혹한 존재인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붉은 송곳니, 카닐'을 포식하였습니다.

-양분을 흡수하여 근력이 5, 민첩이 10 상승합니다.

네임드 몬스터답게, 포식을 통해 상승하는 능력치도 엄청났다.

총합 15의 능력치. 단순히 레벨 업을 통해 얻는 잔여 능력치를 기준으로 본다면, 무려 5레벨에 해당하는 능력치가 한 번에 상승한 것이다.

-레드 울프의 공포가 더욱 커집니다!

"끼잉...."

압도적인 무위로 보스 몬스터를 사냥했기 때문일까? 레드 울프들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세운은 검에 묻은 카닐의 피를 털어내며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정리 부탁드립니다."

"아, 알겠습니다!"

아무리 레드 울프라 하여도 공포에 물들어 전투 의지를 잃어버린 녀석들을 상대하는 건 의미 없었다.

강한철이나 유서아가 아니더라도, 저 상태의 레드 울프라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세운은 그렇게 생각하며 좌측으로 달렸다.

그곳에는 붉은 가죽을 한 멧돼지, 레드 보어와 사람들이 힘겹게 대치하는 중이었다.

특히, 그 중앙에서는.

"꿰에에에엑!"

"흡!"

투쾅!!

강한철이 네임드 몬스터인 '붉은 어금니'와 대치하고 있었다.

저 집채만 한 크기의 몬스터와 오로지 힘과 힘으로 대치하는 사람이라니.

튜토리얼의 수많은 플레이어 중에서도 저 정도의 힘을 가진 플레이어는 손에 꼽을 정도일 게 분명하다.

솔직히 오우거가 튜토리얼에 참여하지 않는 이상 강한철의 힘을 넘어서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지구보다는 탑에서 활약하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닐까 싶을 지경이다.

-붉은 송곳니, 파그가 땅 울림을 사용합니다.

쿠르르르!

붉은 송곳니, 파그. 녀석이 발을 구르자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대지가 떨려온다.

카닐이 버서커를 사용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것 역시 네임드 몬스터인 파그의 고유 스킬이었다.

다만, 강한철은 이에 당황하지 않고 기합을 머금으며 주먹으로 바닥을 내려찍었다.

콰르르르!

-성좌, '악어를 탄 노인'이 크게 흔들리는 지면을 바라보며 크게 만족스러워합니다.

파그의 지진을 같은 지진으로 봉쇄한다.

네임드 몬스터의 스킬을 같은 스킬로 무마시키다니, 성좌 '아가레스'에게 내려받은 힘도 제법 잘 적응한 모양이다.

"강한철."

"...왔나."

목소리가 거친 걸 보니,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속으로는 제법 힘든 모양이다.

하긴, 혼자서 네임드 몬스터를 상대하고 있었으니, 멀쩡한 게 오히려 비정상이다.

이 짧은 시간에 카닐을 물리치고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있는 세운이 비정상일 뿐이다.

"진주언가권의 초식, 기억나?"

"일 초식이라면, 가능하다."

"그럼 됐어."

세운이 멧돼지의 뒤로 돌아갔다. 검을 허리춤에 꽂아 넣고, 가볍게 손목을 풀었다.

"알아서 잘 따라와."

"알겠다."

타앗!

세운이 땅을 박차고 튀어 나갔다. 카닐의 피가 묻어 붉게 물든 망토가 바람에 펄럭였다.

"꾸엑!"

"꾸익!"

레드 보어들이 세운의 앞길을 막아보려 하였지만, 민첩성부터가 너무 차이 났다.

거기에 십로담퇴의 보법까지 더해지니, 멧돼지들이 아무리 달려들어도 세운의 전진을 막을 수는 없었다.

"꿰에에에엑!"

무능한 부하들을 꾸짖듯이 파그가 크게 울부짖었다.

그러면서 감히 자신에게 직진으로 달려드는 인간을 뭉개 버리기 위해 어금니를 한껏 드러내며 발길질을 하였다.

세운이 거리를 줄이는 데 맞춰 강한철 역시 땅을 박찼다.

스으읏!

세운의 주먹에 내공이 깃들며 청색으로 물들어 갔다. 진주언가권에 내공을 운용하였을 때 나타나는 특징이었다.

"꿰에에엑!"

붉은 어금니, 파그도 발을 크게 굴리며 땅을 박찼다.

그 순간.

-내공을 통해 진주언가권의 제일 초식, 강시권(僵尸拳)이 강화됩니다.

세운의 주먹이 파그의 어금니와 부딪혔다.

그리고 또 하나.

-성좌, '악어를 탄 노인'이 자신의 계약자를 위해 기꺼이 격진(激震)의 힘을 베풉니다.

-플레이어 '강한철'의 강시권이 강화됩니다.

콰앙!

파그의 뒤에서 강한철의 주먹이 들이닥쳤다.

이미 세운의 공격이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을 정도로 강한 탓에 당황한 사이에 들어온 또 하나의 공격.

몸을 내빼며 충격을 흘려야 할 판에 뒤에서도 공격이 들어오니 앞뒤의 공격이 파그의 몸속에서 강하게 충돌했다.

빠직!

단 한 번도 부서진 적이 없었던 파그의 어금니가 거칠게 부서져 나갔다.

세운의 주먹은 이것을 기회로 반대쪽 주먹을 내밀었다.

-내공을 통해 진주언가권의 제이 초식, 사후강직(死後强直)이 강화됩니다.

-파극심공의 묘리에 따라 무공의 위력이 강화됩니다.

콰직!

두꺼운 털가죽을 뚫고 들어온 충격이 파그의 두개골을 깨트렸다.

그리고 마침내.

퍼어어엉!

앞뒤에서 들이닥친 충격을 견뎌내지 못한 파그의 몸이 거칠게 터져 나갔다.

제 28화

28. 제28화

-네임드 몬스터, '붉은 어금니, 파그'를 처치하였습니다.

-개인 공적치가 4,000point 상승합니다.

-'파그의 심장'을 획득하였습니다.

순식간에 또 한 마리의 네임드 몬스터가 쓰러졌다.

양쪽에서 닥쳐온 충격에 버티지 못하고 내부가 터져 나간 덕에 속에서부터 피가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사이 강한철은 스스로도 놀란 표정으로 자신의 주먹을 바라보고 있었다.

"익숙해지면 성좌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이 정도 위력은 가뿐히 낼 수 있을 거야."

"이게 강권(强拳)이라는 건가?"

"맞아."

체력이 강점이라 할 수 있는 멧돼지 형 몬스터. 그중에서도 보스 몬스터를 터트려 버리는 힘.

이게 바로 세운이 강한철에게 진주언가권을 알려 준 이유였다.

강한철 역시 강권의 힘이 마음에 드는지, 한동안 자신의 주먹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붉은 어금니, 파그'를 포식하였습니다.

-양분을 흡수하여 근력이 5, 체력이 10 상승합니다.

카닐과 마찬가지로, 파그 역시 15에 해당하는 능력치를 제공해 주었다.

게다가.

-성좌, '배고픈 왕자'가 고기가 아주 부드러운 연육이 되었다며 황홀한 맛을 음미합니다.

권능의 주체라고 할 수 있는 베엘제붑의 반응도 기대 이상이었다.

"강한철, 여기 나머지 돼지들은 네가 정리할 수 있겠지?"

"물론이다."

"그럼, 맡겨 둘게."

고비는 이걸로 끝이 아니다.

아직 마지막 네임드 몬스터 한 마리가 남아 있었다.

세운은 바위산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얼마 움직이지 않아, 붉은 원숭이들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유서아. 역시 생각 이상이야.'

홀로 네임드 몬스터를 상대하고 있던 강한철과는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그녀는 전방에 나서서 검을 휘두르는 것은 물론, 사람들을 지휘하며 진형과 전술로 원숭이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쌍둥이 자매가 세워둔 목책이나 함정도 철저하게 이용하고 있다.

-성좌, '왕관을 쓴 거미'가 자신의 계약자에게 아직까지 거미줄이 허술하다며 지적합니다.

아마, 유서아의 재능과 동시에 성좌의 힘이 발현한 것이겠지.

서열 1위의 대마왕, 바알은 '지옥의 왕'이라 불리는 성좌답게 지옥에서도 손꼽히는 세력가이자 지휘관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유서아의 지휘 능력을 보던 중.

"나 잡아 봐라! 못 잡겠지? 약 오르지? 크헤헷!"

"음?"

원숭이들의 사이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좌, '당나귀 머리의 날치기'가 누가 내 배꼽 좀 찾아주라며 바닥을 뒹굽니다.

자세히 보니 자칭 세운의 오른팔이라는 박정필이 여기서도 활약을 보이고 있었다.

세운에게 배운 미끼 수단인 바나나를 들고 레드 몽키 사이를 종횡무진으로 움직이고 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몰이꾼의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 중이다.

관심을 보이는 성좌인 발레포르에게 능력이라도 받은 것인지, 발도 더욱 빨라져 레드 몽키도 쉽게 따라잡지 못한다.

게다가, 교묘하게 공격을 피해 내며 레드 몽키가 들고 있던 장비를 훔치기까지 한다.

서열 6위의 마왕, 발레포르의 능력인 '도둑질'을 배운 게 분명하다.

'저놈은 뭔데 활약을 하고 있는 건지.'

세운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에 녀석을 받아들일 때 예상했던 것과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 탓이다. 유서아나 강한철과는 달리 대련을 해 주지도 않았는데, 그에 맞먹을 정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좋은 거긴 하지만....'

캠프의 전력이 상승하는 건 어떻게 보아도 세운에게 긍정적인 사안이다.

회귀 전에 겪었던 박정필의 모습이 떠올라 영 내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회귀 전의 일로 녀석을 내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끽!"

콰직!

우르르-

"뒤로 빼세요! 네임드는 제가 상대할 테니까 다른 분들은 부서진 방벽에 서서 진형을 유지해 주세요!"

잡생각을 하는 것도 잠시, 원숭이들의 네임드 몬스터인 '붉은 손톱, 야샥'이 목책을 무너트렸다.

열 곳에 달하는 함정들도 전부 사용하거나 무너져 있었다.

아무리 전술과 진형이 뛰어나도, 힘의 차이가 너무 심했다.

상황이 안 좋아지는 것을 확인한 세운이 곧장 유서아의 옆으로 달려왔다.

"유서아."

"세운 씨! 어째서 여기에 오셨어요? 다른 곳은요?"

"대충 정리됐다. 네임드 몬스터는 잡았고 뒷정리 중이니까 금방 끝날 거야."

"다행이네요. 힘드시겠지만, 혹시...."

"걱정 마, 멀쩡하니까. 얼른 끝내자고."

"감사해요!"

"우꺅! 우끽!"

붉은 손톱, 야샥.

녀석은 2m가 조금 넘어가는, 다른 네임드 몬스터에 비해 작은 키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움직임은 대충 보아도 네임드 몬스터에 걸맞았다.

재빠른 몸놀림에 레드 몽키들을 지휘할 정도로 뛰어난 지능.

손에는 펄션의 모습을 한 쇠 검과 둥근 쇠 방패가 들려 있었고, 몸에도 꽤 견고해 보이는 경갑을 착용하고 있었다.

쌍검을 다루는 그녀에게 방패를 든 네임드 몬스터는 생각 이상으로 까다로운 적이다.

깡, 까앙!

유서아와 세운의 검이 야삭의 방패에 부딪혀댔다.

세운이 합류한 덕에 녀석의 공격을 완전히 봉쇄할 수 있었지만, 생각보다 야삭이 방패를 다루는 실력이 좋았다.

그러는 중에.

'보법이 문제인가.'

세운은 유서아의 허점을 파악할 수 있었다.

대련을 하며 지근거리에서 검을 겨눌 때는 몰랐는데, 필드가 넓어지고 상대의 움직임이 현란해지자 허점이 눈에 보였다.

검을 다루는 실력은 훌륭하지만, 그 실력을 다리가 못 따라가고 있었다.

하긴, 생각해 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구에서 아무리 검을 잘 배워 봤자, 결국 대련장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벌이는 결투였을 테니까. 이렇게 넓고 어지러운 전장을 경험해 본 적은 없었을 것이다.

"유서아, 지금부터 내 발걸음을 따라 해라."

"네? 지금이요?"

"원래 뭐든지 실전에서 보고 배우는 게 가장 빠른 법이거든."

어차피 앞서 두 마리의 네임드 몬스터는 처리했다. 남은 건 야삭을 포함한 레드 몽키들뿐.

유서아에게 보법을 알려 주기에 가장 적절한 순간이었다.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카밀식 쌍검술 ]

- 세상에 다섯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용병왕, 카밀의 쌍검술. 특히, 그녀의 발걸음은 태풍 속의 낙엽과도 같아 그 누구도 따라잡지 못했다고 한다.

마몬의 보물창고에는 수많은 보법이 존재했지만, 그중에 유서아에게 어울리는 보법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애초에 쌍검은 다루기가 까다로운 만큼 이름을 떨친 검사의 수가 적은 편이었다. 때문에 세운은 보법만이 아닌, 쌍검술 그 자체를 가져왔다.

스릉.

허리춤에서 잠들어 있던 어금니 단검을 꺼내 들었다.

뒤랑달에 묻혀 활약하지 못했던 녀석은 자신의 차례가 오자 신난다는 듯이 웅웅 떨어댔다.

카밀식 쌍검술에 따라 양손에 검을 쥔 세운이 빠르게 보법을 밟았다.

"집중하지 않으면 놓칠 거야."

"자, 잠깐만요!"

타앗!

들려오는 외침에도 세운은 멈추지 않았다.

이내 유서아는 이를 악물며 세운의 뒤를 바싹 쫓아왔다.

"무슨 발걸음이...."

세운의 발걸음은 일반적인 보법과 개념부터가 달랐다.

빠르고, 현란하고, 어지러웠다.

왼발을 앞으로 뻗더니, 오른발을 왼쪽으로 빼며 몸을 돌리고 상체를 숙여 검을 휘두른다. 바로 이어 몸을 한 바퀴 구르더니, 자리에서 번쩍 뛰어오른다.

다양한 몬스터를 상대하는 용병의 검술이기 때문일까?

카밀의 쌍검술은 세운이 여태껏 사용해 왔던 무공서들과는 전혀 다른 움직임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서거걱!

"우꺅!"

두말할 것도 없이 훌륭했다.

야샥은 세운의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했고, 당연하게도 방패 역시 세운의 검을 막아 내지 못했다.

다급하게 세운의 몸을 쫓았지만, 이곳저곳 휘날리는 듯한 움직임에 멀미가 날 정도였다.

게다가.

서거걱-!

"잘 따라오네."

"조금만 더 천천히!"

"조금 더 속도를 낼게."

"잠깐만요!"

유서아 역시 세운의 움직임을 잘 따라오고 있었다.

이에 야샥은 폭풍에 갇힌 듯한 느낌을 받아야 했다.

네 개의 칼날이 사방에서 규칙성 없이 휘몰아친다.

방패를 이리저리 휘둘러 보았지만, 네 개의 검은 교묘하게 방패를 피하며 야삭의 몸에 크고 작은 상처를 만들어 냈다.

-성좌, '왕관을 쓴 거미'가 계약자가 이제야 자신의 다리를 따라오기 시작한다며 다리털을 바싹 세웁니다.

이후로도 세운과 유서아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더 이상 야샥이 들고 있는 방패 따위는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되었다.

처음에는 늦기도 하고, 발이 꼬이기도 하던 유서아의 발걸음이 점점 나아지더니 결국에는 세운을 완벽하게 따라가고 있었다.

"대, 대단해요!"

"체력은 어때?"

"살짝 힘들긴 한데, 평소보다는 훨씬 나아요!"

힘이 부족한 거야 어쩔 수 없지만, 체력이 부족하다고 느껴진 것 역시 잘못된 보법 탓이었나보다.

하긴, 검을 제대로 배웠다면 하루에도 수백 수천 번씩 휘둘렀을 텐데 체력이 부족한 게 말이 안 되지.

어느새 야삭의 전신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상처가 생겨났다.

그리고 얼마 후.

툭.

녀석의 손에서 방패가 떨어졌다.

검을 들어 올리면 빈틈을 향해 네 개의 칼날이 닥쳐오고, 방패를 들어봤자 빈틈 사이로 공격이 들어온다.

그렇다고 도망을 치자니, 발을 내뺄 때마다 아킬레스건을 향해 칼날이 날아온다.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상황에 전투를 포기한 것이다.

"끼익...."

세운으로서도 신기한 광경이었다.

첫 번째로 상대한 네임드 몬스터인 카닐이 공포에 떨던 모습도 그렇고, 세운이 겪은 회귀 전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었다.

서걱-

서걱-

유서아와 세운의 검이 동시에 날아들어 야샥의 목을 떨어트렸다.

마지막 네임드 몬스터는 너무나도 허무하게 쓰러졌다.

-네임드 몬스터, '붉은 손톱, 야샥'을 처치하였습니다.

-개인 공적치가 4,000point 상승합니다.

-'야샥의 검'을 획득하였습니다.

"우, 우끼익!"

"우끽!"

이 모습을 지켜보던 레드 몽키들의 눈이 공포로 물들어 갔다.

자신들의 수장이 쓰러진 충격에 더해 세운이 입고 있는 아이템의 능력이 개방된 것이다.

-'붉은 늑대 갑옷'의 능력 '늑대의 위협'으로 인해 인근의 레드 몽키들이 공포에 빠져듭니다!

-'회색 늑대 망토'의 능력 '위압감'으로 인해 카리스마가 강화되며 적의 공포를 더욱 악화시킵니다!

이후부터는 간단했다. 공포에 떨거나 도망치는 레드 몽키들을 사냥하기만 하면 됐으니까.

녀석들은 이미 전투 의지를 잃은 후였기에, 안전하게 모든 몬스터를 섬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 튜토리얼 첫 번째 장 – 적응 ]

-열 번째 웨이브를 성공적으로 통과하였습니다.

-웨이브에 참여한 모든 인원에게 1,000point를 제공합니다.

-축하드립니다! 튜토리얼 첫 번째 장을 훌륭하게 끝마쳤습니다!

-튜토리얼에 참가 중인 모든 인원에게 1,000point를 추가로 제공합니다!

-개인 공적치 집계 중....

[ 1위 : 정세운 58,660point ]

[ 2위 : 유서아 11,120point ]

[ 3위 : 강한철 10,980point ]

"끝났다!"

"진짜, 이 빌어먹을 웨이브! 드디어 해방이다!"

"모두 고생하셨어요!"

몬스터가 모두 사라지자 사람들의 입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웨이브를 통과할 때마다 '다음 웨이브까지 남은 시간'이라는 문구가 떠오르며 불안감을 부추겼는데, 마지막 웨이브답게 이번에는 그런 문구가 사라져 있었다.

다만,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점이 하나 있었다.

'좋아하기에는 너무 이른데.'

그런 세운의 생각을 증명하듯.

-'튜토리얼 두 번째 장 – 이동'이 시작됩니다.

모두의 앞으로 두 번째 장의 시작을 알리는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났다.

제 29화

29. 제29화

"세운 씨, 이건...."

"말 그대로야, 이제 여기서 떠나라는 거지."

[ 튜토리얼 두 번째 장 – 이동 ]

-초원을 따라 이동하여 목적지에 도착하여야 합니다.

-목적지 도착까지 남은 시간 : 167시간 59분

튜토리얼의 두 번째 장이 시작되었다.

내용은 간단하다. 목적지까지 이동하는 것.

남은 시간은 168시간. 즉, 일주일 안에 도착하라는 뜻이었다.

'초원을 따라 이동하여'라는 게 애매할 수도 있지만, 그 위로 화살표 모양의 도형이 떠올라 있었다. 그러니 초원이 끝나더라도 저 화살표만 따라가면 그만이다.

몬스터 웨이브 때와 비교하면 별 어려움도 없어 보이는 심플한 내용이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그리 좋지 않았다.

"떠나라고?"

"이제야 좀 정착하나 싶었는데...."

"몬스터 웨이브가 끝났으니 좀 쉬나 싶었더니."

튜토리얼 첫 번째 장의 테마인 '적응'.

그 목적에 맞게 사람들은 철저하게 이곳에서 적응해 버렸다. 매일같이 몬스터가 공격해 오고, 제대로 된 편의 시설 하나 없는 이 야생 속에서 말이다.

이동은 새로운 적응을 요구하니, 사람들이 곤란해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어떻게 말해 줘야 하려나.'

사람들이 꽤 오랫동안 진정하지 못하는 것을 보아 유서아도 살짝 당황한 느낌이다.

이 상황을 알고 있었던 세운이지만, 회귀 전의 기억을 언급할 수 없는 지금, 사람들을 이끌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두 인물이 분위기 바꾸기 시작했다.

"으앙! 내 건물들! 목책들! 진짜 열심히 지었는데!"

"어차피 방금 웨이브 때문에 거의 다 부서졌잖아? 고치는 것보다는 새로 짓는 게 더 재미있지 않아?"

-성좌, '검은 새'가 이곳에서의 건축은 한계가 있다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성좌, '거대한 새'가 이곳은 너무 좁다며 자신의 계약자가 더 넓은 곳으로 나아가길 바랍니다.

"그건 그래!"

쌍둥이 자매. 건축을 담당하며 캠프다운 캠프를 형성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쌓은 이들이었다.

캠프를 버리고 떠나야 하는 지금, 그 누구보다 상심이 클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두 명이 긍정적인 분위기를 발산하며 사람들을 이끌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 걸까? 아, 어쩌면 마을 같은 게 나올지도?"

"오! 나는 마을에 가면 제일 먼저 따뜻한 물에 목욕부터 하고 싶어!"

"근데 가는 길에 몬스터라도 나오면...."

"에이, 뭐 어때? 지금까지 이렇게나 잘해 왔는데."

둘은 마치 콩트를 하듯이 빠르게 말을 주고받았다.

튜토리얼 두 번째 장의 소식으로 인해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었기에, 둘의 목소리는 캠프 전체에 퍼져 나갔다.

사람들은 자연스레 둘의 대화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렇죠? 언니, 오빠들?"

"그, 그렇지!"

"하긴,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거쳐왔는데 다른 거라고 문제 있겠어?"

둘은 자신들의 분위기에 사람들을 포섭해 나가기 시작했다.

가장 힘들어했을 법한 두 쌍둥이가 주체적으로 나서주니, 사람들도 덩달아 긍정적인 분위기에 끌려왔다.

그러던 중, 세운은 볼 수 있었다.

찡긋!

쌍둥이 자매가 자신에게 어설픈 윙크를 날리고 있는 것을 말이다.

* * *

쌍둥이 자매의 활약 덕분에 상황은 빠르게 진정되었다.

걱정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새로운 튜토리얼에 납득하며 몸을 움직였다.

사냥한 몬스터들의 가죽을 벗겨 고창석에게 넘기고, 고기를 발라 요리사에게 넘긴다. 그 외에도 레드 몽키들이 가져왔던 무기들이나 몬스터의 뼈 등도 고창석에게로 넘어갔다.

열 번째 웨이브 때 등장한 몬스터의 수가 워낙 많았기에, 고창석과 요리사가 꽤나 고생을 해야 했다.

뭐, 다행히도.

"저도 도울게요!"

"고마워요! 그럼, 저기 고기들 좀 날라주시겠어요? 오래 보관할 수 있게 훈연 좀 해 두려고 하거든요!"

"어르신, 뭐 도울 거 없겠습니까?"

"허허, 고맙구먼. 시간 괜찮으면 저기 원숭이 놈들 무기 좀 분해해 주게. 생각보다 조잡해서 어렵진 않을 거라네."

사람들이 둘의 작업을 열심히 도와주고 있다는 것이다.

하긴, 다들 여유 시간에는 휴식을 하거나 몬스터를 상대하기 위해 훈련을 하는 게 대부분이었으니, 몬스터 웨이브가 사라진 지금, 갑작스럽게 할 일이 사라졌을 것이다.

바쁘게 돌아가는 캠프를 바라보며 세운은 부서진 목책 앞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쌍둥이 자매가 아쉬운 눈빛으로 목책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들 앞에서 기운찬 모습을 보였지만, 역시 본심은 이쪽인가 보다.

어찌나 집중하고 있던지, 세운이 바로 뒤에서 작게 헛기침을 하고서야 둘이 몸을 돌렸다.

"어? 혈랑이다!"

"와, 혈랑이다!"

혈랑이라니.

세운은 순간적으로 머리가 지끈거리는 게 느껴졌다.

'이대로라면 이명이 굳혀질 것 같은데.'

이명은 단순히 사람들이 붙여준 별명 같은 게 아니다.

플레이어가 튜토리얼부터 쌓아온 업적이 쌓이고 쌓여, 시스템이 인정해 준 설화의 일부분. 그게 바로 진짜 '이명'이다.

시스템이 인정한 만큼, 이는 플레이어가 나아갈 방향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경우도 많다.

플레이어 중에서 미리 계획을 세워 자신의 설화를 인위적으로 꾸려가는 이들도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원하는 대로 설화를 꾸리고 이명을 얻는 플레이어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경우는 다르다.

튜토리얼의 첫 번째 장이라는 시작 지점부터 이명으로 불리고 그에 걸맞은 행동을 한다면, 시스템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뭐, 그리 나쁜 이명은 아닌 것 같지만.'

검은 옷의 거지라는 뜻을 가진 흑의개(黑衣丐)라거나. 더러운 얼굴이라는 의미의 더티 페이스(Dirty face) 등.

플레이어 중에서는 본인 스스로도 숨기고 싶어 할 정도로 불편한 이명도 많았으니까.

"근데 여긴 어쩐 일이에요?"

"우리랑 놀아주려고 왔어요?"

이제 떠나보낼 목책을 바라보며 가졌던 아쉬운 눈빛을 감쪽같이 숨기며 다가오는 쌍둥이 자매.

세운은 쑥스러운 듯이 시선을 회피하며 작게 읊조렸다.

"고맙다."

"응?"

"엥?"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는 듯이 둘 다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다만, 금방 분위기를 알아채고 밝게 웃음 지었다.

"에이, 뭘 그런 걸 가지고!"

"어차피 떠나야 하는 거, 미련은 금방 버리는 게 좋잖아요?"

"저 시스템이라는 거, 몬스터도 막 내뱉을 정도인데 말 안 들었다가 어떻게 될지도 뻔하고!"

"그리고 전에 나무를 잔뜩 베어 준 거에 대한 보답이랄까?"

"헤헤!"

쌍둥이 자매가 별거 아니라는 듯이 세운의 감사 인사를 웃어넘겼다.

아무래도 세운이 부담을 느낄까 봐 보답이라는 이름으로 말을 넘긴 것이겠지.

쌍둥이의 배려에 미소를 지은 세운이 대화 주제를 넘겼다.

"뭐 필요한 거라도 있나?"

"필요한 거.... 아! 고민이 하나 있긴 한데, 들어 줄래요?"

"엥? 우리한테 고민이 있었어?"

"그거 있잖아, 그거!"

"아, 그거!"

그거라는 말에 세운이 고개를 갸웃했다.

대화를 넘기려 물어본 것뿐이지, 캠프를 떠나게 된 지금 둘에게 필요한 게 무엇일지 전혀 예상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쪽이에요!"

"따라와 봐요!"

쌍둥이 자매가 양쪽에서 세운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졸지에 양손이 포박당한 세운이 둘에게 끌려 캠프의 구석으로 이동했다.

"저거요!"

"...가죽?"

"가죽이라뇨! 침낭이죠! 몬스터의 가죽을 이용해서 만든 거예요!"

"맞다, 혈랑 오빠는 맨날 다른 곳에서 잠을 잤었지?"

도착한 곳에는 가죽으로 된 침낭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풀과 나뭇가지를 엮어 만든 물컵이라든가 나무를 깎아 만든 식기 등, 다양한 생필품이 한가득이었다.

'하긴, 나는 언제나 반대편에서 잠을 잤으니까.'

사람들과 너무 가까워지면 냉철한 판단이 힘들어진다. 또한, 세운이 지금까지 해 온 차가운 행동 탓에 세운을 불편해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때문에 세운은 여태껏 은근히 사람들을 피해고 있었다.

생각 이상으로 적응을 잘하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저 정도일 줄은 세운도 예상하지 못했었다.

"근데 이건 왜?"

"저게 끝이 아니에요. 대장장이 아저씨의 도구나 사람들의 장비, 비상식량 등. 캠프를 떠난다고 해도, 챙길 게 엄청 많거든요!"

"며칠밖에 안 지났는데, 그렇죠?"

"가죽을 보따리처럼 만들어서 챙기는 방법도 생각해 봤는데...."

"그렇게 들고 다니면 만약에 몬스터가 나타나기라도 했을 때, 여러모로 곤란해질 것 같았거든요!"

쌍둥이의 말에 세운이 진지하게 고민을 해 보았다.

확실히, 그녀들의 말이 맞았다. 세운이 회귀 전에는 생존자의 수도 그리 많지 않았고, 분위기도 그리 좋지 않았다. 때문에 제대로 된 계획 없이 무작정 캠프를 떠나야 했다.

'그 덕에 지옥 같은 행군이 시작됐었지.'

당연하게도, 튜토리얼의 두 번째 장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다.

쌍둥이가 예상한 대로 몬스터의 습격도 존재하고, 초원이 끝나자마자 험난한 지형이 플레이어들을 반겨준다.

밤에는 온도도 낮아서 사람들의 컨디션은 언제나 최악이었다.

이동의 속도는 점점 느려지고, 하마터면 제시간에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할 뻔했다.

"그래서 저희가 마차를 만들어 보려는데...."

"마차를 만들어도 끌 수가 없더라구요!"

"한철 오빠가 아니면 힘들걸요?"

"다 같이 밀고 가면 오히려 이동에 방해가 될 것 같구요!"

쌍둥이의 표정이 사뭇 심각해졌다. 가벼운 마음으로 떠드는 게 아닌, 진지하게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모습에 세운은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지금까지 어떻게 하면 캠프를 이끌어갈 수 있을까 하고 혼자 고민하고 있었는데 자신도 모르게, 고민을 함께해 주는 이들이 생겨났으니까.

"고민 많이 했구나."

"헤헤, 잘했죠?"

"근데 언니가 저것들 전부 너무 무거울 거 같다면서...."

"아, 좀! 조용히 해! 분위기 좋았는데!"

상황이 이렇게까지 된 이상 기대에 부응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마차를 이끌 만한 무언가라.

적절한 방법이 세운의 머릿속에 번뜩였다.

"둘은 일단 마차부터 만들어 줄래?"

"네? 어떻게 하게요?"

"설마, 오빠가 직접 끌려는 거예요? 아무리 오빠라도 일주일 동안 마차를 끌고 다니긴 힘들 텐데."

"그럴 리가. 방법이 있으니까, 일단 마차부터 만들어 줘."

"하지만...."

"언니, 뭘 고민해! 오빠가 저렇게 말하면 다 방법이 있는 거겠지."

"그렇지? 그럼, 우리는 오빠만 믿고 있을게요!"

"튼튼한 놈으로 만들어 둘 테니까, 기대하고 있어요!"

-성좌, '검은 새'가 자신의 계약자를 실망시키면 가만있지 않겠다며 당신을 노려봅니다.

-성좌, '거대한 새'가 넓은 날개로 '검은 새'를 황급히 가리며 마신에게 변명을 하기 시작합니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당신의 행보를 기대합니다.

세운이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는 훈제 고기를 만들기 위해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방법이라고 해 봤자 두 가지 중 하나지.'

첫 번째 방법, 몬스터를 테이밍한다. 2 서클에 다다른 세운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방법이다.

게다가 마몬의 보물창고에는 몬스터를 조련할 때 쓰이는 '목줄'도 존재했다.

다만, 문제라면 이곳에 더 이상 몬스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게 튜토리얼의 첫 번째 장이 끝나며 몬스터 웨이브도 멈췄고, 늑대 숲이나 언덕 등의 몬스터들은 이미 모두 토벌하였으니까.

그렇다면 남은 건 두 번째 방법뿐이다.

스윽.

세운이 손을 들어 올렸다.

다름 아닌 가죽과 고기를 발라내고 남은 몬스터의 뼈를 향해서.

그러고는 익숙하게 마몬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다.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레이즈 스켈레톤(Raise Skeleton) ]

- 흑탑(黑塔)의 네크로맨서를 대표하는 마법으로써 마나를 불어 넣어 백골(白骨)을 일으킨다.

드륵!

세운의 손 아래, 몬스터의 사체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제 30화

30. 제30화

레이즈 스켈레톤.

말 그대로 뼈대를 일으키는 네크로맨서의 가장 기초적인 마법이다. 다른 마법과는 다르게, '다크 서클'이 있어야만 사용할 수 있는 마법.

다행스럽게도 세운은 얼마 전의 공동에서 흑탑의 수련법으로 두 번째 마나 서클을 만들어 냈다.

세운의 손에서 시커먼 마나가 흘러나오더니, 발골이 끝나고 뼈만 남은 멧돼지의 사체에 스며들어 갔다.

드득!

고기를 발라내어 산산이 조각나 있던 뼈들이 들썩이며 서로를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척추뼈가 하나하나 맞물리고, 골반뼈에 다리가 척척 이어진다.

"꺄악!"

"뭐, 뭐야!"

덩달아 세운의 주변에서 고기를 발골하던 사람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뼈가 움직이다니.

지구에서는 영화로만 볼 수 있었던, 상식 바깥의 일이었으니까.

개중에는 몬스터가 나타나는 건 줄 알고 다급하게 무기를 꺼내 드는 사람도 있었다.

드드드득!

그러는 사이, 검은 기운이 스며 들어간 뼈가 모든 조각을 되찾았다.

구석에 따로 떨어져 있던 머리뼈가 바닥에 끌리며 다가와 맞물리는 순간.

"일어나라."

우득!

"저게 대체 뭐야!"

"다, 당신이 한 겁니까?"

멧돼지의 뼈가 무릎을 펼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멧돼지 중에서도 제법 큰 녀석이었는지, 살과 가죽이 모두 사라졌음에도 꽤 큰 덩치를 자랑했다.

번뜩!

새까만 어둠만이 가득하던 머리뼈의 눈구멍에서 붉은빛이 새어 나왔다.

세운이 대답을 하지 않자, 사람들의 경계는 더욱 심해졌다.

그 순간.

털썩.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저것도 마법 같은 건가?"

"하긴, 여긴 이미 상식이 통하는 곳이 아니니까...."

멧돼지. 아니, 이제 '보어 스켈레톤'이 되어 버린 존재가 세운의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철저한 복종의 자세.

세운이 복종을 허락하는 의미로, 녀석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이 녀석이라면, 충분하겠지.'

네크로맨서의 가장 기초적인 소환수, 스켈레톤.

좀비에 비해 근력도 낮고, 방어력도 낮지만, 멧돼지 자체가 힘이 좋은 몬스터였기에 스켈레톤이 되어도 마차를 끌 힘 정도는 있을 것이다.

게다가 스켈레톤과 같은 언데드에게는 크나큰 장점이 하나 있다.

바로, 지구력.

마나가 제공되는 이상, 언데드는 결코 지치지 않는다. 온종일 마차를 끌어야 하는 상황에서는, 테이밍으로 포획한 몬스터보다도 훨씬 어울리는 존재였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세운이 다시금 손을 들어 올렸다.

마을의 외곽에 있던 짐의 양이 생각보다 많았기에, 마차 하나에 전부 수용하기는 어려울 거라고 생각이 되었다.

그렇다면.

"일어나라."

드드득!

또 한 마리의 스켈레톤을 소환하면 그만이다.

첫 번째 소환과 마찬가지로 세운의 지시에 따라 멧돼지의 뼈가 맞춰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얼마 가지 않아 세운의 양옆에 두 마리의 스켈레톤이 고개를 숙이게 되었다.

'이게 한계다.'

네크로맨서가 서클당 소환할 수 있는 스켈레톤의 수는 대략 두 마리 정도. 두 개의 서클을 가진 세운이었기에, 총 네 마리의 스켈레톤을 유지하는 게 가능했다.

다만, 마법의 사용 대상에 따라 그 수용 한계가 달라진다.

세운도 일반적인 인간의 뼈라면 네 구까지 유지할 수 있지만, 그보다 강력한 존재인 멧돼지는 두 마리를 유지하는 게 고작이었다.

"히익!"

주변의 인기척에 세운이 고개를 돌리자, 자연스레 두 스켈레톤의 고개도 세운을 따라 움직였다.

그러자 가까이 있던 남자가 숨을 크게 들이키며 뒷걸음질을 쳤다.

'하긴, 저게 정상적인 반응이긴 하지.'

사체가 살아서 움직이다니, 일반인이 가볍게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그러나 이 스켈레톤들은 앞으로 쌍둥이 자매가 만들어 줄 마차를 끌어야 한다. 사람들의 바로 옆에서 말이다.

그러니 이 녀석들이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해 줄 필요가 있었다.

"안전하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저, 정말요?"

"와서 만져보셔도 됩니다."

"저, 전 괜찮...."

"그럼 제가 만져봐도 될까요?"

사람들의 사이를 가르고, 유서아가 나타났다. 캠프의 사람들과 함께 식량 준비를 하고 있었나 보다.

그녀는 당당하게 걸어 나와 세운의 옆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스켈레톤의 앞에 섰다.

'긴장하고 있네.'

애써 숨기려 하고 있었지만, 세운은 볼 수 있었다. 그녀의 손이 미약하게 떨리고 있음을.

아무리 당당한 척해도, 그녀 역시 이제 막 탑에 떨어진 일반인일 뿐이다. 그러니 스켈레톤을 보며 무서워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당당한 태도로 앞에 나선 것은, 아마도 세운의 뜻을 이해했기 때문이겠지.

"읏!"

"그륵-"

유서아에게서 세운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비명이 들려왔다.

그녀의 손이 닿자, 스켈레톤이 가볍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놀라서 몸을 뺄 법도 한데,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도록 고개를 돌린 채 눈을 꼭 감고 버티고 있었다.

잠시 후.

"그륵, 그르륵-"

스켈레톤이 친근감을 표하듯이 유서아의 손에 머리를 비비기 시작했다.

그것을 알아챈 유서아도 신기한 듯이 눈을 크게 뜨더니, 이번에는 양손으로 스켈레톤의 머리뼈를 매만졌다.

"와아, 무슨 반려동물 같은데요?"

"저, 정말요?"

"그럼 저도 한 번...."

"저도 만져봐도 될까요?"

"신기하다!"

유서아가 호감을 보이는 순간 사람들의 불안 역시 사라졌다.

세운이 고개를 끄덕이자 신기함을 느낀 이들이 가까이 다가와 스켈레톤을 만지기 시작했다.

물론, 방금 보인 스켈레톤의 움직임은 세운이 지시한 것이었다. 스켈레톤이란 본래 주인의 지시가 아니면 조금의 움직임도 일으키지 않는 존재였으니까.

세운의 센스와 유서아의 도움 덕분에 스켈레톤에 대한 사람들의 불안감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후, 소문을 들은 것인지 두 명의 소녀가 빠르게 이쪽으로 달려왔다.

"와아아아! 진짜다! 해골이 일어서 있어!"

"오빠, 얘들이 저희 마차 끌어 줄 애들이죠?"

"힘 좋아 보인다! 마차 크기를 좀 더 키워도 되겠는데?"

"얘는 내가 찜!"

"그럼 얘는 내가 찜!"

"언니, 대결할래? 누구 마차가 더 빨리 움직이는지?"

"콜! 딱 봐, 우리 귀염둥이가 훨씬 빠를 테니까!"

"제작자가 자기 작품이 아니라 사용자한테 의지하다니! 나는 내 작품으로 승부를 보겠어!"

"아, 아니! 나도 당연히 작품으로 승부 보지!"

쌍둥이 자매가 스켈레톤 위에 올라탄 모습에, 사람들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다.

* * *

캠프에 어둠이 찾아왔다.

애초에 마지막 웨이브가 끝난 시점이 해가 지기 직전이었기에 이동은 다음 날에 하기로 하였다.

이동 준비를 하느라 힘들었던 탓인지, 다들 평소보다 일찍 잠에 빠져들었다.

'잘 만들었네.'

잠자리에 들기 전, 세운은 사람들에게 받은 가죽 침낭을 바닥에 깔았다.

평소에는 등에 멘 늑대 망토를 이불 삼아 잠에 빠져들곤 했는데, 역시 아예 침낭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에는 미치지 못했다.

몸에 딱 맞는 크기와 부드러운 촉감. 보슬보슬한 털이 차가운 밤공기를 막아주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한껏 부푼 배를 쓰다듬으며 만족스러운 식사였다며 숨을 크게 내뱉습니다.

이곳에서의 마지막 식사였던 만큼, 세운은 베엘제붑에게 나름대로 신경 써서 음식을 대접해 주었다.

마지막 웨이브 때 쓰러트렸던 '붉은 손톱, 야샥'. 녀석을 포함해 세운이 쓰러트렸던 여러 레드 몽키들을 마법으로 불태워 폭식의 권능을 사용한 것이다.

덕분에 민첩과 지력이 크게 상승한 것은 물론, 베엘제붑의 불만도 쏙 들어가게 할 수 있었다.

아마 당분간은 배고프다며 찡얼대지 않으리라.

'튜토리얼 두 번째 장이라....'

세운은 회귀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가까스로 죽음을 면하고, 희망을 잃은 사람들 사이에 섞여 반강제로 여정을 나서던 모습을.

차라리 여기서 죽는 게 낫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사람들의 사체가 무성한 캠프를 떠나보내던 장면을 말이다.

'과거는 과거일 뿐.'

세운이 고개를 짧게 저으며 앞으로의 계획을 다시 점검해 나갔다.

두 번째 장에서 조심해야 할 점이나, 그곳에서 찾아야 할 히든 피스 등. 튜토리얼의 기회는 한 번뿐이었기에, 이번에 놓치면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빛나는 초승달이 세운의 바로 위에 도착했을 때쯤에야, 세운은 정리를 마칠 수 있었다.

그렇게 잠에 빠져들려던 찰나.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부리를 내려 당신을 가리킵니다.

'음?'

탐욕의 마신, 마몬의 메시지가 나타났다.

틈만 나면 침을 줄줄 흘리며 나타나는 베엘제붑과 달리, 평소에 말수가 적었던 마몬이었기에 관심이 가는 건 당연했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당신의 검을 가리키며 탐욕을 일으킵니다.

'그런 거였나.'

잊혀진 영웅의 수행처에서 히든 피스를 통해 발견한 전설의 검, 뒤랑달.

탐욕의 마신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했다. 당장 공동에서 검을 빼 들 때만 해도, 큰 관심을 드러냈으니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마신이라 해도 플레이어에게 함부로 간섭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마음대로 빼앗을 수는 없을 것이다.

탑의 꼭대기 층에 존재하는 성좌들은 기본적으로 아래층의 플레이어들에게 간섭할 수 없었으니까.

만약에 간섭한다고 해도 인과율을 비틀며 스스로의 격에 큰 상처를 내야만 한다. 그 때문에 많은 성좌들은 자신의 아래에 신도를 거느리고 아래층에 영향권을 행사하려 했었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보검을 자신에게 바치라고 권위 있게 읊조립니다.

"제가 왜요?"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발톱에 힘을 주며 인상을 찌푸립니다.

세운의 태도는 처음 마몬을 상대했을 때와 전혀 달랐다.

당당함.

성좌 중에서도 격이 높기로 알려진 마신 앞에서도 전혀 밀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물론, 거기에는 다 그럴듯한 이유가 있었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자신의 명을 거부한다면 보물창고의 사용권을 해지하겠다며 경고합니다.

"한번 해지해 보시죠?"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의 부리가 부르르 떨립니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이미 스무 개가 넘는 보물들을 사용해 오며 세운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사용하고 있는 권능의 정체를 말이다.

'내가 사용하고 있는 마몬의 보물창고는 지금 마몬의 진짜 보물창고와 별개의 것이다.'

이게 세운이 내린 결론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호기심으로 세운이 창고를 사용하는 것을 허락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마몬이 창고를 막지 않은 이유는 애초에 그것을 막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세운이 이를 깨달은 것은 현재 사용 중인 권능의 특성 때문이었다.

'실체를 가져오지 못하고 힘만을 꺼내 올 수 있었던 이유.'

즉, 세운이 사용 중인 창고는 회귀 전의 마몬이 소유하고 있던 창고. 회귀하며 실체를 잃고, 내재한 힘만이 남아 세운에게 권능으로 흡수된 것이다.

세운이 마몬의 협박으로부터 당당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이것이었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당신의 오만한 태도에 날개를 위협적으로 활짝 펼칩니다.

그렇다고 해도, 마몬에게 밉보이는 건 좋지 않았다.

이미 세운의 캠프에는 수많은 마왕이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약을 맺는 중이었으니까.

마몬이 철수 명령을 내린다면 아무리 72 마왕이라고 할지라도, 마신의 명에 굴복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세운은 뒤랑달을 얻은 후에 지금의 상황을 대비하여 생각해 둔 묘안을 꺼내 들었다.

"안 드린다는 게 아닙니다. 다만, 뒤랑달은 지금 제가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펼쳤던 날개를 접으며 당신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마신께서는 아이템의 힘을 모방할 힘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마몬의 보물창고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보물이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 '레플리카'였다.

그렇다면.

"그러니 마신께서 뒤랑달을 모방하는 동안 제 뒤랑달을 빌려드리겠습니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아쉽긴 하지만, 자신의 컬렉션을 채울 수 있다면 나쁘지 않을 것 같다며 고개를 까딱거립니다.

"대신."

여기서부터가 진짜다.

뒤랑달을 빌려주는 대가로, 세운이 바라던 것.

바로.

"제게 '진짜 창고'를 개방하여 주십시오."

현존하는 마몬이 가지고 있는 진짜 보물창고의 사용권이었다.

제 31화

31. 제31화

세운이 사용하는 '탐욕의 권능'이 가진 치명적인 약점. 바로, 창고의 보물을 실체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지금까지 사용해 왔던 보물들도 무공서나 마법서, 몬스터의 신체 등. 힘을 끌어와 신체에 적용할 수 있는 것들이 전부였다.

그 한계를 이번 계약으로 돌파하려는 생각이다.

'뒤랑달을 빌려주는 건 아쉽지만, 어차피 지금 내 몸으로 뒤랑달을 완벽하게 다루는 건 힘드니까.'

봉인이 덜 풀렸다고는 해도, 뒤랑달은 전설급 보검이다. 현재 세운의 능력치로 뽑아낼 수 있는 힘에는 한계가 있다.

고창석의 존재 덕분에 당장 사용할 무기는 얼마든지 있으니, 세운에게는 결코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었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어딜 보아도 자신이 손해 아니냐며 불편한 기색을 한껏 드러냅니다.

"저도 불공평한 제안은 원치 않습니다. 제가 바라는 건 창고의 입구 부분에 나열되어 있던 것들뿐입니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입구에 있던 보물을 떠올리며 고민에 빠집니다.

회귀 전, 세운은 마몬의 보물창고에 들어갔었다. 그리고 짧게나마 그곳의 구조를 알 수 있었다.

'희귀하고 좋은 보물들은 전부 최심부에 있었지.'

보물의 등급이 낮을수록 입구 쪽에, 높을수록 최심부에. 그게 바로 마몬이 보물을 정리하는 방법이었다.

즉, 보물창고의 입구에 존재하는 것들은 전부 '최하급 보물'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빌려주는 것이라고는 해도 전설의 무기 '뒤랑달'을 받는 조건이라면 마몬에게도 나쁜 제안이 아닐 것이다.

최하급 보물은 대부분 희귀도가 낮아 종류가 중복되는 경우도 많았으니 말이다.

'아마 거절할 수 없을 거다.'

얼마 가지 않아, 세운의 예상처럼 마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당신의 제안을 승낙합니다.

이에 세운은 '어금니 단검'을 꺼내 들어 검지의 끝에 상처를 만들었다. 붉은 피가 상처를 따라 뚝뚝 흘러내렸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악신들의 계약법을 알고 있는 당신을 바라보다, 고개를 저으며 말을 아낍니다.

악신.

세운으로서는 선신들과 다를 게 없었지만, 다른 플레이어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때문에 악신에게 속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찾아낸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피의 계약.

아무리 악신이라 하여도, 피의 계약에 묶인다면 플레이어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강제로 계약을 해지하는 게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피의 계약을 어길 시, 성좌는 몇 단계나 격이 떨어지고 만다.

플레이어 역시 계약을 어길 시 시스템으로부터 자격을 박탈당하게 된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의 털끝에서 혈액이 흘러나옵니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와의 계약이 성사되었습니다.

-성좌와의 계약을 통해, 앞으로 '마몬의 보물창고' 일부분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운의 검지를 따라 흐르던 혈액이 꿀렁거리며 허공에 떠올랐다.

계약이 성사됨과 동시에 세운의 혈액이 옆에 놓여 있던 뒤랑달을 집어삼켰다. 곧, 혈액의 크기가 작아지며 뒤랑달의 모습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럼에도 세운은 전혀 아쉽지 않았다.

뒤랑달보다는 당장 지금의 수준에 딱 알맞은 것들이 손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탐욕(眞)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흑련 가루 ]

[ 엘프 숲의 이슬 ]

[ 꿈틀거리는 녹색 그물 ]

창고를 개방하자 가장 먼저 보이는 차별점은 탐욕의 뒤에 붙은 '진(眞)'이라는 글자였다.

아무래도 세운이 사용하고 있는 허물이 사라지고 힘만 남은 창고와는 차별성을 두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긴, 그만큼 자신의 창고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을 테니까.'

비록 세운이 가진 탐욕의 창고 역시 마몬이 모았던, 솔직히 현시점에서 마몬의 창고보다 더욱 뛰어난 창고겠지만, 탐욕의 마신으로서, 그것을 인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세운이 보물창고의 목록을 찬찬히 살펴보았지만, 아쉽게도 항목에 떠오른 건 대부분 소모품이었다.

'어쩔 수 없지.'

마몬의 보물창고에 존재하는 장비들은 대부분 높은 등급의 아이템들이니 입구 쪽에 나열된 보물 중에서 장비류를 찾는 건 욕심이리라.

피의 계약을 나눈 만큼 의심은 하지 않았지만, 신기한 마음에 세운이 보물 하나를 꺼내 보았다.

[ 엘프 숲의 이슬 ]

분류 : 포션

등급 : D

설명 : 매일 아침 세계수의 풀잎이나 나뭇잎에 맺혀 있는 맑은 물방울. 극히 미약하게 세계수의 기운이 서려 있다.

능력 : 1. 자연의 축복 – 20분간 재생력이 200% 상승합니다.

2. 세계수의 정기 – 20분간 마나 회복력이 200% 상승합니다.

'좋아.'

지금까지 세운이 사용했던 탐욕의 권능과는 달리 이번에는 '엘프 숲의 이슬'이 실체가 되어 세운의 손에 들려 있었다.

기분도 낼 겸 이슬을 쭉 들이켜니, 청량한 기운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화앗!

목을 넘어가자마자 전신에 퍼져 나가는 산뜻한 기운.

몬스터를 상대하느라 몸에 쌓인 피로나 스켈레톤을 일으키며 소모되었던 마나가 빠르게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계약대로 창고를 개방해 주겠지만, 자신의 보물을 함부로 사용한다면 용서하지 않겠다며 경고합니다.

'네네.'

창고에 존재하는 보물 중에서 가장 최하급의 보물이라고는 하나, 이것들도 마몬이 직접 모아둔 보물들이니까.

뒤랑달이 탐나 제안을 수락하였지만, 세운이 보물을 함부로 사용할까 봐 영 불안한가 보다.

'그럴 생각도 없지만.'

최하급이라고 해도 튜토리얼 구간에서 쉽게 구하기 힘든 것들이 대부분이다.

세운도 꼭 필요한 순간이 아니면 보물들을 함부로 사용할 생각은 없었다.

'자기 전에, 마나나 좀 쌓아 둘까.'

우웅!

엘프 숲의 이슬을 통해 빠르게 재생되던 마나가 세운의 단전과 서클을 향해 움직였다.

캠프에서의 마지막 밤이 빠르게 흘러갔다.

* * *

다음 날.

"어서 옮깁시다!"

"이야, 그새 이런 건 또 어떻게 만들었대?"

캠프는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쌍둥이가 만든 두 마차 위에 짐을 싣고, 물이나 식량 등을 챙긴다.

사람들은 몬스터의 습격을 대비하여, 고창석이 만들어 준 장비만을 간단하게 착용한 상태였다.

"제 마차가 튼튼하니까 이쪽으로 가져오세요!"

"내 마차가 더 튼튼하거든!"

유서아가 챙겨야 할 물품을 지정하며 사람들을 지휘하고 있다면, 두 쌍둥이는 마차에 짐을 차곡차곡 정리하고 있었다.

평소에도 유서아랑 친하게 지내더니 장난스러워 보이긴 해도, 그녀의 부담을 줄여 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 보였다.

세운도 몇 없는 짐을 간단하게 실은 후, 도울 게 있나 싶어 유서아를 찾아가려던 중, 마차 앞에서 대기 중인 스켈레톤 주위를 서성거리는 남자를 발견하였다.

'뭐지?'

어젯밤, 유서아를 통해 스켈레톤에 대한 공포감을 없앨 수는 있었지만 그 이후로는 세운의 지시가 없었기에, 스켈레톤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반응이 없자, 사람들의 관심도 자연스럽게 사라져 갔다.

때문에 지금은 다들 스켈레톤에 대한 관심이 꺼진 상태였는데, 남자는 그 주위를 돌아다니며 둘러보고, 만지기까지 하며 스켈레톤을 관찰 중이었다.

이십 대 중후반쯤으로 보이는 남자였는데, 마지막 자존심인 듯이 더러워진 하얀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기억에 남는 사람은 아닌데.'

그 말은 즉, 세운의 회귀하기 전의 생에서는 이미 목숨을 잃었을 사람이라는 말이다.

바로 옆으로 다가가도 세운을 알아채지 못하던 그는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다 세운과 툭 부딪힌 후에야 세운의 존재를 알아채고 관찰을 멈추었다.

"아, 죄송합니다. 집중하느라 그만."

"뭐 문제라도 있습니까?"

"신기해서 말입니다."

뭐야, 그런 건가.

세운이 관심을 끄고 몸을 돌리려 하였다.

단순히 신기해서 스켈레톤을 보고 있었던 거라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으니까.

그 순간, 남자의 입에서 세운의 몸을 멈추게 하는 설명이 쏟아졌다.

"아무리 마법이 존재하는 세상이라지만 인대와 힘줄, 근육도 없으면서 몸을 일으키고 설 수 있다니. 신기하지 않습니까?"

세운의 눈이 반짝였다. 남자에게서 무언가의 가능성을 느낀 것이다.

"그래서, 관찰해 보니 뭐라도 알 것 같습니까?"

"인대는 없지만, 관절 사이에 무언가 검은 아지랑이 같은 게 뼈와 뼈를 연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몸을 움직일 때도 근육 대신...."

남자가 하얀 가운을 펄럭이며 설명을 이어갔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물어봐 주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는 사이, 세운은 남자가 내뱉은 '검은 아지랑이'라는 단어에 신경이 꽂혀 있었다.

'마나가 보이는 건가?'

세운은 회귀 전의 기억과 탐욕의 권능을 이용하여 마나를 순식간에 깨달았다지만, 일반적인 플레이어들은 다르다.

재능이 없으면 마나를 보고 느끼는 데까지 수개월, 혹은 수십 년의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그 말은 즉, 눈앞의 남자가 마나에 대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흑마법'에 대한 재능을 말이다.

'관련 지식도 뛰어나 보여.'

남자가 내뱉는 단어들은 일반인이 내뱉을 만한 것들이 아니었다.

힘줄이 붙는다는 뼈의 거친 면이나 머리뼈에 뚫린 작은 신경 구멍, 멧돼지 특유의 다리뼈 구조 등.

그중에서는 피머(Femur)나 티비아(Tibia) 등, 뼈의 각 부위를 뜻하는 영단어까지 나오고 있었다.

물론, 스스로는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지만.

"특히 이 어깨뼈는.... 아, 죄송합니다. 직업병이라. 스켈레톤을 일으킨 당사자 앞에서 주름을 잡았네요."

"직업병이라면, 의사셨습니까?"

"정식 의사는 아닙니다. 치료보다는 구조에 더 관심이 많아 해부학 연구실의 석사 과정을 밟고 있었습니다."

"해부학이라...."

"아쉽게도 이런 세상에서는 큰 의미가 없겠지만요. 지금도 치료는 대부분 하늘 씨가 맡아주고 있고요."

세운이 남자의 말을 들으며 잠시 고민에 잠겼다.

단순히 마나를 보기만 하는 재능이라면 의미가 없지만, 남자가 마나를 느낄 수 있다면? 서클을 만들고, 거기에 해부학에 대한 지식을 접목할 수 있다면?

강한철이나 유서아와 맞먹는 아니, 다른 방향에서는 오히려 그 둘보다 뛰어난 역량을 발휘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잠시 여기 앉아보시죠."

"네? 아닙니다. 사람들도 도와줘야 하고...."

"잠깐이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세운이 진지한 표정을 짓자, 남자도 더 이상 거부하지 못하고 세운의 앞에 주저앉았다.

세운은 그 즉, 허리춤에서 '어금니 단검'을 꺼내 들어 남자의 주위로 원을 그려나갔다.

그리고 그 안으로, 정체 모를 심볼을 그려 나갔다.

'이 정도면 되었겠지.'

회귀 전, 세운은 탑의 곳곳을 돌아다녔던 만큼 수많은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다.

이것 역시 그중 하나. 주로 흑마법사들이 사용하는, 마나를 끌어모으는 가장 기초적인 마법진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마법진에는 매개체가 있어야 하는 법이지만,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탐욕(眞)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흑마석(黑魔石) ]

- 어두운 마나를 지니고 있는 보석으로써 주로 흑탑의 마법사들이 마법의 매개체로 사용한다고 알려진 보석.

어젯밤, 마몬과의 계약을 통해 이 정도는 얼마든지 꺼낼 수 있게 되었으니까.

푹.

세운이 흑마석을 마법진의 중앙, 남자의 바로 앞에 박아 넣었다. 그러자, 마법진에 그려진 심볼이 흑마석과 반응하며 검은 기운을 내뿜기 시작했다.

우우웅!

"이 아지랑이는 스켈레톤에 깃들어 있던!"

마법진이 제대로 작동하는 것을 확인한 세운이 반 바퀴 돌아 남자의 뒤에 섰다.

등 위에 손을 올리며, 숨을 작게 골랐다.

'본래 마나를 깨닫고 흡수하여 서클을 만들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재능만 충분하다면.'

다른 마탑들과는 달리 흑탑은 안정성보다 효율이나 위력, 속도 등을 중시한다. 세운이 서클을 만드는 데 사용했던 '흑탑의 수련법'이 바로 그중 하나다.

그리고 세운의 머릿속에 스며든 흑탑의 수련법 중에는 단순히 스스로의 서클을 만들어 내는 것뿐만 아니라.

"조금 아플 수도 있습니다만...."

"네?"

"죽기 싫으면, 이 악물고 버텨야 할 겁니다."

우우우웅!

"커헉!"

다른 사람의 서클을 강제로 생성하는 방법에 대한 지식 역시 존재했다.

제 32화

32. 제32화

"갑자기 무슨 짓을!"

"지금부터 입은 열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잘못하면 심장이 터질 수도 있으니까요."

"...!"

다른 사람의 마나 서클을 강제로 개방하는 것은 확실히 위험한 행동이다.

세운이 남자에게 하는 경고들도 모두 사실이다. 하지만, 과장된 면이 없지는 않았다.

애초에 남자의 심장이 터질 때까지 몰아붙일 생각이 없었고, 거부감이 느껴지는 순간 모든 작업을 멈출 생각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세운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부정적인 상황이 아닌, 긍정적인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우우웅!

가장 먼저, 세운의 두 번째 서클을 채우고 있던 검은 마나가 움직였다.

검은 마나는 세운의 팔과 손을 타고 움직이더니 곧 남자의 등을 따라 그 속으로 침투해 나갔다.

"큭!"

남자가 고통스러운지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세운은 오히려 작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역시, 재능이 있다.'

재능이 없는 이라면 마나가 들어와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이들은 마나가 심장에 도착하고 나서야 충격을 느끼게 된다.

반면에 남자는 검은 마나가 스며드는 순간부터 신음을 흘렸다. 마나의 존재를 분명하게 느끼고 있다는 증거다.

"시작이 어려울 뿐입니다. 조금만 더 버티시죠."

우웅!

세운이 남자의 몸에 들어간 검은 마나를 심장을 향해 인도하였다.

본래 2 서클밖에 되지 않는 마법사가 다른 사람의 몸에 간섭한다는 행위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 일이지만, 세운의 마나 지배력은 이미 2 서클을 아득히 넘어가고 있었다.

마법사는 아니었지만, 마나라면 회귀 전에 질리도록 다뤄보았으니까.

흑탑의 지식을 온전히 받아들인 지금,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그렇게 세운의 검은 마나가 남자의 심장에 도착하는 순간.

"크흑!"

남자의 입에서 검붉은 핏줄기가 흘러나왔다.

아마, 지금쯤 남자는 누군가 심장을 꽉 부여잡고 있는 듯한 통증을 느끼고 있으리라.

의지가 약한 이라면 여기서 정신을 잃는 이도 있겠지만, 남자는 세운이 말한 대로 이를 악물며 정신을 유지했다.

덕분에 세운은 한층 여유롭게 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우우웅!

검은 마나가 남자의 심장 주위로 원을 그린다. 서클이 만들어질 길을 생성하는 것이다.

그 충격으로, 남자는 한동안 계속해서 검은 핏줄기를 내뱉어야만 했다.

남자가 생각보다 고통을 잘 인내하였기 때문일까? 세운은 처음 예상한 것보다 더욱 넓고, 섬세하게 서클의 길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가 진짜다.

"잘 참았습니다."

우우웅!

세운이 남자의 서클을 강제로 회전시켰다.

그러자 흑마석과 마법진을 통해 주변을 채우고 있던 검은 마나가 남자의 몸속으로 빠르게 흡수되었다.

새로운 손님의 등장에, 세운의 검은 마나는 임무를 마치고 주인에게로 돌아왔다.

"이, 이건...."

세운의 마나가 빠져나감과 동시에 남자의 입에선 핏줄기 대신 감탄성이 터져 나왔다.

심장을 중심으로 휑하게 뚫린 서클 안으로 검은 마나가 채워지며, 터질 듯한 충만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는 것. 그 충족감을 가뿐히 충족시키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압도적인 충족감.

남자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눈까지 감으며 조용히 그 충족감을 음미하였다.

그러던 중, 세운 역시 작은 변화를 경험하고 있었다.

-흑탑의 수련법을 이용하여 타인의 마나 서클을 개방하였습니다.

-새로운 길을 경험한 마나가 돌아오며 경험을 토대로 서클을 다듬습니다.

-서클의 마나 수용력이 소폭 증가합니다.

-서클의 회전 속도가 소폭 증가합니다.

남자의 몸에 들어갔다 나온 마나가 무언가를 배워 오기라도 한 것처럼 세운의 서클을 다듬어간 것이다.

세운으로서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돌아온 마나가 서클을 회전시키며, '나 잘했지?'라고 외치는 듯했다.

'내가 할 일은 여기까지. 이다음은 개인 역량에 따라 달라지겠지.'

마법진 위로 피어오른 검은 마나가 빠르게 사라져 갔다.

세운이 사용한 흑마석은 무려 마몬의 보물창고에 있던 것이다.

비록 최하급 보물들을 보관하는 입구 쪽에 있던 것이라지만, 마몬의 보물창고에 있던 보물인 만큼 그 성능은 흑마석 중에서도 최상급에 가까웠다.

그런데 지금, 최상급 흑마석의 색이 점점 더 빠르게 옅어지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진회색을 넘어 연회색으로 변해 갔다.

'역시.'

남자의 재능은 세운의 기대 이상으로 뛰어났다.

마나를 흡수하는 속도는 갈수록 빨라졌고, 흑마석이 연회색을 넘어 속이 텅 비어 보일 정도로 투명해지는 순간.

스르르-

흑마석이 텅 비고, 바닥의 마법진이 흩어져 사라졌다.

최상급 흑마석의 마나를 모조리 흡수해 버린 것이다.

세운의 머릿속에 스며든 '흑탑의 수련법'에 대한 지식에 따르면, 범재(凡才)가 흡수할 수 있는 마나의 양은 고작 해 봐야 하급 흑마석 정도이다.

이것으로도 남자가 가진 재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수고했습니다."

"후우...."

남자가 묘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떴다.

아직까지 자신의 몸속에 스며든 마나의 존재에 익숙하지 않은 듯했다.

이에 세운은 뒤에서 가만히 이를 지켜보고 있던 스켈레톤을 역소환시켰다.

와르르-

스켈레톤의 뼈를 잇고 있던 마나가 사라지며, 멧돼지의 뼈가 산산이 흩어졌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남자는 알 수 있었다. 세운이 자신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 말이다.

우웅!

남자의 손끝에서 검은 마나가 맺혔다.

그러고는 물방울이 떨어지듯 멧돼지의 뼈 사이에 스며들어 갔다.

다른 점이라면, 속도랄까?

세운이 철저하게 '마법적인' 방법으로 스켈레톤을 일으켰다면, 남자는 '해부학적' 관점으로 멧돼지의 뼈 하나하나를 섬세하게 이어가고 있었다.

덕분에 스켈레톤이 이어지는 속도는 극도로 느렸지만, 세운은 알 수 있었다.

'저게 바로 흑탑의 마법사들이 사체를 연구하던 이유 중 하나지.'

단순히 뼈를 잇는 게 아니라, 관절 사이를 마나로 덮어 연골과 비슷한 형상을 만들어 움직임을 부드럽게 만든다.

뼈의 곡선을 따라 마나를 이어, 본래의 힘줄과 근육을 최대한 모방한다.

고작 스켈레톤 하나 일으키는 데 5분이 넘는 시간이 소모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일어나십시오."

드드득-

스켈레톤이 몸을 일으켰다.

세운이 소환했던 멧돼지보다 훨씬 부드러운 움직임에, 다리를 펼치는 힘이나 속도 역시 뛰어났다.

그렇게.

-성좌, '죽음을 짓밟는 말'이 투레질을 하며 플레이어 '백현'을 바라봅니다.

세운의 캠프 최초의 마법사. 아니, 네크로맨서가 탄생하였다.

* * *

남자. 아니, 백현의 서클을 개방시킨 후, 세운은 그에게 곧바로 흑탑의 수련법을 알려 주었다.

마나를 모르는 이라면 모를까, 백현은 이미 검은 마나로 이루어진 서클을 개방한 상태였기에 손쉽게 수련법을 습득하였다.

'가미긴이라면 내가 더 도와줄 필요는 없겠지.'

죽음의 짓밟는 말.

서열 4위의 마왕이자, 30개의 악마 군단을 지휘한다고 알려진 지옥의 대후작이다.

그러한 가미긴의 능력은 강령술과 사령술.

네크로맨서의 재능에 눈을 뜬 백현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성좌였다.

사실, 세운은 백현이 서클을 개방했을 때부터 이미 가미긴의 등장을 예상하고 있었다.

베엘제붑과 마몬. 두 마신 덕분에, 72 마왕의 시선 역시 세운과 캠프의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이미 바알이나 아가레스, 마르바스 등 쟁쟁한 마왕들마저 계약자를 찾은 마당에 재능 넘치는 네크로맨서를 그가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무튼, 그런 가미긴이 백현의 옆에 붙었으니 세운이 따로 흑마법을 알려 주지 않아도 알아서 잘 성장할 것이다.

'다행이야.'

사실, 마차를 이끌 스켈레톤을 소환하며 세운이 봉착한 문제가 하나 있었다.

바로, 앞으로의 계획.

세운이 세운 계획을 실현하려면, 튜토리얼의 두 번째 장 도중에 사람들을 두고 떠나야만 한다.

하지만, 스켈레톤은 주인의 마나를 받아 형체를 유지하는 소환수. 세운이 사라지고 마나가 부족해지면 무너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백현이 있다면?

'마차 문제도 해결되고, 앞으로의 전력도 상승한다.'

아무런 걱정 없이 히든 피스를 찾아 자리를 떠날 수 있을 것이다.

캠프를 떠나기 직전, 한창 바쁜 타이밍에 세운이 굳이 급하게 백현의 서클을 개방시킨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감사합니다."

네크로맨서 육성에 성공한 세운이 앞으로의 계획을 떠올리며 만족하던 중, 자신이 일으킨 스켈레톤을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백현이 말을 걸어왔다.

"사실, 전투에는 큰 재능이 없어서 캠프에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자신감을 가져도 됩니다. 가미긴의 관심을 받을 정도면, 잠재력만은 탑에서도 손꼽히는 수준일 테니까요."

"잠재력이라.... 지구에서도 찾지 못한 재능을 이곳에서 찾게 되네요."

백현이 어딘가 슬퍼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내저으며 정신을 바로 잡고 스켈레톤을 크게 쓰다듬었다.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이 힘, 열심히 단련하겠습니다."

"그럼, 과제를 하나 드리겠습니다."

"과제라면 어떤?"

흑마법사의 마나 수련법은 일반적인 마탑들과는 다르다.

세운이야 히든 피스로 찾은 공동에 존재하는 방대한 양의 마나를 흡수한 덕에 빠르게 마나 서클을 획득할 수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검은 마나는 사체를 다루며 그 사기를 검은 마나로 치환하여 흡수한다.

그게 검은 마나를 쌓기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으니까.

-탐욕(眞)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만티코어의 사체 ]

- 갈기 달린 호랑이의 머리와 신체, 멧돼지의 송곳니와 황소의 뿔, 박쥐의 날개와 전갈의 꼬리를 합친 형상의 괴수(怪獸).

"이건?"

세운이 마몬의 창고를 개방하여 꺼낸 것은 몬스터의 시체였다.

아무래도 마몬은 용도 쓰러트린다는 만티코어의 독침이 탐나 사체를 통째로 보관 중이었던 듯하지만.

재능 있는 네크로맨서가 생긴 이상, 세운은 이것을 단순히 일회성 독침으로 사용할 생각이 없었다.

"튜토리얼이 모두 끝나기 전까지 이 녀석을 일으키면 됩니다."

"지금까지 봤던 몬스터들과는 완전히 다르네요. 마치, 키메라(Chimera) 같은...."

백현의 말대로, 만티코어는 평범한 몬스터가 아니다.

최소한, 탑의 40층 이상은 올라야 발견할 수 있는 희귀 괴수. 1 서클의 네크로맨서가 다루기는 불가능한 몬스터였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자신의 보물이 망가질 것이라는 생각에 인상을 찌푸립니다.

당연하게도, 마몬이 불편한 기색을 팍팍 드러냈다.

1 서클 네크로맨서가 아무리 잘해 봤자, 만티코어의 시체를 일으키기는커녕 제대로 다루지도 못할 게 분명하니까.

그런데도 세운이 만티코어의 사체를 꺼낸 이유는, 백현이 평범한 1 서클의 네크로맨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성좌, '죽음을 짓밟는 말'이 결코 실망시키지 않겠다며 마신에게 고개를 조아립니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죽음을 짓밟는 말'의 실력을 떠올리며 화를 가라앉힙니다.

가미긴. 72 마왕은 물론, 일곱 마신과 비교해도 최고의 네크로맨서라 불리는 지옥의 대후작.

그라면 마몬에게 밉보이지 않기 위해서라도 책임지고 백현을 가르칠 게 분명했다.

그리고 백현이 만티코어의 사체를 일으키는 순간, 그는 유서아나 강한철을 넘어 캠프에서 가장 강한 주력이 될 것이다.

제 33화

33. 제33화

[ 튜토리얼 두 번째 장 – 이동 ]

-초원을 따라 이동하여 목적지에 도착하여야 합니다.

-목적지 도착까지 남은 시간 : 151시간 41분

튜토리얼의 지시에 따라, 본격적인 이동이 시작되었다.

첫 번째 장의 시련인 웨이브를 무사히 끝내고 처음으로 걱정 없이 푹 쉬었기 때문일까? 사람들의 컨디션은 그 어느 때보다도 좋아 보였다.

그리고 드디어, 쌍둥이 자매가 만든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드드드득-

"와아, 움직인다!"

"봐, 내 마차가 더 빠르지?"

"무슨 소리야, 어딜 봐도 똑같은데!"

"내가 언니 봐주려고 일부러 천천히 가게 하고 있는 건데?"

"자리 바꿔! 내 마차가 앞에 있으면, 우월한 속도를 보여줄 테니까!"

마차는 세운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훌륭했다.

시간도 얼마 없었을 텐데, 크기도 딱 적당하고 짐을 한가득 실어도 문제없을 정도로 튼튼했다.

네 개의 바퀴에는 멧돼지의 것으로 보이는 가죽이 칭칭 감겨 있어, 나름의 쿠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공기 타이어를 구할 수 없는 이곳에서 가장 적절한 선택이었다.

"잘 되고 있습니까?"

"네, 덕분에요. 그런데 저만 이렇게 마차 위에 있어도 되는가 싶습니다."

"괜찮습니다. 마차를 끄는 것만으로도 몇 사람분을 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요."

백현에게 만티코어를 일으키라는 과제를 내준 후, 세운은 곧장 유서아를 찾아가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솔직히 세운 혼자서도 두 마리의 스켈레톤을 다루는 데 문제는 없었지만, 보통 사람이 보기에는 마차 하나에 마부가 하나씩 있는 게 상식이었다.

그 점을 이용하여, 백현을 마차에 앉혀두었다. 그 위에서 네크로맨시를 공부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리고 완전히 거짓말도 아닌 게 백현이 타고 있는 마차의 스켈레톤은 정말 그가 소환한 스켈레톤이었다.

-성좌, '죽음을 짓밟는 말'이 계약자가 가진 풍부한 지식에 놀라워하며 흑마법의 기초를 가르칩니다.

유서아와 강한철의 성좌인 '왕관을 쓴 거미'나 '악어를 탄 노인'이 이론보다는 실전을 중시하였다면, 죽음의 짓밟는 말, 가미긴은 지식을 탐구하는 데 더욱 열정적이었다.

세운과의 짧은 대화를 마치자마자, 진지한 눈빛으로 성좌에게 질문을 거는 백현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적성에 딱 맞는 듯했다.

그러는 동안, 세운은 뒤쪽의 마차에 앉아서 자세를 잡고 마나를 모으기 시작했다.

스켈레톤에게는 앞의 마차를 따라가라는 지시를 내려 두었으니, 변수가 생기지 않는 이상 세운이 당장 해야 할 건 없었다.

우웅!

파극심공을 터득하며, 내공이 쌓이는 속도가 한층 더 빨라졌다.

공동에서 느낀 경험을 살려, 요즘은 단전과 동시에 서클의 마나까지 모으는 중이다.

만약 탑의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이 광경을 보았다면 입을 열고 감탄했으리라.

일반적으로 내공과 마나를 동시에 모으는 건 불가능하다고 알려져 있으니 말이다.

'확실히 서클이 많이 안정화되어 있어.'

파극심공과 마찬가지로, 흑탑의 수련법은 효율을 중시한 대신 안정성이 떨어진다.

마나 서클 역시 마찬가지로 첫 번째 서클에 비해 길도 험하고 모양도 조잡했다.

그러나 백현의 서클을 개방시켜 준 후, 백현의 서클을 뚫고 돌아온 검은 마나가 세운의 서클을 많이 다듬어 주었다.

지금도 서클을 회전 중인 마나가 칭찬을 해 달라는 듯이 '웅웅'거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언제 몬스터가 나타날지 몰라요! 2시간 간격으로 두 명씩 사방을 경계하도록 할게요!"

"네!"

세운이 한창 집중에 빠져 있던 중, 유서아가 사람들을 지휘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이 그녀의 지휘에 따라 마차를 중심으로 사방을 경계하기 시작한다.

시스템에는 몬스터에 대한 언급이 없었기에 방심할 만도 한데. 과연, 꼼꼼한 성격의 유서아답다.

다른 사람들 역시 몬스터 웨이브의 기억과 지금까지 쌓여온 유서아에 대한 신뢰감 덕분에 그녀의 말을 잘 따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쯤이었지.'

세운의 기억대로라면 초원의 마지막 부근에서 몬스터의 기습이 벌어진다.

다만, 초원에는 위치를 특정할 만한 지점이 없었기에 세운으로서도 정확한 위치는 알지 못했다.

회귀 전의 기억을 재차 떠올려도, 당시에는 너무 다급했던 터라 몬스터가 어디서 나타났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 이를 파악할 가장 적절한 방법이 하나 떠올랐다.

바로, 직접 정찰을 나서는 것.

"정필아."

세운은 딱히 어딘가를 바라보지도 않고, 편안한 자세 그대로 박정필을 불렀다.

그런데 평소 같았으면 곧바로 들려왔을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그 때문에 이름을 재차 부르려던 순간.

"넵, 형님! 정필이 왔습니다!"

저 멀리서 박정필이 다급하게 달려왔다.

뭘 하다 온 건가 싶어 녀석이 달려온 곳을 바라보니, 좌측에서 경계를 서던 남자 하나가 세운과 눈이 마주치며 몸을 움찔거렸다.

'경계를 서고 있었나 보네.'

아마, 자신의 이름을 듣자마자 세운을 핑계로 자리를 교체한 것이겠지.

방금 세운과 눈을 마주친 사람은 '세운'이라는 이름값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바꿔주었을 것이고.

이거, 의도치 않게 악명만 더욱 키워졌다.

박정필을 구박할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지금은 이놈이 필요하니까.'

세운이 직접 나서지 않는 이상, 정찰을 나서기 가장 적절한 사람이 바로 박정필이었다.

발레포르와 계약한 덕에 발도 빠르고, 지금까지 몰이꾼으로서 활약하며 도망치는 데는 이골이 나 있을 테니까.

"정찰 좀 다녀와라."

"정찰이요? 어디로요?"

"전방."

"앞에는 이미 경계를 서면서 가고 있는데요? 굳이 제가 필요합니까?"

"저 정도 말고, 훨씬 앞에. 몇 킬로 정도 쭉 둘러보고 와 봐."

"...네?"

박정필의 얼굴이 싹 굳었다.

귀찮은 경계 임무에서 빠졌다 싶었다가, 훨씬 어려운 임무를 맡게 되었으니 저런 반응을 보일 수밖에.

다만, 이번에는 녀석도 쉽게 세운의 말을 듣지 않았다.

"혀, 형님! 제가 실력이 좋긴 한데, 그건 무립니다."

"왜?"

"저희 다 꾸준히 이동 중인데 몇 킬로 앞을 정찰하고 오려면, 진짜 몇 시간 동안은 계속 뛰어야 해요! 저라도 무리예요. 무리!"

"흐음...."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지금까지 워낙 시키면 알아서 하던 놈이라 깊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두 다리로 정찰하러 다녀오는 건 확실히 무리겠지.

정찰병이라 함은 보통 말을 타고 있는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말이라.'

생각해 보니, 못 구해 줄 것도 없었다.

뒤로 돌아선 세운은 마차에 쌓인 짐을 뒤적거리다가, 레드 울프의 뼈 하나를 찾아냈다.

히든 피스를 찾기 위해 장거리 이동을 할 경우를 떠올리며 미리 챙겨둔 것이었다.

어차피 당분간은 찾아낼 히든 피스도 없고, 목적지까지는 보고 움직여야 했기에 세운이 직접 탑승할 일은 없었다.

게다가, 백현이 하나의 스켈레톤을 일으켜 준 덕분에 세운에게는 스켈레톤 한 마리를 더 소환할 수 있다.

드드드득!

"우앗!"

이제는 익숙해진 소환술로 늑대의 뼈를 일으켰다.

멧돼지보다는 못해도, 레드 울프답게 덩치가 제법 볼 만했다. 그 위로 남는 가죽을 안장대용으로 걸치자, 제법 훌륭한 모양새가 나왔다.

다만, 이걸로는 부족하다.

콰직!

세운은 저번에 백현의 서클을 개방하기 위해 사용했던 흑마석을 꺼내 들었다.

마나가 텅텅 비어 투명해진 흑마석.

그것을 늑대의 두개골에 박아 넣었다.

단순히 힘으로 꽂아 넣은 게 아닌, 스켈레톤의 두개골에 '설치'를 한 것이기에 흑마석은 원래 자기 자리인 것처럼 늑대의 두개골에 정착했다.

그 모습이 마치 뿔 달린 늑대를 보는 듯했다.

우우웅!

곧이어, 세운이 흑마석에 마나를 불어 넣었다.

그러자 투명하던 흑마석에 연회색의 마나가 스멀스멀 차올랐다.

완전히 검은색을 자랑하던 본래의 모습에는 못하지만, 최상급 마나석답게 스켈레톤을 유지하긴 충분할 것이다.

"이 정도면 되겠지?"

"와, 이놈 저한테 주시는 겁니까?"

"뭐, 하는 거 봐서."

"으앗, 감사합니다! 역시 형님을 따르길 잘했습니다!"

정기적으로 검은 마나를 불어넣어 줘야 하니 소유권을 넘기지는 못하지만, 박정필의 지시에 따르라는 명령을 걸어 두면 세운이 아니더라도 다루는 게 가능하다.

어차피 정찰을 위해 잠깐 필요한 것뿐이니 자세히는 설명하지 않았다.

탈 것이 생겨나자, 박정필은 곤란한 기색을 완전히 지우고 자선해서 스켈레톤의 안장 위에 올라탔다.

"형님의 선물인 만큼 형님의 이명을 본떠서 백랑으로 이름 짓겠습니다!"

"하아...."

저 녀석, 잘 가다가도 꼭 한마디를 더 해서 이마를 쑤시게 만든다.

그렇게 생각하며, 세운이 손을 휘저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형님! 이랴!"

"제대로 보고하고 가라. 사람들 놀라게 하지 말고."

"에이, 저도 그 정도 상식은 있습니다! 가자, 백랑!"

타앗!

박정필이 탄 스켈레톤이 다리를 움직였다.

녀석, 괜히 눈에 띄는 짓을 할까 봐 미리 조언을 해 뒀는데도 사람들 주위를 한 바퀴 빙 돌며 자랑한 후에야 정찰을 떠난다.

왜 하필 저런 녀석에게 몰이꾼의 재능이 있던 것인지, 발레포르의 관심이 쏠린 것인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우우웅!

그사이 세운은 마음 놓고 다시 내공과 마나를 모으는 데 집중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평화로운 이동이 계속되었다.

사람들의 긴장이 풀리고, 슬슬 휴식을 준비하려던 중.

"어? 저기, 뭐 있는 거 같지 않아?"

"뭐 말이야? 안 보이는데?"

"저기, 작은.... 뭐 있는 것 같은데. 뒤에 먼지도 나는 것 같고."

"그런가?"

몇몇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운 역시 그들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았으나, 거리가 너무 먼 탓인지 제대로 보이지가 않았다.

누구인지는 대충 알 것 같았지만, 확인은 해야 하는 법.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제왕 독수리의 척안(隻眼) ]

- 하늘을 지배한다 알려진 맹수, 제왕 독수리의 눈으로 구름 위에서도 지상의 사냥감을 발견할 정도로 뛰어난 시력을 자랑한다.

마몬의 창고까지 열어가며, 세운은 전방의 상황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세운의 예상대로, 박정필이 속도를 올리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다만, 녀석의 표정이 다급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하아...."

세운이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박정필의 뒤를 쫓아오고 있는 수백 마리의 몬스터를 발견한 것이다.

뭉게뭉게 피어오르던 먼지구름의 정체가 바로 녀석들이었다.

누가 몰이꾼 아니랄까 봐, 정찰을 하라고 보내놨더니 몬스터 떼를 몰이해 왔다.

"다들 전투 준비하십시오."

"저게 보입니까?"

"아니, 저 거리는 몽골 사람도 못 볼 것 같은데...."

"다들 준비하세요! 마차를 중심으로 진형을 형성하겠습니다!"

세운의 진지함을 알아차린 유서아의 지시하에, 사람들이 진형을 꾸린다.

튜토리얼 두 번째 장, 이동.

그 첫 번째 전투가 다가오고 있었다.

제 34화

34. 제34화

"이야, 바람 좋고! 엉덩이가 좀 불편한 거 말고는 이렇게 좋을 수가 없네!"

세운의 정찰 지시를 받은 직후. 박정필은 사람들에게 '백랑'을 자랑하는 것을 잊지 않고,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과연, 늑대랄까? 자신이 달리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속도였다.

게다가 백랑이라 이름 붙인 스켈레톤은 언데드의 특성 때문인지 지치지도 않고 발을 고르게 내뻗고 있었다.

"자, 더 빨리! 야호!"

이게 얼마 만의 속도감인가?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있는 돈 없는 돈 전부 당겨서 구매한 외제 차를 뽐내며 거리를 돌아다녔는데. 지금이 딱 그때의 기분이었다.

'역시, 형님을 따르길 잘했다니까!'

박정필은 생각했다.

저 성좌라는 존재의 선택을 받은 것도, 캠프에서 이인자의 지위를 얻은 것도, 외제 차 못지않은 이 백랑이라는 스켈레톤을 얻은 것도.

모두 세운을 따른 덕분이라고.

-성좌, '당나귀 머리의 날치기'가 앞으로 벌어질 일에 웃음을 힘껏 참으며 끽끽거립니다.

"엥? 뭔 말입니까?"

성좌, 당나귀 머리의 날치기. 서열 6위의 마왕, 발레포르.

그는 박정필에게 힘을 주었지만, 항상 뜬금없이 메시지를 보내며 그 행동을 비웃고는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

누가 보아도 하얀 해골 늑대를 타고 초원을 질주하는, 영화 속 한 장면같이 멋있는 상황인데, 대체 뭐가 웃긴 건지.

그렇게 생각한 순간.

피비비빅-!!

날카로운 무언가가 사방에서 날아왔다.

"우와아앗!"

-플레이어 박정필이 '허겁지겁'을 사용하였습니다.

허겁지겁.

박정필이 성좌인 '당나귀 머리의 날치기'에게서 받은 능력이었다.

능력이 사용되자, 박정필은 그 뜻 그대로 몸을 허둥거리며 안장을 들어 올려 공격을 막아 냈다.

푸부북!

푸부북!

다행히 위력은 그리 강하지 않은지, 공격은 대부분 스켈레톤의 몸체에 부딪혀 떨어지거나, 안장을 뚫지 못하고 가죽 위로 박혀 들어갔다.

"미친, 뭐야!"

정신을 차리고 보니, 가죽과 바닥에는 날카로운 가시들이 가득했다.

맞는다고 해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가시의 끝에 진득한 무언가가 잔뜩 묻어 있었다.

평소 소설이나 영화를 자주 접했던 박정필이었기에, 그것들이 '독침'이라는 것을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어떤 놈들이!"

"키에엑!"

"케켁! 킥! 키케켁!"

박정필이 화를 내려는 순간, 독침을 날린 몬스터들이 몸을 일으켰다.

놈들은 피부 위에 풀을 덕지덕지 붙이고 있었기에, 마치 초원의 일부분이 통째로 일어서는 듯한 광경이었다.

초록색 피부에 작은 키, 얇은 팔다리와 대조적으로 볼록 튀어나온 복부. 길게 찢어진 입에는 덧니가 조악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고, 고블린?"

박정필은 확신했다.

녀석들이 게임이나 영화 속에서 보았던 괴물, 고블린이라는 사실을.

게다가, 그 수가 엄청났다.

대충 보아도 수십 마리. 아니, 수백 마리는 될듯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박정필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하나였다.

-플레이어 박정필이 '헐레벌떡'을 사용하였습니다.

"으아아아악!"

-성좌, '당나귀 머리의 날치기'가 대폭소를 터트리며 배꼽을 붙잡고 바닥을 뒹굽니다.

줄행랑.

박정필은 조금의 미련도, 망설임도 없이 백랑에게 도주 지시를 내렸다.

발레포르에게 받은 능력 덕분에 모습이 추하긴 해도 순간적으로 빠른 속도를 내며 순식간에 고블린 무리의 포위망에서 빠져나갈 수 있었다.

"키에엑!"

"켁, 키킥! 케에엑!"

그리고 고블린들이 그 뒤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원래라면 기습이 실패한 것을 끝으로 재정비에 들어가는 게 정상이었지만, 고블린들의 눈에는 박정필이 재밌는 사냥감. 아니, 재밌는 장난감 정도로 비쳤다.

고양이가 살랑거리는 깃털을 쫓아가듯, 고블린 특유의 지성을 내던지고 다리를 움직였다.

박정필의 힘인지, 성좌의 힘인지 알 수는 없어도, 어떤 의미로 보면 분명 뛰어난 재능이었다.

물론, 정작 본인에게는 최악의 재능이겠지만 말이다.

"사람 살려어어!"

"케케켁!"

"케륵, 키륵, 킥킥!"

피리를 부는 소년이 떠오르는 한 장면.

박정필은 백랑을 부추기며 필사적으로 초원 위를 달렸다.

그런 와중에도 방향은 정확하게 한곳을 향하고 있었다. 박정필의 머릿속에, 이 상황을 해결해 줄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기 때문이다.

세운.

세운을 찾아간다면, 어떻게든 해 줄 것이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달리다 보니, 어느새 저 멀리 마차와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형니이임!"

박정필이 세운을 애타게 찾았다.

그리고 착각일까? 아직 거리가 멀어 보이지 않을 게 분명한데, 박정필은 어쩐지 세운의 얼굴이 보이는 듯했다.

"예?"

세운이 입을 뻥긋거린다. 마치, 박정필에게 무언가를 말하는 듯이.

그 뜻은 분명....

'숙. 여.'

"서, 설마 형님!"

화륵!

세운의 손 앞으로 거대한 불덩이가 만들어졌다.

어찌 모를쏘냐?

세운의 몰이꾼으로서 활약하며 질리도록 보아왔던 마법이었기에 박정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이게 숙인다고 될 일입니까아!"

콰르르륵!

-성좌, '당나귀 머리의 날치기'가 웃음을 감당하지 못하고 숨이 넘어가 자리에서 쓰러집니다.

박정필의 눈앞으로 집채만 한 불덩이가 빠르게 다가왔다.

* * *

콰아아앙!!

-성좌, '배고픈 왕자'가 배고파 죽는 줄 알았다며 간식거리의 등장에 환호합니다.

한 번의 공격에 수십 마리의 고블린이 잔혹하게 불타올랐다. 역시, 다수의 적을 상대할 때는 마법만 한 게 없었다.

"키에에엑!"

박정필의 유혹으로부터 정신을 차린 고블린들이 세운 쪽을 바라보았다.

수십 마리의 고블린을 처치하였지만, 아직도 전력 차이는 몇 배나 되었다.

수적 우세를 확인한 놈들이 날카로운 괴성을 내며 독침을 쏘아 보냈다.

"다들 마차 뒤로 숨어요!"

처음 당하는 장거리 공격에도 유서아는 당황하지 않고 사람들을 대피시켰다.

다만, 세운은 그녀의 지시에 따르지 않았다. 숨기는커녕, 오히려 앞으로 나서 고블린을 향해 달려들었다.

"세운 씨!"

"유서아, 강한철. 따라와라."

"알겠다."

세운의 지시에 강한철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뒤를 따랐고, 유서아도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강한철의 뒤를 이어 빠르게 달려왔다.

그사이 하늘을 뒤덮은 수백 개의 독침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켁켁켁!"

고블린들은 승리를 예상했다.

달려오는 세 사람이 독침을 피할 사각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고, 방패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놈들의 독침은 세운에게 닿기 직전, 거짓말처럼 힘을 잃고 튕겨 나갔다.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와이드 실드(Wide shield) ]

- 무색의 마탑에서 화살 등 범위가 넓은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실드를 개량하여 만들어낸 마법.

와이드 실드.

근접전에서 검같이 강한 공격을 방어하기는 힘들지만, 지금처럼 독침을 막기에는 그야말로 최고의 효율을 지닌 마법이었다.

일반적인 실드 마법보다 범위가 훨씬 넓어, 세운은 물론 뒤따라오던 유서아와 강한철까지 독침에서부터 지켜주고 있었다.

"키에에엑!"

고블린들이 무기를 꺼내 들었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독침 대신 근거리 무기를 선택한 것이다.

날이 빠지고, 녹슬어 보이긴 했지만 어엿하게 쇠로 만들어진 철제 무기. 그것부터가 튜토리얼의 첫 번째 장과의 차이점을 아주 잘 설명해 주고 있었다.

고블린의 진형에 도착하는 순간, 세운은 검 대신 다시 한번 손을 들어 올렸다.

-흑탑의 묘리에 따라 '라이트닝 체인'의 위력이 강화됩니다.

파지지직!

고블린 무리에 검은 번개가 작렬했다.

남은 마나를 모두 쏟아붓고, 흑탑의 묘리까지 적용되어 그 위력은 흡사 3 서클 마법에 가까웠다.

번개에 적중당한 고블린들은 짧은 경련을 마지막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바로 이어, 세운의 뒤를 따르고 있던 강한철과 유서아도 앞으로 출격했다.

-플레이어 강한철이 '개전(開戰)'을 사용합니다.

콰르르릉!

강한철이 바닥을 내려찍자, 초원이 괴로워하며 쩍쩍 갈라졌다.

고블린들은 튀어 오른 돌에 몸이 꿰뚫리고, 갈라진 대지 사이에 끼어 짓이겨졌다.

세운의 마법에 비견될 만한 범위와 위력. 놀라운 건, 이것이 마나를 일절 사용하지 않은 공격이라는 점이다.

오로지 힘.

거기에 서열 2위의 마왕, 아가데스는 큼지막한 날개를 달아 주었다.

-플레이어 유서아가 '타란튤라의 첫 번째 다리'를 사용합니다.

서서서걱-!!

유서아의 활약 역시 뛰어났다.

그녀는 얼마 전 세운에게 배운 쌍검술과 보법을 활용하여 고블린 사이를 빠르게 휘젓고 다녔다.

서열 1위의 마왕, 바알에게서 받은 능력 덕분인지 공격에 잔상이 남아 네 개의 검을 휘두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이 꼭, 양 떼 사이로 던져진 늑대 한 마리를 보는 듯했다.

"우리도 돕자고!"

"세 명한테만 다 맡길 수는 없지!"

마차 뒤에서 독침을 피하던 사람들도 전투에 합세했다.

고블린의 강점은 교활한 지능과 독이나 도구의 활용, 집단생활 등에 있다. 일 대 일이라면, 성좌와 계약하지 않은 일반 플레이어라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다.

"키, 키엑!"

고블린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분명 압도적인 수적 우세를 확인하고 무기를 집어 든 건데, 금세 전세가 완벽하게 기울어졌다.

아직 수는 고블린이 더 많았지만, 녀석들의 머릿속에는 이미 승리가 그려지지 않았다.

콰광!

그사이, 세운은 아군으로서 전장에 끼어든 특이한 존재 하나를 관찰하고 있었다.

스켈레톤.

마차를 끌고 있던 스켈레톤이 고블린 사이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세운이 한 게 아니니, 이런 활약을 할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백현.'

그의 스켈레톤은 뛰어났다.

스켈레톤 특유의 낮은 방어력도, 낮은 공격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진짜 멧돼지처럼 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거칠게 전장을 누비고 있었다.

그가 만티코어의 사체를 일으키는 데 성공한다면, 그가 얼마나 강한 힘을 발휘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었다.

-고블린 무리의 기습을 훌륭하게 막아 냈습니다.

-기습을 막아 낸 모든 인원에게 1,000point를 제공합니다.

"키, 키에에엑!"

"키이이익!"

고블린들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승리에 흥분한 사람들이 함성을 내지르며 고블린들을 따라가려 하였다.

그때, 세운이 앞에 나서서 달려가는 사람들을 막아섰다.

그의 뜻을 알아챈 유서아가 세운의 옆으로 다가와 사람들을 진정시켰다.

"다들 고생하셨어요! 혹시 따라가다가 함정이나 기습에 당할 수도 있으니까, 일단은 재정비부터 하도록 하죠!"

"네, 언니!"

"그러네. 저런 놈들한테 기습당하면 진짜 위험해질 테니까."

유서아의 훌륭한 리더십에 세운이 작게 미소를 지었다. 다만, 세운이 사람들을 막아선 이유는 그런 게 아니었다.

'저놈들, 도망친다는 건 따로 거점이 존재한다는 뜻이겠지.'

회귀 전에는 절망적인 상황의 연속에 생각지도 못했던 것. 계획에 있던 건 아니었지만, 세운은 이것을 새로운 히든 피스라 생각하였다.

"유서아, 재정비 끝나면 나는 신경 쓰지 말고 출발해라."

"네? 어디 가시려고요?"

"고블린들을 따라가려고."

"아니, 음.... 세운 씨라면 생각이 있겠지만, 어떻게 따라오시려고요?"

"걱정하지 마. 바퀴 자국만 따라가도 놓칠 리는 없으니까."

"...알겠어요. 꼭 무사히 돌아오셔야 해요."

"당연하지."

회귀를 한 직후에 그녀와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그때, 유서아는 무기를 찾으려 늑대 숲을 향하는 세운을 막아섰었다.

그와 비교하면, 지금은 세운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강해진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정필아, 고생했다."

"혀, 형님...!"

세운이 창고를 열어 가장 하급 포션 하나를 꺼내 박정필에게 던져 주었다.

상태가 안 좋아 보이기도 했고, 일이 생각과는 다르게 흘러가긴 했지만 그에게 정찰을 시킨 것은 세운이었으니까.

세운은 감동한 눈치의 박정필을 두고 자리를 떠났다.

다리를 절뚝거리며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고블린들의 뒤를 따라서.

제 35화

35. 제35화

-성좌, '배고픈 왕자'가 먹잇감이 바싹바싹하게 잘 익었다며 크게 만족합니다.

잊지 않고 폭식의 권능을 사용한 후, 바로 고블린 무리의 뒤를 밟았다.

고블린의 특색에 맞춰서 그런지, 원숭이들과 마찬가지로 민첩과 지력이 꽤 많이 올랐다.

쓰러트린 수가 너무 많아서인지 고블린을 통한 능력치 상승은 이미 한계였지만 말이다.

"켈, 키륵!"

고블린들은 세운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세운은 현재 '클리어 슬라임의 땀샘'을 사용해 냄새를 감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제왕 독수리의 척안'의 장점을 활용해 고블린들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었으니.

바닥의 풀숲을 제외하고는 장애물 하나 없는 초원이라도 고블린 무리가 세운을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역시, 거점이 따로 있어.'

튜토리얼의 첫 번째 장. 몬스터 웨이브 때는 아무리 최악의 상황에 이르러도 몬스터들은 도망치지 않았다.

그들은 몬스터 웨이브를 위해 시스템이 설정한 존재들일 뿐이니까.

도망친다 해도 돌아갈 곳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고블린들은 명백하게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다.

게다가.

'흔적까지 지우고 있어.'

고블린들은 곧장 거점을 향해 이동하는 게 아니었다.

지나쳐 온 흔적을 지우고, 감시자가 있지는 않은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것은 물론 갑자기 방향을 비틀어 길을 바꾸기도 했다.

평범한 이였으면 진작에 고블린을 놓치거나, 녀석들에게 들키고 말았으리라.

'이쪽으로 온 건 처음인데.'

회귀 전에는 이런 길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당시에는 그저 철저하게 시스템의 안내를 따라 목적지를 향해 이동했을 뿐이었다.

그에 비해, 지금 세운이 고블린을 따라 이동하는 곳은 시스템이 가리키는 방향과 완전히 어긋나 있었다.

짧은 풀이 가득한 초원지대를 벗어나고, 늑대 숲처럼 나무가 무성한 숲이 나타났다.

고블린이 빽빽한 나무 사이로 들어가자, '제왕 독수리의 척안'을 활용한 세운의 추적도 끝이 났다.

'생각보다 넓다.'

아마, 지금 보이는 숲 전체가 고블린의 영역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저 안에 존재하는 고블린의 수는 최소 천 마리. 심하면 그 몇 배나 되는 고블린이 존재할 수도 있다.

게다가.

'저 정도 규모라면 분명 네임드 몬스터도 존재하겠지.'

세운은 확신했다. 저곳이 '잊혀진 영웅의 수행처'와 같은 히든 던전일 것이라고 말이다.

'그냥 불태워 버릴까?'

잠깐 그런 생각을 가졌던 세운이 고개를 저었다.

그게 가능할지도 모르고, 무엇보다 숲이 불타면 그 안에 숨겨져 있을 정체 모를 히든 피스까지 훼손될 가능성이 있었다.

경험치는 얻겠지만, '폭식의 권능'이 있는 세운에게 레벨이나 능력치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결론은 맨몸으로 고블린의 영역에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할까나.'

이곳은 초원이다. 고블린의 신중함을 떠올리면 저 숲에도 초원을 감시하는 고블린이 존재할 게 분명했다.

아마, 숲에 들어가기 전에 고블린들에게 들키게 되겠지.

아무리 세운이라도 천 마리가 넘어가는 고블린을 전부 상대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세운이 고민하는 건 막막함 때문이 아니었다.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어떤 보물을 사용해서 어떤 방법으로 들어갈지. 그러한 고민이었다.

즉, 숲에 들어가는 것 자체는 이미 확정된 사항이었다.

* * *

고블린 부락을 둘러싸고 있는 숲의 외곽. 그곳에는 수십 마리의 고블린이 나무 위에 걸터앉아 경계를 서고 있었다.

그러나.

"키약, 키야악!"

"키히힛! 키힛!"

말이 경계일 뿐이지 고블린들의 태도는 전혀 진지해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게, 이곳의 감시 조건은 그야말로 최상이었다. 숲 바깥에는 장애물 하나 없이 넓은 초원이 탁 트여 있었으니까.

이렇게 대충 경계를 서도, 바보가 아닌 이상 침입자를 놓칠 리 없었다.

게다가 방금 전투에서 패배하고 복귀한 고블린 때문에 평소보다 경계가 엄중해지긴 했지만, 복귀한 고블린은 숙련된 기습조였다.

흔적을 지우고 감시를 파악하는 등의 능력은 그 누구도 따라오지 못한다.

"킥킥킥!"

때문에 고블린들은 경계라는 명목으로 꿀 같은 임무를 즐기고 있었다.

부락에서 노동을 하는 것에 비하면, 경계 임무는 휴식이나 다름없었다.

"키약! 케엑!"

고블린 하나가 옆의 나무에서 경계를 서고 있는 동료의 이름을 불렀다. 출출하니 내려가서 벌레나 잡아먹자고 제안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무슨 일일까? 몇 번을 불러도 동료의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키익?"

화장실이라도 갔나? 아니면, 자기를 두고 혼자서 벌레를 잡으러 내려간 건가?

고개를 갸웃하던 고블린은 바로 옆에서 같이 경계를 서고 있는 고블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놈이랑은 그리 친하지 않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으니까.

그런데.

"끼익?"

동료가 보이지 않았다.

친하지 않았던 만큼, 말도 없이 사라질 애가 아닌데.

그러고 보니, 언제부턴가 주위에서 아무런 소리가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여유로운 경계 임무인 만큼, 곳곳에서 작게나마 동료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게 보통인데 말이다.

그때.

"키, 키엑!"

고블린은 보고 말았다.

자신의 바로 아래에 쓰러져 있는 목 없는 시체를.

눈을 조금 굴리니, 조금 앞에 떨어진 동료의 머리통과 시선을 마주치고 말았다.

척!

고블린이 다급하게 풀피리를 꺼내 들었다.

아직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얼른 부락에 위급 상황을 알려야만 한다.

그런데.

"...."

어째서일까? 아무리 불어도, 풀피리에서 소리가 나지 않았다.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하려 했지만, 목마저도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은 딱히 움직이지 않았는데 세상이 거꾸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일까?

점차 희미해지는 의식 사이로, 고블린은 목이 잘린 자신의 몸과 그 옆에 선 인간 하나를 볼 수 있었다.

시뻘건 가죽 갑옷과 피에 젖은 회색 망토를 입은 남자. 그의 손에는 온기가 남아 따뜻한 초록 피가 묻어 있는 단검 하나가 들려 있었다.

"걱정하지 마, 다들 먼저 가 있을 테니까."

툭.

요란스럽던 숲의 외곽에 침묵이 찾아왔다.

* * *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킬케르가식 은신술 ]

- 한 때, 대륙의 귀족을 두려움에 빠트렸던 희대의 암살자, 킬케르가의 은신술. 수백의 경비와 전속 기사단조차도 주군이 죽기 전까지 그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한다.

탐욕의 권능이 있는 세운에게 들키지 않고 적진에 침입하는 것 정도는 간단했다.

게다가, 경계가 생각보다 허술했기에 고블린들을 처리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한 시간도 걸리지 않고 외곽의 고블린을 모두 정리했으니 말이다.

"자, 그럼...."

지금 처리한 고블린들은 어디까지나 외곽의 경계역일 뿐이다. 조금만 안으로 들어가도, 훨씬 더 많은 고블린이 우글거릴 거다.

은신을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시간을 끌다가는 결국 들키고 만다.

차근차근 상대하는 것도 한계가 있고, 천 마리가 넘어가는 고블린을 세운 혼자서 처리할 수는 없었다.

스읏-

그렇게 생각한 세운이 마음을 정하고 나무 그늘 아래로 몸을 숨겼다. 마치 카멜레온과 같이 세운의 몸이 빠르게 자연 속으로 녹아들었다.

이것이 바로 '킬케르가식 은신술'.

게다가 세운에게는 '클리어 슬라임의 땀샘'까지 있어 고블린의 코에도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케륵! 켁켁!"

"켁켁!"

그림자 속에 녹아든 세운의 바로 앞으로, 한 무리의 고블린이 다급하게 달려간다. 아무래도 외곽의 고블린이 죽은 것을 알아챘나 보다.

그 모습을 보며 세운은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예상대로야.'

세운은 외곽에서 처치한 고블린을 숨겨두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보라는 듯이 고블린의 사체를 바닥에 퍼트려 놓았다.

바로, 고블린의 적당히 높은 지능 때문이다.

고블린은 어린아이 수준의 지능을 가지고 있기에 외곽에서 경계를 서던 고블린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경계가 강화될 것이 분명하다.

거점 안에 있던 고블린 중 대다수가 밖으로 튀어나오겠지.

세운은 바로 그 순간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 얼른 뛰어가라.'

외곽을 향하는 고블린들과는 반대로 세운은 조금씩 착실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나무의 그늘에 숨고, 풀숲에 엎드리기도 하고, 나무에 올라 나뭇잎을 두르기도 했다.

은신에 집중하느라 속도는 나지 않았지만, 그 어떤 고블린도 세운의 존재를 알아챌 수 없었다.

"케륵!"

그러다 경로를 가로막고 있는 고블린이 나타난다면?

서걱-

"켁...."

망설임 없이 다가가 목에 어금니 단검을 쑤셔 박았다.

성대를 한 번에 꿰뚫은 덕에, 녀석은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절명하였다.

툭.

시체를 처리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시체를 질질 끌고 가 주변의 풀숲에 숨기거나 했을 테지만, 세운에게는 그 어떤 방법보다 훌륭한 처리 방법이 있었으니까.

-'고블린 병사'를 포식하였습니다.

-더 이상 같은 개체를 통해 양분을 흡수할 수 없습니다.

날카로운 이빨이 나타나 고블린의 시체를 물어뜯었다.

근육은 물론 뼈와 혈액까지 모조리 집어삼키자, 고블린의 시체는 거짓말처럼 완벽하게 사라졌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맛도 질리고, 양도 적어 감질만 난다며 낮게 중얼거립니다.

베엘제붑이 불평을 터트리지만, 어쩔 수 없다. 네임드 몬스터라도 잡으면 태도를 역변할 게 분명하니 말이다.

그렇게 얼마나 이동하였을까?

숲의 크기는 생각 이상으로 넓었고, 나무가 점점 줄어들더니 마침내 넓은 평지가 나타났다.

'저긴가 보네.'

숲의 중앙.

비정상적으로 나타난 평지는 자연스럽게 형성된 곳이 아니었다. 고블린들이 벌목을 하여, 자신들의 부락을 지어둔 것이다.

당장 눈에 보이는 부락의 크기는 어지간한 마을 이상.

세운으로서도 예상하지 못한 거대한 규모였다.

'몬스터 수준이 낮긴 해도, 이 정도 규모면 분명 무언가가 있을 거야.'

세운이 눈을 반짝였다.

만약 무언가가 없다고 해도 이 규모면 공략과 함께 들어오는 공적치가 어마어마할 게 분명했으니까.

튜토리얼을 1위로 끝내는 것이 목표인 세운으로서는 꼭 거쳐야 할 관문이었다.

"케륵! 켁, 케륵!"

부락의 경계는 숲의 외곽과 비교도 안 되게 뛰어났다.

유일하게 보이는 입구는 수십의 고블린들이 지키고 있고, 부락 곳곳에 설치된 높은 감시탑 위에도 고블린이 자리 잡고 있었다.

평원답게 장애물도 하나 없어, 은신술을 사용한다 해도 들어가기 쉽지 않아 보였다.

그야말로 빈틈없는 철벽 요새.

그렇다면.

'빈틈을 만들어 줘야지.'

화륵!

세운의 손 위에서 불길이 타올랐다.

다만, 세운이 목표로 한 건 입구를 지키는 고블린들이 아니었다. 입구를 공격한다면, 부락 자체의 경계가 늘어날 테니까.

그 대신.

콰아앙-!!

부락 바로 앞의 숲에 화염구를 집어 던졌다.

숲의 특성상 화염이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가며 풀과 나무를 집어삼켰다.

"키륵! 키야악!"

"키략, 칵!"

고블린들의 시선이 불길을 향해 집중된다. 부락에서 수많은 고블린이 다급하게 물과 모래를 들고 튀어나온다.

그리고 그사이.

-히든 던전, '교활한 고블린 부락'을 발견하였습니다.

-놀라운 업적을 달성하였습니다.

-보상으로 2,000point를 획득하였습니다.

감시탑의 고블린들이 화재 쪽으로 시선이 집중된 틈을 타, 세운이 벽을 타고 부락에 진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제 36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