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1화
51. 제51화
"네놈은... 꼭! 산 채로! 사지를! 잘근잘근 씹어 먹어주마!"
"먹어주마! 먹어주마! 먹어주마!"
오우거의 수장이 치밀어 오르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함성을 내지른다. 전신이 화상으로 부글거리는 와중에, 그 눈동자만은 선명하게 세운을 비추고 있었다.
별개의 스킬이 아니라도, 일반인은 그 눈과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공포에 떨며 자리에 주저앉았으리라.
그사이, 세운은 놈과 눈을 똑바로 마주친 채로, 아공간 주머니를 통해 무언가를 꺼내고 있었다.
"이게 좋겠네."
[ 고블린 장검 ]
분류 : 장검
등급 : E+
설명 : 고블린들이 플레이어를 약탈하여 빼앗은 검. 상태가 제법 쓸 만해 보인다.
능력 : 1. 고블린 마크 – 고블린의 체액이 발려 있어 공격한 적에게 일정 확률로 미약한 마비 독을 주입한다.
고블린 창고에서 획득한 무기. 그중에서 가장 상태가 좋아 보이던 철검이었다.
철검을 가볍게 휘두르던 세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어금니 단검을 허리춤에 꽂아 넣었다.
등급이 더 높은 어금니 단검으로도 공격이 통하지 않았던 상대인데, 오히려 무기의 수준을 떨어트리다니.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행동이었다.
"우선 그 약삭빠른 다리부터 찢어주마!"
"찢어주마! 찢어주마! 찢어주마!"
수장이 본격적으로 세운을 향해 달려왔다.
오우거의 익숙한 두 번째 패턴, 잡기.
그렇다고 해도 일반적인 오우거가 아닌 수장이 그 거대한 몸을 앞세우며 달려오자 땅이 쿵쿵거리고 공기가 밀려왔다.
그런 와중에 세운은 피할 생각은 안중에도 없이, 고블린 장검을 꽉 쥐고 자세를 잡았다. 딱히 무공을 운용할 생각도 없었다.
단순한 베기 동작.
쿵, 쿵, 쿵!
그렇게 수장의 발걸음이 지척에 도달했을 때쯤. 세운은 마몬의 보물창고를 열어 미리 생각해 두었던 보물을 불러들였다.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독혈의 마검, 흐룬팅 ]
- 영웅 베오울프가 그렌델의 어미를 죽이기 위해 사용했던 보검. 독물에 담금질 되어 피를 뒤집어쓸 때마다 단단해진다는 마검으로 불린다.
우우웅!
흐룬팅에 보검의 힘이 깃들자, 고블린 장검이 왕왕 울려댄다.
한 영웅이 사용하던 보검의 힘이, E+급의 평범한 철제 장검에 깃들었으니 무리가 가는 게 당연했다.
실제로, 세운이 회귀를 하고 처음 나뭇가지에 '분노의 검, 그람'의 힘을 부여했을 때는 몇 초도 버티지 못하고 가루가 되어 소멸했으니까.
다만.
"한 번만 버텨라."
어차피 세운은 흐룬팅의 힘이 깃든 장검을 언제까지고 사용할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창고에 존재하는 보검의 수는 넘쳐난다.
게다가, 그 전부 실체 없는 검의 힘일 뿐. 가장 필요한 순간에 적절하게 사용해 주는 것이, 검에게도 좋을 거라 생각되었다.
철컥!
당장에라도 터질 듯이 울려대는 장검을 꽉 쥐고, 달려드는 수장을 향해 겨누었다.
거대한 덩치 탓에 놈이 발을 움직일 때마다 땅이 쿵쿵 떨려왔지만, 세운의 발은 땅에서 떨어지기라도 한 듯이 한 치의 미동도 없었다.
"잡았다. 이놈!"
"잡았다! 잡았...."
그렇게, 수장의 두꺼운 손바닥에 세운의 어깨에 닿기 직전.
서걱-
무언가가 날카롭게 베이는 소리와 함께.
-고블린 장검이 '흐룬팅'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소멸합니다.
-'흐룬팅'에 잠재된 독기가 폭발합니다.
푸화아아앗!!
보라색 독 구름이 뿜어져 나갔다.
흐룬팅을 담금질할 때 사용했다고 알려진 독물. 몸체가 부서지자, 그 속에 잠들어 있던 독기가 터져 나간 것이다.
다행히도 독기는 세운이 휘두른 검로를 따라 퍼져 나갔기에, 세운이나 뒤에서 전투 중인 강한철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다만, 베기에 직격당한 오우거의 수장. 크락 카틀락의 상태는 그렇지 못했다.
스으으-
독 구름이 옅어지자, 수장의 상태가 보였다.
안 그래도 화상으로 인해 전신의 피부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는데, 그 위로 독이 스며들어 살이 곪고 진물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피부라도 멀쩡했으면 숨을 참고 도망쳐 어떻게든 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 텐데, 다크 플레어로 인한 화상 덕분에 독 구름의 위력이 극도로 올라가 있었다.
"형, 나 아파. 형, 아파. 형, 형?"
놈의 머리 중 하나가 애타게 반대편 머리를 불러보았지만.
툭.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장검을 휘둘렀을 때 들려왔던 절삭음, 그 정체가 형이라 불리는 수장의 머리였기 때문이다.
베인 머리는 아직까지 자신의 죽음을 못 믿겠다는 듯이 눈을 감지 못하고 있었다.
파직!
세운은 머리의 눈을 감겨주는 대신, 가벼운 발걸음으로 머리통을 짓밟았다.
독기로 인해 경화된 두개골이 허무하게 터져 나갔다.
"형, 형, 형!"
서걱-
어금니 단검을 다시 꺼내 든 세운이 애타는 목소리로 이미 터져 나간 머리를 부르고 있는 남은 하나의 머리를 떨어트렸다.
가죽이 어찌나 단단한지, D+ 무기로도 상처 하나 내기 어려웠는데.
독기로 인해 피부가 짓물러진 것은 물론, 근육이 녹고 뼈가 삭아 들어간 덕분에 놈의 머리는 너무나도 쉽게 베어졌다.
이게 바로 세운이 생각해 낸 보물의 사용법.
일회용으로밖에 사용하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그 단점을 가볍게 뛰어넘을 정도로 엄청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히든 보스 몬스터, '굶주린 오우거의 수장, 크락 카틀락'을 처치하였습니다.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개인 공적치가 100,000point 상승합니다.
-히든 보스 몬스터를 혼자서 처치하여 개인 공적치가 추가로 50,000point 상승합니다.
-'크락의 큰도끼'를 획득하였습니다.
-'카틀락의 작은 도끼'를 획득하셨습니다.
-'트윈 헤드 오우거의 힘줄'을 획득하셨습니다.
…
시야를 가릴 정도로 긴 시스템 메시지가 연이어 떠올랐다.
아이템도 아이템이지만, 15만이라는 공적치는 상식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세운이 기억하기로, 다음 튜토리얼 때도 이런 포인트의 공적치를 한 번에 얻는 경우는 없다고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굶주린 오우거의 수장, 크락 카틀락'을 포식하였습니다.
-양분을 흡수하여 근력이 30 상승합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부드럽게 숙성된 먹이를 씹으며 이것 또한 별미라며 눈을 크게 뜹니다.
'이게 별미라니.'
꿈틀거리는 벌레나 구워진 고블린, 거기에 독에 절은 트윈 헤드 오우거까지.
일반인이었다면 이삼일쯤 굶은 후라도 입에 대지 못했을 것들인데, 어떻게 된 게 베엘제붑은 단 한 번도 '맛없다'고 한 적이 없었다.
과연, 폭식의 마왕.
어쩌면 미각을 버렸기에 폭식이라는 이명을 얻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콰직!
시스템 메시지를 치우고, 정신을 차릴 때쯤, 뒤에서 무언가가 터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등을 돌려보니, 복부 정중앙에 둥근 구멍이 뚫려 있는 오우거 한 마리가 바닥으로 쓰러지고 있었다.
오우거의 방향이 이쪽을 향한 것을 보니, 오우거가 수장을 잃고 당황한 틈을 타 일격을 날린 듯했다.
강한철의 주변에 쓰러진 네 마리의 오우거.
결국, 정말 네 마리의 오우거를 쓰러트리고 만 것이다.
'저놈도 진짜 대단하단 말이야.'
세운이야 회귀 전의 기억을 가지고, 두 마신의 권능을 가지고 있다지만, 강한철은 그 무엇도 아니었다.
세운 덕분에 일찍이 서열 2위의 대마왕, 아가레스와 계약할 수 있었고 무공도 배울 수 있었다지만.
결국, 이 정도로 강해질 수 있었던 건 강한철 스스로의 능력이었다.
스르르-
세운의 손에서 밝은 빛이 흘러나와 강한철의 몸을 감싸 안았다.
힐.
현재 세운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수준 높은 치료 마법이었다.
덕분에 마지막 주먹을 뻗은 그대로 힘을 다해 손끝 하나 움직이지 못하고 있던 강한철이 다시금 몸을 움직여 왔다.
"...고맙다."
"너도 독하네. 버티기만 해도 충분했는데, 진짜 혼자서 오우거 네 마리를 쓰러트릴 줄이야."
-성좌, '악어를 탄 노인'이 과연 자신의 계약자라며 기분 좋게 악어를 쓰다듬습니다.
"그래도 결국 너보다는 늦었다."
"그거야 당연한 거고. 자, 마셔."
세운이 마몬의 보물창고를 열어 포션 한 병을 던져주었다.
뭐, 저걸 마신다고 해도 상처는 회복되어도 피로 자체는 회복하지 못하겠지만, 당장 자리에서 움직일 체력 정도는 회복할 수 있을 거다.
"이제 끝인가?"
"그래."
히든 보스 몬스터라는, 세운조차도 모르는 숨겨진 몬스터의 사냥까지 끝냈다.
이 상황에 더 이상 굶주린 오우거가 추가로 소환될 것 같지는 않았다.
'일단은 거점으로 돌아가야겠지.'
본래 굶주린 오우거의 역할은 튜토리얼 세 번째 장의 진행 속도를 촉진시키는 것.
그러나, 오우거가 사라진 지금. 플레이어들이 열정적으로 싸워주지 않는 이상, 튜토리얼이 끝나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
'이 주위에는 히든 피스도 없을 텐데....'
이곳은 지금까지의 구역과는 다르다.
오로지 플레이어들끼리의 전투를 위해 설정된 넓은 평원으로써 무언가를 숨길 만한 공간이 없었다.
무엇보다, 회귀 전에 생존을 위해 필사적으로 적을 피하며 필드 곳곳을 숨어다녔기에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플레이어 사냥을 하고 다니는 건 영 내키지 않았다.
'포인트도 충분하니까.'
현재 세운의 공적치는 40만 포인트 이상. 다른 플레이어들이 제아무리 날뛰어 봤자, 이 점수를 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마나나 모아야 하나....'
계획을 찬찬히 떠올려도, 이곳에서 더 쟁취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어차피 새로 생긴 세 번째 서클에 마나도 채워 넣어야 하고, 단전의 내공도 모아야 하니, 당분간은 거점에서 명상이나 하는 게 좋아 보였다.
여기까지 생각을 마치고, 적랑을 불러 거점으로 출발하려는 순간.
-탑의 역사상 최초로 '굶주린 오우거의 수장, 크락 카틀락'을 소환하였습니다.
-탑의 역사상 최초로 '굶주린 오우거의 수장, 크락 카틀락'을 쓰러트렸습니다.
-특별 혜택으로 플레이어 '정세운'을 포함한 클랜 전체에게 '튜토리얼 세 번째 장 패스권'을 드립니다.
"패스권?"
설명을 읽지 않아도, 패스권의 의미는 간단했다.
플레이어의 수가 절반 이하가 되어야만 한다는 튜토리얼의 조건을 무시하고, 세운의 클랜을 합격시켜 준다는 뜻이다.
'이거라면....'
세운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튜토리얼 네 번째 장의 정보를 알고 있는 세운에게 이런 보상은 어지간한 완제품보다도 환영이었다.
이것으로, 계획했던 시간을 크게 단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제 52화
52. 제52화
"세운 씨!"
"형니이이임!"
거점으로 돌아가자마자 유서아와 박정필이 격하게 환영해 줬다.
달려드는 박정필의 머리를 가뿐히 밀어내며, 거점의 상황에 관해 물었다.
"별일은 없었어요. 세운 씨가 가신 후에도 몇몇 클랜이 공격해 오긴 했는데, 거점이 워낙 훌륭했던 터라 울타리 하나 안 부서졌거든요."
"거기에 형님의 오른팔인 이 박정필의 활약도 엄청났죠!"
"혈랑 오빠다!"
"오빠가 우리가 만든 투석기의 활약을 봤어야 했는데!"
하긴, 뒤는 시스템이 공인해 준 절벽이 막아서고 있고 앞은 쌍둥이 자매가 세운 요새가 자리 잡고 있었으니까.
설령 굶주린 오우거가 나타났어도 요새를 쉽게 뚫지는 못했을 거다.
"그나저나, 세운 씨는 어떻게 됐어요? 오우거의 수장이라니."
유서아가 티켓 한 장을 꺼내 들었다.
튜토리얼 패스권을 클랜 전체에 제공한다더니, 세운이 보았던 것과 같은 메시지가 클랜원들에게 똑같이 나타났나 보다.
"본 그대로야. 어쩌다 보니 수장이라는 놈을 쓰러트렸고, 덕분에 이번 튜토리얼은 합격 확정이지."
"이것도 계획한 건가요? 세운 씨의 생각은 도저히 읽을 수가 없네요."
"역시 형님이십니다! 저 박정필, 평생을 다해 형님을 보좌하겠습니다!"
유서아의 말에 세운이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평소 같았으면 긍정의 침묵이었겠지만, 오우거의 수장이나 튜토리얼 패스권 같은 경우는 세운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니까.
"여기는 언제 또 플레이어들이 공격해 올지 모르니까, 일단은 쉬더라도 다음 튜토리얼로 건너가서 쉬자."
"네! 아, 한철 씨는...."
"난 괜찮다."
"괜찮기는 무슨. 얼른 가서 치료부터 받아. 내 마법이나 포션으로 치료할 수 있는 거엔 한계가 있으니까."
"...알겠다."
마르바스와 계약한 이하늘이라면, 세운의 응급처치 이상으로 확실하게 강한철을 치료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기껏 지어둔 거점을 며칠 써 보지도 못하고 떠나는 것이지만, 불평을 가지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모두가 이곳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 번째 튜토리얼이라....'
세운이 다시 한번 계획을 되짚으며 절벽을 올려보았다.
* * *
"팀장님, 괜찮겠습니까? 튜토리얼 패스권이라니, 이런 건 한 번도...."
튜토리얼 총책임자, 튜닝의 앞에 선 비쩍 마른 관리자 하나가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바로, 튜닝이 방금 내린 결정인 튜토리얼 패스권이라는 유례없는 보상 때문이었다.
사실, '오우거의 수장, 크락 카틀락'을 쓰러트리고 얻은 보상만 해도 엄청났다.
그 이후로 무언가 추가 보상을 지급할 필요는 없었는데, 튜닝은 무언가 결심한 눈빛으로, 갑작스럽게 저러한 추가 보상을 지급하였다.
그러니 아래 직원들이 난처할 수밖에.
다만, 튜닝의 얼굴에서 후회는 보이지 않았다.
"야, 머리 안 돌아가냐?"
"네?"
"말했지? 이번 튜토리얼에는 특히 유망주가 많다고."
"그거야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이거랑 무슨 상관이 있는 겁니까?"
"굶주린 오우거에 이어서 크락 카틀락까지 쓰러트린 놈이다. 너라면 다음에 뭘 하겠냐?"
"그야 당연히... 아!"
남자가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이제야 튜닝이 무슨 의도로 튜토리얼 패스권이라는 유례없는 보상을 지급했는지 이해한 것이다.
"플레이어 사냥에 나서겠군요!"
"그래. 다른 플레이어라면 몰라도, 저놈이 날뛰다가 유망주 몇 놈이라도 죽인다면...."
"신들의 항의가 장난 아니겠죠."
탑의 관리소는 어디까지나 탑과 동떨어진 별개의 세력이지만, 관리소의 특성상 성좌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 때문에 지금까지 서로 조금씩 양해를 봐주며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고작 튜토리얼 관리소에서 신들의 컴플레인이 쏟아진다면?
분명, 상층부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최소, 자격 정지. 심하면 자격 박탈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게다가, 어차피 다음 단계에 일찍 도착한다고 해도 바뀔 건 없어."
"튜토리얼 네 번째 장의 주제가 분명...."
"공성전."
"그렇군요. 공성전은 어차피 수성전을 준비하는 단계일 뿐이니, 미리 점령을 마친다고 해도 큰 영향이 없으니까요."
"그래."
"오오, 역시 팀장님이십니다!"
"보고 배워라. 좀."
"네, 팀장님!"
부하 직원이 아부를 이어가자, 튜닝의 어깨가 으쓱 올라갔다.
내용물이 텅 비어 있는 선물을 주는 것으로 위험 요소를 이리도 완벽하게 제거하다니, 과연 팀장이라는 직책이 어울리는 결정이었다.
그러나 이 중에서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세운이 회귀 전의 기억을 토대로 준비한 '계획'을 말이다.
* * *
"우와, 신기하다!"
"진짜 작아졌어!"
-성좌, '검은 새'가 이 정도야 지렁이를 쪼아먹는 것보다 간단한 일이라며 부리를 치켜듭니다.
-성좌, '거대한 새'가 다시 원상태로 돌리고 싶다면 얼마든지 자신에게 말하라며 날개를 펄럭입니다.
거점에 설치되어 있던 간이 시설이나 투석기 등. 쌍둥이 자매가 만들어 두었던 것들이 장난감만 한 크기로 줄어들었다.
두 성좌의 메시지를 보아하니, 둘의 권능 중 일부인 듯했다.
하긴, 둘 다 건축과 축성에 상당한 권능을 지닌 이들이었으니, 저런 능력이 있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덕분에 거점이 있던 자리에는 파이고 그을린 전투의 흔적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시설물도 남지 않게 되었다.
다만.
"어? 이건 안 되네?"
"마차만 줄어들어 봤자 의미가 없는데!"
-성좌, '검은 새'가 줄일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제작품뿐이라며 계약자를 외면합니다.
-성좌, '거대한 새'가 이건 어쩔 수 없다며 조용히 날개를 접습니다.
마차는 계속 끌고 가야만 했다. 마차 그 자체는 줄일 수 있지만, 그 위에 실린 짐은 줄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걸로도 활동하기가 무척이나 편해졌다. 특히나.
'투석기는 다음 장에서도 도움이 될 테니까.'
튜토리얼 네 번째 장의 주제는 '공성전'이었다.
애초에 투석기는 공성전을 위해 만들어진 공성 병기의 일종이었으니 성벽을 부수거나 대인 공격을 벌일 때 충분히 쓸 만할 것이다.
"준비는 끝났어?"
"네, 그런데 이 절벽은 어떻게 넘을 생각인가요?"
"그거야, 이게 해결해 주겠지."
세운이 튜토리얼 패스권을 꺼내 들었다.
사용법은 따로 적혀 있지 않았지만, 이런 아이템의 사용법 정도야 잘 알고 있었다.
치이익-
"세운 씨 무슨...."
치이이익!
세운이 티켓을 뜯는 순간, 거점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티켓 또한 한 몸이라도 된 듯이 동시에 찢어졌다.
두 갈래로 찢어진 티켓이 푸른빛을 흘리며 사라져 갔고, 빛의 잔재가 모여 시스템 메시지를 만들어 냈다.
[ 튜토리얼 세 번째 장 – 충돌 ]
-과제를 훌륭하게 수행하였습니다.
-충돌에서 살아남은 모든 인원에게 10,000point를 제공합니다.
-축하드립니다! 튜토리얼 세 번째 장을 훌륭하게 끝마쳤습니다!
-숨겨진 조건을 충족하여 튜토리얼을 조기 통과하여 참가 중인 모든 인원에게 5,000point를 추가로 제공합니다!
-'튜토리얼 네 번째 장 – 공격'이 시작됩니다.
예상했던 대로 세 번째 튜토리얼이 끝나고, 네 번째 장이 시작되었다.
그와 함께 거점 뒤의 절벽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쿠구구구!
"이건...?"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와 날카로운 바람이 휘몰아치며 날아다니던 크고 작은 돌덩이가 떠올라 서로를 이어간다.
돌덩이는 아치의 모습을 띠며 길게 이어지더니, 반대편 절벽을 붙잡는 것으로 움직임을 멈추었다.
돌덩이가 이어진 것이라기에는, 그 위의 표면은 비정상적으로 말끔했다. 마치, 처음부터 놓여 있던 다리와도 같았다.
신기하게, 절벽에서 휘몰아치던 칼바람도 다리 주변만은 피해가고 있었다.
-튜토리얼 네 번째 장을 수행하기 위해 절벽의 반대편으로 이동하십시오.
"가자."
"아, 네! 다들 준비되셨죠?"
"형님, 같이 갑시다!"
갑작스러운 현상에 모두가 놀라고 있을 때쯤, 세운만이 정신을 차리고 앞장서서 다리 위에 올라섰다.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바로 아래에 끝이 보이지 않는 심연이 몸을 빨아들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바람이 불지 않아 망정이지, 자칫해서 발이라도 헛디뎠다가는 지금까지의 노력이 허무하게 목숨을 잃고 말 것이다.
"모두 조심하세요! 마차랑 가까우신 분은 마차를 잡고, 다른 분들은 서로 손을 잡고 이동할게요!"
사람들도 그것을 알고 선뜻 출발하지 못했지만, 유서아의 지시하에 마차가 출발하며 사람들도 서서히 발을 움직였다.
"형님, 근데 이 튜토리얼이라는 건 언제 끝나는 걸까요?"
"나도 모르지."
"아, 좀 쉬고 싶은데 말입니다! 이렇게 술이랑 담배를 끊게 될 줄 알았으면, 진작에 돈 펑펑 쓰면서 재밌는 거 다 즐겼을 텐데!"
세운은 알고 있었다. 튜토리얼이 총 다섯 장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니, 이제 탑으로 진입하는 것도 얼마 안 남았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박정필에게 멋대로 이를 설명할 수는 없었다.
회귀를 했다는 사실을 굳이 숨길 이유는 없지만, 괜히 주위에 말하고 불안 요소를 안고 갈 생각은 없었으니까.
그렇게 옆에서 쉴 새 없이 떠드는 박정필의 수다에 귀가 아파져 올 때쯤.
"퓌요오-!"
날카로운 울음소리와 함께 한 무리의 몬스터가 등장했다.
"젠장, 어쩐지 이번에는 좀 편하게 보내준다 했다!"
"다들 멈추고 마차를 중심으로...."
"서아 씨! 여기, 길이 너무 좁아서 진형을 설 수가 없습니다!"
"그럼 일단 다리 외곽에서 물러나세요! 공격을 당해서 상처를 입는 것보다 다리에서 떨어지는 게 더 위험하니까요!"
"아, 알겠습니다!"
유서아가 능숙하게 사람들을 이끌었다.
천성인지, 바알과 계약하며 얻은 지휘 능력 덕분인지는 몰라도, 그녀의 지휘 실력은 날이 갈수록 발전하고 있었다.
이번만 해도 좁은 지형이라는 변수가 생겼음에도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지시를 수정했으니 말이다.
그러던 중, 세운은 날카로운 바람을 꿰뚫고 다리 주변에 다가온 몬스터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칼바람 수리.'
활짝 펼친 날개는 2m가 넘었고, 깃털 하나하나가 날붙이처럼 날카로워 보였다.
빠른 활강으로 저 깃털에 스치기만 해도, 사지 하나는 가볍게 잘려 나갈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멀리서 날개를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녀석들은 큰 위협이 된다.
좁은 다리라는 특성상, 녀석들의 바람에 조금이라도 밀려나면, 바닥이 보이지 않는 심연 아래로 추락하게 될 테니까.
그런 귀찮은 상대는 세운으로서도 사양이다.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레인 샤워(rain shower) ]
- 청탑의 수류계 마법으로써 시전자 주위에 소나기를 내리게 하는 범위 마법.
촤아아아-!
세운의 손에서 푸른빛이 일렁거리자, 맑은 하늘에서 소나기가 쏟아져 내렸다.
레인 샤워.
말 그대로 소나기를 내리게 할 뿐인 마법이다.
공격 마법이 아니라서 대부분 다른 마법과 조합하여 응용하는 등의 방법이 아닌 단독으로 운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곳에서 세운이 굳이 이런 마법을 사용한 이유?
그야.
"퓌, 퓌이익-"
비가 바로 저놈들의 약점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증명하듯, 날개가 젖은 칼바람 수리들이 몸을 휘청거리며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제 53화
53. 제53화
칼바람 수리.
녀석들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무기인 날카로운 깃털은 비행과는 어울리지 않는 무게를 가지고 있다.
놈들이 다른 필드에서는 보이지 않고 이 절벽가에서만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절벽가의 강하고 날카로운 바람.
그 덕분에 놈들은 무거운 깃털을 가지고도 비행할 수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 물기마저 고여 버린다면?
"퓌이잇-!"
놈들이 다리 위로 볼품없이 떨어져 내렸다.
어두운 심연 아래로 떨어질 뻔한 걸 필사적으로 날개를 꺾어 다리 위로 떨어진 듯했다.
물론, 몇몇 개체는 애처로운 비명을 내지르며 저 아래로 추락하고 있었다.
놈들은 다리 위로 떨어져 목숨을 부지한 것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지만.
"이 틈이에요!"
"공격!"
푹!
날지 못하는 독수리는, 더 이상 맹수라고 불릴 수 없었다.
절벽가에서 가장 위험한 몬스터로 위엄을 떨치는 놈들이 너무나도 허무하게 목숨을 잃어갔다.
"오, 이 깃털은 꽤 쓸 만하겠구먼! 화살촉으로 아주 좋아 보여!"
얼마 지나지 않아, 고창석이 쓰러진 놈들의 소재를 회수하는 것으로 전투가 끝이 났다.
원래는 다리를 다 건널 때까지 칼바람 수리의 공격을 받았어야 했는데.
지능이 똑똑한 놈들이라 그런지, 세운의 소나기를 목격한 이후 단 한 마리의 몬스터도 공격해 오지 않았다.
그렇게, 세운의 일행은 무척이나 편하게 다리를 건널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우와...."
"세운 씨, 저건...?"
"보다시피, 벽이지."
절벽 반대편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길게 펼쳐진 장벽이 지평선까지 이어져 있었다.
지금까지 쌍둥이 자매가 건설했던 울타리 수준이 아니었다.
성벽. 네모난 돌을 겹겹이 쌓아 만든, 중국의 만리장성(萬里長城)이 떠오르는 모습이었다.
그 안으로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 있는 탑이 존재했다.
성벽은 마치, 탑을 지키기 위한 최후의 전선과도 같았다.
'실제는 정반대지만.'
어차피 이곳은 튜토리얼. 탑에 입장할 자격이 있는 플레이어들을 선별하기 위한 장소일 뿐이었다.
즉, 저 성벽이 막고 있는 건 외부의 적이 아니라 플레이어였다. 다양한 차원에서 인과율을 뛰어넘어 세워진 것이 바로 저 앞에 보이는 '탑'이었으니까.
탑이 공격받는 일 따위, 일어날 리가 없었다.
'아우터가 내려오기 전까지는 말이지.'
세운이 회귀 전의 기억을 떠올리다 고개를 휘휘 저었다.
지금은 아우터에 대한 것보다는, 당장 튜토리얼에 집중하여야 한다.
-'튜토리얼 네 번째 장 – 공격'이 시작됩니다.
-성벽을 뚫고 내부로 진입하십시오.
-성주를 물리치면, 튜토리얼 다섯 번째 장이 끝날 때까지 성의 소유권이 인정됩니다.
"성의 소유권?"
튜토리얼의 내용은 세운이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공성전을 벌여 성을 소유하고, 그것을 이용하여 다섯 번째 웨이브인 수성전에 성공하는 일이었다.
유서아가 드넓은 성벽을 바라보며 고민을 하고 있자, 세운이 앞을 가리켰다.
멀어서 잘 안 보였지만, 눈에 힘을 주어 보면 그곳에 성문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일정 간격마다 성문이 있네요?"
"그래, 그리고...."
세운이 무언가 시스템을 조작하자, 사람들의 눈앞으로 정보창이 하나 나타났다.
[ 우뚝 솟은 망루 ]
분류 : 성
등급 : C
설명 : 단단한 성벽과 함께 특유의 망루가 설치되어 있어 궁수들이 힘을 발휘하기 좋은 성.
능력 : 1. 화살 보급 – 일정 시간마다 화살의 수가 자동으로 보충되며 활의 재장전 속도가 20% 상승한다.
2. 높은 망루 – 감시 가능한 구역과 활의 공격 범위가 20% 상승한다.
"이건!"
"성의 정보야. 아마, 보이는 성문마다 다른 특성을 가진 성이겠지."
"그럼, 공격할 성도 제대로 선정해야겠네요."
"맞아."
유서아의 이해는 완벽했다.
성은 단순한 거점이 아니다. 정보창에 보이는 것처럼, 성마다 고유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지금 정면에 보이는 '우뚝 솟은 망루'의 경우 활을 사용하는 플레이어가 많을 때 큰 힘을 발휘한다.
그 외에도 전사를 위한 성이나, 마법사를 위한 성, 무작정 방어력만 높은 성 등. 네 번째 장에는 수없이 많은 성이 존재한다.
"그럼 저희는 어떤 성을 찾아야 할까요?"
"그거야 뭐, 일단은 찾아봐야지."
세운의 머릿속에 금빛으로 번뜩이는 성 하나가 떠올랐다.
'황금성.'
네 번째 장에서 가장 강력한 성이자, 가장 어려운 성.
아쉽게도 위치는 알지 못한다.
회귀 전의 세운은 이쯤에 다른 클랜에 들어가 가까스로 가까운 성에 진입하는 게 고작이었으니까. 그저, 황금성이라는 게 있다는 소문만 들었을 뿐이다.
그러니.
"정필아."
"네, 형님!"
"너는 반대편으로 돌면서 어떤 성들이 있나 조사해 봐."
"네! 이 박정필이만 믿어주십쇼!"
"유서아."
"네."
"너는 클랜을 데리고 오른쪽으로 돌면서 성을 조사해 줘. 어차피 남들보다 여유가 있으니까 공격은 하지 말고."
"알겠어요. 그런데, 그럼 세운 씨는요?"
마음 같아서는 다른 플레이어들이 튜토리얼을 끝내고 올라오기 전에, 보이는 성을 모조리 점령하고 싶었다.
하지만, 한 클랜이 점령할 수 있는 성의 수는 단 하나.
'관리자가 패스권을 지급한 이유도 이것이겠지.'
회귀 전, 탑의 92층까지 올랐던 세운이기에 관리자의 존재도 알고 있었다.
히든 보스 몬스터의 공략이 끝난 후, 굳이 추가 보상을 지급한 이유. 그게 바로 이것이었다.
괜히 다른 이들의 튜토리얼을 방해하지 말고, 얼른 다음 장으로 꺼지라는 의미.
어차피 네 번째 장에 일찍 도착해 봤자 점령 가능한 성의 수는 하나뿐이고, 성을 점령한 이후, 다음 웨이브까지는 손가락 물고 기다려야 하니까.
그러나.
"나는 천천히 따라갈게. 먼저 가고 있어."
"또 히든 피스? 그런 걸 찾으러 가시려는 건가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세운이 전방의 '우뚝 솟은 망루'를 쳐다보았다.
이미 한 차례 성을 점령해 본 적이 있었던 세운이었기에, 성안이 대충 어떤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중에는, 성을 점령한 플레이어들에게 주는 보상 역시 존재했다.
그러니.
"창고 좀 털고 오려고."
다른 플레이어들이 도착하기 전에, 빈집털이에 나설 생각이었다.
* * *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텔레파시(Telepathy) ]
- 마법사들의 공용 마법 중 하나로써 마나를 통해 상대와 대화를 나누는 게 가능하다.
클랜과 헤어지기 전, 세운이 또 독단 행동을 하려 하자, 유서아가 평소 이상으로 걱정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다른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
아무래도 새로운 환경에 도착하자마자 세운이 사라지려 하니 불안감이 커진 듯했다.
그 때문에 세운은 남은 몇 개의 마나석을 꺼내 들어, 새로운 마법진을 새겼다.
통신석. 일종의 휴대폰. 아니, 거리에 따른 제약과 사용 방법을 생각해 보면 무전기에 더 가까운 아티펙트였다.
탑에서는 다른 층끼리의 대화가 불가능해 잘 사용되지 않는 하급 아티펙트지만, 어차피 성벽을 주위로만 움직이게 될 지금의 상황에서는, 최고의 통신 수단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아, 형님! 들리십니까?
"벌써 뭐라도 찾아냈어?"
-아니, 신기해서 말입니다! 이거 완전 휴대폰이잖아요? 이야, 이런 게 있으면서 왜 진작 안 꺼내주셨습니까! 제가 혼자 정찰 뛰면서 얼마나 심심....
뚝.
세운이 마나를 조작하여 박정필과의 연락을 차단하였다. 어쩐지,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연락이 왔나 싶었더니.
"유서아, 그쪽은 이상 없지?"
-네. 일단 해가 완전히 질 때까지만 정찰하다가 휴식을 취할 예정이에요.
"그래. 다들 제대로 쉬지 못했을 테니까. 여기는 먼저 성을 공격하지 않는 이상 별다른 위협은 없을 거야. 편하게 쉬어도 돼."
-세운 씨도 조금은 쉬시는 게....
"몇 곳만 털고 돌아갈게. 걱정하지 마."
-알겠어요. 조심하세요!
"응."
통신을 마친 세운이 늑대 망토를 뒤집어썼다.
통신석이 있으니, 거리가 떨어져도 돌발상황을 보고하거나 위치를 알아내는 등의 상황 파악이 한결 편해질 것이다.
망토를 쓴 채로 땅을 몇 바퀴 구른 세운이 본격적으로 성벽을 향해 움직였다.
'우뚝 솟은 망루는 감지 범위가 넓은 거지, 감지력이 높은 게 아니니까.'
세운은 지금 단지 흙을 뒤집어쓴 게 아니었다.
킬케르가식 은신술. 고블린 부락을 공격할 때 사용했던 기술을 통해 자세를 숙이고 대지와 동화된다.
태양이 가라앉는 속도에 맞춰, 아주 천천히. 또 확실하게. 성벽을 향해 이동한다.
들키는 순간, 성벽과 감시탑에서 수백 개의 화살이 비처럼 쏟아질 테지만 걱정은 없었다. 세운은 킬케르가식 은신술을, 마몬의 보물이 가진 힘을 믿고 있었으니까.
"교대. 교대다."
"저녁은 뭐냐?"
"기대하지 마라. 풀때기뿐이다."
"켁! 그놈의 풀때기. 우리가 초식 동물도 아니고."
마몬의 보물을 통해 청력이 강화된 덕분에 성벽 위에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변성기가 오지 않은 아이처럼 높고 가는 목소리에, 말이 짧긴 해도 제법 자연스러웠다.
놀의 들창코를 활성화하여 후각에도 집중해 보았지만, 몬스터 특유의 악취가 크게 느껴지진 않았다.
수많은 몬스터를 떠올리던 세운은 곧, 적의 정체를 추정할 수 있었다.
'하플링인가.'
하플링. 소인족으로 분류되어 있는 종족으로, 인간의 절반 정도의 크기를 가지고 있다.
신체 능력이 높지는 않지만, 몸놀림이 재빠르고 손재주가 좋아 활과 함정을 이용한 사냥술이 뛰어나다고 알려진 종족이었다.
그야말로 '우뚝 솟은 망루'에 딱 어울리는 병사들이다.
다만.
'그럼 걱정할 필요 없겠네.'
하플링의 감지 능력은 인간과 비슷한 정도이다.
혹시나 놀이나 코볼트 같이 후각이나 청각이 뛰어난 종족이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하플링이라면 들킬 걱정 없이 진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탓!
세운이 성벽의 돌 틈에 손가락을 끼워 넣었다.
손가락 끝의 반 마디만 간신히 걸칠 수 있는 아주 작은 틈이었지만, 세운에게는 '발라탄 절벽의 개코원숭이'라는 힘이 있다.
직각을 넘어서는 경사의 바위산도 등산했는데, 성벽을 등반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져가는 햇빛에 생겨난 그늘 덕분에, 그 어떤 하플링도 세운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게 차근차근 성벽을 오르다 보니, 금세 벽의 끝자락에 다다를 수 있었다.
다만, 여기부터가 본격적인 문제다.
후각과 청각을 살려 짐작하기로는, 성벽 위로 대략 10m 간격으로 호빗이 경계를 서고 있다.
죽이는 건 간단하지만, 그랬다가 들키기라도 한다면 일이 귀찮게 돌아갈 게 분명하다.
함부로 놈들을 죽이다가 공략이 되어 버리면, 의미 없이 '우뚝 솟은 망루'가 세운의 클랜에 귀속될 테니까.
게다가 아직 털어야 할 성들이 많아 여기서부터 체력을 낭비하기는 싫었다.
그러니.
-그거 들었어? 방금 들었는데, 오늘 메뉴 고기로 바뀌었대.
"켁? 진짜? 고기라고?"
"...갑자기 무슨 소리야. 고기?"
"방금 오늘 메뉴가 고기랬잖아!"
"정말? 고기?"
"아니, 네가...?"
"...?"
호빗 두 마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틈에, 세운이 성벽을 넘어 아래로 뛰어내렸다.
텔레파시의 사용법.
고블린이나 오크같이 언어에 미숙한 존재라면 모를까, 하플링처럼 언어가 숙달된 놈들이라면 제법 쓸 만한 교란법이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역시 고기는 못 참는다며, 속은 하플링들의 심정을 격하게 공감합니다.
이제 놈들의 창고를 찾아내기만 하면 된다.
제 54화
54. 제54화
창고를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고블린 부락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곳에는 추가적인 경계 인원이 서 있게 마련이니까.
문제는 어떻게 들키지 않고 창고까지 진입하느냐인데.
-이 육포는 숨겨뒀다가 나중에 나 혼자 먹어야지.
"이 치사한 놈아!"
"켁?"
"콩 한 쪽도 나눠 먹어야지, 치사하게 혼자서 그러기냐!"
"갑자기 무슨 소리냐?"
"숨겨도 소용없다! 나눠 먹자!"
-성좌, '배고픈 왕자'가 먹을 거로 괴롭히는 방식은 너무 잔인하다며 중얼거립니다.
텔레파시를 이용한 덕분에 경비는 쉽게 넘어갈 수 있었다.
'애초에 다들 형식적으로 경비를 서는 것뿐이니까.'
튜토리얼 네 번째 장. 이곳은 어디까지나 공성전을 위해서 만들어진 곳이다.
그런 만큼, 경계는 대부분 성벽 주위에 몰려 있지 내부에 침입자가 나타날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끼익-
덕분에, 생각보다 쉽게 녀석들의 창고에 들어올 수 있었다.
"생각보다 평범하네."
우뚝 솟은 망루.
활에 특성화된 성채인 만큼, 창고 내부에는 경갑옷이나 다양한 종류의 활, 화살이 보관되어 있었다.
정보를 확인해 보니 제일 쓸 만한 게 D-급.
C급 성인 만큼, C급의 활이라도 하나 건질 수 있을까 싶었는데. 이래서야 고블린 부락에서 얻은 것보다 조금 더 나은 수준이다.
뭐,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창고의 모든 아이템을 아공간 주머니 안에 쓸어 담았다.
마나석도 몇 개 챙길 수 있었으니, 수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그렇게 다시 창고를 빠져나가려던 중.
"이상은 없나?"
"네, 없습니다!"
창고 바깥에서 하플링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다만, 목소리 하나는 세운이 알고 있던 일반적인 하플링의 것과 달랐다. 분명 높은 톤의 목소리이긴 하지만, 말투에서 위엄이 가득 느껴진다.
창고의 틈새로 눈을 가져다 대니, 그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저놈이 성주인가?'
성에는 각각 한 명의 성주가 자리 잡고 있다.
일종의 보스 몬스터.
틈이 워낙 좁아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대충 보아도 번쩍거리는 장비로 전신을 두르고 있었다. 딱 보아도 C급은 될 듯한....
'잠깐.'
성주의 장비를 보는 순간, 세운에게 좋은 생각이 들었다.
창고에서 쓸 만한 장비를 구할 수 없다면....
'성주의 장비를 털면 되잖아?'
세운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 * *
"인간 무리가 보이긴 했는데, 전부 다른 쪽으로 빠졌습니다. 아마 다른 성을 찾아간 것 같습니다."
"그럼 문제없겠군."
"네!"
"알겠다. 계속 감시해라."
"네! 그런데...."
"왜 그러나?"
"오늘 저녁에 고기가 나왔다던데, 못 먹은 이가 꽤 있습니다. 다시 한번 배급을 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고기라고?"
"네! 분명히 들었습니다!"
우뚝 솟은 망루의 성주, 제헤일이 고개를 갸웃했다.
저녁으로 고기가 나왔다면 성주인 자신이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자신도 쓰고 떫은 풀때기로 배를 채웠는데, 대체 누가 고기를 먹었다는 말인가?
"...알아보겠다."
"감사합니다. 성주님!"
제헤일이 식당을 향해 이동했다.
만약 정말 누군가가 몰래 고기를 남겨두었다가, 자신 몰래 빼 먹었다면 자신이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가장 높은 망루에 매달아둔 채로, 놈을 과녁 삼아 궁술을 연습하겠다며 다짐했다.
그렇게 제헤일이 식당에 다다랐을 때쯤.
퍼어엉!
콰아아앙!!
맹렬한 폭음과 함께, 뜨거운 풍압이 제헤일의 등을 덮쳐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익숙한 건물 하나가 산산조각이 난 채로 이글이글 불타오르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모,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창고에서 폭발이 일어났습니다!"
"창고에서? 이럴 수가! 어째서!"
창고는 성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었다.
성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소재나 수성전을 벌일 때 필요한 장비 등. 성의 핵심 요소들이 전부 그곳에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적이 침입하지 못할 걸 알면서도 굳이 경비를 배치해 두었던 것인데,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적이 침입했을 가능성은?"
"그럴 리가 없습니다! 경비도 비지 않았고, 성벽에서도 수상한 기미는 못 느꼈습니다!"
"젠장! 일단 어서 화재부터 진압해!"
"네!"
하플링들이 다급하게 움직였다.
폭발이 어찌나 강력했는지, 불이 주변의 건물에까지 옮겨붙은 덕에 성벽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이들까지 내려와야 했다.
그러는 사이.
스윽.
제헤일은 알지 못하였다.
자신의 등에 걸려 있던 거궁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 것을 말이다.
* * *
"흥, 흐흠~ 흐으음~"
세운을 튜토리얼의 다음 장으로 보낸 후, 튜토리얼 관리자, 튜닝은 콧바람을 부르며 세 번째 장의 상황을 살펴보고 있었다.
부하 직원이 마지막으로 보인 존경의 눈초리가 떠오른 덕에, 그의 어깨는 하늘에 닿을 듯 한껏 올라가 있었다.
"역시 유망주들이야. 다들 잘 크고 있군."
성좌들이 점 찍어 둔 플레이어들.
예상대로 그들은 높은 공적치를 획득하며 세 번째 장의 마무리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이게 다 내 덕분이란 말이야. 솔직히 이건 보너스라도 받아야 하는데."
세운을 다음 장으로 보낸 것. 튜닝은 이것이 신의 한 수라고 생각했다.
자칫 저기 보이는 유망주 중 몇 명이라도 세운에게 당했다면, 몇몇 성좌들이 항의를 걸어올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한창 기분 좋게 콧바람을 불고 있을 때쯤.
삐리리-
"이번엔 또 뭐야?"
흥을 깨는 전화 소리가 들려왔다.
수화기를 들어 올리니, 부하 직원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어쩐지 익숙한데....'
튜닝은 세운이 '오우거의 수장, 크락 카틀락'이 소환했을 때가 떠올라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 세운은 패스권으로 인해 튜토리얼의 네 번째 장으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점령할 수 있는 성의 수는 하나뿐이니까.
하지만, 불행히도 부하 직원이 언급한 건 튜토리얼의 네 번째 장. 즉, 세운이 있는 곳에 관한 이야기였다.
"팀장님! 지금 다음 구역 안 보고 계시죠?"
"볼 게 뭐 있어? 유망주들 보고서 작성하기도 바쁜데. 너도 그쪽 신경 쓰지 말고 유망주들이나 관찰해. 까딱 실수하면 성좌들이 또...."
"아니, 보셔야 합니다! 지금 난리 났어요!"
"뭐? 아니, 네 번째 장에서 난리 날 게 뭐 있다고 난리야."
"일단 보시라니까요!"
"이놈이 소리는 왜 지르고 그래...."
튜닝이 어쩔 수 없이 모니터를 돌렸다.
그럴 리 없다고,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이미 그의 손은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눈을 꼭 감으며 화면을 돌리자.
화르륵!
-부, 불 꺼! 얼른!
-어떻게 된 거야! 대체!
화면을 돌리자마자 보이는 것은 불타고 있는 성의 모습이었다.
죽은 이는 별로 안 보이지만, 화재로 인해 성 내부는 이미 엉망진창이었다.
덕분에 병사들은 손발이 닳도록 다급하게 움직이며 다급하게 화재를 진압하고 있었다.
점령 방식이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그래서 뭐가 문제라는 건데?"
별 이상은 없었다.
꼭 맨몸 박치기로 공성전을 벌이지 않더라도, 저런 방식을 사용하는 플레이어 역시 존재했으니까.
이상한 점이라면.
'그 정도 힘을 가진 플레이어라면, 조금 더 좋은 성을 차지할 줄 알았는데.'
성의 난이도였다.
C급.
네 번째 구역에는 수많은 특성을 가진 성이 존재했고, 그중에는 일면 '레어'라 불리는 희귀하고 좋은 성도 존재했다.
그런데 지금 불타오르고 있는 건 평범하디 평범한 일반 성 중 하나였다. 아무래도 성의 종류는 생각하지 못하고 당장 눈에 보이는 성을 점령한 것 같았다.
...라는 착각은, 이어서 들려오는 부하 직원의 말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다.
"다중 화면 띄워 보세요!"
"다중...?"
멋지게 활약하고 있는 유망주의 화면을 뒤로하고, 다음 구역의 화면을 띄웠다.
그러자.
화륵!
퍼어엉!
-창고가 터졌다!
-대체 관리를 어떻게 한 거야!
-저, 전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럼 창고가 멋대로 터지기라도 했다는 거야?
-그, 그건 잘....
-창고 건은 네가 단단히 책임져야 할 거다!
-그럴 수가!
-자, 잠깐. 내 검! 내 검 어디 있어?
마치 같은 곳인 것처럼 화염이 이글거리는 성채가 다수 나타났다.
혹시 같은 성을 화면만 바꾼 건 아닌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성마다 자리 잡고 있는 병사들의 종족이 달랐기 때문이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튜닝이 잡고 있던 볼펜을 뚝 떨어트렸다.
네 번째 구역에서 클랜 하나가 점령할 수 있는 성의 수는 오직 하나. 그런데 어째서 저 많은 성이 폐허가 되고 있는 것인가?
어찌나 당황했는지 머리도 굴러가지 않아 입만 벌리고 있을 때쯤, 부하 직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세운 플레이어.... 그자의 짓입니다."
"호, 혼자서?"
"네. 화면에 보이다시피, 그의 클랜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미친, 진짜 혼자라는 거야?"
"네. 모니터링해 본 결과, 성을 점령하는 대신 테러를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어째서! 그런다고 공적치를 추가로 주는 건 아닐 텐데?"
"그게, 도둑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도둑질?"
"네. 창고를 털고, 성주가 가진 아이템을 훔친 후, 폭발을 일으켜 그 틈을 타 도망치기를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미친X...."
튜닝이 욕설을 내뱉었다.
세 번째 구역의 방해꾼을 제거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문제를 벌이고 있었을 줄이야!
이건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지금 불타고 있는 성들은 곧 튜토리얼을 마치고 도착할 플레이어들이 점령할 성들이었으니까.
점령이 쉬워지긴 하겠지만, 점령을 성공한 후 폐허가 된 내부를 발견한다면? 플레이어들은 물론, 성좌들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으아악! 일단, 저놈부터 막아!"
튜닝이 다급하게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창 활약하고 있는 유망주들의 화면은 뒤로한 채로 말이다.
* * *
"후우."
세운은 화재를 진압하느라 텅 비어 버린 성벽 위에서,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꽃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런 세운의 등에는 못 보던 활이 걸려 있었고, 허리춤에는 매끄러운 장검이 걸려 있었다.
우뚝 솟은 망루로 시작해, 철옹성이나 가시탑 등. 이미 다섯 곳의 성을 털고 온 덕에 아공간 주머니는 빵빵하게 차올랐고, 성주로부터 얻은 아이템도 다수 있었다.
[ 거대한 사냥꾼 ]
분류 : 활
등급 : C
설명 : 우뚝 솟은 망루의 성주, 제헤일이 사용하던 무기로써 하플링 종족의 비기가 한껏 깃든 훌륭한 활이다.
능력 : 1. 크지만 가벼운 – 공격의 사정거리가 10% 증가한다.
2. 크고 빠른 – 화살의 비행 속도가 20% 증가한다.
3. 크고 매서운 – 화살의 공격력이 20% 상승한다.
거대한 사냥꾼이라는 이름답게 성주가 사용하던 활은 거궁(巨弓)이었다.
성주의 키를 생각한다면, 녀석은 자기 키만 한 활을 들고 다닌 셈이다.
녀석이 활을 쏘려고 자세를 잡는 장면을 상상하니, 아무리 생각해 봐도 우스꽝스러울 것 같았다.
이뿐만 아니라, 다른 성주들에게 얻은, 아니, 훔친 아이템들은 모두 C-에서 C+급까지의 물건들이었다.
하나같이 튜토리얼에서는 보기 힘든 상급 아이템.
한참 후에야 자신의 무기가 없어진 걸 깨닫고 당황 중인 성주를 뒤로하고 세운이 몸을 떠날 때쯤.
"이렇게 나오시겠다, 이거지?"
세운의 눈앞에 튜토리얼 관리자가 보낸 것으로 보이는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제 55화
55. 제55화
-지금부터 어떠한 방식으로든 성에 피해를 입힐 시, 정식 공성전으로 취급받습니다.
-공성전 이외의 방법으로 성의 아이템을 획득할 수 없습니다.
이 외에도 다양한 룰이 떠오르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세운이 벌인 행동 탓에 갑작스럽게 만들어진 규칙인 게 분명했다.
'뭐, 아이템은 적당히 만족스럽게 털었으니까.'
사실, 이것만 해도 꽤 많이 털었다.
이런 꼼수를 이용하는 건 기껏해야 두세 번이라고 예상했는데. 아무래도 네 번째 구역에서의 변수는 예상하지 못한 탓에 대응이 늦어진 듯했다.
게다가.
'어차피 더 털라고 해도, 이제는 무리인 것 같고.'
워낙 화려하게 성을 털고 다닌 탓일까?
아직 세운의 클랜을 제외한 플레이어들이 도착하지 않아 경계가 느슨하던 성들이 바짝 주의하기 시작했다.
폭발음이 워낙 크기도 했고, 소통이 없다시피 한 성들이라고 해도 병사들의 고함과 비명이 충분한 정보를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다.
획득한 아이템을 정리하고 떠나려던 중.
삑, 삐익-
꺼두었던 통신석에서 신호가 들려왔다.
세운이 마나를 주입하니, 통신석이 영롱한 빛을 발산하더니 곧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운 씨, 들리시나요?
"어, 듣고 있어."
-다행이에요. 아까부터 연락이 안 되길래 걱정했거든요.
"아, 조금 바빴거든."
통신석 건너로 유서아의 안도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박정필이 귀찮게 굴길래 꺼두었던 건데, 아무래도 세운이 창고를 털 무렵에 계속 연락을 걸어왔던 듯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어?"
-아뇨, 이동은 순조로워요.
"그럼?"
-그게....
-형님! 형님, 저 정필입니다!
"왜 또. 이번에도 시답잖은 이유로 연락한 거라면...."
-찾았습니다! 다른 성이랑은 겉모습부터 다른, 번쩍거리는 성을 발견했습니다!
드디어 찾았다.
황금성.
* * *
소식을 들은 세운은 즉시 클랜의 위치로 돌아갔다.
거리가 생각보다 멀어 도착할 때쯤에는 이미 해가 저물었기에, 휴식을 먼저 취했다.
솔직히 당장에라도 공략에 나서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지만, 클랜원 모두 튜토리얼 세 번째 장에 이어 여기까지 쉬지 않고 달려왔기에 쉴 시간이 필요했다.
그 와중에 대련을 요청하는 강한철의 부탁을 들어준 후, 시간이 흘러, 아침이 찾아왔다.
"어떱니까, 형님? 제가 찾았습니다!"
"잘했어."
황금성. 그 이름 그대로, 성벽은 떠오르는 아침 햇살에 비쳐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다.
실제로 금으로 이루어진 건 아니지만, 햇살에 비춰 철벽이 밝게 빛나는 모습만큼은 정말 성벽이 황금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 황금성 ]
분류 : 성
등급 : A+
설명 : 황금처럼 찬란한 철벽으로 둘러싸인 성채. 뛰어난 방어력은 물론 각종 수성 무기와 무장 병력이 가득한 최후의 요새이다.
능력 : 1. 금빛 철벽 – 성벽이 무너지지 않는다. 황금성의 병사들은 모든 공격으로부터 받는 데미지가 30% 감소한다.
2. 금빛 병기 – 성에 존재하는 모든 수성 무기나, 병사들의 공격이 적의 방어력을 30% 무시한다.
3. 황금성 내부에 있는 병사들의 모든 능력치를 15% 상승한다.
4. 하루에 한 번. 적의 움직임을 일제히 멈추는 '골든 라이트'를 사용할 수 있다.
황금성의 정보를 확인한 세운이 미소 지었다.
무려 A+급 성채.
이미 창고를 털고 다녔던 성들이 모두 C-에서 C+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단연 압도적인 등급이었다.
당연하게도, 그 능력은 A+이라는 등급에 걸맞게 엄청났다.
다른 성들과는 달리 어느 누가 자리를 잡아도 강력한 만능형 효과들. 게다가 성 자체에 고유 스킬까지 달려 있었다.
이곳을 차지하게 되면, 다음 다섯 번째 튜토리얼의 난이도가 팍 줄어들 게 분명하다.
문제는....
'그만큼 점령하기 까다롭다는 거지.'
저기 보이는 능력들이 수성전을 할 몬스터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것이었다.
성의 등급이 A+급인 만큼 몬스터의 수준 역시 강력한데, 거기에 저런 효과까지 받는다니....
솔직히 점령하라고 만든 곳이 맞는지 의문이 들 지경이었다.
황금성을 어떻게 공략할지 고민하던 중, 세운을 지켜보던 두 성좌 역시 반응을 내보였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제법 멋진 성이라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뱃가죽이 등에 붙을 지경이라며 바닥에 쓰러집니다.
'그러고 보니 오우거 이후로는 폭식의 권능을 안 썼지.'
생각해 보니 튜토리얼을 시작한 이후로 이렇게 오랫동안 폭식의 권능을 사용하지 않은 건 처음인 듯했다.
오래라고 해 봤자 아직 24시간도 안 지났지만 말이다.
세운은 찡얼거리는 베엘제붑에게 조금만 기다리라고 다독이며 공성전의 준비를 마쳤다.
저 성에만 진입하면, 폭식의 권능이야 베엘제붑이 쓰지 말라고 해도 쓸 테니까.
"세운 씨, 다들 준비 끝냈어요."
"다들 고생했어. 성만 점령하면 다음 튜토리얼까지는 큰일 없을 테니까, 조금만 더 힘내자."
"네, 그런데 어떻게 공격할 생각이신가요?"
애초에 굳이 어려운 성을 찾아내 공략하자고 했던 게 세운이었기에 유서아가 이런 질문을 하는 건 당연했다.
세운 역시 밤에 휴식을 취하면서 황금성을 어떻게 공략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적어도 지금까지처럼 성벽을 오르는 건 안 될 테니까.'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역시 앞서 창고를 털었던 성들처럼 몸을 숨기고 내부에 침입하는 것이었다.
성공만 한다면, 성문을 쉽게 여는 것은 물론 잘하면 성주의 암살을 시도할 수도 있을 테니까.
다만, 이곳, 황금성은 불가능했다. 다른 곳과는 다르게, 성벽 위뿐만 아니라 성문 앞에서도 열 마리가량의 몬스터가 문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킬케르가식 은신술'이라고 해도, 황금성에 잠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
"전면전이지."
"가능할까요? 당장 성문 앞을 지키는 몬스터만 해도 열 마리인데. 분명 성안에는 수십 배의 몬스터가 있을 거예요."
"알고 있어. 못해도 이백 마리는 넘어가겠지."
황금성의 몬스터.
제왕 독수리의 척안을 활성화하자, 놈들의 정체가 보였다.
'글로리 오크.'
오크의 상위종으로, 크기는 비슷하지만 신체 능력이나 지능이 훨씬 높은 종이다.
이것뿐이라면 다행이지만, 놈들은 황금성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금빛 갑주를 착용하고 있었다.
딱 보아도 수준 높아 보이는 장비. 아마 어지간한 창칼은 통하지도 않을 게 분명하다.
"혈랑 오빠! 우리가 공성 병기를 만들어 볼까?"
"저 성문, 한철 오빠도 못 부술 것 같으니까!"
"시간만 주면 투석기도 더 만들 수 있어!"
쌍둥이 자매가 자신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그녀들의 뒤로는 성좌의 힘으로 다시 크기를 키운 투석기가 자리 잡고 있었는데, 이번 공성전에서도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다만....
"괜찮아."
"엥? 어째서?"
"그럼 저 성문은 어떻게 뚫으려구?"
"성문이야 뭐."
세운이 새로 생긴 무기 몇 개를 떠올렸다.
고블린 창고에서 얻은 싸구려 무기들만 있을 때라면 몰라도, 지금이라면 준비는 충분하다.
"내가 부수면 되니까."
* * *
[ 튜토리얼 세 번째 장 – 충돌 ]
-다른 플레이어들이 과제를 훌륭하게 수행하였습니다.
-이제 곧 해당 구역에 다른 플레이어들이 진입할 예정입니다.
공성전을 시작하기 직전, 세 번째 튜토리얼의 종료를 알리는 메시지가 떠 올랐다.
시작 지점으로부터 꽤 거리가 떨어진 곳이었기에 당장은 플레이어가 보이지 않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둘 플레이어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할 거다.
그러니.
"방해꾼이 나타나기 전에 끝내자고."
"네!"
"알겠습니다. 형님!"
세운의 클랜이 본격적으로 공성전을 시작했다.
다들 전투태세를 갖추고, 쌍둥이 자매가 만들어 둔 공성 병기를 끌고 나간다.
이에 당연하게도 황금성에서도 눈치를 채고 무기를 꺼내 든다.
"취익! 멈춰라! 한 걸음만 더 다가오면 우리 황금성에 대한 공격 행위로 간주하겠다!"
글로리 오크.
나름 보통의 오크보다 신체 조건이나 지능까지 높은 상위 종으로 알고 있는데, 입을 열 때마다 들려오는 바람 소리를 듣고 있자니, 꼭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시든가."
-내공을 통해 혈랑검법의 제이 초식, 혈랑아(血狼牙)가 강화됩니다.
서걱-
그리고 세운이 선두에서 경고를 외치는 글로리 오크의 목을 베어 내는 순간.
-'황금성'과의 공성전이 시작되었습니다!
황금성의 본격적인 반격이 시작되었다.
"적이다!"
"취익, 공격하라!"
세운의 주변으로 반짝거리는 창칼이 빠르게 날아들었다.
성문을 지키던 오크의 수는 열 마리. 세운이 방금 한 마리를 쓰러트렸으니, 동시에 아홉 개의 무기가 날아든 셈이다.
진법도 제대로 배웠는지, 그 모든 공격이 서로의 경로를 전혀 방해하지 않고 사각을 차단한 채 다가왔다.
그러나 세운은 혼자가 아니었다.
-플레이어 강한철이 '개전(開戰)'을 사용합니다.
쿠구구구!
"취익!"
갑작스러운 땅의 울림. 그 때문에 오크들의 자세가 무너지며, 세운을 향해 다가오던 창칼 사이에 빈틈이 생겨났다.
그 사이로.
-플레이어 유서아가 '타란튤라의 두 번째 다리'를 사용합니다.
강한철의 등을 밟고 뛰어올랐던 유사어가 떨어져 내렸다.
서거거걱!
"크억!"
유서아가 착륙하자 벌어지는 피의 향연.
그녀의 쌍검은 오크의 갑옷을 뚫을 만큼 강하진 않았지만, 놀랍게도 빠르게 휘두르는 검은 오크의 갑옷 사이의 빈틈을 정확하게 베어나가고 있었다.
겨드랑이, 목, 오금 등. 갑옷으로 지켜지지 못하는 아주 작은 틈으로 붉은 바람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초록색 피가 뿜어져 나왔다.
"세운 씨!"
"부탁한다."
그 틈을 타, 세운은 당당하게 황금성의 성벽 앞으로 도달할 수 있었다.
당장 앞에서 열 마리의 동료가 당하고 있는데도 성벽은 꿈쩍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다만.
"감히 우리의 황금성을 공격하다니!"
"취익! 인간 따위가 황금성에 한 발짝이라도 내디딜 수 있다고 생각하나!"
"성문을 건드리기도 전에 고슴도치로 만들어 주마!"
"쏴라!"
성벽 위에서 수십, 수백 발의 화살이 날아들었다.
날카로운 화살촉은 모두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는데, 그 모두에는 '적의 방어력을 30% 무시한다.'라는 황금성의 힘이 깃들어 있었다.
투두두둑!
그것들이 세운의 몸에 꽂히기 직전, 허공에서 얇은 벽이 하나 생겨났다.
와이드 실드.
이전에 고블린의 독침을 막아 내기 위해 세운이 사용했던 넓은 방어막이었다.
쨍, 째앵!
그러나 이번 와이드 실드는 이전의 고블린의 독침처럼 화살을 완벽하게 막아 내지는 못했다.
금빛 화살이 박혀 들어가며, 금이 쩍쩍 갈라지며 순식간에 위태로운 모습을 보였다.
세운은 그 상황에도 당황하지 않고, 거대한 도끼 하나를 꺼내 들었다.
굶주린 오우거의 수장, 크락 카틀락을 쓰러트리고 얻은 두 개의 도끼 중 하나. 크락의 큰도끼였다.
히든 보스 몬스터를 쓰러트리고 얻은 아이템이니만큼, 강력한 무기이지만.
"취익! 고작 인간 따위가! 공성 병기도 아닌 도끼 하나로 황금성의 성문을 무너트릴 셈인가!"
성문을 무너트리는 것은 무리였다.
설사 황금성이 아니더라도, 개개인이 무기를 휘두르는 것으로 성문을 부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거인의 도끼, 반고부 ]
- 혼돈을 쪼개고 하늘과 땅을 둘로 나누었다고 알려지는 거인 반고의 도끼.
그게 평범한 도끼가 아닌, 신의 도끼라면 얘기가 다르다.
서걱.
쿠콰콰콰콰쾅!!!
세운이 도끼를 휘두르는 순간, 날카로운 절삭음과 함께 세상이 터져 나가는 듯한 폭발음이 들려왔다.
그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성벽 위의 오크들은 사격을 멈추고 일제히 고막을 막아야만 했다.
금가루가 섞인 황금빛 먼지가 주변으로 퍼져 나가고 그 먼지가 걷히는 순간.
"취익! 서, 성문이!"
쿠궁!!
황금성의 문이 두 동강 나 무너져 내리고, 그 안에서 무장을 갖춘 오크들이 얼빠진 모습으로 세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 56화
56. 제56화
스르르-
세운의 손에 들려 있던 큰 도끼가 금가루와 함께 휘날리며 사라졌다.
일회성으로 사용하기는 아까운 아이템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쌍둥이 자매가 공성 병기를 만든다 해도 시간이 오래 걸림은 물론, 그걸로 황금성의 단단한 성문을 부술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으니까.
불확실한 도박을 할 바에는 무기를 하나 날려 보내더라도 확실한 수를 택하는 게 낫다.
어차피 다섯 채의 성을 털면서 세운에게는 쓸 만한 무기가 많이 생겼으니 말이다.
"고, 공격하라!"
"취익!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성문을 부순 무기는 이미 사라졌다!"
"황금성의 영광을 위하여!"
철석같이 믿고 있던 성문이 부서지자, 당황하던 오크들.
하지만, 과연 A+이라는 등급에 걸맞게 녀석들은 금방 정신을 차리고 무기를 꺼내 세운을 향해 겨누었다.
그러나 녀석들이 발을 떼기도 전에, 세운의 팔이 먼저 올라가며 마나 서클이 맹렬하게 회전하였다.
-흑탑의 묘리에 따라 '프로즌 웨이브'의 위력이 강화됩니다.
쩌어어억!
"취익!"
성의 바닥이 시리도록 차갑게 얼어 나갔다.
이는 자연스럽게 바닥에 발을 디디고 있는 오크들에게까지 퍼져 나갔고, 금속 군화를 신고 있던 오크들은 발에 자석이라도 붙은 듯이 바닥과 일체가 되었다.
힘을 주어도 발은 떨어지지 않았고, 전신 갑옷의 특성상 군화를 벗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녀석들을 바라보며, 세운이 새로운 무기를 꺼내 들었다.
"무기는 그거 말고도 넘쳐나거든."
-내공을 통해 혈랑검법의 제삼 초식, 혈랑습격(血狼襲擊)이 강화됩니다.
크아앙!
날카로운 늑대의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세운의 주위로 피어오른 내공이 일렁거리며 핏빛 늑대의 형상을 만들어 냈다.
세운이 검을 휘두르는 순간, 그 움직임에 따라 늑대가 아가리를 벌리며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오크들을 덮쳐갔다.
"크헉!"
늑대의 습격에, 바닥의 얼음마저 버티지 못하고 깨져 나갔다.
바닥에 쓰러진 놈들은 늑대에게 베이고, 물린 것처럼 잔혹한 상처를 남긴 채 생을 마감해 갔다.
"취익, 저놈이다! 저놈이 우리 성의 성문을 무너트렸다!"
"공격하라!"
성안 쪽에서 새로운 오크들이 등장했다.
세운이 새로운 무기를 꺼내 들며 마신의 창고를 개방하려는 순간.
-플레이어 이하늘이 '피에 젖은 병동'을 사용합니다.
푸홧!
오크들을 향해 새로운 공격이 날아들었다.
클랜의 치료사, 이하늘의 지원이다.
"여러분, 힘내 주세요!"
"혈랑의 뒤를 받쳐라!"
"공격해!"
회귀 전과는 다르게 세운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세운 씨, 얼른 가세요!"
"형님, 제가 길 한번 뚫어보겠습니다!"
세운의 클랜이 난입하며 순간적으로 길이 뻥 뚫렸다.
아무리 세운의 클랜이더라도 글로리 오크를 정면으로 상대하기는 무리였지만, 모두 길을 내주고, 시간만 벌어주면 세운이 끝을 내줄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렇다면.
"부탁한다."
타앗!
기대에 부응해 주는 수밖에.
세운이 땅을 박차고 열린 길을 통해 내달렸다.
"취익! 막아라!"
콰아아앙!!
"췩! 뭐, 뭐냐?"
하늘에서 돌이 떨어진다. 하나가 아니라, 두 개의 거대한 바위가 동시에 떨어진다.
그것을 보자마자 활짝 미소 짓고 있는 쌍둥이 자매가 떠올랐다.
-성좌, '검은 새'가 투석기의 충전 방법을 흥미로워합니다.
-성좌, '거대한 새'가 권능의 응용법에 대해 감탄합니다.
투석기에 올라가는 돌의 크기는 엄청나다. 사람 한둘로는 도저히 들 수 없을 정도.
심지어 쌍둥이 자매는 강한철 같은 힘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그들만의 힘으로 투석기를 충전하는 건 무리였다.
때문에 세운은 전장에 참여하기 전 하나의 조언을 남겼다.
'그 권능, 이렇게 사용해 보는 건 어때?'
바위의 크기를 줄인다.
물론, 두 새의 권능은 일반적인 소재의 크기를 줄일 수는 없었다. 때문에 세운은 바위를 투석기에 올리기 좋게 둥근 모양으로 다듬어보라고 하였다.
그 결과, 바위는 소재가 아닌 투석기의 '탄환'이 되었고 성공적으로 크기를 줄일 수 있었다.
쾅, 콰르르르릉!
"또 날아온다!"
"취익! 저런 크기의 바위를 어떻게 이렇게...!"
덕분에 쌍둥이 자매는 끊임없이 바위를 날려 보낼 수 있었다.
온갖 보물로 강화된 세운의 감각은 바위가 떨어지는 위치를 어림짐작하며 피해 낼 수 있었고.
반대로 오크들은 두 눈으로 날아오는 바위를 보면서도 진형을 갖춘 만큼 쉽게 피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어쩔 수 없다! 일단 산개하라!"
"취익! 산개하라!"
결국 오크들은 진형을 해체하고 말았다.
이대로는 바위에 짓뭉개져 의미 없는 희생만 가중될 뿐이니 말이다.
뭐, 그 덕에.
타앗!
세운의 움직임은 더욱 빨라졌다.
진형이 망가지니, 놈들이 아무리 세운을 막아 내려 해도 결국 틈이 생길 수밖에 없었으니까.
-흑탑의 묘리에 따라 '프로즌 웨이브'의 위력이 강화됩니다.
으드드득!
그런 와중에도 세운을 잡기 위해 덮쳐오는 오크들의 발이 꽁꽁 얼어 나갔고.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니추공(泥鰍功) ]
- 청성파의 무공 중 하나로써 미꾸라지의 모습을 본떠 만들어졌다는 이름에 걸맞게 상대의 공격을 물 흐르듯이 피해 내는 보법.
얼음마저 피해 달려드는 이들 역시, 결국 세운의 몸에는 작은 상처 하나 만들지 못하였다.
슉, 쉬익!
검, 창, 둔기 등. 그 어떤 무기도 세운에게 닿지 못했다.
니추공.
마치 미꾸라지가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것처럼 교묘하게 상대의 공격 범위를 빠져나가는 보법이다.
오크의 수가 워낙 많았던 탓에 내공과 마나가 빠르게 줄어들었지만, 세운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성주만 찾아낸다면.'
세운이 찾는 것은 오로지 단 하나. 성주뿐이었다.
나머지 것들은 니추공으로 최소한의 내공만 들여 피해 낼 뿐, 공격할 생각 따위는 가지지 않았다.
물론, 그 와중에.
-내공을 통해 혈랑검법의 제이 초식, 혈랑아(血狼牙)가 강화됩니다.
"컥! 꾸르륵!"
지휘관으로 보이는 오크의 멱을 따는 것 정도는 잊지 않았다.
일반 병사를 죽이면 그 개개인의 전력만 무효화시키는 것이지만, 지휘관 한 마리만 잡아도 해당 부대의 전력을 20% 이상 감소시킬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높은 계단을 오르고, 황금 깃발을 건너 내성을 이루는 성벽까지 넘자, 마침에 왕궁으로 보이는 건물이 나타났다.
소란스러웠던 바깥과는 다르게, 내성은 전혀 다른 세상인 듯이 한없이 고요했다.
"침입자여. 혼자인가?"
"친위대인가 보네."
"그렇다. 우리가 바로 성주님의 직속 친위대. 골든 나이츠다."
"누가 오크 아니랄까 봐, 이름 한번 대충 지었네."
빠직!
스무 마리가량의 오크들이 동시에 인상을 구겼다.
대충 농담으로 받아치긴 했지만, 대충 보아도 놈들은 지금껏 마주쳤던 오크들과는 기세부터가 달랐다.
한 마리, 한 마리가 지휘관급보다 강해 보인다.
과연, 황금성.
쉽게 쉽게 성주를 찾아가는 건 불가능한가 보다.
"혼자서 이곳까지 침입한 것은 칭찬할 만하지만. 더 이상은 우리 골든 나이츠가 용납하지 않는다."
쿵!
놈들은 합이라도 맞춘 듯 일제히 무기로 바닥을 내리찧었다.
그것만으로도, 놈들이 얼마나 제대로 된 훈련을 받아왔는지 알 수 있었다. 아마, 무기술 역시 그에 걸맞게 대단할 게 분명하다.
솔직히 지금쯤 튜토리얼 세 번째 장을 통과한 어중이떠중이들보다는 이 오크 친위대 한 마리 한 마리가 더욱 강력할 테지.
애초에, 황금성은 튜토리얼의 역사 속에서도 점령된 적이 극히 드물다고 알려져 있으니까.
'내가 들었던 점령 사례 중 하나가 카샬락카스의 클랜이었나.'
카샬락카스.
놈은 늦은 시기에 탑에 입성했음에도, 순식간에 탑의 랭킹에 오른 인물이었다.
하긴, 그럴 수밖에. 놈은 무려 고귀한 마나의 종족이라 불리는 '드래곤'이었으니까.
그의 클랜 역시도 용을 수호하는 가디안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했으니, 제아무리 황금성이라 해도 버틸 수가 없었을 거다.
놈은 애초에 튜토리얼 같은 단계를 거칠 만한 수준의 플레이어가 아니었으니까.
"용납하든 말든. 어차피 이대로 돌아간다고 얌전히 보내 줄 것도 아니잖아?"
"잘 알고 있구나. 공격하라!"
"공격하라!"
쿠궁!
놈들이 세운에게로 달려들었다.
두꺼운 갑옷의 무게 때문인지, 놈들이 발을 움직일 때마다 바닥이 쿵쿵 울려댔다.
그 와중에, 발걸음이 얼마나 일정한지 진동은 마치 한 마리의 오크가 걷는 것만 같았다.
스무 마리의 오크가 전개하는 진법을 보고 있자니 철벽을 보는 듯했다.
공격을 피할 사각 따위는 보이지 않았고, 공격이 통할 만한 약점 역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사각이나 약점은 내가 만들면 그만이지.'
애초에 빈틈을 노리는 요행은 바라지 않았다.
화륵!
세운의 손아귀에서 검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멀리서도 느껴지는 뜨거운 온도에도 불구하고, 빛을 밝히긴커녕 주위의 빛을 잡아먹고 있는 신비한 불꽃.
-흑탑의 묘리에 따라 '다크 플레어'의 위력이 강화됩니다.
콰르륵!
"취익!"
세운이 팔을 휘두르는 순간, 불꽃이 주위로 퍼져 나가며 오크들을 휩쓸었다.
오크들이 입고 있는 갑주 중에 불이 옮겨붙을 법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검은 불꽃은 신기하게도 진드기처럼 오크들에게 달라붙어 지속해서 뜨거운 열기를 토해냈다.
다크 플레어.
화탑의 마법과는 달리 불보다는 어둠의 속성이 더욱 강한 흑탑의 마법인 만큼 세운이 마나만 지속적으로 제공해 준다면 절대 꺼지지 않는 불꽃이었다.
뭐, 전에 사용했을 때처럼 엄청난 마나 소모량이 단점이긴 하지만 말이다.
"우리 용맹한 골든 나이츠에게! 이따위 잡기술은 통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는 아닌 것 같은데?"
오른쪽 팔이 불타오름에도 당황하지 않고 눈빛을 번들거리고 있는 오크와는 달리, 절반의 오크들은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진형은 깨져 나간 지 오래.
다크 플레어를 계속 유지한 채로, 세운이 뭉툭한 둔기 하나를 꺼내 들었다.
[ 노움의 압축 광물 ]
분류 : 둔기
등급 : C
설명 : 지저분한 광산의 성주, 단탕이 사용하던 무기로써 광산에서 캐낸 광석 중 강도가 높은 것을 뭉치고 압축시켜 만든 무기.
능력 : 1. 우둘투둘 – 공격 후, 적에게 20%의 추가 데미지를 입힌다.
2. 울퉁불퉁 – 적의 갑옷이나 방패를 공격할 때, 방어력을 40% 무시한다.
3. 울긋불긋 – 압축되어 있는 다양한 광석에 의해, 공격 시 일정 확률로 다양한 속성 데미지를 입힌다.
"네놈들같이 단단한 것들한테는 역시 둔기가 답이지."
세운에게는 다양한 무기가 있었고, 둔기는 손에 잘 맞지 않는 무기 중 하나지만, 저들의 갑주는 다른 오크들이 입고 있는 것과 달리 빈틈이라는 게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어금니 단검을 든다고 해도, 약점을 노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 때문에 선택한 게 바로 이 둔기.
이거라면, 단단한 갑주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시원한 일격을 날릴 수 있을 것이다.
"어디 한번 막아 보라고."
콰앙!
꽈득-
세운이 둔기를 내려치자, 앞에서 검은 불꽃을 끄기 위해 바닥을 구르던 오크의 투구가 짓뭉개졌다.
투구와 함께 머리가 통째로 뭉개진 것이다.
"취, 취익!"
-'붉은 늑대 갑옷'의 능력 '늑대의 위협'으로 인해 인근의 골든 나이츠가 공포에 빠져듭니다!
-'회색 늑대 망토'의 능력 '위압감'으로 인해 카리스마가 강화되며 적의 공포를 더욱 악화시킵니다!
그 모습에 당당하던 오크들의 눈빛이 거칠게 떨려오기 시작했다.
제 57화
57. 제57화
콰직!
마지막 남은 오크의 머리통이 섬뜩한 소리를 내며 터져 나갔다.
세운의 주위로는 투구나 갑옷과 함께 몸이 찌그러지고, 뼈가 함몰되어 목숨을 잃은 오크들이 가득했다.
스무 마리의 오크 친위대, 골든 나이츠를 세운 혼자서 다 쓰러트린 것이다.
"후우...."
물론, 그런 만큼 세운의 상태도 정상은 아니었다.
다크 플레어를 한계까지 운용한 덕에 세 개의 마나 서클은 텅텅 비어 있었고.
오크들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끊임없이 운용했던 니추공과 공격에 힘을 더하기 위해 끌어 올렸던 내공 덕에 단전도 텅텅 비어 있었다.
마몬의 창고를 열어 포션 하나를 꺼내 마시긴 했지만, 이걸로 컨디션을 백 퍼센트 회복할 수는 없었다.
-폭식의 권능으로 '골든 나이츠' 전체를 지정하였습니다.
-폭식의 어금니가 친위대를 덮쳐옵니다!
콰득!
-성좌, '배고픈 왕자'가 이게 얼마만의 먹이냐며 환호성을 내지릅니다.
성주가 바로 코앞인 지금, 조금이라도 전력을 강화해 둘 필요가 있었다.
폭식의 권능을 사용한다고 체력이 회복되지는 않지만, 친위대답게 많은 능력치를 상승시켜 주며 몸이 한결 가벼워진 게 느껴졌다.
게다가 폭식으로 인해 놈들에게서 마나까지 흡수할 수 있었으니, 이것으로 성주를 마주할 최소한의 요건은 충족되었다.
'뒤쪽은....'
세운이 감각을 확대하여 한창 전투를 벌이고 있는 외성에 집중하였다.
창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고, 비명과 함성이 혼합되어 대기를 울려댔다.
-성좌, '왕관을 쓴 거미'가 계약자의 발놀림에 크게 만족하며 다리를 높이 들어 올립니다.
-성좌, '악어를 탄 노인'이 계약자가 지진을 일으킬 때마다 신이 나 대지를 쾅쾅 두들깁니다.
-성좌, '당나귀 머리의 날치기'가 계약자가 바닥을 뒹구는 모습을 보며 그럴 줄 알았다며 폭소를 터트립니다.
성좌들의 반응을 보고 있자니, 전투의 흐름도 생각보다 괜찮은 것 같았다.
전력이 크게 차이 나는 상황이라 못 버티면 어쩌나 싶었는데, 아무래도 세운이 클랜의 전력을 과소평가한 듯했다.
'그래도 최대한 빨리 끝내야지.'
클랜이 잘 버텨주고는 있지만, 말 그대로 잘 '버티고' 있는 것뿐이다.
수, 장비, 신체 능력 등. 모든 게 오크들이 우세했기에 이대로 전투가 길어지면 세운의 클랜이 먼저 지치고 말 것이다.
그전에 어떻게든 황금성의 성주를 쓰러트려야만 했다.
* * *
세운이 성주를 향해 나아가는 사이. 그의 클랜은 글로리 오크들과의 치열한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오크들의 수적 우세를 막기 위해, 좁은 성문에 진형을 꾸리고 적을 막아 냈다.
금빛 갑옷이 워낙 단단했기에 상처를 내기 쉽지 않았지만, 자잘한 상처 정도는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렇게만 해도.
-플레이어 이하늘이 '피에 젖은 병동'을 사용합니다.
이하늘의 성좌, 마르바스의 권능에 의해 상처는 크게 벌어지며 초록 피를 울컥 쏟아냈다.
이전에만 해도, 몬스터의 수준이 높아지며 클랜원들이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하지 못했었는데, 이하늘이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 이후로는 전투력이 놀랍도록 상승하였다.
그리고 클랜의 진형에서 벗어나 눈에 띄는 활약을 하고 있는 인물이 셋 있었다.
서거걱-!
유서아.
그녀가 오크들 사이를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며 갑옷의 작은 틈새 사이로 검을 밀어 넣고 있었다.
고창석이 만들어 준 유서아 전용 쌍검은 놀랍도록 예리했기에, 검이 움직일 때마다 초록 피가 갑옷 사이로 뿜어져 나왔다.
물론, 이것만으로 글로리 오크를 쓰러트릴 수는 없었다. 갑옷 사이로 검을 내지르는 만큼, 깊은 상처를 내기는 어려웠으니까.
하지만.
-플레이어 유서아가 '타란튤라의 독니'를 사용합니다.
"꾸륵!"
유서아의 전투 스타일은 전보다 한층 더 강해져 있었다.
그녀의 공격에 당한 오크들은 맹독에 당한 것처럼 거품을 물고 자리에서 쓰러졌다.
타란튤라의 독니.
성좌, 바알에게서 받은 힘으로, 강한 일격보다는 빠른 공격으로 적을 제압하는 유서아에게 놀랍도록 잘 어울리는 힘이었다.
유서아가 오크 사이를 휩쓸고 지나가자.
퍼엉!!
그 뒤로 오크 두 마리의 몸통이 터져 나갔다.
분명 갑옷은 부서지지 않았는데, 그 내부에 있던 오크의 몸만이 터져 나간 것이다.
그리고 그 앞으로는, 주먹을 굳게 쥐고 있는 강한철이 자리 잡고 있었다.
-플레이어 강한철이 '진군(進軍)'을 사용합니다.
이 역시 강한철이 새로 얻은 힘. 아니, 새로 깨달은 힘이었다.
세운과 함께 오우거를 사냥하며 대지가 아닌 적의 몸에 격진의 힘을 욱여넣은 순간 깨달은 '개전'의 새로운 공격 방식.
그 힘 덕분에, 적의 장비에 상관없이 내부에 직격을 날릴 수 있었다.
진군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강한철이 앞으로 발을 내디딜 때마다 오크들의 몸이 거칠게 터져 나갔다.
오로지 혼자서, 천천히 발을 움직이고 있지만, 그 움직임은 흡사 하나의 군대가 움직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 와중에 강한철의 반대편에서는 당황한 오크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취익! 내 무기! 내놔라!"
"감히 신성한 황금성의 징표를! 인간, 멈춰라!"
"미꾸라지 같은 인간! 잡히기만 하면 두 손부터 잘라 주겠다!"
무기, 증표, 갑옷의 이음새 등. 뭔가 하나씩 부족해 보이는 오크들이 인간 하나를 뒤쫓고 있었다.
인간의 정체는 바로, 자칭 세운의 오른팔. 박정필이었다.
"잡을 테면 잡아보든가! 어익후, 이건 또 뭐야? 제법 비싸 보이는데?"
"취익! 그건 안 된다! 그것만은 안 된다!"
품에 넘칠 정도로 많은 아이템을 들고 오크 사이를 뛰어다니고 있는 박정필.
그는 많은 아이템을 들고 있어 움직임이 어리숙해 보였는데, 그런데도 움직임이 느려지기는커녕 그 와중에도 새로운 아이템을 훔치고 있었다.
수십의 오크가 박정필을 잡기 위해 달렸지만, 누구도 그를 잡지 못했다.
-플레이어 박정필이 '스리슬쩍'을 사용합니다.
이 역시 박정필이 자신의 성좌인 발레포르에게서 받은 능력이었다.
전투에 관련된 능력은 아니었지만, 그 누구보다 훌륭하게 오크들의 전투력을 무효화시키고 있었다.
그 외에도 쌍둥이 자매의 공성 병기나, 백현의 스켈레톤 등. 다양한 이들이 눈에 띄는 활약상을 보이고 있었다.
튜토리얼 네 번째 장에서 가장 강력한 성채, 황금성.
탑의 역사 속에서도 점령된 적이 손꼽히게 드물다던 그곳에서, 세운의 클랜은 훌륭하게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비록 전투가 길어짐에 따라 체력이 빠르게 빠져나가고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믿고 있었다.
"형님, 빨리 끝내주십쇼오!"
이대로 버티다 보면, 세운이 성주를 물리치고 황금성을 점령해 주리라는 걸 말이다.
* * *
"...결국, 여기까지 도착하였나."
내성의 중심.
골든 나이츠가 지키고 있던 계단을 오르니, 황금으로 만들어진 듯이 번쩍이는 왕좌 위에 오크 하나가 자리 잡고 있었다.
골든 나이츠만 하더라도 충분히 강력해 보였는데, 저 녀석은 그와도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강한 기백을 뽐내고 있었다.
"적이지만, 한 명의 전사로서 그대를 인정하고 있다네."
그가 왕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오묘한 금빛을 일렁이던 다른 오크들의 장비와는 다르게 그가 입고 있는 갑옷은 정말 황금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였다.
조명에 비춰 반짝이는 갑옷을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아플 지경이었다.
"나는 이 고결한 황금성의 성주. 용맹한 글로리 오크들의 왕. 골드 가든이다."
"...정세운이다."
비록 튜토리얼의 몬스터일 뿐이지만, 세운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그에게서는 다른 몬스터와는 다른 무언가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철컥.
가든이 왕좌의 옆에 기울어져 있던 무기를 쥐어 들었다.
할버드. 기다란 창에 도끼의 머리가 달린, 도끼 창이라고도 불리는 무기였다.
2m가 넘을 듯이 길고, 도끼날 때문에 무게도 꽤 무거울 것 같았지만, 가든은 너무나도 가볍게 할버드를 집어 들었다.
황금색 도끼날이 갑옷과 어우러지며 더욱 찬란한 빛을 내뿜었다.
"지친 적을 상대하는 건 전사로서 내키지 않지만."
세운 역시 검 하나를 꺼내 들었다.
앞서 털었던 성주의 무기 중 하나였다.
마음 같아서는 마몬에게 뒤랑달을 돌려받고 싶었지만, 반응이 없는 것을 보니 쉽고 넘겨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뭐, 그래도 상관없다. 뒤랑달이 있으면 전투가 한결 편해지긴 했겠지만, 지금도 그를 쓰러트릴 자신은 충분했으니까.
"황금성의 성주로서, 나는 그대를 쓰러트려야만 한다."
쿵!
가든이 땅을 박찼다.
그의 공격에서 방어란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공격. 적을 베고, 찌르고, 짓뭉개기만을 위한 움직임이었다.
'아마, 저 갑옷을 믿고 있는 거겠지.'
황금 갑옷. 최소한 B급 이상으로 보인다.
거기에 성의 능력인 받는 데미지 감소 효과까지 더해지면, 어지간한 공격 따위는 그에게 통하지 않을 것이다.
후웅!
세운이 자세를 숙이자, 그 바로 위로 황금 도끼날이 스쳐 지나갔다.
묵직한 풍압으로 인해 머리칼이 휘날렸다.
"황금성을 가지려는 자. 자격을 증명하여라."
챙!
가든의 공격은 지금까지 상대한 몬스터들과는 전혀 달랐다.
완벽한 무기술.
단순히 할버드의 날로만 공격하는 게 아니라, 창대를 짧게 잡아 빠른 공격을 섞어 넣거나 태클을 날리기도 한다.
이런 모습을 보며 누가 가든이 평범한 몬스터라고 생각할까?
지능, 지식, 기술 등. 모든 게 어지간한 플레이어보다 나아 보였다.
캉, 카앙!
세운이 공격을 피해 가든의 품에 파고들었지만, 공격이 통하지 않았다. 갑옷의 약점이라 할 수 있는 갑옷의 틈새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빈틈을 보았다 싶어 검을 휘두르면, 가든이 재빨리 자세를 다잡으며 되레 반격을 해 왔다.
외성과 내성을 지나, 골든 나이츠를 상대하며 몸 상태가 안 좋았기 때문? 아니다. 그와는 별개로, 가든이 강한 것이다.
-흑탑의 묘리에 따라 '다크 플레어'의 위력이 강화됩니다.
콰륵!
때문에 세운은 검은 불꽃을 토해내며 가든을 멈추려 해 보았지만.
"황금 갑주의 앞에서, 부정한 불길은 통하지 않는다."
치익-
가든의 갑옷이 번쩍이자 검은 불꽃이 거짓말처럼 사그라들었다.
애초에 불꽃의 특성이 적어 어지간한 방법으로는 절대 꺼지지 않는 공격이었는데. 과연, 그가 방어를 등한시하는 이유가 있었다.
"미안하지만, 내가 여유를 부릴 시간이 없어서 말이야."
-내공을 통해 혈랑검법의 제삼 초식, 혈랑습격(血狼襲擊)이 강화됩니다.
카앙!
세운의 몸에서 붉은 기류가 일렁이며 튀어나온 늑대 한 마리가 가든의 할버드를 물어뜯었다.
단전의 내공을 전부 쏟아부은 일격.
덕분에 가든의 할버드가 아래로 튕겨 나가며, 바닥에 박혀 들어갔다. 그래도 가든은 당황하지 않았다.
"아직 자격이 부족하다."
콱!
가든이 반대편 손으로 다가오는 세운의 검을 쥐었다.
황금 갑주와 연결된 건틀릿 덕분에, 상처를 입은 건 가든의 손바닥이 아닌 세운의 검이었다.
검이 그의 악력을 견디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려왔다.
그때.
"자격 따위, 쟁취하면 그만이다."
툭.
세운이 검을 놓았다. 그러고는 허리춤에 꽂혀 있던 어금니 단검을 꺼내 들었다.
"그런 무기로는 황금 갑주에 생채기도 내지 못할 것이다."
어금니 단검. 분명 좋은 무기지만, 그것도 튜토리얼 초창기 때의 이야기다.
세운이 가진 아이템 대부분이 C급을 넘어가기 시작한 지금. D+급의 어금니 단검은 강한 편에 속하지 않는다.
게다가 상대는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고 있으니, 단검으로 타격을 입히는 건 불가능했다.
다만.
"그래, 이걸로는 부족하겠지."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왕의 성검, 카른웨난 ]
- 엑스칼리버, 롱고미안트와 함께 아서왕의 삼종 신기 중 하나로 알려진 무기로써 '하얀 칼자루'라는 뜻을 지닌 단검.
카른웨난.
아서왕이 동굴 속에 사는 마녀 오르두를 단칼에 쪼개어 반으로 갈렸다고 알려진 무기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제 58화
58. 제58화
"그건...?"
가든도 단검의 변화를 눈치챘는지 눈을 크게 떴다.
하얀 칼자루라는 뜻을 가진 이름답게, 카른웨난의 힘이 깃든 어금니 단검이 새하얀 빛을 내뿜었다.
그 빛이 어찌나 강한지, 가든이 입고 있던 찬란한 황금 갑주의 빛을 가뿐히 집어삼키고 있었다.
가든의 본능이 외쳤다.
당장 피해야 한다고. 저 새하얀 검은, 황금 갑주로도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하지만, 그의 도끼는 바닥에 박혀 있었고 반대 손은 세운이 놓아 버린 검을 쥐고 있었다. 남은 빈손으로는 결코 저 검을 막을 수 없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도망.
무기를 포기하고, 등을 돌려 바닥을 구른다면 잘하면 목숨 정도는 부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아....'
가든은 움직이지 않았다.
경고를 왱왱 울려대는 본능과 정반대로, 그의 이성은 이 자리에서 도망칠 생각 따위가 티끌만큼도 없었다.
전사가 어찌 무기를 놓고 등을 보이랴? 용맹한 글로리 오크의 이름으로 그것만큼은 스스로도 용서하지 못할 행동이었다.
하물며 그는 모든 글로리 오크의 왕.
전사의 신념을 굽힐 수는 없었다.
게다가.
"진정한... 왕의 자격이구나."
새하얗게 빛나는 카른웨난을 보면서, 가든은 자신이 찾고 있던 자격을 찾아내고 말았다.
진정한 왕의 기품. 용맹한 전사의 의지.
카른웨난에서는 이 모든 것들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렇게 일순간의 정적이 찾아온 후.
파앗!
세운의 팔이 움직이며, 하얀 섬광이 종으로 그어졌다.
그의 예상대로, 황금 갑주는 카른웨난을 막아 내지 못했고 갑옷과 함께 가든의 몸이 반으로 갈라지며, 전투가 끝이 났다.
-황금성의 성주, '골드 가든'을 처치하였습니다.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개인 공적치가 100,000point 상승합니다.
-황금성의 성주를 혼자서 처치하여 개인 공적치가 추가로 100,000point 상승합니다.
-'골든 할버드'를 획득하였습니다.
-'영광의 황금 갑주'를 획득하셨습니다.
파스스-
세운이 고개를 내려 사라져가는 어금니 단검을 바라보았다.
고창석이 처음으로 만들어 준 무기.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튜토리얼의 초창기에 얻고 뒤랑달을 마몬에게 넘긴 덕에 가장 많이 손에 익은 무기였다.
그런 무기가 사라진 것은 너무나도 아쉽지만.
'언제까지고 사용할 수는 없으니까.'
세운의 목표는 튜토리얼이 끝이 아니다.
회귀 전에 도달했던 92층. 거기서 더 나아가, 탑의 최상층에 도달한 후 아우터들을 막아 내는 게 최종 목표였다.
최소 뒤랑달과 같은 신화급 아이템이 아니라면, 계속 가져갈 수는 없었다.
-'골드 가든'를 포식하였습니다.
-양분을 흡수하여 모든 능력치가 10 상승합니다.
폭식의 어금니가 가든의 몸을 황금 갑주와 함께 으적으적 씹어댔다.
쿵!
가든의 몸과 함께 갈라졌던 황금 왕좌가 쓰러지는 것을 마지막으로.
-최후, 최강의 요새 '황금성'을 완벽하게 공략하였습니다.
-놀라운 업적을 달성하였습니다.
-보상으로 개인 공적치가 50,000point 상승합니다.
-성주를 쓰러트림으로써, 황금성의 왕좌를 획득합니다.
-튜토리얼 다섯 번째 장이 진행되는 동안, 황금성이 당신의 클랜 소유가 됩니다.
[ 튜토리얼 네 번째 장 – 공격 ]
-과제를 훌륭하게 수행하였습니다.
-공성전에서 살아남은 모든 인원에게 50,000point를 제공합니다.
-축하드립니다! 튜토리얼 네 번째 장을 훌륭하게 끝마쳤습니다!
-최후, 최강의 요새를 점령하여 참가 중인 모든 인원에게 50,000point를 추가로 제공합니다!
짧지만 강렬했던 공성전에 막이 올랐다.
* * *
튜토리얼 관리소.
튜닝은 어찌나 다급했는지 전화가 아닌 머리카락으로 직접 팀장실까지 달려온 부하 직원과 함께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황금성. 탑의 길고 긴 역사 속에서도 점령된 적이 극히 드물었던 최강의 요새.
그곳이 세운의 클랜에게 점령되고 있었다.
"티, 팀장님. 이거 어떻게 합니까?"
"뭐가."
"황금성 말입니다! 다른 성좌들이 분명 따지고 들 게 분명합니다!"
튜닝도 부하 직원의 말을 이해하고 있었다.
세운의 클랜이 황금성을 찾아내고, 이렇게나 빨리 공략할 수 있었던 이유? 그중 하나가 바로, 튜닝이 저들에게 지급했던 '튜토리얼 패스권' 덕분이기 때문이다.
성좌 중에서는 분명 패스권을 빌미로 책임을 따질 이가 있을 것이다.
왜 자신의 유망주에게는 패스권을 주지 않았냐며. 이건 불공평하지 않냐고.
세 번째 구역에서 자신들의 유망주를 위해 세운을 미리 보낸 것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말이다.
하지만, 튜닝의 반응은 이전과 달랐다.
"너는 그 유망주라는 꼬맹이들이 황금성을 점령할 수 있었을 것 같냐?"
"네? 아니, 그건 어렵겠지만...."
"패스권이고 뭐고. 역사를 통틀어서도, 황금성을 점령한 플레이어는 한 명뿐이었어. 특히, 인간이 공략한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그거야 저희 생각이잖습니까! 성좌들이 막무가내로 덤벼들면...."
"너, 저 플레이어를 지켜보는 성좌가 누군지는 알고 말하는 거냐?"
"그것까진 못 보았습니다만...."
"마계를 아우르는 칠대 마신 중 하나. 탐욕의 마신, 마몬이다."
"...마몬이라고요?"
부하 직원은 순간 얼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마몬이 누구인가? 악신의 진영을 다스리는 거대한 축으로, 그 어떤 성좌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강대한 마신이다.
다만, 부하 직원이 놀란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니었다.
"칠대 마신 대부분은 계약자를 두지 않는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그래, 그게 문제라는 거지."
기본적으로 탑의 하층에 관심이 많고 유흥을 즐기는 선신들과는 다르게, 악신들은 탑의 하층에서 벌어지는 일에 거의 관여하지 않는 편이다.
물론, 자신의 계약자에 관해서라면 관여를 하기야 하겠지만 앞에도 말했다시피 그들이 플레이어와 계약하는 일은 거의 없었으니까.
하물며, 탑에 도착도 하지 못한 튜토리얼의 플레이어라면 더하다.
아무리 유명한 플레이어가 있어도, 시선조차 주지 않는 게 악신들이다.
"그런 마신이, 두 명이나 붙어 있다."
"네? 마몬 외에 어떤 마신이...."
"폭식의 마신, 베엘제붑."
"그럴 리가!"
"끝이 아니다. 바알, 아가레스, 가미긴, 마르바스, 발레포르 등. 지옥의 72 마왕 대부분이 저 클랜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
이건 튜닝도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정보였다. 이번 튜토리얼은 유난히 성좌들의 관심이 많아 유망주들을 관리하기에도 바빴으니까.
그 때문에 세운의 클랜을 조사하는 순간, 튜닝은 충격과 공포에 빠져야만 했다.
만약, 다른 성좌들의 눈치를 보며 세운에게 불이익을 줬더라면?
역사상 처음으로, 관리소에 마신의 항의가 접수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알겠지? 유망주라고 해 봐야, 그중에서 마신의 격에 다다르는 성좌가 얼마나 있어?"
"거의... 없죠."
"그래. 지금은 그 꼬맹이들을 신경 쓸 때가 아니야."
튜닝이 펜을 꽉 붙잡으며 모니터 속의 세운을 바라보았다.
인간. 그것도 지구라는 마법도, 초능력도 없는 평범한 차원에서 굴러들어온 인간이, 튜토리얼에 엄청난 충격을 불러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튜닝은 본격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부터 특별 전담팀을 꾸린다. 정세운. 저 플레이어의 클랜을 철저하게 조사하고, 분석하도록."
"네, 네! 알겠습니다!"
저 인간이 곧 탑에 엄청난 파급 효과를 불러일으키리라는 걸.
* * *
"다들, 고생하셨어요!"
"수고하셨습니다!!"
황금성의 점령이 끝난 후.
성을 정리하고, 짐을 옮기가 보니 벌써 해가 져가고 있었다.
다들 지칠 법도 한데, 승리의 기쁨 때문인지 모두의 얼굴에는 미소가 만연하게 피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게, 황금성을 공략하면서 단 한 명의 사상자도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부상자는 꽤 여럿 있었지만, 클랜의 치료사, 이하늘 덕분에 어지간한 상처는 금방 치료할 수 있었다.
"다들 오래 기다리셨어요!"
"밥이다!"
"성의 창고에서 괜찮은 식재료랑 조미료를 찾아서, 오랜만에 제대로 된 요리를 준비해 봤어요! 양은 충분히 있으니, 얼마든지 드세요!"
"와아!"
기다리고 기다리던 식사 시간.
메뉴로 나온 것은 평소와 같은 통구이 고기나 나무 열매로 간신히 간을 맞춘 고기 스튜 따위가 아니었다.
멧돼지의 고기를 사용해 만든 쫄깃한 불고기나 부드러운 갈비찜. 칼바람 수리의 고기를 사용해 만든 매콤한 닭볶음탕 등.
갖가지 자극적인 요리가 눈앞에 가득했다.
"이게 대체 얼마 만에 먹는 제대로 된 요리야!"
"잘 먹겠습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오크의 다리를 뜯으면서도 당신의 밥상에 군침을 줄줄 흘립니다.
다들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음식을 재빨리 집어 들었다.
지금까지도 배를 곯은 적은 없었지만, 이렇게 제대로 된 요리는 튜토리얼을 시작한 후 처음이었으니까.
다만, 세운이 주목한 건 요리의 맛보다는 요리에 깃들어 있는 힘이었다.
'이거, 보통 요리가 아니네.'
그 증거로, 세운이 갈비찜 하나를 뜯어 먹는 순간.
-미정표 특제 찜닭을 섭취하였습니다.
-하루 동안 이동 속도가 10% 상승합니다.
-하루 동안 민첩이 5 상승합니다.
꽤 뛰어난 버프가 걸려 왔다.
'아무리 요리에 대한 고유 스킬이 있다고 해도, 이렇게 실력이 빠르게 증가하려면....'
성좌의 영향을 받은 게 분명하다.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들어보니, 역시나 그녀의 위로 성좌의 메시지 하나가 떠올라 있었다.
-성좌, '기괴한 별자리'가 음식 냄새를 맡으며 만족스럽다는 듯이 빛을 반짝입니다.
기괴한 별자리. 서열 10위의 마왕, 부에르였다.
주로 약초의 지식이나 정신 계열의 능력 등을 가지고 있다고 알고 있었는데, 그가 요리에도 관심을 가질 줄은 몰랐다.
주위를 둘러보니, 그 외에도 마왕들이 관심을 표하고 있는 클랜원이 제법 많았다.
'그만큼 전력이 강해졌다는 거지.'
세운으로서는 충분히 만족스러운 상황.
그 때문에 오랜만에 아무 걱정 없이 제대로 된 식사를 즐길 수 있었다.
그러던 중, 박정필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주목! 흐흐흐, 다들 이게 뭔지 보입니까?"
뽕!
무언가 따는 소리와 함께, 코를 찌르는 과일 냄새가 퍼져 나갔다.
단순한 과일 냄새가 아닌, 긴 시간 동안 숙성되고 발효된 이 냄새. 굳이 마셔보지 않아도, 대부분 그 정체를 바로 알 수 있었다.
"술?"
"진짜 술이야?"
"꿀꺽...."
황금성을 점령하자마자 가장 먼저 창고에 들렀던 세운도 찾아내지 못한 것인데. 저걸 어디서 어떻게 찾아낸 건지, 감도 안 잡혔다.
하지만, 다들 술을 눈앞에 두고도 선뜻 손을 뻗지 못했다.
뭔가 싶어 살펴보니, 대부분 세운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내가 너무 빡빡하게 굴긴 했지.'
사람들을 이끌고 지휘하는 건 유서아지만, 실질적으로 클랜의 방향을 정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건 언제나 세운이었다. 그 때문에 모두가 세운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다.
평소라면 세운도 다음 날을 위해서 술은 자제하라고 말했겠지만.
'당분간은 몬스터와 싸울 일이 없을 테니까.'
오늘만은 달랐다.
-탐욕(眞)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사막의 이슬 ]
- 대륙의 서부, 드넓은 사막 지대를 다스리는 아스웬 왕국에서 자랑하는 특산물. 도수가 매우 강하고, 사막과도 같은 뜨거운 열기를 품고 있는 술이다.
"그걸로 되겠어? 부족하면 언제든 말해."
"크으, 역시 형님이십니다! 다들 건배!"
"건배!"
다들 고생한 만큼, 하루 정도는 마음 놓고 쉬어도 괜찮으리라.
세운은 오랜만에 다급함을 집어던지고, 제대로 된 마음의 휴식을 즐길 수 있었다.
제 59화
59. 제59화
세운이 회귀를 한 후.
그러니까, 튜토리얼이 시작된 후로 처음으로 다들 마음 놓고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성문이 부서져 있긴 했지만, 이곳 황금성은 그 어떤 몬스터의 침입도 걱정하지 않아도 됐으니까.
게다가.
-'튜토리얼 다섯 번째 장 – 방어'까지 남은 시간 62시간 10분
시스템마저 당분간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알려주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남은 시간 동안 놀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튜토리얼의 마지막 장, 방어.
마지막인 만큼 위험도도 높고, 그만큼 공적치를 획득할 기회도 많은 장이니까.
"이해했어요. 성을 수리하고, 방어를 보강하면 된다는 거겠죠?"
"응. 방어라는 이름만 봐도 어떤 느낌일지 알 것 같잖아?"
"네. 사람들한테 말해 둘게요. 시간도 많으니 충분히 준비할 수 있을 거예요."
"좋아."
상의를 마친 유서아가 밖으로 나가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다들 튜토리얼에 익숙해져 있었기에, 성을 수리하고 방어를 보강하자는 힘든 제안에도 인상을 굳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처럼.
하나같이 역할을 분배하며 자기 일을 찾아갔다.
"그럼 저도."
"아뇨. 백현 씨는 만티코어의 사체에 집중해 주시죠."
"다들 성을 복원하느라 바쁜데 저만 그럴 수는 없죠."
"백현 씨는 만티코어의 사체에 집중하는 게 전력 상승에 더 큰 도움이 돼요. 다른 사람들한테도 말해 놨으니까, 성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알겠습니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까지, 꼭 성공해 보이겠습니다."
"좋습니다."
백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만티코어의 사체를 다루었다.
덜컹거리는 마차 위에서도 꽤 빠른 성장을 보였던 그였으니, 성에서 온전하게 집중을 할 수 있으면 그 속도는 훨씬 빨라질 것이다.
만약, 백현이 정말로 다섯 번째 튜토리얼 전에 만티코어를 일으킬 수 있다면.
'튜토리얼 따위, 문제도 안 되겠지.'
어쩌면, '그것'을 다시 한번 보게 될지도 모른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세운이 회귀 전 마지막 보스 몬스터를 쓰러트리고 보았던 희미한 윤곽의 정체.
그 누구도 믿어주지 않았지만, 세운의 고유 스킬인 '여정의 지침표'가 가리켰기에 거짓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그것.
당시 상황이 너무 혼잡했기에 그것이 나타나는 조건이나 위치 등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지금이라면 어떻게든 그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사람들을 도와 성을 보수하러 나가기 전, 세운은 자신의 상태를 먼저 확인해 보았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적을 상대하기 전에 자신에 대해 파악하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었으니까.
[ 상태창 ]
이름 : 정세운
레벨 : 17
칭호 : -
근력 : 122 민첩 : 96
체력 : 99 지력 : 92
잔여 능력치 : 6
고유 스킬 : 탐욕의 권능, 폭식의 권능
스킬 : 십로담퇴, 놀의 들창코, 하멜가 장검술, 하이 오크의 힘줄, 카샤의 불씨, 블루 마나 서클, 파이어 볼....
마지막으로 상태창을 확인하고 잔여 능력치를 분배했던 게 황금성을 공략하기 직전이었다.
황금성의 성주, 가든을 쓰러트리고 레벨이 두 번이나 오른 덕에 새로운 잔여 능력치가 생겨나 있었다.
'능력치는 내가 봐도 놀랍네.'
모든 능력치가 100에 다다르기 직전이었다.
그중에서도 근력은 100을 가뿐히 넘은 지 오래였다.
아무래도 튜토리얼의 세 번째 구역에서 굶주린 오우거들을 사냥하고, 최후에는 놈들의 수장이었던 '크락 카틀락'을 사냥한 덕이 큰 듯했다.
'이게 다 폭식의 권능 덕분이지.'
-성좌, '배고픈 왕자'가 당신의 반응을 보며 어깨를 으쓱거립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밥만 잘 차려준다면 대가는 얼마든지 치르겠다며 호언장담합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그러고 보니 슬슬 밥 먹을 시간이 된 것 같다며 눈치를 줍니다.
생색을 부리는 베엘제붑의 메시지를 가뿐히 무시한 후, 세운은 다음 정보를 확인하였다.
바로, 공적치.
튜토리얼 네 번째 장 이후부터는 전과 같은 '클랜 내 랭킹'이 아닌 '튜토리얼 전체 랭킹'으로 순위가 집계된다.
지금까지 온갖 히든 피스를 찾아다니고, 난관들을 가뿐히 넘어왔기에 걱정은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튜토리얼에는 워낙 괴물 같은 플레이어가 많기에 조금은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개인 공적치 랭킹
[ 1위 : 정세운 740,080point ]
[ 2위 : 리엘 리프레인 451,220point ]
[ 3위 : 첸 400,080point ]
[ 4위 : 아이언 티스 388,570point ]
[ 5위 : 칸 체이스 비바체리아 388,560point ]
…
[ 24위 : 강한철 311,000point ]
[ 25위 : 유서아 309,550point ]
하지만, 공적치 랭킹을 확인하는 순간 세운의 걱정은 가볍게 날아갔다.
2위와의 차이가 무려 대략 30만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공성전을 마친다고 해도, 이 차이를 메꾸기는 힘들겠지.'
리엘 리프레인. 본래 튜토리얼에서 1위의 자리를 거머쥐는 플레이어였다.
튜토리얼이 시작하면서부터 성좌의 지원을 받아 1등을 약속받은 채로 여기까지 달려왔을 텐데, 아마, 공적치 랭킹을 확인하는 순간 꽤나 많이 당황했을 거다.
'강한철이랑 유서아. 저 정도면 훌륭하네.'
솔직히, 튜토리얼이 진행되는 와중에 대부분의 공적치를 세운이 독점하다시피 했다.
때문에 둘의 공적치는 상대적으로 낮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무려 24위와 25위를 차지하였다.
게다가 아직 가장 많은 공적치를 획득할 수 있는 튜토리얼의 다섯 번째 장이 남아 있었기에 순위는 충분히 역전이 가능했다.
'다음은 아이템인데....'
아이템 쪽은 일일이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먼저, 고블린 부락에서 획득했던 장비들. 대부분 E급의 아이템이었지만, 일회용으로 사용하기에는 충분한 성능이었다.
다음으로 다섯 개의 성채를 털며 획득한 장비들은 D급의 아이템이 대부분이었는데, 그중에서도 성주에게서 훔쳐낸 다섯 개의 아이템은 C급을 넘어갔다.
어금니 단검이 사라진 지금, 세운이 가장 자주 사용하게 될 무기들이기도 했다.
그 외에도 오우거의 수장을 사냥하고 얻은 도끼나, 판을 상대하며 얻은 악기, 골드 가든을 쓰러트리고 얻은 할버드 등.
세운에게는 수를 세기 힘들 정도로 많은 아이템이 있었다.
아공간 주머니가 아니었다면, 가지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힘이 들었을 게 분명하다.
'이 중에 몇 개는 나눠주든가 해야겠는데.'
아공간 주머니의 용량에도 한계가 있다. 게다가, 아무리 세운이라고 해도 이 모든 아이템을 동시에 사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탐욕의 권능을 사용하기 위해서라도 많은 무기가 필요한 건 맞지만, 지금은 그걸 생각하더라도 포화 수준이었다.
그렇다고 장비를 나눠주기 위해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다닐 수도 없는 노릇.
클랜원들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유서아에게 찾아갈까 했지만....
"서아 씨, 이건 어디에 둘까요?"
"왼쪽 창고에 쌓아 주세요. 식량은 오른쪽 창고에 부탁드려요."
"언니! 수성 병기 몇 개 구상해 봤는데, 봐줄 수 있어?"
"물론이지. 아, 일중 씨는 성벽 위의 상태 좀 점검해 주시겠어요?"
"네, 그러죠."
그녀는 리더로서 사람들을 지휘하느라 바빴기에 이 이상으로 짐을 짊어주기는 싫었다.
그러던 중, 세운은 괜찮은 방법이 떠올라 발걸음을 돌렸다.
캉, 캉!
"어르신."
"오, 왔나? 뭐, 수리라도 맡기려는 겐가? 아니면, 제작?"
고창석. 클랜의 유일한 대장장이로서, 클랜의 모든 장비 제작이나 수리를 맡고 있다.
저번에는 쌍둥이 자매와 협력하여 공성 무기를 만들기도 했었지.
실력도 실력이지만, 서열 28위의 마왕 '베리스'의 계약자인 만큼 그가 손을 댄 아이템은 어지간한 탑의 대장장이 이상으로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지금도 이전에 얻은 몬스터의 소재로 다양한 장비들을 만드는 중이었다.
그런 고창석의 앞으로.
우르르-
세운은 미리 정리해 둔 아이템을 쏟아부었다.
"이건 뭔가?"
"제게 필요 없는 아이템들입니다."
"오호."
"필요한 사람들한테 나눠주시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분해해서 장비를 만들 때 사용하셔도 되고요."
"재료로 사용하는 건 언제든 환영이지만, 나눠주는 건 나보다 서아, 그 아이가 낫지 않겠나?"
"장비를 보는 눈이나, 그에 맞는 사람을 보는 눈은 어르신이 더 뛰어나실 것 같아서요."
"허허, 칭찬 고맙구먼. 내 신경 써 보도록 하지."
"부탁드립니다."
세운은 그 외에도 지금까지 얻었던 다양한 소재들을 고창석에게 넘겨주었다.
역시 대장장이는 대장장이인지, 그는 소재를 보자마자 눈을 크게 뜨며 곧바로 망치질에 들어갔다.
"다음은...."
세운이 햇살에 비춰 금빛으로 반짝거리는 갑옷 하나를 꺼내 들었다.
영광의 황금 갑주.
골드 가든을 쓰러트리고 얻은 갑옷으로, 무려 B급에 해당하는 뛰어난 방어구였다.
당연하게도 성능 역시 엄청났다. 근접형 전사가 보았다면, 누구라도 욕심을 부릴 만한 뛰어난 갑옷이다.
탑에 들어가서도, 하층에서 이 정도 되는 아이템을 구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다만, 문제라면.
'내가 입기에는 안 맞단 말이지.'
황금 갑주가 풀 플레이트 아머. 즉, 전신 갑옷이라는 것이었다.
기본적으로 다양한 무기와 마법을 번갈아 사용하며 적진을 빠르게 휘젓고 다니는 세운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방어구였다.
애초에 세운의 전투 스타일은 방어보다는 회피와 공격에 더욱 중점을 두었으니 말이다.
'나중에 강한철에게 줘야겠네.'
지금 떠올리기로 황금 갑주와 가장 어울리는 이는 강한철이었다.
적의 공격을 몸으로 받아, 더욱 강력한 일격을 날리는 강한철이라면, 황금 갑주의 이점을 충분히 살릴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던 중, 저 멀리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니이임!"
박정필. 세운의 지시로 아침부터 적랑을 타고 나가 주변의 성채를 정찰하다가 이제 막 도착한 듯했다.
"보고."
"넵! 형님이 말씀하신 대로 다른 사람들이 꽤 많이 도착해 있었습니다. 저희처럼 공성전을 하는 곳도 있었구요."
"특이사항은?"
"다들 자기 할 일이 바빠 보여서, 딱히 특이한 건 없었습니다. 아, 근데...."
"근데?"
"클랜 하나가 이쪽으로 오는 것 같았습니다. 아니, 그냥 방향만 그런 것 같기도 한데. 뭔가 영 찝찝해 보이는 놈들이라...."
세운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야 패스권을 통해 미리 도착하여 정찰을 마치고 황금성을 점령했다지만, 이제 막 튜토리얼의 네 번째 장을 시작한 클랜이 이쪽을 찾아올 이유가 뭐가 있을까?
점령할 만한 성을 찾는 거라면, 굳이 여기까지 올 필요가 없었다.
이후에도 박정필의 쉴 틈 없는 보고. 아니, 수다에 가까운 정보를 걸러 듣던 중, 사람들을 지휘하고 있던 유서아가 세운에게 다급하게 달려왔다.
"세운 씨!"
"무슨 일이야?"
"지금, 성문 밖에 사람들이 찾아왔어요!"
성문 밖에 사람들. 아마, 박정필이 언급했던 클랜이리라.
별로 좋지 못한 예감에 세운의 표정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제 60화
60. 제60화
유서아의 보고를 들은 즉시 세운은 성문을 향해 이동했다.
다른 사람들도 소식을 들은 것인지, 잠시 일을 멈추고 성문의 주위에 몰려들어 있었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니, 세운의 공격으로 반파된 성문 밖으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였다.
그 수는, 대략 60. 아니, 성벽에 가려서 안 보이는 사람들을 합친다면 그 이상인 듯했다.
"요구는?"
"아직 별다른 말은 없었어요. 싸울 생각은 없고, 클랜장과 대화하고 싶다는 말뿐이었어요."
"그런데 왜 나를 부른 거야?"
"지금까지 클랜의 방향은 모두 세운 씨가 결정했잖아요. 저도 그걸 존중하고 있구요.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네."
이미 주인이 있는 성채에 찾아오는 플레이어라면 둘 중 하나다.
첫째, 자신들의 힘으로는 성을 점령하기가 힘들거나 싸울 생각이 없어 합병을 요청하는 것이거나.
둘째, 공성전을 진행하며 지친 클랜을 상대로 성을 날로 점령하거나.
보통, 이 두 경우 전부 튜토리얼의 남은 시간이 얼마 없을 때 행해지는 편이다.
'지금은 시기가 너무 일러.'
그렇다는 말은, 저 클랜은 애초에 시작부터 정석적인 공성전을 벌일 생각이 없었다는 뜻이다.
전자일까? 아니면 후자일까?
사실, 둘 다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들이 손을 내밀어 합병을 요청해도, 병력이 늘어나는 이점보다는 불안정한 변수가 생기는 꼴이 될 뿐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세운이 부서진 성문을 넘었다.
그러자 인상 좋게 생긴 남자 하나가 클랜을 대표하며 앞으로 나왔다.
"오! 그쪽이 클랜장이신가 보군요! 인상이 훤칠하신 게, 아주 멋지십니다! 하하!"
"...."
대표의 등장에, 세운의 표정이 더욱 차갑게 굳었다.
남자가 무언가 실수를 저지른 건 아니다. 다만, 세운이 남자의 정체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찰스.'
회귀 전. 튜토리얼의 네 번째 장에 도착했을 무렵, 세운의 클랜은 이미 전멸에 가까운 상태였다.
플레이어가 절반 넘게 죽었고, 남은 사람들도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공성전을 벌여 성을 점령하라? 말이 안 되는 목표였다.
때문에 세운의 일행은 다른 클랜에 들어가는 길을 택했다.
그때 선택한 클랜이 바로 저 남자, 찰스라 불리는 녀석이 다스리는 곳이었다.
찰스를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위선자.'
그래, 위선자였다.
처음에만 하더라도 세운의 일행을 안쓰럽게 여기며 따뜻하게 받아주었지만, 그 뒤는 지옥이었다.
세운의 일행은 노예처럼 부려지며 클랜의 온갖 궂은일을 다 맡아야만 했다.
공성전이 진행될 때도, 가장 앞에 서서 화살받이가 되어야만 했다.
다른 클랜원 역시 찰스의 영향을 받아 세운의 일행을 마구 굴렸었지.
그 때문에 튜토리얼이 끝나자마자, 세운은 그곳에서 탈출해 한동안 숨어 지내야만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
찰스는 사람 좋은 미소를 보이며 세운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찰스 맥그리거라고 합니다. 이제 막 튜토리얼이 시작됐는데, 벌써 성을 점령하시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
녀석은 입을 멈추지 않았지만, 세운은 단 한 마디도 대꾸하지 않았다.
악수 역시 마찬가지.
세운이 손을 마주 잡지 않자, 녀석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경직되었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세운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하하, 이해합니다! 이놈의 튜토리얼, 몬스터는 물론 사람끼리도 믿기 힘드니까요. 특히, 세 번째 튜토리얼은 정말 너무하지 않았습니까?"
"용무는?"
"...하하. 제가 말이 조금 길었군요. 그쪽이 워낙 마음에 들어서,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그런 점 이해 부탁드립니다."
세운의 차가운 반응에 옆에 있던 유서아가 괜히 불안해했다.
그래도 세운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찰스.
악감정을 배제하더라도, 녀석이 가면 뒤에 숨기고 있는 칼의 정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충분히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저희 모두 이전 구역에서 플레이어들끼리의 전투에 신물이 났습니다. 그런 무의미한 전투, 더 이상 벌이긴 싫습니다."
"무의미한 전투라...."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몬스터를 상대하기도 힘든데, 같은 사람끼리 치고받고 싸우라니! 이 얼마나 잔인한 일입니까?"
찰스가 말을 이어 나갈 때, 세운은 자연스럽게 회귀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녀석들이 '노예'를 대하던 태도. 심심하다고 때리는 것은 기본이고, 식용이 가능한지 확인한다며 몬스터의 고기를 생으로 먹이기도 했었다.
마주친 플레이어들이 자신들의 밑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곧바로 무기를 꺼내 들었다.
그런 녀석들이, 저런 말을 내뱉다니.
어이가 없어서 웃음도 안 나온다.
"그래서, 허락만 해 주신다면 그쪽 클랜과 합병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도 성을 점령하느라 피곤하시지 않습니까? 궂은일은 저희가 맡겠습니다."
"일단 저희끼리 의논 좀 해 보겠습니다."
"오, 좋습니다! 아무쪼록, 긍정적인 대답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세운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옆에서 얘기를 듣고 있던 유서아가 대신 대답하며 세운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녀의 심정은 이해한다.
지금은 튜토리얼에 익숙해졌지만, 본래 그녀는 지나칠 정도로 선한 성향이었으니까 평화를 바란다는 찰스의 말에 긍정했을 것이다.
"세운 씨, 어떻게 생각하세요?"
"당연히, 거절이다."
"음, 세운 씨라면 무언가 생각이 있는 거겠지만, 그래도...."
"공적치 랭킹을 확인해 봐."
"공적치 랭킹이요?"
유서아는 잠시 의아해하더니, 곧바로 랭킹을 확인해 보았다.
여태까지 해 온 게 있다 보니, 1위에 당당하게 세운의 이름이 적혀 있어도 별로 놀라는 반응은 아니었다.
하긴, 클랜 내 랭킹에서 튜토리얼 전체 랭킹으로 바뀌었을 뿐, 그녀에게는 세운이 항상 1위였던 건 늘 변함없는 사실이었으니까.
그렇게 랭킹을 읽어내려가던 중,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세운이 자신에게 랭킹을 확인하라고 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 10위 : 찰스 맥그리거 365,120point ]
"10위...?"
"그래. 포인트를 저렇게까지 올릴 방법이 뭐가 있다고 생각해?"
"세운 씨처럼 특별한 무언가를 찾아다니거나, 아니면.... 아, 튜토리얼 세 번째 장."
"맞아. 플레이어 사냥이지."
찰스.
녀석은 세 번째 구역에서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플레이어 사냥을 다녔었다. 그것도 자신보다 약한 플레이어만 철저히 노렸다고 했었지.
"하, 하지만 세운 씨처럼...."
"굶주린 오우거는 나랑 강한철이 거의 다 쓰러트렸어. 아니면, 평화주의라는 놈이 나처럼 히든 피스를 찾으러 돌아다녔을까?"
"...."
세운의 짐작이 틀렸을 수도 있다. 박정필처럼, 세운의 회귀와 함께 무언가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저 찰스란 놈이 마음을 고쳐먹었고 운 좋게 히든 피스를 찾아 높은 공적치를 얻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혹시나' 하는 감정으로 변수를 가져갈 생각은 없었다.
고민을 마친 유서아도 고개를 끄덕이며 세운의 생각에 동의하였다.
"알겠어요. 세운 씨 말대로, 괜한 걱정을 안고 갈 필요는 없으니까요."
대화를 마치고, 다시금 찰스의 앞으로 나섰다.
녀석은 우리들이 당연히 자신들의 제안을 승낙할 것으로 생각하는지 싱글벙글 웃으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결정하셨습니까? 분명,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역시, 사람은 많을수록 좋은 법 아니겠습니까?"
"거절이에요."
"...네?"
세운은 볼 수 있었다. 유서아의 거절에, 찰스의 웃는 얼굴이 미묘하게 깨지고 있는 것을.
앞머리에 가려서 보이지 않지만, 얼굴이 붉어질 정도니 혈관이라도 툭 튀어나와 있을 것 같았다.
"그쪽을 신뢰할 수 없어요. 괜한 불안 요소로 저희 쪽 사람들을 위험에 빠트릴 수는 없으니까요."
"...하하. 이거 참. 기대했던 답변이 아니군요. 후회, 안 하시겠습니까?"
"네, 아직 튜토리얼이 끝나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까 다른 방법을 찾으시는 게 좋을 거예요."
"아쉽지만, 저희는 다른 방법을 찾을 생각이 없습니다."
"네?"
세운이 앞으로 한 걸음 나와 유서아의 앞을 막아섰다.
찰스는 그 반대로 한 발짝 물러서더니,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이 찰스를 둘러싼 채로 한 발짝 앞으로 나왔다.
"정석적인 공성전을 벌이는 것보다는, 이미 전투를 치르느라 지친 플레이어들을 공격하는 게 훨씬 수월하니 말입니다."
"당신, 설마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나요?"
"물론이죠! 원래는 성안에 들어가서 한 번에 죽일 생각이었지만. 뭐, 상관없겠죠."
스릉-
찰스의 수하들이 각자 무기를 꺼내 들었다.
제대로 관리되지 않았는지 무기에는 얼룩덜룩한 혈액이 묻어 있었는데, 몬스터 특유의 초록 피가 아니었다.
붉은 피. 플레이어를 사냥하고 묻은 피가 분명했다.
"어차피 성문도 부서져 있고, 다들 정비하느라 바쁜 것 같으니. 성은 저희가 잘 받아가겠습니다."
"...역시, 세운 씨 말이 맞았네요."
"세운이라. 혹시 저기 저 남자를 말하는 건가요? 그런데 어쩐지 이름이 낯익은.... 흠, 아니겠죠."
찰나의 고민을 마친 후, 찰스가 세운에게 손을 가리켰다.
"치시죠."
"가자!"
"근질근질해서 죽는 줄 알았네!"
"오늘은 다들 배부르게 처먹자고!"
찰스의 수하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성문이 무너져 있었기에, 그들에게 막힘 따위는 없어 보였다.
그 순간, 세운이 누군가의 이름을 외쳤다.
"강한철!"
탓!
성벽 위에서 누군가가 뛰어올랐다.
거대한 덩치 덕분에, 아래로 넓은 그림자가 새겨지며 찰스와 수하들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들려졌다.
그들이 위험성을 감지했을 무렵.
-플레이어 강한철이 '개전(開戰)'을 사용합니다.
콰아아아아앙-!!!
이미 강한철의 주먹이 바닥을 내려찍고 있었다.
"크악!"
"저, 저건 뭐야!"
"무슨 스킬이길래 이렇게 강한 거야!"
강한철의 능력, '개전'은 시전자의 근력에 따라 그 위력과 범위가 결정된다.
안 그래도 강한철의 근력은 오우거와 비견될 정도로 강력한데, 성벽 위에서 뛰어내리며 중력과 가속도의 힘까지 받았으니, 바닥은 정말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크게 휘청거렸다.
바닥이 갈리고, 날카로운 돌덩이가 튀어나왔다.
물론, 상대는 몬스터가 아니라 플레이어.
빠른 대처를 통해 피해를 입은 인원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이것만으로도 상대의 움직임을 방해하기에는 충분했다.
"딱 봐도 일회성 공격이다! 후속 공격은 없어! 다들 움직여!"
"좀 귀찮긴 해도, 문제없다!"
그렇게 외치며, 찰스의 수하들이 갈라지고 튀어나온 대지를 넘어 움직였다.
1m, 2m, 3m.
수많은 몬스터와 플레이어를 상대하며 성장해 왔기에,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부서진 대지를 건널 수 있었고, 그 끝에 달했을 때쯤.
씨익-
바닥에 두 손을 짚은 채 미소 짓고 있는 세운을 마주할 수 있었다.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라바(Lava) ]
- 화탑의 비전 마법 중 하나로써 끓어오르는 용암을 만들어 낸다. 다만, 단순히 용암을 만들어 낼 뿐, 물리적인 힘이 없어 실전성은 매우 낮다.
부그르르-
세운의 손에서 진득한 용암이 꾸물럭거리며 강한철이 만들어 낸 대지의 틈새 속으로 스며 들어가고 있었다.
연계 공격.
세운은 클랜원들의 힘이 강해질수록 그들과 연계할 수 있는 여러 공격법을 떠올리고는 했다.
제대로 된 연계 공격을 펼칠 수 있다면, 지금 세운이 낼 수 있는 힘보다 훨씬 강한 위력을 낼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지금 선보이는 공격이 바로 그중 하나였다.
강한철이 만들어낸 부서진 대지의 틈새로 용암을 넣은 후.
-흑탑의 묘리에 따라 '브리즈'의 위력이 강화됩니다.
후우우웅!!
그 사이로 바람을 불어 넣으면.
-플레이어 강한철과의 연계기. '끓어오르는 전장(戰場)'이 시전됩니다!
콰아아아앗!
열극분출(裂隙噴出)이라 불리는 화산지대의 재해를 재현하는 게 가능했다.
제 61화
61. 제61화
황금성의 앞.
이곳에는 가히 지옥이라는 이름이 걸맞은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미친, 이게 뭐야!"
"크아아악! 뜨거워!"
"사, 살려줘! 모, 몸이! 내 몸이 타들어 가고 있어!"
쩍쩍 갈라진 대지 사이로 바위마저 녹여 버리는 뜨거운 용암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도망치려 해도, 곳곳에 튀어나온 바위 때문에 이동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방어구? 그따위는, 용암 앞에선 아무런 쓸모도 없었다.
가죽 갑옷도, 철제 갑옷도 용암에 닿는 순간 벌겋게 달아오르거나 이글이글 타올랐다.
공격의 범위 역시 클랜원 대부분을 집어삼킬 정도로 넓었기에, 찰스를 제외하고는 모든 인원이 뜨거운 용암 위에서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용암이 끓어오르고 있는 대지의 바깥에서, 찰스가 넋 나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분명, 상대는 성을 점령하느라 지친 상태였을 텐데.
게다가, 저 성은 무려 A+라는 괴랄한 등급을 가진 성이다. 그만큼 성의 난이도 역시 엄청났을 게 분명하다.
그러니 상대가 강할 줄은 예상했지만, 지치기는커녕 단 일격에 자신의 수하들을 반파 상태로 내몰 정도의 강력함이라니?
"랭커들의 힘이 이 정도였단 말입니까?"
들어주는 이도 없지만, 찰스는 버릇처럼 질문을 반복했다.
그 역시 무려 랭킹 10위의 랭커.
약한 플레이어만 골라서 사냥했다고 해도, 그 역시 세 번째 튜토리얼 구역을 돌아다니며 소위 랭커라 불리는 플레이어들을 만나 보았다.
다만, 상대가 랭커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그는 자세를 숙이고 평화를 주장하며 전투를 피해 왔다.
그 랭커들과 맞붙었으면 지금과 같은 광경이 재현되었을까?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아무리 랭커라고 해도, 이렇게 강한 건 반칙 아닌가?
그 순간, 찰스의 머릿속에 상대 클랜장의 이름이 떠올랐다.
'세운. 세운. ...정세운?'
처음 남자의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무언가 낯익은 느낌이 있었다.
그래도 별거 아닐 거라며 넘어갔었는데,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공적치 랭킹 1위의 플레이어!"
공적치 랭킹. 그 가장 위에 적혀 있었던 세 글자의 이름이 분명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상대를 잘못 골라도 심각하게 잘못 골랐다고.
"자, 잠깐 멈춰 주십시오! 항복! 항복하겠습니다! 저희가 졌습니다!"
"대, 대장!"
"다들 무기 집어넣으십시오!"
찰스의 다급한 외침에 그의 수하들이 입술을 꽉 깨물고 무기를 집어넣었다.
당장 용암이 끓어오르고 있는 와중에, 반격은커녕 무기를 집어넣으라니.
대체 무슨 생각인가 싶었지만, 지금까지 찰스의 말을 들어서 손해 본 적이 없었기에 그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부그르-
찰스의 다급한 외침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단순히 마법의 지속 시간이 다한 것일까?
그의 수하들이 무기를 집어넣자, 터져 오르던 용암이 점차 사그라들었다.
용암이 가라앉은 자리에는, 이미 그의 수하들 절반 이상이 자리에 쓰러져 있었다.
남은 수의 절반은 중상을 입어 전투 불능으로 보였고, 나머지 역시 크고 작은 화상을 입은 채 상처를 부여잡고 있었다.
용암이 멈추지 않았으면 이대로 꼼짝없이 모두 전멸했을 게 분명하다.
"멈춰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감히 랭킹 1위의 플레이어를 못 알아보고 이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찰스가 다급하게 달려가 세운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자존심이고 뭐고 다 필요 없었다. 여기서는 살아남은 게 최우선이다.
아니, 여기서 말만 잘하면....
'랭킹 1위의 플레이어와 한배를 탈 수도 있다.'
이곳이 무슨 세계인지, 튜토리얼을 1등으로 통과하면 어떤 이점이 있는지, 저 멀리 보이는 탑은 어떤 곳인지 아무것도 모르지만.
지구에서 철저한 경쟁주의를 배워 온 그였기에, 1위의 혜택이 엄청날 거라는 건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튜토리얼을 통과한 후가 아니더라도, 최소한 튜토리얼을 진행 중일 때는 최고의 뒷배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저, 찰스. 무슨 일이라도 다 하겠습니다. 제 랭킹은 보셨습니까? 10위입니다! 분명, 세운 님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찰스는 자신에게 남은 모든 수를 꺼내 들었다.
자신의 수하들과 현재 지닌 아이템, 그리고 자신들의 강함.
그러는 중에도 온갖 상황에 대해 계산을 하느라 머리가 팽팽히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
찰스가 아무리 매혹적인 제안을 해도, 세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처음과 마찬가지로, 인상을 찌푸리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 순간, 깨달았다. 이 남자에게 협상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찰스는 다급하게 무릎을 돌려, 세운의 옆에 서 있던 유서아를 향해 머리를 바닥에 박았다.
"살려주십시오! 못 믿으시겠으면, 튜토리얼이 끝날 때까지 팔다리를 속박하셔도 좋습니다!"
그가 방향을 바꾼 이유는 하나였다.
'이 여자는 그래도 마음이 좀 약해 보였다.'
첫 대면에서 세운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유서아가 세운을 설득하기 위해 대화를 나누었다.
찰스 역시 그 장면을 보고 있었기에, 이런 판단이 가능했다.
"저희, 같은 인간 아닙니까? 아까 전의 일은 정말 죄송합니다! 저도 저희 클랜원들을 생각하느라. 피해를 줄이기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이성과.
"그쪽도 클랜을 다루다 보면 아시지 않습니까? 그 누구보다도, 자신의 클랜원들이 소중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감정을 적절하게 뒤섞는다.
그는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 이 말 실력 하나만으로 수많은 사람을 울고 웃게 만들었다.
그러니, 자신이 있었다.
"그렇네요. 맞는 말이에요."
"역시! 분명 이해해 주실 거라 믿고 있었습니다!"
유서아의 대답에, 찰스가 속으로 환호를 내질렀다.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하고 성안으로 들어간다면, 그 이후에 다시 한번 입을 놀려 사람들을 현혹하면 그만이다.
튜토리얼 랭킹 1위의 플레이어를 뒷배로, 아니, 1위를 앞으로 내세워 마음껏 조종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튜토리얼의 실질적인 1위는 자신이나 다름없다.
"당신 말대로, 전 제 클랜이 가장 소중해요."
서걱-
'...어?'
갑자기 저게 무슨 말일까? 그보다, 어째서 세상이 기울어져 가는 것일까?
어서 빨리 그녀를 설득하고 싶었지만, 입을 뻐끔거려도 아무런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가 죽음을 자각했을 때쯤에는, 이미 머리가 바닥에 떨어진 후였다.
툭.
그렇게 찰스의 클랜은 황금성 안에 한 발자국도 딛지 못한 채로 생을 마감하였다.
* * *
'이건 예상 못 했는데.'
유서아의 손에 의해 찰스의 목이 떨어져 나갔다.
튜토리얼이 진행되며 이 잔혹한 세상에 많이 적응했다고는 생각했지만, 이 정도였을 줄이야.
하지만, 문제 될 건 없었다. 유서아가 저러지 않았다면, 세운이 찰스의 목을 베어 낼 생각이었으니까.
"으아아악!"
"도, 도망쳐!"
도망가는 이들은 굳이 쫓지 않았다.
어차피 저들을 쓰러트린다고 해도 세 번째 튜토리얼처럼 공적치를 온전히 획득하지도 못하고, 강한철과의 연계기 '끓어오르는 전장' 덕분에 이미 저들의 상태가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대로 가만 내버려 두어도, 저들이 이번 튜토리얼을 통과할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
"...저, 잘한 거겠죠?"
"네가 안 했으면, 내가 했을 거야."
다만, 유서아의 상태가 멀쩡한 건 아니었다.
손에 힘을 주어 간신히 억누르고 있는 모양이지만, 그녀의 팔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세 번째 구역처럼 무기를 들고 달려오던 플레이어를 공격했던 게 아닌, 목숨을 구걸하던 자의 목을 베어 낸 것이니까.
뭐, 순서가 바뀌었을 뿐, 찰스가 우리를 공격한 건 사실이었지만 말이다.
"들어가자. 좀 쉬어."
"네, 고마워요."
"언니! 괜찮아?"
"잘했어! 보는 내가 속이 다 시원하더라!"
"얼른 들어가자!"
다행히 쌍둥이 자매가 달려와 유서아를 데려가 주었다.
성안에서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 중 유서아에게 뭐라고 말하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방금의 일이 그녀가 자신들을 위험에 빠트리지 않기 위해 선택한 일임을 모두가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사이, 세운은 고개를 돌려 바닥에 쓰러진 찰스와 그 수하들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악연이 이렇게 빨리 정리될 줄은 몰랐네.'
뭐, 악연이라고 해도 회귀 전의 악연일 뿐이다.
게다가, 회귀 전의 더러웠던 기억이지만 놈들하고는 탑에 도착하자마자 연을 끊었었다.
길고 길었던 탑의 기억에 비교하면, 찰스와의 악연은 아주 찰나의 순간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놈을 좋게 볼 생각은 티끌만큼도 없었지만 말이다.
"장비는 내가 잘 써 줄게."
세운은 찰스가 가지고 있던 장비들을 털었다.
플레이어 사냥을 하고 다녔던 만큼, 꽤 쓸 만한 장비들을 착용하고 있었다.
찰스를 포함한 수하들을 시체를 정리할까도 생각했지만.
'본보기로 놔두는 것도 괜찮겠지.'
다섯 번째 튜토리얼이 시작하기 전에, 같은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운 나쁘게 세운을 만나서 이렇게 됐을 뿐. 찰스의 계획은 실용성 면에서 따지면 꽤 괜찮은 전략이었으니까.
다만, 한 가지 해결할 일이 남아 있었다.
-탐욕(眞)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광물수(鑛物樹)의 진액 ]
- 단단한 바위에서만 자라난다고 전해지는 광석과 같이 단단한 나무, 광물수의 진액. 뛰어난 접착 효과를 가지고 있다.
스륵-
진액, 아니, 진액보다는 광석의 가루와도 같은 물건을 성문의 절단면에 펴 발랐다.
광물수의 진액이라 하더라도 본래 저렇게 거대한 구조물을 이어 붙이는 건 어려웠지만, 성문이 워낙 깔끔하게 절단되어 있었기에, 생각보다 쉽게 잘린 성문을 이어 붙일 수 있었다.
"신기하군."
"여긴 지구의 법칙이 통용되는 곳이 아니니까."
"나도 돕겠다."
"그럼 나야 고맙지."
끼이익- 쿵!
완벽하게 이어 붙은 성문을 강한철과 함께 들어 올려 본래의 위치에 끼워 넣었다.
이음부가 고장 나 있긴 했지만, 저 정도야 쌍둥이 자매가 충분히 고칠 수 있을 듯했다.
"아, 그리고 이건 선물."
"...갑옷?"
"고창석 어르신한테 가서 사이즈만 조정하면 될 거야."
"불편할 것 같아 보인다만."
"네 전투 스타일에 딱 어울릴 거야. 불편해도 익숙해지는 게 좋아."
"알겠다."
역시, 강한철. 자세한 이유를 묻지도 않고, 세운의 말에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세운이 강한철을 대하기 편한 이유도 바로 이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처럼 회귀에 대한 걸 숨기느라 머리를 한 번 더 굴릴 필요가 없었으니까.
'자, 그럼....'
-'튜토리얼 다섯 번째 장 – 방어'까지 남은 시간 60시간 02분
튜토리얼의 마지막 장까지 남은 시간은 대략 이틀하고도 한나절.
시간은 충분하다.
몬스터의 공격을 대비하여 수성전의 준비를 마치고....
'그것도 한번 알아봐야지.'
세운조차 확신할 수 없는, 튜토리얼에 숨겨진 미지의 히든 피스를 수색할 시간이 말이다.
제 62화
62. 제62화
모두의 노력 끝에, 황금성은 빠르게 제 모습을 되찾아갔다.
공성전을 치르느라 부서졌던 것들은 완벽하게 수리가 되었고, 고창석 덕분에 장비의 수리 역시 모두 마쳤다.
아니, 황금성에 남아 있던 재료들과 세운이 주었던 장비 덕분에 이전보다 훨씬 강한 장비를 세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세운의 장비 역시 마찬가지였다.
[ 회색 늑대 망토 ]
분류 : 망토
등급 : C-
설명 : 늑대 숲에서 브라운 울프들을 다스리고 있던 그레이 울프의 가죽. 숙련된 장인에 의해 개량을 거쳐 전보다 뛰어난 성능을 지니게 되었다.
능력 : 1. 위압감 – 리더로서의 자격으로 아군에게는 카리스마를, 적에게는 공포를 부여한다.
2. 바람의 축복 – 이동 속도가 15% 상승한다.
3. 은은한 황금빛 – 물리, 마법 방어력이 추가로 10% 상승한다.
[ 붉은 늑대 갑옷 ]
분류 : 갑옷
등급 : C+
설명 : 레드 울프의 가죽에 원숭이 바위산의 개암석을 박아 넣어 만든 징갑옷. 숙련된 장인에 의해 개량을 거쳐 전보다 뛰어난 성능을 지니게 되었다.
능력 : 1. 붉은 늑대의 송곳니 – 공격력이 15% 상승한다.
2. 늑대의 위협 – 착용자보다 약하거나 동등한 몬스터에게 공포를 유발한다.
3. 바위산의 정수 – 방어력과 내구도가 대폭 상승한다.
"어때, 좀 마음에 드나?"
"네, 무척이요."
"허허, 그거 다행이구먼. 창고에 쓸 만한 재료가 있길래 한 번 개량해 봤다네. 수리도 마쳤으니, 당분간은 사용하는 데 문제없을 거야."
"감사합니다."
장비를 착용한 세운이 마음에 드는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본래 D 등급이었던 망토가 C- 급으로. C- 급이었던 갑옷이 C+ 급으로.
등급이 두 단계나 증가한 것답게, 기본적인 방어력은 물론 능력의 효과까지 올라가 있었다.
황금갑옷을 강한철에게 넘겨 아쉬워하고 있었던 상황이었으니, 세운으로서는 무척 만족스러운 상황이었다.
"무기는 괜찮겠나? 단검이 부서진 것 같았네만."
"죄송합니다. 성주를 상대하다 보니."
"허허, 괜찮네. 제대로 된 도구 하나 없이 처음 만들어 본 장비였으니 어쩔 수 없지. 오히려 최후에 걸맞게 사용해 주어서 고맙다네."
다른 무기도 개량을 받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현재 고창석이 개량할 수 있는 건 자신이 직접 만들었던 과거의 장비뿐이었다.
그러니 세운이 몬스터를 통해 얻거나 성주에게 빼앗은 장비들은 개량이 불가능했다.
'뭐, 당장은 충분하니까.'
현재 세운이 가지고 있는 무기들은 대다수가 C급 이상. 게다가 마몬도 복제 작업이 거의 끝났다고 하였으니, 곧 있으면 뒤랑달을 돌려받을 수 있을 것이다.
"정필아."
"넵, 형님!"
타다닷!
세운이 이름을 언급하자, 박정필이 과장된 몸짓으로 후다닥 달려왔다.
다들 일하느라 바쁜데, 이 녀석은 어디서 뭘 하고 있었기에 이렇게 바로 나타난 것인지.
귀찮게 찾을 필요가 없어 편하긴 했지만, 맨날 농땡이를 피우는 것 같아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스켈레톤 좀 빌리자."
"적랑 말입니까? 아유, 형님이 주신 건데 당연히 드려야죠! 적랑!"
타다닷!
반려동물은 주인을 닮는 법이라던가?
마치 세운이 박정필을 불렀을 때와 같이 적랑이 재빠르게 나타났다.
세운이 사용했던 '적토마의 갈기'의 여파 덕에 스켈레톤의 색은 아직까지 선명한 붉은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거기에 백현의 개량을 거친 것인지, 전체적인 모습이 이전보다 섬세하고 날카로워 보였다.
처음에는 '적토마의 갈기'의 힘을 못 버텨 곧 부서지지 않을까 싶었는데.
백현의 개량 덕분에, 지금은 불안정성이 완전히 사라지고 전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머금고 있었다.
"아, 안 그래도 제 운전 실력이 한창 물올랐거든요! 어디든지 말만 해 주십쇼. 제가 편하게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자연스럽게 적랑의 등에 올라타는 박정필. 다만, 세운은 얌전히 그 뒤에 올라탈 생각이 없었다.
"내려."
"...넵?"
"내리라고. 내가 몰고 갈 거니까."
"혀, 형님! 저 한 번만 믿어주십쇼! 진짜, 엉덩이에 굳은살 안 생기게 편안하게 잘 모시겠습니다!"
"적랑. 털어내."
쿵!
"컥!"
박정필에게 위임했다고는 하나, 적랑의 원주인은 어디까지나 세운이다. 당연하게도, 세운의 명령에 적랑이 몸을 탈탈 털어 박정필을 내동댕이쳤다.
애초에 목적지도 모르는 박정필에게 길을 친절히 안내하며 움직일 생각은 없었다.
가죽으로 만들어진 푹신한 안장에 올라탄 세운이 적랑의 머리뼈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가자."
"적랑아! 형니이임!"
지금까지의 정 따위는 신경도 안 쓰이는지, 적랑은 박정필을 뒤로한 채 빠르게 네 다리를 움직였다.
* * *
"우리 적랑, 많이 빨라지지 않았습니까? 마치 제가 예전에 몰던 애마인 포로쎄 부스터 TMG를 떠올리게 하는...."
뒤에서 박정필의 목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려왔다.
제법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기에, 보통 사람이라면 눈을 뜨고 있기도 힘든 상황인데.
그런 상황에서 저렇게 멀쩡하게 입을 나불거리고 있는 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다.
'웬만하면 혼자 오고 싶었는데....'
적랑을 타고 성을 빠져나왔을 때가 떠올랐다.
분명, 적랑은 엄청난 속도로 속도를 내고 있었으나.
'형니이임! 저도 좀 데려가 주십쇼오! 귀찮게 안 할 테니까, 제발요오!'
그에 맞먹는 속도로 박정필이 세운의 뒤를 따라왔다.
멈추지 않으면, 정말 끝까지 따라올 것 같았기에 어쩔 수 없이 뒷자리에 태워 주었다.
그게 바로 지금의 상황이었다.
"이야, 벌써 점령된 성이 제법 보이네요! 바로 전에 정찰했을 때만 해도 몬스터만 가득했는데."
바람을 가르며 달리던 중, 옆으로 저마다 특색 있게 생긴 성들이 눈에 들어왔다.
박정필의 말대로, 상당수의 성 위에 플레이어에게 점령당한 것을 증명하는 깃발이 떠 올라 있었다.
그 외에도, 한창 공성전을 벌이는 중인지 쇳소리가 챙챙 울려대는 곳이나 임시 거점을 꾸리고 전략 회의를 하는 클랜 등 다양한 상황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저 성들, 형님이 들렀던 곳 아닙니까? 전에 정찰할 때 보니까, 제일 먼저 점령됐더라고요!"
박정필이 가리킨 성은 세운에게도 익숙한 곳이었다.
'우뚝 솟은 망루.'
세운이 가장 먼저 침입하여 창고를 털고, 성주의 무기를 훔쳤던 곳이다. 지금도 그 활은 아공간 주머니 속에서 세운의 손길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럴 만하지.'
창고의 물품과 성주의 무기마저 사라진 곳이다. 당연하게도 공성전에서의 힘 역시 빠질 수밖에 없었다.
아마, 저곳에 도전한 플레이어들은 '생각보다 쉬운데?'라고 생각하며 수월하게 성을 점령했을 것이다.
다만.
'얻을 거라고는 공적치밖에 없겠지만.'
성을 점령했다고 이미 텅 비어 버린 창고가 다시 차오를 일은 없었다.
플레이어들은 성을 점령하자마자 텅 비어 있는 창고를 보며 얼빠진 표정을 지어야만 했을 거다.
성주를 처치하고도 제대로 된 완제품 하나 얻지 못했겠지.
그게 조금 가엽긴 하지만, 뭐, 세운 덕분에 성을 쉽게 점령할 수 있었으니 저들에게도 나쁠 건 없다.
...적어도, 세운의 생각으로는 말이다.
"그런데 형님. 대체 어디로 가는 겁니까?"
"그것도 모르면서 왜 따라온 거냐?"
"그야, 전 형님의 오른팔이지 않습니까! 저 박정필, 형님이 가시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
"그게 몬스터가 가득한 던전이라도?"
"...그런 거였습니까? 하하, 형님. 저 이쯤에서 내려주셔도 됩니다. 혼자서 잘 돌아갈 수 있습니다. 형님께 방해될 수는 없으니...."
"됐어, 이미 거의 다 도착했으니까."
"여긴 저희가 넘어왔던 절벽 아닙니까?"
"맞아."
튜토리얼 세 번째 장과 네 번째 장을 나누던 절벽.
이미 세 번째 장이 끝나고 살아남은 플레이어가 모두 이곳으로 넘어왔기 때문인지, 이전에 떠 올랐던 다리 역시 사라져 있었다.
다만, 사라진 것은 다리뿐만이 아니었다.
"근데, 저기... 다 어디 간 겁니까?"
박정필이 얼빠진 표정으로 질문을 내뱉었다.
평소라면 그 한심한 반응에 한숨을 내쉬었겠지만, 세운도 지금만큼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세운 역시 네 번째 장이 시작된 이후 절벽가에 찾아온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예상은 했지만, 진짜였네.'
절벽의 반대편에 보이는 건 세운의 클랜이 지나쳐온 드넓은 평야가 아니었다.
촤아아아-
드넓은 바다.
수평선이 보일 정도로 넓은 바다 위로, 파도가 기분 좋게 출렁였다. 파도에 부스러진 물방울이 햇살에 반사되어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지금까지 넘어온 튜토리얼이 모두 거짓말이라도 되는 것처럼.
'역시, 착각이 아니었어.'
튜토리얼 다섯 번째 장에서 성을 공격해 오는 몬스터는 수중형 몬스터가 대부분이었다.
씨 리자드 맨이나 나가, 씨 서펜트와 자이언트 터틀 등.
전부 어디서 나타났는지, 이 절벽가 쪽에서부터 꾸역꾸역 올라왔었지.
그것과 회귀 전에 조사한 서적들의 지식을 확인해 보기 위해 찾아온 것인데....
과연, 세운의 추측은 정답이었다.
그 많은 몬스터의 근원지가 바로 이곳이었다.
"이야, 이게 얼마 만에 보는 바답니까! 저희, 돌아가기 전에 물고기 좀 잡아가면 안 됩니까? 바다 보니까 간만에 시원한 매운탕이 당기는데 말입니다!"
"그건 힘들걸."
"저한테 맡겨만 주십쇼! 이래 봬도 왕년에 대산동의 작살이라고 불리던 몸입니다!"
박정필이 적랑의 안장에서 내려 웃통을 벗으려 하자, 세운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손을 뻗었다.
설명을 해 주는 것보다는, 직접 보여주는 게 더 빠르겠지.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라이트닝 스피어(Lightning Spear) ]
- 자탑의 공격 마법으로, 뇌전으로 이루어진 창을 만들어 적을 꿰뚫는다. 명중률은 낮지만 사거리가 길고 속도가 빠르다는 장점이 있다.
파직!
"혀, 형님!"
쐐액!
세운의 손끝에서 생겨난 기다란 뇌창이 바다를 향해 쏘아졌다.
거리가 제법 멀었지만, 마나가 극도로 응축되어 만들어진 뇌창은 넘실거리는 수면을 훌륭하게 꿰뚫었고.
-흑탑의 묘리에 따라 '라이트닝 스피어'의 위력이 강화됩니다.
파지직!
검보랏빛 뇌전이 파도를 타고 퍼져 나갔다.
박정필이 그 모습을 보고 물고기가 몇 마리 떠오를 걸 생각하며 자기가 주워 오겠다며 입수하려는 순간.
"크오오오-!"
짜릿한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몬스터 한 마리가 수면 위로 튀어나왔다.
씨 서펜트.
수중형 몬스터의 대표 격이라고도 불리는 바다 괴물이었다.
몸은 뱀의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각진 머리는 용에 가까워 보였다.
수면 위로 튀어나온 부분만 해도 4m는 훌쩍 넘어 보이니, 바다 아래 잠긴 몸까지 생각하면 얼마나 클지 짐작하기도 어려웠다.
"히익!"
그 모습을 보며, 박정필이 뒤로 나자빠졌다. 조금이라도 늦었다가는, 저 해룡의 아가리 속으로 다이빙하는 꼴이 되었으리라.
'역시, 몬스터들이 허공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었어.'
확신이 들었다.
다섯 번째 장에서 나타난 몬스터들은 모두 이 바다에서 절벽을 타고 올라온 놈들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회귀 전에 읽었던 마신의 위치에 대한 정보가 사실일 확률이 더욱 높아진다.
"레비아탄...."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깊은 바다를 내려봅니다.
마계를 다스리는 일곱 마신 중 하나.
질투의 마신, 레비아탄의 위치 말이다.
제 63화
63. 제63화
-'튜토리얼 다섯 번째 장 – 방어'까지 남은 시간 10분
"다들 마지막 확인 철저히 해 주세요!"
"네!"
"투석기 탄환은?"
"전부 준비됐습니다!"
"함정도 멀쩡합니다."
튜토리얼 다섯 번째 장. 즉, 튜토리얼의 마지막 장이 시작되기까지 10분.
황금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분주했다.
쌍둥이 자매와 고창석을 주축으로, 몬스터를 대비할 준비는 이미 완벽하게 하였다.
성벽 위에는 발리스타나 투석기 등 다양한 수성 병기와 탄환들이 가득했고, 사람들은 개량된 활을 쥔 채, 옆에 수백 발의 화살을 들여놓았다.
아무래도 수성전인 만큼 근접 무기보다는 원거리 무기를 드는 게 효율이 높을 테니 말이다.
뭐, 이것도 성의 방어력이 받쳐줘야만 가능한 일이지만.
"혈랑 오빠! 저거 대체 어떻게 한 거예요?"
"성문, 진짜 새것 같은데요?"
"저희한테도 안 알려줄 거예요?"
"알려줘요! 네? 네?"
이곳은 황금성이다. 수십, 수백 개의 성 중에서도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A+ 등급의 성.
설령 이전에 보았던 씨 서펜트가 난동을 부리더라도, 어지간하면 황금 성벽이 부서질 일은 없을 것이다.
"모두 자리에서 대기해 주세요!"
"네!"
유서아의 지시에 따라, 사람들 모두 제 자리를 찾아갔다.
세운 역시 성벽의 정중앙, 성문의 위에서 자리를 잡고 절벽으로 이루어진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손에는 '우뚝 솟은 망루'의 성주에게서 훔쳐낸 거궁, '거대한 사냥꾼'을 쥔 채로 말이다.
"이번에도 문제없겠죠?"
"당연하지."
불안해하는 유서아를 안심시켰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한없이 강한 모습을 유지하는 그녀이지만, 세운의 앞에서는 때때로 이렇게 약한 모습을 내보이곤 했다.
아무래도 그만큼 세운이 편하다는 뜻이리라.
모두의 기대라는 어깨 위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 바로 세운이었으니 말이다.
-'튜토리얼 다섯 번째 장 – 방어'까지 남은 시간 12초
-이제 곧 튜토리얼의 마지막 장이 시작됩니다.
-플레이어들은 모두 성안에서 몬스터의 공격을 대비하시길 바랍니다.
초마다 줄어가는 시스템의 숫자를 바라보며 모두가 침을 삼키고 있을 때쯤, 저 멀리 지평선에서 붉은 무언가가 빠르게 달려왔다.
그와 덩달아 들려오는 목소리의 정체는 바로.
"형니이임! 올라왔습니다! 진짜, 바다에서 올라왔습니다아!"
박정필이었다.
그럴 필요는 없었는데, 세운이 바다에 관심을 가지는 것을 알아챈 박정필이 굳이 정찰을 나갔던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달려온 박정필이 성안으로 들어오고.
마침내, 시스템의 숫자가 영을 가리키는 순간.
-'튜토리얼 다섯 번째 장 – 방어'가 시작됩니다.
-침략해 오는 몬스터를 막아 내어 성을 지키고 생존하십시오.
절벽으로 이루어진 구불거리는 지평선에서 파도가 일렁이듯 몬스터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크어어-"
"꿰에에엑!"
"그릉, 크르릉...."
회귀 전에 보았던 장면 그대로다.
반인반어(半人半魚)의 괴물이나 물뱀, 거북이, 악어 등 다양한 모습을 한 몬스터가 기어 나왔다.
그 수가 어찌나 많은지 드넓은 지평선의 좌우를 모두 침범하고 있었다.
흡사 영화의 한 장면.
다만, 영화로 보았을 때에 느꼈던 웅장함과는 별개로 압도적인 수에서 오는 공포감이 더해지고 있었다.
모든 각오를 마쳤다고 생각했는데, 몬스터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손이 긴장감으로 떨려오는 게 보였다.
그러는 중 세운은 말없이 활을 들어 올려, 지평선을 가리켰다.
"형님, 여기 있습니다!"
어느새 성벽 위로 기어오른 박정필이 세운에게 화살을 대령하였다.
아니, 화살이 아니었다.
단창.
일반적인 창에 비해 길이가 짧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길이가 족히 1.5m를 넘어가는 무기였다.
무기를 받아 든 세운은 말없이 활시위에 단창을 걸었다.
'거대한 사냥꾼'은 거궁답게 단창도 문제없이 받아들였으나, 본래의 사용법이 아니었던 만큼 '우드득!'거리며 괴로운 신음을 내뱉었다.
그때, 세운이 붙잡고 있던 활대부터 시작해, 활 전체가 검붉게 물들어 갔다.
-내공을 통해 '그라드 제국의 사법'이 강화됩니다.
-일시적으로 '거대한 사냥꾼'의 탄성과 내구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검붉게 물든 활이 세운의 힘을 견디며 더욱 크게 휘어졌다.
활시위가 어찌나 크게 당겨졌는지, 단창의 창대가 모두 활대 안으로 들어올 지경이었다.
단순히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것만으로도, 주위에 검붉은 힘이 위압감이 되어 퍼져 나갔다.
그것을 느낀 클랜원 모두가 세운에게로 시선을 집중하였다.
다만,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활시위를 놓기 직전, 세운은 탐욕의 창고를 개방하여 미리 골라 두었던 보물을 떠올렸다.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피에 굶주린 마창, 루인 ]
- 영웅 켈트하르의 명창. 항상 불길을 뿜어내기 때문에 물에 넣어 보관해야만 한다고 전해지는 마창.
우우웅!
단창에 루인의 힘이 깃들며, 당장에라도 터져 나갈 듯이 공명했다.
이 단창 역시 성주가 사용하던 무기를 훔친 것으로 C급의 성능을 자랑하는, 튜토리얼에서는 최상급에 가까운 무기였는데.
그런 무기마저, 루인의 힘은 견디기 힘들어 보였다.
단창의 창끝에서 루인을 상징하는 검은 불길이 이글거렸다.
당장 자신을 내보내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폭발해 버리겠다며 세운을 협박하는 듯했다.
이에 세운은 순순히 루인의 요청을 들어주었고.
파앗!
활시위를 놓는 순간, 단창이 태양을 꿰뚫을 듯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자연스레 사람들의 시선 역시 화살을 따라 올라갔고.
그 시선이 내려가는 순간.
"꿰에에-"
콰직!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먼 거리에서 뒤뚱거리며 다가오고 있던 거대한 두꺼비의 정수리가 꿰뚫리며 몸이 터져 나갔다.
그 충격이 얼마나 강했는지, 바닥에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겨나며 주변의 몬스터 수십 마리가 함께 생을 마감했다.
이것으로 끝나면 다행이겠지만, 루인의 본 힘은 이게 다가 아니다.
-구렁이 꼬리 단창이 '루인'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소멸합니다.
-'루인'에 잠재된 화염이 폭발합니다.
콰아아앗!
화륵!
콰르르르륵!!
이전에 '흐룬팅'을 사용하여 오우거의 수장을 공격했을 때랑 비슷한 상황이었다.
단창이라는 구속구가 깨져 나가는 순간, 피에 굶주린 마창, 루인에 깃들어 있는 불길이 폭발하듯이 주위로 퍼져 나갔다.
마창이라는 별칭답게, 그 불길은 평범한 불길이 아니었다.
세운이 현재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흑마법, 다크 플레어처럼 새까만 불길이 몬스터들을 불태워 갔다.
"키에에에엑!"
"꿰에엑!"
"크오, 끄오오오-!"
비늘이 그을리고, 살이 타들어 간다. 아가미가 문드러지고, 지느러미가 녹아내린다.
이제 막 수면 위로 빠져나온 몬스터들은, 생전 처음으로 마주하는 불꽃에 참지 못하고 다시 절벽 아래의 바다로 몸을 던졌다.
다만.
치이익-
놈들이 바다에 가라앉았을 때쯤에는, 이미 때는 늦은 후였다.
아가미와 지느러미가 불타 버린 놈들은 바다에 들어가서도 숨을 쉬지 못하고 서서히 죽어갔다.
지면 위의 몬스터들이 바닥을 굴러보았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순식간에 수백의 몬스터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생을 마감해 갔다.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개인 공적치가 1,000point 상승합니다.
-개인 공적치가 1,500point 상승합니다.
-준 보스 몬스터, '이끼 두꺼비'를 처치하여 개인 공적치가 10,000point 상승합니다.
…
불꽃이 꺼지지 않는 이상, 몬스터의 비명 역시 줄어들지 않았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지평선의 중심을 끊어놓을 수 있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향기로운 냄새에 침을 꿀꺽 삼킵니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아무리 형체 없는 힘이라 하더라도,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사용하는 건 너무 아깝지 않냐며 중얼거립니다.
마몬이 아까운 티를 냈지만, 세운으로서는 그렇지 않았다. 이번 공격은 단순히 적의 수를 줄이기 위함이 아니었으니까.
적의 수를 줄임과 동시에....
-'붉은 늑대 갑옷'의 능력 '늑대의 위협'으로 인해 화염을 마주한 적군이 공포에 빠져듭니다!
-'회색 늑대 망토'의 능력 '위압감'으로 인해 카리스마가 강화되며 적의 공포를 더욱 악화시킵니다!
-아군의 사기가 극도로 상승합니다!
아군의 사기를 증가시키기 위함도 있었으니 말이다.
"미친! 장난 아닌데?"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투석기 장전, 발사!"
"발사!"
세운의 공격을 목격한 이들의 얼굴에서 자신감이 차올랐다.
이 한 번의 공격으로, 모두가 깨달은 것이다.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아니, 이기는 게 당연하다는 것을.
쾅, 콰광!
투석기에서 발사된 거대한 돌덩이가 적진으로 날아갔다.
매끈한 원의 형태로 다듬어진 바위는 가속도를 그대로 유지한 채 바닥을 뒹굴었고, 수많은 몬스터가 이에 깔려 목숨을 잃어갔다.
푸북!
발리스타에서 발사된 거대한 화살이 대형 몬스터의 몸통을 꿰뚫었다. 어지간한 창칼도 무시할 법한 단단한 비늘도, 발리스타의 화살을 막아 내진 못했다.
피유웅-
수십 발의 화살이 하늘로 치솟았다.
그동안의 연습 덕분에, 그들이 쏘아 낸 화살은 정확하게 몬스터의 급소를 꿰뚫었다.
그럴수록 몬스터들에게 새겨진 공포는 더욱 커지며, 움직임을 굼뜨게 만들었다.
덕분에 놈들은 황금성에 도달하기도 전에, 천이 넘는 아군을 잃어야만 했다.
어떻게든 공포를 이겨내고 앞으로 발을 내디뎠지만, 마주한 현실은 더욱 가혹했다.
푹!
콰과광!!
세운의 클랜은 지금까지 단순히 성벽을 보수하고 수성 병기만을 제작한 게 아니었다.
몬스터의 진군을 막아 내기 위해, 성벽 앞에 수많은 함정을 설치해 두었다.
그 규모가 생각보다 커서, 도약으로 뛰어넘을 수 있을 정도가 아니었다.
최전방의 몬스터들이 그것을 알아채고 발을 멈추었지만.
"키, 키이익!"
푹, 푸북!
후방에서 움직이는 몬스터들은 함정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막무가내로 밀어대는 탓에, 최전방의 몬스터들은 함정을 존재를 알면서도 몸이 떠밀려 아래의 가시에 꿰뚫리고 말았다.
그렇다고 해도, 몬스터의 수는 이전의 '웨이브' 때처럼 수십 마리 수준이 아니었다.
아직까지도 구불거리는 지평선에서는 몬스터가 끊임없이 밀려 나오고 있었다.
몬스터의 사체가 함정을 메우고, 그것을 발판삼아 놈들이 성벽에 도착할 때쯤.
띠리링-
어디선가 부드러운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몬스터들이 '공포의 비명'을 들었습니다.
-뛰어난 연주 실력으로 인해 상당수의 몬스터들이 '공포'에 빠집니다.
-공포에 빠진 몬스터들이 이성을 잃고 날뛰기 시작합니다.
요정을 닮은 악기. 시링크스의 연주음이었다.
다만, 전처럼 세운이 연주한 게 아니었다.
전투를 벌이는 동안 악기를 연주하는 것보다는 전투를 벌이는 게 훨씬 효율적이라고 생각하여, 다른 무기들과 함께 악기를 고창석에게 넘겼으니까.
지금 악기를 연주하는 이는 세운의 클랜원 중 한 명이었다.
실력이 꽤나 좋은 건지, 그의 연주는 세운이 악보를 사용했을 때와 맞먹을 정도의 효과를 발휘했다.
게다가.
-성좌, '노래하는 일각수'가 공포의 선율에 몸을 맡기며 뿔을 거칠게 휘두릅니다.
세운도 모르는 사이에, 새로운 성좌가 악기의 주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래하는 일각수.
서열 67위의 마왕, 암두시아스.
이미, 세운의 클랜에는 그 선택받기 힘들다는 성좌의 선택을 받은 플레이어가 열 명 넘게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도 악신의 축에서 큰 힘을 발휘한다는 72 마왕들에게 말이다.
"강한철, 가자."
"알겠다."
"저도 따라가겠어요!"
아름다운 선율을 감상하며, 세운은 성벽의 난간 위에 올라섰다.
이대로 몬스터의 진군만 막아 내도 튜토리얼의 마지막 장은 가뿐하게 통과하겠지만, 세운의 목적은 단순히 '튜토리얼 통과'가 아니었다.
타앗!
세운과 강한철, 그리고 유서아.
황금성의 난간에서, 세 명의 플레이어가 수천의 몬스터를 향해 도약하였다.
제 64화
64. 제64화
성벽에서 뛰어내린 후, 가장 먼저 전장에 도착한 것은 강한철이었다. 늘 그렇듯이 그의 주먹이 지면과 부딪히며 거대한 충격파를 만들어냈고.
-플레이어 강한철이 '개전(開戰)'을 사용합니다.
전보다 강력한 지진이 전장을 울렸다.
뒤이어 도착한 세운이 고양이처럼 사뿐히 착륙하여, 강한철이 만들어낸 지진의 흔적에 두 손을 올렸다.
-흑탑의 묘리에 따라 '라바'의 위력이 강화됩니다.
-흑탑의 묘리에 따라 '브리즈'의 위력이 강화됩니다.
쿠구구구!
이전과 똑같았다.
갈라진 지면 사이로 검은 마나가 깃들어 검붉은 빛을 발하는 용암을 꽉꽉 채워 넣고, 만족스러울 만큼 용암이 차올랐을 때쯤.
한껏 응축된 바람을 거세게 밀어 넣는다.
지진의 권능을 가진 강한철과의 연계기.
-플레이어 강한철과의 연계기. '끓어오르는 전장(戰場)'이 시전됩니다!
끓어오르는 전장.
푸화앗!
"크에엑!"
"켁, 케헥! 끄히익-"
이전에는 단순히 '실험용'으로 사용한 것이라면, 이번에는 실험을 마치고 철저하게 '실전용'으로 사용한 공격이었다.
끓어오르는 용암은 흑탑의 묘리를 진득하게 이어받아 검붉게 터져 나오고 있었다.
용암에 닿은 몬스터의 몸은 단순히 타들어 가는 게 아니라, 용암과 함께 녹아내려 사라졌다.
기껏 함정을 뚫고 나와 공격을 준비하던 몬스터들이 빠르게 사라져갔다.
그리고 그 사이를.
-플레이어 유서아가 '타란튤라의 세 번째 다리'를 사용합니다.
유서아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아무런 규칙성도 없이 분출되는 용암이었지만, 결코 그녀의 몸에는 닿지 못했다.
간신히 용암을 피해 달아나던 몬스터들은 속수무책으로 그녀의 검에 꿰뚫렸다.
서거걱-
타란튤라의 세 번째 다리.
세운도 정확한 효과는 알 수 없었지만, 그 힘은 세운이 사용하는 그 어떤 무공보다도 빠르고 현란했다.
분명 그녀의 손에는 두 개의 검만이 들려 있을 텐데.
그녀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몬스터의 몸에는 여섯 갈래의 창상이 새겨지고 있었다.
상처의 깊이가 얕아 보여 그리 큰 데미지는 아닐 거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플레이어 유서아가 '타란튤라의 독니'를 사용합니다.
실상은 전혀 달랐다.
그녀의 검에 당한 몬스터들은 모두 거품을 깨물며 쓰러지거나, 상처 부위부터 시작해 몸이 시커멓게 썩어들어 갔다.
강한철과 유서아.
비록 튜토리얼일 뿐이지만, 둘 다 랭커라는 위치에 걸맞은 강력한 힘을 자랑하고 있었다.
"난 먼저 간다."
"가시다니요? 저희 목적은 성을 지키는 게...."
"성은 너희끼리 충분히 지킬 수 있잖아?"
세운이 유서아와 눈을 마주했다. 그 눈빛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한 신뢰가 묻어나오고 있었다.
이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맡겨 주세요."
"부탁한다."
세운이 떠난 자리로, 강한철과 유서아가 눈빛을 교환하며 다시 한번 몬스터들에게 달려들었다.
* * *
"쏴라, 쏴!"
"젠장, 무슨 몬스터가 끝이 없어! 첫 번째 장 때의 웨이브랑은 비교도 안 되잖아!"
튜토리얼의 다섯 번째 장이 시작되고, 다섯 번째 구역에 존재하는 성에서는 전투의 함성과 비명이 울려 퍼졌다.
성을 점령한 플레이어는 물론, 원래부터 성을 차지하고 있던 몬스터들도 새로이 등장한 몬스터를 막아 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힘들어 보이는 곳이 한 곳 있었으니. 바로 세운이 가장 먼저 털었던 비운의 성, '우뚝 솟은 망루'였다.
"화살이 다 떨어졌어!"
"기다려! 어차피 조금만 기다리면 보충될 테니까!"
"기다릴 시간이 어디 있어! 당장 저것들이 성벽을 때려 부수고 있는데!"
"제길...."
우뚝 솟은 망루를 차지한 클랜의 리더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분명 좋은 성 같았는데....'
우뚝 솟은 망루의 두 능력.
화살이 자동으로 보충되고 재장전 속도가 증가하는 화살 보급과 활의 공격 범위가 상승하는 높은 망루.
C급의 성이긴 했지만, 클랜원이 대부분 궁수인 그들이었기에 성의 능력은 꽤 쓸 만해 보였다.
게다가, 성의 공략 난이도도 낮아서 손쉽게 점령을 할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세 번째 장보다 난이도가 월등히 낮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그런데 이게 웬걸? 성을 점령하자마자 그들은 당황스러운 현실을 마주해야만 했다.
'뭐야, 창고가 왜 텅텅 비었어?'
'원래 이런 건가...?'
'성주는 왜 아이템을 아무것도 안 주는 건데?'
성을 점령하고 얻은 것이라고는, 병사들이 착용하고 있던 아이템. 소위 '잡템'이라 불릴 만한 것들과 적당한 공적치뿐.
이 많은 몬스터를 상대하기 위한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때문에 몬스터들이 생각보다 약한 건 아닐까 싶었는데, 그것도 오산이었다.
몬스터가 어찌나 많이 몰려왔는지, 순식간에 성벽에 붙는 바람에 성의 능력인 '공격 범위 상승'이 쓸모없어졌다.
쿵, 쿠웅!
"젠장, 성벽이!"
망루라는 이름답게, 성벽은 그리 강하지 않았다.
거대한 거북이 모습의 몬스터가 몇 번 부딪히자, 성벽은 당장에라도 무너질 듯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이대로 끝인 건가....'
심지어는 화살마저 동이 난 상태.
화살이 자동으로 보충되기 전까지, 궁수인 그들로서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공격을 포기하고 활시위를 놓았을 때, 전장에 이변이 일어났다.
콰앙!!
"포, 폭발?"
전장의 외곽에서부터 검붉은 폭발이 일어났다.
위력도 제법 강한 듯, 한 번의 폭발로 열댓 마리의 몬스터가 목숨을 잃어갔다.
이변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파지직!
검보랏빛 뇌전이 몬스터 사이를 지그재그로 휘어 나가며 수많은 몬스터를 감전시켰고.
쿠구구구!
대지가 쩍쩍 갈라져 몬스터를 삼키더니, 불룩 튀어나온 바위가 몬스터의 몸을 꿰뚫었다.
그야말로 천재지변(天災地變).
이변은 멈추지 않고 반복되었고, 그 당당하던 몬스터들이 공포에 질려 밀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제야 리더는 이변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저건 대체 누구야...?"
붉은 갑옷에 회색 망토를 걸친 남자.
우뚝 솟은 망루의 감지력과 궁수 특유의 뛰어난 시력을 활용해 보아도 다른 사람은 더 보이지 않았다.
결국, 저 남자 혼자서 이 천재지변을 만들어 냈다는 뜻이다.
"말도 안 되는...."
"리더, 화살 보충됐습니다!"
"조, 좋아! 다들 조준! 저 사내를 지원한다!"
"일단은 성벽부터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진행 방향을 봐라! 이유는 몰라도, 저 사내가 몬스터를 뚫고 이쪽으로 이동 중이다! 그러니 저 사내를 지원하여 이곳에 도착하게 하는 게 우선이다!"
"알겠습니다!"
"발사!"
피유우웅-
우뚝 솟은 망루의 플레이어들에게 지금까지 없던 희망이 감돌았다.
단, 저 사내가 자신들의 창고를 털었던 주범이라는 사실은 모른 채로 말이다.
* * *
화륵!
파지직!
쿠르르릉!!
세운의 손에서 연이어 마법이 빠져나간다.
수많은 몬스터의 공격을 피하다 보니, 니추공에 집중하며 내공 역시 빠른 속도로 줄어든다.
애초에, 플레이어 한 명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혼자서 이 대군을 상대하기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적과는 다르게 사람에게는 체력의 한계라는 게 존재하니까.
더군다나 마법과 무공을 사용하는 데 필요한 마나와 내공의 소모 속도는 이 상식을 모두 뛰어넘을 정도로 엄청났다.
그런데도 세운은 지치지 않았다.
오히려, 전투가 길어질수록 다리는 더욱 빨라졌고 마법은 더욱 강해졌다.
그럴 수 있는 이유? 바로, 폭식의 마신. 베엘제붑의 권능 덕분이었다.
-폭식의 권능으로 '절벽가의 전장' 전체를 지정하였습니다.
-폭식의 어금니가 몬스터를 덮쳐옵니다!
콰득!
세운이 지나간 자리로, 날카로운 어금니가 탐욕스러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들은 세운이 도륙 낸 몬스터의 사체를 게걸스럽게 집어삼켰고, 능력치가 빠른 속도로 흡수되고 있었다.
-'씨 리자드 맨'을 포식하였습니다.
-양분을 흡수하여 민첩이 2, 지혜가 1 상승합니다.
-'그린 나가'를 포식하였습니다.
-양분을 흡수하여 체력이 1, 지혜가 2 상승합니다.
…
-내공과 마나가 지속적으로 흡수되고 있습니다.
한 마리의 몬스터에게서 흡수하는 내공과 마나는 극도로 미약하여 흡수되지도 못한 채 흩어졌지만, 이렇게 수많은 몬스터를 한 번에 흡수하면 말이 달라진다.
왜,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하지 않던가?
미약한 마나가 뭉치고 뭉쳐, 세운의 단전과 서클을 채워 나간다.
덕분에 세운은 마르지 않는 샘물에서 기운을 끌어 쓰는 것처럼 쉴 새 없이 마법과 무공을 사용할 수 있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드디어 금식을 끊을 수 있겠다며 먹이를 쉴 새 없이 집어삼킵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씹을 시간도 아깝다며, 입을 크게 열고 음식을 들이마시기 시작합니다.
다만, 능력치가 폭발적으로 오르는 것도 초반이 끝. 같은 몬스터가 반복되며, 능력치의 상승폭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손해 볼 건 없었다. 이미 세운의 세 번째 서클이 벌써 절반가량 차올랐으니까.
단전의 내공 역시 체감이 될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마나가 여유로워지니, 세운이 선택할 수 있는 공격의 폭 역시 크게 늘어났다.
"레인 샤워."
솨아아아-
세운의 주위로 빗줄기가 부드럽게 퍼져 나갔다.
"키익!"
"쿠우우우-"
덕분에 세운의 주위에 있던 몬스터들이 기운을 찾아갔다.
애초에 이들은 수중형 몬스터, 육지에 올라선 순간부터 전투력이 급감한 상태였다.
안 그래도 피부가 쩍쩍 말라 고통스러웠는데, 비를 뿌려주다니?
몬스터들이 세운을 비웃으며 손톱을 들어 올리는 순간.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라이트닝 웨이브(Lightning Wave) ]
- 자탑의 공격 마법으로써, 넓은 범위에 뇌전의 파도를 일으킨다. 시전자를 중심으로 넓은 범위의 광역 공격이 가능하다.
파지지지직!
세운을 중심으로, 뇌전의 파도가 퍼져 나갔다.
광역기인 만큼, 본래는 상대가 아무리 전기에 약한 수중계 몬스터라 하더라도 몸을 경직시킬 정도의 약한 마법이지만.
"키에에에엑!"
"크오오오옥!"
치이익-
지금의 몬스터들은 세운의 마법에 의해 물에 흠뻑 젖은 상태였다.
덕분에 놈들은 물속에서 벼락에 맞은 것처럼, 강렬한 충격을 받아야만 했다.
기껏해야 마비나 경직 정도로 끝났어야 했을 공격이, 놈들을 죽음의 길로 인도하고 있었다.
잠깐이나마 물을 반기며 행복해하던 놈들이 이 순간을 마지막으로 생을 마감해 갔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요리의 종류가 다양하여 질리려야 질릴 수가 없다며 당신의 요리를 찬양합니다.
"근데 왜 질릴 수 없다면서 능력치는 안 올라갑니까?"
-성좌, '배고픈 왕자'가 당신의 말을 무시합니다.
"그럼, 질리는 건 안 드려도 되겠죠?"
-성좌, '배고픈 왕자'가 그런다면 다른 음식도 더 빨리 질리게 될 거라며 그런 짓은 절대 안 된다며 단언합니다!
"네네."
망루의 플레이어들이 필사적으로 화살을 쏘아준 덕분에, 수월하게 길을 뚫을 수 있었다.
그렇게 몬스터를 뚫다 보니, 어느새 우뚝 솟은 망루의 성문에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성을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이름이라도 알려주시면 튜토리얼이 끝나고 꼭 보답하겠습니다!"
성벽 위의 플레이어들이 세운을 향해 말을 걸어왔다.
단, 이름을 알려줄 수는 없었다. 굳이 이름을 언급해서 얻을 것도 없었고, 무엇보다 저 성의 창고를 털어 수성전을 힘들게 한 게 바로 세운이었으니까.
'...일단은 내 탓도 있으니까, 털었던 성 위주로 움직여야겠네.'
어차피 다섯 번째 장의 총 보스 몬스터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혼자 필드를 돌아다니며 공적치를 쌓는 게 목적이었다.
아마, 다섯 개의 성을 모두 돌 때쯤에는 보스 몬스터가 나타날 것이다.
'그때부터가 진짜니까.'
공적치를 쌓은 후, 두 번째 목표인 보스 몬스터를 처치한 후.
다음은.
'레비아탄....'
세 번째 목표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제 65화
65. 제65화
-'씨 리자드 맨'을 포식하였습니다.
-더 이상 같은 개체를 통해 양분을 흡수할 수 없습니다.
-'니들 터틀'을 포식하였습니다.
-양분을 흡수하여 체력이 0.2 상승합니다.
…
세운의 사냥은 계속되었다.
다만, 문제라면 이제 어지간한 몬스터는 죽인다고 하여도 폭식의 권능으로 양분을 흡수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전투가 길어질수록 체력이 점차 빠져나갔고, 무한동력과도 같았던 전투에도 속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흑탑의 묘리에 따라 '다크 플레어'의 위력이 강화됩니다.
화르륵!
한계를 깨달은 세운이 남은 마나를 모두 쥐어짜 내 검은 불꽃을 뿜어냈다.
안 그래도 공포의 효과 때문에 세운에게 다가가기를 꺼려하던 몬스터들이 불꽃에 의해 와해하기 시작했다.
그 틈을 타, 세운은 가장 가까운 성의 가장 위로 올라섰다.
다행히 성의 벽면에 구멍이 송송 뚫려 있었기에 벽을 타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 구멍 뚫린 가시성 ]
분류 : 성
등급 : C
설명 : 성벽에 작은 구멍이 뚫려 있어 성벽에 붙은 적에게 창 공격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진 성채. 다만, 그만큼 방어력이 부족하다는 단점이 있다.
능력 : 1. 튀어나오는 가시 – 성벽을 이용한 창 공격 시에 공격력 및 관통력이 20% 상승한다.
2. 가시 박힌 벽 – 성벽과 성문을 타격하는 적에게 20%의 데미지를 되돌려준다.
구멍 뚫린 가시성.
세운이 마지막으로 털었던 성이다.
아슬아슬하게 다섯 곳의 성채를 모두 지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다행히도 세운의 활약을 지켜보았던 플레이어들이 두 팔 벌려 세운을 환영해 주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아, 물이라도 좀 드시겠습니까? 이봐, 얼른 수통 좀 가져와!"
"아뇨, 물은 괜찮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당신이 아니었으면, 성벽이 무너질 뻔했습니다!"
"이 성, 어떻게 된 건지 창으로 공격을 하라면서 창고에는 창이 하나도 없던 터라...."
뜨끔.
과도한 환영에 주춤거리던 세운은 양심에 찔리는 것을 느꼈다. 누가 뭐래도, 이 성의 창고를 털었던 건 자신이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뭐, 결과는 좋았으니 됐겠지.'
창고를 털었다지만, 저들에게도 그리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첫 번째로, 세운으로 인해 줄어든 난이도로 성을 쉽게 점령했을 것이고.
두 번째로, 문제였던 다섯 번째 장도 세운이 직접 나서 막아 주었으니까.
-탐욕(眞)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생록 숲의 샘물 ]
- 환수들이 살아간다고 알려진 생록 숲의 샘물. 놀라울 정도의 생명력과 자연의 기운이 담겨 있다.
세운이 수통을 거절한 이유가 이것이었다.
평범한 물을 마시는 것보다는, 어지간한 포션보다 뛰어난 효과를 보이는 마몬의 보물을 사용하는 것이 나았으니까.
꿀꺽, 꿀꺽.
샘물을 마시자 시원한 청량감이 목을 타고 내려갔다.
그것은 단순히 위장에 머무는 것이 아닌, 목을 통과하자마자 전신으로 퍼져 나가며 충만한 기운을 제공해 주었다.
에너지가 다 떨어져 욱신거리던 근육에 힘이 차오르고, 텅텅 빈 서클과 단전에 깨끗한 기운이 차올랐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자신도 먹어 보고 싶다며 욕심을 부립니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이를 무시합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창고에 먹을 게 꽤 많아 보인다며 구경 좀 해 보자고 까마귀를 조릅니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그랬다간 창고의 모든 식용 가능한 보물이 없어질 것이라며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식용 가능한 것은 먹으라고 있는 것이라며 까마귀의 깃털을 부여잡고 징징거립니다.
'그것보다, 다른 사람들은 잘 막아 내고 있으려나.'
대충 보면 절벽에서 몬스터들이 막무가내로 올라오는 것처럼 보여도, 다섯 번째 장의 몬스터 습격은 무작위가 아니었다.
성의 수준에 따라, 그에 합당한 몬스터가 공격을 해 오게 마련이다.
이곳은 C급 성이었기에 세운 혼자서도 꽤 활약할 수 있었지만, 황금성의 몬스터라면, 세운이라 하여도 마몬의 보물 없이는 혼자 날뛸 수 없을 것이다.
'여차하면 골든 라이트도 있으니, 괜찮겠지.'
골든 라이트.
황금성의 고유 능력 중 하나로, 하루에 한 번, 적의 움직임을 일제히 멈추는 힘이다.
유서아에게 미리 언질을 해 두었으니, 그것만 활용하면 강한 적이 나타나도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거다.
적당히 휴식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날 때쯤.
-몬스터의 수가 3/4 이하로 줄었습니다. 이에 분노한 바다의 폭군, '다라칸'이 나타납니다.
시스템이 한 몬스터의 등장을 경고해 주었다.
씨 드레이크, 다라칸.
다섯 번째 장의 최종 목표이자, 지금 눈앞에 보이는 수천의 몬스터를 다스리는 폭군.
'가 볼까?'
그리고 세운의 목표물이었다.
* * *
그 시각, 황금성에서는 다른 성보다도 더욱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플레이어 이하늘이 '독에 잠긴 병동'을 사용합니다.
푸홧!
몬스터들의 정중앙, 그 위에서 보랏빛의 액체가 꿀렁거리더니 물풍선처럼 터져 나갔다.
그 끈적거리는 느낌에 몬스터들이 인상을 구겼지만. 아무런 일도 생겨나지 않았기에 몬스터들은 신경 쓰지 않고 공격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끄... 끄엑...."
시간이 지나며, 액체에 닿은 몬스터들의 상태가 변하기 시작했다.
피부에서 고름이 올라오거나, 피부가 퉁퉁 붓는 등. 다양한 외양적 변화와 함께, 열이 나거나 기침이 나오기까지 했다.
당장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창칼이 난무하는 전장에서 컨디션 악화는 목숨을 앗아가기에 충분했다.
푸북-
"하늘 씨, 고마워요!"
붉어진 목을 벅벅 긁느라 방심하고 있던 물고기의 아가미 사이에 유서아의 검이 틀어박혔다.
그 외에도 각종 수성 병기의 공격이나 독이 발린 화살 등. 황금성에서 갖가지 공격이 날아와 몬스터들을 괴롭혔다.
그러던 중.
"크오오오오-!!"
단순히 물량전으로 승부하던 작은 몬스터들과는 차원이 다른 크기의 몬스터가 등장했다.
문제는 그 수가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꾸륵, 꾸륵."
"쉬이잇-"
등에 징이라도 박힌 듯이 피부가 울룩불룩한 두꺼비와 들어 올린 목과 머리만 해도 2m는 될 법한 거대한 뱀.
그리고 수백 개의 빨판을 드러내며 꿀렁거리는 문어 모습의 몬스터까지.
지휘관 격이라도 되는지, 놈들의 등장에 다른 몬스터들도 순순히 길을 비켜 주었다.
"...한철 씨, 괜찮겠어요?"
"괜찮지 않아도, 해야 한다."
"그렇겠죠."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던가? 처음에는 그렇게 날뛰던 둘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며 체력이 줄어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강한철은 세운에게 받은 갑옷으로 데미지를 막아 내고, 유서아는 세운에게 배운 보법으로 공격을 피해 냈지만.
이미 전투가 꽤 오래 지속되면서, 둘은 차오르는 숨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었다.
"가자."
"네!"
콰앙!!
세 마리의 준 보스 몬스터가 본격적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거대한 덩치답게, 놈들이 몸을 부딪치자 철벽같던 성벽이 웅웅 울려댔다.
다만, 강한철과 유서아 두 명이서는 세 마리의 몬스터를 모두 마크하지 못해 곤란해하고 있는 참이었는데.
"정필 씨!"
"네네, 갑니다요!"
-플레이어 박정필이 '용용 죽겠지'를 사용하였습니다.
성벽 위에서 뛰어내린 박정필이 이를 해결해 주었다.
성벽을 향해 꼬리를 휘두르던 뱀이 박정필에게 눈이 돌아간 것이다.
"으아악, 이놈 뭐 이렇게 커?"
그사이, 강한철과 유서아가 공격을 이어갔다.
여태껏 수많은 몬스터를 학살해 온 그들이었기에, 황금성의 사람들은 걱정하지 않고 다른 몬스터들을 견제하였다.
하지만.
뭉클!
티잉!
강한철의 주먹이 문어의 부드러운 살에 빨려 들어갔다.
유서아의 검이 두꺼비의 단단하게 튀어나온 피부에 튕겨 나갔다.
처음으로 공격이 통하지 않는 상대를 만난 둘은 당황하면서도, 서로 눈치를 교환하며 빠르게 상대를 바꿨다.
그래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유서아의 검은 문어의 질긴 점막을 뚫지 못했고, 두꺼비는 적당히 몸을 튕겨내며 강한철의 공격을 흡수하였다.
"으아아악! 나 죽네, 나 죽어!"
자신만만하게 뛰어내린 박정필도 어느새 뱀의 빠른 속도에 따라잡히고 있었다.
질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빨리 끝낼 수는 없어 보였다.
그렇게 제대로 된 데미지도 넣지 못한 채 시간이 끌리며, 전투는 점점 더 불리해졌다.
"너희만 믿고 내려온 건데 이게 뭐야!"
"시끄럽다."
"뭐? 지금 감히 형님의 오른팔인 나한테 시끄럽다고...."
"시끄러워요."
"...옙."
결국 세 명은 세 마리의 준 보스 몬스터에게 포위당한 꼴이 되고 말았다.
"일단은 성안으로 대피하죠."
"난 더 이상 시선 못 끌어! 지금 문 열면 저것들도 다 들어올 텐데?"
"성의 고유 능력을 사용하면 돼요. 성에 들어갈 시간은 벌 수 있을 거예요."
"맞다! 그럼 얼른!"
"잠깐."
유서아가 임시 성주로서 '골든 라이트'를 발동하려던 찰나, 강한철이 손을 들어 그녀를 말렸다.
왜 그러나 싶어, 고개를 돌리던 중, 그녀는 세 마리의 몬스터의 아래에서 무언가가 올라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어어-"
"그으으으-"
"저게 무슨...."
"으익, 좀비다!"
그것의 정체는 바로, 좀비였다.
좀 전까지 쓰러트린 몬스터들이 관절을 괴이하게 꺾으며 일어서더니, 세 마리의 몬스터를 부여잡았다.
흡사 공포 영화를 보는 듯한 장면.
세 마리의 몬스터가 저마다 괴성을 지르며 좀비들을 떼어 내려던 중, 성벽에서 무언가가 떨어졌다.
아니, 날아왔다.
"저건?"
갈기 달린 호랑이의 머리를 한 괴수, 만티코어.
멧돼지처럼 툭 튀어나온 송곳니에는, 언제 물어뜯었는지 잘린 문어 다리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퍼억!
만티코어의 손톱이 휘둘러지자, 강한철의 공격도 흡수하던 두꺼비의 징이 뭉텅 떨어져 나갔다.
푸부북!
만티코어가 몸을 돌리자, 수많은 가시가 달려 철퇴를 연상시키는 꼬리가 뱀의 몸에 박혀 들어갔다.
그것은 단순한 가시가 아닌, 만티코어의 극독이 담긴 가시었기에 뱀은 순식간에 피를 토하며 바닥에 머리를 처박았다.
-성좌, '죽음을 짓밟는 말'이 구울의 활약에 만족해합니다.
"버텨 주셔서 감사합니다! 꼬리의 사독을 온전히 구현하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백현 씨!"
만티코어와 좀비들의 주인은 바로, 백현이었다.
죽음을 짓밟는 말, 가미긴과 계약하고 세운에게 만티코어의 사체를 받으며 얻은 '과제'를 드디어 해결한 것이다.
그것도 가장 하급이라 취급받는 스켈레톤이 아닌 독에 특화된 좀비로 알려진 구울로서.
덕분에 만티코어는 비행 능력은 물론 뛰어난 신체 능력과 극독을 모두 보전한 채 일어날 수 있었다.
"제가 최대한 보조하겠습니다!"
콰앙!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강한철이 징 벗겨진 두꺼비의 머리를 강타했다. 유서아 역시 다리가 뜯겨나가 점액질이 벗겨진 문어의 다리를 갈라내고 있었다.
"크아아앙!!"
만티코어는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깊은 포효를 내질렀다.
이에 몬스터들이 순간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본능적으로 상대가 자신들의 역량을 아늑히 추월한 포식자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뭐야, 저거, 내 적랑보다 더 멋지잖아?"
만티코어의 힘은 강력했다.
물론, 그것은 백현의 뛰어난 컨트롤 실력이 뒤를 받쳐 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만티코어가 전장에 합류하자마자, 세 마리의 준 보스 몬스터가 빠르게 정리되며 지휘관을 잃은 몬스터들이 등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제야 성벽 아래의 세 명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숨을 고를 수 있었다.
"백현 씨, 고마워요."
"아닙니다. 지금까지 만티코어를 연구하느라 도움이 되지 못했는데, 지금이라도 힘을 보태드려야죠. 그것보다...."
-몬스터의 수가 3/4 이하로 줄었습니다. 이에 분노한 바다의 폭군, '다라칸'이 나타납니다.
그들도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를 확인하였다.
다라칸.
성을 떠날 때 세운이 말했던 다섯 번째 장의 보스 몬스터가 분명했다.
"저희, 혈랑을 도우러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하지만, 황금성은...."
"성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몬스터도 많이 줄어들었고! 저희끼리 충분히 막아 낼 수 있습니다!"
유서아가 걱정을 내비치자, 성벽 위에서 그들을 지원하던 클랜원들이 힘차게 함성을 내질렀다.
모두 튜토리얼을 거치며 처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져 있었다.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그들의 힘찬 외침에, 유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들 부탁드려요!"
"흐흐, 서아 씨! 제 뒤에 타시죠! 제가 적랑으로 아주 안전하게, 형님께 모셔다드리겠습니다!"
튜토리얼의 다섯 번째 장.
그 뜨거운 전장의 막이 내려가고 있었다.
제 66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