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약점을 쥐고 흔든다. (1)
"못난 놈!"
철썩, 하는 세찬 소리와 함께 시야가 휙 돌았다. 뺨이 후끈 달아올랐다.
'뭐, 뭐야? 나 왜 맞은 거?'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는데, 갑자기 왜....
나는 뺨을 감싸 쥐며 고개를 돌렸다.
"언제까지 그리 살 생각이냐!"
대략 4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남성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누구지?'
처음 보는 사람.
이목구비 자체가 낯설었다. 열대 바다와 같은 빛깔의 눈동자가 특히.
'여긴 어디고?'
나는 슬그머니 눈알을 굴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닥에 깔린 두꺼운 카펫, 한쪽 벽을 완전히 덮는 거대한 휘장, 그 앞에 서류가 잔뜩 쌓인 책상.
'집무실?'
어쩐지 사람을 압도하는 듯한 느낌의 방이었다. 꼭 내 앞에 서 있는 남자처럼.
푸른 머리칼과 엄숙한 인상. 늘 남들을 내려다볼 것 같은 큰 키에 나이가 무색할 만큼 잘 단련된 육체.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나를 짓눌렀다.
"할 말이 있으면 해 보거라."
내 귓가로 차가운 음성이 떨어져 내렸다.
"...."
당연하게도, 할 말은 없었다.
나는 그가 누구인지도, 내가 왜 갑자기 여기 오게 된 건지도 몰랐다.
"아벨."
남자의 부름에 나는 움찔했다.
'아벨이라고?'
아니었다. 내 이름은 분명,
"아벨, 어서!"
그는 생각을 정리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나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지금 무슨 말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놈이!"
벼락과 같은 노성이 쏟아졌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정녕 네가 뭘 잘못했는지 모른단 말이냐!"
"...."
"어찌 그리 생각이 짧은 게야...!"
남자가 착잡한 얼굴로 이마를 짚었다.
답답한 건 오히려 나였다.
갑자기 이상한 곳에 와서 뺨까지 맞고, 훈계만 쭉 듣고 있다. 난 아벨이 아닌데 말이다.
"저...."
"제발 경각심을 갖거라. 너는 이 오베스트 영지의 하나뿐인 후계자다."
"아니...."
"네가 그러고도 킨드리얼의 이름을 달고자 하느냐? 정녕 이 아비가 숨넘어가는 꼴을 봐야겠느냐?"
아니, 뭔 말을 못 하게 하네.
속으로 투덜거리던 나는 몸을 흠칫했다.
'잠깐. 아벨 킨드리얼이라고?'
분명 본 적 있는 이름이었다.
'어디서 봤었지?'
기억을 더듬으려는 찰나,
"영주님!"
집무실의 문이 벌컥 열리며 기사 한 명이 들이닥쳤다. 그는 다급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영주님. 급한 사안입니다."
"...알겠네."
남자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손짓해서 기사를 내보낸 뒤 내게 말했다.
"당분간 방에서 근신하거라."
"네?"
"못 알아들었느냐? 근신하라고 말했다."
아니, 근신이라니. 지금 시대가 어느 땐데 근신을....
남자가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가거라."
그는 어느새 집무실 책상에 놓여 있던 투구를 착용하고 있었다. 중세 시대 기사가 쓸 법한 물건.
남자가 문을 열자 시립하고 있던 기사가 고개를 숙였다.
"영주님."
"종류는?"
그는 앞뒤 상황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당연하다는 말투로 물었다. 기사 또한 많은 것이 생략된 질문을 즉각 알아듣고 대답했다.
"트롤이고 총 스무 마리입니다."
"피해는?"
"성벽을 먼저 무너뜨렸습니다. 그 아래 깔린 병사들이 꽤 됩니다. 생존자들이 최선을 다해 막고 있습니다."
남자의 잇새로 침중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가 망토를 펄럭이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니, 저기."
나는 방문 앞에 멀거니 서 있었다. 그런 내게 무장한 남자 둘이 다가왔다.
"도련님."
그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영주님의 명령입니다. 방으로 가십시오."
"...."
난 내 방이 어딘지 모르는데. 아니, 그보다 난 아벨이 아니라고.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내가 멀뚱히 서 있자 남자들이 얼굴을 굳히며 다가왔다. 그들의 손에 양쪽 팔이 덥석 붙들렸다.
"가시죠."
어어, 하는 사이에 남자들에게 끌려가고 있었다. 두 사내는 가차 없는 손길로 나를 방에 밀어 넣었다.
"윽!"
카펫이 푹신한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곧장 몸을 일으켰지만 문은 이미 닫힌 뒤였다.
"잠깐...!"
문고리를 비틀었지만, 황당하게도 문은 어느새 잠겨 있었다.
도대체 밖에서 잠기는 문을 왜 달아 놓은 거야?
나는 입을 뻐끔거리다가 바닥에 스르르 주저앉았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상황이 어떻게 손 쓸 틈도 없이 흘러가 버렸다.
'아벨 킨드리얼, 영주, 트롤, 중세 시대.'
낯선 단어들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람 세 명이 누워도 거뜬할 듯한 거대한 침대에, 나무로 만든 고급스러운 가구들이 보였다.
"이게 내 방이라고?"
아까 끌려오면서 봤던 복도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 화려한 벽지, 사치스러운 장식품 등이 눈을 어지럽혔다.
그러다 황망한 시선 끝에 거울이 닿았다.
"-!"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본 나는 경악했다.
"이게, 나야?"
아까 내 뺨을 때린 남자와 똑 닮은 푸른 머리카락, 라일락 꽃잎이 물든 듯한 청보랏빛 눈동자.
약간 창백한 낯은 빠진 데 없이 수려했으며, 치켜 올라간 눈매는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게..., 대체?"
나는 얼빠진 얼굴을 한 채 거울로 다가갔다. 잘게 떨리는 손가락을 거울 위에 얹자, 차갑고 매끄러운 표면이 느껴졌다.
지극히 실제 같은, 더없이 현실 같은 감각.
"몸이...."
나는 거울 위에 올려진 손을 보고 전율했다. 길게 뻗은 손가락은 단단해 보였으며 피부는 주름 하나 없이 탄력이 넘쳤다.
"...내 몸이, 멀쩡하잖아."
잠시 굳은 듯이 서 있던 나는 이윽고 거울에서 멀어졌다.
'아벨 킨드리얼.'
이 외모에, 이 이름이라면.
"설마."
나는 무언가에 이끌린 듯이 방 안을 가로질렀다. 어찌나 방이 크던지 한참을 걸은 후에야 발코니에 도달할 수 있었다.
끼익.
작은 소음과 함께 투명한 유리문이 열렸다.
"...!"
발코니에서 아래를 본 내 눈이 잘게 흔들렸다.
까마득하게 높은 시야 너머 멀리, 흰 눈이 쌓인 거대한 산이 보였다. 바로 아래엔 민가와 상점이 옹기종기 모인 마을이 보였다.
"...여기가 오베스트 영지."
그리고 아마, 내가 있는 곳은 마을 중앙의 성. 그러니 이토록 높은 곳에 위치해 있겠지.
성과 마을을 잇는 도개교 위로 한 무리의 병사들이 달려갔다. 선두의 흑마에 탄 남자가 눈에 익은 투구를 쓰고 있었다.
"아버지...라고."
내가 아까 들은 대로라면, 그는 트롤을 상대하기 위해 나서는 게 분명했다.
"아니, 무슨 판타지 소설도 아니고."
헛웃음을 짓던 내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판타지 소설?'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무심코 옮긴 시야에 거대한 호수가 들어왔다.
호수 중앙엔 떠 있는 섬이 하나 있었다. 그곳엔 장례를 치르기 위한 경건한 느낌의 건물이 우뚝 서 있었다.
나는 저 건물의 이름을 알고 있다.
'마그나 모르텐.'
이 영지를 지키다 순직한 병사들을 기리는 곳. 그리고, 그 수많은 죽음과 원한들이 모이고 모여 이 영지를 초토화시킬 원흉을 불러오는 곳.
'레퀴엠....'
몇 가지 사실이 더해지는 순간, 기억 속에서 어떤 단어가 솟아올랐다.
<홍염의 지배자>
그것은 내가 몇 번이고 완독했던, 유명한 판타지 소설이었다. 거기서 아벨 킨드리얼은....
'최악, 최강의 최종 보스.'
제국 역사상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전무후무한 재앙이 되는 인물.
그리고 그게, 지금의 나였다.
"X발."
욕이 절로 나왔다.
"내가 아벨 킨드리얼이라고?"
주먹을 꾹 쥐어보아도 손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홍염의 지배자>의 세계에는 전설로 전해지는 네 개의 검이 있다.
통칭 사계절의 검.
내로라하는 검사들은 이 검들을 몹시 탐내어 찾아다녔고, 학자들은 이 검들이 존재하는지 논쟁을 벌여왔다.
이는 오베스트 영지 한가운데, 새카만 몸을 가진 검이 강림하며 사실로 드러났다.
가을의 검, 레퀴엠.
이 검엔 공허의 소용돌이, 재앙의 씨앗, 생명 강탈자 등 섬뜩한 이명이 따라다닌다.
그중 가장 유명하고 잘 알려진 것은.
'죽음의 검.'
그 어떤 단어보다도 가장 확실하게 레퀴엠을 가리키는 단어.
레퀴엠을 쥔 인간은 무차별적으로 타인을 살해하게 된다. 타인의 생기를 탐하는 레퀴엠의 습성 때문에.
그리고 아벨은 이 레퀴엠을 쥐고 오베스트 영지를 멸망시킨다.
"...안 돼."
나는 꺼져가는 목소리로 탄식을 내뱉었다. 원작의 뒷 내용을 생각하면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벨은 오베스트 영지를 죽음의 땅으로 만들고, 서쪽 산맥에 가득하던 몬스터들의 씨를 말려버린다.
그리고 새로운 먹잇감을 찾아 동쪽으로 향한다. 제 앞을 가로막는 제국군을 압도적으로 말살하면서.
타고난 검술의 재능에 레퀴엠이라는 날개가 돋치자 그를 막을 수 있는 자는 없었다.
'하지만 있었지.'
<홍염의 지배자>의 주인공, 카인.
아벨은 최후의 최후까지 발악하며 버티다가, 끝내는 카인의 손에 비참한 몰골로 죽는다.
그것이 내 앞에 예견된 운명이었다.
"X발."
갑자기 남의 몸으로 살게 된 것도 억울한데, 하필이면 세계관 최고 악당이라니. 거기에 원작의 흐름대로라면 반드시 죽을 운명이다.
나는 이 기막힌 운명을 향해 온갖 욕설과 저주를 퍼부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이렇게 죽을 순 없어.'
<홍염의 지배자>를 몇 번이고 읽었던 나라면. 부록으로 수록된 지도와 설정까지 모조리 독파했던 나라면.
'할 수 있다.'
죽음과 파국이 예견된 미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아니, 해야만 해.'
나는 푸른 핏줄이 불거진 손등을 바라보았다. 주먹을 꾹 쥐자, 단단히 조여드는 근육과 펄떡펄떡 뛰는 혈관이 느껴졌다.
'이렇게 건강한 몸을 얻게 되었는데, 죽을 순 없지.'
주사 구멍으로 가득한 손등, 앙상하게 말라비틀어진 팔뚝. 그런 육체는 이제 지긋지긋했다.
'반드시, 살고 말겠어.'
나는 이를 갈며 방 중앙의 의자에 털썩 앉았다. 턱을 두드리며 찬찬히 생각에 잠겼다.
'아벨이 어떻게 죽었더라.'
기억을 더듬어 그가 일궈낸 깽판의 역사를 떠올렸다. 아벨의 악운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되짚었다.
"그렇다면...."
나는 창문 너머 멀리 보이는 마그나 모르텐을 응시했다. 그곳에 강림할 레퀴엠의 소름끼치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일단 강해져야 해."
레퀴엠을 손에 넣은 뒤, 그것의 확고하고 완벽한 주인이 되어야 한다. 레퀴엠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등장하는지 알고 있으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다른 놈이 쥐게 해서는 안 돼."
레퀴엠은 사용자의 능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려, 살육에 최적화된 상태로 만들어 준다.
"그놈에게서 레퀴엠을 빼앗는 것보다는, 처음부터 내가 쥐는 게 나아."
계산을 마친 나는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우선순위를 정하기 시작했다.
"잠깐, 오늘이 언제지?"
일단 레퀴엠이 강림하기까지 남은 기한을 알아야 했다.
"아벨이 아버지한테 뺨을 맞는 사건이...."
기억을 헤집어본 나는 경악했다.
"아냐. 설마, 그럴 리 없어. 오늘이 '그날'이라고?"
다급해진 나는 문으로 달려갔다. 문고리를 잡고 돌려 봤지만 여전히 열리지 않았다.
"아니, 지금 상황에 근신이라니. 이게 말이나 돼?"
아벨의 아버지, 디에고 킨드리얼. 이 오베스트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디에고가 돌아올 때까지 여기 갇혀 있어야 한다고!?"
허탈하게 중얼거리던 나는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내 눈이 영리한 빛으로 번뜩였다.
"아니지, 내가 '아벨'이라면...."
나는 돌아서서 다시 의자에 앉았다. 다리를 꼬고 앉은 채 방 밖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여러 사람의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나이 든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련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역시, 예상대로군.
나는 히죽 웃었다.
"들어와."
Chapter 1. 약점을 쥐고 흔든다. (2)
문이 열리고 익히 아는 얼굴이 나타났다.
"필립."
희끗희끗한 머리카락, 그러나 주름 하나 없이 팽팽한 얼굴. 꼿꼿한 걸음걸이엔 기품마저 감돈다.
그는 오로지 오베스트 영지를 위해 일하며, 오로지 영주에게만 충성한다.
...라고, 디에고는 생각하고 있겠지만.
"죄송합니다, 도련님."
필립이 몹시 송구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휘하 사람들을 감독하지 못한 죄를,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그는 이미 아벨의 수족이 된 지 오래. 아벨이 악행을 저지르는 데 협조하고, 뒤에서 더러운 일을 손수 처리했다.
아벨은 아버지의 잦은 외근을 틈타 성의 가솔들을 완벽히 장악한 뒤였다. 공포에 질린 그들을 유린하고, 폭력과 살인을 일삼는 절대적인 권력자.
그게 현재 아벨의 모습이었다.
"이쪽으로."
필립이 옆을 향해 손짓하자, 대기하고 있던 두 하인이 다가왔다. 그들의 손에 붙들려 있던 어린 하인이 방 안에 내팽개쳐졌다.
"으읏!"
바닥에 엎어진 하인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낯은 두려움으로 짙게 젖어 있었다.
"으으, 아아...."
"성 밖으로 도망치려던 것을 잡아왔습니다."
필립이 내게 말한 뒤 하인을 노려보았다.
"감히 도련님의 일을 방해하다니."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
"도련님, 부디 처분을."
필립이 내게 고개를 숙였다. 그 뒤에 시립한 사용인들도, 바닥의 하인도 고개를 조아렸다.
'이 장면은....'
나는 스쳐가는 기시감에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라고, 아닐 거라고 애써 자위했지만.
아벨의 뺨을 때리고 나간 아버지, 집사가 손수 끌고 와 무릎 꿇린 하인까지.
이것은 뇌리에 강렬하게 남은 에피소드 중 하나였다. 헷갈릴 수가 없는.
'오늘이 그날 맞잖아.'
나는 비로소 내가 원작의 어느 시점에 빙의했는지 깨달았다.
"X발."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욕이 튀어나왔다.
"...!"
필립이 흠칫하며 몸을 바로 세우고, 하인들의 눈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하."
주변의 반응을 신경 쓸 틈이 없었다. 턱을 괸 채 지끈거리는 이마를 꾹 눌렀다.
'이렇게까지 급할 줄 몰랐는데.'
레퀴엠은 제 이름답게 가을의 한 가운데, 정확히는 10월 15일에 등장한다.
그리고 그날은 오늘을 기준으로,
'10일 남았잖아!'
참으로 빠듯한 기한이었다.
"하...."
나는 솟구치는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할수록 속이 들끓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후우."
꿈틀거리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도, 도도 도련님...."
오들오들 떨고 있는 하인이 보였다.
'이때 아벨이 어떻게 했더라.'
그는 이 하인을 제 성이 풀릴 때까지 두들겨 팬다. 팔다리가 부러진 그는, 끝내 걷지 못하는 몸이 되고 만다.
원작대로라면 여기서 주먹을 치켜들어야겠지만.
'귀찮아.'
게다가 그런 짓 하고 있을 시간도 없다. 당장 해야 할 일이 산더민데 뭐하러 하인을 팬단 말인가.
'무엇보다,'
하인의 얼굴과 체형을 꼼꼼히 살핀 뒤 결론지었다.
'이 녀석이 내가 아는 그 녀석이 맞다면....'
지금 이 녀석에게 처분을 내리는 것은 좋지 못한 선택이다.
나는 의자 팔걸이에 기울였던 몸을 바르게 했다. 그 사이 방 안을 가득 채운 싸늘한 공기가 느껴졌다.
다들 내가 분을 삭이는 모습을 보며 겁에 질려 있었다. 내가 하인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기라도 한 듯한 분위기였다.
'이 녀석 때문에 화가 난 건 아닌데.'
나는 벌떡 일어나 주먹을 휘두르는 대신, 대충 손을 내저었다.
"내보내."
"예?"
필립의 눈가가 경련했다.
"-!"
"...!"
뒤에 선 하인들이 눈을 부릅떴다. 서로 시선을 교환하는 그들의 낯에 공포와 의문이 뒤섞였다.
예상치 못했던 반응에 나는 내심 놀랐다.
'뭐지, 이 표정들은?'
다들 놀라면서도 안도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도, 도련님!"
꿇어 앉아 있던 하인이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죄송해요! 영주님께서 너무 빨리 눈치를 채셔서 그만...!"
그리고 바닥에 머리를 쿵쿵 찧기 시작했다.
"도련님이 시키신 대로 마을에 놀러 나가셨다고 둘러댔는데 도통 믿지 않으셨어요!"
울음 섞인 처절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다시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제발 '그곳'만은...!"
그곳?
'아하, 그거군.'
성 내의 사용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곳이자, 오로지 필립과 아벨만 출입하는 곳.
성의 지하에는 본디 오래된 고서와 물품들을 쌓아 두는 창고가 있다. 하지만 그곳은 이제 온갖 고문 기구들이 즐비하며, 사람들의 신음과 음습한 피냄새로 가득하다.
아벨은 그곳에서 인간을 대상으로 '유희'를 즐기는 쾌락 살인마였다.
나는 이들이 왜 더욱 겁에 질렸는지 이해했다.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내 아래에서 울부짖는 하인을 바라보았다.
딱히 달래줄 생각은 없지만, 너무 시끄럽군.
"내가 언제 그곳에 보낸다고 했나?"
나의 나직한 한마디에 하인이 황급히 물러났다. 그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렸다.
"도, 도련님. 그게, 저는...."
불같이 사나운 고함보다도, 얼음처럼 차디찬 일갈이 사람을 더욱 겁먹게 한다.
나는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조용."
하인이 급히 제 입을 틀어막았다.
어깨를 부들부들 떨더니 기어이 소리 없는 눈물을 주룩주룩 쏟기 시작했다.
필립과 하인들의 안색이 시커멓게 타들어갔다. 그들은 눈앞의 비극을 차마 눈 뜨고 못 보겠다는 듯 얼굴을 돌려버렸다.
그 모습을 보자 피식 웃음이 났다.
'이러니 정말 악당이 된 느낌이잖아.'
아, 물론 악당이 맞았었지만.
손을 들어 날파리를 쫓듯 휘휘 내저었다.
"알아들었으면 데리고 꺼져."
두 하인들이 허겁지겁 다가와 하인을 붙잡았다. 하인은 이미 저항할 의지를 잃은 듯 움직임이 없었다.
그들이 사라지자, 필립이 입을 열었다.
"도련님. 차라리 제게 처리를 맡기는 게 어떠십니까?"
"네게?"
"저런 놈에게 시간을 허비하실 필요 없습니다."
필립의 얼굴엔 비장한 빛이 감돌았다. 제 손을 더럽힐 각오가 가득한.
"맡겨만 주십시오. 다시는 저런 실수를 반복하지 못하도록 확실히 교육시켜 놓겠습니다."
언뜻 보기엔 충정이 가득한 집사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능구렁이 같은 노인네.'
나는 필립의 이중적인 면모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충실히 아벨의 유희를 돕는 척하면서, 뒤로는 몰래 노예를 빼돌렸다. 아벨을 멈출 순 없으니 다른 방법으로 희생자들을 도운 것이다.
지금도 그랬다. 제가 직접 피를 묻힐 것처럼 말해 놓고, 사실은 저 하인을 빼돌리려는 속셈이겠지.
정말이지 눈물겨운 노력이다. 또한, 쓸모없는 짓이기도 하다.
"그냥 놔두라고 했어."
나는 재고할 가치도 없다는 듯 단호히 말했다.
저 하인의 팔다리는, 내가 다시 부를 때까지 멀쩡하게 붙어 있어야만 한다는 경고를 눈으로 전하면서.
"...."
필립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내가 뭘 생각하는지 차마 짐작조차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알겠습니다."
마지못해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만 가지."
난 필립의 무의미한 고민을 도와주지 않았다. 사실 그럴 필요도 없고.
"예."
행선지를 말하지 않았음에도, 필립은 능숙하게 앞장섰다.
그렇게 향한 곳은 영주의 집무실.
나는 자연스럽게 영주의 책상 앞에 앉았다. 그곳에 앉아 책상 위를 둘러 보았다.
서류, 깃펜. 각종 물건의 위치와 서랍의 높이, 손 닿는 깊이까지.
모든 것이 아벨에겐 익숙했다. 모든 것에 아벨의 손때가 묻어 있었다.
"가져와."
손을 까딱하자 필립이 서류의 탑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영주님이 처리하시다 급히 중지된 것들입니다."
내가 종이를 끌어당기자, 그가 또다른 서류의 탑을 옆에 쌓았다.
"이 건들은 비교적 우선순위가 낮아, 비교적 천천히 보셔도 되는 것들입니다."
나는 날카로운 눈으로 서류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영지 내의 세금, 상업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디에고는 제 아들 아벨이 한량처럼 먹고 놀기만 하는 줄 알았지만....
"도련님, 결재를 부탁드립니다."
사실 아벨은 그의 부재를 틈타 영지 경영에까지 손을 뻗은 뒤였다.
디에고는 대부분의 시간을 국경 지대에서 보냈기에, 그곳에서 급한 공문을 처리하여 본성으로 보냈다. 그리고 다소 중요도가 낮은 건은 본성으로 돌아온 후에 천천히 처리하곤 했다.
그는 그 간극을 집사가 잘 메꿔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 영지의 업무가 그것만으로 제대로 굴러갈 리 없지.'
하지만 실질적으론 모든 일이 아벨의 손안에서 이루어졌다.
아벨은 디에고가 이상함을 느끼지 못할 선 안에서, 교묘하게 공문을 결재하는 식으로 업무에 관여하고 있었다.
즉 디에고가 명한 근신은 아벨에겐 아무 의미도 없었다. 아버지가 없는 성에서 아벨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흠...."
어쨌건 지금의 나에겐 호재였지만.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서류들을 빠르게 훑었다.
최대한 빨리 이 서류들을 이해하고 체화할 필요가 있었다. 그럴수록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지니까.
영지의 시스템을 머리에 입력하는 한편, 이것들을 어떻게 이용해야 할지 계산하기 시작했다.
'일단은 검술을 익히는 게 급선무야.'
체력을 키우거나 근력을 강화하는 것은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다. 하지만 검술은 반드시 타인의 가르침이 필요하다.
원작에서 아벨은 일평생 그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의 아버지, 디에고가 그것을 금했기 때문이다.
일찍이 아벨의 기질을 알아챈 디에고는 아들에게 결코 검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저 후계자 수업 및 책상 위 공부만 시켰을 뿐.
'디에고를 제외하고, 아벨에게 검술을 가르칠 만한 인물이....'
일단 성안에는 없었다. 디에고는 일부러 성내에 경비 인원을 배치하지 않았다.
영지 내 최강의 기사인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북쪽 국경에서 보냈다. 영지에서 가장 강한 기사 및 병사들과 함께.
그런 그들이 몬스터를 막는 데 실패한다면, 결국 오베스트 영지가 무너지는 것 또한 시간문제였다.
'불명예스럽게 목숨을 구걸하느니 나한테 자결하라고 권할 인물이지.'
어쨌건 디에고의 이 방침 덕분에, 아벨은 성 내에서 자유롭게 활개를 칠 수 있었다. 때문에 나 또한 당분간은 디에고의 이 방침을 유지할 생각이었다.
'그럼 성 밖에서 찾아야 하는데.'
그렇다면 선택지는 영지 내의 경비대나 디에고 휘하의 기사로 좁혀진다.
하지만 아벨은 그들에게 강제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그들 또한 영주의 명을 거스르려 들지도 않았고.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손을 뻗어 영지 소속의 기사 명단이 적힌 종이를 쥐었다. 그것을 쭉 훑어 내리며 쓸만한 이가 있는지 살폈다.
"-!"
한 이름을 발견한 나는 눈을 반짝 빛냈다.
'이 이름은....'
곧이어 내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번졌다.
'그래, 이 녀석이라면 이용할 수 있겠어.'
그는 나의 훌륭한 검술 스승이 되어줄 게 분명했다.
결정을 내린 나는 서류뭉치를 탁 내려놓았다. 그리고 의자를 밀고 일어섰다.
"도련님?"
옆에서 차를 따르고 있던 필립이 의문스러운 얼굴로 바라봤다.
"외출 준비를."
"아, 외출하시려는 거군요."
필립의 낯에 복잡한 빛이 스쳤다. 이 천방지축 망나니가 어디로 튈지 두려운 모양이다.
"알겠습니다. 행선지는 어디입니까?"
나는 그가 걸쳐 주는 옷을 입으며 씩 웃었다.
"카데르."
Chapter 1. 약점을 쥐고 흔든다. (3)
"도착했습니다."
마차가 멈추고, 마부가 덧창을 두드렸다.
나는 다시 한 번 머리카락을 매만진 뒤, 마차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도련님. 언제까...."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린 마부의 눈이 커졌다.
"도, 도련님?"
"왜."
"머, 머리카락이...."
그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려다가, 무례를 깨닫곤 급히 손을 접었다.
"죄, 죄송합니다."
마부의 흔들리는 눈동자에 내 머리가 담겼다. 정확히는 밀빛 머리카락으로 만들어진 가발이.
"왜, 안 어울리나?"
나는 가발이 흘러내리는지 확인하기 위해 머리를 한번 쓸어넘겼다.
'음, 잘 고정됐군.'
그리고 마차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벨의 얼굴은 디에고와 무척 닮아 있었다. 남자답게 짙고 시원스레 뻗은 눈썹, 그리고 선명한 이목구비가 훌륭한 조화를 이루었다.
하도 성격이 삐뚤어져서 주워온 자식인 줄 알았건만.
"피는 못 속이는군."
예리한 눈매 끝에 문득문득 묻어나는 살기가 장난 아니다. 아버지와는 다른 의미로 사람을 주눅 들게 하는 낯이다.
거기에 본디 머리칼은 킨드리얼 가문의 상징과도 같은 푸른색. 이 모습을 보고 내 정체를 알아채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면 되려나."
흔해 빠진 밀빛 가발로 얼굴을 덮어버리자 분위기가 많이 희석되었다.
지금 마차 앞엔 훤칠한 키에 날렵한 체형을 가진, 날카로운 인상의 청년이 서 있었다. 머리색이 바뀌자 언뜻 보아선 아벨을 연상하기 어려웠다.
"아, 아닙니다. 안 어울리다니요. 감히 그럴 리가요."
마부는 내 눈치를 살피며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도련님의 용안에 무슨 머리카락인들 안 어울리겠습니까. 다만 좀 놀라서...."
마부의 안색이 흙빛이었다. 그의 눈동자가 말하고 있었다.
'정체까지 숨기고 어딜 가려는 거지?'
라고.
내가 왜 가발을 썼는지 궁금하면서도, 차마 그 이유를 묻기 두려운 눈치였다.
나는 옷을 한번 툭 털어낸 뒤 말했다.
"그만 돌아가. 집엔 알아서 갈 테니까."
"하지만...."
뭐라고 항변하려던 그는 내가 시선을 한번 주자 바로 풀이 죽었다.
"예, 알겠습니다."
"집사에게 알아서 잘 말하고."
"예."
그는 내가 외출할 때마다 마차를 운전했던 마부였다. 따라서 집사에게 뭐라고 말해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사실 그가 오늘 일을 말한다 해도 상관없었다. 이 가발을 준비해준 건 다름 아닌 필립이었으니까.
나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카데르, 제국 최서단의 오베스트 영지 바로 옆에 맞닿은 영지.
이곳은 오베스트 영지가 최전선에서 몬스터를 막아 주는 덕분에, 몬스터에 대한 걱정 없이 안락한 삶을 누리고 있었다.
그리고 골목 깊이 들어가면, 이 안락함이 다른 의미로 변질된 것을 목격할 수 있다.
"거기 오빠, 잠깐 들렀다 갈래?"
"누나가 잘해줄게. 이리 와요."
아직 해가 지지 않은 낮인데도, 골목 어귀마다 창부들로 가득했다.
그녀들의 눈은 약 기운으로 몽롱하게 젖어 있었으며, 수치를 모르고 풀어헤친 옷자락 사이로 맨살이 훤히 드러났다.
"에휴."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골목을 빠르게 가로질렀다.
저런 여자들을 보고선 그 어떤 감흥도, 음심조차 일지 않았다. 그저 한숨만 나올 뿐.
'이런 직종이 많이 생길 수밖에 없는 환경이긴 하지.'
오베스트 영지의 기사단은 군기를 빡세게 잡기로 유명하다. 조금만 방심하거나 혹은 조금만 실력이 부족해도 몬스터에게 짓밟혀 실려 나가기 때문에.
그래서 오베스트 영지의 기사단은 3관왕으로 유명했다.
제국 내에서 가장 훈련량이 많으면서, 봉급이 가장 낮고, 동시에 사망률이 가장 높은 기사단.
그런 상황이다 보니, 기사들은 제 억눌린 욕구를 해소할 수단이 절실했다. 자연스레 오베스트 영지와 맞닿은 카데르 영지에 사창가가 우후죽순 생겨났다.
'디에고는 이 모든 걸 알면서도 눈감아 주었지.'
이마저도 통제한다면, 기사들의 대거 이탈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걸 알기에.
'사명감만으로 모든 것을 감내할 수는 없으니까.'
혀를 끌끌 차며 걸음을 재촉하는데, 간드러진 목소리가 귓가를 건드렸다.
"자기, 여기 처음이야?"
"...."
벌써 세 번째다. 창부가 내게 말을 걸어온 것이.
나는 그녀를 완벽히 무시하며 슥 지나쳐 버렸다.
'가발 하나 썼다고 이렇게 사람을 못 알아보나.'
아벨은 카데르 영지의 유흥가를 제 집처럼 들락날락하곤 했다. 그리고 제법 미색을 갖춘 고급 창부를 거칠게 굴리며 놀았다.
따라서 평소 창부들은 아벨이 등장하면 조개처럼 입을 딱 다물었다. 그리고 최대한 그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현재 내가 있는 장소는 아벨이 평소에 찾던 곳이 아닌 허름한 뒷골목.
"걱정할 거 없어. 알아서 해줄 테니까, 응?"
그래서 창녀들은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열렬히 추파를 던져대었다. 카데르에 처음 온 촌뜨기로 오해한 모양이었다.
이곳이 유난히 어두워 사람을 잘 알아보기 힘든 것도 한몫했다.
'그냥 도착한 뒤에 가발을 쓸 걸 그랬나.'
짜증이 치솟았지만 상대하기 귀찮기도 했다. 그냥 이곳을 빨리 지나치는 게 상책이었다.
나는 대꾸 없이 발길을 재촉했다. 그러자 휘파람 소리, 야유 소리가 점점 커져만 갔다.
"다 알고 온 거잖아? 왜 빼고 그러시나."
"처음이 어려운 거지, 두 번째는 별것 아니야."
개 중 한 여성이 바르작거리며 손을 뻗었다.
"부끄러워서 그래?"
새빨갛게 칠한 손톱이 내 팔뚝에 닿는 순간,
"꺼져."
나는 매몰차게 손을 쳐냈다.
"흐응."
여성이 손목을 붙잡곤 애교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내가 지레 놀라 강하게 나온다고 생각한 것인지 미소가 짙어졌다.
"자기, 그러지 말고...."
"꺼지라고 했지."
음산하게 깔리는 목소리와 번득이는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여자의 눈이 커졌다.
"설, 설마?"
그녀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하니 입술을 움직였다.
"아-"
나는 그녀의 입을 냅다 틀어막았다. 여기서 그 이름을 말하는 건 곤란했다.
"...."
여자가 눈을 끔벅거렸다. 이윽고 그녀의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즈, 즈스흐느드...."
그녀가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숙였다. 날아올 손찌검에 대비하는 듯 이를 악물었다.
'내 소문을 알고 있나 보군.'
나는 그녀의 얼굴을 틀어쥐고 있던 손을 뗐다.
"입 조심해."
새처럼 떠들던 여자들이 일순 조용해졌다. 소름 끼치는 정적이 스멀스멀 퍼져나갔다.
나는 여자의 정수리를 흘끗 일별하곤 걸음을 옮겼다. 그녀 이후로 다시 나를 붙잡는 사람은 없었다.
아주 만족스러운 고요가 내 주변에 가득했다.
골목 끝에 도달하자 나무로 된 작은 문이 보였다. 주변에 어떤 간판도, 표식도 없는 평범한 문.
'제대로 찾아왔나 보네.'
카데르엔 이런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문이 몇 군데 있다. 영지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어 위치와 특징을 알지 못하면 찾아가기 어렵다.
물론 원작에서 이 시점의 아벨은 이곳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문고리를 잡고 돌리자, 평범한 주점의 모습이 펼쳐졌다.
"그래서 지금 국경에서는...."
"디에고 영주님이...."
주점 안은 사람들의 드문드문한 말소리 외엔 조용했다. 다들 술 한잔을 앞에 둔 채 대화를 나누고 있을 뿐, 만취하여 크게 떠드는 주객은 없었다.
사람들은 새로 들어온 나를 한 번 흘끗 보곤 곧 관심 없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약속이라도 한 듯한 완벽한 무시. 그들은 같은 테이블에 앉은 이 외엔 절대로 주변에 시선을 두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장소를 제대로 찾아왔다는 증거였다.
'시작해볼까.'
나는 여유로운 걸음으로 바텐더에게 다가갔다.
바에는 총 두 명의 바텐더가 있었다. 그중 가슴에 빨간 타이를 꽂은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새벽의 눈동자'로."
"베이스는요?"
"차갑게."
"잔은 어떻게 드릴까요?"
"달콤하게."
수수께끼와 같은 동문서답. 그러나 바텐더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은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어서 다른 바텐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슴에 노란 띠를 두른 자였다.
"안으로 들어오시죠."
나는 그의 안내를 따라 옆의 문으로 들어갔다. 방 안은 아주 협소했고, 들어온 곳 맞은편에 문이 하나 있었다.
가구는 일절 없었다. 있는 것이라곤 벽면에 처진 커튼이 전부.
짤랑.
나는 주머니에서 금화 하나를 꺼내 그에게 튕겼다. 능숙하게 금화를 받아든 바텐더가 허리를 숙였다.
"아래로 내려가시면 됩니다."
그가 커튼을 걷어내자,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드러났다.
"규칙은 알고 계시겠지요."
그는 단순하게 생긴 흰 가면을 내게 내밀며 말했다.
"물론이지."
나는 여유롭게 응수하며 가면을 챙겼다. 그것을 얼굴에 뒤집어쓰자 얼굴의 절반이 가려졌다.
현재 내 얼굴에서 보이는 것은 입술과 턱뿐. 그리고 눈구멍 사이로 비치는 시린 청보랏빛뿐이었다.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바텐더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곤 계단으로 다가섰다.
내려가는 동안, 계단은 잘 관리된 듯 나무가 삐걱대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아주 좁고 가파른 경사를 거쳐 내려서자, "올인!"
"아, 안돼! 한 칸만 더!"
"여기까지 하시겠습니까?"
여러 사람들의 말소리, 그리고 칩이 짤랑짤랑 떨어지는 소리가 훅 밀려들었다.
은은한 조명을 드리운 공간 곳곳에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각 테이블에는 제복을 입은 딜러들이 서서 게임을 하는 중이었다.
사람들은 그 테이블에서 카드 게임, 혹은 다른 도구를 이용한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정확히는 도박이지만.
나는 계단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생각보다 넓네."
온갖 범법 행위가 이루어지는 이 영지에서도, 가장 큰돈이 오가는 곳.
불법 도박장.
합법적인 도박장은 수도에 위치한 도박장뿐. 그마저도 실질적인 운영자가 황실이라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어쨌건 그 외의 다른 도박장은 이처럼 은밀히 운영되고 있었다.
영지 곳곳에 흩어진 주점에 미로처럼 입구를 설치하고, 복잡한 암호를 말한 후에야 입장할 수 있는 방식으로.
원래는 각 딜러들이 믿을 만한 사람에게만-도박꾼이 믿음직스러워 봤자겠지만-입구를 안내하고, 인맥을 통해서만 암호가 전달되었다.
하지만 나야, 답안지를 이미 봤으니까.
"원작이라는 답안지 말이지."
나는 히죽 웃으며 천천히 도박장 안을 거닐었다.
이 지하에 이토록 큰 공간이 있으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누가 만들었는지 몰라도 정말 대단하군.
느긋한 걸음으로, 어떤 게임을 할지 고민하는 척하면서 걸음을 옮긴다. 그러나 가면 속의 눈은 게임을 하는 사람들을 꼼꼼히 훑고 있었다.
'어디 있지? 오늘 비번이니 여기 왔을 텐데.'
사람들은 모두 가면을 쓴 채 도박을 즐기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의 정체를 알아채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니, 설령 알게 되더라도 이곳에서는 서로를 모르는 척하는 것이 원칙이다.
평범한 농부건, 길거리 불량배건, 주머니 두둑한 상인이건, 영주의 아들이건.
모두가 평등해지는 곳이 이곳, 불법 도박장인 것이다.
"칩을 교환하고자 하는데."
그리고, 영주의 기사 또한 이곳에선 한 명의 도박꾼일 뿐이다.
"-!"
나는 딜러에게 다가서는 한 남자를 발견하곤 눈을 빛냈다.
Chapter 1. 약점을 쥐고 흔든다. (4)
어두운 고동색 머리카락, 그리고 다른 이들의 머리를 내려다볼 정도로 큰 키가 눈에 띄었다.
'저 사람인가?'
확인하기 위해서는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나는 칩 교환이 목적인 것처럼 천천히 그쪽으로 다가갔다. 주머니를 뒤지는 척하며 그를 힐끔 살폈다.
검은색 상의를 입어도 결코 왜소해 보이지 않는 건장한 체격. 떡 벌어진 어깨 아래로 우락부락하게 붙은 근육.
결정적으로, 가면 아래 드러난 입술 옆에 붙은 점까지.
"여기 있습니다."
환전 담당 딜러가 칩을 내밀었다.
남자의 크고 투박한 손이 단번에 모든 칩을 쓸어 담았다. 시퍼렇게 못 박힌 손등이 삼엄한 기운을 풍겼다.
"고맙소."
그는 곧바로 뒤돌아서 다른 테이블로 향했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찾았다.'
생각보다 빠르게. 적어도 사흘 정도는 들락거릴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그의 인상착의를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리암 슈미트. 오베스트 영지의 국경군 소속 기사.
나는 그를 검술 스승으로 삼을 계획이었다. 물론 이 계획에 그의 의사는 들어있지 않았지만.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한데.'
리암을 마주할 생각을 하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기분 좋은 예감이 뭉글뭉글 피어올랐다.
나는 키득키득 웃으며 그가 앉은 테이블 옆으로 향했다. 다른 테이블의 게임을 구경하는 척하면서 틈틈이 그가 있는 테이블을 살폈다.
현재 참여한 게임은 포커. 승률은 높지 않은 편이었다.
테이블을 두드리는 그의 손길에서 초조함이 느껴졌다. 가면 틈새로 비치는 눈엔 핏발이 가득했다.
'오베스트 영지 기사단의 봉급이 많지는 않을 테지.'
하지만 그 혼자 먹고 살기엔 충분한 금액이다. 그럼에도 그는 이 도박장 바닥을 전전했다.
이미 도박이라는 늪에 깊이 빠진 뒤였기 때문이다.
내 입가에 날카로운 미소가 스쳤다.
'나는 녀석을 그 늪에서 끌어올려 주면 되는 거고.'
리암이 문득 얼굴을 든 순간,
"...."
나는 태연하게 고개를 돌려 테이블을 보는 척을 했다.
'역시 기사의 감은 무시할 수 없네.'
그에게 들키지 않으려면 드문드문 시선을 다른 곳에 던져야 할 듯했다.
얼마 후, 약간의 돈을 잃은 리암은 테이블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이리저리 주변을 둘러보며 다른 할만한 게임이 없는지 살폈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기도했다.
'저기로 가라, 제발 저기로 가.'
내 바람을 들었는지, 리암은 내가 원했던 테이블로 향했다.
'이제 가까이 갈 수 있겠군.'
나는 슬금슬금 그가 자리한 테이블로 다가갔다. 테이블은 그가 앉은 덕분에 만석이 되어 게임에 참가하려면 조금 기다려야 했다.
"패 돌리겠습니다."
그가 선택한 게임은 블랙잭. 카드의 수 합을 21로 만들어야 이기는 게임이다.
기본 규칙은 간단하다. 하지만 현재 등장한 패를 보고 다음 수를 예측해야 하기 때문에, 상당한 두뇌 회전을 요구한다.
'평생 검만 휘둘러온 리암이 하기에 쉬운 게임은 아닐 텐데.'
예상대로 그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처음에는 조금 따는 듯했으나, 다른 사람들이 참가하면서 연달아 잃기 시작했다.
"...."
나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그의 칩더미를 꼼꼼히 관찰했다. 얼추 계산해보니 이전 테이블에서보다 더 많은 돈을 잃은 것 같았다.
시간이 흐르고, 결국 그의 칩이 모두 바닥났다.
가면 아래 드러난 턱이 악다물어졌다. 얼굴이 전부 보이진 않았지만 많이 낙심한 게 느껴졌다.
드르륵.
결국 리암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미련이 남았는지 테이블 주변을 계속 맴돌았다.
'그래. 지금 가면 안 되지.'
나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자리가 비길 기다렸다.
"난 여기까지."
마침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이도 일어났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그 자리에 앉았다.
"룰 설명이 필요하십니까?"
새로운 참가자가 많은 탓에 딜러가 확인차 물었다. 나를 포함한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
"필요 없어."
"그냥 바로 시작."
"알겠습니다. 그럼 패를 받으십시오."
카드를 받은 뒤 힐끗 시선을 돌리니, 리암이 입을 일자로 다문 채 테이블 위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의 옆 얼굴을 향해 미소를 보냈다.
지금부터 잘 보라고. 게임이란 어떻게 하는 것인지 알려줄 테니까.
"시작하지."
나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툭 두드렸다.
❖ ❖ ❖
"블랙잭."
내 한마디에 주변에 탄성이 터졌다.
"또, 또 이겼어."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지?"
"저런 말도 안 되는 승률은 처음 봐."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나를 힐끔거렸다.
"뭐야,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몰라. 그냥 내는 족족 21이야."
"딜러가 이기는 꼴을 못 봤네.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거지?"
나는 속으로 콧노래를 불렀다.
'알아도 너희들이 못할 방법이지.'
손해를 보며 장사하는 상인은 없다. 따라서 도박장은 반드시 일정 이상의 승률을 확보한 채 운영한다.
기본적으로 참가자에게 불리하게 설정되어 있는 게임. 오로지 확률과 운에 의해 결정되는 결과.
하지만 그 게임들 중에서도, 블랙잭은 유난히 특별하다.
'유일하게 현재의 카드가 다음 카드에 변수를 일으키는 게임.'
따라서 현재 테이블에 놓인 카드를 제외하고, 남은 카드를 유추한다면 승률을 끌어올릴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바닥에 놓인 카드와 각 플레이어의 수중에 있는 카드를 짐작해야 한다.
그것은, 카드의 수를 전부 꿰고 있는 채 가능한 경우의 수를 전부 추론해야 가능한 일이다.
보통 사람들에겐 불가능한 일. 하지만....
"어떻게 계속 이기는 거야?"
"카드를 전부 외우고 있지 않고서야...."
"그런 게 가능하다고?"
가능하다.
원작에서 중요하게 다뤄지지는 않았지만, 아벨에겐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바로 한 번 본 것은 완벽하게 기억하는 것.
'완전 기억능력이라고 하던가.'
정말이지 독특한 감각이었다. 모든 기억들이 마치 사진처럼 차곡차곡 뇌에 저장되는 느낌.
약간 정신을 집중해 그것을 끌어내면, 방금 본 것처럼 선명하게 망막에 새길 수 있다.
그것이 내가 연전연승을 거두는 이유였다. 이미 이것은 딜러가 다룰 수 있는 영역 밖의 일이었다.
'어디까지 벌 수 있을까.'
나는 눈으로 칩의 금액을 계산했다. 이 정도면 아마 오늘 카지노에서 가장 많은 수익을 거뒀을 터이다.
하지만 내 목적은 돈이 아니었다.
이 정도의 돈은 내게 푼돈에 불과했다. 이미 원작의 정보를 꿰고 있는 나에겐, 더 막대한 재산들이 미래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내 목적은 다른 곳, 정확히는 사람이었다.
"...."
내 왼쪽 근처에 서 있는 리암을 흘끗 살폈다.
그는 어안이 벙벙한 기색으로 테이블 위를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자신이 입을 살짝 벌리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역시 끝까지 지켜볼 줄 알았어.'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미 내게 패배한 많은 참가자들이 칩을 잃고 떠났다. 그런 일들이 반복되자,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
내 파죽지세를 꺾어 주길 바라는 쪽과, 내 승리가 어디까지 이어질지 궁금해하는 쪽.
리암의 경우엔 후자였다.
그는 내가 2연승을 따내기 시작한 때부터 쭉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내 칩의 높이가 높아질수록, 그의 입이 벌어지는 빈도 수도 늘어났다.
"...말도 안 돼."
리암의 중얼거림을 입모양으로 읽어냈다. 그는 내가 떠날 때까지 이 테이블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내게 궁금한 것이 생겼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이 내가 의도한 바였다.
"블랙잭."
"...."
내 패를 확인하는 딜러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그는 창백하게 질린 안색으로 본부 쪽을 힐끔힐끔 돌아보았다.
기본적으로 딜러들은 도박장에 이득을 가져다주기 위해 고용된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 반대가 되었으니,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눈앞의 딜러를 애도했다.
재수 옴 붙었다고 생각해. 지금껏 많이 벌어왔잖아?'
주변 분위기를 유심히 살피다가, 이 정도면 됐다 싶어 카드를 내려놓았다.
"난 여기까지."
"헉, 네. 알겠습니다."
딜러가 반색하며 대답했다. 그러고는 손을 잘게 떨며 칩을 옮기기 시작했다.
저 떨림이 아까는 공포였다면, 지금은 기쁨이 조금 섞여 있었다.
나는 한쪽 손으로 턱을 괸 채 앞을 바라보았다. 테이블 위의 모든 칩이 내 앞으로 옮겨져, 높게 솟아오르는 모습이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사람들은 제 턱이 빠지는 줄도 모르고 내 앞의 칩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눈구멍 사이로 비치는 눈동자에 탐욕의 빛이 넘쳐흘렀다.
한편, 몇몇 사람들의 눈에는 그보다 스산한 빛이 감돌았다.
나는 그들의 눈빛을 모르는 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쩔그렁, 짤그르르....
어찌나 칩이 많았던지, 칩 하나가 테이블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바닥을 구른 칩은 누군가의 발 앞에 멈추었다.
"아."
리암 슈미트. 그의 앞에서.
리암이 칩을 주워 내게 다가왔다. 그는 두 손가락으로 칩을 잡고 내밀었다.
"받으시오."
"고마워."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가면 속의 눈동자가 흠칫 떨렸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동공이 확장됐다.
내가 누군지 알아챈 모양이군.
나는 모르는 척 자연스레 시선을 돌렸다.
'기사의 관찰력은 무시 못하겠네.'
하긴 이렇게 가까이서 아벨 특유의 눈동자를 보았는데 못 알아채면 그게 등신이지.
나는 태연하게 그를 지나쳐 걸었다. 등 뒤로 그의 눈길이 날아드는 게 느껴졌다.
칩이 담긴 자루가 묵직했다. 그것을 환전소에 내려놓자, 칩만 든 것 치고는 굉장한 소리가 났다.
쿵.
이미 나를 지켜보고 있던 직원의 눈길은 곱지 않았다. 하지만 곧 그 위에 영업용 미소가 덮어 씌워졌다.
"환전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두둑해진 주머니를 품에 넣고 아까 사용했던 계단을 올랐다. 아무도 없는 방에 들어선 뒤 가면을 벗었다.
"휴우."
환기가 잘 안 되는 밀폐된 공간에서 쭉 쓰고 있었더니 답답했다.
"여름엔 이 짓도 못 해 먹겠군."
얼굴을 몇 번 매만진 뒤 다시 가면을 썼다.
'원래는 반납해야 하지만.'
더 쓰고 있어야 하니까 대충 은화 1개 정도 올려두면 되겠지.
나가는 문은 들어온 문의 맞은편 벽에 있었다. 문고리를 잡고 돌리자, 아무도 없는 휑한 골목이 나를 맞이했다.
"슬슬 가볼까."
아주 천천히.
뒷말을 속으로 중얼거린 뒤 걸음을 옮겼다. 나가는 골목은 바텐더도, 창녀도 없이 조용했다.
미끼를 던져뒀으니 슬슬 입질이 올 때가 되었다.
나는 속으로 1부터 100까지를 천천히 세었다.
'...79, 80.'
막 골목을 빠져나와 공터에 다다랐을 무렵이었다.
"어이."
뒤에서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왔군.'
나는 미끼를 문 첫 번째 손님을 향해 돌아섰다.
험상궂은 생김새와 꽤 좋은 덩치. 얼굴에 나 불량배요, 라고 써 놓은 듯한 세 명이 터벅터벅 다가왔다.
"...."
나는 찬찬히 그들의 얼굴을 훑었다.
아까 카지노에 있었던 녀석들 중 하나로군. 유난히 탐욕이 덕지덕지 묻은 눈길로 나를 바라보던 놈들 중 하나였다.
"왜 불러."
Chapter 1. 약점을 쥐고 흔든다. (5)
이 상황에서 나 불렀냐, 라고 묻는 건 무의미하다. 어차피 여긴 나와 그들뿐일 테니까.
내 불퉁한 대꾸에 셋이 시선을 교환했다. 그중 가장 먼저 나를 불러 세운 남자가 입을 열었다.
"이거 생각한 대로네."
"뭐가."
"배짱이 꽤 좋다고 생각했거든."
"아까 도박장에서?"
내 느른한 대꾸에 남자가 입꼬리를 쫙 찢었다.
"알고 있다면 이야기가 빠르겠군."
세 남자가 품에 감춰 두었던 무기를 꺼내 들었다.
봉, 그리고 몽둥이. 날이 없어 살상력은 떨어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 무기가 사람을 죽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뼈가 부러지고 살이 으스러질 때까지 패면 결국엔 죽을 테니까.
'쯧쯔.'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저 치들이 어디에 소속된 자들인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도망간 창녀를 붙잡아오는 자들이군.'
상품이 상하면 안 되기에 저렇게 날이 없는 무기를 들고 다닌다. 하지만 그것만이 그들의 일은 아니다.
한 놈이 든 무기 끝엔 못이 여러 개 박혀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엔 검붉은 피딱지가 얹혀 있었다.
'아마 도망간 창녀의 기둥서방 피겠지.'
본보기로 그를 두들겨 패며 창녀에게 경고했을 것이다. 또 도망치면 너도 이런 꼴이 될 거라고.
저렇게 못 박힌 무기로 두들겨 맞은 상처는 참혹하다. 그 꼴을 본 창녀는 도망갈 의지를 상실했을 것이다.
'꼭 와도 질 나쁜 놈들이 달라붙는군.'
아무튼 잘 된 일이었다.
죄책감 없이 일을 마칠 수 있겠어. 딱히 있지도 않았지만.
선두의 사내가 몽둥이를 들더니 손바닥에 탕 내리쳤다.
"곱게 자란 도련님 같은데, 내 특별히 선심 써주지."
"무슨 선심?"
"처음에 들고 온 돈 빼고, 오늘 번 돈만 다 내놓고 가라."
옆의 사내가 들고 있던 몽둥이로 바닥을 퉁 쳤다. 끝에 달린 못에서 쇳소리가 났다.
"여기 내려놓고 가면 곱게 보내 주지."
눈가에 상처가 있는 세 번째 사내가 주먹에서 뚜둑, 소리를 냈다.
명백한 협박의 몸짓이었다. 물론 내겐 씨알도 먹히지 않았지만.
나는 키득키득 웃었다.
"싫다면 어쩔 건데?"
세 사람이 서로 마주 보곤 별 미친놈 다 본다는 표정을 지었다. 선두의 사내가 대답했다.
"싫으면 맞아야지."
"해 봐."
나는 거만한 태도로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노골적인 비웃음을 입가에 피워 올렸다.
"할 수 있으면."
믿는 구석이 있기에 보일 수 있는 허세였다.
"저 새끼가!"
마지막 사내가 몽둥이를 들고 달려들었다. 놈의 몽둥이가 나를 노리고 크게 휘둘러졌다.
나는 품에 손을 집어넣으며 눈을 빛냈다.
'아래.'
생각과 동시에 무릎을 굽혀 몸을 낮췄다. 동작이 큰 탓에 피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손끝에 호신용으로 가지고 다니는 단도가 느껴졌다.
'어떡할까.'
고민은 짧았고 결정은 한순간이었다. 무언가에 이끌리듯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
품에서 단도를 꺼내는 동작 그대로, 손이 앞을 향해 쭉 뻗어갔다. 놈의 무방비한 하반신을 향해서.
"아아악!"
빠르고 강하게, 날카로운 단도가 놈의 발목을 베었다. 그 궤적을 따라 선홍빛 피가 휘날렸다.
놈이 발목을 붙잡고 바닥에 널브러졌다.
"끄아악!! 젠장."
그는 욕설을 내뱉은 뒤 무릎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니, 일어서려고 했다.
"아악...!"
단지 발목 뒤를 베였을 뿐인데, 놈은 발목이 통째로 잘린 것처럼 고통스러워했다. 그리고 두 번 다시 그쪽 발목을 땅에 딛지 못했다.
"끄흐윽."
놈이 간신히 몽둥이를 짚고 바닥에서 일어섰다. 베인 발목을 저는 것이 그조차도 힘에 겨워 보였다.
나는 놀란 표정을 짓지 않기 위해 애썼다.
'이 몸은 대체....'
원작에서 아벨은 검술을 배운 적이 없다. 하지만 '인간'의 살을 가른 경험은, 영지의 그 누구보다도 많았다.
어디를 베면 상대가 고통스러워하는지, 어디를 베면 상대가 움직이지 못하게 되는지. 지독할 정도로 자세하게 아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경험과 지식은 이 육체에 충실히 축적되어 있었다.
'타인을 베는 게... 지나치게 자연스러워.'
본능에 가까울 정도로 완벽한 약점 파악, 사람을 베는 것에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는 단호함, 소름이 끼칠 만큼 정교한 움직임.
그는... 살인의 천재였다.
'과연 제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살인귀가 될 만하네.'
나는 단도를 쥔 손에 힘을 꾹 주었다. 동시에 콧속으로 밀려드는 강렬한 혈향을 느꼈다.
"...."
놈이 움직일 때마다 흘러나온 피가 바닥을 물들였다.
두근, 두근.
심장이 아플 정도로 빠르게 뛰었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가슴에 손을 얹었다.
'뭐지, 이 느낌?'
격렬한 두근거림은 차라리, 순수한 환호에 가까웠다. 아벨의 심장은 지금 진심으로 기뻐 날뛰고 있었다.
'이거...구나.'
아벨의 아버지가 그에게 검술을 가르치지 않았던 이유가, 뒤늦게 떠올랐다.
아벨은 피를 보는 것을 즐기고, 더한 살인 충동에 휩싸이는 광증을 타고났다. 심지어 이 충동은 주기적으로 찾아들어 아벨을 부채질하곤 했다.
'그래서 디에고는 계속해서 아벨을 억압하고 통제하려 들었지.'
나는 입안의 여린 살을 깨물었다.
자꾸만 환청 같은 것이 들려왔다. 저놈의 가슴을 가르고 심장을 꺼내라고 부추기는 듯한.
몹시도 강력하게 사람을 현혹하는 속삭임이었다. 여기 몸을 맡기면 그저 모든 것이 편안해질 것만 같았다.
'...안 돼. 듣지 마.'
이성을 단단히 붙들고 현실로 돌아오려 애를 썼다. 여기서 굴복하면 걷잡을 수 없어진다.
나는 배에 힘을 주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거칠게 들썩이는 심장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실제론 아주 짧지만, 체감상 무척 길고도 고통스러운 시간이 흘렀다. 나는 몇 번이고 내 자신을 삼키려 드는 충동의 해일을 버텨냈다.
"...."
어느 순간,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목소리가 조금씩 희미해졌다.
요동치던 심장이 내 의지를 따라 잠잠해졌다. 당장이라도 눈앞의 희생양을 향해 뻗어 나가려던 손이 축 늘어졌다.
'휴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긴장을 풀어서는 안 되었다. 무엇보다 아직 적과 대치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짧게 심호흡한 뒤 눈앞의 놈에게 시선을 옮겼다. 놈은 여전히 제 다리를 움직이기 위해 갖은 애를 쓰고 있었다.
"그냥 쉬지 그래?"
바짝 말라버린 목구멍을 축이고 일부러 여유로운 목소리를 내었다.
"그쪽 다리, 당분간은 못 쓸 테니까."
"끄으윽...."
헛된 노력에 종지부를 찍어 주자, 분노와 공포로 놈의 양 뺨이 부들부들 떨렸다.
물론, 놈이 내게 다시 덤비는 일은 없었다. 나는 놈을 지나쳐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뭐, 뭐야 저놈?"
"이게 무슨...."
나머지 두 사내가 눈에 띄게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그들의 계획에 이런 상황은 들어 있지 않았겠지.
"다음은 누구?"
나는 피 묻은 단도를 가볍게 흔들었다.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애초에 믿는 구석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아벨은 저 셋의 명백한 포식자였다.
"누구냐니까?"
"감히 루이스를!"
다른 한 놈이 소리치며 달려들었다.
나 참, 이런 깡패들에게도 전우애라는 게 있는 건가.
"저놈 이름이 루이스야?"
나는 키득거리며 놈에게 맞섰다. 흥분한 탓에 놈의 동작이 커졌고, 그걸 피하는 것은 처음보다 훨씬 쉬웠다.
몸을 살짝 옆으로 트는 것만으로 공격을 비껴냈다. 놈의 무방비한 뒷모습이 그대로 노출되었다.
나는 놈의 무릎 뒤쪽을 단도로 콱 찍어 버렸다.
"크아악!"
놈이 다리를 붙잡고 바닥에 쓰러졌다.
"여기가 잘리면, 걸을 수가 없지."
"끄윽, 끄으어억...."
놈이 버둥거리며 일어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놈의 몸은 의지를 배신했다.
마치 다 늙어 죽어 가는 노인의 몸처럼, 아무리 힘을 주어도 일으킬 수 없었다.
"끄으윽...."
놈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바닥에 쓰러진 놈을 응시했다.
인간의 몸은 생각보다 나약하다. 결정적인 한 곳만 제압해도 일어나질 못하니.
아벨의 '그곳'에서, 가끔 달아날 기회를 잡은 희생자들이 있었다. 우연히 그들을 구속한 쇠사슬이 끊어지거나, 매듭이 풀린 덕분에.
그때 아벨은 무기를 단 한 번 휘두르는 것으로 그들을 간단하게 무력화시켰다. 바로 지금처럼.
물론 그들이 달아나려는 시도조차 할 수 있었던 것은....
'일부러 풀어줬던 거였지.'
사냥감이 달아나도록 유도하고, 절박하게 발버둥치는 놈의 숨통을 조이는 것.
그것이 아벨의 유희이자 쾌락이었다.
"젠장...."
남은 한 놈이 몽둥이를 꽉 붙잡았다. 놈의 불안하게 떨리는 눈이 바닥의 동료들과 내 손에 들린 단도를 바쁘게 오갔다.
"뭐해? 어서 움직여."
나는 머뭇거리는 놈을 채근했다. 그리고 보란 듯이 날에 묻은 피를 혀끝으로 핥았다.
미친놈처럼 보이기 딱 좋은, 그렇기에 놈을 더 겁줄 행동이었다.
"-!"
놈의 눈이 더욱 격렬하게 진동했다. 머릿속으로 계산이 요란하게 오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느릿하게 칼날을 핥으며 놈에게 시간을 주었다.
'으윽, 맛 없어.'
도대체 뱀파이어들은 이게 뭐 그리 맛있다고 먹는 거지? 그러고 보니 이 세계관엔 뱀파이어가 있었지. 만날 수 있으려나?
따위의 생각을 하면서.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표정엔 감정 한 조각조차 깃들어 있지 않았다. 그저 나른하고 여유로운 모습뿐.
"으아아아아!!!"
마침내 놈이 결심한 듯 몸을 날렸다. 자신이 겁먹었다는 것을 감추려는 듯 크게 고함치면서.
'흠, 보통 마지막이 가장 센 놈 아닌가?'
놈의 움직임은 앞선 두 놈보다 허점이 많았다. 싸움을 잘해서 놈들을 통솔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
"이야압!"
놈은 다른 놈들보다 가볍고 얇은 몽둥이를 사용했다. 그리고 철저하게 자신의 하체를 보호했다.
'아하.'
앞의 두 놈이 당한 것을 보고 저리 대처하나 본데. 확실히 머리는 가장 좋은 것 같았다.
뭐, 그리 잔머리 굴려보아야 소용없는 일이지만.
나는 순간적으로 거리를 확 좁혀 놈에게 달려들었다.
"히익!"
예상대로 놈은 꼴사나운 비명과 함께 마구잡이로 팔을 휘저었다.
'빈틈.'
내 눈이 차갑게 번득였다.
사악!
단도가 놈의 겨드랑이 아래를 갈랐다.
"끄아아아!"
놈이 몽둥이를 놓치고 바닥에 널브러졌다.
"내 팔, 내 팔이!"
놈의 팔이 인형의 그것처럼 힘없이 덜렁거렸다. 나는 어깨를 붙잡고 흐느끼는 놈에게 친절히 말해 주었다.
"힘이 안 들어가지? 빨리 치료 안 하면 그 팔, 평생 못 쓸 거다."
놈의 눈에 공포가 스멀스멀 번졌다. 놈이 젖먹던 힘까지 쥐어짜 외쳤다.
"제발, 제발 우릴 보내 주시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전의를 잃은 상대와 싸우는 것엔 흥미가 없었다.
"10초 안에 꺼져."
"네, 네! 감사합니다!"
놈은 제 인생의 모든 예의를 다해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나머지 두 놈을 추슬렀다.
"얼른 일어나."
"으흑, 형님...."
"빨리!"
놈들은 서로를 부축하고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
나는 멀어져 가는 놈들의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일부러 깊이 안 벴어. 아물면 걸을 수는 있을 거다."
질질 끌리는 발소리가 멀어지고, 사위에 정적이 찾아들었다.
"후우...."
나는 팔을 축 늘어뜨렸다.
팽팽 솟아나던 아드레날린이 잦아들자 탈력감이 몸을 감쌌다.
'아벨로 사는 게 쉬운 일은 아니군.'
낮게 혀를 찬 뒤 단도를 품에 집어 넣었다. 내가 열심히 핥은 덕에 깨끗해진 그것을.
그리고 들으라는 듯 크게 소리쳤다.
"리암 슈미트. 슬슬 나오지 그래?"
근처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을 리암을 향해서.
Chapter 1. 약점을 쥐고 흔든다. (6)
그러나 예상과는 다르게, 주변에선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가 입을 열었다.
"지켜본 거 알고 있어. 나와서 이야기하자고."
애써 머쓱함을 감추며 태연한 척했지만.
"...."
민망하기 짝이 없는 침묵이 되돌아왔다.
"하."
천하의 아벨 킨드리얼이, 아무도 없는 골목에서 혼자 소리치는 얼간이가 되는 순간이었다.
'허탕인가? 그럴 리 없는데.'
리암은 분명 날 알아본 눈치였다.
영주의 아들을 눈앞에서 보고, 또 그가 도박에서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봤는데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그렇다는 건 역시,'
근처에 몸을 숨긴 채 날 지켜보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귀찮게 구는군.'
나는 내심 혀를 찼다.
일 분 일 초가 아쉽고 또 소중한 이 상황에, 정말이지 쓸데없는 조심성이었다.
"당장 성으로 돌아가야겠군."
결국 최후통첩을 날리는 수밖에 없었다.
"가서 오늘 카데르 영지에서 누굴 봤는지 말해야겠어."
어디, 이렇게까지 해도 네가 안 나오고 배길 수 있을까?
나는 팔짱을 낀 채 한쪽 다리를 비틀어 섰다. 그리고 주변의 소리에 귀를 집중했다.
뚜벅.
이윽고, 뒤에서 묵직한 발걸음이 날아들었다.
뒤쪽으로 몸을 돌렸다. 좁은 골목길 사이로 아깐 보이지 않았던 인영이 보였다.
새카맣게 보일 정도로 어두운 고동색 머리카락과 눈동자.
리암 슈미트가 내 앞에 서 있었다. 아까 도박장에서 사용했던 가면을 쓴 채.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그의 실력에 더욱 확신이 섰다.
그저 서 있을 뿐인데도 존재감이 엄청나다. 확실히 조금 전의 세 떨거지 놈들과는 달랐다.
나는 웃으며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 던졌다.
"피차 서로 정체도 아는데, 이런 건 집어치우지?"
답답하게 머리를 죄어오던 가발도 벗어 버렸다. 아직 가면을 쓰고 있는 리암을 향해 비웃음을 날렸다.
"지금 와서 말하는데, 그 가면 진짜 구려. 다음엔 좀 큰 걸로 사."
"...."
미동 없이 서 있던 리암이 손을 움직였다. 탁, 가면이 튕겨 나가고 투박한 인상의 얼굴이 드러났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약간의 쇳소리가 섞인 낮은 음성.
"아벨 도련님."
그는 나를 탐색하려는 듯 찬찬히 훑었다. 오래된 나무 같은 눈동자가 냉철한 안광을 뿜어냈다.
나는 그 시선을 맞받아쳤다.
"그냥 딱 보면 알지. 우리 영지의 기사들인데."
그를 일부러 찾아왔다는 사실은 흘리지 않는 게 좋았다.
리암이 미심쩍다는 어조로 물었다.
"그냥 보고 아셨다고요?"
"그래. 기사 특유의 기운, 그리고 그 덩치까지. 그게 가면만 쓴다고 가려지겠어?"
내 신랄한 말투에 리암이 찔끔했다.
"너도 그래서 날 알아봤잖아. 아닌가?"
"모를 수가 없죠. 도련님의 눈 색은 유명하니까요."
"아, 그래?"
피식 웃으며 내 뒤를 향해 턱짓했다. 아까 세 놈들이 달아난 방향으로.
"그런데도 구경만 하고 있었나?"
"도움이 필요하지 않아 보이셔서요."
내 힐난에도 리암은 끄떡없는 눈치였다. 그의 시선이 바닥에 남은 피웅덩이를 향했다.
"게다가, 도련님도 즐기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만."
"그래도 놈들은 셋이었어. 내가 위험에 처하면 어쩔 생각이었지?"
"그럴 일은 없었을 겁니다."
리암이 확신 어린 말투로 말했다.
"도련님이 정체를 밝히시는 게 먼저였을 테니까요."
그가 바닥에 나뒹구는 가면을 가리켰다.
'한 마디도 안 지네.'
나는 슬그머니 미소지었다.
지금껏 내가 입만 뻥긋해도 오들오들 떠는 사람들만 보다가, 기죽지 않고 맞서는 상대를 보니 신선했다.
게다가 꽤 정확하고.
나를 쫓아온 놈들과 당당히 맞서 싸운 데는, 리암이 지적한 대로 믿는 구석이 있어서였다.
내가 정체를 드러냈다면 그 세 놈들은 즉시 싸울 의지를 잃었을 터였다.
"그러면 재미없잖아."
"...."
내가 빙그레 웃자 리암의 안색이 흐려졌다. 아까의 세놈들이 난자당하던 순간을 떠올리고 있는 듯했다.
"...그 말을 하려고 부르신 겁니까?"
그가 곧 화제를 돌렸다. 여전히 꺼림칙한 기색이 가득한 얼굴로.
내가 도박장에서 자신과 마주친 것도, 근처에서 지켜보는 자신의 존재를 알아챈 것까지.
모든 상황이 그를 겁먹은 고양이처럼 잔뜩 경계하게 만들었다.
"아니. 내 용건은 그게 아니야."
나는 잠시 간격을 두었다가 말했다.
"나와 거래하자."
뜻밖의 발언이었는지 리암이 눈썹을 추켜올렸다.
"제가 도련님과 무슨 거래를 한단 말입니까?"
나는 손가락을 들어 리암의 팔뚝을 가리켰다.
"네 검술을 원해."
"...."
뜻밖의 말이었는지 리암의 얼굴이 경직됐다. 잠시 굳은 듯이 서 있던 그가 입을 열었다.
"도련님께 검술을 가르치는 것은 금기입니다. 영주님께서 결정하신 사항이고요. 저는 영주님의 뜻을 거스를 생각이 없습니다."
"아, 그래? 아주 충성스러운 기사로군."
배배 꼬인 말투가 이어졌다.
"요샌 도박이 기사의 소양인가 보지?"
리암의 그림자가 흠칫 떨렸다. 나는 그가 뭐라 말할 틈도 없이 말했다.
"내 요구는 간단해. 내게 검술을 가르치면, 오늘 본 건 잊어 주지."
약간의 침묵 후, 리암이 딱딱한 말투로 물었다.
"지금 저를 협박하시는 겁니까?"
"네가 뭐라고 생각하든 상관없어. 난 원하는 것만 얻으면 되니까."
리암의 눈빛이 한층 험악해졌다. 자신이 모시는 영주의 아들을 향하는 것치곤 거친 눈빛.
'내 소문을 대충은 알고 있나 보군.'
아벨은 잔악하고 폭력적인 성향을 성내에선 유감없이 드러냈지만, 그것이 성 밖으로 새어 나가는 것은 철저하게 막았다. 이른바 영지민이나 디에고 휘하의 기사들에게.
그 탓에 그들은 아벨을 그저 철없는 한량, 질펀한 망나니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디에고가 일평생 유일하게 사랑한 여자에게서 얻은 아들이기에, 꼼짝없이 아들의 말을 들어 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게 전부는 아니지만.'
나는 리암을 지긋이 응시했다.
"한 대 치겠는데?"
"...죄송합니다."
리암은 마지못해 대답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다시 나와 눈을 맞추었다.
"오늘 일을 이야기하시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닐 겁니다."
"흐응, 어째서지?"
"그 도박장에서 도박에 참여한 건 저뿐만이 아니잖습니까."
만약 오늘 일을 말하면, 자신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협박이었다.
'기껏 생각한 게 그건가?'
리암의 수가 뻔히 들여다 보였다. 너무도 얄팍하고 무의미한.
"네 말이 맞아."
나는 느긋하게 턱을 톡톡 두드렸다.
"아버지는 내가 도박장에 간 것에 무척 분노하실 거다."
"네, 동귀어진이나 다름없는 짓입니다. 그러니...."
"하지만."
내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스쳤다.
"그런다 한들 나는 그분의 유일한 아들. 내가 이 영지에서 쫓겨날 일은 없다."
"...."
"하지만 넌? 얼마든지 대체 가능한 인력이지."
"그건...!"
리암이 이를 악물었다. 내 말에 자존심이 상한 듯 얼굴이 미미하게 붉어졌다.
"어쭙잖게 날 설득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리암."
나는 여유로운 목소리로 선택을 종용했다.
"그러니 어서 고르도록 해. 나를 가르칠 것인지, 이 영지에서 쫓겨날 것인지."
리암은 입을 꾹 다문 채 고민에 잠겼다. 그의 일그러진 미간이 격렬한 갈등을 담고 꿈틀거렸다.
이윽고 그가 시선을 들어 올렸다. 갈색 눈동자 깊숙이, 나뭇결처럼 새겨진 굳은 의지가 엿보였다.
'저런. 거절하려는 모양인데.'
나와 얽혀서 좋을 게 없으리라는 계산인 듯했다. 그건 그가 하나는 알지만 둘은 모르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네가 뭘 걱정하는지 알고 있어."
나는 재빨리 선수를 쳤다.
"하지만 지금 방식으론 빚을 감당할 수 없을 거다."
주변의 공기가 급변했다. 리암이 몸을 바짝 긴장시키며 나를 응시했다.
"그걸 어떻게...."
"이 영지 안에서 내가 모르는 일은 없어."
나는 옅은 웃음을 흘려보냈다.
"그렇게 해선 빚이 점점 늘어나기만 할 뿐이야. 도박장을 운영하는 놈들이 그렇게 깨끗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
"빚 독촉이 시작되면, 그땐 도박장을 방문한 건 더이상 문제가 되지 않을 거다."
오히려 다른 게 문제가 되겠지.
"-!"
의심의 눈초리로 나를 보던 리암이 흠칫했다.
일부러 뒤까지 말하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리암은 충분히 내용을 짐작한 듯했다.
"...."
그의 낯이 한층 어둡게 가라앉았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다른 이의 입으로 들으니 더욱 마음이 무거워지는 모양이었다.
'채찍질은 충분한 거 같군.'
그렇다면 이제 당근을 던질 차례지.
"아까 거래를 하자고 했지?"
"...네."
"내 거래에 응한다면, 빚을 갚을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
리암의 눈동자에 일순 빛이 돌았다. 그는 당장이라도 승낙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였다.
"...."
하지만 문장이 되어 나오는 말은 없었다. 그는 여전히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갈등을 계속했다.
여기서 슬슬 물러나는 게 좋겠군. 고민은 그의 몫이니까.
나는 바닥에 떨어진 가면과 가발을 툭 걷어찼다.
"생각할 시간을 주지. 마음을 정하면 내일 8시까지 마구간으로 와."
내일은 리암이 근무하지 않는 날이다. 근무일지를 꿰고 있기에 던질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럼."
나는 등 뒤에 리암을 남겨둔 채 그 자리를 떠났다.
❖ ❖ ❖
"다음."
나는 들고 있던 서류를 옆으로 툭 넘겼다. 책상 곁에 서 있던 필립이 다음 서류를 건넸다.
"이게 마지막입니다."
그의 음성이 미묘하게 떨떠름했다. 필립은 질린다는 듯이 탁자 위를 바라보았다.
"...."
그의 시선이 서류탑을 따라 위아래로 오르내렸다.
세금, 유통, 농사, 상업.... 영지 내의 모든 공문이 매일 같이 탁자에 올라온다.
사소한 것이라고 대충 넘겼다간 나중에 어떤 손해로 돌아올지 모른다. 몇 수를 내다보고, 이 선택이 가져올 결과를 생각하며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그 모든 일들을, 아벨은 지금껏 단신으로 처리하고 있었다.
'괴물 같은 능력이긴 하네.'
원작의 아벨이 어느 정도의 천재였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놀랄 만큼 정교한 기억력, 남들보다 몇 배나 빠른 비상한 두뇌 회전.
아마 아벨이 없었다면 오베스트 영지는 파산하고 말았을 것이다.
'디에고는 그것도 모르고 영지가 잘 돌아간다고 생각하겠지. 집사가 정리해 놓은 서류에 도장만 찍으면서 말이야.'
하여간 그 양반, 몸 쓰는 일은 잘해도 머리 쪽으론 영 아니라니까.
나는 속으로 꿍얼거리면서 마지막 서류를 빠르게 훑었다.
"요즘... 일을 굉장히 빨리 처리하시는군요."
필립의 눈알이 불안한 듯 데굴데굴 움직였다.
일을 빨리 끝낸 내가 무엇을 할지 못내 두려운 모양이었다. 아니면 한가한 나머지 잊고 있었던 일을 떠올린다든가.
필립의 노력은 가상했다. 내가 행여나 그 하인을 다시 부르기라고 할까 봐 절대 저번 일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하인을 결코 잊지 않았다. 심지어 늘 염두에 두고 있기까지 했다.
물론 그 사실을 필립에게 말하진 않았지만.
"그럼 안 되나?"
내 반문에 필립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Chapter 1. 약점을 쥐고 흔든다. (7)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냥 도련님께서 피로하시지 않을까 싶어 드린 말씀입니다."
"전혀 그렇지 않아."
나는 비웃음 섞인 말투로 덧붙였다.
"걱정해줘서 고맙군."
실은 전혀 고맙지 않았지만.
"...예."
필립의 낯에 안도감, 그리고 희미한 허탈함이 스쳤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걱정은커녕, 제발 죽었으면 하고 매일 빌고 있겠지.'
이 영지에서 나를 가장 걱정하지 않는 인물을 꼽으라면 그일 게 분명했다.
아쉽게도 아벨의 몸은 아주 튼튼했다. 그 산더미 같은 서류를 끝내고도 쌩쌩할 정도로 말이다.
'이제 마지막.'
서류에 도장을 쿵 찍고 내려놓았다. 필립이 서류를 차곡차곡 정리하는 동안,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뭉친 어깨를 풀었다.
"휴우."
오늘 안건은 일단락됐으니 이제 다음 일을 하러 가볼까.
"도련님, 옷을."
정리를 마친 필립이 내게 겉옷을 걸쳐 주었다. 나는 옷매무새를 다듬자마자 집무실 문을 벌컥 열었다.
"도, 도련님."
필립이 나를 다급히 쫓아왔다.
"혹시 지금 어디로 가시는 건지...."
"보면 모르나?"
"그, 그럼 오늘도 방에 가십니까?"
"어."
내가 복도를 가로지르자 주변의 하인들이 급히 고개를 숙였다. 행여나 아벨의 심기를 거스를까 두려움 가득한 기색들이었다.
나는 그들 사이를 왕처럼 지나쳐 내 방으로 향했다. 방문을 열자 예전과는 달라진 풍경이 나를 맞이했다.
값비싼 와인이 가득한 저장고를 구석으로 밀어, 중앙에 넓은 공간을 만들었다. 바닥에는 푹신한 매트를 깔고, 그 옆엔 쥐고 들어 올릴 무거운 봉을 마련했다.
'이건 그러니까....'
말하자면 실내 운동.
요근래 나는 남는 시간을 온통 체력 기르기에 쏟고 있었다.
'너무 나약한 몸이야.'
아벨의 육체는 민첩했으나 전반적으로 체력이 약했다. 거기에 힘도 부족한 편이라, 검을 들면 금세 팔이 후들거리곤 했다.
'레퀴엠을 쥐고 휘두르려면 이 정도론 턱도 없어.'
물론 레퀴엠은 보통의 강철검보다 훨씬 가볍다. 그러면서도 뛰어난 절삭력을 가지고 있고, 접촉한 생물의 생기까지 빼앗는다.
하지만....
두근.
갑자기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뛰었다.
"...."
나는 미간을 모은 채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또 시작이군.'
아벨의 광증은 이렇게 평상시에도 불쑥불쑥 찾아들곤 했다.
'살인을 멈추면 잦아들 줄 알았는데.'
보이는 생명을 갈가리 찢고, 심장을 꺼내어 터뜨리고 싶은 파괴적인 충동이 치솟는다.
솔직히 말해서 아벨이 미치지 않은 게 용했다.
'아, 아니지. 미쳤으니까 그런 짓을 하고 다닌 건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곤 눈을 꾹 감았다. 그리고 훌쩍 뛰어 내 키보다 높은 봉에 매달렸다.
'이깟 충동 따위에 질 수 없지.'
내 몸조차 다스리지 못한다면, 레퀴엠의 속삭임 또한 이기지 못할 것이다.
강한 몸에 강한 정신력이 깃든다. 그리고,
'곧 검술도 배워야 하니까.'
리암의 지도 대련을 받기 위한 준비이기도 했다. 녀석과의 시간은 혹독할 게 분명했다.
"하나, 둘, 셋...."
나는 턱걸이를 시작했다.
'일단 팔 힘을 먼저 기르고.'
그 다음엔 체력을 높여야 하니까 성 안이라도 좀 돌아야 하나.
이런저런 계산을 하고 있는데, 문득 시선이 느껴졌다.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문가에 서 있는 필립이 보였다.
그는 몹시 혼란스러워하는 눈빛으로,
'도련님이 왜 저러지?'
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만했다. 그가 아는 아벨은, 하루가 멀다 하고 사람을 고문하는 미친놈이었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아무 짓도 하질 않고 있다. 거기다 안 하던 몸 단련에 열중하고 있으니 통 종잡을 수가 없겠지.
"...."
필립이 분주히 머리를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래 봤자 소득은 없을 텐데.
"그만 가 봐. 필요하면 부를 테니."
나는 퉁명스레 말을 툭 던졌다.
그리고 몸을 내렸다가, 다시 힘주어 끌어 올리기를 반복했다.
"...열둘, 열셋...."
힘들다. 존나 힘들다. 팔이 끊어질 것 같다.
하지만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꾸준히 훈련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아니지, 더 좋은 방법이 있긴 한데.'
문제는 지금은 쓸 수 없는 방법이라는 것.
'역시, 그때 같이 챙기는 게 좋겠어.'
나는 머릿속으로 미래의 선택지 한 가지를 정리했다. 그와 동시에 몸을 파고드는 한계를 느꼈다.
"...오십."
봉에서 떨어지며 바닥에 내려섰다.
"후우, 후우."
등에서 땀이 비오듯이 쏟아졌다. 봉을 쥐고 있던 손바닥도 얼얼했다.
"후우, 죽겠다, 후우."
손바닥을 내려다보니 벌써 봉을 쥔 부분은 벌겋게 부풀어 있었다.
'굳은살이 생기면 훨씬 낫겠지.'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풀어주는데, 여전히 나를 지켜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필립."
눈썹을 찌푸렸다.
'왜 아직도 안 가고 저렇게 서 있는 거지?'
필립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넋 나간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정체 없이 헤매다, 이윽고 찌푸려진 내 미간에 닿았다.
"도련님. 혹시... 카데르 영지에서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나는 입가를 비틀었다.
"내가 그걸 일일이 알려줘야 하나?"
"저는 그저 도련님의 안위가 걱정되어서,"
"헛소리 그만하고."
나는 필립 쪽으로 아예 몸을 돌렸다. 그는 몸을 움찔거리면서도 끝끝내 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아하. 이렇게 나오시겠다? '
아무래도 요 며칠간 내가 너무 얌전히 군 모양이다. 이리 겁대가리를 상실한 꼴을 보아하니.
"내가 걱정되는 게 아니라."
치미는 비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무슨 짓을 하고 다녔을지가 걱정되어서겠지."
그는 아벨이 앓는 광증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내가 카데르 영지에서 뭔가 일을 벌였기에 잠잠한 거라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그걸 이런 식으로 드러내는 건 문제가 있다.
"필립."
나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딸은 잘 지내나?"
필립의 얼굴이 탈색이라도 한 듯 하얗게 변했다.
'주기적으로 목줄을 당겨줄 필요가 있겠군.'
필립이 나를 경멸하면서도 내 요구에 꼼짝 못 하는 이유. 그것은 내가 그의 비밀을 쥐고 있기 때문이었다.
필립은 제 봉급의 일부를 떼어 멀리 사는 아내와 딸에게 매달 송금하곤 했다.
문제는 그 딸이 아카데미 진학을 원할 때 생겼다.
제국의 아카데미는 고액의 입학금과 수업료를 요구한다. 일개 영지의 집사인 그에겐 감당하기 힘든 상황.
결국 그는 디에고의 부재를 틈타 영지의 세금을 횡령했다. 장부를 조작하는 수를 부리면서.
돈 다루는 일에 서투른 디에고는 이를 알아채지 못했다. 하지만 장부에 기록된 숫자를 정확히 기억하는 아벨에겐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 돈, 내가 기억하던 금액과 다른데?'
결국 아벨은 필립이 감춘 원래 장부까지 찾아냈다.
그 후로 필립은 아벨의 충실한 개가 되었다. 장부를 가지고 있는 한, 필립은 영원히 그의 명령에 복종할 것이다.
바로 지금처럼.
"도련님, 부디 용서를."
그의 허리가 휘어지도록 땅을 향했다.
"제가 결례를 범했습니다."
자신보다 20살은 어린 청년에게 꼿꼿한 허리를 굽히게 만들고, 비굴한 목소리를 자아내는 힘.
'부성애라는 게 무섭네.'
나는 그의 희끗한 정수리를 보며 느긋하게 말했다.
"기억력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인가?"
"죄송합니다."
손을 뻗어 필립의 어깨를 꾹 쥐었다.
"내가 하는 일을 궁금해하지도, 이유를 묻지도 마. 그냥 따르기만 하면 돼. 알겠나?"
"예."
내 손이 떨어지자마자, 필립이 곧바로 허리를 들어 올렸다. 그의 낯엔 어떤 감정의 찌꺼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나는 대꾸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필립은 그대로 몸을 돌려 밖으로 사라졌다. 몹시 마음에 드는, 순종적인 모습이었다.
❖ ❖ ❖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느긋하게 오후 시간을 보낸 뒤, 가벼운 저녁 식사까지 마쳤다.
스푼을 내려놓자 곁에서 시중을 들던 하녀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만 드시려고요?"
"이만 치워."
나는 손을 휘휘 저은 뒤 식당을 나섰다.
식욕이 왕성한 편인데다, 낮에 땀까지 흘렸더니 더더욱 배가 고팠다. 하지만 일부러 여기서 멈추었다.
곧 리암을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몸이 무거우면 그를 따라가기 힘들 테니까.
"시간이 다 됐군."
나는 어깨를 휘휘 돌리며 약속 장소로 향했다.
마구간 뒤쪽의 넓은 공터.
저녁 8시 이후로는 아무도 오가지 않는 한적한 장소. 검을 휘둘러도 될 정도로 충분한 공간을 갖춘 곳.
이 성 내에서 사람들의 눈을 피해 대련할 만한 장소는 이곳뿐이다.
나는 일부러 주변에서 뜸을 들이다가, 정확히 8시가 되었을 때 발을 들였다.
"...."
아무도 없나?
라고 생각한 순간,
"도련님."
마구간 기둥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리암이 나타났다.
나는 슬그머니 피어오르는 미소를 감추었다.
"왔군."
리암은 경계하듯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곧 얕은 한숨을 삼키고는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기사 특유의 정돈된 발걸음, 그 위로 허리춤에 매달린 검이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내려앉는다.
"한 가지 여쭐 게 있습니다."
그의 낯에 어린 수심은, 여기까지 오는 길이 쉽지 않았음을 드러냈다.
"왜... 저를 택하셨습니까."
이어지는 질문에서, 그가 어떤 고민을 거쳐 여기 이르렀는지 알 수 있었다.
"불만인가?"
"그런 건 아닙니다. 다만...."
리암의 눈빛은 그저 궁금한 것을 묻는 것처럼 담담했다.
"이유를 알고 싶을 뿐입니다. 도련님께는 저 외에도 다른 선택지가 있으시잖습니까."
타당한 지적이었다. 나에게는 여러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나는 리암의 허리춤을 바라보았다.
'근무일이 아닌데도 검을 차고 왔군.'
그는 이미 거래에 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내가 그의 약한 곳을 찌른 이상, 그에게 다른 선택지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의 질문은 그저 의미 없는 확인 절차에 불과했다. 나에겐 진실을 말해 줄 의무가 없었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나는 감정이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제안했고, 넌 선택했지. 남은 것은 따르는 것뿐이다."
손가락을 뻗어 그의 허리춤을 가리켰다.
"무엇보다, 네 대답은 이미 정해진 것 같군."
리암의 손이 움찔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가, 이내 떼었다.
"도련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한숨과 같은 대꾸가 흘러나오고, 이윽고 그의 시선이 내게 고정되었다.
"불필요한 의문이었군요."
리암이 다시 허리춤의 검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아까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 날카롭고 새파란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시작하겠습니다."
나는 그를 보며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그래,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
지금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보였다.
철없는 도련님의 수작질에 장단을 맞춰, 대충 가르치는 시늉만 하려다 끝낼 생각.
'검이라곤 한 번도 쥐어본 적 없는 일반인이, 제대로 배울 수 없으리라 생각하겠지.'
나는 굳이 그의 생각을 정정하진 않았다. 어차피 시간이 흐르면, 내가 말하지 않아도 그가 스스로 깨우칠 테니까.
"좋아. 근데 그 전에 잠깐."
그를 손으로 제지하곤 가져왔던 자루를 풀었다.
Chapter 1. 약점을 쥐고 흔든다. (8)
자루 안에 있던 목검 하나를 꺼내 리암에게 던졌다.
"이건...."
리암은 갑자기 날아온 목검을 여유롭게 잡아챘다.
"설마 진검을 쓰려고 했어?"
나는 그의 허리춤을 향해 턱짓하며 웃었다.
"왜, 이 기회에 날 좀 패고 싶었나 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리암이 흠흠 헛기침을 하더니 목검을 바로 쥐었다.
'아닌 게 아니라 기회를 노리고 있었겠지.'
그는 대련 중 실수인 척 내게 부상을 입힐 확률이 아주 높았다. 물론 그런 상황이 오지 않게 원천적으로 차단할 계획이지만.
남은 목검 하나를 마저 자루에서 풀었다. 그사이 목검을 쥔 리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목검을 안 쓴 지 오래되어서 괜찮을지 모르겠군요."
"그거 적응하는 데 그렇게 오래 걸리나?"
"...."
내 도발적인 질문에 리암의 눈빛이 변했다.
그는 입을 다물고는 목검을 강하게 몇 번 휘둘렀다. 휭, 휭 하고 위협적인 소리가 났다.
이윽고 리암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다 끝난 것 같습니다."
아, 그러냐?
나는 입을 비죽이며 목검을 잡았다.
'이 정도 무게면 레퀴엠만 하려나.'
대충 무게를 가늠해 보고 있는데, 리암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정확히는 목검을 쥔 내 손목에.
"도련님."
리암이 몹시 심각한 음성으로 나를 불렀다.
"일단 한번 휘둘러 보십시오."
내심 한숨을 쉬었다. 그의 의도가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일단은 장단을 맞춰줘 볼까.'
목검을 쥐고선 성의 없이 휘둘러 보았다.
훙, 훙.
조금 전 리암이 휘두를 때와는 다르게 연약한 소리가 흘러내렸다.
내 모습을 유심히 살피던 리암이 열성적으로 말했다.
"일단 서 있는 자세부터 교정해야겠군요. 그리고 팔의 힘이 많이 부족하십니다."
그러더니 멀리 연병장이 있는 곳을 힐끗 보곤 말을 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연병장을 돌며 체력을 길러야 하는데...."
턱에 손까지 얹고는 진지한 어투로 말했다.
"저기를 쓸 수는 없으니 다른 방법을 고민해봐야겠습니다."
내버려 뒀다간 아주 몇 달치 훈련 계획을 짜오겠군. 그것도 매 시간마다 해야 할 일을 빼곡하게 채워서.
"일단은 가볍게 쇠주머니를 달고...."
"그만, 그만."
나는 한없이 뻗어가는 리암의 생각을 가로막았다.
'그렇게 둘 순 없지.'
그는 이 시간을 체력 훈련으로 대충 때우려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가뜩이나 얼마 안 되는 귀중한 시간을 고작 체력 훈련으로 버리는 얼간이가 아니었다.
"체력 훈련은 필요 없어."
"하지만 지금 도련님의 몸 상태로는...."
"내 몸은 내가 더 잘 알아. 훈련은 이미 하고 있고."
"...하고 계신다고요?"
리암이 몹시 당황스러운 듯 물었다.
"하고 있는데 이 상태인 겁니까?"
이 자식이?
내가 눈에 힘을 한번 주자 리암은 곧바로 딴청을 피웠다.
"죄송합니다."
"됐고. 내가 너한테 바라는 건 딱 하나다."
나는 목검을 들어 리암에게 겨누었다.
"죽일 각오로 나한테 덤벼."
"무슨 말씀을."
리암의 낯이 거칠게 일그러졌다.
"제가 어떻게 감히 도련님을 해치려 들겠습니까."
아깐 했으면서.
나는 그의 뻔뻔함에 입을 비죽였다. 지금의 그는 강경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불가합니다. 부디 거둬 주십시오."
"내가 시켰으니까 괜찮아."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리암이 답답하다는 어조로 재차 말했다.
"검술을 한 번도 배운 적 없는 이와 지도 대련은 할 수 없습니다. 부상을 입으실 게 분명합니다."
"그래서 다치지 말자고 목검 줬잖아."
"애초에 싸움이 안 되는...."
"카데르 영지에서의 일을 잊었나?"
내가 그의 말을 자르자 리암은 곧 입을 다물었다.
나 혼자 상처 없이 세 명을 해치운 그 날의 기억. 그것을 떠올렸는지 그의 얼굴에선 걱정스러운 기색이 사라졌다.
"그건...그렇습니다만."
리암이 마지못해 대꾸했다.
"도련님의 재능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일개 불량배와 훈련받은 기사 사이에는 큰 격차가 있습니다."
숨을 잠시 고른 리암은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도, 제 검술을 원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다면 기초부터 차근차근, 제가 알려드리는 대로 배우시는 게 훨씬 효과적일 겁니다."
그러니 체력 훈련부터 시작하자고? 안 될 말이었다.
나는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너무 늦어."
"뭘 그리 조급해 하시는 겁니까? 이런 과격한 방식, 이해가 안 됩니다."
리암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의 낯엔 몰이해만이 담겨 있었다.
'그래, 답답하겠지.'
오직 이 세계에서 나만이 알고 있는 미래.
그것을 막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했다.
"리암 슈미트."
나는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두 번 말하지 않겠다."
목검으로 그의 목을 겨누고 명령했다.
"덤벼, 당장."
리암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진심이십니까?"
"지금 덤비지 않으면, 네가 받을 돈을 점점 깎겠어."
"...."
"그리고, 내가 다칠 때마다도 네가 받을 돈이 줄어들 거다."
리암의 낯이 와락 찌푸려졌다. 나는 짓궂은 미소를 베어 물었다.
"그러니 내가 다칠 걱정은 안 해도 돼. 이해했나?"
리암이 눈썹을 모은 채 한참 동안 날 바라보았다. 조금 과격하게 표현하자면,
'머리가 어떻게 되신 건가?'
그렇게 생각하는 눈빛이었다.
나는 지지 않고 그의 시선을 맞받았다. 내 눈동자에 서린 의지는 확고했고, 그것이 흐려지는 일은 없었다.
"...알겠습니다."
리암이 긴 숨을 내뱉었다.
"그럼 도련님께서는 최대한 방어에 집중해 주십시오. 그것만으로도 실력은 많이 느실 겁니다."
내가 원하던 바로 그 상황. 오베스트 검술을 펼치며, 이성이 있는 채로 나를 공격하는 상대와 맞서 싸우는 것.
그것이 내 앞에 펼쳐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좋아. 시작하지."
나는 몹시 흡족해져서 빙그레 웃었다.
리암의 시선이 내 입가를 스쳤다. 그가 나직이 한숨을 쉬곤 손에 힘을 주었다.
"시작하겠습니다. 부디 조심하십시오."
말이 끝나자마자,
스팟!
그의 몸이 섬광처럼 날아들었다. 본능적으로 검을 내밀어 막은 순간,
"큭."
압도적인 힘의 격차가 느껴졌다. 힘을 주어 버티는 대신, 검날을 옆으로 눕혀 리암의 검을 비껴냈다.
"...."
공격을 단 한 번 받아낸 것뿐인데 손바닥이 얼얼했다.
정말 무식한 힘이다. 저 팔뚝에 달려 있는 게 다 근육이니 당연한 건가.
호흡을 고르며 상황 판단을 내렸다.
힘, 속도 모두 밀린다. 반격은 무리. 빈틈을 노려야 한다.
차분하게 자세를 가다듬고 리암이 다가오길 기다렸다. 그런 나를 유심히 관찰하던 리암이 딱딱한 말투로 말했다.
"잘하셨습니다. 억지로 버티지 마시고 회피하는 데 집중하십시오."
"오기나 해."
내 차가운 대꾸에도 리암은 설핏 미소지었다.
"알겠습니다."
또다시 그의 검이 벼락처럼 날아들었다. 단순하지만 정확하게 급소만을 노린 공격.
'이게 오베스트 검술 1식.'
나는 리암의 검을 흘려내는 데 주력했다. 리암이 일부러 전력을 다하지 않는 덕에 할 만했다.
하지만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지칠 게 분명하고, 그럼 실수할 가능성 또한 커진다.
"헉, 헉."
이미 호흡은 조금씩 흐트러지고 있었다. 쉴새 없이 움직인 탓에 팔다리의 힘이 슬슬 빠져나갔다.
그에 비해 리암의 얼굴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얄밉게도.
'이 방식으로 어떻게 검술을 배우시겠다는 겁니까.'
리암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에겐 이미 미래가 보이는 듯했다. 이런 지리멸렬한 공방이 계속되다가, 결국 내가 지쳐 나가떨어지는 그런 미래가.
일반적으론 그렇다. 검이라곤 쥐어본 적 없는 도련님이, 저와 대련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으니까.
'그것으론 부족해.'
하지만 '나'는 일반적으로, 평범하기만 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반드시 그것을 넘어서야만 했다.
나는 리암과 검을 주고받는 동시에, 그의 자세와 검을 쥔 손, 발걸음을 눈에 담았다.
'알아야지 파훼할 수 있다.'
청보랏빛 눈동자가 일순 새파랗게 보일 정도로 번득인다. 모든 동작 하나하나가 느릿하게 망막에 새겨진다.
어느 순간, 완벽해 보이던 동작에 빈틈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는 새 리암의 동작을 따라하고 있었다.
"...!"
그걸 알아챘는지 리암은 눈을 부릅떴다. 흠칫하고 손이 멈춘 순간, 그는 내 움직임을 놓쳤다.
'지금!'
오베스트 검술 1식은 맹렬한 공세를 퍼붓지만, 하단이 취약하다.
이 사실을 이론으로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실전에서 목격한 지금, 이 다음에 무엇을 해야할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내 신형이 리암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무슨!"
리암이 다급히 검을 회수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자세를 극도로 낮춘 채 제 아래에서 솟구쳐오는 나를 발견했다.
'늦었어!'
그는 나에게 상처를 입힐 수 없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가능하다.
파앙!
내 검은 자비 없이 리암의 겨드랑이를 스쳤다.
❖ ❖ ❖
며칠 뒤.
"교대하자."
동료 기사가 리암의 어깨를 툭 쳤다. 순간 찾아드는 통증에 리암은 인상을 찌푸렸다.
"읏."
"어, 미안. 다쳤냐?"
그는 얼른 인상을 펴고 대답했다.
"다친 건 아니고, 조금 삐었어."
"리암 네가 웬일이냐? 한 번도 그런 일 없더니."
리암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실수했어."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했지만, 동료는 리암이 다쳤다는 게 못내 신기한 모양이었다.
"야, 들었어? 이 녀석 어깨 다쳤다는데?"
마침 교대하러 온 다른 동료들에게까지 말을 전했다.
"아, 어쩐지. 움직일 때 좀 불편해 보이더라."
"뭐하다 그랬대?"
말하기 싫은 듯 리암은 고개를 흔들었다.
"별일 아니야."
"아, 얼른 말해보라고."
옆에서 말을 거들던 동료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근데 너 요새 비번날 뭐하냐?"
"그건 왜?"
"통 보이질 않잖아. 혹시 누구 만나냐?"
툭 던진 말에, 다른 동료들의 눈이 번쩍 빛났다.
"여자냐?"
"여자구만?"
"...아니야."
리암은 탄식하며 이마를 감쌌다.
"차라리 여자면.... 에휴, 됐다."
"아, 뭔데 그래. 말 좀 해봐."
"됐어. 나 이제 간다."
리암은 손을 휘휘 내젓곤 돌아섰다. 그 순간, 찌릿하는 통증이 어깻죽지에서부터 밀려들었다.
"...."
그의 눈가가 씰룩였다. 그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통증을 밀어냈다.
저녁 식사를 가볍게 한 뒤, 숙소 침대 아래 감춰둔 목검을 챙겨 마구간으로 향했다.
아무도 없는 고요한 마굿간 위로 은은한 달빛이 서서히 내려앉고 있었다.
'오시려면... 시간이 좀 남았군.'
아벨은 꼭 정각이 된 후에야 어슬렁어슬렁 나타나곤 했다. 그를 기다리는 것은 리암의 몫이었다.
리암은 마굿간 기둥에 기대어 섰다. 시큰거리는 어깨를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가 도박장에 막 발을 들였을 때는, 혹시나 다른 이들이 자신을 알아볼까 초조했다. 오베스트 기사단의 고결한 기사가 이런 불법 도박장에 출입한다는 사실이 알려질까 불안했다.
하지만 처음이 어렵고 그 후로는 쉬운 법이다.
Chapter 1. 약점을 쥐고 흔든다. (9)
딱 한 번만, 은 어느새 두 번이 되고 결국 세 번이 되었다. 그는 결국 비번 날만 되면 이곳에 오는 자신을 통제할 수 없었다.
불행한 사실은, 그가 도박엔 통 소질이 없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봉급으로 쉽게 갚을 수 있었던 빚은, 어느새 눈덩이처럼 불어나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 되어 버렸다.
"블랙잭."
그러니 흰 가면을 쓴 유려한 턱선의 남자에게 시선이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20대로밖에 보이지 않는 앳된 뺨과 낮고 듣기 좋은 음성. 무엇보다도 그 나이와 통 어울리지 않는 여유로운 태도가 인상 깊었다.
청년은 순조롭게 연승을 이어갔고, 그럴 때마다 테이블 위에는 칩이 쌓여 갔다.
'도박의 신인가?'
리암은 그런 생각까지 하며 계속해서 청년을 지켜보았다. 그러다 테이블 주변의 몇몇 인물들이 입맛을 다시는 것을 목격했다.
'세상 물정 모르는 도련님 같은데. 오늘 험한 꼴 좀 보겠군.'
별로 참견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제 앞으로 청년의 칩이 데구르르 굴러오자, 참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받으시오."
칩을 주워 건네는 순간, 가면 속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고마워."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청보라빛 눈동자. 제가 섬기는 영주의 눈과 흡사한 눈매.
'설마, 아벨 킨드리얼?'
리암은 충격에 사로잡혀 멈춰 섰다. 칩을 교환하러 가는 아벨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처음엔 머리카락 색 때문에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나이대, 체형을 고려하니 확신이 섰다.
'정말 아벨 킨드리얼이군.'
그는 디에고 영주의 실력과 인품은 존경했지만, 그의 자식 농사만큼은 존경하지 않았다.
디에고 영주의 유일한 결점. 오베스트 영지의 골칫덩어리. 하루가 멀다 하고 사고를 치는 망나니.
그런 그이니, 그가 이런 도박장에 나타났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 것이 못 되었다.
리암이 놀란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그는 딱 한 번, 성 밖에 나온 아벨을 먼발치에서 본 적이 있다. 집사 필립을 대동하고 걸어가는 모습을.
그때 아벨의 얼굴은 음침하기 그지없었다. 가차 없이 잔혹한 성정만이 오기처럼 깃들어 있었다.
거기에 아버지와는 판이하게 다른, 마치 흙탕물처럼 지저분한 눈빛. 그것이 못내 보기 거북했었는데.
'눈빛이... 다르다.'
방금 아벨의 눈빛은 몹시 또렷했다. 밤하늘을 반사하는 우물처럼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도련님이 저런 눈빛을 하고 있었나?'
꼭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리암은 당혹스러운 심경을 억누르며 황급히 아벨의 뒤를 쫓았다. 마침 아벨은 돈을 노리고 따라온 불량배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싫다면 어쩔 건데?"
그는 세 명의 불량배들을 상대로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당당히 배짱을 부리며 상대를 도발하고 있었다.
'뭘 믿고 저러는 거지?'
리암은 아벨이 제 정체를 드러낼 것이라 생각했다.
아무리 다른 영지라 한들, 오베스트 영주의 하나뿐인 아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법이니까.
하지만 아벨이 선택한 것은, 직접 무기를 들고 그들을 응징하는 것이었다.
"아아악!"
전투는 싱거웠다. 아니, 그것을 전투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를 지경이었다.
도망친 창녀들을 붙잡아 넘기는 불량배들.
그들은 천성이 거칠고 길바닥 싸움에 잔뼈가 굵은 자들이다. 웬만한 사람들은 그들의 기세에 지레 겁먹고 달아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아벨은 그들을 너무나 손쉽게 제압했다. 그것은 이미 포식자가 제 사냥감을 물어뜯는 것에 불과했다.
"내 눈이 잘못된 건가?"
리암은 황당해하며 제 눈을 비볐다.
"검술을 배운 적은 없을 텐데."
그런데도, 아벨에게서 몇 번이고 전투를 치른 듯한 노련함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아무리 어려도 그 영주님의 자식이라는 건가.'
왜 영주님께서는 저런 놀라운 재능을 가진 아들에게, 검술 가르치기를 금하신 걸까.
리암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 사이 아벨은 피를 완전히 닦아낸 단도를 품에 집어넣고 있었다.
'이제 가야겠군.'
그가 막 돌아선 순간이었다,
"리암 슈미트. 슬슬 나오지 그래?"
처음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러나 아벨은 명확히 그가 있는 방향을 향해서 말하고 있었다.
"지켜본 거 알고 있어. 나와서 이야기하자고."
리암은 못 들은 척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다. 아벨이 다음 말을 하기 전까진.
"당장 영지로 돌아가서 말해야겠네. 내가 오늘 카데르에서 누굴 봤는지 말이야."
"...."
결국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골목 밖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시리도록 푸른 달빛, 그 아래에 아벨이 비스듬히 서 있었다. 리암을 향하는 눈동자는 흥미로운 듯 반짝이고 있었다.
그 눈빛을 본 순간, 리암은 자신이 이 도련님과 지독하게 얽힐 것임을 직감했다.
"리암."
나지막한 목소리가 정신을 일깨웠다. 어느새 아벨이 등 뒤에 서 있었다.
"도련님."
어찌나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는지, 인기척을 느끼지도 못했다. 리암은 머쓱함을 감추기 위해 태연한 얼굴을 지어냈다.
"오셨습니까."
아벨은 대답 대신 무언가를 휙 던졌다.
'또 뭘 던지는 거야?'
리암은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얼른 물건을 받았다. 손에 잡힌 것은 둥그런 원통이었다.
"이게 뭡니까?"
아벨이 자신의 오른쪽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너 여기 다쳤잖아."
"...."
"의원도 못 찾아간 거 다 알아. 효과 빠른 거로 가져왔으니 발라라."
아벨의 말투는 무심하기 그지없었다. 리암을 향한 걱정도, 온기도 전혀 담겨 있지 않았다.
"한번 삔 데는 또 다치기 쉽다."
리암은 멍하니 손에 쥔 연고통을 바라보았다.
'이 연고는....'
기사단에서 지급되는 것보다 훨씬 좋은, 귀족가에서 유통되는 상등품. 바르는 즉시 통증을 완화시켜 주는 효과가 있다.
'꽤 비싼 것으로 알고 있는데.'
게다가 크기도 꽤 컸다. 다음에 또 다쳤을 때 두고두고 바르라는 의미인 것 같았다.
리암은 손에 쥔 연고통을 느릿하게 쓸었다.
"절 걱정하셨습니까."
"그럴 리가."
아벨의 대답은 퉁명스러웠다.
"네가 다치면 내가 검술을 배우는 게 늦어지잖아."
아벨이 비딱한 태도로 팔짱을 끼더니 불쑥 손을 내밀었다.
"헛소리하는 거 보니 멀쩡한가 보군. 도로 내놔."
"왜 줬다 뺏고 그러십니까."
리암은 얼른 아벨에게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보란 듯이 연고통에서 연고를 듬뿍 떠냈다.
"...."
말은 그리했지만, 아벨은 리암이 연고를 다 바를 때까지 묵묵히 기다려 주었다.
리암은 연고를 꼼꼼히 바르면서 곁눈질로 아벨을 훔쳐보았다.
'마냥 철없는 망나니라고만 생각했는데.'
언행도 거칠고 툭툭 내뱉긴 하지만, 제법 사람을 알뜰살뜰히 챙긴다. 생각보다 눈치가 빠르고 머리가 좋다.
아벨과 함께 있던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는 아벨에 대해 이런저런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그 눈빛을 잘못 본 건 아닌 모양이야.'
리암은 연고통을 집어넣고 목검을 고쳐 쥐었다.
"다 됐습니다."
아벨을 향해 다가서자, 지난 대련의 기억이 선명하게 밀려들었다.
'지난번엔 방심했어.'
제 실책이었다. 검술을 접한 적 없는 일반인이라고 생각하고 상대했다.
'그래도 그간 보고 배운 게 있을 텐데.'
리암은 제 마음속에서 아벨에 대한 평가를 상향했다. 그리고 동시에, 마음 한구석에서 의문이 떠올랐다.
'...정말 방심해서였을까?'
지난 시간, 그는 제가 한 대도 맞지 않고 대련을 마무리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진 아벨에게 한 대 얻어맞고 말았다.
'갑자기... 자세가 달라졌다.'
아벨이 처음 목검을 쥐었을 땐, 그저 모든 것이 엉성했다. 그런데 리암의 공격을 받아내면서 점점 자세가 변화했다.
어느 순간, 아벨은 오베스트 검술의 기본 자세를 닮아가고 있었다.
'그게 가능한가?'
단 몇 분 만에 자신의 자세를 보고 따라할 수 있다고? 쉴새 없이 쏟아지는 공격을 방어하는 동시에?
'내가 잘못 본 것은 아닐까. 혹은 우연이었을지도.'
그는 그날 이후로 쭉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오늘,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발길을 재촉했다. 처음 이곳에 올 때와는 달라진 마음가짐이었다.
리암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시작하겠습니다."
"어."
아벨이 목검을 어깨에 얹은 채 건들건들 걸어왔다. 리암의 앞에 선 뒤 천천히 자세를 잡았다.
"와라."
나른하지만, 예리하게 갈린 투지를 눈에서 뿜어내며.
"...."
리암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다 간신히 숨을 들이쉬고, 어느새 말라버린 입술을 축였다.
'이럴 수가.'
현재 아벨이 검을 들고 서 있는 자세는 오베스트 영지 기본 검술과 정확히 일치했다.
팔의 각도, 손목에 들어간 힘, 발끝이 향하는 방향. 모든 것이 그야말로 완벽했다.
아벨은 기본 자세의 핵심을 꿰뚫고, 이를 완전히 몸에 익힌 상태였다.
"...어떻게 하신 겁니까?"
"뭘?"
"자세, 검을 쥐는 법, 이런 것들이요. 몰라보게 달라지셨습니다."
리암은 입술을 잘근 씹었다가 물었다.
"혹시 다른 누군가에게 배우셨습니까?"
그거 외엔 이 상황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리암의 당혹스러워하는 반응에도 아벨은 시큰둥했다.
"뭔 소리야. 너한테 배운 거잖아."
"제가요? 제가 언제...."
"네가 보여줬잖아."
리암은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그 말씀은 지금... 제가 한 걸 그대로 따라 하셨다는 겁니까?"
"응. 쉽던데?"
아벨이 무심히 콧잔등을 긁었다. 리암은 그를 보며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거짓말.'
이라고 생각했다가,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으시지. 그럼 잘못 본 게 아니었나? 우연이 아니었다고?'
이미 아벨은 첫 대련을 할 때부터, 자신의 동작을 유심히 관찰해 제 것으로 만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대부분의 병사들은 이 자세만 익히는 데도 한 달씩 걸린다. 상당히 빠른 편이었던 리암 본인만 해도 2주일을 소모했다.
'그런데 고작 며칠 만에?'
정말이지 유례없는, 그야말로 괴물 같은 습득력이었다.
"허."
헛웃음만이 흘러나올 뿐이었다. 그는 이윽고 고개를 저었다.
'서 있는 자세로만 속단하긴 이르다. 움직여 봐야 정확히 판단할 수 있어.'
리암은 천천히 웃음기를 거둔 뒤,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그래."
"갑니다!"
리암은 가볍게 검을 휘두르며 아벨에게 달려들었다. 아벨은 저번과 마찬가지로 억지로 받아내기보다는 흘려내는 쪽을 택했다.
그런데.
"-!"
리암은 경악으로 눈을 부릅떴다.
검을 휘두르는 궤적, 손목의 스냅, 스텝을 밟는 것. 전부 자신이 선보였던 검술 그 자체였다.
'서 있는 자세만 익힌 게 아니야.'
믿기지 않아 다시 공격을 시도해 봤다. 이번엔 측면으로 다가서며 중단을 향해 베어갔다.
탁!
시원스러운 타격음과 함께 검이 미끄러졌다. 아벨은 검을 사선으로 들고 허리를 살짝 꺾은 채였다.
"...."
더 이상 의심할 수 없었다. 아니, 의심의 여지조차 없었다.
아벨은 오베스트 검술 기초 자세를 완벽하게 습득했다. 그리고 움직임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는지까지 정확히 이해했다.
'단 한 번의 대련으로, 이게 가능한 일인가.'
날카로운 전율이 리암의 등허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자신이 엄청난 천재를 만났음을 직감했다. 일생에 단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Chapter 2. 구덩이에 물을 쏟아붓는다. (1)
"하하하!"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아벨이 미친놈 보듯이 그를 쳐다보았다.
"갑자기 왜 그러냐?"
"아닙니다. 저는 그냥...."
아, 이러면 안 되는데.
너무 즐거웠다. 반강제로 시작한 이 대련이, 이렇게 재밌어질 줄은 몰랐다.
눈앞에서 못마땅한 듯 미간을 찌푸리는 도련님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그것은 검의 길에 들어선 자라면 누구나 가질 호기심이었다.
리암은 미소 띤 얼굴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마저 가겠습니다."
아벨이 리암을 대놓고 위아래로 훑었다. 이놈이 멀쩡한 건지, 가늠해 보는 눈빛이었다.
그런 시선을 받는데도 왜 자꾸 웃음만 나오는지, 모를 일이었다.
"준비하시죠, 도련님."
리암은 씩 웃었다.
❖ ❖ ❖
방 안은 고요했다. 그 중앙에 선 나는 목검을 쥐고 눈을 감고 있었다.
"...."
천천히 기억 속의 잔상을 그려낸다. 그것을 현실화하여 눈앞에 세운다.
'갑니다!'
세찬 바람처럼 휘몰아치던 검격이 떠올랐다. 어제의 일인데도, 너무나 생생하게.
측면!
나는 목검을 움직여 리암의 검을 받아냈다.
그렇게 기억 속의 리암과 수없이 합을 겨루었다. 팔이 무거워져서 더 이상 검을 들 수 없을 때까지, 뻐근해진 다리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을 때까지 쉬지 않고.
"헉, 헉...."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잠시 멈추었다. 검을 지팡이처럼 짚은 채 숨을 골랐다.
'어떻게 하신 겁니까?'
리암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감탄 가득한 시선을 던지던 게 떠올랐다.
'표정하고는.'
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웃었다.
그는 내가 이런 방식으로 훈련을 하고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하겠지. 현실과 달리 지치는 일 없이 계속해서 공격을 퍼붓는, 기억 속의 대련 상대라니.
이 방식은 아벨의 비상한 기억 능력, 그리고 스펀지와 같은 흡수력이 전제되어야 가능한 훈련이었다.
리암과 만날 때마다 실력이 일취월장하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내 기억 속의 리암은 더욱 다양한 기술을 보여줄 것이고, 이는 고스란히 내 밑거름이 되어줄 터였다.
"후우, 다시 시작해 볼까."
팔다리에 힘이 돌아오는 듯하자, 훈련을 재개했다. 몸을 움직일수록, 기억을 반복해서 재생할수록 리암의 자세가 점점 몸에 스며들었다.
자연스레 다음 움직임은 무엇일지 생각할 수 있게 된다. 한 자세에서 뻗어 나가는 다양한 갈래를 미리 상상해 보게 된다.
뚝, 뚝.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이 바닥을 적셨다. 한번 집중해서 훈련을 하고 나면 이렇게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곤 했다.
"휴우."
나는 이마를 훔쳐내며 들고 있던 목검을 내던졌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호흡을 길게 내뱉었다.
'죽겠네.'
하지만 매일매일 아주 조금씩, 지치는 속도는 느려지고 있었다.
꾸준한 체력 훈련, 그리고 리암의 움직임이 눈에 익어 가는 덕분이었다. 동시에 충동을 억누르는 것도 점점 수월해졌다.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효과가 있군.'
역시 꾸준함은 배신하지 않는다. 가장 확실하고 정직하게 나 자신을 성장시키는 방법.
한결 단단해진 손바닥, 그리고 전신에 도는 활력이 기분을 들뜨게 했다.
'그만 가 볼까.'
이젠 업무를 처리하고, 훈련까지 마쳐도 시간이 남았다. 물론 나는 남는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지도 계획해 둔 뒤였다.
"도, 도련님!"
막 외출을 나서려는데, 필립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어디로 가십니까?"
대답 대신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는 즉시 눈을 내리깔았다. 한번 겁을 준 이후로 생긴 반가운 변화였다.
"죄송합니다. 근데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왜?"
"구해 왔습니다."
무슨 소린가 생각하는데, 필립이 가까이 다가와 속삭였다.
"노예 말입니다. 이번엔 아주 튼튼한 놈들로 다섯 명 골라 왔습니다."
"...."
황당함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원작에서 필립은 제국 내에서 금지되어 있는 노예를 직접 구해다 바치곤 했다. 성 안의 인간이 죽어 나가는 꼴을 보기보다는, 이편이 낫다는 판단하에.
물론 그 안에는 자신의 안위도 포함되어 있었다. 정말이지 눈물겨운 충정이었다.
'쓸데없는 짓을 하는군.'
나는 심드렁한 어투로 대꾸했다.
"됐어."
그리고 저택 밖으로 나서려는데 필립이 해쓱해진 얼굴로 급히 따라붙었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겨우 다섯 명밖에 안 돼서 불쾌하셨지요?"
"겨우?"
기가 막혀 반문하자 필립은 몹시 송구한 얼굴로 변명 아닌 변명을 이어갔다.
"하지만 노예상도 최근 노예 수급이 어렵다고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보다 못한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요새 체력 단련을 하신다는 것은, 기존의 비실비실한 노예로 만족할 수 없으시다는 뜻이시죠?"
"모두 제 불찰입니다. 도련님의 뜻을 알아채고 빨리 움직였어야 했는데."
이쯤 되니 이놈이 어디까지 갈지 궁금해졌다. 어디, 뭐라고 말하는지 두고....
"일단 부족하게나마 다섯으로라도 회포를 풀고 계십시오. 당장 다른 노예상에게 연락해서 더 구해오겠습니다."
...보고 싶지 않아졌다.
저 자식, 한번 기를 죽여 놨더니 이상한 방향으로 충성스러워졌잖아. 이대로 뒀다간 내 일을 방해할 가능성이 커지겠어.
"필요 없으니까 그냥 놔둬."
"...?"
"노예들도 다 되돌려 보내."
"...예?"
필립의 얼굴 가득 당황이 피어올랐다.
"말했을 텐데. 내 말에만 따르라고."
"저, 저는 그저...."
"시키지도 않은 일을 지레짐작으로 나서서 하지 마."
나는 고개를 비딱하게 기울이며 덧붙였다.
"안 그러면, 내 마음이 변할지도 모르니까."
노예 대신 너를 고문하겠다.
라고, 필립이 충분히 오해할 수 있도록.
"...!"
필립의 낯빛이 희게 질렸다. 그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겠습니다. 당장 시키신 대로 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가 줄행랑을 쳤다. 노예들을 풀어주러 가는 듯했다.
"흥."
나는 콧방귀를 뀌며 뒤돌아섰다.
'아벨이 왜 이렇게 자랐는지 알겠군.'
조금만 인상을 찌푸려도 입안의 혀처럼 구는 놈들만 주변에 가득하다. 그를 유일하게 통제할 수 있는 아버지조차 자주 성을 비우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나는 마차를 타지 않고 성 밖으로 나왔다. 느긋하게 걸음을 옮겨 마을 중앙으로 향했다.
마그나 모르텐.
그곳의 거대한 호수는 희고 높은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타인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가 아닌, 이곳의 의미를 더욱 강화하는 용도였다.
오베스트 영지를 지키다 사망한 이들의 시신을 거두고 그들의 넋이 편히 쉴 수 있게 해주는 곳.
그렇기에 무기 소지는 허가되지 않았다. 오로지 경건한 마음으로, 사자(死者)에게 인사를 드리려는 목적으로만 방문할 수 있다.
"아벨 도련님."
관문을 지키고 서 있던 몇몇 인원들이 고개를 숙였다.
이곳에 방문하는 사람을 살피고, 주변의 호수 및 환경을 관리하는 자들이었다. 은퇴한 기사, 혹은 부상을 입어 더는 현역으로 활동하기 힘든 기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
그들은 잠시 서로 떨떠름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이 망나니가 왜 여길 찾아왔는지, 무슨 사고를 칠지 걱정스러운 눈치였다.
"뭐해? 비키지 않고."
내가 시큰둥한 얼굴로 말하자, 그들은 즉시 양옆으로 물러났다.
"들어가십시오."
의례 묻는 방문 목적조차 생략한 채.
영주의 아들이라는 것은 이럴 때 좋다. 어느 누구도 내 방문을 거부하거나, 의의를 표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 맛에 권력 휘두르는 거지.'
나는 히죽 웃으며 천천히 거대한 호수를 향해 다가갔다.
호수를 가로지르는 기다란 다리, 그리고 그 뒤로 높이 솟아오른 거대한 탑이 보였다.
"마그나 모르텐."
탑을 훑는 내 눈이 차갑게 번득였다.
"여기 레퀴엠이 나타난단 말이지."
오늘 이곳을 방문한 목적은 이거였다. 레퀴엠의 강림을 대비해 지형을 미리 파악해 두는 것.
신중하게 주변을 샅샅이 훑으며 다리를 건넜다. 모든 장면이 고스란히 내 머릿 속으로 흘러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호수가 꽤 넓군.'
이 호수는 오베스트 영지가 생겼을 때부터 존재했다고 들었다. 겉으로 보기엔 얕아 보이지만, 수심이 상당해 빠질 경우 자력으로 벗어나기는 어려워 보였다.
'관리인들이 매년 하는 업무 중에 물에 빠진 이를 구해 내는 것도 있었지.'
장소가 장소다 보니, 우울감에 빠져 스스로 몸을 내던지는 유족들이 있곤 했다. 하지만 관리인들이 재빨리 구출한 덕에 익사하는 사고는 벌어진 적이 없다.
'반대로 생각하면, 레퀴엠을 쥔 자가 물에 빠지면 벗어나기 어려울 수 있다는 의미.'
나는 계속해서 레퀴엠이 나타났을 때의 여러 가지 가정을 생각해 보고 있었다.
가장 이상적인 상황은, 레퀴엠이 나타난 순간에 내가 이곳에 있어 최초로 레퀴엠을 손에 쥐는 것.
하지만 이것만으론 반쪽짜리 성공에 불과했다.
'레퀴엠의 속삭임을 이겨내고 완벽하게 지배해야만 해.'
그때를 대비해 레퀴엠에 맞설 만한 방책이 필요했다.
만약 소유자가 물에 빠져 목숨의 위협을 느끼게 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레퀴엠은 필연적으로 인간을 끌어당겨 도구로 삼는다. 자신을 쥐고 휘두를 인간이 없으면 하나의 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쩌면 사용자의 목숨 구제를 최우선으로 할지도.'
그렇다면 빈틈이 생길 수 있다. 그 틈을 잘 이용한다면 내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에 빠지는 게 생각보다 괜찮은 방법일지도 모르겠어.'
나는 고개를 주억이며 천천히 다리 위를 걸었다. 그러다 문득, 수면 위로 떠오른 내 얼굴을 발견했다.
'볼수록 참 잘생겼다.'
눈매가 매섭긴 했지만, 또렷한 이목구비와 남성스러움이 적절히 어우러진 매력적인 얼굴이었다.
'이 정도면 얼굴로 먹고 살 수 있지 않을까.'
아마 입만 잘 다물고 있다면, 그리고 아무 짓도 하지 않는다면. 아벨은 그럴 만한 재능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원작에서 죽었을 때도 얼굴이 아깝다는 이야기가 많았었지.'
후에 공개된 일러스트를 보고 가슴을 쥐어뜯은 독자들이 무척 많았다. '이 얼굴 이렇게 쓸 거면 나 줘!'라면서.
하지만 아벨이 쌓은 악업은 자명한 것이었고, 이는 그의 죽음이 아니고선 해결되지 않는 종류의 것이었다.
'뭐, 이번엔 그렇게 안 살 거니까. 이 얼굴이 아까워서라도 못 죽지.'
나는 수면을 바라보며 뺨을 쓸어내렸다. 손가락 끝에 느껴지는 탄력과 매끄러운 감촉을 느꼈다.
'얼굴만은 절대 사수한다.'
누군가 내 얼굴에 상처를 낸다면, 그날은 그놈의 제삿날이 될 터였다.
"오빠, 저기 좀 봐봐."
"왜?"
"잘생긴 오빠가 있어."
문득 귓가에 아이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나를 손으로 가리키는 작은 여자아이가 보였다.
"어? 눈 마주쳤다."
고작 일곱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작은 체구. 뽀얀 얼굴에 떠오른 해맑은 미소.
"오빠, 안녕-."
여자아이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귀엽네.'
피식 웃으며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결코 나보고 잘생겼다고 해서는 아니다. 그냥 어린아이니까 받아준 것뿐이다.
"에헤헤."
여자아이가 부끄러운 듯 웃으며 옆에 서 있는 소년의 바지폭에 얼굴을 폭 묻었다.
"...."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있던 소년이 나를 보았다. 곧이어 그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졌다.
"...아벨 도련님."
Chapter 2. 구덩이에 물을 쏟아붓는다. (2)
제 동생과는 달리, 그는 내 정체를 알아챌 만한 눈썰미가 있었다.
소년은 황급히 여동생의 몸을 끌어당겨 뒤로 감추었다. 그러고는 깊이 허리를 숙였다.
"동생의 무례를 부디 용서해 주세요. 아직 어린아이입니다."
몹시도 간절하게, 그리고 떨리는 음성이었다.
'과연 아벨 킨드리얼.'
아마 영지 내에서 내 악명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직 10대 중반으로 보이는 소년마저 이리 벌벌 떨어댈 정도니 말이다.
'포섭할 수 있으려나.'
나는 머릿속에 한 인물을 떠올리며 두 남매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
여동생을 보호하듯 서 있는 소년의 몸이 바짝 굳었다. 나는 소년의 등 뒤에 선 여자아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소년이 눈을 질끈 감은 순간,
"보는 눈은 있군."
여자아이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그리고 곧바로 남매를 지나쳐 걸어갔다.
"허억!"
등 뒤로 소년이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흩어졌다.
"오빠, 왜 그래?"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두 남매의 대화 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흠."
나는 주변을 꼼꼼히 살피며 걸었다. 특히 마그나 모르텐으로 들어가거나, 거기서 걸어 나오는 사람들에 주목했다.
'얼추 일곱, 여덟.'
다리를 건너는 짧은 시간 동안 오간 사람의 수만 이 정도다.
"다음에 또 오자꾸나."
"덴버 삼촌, 안녕...."
대부분이 유족들로, 가족과 함께 무리 지어 오는 경우가 많았다.
"흐흑."
혹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내며 홀로 걸어가는 여자도 있었다.
나는 훌쩍이며 걸어가는 여자의 등을 응시했다.
원작에서 최초로 레퀴엠을 쥔 사람은, 일찍이 남편을 잃고 마그나 모르텐을 찾은 과부였다.
일생 검이라고는 쥐어본 적도 없던 그녀는 순식간에 주변 민가 몇 채를 몰살시켰다.
'그 과부의 이름은 원작에 나오지 않았어.'
따라서 레퀴엠을 최초로 쥔 자를 정확히 특정할 순 없었다.
'그걸 찾는 것도 의미가 없고.'
그 사람이 그 순간 그 자리에 없다면, 레퀴엠은 다른 이를 끌어당겨 저를 쥐게 할 것이므로.
'이곳을 출입금지 구역으로 만드는 게 최선일지도.'
생각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다리의 끝에 도달했다.
"이곳인가."
다리의 끝은 넓은 섬과 맞닿아 있었고, 섬 전체는 거대한 돔 형태의 건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 안에 들어서자 장엄한 분위기의 묘지가 나를 맞이했다. 차곡차곡 연도별로 구획을 나누었고, 각 구획엔 비석을 세워 시기를 확인할 수 있게 해두었다.
"허어."
나는 넓게 펼쳐진 구획을 보고 탄식을 흘렸다.
내가 아는 한 우리 영지의 인구 수는 약 5천 명. 그런데 이토록 많은 비석이라니.
'이건 좀, 너무하잖아.'
사망자가 많다고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이 오베스트 영지는 이들의 죽음 위에 세워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정말이지... 지독하군.'
이러니 레퀴엠이 생기지 않을 수가 있나.
사계절의 검이 생기는 장소는 그들의 특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오베스트 영지는 죽음의 검인 레퀴엠과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장소였다.
'그리고 나머지 검들은....'
나는 머릿속으로 원작에 등장하는 나머지 사계절의 검들을 떠올렸다.
하나는 남부, 하나는 북부에 나타날 테고. 나머지 하나는... 그래,
'제국의 수도에 있었지.'
그 검들이 언제, 어디서 나타나는지도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들을 어찌할지는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
'일단은 레퀴엠부터 손에 넣고 생각하자.'
나는 그리 생각하며 천천히 구획의 중앙으로 나아갔다. 돔으로 둘러싸인 건축물의 중앙엔 성에서도 보일 만큼 높게 솟은 탑이 있었다.
탑의 기둥에는 힘 있는 필체로 한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죽음을 넘어서.]
나는 그 비석 앞에 서서 쓴웃음을 흘렸다.
'저 또한 다 허울 좋은 소리일 뿐이지.'
죽은 이는 되돌아오지 않는다. 이토록 경건하고 웅장한 건축물을 지어 둔다 한들, 그들의 영혼은 이미 이 세계를 떠났다.
'이건 그저 유족들에게 보여주기식 위로에 불과해.'
남은 자들에게 이런 위로는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그저 그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달래려는 노력의 일환일 뿐.
"으흑, 으흐흑."
"끄흐흐흐흑."
그 탓에, 마그나 모르텐 내부는 유족들의 흐느낌으로 가득했다.
나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우는 유족들을 흘끗 쳐다보았다. 그들이 서 있는 구획의 숫자가 눈에 들어왔다.
'1378년.'
불과 3년 전. 사랑하는 이를 영원히 볼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엔 짧은 시간이었다.
웃음은 전염된다. 그리고 그것은 반대의 속성을 지닌 울음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보다 연도가 오래된 다른 구획에 서 있는 유족들은 비교적 담담했다. 그러나 울고 있는 유족들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시울도 붉어져 있었다.
슬프지 않은 게 아니었다. 그저 익숙해진 것뿐이었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를 위로하며, 혹은 눈물을 삼키며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헉!"
"아벨 도련님?"
"저분이 여긴 왜...."
무심코 주변을 둘러본 유족들이 나를 발견했다.
"딸꾹."
누군가의 딸꾹질을 기점으로,
"끕, 끄읍."
"흡."
모두들 입을 틀어막아 울음소리를 죽였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나를 외면했다.
"...."
내 존재가 마그나 모르텐에 가득했던 슬픔을 몰아내고 있었다. 의도치 않은 위로의 효과였다.
'꼭 죽음을 불러오는 사신이 된 기분이네.'
사실, 아벨의 미래를 생각하면 어느 정도 들어맞는 구석이 있긴 했다.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유족들을 지나쳤다.
"휴우우...."
등 뒤로 안도의 한숨들이 흩어졌다. 유족들은 서둘러 눈물을 닦아내곤 슬금슬금 마그나 모르텐을 떠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무인지대를 만들며 돌아다니던 중,
"음?"
한 소녀를 발견했다. 적갈색의 머리를 땋아 내리고, 수수한 흰옷을 입은 소녀였다.
"후우우...."
그녀는 비석 앞에 쭈그리고 앉아 술병을 따고 있었다.
열여덟 살이나 되었을까. 아직 미성숙한 선의 뺨 위로 홍조가 눈에 띄었다.
나는 곧 앞선 감상을 수정했다.
'홍조가 아니라 취기일지도.'
목부터 벌겋게 익어 가는 걸 보니 확실했다.
그녀는 제 얼굴만 한 술병을 입에 쉴 새 없이 기울였다. 여기까지 독한 냄새가 풍겨 오는 걸 보니 보통 도수가 높은 술이 아닌 듯했다.
'설마 저건, 화이어 브랜디?'
어렵지 않게 그 술의 정체를 눈치챌 수 있었다.
이명은 드래곤의 숨결.
'저만한 여자애가 혼자 마실 술이 아닌데.'
저건 구르고 구른 용병들이 첫 살인을 저지른 뒤, 그날의 기억을 잊기 위해 마시는 술이다. 한 잔 먹고 나면 개가 되어 자신을 완벽히 잊을 수 있다는 소문이 따라다니는.
꼴깍, 꼴깍.
술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소리가 연신 들려왔다.
소녀는 개가 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스스로를 완전히 제어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저 무언가에 씌인 것처럼 화이어 브랜디를 한입, 그리고 또 한입 먹을 뿐.
소녀가 한 손에 술병을 쥐고 다른 손으로 입가를 훔쳐냈다.
"하아...."
애달픈 한숨이 속삭임처럼 흘러나왔다. 술에 약한 사람이라면 저 숨결을 마시고 취할지도 모르겠다.
'관리인이 저걸 들여오게 내버려 뒀나?'
소녀의 주변에 별다른 짐이 없는 걸 보니 품에 숨겨온 것 같았다.
"저런.... 또 시작했네."
"곧 기일이니까요."
"좀 잠잠하다 싶더니, 다시 병이 도졌나 봐요."
주변의 다른 유족들이 소리 낮추어 수군거렸다. 저 소녀가 이렇게 비석 앞에서 병나발을 분 게 하루이틀 일이 아닌 모양이었다.
"가서 좀 말려보는 게...."
"내버려 둬요. 저럴 땐 누구 말도 안 들으니까."
"저 술병 뺏으려다가 닐스 영감 머리 깨진 거 못 들었어요?"
게다가 술에 취하면 앞뒤 못 가리는 기질의 소유자인 모양이었다.
호기심이 이는 동시에, 어쩐지 엮이면 피곤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나는 그녀를 지나치는 척 앞의 비석을 살폈다.
[1345-1380. 4. 5. 알레시아의 남편, 멜리나의 아버지 루카스. 이곳에 잠들다.]
그 아래엔 그의 죽음을 향한 짧은 축사가 새겨져 있었다.
[영지를 지키기 위해 헌신한 그의 노고를 잊지 않겠노라. 디에고 킨드리얼.]
나는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알레시아의 남편, 멜리나의 아버지.
'설마!'
터지기 직전의 토마토 같은 소녀의 얼굴을 정신없이 바라보았다.
이 비석 앞에서 울고 있다는 것은 가족이라는 뜻. 비석으로 짐작할 수 있는 루카스의 나이, 그리고 소녀의 연령대를 고려했을 때....
'이 여자가 알레시아의 딸, 멜리나?'
알레시아 스쿠젠.
몇백 년에 한 번 태어난다는, '수호자의 손'을 타고 나는 대장장이. 원작에서의 그녀는 주인공 카인에게 전설적인 방어구를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나는 그 방어구를 가로채어 손에 넣을 생각이었다. 레퀴엠의 살의, 그리고 속삭임을 막아내기 위해서.
'안 그래도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물론 알레시아가 어디에 거주하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영지에 관한 정보는 모조리 머릿속에 집어넣은 지 오래였으니까.
만약 이 소녀가 정말 알레시아의 딸이라면, 이용할 구석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얘가 원래 이런 캐릭터였나?'
원작에서의 멜리나는 활기차고 씩씩한 소녀였다. 대장간을 찾아 방황하는 카인의 등을 떠밀어 어머니의 대장간으로 직접 데려갈 만큼.
'머리 색은 맞는 것 같은데.'
생김새만 가지고는 확신할 수 없었다. 뭣보다 계속 술을 들이붓는 서슬에 말을 걸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일단 그 옆에 가만히 서서 기다렸다. 소녀의 요란한 음주 현장을 관찰하길 얼마나 되었을까.
탕.
소녀가 술병을 바닥에 세차게 내려놓았다. 꽤 큰 소리가 났지만 병이 튼튼한 탓인지 깨지지는 않았다.
"흡."
나는 그보다도 소녀의 악문 잇새로 흘러나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소녀의 감은 눈 아래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미동 없는 뺨을 타고 흐르는 물줄기가 더없이 서글퍼 보였다.
"흐흡."
소녀는 그 순간 이곳의 그 누구보다도 서글프고 애잔하게 울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읏...."
갑자기 소녀의 몸이 앞으로 휙 기울었다. 그녀가 머리를 비석에 박기 직전,
"조심."
반사적으로 손이 뻗어 나갔다. 소녀의 이마가 내 손바닥에 감겨들었다.
"흐윽."
소녀는 지금 이마를 맞댄 곳이 비석인지, 벽인지, 사람의 손인지조차 모르는 듯했다. 그저 소리 없는 눈물을 흘려댈 뿐.
어느새 건조했던 손바닥이 물기로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쯧."
나는 천천히 손바닥을 밀어내 소녀의 몸을 바로 세웠다.
"여기."
그리고 품에 가지고 다니던 손수건을 내밀었다.
"...."
소녀는 흐릿한 시선을 손수건에 두다, 이윽고 나를 향해 들어올렸다.
소녀의 눈동자는 꼭 먹구름이 잔뜩 낀 잿빛 하늘 같았다. 우울하게 젖어 있는.
"...?"
왜 이걸 자신에게 주냐는 눈빛. 그녀는 제 앞에 서 있는 사람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취해 있었다.
'어린아이가 아니고서야 날 모르진 않을 텐데.'
나는 무덤덤한 음성으로 짧게 말했다.
"써라."
뜻밖이라는 듯 소녀의 눈에 파문이 번졌다. 이윽고 그녀는 고개를 수그리며 내가 내민 손수건을 받아들었다.
"고맙...습니다."
채 슬픔이 가시지 않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Chapter 2. 구덩이에 물을 쏟아붓는다. (3)
의외로 정확한 발음이었다. 취기보다는, 그저 잔뜩 지쳐 있는 듯한 음색.
소녀는 손수건을 눈가로 가져가 슥슥 문질렀다. 연한 푸른색이었던 손수건이 짙게 물드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 장 가지곤 부족하려나?'
저 작은 얼굴 어디에서 저런 수분이 쏟아지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더 신기해 할 겨를이 없었다.
"으음...."
소녀의 몸이 좌우로 조금씩 흔들리더니, 기어코 옆으로 픽 쓰러졌기 때문이다.
"이런."
나는 소녀의 어깨를 붙잡은 채 난감한 한숨을 흘렸다.
"우웨에엑."
소녀의 입에서 누런 물이 쏟아져 나왔다. 정확히 내 신발 위로.
"아."
뜻밖의 재해에 내가 굳어 있는 사이, 소녀는 이제 본격적으로 내게 몸을 기댔다. 그리고 고롱고롱 코를 골기 시작했다.
뒤이어 신발에 묻은 물에서 시큼한 냄새와 술 냄새가 뒤섞여 밀려들었다.
"하."
절로 어깨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참자, 참아.'
나는 눈을 질끈 감아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억눌렀다.
아벨의 몸이 된 이후로 화를 조절하는 게 특히 어려웠다. 이런 사소한 일에도 상대방을 죽이고 싶어지는, 그런 무시무시한 충동이 치솟곤 했다.
'참아야 한다.'
나는 가까스로 들끓는 살심을 잠재우는 데 성공했다. 감았던 눈을 뜨자, 사람들이 사색이 된 채 날 지켜보는 게 보였다.
"히익."
"저, 저저 저 계집애가...."
"도련님의 옷에.... 오, 맙소사."
주변 사람들은 이미 충격의 도가니에 빠져 있었다. 다들 내 똥 씹은 얼굴과 옷을 번갈아 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쯧."
나는 짧게 혀를 찬 뒤 얼굴의 감정을 지웠다. 그리고 소녀를 안은 자세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녀가 워낙 가벼운지라 그리 힘들진 않았다.
"으헉."
"헉."
우리를 지켜보던 영지민의 눈이 터질 듯이 커졌다. 나는 그중 한 남자에게 다가가 물었다.
"이 소녀, 집이 어딘지 알고 있나?"
"도, 도도 도련님."
화들짝 놀란 남자는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그, 그 그러니까 그 애 집이, 그게."
보다 못했는지 옆 사람이 끼어들었다.
"도련님, 제발 용서해 주세요."
"그 아이가 요새 워낙 심적으로 힘들어서 그런 겁니다."
"예, 맞습니다. 요새 그 집 어미도 제정신이 아니에요."
옆에서 다른 사람들이 용기를 내어 거들었다.
'다들 무슨 생각들을 하는지 뻔하군.'
그들의 머릿속엔 이미 내가 멜리나의 집을 찾아가 난동을 부리는 상상까지 펼쳐진 게 분명했다. 그러니 이토록 필사적으로 날 말리는 거겠지.
"묻는 말에나 대답해."
처음의 그 남자가 눈알을 데구르르 굴렸다. 주변과 내 눈치를 살피곤 더듬더듬 말했다.
"예, 예에. 중앙도로에서 남쪽으로 가면 있는, 3번가 쪽으로 알고 있습니다."
"3번가라면, 대장장이들이 모여 사는?"
"예에. 맞습니다요."
남자 덕분에 불확실했던 것의 확증을 얻었다. 그가 말한 주소는 내가 아는 알레시아의 집과 일치했다.
'이 애, 알레시아의 딸이 분명하군.'
그렇다면....
"알았다."
고개를 끄덕인 뒤 몸을 돌렸다. 뒤에서 남자가 어어, 소리를 흘렸다.
"도, 도련님. 지금...?"
"왜."
나는 픽, 입꼬리를 비틀었다.
"집을 알았으니 데려다 줘야지."
❖ ❖ ❖
멜리나를 데려다 주는 것은 하인들을 시켜도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뿌리치고 직접 멜리나의 마을로 가는 것을 택했다.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멜리나는 단 한 번도 깨지 않았다. 그저 죽은 듯이 곤히 잠들어 있었다.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멜리나의 코 아래에 손을 가져다 댔다. 옅은 숨결이 손등을 스치는 것을 확인한 후에 안심했다.
"정말 술이 세군."
나는 멜리나에게서 물러나 좌석에 편히 기댔다. 그리고 팔짱을 낀 채 아까 영지민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요새 그 집 어미도 제정신이 아니에요.'
알레시아가 남편을 잃은 지 6개월이 흘렀다. 멜리나의 몰골을 보아하니, 알레시아의 상황도 썩 좋지 않을 것 같았다.
'예상대로군.'
이후 원작에서 그녀는 요양을 위해 딸과 함께 오베스트 영지를 떠났다. 그리고 그 덕분에 레퀴엠이라는 재해를 피해 생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제 남편의 묘지, 마그나 모르텐을 되찾기 위해 카인에게 협력한다.
'그런 수순이었지. 어쨌건 이대로라면 곤란한데.'
그녀는 지금 당장 내게 방어구를 만들어 주어야만 했다.
나는 신발을 노려보며 생각에 잠겼다.
다그닥거리는 말발굽 소리, 마차 바퀴가 덜커덩거리는 소리, 그리고 멜리나가 도롱도롱 코를 고는 소리 속에서 결단을 내렸다.
'어쩔 수 없군.'
그럴 상황이 아니라면, 강제로라도 만들게 하는 수밖에.
끼익, 소리와 함께 마차가 멈추었다.
"도착했습니다."
마차 앞쪽에서 마부가 덧창을 두드렸다.
나는 멜리나를 다시 품에 안아 들었다. 그녀의 슬픔으로 얼룩진 낯을 한번 내려다본 뒤, 마차 문을 발로 차서 열었다.
"도, 도련님?"
문을 열어주려고 서 있던 마부가 기절할 듯한 얼굴을 했다.
"돌아올 때까지 조용히 있어."
"예, 예에."
영지 남부 마을은 기술자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그중에서도 3번가에는 무기와 방어구를 다루는, 즉 대장장이들이 밀집되어 있었다.
나는 어렵지 않게 알레시아의 대장간을 찾아냈다.
"알레시아, 정말 이런 식으로 할 거야?"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
모퉁이 너머에서 두 남녀의 언쟁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저기 있나 보네.'
축 늘어진 멜리나를 업은 채 그쪽으로 향했다.
"계속 이렇게 일을 안 하고 살 순 없어! 딸 생각도 해야지. 멜리나, 그 아이는 아직 한창 자랄 때라고."
화로 앞에 서 있는 두 남녀가 보였다.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남자와 두건을 머리에 뒤집어 쓴 여자.
여자가 벽에 기댄 채 고개를 내저었다.
"됐어. 일 안 받는다니까."
"알레시아!"
남자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렸다. 나는 못 들은 척 얼굴을 돌려버리는 여자에게 눈길을 주었다.
'저 여자가 알레시아.'
소설의 묘사처럼 타오르는 듯한 적갈색의 머리카락이 인상적이었다. 질끈 동여맨 머리끝 아래로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이 풍성하게 늘어졌다.
쩍 벌어진 어깨엔 승모근이 발달했고, 두툼한 팔뚝은 보기 좋은 구릿빛으로 그슬렸다. 특히 팔 곳곳에는 화상이 가득했다.
'40대로 알고 있는데, 그보다 늙어 보이는군.'
쇠에서 뿜어져 나온 열기는 피부를 빨리 상하게 하고, 속의 수분을 증발시켜 건조하게 만든다. 불을 다루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그래서 또래보다 빨리 늙는다.
"흐음."
슬며시 인상을 찌푸렸다. 알레시아의 얼굴이 소설에서 묘사했던 것보다 훨씬 안 좋아 보였기 때문이다.
거뭇한 안색, 눈가 아래로 짙게 내려온 다크서클, 버석하게 말라붙은 입술까지.
'확실히 상태가 안 좋군.'
예상은 했지만 그게 적중하자 입맛이 썼다.
"소리 지르지 마, 머리 아파."
알레시아가 얼굴을 찌푸리며 으르렁거렸다. 남자는 기가 찬 듯 하, 소리를 내뱉더니 더욱 언성을 높였다.
"그러니까 술 좀 작작 마시랬잖아. 됐고, 이번에 국경의 성벽이 무너졌다는 소식은 들었지?"
아, 그거.
나는 어렵지 않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성벽을 먼저 무너뜨렸습니다. 그 아래 깔린 병사들이 꽤 됩니다. 생존자들이 최선을 다해 막고 있습니다.'
기사가 전하던 다급한 보고. 이 사건은 원작에도 기록되어 있었다.
나비의 날갯짓이 폭풍을 만들 듯, 이 작은 구멍이 결국 오베스트 기사단을 무너뜨리는 축이 되었으니까.
"거길 축조하는 데 재료가 많이 필요할 거야. 아주 간단한 거겠지. 못이나 철괴 같은 거. 네가 납품하면 돼."
남자는 열성적으로 손을 휘저으며 알레시아에게 다가섰다. 그녀를 설득하려는 의지로 가득한 모습이었다.
"제안은 고마운데,"
알레시아는 그 열정에 조금도 감화되지 않은 듯, 피곤한 기색으로 이마를 짚었다.
"안 해. 아니, 못 해."
"뭐?"
"못 한다고."
싹둑 잘라내듯이 말한 그녀가 담담한 음성으로 덧붙였다.
"게으름을 피우는 게 아니야. 그냥... 쇠가 안 잡혀. 예전엔 내 몸을 다루듯이 쉬웠던 그게, 이제 안 잡힌다고."
남자는 말문이 막힌 듯 입을 스르르 벌렸다.
"맨정신일 때 쇠를 잡으면, 자꾸 남편의 환청이 들려 와. 그걸 듣지 않으려고 술을 마시면, 몸이 말을 듣지 않지."
알레시아의 음성이 서서히 젖어 들었다.
"이런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어?"
"...."
"그 일, 난 못 해. 다른 사람 알아봐."
말을 마친 알레시아는 남자에게서 몸을 완전히 돌렸다. 더이상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다는 표시.
굳은 듯이 서 있던 남성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이내 다시 내렸다. 그는 돌아서서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나는 사라지는 남자의 등에서 대장간으로 시선을 옮겼다.
으레 불티가 타닥 튀어야 할 용광로는 차갑게 식어 있었고, 쉴새 없이 땅땅 소리가 들려야 할 모루는 죽은 듯이 조용했다.
알레시아의 말마따나, 그녀는 정말로 쇠질을 할 수 없게 된 것 같았다. 그리고 거기에서 벗어나려는 의지도, 기회도 없어 보였다.
'강경책이 필요하겠어.'
나는 알레시아의 축 처진 등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그나저나 딸과 별로 닮지는 않았군.'
그런 생각을 하며 멜리나를 슥 내려다 보았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땐,
"...."
눈살을 찌푸린 채 이쪽을 바라보는 알레시아를 발견했다.
아, 닮은 구석이 있긴 있었다.
의심으로 가늘게 좁혀진 알레시아의 눈동자는, 멜리나의 그것과 똑 닮아 있었다.
"...멜리나?"
무의식적으로 움직였던 입술이 문득 멈췄다. 알레시아의 시선이 위로 거슬러 올라가 내 머리칼, 그리고 눈동자를 훑었다.
이윽고 알레시아가 몸을 빳빳히 굳혔다.
"아벨 도련님이시군요."
알레시아가 나와 멜리나를 번갈아 보더니 초조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제, 제 딸이 왜...."
이미 창백했던 낯이 이젠 새파랗게 질려가고 있었다.
아마 지금 그녀의 머릿속엔 내 뒤를 따라다니는 온갖 소문들이 활개치고 있을 테지.
하루가 멀다 하고 창녀를 갈아치우는 망나니, 아랫도리 가벼운 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는데,"
나는 그녀가 돌이킬 수 없는 결론에 도달하기 전에 막아섰다.
"그런 거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라."
"네?"
"이 녀석과는 마그나 모르텐에서 만났으니까."
"아."
알레시아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가, 이내 어둑해졌다.
"그 애가 설마 또...."
"그래. 화이어 브랜디를 물처럼 마시고 있던데."
멜리나를 향하는 알레시아의 낯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아무래도 내가 없었다면 저 솥뚜껑만한 손으로 딸의 등짝을 후려치고도 남았을 것 같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그녀에게 다가섰다. 알레시아를 향해 멜리나를 내밀자, 알레시아가 딸을 부축해 옆의 의자에 앉혔다.
"이 애가 정말...."
멜리나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술냄새에, 알레시아가 미간을 짚었다.
"또 아빠 술을 몰래 훔쳐서는."
"그 주량이 유전이었나 보군."
"생전에 그이가 좋아하던 술이었지요."
못마땅하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알레시아는 멜리나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었다.
"최근엔 좀 괜찮은가 싶었더니, 아직은 힘든가 봅니다."
Chapter 2. 구덩이에 물을 쏟아붓는다. (4)
멜리나를 향한 눈길에서 감출 수 없는 따스한 모정이 느껴졌다. 아벨이 몇 년간 받아보지 못한, 그런 눈빛.
"...."
왜 괜히 가슴 한쪽이 욱신거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애써 멜리나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잠시 허리를 굽힌 채 멜리나의 안색을 살피던 알레시아가 몸을 일으켰다.
"감사합니다, 도련님. 폐를 끼쳤군요. 제 딸이 실례를 범했습니다."
"글쎄."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안쓰러웠을 뿐이다."
의외의 대답을 들었는지, 알레시아의 눈썹이 슬쩍 들렸다.
"그런데 도련님께서 마그나 모르텐엔 왜...."
"내가 가면 안 되는 곳인가?"
"그건 아닙니다만. 도련님께서는 지금껏 한 번도 마그나 모르텐에...."
알레시아의 눈에 의심의 빛이 번졌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그저 미소만 지었다.
"하인들을 시켜도 되셨을 텐데."
내 미소를 보고 무엇을 읽어냈는지, 알레시아가 화제를 돌렸다.
"굳이 여기까지 걸음하시게 하여 죄송합니다."
"아, 받을 게 있어서 말이야."
"받을 거라니요?"
나는 발 한쪽을 들어 올렸다. 노랗게 물든 자국이 선연한 신발을 알레시아에게 보였다.
"이거, 멜리나의 작품이거든."
"네? 멜리나가요?"
"그래. 비석이랑 박치기 대결을 하려 들길래 막아 줬더니만, 기어이 나한테 선물을 주더군."
알레시아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저 사실을 말하는 것뿐인데도, 아벨의 낮은 음성은 그것을 위협처럼 들리게 하는 힘이 있었다.
"도, 도련님...."
알레시아가 바닥에 납죽 엎드렸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부디 용서해 주세요!"
그녀는 간절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아직 어린아이입니다. 감히 도련님께 누를 끼치려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아직 어린데, 대낮부터 술을 벌컥벌컥 마셔대나 봐?"
"그건...."
"내 신발값을 받아야겠어."
알레시아의 눈빛에 절망이 스멀스멀 번졌다.
나는 그것을 고스란히 읽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물론, 그녀가 이 값을 지불할 능력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현재 내가 신은 것은 따뜻한 남부에서만 기를 수 있는 소의 새끼를 도축하고, 수도의 일류 가죽점에서 무두질하여 한 땀 한 땀 짜낸 맞춤형 신발이었다.
이 대장간을 판다고 한들, 내 신발값을 마련할 수 있을까? 아마 아닐 터였다.
"도, 도련님."
알레시아가 어렵게 입을 뗐다.
"죄송하지만 현재 저는 일을 못 하고 있습니다. 몇 달째 의뢰도 받지 못 했...."
"안 되면 되게 해야지."
"...."
냉정한 일축에 알레시아가 고개를 푹 수그렸다.
"사흘을 주겠다."
나는 그녀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무심히 말했다.
실의의 구덩이에 빠져 있는 알레시아를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밧줄을 던져주는 것으론 부족했다. 지금의 그녀에겐 그것을 붙잡을 힘이 없었다.
"내가 쓸 만한 건틀릿을 만들어 와."
그 대신, 구덩이에 물을 콸콸 쏟아붓기로 했다.
"...네?"
알레시아가 얼굴을 들었다. 내가 한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한 듯 멍한 표정이었다.
"건틀릿 하나면 돼."
"...."
"신발값은 그걸로 받겠다."
물이 코 아래까지 차오른다면, 그때는 죽기 살기로 헤엄치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
말을 마친 나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도, 도련님!"
한 걸음을 내딛기 직전, 알레시아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힐끔 뒤를 돌아보자 알레시아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서 있었다.
"그, 정말... 진심이십니까? 방금 하신 말씀?"
"그래."
"하, 하지만."
알레시아가 노랗게 물든 내 신발을 바라보았다. 그녀도 지금 이 거래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 알고 있을 것이다.
"어떻게 건틀릿 한 벌로 그 신발값을 치룰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니까 그에 걸맞는 걸 만들어야지."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말투로 덧붙였다.
"딸을 지켜야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제작에 임해 봐."
"...."
"혹시 모르지. 전설적인 건틀릿이 탄생할지도 모르잖아?"
사흘이라는 촉박한 기간, 그리고 아벨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압박감은 알레시아의 숨겨진 재능을 일깨워줄 것이다.
주인공 카인에게 건틀릿을 만들어 줄 때의 그녀는 남편의 묘지를 '지키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 일념이 '수호자의 손'이라는 재능을 깨우치게 했다.
'이번엔 지킬 대상이 좀 달라졌지만, 효과는 훨씬 좋을 테지.'
나는 알레시아를 향해 상큼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이해했나?"
"...."
물론 그녀에게는 상큼하기는커녕 공포스럽게만 보일 테지만.
어쨌건 나는 알레시아에게 기회를 주는 동시에, 빚을 지울 수 있는 지금 상황이 흡족하기 그지없었다.
이제 미끼를 던졌으니 기다리면 될 뿐이었다.
❖ ❖ ❖
의외로 입질은 빨리 왔다. 그것도 기대하지 않은 쪽에서.
"도, 도련님."
다음 날도 마그나 모르텐에 방문했다. 어제 멜리나의 일로 충분히 안을 다 둘러보지 못한 탓이었다.
작고 수줍은 음성이 뒤에서 들려오자, 나는 서서히 몸을 돌렸다. 뒤에 서 있을 이를 짐작하면서.
"아, 안녕하세요."
두 손을 공손히 모아선 멜리나가 서 있었다. 가느다란 어깨가 긴장과 두려움으로 바짝 굳어 있었다.
"아."
난 입꼬리를 비뚜름히 밀어 올렸다.
"어제의 주정뱅이로군."
멜리나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을 본 내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오늘도 술을 마신 건가? 얼굴이 빨간데."
"아, 아니에요!"
빽 소리를 질렀던 멜리나는 이내 아차, 하고 입을 막았다. 황급히 주변을 둘러본 뒤 다시 나를 보는 멜리나의 얼굴은 여전히 토마토처럼 빨갰다.
이제야 내가 알던 원작에서의 멜리나 같았다.
'계속 놀리고 싶어지는데.'
그런 삐딱한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참았다.
"무슨 일이지?"
멜리나가 왜 나를 찾았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설마 벌써 건틀릿이 완성되었을 리는 없고.
"잠깐 시간을 내주실 수 있으실까요.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요."
주변을 한 번 휙 둘러보았다.
뭐, 거의 다 보긴 했는데. 어제도 그렇고 계속 이 녀석에게 방해받는 느낌이군.
"뭔데?"
"저, 그, 어제 일 때문에요."
멜리나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도련님께 실례를 범했어요."
"기억은 나나?"
"...아뇨."
멜리나의 목소리가 한층 작아졌다.
"어머니께서 알려주셨어요. 저어, 그리고...."
멜리나가 품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이것을, 돌려드리려고요."
내가 어제 건넸던 손수건이었다.
형편없이 구겨지고 젖었던 어제와는 달랐다. 말끔히 갠 데다, 원래의 색을 되찾은 상태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도련님."
멜리나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손수건을 내밀었다. 나는 픽 웃었다가 얼른 웃음기를 지웠다.
"그래."
사실 돌려받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정성스레 빨아서 돌려주는데 그 성의를 거절할 필요도 없었다.
손수건을 받아 품에 넣는 순간, 희미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멜리나의 몸에서 내내 맴돌던 그 향기가.
"...."
잠깐 입술을 씰룩였다가, 이내 품에 넣었던 손을 내렸다.
"됐지? 이제 가라."
아직 하던 일이 끝나지 않았다. 마그나 모르텐의 모든 구획을 돌아보고, 레퀴엠이 어디에 나타날지 유추해 보아야 했다.
나는 돌아서서 보던 구획을 마저 살폈다. 그런데 뒤에서 다람쥐와 같은 인기척이 따라붙는 게 느껴졌다.
"...왜 따라오냐?"
나는 고개만 뒤로 돌렸다. 내 뒤에서 쭈뼛대던 멜리나가 몸을 흠칫 떨었다.
"저, 그게."
"아직 할 말이 남았나?"
"아, 네. 그러니까."
멜리나가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는 게 보였다. 이윽고 그녀가 용기를 내어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여쭤볼 게 있어서요."
"뭐지?"
어떤 질문일지 짐작했지만, 일부러 말할 기회를 주었다.
"제가 어제, 도련님의 신발을 더렵혔다고 들었어요."
아니나 다를까, 멜리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내 예상 범주 안에 있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값을 어머니가 갚기로 하셨다는 것도 들었고요."
"그래서?"
"부디 그 명령을 거둬 주세요."
멜리나의 치마에 생긴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그녀의 음성은 점점 또렷해졌다.
"도련님의 신발에 상응하는 건틀릿을 만들라는 것은... 결국, 보석을 사용하라는 뜻 아닌가요?"
아닌데?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계속 말해보라는 듯 턱짓했다.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이 꼬맹이가 무슨 말을 할지 궁금했다.
"저희집은 그럴 만한 상황이 안 됩니다. 도련님께서 요구하신 방식으론 신발값을 갚을 수 없어요."
멜리나의 입술 새로 체념 가득한 한숨이 흘렀다. 그녀는 침을 꿀꺽 삼킨 뒤 말을 이었다.
"도련님께 죄를 저지른 것은 저예요. 그러니까...."
그녀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게 물들었다. 몹시도 중대한 결심을 한 듯한 비장함이 번졌다.
"제가, 죗값을 치르겠습니다."
"...."
"무엇이든 할게요."
나는 멜리나의 얼굴을 보며 무표정하게 되물었다.
"무엇이든?"
멜리나의 눈이 요동쳤다. 내가 무엇을 시킬지 오만 가지 상상을 하는 모양이었다.
그 속에는 그녀의 신체적 자유를 포기한 채, 매일 같이 굴욕감을 맛보며 내게 안기는 선택지도 포함되어 있으리라.
'과연 무엇이든 할 수 있을까?'
돌아가신 아버지의 비석 앞에서 울며 술병을 비우던 네가 말이야.
내가 비웃는 찰나,
"네."
멜리나의 눈에서 갈등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 순간의 그녀는 화덕에서 불타오르는 장작과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
나는 약간 허를 찔린 기분이 되었다. 이윽고 허탈한 미소가 잇새를 비집고 나왔다.
'과연, 그 엄마에 그 딸이군.'
우중충한 먹구름이 걷힌 두 눈은 겨울 하늘 같았다. 한없이 시리고 삭막하지만 굳세게 버티는. 그런 서릿발 같은 눈빛.
나는 픽 웃음을 흘렸다.
"내가 널 거둬서 어디에 쓰겠냐."
"예?"
"자신에게 엄청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글쎄다."
심드렁하게 손을 내저었다.
"일단 난 주정뱅이를 싫어해. 네 얼굴도 내 취향이 아니고."
객관적으로 멜리나는 꽤 예쁘장하게 생긴 소녀였다.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성장하면 더욱 빛을 발할 터였다.
그럼에도 나는 가차 없는 평가를 쏟아부었다.
"뭣보다...."
눈을 가늘게 뜨고 멜리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어린애를 건드리는 취미는 없어서."
"...!"
멜리나의 얼굴이 화르륵 불타올랐다. 그녀가 양팔을 감싸 쥐며 내게서 한 걸음 물러섰다.
'뭐냐, 저 반응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치한 취급을 받는 느낌이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괜한 시도를 하려 들 테니,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것이 옳다.
"아무튼,"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네 굳센 의지는 알겠는데 필요 없어."
"하지만 제 어머니는,"
"알레시아가 내 말을 잘못 이해한 것 같군. 내 요구는 간단하다."
나는 손가락을 하나 들어 올렸다.
"건틀릿 한 벌. 소재는 가죽이 좋아. 굳이 비싼 것 쓸 필요도 없어. 가볍지만 단단하고, 내구성이 좋은 것으로."
멜리나에게 다가가 한 손을 끌어당겼다.
"꺅!"
멜리나가 비틀거리며 끌려오고,
"크기는 이 정도로."
그녀의 손바닥에 손을 맞대고 쫙 펼쳤다.
Chapter 2. 구덩이에 물을 쏟아붓는다. (5)
내 손은 크기가 큰 편이라 멜리나의 손을 전부 덮고도 남았다.
"알았지? 기억해 둬."
나는 담담하게 멜리나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품속에 있던 흰 장갑을 내밀었다.
"정확한 치수가 필요하다면 이걸 참고하고."
"아, 저, 네에."
멜리나는 어쩐지 몽롱해 보이는 표정으로 장갑을 받아들었다. 나는 그녀가 잘 들을 수 있도록 힘주어 말했다.
"다시 말해 두지만 보석 같은 건 필요 없어. 거추장스럽기만 하니까. 내가 원하는 건 용도에 충실한 물건이다."
"말이 안 되잖아요!"
멍하니 듣고 있던 멜리나가 고개를 흔들며 항변했다.
"어떻게 한 벌로 그 값을 갚으라는 말씀이세요? 건틀릿을 여러 개 만들지 않는 이상...."
"네 어머니를 믿지 못하는 건가?"
내 반문에 멜리나가 아차 싶은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헛생각하지 말고, 가서 어머니나 잘 도와 드려."
"...."
"잊었나? 일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멜리나의 눈가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네가 여기 와서 술을 퍼먹지만 않았더라도,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거다."
사실 난 멜리나에게 약간의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 덕분에 순조롭게 알레시아에게 빚을 지울 수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이건... 조금 쓴 약을 처방하는 것이다.
"난 분명히 건틀릿 한 벌이라고 말했으니, 더 이상의 오해는 없었으면 좋겠군."
나는 냉담한 얼굴로 멜리나에게서 돌아섰다.
"내가 만족할 만한 물건을 만들어 오라고 전해."
난 두 모녀를 더이상 그런 식으로 살게 둘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반드시 제 힘으로 일어나야만 했다.
그 까닭이 아벨에 대한 분노든 뭐든 좋았다.
'어쨌건 일어서기만 하면 돼.'
그렇다면 그 후는 어떻게든 될 것이다. 저런 눈빛을 가진 소녀가 다시 고꾸라질 리 없다.
'지금은 죽어라 내 욕을 하고 있겠지만 말이야.'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마그나 모르텐을 향해 걸어갔다. 악당의 삶은 참 고달프다.
❖ ❖ ❖
나는 방 중앙의 소파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흐음."
여전히 호화롭기 그지없는 소파, 고급 목재로 만든 가구와 침대. 그리고 사라져 버린 체력 단련 기구들.
'꼭 이 몸에 처음 빙의했을 때 같네.'
소파 깊숙이 몸을 기대며 히죽 웃었다.
'이렇게 산 지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 낯설군.'
턱을 뒤로 젖혀 천장을 바라보았다가, 벽에 걸린 시계로 눈을 돌렸다.
'언제쯤 오려나.'
내가 이렇게 방을 치운 이유는 단 하나였다. 오늘, 아벨의 아버지인 디에고가 돌아오기 때문이다.
'이제 슬슬 올 때가 되었지.'
오늘은 집무실에 들어가지도,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다. 근신 중이라는 상황에 아주 충실히 임했다.
대신 방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 체력 훈련 대신 기억 속의 리암과 훈련하기를.
'잠시라도 쉬어선 안 돼.'
이제 레퀴엠이 나타나기까지 사흘이 남았다. 시간은 착실하게 나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낭비할 시간이 없어.'
하루하루가, 1분 1초가 소중하고 귀했다.
땀에 흠뻑 젖을 정도로 몰입한 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뿌우-
멀리서 뿔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도착했나 보군.'
창가로 다가서서 밖을 내다보았다.
멀리서 보아도 크고 우람한 흑마 위에 앉아, 푸른 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사내가 보였다.
'디에고 킨드리얼.'
이 오베스트 영지의 주인이자, 제국의 서쪽을 수호하는 최강의 변경백. 그리고 나의 아버지.
나는 귀 옆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선명한 쪽빛은 내가 그의 핏줄이라는 감출 수 없는 증거였다.
'슬슬 준비할까.'
가볍게 몸을 씻은 뒤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몇 분 뒤,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
"도련님."
필립의 목소리였다.
"영주님께서 오찬을 같이 들자고 하십니다."
그를 따라 식당으로 내려갔다.
'점심 때 오긴 처음인데.'
식당은 주로 저녁에 이용하곤 했다. 낮에는 대부분 집무실에서 식사를 해결하는 탓이었다.
"이쪽입니다."
하인 둘이 식당 문을 열자, 안에 길게 펼쳐진 탁자가 보였다. 그리고 그 끝에 앉아 있는 거대한 남자도.
"...."
디에고의 새파란 시선이 나를 향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에게 샅샅이 파헤쳐지는 느낌이다.
'이게 어떻게 아들을 바라보는 눈빛인 건지.'
나야 정말 생면부지의 타인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그의 태도는 이해하기 힘든 면이 있었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나는 그에게 향했던 눈길을 거두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도련님."
미리 대기하고 있던 하인이 의자를 꺼내 주었다. 디에고의 맞은편이자 그와 가장 멀리 떨어진
자리였다.
'자리 선정 죽여주네.'
서먹한 부자 사이를 반영하듯 굉장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이래서야 말하는 게 들리긴 하려나.'
어차피 대화를 나누진 않을 테지만.
일단 얌전히 의자에 앉아 식기만 바라보았다. 디에고 또한 말 한마디 없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아버지를 향한 따뜻한 인사도, 안부를 묻는 말조차 없었다.
"...."
식당에 삭막한 정적이 내려앉자, 하인들의 등허리가 바짝 움츠러들었다.
그들은 소음을 최대한 줄인 채 음식을 날라왔다. 식기 움직이는 소리, 수레의 바퀴 굴러가는 소리만이 희미하게 들렸다.
'과연 성내 최고 베테랑들만 모였군.'
디에고는 성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 끽해야 1-2주에 며칠 정도.
그래서 하인들은 귀가한 영주가 편안히 쉴 수 있게 하는데 가장 많은 심혈을 기울였다.
'사실 영주가 제 집에서 화낼 만한 일이 많진 않지.'
그의 아들이 속을 긁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디에고는 일평생 단 한 명의 여자를 사랑해 그녀와 결혼했다. 그리고 아내를 잃으면서 미소도 함께 잃었다.
그 후 남은 생은 그에겐 그저 의미 없는 하루의 연속일 뿐. 아내가 이 세상에 유일하게 남긴 흔적인 아들조차, 그에겐 짐덩이에 가까웠다.
'그 결과가 이 꼴이지.'
지독하게 차가운 부자 관계.
일단 디에고는 다정한 아버지는 아니었다. 정확히는 냉혹한 아버지에 가까웠고, 아벨의 행실을 못마땅해하는 경우가 많았다.
잔소리를 듣기 싫은 것은 어느 아들이나 마찬가지라, 아벨 또한 되도록 아버지를 피해 다녔다.
'본인도 아버지에게 살가운 성격은 아니었고 말이지.'
그 탓에 두 부자는 되도록 성 내에서 마주치지 않게 되었다. 드물게 마주치는 공간은 식당뿐.
결국, 이 성에서 가장 일을 잘하고 눈치가 빠른 하인들이 이곳에 배치되었다.
"...."
하인이 디에고의 앞에 음식을 내려놓으며 양쪽의 눈치를 살폈다.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디에고가 식기를 집어 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가 식전 빵을 베어 물자 나 또한 식사를 시작했다.
한동안 식당에는 미세한 잡음만이 들릴 뿐, 두 부자가 식사를 하는 것치곤 과할 정도의 고요함이 유지되었다.
'용케 안 체하고 먹네.'
나는 머리를 작게 흔들며 식사에 집중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식사가 퍽 내 입맛에 맞다는 점이었다.
'요리사의 솜씨가 좋아.'
요리사가 내 까다로운 요구에도 군말 없이 따라 준 덕에, 식사 시간은 하루 중 가장 기다리는 시간이 되었다.
나는 디에고의 식사 속도에 상관하지 않고 묵묵히 접시를 비웠다. 이윽고 식후 디저트가 차려졌다.
'음, 이거 진짜 맛있다.'
레몬 셔벗을 베어 물면서 만족스러운 신음을 삼켰다.
레몬의 톡 쏘는 향과 신맛이 침샘을 자극하고, 그 뒤로 느긋하게 밀려드는 단맛이 어우러지는 게 정말 훌륭했다.
"이거 하나 더."
내가 다 비운 접시를 가리키며 말하자 하인이 고개를 숙였다.
"...."
그와 동시에 디에고가 내 접시를 빤히 바라보았다.
'뭐지, 더 먹고 싶어서 그러나?'
그런 거라면 하인에게 말하면 될 텐데.
그의 앞에는 와인 한 잔과 함께 들기 좋은 치즈 몇 조각이 놓여 있었다.
'소설에 나오는 영주들은 꼭 와인을 즐겨 먹던데.'
참으로 그다운 후식 취향이었다.
이윽고 새로운 레몬 셔벗 접시가 내 앞에 차려졌다. 나는 디에고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레몬 셔벗을 날름 해치웠다.
그때까지도 디에고는 내게 말 한마디도 걸지 않았다. 그저 잔에 담긴 와인을 찰랑찰랑 굴리며 생각에 잠겨 있을 뿐.
'그럼 내가 말하는 수밖에 없겠군.'
나는 손을 말끔히 닦아낸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
"이제 근신은 풀린 겁니까?"
퉁명스레 물으면서 나는 내심 코웃음을 쳤다.
'어차피 의미 없는 근신이지만.'
그래도 디에고가 있는 동안엔 지키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다.
"...."
디에고가 비로소 눈을 들어 나를 응시했다.
그의 눈동자에 비치는 나는, 아버지를 향한 존경이라곤 조금도 없는 시건방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니, 그런 표정을 짓고 있어야 했다.
일주일의 근신은 아벨을 변화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 그저 아버지를 향한 반감만을 키울 뿐이었다.
나는 그렇게 지금껏 디에고가 알고 있던 아들의 모습을 연출했다.
디에고의 미간이 미미하게 꿈틀거렸다.
"...그렇게 해라."
그는 다시 들고 있던 와인잔을 향해 눈을 돌렸다.
"그만 가보아라."
나는 즉시 일어서서 식당을 나왔다. 문가에 서 있던 필립을 지나치며 작게 속삭였다.
"아버지가 누굴 만나는지 지켜보고 보고해."
필립은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알겠다는 듯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나는 든든한 배를 두드리며 성 밖으로 나왔다.
"슬슬 가볼까."
디에고가 오는 날엔 훈련을 쉬겠다고 리암에게 미리 일러두었다. 행여나 훈련하는 모습을 들킬 수도 있으니까.
'일주일 만에 근신이 풀린 아벨이 할 일은....'
나는 씩 웃으며 마차를 준비하라라고 하인에게 일렀다.
'당연히 외출이겠지.'
그리고 오늘은, 알레시아에게 준 기한의 마지막 날이었다.
❖ ❖ ❖
나는 곧장 알레시아의 대장간을 찾아갔다. 예전에 멜리나를 안아 들고 돌았던 모퉁이가 보였다.
'저기만 지나면 보이겠네.'
막 모퉁이를 돌려는 순간,
"어머니, 다 됐어요?"
"잠깐만 기다리렴."
멜리나와 알레시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모퉁이에 바짝 몸을 붙인 채 둘을 살폈다.
'호오.'
차갑게 식어 있던 용광로는 활활 불타고 있었고, 먼지가 쌓여 있던 도구들도 모두 제 원래 모습을 되찾았다.
땅, 땅!
알레시아가 모루 위에서 무언가를 두드리고 있었다. 그녀의 팔이 움직일 때마다 번쩍번쩍 불꽃이 튀었다.
"끈 줘 보렴."
"네."
멜리나는 그 복잡한 도구들 사이에서 곧장 원하던 물건을 찾아냈다.
"여기 있어요."
알레시아에게 손을 내미는 그녀의 얼굴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지금껏 보지 못했던 영민함이 그득했다.
'그래, 이게 원래 둘의 모습이지.'
원작에서 둘은 이런 모습으로 카인을 만났었다. 알레시아의 유능함, 그리고 멜리나의 매력은 독자들을 끌어당겼다.
'확실히 지금이 더 보기 좋군.'
나는 가볍게 미소 지으며 모퉁이 밖으로 나왔다.
"잘 되고 있나 봐?"
내 목소리가 들리자 두 모녀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아벨 도련님."
"도련님."
두 모녀가 화들짝 놀라 허리를 숙였다.
Chapter 2. 구덩이에 물을 쏟아붓는다. (6)
나는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았다.
"도련님이 여기까진 어쩐 일이신지요. 완성되면 성으로 가져다 드리려 했습니다만."
알레시아가 퍽 곤혹스럽다는 듯이 나를 보았다. 멜리나도 내가 나타난 순간부터 안절부절못 하는 게 눈에 보였다.
"기다리기 지루해서."
정확히는, 물건을 받는 모습을 성 안 사람들에게 보이기 싫어서지만.
현재 집무실에 앉아 있을 디에고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가 만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인물도.
'이따가 정확히 알 수 있겠지.'
생각을 마친 나는 건들건들한 걸음으로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물건은 어느 정도 완성됐나?"
"마무리 단계입니다."
알레시아의 공손한 대답에 절로 유쾌한 미소가 떠올랐다.
"영영 쇠를 못 잡을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군?"
"그건...."
알레시아가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표정을 지었다. 자신을 강제로 일어서게 만든 나를 향한 고마움, 그러나 아직 남아 있는 나에 대한 공포 등이 복잡하게 뒤섞인.
"뭐, 잘됐군."
나는 대장간 옆에 놓인 의자에 털썩 앉았다. 별로 큰 소리가 나지 않았는데도 멜리나는 어깨를 움찔거렸다.
"얼른 마무리하라고."
내가 손을 휘휘 젓자 알레시아가 난감한 얼굴을 했다.
"거기 앉아 계시려고요?"
"왜, 안 되나?"
"그건 아닙니다만...."
"나는 신경 쓰지 말고 하던 일 계속해."
알레시아의 옆에서 멜리나가 표정으로 말했다.
'거기 그러고 있는데 어떻게 신경을 안 써요!'
나는 보란 듯이 콧방귀를 뀌었다. 그 모습을 본 알레시아는 체념한 듯 다시 집게를 쥐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도련님."
확실히 딸보다는 어미 쪽이 더 강단 있다. 아마 멜리나도 성장하면 저런 모습을 닮아가겠지.
품속의 회중시계를 꺼냈다.
"아직 3시간 정도 남았어."
"네?"
"사흘이 다 되기까지, 3시간 남았다고."
알레시아의 얼굴에 당혹과 조급함이 스쳤다. 뒤에서 멜리나가 입을 뻐끔거렸다.
"그, 그 사흘이 그렇게 돼요?"
"그럼, 오늘 자정까지인 줄 알았나?"
무슨 학생들 숙제 내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직접 대장간에 온 것은, 그들이 이런 착각을 하고 있을까 봐 재촉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그만큼 한시라도 빨리 건틀릿을 손에 넣고 싶었다.
'완성된 순간을 직접 보고 싶기도 하고.'
과연 알레시아가 자신의 재능을 깨우쳤을지 궁금했다.
"...알겠습니다."
알레시아가 굳은 얼굴로 작업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멜리나도 상황을 깨달았는지 어머니를 거들었다.
"흐음."
나는 다리를 까딱거리며 알레시아의 작업을 지켜보았다. 그녀가 가죽끈을 묶고, 장갑의 손가락 끝을 다듬고, 손이 들어가는 입구를 매만지는 순간들을.
알레시아가 내 쪽을 흘끔 보았다가, 멜리나를 보았다.
"뭐 드릴까요?"
멜리나가 천진한 얼굴로 되물었다.
"...아니야."
알레시아는 무언가 결심한 듯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더욱 매서운 기세로 작업에 임했다.
시간이 흐르고, 그녀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이제 마지막."
알레시아가 망치를 들어 여미는 곳을 쿵 내려찍었다. 그 순간,
파앗!
건틀릿에서 초록빛이 뿜어져 나왔다.
"앗!"
"어?"
알레시아와 멜리나가 놀라서 한 걸음 물러섰다. 나 또한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저건!"
따뜻하고 부드러운, 보는 이를 어루만져 주는 것 같은 다정한 색채. 그것은 '수호자의 손'이 발현되었을 때 나타나는 상징과도 같았다.
'원작에서 묘사한 거랑 똑같아.'
아니, 실물로 보니 훨씬 인상 깊었다. 정말 누군가를 보호한다는 느낌이 강했다.
초록빛은 마지막으로 환한 빛을 한번 쏟아내곤, 이윽고 건틀릿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갑자기 이게 웬...."
알레시아가 황급히 건틀릿을 집어 들었다. 멜리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바, 방금 그게 뭐죠?"
"나도 모르겠어. 이런 적은 처음인데...."
알레시아는 땀을 뻘뻘 흘리며 건틀릿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건틀릿은 방금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조용했다. 색깔도, 모양도 완성되었을 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뭐지? 잘못 본 건가?"
"초록색 빛 같은 게 나오지 않았어요?"
두 모녀가 건틀릿을 둘러싸고 수군댔다.
내가 가까이 다가서는 것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거,"
나는 약간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이리 줘봐."
"아."
나를 알아챈 알레시아가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건틀릿을 만지작거리며 우물쭈물했다.
"도, 도련님. 지금 이게 무슨 일인지 저도 잘...."
"줘보라고."
알레시아와 멜리나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일이 잘못됐다고 생각하는지 안색이 안 좋았다.
"얼른."
내 재촉에 알레시아가 마지못해 건틀릿을 내밀었다. 나는 거의 낚아채다시피 해서 건틀릿을 쥐었다.
"...."
가까이서 본 건틀릿의 상태는 훌륭했다. 무두질을 잘한 듯 감촉이 매끈했으며, 각 이음매도 빠짐없이 꼼꼼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하."
건틀릿을 손에 끼어본 나는 낮은 탄성을 흘렸다.
'느껴져.'
착용자를 감싸 안는 듯한 따뜻함이.
단순히 방어구를 하나 걸쳐서 얻는 온기와는 명백히 달랐다. 이 세상의 온갖 해로운 것, 혹은 악의로부터 보호받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정도라면... 레퀴엠에 맞서볼 만하겠어.'
나는 건틀릿을 착용한 채 한참을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정확히는 밀려드는 안도의 한숨을 삼키느라 바빴다.
"잘도...."
한참 만에 겨우 한 마디를 뱉을 수 있었다.
"이런 걸, 만들었군."
알레시아가의 몸이 흠칫 떨렸다. 그녀는 흉터와 상처로 가득한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제가 일을 쉰 지 너무 오래되어서..."
"음, 그랬지."
나는 흡족하게 웃으며 천천히 건틀릿을 벗었다.
"그랬는데 이 정도일 줄이야."
알레시아는 정말 잘해 주었다. 내가 바라던 바로 그 건틀릿을 만들어 주었으니까.
"아주 훌륭해."
"?"
알레시아가 한 걸음 옆으로 물러났다. 그녀의 낯에 스멀스멀 두려움이 번졌다.
"저에겐... 그것이 최선이었습니다."
"그런 것 같네."
그러니까 그 재능을 깨우쳤겠지.
나는 벗은 건틀릿을 곱게 접어 품에 갈무리했다.
"으윽."
알레시아가 이를 악물었다. 그러더니 옆으로 한 걸음 옮겨 내게서 멜리나를 가리듯 막아섰다.
"어머니...."
멜리나가 겁에 질린 얼굴로 알레시아의 팔을 감싸 쥐었다.
"좋아, 그럼."
나는 만면에 웃음을 머금은 채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바닥에 납죽 엎드린 두 모녀를 발견했다.
"...뭐하냐?"
두 모녀가 절박하게 외쳤다.
"도련님, 제발 용서해 주세요!"
"죄송합니다! 부디 딸 아이만은!"
알레시아가 먼저 머리를 들었다.
"배운 게 이뿐이라 도련님의 눈에 부족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흘 내내 잠도 자지 않고 오직 건틀릿을 만드는 데만 집중했습니다. 이 정성을 갸륵하게 여겨 주십시오!"
이에 질세라 멜리나도 외쳤다.
"잘못을 한 건 저잖아요, 그러니 차라리 제게 벌을 주세요! 저희 어머니는 죄가 없어요!"
아니, 이게 무슨.
나는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두 모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봐."
"도련님,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저희를 불쌍히 여겨 용서해 주세요!"
"...."
나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흘렸다.
왜 칭찬을 했는데 오해를 사버린 거지?
"그럼 신발값은 잊도록 하겠다."
"제발 딸 아이만... 네?"
"이제 됐다고."
용건을 끝냈으니 여기 더 있을 필요가 없었다. 나는 미련 없이 휙 돌아섰다.
"고생했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툭 던지곤 대장간을 나섰다.
❖ ❖ ❖
덩그러니 남은 멜리나와 알레시아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냥... 가셨네요?"
"그러게 말이다."
뭔가 폭풍이 휘몰아친 것처럼 정신이 없었다. 두 사람은 얼떨떨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게 어떻게 된 걸까요? 겨우 이 정도밖에 못 만들었냐며 화를 내시는 것 같았는데."
"나도 그렇게 생각했단다."
건틀릿을 낀 후 서서히 입꼬리를 끌어올리는 아벨의 얼굴은 두 사람의 얼을 빠지게 만들기 충분했다.
"아, 근데 신발값 잊겠다고 하시지 않았어요?"
"너도 들었니?"
알레시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었구나."
"저 분명히 들었어요. 이제 됐다고 하셨어요."
그 사실을 확인하자 왈칵 감동이 치밀었다. 두 모녀는 서로를 얼싸안고 환호성을 내질렀다.
"우리 이제 살았어요!"
"아이고, 세상에!"
둘은 서로 한 몸이 된 채 그 자리에서 통통 뛰었다. 그렇게 기쁨을 나누기도 잠시, 알레시아가 몸을 떼어냈다.
"그러니까!"
커다랗고 단단한 손바닥이 멜리나의 등을 후려쳤다.
"술 좀 그만 마시고 다니랬잖아, 이 계집애야!"
"아, 아파요! 어머니도 많이 드셨으면서!"
"이 계집애가 정말?!"
알레시아는 웃는 건지 화를 내는 건지 모를 얼굴로 멜리나를 마구 쥐어박았다.
"아,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멜리나는 얼얼해진 등짝을 어루만지며 울상을 지었다. 그녀의 시선이 아벨이 사라져 간 쪽을 향했다.
"기분이 좀 이상해요."
"뭐가 말이니?"
"아벨 도련님이 꼭...."
멜리나가 손을 꼼지락거리며 웅얼거렸다.
"...꼭, 저한테 정신 차리라고 야단을 친 것 같았어요."
"그랬어?"
알레시아도 멜리나와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다시는 쇠를 쥐지 못할 줄 알았는데.'
아벨의 명령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자신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어쨌건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아벨 덕분에 자신이 다시 일어섰다는 점이었다.
'이 영지를 떠날 생각까지 했었지.'
자꾸만 남편의 죽음을 상기하게 되는 이곳이 싫었다. 무작정 도망쳐서 숨고만 싶었다.
하지만 다시 모루 앞에 선 순간 깨달았다.
'우와, 여보. 이거 당신이 만든 거야?'
제 남편이 가장 사랑하고 아끼던 것은, 구슬땀을 흘리며 모루를 두드리던 자신의 모습이었다는 것을.
"루카스...."
알레시아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 ❖ ❖
외출을 마치고 귀가한 뒤, 필립이 내 방으로 찾아들었다.
"도련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말하라는 뜻으로 고개를 까딱이자, 그가 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도련님께서 내리신 명령대로, 영주님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했습니다."
이미 듣고 있는 사람이 없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나는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할지 짐작할 수 있었다.
"말해봐."
"예. 일단 오전 중에는 밀린 업무를 처리하셨고, 오후에는 영지 시찰에 나서셨습니다."
"그리고?"
"농가 및 상가를 방문하신 후엔, 성에 돌아와 사용인들의 상황을 돌보셨습니다."
순간 내 눈이 반짝 빛났다. 나는 태연한 낯빛을 유지하며 자연스럽게 물었다.
"사용인이라면, 누구누구?"
"예, 일단 식당의 막스 조리장 및 부엌의 사용인들을 전부 만나 보셨고. 그 다음으론...."
이미 알고 있는 이름들이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필립의 목소리에 영 내키지 않아 하는 기색이 담겼다.
"피에르를 마지막으로 본 뒤, 일과를 마치셨습니다."
내 앞에서 그 이름을 말하는 것이 꽤 곤혹스럽다는 듯.
"이상입니다."
말을 마친 그가 은근슬쩍 내 눈치를 살폈다. 나는 느릿하게 턱을 쓸며 중얼거렸다.
"흐음."
필립의 낯에 초조함이 번졌다.
Chapter 2. 구덩이에 물을 쏟아붓는다. (7)
혹여나 내가 녀석을 불러오기라도 할까 봐 일부러 노예를 들이밀면서까지. 그가 며칠간 일부러 내게 언급하지 않았던 이름.
'그래, 피에르였지.'
내가 아벨의 몸에 빙의한 첫날, 실수를 저질렀던 그 하인의 이름이.
"그래, 그랬군."
필립의 이마에 식은땀이 배어나기 시작했다.
"도련님, 맹세컨대 피에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녀석이 아무리 어리숙하다 한들 그 정도로 생각이 없진 않습니다."
그는 필사적으로 변명을 주워섬겼다.
"그 후 디에고 영주님께서는 별 표정 변화 없이 만찬을 드셨습니다. 제게 따로 전하신 말씀도 없고요."
나는 천천히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내 입꼬리가 올라갈수록 필립의 이마엔 더욱 많은 땀이 맺혔다.
"그래?"
그 녀석을 다시 불러와 매질할 생각에 떠오른 미소는 아니었다. 그저 모든 것이 순리대로 흘러감에, 미소를 감출 수 없을 뿐이었다.
'역시 녀석이 맞았군.'
내 생활을 디에고에게 밀고하던 놈이.
원작에서 디에고는 성에 돌아올 때마다 기묘한 느낌을 받곤 했다. 마치 모든 이들이 무언가에 짓눌려 있는 듯한, 어둡고 습한 분위기를 감지했던 것이다.
그는 하인 하나를 시켜 아벨의 생활을 몰래 관찰하여 제게 전달하도록 했다.
하지만 그가 성으로 다시 돌아왔을 땐, 그 하인이 짐을 싸서 고향에 내려갔다는 소식만이 남아 있었다.
'그게 바로 오늘이었던가.'
이상함을 느낀 디에고는 집요하게 주변을 추궁했다. 그리고 아벨이 그 하인을 죽을 지경에 이르기까지 매질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분노한 그는 아벨에게 과도한 손찌검을 하고 그 결과, 아벨과 그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
그리고 사흘 후, 오베스트 영지에 레퀴엠이 강림한다. 아들이 아버지의 목을 베는, 비극적인 결말의 시작이었다.
'뭐, 앞으로 일어나지 않을 일이긴 하지만.'
나는 배부른 미소를 지으며 의자에 몸을 느슨히 기댔다.
'그 밀고자가 하인 중에 있을 거라곤 생각했는데.'
원작에서 디에고가 아벨을 감시할 인력을 성에 두고 있다는 복선은 종종 등장했다. 하지만 정작 그게 누구인지, 그리고 어느 시점에 깨닫는지는 정확히 나오지 않았다.
'그걸 한 방에 맞출 줄이야.'
자칫 일을 그르칠 수 있는 상황까지 잘 넘겼다. 디에고의 감시가 심해지면, 아벨의 행동에 제약이 걸리게 되니까.
정말 일이 술술 풀리는군. 유쾌한 기분에 웃음이 치밀었다.
"크큭."
음산하게 새어 나오는 웃음소리에, 필립의 눈이 지진을 일으켰다.
"도, 도련님...."
나는 그를 힐끔 보곤 냉소를 머금었다.
'피에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거라고?'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군. 녀석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지금쯤 내가 디에고에게 불려가 있었겠지.
'이득을 많이 봤어.'
이제 디에고의 세작이 누구인지 알았으니, 효율적으로 그의 눈과 귀를 막을 수 있게 되었다.
'자, 그럼 다음은 어떻게 할까.'
나는 미소를 유지한 채 앞으로의 계획을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