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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 - 4

"알면 어쩔 건데?"

녀석을 향해 보란 듯이 비웃음을 날렸다. 그리고 나머지 쇠사슬까지 붙잡으려 팔을 뻗었다.

그때, 갑자기 블랙스타의 움직임이 잠잠해졌다.

"음?"

잠시 의아한 신음을 흘렸다.

'이 정도로 포기할 녀석이 아닌데?'

내 예상은 그대로 적중했다.

다음 순간 블랙스타의 무릎이 살짝 굽혀진 것이다.

'...이 자식, 설마?'

즉시 녀석의 의도를 깨달았다.

아니나 다를까, 녀석이 정면의 벽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몸을 벽에 들이박아 나를 떨어뜨리려는 것이다.

"으아악!"

청년이 다시 눈을 가리며 비명을 질렀다.

"어림없어!"

그 찰나에 마지막 쇠사슬을 잡아채는 데 성공했다.

까드득!

쇠사슬이 거세게 마찰하는 소리와 함께,

"푸륵!"

블랙스타의 몸이 멈추었다. 하지만 녀석은 포기하지 않았다.

녀석의 금빛 눈동자가, 용광로에서 녹아 지글지글 불타는 용암처럼 달아올랐다.

쇠사슬 끝에서 반대로 당기는 힘이 강해졌다.

끼긱, 끼기긱.

쇠사슬이 조금씩 손을 빠져나가 블랙스타 쪽으로 밀려가려 했다.

블랙스타가 나와 힘겨루기를 시작한 것이다.

"흥."

나는 입가를 비틀어 웃었다.

손끝에 힘을 주고 턱을 당겨 악다물었다. 양팔의 근육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르고, 억세게 그러쥔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질렸다.

끼기기긱.

쇠사슬이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며 내게 끌려왔다.

"푸, 르륵...."

블랙스타의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쇠사슬에 당겨지는 부위가 꽤 고통스러울 텐데도, 녀석은 포기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독한 녀석이군."

녀석은 일평생 인간을 제 위에 태워본 적 없을 것이다.

자신을 어두운 철창에 가둬두고 죽지 않을 만큼만 먹이를 주던 인간.

그 증오의 대상이 제 위에 올라탔다는 사실이 녀석을 독하게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 독함을 내 앞에서 내세우는 건 의미가 없었다.

알다시피, 독하다는 것은 상대적인 것이니까.

"포기하는 게 좋을걸."

낮은 웃음소리를 흘리고는, 최후의 수단을 동원했다.

"...."

눈을 감고 내면에 집중했다.

공허, 레퀴엠의 기운. 디에고가 치를 떨며 질색하던 바로 그것.

그리고, 그가 내 팔을 부러뜨리기 직전 뿜어냈던 살기.

둘 사이엔 극명한 차이가 있었지만, 동시에 본질적인 공통점이 있었다.

'절대영역과 살기를 퍼뜨리는 것은 달라.'

절대영역은 기감(氣感)을 실처럼 가늘고 길게 뽑아내어 펼치는 것이다. 상대방이 느낄 수 없는, 오로지 나만 인지할 수 없는 특별한 것.

하지만 디에고가 뿜어낸 살기는 뭔가 희뿌옇다. 손에 잡힐 듯하지만, 한편으론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이건... 그래, 안개. 안개처럼.'

서서히 상대방의 발등을 적시고, 발목을 타고 기어올라 어느새 호흡을 가빠지게 만드는 안개.

본능적으로 혹은 이미 알고 있던 듯이, 새카만 기운이 내 몸에서 발산되기 시작했다.

"푸...륵."

순간 블랙스타의 움직임이 멎었다. 팽팽하게 당겨지던 쇠사슬 끝이 느슨해졌다.

이거구나.

확신을 얻은 나는 더욱 그 느낌에 집중했다. 안개처럼 옅고, 얇게, 몸에서 뿜어낸다는 느낌을 더욱 더했다.

"푸르륵...."

분노에 가득 차 있던 난폭한 울음소리에서 점차 힘이 빠져나갔다.

더, 더. 완전히 굴복할 때까지.

기운을 더욱 진득하게, 무겁게, 촘촘하게 뽑아내도록 노력했다.

마치 장막처럼 펼쳐지도록, 기감이 예민한 이라면 감히 그것을 뚫고 나올 시도조차 할 수 없도록.

'디에고처럼.'

내가 목표로 삼는 것, 되고자 하는 바를 그렸다. 나의 모습 위에 그를 덧씌웠다.

그렇게 손끝으론 쇠사슬을 단단히 옭아매고, 뿜어내는 살기를 더욱 날카롭고 예리하게 갈아냈다.

그리고 마침내,

"...끼잉."

블랙스타의 입가에서 항복의 울음소리가 흘러 나왔다.

철그렁, 툭.

녀석이 반항을 멈추자 느슨해진 쇠사슬이 늘어졌다.

"끼이잉."

블랙스타가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퍽 온순해진 태도는 내게 복종하기로 결심했단 증거였다.

상위 몬스터인 자신조차 견뎌낼 수 없는 거대한 압박감을 뿜어내는 인간에게.

"그래야지."

나는 입매를 끌어올려 웃었다.

블랙스타가 온전히 내 손에 들어왔음에 만족하며.

❖ ❖ ❖

"푸하!"

새벽의 공기는 차고, 밤새 두레박에 담겨 있던 물은 그보다 더욱 시렸다.

"으으으."

멜리나는 두레박에 손을 집어 넣으며 이를 딱딱 부딪혔다.

"이제 조금 있으면 겨울이겠네."

그때 이렇게 세수를 하다간 손과 얼굴이 꽁꽁 얼고 말겠지.

그렇게 생각하던 그녀는 두레박에 비친 제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끄응."

본디 멜리나는 물, 혹은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보며 슬며시 미소짓곤 했다.

제가 생각해도 이 영지에서 본인만한 미색은 보기 드물었다. 대장간의 벽에서 묻어난 숯검댕에도 불구하고, 멜리나의 청초한 미모는 빛이 바래지 않았다.

"하아아."

하지만 며칠 전의 일을 겪은 후론, 멜리나는 제 얼굴을 볼 때마다 미소는커녕 짜증스러운 한숨을 내쉬곤 했다.

'네 얼굴도 내 취향이 아니고.'

옅은 웃음소리와 함께 뱉어진 한 마디. 아벨이 던진 그 한마디가 두고두고 뇌리에 남아 그녀를 괴롭혔다.

멜리나가 부루퉁한 얼굴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나 정도면 괜찮은 편 아닌가?"

그녀는 물에 젖은 손으로 뺨을 매만졌다. 앳된 뺨은 매끄러웠고 고운 이목구비에 싱그러움이 가득했다.

"남자애들이 다 나보고 예쁘다고 그랬는데."

실제로 마을의 남자애들은 대부분 한 번씩은 멜리나에게 고백했다. 다들 멜리나의 흉악한 술주정에 겁을 먹고 도망가긴 했지만.

"멜리나! 아직이니?"

한참 두레박 속을 들여다보던 멜리나의 귓가에 어머니 알레시아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땅땅!

그 뒤로 강하게 모루를 두드리는 소리가 따라왔다.

요근래 알레시아는 국경에 자재를 납품하기로 해서 통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바쁜 와중에도 그녀의 낯엔 미소가 감돌았으며, 혈색 좋은 뺨은 생기로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멜리나는 어머니의 그런 모습이 퍽 보기 좋았다.

"금방 가요!"

멜리나가 힘차게 대답한 뒤 어푸어푸, 세수를 했다.

"으으, 손 시려."

얼굴을 부르르 떨며 손으로 더듬더듬 옆에 둔 수건을 찾았다.

"어디 갔지?"

라고 중얼거린 순간,

"옛다."

낯설지 않은 목소리와 함께 손에 턱, 수건이 얹혔다.

"엄마야!"

멜리나는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팔짱을 낀 채 서 있는 아벨이 눈에 들어왔다.

"나 엄마 아닌데."

아벨이 뚱한 표정으로 툭 내뱉었다. 멜리나는 너무 놀라 수건을 움켜쥔 채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아, 그. 어...."

뭐라고 대꾸해야 하지?

멜리나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갑작스레 마주친 것도 놀라운데, 저런 말을 던져올 줄은 몰랐다.

그러다 아벨의 빤한 시선을 느끼곤 겨우 정신을 추슬렀다.

"아, 안녕하세요. 도련님."

들고 있던 수건을 뒤로 숨기며 고개를 숙였다. 얼굴을 타고 흐른 물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아."

나 세수하고 있었지.

부끄러운 모습을 보인 것 같아 얼굴에 열이 올랐다.

멜리나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사이, 아벨의 시선이 빨개진 그녀의 귀 끝을 스쳤다.

"씻는다고 수박이 호박 되냐."

"네?"

멜리나는 기가 막혀서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러곤 저를 보며 픽, 흘러내리는 아벨의 한 줄기 미소를 마주했다.

"뭐, 저번보단 낫네."

그가 한 마디 흘리고는 뒤돌아섰다.

"알레시아 안에 있지?"

아벨은 멜리나의 대답을 듣는 둥 마는 둥 성큼성큼 걸어 대장간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

멜리나는 잠시 쿵쿵대는 심장을 억누르느라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다 어느새 제 얼굴의 열기로 인해, 세숫물이 바짝 말라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

멜리나의 얼굴이 벌겋게 변했다. 술이라곤 한 잔도 입에 대지 않았는데도.

"으으, 진짜."

어째서 아벨에게는 자꾸 이렇게 휘둘리게 되는지. 단지 영주님의 아들이라는 사실, 그 외의 이유가 있는 것 같아 창피했다.

"내가 왜 이러지?"

멜리나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대장간으로 종종걸음했다.

❖ ❖ ❖

"호오."

나는 알레시아의 대장간에 들어서며 휘파람을 불었다.

"누구...."

막 고개를 돌리던 알레시아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아, 아벨 도련님?"

그녀가 모루를 두드리던 손을 멈추고 황급히 일어섰다.

"도련님을 뵙습니다."

"그래, 그래."

나는 건성으로 그녀의 인사를 받았다. 그리고 흥미로운 눈길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알레시아의 대장간은 저번과는 몰라보게 달라진 뒤였다. 쉴새없이 불타오르는 화로는 물론이고, 그 주변엔 그녀가 만들어낸 온갖 물건들로 가득했다.

"흐음."

내 눈길은 특히 그 물건들에 오래 머물렀다.

"저, 도련님."

그런 나를 보고 알레시아가 우려 섞인 목소리를 내었다.

"여긴 무슨 일이신지요?"

"내가 오면 안 되는 곳을 왔나?"

"...그건 아닙니다만."

아마 저번 일 이후로 내가 다시 찾아올 일은 없다고 생각했겠지. 아니, 정확히는 나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을 터였다.

요란하게 흔들리는 알레시아의 눈동자를 보니 확실했다. 그녀의 눈엔 내가 왜 다시 찾아왔는지에 대한 불안함으로 가득했다.

"혹시 저번 물품에 무슨 문제라도 있었는지요?"

"그랬으면,"

나는 픽 웃음을 흘렸다.

"네가 지금까지 살아있을 수 없었겠지."

레퀴엠에 지배당한 내가 온 영지를 휩쓸어 버렸을 테니까.

"...!"

알레시아의 낯이 파랗게 질렸다.

뒷말을 듣지 못한 그녀는 분노한 내 손에 제 목이 달아났으리라 착각했을 것이다.

"뭐, 아무튼."

나는 그녀에게 다가서며 턱짓으로 주변의 물품들을 가리켰다.

"그 후론 일이 꽤 잘 되는 모양이네."

"...예, 그렇습니다."

"혹시 그 후에도 다시 녹색 빛이 번쩍인 적이 있나?"

내가 새롭게 꺼내 든 화제에 알레시아의 얼굴이 묘해졌다.

"아, 예. 종종 있었습니다."

"이 중에 어떤 거지?"

"아... 그게."

알레시아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다 파괴해버렸는데요."

"...뭐라고?"

내 눈빛이 사납게 번득였다. 겁을 먹은 알레시아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쩐지 불길한 느낌이 들어서.... 혹시 귀신이 들린 걸지도 모르잖습니까."

아니, 귀신은 무슨 놈의 귀신이야?

나는 답답한 마음에 속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젠장.'

급한 마음에 자세히 안 알려줬더니 이런 일이 벌어져 버렸다. 확실히 정황을 모르는 그녀 입장에선 그리 느껴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걸 써보면 불길한 게 아니란 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나는 인상을 찌푸린 채 물었다.

"어떤 물건이었지? 기억나는 대로 말해 봐."

"음...."

알레시아가 턱을 짚고는 생각에 잠겼다.

"낫 한 자루, 그리고 도끼 한 자루였습니다."

"으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물품에 수호자의 힘이 깃들었다면, 그것을 느끼기 어려울 만했다.

'낫과 도끼는 상대를 해치기 위한 물건이니까.'

물론 알레시아의 경우엔 평범하게 농부들에게 주려고 만들었겠지만 말이다.

아마 그녀가 그때 한 생각은....

'그들의 번영과 안녕을 빌었겠지.'

수호자의 힘은 그렇다.

만드는 이의 강렬한 염원, 의지 같은 것이 발현되는 것이다.

Chapter6. 안심한 때 등을 친다. (4)

지금까지는 자신의 힘을 모르기에 이렇게 불현듯이 발현되었겠지만.

'알려준다면 달라지겠지.'

하지만 그러기에 앞서, 먼저 이야기해볼 것들이 있었다.

나는 품에 넣어 왔던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그것을 탁자 위에 올리고, 입구를 동여맨 매듭을 느슨하게 풀었다.

"...이게, 다 뭡니까?"

자루 속을 확인한 알레시아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보면 모르나?"

느슨하게 풀린 입구에서 흘러나온 광석들이 밝은 빛을 뿜어냈다.

"광석이잖습니까."

"그래."

나는 자루를 한번 툭 건드렸다.

입구가 더 벌어지면서 속에 담긴 광석들이 바깥으로 쏟아졌다.

"이것으로 반지를 만들었으면 하는데."

"지금, 그러니까."

알레시아의 황망한 눈길이 광석을 쓸었다.

"이걸로 반지를 만들라고요?"

"그래, 어렵나?"

"하지만 이건...."

알레시아가 광석 중 하나를 집어들어 자세히 살피곤 고개를 저었다.

"설마 이 광석을 반지 형태로 가공하라는 말씀은 아니시겠지요?"

"물론 아니지."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태론 반지에 넣을 수 없습니다. 세공을 거치기 전엔 안돼요."

그 순간 등 뒤로 가까워지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느른한 웃음을 베어 물며 말했다.

"그건 나도 알아. 그러니까 세공을 하고 만들면 되잖아."

알레시아의 눈썹이 당혹으로 일그러졌다.

"도련님. 저는 쇠를 두드려 물품을 만들 줄만 알지, 세공까지는 할 줄 모르는...."

"멜리나."

갑자기 불려진 제 이름에,

"네?"

막 대장간에 들어서던 멜리나가 새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몸을 뒤로 돌려 멜리나를 응시했다. 안 그래도 커다란 눈을 더 크게 뜬 채 끔벅거리고 있는 그녀가 보였다.

"네가 세공해."

"네에?"

"일단 에메랄드 컷까지 할수 있도록 연습해. 최대한 곡률을 일정하게 유지하도록 노력해 봐."

나는 느릿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기한은 약 3주. 그쯤이면 충분하겠지. 어떤 광석을 받더라도 세공할 수 있는 상태여야만 해."

말을 마친 뒤 손가락으로 탁자 위에 굴러다니는 광석 한 개를 툭 쳤다.

"연습은 이 광석들로 하고."

대장간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연한 얼굴의 알레시아, 그리고 당황과 기대가 반반 섞인 멜리나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아벨 도련님."

먼저 입을 연 것은 알레시아였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제가 세공 면에서는 문외한이지만, 지금 말씀하신 것들이 굉장히 어렵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녀의 시선이 바짝 얼어붙어 있는 멜리나를 향했다.

"그런데 한 번도 보석 세공을 해본 적 없는 아이에게 이를 맡기시다니요. 이건 너무...."

"너무, 뭐?"

나는 별 감흥 없는 목소리로 반문했다.

"...너무, 하신 처사입니다."

알레시아가 이를 악다물며 시선을 치켜들었다.

"저번 일은,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그 건틀릿으로 만족하신 것 아니었습니까?"

탁자 아래로 보이는 알레시아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낯엔 감출 수 없는 두려움이 감돌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맹수 앞에서 제 새끼를 감싸는 어미 사슴처럼 용기를 끌어모았다.

"그러니 부디, 명을 거두어 주십시오."

알레시아가 그렇게 있는 용기 없는 용기를 전부 모으고 있을 때,

"흐음."

나는 태평한 얼굴로 손톱을 살피고 있었다. 대놓고 딴청을 부린 것이다.

"할 말은 다 했나?"

손을 내리고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물론, 내 낯은 그녀의 절절한 호소에도 전혀 감화가 없었다.

"...."

알레시아는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얼굴이 서서히 바닥을 향했다.

'쯧쯧.'

못마땅한 심정에 혀를 찼다.

저 좋은 일을 해주려고 그러는데 말이야. 한낱 평민이 내 깊은 뜻을 어찌 알겠어.

'별 수 없지.'

숨을 길게 뱉은 뒤 입을 열었다.

"알려줄 게 세 가지 있는데."

몹시 번거롭지만 미래를 위해 한 번만 참기로 했다.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간 저번처럼 아까운 물품을 버리게 될 테니 말이다.

"딱 한 번만 말할 테니 귀 파고 잘 들어."

마지못해 선심을 쓴다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첫째, 네가 딸에 대해 모르고 있는 것이 한 가지 있다."

"...예?"

의외의 한 마디에, 알레시아는 숙였던 얼굴을 들어 올렸다.

나는 멜리나 쪽을 향해 턱짓했다.

"멜리나는 세공을 할 줄 알아."

"...예에?"

알레시아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녀가 확인하듯 얼굴을 돌리자, 그 자리에 석고상처럼 굳어버린 멜리나가 보였다.

"멜리나, 그게 정말이니?"

"저기, 그게."

멜리나는 치마폭을 꾹 움켜쥐었다. 무언가 감추고 싶은 게 있을 때 곧잘하는 행동이었다.

"그러니까, 엄마. 저는,"

멜리나가 더듬거리자, 알레시아가 눈썹을 곤두세우며 매섭게 그녀를 몰아붙였다.

"얼른 말해! 사실이야?"

멜리나의 치마가 마구잡이로 구겨졌다. 멜리나는 치마를 꾹 움켜쥔 채 어깨를 떨었다.

"멜리나, 어서!"

화살처럼 쏘아지는 채근에,

"...네, 맞아요."

마침내 멜리나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인정했다. 알레시아가 기가 막힌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맙소사, 언제부터?"

"좀, 됐어요."

"어떻게 하게 됐는데?"

"간단히 검날 표면을 다듬거나... 크로스 가드의 균형이 안 맞으면 맞추는 정도요."

"아니 너는, 그걸 왜."

알레시아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더니 후, 한숨을 뱉었다.

잠시간 팽팽한 침묵이 흘렀다. 그것을 깨뜨린 것은,

"...이러실 줄 알았어요."

물기 어린 멜리나의 한 마디였다.

"뭐?"

알레시아가 이마를 짚었던 손을 뗐다. 그녀의 눈동자에 코를 훌쩍이는 멜리나가 들어왔다.

"엄마가 이럴 줄 알았다고요."

"...."

"제가 가업을 잇지 않길 원하시잖아요."

알레시아는 숨이 탁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내가 딸에게까지 이런 삶을 살라고 하겠니?"

그녀가 제 팔뚝을 확 들어 올렸다. 화상 자국과 흉터로 가득한 팔을.

"이거 보렴, 멜리나. 이게 대장장이의 팔이다. 직업인으로서는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글쎄."

알레시아의 입가에 짙은 회한이 스쳤다.

"여자로선 아니지."

"엄마!"

"그래서, 네가 이 일에 관심을 갖지 않길 바랐다."

"그럼 저번에는 어째서!"

멜리나가 눈물을 글썽이며 외쳤다.

"저번에, 그러니까 도련님의 건틀릿을 만들 때. 제가 도와줘서 고맙다고 하셨잖아요!"

"...."

"전 대장간에서 일하고 싶어요! 계속해서 어머니를 돕고 싶다고요!"

멜리나의 울먹임을, 알레시아는 단호한 목소리로 물리쳤다.

"돕는 것 정도는, 필요한 도구를 가져다주는 그런 허드렛일 정도는 괜찮아. 하지만 이 일을 업으로 삼겠다는 건 다른 문제야."

"그건,"

"이쪽 계통 일은 꿈도 꾸지 말아라. 난 그거 용납 못 한다."

알레시아가 멜리나를 강하게 노려보았다.

"세공도 마찬가지야. 결국은 쇠를 다루는 일이지. 절대 안 돼."

"엄마, 전 그래도-"

"멜리나."

"...."

멜리나는 말문이 막힌 듯 입술만 달싹였다. 하고 싶은 말이 몹시 많아 보였지만, 알레시아의 엄격한 눈빛이 그녀의 입술을 콱 조여버렸다.

"으윽...."

기어이, 멜리나가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서러움과 속상함이 가득한 얼굴로.

"엄마, 나 정말 하고 싶어요."

"...."

"뜨거운 쇠를 두드리는 게 아니잖아요. 그냥 다듬는 것 뿐이에요. 그런데 그게 정말 재밌어요. 그 섬세한 작업이 정말 즐겁다고요."

알레시아의 눈이 순간 거세게 흔들렸다.

더듬더듬 의견을 말하는 멜리나의 모습이, 대장장이 일을 할 때의 자신과 겹쳐 보여서일 것이다.

그녀도 쇠를 두드릴 때 재밌고 즐거웠다. 하지만 그것만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알레시아는 애써 눈가에 힘을 주었다.

"안 된다고 말했어."

"하지만 엄...!"

"멜리나!"

결국 알레시아의 언성이 높아졌다. 그녀의 고함이 쩌렁쩌렁하게 대장간 안을 울렸다.

그리고 그쯤에서,

"거기까지."

나는 모녀의 팽팽한 말싸움을 중단시켰다.

"싸움은 나중에 나 없을 때 해."

두 모녀는 그제야 내 존재를 깨닫고 꼬리를 내렸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나는 지루하다는 표정을 지우지 않은 채 계속 말했다.

"둘째, 알레시아가 물건을 만들 때 종종 나타나던 초록빛의 정체."

알레시아가 흠칫 몸을 일으켜 세웠다.

내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올 줄은 몰랐던 눈치였다. 특히 그것이 자신도 수상쩍게 생각하던 기이한 힘이라면.

나는 그녀를 지긋이 바라보며 말했다.

"그거, 수호자의 힘이다."

"...!"

알레시아가 입을 쩍 벌렸다가, 황급히 제 손으로 가렸다.

"맙소사."

가려진 입 사이에서 앓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수호자의 힘?"

상황을 모르는 멜리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빨개진 눈가가 꼭 작은 산토끼 같았다.

'귀엽군.'

나는 멜리나에게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 알레시아에게 물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알고 있겠지?"

"저, 그. 들어본 적은 있습니다만...."

"그래. 대장장이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지."

알레시아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더듬거렸다.

"제가, 제가 수호자의 손이라고요...?"

"그래."

나는 짧게 수긍한 뒤 덧붙였다.

"쓸데없는 의심은 하지 마라. 이미 시험해 봤으니까."

"혹시 저번에... 아, 그 건틀릿이? 그런데 그건,"

무의식적으로 말을 뱉었던 알레시아는, 나의 싸늘한 시선에 다시 입을 다물었다.

"...아니, 아닙니다."

그 건틀릿의 용도를 궁금해하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나는 그녀의 현명한 행동에 만족하며 말했다.

"핵심은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다. 그것이 수호자의 힘을 발현하게 하지."

"아."

알레시아가 비로소 깨달음을 얻은 듯 이마를 탁 때렸다. 의혹과 불신으로 가득하던 눈동자에 환희가 번졌다.

"그래서, 그래서였군요."

자신이 그 힘을 발현시켰을 때를 찬찬히 떠올려 보곤, 내 말이 진실에 닿아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정말,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알레시아가 고개를 옆으로 몇 번 휘휘 젓고는 물었다.

"그런데 도련님께서는 그걸 어떻게 알고 계시는지요? 그 이야기는 대장장이들 사이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힘의 발현 조건까지 정확하게 알고 계시다니요."

호기심과 의혹으로 반짝이는 알레시아의 눈빛에, 나는 무심한 말투로 대꾸했다.

"내가 좀 똑똑하긴 하지."

"...."

알레시아가 순간 입술을 일그러뜨리려다가,

"셋째, 수호자의 힘은 왜 드물게 전승되는가."

내 한 마디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게...무슨 말씀이시죠?"

알레시아의 낯에 두려움이 와락 떠올랐다. 내가 뱉은 말의 무게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수호자의 손이 탄생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듣지 못했나 보군."

나는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어른처럼, 인자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모든 악한 것, 해로운 것으로부터 사용자를 보호해준다니. 이보다 달콤한 일이 어디 있을까?"

"...."

"제 손가락 하나를, 다른 이의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귀족들에게 말이야."

그제야 내 말의 뜻을 눈치챈 듯 알레시아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설마...."

Chapter6. 안심한 때 등을 친다. (5)

"수호자의 힘을 각성한 대장장이들은 모두 평온한 죽음을 맞이하지 못했다."

옛이야기를 들려주듯 단조롭고 무심한 어투로, 잔혹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각 나라의 권력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그 힘을 탐내었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것을 독점하려고 들었지."

"...."

"네가 그 힘을 발현했다는 것이 세상에 알려진다면, 글쎄."

내 입가가 비죽, 날카로운 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적어도 이 대장간에서 일하기 힘들 거라는 건 확실하군. 아마 평생 어딘가의 지하에 갇혀 물품만 제작하는 삶을 살게 될 거다."

알레시아의 얼굴이 탈색되듯 하얗게 변했다. 그녀가 뒤로 주춤 물러서자 멜리나가 뒤에서 등을 잡아주었다.

"엄마."

"아아, 멜리나."

서로를 감싸 안는 두 모녀를 보며 나는 픽 웃었다.

"그런데, 지금 그 사실을 아는 게 누구뿐이지?"

손가락을 들어 두 사람을 가리켰다.

"너, 그리고 네 딸."

다시 손가락을 돌려 나를 가리켰다.

"나밖에 없네?"

"아, 아벨 도련님."

알레시아가 바들바들 떨며 무릎을 꿇었다. 뜻밖에 마주한 진실이 감당하기 버거운 듯, 퍽 힘겨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

알레시아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멍하니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나는 그녀를 보며 비스듬한 미소를 흘렸다.

'정말 다루기 쉽군.'

아직 어떤 협박도 가하지 않았는데 벌써 절망에 잠겨 들다니. 한번 구렁텅이에 빠졌던 인간은 너무나 쉽게 다시 돌아가고 만다.

남이 알지 못하는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 그리고 그것을 적재적소에 사용하는 것.

이 간단한 전략이 너무나 쉽게 사람을 우위에 서게 했다.

정말, 싱거울 정도로.

'사실 수호자의 힘은 사용 범위가 제한되어 있단 말이지.'

일부러 그녀에게 말하지 않은 정보를 떠올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수호자의 힘은 물리적 타격엔 소용이 없다. 오직 마법적, 혹은 영적 기운에만 반응하여 사용자를 보호한다.

따라서 인간을 맨손으로 갈가리 찢어버리는 몬스터를 상대하는 데는 아무 소용이 없다.

즉 이 척박한 오베스트 영지를 다스리는 아벨 킨드리얼이 가져봤자 별 소용이 없는 힘이다.

'하지만 사계절의 검이 등장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레퀴엠을 손에 넣은 나에겐 그 어떤 것보다도 큰 쓸모를 발휘하는 힘이 된다. 게다가 이후 등장할 다른 검들을 상대하는 데도 요긴하게 쓰일 것이다.

'물론, 그 사실까지 말해줄 필요는 없겠지.'

나는 비죽이 치솟는 웃음을 내리눌렀다. 그리고 막 입을 떼려는 순간,

"...."

형형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멜리나를 발견했다. 그녀는 알레시아를 감싸 안듯 조금 앞으로 나선 상태였다.

"도련님."

멜리나의 나직한 음성이 대장간을 갈랐다.

"제가, 아니 저희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그녀의 한 마디는 이전과 비슷했지만, 속에 품은 뜻이 완전히 달랐다.

"이렇게 친절하게 설명해주시는 건, 원하는 게 있으시다는 거죠?"

나는 속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그사이 철이라도 들었나.'

대답 대신 입매를 끌어올려 멜리나의 질문에 긍정했다.

멜리나는 잠시 생각하더니 덧붙여 물었다.

"말씀하신 반지를, 어떻게든 만들어두면 될까요?"

그녀의 눈빛은, 무슨 일이든 하겠노라 대답하던 그때와 닮아 있었다.

무엇이 되었든 반드시 해내고야 말 눈빛. 오베스트의 영지의 하늘 같은, 시리고도 맑은 눈동자.

"이해가 빨라서 좋군."

웃음기 어린 말투로 멜리나를 칭찬했다. 그리고 본론을 꺼내 들었다.

"내 제안은 간단해."

탁자 위에 굴러다니는 광석을 하나 집어 들었다. 손가락을 움직여 멜리나를 가리켰다.

"멜리나가 세공한 보석을,"

그대로 손가락을 옆으로 틀어 알레시아에게 향했다.

"알레시아가 만든 반지에 넣어. 물론 그 반지엔 수호자의 힘이 깃들어 있어야 하고."

다시 광석을 탁자에 내려둔 뒤 팔짱을 끼었다.

"그렇게 만든 반지는, 오직 나에게만 제공해야 한다."

멍하니 듣고 있던 알레시아가 중얼거렸다.

"수호자의 힘을... 독점하고 싶으신 거군요."

"전 제국에 단 한 명밖에 없는 수호자의 힘을, 다른 이와 공유할 필요는 없으니까."

말을 마친 나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딸과 생이별을 하고 싶진 않을 테지? 만약 반지가 순조롭게 내 손에 들어온다면...."

알레시아가 두려움에 젖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혹시 모르지? 내가 수호자의 손이 탄생했다는 걸 잊을지도?"

"그, 도련님 말씀은 알겠습니다. 원하시는 반지를 반드시 만들어두겠습니다. 하지만...."

겨우 정신을 차린 듯 알레시아가 더듬더듬 말했다.

"...하지만, 그런 거라면 굳이 멜리나가 세공을 하지 않아도 되지 않습니까."

그 모습이, 아벨에게 가르침을 내리던 디에고의 모습과 문득 겹쳐 보였다.

넌 안 돼. 안 될 거야.

라고 단언하는 듯한 모습이.

왠지 모를 불쾌감에 눈썹 끝이 슬쩍 일그러졌다.

"그럼 나는, 왜 굳이 다른 사람을 찾아야 하지?"

저절로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튀어 나갔다.

"네?"

"솜씨 좋은 세공사가 여기 있는 데 말이야."

턱짓으로 멜리나를 가리켰다.

"멜리나에겐 자질과 재능이 충분해. 그걸 부모와 같은 길을 갈 수 없게 한다고 찍어 누르는 게 더 어리석은 일이지."

"...."

"두고 봐. 멜리나는 제국에서 제일가는 보석 세공 장인이 될 거다."

이는 마음에 없는 소리거나, 혹은 허풍이 아니었다.

'원작에서 그랬으니까.'

주인공 카인이 레퀴엠 정벌을 떠나기 전.

멜리나는 그에게 제 수줍은 마음을 고백한다. 카인은 답례품으로 작은 보석이 박힌 목걸이를 준다.

틈날 때마다 그것을 들여다보던 멜리나는 문득, 자신이 이와 같은 것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에 이른다.

'그게 멜리나 보석 상점의 시작이었지.'

그녀에게는 놀라운 재능이 있었고,무시무시한 속도로 보석 세공 기술을 익혔다.

거기서 정점은, 멜리나가 최초로 독자적인 커팅법을 개발했을 때였다.

소위 '멜리나 컷'으로 세공한 보석은 어마어마한 금액에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갔다.

멜리나와 알레시아가 돈방석에 올라앉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결국 그들은 그 돈으로 스스로를 지킬 수 있었다.

"...."

멜리나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언제 내게 당당히 맞섰냐는 듯 다시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그리곤 꾸물꾸물 움직여 알레시아의 뒤로 숨어버렸다.

'뭐지?'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제 편을 들어주어 좋아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반응이 시원찮군.

어깨를 으쓱하곤 복잡한 얼굴빛의 알레시아에게 말을 건넸다.

"당분간 힘의 사용은 자제하는 게 좋을 거야. 혹시나 이 대장간에서 시도 때도 없이 초록빛이 번쩍이더라, 이런 소문이 돌면 곤란할 테니까."

알레시아가 한숨을 삼키곤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제 힘이 어떤 조건에서 발현되는지 알았기 때문에, 그것을 조절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터였다.

"그리고, 완성된 반지는 당분간 가지고 있도록 해."

"성으로 보내지 않고요?"

"그래. 그냥 가지고 있어. 내가 부를 때까지."

"어...."

알레시아가 순간 멈칫했다.

"왜? 기한이 늘어나면 더 좋은 것 아닌가?"

"아니, 그렇긴 한데. 아무튼... 아닙니다. 알겠습니다."

"좋아."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뒤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대하고 있겠다."

한 마디 남긴 뒤 인사도 듣지 않고 대장간을 떠났다. 나에겐 다음으로 마무리해야 할 일들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 ❖ ❖

바람처럼 찾아들었던 아벨의 뒷모습이 순식간에 멀어졌다.

"...."

멜리나와 알레시아, 두 모녀는 잠시 말을 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왠지...."

침묵을 깬 것은 멜리나였다.

"도련님이, 이대로 어딘가 떠나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너도 그렇게 생각하니?"

알레시아가 작게 속삭였다. 그녀의 눈이 확연히 작아져 버린 아벨의 점을 쫓았다.

"왠지... 나도 그런 느낌이 드는구나."

그러면 잘된 일이지 뭐.

알레시아는 그리 중얼거리며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멜리나는 쉽사리 아벨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

잿빛 하늘 같은 그녀의 눈동자가 더욱 짙어졌다.

❖ ❖ ❖

늦은 새벽, 오베스트 성의 입구.

굳게 닫힌 정문 앞에 한 마리의 말이 멈추어 섰다.

푸르르릉.

"워, 워."

지친 말이 거친 소리를 내었다.

요나스는 푸르릉거리는 말의 콧잔등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진정해라, 진정해."

하지만 한참을 쉬지 않고 달려온 말은 쉽게 진정하지 못했다.

"쉬이, 착하지?"

요나스가 인내심을 가지고 한참을 다독이자 말은 곧 안정을 되찾았다.

"옳지, 잘했어."

요나스는 말을 다독이던 손을 떼어냈다. 그리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부스스, 엄청난 모래와 먼지가 손바닥에 묻어났다.

"이런."

그가 난감한 웃음을 흘리는 새,

"요나스 경."

집사 필립이 허겁지겁 달려 나왔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그의 눈엔 잠기 하나 없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미 언제쯤 도착하리란 기별을 받고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그가 서둘러 성문을 열었다.

요나스는 말에서 훌쩍 뛰어내린 뒤 고삐를 잡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군기가 바짝 든 말투로 딱딱하게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요나스 클라인라고 합니다."

"예, 이미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필립은 공손한 태도로 요나스를 맞아들였다.

"오시는 길에 수고가 많으셨지요?"

"아닙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

요나스의 겸양에 필립이 다 이해한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요나스는 필립의 뒤를 따라 걸었다.

성으로 진입하는 길 위엔 주변을 식별할만한 최소한의 불빛만이 밝혀져 있었다. 소란을 일으키지 않고 밤중의 손님을 맞이하기 위한 배려였다.

필립은 우선 마구간으로 그를 안내했다. 마구간 한쪽에 요나스의 말이 쉴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타고 오신 말은 이쪽에 두시면 됩니다. 마구간지기에게 일러 잘 돌보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따로 이르실 말이 있으신지요?"

요나스는 필립에게 고삐를 건네며 단단히 일렀다.

"저와 오랫동안 함께한 전우 같은 녀석입니다. 제가 돌아올 때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필립은 그 정도는 식은 죽 먹기라는 듯 사람 좋은 웃음을 보였다. 요나스는 시선을 돌리다가 옆에 있는 다른 말을 발견했다.

"이 말은...."

그 옆에는 아주 튼튼하고 늠름해 보이는 암갈색 말이 눈망울을 끔벅이고 있었다.

"예, 갈아타고 가실 말입니다."

필립이 믿음직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영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식량과 물품을 충분히 준비해두었습니다. 언제 출발하실 계획이십니까?"

"잠시 몇 시간 정도만 눈을 붙이고 출발할 예정입니다. 시간이 많지 않거든요."

"알겠습니다."

성 전체를 돌로 쌓아 올린 오베스트 성은 언제나 그렇듯이 고요했다. 요나스는 필립과 함께 걷다가 문득 생각난 듯이 물었다.

"아벨 도련님은요?"

"주무시고 계십니다. 혹시 뵙길 원하신다면...."

필립이 오묘한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아닙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요나스는 담담히 대꾸했다.

사실 그도 아벨의 안부가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어본 것은 아니었다.

Chapter6. 안심한 때 등을 친다. (6)

"도련님께는 제가 시간이 촉박해 서둘러 떠났노라 전해주십시오."

"예, 잘 알겠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 성에 방문하면 그 영지의 최고 책임자, 즉 아벨 킨드리얼에게 보고를 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요나스는 이미 디에고에게 들은 바가 있었다. 그래서 조용히 휴식만 취한 뒤 사라지는 것을 택하기로 했다

"여기 묵으시면 됩니다."

필립이 안내한 방은 깔끔하게 잘 정돈되어 있었다.

"식사는 어찌하시겠습니까?"

"아니, 됐습니다. 그냥 목욕만 하고 자려고 합니다."

"그러시군요. 그럼 식당에는 출발하시기 전 간단하게 요기할 것들을 준비하라고 일러두겠습니다."

요나스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순간 멈칫했다.

"설마 주방장이 아직 안 자고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영주님께서 요나스 경을 맞이하는 데 부족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에 요나스는 머쓱하면서도 뿌듯해졌다.

이번 일에 자원한 것은 디에고 영주님의 눈에 들고픈 마음이 컸다. 그 마음을 영주님이 알아줬다고 생각하자 무척 설렜다.

"무엇보다 요나스 경은 디에고 영주님의 대리인 자격으로 수도에 가십니다. 이보다 더 성대하게 대접해드리지 못하는 게 아쉬울 따름입니다."

거기에 필립이 그렇게 말하자 정말 영주 대리로써 간다는 사실이 실감났다.

"흠흠."

요나스는 헛기침을 해 머쓱한 기분을 물리쳤다.

"...알겠습니다, 그럼. 감사히 받도록 하겠습니다."

"예, 그럼 목욕은 어찌하시겠습니까? 시중을 붙여드릴까요?"

필립이 은근한 눈웃음을 보내자, 요나스는 단호한 태도로 손사래를 쳤다.

"혼자 하겠습니다."

"...그러시다면. 따뜻한 물은 이미 준비되어있습니다. 갈아입으실 옷은 여기 안쪽에...."

필립이 말을 멈춘 뒤 날카로운 눈초리로 요나스의 몸을 훑었다. 그가 턱을 쓰다듬곤 다시 말했다.

"생각보다 체격이 좋으셔서, 현재 준비한 옷으론 힘들 것 같군요.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굳이 그럴 필요까진...."

"아닙니다. 단 몇 시간이라 할지라도 요나스 경께 불편을 끼칠 수 없습니다."

절대 물러서지 않을 듯한 말투에, 요나스는 못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편히 씻고 계십시오."

필립이 종종걸음으로 방에서 사라졌다. 혼자 남은 요나스는 잠시 머리를 긁적이다가,

"아."

제 손끝에 두텁게 묻어난 흙을 발견했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곤 욕실 안으로 들어섰다.

"오호."

국경의 허름한 공용 욕실과는 수준이 달랐다. 무엇보다, 몸을 담글 수 있는 넓은 욕조가 있다는 것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요나스는 차근차근 옷을 벗고 품속 깊숙이 넣어 두었던 주머니를 꺼냈다.

주머니를 주물럭거리자, 단단한 감촉과 함께 도장의 형태가 느껴졌다.

"영주님의 인장."

이번 여행의 핵심이자 목적.

이 인장을 지닌 채 수도에 도착해, 디에고 영주의 대리인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것.

"절대 잃어버려선 안 돼."

요나스는 인장을 매만지며 다시금 다짐했다. 혹시나 물에 젖지 않도록 옷가지 위에 조심스레 올려놓고, 욕조를 향해 다가갔다.

욕조에 담긴 물에 몸을 집어넣자,

"으아아."

소리가 절로 나왔다.

노곤한 팔다리와 지친 근육들이 뜨거운 물에 사르르 풀어졌다.

요나스는 욕조 속에 몸을 푹 담근 채 눈을 감았다. 그렇게 몸을 이완시킨 지 얼마나 되었을까.

똑똑.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옷을 가져왔습니다."

문 너머로 집사 필립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십시오."

요나스가 소리 높여 외치자 문이 열렸다. 욕조와 문 사이에 나무 칸막이가 있어 필립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옷은 여기 두겠습니다."

두툼한 옷가지가 놓이는 소리가 들리고,

"입고 오신 옷은 가져가서 세탁하도록 할까요?"

부스럭거리며 옷을 챙기는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아, 고맙습니다."

무심코 대답했던 요나스는 급히 덧붙였다.

"잠깐."

"네?"

"옷 위의 주머니는 손대지 마십시오."

명령조의 강한 말투에도,

"알겠습니다."

필립은 별 의문 없이 곧바로 수긍했다. 그가 부스럭거리며 옷을 챙긴 뒤 문으로 다가섰다.

"혹시 필요한 게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불러주십시오. 방의 설렁줄을 당기시면 됩니다."

다시 문이 열리고, 뚜벅뚜벅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

잠시 멈추어 있던 요나스는 벌떡 일어서 칸막이 너머를 확인했다.

"아."

인장이 담긴 주머니는 손댄 자국 없이 새 옷 위에 잘 놓여 있었다.

"하긴, 그럴 리가 없지."

괜한 걱정을 했나 싶어 픽 헛웃음이 나왔다.

요나스는 여유로운 마음으로 몸을 마저 씻어냈다. 옷을 갈아입고 방으로 돌아오자, 아깐 느끼지 못했던 향이 느껴졌다.

"흐으음."

숨을 깊게 들이쉬자 은은하고 부드러운 향이 콧속을 가득 채웠다.

"향초인가."

침대맡에 놓인 초에서 나는 향기였다. 필립의 세심한 배려에 더욱 기분이 좋아졌다.

"지금 자면 한 네 시간 정도 잘 수 있으려나."

이런 융숭한 대접을 조금밖에 못 느끼고 떠나야 한다니.

요나스는 아쉬움을 느끼며 침대로 다가섰다. 푹신한 매트리스가 느껴지자 아쉬움이 두 배로 커졌다.

"일찍 출발해야 하니 어쩔 수 없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애써 마음을 달랬다.

어차피 이 일을 잘 마치고 돌아오면 이보다 더한 보상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뭐, 초소 근무할 땐 한 두 시간밖에 못 잘 때도 있었으니까."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정말이지 사치스럽기 짝이 없었다.

요나스는 흐뭇하게 웃으며 부드러운 이불을 목까지 끌어 올렸다.

"내일도 열심히 달려가야겠군."

힘든 일정을 기약하며 눈을 감았다.

❖ ❖ ❖

"요나스 경! 요나스 경!"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 요나스의 어깨를 쥐고 흔들었다.

"요나스 경! 일어나십시오!"

집사의 목소리였다.

"-!"

요나스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게 무슨...."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쩐지 눈앞이 뿌옇고 몸이 물에 젖은 것처럼 무거웠다.

"요나스 경."

침대 옆에서 필립이 황망한 얼굴로 서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죄송합니다."

필립은 고개를 한 번 숙인 뒤 빠르게 말을 이었다.

"곧 출발하셔야 할 분이 나타나질 않으셔서 실례를 무릅쓰고 방에 들어왔습니다."

"그렇다고 노크도 없이 방에 들어옵니까?"

가벼운 질책에 필립이 송구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했습니다. 상당히 여러 번이요. 그랬는데도 반응이 없으셔서...."

"내가요?"

요나스는 당혹스러움에 입을 살짝 벌렸다.

'노크 소릴 못 들었다고?'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원래 그는 잠이 얕은 편이었다. 경계 근무가 일상인 곳에서 지내다 보니 자연스레 그렇게 되었다.

거기에 남이 흔들어 깨울 정도로 깊이 잠들다니.

'뭔가 이상해.'

동시에 요나스는 필립이 제 눈치를 살살 살핀다는 것을 깨달았다.

...집사가 뭔가를 숨기고 있다.

"집사님."

그가 막 입을 뗀 순간,

"집사님! 집사님!"

하인 한 명이 헐레벌떡 방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그, 그게! 없어졌습니다!"

"뭐가 없어졌다는 건가?"

필립의 물음이 하인이 발을 동동 굴렀다.

"말이, 말이 없어졌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요나스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위압적인 풍채의 그가 다가오자 하인이 바짝 움츠러들었다.

"그, 그러니까... 기사님께서 타고 오신 말이 없어졌습니다."

"뭐라고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기사님이 갈아타고 가실 말도 사라졌습니다!"

요나스는 망치로 머리를 두들겨 맞은 느낌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그가 돌아서서 사나운 어조로 필립을 다그쳤다.

"분명 잘 돌보겠노라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아니 그게, 저는 분명히."

두 사람이 막 말다툼을 벌이려는 찰나였다.

"집사님, 집사님!"

누군가 또 방 안에 들이닥쳤다.

요나스는 입술을 씰룩이며 뒤쪽을 돌아보았다.

"집사님! 여기 계셨군요!"

콧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중년의 남성이었다. 요리사 특유의 흰옷을 입은 것으로 보아 주방에서 일하는 것 같았다.

'옷을 왜 저렇게 크게 입지?'

소매의 품이 남아 볼품없이 펄럭거리는 게 의아했다.

"헉, 헉."

중년의 남자가 무릎을 짚고 숨을 골랐다. 필립이 애써 태연한 얼굴을 유지하며 물었다.

"갑자기 무슨 일인가? 막스."

"큰일 났습니다!"

막스가 호흡을 가다듬곤 급히 말을 이었다.

"그게, 헉, 그게 어, 없어졌습니다!"

"아니, 또 뭐가 없어졌는데?"

"왜 그, 집사님이 부탁하신, 식량과 보급품, 있잖습니까!"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요나스는 벌컥 성을 내며 막스에게 다가섰다.

"아이고, 기사님. 진정하십쇼."

"지금 내가 진정하게 생겼습니까? 말도 없어졌지, 준비한 식량과 보급품까지 없어졌다고 하는데!"

요나스가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필립은 슬그머니 그 시선을 회피했고, 막스는 땀을 뻘뻘 흘리며 양손을 내저었다.

"아이고, 저는 오늘 새벽에 출발하신다길래 미리 준비해놨습니다. 근데 그게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걸 어떡합니까?"

"다른 하인들이 가져갔을 가능성은 없습니까?"

"무슨 큰일 날 말씀을. 저는 어제 주변에 단단히 일러 두었습니다요!"

"하아, 젠장."

막스는 기가 막혀서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정말이지 어이가 없었다. 이 중요한 일을 앞두고 이렇게 발목이 잡힐 줄은 몰랐다.

그는 부글거리는 속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물었다.

"다시 준비하는 데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너무 염려 마십시오, 요나스 경."

뜻밖에도 필립이 믿음직스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이럴 때를 대비해 여분의 말과 식량을 준비하도록 일러두었습니다."

"오오, 역시 집사님! 늘 준비성이 철저하시군요!"

옆에서 막스가 엄지를 추켜올렸다. 그러나 요나스는 거기 동조하여 기뻐할 틈이 없었다.

'이럴 때를 대비해, 라고?'

필립의 태도가 퍽 미심쩍었다. 마치 이런 일이 생길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한....

"집사님! 집사님!"

또 다른 하인이 숨을 헐떡이며 달려왔다.

'아니, 또?'

요나스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번엔 뭐가 사라졌다고 해도 그리 놀라지 않을 것 같았다.

필립이 피곤한 음성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냐?"

"아, 아벨 도련님께서."

하인이 턱까지 차오른 숨을 겨우 삼키고는 말했다.

"사라지셨습니다! 방이 텅 비어있는 상태입니다!"

필립이 미간을 짚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으니 다들 가보아라."

그가 하인들을 전부 내쫓았다.

"다시 식량과 보급품을 준비하도록 하게."

막스까지 내쫓고 나자, 필립이 지친 얼굴로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요나스 경. 전부 저의 불찰입니다."

요나스는 황당함을 감추지 않고 물었다.

"도련님이 이 시간에 일어나는 게 그리 놀랄 일입니까?"

"뭐 그게, 아벨 도련님이 좀 낙천적이셔서요."

필립은 아벨이 게으르다는 말을 고상하게 돌려 말했다.

"보통 느지막이 일어나서 늦은 아침을 드십니다. 이 시간에 일어나시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일단 알겠습니다. 근데 이럴 때를 대비해서라는 건 무슨 말입니까?"

필립이 올 것이 왔다는 듯 체념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허리를 깊이 숙였다.

"죄송합니다, 요나스 경.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요나스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대신이라니? 누굴 대신한단 말입니까?"

Chapter6. 안심한 때 등을 친다. (7)

"이 모든 일이 아벨 도련님의 소행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무슨?"

"본인이 영주 대리로 못 가는게 불쾌하신 게지요."

필립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요나스 경이 제때 출발하시지 못하도록 방해하시는 겁니다. 본인께 인사를 못 하면 출발이 더욱 지연될 테니까요."

"...."

"아까 말씀드렸듯이, 이런 일이 있을까 봐 미리 준비를 해두었습니다. 곧 출발하실 수 있을 겁니다."

요나스는 할 말이 없어서 필립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구제할 길 없는 망나니라더니, 이 정도였어?'

이런 짓을 태연히 저지르는 아벨 도련님이나, 그럴 줄 알고 미리 대비해놓는 집사나 모두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이러니까 영주님이 날 대신 대리로 보낸 거겠지.'

요나스는 비로소 디에고의 마음을 이해할 것 같았다.

만약 아벨을 대신 보냈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를....

"잠깐."

그 순간 요나스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요나스는 황급히 제 품 속을 뒤졌다. 안쪽에 고이 넣어둔 주머니를 꺼내 펼쳤다.

그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졌다.

"없어!"

"뭐, 뭐 말씀이십니까?"

급히 묻는 필립에게 대꾸해줄 정신도 없었다. 그저 제가 착각한 것이길 바라며 꾸러미 속을 다시 뒤져보는 수밖에.

하지만 몇 번이나 속을 헤집고, 아예 뒤집어 탈탈 털어봐도 그가 찾는 것은 나오지 않았다.

"...진짜, 없어."

디에고가 신신당부하며 맡긴 영주의 인장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인장이, 없어...."

요나스는 스르륵 침대에 주저앉고 말았다.

눈앞이 하얀 것 같기도, 까만 것 같기도 했다. 아니, 팽팽 도는 것만 같았다.

"인장이 없다고요? 설마 디에고 영주님의 그 인장 말입니까?"

필립이 옆에서 진땀을 흘렸다. 그의 시선이 요나스의 손에 붙들린 주머니를 향했다.

"어제 그 주머니로군요. 그건 분명 요나스 경이 잘...."

필립의 얼굴에서 일순 핏기가 가셨다. 무언가에 생각이 미쳐, 짐작이 가는 듯한 표정이었다.

"...설, 설마?"

요나스는 벌떡 일어나 그의 멱살을 붙잡았다.

"컥!"

필립의 얼굴이 벌게지는 걸 무시하고 으르렁거렸다.

"향초."

"크헉, 네?"

"향초에 무슨 짓을 했어? 당장 말해!"

이미 눈이 뒤집힌 그는 사용하던 경어까지 내던져버렸다. 필립이 컥컥대며 간신히 말을 뱉었다.

"그저, 숙면을 돕는, 향초라고, 들었습니다."

"웃기지 마!"

요나스가 거칠게 쏘아붙였다.

"겨우 그 정도 향초에 내가 이리 깊이 잠들리 없어! 애초에 저 주머니, 내 품에 넣고 잤다고!"

"푸, 품에요?"

"그래! 그걸 가져가는 데도 못 일어날 정도로 깊게 잠들다니, 그게 평범한 향초일리 없잖아!"

요나스의 다그침에, 필립이 시뻘게진 얼굴로 눈을 질끈 감았다.

"아, 아벨 도련님께서, 주신 향초입니다. 그분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습니다...."

요나스는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다가 손을 놓았다.

"크헉!"

겨우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필립이 쿨럭거렸다. 요나스는 필립을 노려보며 한 글자씩 씹어뱉었다.

"지금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고 있습니까?"

"...."

"아벨 도련님이 영주 대리인척 가고 있다는 거 아닙니까!"

그가 뜨끈뜨끈하게 달아오른 이마를 짚었다. 눈가부터 열이 치솟아 딱 돌아버리기 직전이었다.

"이 무슨 꼴입니까! 내가 영주님 얼굴을 어떻게 봅니까!"

"그건... 불가능합니다."

힘겹게 터져 나온 필립의 한 마디에, 요나스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뭐라고요?"

"아니, 그. 지금 말씀하신 건 불가능하단 뜻입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필립이 목을 움켜쥔 채 말을 이었다.

"도련님께서는 오른팔이 부러지셨습니다. 그러니 지금 말씀하신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는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도련님께서는 그저 고약한 장난을 치시려는 걸 겁니다."

"고약한, 장난?"

요나스는 제 귀를 의심하듯 눈을 깜박였다. 지금 저 집사가 미쳐서 아무 말이나 지껄이고 있는 듯했다.

"예, 장난이요."

하지만 필립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듯 또박또박 말했다.

"그분께는 이 모든 게 장난입니다. 저희가 이렇게 안절부절하는 모습을 보며 즐기고 계시겠지요. 아마 인장도 어딘가에 숨겨두셨을 겁니다."

"...하!"

너무 어처구니가 없으면 웃음이 나온다더니 딱 그짝이었다.

요나스는 먼 산을 바라보고 심호흡을 했다.

철없는 애송이 도련님의 장난질에 이렇게 놀아나야 한다니. 치솟는 열기로 가슴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그는 한결 거칠어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도련님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성안에 숨어계시거나, 아니면 영지 안일 것입니다."

"좋습니다."

요나스는 짓씹듯이 내뱉었다.

"일단 내가 탈 말, 그리고 식량을 다시 준비해주십시오."

"예."

"하인들을 샅샅이 풀어 도련님을 찾아내십시오. 인장을 찾으면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필립은 벌겋게 변한 목을 주무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멀리 가진 못하셨을 겁니다."

❖ ❖ ❖

"푸르르릉!"

우렁찬 울음소리와 함께 블랙스타가 기세 좋게 달려나갔다.

그저 마구잡이로 달려가는 듯하지만, 블랙스타의 움직임은 퍽 섬세한 구석이 있었다.

밟았을 때 몸이 흔들릴 것 같은 자갈을 피하고, 땅이 단단한 곳만을 골라 짚어 속력이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했다.

사위가 어둑했지만, 블랙스타는 지금이 마치 밝은 대낮인 것처럼 행동했다. 다른 동물의 몇 배에 달하는 우수한 시력 덕분이었다.

"푸릉! 푸릉!"

블랙스타가 연신 콧김을 뿜어대며 힘차게 다리를 움직였다. 탐스러운 갈기가 바람에 나부꼈다.

"자식, 신이 났군."

나는 히죽 웃으며 고삐를 단단히 붙잡았다. 그러다 왼손을 들어 블랙스타의 머리 뒤쪽을 한번 긁어주었다.

"히힝!"

블랙스타는 기분이 좋은지 퍽 귀여운 울음소리를 냈다. 그리고 더욱 속력을 내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래, 그래. 잘하고 있어."

다시 양손으로 고삐를 붙잡았다.

"녀석들, 잘 가고 있으려나?"

내가 말하는 녀석들이란 말을 뜻했다.

바로 요나스가 타고 왔던 말과 타고 갈 예정이었던 말 말이다. 그리고 몇 시간 전, 내가 끌고 나와 숲속에 풀어줘 버린 녀석들.

"뭐, 지금쯤 풀을 뜯어 먹으며 자유롭게 거닐고 있겠지."

재수 없으면 지나가던 몬스터에게 잡아먹혔을지도? 아니면, 왔던 길을 되짚어 돌아가 영지로 돌아갔을 수도 있고.

"뭐, 그땐 이미 늦어있겠지만."

키득키득 웃으며 고삐를 단단히 감아쥐었다.

"지금쯤이면 눈치챘으려나."

희끄무레한 빛이 비치기 시작하는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가을의 한가운데를 넘어가는 지금, 해가 뜨는 시각이 점점 늦어지고 있었다.

"아마 동틀 무렵 출발할 예정이었겠지."

지금쯤 필립이 부산스레 요나스를 깨우고 있을 터였다.

"대충 짐작은 한 것 같던데."

그간 필립은 내 꿍꿍이속을 파악하려고 애썼다. 내가 시키는 대로 향초를 준비하면서도, 제 딴에는 만약의 사태를 위해 몰래 움직이곤 했다.

그가 전전긍긍해하는 모습을 관찰하는 것은 퍽 재미있는 일이었다.

"단순히 요나스를 방해하려는 속셈인 줄 알았겠지만."

내 궁극적인 목표는 영주의 인장이었다. 그것을 강탈해 요나스 대신 수도에 가기 위해서였다.

"어딘가 숨어있을 나를 열심히 찾고 있겠군."

왜냐면 내 팔이 성하지 않다고 생각할 테니까. 말을 풀어주고, 물건을 숨기는 일 외엔 불가능하다고 여길 테니까.

하지만 내 양쪽 팔은 너무나 멀쩡했다.

그 흉포한 블랙스타를 길들이고, 녀석을 타고 이렇게 달려나갈 정도로 말이다.

"그럼, 어디 잘들 해 보라고."

나는 낄낄 웃어댔다. 필립과 요나스가 하고 있을 삽질을 생각하니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는 동안 풍경들이 빠르게 내 옆을 지나쳐갔다. 블랙스타는 오랜만에 달리는 게 신이 났는지 거침없이 속력을 냈다.

평범한 말을 탔을 땐 느끼기 어려운 속도감이었다. 그 탓에 몸이 위아래로 거칠게 흔들려 힘들긴 했다.

"나 참. 벤 영감은 이런 녀석을 군마로 어떻게 키우려 했던 건지."

이 녀석을 타고 다녔다간 금방 정강이뼈가 아작났을 것이다. 아무리 능력 좋은 말을 갖고 싶다지만 너무 무리수였다.

"애초에 교배가 가능하겠냐고."

평범한 말들은 블랙스타에게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한다. 겨우 다가가도 고간을 채이고 생식 기능이나 상실했겠지.

"어휴, 끔찍하군."

어깨를 부르르 떤 뒤 달리는데 집중했다. 어느 순간 서서히 동이 트고 사위가 밝아졌다.

"워, 워."

중간에 연못을 발견하곤 고삐를 잡아챘다.

"푸르릉!"

블랙스타는 속도를 줄이면서도 고개를 좌우로 휘저었다. 울음소리에 가벼운 앙탈이 섞였다.

"더 달리고 싶어서 그래?"

피식 웃고는 녀석을 마저 멈춰서게 했다.

"계속 달리려면 수분 보충을 잘해야지. 물 마시고 다시 달리자."

"푸릉."

블랙스타는 내 말을 알아들은 듯 순순히 연못가에 멈춰 섰다. 보면 볼수록 참 영특한 녀석이었다.

"엇차."

나는 블랙스타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녀석이 물을 마시도록 내버려 두고, 얼얼한 다리를 여기저기 풀어주었다.

"음, 그래도 이 정도면 할만한데?"

충분히 몸을 풀어준 뒤 짐가방에서 지도를 꺼내 들었다.

"여기가 어디쯤이려나?"

사람들은 장거리 여행을 할 때 보통 제국 수도로부터 동서남북으로 뻗어 나온 대로를 이용한다.

그것이 가장 빠르고 안전하게 영지와 영지 사이를 이동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수도로 가기 위해서는 동쪽으로 향하는 대로를 이용해야 했다.

하지만.

"음.... 이쯤이려나? 능선을 따라 쭉 달려왔으니."

내 손가락은 지도에서 남동쪽 산맥을 짚고 있었다. 그리고 산을 따라 쭉 훑어내렸다.

"이대로 내려가서... 그래, 여기로 가면 되겠군."

산맥 끝에 붙어있는 작은 영지를 짚었다. 서쪽 영지와 수도를 잇는 대로와는 퍽 떨어져 있는 장소였다.

"베저크."

이 경로로 이동한다면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마지막으로 지도를 꼼꼼하게 훑은 뒤 다시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히죽 웃었다.

"설령 요나스가 쫓아오더라도 잡힐 일은 없겠군."

필립과 요나스는 머지않아 내가 영지에서 완전히 사라졌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눈에 불을 켜고 나를 뒤쫓아 올 테지.

"동쪽으로 가는 길 위에서."

하지만 나는 애초에 그 길을 택하지 않았다. 오히려 남들이 가지 않는 길, 즉 남동쪽으로 빙 돌아서 나아갈 것이다.

"그래도 요나스보단 더 빨리 수도에 도착하겠지."

일단 요나스는 내 흔적을 샅샅이 찾아다니느라 이동이 더딜 것이다. 그에 비해 나는 말보다 훨씬 빠른 블랙스타를 타고 있으니 2배의 속도를 낼 수 있었다.

"안됐군."

그렇게 중얼거리는 내 입가로 유쾌한 미소가 번졌다. 요나스가 허탕을 치고 길길이 날뛰는 상상을 하자 기분이 좋아졌다.

"이게 다 네 덕분이다."

나는 블랙스타의 갈기를 정성껏 빗어 넘겨주었다.

"푸릉."

블랙스타가 내 손바닥에 콧잔등을 비벼대었다. 지금껏 쭉 달려온 것이 마음에 들었는지 제법 애교 섞인 태도였다.

Chapter6. 안심한 때 등을 친다. (8)

"자, 다시 가 볼까."

나는 다시 블랙스타의 몸 위로 올라탔다. 녀석의 탄탄한 몸뚱이가 다리 아래로 느껴지자 기묘한 고양감이 일었다.

"내가 이 녀석을 타고 있다니."

원작의 아벨이 끝내 얻지 못한, 바로 그 블랙스타를.

아벨이 목마장의 사람들을 학살하는 동안, 벤 영감은 목숨을 걸고 말들을 모두 풀어주었다.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벨은 혼비백산해서 달아나는 말들을 쫓아가 끝내 죽여버렸다.

하지만 단 한 마리.

"블랙스타."

이 녀석만큼은 죽이지 못했다.

녀석의 속도가 너무나 빨라 극도로 강화된 아벨의 다리 근력으로도 쫓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원작에서 블랙스타는 아벨을 비웃듯이 노려보고는, 그대로 전속력으로 달려 도망쳐버렸다.

[블랙스타의 새카만 궁둥이가 석양 속으로 사라졌다....]

가 녀석의 마지막 묘사였는데.

나는 소리 내어 웃은 뒤 고삐를 움켜쥐었다.

"자, 가자!"

"푸릉!"

블랙스타가 힘차게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블랙스타와 함께 숲길을 빠르게 가로질렀다.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렸다.

그러다 블랙스타가 헥헥대거나 못 견디게 내 허벅지가 아프면 잠시 멈춰서 쉬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길지 않았다. 오랜만에 자유를 맛본 블랙스타는 계속해서 달리기를 원했다.

그리고 나 또한, 녀석과 달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합이 맞아가는 게 느껴졌다.

허벅다리의 통증도 바람을 가르며 신나게 달리다 보면 잊을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쉬는 간격이 점점 멀어졌다. 그야말로 블랙스타와 한 몸이 되어 질풍처럼 달리기만 했다.

몇 시간 뒤.

"으으, 당분간 이것만 먹어야 한다니."

배낭에 들어있던 육포를 보고 울상을 지었다. 이게 얼마나 기능에만 충실한 음식인지는 이미 겪어본 바 있었다.

하지만 한 입 물어뜯자마자,

"...?"

나는 이마를 찌푸렸다.

"뭐야. 전에 나한테 준 거랑 다르잖아?"

그저 짭조름하고 딱딱하기만 했던 그때와는 달랐다.

육포마다 양념을 달리한 듯 다양한 맛이 느껴졌다. 게다가 고기의 결이 살아있어 훨씬 쫄깃하고 씹기 편했다.

설마 요나스 준다고 이 공을 들인 건가.

"...막스 이 새끼가?"

이런 걸 나 때 안 내놓고 지금 내놓다니.

눈에서 파지직 불꽃이 튀었다.

"나 덕분에 체중 감량도 하고 건강해졌으면서. 이거 완전 은혜를 모르는 새끼네?"

잠시 육포를 이글이글 노려보다가 결국 입에 털어 넣었다.

"...육포는 죄가 없지."

사실 내 명령으로 만들기 시작한 덕분에, 점점 맛을 개선하는 방법을 알게 된 것일 테니까.

"뭐, 그게 결국 내 손에 들어왔으니 잘된 건가."

육포를 질겅질겅 씹어 삼킨 뒤 다시 블랙스타에 올라탔다. 그 이후로는 쭉 쉬고, 달리고의 반복이었다.

따가운 가을 햇살, 서늘한 가을바람, 인적이 드문 숲의 향기. 그런 것들을 느끼면서.

계속 달리기만 하면 지루할 만도 하건만. 아쉽게도 내겐 그럴 틈이 없었다.

"...."

블랙스타를 모는 와중에 틈틈이 절대영역을 펼치는 연습을 했기 때문이다.

처음 레퀴엠을 손에 넣은 날부터 꾸준히 활용한 덕에, 절대영역을 펼치는 게 예전보다 훨씬 쉬웠다.

문제는, 지금은 달리는 블랙스타의 몸 위라는 것이다.

"움직이면서 하려니 좀 어렵군."

고정된 장소에서 펼치는 것과는 달랐다. 기준이 되는 좌표가 조금씩 바뀌는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내가 넘어서야 할 관문이었다.

나는 절대영역을 계속 펼친 채 블랙스타를 몰았다.

'더 가늘고 길게, 더 멀리, 더 오래.'

계속 이것을 염두에 놓고서.

점점 절대영역을 유지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범위가 넓어지며, 감지하는 정도가 더 정교해진다.

예를 들자면,

"다섯 마리인가."

절대영역 안에 잡히는 생물의 수.

이것은 예전에도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토끼나 다람쥐 같은데. 이 크기면 토끼가 맞겠어."

미약한 생명의 크기. 연약한 몸체와 가냘픈 호흡까지. 여러 가지 단서를 통해 어떤 존재인지까지 알 수 있게 되었다.

후다닥!

작은 동물들은 나와의 거리가 좁혀지자 황급히 달아났다. 내 기운을 느끼고 겁에 질리던 말들처럼.

블랙스타를 타고 무시무시한 속도로 질주하는 내게 접근하는 생물은 없었다.

하늘을 높이 나는 매도, 나무 위에서 쪼롱쪼롱 지저귀던 새도, 한가로이 낮잠을 자던 다람쥐도 모두 내게서 멀어지려 했다.

그렇게 달린 지 얼마나 되었을까.

"슬슬 밤이 되어가는군."

시선을 멀리 뻗어 저물어가는 해를 바라보았다.

점차 주변에 어둠이 내려앉고, 한낮의 활기로 가득하던 숲이 고요해지기 시작했다.

"거의 종일 달리기만 했네."

이제 요나스와 나의 거리는 좁힐 수 없을 만큼 벌어져 버렸을 것이다.

"내일부터는 좀 더 여유롭게 달려도 되겠어."

히죽 웃으며 속도를 조금 줄였다. 어쨌건 등 뒤에 추격자를 달고 달리는 게 좋지만은 않았다.

여전히 절대영역은 유지되고 있었다. 불과 몇 분도 유지하기 어렵던 것이 하루 만에 이토록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

이제 절대영역 안에 작은 동물들은 없었다. 대신, 다른 존재들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푸릉?"

블랙스타가 무언가를 감지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녀석의 황금빛 눈동자에 경계가 서렸다.

"그래, 너도 느껴지지?"

나는 피식 웃으며 더욱 속도를 줄였다.

사박.

보다 거대하고, 포악하며, 거칠기 짝이 없는 기운이 느껴진다.

놈들의 입가에선 진한 피냄새가 풍기고, 이빨 사이엔 갈가리 찢긴 다른 동물의 살점이 엉겨 있다.

"크르르."

듣는 이의 오금을 저리게 만드는 낮은 으르렁거림, 살기로 물든 채 번들거리는 붉은 눈동자.

몬스터들이 나를 향해 날카로운 이를 드러냈다.

"오호."

그들의 기척이 다가옴에도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아니, 두려움은커녕 희열이 느껴졌다.

내가 남동쪽 길을 택한 것은 단지 요나스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남동쪽 산맥은 온갖 몬스터들의 서식지로 유명하지."

그래서 사람들은 자살하고 싶을 때가 아니면 이 길을 이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겐 좋은 기회야."

직접 몬스터들의 살과 뼈를 가르며 강해질 기회.

적의 공격을 피하고 허점을 찾아 공격할 연습을 할 기회.

일대 다수의 난전에서 고지를 선점하는 법을 익힐 기회.

레퀴엠의 광포한 기운을 느끼고도 달아나지 않는 그들이, 내게 어떤 가르침을 줄 수 있을지 궁금했다.

"비록 디에고만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비슷하겠지."

그 또한 서쪽 국경 끝의 몬스터들을 상대하며 강해졌으니 말이다.

이 여정의 끝에 레퀴엠이 얼마나 많은 피를 머금게 될지. 또 나는 얼마나 성장하게 될지 기대가 되었다.

"좋아, 좋아. 어서들 오라고."

나는 히죽거리며 주머니에서 건틀릿을 꺼냈다. 그것을 손에 끼우는 동안, 블랙스타가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주변을 살폈다.

"푸르릉."

"그래, 점점 다가오고 있지?"

블랙스타는 조금도 겁먹은 눈치가 아니었다.

"푸릉, 푸릉!"

오히려 콧김을 더욱 강하게 뿜어내며 흥분했다. 적이 다가오면 곧바로 들이받을 듯이 용맹한 모습이었다.

나는 콧노래를 불렀다.

"역시, 이래야 내 새끼지!"

잘 훈련받은 군마는 몬스터를 보고도 달아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저 그 자리를 버티기만 하는 것과 몬스터를 공격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푸르릉!"

블랙스타가 호기로운 울음소리와 함께 발로 땅을 강하게 굴렀다. 지금 당장이라도 돌격할 준비가 된 것처럼.

"그래, 너도 기대되지?"

녀석의 적극적인 의사 표현에 나도 덩달아 신이 났다. 지금 당장이라도 땅을 박차고 달려가고 싶었다.

"좋았어."

나는 씩 웃으며 한쪽 팔을 옆으로 휘저었다.

촤랑!

경쾌하고도 유려한 소리와 함께 손끝에서 레퀴엠이 나타났다.

우우, 우웅.

레퀴엠이 즐겁게 울어대었다.

내가 자신을 꺼낼 때마다 좋은 일이 생겼다는 것을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크오오!]

몬스터의 울음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놈들이 땅을 박차고 달려오는 소리와 함께.

몬스터와 맞닥뜨릴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절대영역의 끝자락에 강렬한 기운이 불쑥 들어왔다.

"일단 세 놈이로군."

나는 가볍게 레퀴엠을 쥔 채 손목을 까닥거렸다.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그렇게 걱정되진 않았다.

"레퀴엠으로 찌르면 어차피 죽는 건 똑같은데 뭐."

인간이든 몬스터든 말이다.

목을 베는 것도, 심장을 꿰뚫는 것도 필요 없다. 그저 놈의 공격을 피하고, 허점을 찾아 찔러넣으면 그만.

그러니 내게 몬스터는 더 이상 미지의 생명체이자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저 인간보다 몸집이 더 크고, 빠르며, 인간과 형태가 다른, "사냥감일 뿐이지."

내 분홍빛 입술에 그보다 더 붉은 미소가 맺혔다. 그것은 앞으로 펼쳐질 핏빛 참상과도 닮아 있었다.

두근, 두근.

거칠게 박동하는 심장 소리가 나의 것인지, 혹은 레퀴엠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이 싸움의 끝에서, 승자는 나일 것이라는 사실을.

"크오오오!"

첫 번째 몬스터, 아니 희생양이 나타났다.

내 입가에 맺힌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학살극의 시작이었다.

❖ ❖ ❖

방 안은 어두웠다. 오로지 책상 위에 밝혀진 작은 등잔 하나가 유일한 광원이었다.

그 위로 앙상하게 마른 손가락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래서,"

손가락이 찬찬히 움직여 책상 위에 놓인 펜을 쥐었다.

"다 죽었다?"

손가락의 주인은 늙수그레한 목소리를 갖고 있었다. 낮고 차분했으나, 마치 상대를 꿰뚫는 듯한 날카로움이 깃든 음성이었다.

"예."

방 중앙에 서 있던 청년이 대답했다.

그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고개를 깊이 숙인 채였다. 노인을 몹시 공경하는, 혹은 두려워하는 듯한 눈치였다.

"모리츠도?"

불빛 너머의 노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예."

청년은 잠시 저어하는 기색이었으나,

"마찬가지로, 죽었습니다."

대답만은 빠르게 뱉었다. 대답이 늦어지는 것을 노인이 무척 싫어하기 때문이었다.

삐걱-

다음 말 대신, 의자가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노인이 의자에 몸을 깊이 기댄 채 팔걸이에 깍지낀 손을 올렸다.

"이상하군."

내용과는 달리, 퍽 무덤덤한 어조였다. 노인은 어떤 방식으로든 제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편이었다.

"모리츠 그놈이 그렇게 허무하게 죽었다고?"

청년은 대꾸하지 않고 묵묵히 서 있었다.

지금 노인은 자신에게 말을 건 게 아니었다. 그가 저렇게 의자에 몸을 묻은 채 중얼거릴 때는, 혼자서 생각을 정리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변고가 생기면 즉시 연락을 넣도록 훈련받았을 텐데."

노인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었다.

"결론은 두 가지로군."

그가 이윽고 단정적인 말투로 말했다.

"그러지 못할 정도로 상대가 강했거나, 혹은 방심하고 있다가 허를 찔렸거나."

노인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전자라면 모를까... 후자라면 차라리 잘된 일이지."

그것은 몹시도 싸늘해, 마치 설산에서나 불어올 법한 북풍처럼 들렸다.

"그런 놈은 결국 내 손에 죽었을 테니."

Chapter6. 안심한 때 등을 친다. (9)

냉혹하기 그지없는 선언 후,

삐걱.

노인의 의자가 다시 움직였다.

이번에 그는 책장에서 무언가를 꺼내 책상 위에 펼쳤다. 그것은 그가 늘 공들여 관리하는 장부였다.

노인은 새카만 잉크병에 고급 깃펜을 푹 담갔다. 장부를 펼친 뒤 잉크를 듬뿍 머금은 깃펜으로 무언가를 적어 내렸다.

"아쉬운 일이군. 카데르까지 뚫는 게 쉽지 않았는데."

그는 깃펜을 움직이며 계속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모리츠의 장사 수완도 나쁘지 않았지. 안정적으로 물품을 수급하고, 판매까지 깔끔하게 해결했건만."

노인이 손가락을 멈추었다.

"그런데."

칼날 같은 음성이 공기를 도려냈다.

"왜 이렇게 파악이 늦은 건가?"

청년이 짧게 숨을 들이켰다.

올 것이 왔다.

"죄송합니다."

그는 길게 호흡을 뱉은 뒤 설명을 시작했다. 되도록 노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일단 연락에 답신이 없자 바로 조직원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상회에 도착했을 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그 영지 경비병들이 그렇게 부지런한 치들이 아닐 텐데."

노인의 목소리가 한층 싸늘해졌다. 덩달아 방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게다가 카데르 영지 가까이 지부가 있는 것으로 안다. 가는 길에 늦장이라도 부렸다는 말인가?"

"아닙니다."

청년이 고개를 무겁게 흔들었다.

"경비병들이 서둘러 현장을 정리해버린 탓이었습니다."

"왜지?"

"시체들이 모두 썩어있었기 때문입니다."

청년은 보고받은 기억을 되살려가며 차분하게 말했다.

"모든 시체가 시커멓게 타버린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체액을 모조리 빨린 것처럼, 아니."

그가 무겁게 내뱉었다.

"생기를 모조리 빨린 것처럼요."

노인은 다그치길 멈추고 청년의 말을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불과 며칠 전에 생긴 시체가 무덤에 몇 년은 묻혀 있던 모습을 하고 있으니, 퍽 불길하게 여긴 모양입니다."

"...."

"역병이나 저주가 내린 게 아니냐며 수군거리는 통에, 경비병들이 급하게 시체를 수거해서 처리했다고 합니다."

청년이 설명을 마치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최대한 빠르게 소문을 수집하여 자초지종을 파악하였습니다. 그러느라 시간이 다소 소요된 점, 정말 죄송합니다."

설명을 듣는 사이 깃펜의 잉크가 말라 있었다. 노인이 더이상 잉크가 흐르지 않는 깃펜을 손에 쥐고 빙빙 돌렸다.

"...괴이쩍은 일이로군. 그 시체를 구할 순 없었나?"

"예. 이미 전부 소각해버렸다고 합니다."

"흠...."

깃펜이 노인의 생각을 대변하듯 까딱까딱 움직였다.

"이런 경우는 듣도 보도 못했군. 어떤 수를 쓴 거지? 기이한 사술이라도 쓰는 건가. 아니면, 마법이라도?"

중얼거리던 노인이 다시 깃펜을 멈추었다.

"그놈 인상착의는 어떻지?"

다행히도 이번 일에 대한 질책은 길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보고할 일이 더 남아있었다.

'젠장. 다음 건 또 어떻게 말한담.'

청년은 얕은 한숨을 삼킨 뒤 즉시 대답했다.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을 가졌다고 합니다. 덩치는 호리호리한 편이라 하더군요."

"나이는?"

"많아 봐야 이십 대 중반으로 추측됩니다."

"어린놈이로군."

노인이 손에 쥔 깃펜을 빙빙 돌렸다.

"고작 애송이 한 놈에게...."

상품 전부와 일 잘하는 부하를 잃었다. 더 나아가 그곳과 연결된 줄, 그리고 고객까지 잃었다. 특히 전부 죽어버려 이젠 손쓸 도리가 없다는 게 입맛이 썼다.

노인은 짧게 혀를 찼다.

"그 외의 정보는 없나? 놈을 특정하기가 어렵지 않나."

"죄송합니다."

노인의 물음에 청년이 송구스러워하며 답했다.

"이 인상착의도 소문을 통해 얻어낸 것이라.... 현장에 있던 상품 중 일부가 살아남아 소문을 흘린 모양입니다."

"그 와중에 생존자가 있었던 건가."

"예. 하지만 워낙 횡설수설한 데다, 그때 상황에 대한 기억이 흐릿한 듯합니다. 그래서 이 정보도 정확하다고 말씀드리긴 어렵습니다."

노인이 잠시 간격을 두었다가 물었다.

"그럼 어떤 무기를 쓰는지는 알아냈나? 그걸 알아야 왜 놈이 죽인 시체가 그 꼴이 되는지 파악할 것 아닌가."

"일단은, 날이 새카만 검을 사용한다고 들었습니다."

"검, 검이라...."

깃펜이 빙글빙글 도는 속도가 느려졌다.

"확실히, 그런 검은 보기 드물지...."

덩달아 노인의 중얼거림도 느릿해졌다.

"손잡이나 장식이 까만 것은 보았어도 날은 처음 듣는군. 어쨌건 놈을 특정하는 데 도움이 되겠어."

노인의 목소리가 잦아들자, 청년은 조용히 숨을 죽였다. 그가 생각을 정리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 나이에 혼자서 상회를 몰살 시켰다는 건 굉장한 실력자라는 뜻인데."

노인이 깃펜 끝의 깃털을 툭툭 두들겼다.

"그렇게 실력 좋은 검사가 서쪽에 있다고? 그 외진 산골짜기에 있을 강자라고 해봐야, 그래."

노인의 목소리가 버석하게 말라붙었다.

"디에고 오베스트 킨드리얼이 있지. 하지만 그 꼰대 같은 자가 카데르 영지를 굳이?"

느릿느릿한 중얼거림이 이어졌다.

"귀족 회의도 안 나오는 양반이 거기까지 그 무거운 궁둥이를 끌고 나올 리가 없단 말이지."

"...."

"그렇다는 건, 기사단에 속한 다른 검사인가? 아니, 오히려 이쪽이 가능성은 더 낮겠군. 국경을 지키는 데만도 급급할 텐데."

노인의 깃펜이 멈추었다.

"어쨌건 덕분에 놈이 나타난 걸 알아채기는 쉽겠어. 지나가는 길마다 그런 모습의 시체가 즐비할 테니 말이야. 안 그런가?"

"...예, 그렇습니다."

"대답을 보아하니 그 후로 또 나타난 것 같군. 언제, 어디였지?"

청년의 눈꺼풀이 가늘게 떨렸다.

'역시 로웰님.'

오랜 기간 이 세계에 몸담은 자답게, 노인의 통찰력은 날카로웠다.

그는 아마 청년의 숨소리, 말투만으로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알아챌 것이다.

"사실, 놈이 카데르 영지에 한 번 더 나타났었습니다."

거기까지 들은 노인이 대충 내용이 짐작된다는 투로 말했다.

"또 크게 한 건 한 모양이군."

"예. 이번에는 사창가를 털었더군요. 손님들을 폭행하고, 그곳을 지키는 건달들을 모조리 살해했다고 합니다."

"정확히 어디였지? 그곳의 사창가가 한둘이 아니지 않나."

청년은 잠시 망설이다가 어렵게 입을 뗐다.

"그게... 하필 저희 길드에서 관리하던 곳입니다."

"...."

"관리하던 건달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몇몇 가치 높은 상품을 잃었습니다. 워낙 소문이 흉흉하게 나서 재건하는 데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뼈아픈 실패를 보고하는 청년의 목소리가 점점 움츠러들었다. 되도록 별일이 아닌 것처럼 사무적으로 말하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실패는 아무리 가볍게 이야기하려고 해도 실패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진실을 정확히 이야기하지 않았을 때의 후폭풍이 더 클 것이다.

'매도 맞을 거면 먼저 맞는 게 낫지.'

그래서 청년은 정면돌파를 선택했다. 그렇다고 해서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

충격을 받은 건지, 생각에 잠긴 건지 노인은 잠시 말이 없었다.

청년은 손에 땀을 쥐었다. 손바닥이 땀으로 흥건해졌을 무렵, 노인이 불쑥 물었다.

"그 시체들도 같은 꼴이던가?"

"예."

"겁 없는 놈이군."

노인이 흥미롭다는 듯 중얼거렸다.

"보란 듯이 일을 벌이는 것 같지 않나. 제 흔적을 분명하게 남겨가면서."

"...."

"처음엔 경쟁 길드의 소행인가 했는데. 단순히 우리 길드를 엿 먹이려 했다기엔, 좀 애매한 구석이 있어."

노인의 목소리가 냉정하게 가라앉았다.

"자넨 어떻게 생각하나?"

청년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저는 그쪽에 좀 더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요란하게 일을 벌인 것은, 그 의도를 숨기기 위해서일지도 모릅니다."

"그래. 그럴 가능성도 분명히 있지."

"단순히 '살인'을 목적으로 했다기엔, 정확하게 우리 길드가 운영하는 곳만을 골라서 털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의도가 있는 행동으로 보입니다."

노인은 청년의 말을 곱씹는 것처럼 흐음, 소리를 흘렸다.

"그 후로 보고된 것은 없는가?"

"네. 잠잠합니다."

"하지만 그게 정말 아무 일도 없어서는 모를 일이지."

노인의 목소리는 별다른 감정이 담기지 않아 고저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그 속에 얼음 조각이 담겨 있다는 것을, 청년은 선연히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다른 어딘가에서 또 우리 지부를 들쑤시고 있을지도. 이번 일도 조직원들이 몰살당한 탓에 늦게 알아채지 않았나."

냉기를 풍기는 노인의 목소리 덕에 손바닥에 고인 땀이 식었다. 청년은 제 손이 얼음처럼 차가워진 것을 느꼈다.

"...송구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앞으론 사흘 이상 연락이 되지 않을 경우, 즉시 조직원을 보내도록 하게."

"예, 알겠습니다."

노인은 청년을 꽁꽁 얼어붙게 만든 뒤 잠시 침묵했다.

잠시 후.

"새장을 열어라."

"-!"

청년은 아주 오랜만에, 그 단어가 노인의 입에서 발해지는 것을 보았다.

그가 떨리는 음성으로 되물었다.

"지금 새장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노인의 손가락이 다시 깃펜을 쥐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목표는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을 가진, 새카만 날의 검을 쓰는 놈이다."

살벌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노인의 말투는 다음 끼니에 먹을 음식을 말하는 것처럼 단조로웠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생포하도록."

"알겠습니다."

청년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그놈이 붙잡혔을 때 어떤 험한 꼴을 볼지 안 봐도 상상이 되어서였다.

사각사각.

방 안의 분위기와는 다르게, 노인은 깃펜을 쥔 손을 유려하게 움직였다.

"놈이 어떤 무기를 쓰는지 자세히 보아야겠다. 보아하니 보기 드문 천하의 명검이라도 손에 넣은 모양인데, 그렇다면 더더욱 가만히 둘 수는 없는 노릇이지."

노인의 희미한 웃음소리가 손가락 위로 내려앉았다.

"검을 가져다드리면 아주 기뻐하시겠군."

노인의 뒤편에 자리한 책장 위에는 온갖 장식품이 놓여 있었다. 그중 한가운데 놓인 푸른 진주가 희미한 빛을 발했다.

❖ ❖ ❖

베저크 영지의 관문 초소.

"흐아아암."

에버렛은 높게 솟은 성벽 위에서 얼굴을 문질렀다.

"오늘도 한가하구만."

원래 '오늘 좀 한가하네.'라는 말은 초소 근무자에게 금기어다. 그 말을 한 순간부터 갑자기 예기치 못한 손님이 찾아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베저크 영지에서는 아니었다.

"어제도 한가했고, 아마 내일도 한가하겠지."

아무리 이 말을 반복해도 그를 무료하지 않게 만들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슥삭. 슥삭.

에버렛은 연거푸 하품을 하면서도 성실하게 근무일지를 적었다.

"근무 상황... 이상 없음."

작성을 마친 그가 휴, 한숨을 쉬었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넘어가겠군."

사실 그는 이 심심함을 몹시 반기는 사람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늘 심심하고픈 사람이었다.

"제발 은퇴할 때까지 몬스터의 털 끝도 안 봤으면."

그가 몹시 겁이 많고 비위가 약한 편이었다. 그런데도 이 직업을 택한 것은 정해진 날에 꼬박꼬박 봉급이 나오기 때문이었다.

"어디 보자. 이제 세 시간 뒤면 교대할 수 있겠군."

초소 근무는 둘이서 서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근 몇 년간 가끔 오는 방문객을 통과시키는 것 외에 경비원이 할 일은 딱히 없었다.

그래서 그는 경계 근무를 혼자 서게 되었고, 이것은 그의 심심함을 두 배로 늘렸다.

"으어, 심심하다. 소금이라도 찍어 먹을까."

에버렛은 습관이 되어버린 그 말을 중얼거리면서, 혹은 헛소리를 덧붙이며 시간을 보냈다.

"심심하다, 심심해."

그렇게 그가 심심하다는 말을 스무 번쯤 반복했을 때쯤이었다.

"심심하다, 심심... 응?"

그는 저 멀리 늘 보이던 풍경 위로 이변이 일어나는 것을 발견했다.

"어어어?"

Chapter6. 안심한 때 등을 친다. (10)

이 자리에 서면 잘 보이는 높은 절벽. 요 몇 년간 사슴 한 마리도 얼씬 않던 그곳에서, 심상찮아 보이는 새카만 바람이 일고 있었다.

에버렛은 손으로 차양을 만든 뒤 있는 힘껏 눈에 힘을 주었다.

"저게 뭐야?"

작은 점처럼 보였던 새카만 바람의 몸집이 순식간에 커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 바람은 점점 초소를 향해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억, 어떡하지?"

지금껏 그는 사람이 아닌 이런 불가사의한 현상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심지어 혼자 근무를 서고 있어 다른 동료를 먼저 보낼 수도 없었다.

에버렛은 발을 동동 구르다가 옆을 바라보았다.

"긴급 종을 울려야 하나?"

영지에 위급한 일이 생겼을 때 울리는 종. 이 종을 울리면 모든 마을 사람들이 영주의 회관으로 모이게 된다.

하지만 이게 위급한 일이 아니라면?

그 생각에 에버렛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아오, 미치겠네. 저게 도대체 뭐...."

에버렛의 입이 멈추었다. 그의 동공이 좀 더 크게 벌어졌다.

"마, 마마 말이잖아?"

그랬다.

멀리서 보았을 때 검은 바람이었던 것은, 실제로는 검은 갈기를 휘날리는 말이었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가히 바람이라고 착각할 만한 수준이었다.

게다가 그 위에는 검은색 로브의 사람이 타고 있었다.

"내가 꿈을 꾸고 있나?"

에버렛은 있는 힘껏 눈을 비벼보았다.

하지만 검은 말은 여전히 시야에 남아있었다. 그리고 믿기 어려운 속도로 점점 초소를 향해 가까워지고 있었다.

"뭐가 저리 빠르지? 저 절벽에서 여기까지 오는데 1분도 안 걸리겠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는 사이, 어느새 말이 자세히 볼수 있을 만큼 거리가 가까워졌다.

"저건 또 왜 이렇게 커?"

에버렛은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는 맹세코 저렇게 거대한 말은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기분 탓인지 착각인지, 말의 눈이 금빛으로 번쩍이는 것 같았다.

"아, 아니겠지? 설마 그럴 리가."

어쨌건 저것은 자연현상이 아닌 말을 타고 있는 사람이었고, 그렇다는 것은 그가 신분패를 검사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에버렛은 초조한 마음으로 초소에 기대어 둔 창을 만지작거렸다. 전에 없던 일이 일어난 데다 불안한 마음이 겹쳐져 온갖 상상이 떠올랐다.

"서, 설마 저대로 관문을 지나치진 않겠지?"

다행히도, 말의 주인은 관문을 인지한 듯 점점 속도를 늦췄다. 그리고 관문에 다 왔을 때 즈음엔 거의 걸어오게 되었다.

따각, 따각.

과연 검은 말은 크기만큼이나 말발굽 소리도 컸다. 발을 디딜 때마다 육중한 무게 덕에 땅이 진동하는 게 느껴졌다.

"...."

에버렛은 창을 든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다 말이 가까이 오자 내심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부드러운 털, 지방 따윈 전혀 없이 탄탄한 근육으로 꽉 짜인 몸체.

게다가 풍성한 속눈썹 아래, 황홀하게 빛나는 눈동자는 분명히 황금빛이었다.

'잘못 본 게 아니었잖아?'

쏟아지는 가을 햇살에 착각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맹세코 이런 아름답고 강인한 말이 존재한다고는 평생 듣도 보도 못했다.

마침내 말의 걸음이 멈추고,

"후우."

그 위에서 낮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에버렛은 시선을 한참 들어 올려 말 위에 앉은 남자를 확인했다.

'목소리를 보니 젊은 남잔데.'

남자의 로브가 옆으로 조금 움직여 관문을 살폈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에버렛을 향했다.

"...."

로브의 새카만 그림자 속에서 찌를 듯한 안광이 쏘아져 내렸다. 이윽고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기가 베저크 영지인가?"

에버렛은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

남자의 질문이 어려워서는 아니었다. 다만 약간 잠긴 그 목소리가 너무나 듣기 좋았기 때문이다.

앳된 청년의 음색 위로 여운이 깊게 남는 무게감이 서려 있어, 듣는 순간 홀린 듯 걸음을 멈추게 된다.

'말투가 꼭... 귀족 같네.'

젊은 나이에도 명령조가 퍽 익숙한 듯한, 그리고 그것이 또 어울리는 말투였다.

'에이, 설마. 그럴 리 없지.'

에버렛은 속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남자가 정말 귀족이었다면 이런 방식으로 이곳을 방문할 리 없었다.

귀족들은 보통 고급 마차를 타고 거들먹거리며 영지를 통과한다. 그리고 방문하기 전 미리 영주에게 기별을 넣는 게 보통이다.

'이런 시골 영지에 귀족 나으리가 왜 오겠어?'

에버렛은 잠깐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네, 맞습니다."

그럼에도, 어쩐지 경어를 써야 할 것 같았다. 남자에게서 은연중에 흘러나오는 기묘한 압박감이 그를 움츠러들게 하고 있었다.

에버렛은 침착하려고 애쓰며 다음 해야 할 말을 했다.

"신분을 입증할 만한 패를 보여주십시오."

"아, 그거."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곤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우와.'

에버렛은 순간적으로 감탄했다.

남자의 동작은 몹시도 가볍고 빨라, 순간적으로 무게가 없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게다가 저 높은 말 위에서 뛰어내렸는데도 전혀 타격이 없어 보였다.

'로버트 대장님보다 말을 더 잘 탈지도.'

남자는 말 안장에 연결된 짐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 안장엔 짐가방뿐만 아니라 커다란 자루 같은 것이 함께 매달려 있었다.

에버렛은 그를 흘끔흘끔 살피다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말과 눈이 마주쳤다.

"크르르."

말이 갑자기 이를 드러냈다.

"힉!"

에버렛은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크르릉!"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이 으르렁대던 말은,

"블랙스타, 안돼."

남자의 한 마디에 급격히 얌전해졌다.

"푸르릉."

"보채도 소용없어. 저건 먹는 거 아니야."

에버렛은 질겁해서 입을 쩍 벌렸다.

'뭐, 뭐라고? 먹는 거?'

대체 그게 무슨 뜻이냐고, 당신 도대체 말에게 뭘 먹인 거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푸릉, 푸릉."

말이 거세게 콧구멍을 벌름거리는 통에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그저 오들오들 떨며 최대한 뒤로 물러날 뿐.

"안 된다고 했어."

남자가 단호하게 일축하자,

"푸르릉."

말은 결국 에버렛의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부루퉁한 표정을 지으면서.

"하여간."

남자는 그런 말이 귀엽다는 듯이 픽 웃기만 했다. 그 잠깐 사이에 겁에 질려버린 에버렛과는 대조되는 반응이었다.

"여기 어디 넣어놨는데."

남자가 짐가방에 손을 넣고 마구 뒤적거렸다. 도통 찾던 것이 나오질 않는지 퍽 거친 손길이었다.

"쯧, 하도 안 쓰니 어디 처박혔나 보네."

그러다 그의 손이 옆에 매달린 자루를 건드렸다.

헐겁게 묶여 있던 자루가 툭 벌어졌다. 그 속에 가득 담겨있던 시커먼 무언가가 아래로 쏟아졌다.

"끼야아악!"

에버렛은 참지 못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바닥에 쏟아진 것이 웬 몬스터의 머리통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시커멓게 타들어 간 흉측한 몰골의.

"으악!! 으으읍…!"

연신 비명을 내지르는 그의 입을 남자가 대뜸 틀어막았다.

"시끄러워."

남자의 손아귀 힘은 몹시 억셌다. 그래서 빠져나올 수도 없을뿐더러, 확 조여드는 입가가 퍽 고통스러웠다.

에버렛은 울상을 지으며 놓아달라고 말했다.

"으, 으븝븝븝."

입이 막힌 탓에 이상한 소리만 튀어나왔다. 남자가 못마땅한 듯 쯧 혀를 찼다.

"이제 진정됐나?"

에버렛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소리 지르지 마. 거슬리니까."

남자의 눈이 스산하게 빛났다.

에버렛은 아까보단 조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더 소리를 질렀다간 큰일이 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흐음...."

남자가 에버렛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천천히 손을 뗐다. 에버렛은 입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되자마자 물었다.

"바, 방금 그거 뭡니까?"

"뭐긴 뭐야, 몬스터 머리지."

"무, 무슨 몬스터인데요?"

"알 게 뭐냐. 죽었는데."

남자가 몬스터의 머리를 휙 집어 들어 다시 자루에 넣었다. 에버렛의 눈길이 그 움직임을 따라가다가, 자루 속까지 이어졌다.

"-!"

에버렛은 다시 비명을 지르는 대신 스스로 입을 막았다.

'머, 머머머 머리가 도대체?'

자루 속에는 온갖 종류의 몬스터들 머리가 가득 들어있었다. 얼핏 눈으로 센 것만 해도 열 마리는 넘어 보였다.

'왜 모가지만 다 따서 온 거야? 몬스터 머리만 수집하는 사람인가?'

에버렛은 이를 덜덜 부딪히며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부정적인 방향으로 저 로브 속의 모습이 상상되고 있었다. 아주 흉악한 범죄자가 들어있을 지도 몰랐다.

'어, 어떡하지? 대장님께 알려야 하나?'

그는 긴급 종을 울리는 것을 진심으로 고민해보기 시작했다.

"하여간,"

남자가 자루를 동여멘 뒤 짐가방으로 다가서며 들으란 듯이 중얼거렸다.

"몬스터 처음 보나? 관문 경비를 서는 놈이 왜 이렇게 심약해."

조금 억울해진 에버렛은 얼른 대꾸했다.

"몬스터라곤 평생 구경도 못 해봤습니다. 방금 본 게 처음이고요."

"하긴 이 영지는 그렇지."

남자가 다 안다는 듯 대꾸하더니 아, 하고 탄성을 흘렸다.

"찾았다."

무언가가 에버렛에게 휙 날아들었다.

"어이쿠."

에버렛은 겨우 놓치지 않고 그것을 잡아냈다.

"이건...."

금속으로 음각된 묵직한 신분패였다. 그는 긴급종에 대한 생각을 잠시 접어두고 신분패를 뒤집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앞면의 내용을 확인한 그의 눈동자가 커졌다.

"아벨 오베스트 킨드리얼?"

분명 들어본 이름이었다.

'킨드리얼 가문이라면....'

그는 서둘러 아주 오래전 암기한 귀족 명부를 떠올렸다.

그것은 관문에서 근무하기 위한 기본 소양이었지만, 워낙 쓸일이 없는 탓에 기억 깊숙이 묻혀 있었다.

'가운데에 들어가는 게 영지 이름 인데...?'

에버렛의 눈이 터질 듯이 확장되었다.

"서, 설마?"

그 유명한 서쪽의 오베스트 영지를 다스리는 킨드리얼 가문. 그곳의 영주, 불세출의 검사이자 제국 최강자로 불리는 디에고 킨드리얼.

...에게, 아들이 한 명 있지 않았던가?

"아, 아벨 킨드리얼님...?"

에버렛은 이 신분패의 주인이 제 앞에 있다는 현실을 도저히 믿고 싶지 않았다. 특히 그가 몬스터 머리통을 몇십 개씩 들고서.

제 눈이 잘못된 것이길 빌며 뻣뻣하게 굳어버린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래."

남자가 로브를 벗어넘겼다.

흙먼지로 범벅이 된, 맑게 갠 가을 하늘처럼 푸른 머리카락이 휙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그 아래로 약간 창백하지만 섬세한 선을 가진 이목구비, 한가운데 박힌 보석 같은 청보랏빛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게 내 이름 맞아."

그 속에 깊이 모를 광채가 번득였다.

에버렛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지, 진짜 아벨 킨드리얼?'

다른 지역의 귀족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적어도 서쪽 근방의 유력한 영주들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귀족 명단 중에서 아벨 킨드리얼은 꽤 유명했다. 그것도 안 좋은 쪽으로.

아벨의 입꼬리가 비뚜름하게 밀려 올라갔다.

"얼른 문이나 열어."

에버렛은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심심하다고 지껄인 과거를 후회했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모든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이었다.

Chapter7. 내 것은 철저하게 지킨다. (1)

끼이이익.

듣기 싫은 금속성 소음과 함께 관문의 문이 열렸다.

"아, 안녕하십니까."

관문 옆의 초소에서 경비병이 허둥지둥 달려 내려왔다. 계단이 퍽 가파른 데도 개의치 않는 듯 빠른 속도였다.

"아벨 오베스트 킨드리얼님을 뵙습니다."

경비병의 얼굴은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희게 질려 있었다. 원래도 눈꼬리가 축 처진 시무룩한 얼굴인데, 창백한 안색까지 더해져 더욱 심약해 보였다.

하긴, 이런 시골 변두리에서 언제 나 같은 귀족을 만나봤겠는가.

"그래."

대충 고개를 끄덕여 주곤 블랙스타의 고삐를 잡아끌었다.

경비병은 어쩔줄 몰라하는 기색으로 관문을 통과하는 나를 지켜보았다. 그러다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는 조심스레 물었다.

"그, 저희 영지는 무슨 일로 방문하셨습니까?"

"이거 때문인데."

블랙스타의 몸에 달린 자루를 툭 쳤다. 아까 단단히 묶은 덕에 풀리는 일은 없었지만.

"으헉!"

거북이 보고 놀란 가슴 무쇠팬 보고 놀란다고, 경비병은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모, 몬스터는 왜...?"

"네 알 바는 아니고."

몬스터를 처음 본다며 저리 호들갑을 떠는 놈에게 할 이야기는 없었다. 그보다도 이것을 잘 처리해줄 책임자를 만나야 했다.

'이 영지에 방문한 목적은 이거니까.'

나는 시큰둥하게 고갯짓했다.

"영주의 회관은 어디 있지? 경비대장이 거기 있을 텐데."

이 작은 영지에 '성'이라고 불릴 만한 건물은 없다. 다른 주민보다 조금 더 큰 집을 영주의 거처로 삼고, 행정 및 군사의 기능을 담당할 뿐.

"아, 네."

내가 영지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자 경비병은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알겠습니다. 따라오십시오."

하지만 곧바로 몸을 돌려 앞장서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뒤를 따라가며 습관적으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그러자 거기 묻어있던 흙먼지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아, 젠장."

투덜거리며 먼지를 털어내자, 머리카락 깊숙이 숨어있던 모래가 더 많이 떨어져 내렸다.

"아오."

이를 갈며 손을 멈추는 수밖에 없었다.

'천하의 아벨 킨드리얼 꼴이 말이 아니네.'

늘 깔끔한 귀공자의 모습을 하고 있던 내가 이토록 지저분한 몰골이라니.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일주일 만에 오베스트 영지에서 여기까지 왔으니까.'

깔끔한 몰골인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그동안 내 삶은 복잡하면서도 단조롭기 그지없었다.

미친 듯이 달리고, 죽이고, 먹고, 잔다.

오로지 그것만 반복하고 나니 어느새 베저크 영지에 도착해 있었다. 그동안 내가 죽인 몬스터의 수는....

'음, 하도 많이 죽여서 기억이 잘 안 나네.'

자루 속에 든 머리의 개수는 얼추 50개였다.

하지만 같은 몬스터 여러 마리를 죽인 경우 머리를 하나만 챙겼다. 따라서 실제로 죽인 수는 그보다 많을 터였다.

아무튼, 준비해온 식량을 전부 소진했을 무렵 아슬아슬하게 베저크 영지에 도착했다.

'얼른 가서 씻고 싶다. 푹신한 침대에서 좀 자고.'

이곳의 영주가 제 방을 내어준다 한들 오베스트 영지의 내 방 보다야 허름하겠지만.

'그래도 숲에서 야영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으니까.'

이제 여기서 하룻밤 잘 쉬고 회복한 뒤, 필요한 물자를 챙겨 수도로 올라가야 했다.

'사흘 정도 남았나. 그 안에는 도착하겠군.'

아니, 그보다는 빠를 것 같았다. 지금까지 달려온 속도를 보면 내가 예상한 시간보다 단축될 가능성이 컸다.

'일찍 도착해서 미리 해둘 일들이 있으니까.'

나는 수도에 도착하면 해야 할 일을 머릿속으로 차근차근 정리했다.

"크르르릉."

그러다 블랙스타가 으르렁거리는 소리에 생각을 멈추었다.

"크르르릉!"

블랙스타는 주변의 인간들을 향해 들끓는 적개심을 드러냈다. 이를 마구 들썩이는 모습이 꼭 누구 하나 걸리기만 하면 뼈째 씹어먹을 기세였다.

"으헉!"

"어, 엄마야."

지나가던 행인들이 혼비백산해서 물러섰다.

"크릉, 크릉!"

그럴수록 블랙스타는 더욱 기세등등해서 소리를 키웠다. 그 모습은 집 주변의 모든 인간을 향해 짖어대는 개와 닮아 있었다.

'아니, 이 자식이?'

나는 보다 못해 블랙스타의 이마를 살짝 쥐어박았다.

"안 된다고 했지. 네가 인간한테 당한 게 많은지는 알겠는데, 성질 그만 부려."

블랙스타가 억울한 듯 콧잔등을 열렬히 찡긋거렸다.

"끼잉, 끼잉."

"...."

주변을 둘러보는 척 녀석의 호소를 무시했다. 그러자 녀석이 처량하게 속눈썹을 팔랑거리기 시작했다.

"히히힝."

배가 고프다고 보챌 때 내는 소리였다.

"안 돼, 어림없어."

물론 나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너 오기 전에 밥 실컷 먹었잖아."

블랙스타는 살아있는 생물을 통째로 씹어먹는 걸 좋아했다. 그래서 지난 일주일간 부지런히 작은 동물을 사냥해야 했다.

"그렇게 먹고도 성에 안 차?"

그동안 녀석이 먹은 동물의 수만 두 자릿수였다. 그런 사소한 부분도 날 닮았다는 게 좀 웃겼다.

"아니면, 이거라도 먹을래?"

자루를 툭 치면서 물어보자 블랙스타가 힝힝 고개를 저었다. 녀석은 레퀴엠으로 생기를 흡수해버린 살점은 혀도 대지 않았다.

'인간의 음식으로 치면 차갑게 식어버린 건가.'

아니, 어쩌면 오래 되어 부패한 음식일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또 맛있는 거 줄게, 알았지?"

부드럽게 속삭이며 블랙스타의 콧잔등을 슥슥 긁어주었다.

"푸릉."

녀석은 그제야 화가 풀린 듯 내게 몸을 비비적거렸다.

흉포한 생김새와 달리, 녀석은 정말로 애완견처럼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함께 달리면서 더욱 정이 붙은 것도 한몫했다.

"녀석, 참."

흐뭇하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런 나를 경비원이 경이롭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그, 그거 진짜 말입니까?"

"그럼 말이지, 뭐겠냐."

"아니, 그렇게 큰 말은 처음 봐서요. 눈 색도 특이하고."

경비원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처음엔 몬스터인 줄 알았습니다."

...저 놈이 진실을 꿰뚫어볼 때도 있군. 하지만 사실을 말했다간 저 심약한 경비원이 까무러칠지도 몰랐다.

나는 시큰둥한 척 둘러댔다.

"인간도 생김새가 다양하잖아? 말도 그런거지."

"아, 예. 그렇습죠."

"자네를 잡아먹을 일은 없으니 빨리 가기나 해."

"예, 예에."

경비원의 발걸음이 아주 빨라졌다. 그의 뒤를 따라 걸어가자 행인들의 시선이 점점 모여들었다.

"우와, 저 말 봤어?"

"굉장하다. 엄청 커!"

"저 사람은 누구지?"

"처음 보는 사람인데...."

마을 사람들은 생전 보지 못한 커다란 말, 그리고 마을에서 보지 못한 외부인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무표정한 얼굴로 걸어가는 내게 감히 말을 걸지 못했다. 은연 중 풍겨오는 분위기, 그리고 몸에 배어 있는 귀족적 위압감 때문일 것이다.

그러다 한 사람이 용기를 내어 내 앞의 경비원에게 다가섰다.

"에버렛?"

이름을 불린 경비원이 퍼뜩 놀라 고개를 좌우로 마구 흔들었다. 그가 입모양으로 속삭였다.

'나중에 이야기해요, 나중에.'

그 서슬에 말을 걸었던 마을 사람은 쭈뼛대며 물러났다.

그렇게 나를 중심으로 한 보이지 않는 원이 생겨났다. 나는 주변의 반응을 그리 신경 쓰지 않고 느릿하게 걸었다.

'흐음, 재밌네.'

이러고 있으니 꼭 오베스트 영지에 있을 때 같잖아. 물론 그때는 아벨의 악명이 자자할 때였지만.

이런 시골 마을에서는 나에 대한 소개 없이도 자연스레 주변을 압도하게 된다.

아마 이 순간 사람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뚜벅, 뚜벅.

나의 별로 크지 않은 발걸음 소리가 꼭 사신의 발걸음 소리처럼 들린다고.

그렇게 걸어가던 나는 문득 지나가던 여인에게 눈길을 주었다. 정확히는 그녀가 들고 있는 두레박에.

"이봐."

"네, 네?"

"물 좀 줘. 목 축일 정도로만."

나는 거절 따윈 없다는 말투로 말했다. 지목당한 여인은 당황한 얼굴로 주변의 눈치를 살피다가, "얼른."

내 재촉에 머뭇머뭇 앞으로 나섰다.

"여기."

목에 걸고 있던 수통을 풀어 내밀자, 여인은 조심스럽게 수통 가득히 물을 부어주었다.

"그만 가봐."

나는 건성으로 손을 내저은 뒤 목구멍에 물을 벌컥벌컥 들이부었다.

쩍쩍 갈라져 있던 목에 수분이 들어오자 살 것 같았다. 이렇게 물이 달게 느껴지긴 처음이었다.

순식간에 수통의 물이 절반 이상 사라졌다.

"좀 살겠군."

절로 부드러운 음색이 흘러나왔다.

나는 잠시 수통에 남은 물을 바라보다가, 그것을 들어 올려 머리 위에 물을 쏟아부었다.

차가운 물이 머리카락을 적시고 턱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

"후우우."

나른한 한숨을 흘리며 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모래와 땀으로 절어 있던 얼굴이 조금 깨끗해진 느낌이었다.

"...!"

사람들 주변으로 동요의 원이 퍼져나갔다. 그들은 비교적 말끔해진 내 얼굴을 정신없이 바라보았다.

"와, 잘생겼다."

누군가 감탄을 참지 못하고 입 밖으로 뱉었다. 주변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고, 그 말을 뱉은 이마저 놀라서 입을 틀어막았다.

"...."

나는 소리가 들려온 쪽을 휙 돌아보았다. 날카로운 눈매를 가늘게 떴다가,

"고맙다."

픽 웃음을 흘렸다.

와장창!

한 아낙네가 들고 있던 그릇을 떨어뜨렸다.

"에, 에구머니나."

좀 격한 반응이긴 한데, 사실 주변의 반응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사람들은 넋을 잃은 채 내 미소만 바라보았다. 내 얼굴을 멍하니 보면서 걸어가다가 고꾸라지는 사람이 속출했다.

저런. 아무리 촌사람들이라지만 반응이 너무 적나라한걸.

'아벨이 잘생기긴 했단 말이지.'

역시 작중 공인된 꽃미남답다. 물론 입을 다물고 있을 때의 이야기긴 하지만.

그렇게 소란 아닌 소란을 일으키며 마을 중앙을 가로질렀다. 저 끝에 지금까지 본 허름한 집 중 가장 크고 좋은 건물이 보였다.

"저, 저깁니다! 천천히 오십시오!"

경비원이 잽싸게 달려가 회관 문을 열고 쏙 사라졌다. 나는 그 안에서 벌어질 일을 예상하며 키득 웃었다.

'안에서 난리가 나겠군.'

마음속으로 천천히 숫자를 셌다.

'1, 2, ... 10.'

마지막 숫자를 세는 것과 동시에,

벌컥!

회관 문이 다시 거칠게 열렸다. 거기에서 튀어나온 것은 아까 본 경비원과 비슷하지만 더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40대의 남자였다.

'흠, 경비대장인가.'

그가 정신없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나를 발견했다.

"...!"

그의 입이 소리 없는 경악을 담아 쩍 벌어졌다. 그가 나와 말을 번갈아 가며 훑다가 끄응, 한숨을 내쉬었다.

경비대장이 몸을 돌려 회관 안에다 외쳤다.

"어서 영주님을 모셔 와라!"

그리곤 문을 닫고 돌아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다가오길 기다리는 그의 얼굴에 비장함이 감돌았다. '올 것이 왔구나.'라고 말하는 표정.

"아벨 오베스트 킨드리얼님이십니까?"

"맞아."

나는 손짓으로 인사를 받아주고는 회관 옆의 기둥으로 다가섰다.

"마구간이 따로 없는 것 같은데. 여기 묶어둬도 되겠지?"

"예. 아니, 제가 하겠...."

손사래를 치던 경비대장이 문득 정지했다. 그가 눈을 빠르게 깜박이며 다시 한번 블랙스타를 훑었다.

"이, 이걸 타고 오신 겁니까?"

내게 묻는 그의 표정이 말하고 있었다.

'이거 말이 아니라 몬스터 아닌가요?'

Chapter7. 내 것은 철저하게 지킨다. (2)

오, 제법인데.

그는 블랙스타의 정체를 곧바로 알아챈 눈치였다. 아까의 경비원보다는 확실히 경험이 풍부한 듯했다.

'여기 온 용건을 해결할 수 있겠군.'

촌구석 영지라 몬스터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놈들만 있을 줄 알았는데, 뜻밖의 수확이었다.

"그래. 여기까지 오는 내내 타고 왔지."

나는 짧게 긍정한 뒤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물음 끝에 그윽한 미소가 번졌다.

"...."

경비대장은 내 얼굴을 바라보며 두꺼비처럼 느릿하게 눈을 껌벅였다. 그러다 퍼뜩 정신을 차리곤 말했다.

"아, 아닙니다! 말이 참 튼튼하고, 씩씩해 보이는군요!"

"음."

"과연 아벨님의 명성과 잘 어울리는 말입니다!"

...그거 욕 아닌가?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경비대장은 양손을 바삐 비벼대었다.

"그럼 이후 일정은 어찌 되십니까? 여기서 묵고 가실 생각이신지요?"

"그럴 예정이다."

나는 기둥에 블랙스타의 고삐를 단단히 묶었다.

"이거 부수면 안 돼. 알았지?"

"푸릉."

블랙스타는 조금 불만스레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이윽고 얌전히 자리에 머물렀다.

경비대장이 처량한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속으로 저 기둥이 무사하길 빌고 있는 듯 했다.

"안으로 드시지요. 영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잠시."

나는 안장에 묶어둔 자루를 풀어냈다. 그것을 한 손으로 번쩍 들자, 경비대장이 양손을 내밀었다.

"제가 들겠습니다. 이리 주시지요."

"아, 그럴래?"

픽 웃고는 그에게 자루를 건넸다. 그가 자루 위쪽을 잘 잡았다는 것을 확인한 뒤 손을 놓았다.

"어어엇?"

경비대장의 멱따는 비명과 함께,

쿵!

자루가 바닥에 내려앉았다.

"아이고오."

경비대장이 허리를 붙잡고 끙끙거렸다. 자루를 바닥에 놓지 않기 위해 순간적으로 강하게 힘을 준 탓이었다.

그럼에도 허무하게 자루를 바닥에 놓치고 말았다.

"아니, 대체 속에 뭐가 들었길래...."

"내가 여기 온 용건이지."

나는 대답하며 그가 놓친 자루를 다시 한 손으로 들어 올렸다. 너무도 가볍게 쑥 올라가는 자루를, 경비대장은 당황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이, 이게 에버렛이 말한 그 몬스터의...?"

에버렛, 이라면 아까 그 경비원을 말하는 건가. 그 짧은 시간에 잘도 상황을 설명했나 보군.

나는 친절한 설명 대신 무뚝뚝하게 응수했다.

"자네가 들기엔 너무 무거울 것 같군. 그냥 내가 들지."

경비대장은 잠시 쭈뼛거리다가 회관의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드시지요."

건물 내부는 호화롭다고는 할 수 없으나 깔끔하고 아늑하게 꾸며져 있었다.

"이쪽입니다."

건물 가장 안쪽의 방. 그곳에 들어서자 책상에 앉아 있는 남자가 보였다.

"어서 오시게."

세월의 흐름을 피하지 못한 주름진 얼굴, 그 위에 염수 수염을 기른 노인이 나를 맞았다.

"베저크 영지에 온 것을 환영하네."

영주 마르코 메디치.

이 베저크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이자, 곧 내게 털릴 예정인 남자였다.

나는 뚜벅뚜벅 걸어가 책상 앞에 놓인 의자에 털썩 앉았다.

"...."

아직 앉으라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 먼저 앉아버린 나를 본 마르코의 수염이 움찔 떨렸다.

쿵!

나는 보란 듯이 자루를 의자 옆에 내려놓곤, 한쪽 다리를 꼬았다.

"환영해줘서 고맙군."

마르코의 얼굴이 볼썽사납게 일그러졌다.

새파랗게 어린놈이 초면부터 반말을 하니 기분이 좋진 않겠지.

하지만 지도에 자그맣게 박혀있는 시골 마을의 촌장과 제국 서쪽의 거대한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의 아들.

이 사이엔 좁힐 수 없는 거대한 격차가 있었다.

'그리고, 몇 분 뒤면 내 앞에서 설설 기게 될 테지.'

분노로 파르르 떨리고 있는 그의 수염이, 조금 있다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여유로운 미소를 지은 채 마르코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래, 우리 영지엔 무슨 일로 온 겐가?"

이윽고 마르코가 화제를 돌렸다. 내 방만한 태도에 아무 의의도 제기하지 않고.

'역시나.'

이게 계급이고 권력이다. 나이를 무시하는 절대적인 힘.

"에버렛의 말에 따르자면, 몬스터와 관련된 용건이라고 하십니다."

옆에 서 있던 경비대장이 대신 설명했다. 나는 그의 설명에서 범위를 좁혀주었다.

"정확히는 현상금과 관련된 용건이지."

"현상금?"

되묻는 마르코의 눈에 경계심이 어렸다.

"그래. 예를 들자면,"

나는 말을 맺는 것과 동시에 자루를 풀어헤쳤다.

"헉!"

경비대장과 마르코가 몸을 뒤로 물리고,

탕!

자루에서 꺼낸 몬스터의 머리통이 책상 위로 던져졌다.

"할파스."

"...."

"사자의 몸에 독수리의 날개, 그리고 뱀의 얼굴을 한 거대한 몬스터지."

나는 손가락으로 할파스의 이빨을 가리켰다.

"여기 이렇게 길게 튀어나온 송곳니가 할파스의 상징이고."

경비대장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몬스터에 대해서 잘 아는 눈치였다.

"그, 그런데 이 놈은 어떻게 죽이신 겁니까?"

그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이놈 날갯죽지를 다 펼치면 사람 키만하다고 들었습니다. 게다가 하늘을 활공하면서 빙빙 돌다가, 딱 필요한 순간에만 내려와 먹이를 낚아챈다죠? 그래서 몹시 잡기 어렵다고 하던데요."

"뭐, 그렇긴 하지만."

나는 다리를 더욱 깊이 꼬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나한텐 별거 아니던데?"

레퀴엠이 있으니까.

산에서 벌어진 나와 몬스터의 싸움은 전투라고 부르기도 싱거운 수준이었다.

몬스터들은 내게 다가오기 무섭게 생기를 빼앗기고 말라비틀어진 사체로 변해야 했다.

바닥에 즐비한 사체에서 목만 베어내는 것은 누워서 수프 먹기보다도 쉬웠다.

"쉬, 쉽다고요...?"

경비대장이 믿기 어렵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내 허리춤에 걸린 장검을 훑었다.

"그 검으로...?"

나는 긍정하는 대신 애매한 침묵을 택했다.

내 허리춤에 달린 것은 예전에 식당에서 디에고를 상대할 때 쓴 검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이 검으로 모든 몬스터를 베어 죽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머리만 베면 몰라도.'

속내를 숨긴 채 그저 옅은 미소만 지었다.

"...."

경비대장과 마르코 영주가 불안한 시선을 교환했다. 그들의 시선이 자루 속에 가득한 몬스터의 머리들을 흘끗흘끗 훔쳐보았다.

"흠흠, 과연 디에고 킨드리얼의 하나뿐인 아들다운 무용이로군."

마르코 영주가 짐짓 담대한 척 말했다. 그래 봐야 인중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어 큰 소용은 없었지만.

"그래서, 무슨 현상금을 말하는 겐가?"

마르코 영주가 전혀 모르겠다는 듯 흐릿한 눈빛을 해 보였다.

아, 모르는 척하시겠다?

"오래전 내려온 공고가 있을 텐데. 서쪽 산맥에서 내려온 몬스터에 관해서."

"글쎄. 나이가 들면 어제 있었던 일도 희미해지니 말일세."

"그래? 그럼 도움을 좀 줘야겠군."

나는 히죽 웃으며 책 읽는 투로 말하기 시작했다.

"개요. 위 몬스터는 서쪽 산맥을 주요 서식지로 삼고 있으며, 시체를 파먹는 습성이 있어 종종 민가를 습격한다."

마르코 영주의 낯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몬스터 명, 할파스. 몸길이는 대략 2미터에 육박하며, 뱀의 얼굴에 사자의 몸, 그리고 독수리의 날개를 갖고 있다."

"...."

"제국민의 평화와 안전을 위협하고 있기에, 발견 즉시 처치할 것을 명한다."

말을 마친 뒤 깍지를 낀 손을 무릎 위에 올렸다.

"분명 이런 공고문이 내려왔을 텐데. 황실의 인장이 찍힌 채로."

순간 마르코 영주의 눈이 슬그머니 내 옆을 향했다. 찰나였지만 내 동체 시력을 벗어날 순 없었다.

'저기 있는 서랍장에 들어있나 보네.'

속으로 짐작하면서 느릿하게 물었다.

"몬스터를 처치한 자에게 수여할 현상금도 같이 왔을 테고. 아닌가?"

"그게, 그것이... 들어도 기억이 나질 않네만."

마르코 영주는 끝까지 잡아떼기로 한 듯 모르쇠로 일관했다. 옆에 선 경비대장은 뒷짐을 진 채 딴청을 부렸다.

헛웃음이 나왔다.

'벌써 꿀꺽했군.'

서쪽 산맥은 산세가 몹시 깊고 험준해, 사람은 물론이고 몬스터조차 쉽게 길을 잃는다.

하지만 행인들이 몬스터의 습격을 받는 일은 종종 발생했다. 그래서 제국은 서쪽 산맥 인근의 유일한 영지인 이곳에 현상수배령을 내렸다.

'그동안 보낸 공문이 열 장이 넘을 텐데.'

충분히 욕심이 날 만한 일이었다. 이런 시골의 촌장이 언제 그리 큰 금액을 손에 쥐어보았겠는가.

게다가 베저크 영지는 위치적 특성상 방문객이 뜸한 편이다. 거기에 몬스터를 사냥한다는 조건까지 더해지면, 확률은 희박하게 낮아진다.

몇 년간 받아 가는 이 없는 거대한 현상금.

'그러니 손을 대기 더 쉬웠겠지.'

예상은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기에, 나는 그들을 더욱 쉽게 휘두를 수 있을 터였다.

"그럼 공문이 안 왔다는 건가?"

내 질문에 마르코 영주가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네. 로버트, 혹시 자네는 기억나는가?"

"음.... 아니오, 저도 본 적이 없습니다만."

"그렇다는 건, 아무래도 공문이 누락된 것 같은데."

"저런. 황실 측에서 실수한 모양입니다. 이거 큰일이군요."

"그러게 말일세. 그런 공문이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니."

두 횡령범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모습이 한 편의 연극 같았다.

아아,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그래?"

나는 입꼬리를 비틀어 웃은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성큼성큼 옆으로 걸어가 서랍장을 열어젖혔다.

"지금 뭐하는...!"

경비대장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는 서랍 한쪽을 완전히 뜯어냈다.

마르코 영주의 눈이 뒤집혔다.

"이 무슨 무례한 짓인가!"

하지만 내가 마르코 영주의 책상 위에 서랍을 뒤집은 순간,

촤라락.

그 속에 고이 잠들어 있던 서류들이 쏟아졌다. 동시에 마르코 영주의 입이 철컥 다물어졌다.

"흐음."

팔랑.

나는 그중 한 장을 집어 들어 살짝 흔들었다.

"여기 들어있었네?"

"아니, 그, 그게."

마르코 영주는 나와 서류를 번갈아 보며 더듬거렸다.

'그게 거깄는지 어떻게 알았지?'

하고 현실을 부정하는 얼굴이었다.

"그러면 이렇게 할까."

나는 서류를 책상에 툭 던지듯 내려놓은 뒤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거만한 자세로 다리를 꼬고 앉았다.

"내가 이 영지에서 하루 동안 쉬어갈 예정이거든."

"...."

"그동안 어떻게든 꿀꺽한 현상금을 마련하도록 해."

마르코 영주가 짧게 숨을 들이켰다.

"갑자기 그게 무슨...."

"시치미 그만 떼고. 꿀꺽 한 거 다 알고 있으니까."

나는 그를 향해 손가락을 펼쳤다.

"여기 온 공문은 총 15장. 현상수배금은 총 합쳐서 50만 골드."

원작의 주인공 카인이 서쪽 산맥의 몬스터를 쓸어버린 뒤, 이 영지의 비리를 밝혀내는 것은 원작에서도 손꼽히는 사이다 장면 중 하나였다.

'그 장면을 내가 재현하면 안 된다는 법은 없잖아?'

비릿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그게 내가 이곳을 떠날 때까지 준비되지 않는다면, 황제 폐하의 진노를 살 각오를 해야 할 거야."

"화, 황제 폐하?"

뜻밖의 단어가 등장하자 마르코 영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Chapter7. 내 것은 철저하게 지킨다. (3)

나는 어린아이에게 설명하듯 친절한 말투로 말해주었다.

"알다시피 그분께서는 자신의 것을 탐내는 이를 몹시 싫어하시지."

"...."

"그런데 마침 내가 수도에 올라가는 길이었거든. 그것도 영주 대리로."

품에 지니고 있던 디에고의 인장을 꺼내 슬쩍 흔들었다.

"가서 황제께 정확히 보고 드려야겠어. 베저크 영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말이야."

"화, 황제 폐하께...."

"그땐 이렇게 서랍장 하나를 뜯기는 일론 끝나지 않을 거야."

"지, 지금!"

마르코 영주가 목소리를 쥐어짰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했던가.

"지금, 나를 협박하는 거라면...."

"협박?"

나는 재밌다는 듯이 낮게 뇌까렸다.

"협박이라."

마르코라는 쥐가 문 곳엔 이빨 자국조차 남지 않았다. 그 정도로 그의 저항은 미약하고, 어리석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섭섭하지. 난 지금 기회를 주는 건데."

웃음기 어린 중얼거림을 흘리고, 몸속 깊이 잠들어 있던 기운을 일으켰다.

사아아-

내게만 들리는, 평범한 인간이라면 들을 수 없는 소리가 귓등을 스쳐 지나간다.

새카만 살기가 마르코 영주를 덮칠 듯이 뻗어 나갔다. 그의 발등을 덮으며 거슬러 올라가, 검고 깊은 안개 속으로 그를 빠뜨렸다.

"...헉!"

마르코 영주의 수염이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거칠게 진동했다. 새파랗게 질린 뺨 위로 식은땀이 비 오듯이 쏟아졌다.

"영주님?"

곁에 서 있던 경비대장이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그의 눈에는 영주가 갑자기 사색이 되어서 덜덜 떠는 것으로 보일 터였다.

그는 모를 것이다. 지금 마르코 영주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마르코 영주만 노리고 살기를 보냈으니까.'

지난 일주일은 내게 기운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했다.

특히 레퀴엠의 기운은 평상시엔 온전히 잠들어 있어 겉으로 전혀 드러나지 않도록 했다.

그 어떤 강자를 만나더라도, 그들의 눈엔 내가 평범한 귀족 자제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제국을 멸망시킬 만한 재앙, 레퀴엠을 손에 품고 있다고는 전혀 상상할 수 없을 테지.

"헉, 허헉!"

하지만 현재 마르코 영주는 그 기운을 정면으로 맞닥뜨린 상태였다.

일평생 마주해 본 적 없는, 한치앞이 보이지 않는, 깊이를 가늠할 수조차 없는 공허가 그의 앞에 아가리를 벌리고 있다.

눈앞이 빙빙 돌고 목이 졸리는 듯 숨이 막히며, 전신에 오한이 들면서 발밑이 쑥 꺼지는 듯해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 없을 것이다.

"영주님, 영주님?!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경비대장이 당황한 말투로 그를 연신 불렀다. 하지만 마르코 영주는 그의 말에 귀 기울일 상태가 아니었다.

양손으로 무릎을 꼭 쥔 채 이를 딱딱 부딪힐 뿐. 그는 새파랗게 빛나는 내 눈에서 감히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래, 이건 기회지."

"...."

"내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내어줄 기회 말이야."

부드러운 말투로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도 내 말이 협박으로 들리나?"

마르코 영주가 바들바들 떨며 입술을 벌렸다.

"...아, 허."

온전한 단어가 되지 못한 힘겨운 소리만이 새어 나왔다.

"으, 으허."

몇 번이고 목소리를 끄집어내려 애썼지만, 매번 허탕으로 돌아갔다. 그는 결국 힘겹게 고개를 옆으로 틀기 시작했다.

"...허, 허헉."

나는 옅은 미소를 지은 채 마르코 영주가 발악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의 힘없는 움직임이 겨우 좌우로 젓는 고갯짓이 되었을 무렵, "흠."

안개처럼 짙게 깔렸던 살기를 거둬들였다.

"흐어억!"

마르코 영주가 가슴을 움켜쥐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한참이나 목이 졸렸던 사람 같은 안색을 하고 있었다.

"영주님! 정신 차리십시오!"

경비대장은 혼란이 가득한 얼굴로 그를 다독이려 애썼다.

'좀 심했나.'

턱을 긁적이다가 이내 콧방귀를 팽 뀌었다.

'내 돈을 꿀꺽하려고 들면 황제라도 가만 안 둬.'

왜 수고로움을 감수해가면서 몬스터들 목을 썰어왔는데. 그것을 허사로 돌아가게 둘 순 없었다.

"그러니까 남의 것을 훔칠 땐 뒷일을 각오했었어야지."

내 통렬한 한 마디에 마르코 영주의 얼굴이 까맣게 썩어들어갔다. 그가 뿌리부터 썩은 나무처럼 고개를 아래로 푹 꺾였다.

"알겠...네."

상대방의 뻣뻣하던 목이 무두질이라도 한 듯 부드럽게 꺾이는 것은 언제 보아도 흡족한 모습이었다.

"돈은 어떻게든 마련하겠네. 그러니 부디 이 일은...."

완전히 굴복한 듯이 힘 빠진 목소리였다.

"아, 물론이야."

나는 흔쾌히 손을 흔들었다.

"현상금만 정확히 지급하면 돼. 원래 받아야 할 돈을 받는 거니 문제 될 게 없지."

말을 마친 뒤 할파스의 머리를 집어 다시 자루에 넣었다.

"아, 그리고."

자루의 입구를 여미며 잠깐 사이 10년은 늙어버린 듯한 마르코 영주에게 말했다.

"내가 집을 떠나온 지 좀 오래되어서 말이야. 내 방이 좀 많이 그립네?"

"...?"

마르코 영주가 흐릿한 눈을 크게 뜨려고 노력했다.

"이 그리움이 심해지면, 글쎄. 빨리 이 영지를 떠나서 수도로 가고 싶어질지도 모르겠어."

마르코 영주의 얼굴에 조급함이 떠올랐다. 나는 그의 안색 변화를 지켜보며 즐겁게 읊조렸다.

"중부산 고급 매트리스를 깐 침대 위에, 거위털 100%로 가득 채운 이불을 세 겹 이상 깔고."

"...."

"목욕물에 쓸 향료를 3가지 이상 준비하도록 해. 나는 여러 향을 섞어서 쓰는 걸 좋아하거든."

듣고 있던 경비대장의 얼굴이 점점 구겨졌다.

"그리고 식사는 매번 메인 디쉬를 3가지 이상 준비하고, 디저트에는 반드시 레몬이 들어가야 해."

나는 픽 웃으며 깍지 낀 손을 머리 뒤로 올렸다.

"기대해도 되겠지?"

❖ ❖ ❖

제국에는 수도 마기오레를 중심으로 하여, 동서남북으로 크게 펼쳐진 대로가 있다.

그리고 그 길 위엔 수도 마기오레의 서쪽에 위치한 도시, 다반티가 있다.

서쪽 영지에서 수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곳. 교통의 중심지에 있어 무역과 상업이 발달한 도시.

다반티의 거대한 관문 앞.

그곳에는 다양한 생김새와 연령, 성별을 가진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으아아아."

덥수룩한 수염과 며칠 동안 감지 않아 떡이 된 머리를 가진 남자가 한 명 있었다.

"여기에도 안 계시면 어쩌지?"

그는 기사 요나스 클라인이었다.

찬란한 금발과 물망초처럼 새파란 눈동자는 온데간데없었다. 그의 몰골이 어찌나 꾀죄죄한지, 오베스트 기사단의 사람이 보아도 알아보지 못할 지경이었다.

"여기에도 없으면 정말 답 없는 건데. 빌어먹을."

그는 기사답지 않게 걸쭉한 욕을 질겅질겅 씹으며 발로 땅을 탁탁 두드렸다.

"제발, 제발 여기엔 있어라."

그는 심적으로 불안한 듯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자꾸 혼잣말을 하며 서성거리는 그를 사람들이 이상한 사람 보듯이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그 시선을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깊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혹시 내가 안 거친 데가 있던가?"

그의 발걸음이 갑자기 멈추었다. 그가 꾀죄죄한 배낭에서 손때가 묻다 못해 시커멓게 변한 지도를 꺼내 들었다.

"여기서부터,"

떨리는 손가락이 오베스트 영지를 짚었다.

"카데르, 에이크...."

그리고 동쪽을 향해 서서히 나아갔다.

"와이트..., 그리고 다반티."

그가 중얼거리는 것은 오베스트 영지에서 제국의 수도까지 가는 대로 위에 위치한 도시 이름이었다.

서쪽에서 수도로 오기 위해서는 이 길이 최단 루트였으며, 가장 안전하고 효율적이었다.

요나스는 지금껏 이 길을 따라서 쭉 달려왔다. 말을 마구 재촉해서 최고 속도로, 들리는 도시마다 말을 갈아가며, 쉬는 일 없이 최대한 빠르게 전진했다.

"도련님은 대체 어딜 가신 거야?"

바로 아벨 오베스트 킨드리얼을 찾기 위해서.

아벨이 영주의 인장과 함께 사라진 그 날, 그는 필립과 함께 온 영지를 쥐잡듯이 뒤졌다.

그리고 아벨이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 심각한 문제는, 성문의 문지기가 아벨이 지나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정말이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무슨 땅에서 사람이 증발한 것도 아니고.'

어쨌건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요나스는 필립에게 계속해서 아벨을 찾게 하는 한편, 말을 구해 바로 출발했다. 아벨이 먼저 지나갔으리라 짐작되는 길을 되짚으며 나아갔다.

하지만.

'아벨 오베스트 킨드리얼님이요? 그런 분은 보지 못했는데요.'

모든 영지의 경비병들은 하나 같이 그렇게 대답했다. 방문객의 신분패를 일일이 확인하는 그들이 아벨 정도 되는 신분의 남자를 기억하지 못 할리 없었다.

'아뇨, 진짜 못 봤습니다. 믿어주십시오.'

그런데 정말 없었다. 정말로.

'푸른 머리에 청보랏빛 눈이요? 그런 사람은 못 봤는데.'

그들은 마치 아벨의 털끝조차 보지 못한 것처럼 굴었다.

요나스는 그제야 그들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아벨의 외모로 눈에 띄지 않고 관문을 지나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말도 안 돼."

요나스는 입술을 잘근잘근 짓씹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지금 이 상황은 도무지 불가능했다.

"나보다 더 빨리 말을 몰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의 기마술은 기사단 내에서도 제법 인정받는 축에 속했다. 그런 그가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하고 쉴새 없이 달려갔으니, 이론상으론 아벨을 따라잡아야 마땅했다.

"게다가 필립이 팔도 다쳤다고 했고."

그러니 더더욱 속도를 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요나스는 어떤 방식으로든 아벨을 마주했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왜 없냐고!"

견디다 못한 요나스는 버럭 고함을 지르고 말았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그의 고함에 흠칫 놀라 뒤로 멀어졌다.

"젠장!"

그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들고 있던 지도를 바닥에 던져버렸다. 이미 그가 수십 번 내던진 탓에 지도의 귀퉁이는 너덜너덜하게 변해 있었다.

"젠장, 젠장!"

요나스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미치겠네, 진짜."

환장할 노릇이었다.

중간중간 필립과 전서구를 주고 받았지만 신통한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여전히 아벨이 행방불명이라는 답답한 이야기뿐이었다.

"도대체 어디로 갔냔 말이야. 이 길 말고는 갈 곳이 없는데."

요나스의 시선이 바닥에 활짝 펼쳐진 지도를 향했다. 이미 수십 번 들여다본 탓에 산의 모양마저 외어버릴 판이었다.

"...아니지."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그가 문득 중얼거렸다.

"다른 길이 없지는 않아."

다시 지도를 집어 들어 코를 처박았다. 그의 충혈된 눈이 지도 남서쪽을 향했다.

"이쪽 산맥을 타고 내려와서, 올라가는 길도 있긴 하지."

귀신 들린 사람처럼 중얼거리던 그가 이내 하, 웃음을 터뜨렸다.

"요나스, 네가 정녕 미쳤구나."

허탈한 웃음은 이윽고 킬킬대는 소리로 바뀌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릴. 서쪽 산맥에 득시글거리는 몬스터가 몇 마린데. 그쪽 길로 가는 건 자살 행위야."

무엇보다 그 길로 갔다면 결코 제시간 안에 수도에 도착할 수가 없다.

그 험난한 몬스터 소굴을 뚫고 가야 하는 데다, 직진이 아닌 빙 돌아가는 경로였기 때문에.

이미 귀족 회의의 소집일이 사흘 앞으로 성큼 다가와 있었다. 늦어도 오늘까진 다반티에 와 있어야 했다.

"혹시 수도로 향한 게 아닌가? 어디 다른 데서 놀고 계시는 거 아냐?"

너무나 답답한 나머지 요나스는 그런 생각도 했다.

Chapter7. 내 것은 철저하게 지킨다. (4)

하지만 이 또한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아벨에겐 모든 의식주가 호화롭게 갖춰진 제집을 버리고 떠날 이유가 없었다.

"아니, 그리고 도련님이 뭔 뾰족한 수가 있어서? 돈을 벌 방법도 없잖아."

세상 물정 모르는 도련님의 가출이란 짧게 끝나기 마련이다. 지금쯤이면 가져간 돈을 모두 탕진하고, 빈털터리가 된 채로 터덜터덜 영지에 돌아와야 마땅했다.

그러나 아벨은 생각보다 더 오래 요나스의 속을 갉아대고 있었다.

"젠장, 인장만 아니었어도."

그것이 아벨의 손에 들어가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허덕이며 아벨을 추적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 철없는 도련님이 가출을 하든 말든, 어디서 굶어 죽든 말든 그가 상관할 일은 아니었으니까.

"후우...."

차근차근 제 앞의 줄이 줄어들고 있었다. 요나스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푹 쉬며 앞으로 나아갔다.

"신분패를 보여주십시오."

지쳐 보이는 인상의 경비병이 요나스를 맞이했다.

"...."

경비병은 요나스의 행색을 한 번 훑고는 슬그머니 뒤로 물러섰다. 오랫동안 씻지 않은 요나스에게서 영 좋지 않은 냄새가 나는 탓이었다.

'제기랄. 꼴이 말이 아니군.'

요나스는 욕설을 씹어삼킨 뒤 품에 들어있던 신분패를 내밀었다.

"요나스 클라인. 오베스트 기사단 소속입니다."

내용을 확인한 경비병이 급히 몸을 바로 세웠다. 요나스를 보는 그의 눈빛이 180도 변했다.

"어서 오십시오, 기사님."

몬스터들이 쉴새 없이 쏟아져 나오는 서쪽 영지의 끝에서 국경을 지키는 기사단. 제국 최강의 검사 디에고 킨드리얼의 직속 기사단.

일개 경비병에게 오베스트라는 이름은 몹시도 멀고 높은 위치에 있었다.

"다반티 영지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경비병의 피로함이 가득한 얼굴에서 눈동자만이 샛별처럼 빛났다. 그는 선망과 존경이 가득한 표정으로 요나스를 바라보았다.

"네, 수고하십니다."

요나스는 경비병보다 더 지친 목소리로 대꾸했다.

"뭐 하나만 물어봅시다."

"예, 말씀하십시오."

"사람 한 명을 찾고 있습니다. 이 관문을 지나갔으리라 보고 있고요."

"이름이 어떻게 되는지요?"

요나스는 별 기대를 품지 않은 채, 아니 품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대답했다.

"아벨 오베스트 킨드리얼."

경비병의 안색이 급변했다.

그 모습을 본 요나스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그가 다급히 경비병을 다그쳤다.

"지나갔습니까? 언제였죠?"

"아, 그게. 정확한 건 잘 모릅니다. 저도 어제 근무한 사람에게 들어서."

요나스는 마음이 급한 나머지 그에게 성큼 다가섰다.

"그게 누굽니까?"

"어엇, 잠시만요."

경비병이 두 손바닥을 내밀어 요나스를 저지했다. 남들보다 강대한 체격의 요나스는 다가오는 것만으로도 위협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그게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요나스의 음성이 극도로 낮아졌다. 다른 쪽 줄에서 신분패를 검사하던 경비병이 목을 길게 뺐다.

"이봐, 무슨 일이야?"

"어, 그게...."

"어제 근무한 사람!"

요나스는 경비병의 말을 끊어먹으며 외쳤다.

"누굽니까?"

몹시 다급하고도 격렬한 분노를 담은 목소리로.

"저, 절 부르셨습니까...?"

소란 아닌 소란에, 밥을 먹고 있던 경비병은 포크를 내려놓은 채 끌려나와야 했다.

"아벨 도련님이 여길 지나갔습니까?"

요나스의 어조가 심상치 않자 경비병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예, 맞습니다."

"그게 언제쯤이었죠?"

"어.... 대략 어제 오전쯤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제 오전. 약 하루 전의 일이었다.

아벨은 그의 희망적인 상상처럼 가출한 게 아니었다. 명확한 의도를 가지고 수도로 향하고 있었다.

그보다 더 빠르게.

"빌어먹을!"

요나스는 습관이 되어버린 욕설을 내뱉었다. 그의 험악한 기세에 주변의 경비병들이 움찔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도련님께 무슨 일이라도?"

경비병이 행여 이 일로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걱정스러운 눈치였다.

"대장님께 보고 드릴까요? 협조가 필요하십니까?"

"아니, 아니. 아닙니다. 그럴 필요까진 없습니다."

요나스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지금 아벨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자신이 디에고 영주님의 인장을 아벨에게 빼앗겼다는 사실이 알려질 테니까.

그는 비밀스럽고 조심스럽게 아벨의 뒤를 쫓아야만 했다. 다른 이에게 알리지 않은 채.

'침착하자, 침착해.'

요나스는 두방망이질 치는 심장을 가라앉히려고 애썼다. 오랫동안 소득 없는 추적을 벌인 끝에 겨우 실마리를 잡은지라 쉽진 않았지만.

'진정해라, 요나스. 이 기회를 놓쳐선 안 돼.'

차분하고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했다. 지금까지 축적한 실패를 해소하기 위해선.

일단은 아벨이 수도에 도착하기 전 따라잡는 게 급선무였다.

'빨리 움직여야겠어.'

요 며칠간 먹구름이 낀 것처럼 흐릿했던 머릿속이 비로소 개였다. 요나스는 모처럼 기사단에 근무하던 시절의 명석함을 되찾았다.

"몇 가지 묻겠습니다."

그는 극도로 침착해진 말투로 본격적인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도련님이 지나갈 때 어떠셨습니까?"

"어, 그때 말입니까?"

자신에게 쏟아지는 질책이 없자, 경비병은 다소 안심한 기색으로 말했다.

"일단 멀리서부터 굉장히 눈에 띄긴 했습니다. 엄청 희귀하고 비싸 보이는 고급 말을 타고 계셨거든요."

"비싸 보이는 말?"

"네. 제가 여기서 수많은 말이 지나가는 걸 봤지만 그만한 말은 본 적이 없었죠. 초콜릿색 몸에서 어찌나 윤기가 좔좔 흐르던지, 눈이 부실 지경이었습니다."

그런 고급 말은 오베스트 영지에서 구할 수 없었다. 아벨이 중간에 구해서 탄 게 분명했다.

'무슨 돈이 있어서 그렇게 비싼 말을 구한 거지?'

요나스는 의구심을 느끼며 경비병을 채근했다.

"그리고 또? 어디 불편해 보이진 않으셨습니까?"

"어, 글쎄요. 그런 점은 없었는데요. 그냥 척 봐도 귀족 자제분이다, 라는 느낌이 드는 차림새였습니다."

"...."

"아, 보통 다른 귀족분들은 마차를 타고 오시는 데 말을 타고 오신 게 좀 희한하긴 했죠."

경비병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서 괜찮으시냐고 물었더니, 그냥 픽 웃고는 '난 이게 더 편해.'라고 하셨습니다."

요나스는 이마를 찌푸렸다.

'팔이 부러졌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말을 탄 거지?'

집사에게 들은 바로, 아벨의 팔은 아직 회복되는 중이어야 했다. 그래서 마차를 타고 갈 줄 알았는데 이건 좀 의외였다.

'게다가 뭐? 차림새가 어떻다고?'

요나스는 자신의 행색을 돌아보았다. 흙먼지가 가득한 옷, 다 낡아 해진 신발까지.

처음에 오베스트 영지를 출발할 때와는 너무나 달라진 모습. 그 유명한 오베스트 기사단 소속이라고는 보기 힘든 몰골이었다.

'어떻게 그런 여유로운 모습으로 여길 통과한 거지?'

그것도 자신보다 빠르게, 자신이 짚어간 경로를 피해서.

의혹은 더더욱 커져만 갔다.

무엇보다, 자신이 이렇게 고생하는 동안 아벨이 희희낙락 웃으며 이곳을 통과했다고 생각하니 속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

요나스는 소리 나게 이를 갈아붙이며 배낭을 단단히 묶었다.

이제 알아낼 것은 다 알아냈다. 어서 관문을 통과해 말에 올라타야 했다.

"아, 맞다!"

갑자기 경비병이 이마를 딱 때렸다.

"그러고 보니 아벨님께서 전하란 말씀이 있었습니다."

"네? 나한테요?"

"예. '수도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라고 하셨습니다."

경비병은 순진한 얼굴로 덧붙였다.

"그냥 전해달라고만 하셔서 무슨 말인지 몰랐습니다만. 이제보니 요나스님께 전하는 말씀이셨군요."

요나스는 경비병을 바라보며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속에서 치솟았던 불길이 그의 목구멍을 지글지글 불태우고 있었다.

'수도에서 기다리고 있겠다.'

그리 말하며 씩 웃었을 아벨을 생각하니, 더이상 참을 수 없어졌다.

"...."

요나스는 대꾸도 없이 말에 올라탔다.

"기사님, 잠깐만-"

경비병의 말을 무시하고 말의 옆구리를 힘차게 걷어찼다.

"히히힝!"

갑자기 옆구리를 채인 말이 거친 울음소리와 함께 뛰기 시작했다.

"으아악!"

"다들 피해!"

"꺄악!"

"물러서요!"

다반티 마을의 중앙 대로변 일대에 혼란이 빗발쳤다. 다들 무서운 속도로 대로를 가로지르는 말을 피해 바깥쪽으로 피하기 바빴다.

"아니, 저런...!"

관문에 서 있던 경비병들은 황망한 얼굴로 그 소란을 바라보았다.

"오베스트 기사단 소속이라 그런지, 거만하기 짝이 없구먼."

"허 참, 최강의 기사단이면 다인가. 사람을 이렇게 오라 가라 해놓고 말이야. 자네 괜찮나?"

수군거리던 경비병이 밥 먹다가 난데없이 끌려와 봉변을 당한 경비병에게 물었다. 하지만 질문을 받은 경비병은 멀거니 서 있을 뿐 대답이 없었다.

"이봐, 괜찮아?"

"아, 예?"

그는 뒤늦게 꿈에서 깨어난 듯 멍한 얼굴을 했다.

"예, 예. 괜찮습니다."

하지만 그의 뇌리엔 아직도 요나스의 얼굴이 맴돌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 말에 올라타기 직전 요나스의 흉하게 일그러진 얼굴은....

꼭 누군가를 죽이러 가는 듯했다.

"으아아악!"

다반티 마을을 통과하는 요나스의 뺨 위로 한 줄기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아벨 킨드리어어어얼!"

심지어 그는 아벨의 이름을 마구 부르는 짓까지 자행하고 있었다.

요나스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내 반드시, 기필코!

이 천둥벌거숭이 같은 도련님의 궁둥짝을 걷어차고 말겠노라고.

❖ ❖ ❖

팔락, 팔락.

"흐으응."

성서가 한 장 한 장 넘어가는 소리와 콧노래가 섞였다.

둥근 형태의 넓은 방은 호화로운 가구로 가득했다. 제국 수도의 장인이 섬세하게 조각한 최고급 램프라던가, 드물게 발견되는 백색호랑이의 모피를 무두질하여 바닥에 깐 카펫 등이 그러했다.

"흐응."

방 안에는 푹신한 의자에 걸터앉아 성서를 읽는 성녀, 라헬이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봄의 기운을 물씬 머금은 듯 연녹색이었고, 봄처럼 생기 어린 낯에는 홍조가 감돌았다.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맞은편 벽에서 성녀의 옷가지를 정리하고 있던 신관이 말했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그의 질문에 라헬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일 없어요."

"하지만 정말 흐뭇해 보이십니다."

"그래요? 그냥 성서를 읽다 보니 마음이 흐뭇해져서 그런가 봐요."

라헬이 머리카락을 배배 꼬며 배시시 웃었다. 부드러운 흰 빵 같은 뺨 위로 미소가 스치자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아아."

신관은 저도 모르게 제 가슴을 움켜쥐고 말았다.

정말이지 그가 모시는 성녀 라헬 님은 너무도 귀여웠다. 그는 지금껏 봐온 10대 소녀 중 라헬만큼 귀엽고 어여쁜 소녀는 보지 못했다.

그뿐이랴. 라헬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제국 유일한 성녀다운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쉬는 시간에도 틈만 나면 저리 성서를 읽고, 성서의 내용에 진심으로 감동 받아 흐뭇해하는 모습.

거기에 이 제국의 누구도 발현하지 못했던 신의 권능까지.

라헬은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이고 완벽한 성녀의 상이었다.

Chapter7. 내 것은 철저하게 지킨다. (5)

"성녀님, 아까 신전에서 준비한 다과가 식겠습니다. 어서 드시지요."

그는 이렇게 성녀를 가까이서 모시게 된 것에 무척 감사했다. 그래서 성녀의 신변에 어떤 불편함도 없도록 성심성의껏 그녀를 살폈다.

"으응, 괜찮아요. 지금 먹으면 성서에 부스러기가 묻는걸. 다 읽고 먹을게요."

라헬은 손을 내젓고는 다시 성서로 시선을 돌렸다. 그 모습에 신관은 다시 가슴을 움켜쥐어야만 했다.

'이런 달콤한 다과에 약할 나이이신데.'

얼마나 신앙심이 깊으면 다과마저 눈에 안 들어올 지경인 건지. 정말이지 너무나 존경스러웠다.

라헬은 습관적으로 머리카락을 배배 꼬면서 다른 손으론 성서를 팔락팔락 넘겼다.

"그런데요."

문득 그녀의 입이 움직였다.

"예, 성녀님. 말씀하십시오."

"혹시 요새 재미있는 소문 같은 거 없어요?"

신관은 고개를 갸웃했다.

"소문이라면 어떤...?"

라헬이 머리를 꼬는 속도가 더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흡사 나무 덩굴과 비슷한 형태가 되어갔다.

"으음, 그러니까...."

라헬은 미간을 모았다가, 입술을 오므렸다가 하며 고민했다.

"으음, 이걸 뭐라 해야 하지?"

그녀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겨우 말했다.

"왜 막, 뭐, 그런 거 있잖아요. 막 어디에서 큰일이 났다던가, 엄청난 사람이 나타났다던가, 그런 거요."

참으로 뜬구름 잡는 듯한 소리였다.

신관은 라헬이 무엇을 원하는 건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앳된 얼굴의 소녀가 평소에 '지루해.'를 입에 달고 산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도 성녀의 삶은 퍽 단순하고 반복적이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기도실에서 보냈으며, 간혹 그레이트홀에 나타나 미사에 참여하곤 했다.

친근한 사이의 친구도 없고, 비는 시간에 시내에 놀러 가거나, 쇼핑을 즐기는 모습조차 보지 못했다.

그가 본 성녀는 그저 신전의 일정에 따라 움직이는 인형에 불과했다.

그녀에 대한 존경심과는 별개로, 한 인간으로 보았을 때 동정심이 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성녀님께서 많이 지루하셨나 봅니다."

신관은 성녀의 뜬금없는 질문에도 내색하지 않고 미소 지었다.

"죄송합니다만 저도 들은 바가 없습니다. 제 귀에도 들려올 정도라면 꽤 떠들썩한 일일 텐데 말입니다."

"흐응, 그래요?"

순간 라헬의 입가에 의미 모를 미소가 스쳤다. 하지만 몸을 돌려 뭔가를 부스럭거리고 있던 신관은 그것을 보지 못했다.

"비록 성녀님께 허락된 도서가 많지는 않지만.... 이건 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가 준비해온 신문뭉치를 성녀에게 건넸다.

"지난 일주일간의 소식이 들어있습니다. 성녀님의 지루함을 쫓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면 좋겠군요."

"와아!"

라헬의 입이 활짝 벌어졌다. 가지런한 치아가 드러나 환한 미소로 번졌다.

"고마워요!"

그 미소에 신관은 그간의 피로가 싹 잊히는 느낌이 들었다. 한편으로 성녀의 환심을 산 것 같아 뿌듯했다.

혹시 모르지 않은가. 성녀가 자신을 마음에 들어해 축복을 내려줄지도.

"흐흥~"

성녀는 콧노래를 부르며 신문을 펼쳤다. 그리고 꼼꼼하게 천천히 기사를 훑었다.

'무슨 내용인지 알기는 하실까?'

신관은 곁에서 침대를 정리하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성녀는 성서의 내용에는 빠삭하지만, 그 외 세상 물정에는 어두울 터였다. 오고 가는 곳이 신전과 황궁뿐이니까.

그런데도 뭘 저리 진지하게 보는지 모를 일이었다. 턱까지 괴고 신문에 몰두한 모습이 귀엽기도 했다.

"곧 귀족 회의가 있다죠?"

그렇게 질문하는 라헬의 눈가에 날카로운 기운이 스쳤다. 어린 소녀가 보이기엔 퍽 신중하고 노련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신문에 가려진 탓에 신관에게 보이진 않았다. 그는 성녀가 일정을 확인하려니 싶어 흔연스럽게 답했다.

"예, 정확히는 이틀 뒤에 시작됩니다. 그래서 황실에서도 요새 꽤 바쁜 것 같더군요."

"그렇지. 덕분에 나도 좀 살겠네."

라헬이 가라앉은 말투로 작게 중얼거렸다.

"예?"

"으응, 아니에요."

신문 옆으로 라헬의 얼굴이 빼꼼 나타났다.

"그보다 나 슬슬 배고픈데. 식당에 음식을 준비하라고 해 줘요."

"예, 알겠습니다."

신관은 허리를 깊이 숙인 뒤 방문을 닫고 사라졌다. 신문을 넘기던 성녀의 손이 멈추었다.

툭.

라헬은 신문을 내려놓고 그대로 몸을 의자에 기댔다.

끼이익.

몸을 뒤로 젖혀 천장을 바라보았다.

"...."

라헬의 얼굴이 무표정하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언제 베시시 웃었냐는 듯 차가운 낯을 하고 있었다.

"언제까지 이 유치한 짓거리를 해야 하는 건지."

라헬의 입술 새로 이를 가는 듯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차라리 테오도어 그 새끼 앞에선 되는대로 뱉어도 되니 편한데."

혼자 남게 되자 예절 바르고 부드러운 말씨는 갖다 버리고, 본연의 불량스러운 말투가 튀어나왔다.

"그 무능하고 욕심만 더럽게 많은 새끼가 도움이 될 때도 있다니, 어처구니가 없네."

그녀는 제국 황제의 이름을 마구 부르며 습관처럼 욕설을 짓씹었다. 그러다 아차, 하고 손으로 입을 가렸다.

"어머, 내가 무슨 험한 말을. 신께서 노하실라."

그녀는 혼이라도 내듯 손으로 입술을 찰싹 때렸다.

"디오 베네디카."

성호를 그리며 눈을 감은 뒤 조용히 속삭였다.

"신이시여, 만민에게 신의 자애로움을 전파해야 할 제가 말실수를 했나이다.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극적인 말투로 기도를 마친 라헬이 눈을 번쩍 떴다. 그녀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얼어붙은 잎의 결정처럼 차게 반짝였다.

"그러니까 부디 나가 뒈지세요, 네?"

그녀는 신을 믿지 않았다.

몇백 번을 기도해도 신은 그녀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았다. 만약 신이 정말로 존재했다면, 이토록 불행하고 지독한 삶을 제게 안배했을 리 없었다.

"뭐, 이번 신관도 순진해 보여서 다행이네. 다루기 쉬워 보여."

라헬은 가차 없는 말투로 방금 나간 신관을 깎아내렸다.

"저 녀석도 머지않아 끌려나가겠지만."

그녀를 곁에서 보필하는 신관들은 일주일을 채 못 넘기고 교체되곤 했다. 그리고 그 후로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그것은 그녀가 몸에 품고 있는 비밀 때문이었다. 황제는 결코 그 비밀이 새어 나가길 원치 않았다.

"흥."

콧방귀를 거세게 한번 뀐 뒤 라헬이 팔짱을 꼈다.

"지금쯤 어디 있으려나?"

그녀가 눈을 감고 노래하듯 읊조렸다. 무표정하던 얼굴에 천천히 감정의 빛깔이 서리기 시작했다.

"레퀴엠, 레퀴엠. 어디에 있니."

그녀의 머릿속으로 제국 지도가 떠올랐다. 그 위에 레퀴엠의 이동 경로를 그려보기 시작했다.

"처음 강림한 영지는 초토화되었을 테고.... 아마 다음 영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겠지."

라헬이 처음 레퀴엠의 존재를 인지했을 때, 그 기운은 먼 서쪽으로부터 전해지고 있었다.

"서쪽이라면, 그래. 서쪽 산맥이 있는 곳이군. 거기라면 레퀴엠이 나타날 만해. 이 제국 어디에도 거기만큼 많은 죽음이 깃든 곳은 없을 테니까."

라헬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영주가 디에고 오베스트 킨드리얼이었나? 국경의 몬스터만으로도 힘든데, 레퀴엠까지 나타나면 답이 없겠네. 지금쯤 레퀴엠한테 잡아 먹힌 지 오래겠는걸? 안됐군, 안 됐어."

그렇게 말하고 있지만, 라헬의 입가에는 감출 수 없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갑작스러운 재앙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학살당하는 비극.

모든 생명을 굽어살피는 성녀에겐 마땅히 슬퍼해야 할 일이었다. 그리고 최대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 나서야만 했다.

하지만.

"다음은 어디일까? 카데르? 아니지, 어쩌면 에이크까지 갔을지도."

라헬은 그저 웃음기 어린 말투로 레퀴엠의 행방을 점칠 뿐이었다.

그녀는 이미 몇 주 전에 레퀴엠의 강림을 알아챘고,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예측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또 곧 열릴 예정인 귀족 회의에 귀띔할 생각도 없었다.

"다음은 이곳 마기오레겠지. 좋아, 잘하고 있어."

라헬은 마치 레퀴엠을 응원하듯, 혹은 재촉하듯 중얼거렸다. 아니, 정확히는 자신의 소망이 이루어지길 기도하는 듯했다.

그녀의 머릿속에 이 제국의 안위는 조금도 들어있지 않았다. 일말의 애정도 혹은 미련조차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녀에게 이 제국은 세계에서 사라져야 할 악이자 암 덩어리였다.

"전부, 전부 없애버려."

라헬의 목소리가 서글픈 떨림을 머금었다.

"그래서... 제발, 나를 죽여줘."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고, 산다고 해서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타인에게 이용당하고 갈취당하는 삶. 라헬은 몇백년간 이토록 불쾌하고 타율적인 삶을 지속해왔다.

길게 이어진 고통의 굴레를, 이제는 끊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은 레퀴엠만이 이루어 줄 수 있는 일이었다.

오직, 레퀴엠만이.

"이제 2주 정도 지났나.... 하지만 아직 만족하지 못했겠지."

라헬은 머릿속으로 현재 레퀴엠이 어떤 모습일까 상상해보았다. 그녀는 비교적 레퀴엠의 특성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레퀴엠을 쥔 학살자는 흔히 소설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온몸에 피 칠갑을 하고 있지 않다.

"그러니까... 아마 새카만 악마처럼 움직이고 있겠지."

가장 조용하고, 빠르게, 그리고 깨끗하게 상대의 생기를 거둔다. 새카만 공허의 기운을 몸에 두른 채, 바람처럼 움직여 다음 희생양을 찾는다.

"레퀴엠, 레퀴엠. 지금 뭐하고 있니."

라헬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레퀴엠이 등장한 이후로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해왔던 일을 해보았다.

"...."

저 멀리, 어딘가에서 레퀴엠의 존재가 느껴졌다.

라헬은 거기서 나아가 레퀴엠의 상태를 파악하려고 애썼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략적인 느낌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레퀴엠은, 지금 그러니까... 아주 잠잠했다.

"...?"

라헬은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 왜 이렇게 조용한 거지? 꼭 잠든 거 같잖아?"

레퀴엠의 근원이 되는 감정은 공허, 허기, 살의다. 놈은 결코 만족하지 않으며,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집어삼킬 때까지 끊임없이 사용자를 채근한다.

그렇기에 항상 불만족스러워야 정상이건만.

"음.... 혹시 충분히 배부를 만큼 먹고 잠이 든 건가?"

그거 외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레퀴엠에 의한 재앙의 시작은 쉽게 알려지지 않는다. 하룻밤이 지나면 마을 하나가 송두리째 사라진다.

살아남은 이가 아무도 없기에 소식조차 늦게 전해진다. 주변 마을에서 이변을 감지했을 때는, 이미 레퀴엠의 살육이 시작되고 있을 즈음이다.

그래서 라헬은 이토록 세상이 조용한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건 처음 보는데...?"

현재 레퀴엠의 상태는 조금도 당연하지 않았다.

이전에 레퀴엠이 나타났을 때, 놈은 생명을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다가, 결국 죽일 게 없어진 후에야 스스로를 죽이고 세상에서 사라졌었다.

그러니 지금도 미쳐 날뛰고 있어야 정상이었다.

"이상하다? 레퀴엠이 왜 이러지?"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에, 라헬은 한 가지 가설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설마... 누군가 녀석을 지배하는데 성공한 건가?"

잠시 멍하니 있던 라헬은 이내 헛웃음을 터뜨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릴 했네. 한낱 인간이 레퀴엠을 지배한다니."

가당치도 않은 소리였다.

Chapter8. 속을 살살 긁는다. (1)

이것은 현 황제 테오도어가 자살을 한다는 것보다 더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였다. 그의 생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은 어마어마했으니까.

"그래, 내가 착각한 거겠지. 아니면 배가 불러서 아주 잠깐 쉬고 있다던가."

라헬은 웃음을 거둬들이며 다시 신문을 펼쳤다. 슬슬 신관이 돌아올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순간 멈칫했다.

"어라?"

기분 탓인지, 방금 레퀴엠의 기운이 조금 커진 것 같았다. 마치 놈이 가까이 오기라도 한 것처럼.

"...아냐, 그럴 리가. 레퀴엠이 여기까지 왔는데 세상이 이토록 조용할 리 없어."

라헬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말 그런 거라면, 지금쯤 난리가 났어야 정상이야."

만약 레퀴엠이 수도 근처까지 접근했다면, 황제가 자신을 가만 내버려 둘리 없었다. 제 혈육보다도 성녀를 더 소중하게 여기는 놈이므로.

아니, 정확히는 제 몸속에 들어있는 세레나드를.

봄의 검, 세레나드.

이명으로는 봄볕의 수호자, 절대적 구원자, 그리고... 생명의 검.

세레나드를 가장 잘 설명하는 이름이 바로 이것이었다. 레퀴엠과 상반되는 극점에 이른 성질.

레퀴엠이 상대방의 생기를 빼앗는다면, 세레나드는 반대로 상대방에게 생기를 건넬 수 있었다.

세레나드가 품은 생명력은 너무나 강대하여, 마르지 않는 우물처럼 퍼내도 퍼내도 소진되지 않았다.

절대로.

황실은 라헬을 이용해 정권을 굳건하게 유지했다. 세레나드의 강대한 생명력을 신의 힘이라고 부르면서.

[신이 이 황실을 수호하고 지지한다.]

제국들의 지지를 이끌어 내는데 이만한 수단이 없었다.

그래서 라헬은 몇백년의 긴 삶을 늘 권력자들에게 이용당해야 했다. 그들은 결코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

라헬은 다시 한번 레퀴엠의 기운에 집중해보았다. 레퀴엠의 감정이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착각했나 보네."

라헬은 고개를 내젓고는 문가를 바라보았다. 그 너머에서 뚜벅뚜벅 걸어오는 신관의 존재가 느껴졌다.

그녀는 쳐다보는 것만으로 상대방이 몸 상태를 즉각 알아챌 수 있었다. 어떤 부위가 손상을 입었는지까지 정밀하게 보였다.

세레나드의 소유자가 깨우치게 되는 능력. 라헬은 오랜 시간 세레나드와 함께한 만큼 숨 쉬듯 그 능력을 사용할 수 있었다.

"배가 고픈가 보군."

라헬은 피식 웃으며 신관의 복부에서 눈을 돌렸다.

식사를 마친 그녀는 신전 밖으로 나섰다. 주기적으로 수도 안을 돌며 축복을 내려야 하기 때문이었다.

"하아."

마차로 향하는 라헬의 입가에서 짜증스러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축복 같은 소리하고 있네.'

사람들에게 축복으로 알려진 이 힘은, 사실 세레나드의 생명력을 사용하는 것에 불과했다.

'귀찮아 죽겠어, 정말. 이딴 행사는 왜 만들어서.'

신전에 막대한 기부금을 내는 이를 대상으로 축복이란 이름 아래 생명력을 주입한다. 이는 결국 세레나드의 힘을 기부금과 맞바꾸는 것에 다름없었다.

"...."

라헬은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마차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도 있고, 저기도 있고.'

그녀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기사들이 포진해 있었다.

모두 성녀를 감시하기 위해 황제가 배치한 인원이었다. 인원이 어찌나 많던지 이게 자신을 호위하기 위한 인원인지 호송하기 위한 인원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내가 어떻게 도망을 간다고 이러는 거야?'

세레나드의 힘을 가지고 있을 뿐 라헬 그 자체는 평범한 여성이었다. 아니, 몇백년간 자라지 않는 몸을 가지고 있으니 평범하다곤 할 수 없나.

어쨌건 라헬의 몸은 작고 연약해서 이 기사들을 따돌리고 달아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여간 황제 새끼, 이런 부분에선 쓸데없이 꼼꼼하다니까.'

라헬은 투덜거리며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는 언제나처럼 몹시도 호화스러웠다. 황제가 타는 것과 같은 수준이었기에.

그래서 승차감이 좋을 뿐 아니라 내구성도 좋았다. 드래곤이 온다 한들 이 마차를 쉽게 부술 수는 없을 것이다.

'드래곤은 무슨, 당장 나조차도 못 부술 마차인데.'

라헬은 연신 투덜거리며 마차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등받이는 정말 지랄 맞게도 푹신했다.

하지만 그 편안함이 그녀는 도통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건 그녀가 인생을 저당 잡히고 누리는 사치에 불과하니까.

라헬의 맞은편에 신관이 올라타고,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아."

라헬은 무료한 한숨을 흘리며 창가에 팔을 기대었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바깥 풍경을 보며 레퀴엠이 어서 나타나길 소망했다.

지금 그녀의 인생에 유일한 희망은 그것뿐이었다.

마차가 수도의 중앙 대로에 진입했다. 마차 옆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던 어느 순간,

"응?"

라헬은 눈을 번쩍 떴다. 어깻죽지에서 화끈한 열감이 느껴졌다.

"무슨...?!"

라헬은 황급히 마차 창문을 열어젖혔다.

"성녀님?"

신관이 당황하는 것, 이 일이 황제의 귀에 들어갈 거라는 것도 잊어버릴 정도로.

라헬은 몹시 당황했다.

'레퀴엠?'

그 말만은 뱉을 수 없어 속으로 중얼거렸다.

'틀림없어. 이건 레퀴엠이야.'

이 기운을 이토록 가까이서 접하고도 모를 순 없었다. 지금껏 멀게만 느껴졌던 그 기운이 유난히 선명하게 느껴졌다.

두 검의 거리가 극도로 가까워진 순간, 서로 공명한 것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라헬은 그 자리에 앉은 채로 얼어붙었다.

'레퀴엠이, 지금 수도에 있다고?'

지금 당장이라도 마차에 내려서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저 인파 속을 헤치고 한 명 한 명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황제가 자신을 추궁하려 들 테니까. 자신의 소망을 이루는 게 영영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성녀님?"

재차 묻는 신관의 목소리에, 라헬은 비로소 현실로 돌아왔다.

"아."

신관이 이상한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 그게. 아는 신도를 본 거 같아서."

"아는 신도요?"

라헬은 그새 바싹 말라버린 입술을 축였다.

"네. 예전에 신전에서 봤었는데 기억에 남아서. 아무래도 잘못 봤나 봐요."

라헬은 그리 둘러대고 다시 창문을 닫았다. 동시에 나중에 이 일에 대한 추궁이 들어오면 뭐라고 대답할지 생각해두었다.

'휴우.'

생각을 마친 그녀는 평온을 되찾으려고 애썼다.

'레퀴엠, 레퀴엠이.'

자꾸만 심장이 빠르게 뛰고, 손바닥에 땀이 고였다.

'안돼. 동요한 티를 내서는.'

신관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라헬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수상쩍은 티를 냈다간 황제의 의심을 살 수 있다.

이럴 땐 제 얼굴을 가리는 은빛 베일이 무척이나 고마웠다. 라헬은 흐트러졌던 베일을 바르게 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아까 의혹으로 떠올랐던 가정이 현실이 되어 눈앞에 나타났다. 누군가 레퀴엠을 손에 넣었고, 심지어 놈을 잠재운 채 움직이고 있었다.

'처음부터 수도에 있었나?'

라헬이 처음에 레퀴엠을 느꼈을 당시, 그 거리는 결코 수도가 아니었다.

'그럼 그동안 쭉 조용했던 게, 레퀴엠이 다 죽이고 있어서가 아니었다고?'

그 반대였다.

레퀴엠의 소유자가 조용히 수도로 이동해서였다. 레퀴엠으로 인한 폭주, 살육 없이 평화롭게.

"...."

라헬의 미간에 잡힌 주름이 깊어졌다.

'만나야겠어.'

그녀가 시선을 돌려 마차 밖을 바라보았다. 풍경을 더듬는 그녀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 ❖ ❖

나는 그 자리에 멈추었다.

"-!"

온몸의 세포가 진동하며 어딘가로 강하게 끌리는 듯하다.

마치 자석의 서로 다른 극에 끌려가는 것처럼, 처음부터 함께 했던 무언가가 쪼개져 그 조각을 맞추려 드는 것처럼.

어깻죽지 한쪽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레퀴엠의 문양이 새겨진 바로 그곳이.

'설마,'

마차 창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대로변에 많은 사람들, 온통 화려한 장식과 문양이 가득한 마차들이 가득했다.

저 중에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어떤 존재인지는 알고 있었다.

'세레나드.'

봄의 기운을 가진, 레퀴엠과 반대되는 속성을 가진 형제검.

레퀴엠과 세레나드는 함께 있을 때 공명한다. 그리고 서로의 존재를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다.

'순간 가까워졌었나 보군.'

더는 느껴지지 않는 걸 보니 마차를 타고 멀어져 버린 듯했다.

'저긴가? 아니면 저기?'

의심 가는 곳에 시선을 던져 보았지만 눈에 띄는 사람은 없었다. 주변을 마구 두리번거리며 헐레벌떡 뛰어오는 사람도 없었다.

그렇다고 절대 영역을 펼치진 않았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썼다간 힘을 낭비할뿐더러,

'어차피 저쪽에서 찾아올 테니까.'

몸이 단 것은 저쪽이지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흠."

다시 창문을 닫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지금쯤 세레나드의 주인은 몹시 당황하고 있을 것이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순간에, 바로 이곳에 레퀴엠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테니.

'성녀 라헬.'

그녀가 세레나드의 소유자이자, 현시대의 유일한 성녀이다.

물론 세간에는 후자로만 알려져 있다. 그녀가 세레나드의 소유자라는 것은 오직 황제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그녀에게 내 존재를 들켰음에도 그리 걱정이 되진 않았다.

'바로 찾아오진 못 하겠지.'

성녀는 일거수일투족을 황제에게 감시받고 있으며, 황제의 허가 없이는 쉽게 외출을 할 수 없다.

'어떻게 할지 궁금하군.'

내가 아는 그녀의 성격이라면, 아마 이대로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 나를 만나려 들겠지.

그녀에겐 이루지 못한 소망이 있으니까.

그리고 그 소망을 오직 나만이 이루어줄 수 있다는 것 또한,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수도에 오자마자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성녀는 대부분의 시간을 신전에서 보낸다. 저렇게 외출하는 일이 드물 텐데, 기막힌 우연이었다.

그렇게 원작의 중요 인물 중 하나와의 조우가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나는 마차 창문을 열어둔 채 바깥 풍경을 감상했다.

"여기가 제국의 수도."

이 제국의 심장이자 중심, 가장 지고한 존재인 황제가 기거하는 곳.

마기오레.

그 이름에 깃든 의미와 같이, 이 곳은 대륙의 중부, 그중에서도 가장 비옥한 땅을 차지하고 있다.

게다가 영토가 어찌나 넓은지, 오베스트 영지처럼 걸어서 이동한다는 것은 꿈에도 못 꿀 정도였다.

"서부하고는 정말 딴판이로군."

나직이 혀를 차며 수도의 정경을 눈에 담았다.

시선을 어디로 돌려도 산이 보이는 서부와는 다르게, 이곳은 눈이 닿는 곳마다 높게 솟아오른 건물이 보였다.

그나마도 서부는 베어낼 나무가 없어 거친 암석을 깎아내어 짓는다. 하지만 이곳은 희고 고운 대리석이나 고급 석재를 사용해 호화롭게 몇 층씩 높게 올린다.

"뭐 튼튼하기야 서부 건물이 더 튼튼하겠지만."

어쨌건 제국에서 제일가는 건축가들이 공들여 지은 건물이라 호화롭기 그지없었다.

그뿐이랴.

지나가는 사람들의 옷도 다채로운 색으로 가득했다. 비싼 원단을 사용한 듯 퍽 고급스러워 보였다.

사람들의 얼굴에 활력이 넘쳤다. 걱정은커녕 해맑기만 했다.

"우리 영지와는 정말 다르네."

이곳의 인간들에겐 죽음을 코앞에 둔 절박함도,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처절함도 없었다.

"흥."

그새 오베스트 영지에 정이라도 든 것일까. 괜히 그곳에서 고생하는 영지민들이 떠올라 심기가 뒤틀렸다.

Chapter8. 속을 살살 긁는다. (2)

"좀 짜증나네."

그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은 하얀 눈길을 보면, 거기 지저분하게 발자국을 남기고 싶은.

그런 심술궂은 생각이 덩치를 키운다.

어린아이보다 더 치기 어리지만, 어른보다 더 악랄하고, 노인보다 더 음흉한 마음.

"고생이라곤 전혀 안 해본 것 같단 말이지."

나는 이 몸에 빙의해서 그 개고생을 했는데 말이다.

내가 아니었다면 이들은 레퀴엠의 악마가 나타날까 봐 두려움에 덜덜 떨어야 했을 것이다.

자신들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간 불운을 모르고, 걱정이라곤 전혀 없는 천진한 낯짝을 자근자근 짓밟아주고 싶었다.

정말로.

"...."

뱃속 깊이 잠들어 있던 공허가 꿈틀거렸다. 그르렁거리며 아가리를 쩍 벌리고, 원한다면 이 속에 집어넣으라고 내게 속삭였다.

"...하아. 관두자."

여기서 레퀴엠의 기운을 일으키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니다.

"마차 전복 사고로 죽고 싶진 않다고."

여기까지 오는 동안 레퀴엠의 기운을 잠재우는 데 성공했다.

블랙스타가 아닌 다른 말을 탈 수 있었던 것도, 이렇게 평화롭게 마차를 탈 수 있는 것도 모두 그 덕분이었다.

게다가 이 수도엔 디에고만큼은 아니더라도, 레퀴엠의 기운을 눈치챌만한 강자들이 있었다.

"그 녀석도 와 있겠지."

지금쯤 수도의 제 저택에 입성했을 주인공, 카인을 떠올렸다.

보통 귀족들은 수도의 노른자 땅 위에 자신의 저택을 몇 채씩 준비해 놓는다. 종종 있는 수도의 행사에 참석할 때 머물기 위해서.

하지만 아벨의 아버지가 누군가.

"디에고가 이런 데 저택을 살 위인이 아니거든."

그 청렴결백한 꼰대에게 그럴 돈이 있다면, 기사들에게 줄 무기나 갑옷을 사는 데 소비할 것이다.

"하여간 돈 쓴 줄 모르는 양반 같으니."

그 고지식함이 그를 그 자리까지 올라서게 했으나, 한편으론 그 자리라는 한계에 머무르게 만든 요인이었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명색이 4대 대영주 중 하나인데."

수도에 저택 하나가 없다는 게 말이나 되나. 원작 주인공인 카인은 벌써 자신의 앞으로 저택을 몇 채씩 갖고 있는데 말이다.

정말이지 너무나 불공평하고 차이 나는 시작이다.

"하여간 다 가진 놈이란."

나는 작중에서 가장 자주 쓰였던 카인의 별명을 짓씹었다.

먼치킨물의 특혜란 특혜는 모조리 독차지한, 그야말로 없는 게 없는 놈.

"흥, 두고 보라고."

그 차이, 내가 다 빼앗아서 좁혀버릴 테니까.

"워, 워."

마부의 목소리와 함께 마차의 속도가 느려졌다.

"도착했군."

마차 문을 열고 훌쩍 뛰어내렸다.

눈앞에 고급스러운 석재로 외관을 장식한 여관 건물이 보였다. 수도에 저택을 마련하지 못한 귀족들이 주로 묵는 곳.

"뭐, 겉보기에 나쁘진 않네."

들어가 보니 내부도 괜찮았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오베스트 영지의 내 방보다 나았다.

그중 가장 좋은 방을 골라 값을 치렀다.

"내가 조만간 수도에 저택 꼭 사고 만다."

연신 투덜거리며 1층의 마굿간으로 향했다.

수도 내에서는 함부로 말을 타고 돌아다닐 수 없다. 그래서 타고 왔던 말, 브라우니는 여기 맡기기로 했다.

왜 브라우니냐고?

"우와...."

말을 본 마굿간지기 소년의 입이 스르륵 벌어졌다.

"굉장하다...!"

녀석은 말의 윤기 나는 육체와 가지런하게 정돈된 초콜릿색 갈기를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잘 돌봐줘라. 비싼 놈이다."

마굿간지기 소년에게 팁으로 은화를 하나 던져주었다.

"예, 나리! 알겠습니다!"

소년의 우렁찬 대답이 들려왔다. 녀석은 행여나 말이 다칠까 조심스레 고삐를 잡고 끌고갔다.

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마르코 영감, 제법 쓸만하단 말이지."

저것은 마르코 영주가 내게 선물한 말이다. 그것도 그가 가장 아끼던, 혈통 증명서까지 있는 순종 명마로.

"선물이 맞지, 암."

비록 말을 바라보던 그의 눈가에 눈물이 글썽거리고, 고삐를 내어주던 손이 부들부들 떨렸어도.

"하하하."

그의 마지막 얼굴을 떠올리며 소리 내어 웃었다.

아무튼 내가 지금껏 타본 말 중에선 제일 좋았다.

비록 블랙스타보다는 느렸지만, 그 정도면 꽤 준수한 편이었다. 무엇보다도 성격이 순종적이어서 내 명령을 잘 따랐다.

"역시 명마는 다르군."

여관을 나서는 내 가슴에는 전에 없던 목걸이가 하나 달랑거리고 있었다.

찰그랑.

그 끝에는 호루라기가 하나 매달려 있었다. 그것을 집어 들어 빤히 바라보았다.

"대체 돈을 얼마나 숨겨놨길래 이런 것도 뚝딱 만들어 오는 거지?"

이건 내가 베저크 영지를 떠나기 직전 받아온 물건이었다. 그것을 부는 대신 다시 가볍게 내려놓았다.

"어차피 불어봤자 소리도 안 나겠지만."

이 호루라기에선 인간의 귀에 들리지 않는 음역대의 소리가 난다. 따라서 오직 나와 블랙스타만이 듣고 반응할 수 있다.

"지금쯤 잘 뛰어놀고 있으려나."

블랙스타는 베저크 영지 주변의 숲에다 풀어주었다. 그리고 이 호루라기 소리를 들려주며, 내가 이것을 불면 꼭 달려오라고 말해두었다.

"아직은 녀석을 수도로 들여올 때가 아니니까."

놈의 생김새와 뛰어난 능력은 너무 눈에 띈다. 그래서 이런 숙소에 매어두었다간 내 위치를 노출당하기 쉽다.

"조금만 기다리라고. 네 녀석이 편히 묵을 곳을 곧 마련해 줄 테니까."

물론 직접 돌아다니며 저택을 구할 생각은 없었다.

"곧 나 대신 일해줄 놈을 구할 거거든."

히죽 웃으며 다시 마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수도에 나의 터전을 다지기 위한 첫 번째 작업을 하러 출발했다.

"와, 겁나 편하네."

엉덩이에 닿는 감촉이 어찌나 폭신폭신한지, 이대로 의자와 한 몸이 될 것만 같았다.

역시 수도의 마차는 승차감부터가 달랐다. 때깔은 물론이고.

"도착했습니다."

이동할 거리가 길지는 않았기에 금방 목적지에 도착했다.

"수고했어."

마차에서 휙 뛰어내린 뒤 마부에게 돈을 건넸다.

"일을 마치고 올 때까지 기다려."

"알겠습니다."

처음 오는 장소였지만, 무엇을 보고 길을 찾아가야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수탉 모양의 간판, 그리고 그 옆에 세워진 기둥.'

원작의 기억을 쫓아 길을 더듬어 갔다. 목표했던 것은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아하, 저기군."

나는 빙그레 웃으면서 선술집으로 다가섰다. 로브의 후드를 내려 꼼꼼히 여민 뒤 문고리를 잡았다.

'어디 보자.'

문을 열기 전 절대영역을 펼쳤다.

레퀴엠을 손에 넣은 후 새로 들인 습관이었다. 다른 장소에 방문하기 전 절대영역으로 내부를 확인해 보는 것은.

'셋, 인가. 손님은 없는 듯하군.'

아마 내가 예상한 인물들만 모여 있는 듯했다. 다른 이가 있으면 쫓아내야했을 텐데, 귀찮은 일이 줄어들어 다행이었다.

달칵.

기름칠을 잘해 두었는지, 문은 별다른 소음 없이 열렸다.

문이 열리면서 생긴 틈 사이로 햇살이 비쳐들었다. 그 궤적을 따라 띄엄띄엄 놓여 있는 탁자와 의자가 보였다.

"어서 오세요."

바닥을 쓸고 있던 중년의 여인이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안을 마저 둘러보았다.

카운터에선 거무튀튀한 인상의 남자가 종이에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종이 뭉치가 꽤 두툼한 것을 보니 장부인 듯 했다.

"어서 오세요, 손님."

다른 남자 점원이 바삐 다가왔다. 얼굴에 영업용 미소를 장착한 채 싹싹하게 말했다.

"자리로 안내하겠습니다."

점원은 나를 한 테이블에 안내한 뒤 접시와 식기, 물잔 그리고 메뉴판을 내려놓았다.

"주문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메뉴판을 보는 둥 마는 둥 대충 훑어보았다. 싸구려 술과 간단한 안줏거리를 함께 파는 곳이었다.

"좀 고민해보고. 결정하면 부르지."

손을 내젓자 점원은 꾸벅 고개를 숙이곤 돌아섰다. 그가 돌아서는 순간, 푸른 빛이 도는 그의 손톱 끝이 보였다.

'흐음.'

메뉴판을 보면서 그 너머로 카운터에 앉은 남자를 살폈다. 정확히는 서슬 퍼렇게 못 박힌 주먹과, 굳은살이 가득한 손바닥을.

'제대로 찾아왔나 보군.'

내 눈이 슬쩍 가늘어졌다.

입술을 핥으며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정확히는 중년의 여인이 내 근처로 올 때까지.

"이봐."

그녀의 팔을 툭 치자, 다른 테이블을 닦고 있던 여인이 돌아섰다.

"네, 손님. 주문하시려고요?"

"아니. 그보다는 그쪽에 관심이 있어서."

순간 선술집 안의 공기가 약간 변했다. 카운터의 남자도, 다른 점원도 모두 내 쪽을 주시하는 게 느껴졌다.

여인이 애매한 미소를 흘렸다.

"저 말씀하신 건가요?"

그녀가 곱게 접힌 눈길로 내 얼굴을 훑었다.

'이놈이 미쳤나?'

눈웃음에 감춰졌지만, 그녀의 새파란 눈동자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젊은 목소리를 가진 남자가 중년의 여인에게 관심을 보이는 이상한 상황이었으니까.

피 끓는 혈기 왕성한 청년은 보통 제 나이 또래의, 혹은 더 어린 여자를 찾기 마련이다.

"손님, 죄송하지만 저는...."

"결혼 안 한 거 알고 있어. 반지도 없잖아?"

"형편이 마땅치 않아서 반지를 구하지 못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으시나요?"

여인이 애교스럽게 말하며 웃었다. 그녀의 주름진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퍽 싱그러운 웃음이었다.

"손님께 어울릴만한 여자는 여기 없답니다. 다른 가게를 찾아보시는 게...."

"아니."

나는 여인의 회유를 단칼에 잘라냈다.

"당신, 내 또래잖아."

여인의 눈이 살짝 커졌다. 흠칫 놀라 물러서려는 그녀의 팔을, 내가 덥석 붙잡았다.

"아."

팔목을 잡힌 여인은 더 이상 물러나지 못했다.

"-!"

카운터의 남자와 점원의 기세가 바뀌었다.

아까는 나를 주시하고 있었을 뿐이었다면, 지금은 언제든지 나를 공격할 수 있는 날카로운 상태로.

두 남자가 온몸을 긴장시킨 채 나를 주시했다.

"제가 좀 동안이긴 하죠?"

여인이 아무렇지 않은척 천천히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젊게 봐주어 고마워요. 마음이 넉넉하신 분이군요."

"그 뜻이 아니야."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은 뒤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크루델레."

여인의 얼굴이 걷잡을 수 없이 허물어졌다.

크루델레.

이 병의 증상은 노화와 비슷하다. 탄력 있던 피부가 쭈그러들고, 희고 매끈했던 피부엔 검버섯이 피고 주름이 번진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장기로 번져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 어떤 약을 써도, 그 어떤 의사가 돌보더라도 차도를 보이지 않는다. 당연히 완쾌는 불가능하다.

내 앞에 선 여인의 실제 나이는 20대. 하지만 현재 겉으로 드러난 그녀의 모습은 40대, 넉넉잡아 50대로도 보일 수준이었다.

가장 아름다워야 할 시간을 잔혹하게 빼앗기는 불치병을, 그녀는 앓고 있었다.

"...."

여인의 오른손 주먹이 꽉 쥐어지는 게 보였다. 이윽고 이 악문 음성이 들려왔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그녀의 말끝엔 수치심과 좌절감이 희미하게 배어났다. 나의 뜬금없고 노골적인 추파에도 흔들리지 않던 평정심에 금이 간 것이다.

"...."

여인이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놀랍게도, 그녀는 그 짧은 사이에 동요를 억누르고 침착함을 되찾았다.

"계속 이러시는 건 곤란합니다. 용건이 그것뿐이라면 이만 가보아도 될까요?"

Chapter8. 속을 살살 긁는다. (3)

아마 내가 이 선술집을 나선다면 뒤로 사람이 따라붙을 것이다. 어떻게 제가 그 병을 앓고 있는지 알아챈 게 궁금할 테니까.

물론, 나는 그 궁금증을 해소해줄 생각이었다. 다른 방법으로.

"뭐,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할 수 없지."

양손을 들어 올려 졌다는 시늉을 해보았다. 여인이 자유로워진 손목을 슬그머니 빼내었다.

"그런데 용건이 이것뿐인 건 아니야."

그렇게 말하며 테이블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나의 반대 방향을 가리키고 있던 식기를 모두 내 쪽으로 오게. 그리고 접시의 가장자리를 긁으며 여인을 바라보았다.

"사장이랑 이야기가 하고 싶어."

여인의 낯빛이 바뀌었다.

방금 내 행동이 이 길드에 의뢰를 하고 싶을 때 하는 몸짓이기 때문이었다.

여인의 새파란 눈동자가 아까와는 다른 기색을 품고 나를 꼼꼼히 살폈다.

"그러셨군요."

그녀의 목소리 톤이 약간 바뀌었다.

"사장님은 저기 계십니다."

여인이 자유로운 한 손을 들어 카운터를 가리켰다. 거기서 돈을 세고 있던 사장이 나를 향해 날카로운 눈빛을 보냈다.

"저와 이야기하시지요, 손님."

나는 가당치도 않다는 듯 콧방귀를 세게 뀌었다.

"내 말 못 들었어? 사장이랑 이야기한다고 했잖아."

"네, 그러니까 저기...."

"네가 사장이잖아, 엘리체."

선술집 안에 기괴한 침묵이 흘렀다.

일순 얼어붙은 듯이 서 있던 세 사람 중,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카운터의 사장이었다.

쐐액!

언제 꺼내 들었을지 모를 단검이 나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하지만 단검은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고 중간에 여행을 마무리해야 했다.

쨍그랑!

내가 냅다 던져버린 물잔에 의해서.

"-!"

선술집 안 세 사람의 눈이 커졌다.

눈에 띄게 놀라움을 표현하는 두 사람과 다르게, 카운터의 남자는 그저 눈썹을 꿈틀하는 것만으로 제 감정을 드러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사장인 것은 아니다.

"손님한테 냅다 무기를 던지는 게 벤데타 길드의 환영인사인가?"

나는 내 앞에 굳은 듯이 서 있는 여인을 향해 물었다.

중년의 점원, 그리고 무력해 보이는 모습은 여인을 중요하지 않은 인물로 보이게 만든다.

이곳을 찾아든 수많은 이들은 그녀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안쪽방에 들어가 카운터의 남자와 용건을 해결했다.

하지만 진짜 사장은 그가 아니었다. 이 선술집, 정확히는 벤데타 길드의 주인은 여기 있는 엘리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나를 응시하는 여인이었다.

"...."

선술집 내에 침묵이 흘렀다.

어느새 단검을 꺼내어 들고 내게 다가온 점원도, 카운터에서 어깨를 긴장시킨 채 이쪽을 바라보는 사장도.

모두 엘리체를 바라보며 그녀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후우."

낮은 한숨 소리와 함께 엘리체가 굳어 있던 몸을 이완시켰다.

"그쪽 정말,"

엘리체의 목소리가 조금씩 바뀌었다.

"꽤 많은 것을 알고 계시는군요."

중년의 여성이 낼법한 낮은 음색에서, 젊은 처녀의 그것으로.

"제 뒷조사라도 하셨나 봐요?"

최종적으로 변화한 그녀의 목소리는 구슬이 또랑또랑 굴러가듯 싱그러운 음색이었다.

나는 피식 미소를 흘렸다.

"이제 좀 대화할 마음이 생겨?"

"글쎄요."

엘리체가 새침하게 대답하며 의자에 앉았다.

"여자들은 면전에서 치부를 꺼내는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답니다."

"하지만 그건 네가 선택한 게 아니잖아? 그러니 치부라고 여길 건 아니지."

나는 그녀의 푸른 눈동자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게다가 네 눈은 여전히 아름답다고."

"...."

엘리체가 입술을 지그시 깨문 채 날 노려보았다. 그녀는 내가 아직도 장난을 치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주름진 얼굴과는 도통 어울리지 않는 생생한 눈빛.

그녀의 실제 나이가 정말 20대라는 게 실감이 났다.

"농담은 그만두고, 일 이야기나 하시죠."

엘리체가 앉으라는 듯 건너편의 의자를 가리켰다. 나는 턱짓으로 내 옆의 남자를 가리켰다.

"무기 집어넣으면."

"덱스터."

엘리체가 명령하듯 이름을 부르자,

"쳇."

점원 덱스터가 소리 나게 혀를 차며 단검을 품에 집어넣었다.

"이제 되셨을까요?"

"아니."

나는 키들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저놈 손에 쥔 암기도 다 집어넣으라고 해."

말하는 나의 시선은 카운터에 있는 남자를 향하고 있었다.

"-!"

카운터에서 서 있던 남자가 흠칫 굳었다. 그가 엘리체를 바라보며 눈빛으로 대답을 구했다.

"...윌리엄."

엘리체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윌리엄은 작은 한숨을 삼켰다. 그의 팔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달칵.

쇠붙이가 손을 스쳐 갈무리되는 소리가 귀 끝을 스쳤다.

평범한 인간에겐 결코 들리지 않을 소리. 하지만 극도로 강화된 내 청력은 이를 예민하게 감지했다.

여기서 나보다 이 공간을 완벽히 장악하고 있는 인간은 없을 것이다.

"좋아."

나는 두 남자에게서 투지가 완전히 사라진 것을 느낀 후에야, 엘리체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일단, 그쪽 정체를 좀 밝혀주시죠?"

엘리체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위로 치뜬 눈꺼풀 아래 푸른 눈동자가 시리게 빛났다.

확실히, 얼굴에 가득한 주름만 아니라면 꽤 눈에 띄는 미인이다.

'멜리나, 그 꼬맹이보다는 훨씬 낫군.'

솔직히 말하자면 이쪽이 내 취향.

아, 그렇다고 내가 한참 연상을 좋아하는 취향이라는 건 아니다. 내가 말하는 취향은 다른 쪽이니까.

나는 여유롭게 응수했다.

"언제부터 의뢰인과 친목을 그리 다졌나?"

"뭐, 사실 의뢰인이 누구든 상관 안 하긴 해요."

엘리체가 손톱 끝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하지만 그 의뢰인이, 저에 대해 너무 많은 걸 알고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죠."

"그래?"

나는 로브를 살짝 들추었다. 엘리체의 눈동자가 드러난 내 턱 끝을 향했다.

그녀의 시선을 오롯이 담은 채로, 내 입술이 움직였다.

"그럼 한 번 맞춰보는 게 어때? 내가 누군지."

"흐음."

엘리체가 눈을 살포시 내리깔았다. 생각에 잠긴 듯 그녀가 턱을 괴었다.

"보니까 목소리도 젊고, 얼굴도 꽤 미남인 것 같은데."

"...."

"검을 찬 거 보니 쓸 줄 아시는 것 같고, 입고 있는 옷은 중부에서만 나는 고급 원단으로 만들어졌네요."

나는 계속해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몸가짐이나 말투로 미루어보아... 고급 교육을 받으신 분이세요. 나잇대로 미루어보아 어떤 가문의 자제분이겠지요."

오, 제법인데.

엘리체는 생각보다 빠르게 정답에 근접해가고 있었다.

"그런데 말투에 서부쪽 억양이 조금 섞여 있네요. 지금 이맘때쯤 수도에 올라오실 분이라면...."

나는 흥미로워하며 입술 끝을 끌어올렸다.

"...오베스트 기사단 소속의 기사분?"

"...."

내 입술이 일자로 다물렸다.

젠장, 그럼 그렇지. 오베스트 가문의 망나니가 아버지의 인장을 가지고 수도에 올라올 거라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거군.

나는 급격히 흥미가 식은 얼굴로 말을 돌렸다.

"됐고, 의뢰 이야기나 하지."

"아니, 그래서 제 추측이 맞아요? 그건 말해주셔야죠."

"지금 그게 중요해? 의뢰가 중요하지."

내 대꾸에 엘리체가 기가 찬다는 듯 하, 웃음을 흘렸다.

"제가 길드를 운영한 지 몇 년째지만 손님 같은 분은 처음 보네요."

"그런 말 많이 들어."

"그래서, 저에 대해서 어떻게 아는 지는 말 안 해주실 건가요?"

원작에 나왔는데.

약간 심통이 난 듯한 엘리체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원작에서 널 봤다고 하면 그녀가 뭐라고 반응할지 궁금했다.

뭐, 굳이 말할 필요는 없지만. 그녀가 이해할 만한 내용도 아니고.

그래서 대충 말을 돌렸다.

"그건 이 이야기가 끝나면 자연스레 알게 될 거야."

"곤란하네요, 정말."

엘리체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원래 환한 금발이어야 할 머리칼은, 희게 세어버린 머리가 섞여 은빛을 띠는 금발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궁금한 게 더 크다는 건 부인할 수 없군요."

엘리체가 두손 두발 다 들었다는 듯이 양손을 들어 올렸다.

"제가 졌습니다. 의뢰에 대해 자세히 말씀해주시죠."

"근데 내가 하려는 건 의뢰가 아니야."

내 말에 엘리체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지금까지 한 이야기는 뭔데요?"

"정확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