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궁 기사단의 연무장을 빌리는 것은 몹시 수월하게 이루어졌다.
먼저 미켈이 테오도어 황제에게 나아가 이야기를 꺼냈다. 이야기를 들은 황제는,
"호오? 둘이서?"
하고 감탄하더니 두 번 묻지 않고 황궁 기사단장 조슈아를 불렀다.
"미켈 영주와 아벨 공자가 대련을 한다고 하니, 연무장을 비워두도록 하게."
황제의 명령에 조슈아는 놀란 기색을 애써 감추며 허리를 숙였다.
"예, 폐하."
이 사건은 바람과 같은 속도로 연회장에 있던 귀족들 사이에 퍼졌다.
"뭐? 아벨 킨드리얼과 미켈 콘첼라레가?"
"드디어 두 검술 사이의 승자를 가리는 건가?"
"당장 가세!"
순식간에 모든 귀족들이 썰물처럼 연회장을 빠져나가 연무장으로 향했다.
덕분에 시종들은 연회장에 차렸던 음식들을 모두 들고 옮겨야만 했다. 어쨌건 진귀한 구경엔 팝콘이 필요한 법이다.
원래 연무장은 공식 훈련 일정이 잡혀 있었으나 황제의 손짓 한 번에 취소되었다.
즉, 황궁의 기사단 또한 이 구경꾼 무리에 합세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모여든 바글바글한 시선들이 연무장 위로 교차했다.
나는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그곳에서 미켈과 마주 보고 섰다.
'이거 꼭, 디에고와 처음 검을 맞대었을 때 같군.'
그때도 식후 소화하듯이 검을 맞대었었지. 물론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랐다.
"황궁 법도상 둘 다 무기를 소지하지 않았으니...."
미켈이 손가락을 뻗어 연무장 한쪽을 가리켰다.
"오늘은 저것을 사용하도록 하지. 괜찮은가?"
그곳엔 황궁 기사단이 사용하는 목검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곤 그 옆을 가리켰다.
"대련도 실전처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양한 크기와 너비, 길이를 가진 검들이 그곳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진검을 드시지요."
Chapter 15. 자존심을 건드린다. (4)
"진심인가? 난 나중에 디에고에게 아들의 핏값을 받아내니 어쩌니 하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네."
"절 죽이실 생각이십니까?"
"...그건 아니네만. 아무튼, 내 호의를 거절한 건 공자라네. 그 점 유념하게나."
선심을 베푸는 듯한 말에, 나는 그저 공손히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속으론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호의라니. 지나가던 카를로가 비웃을 소리를 하는군.'
미켈이 목검을 들었다면 그것을 빌미로 더욱 악랄해졌을 테니까.
원작의 레아도 그의 목검에 호되게 두들겨 맞았다. 그래놓고 한 말이 가관이다.
'그래도 잘려 나가는 것보다는 낫지 않느냐?'
물론 나중에 최고급 상처약을 구해다 발라주기는 했지만. 이건 뭐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아무튼 미켈은 디에고와 다른 의미로 혹독한 아버지였다.
'게다가 난 딸도 아니잖아.'
목검을 든 그가 얼마나 가혹해질지는 안 봐도 뻔했다. 그러니 차라리 진검을 드는 것이 더 나았다.
"흐음...."
미켈이 검을 하나 골라 쥐었다.
그가 고른 것은 사람만큼 큰 대검이었다. 평소에 그가 사용하던 검과 비슷한.
"그럼 저도."
나도 그 옆에서 검을 골랐다. 레퀴엠과 비슷한 형태의 가볍고 날렵한 검을 찾아 쥐었다.
미켈과 함께 터벅터벅 걸어 연무장 중앙에 섰다. 구경꾼들이 관람석에서 수군거렸다.
"너무 결과가 뻔한 대결 아니오?"
"검을 고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소. 저런 부실한 검으로 어찌 미켈의 대검을 막아내겠다는 건지."
"몇 대 호되게 맞고 나면 정신이 번쩍 들지 않겠소?"
"1분도 안 돼서 검을 내던지고 항복할 게 분명하오."
다들 내가 압도적으로 패배할 거라 결과를 점쳤다.
"흐응."
나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미래를 아는 자의 여유란 이런 것이었다.
문득 카인의 붉은 시선이 느껴졌다. 열망이 담긴 그것을 가볍게 흘려 넘겼다.
'배가 아프겠지.'
그토록 원했던 미켈과의 대련을 내가 하고 있으니 말이다.
카인의 승부욕이 얼마나 강한지는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여름의 검, 카덴챠도 그를 이기지 못하고 굴복했을 정도니까.
어깨를 반듯이 펴고 맞은편의 미켈을 응시했다. 그는 여유로운 태도로 검을 살피고 있었다.
'이기는 것은 어렵겠지만.'
그에게서 얻어낼 수 있는 건 최대한 얻어내는 게 목표였다.
"준비됐나?"
미켈이 검을 쥐고 가볍게 늘어뜨렸다. 긴장감이라곤 조금도 없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선공을 양보하지. 먼저 오게나."
"이럴 때 노인공경을 하지 않으면 언제 하겠습니까? 먼저 오시지요."
"...알겠네."
미켈의 기세가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서릿발이 내린 것처럼 주변의 기온이 한 단계 내려갔다.
뚜벅.
미켈은 내게 접근하는 대신 원을 그리듯 옆으로 걷기 시작했다.
뚜벅, 뚜벅.
걸음 하나하나에 냉기가 실려, 마주 선 이의 호흡을 조여들게 했다.
나는 미켈에게 검을 겨눈 채 그의 위치를 좇았다. 그가 덤벼들 때를 대비해 몸을 긴장시켰다.
'자세에 빈틈이 없네.'
미켈은 더이상 인상 좋은 노귀족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았다. 웃을 때면 부드럽게 씰룩이던 수염마저 고요했다.
'검을 들면 놀랍도록 과묵해지는 캐릭터였지.'
내 앞에는 설산에 은둔하던 은빛 호랑이 한 마리가 도사리고 있었다.
미켈의 기운이 조금씩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솟아오르고 솟아올라, 마침내 거대한 산이 된 순간.
팟!
그의 신형이 사라졌다.
'누가 노드 검술 보고 느리다고 했냐!'
나는 원작의 묘사를 비웃으며 몸을 날렸다.
퍽!
내가 방금까지 있던 자리에 미켈의 검이 내려꽂혔다.
"흠."
미켈이 침음을 흘리며 검을 잡아뺐다. 흠집이 난 바닥에서 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의 청회색 눈동자가 번득였다.
스팟!
다시 그의 몸이 사라지는가 싶더니 이내 나를 향해 짓쳐 들어왔다.
'어깨!'
검을 치켜들어 파고드는 공격을 방어했다.
꽝!
미켈의 검과 맞닿는 순간 손목뼈가 진동하는 느낌이 들었다.
'흠.'
계속 이렇게 막을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흘려내는 수밖에!'
미켈이 곧바로 검을 꺾어 하반신을 노렸다.
'이번엔 다리!'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검을 비스듬하게 갖다 댔다.
까가강!
검과 부딪히자마자 아래로 강하게 밀어붙였다. 미켈의 검은 더 이상 내 다리를 노리지 못하고 바닥을 긁어야 했다.
"-!"
미켈의 얼굴에 당혹과 이채가 동시에 스쳤다.
이윽고 그가 훌쩍 뛰어 뒤로 물러났다. 그 거대한 검을 들었다곤 믿을 수 없는 신속한 움직임이었다.
"과연, 자신 있을 만하군."
미켈이 흥미롭다는 투로 말했다.
"다음도 가능할까?"
그는 대답을 들을 생각조차 없는 듯 곧바로 내게 달려들었다. 그의 검이 다양한 각도로 내 몸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쩌엉! 쩡!
한 번 내려찍을 때마다 바위를 내던지는 것 같았다. 정확하게 각도를 맞추고 적절한 힘을 주어야지 흘려낼 수 있었다.
콱! 카가각!
미켈의 공격은 노리는 부위도 다양했다. 팔꿈치, 발목 등 맞으면 움직임이 흐트러지는 부위를 골고루 두드려댔다.
'아주 온 관절을 다 부술 기세네.'
방어하거나 피하기 위해서는 쉴새 없이 움직여야 했다.
정작 미켈은 가볍게 몸을 틀거나, 한 걸음 내딛는 것만으로 손쉽게 자세와 위치를 바꾸고 있었다.
'과연 노드 검술!'
상대방의 행동을 봉쇄하고, 자신의 체력을 아껴가며 압도적으로 격차를 벌린다.
'아주 마음에 들어.'
저 검술마저 집어삼킬 생각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하지만 이런 속내를 드러낼 수는 없었다.
"...."
미소를 얼굴 깊숙이 감추고, 무표정한 낯으로 미켈에게 맞섰다.
카랑! 카가각!
날과 날이 부딪힐 때마다 불꽃이 튀고, 검에 긁힌 바닥이 구슬피 울었다.
그야말로 보는 이의 숨이 가빠오는 접전이었다.
"...."
그동안 관중석은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가, 이내 벌집을 건드린 것처럼 시끄러워졌다.
"이게 어찌 된 거요? 예상과 달라도 너무 다른데?"
"썩어도 준치라고, 디에고 킨드리얼의 아들이라는 이름값은 하는구려."
"이건 그 수준이 아니지 않소. 어떻게 미켈을 상대로 몇 분이나 버틴단 말이오?"
관중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쑥덕거렸다. 예상과 너무 다른 일들이 계속 벌어지고 있으니 그럴만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는, 검술에 조예가 있는 자의 해설이 등장하는 법이었다.
"검이라면 내 아들이 좀...."
카를로가 냉큼 나서려고 했으나,
"조슈아 단장께서는 어찌 생각하시오?"
다른 귀족의 질문에 입을 다물었다. 물론, 그 귀족이 미켈의 무리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흠흠."
조슈아가 헛기침과 함께 앞으로 나섰다. 그는 이 세기의 대결에서 해설을 맡게 된 것을 몹시 기꺼워하는 눈치였다.
"알다시피, 미켈 영주님의 노드 검술은 그야말로 정석이오. 단순하지만 그런 만큼 아주 강력하지."
관중들은 모두 조슈아 단장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실력이 부족하면 어설프게 방어하다가 뼈가 부러지고 마오. 그런데 아벨 공자는 모든 공격을 막거나 피했소."
듣고 있던 카를로가 콧방귀를 뀌었다.
"미켈 영주가 봐주는 것 아니오? 아벨 공자를 죽일 순 없을 테니 말이오."
"물론 살수(殺手)가 아닌 것은 맞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 공격이 쉽게 막아낼 수준은 아니오."
조슈아가 짧게 깎은 구레나룻을 쓰다듬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미켈 영주님은 한 대라도 잘못 맞으면 뼈가 으스러질 공격을 가하고 있소. 모르긴 몰라도, 아벨 공자는 지금쯤 퍽 지쳐있을 것이오."
그는 느릿한 어조로 확신하듯 마무리 지었다.
"그럼에도 여기까지 버텼다는 것은, 아벨 공자의 실력이 굉장하다는 의미지."
"허어...."
"그런 것이오?"
권위자의 인정에 사람들은 의혹을 접고 감탄을 흘렸다.
"...."
카를로가 못마땅한 듯 입술을 씰룩이며 고개를 돌렸다. 그 옆의 카인은 굳은 얼굴로 대련을 지켜보고 있었다.
'옳지, 잘한다.'
나는 속으로 조슈아 단장에게 박수를 쳤다.
과연 황실 기사단장. 그는 미켈과 내 대결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볼 수 있는 안목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지쳤다고?'
그 말엔 동의할 수 없었다.
스겅! 쩡!
미켈의 검은 여전히 집요하게 내 팔다리를 노리고 있었다. 아까의 도발에 대한 분풀이라도 하듯, 노호(老虎)와 같은 움직임.
퍽!
성난 호랑이가 앞발을 휘두르면 이러할까. 한 대 맞으면 뼈도 못 추릴 것 같은 공격들이 연달아 이어졌다.
이미 연무장 바닥은 미켈의 검에 긁힌 생채기로 가득했다.
타닥.
그 위를 춤추듯 밟으며 미켈의 검을 이리저리 피하고 또 막았다.
몇 십번, 몇 백번 머릿속에 그렸던 디에고의 움직임. 아예 뇌리에 때려 박았던 그 흐름이 어느새 몸으로 구현되고 있었다.
'조금, 알 것 같아.'
디에고의 보법, 몸의 선, 어깨에서 팔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흐름. 리암의 것보다 몇 배는 우수하고 완성된 동작.
그 원리와 핵심이 조금씩 이해되었다.
쩡!
디에고와 비슷한 수준의 강자와 싸우면서. 미켈과의 대련은 어느새 그동안 익힌 검술을 연습하는 시간이 되어 있었다.
쩌엉! 쩡!
'과연, 이것이 오베스트 검술.'
미켈의 검을 막아내며 전율했다.
오베스트 검술은 상대방의 공격을 자연스레 방어하면서 움직이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그뿐이랴.
파박! 팍!
미켈의 공격이 향하는 곳을 예상하고 미리 피할 수 있었다.
'대충 느낌 알겠네.'
이미 한차례 디에고의 강력한 검술을 맛본 눈은 상당히 레벨업을 한 상태였다.
그래서 디에고와 비슷한 수준의 강자가 검을 휘두르자 그 파훼법이 바로 보였다.
상대방의 검술을 지독할 만치 따라 하며 익힌 눈썰미가 빛을 발했다.
깡! 까강!
북풍처럼 휘몰아치는 미켈의 공격을 연달아 막아냈다. 단 한 수도 놓치지 않고.
'좋았어.'
따당!
어느 순간부터, 미켈의 검을 받아내는 게 점점 쉬워지기 시작했다.
더이상 손목뼈가 진동하지 않았다. 최소한의 힘만 주어 가볍게 손목을 돌리는 식으로 부담을 줄인 덕분이었다.
콱!
약간의 스텝만으로 공격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땅!
도는 속도를 이용해 다음 공격까지 맞받아쳤다.
'이게 되네.'
처음 디에고와 검을 맞댔던 때에 비하면 놀라운 성취였다.
디에고와 비슷한 수준의 강자를 대하면서, 이 정도 여유를 갖게 되었다는 것 자체가 굉장한 성장이 아니겠는가.
따앙! 땅!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미켈은 착실하게 나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시종일관 여유로웠고, 입가에는 '이놈 봐라?' 하는 미소가 머물러 있었다.
그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제게 맞서는 새끼 늑대의 이빨이 제법 날카롭고 단단하다는 것을.
따당!
검이 맞부딪치는 소리 너머로, 희미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르릉-
물론 나에게만 들리는 소리였다.
'...레퀴엠, 이 새끼가 또?'
속으로 치를 떨었다.
'그래, 이 새끼가 조용할 리가 없지.'
먹음직스러운 상대가 눈앞에 있는데 말이다.
그동안 썰어왔던 먹잇감과는 차원이 다른, 강인하고 역동적인 생명력.
굳이 절대영역을 일으키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흰 눈썹과 수염을 휘날리며 움직이는 미켈은 그 누구보다도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으니까.
그릉-그릉-
레퀴엠이 거칠게 몸을 들썩였다. 동시에 군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당장 미켈을 베고 그 생명력을 집어삼키고 싶어 안달이 난듯한 몸짓이었다.
'하긴, 어련하겠어.'
디에고를 보고도 신이 났던 녀석이니, 그와 비슷한 강자인 미켈을 보면 눈이 돌아갈 법했다.
물론 아니 될 일이었다.
'그때 곤혹 치른 걸 생각하면 진짜....'
디에고가 살기를 날렸던 그때를 생각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때 레퀴엠이 속살거리지만 않았어도, 닥치라는 말로 디에고를 자극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그래도 팔이 부러지는 엔딩은 똑같았겠지.'
아무튼, 이번엔 절대 그런 실수를 하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입을 꾹 다물고, 레퀴엠의 속삭임을 철저히 무시했다. 오로지 미켈을 상대하는 것에만 몰두했다.
'모조리 빨아먹어 주마.'
너무 정확하게 받아내지 않도록, 약간은 힘이 부족해서 힘겨워하는 것처럼.
그렇게 보이도록 연기하며 미켈이 계속해서 나를 공격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
정말이지, 너무나 유익한 시간이었다.
Chapter 15. 자존심을 건드린다. (5)
"흐음."
미켈은 검을 휘두르며 낮은 신음을 삼켰다.
벌써 대련을 시작한 지 몇 분째. 남들은 모를 미묘한 위화감이 그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다.
'이상하군.'
첫째, 아벨 킨드리얼이 제 모든 공격을 받아낸다는 것, 그리고 그 박자가 약간씩 늦다는 것.
'벌써 이게 몇 분째.'
똑같은 상황이 쭉 계속되자 의혹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미켈은 일정한 강도와 속도로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그러니 거기 익숙해진 아벨은 점점 반응이 빨라져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아벨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너무나 일정한 속도로 미켈의 공격을 받아내고 있었다.
둘째, 아벨 킨드리얼의 호흡이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는 것.
검을 받아내다 보면 점점 숨이 가빠지기 마련이다. 게다가 많은 근력을 소모하므로 팔에 점점 무리가 가게 된다.
그런데 아벨의 낯빛은 묘하게 평화로웠다. 매끄러운 이마엔 땀방울조차 비치지 않았다.
'억지로 여유로운 척하는 건가?'
마지막으로 셋째, 아벨 킨드리얼에게서 기묘하게 허술한 모습이 보이는 것.
아벨의 보법과 검을 쥔 자세는 완벽했다. 그런데 미켈이 공격하기 직전엔, 몹시도 유혹적인 허점이 슬쩍 내비쳤다.
이쯤에서, 미켈은 믿기 어려운 한 가지 가설을 세웠다.
제가 생각해도 정말 말도 안 되지만, 정말 낮은 확률이지만.
'만약, 아벨 킨드리얼이 이 모든 것을 계산하고 있는 거라면?'
이 가정을 시험해 볼 필요가 있었다.
미켈은 지금껏 노드 검술의 기본만 사용했다. 그것은 처음 기사단에 입단한 이들이 익히게 되는 통과 의례와도 같았다.
'어디 한 번....'
그는 슬그머니 검술의 강도, 그리고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구경하는 이들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조금씩.
"-!"
아벨의 청보랏빛 눈이 번득였다. 동시에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웃어?'
순간 미켈은 제 눈을 의심했다. 곧이어 등줄기로 전율의 소름이 일었다.
까앙!
아벨의 검이 빈틈없이 맞붙어왔다. 그 뒤로 비치는 아벨의 낯은 상황이 바뀌었음에도 똑같이 차분했다.
까강! 깡!
두 사람의 검이 연달아 부딪혔다. 아벨은 북풍처럼 몰아치는 미켈의 검을 물샐틈없이 방어하고 있었다.
'허어, 이럴 수가.'
자신의 공격이 한결 강화되었는데도, 아벨의 대응은 완벽했다. 심지어 지금까지의 간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노드 검술의 파훼법을 깨닫지 않고선 불가능한 경지였다.
'이게 이 나이대에 가능한 수준인가?'
미켈의 공격을 읽어내는 동체 시력과 거기 반응할 수 있는 반사 신경, 그리고 상당한 근력까지.
게다가 디에고에게 하사받은 듯한 오베스트 검술을 사용하고 있었다. 꽤 정교하게 완성된.
'흐음....'
미켈은 남몰래 군침을 삼켰다.
일찍이 그의 딸 레아는 제게 선언한 적이 있었다. 자신보다 약한 남자와는 혼인하지 않겠노라고.
이 제국에 그 조건을 만족하는 청년은 카인 아르단테뿐이었다. 그러던 와중, 지금 그의 앞에 하나의 가능성이 펼쳐지고 있었다.
바로 아벨 킨드리얼이라는 선택지가.
'옳거니!'
그렇게 미켈의 머릿속에서 당사자들의 동의는 전혀 구하지 않은 계획이 완성되었다. 절로 마음이 후해졌다.
'미래의 사윗감에게 이 정도 가르침은 줄 수 있지.'
아벨이 안다면 큰일 날 생각을 하며, 미켈은 더욱 공격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여태까지 자신의 공격을 이렇게 잘 받아낸 상대는 없었다. 콩떡같이 공격해도 찰떡같이 받아내니 신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 이것도 막아보게나!'
정말이지 이렇게 재미있는 대련은 처음이었다. 흥에 겨워서 팔이 마구 날뛰었다.
공격에 열중한 미켈은 아벨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눈동자에 어린 희미한 열기, 미세하게 어긋난 호흡. 그리고 흰 이마에 배어나기 시작한 식은땀을.
"윽...!"
아벨이 이를 악물었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악전고투를 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
미켈은 그제야 아벨의 상태를 눈치챘다. 일단 멈추고 상황을 확인하려고 했다.
하지만 생각이 흐트러진 순간, 검이 저절로 아벨의 어깨 쪽을 향했다. 치명적인 부위를 노리는 오랜 습관 때문이었다.
'이런, 나도 모르게 살기를!'
미켈은 급히 검을 회수하려고 했다.
그 순간 아벨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청보랏빛 눈동자가 붉게 보일 정도로 짙어졌다.
동시에 그의 움직임이 눈으로 좇기 힘들 정도로 빨라졌다.
"-!"
미켈은 일순 아벨이 검 뒤로 사라지는 것 같다고 느꼈다. 아니, 그가 검 자체가 된 것 같았다.
오베스트 검술의 절정, 극점에 이른 한 수가 꽃처럼 피어났다.
'저것은!'
미켈의 눈이 급격히 커졌다. 바로 앞에 디에고가 있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저, 저런!"
"위험한 것 아니오!"
"그만 멈추게 하는...!"
관중들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모두의 시선이 아벨과 미켈의 격돌에 집중되었다. 두 사람의 검이 맞부딪히는 절체절명의 순간,
쨍강!
아벨이 검을 바닥에 냅다 던져버렸다.
"응?"
"허어?"
지켜보던 관중들은 모두 얼빠진 소리를 흘렸다.
"제가, 졌습니다."
아벨이 천천히 양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목에 미켈의 검이 닿아 있었다.
미켈은 마지막 순간 검의 방향을 트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힘조절엔 실패했다.
결국 그의 검은 아벨의 목에 상처를 내고 말았다.
뚝.
미켈의 검날을 타고 흐른 핏방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
순간 아벨이 뭔가에 데인 듯 흠칫거렸다. 그는 바닥의 핏방울을 보았다가,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시선을 돌렸다.
"후...."
아벨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의 낯빛이 창백하게 질려갔다.
그걸 본 미켈은 의혹에 잠겼다.
'피를 무서워하나?'
아벨이 현재 어떤 상태인지 모르는 그로선, 아벨의 비위가 약하다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미안하네."
미켈은 얼른 검을 거두었다. 안쓰러운 얼굴로 아벨에게 다가섰다.
"아벨 공자, 괜찮은가?"
아벨은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바닥을 노려보기만 했다.
그의 악다물어진 턱이 바르르 떨렸다. 무언가를 꾹 억눌러 참는 듯한 고통스러운 표정이었다.
"대체 왜 저러는 것이오? 검은 왜 던진 건데?"
"목의 상처가 심각한 것 아니오?"
"저게 아프다고 죽상일 거면 검을 어떻게 쥔단 말이오?"
그 모습을 본 관중들은 그저 의문스러울 뿐이었다.
미켈 또한 의문의 연속이었다. 그가 본 아벨은 이 정도의 일로 겁먹을 이가 아니었다.
"공자, 상처가 많이 아픈 겐가?"
"...."
"늙은이의 의욕이 너무 앞서고 말았군. 상처가 깊진 않으니 빨리 치료하면 괜찮을 걸세."
모두의 의문을 해결해 줄 당사자는 계속 침묵하기만 했다.
미켈은 잠시 고민하다가 아벨의 어깨를 살짝 짚었다.
"아벨 공자?"
"-!"
아벨이 움찔 고개를 들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미켈은 멈칫했다.
아벨의 청보랏빛 눈동자가 붉게 일렁이고 있었다. 지금껏 보지 못한 위험스럽고 난폭한 안광.
결코 길들일 수 없는 괴물을 맞닥뜨린 기분이 이러할까.
미켈의 등줄기에 오싹, 소름이 일었다.
'이 내가 섬뜩함을 느끼다니?'
그는 지레 놀라 손을 떼고 물러섰다. 이해할 수 없는 일투성이었다.
"...괜찮습니다."
마침내 아벨이 입을 뗐다. 한결 탁해진 그 음성이, 어쩐지 짐승의 그르렁거림처럼 들렸다.
"가르침은, 잘, 받았습니다."
아벨의 문장은 힘에 겨운 것처럼 띄엄띄엄 끊어졌다. 말을 마친 그가 몸을 홱 돌렸다.
"나중에, 뵙겠습니다."
그리곤 미켈의 대답조차 듣지 않고 떠나버렸다. 관중석에 앉아있는 황제에게 인사조차 생략한 채.
"저, 저런 고얀...."
"말도 없이 훌쩍 가버리다니!"
관중들은 황당해하며 시선을 돌렸다. 이 대련의 승패를 선언해 줄 조슈아 단장을 향해서.
"어...."
조슈아 단장은 얼이 빠진 얼굴로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왜 저러는 것이오?"
"우리도 영문을 모르겠군."
관중들의 시선은 자연스레 미켈을 향했다. 그리고 왠지 심각한 얼굴로우두커니 서 있는 미켈을 발견했다.
"-아."
비로소 관중들의 시선을 느낀 그가 몸을 바로 세웠다.
"허허허."
미켈이 너털웃음을 터뜨린 뒤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어찌 된 일인지 영문을 모르겠구려."
"허면, 이 대련의 승패에 대해 확실히 말해주는 게 어떠하오?"
카를로가 은근한 말투로 물었다. 아벨이 패배했다는 말을 두 귀로 직접 듣고 싶은 눈치였다.
"흠, 글쎄."
미켈이 느긋하게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의 눈길이 아벨이 사라져 간 방향을 향했다.
"아벨 공자는 스스로 졌다고 말했지만, 내 생각에 이건...."
관중들이 눈을 빛내며 미켈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무승부, 라고 할 수 있겠소."
확신 어린 발언에 관중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이게 어떻게 무승부일 수가 있소?"
"먼저 검을 내던지고 도망간 것은 아벨 공자인데!"
"스스로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소이까?"
"조용."
미켈이 위엄 있게 손을 들어올리자 관중들의 아우성이 멈췄다.
"내 단언하지."
미켈이 관중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의 뺨에 의미 모를 미소가 번졌다.
"제국 최강자의 이름은, 곧 바뀌게 될 것이오."
말을 마친 그가 자리를 떴다. 관중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웅성거리기 바빴다.
까득.
소란스러운 틈으로 난폭한 소리가 한줄기 섞여들었다. 똥 씹은 얼굴을 하고 있는 카인의 입가에서 난 소리였다.
❖ ❖ ❖
"...것으로 사료됩니다."
엘리체는 점을 꾹 찍은 뒤 깃펜을 들어 올렸다. 쓰고 있던 종이를 장부에 끼워 넣은 뒤 옆으로 밀쳤다.
"으아아아."
책상 위로 엎어지는 엘리체의 입에서 긴 한숨이 터져 나왔다.
"드디어 끝...!"
"다 했어요?"
그 옆에 쪼그리고 앉아있던 잭이 물었다. 엘리체는 앓는 소리를 내며 팔을 흔들었다.
"아니, 이제 한 4/5쯤 끝냈어. 아마 주인님이 오시기 전까진 끝낼 수 있을 듯해."
"징하네, 징해."
잭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곤 사육장의 뚜껑을 조심스럽게 열어젖혔다.
"좀 쉬어가면서 하세요. 벌써 3시간 째 책상에 앉아있기만 했어요."
"그래야지. 허리가 너무 아파."
엘리체가 허리를 두들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가 책상 앞을 벗어나 잭에게 다가왔다.
"볼수록 신기하네."
"골드스타요? 하긴, 진짜 신기하긴 해요."
잭이 사육장의 흙 위에 메추리알을 내려놓았다. 알을 발견한 골드스타가 그쪽으로 슬금슬금 다가오기 시작했다.
"에그 이터 스네이크라니. 처음 들어봤어요. 뱀들은 다 살아있는 먹잇감을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골드스타를 바라보는 잭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진짜 귀엽다. 이 동그란 눈 좀 봐요. 볼수록 더 귀여운 거 같아요."
잭의 취향은 일반인과는 남다른 구석이 있었다. 그런 잭을 바라보던 엘리체가 풋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걔가 신기하다는 게 아니고. 너 말이야, 너."
"어? 저요?"
"그래."
엘리체가 손을 뻗어 잭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첫날 여기 문 열고 들어오면서 벌벌 떨던 게 엊그제 같은데."
엘레체의 입가에 픽, 미소가 번졌다.
"그새 이렇게 적응해버렸네."
"아이, 누나도 참. 머리는 건드리지 말라니까요!"
잭이 부스스해진 머리를 붙잡고 울상을 지었다. 잭의 항변에도 엘리체는 재밌다는 듯 웃기만 했다.
"널 보면 꼭 덱스터 어릴 때를 보는 것 같아."
"엑, 그 형이요?"
잭이 빽 소리치곤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끔찍한 소리 마세요."
덱스터는 틈만 나면 잭을 괴롭히곤 했다. 잭의 반응이 재밌다는 이유에서였다.
사실, 잭은 그런 덱스터가 정말 싫지는 않았다. 그런 짓궂은 장난도 호감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좋으면서 싫은 척 하긴."
잭의 속내를 꿰뚫는 듯한 엘리체의 한 마디였다.
Chapter 15. 자존심을 건드린다. (6)
"아닌데요? 저 진짜 덱스터 형 싫어하는데요?"
투덜거리는 잭의 모습은 덱스터와 무척 닮아 있었다. 덱스터도 같은 질문을 받았을 때 저렇게 치를 떨곤 했다.
"그래그래, 알았어."
엘리체는 키득키득 웃으며 한발 물러섰다.
"아무튼 네 덕에 골드스타가 호강하네."
그녀는 절대 골드스타의 근처로 다가가지 않았다. 철저히 거리를 유지한 채 대화를 계속했다.
"난 아직도 녀석이 무서운데 말야."
"에이, 뭐가 무서워요? 안 물어요. 얘 진짜 순해요."
때마침 골드스타가 알을 삼키기 위해 입을 쩍 벌렸다. 순식간에 입이 위아래로 4~5배 이상 크게 벌어졌다.
덥석.
골드스타는 제 머리보다 큰 알을 한입에 삼켰다. 그리고 꿀렁대며 뱃속으로 밀어 넣기 시작했다.
물론, 그 모습은 몹시 포악해 보였다.
"...어,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잖아요? 뭐 그런 거죠...."
"푸훗."
엘리체는 픽 웃으며 골드스타를 처음 본 날을 상기했다.
"그때는 정말 어떻게 다가갔는지...."
아벨의 강압이 없었다면 절대 가지 않았을 것이다.
이 골드스타를 데려올 때도 그녀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덱스터를 시켜 데려온 뒤, 돌보는 것은 잭에게 맡겨 버렸다.
"어제 돌은 얼마나 주웠어?"
"어제는 2개요."
뿐만 아니라, 잭은 아벨의 지령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바로 골드스타를 데리고 다니면서 녀석이 입에 넣는 돌을 챙기는 일이었다.
"그럼 지금까지 다 해서 몇 개지?"
"음.... 한 12개 정도 되는 거 같아요."
잭이 시무룩한 얼굴로 덧붙였다.
"너무 적지 않아요? 주인님께서 만족하시지 못할 거 같은데."
그는 이 벤데타 길드의 진짜 주인이 따로 있음을 알고 있었다. 바로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무서운 냄새가 나는 그 남자.
"보고 화내시면 어떡하죠?"
잭에게 주인님은 이미 공포의 대상으로 각인된 뒤였다. 그가 톰과 제리를 두들겨 패던 모습이 아직도 종종 꿈에 나오곤 했다.
엘리체는 흔쾌히 대답했다.
"괜찮을 거야."
그녀는 아벨이 시킨 일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진 못했다. 하지만 아벨의 말에서 대충 유추할 능력은 있었다.
'만약 녀석의 몸에 이상이라도 생긴다면, 그렇게 만든 놈을 똑같은 꼴로 만들어줄 생각이야.'
그가 골드스타를 아낀다는 것은, 그만큼 이 뱀이 물어온 돌이 진귀하기 때문일 것이다.
'희귀도가 높을수록 수량이 적어지는 것은 당연하니까.'
굉장한 가치를 가진, 그리고 아주 드물게 발견되는 무언가. 또한 골드스타가 아니면 찾을 수 없는 것.
'...설마, 그건가?'
엘리체는 이미 정답에 근접해 있었다. 하지만 제 생각을 굳이 입 밖에 내는 섣부른 짓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아벨이 돌아오면 알 수 있을 테니까.
"너무 걱정할 것 없어, 잭."
엘리체는 기나긴 사고의 흐름을 잭에게 설명하는 대신 어린 잭을 안심시키는 데 힘썼다.
"그리고 설령 주인님께서 화를 내시더라도, 그게 너를 향할 일은 없을 거야."
처음 잭은 엘리체에게 날을 세우고 되바라지게 굴었다. 하지만 엘리체의 상냥한 모습에 금세 마음을 열었다.
아닌척 해도 아직 따뜻한 정이 그리울 나이였다.
"정말요? 아 그래도 불안한데. 진짜 괜찮은 거 맞아요?"
잭은 여기서 언제 내쳐질지 모르는 것처럼 몹시 불안해했다.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는 것처럼 시키지도 않은 일까지 열심히 하곤 했다.
그 모습이 고달팠던 어린 시절의 엘리체를 떠오르게 했다.
그래서 엘리체는 잭을 볼 때면 마음이 약해지곤 했다. 그 모습을 본 덱스터는 이렇게 차별하기 있냐며 투덜거렸지만.
"정말 괜찮아. 그런 생각하지 마."
"아, 안 되겠어요."
엘리체의 말에도 잭은 아직 안심한 기색이 아니었다.
"저 덱스터 형 돌아오면 바로 같이 나가자고 할래요. 더 찾아보는 게...."
"괜찮대도. 주인님께서 할당량을 따로 지시하지도 않았고."
엘리체는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잭의 어깨를 짚었다.
"주인님은 내일 오후 늦게 오실 거야. 그러니 아침에 한 번 더 다녀오렴."
"하지만...."
"지금 나가서 언제 들어오려고? 늦게 자면 키 안 큰다?"
"엑, 그건 싫어요!"
잭이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그 서슬에 골드스타가 흠칫 몸을 일으켰다.
"아, 미안. 미안. 먹던 거 마저 먹어."
잭은 골드스타를 한번 쓰다듬어 준 뒤 소리쳤다.
"키 커야 해요!"
비장한 얼굴로 옆에 놓여 있던 쟁반을 쥐었다. 그곳엔 흰 우유가 담긴 유리병이 올려져 있었다.
물론, 이 벤데타 길드에서 아직 우유를 마시는 것은 잭뿐이었다.
엘리체는 웃음을 참으며 잭이 우유 뚜껑을 여는 걸 지켜보았다. 그때였다.
탕!
거칠게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
"-까! 갑자기...."
방 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홀의 윌리엄이 누군가와 대화하는 소리였다.
"어?"
잭이 우유병을 내려놓았다. 그의 인중에 흰 수염이 생겨 있었다.
"무슨 일이지?"
"윌리엄이 누구랑...."
엘리체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는 최대한 바깥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다투고 있어."
금세 상황을 파악한 그녀가 허벅지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의뢰인인가? 아니면 다른 길드?'
엘리체는 최근 작업한 일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그리고 딱히 문제될 게 없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럼 누구지?'
사실, 최근에 여기서 거창하게 난동을 부린 사람이 있긴 했다. 그때의 기억은 엘리체의 평생에 잊을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잠깐, 아직 오실 때가 안 됐는데?'
무엇보다 아벨은 거칠게 입장할 필요가 없었다. 윌리엄이 알아서 깍듯하게 안쪽의 방으로 안내해줄 터였다.
'그럼 대체....'
엘리체의 표정이 차츰 굳어졌다.
"-십시오!"
계속해서 윌리엄의 고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이제 결단을 내려야 할 때였다.
"누, 누나도 싸우게요?"
잭의 얼굴에 와락 겁이 떠올랐다.
"누나가 무슨 힘이 있다고...."
"나 자신을 지킬 정도는 돼."
엘리체는 짧게 대답하며 손짓했다.
"이 쪽으로 와."
책장을 밀어내자 그 뒤에 숨겨졌던 공간이 드러났다. 몸집이 작은 성인, 혹은 어린아이 한 명이 간신히 들어갈 크기였다.
'하필 덱스터도 없는데....'
엘리체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잭을 비밀 공간으로 밀어 넣었다.
"안에서 보면 책 사이로 틈새가 있을 거야. 나올 땐 그걸 잡고 밀어내면 돼."
"하지만...."
"나중에 조용해지면 나와서, 어떻게든 주인님을 만나러 가."
엘리체가 목걸이를 풀어 잭의 손에 쥐여 주었다.
"절대 잃어버리면 안 돼. 알았지?"
"누, 누나...."
잭의 눈이 그렁그렁해졌다. 그는 목걸이를 꼭 쥐면서도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내게 무슨 일이 생겨도 나오지 마."
엘리체는 그런 잭의 눈망울에서 시선을 돌렸다. 책장을 밀어 닫은 뒤 거기서 물러났다.
뒤돌아서 방 밖의 상황을 살폈다.
'...온다.'
정체 모를 침입자는 이 방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발걸음 소리가 점점 커졌다.
"...어?"
엘리체의 눈이 커졌다. 귀에 익은 목소리를 감지한 탓이었다.
벌컥!
방문이 노크도 없이 활짝 열렸다. 잔뜩 긴장한 채 방 밖을 바라보던 엘리체가 멍한 얼굴을 했다.
"당신은...?"
문 앞에 서 있는 것은 아벨 킨드리얼이었다. 그 뒤에선 윌리엄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쫓아오고 있었다.
"엘리체님, 그게...."
"엘리체."
윌리엄이 뭐라고 설명하기도 전에, 아벨이 방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스윽.
잭은 호기심과 두려움을 참지 못하고 책을 옆으로 살짝 밀었다. 가느다란 틈새 사이로 바깥 풍경이 비쳤다.
'...우와.'
감탄이 터져 나왔다.
문을 열고 들어선 사람은 굉장한 미청년이었다. 섬세한 이목구비는 물론이고, 푸른 머리카락과 라일락빛 눈동자가 굉장히 독특했다.
잭의 인생에 저렇게 잘생긴 사람은 처음이었다.
'저 남잔 누구지?'
잭은 대번에 그가 귀족임을 눈치챘다. 먼발치에서 본 귀족들과 비슷한 분위기가 풍겼기 때문이다.
'근데 표정이....'
청년의 낯이 신경질적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터지기 직전의 무언가를 눌러 참는 듯이 보였다.
"...주인님."
엘리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렇게 갑자기 무슨 일이십니까?"
잭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주, 주인님? 저 사람이?'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청년, 즉 주인님을 힐끔힐끔 훔쳐보았다.
'헐....'
로브 속의 얼굴이 저렇게 생겼을 줄이야.
사실 잭은 주인님의 얼굴이 아주 험상궂은 데다 칼자국이 몇 개씩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윽!'
잭이 뒤늦게 인상을 찌푸렸다.
주인님에게서 났던 소름끼치는 냄새. 그것이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게 풍겨오고 있었다.
'아니, 뭔가 달라.'
냄새가 격렬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꼭 정체 모를 거대한 괴물이 몸을 들썩이는 듯한 느낌. 조금이라도 고삐를 풀어주었다간 냉큼 올라타서 자신을 물어뜯을 것만 같았다.
'으윽, 너무 지독해.'
잭은 차마 코를 틀어막지는 못하고 숨만 죽였다.
예전에 이 일로 곤욕을 치른 경험 때문이었다. 또다시 무슨 냄새가 나냐고 추궁받고 싶진 않았다.
"주인님?"
엘리체는 잭만큼 코가 예민하지 않았기에 그저 혼란스러웠다.
아벨이 왜 이렇게 갑자기 들이닥쳤는지, 왜 저렇게 안색이 파리한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
아벨은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숨을 고르며 바닥을 노려보기만 했다.
여유로운 미소는 온데간데없고, 일그러진 낯만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가 만들어낸 침묵이 공간 전체를 감싸 안았다. 아벨을 제외한 세 사람은 왠지 모를 한기를 느꼈다.
"...엘리체."
마침내 아벨이 고개를 들어 엘리체를 응시했다.
"-!"
엘리체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깊이 모를 안광이 푹 찔러 들어오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자신을 베는 것 같았다.
'...내가 뭘 잘못했나?'
엘리체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근거 없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전에 드린 자료가 잘못됐나? 그거 때문에 회의에서 창피를 당하신 건가?'
부정적인 방향으로 상상이 뻗어 나갔다. 짚이는 곳은 거기뿐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화난 얼굴로 들이닥치신 건가?'
온몸의 피가 마르는듯했다. 순식간에 손발 끝이 차가워졌다.
혼란스럽던 머릿속이 정리되었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엘리체는 떨리는 손끝을 감췄다.
"무슨 상황인지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말씀해주신다면, 최선을 다해 수습하도록 하겠습니다."
"...최근,"
아벨의 목소리는 가뭄이 온 땅처럼 버석하게 말라붙어 있었다.
'겨우 참고 계시는 거구나.'
엘리체는 호흡이 조여오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말씀하십시오."
"최근, 수도 주변에서."
아벨은 잠시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최근 수도 주변에서 여행객들이 공격당한 적은 없나?"
뜬금없는 단어들이 엘리체의 귀를 간지럽혔다.
'수도? 여행객? 공격?'
엘리체의 머릿속이 다시 혼란해졌다.
'이게 왜 여기서 나와?'
의문이 치밀었지만, 이성이 주도권을 잡는 게 먼저였다.
엘리체는 이유를 묻는 대신 기억부터 더듬었다. 서둘러 아벨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았다.
"있습니다. 그것도 꽤 자주요."
"...."
"수도로 오는 여행객, 혹은 상단을 습격 후 납치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아벨은 표정 없는 얼굴로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도적들의 소행으로 추정됩니다. 그 세력이 점점 불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거기 어디야."
"네?"
"거기 어디냐고."
엘리체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거, 거기가."
겨우 입술을 움직였다. 이상하게 자꾸 오한이 들어 혀가 제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그러, 니까...."
"...."
"케, 케...."
분명히 그곳 이름을 아는데, 눈앞이 핑핑 돌고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케, 뭐?"
아벨의 얼굴이 제게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Chapter 15. 자존심을 건드린다. (7)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조각 같은 얼굴 한가운데, 핏빛으로 물든 눈동자가 이글이글 들끓었다.
탁.
아벨의 손이 엘리체의 어깨를 꾹 쥐었다.
"어디냐고."
이상하리만치 싸늘한 얼음장 같은 손길. 손을 목으로 조르는 것처럼 호흡이 가빠왔다.
"케, 케케 케자르요!"
엘리체는 그 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를 뻔했다.
"케케케자르라고?"
차마 웃지 못할 반문이 되돌아왔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케자르입니다!"
"케자르?"
"네, 네!"
"거기가 어디쯤이지?"
"수도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에 있는 중소 영지...."
"그래."
아벨의 손이 바로 떨어져 나갔다. 훅, 하고 차가운 안개 같은 것이 멀어지는 듯했다.
"하아, 하아."
엘리체는 잠시 가슴을 움켜쥐고 호흡을 골라야 했다. 아벨이 멀어진 후에야 겨우 숨을 쉴 수 있었다.
"후우...."
그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응?"
어느새 아벨은 사라진 뒤였다.
방 안에 남은 것은 엘리체와 책장 뒤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을 잭, 그리고 아연한 얼굴의 윌리엄뿐이었다.
"...주, 주인님은?"
윌리엄이 문을 향해 턱짓했다.
"보다시피, 나가셨습니다."
"벌써? 방금까지 계셨는데?"
"엘리체님 말이 끝나자마자 뛰쳐나가시더군요."
엘리체는 그제야 온몸에 들어간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하아...."
"엘리체님!"
비틀거리는 그녀를 윌리엄이 부축했다.
"괜찮...아. 괜찮아."
엘리체는 윌리엄의 팔을 붙잡고 버텨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지만 애써 힘을 주었다.
"누, 누나."
잭이 끙끙대며 책장을 밀고 빠져나왔다. 허둥지둥 다가와서
엘리체의 얼굴을 확인하곤 화들짝 놀랐다.
"누나! 얼굴이...."
엘리체의 안색이 새파랬다. 고작 몇 초 만에 사람 얼굴이 이렇게 창백해질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엘리체는 그런 잭을 향해 힘없이 웃어 보였다.
"많이 놀랐지, 잭?"
"네, 네에. 꼭 처음 봤던 때처럼 살벌하셔서...."
잭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원래 저런 분이에요? 이렇게 무서운 분을 어떻게 주인으로 모셔요?"
윌리엄과 엘리체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다시 잭을 보며 입을 열었다.
"원래 그런 분은 아니시긴 한데...."
"원래 그런 분이긴 한데...."
아차.
두 사람은 동시에 얼굴을 구겼다. 그 반응을 본 잭은 생각했다.
'...나, 여기 있어도 괜찮은 걸까?'
❖ ❖ ❖
삐이익-
나에게만 들리는 날카로운 소리가 허공을 가른다.
삐익, 삐익-
나는 호루라기를 연거푸 분 뒤 툭 놓았다.
"하아, 하아."
시야가 붉게 일렁인다.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거칠게 뛰고, 등 뒤에 식은땀이 밴다.
[죽여.]
누구의 것인지 모를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독한 허기가 뱃속을 박박 긁어대었다.
'젠장.'
미간을 찌푸리며 한 줄기 욕을 짓씹었다.
'빌어먹을 영감탱이 같으니.'
괜히 미켈을 자극했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미켈의 어마어마한 승부욕을 간과한 게 실책이었다.
'내가 생각보다 잘 따라오니 점점 신이 난 모양이지.'
처음엔 간단히 내 수준을 시험하려는 듯하던 움직임이, 점차 거칠어지고 묵직해진 게 그 증거였다.
'망할 노인네.'
아니, 아무리 내가 잘해도 그렇지. 갑자기 살기를 흘리면 어떡하자는 건지.
'하아, 아니다.'
이건 아무래도 내가 너무 잘난 탓인 것 같다. 조금만 실력이 모자랐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말이다.
"...."
일부러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해보았지만, 요동치는 속이 잠잠해지진 않았다.
까드득.
내 어금니가 맞부딪치며 기괴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X발, 존나 힘드네.'
내 목덜미의 피는 멎은 지 오래였으며, 갈라졌던 틈도 매끈하게 붙어버렸다.
이제 나와 레퀴엠의 동조율은 살짝 벤 상처 정도는 한 시간 만에 아물게 해버릴 정도였다.
[죽여!]
잠깐, 이제 듣는 사람도 없으니까 그냥 말해도 되잖아?
"닥치라고!"
낮게 외치고는 귀를 꽉 막았다.
황궁을 뛰쳐나와 마차를 타고 달리는 지금까지, 레퀴엠은 그야말로 미쳐 날뛰어 댔다.
'고작 피 한 방울 때문에....'
안 그래도 미켈 때문에 들썩이던 와중에, 피 냄새까지 맡자 말 그대로 돌아버린 것이다.
뚝, 하고 떨어지는 핏방울은 가득 차 있는 유리잔을 흘러넘치게 만든 마지막 한 방울이었다.
'크윽.'
지금도 꿀렁거리며 나라는 유리잔 너머로 피를 뿌려댔다. 그게 넘치려 들 때마다 온 힘을 다해 억눌렀지만 이제 한계였다.
'조금만 더.'
수도 안에서 사고를 치게 되면 두고두고 골치 아파질 것이다.
수도의 경비대는 일개 영지의 경비대와는 급이 달랐다. 사태를 알아채고 추적하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무조건, 수도 밖으로 나가야 해.'
엘리체를 급하게 찾은 것도 그래서였다. 최대한 뒤탈 없이 일을 치려면 죽여도 상관없는 자들을 찾아야만 했다.
천천히 마차의 속도가 느려지고 있었다. 창밖으로 수도 밖으로 나가는 관문이 보였다.
"다 왔습니다만."
마부가 덧창을 열었다.
"정말 여기서 내려드리는 게 맞습니까? 왜 관문을 통과 안 하시고... 어?"
그는 거칠게 일그러진 내 얼굴을 보고 걱정스레 물었다.
"손님, 괜찮으십니까?"
"...."
대답도 못 하고 이를 악물었다.
'제발, 조용히 해.'
인간이 웅얼거리는 소리가 내 귀를 자극했다. 이미 레퀴엠이 앵앵대는 소리가 뇌를 가득 채우고 있는데도.
너무, 너무 시끄러웠다.
"마차를 돌릴까요? 근처에 아는 진료소가 있습니다만."
"...."
"말하기 힘드시면 고개를 끄덕이셔도-"
"닥치고 마차나 세워."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내뱉고 말았다.
누군가와 대화를 할 상황이 아니었다. 아까 엘리체에게 몇 마디 하는 데만도 엄청난 심력을 소모했다.
끼익!
당황한 마부가 마차를 세웠다. 나는 발로 마차 문을 걷어차 연 뒤 훌쩍 뛰어내렸다.
"아니, 저...."
마부에게 휙, 동전을 던졌다.
"다시 부를 일 없으니 가라."
대답도 듣지 않고 휙 돌아섰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관문을 향해 나아갔다.
관문에 서 있던 경비병들이 나를 보고 흠칫 놀랐다.
"어? 당신은...."
"지금 이 시각에 나가시면...."
그들을 무시하며 관문을 휙 지나쳤다.
관문 안으로 진입할 때는 신분패 검사가 필요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엔 딱히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타닥!
관문을 벗어난 순간부터, 나는 힘껏 내달리기 시작했다.
"헉, 헉."
벗어나야 했다.
내 등 뒤로 가득한 핏빛 생명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삐익!
다시 호루라기를 꺼내어 불었다. 절대영역을 펼치고 오감에 신경을 집중했다.
'블랙스타, 빨리!'
아직은 녀석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파사삭!
행인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길을 벗어나 수풀이 우거진 숲으로 뛰어들었다.
'아직인가?'
점점 절대영역의 범위 내에서 인간의 수가 줄어들고 있었다.
레퀴엠은 그런 나를 제지하려고 버둥거렸다.
어서 발길을 돌려 반대 방향으로 돌아가라고, 진수성찬이 차려진 저곳을 향해 가라고 성화였다.
'닥쳐! 그쪽으로 안 간다니까!'
젠장.
이래서 황궁의 음식을 열심히 먹어뒀던 건데. 배가 차 있을수록 레퀴엠의 유혹을 이기기 쉬우니까.
하지만 녀석의 공허는 역시 그 정도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저 잠시 진행을 늦출 뿐.
끊임없이 소유자를 허기와 갈증에 시달리게 만드는, 이 미쳐버린 검이 나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안...가!'
마지막 힘까지 쥐어짜내 외친 순간,
"-!"
절대영역의 끝자락에 새로운 존재가 느껴졌다.
내겐 몹시도 익숙한, 항상 내 다리 아래로 느껴지던 생명의 감각이었다.
"블랙 스타!"
녀석의 푸르릉거리는 소리가 벌써 귓가에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삑!
위치를 알리기 위해 호루라기를 힘차게 불었다. 녀석의 존재감이 즉시 내 쪽으로 휙 방향을 트는 게 느껴졌다.
'어서 이쪽으로!'
녀석이 있는 방향을 향해 박차를 가했다. 어두운 숲을 헤치고,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뛰어가기를 한참.
"푸르르릉!"
귀에 익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블랙 스타!"
다음 순간, 블랙스타의 거대한 몸이 나무 사이로 나타났다.
두두두두두!
녀석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푸릉! 푸릉!"
애타는 울음소리는 꼭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주인님, 젠장! 믿고 있었다고!'
녀석의 황금빛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반짝반짝 빛났다.
"녀석...."
기특한 마음에 코를 쓱 훔치려는 순간, 블랙 스타의 입에서 덜렁거리는 무언가가 보였다.
"-?"
눈을 가늘게 떠 시력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얼굴을 콱 구겼다.
"...저 새끼가?"
블랙스타가 입에 물고 있는 것은 죽은 쥐였다. 달려오는 그새를 못 참고 입에 집어넣은 것이다.
"너 입에 그거 뭐야!"
버럭 소리치자 블랙스타의 눈이 데굴 굴렀다. 그러더니 냅다 쥐를 꿀꺽 삼켜버렸다.
"푸릉?"
블랙스타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순진무구하게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저... 저 자식이!"
뒷목을 잡으며 앓는 소리를 흘렸다. 누굴 닮아 저러는지 속이 터질 뿐이었다.
"야! 빨리 안 와?"
"푸릉! 풍!"
블랙스타는 콧방귀를 팽팽 뀌며 달려왔다. 뭐 그런 일로 화를 내냐는 표정이었다.
블랙스타의 속도가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내 앞에 딱 멈춰 서려는 의도인 듯했다.
"아니, 그러지 마!"
인상을 쓰며 고개를 흔들었다.
"푸릉?"
블랙스타가 지금 뭔 소리 하냐며 나를 바라보았다.
"속도 줄이지 마! 계속 달려!"
"푸르릉?"
블랙스타가 어리둥절한 눈빛을 보냈다.
'주인이 왜 저러지? 미쳤나?'
...저 녀석이 진짜?
못 본 사이 사람 말이라도 배운 건가. 눈빛만으로 속내를 전달하는 게 아주 수준급이다.
"그냥 쭉 달리라고!"
다시 외치자 블랙스타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쭉 달려왔다. 내 말을 따라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그래, 이쪽으로!"
저 하늘 위에 빛나는 달보다도 더 환한 금빛이 내게 가까워졌다. 블랙스타의 거체가 가까이 오는 순간,
타닥!
곡예처럼 나무를 박찬 뒤 하늘로 훌쩍 날아올랐다.
털썩.
블랙스타의 거대한 등 위로 몸이 안착했다. 마치 녀석을 처음 길들이던 그때처럼.
"좋았어."
일 분 일 초가 아까운 지금, 녀석을 괜히 멈추게 할 필요는 없었다.
"가자!"
고삐를 당겨 블랙스타를 재촉했다.
그런데 녀석은 속력을 내긴커녕 눈을 깜박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황금빛 눈동자가 열렬하게 반짝이는 것이 꼭 뭔가 기다리는 눈치였다.
'설마, 칭찬해 달라는 건가?'
꽁!
대답 대신 녀석의 이마를 쥐어박았다.
"히힝!"
난데없이 꿀밤을 맞은 블랙스타가 낑낑거렸다.
"중간에 처먹고 온 주제에, 뭘 잘했다고 큰 소리야!"
녀석을 윽박지른 뒤 다시 고삐를 당겼다.
지금 내겐 녀석을 어르고 달랠 여유가 없었다. 잠깐 실랑이하는 사이 레퀴엠이 또 유리잔을 비집고 나오려 들었기 때문이다.
"힝...."
블랙스타는 서글프게 웅얼거리더니 달려가기 시작했다. 엘리체가 알려준 케자르 영지 쪽을 향해서.
두두두두!
블랙스타가 콧김을 뿜으며 마구 질주했다. 심통이 난 모양인지 발길이 퍽 거칠었다.
'흥.'
그것을 못 본 체하며 녀석의 몸에 바짝 붙었다.
그렇게 블랙스타와 한 몸이 되어 질풍처럼 한밤중의 숲을 돌파했다. 빛 한점 없는 어둠 속에서도 전혀 망설이지 않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
절대영역 안으로 많은 생명이 훅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이 깜깜한 숲속에 이 정도의 인원이 모여있을 일은 많지 않았다.
"찾았다."
안도 어린 웃음이 흘러나왔다. 소리 내어 웃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블랙스타에게 속삭였다.
"저거 보여?"
"푸릉."
블랙스타는 내 손가락 끝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 부숴버려, 전부."
즐거운 미소를 지으며 뇌까렸다.
Chapter 15. 자존심을 건드린다. (8)
블랙스타는 내 말을 알아듣곤 더욱 박차를 가했다.
"자, 가자!"
"푸릉!"
블랙스타가 크게 포효하며 돌진했다.
"어, 어어?"
"저게 뭐야?!"
보초를 서던 도적들이 우리를 발견했을 땐 이미 늦어 있었다.
와지끈!
야영지의 문이 블랙스타의 발굽에 채여 박살났다.
"푸르르릉!"
흥에 겨워 폴짝폴짝 뛰는 블랙스타의 위에서 뛰어내렸다. 녀석의 궁둥이를 툭 치며 말했다.
"가서 맘껏 날뛰어 봐."
다른 손으론 레퀴엠을 스릉, 뽑아냈다.
"근데 인간은 건드리지 마."
"푸릉?"
"인간이 아닌 것만 부수면 돼. 이해했어?"
마지막으로 힘주어 강조했다.
"인간 건드리면 나한테 죽을 줄 알아."
그리고 뒤돌아섰다.
"뭐, 뭐야!"
"침입자다!"
"대장님을 불러!"
우왕좌왕 난리가 난 도적들을 향해서.
살육의 시작이었다.
❖ ❖ ❖
오늘은 블랙스타에게 참 재수 없는 날이었다.
'열심히 달려왔는데!'
주인은 제가 오는 길에 먹이를 주워 먹은 줄 알고 화를 냈지만, 진실은 그게 아니었다.
'그냥 씹는 걸 깜박했을 뿐인데!'
아벨이 들었다면 그게 그거라고 쥐어박았을 생각이었으나, 블랙스타의 기준에 그 둘은 확연히 다른 것이었다.
삐익-!
이 소리가 들려온 것은 약 한 시간쯤 전이었다. 그때 블랙스타는 막 사냥한 들쥐를 입에 넣던 참이었다.
'주인님이다!'
주인이 귀에 딱지가 얹도록 들려준 바로 그 소리였다.
블랙스타는 곧바로 몸을 틀어 소리가 난 방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느라 입에 들쥐를 물고 있던 것도 깜박했다.
아니, 정확히는 그것을 씹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고 봐야 했다.
삐익-! 삐익-!
그 호루라기 소리가 신경질적으로 자주 들려오는 탓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가고 있는데에!'
블랙스타는 눈물을 삼키며 열심히 달려갔다. 정말이지 태어나서 이렇게 꽁무니가 빠져라 뛰어본 건 처음이었다.
어느 순간, 블랙스타는 주인 특유의 독특한 냄새를 맡았다.
'주인이다!'
죽어라 달려온 보람이 있었다.
제가 생각해도 자신은 정말 빨랐다. 주인이 없는 동안 들판을 마구 돌아다녔지만, 자신보다 빠른 녀석은 보지 못했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빠른가 봐! 역시 난 최고야!'
그 말에 그 주인이었다. 정확히는 몬스터지만 말이다.
이윽고 시커먼 나무 사이로 주인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주인이다!'
블랙스타는 흥겹게 힝힝거리며 주인을 향해 달려갔다.
'나 이쁘지?! 나 잘했지?!'
주인이 또다시 제 목 뒤를 긁어 줄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렇게 빨리, 정확하게 도착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너 입에 그거 뭐야!"
주인은 블랙스타를 보자마자 고함부터 질렀다. 블랙스타는 그제서야 제가 입에 뭘 물고 있었는지 떠올렸다.
'아차!'
블랙스타는 당황한 나머지 일단 들쥐를 꿀꺽 삼켰다. 뼈까지 와작와작 가루가 되도록 씹어먹는 재미를 포기하면서.
그러자 주인이 눈에서 불똥을 튀겼다.
"저... 저 자식이!"
결국 블랙스타는 주인에게 목 뒤를 긁히긴커녕 마구 쥐어박히기만 했다. 큰 소리로 화내는 것만 잔뜩 들었다.
블랙스타는 울컥해서 순간 생각했다.
'발로 차버릴까?'
하지만 흉흉하게 번득이는 주인의 눈을 보곤 포기했다.
'...관두자.'
제 주인의 성질은 정말이지 너무너무 더러웠으니까.
그를 만난 첫날, 블랙스타는 엉망이 된 나무 동굴에서 혼자 울음을 삼켰다.
'역시 인간은 싫어!'
인간들은 제가 이를 조금만 드러내도 '힉!'하고 우스꽝스러운 소리를 냈다.
그렇게 저를 겁내면서도 밥은 꼬박꼬박 주고, 제 몸이 더러워지면 닦아주고, 제가 퍼질러놓은 똥을 치웠다.
그걸 본 블랙스타는 생각했다.
'내가 왕인가 봐!'
이 하찮은 인간들은, 저들보다 훨씬 크고 빠르고 아름다운 자신을 섬기는 노예였던 것이다!
그런 놈들이 자신을 가둬두고 있다는 게 너무 짜증났다. 하지만 아무리 몸부림쳐도 두꺼운 쇠줄들이 끊어지질 않았다.
"야, 뛰어."
주인은 그런 자신을 꺼내주고 마음껏 달리게 해줬다.
발굽이 한번 땅을 박찰 때마다 순식간에 멀어지는 풍경, 휘날리는 바람이 갈기를 스치고 지나가는 감각. 바람, 숲, 온갖 것들의 냄새.
모든 것이 블랙스타에겐 너무나 새로웠다. 생생하고 또 황홀했다.
'세상에 이런 재미가 있었다니!'
처음엔 등 위에 인간을 태운다는 게 썩 내키진 않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블랙스타는 주인을 태우고 달려가는 시간을 몹시 좋아하게 되었다. 그 시간은 몹시도 즐겁고, 유쾌했으며, 재미있었다.
게다가 주인은 요술을 부릴 줄 알았다.
그가 새카맣고 긴 막대를 꺼내서 휘두르면, 거기 닿은 몬스터들은 고통스러워하며 죽어갔다.
'굉장하다!'
블랙스타가 저 녀석들을 죽이기 위해서는 열심히 싸워야 했다. 그런데 주인은 저 막대기를 한번 휘두른 것만으로 놈들을 해치웠다.
'인간 중 가장 강한 인간인가 봐!'
이 정도 수준의 인간이라면 주인으로 모셔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주인에게 다시는 까불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래도 억울한 건 억울한 거였다.
"푸릉!"
블랙스타는 이 감정을 눈앞의 인간들에게 풀기로 했다. 주인의 명령 때문에 그들을 물어뜯는 대신,
꽈앙!
눈에 보이는 나무를 마구 걷어찼다.
"으아악!"
"무너진다!"
"다들 피해!"
인간들이 괴성을 지르며 달아나는 꼴을 보니 속이 다 시원했다.
'흥, 하찮은 것들 같으니.'
블랙스타는 금빛 눈을 빛내며 다음 부술 것을 찾았다. 아무튼 주인의 말은 잘 따라야만 했다.
'안 그러면 또 혼나고 말 거야.'
블랙스타가 부르르 고개를 흔들며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쿵! 쿵! 쿵!
나무란 나무는 모조리 걷어차고,
'앗, 위험해!'
쾅!
시뻘겋고 뜨거운 불은 발로 지져 꺼버렸다.
"악! 왜 이렇게 어두워!"
"앞이 안 보여!"
인간들의 아우성이 더 커졌다. 블랙스타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아, 재밌다!'
역시 주인과 함께하면 즐거운 일들만 생긴다.
'주인은 뭐하고 있지?'
뒤돌아보니, 주인은 또 요술을 부리고 있었다.
"아아악!"
주인의 막대기에 찔린 인간들이 고통스레 울부짖었다.
'옳지, 잘한다!'
블랙스타는 신이 나서 더 열심히 나무를 부수고 다녔다. 도적 야영지가 쑥대밭이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이제 마지막!'
모든 나무를 부수고 한 곳만 남았다. 블랙스타는 신나게 도움닫기를 해서 달려가 그곳을 들이박았다.
꽈광!
"흐어억!"
안에서 늙은 인간의 비명이 들려왔다.
"푸릉?"
블랙스타는 부서진 나무의 틈 사이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던 늙은 인간과 눈이 마주쳤다.
"헉!"
늙은 인간의 입이 쩍 벌어졌다. 인간을 본 블랙스타는 습관적으로 이빨을 드러냈다.
"크르릉."
다음 순간,
"흐어억!"
늙은 인간이 눈을 까뒤집으며 기절해버렸다.
'에엑?'
블랙스타는 당황했다. 인간을 건드렸냐며 고래고래 날뛰는 주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냥 겁만 준 건데!'
블랙스타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 ❖ ❖
필립은 자신이 참 재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건 말도 안돼...."
좁고 어두운 공간. 창살로 사방을 막아두었고, 바닥엔 지푸라기 조금 뿐이다.
"꺼내줘! 꺼내 달라고!"
필립은 몇 번이고 반복해서 외쳤던 그 말을 또 외쳤다. 하지만 아무리 반복해도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아무도 그의 말에 반응해주지 않았다.
여전히 감옥엔 혼자뿐이었고, 디에고의 서신은 빼앗겼으며, 딸에게 주려고 몰래 챙겨온 돈마저 뺏겼다.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보아하니 저 투실투실한 산적 두목 놈은 디에고에게 편지를 쓸 심산인듯했다.
필립은 과연 디에고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도적의 요구에 따를지 의심스러웠다.
"그냥 무시하시면 어떡하지?"
가뜩이나 영지 사정이 좋지 않은데, 안 그래도 예산이 부족하다고 인상을 찌푸리던 디에고였는데.
물론 그 도적들이 오베스트 영지 주변에 있었다면 진작 디에고의 검에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오베스트 영지로부터 1주일은 넘게 달려와야 하는 곳이었다.
한마디로 필립의 앞날은 새카맸다. 점점 저물어가는 바깥처럼.
'제기랄.'
필립이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조용했던 것도 잠시,
"으흐흑."
흐느끼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너무 서러웠다. 나이 든 몸을 이끌고 여기까지 온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운도 지지리도 없지.
"어떻게 도적떼를 만날 수가 있는지!"
마차가 박살 나고, 마부가 바닥에 나동그라지고, 멱살을 잡혀 끌려나가는 경험은 몹시도 끔찍했다.
필립의 노쇠한 몸뚱이로는 감당하기 버거운 재앙이었다.
몸 이곳저곳에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움직이기도 힘들어 바닥에 앉아만 있었다.
맥없이 눈을 감고 있던 필립이 중얼거렸다.
"도련님이 인장을 들고 도망가지만 않았어도...."
자신이 여기까지 올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뿐이랴, 오베스트 영지의 성에서 그렇게 고생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제게 일어난 모든 일이 전부 아벨의 탓이었다. 그 망나니 쓰레기 도련님 때문이었다.
"젠장, 아벨 도련님만 아니었어도...."
필립은 이를 악물고 욕설을 짓씹었다.
자신이 어쩌다 아벨에게 휘둘리게 되었는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에겐 그저 원망할 상대가 필요할 뿐이었다.
"으흐흐흑."
대영주의 직속 집사로 살아온 지 몇 년.
호사에 젖어버린 몸은 고작 단 하룻밤의 감옥 생활에도 고통을 호소했다. 이런 냄새나고 습하고 칙칙한 곳에 며칠이라도 더 있다간 죽어버릴지도 몰랐다.
"덮고 잘 거라도 줬으면!"
도적들은 하루에 딱 세 번, 그것도 돼지죽 같은 것을 넣어줄 뿐 감옥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나마 전날까지는 다른 인질들과 함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오늘 아침 노예상에게 넘겨졌다.
그 모습이 필립의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했다.
노예상들과 거래하던 게 몇 주 전이었는데, 잘못하면 자신이 그 노예가 될 수 있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누가 나 좀 구해줘...."
필립은 그렇게 이루어지지 않을 소망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다시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어느새 해가 지고 창 밖이 어두워졌다.
"응?"
필립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감옥 밖이 소란스러워진 것을 느낀 탓이었다.
사나운 고함,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 무언가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무, 무슨 일이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필립은 감옥 창살을 붙잡고 비틀비틀 일어섰다. 바깥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죽여! 죽이라고!"
"안 보여서 어떻게 할 수가...!"
"피해!"
도적들이 어지럽게 외치는 소리가 마구 섞였다. 대충 들어보니 상황이 도적들에게 영 불리한 쪽으로 흘러가는 모양이었다.
"뭐지? 누구한테 당하고 있는 거지?"
잠시 생각하던 필립은 무릎을 탁 쳤다.
"그래, 경비대로구나!"
정의의 수호자들이 드디어 나선 것이다. 도적단을 추적하다 야영지를 찾아낸 게 분명했다.
"오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필립은 두 손을 맞잡으며 하늘을 향해 벌떡 일어섰다.
"디, 디오 베네디카,"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단어로 성호를 그었다.
"역시 저를 버리지 않으셨군요! 믿고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나가게 되면 꼭 거액의 기부금을 내리라 다짐했다. 그리고 창살에 바짝 붙어 외쳤다.
"살려주세요! 여기 사람 있어요!"
온몸이 고통을 호소했지만 꾹 참고 목청껏 소리쳤다.
"여기에요! 여기 사람 있어요!!"
아무래도 밖이 소란스러워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헉, 헉."
소리 좀 질렀다고 벌써 숨이 가빴다. 필립은 무릎을 짚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러다 문득,
"끄아악!"
귓가에 꽂히는 소름끼치는 소리를 들었다.
"뭐, 뭐지?"
필립은 혼란에 빠졌다.
경비대가 사람을 저렇게 죽일 리 없는데? 최대한 생포해서 감옥에 가두려고 할 텐데?
Chapter 15. 자존심을 건드린다. (9)
그는 숨을 죽이고 밖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쿵! 쿵! 쿵!
나무가 부서지고 으깨지는 소리 사이로,
"컥, 커걱!"
"끄그극...."
섬찟한 소리가 간간히 섞였다.
인간이 저렇게 고통스러워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끔찍한 소리였다.
"헉!"
무언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불길하고 오싹한 느낌이 여기까지 전해졌다.
지금 도적들은 정체 모를 침입자에게 무참히 죽어 나가고 있었다. 도적들의 아우성이 점점 줄어드는 게 그 증거였다.
"어, 어어 어떡하지?"
필립은 입술을 떨며 감옥 구석으로 물러섰다.
저 밖에서 도적들을 베고 있는 누군가는 경비대가 아니었다. 그가 자신을 발견하고 살려줄지도 미지수였다.
"겨우 사는가 싶었더니...!"
필립은 울먹이며 한탄했다. 정말이지 제 팔자는 너무 기구한 것 같았다.
그때였다.
꽈광!
무언가가 감옥의 벽을 들이박았다.
"흐어억!"
필립은 화들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입술을 달달달 떨며 부서진 벽을 바라보았다.
"푸릉?"
벽의 틈새로 금빛으로 반짝이는 눈동자가 보였다.
모, 몬스터?
"헉!"
그, 그럼 저 밖에서 도적들을 죽이고 있는 게 몬스터란 말인가!
'기어이 여기서 생을 마감하는구나.'
필립의 주름진 뺨 위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딸이 너무나 보고 싶었다.
❖ ❖ ❖
시야가 붉게 점멸한다.
눈을 한번 깜박일 때마다 원래대로 돌아왔다가, 다시 붉게 변하길 반복했다.
"젠장."
입안의 여린 살을 와득 깨물었다.
모든 오감이 너무나 예민해져서 괴로웠다.
엉덩이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뛰어다니는 도적들, 사방팔방 날뛰고 있는 블랙스타가 보인다.
바닥의 풀 냄새, 횃불에서 풍겨오는 나무 타는 냄새, 들판의 바람 냄새가 강렬하게 코를 찌른다.
그리고, 그윽한 생명의 냄새까지.
[죽여.]
레퀴엠이 속삭이며 내 등을 떠밀었다. 습관적으로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런데 어째선지, 거기 저항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구 쪽이다! 입구 쪽에 있어!"
"두목님이 안 보여!"
"그럼 부두목님이라도 불러와!"
도적들이 외쳐대는 소리가 귀를 마구 쑤셔댄다. 무기를 쥐는 금속성, 이쪽으로 커지는 발소리.
나를 자꾸만 자극하는 소리, 소리, 소리들.
"X발, 시끄러워."
이를 갈며 중얼거리자,
[그럼 죽여.]
낮게 쉿쉿거리는 듯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죽이면 조용해질 거야.]
새카맣게 일렁이는 공허로 가득 찬 목소리. 그것은 이 혼란스러운 오감의 향연 속에서도 선명하게 나를 적셨다.
[어서.]
발이 뭔가에 잡아 당겨지듯이 움직였다.
뚜벅, 뚜벅.
한 걸음이었던 것이 두 걸음, 그리고 세 걸음이 된다.
시야가 명멸하는 속도가 빨라졌다. 나를 향해 다가오는 인간들이 불그스름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하아...."
부지불식간에 한숨이 흩어진다.
그것은 괴로움으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 조만간 맛보게 될 황홀한 맛을 향한 기대 때문이었다.
"배고파...."
배가 고프다 못해 아팠다. 수십 개의 손가락이 위장을 득득 긁어대는 듯이 고통스러웠다.
지금 당장 뱃속에 뭐라도 집어넣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다.
난, 너무 오래 굶었다.
"빨리...."
막 피부를 헤집고 흘러나오는 피를, 생생하게 온몸을 휘감아 도는 생명력을.
"저 자식이!"
도적 한 명이 창을 꼬나쥐고 내게 돌진했다. 아까 문짝에 맞고 날아갔던 놈이었다.
퍽!
내 발에 걷어차인 놈이 허공을 날았다. 손에서 놓친 창은 맥없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커헉!"
놈의 몸이 목책에 부딪힌 순간, 레퀴엠을 뽑아 찔렀다.
푸욱!
레퀴엠이 도적의 어깨를 뚫고 목책에 퍽 박혔다. 그 어떤 저항감도 없는, 마치 두부를 찌르는 듯한 감각이 전해졌다.
"아아아악!"
목책에 못 박힌 도적의 몸이 파드득 튀었다. 놈은 작살에 찔린 물고기처럼 몹시 고통스러워했다.
"하아."
낮은 신음이 입에서 새어 나온다.
너무나 오래 참았던, 그리고 오래 기다렸던 생명력의 맛은 달고 또 달았다.
도대체 이걸 어떻게 안 먹고 살 수 있었나 싶을 만큼. 그동안 욕망을 억눌렀던 자신이 어리석게 느껴질 만큼.
레퀴엠이 기쁨으로 몸부림쳤다.
'더, 더.'
녀석의 속삭임인지, 내 중얼거림인지 모를 단어들이 머릿속으로 흩어졌다.
파스스-
도적의 어깻죽지부터 차근차근 쭈그러들기 시작했다. 가까이 있던 입이 말라붙자, 놈의 신음은 점점 기괴한 소리로 변해갔다.
"끄르르...."
등 뒤에서 다른 도적이 달려들었다.
"찰리!"
돌아보지 않고 뒤로 왼손을 뻗었다.
"끕?!"
번개같이 튀어나간 손이 달려들던 도적의 목을 움켜쥐었다.
"커허헉."
도적의 발이 서서히 바닥에서 떠올랐다. 내가 팔을 점점 위로 치켜드는 탓이었다.
챙그랑!
도적이 들고 있던 무기를 떨어뜨리고 내 손을 붙잡았다. 당장 숨이 막혀오는 상황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터였다.
"켁, 케헥."
도적이 내 손을 제 목에서 떼어내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놈의 목을 틀어쥔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켁...."
놈의 얼굴이 터질 듯이 붉게 변하고, 눈동자가 빙글 돌았다. 건틀렛 위를 긁던 손톱이 맥없이 미끄러졌다.
마침 처음 레퀴엠에 찔린 도적이 숨을 거두었다. 즉시 레퀴엠을 뽑아내자,
털썩.
놈의 시신이 나무토막처럼 바닥에 쓰러졌다.
'아직 모자라.'
인간 한 명분의 생명력을 섭취한 것은 간에 기별도 가지 않았다. 거대한 바다에 작은 돌덩이를 하나 던져넣은 것만 같았다.
'빨리. 다음 것을.'
내 손에 붙들린 도적의 심장이 거세게 뛰고 있었다.
공포를 머금은 그 피가, 생명력이 얼마나 달콤할지 입에 군침이 돌았다. 아니, 이미 아는 맛이기에 더욱 기대되었다.
곧장 레퀴엠을 도적의 복부에 찔러 넣었다.
"꺽!"
목이 졸린 와중에도 극심한 고통을 느낀 도적의 몸이 경련했다.
놈의 목을 놓고 레퀴엠을 쥔 손 위에 얹었다. 양손으로 그립을 꽉 쥔 뒤 허공으로 점점 밀어 올렸다.
"끅, 끄그극."
도적이 레퀴엠에 꽂힌 채 위로 천천히 솟아올랐다. 마치 나무 꼬챙이에 꽂힌 개구리 같은 꼴이었다.
"커헉!"
놈의 입에서 피가 터졌다. 불치병에라도 걸린 듯이 검게 물든 피였다.
무게 덕분에 도적의 몸이 점점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끄으윽...."
놈은 제 고통을 어떻게든 줄여보려고 레퀴엠을 붙잡았다. 하지만 검날에 손이 닿는 순간,
"끄아아악!"
찢어지는 듯한 비명과 함께 몸부림쳤다.
레퀴엠에 닿았던 놈의 손이 녹아내렸다. 새카만 불길이 접촉면을 지글지글 불태웠다.
놈은 끝내 레퀴엠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말라비틀어진 팔뚝을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에.
"끄극...."
놈의 몸이 비틀리고, 오그라들어, 결국 바싹 말라갔다.
꼴깍, 꼴깍.
레퀴엠은 놈에게 이를 박고 게걸스레 생명력을 빨아댔다. 이윽고 만족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맛있어....]
그렇게 중얼거린 것은 레퀴엠뿐만이 아니었다.
"맛있어...."
조금이라도 이 맛을 깊게 음미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오랜만에 취한 미식(味食)에 심장이 마구 두근거렸다.
사아아-
어느 순간, 레퀴엠을 통해 흘러들어오던 극상의 맛이 멈췄다.
"아...."
벌써 끝인가.
아쉬움이 담긴 눈동자를 번쩍 떴다.
"하아, 젠장."
입맛을 다시며 도적의 몸에서 레퀴엠을 빼냈다.
검날에 닿았던 도적의 손가락은 이미 썩은 나뭇가지처럼 변해 있었다. 레퀴엠을 빼내는 서슬에 그마저도 파스스 부스러져 사라졌다.
도적의 몸이 바닥에 쏟아졌다. 검은 먼지처럼 흩어지는 그것을 응시했다.
그 잔해들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다음.'
빨리 다음 생명을 먹고 싶었다.
뒤로 돌아보았다. 도적 야영지는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어있었다.
꽝! 꽝!
블랙스타가 내달리며 건물을 모두 부수는 덕분이었다.
"으아악!"
"피해! 피하라고!"
"저건 뭐야?!"
도적들은 아우성치며 블랙스타를 피하느라 바빴다. 그러느라 내게 접근하는 놈이 없었다.
후웅!
그 순간, 바람을 가르며 날아오는 쇠붙이의 소리가 들렸다. 옆으로 한 걸음 내딛자마자,
푹!
화살이 허공의 먼지를 가르고 날아가 뒤에 박혔다.
"쳇."
머리 위쪽에서 누군가의 투덜거림이 들렸다.
망루 위에서 활대에 화살을 장전하는 도적이 보였다. 나와 눈이 마주친 놈의 손이 빨라졌다.
'다음.'
내 머릿속을 차지한 생각은 여전히 그뿐이었다.
타닥!
지면을 박차고 달려갔다. 한 칸씩 올라야 할 사다리를 몇 칸씩 단번에 뛰어올랐다.
"뭐, 뭣!"
눈이 동그래진 도적을 휙 잡아들고 던져버렸다.
"아아악!"
도적은 활대를 쥔 그대로 바닥에 추락했다.
쿵!
망루 위에서 그런 놈을 내려다보았다.
"으, 으으윽...."
도적이 땅에서 끙끙대고 있었다. 놈의 다리가 기괴한 각도로 꺾여 있었다.
그 모습이 땅을 기는 한 마리의 벌레 같았다. 그 형체조차도 이내 붉게 변해 일그러졌다.
'빨리, 먹고 싶다.'
망루에서 그대로 훌쩍 뛰어내렸다. 건물 3층쯤 되는 높이에도 불구하고, 내 몸은 가뿐하게 착지했다.
저벅.
내 발소리를 들은 도적이 고개를 들었다.
"힉!"
놈이 허둥지둥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 앞에 제가 놓쳤던 활대가 보였다.
"윽...."
놈은 엉금엉금 활대를 향해 기어가기 시작했다. 다리가 부러져서 움직이지 못하는 듯했다.
저벅, 저벅.
나는 그런 놈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놈의 벌레 같은 몸부림을 바라보면서.
"허억, 헉."
도적의 숨소리가 가빠졌다. 두 팔을 다 사용해서 기어가는데도, 놈과 나의 거리는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헉, 헉."
도적이 뒤를 돌아보았다가 내 새카만 눈동자와 마주쳤다.
"-!"
도적의 얼굴에 두려움의 빛이 한줄기 흘렀다.
"아, 안돼."
놈이 팔을 움직이는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막 팔을 뻗으면 활대에 닿을 거리에서,
푹!
"아악!"
레퀴엠으로 놈의 부러진 다리를 찔렀다. 레퀴엠이 땅을 파고 들어가 말뚝처럼 놈의 몸을 고정시켰다.
"악, 아아아악!"
도적이 고통스럽게 발버둥쳤다. 부러졌을지언정 다리의 감각까지 잃은 것은 아니었기에.
그럴수록 생명력이 힘차게 용솟음치며 레퀴엠을 타고 올라왔다.
"하아...."
정말, 즐거웠다.
이렇게 무의미한 발버둥을 치는 놈을 바라보는 것도, 거기서 풍겨오는 진한 생명력의 향기를 맛보는 것도.
"끄흑, 끅."
움직일수록 레퀴엠이 몸에 닿는 부위만 늘어날 뿐이었다. 아무리 애써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함을 깨달은 도적이 뒤를 돌아보았다.
"-!"
기괴하게 꺾여버렸던 놈의 다리는, 이제 썩은 나무토막으로 변해 있었다.
확실히 심장에서 먼 곳에 꽂으니 생명력을 흡수하는 게 느렸다. 하지만 그래서 더 좋았다.
더 오래, 진득하게 즐길 수 있으니까.
놈의 한쪽 다리가 완전히 말라비틀어진 것을 확인한 뒤 레퀴엠을 뽑아냈다. 그리고 반대쪽 무릎에 다시 꽂았다.
"아아악!"
도적의 상체가 위아래로 들썩였다. 하반신의 절반은 이미 놈의 통제를 벗어나 있었다.
그르릉-
레퀴엠은 만족스럽게 으르렁거리며 생명력을 쭉쭉 빨아대었다. 도적의 무릎을 중심으로 위아래 다리가 금세 쪼그라들었다.
"끄으윽...."
도적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했다. 이제 활대에 손이 닿는 데도 그것을 붙잡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래, 그래야지."
그런 놈의 모습이 아주 기특했다.
'저항하면 빨리 죽여야 하잖아.'
나는 좀 더 놈이 오래 살아있으면 했다. 온몸의 생명력을 마지막 한 줌까지 모조리 흡수할 때까지 버텨줬으면 했다.
사악!
레퀴엠을 마저 뽑아낸 뒤 도적의 옆으로 다가갔다.
"제, 제발...."
도적의 얼굴이 눈물로 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고통스레 바닥을 긁었던 손톱이 부러져 피가 흘렀다.
물론 동정심은 일지 않았다.
"살려줘...."
눈앞의 도적은 그저 먹잇감이었다.
내 지독한 공허를 채워줄, 내 입안을 달콤하게 적셔줄, 내 귀에 감미로운 소리를 흘려 넣어줄.
그런, 먹잇감.
"사, 살...."
푹!
레퀴엠이 도적의 목젖을 관통했다.
Chapter 15. 자존심을 건드린다. (10)
소리를 내는 기관부터 잡아먹힌 덕에, 놈은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꿀꺽, 꿀꺽.
레퀴엠이 생명력을 한 모금씩 삼킬 때마다 희열에 찬 신음이 새어나왔다.
"하아아...."
이 소리가 레퀴엠의 것인지, 아니면 나의 것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어느샌가 나와 레퀴엠을 분리하던 경계가 사라진 뒤였다.
[더, 더.]
"그래, 더."
[전부.]
"다 죽이자."
오랫동안 레퀴엠을 억눌렀던, 그리고 파멸적인 방식으로 녀석을 자극한 대가는 컸다.
오래 갈증에 시달린 여행자는 오아시스를 만나면 이성을 잃는다. 자신의 몸이 점점 잠겨 드는 줄도 모르고 거기 빠져든다.
"...빨리."
머릿속엔 오로지 다음 생명을 향한 갈급한 욕망뿐이었다. 건틀렛의 초록빛이 위태롭게 일렁였다.
온통 붉은 시야에, 이젠 더 이상 붉지 않은 내 앞의 인간이 잡혔다.
사악!
레퀴엠을 거두고 뒤로 돌아섰다. 다음 먹잇감을 향해 눈을 돌렸다.
"아직 부족해."
새카맣게 일그러진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린다. 그 틈새로 보이는, 주변에 있는 붉은 인간의 개수를 셌다.
"...열 여덟, 아홉. 모두 열 아홉 명이군."
배부르다는 느낌이 언제 올지 감도 오지 않았다. 못해도 여기 있는 생명은 다 먹어야 할 것 같았다.
[다 먹으면 되지.]
"그래, 다 먹자."
키득키득, 잔혹한 웃음소리가 잇새로 흩어졌다.
"전부, 다."
붉은 생명들이 점점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도적들은 블랙스타를 쫓는 데 실패했다. 그 대신 만만해 보이는 내게 접근했다.
놈들의 시선이 내 주변에 널브러진 시체들을 훑었다.
"뭐, 뭐야 저건?"
"시체 맞아?"
도적들이 불안스레 웅성거렸다. 그들은 세 구의 시체 앞에 비딱하게 서 있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들도 은연중에 느끼고 있을 것이다. 내 옆으로 아지랑이처럼 번져 나가는 은은한 살기, 이 소란스러운 상황에 어울리지 않은 침착한 태도.
그것은 마치 포식자의 것과 비슷하다는 것을.
"지금 비는 놈들 확인해 봐!"
그중 유난히 덩치가 크고 얼굴이 험상궂은 한 도적이 외쳤다.
"부두목님! 찰리랑 톰, 닉이 없습니다!"
다른 도적들이 앞다투어 고하자, 부두목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설마 저게...?"
놈이 무기를 꽉 쥐며 앞으로 나섰다.
"뭐하는 놈이냐?"
나는 대답 대신 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꼴을 보니 경비대나 기사단 소속은 아닌 것 같은데."
부두목이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다른 도적단에서 보냈나? 볼프? 아님 토포?"
"곧 죽을 놈이 알아서 뭐하게?"
키득거리며 대꾸하자 부두목의 콧구멍이 벌렁거렸다.
"이 미친 새끼가...."
"...."
"이런 짓을 저지르고도 살아나갈 줄 알았느냐!"
부두목이 다른 도적들을 향해 손짓했다.
"래토 도적단을 건드린 걸 후회하게 해줘라!"
"네, 부두목님!"
도적들은 지휘하는 이가 생기자 금세 침착을 되찾았다. 부두목을 구심점으로 해서 꽁꽁 뭉쳤다.
"이야아!"
"죽어라!"
도적들이 각자의 무기를 들고 달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킬킬 웃었다.
'더 빨리 먹을 수 있겠네.'
정말이지 신이 났다. 진수성찬이 어서 날 잡아 잡수라며 성화인데, 흥겹지 않을 수 없었다.
'기꺼이.'
탁!
땅을 박찬 내 신형이 희미해졌다.
"응?"
"사라졌...."
도적들의 의아한 외침 사이로, 새카만 바람이 지나쳤다.
"끅!"
난데없는 비명이 터졌다.
도적들은 그제야 내가 어디 있는지 알아챘다. 그러나 그들이 그곳을 돌아봤을 땐,
"끄륵...."
부두목의 몸이 양쪽으로 갈라지고 있었다.
툭, 투둑.
정확하게 반으로 양단된 몸뚱이가 바닥에 쏟아졌다.
"하하."
나는 레퀴엠을 회수하며 돌아섰다.
그 거대한 인간을 반으로 자른 후에도, 레퀴엠은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았다.
치이익-
바닥에 뿌려진 부두목의 사체가 말라 비틀어지기 시작했다.
"부두목이 당했어...!"
"저 검은 뭐지?"
도적들이 흠칫흠칫 뒤로 물러섰다. 그들은 구심점을 잃는 동시에 용기마저 잃었다.
"으, 으아아악! 사람 살려!"
부두목의 옆에 서 있던 도적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야이 새끼야!"
다른 도적들이 놈을 향해 주먹을 흔들었다.
"지금 도망치면...."
"끄악!"
달려가던 도적이 갑자기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놈이 제 다리를 더듬었을 땐, 이미 그 아래에 아무것도 없었다.
"힉, 히이익!"
찢어질 듯한 비명도 금세 멈추었다.
푸쉬식-
레퀴엠에 찔린 놈의 얼굴이 쪼그라들었다.
"시끄러워."
레퀴엠을 튕기듯이 빼낸 뒤 그 반동을 이용해 횡으로 그었다.
터엉!
잘려나간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그 옆엔 이미 잘려나간 두 다리가 나뒹굴고 있었다.
"도망치지 마. 귀찮으니까."
작게 중얼거리며 레퀴엠을 회수했다.
'열일곱.'
그저 계산기를 두드리는 것처럼, 남은 숫자를 셌다.
"무, 무무 무슨...."
도적들 몇몇이 입술을 덜덜 떨어대고,
"쫄, 쫄지 마! 우리가 더 많아!"
"다들 모여!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그나마 용기 있는 몇이 소리쳤다.
"헛소리."
픽 웃은 뒤 그들을 향해 돌진했다.
레퀴엠이 날았다. 그것을 따라 내 몸도 날 듯이 달렸다.
"아악!"
"크, 크헉."
오베스트 검술을 사용할 것도 없었다. 그저 다가가 목을 찌르고, 심장을 꿰뚫고, 정수리에 레퀴엠을 박아 넣었다.
'열 넷.'
몸을 낮추며 레퀴엠을 횡으로 휘두르고, 그 자세 그대로 아래에서 위로 쳐올린다.
'열 둘.'
허리를 숙여 뒤에서 뻗어오는 공격을 피하고, 그대로 발로 밀어 올려 걷어찬다.
"으아악!"
턱을 얻어맞은 도적이 뒤에 서 있던 도적과 부딪힌다. 서로의 몸이 겹쳐진 그때 레퀴엠을 깊게 찔러 넣는다.
"이야아압!"
내 목을 노린 검이 위에서 날아든다. 빙글 돌아서 어깨부터 반대쪽 허리께까지 단번에 베어낸다.
'아홉.'
순식간에 주변이 검게 물든 시체로 가득해졌다. 절반 가까이 동료를 잃은 도적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사, 살려주십시오!"
"잘못했습니다!"
"목숨만은 살려주세요!"
놈들이 무기를 내던지고 바닥에 엎드렸다. 두 손을 싹싹 모아 빌었다.
그 위로 망설임없이 레퀴엠을 내려그었다.
"꺼걱...."
"컥...."
저항할 생각조차 없는 자들을 죽이는 일은 몹시 쉽고 싱거웠다.
'다섯.'
내키는 대로 아무 곳이나 푹푹 찔렀다. 급소를 찌르지 않아도, 극도로 흥분한 레퀴엠은 빠르게 생명력을 흡수했다.
'둘.'
내 앞에 남은 마지막 도적의 몸이 허물어졌다.
"하하하...."
나직한 웃음소리가 도적들의 시체 위로 쏟아져 내렸다. 나는 검게 물든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웃고 또 웃었다.
"하하하."
너무 즐거웠다.
인간의 거죽과 살갗을 베고 가르는 그 감각, 그 속에서 생생하게 밀려 들어오는 생명력, 결국 손에 남는 매끄러운 감촉까지.
"이걸 왜 참았지?"
이렇게 좋은 걸 말이다.
앞으로 더 자주, 많이 먹고 싶었다. 아니, 그냥 이 제국의 모든 생명을 먹어치우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럼 어디부터... 그래. 수도부터 시작해야겠다."
거긴 맛있는 생명이 널려있을 것이다. 생명의 수도 아주 많을 테고.
"아, 그러고 보니."
몇 시간 전쯤에 굉장히 맛있을 것 같은 먹잇감이 있었다. 풍겨오는 향이며 육질을 보아하니 천하의 극미일 게 분명했다.
"그것부터 먹을걸."
아쉽다는 듯 중얼거리던 나는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지, 아니야. 가장 맛있는 건 마지막에 남기는 게 좋지."
그래야 기대감이 더 커지니 말이다.
"하하하."
나는 연신 웃어대며 몸을 돌렸다.
온몸이 나른해지고, 발걸음이 구름 위를 걷는 듯이 두둥실 떠올랐다. 물속에 있는 것처럼 소리가 먹먹하게 변해서 들려왔다.
"이게 술에 취한다는 건가?"
낄낄 웃으며 아직 남아있는 두 생명을 향해 뚜벅뚜벅 걸었다.
[윙, 위잉.]
언제부터인가 날벌레 소리가 귓가에서 앵앵댔다.
"아, 시끄러워."
대충 손을 휘저으며 계속 걸어갔다. 저 멀리 일렁이는 생명의 불꽃을 향해서.
두 생명 중 가까운 쪽을 먼저 찾았다. 그것은 한쪽 벽이 다 무너져 내린 건물 안에 있었다.
터벅.
막 건물 안으로 발을 들이자, 훅 하고 불쾌한 냄새가 끼쳐왔다. 오물 냄새, 먼지와 축축한 습기의 냄새.
그 까닭은 눈앞을 보니 알 수 있었다.
"감옥이었나."
쇠로 만든 창살이 단단하게 박혀 있었다. 그 안에 생명이 하나 덩그러니 있는 게 보였다.
[윙이잉. 위이이잉.]
앵앵대는 날벌레 소리가 더 커졌다.
"아, 시끄럽다고!"
짜증을 내던 나는 멈칫했다.
이거 날벌레 소리가 아니라 꼭... 짐승 울음소리 같은데.
"알게 뭐냐."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빨리 이 요동치는 뱃속에 무언가를 집어넣어야 했다.
손을 얼굴 주변에서 휘휘 흔든 뒤 쇠창살을 붙잡았다.
우드득!
양손으로 잡고 잡아당기자, 쇠창살이 엿가락처럼 늘어났다. 지나갈 만한 틈을 만든 뒤 그 안으로 들어섰다.
찾고자 했던 것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기절한 건가."
자세히 보니 꽤 나이 든 인간이었다. 입고 있는 옷은 더러웠지만 꽤 고급이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복식이 눈에 익었다.
"도적이 아닌 것 같은데."
하긴 같은 도적을 굳이 감옥에 가둬 둘 필요가 없었다.
눈살을 찌푸리며 그 인간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무릎을 굽히고 인간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내 미간이 더욱 깊어졌다.
"아는 얼굴...인가?"
그의 얼굴이 낯설지 않았다. 분명히 나와 관련이 있는 사람이었다.
"이름이 뭐더라."
머릿속이 검은 안개가 낀 것처럼 어두컴컴했다. 모든 것을 사진처럼 명확히 남기던 기억력이 물에 푹 젖어버린 것처럼 제 구실을 하지 못했다.
"이름, 이름이...."
[그게 중요해?]
레퀴엠이 차갑게 일갈했다.
[그냥 죽여.]
"...하긴 그렇지."
생각해 보니 그 말이 맞았다. 어차피 죽일 놈인데 이름을 알 필요가 없었다.
레퀴엠을 쥐고 인간의 목에 겨누었다. 그 순간 다시 날벌레의 소리가 커졌다.
[애앵! 애애앵!]
그것을 무시하고 손에 힘을 주었다.
"...아, 잠깐."
마지막 순간 뇌리에 어떤 단어가 스쳤다.
"필... 필 뭐였는데. 뭐였지?"
무심코 중얼거린 순간,
지끈!
손으로 잔뜩 쥐어짜는 것처럼 머리가 아팠다.
"윽!"
이마를 붙잡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느라 내게 빠른 속도로 접근하는 무언가를 허용하고 말았다.
"푸르릉!"
물 밖으로 갑자기 나왔을 때처럼, 먹먹하던 소리가 갑자기 생생하게 꽂혀 들었다.
뻥!
무언가가 내 몸을 세게 걷어찼다.
"욱!"
억눌린 소리와 함께 반대쪽 벽에 부딪혔다. 걷어 채인 옆구리가 뻐근하게 아팠다.
동시에, 귓가에 울리던 목소리가 깨끗하게 사라졌다.
"...어?"
나는 눈을 깜박였다.
어느 순간 붉었던 시야가 정상적으로 돌아와 있었다. 새카맸던 머릿속이 불을 켠 것처럼 환하게 밝아졌다.
"잠깐, 내가...."
뭘하고 있었지?
멍한 중얼거림이 잇새로 새어나왔다. 옆구리를 문지르며 고개를 들었다.
"푸릉! 푸릉!"
블랙스타가 앞발을 구르며 나를 향해 돌진할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제야 옆구리의 고통이 어디에서 기인한 건지 깨달았다.
'저 자식이 날 찼어?'
깨달음과 함께 화가 치밀었다.
"야! 미쳤냐?!"
주먹을 치켜들자 블랙스타가 움직임을 멈췄다. 녀석의 황금빛 눈이 끔벅거리며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주인? 정신이 들어?'
몹시도 걱정스러운 눈빛이었다.
"...음."
머쓱한 얼굴로 주먹을 슬쩍 내려놓았다.
'저 녀석 덕분에... 정신을 차린 건가?'
내 몸의 모든 것이 통제 하에 돌아온 게 느껴졌다.
'큰일날 뻔했네.'
하마터면 레퀴엠에 잠식된 채, 전 제국의 생명을 집어삼키는 악마가 될 뻔했다. 원작과 똑같은 꼴로 생을 마감하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여기는 수도 근처. 원작 공인 강자들이 수도에 모여있는 지금, 원작보다 더 빠르게 죽을 수도 있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아오, 골이야."
물론 후폭풍은 상당했다.
레퀴엠과 동화된 상태에서 강제로 벗어난 덕분이었다. 텅 비었던 속은 가득 찼는데, 대신 머리가 많이 아팠다.
"으으, 이게 숙취인가?"
한 손으로 이마, 한 손으론 옆구리를 붙잡은 채 한참을 끙끙대야 했다.
Chapter 16. 매가 약이다. (1)
검게 물들었던 머리카락과 눈도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겨우 몸을 추스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오오."
역시 레퀴엠을 오래 굶기니까 이런 일이 생기는군. 이번엔 운이 좋았지만 다음에도 이럴 것이란 보장은 없었다.
"더 조심해야겠어."
몸에 묻은 풀을 탁탁, 털어낸 뒤 몸을 돌렸다.
"이리 와, 블랙 스타."
손가락을 까딱이자 블랙스타가 주춤거렸다.
"히, 히잉."
아까 발로 걷어찰 땐 언제고, 이제 와서 혼날 것 같은지 잔뜩 쫄아 있었다.
"혼 안 낼 테니까 와라."
손가락을 빠르게 까닥였다.
블랙스타는 그제야 머뭇머뭇 내게 다가왔다. 내 손이 허공으로 올라가자 블랙스타의 눈이 질끈 감겼다.
슥슥.
"잘했다."
녀석의 콧잔등을 부드럽게 긁어주었다.
"푸릉?"
블랙스타의 눈동자가 커졌다.
"고맙다고. 덕분에 정신 차렸네."
나직이 속삭이자 블랙스타가 흥분의 콧김을 팽! 뿜어냈다.
"푸릉! 푸르릉!"
머리를 마구 들이밀며 애교를 부렸다. 혀까지 내밀어 핥으려 드는 것을 겨우 손으로 막았다.
"더러우니까 하지 마."
"푸릉...."
녀석은 아쉬워하면서도 꼬리를 살래살래 흔들며 물러났다.
생각해 보니, 아까부터 들렸던 날벌레 소리는 블랙스타의 울음소리인 것 같았다.
어떻게든 날 깨우려고 애쓰다가 최후의 수단으로 발길질을 동원한 모양이다.
'기특하군. 인간보다 낫네.'
게다가 내가 시킨 대로 건물도 착실하게 다 부숴놓았다. 아까 늑장을 부린 것은 이제 잊기로 했다.
"잘했어."
덤으로 녀석이 좋아하는 갈기 긁어주기까지 해주었다. 그러다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너, 살쪘냐?"
"푸릉?"
녀석의 몸이 미묘하게 더 커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쩐지 피부에도 윤기가 자르르 흐르고, 털도 더 고와졌다.
이 녀석, 나 없는 새 잘 먹고 잘 산 모양인데?
"혹시 인간을 먹고 다닌 건 아니겠지?"
"푸릉릉, 풍!"
블랙스타는 절대 아니라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딱히 믿음직스러운 모습은 아니었다.
'나중에 엘리체에게 물어봐야겠군.'
사람 잡아먹는 몬스터가 수도 주변에 출몰했다는 소문은 없었냐고.
"그래, 알았다."
마지막으로 블랙스타의 갈기를 탁, 털어낸 뒤 말했다.
"이제 비켜. 볼일 보게."
"-!"
블랙스타가 눈알을 데구르르 굴렸다. 갑자기 내 앞을 가로막곤 필사적으로 말했다.
"푸릉, 푸릉. 푸르르릉!"
"뭐라고?"
"푸릉, 푸르릉!"
무슨 조화라도 생긴 건지, 방금까지 제 뜻을 잘만 전달하던 녀석이 이상해졌다.
뭐라고 말은 많이 하는데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표정이며 정신없는 몸짓을 보아하니 지금 대단히 당황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뭐라는 거야?"
블랙스타를 대충 밀어내고 바닥에 쓰러진 인간에게 다가갔다. 얼굴을 보자 아까만 해도 떠오르지 않았던 이름이 바로 떠올랐다.
"필립."
이 인간이 왜 여기 있는 거지?
놀라운 우연에 그저 혀를 쯧쯧 찰 뿐이었다.
"꼴이 말이 아닌데?"
처음 멀리서 봤을 땐 거지인 줄 알았다. 도적단에 잡혀서 꽤나 고초를 치른 모양이다.
"날 만나러 수도로 올라오고 있었나 보군."
역시, 디에고 그 양반이 직접 행차할 리가 없었다. 필립을 보낼 것 같았는데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어디 보자...."
필립의 품을 뒤적여 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감옥에 갇히면서 소지품을 다 털린 듯했다.
조금 생각해 본 뒤 답을 찾았다.
"두목한테 있나 본데."
그러고 보니 두목의 털끝 한 자락도 못 봤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필립을 제외하고 남은 하나의 생명이 놈인듯했다.
절대영역을 펼치자 발 아래 쪽에서 생명이 느껴졌다.
"지하실, 혹은 굴이겠군."
내 입꼬리가 비틀리듯 밀려 올라갔다.
그래도 한 집단의 수장이란 놈인데, 이렇게 비겁할 줄이야.
제 부하들이 다 죽어가는 동안 얼굴 한 번 비치지 않았다는 게 퍽 괘씸했다.
"그 낯짝이나 좀 볼까."
어차피 전부 죽일 생각이었지만, 이 녀석은 아주 고통스럽게 죽여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블랙스타."
몸을 일으키며 블랙스타를 불렀다.
"푸, 푸릉?"
블랙스타는 어째서인지 겁에 질려있었다. 꼬리를 축 내린 채 내 눈치를 살폈다.
"이놈 어디 못 도망가게 잘 지키고 있어."
필립을 가리키며 말하자 블랙스타가 느릿하게 눈을 끔벅였다.
"푸릉...?"
"나 잠깐 이 아래 내려갔다 올 거니까, 잘 감시하고 있으라고."
내 말을 비로소 이해한 블랙스타가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푸릉!"
어쩐지 아주 안심한 얼굴이었다.
블랙스타와 필립을 뒤로 하고 감옥을 나섰다. 여기저기 너덜너덜해진 건물 중 가장 큰 것을 찾았다.
"저거군."
모름지기 우두머리의 처소는 가장 큰 건물에 있기 마련이니까.
블랙스타가 정중앙을 제대로 들이박은 덕에 문은 완전히 박살 나 있었다. 문짝 조각을 대충 들추고 안으로 들어섰다.
복도를 통해 쭉 걷다가 가장 큰 방으로 들어섰다. 급하게 떠난 듯 방안은 온통 난장판이었다.
눈에 띄는 귀중품이나 보물은 없었다. 그것이 이 아래 지하실이 있으리라는 확증을 더 했다.
"음?"
식탁 위의 접시를 보곤 혀를 쯧쯧 찼다.
"식사가 왜 이리 부실해?"
접시 위엔 건더기가 몇 없는 야채죽과 감자, 빵이 놓여 있었다.
이쪽 근방에 들짐승이 많을 텐데, 사냥은 안 하는 건가? 고작 이거 먹고 어떻게 도적질을 하고 다닌 거지?
의아해하던 중, 문득 하나의 가설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에이, 설마."
애써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나 가설이 사라지기는커녕 더욱 또렷하게 떠올랐다.
"설마, 블랙스타 때문은 아니겠지."
녀석이 이 주변의 들짐승을 다 처먹고 다녀서, 도적들이 사냥할 게 없었다던가. 그런 건 아니겠지.
"...."
블랙스타의 몸을 상기한 순간, 이 가설에 더욱 힘이 실리는 것을 느꼈다.
"어째 살이 피둥피둥 쪘더라니."
잠시 도적들에게 애도를 표했다. 다시 생각해 보니 녀석들의 움직임에 유독 힘이 없었던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엘리체가 알고 있을 정도면 꽤 이름을 날리는 도적단일 텐데, 허무할 정도로 쉽게 당하더라니.
그렇게 블랙스타의 공적(?)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대충 바닥에 있을 텐데."
발로 바닥을 더듬으며 돌아다니다가, 카펫 아래에서 소리가 다른 한 곳을 발견했다.
펄럭!
짐승 가죽으로 된 카펫을 들어 올리자 나무 문이 보였다.
"오호라."
빙그레 미소를 머금었다.
남의 비밀 공간을 발견하는 것은 짜릿한 재미가 있다. 거기에 뭐가 들어있을지 알면 더더욱.
문 위쪽의 둥그런 고리를 잡고 당겼다.
덜컥!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려간 뒤 잠갔나 보군."
뭐, 안 열리면 힘으로 뜯으면 되지.
두 손으로 고리를 잡은 뒤 힘을 주었다.
빠각!
문짝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뜯겨 나갔다. 그 아래로 나무 사다리가 보였다.
"꽤 깊네?"
휘파람을 분 뒤 그냥 훌쩍 뛰어내렸다. 이미 건물 3층의 높이에서도 뛰어내렸는데, 이 정도 높이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안쪽은 생각보다 어둡지 않았다. 바닥에 촛불이 드문드문 놓여 있는 덕분이었다.
앞쪽으로 쭉 파인 굴이 보였다. 딱 사람 한 명이 지나갈 만큼의 크기였다.
시선을 멀리 던지자, 중간에 옆으로 꺾이는 지점이 있는지 끝은 보이지 않았다.
'생각보다 큰데?'
인간의 몸에서 나는 구질구질한 냄새, 동전과 패물에서 나는 금속 냄새 등등. 공중에 떠돌고 있던 냄새 입자들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두목이 여길 지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절대영역을 펼치자 예상대로 생명 하나가 느껴졌다. 이젠 발아래가 아닌 같은 높이에서.
'이 정도 크기의 굴을 그놈 혼자 팠을 리는 없고.'
이미 있던 굴을 우연히 발견해 사용하는 듯했다. 부하들에게 비밀로 한 채 혼자서 몰래.
두목의 기척은 한 곳에 꿈쩍 않고 멈추어 있었다. 무언가에 잔뜩 집중한 듯한 느낌이었다.
'슬슬 가볼까.'
부러 발소리를 크게 내면서 걷기 시작했다.
뚜벅, 뚜벅.
예상대로 좁은 굴은 내 발소리를 더 크게 만들어주었다. 음산한 발소리가 몸집을 키우며 멀리멀리 퍼져나갔다.
그렇게 굴속을 나아가던 어느 순간,
[히익!]
두목이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귀를 스쳤다. 내 발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이어서 덜그럭거리며 무언가를 움켜쥐는 소리, 허둥지둥 몸을 숨기는 소리가 이어졌다.
'재밌네.'
저쪽은 나를 보지 못하는데, 나는 상대방이 뭘 하고 있는지 뻔히 알 수 있다는 사실이.
뚜벅, 뚜벅.
발소리를 죽이지 않고 계속 걸었다.
굴이 옆으로 꺾이는 지점과 점점 가까워졌다. 더불어 모든 상황이 눈에 그리듯 보였다.
[후웁, 후웁]
소리를 죽여 코로만 가늘게 내뱉는 날숨.
[두근, 두근]
긴장으로 인해 빠르게 뛰어대는 심장.
[찌걱]
땀에 젖은 손바닥으로 무기를 고쳐 쥐는 것까지.
저 굴 안쪽에서 숨도 못 쉬고 긴장하고 있을 두목을 생각하니 픽 웃음이 나왔다.
놈의 기척이 점점 가까워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속도를 줄이지 않고 계속 걸었다.
내 그림자가 점점 길어져 굴 안을 뒤덮었다. 막 모퉁이를 돌려는 순간,
"이야압!"
우렁찬 고함과 함께 거대한 메이스가 날아들었다.
'쯧쯧.'
어쩌면 이리 한치의 예상도 다르지 않게 움직이는 건지.
두목을 비웃으며 가볍게 메이스를 피했다. 그와 동시에 두목의 발을 걸었다.
"으허억?!"
쿵!
두목이 우스꽝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달려들던 자세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이, 이 자식이!"
놈은 벌떡 일어나 다시 내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 좁은 굴에서 할 수 있는 선택은 많지 않았다.
똑같은 자세로 달려드는 놈을 제압하는 것은, 기습의 형태를 띠었던 아까보다도 훨씬 쉬웠다.
쩍!
손바닥으로 뺨을 갈긴 것 치고는 굉장한 소리가 났다.
쿠당탕!
두목의 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벽과 부딪혔다.
"꾸엑!"
소리가 꼭 돼지 멱따는 소리 같군. 덩치도 좋고 생긴 것도 험상궂은 게 멧돼지를 닮긴 했어.
꽥꽥대는 두목을 보며 태평하게 그런 생각을 했다.
"제, 제법이군."
두목이 입가를 훔치며 비틀비틀 일어섰다.
"하지만 이, 이 정도쯤이야...."
그 와중에도 지고 싶지 않은지 호기로운 척 중얼거렸다.
그러나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와 좌우로 흔들리는 머리는 주인의 의지를 완전히 배반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얻어맞은 한쪽 뺨이 이미 벌겋게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귀찮으니까 그만 꿇어라."
손가락을 까딱거리자, 두목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닥쳐!"
두목이 발끈해서 다시 내게 달려들었다. 그 모습이 꼭 뺨을 얻어맞고 날뛰는 멧돼지 같았다.
쇄액!
그 사이 좁은 굴에서 무기를 휘두르는 것에 익숙해졌는지, 놈의 공격이 한결 날카로워져 있었다.
이런 도적단에서 볼 거라 기대하지 않았던 꽤 빠른 동작이었지만,
"하아암."
나에겐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렸다. 이번엔 피하는 대신 한 걸음 나아가 놈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무슨...!"
두목의 눈이 대뜸 커진 순간,
쩍!
내 손바닥이 놈의 다른 쪽 뺨을 갈겼다. 두목의 몸이 다시 슝 하고 날아갔다.
우당탕!
"끄, 끄으윽...."
두목이 바닥에 쓰러진 채 앓는 소리를 흘렸다. 이제 다른 쪽 뺨마저 붉게 붓고 있었다.
"왜, 공평하고 좋잖아."
키득키득 웃으며 손을 휘휘 흔들었다.
"옛말에 한쪽 뺨을 내주면 다른 쪽 뺨도 내주라는 말이 있거든."
"그게 무슨 개소리야!"
두목이 울분을 터뜨리며 다시 달려들었다. 아무래도 놈이 이 도적단의 두목이 된 것은 단순하고 흉포한 성정 때문인 것 같았다.
짝!
"이, 이 자...."
짝!
"대, 대체...."
짝!
"...잘못했습니다."
역시 매 앞에 장사 없는 법이었다.
Chapter 16. 매가 약이다. (2)
연속해서 뺨에 가해지는 무자비한 폭력이 두목의 무릎을 꿇렸다.
"죄송합니다."
두목은 메이스를 내던지곤 바닥에 납죽 엎드렸다.
"흠."
두목의 풍성한 정수리에서 시선을 떼고,
철그렁.
땅에 떨어진 메이스를 주워들었다.
"꽤 괜찮은데?"
한낱 도적단의 두목이 쓰기엔 지나치게 질이 좋아 보였다.
'그러고 보니.'
아까 내게 덤벼들었던 도적들도 하나같이 상당한 품질의 무기를 들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도적은 갈 데 없는 부랑자들이 이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무기도 조악한 걸 쓰는 게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 래토 도적단은 창, 장검 등 '무기'라고 불릴 법한 것들을 사용했다.
'혹시....'
내 눈이 뱀처럼 가늘어졌다. 아무래도 이 두목 놈을 먼지까지 탈탈 털어봐야 할 것 같았다.
콱!
메이스를 바닥에 꽂아 넣고 팔짱을 꼈다.
"안내해라."
"어, 어딜...."
"어디겠냐. 네가 쥐새끼처럼 숨어있던 저 구석이지."
"그, 그건...."
두목이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머릿속으로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리는 게 훤히 보일 지경이었다.
요컨대, 어디까지 나에게 내줘야 살아남을 수 있을지에 대한 것.
'귀찮게.'
내 입가에 짜증스러운 미소가 스쳤다.
아직도 그런 고민할 정신머리가 남아있다니. 내가 여기까지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내려왔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이해를 못 한 건가?
아니면, 그 정도로 저 안에 숨긴 것이 귀중한 것이거나.
어느 쪽이든 내겐 상관없었다.
'정보만 아니었어도 진작 죽였을 텐데.'
짝! 짝!
연달아 두목의 뺨 양쪽을 휘갈긴 뒤, 가슴팍을 걷어찼다.
"컥!"
뒤로 날아가는 놈에게 바짝 따라붙었다.
콱!
놈의 허리춤에 붙어 있던 검을 꺼내 손바닥에 내려꽂았다. 두목의 손이 벽에 말뚝 박듯이 고정되었다.
"끄아악!"
두목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울부짖었다.
왈칵.
치솟는 피가 벽을 따라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두근.
다시 심장이 뛰었다. 하지만 미켈의 앞에서처럼 격렬하게 진동하진 않았다.
그저 습관적인 광증이 치밀뿐.
다시 고개를 들어 올리는 레퀴엠을 지긋이 억눌렀다.
"아 참, 공평하게 하기로 했지?"
선득한 미소를 지으며 단검을 뽑아낸 뒤,
푹!
다른 쪽 손에 꽂아 넣었다.
"끄으으윽!"
두목의 양어깨가 거칠게 들썩였다. 양 손바닥에 뚫린 구멍으로 피를 철철 흘리며 애원했다.
"제, 제발.... 잘못했습니다."
"그 말 아까도 했잖아? 별로 잘못을 모르는 것 같은데."
"정말... 정말입니다. 죄송합니다."
두목의 비틀린 눈가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제, 제발.... 전부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놈의 얼굴엔 미래를 향한 두려움이 가득했다. 이 손을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평생 불구로 살게 될 거라는 두려움.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될 텐데.'
스산하게 중얼거린 뒤 검을 뽑아주었다.
정말 놈의 말을 믿어서는 아니었다. 그저 시간 낭비를 하기 싫었을 뿐.
"으윽!"
두목이 양손을 감싸 쥐며 울음을 삼켰다.
"앞장서라."
발로 무릎을 툭 차자, 놈이 비척비척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있는 거 다 꺼내와."
명령조로 말한 뒤 덧붙였다.
"거기 피 한 방울이라도 묻어 있으면 죽을 줄 알고."
"-!"
두목은 겁에 질린 얼굴로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헝겊을 주워 손에 둘둘 감았다. 그리고 내 명령대로 굴 안쪽에서 바삐 움직였다.
"흐음."
벽에 비스듬하게 기댄 채 놈이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굴 안쪽은 제법 쾌적하게 꾸며져 있었다. 단순히 돈과 패물을 숨겨둘 금고뿐만 아니라, 책상과 간단한 침대까지 있었다.
"뭘 이렇게 정성껏 꾸며났어?"
"혹시 경비대가 오면 피신하려고...."
"싸운다는 생각은 안 하고?"
"일개 도적단이 어떻게 버티겠습니까. 물량 공세엔 답 없지요."
두목은 제법 순순한 어조로 대답했다.
"오늘 같은 때를 대비해서 혹시나 하고 준비해둔 겁니다. 여기 숨어서 버티다가 조용해지면 나갈 생각이었습니다요."
고분고분 내 말을 따르면 목숨은 건질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여기 다 꺼내왔습니다."
두목이 물건들을 내려놓곤 그 앞에 꿇어앉았다.
"흠."
날카로운 눈으로 바닥의 물품들을 찬찬히 살폈다. 상당한 양의 돈, 싸구려 보석, 귀중품들이었다.
이윽고 내 입술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내가 다 가져오라고 했을 텐데?"
"네? 이게 전부...."
"인질한테서 빼앗은 편지 있잖아."
두목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그, 그걸 어찌 아셨는지...."
"말귀 못 알아 처먹어? 아니면 내 말을 무시한 건가?"
두목이 식은땀을 흘리며 손을 내저었다.
"오, 오해십니다. 그게 아니라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서 안 가져온...."
"닥치고 다 가져와."
내 눈이 서슬 퍼렇게 번득이자, 두목은 허둥지둥 일어서서 안쪽의 금고를 통째로 들고 왔다. 그것을 거꾸로 들고 탈탈 쏟아부었다.
쨍그랑, 찰그랑.
그 안에 있던 온갖 잡동사니들이 쏟아졌다. 말리 비틀어진 빵 조각, 여성의 속옷, 채찍, 촛농....
'...이딴 건 왜 갖고 있는 거지?'
어처구니없어하던 내 눈에 펄럭 떨어져 내리는 편지가 잡혔다. 그것을 주워든 뒤 내용을 확인했다.
편지를 펼치자마자 눈에 익은 글씨체가 보였다. 그 주인은 물론 디에고였다.
'역시.'
내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스쳤다.
글씨체는 물론이고 내용마저도 몹시 뻔했다. 내가 예상했던 바로 그대로였다.
"지나가던 마차를 습격했는데, 거기 있던 노인네의 품에서 나온 것입니다. 귀족가의 하인인 것 같더군요."
"...."
"해서 혹시나 몸값을 받을 수 있을까 하고 보관했던 겁니다. 어차피 검사님 같은 귀한 분께는 별로 필요도 없을 것이라...."
"됐고,"
중언부언 길어지는 두목의 이야기를 대충 잘라냈다.
"내놓을 건 이게 다야?"
놈의 몸을 뚫어지게 보며 으름장을 놓았다.
"뒤져서 동전 한 닢 나올 때마다 싸대기 한 대씩 추가다."
"저, 정말 없습니다!"
두목은 제자리에서 폴짝 뛰어올랐다.
"정말입니다! 제 이름을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전부 다 꺼낸 겁니다!"
그 이름에 걸 명예가 얼마나 있다고 거는 건지.
나는 콧방귀를 뀌곤 손짓했다.
"묻는 거에나 대답해라."
"예, 예에."
"무기는 어디서 구했냐?"
이번에야말로 두목의 얼굴은 시퍼렇게 질리고 말았다.
'그걸 어떻게 알았지?'
라고 생각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 그 지나가던 마차를 습격하거나... 전리품으로...."
"저만한 무기라니, 기사단의 마차를 습격하기라도 했나 봐?"
단검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으르렁거렸다.
"어느 기사단이 그렇게 멍청해 빠졌는지 정말 궁금하네. 이런 일개 도적단한테 털릴 정도라니."
눈을 서슬 퍼렇게 빛내자, 압박을 이기지 못한 두목이 실토했다.
"고, 공급 받았습니다!"
"누구한테?"
"정체는 모릅니다. 늘 로브를 쓰고 와서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습니다."
두목은 오들오들 떨며 내 손에 쥔 단검에 눈을 고정했다.
"저, 정말입니다. 목소리밖에 들리지 않아서, 젊은 남자라는 것밖에 모릅니다."
"대가는?"
"무기를 공급받는 대신.... 그 대신, 그들이 지정하는 상단의 마차를 습격했습니다."
"어디 상단인데."
"루비노, 자피로.... 보석을 주로 판매하는 상단입니다."
놈이 말하는 이름들을 입 안에 굴리며 생각에 잠겼다.
'이 상단을 공격해서 이득을 얻을 집단이 어디지?'
두목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사람은 노예로 팔았을 테고, 물품은 어떻게 했나?"
"전부 팔았...."
두목이 시퍼렇게 빛나는 내 눈을 보고 얼른 말을 바꿨다.
"...지만, 한 개가 남아있습니다!"
놈이 바지춤에 손을 넣어 뒤적거리더니 무언가를 꺼냈다. 그걸 양손으로 받쳐 들고 애원했다.
"여, 여기 넣어두고 꺼내는 걸 깜박했습니다! 이제 정말 없습니다!"
"흠."
두목의 손바닥 위에 올려져 있는 보석을 집어 들었다.
"루비로군."
선명한 붉은 빛이 아름다운 보석이지만, 현재 제국에서는 그다지 가치 있게 취급되지 않는 물건.
그것을 품속에 넣는 대신, 놈의 손바닥에 다시 올려주었다.
"...!"
두목의 눈이 안도와 기쁨으로 환히 떨린 순간,
퍽!
자비 없는 발길질이 놈의 가슴으로 날아들었다.
"커흑!"
두목이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난 거짓말을 싫어해."
차가운 얼굴을 한 채 놈에게 다가섰다.
"아깐 더는 없다고 하지 않았었나?"
"꺼내는 걸, 깜박해서...."
"깜박한 게 아니라, 마지막까지 쓰려고 남겨둔 거겠지."
냉정히 일축한 뒤 바닥에 떨어진 물건 중 단검을 주워들었다.
날이 반사하는 빛에, 두목이 흠칫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사, 살려주신다고 하셨잖습니까?"
"내가 언제?"
비릿하게 웃으며 단검을 놈에게 겨누었다.
"난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아, 아까 분명히...."
"멍청하긴."
두목의 몸 어디에 꽂아 넣을지 가늠하면서 킥킥 웃었다.
"정보를 다 분 놈을 왜 살려두지? 무슨 가치가 있다고."
"제, 제발! 다시 한 번만 생각해 주십시오!"
두목이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네 발로 기었다.
"뭐든 하겠습니다! 시키시는 건 뭐든 다 하겠습니다!"
"필요 없어."
푹!
단검이 정확하게 놈의 심장 정중앙을 찔렀다.
"부하로 삼기엔 넌 너무 형편 없거든."
"끅, 끄윽...."
두목이 단검을 쥔 내 손을 붙잡았다.
뚝, 뚝.
어느새 놈의 손바닥에서 새어 나온 피가 헝겊을 전부 물들이고 아래로 떨어졌다.
두근, 두근, 두근.
짙은 피 냄새를 맡은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동요하지 않고 그것을 차분하게 억눌렀다.
예민해지는 오감을 느슨하게 풀어 헤치고, 천천히 숨을 골랐다. 처형을 행하는 심판관처럼, 삭막하고 무표정한 얼굴을 했다.
쾌락이 아닌 오로지 목적을 위해, 단검을 쥔 손을 우득 비틀었다.
"끅...."
두목이 짧은 단말마와 함께 숨을 거두었다. 고통스레 움찔거리던 팔다리가 축 늘어졌다.
"...후."
쉬우면서도 어려운 살인이었다. 앞서 열 여덟 명을 베는 것보다도 훨씬 까다로웠다.
손을 툭툭 턴 뒤 두목이 내놓은 물건 중 돈과 귀중품 몇 가지를 챙겼다. 물론, 놈의 속옷에 들어있었을 보석엔 손도 대지 않았다.
짧은 시간 동안 어느새 굴 안에는 피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쯧."
나직이 혀를 찬 뒤 들어온 길을 거슬러 나왔다. 그리고 아까 블랙스타와 필립이 있던 감옥으로 향했다.
막 입구에 들어서자,
"저, 저저 저리가! 저리 가란 말이다!"
"크르릉!"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사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저리 가! 훠이!"
막대기를 주워들고 블랙스타를 위협하는 필립과,
"크릉!"
그 꼴이 같잖다는 듯 으르렁거리는 블랙스타였다.
블랙스타는 내가 벌려놓은 창살의 틈에 몸을 꼭 붙인 채였다. 필립이 나오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듯했다.
"푸르릉!"
당장이라도 필립을 깨물고 싶지만 내 명령 때문에 눌러 참고 있었다.
"잘한다."
들으라는 듯이 크게 빈정거리며 감옥으로 들어섰다.
"푸릉!"
블랙스타가 내 쪽을 돌아보며 반색했다.
"어...?"
필립의 눈이 터질 듯이 커졌다.
툭.
그가 잡고 있던 막대기가 맥없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아, 아아아."
필립의 손가락이 나를 향했다.
"아, 아아 아벨 도련님?"
"그래."
"도, 도도 도련님이 어떻게...."
필립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어찌나 놀랐는지 얼굴이 탈색 된 것처럼 하얗게 질려있었다.
"어, 어떻게 여기에...."
그 중얼거림에 답하는 대신 심드렁한 투로 말했다.
"손가락 치워라."
"-!"
필립이 화들짝 놀라 손가락을 접었다.
"지, 진짜 아벨 도련님이시군요...."
"그럼 가짜겠냐?"
필립은 두 손을 꼭 감싸 쥔 채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도련님이 여긴 왜...."
"여기 있으면 안 되나?"
"그, 그게 아니라. 수도에 계신 것 아니셨는지...."
"그랬었지."
과거형의 대답에 필립이 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
그러다 이윽고 무언가에 생각이 미쳤는지 몸을 흠칫 떨었다.
"서, 설마 인질로 잡혀 오신 건...."
Chapter 16. 매가 약이다. (3)
"그럴 리가 있나."
느릿하게 대답한 뒤 아직 필립을 노려보고 있는 블랙스타에게 손짓했다.
"이리 와.".
"푸르릉."
블랙스타가 즉시 몸을 돌려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살갑게 머리를 치댔다.
"푸릉, 푸릉."
언제 인간에게 으르렁댔냐는 듯, 몹시도 온순한 몸짓이었다.
"저, 저런...."
필립은 저 흉악한 몬스터가 내게 복종한다는 사실에 기겁했다. 나는 그런 그를 향해 여유로운 미소를 흘려보냈다.
"이 녀석을 타니까 수도까지 금방 가더군. 덕분에 요나스가 고생을 꽤 했지."
"-!"
필립이 입을 쩍 벌렸다. 내 말투에서 숨겨진 뜻을 읽어낸 탓이었다.
"호, 혹시 요나스님을 만나셨습니까?"
"황궁 입구 앞에서. 그 안으로 들어오진 못했지만."
"그, 그럼 도련님께서 귀족 회의에 대신 참석하신 겁니까?"
"그래. 하루도 빠짐없이."
매끄러운 대답이 이어지자 필립이 눈을 질끈 감았다.
"오, 맙소사...."
설마 했던 일이 사실로 드러나자 충격이 큰 모양이었다.
"영주님께 이 사실을 어찌 고할꼬...."
"지금 그걸 걱정할 때가 아닐 텐데."
나는 블랙스타에게 몸을 기댄 채 천천히 녀석의 갈기를 쓸어주었다.
"내가 지금 여기 있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아직 이해를 못 했나?"
필립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멍청히 눈만 끔벅였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서 정리가 안 되는 얼굴이었다.
"그러고 보니 도련님께서 도대체 여긴 왜...?"
필립이 더듬더듬 대답하기 시작했다.
"저를 구하러 오신 건 아닐 것 같은데...."
"당연한 소릴. 네가 여기 있는지 어떻게 알고 구하러 오겠어?"
쿡 웃으며 덧붙였다.
"나야말로 놀랐네. 네가 여기 있을 줄은 몰랐거든."
필립은 그제야 내 말을 이해했는지 아연한 얼굴을 했다.
"설마...."
"그래. 나도 알고 너도 알고 있는 그 이유 때문이지."
필립의 낯이 두려움으로 물들었다. 그는 비로소 내 입가에 흐르는 나른함이 무엇에서 기인했는지 깨달은듯했다.
"그럼 밖에서 들리던 비명이 전부...?"
"그래."
블랙스타의 갈기를 찬찬히 쓸어내리며 대답했다.
"내가 다 죽였다."
"그 도적들을 전부 다요?"
"그래, 두목까지 전부."
필립의 요동치는 눈동자가 내 팔을 담았다.
"팔이 다 나으셨군요. 하긴 그러니까 저걸 타고...."
"대체 언제적 이야기를 하는 건지. 내 팔은 한참 전에 다 나았다."
물론 이 세계에서 부러진 팔이 1-2주 만에 붙는 것은 불가능했다. 내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이야기였지만.
"어떻게 도련님 혼자서 그 많은 수를...."
"왜, 아직 못 믿겠어? 시험해 볼래?"
상큼하게 웃어 보이자 필립이 조개처럼 입을 딱 다물었다. 그리고 내가 한 말을 가늠했다.
그는 내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 다는 것을, 그리고 그럴 필요도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인물이었다.
"오, 세상에. 맙소사...."
필립이 비틀, 하더니 무릎의 힘이 풀린 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도련님, 대체 무슨 짓을...."
그의 얼굴에 지독한 공포, 그리고 두려움이 스멀스멀 번졌다.
"뭘 그렇게 놀라냐."
손가락을 튕기며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노예들을 사서 죽이나, 도적들을 죽이나 인간을 죽이는 건 마찬가지인데."
"그렇지만 여긴...."
"오, 물론 여긴 오베스트 영지가 아니지. 하지만 알 게 뭐야?"
키득키득, 잔혹한 웃음이 감옥 안으로 밀려 들어오는 싸늘한 바람결에 흩어졌다.
"누가 죽였는지 아무도 모를 텐데."
"아아, 어쩐지...."
필립은 바닥에 꿇어앉은 채 부들부들 온몸을 떨었다.
"여기까지 오는데 아무 일도 없었더라니...."
그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런 식으로 욕구 불만을 해소하신 겁니까. 대체 앞으로 어떡하시려고 이러시는 겁니까...."
그나마 영지 안에서만 사고를 치던 이 망나니가 영지 밖에서, 심지어 수도 근처에서 살인을 일삼고 다녔다는 사실이 필립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있었다.
"매번 이렇게 모두를 죽일 수는 없으십니다. 게다가 이런 식으로 대량 학살을 하고 다니시면...."
"그건 네 알 바 아니고."
철창으로 다가가 그 틈새로 무언가 내밀었다. 내 손에 들린 서신을 확인한 필립의 눈이 커졌다.
"이, 이건!"
"그래, 네가 품에 소중히 모시고 온 편지지."
내 차가운 얼굴을 본 필립은 이미 내가 그 내용을 확인했다는 것을 짐작했다. 그가 참담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도련님, 이건...."
"아, 변명은 됐어."
피식 웃으며 편지를 좍좍 찢어버렸다.
"아버지께서 그리 행동하실 거라는 건 예상했거든. 그런데,"
찰그랑.
품속에 손을 넣어 돈자루를 꺼내 들었다.
"이건 예상 못 했네."
"그, 그것은!"
자루를 본 필립이 눈을 부릅떴다. 그가 반가워하는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두목이 그걸 아직 갖고 있었습니까?"
"그래, 그랬지."
"다행이군요! 그게 있어야 저는...."
"그래, 딸에게 갖다줄 수 있겠지?"
말을 뚝 잘라먹자 필립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 그게 무슨. 그건 그냥 여비...."
"치고는 너무 많던데. 너와 마부 둘이서 여행하는 데 이리 많은 돈이 필요하다고?"
자루를 짤랑짤랑 흔들며 말을 이었다.
"내가 알기로 지금 오베스트 영지의 자금 사정이 그리 좋지는 않을걸."
"...."
"가뜩이나 내가 없어서 업무에 구멍이 났을 테고."
내 말이 정곡을 찌른 듯 필립의 얼굴이 점점 딱딱하게 변했다. 얼굴의 근육이란 근육은 모조리 굳어버린 듯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만한 돈이라니, 흠."
"도, 도련님. 그게 그러니까...."
"여전히 제 버릇 개 못 줬군, 필립?"
필립은 침을 꼴깍꼴깍 살피며 내 얼굴만 애타게 바라보았다.
"도, 도련님."
몹시도 절박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래, 그랬겠지. 내가 없으니 또 손을 대기가 얼마나 쉬웠을까. 그렇지?"
"저는, 그게. 그러니까."
뭐라고 띄엄띄엄 말하려던 필립은 결국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입이 열 개, 아니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쯧쯧.'
나는 한심한 눈초리로 그의 숱 없는 정수리를 바라보았다.
'발전이라는 게 없군.'
이미 아벨에게 걸려서 그렇게 고생하고 있으면서 같은 짓을 또 하다니. 물론 이번엔 걸리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벌인 일이겠지만.
'수도로 가는 김에 딸에게 용돈이라도 주려던 거겠지.'
나는 상황의 일부만 보고도 필립의 목적을 정확하게 파악했다.
'이런 게 부성애인가.'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 한다던데, 저 못난 놈마저 자식을 챙기는 모습을 보니 입맛이 씁쓸했다.
철창 사이로 손을 뻗어 필립의 멱살을 잡았다.
"도, 도도 도련님!"
필립이 눈을 질끈 감고 두 손을 모았다.
"제, 제발 살려주십시오!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누가 죽인대?"
필립의 몸을 휙 들어 올려 감옥에서 꺼낸 뒤 블랙스타 위에 얹었다.
"히, 히이익!"
"가만히 있어."
짧게 명령한 뒤 블랙스타의 위에 훌쩍 올라탔다.
"떨어지기 싫으면."
"그, 그게 무...."
필립은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자, 가자!"
내가 힘차게 외치며 블랙스타를 출발시켰기 때문에.
"끄에에에엑!"
필립의 구슬픈 비명이 감옥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던 그는 감옥 밖으로 나오자마자 입을 다물었다.
"...."
필립이 뜨악한 눈으로 아수라장이 된 도적 야영지를 바라보았다. 이 모든 게 나의 업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난 뒤, 그는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제 목숨 아까운 줄 아는 자는 태세 전환이 빠른 법이었다.
두두두두두!
블랙스타는 빠르게 왔던 길을 되짚어 달렸다. 다만 이번에는 숲길을 벗어나 대로변의 옆으로 빠르게 달려갔다.
그렇게 한참을 달린 뒤.
"우웨에엑!"
필립은 내리자마자 연신 구토를 해댔다. 먹은 게 별로 없었는지 노란 물만 쏟아져 나왔지만.
짐짝처럼 실려 오는 게 퍽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블랙스타가 워낙 빠르기도 하고.
그런 그를 내버려 두고 블랙스타에게 말했다.
"다음에 또 부를게. 잘 지내고 있어."
"푸릉."
"다음엔 뭐 처먹지 말고 부르면 재깍재깍 와라."
"푸, 푸릉."
블랙스타의 눈이 한 바퀴 굴렀다.
"인간 먹지 말고."
"푸릉!"
블랙스타는 힘차게 대답하며 멀어져갔다. 녀석의 토실토실한 궁둥이를 보고 있자니 이 주변 도적들의 안위에 생각이 미쳤다.
'다음엔 거기를 칠까?'
물론 이 상황을 유리하게 이용할 계획으로.
"도, 도련님...."
필립이 겨우 몸을 일으켜 내게 다가왔다.
"여긴 왜 오신 겁니까?"
우리가 멈춘 곳은 수도의 관문이 보이는 성벽 앞이었다.
"왜긴."
품에서 필립의 신분증을 찾아 던져주었다.
"요나스 알지?"
"...물론입니다."
대답하는 필립의 낯빛이 영 불편해 보였다. 그를 떠올릴 때마다 내 명령으로 향초를 갖다두었던 그때가 함께 생각나는 모양이었다.
"녀석이 여기 수도에 있다. 찾아서 내게 데려와."
"예, 예예? 요나스 님을요?"
"기한은 내일 회의 끝날 때까지. 찾으면 황궁 앞에서 대기하고 있어."
필립이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듣고 있다가 더듬거렸다.
"혹시 못 찾으면...."
"찾을 때까지 내 앞에 나타날 생각하지 마라."
딱 잘라 말하자 필립의 어깨가 축 처졌다.
"아,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 넓은 수도에서 제가 어찌 혼자서...."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필립에게 은화를 던져준 뒤 몸을 돌렸다. 어둠 속에 환히 불을 밝히고 있는 성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내일 그 꼴로 서 있지 마라. 창피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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