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0. 손에 든 패를 여기저기 활용한다. (1)
"굉장한데?"
신전을 나온 뒤, 비올렛 황녀는 다소 기분이 좋아 보였다.
"뭐가요?"
"실재하는 신의 힘을 눈앞에서 봤잖아. 놀랍지 않아?"
"놀랍긴 하더군요."
레퀴엠이 잠잠해지는 게.
내 속뜻을 모르는 비올렛 황녀가 흥, 하고 턱을 쳐들었다.
"횡재한 줄 알아. 나 아니었으면 성녀를 쉽게 만날 수 없었을걸?"
"제가 그러니까 황녀님께 '부탁'을 드린 것 아니겠습니까."
능청스레 아부를 떨어주자, 비올렛 황녀는 더욱 의기양양해졌다.
"그나저나 네가 데려온 저 여자, 운이 좋네."
비올렛 황녀의 시선이 옆에 서서 눈물을 닦아내고 있는 엘리체를 향했다.
"처음엔 어처구니가 없었지. 오늘 가면 축복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네가 너무 자신만만하게 말해서."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습니다. 비올렛 황녀님이 행차하셨는데, 신께서도 당연히 기쁘지 않겠습니까."
"...지금 비꼬는 거지?"
비올렛 황녀가 미간을 모았다가, 이내 픽 웃었다.
"아무튼 잘 됐네. 축복을 받아서인지 나도 활력이 넘치는 기분이야."
그녀는 철석같이 성녀의 힘을 신이 내린 성력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간 신전에서 얼마나 사람들을 잘 통제해왔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정확히는 테오도어의 입김이 작용한 덕분이겠지만.
"크루델레.... 정말 지독한 질병이지. 저리 우는 것도 이해가 가."
비올렛 황녀가 넌더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 병을 알고 계시는군요."
"유명한 병이니까. 세간엔 유전이라는 둥 말이 많은데, 일단 불치병이라는 게 가장 중요하고."
비올렛 황녀가 날카로운 눈으로 엘리체를 유심히 살폈다.
"그런데 저 여자.... 어쩐지 얼굴이 좀 낯익네."
"그렇습니까?"
"처음 봤을 때부터 생각했는데, 병이 낫고 나니 확실해졌어."
이윽고 그녀의 입술에 흥미롭다는 미소가 맺혔다.
"왜 굳이 내 시녀로 붙여서 들여왔는지 알겠군. 재미있는 일을 꾸미고 있나 봐?"
아무래도 그녀는 엘리체의 정체를 대강 눈치챈 것 같았다. 과연 귀족들의 얼굴을 꿰고 있는 황족다웠다.
희미한 미소로 그녀의 의문을 긍정했다.
"오늘 일은 불문에 부쳐주실 거라 믿겠습니다."
"아아, 물론이지. 나는 이런 류의 논란을 굉장히 좋아하거든."
비올렛 황녀가 부채를 꺼내 들어 입가를 가렸다.
"네가 회의 때 뭘 했는지도 잘 전해 들었지. 정말 재밌었어."
"황녀님께 기쁨을 드렸다니 황송할 따름입니다."
"앞으로도 이렇게 고분고분하면 좋을 텐데."
부채의 틈 사이로 비올렛 황녀의 눈이 반짝 빛났다.
"설마요. 제가 그리 고분고분하면 이 자리에도 안 나오셨겠지요."
"...푸훗."
비올렛 황녀가 웃음을 감추며 돌아섰다.
"이따 저녁에 봐. 마차를 보내도록 하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비올렛 황녀의 모습이 아까 타고 왔던 마차 안으로 사라졌다.
다그닥, 다그닥.
이내 비올렛 황녀가 탄 마차가 멀어져 갔다. 나 또한 엘리체와 함께 대기하고 있던 마차로 향했다.
"어서 오... 어어? 어어어어?"
마부석에 앉아 건들거리고 있던 덱스터의 눈이 커졌다.
"어어어? 어어?"
그가 손으로 엘리체를 가리키며 어버버거렸다.
"조용히 해라."
한 마디로 입을 다물게 만든 뒤 엘리체와 함께 마차에 올라탔다.
"흐흑."
엘리체가 마차 좌석에 앉자마자 또 훌쩍이기 시작했다.
"아까 그렇게 울고도 부족한가?"
"아뇨, 흡, 그게."
엘리체는 코를 몇 번이나 들이쉰 후에야 제대로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고맙...습니다. 주인님. 정말, 고맙습니다."
"흠."
"성녀의 축복이라니.... 저 같은 평민은 꿈도 못 꿀 일입니다."
엘리체가 마차 창문에 비치는 제 얼굴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그래.... 이런 얼굴이었죠. 몇 년간 잊고 살았었네요."
잘게 떨리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뺨을 쓸었다.
"병에 걸린 이후로, 주변의 거울과 유리를 모두 없애버렸었어요. 제 얼굴을 보는 게 너무 끔찍해서."
그녀의 손가락은 더이상 주름지고 갈라져 있지 않았다. 매끄러운 데다 희미한 광택마저 감돌았다.
"전부 주인님 덕분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엘리체의 얼굴에 감동이 물결쳤다. 그녀는 내가 지금껏 봐왔던 모습 중 가장 기쁘게 웃고 있었다.
"내가 뭘. 신실한 황녀님을 본 신께서 감동하신 게지."
"글쎄요."
내 시큰둥한 반응에도 엘리체는 옅게 미소 지었다.
"비올렛 황녀님이 주인님 없이 혼자 오셨더라면, 축복을 받는 일은 없었을 거라는 확신이 드는군요."
내게 주변 이들을 잠들게 하는 약을 구해다 준 게 엘리체니, 그녀가 어느 정도 상황을 짐작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감사 인사는 이만 됐고, 앞으로의 일을 이야기해보지."
나는 엘리체의 말을 픽 웃어넘겼다. 엘리체는 눈가에 눈물방울을 단 채로 밝게 웃었다.
"네, 주인님."
"다른 녀석들은 잘 적응하고 있나?"
엘리체가 눈가의 눈물을 훔치고는 재빨리 대답했다.
"윌리엄의 상처는 순조롭게 나아가고 있습니다. 주인님 덕분에 좋은 약을 구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덱스터는... 방금 보시다시피, 잘 적응했습니다. 얼굴의 멍을 가짜 수염으로 가리고 다니는 게 귀찮다고 투덜거리긴 하지만요."
"배가 불렀군. 나머지는?"
"잭 또한 부지런히 골드스타와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술술 대답하던 엘리체가 살포시 웃었다.
"물론, 밥도 잘 먹여가면서요."
무엇을 떠올리는지 장난스러운 얼굴이었다.
"아마 더는 찾기 어려울 거다."
"어쩐지, 소득이 영 없다고 낙담한 눈치더군요."
"이 정도면 충분해. 골드 스타 녀석도 더는 물지 않을 테지."
고개를 까딱이며 가장 중요한 인물에 대해 물었다.
"멜리나는 잘하고 있나?"
"물론입니다. 아주 영특한 아가씨에요."
엘리체의 표정이 냉정한 사업가의 그것으로 바뀌었다.
"처음 써보는 계약서일 텐데도, 꼼꼼하게 읽고 서명하더군요. 제법 질문이 날카로워서 고생했습니다."
"농담도 잘하는군. 마음만 먹으면 순진한 시골 아가씨 한 명 등쳐먹는 건 일도 아니면서."
"우리 상단의 중요한 기술자인데 그리 허투루 할리 있나요."
엘리체가 생긋 웃으며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그러다 그 빛깔을 확인하고는 흠칫했다.
"제 얼굴인데도, 적응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리겠어요."
"오래 걸려선 안 될 거야. 곧 상단주로서 전면에 나서야 하니까."
"네, 주인님."
엘리체가 배시시 웃었다. 늘 짓던 미소인데도, 얼굴의 구김살이 사라져 훨씬 환해 보였다.
"맡겨둔 홍보용 액세서리 세트는?"
"멜리나 양이 심혈을 기울여서 만들더군요. 주인님께 인정받고 싶은지 무척 열심힙니다."
"좋아. 오늘 저녁까지 완성할 수 있겠나?"
"마무리 단계이긴 한데.... 아!"
엘리체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가능할 것 같습니다. 오늘 저녁 약속 때 들고 가실 예정입니까?"
"맞아."
"그렇다는 건 설마 전에 말씀하신, 홍보용이라는 의미가...."
"맞아. 비올렛 황녀가 우리의 홍보 수단이 되어줄 거다."
"역시 주인님!"
엘리체는 이제 저 말이 입에 붙은 듯했다.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엄지를 치켜 들었다.
"비올렛 황녀님은 사교계 최고의 유명 인사죠. 그분께서 걸치고 나타나신다면 홍보 효과가 굉장할 겁니다."
"그래. 그리고 그 후로 주문이 물밀 듯이 들어올 테니, 부지런히 일하라고 닥달해."
"맡겨두세요. 그건 제가 전문이죠."
엘리체의 말투에 자신감이 넘쳤다. 그녀가 악덕 고용주는 아니겠지만, 멜리나가 꽤 고달프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상단 이름은 정했나?"
"네. 비토리아 상단입니다."
"그렇군."
원작에서는 멜리나 보석 공방이었지만, 이름은 중요하지 않았다. 멜리나가 제 재능을 발휘한다는 점은 똑같았으니까.
"수확제가 끝날 때쯤부터 본격적으로 주문이 들어올 거야. 잘 준비해 놓도록 해."
"네, 알겠습니다."
나와 엘리체 사이로 비밀스러운 공모자의 미소가 오갔다.
❖ ❖ ❖
몇 시간 뒤, 비올렛 황녀의 마차 앞.
"세상에, 이게 옷이라니. 내가 알고 있던 옷의 개념이 달라지기라도 한 건가?"
비올렛 황녀가 투덜거리며 마차 밖으로 나왔다. 마차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나와 호위 기사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무슨 옷감이 이리 거칠담? 피부가 다 쓸릴 것 같아."
내가 준비해 온 옷은 비올렛 황녀의 미모를 효과적으로 감춰주고 있었다.
몸매가 드러나지 않는 펑퍼짐하고 단출한 디자인의 드레스, 그리고 코까지 가려주는 커다란 모자까지.
그렇게 비올렛 황녀는 황족의 태를 벗어던지고 평범한 제국민 1로 탈바꿈했다.
"오늘 귀궁 하자마자 고급 항유로 마사지를 해야겠어. 그렇지 않으면 피부가 온통 상하고 말 거야."
쉴 새 없이 투덜거리는 저 입만 아니라면 말이다.
"변함없이 아름다우십니다, 황녀님."
호위 기사의 최선을 다한 칭찬에도, 잔뜩 찌푸려진 비올렛 황녀의 얼굴은 펴질 줄 몰랐다.
"이거 진짜 옷 맞지? 걸레를 잘못 가져온 거 아니야?"
"나름대로 고심해서 준비해 온 건데, 그리 말씀하시니 서운하군요."
나는 보란 듯이 한숨을 내쉬며 처량한 표정을 지었다.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이런 옷을 입으면 소매치기의 표적이 되기 십상이라고."
아까 비올렛 황녀가 준비해 온 옷을 덜렁덜렁 흔들었다.
옷감의 광택이나 고급스러운 마감이, 나 지체 높은 귀족이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듯한 옷을.
"황녀님이 원하는 '진짜' 평민들의 축제를 구경하시려면, 이게 최선입니다."
"그래, 알았어. 알았다고."
비올렛 황녀는 그제야 투덜거리기를 멈추었다.
"노천카페라던가, 마술 쇼라던가, 길거리 내기 같은 걸 볼 수 있다 이 말이지?"
"기억력이 좋으시군요."
놀리는 듯한 대꾸에 비올렛 황녀가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옷차림의 완성은 얼굴이라고, 평범한 옷을 입고 있어도 그녀의 미모가 바래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이 다음엔 어떻게 할 거지?"
"그건 말입니다...."
말끝을 길게 늘이다가,
"앗?! 저것은?!"
큰 소리를 내며 뒤쪽을 가리켰다. 황녀와 호위 기사가 놀라 그쪽을 바라본 순간,
"실례."
작게 속삭이며 비올렛 황녀를 안아 올려 옆구리에 꼈다.
"꺄...."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려는 황녀의 입을 틀어막고 몸을 날렸다.
훙!
가볍게 도약해 옆의 건물 위로 날아올랐다. 막 옥상에 착지하자마자,
"화, 황녀님!"
호위 기사가 깜짝 놀라 고함을 지르는 게 들려왔다.
"황녀님이 사라지셨다!"
"뭐라고요?!"
마차 안에 있던 시녀가 비명을 질렀다.
"뭐?! 황녀님이 사라지셨다고?!"
마부도 놀라서 마부석에 뛰어내렸다.
"아벨 킨드리얼님도 같이 사라지셨어!"
"어떻게 된 거지?"
그렇게 황녀의 수행 인원들은 모두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자세를 낮추어 몸을 숨긴 채 그 웃지 못할 광경을 지켜 보았다.
"난리가 났군."
히죽 웃다가, 팔에서 격한 저항이 느껴져 옆을 돌아보았다.
"읍! 읍읍!"
비올렛 황녀가 얼굴이 벌게진 채로 뭐라 악을 쓰고 있었다.
대충 들어보니 감히 나를 짐짝 취급하다니, 이거 놓지 못하겠느냐, 와 같은 소리인듯했다.
"조용히 하면 놔 드리죠. 아시겠습니까?"
비올렛 황녀가 표독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놔주자,
"감히 날 짐짝처럼 들어 올려?"
비올렛 황녀의 잇새로 악문 음성이 흘러나왔다. 나는 픽 웃으며 지지 않고 대꾸했다.
"공주님 안기로 바꿔드릴까요?"
"지금 그 뜻이 아니잖아! 일단 내려놓고 말해!"
"분부대로."
팔을 펼치자 비올렛 황녀의 몸이 바닥에 털썩 떨어졌다. 그래봤자 겨우 한 뼘 높이였지만.
비올렛 황녀가 대번에 눈을 치켜떴다.
"야! 미쳤...."
내 손이 다시 뻗어나갔다.
텁.
그렇게 비올렛 황녀의 입은 다시 틀어막히고 말았다.
Chapter 20. 손에 든 패를 여기저기 활용한다. (2)
"쉬잇. 조용히 하세요."
다행히 아래쪽의 인원들은 위의 소란을 눈치채지 못했다. 자기들끼리 허둥거리느라 바쁜 탓이었다.
"그래도 덕분에 귀찮은 혹을 뗄 수 있게 됐잖습니까."
말하며 손으로 아래쪽을 가리켰다.
"...."
비올렛 황녀가 내 손을 우악스레 잡고 떼어냈다. 그리고 슬금슬금 가장자리로 다가왔다.
"...진짜네."
호위 기사가 저쪽으로 급히 달려가고, 황녀가 타고 왔던 마차 또한 반대 방향으로 달려갔다. 각자 황녀를 찾기 위해 흩어진 듯했다.
"황궁으로 가진 않겠지?"
"아마 아닐 겁니다. 문책받을 게 뻔한데, 일단은 자기들 선에서 해결하려고 애쓰겠죠."
키득키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 일어나시죠."
비올렛 황녀를 향해 손을 뻗자, 황녀가 새침하게 내 손을 잡았다.
"흥. 근데 몸놀림이 대단하네. 순식간에 이 위로 올라오고."
"무서우셨습니까?"
"아니, 재미있었어."
내 손을 잡고 일어선 비올렛 황녀가 고개를 기울였다.
"내려갈 땐 보다 신사적으로 해줬으면 하는데."
"분부대로."
다른 손을 뻗어 비올렛 황녀의 어깨를 확 끌어당겼다.
"꺅...."
그대로 비올렛 황녀를 안아올린 뒤, 옥상에서 휙 뛰어내렸다.
"자, 됐습니까?"
묻는 순간, 비올렛 황녀와 가까이서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어느새 내 목을 꼭 끌어안은 채였다. 갑작스러운 도약에 자연스럽게 팔이 움직인듯했다.
"...!"
비올렛 황녀가 급히 팔을 떼어냈다.
"당장 내려줘!"
"왜 분부대로 했는데도 성질이십니까."
"아니, 바로 그러면 어떡해? 준비할 시간을 줘야지."
"준비할 게 뭐가 있습니까. 가만히 있는 거 말고 할 일도 없으시면서."
"아! 말대꾸 그만하고 다음부턴 미리 말하고 해!"
비올렛 황녀가 씩씩대며 고개를 홱 돌렸다.
머리카락 사이로 슬쩍 비치는 귀 끝이 붉었다. 희미한 빛 아래서도 충분히 알아챌 정도로.
이래도 불만 저래도 불만인 모습을 보니 역시 내 뜻대로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저 마차에 타고 그대로 갔으면....'
보나 마나 황녀의 뒤치다꺼리나 해야 했겠지. 오늘 이 시간을 그렇게 보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어차피 최종 목적지는 정해져 있고 말이야.'
속내를 감춘 채 말을 돌렸다.
"일단 알겠습니다."
안전히 착지할 수 있게 자세를 낮춰주었다. 황녀는 바닥에 서자마자 연신 흥, 흥 콧소리를 흘리며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그럼 제가 준비한 마차를 타고 가시죠."
"마차가 있어?"
"네. 누가 준비하신 것과 다르게 아주 평범한 것으로요."
비올렛 황녀가 입술을 비죽이며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뾰로통한 얼굴 한켠에 오늘 하루에 대한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그럼 가 보실까요?"
철부지 황녀와의 본격적인 일정 시작이었다.
❖ ❖ ❖
"저건 뭐지? 왜 불을 피운 거야? 악마를 부르는 의식이라도 하는 건가?"
"아닙니다. 날이 추우니까 모닥불을 피운 거죠 가까이서 불에 손을 쬘수 있도록."
"저긴 왜 무대를 세워서 사람을 올리는 거지? 공개처형이라도 하는 건가?"
"내기판인데, 종목은 매번 달라집니다. 판돈을 걸고 이기면 배당에 따라 수익을 거둘 수 있고요."
"오오!"
비올렛 황녀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신기해했고, 일일이 손으로 짚어가며 설명을 요구했다. 간단히 설명해주던 나는 슬슬 입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자, 이거 드시죠."
그래서 비올렛 황녀의 입에 하얀 소스를 바른 튀김을 물려주었다.
"악! 이거 왜 이렇게 매워?"
이 일대의 명물, 하얀 악마.
겉보기와는 다르게 극강의 매운 맛을 가지고 있어, 먹은 사람을 울게 만들기로 악명이 자자한 음식이었다.
"이 음료랑 같이 드시죠."
"아! 죽을 것 같아!"
처음엔 펄펄 뛰던 황녀는 어느새 그 맛에 중독되어버리고 말았다.
"이거 은근히 괜찮은데? 하나 더 먹자!"
그 모습이 꼭 매운 음식을 즐겨 먹는다는 어떤 나라의 사람들을 생각나게 했다.
광장 곳곳에서 몸을 녹이고 길을 밝히기 위한 불이 피어올랐다. 사람들은 그 주변에서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불렀다.
사소한 잡음이 있었지만, 그 후로 비올렛 황녀와의 일정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거기 두 분! 축하드립니다! 딱 100번째 손님으로 당첨되셨습니다!"
포장마차 줄인 줄 알고 섰다가, 사실은 행사 줄이어서 대형 곰인형을 받거나.
"네! 거기 커다란 모자를 쓴 아가씨! 잠깐만 잡아주시면 됩니다!"
마술쇼에 잘못 걸려, 상자를 잡아주는 일을 하거나 했다.
"완전 짜릿해! 늘 새로워! 야간 축제는 최고야!"
비올렛 황녀가 곰인형을 끌어안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이런 축제는 처음이야! 평민들은 이렇게 노는구나!"
그녀는 발걸음도 가볍게 통통 뛰어가며 나를 앞장서기까지 했다. 차가운 공기 탓에 코끝이 빨개졌는데도, 전혀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아벨! 빨리 와! 저기도 가 보자!"
"네, 네."
나는 느긋하게 뒷짐을 지고 그녀를 뒤따랐다.
철없는 어린 여동생을 돌보는 게 이런 기분일까. 실제 황녀의 나이도 나보다는 어리고 말이다.
'모처럼 노는 것도 나쁘지 않군.'
생각해 보니 그동안 계획을 위해 너무도 바삐 움직인 것 같기도 했다. 가끔은 이런 여유로움을 즐기는 것도 괜찮은 듯했다.
'하긴, 예전 몸으론 생각도 못 했을 일이지.'
이렇게 쌀쌀한 날 밖에 나와 걷거나, 사람이 많은 곳을 돌아다니는 것은.
그래서 이 시간이 썩 지루하지만은 않았다. 사람들의 활기, 경쾌한 웃음소리로 가득 찬 거리를 여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
마침 레퀴엠도 세레나드의 생명력을 먹은 탓인지 조용하기도 했고.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닙니다! 장인이 한땀 한땀 꿰매어 만든 수공예품 팔아요!"
"지금까지 이런 무기는 없었다! 3대째 물려 내려온 기술을 남김없이 발휘한 제품들! 구경하고 가세요!"
워낙 사람이 몰리는 날이다 보니, 상인들은 손님을 끌어모으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다들 목청껏 외치며 자신들의 물건을 홍보했다.
이것저것 체험도 했겠다, 배도 부르겠다.
"이제 기념품을 골라 볼까?"
비올렛 황녀는 쇼핑중독자의 눈빛으로 가판대를 이리저리 둘러보기 시작했다.
"자, 싸요, 싸! 최고급 탄생석 목걸이를 단돈 50실버에 구하실 수 있는 절호의 기회!"
문제는, 그녀가 갑자기 어떤 가판대에 관심을 보이며 시작했다.
"뭐? 탄생석이라고?"
비올렛 황녀의 귀가 쫑긋했다.
"한 번 가 보자."
그녀가 곰인형을 내게 건네고는 상인이 있는 곳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역시 사치품 애호가.'
고양이가 생선 가게를 못 지나친다고, 보석을 보고서는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흐음."
비올렛 황녀가 목걸이들이 잔뜩 놓인 가판대 앞에 멈춰 섰다. 이미 그 앞은 상품을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 인파로 북적북적했다.
"이건 얼마예요?"
"아, 아가씨가 보는 눈이 있구만! 그것은 지금 11월의 탄생석인 토파즈인데, 마침 매물이 싸게 나왔지. 세공도 이쁘게 잘 들어갔지요."
"이건 뭐죠? 설마 푸른 진주인가요?"
"수드 지방에서 나오는 건 아니고, 동남 해안가에서 나오는 진주랍니다. 뽀얗고 광택이 흐르는 것이, 아가씨 목덜미에 참 잘 어울리겠어."
상인은 인상 좋게 생긴 중년의 여인이었는데, 손님들이 듣기 좋을 말만 쏙쏙 골라 하는 재주가 있었다.
"보석 알이 너무 작은 것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 가격에 파는 거지요. 아가씨 손톱만한 것이 몇골드씩 한 답니다. 진품에 이 가격이면 진짜 거저 파는 거라구요?"
상인은 손님의 날카로운 질문에도 여유롭게 응수했다. 과연, 손님들은 그녀의 말솜씨에 넘어가 홀린 듯이 목걸이를 구매해버렸다.
"자자, 믿음직스러운 공급처에서 납품받은 보석입니다! 오늘이 아니면 살 수가 없어! 싸게 싸게 챙겨들 가세요!"
그렇게 상인의 가판대는 순조롭게 호황을 이루는 듯했다.
"이게 진품이라고?"
비올렛 황녀의 못마땅한 목소리가 섞여들기 전까진.
"입이 비뚤어져도 말은 똑바로 해야지. 어디서 사기를 쳐?"
가판대 주변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상인을 비롯해 손님들은 뜨악한 얼굴로 갑작스럽게 나타난 불청객을 바라보았다.
인상 좋던 상인의 얼굴이 순간 험악해졌다. 그녀가 뒤쪽을 향해 슬쩍 눈짓했다.
"...."
뒤쪽 벽에 기대어 서 있던 사내 둘이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아가씨는 뉘슈?"
상인이 얼른 얼굴을 가다듬고 차분하게 물었다.
"그건 알 거 없고."
비올렛 황녀는 오만한 어투로 대꾸하며 가판대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이딴 걸 진품이라고 속여 팔다니, 제정신인가?"
훤칠한 키와 모자 아래로 비치는 매혹적인 입술.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에, 손님들이 주춤 물러섰다.
"이것."
비올렛 황녀의 기다란 손가락이 진주를 하나 집어 들었다.
"동남 해안가에서 진주를 생산하긴 하지만. 이런 조악한 것과는 수준이 달라."
"조, 조악한?"
"그래. 이건 그냥 모양을 본 따 만든 모조품에 불과하잖아."
확고한 말투에 상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상인이 억울하다는 듯 한껏 목소리를 키웠다.
"큰일 날 소리를 하는구먼. 말도 안 되는 헛소리로 남의 장사판에 초를 치면 되겠슈?"
이미 가판대 주변의 분위기는 엉망이 되어버렸다. 손님들은 비올렛 황녀와 상인의 설전을 지켜보며 소리 낮추어 수군거렸다.
"헛소리는 무슨."
비올렛 황녀가 콧방귀를 뀌며 진주를 한 손 위에 올렸다.
"자, 잘 보라고."
"뭘 하려...!"
상인이 흠칫 놀라 손을 뻗었지만,
까드득.
비올렛 황녀의 손가락이 진주 표면을 긁어내는 게 먼저였다.
"헉!"
"저게 뭐야?"
손님들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비올렛 황녀의 손톱 끝에서 하얀 껍질이 부스러지고, 그 아래 무색의 표면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보이지?"
비올렛 황녀가 손가락 끝이 잘 보이도록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이런 저급한 물건을 진품이라고 속여 팔다니. 간이 부어도 한참 부었군."
모양 좋은 붉은 입술이 피식, 말려 올라갔다.
"차라리 모조품이라고 솔직히 말하는 게 어때?"
"지금 남의 장사를...!"
상인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황녀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방금 저분 말이 사실이에요?"
"당장 환불해주세요!"
손님들이 성난 얼굴로 달려드는 탓에 물러나야 했다.
"아니, 그러지들 마시고...."
상인은 쩔쩔매며 손님들의 항의를 일일이 받아줘야 했다.
"흥."
비올렛 황녀가 콧대를 높이 쳐들고 내게 돌아왔다.
속임수를 싫어하고, 비겁한 짓을 경멸하는 당당함이 그녀의 얼굴에서 흘러내렸다. 원작에서 카인이 반했던 바로 그 모습이었다.
나는 귀찮은 일에 휘말렸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지만.
"언제부터 그렇게 정의로우셨다고 나선 겁니까?"
"저 열 받는 꼴을 내버려 두라고?"
비올렛 황녀가 입가를 비틀었다.
"내가 한 번 가품에 당해봤는데, 정말 기분 더러워. 사기도 정도껏 쳐야지."
"뒷감당은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턱짓으로 상인 뒤쪽의 사내들을 가리켰다. 그들은 이미 상인과 쑥덕거리며 우리 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뭐 어때? 저 정도는 한주먹거리도 안 되면서."
"믿는 구석이 있으니 일을 벌이셨다, 이 말씀이시군요."
"뭣하면 모자라도 벗지 뭐."
비올렛 황녀가 모자를 만지작거리더니, 결국 손을 거두고 나를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니 그건 싫군. 그러니 잘 좀 처리해줘."
"어련하시겠습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내들을 바라보았다.
"어이. 잠깐 우리 좀 보지?"
우락부락한 얼굴의 사내가 말했다.
Chapter 20. 손에 든 패를 여기저기 활용한다. (3)
"조용히 따라오면 별일은 없을 거야."
옆의 사내가 허리춤에 달린 무기를 슬쩍 보였다.
"쓸데없이 소란 피우면 재미없을 줄 알아라."
은근한 위협이 담긴 말투였다.
따라가면 무슨 꼴을 당할 줄 알고. 그냥 여기서 안 간다고 버티는 게 더 좋지 않을까?
-라는 게 일반인의 생각이었겠지만.
"그래, 가자."
나는 그들을 선뜻 따라나섰다. 이렇게 쉽게 따라올 줄 몰랐는지 사내들의 반응이 반 박자 늦었다.
"...잘 생각했군."
"...조용히 따라와라."
보통은 오들오들 떨면서 왜 이러세요, 이러지 마세요, 하는 게 일반적이긴 했다.
비올렛 황녀가 내 옷깃을 슬쩍 잡았다.
"나도 따라가야 해?"
작은 속삭임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별일 없을 테니 따라오시죠. 서로 찢어지면 더 불편하니까."
그러느라 잠시 시간을 지체하자, 사내 중 한 명이 버럭 성을 냈다.
"뭐라고 지들끼리 궁시렁거리는 거야? 빨리 안 와?"
"시끄러워."
"조용히 가자더니 왜 지가 더 지랄이야?"
되돌아온 짜증스러운 반응에 사내들의 얼굴에 황당함이 떠올랐다.
"이 년놈들이 쌍으로 미쳤나?"
"닥치고 앞장서기나 해라."
거만하게 손짓하며 걸음을 내디뎠다.
"...."
사내들이 언짢은 표정으로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이동한 뒤에 가타부타 없이 폭력을 휘두르기로 합의를 보는 듯했다.
'뭐, 착각은 자유니까.'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비올렛 황녀와 함께 그들을 따라갔다.
사내들은 환하게 밝힌 중앙 광장을 벗어나, 급격하게 어두워지는 골목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방금까지 있던 곳과 너무나 대조되는 허름하고 음침한 곳. 흉흉한 눈빛을 가진 자들이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워대는.
"뭐냐?"
그중 눈가에 긴 자상이 있는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이것들 때문에 오늘 장사 종쳤다."
"뭐했는데?"
"갑자기 보석이 가짜라고 물고 늘어졌어. 노친네가 환불해 주느라 죽어났다."
사내들과 대화를 주고받은 뒤, 남자가 바지춤에 손을 넣었다.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건가? 아무리 봐도 어린애들인 것 같은데."
그의 따가운 시선이 모자 아래 드러난 우리의 뺨과 턱을 훑었다.
"돈은 넉넉히 갖고 있겠지? 이런 짓을 저지를 배짱이면."
남자가 불량한 걸음걸이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100골드."
그의 더럽고 거친 손바닥이 나를 향해 펼쳐졌다.
"그 정도면 좋게 보내주지."
내 입에서 픽, 헛웃음이 터졌다.
"아까 그 아줌마보다 더한 사기꾼들인데?"
뒤에서 마찬가지로 헛웃음을 흘리고 있는 황녀에게 물었다.
"안 그렇습니까? 아까 그걸 다 팔아봤자 10골드도 안 되겠던데."
"살다 살다 이런 폭리는 처음이군."
비올렛 황녀도 어이가 없다는 투로 대꾸했다.
"뭔가 착각하고 있나 본데."
남자는 여유를 잃지 않고 유들유들하게 대꾸했다.
"너희 목숨값도 포함이야."
그 말을 대변하듯,
스릉-
골목 곳곳에서 무기를 뽑아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우리를 안내한 두 사내를 비롯해 안쪽에 몸을 숨기고 있던 다른 사내들이었다.
"호오."
나는 보란 듯이 휘파람을 불었다.
"들으셨습니까? 우리 두 사람의 목숨값이 100골드라는데요?"
"터무니없이 적네."
우리 둘의 여유만만한 대화에, 기어코 남자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들이 천지분간을 못하고...."
그가 뒤를 향해 눈짓했다.
"손 좀 봐줘라. 남자 놈은 반 죽여 놓고, 여자는 얼굴이나 보자."
새빨간 혀가 느릿하게 입가를 핥았다.
"보아하니 꽤 반반해 보이는데, 가지고 노는 재...."
쩍!
내 손이 허공을 갈랐다.
숙련된 싸다구를 맞은 남자가 빙글빙글 돌며 벽에 처박혔다.
쿵!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남자의 몸이 무너졌다.
그는 얼굴을 벽에 박은 채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몸을 꿈틀거리지도 않았다.
그 한 방에 건장한 사내가 기절해버린 것이다.
"나한테 감사하도록 해. 하마터면 혀가 잘릴 걸 막아줬으니까."
나는 뻗었던 손을 회수하며 빙글빙글 웃었다. 물론 사내에게서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
"뭐야?"
뜻밖의 상황에 사내들이 주춤했다.
"총 여덟 명인가?"
절대영역으로 수를 확인한 뒤 손을 까딱거렸다.
"한꺼번에 와라. 일일이 상대하기 귀찮으니까."
"이런 미친...!"
씨근거리던 사내들이 이내 우르르 달려들었다.
"한꺼번에 쳐!"
"죽여!"
비올렛 황녀를 뒤에 둔 채 비스듬히 섰다.
"제 뒤에 가만히 있으세요."
"나는 걱정말고 저 치들에게 본때를 보여주도록 해."
"여부가 있겠습니까."
좁은 골목은 비전투 인원을 보호하며 싸우기 딱 좋았다.
거기다 상대의 많은 인원수를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너비가 좁은 탓에 한 두 명씩밖에 다가올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새끼가!"
사내들의 움직임은 단순했고, 거기 맞서는 것은 하품이 나올 정도로 지루했다.
"흐암."
나는 실제로 하품을 찍찍 해가며 놈들을 상대했다.
꽝!
주먹을 뻗어 놈들의 얼굴을 부스러뜨리고,
쩍!
"커헉!"
팔꿈치로 명치를 가격했다.
"이익!"
날아드는 무기를 스치듯이 피한 뒤,
뻑!
몸을 한 바퀴 돌리며 발로 복부를 걷어찼다.
한 방에 한 놈씩, 철저하게 놈들을 때려눕혔다. 일곱 명을 상대하는데 채 몇 분이 걸리지 않았다.
"...."
사내들은 외마디 고함과 함께 바닥에 쓰러진 뒤 쭉 조용했다.
몇몇은 뼈가 부러져 움직이지 못했고, 몇몇은 내장이 진동하는 고통에 입에서 침을 줄줄 흘려댔다.
"쯧쯔."
남은 사내 한 명을 바라보며 손을 탁탁 털었다.
"어쩔 거냐? 추하게 도망, 아니면 멍청하게 도전?"
어느 쪽이든 결말은 정해져 있었지만. 자비로운 척 선택지를 주었다.
"으, 으으...!"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사내의 얼굴이 공포로 파랗게 질려 있었으니까.
"으아악!"
사내가 무기를 내던지고 몸을 홱 돌려 도망가기 시작했다.
"꼭 저러더라니까."
픽 웃으며 땅을 박찼다.
스팟!
바람을 가르는 위협적인 소리와 함께 내 신형이 사라졌다.
바닥에 쓰러진 사내들의 몸을 타 넘고, 좁은 외벽을 교차해 짚어가며 위로 날아올랐다.
"히익!"
머리 위로 갑자기 드리운 그림자에, 사내가 본능적으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뻑!
무자비한 발길질이 사내의 어깨에 내리꽂혔다.
"아악!"
어깨가 찢어지는 고통에 사내가 울부짖으며 무릎을 꿇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까, 도망치는 게 멍청한 선택이네."
낮게 뇌까리며 사내의 뒤통수를 꾹 쥐었다.
"자, 잠깐...."
사내가 얼굴을 도리도리 흔들며 거부했지만,
쾅!
그대로 놈의 얼굴을 벽에 처박았다.
"한 대 맞을 걸 두 대 맞잖아, 응?"
히죽 웃으며 손을 뗐다.
사내의 얼굴이 박힌 곳을 중심으로, 벽에 균열이 번지기 시작했다.
주르륵-
사내의 몸이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그 궤적을 따라 핏자국이 길게 이어졌다.
"흠."
그 모습을 짧게 일별한 뒤 몸을 일으켰다. 뒤를 돌아보는 순간, 비올렛 황녀와 눈이 마주쳤다.
"...."
비올렛 황녀는 두 팔을 감싸쥔 채 질린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양 팔뚝이 잘게 떨리는 게 보였다.
"추우십니까?"
비올렛 황녀가 양 팔뚝을 위아래로 쓸어내렸다.
"이상하게 춥네. 네가 움직이기 시작하면서부터."
"...."
카지노에서 내 살기에 노출됐던 기억이, 비올렛 황녀에겐 꽤나 강렬하게 각인된 모양이었다.
"왠지 예전에 이런 감각을 느껴본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설마, 착각이겠지요."
나는 뻔뻔스레 대답하며 옅게 흘러나온 살기를 거둬들였다. 비올렛 황녀의 안색이 한결 편해졌다.
"게다가 아벨 너, 아버지께 검을 하사받았다지 않았나? 그런 것 치곤 싸우는 모습이 꼭...."
비올렛 황녀가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할 듯 말 듯 망설였다.
"제 모습이 뭐요?"
입가에 매끄러운 미소를 그리자, 비올렛 황녀는 껄끄럽다는 말투로 대답했다.
"...너무 불량해 보여. 아까 우리를 데려온 것들보다도 더."
아무래도 내가 싸우는 모습이 기사와는 거리가 많이 멀었던 모양이다.
"칭찬이시죠?"
키득 웃으며 비올렛 황녀에게 성큼 다가섰다.
"-!"
거리가 좁혀진 순간, 비올렛 황녀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나는 짐짓 자상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좀 서운한데요? 시킨 일을 잘 처리하고 왔는데 말입니다."
"...흥."
비올렛 황녀는 제 감정을 들켰음을 깨닫고 미간을 구겼다. 금이 간 자존심을 감추려는 듯 쌀쌀맞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만 나가지. 이런 곳에 더 있고 싶지 않아."
"아, 잠시만요."
몸을 홱 트는 그녀를 멈춰 세운 후 뒤를 돌아보았다.
"구경 다 했으면 나와라."
예전에 리암을 기다릴 때와는 달랐다. 지금은 나를 지켜보고 있던 한 쌍의 눈동자를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멈춰서서 잠시 기다리자,
뚜벅.
묵직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청년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어떻게 알았지?"
여자들이 들으면 자지러질 만큼 근사하지만, 내게는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그리고 몹시도 익숙한 음성이었다.
'설마?'
나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골목 끝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한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칼과 눈동자. 평소보다 단출하게 차려입은 옷차림, 그럼에도 가려지지 않는 눈부신 외모.
"...카인 아르단테."
여전히 재수 없게 빛나는, 매끄러운 낯짝의 원작 주인공이었다.
'이 자식이 여긴 왜 있는 거지?'
수상하다는 표정을 노골적으로 보이며 물었다.
"너, 처음부터 보고 있었지?"
"그건 또 어떻게.... 아니, 잠깐."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이던 카인이 멈칫했다.
"너라니. 우리가 동갑이긴 하지만, 말을 놓기로 한 적은 없지 않았나?"
"억울하면 너도 불러."
"...."
카인은 잠시 얼굴을 찌푸렸다가, 이내 그것을 펴고 말했다.
"중앙 광장에서의 소란을 봤다. 아벨 네게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 따라왔다."
"그런 것 치곤 구경만 열심히 하지 않았던가?"
날카로운 일침에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처음엔 나서려고 했는데, 네가 첫 번째 남자를 때려눕힌 순간 생각이 달라지더군."
느슨하게 팔짱을 끼며 덧붙였다.
"도움이 필요한 건 네가 아니라 상대방 쪽인 것 같았다."
"...."
"물론 그놈들을 도울 생각은 없었지만."
터져 나오는 헛웃음을 삼키며 카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상하네. 왜 이 녀석과 마주친 거지?'
오늘 나는 원작에서 카인이 황녀와 함께 했던 코스를 피해 다녔다.그런데도 그와 마주쳤다는 것은....
'설마.'
내 추측을 확인하기 위해 운을 띄워 보았다.
"그러는 카인, 넌 중앙 광장엔 무슨 일인데?"
"당연히 축제 구경을 하러 나왔지. 그건 아벨 너도 마찬가지 아닌가."
카인은 꿋꿋하게 너라는 호칭을 고수했다. 그의 루비빛 눈동자에 희미한 적개심이 비쳤다가 사라졌다.
언제나 타인에게 선량한 미소와 정중한 태도를 보이는 그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때 들쑤신 것 때문인가.'
클럽 가입 제안을 거절한 게 꽤나 자존심에 타격을 준 모양이었다.
'하긴, 그것만은 아니었지.'
처음 회의장에서 만난 이후로 온갖 다양한 방법으로 그에게 엿을 먹였으니.
아무리 호인이라 한들 내게 선의를 베풀기는 어려울 것이다.
"여기서 너를 만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카인은 능숙하게 제 감정을 감추어 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 내게 말을 걸기까지 했다.
'아직 여유가 있다, 이거지.'
아니면 내 말에 동요하는 것을 보이기 싫거나.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마침 뒤에 그를 약 올릴 카드도 준비되어 있고 말이다.
내가 가리고 선 탓에 아직 발견하진 못한 것 같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비틀린 심경을 반영하듯 배배 꼬인 말투가 튀어나왔다.
"난 네가 연회에 참가할 줄 알았는데. 초대장이 쏟아져 들어오지 않았나?"
"많이 들어오긴 했다. 하인들이 정리하느라 애를 먹더군."
정말이지 얄미운 대답이었다.
Chapter 20. 손에 든 패를 여기저기 활용한다. (4)
어차피 초대장을 받을 저택도 없지만, 비교되는 느낌에 새삼스레 열이 뻗쳤다.
'빨리 저택을 구해야겠어.'
계획에도 없던 내집마련의 꿈이 확 부풀어 오르는 순간이었다.
"어차피 연회는 수드 영지에서 많이 열리니까."
카인은 권태롭다는 얼굴로 말했다.
"어제 볼 사람들도 다 봤고 해서, 오늘은 야간 축제를 구경하러 나왔다."
"혼자 나온 건가?"
"저번에 소개해 준 두 사람 기억하지? 그들과 함께 나왔다."
"아, 그랬군."
내 추측이 맞았음을 깨달았다.
원작의 흐름대로, 카인이 오늘 축제 구경을 하러 나오는 것은 충실히 재현되었다.
다만 함께하는 대상이 황녀에서 그의 친구들로 바뀌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그가 움직이는 경로 또한 달라졌다.
예상치 못한 조우는 그래서 벌어진 듯했다.
'전부 내 덕분이네.'
카인에게 찾아든 변화를 상기하자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공식 수행원으로 들어가겠다는 제안을 거절당하고, 결국 축제 땐 동성의 친구들과 함께하게 된 카인이라니.
너무나 즐거운 울림을 품은 문장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럼 이렇게 마주친 건 순전히 우연이라는 거군.'
그래도 그렇지, 이 넓은 수도 한복판에서 마주치게 될 줄이야.
우리를 그렇게 열심히 찾아 헤매는 호위 기사 일행은 정작 못 만났는데 말이다.
"그럼 그 친구들에게 돌아가도록 해. 나는 이만."
"아, 잠깐만."
카인이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중앙 광장으로 돌아갈 거지? 괜찮다면 거기까지 동행해도 될까?"
"왜 굳이?"
"...혼자 가면 길을 잃어버릴 것 같다."
아, 맞다.
잊고 있었던 카인의 설정이 떠올랐다. 그는 원작 공인 최강의 길치였다.
"싫은데."
삐딱한 대답에, 카인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널 도우려고 따라온 사람한테 너무 야박하군. 약간의 도움을 주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인가?"
그의 붉은 눈동자가 말간 루비처럼 반짝였다.
카인은 종종 이해할 수 없는 선의를 보이곤 했다. 나쁘게 말하면 배알이 없고, 좋게 말하면 정의롭고 선량한.
나는 그의 그런 관대함이 어디서 나오는지 늘 궁금했다. 어떻게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면서, 남에게 베풀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지도.
그리고 그와 직접 마주한 그날, 깨달았다.
"도와주라고 한 적 없어."
"...."
"요구하지도 않은 호의를 멋대로 건네고, 그걸 핑계 삼는 건 좀 치사하지 않냐?"
그의 선의는 날 때부터 타고난 여유로움에서 기인했다는 것을. 남에게 나눠준 뒤에도, 남다 못해 넘쳐흐르는 그 여유로움 때문에.
하지만 그 여유로움이 사라지면, 단단해 보이던 선의가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녹아버린다.
그게 그럴싸한 겉껍질에 감추어 둔 카인의 본성이었다.
"...."
카인의 매끄러운 눈동자에 금이 갔다. 그가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윽고 이를 꾹 악물었다.
"이제야 알겠군."
카인의 눈빛에 뾰족한 가시가 돋아났다.
"아벨 킨드리얼, 너는 날 싫어해."
그가 목덜미를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런 느낌을 받긴 했다."
"...."
"이상한 일이지. 너와 나는 전에 만난 적이 없는데도."
불편함이라는 감정이 파편처럼 박힌 낯은, 평소답지 않게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나는 나름대로 너와 친해지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게 무의미한 시도였다는 생각이 드는군."
"...."
"내 착각인가. 아니면, 내가 제대로 본 건가."
내가 이만큼이나 베풀었는데 네가 감히 이럴 수 있느냐는, 우월감과 배신감이 옅게 깔린 음성.
"솔직하게 말해 봐. 나무라지 않을 테니까."
카인이 대답을 요구하듯 목소리를 조금 키웠다. 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잠시 침묵했다.
'자신을 싫어하냐고?'
이보다 더 당연하고 쉬운 질문은 없었다.
나를 죽이는 미래가 예정된 자를 어떻게 좋아할 수 있을까. 나를 가로막고 목을 조른 뒤, 끝내는 심장을 찌를 자를.
그의 아버지 카를로가 있는 이상 카인과 나의 대립은 예정된 수순이다. 내 행보를 가만히 둘 그가 아니었으니까.
그렇다고 카인에게 굽히거나 협력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오로지 철저하고도 완전한 승리만을 노릴 뿐.
"이미 답을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차가운 긍정을 머금은 채, 내 입술이 천천히 호선을 그렸다.
"그리고, 모든 게 내 탓인 것처럼 말하지 마."
손가락을 들어 눈가를 툭 두드렸다.
"말했지? 티 많이 난다고."
"...."
"지금껏 네가 만났던 멍청한 놈들과 나는 다르거든."
카인의 입매가 눈에 띄게 경직되었다. 그 변화를 낱낱이 눈에 담으며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 내게 일행이 있다는 걸 잊은 모양인데."
살짝 몸을 틀어 뒤에 있는 비올렛 황녀가 보이게 했다. 챙이 넓은 모자로 얼굴을 감추고 있는 그녀를.
"그런 상황에 별로 내키지도 않는 일을 할 필요가 없지."
내 뒤를 확인한 카인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일행이 있었군."
무언가 기회를 포착한 듯한 얼굴이었다. 그가 내 쪽으로 성큼 다가왔다.
"실례합니다, 레이디."
뭇 영애들이 봤다면 자지러졌을, 부드러운 미소가 그의 낯에 떠올랐다.
"괜찮으시다면, 중앙 광장까지만 동행해도 괜찮을까요?"
카인은 제 미소만으로 상대를 녹일 수 있다고 확신하는 듯,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였다.
"저와 함께하면 더 안전할 테니 그 편이 낫지 않으시겠습니까?"
나는 그런 카인을 지긋이 바라보다가, 한 걸음 옆으로 비켰다.
그제야 내 그림자 속에 숨겨져 있던 일행을 확인한 카인이 더욱 진한 미소를 머금었다.
"레이디를 불편하게 만드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저 잠...."
술술 흘러나오던 말이 천천히 잦아들었다.
"...잠깐."
카인의 요동치는 눈동자가 비올렛 황녀의 턱과 입술을 담았다.
"그럴 리가.... 설마?"
고작 보이는 것은 얼굴의 일부분이었지만, 그는 그것만으로도 제 앞의 상대가 누구인지 눈치챈 모양이었다.
"흠."
비올렛 황녀가 모자 챙을 슬쩍 잡고 들어 올렸다.
"여기서 보는군, 카인 공자."
아까 나를 대할 때와는 너무나 다른, 몹시도 위압적인 말투였다.
"비올렛 황녀님...!"
카인의 눈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털썩.
그가 즉시 무릎을 꿇고 황녀에게 예를 표했다.
"비올렛 마기오레 임페로 제 1황녀님을 뵙습니다."
떨림과 당황을 채 감추지 못한 음성이었다.
"일어나게."
비올렛 황녀가 나직히 한 마디 하자, 카인은 급히 몸을 일으켰다.
"비올렛 황녀님이 여긴 어째서...."
성마른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는 제 눈앞에 서 있는 여자가 비올렛 황녀라는 것을 도무지 믿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어째서...."
입술을 달싹이던 그의 시선이 비올렛 황녀에게서, 그 옆에 비스듬히 서 있는 내게로 옮겨갔다.
"...."
일순 그의 눈동자가 피처럼 붉어졌다. 그 아래 짙게 내리깔리는 강렬한 질투의 흔적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보다시피."
비올렛 황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축제를 즐기러 나온 참일세. 카인 공자와 마찬가지로."
"왜 아벨 공자와 함께이신 겁니까?"
마치 절대 일어나선 안 될 일이 벌어졌다는 듯한 말투였다.
"호위 기사나 시녀들은 어디 두고요?"
비올렛 황녀가 슬그머니 딴청을 부리자, 카인의 목소리가 다소 격해졌다.
"그들이 얼마나 황녀님을 애타게 찾을지 아시잖습니까."
그가 몸을 틀어 내게 엄한 시선을 보냈다.
"아벨 공자. 이 무슨 무책임한 짓입니까."
비올렛 황녀의 앞이라는 것을 깨달은 후, 그는 급작스레 존대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황녀님을 뵈었으면 황궁으로 모실 생각을 해야지 않습니까."
카인은 중대한 착각을 하고 있었다. 호위 기사를 따돌리고 도망 나온 황녀를, 내가 우연히 만났다는 착각 말이다.
"뭐가 무책임하다는 거지?"
나는 머리 뒤로 팔짱을 끼며 느긋하게 말했다.
"황녀님을 황궁에서 여기까지 모셔온 게 나인데."
"뭐라고?"
카인의 낯빛이 변했다. 그가 더욱 나를 질책했다.
"제정신입니까?"
"...."
"황녀님은 이 제국의 유일무이한 제 1황녀이십니다. 그런 분께 이런 대접이라니."
카인의 눈이 비올렛 황녀를 살피고는 탄식을 삼켰다.
"최고급 의복을 입고, 최고급 마차에 타서 최고의 대접을 받으셔도 모자를 분께 감히...."
기가 막히다는 시선이 내게 쏘아져왔다.
"보나 마나 아벨 공자가 황녀님을 꼬드겼겠지요. 아벨 공자의 말솜씨가 뛰어나다는 것은 이미 증명된 바가 아닙니까."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콧방귀를 크게 뀌며 대꾸했다.
"여기 나오고 싶다고 하신 건 내가 아니라 비올렛 황녀님이다."
카인의 얼굴이 순간 멍해졌다.
그는 내 말을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그것을 결코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못 알아들었어?"
비뚜름한 미소를 걸친 채 친절하게 다시 말해주었다.
"비올렛 황녀님의 명령으로 모시고 나온 거라고."
"...."
"호위 기사를 따돌리도록 도와드린 것도 나야. 축제의 진면목을 즐기고 싶다고 하셨거든."
카인은 석고 조각상처럼 굳은 채 멈춰 있었다. 내가 흘려 보낸 말들이 의미 없이 그의 귓속을 스쳐 지나가는 게 보였다.
"...그러니까,"
이윽고 그가 굳어버렸던 입술을 움직였다.
"황녀님이, 아벨 공자와 지금껏 시간을 보내셨단 말입니까? 황녀님의 요청으로?"
"바로 그거야."
한 손으로 나를 가리키며 빙글빙글 웃었다.
"덕분에 호위 겸, 물주 겸, 짐꾼 역할을 도맡고 있지."
말하던 나는 문득 깨달았다.
"아, 맞다. 곰인형."
"아!"
덩달아 그 사실을 깨달은 비올렛 황녀가 눈을 치켜떴다.
"그걸 두고 오면 어떡해?"
"그럼 그 소란 통에 그걸 챙기겠습니까. 어쩔 수 없지요."
"아, 아까워."
"똑같은 걸 100개도 넘게 사실 수 있으면서 뭘 그리 아까워하십니까."
"그건 특별한 거잖아."
나와 비올렛 황녀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카인은 온전히 우리에게서 배제되었다.
우리라는 주인공의 뒤를 장식한 배경이 되어버린 것이다.
"어째서 아벨 공자에게...."
그 사실보다도, 그는 나와 비올렛 황녀가 친근하게 대화를 나눈다는 사실에 더 경악한 것 같았다.
"흠흠."
비올렛 황녀가 낮게 헛기침을 흘리더니, 말을 돌렸다.
"아무튼 그리 알고, 혹여 내 호위들을 만나더라도 모르는 척 하게."
"...."
"또한 오늘 일을 어디가서 발설하지 말도록. 알아들었나?"
비올렛 황녀의 명령에도 카인은 여전히 수긍이 안 된다는 얼굴이었다.
캐묻고 싶은 것이 많지만, 차마 그러기 힘들어 보였다. 너무나 궁금하지만 그 대답이 결코 제게 이롭지 않으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는 듯했다.
"그럼 이만 가지. 아벨, 안내하도록."
비올렛 황녀는 그런 카인에게서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네, 황녀님."
나는 아주 고분고분하게 대답하는 척 황녀를 뒤따라갔다.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굳어 있는 카인을 보아하니 절로 온순한 목소리가 나왔다.
그렇게 우리가 세 걸음 정도 움직였을 무렵,
"잠깐!"
카인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날아들었다. 카인이 걸음을 빨리해 우리에게 따라붙었다.
"저와 같이 가시지요, 황녀님."
카인이 결연한 눈빛으로 선언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뭔 개소리야?"
비올렛 황녀와 나는 동시에 말한 뒤 잠시 시선이 마주쳤다. 내가 슥, 고개를 돌리자 비올렛 황녀가 마저 말했다.
"뭘 같이 가겠다는 말인가?"
"말 그대로입니다."
카인이 단단히 버티고 서선 말했다.
"아벨 공자와 황녀님이 단 둘이 가도록 내버려 둘수 없습니다."
Chapter 20. 손에 든 패를 여기저기 활용한다. (5)
카인의 손이 골목 안을 가리켰다. 이미 피떡이 된 불량배들이 널브러져 있는 그곳을.
"그가 제대로 된 안내자라면, 황녀님이 이런 곳까지 오셨을 리 없습니다."
"...."
"겪어보지 못한 문화에 흥미를 느끼시는 것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것과 위험에 처하시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카인이 눈으로 나를 꾸짖으며 말을 이었다.
"저와 함께 가신다면, 보다 안전하게 황녀님의 일정을 마무리 지으실 수 있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턱을 살짝 치켜들며 마무리했다.
"지금부턴 제가 모시겠습니다. 부디 윤허해 주십시오."
그래, 어쩌면 카인의 눈에는 내가 그렇게 비칠지도 모른다.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황녀를 꼬드겨 악의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놈팽이로.
정말이지 터무니 없고 언짢은 오해였다.
"이 골목에 오게 된 건 황녀님 때문인데?"
나는 불쑥 입을 열어 말했다.
"아까 황녀님이 보석 사기단을 응징하고 장사를 엉망으로 만드셨거든. 그래서 앙심을 품은 놈들이 시비를 건 거고."
배배 꼬인 말투로 빈정거렸다.
"소란을 보고 따라왔다더니. 처음부터 다 본 건 아닌 모양이군?"
비올렛 황녀의 얼굴이 벌겋게 변하고,
"야! 그걸 왜 말하고 있어! 창피하게!"
카인의 얼굴은 그와 반대로 파랗게 변했다.
"...황녀님이 뭘 어쨌다고?"
지금껏 보지 못했던 황녀의 새로운 모습, 그리고 그것을 자신이 아닌 나와 공유했다는 점이.
카인을 더욱 엉망으로 뭉개고 있었다.
"...아무래도 좋다. 앞으로의 일정이 더욱 중요하니."
그는 슬슬 표정을 관리하기가 어려운 듯 입술을 사려 물었다. 패배감으로 짙게 얼룩진 낯이 어둡게 가라앉은 순간, "꺄악! 이러지 마세요!"
골목 반대편에서 소녀의 비명이 들려왔다.
"-!"
카인이 흠칫 놀라 몸을 돌렸다.
"저런."
나는 휘파람을 작게 불며 그곳을 향해 턱짓했다.
"아무래도 누군가 위험에 처한 모양인데?"
카인의 몸이 다시 우리를 향했다. 그의 눈 위로 치열한 갈등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뭘 고민하고 있는 건지.'
내게 이건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얼굴도 모르는 타인과, 나와 동행한 비올렛 황녀.
저울추는 너무나 압도적으로 후자를 향해 기울어 있었다.
하지만 카인은 달랐다.
'정의롭고 선량한, 약자를 위해 움직이는 캐릭터.'
그 바보 같은 도덕심이 카인을 고민에 빠지게 만들었다. 나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나는 속으로 카인을 비웃으며 비올렛 황녀를 이끌었다.
"앞으로 황녀님은 내가 '안전하게' 모실게. 누구 말대로."
"...."
"그러니 카인 넌 저 불쌍한 소녀를 돕도록 해."
한 걸음, 멀어지는 우릴 보며 카인의 몸이 움찔거렸다.
"네가 아니면 저 소녀는 위험해질지도 모른다고?"
카인과 우리 사이의 거리가 점점 멀어졌다. 카인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고민이 역력한 얼굴로 우릴 응시했다.
"어서 가봐, 정의의 사도님."
내 빈정거림에도 그의 몸은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다 우리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순간, 타다닥.
카인의 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우리에게 가까워지는 것이 아닌, 저쪽을 향해 멀어지고 있었다.
'결국 가는군.'
진한 비웃음이 잇새로 흘러나왔다.
'그래서 네가 안 되는 거야, 카인.'
양심과 정의감이라는 건 내게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종류의 감정이었다.
'뭐, 별일 있겠어?'
그리 생각하며 비올렛 황녀를 데리고 가는 데 집중했다. 이후 카인이 누구를 만나게 될 지도 모른채.
❖ ❖ ❖
타다닥!
골목을 가로지르는 카인의 발걸음은 거칠었다.
"하아, 젠장."
평소에 담을 일 없었던 거친 욕설마저 짓씹었다.
모든 일이 엉망이었다. 왜 이렇게 요새 되는 일이 없는 걸까.
그게 언제부터인지를 돌이켜보니, 수도에 올라오면서부터인 것 같았다.
아니, 정확히는 귀족 회의에 참석한 아벨 킨드리얼을 만나면서부터였다.
그 이후로 카인은 뭔가 일이 잘 풀려간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었다.
'황녀님은 어째서!'
분명 아버지를 통해 공식 수행원이 되겠노라 제안을 넘겼다고 들었건만.
정작 그 제안은 거절하고, 아벨 킨드리얼 같은 한량 놈과 놀러 다오다니.
카인은 도무지 황녀의 속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왜? '
아벨 킨드리얼, 그가 나보다 나은 게 뭐가 있단 말인가?
가문과 재력, 제국에서의 입지, 모든 걸 따져도 자신이 우세했다. 희멀건한 여자 같은 얼굴보다는 제가 훨씬 나았다.
게다가, 아벨 킨드리얼이 순순히 자신을 싫어한다고 인정한 것도 거슬렸다.
'왜 날 싫어하지?'
그 앞에 선 남성들이 보이는 반응은 호감, 감탄, 존경이 대부분이었다. 애초에 압도적으로 우월한 수컷 앞에서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으므로.
결국 그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열등감인가.'
자신보다 나은 점이 한 가지도 없는 아벨이 자신을 싫어하는 것은 당연한 게 아닐까. 갖지 못한 자는 가진 자를 부러워하기 마련이니까.
'그것도 엄청난 열등감이겠지.'
저를 향해 부정적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이는 제국 귀족 명단에 존재하지 않았다. 카인의 또래 중에서는 특히.
대부분 아르단테 가문의 위세를 두려워해 몸을 낮추거나, 주변 이들에 의해 소리 없이 짓밟혔다.
즉 아벨이 반감을 드러낸다는 것은, 그것을 감수할 정도로 카인을 질시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네가 자초한 일이다, 아벨.'
카인은 냉정히 마음을 정리했다.
그는 대부분의 타인에게 상냥했지만, 자신을 노골적으로 배척하는 이에게까지 그럴 생각은 없었다.
'다음에 본다면,'
더 이상 아벨 킨드리얼에게 아량을 베푸는 일은 없을 것이다.
실제로 아벨은 그의 신경을 너무나 많이 건드렸다. 황녀와 친분을 다지는 것도, 그가 존경하는 미켈과 대련을 하는 것도.
모든 것이 그에게 알 수 없는 불쾌감을 느끼게 했다.
'감히....'
카인은 바로 자신이 그 '열등감'을 느끼고 있다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이 기분이 아벨의 껄렁한 태도와 오만불손한 말투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러지 마세요!"
뾰족한 비명을 마지막으로, 소녀의 비명이 끊겼다.
"-이런."
카인은 잡생각을 쫓아내고 더욱 걸음을 재촉했다. 마지막으로 비명이 들려왔던 곳을 찾아 몸을 홱 들이밀었다.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그래봤자 널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
두 남자가 골목벽에 한 소녀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두 사람의 거대한 덩치에 비해 소녀의 몸은 너무나 작고 여려, 카인의 시야에서는 소녀가 잘 보이지 않았다.
"제발 저를 보내주세요!"
그저 겁에 질린 가냘픈 음성만이 들릴 뿐.
"그러게 왜 혼자 이런 데를 들어와? 뭔 일을 당할 줄 알고."
"쉿, 조용히 해. 누가 잡아먹는 댔나?"
한 사내가 킬킬 웃으며 소녀의 턱을 그러쥐었다.
"...."
남자의 손이 닿는 순간, 소녀의 눈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지독한 경멸이 뒤섞인 그 눈빛은, 앳된 얼굴에 도통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동시에 날카롭게 갈린 비수 비수처럼 퍽 냉혹했다.
"풋."
소녀의 입가에 비웃음이 스쳐 지나갔다. 소녀가 서서히 손을 들어 올리자 손바닥 위로 희미한 빛의 소용돌이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 계집애가 미쳤나?"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남자들이 어이없어하며 한 걸음 다가선 순간,
"그만, 멈춰라."
카인이 남자들의 등 뒤에 섰다.
"-!"
소녀가 즉시 손을 거둬들여 빛의 소용돌이를 없앴다.
"아, 어떤 새끼가 방해하고 지랄이야?"
"뭐야, 이 자식은?"
예상대로 사내들은 시시껄렁한 반응을 보였다. 카인은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말했다.
"지금 물러난다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얼씨구, 정의의 기사 납셨네."
"그러면 우리가 죄송합니다, 하고 물러설 줄 알았나?"
사내는 보란 듯이 소녀의 팔을 꽉 틀어쥐었다.
"이렇게 하면 어쩔 건데, 응?"
그들은 거나하게 술에 취해 있었고, 카인의 붉게 타오르는 눈동자나 고귀한 외모를 알아볼 정신이 없었다.
그저 낄낄 소리높여 웃을 뿐.
"응? 어쩔 거냐고."
카인은 나직이 한숨을 삼키며 중얼거렸다.
"이 놈이나 저 놈이나 분수를 모르는군."
훙!
그가 그대로 돌진해 상대의 명치를 가격했다.
"컥!"
방심하고 있던 사내는 그대로 고꾸라졌다. 숨이 막혀 켁켁대는 그를 내버려 두고 옆을 향했다.
"어어?"
소녀의 팔을 붙잡은 사내는 멍청하게 굳어 있었다. 술에 푹 적셔진 머리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런 그를 향하는 카인의 눈동자가 차게 빛났다. 소름 끼칠 정도로 깨끗한 궤적을 그리며 검이 뽑혔다.
스릉!
검이 청명한 울음을 내며 사내의 목젖을 겨누었다.
"두 번의 기회는 없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움직임은, 숙련된 검사의 바로 그것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수드 기사단과 함께 훈련했고, 헥터에게 손수 검을 하사받으며 성장한 카인의 실력은 또래 중에선 비견될 이가 없었다.
"으, 으어."
찌를 듯이 날카로운 살기에, 사내의 눈이 오갈 데를 모르고 방황했다.
"사, 살려."
"꺼져라."
사내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허둥지둥 줄행랑쳤다. 카인은 그런 그들의 한심한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몸을 돌렸다.
"아...."
소녀는 벽에 몸을 바짝 붙인 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제 십대 후반이나 되었을까 싶은 앳된 외모의 소녀였다. 특징 없는 잿빛 머리칼에, 조금은 우중충한 낯을 한.
입고 있는 옷을 보아하니, 평민 소녀가 축제 거리에 놀러 왔다가 변을 당한 모양이었다.
그보다도, 카인은 소녀가 잘게 떨고 있음에 주목했다.
"괜찮습니까?"
부드럽게 물으며 다가갔다. 소녀를 배려해,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괜찮은 겁니까? 대답할 수 있겠어요?"
소녀는 아무 말도 안 하고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문득 카인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이 고압적인 자세가, 소녀에게 아까의 사내들을 상기시키는 상황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탁
카인은 즉시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어 자세를 낮추었다. 이렇게 하면 소녀와 같은 눈높이에서 대화할 수 있었다.
"겁먹지 마세요. 해치려는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
"어때요, 말 할 수 있겠습니까?"
문득 카인은 소녀의 남청색 눈동자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동공 안의 무늬가 살아 움직이는 듯이 일렁이는 독특한 눈이었다.
"...네."
하지만 작게 들려오는 소녀의 대답에 신경이 더 쏠렸다.
"다행이군요. 늦기 전에 올 수 있어서."
카인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하자 소녀의 낯이 약간 상기되었다.
"고맙...습니다."
소녀가 카인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더듬더듬 말했다.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별 말씀을요. 위기에 처한 레이디를 돕는 것은 당연한 일이죠."
카인은 몸을 일으킨 뒤 소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몹시도 우아하고 정중한 몸짓에, 소녀의 입이 스르르 벌어졌다.
"헤...."
"댁까지 모셔드리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아, 네에."
소녀는 선뜻 손을 내밀어 카인의 손바닥 위에 얹었다. 작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저와 닿는 순간, "...."
카인은 왠지 주변의 공기가 미세하게 진동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착각인가?'
그 느낌을 떨쳐내고, 카인은 소녀를 골목 밖으로 이끌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와 함께 있는 이상 안전합니다."
"...네."
"레이디의 이름을 알려주시겠습니까?"
소녀가 얇은 입술을 움직였다.
"시에나."
낮은 채도의 눈동자에 정체 모를 광채가 스쳤다.
Chapter 20. 손에 든 패를 여기저기 활용한다. (6)
이후의 일정은 순조로웠다.
비올렛 황녀가 더 이상 돌발행동을 하는 일 없이 내 지시를 따랐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들어가셔야 합니까?"
"글쎄. 앞으로 두 시간 정도?"
"그러시군요."
나는 남은 시간을 계산하여 신중하게 움직였다.
"이번엔 어디로 가?"
"잠시 들를 데가 있습니다."
약속한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던 잭이 나를 발견했다.
"앗, 주...."
잭의 입술이 멈추었다. 내가 손가락을 입술 위에 얹어 조용히 하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
잭이 나와 그 뒤의 비올렛 황녀를 번갈아 보며 눈을 데굴 굴렸다. 이윽고 녀석이 헤헤 웃었다.
"안녕하세요, 나으리. 여기서 기다리라는 분부를 받고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과연, 녀석의 눈치는 알아주어야 했다.
내 손짓만 보고도 '주인님'이라는 호칭을 뺀 뒤, 초면인 것처럼 군다.
길드에서 일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잭은 놀랍도록 빠르게 이곳의 생태에 적응한 듯이 보였다.
"그래, 시킬 것이 있어서 불렀다."
나는 비올렛 황녀를 뒤에 두고 잭에게 다가갔다.
"저 여자를 찾고 있는 일행들이 있다. 그들에게 이 위치를 알려주도록 해."
잭에게 속삭인 뒤 종이에 특정 장소의 위치를 적어 건네주었다.
잭도 마찬가지로 소리를 낮추어 대답했다.
"그 일행은 어떻게 구분하지요?"
"저 여자에게서 향수 냄새가 나지? 그들 또한 같은 냄새를 풍기고 있을 거야."
잭이 비올렛 황녀 쪽을 티나지 않게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어마어마하게 진한 냄새네요. 그래도 향기가 엄청 좋은 걸요?"
"그래. 나한테서 나는 축축한 냄새보다 훨씬 낫지?"
"...아니, 그, 그건."
잭은 금세 울상이 되어 눈을 데굴데굴 굴려댔다.
하여간 놀리는 맛이 있는 녀석이었다.
"시간은 약 한 시간 후. 그쯤 전달하면 얼추 시간이 맞을 것 같군."
"알겠습니다."
잭이 꾸벅 허리를 굽혔다가 일으켰다. 녀석의 머리를 한 번 툭 치고 말했다.
"이런 날엔 탈 나기 쉬우니 덱스터랑 같이 다녀라."
"우와."
잭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저 걱정해주시는 거예요?"
"아니. 일 틀어질까 봐 미리 대비하는 건데."
"...."
잭이 투덜거리며 광장 쪽으로 사라져 갔다. 그 모습을 짧게 일별하고는 뒤돌아섰다.
"아, 발 아파."
비올렛 황녀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었다.
"많이 아프십니까? 돌아갈까요?"
짐짓 걱정스러운 척 말하자,
"아니?!"
비올렛 황녀의 몸이 반듯하게 변했다.
"그냥 좀 피곤한 것 뿐이야. 아직 걸을 수 있어."
몹시도 꿋꿋한 목소리였다.
어차피 나도 그냥 해본 소리였다. 아직 가야 할 곳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제가 황녀님을 미처 배려하지 못했군요. 좀 더 천천히 걷도록 하겠습니다."
비올렛 황녀가 새삼 놀랍다는 듯 나를 돌아보았다.
"그런 말도 할 줄 알았어?"
"...대체 절 어떻게 보신 겁니까?"
"피도 눈물도 없는 나쁜 놈."
...뭐, 틀린 말은 아닌데.
그렇게 비올렛 황녀와 티격태격 하며 걸음을 옮겼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수도에서 가장 큰 규모의 경매가 열리는 경매장이었다.
"경매장이로군."
비올렛 황녀가 건물을 확인하곤 고개를 갸웃했다.
"이곳에서 고가의 미술품, 보석 등을 경매에 붙인다는 건 알고 있어. 그런데 여긴 왜 온 거지?"
"축제 기간엔 평소에 보기 힘든 특별한 상품들이 올라옵니다. 아까 보니 보석을 정말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요."
"그렇긴 하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내 목표는 따로 있었다.
이곳에서는 후에 카인의 조력자가 될 중요한 인물이 등장한다. 아주 강력하고, 한편으론 몹시 다루기 어려운 인물이.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입구를 지키고 있던 직원이 우리를 멈춰 세웠다. 그의 시선이 소박해 보이는 우리의 옷차림을 훑었다.
"사정이 있어서."
"아아, 알겠습니다."
직원은 몹시 능숙하게 내가 내민 돈자루를 받아들었다.
태도를 보아하니, 우리처럼 신분을 속인 귀족들이 이미 이곳을 꽤 많이 다녀간 듯했다. 그것은 이곳이 단순한 경매장이 아님을 뜻했다.
"따라오십시오."
다른 직원이 스르륵 나타나 우리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그를 따라 계단을 올라가자, 원형으로 쭉 펼쳐진 복도가 보였다.
고급 카펫을 바닥에 깔아 소리를 줄이고, 어두운 벽지를 사용하여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호오."
비올렛 황녀가 소리 낮추어 감탄했다. 그녀의 눈에 찰 정도로, 이 건물의 인테리어는 꽤나 수준이 높았다.
"이쪽입니다."
직원이 한 방의 문을 열고 우리를 들여보냈다.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방 한 면이 완전히 개방되어 있었다. 그 너머로 아직 불을 밝히지 않은 경매장의 무대가 보였다.
'어쩐지 건물 전체가 원형이더라니.'
모든 방에서 중앙 무대를 볼 수 있도록 설계한 구조였다. 느긋하게 즐길 수 있도록 푹신한 소파와 테이블을 준비해 둔 게 보였다.
"음료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나는 칵테일. 그리고 같이 온 숙녀분은 무알콜 음료로."
"네."
직원이 조용히 문을 닫고 사라졌다.
비올렛 황녀는 내 주문에 만족한 듯 별다른 딴지를 걸지 않았다. 대신 소파에 걸터앉아 밖을 둘러보았다.
"꽤 크네."
테이블 위에는 오늘 경매 물품의 목록을 적은 종이가 올려져 있었다.
"흠...."
비올렛 황녀는 흥미롭다는 듯이 물품들의 목록을 살폈다.
"마음에 드는 물건은 있으십니까?"
"글쎄. 직접 물건을 봐야 알 것 같은데."
그러는 동안 음료가 들어왔고, 서서히 다른 방에도 손님들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어떤 인사들이 여기 와있을지, 좀 궁금하긴 하네."
비올렛 황녀는 피식 웃으며 발코니에 앉은 인물들을 살폈다.
"너무 멀어서 잘 보이진 않지만. 아마 내가 아는 사람들도 있을 테지."
"그렇겠죠."
물론 내 눈에는 누가 왔는지 잘 보이긴 했다. 그들의 턱에 박힌 점 하나하나까지 다 식별할 수 있는 시력을 갖고 있으니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무대가 환하게 밝아졌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우렁찬 음성과 함께 사회자가 무대 중앙에 나타났다.
"오늘 경매에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주신 귀빈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가 주변을 둘러보며 천천히 설명했다.
"오늘 방문이 처음이신 손님을 위해 짧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현재 여러분이 앉아 계신 테이블 서랍 안에는, 입찰 의사를 표시하는 막대가 들어있습니다."
서랍을 열어보자, 그의 말대로 노란색 막대가 들어있었다. 비올렛 황녀가 그것을 받아들곤 고개를 끄덕였다.
"입찰을 원하시는 분께서는 그 막대를 들고 외쳐주시면 됩니다. 모든 거래는 경매가 끝난 후 이뤄집니다."
사회자가 사무적이지만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
"지불 능력이 없으시다면, 해당 물품은 유찰되어 다음 경매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의 입가에 유들유들한 미소가 맺혔다.
"물론, 그런 일은 지금까지 한 번도 벌어진 적 없었습니다. 저희 경매는 전 물품 100% 낙찰을 목표로 하고 있으니까요."
그가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자, 그럼 지금부터 11월의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 ❖ ❖
"네, 그럼 13번 손님이 세누아르의 '오찬'을 낙찰받으셨습니다!"
사회자가 싱글벙글 웃으며 외쳤다. 그가 시계를 확인하곤 다시 말했다.
"준비한 1부 상품이 모두 낙찰되었습니다. 10분간 휴식 시간을 가진 뒤 2부 경매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무대 뒤로 사라지는 그의 걸음이 몹시도 신나 보였다. 이어서 탁, 하고 무대 불이 꺼지며 암흑이 찾아들었다.
"흐응."
비올렛 황녀가 무대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어떠셨습니까?"
"나쁘진 않았어. 특히 카르다산 피죤 루비가 정중앙에 박힌, 그 목걸이도 탐이 나더군."
"그런 것 치곤 한 개도 구매하지 않으셨는데요?"
"경매에서 쓸만한 물건은 보통 마지막에 나오거든."
비올렛 황녀가 음료를 들이키며 느긋하게 말했다.
정확하다. 나 또한 이 경매의 마지막에 나올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끝까지 한 번 지켜봐야지. 아직까지는 눈에 차는 게 없었어."
과연 사교계를 주름잡고 있는 비올렛 황녀다운 발언이었다. 그녀는 미술품과 귀금속 등 사치 문화에 대단히 높은 안목을 갖고 있었다.
"그럼 이건 어떠십니까?"
나는 품속을 뒤져 작은 상자를 하나 꺼냈다.
지금이 바로 이것을 건네 줄 적기였다. 1시간 쯤 뒤면 이 경매장은 온통 아수라장이 될 게 분명했으니까.
"그건?"
예상대로 비올렛 황녀는 바로 반응을 보였다. 내가 꺼낸 것이 일반적으로 귀금속을 담는 고급 벨벳 상자였기 때문이다.
"비올렛 황녀님을 위해 준비해 온 물건인데... 성에 차실 련지 모르겠군요."
"한 번 보지."
비올렛 황녀를 향해 상자를 내밀었다. 탁, 하고 상자 위를 잡고 들어 올린 순간 화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호오."
비올렛 황녀가 흥미롭다는 듯 상자로 가까이 다가왔다.
상자 안에는 붉은 빛이 감도는 푸른 사파이어를 세공해 만든 목걸이와 귀걸이 한 세트가 들어 있었다.
비올렛 황녀가 귀걸이를 집어 들고 유심히 살폈다. 상품의 가치를 감정하듯 날카롭고도 꼼꼼한 시선이었다.
"이건... 제법, 괜찮네."
이윽고 그녀의 입술 새로 흡족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일단은 성공이군.'
비올렛 황녀의 기준으로 괜찮다, 라는 것은 시장에 내놓았을 때 굉장한 반향을 일으킨다는 뜻과 같았다.
"이런 세공법은 처음 봐. 지금까지 내가 알던 커팅과는 다른데?"
비올렛 황녀의 흥미로 반짝이는 눈이 나를 향했다.
"어디서 구한 거지?"
"비토리아 상단에서 부탁을 받았습니다. 비올렛 황녀님께 꼭 진상하고 싶다 하더군요."
"비토리아라, 처음 듣는 이름인데."
"기존까진 다른 사업을 하다가, 최근에 이쪽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혀에 침도 바르지 않고 술술 거짓말이 흘러나왔다.
"그곳 소속의 세공사가 비올렛 황녀님의 팬이라고 하더군요. 특히 비올렛 황녀님의 눈동자와 같은 색의 이 사파이어를 본 순간, 번뜩이는 영감이 떠올라 만들게 되었다고 합니다."
"호오, 그래?"
비올렛 황녀가 목걸이를 집어 들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흘렸다.
"놀랍군. 이 정도 작품이라면, 그간 침체되었던 보석 업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겠어."
"그렇습니까?"
"그래. 그간 보석 업계는 푸른 진주와 붉은 산호가 지배하고 있었지. 굵은 알, 그리고 매끄럽고 둥근 표면이 높은 가치를 지니는 보석 말이야."
나직히 중얼거리는 비올렛 황녀의 눈가에 옅은 불쾌감이 스쳤다.
"난 그 불투명한 보석이 최고로 떠받들어지는 분위기가 싫었어. 보석이라는 건 자고로,"
비올렛 황녀가 목걸이를 조명 빛에 비추었다. 사파이어 속으로 들어간 빛이 찬란하게 부서지며 아름다운 광채를 뿜어냈다.
"이렇게 반짝반짝해야 예쁜 법이거든."
비올렛 황녀의 손이 목걸이와 귀걸이를 거두어 다시 상자에 넣었다.
"그래, 그럼 당분간 이 장신구를 착용하고 돌아다니면 되나?"
내 의도를 꿰뚫고 있는 한 마디였다. 나는 속내를 들켰다는 티를 내지 않으며 여유롭게 대답했다.
"그야 비올렛 황녀님께서 그 장신구가 마음에 드실 때의 이야기지요."
"안 하고 다니면, 네가 곤란해지지 않겠어?"
"설마요. 어떻게든 다른 살길을 찾지 않겠습니까."
그리 말하면서도 아쉬움 가득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기왕이면 비올렛 황녀님께서 착용하고 다니셨으면 하는 마음은 있습니다."
"그래? 이유는?"
"그때마다 제가 줬다는 걸 떠올리실 테니까요."
"...."
비올렛 황녀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조용히 상자 뚜껑을 닫은 뒤 품에 집어넣었다.
"생각해 보지."
말은 그리하지만, 곧 그녀가 이 장신구를 차고 사교계를 활보할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비올렛 황녀의 살짝 붉어진 귀가 그리 말하고 있었으니까.
Chapter 20. 손에 든 패를 여기저기 활용한다. (7)
시간이 흐르고, 경매가 다시 재개되었다.
"흐응, 시시하네."
비올렛 황녀는 끝내 아무 물건도 사지 않았다. 결국 마음에 드는 물건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오늘 준비한 물품은 여기까지입니다!"
사회자가 즐겁게 외쳤다. 그의 낯이 환희로 넘쳐흘렀다.
"지금까지 열정적으로 참여해주신 귀빈 여러분께 감사드리면서, 오늘의 경매를 이만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그가 한쪽 팔을 몸에 가까이 붙이며 허리를 숙였다.
"밤이 늦었으니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감사합니다!"
탁, 하고 무대의 불이 꺼졌다.
"아, 오늘 경매는 종쳤네."
"5번 보석, 내가 갖고 싶었는데. 상위 입찰한 거 누구야?"
두런두런한 말소리와 함께 부스럭부스럭 소리가 온 사방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볼일을 마친 손님들이 일어서는 소리였다.
"10만 골드에 낙찰받으신 5번 물품에 대한 대금을 치르도록 하겠습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다른 방으로 이동하도록 하겠습니다."
혹은 돈을 지불하고 낙찰받은 물건을 건네받기 위해,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도 했다.
일반 사람들에겐 약간의 소란처럼 느껴질 소리가, 나에게는 선명하게 구분되었다.
"우리도 이만 갈까?"
비올렛 황녀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나는 그녀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아직 앉아계십시오."
"왜? 경매는 끝났잖아."
말없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순간,
똑똑.
방 밖에서 직원이 문을 두드렸다.
"실례합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와."
허락이 떨어지자 직원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아직 소파에 앉아 있는 나와 비올렛 황녀를 살폈다.
"15번 손님께서는 입찰하신 물품이 없는 것으로 확인했습니다. 맞습니까?"
"맞아."
"그럼 나가는 길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를 향해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여 보였다.
"'마지막' 경매에 참여하고 싶은데."
내 한 마디에 직원이 잠시 침묵했다. 이윽고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규칙은 알고 계십니까?"
중요한 비밀을 속삭이듯 은밀한 어조였다.
"물론이지."
나 또한 비슷한 어조로 대답하자, 직원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받으십시오."
아무 무늬도 없는 새카만 가면이었다.
"...흠."
비올렛 황녀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스쳤다. 나와 비올렛 황녀가 각자 가면 착용을 마치자 직원이 말했다.
"마지막 경매는 10분 뒤에 시작됩니다. 자리를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그가 문을 닫고 사라지자, 가면을 만지작거리던 비올렛 황녀가 물었다.
"마지막 경매라니, 그게 뭐야?"
"말 그대로 마지막 경매입니다. 이 경매의 존재를 아는, 특별한 손님들만이 참여할 수 있는 거지요."
"넌 이런 걸 어떻게 아는데?"
"우연히 전해 들었습니다. 재미있을 거라고 해서, 기억해 두고 있었죠."
정확히는 원작을 보고 알고 있었던 거지만.
바로 이 '마지막 경매'에 등장할 인물이 내 목표였다. 아니, 정확히는 상품이라고 해야 하나?
내가 기다리는 인물은 저 무대 위에서, 가장 초라하고 볼품없는 모습으로 나타날 예정이었다.
"그래? 꽤 흥미롭군."
비올렛 황녀가 미소 지으며 가면 끝을 툭 쳤다.
"그런데 이건 마음에 안 들어. 우리 카지노를 표절한 것 아니야?"
"직원을 다시 불러와서 족칠까요?"
대담무쌍한 발언에 비올렛 황녀가 어휴, 인상을 찌푸렸다.
"관둬. 그냥 가면 수준이 너무 떨어진다는 말이었어."
비올렛 황녀의 손톱 끝이 가면을 톡톡 두들겼다.
"우리 카지노에서는 가면 장인을 시켜서 만든다고. 이런 싸구려 재질은 쓰지도 않아."
카지노 내에 유통되는 주류 뿐만 아니라 이런 물품에도 관여하는 모양이었다.
확실히, 비올렛 황녀는 꽤 사업적 소질이 있다. 망해가던 카지노를 매입해 지금처럼 크게 키운 게 그녀였으니까.
물론 거기 출몰해서 다른 귀족들을 엿 먹이는 건 고약한 취미긴 했지만.
'이따가 마지막 경매를 보면 더 뒤집어지겠는걸?'
내가 비올렛 황녀를 여기 데리고 온 것은 그녀의 성품 때문이기도 했다.
진실을 숭상하고 거짓을 혐오한다. 정정당당한 승부를 그 무엇보다 중요시여긴다.
그런 고지식한 성품은 이따가 이 경매장을 뒤집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그동안 난 내 볼일을 처리하면 되는 것이고.'
입가의 미소를 감추며 경매가 재개되길 기다렸다.
청력에 집중하자, 우리처럼 나가지 않고 남아있는 다른 손님들의 존재가 느껴졌다.
그러고 있자니 영화관에서 쿠키 영상을 기다리는 관객이 된 기분이었다.
정확히 10분이 흐르자,
탁!
보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무대의 불이 다시 들어왔다. 소리가 달라졌듯이 조명에도 차이가 있었다.
아까는 물품을 잘 보이게 하기 위한 밝고 흰 조명을 썼다면, 지금은 살짝 붉은 기가 도는 희미한 조명을 썼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사회자 또한 달라졌다.
보다 젊은 남자의 목소리, 그리고 우리들처럼 얼굴을 가리는 황금빛 가면을 착용했다.
"'마지막' 경매에 참여해주신 귀빈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그가 연극적인 자세로 허리를 굽혔다가 편 뒤 말했다.
"이 경매는 앞선 경매보다 귀하고, 가치가 높은 상품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의 입가에 비밀스러운 미소가 스쳤다.
"따라서 모든 거래는 당일 이 자리에서 100% 현금으로 이루어집니다. 물론, 이 규칙을 모르는 분께서 남아계시진 않을 테지요."
사회자가 씩 웃으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자, 그럼 첫 번째 상품을 소개하겠습니다!"
무대 뒤쪽의 커튼이 밀려 올라가고, 그 아래로 남성의 하반신이 비쳤다.
"아주 건강하고, 또 매력적인 남성 상품입니다!"
커튼이 완전히 밀려 올라가 그 뒤에 서 있던 남자의 모습이 완전히 드러났다.
팔과 다리에 수갑을 차고 단순한 흰옷을 걸친. 체념의 얼굴을 한 젊은 남성 노예였다.
"20대 초반의 활력적인 상등품입니다. 동부 지방 출신이라 신장이 크고, 훈련으로 다져진 탄탄한 근육을 갖고 있습니다."
사회자가 물 흐르듯이 자연스레 소개를 내뱉었다.
"천연 금발과 투명한 푸른 눈동자가 귀부인들의 마음에 쏙 들 거라 확신합니다. 성격이 온순한 편이라, 반항적인 맛을 좋아하는 분들께는 조금 감점 요소일지도 모르겠군요?"
사회자는 남자 노예를 바로 옆에 두고도 거리낌 없이 그런 말들을 지껄였다. 웃음기 담긴 음성은 이 일에 전혀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듯이 들렸다.
"호오.... 제법 괜찮은데?"
"키가 큰 게 마음에 들어. 일을 잘할 것 같네."
"난 별로. 좀 더 길들이는 맛이 있는 게 좋아서."
다른 손님들의 자리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작게 흘러나왔다.
"1만 골드."
이윽고 누군가 팻말을 들어 입찰하기 시작했다.
"3만 골드."
"5만 골드."
인간의 가치가 돈으로 매겨지는, 이 비인간적인 노예 경매에 퍽 익숙한 모습이었다.
"세상에...."
옆에서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 비올렛 황녀와는 대조적인 반응이었다.
"어떻게 노예 경매를! 제국에서 법으로 금지한 사항인데!"
비올렛 황녀의 활활 불타는 눈동자가 무대에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렇게 몰래몰래 하고 있는 거겠죠."
"이 고얀 것들을 그냥! 감히 폐하의 목전에서 이런 짓을 저질러?"
비올렛 황녀는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일어설 기세였다.
"진정하십시오."
그런 그녀의 어깨를 잡아 지그시 눌렀다. 비올렛 황녀의 어깨가 거칠게 들썩였다.
"이거 놓지 못해? 저걸 보고 어떻게 진정하라는 거야?"
"멀리 보시라는 겁니다. 지금 나가서 황녀님이 깽판을 쳐봤자, 남은 상품을 숨기기밖에 더하겠습니까?"
비올렛 황녀의 어깨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 나갔다.
"조금 더 지켜보다가 적절한 순간에 나서시는 게 좋습니다. 그래야 일망타진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 적절한 순간이 언젠데?"
"적어도 지금은 아닙니다."
현실적인 설득에 비올렛 황녀가 침착을 되찾았다.
"일단 알겠어. 그런데 아벨 넌 왜 이렇게 태연해? 이미 알고 있었던 건가?"
"설마요. 저도 놀랐습니다."
비올렛 황녀의 미간이 슬며시 구겨졌다.
"전혀 안 놀란 얼굴인데...."
"제가 표정 연기에 좀 능합니다."
뻔뻔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저도 마지막 경매가 이런 것일 줄은 몰랐습니다."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내가 별로 놀라지 않은 것은, 이미 이전에 이런 광경을 본 적이 있어서였다.
한 인간이 모든 권리와 자아를 잃고 상품으로 전락한 광경. 그것은 카데르 영지에서 보았던 노예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그들에 비해서 이들의 처우가 비교적 낫기는 했다. 몸의 상태나 입은 옷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아니, 그렇게 낫다고는 할 수 없나.'
절로 실소가 흘러나왔다.
그들과 이 경매에 나온 노예들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이들이 일개 평민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영지전에서 패배한 귀족 가문의 방계, 혹은 재산을 모조리 몰수당한 귀족 등.
자신의 권리를 상실한 몰락 귀족들이 이 시장에 노예로서 팔려 오게 된다.
귀족의 예법을 알고 있는 데다 외모 또한 출중한 편. 거기에 한때 귀족이었던 사람을 제 발밑에 둔다는 저열한 우월감까지.
귀족들은 그런 즐거움을 얻기 위해 이들을 사들였다. 밤 시중을 드는 노예로 삼거나, 혹은 직속 하인으로 부리는 식으로.
'고약한 취미지.'
정말이지 우습지도 않은 일이었다.
나는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채 경매가 진행되는 꼴을 지켜보았다. 비올렛 황녀 또한 언짢은 표정을 감추지 않고 경매를 지켜보았다.
"뜨거운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이제 남은 상품은 단 한 건입니다."
놀랍게도, 그 앞에 나온 9명의 노예들이 모두 낙찰되었다. 그것도 꽤나 고가의 금액에.
"어떤 귀족들인지 이따 보기만 해 봐."
비올렛 황녀가 이를 갈아붙였다.
"이딴 일에 그렇게 돈을 물 쓰듯이 써?"
그녀의 투덜거림을 한 귀로 흘리며, 무대에 올라오는 다음 상품에 주목했다.
"오늘 저희가 준비한 상품 중 가장 고품질의 상품입니다. 과연 어떤 금액에 낙찰될지 저도 기대가 되는군요."
사회자가 두 팔을 활짝 펼쳤다.
"소개하겠습니다. 오늘 경매의 마지막을 장식할, 미소년 상품입니다."
타박, 타박.
작은 발소리가 무대 위를 갈랐다.
"어머머. 마음에 쏙 드는데?"
"아직 너무 어리지 않아?"
"그래서 더 좋아."
귀빈석에서 찬사가 쏟아져 나왔다. 사람들은 모두 무대 위에 나타난 소년의 모습에 시선을 빼앗겼다.
사락, 사락.
입고 있는 옷이 너무 커 발목 아래로 질질 끌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년의 모습은 조금도 우스워 보이지 않았다.
순은을 녹여 만든 듯이 눈부시게 빛나는 은발, 아직 어리지만 또렷한 이목구비가 사람을 홀릴 만큼 아름다웠다.
"...."
수치심을 감추기 위해 꾹 다문 입술. 그 위로 선명하게 번지는 금빛 눈동자는 섬세하면서도 날카로웠다.
'드디어.'
나는 소년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집중해서 소년의 눈동자를 살피자, 동공에 새겨진 복잡한 무늬가 살아있는 것처럼 일렁이는 게 보였다.
'확실하군.'
저 눈동자는 이 세계에서 소수의 인간에게만 허락된 마법의 재능을 의미했다.
에카로트.
전 제국에서 가장 강력한 마법사이자, 후에 마탑의 주인이 될 소년의 이름이었다. 원작에서 그는 카인에게 구원받고, 그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창이 된다.
하지만.
'이번엔 그 힘을 날 위해 써줘야겠어.'
나는 그 창을 내 손에 쥘 생각이었다. 바로 여기, 경매장에 나타난 그를 구해냄으로써.
Chapter 20. 손에 든 패를 여기저기 활용한다. (8)
에카로트는 앞서 나왔던 노예들과 극명한 차이점이 있었다.
첫째로 천애고아였으며, 둘째로 귀족보다도 더 귀족적인 보기 드문 빼어난 미모를 지녔다. 마지막으로 눈빛이 달랐다.
아직 생생하게 살아 날뛰는 그것은 포기라는 것을 모르는듯했다.
가장 낮은 곳에 선 이가,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것처럼 다른 이들을 오연하게 내려다본다. 결코 꺾이지 않을 것처럼 반듯하게 서서.
다른 이를 무릎 꿇리고 군림하는 것에 익숙한 귀족들에겐 퍽 아니꼬운, 동시에 구미가 당기는 상품이었다.
"저런 머리카락과 눈 색은 흔하지 않은데.... 아아, 갖고 싶어라."
"표정이 마음에 드네요. 저런 아이를 굴복시킬 때의 쾌감이 엄청나죠."
"자랐을 때의 모습이 기대되는데요? 어디서 저런 상등품을 구해왔담?"
귀빈석에서는 쉴새 없이 열띤 속삭임이 들려왔다.
"5만 골드."
이윽고 누군가 팻말을 들어 입찰 의사를 표현했다. 상품이 마음에 드는 듯 초장부터 꽤 높은 금액이었다.
"7만."
"10만 골드."
"12만."
이어서 경쟁적으로 금액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다들 소년을 낙찰받고 싶어 몸이 달은 듯했다.
"...."
에카로트의 턱이 바짝 당겨졌다.
그는 저를 향한 탐욕스러운 시선에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다만 경멸이 담긴 눈초리로 귀빈들을 쏘아볼 뿐이었다.
"20만!"
"23만!"
기어코 지금껏 한 번도 나오지 않았던 높은 금액이 등장했다. 소년의 그런 모습이 귀빈들의 욕구를 부채질한 탓이었다.
"이런 미친 것들."
비올렛 황녀가 혀를 쯧쯧 차며 이마를 짚었다.
"저런 어린애에게 군침을 흘리는 꼴이라니. 정말 역겹기 그지없군."
그녀의 언짢은 얼굴이 나를 향했다.
"저게 마지막 상품이라지 않았나? 이 더러운 꼴을 그만 보고 싶은데."
"잠시만 기다리시죠."
나는 신중하게 에카로트의 상태를 살폈다.
'얼굴이 얼음장 같군.'
에카로트는 화가 날수록 얼굴을 더 차갑게 굳힌다. 즉 지금 그의 속은 부글부글 끓다 못해 넘쳐흐르기 직전이라는 의미였다.
문제는, 사회자가 이런 류의 노예를 다루는 데는 도가 튼 자라는 점이다.
"...."
그가 눈짓을 한 번 슥 하자, 뒤에서 그를 감시하고 있던 남자가 에카로트의 어깨를 붙잡았다.
"욱!"
에카로트는 어깨를 짓누르는 힘에 그만 무릎을 꿇고 말았다.
"뭐 하는 짓이야!"
"우리 애 무릎 상하겠네!"
"살살하지 못해?"
객석에서 야유가 터져 나왔다. 상품을 함부로 다루지 말라는 의미에서였다.
하지만 에카로트가 얼굴을 천천히 들어 올린 순간, 객석의 야유가 쏙 들어갔다.
굴욕감으로 일그러진 눈매와 흥분으로 발갛게 물든 뺨이 시선을 사로잡은 탓이었다.
"30만 골드!"
"35만 골드!"
에카로트는 기어이 역대 경매가 최고액을 갱신하고 말았다. 사회자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에카로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다들 널 갖고 싶어 안달이 났구나. 어때, 기쁘지 않으냐?"
귀빈석에 들리지 않을 크기였으나, 무대에 집중하고 있던 내게는 또렷하게 들렸다.
까득.
이어지는 에카로트가 이를 악무는 소리도.
"닥쳐."
분노로 하얗게 질린 음성이 잇새로 새어 나왔다.
쿠궁-
무대 주변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하지만 사회자와 귀빈들은 입찰에 집중하느라 그 소리를 알아채지 못했다.
'오호.'
나는 눈을 반짝이며 에카로트를 응시했다.
그의 주변 공기가 거칠게 들썩이는 것이 보였다. 마치 에카로트의 분노에 감응하여 움직이는 듯한 모습이었다.
'저것이군.'
원작에서 이 경매장을 초토화시킨 에카로트의 힘이.
분노가 극에 달한 에카로트는 자신의 마법적 재능을 깨닫는다. 제 몸 안에 감도는 광활한 힘을 느낀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사회자 죽이기였지.'
저 사회자를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갈갈이 찢어 죽인 뒤, 에카로트는 이 경매장 안에서 피의 학살극을 벌인다.
그 결과 그는 자신의 힘을 통제할 줄 모르는 시한폭탄과도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다.
에카로트는 후에 카인에게 제압당한 후에야 안정을 되찾고, 자신의 힘을 올바르게 쓰는 법을 익히게 된다.
'슬슬 가 볼까.'
그가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르기 전에.
에카로트의 첫 번째 살인은 두고두고 족쇄가 되어 그를 괴롭히게 되니까.
"...."
이미 그는 사회자를 향해 죽일듯한 증오를 내보이고 있었다. 금빛 눈동자가 희게 보일 정도로 뜨거운 불길이 일었다.
덜걱, 덜걱.
에카로트의 주변에 있는 물건들이 덜그럭대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
이변을 눈치챈 것은 에카로트의 바로 뒤에 서 있던 사내뿐이었다.
"일단 이거부터 받으시죠."
나는 아까부터 뭔가 적고 있던 종이를 비올렛 황녀에게 내밀었다.
"이게 뭔데?"
비올렛 황녀가 종이를 확인하곤 흠칫 놀랐다.
"이건... 이 경매장 구조도 같은데?"
"간략화해서 그린 겁니다."
간단하게 이 경매장을 그린 뒤 개수에 맞게 방을 채워 넣었다. 각방 번호 아래에는 특정 귀족의 이니셜을 적어 두었다.
비올렛 황녀는 그것만 보고도 이게 무슨 의미인지 깨달은 듯했다.
"너... 설마?"
"알아서 요긴하게 잘 써먹으시죠."
"아니, 이 거리에서 그게 다 보여? 가면도 쓰고 있는데?"
"전부 다 아는 건 아니고요. 아까 1, 2부 경매할 때 적어뒀습니다."
비올렛 황녀가 입을 떡 벌리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를 향해 픽 웃어 보이며 손을 내밀었다.
"내려갈 거니 준비하시죠."
"뭐, 지금?"
"네. 미리 말해주라면서요?"
금방이라도 움직일 것처럼 손을 까딱거렸다. 그제야 비올렛 황녀가 허둥지둥 옷매무새를 가다듬기 시작했다.
'1, 2, 3... 10.'
정확하게 10초를 센 다음 비올렛 황녀를 들어 올렸다.
"야, 아직...!"
비올렛 황녀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녀를 안아 든 내가 난간 위로 훌쩍 올라섰기 때문이다.
"갑니다."
"잠...."
대답도 듣지 않고 무대를 향해 휙 몸을 날렸다. 어차피 들을 생각도 없었다.
"어엇?"
점점 올라가는 액수에 정신이 팔려 있던 사회자가 뒤늦게야 나를 발견했다.
"누구...!"
그의 손가락이 나를 향한 순간,
탁.
사뿐하게 사회자 바로 앞에 내려섰다. 정확히 무대 중앙에.
"...널 믿은 내가 바보지."
비올렛 황녀가 얼굴을 꾸깃 구기며 내 품에서 내려섰다.
"당신들 뭡니까?"
사회자가 경계하는 기색으로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뭐야? 깜짝 이벤트인가?"
"아닌 것 같은데?"
귀빈석에서 입찰 경쟁을 멈추고 웅성거렸다.
그 모든 소란 속에서, 내 신경은 오로지 한 사람. 에카로트에게 쏠려 있었다.
"...."
에카로트는 내 난입에 놀란 듯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뜨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그의 몸에서 일어난 마력의 파동이 주변의 물건을 허공으로 띄워올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기든 간에, 저 사회자는 꼭 죽여버리겠다는 강한 결심이 느껴졌다.
'멈춰.'
에카로트를 향해 입모양으로 속삭였다. 에카로트가 흠칫 놀라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경매를 방해하는 행위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당장 내려가십시오!"
사회자가 심각한 얼굴로 우리를 노려보았다.
동시에 무대 주변에 대기하고 있던 인원들이 무기를 움켜쥐는 게 보였다.
귀빈석에선 보이지 않았지만, 이제 보니 많은 인원들이 무대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래서 이제껏 무대에 올라왔던 노예들이 도망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안 내려가면 어쩔 건데?"
내 천연덕스러운 물음에 사회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경...."
빡!
경비를 부르려던 시도는 허사로 돌아갔다. 그는 내 주먹에 호되게 얻어맞고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끄르륵...."
피가 철철 흘러나오는 입 사이로 부러진 뼈와 침이 고였다.
"너 입 터는 게 마음에 안 들더라."
"-!"
에카로트가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부릅떴다. 순간 허공으로 조금 떠올랐던 물건들이 덜커덩, 바닥에 내려앉았다.
"이런...!"
에카로트의 뒤에 서 있던 사내가 움직였다. 위급한 상황에서 상품을 최우선으로 삼으라는 지시를 받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 발이 움직이는 게 더 빨랐다. 바닥을 박차고 도약해 몇 걸음 만에 그에게 바짝 붙었다.
"-!"
에카로트를 향해 손을 뻗던 사내의 눈이 와락 커졌다.
빠드득!
"아악!"
사내의 다섯 손가락이 모조리 뒤로 꺾였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사내의 손목을 붙잡아 끝까지 밀어붙였다.
"끄아아악!"
사내의 어깨가 완전히 뒤로 돌아가 버렸다.
다리에 힘이 풀린 사내가 바닥에 쓰러졌다.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에 헐떡이며 몸부림쳤다.
"끄, 끄흑, 으으...."
"넌 손 쓰는 게 마음에 안 들고."
히죽 웃으며 손을 탁탁 털어줬다. 그 모습을 에카로트가 뚫어져라 보고 있다는 걸 확인하면서.
"다들 뭐하고 있어!"
"잡아!"
"상품부터 확보해!"
순식간에 무대 위의 인원 둘이 쓰러져버린 상황에, 얼이 빠져 있던 경비들이 뒤늦게 움직였다.
스릉!
경비들이 동시에 검을 빼어 들고 무대 위로 달려들었다.
"감히...."
비올렛 황녀가 이를 악다물고, 에카로트가 몸을 바짝 긴장시킨 그때였다.
쾅!
무대 반대쪽의 문이 덜컥 열렸다.
"황녀 전하!"
익히 알고 있는 호위 기사의 목소리였다. 그의 뒤로 황궁 경비군들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엥?"
비올렛 황녀가 순간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가, 무언가에 생각에 미친 듯 나를 돌아보았다.
"혹시 네 짓이야?"
"어떻게 아셨습니까?"
비올렛 황녀가 뭐라고 말하려 했으나,
"다들 뭣하는가! 어서 황녀님을 보호하지 않고!"
호위 기사의 성난 외침에 묻혀 버렸다. 경비군들이 그의 명령에 따라 무대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이, 이게 무슨...."
"젠장, 다들 도망쳐!"
경비들이 전의를 잃고 쥐새끼들처럼 우르르 흩어졌다.
"오늘 제 역할은 여기까지."
비올렛 황녀의 옆을 스쳐 가며 속삭였다. 비올렛 황녀가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왜 지금...."
"귀찮은 일에 휘말리기 싫어서요. 나머지 일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대로 에카로트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야, 너-"
"황녀님!"
허겁지겁 달려오는 호위 기사에 의해 비올렛 황녀의 목소리가 끊겼다.
"제가 얼마나 찾았는지 아십니까!"
"아니, 그...."
그런 두 사람을 뒷전에 두고, 에카로트의 앞에 멈춰 섰다.
"...."
에카로트는 털을 바짝 세운 고양이처럼 긴장한 채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개의치 않고 소년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가자."
에카로트의 신비로운 금빛 눈동자에 잔잔한 물결이 퍼졌다. 의심과 경계의 색채로 가득한.
그는 아직 나를 믿지 못하고 있었다.
"어디로?"
"그럼 여기 계속 있게? 안 나갈 거야?"
내 반문에 에카로트가 고집스레 입을 다물었다.
"난 안 가."
"왜 안 가는데?"
에카로트의 얼굴이 팍 일그러지더니, 갑자기 발을 쾅 굴렀다.
"여기 있는 자식들 다 죽이기 전엔 안 갈 거야!"
"저 자식들이 내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아?!"
악에 받친 음성이 터져 나왔다.
"다 죽일 거야! 여기 있던 놈들, 다 죽여버릴 거라고!"
핏발선 금안이 지글지글 타올랐다. 황금을 고온에서 녹이면 이러한 모습일까.
에카로트는 씩씩대면서 나를 노려보았다. 제 말에 반대했다간 가만두지 않겠다는 눈빛이었다.
"...."
"그래, 그러자."
물론 나는 에카로트에게 반대할 생각 따위 없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아직 목숨이 붙어 있는 저놈들부터?"
손을 들어 무대 바닥에 쓰러져 있는 두 사람을 가리켰다.
"아니면 다른 방에 숨어있는 놈들부터? 어떻게 할래?"
자신감으로 가득 찬, 냉혹하기 그지없는 발언에 에카로트가 입을 벌렸다.
"...뭐라고?"
Chapter 21. 미래를 예비한 포석을 깔아둔다. (1)
"말 그대로야. 이 경매를 주최한 놈들이든, 아니면 허둥지둥 도망치는 귀족 놈들이든 상관없어. 원하는 쪽부터 죽여주지."
"진심이야?"
"물론이지. 그런데 기왕이면 귀족들부터 처치하는 게 좋을걸."
어깻짓으로 저 멀리 떨어져 있는 귀빈석을 가리켰다.
"저 한목숨 살겠다고 도망치는 이들이 많아서."
"...."
"이 경매를 주최한 놈들은 상품을 챙기느라 지체될 거고. 그러니까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지."
한가롭게 살인을 논하는 내 모습에 에카로트는 할 말을 잃은 듯했다.
"얼른 결정해. 빠를수록 좋으니까."
눈을 살짝 감았다 뜨며 살기를 일으켰다. 급변한 내 분위기에 에카로트의 안색이 질렸다.
"당신.... 누구야?"
그가 더듬거리며 한 걸음 물러났다. 내 주변으로 일렁이며 퍼져가는 살기를 느낀 모양이었다.
"나? 지나가던 사람."
히죽 웃으며 손을 까딱거렸다.
"그리고 널 도울 수 있는 사람이지."
허언이 아니었다.
지금 당장 레퀴엠을 빼어 들어 달리기 시작하면 충분했다. 정체를 감추는 것 쯤이야 어렵지 않았으니까.
"아...."
에카로트는 그제야 내 말이 허언이 아니며, 내가 언제든지 말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사람임을 깨달았다.
"나는...."
처음에 기세 좋게 외치던 것과 달리, 에카로트의 목소리엔 망설임이 묻어났다.
'이럴 줄 알았지.'
예상대로였다. 경매장에서 폭주하기 전의 에카로트에겐 아직 유약한 심성이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날 이렇게 만든 건 그 자식들이야! 그 개자식들이라고!'
원작에서 눈물이 범벅된 얼굴로 외쳤던 그였으니까.
"아직 결정 못 했어? 왜 이렇게 망설여?"
심드렁한 어조로 채근하자 에카로트는 몹시 당황하기 시작했다.
"아니, 그게...."
"빨리해. 다 도망가겠다."
에카르트가 우물쭈물하며 내 눈치를 살폈다. 나는 그런 그를 보며 속으로 피식 웃었다.
'아직 애는 애군.'
이런 꼬맹이를 구워삶는 일 따위, 내겐 아무 일도 아니었다.
"한 가지 알려줄까?"
"...뭔데?"
"널 납치해 노예로 삼은 놈들이, 여기에만 있을 것 같아?"
에카로트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나는 굴곡 없는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
"난 이 짓거리를 하는 놈들을 이미 몇 번이나 죽였어. 하지만 아직도 이렇게 남아있네."
"...."
"이놈들을 죽인다고 이 굴레가 끝날까? 난 아니라고 생각해."
사실을 조금 그럴싸하게 포장하여 말하자, 마치 정의의 사도가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럼 어떻게 해야 끝나는데?"
에카로트가 입술을 파르르 떨며 물었다.
"궁금해?"
픽 웃곤 에카로트를 향해 손을 뻗었다.
"-!"
에카로트가 눈을 질끈 감으며 몸을 움츠렸다. 숱한 폭력에 노출된 이가 으레 보이는 반응이었다.
빠각!
내 손이 에카로트를 구속하고 있던 수갑을 부러뜨렸다.
"아...."
에카로트의 입술 새로 탄식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가 흩어졌다.
투둑, 쩔그랑.
에카로트가 제 발치에 떨어지는 수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두꺼운 걸 한 번에...."
"말했지? 다 죽일 수 있다고."
에카로트의 얼굴이 천천히 나를 향해 들어 올려졌다.
"...."
다시 마주한 눈은 이전과는 다른 색을 머금었다. 증오심으로 일그러진 그 속에 희미한 희망과 기대가 피어난 게 보였다.
"가자."
나는 다시 말하며 손을 뻗었다.
에카로트는 처음과 달리 저를 향해 다가오는 손을 피하지 않았다.
탁.
그를 한 팔로 안아 들었다.
에카로트는 잠시 꼼지락거렸으나 이내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우리, 어디로 가요?"
순순히 흘러나온 존대에, 나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에카로트는 원작에서 카인 외엔 그 누구에게도 경어를 쓰지 않는 오만한 캐릭터였다.
그런 녀석이 내게 경어를 쓴다는 것은, 카인이 맡았던 구원자 역할을 훌륭하게 대신했다는 의미였다.
새삼 느끼지만, 내가 사람 꼬시는 것 하나는 정말 잘하는 것 같다.
"일단 내가 사는 곳으로 가야지."
자신만만한 대답에 에카로트의 눈이 한 차례 흔들렸다. 그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어요?"
"뭔데?"
"다른 사람들을 풀어주세요."
에카로트가 한결 온순해진 목소리로 덧붙였다.
"사람들이 자유를 되찾았으면 좋겠어요."
다행히도 그의 마음속엔 아직 한 줄기 온정이 남아있었다. 매우 이용하기 쉬운, 그런 물렁한 감정이.
"그래."
흔쾌히 대답하며 발을 내디뎠다.
"봉쇄해! 못 나가게 해!"
"이거 놓지 못해?! 내가 누군줄 알고 이러느냐!"
제국군과 귀족들의 아수라장을 뒤로 한 채. 그 틈에 나를 놓치고만 비올렛 황녀를 뒤에 두고.
타다닥!
에카로트를 안은 채, 무대 안쪽의 공간을 향해 달려갔다. 내 어깨를 힘주어 잡는 에카로트의 작은 손을 느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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