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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9 - 9

❖ ❖ ❖

다음날.

"아벨 공자."

회의장에 들어서자마자 미켈이 곧장 내게 다가왔다. 그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 안색을 살폈다.

"몸은 괜찮은가?"

그의 시선이 스카프로 꽁꽁 싸맨 내 목을 스쳤다.

"치료는 잘 했고?"

"물론입니다."

싱긋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작은 상처였으니 그리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애초에 걱정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속으로 하지 못한 대답을 삼키며 미켈을 응시했다.

"이것 참 미안하게 되었군."

미켈이 흰 눈썹을 축 늘어뜨렸다.

"디에고가 화를 내진 않으려나 모르겠어. 귀한 아들의 몸에 생채기를 냈으니."

"아버지께서 화를 내실 일은 없을 겁니다."

이미 다 나아버렸으니까. 게다가 디에고는 아벨의 목에 상처가 났다고 속상해할 위인이 아니었다.

"그런가. 하긴 그렇겠군."

미켈이 빙그레 웃었다.

영지로 돌아가는 동안 상처가 나을 테니,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이해한 눈치였다. 물론 오해였지만.

"덕분에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옅게 미소 지으며 화제를 전환했다. 미켈이 묘한 눈으로 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정말 유익했나?"

"물론입니다. 결코 잊지 못할 시간이었습니다."

미켈이 보여준 모든 공격은 내 머릿속에 그대로 담겨 있었다. 조만간 노드 검술까지 연습해 내 것으로 삼을 생각에 미소가 사라지질 않았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미켈의 눈가에 의미 모를 웃음기가 담겼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우리 둘을 귀족들이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뭔가 이상한데?'

어제 패배를 인정한 뒤 인사조차 남기지 않고 떠났기에, 부정적인 반응을 각오하고 있었다.

먼저 대련을 청해놓고 그깟 상처에 놀라 꽁무니를 뺐다며 수군거릴 줄 알았다.

'어차피 그깟 평판, 어찌 되든 별로 상관은 없지만.'

그런데 귀족들의 시선은 각오했던 것보다는 훨씬 호의적이었다. 감탄, 호기심, 흥미 등 다양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미켈 이 양반이 뭐라고 한 건가?'

Chapter 16. 매가 약이다. (4)

옆에서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는 미켈을 빤히 바라보았다.

"왜 그러는가?"

자신은 아무것도 한 게 없다는 듯 뻔뻔한 태도였다. 하지만 어제 내가 나간 후로, 대충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것 같았다.

"고맙습니다, 미켈 영주님."

절로 부드러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감사 인사는 아까 했잖은가."

"다른 것에 대해서 드린 겁니다."

"원, 눈치만 빨라서는."

미켈이 흠흠, 헛기침을 하더니 몸을 돌렸다.

"오늘이 마지막 회의니, 끝까지 잘 마무리하도록 하세."

"알겠습니다."

공손히 인사해 미켈을 자리로 돌려보냈다. 나 또한 자리를 찾아 앉는데, 2층의 참관석에서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

시선의 근원지는 카인이었다. 그나마도 나와 눈이 마주치기 직전 고개를 돌려버렸지만.

'꽤 속이 상했겠지.'

그가 이번 귀족 회의에서 받아야 할 관심, 주목을 모두 내가 가져가 버렸으니. 거기에 원작에선 카인이 이루지 못했던 미켈과의 대련까지.

이번 수도행으로 내가 많은 것을 얻은 만큼, 카인은 거꾸로 많은 것을 잃어야 했다.

하지만.

'방심해서는 안 돼.'

아벨의 삶에 안배된 장애물이 너무나 많았다.

게다가 카인은 원작 공인 먼치킨 행운아. 아무리 격차를 벌려도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를 우연이 그를 도울 것이다.

'그러려면 역시....'

자리에 잠자코 앉아 테오도어 황제가 입장하기를 기다렸다.

"황제 폐하 드십니다!"

보좌관의 안내와 함께 회의가 시작되었다.

오늘 회의는 앞선 이틀 간의 회의와는 성격이 조금 달랐다. 그간 협의된 내용을 정리한 뒤 본 안건 외에 추가된 안건을 다뤘다.

"-하는 방향으로 진행했으면 하오."

여느 때처럼 카를로가 주도적으로 회의를 이끌었다.

그는 자주 내 쪽을 돌아보며 견제하는 눈빛을 보냈다. 나는 그런 그를 무시하고 회의를 관망했다.

'또, 또. 쓸데없는 데 힘 빼고 있네.'

어차피 이 회의에서 얻어내야 할 것은 다 얻어냈다. 이제 남은 것은 마지막에 던질 큰 한 방뿐이었다.

"계속해서 기온이 내려간다면, 노드 영지에 추가적인 지원이 필요할 거라 보오."

베니퍼 영주가 차분한 어투로 말했다. 어느덧 마지막 추가 안건을 논하는 시간이었다.

"노드 영지는 곡물의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는 것으로 알고 있소. 올해는 에스트 영지에서 곡식을 지원하도록 하겠소."

"그리 말해주니 마음이 편해지는구려. 고맙소, 베니퍼 영주."

"별말씀을."

두 영주 사이에 훈훈한 바람이 불었다. 카를로는 그런 둘을 보며 남몰래 콧방귀를 뀌었다.

그 틈을 타,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지원'에 관해 한 가지 제안할 사항이 있습니다."

오늘 처음 올라간 내 손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제안이라니."

카를로가 입가에 슬쩍 비웃음을 걸쳤다.

"오베스트 영지에 그럴 여유가 있소?"

카를로의 공격을 무시하고 보좌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발언해도 되겠습니까?"

이 자리의 최종 결정권자는 그가 아니라, 저 보좌관 옆에 있는 황제라는 것을 짚어주면서.

"...."

카를로가 입가를 굳히며 나를 노려보았다.

"물론입니다."

보좌관은 여전히 사무적인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입꼬리가 슬쩍 밀려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미켈 영주님께서 몬스터가 민가를 침범하는 일이 늘어난다고 하셨습니다. 맞습니까?"

"그랬지."

미켈 영주의 동의를 구한 뒤 선선히 말을 이었다.

"물론 베니퍼 영주님께서 제안한 방법은 고통받는 민가에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내 말을 들은 베니퍼 영주의 붉은 입술이 미끄러져 호선을 그렸다.

"하지만 저는 근본적인 문제는 따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몬스터지요."

내게 귀 기울이는 모든 귀족, 그리고 황제를 바라보며 말했다.

"본격적인 추위가 시작되기 전, 북부 몬스터 토벌전을 제안합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귀족들이 소리를 낮추어 웅성거렸다. 예상 못 했던 제안에 꽤 놀란 눈치였다.

내가 처음 비율제를 제안했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반응이었다.

그때는 '저 애송이가 뭐라고 지껄이는 거지?'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면, 지금은 내 발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는 쪽이 더 많았다.

'불과 이틀 만에 완전히 달라진 대접이로군.'

그런 변화를 느긋하게 즐기며 상황을 살폈다.

'원래는 카인이 제안했을 토벌전이지만.'

원작의 카인은 곧 영지로 돌아가 여름의 검 카덴차의 주인이 된다. 반면 북부에 강림한 아리아는 미켈을 죽게 만들고, 미켈의 딸 레아를 자신의 품에 가두어 버린다.

[제가 가겠습니다.]

카인은 북부 토벌전에서 카덴차를 쥐고 맹활약을 펼친다. 그에겐 불꽃을 다루는 힘이 있으니 너무도 쉬운 일이었다.

...라는 전개지만.

'이미 많은 것이 어그러졌으니.'

카인은 카덴차를 얻는 데 꽤 고전할 것이다.

하지만 북부에 아리아가 강림하는 것은 예정된 사항이다. 미켈이 북부의 기온이 내려가기 시작했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그 전조다.

'이번엔 내가 레아를 구해주면 되겠네.'

원작에서 카인이 얼음 결정 속에 갇혀 있는 레아를 구해내는 장면은 두고두고 회자되는 명장면이었다.

물론 내겐 카덴챠가 없으니 다소 까다롭겠지만. 그걸 해결할 방법은 이미 생각해 두었으니까.

짧은 생각을 마친 뒤 미켈을 힐끗 보았다. 미켈은 턱을 감싸 쥔 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 무슨 무례한 발언인지!"

당사자는 차분한데, 정작 다른 이가 불쾌한 심정을 드러냈다. 노골적으로 눈썹을 찌푸린 카를로였다.

"미켈 영주는 몇 십년간 굳건히 북부의 설산을 지켜왔소. 헌데 토벌전을 제안한다는 것은, 미켈 영주의 실력을 의심하는 것과 진배없지 않소?"

나는 별 동요 없이 카를로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 순간, 나뿐만 아니라 이 회의장의 모든 사람들은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언제부터 미켈을 그렇게 챙겼다고?'

물론 카를로의 이 발언은 진정 미켈을 우려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내가 미켈 영주와 친분을 쌓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다.

'이렇게 이간질을 하네.'

저렇게 말하면, 내가 마치 미켈을 무시해서 이런 제안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겠는가.

"제가 감히 그럴 리 있겠습니까."

나는 입을 열어 매끄럽게 대응했다.

"노드 영지를 도울 방법을 생각하다가 떠오른 것뿐입니다."

왜 그리 속이 배배 꼬였냐?

라고 돌려서 묻자 카를로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우리 영지는 에스트 영지처럼 곡식이 풍부하지 않습니다."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흘리며 덧붙였다.

"해서 곡식 대신 인력을 보태면 어떨까 한 것입니다."

"...크흠."

카를로는 능숙하게 얼굴의 감정을 감추었다. 잠시 생각하더니 다소 신중한 어투로 물었다.

"그런 거라면 오베스트 영지에 먼저 지원을 하는 게 맞지 않겠소?"

확실히, 정치판에서 오래 구른 경험은 녹록지 않았다.

그는 내가 자신을 공격할 수 없도록 조심하고 있었다. 특히, 지난 회의에서 사용한 논리-이 모든 게 제국을 위한 것이라는-를 피해가려고 했다.

"물론 오베스트 영지에 손이 아쉬운 것은 사실입니다만."

쓴웃음을 감추며 대답했다.

"여긴 겨울에 훨씬 사정이 괜찮은 편입니다. 상당수의 몬스터들이 동면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카를로의 붉은 눈동자가 의심을 담고 나를 노려보았다.

'또 무슨 꿍꿍이를 벌이는 거지?'

라고 묻는 듯한 눈빛이었다.

고작 며칠 간의 경험으로, 그는 내가 이유 없이 나서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하게 깨달은 듯했다.

'사실 나 좋자고 제안한 게 맞긴 하지만.'

나는 순진한 척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제가 너무 쉽게 생각했을까요?"

어깨를 으쓱하곤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이 소리를 키웠다.

"단순히 각 지역에서 인력을 조금씩 차출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노드 영지는 골치 아픈 일을 해결하니 좋고, 다른 영지는 제국의 안전에 기여할 수 있으니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그 순간 영주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재빨리 이것저것 계산해보는 눈빛이었다.

'그래, 그럴 줄 알았지.'

테오도어 황제가 전쟁을 멈추고 쉬고 있는 지금, 각 가문의 기사단은 힘을 드러낼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만약 이 토벌전에서 공을 세운다면? 노드 영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물론이고, 가문의 이름을 드높일 수 있게 된다.

군대는 전쟁으로써 제 가치를 증명하는 법이니까.

카를로가 흘끗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참관석의 난간에 바짝 붙어 있는 카인이 있었다.

두 부자의 눈이 마주쳤다.

카인이 카를로에게 열렬한 눈빛을 보냈다. 이 토벌전에 꼭 참가하고 싶다는 의지를 담은.

"...."

카를로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생각에 잠겼다.

'무슨 생각하는지 뻔히 보이네.'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카인이 위풍당당하게 승전식을 올리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 의도의 토벌전이라면 괜찮을 것 같군."

이윽고 카를로가 느릿하게 말했다.

"수드 영지에서도 돕도록 하겠소. 노드 영지, 더 나아가 제국을 위한 일인데 힘을 아낄 순 없지."

몹시도 진지한 각오가 서린 말투였다. 누가 보면 진정으로 제국을 위하는 것은 수드 영지의 아르단테 가문밖에 없다고 할 정도로.

'혀에 침도 안 바르고 저런 말을.'

카를로의 속셈을 아는 나로서는 우스울 뿐이었다.

'눈가에 주렁주렁 매달린 탐욕은 지우고 말할 것이지.'

카를로는 더욱더 높아질 카인의 이름값, 더 나아가 자신이 노드 영지에 행사할 영향력을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어떻게든 미켈에게 빚을 지우고 싶을 테니까.'

미켈이라고 카를로의 그런 속셈을 모를 리 없을 터. 과연 카를로를 스치는 미켈의 눈길이 퍽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그런 거라면 저희 영지도...."

"저희는 마땅한 병력이 없어서. 그냥 곡식으로 지원하겠습니다."

다른 영주들도 슬금슬금 의견을 보탰다.

"나쁜 제안은 아닌 것 같군."

테오도어 황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예로부터 국경이 위험에 처했을 때, 다른 영지의 병력을 모아 지원군을 보내곤 했었으니."

그의 붉은 눈동자가 미켈을 담았다.

"허나 가장 중요한 것은 미켈 영주 본인의 의사일 터."

회의장 내 모든 사람들의 눈이 미켈을 향했다.

"...."

미켈은 상처 가득한 손으로 천천히 수염을 쓰다듬었다. 생각에 잠긴 듯 신중한 손길이었다.

어떤 선택이 영지를 위한 것인지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을 터였다.

"좋소."

이윽고 미켈이 입을 뗐다.

"각 영주들의 도움, 기쁘게 받아들이도록 하겠소."

카를로의 입가에 미소가 스치고, 다른 영주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단, 한 가지 사실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오."

그런 그들을 보며 미켈이 힘있게 못 박았다.

"내 손님맞이에 부족함이 없게 할 것이나, 손님의 예를 모르는 이에게까지 관용을 베풀진 않겠소."

요컨대, 몬스터를 토벌하는 것 외에는 욕심을 품지 말라는 경고였다. 특히 음흉한 속내를 품고 있을 카를로를 꼬집는 말이었다.

"오, 물론이외다."

카를로가 그윽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하지만 도움을 준 손님을 노드 영지에서 모른 척하지 않을 거라 믿소이다."

"그 손님이 과욕을 부리지 않는다면, 당연히 그러하지 않겠소?"

파직!

두 영주 사이에서 불꽃이 튀었다.

'두 사람은 여전하군.'

그 후의 상황은 일사천리로 흘러갔다.

"그렇다면 토벌전 일정은...."

"수확제가 끝나고 일주일 뒤 정도면 좋을 것 같군. 다른 영주들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할 듯 하니."

미켈의 대답에 보좌관이 마무리를 지었다.

"그렇다면 수확제가 끝난 후, 12월 초에 북부 몬스터 토벌전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미켈은 잠시 복잡스러운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그것을 떨쳐냈다.

"알겠소."

타 영지의 손을 빌리는 것이 내키진 않겠지만, 심상치 않은 추위가 그의 저울에 추를 얹은 듯 했다.

Chapter 16. 매가 약이다. (5)

'디에고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지.'

디에고, 그 양반은 죽는 한이 있어도 다른 이의 도움은 받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미켈에겐 지켜야 할 가족이 있었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끔찍하게 아끼는 제 딸도.

"이상으로 회의를 마칩니다.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

보좌관이 망치를 두드리는 것으로, 사흘에 걸친 귀족 회의가 끝났다.

"흐아아암."

시원하게 기지개를 켜면서 회의장을 나왔다. 주변을 살펴보니 다들 피곤한 얼굴로 비척비척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이거 가지고 저리 힘들어하다니.'

과연 집무실 책상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영주들다웠다. 그래도 지난 이틀에 비해서 훨씬 안색이 밝긴 했다.

"아이고.... 그래도 어찌저찌 끝나긴 했구려."

"오늘은 편히 놀고 먹고 마실 수 있을 것 같소."

"셋째 날 연회의 음식이 지금껏 나온 것 중 가장 훌륭하다지요?"

다들 옹기종기 모여 연회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내 신발 끝은 연회장이 아닌 바깥을 향했다.

"아벨 공자."

그런 나를 미켈의 목소리가 붙잡았다.

"미켈 영주님."

"혼자 가지 말고 같이 가도록 하세."

나는 그 자리에 멈춰서서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제안은 감사합니다만, 오늘은 어려울 것 같군요."

"음? 연회에서 빠지려는 것인가?"

미켈이 고개를 갸웃했다.

"오늘 자리는 다른 귀족들에게 눈도장을 찍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네. 그래서 다들 기를 쓰고 참석하려고 하지."

"눈도장은 이미 충분히 찍은 것 같습니다만."

"그건 그렇지. 확실하게 찍긴 했을게야."

미켈이 껄껄 웃고는 약간의 걱정이 섞인 말투로 말했다.

"정말 괜찮겠나? 황제 폐하께서 불쾌히 여기실 수도 있다네."

"저도 정말 참석하고 싶습니다만.... 어제 대련을 한 이후로 몸이 좀 좋지 않아서요."

아주 멀쩡한 팔을 주무르며 덧붙였다.

"근육통이 심하고 머리가 어지러운 것이, 아무래도 휴식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하하, 그랬나?"

미켈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것 치고는 혀가 잘 움직이던데."

몬스터 토벌전을 제안한 나를 꼬집는 한 마디였다.

"겨우 버틴 것이지요. 그렇지만 이제 한계라서, 연회장까지 가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실실 웃으며 팔을 붙잡고 엄살을 부렸다.

"혹여 황제 폐하께서 묻걸랑 미켈 영주님께서 잘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이렇게 된 데는 영주님의 탓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 대련을 누가 신청했는지는 잊은 모양이로군?"

미켈은 그리 말하면서도 더 이상 나를 붙잡진 않았다.

"그래, 그래. 이해하네. 젊은이들에게 이런 자리는 꽤 고역일 수도 있지."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실제로 오늘 자리는 꽤 고역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비올렛 황녀가 올 테니까.'

그 천방지축 황녀가 무슨 흉계를 꾸미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특히 오늘처럼 많은 귀족이 자리한 곳에서.

카인의 약을 올리는 것도 좋았지만 황녀가 귀찮은 것도 사실이었다. 게다가 처리해야 할 일이 많이 밀려 있기도 했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게."

되돌아서는 나를 미켈이 붙잡았다.

"앞으로의 일정이 어찌 되나?"

"정확하게 말씀드리긴 어렵지만, 수확제 전까진 꽤 바쁠 것 같습니다."

"그렇군. 하긴 수도에 왔으니 이래저래 할 일이 많을 테지."

"아무래도 그렇죠."

그가 생각한 할 일과 내가 생각한 할 일엔 큰 차이가 있지만, 일단은 수긍해주었다.

"그럼 수도에는 언제까지 머무를 건가? 수확제엔 참여할 테지?"

"물론입니다. 토벌전 전까지 쭉 수도에 있을 예정입니다."

"호오."

미켈이 의외라는 듯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영지로 돌아가지 않을 건가 보군. 디에고가 그걸 허락하겠나?"

"아버지께서는 제 뜻을 존중해주실 겁니다."

사실은 말을 안 해서 존중이고 나발이고 없을 테지만.

"아무튼 좋은 소식이군. 나도 당분간 수도에 있을 예정이라네."

미켈이 빙그레 웃으며 나를 떠나갔다.

"조만간 연락하지. 차나 한 잔 하세."

그런 그의 뒤로 한 무리의 귀족들이 뒤따랐다.

"흠흠."

이어서 카를로와 카인의 무리가 내 옆을 지나쳤다. 그들의 찌릿한 시선이 등골을 간질였다.

"흥."

코웃음 한 번 치곤 자리를 벗어났다.

시종을 부르지도 않고 느긋하게 걸어 본관을 나왔다. 지난 사흘간 잘 타고 다녔던 마차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출발하세."

곧장 출발해 성문을 향해 나아갔다. 도열해 있던 경비병들이 마차를 확인하곤 문을 열었다.

그 순간, 성문 밖에서 내가 잘 아는 누군가가 보였다.

"정말입니다. 정말로 도련님께서...."

"본인의 확인 없이는 들여보낼 수 없소. 여기서 기다리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마차 덧창을 열고 마부에게 명령했다.

"잠깐 멈추게."

성문에서 마차를 세운 뒤 창문을 열었다.

"어이."

내 부름에 성문 옆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필립이 고개를 들었다.

"도련님!"

나를 확인한 그가 벌떡 일어섰다.

"아이고, 머리야."

갑자기 일어선 것에 어지럼증을 느꼈는지 처량한 신음이 이어졌다. 비틀거리며 내게 다가오는 그를 경비병이 뒤따랐다.

"오."

그를 기억해냈다. 요나스와 실랑이를 하느라 고생했던 바로 그 경비대장이었다.

"오늘도 수고가 많군."

"감사합니다."

경비대장이 경례를 붙이곤 말을 이었다.

"이 사람이 아벨 님을 꼭 만나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정말 아는 사람이 맞습니까?"

그의 날카로운 눈이 필립을 위아래로 훑었다.

"앞선 일이 있어 섣불리 들여보내지 않고 여기 머무르게 했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잘했네."

황궁은 한낱 평민의 신분증으론 들어설 수 없는 곳이었다. 보통의 귀족도 용건이 있지 않은 이상은 들락날락할 수 없었다.

"그리 경계할 건 없네. 우리 킨드리얼 가문의 집사니까."

그제야 경비대장이 눈에 들어간 힘을 풀었다.

"그렇습니까? 어째서 같이 오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속도를 즐기는 편이라. 먼저 오고 천천히 뒤따라 오게 했었지."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거짓말을 하는 나를 필립이 뜨악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는 곧 내 시선을 느끼고 얼른 눈을 내리깔았다.

"아무튼, 수고가 많았네. 내 지난 일은 깨끗이 잊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경비대장을 물러서게 하고는 필립에게 손짓했다.

"가까이."

필립이 주춤거리며 창문에 바짝 붙었다.

"도련님."

비교적 옷은 말끔해졌지만, 어젯밤보다 안색이 더 나빴다. 밤새 내가 시킨 일을 해내느라 고생한 모양이었다.

물론, 그의 안쓰러운 모습에도 동정심 따위는 전혀 들지 않았다.

"요나스는 왜 없는 거지?"

날카로운 질책만이 튀어나갈 뿐.

"아, 그게...."

"설마 못 찾은 건가?"

"아, 아닙니다요! 그게 아닙니다!"

필립이 진땀을 흘리며 변명했다.

"찾긴 찾았습니다만, 그게 도저히 여기 올 상태가 아니라...."

"그게 뭔 소리야?"

내 의문은 필립이 안내한 숙소에 간 후에야 풀렸다.

❖ ❖ ❖

"음냐음냐...."

허름한 여관의 작은 방. 싸구려 침대 위에 곯아떨어져 있는 요나스를 본 후에야.

"아오, 냄새."

침대에 널브러져 있는 그에게서 고약한 냄새가 났다. 술과 싸구려 안주, 거기에 오랫동안 씻지 않아 나는 냄새 등등.

그뿐이랴.

"이건 또 뭐야?"

침대 옆에는 그가 그동안 해치운 술병들이 굴러다녔다. 대충 생김새만 봐도 엄청나게 독한 술들 뿐이었다.

"그, 그것이...."

송구스럽다는 듯 서 있던 필립이 설명했다.

"제가 찾았을 땐 또 술을 한창 마시고 있던 참이라.... 절 보더니 술병을 내던지며 패악을 부리길래 겨우 도망쳐 나왔습니다."

그 말대로 문가 옆에는 깨진 술병 조각이 흩어져 있었다.

"아이고...."

필립은 그런 요나스의 모습을 차마 눈뜨고 못 보겠다는 듯 연신 한숨을 흘렸다.

하긴,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지금 침대에서 드르렁 드르렁 코를 골고 있는 저 주정뱅이가, 오베스트 기사단의 촉망받는 유망주 요나스 클라인이라는 것을.

불과 몇 주전만 해도, 눈을 반짝이며 영주의 인장을 받아 말을 몰았던 사내는 이제 구제할 수 없는 거렁뱅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쯧쯧."

혀를 차며 침대로 다가갔다.

"도, 도련님. 지금 뭐하시려는...."

필립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촤악!

탁자의 물컵을 들어 요나스의 얼굴에 뿌렸다.

"우푸푸풋!"

요나스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야?! 어떤 새끼야?!"

대뜸 걸쭉한 욕설을 내뱉는 요나스의 모습은 전혀 기사답지 않았다. 누가 보면 저잣거리에 뒹굴던 불량배라고 해도 믿을 모습이었다.

"도대체 누... 응?"

정신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요나스의 얼굴이 멈추었다.

"너, 너는?"

요나스의 푸른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 아래 땟국물이 배어난 누런 수염도 덩달아 씰룩였다.

"아, 아벨 킨드리얼?"

얼씨구. 이제 막 내 이름을 부르네?

뭐라고 한 마디 하려는 순간,

"으아아악!"

요나스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내게 돌진했다.

"아벨 킨드리어어얼!"

지독한 한이 맺힌 절규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부웅!

요나스의 주먹이 온 힘을 담아 내 얼굴로 향했다.

"쯧쯔."

물론, 한숨이 나올 정도로 느린 주먹이었다. 술과 잠이 덜 깬 탓에 정확하지도 않았다.

이런 공격은 눈 감고도 피할 수 있었다. 대충 한 발을 옮겨 피하자,

"우아악!"

요나스는 달려가던 자세 그대로 고꾸라졌다.

우당탕!

옷장과 그의 얼굴 사이에 진한 입맞춤이 이루어졌다.

"요, 요나스 경!"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필립이 입을 떡 벌렸다.

"우으윽...."

요나스가 얼굴을 훔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륵.

그의 코 아래로 피가 주륵 흘러나왔다. 하지만 방금의 충격도 요나스의 정신을 차리게 하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이 자식이...!"

도리어 그의 화를 부채질했을 뿐.

"얼씨구."

이젠 이름도 아니고 이 자식, 저 자식이라. 아무래도 정신교육이 필요할 듯했다.

"아벨 킨드리어얼! 너 때문에 내가!"

요나스의 콧구멍이 벌렁거릴 때마다 피가 울컥 흘러나왔다.

"죽인다!!!"

요나스가 괴성을 지르며 내게 다시 덤벼들었다.

"역시 매가 약이지."

피식 웃으며 피하는 대신 그 자리에 버티고 서 있었다.

"도련님!!"

필립이 비명을 지르고,

"아베에엘!"

요나스의 우악스러운 손길이 내 멱살을 향하는 순간,

빡!

요나스의 이마에 강렬한 딱밤이 작렬했다.

"크, 크헉...."

요나스가 이마를 감싸 쥐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이, 이 자식이!"

처맞으면 정신을 차릴 줄 알았건만.

웬걸 요나스는 엉덩이를 맞은 황소처럼 더욱 날뛰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딱밤으로는 약효가 부족했던 모양이다.

"다 네가 자초한 거다."

히죽 웃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감히!!"

눈이 뒤집혀 달려드는 요나스를 향해 휘둘렀다.

꽝!

사람의 몸이 언제 회전할까? 춤을 출 때? 바닥에서 미끄러졌을 때?

아니다.

사람의 몸은, 이마에 주먹을 맞았을 때 빙글빙글 돌아간다.

"꾸에엑!"

요나스의 몸이 뱅글뱅글 돌며 날아갔다.

쿠당탕!

그리고 바닥에 부딪힌 후에야 멈추었다.

"...."

꿈틀거리던 요나스의 몸이 픽 늘어졌다.

"히이익!"

필립이 입을 가리며 비명을 내질렀다.

"죽, 죽었어?!"

"안 죽었어."

과장이 심하군.

혀를 쯧쯧 차며 팔짱을 꼈다.

"힘 조절했으니까 걱정마라."

"하지만 굉장한 소리가 났는데...."

"원래 소리가 요란한 딱밤이 덜 아프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었지만. 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일으켜 세워."

"예? 요나스 경을요? 지금요?"

"그럼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 바빠 죽겠는데."

필립이 잔뜩 울상을 한 채 요나스에게 다가갔다.

"끄으으응."

그는 요나스를 붙잡아 일으키는 것만으로도 힘겨워 보였다.

기사라 덩치가 좋은 데다, 술까지 마셔 푹 늘어졌으니 두 배는 무거워졌을 테니까.

'아, 진짜 혼자 보기 아까운 광경이네.'

그 모습을 보며 키득키득 웃다가 슬쩍 일어섰다.

Chapter 16. 매가 약이다. (6)

아래층에 다녀온 뒤 다시 문을 열었다.

"헉, 헉. 아이고 죽겠다."

필립은 겨우 요나스를 의자에 앉히는 데 성공한 참이었다.

그의 주름진 이마 위로 땀이 비 오듯이 흘렀다. 잠깐 사이 격렬한 달리기라도 한 듯한 몰골이었다.

"도도련님? 어디 갔다가...."

다시 돌아온 나를 확인한 필립의 입이 벌어졌다.

"그 밧줄은 대체...."

"뭐하긴."

내가 아래층에서 구해 온 것은 엄청난 굵기의 밧줄이었다.

"밧줄을 뭐 하는데 쓰겠어? 보면 모르나?"

키득거리며 필립에게 밧줄을 던졌다.

"묶어."

"예? 뭐, 뭐를...."

"뭐라니, 누구라고 해야지."

대답 대신 턱짓으로 상대를 가리켰다. 내 턱이 향하는 방향을 본 필립이 대경실색했다.

"예? 요나스 경을 무무, 묶으라고요?"

"어. 거기 침대 헤드에다 단단히 묶어."

코를 움켜쥐며 인상을 찌푸렸다.

"저 자식 냄새나서 가까이 가기 싫어. 그러니까 네가 해."

"하지만 기사님을 제가 감히...."

"향초도 갖다줬으면서 이제 와서 내숭은."

대놓고 빈정거리자 필립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리고 지금 저 꼴은 기사라고도 하기 민망할 수준이니까 빨리해라."

더 재촉하는 대신 의자에 털썩 앉았다. 한쪽 다리를 꼬고 앉은 뒤 필립을 지긋이 바라보기 시작했다.

"...으으."

필립이 밧줄을 주워들며 앓는 소리를 흘렸다. 그리고 울며 겨자먹기로 요나스를 꽁꽁 묶기 시작했다.

잠시 뒤.

"오, 제법인데."

나는 신이 나서 손뼉을 쳤다.

"어디서 밧줄 묶는 법이라도 배웠나? 솜씨가 수준급이야."

필립은 의외의 곳에서 재능이 있었다. 바로 코끼리가 와도 끊지 못하게 매듭을 단단히 묶는 재능이.

만족스레 웃으며 턱짓했다.

"이제 깨워."

"예?"

"한 번만 더 그 멍청한 '예?' 소리하면 네 입에 밧줄을 쑤셔 박아주지."

다시 말해주는 대신 사납게 윽박질렀다. 필립은 침을 꿀꺽 삼킨 뒤 몸을 돌렸다.

"요나스 경, 요나스 경!"

요나스는 필립이 한참 동안 흔들고 때리며 야단법석을 피운 후에야 눈을 떴다.

"으, 으으...."

잠깐 사이 그의 이마는 한가운데가 시퍼렇게 부풀어 있었다. 저 속에 뼈가 하나 더 들어있다고 해도 믿을 수준이었다.

"어지러워...."

암, 어지럽겠지. 내 꿀밤도 꿀밤이지만, 저렇게 많은 술을 퍼마셨으니 머리가 안 아프면 그건 이미 죽은 놈일 거다.

"내가 왜...."

느릿하게 눈을 끔벅이던 요나스가 나를 발견했다.

"아벨 킨드리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려고 했지만,

"욱!"

밧줄에 꽁꽁 묶인 몸은 그의 의지를 배반했다.

"이게 뭐야?!"

요나스는 그제야 제 몸이 밧줄에 꽁꽁 묶였다는 것을 알아채고 발끈했다.

"이게 무슨 짓이오?! 당장 풀지 못하겠소?!"

그는 온몸이 결박된 상태에서도 펄펄 날뛰었다. 저러다 침대가 부서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아벨 킨드리얼! 당장 이것 푸시오!"

"...."

"감히 오베스트 기사를 이런 식으로 대하다니! 아무리 영주님의 아들이라도 이런 모욕은 용납할 수 없소!"

그의 눈동자는 아직 사라지지 않은 술기운을 원료로 거세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아주 뜨겁게, 활활.

그는 멀찍이 서 있는 필립은 발견하지 못하고, 나에게만 분노를 퍼부었다.

"감히 오베스트 기사단의 기사인 나를 그딴 식으로 대하고도 괜찮을 줄 알았소? 이번 일을 디에고 단장님께서 아신다면 경을 치실 거요!"

아무래도 요나스의 머릿속에서 나라는 존재는 불구대천의 원수가 된 모양이었다.

하긴 계속해서 똥개 훈련 시키듯 따라오게 한 것도 있고. 황궁 입구에서 그렇게 문전박대를 당했으니 앙심이 쌓이지 않을 수가 있나.

"아, 그러냐?"

피식 웃으며 의자에서 일어나 요나스를 향해 걸었다.

"아벨 킨드리얼! 지금 당...."

침까지 튀겨가며 움직이던 요나스의 입은,

"헉!"

내 손이 제 이마에 다가가는 순간 멈추었다.

정신없이 만취해 있던 와중에도, 제 이마를 사정없이 가격한 그 손을 기억하는 듯했다.

"자, 잠깐! 잠깐만!"

요나스가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뒤로 물렸다.

"아직 못 차린 게 확실하네. 말이 짧은 걸 보니."

내 중지와 엄지가 모여 둥그런 원을 만들었다.

땅!

요나스의 얼굴이 뒤로 튕겨 나갔다.

"으아악!"

당장이라도 이마를 부여잡고 싶었겠지만 팔이 꽁꽁 묶여 있어 그마저도 불가능했다.

"끄으윽...."

요나스가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았다. 이미 그의 눈가엔 눈물이 찔끔 맺혀 있었다.

"아직 참을만 한가봐?"

히죽 웃으며 다시 손을 가져다 댔다. 중지와 엄지를 모아 원을 만들고 천천히 흔들었다.

"괜찮아. 시간은 많으니까."

"자, 잠깐. 지금 나한테...."

"몇 대 더 맞고 나면 정신을 확실히 차릴 수 있을 거야."

따앙!

"아아악!"

요나스가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질렀다. 순식간에 그의 얼굴로 피가 확 몰렸다.

"으으, 으으으...."

잔뜩 구겨진 그의 얼굴은 이마의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 대강 짐작할 수 있게 해주었다.

'머리가 쪼개지는 느낌일 거다.'

도적단 두목을 대상으로 연습한 결과, 상대를 가장 아프게 때릴 수 있는 기술을 터득했다.

손목의 스냅을 이용하되, 가장 단단한 부분에 힘을 집중하여 단번에 가격하는 것.

이제 나의 딱밤은 예술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조금 더 연습하면 이걸로 사람도 죽이겠는데?'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요나스는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큿...."

그의 목울대가 거칠게 일렁였다. 치미는 울분과 고통을 참기 위한 격렬한 몸짓이었다.

그런 그를 향해 빙그레 웃어보였다.

"내가 누구지?"

요나스는 이를 악문 채 나를 노려보았다. 그간 쌓인 한과 오기가 눈 속에서 들끓었다.

"다시 묻겠다. 네 앞에 있는 내가, 누구지?"

"...."

"입을 맞은 것도 아닌데 왜 말을 못해?"

키득거리며 서서히 손을 그의 입가로 가져갔다.

"큿!"

요나스가 얼굴을 홱 틀었지만 소용없었다. 그의 입가에 손을 바짝 붙이고 일정 거리를 유지했다.

"내가 묻잖아, 어?"

마지막 기회라는 듯, 내 목소리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요나스 클라인."

서리가 내려앉듯, 주변의 공기가 내 심기를 따라 얼어붙었다. 요나스가 이마의 고통도 잊은 채 숨을 죽였다.

"...아벨 오베스트, 킨드리얼님입니다."

마침내 그의 입술 새로 한풀 꺾인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와 동시에, 요나스는 현실을 뼈저리게 깨달았을 것이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지금 제 앞에 있는 것이 자신이 섬기는 영주의 아들이라는 것을. 아무리 화가 나고 속이 터져도 넘어서는 안 될 선이 있다는 것을.

"제가 술에 취해서 그만....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꿈이라고 착각했습니다."

"꿈에서라도 날 그리 패고 싶었나 보지?"

"...아닙니다."

마지못해 대답하는 요나스의 어깨가 치욕과 분노로 파르르 떨렸다.

"흐음."

놀리는 건 이쯤 해둘까.

내가 천천히 손을 거두자, 요나스가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그래도 이건,"

뭐라고 말하려던 그는 내 손가락이 움직이자마자 반사적으로 입을 멈추었다.

"이건, 뭐?"

"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편히 말씀하십시오."

역시 매 앞에 장사 없다.

그 자존심 강한 기사도, 악명 높은 도적단 두목도 꼬리를 내리게 만드는 것은 철저한 폭력뿐이었다.

"그래. 궁금한 게 많겠지."

빈 의자를 끌어와 요나스의 앞에 털썩 앉았다. 요나스가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일단 이것부터 대답해 주십시오. 어떻게...."

"누가 대답해 준 댔나?"

그렇게 요나스를 꿀먹은 벙어리로 만든 뒤 필립에게 손짓했다.

"이쪽으로."

필립은 머뭇머뭇하다가, 내가 낮게 혀를 한 번 차자 후다닥 달려왔다.

"당신...!"

요나스는 그제야 필립을 알아채곤 경악했다.

"집사, 설마 당신이...,"

필립이 송구하다는 표정으로 시선을 피했다. 그런 그를 보며 요나스는 기가 막혀 했다.

"영지에서 내 뒤통수를 친 것도 모자라, 여기까지 와서 사람을 물 먹이다니!"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사정은 무슨, 내가 집사 당신 때문에-!"

"그만, 그만."

나는 손을 휘휘 저어 두 사람의 말싸움을 막았다.

"같이 가야 하는데 벌써부터 싸우지 마라."

"예? 그게 무슨...."

요나스의 의문을 무시하고 필립에게 손짓했다.

"종이랑 펜 가져 와."

"예, 도련님."

필립은 곧장 내가 말한 것을 구해와 책상 앞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내 옆에서 다음 명령이 내려지길 대기했다.

꼭 오베스트 영지의 집무실에서 일할 때 같았다.

"허, 허허. 허허허."

너무나 쿵짝이 잘 맞는 우리를 보며 요나스는 기가 찬 듯 헛웃음을 흘렸다.

"대체 누구의 집사인 건지...."

일단 펜을 잉크병에 푹 담갔다.

"어디 보자.... 뭐라고 시작하면 좋을까."

입술을 한 번 핥은 뒤, 종이에 일필휘지로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버지께.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공사다망하신 아버지를 위해, 부러진 팔을 부여잡고 영지를 떠난 지 어언... 음? 얼마나 지났더라?]

한동안 방 안에는 종이 위로 펜이 왔다 갔다 하는 소리만이 흘렀다.

"저, 도련님."

문득 요나스가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이 밧줄 좀 풀어...."

"닥치고 있어."

"...예."

대충 편지도 거의 다 썼겠다, 마지막으로 한번 쭉 훑어보았다.

[...해서, 조만간 즐거운 소식을 전해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곧 올 공문에서 확인해 주십시오.]

"음, 그것도 써야겠네."

마지막으로 펜을 잉크에 적신 뒤, 빠르게 휘갈겨 썼다.

[추신. 카를로 영주를 놀려먹는 건 꽤 재밌었습니다.]

"좋아."

편지를 탁탁 접은 뒤 봉투에 넣고 필립에게 건넸다.

"아버지께 가져다 드려."

필립은 의아한 얼굴을 하면서도 두 손으로 공손하게 편지를 받았다.

"웬 편지를...."

필립을 향해 스산하게 웃어 보였다.

"아버지께서 편지를 먼저 주셨으니, 답장을 드리는 게 자식의 도리 아니겠나?"

필립이 얼굴에 밴 식은땀을 슬쩍 닦아냈다.

"예, 예.... 알겠습니다, 도련님."

품속에 편지를 집어 넣던 그가 흠칫 멈추었다.

"잠깐, 방금 그 말씀은... 같이 안 가신다는 뜻입니까?"

"그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황당하다는 반문이 요나스에게서 터져 나왔다. 그런 요나스를 깨끗이 무시하며 필립에게 말했다.

"요나스랑 같이 영지로 귀환해라."

"네? 하지만...."

"하지만이고 자시고. 혼자 가다가 도적한테 홀랑 털리지 말고."

내 말이 끝나자 필립이 수치심으로 물든 얼굴을 푹 숙였다. 그런 필립에게서 할 말이 많은 듯한 표정을 하고 있는 요나스에게 시선을 옮겼다.

"너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여기 남아서 할 일도 없잖아? 회의도 끝난 마당에."

요나스의 낯에 다시 울컥 화가 치밀었다.

"그건 도련님께서...."

"무의미한 말 그만하고. 계속 내 탓 해봤자 달라지는 게 있나?"

"...."

"이미 네 임무는 실패했고, 그렇다면 최대한 아버지의 화를 덜 사는 쪽으로 고민하는 게 더 나을 거다."

머리를 톡톡 두드리며 덧붙였다.

"머리를 쓸 거면 그런 데다 쓰라고."

의자에서 휙 일어나 나갈 채비를 했다. 필립이 엉거주춤 일어섰다.

"벌써 가십니까?"

"바빠. 누구 몸에서 나는 냄새 때문에 머리도 아프고."

"도련님 말씀대로 회의도 끝났는데 수도에서 뭘-"

"하냐고?"

키득 웃으며 휙 돌아섰다.

"나야 할 일은 많지."

여관 방 문고리를 잡고 돌리며 뒤를 흘낏 보았다.

"아 참."

품속의 돈자루를 툭 쳐서 짤그랑 소리를 냈다.

"딸한텐 소식 잘 전해주지."

"-!"

멍하니 서 있던 필립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도, 도련-"

쿵.

문을 닫자 필립의 다급한 목소리가 끊겼다.

'환상의 콤비겠군.'

어깨를 으쓱하곤 여관 밖으로 걸어 나갔다.

Chapter 17. 먹음직스러운 미끼를 던진다.(1)

벌컥.

습관처럼 노크도 없이 선술집의 문을 대뜸 열고 들어섰다.

"...!"

카운터에 앉아 있던 윌리엄이 눈을 크게 떴다. 그는 닦고 있던 접시를 내려놓고 급하게 달려왔다.

"어서 오십시오, 주인님."

그러고 보니 태도가 달라졌군.

어젠 경황이 없어서 못 알아챘는데, 윌리엄의 말투는 몹시 깍듯했다. 마치 엘리체를 대하듯.

"엘리체는?"

"안에 계십니다."

대답을 마친 윌리엄이 슬그머니 내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 망설이는 말투로 물었다.

"오늘은 심기가 괜찮으신지...."

그의 낯엔 아직 채 가시지 못한 불안감이 맴돌았다.

음. 생각해 보니 어제 너무 막무가내로 들이닥치긴 했지. 하지만 레퀴엠이 미쳐 날뛰는 통에 이성을 유지할 겨를이 없었다.

"내 기분이 그렇게 나빠 보이나?"

턱짓하며 묻자 윌리엄이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그래. 그럼 안쪽에다 알려. 오늘은 노크할 시간 정돈 주지."

오만한 말투에도 불구하고, 윌리엄은 표정 변화 없이 묵묵히 앞섰다.

그 점이 내가 그를 마음에 들어 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나는 조용히 일 잘하는 부하가 좋다.

똑똑.

윌리엄이 안쪽 방의 문을 두드린 뒤 말했다.

"엘리체님, 윌리엄입니다. 주인님께서 오셨습니다."

윌리엄의 말이 끝나자마자,

와장창! 쨍그랑!

[악!]

방 안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윌리엄은 방 앞을 가로막듯 서서 고개를 숙였다.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들어오시라고 해.]

방 안에서 엘리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금까지 언제 그런 요란한 소리가 났냐는 듯 몹시도 차분한 음성이었다.

끼익.

윌리엄이 문을 열어주고는 고개를 숙였다.

"곧 차를 대령하겠습니다."

"그래."

대충 대꾸해주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정갈한 분위기, 손때 묻은 소박한 가구와 양쪽 벽면의 책장에 가득 찬 책들.

방 안은 어제 본 풍경과 비슷했다. 다만 어제는 엘리체가 무기를 들고 뒤에 꼬맹이를 숨기고 있었다면.

"오셨습니까?"

오늘은 비교적 침착하게 책상에 앉아 있다는 점이 달랐다.

"어서 오십시오, 주인님."

엘리체는 책상 위에 두 팔을 올린 채 사무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입꼬리가 움찔움찔 떨리는 것으로 보아, 방금까지 아주 바쁜 시간을 보냈던 것 같았다.

"흐음."

코를 몇 번 킁킁거린 뒤 물었다.

"일과 중에도 술을 마시나?"

"아니 그건 어떻...."

반사적으로 대답했던 엘리체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윽고 그녀가 살짝 붉어진 얼굴로 대답했다.

"약주입니다, 약주. 이 정도는 음료수에요."

"확실히. 이 정도 도수라면 취할 정도는 아니겠군."

"어떻게 거기까지...?"

엘리체가 휘둥그레 커진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물론 책상 위-그녀가 방금 치운-엔 서류 외엔 전혀 술의 흔적이 없었다.

"냄새가 나더라고."

하지만 내 예민한 후각은 방금 그녀가 술을 엎었으며, 와인 잔을 깨뜨렸다는 것을 읽어냈다.

또 책상 위는 전부 닦았지만, 그 옆 서류 한 귀퉁이에 튄 몇 방울이 남아있다는 사실도.

그 모든 게 이 방에 들어온 지 몇 초도 되지 않아 이루어졌다.

"후각이... 정말 뛰어나시군요."

엘리체가 떨떠름한 얼굴로 대꾸했다. 개코 같다는 말을 하려다 삼킨 듯했다.

"일단 들어오시지요."

그리 말하면서도 그녀는 아직 처리 못한 게 있는지 주변을 살피느라 바빴다.

"-!"

엘리체가 서류 귀퉁이의 붉은 자국을 발견하곤 슬쩍 팔로 가렸다.

"이미 다 봤으니까 가리지 마."

내 일침에 엘리체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죄송합니다. 연회까지 즐기고 좀 더 늦게 오실 줄 알았습니다."

"아냐, 뭐 어때? 엘리체 네가 그 정도 술로 취할 위인도 아니고."

어깨를 으쓱한 뒤 다가가 엘리체의 책상 앞에 털썩 앉았다.

"향이 좋던데. 나도 한 잔 줘."

엘리체는 내가 자신을 책하지 않자 내심 놀란 눈치였다. 잠깐 고민하더니 책상 밑에서 슬금슬금 잔과 병을 꺼내 들었다.

"이번에 어렵게 구한 에스트산 와인이라...."

"그래, 좋은 술은 나눠 먹으면 더 맛있지."

마침 윌리엄이 차를 준비했는지 방문을 두드렸다.

"실례하겠습니다."

"윌리엄. 미안한데 안주로 바꿔 와주겠어?"

엘리체의 말에 윌리엄은 군말 없이 허리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되돌아나간 그가 돌아왔을 땐 와인에 먹기 좋은 안줏거리를 든 채였다.

"고마워, 윌리엄."

"아닙니다."

그렇게 간단한 술상이 차려진 뒤.

"사실, 이건 주인님께 드리려고 준비한 와인입니다."

엘레체가 어렵게 입을 뗐다.

"그랬나?"

"예. 두 병을 구했는데 맛이 어떤지 확인하던 참이었습니다."

엘리체의 눈이 내 얼굴을 주의 깊게 살폈다.

"어젠 많이 놀랐습니다. 주인님께서 그리 화가 나신 모습은 처음 보아서...."

엘리체가 내 잔에 와인을 따르며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제가 무슨 실수를 했는지요?"

잔을 내려놓고 엘리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엘리체가 내 시선을 오해했는지 더욱 깊게 고개를 숙였다.

"어제 그리 가신 이후로 쭉 고민해봤지만 도통 짚이는 곳이 없어서.... 말씀해주신다면 즉시 시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나 보군. 하긴 어제 갑자기 들이닥쳐 그 난리를 쳤으니 오해할만했다.

내 화를 풀려고 비싼 와인까지 준비한 모양이다.

"그냥 좀...."

내 안에서 만족스레 코를 골고 있는 레퀴엠을 한번 노려본 뒤 말했다.

"좀, 골치 아픈 일이 생겼던 것뿐이다."

"서류에 문제라도?"

"전혀. 네 서류는 훌륭했어."

와인 병을 들고 엘리체의 빈 잔에 와인을 따라주었다.

"-!"

엘리체가 눈을 크게 떴다. 방금 내 행동이 일반적으로 주인 된 자가 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난 기분이 무척 좋으니까.

"수고했어, 엘리체. 덕분에 회의에서 좋은 결과를 얻었다."

가득 찬 내 잔을 집어든 뒤 엘리체를 향해 내밀었다.

"와인 향이 좋군. 같이 들지."

옅은 미소를 입가에 그리자,

"아."

엘리체는 잠시 내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 웃으실 때마다 꼭...."

"뭐가?"

"아뇨, 아닙니다."

엘리체가 잠시 가슴에 손을 얹었다가, 천천히 내려놓았다.

"도움이 되었다니 기쁩니다. 안 그래도 여기저기서 소문이 밀려 들어오더군요."

"벌써?"

"역시 주인님이시다 싶었습니다. 이번 회의 결과가 빠르게 여기저기 공유되고 있어요."

엘리체의 푸른 눈동자가 빛깔과는 다르게 열정적으로 빛났다.

"늦어도 모레면 제국 전역에 퍼져 있을 겁니다. 엄청난 일을 해내셨어요. 역시 주인님이십니다."

"음."

이렇게 코앞에서 금칠하는 걸 듣고 있자니 썩 기분이 나쁘진 않군.

더 해보라는 듯 고갯짓을 했다. 눈치 빠르게 내 뜻을 이해한 엘리체가 열심히 입을 놀렸다.

"그날 카를로 아르단테가 어찌나 이를 갈았던지, 조만간 치의사를 찾을 거라는 소문이 돌 정도였습니다."

"흐음."

"미켈은 또 어떻고요. 북부의 그 노호가 그토록 관심을 가진 상대는 실로 드물었습니다. 거기다 놀라운 검술 실력까지 선보이셨다니. 아마 그날 귀족들은 더 이상 벌릴 입이 없었을 것입니다."

...엘리체, 이 여자. 이제 보니 칭찬에 소질이 있군.

역시 길드를 운영하는 사람은 혓바닥부터 달랐다. 하는 말 하나마다 어찌나 심금을 울리는지 가슴이 웅장해질 지경이었다.

"게다가 제 1황녀, 비올렛 마기오레 임페로 마저 주인님께 관심이 있다는 소문이 돌던데요. 사실입니까?"

"...잠깐, 뭐라고?"

칭찬을 즐기던 것도 멈추고 으, 소리를 냈다.

"거기서 그 황녀 이름이 왜 나와?"

"아닌가요? 하지만 소문으로는 조만간...."

"절대 아니니까 그런 끔찍한 소리는 하지 마라."

엘리체가 눈을 깜박이더니 이내 다행이라는 듯이 웃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주인님께서 시키신 일은 모두 처리해 두었습니다."

"좋아. 하지만 이것부터."

와인을 한 모금 마신 뒤 다음 용건으로 넘어갔다.

"어제 알려준 도적단 말인데."

"네."

"일단은 다 죽었다."

엘리체의 얼굴에 동요가 번졌다.

"...어떻게요?"

"내가 죽였으니까."

엘리체는 잠시 말을 잃은 듯 침묵하다가, 이내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주인님께서 그러셨다면 분명 이유가 있었겠지요."

한 치의 의심조차 없는 군건한 말투였다. 그녀의 바람직한 변화에 몹시 흡족했다.

"근데 그 놈들, 정체 모를 누군가의 의뢰를 받고 움직이고 있더군."

엘리체의 눈빛이 변했다.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루비노, 자피로 등 보석을 다루는 상단을 습격하라는 지령을 받았다고 한다. 이곳을 공격해 이득을 얻을 자가 누구일까?"

"거기라면...."

엘리체가 입을 감싸쥔 채 생각에 잠겼다.

"-아."

이윽고 엘리체의 눈이 반짝 빛났다.

"마레 길드로군요."

"이유는?"

엘리체는 자신이 결론에 도달한 과정을 빠르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말씀하신 상단들은 보석 중에서도 사파이어, 루비 등을 주로 다룹니다."

"붉고, 푸른 보석들...."

중얼거리던 나 또한 엘리체와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그렇군."

마레 길드, 즉 수드 가문의 특산품은 푸른 진주와 붉은 산호다. 시장에서 사파이어, 루비 등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경쟁 상품의 공급 악화."

"아무리 수요가 있다고 한들, 공급이 따라주지 못하면 소용없으니까요."

그렇게 경쟁 업체의 팔다리를 잘라낸 뒤, 그 자리에 자신들의 푸른 진주와 붉은 산호를 밀어넣은 것이다.

"어쩐지...."

엘리체가 느릿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수드 영지의 특산품이 자리를 잡는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다고는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너무나 기가 막힌 타이밍에 다른 보석들의 공급이 줄었고요."

엘리체의 말을 들으며 턱을 툭툭 두드렸다.

'마레 길드의 수장, 로웰의 짓이겠군.'

원작에서는 그가 수드 가문을 위해 온갖 더러운 일을 서슴지 않았다고만 묘사했다. 정확하게 어떤 일을 했었는지는 나오지 않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카인이라는 후광에 가려져 드러나지 않았다. 그저 카인이 빛나기 위한 재료로 쓰인 뒤 사라졌을 뿐이었다.

'카인이 수도 주변의 도적단을 싹쓸이하는 내용이 있었는데.'

카인의 정의로움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 뒤엔 이런 속사정이 숨어있었다.

도적단으로 추잡한 뒷공작을 벌인 뒤 카인이 직접 제거하게 한다. 카인의 이름을 드높이는 한편, 뒤처리까지 완벽하게 해낸 것이다.

그야말로 알뜰살뜰한 도적 사용법이었다.

'이런 배경이 있었다니.'

풋, 하고 조소가 흘러나왔다.

카인을 뒷받침해줬던 단단한 바닥이, 사실은 아주 얇고 얇은 얼음장이라는 것을 알게 된 기분이었다.

"좋아."

와인 잔을 비워낸 뒤 탁 내려놓았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정해진 것 같군."

엘리체 또한 잔을 내려놓고는 진지한 얼굴을 했다.

"말씀하시지요."

"앞으로 벌어들이는 모든 자금은 루비, 사파이어 등을 구매하는 데 쓴다. 지금껏 수드 영지의 특산품에 밀려 빛을 보지 못한 보석들은 전부."

차분하지만 자신감 있는 말투로 말했다.

"모두 원석으로 사들이도록 해. 마침 가격도 그리 높지 않으니 할만하겠지."

"그 다음엔요?"

"팔아야지, 아주 비싸게."

엘리체의 미간이 슬쩍 찡그려졌다.

"쉽지 않을 겁니다. 현재 보석 및 사치품 업계는 수드 영지가 꽉 잡고 있습니다."

"그랬지."

"그렇다고 저희가 마레 길드의 운송 마차를 습격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럴 필요 없어."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조만간, 수드 영지에서 산호와 진주의 씨가 마를 테니까."

"네?"

엘리체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Chapter 17. 먹음직스러운 미끼를 던진다. (2)

"어떻게 그리 단언하시는 겁니까?"

"영업 비밀."

짤막한 대꾸에 엘리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차피 그녀에겐 설명해도 이해 못 할 일이었다.

'여름의 검, 카덴차 때문이니까.'

카덴차는 이미 수드 영지에 있는 한 섬에 강림해 있다. 예전부터 화산 폭발이 잦았던 곳에.

지금까지는 날이 따뜻한 탓에 아무도 그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다. 제국 남부가 원래 기온이 높은 편이기도 하고.

'하지만 곧 이변이 생기겠지.'

카덴차가 불타오르는 덕분에, 남부 해안가의 수온이 비정상적으로 높게 유지된다. 그 결과 그 주변에 서식하는 진주와 산호들이 말라 죽고 만다.

'카를로, 그리고 카인의 자금줄에 이상이 생긴다는 거지.'

나는 그때를 노려 아르단테 가문이 장악한 시장에 파고들 계획이었다.

'자신이 썼던 방법에 역으로 당하면 기분이 어떠려나?'

모르긴 몰라도, 카를로는 또다시 치의사를 찾게 될 것이다. 그때쯤이면 어금니가 남아있기나 할련지 모르지만.

"...알겠, 습니다. 그때까지 보석을 전부 사 두겠습니다."

엘리체가 일그러졌던 얼굴을 펴고 말했다.

"세공사도 구해둘까요? 보석을 가공하려면 필요할 것 같습니다만."

"그건 됐어. 생각해 둔 이가 있다."

"아, 네. 알겠습니다."

서류에 뭔가를 적는 엘리체를 바라보며, 지금쯤 열심히 수도로 달려오고 있을 누군가를 떠올렸다.

'어디쯤 왔으려나.'

엘리체가 시킨 대로 편지를 잘 보냈다면, 곧 도착할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골드 스타 건은?"

"아, 여기 준비해뒀습니다."

엘리체가 즉각 알아듣고는 서랍에서 자루를 하나 꺼냈다.

"잭이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 꼬맹이 이름이 잭인가?"

"네. 지금도 덱스터와 함께 돌아다니고 있을 겁니다."

"잘하고 있군."

자루를 받아 들어 펼쳤다. 그 속에 들어 있는 돌의 개수를 셌다.

'하나, 둘, 셋... 열둘.'

다 센 뒤 고개를 들자, 엘리체가 긴장된 얼굴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혹시, 부족하십니까?"

"흠...."

일부러 뜸을 들이다가 천천히 내뱉었다.

"제법이네. 수고했어."

"휴우."

엘리체가 소리 나게 한숨을 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만족스러워하시니 다행입니다."

"고생을 많이 했나 보네."

"저보다는 잭이 가슴을 많이 졸였습니다. 주인님께서 혹 불쾌해 하실까 봐."

"생각보다는 많이 찾았군."

자루에 들어있던 돌을 하나 꺼냈다. 휘휘 둘러보며 살폈지만 여전히 특별한 무언가는 느껴지지 않았다.

"혹시 그게 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엘리체가 노심초사하며 던진 질문에,

"네가 생각하는 그거 맞아."

나는 몹시도 가볍게 대꾸해주었다.

"네?"

"뭔지 대충 짐작하고 있잖아? 그거 맞다고."

"그, 그럼 이게...."

"쉿."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비밀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엘리체가 어쩔 줄 몰라하는 얼굴로 더듬더듬 말했다.

"맙소사. 그거 하나만 해도 엄청난 돈인데. 열두 개나...."

"계산 때리지 마라. 팔 거 아니니까."

"네?"

자루를 잘 묶은 뒤 품에 집어 넣었다.

"사용할 목적으로 찾은 거야."

"아.... 하지만 그건,"

"알아. 지금 상태로는 쓸 수 없다는 거. 물론 방법은 있지."

의미심장한 말투에 엘리체가 입술을 씰룩였다.

"그것도 물론, 영업비밀이시겠지요?"

"잘 아네."

"그럴 것 같았습니다."

엘리체가 나직히 투덜거린 뒤 물었다.

"앞으로도 계속 찾을까요?"

"최대한 많이. 그리고,"

잠잠한 배를 슬슬 쓰다듬으며 덧붙였다.

"이런 식으로 상단이 습격받았던 장소를 전부 알아내."

"혹시...?"

"그래."

의자에서 일어나며 싱긋 웃어 보였다.

"목적을 알았으니, 다 털어줘야지."

❖ ❖ ❖

수도 인근에 위치한 루바레 영지의 외각.

"흑흑...."

"제발...."

"살려주세요...."

흙바닥에 꿇어앉은 채 사람들이 숨죽여 흐느꼈다.

타고 왔던 마차는 부서진 지 오래였다. 뒤에 실려 있던 궤짝들은 모조리 풀어헤쳐져 바닥에 던져졌다.

"돈이 될 만한 건 모조리 털어라!"

토포 도적단의 두목, 카슨이 크게 소리쳤다. 다른 도적들은 바삐 움직여 타고 온 말의 뒤에 짐을 실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카슨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번졌다.

"크크크. 쉽구만, 쉬워."

정체 모를 남자가 공급해준 무기, 그리고 말 덕분에 도적질이 너무나 쉬워졌다.

보석을 나르는 상단은 제법 괜찮은 수준의 용병을 고용했다. 하지만 용병들의 것과 버금가는 수준의 무기, 그리고 압도적인 물량 공세에는 버티지 못했다.

"이게 다 얼마냐."

토포 도적단의 황금빛 미래가 눈앞에 그려졌다. 이 도적단 생활을 청산할 날이 머지않았다.

"두목! 전부 다 실었습니다!"

도적의 보고에 카슨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터벅.

그의 발걸음이 죽은 용병들의 시신을 지나쳤다.

그들은 끝까지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끝내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바닥을 물들이고 있었다.

카슨은 포획한 인질들의 앞에 섰다. 그의 옆으로 검을 든 도적이 다가왔다.

"이놈들은 어떻게 할까요?"

카슨이 찬찬히, 물건을 품평하듯 인질들의 얼굴을 살폈다. 인질들은 공포에 질린 채 그의 시선을 피했다.

"이놈, 그리고 저놈. 그리고 저놈까지."

턱짓으로 남자들을 가리켰다. 그중에는 이 상단을 이끄는 상단주도 있었다.

"노예로 팔아넘기게 감옥에 가둬라."

"아, 안 돼요!"

"제발 살려주세요!"

인질들에게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카슨은 킬킬 웃으며 대꾸했다.

"너무 걱정하진 마. 여자들은 안 가둘 거니까."

그의 눈가에 지저분한 음욕이 서렸다.

"대신 내 방으로 와야 하지. 누구부터 올 테냐, 응?"

그의 말뜻을 이해한 여자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카슨의 옆에 서 있던 도적이 두 손을 슬슬 비볐다.

"두목님, 헤헤. 혼자만 재미 보실 건 아니죠?"

"이놈이! 쯧, 찬물도 위아래가 있는 법이거늘."

"아휴, 당연한 말씀을. 저희끼리 순번이나 정해놓고 있겠습니다."

카슨은 턱을 손으로 괸 채 여자들의 면면을 유심히 살폈다. 개 중 유독 예쁘장한 소녀 한 명에게 눈이 갔다.

"-!"

카슨과 눈이 마주친 소녀가 뒤로 흠칫 물러섰다.

"시, 싫...."

"저년으로."

"예! 두목님!"

도적이 경례를 붙인 뒤 소녀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하지 마세요! 제발!"

"닥치고 따라와!"

소녀의 팔이 도적의 억센 손길에 붙들렸다.

"크흐흑."

"아아...."

주변의 다른 인질들이 눈물을 삼켰다. 그들에게 예정된 결말은 너무도 가혹했다.

그때였다.

"음?"

흐뭇한 얼굴로 소녀를 바라보던 카슨이 고개를 들었다.

"저게 뭐지?"

그의 시야 끝에 새카만 무언가가 잡힌 탓이었다.

"엥? 뭐가 저렇게 빠르지?"

소녀를 붙잡고 실랑이하던 도적도,

"야, 야. 저거 봐봐."

"너도 보이냐?"

옆에서 인질들을 끌어내던 도적들도 그것을 보았다.

두두두두두!

새카만 무언가는 눈에 잡히지 않을 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뭐, 뭐뭐뭐 뭐야!"

"다들 대비해!"

"이쪽으로 온다!"

우왕좌왕하던 것도 잠시, 도적들은 곧 대열을 갖췄다. 오랫동안 함께 했던 경험 덕분이었다.

그들은 곧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그것이 새카만 말 위에 올라탄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을 알아챈 순간,

쾅!

그 말이 가공할 속도로 그들 옆을 지나쳤다.

"바, 방금 뭐지?"

"뭐가 부딪혔...."

의아해 하며 주변을 둘러본 도적들은 곧 발견했다.

"히이이익!"

얼굴 뼈가 완전히 함몰되어 사망한 도적을.

"꺄아악!"

그 도적에게 붙잡혀 있던 소녀가 비명을 내질렀다. 그녀는 허둥지둥 뒤로 물러서다가 그만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 사이, 어느새 되돌아온 말이 도적들을 향해 질주했다.

"다들 뭐하냐!"

"막아!"

"막으라고!"

어지러운 소리가 흩어지고,

푸욱!

한 도적의 몸이 검에 꿰여 하늘로 치솟았다. 말 위에 타고 있던 남자가 달려오던 속도 그대로 검을 찌른 것이다.

"꺼헉...."

도적은 풍선 빠지는 소리를 내더니 그대로 절명했다.

탁, 탁.

남자는 꼬챙이에 꿴 고깃덩이를 빼내듯이 바닥에 검을 툭툭 털었다. 거기 꿰여 있던 고깃덩이, 도적의 몸이 바닥에 풀썩 쏟아졌다.

"...."

도적들 사이에 기괴한 침묵이 흘렀다. 그들은 순식간에 두 명이 죽어버린 이 사태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몰이해는 쭉 계속되었다. 왜냐면 뭔가를 이해하기도 전에 그들이 모두 사망했기 때문이다.

"흡...."

인질들은 서로 부둥켜 안은 채 숨을 죽였다.

"크아악!"

검은 머리카락의 남자가 움직일 때마다, 시체가 한 구씩 생겨났다.

"커허헉!"

그의 움직임은 너무도 빨라 눈으로 따라갈 수가 없었다. 비명이 들리는 순간에 돌아보면 허물어지는 도적의 몸이 보일 뿐이었다.

"사, 살려... 컥!"

남자는 단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그저 꼭 해야 하는 업무를 수행하는 것처럼 기계적으로 살인을 행했다.

그 모습은 경외로운 한편, 인간에게는 비이성적인 두려움을 안겼다. 인간이 아닌 존재를 맞닥뜨렸을 때 느끼는 감각과 흡사했다.

"워, 원하는 게 뭐냐!"

모든 도적이 죽고, 결국 남은 것은 두목 카슨뿐이었다.

"보석? 인질? 뭐든 말만 해라!"

카슨은 무기를 움켜쥔 채 애써 목소리를 키웠다.

하지만 그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어느새 사신의 칼날이 제 목젖에 닿아 있다는 것을.

"...."

남자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의 입가에 어둠처럼 매혹적인 미소가 번졌다.

사악!

그의 검이 매끄러운 궤적을 그리며 카슨에게 날아들었다. 순간 카슨은 철퍽, 하는 소리가 제 귓가에 들렸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제 머리통과 땅과 부딪히는 소리였다. 그와 동시에 카슨의 사고가 정지했다.

"...."

인질들은 입을 틀어막은 채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사, 살았다."

누군가 무심코 중얼거리자,

"살았나?"

"산 거 맞죠?"

인질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낮게 수군거렸다.

무작정 기뻐하기에는 도적들을 쓸어버린 남자가 너무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에게선 어쩐지 정의로운 느낌보다는 위험한 느낌이 잔뜩 풍겼다.

"푸르릉."

그의 곁을 맴도는 새카만 말도 그 느낌을 주는 원인 중 하나였다. 반짝이는 황금빛 눈동자는 아름다웠지만 이질적이었다.

"그래, 그래. 잘했다."

남자는 제 키보다 훨씬 큰 그 말을 강아지처럼 다뤘다. 목덜미를 슥슥 쓰다듬어 주자 말은 기분이 좋은 듯 낮게 푸릉거렸다.

"어... 어쩌죠? 우리 괜찮을까요?"

"저 도적들을 죽여버렸다는 건 우릴 돕겠다는 뜻 아니겠어?"

"뭐라고 말 좀 걸어봐요!"

결국 등을 떠밀린 상단주가 주춤 일어섰다.

남자는 어느새 검을 집어넣은 채 서 있었다. 고요한 눈빛은 더 이상 누굴 죽일 것 같진 않았다.

꿀꺽.

상단주가 침을 삼킨 뒤 천천히 남자에게 다가갔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

"혹시, 기사단 소속이십니까? 아니면 용병단?"

남자는 대답은커녕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상단주는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더욱 조심했다.

"정체를 드러내고 싶지 않으신 거군요. 알겠습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그는 곧 남자가 손을 내저으며 겸양을 표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별말씀을, 이라던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오, 라던가.

하지만.

"그걸로 끝?"

"...예?"

상단주는 멍청히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목숨을 구해줬는데, 그걸로 끝이냐고."

남자의 말투는 시큰둥했으나 음색만큼은 귀에 착 감길 듯이 매력적이었다.

"아, 아닙니다."

상단주는 이마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왜 귀족 나리들을 상대하는 것 같지?'

Chapter 17. 먹음직스러운 미끼를 던진다. (3)

남자에게서 은은하게 흐르는 기품, 묘하게 고압적인 태도가 그런 느낌을 주었다. 그가 방금 순식간에 도적들을 몰살시켜버리는 것을 보았는데도 말이다.

어떻게 한 사람에게 우아함과 잔혹함이 공존할 수 있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마차가 부서져 시간은 좀 걸리겠으나, 수도에는 저희 상단의 본점이 있습니다. 해서 은인님께서 방문해 주신...."

"됐고,"

남자가 한 손을 슥 들어 올렸다. 그것은 권세 높은 귀족이 행하는 것처럼 몹시 오만했다.

"이것으로 하지."

그가 집어 든 것은 상단이 운송하던 보석 상자였다.

"그, 그것은...."

상단주는 덜컥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저희 상단에 너무 소중한...."

피식, 남자의 입가에 느른한 미소가 스쳤다.

"네 목숨보다 소중한가?"

얼음처럼 차갑고 매끄러운 목소리였다.

"...."

상단주는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잘못했다간 벼랑 끝으로 밀려 떨어질 거란 예감이 들었다.

"...아닙니다! 가져가셔도 됩니다!"

"네 허락은 필요 없는데."

"...예."

남자가 말 위로 훌쩍 올라탔다. 어찌나 움직임이 날랜지 마치 무게가 없는 것 같았다.

"그럼."

남자와 말이 땅을 박차고 달려가기 시작했다. 아까 이곳에 들이닥칠 때처럼 엄청난 속도였다.

그는 순식간에 검은 점이 되어 자취를 감추었다.

"사, 상단주님...."

"괜찮으세요...?"

"진짜 다 가져갔어요...?"

사람들이 슬금슬금 상단주에게 다가왔다. 빙 돌아 상단주의 얼굴을 확인하곤 멈칫했다.

"끄흡."

상단주가 눈물을 꾸역꾸역 삼키고 있었다.

"괜찮아.... 사는 게 더 중요하지...."

그의 눈가에 맺힌 이슬이 달빛을 받아 반짝 빛났다.

❖ ❖ ❖

폐허가 된 래토 도적단의 야영지.

"끙."

마레 길드의 간부, 에단이 두목의 방 바닥에 뚫린 구멍에서 기어 나왔다.

그는 그 속에서 부패하는 두목의 시체, 그리고 탈탈 털린 궤짝을 확인했다.

"젠장."

에단은 낮게 욕설을 뇌까린 뒤 밖으로 향했다. 같이 온 부하들이 시신을 모아 차곡차곡 쌓고 있었다.

놀랍게도, 시신 중 일부는 이미 해골로 변해 있었다. 마치 죽은 지 몇 년은 지난 것처럼.

"젠장, 젠장할."

에단은 그 광경을 보며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가끔 찾아오던 두통이 이젠 너무 잦아지고 있었다.

"...젠장!"

그는 결국 분을 이기지 못하고 발길질을 했다.

파사삭!

이미 바싹 타 들어가 있던 시체가 검은 먼지가 되어 흩날렸다. 에단은 부유하는 입자들을 노려보다가 몸을 돌렸다.

"그놈이군."

일찍이 카데르 영지에서 소식을 접했던, 새카만 검을 쓴다는 그 놈. 오로지 그놈만이 남길 수 있는 흔적이 바로 저것이었다.

"고작 며칠 만에 이렇게 되다니. 소문이 사실이었어."

래토 도적단 두목과의 거래는 늘 만족스러웠다. 그래서 에단은 여러 도적단 중에서도 특히 이 곳과 자주 접선하는 편이었다.

이젠 그럴 수 없게 되었지만.

"대체 언제 수도에 온 거지?"

어쩐지 카데르 영지로 보낸 새들이 감감무소식이다 싶었다. 그들이 서쪽 영지를 쥐잡듯이 뒤지는 동안, 그놈은 진작 수도로 올라가고 있던 것이다.

"하.... 오자마자 우리 길드를 또 털었어?"

정말이지 집요하기 짝이 없는 놈이었다. 대체 어느 길드의 사주를 받고 움직이는 건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에단님!"

에단을 부르는 부하의 팔엔 막 내려앉은 파란새가 보였다. 부하가 파란새의 다리에서 쪽지를 풀어 건넸다.

"다른 길드원이 보낸 서신입니다."

에단은 잔뜩 얼굴을 찌푸린 채 서신을 펼쳤다.

"...이게 무슨 소리야."

그의 이마에 퍼렇게 힘줄이 돋았다.

"다른 도적단까지 당했다고?"

마레 길드에서 고용했던 상당수의 도적단들이 옥수수처럼 탈탈 털렸다는 내용이었다.

"제기랄!"

에단이 서신을 좍좍 찢어 바닥에 던졌다. 옆에서 눈치를 살피던 부하가 쪼그려 앉아 종이 조각을 주섬주섬 주웠다.

"미치겠네."

에단은 관자놀이를 누른 채 이를 뿌득 갈았다.

'이걸 로웰 님께 어떻게 보고하지?'

마레 길드의 수장, 로웰은 한 번의 실수는 넘어가 준다. 그러나 같은 실수를 두 번이나 한 무능한 자는 남아있지 못 한다.

'이대로 가면 난 죽는다.'

로웰에게 가기 전에 무조건 그놈을 잡아야 했다.

"이랴!"

에단이 말에 올라탔다. 서신에 표기된 장소를 향해 부하들과 전속력으로 달려갔다.

몇 시간 뒤.

에단은 부서진 마차 앞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상단 일행을 만났다.

"오오! 저것은?!"

"마레 길드의 표식이에요!"

"우린 살았어!"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그들은 에단 일행을 보곤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뛸 듯이 기뻐했다.

"안심하십시오, 여러분."

에단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그들에게 접근했다. 자신이 이 마차를 습격하라고 의뢰한 당사자임을 숨긴 채 자초지종을 들었다.

"...당신들을 구해준 사람이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가졌다고요?"

에단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분위기가 꽤 살벌하긴 했는데...."

"엄청난 미남이었어요!"

일행 중 여성들이 꺅꺅거렸다.

"무섭기는 했지만, 그래도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잘생겼어요!"

"목소리도 끝내줬고요!"

상단주가 어처구니 없다는 얼굴로 그녀들을 노려보았다.

"이 녀석들이! 그 틈에 그걸 보고 앉았어?!"

"그럼 볼 게 그 사람밖에 없는데 어떡해요!"

"너희 지금 제정신이야?! 그놈이 뭘 털어갔는지 기억 안 나?"

상단주가 뒷목을 잡았으나 그들은 끄떡 않고 재잘거렸다.

"어차피 보석은 도적들한테 털렸던 거잖아요!"

"그 사람 아니었으면 우린 다 죽었을걸요?"

조용히 찌그러져 있던 남자들도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솔직히 그건 그렇죠. 하마터면 노예로 끌려갈 뻔 했는데."

"용병들도 다 죽어 나간 걸 그 사람 혼자서 처리했잖아요."

"아이고, 그럼 뭐하냐! 우리 상품을 싸그리 쓸어갔는데!"

에단은 복장이 터진다는 듯 가슴을 두드리는 상단주에게 물었다.

"그놈, 아니 그 사람이 어디로 갔는지는 아십니까?"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시커먼 말을 타고 빠르게 사라져 버려서."

대답을 마친 상단주가 울먹였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수도에 있는 저희 본점으로 가면 사례하겠습니다."

"오, 물론입니다."

에단은 친절하게 말한 뒤 몇 걸음 떨어져 있는 부하들에게 손짓했다.

"예, 에단님."

가까이 다가온 그들에게 에단이 명령했다.

"다 죽여."

상단 일행이 눈을 부릅떴다.

"네?"

"그게 무슨...."

그들의 떨리는 음성은 곧이어 터져 나온 비명에 묻혀버렸다.

"컥!"

상단주가 가슴에서 피를 뿜으며 바닥에 쓰러졌다. 다른 사람들도 부하들의 손에 차례차례 목숨을 잃었다.

순식간에 길바닥이 피로 흥건해졌다. 몹시도 을씨년스러운 광경이었다.

에단은 차가운 얼굴로 몸을 돌렸다.

"흔적이 남지 않게 태워라."

"예."

다시 말에 올라탄 그의 눈이 번득였다.

'보석을 전부 가져갔다고.'

드디어 그놈의 실마리를 잡았다. 대체 어떤 길드인지, 잡히기만 하면 가만두지 않으리라.

"이랴!"

에단이 땅을 박차고 달려가기 시작했다 수도 마기오레를 향해서.

❖ ❖ ❖

룰루랄라.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었다. 벤데타 길드의 선술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예감이 좋네."

계획했던 대로 일이 술술 풀리고 있었다.

엘리체가 물어온 정보대로 열심히 도적단을 털고 다녔고, 거기서 얻은 보석을 팔아 수익을 챙겼다. 원석은 남겼지만.

'이렇게 많은 돈을 쥐어보긴 처음입니다.'

두 손을 모은 채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엘리체가 떠올랐다. 워낙 돈에 쪼들리는 생활을 했던 지라 유독 감격스러워하긴 했다.

그 돈으론 또 보석을 산 뒤 새로 마련한 창고에 보관했다.

'맙소사, 창고까지 사야 할 정도라니!'

거기에는 엘리체의 즐거운 비명이 뒤따랐다.

"나중에 내가 시키는 일을 하게 되면 아주 뒤집어지겠군."

키득키득 웃으며 선술집이 위치한 골목 어귀에 들어섰다.

"...."

발길이 멈추었다.

무기와 가죽, 그리고 피 냄새. 무엇보다 골목 여기저기에 어지러운 발자국들이 흩어져 있었다.

"...설마."

절대영역을 펼치자, 선술집 건물 안에는 으레 있어야 할 생명들이 느껴지지 않았다.

웃음기를 지우고 빠르게 건물로 다가섰다.

벌컥!

평소처럼 문을 열어젖히자, 평소와는 다른 풍경이 나를 맞이했다.

"...저런."

선술집 안은 말 그대로 엉망진창이었다. 탁자와 의자가 나뒹굴고 있었고, 술병이며 잔들이 여럿 깨져 있었다.

격렬한 저항의 흔적. 흉흉한 분위기가 곳곳에 감돌았다.

윌리엄이 있었을 카운터에는 핏자국이 선연했다.

"흠."

핏자국의 양을 보니 저항은 길지 않았던 것 같았다.

상당히 많은 인원이 여길 침입했다는 의미였다. 윌리엄, 덱스터와 엘리체로는 역부족이었을 터.

"역시나."

예상대로, 엘리체의 방 문은 열려 있었다. 정확히는 반쯤 부서졌다고 보는 게 맞지만.

바닥에 쏟아진 문짝 조각들을 지나 방 안으로 들어섰다.

엘리체의 방은 난장판이었다. 서랍장과 궤짝도 전부 열려 있었다.

무언가를 찾기 위해 들쑤신 티가 역력했다.

"보석을 찾았던 거겠지."

여기 있던 귀중품은 전부 털어간 듯했다. 엘리체가 고생해서 모았던 서류들까지도.

"쯧쯔...."

낮게 혀를 차며 엘리체의 책상 뒤에 놓인 책장에 다가갔다.

탕탕.

책장을 두드린 뒤 안에 대고 말했다.

"나와라, 잭."

팔짱을 낀 채 잠시 기다렸다.

드르륵.

이윽고 책장이 옆으로 밀리며 뒤의 비밀 공간에서 잭이 기어나왔다.

"주, 주인님...!"

잭이 나오자마자 벌떡 일어나 내게 달려들었다. 핏기없이 새하얗게 질린 안색이 유독 눈에 띄었다.

"갑자기 사람들이 우르르 들이닥쳐서 모두 끌고 가버렸어요!"

울음 섞인 설명이 이어졌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가진 남자랑 무슨 사이냐고, 마구 다그쳤어요!"

묵묵히 서서 잭이 하는 말을 들었다.

"누나가 계속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고 그랬는데...."

"...."

"말은 전혀 듣지 않고 막무가내로 끌고 가버렸어요."

잭이 눈물로 얼룩진 뺨을 닦아내며 말했다.

"윌리엄 삼촌이랑 덱스터 형이 많이 다쳤어요. 끝까지 저항했는데 소용이 없었어요."

가만히 듣고 있던 나는 그제야 한 마디했다.

"엘리체는?"

잭은 전혀 동요하지 않는 내 모습에 잠시 멈칫했다. 그러다 코를 한번 훌쩍이고 답했다.

"누나도 끌려가긴 했는데 크게 다치진 않았어요. 윌리엄 삼촌을 가장 험하게 다루더라고요."

역시, 보통은 그렇게 된단 말이지.

대외적으로 윌리엄이 사장으로 알려져 있는 탓이었다. 나야 다 알고 있으니까 엘리체 먼저 급습한 거지만.

"왜 사장을 이런 데다 두냐고 했던 건 취소해야겠는걸."

그 말에 발끈하던 덱스터를 떠올리며 픽 웃었다.

"주인님?"

잭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웃으시는 거에요?"

"뭐가."

"뭐긴요.... 지금 길드원들이 다 잡혀갔는데, 걱정도 안 되세요?"

잭이 두 주먹을 꽉 쥔 채 절절하게 외쳤다.

"그 사람들 누군지도 모르고, 형이랑 누나가 어디로 끌려갔는지도 모르는데!"

"누군지는 알아. 마레 길드겠지."

"마, 마레 길드요?"

잭의 입이 쩍 벌어졌다. 눈동자에 두려움이 와락 떠올랐다.

"그 커다란 길드에서 우리를 왜...?"

잭이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기 시작했다.

"어떡해요? 형이랑 누나는 주인님처럼 강하지 않잖아요. 무슨 일이라도 당하면...."

"쓸데없는 걱정이군."

잭은 기가 막힌 듯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어째서 그렇게...."

"쉽게 죽이진 않을 테니까."

냉정한 한 마디에 잭의 입이 딱 다물어졌다. 할 말을 잃은 듯한 얼굴이었다.

"게다가, 이렇게 될 줄은 알고 있었다."

"네...?"

잭이 굳어버린 입을 힘겹게 움직였다.

"알고... 알고, 계셨다고요?"

"그래."

그런 잭을 향해 화사한 미소를 보내주었다.

"대어를 잡으려면 좋은 미끼가 필요하거든."

Chapter 17. 먹음직스러운 미끼를 던진다. (4)

"미끼요...?"

잭의 얼굴이 흐려졌다. 자신이 들은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글쎄."

어차피 이 녀석에게 자세히 설명할 생각은 없었다. 엉망이 된 방을 보면서도 입가의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미끼를 이렇게 빨리 물 줄은 몰랐는데.'

도적단을 습격하며 일부러 생존자를 남기고, 보란 듯이 요란하게 흔적을 남겼다. 레퀴엠을 사용할 때의 모습을 한 채 벤데타 길드에 들락날락거리고, 심지어 보석을 유통하기도 했다.

마레 길드에서 곳곳에 심어둔 눈들이 그런 나를 포착한 모양이었다.

'그렇다 치더라도 굉장히 빠르긴 하군.'

꼭 미리 준비하고 있던 것처럼.

아무튼, 계획했던 대로 순조롭게 잘 진행되고 있었다. 내 앞에 서 있는 잭은 전혀 순조로워 보이지 않았지만.

"그건 뭐지?"

녀석의 주머니에 불룩 튀어나와 있는 것을 가리켰다.

"아."

잭의 눈에 다시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누나가... 저에게 이걸 몰래 맡겼어요."

주머니에서 목걸이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소중한 거라고, 주인님을 만날 때까지 절대 잃어버리면 안 된다고 했어요."

목걸이가 영롱하게 반짝이며 흔들렸다.

엘리체가 십수년간 수소문하여 찾아 헤매던 것. 그리고, 언젠가 그녀가 제 정체를 밝힐 때 결정적인 증거가 되어줄 물건.

"이걸 너한테 맡겼단 말이지."

그토록 소중한 것을 잭에게 맡길 정도라니.

어느새 둘 사이에 신뢰가 싹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이것은 엘리체가 내게 보내는 메시지이기도 했다.

자신을 구하러 오라는.

"하여간 맹랑한 여자야."

어차피 가기는 할 거지만 막상 기대(?)를 받게 되니 기분이 묘한걸.

마지막으로 방 안을 한 번 둘러보다가, 구석에 처박힌 뱀 사육장을 발견했다.

단단한 통유리로 되어있어 깨지진 않았다. 하지만 전면부에 금이 갔고, 그 속의 바위나 나뭇가지가 이리저리 흐트러져 있었다.

"-!"

잭이 차갑게 굳어진 내 얼굴을 보고 흠칫 놀랐다.

"왜, 왜 그러세요?"

"저거."

손으로 뱀 사육장을 가리켰다.

"저거 누가 저렇게 했냐."

잭이 내 손가락 끝을 보곤 기억을 더듬었다.

"모르겠어요.... 숨어 있느라 볼 틈이 없었어요."

사육장에 다가가 속을 확인했다.

골드스타가 나뭇가지 사이에 낀 채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겉보기에 외상은 없었으나 상태가 영 나빠 보였다.

"...온도 조절계가 부서졌군."

속이 드글드글 끓었다. 내가 일찍이 골드스타에 대해서 공헌한 바가 있다.

[만약 녀석의 몸에 이상이라도 생긴다면, 그렇게 만든 놈을 똑같은 꼴로 만들어줄 생각이야.]

아무래도 이 말을 실현할 때가 된 것 같았다.

"우욱."

잭이 뒤에서 헛구역질을 시작했다.

안개처럼 스멀스멀 번져나가는 내 살기를 감지한 탓이었다. 하지만 내 불편한 심기를 느끼고는 얼른 소리를 죽였다.

"...저어, 주인님."

잭이 구역감을 억누르며 슬금슬금 내게 다가왔다. 얼굴이 완전히 흙빛이었다.

"구하러... 가실 거죠...?"

혹시나 하는 반신반의하는 말투.

내가 길드원들보다 골드스타를 더 챙기는 모습에 질린 듯한 기색이었다.

"...."

잠시 잭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하나, 둘... 여섯.'

몇몇 인간들이 진형을 이루어 이 건물로 접근하고 있었다. 명백한 살의를 품은 채.

'매복을 숨겨뒀었군.'

잭이 불안 가득한 얼굴로 재차 물었다.

"주인님? 왜 그러세요?"

"저거."

손가락으로 골드 스타가 들어있는 사육장을 가리켰다.

"이동장에 옮겨 담아라."

"아, 넵."

잭이 사육장을 주섬주섬 챙기는 것을 보곤 돌아섰다.

"내가 나오라 할 때까지 여기서 기다려."

"왜, 왜요? 설마 또...?"

잭의 질문을 무시하곤 성큼성큼 방 밖으로 나왔다.

탕.

문을 닫은 뒤 선술집 홀에서 절대영역을 펼쳤다.

'문밖에 두 명.'

그리고 바깥으로 나가는 길목에 숨은 네 명까지, 총 여섯 명이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건물에서 나갈 때 기습하려는 건가.'

여기서 레퀴엠의 능력이 또 빛을 발했다. 그 어떤 기습도 허용하지 않는, 완벽한 인간 탐지 기능이.

'좋아.'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척 선술집 안에 가만히 서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점점 다가오던 네 명마저 문 앞에 섰다. 그들이 문 앞에서 신호를 주고받는 게 느껴졌다.

쾅!

문이 부서질 듯 열리며 여섯 명의 사내들이 들이닥쳤다.

"-!"

그들이 내 얼굴을 확인하곤 잠시 당황했다.

"누구지?"

"우리가 찾던 거랑 다른데?"

내가 누군지 못 알아보는 것을 보니, 마레 길드에서도 말단인 듯했다. 길드의 최정예 요원들은 당연스럽게 귀족의 명단을 꿰고 있다.

이윽고 그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앞으로 나섰다.

"여긴 무슨 용건이냐?"

"술 마시러 왔는데."

어깨를 으쓱하며 느긋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여기 주인이 질 좋은 술을 가져다 두거든. 근데 아무도 없네."

"흠."

사내들이 소리를 낮추어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선술집 손님인 것 같군."

"길드원은 총 3명이라 했고, 전부 잡아갔다고 했다."

"괜한 소란을 일으킬 필요는 없으니 그냥 보낼까."

처음에 말을 걸었던 사내가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살핀 뒤 밖을 향해 턱짓했다.

"오늘 본 것은 잊고 조용히 나가도록."

과연, 무고한 사람은 건들지 않겠다는 건가.

나는 그들의 말에 따르는 척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문으로 나가려면 어쩔 수 없이 그들을 지나쳐야 했다.

"...."

사내들은 내가 다가오자 잠시 몸을 긴장시켰다가, 이내 여유를 되찾았다.

내 허리춤에 아무것도 매달려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수적으로 훨씬 우세하다는 것 때문일 터였다.

"근데 누굴 찾으러 온 것 아니었어?"

내 질문에 사내가 픽 콧방귀를 뀌었다.

"닥치고 나가기나 해라."

그를 향해 빙그레 웃어 보였다. 내 미소에 사내의 얼굴이 설핏 찌푸려졌다.

"왜 웃는 거지?"

"재밌잖아."

"뭐가?"

수상쩍다는 듯 나를 노려보는 사내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 찾는 거 아니었나?"

"그걸 어찌...!"

사내가 눈을 부릅뜨더니 험악한 말투로 되물었다.

"보았나? 어디서 보았지?"

"그러니까 재밌다는 거야."

키득키득 웃으며 팔을 아래로 휘둘렀다.

차랑!

그림자처럼 나타난 레퀴엠이 손에 휘감겼다.

"바로 눈앞에 있는데 모르잖아."

동시에 먹물 번지듯 머리카락과 눈이 검게 물들었다. 사내들이 화들짝 놀라며 물러섰다.

"이놈이다!"

"잡아야 해!"

여섯 명이 동시에 검을 빼어 들었다. 우두머리 역할을 하는 사내가 외쳤다.

"반드시 생포하라고 하셨다!"

"생포?"

피식, 입가로 비웃음이 스몄다.

"생포라."

레퀴엠을 단단히 감아쥔 채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할 수 있으면 해 봐."

"이 새끼가!"

사내들이 으르렁거리며 내게 달려들었다.

"팔다리를 노려!"

과연 진심으로 나를 사로잡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하하."

그저 우스울 뿐이었다. 심장이나 급소를 노려도 모자랄 판에 이런 마음가짐이라니.

"물러도 너무 물러."

섬짓한 미소를 베어 물며 반격에 나섰다.

'양쪽 어깨!'

철저하게 내 팔을 노리고 양쪽에서 검이 날아들었다. 제법 날카로운 협동 공격이었다.

까강!

한 번 검을 맞대는 것만으로 두 검이 교차하는 지점을 정확하게 찔렀다.

"?!"

두 놈이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눈을 크게 떴다.

이런 형태의 공격은 내게 익숙했다. 지금 이들의 것보다도 훨씬 날카롭고 묵직한 공격에 맞섰던 기억 덕분이었다.

'미켈에게 감사해야 하는 건가.'

피식 웃으며 손목을 홱 돌렸다. 레퀴엠의 방향을 바꾼 뒤 직선으로 거세게 밀었다.

그 궤적 끝에는 엉긴 검을 미처 빼내지 못한 두 명의 목이 있었다.

텅! 터엉!

두 사내의 머리가 수박 떨어지듯 바닥을 굴렀다.

"-!"

나머지 사내들의 안색이 변했다.

"아직도 생포해야 할 것 같나?"

내 노골적인 도발에도 그들은 발끈하지 못했다. 당혹스러운 눈길로 머리통을 바라볼 뿐.

사아아-

점차 거멓게 사그러지는 머리통은 그 자체만으로도 음산한 한기를 풍겼다.

"저게 뭐야...?"

그들의 시선이 바닥에 널브러진 몸통을 향했다. 정확히는 잘린 목의 단면을.

"이게 무슨...."

이해할 수 없는 공포를 목도했을 때, 인간이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다. 그중에서 그들이 고른 것은 그 공포의 대상을 제거하는 방법이었다.

"으아아!"

괴성을 지르며 한 놈이 내게 검을 휘둘렀다. 여전히 물러빠진 생각을 버리지 못한, 다리를 노린 공격이었다.

훙!

뛰어올라 검을 피한 뒤 발로 놈의 손등을 내리찍었다.

"끄윽!"

손을 붙잡고 물러나는 놈에게 레퀴엠을 꽂아 넣었다.

"크헉."

명치를 찔린 놈이 숨 막히는 소리를 뱉어냈다. 레퀴엠이 찔린 지점부터 급격하게 피부가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그릉, 그르릉-

머릿속에 레퀴엠의 희열에 가득 찬 신음이 맴돌았다. 그러나 녀석의 목소리는 더 이상 내게 영향을 주지 못했다.

보이지 않는 하나의 벽을 둔 채, 녀석과 나를 완전히 분리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앞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거미줄에 걸려든 먹잇감을 차근차근 갉아먹듯이.

"이 자식이!"

후웅!

뒤에서 파공음이 들려왔다. 무기가 공기를 거칠게 가르며 등 쪽으로 날아들었다.

"쯧."

끝까지 레퀴엠을 빼내지 않은 채 기다리다가,

"엇?!"

놈의 검이 몸에 닿기 직전 슥 빠져나왔다.

푸욱!

놈은 달려오던 속도를 줄이지 못하고 제 동료의 목을 검으로 뚫어버렸다.

"!"

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놈이 황급히 검을 빼내기 위해 뒤로 물러났다.

"저런."

하지만 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 손이 놈의 손목을 꽉 붙잡은 탓이었다.

"이를 어쩌나."

나는 노래하듯이 즐겁게 흥얼거렸다.

"네 동료가 죽어버렸네?"

충격으로 크게 홉떠진 놈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너 때문에."

"으, 으으...."

놈이 검과 나를 번갈아 보았다.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검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으, 으아아."

결국 놈은 검을 놓고 비틀비틀 물러섰다. 놈의 얼굴엔 제 손으로 동료를 죽였다는 경악, 그리고 나를 향한 두려움이 가득했다.

'거짓말인데.'

놈의 허여멀건 한 얼굴을 보며 히죽 웃었다.

사실 놈의 동료는 검에 꿰뚫리기 전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레퀴엠이 놈의 생명력을 모조리 빨아먹었기 때문이다.

'검에 박힐 때 아무 소리도 안 난 걸 보면 모르나.'

하긴, 이 급박한 상황에 그걸 판단할 여유는 없겠지.

[더....]

레퀴엠이 앓는 듯한 소리를 흘렸다.

'조용히 있어.'

차갑게 일갈한 뒤 몸을 돌렸다.

"으, 매, 매튜가...."

턱을 달달 떨며 나를 바라보는 사내를 향해서.

타다닥!

땅을 박차고 놈에게 돌진했다. 달려가던 속도 그대로 놈의 몸을 레퀴엠으로 찔러갔다.

푸욱!

레퀴엠이 놈의 심장을 지나쳐 등 위로 튀어나왔다.

"끕!"

놈의 눈이 터질 듯이 커졌다. 놈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드는 것은 금방이었다.

"으, 으으."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남은 두 명의 얼굴이 공포로 일그러졌다.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기색이었다.

물론 나는 상대가 싸울 의지가 없다고 해서 봐주지 않았다.

철퍽.

한 놈의 몸이 사선으로 잘려 바닥에 쏟아졌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비틀린 팔다리가 고통스레 움찔거리다가, 이윽고 잦아들었다.

"어, 어어...."

일부러 우두머리처럼 보이는 사내를 남겼다. 놈에게 물어볼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그...."

놈이 불안스레 검을 고쳐 쥐었다. 순식간에 혼자 남게 되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아직 승산이 있어 보여?"

어깨를 으쓱하며 주변을 가리켰다. 놈은 이미 시커먼 시체가 되어버린 동료들을 보고 망연자실해졌다.

"그게...."

슉!

레퀴엠이 빛살처럼 뻗어나가 놈의 목을 겨누었다.

"-!"

놈이 거기에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흠칫 뒤로 물러섰다.

"사람들을 어디로 데려갔지?"

Chapter 17. 먹음직스러운 미끼를 던진다. (5)

놈을 완전히 벽에 밀어붙이며 물었다. 레퀴엠의 끝이 자신과 가까워질수록 놈의 얼굴이 점점 사색이 되어갔다.

"모릅니다...."

말투는 퍽 공손해졌으나 내용엔 영양가가 없었다.

"그래? 그럼-"

"자, 잠깐!"

레퀴엠을 점점 밀어 넣자 놈이 턱을 위로 최대한 치켜들었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수도 외곽일 겁니다."

"...."

"루바레 영지 주변에, 빈 창고가 여럿 있습니다. 사람들을 납치해서 가둬둘 때 주로 쓰곤 합니다."

"흐음."

레퀴엠을 잠시 멈추고 미소 지었다.

"인원은 이게 다인가? 더 올 놈들 없어?"

"저희가 답니다.... 에단 님께서 소수 인원으로만 움직이라고 하셔서."

"에단."

그 이름을 입에 굴려본 뒤, 입꼬리를 깊게 끌어올렸다.

"그래, 고맙다."

"?!"

갑작스러운 감사 인사에 놀라기도 순간,

푹!

레퀴엠이 놈의 턱을 뚫고 들어가 정수리로 빠져나왔다.

"끄륵, 끅."

놈이 눈을 허옇게 뒤집었다. 부들부들 떨리던 몸이 이내 힘을 잃고, 사지를 쭉 뻗었다.

"흠."

레퀴엠을 집어넣고 손을 탁탁 털었다.

"루바레 영지라."

대략적인 위치를 알았으니 슬슬 출발해볼 때였다. 더 이상 뒤따라올 인원이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으니.

탕!

안쪽의 방문을 발로 차서 열었다.

"헉!"

쪼그리고 앉아 무언가와 씨름하고 있던 잭이 고개를 들었다.

"주인님! 무사하셨군요!"

"당연한 소릴."

잭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이동장을 내밀었다.

"다행히 여분의 온도 조절계가 있었어요."

골드스타는 아까보다 한결 기운을 되찾은 듯이 보였다. 이동장 속에서 몸을 꼭 만 채 쉬고 있었다.

"들고 따라와라."

"앗, 네...."

잭은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나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삑!

호루라기를 들어 힘차게 분 뒤 잭을 응시했다.

"가지."

"저도 같이요?"

"그래. 네가 길을 안내해야겠다."

처음 만났을 때와 비슷한 상황에, 잭이 눈을 크게 떴다.

"어디로요?"

"그놈들 있는 곳으로."

"제, 제가 거길 어떻게 알아요? 저는 책장 뒤에 숨어 있느라 아무 것도 못 봤는데...!"

손을 뻗어 잭의 코를 툭, 두드렸다.

"냄새, 기억하잖아."

"아."

잭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코를 킁킁거린 뒤 반색했다.

"알 것 같아요!"

"좋아, 가자."

그렇게 잭과 나의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 ❖ ❖

두두두두두두!

블랙스타의 위에 두 명의 인영이 비쳤다.

"푸릉, 풍."

블랙스타는 처음에 나 외의 인간을 태우는 것을 거부했다. 하지만 내 으름장에 끝내 눈물을 머금고 잭을 태웠다.

"우웁."

잭은 이렇게 빨리 달리는 말 위에 탄 게 처음이었다. 어지럽고 속에 메스꺼운 듯 입을 틀어막았다.

"힘드냐?"

물어보면서도 사실 딱히 속도를 늦춰줄 생각은 없었다.

"...아뇨."

잭 또한 고통을 감수하는 쪽을 택했다. 계속 목을 꿀렁거리면서도 이를 악물고 참았다.

"더 빨리 가주세요!"

오히려 그렇게 외치는 모습에 픽, 미소가 번졌다.

"그래, 그래야지."

역시 녀석을 택했던 것은 좋은 선택이었다. 그렇게 루바레 영지 쪽으로 블랙스타를 몰아간 지 얼마나 되었을까.

"아!"

블랙스타 위에 축 늘어져 있던 잭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냄새가 나요!"

과연, 비상한 후각이었다.

"어느 쪽?"

"저쪽이에요!"

잭이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속도를 더욱 높였다.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반을 가진 기분이었다.

두두두두!

힘껏 블랙스타를 재촉해가며 달린지 얼마나 되었을까.

"점점 가까워지는 것 같아요!"

"음."

절대영역을 펼치자 저 멀리서 상당한 인원들이 모여 있는 게 느껴졌다.

"저기로군."

블랙스타의 속도를 서서히 줄였다. 허름한 농가가 멀리 보이는 거리에서 멈추었다.

커다란 나무 뒤에 블랙스타를 세운 뒤 휙 뛰어내렸다.

"블랙스타, 넌 여기 있어."

"푸릉."

두손 두발을 전부 이용해 엉금엉금 내려오던 잭에게도 말했다.

"너도 여기 있고."

"네?"

"그럼 같이 가려고 했어?"

"저도...!"

가고 싶다는 기색이 역력한 잭의 말허리를 뚝 잘라냈다.

"가봤자 방해만 돼."

"주인님은 엄청 강하시잖아요...! 저 사람들도 다 이길 수 있으시지 않아요?"

잭은 억울하다는 얼굴로 제법 맞는 말을 했다. 하지만 이 상황은 내 실력과는 별개의 문제가 있었다.

"다 죽일 순 있지."

"네, 그러니까-"

"하지만 엘리체의 안전을 보장할 순 없다."

"아."

잭은 그제야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인질이...될 수도 있으니까."

"그래. 엘리체가 왜 널 책장 뒤에 숨겼는지, 모르는 건 아니겠지?"

그런 과정을 감수해가며 엘리체가 지키려고 했던 것은, 잭의 안전이었다.

"...네."

잭은 그것을 깨닫지 못할 만큼 멍청하지 않았다. 녀석이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주인님. 조용히 숨어 있을게요."

"착한 아이로군."

빙긋 웃은 뒤 사람과 몬스터 각각에게 단단히 일러두었다.

"찍소리 내지 말고 조용히 있어라."

"네."

"푸릉."

블랙스타는 한낱 어린아이에겐 관심 없다는 듯 지루한 얼굴이었다. 불안한 얼굴의 잭을 뒤로 한채 돌아섰다.

사박, 사박.

발에 밟히는 풀 소리에 유의하며 조심히 다가갔다. 수풀 사이에 몸을 숨긴 채 동태를 살폈다.

집 주변에서 보초를 서는 세 명의 인간이 보였다.

'안에는 10명.'

저 중에 셋은 엘리체와 덱스터, 윌리엄일 것이다. 벤데타 길드를 덮친 인원이 총 10명이라는 뜻이었다.

'많이도 모아왔군.'

천천히, 소리를 죽여서 집 쪽으로 접근했다. 보초들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도 입을 안 열었대?"

"어, 진짜 독한 새끼야."

"뭐, 아직 몇 시간 안 됐으니까."

보초 한 명이 입을 쩍 벌리고 하품을 했다.

"에단 님이 보통 화가 나신 게 아니더라."

"그럴 만도 하지. 관리하시던 도적단이 전부 털렸으니."

"어떻게 생긴 놈이랬지?"

"검은 머리에 검은 눈. 옷도 시커먼 색만 입는다던데."

하품을 했던 보초가 킬킬 웃었다.

"컨셉 한 번 끝내주네. 검은색이 취향인가?"

말까지 검은 색인걸 알면 뒤집어 지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보초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쯧, 저 길드장 놈이 빨리 불어야 빨리 갈 텐데."

"아직 뻣뻣한 걸 보니 새벽 넘길 듯."

보초가 짜증스러운 손길로 등을 북북 긁었다.

"그럼 그 시커먼 놈은 내일 잡으러 가겠네."

"아마 그렇겠지. 아니면 매복조가 이미 잡았을 수도 있고."

대화를 끝낸 그들이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다시 집 주변을 돌며 순찰을 시작했다.

'흐음.'

대충 상황을 파악한 뒤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근처의 나무 뒤에 몸을 숨긴 뒤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컴컴한 밤, 풀벌레 소리만 간간히 들려오는 와중에 시간이 더디게 흘렀다.

마침내,

"나 볼일 좀."

보초 한 명이 바지춤을 여몄다.

"얼른 와."

"어쩐지 아까 많이 처먹더라."

다른 두 명은 대수롭지 않게 그를 보냈다.

보초가 터벅터벅 걸어 큰 나무가 있는 곳으로 걸었다. 내가 숨어 있는 나무 근처였다.

'운이 좋군.'

내 눈이 먹이를 기다리는 짐승의 그것처럼 가늘어졌다. 전생에 봤던 소설에서 쓴 방법을 활용해 볼 기회였다.

"흐아암."

보초가 하품을 찍찍 하며 큰 나무 뒤로 돌았다. 바지춤을 내린 뒤 쭈그리고 앉아 뱃속의 큰 것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뿌직, 뿍.

"...."

뭘 먹었는지 냄새가 정말 고약했다. 예민한 후각이 괴롭다고 아우성쳤다.

'X발.'

다 큰 사내새끼가 똥 싸고 있는 모습을 직관해야 한다니. 하지만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조금만 참자.'

속으로 참을 인을 되뇌며 놈이 괄약근에 힘을 주는 것을 기다렸다.

뿌부북.

내 미간이 점점 강하게 찌푸려졌다. 조금만 더 있다가 못 참고 놈을 죽여버릴 것 같았다.

'가지가지 하는군....'

천 년 같은 인고의 시간이 흐르고,

"끙차."

놈이 주머니에 손을 넣어 휴지를 찾기 시작했다.

'지금.'

나무 뒤에서 재빨리 튀어나가 놈을 덮쳤다.

"웁?!"

왼손을 뻗어 놈의 입을 막고, 오른손으로 어깨를 꽉 잡아 눌러 앉혔다.

철퍽.

"–!"

축축한 소리와 함께 놈의 엉덩이가 땅에 수직낙하했다.

"—! –-!"

놈의 몸이 마구 진저리쳤다. 엉덩이 아래에서 느껴지는 대변의 따끈한 온도, 그리고 질퍽한 감각 덕분이었다.

"–!"

계속해서 알 수 없는 소리를 지르는 놈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조용히 안 하면 옆으로 비벼주지."

"...."

거짓말처럼 놈이 조용해졌다.

입을 틀어막은 손바닥이 습기로 축축해졌다. 놈의 숨을 어찌나 크게 쉬는지, 가슴이 오르락 내리락하는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스릉-

오른손을 보초의 어깨에서 떼고 레퀴엠을 뽑아 들었다. 놈의 목에 겨누고 속삭였다.

"자, 동료들을 불러."

보초가 나를 보며 눈으로 물었다.

'어, 어떻게요?'

놈의 입을 틀어막고 있던 손을 떼며 말했다.

"지금 상황 그대로 말하면 되잖아."

"지, 지금 상황...."

보초의 얼굴이 굴욕감으로 뒤덮였다. 그 모습을 보며 키득키득 웃었다.

"10초 안에 안 하면 죽인다."

보초가 눈을 두리번거리며 마구 생각하더니, 허겁지겁 외쳤다.

"야, 야아...!"

놀란 게 가라앉지 않았는지 개미만한 목소리였다. 놈을 무심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7초 남았다."

"야! 도와줘!"

버럭 내지르는 소리에 저쪽에서 반응이 왔다.

"뭘 도와줘? 설마 변비냐?"

"그러니까 고기 좀 작작 처먹으라니까!"

참으로 눈물겨운 우정이었다.

"5초."

가차 없는 시간 재기에, 보초가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아, 다리 힘 풀려서 똥 위에 넘어졌다고! 좀 도와달라고!"

"어이구, 저 병신."

"새꺄, 그러니까 평소에 하체 운동 좀 하랬잖아!"

동료 보초들은 투덜거렸지만 그래도 한 명이 터덜터덜 걸어오기 시작했다.

"어딘데?"

보초의 어깨를 한 번 꽉 틀어쥐자,

"여기야! 여기!"

놈은 착실하게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다.

"아, 새끼 멀리도 갔네."

동료 보초가 연신 투덜거리며 나무 쪽으로 다가왔다.

"미친, 무슨 냄새가 여기까지 나냐?"

어두운 탓에 쉽게 동료를 찾지 못하고 두리번거렸다.

"여기냐? 나무 뒤에 있어?"

드디어 놈이 나무에 기대어 앉아 있는 동료의 모습을 발견했다.

"아오, 한심한 새끼. 대체 똥을...."

퍽!

내 주먹이 동료 보초의 복부에 꽂혔다. 놈이 배를 움켜쥐고 새우처럼 몸을 웅크렸다.

텁.

소리를 내기 전에 놈의 입을 틀어막았다.

"네 동료는 방금 죽었어."

"...."

"내 앞에서 똥을 싼 죄로."

낮게 속삭이자 동료 보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

나무에 기대어 있는 시커먼 시체를 확인한 보초가 몸부림쳤다.

"읍읍, 읍."

"뭐라 하는지 관심 없고,"

이미 한 명의 목숨을 집어 삼킨 레퀴엠을 놈의 목젖에 갖다 댔다.

"다른 동료 불러."

살짝 손을 떼주자 보초가 입술을 덜덜 떨었다.

"뭐, 뭐뭐 뭐라고-."

"10초 준다."

결국 보초는 이를 악물고 외쳐야 했다.

"야, 이 새끼 다리 힘이 완전 풀렸어! 혼자서 못 데려가겠다!"

집 쪽에서 어이없어하는 목소리가 돌아왔다.

"그럼 완전히 똥범벅이란 소리잖아? 그냥 기어 오면 안 돼?"

"이걸 어떻게 끌고 가! 와서 좀 도와줘!"

남은 보초가 한참을 궁시렁거리더니 결국 투박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아오, 진짜. 그거 한 놈을 못 데리고 오냐."

불평하던 놈은 늦게서야 서로 얼싸안고 있는 동료들을 발견했다.

"너네 뭐하...."

빡!

내 주먹이 놈의 안면에 직격했다.

Chapter 17. 먹음직스러운 미끼를 던진다. (6)

"욱...."

뭉개진 코뼈를 붙잡고 물러나는 놈의 복부를 걷어찼다.

"컥!"

바닥에 쓰러진 놈의 위에 올라탄 뒤 입을 틀어막았다. 한쪽 어깨를 붙잡은 뒤,

우드득!

완전히 어깨뼈를 돌려 뽑아냈다.

"––!"

놈이 알아들을 수 없는 괴성을 내질렀다. 손바닥 아래 붙잡힌 놈의 몸이 펄떡펄떡 뛰었다.

"오른손잡이 맞지?"

히죽 웃으며 물었으나 놈은 꺽꺽대기만 하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 가볼까."

완전히 축 늘어진 오른쪽 어깨를 붙잡고 놈을 일으켰다.

"—! –!"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에 놈의 몸이 마구 들썩였다.

지금 말도 못 하게 정신이 혼미할 것이다. 제정신인 상태에서 어깨뼈가 빠지는 것은 굉장히 고통스러우니까.

"앞장서라."

어깨를 밀자 놈이 눈물을 줄줄 흘리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얼른."

계속 밀어붙이자, 놈은 차라리 움직이는 편이 고통이 덜하다는 것을 깨닫고 걷기 시작했다.

'드디어 이 똥냄새에서 벗어나는 군.'

한숨을 내쉬며 집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냥 들이닥쳐서 쓸어버리면 편할 텐데.'

이 방법을 쓸 수 없다는 게 못내 아쉬웠다.

전투가 진행되면, 상대쪽에서 엘리체나 다른 인물들을 인질로 잡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자고로 인질은 불리한 쪽이 유리한 쪽에 맞서기 위해 잡는 거니까.

'사실 그 녀석들이 다쳐도 상관없기는 한데.'

혹시라도 죽어버리면 꽤 먼 길을 돌아가야 하니까. 그러니 되도록 팔다리 멀쩡하게 붙여서 돌아가는 편이 이득이었다.

게다가 내가 누군가를 협박하면 했지, 당하는 것은 딱 질색이었다.

후두둑.

"음?"

갑자기 풀이 확 젖는 냄새가 훅 끼쳤다. 동시에 정수리 위로 축축한 것이 뚝, 떨어졌다.

"비 오네."

쿠르릉-

하늘이 쪼개지는 소리와 함께 빗방울이 세차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날씨가 날 돕고 있었다. 거센 비와 천둥소리는 많은 것을 묻히게 해줄 테니까.

"어디, 가볼까."

오두막을 향해 다가서는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번졌다.

❖ ❖ ❖

"끄으으으윽!"

고통스러운 비명이 공기를 찢었다. 벽을 타고 넘어와 선명하게 귓가를 적셨다.

"후우...."

엘리체는 눈을 질끈 감았다.

미친 듯이 울부짖고 싶기도, 바닥에 머리를 마구 들이박고 싶기도 한. 그런 난폭한 감정이 속에서 몸을 달구고 있었다.

"얼른 말하라니까."

젊은 남자의 고저 없는 목소리가 윌리엄을 채근했다.

"...모른다."

윌리엄의 목소리는 바짝 갈라져 있었다. 하지만 그 속에는 꺾이지 않을 의지가 단단히 박혀있었다.

"하."

상대도 그것을 느꼈는지 코웃음을 쳤다.

"다시."

그의 냉혹한 명령이 이어졌다.

"끄으으윽!"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윌리엄의 신음이 다시 시작되었다.

엘리체는 벽 너머의 저 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정확히 몰랐다. 아니, 사실은 알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윌리엄이 굉장히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것만은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이 자들이 윌리엄의 신음을 잘 들을 수 있는 벽 앞에 엘리체와 덱스터를 앉혀놓았다는 것도.

꾸욱.

엘리체는 입안의 여린 살을 깨물었다.

'침착하자.'

자신이 이성을 잃고 날뛰면 윌리엄이 저 안에서 고초를 겪는 것이 모두 허사로 돌아간다.

그가 사장이라 자처하고, 계속해서 모른다고 버티는 것도 전부 엘리체를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길드장이 뭐라도 정보를 부는 순간, 그 휘하 길드원들의 목숨을 보장할 수 없게 되므로.

엘리체는 목구멍에서 치미는 뜨거운 것을 꿀꺽 삼킨 뒤, 옆을 돌아보았다.

"...덱스터."

덱스터의 얼굴은 본디 모습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퉁퉁 불어 있었다. 시퍼렇게 멍든 눈가와 피떡이 된 뺨이 참혹했다.

엘리체를 붙잡고 끌고 가려는 정체 모를 남자들에게 가장 거세게 반항한 것은 그였다.

혼자서 다섯 명이나 되는 자들에게 달려들었으니 몸이 성할 리 없었다. 금세 바닥에 내쳐져 짓밟히고 이리저리 채이고 말았다.

"네."

덱스터가 불분명한 발음으로 대답했다.

그들을 감시하고 있는 사내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최대한 목소리 크기를 줄인 채였다.

"왜요?"

"...아냐."

엘리체는 고개를 저었다.

덱스터의 엉망이 된 얼굴을 보니, 고작 머리채를 잡힌 게 다인 자신의 꼴이 너무나 한심했다.

이토록 가슴이 미어질 듯이 아픈 것은 육체적 고통 때문이 아니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그리고 제 사람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무력감 때문이었다.

'대체 왜.'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들을 끌고 온 것은 마레 길드에서 나름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고위 간부, 에단 크로퍼드였다.

행동이 빠르고 손속이 거침 없어 로웰의 신임을 받는 자였다.

'그가 왜 우리 길드를?'

벤데타 길드는 마레 길드의 심기를 거스를만한 일은 하지도 않았다. 그럴 예정이긴 했지만, 어쨌건 아직은 아니었다.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의 청년이라고?'

그런데 이런 말도 안 되는 트집이라니. 한 번도 본 적 없는 청년을 들이밀며 이렇게 막무가내로 끌려오다니.

협상을 하고 싶었으나 길드원들과 입을 맞출 틈도 없었다. 진짜 길드장이 자신이라고 밝히는 것이 옳은 판단인지도 알 수 없었다.

이곳에서 자력으로 빠져나가긴 어려워 보였다. 밖의 보초가 3명, 거기에 이 방 안엔 5명의 사내들이 둘을 감시하고 있었다.

이제 남은 희망은 하나뿐이었다.

'잭이 무사해야 할 텐데.'

부디 주인님을 만나서 이야기를 잘 전해줬기를.

'제발....'

엘리체는 입 안쪽 살을 피가 나도록 짓씹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 불안감을 해소할 방법이 없었다.

"끄으윽...!"

그러는 와중에도 윌리엄을 향한 고문은 계속되고 있었다.

으득.

엘리체는 어금니를 악다물며 감정을 삭혔다. 여기서 풀려나기만 하면 저 에단이라는 놈을 가만두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후둑, 후두둑.

설상가상으로, 온통 어두운 유리창 위로 빗자국이 번졌다.

"뭐야? 비 오네."

"크크, 밖에서 보초 서는 녀석들 고생하겠는걸."

"어차피 몇 시간 뒤엔 우리 차례잖아."

"그건 그렇지."

두 사람을 감시하고 있던 인원들이 태평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엘리체는 그런 그들을 힐끗 보았다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주인님....'

이 어두운 밤에, 비까지 쏟아지는데 과연 아벨이 자신을 구해낼 수 있을까.

엘리체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그때였다.

똑똑.

거센 빗소리를 뚫고 선명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어?"

"뭐지?"

각자의 일을 하고 있던 사내들이 놀라 몸을 일으켰다. 서로를 바라보며 의아한 시선을 교환했다.

"웬 노크? 밖에 있는 놈들인가?"

"지들이 언제부터 예의를 차렸다고...."

사내 한 명이 궁시렁거리며 문으로 다가섰다.

"무슨 일이야?"

문밖에서는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똑똑.

그 대신 다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만 들렸다. 나무판자가 울리는 소리가 어쩐지 음산한 느낌이 풍겼다.

"뭐지?"

문 앞에 선 사내가 옆에 놓인 등불을 들어 창문에 가져갔다.

"쩝, 안 보이네."

밖이 어두운 탓에 보이기는커녕 집 안에 있는 자신의 모습만 비쳤다.

등불을 내려놓아도 마찬가지였다. 비까지 쏟아지자 한치 앞도 안 보일만큼 완전히 컴컴했다.

똑똑.

또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연이은 수상쩍은 상황에 다른 사내들마저 문가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한 사내가 미간을 찌푸렸다.

"야, 왠지 좀...."

소름 돋지 않느냐고 하려던 찰나,

"그냥 밖에 있는 애들이겠지. 얼른 열어줘."

다른 한 명이 대수롭지 않게 말을 잘랐다.

"흐음."

문 앞에 서 있던 사내가 고개를 갸웃한 뒤 문고리를 돌렸다.

끼이익-

문이 열리고,

쏴아아아!

빗소리가 몸집을 키우며 집안으로 들이닥쳤다.

"어?"

사내가 앞을 확인하곤 의아한 얼굴을 했다.

뚝, 뚝.

보초 중 한 명이 한쪽 팔을 붙잡고 서 있었다. 그의 젖은 옷깃에서 물이 떨어져 바닥을 적셨다.

"뭐냐?"

사내의 질문에도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아예 미동이 없었다.

"아니, 무슨...."

사내가 황당해하며 등불을 들어 올렸다. 보초의 몸을 비추는 순간,

"-!"

사내의 눈이 크게 확장되었다.

보초는 이미 죽어있었다. 온몸이 바짝 말라비틀어졌고, 시커멓게 변색된 살갗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이, 이게...."

사내는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보초의 몸이 기우뚱, 하더니 갑자기 제 쪽으로 기울었기 때문에.

"으악!"

그는 황급히 팔을 휘저으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느라 보초의 시체 뒤에 숨어 있던 누군가가 튀어나오는 것을 놓쳤다.

퍽!

누군가가 사내의 손을 가격했다.

챙그랑!

바닥에 떨어지는 등불을 발로 짓밟았다.

파슷!

방 안을 밝히던 두 개의 광원 중 하나가 갑자기 스러졌다.

"무슨 일이야?"

"뭐야?"

방 한쪽이 돌연 어두워지자 사내들이 고개를 홱 돌렸다.

하지만 그들의 시선이 문가에 닿았을 때, 거기 서 있던 남자는 이미 집 안에 진입한 뒤였다.

훅!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촛불마저 꺼져버렸다.

방 안은 순식간에 완전한 어둠으로 뒤덮이고 말았다. 코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무슨 일이야!"

"누가 불을 껐어!"

"안 보여!"

사내들이 놀라 몸을 일으켰다.

달그락. 달칵.

옆에 놓아두었던 무기들을 습관적으로 쥐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엘리체는 갑자기 급변한 상황에 당황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옆을 흘낏 보았으나 덱스터의 모습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다만, 조금 거칠어진 덱스터의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덱스터도 자신처럼 몸을 바짝 긴장시키고 있다는 증거였다.

쿠르릉-

긴장과 고요로 가득한 방 밖으로, 천둥 소리만이 무겁게 깔렸다.

"침착해! 일단 서로...."

누군가 입을 연 순간,

"끄륵!"

기괴한 신음과 함께 그의 입이 닫혔다.

"끄아악!"

바로 옆에서 소름 끼치는 비명이 들려왔다. 방금 당한 이의 최후를 목격한 듯 몹시도 놀란 목소리였다.

"끄륵...."

그마저도 금방 끊겼다. 숨이 넘어가는 고통스러운 소리를 마지막으로.

꿀꺽.

엘리체는 소리를 내지도 못하고 침만 삼켰다. 그녀도 사람을 죽여보았기에 알 수 있었다.

'즉사했어.'

그들이 앓는 소리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통스레 몸을 들썩이는 소리조차 없었다.

이 침입자는 정말이지 무시무시한 속도로, 고작 몇 초 만에 두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다.

'단번에 가슴을 꿰뚫은 건가? 아니면 목을 베었나?'

게다가 그는 소리 없이 날쌔게 움직였다. 이 어두운 환경에도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이.

아예 밤눈이 밝은 수준이 아니라, 모든 상황을 정확히 보고 있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쿠릉-번쩍!

순간 창밖으로 번개가 내리쳤다. 아주 잠깐 방 안이 밝아진 순간, 엘리체는 겨우 그 침입자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컥!"

번개보다도 빠른 속도로 누군가에게 달려들고 있는 그를.

"끄르륵...."

침입자에게 공격당한 사내가 끔찍한 소리를 흘렸다. 몹시도 고통스러워, 듣는 이마저 쥐어짜이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 자식!"

겨우 위치를 파악한 다른 사내가 그에게 달려들었다.

칵!

그의 검이 허공을 가르고 마룻바닥을 내려찍었다. 침입자는 이미 그 자리를 떠난 뒤였다.

털썩.

공격당했던 사내의 몸이 바닥에 쓰러졌다. 앞서 당했던 이들처럼, 마찬가지로 경련하는 소리는 이어지지 않았다.

불과 몇 초만에 5명 중 3명이 명을 달리했다. 상황은 같았으나, 남은 두 사람이 내린 판단은 달랐다.

"이게 무슨...."

한 명은 얼이 빠져서 제자리에 멈춰 서고,

"에단 님께 알려야 해!"

다른 한 명은 안쪽의 방을 향해 몸을 돌렸다.

타다닥.

앞이 잘 안 보이는 상황에서도, 사내는 기억에 의존해 방 쪽으로 달려갔다.

"에...."

사내가 입을 벌린 순간,

번쩍!

다음 번개가 방 안을 환하게 밝혔다. 달려가던 사내는 그 자리에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힉!"

그 침입자가 제 앞에 서 있었으므로.

"어디 가?"

아주 깊은 동굴에서 울려 퍼지는 듯한 기괴한 목소리였다.

Chapter 17. 먹음직스러운 미끼를 던진다. (7)

서걱!

스산한 소리와 함께 침입자의 팔이 움직였다.

"-!"

사내가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목에 가져갔다.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베인 곳에서 피가 왈칵 터져 나오기는커녕, 점점 시커멓게 물들며 말라 비틀어지기 시작했다.

"끅, 끄륵...."

사내는 몇 번이고 목소리를 내려고 애썼지만, 이미 갈라진 성대는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털썩.

사내가 바닥에 무릎을 꿇더니 이내 숨을 거두었다.

"...."

바로 엘리체의 코앞에서.

엘리체와 덱스터의 위치가 방문 바로 옆이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쿠르릉-

다시 천둥이 친 순간, 침입자의 모습이 언뜻 드러났다.

"-!"

엘리체의 눈이 커졌다.

두 사람을 등지고 선, 침입자의 새카만 머리카락이 어둠 속에 녹아드는 것을 확인했기에.

"저 사람...."

덱스터 또한 그것을 확인했는지 놀란 음성을 내었다.

"히익!"

그제야 상황을 인지한 남은 사내가 숨을 들이켰다. 그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성이는 사이,

타닥!

침입자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에게 돌진했다.

쿠구궁-

계속해서 방 안으로 쏟아지는 요란한 소리 덕분에, 사내는 침입자가 제게 달려드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쩍!

침입자의 검이 사내의 갈비뼈 사이를 파고 들었다.

"하윽!"

사내는 폐부가 찢겨나가는 느낌에 숨을 헐떡였다.

툭.

침입자가 발로 사내를 걷어차 검을 빼냈다. 그리곤 생사조차 확인하지 않은 채 돌아섰다.

"끅...."

사내의 몸이 경련하며 푸르르 떨렸다. 그조차도 금방 끊기고, 이내 고요가 찾아들었다.

쿠르릉-

간간히 들려오는 천둥과 번개 소리 뿐. 방 안은 그야말로 숨이 막힐 듯한 싸늘한 침묵으로 가득했다.

꿀꺽.

엘리체가 마른 침을 삼켰다. 어느새 긴장으로 바짝 말라붙은 목구멍이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숨을 쉬지 못했다. 바로 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시커먼 침입자가 방에 들어온 순간부터.

침입자가 무기를 휘두를 때마다 기묘하게 일렁이는 공기, 일격에 숨을 끊어 버리는 무자비한 공격.

무엇보다, 인간이 아닌 것 같은 괴기한 분위기.

온몸의 세포들이 부르짖고 있었다.

저 자는 너무나 위험한 존재라고. 까딱 잘못 건드렸다간, 도리어 목숨을 잃게 될 거라고.

"...."

엘리체는 손바닥이 아플 만큼 주먹을 꽉 쥐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침착을 유지할 수 없었다.

탁.

침입자가 촛불을 매만지더니 위에 불을 붙였다. 희미한 불빛이 온통 어두웠던 방 안을 밝혔다.

"...."

침입자는 윌리엄이 있는 방 쪽을 지긋이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벽 너머의 무언가를 또렷하게 보는 듯이, 한층 깊어진 눈빛을 한 채.

이윽고 그가 시선을 엘리체와 덱스터 쪽으로 돌렸다.

"꼴이 말이 아니군?"

여전히 괴기스러운 음성이었다. 그의 목소리엔 듣는 순간 등골이 쭈뼛하게 만드는 기묘한 힘이 있었다.

뚜벅.

침입자의 발걸음이 엘리체와 덱스터 쪽을 향했다.

"누님...."

덱스터가 엘리체에게 몸을 바짝 붙였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려는 듯한 몸짓이었다.

"가만히 있어."

엘리체는 그런 덱스터를 제지했다.

저 침입자가 마음만 먹는다면, 두 사람은 눈 깜빡할 사이에 아까의 사내들과 같은 꼴이 될 수도 있었다.

그녀는 눈에 힘을 준 채 침입자의 모습을 놓치지 않고 쫓았다. 그리고 확신했다.

이 남자가 마레 길드에서 찾던 그 남자가 분명했다.

뚜벅, 뚜벅.

침입자가 두 사람의 앞에 멈춰 섰다.

그의 얼굴 위로 검은 연기 같은 것이 아른거렸다. 때문에 얼굴을 정확하게 인식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보기 드문 미남이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또 뺨의 선이 상당히 앳되다는 것도.

"당신 누구야?"

마침내 엘리체는 굳게 마음 먹고 입을 열었다.

❖ ❖ ❖

엘리체의 눈동자가 거친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분노로 일렁이는 눈빛이었다.

"저들이 찾는 게 당신이지?"

"아마 그럴걸."

"대체 왜...."

"글쎄."

엘리체의 말을 잘라먹고 그 앞에 우뚝 섰다. 엘리체가 입술을 질끈 깨물며 나를 노려보았다.

"...?"

순간 그녀의 눈에 의혹이 스쳤다. 그녀가 동요 어린 눈동자로 내 얼굴 구석구석을 살폈다.

"...잠깐, 당신?"

레퀴엠을 사용할 때면 그 안의 힘이 내 육신을 지배할 듯 일렁인다. 덕분에 내 머리카락, 눈은 물론이고 목소리까지 변하곤 했다.

휙, 팔을 휘둘러 레퀴엠을 집어넣었다.

"아직 모르겠나?"

깊은 동굴에서 메아리치는 듯한 음색이 점차 변화했다.

"금방 알아볼 줄 알았는데, 실망이군."

매력적인 울림을 품은, 내 본연의 목소리대로. 동시에 검은 물결이 머리카락과 눈에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엘리체."

완전한 아벨 킨드리얼의 모습을 한 채 웃었다.

"-!"

엘리체의 입에서 소리 없는 비명이 터졌다.

"저, 저...."

덱스터는 내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을 잃었다. 팔만 묶여 있지 않았다면 당장이라도 손가락으로 날 가리키고 싶은 눈치였다.

"왜 그런 얼굴들 하고 있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좀 더 반가워할 줄 알았는데. 내가 온 게 기쁘지 않은 건가?"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입술만 달싹일 뿐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러다 겨우 정신을 다잡은 엘리체가 입을 열었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어떻게 되긴."

스릉!

레퀴엠을 꺼내자 처음과 같은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다시 흑발 흑안이 된 나를 보고 엘리체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마법사라고는, 말씀 한 적 없으셨는데...."

"마법사는 아니니까."

단지 특별한 검을 쓸 뿐이지.

히죽 웃으며 새카만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그 모습을 보면서도 엘리체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정말 주인님 맞으시죠?"

"왜, 그럼 이렇게 잘난 얼굴이 세상에 또 있겠어?"

"...아니, 그. 목소리는 또 왜."

"난 마음에 드는데, 왜? 별로인가?"

"그게 문제가 아니라...."

엘리체가 복잡스러운 얼굴로 말 끝을 흐렸다.

"...그럼, 저놈들이 찾는 게 결국 주인님이었던 겁니까?"

"그래. 그간 이 모습으로 도적단을 털고 다녔거든."

"어쩐지."

엘리체가 나직히 탄식했다.

"저놈들이 도통 무슨 소리를 하나 싶었는데. 그걸로 꼬리를 잡힌 모양이군요."

"아마도."

내가 일부러 얼굴을 드러낸 채 놈들을 털고 다녔으며, 보란 듯이 흔적을 흘리고 다녔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엘리체의 푸르게 질린 낯빛과 거칠어진 입술 때문이었다.

'윌리엄이 고문받는 것이 퍽 괴로웠나 보군.'

이런 상황에 내가 자신들을 일부러 위험에 빠뜨렸다는 걸 알게 되는 건 좋지 않았다. 충성심에 금이 갈 위험성이 있으므로.

'진실을 말해 줄 놈들은 어차피 다 죽을 텐데 뭐.'

이제 남은 것은 저 방에 있는 두 놈뿐이었다.

그런 시커먼 생각을 꽁꽁 숨긴 채, 싱긋 웃으며 엘리체를 안아 일으켰다.

"헉!"

엘리체가 헛바람을 들이키며 몸을 내뺐지만, 내 손길을 벗어날 순 없었다.

"...."

꼼짝없이 내게 바짝 붙은 엘리체가 호흡을 멈췄다. 엘리체의 핏기없던 뺨에 혈색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우두커니 앉아 있던 덱스터가 퍼뜩 놀라 정신을 차렸다.

"지금 뭐하시는...."

"그래, 그래."

건성으로 대꾸하며 이번엔 덱스터도 잡아 일으켰다. 각자 내 팔에 대롱대롱 매달리게 된 두 사람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자자, 혹시 모르니까 여기들 있으라고."

어안이 벙벙한 두 사람을 번쩍 들고 가서 안쪽 문에서 최대한 떨어진 곳에 앉혔다.

"뭣 때문에 그러시는 건데요?"

엘리체가 벌게진 얼굴로 묻고,

"일단 이것 좀 풀어주시면 안 될까요?"

덱스터는 간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거기서 좀 기다려."

휙 돌아서서 안쪽의 문을 향해 다가갔다. 방 안쪽에 귀를 기울였다.

"끄으으으윽!"

방 안에서는 여전히 윌리엄의 신음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덜거덕, 덜걱.

의자가 바닥을 거칠게 내려찍는 소리도 함께였다. 의자에 묶인 채 몸을 들썩이는 모양이었다.

탕!

쇠로 된 작은 물건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이제 두 손 끝."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이죽거렸다.

"물론, 아직 발이 남아있지."

"...."

"이제 열 개가 더 남았다는 뜻이야."

그가 웃음기 어린 음색으로 덧붙였다.

"과연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윌리엄의 손톱을 모두 뽑아내는 고문을 가한 모양이었다.

"...모른다."

고통이 상당할 텐데도, 윌리엄은 끝내 아까부터 반복했던 말을 중얼거릴 뿐이었다.

역시 마음에 드는 자였다.

"답답한 놈이로군."

물론 고문을 가하는 쪽에선 그가 마음에 안 들겠지만.

"주인님, 부디 조심하십시오."

등 뒤에서 엘리체의 갸날픈 목소리가 들렸다.

"그 방에 있는 자는 에단 크로퍼드, 마레 길드에서 손꼽히는 강자입니다. 로웰의 직속 명령을 받는 위치에 있습니다."

"아, 들어 봤어."

아까 매복조와 보초들이 말하던 이름이었다. 어디, 어떤 놈인지 슬슬 얼굴을 볼 때가 되었다.

"사실 말이야, 굳이 이렇게 버틸 필요가 없어."

에단이 윌리엄을 회유하듯 말투를 바꾸었다.

"어차피 그 시커먼 놈은 못 오거든."

"누군지 모른...."

"정확히는 못 오는 거지만."

에단이 킬킬거리며 기분 나쁘게 웃었다.

"너희가 사용하던 그 낡은 선술집 주변에 매복을 시켜뒀지. 지금쯤 그 시커먼 놈을 붙잡아 오고 있지 않을까?"

말을 마친 그가 웃음소리를 키웠다.

"하하하하...."

그 소리가 끝나기 전,

쾅!

문을 열어 젖히며 그 안으로 들이닥쳤다.

"여어."

한 손을 들어 올리며 인사했다.

"날 찾았다면서?"

다른 손에는 레퀴엠을 꺼내든 채.

의자에 결박된 채 앉아 있는 윌리엄, 그의 발치에 집게를 들고 쭈그려 앉아 있는 남자가 보였다.

"저...!"

경악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남자, 에단도.

'오, 생각보다 젊은데?'

나서서 이 일을 지휘할 정도면 어느 정도 나이가 있을 줄 알았는데. 유능해서 빨리 승진한 경우인 듯했다.

"네 놈!"

에단이 벌떡 일어나 허리춤의 검을 움켜쥐었다. 그의 적대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태연하게 웃어 보였다.

"기다리기 지루해서 직접 왔어."

"여긴 어떻게...."

곁눈질로 방 밖을 살피던 에단의 입매가 일그러졌다.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들, 그리고 엘리체와 덱스터를 훑고는 탄식했다.

"...그렇군. 전부 당한 건가."

"길드에 남겨둔 선물도 잘 받았어."

"설마, 매복조까지?"

"그래, 잘 구겨서 버려줬지."

빙글빙글 웃으며 대꾸한 뒤 레퀴엠을 까딱거렸다. 에단이 흠칫하고 몸을 긴장시킨 순간,

탕!

바로 앞에 있던 양동이를 걷어찼다.

"억!"

날아간 양동이가 윌리엄을 고문하고 있던 남자의 얼굴에 정통으로 부딪혔다.

타닥!

빠르게 달려 놈에게 접근한 뒤 레퀴엠을 찔러 넣었다.

푹!

레퀴엠이 남자의 복부를 뚫고 등으로 튀어 나갔다.

"욱...."

놈은 불의의 기습에 제대로 된 반항조차 하지 못했다. 놈의 몸이 경련하며 푸르르 떨리다가, 이내 고요해졌다.

"허...."

등 뒤에서 에단의 탄식이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자, 그는 이미 검을 꺼내 든 채 내게서 몇 걸음 물러나 있었다.

"저게, 저렇게 된 거군...."

에단은 신기하다는 얼굴로 남자의 시체를 구석구석 훑었다. 그 시선이 찬찬히 움직여 내가 쥐고 있는 레퀴엠으로 옮겨갔다.

"그 검 덕분인가?"

마치 나에 대해서, 그리고 레퀴엠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는 듯한 말투였다.

'뭐지?'

내가 마레 길드의 도적단을 털고 다닌 지 얼마나 됐다고. 게다가 레퀴엠은 자주 쓰지도 않았는데?

물끄러미 바라만 보자, 에단이 낮게 말했다.

"확실히 소문대로 보통 솜씨는 아닌 듯 하군."

"무슨 소문?"

"네 검! 카데르 영지에서부터 휘두르고 다녔지 않느냐!"

"...오호."

이건 좀 의외였다.

Chapter 17. 먹음직스러운 미끼를 던진다. (8)

'카데르라니, 정말 오랜만이네.'

오베스트 영지 바로 옆에 있는 그곳. 그곳에서 처음으로 레퀴엠을 사용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 영지가 왜 여기서 나와?"

"시치미 떼지 마라. 네 놈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에단의 잇새로 까득, 소리가 났다.

"마레 길드가 관리하는 노예상과 사창가를 턴 게 네놈이지?"

"엥, 거기가 마레 길드 거라고?"

뒷걸음질로 쥐를 잡은 격이었다.

그냥 눈에 보이는 곳을 털었을 뿐인데, 그게 마레 길드가 관리하는 곳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참 제국 여기저기에 손을 뻗쳤군.'

혀를 쯧쯧 차며 에단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래서, 뭐?"

"지금껏 벤데타 길드의 사주를 받아 움직였던 것이군. 그것도 이렇게 꾸준하게, 오랫동안."

에단이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감히 마레 길드를 노리다니, 한낱 조그만 길드 주제에...."

그가 검을 든 채 자세를 바로 잡았다. 나를 향한 음험한 살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호오.'

아무래도 이 녀석, 카데르 영지에서부터 내 흔적을 쫓았던 모양이다. 흉악스럽게 번득이는 눈동자에 강한 적대감이 서려 있었다.

"뼛속 깊이 후회하게 만들어 주마."

"아, 그래?"

딱히 후회할 것 같지는 않은데.

눈으로 그런 의사를 전달하자 에단이 코에서 김을 뿜었다.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저들 중 널 도울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의 검이 뱀의 대가리처럼 위협스레 까딱였다.

"안 됐군. 길드장을 구하려고 헐레벌떡 달려왔을 텐데."

"아닌데?"

내 대답에 에단은 물론이고 윌리엄까지 황당하단 얼굴이 되었다.

"멍청하게 잡혀간 걸 내가 왜 구해야 하지?"

"그럼...."

"내가 여기 온 이유는 하나다."

레퀴엠을 들어 에단을 가리켰다.

"내 뱀 건드린 놈을 족쳐야 하니까."

"무슨 뱀? 설마 선술집에 있던 그 파란 파충류를 말하는 건가?"

"그래."

에단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헛소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놈이 바닥을 박차고 내게 달려들었다.

"직접 끌고 가 죽여 주마!"

훙!

놈의 검이 위협적으로 공기를 갈랐다.

"오, 제법."

빠르고, 날카롭다.

"어디."

슬쩍 레퀴엠을 내밀어 공격을 받아 보았다.

깡!

검날에 부딪혀오는 힘, 그리고 이어지는 압력까지 상당한 수준이었다.

에단의 공격은 지금껏 상대했던 놈들과는 급이 달랐다. 확실히 젊은 나이에 요직을 차지할 만했다.

"쯧!"

에단이 검을 비틀어 다음 공격을 시도했다. 뱀이 움직이는 듯이 교활한 움직임이었다.

기사단 고유 검술과는 달랐다.

뒷골목에서부터 성장한, 지저분하고 추잡한 공격. 상대를 쓰러뜨리고 바닥에서 짓밟기 위한.

까강!

물론 레퀴엠 앞에서 모두 가로막혔지만.

"보여줄 건 이게 다야?"

한가로운 말투로 묻자 에단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건방진 자식!"

말은 거칠었지만 놈의 공격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냉정하게 내 약점을 찾아 집요하게 노렸다.

과연, 이 정도 도발엔 넘어가지 않는다는 건가.

퍽!

에단의 검이 내 옆을 스치고 마룻바닥에 꽂혔다. 에단이 검을 뽑아낸 뒤 바로 나를 쫓았다.

"미꾸라지 같은!"

훙!

휘두르고,

슉!

찌르고,

칵!

베어낸다.

내 몸이 아닌 허공을.

에단의 공격은 단 한 번도 내게 유효타를 먹이지 못했다. 닿을 듯 말 듯 한 아슬아슬한 간격이 유지될 뿐.

일부러 놈의 공격을 막지 않고 피하기만 했다. 꼭 술래잡기하듯이.

"이익!"

에단이 이를 갈며 속도를 높였다.

칵!

보다 매서워진 공격이 연달아 날아들었다. 하지만 단지 그뿐, 거기 날 죽이려는 의도는 없었다.

고개를 살짝 틀거나, 어깨를 돌리고, 가볍게 스텝을 밟는 것만으로 충분히 피할 수 있었다.

몹시도 시시하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공방이었다.

'아, 재미없네.'

처음에는 비교적 괜찮은 실력에 흥미를 가졌다. 확실히 이 정도라면 윌리엄과 덱스터를 제압하고도 남았으리라.

놈의 공격을 한 끗 차이로 피해내는 것도 슬슬 지겨워졌다. 강자들을 상대했던 눈이 지나치게 높아진 결과였다.

"슬슬 그만 하자."

귀찮다는 듯한 한 마디에 에단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누구 맘대로...!"

"내 맘대로지."

가볍게 늘어뜨리고 있던 팔에 힘을 주고, 어깨를 찔러오는 검을 정면으로 막았다.

깡!

"흥, 겨우-"

에단이 비웃으려는 듯 입을 열었으나,

까가강!

제 검이 홱 밀려나며 자신의 목을 노리자 급히 다물었다.

"큭!"

한 걸음 뒤로 물러나는 에단을 계속 몰아붙였다. 검을 맞댄 부분에서 몰아치는 엄청난 압력에, 놈의 몸이 뒤로 쭉쭉 밀려났다.

"으윽!"

마침내 에단의 등이 벽에 닿았다. 견디지 못한 놈이 손목을 비틀어 레퀴엠을 떨쳐 내려 했다.

"어딜 도망가?"

하지만 소용없었다. 내 팔은 조금도 밀려나지 않았으며, 레퀴엠을 똑같은 각도로 틀어 빈틈없이 맞붙였다.

"크윽...."

에단의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마에 어느새 땀이 배어나기 시작했다.

"오, 힘 좀 쓰네?"

히죽 웃으며 팔에 가하는 힘을 더했다. 지금의 나는 최대 힘의 절반도 채 쓰지 않았다.

"큭...."

에단이 이를 악물었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이 점점 시뻘겋게 변했다.

마치 어린아이와 어른이 겨루는 듯한 압도적인 힘의 격차.

"으윽."

에단의 무릎이 천천히 굽혀졌다.

벽에 등을 댄 상황에 더 이상 뒤로 물러날 수 없으니, 결국 아래로 가라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다간, 자신의 검으로 목을 치게 될 테니까.

에단이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더니,

"이것... 놔!"

온 힘을 다해 나를 강하게 밀어냈다.

까강!

두 검이 거친 울음소리를 내며 서로 빗겨나갔다.

내가 못이기는 척 물러난 덕분이었다. 어차피 이대로 놈을 죽일 생각은 없었으니까.

"...."

에단이 입술을 짓씹으며 나를 노려보았다. 어느새 거칠어진 숨이 잇새로 흘러나왔다.

"...과연, 대놓고 죽이면서 돌아다닐 만하군."

"...."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거겠지."

놈은 말을 하면서 팔을 은근슬쩍 흔들었다. 저릿해진 근육을 풀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아직 포기 못 했군.'

확실히 머리 굴리는 게 빠르다. 금세 상대와의 격차를 깨닫고 제 살길을 도모하는 것을 보니.

"그래서?"

느물느물 웃으며 묻자 에단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언제까지 그리 기고만장할 것 같나?"

놈이 차분하게 호흡을 가다듬더니 돌연 자세를 낮추었다.

훙!

에단의 다리가 내 발을 노리고 휘둘러졌다.

"흠."

훌쩍 뛰어 물러난 순간, 에단의 검이 솟구쳤다. 검의 넓적한 면이 내 팔을 때릴 듯이 쇄도했다.

쩡!

팔을 꺾어 막아낸 뒤 물러섰다.

"서라!"

에단은 내가 자세를 잡을 틈도 주지 않고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어쩐지 조급함마저 느껴지는 공격이었다.

쩌엉!

'음? 뭔가 아까랑 다른데?'

차분하게 공격을 막아내며 놈을 관찰했다. 놈의 시선, 공격의 방향과 흐름을.

곧 결론을 내렸다.

'레퀴엠을 노리는 건가.'

정면승부로는 승산이 없으니 검을 빼앗으려는 목적인 듯했다. 어쩐지 아까 레퀴엠을 보는 시선에 탐욕이 묻어나더라니.

'어디, 낚시 좀 해볼까?'

역시 먹잇감을 낚기 위해 미끼를 드리울 때가 가장 즐거운 법이었다.

쩡! 쩌엉!

에단의 의도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방어에만 몰두했다. 그러다 일부러 허점을 노출시켰다.

"-!"

에단이 눈을 반짝 빛냈다. 무방비하게 드러난 내 손목을 노리고 공격해 왔다.

에단의 검이 내 손목에 닿기 직전,

"흥."

콧방귀를 뀌며 레퀴엠을 거둬들였다.

"어?!"

이변을 깨달은 에단이 숨을 들이켰다. 놈의 황망하게 떨리는 눈동자에 텅 빈 내 손이 담겼다.

놈이 주춤한 사이,

빡!

내 주먹이 놈의 이마를 강타했다.

"커헉!"

에단이 뒤로 몇 걸음이나 물러서며 비틀거렸다. 머리가 핑핑 도는 듯 이마를 감싸쥐었다.

"으, 으으."

놈은 낮게 신음하면서도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내 손에 다시 나타난 레퀴엠을 발견했다.

"어, 어떻게...."

에단의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휘파람을 불며 놈의 말을 받았다.

"어떻게 했냐고?"

손을 허공에 뿌리듯 휘두르자 다시 레퀴엠이 사라졌다.

"이렇게 했지."

"이, 이...."

에단은 기가 막힌 듯 입술을 달싹였다. 그런 그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이게 갖고 싶었나 봐?"

다시 레퀴엠을 꺼내 딸랑, 흔들었다.

"이, 이 자식이...."

저를 갖고 놀았다는 걸 깨달은 에단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죽어어!"

놈이 고함을 내지르며 막무가내로 덤볐다.

"어이쿠, 저런."

이젠 놈을 더 데리고 놀 생각조차 없었다.

칵!

무턱대고 들어오는 공격을 빗겨낸 뒤, 놈의 손목에 레퀴엠을 꽂아 넣었다.

"윽!"

에단의 팔이 바르르 떨렸다. 끝까지 검을 붙잡고 있으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파스스-

레퀴엠이 게걸스럽게 놈의 생명력을 탐하는 덕분이었다. 손톱이 말라비틀어지고, 피부가 거멓게 타 들어가며, 끝내는 혈관까지 바싹 갈라졌다.

"으, 으큭...."

찰그랑.

에단의 검이 끝내 주인의 손을 떠났다.

"으, 으으...."

에단이 완전히 생기를 잃은 제 손을 보며 침음했다. 놈의 눈동자에 뒤늦게야 공포의 물결이 밀려들었다.

"아, 안돼...."

자신을 마레 길드에서 군림하게 해줬던 검술의 상실. 놈은 다시는 검을 쥐지 못하게 될 것이다.

"안돼!"

절규하는 놈에게서 레퀴엠을 빼내어 뒤로 물러났다.

"안 돼! 안 된다고!"

에단이 멀쩡한 다른 손으로 손목을 움켜쥐었다.

레퀴엠은 타인의 신체에 닿는 순간, 한계의 한계까지 갈급하게 생명력을 빨아들인다.

"안 돼애애!"

그 결과, 에단의 손목에는 불길하게 타오르는 새카만 불꽃이 남게 되었다. 다른 손으로 움켜쥔다고 해서 막을 수 없는.

공허의 불꽃이 착실하게 손목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제, 제발!"

에단이 울부짖었으나 불꽃엔 귀가 없었다.

새카만 불꽃은 에단의 팔꿈치까지 다다른 후에야 멈추었다. 에단의 팔 절반이 무덤에서 몇 십년 썩은 시체처럼 변해버렸다.

"아, 아아...."

털썩.

에단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망연자실한 얼굴 위로 절망이 쏟아져 내렸다.

"그러니까,"

그런 놈을 응시하며 입가에 비웃음을 걸쳤다.

"넘볼 걸 넘봐야지."

"아...."

에단의 허망한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이윽고 그곳에 필사적이고도 절실한 생존 욕구가 비쳤다.

타닥!

에단이 벌떡 일어나 도망치기 시작했다.

"쯧쯔."

결국 선택한 게 도주라니.

휙 하고 몸을 날려 곧바로 에단을 따라잡았다. 달려가던 속도를 실어 놈의 등을 걷어찼다.

뻑!

"아윽!"

에단이 볼썽사납게 바닥을 굴렀다.

"자, 자. 일어서."

놈의 멱살을 틀어잡고 들어 올린 뒤 남아 있던 의자에 앉혔다.

"뭐, 뭐하려는...."

푹!

레퀴엠을 놈의 허벅지에 냅다 꽂았다.

"아아아악!"

에단의 몸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무표정한 얼굴로 레퀴엠을 뽑아낸 뒤, 다른 쪽 허벅지에도 꽂았다.

"아악! 아아악!"

한참 동안 비명을 내지르던 에단이 고개를 축 늘어뜨렸다. 색색 가느다란 숨소리만이 그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죽, 죽여...."

완전히 전의를 잃고 굴복한, 맥없는 목소리였다. 아까 나를 죽이겠다며 달려들 때와는 딴판인.

"이제야 좀 고분고분해졌네."

피식 웃으며 옆을 돌아보았다.

"주, 주인님...."

윌리엄이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나를 멀거니 보고 있었다. 손톱이 뽑힌 자리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허여멀건 낯이 과다 출혈 때문인지, 아니면 눈 앞의 광경 때문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오, 그래."

윌리엄을 향해 빙그레 웃어 보였다.

"걱정하지 마. 네 원수는 내가 갚아줄 테니까."

"아, 아니. 굳이 그러지...."

"어허. 그런 관대함은 넣어둬."

Chapter 18. 칼날은 숨기고 있을 때 더 예리하다 (1)

윌리엄의 몸을 들어 올려 방 밖으로 옮겨주었다.

"윌리엄!"

"형님!"

엘리체와 덱스터가 꿈틀꿈틀 이쪽으로 기어오기 시작했다. 아까 에단이 떨어뜨린 검을 주워 윌리엄의 옆에 놓아주었다.

"알아서들 풀고 있어. 곧 나갈 테니."

다시 문을 쾅 닫고 방으로 돌아왔다.

"허윽... 헉."

에단은 입에서 침을 줄줄 흘리며 완전히 늘어져 있었다.

"오, 저런. 벌써 그리 맛이 가면 쓰나."

픽 웃으며 방 안쪽의 화롯가로 다가섰다. 내 목소리에 에단이 겨우 고개를 들어 이쪽을 쳐다보았다.

"죽여라...."

"아직 안 돼. 물을 죄가 남아 있거든."

화롯가에 박혀있던 인두를 하나 꺼냈다. 그걸 들고 성큼성큼 다가가자, 에단이 흠칫 몸을 바로 세웠다.

"설마...."

"골드스타, 그러니까 그 뱀 말이야. 네가 손댔지?"

에단의 파르르 떨리는 눈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인두의 끝을 향했다.

"모르는 일이다, 나는...."

"아, 그래? 근데 이제 남은 게 너뿐이라서."

"...."

"어쩌지? 이미 죽은 놈들한테 죄를 물을 순 없잖아?"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인두를 슬슬 흔들었다.

"골드스타가 당한 고통, 그대로 돌려줄게."

"그, 그만...."

에단의 눈동자에 절망이 스멀스멀 번졌다.

치이익.

뜨겁게 달아오른 인두가 거침없이 그의 살갗을 파고 들었다.

"아아아아악!"

놈이 결코 잊지 못할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 ❖ ❖

며칠 뒤.

가을 햇살이 따갑게 내리쬐는 화창한 오후.

"흐음."

나는 현재 수도에서 가장 잘나가기로 소문난 고급 커피 하우스에 와 있었다. 황궁 출신 조리장이 운영하여 특히 유명해진 곳이다.

[황제 폐하께서 두 번 찾으신 바로 그 베이크드 쿠키]

[비올렛 황녀님께서 즐겨드시는 치즈 케이크]

과연, 지난 경력을 강조하는 홍보 문구가 시선을 끌었다. 연일 매진을 이어갈만 했다.

[최근 만찬장에서 선보인 커스터드 푸딩]

"오, 이것도 있네."

내가 며칠 전 연회장에서 맛봤던 디저트도 몇 종류 있었다. 물론 가격은 일반 평민들의 눈이 튀어나올만큼 비쌌다.

그래서 이곳을 방문한 손님은 하인을 대동한 귀족들이 대부분이었다. 혼자 온 나 같은 예외도 있지만.

"저어, 주문하시겠습니까?"

한 점원이 내 뒤꽁무니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들어온 지 한참 지났는데도 주문은커녕 계속 구경만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필요하면 부르지."

손을 내젓자 점원은 퍽 곤란해하는 얼굴로 물러났다. 사람들의 주목이 내게 쏠리는 것이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저 사람이...."

"아벨 오베스트 킨드리얼...."

"회의장에서...."

벌써 회의장에서의 소문이 돌았는지, 다들 소리 낮추어 수군거렸다. 그 시선을 즐기면서 찬찬히 매장 안을 돌았다.

"흐음...."

디저트를 둘러보고 있었지만, 한편으론 매장의 구조와 인테리어를 살피고 있었다. 수도의 최신 유행을 눈에 익히기 위해서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오."

기다리고 있던 인물이 나타났다.

"오셨습니까!"

"어서오십시오!"

한 손님을 향해 점원들이 깍듯하게 허리를 숙였다.

"음."

거만하게 목을 까딱이는 메이슨 영주였다. 커피하우스의 사장이 두 손을 비비며 그에게 다가섰다.

"오셨습니까, 메이슨 영주님."

"그래. 말해둔 것은?"

"여기 잘 준비해두었습니다."

짝짝!

그가 손뼉을 치자 다른 점원이 재빨리 뛰어나와 두 개의 상자를 내밀었다.

"이쪽엔 최신 디저트를 전부 두 종류씩 담았습니다."

지배인이 각 상자를 가리키며 설명을 이어갔다.

"그리고 이쪽은 저희 커피하우스를 꾸준히 찾아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입니다. 조리장님이 직접 만드신 초콜릿 볼로, 뜨겁게 달인 술을 부어...."

만족스러운 얼굴로 설명을 들은 메이슨 영주가 손을 들어 올렸다.

"집사, 계산을."

"예, 주인님."

옆에 서 있던 집사가 상자를 받아든 뒤 값을 치렀다. 그동안 나는 슬그머니 메이슨에게 다가갔다.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일부러 큰 소리를 내며 그의 등 뒤에서 불쑥 나타났다.

"메이슨 영주님 아니신지요?"

"헉!"

나를 발견한 메이슨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자, 자네는...."

"여기서 뵙다니, 이런 우연이 다 있군요."

물론, 오늘의 이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다.

메이슨이 매주 목요일마다 이 커피하우스에 들른다는 사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서도 쫙 꿰고 있었으니까.

나는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설마 그새 까먹은 건 아니시겠죠? 불과 며칠 전에 뵈었는데 말입니다."

메이슨이 험험, 턱을 쓰다듬으며 뒤로 물러났다.

"물론 기억하고 있네, 아벨 공자."

그가 집사에게 빨리 오라고 재촉의 손짓을 했다. 나와의 조우를 썩 달가워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럼 나는 바빠서 이만...."

"이야, 이거 놀랍네요."

그의 앞을 슬쩍 가로막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메이슨 영주님께서 달콤한 디저트를 이리 좋아하시는 줄은 몰랐습니다."

메이슨에게 몸을 바짝 붙인 뒤 그에게만 들리도록 소리를 낮추었다.

"양을 보니 누군가와 같이 드실 것 같은데. 그게 저택의 귀부인은 아닐 듯 하군요."

비릿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그분께서는 단 것을 질색하시니까요."

"...!"

메이슨은 화들짝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들은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곤 다시 나를 보았다.

"자자, 자네. 지금 무무 무슨 말을...."

그가 다급한 어조로 속삭였다. 어찌나 당황했는지 혀가 꼬인듯했다.

"잠시 시간 좀 내실까요? 할 이야기가 있으니."

"나는 자네와 할 이야기가...."

"없다고요? 정말 그럴까요?"

빈정거리는 듯한 말투에도 메이슨은 딱히 대꾸하지 못했다.

"이 디저트를 먹을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습니다."

"...."

"어떻습니까? 갑자기 할 이야기가 생길 것 같죠?"

"아, 알겠네. 알겠어."

그가 시커멓게 변한 얼굴을 급하게 끄덕였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다른 데서...."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손을 들어 위층을 가리켰다.

"3층의 프라이빗 룸에서 이야기 나누시죠."

"그러세."

메이슨이 손짓으로 사장을 불렀다. 설명을 듣고 난 사장이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차와 다과는 어떻게 준비해 드릴까요?"

메이슨이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알아서 대충...."

"제가 주문해도 되겠습니까?"

그의 말을 자르고 끼어들었다. 몹시 무례한 행동이었으나 메이슨은 눈만 끔벅거렸다.

"...그렇게 하지. 아벨 공자의 말대로 해주게."

"예, 알겠습니다."

사장이 깍듯한 태도로 대답한 뒤 나를 응시했다. 그가 듣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뒤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여기부터,"

가장 왼쪽의 진열장을 가리킨 뒤,

"저기까지."

반대쪽 끝의 진열장을 가리켰다.

"다 가져오게."

사장의 낯에 환한 미소가 떠오른 반면, 메이슨은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몇 분 뒤.

3층의 프라이빗 룸에 메이슨과 단 둘이 마주 보고 앉았다.

"할 이야기라는 게 뭔가?"

메이슨이 성급하게 물어왔다.

"어허, 성질도 급하시긴."

느긋한 태도로 탁자 위의 쿠키를 향해 손을 뻗었다.

"차근차근히 이야기하시지요. 시간은 많으니까."

"나는 시간이...!"

"없으시겠지요, 물론."

내 눈이 뱀처럼 가늘어졌다.

"지금쯤 애첩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메이슨 영주님과 함께 올 디저트도."

"...!"

메이슨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뭘 그리 놀라십니까. 제가 회의장에서도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

"그그 피죤 루비! 그걸로 날 협박할 셈인가? 그건 내게 아무 위협도 되지 못해!"

"오, 물론 아니죠. 그것 뿐일 리가요."

느른하게 입술을 핥은 뒤 덧붙였다.

"저는 꽤 많은 것을 알고 있답니다."

레몬 타르트가 담긴 접시를 하나 집어 들었다.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하는 그를 보며 말하기 시작했다.

"테소로 영지."

메이슨의 애첩이 머무는 수도 인근 영지였다.

"2번가의 가장 외곽에 있는 건물."

애첩이 거주하는 장소와,

"선명한 장밋빛 머리칼, 그리고 초록 눈."

애첩의 외모까지.

"모시는 하녀들이 꽤 쩔쩔맨다죠. 증언까지 다 받아두었답니다. 물증도 확보해 뒀고요."

"—!"

메이슨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는 입을 다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나를 바라보았다.

"그, 그...."

그러거나 말거나 타르트를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레몬의 상큼한 향과 부드러운 치즈의 맛을 만끽하며 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달다, 달아.'

입에서 달콤하게 녹아내리는 맛도, 시야에 들어오는 풍경들도. 그리고 뒤가 구린 인간을 놀려먹는 일도.

'꿀잼이네.'

꼭 독 안에 든 쥐를 데리고 노는 것 같달까. 상대방이 내 눈치를 보며 설설 길수록 더욱 재밌었다.

메이슨 영주는 자신 보다 스무 살은 어린 애첩을 끼고 노는 자였다.

원작에서의 그는 아랫도리를 잘 간수하지 못해 경을 치렀다. 배가 잔뜩 부른 애첩이 수도로 올라와 깽판을 쳤기 때문이다.

'하여간 나이 먹고 주책은....'

속으로 혀를 쯧쯧 찬 뒤 입을 열었다.

"용건만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메이슨은 숨을 헐떡이며 내 입만 바라보았다.

"이 커피하우스 인근에 또 다른 3층 건물이 하나 있습니다."

히죽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거, 내놓으십시오."

메이슨의 얼굴이 석고처럼 굳어버렸다.

"자네가 그걸 어떻게 알...."

"그게 중요합니까?"

양손을 깍지낀 채 머리 뒤에 얹었다.

"제가 그걸 원한다는 게 더 중요하지요."

"하지만 이건...."

"네. 아르단테 상단의 분점으로 계획하고 있던 곳이라는 거, 알고 있습니다."

메이슨의 얼굴이 완전히 허물어졌다. 그는 귀신이라도 보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어떻습니까. 제가 아는 것이 꽤 많지요?"

그를 향해 비밀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르단테 상단의 분점을 내는 것은 그가 오래전부터 준비해온 일 중 하나였다.

단순히 수드 영지의 특산품을 유통하는 것에서 벗어나, 제대로 한 자리 차지하겠다는 원대한 계획.

친 아르단테파의 세력 중 상당한 발언권을 얻는 것은 물론, 수도에서의 입지도 크게 높일 수 있을 터였다.

원작에서는 순조롭게 분점을 차렸지만.... 내가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이상, 그의 계획은 어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고민되시겠지만, 잘 생각해 보시지요."

넋이 나가 있는 메이슨 영주를 달래듯이 조근조근히 말했다.

"타일러 영주님이 요새 곤란한 입장에 있는 거, 아십니까?"

"-!"

메이슨 영주의 눈에 비로소 빛이 돌아왔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한 눈빛이었다.

"카를로 영주님은 자비가 없으시지요. 제 것에 흠집을 내는 것을 특히 싫어하시는 분입니다."

타일러는 최근 마레 길드로부터 상당한 압박을 받고 있었다. 감히 카를로의 눈을 속이고 거래 장부에 장난질을 한 대가는 어마어마했다.

그는 조만간 그동안 쌓아 올린 모든 것을 잃을 것이다.

"그간 메이슨 영주님의 훌,륭,한 인품은 푸른 진주와 붉은 산호 홍보에 도움이 되었지요."

"...."

"하지만 그게 무너진다면? 그땐 카를로 영주님의 칼이 누굴 향할까요?"

메이슨의 얼굴에 절박한 빛이 떠올랐다.

"아벨 공자...."

"그건 메이슨 영주님 본인이 가장 잘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악마의 유혹처럼, 나긋나긋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그 건물, 제게 넘긴다면 방금 말한 건 전부 잊어드리겠습니다."

메이슨이 침을 꼴깍 삼키더니, 이리저리 재어 보는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공자가 말한 것은... 좀 곤란하네. 혹시 다른 원하는 것은 없는가? 돈, 보석 뭐가 됐든 줄 터이니...."

"돈과 보석이라."

"그래, 말만 하게. 내 힘 닿는 대로 최대한...."

드르륵.

메이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의자를 밀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Chapter 18. 칼날은 숨기고 있을 때 더 예리하다. (2)

"아직 계산이 잘 안 되는 모양이군요."

싸늘한 목소리로 말하며 그를 내려다 보았다.

"본인이 무엇을 잃게 되는지."

갑자기 돌변한 내 말투에 메이슨이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이 자리가 흥정을 위한 거라 생각하십니까?"

픽, 입가에 머금었던 미소를 꺼뜨렸다.

"그리 생각하신다면 어쩔 수 없지요."

바지를 툭툭 털며 매몰차게 돌아섰다.

"잃고 나서 후회하면 늦은 법입니다, 메이슨 영주님."

성큼성큼 걸어 문가로 다가갔다. 속으로는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채 셋을 세기도 전에.

"아, 아아 아벨 공자!"

등 뒤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잠깐 기다리게!"

허둥지둥 달려온 메이슨이 내 소매를 붙잡았다.

"뭘 그리 급하게 구는 겐가. 좀더 이야기를 나누...."

"바쁘신 분을 붙잡고 실례했군요."

더 이상 대화할 생각이 없다는 듯 냉정히 대꾸했다.

"앞으로 더 바빠지실 테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메이슨의 손을 탁 떨쳐 낸 뒤 고개를 돌렸다. 마지막 순간, 메이슨의 얼굴이 와르르 무너졌다.

"알겠네!"

우뚝.

문가를 향해 서슴없이 나아가던 걸음을 멈추었다.

"공자가 말한 것, 넘기겠네. 그러니 부디...."

몸을 빙글 돌렸다. 바짓자락을 꽉 움켜쥔 채 헐떡이고 있는 메이슨이 보였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산뜻한 대꾸에 메이슨은 그제야 한시름 놓았다는 듯 숨을 몰아쉬었다.

"아까 한 말은 확실히 지키는 거겠지?"

"오, 몰론입니다. 거래는 확실하게 합니다."

메이슨이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까지 명의 이전 작업을 마쳐 주신다면요."

"내, 내일...?"

너무나 촉박한 기간에 메이슨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싫으면 관두시고요."

이런 사람에게는 시간을 여유롭게 줘서는 안 된다. 조금이라도 틈이 생기면 쥐새끼처럼 빠져나갈 궁리를 하기 때문이다.

"아니, 아닐세. 어떻게든 해 보겠네."

"잘 생각하셨습니다. 아, 그렇지."

메이슨 영주를 바라보며 빙글빙글 웃었다.

"여기 디저트 꽤 마음에 드는군요. 더 먹고 싶을 정도로요."

말귀를 알아들은 그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원하는 만큼 구매하게나. 내 계산하도록 하지."

메이슨의 입꼬리 끝이 파들파들 떨렸다.

"참으로 관대하시군요. 그럼 감사히 먹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이 커피하우스에 남은 상품을 다 사 갈 생각이었다. 역시 남의 돈으로 사 먹는 음식이 제일 맛있는 법이었다.

❖ ❖ ❖

다음 날.

"쩌, 쩐다...."

잭이 입을 쩍 벌린 채 두리번거렸다. 상앗빛 대리석으로 꾸민 벽, 제 얼굴이 비치는 반들거리는 바닥을 정신없이 훑었다.

"진짜 이게 우리 집이라고요?"

홀 중앙에 서 있던 나는 심드렁한 어투로 대답했다.

"어, 맞다. 한 번만 더 물어보면 세 번째다."

"하지만 너무 좋은데요...? 이런 집에서 살아도 되는 건지...."

"안 될 건 또 뭐냐."

잭이 눈을 끔벅거리며 다시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우와아...."

벌린 입이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그런 잭의 옆에 덱스터, 윌리엄, 엘리체가 서 있었다. 그들 또한 쉽게 들어오지 못하고 입구에서 건물 안을 들여다보기만 했다.

덱스터가 윌리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형님, 이거 괜찮은 걸까요?"

"뭐가."

"아니, 어제는 오다 주웠다고 디저트 몇 상자를 들고 오시고. 그거 수도에서 제일 비싼 커피하우스 거였잖아요?"

"그래. 맛이 정말 좋았지."

"오늘은 갑자기 이런 삐까번쩍한 건물로 데려오시고. 요즘 왜 이렇게 잘해주시는지 모르겠다니까요."

덱스터의 목소리가 걱정스레 줄어들었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을 때가 된...."

스윽.

지긋이 덱스터를 바라보았다.

"나 아직 쌩쌩하다."

"헉!"

덱스터가 화들짝 놀라 윌리엄에게서 떨어졌다.

"그건 또 언제 들으셔서.... 왜 이리 귀가 밝으십니까."

투덜거리는 덱스터와 주변 사람들을 향해 손짓했다.

"촌놈 티 그만 내고 들어와라."

네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더니 쭈뼛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저, 주인님."

앞에 서 있던 엘리체가 슬그머니 내게 다가왔다.

"저도 정말 믿기지 않아서 말입니다. 이곳은 수도에서 땅값이 가장 비싸기로 유명한 노른자 땅이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

"매일 이곳을 지나다니는 귀족들의 마차만 수십 대입니다. 그런 곳에다 무려 3층 건물이라니요."

엘리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도대체 어느 정도의 금액일지 감조차 오지 않습니다."

"돈 주고 산 거 아니야."

"네?"

엘리체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럼 어떻게...."

"메이슨한테 받은 거다."

"이렇게 좋은 건물을 메이슨 영주가 내놓았다고요?"

"안 내놓곤 못 배기게 만들었지."

의기양양한 대답에 엘리체의 입이 벌어졌다.

"역시 주인님. 수완이 대단하십니다. 제가 가져온 별것 아닌 정보로 이만큼 이득을 취하시다니요."

그녀의 감탄 어린 시선을 즐기며 몇 시간 전 만났던 메이슨을 떠올렸다.

'지금쯤 뭘 하고 있으려나?'

쿵.

아벨 오베스트 킨드리얼 이라는 이름 옆에 도장을 찍은 뒤 종이를 챙겼다. 3번지의 건물이 내 명의로 옮겨졌다는 서류였다.

메이슨은 나를 바라보며 못내 아깝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이내 미련을 떨치곤 말했다.

"자, 이제 됐는가?"

"일 처리가 아주 빠르시군요. 만족스럽습니다."

"흠흠. 자, 그럼 이제 그 서류를 넘기게나."

"무슨 서류 말씀이신지요?"

메이슨의 손을 바라보며 천연덕스럽게 눈을 깜박였다.

"왜 모르는 척을 하는 겐가! 그, 그 서류 말일세!"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전혀 모르겠는데요?"

"아벨 공자!"

감정이 격해진 얼굴로 메이슨이 바짝 다가섰다.

"분명 약조하지 않았나! 그 건물을 넘기면, 넘기면...."

그의 말투에서 점점 힘이 빠져나갔다.

"넘기면...."

그도 깨달은 것이다. 내가 잊겠다고 말했을 뿐, 무언가를 명확히 약속한 적은 없다는 것을.

"이, 이게...."

"그럼 이만."

우아한 태도로 의자에서 일어섰다.

메이슨은 표정 관리가 안 되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분노, 황당함, 억울함 등 온갖 감정이 고루 뒤섞인 얼굴은,

'풋.'

퍽 보기 우스웠다.

비웃음을 감추지 않으며 그에게서 뒤돌아섰다. 메이슨은 그런 나를 붙잡을 생각조차 못 하고 입가를 파르르 떨기만 했다.

"아 참, 혹시 해서 말씀드리는 건데."

문고리를 잡고 돌리며 말했다.

"허튼 생각은 하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문틈 사이로 몸을 밀어 넣고 툭, 한 마디 남겼다.

"전 기억력이 아주 좋거든요."

내가 그의 애첩에 대한 정보를 쥐고 있는 한, 메이슨은 결코 나를 거스를 수 없었다.

'돈 많은 호구가 하나 생겼군.'

지금쯤 오베스트 영지로 가고 있을 다른 호구 1호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생각을 마치고 네 사람에게 손짓했다.

"다 봤으면 이만 올라가지."

앞장서서 위로 올라가는 계단을 올랐다.

"신난다아!"

가장 먼저 잭이 신이 난 다람쥐처럼 쪼르르 나를 따라왔다. 그 뒤로 조금 머뭇거리는 세 명의 어른들이 뒤따랐다.

"우와...."

"이게 다 뭐람."

2층을 본 길드원들의 입이 다물어 질 줄을 몰랐다.

1층이 탁 트인 넓은 홀이었다면, 2층은 복도 양옆으로 여러 개의 방이 놓인 구조였다.

"프라이빗 룸이로군요."

"맞아."

엘리체의 말에 동의하며 설명을 덧붙였다.

"거물들, 혹은 지갑을 활짝 열 준비가 된 사람들을 위한 곳이다."

다시 계단을 오르며 말했다.

"다 봤으면 계속 올라가지."

"네!"

잭이 씩씩하게 외치며 나를 뒤따랐다. 나머지 세 명도 아까보다는 걸음이 빨라졌다.

"음."

무심코 계단 난간을 짚었던 윌리엄이 신음을 흘렸다.

"윌리엄."

그런 그에게 엘리체가 미안함 가득한 얼굴로 다가섰다.

"정말... 정말, 미안해. 윌리엄."

엘리체는 그간 반복했던 말을 또 다시 꺼냈다. 몇 번이고 말해도 그 미안함이 덜어지지 않는듯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엘리체님."

윌리엄 또한 계속 그래왔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의 낯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다는 당연함 외에는 비치지 않았다.

"지금 엘리체님의 몸이 성치 않았다면 이보다 더욱 괴로웠을 겁니다."

"하지만 네 손이...."

엘리체가 붕대로 칭칭 감긴 윌리엄의 손을 보며 침중하게 중얼거렸다.

"당분간은 검을 쓰기 어려울 테지만, 곧 회복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우와아!"

엘리체의 말은 잭의 우렁찬 비명에 묻혀버렸다.

"형, 이것 좀 봐요! 침대가 있어요! 엄청 커요! 우리 둘이 누워도 남겠어요!"

"오호?"

그 말엔 덱스터도 솔깃했는지 잭의 옆으로 냉큼 다가섰다. 두 사람은 곧 이곳저곳 방문을 열어보는 재미에 푹 빠져 버렸다.

마찬가지로 3층을 살펴본 엘리체가 나를 돌아보았다.

"이곳은...."

"그래, 앞으론 이곳이 우리 길드의 본거지다."

"여기가...."

엘리체가 주변을 둘러보며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었다. 문득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 수심이 번졌다.

"어차피 기존 선술집은 위치가 발각되서 더는 쓸 수 없어. 알잖아?"

속을 읽는 듯한 한 마디에 엘리체가 어깨를 움찔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조금 아쉬워서요."

"아쉬워할 필요 없어. 나중에 마레 길드를 무너뜨리고 되찾으면 되니까."

엘리체가 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쉬움 따윈 모두 지워버린 후련한 얼굴로.

"자, 들어가지."

길드원들을 이끌고 가장 안쪽의 방으로 들어섰다. 고풍스러운 벽지와 바닥, 그리고 고급 마호가니 가구들이 맞이했다.

문 맞은편 벽의 전면은 통유리로 덮었다. 투명한 창 너머로 수도 마기오레의 전경이 한눈에 보였다.

"다들 정신없이 바빠 보이네."

중앙 광장을 비롯해 온 거리가 수확제 준비로 떠들썩했다.

화려한 축제용 가랜드가 바람에 나부끼고, 등불을 밝힌 포장마차들이 곳곳에 자리를 잡았다.

"드디어, 내일인가."

수확제의 시작이.

수확제 이전에 기반을 닦아 놓겠다는 계획이 순조롭게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씨를 뿌린 곳에 싹이 트고 줄기가 자라나는 것이 눈에 선연히 보였다.

"기대되는군."

아마 수도 어딘가에 있을 성녀 라헬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터였다.

털썩.

방 안쪽 의자에 앉은 뒤 턱짓했다.

"다들 앉아."

방 중앙에 놓인 손님용 테이블과 의자를 향해서.

"...."

네 사람이 눈치를 살피더니 조심스레 의자에 앉았다. 그들의 면면을 지긋이 살피다가 운을 뗐다.

"다들 그간 고생이 많았다."

말이 끝나자마자 다들 입을 떡 벌리고 나를 바라보았다.

"뭐야, 그 표정은."

"아니, 그."

덱스터가 쑥스러운 듯 뺨을 긁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라서요."

사람 심리가 그렇다.

백번 잘해주다가 한 번 실수하면 돌아서듯, 백번 야멸차게 굴다가 한 번 다정하게 굴면 껌뻑 넘어온다.

"주인님이 아니었다면 이 자리에 어찌 모였을지...."

엘리체마저 얼굴에 감동의 물결이 흐르고 있었다.

'으음.'

일의 원흉도 모르고 저렇게들 감동하고 있는 걸 보니 기분이 좀 그렇군.

"흠흠. 아무튼,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하겠다."

엘리체, 윌리엄, 덱스터, 잭 모두 진지한 얼굴로 내 말을 경청했다.

"일단 기존에 맡고 있던 역할을 모두 뒤엎을 예정이다."

붕대로 감은 두 손을 늘어뜨린 채 앉아 있는 윌리엄을 응시했다.

"윌리엄, 이제 표면적 길드장을 내려놓고, 집사 역할을 수행하도록."

"집사...라고 하셨습니까."

윌리엄이 다소 놀란 얼굴빛을 보였다.

"그 손톱, 자라는 데 몇 개월은 걸릴 거다. 검을 쥐기도 어려울 테지."

"...예."

"그러니 당분간은 장갑으로 손을 감추고, 사무직을 수행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순순히 응하는 윌리엄의 옆에 앉은 덱스터를 보았다.

"당분간은 덱스터 네가 길드 외부의 일을 처리하도록 해. 바깥에서 물건도 구해오고, 필요하면 마차도 좀 몰고."

"...."

"한 마디로 잡일꾼이지."

덱스터가 입꼬리를 파들파들 떨며 표정을 관리했다.

"알겠습니다."

제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잭이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주인님, 저는요?"

"너는 그냥 골드스타 밥이나 줘."

"...."

Chapter 18. 칼날은 숨기고 있을 때 더 예리하다. (3).

"농담이고,"

급격히 침울해지는 잭을 얼른 달랬다.

"넌 잘하고 있다. 그 개코로 길드원들을 구했잖아."

"아...."

잭의 뺨이 붉어졌다. 녀석은 멋쩍은 듯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이윽고, 각자 역할을 부여받은 세 사람의 시선이 엘리체에게 모였다. 엘리체 또한 마른 입술을 핥으며 나를 응시했다.

"엘리체, 너는...."

손가락으로 탁자를 툭툭 두드린 뒤 말했다.

"앞으론 전면에서 길드장 역할을 수행한다."

쿵.

네 사람은 가슴에 돌덩어리가 떨어진 듯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곧장 항변하려는 덱스터를 엘리체가 제지했다. 잭 또한 두려운 얼굴을 했고, 윌리엄은 조용히 입술을 사려 물었다.

이미 지난 습격 사건으로 길드원들의 마음엔 불안감이 깃들었다. 특히, 엘리체를 전면에 내세우는 것에 대한 위험 부담이 커졌다.

팽팽한 침묵이 방 안을 갈랐다.

"다들 무슨 생각하는지 알겠는데,"

내 덤덤한 목소리가 침묵을 깨뜨렸다.

"전면에 나서는 게 꼭 위험한 것만은 아니야."

팔짱을 끼며 긴 숨을 내쉬었다.

"오히려 엘리체를 보호하는 거지."

엘리체를 비롯한 나머지 길드원은 여전히 내 말을 못 믿는 눈치였다. 그런 그들을 납득시키기 위해 설명을 계속했다.

"일단, 저번 일에 연루됐던 놈들은 모두 죽었다. 당분간 마레 길드에서 우리를 쫓을 일은 없어."

내 말투는 차분했으나 은은한 한기가 배어 있었다. 그것을 느낀 잭이 슬쩍 어깨를 움츠렸다.

"게다가 곧 수확제가 시작되니 정신없이 바쁠 테지. 무엇보다, 놈들은 곧 다른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질 거다."

곧 여름검 카덴차로 인한 이변을 깨닫게 될 테니까. 특산품의 수급량이 줄어드는 탓에, 놈들은 눈코뜰새 없이 바빠질 예정이었다.

"그리고 이 건물의 위치. 어떤 길드라도, 심지어 황궁 기사단이라 해도 이곳을 조용히 습격하진 못 한다."

"아."

덱스터가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맞습니다. 이곳은 치안이 굉장히 잘 되어있어요. 게다가 밤낮없이 항상 환하죠."

"무장 세력도 충원할 거다. 그러니 보안 문제는 접어둬도 돼."

이해했다는 듯 환해졌던 길드원들의 얼굴은,

"또, 이제 우리는 길드가 아니라 상단을 운영할 거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다시 의문으로 가득해졌다.

"상단...이요?"

"그래, 엘리체. 너와 내 목표를 위해서 꼭 필요한 절차지."

엘리체의 얼굴이 기묘해졌다.

"그게 이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 지, 잘 모르겠습니다."

"바네스 가문, 그리고 마레 길드가 부를 축적한 수단이 무엇이지?"

"그야 특산품을 가공한 사치품을... 아!"

엘리체의 푸른 눈이 번득였다.

"그럼 예전에 말씀하신 대로, 그들의 사업 기반을 무너뜨릴 작정이시군요."

"그래. 엘리체 너는 거대 상단을 이끄는 상단주로서, 화려하게 수도에 나타날 거다."

"제가... 상단주를."

엘리체가 실감이 안 된다는 듯 두 손을 꼭 모아쥐었다.

"겉은 상단이지만, 뒤에서는 길드를 운영할 거다. 아르단테 가문과 비슷하지."

피식 웃으며 손을 튕겼다.

"길드의 힘은 자금력에서 나오는 거거든."

"역시 주인님...."

엘리체는 진정 탄복했다는 듯 존경 어린 눈길을 내게 보냈다.

"상단 이름은 네가 고민해 봐."

"예, 알겠습니다."

"당분간은 물품을 조달하고 내부를 꾸미는 데 주력해. 그 어느 상단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모든 것을 최고급으로 구매하도록."

"네, 주인님!"

엘리체가 기운 좋게 대답했다. 예나 지금이나 그녀는 돈 쓰는 일을 아주 좋아했다.

"아, 그런데. 한 가지 걱정이 있습니다."

"뭔데?"

"잭을 제외한 길드원들의 얼굴이 알음알음 알려진 상태입니다. 이대로 상단을 만든다 해도, 벤데타 길드의 흔적을 완전히 지우긴 힘들 겁니다."

그것도 이미 생각해 둔 방법이 있었다.

"일단 윌리엄과 덱스터는 변장을 하도록 해. 염색과 도구를 활용하면 쉽게 인상을 바꿀 수 있다."

"네."

"알겠습니다."

윌리엄과 덱스터가 군말 없이 대답했다.

"그리고 엘리체 너는...."

엘리체는 지긋이 바라보다가, 이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곧 해결해 줄 테니 걱정 말고."

"...으음. 일단 알겠습니다."

엘리체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수긍했다.

"자, 그럼. 각자 맡은 일들 시작하자고. 시간이 없어."

손뼉을 치며 길드원들을 일으켜 세웠다. 엉거주춤 일어서는 그들 중 덱스터를 불렀다.

"덱스터는 남아."

덱스터가 눈알을 데굴 굴리더니 얼른 다가왔다.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그건 아니고."

덱스터의 어깨를 짚으며 씩 웃었다.

"네가 데려올 사람이 있다."

❖ ❖ ❖

다그닥, 다그닥.

두 마리의 말이 부지런히 달려갔다.

"우와."

멜리나는 그 뒤의 마부석에 앉은 채 부지런히 주변을 감상했다.

"여기도 사람, 저기도 사람이네."

오베스트 영지는 인구밀도가 높지 않은 편이다. 그래서 이렇게 사람이 북적북적한 길거리가 몹시도 낯설었다.

게다가 지나가는 사람들의 옷은 어찌나 다채로운지, 그 옆에 죽 늘어선 건물들은 어찌나 높고 휘황찬란한지.

수도 마기오레의 풍경은 멜리나의 정신을 쏙 빼놓았다.

"입에 파리 들어가겠다."

옆에서 핀잔이 들려왔다.

"-!"

멜리나는 뺨을 붉히며 얼른 입을 닫았다. 그리고 옆을 째려보았다.

"그렇게 안 벌리고 있었거든요?"

"침 떨어지던데."

킬킬대는 남자의 이름은 덱스터. 아벨의 명령으로 자신을 데리러 왔다고 했다.

"당신, 진짜 아벨 도련님이 보낸 사람 맞아요?"

"맞으니까 시간 맞춰 데리러 온 거지. 네가 그란데 상단의 마차를 타고 오겠다고 했다면서?"

"그랬죠."

멜리나는 뾰로통한 얼굴을 흥, 옆으로 돌렸다.

"그란데 상단의 마차를 타고 오는, 적갈색 머리카락의 10대 소녀는 너뿐이었거든. 헷갈릴 일은 없지."

덱스터가 키들거리곤 화제를 돌렸다.

"오는 길이 험하진 않았어?"

"아, 네. 다들 이번 여행은 묘하게 평안하다고 했어요."

멜리나는 금세 얼굴을 풀곤 재잘거렸다.

"희한하게 수도 주변의 도적들이 조용하다고. 습격이 눈에 띄게 줄었다고 그러더라고요."

"호오."

"게다가 대형 상단은 용병도 많이 고용하니까요. 별일 없었어요."

"그래도 마차 여행이 쉽진 않지. 올라오는 데 시간도 오래 걸리고."

덱스터의 말에 멜리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그렇지만, 수도로 간다는 기쁨이 더 컸어요. 소일거리가 있어서 버틸 만 했고요."

"소일거리라면, 어떤?"

"아 그건...."

막 대답하려는 찰나, 마차의 속도가 서서히 느려졌다. 멜리나는 하려던 말을 삼켰다.

"벌써 도착했어요?"

"응."

덱스터의 대답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여긴...."

화려한 건물들이 잔뜩 들어선 길가였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은 높이, 그리고 번쩍번쩍 빛나는 흰 대리석 벽.

수도 문화에 문외한인 멜리나마저 이곳이 수도 최신 유행의 집약지임을 알 수 있었다.

끼익.

마차가 멈춰 섰다.

멜리나는 마차가 선 곳의 앞을 확인하곤 아연해졌다. 이 거리에서도 가장 높게 솟은 건물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 왔어요? 여기에요?"

"맞아. 자자, 내리라고."

덱스터가 먼저 내려 손을 내밀었다. 멜리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 손을 잡고 마부석에서 뛰어내렸다.

"그럼 가볼까."

덱스터가 멜리나의 짐을 들고 앞장섰다. 멜리나는 그의 뒤를 조심스레 따라갔다.

"진짜 여기에 아벨 도련님이 계신다고요?"

"응."

덱스터가 문을 열어젖히자,

"와아."

멜리나는 의심하던 것도 잊고 감탄을 흘렸다.

천장을 장식한 샹들리에, 거기서 뿜어져 나온 빛이 눈부시게 바닥을 물들였다. 최고급 상앗빛 대리석을 아낌없이 사용한 벽과 바닥이 찬란하게 일렁였다.

다만 아직 가구나 물품이 채워지지 않아 지나치게 넓어 보이는 경향이 있었다.

"이건, 그래. 중앙에 놓아서 주목받게 하는 게 좋겠군."

"그럼 여기를 중심으로 해서...."

두 남녀가 홀 중앙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커다란 종이를 함께 보며 진지하게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바닥재 시공은 곧 마무리된다고 합니다."

남자는 백색의 머리를 단정하게 쓸어넘긴 중년이었다. 나이답지 않게 다부진 체격에, 흰 장갑과 까만 정장이 퍽 잘 어울렸다.

"다행이네. 벽은 이미 끝났으니까, 이제 커튼만 달면 되겠어."

그와 마주 선 채 대화를 나누는 중년의 여성은 희게 세어버린 금발을 갖고 있었다. 목깃까지 완전히 감싸는 단정한 베이지색 드레스가 잘 어울렸다.

"이건 어디로 옮길까요?"

거대한 유리 케이스를 든 인부들이 둘에게 다가섰다. 여성이 주변을 둘러보곤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그건 저쪽 벽으로."

"예, 알겠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멜리나는 여성 쪽이 더 계급이 높겠다고 짐작했다. 그리고 이 공간은 마치 무언가를 '판매'하기 위한 곳 같다고 생각했다.

"어머."

다시 고개를 숙이려던 여성이 덱스터와 멜리나를 발견했다.

"다녀왔습니다."

덱스터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둘에게 다가섰다. 여성은 덱스터의 인사를 받고는 곧장 멜리나에게 말을 걸었다.

"멜리나 양, 맞나요?"

부드럽고 상냥한 목소리였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멜리나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여자구나.'

제게 편지를 보낸 사람이 그녀라는 것을.

예전에 의뢰했던 물품을 들고 수도로 올라오라는 아벨의 전언이 담긴 편지.

내용도 내용이지만, 글씨체가 못내 신경을 건드렸다. 단정하고 깔끔한 것이 누가 봐도 여성의 글씨체였으니까.

'아, 다행이다.'

기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사실 멜리나는 오는 내내 이 글씨체의 주인이 누구일지 생각했다. 아벨이 대필을 맡길 정도면 퍽 친밀한 사이가 아닌가 싶어서.

그러나 직접 만나 본 여성은 아리따웠으나 나이가 꽤 많아 보였다. 고운 얼굴에 자리한 주름을 숨기지 못했다.

'아벨 도련님과 특별한 사이는 아닌가 봐.'

가슴을 쓸어내리던 멜리나는 경악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특별한 사이면 뭐 어쩔 건데?'

화르륵, 갑자기 얼굴이 불타는 것 같았다.

"멜리나 양?"

여성이 멜리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멜리나는 고개를 휘휘 젓고는 얼른 대답했다.

"네, 안녕하세요!"

여성은 그런 멜리나가 귀엽다는 듯 생긋 웃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오는 길이 고되진 않았나요?"

"네, 힘들지만 버틸 만 했어요."

멜리나는 대답한 뒤 눈을 데굴 굴렸다.

"저어, 근데 아벨 도련님은 어디 계시나요?"

"아, 주인님께서는 위에 계십니다."

"주인...님이요?"

멜리나는 어리둥절해졌다. 여성이 아벨을 부르는 호칭에서, 은은한 자부심 같은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성은 주변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멜리나 양은 내가 모시고 올라갈게. 멜리나 양의 짐은...."

"제가 하겠습니다."

"제가 옮겨둘게요."

대답은 양쪽에서 동시에 나왔다.

"덱스터."

중년의 남자가 덱스터를 향해 강한 눈빛을 보냈으나 덱스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건 제 일입니다, 예? 주인님께서 직접 지명하신. 형님은 형님의 일이 있잖아요?"

"하아, 알았다."

고집 세보이는 얼굴의 남자는 주인님이라는 말에 곧바로 수긍했다. 미소를 지은 채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여성이 나섰다.

"어차피 1층을 비워두면 안 되니까. 나 대신 인부들을 맡아줘."

"알겠습니다."

덱스터를 대할 때와는 다르게 아주 정중한 태도였다. 여성이 빙그레 웃곤 몸을 돌렸다.

"자, 올라갈까요?"

세 사람은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방이 쭉 늘어선 2층을 지나쳐, 3층까지 바로 올라갔다.

"그럼 이만 실례."

덱스터가 멜리나의 가방을 들고는 복도를 돌아 사라졌다. 여성은 덱스터의 등을 응시하다가 이내 멜리나에게 말했다.

"자, 가실까요? 주인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녀가 복도의 가장 끝 방으로 멜리나를 안내했다.

똑똑.

여성이 문을 두드리고 안에 고했다.

"멜리나 아가씨를 모셔왔습니다."

잠시 기다리자 안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라고 해."

아벨의 목소리였다.

Chapter 18. 칼날은 숨기고 있을 때 더 예리하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