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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6 - 6

Chapter11. 궂은 일은 남에게 시킨다 (1)

하지만 그런 무례를 범했음에도 그녀의 얼굴에 노여운 기색은 없었다.

"건방져, 건방져 정말."

그녀는 제게 굽실거리는 귀족들에게 진절머리가 나 있었다. 그리 행동하면서 눈빛 속에 칼날을 감춘, 이중적인 태도에 특히.

그래서 그녀는 그런 그들의 무릎을 굽히고 모욕을 주는 것을 즐겼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무례했다. 다만 그 속에 저열한 악의는 없었다.

겉과 속이 똑같은 투명함이, 오히려 비올렛 황녀에겐 신선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됐어. 재미없으니까."

예상대로 비올렛 황녀는 시큰둥하게 손을 내저었다.

"그럴 거면 처음부터 가면을 벗었겠지."

뭐, 어떤 수단을 쓰더라도 그녀의 정체를 감추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황족 특유의 위압감이 쉽게 감춰지지 않을뿐더러,

'애초에 몸에 두른 것 자체가 다르니까.'

비올렛 황녀의 목에 걸려 있는 저 다이아몬드 목걸이는 제국 내 유일무이한 제품이다.

명품 악세사리 부티크인 사르티에에서, 가장 몸값이 비싼 장인이 알알이 다이아몬드를 박아 만든 초고가의 작품.

그것을 알아보지 못할 안목의 소유자라면 사교계에 발을 들이지 않는 것이 맞았다. 이 카지노에 와봤자 촌뜨기 취급을 받을 게 분명하고.

"그래서, 이 수도까진 왜 왔는데? 관광이라도 하러 왔나?"

비올렛 황녀는 이제 다른 방법으로 내 정체를 알아내려고 애썼다.

나는 다시 샴페인 잔을 집어 들고 천천히 돌렸다.

"겸사겸사. 볼일도 볼 겸."

"그러니까 그 볼일이 뭐냐고."

"그게 그렇게 궁금해?"

"당연하지. 수도에서 한 번도 못 본 사람인데."

비올렛 황녀의 얼굴엔 호기심이 가득했다. 그녀는 무슨 대답이 나올지 기대되는 듯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내 입술을 바라보았다.

'저렇게 구니까 좀 귀엽네.'

픽 웃으며 내 쪽으로 손짓했다.

"이쪽으로 가까이."

비올렛 황녀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걸음을 옮겼다. 그새 취기가 올랐는지 약간 비틀거리면서.

하지만 불안해 보이진 않았다.

아니 그러할까. 허락 없이 황족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은 황족 모독죄로 극형에 처해진다.

게다가 몇 걸음 너머에 충분히 비명을 들을 수 있을 만한 거리에, 그녀의 호위 기사가 둘이나 있으니 말이다.

"내가 수도에 온 것은...."

나는 말끝을 길게 늘이다가 난간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손을 들어 먼 곳을 가리켰다.

"저곳 때문에."

"응?"

비올렛 황녀가 내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그 시선 끝에는 높게 솟아오른 황성이 있었다.

"설마...."

황녀가 고개를 돌리기 직전,

퍽!

내 손날이 그녀의 목덜미를 가격했다.

"...."

비올렛 황녀는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어이쿠."

난간으로 고꾸라지는 비올렛 황녀의 몸을 받아냈다.

"이런, 황녀님께서 술을 너무 많이 드셨나보군."

비올렛 황녀의 손에서 미끄러지는 술잔을 잡아 난간에 올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역시 술에 약하다니까."

비올렛 황녀를 찬찬히 바닥에 앉혔다. 드레스가 구겨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정말, 나만한 매너의 남자도 드물 것이다.

"황족 모독죄도, 벌을 내릴 황족이 알아야 성립하지 않겠어?"

약간 흐트러진 그녀의 가면을 바르게 해준 뒤 손가락으로 툭 쳤다.

"다음엔 황성에서나 볼 수 있겠군."

깨어나선 아마 길길이 날뛸 테지만, 그때 난 이미 여기 없을걸.

키득 웃으며 테라스 문 쪽으로 향했다. 살짝 열어 보자, 철통같이 그곳을 지키고 서 있던 두 호위 기사와 눈이 마주쳤다.

그들을 향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댁들의 주인께서 과음을 하셨는지, 쓰러져 버리셨네."

"무슨...."

"얼른 들어가서 보살펴 드리라고."

그 말만 남기고 테라스를 휙 빠져나왔다.

"잠깐...."

"아니, 그."

호위 기사들은 그런 나를 뒤쫓아야 할지, 아니면 들어가 테라스를 확인해야 할지 갈팡질팡했다.

결국 그들은 비올렛 황녀의 안위를 우선시한 듯 테라스 안으로 들어섰다.

"그래, 그래야지."

나는 그들의 충성심에 경의를 표하며 발을 옮겼다. 적당히 구석에 몸을 숨긴 채 테라스를 지켜보았다.

몇 분쯤 흘렀을까.

테라스의 문이 열리고, 비올렛 황녀를 등에 업은 호위기사가 나타났다.

"푸흡."

웃음을 터뜨리지 않기 위해 입을 막았다.

"맙소사."

비올렛 황녀의 얼굴에 숄이 덮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얼굴을 드러내지 않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보였다.

"하긴, 황녀가 기절해서 실려 나가는 꼴을 보일 수는 없었겠지."

비올렛 황녀가 이 사실을 알면 길길이 날 뛸 테지만. 그래도 못볼꼴을 보이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나는 두 호위 기사들이 바쁘게 사라져가는 뒷모습을 일별했다.

"슬슬 오려나."

카지노에 좀 더 머물며 상황을 지켜보았다. 내 계획대로 일이 잘 흘러가고 있다는 확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약 한 시간쯤 지났을 때였다.

"...왔군."

의자에 비스듬하게 기대었던 몸을 일으켰다. 중앙 홀로 입장하는 붉은 머리카락의 남성이 눈에 들어왔다.

"누가 주인공 아니랄까 봐."

그가 카지노에 들어서는 순간, 주변의 공기 자체가 달라졌다.

카인이 갖춰 입은 의복, 얼굴 위를 장식한 가면은 모두 최고급 제품이었다. 훤칠한 팔다리와 균형 잡힌 체격은 멀리서 보아도 빛이 났다.

무엇보다 타오르는 듯한 선명한 붉은 색 머리카락이 시선을 끌었다.

"수드 가문...."

"진홍의 귀공자."

"카인 수드 아르단테."

사람들이 소리 죽여 속삭였다. 다들 그의 자태, 그리고 유명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눈치였다.

"흥."

멀리서 카인을 바라보며 코웃음을 쳤다. 주변의 사람들과는 다른 감상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원작의 진짜 주인공.

모든 것을 다 가진 채 태어났고,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손에 쥐게 되는 남자. 정의롭고 선량한, 그야말로 그린 듯이 완벽한 주인공.

그리고 레퀴엠을 쥔 아벨 킨드리얼을 처단하는 제국의 수호자이자 구원자.

"카인 수드 아르단테."

그런 그가 나와 같은 공간에, 그것도 불과 몇 걸음 안에 함께 있었다.

카인은 아직 나를 보지 못했다. 그저 흥미로워하는 기색으로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고 있었다.

"그래, 그렇게 있으라고."

나는 천천히 발을 옮겨 홀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홀의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그를 스치듯이 지나쳤다.

시선은 마주치지 않았다. 그저 잘 깎은 조각 같은 그의 옆얼굴을 힐끔 바라볼 뿐.

"두고 봐."

그에게 들리지 않을 크기로 중얼거렸다.

결코 너에겐 죽지 않을 거다.

아득바득 독하게 살아남아서, 강해지고 또 단단해져서. 너라는 시련을 넘어 최강이 될 거다.

"네가 했던 일을, 나라고 못 할 리 없잖아?"

입가를 비틀어 웃었다.

카인이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내 손바닥 위다. 아직 애송이인 그에 비해, 나는 이미 많은 것들을 스스로 쟁취한 뒤였다.

"게다가 버스는 이미 떠났다고."

호위 기사들은 비올렛 황녀를 황궁으로 데려간 뒤였다. 원작에 존재했던 카인과 비올렛 황녀와의 만남은 철저히 무산되고 말았다.

"아, 재밌다."

카인이 모르는 새, 그의 뒤통수를 거세게 후려갈기고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앞으로도 이런 일이 차근차근 반복될 예정이라는 게.

결국 최종 승자는 나라는, 유쾌한 미래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슬슬 가볼까."

등을 돌려 카지노 밖으로 나왔다. 숙소를 향해 가는 발걸음이 가볍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원작에 없던 카인과의 첫 번째 만남이 샴페인의 거품처럼 스러졌다.

강렬하고, 또 짧게.

❖ ❖ ❖

그날 밤.

"아, 재밌었다."

욕조에 몸을 담근 채 콧노래를 불렀다.

"요새 아주 일이 술술 풀리네."

마음이 여유로우니 육체적으로도 훨씬 편안하게 느껴졌다. 그 덕분인지 유난히 레퀴엠도 잠잠한 것 같았다.

"오기 전에 하도 몬스터들을 왕창 썰고 와서 그런가."

수도에 온 이후론 한 번도 레퀴엠을 꺼낸 적이 없었다. 물론 이러려고 서쪽 산맥을 경유해서 내려온 것이긴 하지만.

"어쨌건 조만간 해소를 해 주긴 해야 할 텐데...."

수도에선 치안대의 눈을 피해 일을 벌이는 게 쉽지 않다.

욕조의 가장자리를 툭툭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욕조를 가득 채운 물, 그리고 그 위를 뽀얗게 덮은 입욕제 거품에서 좋은 향이 올라왔다.

"어쩌면 이게 기회일 수도 있어."

수도의 어둠을 잘 이용한다면, 오히려 카데르 영지보다 더 효과적으로 일을 치를 수도 있을 것이다.

"엘리체를 잘 이용해 봐야겠군."

생각을 정리한 뒤 레퀴엠의 문양을 한 번 쓸어보았다. 손가락 끝에 닿는 살갗이 매끄럽기 그지없었다.

"참 좋은 몸이야."

샴페인을 음료수처럼 붓다시피 했는데도 숙취가 전혀 없다. 못해도 카지노에서 몇 병은 해치운 것 같은데 말이다.

"술이 이렇게 맛있는 건 줄은 몰랐네."

오베스트 영지의 술은 즐기기보다는 취하기 위함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극악하게 도수가 높은 종류가 대부분이었다.

"그 정도로 독하지 않으면 잘 안 취하는 강한 영지민들이었지."

나 또한 음식을 즐기느라 바빠서 술을 잘 안 마시긴 했다. 워낙 전생에서 술을 안 마셔 버릇하던 것도 있고.

"앞으론 즐겨 마셔야겠군."

겸사겸사 공부도 하고 말이다. 귀족의 세계에서 주류라는 건 꽤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니까.

촤라락.

나는 욕조에서 가뿐히 몸을 일으켰다. 욕실에 걸려 있던 얇은 가운을 걸친 뒤 대충 물기를 털어냈다.

욕실 밖으로 나오자 넓고 호화로운 방이 나를 맞이했다.

"거의 오베스트 영지의 내 방만 하네."

잘 관리된 게 분명 없는 온갖 화려한 가구가 반짝였다. 고급 침구를 몇 겹씩 깐 침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방 중앙을 가로질러 창가 옆으로 다가갔다.

그 옆에는 고급 화초로 잘 알려진 칼라데아가 놓여 있었다. 화분 하나에 몇 만 골드를 호가한다던가.

그 값비싼 나뭇가지 위엔 노란 비늘을 가진 뱀 한 마리가 칭칭 감겨 있었다.

"그래, 골드 스타. 살만해?"

녀석의 비늘 색을 따서 멋진 이름을 지어주었다. 꼭 블랙 스타와 형제 같은 이름이라 마음에 들었다.

슈르륵.

골드 스타는 만족스러운 듯이 혀를 낼름거렸다. 나뭇가지에 몸을 꼭 붙인 채 편안하게 쉬고 있는듯했다.

"집이 마음에 든 모양이군."

정확히는 그 주변에 뿌려둔 얼음이 마음에 드는 거겠지만. 녀석의 기존 거주 환경과 비슷하게 맞추기 위한 조치였다.

"이거 식물한테 괜찮은 것 맞나?"

이토록 차가운 얼음물이라니. 따뜻한 환경을 유지해줘야 하는 칼라데아한텐 치명적이다.

조만간 냉해를 입고 시들시들해질 게 분명했다.

"알게 뭐람."

대수롭지 않게 화초 옆을 지나쳐 소파에 앉았다.

"더 추워지기 전에 수도의 마정석을 싹쓸이 해야 할텐데."

날이 더 추워지면 골드 스타는 더 이상 냉기의 마정석을 탐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기 전에 녀석을 데리고 수도 곳곳을 돌아야만 했다.

"그걸 내가 일일이 하고 있을 순 없고."

그래서 길드를 구했던 참인데. 나 대신 많은 일을 할 손발을 구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로 엘리체와 벤데타 길드는 내게 꼭 필요한 존재였다.

"슬슬 올 때가 되었는데."

시계를 확인한 뒤 느긋하게 소파에 몸을 편히 기대었다. 눈을 감고 차분히 주변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드르륵.

문득 내 방을 향해 다가오는 수레의 바퀴 소리가 들려왔다.

뚜벅, 뚜벅.

그 수레를 끄는 듯한 가벼운 발걸음도.

똑똑.

"실례합니다."

문 너머로 여성의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Chapter11. 궂은 일은 남에게 시킨다 (2)

"주문하신 룸서비스를 가져왔습니다."

내 입가에 진한 미소가 서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다가갔다. 안에서 잠글 수 있는-몹시 중요하다-문의 걸쇠를 푼 뒤 살짝 열었다.

"왔어?"

열린 문 틈새로 고개만 쏙 내밀어 속삭였다.

"엘리체."

복도에 서 있던 여자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저인 줄 아셨습니까?"

수레 손잡이를 붙잡고 서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엘리체였다.

그녀는 호텔 직원 복장을 입고 있었는데, 전혀 위화감이 없어 원래부터 호텔에서 일했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오늘 이 시각에 보기로 했잖아. 그러니 슬슬 올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지."

"직접 오실 생각은 전혀 없으셨군요?"

"당연하지. 어차피 내가 사는 곳도 알잖아."

"이렇게 나오실 것 같긴 했는데...."

엘리체가 골치 아프다는 듯 머리를 쓸어넘겼다. 머리 위의 직원용 헤어밴드가 살짝 움직였다.

"잘 어울리네."

"농담은 됐습니다. 문을 마저 열어주시지요."

엘리체는 질색하는 기색으로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흠.'

외모 농담을 싫어하는 것 같단 말이지. 진심으로 말해도 꼬아 듣는 버릇이 생긴 것 같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텐데.'

나는 어깨를 으쓱하곤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들어와."

"네, 실례하...?!"

엘리체가 수레를 밀다 말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녀의 요동치는 눈동자가 훤히 풀어헤친 내 앞섶을 담았다.

"그, 그. 옷차림은 뭡니까?"

"뭐긴, 가운인데."

"아니, 그."

엘리체는 눈 둘 곳을 모르겠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그녀의 귀 끝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생각 외로 순진한 구석이 있군.'

나는 픽 웃으며 돌아섰다.

"야단 떨지 말고 들어오기나 해."

뚜벅뚜벅 걸어가 소파에 털썩 앉았다.

엘리체는 곧바로 따라오지 않고 복도에 잠시 서 있었다. 놀란 가슴을 잠재우려는 듯 그녀의 호흡이 길어졌다.

"후우우우."

제 딴에야 몰래 한다고 하는 거겠지만, 내 귀를 속일 순 없었다.

'귀엽게 구네.'

난 굳이 그 사실을 지적하는 대신 소파에 편히 몸을 기대었다. 다행히 엘리체는 더 미적거리지 않고 수레와 함께 방으로 들어왔다.

"요구한 건 다 가져왔겠지?"

내 질문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었다.

호텔에 요구한 룸서비스, 그리고 꼬마를 통해 전달한 지령까지.

"물론입니다."

엘리체는 영리하게도 내 말을 곧바로 이해했다.

"먼저, 주문하신 룸서비스입니다."

엘리체가 수레 위에서 쟁반을 집어 올렸다.

달그락.

와인병과 잔, 그리고 치즈 조각이 놓인 쟁반이 내 앞에 놓였다.

'딱 디에고가 즐겨 먹던 구성이군.'

그래서 이 상품을 시킨 것이기도 했다.

나는 와인병을 집어 들며 엘리체에게 말했다.

"앉아."

"저 말씀이십니까?"

"그럼 여기 너 말고 누가 있어?"

엘리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얼른 앉아."

나의 고압적인 한 마디에 마지못해 맞은편에 앉았다.

"잔도 딱 두 개네."

나와 엘리체의 앞에 각각 잔을 놓은 뒤 와인 병을 땄다. 와인병을 기울이자 진한 붉은빛 음료가 흘러나와 잔을 채웠다.

"술은 마실 줄 알지?"

"못 마시는 편은 아닙니다."

"겸손이 심하군."

내가 알기로 엘리체의 주량은 상당한 수준이다. 어린 시절부터 술을 병째로 마시는 버릇이 있었다나.

"천상의 숨결이군요."

와인을 유심히 바라보던 엘리체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수도 내에서 유통되는 술에 대해서는 완전히 꿰고 있었다.

"이 호텔의 자랑거리이자 수도의 핵심 관광 상품이죠."

"음. 마기오레에 오면 꼭 마셔봐야 한다던가."

그렇게 나는 얼떨결에 수도의 핵심 관광 상품을 두 개 달성했다.

"왜 꼭 그래 숨결들을 좋아하는지 몰라."

오베스트 영지에서 병째로 술을 들이붓던 멜리나가 문득 떠올랐다.

'지금쯤 시킨 것은 다 끝냈으려나?'

짧은 상념을 날려 보낸 뒤 잔을 집어 들었다.

"마시기 전에 건배할까?"

엘리체가 천천히 손을 뻗어 잔을 쥐었다. 위로 들어 한 번 찰랑인 뒤 내게 내밀었다.

"이걸 마시는 건, 아벨님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는 뜻일까요?"

"그렇지."

나 또한 그녀에게 잔을 가까이 가져갔다.

"마시면 돌이킬 수 없어."

"알겠습니다."

엘리체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잔을 부딪혀 왔다.

쨍!

투명한 와인잔 너머로, 단호한 의지가 아로새겨진 푸른 눈동자가 비쳤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나야말로."

부드러운 미소를 그리며 덧붙였다.

"앞으로 잘해 보자고."

두 와인잔이 서로 멀어진 뒤, 각자의 입술에 닿았다.

"...."

와인을 한 입 삼키는 동안, 엘리체의 시선은 내게서 떠나지 않았다. 마치 그녀가 앞으로 내게 보일 태도를 암시하는 듯했다.

'믿을 수 없는 우방이자, 견제하지 않는 적이라는 건가.'

처음부터 나를 온전히 신뢰할 순 없겠지. 일단은 협력하면서 이익을 가져가겠다는 것이고.

위험인물일수록 제 곁에 두고 감시하는 게 편할 테니 말이다.

'뭐, 그러시다면야.'

나는 비스듬한 미소를 흘리며 와인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잠시 말없이 와인을 마시며 상대를 탐색하는 시간이 흘렀다.

엘리체의 손은 와인잔을 붙잡고 있었지만, 발은 안달나는 심정을 대변하듯 바닥을 툭툭 두드렸다.

"궁금한 게 많아 보이는 얼굴이군."

"...솔직히 말해도 될까요?"

"해 봐."

"아벨 님의 머리통을 열어서 뭐가 들었는지 확인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솔직해지랬더니 어마어마한 발언을 쏟아내는군.

"안 될 줄 알고 한 말이지?"

"네. 근데 정말 궁금합니다. 어디서 그런 정보를...."

"영업 비밀이야."

"네?"

엘리체의 얼굴이 파스스 허물어졌다.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일 수도 있어."

"...."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는 말 알지?"

엘리체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날 바라보았다.

하지만 정말로 내가 가진 정보들은 영업 비밀 그 자체다. 이 세계에서 오로지 나만이 획득하여 사용하는 것.

"앞으로 더는 묻지 마."

그러니 이런 두루뭉술한 표현으로 넘어갈 수밖에.

"됐고, 내가 시킨 건?"

엘리체는 영리한 여자였다. 내 경고를 기민하게 눈치채곤 화제 전환에 동참했다.

"당연히, 가져왔습니다. 어떤 것부터 드릴까요?"

"옷부터."

엘리체가 수레의 아래쪽을 열곤 부피가 큰 상자를 하나 꺼냈다.

"잘 골랐지?"

"아무렴요. 누가 입으실 옷인데요."

"그래. 계산은 이걸로 해."

준비해둔 돈 자루를 건네자, 엘리체의 입꼬리가 밀려 올라갔다.

"흠흠, 감사합니다."

그리곤 수레의 아래쪽에서 두툼한 종이 뭉치를 꺼냈다. 양이 꽤 될 텐데 수레 아래 잘도 숨겨온 모양이었다.

"이쪽은 요청하신 수도에 저택을 두고 있는 귀족의 조사 자료,"

테이블 위에 서류의 탑이 턱턱 쌓이기 시작했다.

"이쪽은 말씀하신 영지의 귀족들의 1년간 활동 내역. 지출 관련 세부 내역은 첨부 자료를 참고해주십시오."

그 옆에 다른 서류의 탑이 쌓였다.

"마지막으로 요청하신, 군수 관련 자료입니다. 아무래도 기밀이다보니 접근하기 까다로웠습니다."

테이블 위가 서류의 산으로 가득 찼다.

별로 놀라진 않았다. 오베스트 영지에서 자주 본 광경이니까.

엘리체는 손을 탁탁 털더니 나직이 투덜거렸다.

"이 많은 양을 하루에 구해오라고 하는 건 좀 너무하지 않나요?"

"어차피 있던 서류를 정리해서 가져온 것뿐이잖아."

"새로 구해야 하는 내용도 있었습니다만?"

요컨대, 제 성과를 인정해 달라는 말이었다.

"어제 종일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녔단 말입니다."

"그랬어?"

나는 입을 삐죽 내밀고 있는 엘리체를 향해 씩 웃어주었다.

"수고했어, 엘리체."

엘리체는 잠시 말을 잃고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기습을 받은 것처럼 그렇게.

"그렇게 웃을 줄도 아시는군요."

"뭐라고?"

"...아닙니다."

엘리체가 흠흠, 헛기침을 하더니 말을 돌렸다.

"아무튼, 추가 수당 정도는 주셔야하지 않을까요?"

"아직 서류 들춰보지도 않았어. 내 마음에 안 들면 어쩌려고 그러나?"

"그럴 리 없습니다. 절대로요."

엘리체는 자신만만한 투로 대답했다.

"분명 만족스러우실 겁니다."

"자신감이 넘치는군."

하여간 길드 운영만 몇 년씩 한 여자 아니랄까 봐. 약삭빠르게 협상을 하려 든다.

그런 모습이 내심 싫지는 않았다.

자신의 가치를 잘 알고 이를 낮추지 않는 것은 좋은 습관이다.

하지만.

"투자금 이미 줬잖아. 그것으론 부족했나?"

나는 서류 뭉치 한 움큼을 집어 든 뒤, 손가락으로 엘리체의 가슴께를 가리켰다.

"요긴하게 잘 쓴 것 같은데."

협상이라면 이쪽도 만만치 않아서 말이지.

"이건...."

엘리체가 칼에라도 찔린 것처럼 어깨를 움츠렸다. 그녀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가슴에 걸린 목걸이를 보호하듯 가렸다.

"아, 오해는 하지 마. 줬다가 뺏는 악취미는 없으니까."

나는 손가락을 다시 접은 뒤 서류를 한 장 넘겼다.

"양심이 있다면 감사합니다, 하면서 넙죽 갖다 바칠 줄 알았는데 말이야."

"...드릴 말씀이 없군요."

엘리체는 머뭇거리며 자신의 발언을 철회했다.

"감사합니다. 아벨 님."

목걸이를 덮은 그녀의 손등이 잘게 떨렸다.

"완전히 포기하고 있었는데....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파르르 떨리는 그녀의 손을 힐긋 보곤, 다시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간수 잘해. 대놓고 가슴에 걸고 다니다 잃어버리지 말고."

"네?"

"그거, 나중에 아주 요긴하게 쓰일 거야."

서류를 한 장 넘기곤 덧붙였다.

"네가 원하는 걸 이룰 때 말이지."

엘리체의 눈이 일순 커졌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녀가 잠시 생각한 뒤 물었다.

"그것도, 영업 비밀의 선에서 말씀하신 건가요?"

"맞아."

"알겠... 습니다."

엘리체의 눈빛이 짙푸른 빛을 띄며 깊어졌다. 그녀는 한동안 생각에 잠겨 말이 없었다.

팔랑, 팔랑.

그 사이 내 손가락은 서류를 넘기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눈은 서류를 위에서 아래로 쪽 훑으며 빠르게 내용을 확인했다.

"흐음."

입꼬리가 완만한 곡선을 그렸다.

엘리체가 준비해 온 서류는 오베스트 영지에서 보았던 것과 비교해봐도 상당히 수준이 높았다.

'자신있어 할만 했네.'

각 인물의 생김새, 가족 관계는 물론이고 현재 직면해 있는 문제들까지 상세하게 적혀 있다.

특히 내용을 표로 정리해 가독성을 높인 게 마음에 들었다. 단정한 글씨체는 엘리체 본인의 것이 틀림없었다.

'아주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군.'

물론 내용을 머릿속에 무작정 넣지 않았다. 가지고 있는 원작의 정보, 그리고 카지노에서 입수한 정보와 결합한 최종본을 넣었다.

"여기. 이 사람 말인데."

나는 서류 한 장을 엘리체가 볼 수 있게 뒤집었다.

"이 후작. 갈색 머리에 콧수염 기르고, 배가 공처럼 튀어나온 자가 맞나?"

"네, 맞습니다."

"그 후작, 숨겨 둔 첩이 하나 있을 거야. 테소로 영지를 알아봐."

엘리체가 고개를 끄덕이곤 수레에서 깃펜을 꺼냈다.

그 수레 참, 없는 게 없군.

"테소로 영지. 알겠습니다."

내가 내민 서류에 엘리체가 쓴 글씨가 추가되었다.

Chapter11. 궂은 일은 남에게 시킨다 (3)

"이 서류는 제가 가져가도 되겠습니까?"

"어, 다 봤어."

"음.... 네."

엘리체는 약간 못 미더워하는 태도로 서류를 챙겼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음 서류를 팔랑팔랑 넘겼다. 그리고 중간중간 엘리체에게 추가 지령을 내렸다.

"이 부인 말인데."

"네."

"이 부인이 매일 복용하는 약재가 있어. 구매 경로를 파악해 봐."

엘리체의 눈가에 의문이 서렸다.

"이런 정보는 어디서 구하시는.... 아, 영업 비밀이랬죠. 알겠습니다."

내가 별말 하지 않았는데 혼자 꿍얼거렸다.

"저 안 물어봤습니다. 그냥 혼잣말한 겁니다."

착실히 내가 건넨 서류에 꼼꼼히 적은 뒤, 차곡차곡 옆에 쌓았다.

"대체 나도 모르는 가문의 치부를 어떻게 구해오시는 건지...."

엘리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는 그렇게 엘리체가 준비해온 첫 번째 서류의 탑을 해치웠다. 그리고 옆의 두 번째 탑에 손을 뻗었다.

"어.... 설마 이건 다 보신 겁니까?"

엘리체의 손가락이 첫 번째 서류의 탑을 가리켰다.

"응."

"이 많은 걸 다 보셨다고요? 이 수도의 귀족만 몇 명인데."

엘리체가 미심쩍은 얼굴로 반문했다.

"혹시 빠뜨린 게 있진 않을까요?"

"응, 아니야."

나는 맨 위에 놓인 서류에 손을 뻗으며 수레 쪽으로 턱짓했다.

"룸서비스로 얼음도 시켰는데. 안에 있나?"

"...네."

엘리체는 뾰로통한 얼굴로 수레에 다가갔다.

"설마 와인에 넣어서 드시려는 건 아니죠?"

얼음이 잔뜩 든 얼음통이 테이블 옆에 놓였다.

"얼음은 와인에 안 어울리는데요. 위스키면 모를까."

술에 대해 박식한 엘리체 다운 발언이었다.

"설마 그럴까."

나는 엘리체의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 손가락으로 창가 옆을 가리켰다.

"얼음은 저기다 부으면 돼."

엘리체의 시선이 내 손가락 끝을 향했다.

"...?"

엘리체가 눈을 가늘게 뜨고 화초의 주변을 살폈다. 그 위에 얼음이 쌓여 있는 것을 발견하곤 의아해했다.

"왜 저기다 얼음을 부으신 거죠?"

"자세히 보면 알아."

엘리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얼음통을 들고 화초를 향해 다가갔다. 그러다 그 위에서 반짝이는 금빛 비늘의 뱀을 발견하곤,

"꺄아악!"

자지러지게 비명을 질렀다. 다행히 두 손으로 얼음통을 꽉 잡고 있던 덕에 얼음을 쏟는 일은 없었다.

"저런."

예상했던 결과를 보고 나는 피식 웃었다.

"소리 지르지 마. 애 놀라겠다."

"아니, 무슨. 무슨... 뱀을!"

엘리체가 아직도 가슴이 벌렁거린다는 듯 손을 그 위에 갖다 댔다.

"깜짝... 놀랐잖습니까!"

"앞으로 계속 봐야하는 녀석이니까, 그만 놀라고 얼음이나 부어줘."

엘리체는 입을 떡 벌리더니 내 말에 의문을 제기했다.

"계속 봐야 한다고요? 이 녀석을?"

"그럼 내가 계속 돌보고 있으랴? 길드에서 키워야지."

기가 막혀하는 엘리체의 시선이 나와 골드 스타 사이를 오갔다. 눈매 끝이 그 여느 때보다도 황당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꼭 키워야 하는 겁니까?"

"물론. 만약 녀석의 몸에 이상이라도 생긴다면, 그렇게 만든 놈을 똑같은 꼴로 만들어줄 생각이야."

내 말이 끝나자마자 엘리체의 안색이 변했다.

"농담이시죠?"

"내가 한 입으로 두 말하는 거 본 적 있나?"

다음 서류를 집어 들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녀석이 더워 죽지 않게 잘 보살펴 줘. 온도에 아주 예민하거든."

"더위를 탄다고요? 뱀은 보통 따뜻한 환경을 좋아한다던데."

"골드 스타, 그 녀석은 좀 특별해."

엘리체는 있는 힘껏 인상을 찌푸리더니 한숨을 쉬었다.

"골드 스타라니. 작명 센스가 참...."

"훌륭하다고? 나도 알아."

"...그렇다고 해두죠. 일단은 알겠습니다."

엘리체가 화초로 살금살금 다가가 얼음통을 내려놓은 뒤, 골드 스타의 동태를 살폈다.

이윽고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얘, 물어요?"

"지금은 아냐."

"그럼 물 때도 있다는 거예요...?"

나는 말 없이 서류만 집어들었다. 그 모습을 본 엘리체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다음엔 덱스터 시켜야겠어...."

작게 중얼거린 뒤, 조심스럽게 얼음을 흙 위로 올렸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비죽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췄다.

'그렇게까지 벌벌 떨 필요는 없을 텐데.'

골드 스타가 인간에겐 전혀 관심이 없으며, 오직 알만 먹는다는 것. 심지어 애완 뱀으로 인기가 많다는 사실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엘리체가 오들오들 떨며 얼음을 옮기는 모습이 볼만했기 때문이다.

"휴우."

얼음통의 얼음을 전부 부은 뒤, 엘리체가 이마를 훔치며 자리로 돌아왔다. 그 짧은 새에 몹시 고전한 듯 이마에 땀이 배어 있었다.

'너무 심하게 놀렸나.'

어차피 나중엔 이 뱀에 대해서 자세히 알게 될 테지만. 지금은 함구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어?"

엘리체가 테이블 위를 보곤 당황스러운 소리를 흘렸다.

"서류가 왜 전부... 섞여 있죠?"

그녀가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사이, 서류는 처음과 달리 뒤죽박죽 섞여 버린 상태였다.

내가 모든 서류를 다 읽고 새롭게 정리하는 탓이었다.

"아직 손대지 마."

엘리체는 눈을 끔벅이며 내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어디 보자...."

나는 가라앉은 눈빛으로 새롭게 분류된 서류를 바라보았다.

'이쪽은, 미래에 카인의 편에 서는 귀족들.'

시선을 옆으로 옮겨 오른쪽을 보았다.

'그리고 이쪽은....'

끝끝내 카인에게 반기를 들었던 가문들. 그리고, 내가 손에 넣을 가문들이기도 했다.

"좋아. 이렇게 하면 되겠군."

나는 오른편의 서류를 가리키며 엘리체에게 말했다.

"여기 가문의 차남들이 주로 방문하는 곳을 조사해 봐."

"차남이요?"

"응. 접선할 예정이다."

"알겠습니다."

엘리체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깊은 뜻을 이해하진 못하면서도 일단 명령에 수긍하는 모습이 기꺼웠다.

"수고했어."

나는 소파에 앉아 와인잔에 와인을 채웠다.

"이만 가봐."

내려진 축객령에, 엘리체는 얼이 빠진 얼굴을 했다.

"끝...입니까? 서류는 다 보셨고요?"

"응."

심드렁한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치즈를 입에 넣었다.

음, 맛있네. 이제 찐득해진 입을 와인으로 적시면 딱이겠어.

"...너무 하시는 거 아닙니까?"

와인잔을 집어 드는 내 귓가로 엘리체의 분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일 귀족 회의 때문에 준비해오라고 하신 서류 아닙니까?"

엘리체가 상기된 얼굴로 나를 직시했다.

"이게 아벨 님께 얼마나 중요할지 알기에, 또 아벨 님께서 내린 첫 번째 지령이기에."

엘리체의 목소리 끝이 갈라졌다.

"정말 성심성의껏 준비해왔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대충...."

"누가 대충 봤다고 그래?"

짜증스러운 기색을 대놓고 드러냈다.

이제 쉬면서 다음 날을 준비하고 싶은데 귀찮게 하는군.

"이거."

가장 위에 있던 서류 한 장을 들어 엘리체에게 내밀었다.

"왼쪽 표 첫 번째 항 봐."

"네?"

"1980, 178, 134, 124, 56. 끝."

"...?"

엘리체의 미간이 좁혀들었다. 그녀가 서류에 코를 박으며 말했다.

"다시 한 번만 말씀해주십시오."

"하아."

몹시 귀찮았지만 꾹 참았다. 앞으로도 계속 의문을 품고 번거롭게 구는 건 싫으니까.

"1980, 178, 134, 124, 56. 됐나?"

"이, 이게."

엘리체가 서류에서 얼굴을 들었다. 그녀의 낯이 놀라움으로 물들어 있었다.

"어떻게 하신 겁니까? 어떻게 이 숫자를 전부?"

"어떻게 하긴. 그냥 다 외운 거지."

"그게 가능해요?"

어려울 것도 없었다.

오늘 내가 본 서류는 전부 머릿속에 온전한 형태로 저장되었다. 그걸 꺼내어 읽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다른 것도 해줘? 아무 서류나 짚어보던지."

"아.... 아닙니다."

나는 내 머리를 톡톡 두들겼다.

"됐지? 네가 성심성의껏 준비해온 서류, 다 기억하고 있다고."

"아...."

엘리체는 멍한 얼굴로 서류와 나를 번갈아 보았다.

"그러니까, 그걸 전부...."

그녀의 얼굴에 의혹, 당황 등의 다채로운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내가 지금껏 해온 말들을 돌이켜보고, 곰곰이 되씹은 뒤,

"...그러셨군요."

비로소 모든 것을 이해한 얼굴이 되었다.

"알겠습니다, 아벨 님."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얼굴에 남은 것은 경외와 찬탄, 그리고 약간의 홀가분함이었다.

"더 남기실 말씀은 없으신가요?"

"난 내일 종일 황궁에 있을 거다. 꽤 바쁠 테지."

"네."

"뱀은 데려가서 잘 돌봐줘. 그리고 그놈 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고놈이 입에 넣는 돌 전부 챙기라고 해."

"저, 저걸 데려가라고요?"

"꼭 네가 할 필욘 없지. 내일 다른 사람 시키든가."

손을 휘휘 내저은 뒤, 와인을 한 입 머금었다.

"그리고 수도 내에 괜찮은 저택 매물이 나왔는지 알아봐. 금액 걱정은 하지 말고."

"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이 서신을 보냈으면 하는데."

테이블 아래에 넣어두었던 봉투를 꺼내 내밀었다. 엘리체가 투덜거리면서도 양손으로 공손히 봉투를 받았다.

"정말 알뜰살뜰하게 부려 드시는군요."

"겨우 이 정도로 엄살은. 앞으론 더 바빠질 텐데 말이야."

"예에, 알겠습니다. 서신은 어디로 보내면 될까요?"

"오베스트 영지의 3번가에 사는 멜리나에게."

엘리체의 얼굴에 야릇한 미소가 맺혔다.

"여자군요?"

"...."

"혹시 영지에 숨겨 둔 귀여운 애인이라도...."

"헛소리."

나는 냉담하게 엘리체의 말을 일축했다.

"이만 됐어. 가 봐. 조만간 연락하지."

"후후, 알겠습니다. 편히 쉬시길."

엘리체가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서류를 흩어지지 않게 조심해서 수레에 다시 넣은 뒤 천천히 밀고 나갔다.

"아, 참."

"네?"

나는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덧붙였다.

"와인 한 병 더 갖다 줘."

"중요한 날 전날에 과음은 안 좋을 것 같습니다만."

"걱정 마. 안 취하니까."

엘리체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문 밖으로 사라졌다.

몇 분 뒤.

똑똑.

"실례합니다. 주문하신 룸서비스 가지고 왔는데요."

문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엘리체가 아닌 다른 점원의 것이었다.

"열려있어."

나는 소리 높여 대답한 뒤 편히 몸을 기대었다.

지금쯤 엘리체는 위장을 벗어던지고 선술집으로 돌아가고 있겠지.

"내일이 기대되는군."

창문 밖으로 보이는 흰 달을 향해, 나는 옅은 미소를 날려 보냈다.

❖ ❖ ❖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밖에 나갈 준비를 마쳤다. 어제 엘리체가 준비해 온 옷을 입고, 깔끔하게 면도도 했다.

"혼자 하려니 정말 귀찮군."

오베스트 영지에서 하인들의 시중을 받다가, 모든 것을 혼자 하려니 퍽 번거로웠다.

"저택부터 빨리 구해야겠어."

마지막으로 방 안을 한 번 둘러본 뒤 밖으로 나왔다. 홀에 들어서서 카운터 직원에게 말을 걸었다.

"어제 마차를 요청해두었는데."

"아, 5층의 손님이시군요. 알겠습니다."

참고로 5층엔 나 혼자만 묵고 있다. 그래서 5층의 방에는 번호가 따로 없었다.

"안내하겠습니다. 따라오십시오."

미리 준비 된 최고급 마차에 올라타서 황궁으로 향했다. 승차감과 내부의 쾌적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훌륭했다.

"역시 돈이 최고라니까."

직원들에게 팁을 넉넉히 쥐여 준 보람이 있었다.

Chapter11. 궂은 일은 남에게 시킨다 (4)

어느새 황궁의 휘황찬란한 성벽이 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황궁에 들어가는구나."

오늘을 위해 많은 것을 준비했다.

귀족 회의에서 만날 인물, 그리고 앞으로 벌어질 일들까지 대비하며.

긴장은 되지 않았다. 기대감만이 기분 좋게 심장을 달굴 뿐이었다.

이미 황궁 앞은 입장하려는 마차들로 인해 북적거렸다. 내 마차 또한 그 긴 줄의 끝자락에 합류했다.

"죄송합니다. 시간 보다 일찍 왔는데도 이렇군요."

마부가 덧창을 열고 송구한 듯 고개를 숙였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될 겁니다."

"알겠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마차 밖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실례합니다. 안에 계신 분을 확인하겠습니다."

"출입 목적은 무엇입니까?"

저 멀리 앞쪽에서 황궁 경비대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흠, 미리 준비해야겠군."

품속에서 신분패와 서신을 미리 꺼내어 손에 쥐었다. 마차가 움직이기만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음?"

나는 의자에 기대었던 몸을 일으켰다.

"뭐지?"

앞쪽에서 소란이 일고 있었다.

"멈추시오. 이러시면 안 됩니다."

"잠깐이면 됩니다. 한 번만 안을...!"

"어허!"

경비대원의 언성이 높아졌다.

"지금 당신이 우릴 얼마나 곤란하게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까?"

"아주 잠깐이면...."

"잠깐이고 자시고, 이리 허락 없이 마차 안을 들여다보려는 것 자체가 굉장한 무례란 말입니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아하."

내가 아는 얼굴이 저 앞에서 경비대원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아주 잠시도 안 되겠습니까? 마차 안에 계시는지 확인만 하겠습니다."

"안 됩니다."

"그럼 차라리 신분패 검사를 내게 맡기면...."

"말도 안 되는 소릴."

경비대원이 황당하다는 어조로 남자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 거대한 창을 들어 바닥을 쿵 찧었다.

"지금 이 앞에서 기다릴 수 있게 해주는 것도, 당신이 오베스트 기사단 소속이기 때문입니다."

"...."

"우리의 선의를 더 이상 모욕하지 마시오."

한 번만 더 같은 짓을 반복하면, 그땐 좌시하지 않겠다는 경고가 담긴 한 마디였다.

"...하아, 젠장."

남자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뒤로 물러났다.

"저런."

나는 남자를 알아보곤 빙그레 웃었다.

그는 요나스 클라인이었다.

원래 나 대신 귀족 회의에 참석하기로 했던, 디에고 킨드리얼이 지정한 영주 대리.

일찍이 요나스의 품에서 인장을 훔친 덕에, 나는 그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화사한 금발의 미남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 그의 모습은 처음 봤을 때와는 확연하게 달라져 있었다.

무성의하게 자라난 머리카락, 구레나룻과 턱을 덮은 덥수룩한 수염. 초췌해진 안색과 거뭇한 눈가까지.

"누가 보면 기사라고 생각도 못 하겠어."

그만큼 지금 그의 모습은 꾀죄죄하기 그지없었다.

"날 쫓아오느라 고생 좀 한 모양인데?"

나는 소리 죽여 키득키득 웃었다.

"몸이 많이 달았군."

처참한 겉모습은 둘째치고, 그의 행동은 기사가 저질렀다기엔 몹시 무식했다.

계속 황궁 입구에 버티고 서 있는 다든가, 지나가는 마차 속을 보려 한다든가, 신분패 검사를 대신 하겠다는 황당한 요구를 한다든가.

"뭐, 초조할 만도 하지."

요나스의 목적은 단 하나, 내게 뺏긴 인장을 되찾아 귀족 회의에 참석하는 것이니까.

그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자 마지막 장소는 이제 여기뿐이었다.

"여기 죽치고 있으면 나를 만날 거라 믿었나 보군."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나를 제지할 수는 없을 테지만.

마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차례로 앞 마차의 신원 검사가 끝나고, 드디어 내 차례가 돌아왔다.

똑똑.

경비대원이 마차의 문을 두드렸다.

"실례하겠습니다. 안에 계신 분을 확인해도 되겠습니까?"

"그래."

내 대답이 떨어지자, 그가 마차의 문을 살짝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경비대원은 탁한 금빛 머리카락을 가진 호쾌한 인상의 남자였다.

"신분패를 부탁드립니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신분패를 내밀며, 또렷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벨 오베스트 킨드리얼이다."

"...!"

경비대원이 흠칫 놀랐다. 그의 시선이 내 푸른 머리카락과 얼굴을 꼼꼼히 담았다.

이윽고 그는 노련하게 얼굴의 감정을 감추었다.

"아벨 오베스트 킨드리얼님. 확인했습니다. 들어가십...."

"뭐라고?"

그의 옆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잠깐, 뭐하는...."

경비대원의 당황스러운 음성에도 불구하고,

덜컥!

예고 없이 마차 문이 활짝 열어 젖혀졌다.

"아벨 도련님."

요나스가 핏발선 눈을 한 채 서 있었다. 그는 마차 문을 꽉 붙든 채 나를 노려보았다.

"드디어 뵙는군요."

"지금 뭐하는 겁니까!"

옆에서 경비대원이 호통을 쳐도 막무가내였다.

"저리 비키시오. 도련님과 아주 중요한 대화를 해야 하니까."

"이 사람이 정말?"

"도련님, 제가 얼마나 도련님을 뵙고 싶었는지 모르실 겁니다."

요나스의 두 눈이 어찌나 활활 불타는지, 순간 그의 눈동자가 푸른색이라는 걸 잊을 지경이었다.

"도련님이 저지른 수많은 일들. 하나하나 다 따지고 싶지만, 시간이 없으니 참겠습니다."

"...."

"인장, 어디 있습니까?"

요나스는 인장이라는 단어에 강세를 주었다. 그게 그에게 몹시 중요한 물건이라는 듯이.

"영주 님의 인장을 어서 돌려주십시오."

옆에 선 경비대원은 심상치 않은 요나스의 언행에 다소 당황한 듯했다.

그를 제지해야 할지, 아님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지켜봐야할지 갈등하기 시작했다.

"잠깐 물러나 주게."

나는 경비대원에게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경비대원은 반색하며 뒤로 슬쩍 물러났다. 이런 싸움에 휘말리고 싶은 공무원은 없는 법이다.

"인장?"

나는 요나스를 향해 순진무구하게 눈을 깜박였다.

"지금 자네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군."

"아벨 도련님!"

요나스가 울화통이 터진다는 듯 얼굴을 팍 구겼다.

"진정 제가 미치는 꼴을 보려고 그러십니까?"

"어허. 침 튀기지 말고."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쏘아댔다. 약간의 침방울도 곁들여서.

"대체 그동안 어디 계셨던 겁니까? 여기까지 오면서 온 도시를 쥐잡듯이 뒤졌습니다."

"자네가 길치인 걸 어쩌라는 건지."

"길치.... 아니 그보다. 다반티 영지에서 그건 뭡니까? 예?"

요나스가 가슴을 팡팡 두드렸다.

"제가 그 말을 듣고 얼마나, 얼마나.... 아무튼,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모르실 겁니다."

"왜 고생을 사서 하고 그러나. 그냥 오베스트 영지에 남았으면 될 것을."

내 천연덕스러운 말투에 요나스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아벨님께서 인장을 훔치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습니다!"

"어허, 훔치다니."

나는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난 그냥 놓여 있는 걸 주웠을 뿐이야."

"뭐라고요...?"

"글쎄, 방에 들어갔더니 고로롱거리는 짐짝 위에 인장이 놓여 있던데? 그래서 얼른 챙겼지. 중요한 거니까."

졸지에 고로롱거리는 짐짝이 된 요나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건, 도련님이, 향초를...!"

"그러니까 물건 간수를 잘했어야지."

나는 품에 든 인장 주머니를 톡톡 두드렸다.

"이것은 마땅한 자격이 있는, 그리고 물건을 잘 '관리'하는 내가 갖는 게 맞아."

"아벨 도련님!"

요나스가 벌겋게 변한 얼굴로 악을 썼다.

"도대체 어디까지 막 나가실 생각이십니까! 당장 돌려주십시오!"

"막 나가는 건 자네고."

그의 격렬한 반응에도 나는 태연했다.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지금 자네가 얼마나 사람들을 곤란하게 하고 있는지 모르는 건가? 주변을 둘러보게."

그제야 요나스는 퍼뜩 놀라 옆을 돌아보았다.

"아니, 무슨 일입니까? 도대체."

"거 빨리 빨리 좀 가쇼!"

뒤에 선 마부들이 열을 내고 있었고,

"...."

경비대원들이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요나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까부터 그의 훼방질 때문에 인내심이 바닥난 듯했다.

요나스가 비로소 이성이 돌아온 듯 말을 더듬었다.

"아니, 이건. 도련님이...."

"거기, 자네."

나는 요나스의 말을 끊고 경비대원에게 손짓했다.

"다른 귀족들이 이 꼴을 보고 뭐라 생각하겠나?"

"...죄송합니다."

경비대원이 꺼멓게 타 들어가는 얼굴을 깊이 숙였다.

"자칫 잘못했다간 황궁경비대의 기강이 해이해졌다는 말이 나올 수도 있는 부분이지."

"그, 그건...!"

"아, 알고 있네. 자네의 잘못이 아니라는 건."

나는 개탄스럽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 아랫사람의 무례를 사과하지. 황궁 출입을 관리하는 중요한 업무에 차질을 빚게 해, 참으로 미안한 마음뿐일세."

"아니, 아닙니다!"

경비대원은 고위 귀족인 내게 사과를 들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지 몹시 당혹스러워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앞으로 저자가 또 나타나걸랑, 그때는 망설이지 말고 내쫓도록 하게. 나와는 상관없는 자일세."

내 손가락이 요나스를 가리켰다. 내말 뜻을 알아들은 요나스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지, 지금 뭐라고...?"

"참으로 창피한 일이군. 그런 식으로 행동할 거면 어디 가서 오베스트 기사단이라고 말하지 말게."

말을 마친 나는 경비대원에게 재차 당부했다.

"내 말 이해했나?"

"예, 알겠습니다."

경비대원의 눈에 단호함이 감돌았다. 내 허락도 떨어졌겠다, 더는 조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완전히 이해한 눈치였다.

"그럼 이만."

나는 마차 문을 휙 당겼다.

"아니, 잠...!"

쾅.

맥없이 요나스의 손을 떠난 마차 문이 매몰차게 닫혔다.

"방금 뭐...?"

요나스가 제 손과 마차 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힘겨루기에서 내게 졌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만 출발하게."

나는 마차 덧창을 두드려 마부에게 말한 뒤 의자에 앉았다.

"자, 잠깐. 도련님!"

요나스가 다급하게 마차 문에 들러붙었지만,

"그만!"

경비대원의 우렁찬 고함이 그를 제지했다.

"다들 이 무뢰배를 끌어내지 않고 무엇하나!"

"예!"

안 그래도 벼르고 있던 다른 경비대원들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이, 이거 놔!"

요나스는 그들에게 팔다리를 붙잡힌 채 볼썽사납게 버둥거렸다.

"이거 놓으라고! 저 마차에 타야 할 건 나라고! 아벨 도련님이 아니라!"

"이 자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경비대원이 엄한 어조로 일갈했다.

"당장 끌고 가게!"

"이거 놓지 못해?!"

요나스는 격렬히 저항했으나, 건장한 경비대원 여럿이 들러붙는 데는 이길 도리가 없었다.

"난 죄가 없어! 죄가 없다고오!"

끝내 팔다리를 단단히 결박당한 채 질질 끌려 나갔다. 그를 뒤로 한 채, 마차는 천천히 출발하기 시작했다.

"죄가 없기는 무슨."

나는 마차 창문을 열고 얼굴을 쏙 내밀었다.

"아벨 도련님!"

나를 발견한 그가 마지막 동앗줄이라도 되듯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그런 그에게 상큼한 미소를 날려 주었다.

"잘 가."

손을 살랑살랑 흔들곤 다시 창문을 닫았다. 이윽고 분노를 참지 못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아벨 오베스트 킨드리어얼!"

"이 자가 미쳤나!"

"아아악! 거기 서! 거기 서라고오!"

마차 뒤로 멀어지는 처참한 비명이 감미롭기 그지없었다.

Chapter12. 비수를 감추고 웃는다. (1)

뚜벅, 뚜벅.

두 남자의 발걸음 소리가 황궁 복도를 갈랐다.

"이쪽입니다."

앞서서 걷던 황궁 시종이 걸음을 멈추었다.

"아버지, 저기가."

"그렇지."

카인의 말에 카를로는 빙그레 웃었다. 그가 손을 들어 앞을 가리켰다.

"대회의장이다."

금으로 양각을 새긴 거대한 문이 열려 있었다. 그 양옆으로 엄격한 얼굴의 기사들이 시립해 있었다.

그들의 기세는 잘 벼린 칼과 같아, 몹시 날카로우면서도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호오."

카인이 손가락을 꿈틀 움직였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 흥미와 호승심이 번졌다.

그런 아들을 보고 카를로가 허허 웃었다.

"왜, 몸이 근질거리느냐?"

마기오레 기사단.

테오도어 황제가 잔혹한 정복자로 이름을 날리게 한 일등공신.

그들은 제국의 정복 전쟁에 앞서 싸웠으며, 전쟁이 없는 지금은 수도 마기오레의 방위에 힘쓰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황성에 배치된 이들은 가장 실력이 뛰어난 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한 번 붙어보고 싶네요."

곧장 대답하는 카인의 목소리엔 자신감이 넘쳤다.

"사실 가장 상대해보고 싶은 건 오베스트 기사단인데, 아무래도 어려울 테니까요."

"글쎄다."

카를로가 잘 기른 콧수염을 쓰다듬었다.

"그 영지에선 매번 기사를 대리인으로 보내곤 했다. 그러니 혹시 모르지, 기회가 올지도."

"온다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녀석."

카를로는 흐뭇한 웃음을 입가에 걸쳤다. 아들의 성취는 언제나 그를 기쁘게 했다.

시종이 다가가 기사들에게 말했다.

"카를로 수드 아르단테님, 그리고 자제분인 카인 수드 아르단테님입니다. 카인님은 참관자로 오셨습니다."

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이곤 양옆으로 물러났다.

"...와아."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카인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대회의장 내부는 함부로 떠들기 힘들 듯한 엄숙함, 그리고 제국 내 가장 오래된 건물다운 고풍스러운 느낌이 공존했다.

거대한 원형의 홀은 중심을 향해 갈수록 깊어지는 형태였다. 그 중심에는 화려한 옥좌가 놓여 있었다.

"혹시 저 곳이...."

카인의 시선을 따라간 카를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황제 폐하의 자리이지."

카인은 눈을 반짝이며 그 주변을 둘러보았다.

옥좌를 중심으로 하여 원이 퍼져나가듯이 붉은 좌석을 놓았다. 몇몇 귀족들은 이미 그곳에 앉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홀 위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상앗빛 기둥 사이로 참관석을 마련해 두었다.

그곳에서는 나이 어린 귀족 자제들이 난간에 달라붙어 홀 아래쪽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귀엽네."

카인은 피식 웃은 뒤 다시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어라?"

상당수의 귀족들이 회의장의 바깥쪽에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어휴, 먼 길 오느라 엉덩이에 쥐가 날 지경입니다."

"마차 여행이 고되긴 하지요. 3개월에 한 번이라 망정이지, 더 자주였으면 죽어났을 겁니다. 껄껄껄."

그들은 휴게 공간에 비치된 음료를 마시면서 웃고 떠들었다. 자리에 착석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왜 안 들어가고 여기서 떠들기만 하는 거죠?"

카인의 질문에 카를로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턱짓으로 대회의장 안쪽 좌석을 가리켰다.

"이미 앉아 있는 자들을 보아라."

그들의 얼굴엔 불안, 혹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손발을 덜덜 떨거나, 준비해온 서류를 끊임없이 살피며 초조한 모습을 보였다.

그들의 면면을 유심히 살핀 카인이 말했다.

"대부분 중소 영지의 영주들이로군요."

새로 회의장에 입장한 다른 중소 귀족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머뭇거리며 회의장에 들어왔다가, 주변의 누구도 인사를 걸어주지 않자 의기소침해졌다.

터벅터벅 걸어가 좌석에 앉는 그들의 등이 퍽 외롭고 쓸쓸해 보였다.

"이번엔 저 자를 보거라."

카인은 카를로의 눈길이 닿는 곳을 찾았다.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한 가운데에, 눈에 띄는 중년의 남성이 보였다.

긴 백발을 한데 모아 묶고 춥지도 않은지 얇은 옷을 걸쳤다. 얼굴 곳곳에 주름이 가득했으나 노쇠함보다는 노련함이 느껴졌다.

그것은 흰 눈썹 아래 자리한 청회색 눈동자 덕분이었다. 채도가 낮은 빛깔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한 안광이 사람을 주눅 들게 했다.

"미켈 영주로군요."

카인이 작게 속삭였다.

수도로 오기 전 주요 귀족들의 정보를 숙지했기에, 그의 정체를 알아채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미켈 노드 콘첼라레.

북쪽의 광활한 설산을 다스리는 은빛 호랑이. 현 영주 중 최고령자이자, 극한지에서 살아남은 노익장.

카를로가 턱으로 미켈의 옆을 가리켰다.

"저 여자를 보거라."

그곳에는 붉은 빛이 도는 금발을 틀어 올린 중년의 여성이 있었다. 머리칼과 대조되는 푸른 눈동자가 청명하게 빛났다.

"베니퍼 영주로군요."

베니퍼 에스트 콘타디나.

광활한 곡창지대를 품은 동부 에스트 영지의 지배자. 남편이 지병으로 사망하고, 후계자가 없는 탓에 영주 자리를 차지한 미망인이다.

"그간 잘 지내셨소?"

"물론이오. 사실, 자고 일어나면 뼈마디가 좀 쑤시긴 하지만."

"엄살이 심하시구려. 아직 정정하신 분께서 그리 말씀하시면 아니되오."

"베니퍼 영주도 북부에 와보면 그리 말하게 될 거요."

미켈의 너스레에 베니퍼는 입을 가리고 쿡쿡 웃었다.

두 대영주가 대화를 나누고 있자, 다른 귀족들은 감히 끼어들지 못하고 그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 슬그머니 몸을 돌려 좌석을 찾아 앉아버렸다.

결국 계속해서 사담을 나누는 것은 꽤 이름 높은 가문의 귀족들밖에 남지 않았다.

"이제 알겠느냐?"

카를로가 돌아서서 카인에게 물었다.

"예, 아버지."

카인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권력을 과시하는 것이로군요."

"그렇다."

카를로가 흡족하게 웃었다.

"이 회의에서는 늘 공식적이지 않은 힘싸움이 벌어지곤 했다."

"힘싸움이라고 하면 어떤...?"

"누가 누가 제일 늦게 앉나."

꼭 어린아이들의 놀이 같은 한 마디였다.

카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늦게 앉는다고요?"

"그래. 일부러 황제 폐하가 오기 전까지 버티다가, 바로 직전에 자리에 앉는 거란다."

"으음...."

"그리고, 가장 늦게 앉는 자가 오늘의 승자가 되는 게지."

카를로가 재미있다는 듯 미소 지었다.

"가장 권력이 강한 자 말이다."

카인은 별 해괴한 것을 본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알다가도 모르겠군요, 권력이라는 건."

"하긴, 날 때부터 자연스레 숨 쉬듯 휘둘러온 너에겐 어려운 개념이겠지."

카를로의 눈빛이 깊어졌다.

거기엔 아득바득 바닥부터 기어 올라와 고지를 차지한 자의 험난함이 묻어 있었다.

"보기엔 왜 저러나 싶어 보여도 그 이면엔 다 의미가 숨어 있기 마련이란다."

"예, 아버지."

아버지의 말을 온전히 이해하진 못했지만, 카인은 순종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이 모든 것을 알기엔 그는 아직 어리고 순수했다. 그리고 카를로는 카인에게 그런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이곳에서 황제가 오기 직전에 자리에 앉는다는 것."

그가 화제를 돌렸다.

"그것은 엄청난 특권이란다."

카를로의 손이 카인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자신을 따라오라는 표시였다.

"바로 우리에게 허락된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두 사람이 회의장 안으로 들어선 순간, 모두의 이목이 입구 쪽으로 쏠렸다.

"카를로 수드 아르단테."

"드디어 오셨군."

4명의 대영주 중에서도 가장 강한 발언권을 가진, 압도적인 권력과 부의 소유자.

그의 영향력은 제국 곳곳으로 퍼져나가고 있었고, 점점 넓어져 제국 전역을 차지할 날이 멀지 않았다.

"옆의 청년은...."

"아들인가? 정말 똑닮았어."

함께 서 있는 두 부자는 누가 보아도 가족이 분명했다.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칼, 그리고 피처럼 맑고 투명한 선홍빛 눈동자가 똑같았으니까.

"카를로 영주님!"

"오셨습니까!"

몇몇 귀족들이 카를로를 향해 우르르 달려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간 잘 지내셨지요?"

"메이슨, 타일러 영주."

카를로가 환히 웃었다.

"나야 그동안 잘 지냈지. 자네들도 잘 지냈나?"

"살펴주신 덕분입니다."

카를로와 귀족들의 사이는 퍽 친밀했다.

이들은 아르단테 가문과 긴밀한 협약 관계에 있었다. 특히 수드 지방의 특산물 사업을 수도로 확장할 때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

귀족들은 잠시 안부를 나눈 뒤 카인에게 눈을 돌렸다.

"혹시 이 분은?"

반짝이는 그들의 눈동자는 이미 답을 짐작한 듯이 보였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카를로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소개하지. 내 아들, 카인 수드 아르단테라고 하네."

"아앗, 이분이!"

귀족들이 과장되게 눈을 부릅떴다.

"진홍의 귀공자라는! 과연 그 이름에 걸맞는 용모로군요."

"히야, 아주 그냥 인물이 훤하십니다."

"검술 실력이 엄청나시다면서요?"

"곧 헥터 단장님께서 자리를 내주실 거라고 들었습니다."

쏟아지는 칭찬의 폭격에 카인이 슬쩍 얼굴을 붉혔다.

사실, 카인에게 이런 상황은 낯설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이럴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과찬이십니다. 소문이 과장된 것이겠지요."

담담한 겸양에 귀족들은 탄복한 눈치였다.

"정말 겸손하시군요."

"과장이라니요, 여기 수도까지 소문이 자자한걸요?"

"맞습니다.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카인은 못내 계면쩍은 듯 베시시 웃었다.

가지런히 드러나는 흰 이와 미소가 어찌나 눈이 부신지, 귀족들은 순간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릴뻔했다.

카를로는 그런 아들의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러다 문득, 그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카를로 영주."

미켈과 베니퍼가 둘에게 다가왔기 때문에.

"...."

이야기를 나누던 귀족들이 카를로의 뒤로 물러섰다. 카를로는 카인과 함께 정면을 바라보았다.

"미켈 영주."

"오랜만이오. 그동안 잘 지내셨소?"

"나야 뭐 늘 그렇듯이 잘 지냈소."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린 뒤, 카를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헌데 미켈 영주께선 수도의 최신 유행을 아직 모르시나 보오. 가을에 입기엔 옷이 너무 얇아 보이는군."

이어서 그는 선심 쓰듯이 덧붙였다.

"필요하다면 내 전속 의상실을 소개해 줄 수도 있는데, 어떻소?"

그렇게 저렴한 옷을 입어야만 했냐는 고도의 돌려 까기였다.

"말씀은 고맙소만,"

미켈은 카를로의 공격을 알아채지 못한 것처럼 허허 웃었다.

"수도에 내려오니 너무 더워서 말이오. 해서 시원하게 입은 것뿐이라오."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매섭게 빛나고 있었다.

"카를로 영주께서 이리 나를 걱정해주시니 기쁘기 한량없소이다."

"허허, 그리 생각해주니 저 또한 기쁘오."

파직!

두 영주의 눈동자 사이에서 불꽃이 튀는 듯했다.

Chapter12. 비수를 감추고 웃는다. (2)

카를로의 붉은 눈동자와 미켈의 푸른 눈동자가 서슬 퍼렇게 빛났다.

"두 분은 여전하시구려."

웃음기 머금은 음성이 둘 사이로 툭 떨어졌다. 베니퍼가 두 영주 사이를 가로막듯이 섰다.

"인사는 그만하면 충분하지 않겠소?"

그녀의 중재에 두 영주는 못이기는척 물러섰다.

"흠흠, 뭐. 오랜만에 보니 반가워서 그랬을 뿐이오."

"마찬가지외다. 몇 달 만에 보니 반가움의 표현이 지나쳤군."

마음에도 없는 소리가 이어졌다.

카를로는 픽 웃은 뒤 물었다.

"그러고 보니 미켈 영주, 후계자는 데려오지 않은 것이오?"

그가 손을 뻗어 카인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이런 자리는 좋은 배움의 기회가 되지 않겠소?"

"그 아이는.... 글쎄."

미켈의 수염이 씰룩였다.

"워낙 낯을 가려서 말이오. 게다가 굳이 '이런' 자리가 아니더라도 배움엔 정진할 수 있으니."

진흙탕 같은 정치판엔 올 필요 없다는, 고고한 학 같은 발언이었다.

파지직!

두 영주 사이로 또 불꽃이 튀었다. 크게 한 방씩 주고받는, 치열한 공방이었다.

"어머, 그래도 한 번 데려오지 그랬소."

베니퍼 영주가 요령 좋게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었다.

"수도 공기를 쐬는 건 좋은 일이지 않겠소? 여러 경험이 될 테고."

그녀가 콧잔등을 찡긋거리며 카인을 흘깃 보았다.

"혹시 아오? 마침 여기 있는 훤칠한 젊은이와 사랑에 빠질지도?"

호, 호, 호.

베니퍼의 웃음소리가 이어지는 동안, 두 영주는 의미심장하게 서로를 바라보았다.

베니퍼는 호들갑인 척 두 사람의 뜻을 묻고 있었다.

'혹시 두 후계자끼리 결합할 의향이 있는지?'

그것은 아르단테 가문과 콘첼라레 가문 사이의 결속을 의미했다. 제국 내 권력 구도를 송두리째 뒤흔들 수 있는 사건이었다.

"마침,"

카를로가 입술 끝을 끌어올렸다.

"두 사람의 나이가 비슷하긴 하지요. 미켈 영주의 생각은 어떻소?"

"아버지!"

카인이 목소리를 낮춰 카를로를 불렀다가, 주변을 살피고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미켈이 카인의 낯을 찬찬히 살폈다.

"흐음."

객관적으로 보아도 카인이라는 선택지는 나쁘지 않았다. 아니, 사실 제국에서 그만한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득을 위해 승냥이와 손을 잡는 이는 없는 법이다. 특히 언제 옆을 물어뜯을지 모르는 승냥이라면.

"내 딸이 아직 어려서 말이오."

미켈은 웃는 얼굴로 답했다. 좋다, 싫다도 아닌 유보적인 말투였다.

"허허, 아직 어리다니. 내가 알기론 우리 아들과 동갑일 텐데."

"그렇긴 하오만. 부모의 눈에 자식이 차는 법이 있겠소? 팔불출이 아니고서야."

그는 끝까지 카를로에게 한 방 먹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나저나, 거긴 아직 안 왔나 보오?"

베니퍼가 화제를 돌렸다.

"어디 말이오?"

"오베스트 영지 말이오."

"어차피 거긴 늘 대리인을 보내지 않소."

카를로가 비웃듯이 말한 뒤 회의장 안을 살폈다.

"그러니 저 중 누군가겠지."

"매번 같은 기사를 보내던데, 올해는 안 보이더군. 그래서 아직 안 왔나 했소."

"올해는 다른 자를 보낸 모양이구려."

미켈이 말을 받자 베니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디에고 킨드리얼 영주를 본지 너무 오래 된 것 같지 않소?"

"제국 서쪽 산맥은 험하기로 유명하지. 그가 아니었다면 국경은 진작 무너졌을 거요."

미켈의 걱정스러운 말투에 베니퍼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렇다고 이리 몇 년째 두문불출하는 것도 좋은 행동은 아니라고 보오. 황제 폐하의 관대함에 감사할 뿐이오."

"동감이오."

기회는 이때다 싶은지 카를로가 나섰다.

"몇 달에 한 번 얼굴 비추는 게 그리 힘든 건가 싶군. 제국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중요한 자리지 않소."

"흐음."

미켈은 그저 낮은 신음을 흘릴 뿐이었다.

겉보기엔 한가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듯해도, 그들은 사실 치열하게 서로 견제하는 중이었다.

제국에서 가장 넓은 영지, 그리고 권력을 가진 자들의 숙명이었다. 조금이라도 허점을 보이면 뒤처져 도태되고 말 테니까.

"그래, 보니 오늘 회의의 마지막 안건이 꽤 흥미롭던데."

마침내 미켈의 입에서 본격적인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카를로와 베니퍼의 눈빛이 의미심장해졌다.

"동의하오. 아주 흥미로운 안건이지."

"그건 매년 화제가 되는 안건이었지."

세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그럼 이만, 들어가 보는 게 좋겠군. 시간이 다 되었소."

먼저 시선을 돌린 것은 미켈이었다.

"좋소. 곧 황제 폐하께서 오실 테니 앉아 있어야겠구려."

이어서 베니퍼가 그 뒤를 따랐다.

"카를로 영주께서는 안 들어가시오?"

"나도 곧 들어가겠소. 그전에 아들과 잠시."

"...그러시다면야."

두 사람이 몸을 돌려 좌석을 향해 걸었다.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는 두 사람의 속도가 비슷했다.

"아버지."

두 사람의 뒷모습에서 카인이 눈을 뗐다.

"별로 좋은 사이는 아니신가 봅니다."

"왜 그렇게 생각했느냐?"

"다들 웃고는 계시지만 눈에 칼날이 서 있더군요."

대답하던 카인이 아, 소리를 흘렸다.

"그런데 베니퍼 영주와는 조금 뜻을 같이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오, 그럴 리가. 그 여자와는 상종도 하고 싶지 않단다."

"...예?"

"아들아, 잘 기억해두거라."

카를로의 입가에 조소가 스쳤다.

"차라리 미켈과 손을 잡을지언정, 베니퍼와는 그럴 일이 없다는 것을."

"...."

"저 여자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황제뿐이다. 전 제국을 그에게 갖다 바칠 생각으로 가득 차 있지."

말을 마친 카를로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마레 길드를 통해 알아본 결과, 동부 영지의 상당한 면적이 이미 황제의 손에 들어갔다.

정확히는 황제의 측근의 손이었지만, 이는 눈 가리고 아웅하는 수작에 불과했다.

'황제의 암캐 같은 년.'

욕설이 혀 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그저 속으로 삼켜냈다.

그는 제 이런 거친 모습을 카인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언제나 자상하고 다정한 아버지의 모습만 보이고 싶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카를로는 감정을 마무리하고 차분히 말했다.

"그러니 저 여자와는 되도록 상종하지 말 거라. 속에 독을 품고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아버지."

카인은 순종적인 눈빛으로 대답했다.

"아버지의 말씀은 틀린 적이 없으니까요. 믿습니다, 아버지를."

한없이 깨끗하고 맑게 자신 있는 모습. 한치의 의심 따위 없는 순수한 정의.

그것을 위해서라면 카를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설령 그것이 제 손에 더러운 피를 묻히는 일이라고 해도.

"자, 이만 올라가 보거라."

그가 손으로 회의장 바깥쪽의 2층을 가리켰다.

"가장 전망이 좋은 참관석으로 준비해두었다. 우리 아들이 앉을 곳은 언제나 최고여야 하니까."

"감사합니다, 아버지."

"이 회의장에 4개의 영역, 즉 동서남북으로 나뉘어 있다는 건 이해했느냐?"

카를로의 손이 회의장의 한 좌석을 가리켰다. 그 뒤로는 아까 그들에게 친밀하게 다가왔던 귀족 무리가 앉아있었다.

"우리 수드 영지의 자리는 저곳이다. 그러니 카인 너는 저 자리의 위쪽에 착석하면 된다."

"예. 그나저나 한 자리가 비어있군요."

카인이 예리하게 그 사실을 지적했다. 그의 시선은 아버지의 자리 맞은 편을 가리키고 있었다.

"오베스트 영지는 아직 안 온 걸까요?"

카를로가 그 자리를 보곤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하여간, 옹졸한 양반 같으니.'

사실 카를로는 디에고가 회의에 나오지 않게 된 것에 일조한 사람이었다.

계기는 별것 아니었다. 제국 최강자라며 주변에서 떠받들어 주는 것도, 콧대 높게 구는 것도 꼴 보기 싫었다.

그래서 회의에서 몇 번 망신을 줬건만.

'아예 안 나올 줄이야.'

그 정도로 속 좁은 위인인 줄은 몰랐다. 과연 푸른 늑대라는 칭호에 어울리는 고고함, 아니 뻣뻣함이었다.

'어차피 그 꽉 막힌 양반이 뭘 할 수 있다고.'

생각해보면 킨드리얼 가문은 제게 별 위협이 되진 않았다. 그럼에도 카를로는 눈에 거슬리는 건 치워버려야 직성이 풀리는 성미였다.

"곧 회의가 시작할 텐데 어쩌려는 건지. 이제 대리인조차 보내지 않겠다는 건가?"

그가 혀를 쯧 찼다.

"그만 신경 끄고 올라가려무나. 우린 우리 할 일을 해야지 않겠느냐."

"알겠습니다. 그럼 회의 끝나고 뵙겠습니다."

카인은 공손히 대답한 뒤 몸을 돌렸다. 막 2층으로 향하는 계단 위로 발을 들어 올린 순간, "-!"

그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아버지?"

카를로의 눈이 급격히 부릅떠지는 걸 목격했기에.

"왜 그러십니까?"

카를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회의장 바깥을 바라보며 중얼거릴 뿐.

"저 자는...?"

이를 사려문 듯한 음성이었다. 몹시 놀란 듯, 충격이 그대로 아로새겨진.

"무슨...?"

카인은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다시 계단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아버지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찾았다.

뚜벅, 뚜벅.

한 청년이 회의장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창공처럼 푸르른 머리카락은 가지런히 빗어 넘기고, 그 아래 그린 듯이 수려한 낯이 돋보였다.

훤칠한 키와 균형 잡힌 체격이 조화를 이루었다. 몸에 딱 맞추어 재단된 코트는 고급스러운 한편, 그의 탄탄한 육체를 그대로 드러냈다.

조급함이라곤 전혀 없는 느긋한 걸음걸이. 거기에 보랏빛 눈매가 나른하게 이지러진다.

"...설마?"

카를로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이 청년의 푸른 머리카락을 정신없이 훑었다.

그 사이 청년은 회의장의 입구에 도달했다.

터벅.

발걸음이 멈추고, 그의 분홍빛 입술이 벌어졌다.

"길 좀 비키지?"

몹시도 불량스럽고 껄렁한 말투였다.

"...?"

카인은 잠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다 주변을 둘러보고는, 손가락을 들어 자신을 가리켰다.

"...지금, 나한테 말한 건가?"

"그럼 여기 다른 사람이 더 있나?"

청년이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면 빨리 2층으로 올라가든지."

졸지에 카인은 회의장 입구를 막고 서 있는 불청객이 되어버렸다.

'이 자식 뭐야?'

지금껏 자신을 이렇게 대한 사람은 없었다. 청년의 시건방진 태도는 카인을 몹시 불쾌하게 했다.

그는 자신이 거친 말을 썼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청년을 위아래로 훑었다.

'귀족 맞아?'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리고 안타깝게도.

청년에게는 귀족다운 기품과 예절이 배어 있었다. 그저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평민과는 확연히 다른 태가 났다.

하지만.

'저 눈빛.'

사람을 깔보는 듯한, 자신만만하면서도 오연한. 그것이 몹시도 불량스러워 귀족답지 않은 분위기가 일었다.

게다가 청년은 카인보다 약간 더 키가 컸다. 그 사실이 카인의 짜증을 미묘하게 부추겼다.

'여기 있다는 건 귀족이 맞다는 건데.'

제가 아는 자 중에 이런 얼굴이 있었나?

카인이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카를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네, 혹시 부친의 성함이 어찌되나?"

"알면서 왜 떠보십니까."

청년이 씩 웃었다. 그 말에 카를로가 허, 낮은 탄식을 터뜨렸다.

"그럼 자네가...."

"짐작하신 대로입니다."

청년의 잘게 접히는 눈매 사이로 미소가 부서져 내렸다.

"아벨 오베스트 킨드리얼입니다."

Chapter12. 비수를 감추고 웃는다. (3)

그 말에 카인은 그를 다시 바라보았다.

'아벨 오베스트 킨드리얼이라고?'

제국 최강자라고 불리는 그 디에고 킨드리얼의 외동 아들.

이름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다만, 전혀 예상치 못했던 등장에 약간 놀랐다.

"역시, 그랬군."

카를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봤을 땐 디에고인 줄 알았네. 자네 부친의 젊은 시절을 꼭 빼닮았군."

"그런 말 많이 듣습니다."

"하지만 눈동자는 그렇지 않아. 모친께 물려받은 모양이군?"

카를로의 붉은 눈동자가 말라붙은 핏자국처럼 짙어졌다. 거기 떠오른 낯선 빛을, 카인은 알아채지 못했다.

"맞습니다. 저에 대해 참 잘 알고 계시는군요."

아벨이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카를로 수드 아르단테 영주님."

그가 카를로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이야기는 익히 들었습니다."

카를로는 한 방 먹었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에게 이토록 당당하게, 먼저 악수를 요청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자신을 향한 단단한 손을 빤히 바라보기도 잠시,

"...반갑네."

카를로가 손을 내밀어 아벨의 손을 맞잡았다. 여기서 밀려날 수는 없었으니까.

"...."

아벨의 눈가가 둥글게 휘어졌다.

그 순간, 카를로는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아벨이 '네가 그 카를로?'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건 그간 자신의 앞에 선 사람들이 보였던 태도와 아주 달랐다.

아주 오랫동안 그를 알았다는 듯, 그리고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듯한.

마치 '간파'당하는 듯한 느낌.

"저도, 반갑습니다."

이윽고 아벨이 손을 떼어낸 뒤 몸을 슥 돌렸다.

"이쪽은?"

카인의 외모는 누가 보아도 카를로의 아들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아벨은 뻔뻔하게 소개를 요구했다. 카인을 지긋이 응시하면서.

아벨의 청보랏빛 눈과 카인의 선홍색 눈이 마주쳤다.

'...뭐지?'

그 순간 카를로와 마찬가지로, 카인은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것은 카를로 때와는 조금 달랐다.

이유 모를 압박감. 모르고 있던 거대한 불운이 제게로 한 걸음씩 다가서는 느낌.

'어째서?'

눈앞의 아벨은 대놓고 적개심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그저 깊이 모를 시선을 던져올 뿐.

'기분 탓인가?'

카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카를로는 헛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쪽은 내-"

"카인 수드 아르단테라고 한다."

먼저 앞으로 나선 것은 카인이었다. 그가 아벨을 향해 손을 슥 내밀었다.

'첫인상은 마음에 안 들지만.'

카인은 자신의 사감과는 별개로, 공적인 자리에서 지켜야 할 예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나도 만나서 반갑군."

카인의 매끄러운 낯 위로 언제나와 같은 밝은 미소가 어렸다. 상대방에게 호감을 주던 그 미소였다.

"아하."

아벨은 카인의 갑작스러운 개입에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태연하게 손을 내밀어 카인의 손을 맞잡았다.

"반갑다."

아벨의 손이 닿는 순간, 카인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검을 다루는 자구나.'

약간의 호승심이 일었다. 제국 최강의 검사라고 불리는 자의 아들이니, 검사라면 당연히 가질만한 감정이었다.

그것도 잠시,

"...."

카인의 미소에 살짝 금이 갔다.

굳은살이 박힌 단단한 손바닥. 그것이 카인의 손을 무시할 수 없는 악력으로 압박해 왔기 때문이다.

'...이 자식이?'

험한 말을 벌써 두 번째 썼다는 것도 잊은 채, 카인은 지지 않기 위해 손에 힘을 주었다.

대부분의 귀족 자제들은 자신을 만나자마자 한 수 굽히고 들어왔다. 그만큼 수드 영지의 힘, 그리고 아르단테 가문의 권력이 막강했기 때문이다.

'대체 뭐지?'

이 아벨이란 녀석은 다른 자제들과 달랐다. 제가 누군지 알았음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함부로 대한다.

게다가 지금은 보란 듯이 대놓고 힘싸움을 걸어오고 있었다. 여기서 물러날 순 없었다.

"...."

카인이 티나지 않게 이를 악물었다.

'이 자식이 진짜....'

얼굴은 평온했지만, 그는 내심 젖먹던 힘까지 다 짜내는 중이었다. 이미 그의 손은 하얗게 변해 있었다.

'무슨 힘이 이리 무식하게 세?'

이런 행동을 하는 녀석들은 두 가지 경우였다. 힘의 논리를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거나, 혹은....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거나.'

어느 쪽일지는 아직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현재 카인의 정보로는 전자 쪽이 훨씬 유력했다.

"허허, 녀석들 참."

카를로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카인의 생각을 깨트렸다.

"힘자랑은 그쯤 해두시게. 누가 한창때 젊은이들 아니랄까 봐 혈기 왕성하군."

그 말이 떨어지는 동시에, 카인과 아벨은 손을 뗐다.

카인은 손을 뒤로 감추며 아벨을 흘끗 노려보았다. 아벨은 멀쩡한 얼굴로 얄밉게 픽 웃어 보였다.

'저 자식이!'

정말이지 좋게 봐주려고 해도 봐줄 수가 없는 녀석이었다. 카인은 불과 몇 분 만에 아벨에 대한 평가를 완전히 결론지었다.

'재수 없는 자식.'

이라고.

둘의 감정이 어떻든, 카를로는 흥미 어린 얼굴로 물었다.

"그래, 부친께서는 좀 늦으시는가? 곧 오시겠지?"

그는 아까부터 대회의장 입구로 흘끗흘끗 시선을 던지던 참이었다.

'모처럼 그 무거운 엉덩이를 들어올린 모양이군.'

이렇게 아들을 먼저 보낸 것은, 제가 행차할 것이라는 선전포고임에 분명했다.

그러나.

"아뇨, 안 오실 겁니다."

"그럼...?"

카를로의 얼굴이 실망감과 의혹으로 흐려졌다. 아벨은 그런 그의 얼굴을 응시하며 여유롭게 대답했다.

"이번 오베스트 영지의 대표는 접니다."

세 사람 사이로 일순 정적이 흘렀다. 아벨이 던진 한 마디에 두 사람이 굳어버린 탓이었다.

이윽고 정적을 깨뜨린 것은,

"영지 대표라고?"

당황의 빛을 겨우 감추는 카를로였다.

"부친께서 자네를 보냈단 말인가? 어째서?"

"뭐 문제될 거라도 있습니까?"

아벨의 태연자악한 대답에 카를로는 남몰래 입술을 씰룩였다.

'이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이.... 네 소문을 내가 모를 줄 알고?'

그는 이미 마레 길드를 이용해 각 영지의 후계자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그래서 오베스트 영지에서 아벨이 얼마나 악명 높은지, 그가 영지에서 무슨 패악을 저지르고 다니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런 아벨을 보내느니, 디에고가 직접 올 위인이라는 것도.

"...."

의혹을 느끼는 것은 카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비록 카를로 만큼 구체적이진 않더라도, 아벨에 대한 대략적인 소문은 알고 있었다.

각 영지의 다음 후계자가 누가 될 것인지는 뜨거운 화제였다. 대부분의 장남들이 갓 성인이 된 상황이었으므로.

하지만.

'이 녀석은... 언급도 안 되는 녀석이었는데.'

오베스트 영지는 제국에서 크게 주목받는 곳이 아니었다. 자연스레 아벨에 대한 주목도도 함께 떨어졌다.

게다가 그는 뭘 하는지 영지에 콕 박혀 도통 얼굴도 비추지 않았다. 꺼림칙한 소문이 뒤따르긴 했지만 자세한 내막까진 알지 못했다.

'범에게서 괭이 새끼가 나왔다.'

아벨 킨드리얼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딱 이 정도였다.

"아니, 자네와 같은 젊은이가 오기엔 다소 어려운 자리이니 한 말일세."

카를로는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이는 설명을 가장한 충고였다.

"그래서 경험 많고 노련한, 각 영지의 영주들이 참석하는 것 아니겠나?"

"누가 그걸 모르겠습니까?"

아벨은 전혀 타격이 없는 것처럼 화사하게 웃었다. 그의 손이 코트 안쪽으로 향했다.

"그러니 아버지께서 절 보낸 겁니다."

그가 꺼내 든 것은 오베스트 영주의 인장이었다. 킨드리얼 가문의 상징인 늑대가 음각된.

"이 회의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시기 때문이죠."

"...부친께서 정말 자네를 보냈다고? 자네를 인정하신 건가?"

"글쎄요."

아벨의 긴 손가락이 인장을 매만졌다.

"이 자체가, 영주의 인정을 의미하지 않겠습니까?"

"...."

"그러니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은 충분하지요."

아벨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덧붙였다.

"누구와는 다르게."

그의 비릿한 시선이 카인에게 닿았다.

"-!"

카인은 화살에라도 찔린 듯 몸을 움찔했다.

아벨이 곧 참관석으로 올라가야 하는 자신의 위치를 꼬집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올라가려던 참이었다."

"오, 물론 그렇겠지."

그저 빙그레 웃는 것뿐인데도, 왜 이리 사람 속을 긁는 것 같을까?

카인은 아벨을 바라보며 지금 제가 느끼는 것이 합리적인지 고찰하기 시작했다.

"험, 험."

카를로가 헛기침으로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카인, 이만 올라가거라. 나도 내려가 볼 참이다. 곧 황제 폐하께서 오실 것 같구나."

"...."

순간 카인은, 그간 아버지께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반항심을 느꼈다.

그의 짙게 얼룩진 눈빛이 아벨을 향했다.

'저 자식은 회의장으로 내려갈 텐데.'

저 녀석은 되고, 나는 안 된다.

그것은 그가 지금껏 인생에서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각이었다.

'...이러지 말자.'

이윽고 카인은 속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어차피 나중엔 나도 참석할 테니까.'

그는 이번 상황이 특수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머지않아 자신도 저 희의에 '당당히' 참석할 수 있으리라는 사실도.

"예, 아버지."

카인은 여느 때처럼 순종적인 아들의 모습으로 고개를 숙였다.

"이따 뵙겠습니다."

"그래, 나중에 보자꾸나."

그가 2층 참관석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아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카를로는 옆에 선 아벨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허, 참.'

아벨은 난간에 팔을 기댄 채 회의장을 쭉 둘러보고 있었다.

그의 낯은 흥미와 호기심으로 일렁였다. 긴장과 불안 따윈 전혀 엿보이지 않았다.

그는 너무나 여유로웠고 자신감이 넘쳤다.

'오늘 처음 참석한 것 맞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이 많고 경험이 풍부한 영주들조차 회의에 참석할 때는 긴장한다. 하물며 스무 살의 청년은 오들오들 떨어도 이상하지 않다.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군.'

카를로가 알고 있던 정보와 너무 달랐다. 노름을 즐기고, 주색잡기에 여념이 없다는 망나니가 저럴 수 있을까.

'디에고 킨드리얼, 고고한 늑대인 줄로만 알았더니.'

그가 원래 이 자리에 왔어야 할 남자를 생각하며 쓰게 웃었다.

'여우처럼 교활한 구석이 있었군.'

아무래도 제가 지금껏 수집한 정보에 허점이 있는 것 같았다. 아벨 킨드리얼의 모습은 그가 지금껏 들어온 소문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이런 아들을 숨겨두고 있었단 말이지.'

물론 제 아들 카인은 객관적으로도 뛰어났다.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고 뒤처지지 않을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다.

하지만,

'뭔가 있어.'

아벨에게서 뭔지 모를 게 느껴졌다. 오랜 기간 사람을 다루는 계급으로 머물며 얻은 경험이 경고하고 있었다.

눈앞의 청년을 조심하라고.

'주의 깊게 지켜봐야겠군.'

카를로는 생각을 마치고 아벨에게 다가섰다.

"어째서 들어가지 않고 그리 서 있는 겐가?"

"아, 좀 둘러보고 싶어서요. 현 황궁에서 두 번째로 넓은 장소 아닙니까."

"그래, 연회장 다음으로 넓은 곳이지."

아벨은 빙그레 웃더니 난간에서 몸을 떼어냈다. 그의 가라앉은 눈빛이 황제의 자리를 향했다.

"오늘 제 무대가 될 곳이기도 하고요."

Chapter12. 비수를 감추고 웃는다. (4)

나직이 흩어지는 목소리는 크기가 작아 잘 들리지 않았다.

"음? 방금 뭐라고 했나?"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벨이 한 팔을 들어 아래쪽을 가리켰다.

"그만 내려가시죠."

"...음."

카를로는 잠시 고민했으나,

"그렇게 하세."

시계를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가 시작할 시각이 가까워진 탓이었다.

그가 막 발을 내딛으려는 순간,

뚜벅.

아벨이 그보다 먼저 아래로 내려섰다.

"-!"

카를로는 놀란 얼굴로 아벨의 등을 바라보았다.

이러면 마치 자신이 그의 뒤를 따라가는 듯한 모양새가 되지 않는가.

하지만 뭐라고 말할 틈도 없이, 이미 아벨은 회의장을 향해 나아가는 중이었다.

뚜벅.

소리 죽여 이야기를 나누던 영주들의 입이 멈추었다.

뚜벅, 뚜벅.

고요한 회의장 안에 유일하게 울려 퍼지는 발소리에, 그들이 뒤를 돌아보았다.

뚜벅.

영주들의 시선이 회의장 중앙 복도를 가로지르는 아벨에게 고정되었다.

이 회의장에서 가장 어리지만, 가장 오래 있었던 사람처럼 차분한 태도. 입가에 스민 미소는 나른하기도, 날카롭기도 했다.

"저 청년은...."

"머리카락 색이...."

"지금 빈 자리가...."

영주들 사이로 속삭임이 퍼졌다. 몇몇은 이미 아벨의 정체를 눈치채곤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현재 회의장에 빈 자리는 두 군데 뿐이었다. 한 곳은 아르단테 가문의 자리, 그리고 나머지 한 곳은....

"오베스트 영지?"

"킨드리얼 가문?"

영주들은 경악한 눈초리로 다시 아벨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의 생김새가 디에고 킨드리얼과 닮았다는 것을 확인했다.

뚜벅, 뚜벅.

영주들의 시선이 화살처럼 꽂히는 와중에도, 아벨의 걸음은 조금도 느려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는 현 상황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입가에 서린 미소가 아까보다 한결 짙어져 있었다.

"허, 참."

카를로는 남몰래 한숨을 삼켰다.

평소대로라면 저렇게 시선을 독차지하며 걸어가야 하는 것은 자신이어야 했다. 늘 가장 마지막에 좌석에 앉곤 했으니까.

하지만 상황은 그의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 되려 새파란 애송이의 뒤나 따르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이렇게 무시 받기는 또 처음이군.'

영주들은 아벨의 뒤에 카를로가 걸어오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린 눈치였다.

아니, 보긴 봤지만 금세 시선을 거두곤 했다. 그보다는 그 앞의 아벨에 더 신경이 쓰였으니까.

입맛이 썼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제 와서 체신머리 없게 걸음을 재촉하기엔 늦었다.

뚜벅.

그리고 마침내, 아벨의 걸음이 멈추었다.

"-!"

"세상에."

"설마."

그 앞을 확인한 영주들이 숨을 들이켰다.

[오베스트 영지-킨드리얼 가문]

-라고, 선명하게 새겨진 명패가 놓인 자리였다.

아벨은 잠시 멈춰서서 그 자리를 바라보았다. 청보랏빛 눈동자는 '드디어.'라고 말하는 듯 홀가분한 빛으로 반짝였다.

그가 자리에 앉는 대신 고개를 들어 올렸다.

"...!"

막 제 자리를 찾아 앉으려던 카를로는 자신을 향한 시선을 느꼈다.

오베스트 영지의 자리는 수드 영지의 맞은 편이었다. 아벨이 그 자리에 서서 자신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왜, 아직 안 앉은 거지?'

그는 순간 아벨이 이 회의장의 암묵적인 힘싸움을 알고 있나 싶었다.

그것은 불가능했다. 이 수도에 처음 얼굴을 비치는, 회의에 처음 참석하는 자가 그것을 알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아벨은 카를로가 움직이길 기다리는 것처럼 멈춰 있었다.

"...."

솔직한 심정으로, 카를로는 절대 이 자리에 먼저 앉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지금껏 지켜온 자존심이자 권력의 상징이었다. 해서 아벨을 향해 눈빛으로 무언의 압박을 보냈다.

'어서 앉게.'

그러나 아벨은 그의 시선을 못 알아차린 것처럼 딴청을 피웠다. 그러다 조용히 중얼거렸다.

"오시는군요."

카를로를 포함한 영주들이 의문스런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의문은 곧 해결되었다.

탕!

회의장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임페로 제국의 황제는 영주들과는 다른 입구로 입장한다. 바로 회의장 가장 안쪽, 황제의 자리로 바로 들어설 수 있는 내실의 입구로.

회의장의 문이 닫혔다는 것은 황제가 바로 저 내실에 들어섰다는 의미였다.

"...크윽."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카를로는 이를 악물며 의자로 엉덩이를 내렸다.

"...."

그런 그를 아벨이 빤히 바라보며 똑같이 따라 했다.

털썩.

두 남자가 동시에 앉는 소리가 쥐죽은 듯이 적막한 회의장을 갈랐다.

"허...!"

"저 천둥 벌거숭이가...!"

"내가 뭘 본 거지?"

영주들은 눈을 크게 뜨고 입을 쩍 벌렸다.

그들은 근 몇 년간 카를로가 아닌 다른 자가 마지막에 앉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이 이 회의장의 암묵적인 규칙이었기에.

그러나 그것은 오늘,

"흐음."

자신이 불러온 파란을 전혀 모르는 듯이, 태연하게 다리를 꼬는 아벨 킨드리얼에 의해 깨어지고 말았다.

"크흠."

카를로가 불쾌한 듯 헛기침을 했다. 영주들은 그제야 제 눈과 입을 단속했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에 전혀 휩쓸리지 않는 두 사람이 있었다.

"허허, 이것 참 흥미롭구먼."

수염을 쓰다듬으며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미켈과,

"재미있군."

긴 손톱을 매만지며 슬며시 미소 짓는 베니퍼였다.

둘을 제외한 영주들은 입이 근질거린다는 표정으로 턱에 힘을 주었다. 여기서 자칫 입을 잘못 놀렸다간 카를로의 분노를 살 수도 있었기에.

다행히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황제 폐하 드십니다!"

시종들의 외침이 들려온 덕분이었다. 사람들은 황급히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실의 문 양옆에 서 있던 기사들이 문을 열었다.

벌컥!

그 사이에서 훌륭한 풍채에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남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테오도어 마기오레 데 임페로.

이 제국을 다스리는 절대적인 군주이자, 전장의 흑사자라고 불리는 황제였다.

❖ ❖ ❖

"제국의 큰 태양을 뵙습니다."

회의장의 모든 인원이 허리를 숙였다.

마찬가지로 허리를 숙이곤 있었으나,

'드디어 행차하셨군.'

나는 혼자서 빙그레 웃었다.

"다들 자리에 앉게."

황제의 목소리가 바로 앞에서 들려왔다. 내 자리가 황제와 가까운 덕분이었다.

하지만 이 소리는 회의장 끝 좌석까지, 그리고 2층 참관석까지 똑똑히 들릴 것이다.

소리를 반사한 후 골고루 퍼지도록 회의장을 설계했기 때문이다.

영주들은 의자 긁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유의하며 제각각 자리에 앉았다.

"이렇게 오랜만에들 보니 반갑구려."

테오도어 황제가 인자하게 웃었다.

그의 음성에서는 고귀함과 위엄이 느껴졌고, 사람을 따르게 만드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다들 먼 길 오느라 힘들진 않았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당치도 않은 말씀이옵니다."

그가 싱긋 웃으며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한쪽으로 당겨 묶은 새카만 머리카락이 가볍게 흔들리고, 선명한 핏빛 눈동자가 생기있게 빛났다.

남자다운 매력이 물씬 풍기는 이목구비는 그야말로 조각처럼 완벽했다.

과연 한 때 제국의 모든 미혼 영애들이 가슴앓이를 하게 만든 외모다웠다.

'나 참.'

나는 거기 감탄하는 대신, 남몰래 입술을 씰룩였다.

'저게 어떻게 50대의 얼굴인지.'

테오도어 황제의 피부는 주름 하나 없이 탱탱했고, 혈색 좋은 뺨이 매끄럽기 그지없었다.

실제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젊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겉보기론 30대 정도로 밖에 안 보이네.'

물론 나이보다 동안인 사람들은 분명히 있다. 어느 정도 타고나는 면도 있고, 지속적인 관리로 노화를 늦출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들과 테오도어 황제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단순히 젊어 보이는 것과 실제로 젊은 것은 다르니까.'

황제의 경우엔 후자였다.

그의 신체 능력, 신진대사, 뼈와 근육의 상태 등 모든 것이 실제 30대에 가까웠다.

그 어떤 영약으로도, 그 어떤 시술로도 저토록 완벽히 젊음을 유지할 수 없다.

이 세계에서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오직 하나, 세레나드의 힘 뿐이었다.

'주기적으로 세레나드의 힘을 받아 노화를 정지시키고 있겠지.'

욕심껏 20대의 젊음을 되찾고 싶었겠지만, 거기까진 자제한 모양이었다. 주변의 의심을 살수도 있으니까.

테오도어 황제의 충격적인(?) 동안에 감명을 받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폐하의 용안은 언제 보아도 놀랍습니다."

영주 중 하나가 아첨을 던졌다.

"어떻게 젊음을 유지하시는 겁니까? 그 비결을 저희에게도 좀 알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하하, 고맙네."

테오도어 황제는 기분이 좋은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짓궂게 반짝였다.

"그저 잘 먹고 잘 쉬는 것 외에 방법이 있겠나?"

"하하, 참. 너무 당연한 말이라 뭐라 드릴 말씀이 없군요. 저는 그리 해도 늙어버렸지 말입니다."

이어서 그 옆의 다른 영주가 끼어들었다.

"역시 황제 폐하. 동안의 비결은 타고나야 하는 것이었군요!"

그들의 만담을 보며 나는 콧방귀만 뀌었다.

'타고나긴 개뿔.'

야 너두 할 수 있어. 세레나드만 있으면.

아니꼬워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오늘 내가 할 일은 황제의 흠을 들추어내는 게 아니었으니까.

테오도어 황제가 미소를 띤 채 회의장 전체를 쭉 둘러보았다.

"어디 보자.... 그래, 빈 자리는 없군."

그가 각 자리에 앉은 인물들을 눈으로 훑었다.

"모두 빠짐없이 참석했나?"

"예, 폐하."

질문에 답한 것은 늘 황제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보좌관이었다.

그는 얼굴의 외알 안경을 추어올린 뒤, 참석자 명단에 시선을 주었다.

"총 53명의 영주들이, 모두 빠짐없이 참석했습니다."

"그렇군."

테오도어 황제는 회의장 먼 곳부터 찬찬히 훑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시선을 따라가며 피식 웃었다.

'너무 노골적인 자리 배치로군.'

소유한 영지의 개수가 많고, 그 면적이 넓을수록 회의장의 중앙에 앉는다.

즉, 영주가 가지고 있는 힘이 클수록 황제와 가까이 앉게 된다는 뜻이었다.

이를 증명하듯, 동부의 에스트 영지를 지배하는 베니퍼 에스트 콘타디나의 자리가 황제와 가장 가까웠다.

'그 드넓은 평야를 모조리 엉덩이 밑에 깔고 있으니.'

베니퍼 영주는 테오도어 황제가 들어온 시점부터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그녀의 물빛 눈동자가 지독한 갈망을 품었다가 스러지는 게 보였다.

'그래도 미망인이라고 겉치레는 하네.'

품어선 안 되는 욕심을 품었으니 그녀의 최후가 어찌 될지는 불 보듯 뻔했다.

그 다음으로 황제와 가까운 것은 남부의 수드 영지, 카를로 수드 아르단테의 자리였다.

그가 차지한 영지의 크기는 베니퍼 영주에 비해서는 작았다. 하지만 개수만큼은 훨씬 많았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남부 해안가의 특산물을 이용한 막대한 부가 있었다.

'동부보다 훨씬 작은 땅덩어리에서 비슷한 수입을 얻고 있으니 오죽하겠어.'

나는 남몰래 입을 비죽였다.

역시 카인 그 놈은 운이 좋아도 너무 좋다.

Chapter12. 비수를 감추고 웃는다. (5)

다음은 북부의 노드 영지를 다스리는 미켈 노드 콘첼라레.

그는 카를로와 비슷한 위치에 앉아 있었다. 북부와 남부의 힘이 막상막하라는 뜻이었다.

'카를로가 가장 견제하는 상대였었지.'

콘첼라레 가문은 대대로 설산의 혹렬한 추위 속에서 북부를 지켜왔다.

미켈 영주는 본인의 무위도 뛰어나거니와, 귀족 명부에 가장 먼저 이름을 올린 자 중 하나였다.

가문의 역사로 치자면 감히 아르단테 가문과 비교할 바가 못 되었다.

'뭐, 그래도 돈을 이길 순 없겠지만.'

실리 앞에서 명분은 위세를 떨치지 못하는 법이다.

남부의 신흥 귀족으로 급부상한 카를로가, 지금은 제국을 쥐락펴락하는 걸 보면 그러했다.

"흐음...."

앞에 놓인 명패와 인물을 빠르게 비교 대조하면서, 테오도어 황제의 시선이 화살처럼 휙휙 지나갔다.

"음?"

그러다 내 앞에서 멈추었다. 책상에 놓인 '오베스트 영지'라는 명패를 확인하곤 내 얼굴을 보았다.

"못 보던 얼굴이군."

그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내 얼굴을 훑었다.

"디에고 영주가 이번에도 대리인을 보낸 건가? 기사치곤 많이 어려 보이는데."

잠시 생각한 뒤, 테오도어 황제가 고개를 기울였다.

"이젠 대리인을 보내는 걸로도 모자라 종자를 보냈나?"

그의 입가가 불편한 심기를 답고 비틀렸다.

"이게 킨드리얼 가문이 내게 보이는 성의인가?"

...아니, 잠깐.

'눈이 삐었나?'

이 얼굴을 보고도 내가 누군지 모른단 말이야?

이쯤 되면 황제가 알아도 모르는척 하는 게 분명했다.

다행히 이 오해를 해결해 줄 이가 있었다.

"아닙니다, 폐하."

보좌관이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아벨 오베스트 킨드리얼, 디에고 영주의 장자분입니다. 영주의 인장을 들고 참석하셨습니다."

"호오오."

테오도어 황제가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의 낯에 희미한 경계, 그리고 뚜렷한 흥미가 떠올랐다.

"웬일로 자네가 오게 된 건가?"

"예, 폐하."

나는 예의 바른 미소를 장착한 뒤 입을 열었다.

"그간 아버지께서는 회의에 직접 참여하지 못하는 것을 무척 안타깝게 여기셨습니다."

턱도 없는 거짓말이었다.

아벨의 아버지, 디에고는 귀족 회의에 나가는 것을 몹시 거추장스럽고 쓸데없는 일이라고 여기는 사람이니까.

'뭐,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지만.'

디에고도 초기엔 직접 나와 내가 지금 앉아 있는 이 자리를 뎁히곤 했다. 하지만 그는 펜이 아닌 검을 쥘 때만 강한 자였다.

'천하제일 꼰대 대회에 나가면 우승할만한 캐릭터지.'

권위적이고, 말주변은 부족하고, 융통성도 없다.

그런 디에고에게 귀족 회의란 몹시 곤혹스러운 자리였다. 영주들이 세 치 혀를 간교하게 놀리며 아첨을 떠는 분위기에 통 적응하지 못했다.

'특히 카를로 저 인간 때문에.'

몇 번 물어뜯기고 난 후, 그는 회의에서 급격히 말수가 줄었다. 황제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니 그 험지에 몇 년간 처박혀 몬스터 뒤치다꺼리나 하고 있겠지.'

아무튼, 디에고의 생각이 어떻든 말든 상관없는 일이다. 어차피 본인은 여기 없으니까.

나는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계속했다.

"특히 폐하를 뵌 지 오래되었다며, 직접 안부를 전하지 못하는 것을 송구스러워 하셨습니다."

"호오, 디에고가?"

테오도어 황제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아무렴, 그 대쪽 같은 디에고가 그랬다는 데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을 터였다.

황제의 환심을 사려는 내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예. 그래서 아버...."

"그렇게 충성스러운 사람이 얼굴 한 번을 안 비춘단 말인가?"

물론 방해꾼도 있었다.

"거기서 여기까지 오는데 며칠이나 걸린다고. 몇 년 동안 대리인만 보냈으면서, 말이 앞뒤가 안 맞지 않소이까?"

비웃음이 역력한 얼굴을 한 카를로였다.

"아무렴요. 회의가 자주 있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몇 달에 한 번 있는 회의에 참석 하는 게 그리 어렵답니까?"

그의 뒤에 앉은 다른 영주들이 거들었다.

'그래. 카를로 네가 조용히 있을 위인이 아니지.'

나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아까 내가 제 권력에 도전한 것의 보복이었다. 황제의 주목을 받는 것을 방해하려는 목적도 있을 터였다.

'다 큰 어른들이 유치하게 뭐하는 짓이람.'

도대체 의자에 늦게 앉는 것 따위가 뭐가 중요하다고. 그새를 못 참고 찍어누르려는 꼴이 참 우스웠다.

"오, 물론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요."

나는 태연한 목소리로 맞받아쳤다.

"하지만 서쪽 산맥은 몬스터의 침입이 잦은 곳입니다. 평화로운 남부 해안과는 다르게."

"...."

"만약 아버지가 자리를 비운 사이 강력한 몬스터가 침입한다면, 그땐 어찌 되겠습니까?"

카를로가 반박하기 위해 입술을 씰룩인 순간,

"서쪽 산맥이라면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지. 트롤이 떼거리로 몰려다니는 곳이니까."

의외의 곳에서 지원이 들어왔다.

"-!"

나와 카를로 둘 다 놀라서 옆을 쳐다보았다. 미켈이 눈썹을 늘어뜨리며 웃고 있었다.

"서쪽 산맥의 험준함은 말하면 입 아픈 것 아니겠소."

"음, 그렇긴 하지."

거기에 테오도어 황제까지 고개를 끄덕이자, 카를로는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물었다.

기회는 지금이었다.

"그렇게 제국의 안녕에 누를 끼치느니, 아버지께서는 눈물을 머금고 국경에 남는 쪽을 택하셨습니다."

"...."

"대리인을 보내는 선택은 불가피한 것이었습니다. 치열한 갈등 끝에 내린 결정이었던 겁니다."

절절한 어투로 말하며 고개를 숙이는 순간,

"-하!"

작게 혀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 강화된 청력으로만 잡아챌 수 있을 만큼 미미한 소리였다.

곁눈질로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보니 황소처럼 콧구멍을 벌름거리는 카를로가 있었다.

'어지간히 듣기 싫었나 보군.'

하긴, 디에고의 성정을 아는 그로서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이야기긴 했다. 그걸 혀에 침도 안 바르고 술술 뱉어대고 있으니 얼마나 못마땅할까.

하지만 이미 분위기는 내 쪽으로 넘어왔다.

"그러니 부디 제국을 향한 오베스트 영지의 충정을 의심하지 말아주소서, 폐하."

"허허, 그랬군."

테오도어 황제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이번에 오게 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간의 불충, 이 아벨 오베스트 킨드리얼이 깊이 고개 숙여 사죄드립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충성스러운 신하의 모습을 연기했다.

"또한 좋은 배움의 기회를 얻게 된 것에 감사드립니다. 열린 자세로 모든 가르침을 겸허히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주변을 향해 말하자 영주들이 헛기침을 하며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젊은이가 꽤 싹수가 있구먼."

"험험, 마땅히 그래야지. 처음 오게 된 것 아니오."

서투른 신입을 잘 보살펴 달라는 말에 다들 아닌 척하면서도 흡족해하는 눈치였다. 상대방이 먼저 굽히고 들어오는데, 무작정 뻣뻣하게 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단 한 명, 카를로를 제외하고.

"저... 저...."

그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마레 길드의 진짜 주인.'

그라면 오베스트 영지에 도는 내 소문에 대해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거기에 첫 만남 때 보인 불손한 태도까지.

내가 본색을 감춘 채 연기를 하고 있으니 기가 막히겠지.

'그래봤자 어쩔 건데?'

나는 그를 향해 빙그레 웃어 보였다. 겉보기엔 그저 미소였지만, 카를로라면 여기 담긴 뜻을 분명히 읽어냈으리라.

"...!"

카를로의 이마가 사정없이 구겨졌다.

오, 저런.

나는 고개를 휘휘 내저으며 이마를 툭툭 두드렸다.

'그러다 주름살 생깁니다.'

라는 뜻으로.

꽈득.

카를로가 주먹을 움켜쥐고, 그 위로 새파란 힘줄이 돋아나는 게 보였다.

'여기까지만 할까?'

나는 터져 나올 것 같은 웃음을 삼키며 마무리 지었다.

"다들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 회의에서 킨드리얼 가문을 대표하여 성심성의껏 참여하도록 하겠습니다."

언뜻 듣기에는 디에고의 뜻대로 행동하겠다는 말이지만, 속내는 전혀 달랐다.

'내가 미쳤다고 디에고 그 꼰대가 시키는 대로 해?'

요나스의 품속에는 인장뿐만 아니라, 회의 안건에 어떻게 응답할지 써둔 종이도 있었다. 물론 그 종이는 갈기갈기 찢겨 강에 버린지 오래였다.

이제 날 막을 수 있는 이는 없었다.

디에고가 내 부재를 아무리 빨리 알아차린다 해도, 그와 나 사이엔 절대적인 물리적 거리가 있었다. 그가 나를 잡겠다고 직접 올 위인도 아니기도 하고.

"허허허. 그래, 그래."

테오도어 황제가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내 디에고에게 장성한 아들이 있다는 소식은 들었으나, 이리 실제로 보게 되니 반갑기 그지없구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내가 공손히 고개를 숙이자 황제의 미소가 짙어졌다.

"얼굴은 아비와 판박인데, 성격은 퍽 다른 듯 하군."

그는 어느새 얼굴의 경계를 거둬들이고 보다 친근한 태도를 보였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권력에 민감한 자니까.'

내가 공손하게 굴며 비위를 맞춘 덕분이었다. 하긴 그가 언제 킨드리얼 가문으로부터 이런 대접을 받았겠는가.

그동안 영주의 대리인으로 온 기사들도 모두 영주를 닮아 뻣뻣하기가 대나무 못지 않았다.

그랬던 킨드리얼 가문이, 심지어 디에고인 아들인 내가 입속의 혀처럼 굴어주니 아니 기분이 좋을까.

'이런 걸 두고 삼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라고 하지.'

하지만 지금 내 태도를 충성심으로 착각해선 곤란했다. 실제로 황제 따윈 내 안중에도 없었으니까.

'일단 나를 방해하지 않으니 내버려 두는 것 뿐.'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이 제국을 뒤집는 것도 가능했다. 다만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고, 굳이 그럴 필요성을 못 느꼈을 뿐이다.

속에 품은 뱀 같은 생각과 달리, 나는 그저 순진무구하게 대답했다.

"그리 말씀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곁눈질로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주변 대영주들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그들은 행여나 내가 황제와 결탁하려는 건지, 새롭게 세력을 구축하려는 건지 경계하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자, 그럼 사담은 여기까지 하고."

테오도어 황제가 손뼉을 두 번 쳤다.

"그만 회의를 시작하도록 하지."

"예, 폐하."

극진하게 허리를 굽힌 보좌관이 고갯짓을 했다.

"서기관."

"준비되었습니다."

모든 준비가 완료되자, 회의장의 벽에 석상처럼 서 있던 시종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탁자 위에 탑처럼 쌓여 있던 서류들을 하나씩 꺼내어 영주들 앞에 내려놓았다.

"오늘의 안건입니다."

보좌관이 소리 높여 말했다.

"그럼 첫 번째 안건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곡식 판매 수수료에 관련된 건입니다."

그렇게 고대하던 정기 귀족 회의가 시작되었다.

Chapter 13. 타인의 논리를 무기로 삼는다. (1)

"...해서, 현안을 유지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그렇다면 기존 방식을 유지하는 것으로 진행하겠습니다. 다들 동의 하십니까?"

보좌관이 주변을 둘러보며 물엇다.

"동의하신다면 거수해주시기 바랍니다."

영주들의 손이 전부 올라가고, 그렇게 순조롭게 안건은 통과되었다.

이렇게 진행된 안건만 벌써 10개째.

영주들의 얼굴에 차차 피로가 깃들었다. 오랜 시간 동안 자리에 앉아 감정을 쏟는 것은 상당히 심력을 소모한다.

그 팔팔한 테오도어 황제도 마찬가지였는지, 보좌관을 향해 슬쩍 눈짓했다.

"그럼, 다음 안건을 진행하기 전에 잠시 휴식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보좌관이 눈치 빠르게 휴식을 선언했다.

"후우우."

"아이고, 허리야."

영주들이 찌뿌드드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회의장 위쪽을 향해 올라갔다.

그곳에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간단한 다과와 음료가 준비되어 있었다. 회의 시작 전에 준비된 것과는 메뉴가 약간 달랐다.

"황궁은 다과조차도 수준이 높군요."

"황제궁 담당 조리장이 참여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호오, 과연."

"이거 먹는 맛에 회의 참여합니다, 하하하."

영주들은 각각 친한 이들과 무리지어 다과를 들거나, 편히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내겐 아무도 다가오는 이가 없었다. 오늘 처음 참석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덕분에 편히 테이블로 다가가 다과를 살필 수 있었다.

'호오.'

오베스트 성에서는 보지 못했던 다양한 종류의 다과들이었다. 그중 레몬과 자몽을 사용한 것을 골라 집었다.

'나중에 막스한테 만들어보라 해야겠군.'

그 나중이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내가 수도에서 볼일을 마치고 오베스트 영지로 돌아갈 확률은 극히 낮았다.

'돌아가는 건, 내가 디에고 킨드리얼을 이길 수 있을 때.'

혹은 카인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졌을 때, 였다. 아무튼 그때까지는 세력을 키우며 강해져야만 했다.

'오, 이거 맛있네.'

열심히 황궁 특제 다과를 즐기고 있는데, 다양한 시선들이 날아와 꽂히는 게 느껴졌다.

그중 가장 강렬한 시선의 주인공은 카를로였다. 그는 수하들과 함께 담소를 나누는 와중에도 힐끗힐끗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회의가 막 시작했을 때보다는 상당히 누그러진 눈빛이었다.

'내 모습을 보고 안심한 모양이지.'

나는 10개의 안건이 진행되는 동안 단 한 번도 의견을 표현하지 않았다. 그저 손을 들어 투표에만 참여했다.

애초에 내겐 별 중요하지 않은 안건들이었으며, 내 의견과는 상관없이 결과가 정해져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중요한 안건은 이 뒤에 나오니까.'

카를로는 그런 내 행동을 다르게 해석한 듯 했다.

'역시 별 볼일 없는 놈이었군.'

하는 표정으로 나를 보며 비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제 아무리 영지에서 날고 기던 나라도, 진짜배기들이 앉아 있는 정치판에선 맥을 못 춘다고 여겼겠지.

승리자의 미소가 카를로의 얼굴에 감돌고 있었다. 앞선 안건들이 모두 제 뜻대로 진행된 것이 퍽 흡족한 듯했다.

'뭐,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지 두고 보자고.'

나는 카를로가 착각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어차피 재개될 회의에서 저 미소는 무참히 깨어질 테니 말이다.

그래서 카를로가 대놓고 나를 바라보는 것도 무시했다.

'제 나이 절반도 안 되는 애 이겨서 그리 좋나.'

속으로 콧방귀를 뀌면서.

대신 테이블에 놓인 다과를 모두 섭렵할 기세로 움직였다. 모든 종류를 한 가지씩 입에 넣어보며 즐거운 시간을 만끽했다.

그때였다.

"다과가 입에 맞는 모양이오?"

나직하고 중후한 음성이 옆에서 들려온 것은.

꿀꺽.

입에 들어있던 자몽 푸딩을 삼키고 옆을 돌아보았다.

"미켈 영주님."

손에 들고 있던 접시를 내려놓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흰 수염을 길게 기른, 하지만 청년처럼 생동감 있는 안광을 뿜어내는 미켈이 곁에 서 있었다.

"맛있습니다. 황궁의 조리장들은 솜씨가 좋군요."

"제국 내에서 고르고 고른 인재니 아니 그렇겠소?"

미켈이 허허 웃었다. 퍽 호의적인 웃음이었다.

'원래 이렇게 웃는 남자긴 하지만.'

저 속에 무엇을 숨기고 있을지는 모를 노릇이다.

이런 면에서는 차라리 카를로가 나았다. 대충 속이 짐작 가능한 그와 달리, 미켈은 제 속내를 완벽하게 숨길 수 있었다.

'호랑이가 아니라 너구리라고 불러야 하는 거 아닌가.'

어쨌건 그쪽에서 먼저 다가와 주다니, 좋은 기회였다.

나는 화답하듯 슬쩍 웃고는 손을 뻗어 접시 하나를 들었다.

"이게 특히 맛있더군요."

흰 크림으로 겉을 감싸고, 그 위를 풀잎으로 장식한 미니 케이크였다.

그걸 내 앞으로 가져오는 대신,

"한 번 드셔보시죠."

미켈에게 내밀었다.

그의 청회색 눈동자가 일순 커지더니, 이내 허물어졌다.

"고맙소."

그는 순순히 접시를 받아 갔으나, 바로 먹지는 않고 위의 케이크를 바라보기만 했다.

나는 개의치 않고 다른 접시를 집어 들었다. 케이크를 입에 쏙 넣고 우물우물 씹어 삼켰다.

"음, 역시 괜찮네요."

"그렇소?"

"네. 처음엔 생크림인 줄 알고 먹었는데 아니더라고요? 화하고 시원한 맛이 굉장히 독특해서 자꾸 손이 가게 됩니다."

흰꼬리박하.

북부의 설산에서만 자생하는 박하과의 식물이다. 잎의 끝부분이 흰 색이라 그런 이름이 붙었다.

그리고 이 케이크는 그 흰꼬리박하의 향을 듬뿍 첨가한 케이크다.

흰꼬리박하는 박하 특유의 향이 무척 강해 호불호가 굉장히 갈리는 재료 중 하나였다.

이를 증명하듯 절반 이상 사라진 다른 디저트들에 비해, 이 케이크는 거의 양이 줄어들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미켈은 흰꼬리박하 귀신이지.'

그가 얼마나 이 디저트를 좋아하는지. 그리고 수도에서는 이것을 즐기는 이가 별로 없다는 사실을.

'으으으음. 정말 익숙해지기 어려운 맛이다.'

먹을수록 입이 화해지고, 상큼한 허브 향이 감돈다.

나이 든 사람은 좋아할지 모르겠으나, 아직 단맛을 좋아할 나이의 내가 즐길만한 디저트는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남다른 입맛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이 케이크가 세상 그 무엇보다 맛있다는 듯, 편안한 얼굴로 다음 접시까지 집어 들었다.

"하하!"

이윽고 미켈의 입에서 웃음이 터졌다. 그가 수염을 펄럭이며 껄껄 웃었다.

"이거, 이거. 내 자네 나이 또래에 이걸 잘 먹는 사람은 처음 보았네."

"그렇습니까?"

"보통은 두 번 다신 먹지 않지. 인상을 쓰며 뱉는 경우도 있고."

미켈은 자신과 같은 음식을 즐기는 내게 부쩍 호감을 느낀 듯했다.

그에게 말을 걸고 싶어 접근하는 귀족들조차 손짓으로 물리치고는, 내게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그래, 아까 회의 시작 전 모습은 잘 보았네. 카를로가 한 방 먹었더군."

"제가 뭘 했습니까?"

나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한 접시를 더 들어 입에 넣었다.

"카를로 영주님과는 회의장에 들어오기 전에 인사를 나눈 게 답니다."

"호오, 그러한가?"

미켈은 눈을 가늘게 뜬 채 나를 가늠하듯 살폈다. 나는 그 시선을 모르는 척 흘려넘겼다.

"아, 혹시 제가 좀 늦게 들어온 것 때문입니까? 근데 회의 시작 전에 들어왔으니 된 거 아니겠습니까."

"흐흠."

"수도로 오는 길이 초행이다 보니 좀 늦어졌습니다. 뭐, 그 정도는 다들 이해해주실 테고요."

이 또한 거짓말.

나는 회의 시작하기 한참 전에 입성했다. 물론 요나스 때문에 조금 지체되긴 했지만, 마지막에 입장할 정도는 아니었다.

진실은,

'황궁에서 숨바꼭질하기.'

안내하는 시종을 따돌린 뒤, 황궁 이곳저곳을 한참 쏘다녔다. 최대한 기척을 죽인 채.

그렇게 황궁 지리를 파악하는 데 시간을 알차게 써먹은 뒤 마지막에 입장했다. 원래 주인공은 젤 나중에 등장하는 법이니까.

그 와중에 카를로의 속까지 뒤집어 놓았으니 일석이조였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미켈이 찬찬히 수염을 쓰다듬었다.

달칵.

그의 손이 접시를 내려놓았다.

"방금 한 말, 진심인가?"

강렬한 안광이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왔다.

"정말 아무 의도 없이, 카를로와 동시에 의자에 앉은 거라고?"

눈이 소복하게 쌓인 설산 같이, 낮은 채도의 빛깔이 번득였다.

"게다가 자네, 황제 폐하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하더군."

인자하기만 했던 음성이 어느새 도사리듯 낮아졌다.

"그 행동은 독단인가? 아니면 디에고의 뜻인가."

그리고 태산과 같은 무게를 담아 나를 내리눌렀다.

"그런 태도가 정치적으로 어찌 해석될 수 있는지 모르는겐가?"

미켈이 나를 향해 압도적인 기운을 뿜어냈다. 어서 속내를 다 털어놓으라는 듯이.

일순간 나와 그를 제외한 모든 것이 정지한 것처럼 보였다. 그가 쏟아내는 기운이 나를 회의장으로부터 분리하고 있었다.

묵직해진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이걸 협박이라고 하는 건가.'

내 입꼬리는 비딱하게 호선을 그렸다.

"-!"

내 미소를 읽어낸 미켈의 뺨이 움찔 떨렸다. 내가 조금도 겁먹지 않은 것에 당황한 듯했다.

실제로, 나는 그가 전혀 두렵지 않았다. 그가 발산하는 기운은 레퀴엠에 비하면 새발의 피에 불과했다.

아, 아니다.

'조금은 곤란할지도.'

레퀴엠이 그의 기운에 반응하려고 드는 것은 좀 난감했다. 본능적으로 강자를 느끼고 대비하려고 하는 것이다.

'워, 워. 진정해.'

나는 레퀴엠을 얼른 달랬다.

과연 북부의 호랑이.

이 별칭은 그의 눈동자가 백호와 닮아서 붙여진 것만은 아니었다. 그의 검은 호랑이의 이빨만큼 날카롭기 때문이었다.

오베스트 기사단과 쌍벽을 이루는 검술. 느리고 묵직하지만, 한 방 한 방이 강력하다.

북부의 냉혹한 기후는 쉽게 생물의 에너지를 뺏는다. 따라서 그곳에서는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최대한의 효율을 뽑아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수드 기사단의 검술은 이런 방향으로 발달하게 되었다.

그 검술의 창시자이자, 가장 오래 북부를 지켜온 자가 코 앞에 있었다. 레퀴엠이 신나서 그르렁거릴만 했다.

'아니야, 그거 아니야.'

나는 재차 레퀴엠을 억눌렀다. 여기서 레퀴엠의 기운을 드러내서는 안 되었다.

'내가 기운 감추는 연습을 왜 했는데.'

다 이런 상황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아직은 이들에게 나의 발톱이 자라고 있다는 것을 드러낼 때가 아니었다.

조금 더 신중하게, 그리고 교묘하게. 충분히 날카로워질 만큼 갈고 닦은 후에. 그리고 적이 방심하고 있을 때, 단번에 그들의 목을 쳐야 했다.

'지금은, 아니야.'

나는 끝내 레퀴엠을 침묵시키는 데 성공했다.

"의도가 있다면,"

내 입술 새로 느른한 음성이 새어나왔다.

"뭐가 달라집니까?"

"뭐라고?"

"한 번 직접 판단해보시죠."

달칵.

들고 있던 접시를 내려놓은 뒤 미켈을 직시했다.

"내가 당신의 적인지, 아군인지."

미켈은 한참 동안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내 깊은 심중을 꿰뚫어 보려는 듯 길고 긴 관찰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의 주름진 낯에, 서서히 흥미롭다는 빛이 떠올랐다.

"...자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순간,

"회의 시작까지 1분 남았습니다. 모두 착석해주시기 바랍니다."

시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미켈을 향해 어깨를 으쓱했다.

"이만 들어가 봐야 겠군요."

"...."

"미켈 영주님도 같이 들어가시죠."

미켈은 하려던 말을 계속하는 대신,

"...그러세."

내 권유를 받아들였다.

"자네 말대로, 들어가는 게 좋겠군."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예전과는 다른 빛으로 일렁였다. 그것이 호감의 빛이 될지는 내 손에 달려 있었다.

Chapter 13. 타인의 논리를 무기로 삼는다. (2)

회의가 재개되었다. 몇 가지 소소한 안건에 대한 논의를 마치고, 어느새 마지막 안건에 이르렀다.

"그럼 다음 안건입니다."

보좌관의 선언에 영주들이 긴장한 낯을 보였다.

"다음 회기의 세금 납부에 관한 것입니다."

보좌관은 그런 분위기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듯, 사무적인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현재, 영지의 넓이에 비례하여 세금을 산정하고 있습니다. 1 헥타르당 1만 골드가 기준입니다. 이 안건에 대해 의견이 있다면 말씀해주십시오."

보좌관의 말이 끝나자마자 영주들은 서로 눈치만 살폈다.

세금.

각 영주가 매달 황실에 납부하는 돈이다. 이는 제국에서 작위를 내린 가문들이 황실에 보내는 충성의 증거이기도 했다.

"...."

영주들은 섣불리 의견을 말하지 못하고 슬금슬금 눈치만 살폈다.

지금껏 그들은 이 안건이 나올 때마다 매번 자연스럽게, 그리고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듯 동의하곤 했다.

다른 의견을 냈다가 자칫 황제의 분노를 살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거대한 회의장 안은 고요했다. 사람들이 데굴데굴 눈알 굴리는 소리를 제외하곤.

"이 세금은 제국의 안녕을 위해서 바치는 돈인바,"

중후하고 안정감 있는 목소리가 침묵을 깨뜨렸다.

"이를 납부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오."

카를로 수드 아르단테였다.

'얼씨구.'

나는 속으로 콧방귀를 크게 뀌었다. 아주, 아주 크게.

'제국의 안녕을 위해서는 당연하다고?'

이것이야말로 그가 던진 수준 높은 농담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제국을 집어삼킬 예정이신 양반이?'

입에 침도 안 바르고 잘도 저런 소리를 하고 있었다. 물론 아까 황제를 향해 아낌없는 아첨을 퍼부었던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또한 영지가 넓을수록 걷어 들이는 세금도 많다는 것은 당연한 바, 그로 인한 윤택한 생활을 즐기는 만큼 당연히 제국에 되갚아야지 않겠소."

카를로는 막힘없이 말을 술술 뱉어냈다. 아까 먹은 간식 중에 튀김이 있었나 의심될 지경이었다.

'속 편한 소리만 하고 있네.'

이 방식이 얼마나 불합리한 방식인지는 말하면 입 아픈 소리였다.

같은 1 헥타르라고 해도 영지마다 취할 수 있는 이익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수드 영지의 해안가 1헥타르는 몇백만 골드의 가치를 갖는다. 그곳에서만 나는 특산품인 푸른 진주 덕분이다.

푸른 진주는 특유의 화사한 빛깔과 남부 해안가에서만 채취된다는 특수성을 가졌다.

그래서 귀족들에게 몹시 선호되는 고가의 사치품이었다. 당연히 가격은 개당 몇만 골드를 가볍게 호가했다.

그에 비해서 오베스트 영지는....

'어휴. 골치야.'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진다.

오베스트 영지의 1헥타르에서 나오는 이익은 끽해야 몇만 골드. 그나마도 가장 이익이 많이 나오는 땅을 골라서 나오는 수치였다.

영지의 대부분은 척박한 산맥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나마도 몬스터들이 출몰하는 곳이다.

'그런 땅에 무슨 가치가 있다고.'

아마 카를로는 오베스트 영지 10헥타르를 준다고 해도 자기네 땅과 바꾸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똑같이 면적당 세금을 산정하는 게 말이 되냐.'

이 방식대로 산정한 금액은 우리 영지의 돈을 싹싹 긁어내야지 간신히 납부할 수 있다. 수드 영지는 바닷가 한 번 거닐고 오면 벌어들일 수 있는 금액이고.

"옳으신 말씀입니다."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로써 당연한 덕목이지요."

속이 부글부글 끓는 와중에, 옆에서 기름을 부어댔다.

이른바 친 아르단테파.

아르단테 가문에 줄을 선 저들은 수도에서 수드 영지의 특산품을 유통했다. 그 과정에서 막대한 부를 손에 넣었고, 수도의 신흥 귀족으로 급부상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카를로의 말에 동조하는 것은 당연했다.

'눈 뜨고 못 봐주겠네.'

나이 지긋한 중년들이 열렬히 눈을 반짝이며 카를로를 바라보는데, 그 꼴을 보고 있자니 속이 메스꺼워졌다.

"다른 분들은 어찌 생각하시는지?"

카를로가 여유 있는 모습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들 그의 시선이 닿자 칼이라도 겨눠진 것처럼 목을 움츠렸다. 지금 당장 그에 맞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만한 인물은 많지 않았다.

그 많지 않은 인물 중 하나인 미켈이,

"흐음."

길게 늘어뜨린 턱수염을 찬찬히 쓰다듬었다.

그가 뭐라고 말을 꺼낼 낌새를 보이자 다른 영주들이 덩달아 긴장해서 그를 바라보았다.

나는 비죽이 새어나오는 허탈한 웃음을 감추어야 했다.

'정확히 원작을 따라가는군.'

휴식 시간 전 진행된 안건도, 그리고 지금 진행되는 이 안건도.

모두 원작의 내용 그대로였다. 물론 원작에서는 2층 참관석에서 내려다보는 카인의 시점에서 진행된 내용이지만.

'잘 보고 있나?'

팔짱을 낀 채 슬쩍 시선을 들어올렸다. 내 자리에서는 맞은 편에 앉은 카인이 아주 잘 보였다.

그는 참관석 바깥쪽에 바짝 붙어 아래를 관망하고 있었다. 제 아버지의 모습에 몹시 감명받은 얼굴이었다.

'그래, 즐길 수 있을 때 즐겨둬라.'

저 잘생긴 얼굴이 일그러지는 모습을 또 보고 싶었다. 아까 그를 사정없이 깔아뭉개던 순간은 정말이지 짜릿했다.

그 즐거움을 위해서, 지금은 상황을 관망해야 할 때였다.

"요근래 설산의 기온이 점점 내려가고 있소. 그 탓인지 몬스터들이 민가를 침범하는 일이 늘어나고 있지."

마침내 미켈이 입을 열었다.

"더군다나 지금은 가을, 곧 겨울이 되면 더더욱 민심이 얼어붙을 것이오. 하여 이번 겨울을 어찌 지낼지도 고민이라오."

묵묵히 듣고 있던 베니퍼가 손을 들었다.

"확실히, 북부는 농사짓기 좋은 환경은 아니긴 하오. 그렇다면 동부에서 곡식을 좀 지원하는 건 어떻소?"

"말씀은 고맙소만,"

미켈이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미봉책일 뿐이외다. 나는 보다 근본적인 방안을 말하고 싶소."

"이를 테면?"

미켈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심중의 말을 내뱉었다.

"세금을 조금 줄였으면 하오."

문장은 짧았으나, 그의 발언이 가져온 여파는 그렇지 않았다.

"...."

미켈이 있는 곳부터 회의장 끝까지, 영주들 사이로 술렁임이 물결처럼 번졌다.

"물론, 이 말을 꺼내는 게 쉽진 않았소."

그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곤 말했다.

"하지만 이 문제는 비단 우리 영지에서만 겪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오."

미켈이 주변을 둘러보며 동의를 구하는 시선을 던졌다.

"각 영지의 존속, 그리고 발전을 위해 제안하는 바이오."

그의 말이 끝나자, 영주들은 흘끔흘끔 회의장 중앙을 바라보았다. 거기 앉아 있는 테오도어 황제의 안색을 살피기 위해서.

"흐음."

테오도어 황제는 턱을 괸 채 콧소리를 흘릴 뿐이었다. 도통 의중을 파악할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허나 나는 그의 붉은 눈동자에 스산한 빛이 스치는 것을 감지했다.

'마음에 들 리가 없겠지.'

제 수중에 들어오는 돈이 줄어드는데, 그것을 좋아할 군주는 없을 것이다.

미켈이 이를 모를 리는 없었다. 다만 위험을 무릅쓰고 저 발언을 해야 할 정도로, 사정이 좋지 않은 듯했다.

'원인은 따로 있는데.'

나는 내심 혀를 찼다.

북부의 기온이 점점 내려가는 것은 그곳에 곧 겨울의 검이 강림하기 때문이었다.

아리아.

그것이 세상을 얼음 속에 가두는 검의 이름이었다.

'뭐, 이걸 지금 말해 줄 필요는 없고.'

나는 스미는 미소를 감추며 앞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미켈이 깔아준 판을 잘 이용할 때였다.

테오도어 황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영주들은 슬금슬금 제 의견을 피력하기 시작했다.

"아니, 10년이 넘도록 유지되어온 이 방식을 이제 와서 바꾸자는 말이오?"

"미켈 영주께서도 오죽하면 말을 꺼내셨겠소? 말이 나와서 말이지만, 솔직히 우리 영지도 사정이 좋지만은 않소."

"애당초 이 방식보다 더 적절한 게 없었기에 지금껏 유지되온 것 아니겠소?"

사실 세금을 낮추자는 의견에 진심으로 반대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제 영지에서 굴릴 수 있는 돈이 늘어나는데 아니 그러할까.

하지만 속의 말을 솔직히 꺼낼 상황은 아니었다. 테오도어 황제가 그저 침묵하고 있을 뿐이지 귀를 닫아둔 건 아니므로.

이어지는 무의미한 설전에 쐐기를 박은 것은,

"이것 참, 애석하구려."

카를로의 침중한 목소리였다.

"다들 이 세금이 어찌 쓰이는지 잊으신 모양이오."

모든 영주들의 입이 일시에 다물렸다.

"제국의 부흥과 영화를 위해 내는 돈이 그리도 아까운 것이오?"

카를로가 회의장을 한 바퀴 둘러본 뒤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카를로, 제국을 위해서라면 세금이 얼마가 되건 간에 기쁜 마음으로 낼 수 있소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시선이 미켈을 향했다.

"사실 나는 이런 논의조차 불필요하다고 생각하오. 이 세금의 의미를 생각한다면 말이오."

중후한 목소리와 위엄 있는 말투, 그리고 듣는 이의 심금을 울리는 말까지.

카를로의 웅변은 그야말로 완벽했다. 그 누구도 그에게 반박할 수 없을 듯했다.

일순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던 회의장은,

"나도... 동의하오. 현안을 유지하는 게 좋을 것 같소."

"아까도 말했지만, 이 방식이 꾸준히 유지된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 아니겠소?"

서서히 터져나오는 동조의 의견으로 물들었다.

"...."

미켈 영주는 여전히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주름진 눈가에 회한과 분노가 스치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다들 생각이 비슷한 것 같소만."

카를로가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말했다.

"베니퍼 영주의 생각은 어떠신지?"

그는 이제 질문의 화살을 4대 영주들에게 돌리기 시작했다. 쐐기를 아예 망치로 내려치기 위한 작업이었다.

"노드 영지의 어려움을 모른 체 할 수는 없다는 게, 내 생각이오."

베니퍼의 대답에 카를로와 미켈의 눈썹이 슥 올라갔다. 그녀의 말이 의외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속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속지 마, 쌍년이야.'

이윽고 베니퍼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카를로 영주가 말씀하신 대로, 이 세금의 의미를 생각하면 거기 손을 대는 것도 불가하다 보오."

"방식은 유지하되, 북부에는 다른 종류의 지원을 하는 건 어떻겠소."

미켈의 안색이 흐려졌다.

카를로가 그럼 그렇지, 라고 말하는 듯이 웃었다.

"대충 결정이 된 것 같은데...."

말꼬리를 길게 늘이던 그의 시선이 내게 멈추었다. 그는 잠시 입가를 꿈틀했으나,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벨... 공자의 생각은 어떻소?"

영주라는 표현을 쓸 수 없어 대처된 호칭이었다.

"글쎄요."

나는 두 손을 깍지 끼고 책상 위에 올렸다. 그 위에 턱을 얹은 채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드디어 기회가 왔군.'

속내와는 다르게, 순진무구한 얼굴로 되물었다.

"솔직히 말해도 됩니까?"

"오, 물론이오. 누구나 이 자리에선 자신의 의견을 솔직히 말할 수 있지."

카를로가 두 손을 펼쳤다.

"그게 영주가 아닌, 대리인이라도 해도 말일세."

그의 두 눈이 음험하게 번쩍였다. 어디, 뭐라고 말할지 들어보겠다는 심산이 엿보였다.

"그것을 위해 모인 자리가 아닌가? 복잡하게 생각 말고 말해보게."

그 옆에서 미켈이 나를 보고 느릿하게 고개를 젓고 있었다.

'하지 말게.'

라고 말하는 눈빛이었다.

물론, 나는 카를로의 저 말이 진짜라고 믿는 멍청이가 아니었다.

살면서 자기 생각을 그대로 다 말하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다들 주변 상황을 봐 가며 속내를 감추고, 그럴싸하게 포장하며 살곤 했다.

하지만, 그 멍청한 짓을 자행할 수 있는 인간이 여기 있었다.

"저는 현재 방식이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나.

Chapter 13. 타인의 논리를 무기로 삼는다. (3)

말을 마친 나는 보란 듯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

카를로의 입가에 기회를 잡았다는 듯한 미소가 스치고,

"...쯧."

미켈이 미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회의장 안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사람들이 모두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이윽고 그들의 시선이 서로 교차했다.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당신도 들었소?'

그들은 제 청력을 의심하는 표정으로 멍하니 눈만 깜박였다.

"지금, 뭐라고 했나?"

적막을 깨뜨린 것은 얼굴이 굳어진 황제였다. 꾹 다물렸던 입이 드디어 열린 것이다.

"현재 방식이 부당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나는 그의 분노를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천진난만하게 대답했다.

테오도어 황제는 잠시 말이 없었다. 설마 이 자리에서 저런 말을 들을 거라곤 생각지 못한 것 같았다.

그가 시종에게 손짓하자, 시종이 냉큼 물을 가져다 바쳤다. 그는 잠시 화를 삭이려는 듯 말없이 냉수만 들이켰다.

그런 황제를 대신해 나선 것은,

"아벨 공자."

마찬가지로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카를로였다.

"지금 무슨 말을 한 건지 알고 있는 것이오?"

"물론입니다."

내 뻔뻔한 대꾸에 그가 헛웃음을 지었다.

"지금 공자는 귀족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말을 하고 있소."

"제가요?"

"그래. 우리가 어찌 귀족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오?"

카를로는 철없는 소년을 가르치듯 훈계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황제 폐하께서 영토를 내리고, 그에 맞는 직위를 내리지. 우린 그 대가로 세금을 내는 것이고."

"...."

"이게 부당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네가 귀족으로써 누려온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네."

그가 고개를 좌우로 젓더니 물었다.

"공자는 혹시 노블리스 오블리주, 라는 말을 모르는가?"

노블레스 오블리주.

부와 권력은 그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수반한다는 말. 즉, 귀족이 마땅히 져야 하는 의무를 뜻했다.

"그걸 누가 모르겠습니까."

"헌데도 그런 말을 하는가? 자네가 아까 한 말은, 몹시 위험한 발언일세."

그는 내게 반역을 생각하는 거냐고 넌지시 돌려 말하고 있었다. 그것도 황제를 비롯한 다른 영주들이 듣고 있는 와중에.

'하, 여우 같은 영감탱이.'

정치판에서 오래 구른 티는 내는군. 교활하기가 아주 여우 뺨을 왕복으로 휘갈긴다.

"아벨 공자."

카를로가 나를 너무 몰아붙이는 게 안쓰러웠는지 미켈이 나섰다.

"나 또한 이 방식에 아쉬운 면은 있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은가."

어린 소년을 달래듯 인자한 말투였다. 그 속에는 카를로의 뻔한 술수에 걸려든 나에 대한 동정심도 담겨 있었다.

"그러니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네."

그가 카를로를 보며 한 마디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카를로 영주께선 아벨 공자의 뜻을 곡해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려."

카를로는 대답하는 대신 어깨만 으쓱였다.

"물론 오베스트 영지의 사정이 어렵다는 것은 알고 있소."

질세라 베니퍼가 나섰다. 그녀는 친절해 보이는 미소를 걸친 채 말했다.

"하지만 이건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의 의무요. 피할 수 없는."

그녀의 눈동자에 제국을 향한, 아니 황제를 향한 열기가 일렁였다.

"이 세금을 내야지만 제국이 원활히 돌아가고, 그래야지만 결국 오베스트 영지의 영지민들도 잘 살 수 있는 것이오."

말, 말, 말.

나를 생각하는 듯, 충고한다는 듯이 건네지는 말들.

하지만 그 저변에는 결국 숙이고 기득권의 말을 따르라는 강압이 숨어 있었다.

"그러시군요."

나는 그런 그들을 향해 화사하게 웃어보였다.

"그리 말씀하시니 제 생각에 더욱 확신이 가는데요."

주변을 둘러보며 조소를 날렸다.

"현재 세금 산정 방식이 부당하다는 생각 말입니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카를로 영주가 언성을 높이려는 순간,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내 입술이 매끄러운 미소를 그렸다.

"세금 산정 방식을 비율제로 바꾸는 것이요."

회의장 안이 다시 얼어붙었다. 서로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엔 아까와는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의미가 담겨 있었다.

'당신도 들었소? 비율제라 한 거?'

'비율제가 무엇이오?'

그들은 내가 한 말을 곧바로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다.

그러나.

"...."

카를로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낯에 당혹과 경계가 함께 스쳤다.

'오, 바로 이해했나 보군.'

역시 제국을 집어삼킬 야망이 있는 자는 다르긴 다르다. 그럼 이제 내가 뭘 하려는 지도 짐작하겠지.

"비, 비율제라니? 그게 무슨 말이오?"

영주 중 누군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물었다.

"말 그대롭니다."

나는 회의장 전체에 또렷하게 전달되도록 목소리를 키웠다.

"각 영지의 수입에서 지출을 제외한 순수익. 거기서 일정 비율을 세금으로 내는 겁니다."

거기에 웃음기를 곁들여 덧붙였다.

"비율은... 그래, 10% 정도가 어떨까요?"

쿵.

실제로 들려온 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회의장은 마치 거대한 바위가 낙하한 듯한 분위기가 되었다.

사람들은 아무도 내 말에 대꾸하지 못했다. 그저 입술을 달싹이며 내가 한 말을 해석하려고 애쓸 뿐.

"그러니까, 아벨 공자의 말은."

카를로의 목소리가 무겁게 바닥으로 깔렸다.

"현재 방식이 부당하므로, 비율제로 바꾸자 이 말이오?"

"그렇습니다만."

"왜 굳이?"

카를로가 팔짱을 끼곤 고개를 기울였다.

"영주의 대다수가 찬성하는 방식을 두고, 그런 비효율적인 방식으로 바꿔야 하는지 모르겠구려."

"비효율적이라."

나는 재미있는 말을 들었다는 듯이 웃었다.

"글쎄요. 저는 이 방식이 오히려 세금을 더욱 효율적으로 걷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런 독,특,한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몹시 궁금해지는구려."

카를로는 숫제 나를 물어뜯고 싶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특히 독특한이라는 단어에 들어간 강세는 어떻게든 내 의견을 깔아뭉게려는 의도가 엿보였다.

'그렇게 말하면 누가 쫄 줄 알고?'

나는 태연자약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야 당연히 각 영지마다 환경도, 상황도 다르기 때문이죠."

침착한 음성이 논리를 담고 흘러나온다.

"영지의 순수익이 많다면 세금을 많이 내고, 적다면 적게 내면 됩니다."

"...."

"그게 바로 합리적으로, 각 영지의 형평성에 맞게 세금을 내는 방식이지요."

"지금 공자의 말은...."

곧바로 반격하려드는 카를로의 말을 자르고,

"그리고 바로 이 방식이,"

나는 도장을 찍듯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진정으로 제국을 위하는 길인 것입니다."

뜻밖의 발언에 영주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진정으로 제국을 위한 길?"

"그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요?"

"그냥 겉만 그럴싸하게 포장한 것 같은데."

논란이 이는 와중에 베니퍼가 손을 들어 올렸다.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을 들었으면 하오."

그렇게 묻는 그녀의 얼굴엔 노골적인 흥미가 흐르고 있었다.

"수입과 지출, 에 대해서."

다 알면서도 능구렁이처럼 굴긴.

하지만 필요했던 설명이기도 했기에, 나는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먼저 수입은 다들 아시는 대로, 각 영지에서 발생하는 수익입니다."

영주들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내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조세를 비롯해, 영주가 전권을 가지고 다른 영지에 물품을 판매하여 거둔 수익을 포함합니다."

말이 끝나는 순간 카를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나는 그것을 못 본 척 말을 이었다.

"그리고 지출은 반대의 의미겠지요? 영지의 운영을 위해 사용된 금액입니다."

"영지의 운영이라...."

베니퍼가 새빨간 미소를 피워올렸다.

"그 말이 핵심인 것 같은데, 맞소?"

"그렇습니다."

나는 그녀를 향해 마주 웃어보였다. 베니퍼 못지않게 시커멓고 음흉한 미소였다.

"여기엔 영지 내 치안 문제, 농업 발전을 위한 기술 개발 등등이 포함되죠. 그리고...."

느릿하게 말끝을 끌다가 마무리지었다.

"국경을 지키는 데 들어간 비용도 들어갑니다."

"그 무슨!"

카를로가 노발대발해서 벌떡 일어났다.

"공자야말로 형평성에 치우친 소리를 하고 있군! 순전히 본인 영지만을 위한 논리 아니오?"

"오베스트 영지만이 국경에 맞닿아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나는 카를로의 말에 조금도 끄떡없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리고, 그게 왜 형평성에 치우친단 말입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는 몸을 일으켰다. 회의장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향해 두 팔을 펼쳤다.

"생각해보십시오. 수많은 기사들이 목숨 걸고 국경에 나가 싸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내 질문에 얼이 빠진 표정을 지었다.

"이 제국의 태양이자 등불인 황제 폐하를 위해. 그리고 그 황제 폐하의 백성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말을 마치고는 카를로를 직시했다.

"그런데도 이게 어째서 우리 영지만을 위한 논리입니까?"

청보랏빛 눈동자를 번득이며 일침을 가했다.

"혹시 제 영지만을 위해 일하는 기사단이 있는 겁니까? 그것 참, 애,석,한 일이로군요."

카를로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곤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자신의 말을 그대로 돌려주자 이마에 퍼런 힘줄이 돋아나기까지 했다.

'그러니까 나서긴 왜 나서가지고.'

그렇게 카를로를 침묵시킨 뒤, 나는 회의장의 모두를 향해 물었다.

"더 궁금한 점 있으십니까?"

더 이상 올라가는 손은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내가 한 말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사람들의 눈에 만감이 교차했다.

"...."

테오도어 황제가 입가를 쓰다듬었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 탐욕스런 빛이 넘실넘실 떠올랐다.

'아주 입꼬리가 들썩거려서 죽겠나 보네.'

그라면 이 방식이, 결국 제게 거대한 이익을 가져다 준다는 것을 곧바로 이해했을 것이다.

"...어머나."

베니퍼가 턱을 괴며 빙그레 웃었다. 그녀의 새빨간 손톱이 주판을 두드리듯 뺨을 톡톡 쳤다.

그녀 또한 손익 계산이 빠른 사람이라, 자신이 내야 할 세금이 더 늘어날 거라는 것을 알 것이다.

'그래서 더 좋겠지.'

테오도어 황제에게 합법적으로 제 영지의 돈을 보낼 수 있는 기회니까.

"...허어, 이것 참."

미켈이 허탈한 한숨과 함께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는 완전히 허를 찔린 듯 눈매가 느슨하게 풀어진 상태였다.

'이제야 이해했나 보군.'

이 방식이라면 내야 할 세금이 훨씬 줄어든다는 것을.

이윽고 미켈이 놀랍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완전히 내게 감탄한 눈치였다.

한편으론 영지에 대한 걱정이 줄어든 듯 안도한 기색이기도 했다.

"...."

카를로가 찌를 듯이 날카로운 시선을 내게 보냈다. 아니, 그의 손에 칼이 들려 있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나를 찌를 기세였다.

'어때, 한 방 먹었지?'

나는 그를 향해 보란 듯이 웃었다. 그리고 느릿하게 입술을 핥았다.

노골적인 비웃음이었다.

"-!"

카를로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저런, 벌써 그렇게 흥분하면 곤란한데.'

아직 그가 넘어야 할 산은 많으니까 말이다.

나는 침통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혹시, 마그나 모르텐을 아십니까."

사람들의 시선이 서글픔을 머금은 내 얼굴에 집중되었다.

Chapter 13. 타인의 논리를 무기로 삼는다. (4)

'반드시, 무슨 일이 있어도 통과시켜야 해.'

겉보기엔 여유로웠지만, 나는 내심 의욕을 활활 불태우고 있었다.

지금껏 황실에 낸 세금이 오베스트 영지에 굉장한 부담이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저번 트롤 사건 이후로 계속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어.'

원작에서 레퀴엠에 너무나 쉽게 무너진 것도, 이때의 피해를 다 회복하지 못해서였다.

그 와중에 세금 압박까지 들어오면 어쩔 수 없이 다른 곳에서 예산을 줄여야 할 것이다.

'디에고 그 양반이 군비는 절대 안 아끼는데.'

갑옷이나 무기, 혹은 기사단의 봉급을 줄일 순 없을 테니까. 자연스레 영지의 힘이 약해지고 최악의 경우엔 파산까지 이를 수 있다.

'오늘 해결 못 하면 망한다.'

내가 오베스트 영지를 사랑해서 이러냐고? 오, 천만에.

나는 그저 내 마음대로 자유롭게 움직이고 싶을 뿐이다. 그러기 위해선 등 뒤의 오베스트 영지가 굳건히 버티고 있어 줘야 하고.

'킨드리얼 가문이 사라져선 안 된다고.'

이 세계에서 가문의 이름, 귀족의 작위가 갖는 힘은 몹시 중요하다. 나는 이것을 손에서 놓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자, 슬슬 마무리를 지어볼까.'

슬쩍 주변 분위기를 살폈다. 사람들은 내 처연한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하, 연기력 오졌다.'

이 세계에 연기대상이 있다면 우승은 내 차지일 게 분명했다.

이 안건의 종지부를 찍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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