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이면 디에고가 다시 국경으로 돌아간다. 하인에게 이야기를 듣고는 나에 대한 별다른 의심을 품지 않은 채.
'일단은 얌전히 있어야겠군.'
그가 국경에 도착할 즈음이면, 나는 이 성에 없을 것이다.
'마그나 모르텐으로 가야겠어.'
❖ ❖ ❖
이튿날.
"후우."
거울을 향해 한숨을 뱉었다.
'좋은 컨디션을 유지해야 하는데.'
되도록 일찍 잠자리에 들었고, 몸에 무리가 가지 않을 정도로 훈련하고, 영양 가득한 식사로 회복에 전념했다.
하지만,
'무슨 놈의 악몽이....'
레퀴엠이 내 예상보다 일찍 나타나서, 그곳에 있던 영지민이 쥐고, 그로 인해 영지가 쑥대밭이 되는 꿈.
혹은 최초로 레퀴엠을 쥐는 데 성공했지만, 그것을 제어하는 데 실패해서 살인귀가 되고 마는 꿈.
꿈의 결말은 항상 원작과 같았다.
'카인에게 심장을 찔려 죽었지.'
차갑게 식어가는 육신, 서서히 흐려지는 시야. 마지막 기억은 바닥에 쓰러진 나를 등지고 선 카인의 뒷모습이었다.
"젠장."
신경질적으로 설렁줄을 흔들어 필립을 호출했다.
"부르셨습니까, 도련님."
"외출할 거다, 도시락이 필요해."
잠시 턱을 톡톡 두드리다가 덧붙였다.
"3일분 정도."
"예? 3일이요?"
필립의 얼굴이 복잡미묘해졌다. 내가 오래 외유를 나간다니 기쁘다가도, 내가 나가서 뭘 할지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기도 할 터였다.
"양은 3인분 정도. 육류를 아낌없이 쓰고 보존이 잘 되는 것으로 준비해."
"알겠습니다."
필립은 내 명령에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즉시 따랐다. 그 사이 나는 알레시아가 만들어 준 건틀릿을 챙겼다.
잠시 시간이 흐르자,
"도련님. 준비가 끝났습니다."
필립이 도시락 꾸러미와 함께 방으로 돌아왔다. 그것을 챙기는 대신 말했다.
"그거 들고 따라와."
필립은 몸을 움찔했으나 이내 빠르게 채비를 마쳤다. 그와 함께 향한 곳은 당연히,
"마, 마그나 모르텐?"
마차에서 내린 필립이 경악했다.
"도련님, 여긴 왜...."
그는 나와 마그나 모르텐의 탑을 번갈아 보며 오들오들 떨었다.
"저는 또 왜 데려오셨는지...."
나는 말 없이 관문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자 필립은 허둥지둥 내 뒤를 따랐다.
저 멀리서부터 관문의 관리인들이 보였다. 최근 들어 자주 왔었기에 예전만큼 뜨악한 표정을 짓고 있진 않았다.
"아벨 도련님."
"어서 오십시오."
그들은 내게 허리를 숙였다가 내 뒤에 서 있는 필립을 발견했다.
"집사님은 여기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두 분이 같이 오신 겁니까?"
그들의 얼굴에 뒤늦게 의문이 떠올랐다.
"...."
필립은 그저 고개를 낮게 저었다.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는 표현이었다.
나는 앞에 나서서 물었다.
"지금 마그나 모르텐에 방문한 이가 몇이나 되지?"
"정확하진 않습니다만... 약 8명 정도 됩니다."
"그래?"
고개를 끄덕인 뒤 당당히 명령했다.
"다 나오라고 해."
"예?"
"5분 주지."
품에 늘 가지고 있던 회중시계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우아하기 짝이 없는 말투로 말했다.
"그 후에 남아 있는 놈은, 여기 영원히 있고 싶다는 뜻으로 이해하겠어."
여기 남아 있다면 필히 레퀴엠의 먹이가 될 테니까.
진실을 기반으로 한 예언과 다름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관리인들은 내 말을 다르게 이해했다.
"아니, 그...."
"갑자기 무슨...."
손수 죽여 여기 묻어 주겠다는 협박으로.
관리인들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그들은 내 눈동자에 번들거리는 광기를 보고 이게 결코 농담이 아님을 깨달은 듯했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다들 헐레벌떡 마그나 모르텐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멀어져 가는 그들을 바라보다 중얼거렸다.
"시간을 너무 많이 줬나."
"설마 5분을 다 쓰겠습니까? 아마 그 안에 다 처리될 겁니다."
필립이 필사적으로 나를 달랬다.
"그러는 넌 왜 여기 있어?"
"예?"
잠시 멍청한 얼굴을 하던 필립은 이내 무언가를 깨달은 듯 아, 소리를 흘렸다.
"저, 저도 가겠습니다!"
그렇게 부리나케 사라지는 필립의 뒷모습과 일별했다. 옆의 나무에 기댄 채 발로 땅을 툭툭 차며 시간을 보냈다.
이윽고 조문객들이 마그나 모르텐에서 우르르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그만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최대한 빨리 나가주세요."
뒤에선 관리인과 필립이 혼신의 힘을 다해 사람들을 밀어내고 있었다. 조문객들은 제각기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아우성을 쳤다.
"아니, 갑자기 웬...."
"이렇게 사람을 나가라...."
하지만 그 수군거림은 관문 앞에 서 있는 나를 보자 일제히 사그라들었다.
"...."
다들 모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침묵의 미덕을 잘 아는 것처럼 행동했다.
모든 조문객들은 조용히 다리를 건너왔다. 그리고 관문에 도착하자마자,
"그럼 이만."
"안녕히 계세요."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넨 뒤 재빠르게 사라졌다. 간신히 살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지는 다람쥐 같은 꼴들이었다.
"도련님, 이제 안에 남은 사람은 없습니다."
관리인이 이마를 훔치며 내게 다가왔다. 나는 들고 있던 회중시계를 품에 넣었다.
"운이 좋았군. 딱 5분 걸렸네."
관리인 둘이 서로 바라보며 십 년 감수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 내가 저 안으로 들어갈 차례였다. 그리고 그 전에, 이들에게 시킬 일이 있었다.
"너희들이 해줄 일이 있다."
내 말을 들은 관리인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내가 나오기 전까지, 아무도 들이지 마."
"...예."
"알겠습니다."
"명심해. 내가 나오기 전까지야."
내가 힘주어 덧붙이자, 관리인 중 한 명이 의문스런 표정을 지었다.
"도련님, 혹시... 언제까지 계실 생각이십니까?"
"나도 몰라."
"예?"
관리인이 입을 뻐끔거렸지만 달리 해줄 말이 없었다.
일단 내가 아는 레퀴엠이 나타나는 날은 내일이다. 하지만 만에 하나, 정말로 만약이지만 이보다 더 앞당겨질 수도 있다.
'가령 오늘 저녁이라든가.'
그리고 정확히 내일 나타난다고 해도, 내가 하루 만에 레퀴엠을 완벽히 종속시키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른다.
즉, 나는 정말로 언제까지 있어야 할지 모른다.
나는 손을 내저었다.
"그럼 이만 가 봐."
"...예, 도련님."
"그리고 필립은 아까 준비하라고 시킨 거 있지? 그거 들고 따라와."
"예."
관리인들이 관문으로 돌아가고, 나는 필립과 함께 마그나 모르텐으로 향했다.
"여기다 내려놔."
나는 이미 봐 두었던 자리, 즉 탑 앞에 도시락을 내려놓게 했다. 필립이 주춤주춤 걸어와 짐을 내려놓았다.
"도, 도련님."
"왜."
"그게...."
그는 내가 이곳에서 감히 무슨 짓을 할지 짐작조차 못 하는 얼굴이었다. 아니, 짐작은 가는데 차마 입 밖에 낼 순 없다든가.
그가 아는 아벨이 마그나 모르텐에서 혼자 할 일이라곤....
'고인에게 무슨 못된 짓을 하나 싶겠지. 그것도 끼니마다 도시락까지 잘 챙겨 먹어가면서.'
물론 틀린 예상이지만.
그 탓에 필립의 얼굴은 참담했다.
"...아니,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는 앞선 내 경고를 뼈저리게 기억하고 있었다. 군말 없이 내게 복종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럼 전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아마 속으론 디에고가 돌아오기 전까진 그래도 아벨이 나오겠거니,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필립이 떠나자, 마그나 모르텐 안에 쌀쌀한 고요함이 감돌았다.
"어쩐지 으스스하군."
나는 괜스레 소름이 돋는 팔뚝을 문질렀다. 하긴 이곳에 산 자라곤 나밖에 없으니 당연했다.
"이 정도에 겁먹을 순 없지."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았다. 하늘을 찌를 듯이 높게 치솟은 탑을 노려보았다.
"얼른 와라, 레퀴엠."
이 아래 나타날 그것을 기다리며.
Chapter 3. 여유로운 척 배짱을 부린다. (1)
"으으."
아침에 일어나자 온몸이 찌뿌드드했다.
'몸이 사치스러움에 익숙해졌군.'
요 며칠간 푹신하고 고급스럽기 짝이 없는 침대에서 자다가, 딱딱한 바닥에서 자려니 죽을 맛이었다.
"흐아암."
어제 저녁, 나는 탑 앞에 기대어 앉아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레퀴엠은 정확히 해가 능선을 넘어가는 순간, 즉 일몰에 나타난다. 또한 예고 없이 비가 쏟아짐으로써 징후를 드러낸다.
어제 날씨는 맑고 쾌청했다. 해가 저물 때까지도.
덕분에 나는 일찍이 마음 놓고 저녁을 먹은 뒤, 느긋하게 잠을 청했다.
"결국 예정대로 오늘 나타날 모양이군."
몽롱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는 마그나 모르텐엔 오로지 비석 외엔 보이지 않았다. 그 황량한 풍경이 이제 더는 무섭지 않았다.
'두려움이라는 건 무엇이 나타날지 모를 때 생기는 감정이니까.'
정확히 언제 무엇이 나타날지 아는 지금, 내 마음은 그저 평온했다.
"밥이나 먹자."
나는 미적미적 일어나 도시락을 열었다. 정확히 주문을 한 덕분에 내용물이 꽤 풍성했다.
"이 도시락이라도 없었으면 정말 지루했을 거야."
나는 절인 닭고기를 우적우적 씹으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식사를 푸짐하게 챙겨온 것은 단순히 미각적 즐거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배를 꽉 채워 둬야지."
레퀴엠을 쥐게 된 자는 가히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허기를 느끼게 된다고 묘사되어 있다.
그것을 대비해, 나는 레퀴엠을 쥐기 전에 육체와 정신 모두를 만반의 상태로 만들어 둘 계획이었다.
그래서 꾸역꾸역 3일치 식량까지 꺼내어 먹었다.
"으윽. 맛없어."
보존이 잘 되는 것으로 준비하라고 했더니, 너무 기능에만 충실한 육포를 넣어 놨군.
"너무 잘 말려서 1년이 지나도 안 썩겠네."
그렇게 욕설을 뇌까리며 끝끝내 남은 식량까지 모조리 삼켰다.
탕.
텅 빈 도시락 통을 던진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건틀릿은 잘 준비되어 있고."
다시 한번 상황을 점검했다. 그리고 바닥에 주저앉아 차분히 저녁이 되길 기다렸다.
지루하면서도 긴장되는, 시간이 흐르지 않았으면 하면서도 한편으론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상반된 감정이 오간다.
"...."
눈을 감은 채 마음을 다스리며 여전히 나를 괴롭히는 충동을 물리쳤다.
이젠 쉬워진 그 일을 마무리하는 것과 동시에, 의문이 찾아든다.
'할 수 있을까.'
죽음의 검, 레퀴엠.
쥐는 순간 나를 잊고, 세상을 잊게 만든다는 그 강력한 마검(魔劍)을 과연 이겨낼 수 있을까.
'아니, 해야만 해.'
지금 와서 할 수 있을지 없을지 고민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실패한 후의 미래를 상상하는 것 또한 불필요하다.
'실패하면 어차피 죽음뿐이야.'
부질없이 흩어지려던 마음이 단단히 굳어졌다. 동요하던 심장이 잠잠해졌다.
"...."
나는 귓가를 스치는 빗소리를 느끼며 눈을 떴다. 서서히 해가 능선을 향해 기울고 있었다.
"정말 비가 오는구나."
그 무엇보다도 확실한 전조.
하늘이 검게 물들고, 생명의 상징인 태양이 자취를 감추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후우."
건틀릿을 낀 주먹을 꾹 쥐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 외에는 아무도 없는 게 분명한 이곳에서, 기묘한 속삭임 같은 것이 귀를 간질였다.
[엄마, 엄마아아.]
[아악, 내 팔. 내 팔이!]
[이렇게 죽고 싶지 않아....]
이곳에 묻힌 망자들이 내뱉는 최후의 단말마. 그 한이 레퀴엠을 이곳으로 불러내고 있었다.
이것은 레퀴엠이 강림하기 직전 나타나는 두 번째 징후였다. 뼈를 긁어내는 듯한 불쾌함, 살갗을 얼어붙게 만드는 오한이 치밀었다.
"...."
나는 부르르 떨려오는 턱에 힘을 주었다. 두 발을 넓게 딛고, 어깨를 쫙 편 채 정면을 바라보았다.
'시야가 어두워.'
단순히 해가 저물어서 벌어지는 현상이 아니었다. 실제로 마그나 모르텐 내부에 꺼림칙한 느낌의 어두운 기운이 가득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 기운에 집중했다. 새카만 안개 같았던 그것이 서서히 한곳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온다.'
바로 내가 서 있는 곳, 탑 앞으로.
잔잔한 바람 같았던 흐름이 서서히 돌개바람처럼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휘이잉.
스산한 소리가 점점 강해졌다. 검은 기운이 모이고 모여들어 태풍처럼 휘몰아쳤다.
"이런."
머리카락이 정신없이 휘날리고, 옷자락이 마구 나부꼈다.
한쪽 팔을 들어 올려 시야를 확보했다. 탑 앞의 검은 기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
어느새 회오리 속에 이질적인 형상이 떠오르고 있었다. 검은 기운을 모조리 빨아들이며, 무언가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맙소사.'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한 점의 빛도 반사하지 않을 것 같은 새카만 빛깔.
저토록 지독하게 검은 빛깔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게 놀라울 지경이었다. 심연 속 암흑을 검으로 빚어내면 저러할까.
잘 빠진 기다란 블레이드 위엔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자들이 일렁였다. 그 아래 회오리 같이 휘감는 듯한 가드가 그립의 상단을 감쌌다.
"하...."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나는 그 자리에 멈추어 서서 홀린 듯이 레퀴엠을 바라보았다.
레퀴엠은 그야말로 완벽했다. 저보다 아름다운 것, 혹은 어두운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느껴졌다.
과연 전설 속의 검다운 존재감이었다.
검에 문외한인 사람이 보아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저것이 천문학적인, 아니 돈으로 셀 수 없는 가치를 지녔다는 것을.
"저게, 레퀴엠."
내 중얼거림에 응답하듯 레퀴엠에서 기묘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그것은 분명 인간의 언어는 아니었다. 하지만 분명하고도 확고한 뜻을 담고 있었다.
이리 와서 자신을 손에 쥐라는. 나를 끌어당기는 듯한 속삭임.
"...그래. 기꺼이 쥐어 주지."
나는 천천히 눈을 감으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두방망이질치던 심장을 진정시키고, 혼란스럽던 머릿속을 깨끗이 비웠다.
상념이 많을수록, 탐욕이 클수록, 미련이 많을수록 레퀴엠에 조종당하기 쉽다.
깨끗하고 명징한 마음, 흔들림 없이 올곧은 심상만 남겨 두어야 했다.
"..."
잠시 후, 나는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차갑게 가라앉아 푸른 빛을 띠는 눈동자로 앞을 응시했다.
레퀴엠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나를 부르고 있었다.
"간다."
나는 짓씹듯이 중얼거린 뒤 손을 뻗었다. 알레시아가 만들어 준 건틀릿을 낀 채, 레퀴엠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윽!"
새카만 기운이 나를 덮쳤다. 짐승의 입속으로 집어 삼켜지는 듯한 감각.
레퀴엠의 기운이 넘실거리며 내게 밀려든 순간,
팡!
건틀릿에서 일어난 초록색 기운과 충돌을 일으켰다.
'효과가 있다!'
레퀴엠은 시커먼 이빨을 드러내며 나를 잡아먹으려 들었다. 하지만 건틀릿의 기운이 일차적으로 날 보호해 주었다.
나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군.'
하지만 건틀릿의 보호는 일시적인 것에 불과했다. 결국 나 스스로의 의지로 레퀴엠의 속삭임을 이겨내야 할 순간이 올 것이다.
격렬한 힘겨루기는 예상대로 레퀴엠의 승리로 끝났다.
'온다!'
끈덕지게 밀려들던 레퀴엠의 기운이 건틀릿을 넘어섰다. 나는 덮쳐 올 재앙을 각오하며 이를 악물었다.
"...?"
다음 순간, 나는 아무것도 없는 새카만 공간에 서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손에 쥐고 있던 레퀴엠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뒤였다. 나는 당혹스러운 심경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긴 대체....'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그 직후 엄청난 허기가 치밀어 올랐기 때문이다.
"크윽!"
원작에서 묘사하던 바로 그 감각. 배를 쥐어짜는 듯한, 날카로운 것으로 위장을 긁어내는 듯한 고통.
평소에 끼니를 걸렀을 때 느끼던 허기와는 달랐다. 아니, 아예 궤를 달리하는 수준이었다.
'공허의, 소용돌이.'
레퀴엠의 이명 중 하나가 떠올랐다. 그것은 정말이지 실제보다 너무나 축소된 표현이었다.
깊이를 모를 공허. 그 끝을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아득함.
레퀴엠을 쥔다는 것은, 평생토록 이 감각과 함께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결코 채워지지 않을 목마름과 허기를 느끼며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였다.
"으으윽."
나는 쓰러진 채 손으로 바닥을 박박 긁었다.
차라리 죽고만 싶었다. 평범한 인간은 결코 이 감각을 유지한 채 살아갈 수 없으리라.
그때였다. 온통 어두웠던 주변에서 다른 존재가 느껴진 것은.
'저건!'
나는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들었다.
보이지 않는데도 보였다. 아니, 느껴졌다.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인간. 힘차게 맥동하는 심장을 가지고, 붉은 피가 흐르는 생명이.
'배고파.'
너무너무 배가 고팠다. 당장 저 인간의 가슴을 가르고, 그 속에서 펄떡대는 새빨간 심장을 먹고 싶었다.
"죽인다."
부지불식간에 입에서 뇌까림이 튀어나왔다.
나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움직여 저 멀리 있는 인간에게 조금씩 다가갔다.
"...."
감각이 확장된다. 멀었던 귀가 열리고, 어두웠던 시야가 밝아지고, 먹먹했던 코가 뻥 뚫린다.
'조금만 더.'
걸음을 옮길수록 내 주변에 가득한 생명을 더욱 많이 느낄 수 있었다. 아니, 이 영지에 있는 모든 인간의 존재가 느껴졌다.
"하하."
어느새 나는 핏빛 가득한 미소를 베어 물고 있었다. 이들을 모조리 해치우면 이 지독한 공허를 조금이라도 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다, 죽인다."
한 걸음 더 내디딘 순간,
"아."
발끝에 무언가 닿았다. 나는 고개를 숙여 아래를 보았다.
"저건...."
달빛이 쏟아지는 새카만 수면 위로 내 얼굴이 비쳤다. 라일락 빛깔의 눈동자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아."
그제야 내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나는, 아벨 킨드리얼."
다음 순간,
풍덩!
나는 호수를 향해 몸을 던졌다.
가을밤의 호수는 시리도록 차가웠다. 옷자락이 먹먹하게 젖어 들고, 손발 끝으로 냉기가 밀려든다.
부그르르.
공기 방울이 너울거리며 멀어져 간다.
"...."
나는 간간이 코로만 숨을 내뱉을 뿐,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그럴 힘이 없었다.
'죽겠군.'
레퀴엠의 지배에서 잠시라도 벗어나는 것이 엄청난 심력을 소모했다. 지금 내 몸은 물 먹은 솜처럼 무겁게 축 늘어진 상태였다.
'리암이랑 훈련할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콧속에서 밀려 나오는 공기 방울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지금 이 상태가 너무나 편안했다. 이 어두운 호수 속이 엄마 뱃속처럼 느껴진달까.
골수까지 갉아 먹히는 듯한 공허에서 벗어나니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었다.
'각오는 했지만... 정말이지 지독하다.'
레퀴엠을 쥔 자들이 어째서 미쳐버렸는지 뼈저리게 이해했다. 그걸 쥐고 제정신일 수 있다면 그게 이상한 거였다.
'사람 돌아버리게 만드는 검이군.'
하지만 나는 잠시나마 이성을 찾는 데 성공했다.
수면 위에 비치는 내 얼굴, 그것이 낯선 색채로 물들어 있음에 이질감을 느꼈다. 그리고 '나'를 인지한 순간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닐 테지.'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내 손은 아직도 레퀴엠을 꼭 잡고 있었다. 정확히는 레퀴엠이 나를 쥐고 놓아주지 않는 상태였지만.
새카만 검에서 나를 빨아들일 듯한 압력이 느껴졌다.
'오냐.'
나는 히죽 웃었다. 뭐든 처음이 어렵지 두 번부터는 쉬워지는 법이다.
'와라, 레퀴엠.'
Chapter 3. 여유로운 척 배짱을 부린다. (2)
다시 정적.
나는 아까의 새카만 공간으로 돌아와 있었다.
레퀴엠이 나를 현혹하기 시작했다. 어서 이 물을 헤치고 올라가서, 저 밖의 생명을 집어삼키라고 속삭였다.
"응, 아니야."
나는 뻔뻔스레 고개를 처들었다. 그리고 레퀴엠의 유혹을 무시했다.
[...?]
레퀴엠이 당황하는 게 느껴졌다. 재차 나를 몰아붙이며 어서 움직이라고 소리쳤다.
"싫은데?"
나는 아예 팔짱을 낀 채 바닥에 철퍼덕 앉았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야. 네 말은 듣지 않아."
레퀴엠이 멈칫하더니 이내 파도처럼 기세를 일으켰다.
칠흑과도 같은 공허가 솟구쳐 올라 내 목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이래도 제 말을 거부할 수 있겠냐는 듯이.
"어딜."
나는 공허를 덜컥 붙잡았다.
[-!]
깜짝 놀란 레퀴엠이 몸을 비틀었지만 내 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지금 끼고 있는 건틀릿이 녀석을 단단히 옭아매는 탓이었다.
"좋았어."
나는 빙그레 웃었다.
맨손으로 레퀴엠에게 덤볐더라면 이렇게 대응하긴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수호자의 기운이 방어해 주는 탓에 가능했다.
"좀 쉬고 있으라고."
나는 레퀴엠이 더이상 날뛰지 못하게 바닥에 처박아 버렸다.
[-?!]
레퀴엠에게서 느껴지던 당황스러움이 경악으로 변화했다. 레퀴엠이 이 현실을 믿고 싶지 않은 듯 거칠게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나는 들썩이는 손끝에 힘을 주며 미소지었다.
'이게 되네.'
레퀴엠과 나 자신을 분리시키자, 나를 갉아먹던 허기에서 멀어졌다. 그러자 내 위장이 실제로는 텅텅 비어 있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러려고 밥을 몇 그릇씩 먹었지.'
가득 찬 위장은 확실히 도움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단 한 번 레퀴엠에게서 벗어나는 데 성공한 게 컸다.
레퀴엠의 공허는 더이상 나를 휘두르지 못했다. 그저 내 뱃속 깊숙이 가라앉아 지글지글 끓어댈 뿐.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어.'
나는 입꼬리를 비틀며 평정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지금부터는 레퀴엠과의 주도권 싸움이었다. 내가 결코 놈에게 휘둘리지 않을 것이며, 내 자아를 놓치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어야 했다.
[...!]
레퀴엠은 포기하지 않고 마구 발버둥쳤다. 나는 놈을 꾹꾹 지르밟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 싸움이 되겠군.'
이곳은 레퀴엠이 만들어 낸 관념의 세계. 시간이 흐르지 않고 공간조차 영원하다.
그러나 놈의 지배력에서 벗어난 지금, 나는 현실의 내 육체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손발 끝을 에는 듯한 냉기, 서서히 줄어가는 폐 속의 공기까지도.
'그래, 여긴 호수 속이었지.'
욕실에서 숨 오래 참는 훈련을 한 덕에 호흡 시간이 늘어나긴 했다. 하지만 내 몸이 레퀴엠과의 싸움에서 이길 때까지 버텨줄지 걱정스러웠다.
'천천히, 가늘고 길게.'
스스로에게 주문을 외며 몸의 제어에 힘썼다.
그런 나를 레퀴엠이 비웃는 게 느껴졌다. 내 숨이 막힐 때까지, 견디지 못한 내가 호수 밖으로 나갈 때까지 버티면 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착각하지 마."
나는 보란 듯이 응수했다.
"네가 잠잠해지기 전까진 안 나가."
그게 이 호수 밑바닥에 가라앉아 생을 마감하는 일이라 해도.
그런 의지를 쏘아 보내자, 레퀴엠의 동요가 느껴졌다. 곧 레퀴엠은 생각을 바꿨는지 날 회유하기 시작했다.
막 흘러나온 인간의 피가 얼마나 달콤한지, 막 꺼낸 심장의 박동이 얼마나 역동적으로 찬란한지.
그런 것들을 속살거리며 여기서 나가자고 속삭였다. 자신과 함께.
"응, 많이 해 봤어."
나는 시큰둥한 어투로 대꾸했다.
레퀴엠이 내게 들이미는 것들은 모두 의미가 없었다. 이미 아벨의 몸은 살인에 익숙했으니까.
애초에, 나는 불필요한 살인을 즐기지 않았다.
"너야말로 그만 얌전히 굴지 그래?"
여유로운 척 한쪽 다리를 꼬고 앉았다.
"이 호수, 꽤 깊다고. 내가 이대로 너를 쥔 채 죽는다면 어떻게 될까?"
레퀴엠이 갑자기 쥐 죽은 듯이 잠잠해졌다. 나는 마치 노래하듯이 흥얼거렸다.
"아마 이 호수 밑바닥까지 가라앉겠지. 과연 여기까지 헤엄쳐서 널 잡으려 들 사람이 있을까?"
실제로 즐거웠다. 레퀴엠보다 우위에 서서 놈을 압박하고 있는 상황이.
비록 현실의 육체는 서서히 굳어지고 있을지라도.
"아니, 없을걸? 그러니 이만 내게 복종해."
레퀴엠이 격분해서 사납게 울부짖었다. 하지만 그런 레퀴엠이 더이상 두렵지 않았다.
레퀴엠의 목소리는 이제 어린아이가 떼쓰는 것에 불과했다.
"소용없으니까 닥치고."
계속해서 배짱을 부렸다. 몹시도 태연한 척, 느긋하게.
사실은 점점 호흡이 가빠지고 있었다. 폐가 가파르게 떨리고, 가슴이 쥐어뜯기는 듯 고통스러웠다.
필사적으로 그것을 감추며 여유로운 모습을 연기했다.
'여기서 밀리면 끝장이야.'
이판사판, 더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여기서 결판을 내지 않으면 레퀴엠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숨 막히는 접전이 벌어진 지 얼마나 되었을까.
난동을 부리던 레퀴엠이 서서히 조용해졌다. 끊임없이 들려오던 속삭임이 잦아들고, 나를 덮칠 듯이 으르렁거리던 공허가 슬그머니 가라앉았다.
다음 순간,
파삭, 파사삭.
낙엽이 부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공간이 조각났다. 새카만 편린 같은 것이 흩날리듯 사라졌다.
부그르르.
코끝에서 나와 수면을 향해 올라가는 공기 방울이 보였다. 마그나 모르텐의 호수 속이었다.
'성공이다.'
절로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드디어.'
레퀴엠을 굴복시켰다. 사상 최악, 최강의 검이라는 이 검을.
'성공했어.'
예정된 죽음과 파멸에서 벗어났다. 이성을 잃은 채 검의 노예가 되어 불유쾌한 살인만을 일삼는 미래를 파괴했다.
'하하하.'
가슴이 벅차올라 터질 듯이 뛰었다. 지금껏 느껴본 적 없는 거대한 짜릿함이 온몸에 흘렀다.
소리 내어 웃으며 이 승리의 순간을 좀 더 만끽하고 싶었지만,
'슬슬 한계군.'
차가운 호수 속에 한참을 머문 탓에 저릿할 정도로 몸이 얼어 있었다. 오랫동안 신선한 공기를 맛보지 못한 폐가 고통스레 움찔거렸다.
'얼른 나가야겠어.'
나는 싸늘하게 식어버린 팔다리에 힘을 주었다.
'...젠장.'
쉽지 않았다.
몸 상태가 워낙 좋지 않아 내 의지에 따라 움직이질 않았다. 팔다리를 열심히 휘젓는 것치곤 실제 움직임이 크지 않았다.
물에 젖은 옷이 거추장스럽게 나를 잡아당기는 것도 한몫했다.
'조금만 더.'
나는 이를 뿌득 갈며 수면을 향해 헤엄쳤다.
'레퀴엠까지 손에 넣었는데, 이렇게 죽을 순 없어.'
하늘의 달빛이 가까워졌다. 고통스러울 정도로 아주 느리게, 그리고 더디게.
시야가 가물가물 흐려지고 있었다.
'숨이.'
더는 폐에 남은 공기가 없었다. 호흡이 멈추니 심장이 느려졌고, 몸에 활력을 전달해야 할 피가 돌지 않았다.
가까스로 들이킨 숨에는 공기 대신 차가운 물만이 가득했다. 얼얼해지는 콧속으로 걷잡을 수 없이 물이 밀려 들어왔다.
'제발, 조금만 더.'
나는 안간힘을 다해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더이상 움직이지 못하고 축 늘어지는 감각만이 전해져 왔다.
'안 돼.'
겨우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허무하게.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제기랄.'
나는 레퀴엠을 향해 욕설을 뇌까렸다.
조금만 더 빨리 포기할 것이지. 그럼 이렇게 끝나지 않았을 건데....
'망할 놈.'
뇌까지 새카맣게 물든다고 느낀 순간.
툭, 의식이 끊어졌다.
❖ ❖ ❖
"아이고, 무슨 놈의 비가 이렇게 온다냐."
"그칠 기미가 안 보이네."
마그나 모르텐의 관리인들은 초소에 앉아 밖을 내다보았다. 온통 새카만 창문 위로 빗방울이 쉴새 없이 내리꽂히고 있었다.
"나는 당직 설 때 비 오는 게 제일 싫더라."
"나도 그래. 게다가 오늘따라 유난히 으슬으슬하구먼."
한 관리인이 오싹한 듯 팔을 문질렀다.
"특히 여기는... 어휴, 뭐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곳이니까."
그는 일부러 정확히 무엇이 나오는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피하고 싶은 단어이기도 했거니와, 이곳에 묻힌 이들을 생각하면 말을 조심해야 했다.
"뭐, 사람 하나 빠져도 모를 곳이긴 하지."
다른 관리인이 난로에 장작을 더 쑤셔 넣으며 대꾸했다.
"어차피 지금 저곳엔 한 명밖에 없잖아?"
"아, 그렇지."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한숨을 쉬었다. 그들의 시선이 멀리 어스름히 보이는 마그나 모르텐의 탑을 향했다.
"아무리 도련님이라지만, 마그나 모르텐에까지 와서 행패를 부리는 건 너무하지 않은가."
"냅둬. 높으신 분들이 다 그렇지. 괜히 끼어들었다 좋은 꼴 못 볼 게 분명해."
"그건 알지만."
관리인이 신경질적으로 뺨을 북북 긁었다.
"도대체 저기서 뭔 할 일이 있다는 거야?"
"낸들 아나? 이게 벌써 이틀째야. 뭘 하고 계실지 가늠도 안되는구먼."
"혹시 저기서 아벨 도련님이 나오는 거 본 적 있어?"
"아니, 전혀. 탑 안에서 꿈쩍도... 헉!"
말하던 관리인이 어깨를 흠칫 떨었다.
"왜 그래?"
"아니, 저기 지금!"
그가 덜덜 떨리는 손가락으로 탑을 가리켰다.
"방금 호수에서 사람이 올라왔어."
"예끼, 이 사람.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다른 관리인이 혀를 쯧쯧 차며 창문에 바짝 붙었다. 눈에 힘을 주고 밖을 자세히 살폈다.
"잘못 본 거겠지. 내가 여기서 몇 년을 일했는데, 인간은 절대 여기서 혼자 힘으로 못 빠져나와."
"하, 하지만...."
"게다가 저기엔 아벨 도련님밖에 없잖아?"
오들오들 떨던 관리인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맞다, 그랬지?"
"설마 도련님이 호수에 뛰어들었을 리가 없잖은가."
"아, 그것도 그러네."
관리인은 머쓱한 듯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내가 잘못 본 거 같네. 괜히 소란 피워서 미안허이."
"됐네, 이 사람. 저리 심약해서 이 일은 어찌 하는지...."
"먹고 살려면 별 수 있나?"
관리인들이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마그나 모르텐 앞에는 정말로 사람이 서 있었다.
뚝, 뚝.
흠뻑 젖은 몸에서 물을 떨구며.
"...."
아벨은 몸을 비스듬히 기울인 채 미동 없이 서 있었다.
그의 눈동자가 새카만 먹물이 번지듯 검게 물들었다가, 원래의 청보랏빛으로 돌아오길 반복했다.
아벨의 입술은 지속된 추위로 인해 보랏빛이었다. 자연스레 이가 딱딱 부딪히고 전신이 덜덜 떨렸다.
오랫동안 숨을 참은 탓에 그의 낯빛은 거무죽죽했다. 지금 그는 바닥에 쓰러져 숨을 헐떡거려야 마땅했다.
하지만.
"...."
아벨은 턱 끝을 파르르 떨며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그의 몸속에서는 레퀴엠과의 치열한 힘겨루기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가 의식의 끝자락을 붙잡고 놓지 않은 탓이었다.
그의 눈동자가 먹물이 번지듯 일렁였다가, 다시 아롱지며 흩어지길 반복했다.
그렇게 굳은 듯이 서 있기를 잠시,
"-!"
마침내 아벨의 동공에 초점이 돌아왔다.
"커헉!"
아벨이 무릎을 꿇고 바닥에 쓰러졌다.
Chapter 3. 여유로운 척 배짱을 부린다. (3)
"허억, 허어억,"
나는 한참 동안 새된 소리를 내며 숨을 마구 들이켰다. 잔뜩 수축해 있던 폐가 반색하며 공기를 벌컥벌컥 삼켰다.
"커헉, 커허헉."
숨을 뱉을 때마다 역류한 물이 코와 입에서 울컥울컥 쏟아졌다. 겨우 숨을 들이쉬면 반쯤 나온 물이 공기와 뒤섞여 몸으로 다시 들어갔다.
"쿨럭, 크헉."
나는 한참 동안 밭은기침을 해대었다. 바닥에 엎드린 채 꿈틀거리며, 그저 꼴깍거리며 숨을 삼켰다.
"허억, 헉."
마침내 몸을 뒤집어 벌렁 드러누웠다.
"하아, 하아."
내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코와 입에서 아직 채 뱉어내지 못한 물들이 방울방울 튀어나왔다.
나는 한참 동안 미친 사람처럼 헐떡이다가 겨우 뇌까렸다.
"X발."
깊은 빡침과 분노가 느껴지는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아오, 진짜."
나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앉았다.
흠뻑 젖은 옷이 밑으로 축축 늘어졌다. 등 위로 내리꽂히던 비가 어느새 그친 뒤였다.
"죽는 줄 알았네."
정말 아슬아슬했다. 조금만 더 늦었다면 호수 밑바닥에 가라앉아 생을 마감할 뻔했다.
"이게...."
나는 비어 있는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손에 쥐고 있던 레퀴엠의 감촉이 선연했다.
"이게 날 살린 건가."
눈이 감기던 마지막 순간, 갑자기 몸이 검은 실에 가닥가닥 엮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몸이 실에 조종당하는 인형처럼 움직였다, "내 몸이 죽게 내버려 둘 순 없었겠지."
하지만 실낱같은 공기를 들이쉰 순간, 섬광이 스치듯 정신을 차렸다. 의식의 심해에서 바득바득 기어 올라와 내 몸을 차지하는 데 성공했다.
"하...."
그 이후, 레퀴엠은 거짓말처럼 잠잠해졌다. 그리고 내 시야에도 보이지 않았다.
"완전히 흡수했나?"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어디에도 레퀴엠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아, 그건가?"
잠시 생각에 잠겼던 나는 물에 푹 젖은 윗옷을 훌러덩 벗었다. 그리고 희미한 달빛에 의지해 꼼꼼하게 내 몸 이곳저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아."
찾았다.
오른팔 어깨 아래쪽에 못 보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바짝 마른 낙엽이 검을 감싸고 있는, 즉 가을의 검 레퀴엠을 형상화한 그림이었다.
"역시 여기 생기는군."
원작에서 주인공 카인이 다른 사계절의 검을 손에 넣었을 때, 그 또한 이곳에 문양이 드러났다.
이는 그 사람이 검을 지배하는 데 성공했다는 의미이며, 원할 때 자유자재로 검을 소환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정말, 성공이네."
나는 복잡스러운 감정을 느끼며 어깨를 쓰다듬었다. 신기하기도, 뿌듯하기도 했다.
"내가 레퀴엠을 이겼다니."
기분 좋은 희열로 심장이 마구 두근거렸다. 자꾸 입꼬리가 실실거리며 하늘을 향해 치솟으려 했다.
"흠흠, 으흠."
애써 웃음을 참던 나는 문득 주변을 둘러보았다.
비가 개고 화창한 가을밤. 사위는 그저 어두웠고 고요한 호수 위엔 오로지 나뿐이었다.
'아무도 없잖아?'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푸핫!"
풍선 터지듯이 웃음이 튀어나왔다.
"으하하하하!"
나는 배를 움켜쥔 채 마구 웃어대었다.
"하하하하!"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온몸을 들썩거리며, 미친 사람처럼 그저 그렇게.
"으핫, 으하하!"
어찌나 오랫동안 웃어댔던지 배가 다 땡겼다. 하지만 고통스럽지 않았다. 그저 좋기만 했다.
"후후후."
나는 겨우 웃음을 꺼뜨리며 똑바로 앉았다.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고 씩 웃었다.
'20세에 사계절의 검을 소유하다니.'
이건 정말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원작의 주인공인 카인조차 내년이 된 후에야 검의 주인이 된다.
'그것도 난이도가 가장 높은 레퀴엠을.'
다른 검에 비해 레퀴엠은 가장 다루기가 까다롭다. 검 자체가 지닌 '공허'라는 속성 때문이다.
'이 정도면 다른 소유자들보다 빠른 출발이지.'
이제 이 검의 사용에 숙달되기만 한다면, 아마 제국에서 나를 능가할 자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안심해서는 안 돼.'
이건 시작일 뿐이다. 내가 조금만 약해지거나, 의식을 놓는다면 레퀴엠에게 주도권을 빼앗길 수도 있었다.
"좋았어."
나는 바닥에 내팽개쳤던 윗옷을 주워 일어섰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동그란 달과 반짝이는 별들만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방금 사계절의 검 중 하나가 나타났고, 그것이 한 인간의 손에 완전히 들어갔다는 사실은 이들과 나만이 알 터였다.
나는 비밀스러운 관찰자들을 뒤로 한 채 마그나 모르텐을 향해 다시 걸어갔다.
"아, 배고프다."
작게 투덜거리면서.
❖ ❖ ❖
그 시각, 제국의 수도 마기오레.
땅값이 비싸기로 유명한 이곳에서도, 가장 비싼 노른자 땅 위엔, 그 어떤 귀족의 저택보다도 넓은 부지를 차지한 곳이 있다.
그 중심엔 상아색 대리석과 오색찬란한 스테인드글라스로 감싼 건물이 우뚝 서 있었다.
제국 내 유일한 종교인 세레나교의 본진이자, 제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신전.
리버렌테.
매달 들어오는 기부금만으로 고위 귀족의 수입을 능가한다는 곳, 그리고 제국 유일의 '성녀'가 기거하는 곳.
많은 사람들이 리버렌테 안으로 꾸역꾸역 밀려들었다. 평소의 미사 때도 많은 인파를 자랑하는 곳이었지만, 오늘은 그 수가 가히 2-3배에 달했다.
흰옷을 입은 신관들이 인자한 미소와 함께 그들을 맞이했다.
"디오 베네디카."
"디오 베네디카."
나직한 인사말과 함께 손으로 그리는 성호가 오갔다.
그들은 둥근 돔형 지붕이 펼쳐진 그레이트 홀로 향했다. 그리고 비어 있는 좌석을 찾아 차례로 앉았다.
좌석이 거의 다 채워졌을 무렵, 흰옷을 입은 추기경이 홀로 들어섰다. 그가 연단의 한 가운데에 서자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숨을 죽였다.
"디오 베네디카."
인사를 마친 추기경이 성호를 그었다. 그리고 좌중을 한번 둘러본 뒤 입을 열었다.
"미사를 시작하겠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사람들의 눈이 반짝였다. 물론 어릴 때부터 뼈에 박히게 예절을 익혀온 사람들이라 체통 없게 몸을 들썩거리진 않았다.
하지만 뺨에 떠오르는 홍조까지 막을 순 없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홀 안쪽의 입구를 힐끔힐끔 곁눈질하곤 했다.
그렇게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을까. 길고 긴 미사의 모든 순서가 끝나고, 막바지에 이르렀을 무렵이었다.
"다음으로, 성녀님께서 축복의 말씀을 내리시겠습니다."
추기경의 말이 끝나는 순간, 사람들의 눈이 번쩍번쩍 빛났다. 마치 광선이라도 뿜어낼 듯한 열기가 발산되기 시작했다.
모두의 관심이 홀 안쪽의 입구로 쏠렸다.
사락.
홀 안쪽에서 흰 베일을 걸치고, 치렁치렁한 흰옷을 걸친 소녀가 걸어 나왔다.
"오오...!"
"성녀님이시다!"
대놓고 소란이 일지는 않았지만, 다들 소리 죽여 감탄을 흘렸다.
성녀의 얼굴은 흰 베일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베일 아래로 숱 많은 연녹색 머리카락이 굽이치는 것이 보였다.
몸집은 자그마했으며, 걸친 옷이 워낙 치렁치렁한 탓에 행여나 발에 걸리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성녀는 발을 헛디디는 일 없이 차분하게 걸음을 내디뎠다. 오직 앞만 보고 걸어가 중앙 연단에 살포시 앉았다.
"성녀님,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추기경이 그녀의 옆으로 다가가자, 성녀의 베일이 미세하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허락의 뜻이었다.
"알겠습니다."
추기경이 그제서야 준비해 온 종이를 펼쳤다.
"오늘 성녀님의 축복을 받을 신도는...."
사람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개중엔 간절한 얼굴로 손을 모아 기도하는 이도 있었다.
"바네스 가문의, 소피아 바네스 영애입니다."
"아아!"
맨 앞줄에 앉아 있던 한 무리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름이 불리지 못한 이들은 탄식을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아아, 드디어!"
소피아 영애가 휘청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주름진 낯엔 병색이 완연했고 몸은 쇠꼬챙이처럼 뾰족했다. 손가락이 잘게 떨리는 것은 단지 기쁨 때문만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추기경의 명령에 옆에 서 있던 바네스 백작 부인이 그녀를 부축했다.
"애야, 어서 가자꾸나."
"네, 어머니."
두 여인은 서로 모녀 관계였지만, 겉보기에 나이 차가 많이 나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의 관계를 모른다면 친구라고 착각할 만한 모습이었다.
소피아 영애는 위태롭게 흔들리는 걸음으로 성녀에게 조금씩 다가갔다.
"...."
성녀의 눈길이 두 여인을 스쳤다. 그것은 마치 아무 관계없는 물건을 보든, 냉담한 시선이었다.
곁에 서 있던 추기경이 우렁찬 목소리로 읊었다.
"바네스 가문은 근 몇 달간 신실한 마음의 표현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또 하루도 빠짐없이 미사에 참석하는 성실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여기서 '신실한 마음의 표현'이 기부금을 뜻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바네스 가문이 내는 기부금의 양은 다른 귀족들이 일반적으로 내는 금액의 3배에 달했다.
"아아, 성녀님...."
성녀의 앞에 도달한 소피아 영애가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성녀는 자애롭게 그녀를 위로해 주진 않았다. 그저 나직히 그녀의 이름만 부를 뿐.
"소피아 바네스."
기이할 정도로 사람을 잡아끄는 마력이 있는 목소리였다. 분명 소녀의 음색이지만 노인의 그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진정하거라."
사람을 압도하는 존재감과 광채, 그리고 성스러운 기운이 성녀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예, 예. 성녀님."
소피아 영애는 겨우 눈물을 닦아내며 대답했다. 그녀는 감히 성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했다.
"가까이 오도록."
성녀가 읊조리며 한 손을 내밀었다.
"오오, 드디어!"
"축복을 내리시려나 봐!"
"그 순간을 직접 볼 수 있다니!"
좌중은 서로 속삭이며 성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들의 시선이 성녀와 소피아 영애를 바쁘게 오갔다.
"성녀님, 부디...."
소피아 영애가 바들바들 떨리는 두 손을 기도하듯 포갰다. 그리고 입술을 잘근 깨물며 눈을 감았다.
성녀의 손이 소피아 영애의 두 손 위에 얹어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파앗!
성녀의 손과 맞닿은 곳에서 흰빛이 터져 나왔다.
"오오!"
순간 좌중들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발뒤꿈치를 들었다. 혹, 저도 모르게 거기 가까이 다가간 이도 있었다.
"거기까지."
하지만 기사의 삼엄한 경계에 가로막혀 더이상 다가갈 수 없었다.
"아, 아아."
흰빛이 소피아 영애의 손목을 휘감아 올라 전신으로 퍼졌다. 이윽고 놀라운 변화가 그녀에게 찾아들었다.
"맙소사."
"세상에."
좌중이 숨을 들이켰다.
소피아 영애의 주름이 서서히 펴지며 피부가 탱탱해졌다. 얼굴 가득 피었던 검버섯이 스르륵 자취를 감추었다.
그녀의 실제 나이인 25세에 어울리는 모습이 된 것이다.
이윽고 성녀가 소피아 영애에게서 손을 떼어냈다. 순간 소피아 영애가 휘청, 뒤로 물러섰다.
"얘야...!"
내내 옆에서 대기하던 바네스 백작 부인이 급히 다가섰다.
"어, 어머니."
소피아 영애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울먹였다.
"저, 저, 지금 어떻게 보여요?"
"아아."
바네스 백작 부인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제 딸의 아름다운 얼굴을 눈에 담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내, 내 손이...."
소피아 영애가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는 잡티 하나 없이 매끄러운 제 손등을 보곤 울음을 터뜨렸다.
"아아아!"
Chapter 3. 여유로운 척 배짱을 부린다. (4)
소피아 영애에게 기적이 찾아드는 것을 모두가 확인했다. 사람들은 부채나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바삐 속삭이기 시작했다.
"세상에. 제 눈이 잘못된 거 아니죠?"
"저 영애의 병명이... 그러니까, 크루델레병 아니었나요?"
"맞아요. 몇 달 전부터 증상이 시작되었다고 했으니, 지금 아마 1기일 거에요."
"3기까지 가면 가망이 없다던데요? 의사 대신 장의사를 찾아가면 된다나."
"그런데 성녀님의 손짓 한 번에 저리 말끔해지다니...."
사람들의 눈빛에 시기, 부러움, 질투가 어렸다. 그들은 말끔해진 소피아 영애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감정을 삭이려 애썼다.
"바네스 가문의 신실한 기도에 신께서 응답하셨나니, 앞으로도 이 믿음을 잃지 않고 꾸준히 정진하도록 하여라."
추기경이 소피아 영애와 바네스 백작 부인을 향해, 혹은 신도들에게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감사합니다, 성녀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두 여인이 성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거듭 머리를 조아렸다.
"디오 베네디카."
"디오 베네디카."
좌중들은 함께 성호를 그으며 눈을 감았다.
홀 안은 몹시도 영광된, 그리고 신을 향한 열정적인 믿음으로 가득했다.
그렇게 미사가 마무리되고, 연단에 고요히 앉아 있는 성녀에게 기사들이 다가섰다.
"성녀님, 가시지요."
성녀는 잠시 그들을 빤히 바라보다가 말없이 일어섰다.
기사들은 성녀를 앞뒤로 둘러싼 채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은 마치 성녀를 보호하는 것 같기도, 혹은 감시하는 것 같기도 했다.
성녀가 그레이트 홀 밖으로 빠져나오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다른 신관이 다가섰다.
"성녀님."
그가 소리를 죽여 속삭였다.
"오늘 폐하께서 행차하신답니다."
순간 성녀의 몸이 흠칫 떨렸다. 이윽고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두 손을 모아 쥐었다.
"알겠습니다. 그전까진 기도실에서 몸을 바르게 하도록 하겠어요."
"예, 성녀님."
신관이 물러나고, 아까와 마찬가지로 기사들이 성녀를 기도실까지 호위했다.
"얼마나 걸리시겠습니까?"
기사가 딱딱한 말투로 묻자, 성녀는 더없이 상냥하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대답했다.
"폐하를 뵙는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정돈되질 않는군요. 평온해질 때까지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요."
"예. 하지만 폐하를 너무 기다리게 하셔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성녀의 입매가 순간 굳어졌다. 하지만 그마저도 찰나, 성녀는 다시 그윽한 미소를 입가에 그렸다.
"알고 있어요."
기도실의 문이 열리자 성녀는 사뿐한 걸음으로 안에 들어섰다.
탁.
뒤에서 문이 닫혔다. 성녀는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벽도 바닥도 온통 흰 공간. 곳곳에는 성녀의 베일과 비슷한 흰 휘장이 드리워져 경건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기도실 중앙에는 바닥에 앉을 수 있도록 카펫을 깔아 두었다. 성녀는 그곳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
카펫 앞에 멈춰 선 그녀는 잠시 굳은 듯이 서 있었다. 소매 아래로 살짝 드러난 손가락이 잘게 떨리기도 잠시, "아악!"
성녀가 베일을 벗어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러곤 베일을 발로 마구 짓밟기 시작했다.
퍽, 퍽.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숱이 많은 머리카락이 굽이치며 어깨를 따라 흘러내렸다. 녹음의 빛깔을 띤 그것은 마치 생생하게 살아 있는 나무 덩굴 같았다.
성녀는 천하절색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희고 가냘픈 낯과 투명한 눈빛이 흡사 요정으로 착각할 만했다.
"빌어먹을! 아아악!"
분홍빛 입술에서 내뱉어지는 욕설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기도실은 완벽한 방음 설비가 갖추어져 있었다. 성녀가 안에서 기도에 집중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시설은, 성녀가 내뱉는 욕설이 바깥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돕고 있었다.
"빌어먹을 황제 새끼!"
감히 새어 나갔다간, 성녀의 혀가 잘릴 수 있는 욕설을.
"아 짜증나, 진짜!"
성녀는 울부짖으며 카펫 위로 엎드렸다.
그녀의 어깨가 위아래로 거칠게 들썩였다. 하지만 울음 때문은 아니었다.
"지난주에도 봤으면 됐지 뭘 또 오는데!"
한 음절씩 씹어 뱉는 분노의 표출 때문이었다.
"개새끼! 길 가다 뒤로 넘어져서 코가 깨져 죽을 새끼! 지가 싼 똥에 빠져 죽을 새끼!"
성녀는 제 눈앞에 없는, 하지만 곧 나타날 황제를 향해 저주를 퍼부었다.
그것은 짧은 기간 축적된 분노가 아니었다. 몇 년간 차곡차곡 쌓이고, 또 쌓여 그것을 해소할 방법조차 요원하게 되어버린 것이었다.
"도대체 이게 몇 년째냐고!"
성녀가 양팔과 다리를 펼친 재 천장을 보고 드러누웠다. 아까 좌중들을 압도하던 성녀라곤 믿을 수 없이 철없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제발 누가 그 자식 좀 죽여줘!"
성녀가 어린아이처럼 팔다리를 마구 휘저었다. 팔을 휘젓는 서슬에 성녀의 소매가 말려 올라갔다.
그녀의 팔 위쪽엔 덩굴이 검을 감싸고 있는 문양이 드러나 있었다.
"하아...."
그렇게 울부짖고 저주를 퍼붓던 것도 잠시, 성녀는 지친 듯한 기색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 질긴 목숨줄이 내가 있는 한 끊길 리 없지."
무릎 사이에 얼굴을 푹 파묻고 중얼거렸다.
"지겨워, 지겨워. 지겨워."
성녀의 목소리에서 깊이를 모를 체념이 뚝뚝 흘러내렸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연신 한숨을 내쉬던 그 순간,
파앗!
성녀의 팔에 자리한 문양에서 빛이 번쩍였다. 봄의 싱그러운 기운을 머금은 듯 순후한 녹색 빛이었다.
"앗!"
성녀가 자리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녀의 에메랄드 빛깔 눈동자가 요동쳤다.
"설마, 이건."
성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제 팔을 쓸어내렸다. 이미 문양의 빛은 사라졌으나 거기서 전해진 찌릿한 감각이 손끝을 간질였다.
"느껴졌어."
성녀가 꿈꾸는 듯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눈꺼풀이 서서히 감겼다.
"나타났구나, 레퀴엠."
❖ ❖ ❖
"집사님, 다 됐습니다."
막스 조리장이 헐떡이며 필립의 방문을 두드렸다.
쌀쌀한 가을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그의 투실투실한 뺨과 오동통한 인중엔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아침부터, 어휴, 이게 웬일인지."
그가 연신 얼굴의 땀을 훔쳐내며 숨을 몰아쉬었다.
"도련님은, 갑자기, 무슨 도시락을. 10인분씩이나."
"쉿, 입조심하게."
필립은 황급히 조리장의 입을 단속시켰다. 그리고 그와 함께 마차로 향했다.
"나라고 도련님 뜻을 알겠나. 그저 시키는 대로 할 뿐이지."
"아니, 원래 입이 짧으신 분인데. 요새 무슨 바람이 부신 건지 원. 어디서 보약이라도 드신 답니까?"
막스가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투덜거렸다.
"저번에는 3인분 도시락을 3일치나 싸라 그러시고. 도시락은 일반 식사보다 손이 많이 간단 말입니다."
"그렇긴 하지."
"게다가 보존 식량이라니! 제가 언제 그런 걸 만들어 봤겠습니까? 몇 년 만에 요리책을 펼쳐야 했습니다. 수습 요리사 시절 때처럼요!"
그는 그간 심적 고생이 많았던 듯 쉴새 없이 입을 움직였다.
"게다가 고기는 왜 그렇게 찾아대시는지. 입맛은 또 무진장 까다로우셔선. 육해공 종류별로 고루 넣고 어린 새끼의 고기에 숙성된 고기까지 골고루 챙기려니 죽을 맛입니다."
"고생이 많군."
필립은 막스의 푸념을 건성으로 들어 넘기며 걸음을 재촉했다. 지금 그의 정신은 온통 다른 곳에 쏠려 있었다.
마차에 도착해 문을 열자, 차곡차곡 잘 쌓인 도시락이 보였다.
"이만 가보게. 아침부터 수고가 많았어."
필립이 막스의 어깨를 힘 있게 두드렸다. 막스는 겨우 한 짐 내려놓은 듯 긴 숨을 내쉬었다.
"뭐, 고생은 집사님이 제일 많이 하시니까요. 이만 가보겠습니다."
필립은 막스를 보낸 뒤 마차에 직접 올라탔다.
"마그나 모르텐으로 가세."
마부에게 갈 곳을 지시한 뒤 의자에 몸을 기댔다.
"도대체 이게 며칠만인지."
그는 팔짱을 낀 채 오만상을 찌푸렸다.
"지, 집사님!"
몇 시간 전, 이른 새벽부터 관문의 문지기들이 소식을 전해왔다.
"지금 당장 도련님께서 오라고 하십니다!"
사흘 만에 연락이 닿은 것도 모자라,
"올 때 도시락과 갈아입을 옷을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번거로운 추가 요구까지 곁들여졌다.
'아니, 그럼 그 많은 도시락을 혼자 다 먹었다는 건가?'
저 호리호리한 몸 어디에 그 많은 음식들이 다 들어찼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필립은 인상을 북북 긁으면서도 아벨의 요구를 충실히 따랐다. 어쨌건 약점을 잡힌 쪽은 그였으니 별수 없었다.
"도착했습니다."
필립은 급히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아까 본 관리인들이 관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집사님."
필립을 발견한 그들이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도련님은?"
"저 안에 계십니다. 저희한테 말을 전하시곤 바로 다시 들어가셨어요."
관리인들의 안색이 창백했다. 특히 한 명은 식은땀까지 줄줄 흘리는 것이 썩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
"무슨 일이 있었나? 자세히 좀 말해보게."
"저, 그것이...."
비교적 멀쩡해 보이는 관리인이 더듬더듬 대답했다.
"지난 이틀간은 잠잠하셨습니다. 한 번을 마그나 모르텐 밖으로 안 나오셨지요."
"그랬군."
"문제는 오늘 자정쯤이었습니다. 당직을 서고 있는데, 어디선가 으스스한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겁니다."
관리인은 생각만 해도 오싹한 듯 고개를 휘휘 저었다.
"처음엔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창밖을 보니까...."
필립은 어쩐지 다음에 이어질 말을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차마 입 밖에 낼 수가 없어, 그저 관리인을 재촉했다.
"보니까?"
"아벨 도련님이 호수 중앙에 서 계시는 겁니다. 무엇이 그리 기쁘신지 한참이나 소리 내어 웃어대시더군요."
"...."
"체감상 5분은 넘게 웃으신 것 같았습니다. 쉬지도 않으시고요. 그때는 꼭 미...."
"쉿."
옆의 다른 관리인이 황급히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아차."
두 관리인이 잔뜩 움츠러들어 필립의 눈치를 살폈다.
"계속하게."
필립은 그가 하려던 말을 못 들은 척 넘어갔다. 아벨이 미친 것 같다는 생각은 그도 자주 하는 생각 중 하나였으니까.
"에, 그, 암튼. 그러시더니 다시 마그나 모르텐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아까 새벽 4시쯤 관문 초소에 나타나셨습니다."
다른 관리인이 비로소 입을 열어 거들었다.
"오셔서 대뜸 하시는 말이, 집사님을 불러오라고."
"도시락과 옷도 함께?"
"예. 그러곤 다시 마그나 모르텐으로 들어가 버리셨습니다."
필립은 멀리 호수 위에 떠 있는 마그나 모르텐을 바라보았다.
"그 후로 나오진 않으셨나?"
"네. 한 번 들어가 볼까 했지만.... 아시다시피, 예전에 하신 말씀이 있어서요."
자신이 나오기 전까진, 누구도 들이지 말라는.
그 말을 어겼을 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차마 상상조차 하기 싫다는 말투였다.
"알겠네."
필립은 관리인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그동안 고생이 많았네. 일단 여기서 기다리게."
"예.... 아니, 잠깐. 집사님 혼자서 들어가시려고요?"
관리인들이 두 눈을 부릅떴다. 필립은 체념 어린 낯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겠나. 부르셨으니 가야지."
"하지만...!"
관리인들의 얼굴에 착잡한 빛이 떠올랐다. 그들은 이내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부디, 조심하시길."
Chapter 3. 여유로운 척 배짱을 부린다. (5)
사흘 전, 아벨의 막무가내로 마그나 모르텐의 조문객들이 끌려 나올 때.
그들 사이에는 차마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든 동질감이 싹텄다. 미친 도련님을 모시게 된 운명공동체랄까.
"좀 쉬고 있게들."
필립은 마음을 가다듬으며 관문을 지나쳤다. 양손에 도시락과 옷 꾸러미를 주렁주렁 든 채 마그나 모르텐을 향해 나아갔다.
철벅, 철벅.
간밤에 내린 비로 인해 바닥에 물기가 남아 있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눅눅한 소리가 짓이겨졌다.
본디 필립은 비가 그친 다음 날을 좋아했다. 하지만 오늘부터는 싫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크윽."
그는 마그나 모르텐 앞에 멈춰서 신음을 흘렸다.
원래 엄숙하고 거룩하기 짝이 없는 장소인 이곳이, 지금은 불길한 핏빛으로 물들어 보인다면 착각일까.
저 안의 모습이 어떨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젠장. 이 일을 어찌 수습할지.'
필립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일단 빨리 안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았다. 늦어졌다가 아벨의 심기가 불편해지면 후환을 감당할 수 없을 터였다.
"후우."
필립은 이를 악물고 내키지 않는 걸음을 뗐다. 마그나 모르텐 입구에 서서 고개를 슬쩍 들이밀었다.
비석 위로 피에 젖은 시체가 튀어나와 있고, 그들은 잘게 썬 육편이 되어 피비린내로 흥건....
'...엥?'
하지 않았다.
필립은 놀라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마그나 모르텐은 그저 고요했다. 여느 때처럼 경건한 분위기 속에 많은 비석들이 꼿꼿이 서 있었다.
아벨은 탑을 향한 채 바닥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마치 그 주변의 비석들처럼, 그의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도련님 옷이....'
아벨의 옷이 흠뻑 젖어 짙게 물들어 있었다.
필립은 설마 하는 마음으로 눈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그 빛깔이 붉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안심했다.
'그럼 왜 젖어 있는 거지?'
땀을 흘렸다고 보기엔 전체적으로 푹 젖어 있었다.
'이건 뭐 물에 빠졌던 게 아닌 이상....'
무심코 중얼거렸던 필립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을.'
마그나 모르텐의 호수는 절대 자력으로 헤엄쳐서 빠져나올 수 없는 곳이다.
'그냥 옷을 빨고 싶으셨던 게야. 갑자기 그러고 싶으셨던 게야.'
정말 빨래를 한 거라면, 그 젖은 옷을 입고 있다는 게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필립은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 이상 추측을 진행했다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가 아벨을 부르기 위해 막 입술을 움직인 순간,
"필립."
아벨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나직한 음성이 무섭도록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 예."
필립은 황급히 마그나 모르텐 안으로 들어섰다.
"말씀하신 것들을 가져왔습니다."
"그래?"
아벨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
필립은 흠칫 놀라 멈춰 섰다. 일순 도련님의 눈이 새카맣게 물든 것 같았다.
그뿐 아니라 아벨의 분위기가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뭐라 꼬집어 말하기 어렵지만, 분명 무언가 달랐다.
형체를 알 수 없는 그림자 같은 것이 아벨을 감싸고 있는 듯한, 꺼림칙하고 불길한 감각.
필립의 손바닥에 땀이 배어났다.
'눈빛이....'
저를 바라보는 아벨의 시선, 그 속에 깊이 모를 공허가 넘실대고 있었다. 잠깐 들여다본 것만으로도 눈앞이 아찔하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도련님?"
필립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아."
아벨이 미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가 눈을 깜박이자 여태 느껴지던 분위기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내가 시킨 건?"
방금 무슨 일 있었냐는 듯 태연한 목소리였다. 필립은 잠시 굳어 있다가 겨우 대답했다.
"가져왔습니다."
"옷부터."
그는 가져온 옷을 두 손으로 잡고 공손히 내밀었다.
"갈아입는 걸 도와드리겠습니다."
아벨이 옷을 받아들곤 짧게 명령했다.
"뒤돌아 있어."
"아, 예."
필립은 냉큼 몸을 돌렸다. 옷가지가 바닥에 툭툭 떨어지는 소리, 이어서 새 옷을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받아."
아벨의 목소리에 필립은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아벨은 멀끔해진 모습으로 젖은 옷가지를 내밀고 있었다.
"먹을 것은?"
필립은 얼른 옷가지를 받아 챙긴 뒤 가져온 도시락을 내밀었다.
"수고했어."
아벨이 도시락을 낚아채듯 가져가더니 바닥에 털썩 앉았다. 그러곤 곧장 바구니 뚜껑을 열어 내용물을 입에 털어 넣기 시작했다.
"...."
필립은 아연한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며칠 굶은 사람처럼 드시는군.'
도시락 속의 음식들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귀족의 예법이 몸에 밴 탓에 지저분하진 않았지만, 다른 귀족들이 봤을 때 수군거릴 만한 속도긴 했다.
"후우."
아벨은 짧은 시간 내 필립이 가져온 도시락을 모조리 해치웠다. 필립은 질린다는 듯이 고개를 젓곤 물었다.
"더 가져올까요?"
❖ ❖ ❖
나는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았다. 현재 내 앞의 접시들은 모두 깨끗하게 비워진 상태였다.
냅킨을 들어 입가를 훔친 뒤,
"이제 후식 가져와."
등 뒤에 서 있는 조리장에게 턱짓했다.
"예, 도련님."
막스는 약간 떨떠름한 어조로 답했다. 그가 지진이 이는 듯한 눈동자로 내 앞에 쌓인 접시를 바라보았다.
'맙소사. 이걸 혼자 다 먹는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어쩐지 기시감이 드는 상황과 반응이었다. 나는 저 윗층에서 바삐 일하고 있을 필립을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짝짝.
막스가 손뼉을 친 뒤 주변의 하인들에게 명령했다.
"어서 이걸 치우고 후식을 내오도록 해라."
하인들이 식탁 앞으로 우르르 모여들었다. 그리고 내가 해치운 접시를 주방으로 나르기 시작했다.
그들이 이렇게 수레를 끌고 왔다 갔다 한 횟수가 어림잡아....
'한 대여섯 번?'
이는 거의 일가족, 즉 부모와 두 자녀가 함께 식사를 했을 때 나오는 양이었다.
난 그 양을 혼자 먹어치웠고,
'이제야 배가 차네.'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레퀴엠을 손에 넣은 후 달라진 점이 이거였다. 허기가 쉽게 그리고 굉장히 자주 찾아들었다.
'검이 갖는 공허라는 속성 때문인가.'
요근래 나는 집무실에서 대충 끼니를 때우는 대신, 반드시 식당으로 내려갔다.
애피타이저부터 시작해 본 요리, 후식으로 이루어진 정찬을 빠짐없이 즐겼다. 예전보다 식사 시간이 좀 길어지긴 했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시간이야 많으니까.'
레퀴엠이 나타나 영지가 쑥대밭이 되는 미래도, 주인공 카인의 검에 참수당하는 악몽도 사라졌다.
지금부터 내가 만들어 갈 시간은 원작엔 없던 것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새로 얻은 삶을 즐기는 것뿐.'
그리고 나는 지금의 상황이 몹시 마음에 들었다.
일단 이토록 아름답고 건강한 육체를 가졌다는 것. 거기에 레퀴엠까지 손에 넣었으니 성장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
'이미 원작에서 최강이 되었던 몸이니, 그 미래가 달라지진 않겠지.'
아니, 오히려 더 빨리 찾아올 것이다. 원작보다 더욱 안정적이고 발전된 형태로.
그뿐인가.
'의식주도 완벽하고.'
늘 하인들이 달라붙어 의복 및 몸 관리에 신경 써 준다. 제철 재료를 사용한 푸짐한 식사가 끼니 때마다 차려지고, 침대는 구름처럼 푹신한 데다 가구에는 먼지 하나 없다.
제국 서쪽의 거대한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의 아들이라는 자리는,
'확실히 이름값을 하는군.'
나는 이 호사로운 삶을 보다 열심히 즐길 계획이었다. 맛있는 음식을 더 많이 자주, 끊임없이 먹는 것으로써 말이다.
'고생은 조리장이 하겠지.'
나는 식탁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부른 배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수레에서 후식 접시를 집어드는 막스를 바라보았다.
'좀 야위었나?'
돼지처럼 투실투실하던 살집이 약간 줄어들었다. 요근래 내가 이런저런 요구를 많이 해서 그런 듯한데.
'그동안 편하게 살긴 했지.'
영주가 원체 성에 자주 오지 않는데다, 아내 또한 병사했다. 유일한 직계 후손인 아벨은 입이 짧은 편이었다.
덕분에 막스는 성내에서 꽤 중책을 맡고 있음에도 한가하게 지내곤 했다.
'뭐, 내가 아무리 먹어 봐야 영주 일가를 모시는 것보단 쉬울 텐데.'
나는 심술궂은 미소를 지으며 몸을 바로 세웠다.
"여기 레몬 셔벗, 푸딩 및 사블레입니다."
막스가 내 앞에 후식 접시를 척척 내려놓았다.
"남부 해안에서 자라는 레몬을 공수해 왔습니다. 하루 동안 숙성하면 새콤한 맛이 더욱 강해지고, 달콤한 향이 더해져 디저트로 애용되는 재료입니다."
막스는 내 까다로운 입맛에 거슬리지 않을 요리를 만들어 내는 실력자였다. 또한 눈치껏 내 비위를 맞출 줄 아는 노련함도 갖췄다.
"수고했어."
만족한 나는 웃으며 레몬 푸딩을 포크로 잘라 입에 넣었다.
"맛있네."
짧게 치하를 건네자 막스의 낯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도련님."
그가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덧붙였다.
"갑자기 즐겨 드시지 않던 새콤한 디저트를 찾으셔서 좀 당황했지만, 다행히 저장고에 충분한 재료가 있었습니다. 앞으로 이런 일이 없도록 만전을 기하겠습니다."
나는 푸딩을 우물우물 씹어 넘기다가 물었다.
"내가 예전엔 새콤한 맛을 싫어했나?"
"예."
막스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맛이 나는 재료는 물론이고, 톡 쏘는 맛의 과일조차 무척 싫어하셨습니다. 그래서 되도록 후숙시켜 단맛이 강해진 재료를 사용했습지요."
"음, 그랬지."
나는 그 순간 아벨의 아버지, 디에고를 떠올렸다.
'그래서 그랬나.'
이상할 정도로 나를 빤히 쳐다보던 그를. 아들의 입맛이 변했다는 걸 알아챘던 것일까.
'두고 보면 알겠지.'
나는 마지막 디저트 접시를 향해 손을 뻗었다.
"다 나가."
내 명령에 하인들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시중 필요 없으니까 나가라고. 전부."
그제야 하인들은 물론이고, 막스와 필립까지 모두 식당에서 빠져나갔다.
"...."
그동안 나는 눈을 감고 감각에 집중했다.
'확실히, 달라졌군.'
레퀴엠을 손에 넣은 후 내 몸에 찾아든 또 다른 변화.
서서히 멀어지는 하인들의 발걸음, 점차 냉기를 잃고 녹아내리는 셔벗, 코끝을 희미하게 찌르는 이런 저런 냄새들이 보다 생생하게 느껴진다.
'예전보다 감각이 예민해졌어.'
이는 내 몸이 이전 단계보다 몇 단계는 뛰어올랐음을 의미했다. 그렇다는 건,
"흐음."
나는 들고 있던 포크에 힘을 주었다.
까드득.
단단한 금속으로 만들어진 포크가 손쉽게 구부러졌다.
'역시 근력에도 영향이 있군.'
나는 곧 강렬한 호기심에 사로잡혔다. 내가 이전에 비해 얼마나 강해졌는지 몹시 시험해보고 싶었다.
'마침 좋은 상대가 있지.'
나는 미소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완벽히 쪼그라든 포크를 바닥에 팅, 내던지곤 식당을 나섰다.
몇 시간 뒤.
"좀 빨리 와버렸네."
나는 리암과 늘 만나던 마구간에 서 있었다. 이미 가득 찼던 배는 꺼진 뒤 오래였다.
"끝나고 가서 간식이나 좀 먹을까."
배를 통통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막스가 들었다면 머리를 쥐어뜯을 만한 생각이었다.
마구간 벽에 기대어 시간을 보내길 잠시.
'온다.'
나는 살짝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시야에 들어오는 인물은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저벅, 저벅]
리암의 걸음을 따라 바닥에 스며드는 발소리,
[두근, 두근]
일정한 속도로 가볍게 뛰는 그의 심장 소리,
[후우.]
나직한 숨소리.
그리고 국경선 너머의 찬 바람이 품은 냄새, 가죽과 쇠의 냄새, 그리고 희미한 피냄새까지.
'이거 굉장한데?'
Chapter 3. 여유로운 척 배짱을 부린다. (6)
일반인이라면 결코 인식할 수 없는 정보가 밀려들어 온다. 예전이라면 듣지 못했을 소리를 잡아채고, 맡지 못했을 냄새를 감지할 수 있다.
가히 짐승과도 같은 감각이었다.
무엇보다,
"...."
나는 눈을 감고 뱃속 깊이 자리 잡은 공허에 집중했다. 그것을 살살 달래어 밖으로 조금씩 분출했다.
새카만 실 같은 것이 몸 주변으로 풀려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느껴진다.'
실이 닿는 범위 내에 있는, 생명체의 존재가 전부.
절대 영역.
레퀴엠이 최강, 최악의 검이라고 불리는 이유 중 하나. 적의 접근 자체를 허용하지 않는 광활한 감지 범위.
원작에서의 아벨은 이를 평소에 숨 쉬듯이 구사했다. 마치 패시브 스킬처럼.
'그래서 제국군이 손끝 하나 댈 수 없었지.'
기습도, 은신도 통하지 않는다. 이 레퀴엠의 절대 영역 안에서 자신을 감출 수 있는 생명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직은 범위가 얼마 되지 않지만.'
이는 내가 레퀴엠의 사용에 익숙해지면 자연스레 해결될 문제였다. 지금은 사용할 때마다 힘이 많이 빠져나가 오래 유지하기도 어려웠다.
나는 절대 영역을 거둬들인 뒤, 현재 내게 가장 가까운 사람을 돌아보았다.
"왔냐."
"아벨 도련님."
마구간으로 접근하던 리암이 멈추어 섰다.
"웬일로 먼저 와 계십니까."
"그냥."
리암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마저 다가왔다.
"원래 안 그러시던 분이...."
리암의 발걸음이 다시 멈추었다.
"도련님?"
"왜."
리암이 나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뭔가 좀, 달라지신 것 같은데요."
자식, 눈치 한번 빠르긴.
일전에 필립도 나를 보곤 멈칫거리는 기색을 보였다. 아무래도 레퀴엠을 손에 넣은 것의 영향인 것 같았다.
"기분 탓이겠지."
이럴 때는 무조건 잡아떼는 것이 최고다.
"아닙니다. 분명히 뭔가가,"
"내가 잘생긴 게 하루 이틀 일인가? 아부는 그만둬."
퉁명스러운 대꾸에 리암의 얼굴이 꾸깃 구겨졌다.
"그런 뜻으로 드린 말씀이 아닙니다만."
"아니면, 뭐 키라도 자랐겠지. 난 한창 성장기인데."
"...."
리암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그가 나를 더 꿰뚫어 보기 전에 냉큼 화제를 돌렸다.
"됐고, 대련이나 시작하지. 너무 오래 쉬었어."
"...예."
리암이 마지못해 대답하곤 들고 온 목검을 집어 들었다.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하겠습니다."
"시작해."
나는 마찬가지로 목검을 들고 섰다. 오베스트 검술이 몸에 밴 탓에,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자세가 잡혔다.
"갑니다."
리암이 검을 꼬나 쥐고 내게 달려들었다. 그의 목검이 공기를 가르며 쇄도했다.
'...어?'
나는 눈을 깜박였다.
리암이 아주 느리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모든 동작을 내게 다 보여주겠다는 듯이.
'이건 설마.'
그 순간 깨달았다.
리암이 느린 게 아니라, 내 감각이 그만큼 빨라졌다는 것을. 그래서 이 모든 자극을 느릿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보인다.'
리암이 내 몸의 어디를 노리고 있는지, 그래서 몸을 어떻게 움직일지.
그걸 막지 않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탁.
리암의 목검이 내게 닿기도 전에 가로막혔다.
"...?!"
리암의 눈이 확장되었다. 그가 믿기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뭐하신 겁니까?"
"막았는데?"
리암의 안색에 당혹감이 짙어졌다.
"닿지도 않았는데요?"
"지금 내 오른 어깨 노리고 들어온 거 아니야?"
"맞습니다만."
리암이 검을 떼고 한 걸음 물러섰다. 그가 내 말을 가늠하듯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다시,"
이윽고 그가 입을 뗐다.
"다시 해보시죠."
리암은 얼굴의 당황을 지워낸 뒤 재차 공격을 시도했다. 하지만 결과는 매번 똑같았다.
"..."
그의 공격은 내게 접근하기도 전에 차단당했다. 검을 뻗을라치면 시작점부터 멈추고, 휘두르기 전에 가로막혀 전진할 수 없었다.
"이게 도대체?"
리암이 검을 늘어뜨리며 내게서 물러섰다.
"도련님,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아니,"
그는 급기야 심각해진 낯으로 이렇게 물었다.
"당신 누구야? 아벨 도련님 맞아?"
아니, 아무리 달라졌어도 딴 사람 취급은 좀. 그리고 말투는 또 저게 뭐야. 아주 기회는 지금이다 싶은지 득달같이 달려드네.
"미쳤냐? 죽고 싶어?"
보다 못해 눈을 부라리자 리암이 주춤했다.
"아벨 도련님 맞으시군요."
"그럼 맞지, 누구겠냐."
리암이 얼른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가 알던 도련님과 너무 달라서...."
그가 고개를 번쩍 들고 나를 뜯어보았다.
"그간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몰라보게 실력이 오르신 것 같은데요."
"그런가? 잘 모르겠는데."
나는 일부러 눈가를 찌푸리며 시치미를 뚝 뗐다.
"허."
리암이 이럴 리가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모르는 척 검을 흔들었다.
"뭐해? 계속하자고."
이후 상황은 앞선 대련의 반복이었다. 리암의 공격은 계속해서 무의미한 시도로 되돌아갔고, 그럴 때마다 리암의 얼굴에 낀 먹구름이 짙어졌다.
나는 속으로 히죽히죽 웃었다.
'아, 재밌다.'
첫 대련 때 리암의 겨드랑이를 때린 이후, 단 한 번도 그에게 유효한 공격을 하지 못했다.
아니, 그의 옷깃조차 스치지 못했다. 그저 압도적인 공세를 방어하는데만 급급할 뿐.
하지만,
'지금이라면.'
어쩐지 그 이상을 노려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잠깐."
나는 웃으며 뒤로 크게 한 걸음 물러섰다.
"-?"
리암이 검을 멈추곤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그를 지긋이 바라보며 검을 편히 늘어뜨렸다.
호흡은 흐트러짐 없이 평안했고, 팔은 검을 몇백 번이고 더 휘두를 수 있을 것처럼 쌩쌩했다.
금방 지쳤던 예전과는 달랐다. 그 사실이 내게 더 자신감을 주었다.
"전에 나를 다치게 하면 안 된다 했었지?"
"예."
"그거 취소할게."
나는 리암의 호수 같은 눈동자에 커다란 바위를 던져 넣었다.
"진짜 죽일 각오로, 날 공격해 봐."
"...."
리암의 눈동자가 크게 출렁였다.
이윽고 그가 흔들리는 눈동자를 가라앉혔다. 그리고 차게 굳은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지금 본인이 무슨 말을 한 건지 아십니까?"
"정확히 알고 있어."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하지. 행여나 내가 다치더라도 네게 책임을 묻지 않겠다."
"...."
"그리고, 네가 받을 돈이 줄어드는 일도 없을 거다."
리암의 턱이 바짝 당겨졌다가 이내 풀어졌다.
"진심이십니까?"
"물론. 내가 언제 빈말하는 거 봤어?"
"...."
그는 내 속내를 가늠하듯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가문의 이름을 걸고?"
나 참, 그렇게까지 나를 못 믿나. 하긴 그간 아벨이 한 짓을 보면 불신이 쌓일 만하긴 했지만.
나는 콧방귀를 뀌면서도 선선히 대답했다.
"그래."
"...."
그제야 리암의 굳었던 얼굴이 조금 풀렸다. 그가 천천히 검을 고쳐 쥐었다.
"그러시다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그 순간 그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드디어 이 버릇 없는 도련님을 흠씬 두들겨 줄 수 있겠군.'
라고 말하고 있었다.
'요놈 봐라?'
나는 그것을 읽고 픽 웃었다.
다음 순간, 리암의 눈에서 강렬한 투지가 뿜어져 나왔다.
"후회하실 겁니다."
팟!
그의 신형이 사라졌다. 아니, 예전의 나라면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보인다.'
지면을 박차고 달려드는 리암이.
그의 움직임이, 팔 근육의 미세한 꿈틀거림이, 휘어지는 손목의 각도가 모두 선명하게 보였다.
심지어,
'느려.'
마치 순간순간을 길게 늘인 듯이, 그 흐름이 모조리 눈에 들어왔다.
리암은 일종의 정지 화면처럼 내 앞에 서 있었다. 나와 대련하던 그 어느 때보다도 가장 활기 있고 의욕에 가득 찬 얼굴로.
'나를 그렇게 패고 싶었나 보군.'
나는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렸다. 그리고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후회할 거라고 했던가?'
아마 그 대상은 내가 아닐 것이다. 이 싸움의 끝이 내 눈엔 훤히 보였다.
탁.
나는 리암의 검을 가볍게 막아냈다.
"...."
앞서 반복되어 왔던 일인만큼, 리암은 이 상황을 어느 정도 예상한 눈치였다.
그가 이번엔 손에 힘을 주어 나를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예전이라면 검을 미끄러뜨려 자리에서 벗어났겠지만.
'어디 한번 볼까.'
오늘은 그러지 않을 생각이었다. 나는 손에 힘을 주었다.
리암의 검을 막아낼 때부터 느끼고 있었다. 내 근력이 그에 맞설 만큼 강해졌다는 것을.
아니, 넘어서고 있다는 것을.
"-!"
리암의 눈이 더욱 커졌다. 그는 내가 조금도 밀리지 않고 제 검을 받아낸다는 것에 몹시 충격을 받은 듯한 얼굴이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이를 악물었다. 다음 순간 검에서 전해지는 압력이 한층 강해졌다.
"...."
나는 입가에 걸린 미소를 유지했다. 그리고 천천히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놀랍게도, 그리고 리암에겐 아쉬운 일이지만.
나는 아직 여유로웠다. 한참이나.
"...무슨!"
리암이 입을 떡 벌렸다. 그는 조금씩 밀려나는 제 검을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말도 안 될 건 뭐야."
나는 빙글빙글 웃었다.
"체력 훈련, 하고 있다고 했잖아?"
리암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입을 뻐끔거렸다.
"그게, 그런."
그러는 동안에도 내 검은 착실히 그를 밀어내고 있었다. 마침내 그의 팔이 완전히 접히기 직전, "큿!"
리암이 힘을 주어 나를 확 밀어냈다. 날카로운 금속성과 함께 그와의 거리가 벌어졌다.
"...."
리암이 씨근거리며 나를 노려보았다. 그의 눈엔 감출 수 없는 패배감이 짙게 어려 있었다.
"정말, 도련님께서는."
이윽고 리암은 제 눈 위에 평정심을 덮어씌웠다.
"저를 여러 번 놀라게 하시는군요."
못내 감정을 갈무리하지 못했는지 씹어뱉는 듯한 음성이었다.
"제자의 성취가 기쁘지 않나?"
나는 빙그레 웃었다. 리암이 입술을 씰룩이더니 대꾸했다.
"기쁩니다."
저런. 전혀 기쁘지 않은 듯한 말투인걸.
리암은 몹시 불편해 보였다. 자신이 힘으로 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을 터였다.
"마저, 가겠습니다."
그가 마음을 굳힌 듯 자세를 고쳤다.
'아하.'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힘으로 안 된다면 아마,
'기술로 승부를 보려나 보군.'
국경에서 수십 번 사선을 넘어왔을, 오베스트 기사단에 오래 몸담은 그에겐. 내게 아직 보여주지 않은 2식, 3식의 검술이 있다.
과연, 리암이 검을 쥔 자세는 이전과는 달랐다.
'저게 2식인가.'
하단이 취약하다는 1식의 단점을 보강하고, 한층 공격력을 강화한 안정적인 검술.
그 시작점이 리암의 검 끝에서 발휘되기 시작했다.
"이것도 받아내 보시죠."
과연 네가 할 수 있을까? 라고 말하는 듯한 말투였다.
"오기나 해."
물론 나는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쌔액-
리암의 검이 내 손목을 노리고 섬광처럼 날아들었다.
'어깨!'
나는 그의 약점을 또렷하게 읽어냈다. 아니, 읽어내려 하지 않아도 보였다.
턱.
가볍게 검의 옆면으로 리암의 검을 막아내고,
"-!"
힘을 주어 검을 한 바퀴 돌려 비튼다.
"엇...!"
놀란 리암이 소리를 뱉었다.
깡!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리암의 검이 허공을 날았다.
푹.
검은 빙그르르 원을 그리며 날아가 흙바닥에 꽂혔다.
Chapter 4. 약한 놈부터 쫓는다. (1)
"이, 무슨!"
리암의 안색이 충격으로 하얗게 질렸다. 그는 자신이 검을 놓쳤다는 현실을 믿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흔들었다.
"이건, 이건...!"
"앞으론 진검을 쓰도록 하지."
나는 쥐고 있던 목검을 바닥에 팍 꽂았다.
"그리고, 하루에 하나씩 다른 검술을 보여주는 것으로."
거기에, 기대어 선 채 느긋하게 물었다.
"어때?"
리암의 얼굴이 볼썽사납게 일그러졌다. 그건 아마도, 그가 내게서 보고 싶어 했을 그런 얼굴이었다.
나는 그것을 즐겁게 감상했다.
'기분 째지네.'
압도적인 무력으로 타인을 압살하는 것. 그것은 너무나 황홀한 감각이었다.
'이 정도라면, 해볼 만하겠어.'
나는 웃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 목검이 아닌 다른 것을 쥐고 싶어 손이 근질거렸다.
❖ ❖ ❖
다음 날.
나는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마친 뒤 집무실로 돌아왔다. 막 첫 번째 서류를 집어 드는 내게,
"도련님."
필립이 걱정스러운 어투로 말을 걸었다.
"속은 괜찮으십니까?"
"뭐가?"
"그, 원래 아침엔 속이 불편하다며 많이 안 드셨지 않습니까. 요새 식사량이 조금 느셔서, 괜찮으신지 여쭤봤습니다."
필립의 '조금'이라는 표현에는 어폐가 있었다. 요근래 내가 밥 먹는 모습은 거의 걸신들린 수준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딱히."
나는 짧게 대꾸한 뒤 여상스레 물었다.
"막스가 힘들어 하나?"
"그, 그럴 리가요!"
필립이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아닙니다, 절대로요. 감히 도련님께서 식사를 즐기시는데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그는 거듭 고개를 내저으며 절대 아니라고 강조, 또 강조했다.
"막스는 절대 힘들어하지 않았습니다. 절대, 절대로요."
"...."
"부디 그의 충정을 의심하지 말아 주십시오. 도련님도 아시잖습니까. 그가 얼마나 도련님께 충성을 다하는지."
"물론, 알지."
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었다.
'그냥 물어본 건데.'
그는 내가 레퀴엠을 손에 넣은 이후로 확연히 공손해진 경향이 있었다. 물론 그전에도 깍듯하긴 했지만, 지금은 뭐랄까.
'아예 내면 깊숙이 굴복한 느낌?'
필립은 검술 및 무력과는 통 인연이 없었다. 그러나 눈치만은 비상하기에 내가 무언가 달라졌다는 것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어쨌건 내겐 반가운 변화였다. 나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인물을 성에 둘 생각이 없었다.
"다음 서류는?"
"여기 있습니다."
나는 그 후로 별말 없이 서류 작업에 집중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막스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막스가 채워 주지 못하는 나의 공허에 대해서.
'언젠가 터진다.'
본능적인 예감이었다.
지금은 잔잔하게 밀려드는 파도 같은 이것이, 언젠가는 막을 수 없는 거대한 해일이 되리라는 예감.
나의 통제는 결국 레퀴엠을 일시적으로 억누른 것에 불과하다. 아무리 억누른다 한들 이토록 강력한 검을 완벽히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득 차오른 공허는 결국 나라는 둑을 넘어 쏟아지고 말 것이다.
'해소해 줄 필요가 있겠어.'
차라리 수도꼭지를 만들어 평소에 조금씩 물을 흘려보낸다면.
레퀴엠의 강력한 힘을 이용하면서도, 안정적으로 자아를 유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흠...."
나는 도장을 찍던 손을 멈추고 턱을 톡톡 두드리기 시작했다.
"...."
필립의 낯에 긴장이 어렸다. 그는 나의 이 행동이 집중했을 때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정확히는, 안 좋은 쪽으로 집중했을 때.
"필립."
"예."
"저번에 노예 구해 온 거, 어떻게 했지?"
필립은 긴장을 풀지 않은 채 곧장 대답했다.
"말씀하신 대로 전부 풀어 주었습니다."
"전부?"
"예. 현재 '그곳'은 노예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래? 잘했군."
내 칭찬에 필립이 긴장을 조금 내려놓았다.
"지금껏 노예들은 어디서 구해 왔지?"
하지만 내가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 순간,
"-!"
필립의 얼굴에 낭패감이 떠올랐다. 그는 제 치부가 드러난 것처럼 몹시 곤란해 하며 이마의 식은땀을 훔쳐냈다.
"어서."
그러다 내 채근에 겨우 입을 열었다.
"그것이, 그러니까. 노예상을 통해 구매했습니다."
"그놈들하곤 어떻게 만났는데?"
필립의 눈이 세차게 진동했다.
"도, 도련님."
그는 내 질문의 의도를 곡해하곤 허둥지둥 변명을 주워섬겼다.
"염려 마십시오. 그놈들을 만날 땐 철저하게 제 정체를 숨겼습니다. 제가 킨드리얼 가문의 집사라는 건 절대 알지 못할 겁니다."
"그래, 그래."
나는 건성으로 대꾸한 뒤 다시 물었다.
"그래서 그놈들하고 어떻게 만나냐고."
필립이 멍청한 얼굴로 눈을 끔벅거렸다. 나는 턱을 괴곤 신랄한 말투로 물었다.
"내가 못 물을 걸 물었나? 그냥 궁금해서 그래."
'그러니까 왜 그게 궁금하신데요?'
그렇게 말하고 싶은 듯 보였지만 필립은 눈으로만 묻고 차마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자세히 설명해."
그가 눈을 데굴데굴 굴리더니 결국 자세히 털어놓았다.
"그놈들과는 카데르 영지에서 접선했습니다. 보통 전서구를 보내 구매 의사를 알리고...."
"흐음."
나는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설명에 집중했다. 그리고 그의 설명이 내가 아는 정보와 대부분 일치함을 확인했다.
"그렇군."
필립의 설명이 끝나자, 나는 턱을 괸 채 손가락으로 뺨을 툭툭 두드렸다.
필립이 내 눈치를 살폈다.
"도, 도련님. 노예가 더 필요하신 거라면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굳이 도련님께서 번거롭게 거기까지...."
나는 필립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서류에 도장을 마저 찍었다. 그것이 내 손에 남은 마지막 서류였다.
"이게 끝?"
"...예, 그렇습니다."
필립이 계속해서 불안한 시선을 보냈지만 무시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가 얼른 따라붙었다.
"오늘도 방으로 가십니까?"
그동안 내가 '응'이라고 대답했다면,
"아니."
오늘은 달랐다. 평소와 반대되는 내 대답에 필립의 낯이 파리하게 질렸다.
"네? 그럼 어디로...?"
"겉옷 가져와."
나는 씩 웃으며 손짓했다.
"성 잘 보고 있고."
항상 내 기준에서 상큼한, 필립 입장에서는 오한이 드는 그 미소를 지으며.
❖ ❖ ❖
푸른 깃털을 가진 새 한 마리가 하늘을 갈랐다. 새의 다리에는 흰 쪽지가 단단히 동여매여 있었다.
새는 곧장 한 건물의 창문으로 날아들었다.
휘익.
창가에 서 있던 남자, 모리츠가 휘파람을 불었다. 새는 그가 들어 올린 팔 위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모리츠가 새의 다리에 묶인 전서구를 풀어냈다. 내용을 확인한 그의 입가에 날카로운 미소가 스쳤다.
"역시나."
그는 복도로 나가 옆방의 문을 두드렸다.
"어이, 노아. 주문 들어왔다."
"예, 나가요."
방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이십 대의 앳된 외모를 가진 청년이었다.
"어디로 가면 됩니까?"
"7번지 골목으로."
"아, 거기요."
노아의 눈이 교활한 빛으로 번득였다.
"그 저번에 다섯 명 요청한 거기 아니에요?"
"맞아."
"이번엔 몇 명 달래요?"
"이번에도 다섯 명."
노아가 눈을 크게 뜨며 놀라는 시늉을 했다.
"우와. 역시 우량 고객. 구체적인 요구는 없고요?"
"그냥 다섯 명이면 된다는군."
"아하. 그럼 바로 가겠습니다."
노아는 이미 채비를 마친 듯 밖으로 나가는 문 앞에 섰다. 문고리를 잡는 그에게 모리츠가 물었다.
"그 고객님, 누구인지 알지?"
"알죠, 당연히."
노아는 입이 찢어지게 씩 웃었다.
"너무 티 나던데요."
모리츠 또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마주 웃었다.
"그래. 그러니까 심기 거스르지 말고 잘해 드리라고."
"아무렴요. 그분들 비위 살살 맞추는 건 제 전문 아닙니까."
둘 사이에 비밀스러운 미소가 오갔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노아는 인사를 한 뒤 아래층으로 향했다. 경계를 서고 있는 동료들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갔다.
"다섯 명. 나이나 성별 상관없습니다."
벽에 난 작은 창에 대고 말하자, 옆의 문이 드르륵 열렸다.
"들어와."
얼굴에 길게 칼자국이 난 험상궂은 인상의 남자가 손짓했다. 노아는 그를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핏빛 할버드의 브루노.'
브루노의 이름은 뒷세계에서 꽤 유명했다. 그의 거대한 할버드는 칼날이 붉은색인데, 원래는 그 색이 아니었다고 한다.
'하루도 피가 마르지 않는 탓에 색이 변했다던가.'
노아는 그에 대한 소문을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다섯 명, 확인해."
브루노가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옆에는 남자 노예 셋, 여자 노예 둘이 서 있었다. 겉보기에 외상은 없고 팔다리도 모두 멀쩡히 붙어 있었다.
다만 심적으로 큰 충격을 받은 듯 다들 안색이 핼쑥했다.
"다들 얼굴 안 펴? 초상났어?"
브루노가 으르렁거리자 노예들이 몸을 바로 세웠다.
"오갈 데 없는 것들을 주워다가 먹여 주고, 입혀 주고, 재워 줬으면 감사한 줄 알아야지. 이제 새 주인까지 만나게 해주는데, 어?"
브루노는 계속해서 사나운 말투로 노예들을 윽박질렀다.
"하여간 은혜도 모르고 말이야."
그가 눈을 부라리자, 노예들이 앞다투어 머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식사는 멀건 죽, 그나마도 건더기는 손에 꼽았다. 옷은 길거리에 버려진 옷을 주워 입혔다. 잘 때는 좁은 방에서 다들 꽉꽉 끼여 옴짝달싹도 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 감사라니.'
노아는 내심 혀를 찼다.
자신도 그리 깨끗한 사람은 아니지만, 제 앞의 남자는 정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종인 것 같았다.
그는 이 상점의 '상품'을 조달하는 역할을 했다. 길 잃은 아이, 가출한 청소년, 도망치는 창녀 등을 납치해 노예로 삼았다.
지금껏 이런 식으로 그가 생산한 노예의 수를 세려면 열 손가락으로도 부족했다.
'뭐, 내 알 바 아니지만. 난 돈만 받으면 되니까.'
노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사무적인 표정으로 노예들을 훑었다.
그들에게 이미 이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그저 상품일 뿐이었다.
"확인했습니다."
"가라."
"안녕히 계세요."
노아는 예의 바르게 인사를 남김 뒤 노예들을 끌고 나왔다. 그들을 마차에 싣고, 처리를 마친 뒤 마부와 함께 마부석에 올라탔다.
"카데르로 가죠."
마차가 달그락거리며 길 위를 달려가고, 그동안 노아는 마부석에 기대어 생각에 잠겼다.
'정말 꾸준히도 사가는군.'
이 고객은 늘 잿빛 로브를 쓰고 나타났다. 그래서 그의 이름도 얼굴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나이 든 목소리, 그리고 말투로 미루어 중년의 남자임을 알 수 있었다.
'호구가 따로 없어.'
그는 늘 노아가 부르는 대로 돈을 지불했고 가격에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흥정을 하거나 상품을 자세히 살피지도 않았다.
그저 이 자리에 억지로 나왔다는 듯, 내키지 않는 태도로 서둘러 거래를 마치곤 했다.
'덕분에 수익이 짭짤했지.'
노아는 그간 웃돈을 얹어 노예를 팔았다. 그렇게 생긴 차익은 마부에게 입막음 비용으로 일부 건네고, 나머지는 제 배를 채웠다.
그렇게 여러 거래를 거치면서 그는 나름 고객의 정체를 눈치채고 있었다.
'귀족을 모시는 하인일 게 분명해.'
노아과 같은 뒷골목 인간들이 쓰는 것과는 다른 고풍스러운 말투. 노아를 조금 꺼리는 듯하면서, 약간의 거드름을 피우는 것까지.
'옷도 꽤 고급스러운 걸 입고.'
그가 걸친 로브는 결코 싸구려가 아니었다. 게다가 돈을 건넬 때마다 슬쩍 보이는 소맷단이나 로브 아래로 보이는 깔끔하게 다려진 바짓단, 그리고 고급스러운 신발까지.
이쯤 되면 모르는 게 멍청할 지경이었다.
'조금만 더 캐보면 정체를 알 것 같은데.'
노아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Chapter 4. 약한 놈부터 쫓는다. (2)
정보는 자산이다. 귀족 가문에서 노예를 사들인다는 정보는 특히 가치가 있었다.
귀족의 지원-강제적인-을 등에 업고 더욱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지금은 이런 촌구석에서 노예 뒤치다꺼리나 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수도의 '본점'까지 진출해 그곳에서 수하들을 호령하는 상급 직원이 되고 말리라.
어느 화창한 가을 오후, 노아는 그런 꿈을 꾸었다.
"이랴."
마부가 서서히 마차를 세웠다. 약속 장소는 카데르 영지의 허름한 7번지 길목이었다.
'오늘도 잘 뜯어 볼까.'
노아는 콧노래를 부르며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모퉁이를 돌아 고객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는 늘 자신보다 먼저 도착해 있었으며, 주변의 시선을 피해 몸을 움츠리곤 했다.
'음?'
노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늘 고객이 서 있었던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뭐야? 설마 일방적으로 약속을 깬 건가?'
어처구니가 없어 주변을 돌아보는데,
"여어."
낯선 목소리가 그를 불러세웠다.
뒤를 돌아보자, 익숙한 잿빛 로브를 걸친 사람이 벽에 기댔던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어라?'
노아는 놀란 기색을 감추며 남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목소리가 다른데?'
젊은 남자의 미성이었다. 나른하게 흩어지는 끝소리가 무척 매력적이었다.
"누구십니까?"
노아의 질문에 청년이 고개를 까딱거렸다.
"숟가락 사러 왔는데."
숟가락은 뒷세계에서 노예를 가리키는 은어였다.
"숟가락이요?"
노아는 일부러 못 알아들은 척 되물었다.
'혹시 모르니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그의 신중한 성격은 이 험난한 뒷세계에서 그를 살아남게 해주었다.
알고 있던 고객 대신 다른 이가 나타났으니 주의해야 마땅했다. 어쨌건 노예 거래는 제국에서 불법이니까.
"퍽 조심성이 많군?"
청년이 픽 소리 내어 웃었다.
"여기서 숟가락 다섯 개 팔기로 했잖아. 아냐?"
그리곤 팔짱을 끼며 몸을 비스듬히 기울였다.
"원래 오려던 할아범이 일이 생겨서 내가 대신 왔어. 이러면 됐나?"
"아."
노아는 그제야 경계를 풀었다. 다섯 명을 산다는 정보에 원래 고객의 정보까지 알고 있으니 확실했다.
"그러셨군요. 죄송합니다. 이 일이 워낙 조심스럽게 진행되다 보니."
"음, 그래. 그럴 만하지."
퍽 선심을 쓴다는 듯이 관대한 동의였다. 이런 식의 사과를 받는 게 익숙해 보였다.
노아는 그제야 로브를 쓴 청년을 자세히 살폈다.
자신보다도 훨씬 훤칠한 키, 호리호리하지만 균형 잡힌 단단한 체격이 로브 너머로 느껴졌다.
보이진 않지만 로브 속의 얼굴도 꽤 미형일 것 같았다.
노아는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혹시 원래 오시기로 한 고객님과 어떤 관계이신지요?"
"그게 중요해?"
"네?"
청년은 퉁명스러운 말투로 대꾸했다.
"숟가락만 사고팔면 되잖아. 남자랑 수다 떠는 취미는 없으니 넘어가지?"
"아.... 알겠습니다."
노아는 얼떨떨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리고 가시처럼 돋아나는 감정을 고개를 숙여 감추었다.
'이 새낀 왜 계속 반말이지?'
예전의 중년 고객이 노아를 껄끄러워할지언정 함부로 하지는 않았다면, 이 청년은 달랐다. 건들건들한 태도와 시건방진 말투로 사람의 속을 긁었다.
'후.... 진정하자. 고객이다, 고객.'
노아는 울컥했던 스스로를 가라앉혔다. 어쨌건 그는 서비스 정신에 충실했다.
'저놈 말이 맞아.'
그의 마음속에서 눈앞의 청년은 놈으로 격하되어 있었다.
'중요한 건 거래지.'
무엇보다 이 청년은 꾸준히, 그리고 많은 노예를 사가는 우량 고객을 뒤에 두고 있었다. 그의 심기를 거스를 필욘 없었다.
"네, 맞는 말씀이십니다."
노아는 재빨리 얼굴에 미소를 장착했다.
"상품은 다섯 개. 따로 요청사항은 없으셔서 일반 숟가락으로 준비했습니다."
이 또한 은어의 한 종류였다. 금수저, 은수저, 흰수저 등 노예의 특성에 따라 이름을 달리 붙였다.
"그럼 거래를."
노아는 그리 말하고 청년을 기다렸다. 정확히는 그가 품에서 꺼낼 돈을.
이렇게 말하면 노인 고객은 늘 미세하게 떨리는 손으로 품에서 돈주머니를 꺼내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일이 다르게 흘러갈 모양이었다.
"상품을 보고 싶은데."
청년은 품에서 돈을 꺼내는 대신 말했다.
"네?"
"상품도 안 보고 돈을 내는 병신이 어딨어? 이 안에 든 게 포크인지 나이프인지 어찌 알아?"
노아는 아까 가라앉혔던 화가 다시 올라오는 걸 느꼈다.
'...이 새끼가 진짜?'
정말이지 사람 속을 긁는 데 도가 튼 녀석이었다.
'고객이다, 고객.'
그는 아까부터 주문처럼 반복하던 말을 씹어 삼켰다. 와작와작 씹어 가루가 된 후에야 진정할 수 있었다.
노아는 겨우 감정을 감추고 서운하다는 듯 울상을 지었다.
"저희를 못 믿으시는 겁니까? 지금껏 거래에 문제는 없었습니다만."
"믿긴 하지."
청년이 퍽 안 믿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그냥 확실히 하자는 거야. 혹시나 문제라도 생기면 경을 치는 건 나라고."
그러곤 영 껄끄럽다는 듯이 덧붙였다.
"내 주인께서는 성미가 아주 고약하시거든."
노아는 호기심이 동하는 것을 느꼈다. 늘 궁금해했던 고객에 대한 실마리를 비로소 잡은 느낌이었다.
'이 녀석을 잘 구슬리면 정보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노아는 얼른 실실 웃으며 청년의 비위를 맞췄다.
"아, 그러시다면야. 알겠습니다."
노아는 앞장서서 청년을 마차로 데려갔다.
"같이 보시지요."
주렁주렁 허리에 들고 다니는 열쇠를 3개씩 차근차근 꽂자, 비로소 굳게 잠겨 있던 문이 열렸다.
"호오."
청년이 콧소리를 흘리며 마차로 가까이 다가섰다.
마차 안에는 다섯 명의 노예들이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안대는 당연하고, 손목과 발목에 재갈을 물려 두어 도망치지 못하게 해두었다.
노아는 친절히 설명을 시작했다.
"오기 직전 약을 먹여 둬서 아직 약효가 도는 상태입니다. 혹시 이동하는 데 시간이 걸리신다면 약을 추가로 드리겠습니다. 귀택으로 돌아가신 뒤 해독제만 먹인다면 곧 쌩쌩해질 겁니다."
그리고 은밀히 눈짓하며 덧붙였다.
"물론 주인의 취향에 따라, 약에 젖은 상태가 좋다면 그대로 두셔도 무방하지요."
청년은 잠시간 말이 없었다. 그저 옅은 저녁놀에 비추어 노예들의 상태를 꼼꼼히 살필 뿐이었다.
"흐음."
그러더니 갑자기 성큼 마차 위로 훌쩍 올라섰다. 노아는 화들짝 놀라 마차 위로 뛰어 올라갔다.
"지금 뭐하시는...!"
"가까이서 좀 보려고."
청년은 그리 말하곤 노예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곤 말 그대로 그들을 꼼꼼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허, 참.'
그 모습을 보며 청년은 혀를 내둘렀다.
'여간 강심장이 아니네.'
보통 사람들은 마차 안에 널브러진 노예들을 보고 기겁했을 것이다.
한 인간이 모든 인권과 자아를 상실한 채 상품으로 전락한 모습은, 썩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다.
그래서 원래 거래하던 중년인은 노아가 마차를 열 때마다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리곤 했다.
'애초에 그 인간이라면 노예를 보자는 말조차 하지 않았겠지만.'
노아는 그리 생각하고 있다가 청년이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이봐."
"예?"
"이 노예, 상태가 영 엉망인데?"
"예? 그럴 리가...."
노아는 쪼르르 달려가 청년이 가리키는 노예를 확인했다.
"이 근육 좀 봐. 이리 빈약해서 밥숟가락이나 들겠어?"
"...."
"노예를 사라는 거야, 아니면 데려가서 모시라는 거야?"
참고로 그들 앞에 있는 노예는 30대의 건장한 남성이었다.
'아니, 노예한테 뭘 바라는 건데? 애초에 그렇게 건강하면 왜 여기 있겠어?'
노아가 어처구니없어 입을 뻐끔거리는 사이, 청년은 옆의 노예를 손가락질했다.
"이 노예는 또 어떻고. 표정이 이게 뭐야, 도대체. 주인을 모실 자세가 안 되어 있군."
사실 모든 노예들의 표정은 똑같았다. 왜냐면 다들 약에 취해 잠들어 있었으니까.
"...."
노아가 말문이 막혀 있는 동안 청년은 한술 더 떴다.
"이건 더 못 쓰겠군."
이번에 그가 가리킨 노예는 젊은 여성 노예였다. 다섯 노예 중 가장 어리고 싱싱한 축에 속했다.
"예? 이 정도면 꽤 상등...."
"못생겼어. 입맛이 뚝 떨어지는 것 같군."
노아는 입을 다물었다.
어처구니없던 감정이 이젠 불쾌감으로 변했다. 청년은 지금 명백히 트집을 잡고 있었다.
"지금 무슨...."
"상점에 직접 가서 고르겠어. 안내해."
노아는 하던 말을 멈추었다. 기가 차서 인상을 콱 찌푸렸다.
'직접 가겠다고?'
상점은 평소에 다른 가게인 척 위장하고 영업을 했다. 그곳에 노예를 사기 위한 손님은 들인 적이 없었다.
애초에, 고객의 불만족 사유가 있다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만약 저 청년을 데려갔다간 모리츠가 벌컥 화를 낼 터였다.
노아는 난감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건 곤란합니다."
"너보단 내가 더 곤란해. 제대로 된 노예를 데려가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고."
"그럼 차라리 그 조건을 제게 말해 주시죠. 맞춰서 데려오겠습니다."
노아의 설득에도 청년은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건 말하기 좀 비밀스러운 거라. 그냥 내가 직접 가서 고르겠어."
노아는 생각했다.
'이미 노예를 데려오는 시점에서 비밀은 문제가 아니지 않나?'
청년의 고집 아닌 고집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 청년은 아까부터 자신을 계속 난처하게 만들고 있었다. 진작 거래를 끝내고 돌아갈 시간인데도 이런 실랑이라니.
급기야 청년이 마차 안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쯧쯔, 이러니까 애들 상태가 이 모양이지. 바닥에 지푸라기라도 좀 깔아 주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러곤 마차 밖으로 나오는 문을 만지작거렸다.
"어차피 약까지 먹인 마당에 이런 게 필요한가?"
비웃는 듯한 말투로.
노아는 더이상 참을 수 없었다.
"이봐! 어딜 손대는 거야!"
으르렁거리며 청년의 어깨를 콱 잡아당기려 했는데,
"웁!"
갑자기 마차 벽에 쿵 부딪혔다. 뺨부터 거세게 박은 탓에 순간적으로 머리가 띵했다.
"으윽."
노아는 억눌린 신음을 내뱉었다.
오른쪽 어깨가 찢어질 듯이 아팠다. 억센 힘이 제 팔을 비튼 뒤 찍어 누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등 뒤에서 청년의 태평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가서 고르고 싶다고. 아직 이해 못 했어?"
노아는 굴하지 않고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꺾인 어깨가 더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크윽, 안 된다고 말했잖습니까! 그냥 제가 다녀온다고요!"
노아는 그렇게 말하며 왼손으론 허리춤을 더듬었다. 늘 가지고 다니는 단도를 조용히 쥔 순간,
"어허."
청년의 다른 손이 노아의 손목을 꽉 움켜쥐었다.
"위험하게 이런 걸 들고 다녀? 손버릇이 안 좋네."
뒤에서 키들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으윽...!"
노아는 팔을 부들부들 떨며 얼굴이 벌게지도록 힘을 주었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잡힌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무슨 놈의 힘이.'
마치 어린아이가 어른의 힘을 이기지 못하는 것 같은, 거대한 바위에 부딪치는 것 같은 무력감이 밀려들었다.
"도와줄까?"
뒤에서 청년이 웃음기 담긴 어투로 물었다. 노아는 왈칵 성을 냈다.
"이거 당장 놓지 못해?!"
청년은 대꾸 대신 흐응, 소리를 흘렸다. 그리고 노아의 손목을 붙잡은 채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Chapter 4. 약한 놈부터 쫓는다. (3)
"크윽."
노아는 이를 악물고 청년의 힘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애썼다. 본능적으로 불길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단도를 쥔 제 손은 착실하게 치켜 올라가더니,
"-!"
종국엔 제 목을 겨누고 있었다. 청년의 '도와준다'는 의미를 깨닫는 순간이었다.
"으윽!"
노아는 거부의 의미로 머리를 마구 흔들었다. 그러나 청년은 태연자약한 기색으로 웃기만 했다.
"왜, 싫어?"
타인의 고통을 진심으로 즐기는 듯한, 등골이 오싹해지는 웃음소리.
'잘못 걸렸다.'
노아는 눈앞이 하얘지는 것을 느꼈다. 등줄기엔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제대로 미친놈이야.'
그러는 사이 칼날은 순조롭게 자신의 목에 닿았다. 노아는 참다못해 외쳤다.
"그, 그만! 그만해!"
"싫은데?"
내가 왜 네 말을 들어야 하는 듯한 의문이 담긴 반문.
이윽고 날카로운 칼날 끝이 목에 닿았다. 지금은 한 끗에 불과하지만, 곧 불같은 고통이 되어 노아를 헤집을 것이다.
손목을 붙잡은 억센 힘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 그만...."
이제 노아는 크게 소리를 내지도 못했다. 섣불리 움직였다간 칼날에 목을 베일 것만 같아서였다.
그러다 칼날이 제 살갗을 파고들어 따끔한 고통을 선사한 순간,
"가, 갈게요!"
노아는 결국 청년에게 굴복하고 말았다.
"데려갈게요! 제발 그만해요!"
"데려가?"
"아, 아니. 모시고 가겠습니다. 그러니 이것 좀!"
목을 움직인 탓에 칼날이 조금 더 깊게 들어왔다.
날카롭게 잘 갈아둔 날은 그것만으로도 쉽게 피부를 갈랐다. 화끈한 열기와 함께 피가 칼날을 타고 손을 적셨다.
뚝, 뚝.
핏방울이 추락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온 순간,
"...."
갑자기 등 뒤의 청년이 조용해졌다.
'...뭐지?'
노아는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청년에게서 뒤돌아선 지금, 그는 청년이 어떤 표정을 하고, 어떤 눈빛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왜 오한이.'
빙굴에 빠져드는 것처럼 전신이 차갑게 식어 내리는 것일까. 거대한 맹수를 맞닥뜨린 것 같은 아득한 공포가 그를 짓눌렀다.
"으, 아."
노아는 턱을 달달 떨었다.
이제 목덜미로 흘러내리는 핏줄기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글이글 불타는 듯한 고통도 그저 멀게만 느껴졌다.
제 뒤에 뭔가 있다.
인간이 아닌 무언가, 헤아릴 수 없는 심연, 깊이 모를 어둠.
그것이 제 뒤에서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황홀한 듯 혀를 날름거리며 그를 잡아먹으려 들었다.
"으, 으으...."
감당하기 힘든 공포를 맞닥뜨리면, 인간의 근육은 이성을 놓고 제 기능을 잃는다.
쉬이이-
노아의 아랫도리가 축축해지더니 누런 웅덩이가 바닥으로 퍼져 나갔다. 그가 10살 이후로 저지른 적 없는 실수였다.
"...하."
등 뒤에서 청년의 한숨이 들려왔다. 한참이나 뜀박질을 한 것처럼 몹시 거친 소리였다.
"...."
청년은 잠시 뭔가를 참는 것처럼 말이 없었다. 노아의 왼손을 붙잡은 그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어느 순간, 노아의 뒤를 압박하던 기운이 천천히 흩어졌다.
"으어...."
노아는 반쯤 풀린 눈으로 벽에 쓰러지듯이 기댔다.
이제 뭐라 말할 힘도 없었다. 젖은 바지가 거추장스러웠지만 그게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였다.
"마부한텐, 뭐라고 할 거지?"
이윽고 청년의 질문이 노아의 귀를 저몄다. 몹시도 날카롭고, 한 글자 한 글자씩 씹어뱉는 듯한 음색이었다.
노아는 혼란한 와중에도 자신이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제 실수라고 말하겠습니다...."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사정했다.
"뭔가 착오가 있었다고, 그렇게 말하겠습니다...."
"...."
"상점에 가서도 잘 둘러대겠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노아는 눈을 꾹 감고 치미는 울음을 억눌렀다. 지금 제 뒤의 청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어 더욱 두려웠다.
"좋아."
흔쾌한 한마디가 떨어지자, 노아는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이건 압수."
청년이 제 왼손을 비틀자, 노아는 맥없이 단도를 내줄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그의 어깨를 억누르던 손이 사라졌다.
"으윽."
노아는 벽에 몸을 기댄 채 숨을 헐떡였다. 지옥의 입구까지 발을 들였다 돌아온 것만 같았다.
"가, 감사합니다...."
노아는 턱을 천천히 돌려 뒤를 보았다. 제 뒤에 인간이 아닌 다른 게 서 있을 것 같아 두려웠다.
다행히도, 제 뒤에 서 있는 것은 로브를 쓴 조금 전 그 청년이 맞았다.
'방금 그건... 대체 뭐였지?'
노아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어 멍하니 청년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늦게서야 청년이 제 목덜미를 손으로 가리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이대로 나갈 생각은 아니겠지?"
"아."
노아는 얼른 제 목을 감싸 쥐었다. 축축한 피가 손바닥에 묻어났다.
"닦고... 닦고, 나가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청년의 시선이 아래쪽을 향했다.
"아!"
노아는 시뻘게진 얼굴로 황급히 바지춤을 부여잡았다.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서둘러. 난 시간 낭비하는 걸 싫어하니까."
"예, 옙."
노아는 황급히 주머니 속 손수건을 꺼내 목을 닦 은 뒤, 상처가 보이지 않도록 잘 감쌌다.
그리고 노예의 바지를 벗겨 자신이 입었다. 오줌에 절은 제 바지는 구석에 대충 던져 버렸다.
노아가 정돈을 마치자 청년이 툭 내뱉었다.
"가지."
노아는 서둘러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제 뒤에서 청년이 잘 따라오는 것을 확인하며 마부석으로 향했다.
그동안 그의 감정은 빠르게 변화했다.
아까의 공포가 사라지자, 그 뒤엔 수치심이 뒤따랐고, 마지막엔 불타는 분노가 차지했다.
'내가 순순히 새 노예를 보여줄 줄 알고?'
그는 속으로 이를 빠득 갈았다.
상점에 가면 안쪽으로 안내하는 척 바로 '정신 개조실'로 끌고 갈 계획이었다. 그곳에선 브루노가 할버드를 들고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새 상품으로 삼아 줄 테다.'
물론 저 버르장머리를 싹 뜯어 고쳐준 다음에. 거래가 성사되지 않은 것에 혼은 좀 나겠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놈이 안 돌아오면 그 중년인이 연락하겠지. 모르는 척 잡아떼면 그만이야.'
감히 제 목에 상처를 낸 놈을, 감히 추한 꼴을 보이게 만든 놈을 이대로 가만둘 수 없었다.
'네 놈이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브루노는 못 이길걸.'
그리고 몇 분 뒤, 그는 차라리 제 목에 구멍이 나는 게 나았을 거라고 후회하게 된다.
❖ ❖ ❖
다그닥, 다그닥.
마차가 힘차게 거리를 가로질렀다. 마차 옆으로 사람, 건물 등이 빠르게 지나쳐 갔다.
"...."
반면, 마차의 마부석은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나를 힐끔힐끔 바라보며 말을 모는 마부, 그에게 바짝 붙은 채 입을 꾹 다문 청년.
그리고 팔을 뒤로 젖혀 마부석에 기대어 앉은 나까지.
세 사람이 있는 데도 말이다.
'흐응.'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현재 마차는 순조롭게 이들의 상점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 뭔가 착오가 생긴 모양입니다. 일단 돌아가야겠어요."
청년은 태연한 얼굴로 마부에게 말했다.
"고객님도 같이. 괜찮으시죠?"
그리고 내게 부지런히 눈을 깜박였다. 방금까지 오줌을 지리고 있던 녀석치고는 놀라운 태세 전환이었다.
'연기력이 훌륭한데.'
나는 그때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이건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레퀴엠의 존재를 느끼고도 금방 회복할 수 있다니.'
놈을 일으켜 세운 건 나를 향한 분노일 게 분명했다. 정확히는, 나를 상점으로 데려가 조지고 싶은 강렬한 욕구.
'그게 아니고서야 저리 태연할 리 있나.'
나는 품에 넣은 단도를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괜찮으려나.'
한순간이었다. 놈의 목에서 흘러내린 핏방울이 바닥에 떨어지고, 거기서 혈향이 밀려든 순간.
억눌러 두었던 '아벨'의 광증이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그러자 레퀴엠까지 덩달아 들썩였다.
아사 직전의 노예가 음식을 눈앞에 둔 것처럼, 뜨거운 사막을 헤매던 여행자가 간신히 오아시스를 찾은 것처럼.
몹시도 갈급하고, 격렬하게 허덕이는, 거칠고 광포한 움직임.
그 순간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며 이성을 바로 세우려 애쓸 뿐.
힘겹게 줄다리기를 하던 나를 도운 것은,
'...음?'
코를 찌르는 듯한 지린내였다. 앞의 청년이 배설한 오줌 냄새가 바닥에서 올라왔다.
'와, X발.'
가뜩이나 예민해진 감각 덕분에, 마치 오줌 구덩이에 쑤셔 박힌 듯한 착각이 들었다.
하지만 덕분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가까스로 욕구를 잠재우는 데 성공했다.
'겨우 피 냄새에 이리 흥분해서야.'
나는 나지막이 혀를 찼다.
원래 아벨의 몸이 갖고 있던 광증에 레퀴엠까지 더해지자 힘이 두 배로 들었다.
'아니지, 네 배?'
체감상 그 이상은 되는 것 같았다. 앞으로도 피를 볼 때마다 상당히 힘들어지리란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
나는 손을 들어 팔뚝을 가만히 문질렀다. 정확히는 레퀴엠의 문양이 새겨진 곳을.
'레퀴엠을 쓴다면.'
결과는 조금, 아니 많이 다를 것이다.
나는 품속 깊이 단도를 밀어 넣었다. 오늘은 이 녀석을 더이상 쓸 필요가 없을 테니까.
마차의 속도가 조금씩 느려지고 있었다. 도착 지점에 가까워졌다는 증거였다.
나는 즐거운 미소를 입가에 덧그렸다.
'가면 몇 명쯤 있으려나?'
노예 다섯 명을 구매하겠다는 것은 그저 이들을 불러내기 위한 핑계에 불과했다.
'내 목표는 처음부터 이놈들의 상점이었으니까.'
지방의 평범한 상회에서 노예상을 운영할 리 없다. 수도에 본부를 두고 있는 거대 길드의 지방 분점일 터.
비밀스럽게 영업을 하니 인원을 최소한으로 둘 테고, 경비대가 달려올 일도 없다.
'내가 일을 치기 딱 좋은 환경이군.'
괜히 뒷감당이 안 될 일을 벌였다간 피곤해진다. 뒤탈이 없으려면 이런 곳을 건드리는 게 좋다.
'최소 5명.'
내 옆에 앉은 이 두 사람, 추가로 경비를 서는 인원, 거기에 총괄하는 우두머리까지.
이 정도면 충분히 레퀴엠의 욕구를 채울 수 있을 것이다.
'훌륭한 식사가 되겠군.'
잘 먹고 사는 놈들이라 때깔도 좋을 테니, 맛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뱃속 깊이 가라앉은 공허가 군침이 돈다는 듯 혀를 날름거렸다.
'곧 채워줄 테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나는 키득 웃으며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움직일 때마다 건틀릿의 부드러운 내피가 내 손을 감싸 안았다.
'건틀릿을 낀 채로 쥔다면 해볼 만하겠지.'
내 목표는 몰살.
그 상점에서 일하는 직원은 모두 죽일 생각이었다. 이는 레퀴엠의 욕구를 해소하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내 정체를 곧 알아낼지도 몰라.'
괜히 꼬리를 잡히는 일을 방지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필립이 로브를 쓰고 조심한다고 했겠지만, 아무렴 이쪽 계통에서 일하는 자들이 그리 눈이 어두울 리 없다.
'아주 사소한 단서만으로 필립의 정체를 유추했겠지.'
그러니 내가 흘린 '주인의 성미가 고약하다'는 미끼를 덥석 문 것일 테고.
옆에 앉은 놈이 아까 눈을 번득이는 것을 보고 확신했다.
이 거래를 계속했다간, 어쩌면 필립이 오늘의 나처럼 마차를 타고 상점에 갔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자의가 아닌 타의로.'
그땐 마부석이 아니라 마차에 실려 갔겠지. 정신을 잃은 채로.
'이런 하찮은 것들한테 방해받을 순 없어.'
내 앞길을 가로막는 것들은 모조리 치워버릴 심산이었다.
"도착했습니다."
이윽고 마차가 한 상점 앞에서 멈추어 섰다.
Chapter 4. 약한 놈부터 쫓는다. (4)
"일단 내리시죠."
청년이 공손하게 말하자, 나는 그의 뒤를 따라 내렸다. 마부는 그대로 마차를 몰아 건물 뒤편으로 돌아갔다.
나는 날카로운 눈으로 그 모습을 쫓았다.
'뒷문을 통해서 노예를 옮기나 보군.'
옆에서 청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쪽입니다."
청년이 안내한 입구로 향하자, 옆에 높이 달린 간판이 보였다. 그릇 위로 한 개의 숟가락이 놓인 그림이 그려진.
'설마, 여기는?'
딸랑.
청년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진열장을 가득 채운 여러 종류의 그릇들이 보였다.
몇몇 사람들이 진열대 앞에 서서 그릇을 고르고 있었다. 여느 일반 상점과 별다를 것 없는 평범한 모습이었다.
카운터에는 한 노인이 서서 컵을 닦고 있었다. 그의 옆으로 반질반질한 숟가락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아하.'
참으로 본디 목적에 충실한 업종 선택이로군. 게다가 저 숟가락, 아마 다른 목적으로 방문한 손님들을 위해 준비된 것이겠지.
"노아?"
카운터의 노인이 청년을 보곤 눈썹을 추켜 올렸다. 외알 안경 너머로 푸른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무슨 일이지? 옆에 계신 분은 누구고?"
"모리츠님."
노아라 불린 청년이 노인에게 다가섰다. 그가 뭐라 속닥거리자 노인, 즉 모리츠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흐음."
모리츠는 콧소리를 흘리더니 이윽고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노아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였다.
"...해서, 부득이하게 모셔왔습니다."
보고를 마친 노아가 물러서자, 그는 카운터를 벗어나 내게 다가왔다.
"상품에 미흡함이 있었던 점 정말 죄송합니다. 총책임자로써 사과드리겠습니다."
모리츠가 정중하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노아가 뭐라고 보고했는지 모르겠으나, 그의 태도엔 흠잡을 데가 없었다. 과연 이 상점의 총책임자다운 노련함과 연륜이 느껴졌다.
"사과는 잘 받도록 하지."
나는 거만한 태도로 응수했다. 저쪽에서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했다.
"...."
노아는 남몰래 눈썹을 꿈틀거렸고,
"예, 감사합니다. 그럼 새 상품을 보여드리지요."
모리츠는 그저 평온한 낯으로 물러섰다.
새파랗게 어린 청년의 하대에도 감정의 기복 따윈 전혀 없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과연. 이 정도는 되어야 노예상을 꾸려나가는 건가.'
픽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리츠는 여전히 부드럽기 짝이 없는 말투로 말했다.
"말씀하신 상품은 보다 안쪽에 있습니다.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카운터로 돌아간 그가 통신구를 들어 어딘가에 연락을 넣었다. 그리고 노아를 향해 손짓했다.
"노아. 손님을 안내해드려라."
"예."
나는 앞장서는 노아를 뒤따라 안쪽의 문으로 향했다.
문이 열리기 직전, 모리츠의 시선이 내 뒤를 스쳤다. 칼날처럼 예리하게 사람을 베어낼 것 같은 시선이었다.
탁.
열렸던 문이 닫히자 그 시선마저도 사라졌다.
복도 천장엔 아주 미약한 불이 들어오는 전등이 달려 있었다. 좁은 복도 양옆은 그릇 및 식기들로 가득했다.
"따라오시죠."
노아의 말투는 아까보다 퍽 불손해져 있었다. 일단 별다른 말 없이 그를 따라갔다.
당장 양옆에서 뭐가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복도를 지나, 끝의 문에 다다랐다.
찰칵.
노아가 문을 열곤 나를 향해 손짓했다.
"들어오시죠."
누가 봐도 수상쩍은 행동이요, 속이 뻔히 보이는 수작이었다.
"이 안에 노예가 있나?"
"네. 얼른 들어가시죠."
내 물음에도 노아는 뻔뻔스레 대답했다.
'흐음.'
난 잠시 멈춰서서 레퀴엠의 힘을 일으켰다. 내 눈에만 보이는 검은 실타래가 뻗어나갔다.
'하나.'
이 방 안에 있는 생명체의 수였다.
'그럼 그렇지.'
입꼬리가 빙그레 호선을 그렸다.
노아의 거짓말을 간파하는 것은 너무 쉬웠다. 하지만 나는 굳이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그래."
그저 흔쾌히 노아가 가리키는 방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내가 한 걸음 내딛는 순간,
쿵.
뒤에서 문이 닫혔다.
철커덩.
걸쇠가 잠기고,
탁.
스위치를 켜는 소리와 함께 붉은 전등이 빛을 밝혔다. 보통 인간이라면 갑자기 밝아진 빛에 눈살을 찌푸렸겠지만, "흠."
나는 그저 몇 번 눈을 깜박이는 것만으로 빠르게 빛에 적응했다.
방 안엔 곰 같은 덩치의 남자가 뒤돌아 서 있었다.
"으흠흠~"
그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무언가를 닦고 있었다. 그의 큰 덩치로도 가릴 수 없는 거대한 할버드의 끝이 보였다.
'날이 붉군.'
원래 색이 그런 건지, 아니면 다른 게 묻어서 그런지 확실하진 않았다.
'뭐, 어느 쪽이든 별 상관없는 일이지만.'
그의 앞에 놓인 수레엔 쇠로 된 도구들이 놓여 있었다. 꼬챙이, 집게, 인두, 망치, 송곳 등이 스산한 빛을 발했다.
'인간을 치료할 목적은 아니겠군.'
나는 태평하게 평가했다.
사실 저런 것은 누구보다도 아벨에게 익숙한 물건이었으니까. 오베스트 성의 '그곳'에는 저보다 더 많은 가짓수의 쇠붙이들이 가득하다.
'이 쪽으로 전문가는 아니겠어.'
그 옆으로는 양동이, 손걸레, 대걸레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은 이 조명보다도 더 붉은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노예를 보여준다더니, 이 남잔 뭐야?"
내가 묻자,
"하!"
밖에서 노아가 코웃음을 쳤다.
그는 문 위쪽에 난 작은 구멍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가 킬킬거리며 쏘아붙였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상황 파악이 잘 안 돼?"
"뭐가?"
"여기 노예가 있잖아."
노아의 손가락이 나를 똑바로 가리켰다.
"너 말이야, 이 새끼야."
노아가 씹어뱉듯 말한 뒤 내 뒤에선 남자에게 말했다.
"이놈입니다, 브루노."
브루노라고 불린 남자가 흐흠, 소리와 함께 돌아섰다.
놈의 코 밑이며 턱 옆으로는 수염이 수북했고, 그 위로 뺨을 가로지르는 흉터가 나 있었다.
놈이 할버드를 들어 올려 어깨에 척 얹었다.
"젊은 남자는 늘 환영이지."
노아가 느물느물 웃으며 맞받아쳤다.
"새 상품이니 잘 부탁드려요. 근데 좀 뻣뻣할 겁니다."
당사자를 앞에 두고 하는 말이라기엔 조금도 거리낌 없는 말투. 이는 내가 브루노의 손에 쓰러지리라 확신하는 데 기인했다.
"많이 두들겨야 부드러워질 것 같아요."
"아, 걱정 접어둬. 난 뻣뻣한 거 좋아하니까."
브루노의 호기로운 대답에 노아가 입이 찢어져라 씩 웃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그가 마지막으로 자물쇠를 힘 있게 들었다 놓은 뒤, 자리를 떠났다.
'또 밖에서 잠그는 문이야?'
나는 그 문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역시 이런 형태의 문은 싫다.
"그래, 상품에 불만이 있다고?"
브루노가 할버드를 가볍게 까딱이며 다가섰다. 놈이 움직일 때마다 둔중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럼 잘 찾아왔어. 내가 사람들의 불만을 잘 해결해주거든."
"글쎄. 네가 그리 친절한 사람으론 안 보이는데?"
내가 배배 꼬인 말투로 응수하자, 놈의 덥수룩한 수염이 씰룩였다.
"어떻게 했는지 궁금해? 알려줄까?"
이어지는 듣기 싫은 웃음소리에, 보기 역한 미소까지.
놈과 1초도 더 얼굴을 맞대고 싶지 않아졌다.
"아니, 됐어."
싸늘히 내뱉으며 팔을 늘어뜨렸다. 레퀴엠의 형상을 떠올리고 손바닥에 정신을 집중했다.
촤락.
어느새 나타난 레퀴엠이 손에 감겨들었다.
검 손잡이를 쥐는 순간 거센 진동이 느껴졌다. 어떻게든 내 몸을 장악해보려는 레퀴엠의 발악이었다.
하지만 건틀릿 안쪽이 달아오르는 감각과 동시에, 레퀴엠이 다시 잠잠해졌다.
'역시 수호자의 능력.'
나는 씩 웃으며 단단히 검을 쥐었다.
"응?"
놈이 얼빠진 소리를 흘렸다. 놈의 좁쌀 같은 눈이 갑자기 나타난 새카만 검을 향했다.
"뭐야, 그건?"
놈이 할버드로 나를 가리키는 순간,
펄럭.
나의 로브가 크게 부풀었다가 가라앉았다,
챙그랑, 챙강.
놈이 쥐고 있던 할버드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리고, 주인을 잃은 팔뚝이 추락했다.
"으어억!"
놈이 잘린 팔을 움켜쥐고 뒤로 물러섰다. 놈의 두 눈이 급격히 확장되었다.
"끄으윽."
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제 팔 끝을 바라보았다.
말끔하게 잘린 단면에서는, 으레 그렇듯이 피가 흘러내리고 있지 않았다.
치이익.
으레 보여야 할 핏줄, 근육, 뼈 대신 시커먼 불꽃이 지글거렸다. 그것은 놈의 팔뚝을 서서히 불태우며 위쪽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이, 이게 뭐야! 떨어져!"
놈이 울부짖으며 팔을 휘저었다. 하지만 시커먼 불길은 결코 놈의 팔에서 떨어지지도, 꺼지지도 않았다.
놈의 팔뚝이 생명을 잃은 나뭇잎처럼 바싹 타들어갔다. 혈색 좋던 살갗은 그 빛을 잃고, 그 아래로 흐르던 혈액은 가뭄이 든 것처럼 말라버렸다.
"끅, 끄아아!"
놈이 무릎을 꿇은 채 몸부림쳤다. 뾰족한 송곳으로 마구 들쑤시는 듯이 날카로운, 끓는 기름을 솥째 퍼붓는 듯이 뜨거운 고통이 놈을 괴롭히고 있었다.
새카만 공허가 착실히 놈의 생기를 집어삼켰다. 그리고 어깨에 다다른 후에야 멈추었다.
"끄으으...."
놈이 남은 팔을 감싸 쥐고 헐떡였다. 이미 놈의 팔은 다 죽어가는 노인, 아니 그보다도 더 늙어 있었다.
무덤에 묻혀 몇십년은 썩은 팔이 이러할까. 놈은 두 번 다시 이 팔을 사용하지 못할 것이다.
"으, 으윽. 내, 내 팔. 내 팔 어디있...."
일그러진 얼굴로 주변을 정신없이 돌아보던 놈이 멈추었다. 놈의 시선 끝에는 바닥에 나뒹구는 팔뚝이 있었다.
"저, 저게 무슨."
아니, 이제 그것은 팔뚝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모든 생기를 빨아 먹히고, 거죽과 뼈만이 남은 고깃덩어리. 한 생명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지독한 결말이 거기 남아있었다.
"으, 으으."
놈이 이를 딱딱 부딪쳤다. 이해할 수 없는 공포를 목도한 놈의 낯이 새파랗게 질렸다.
나는 부들부들 떨어대는 브루노에게서 눈을 돌리고,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새카맣게 일렁이는 검이 내 손에 쥐여 있었다.
'과연, 이게 레퀴엠의 힘인가.'
레퀴엠이 죽음의 검으로써 악명을 떨치게 만든 힘. 바로, 닿는 것만으로 생명력을 모조리 흡수하는 능력.
그야말로 살육에 최적화된, 오직 살육을 위한 능력이다.
일반인이 쥐어도 강력한 이 능력은, 뛰어난 검사의 손에 들어갔을 때 그를 절대적이고 완벽한 승자로 만들어 준다.
일대일 대결에서 레퀴엠을 이길 자는 없었다. 그저 스치기만 해도 생명을 빼앗기는데 어찌 대적할 수 있을까.
지상 최강의 생물이라는 드래곤 조차 이 검 앞에서는 무력하다.
'물론 사용자에 따라 다르겠지만.'
어쨌건 이런 한낱 인간 따윈 가볍게 무릎 꿇릴 수 있었다. 아니, 데리고 놀 수 있었다.
그보다 나는 레퀴엠의 날카로움에 새삼 감탄하고 있었다.
'이게 한 번에 베어지다니.'
검을 뽑아낸 순간, 팔이 너무나 유려하고 효율적으로 움직였다. 마치 평생을 이 순간을 위해 검을 연마해 온 것처럼,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그 결과, 발검만으로도 놈의 팔을 잘라내고 말았다.
'너무 매끄러워.'
나는 그 베어내는 감각에 전율했다.
단도로 불량배들의 팔다리를 베어낼 때는 분명한 저항감이 있었다.
하지만 방금은,
'푸딩을 자르는 것 같았어.'
오늘 아침 후식으로 나왔던 푸딩을 포크로 자를 때 이런 느낌이었을까?
단순히 살을 도려내는 게 아니라, 뼈를 가르고 팔을 완전히 잘라냈는데도 말이다.
그만큼 레퀴엠의 절삭력은 몹시도 위력적이었다.
Chapter 4. 약한 놈부터 쫓는다. (5)
'가볍고 날카로운 검이라고 정평은 나 있었는데.'
원작에서도 몇 번이고 강조된 점이었으나, 직접 손에 쥐고 휘둘러보니 느낌이 남달랐다.
'과연 세계관 최강의 검.'
감탄하는 동시에, 경계심이 스멀스멀 밀려들었다.
'이걸 쓰면서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까.'
생명을 벨 때마다 도덕심을 잃고, 그 생명을 거둔 수만큼 이성을 상실한다. 그저 살인이라는 쾌락에 취한 괴물이 되고 만다.
인간을 베는 일이 푸딩을 써는 일보다 쉬우니 당연한 일이었다.
"...."
레퀴엠의 새카만 검날을 노려보았다.
방금 한 인간을 완전히 불구로 만들어놓고도, 너무나 완벽하게 태연한 그것을.
레퀴엠은 여전히 아름다웠고, 매끄러운 검신엔 피 한 방울조차 묻어있지 않았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그저 검게 너울지며 타오를 뿐이었다.
'여기 현혹되어선 안돼.'
나는 입술을 깨물며 다짐했다. 그리고 레퀴엠에게서 시선을 떼어냈다.
"이... 자식!"
브루노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놈의 작은 두 눈이 분노로 번들거렸다.
"감히, 내 팔을...."
놈은 더 이상 쓸 수 없는 제 팔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 대신 남은 한 팔로 바닥에 나뒹굴던 할버드를 움켜쥐었다.
"죽여버리겠어!"
놈이 우악스럽게 울부짖으며 내게 달려들었다. 힘껏 할버드를 들어 나를 내리치려는 순간,
"어억!"
한쪽 팔을 잃은 놈의 몸은 주인을 배신했다. 이전과는 달라진 균형 감각 때문에 할버드가 엉뚱한 곳을 갈랐다.
"큭."
브루노가 바닥에 엎어지기 직전 간신히 몸을 세웠다.
"이, 이게 왜."
"왜긴. 한쪽 팔이 없는데, 당연히 예전과 다르지."
나의 유들유들한 대꾸에 놈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놈이 언제 이런 굴욕감과 분노를 느껴 보았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이 새끼가...!"
이를 증명하듯 놈에게서 뻗어 나오는 살기가 피부에 느껴질 정도로 강해졌다.
'오, 저릿저릿한데.'
투지, 혹은 살의.
인간이 뿜어내는 기운의 형태가 예전보다 훨씬 첨예하게 느껴졌다. 조금 더 능력이 강화된다면 시각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암살에 대처하기 좋겠군.'
놈이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는 상황에도, 나는 그저 태평했다.
내가 질 것 같은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으니까.
"죽어-!"
놈이 격노에 가득 찬 외침과 함께 다시 달려들었다.
넘어지지 않으려는 듯보다 신중한 걸음. 그렇기에 속도는 빠르지 않았다.
저보다 쾌속한 검을 사용하는 리암을 겪은 나에겐, 놈의 움직임은 거의 정지한 것처럼 느껴졌다.
'느려도 너무 느리네.'
나는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발을 움직였다. 몸을 가볍게 비틀어 할버드를 피하고, 검을 든 손에 힘을 쥐었다.
'아벨의 몸으로 저지르는 첫 번째 살인.'
그 희생양으로, 눈앞의 남자는 썩 나쁘지 않은 상대였다.
이 결정에는 어떠한 갈등도, 망설임조차 없었다. 그저 당연한 일을 행하는 의무감뿐.
'지금!'
나는 한 걸음 내디디며 훤히 드러난 놈의 목을 그대로 베어갔다.
인간의 목뼈는 가지고 있는 뼈 중 가장 두껍고, 그 주변을 보호하는 수많은 근육으로 둘러싸여 있다.
잘 훈련된 사형수조차, 한 방에 목을 베어내기 위해서는 잘 갈린 도구와 나름의 기술이 필요하다고 하다.
그러나.
서걱!
물 흐르듯이 나아간 레퀴엠은 손쉽게 놈의 목을 베어냈다.
"끄...."
놈의 목구멍을 비집고 올라왔던 비명은,
텅!
머리통이 바닥에 굴러떨어지면서 그대로 삼켜졌다. 놈은 단말마조차 지르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하."
나는 머리를 잃은 시체를 보며 신음과도 같은 감탄을 흘렸다.
"아까랑 별다를 게 없네."
목뼈에 걸리는 느낌도, 썰리는 느낌조차 없었다. 이는 날에 닿는 순간 레퀴엠이 생기를 흡수하기 때문이었다.
그 증거로 놈의 목 아래쪽부터 어깨가 이미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나의 첫 살인엔 피 한 방울 조차 튀지 않았다. 약간의 싱거움, 그리고 매끄러운 감촉만이 손에 남았다.
"후우."
나는 검을 움켜쥐고 나른한 신음을 삼켰다.
'이건, 너무.'
달콤하다.
검을 통해 흡수되는 생명의 기운은 내가 지금껏 먹었던 그 어떤 음식보다도 훌륭했다. 가히 극미(極味)에 가까운 맛.
그뿐이랴.
인간의 몸을 베었을 때의 그 감각, 공포와 절망에 질린 인간의 얼굴, 너무나 쉽게 획득되는 승리.
그 순간들이 전신을 녹일 듯이 감싸 안는다. 이건 아벨의 몸이 겪었던 그 어떤 감각보다도 자극적이고, 매혹적이었다.
'...타인의 생명을 갈취함으로써 말이지.'
나는 애써 거부감을 일으키려 애썼다. 레퀴엠이 가져다주는 이 자극에 쉽게 매혹된다면, 결국 주도권을 내주고 말 게 분명했다.
"...."
눈을 스륵 감았다.
바싹 마른 입술을 축이고, 빠르게 뛰던 심장을 가라앉혔다. 죽음의 냄새를 맡고 들썩이려 하는 광증을 억눌렀다.
'휘둘려선, 안 돼.'
즐길지언정 빠져들어서는 안 된다.
마약과도 같은, 도박과도 같은 쾌락. 이를 항상 경계하고 나와 분리해야 했다.
일부러 눈을 떴다.
"으음."
놈의 시신 옆에 나뒹구는 머리통, 아니 머리통이었던 것을 눈에 담았다.
덥수룩했던 수염, 그리고 머리카락이 모두 흩날리고 있었다. 기름기로 번들거리던 피부는 소금에 말린 것처럼 거칠어졌다.
그 흉측한 몰골을 보자 조금 더 차분해질 수 있었다.
"편히 죽지는 못했겠군."
놈은 시체가 일반적으로 썩는 과정을 겪지 못할 것이다.
부패해 고약한 내가 나고, 구더기가 생기며, 쥐가 물어뜯는 그런 과정. 그럴 살점조차 남지 않았기 때문에.
'아마 조금 있으면 해골이 되겠지.'
레퀴엠에게 당한 시신은 으레 그렇다. 모든 생기를 빨아 먹히고, 살점이 말라 붙으며, 썩지 않는 뼈만 남아 부식한다.
원작의 아벨이 쓸고 지나간 곳엔 해골만이 남았다. 심지어 그 시신의 신원조차 확인할 수 없어 더욱 지독한 재앙이었다.
'그래서 찌르는 검법을 주로 썼었고.'
아벨이 대량 학살을 자행할 때는 거추장스럽게 목을 베지 않았다. 그저 아무 부위나 푹 찔렀다가 검을 거두었다.
'단 몇 초.'
그 찰나 동안 희생자는 모든 생기를 빨아 먹히고 절명한다.
작품 후반부, 카인이 섬멸에 나서기 전의 아벨은 거의 레퀴엠과 동화되어 있다시피 했다. 그때의 그는 그저 검으로 상대를 스치는 것만으로도 목숨을 앗아갔다.
'지금은 어느 정도 걸릴까.'
검을 늘어뜨린 채 생각에 잠겼다. 한 인간의 생기를 완벽히 흡수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재볼 필요가 있었다.
레퀴엠은 새로 빨아들인 생기가 마음에 드는지 게걸스레 쩝쩝거렸다. 지금껏 나와 함께 있던 레퀴엠의 모습 중 가장 만족스러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좋단다.'
검을 한번 노려본 뒤 바닥에 널브러진 육편들을 뛰어넘었다.
'내가 뭐 때문에 이 귀찮은 짓을 하고 있는데.'
어쨌건 오늘 계획한 일은 끝마쳐야 했다.
검을 꺼내 들어 인간을 베는 이 시간이 길수록 내겐 좋지 않을 터였다. 최대한 빠르고 신속하게, 그리고 무덤덤하게 적들을 해치우고 나가야 했다.
놈의 뒤쪽으로 보이던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사람이 나다닌 흔적이 가득한 복도와 방문이 보였다.
'여기가 내부인이 다니는 통로로군.'
확실히 아까 내가 거쳐온 복도와는 느낌이 달랐다. 이쪽이 이곳 상점 놈들의 소굴인 게 분명했다.
'이 중에 어디 있으려나.'
아직 남아 있을 직원과 나머지 노예들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일일이 문을 열어보는 수고를 할 필욘 없었다.
"...."
눈을 감고 절대 영역을 일으키자, 저 멀리 일렁이는 생명이 느껴졌다.
'꽤 여럿. 노예들인가.'
그리고 그 앞을 서성이는 다른 생명. 그들은 앞서 느꼈던 존재보다 훨씬 강한 생명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쪽이 경계를 서는 인원들이겠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능력을 사용할 때마다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었다. 범위가 늘어나는 것은 물론이고, 생명력의 정도까지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뒤쪽으론....'
아까 내가 들어왔던 문을 흘낏 보았다. 그 너머로도 여러 생명들이 보였다.
다만 이쪽은 이 전의 것보다 더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손님들이겠지.'
곧 장사를 마무리할 시간. 이들은 빠져나가고 내가 아까 보았던 직원들만 남게 될 것이다.
'좋아.'
결정을 내린 나는 땅을 박차고 눈앞의 복도로 뛰어들었다. 노예들을 먼저 치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노아라 했던가.'
그놈은 곧 방으로 돌아올 것이다. 총책임자 모리츠와 함께.
'새 상품이 궁금할 테니까.'
그리고 예상 밖의 상황에 경악하곤, 서둘러 나를 찾으러 오겠지. 그러니 지금은 그쪽을 찾으러 갈 필요가 없었다.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궁금한데.'
나는 히죽 웃으며 속도를 높였다. 솔직히, 노아를 놀리는 일은 퍽 재미있었다.
몇 개의 문을 지나치자 생명을 느꼈던 장소가 점점 가까워졌다.
"이게 마지막이야?"
"네. 아이고, 다섯 명 옮기려니 죽겠네요."
두런두런한 말소리. 그리고 묵직한 무언가를 질질 잡아끄는 소리.
"뭔 일인데 노예를 돌려보내?"
"저도 모릅니다. 그냥 노아가 착오가 있다 해서 그런가 보다 했습죠."
마부가 복도 끝의 감옥에 노예를 집어넣고 있었다. 검을 든 두 명의 경비가 그런 그를 지켜보았다.
"이런 일은 처...."
의아한 듯 중얼거리던 한 경비의 입이 멈추었다. 그가 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놈 뭐야?"
"뭐, 누구?"
그의 손끝을 바라본 다른 경비가 고개를 갸웃했다.
"처음 보는데? 그보다 저 자식, 검을 들고 있어."
"무슨 일...."
마부가 감옥 밖으로 나왔다가, 나를 보곤 헉 숨을 들이켰다.
"저, 저 녀석은?"
"아는 사람이야?"
"그, 아까 데리고 온 고객인데요."
마부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분명 브루노 형님께 보낸 것으로 아는데...."
"그런데 어떻게 여기 있어?"
"브루노 형님은 뭐하시고?"
두 경비가 경계 태세를 취했다.
"거기, 멈춰라."
"여긴 쥐새끼가 돌아다닐 곳이 아니다."
그들의 목소리는 위협적이었으나, 지루하던 차에 잘됐다는 기색이 서려 있었다.
그들은 셋, 나는 하나.
충분히 여유롭다고 느낄만한 상황이었다. 근질근질하던 손을 풀 오락거리가 찾아왔다고 생각했겠지.
"...."
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않을 미소를 그렸다. 그리고 속력을 높여 그들에게 접근했다.
"어딜!"
"이 자식이!"
두 사람이 나를 막아내기 위해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들의 검은 내 옷깃조차 스치지 못했다.
퍽!
"으악!"
내 목표는 마부였기 때문에.
발길질에 채인 마부가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덜컹, 하고 그가 놓친 문이 맥없이 열렸다.
'12명.'
빠르게 감옥에 갇혀 있는 노예들의 수를 확인했다.
그중 다섯 명은 약에 취해 잠들어 있고, 일곱 명은 구석에 삼삼오오 모여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수급이 어렵긴, 개뿔이.'
나는 필립을 생각하며 혀를 찼다.
Chapter 4. 약한 놈부터 쫓는다. (6)
이놈들의 노예 수급이 어렵다는 말은 값을 올려받기 위한 수작에 불과했다.
'예상대로군.'
이 멍청한 호구 놈이 그동안 얼마나 얕보였을지, 안 봐도 알 것 같았다.
'그러니 노아란 놈이 그 꼴이었겠지.'
언짢은 기분을 털어내며 감옥 바닥에 쓰러진 마부에게 시선을 주었다.
"힉!"
로브에 가려 보이지 않을 텐데도, 마부는 무엇을 느꼈는지 곧장 겁에 질렸다.
'이 녀석은 마지막에 처리해야겠군.'
나는 놈에게 자비로운 유예를 준 뒤 고개를 획 돌렸다.
"이 자식, 노예가 목표야!"
"당장 잡아!"
경비들이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듯 외쳤다. 두 놈의 검이 나를 향해 쇄도했다.
'오합지졸이네.'
나는 간단히 평했다.
놈들은 애초에 침입자를 잡아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저 남들보다 조금 대담한 두 놈에게 검을 들려주고 여기 세웠겠지.
그 정도만으로도 힘없는 노예는 쉽게 다룰 수 있을 것이다. 브루노에게 처맞고 기가 죽거나, 혹은 약에 절어 있었을 테니.
두 놈의 검은 하품이 나올 만큼 느렸고, 끔찍할 정도로 엉망이었다. 굳이 내가 받아칠 필요를 못 느낄 만큼.
'한 놈씩.'
왼편에서 날아오는 검을 피하고, 비틀거리는 경비를 가볍게 발로 걷어 찬다.
그리고,
촤악.
오른편에 선 놈의 양 손목을 베어냈다. 두 손이 검을 쥔 자세 그대로 바닥에 철퍽, 떨어졌다.
"아악!"
두 손을 잃은 경비가 바닥에 꿇어앉았다. 그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텅 빈 제 손목 아래를 보았다.
"으, 으으으."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 보이지 않을 때의 허망함. 일평생 제 팔 끝에 달려왔던 그것이 사라지는 것은, 고통보다도 더한 공포감을 준다.
그가 눈물 젖은 눈으로 옆을 둘러보았다. 검 손잡이에 달려 있어야 할 제 손을 찾았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모든 생명력을 빼앗긴 채, 검에 달라붙어 있는 살점에 불과했다.
"끄아아아아아아!"
경비가 고통스레 울부짖었다.
옆으로 밀려난 다른 경비가 흠칫 놀라고, 마부가 귀를 틀어막고, 모여있던 노예들이 머리를 감싸며 푹 숙여버릴 만큼.
뱃속 깊이부터 끓어오르는 듯한, 한이 맺힌 울부짖음.
"끄르르르...."
놈이 갑자기 발작하듯 몸을 떨어댔다. 눈이 허옇게 뒤집히고, 입 밖으로 거품이 줄줄 흘러나왔다.
"...."
거칠게 들썩이던 놈의 몸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거품 가득한 입가 로 혀가 축 늘어졌다.
"죽었네?"
조용한 중얼거림이 놈의 시신 위로 떨어져 내렸다.
몸의 한 부위를 잃은 것만으로도 너무 놀라서 죽는 경우가 있다더니, 그 짝인 모양이었다.
'쯧쯧. 약해 빠져서는.'
하긴 여기서 힘없는 노예들만 감시하던 놈이 언제 이런 피비린내 나는 광경을 목격했겠는가.
아무튼 운이 나쁜 녀석이었다.
'아니지, 어쩌면 운이 좋은 걸지도?'
다음 녀석을 처리할 방법을 생각하면, 차라리 저렇게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흥."
미동 없는 시체를 내버려 두고 몸을 돌렸다.
"으, 뭐, 뭐야?"
내게 차여 밀려났던 경비가 황급히 자세를 가다듬었다. 하지만 놈은 이미 투지를 잃고 움츠러든 채였다.
놈의 발이 여차하면 도망칠 것처럼 바깥쪽을 향했다.
"젠장!"
놈이 막 한 걸음을 뗀 순간, 나는 몸을 낮춘 채 달려들었다.
푹!
레퀴엠이 놈의 턱을 뚫고 정수리로 튀어나왔다.
"끄, 끄르륵."
놈의 입에서 기괴한 신음이 튀어나왔다. 소리를 내는 근육을 꿰뚫렸기 때문이다.
놈이 두 팔을 들어 올려 내 검을 붙잡았다. 어떻게든 내 검을 밀어내려고 버둥거렸다.
하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스아아-
오싹한 소리와 함께 레퀴엠에 닿은 놈의 손이 쪼그라들었다. 그 현상은 마찬가지로 레퀴엠에 찔린 목에서도 진행되고 있었다.
툭-
놈의 두 팔이 맥없이 떨어져 나갔다. 어깨, 팔꿈치 등 모든 관절이 가능하지 않은 각도로 꺾이고, 손가락 발가락 끝이 한계까지 곱아든다.
"히, 히이익!"
그 모습은 마부가 뒤로 엉금엉금 기어가게 나올 정도로 기괴했다.
"커, 커거, 꺼걱."
경비는 아부 저항도 하지 못했다. 사지를 쭉 뻗은 채, 맥없이 생기를 빨아 먹힐 뿐.
그 모습은 쇠꼬챙이에 꽂힌 개구리와 비슷한 면이 있었다.
'1, 2, 3....'
그 모습을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며 숫자를 셌다.
목과 머리.
심장만큼은 아니더라도 인간에겐 치명적인 부위다. 이 부위를 레퀴엠으로 찔렀을 때, 얼마나 빠르게 생기를 흡수하는지 알고 싶었다.
'...8, 9, 10.'
내가 10까지 세었을 때,
"꺽...."
경비의 입에서 새어 나오던 끔찍한 비명이 멎었다. 그의 팔다리가 축, 늘어졌다.
'10초, 정도로군.'
나는 경비의 목에서 확 검을 빼내었다. 지탱할 곳을 잃은 몸뚱이가 와르르 무너졌다.
바닥에 쏟아진 시체는 형체만으로 간신히 인간이라는 것을 알아볼 뿐.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으, 으으...."
마부가 두려움 가득한 신음을 삼켰다.
"히익...!"
한 노예가 내뱉은 비명에. 다른 노예가 기겁해서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숨죽인 침묵이 감옥을 가득 메웠다. 비탄과 경악, 공포만이 감도는 이곳에서, 소리를 내는 존재는 오직 하나였다.
"...."
레퀴엠.
오직 그것만이 그르렁거리며 환희의 신음을 내뱉었다. 한 인간의 생명력을 모조리 빨아먹은 것에 몹시 흥분한 눈치였다.
더, 조금 더. 어서, 다음 것을.
'닥쳐.'
나는 이를 악문 채 내뱉었다.
모든 살인은 나의 의지대로, 나의 계획하에 이루어져야 했다. 결코 레퀴엠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서는 안되었다.
헌데,
"...."
왜 내 마음과 다르게, 자꾸 입꼬리가 들썩이는지. 왜 자꾸 킬킬거리며 소리 높여 웃고 싶은 건지.
'좋지 않아.'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술에 취한 것처럼 마음이 둥실둥실 떠올라, 구름 위를 걷는 듯한 부유감이 밀려들고, 나른함이 뼈를 녹일 듯이 몸을 적신다.
나는 위험한 경계를 넘어서기 직전의 상태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었다.
'곤란한데.'
이곳에 있는 모든 인간을 죽이는 게 원래 계획이었다. 하지만 지금 몸 상황을 보니, 그렇게 했다간 위험할 것 같았다.
내가 아니라, 이 영지 전체가.
"...."
이를 악다물며 손끝에 힘을 주었다.
'일단, 검부터 집어넣어야겠어.'
처음 검을 빼내었던 것처럼 다시 집어넣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하지만 손바닥에 잡힌 레퀴엠의 존재가 사라지지 않았다.
'...이 자식이.'
레퀴엠이 내 손바닥에 찰싹 달라 붙어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거머리가 제 이빨을 박아넣는 것처럼.
건틀릿에서 초록빛이 일렁였다. 수호자의 기운은 그런 나를 레퀴엠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크윽.'
그러는 동안, 등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달그락.
땅에 떨어진 검을 잡는 아주 미세한 소음. 하지만 그 여느 때보다 예민해져 있던 나의 귀엔 너무나 크게 들렸다.
휙 고개를 돌리자, 마부가 검을 든 채 바닥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괴, 괴물."
그의 눈은 초점을 잃고 불안정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가 검에 힘을 콱 주더니,
"으아아아!"
내게 막무가내로 달려들었다. 이미 공포에 질려 이성이고 뭐고 상실한 표정으로.
공격이라 할 수도 없는 처절한 발악이 내게 짓쳐든다.
'이런.'
살의를 인지한 순간 몸이, 아니 레퀴엠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마치 움직이는 사냥감을 쫓는 맹수처럼, 정확하고 빠르게 급소를 노렸다.
푹!
레퀴엠이 마부의 가슴을 꿰뚫었다.
"컥!"
마부가 숨 막히는 듯한 비명을 내질렀다. 그의 몸이 앞서 죽은 경비처럼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아아."
나는 희미한 탄식을 흘렸다. 그것은, 달콤한 한숨에 가까웠다.
두근, 두근.
놈의 심장 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온다. 갑작스레 찾아든 고통에 놀라 펄떡대는 소리가.
눈앞에 그려지듯 생생히 보인다. 고통스레 움찔거리며 수축하는 심장이, 그렇게 튀어나온 혈액이 혈관을 타고 뻗어나가는 모습이.
어떻게든 제 주인의 몸을 살리려고 고군분투하던 심장은 이내 주도권을 내주고 말았다. 제 한가운데를 꿰뚫은,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암흑 같은 구멍에.
내게로 흘러드는 피와 생명력이, 감미로운 노랫소리가 되어 영혼을 뒤흔들었다.
최후의 순간에 다다른 인간이 내뱉는 고통스러운 숨결이, 황홀한 빛깔이 되어 나를 물들였다.
"꺼헉...."
메마른 미이라와 같은 몰골로, 마부의 몸이 바닥에 털썩 쏟아졌다.
그리고 정적.
"...."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침묵했다. 남은 노예들은 모두 입을 틀어막은 채 숨을 죽였다.
이윽고,
"...하하."
내 입가에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더, 더.
머릿속을 잠식한 목소리가 어느새 내 입술을 움직였다.
"더, 더 듣고 싶어."
그 심장 소리를.
"더 먹고 싶어."
영혼 깊은 곳을 뜨겁게 달구고, 가득히 채워주는 생명을.
"더."
나는 몸을 돌렸다. 내 등 뒤에서 숨을 죽이고 있는, 다음 생명을 향해서.
❖ ❖ ❖
"쯧쯧, 그래도 그렇지."
모리츠가 못마땅한 얼굴로 노아를 노려보았다.
"너무 경솔했어. 혹시라도 누가 봤으면 어쩌려고 그랬나?"
"죄송합니다."
노아가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차던 것도 잠시,
"그래도... 결과적으론 잘 되었네."
모리츠가 노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노아는 베시시 웃으며 얼굴을 들어올렸다.
"덕분에 그 많은 노예들을 사간 고객이 누구인지 알 수 있겠어."
"그렇죠. 제가 그래서 꾹꾹 참으면서 그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을 데려온 거 아닙니까."
"그래, 고생했다."
모리츠가 회계 장부를 슥슥 넘겼다. 숫자를 훑는 그의 눈이 싸늘하게 빛났다.
"확실히, 보통 녀석은 아니더군."
"그렇죠?"
노아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이런 손님 저런 손님 다 만나봤는데, 그렇게 버르장머리 없는 놈은 처음 봤습니다."
"얼굴은 못 봤나?"
"아, 네."
"왠지 어딘가의 하인일 것 같진 않았단 말이지."
모리츠가 손가락으로 장부를 툭툭 두드리다가, 이내 다시 덮었다. 그리고 눈을 번득였다.
"가서 자세히 좀 봐야겠군."
그는 마지막 손님을 내보낸 뒤 문을 닫았다. '영업 종료'라는 패로 갈아 끼운 뒤 돌아섰다.
"슬슬 가지."
"네. 지금쯤이면 브루노 형님이 묵사발을 만들어놨겠죠?"
노아는 히죽 웃으며 앞장서다가, 문득 멈추었다. 따라나서던 모리츠가 물었다.
"왜 그러나?"
"아, 아닙니다."
노아는 고개를 젓곤 다시 걸음을 옮겼다.
'설마 그럴리 있겠어.'
애써 부정했지만, 그의 머릿속엔 혹시나 하는 생각이 맴돌았다.
'혹시 브루노 형님이 그놈에게 진다거나, 하는 일은.'
그건 객관적으로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브루노는 뒷골목에서도 상당히 이름을 날렸던 실력 좋은 깡패였다.
'그런데 왜 이런 생각이 드는 걸까.'
그건 아마도 아까 뒤에서 놈에게 붙잡혔을 때 느꼈던, 불길한 느낌. 그것이 기억에 강하게 남은 탓인 듯했다.
'잊어버리자, 잊어버려.'
노아는 고개를 흔들어 그 생각을 쫓아버렸다. 그리고 모리츠와 함께 브루노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Chapter 4. 약한 놈부터 쫓는다. (7)
브루노가 있는 방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고문하는 소리로 요란할 줄 알았건만, 예상외로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조용하군."
같은 생각을 했는지 모리츠가 중얼거렸다.
"그러게요. 지금쯤 꽥꽥거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노아는 머리를 긁적이다 이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벌써 다 털어놓고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거 아닐까요? 하하."
그가 문에 다가가 구멍으로 안을 내다보았다.
"어?"
"왜 그러지?"
"아니, 그게.... 안에 아무도 없는데요?"
자물쇠는 여전히 잘 잠겨 있었다. 이쪽으로 나온 건 아니라는 뜻이었다.
노아는 급히 허리춤을 뒤져 열쇠를 꺼냈다. 덜그럭,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브루노 형님?"
물음에 답은 없었다. 방 안은 그저 고요했다.
그리고 어디선가, 코끝을 건드리는 냄새가 풍겨오고 있었다. 아주 역하고, 소름이 돋는, 오싹한 냄새가....
"...저게 뭐지?"
모리츠가 눈을 게슴츠레 뜨곤 한 곳을 가리켰다.
브루노가 주로 사용하는 도구들을 모아둔 작업대였다. 그 아래 바닥에 거무스름한 막대기 같은 게 놓여 있었다.
"글쎄요?"
노아는 모리츠와 함께 다가갔다가,
"히익!"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이, 이게...."
노아가 입을 틀어막았다. 모리츠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인간의 팔... 아니, 팔이었던 물건이었다.
새카맣게 말라버린 막대기처럼 보였으나, 관절과 손가락의 형태가 남아 있어 겨우 팔인 걸 알아볼 수 있었다.
"끔찍하군."
온갖 더러운 일을 하며 숱한 꼴을 봐 왔던 모리츠조차 침음을 흘렸다.
"으으으."
그에 대한 면역이 덜한 노아는 구토감이 치밀어 죽을 것 같았다. 계속 보고 있다간 정말 토할 것 같아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
그런데, 그 팔뚝보다도 더한 게 놓여 있었다. 주인을 알아볼 수 없는 머리통이.
"우웨엑!"
노아는 결국 벽에 대고 구토를 쏟아내고 말았다. 위장에서부터 거슬러나온 노란 물이 바닥을 적셨다.
"우욱, 욱."
그가 겨우 토기를 억누르곤 입가를 닦았다.
"젠장. 오늘 일진 진짜 왜 이러냐."
아까 일까지 합치고 나니, 마치 아래 위로 다 쏟아낸 듯해 기분이 더러웠다.
"아니, 브루노 형님도 참."
노아는 투덜거리며 벽에서 몸을 뗐다.
"아직 뒤를 못 캤는데 죽여버리시면 어떡한답니까?"
다시 보아도 흉물스러운 머리였다. 그는 이렇게 몸에서 잘려 나간 머리는 처음 보았다.
"보나 마나 이 녀석이 형님 성질을 건드렸겠죠."
노아가 천천히 바닥에 굴러다니는 머리통으로 다가갔다.
"근데 머리통이 왜 벌써...."
머리를 자세히 들여다본 노아는 입을 다물었다.
모르는 얼굴이 아니었다. 익숙한 턱수염, 그리고 머리카락 색까지.
머리의 주인은, 그가 아는 얼굴이었다.
털썩.
노아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입술을 달싹이다 겨우 한 마디 내뱉었다.
"브, 브루노 형님...?"
노아의 이가 딱딱 부딪혔다.
'형님이 당했다고? 그놈에게?'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이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결코 일어날 리 없다고 생각했던 일이, 무거운 현실이 되어 그를 짓눌렀다.
"...."
그동안 모리츠는 싸늘한 얼굴로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그는 아직 노아가 발견하지 못한 목 없는 시체까지 발견했다. 한쪽 팔이 떨어져 나간 시체를.
"놈에게 당했나 보군."
이 끔찍한 광경, 그리고 브루노의 죽음에도 그는 초연했다.
"저긴가."
모리츠의 시선 끝엔 열려있는 다른 방문이 있었다. 그가 그쪽을 향해 뚜벅, 한 걸음을 뗐다.
"가, 같이 가요!"
노아는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브루노의 사체가 있는 이곳에 혼자 남아 있고 싶지 않았다.
'뭔가 이상해.'
모든 것이 괴이쩍었다.
브루노 정도 되는 거한이 목을 베이고 팔을 잘렸는데도, 방엔 피 한 방울조차 튀지 않았다.
거기다 베인지 얼마 안 된 게 분명한 시체가, 이미 몇 십년은 된 것처럼 썩어버렸다.
"예감이 좋지 않군."
문밖으로 나서며 모리츠가 심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상당한 실력자야. 브루노의 몸을 단칼에 벨 정도로."
"다, 단칼에요?"
그에게 따라붙은 노아가 입을 쩍 벌렸다.
"그, 그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베인 단면을 보면 알 수 있다. 역시 그놈...."
모리츠가 눈살을 찌푸렸다.
"평범한 하인이 아니었군."
"그, 그럼요?"
"혹시 모른다. 다른 길드에서 보낸 암살자일지도."
"암살자라고요?"
노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청년에게서 뿜어져 나오던 수상쩍은 기운이 떠올랐다.
"게다가 시신의 상태가...."
복도를 가로지르던 모리츠가 입을 멈추었다. 그가 팔을 뻗어 노아를 가로막았다.
"잠깐."
복도가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모리츠가 손을 뻗어 복도 끝을 가리켰다. 노예들을 가두어두는 감옥의 문이 열려있었고, 그 앞엔 시체 두 구가 널브러져 있었다.
"헉."
노아는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모리츠가 끝내 혀를 찼다.
"경비들도 당한 건가."
"저, 저게 경비라고요...?"
노아는 입을 뻐끔거렸다.
저기 있으니 경비라고 겨우 유추한 것이지, 다른 곳에서 봤다면 무덤에서 기어 나온 시체인 줄 알았을 것이다.
"조용히 접근하세."
두 사람은 소리를 죽이고 감옥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
둘은 감옥 입구에 멈춰선 채로 굳어버렸다. 감옥 안의 풍경을 눈에 담자마자, 손발이 싸늘하게 얼어붙는 것 같았다.
한 남자가 노예의 심장에 새카만 검을 찔러 넣고 있었다.
"아아악!"
노예가 검에 찔린 곳을 부여잡고 고통스러운 신음을 토해냈다. 단순히 검에 찔린 것치고는 심하게 괴로워하는 눈치였다.
"-!"
노아는 곧 앞선 시체들이 어째서 그런 몰골이 되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푸쉬식-
노예의 몸이 검에 찔린 곳에서부터 쭈그러들기 시작했다. 마치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는 것처럼.
"끄르륵...."
노예의 몸뚱이가 모든 피와 생기를 빨린 듯한 처참한 몰골이 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아."
남자가 나른한 한숨과 함께 검을 뽑아냈다. 그 목소리를 들은 노아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 놈이다.'
그 청년이 확실했다. 허나 그가 기억하고 있던 목소리와는 약간 달랐다.
여전히 미성이었으나 짙게 가라앉아 훨씬 음습하게 들렸다. 무엇보다, 그의 한숨 아래엔 희열이 가득 깔려 있었다.
"후우."
청년이 나지막이 숨을 흘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의 입가엔 그린 듯이 매끄러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
노아는 숨도 쉬지 못하고 침만 꼴깍 삼켰다.
충격적일 정도로 조각처럼 잘생긴 청년이었다. 그는 일평생 이러한 미남자는 본 적이 없었다.
밤바다보다 더 새카만 머리카락이 흩날리고, 까만 눈동자가 불길처럼 일렁였다.
그 모든 색채가 어우러져 그를 비인간적이고 이질적인 존재로 보이게 만들었다.
"...."
노아는 호흡이 가빠지는 것을 느꼈다. 청년에게서 흘러나온 싸늘한 죽음의 냄새가 안개처럼 묵직하게 깔리는 탓이었다.
'하나, 둘....'
남자의 곁에 차곡차곡 쌓인 시체들의 수를 눈으로 셌다. 모두 낡고 헤진 옷을 입은 것으로 보아 노예들이 분명했다.
'6명.'
방금 해치운 노예까지 하면, 총 7명이었다. 12명의 노예 중 절반을 해치운 셈이었다.
앞으로의 장사가 위태로울 만큼의 궤멸적인 타격이었다.
'망했다. 진짜 개망했다.'
입술을 떨던 노아는 문득 눈에 익은 옷을 입은 시체를 발견했다.
'마부잖아.'
그가 여기 있을 이유는 하나였다. 마차에 실었던 노예들을 다시 감옥에 집어넣기 위해서.
'그럼 그때 이미 브루노를 해치우고 여기 왔단 말이야?'
등골에 소름이 쫙 끼쳤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속도였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청년이 사용하는 저 수상쩍은 검 덕분일 터였다.
'저 검은 뭐지?'
새카만 불꽃이 넘실거리는 듯한 늘씬한 검이었다. 어떤 금속을 썼기에 칼날이 저토록 검고, 또 검을 수 있는지 경탄스러웠다.
'아니, 금속이 아니라.'
마치 공허 자체를 검의 형태로 빚어낸 듯한 느낌이었다.
'도망쳐야 해.'
모든 상황이 그에게 경고등을 울려대었다. 여기 있다간 죽을 것이라는, 명백하고도 살 떨리는 미래가 눈앞에 그려졌다.
하지만 그가 마음을 굳힌 순간, 뒤에서 누군가 그를 퍽 떠밀었다.
"어억!"
노아는 앞으로 고꾸라지는 동시에 깨달았다.
'이 영감탱이가!'
모리츠가 혼자서 도망가길 택했다는 것을. 그것도 자신을 희생양으로 삼아서.
'제기랄.'
바닥에 쓰러진 노아는 시선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자신을 쳐다보는 청년과 눈이 마주쳤다.
청년의 입꼬리가 스르르 올라갔다. 새로운 사냥감을 발견했다는 듯, 흥미로 반짝이는 미소였다.
'죽겠구나.'
노아는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을 느꼈다. 눈을 한번 감았다 뜬 순간, 이미 청년은 로브 자락을 휘날리며 제게 쇄도하고 있었다.
"-!"
노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몸에 찾아들 날카로운 통증을 각오하며 이를 악물었다.
그런데.
"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청년의 로브가 펄럭이는 소리가 옆을 지나갔다.
"어어?"
노아는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컥!"
모리츠의 등에 검이 꽂히는 장면이었다. 청년은 뒤에서도 정확하게 모리츠의 심장을 찾아 검을 찔러넣었다.
"크, 커, 커걱."
모리츠는 앞선 사망자들의 전철을 그대로 밟았다. 도망치던 자세 그대로 굳어버린, 새로운 시체가 생겨났다.
"으, 으아."
노아는 엉금엉금 뒤로 기었다. 그를 두렵게 하는 것은 모리츠의 죽음이 아니었다.
"하하."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흩어지는 청년의 미소, 환한 빛살 같은 웃음소리가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
그가 진심으로 이 '살육'을 즐기고 있다는 뜻이었으므로.
"으, 으흑."
노아는 입술을 떨었다. 그의 고간 사이로 다시 오줌이 줄줄 새어나왔다.
'죽고 싶지 않아.'
의식하지 못한 새 눈가에서 눈물이 주륵주륵 흐르고 있었다.
툭.
청년은 모리츠의 시체를 가볍게 털어낸 뒤 돌아섰다. 그리고 노아를 향해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뚜벅, 뚜벅.
고요한 발걸음이 사신의 칼날처럼 매서웠다.
그의 새카만 눈은 노아에게 고정된 채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 남은 노예들이 있는 데도.
그는 더 빠르게 움직이거나 강한 사냥감을 노리는 것 같았다. 짐승과도 같은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
마침내, 청년의 발걸음이 노아의 앞에서 멈추었다.
노아는 표백된 것처럼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청년을 바라보았다. 청년의 검이 서서히 허공을 향해 올라가는 게 보였다.
코끝으로 시큼한 냄새가 밀려드는 것 같았다. 죽음의 향기였다.
거기 잠식되기 직전, 청년의 검이 내려 그어지기 직전,
"제, 제제제 제발!"
노아의 입에서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다.
"사사사사 살려주세요!"
노아는 덥석 청년의 바짓자락을 붙잡았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제가 뭐라고 뱉는지도 몰랐다. 청년에게 말이 통할 것 같지도 않았다.
"아까 헛소리해서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미쳤었나 봐요!"
그저 공포에 질린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노아는 필사적으로 살려달라 애원하고 또 애원했다.
"저, 저는 결코 고객님을 그 방에 넣고 싶지 않았어요! 방금 죽여버리신 그 노인네가 시켜서 한 겁니다!"
Chapter 4. 약한 놈부터 쫓는다. (8)
제가 생각해도 빈약한 변명이었지만.
살고 싶었다. 미치도록, 정말로 살고 싶었다.
그래서 노아는 눈물콧물 다 흘리며 애걸복걸했다.
"제발 살려만 주시면, 오늘 일은 잊고 쥐죽은 듯이 살겠습니다! 다시는 이쪽 일에 몸담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무작정 입을 움직이던 그는 문득 깨달았다.
'나... 아직, 안 죽었나?'
자신이 이렇게 떠들 수 있다는 것은, 아직 살아있다는 의미라는 것을. 청년이 자신을 죽이지 않은 채, 가만히 서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왜... 이렇게, 조용하지?'
노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잔뜩 눈썹을 찌푸린 채, 울 듯이 웃고 있는 청년을 마주했다.
"...?"
노아의 눈이 급격히 커졌다. 검은 연기가 빠져나가듯, 청년의 눈동자에서 색이 흩어지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저, 저 색은?'
라일락과 같은 수려한 청보랏빛. 이 독특한 눈동자 색은, 세간에 널리 알려진 누군가의 인상착의와 흡사했다.
'아, 아벨 킨드리얼?'
노아의 생각은 거기서 끊겼다.
"아아."
아벨이 씩 웃었기 때문에.
"너구나."
퍽 천진난만한, 그리고 잔혹하기 그지없는 미소였다.
❖ ❖ ❖
새카맣게 물들었던 시야가 원래 색을 되찾고, 시뻘겋게 보이던 인간들이 제대로 형상을 갖춘다.
레퀴엠에 잠식되었다가 돌아오는 순간의 느낌은,
'상쾌하다.'
그리고 약간 울적하기도 했다.
온몸을 휘감아돌던, 무엇이든 할수 있을 것 같은 고양감이 잦아드는 탓이었다.
"...."
눈을 한 번 꾹 감았다 떴다. 비로소 온몸의 통제력이 되돌아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으으으...."
눈앞엔 노아가 주저앉아 있었다. 소변으로 흥건한 바닥 위에,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한 채.
"너구나."
나는 반가운 미소를 흘렸다.
"용케 안 죽었네."
진작 죽었을 수도 있는데 말이지.
레퀴엠과 동화된 동안엔 피아를 구분하기 힘들다.
모든 생명체가 타오르는 붉은 불꽃으로 보이고, 그 불꽃의 크기에 따라 강한 자인지 아닌지 정도만 구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의 살육은, 철저히 효율적으로 생명력을 갈취하기 위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모리츠라고 했나?'
가령 눈에 띄게 뒤돌아서서 내게 도망가는 상대라던가. 만약 노아도 그랬더라면 더 빨리 목숨을 잃었겠지.
놈이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은 것은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를 살리고, 이 영지를 살린 선택.
"어디 보자."
감옥엔 내가 만들어낸 지옥도가 펼쳐져 있었다. 노예들은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처음 위치 그대로 시체의 산을 이루고 있었다.
피 한 방울조차 튀지 않은, 가장 어두운 살육의 현장.
"화려하게도 해 먹었군."
키득 웃으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시시각각 내 뱃속을 갉아내던 허기가 잠잠해져 있었다.
"배부르다."
위장이 가득 차도록 음식을 넣는 것으론 결코 채우지 못했던, 허기가 비로소 해소되는 느낌이었다.
아주 만족스러웠다. 오랜만에 제대로 포식을 한 듯한 흡족함이 차올랐다.
나는 배를 가볍게 쓸어내린 뒤 뒤돌아섰다.
"히, 히익...."
노아가 사색이 된 채 나를 쳐다보았다. 마치 '당신이 왜 여기에?' 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
"아."
머리카락을 한 움큼 쥐어 살폈다. 먹물이 빠져나가듯 검은 빛깔이 서서히 흐려지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내 눈동자를 덮었던 검은 기운도 지금쯤 자취를 감추었을 터였다.
'흑풍.'
원작의 아벨이 미쳐 날뛸 때는 이렇게 불리곤 했다. 검은 머리칼, 검은 눈동자에 새카만 공허를 휘날리며 움직였으니까.
"운이 좋았네, 너."
나는 완벽한 '아벨'의 모습을 한 채, 노아를 향해 빙그레 웃었다.
"으으...."
노아는 거무죽죽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내 한 마디에 자신의 운명이 어찌 될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 아베...."
레퀴엠이 섬광처럼 뻗어나가 노아의 입술 앞에 멈추었다.
"-!"
노아는 입을 꽉 다물며 뒤로 흠칫 물러났다. 여기 찔리면 어떻게 되는지 아는 자의 몸짓이었다.
나는 비릿한 미소를 뿌렸다.
"입 조심해야지. 응?"
노아는 이를 악물며 고개를 마구 끄덕거렸다.
"그래. 이제 호기심은 좀 풀렸나?"
계속해서 고개를 위아래로 젓던 노아의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그가 이번엔 고개를 좌우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으읍, 으으읍!"
"아니야? 계속 궁금해했잖아. 그 많은 노예들을 사간 게 누군지."
노아는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고개만 거세게 흔들었다. 그의 애처로운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제발 살려주세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게요.
"아, 그래."
나는 그것을 못본척 천천히 읊조렸다.
"내가 그랬지. 넌 운이 좋았다고 말이야."
"흐읍."
노아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천천히 노아에게 다가가, 그의 앞에 섰다.
"일단, 고맙다."
네 덕분에 정신이 들었거든. 뒷말은 입속으로 삼켜냈다.
"-?!"
뜻밖의 말을 들었는지 노아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의 커다랗게 뜨인 눈동자와 내 눈이 마주친 순간,
스으윽-
레퀴엠이 노아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끕!"
노아가 고통스레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 이를 악문 탓에, 그의 입술이 터져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일부러 천천히, 놈의 몸에 검자루 끝이 닿을 때까지 검을 밀어 넣었다.
"그러니까, 곱게 죽여줄게."
"끅, 끄으윽!"
고통스레 비틀린 놈의 눈가를 무감한 눈으로 응시했다. 귓가에 쟁쟁히 울리는 레퀴엠의 환호성을 깨끗이 무시했다.
턱.
검자루 끝이 노아의 몸에 닿은 순간,
"잘가라."
있는 힘껏 손을 비틀었다. 칼날이 노아의 심장을 찢어발겼다.
"커헉!"
노아는 숨 막히는 소리와 함께 절명했다.
레퀴엠은 진득하게 박힌 채 노아의 남은 생명력을 흡수하길 원했지만,
"흥."
나는 미련 없이 레퀴엠을 빼냈다.
털썩.
노아의 몸이 허물어졌다. 아직 생명력이 남아 있는 채로.
놈의 가슴엔 레퀴엠이 남긴 커다란 구멍이 생겨있었다. 새카맣게 타들어간, 오직 레퀴엠만이 남길 수 있는 상흔이었다.
"이제,"
나는 레퀴엠을 쥔 채 손을 들어올렸다.
"만족하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설령 대답이 들려왔다 하더라도, 레퀴엠의 말을 들어줄 생각은 없었지만.
"후우."
나는 손을 허공으로 뿌리듯 휘저었다. 아깐 거머리처럼 들러붙어 있던 레퀴엠이 이번엔 손쉽게 떨어져 나갔다.
이는 레퀴엠이 그럭저럭 만족한 탓도 있겠지만,
"나쁘지 않네."
새로운 살인에도 평온함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광포하게 날뛰는 심장을 나와 온전히 분리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후우."
나는 눈을 감은 채 절대 영역을 펼쳤다. 이 건물 안에, 나와 감옥의 노예들을 제외한 생명은 더 이상 없었다.
"다섯 명이라."
원래는 내게 팔릴 예정이었지만 결국 이곳에 돌아오게 된 노예들. 그들은 여전히 약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벽에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
"너흰 진짜 운이 좋은 거야."
12명 중 먼저 노예로 차출된 덕에 이렇게 살게 됐으니까 말이다.
"내가 배부른 것에 감사하라고."
난 과식을 싫어하거든.
나는 히죽 웃은 다음 로브의 후드를 다시 뒤집어썼다. 그리고 상점 밖으로 나가는 뒷문을 찾았다.
"아, 배부르니까 졸리네."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 ❖ ❖
며칠 뒤.
여느 때와 같은 평화로운 나날을 보냈다. 물론, 약간의 변화는 있었다.
똑똑.
"도련님, 접니다."
쉴 새 없이 문서를 처리하던 나는 얼굴도 들지 않고 대꾸했다.
"들어와."
집무실 문이 열리고,
"실례하겠습니다."
필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그가 수레를 미는 소리가 따라왔다.
그가 방 안으로 들어와 차근차근 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한창 서류 처리에 골몰해있던 나는 문득 얼굴을 들었다.
"뭐야. 왜 거기다 차려?"
"예?"
필립은 내가 업무를 보는 책상 옆에 따로 준비된 식탁 앞에 서 있었다.
"아, 업무를 보시는 책상 위에 올리기엔 공간이 부족할 듯하여...."
"그러니까, 왜 그렇게 많이 가져왔냐고."
식탁 위에는 샐러드와 수프 및 푸짐한 육류로 구성된 정찬이 차려져 있었다.
나는 못마땅한 얼굴로 입꼬리를 비틀었다.
"내가 '간단히' 차리라고 했잖아."
"어, 그게."
필립은 몹시 당황스러워하는 얼굴로 내 표정을 살피더니, 쩔쩔매며 대답했다.
"그... 간단히 차리라고 하시길래, 평소보다 양을 줄였습니다만."
그 말에 나는 식탁에 차려진 양을 가늠해보았다. 확실히 내가 '평소'에 먹던 양보다는 줄었지만, 일반 사람이 먹는 2배의 양에 해당했다.
"됐으니까 대충 집어먹을 수 있는 것만 가져와."
필립이 눈을 끔벅거리더니, 이내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그는 차려진 음식 중에서 내가 요구한 것을 찾아 꿈지럭거렸다.
달칵.
이윽고 내 옆에 접시가 놓였다. 그 위를 힐끗 바라본 나는 만족스레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좋아."
접시 위에는 한입에 먹기 좋게 자른 샌드위치, 포크로 집어 먹기 쉬운 조각낸 과일 등이 놓여 있었다.
나는 서류에 도장을 찍는 중간중간 음식들을 집어먹으며 작업에 몰두했다.
그런 나를 바라보는 필립의 얼굴에 혼란스러운 기색이 담겼다.
'왜 또 이러시지?'
그의 당황스러움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걸신들린 것처럼 혼자서 몇 인분을 먹던 인간이, 갑자기 양을 확 줄였으니까. 사실 지금 먹는 양이 정상이라곤 해도 말이다.
나는 느릿하게 샌드위치를 씹어 삼켰다.
'정말 별로 배가 안 고픈걸.'
며칠 전 노예상에서 포식한 덕분인지, 정말로 그다지 허기지지 않았다. 그래서 예전처럼 일을 할 땐 집무실에서 간단히 먹어도 좋을 듯했다.
'뭐랄까, 정확히는.'
입에 들어가는 음식의 맛이 예전보다 덜하게 느껴진다는 것?
레퀴엠으로 인간을 죽이며 맛본 극상의 맛이, 더 강하게 뇌리에 남아버린 탓이었다.
'당분간은 자제해야 하지만.'
단순히 미식을 위해 살인을 저지를 생각은 없었다. 그것이야말로 레퀴엠에 현혹당하는 첫 번째 발걸음이니까.
'쾌락을 위한 살인이, 가장 위험하지.'
나의 살인은 오로지 레퀴엠이 굶고 허기져 폭주하는 것을 막기 위한, 일종의 고삐로만 사용되어야 했다.
'이만큼 채웠으니 당분간은 괜찮으려나.'
나는 파인애플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넣었다. 상큼한 맛이 혀를 톡 쏘는 것을 느끼며 입 안에서 굴렸다.
"...."
그런 나를 필립이 유심히 살폈다. 내가 별 말없이 과일을 먹기만 하자, 그가 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나는 한결 안심한 얼굴의 그를 곁눈질로 보곤 피식 웃었다.
'그래도 덕분에 안전하게 일을 치렀군.'
인간을 살해하면 반드시 시신이 남고, 이는 지울 수 없는 흔적이 된다. 그것을 경비대에서 발견하면 귀찮아질 게 분명했다.
'역시 뒤가 구린 놈들을 쳐야 뒤끝이 없단 말이지.'
대로변에서 묻지마 살인을 저지르는 것은 멍청한 짓이었다.
따라서 나는 다음 살인도 이번처럼 정체를 숨긴 채 영업하는 놈들을 목표로 할 생각이었다.
'아니면, 널리 알려진 현상수배범을 쳐도 좋겠군.'
그럼 오히려 제국에선 죽여줘서 감사하다고 넙죽 절을 할 것이다.
그러던 중,
'음?'
나는 보던 서류에서 눈에 익은 이름을 발견했다.
'알레시아 스쿠젠?'
Chapter 4. 약한 놈부터 쫓는다.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