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wnload Chereads APP
Chereads App StoreGoogle Play
Chereads

REYDEMONIOBUENACOSECHA

Kakao_Cuenta_7611
14
chs / week
The average realized release rate over the past 30 days is 14 chs / week.
--
NOT RATINGS
157
Views
VIEW MORE

Chapter 1 - 1-10

1화. 폭군의 출정식

마족.

버려진 땅을 방황하는 굶주린 영혼들.

이들의 기원이 어디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누군가는 마족을 일컬어 모든 이가 고통받는 마계에서 흘러온 부산물이라 하고, 또 누군가는 신화시대 보옥 전쟁의 죄악을 덮어쓴 이들이라 경멸하기도 한다.

다만 그럼에도 확실한 사실이 하나 있다.

오늘부로, 졸지에, 내가 마족 모두를 이끄는 마왕이 되어 버렸다는 것.

"크레도스 님."

상념 사이로 귓구멍을 찔러오는 목소리.

침착하고도 냉랭한 느낌의 음성이었다.

그 부름에 한국대학교 농업대학 대학원생, 김장철은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덕분에 마주할 수 있었다.

"군단의 출정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

이쪽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오는 이가 보였다. 검은 머리칼. 붉은 기운이 서린 어두운 눈동자. 그 위를 덮은 투명한 안경은 더없이 차가워 보였다. 인상 또한 그러했다.

초면인데 익숙한 얼굴이었다.

현실에서만 초면일 뿐.

실제로는 무수히 본 캐릭터인 까닭이었다.

'제피로스.'

김장철은 기억을 되짚었다.

극악의 게임, 유혈의 성기사.

정식 명칭, 팔라딘 오브 블러드.

그 게임 속 최종보스인 크레도스를 보좌하는 자.

즉, 마왕의 부관.

한데 그 부관 제피로스가 지금, 이쪽을 '크레도스'라 부르고 있다. 절제된 걸음으로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고 있다. 심지어 보고까지 올리고 있다.

"모두가 마왕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김장철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거, 실화인가.

내가 마왕이라니.

무려 크레도스라니.

솔직히 어이가 없었다.

만약 누군가가 한 시간 전의 자신에게, '넌 지금 플레이하고 있는 게임 속 최종보스 마왕이 될 거야'라고 진지하게 말했더라면? 당장 정신병원 전화번호를 검색해서 스윽 보여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엄연한 현실이고, 실화이며, 팩트인 상황이었다.

부정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너무나 생생한 공기.

현실 그대로의 실감.

이쪽을 향해 건네어 오는 제피로스의 똑 부러지게 차갑고 공손한 말투까지.

"파괴의 전당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러지."

김장철은 자신이 처한 이 전대미문의 상황을 고스란히 깨달았다. 자신이 가짜라는 것을 들키면 곤란해질 것이다. 제피로스와 다른 마족들의 태도가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자신은 이미 답을 알고 있는지도.

'아마 썰려 죽겠지. 가짜인 걸 들키자마자.'

그럴 수는 없다. 어떤 식으로든 그런 꼴을 당하는 건 사양이다. 그래서였다. 김장철은 자신이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이기를 바라며 마왕의 권좌에서 일어섰다.

 

스윽....

 

어색하게 느껴지는 스스로의 동작.

당연한 일이리라.

이건 평범한 사람이던 자신의 몸이 아니니까. 무려 레벨 666의, 게임 속 최종보스인 마왕 크레도스의 육신이니까.

그래서인지 자연스럽게 걷는 것도 생각만큼 쉽지가 않았다. 신체 밸런스가 모조리 다 낯설었다. 제법 적응이 필요할 듯했다.

'...후우.'

꼴사납게 넘어지지 않도록.

그래서 들키는 일이 없도록.

세심하게 주의를 하며 걸었다.

앞서 걷는 제피로스의 뒤를 따랐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복도는 길지 않았다. 복도의 끄트머리가 가까워지며 함성도 점점 커졌다. 아니, 압도적으로 변해갔다.

 

쿠워어어어어억-!

 

구름 낀 핏빛 하늘.

집결한 마족의 대군단.

열광하는 포효와 괴성.

하늘이 떨리고 땅이 울렸다.

복도의 끝, 파괴의 전당이 내려다보이는 발코니에 선 김장철은 숨이 턱 막히는 위압감을 느꼈다. 전신의 솜털이 와락 곤두서는 기분. 혹은 공포심. 게임 속에서 보던 수많은 마족들을 실물로, 그것도 종합세트로 맞닥뜨리는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섬뜩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김장철은 당황하지 않았다. 최소한 겉으로는 침착한 척하며, 그만큼의 생존 욕구를 불태우며, 마족 군단의 대열을 관찰했다.

그때였다.

"오늘의 대침공으로! 우리의 배고픔을 끝내자!"

군단의 선두에서 핏빛 힘줄과 촉수로 전신을 감싼 마족이 포효했다. 녹슨 철판을 긁는 듯한 사나운 외침. 핏줄이 얼기설기 얽힌 톱날 대검을 치켜든 이였다.

김장철은 그 모습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사천왕, 그중에서도 혈염의 아수라트. 레벨은... 534.'

보자마자 기억이 새록새록 피어났다.

당연했다.

팔라딘 오브 블러드를 플레이하며 지겹도록 싸운 놈이니까. 그 외의 다른 사천왕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무것도 자라나지 못하는 척박한 땅에서 태어난 비극! 동족을 먹으며 살아남아 연명하는 고통! 우리가 그 비참한 시간을! 오직 역사에만 기록된 과거로 만드는 것이다!"

또 다른 서늘하고 낭랑한 외침이 군단을 몰아쳤다. 얼음 갑옷을 입은, 등에서 네 자루의 얼음 칼날이 솟아난 여성형 마족이 보였다.

'저건... 절대영도 혹한의 칼날, 시르케. 레벨은 531.'

기억을 더듬는 김장철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인간을 찢어라! 엘프를 다져라!"

"모두 우리의 식량으로 삼자!"

검은 안개의 날개를 펼친 중년 마족은 안개의 대공 하르토크였다. 그 곁에 산맥처럼 우뚝 선 거대한 근육덩어리 마족은 바위의 폭군, 바할이었다.

'저 둘의 레벨은 555와 539....'

게임 속에서 무수히 자신을 괴롭혔던 극강의 사천왕. 그들의 모습을 현실로 보게 되자 에스프레소처럼 짙고 진한 실감이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힘찬 연어들처럼 뇌척수를 노크해 왔다. 그보다 한층 더 진한 회한과 함께였다.

'나는...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그저 열심히 아등바등 살았을 뿐인데.

어떻게든 학위를 따려고 노력했을 뿐인데.

문득, 한국에서의 삶이 떠올랐다.

가난했지만 꿈이 있었다.

그 꿈을 안고 들어간 한국대학교 농업대학 대학원. 들어가자마자 최선을 다했다. 주위에서도 그걸 알아주었다. 덕분에 순식간에 연구실 에이스가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좋았다.

연구실 에이스가 어떤 의미인지를 알게 되기 전까지는, 분명 그랬다.

"...."

누군가가 미리 말해줬다면 참고했을 텐데. 조심했을 텐데. 연구실 에이스는 그저 교수의 1등 노예에 불과할 뿐이란 진실을.

이상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일은 자신이 다 하는데.

노력도 자신이 다 했는데.

성과는 교수들이 다 챙겨갔다.

억울했다.

그러나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날로 정신이 피폐해져 갔다. 성과는 주어지지 않고, 때려치우자니 지금까지의 노력이 아깝고, 계속 달리자니 끝은 보이지가 않았다. 미칠 것 같았다.

어쩌면 그래서였을 것이다.

먼저 연구실을 때려치우고 탈출한 후배. 그놈에게서 얻어온 구형 게임기가 자신의 유일하고도 실낱같은 숨구멍이 되어준 것은. 그 게임기에 깔려 있던 유일한 게임, 팔라딘 오브 블러드에 몰두하게 된 것은.

"...."

사실 할 만한 게임은 아니었다. 아니, 엄밀하게 말하자면 망작인 게임이었다.

재미가 없어서?

시스템이 구려서?

모두 아니었다.

팔라딘 오브 블러드가 폭망한 이유는 단 하나.

'난이도 조절 실패 때문이었지.'

어려웠다. 토 나올 정도로 어려웠다. 일반인의 상식을 한참 벗어난 수준이었다. 하여 출시 초기에만 잠깐 화제가 되었을 뿐, 유저들이 우수수 다 떨어져 나가는 바람에 1회차 엔딩을 본 사람이 드물 정도였다.

하지만... 자신은 그래서 좋았다.

'보스 때려잡을 때마다 저걸 교수 x끼라고 생각하면 몰입감이 확 생겼으니까.'

연구성과 다 가져가는 교수 x끼.

그러면서 논문 심사는 안 봐주는 교수 새x.

심지어 지 마누라 필라테스 다니는 거 운전기사나 시키고, 군대 간 아들내미 외박 나오게 하려고 아들 친구로 위장시켜서 면회 셔틀까지 강요하던 교수 x끼.

그 개x끼 얼굴을 대입하면서 보스들에게 도전했다. 무수히 썰리고, 죽으면서도 계속 도전했다. 그리고 마침내 꺾었다. 그때마다 남모를 도파민이 터지는 걸 느꼈다.

그렇게 점점 남들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 난이도 막장의 게임에 빠져들었다. 대학원 생활을 하는 틈틈이, 먹고 자는 시간마저 쪼개가며 공략에 몰두했다. 덕분에 마침내, 아마도 세계에서 유일할 19회차 클리어의 위업을 세우게 되었다.

'그 직후에, 20회차를 시작하겠느냐는 물음에 'YES'를 선택했을 뿐인데.'

티브이 화면이 폭발하듯 환해졌다.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깨어나 보니 이렇게(?) 되어 있었다. 자신이 게임 속 최종 보스인 크레도스가 되어 있는 이 상황 말이다.

"...."

그렇다면 나는 좋아해야 할까. 극악의 난이도를 지닌 이 게임 속의 최강 마족, 무려 레벨 666의 마왕이 된 상황을 기뻐하며 반겨야 할까.

'아니.'

김장철은 고개를 저었다.

마냥 좋아할 일이 아니다. 절대로 아니다. 오늘, 인간계 침공을 거행하며 포효하는 마족군단. 이들이 맞이할 결말을 오직 자신만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침공, 이대로 진행한다면... 이대로면 나는... 반드시 죽는다.'

 

쿠워어어억-!

 

상념을 밀어내는 마족 군단의 포효. 인간계 침공을 기대하며 열광하는 함성. 다시 보니 낯선 광경이 아니었다.

게임의 장엄한 시작을 알리는 인트로의 첫 장면이었다.

'이 전쟁은... 반드시 막아야 해.'

열광하는 마족 군단의 모습 위로 문득, 자신이 무수히 보았던 인트로의 다음 장면이 떠올랐다.

 

...화아악!

 

어둠에 잠긴 팔라딘의 무덤.

서광이 엇비치는 버려진 관.

뚜껑이 열리고 있을 것이다. 관 모서리를 짚는 강인한 손등이 세상을 향한 첫 여명을 받을 것이다. 결연한 의지의 상체가 몸을 일으킬 것이다. 그리고 마왕 크레도스의 격멸을 다짐하며 눈을 뜨고 있겠지.

'이 전쟁이 시작되어 버리면 나는 그놈에게... 반드시 죽을 테니까.'

 

딩동!

 

[20회차의 플레이를 시작합니다.]

[당신의 플레이어블 캐릭터, <묵은지 (Lv.9990)> 가 마왕 토벌을 향한 위대한 여정을 시작합니다.]

 

...라는 게임의 시작을 알리는 메시지가 귓가에 울리는 듯한 착각. 환각. 혹은, 선명하고도 섬뜩한 확신.

"...."

그렇게 당할 수는 없다.

무력하게 죽는 것도 싫다.

그런 비참한 결말이라면 사양이다.

살아남고 싶다.

그러자면 내가 극강으로 키워낸, 고일 대로 고여 버린 주인공의 눈에 띄어선 절대로 안 된다.

그러니까 나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도, 굶주린 마족 군단과 사천왕의 불만을 잠재우고, 팔라딘에게 토벌당하지 않는 행복한 여생을 오래오래 살았답니다, 라는 해피한 라이프를 확보하기 위해서 나는....

"...마왕군은 들으라!"

외쳤다.

군단을 향하여.

결심을 품었다.

이쪽의 외침에 군단의 함성이 멎었다. 드넓은 파괴의 전당 가득 소름 돋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모두가 이쪽의 다음 선언을 기다렸다.

"나, 크레도스가 모든 마족에게 명한다!"

붉게 달아오른 군단의 눈길.

세차게 뛰고 있을 심장.

침공의 환희를 불태우며.

살육의 나날을 기대하며.

피에 대한 갈망을 드러내며.

모두가 이쪽을 올려다보는 이 순간.

"지금부터 우리는...."

앞으로 마족들이 살아남을, 이쪽이 살아남을, 주인공에게 걸려서 다 함께 멸망의 칠성장어 승천댄스를 추지 않을, 유일하게 떠오르는 방법을 선언했다.

"...출정을 중지하고, 농사를 짓는다!"

2화. 질소를 고정하는 방법 (1)

"지금부터 우리는... 출정을 중지하고, 농사를 짓는다!"

선명한 포효.

그만큼 또렷한 선언.

김장철의 외침이 파괴의 전당을 뒤흔들었다. 마족 군단 전원의 귓구멍을 톡톡 노크하고, 달팽이관을 쿡쿡 찔렀다. 그리고 일깨웠다. 이게 무슨 개소리냐는 의아함의 쇼크웨이브를.

"...그게, 무슨."

"방금, 내가 들은 거...."

"정말로...."

실화인가.

정말인가.

농담인가.

진담인가.

아니.

마왕 크레도스는 빈말이라도 농담 따위는 하지 않는 희대의 폭군이자 대악마적인 카리스마, 그 자체인 존재일진대.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김장철의 외침을 귓구멍으로 접수하고 마침내 이해한 사천왕은 저도 모르게 한목소리로 포효를 터뜨렸다. 자신들이 아는 크레도스는, 마왕은, 절대 농담으로 이런 선언을 할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렇기에 더욱 황망함을 느꼈다. 분노를 느꼈다. 분출했다.

"그게 무슨!"

"그토록 오래 준비한 대침공을!"

"어째서!"

"크워어어억!"

혈염의 아수라트가 전신에 핏발을 세웠다. 혹한의 칼날 시르케의 몸에서 네 자루의 검이 솟구쳤다. 안개의 대공 하르토크가 검은 살기를 안개로 뿜어냈다. 바위의 폭군 바할의 근육질 육체가 순식간에 세 배나 부풀었다.

원래 평소였다면 감히, 마왕 크레도스 앞에서 이런 행동을 하지는 못했을 사천왕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평소가 아니었다. 마왕 앞이라고 해서 조심하기에는 순간적으로 느낀 충격과 분노, 살기가 너무나 컸다.

 

...화아악!

 

진심으로 분노를 터뜨리는 사천왕에게서 극한의 살기가 줄줄이 뿜어져 나왔다. 그런 모두의 살벌한 기세가 노골적으로 발코니 위의 김장철을 향하였다.

그런 덕분(?)이었다.

'느... 허억?'

김장철은 숨이 콱 멎는 기분을 느꼈다. 무서웠다. 진심으로 살기를 줄줄이 드러내는 사천왕들의 모습은 어지간한 호러 영화는 아동용 영상으로 전락시킬 정도로 공포, 그 자체였다.

마주하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저도 모르게 눈썹이 부들부들 경련했다. 공포심에 질려 미간은 일그러졌고, 입은 떡 벌어졌으며, 눈은 부릅떠졌다.

그런 덕분(?)이었다.

'느... 허억?'

사천왕은 숨이 콱 멎는 기분을 느꼈다. 섬뜩했다. 삽시간에 눈썹을 푸르르 떨며, 미간을 일그러뜨리고, 송곳니를 드러내며, 부릅뜬 눈으로 자신들을 굽어보는 마왕 크레도스의 압도적 위용이란!

마주하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식은땀이 쑴펑쑴펑 돋아났다. 치솟고 있던 분노와 살기마저도 한 큐에 식어 버렸다. 새삼 깨달았다. 자신들이 잠깐 눈이 뒤집혀서 선을 넘었구나, 라는 소름 끼치는 자각과 함께.

역시나 그런 덕분(?)이었다.

"이것이 나의 선언이다. 전원, 해산!"

사천왕이 주춤하는 틈을 탄 김장철이 재빨리 연설을 마무리 지었다. 발코니 안쪽으로 몸을 휙 돌려 사라졌다.

"...."

남겨진 사천왕.

그리고 졸지에 시무룩해진 마족 군단의 침묵만이 파괴의 전당 가득 황망히 내려앉았다.

 

 

"크레도스 그놈! 겁먹은 거야!"

 

콰앙!

 

석제 테이블이 일격에 가루가 되었다. 테이블을 내려친 주먹 가득 핏빛 힘줄을 드러내며, 사천왕 아수라트가 회의실에 모인 이들을 향해 말했다.

"아니, 약해진 거다, 그놈은. 그러니까 겁을 먹고 출정을 중지시킨 것일 테고!"

"...."

나머지 사천왕이 묵묵히 그의 말을 경청하는 가운데, 아수라트의 피를 뿜는 듯한 거친 외침이 이어졌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이렇게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거다!"

"그럼, 어쩌자는 거지?"

묵묵히 듣던 또 다른 사천왕, 시르케가 반문했다.

아수라트의 눈동자에 광기 어린 살기가 스몄다.

"힘을 합쳐야지, 우리가. 그리고 놈의 목을 따는 거야. 어차피 크레도스 그놈도 전대 마왕 목을 따고 마왕이 된 거잖나!"

"...."

"당연한 것 아닌가? 강한 자가 마왕이 된다. 그것이 버려진 땅에 피로 새겨진 오랜 규율일 텐데!"

"...."

나머지 사천왕들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아수라트의 말이 옳았다. 게다가 사실 그들로서도 오늘 마왕 크레도스가 선언한 내용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인간계 침공을 중단한다니.

오순도순 농사나 짓자니.

그게 무슨 미친 소리란 말인가.

아수라트의 선동이 이어졌다.

"다들, 우리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침공을 준비하고 기대했는지를 떠올려보란 말이다. 그런데 그걸, 크레도스 놈은 말 한마디로 뒤엎어 버렸어. 이건 상식이 아니야. 놈이 왜 그랬을까. 생각해볼수록 나는 답이 보이는데 말이지."

"크레도스가, 막상 침공을 앞두게 되니 인간들과의 전쟁에 두려움을 느낀 거라고?"

"그거지."

안개의 대공 하르토크가 물었다.

아수라트가 두 눈을 형형하게 빛냈다.

그 모습들을 묵묵히 보던 바위의 폭군, 바할이 생각했다.

'...아, 배고프다.'

그사이, 아수라트의 주장이 이어졌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약해진 거다, 그놈은. 그런 자신의 실력에 자신감이 사라진 것일 테고. 그러니 이제 와서 저런 꼬락서니를 보이는 거야."

"하지만, 만약 약해진 게 아니라면?"

하르토크가 반문했다.

아수라트가 멈칫했다.

"뭣?"

"사실이 그렇잖나. 어설픈 추측으로만 거사를 치르기엔 불확실한 점이 너무 많다. 만약 네놈의 예측과 달리 크레도스가 약해진 게 아니라면? 그렇다면 우리가 한꺼번에 덤벼도 둘 정도는 반드시 죽거나 치명상을 입을 텐데?"

"맞아. 내 생각도 그래. 하지만 뭐, 아수라트? 네가 앞서서 고기방패가 되어준다면 나도 한 번쯤 협력을 생각해보도록 할까."

시르케도 하르토크를 거들듯이 말했다.

아수라트가 발끈하며 외쳤다.

"이... 비루한 겁쟁이 놈들! 그럼! 마왕놈이 약해졌다는 증거가 나오면?"

"...."

"그땐 내 의견을 따를 건가?"

"...."

사천왕들은 침묵했다.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만약 아수라트의 말대로라면?

정말로 크레도스가 약해진 거라면?

그렇다면....

"...죽여야지."

모두의 입가에 똑같은 색채의 잔혹한 미소가 피어났다.

 

 

"...라는 작당을 사천왕이 공공연하게 모의하는 중입니다."

"...."

"또한, 예정에 없던 침공 중단 사태로 인하여 군단의 사기가 바닥까지 떨어졌고, 내부 폭행과 불법 동족 포식이 급증하는 중입니다."

"...."

"이 모든 원망과 실망이 군단 내부에 전염병처럼 파다하게 번지고 있으며, 모두가 그 원인으로 주군을 지목하는 실정입니다."

"...."

"아마 이대로면 사천왕이 반란을 일으킬 시, 군단 병력 대부분이 주군이 아닌 사천왕을 지지하게 될 것으로 보입니다."

"...."

부관, 제피로스의 보고가 차분하게 이어졌다.

하나같이 살벌하기 그지없는 내용이었다. 그걸 들을 때마다 김장철은 어깨가 남몰래 파르르 떨려옴을 느껴야 했다.

하지만 절망적이고 암울한 보고의 퍼레이드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여기, 변경 팔라딘의 무덤을 감시하던 대장군 오즈마가 보낸 영상입니다."

 

처억.

 

한쪽 무릎을 꿇은 제피로스가 수정구를 내밀어 왔다.

이윽고 수정구가 환해졌다.

영상이 떠올랐다.

 

- ...끄하악!

 

퍼컥!

 

영상이 시작되자마자 수정구를 찢을 듯이 터져 나온 처절한 비명. 그리고 무언가 묵직한 것이 대상을 내리치는 섬뜩한 타격음!

"...!"

김장철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서 수정구의 영상을 안구 가득 접수했다.

그것은 바로....

'묵은지?'

자신이 19회차에 걸쳐서 키운 주인공, 완벽한 근육질 몸매의 묵은지가 하트 소녀소녀 요술봉을 휘두르고 있었다. 영상을 전송하고 있는 대장군 오즈마의 머리통을 향해. 내리치고. 내리치고. 또 내리치고.

 

- 사, 살려줘! 커흐! 컥...!

 

퍽! 퍼컥! 푸컥!

 

"...."

하트 요술봉이 내리쳐질 때마다 영상이 시시각각 짓뭉개졌다. 사방으로 피가 튀었다. 주인공 묵은지의 얼굴과 옷을 잔뜩 적셨다. 그럼에도 묵은지의 표정은 삭막한 무감정, 그 자체. 마족을 멸한다는 숭고함 따윈 조금도 없었다. 악을 징벌한다는 사명감도 없었다.

그것은 그저, 기계적으로 극한까지 단련된 살육 머신의 폭력에 불과했다.

 

- 자, 잠깐만! 뭐, 뭘... 하려고...! 끄하아아악! 내 눈! 내 눈...! 하지 마! 하지... 마하아아가하아악!

 

"...."

대장군 오즈마의 눈알이 뽑히며 찾아온 검은 침묵. 그렇게 영상이 끊어지기 직전의 순간, 김장철은 영상 너머의 묵은지와 시선이 마주친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깨달았다.

'저놈.... 내가 19회차 때 입혀준 코스튬을... 그대로 입고 있어.'

고인물 토끼겅듀 마법소녀 코스튬.

저걸 입혀놓고 얼마나 뿌듯했던가.

하지만 지금은?

더욱 섬뜩해졌다.

자신이 19회차 때 입힌 코스튬이 유지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 뜻하는 바를 고스란히 깨달은 까닭이었다.

'저놈... 내가 19회차까지 키워준 9990레벨과 스킬셋, 장비까지 전부... 그대로 갖고 있는 거야.'

 

...오싹.

 

절대로 못 이긴다.

저놈과는 마주치면 안 된다.

무조건 여기에 짱박혀 있어야 산다.

"...후우."

잠깐 눈앞이 캄캄해졌다.

하필이면 내가 정성껏 키운 극강의 캐릭터가 아니라, 이따위(?) 마왕의 몸으로 들어오게 되다니. 그래서 내가 키운 캐릭터에게 맞아 죽을까 봐 전전긍긍해야 한다니.

세상에 이렇게 억울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런 사면초가가 또 있을까. 생각해볼수록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인간계를 침공하면 묵은지한테 죽음.

대침공을 거부하면 사천왕한테 죽음.

그렇다고 혼자 몰래 도망을 친다면?

역시나 사천왕한테 추격당해서 죽음.

놈들은 마왕 자리 찬탈의 증거물로 이쪽의 잘린 목을 치켜들길 원할 테니까.

'....'

아무리 생각해봐도 역시나 방법은 정면돌파밖에 없겠다. 농사를 지어야겠다. 그렇게라도 모두를 먹여 살려야겠다. 그럼 모두의 불만이 잠재워질 테니까. 그러니까....

"잠시 바람이나 쐬지."

김장철은 창백해진 안색을 숨기며 권좌에서 일어섰다. 마왕성 밖으로 나갔다. 인근의 땅을 둘러보았다.

"...."

검붉은 핏빛 하늘.

그 아래 펼쳐진 황무지.

비옥함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풍경.

문득, 팔라딘 오브 블러드의 게임 속 설정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그래. 이곳이 버려진 땅이라 불리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지.'

아무것도 자랄 수 없는 땅.

말 그대로 버려진 형벌의 땅.

그렇기에 마족들은 언제나 굶주린다 하였던가. 끝이 없는 허기를 원죄처럼 덮어쓰고서, 서로를 잡아먹으며 연명하는 종족이라 하였던가.

그때였다.

"주군. 설마... 정말로 진심이신 겁니까?"

제피로스의 물음이 상념의 틈새를 들쑤시며 들어왔다. 놈을 돌아보았다. 묵묵히 이쪽을 보좌하며 뒤를 따라온 제피로스. 녀석 특유의 서늘한 눈매가 일말의 의구심을 건네어 오고 있었다.

"농사를 짓겠다던 선언 말입니다. 설마, 정말로 그런 걸 하시려는 겁니까?"

"...."

"저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

아마도 그럴 테지.

이곳은 어떤 작물도 자라나지 못하는 땅이니까. 그렇게만 알려졌으니까. 이곳에서 농사를 짓겠다는 이쪽의 선언이 믿기지가 않는 거겠지. 미친놈의 망상처럼 여겨지기도 할 테지.

제피로스의 말이 이어졌다.

"선대 마왕들도, 심지어 주군께서도, 이 땅에서 농사를 시도하지 않은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랬나."

"예. 확실히."

역시.

그랬구나.

"어쨌건, 이미 농사의 실패를 겪으며 주군께서도 절감하셨을 텐데요. 척박하기 그지없는 토양.... 하루에도 극심하게 변하는 온도.... 이 땅에선 어떤 것도 좀처럼 자랄 수가 없다는 잔인한 현실을 말입니다."

"뭐, 그건 그렇지."

김장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피로스의 말대로였다.

지금 자신의 눈으로 딱 봐도 이곳은 황무지 중의 황무지였다. 여기서 뭘 키울 바엔 사막에 콩을 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포기하면 자신에게 남는 것은 죽음뿐일 테니까.

그러니까.

"무조건 한다. 그리고 내게는 가능하다."

"...예?"

"선대의 마왕들에게도, 예전의 크레... 나에게도 불가능한 일이었겠지만, 지금의 내게는 불가능한 것만은 아닐 테지."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의아한 듯이 쳐다보는 제피로스.

녀석을 향해 김장철은 오늘 처음으로, 피식 웃었다.

'연구실에서 쌓은 내 지식이라면, 그 지식을 바탕으로 활용될 마왕 크레도스의 스킬이라면, 이 척박하고 영양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을 절망적인 땅에도 최소한의 질소를 고정시킬 수 있을 테니까.'

그것이라면, 성공적인 농사를 향한 첫걸음으로 충분할 테니까.

 

...콰악!

 

식물의 성장에 반드시 필요한 질소.

그것을 토양에 정착시킬 질소고정법.

그 위업을 현실로 구현하기 위해 자신이 활용할 마왕의 전투 스킬.

'그건 바로... 크레도스의 주력기, 블러디 라이트닝.'

김장철의 꽉 쥐어진 주먹에 한줄기 확신이 서렸다.

3화. 질소를 고정하는 방법 (2)

질소.

대한민국에서는 과자 봉다리의 주원료로 비싸게 팔리는 물질. 자연계에서는 식물의 단백질 합성에 반드시 필요한 기본이자 필수인 재료.

식물은 질소가 없으면 성장할 수 없다.

질소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

그냥 아예 살 수가 없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식물은 대기의 78%나 되는 자연 상태에서의 질소를 그대로 사용하지 못한다. 마트에 가서 질소가 빵빵하게 채워진 과자 봉다리를 카드 긁고 구입해서 흡하흡하 흡입할 수도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식물은 카드 발급을 못 받... 아니, 식물이 사용하기엔 질소를 묶고 있는 분자구조의 삼중결합이 너무 견고하니까. 식물이 그 결합을 깨뜨릴 수가 없어서, 화학반응이 안 일어나니까.'

김장철은 기억을 더듬었다.

자신에게는 간단한 상식이었다.

하여 자연 상태에서의 식물은 암모니아나 아질산 등의 화합물 형태로 흙에 녹아 있는 질소를 사용한다.

그걸 깨달은 인류는?

개쩌는 농사를 위해 화학적 공정을 개발했다. 질소 고정법으로 공장에서 암모니아 질소비료를 쑴펑쑴펑 찍어내게 되었다. 덕분에 20세기 초반까지 10억 남짓이던 인구를 불과 수십 년 만에 수십억까지 폭발적으로 늘릴 수 있게 되었다.

'...라는 방법을 내가 여기서 쓸 수는 없겠지.'

공장 설비가 없다.

전기도 안 들어온다.

하다못해 질소를 토양에 고정해주는 뿌리혹 박테리아 같은 세균조차도 당장 구할 길이 없다. 그러니 자신은 자연계에서 질소가 토양에 고정되는 또 다른 원리를 이용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번개였다.

'번개가 내리치면 순간적인 고전압에 의해 질소가 아질산으로 산화하고, 그게 빗물에 섞여 토양에 흡수되니까.'

그러한 방식으로 지구의 토양에 고정되는 질소의 양은 연간 900만 톤. 그것이 인간이 비료를 뿌리기 전에도 지구의 숲과 들이 푸르렀던 비결이었다. 하여 지금, 자신이 사용하려는 방법 또한....

'크레도스의 주력 기술인 블러디 라이트닝.'

김장철은 주먹을 꾸욱 쥐었다. 팔라딘 오브 블러드의 최종 보스인 마왕 크레도스. 게임을 하며 마왕에게 수없이 블러디 라이트닝을 맞고 죽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핏빛의 벼락.

끔찍한 전격.

예비 동작은 짧고.

시전 동작은 더 간결하고.

발동마저 즉각적이던 극악의 주력기!

"...제피로스, 물러나도록."

명했다.

혹여나 제피로스가 벼락에 휩쓸리지 않도록.

한 걸음 나서며 각오를 다졌다. 게임에서 크레도스가 블러디 라이트닝을 시전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대로 따라 했다. 왼손을 들었다. 오른손의 손톱을 세웠다. 왼쪽 손등을 긁었다. 빠르게. 단호하게.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블러디!'

 

쯔저적!

 

날카로운 손톱이 손등을 쫙 갈랐다.

그와 함께 느껴지는 엄청난 통증!

'...그와악!'

눈물이 콱 맺혔다. 없던 망설임도 확 생겨났다. 설마 이렇게 아플 줄은 몰랐다. 아니,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못처럼 뾰족한 손톱으로 생살을 2센티가량 찢어 버렸다. 현실이었으면? 당장 피가 철철 나기 시작한 손등을 부여잡고 동네 외과로 뛰어가야 할 판이었다.

'크레도스, 그 마왕놈.... 기술 쓸 때마다 이렇게 아팠던 거야?'

아무나 마왕 하는 거 아니구나.

아니.

어쩌면 즐겼던 걸까, 그놈.

그런(?) 유형의 변태였던 건가.

순간적으로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딱 한 번을 시전하기 위해 손등을 찢는데도 이렇게나 아파야 한다니. 앞으로 질소 고정을 하려면 최소 수백 번은 번개를 날려야 하는데. 이 짓을 해야 할 텐데. 눈앞이 막막해졌다. 그냥 다른 방법을 찾아볼까 싶은 유혹마저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죽는 것보단 이게 낫겠지!'

인간계를 침공했다가 묵은지에게 죽거나.

침공을 망설이다가 사천왕에게 썰리거나.

라는 것보다는 손등이 좀 따끔한 게 낫지 않을까. 그래서라도 농사에 성공하면 되는 거 아닐까.

김장철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찌저적!

 

손등을 마저 그었다.

혈관이 끊어진 걸까.

검붉은 피가 솟았다.

서슴없이 떨치듯 뿌렸다.

'라이트닝!'

떨쳐낸 손등의 경로를 따라 마왕의 저주받은 피가 분수처럼 흩뿌려졌다. 공간을 물들였다.

그리고 마침내.

 

토도독.

 

땅바닥에 찰박찰박 떨어졌다.

그걸로 끝이었다.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붉은 핏빛 벼락? 떨어지지 않았다. 야심차게 뿌린 핏방울은 그저 마왕성 앞마당의 황량한 토지 일부에 하찮게 점점이 새겨졌을 뿐!

"...크아악, 쓰읍, 아... 쓰바하...."

보람이 없었다.

아프기만 더럽게 아팠다.

눈물이 쏙 나올 지경이었다.

덕분에 김장철은 깨달을 수 있었다.

'실패...인가?'

아무래도 그런 듯했다.

본디 크레도스의 혈액에는 마족 특유의 파괴적 본능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짙게 깃들어 있다 하였다. 그래서 피만 뿌리면 자동으로 파괴의 벼락이 내리친다고도 했다.

한데 지금은?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분명히 크레도스가 선보이던 게임 속 기술 발동을 그대로 따라 했는데도 그러했다.

'어째서?'

분명히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궁리할 여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불현듯, 등 뒤쪽에서 들려온 물음 때문이었다.

"마왕 크레도스시여. 어딘가 몸이 좀... 불편하시기라도?"

"...!"

제피로스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녹슨 강철판을 긁는 듯한 특유의 목소리.

듣는 순간 등줄기에 소름이 오싹 돋았다.

저도 모르게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사천왕 아수라트가 있었다.

검붉은 혈관과 힘줄로 생성된 톱날검을 노골적으로 들고서. 이쪽과, 방금 이쪽이 성과 없이 뿌려낸 바닥의 핏물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그것도, 더없이 의미심장한 눈길로.

"...."

이럴 때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말문이 막혀 버렸다. 아수라트와 나란히 늘어선 나머지 사천왕, 시르케와 하르토크, 바할의 모습에 더욱 혀가 굳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래도 어떻게든 대답을 해야 한다. 여기서 멍청하게 얼버무리면 약점을 잡힌다. 죽는다. 그럴 수는 없다. 싫다.

그러나 이쪽이 어떻게든 꺼내려던 대답은 아수라트의 섬뜩한 웃음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마왕이시여. 우리 마족의 규칙은 잘 알고 계시겠지요?"

"뭐?"

"강한 자가 마왕이다."

"...."

"그래서 의문이 드는군요."

"...."

노골적이다.

너무나 노골적이다.

이쪽을 쳐다보는 놈의 눈빛. 태도. 그 모든 사소한 동작에서 살기가 진하게 배어나고 있었다. 아니. 저건 거의 사냥감을 바라보는 포식자의 눈동자, 그 자체였다.

덕분에 깨달을 수 있었다.

저놈이 오늘 날을 잡은 거라고.

이미 각을 전부 잰 거라고.

'미친.'

설마하니 사천왕이 벌써부터 이렇게 대놓고 송곳니를 드러낼 줄은 몰랐는데. 그럼 어떡하지. 어떡하면 좋을까. 생각을 해야 하는데. 상황이 너무나 급하게 흘러갔다. 아수라트가 벌써 한 발짝 앞으로 나서고 있었다.

'....'

단지 한 걸음 다가왔을 뿐인데 숨 막히는 위압감이 훅 끼쳐왔다. 압도적인 맹수를 눈앞에서 맞닥뜨린 기분이 이런 걸까. 아까 발코니에서 멀찍이 내려다보던 때와는 차원이 다른 실감이 공포심이라는 실체로 밀려왔다.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이가 딱딱 소리를 낼 정도로 부딪쳤다. 눈꼬리와 볼 근육이 잘게 경련을 일으켜댔다. 이러면 안 된다고. 티를 내면 끝장이라고. 생각을 하는데도 몸의 떨림이 멎지 않았다.

그런 덕분(?)이었다.

김장철의 반응을 마주한 사천왕, 혈염의 아수라트도 살짝 긴장했다.

'...역시 마왕, 크레도스.'

저 일그러진 얼굴이란. 벌써부터 눈가의 경련을 일으키며 어깨를 부르르 떨 정도로 마력을 모으는 무시무시한 모습이란!

'어쩐지 전보다는 약해진 것 같지만... 그럼에도 방심할 수 없는 위압감이다. 하지만....'

 

까드득!

 

아수라트는 송곳니를 드러내며 비릿하게 웃었다.

"지금의 당신이 우리 넷을 모두 이길 수 있을까요?"

그렇다. 자신은 혼자가 아니다. 사천왕이 함께 덤비면? 예전의 강력함이 퇴색되었을 것이 확실한 크레도스는 걸레짝이 되어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아수라트는 든든한 기분으로 오늘의 혈투를 함께할 사천왕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발견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던 나머지 사천왕 놈들이, 어느샌가 50미터쯤 쏙 물러나 있는 광경을!

"...어?"

야?

뭐야?

네놈들이 왜 거기 있어?

같이 싸우는 거, 아니었어?

"...."

당황한 아수라트는 눈빛으로 물었다. 물러나 있던 나머지 사천왕들이 고개를 파파팍 저었다. 그 뜻은 명확했다. 이건 좀 아닌 거 같다고. 네가 싸우는 것부터 보고, 견적이 나오면 그때 참전할 거라고.

'...이, 비겁한!'

아수라트의 눈에서 욕설이 나왔다.

그러나 이미 던져진 주사위였다.

이제 와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마왕...! 크레도스으!"

 

촤라락!

 

아수라트의 톱날검에 휘감긴 혈관과 힘줄이 그의 손과 팔뚝에 연결되었다. 그가 김장철을 향해 톱날검을 겨누었다.

"오늘! 나 혈염의 아수라트가! 마왕의 권좌를 향하여! 찬탈의 규율을 제시한다!"

선언하였다.

그와 동시에 붉은 하늘 일부가 요동쳤다. 아수라트가 선포한 찬탈의 규율. 그 외침에 버려진 땅의 하늘이 반응하였다.

검게 휘몰아치던 구름에 구멍이 뚫렸다. 거대한 눈알이 버려진 땅을 내려다보았다. 공식적으로 찬탈의 규율을 선언한 아수라트와, 규율의 도전장을 받은 김장철을 주시하였다. 핏발 선 눈길에 담긴 둘의 모습이 버려진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마족들에게 생생하게 전해졌다.

그때, 아수라트가 땅을 박찼다.

 

...파앗!

 

'내가... 이긴다!'

아수라트의 입가에 사나운 미소가 맺혔다.

마왕은 약해져 있다.

지금이 유일한 기회다.

이 기회를 살리면 자신이 마왕이 된다. 권좌를 차지한다. 군단을 이끌고 인간계를 침공할 것이다. 자신의 이름이 마족의 역사에 길이길이 명예롭게 새겨지리라!

혈염의 사천왕은 잔혹한 결의를 품으며 톱날검을 움직여 갔다.

"...!"

김장철의 두 눈이 확 벌어졌다. 소름이 오싹 돋았다. 피해야 하는데. 어떻게든 해야 하는데.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나... 죽는 건가....'

아마도 그렇겠지. 자신의 알맹이는 그냥 사람이고 저놈은 마족, 그것도 사천왕이니까. 그것이 당연한 결과겠지.

...라는 절망감에 휩싸이려던 찰나였다.

 

타닷!

 

돌격해 오는 아수라트의 두 번째 걸음이 땅을 박찼다.

그 순간, 김장철은 볼 수 있었다.

'어?'

방금 땅을 박차던 아수라트의 두 번째 스텝.

그 발끝의 방향이....

'...바깥쪽?'

눈에 익은 모습이었다.

순간, 떠올랐다.

게임 속에서 수없이 썰리며 치렀던 아수라트와의 대결이. 그 과정에서 강제로 익히고 외우게 되었던 아수라트의 모든 움직임이.

'저거, 이지선다 공격 개막 패턴 중에서... 찌르기.'

기억이 감각을 불러왔다.

감각이 반응을 일깨웠다.

반응이 본능을 이끌었다.

 

휘릭!

 

김장철은 무의식중에 오른발을 뒤로 반걸음 뺐다.

허리를 틀었다.

어깨를 젖혔다.

그 직후.

 

...후욱!

 

아수라트의 섬전같은 찌르기가 가슴 앞을 스쳐 갔다. 아니, 공기만을 헛되이 갈랐다.

"엇?"

황망히 벌어지는 아수라트의 눈동자.

일순간 교차하며 지나가는 시선.

놈이 얼떨떨해하고 있었다.

그 눈빛을 보며 깨달았다.

'이놈, 모든 움직임이... 게임 그 자체인 거였어.'

그 순간이었다.

 

딩동!

 

이쪽을 황망한 눈길로 보며 스쳐 지나가는 아수라트의 모습. 놈의 모습 위로 불현듯, 미증유의 메시지가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김장철, 당신은 앞으로 활동할 이 세계 기본 규칙의 일부를 깨달았습니다. 또한, 그 규칙을 활용한 고도의 집중력을 통해 치명적인 공격을 가장 유려한 방법으로 흘려내는 데에 성공하였습니다.]

[이에, 그 보상으로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사용하던 게임 시스템의 일부가 당신에게 개방됩니다.]

[타겟팅 기능, UNLOCK!]

 

"...!"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저 말이 무슨 의미인지.

어떤 뜻을 지녔는지.

눈길을 들었다.

시야에 들어오는 아수라트. 자신의 공격이 빗나갔음을 깨닫고는 다음 연격을 준비하는 혈염의 사천왕. 놈의 모습 위로 전에 없던 표식이 새겨졌다. 붉은 사각형의 타겟팅이 낙인처럼 고정되었다.

그 의미는 바로....

'...블러디!'

 

쯔즈즛!

 

손등을 찢었다.

엄습해오는 통증.

솟구치는 붉은 핏줄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찢긴 손등을 휘둘렀다.

공간을 잠식하며 뿌려진 선혈.

그 공간으로 타겟팅이 새겨진 아수라트가 돌격해 들어오는 순간.

 

...빠작!

 

"커하아아악-!"

타겟팅 전용 스킬, 블러디 라이트닝이 폭력적 섬광으로 강림하며 아수라트를 휩쓸었다.

4화. 질소를 고정하는 방법 (3)

 

...빠작!

붉은 섬광이 내리꽂혔다.

버려진 땅의 한구석을 찢었다.

하늘의 핏발 선 눈동자에 경외가 맺혔다.

눈동자에 담긴 영상을 본 마족들이 열광했다.

면전에서 그 모습을 목도한 사천왕은 경악했다.

"...!"

혹한의 칼날, 시르케는 심장을 움켜쥐는 시린 섬뜩함을 느꼈다. 안개의 대공, 하르토크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바위의 폭군, 바할은 어찌할 수 없는 어깨의 떨림을 절감했다.

그리고 모두가 같은 생각을 품었다.

나서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하마터면 낭패를 볼 뻔했다고.

'크레도스 저놈, 멀쩡하잖아...!'

모두의 눈길이 아수라트를 향하였다. 패기를 떨치며 나섰던 혈염의 사천왕은 어느새 새까만 숯이 되어 있었다. 죽은 걸까. 그건 아니었다. 무릎을 꿇은 아수라트의 몸이 희미하게 껄떡거리는 것이 보였다.

"...."

차라리 죽는 게 나았지 않았을까.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식은땀.

나머지 사천왕이 그걸 실감할 틈도 없이 마왕 크레도스, 김장철이 아수라트의 앞에 군림하듯 우뚝 섰다.

"...."

김장철의 심장도 거칠게 뛰고 있었다.

단 일격.

순식간에 만신창이가 되어 무릎을 꿇은 아수라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사뭇 현실감이 희미해지는 기분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게임 속에서 수없이 자신을 썰어댔던 아수라트의 위용이 떠올랐다.

'처음 1회차 때... 이놈을 만났을 때는 기도 안 찼지.'

어려웠다.

그냥 어려운 정도가 아니었다.

이걸 깨라고 만든 게 맞나 싶었다.

빠른 모션에 엇박.

페이크는 기본에 넓은 공격 범위.

사기에 가까운 공격 후의 판정 시간까지.

이놈을 깨기 위해서 얼마나 많이 죽어야 했던가. 또 얼마나 많이 도전해야 했던가.

한 번 죽고.

세 번 죽고.

열 번 죽고.

결국, 128번째의 도전에서야 처음으로 아수라트를 꺾었던 1회차의 자신이었다.

그리고 19회차에 다다랐을 때에는?

모든 장비를 벗은 채로.

아예 맨손으로도.

눈을 감고도.

한 대도 맞지 않고 놈을 잡아낼 수 있게 되었다.

어쩌다 보니 고이고 고여 버린 것이었다.

"...그래서, 아직도 나에게 도전할 생각이 있는가?"

접어두는 기억.

그 끄트머리에서 아수라트에게 물었다.

아수라트는 대답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죄... 죄송...합...니...."

 

...껄떡, 껄떡.

 

넘어가기 직전인 숨을 억지로 부여잡고서, 간신히 혼절하지 않는 것이 놈의 최선일 뿐!

그러나 김장철은 만족하지 않았다.

자만하고 안심할 수도 없었다.

'오늘은 운이 좋았으니까.'

때마침 아수라트가 혼자 설치며 나섰다. 덕분에 나머지 사천왕이 참전하지 않았다. 만약, 놈들이 한꺼번에 이쪽을 덮쳤더라면? 그랬다면....

'지금쯤 나는 형체도 찾아볼 수 없는 고기경단 꼴이 됐겠지.'

아무리 이들의 패턴을 게임으로 달달 외웠다고 해도 그건 게임 속 보스전에서처럼 일대일 상황에서나 활용할 수 있을 뿐. 이놈들이 한꺼번에 덤비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다. 1분은 고사하고 30초도 못 버틸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게다가....'

아수라트의 진정으로 무서운 점이 떠올랐다. 사실 놈의 강점은 현란한 공격도, 난해한 수 싸움 패턴도, 억 소리가 나오는 대미지도 아니었다.

현란하게 몰아치는 공격은 시르케가 제일이었다. 난해한 수 싸움식 패턴은 하르토크가 가장 악랄했다. 억 소리 나오는 한 방 대미지는 바할을 따를 놈이 없었다.

그럼 아수라트의 진정한 강력함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회복력.'

 

...구물, 꾸물...!

 

김장철의 눈길이 아수라트를 향했다.

놈의 전신에 촉수처럼 퍼진 힘줄과 혈관이 맥동했다. 그와 함께 놈의 전신에 새겨진 전격의 충격과 화상이 눈에 띄게 회복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놈은 한 번 꺾었다고 안심하면 안 된다.

지금은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이지만, 방심하는 순간 뒤통수에 칼날을 박을 놈이다. 지금도 그렇다. 보인다. 무릎을 꿇은 채로, 고개를 숙인 채로, 몰래 빛내고 있는 눈빛이. 이쪽의 방심으로 비롯될 빈틈을 탐색하는 기색이.

'한 번 더.'

다시는 도전할 생각을 못 하도록.

이런 짓을 벌일 엄두도 못 내도록.

이참에 제대로 쐐기를 박아야 한다는 결론과 함께 손을 들었다. 아수라트를 향해 뿌렸다. 아까 찢은 손등. 그 상처에서 여전히 흐르는 피를 서슴없이.

 

...빠즈적!

 

"키흐하아아악...!"

아수라트의 전신이 다시금 붉은 전격에 휩싸였다. 그러나 김장철은 매질(?)을 멈추지 않았다. 뿌리고, 또 뿌리고, 계속 뿌렸다.

'둘... 셋... 다섯....'

천천히 세어가는 숫자.

숫자 사이로 불현듯 흐르는 기억.

햇볕이 쨍쨍하던 여섯 살의 여름.

숨바꼭질을 하자며 웃으시던 엄마.

숫자 10을 열 번 센 뒤에 눈을 뜨라고.

어쩐지 손 꼬옥 쥐며 울먹이시던 엄마.

열심히 세었던가.

틀릴까 봐 또박또박.

마침내 다 세었다는 기쁨으로.

활짝 웃으며 고개를 들었던가.

하여 그날 이후로 엄마를 보지 못하였던가, 나는. 그래서, 지금까지도 그 숨바꼭질은 끝이 나지 않은 걸까, 내겐.

 

빠자작!

 

"열하나... 어?"

저도 모르게 잠깐 떠오른 기억.

그 상념의 흔적에 파묻혀 기계적으로 열한 번째의 전격을 뿌린 김장철은 멈칫했다. 그리고 살짝 콧등을 찡그렸다.

"...앗? 11까지 해 버렸네?"

어쩔 수 없겠다.

10은 채워야 하니까.

그러지 않으면 찜찜해지니까.

게다가 어차피 질소 고정을 위해서는 계속 전격을 뿌려야 하는 거니까.

"그러니까 일단 아홉 번만 더."

 

...빠자각!

 

"끄히야아아갸아알!"

그런 덕분(?)이었다.

어느새 옷이 재가 되도록 타서 알몸이 되어 버린 아수라트! 인정도 자비도 합의도 보험도 없는 광경에 몸을 떠는 사천왕!

김장철의 눈앞에 또 다른 메시지가 떠오른 것도 그 무렵이었다.

 

딩동!

 

[당신은 아수라트의 옷을 거칠게 찢어 알몸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이색적인(?) 경험이 당신에게 새로운 시스템 개방의 혜택을 부여합니다.]

[인벤토리의 장비 탈착 기능, UNLOCK!]

 

"...."

뭐, 일단 알겠다.

하지만 지금은 훨씬 중요한 일을 치르는 중이다. 심혈을 기울여 20회나 벼락을 떨어뜨린 상황이다. 이 일부터 제대로 해내야 한다.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첫걸음. 질소 고정을 위한 셋팅이 바로 그것이었다.

김장철은 떨고 있는 나머지 사천왕을 돌아보았다.

"시르케."

"...넷?"

자신의 등에서 돋아난 네 자루의 칼날을 부여잡고 있던 혹한의 칼날, 시르케가 흠칫했다. 그녀를 부른 김장철이 아수라트를 가리켰다.

"이놈을 꽁꽁 묶어서 매달아라."

"...!"

시르케의 얼굴이 삽시간에 확 달아올랐다. 그녀를 순간적으로 엄습한 엄청난 굴욕감. 시르케는 생각했다. 알몸의 남자를 묶으라니. 이건 자신과 아수라트에게 동시에 굴욕을 안겨주려는 잔혹한 처사가 아닌가.

"하지만...."

"싫은가?"

"...."

시르케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솔직히 싫었다. 하지만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랬다간 아수라트와 같은 꼴이 될 테니까.

"명을... 받들겠습니다."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끄덕이는 시르케.

그녀의 모습에 김장철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남모를 걱정 하나를 덜어낸 덕분이었다.

'후우, 살았다. 솔직히 아수라트 이놈을 묶으려고 직접 만지는 거, 좀 무서웠는데.'

아수라트는 워낙 교활하고 회복력이 좋은 놈이었다. 지금은 초주검이 되어서 껄떡거리고 있다곤 해도, 언제 기력을 회복해서 딴마음을 품을지 모르는 놈이었다.

한데 그런 놈을 묶겠답시고 가까이 다가가서 끙끙대다간?

방심하는 순간에 목이 잘릴 수도 있으리라.

그래서 시르케에게 시켰다. 다행히 그녀가 명을 따랐다. 안심이 되었다. 덕분에 아수라트가 꽁꽁 묶인 채로 말뚝에 허수아비처럼 세워졌다.

...이로써 생체 피뢰침(?) 완성!

이제는 질소 고정에 박차를 가할 때였다.

김장철의 눈길이 안개의 대공을 향했다.

"하르토크."

"예?"

"너는 이 일대에 안개를 깔아라. 물이 뚝뚝 흐를 정도로 진득하게."

"...!"

안개의 대공, 하르토크의 눈이 경악으로 벌어졌다. 사천왕 중에서 가장 지략이 뛰어난 그는 김장철의 명령을 듣자마자 그 의도를 간파(?)할 수 있었다.

'설마, 촉촉하게 만들어서 더 아픈 전격을 먹일 생각인 건가...!'

물론 오해였다.

사실 김장철의 의도는 달랐다.

'계속해서 때리는 벼락, 아질산으로 고정되는 질소, 그게 토양에 스미려면 수분이 필요하니까.'

안개 수분을 촉촉하게 깔았다.

그때부터였다.

"블러디-!"

 

빠자작!

 

핏방울을 뿌렸다.

벼락을 때려댔다.

졸지에 피뢰침 역할을 떠맡게 된 아수라트에게 타겟팅을 고정하고서. 놈이 초주검이 되었다가 회복하기를 잠깐 기다리고. 또 때리고. 회복을 기다리고. 또 때리며. 보람찬 질소 고정의 시간을 보내었다.

물론 손등이 어마어마하게 아팠다.

피가 좀 멎는다 싶으면 또 찢어야 했다.

그러나 멈추지 않았다.

농사의 성공이 중요하니까.

그래야 목숨을 보전하니까.

'아파도... 참는다. 그만큼 흙이 질소를 머금는 거야. 풍작. 그래. 풍작 기원이다! 트라하하하하하!'

며칠이 지났다.

아픔과 보람이 교차했다.

흙이 알차게 질소를 머금어갔다.

그럴수록 사천왕의 표정은 더욱 질려갔다.

하지만 김장철의 계획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질소를 제법 뿌렸다곤 해도, 이걸로는 한참 부족해.'

그의 눈길이 주위의 토양을 향했다. 며칠간 기울였던 나름의 노력 덕분에 약간의 질소와 수분을 머금게 된 일대의 토양. 하지만 이건 시작일 뿐이다. 앞으로 넘어야 할 산이 훨씬 많다.

그중에서도 첫 번째가 바로 토질 구조의 개선이었다.

'여기 흙은 영양이 없는 것도 문제지만, 구조도 최악의 홑알 구조니까.'

토양의 물리적 구조는 홑알과 떼알로 나뉜다. 그중에서도 홑알은 흙의 입자가 푸석하게 따로 놀면서 빈틈없이 뭉쳐 버리는 구조였다.

'딱 물기 없이 꽉 찬 밀가루처럼.'

그러면 흙 입자 사이에 틈이 없어진다. 물이 떡져서 빠지지 않는다. 공기가 통하지 않는다. 깊은 곳의 보습력도 떨어진다. 작물이 뿌리를 깊게 뻗을 수도 없어진다. 식물의 성장에 최악의 조건이 완성되는 것이었다.

그래서였다.

'이걸 떼알 구조로 바꿔줘야 해.'

질소고정만큼이나 시급한 토질의 개선. 그걸 위해 이제부터 추진해야 하는 일은 바로....

"...너희들."

벌써 몇 번째의 벼락을 내리친 걸까. 아수라트는 몇 번째나 기절했다가 회복한 걸까.

모두가 세기를 포기했을 무렵.

김장철이 고개를 들었다.

그가 창백해진 사천왕을 스윽 돌아보았다.

"내가 마왕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스읍.

 

더욱 긴장하는 사천왕.

그들을 향해 명했다.

한없이 묵직하게.

더없이 살벌하게.

"똥을 가져와라."

"...!"

"최대한, 많이."

"...!"

믿기지 않는 명령을 달팽이관으로 접수한 사천왕 시르케와 하르토크, 바할의 어깨가 움찔 굳어 버렸다. 그 순간, 셋의 뇌리에 싱크로율 100퍼센트를 자랑하는 빅 오해가 동시에 반짝 떠올랐다.

'똥? 똥이라고?'

'설마... 아수라트가 한 번 덤볐다는 이유로....'

'지지고, 묶고, 적신 것도 모자라... 똥칠까지 하겠다고?'

 

...삐거덕.

 

그들의 믿기지 않는 눈길이 삐걱삐걱, 김장철을 향했다.

김장철이 왜 그러냐는 듯 빙긋 웃었다.

'...자, 잔인해! 믿을 수 없을 만큼 잔인해!'

어쩐지, 자꾸 알차게 짙어져만 가는 사천왕의 오해였다.

5화. 꼼수 쓰는 고인물 (1)

짙어져 가는 암운.

몰아쳐 오는 삭풍.

그곳을 굽어보는 눈길.

한 남자가 버려진 땅을 지켜보고 있었다.

연분홍빛 리본. 왕방울 러블리 브로치. 하늘하늘한 레이스 아래로 드러난 팔뚝은 강인하기 그지없었다. 삭풍에 휘날리는 플랩 스커트는 더없이 사랑스러웠으며, 대지를 디딘 순백색 스타킹의 장딴지는 철기둥과 같았다.

그렇게, 묵은지는 하트뿅뿅 소녀소녀 요술봉을 힘껏 움켜쥐었다.

"...."

모르겠다.

자신이 어째서 이곳에 서 있는지.

어쩌다가 이렇듯 길을 잃은 것인지.

아니.

어쩌면 자신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인지도.

'흐릿하지만... 전생의 기억들이 내 뇌리를 맴돌고 있어.'

묵은지의 수려한 눈매가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는 어렴풋이나마 떠올릴 수 있었다.

'이미 내가 지나온 열아홉 번의 삶....'

단편적으로나마 드문드문 떠올랐다.

덕분에 조금은 알 수 있었다.

이번에 맞이한 자신의 삶은 처음의 것이 아니다. 이에 앞선 열아홉 번의 삶이 있었다. 그 삶에서 자신은 저기 보이는 버려진 땅으로 수없이 향하였고, 끝없이 싸웠고, 투쟁을 거듭하였다.

그리하여 생존했다. 승리했다.

무엇을 위하여?

누구의 의지로?

'...사명의 손길.'

자신을 이끄는 신성하고도 절대적인 손길이 있었다. 그 사명의 손길이 보여주는 인도를 따라 무수한 업적을 쌓아 올렸다. 그것이 자신의 삶이었으며, 목표였고, 유일한 숙명이었다. 다만 그렇게 여기며 살아왔다.

한데, 이번은 다른 것 같았다.

'그런데... 사라졌다.'

묵은지는 굳은살로 가득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느껴지지가 않았다. 사명의 손길이 알려주는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사명의 손길이 아무 말도 해주질 않아.'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그러하였다.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제 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지?'

모르겠다.

사납게 불어오는 삭풍 속에 버려진 기분. 눈앞에 펼쳐진 버려진 땅이 전에 없이 광대해 보이는 느낌. 그 속에서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모르겠다. 전혀. 막막할 정도로.

"...."

묵은지는 한참을 묵묵히 서서 자신의 손만 내려다보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딩동.

 

세계의 종이 울렸다.

묵은지의 머리 위에 떠 있던 상태창의 내용에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이름 : 묵은지]

[레벨 : 9990]

[상태 : 플레이어블 캐릭터 -> NPC]

 

그와 함께 묵은지의 심경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

어째서일까.

까닭 모를 홀가분함이 느껴진 것은. 사명의 손길을 느낄 수 없음이 불안함으로 느껴지지 않게 된 것은. 내가... 진정한 자유의 몸이 되었노라 여겨지는 것은.

무슨 연유에서일까.

전혀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만은 알겠다.

'이제는 내가....'

눈앞에 펼쳐진 버려진 땅으로 향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굳이 그럴 필요가 사라졌다는 것. 그저 나의 걸음이 향하는 곳으로. 나의 의지가 가리키는 곳으로. 자유로이 떠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후우웅.

 

짙어져 가는 암운.

몰아쳐 오는 삭풍.

그 속에서 묵은지는 등을 돌렸다.

어느새 그의 발걸음은 인간의 땅을 향하고 있었다.

 

 

같은 시각.

버려진 땅의 중심.

마왕성의 회의실에서는 아수라트를 제외한 나머지 사천왕이 심각한 표정으로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그리고 고민의 퍼레이드를 마음껏 펼치는 중이었다.

"똥을... 뭐 어떻게 구해오라는 거지?"

안개의 대공, 하르토크가 잔뜩 굳은 얼굴로 번뇌하며 중얼거렸다.

그렇다.

똥.

그걸 구해오란다.

밑도 끝도 없이 똥을 가져오란다.

그것도 최대한 많이 가져와야 한단다.

그것이 오늘, 아수라트를 죽기 직전까지 지지고, 묶고, 적시고, 또 지지던 마왕 크레도스가 자신을 비롯한 사천왕에게 내린 명령이었다.

"...."

진심 똥 같다.

그냥 사천왕 같은 거, 때려치울까.

하르토크는 자신의 직업만족도(?)가 바닥을 기고 있음을 자각하며 망연자실 중얼거렸다.

"설마... 싸서 가져오라는 건 아니겠지?"

"크레도스, 미친 자식! 돌았어...! 더러워! 망측해!"

원탁 건너편의 시르케가 치를 떨며 외쳤다. 그녀는 오늘 받은 명령의 내용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불결함과 불쾌함을 느끼는지 연신 네 줄기의 칼날을 떨어댔다.

그녀의 옆쪽에 앉은 바위의 폭군, 바할이 진지하고 묵직하게 말했다.

"나 바할. 아무것도 못 먹은 지 오래됐다. 그래서 똥 안 싼다. 시르케도 똥 안 싼다."

"...내 똥에 관심 갖지 마, 미친놈아!"

시르케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하르토크가 심각한 눈길로 말했다.

"아니. 설령 똥이 나온다 해도 크레도스, 그놈에게 내 똥을 바치고 싶지는 않다. 놈이 그걸 매개체로 삼아 어떤 저주나 술법을 걸지 모르는 일이니까."

"...."

하르토크의 말에 아웅다웅하던 시르케와 바할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하르토크의 말대로였다. 똥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몸에서 나오는 부산물. 그것을 매개체로 삼는다면? 확실한 저주의 수단이 될 수 있다.

안개 대공의 말이 이어졌다.

"그러니 우리의 똥은 안 돼. 차라리 하급 마족들을 닦달해서 똥을 싸게 만들자."

"하지만 하급 마족은 우리보다 더 굶었다. 그래서 똥 안 싼다. 우리보다 더 변비다."

바할이 고개를 저으며 반대했다.

하르토크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나도 알아. 한데, 그게 뭐가 어쨌다는 거지?"

"안 나오는 똥을 억지로 싸게 만들 수는 없다."

"똥을 못 싸는 놈은 명령을 거역한 죄로 배를 찢으면 되지. 그러면 뱃속에 들러붙은 것이라도 긁어낼 수 있을 테니까."

"그러면 안 된다. 배 찢으면 하급 마족, 허약해서 죽는다."

"상관없어. 똥은 모을 수 있을 테니까."

"안 된다. 죽은 마족은 다시는 똥 못 싼다. 똥, 살아서 계속 싸야 더 많이 모은다."

"웬일로 똑똑한 소리를 해대는군."

"칭찬 고맙다."

"성가시군. 차라리 네놈의 배를 찢어줄까?"

"...바할, 허약한 네 공격에 배 안 뚫린다."

"해보면 알겠지. 갓 죽은 신선한 네 고기를 하급 마족들에게 먹이면 똥이 좀 나올 테고. 그렇지?"

"그런 협박, 바할에겐 안 통한다."

"...."

하르토크의 눈길이 서늘해졌다.

바할의 전신에 힘줄이 돋아났다.

안개의 대공과 바위의 폭군.

두 사천왕 사이에 살벌한 공기가 고조되려던 순간이었다.

 

벌컥.

 

"뭐야. 분위기 왜 이래?"

문이 열렸다. 김장철이 회의실로 들어왔다. 사천왕들을 한심한 눈길로 쳐다보며 물었다.

"퇴비 만들 똥을 구해오랬더니 웬 눈싸움만 하고들 있어?"

짐짓 사천왕을 향해 핀잔을 주었다.

내심 여전히 조금은 무서웠지만. 혹시나 이놈들이 눈 뒤집혀서 달려들까 아직도 좀 불안하지만. 그럼에도 티를 내지 않고서 태연하게 말했다.

"밖에서 듣자니까 똥을 싸니 마니 어쩌던데. 설마 내 명령을 채변 숙제쯤으로 여긴 거냐? 엉?"

"...."

"에잉, 뭔 일을 맡기지를 못해. 쯧쯧!"

김장철은 고개를 내저었다.

똥을 구해오라고 했던 자신의 명령.

기실 그것은 사천왕이나 마족들의 인분을 모으라는 것이 아니었다. 엄연히 농사에 쓰일 퇴비를 만들 짐승 똥을 구해오라는 말이었다.

'인분은 구하기는 쉽지만... 농사에 쓰이기엔 단점이 많으니까.'

제대로 처리되지 않은 인분 퇴비는 보건위생상의 큰 문제가 있다. 대변에 함유되어 있는 기생충의 알과 세균들이 식물에 고스란히 묻어난다. 그걸 먹는 이를 다이렉트로 감염시킨다. 모두에 의한, 모두를 향한, 완벽한 감염 사이클의 완성인 셈이다.

그런 이유로 실제 현대 아프리카의 수많은 국가가 인분 퇴비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 멀리 볼 필요도 없이 7, 80년대 이전의 한국에서도 인분 퇴비 때문에 각종 기생충과 전염병 질환이 창궐했다.

'그런 악순환을 완벽하게 막으려면 제대로 된 발효 처리 시설은 물론이고, 몇 개월의 시간까지 필요해. 하지만... 여기선 그런 설비를 기대할 수 없겠지.'

솔직히 조금 아쉽기는 했다.

기생충과 병원균, 거기에 식물 성장을 저해하는 염분 문제만 해결되면 인분도 나쁘진 않은데. 나름 구하기 쉽고, 영양 풍부하고, 재활용도 가능하다는 점에서 참 좋은데.

'....'

그렇지만 길게 보아선 아니다.

당장 재처리 공정에 들일 시간도 없다.

김장철은 잠깐 느낀 인분에 대한 유혹(?)을 금방 떨쳐냈다. 그리고 사천왕을 향해 말했다.

"다들, 따라오도록."

"어디로 말입니까?"

"북서쪽. 돌아오지 못하는 이들의 절벽."

더 이상의 자잘한 설명은 해주지도 않았다. 어차피 해줘 봤자 알아듣지도 못할 테고.

그렇게 김장철은 세 사천왕과 부관 제피로스, 약간의 하급 마족 일꾼들을 이끌고 마왕성을 나섰다. 게임을 하며 통째로 외운 머릿속 지도에 의지해서 북서쪽을 향하였다. 걸었다. 반나절 넘도록.

그리고 마침내 도착했다.

버려진 땅의 북서쪽 끝.

돌아오지 못하는 이들의 절벽에.

 

...촤아아아아!

 

뚝 끊어지듯 잘린 절벽.

아래에는 파도가 휘몰아쳤다.

소용돌이처럼 휘도는 거센 파도. 그 사이로 날카로운 바위가 짐승의 송곳니처럼 끝없이 늘어서 있었다. 그 어떤 이라도 물결에 빠져 휩쓸리는 즉시 전신이 갈가리 찢길 것이 자명해 보이는 광경이었다.

"마왕님, 이곳에는 대체 무엇을 위해...."

제피로스가 물어왔다.

김장철이 별것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퇴비, 만들려면 똥을 구해야지."

"...."

또 그놈의 똥이다.

제피로스는 굳은 얼굴로 자신이 모시는 마왕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최근 며칠 사이 느끼기 시작한 위화감을 다시금 체감했다.

'확실히 요즘... 이상해졌어.'

전과 달라졌다.

언제부터?

아마도 출정식 직전부터.

이전까지만 해도 이렇지 않았던 크레도스였다. 머릿속에 오직 살육과 파괴만이 넘실거리던 존재가 바로 크레도스였다.

그런데 어쩐지 달라졌다.

달라져도 너무나 많이 달라졌다.

난데없이 출정식을 중단시킨 것도 모자라 농사라니. 퇴비라니. 그걸 위해 똥을 구해야 한답시고 이런 곳까지 직접 온다니.

예전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모르겠군.'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여전히 혼란스럽고 헷갈렸다.

그러는 사이, 김장철의 대꾸가 이어졌다.

"자고로 토질의 구조를 개선하는 좋은 퇴비는 좋은 재료에서부터 시작되는 법이지."

"좋은... 재료라 하심은?"

"뭐, 대강은 나뭇재와 잡초더미, 밭의 흙과 달걀 껍데기, 거기에 닭똥이나 생선 찌꺼기 정도?"

김장철이 빙긋 웃었다.

나뭇재는 마족들의 무기 자루를 태우면 구할 수 있다. 잡초더미는 버려진 땅의 언저리에서 말라죽은 것들을 긁어오면 된다.

하지만 나머지가 조금 막막했다.

'그래서 사천왕에게 똥을 가져오라고 시킨 거였는데.'

혹시나 싶었다.

자신은 게임으로만 이 세상을 접했으니까. 그런 자신보다 디테일하게 이곳을 살아가는 사천왕이라면 다를까 싶었다. 자신이 모르는 방법으로 동물의 똥을 구해올까 기대를 품었더랬다.

한데 실제로 보니 꽝이었다.

그래서 결국, 이곳으로 모두를 이끌고 온 것이었다.

'돌아오지 못하는 이들의 절벽....'

김장철이 눈길을 들었다. 그의 시선이 깎아지른 절벽 아래가 아닌, 건너편을 향하였다. 수십 미터 너머 거리에 바다로부터 탑처럼 높다랗게 우뚝 솟은 기암절벽 수십 줄기가 있었다.

온통 새하얗게 얼룩덜룩한 기암절벽.

그 위로 날아다니는 악마 갈매기.

바로, 마계의 해안에서 서식하는 악마 갈매기의 서식지였다.

'...바로 이거거든!'

이곳은 녀석들의 가장 큰 서식지다.

그러니까 이곳을 야물딱지게 털면 된다. 갈매기 똥은 물론이고 알껍데기와, 놈들이 먹다가 흘린 생선 찌꺼기도 넘치도록 긁어모을 수 있을 것이다.

'그거면 돼. 그럼 질소와 인산, 칼륨까지 풍부한 퇴비를 만들 수 있어.'

토질 개선!

영양 공급!

농사 성공!

머릿속에 꽉 찬 명란처럼 알차게 떠오르는 결과를 그리며, 김장철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이제부터 잘 듣도록. 내가 저 기암절벽으로 건너가서 갈매기 똥과 잡다한 것들을 포대에 담아 이쪽으로 던질 것이다."

"예?"

제피로스가 흠칫 놀랐다.

"하지만 마왕님? 저곳은...."

"안다. 아무도 건너갈 수 없는 곳이지."

사실이었다.

돌아오지 못하는 이들의 절벽.

이 절벽 끄트머리 너머는 애초부터 게임 시스템상 아무도 건너갈 수 없는 지형이었다. 어떤 캐릭터도 예외가 없었다. 그렇기에....

"예로부터 수많은 마족들이 갈매기를 잡아먹어 보려고, 그렇게 해서라도 주린 배를 채우려고 등반을 시도하고, 도전했던 곳입니다. 하지만...그 누구도 돌아온 이는 없었습니다. 아니, 모두가 허망하게 미끄러져 파도의 먹이가 되었지요. 한데 마왕께서는...."

"괜찮다. 나는 오를 수 있다."

"하지만...."

"이번 일이 성공하면 모두가 배불리 먹을 길이 열릴 거야. 잠자코 지켜보도록."

"...."

제피로스는 말문이 막혔다.

새똥 절벽을 본 시르케는 내심 헛구역질을 삼켰다.

바할은 몸을 푸는 김장철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하르토크는 음흉한 눈초리를 애써 감추었다.

이윽고 김장철이 달렸다.

 

타팟-!

 

땅을 박찬다.

여전히 조금은 낯선 육신.

그럼에도 최선을 다해서 달린다.

그 언젠가, 저 깎아지른 기암절벽을 오르기 위해 발악하듯 애를 썼던 13회차의 기억처럼. 수백 번을 죽고 죽으면서도 도전을 거듭했던 나날처럼.

 

...파아앗!

 

몸을 날렸다.

절벽 너머로.

소용돌이치는 파도 너머로.

끝끝내 성공했던 그날의 비결을 떠올리며.

 

츠컹-!

 

목표점인 기암절벽을 움켜쥐기 직전이었다.

반투명한 막이 손을 가로막았다.

단단하고 미끄러웠다.

뚫을 수가 없었다.

잡을 수도 없었다.

마치 매끄럽고 단단한 유리벽에 가로막힌 듯, 전신이 순식간에 아래로 미끄러졌다. 그 어떤 이라도 갈가리 분쇄할 소용돌이 파도를 향하여. 서슴없이, 무력하게, 덧없이 미끄러져 내려갔다.

"...!"

제피로스의 눈길이 흔들렸다.

시르케가 두 눈을 부릅떴다.

놀란 바할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하르토크의 음흉한 미소가 노골적으로 변했다.

반면, 김장철은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이건... 당연한 과정이니까!'

미끄러지며 타이밍을 쟀다. 자신이 이 기암절벽을 오르는 데에 성공했던 13회차. 그날 발견한 비결을 떠올렸다. 그것은 바로 시스템 버그를 활용한 꼼수의 극치.

'...장비 인벤토리 오픈!'

 

딸깍!

 

눈앞에 떠오르는 장비 인벤토리 창.

서슴없이 아래쪽의 메뉴를 선택했다.

'전신 탈의!'

 

따봠!

 

그 순간이었다.

김장철이 순식간에 알몸이 되었다.

그리고 찹쌀떡처럼 쫀득하고 뽀얀 궁디 두 쪽만 살포시 내놓은 채, 나머지 전신이 기암절벽의 픽셀 속으로 파고들어 단단히 고정되었다.

6화. 꼼수 쓰는 고인물 (2)

따봠!

순식간에 샤라방 사라지는 겉옷.

아득한 꿈결처럼 드러나는 속살.

김장철의 전신이 기암절벽의 픽셀 속으로 파고들었다. 단단히 고정되었다. 찹쌀떡처럼 뽀얀 궁디 두 쪽만 살포시 드러났다. 지나가던 바닷바람이 황급히 발길을 돌렸다. 날아가던 갈매기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 심정(?)은 제피로스와 사천왕도 마찬가지였다.

"...!"

모두는 자신의 두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도 오를 수 없다고 여겨졌던 해안의 기암절벽. 수많은 도전자들이 모조리 스러져간 죽음의 도전지.

한데 저곳을 저렇듯....

'미, 민망해...!'

사태(?)를 가장 먼저 깨달은 제피로스는 저도 모르게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어느새 그의 두 눈에는 가녀린 핏발이 살포시 곤두서 있었다.

무리도 아니었다.

어째서, 하필이면, 오늘, 이렇게나 햇볕이 쨍쨍한지. 덕분에 눈부신 햇볕 아래 적나라하게 드러난 마왕 크레도스의 궁디가 어찌나 맨들맨들 뽕뽕해 보이는지. 하여 어쩌다 부끄러움이 자신의 몫이 되어 버린 건지.

그런 기분은 사천왕 또한 마찬가지였다.

'미친! 변태! 망측해! 더러워!'

'저게... 무슨!'

'꿀꺽.'

시르케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하르토크의 눈가에 경악감이 깃들었다. 바할은 저도 모를 긴장감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모두는 동시에 떠올렸다.

절대로 불가능하리라고 여겨졌던 일을 깨부수듯 성공하려는 마왕 크레도스. 그의 당당하고도 위용으로 가득한 뒷모습이 무척이나 뽀얗... 아니, 탐스럽... 그것도 아니, 뽕실... 아무튼! 여러 의미로 엄청(?)나다고.

그러나 김장철은 그런 모두의 감상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사실은 주위의 반응에 신경 쓸 겨를 따윈 없었다. 게임 시스템의 버그를 활용한 기암절벽 등반법은 이제부터가 시작이기 때문이었다.

'...일단 첫 단계는 성공!'

 

후욱!

 

김장철은 거친 콧김을 뿜어냈다.

솔직히 조금도 떨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게임 속의 캐릭터로 수백 번을 도전하며 발견하고 개발한 방법이지만, 이렇듯 자신의 몸으로 직접 시도하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한데 그럼에도 첫 단계인 절벽에 달라붙기를 무난하게 성공했다.

그렇다면 다음은?

'몸을 돌리며 착의!'

픽셀에 파묻힌 몸을 해물파전 뒤집듯이 홱 돌렸다. 궁디를 기암절벽 방향으로. 몸의 앞면을 제피로스와 사천왕 방향으로.

동시에 인벤토리창 아래의 전체착의/탈의 메뉴를 선택했다.

 

뚜봠!

 

절묘한 착의 타이밍.

가출했던 김장철의 옷이 돌아왔다. 전신을 휘감았다. 그의 낯부끄러운 앞면(?)이 만천하게 공개되기 직전에 아슬아슬하게 옷으로 가려졌다.

동시에 그의 몸이 위쪽으로 꿀렁거리며 밀려 올라갔다.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손이 밀어 올리는 것처럼. 여전히 기암절벽의 픽셀 속에 반쯤 파묻힌 채로.

'한 걸음 올라왔고! 그럼 다시 몸을 돌리며 탈의!'

 

따봠!

 

다시금 홰딱.

전신을 빈대떡 뒤집듯이 돌렸다. 절벽과 마주 보는 방향으로. 돌리며 탈의 메뉴를 눌렀다. 찹쌀떡 같은 궁디가 바닷바람에 탱글거리며 드러났다. 동시에 그의 몸이 위쪽으로 꿀렁거리며 밀려 올라갔다. 또다시, 누군가의 손이 밀어 올리는 것처럼.

'좋아, 된다!'

김장철의 입꼬리에 회심의 미소가 스몄다.

완전한 확신이 들었다.

해낸다.

해내고 만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13회차의 플레이를 하던 그날처럼.

'나는...!'

수도 없이 죽었다. 이곳에서. 무모한 도전을 거듭하며.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았더랬다.

어떻게든 이 기암절벽을 오르고 싶었다.

이유?

단순했다.

궁금했으니까.

절대로 오를 수 없는 절벽. 이 위에 뭐가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혹시나 자신이 놓치고 있을 숨겨진 아이템이 있진 않을까. 혹은 이벤트나 통로가 있진 않을까.

하여 수없이 도전했다.

죽고.

또 죽고.

수백 가지의 경로를 모조리 실험했다. 물론 계속 실패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안 되면 될 때까지 해보면 된다. 그러한 일념으로 별별 짓을 다 했다. 덕분에 길을 찾아냈다. 끝끝내 이 기암절벽의 정상을 정복했더랬다.

바로, 지금처럼.

'성공.'

 

...처억!

 

김장철이 기암절벽 꼭대기에 우뚝 섰다.

군림하듯.

절벽 건너편 육지의 제피로스와 사천왕을 굽어보았다.

그 모습에 제피로스는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뻔뻔해.'

차마 상상하기도, 묘사하기도 민망한 방법으로 절벽을 올라놓고선 그동안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정상에 우뚝 서서 분위기를 잡는 모습이라니.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감탄스러웠다.

'대체, 무슨 해괴한 마법을 쓴 거지?'

제피로스의 곁에 있던 하르토크가 눈살을 찌푸렸다. 내심 크레도스가 기암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기를 기대했는데. 혹은 곤경에 처하면 곧바로 달려들어 결정타를 날리려 했는데. 어째 상황이 기대와 다르게 흘러 버리고 말았다.

심지어 그 과정에서 크레도스가 보여준 수법은 실로 기괴했다. 옷을 벗으며 절벽 속으로 파고들어 이동하는 마법이라니. 크레도스가 최근에 비밀리에 개발한 새로운 형태의 마법인 걸까. 대체 저건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 걸까.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졌다.

'...어휴, 내 눈!'

하르토크의 곁에 있던 시르케는 욕지기를 짓씹었다. 방금 못 볼 꼴을 본 자신의 눈을 파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여 그녀는 진심으로 바랐다. 어서 마왕성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자신의 빙굴로 돌아가 가지런히 정돈된 얼음구슬을 매만지며 마음을 씻어내릴 수 있기를.

바라고 또 바라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가 그녀는 보았다.

곁에 있던 바할이 몸을 풀며 앞으로 걸어나가는 모습을.

"음?"

저 근육 덩어리가 뭐 하는 거지? 어째서 꼭 기암절벽을 향해 뛰어갈 듯이 준비를 하는 거지?

...라는 의문을 느낀 순간이었다.

"바할, 배고프다. 더는 못 참겠다. 그런데 저기, 먹을 것 많아 보인다."

"뭐?"

어디?

설마 저 기암절벽 위쪽?

시르케는 진심으로 묻고 싶었다.

물론 바할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바위 같은 눈길을 들어 기암절벽을 노려보았을 뿐이었다.

"...."

 

꾸드득...!

 

문득, 떠올랐다.

사실 자신도 이곳에 온 적이 있었다. 소용돌이치는 바다 너머의 기암절벽. 저곳을 오를 수만 있다면 지옥 갈매기의 알을 깨먹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그러나 포기했더랬다.

두려웠다.

자신이 없었다.

끝내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한데 이제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바할, 크레도스가 올라간 길 봐뒀다. 따라 하면 올라갈 수 있다. 올라가면 먹을 수도 있다. 갈매기 잡아 보겠다."

"무슨...?"

시르케가 미간을 찡그리는 순간이었다.

 

투콱!

 

바할이 내달렸다. 속도를 올렸다. 땅을 박찼다. 몸을 날렸다.

 

...파아악!

 

전신이 허공에 떴다.

"바할 님!"

뒤늦게 울려 퍼진 제피로스의 다급한 외침. 그 사이로 순식간에 가까워지는 기암절벽. 손을 뻗었다. 아까 크레도스가 기암절벽에 달라붙었던 바로 그 자리였다.

'바할, 해낸다!'

배가 너무 고프다.

이대로는 못 참겠다.

솔직히 죽을 것 같다.

굶주림은 이제 지긋지긋하니까. 올라가고야 말겠다. 그러면 배부름을 느낄 수 있겠지. 행복해질 수 있었지.

 

콰적!

 

바할의 우악스러운 손아귀가 기암절벽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아니, 파고들려던 순간이었다.

 

츠컹-!

 

기암절벽 위로 덧씌워진 반투명한 막이 바할의 손을 튕겨냈다. 뚫을 수가 없었다. 바할의 손이 유리벽에 부딪힌 장수풍뎅이처럼 미끄러졌다.

"...!"

황급히 손을 다시 뻗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부질없이 미끄러졌다. 가슴이 철렁. 몸과 함께 내려앉듯 추락했다. 뒤늦은 후회와 암담함. 눈앞이 막막해지는 기분.

'나는....'

실패한 건가.

이대로... 떨어지는 건가.

이렇게 죽기는 싫은데.

이런 식으로 끝나는 건 더 싫은데.

그런데 더는 방법이....

 

...덜컥!

 

돌연, 어깨와 팔뚝이 뽑히는 것 같은 충격이 몰려왔다.

놀란 바할은 고개를 들었다.

덕분에 볼 수 있었다.

"크레...도스...?"

마왕 크레도스.

그가 하반신을 기암절벽에 묻은 채로 이쪽의 한쪽 손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리고 버럭 외쳤다.

"야! 미쳤냐!"

"...."

"뭐? 내가 올라오는 길 봐뒀다고? 그러니까 따라 하면 성공할 거 같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이게 한 번 본다고 되겠냐고, 어!"

"크레...."

"어후, 더럽게 무거워가지고. 꿈틀거리지 마!"

"...."

바할의 입이 다물렸다.

녀석을 붙잡고 버티는 김장철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진짜, 장난 아니고, 엄청 무겁네, 이놈!'

일단 얼결에 붙잡아 주긴 했는데.

불운하게도 사천왕 중에서 가장 압도적인 덩치를 자랑하는 놈이 바할이었다. 한데 그런 놈을 한 손으로 붙잡고 버티자니, 솔직히 팔이 끊어질 것 같았다.

게다가 자신은?

아직 마왕 크레도스의 육체에 다 적응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지닌 힘을 다 끌어낼 수가 없었다. 손아귀에서 힘이 점점 빠져나갔다.

'그으윽...! 더는, 못 버티겠...!'

한계였다.

더는 정신력이고 뭐고가 없는. 아무리 애를 써도 안 되는. 그런 현실의 냉엄한 장벽.

한편으로는 이기적인 계산도 떠올랐다.

'게다가 사실 따지고 보면... 사천왕 이놈들, 언제든 틈만 보이면 나 죽일 수도 있는... 그런 놈들이잖아...?'

그러니 한 놈쯤 여기서 털고 가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그러니까.

나를 원망하지는 마라.

이건 다 멋대로 행동한 네 잘못이....

"...."

순간, 김장철은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뭔데.

어째서 그런 눈으로 올려다보는 건데.

어떻게 그런 얼굴로 울먹이는 건데.

왜 사람 마음 약하게 만드는 건데.

도대체 왜.

잊고 싶던 기억을 떠오르게 만드는 거냐고.

어이가 없어졌다.

바할의 손을 놓으려던 서슬에. 녀석과 눈을 마주쳐 버린 순간에. 뜻밖에도 그렁그렁한, 애원하는 듯한 눈길로 올려다보는 녀석의 얼굴을 보아 버린 덕분에.

차마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

느껴졌다.

그저 배가 고팠던 거라고.

더는 참기가 힘들었노라고.

그래서 같이 올라와 돕고 싶었다고.

그러니까 이 손, 놓지 말아 달라고.

한 번만, 더 힘을 내어달라고.

마치 잊고 있었던 작년 어느 날의 저녁처럼. 교수님이 논문을 봐주질 않는다며 울먹이고 애원하던 연구실 후배의 얼굴처럼.

그저 논문을 제출하고 싶다고.

더는 기다리기엔 너무 힘들다고.

그래서 이렇게 부탁하는 거라고.

형이 교수님께 말씀 좀 해달라고.

한 번만, 교수님들이 좋아하는 형이 나서 달라고.

그래서 나는....

어떡했더라.

'어떡했긴.'

거절했다.

무서웠으니까. 결국 자신도 대학원 노예 신세인 거라서. 괜히 나섰다가 교수 눈 밖에 날까 봐. 뭐라도 불이익을 당할까 봐.

더는 정신력이고 뭐고가 없는. 아무리 애를 써도 안 되는. 현실의 냉엄한 장벽은 어쩔 수가 없는 거라고. 스스로를 향한 변명만 잔뜩 품고서.

그 후배의 손을 놓았던가, 그날의 나는.

그런데 어째서.

바할.

네가 지금 그 후배 녀석이랑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건데.

"...하."

솔직히 좀 어이가 없었다.

이런 순간에 이런 쓸데없는 동정심이라니. 하지만 어쩔 수가 없겠다. 이쪽을 올려다보는 저 눈빛. 저 그렁그렁한 눈길을 마주하면서는 차마 손을 놓지를 못하겠다.

그러니까.

"...꽉 잡아, 이 시키야."

온몸에 힘을 주었다. 움켜쥐었다. 끌어올렸다. 머리에 피가 쏠리는 기분. 팔이 끊어질 것 같은 감각. 통증. 격통.

 

우두둑!

 

팔꿈치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눈앞이 새카매졌다. 놓지 않으려 애를 썼다. 더. 조금만 더. 한 번만 더. 위로. 더.

"...으아아아!"

 

파악...!

 

끌어올려 던졌다. 바할의 커다란 덩치가 순간적으로 해를 가리며 그림자를 드리웠다. 머리 위를 넘어갔다. 기암절벽 꼭대기에 내동댕이쳐졌다.

"...크억!"

비명을 내지르며 나뒹구는 녀석.

김장철은 그걸 보고서야 간신히 숨을 돌렸다.

"후, 후욱... 후우.... 이 멍청한 놈이... 그렇게 배가 고팠냐...."

"...."

자신의 무모했던 행동을 반성하는 걸까. 바할은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우물쭈물하며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새삼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한편으로는 까닭 모를 뿌듯한 기분이 느껴지기도 했다.

"...."

그래도 이번엔 놓지 않았구나.

그때도 이랬다면, 어땠을까.

김장철은 후련하면서도 묘한 기분을 느끼며 바닥에 드러누워 버렸다. 힘들었다. 잠깐이라도 숨을 돌리고 싶었다.

한데 그때였다.

 

...딩동!

 

난데없는 맑고 고운 소리가 온 세상을 울리듯 고막을 때려왔다. 그리고 뜻밖의 메시지가 눈앞을 야물딱치게 촵촵 채우기 시작하였다.

 

[당신은 마왕 크레도스의 육신에 적응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나름의 모든 힘을 쏟아내었습니다.]

[그 결과, 게임 속 마왕군 내의 주요 인물 중 하나인 사천왕 바할에게서 진심 어린 감사의 마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업적에 따라, 당신의 마왕군 부하들에게 배부른 행복감을 안겨줄 때마다 당신에게 막강한 점수가 적립되는 시스템이 개화됩니다.]

[해피 포인트 (Happy Point) 적립 시스템이 오픈되었습니다.]

 

"...뭐?"

김장철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훗날, 그를 마왕을 넘어선 마신으로 등극시킬, 전무후무한 디딤돌과 대면하는 첫 순간이었다.

7화. 버려진 땅의 행복 전도사 (1)

딩동!

온 세상에 울리는 맑고 고운 소리.

김장철은 저도 모르게 두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꽉 찬 명란처럼 야물딱지게 차오른 메시지를 읽어내렸다.

'...뭐? 해피 포인트... 적립? 마왕군 부하들을 배부르고 행복하게 해줄 때마다 포인트가 적립되는 거라고?'

어이가 없었다. 이건 게임 팔라딘 오브 블러드를 19회차 동안 플레이하면서도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설정이었다.

그러는 사이, 뒤이은 메시지가 힘차게 떠올랐다.

 

딩동동!

 

[행복감을 느끼는 마왕군 마족 한 명당 해피 포인트 1점이 적립됩니다.]

[당신은 적립된 해피 포인트를 사용하여 능력치를 상승시킬 수 있습니다.]

[당신이 구매할 수 있는 기본 능력치는 다섯 가지입니다.]

[체력, 정신, 근력, 민첩, 마력]

[현재 당신은 마왕 크레도스가 지닌 본신의 힘을 20%까지 사용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해피 포인트를 소모하여 각 능력치를 구매할 때마다, 당신이 사용할 수 있는 크레도스의 능력치 한도가 10% 추가됩니다.]

[100%를 달성할 시, 당신은 마왕 크레도스의 해당 능력치를 100%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며, 진정한 마왕의 힘을 구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최초 능력치 구매 비용 = 50 해피포인트]

[능력치를 구매할 때마다 다음 구매 비용이 상승합니다.]

 

'이게 무슨.'

휴대폰에서 가끔 돌리던 방치형 게임이 생각났다. 주인공에게 모이는 포인트를 능력치에 팍팍 투자해서 강하게 만드는 류의 게임들 말이다.

한데 그 대상이 자신이란다.

'그러니까... 포인트를 투자하면, 체력이든 근력이든 마력이든 능력 한도치를 올릴 수 있다는 거지?'

그렇게 계속 투자하면?

언젠가는 100%를 채울 수 있을 것이다. 말 그대로 마왕 크레도스의 모든 능력을 100%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팍팍 끌어낼 수 있다는 뜻이 아닌가.

'이거 장난 아니네.'

말 그대로 극한의 셀프 육성!

물론 쉽지는 않을 것이다. 단계가 오를 수록 필요로 하는 포인트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흔한 방치형 게임들의 육성 방식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방치형 게임이라. 그럼 스킬은?'

문득, 그런 류의 게임에서 스킬에도 포인트를 투자하던 경우가 떠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딩동!

 

다시금 울리는 상큼한 알림음이 추가 메시지를 불러왔다.

 

[또한, 당신은 해피 포인트를 소모하여 각종 스킬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보유 스킬]

[블러디 라이트닝 (Lv.1) / 레벨업 : 250 포인트]

 

[현재 보유 중인 해피 포인트 : 0점]

 

[해피 포인트 적립의 길은 멀고도 험하지만, 그 결과는 창대할 것입니다.]

[화이팅♡]

 

메시지는 거기까지였다.

김장철은 조금은 믿기지 않는 눈길로 메시지가 사라진 허공을 훑었다. 저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자그마한 한숨. 한편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이거, 진짜로 장난 아닌 거 맞구만.'

엄청난 가능성이 느껴졌다.

부하 마족들을 배부르게 먹여서 행복감을 느끼게 해줄 때마다 얻는 포인트라니. 그럼 만약, 버려진 땅의 마족 전체를 회식을 시킨다면? 한 방에 수천 포인트는 능히 땡길(?) 수 있을 거란 뜻이 아닌가.

'그러면 더는 남한테 죽을 걱정은 안 해도 되겠지.'

물론 그 괴물, 묵은지만 빼고.

 

...꽈악.

 

그래도 그게 어디인가.

김장철은 작은 희망을 느꼈다. 농사 성공을 향한 더욱 뜨거운 열망을 품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곁에서 비척비척 몸을 일으키는 바할을 돌아보았다.

한데 어째서인지.

바할이 전과는 조금 다르게 보였다. 이 녀석이 해피 포인트 오픈의 계기가 되어 준 덕분일까.

'쓰읍.... 그러니까 이놈도 나한테 해피 포인트를 퍼줄 수 있는 놈, 아니, 고객님이라는 거지?'

밉든 곱든 나한테 이득이 되면 좋은 놈! 좋든 싫든 나한테 퍼주면 뽀뽀해도 안 아까울 놈!

덕분인지 바할이 살포시 예뻐 보이기 시작했다.

전에는 그저 마냥 무서웠는데.

눈만 마주쳐도 살이 떨렸는데.

처신 잘못하면 다이렉트로 척추 교체를 당할 거 같았는데.

그런데 이제는 아니었다.

'이놈도 써먹기에 따라선 도움이 되는 놈인 거야.'

그리고 이런 놈을 많이 거느릴수록 자신이 강해진다. 이곳 세상에서 살아가기 수월하게 된다. 하니 마족들을 최대한 많이 먹여 살려야 한다. 사천왕도 예외가 아니다. 더 잘 챙겨줘야 한다. 다른 마족들에게 큰 영향력을 지닌 간부니까.

그러니까 지금은....

"야, 덩어리."

"...음?"

"너, 이 절벽은 올라온다고 끝이 아닌 거, 모르지?"

"으음?"

"그래서 이러는 거야. 너 죽지 말라고."

"무슨...."

"미안. 스마일?"

"...."

김장철이 바할을 마주보며 푸근하게 웃었다. 바할이 멈칫했다. 이쪽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그러다가 얼결에, 서서히, 이쪽을 따라 어색한 미소를 얼굴에 띠었다.

그 순간이었다.

 

덥썩!

 

손을 뻗었다. 바할의 뒤통수를 움켜쥐었다. 녀석이 반응하기도 전에 바닥으로 머리통을 내리눌렀다. 거의 찍어 버리듯이. 바닥에 잔뜩 쌓여 있던 갈매기똥 무더기를 향하여.

 

부칵!

 

"...거흡!"

바할의 얼굴이 갈매기똥에 파묻혔다. 안면 가득 퍼지는 비릿한 악취! 거구의 사천왕이 기겁하며 버둥거렸다.

하지만 김장철은 바할을 놓아주지 않았다. 당황해서 버둥거리며 일어나려던 녀석의 다리를 걸어서 넘어뜨렸다. 그것도 모자라 옆구리를 걷어차서 갈매기똥밭에 데구르르 굴렸다.

"무, 무슨! 바할한테... 이게 무슨!"

난데없이 당해 버린 봉변!

덕분에 바할은 졸지에 갈매기똥과 묵은 깃털 튀김옷(?)을 입게 되었다. 어이가 없었다. 화도 났다. 하여 항변하려 했다.

아무리 마왕이라도, 방금 자신을 구해줬다 해도, 이건 너무한 거 아니냐고. 바할한테 이래도 되는 거냐고. 혹시 미치셨냐고.

하지만 다음 순간, 바할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상상한 적도 없는, 인생에서 마주치리라 예상할 수도 없었던, 진짜 광기와 마주해 버린 덕분이었다.

"으흐흐흐, 흐흐흣...?"

마왕이.

크레도스가.

셀프로 새똥 밭을 구르고 있었다.

너무나 해맑게 웃으며 좌로 데굴.

즐거워 죽겠다는 듯이 우로 데굴.

구르다가 손을 뻗어 깃털 한 움큼을 이마에 척.

붙이더니 이쪽을 돌아보았다.

"후우, 이제 안심이다. 그치?"

"...."

뭐가 안심이라는 거지.

새똥으로 칠갑을 해놓고서.

깃털로 튀김옷을 입어놓고선.

대체 뭐가 좋다고 행복하게 웃는 걸까.

어쩌면 나는 우리의 마왕이 홰까닥 돌아 버린 첫 순간을 목도한 비운의 당사자가 되어 버린 건 아닐까.

사천왕 바할은 자신의 인생과 진로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품었다.

그때였다.

 

...화아악!

 

돌연, 김장철과 바할이 딛고 선 기암절벽 꼭대기가 밝은 섬광에 휩싸였다. 동시에 투명한 충격파가 일대를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갔다.

"...!"

바할이 깜짝 놀라 커다란 몸을 웅크렸다.

김장철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역시.'

기억이 났다.

이 기암절벽을 처음으로 올랐던 13회차 때였던가.

수백 번의 시도 끝에 간신히 정상에 오른 기쁨에 젖었더랬다. 방방 뛰었다. 그리고 정확히 1분 뒤에 시커먼 화면 가득 떠오르는 'YOU DIED'라는 붉은 글씨를 보아야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 기암절벽 위는 맵 바깥의 지역이니까.'

애초에 캐릭터가 올 수 없는 지점이다. 플레이어블 캐릭터이든, NPC이든 똑같다. 아무도 못 온다.

한데 자신은?

그리고 바할은?

올 수 없는 곳에 와 있다.

시스템에 오류가 생긴 것이다.

'덕분에 이곳에 일정 시간 이상 캐릭터가 머무르면 시스템이 오류를 감지하고, 반응하지.'

일종의 '청소'를 실행한다. 맵 바깥에 잘못 나와 있는 캐릭터를 지워서 오류를 제거하는 작업을 말이다.

그래서였다.

'이곳 등반에 성공한 뒤로도 청소 작업을 피해갈 방법을 찾으려고 별별 쇼를 다 벌였지.'

포기하지 않았다.

이왕 여기까지 온 거.

끝을 보고자 발악했다.

덕분에 알아냈더랬다.

시스템의 오류 제거를 피해가는 방법.

그것이 바로 방금 선보인 '온몸에 새똥 바르기'였다.

"...."

솔직히 이상하다는 건 안다.

하지만 어쩌겠어.

맵 바깥의 오브젝트나 텍스쳐로 온몸을 가려야 시스템이 여기에 있는 캐릭터를 인식하지 못하는 건데. 오류가 없다고 판정을 하는 건데. 그러니까 살려면 새똥이든 개똥이든 바르고 웃기라도 해야지 뭐.

'덕분에 바할 이놈도 살려냈고.'

김장철은 내심 오소소 돋는 소름을 살포시 털어냈다. 솔직히 방금은 좀 많이 위험했다. 조금만 늦었으면 자신이나 바할 둘 중에 하나는 시스템에 의해 '청소'당할 뻔했다. 아니, 갈매기똥을 조금만 덜 발랐어도 그랬을 것이었다.

하지만 살아남았다.

기뻤다.

"...해냈다. 크흐흐흐흣."

이로써 기암절벽 오르기, 완전 성공.

갈매기똥과 알껍데기 채집하기도 성공.

덕분에 퇴비 만들기에 청신호가 뙇!

김장철은 기쁨의 웃음을 머금었다.

온몸에 갈매기 똥칠을 한 채로.

이마빡에는 털뭉치를 한 덩이 붙인 채로.

어깨춤을 실룩실룩 추며 주위의 갈매기똥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래서 더럽냐고?

전혀.

이미 대학원에서 온갖 썩고 발효된 액비와 퇴비를 연구하고, 매만지고, 치덕대느라 썩은내와 비린내에 대한 저항력을 천상계까지 찍어 버린 김장철이었다.

오죽했으면 동네 이비인후과 의사쌤마저도 후각 상실에 대한 자료로 환자님의 진료기록을 써도 되겠느냐며 정중히 물어봤겠는가.

'새똥? 이 정도쯤이야. 연구실에서는 한 달 묵힌 고등어 내장도 치덕거렸다고, 내가!'

한데 지금은?

새똥쯤은 그저 향수처럼 느껴졌다.

혹은 구수한 고향의 향기에 지나지 않았다.

덕분에 그 모습을 보던 바할은....

'...바할, 무섭다.'

저도 모를 오한이 샤라락 돋아남을 느꼈다.

사실 아까는 부아가 제법 났는데.

난데없이 자신의 얼굴을 갈매기 똥무더기에 처박아서. 넘어뜨리고 똥밭에 굴려서. 그래서 모욕감을 느꼈는데. 따지려 했는데. 그러고 싶었는데.

"...."

그래.

엄마가 말씀하셨지.

미친놈한테는 대드는 거 아니라고.

특히나 자기가 미친 걸 모르는 미친놈한테는 절대로 덤비면 안 된다고.

'바할, 엄마 말 잘 듣는다.'

거구의 사천왕은 진심으로 다짐했다.

앞으로 마왕 크레도스한테는 절대로 대들거나 덤비지 말자고. 자칫 생각 잘못했다간 무슨 꼴을 볼지 모른다고. 팔자에도 없던 칠성장어 승천댄스를 추는 날이 올 수도 있겠다고.

그러니까, 몸 사리자고.

그때였다.

"야."

싱글벙글 웃으며 갈매기똥을 긁어모으던 김장철이 바할을 돌아보았다.

"좀 도와줄래?"

"...."

"혼자 하려니까 좀 늦네?"

"...."

"이러다가 시간 늦어지면 똥칠, 또 해야겠는데."

"...!"

바할의 동작이 저도 모르게 신속해졌다.

물론 거구의 사천왕은 꿈에조차 짐작하지 못하였다.

자신의 곁에서 미친놈처럼 보람차게 실실 웃어가며 갈매기똥을 긁어모으는 김장철.

이 순간의 그가 머릿속으로 어떤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그의 큰 그림 덕분에, 버려진 땅의 비참한 현실이 사상 최초의 비옥한 미래로 바뀌게 되리라는 미래 또한.

8화. 버려진 땅의 행복 전도사 (2)

 

새똥 채집이 완료되었다.

풍부한 알껍데기는 덤이었다.

덕분에 한없이 푸근해지는 마음! 라면 봉다리를 열었는데 무려 다시마 다섯 장이 따봠 하고 튀어나온 듯한 넉넉함! 냉장고 옆구리에 붙여놓은 동네 단골 중국집 탕수육 무료 쿠폰이 딱 9장이 모였을 때와 같은 두근거림!

...을 안고서 김장철은 마왕성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제피로스와 바할을 불렀다.

"이제부터 우리는 퇴비를 만든다."

"퇴비...를 말입니까?"

"그게 뭔지 아나?"

제피로스에게 물었다.

녀석이 안경을 슥 추켜올리며 대꾸했다.

"들어본 적은 있습니다. 인간들이 농사에 앞서 땅에 뿌리는 것이 있다는 이야기를 말입니다. 그걸 퇴비라 부른다더군요."

"그래. 맞다. 그것이 퇴비다. 토질을 개선하고 영양을 풍부하게 하지."

"하지만 직접 보거나 만들어본 적은 없습니다만."

"그런가?"

"예."

"어째서?"

"버려진 땅의 그 누구도 제조 방법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

"그건 마왕님도 예외가 아니셨지요."

대답하며 이쪽을 슥 쳐다보는 제피로스. 그 눈길에 저도 모르게 목덜미 근육 한 줄기가 움찔거려졌다. 그렇지. 마왕 크레도스가 퇴비 제조법을 알 리가 없었겠지.

"흠흠."

김장철은 괜한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얼굴 가득 티타늄 3중 엠보싱 철판을 딱 깔았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예전의 나는 퇴비 제조법을 몰랐지.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이제는, 말입니까?"

"그래."

이럴 때일수록 뻔뻔해야 한다.

어설픈 거짓말은 금방 들통이 나는 법이지만, 대놓고 뻔뻔하게 내지르는 거짓말은 오히려 잘 먹히는 법이니까.

그러니까....

"꿈에서 봤다."

"...."

"진짜다."

"...."

"그러니까 해보는 거다."

"...그게, 말이 되십니까?"

"당연히 말이 안 되지. 나도 황당하니까. 하지만 그저 황당하다고 넘기기에는 너무나 상세한 방법을 꿈에서 엿봤단 말이다. 마치 누군가에게 수업이라도 들은 듯이 말이야."

"그게 무슨...."

"그러니까 내가 본 방법이 정말로 맞는 건지, 허무맹랑한 건지는 해보면 알겠지. 안 그런가?"

"확인을 해보고 싶으시다는 겁니까?"

"그렇지."

"하지만 실패한다면...."

"잃을 것이 있나?"

"...."

제피로스는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보니 크레도스의 말대로였다. 버려진 땅의 모두는 어차피 잃을 것이 없다. 매일의 일상에 녹아 있는 비참한 굶주림. 기아를 해결하기 위해 서로를 잡아먹어야만 하는 처참한 현실.

한데 퇴비 제조에 실패한다고 해서 뭐가 딱히 달라지겠는가.

그저 여전히 굶주릴 뿐.

그저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조금이라도 배를 채워보기 위해.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정처 없이 주린 배를 감내하며 떠돌다 쓰러져 죽어갈 뿐.

그것이 버려진 땅의 대다수가 겪는 현실이 아닌가.

"그러니까 해보겠다는 거다. 실패해도 잃을 것은 없고, 만에 하나 꿈에서 봤던 내용이 사실이라서 성...."

"공을 한다면 희망을 엿볼 수도 있겠군요."

"그렇지."

"그렇군요."

"그런데 왜 남의 말을 가로채나?"

"죄송합니다."

"별로 안 죄송한 얼굴인데."

"아닙니다. 정말로 죄송해하고 있습니다."

"말로만 그런 거 같은데."

"설마요. 진심입니다."

"쓰읍."

김장철은 짐짓 가자미눈을 뜨고서 제피로스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내심 한편으로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으. 다행이다.'

들키지 않았다.

내심 철렁했는데.

한순간의 부주의로 정체가 탄로가 날까 봐. 자신이 진짜 마왕 크레도스가 아님을 들키게 될까 봐. 순간 손발에서 핏기가 싹 빠져나가는 듯이 노심초사했는데.

다행히 순간적으로 떠올리고 내지른 무대포식 둘러대기가 잘 통한 것 같았다.

'...다음부터는 조심하자.'

아직 자신의 위치는 위험하다.

마족들은 여전히 굶주리고 있고, 취소된 인간계 침공을 아쉬워하고 있다. 사천왕은 이쪽의 목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을 것이며, 어쩌면 그건 제피로스도 예외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니 함부로 허점을 보여선 안 된다.

자신의 정체에 관련된 빈틈 또한 그렇다.

"...그럼, 크레도스 님께서 엿보신 꿈속의 퇴비 제조법을 알려 주시죠."

잠깐의 반성과 상념. 그 사이로 제피로스의 목소리가 푹 파고들어 왔다. 김장철은 퍼뜩 표정을 관리하며 고개를 들었다.

"당연하지."

그때부터였다.

"첫 번째 단계! 갈갈갈!"

모든 재료를 곱게 갈았다.

기암절벽에서 긁어온 갈매기똥과 알껍데기를 갈았다. 하급 마족 무기의 썩어빠진 나무자루를 태우고 갈아서 재를 만들었다.

거기에 밭의 흙을 섞었다.

"두 번째 단계! 촉촉촉!"

갈아서 버무린 퇴비 재료에 물을 뿌렸다.

"...라지만, 바할, 물을 얼마나 뿌려야 하는지 헷갈린다!"

"쓰읍. 아직도 감이 안 잡혀?"

"바할, 모르겠다!"

"쯧. 이리 와서 봐봐. 여기 퇴비 있지? 손으로 한 움큼만 쥐어볼래?"

"바할, 퇴비 만지기 싫다!"

"왜?"

"냄새난다!"

"그럼 계속 배고플래?"

"바할, 배고픈 건 싫다!"

"그럼 시키는 대로 해야지?"

"...바할, 한다."

"그래그래. 이게 퇴비 재료야. 손으로 꽉 쥐어봐."

"...끄응."

"꽉 쥐니까 어때?"

"바할, 손바닥 촉촉해졌다."

"그렇지? 물기가 살짝 배어나지?"

"바할, 손 닦고 싶다!"

"좀만 참아. 느껴봐. 딱 그 정도야. 꽉 쥐었을 때 물기가 배어날락 말락 하는 딱 그거. 넘치지는 않게. 적당히 약간만 모자라고 감질나게. 알겠지?"

"바할, 기억했다!"

"그래그래. 동원된 하급 마족들한테도 그렇게 알려주면 되는 거야."

"바할, 알았다!"

흑암의 사천왕이 거구를 쿵쿵거리며 현장으로 뛰어갔다. 하급 마족들을 지휘했다. 수백의 마족들이 퇴비밭에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덕분에 다음 단계로 쑥쑥 넘어갈 수 있었다.

"세 번째 단계! 턱턱턱!"

수분을 머금은 퇴비를 건조한 곳에 쌓아두었다. 쌓는 높이는 쌀쌀한 날씨를 고려해서 70cm 정도로 하였다. 그 위에는 갈매기 깃털을 풍성하게 이불처럼 덮어 주었다.

"...사실 조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잘 쌓인 퇴비 위에 깃털을 덮는 작업을 지휘하던 제피로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는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

"재료를 갈고, 물을 섞고, 잘 버무렸으면 퇴비를 다 만든 것이 아닙니까? 어째서 굳이 이렇게 따로 쌓아두어야 하는 건지...."

"당연히 필요한 과정이다."

"필요한 과정이요?"

"그래. 발효."

당연한 과정이다.

사람들은 퇴비를 그저 썩은 덩어리인 줄로만 알지만, 실상은 다르다. 퇴비는 엄연히 살아 있는 유기물의 집합체다.

"오히려 썩은 퇴비는 못 써. 충분히 발효가 완숙된 퇴비를 써야지."

"발효가 안 되면... 문제가 생기는 겁니까?"

"어. 퇴비에서 암모니아 가스가 발생하거든. 그게 또 작물에 치명적이에요. 그냥 썼다간 작물이 다 죽는 거지, 아주."

"그래서 저렇게 쌓아두고서 발효라는 걸 하는 것이로군요?"

"그렇지. 이해가 빠르군."

"하지만...."

"내가 발효라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의문이 든다 그거지?"

"네."

"꿈에서 봤다."

"...."

"그러니까 나도 확인을 해보고 싶다는 거야. 그게 맞는지."

"...."

입을 다물어 버리는 제피로스.

아무래도 할 말이 제법 있는 눈치였다.

하지만 이쪽이 철판을 깔면 뭐 어쩌겠는가.

'꿈이라는데 뭐! 지가 내 꿈을 들춰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덕분에 우기기 성공!

김장철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퇴비 묵히기에 집중했다.

실제로도 농가에서는 가능하다면 완숙된 퇴비를 선호한다. 단지 문제는 완숙 퇴비가 비싸다는 것뿐. 그래서 현실과 타협하며 저렴한 미완숙 퇴비를 쓰는 경우가 많지만, 그럴 때도 충분한 주의를 기울여서 사용하는 편이다.

예를 들자면, 퇴비를 뿌린 후에 최소 7~15일쯤 지나서 작물을 심거나, 작년에 구입해서 묵혀둔 미완숙 퇴비를 올해에 쓴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젠 기다림이 남은 건가.'

퇴비가 알차게 묵어가며 밤낮이 바뀌었다.

일곱 번의 해가 뜨고, 일곱 번의 달이 졌다.

그때쯤 김장철은 하급 마족들을 동원했다.

퇴비 더미 위에 쌓은 깃털을 치웠다. 퇴비를 뒤집어서 섞게 했다. 물도 적당히 뿌려주었다. 발효가 전체적으로 골고루 되게 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퇴비가 발효되며 농축된 엄청난 양의 암모니아 때문이었다.

"크아악, 내, 냄새가...."

"코가... 사라진다아악...."

"하아아아앙...↗"

 

털썩.

 

"이, 이봐? 어이?"

"이 녀석, 심장이 뛰질 않는데?"

"그럼 응급처치부터 해야지!"

"하지만 혈액형을 모릅니다!"

"별자리랑 MBTI만 알면 됐어! 누른다! 셋! 넷!"

"읏챠!"

"...뿌크와하악!"

"살았다아!"

"살려냈다아!"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구나. 김장철은 쓴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묘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

서투르나마 나름 열심히 퇴비를 뒤섞는 하급 마족들. 어느 놈이고 예외 없이 깡마른 모습이었다. 가만히 보면 눈 아래는 푹 꺼졌고, 안색도 누리끼리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힘든 티를 내지 않는 모습이었다.

어째서?

지켜보고 있자니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조장님?"

"어. 왜."

"우리, 인간계를 침공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괜찮은 거겠지요?"

"나야 모르지."

"하지만 말입니다. 농사라는 거, 성공만 하면 우리도 인간들처럼 땅만 일구면서 먹고 살 수 있게 되는 거 아닙니까?"

"...그게 되겠냐."

"예?"

"아서라. 괜히 기대하다가 실망하는 거야. 여긴 버려진 땅이야. 그런데 무슨 농사냐. 이딴 퇴비인지 뭔지, 만든다고 뭐가 되겠냐."

"하지만...."

"그런데 왜 하고 있냐고? 시키니까 하는 거야. 명령을 안 들으면 당장 죽을 테니까. 상위 마족들의 배를 불릴 고깃덩이 신세가 될 거니까. 이래야 조금이라도 더 숨 붙이고 살 수 있는 거니까."

"그런... 겁니까."

"그래. 내가 살아야 자식도 조금이라도 더 살아남지. 부모마저 잃은 하급 마족의 새끼 따위, 누가 봐도 군침 도는 손쉬운 먹잇감 아니겠냐고."

"아...."

"너도 자식 있지?"

"예."

"그러면 몸 사리고 시키는 것만 묵묵히 해. 튀지도 말고. 들뜨지도 말고. 그래야 조금이라도 살 확률이 생기는 법이니까."

"아, 알겠습니다."

"알았으면 그거나 마저 뒤적여. 늑장 부리다간 찍힌다."

"...."

마왕의 몸을 얻은 덕분일까.

인간이던 때보다 훨씬 확장된 감각 덕분에 멀리서도 들을 수 있었다. 강제로 동원되어 퇴비를 뒤적이는 하급 마족들의 넋두리가. 한탄이. 자포자기의 마음이.

모두 들려왔다.

"...."

저런 녀석들을 수도 없이 죽였는데, 나는.

비록 게임을 즐기던 것이었다고 해도.

어떻게 하면 잘 죽이나를 연습했는데.

그게 일상의 가장 큰 즐거움이었는데.

'어쩌면, 상대에게 진짜 마족처럼 지독했던 쪽은 저 녀석들이 아니라 나였던 건지도.'

그러지 않으려고 하는데.

자꾸만 묘한 기분이 치밀었다.

한편으로는 얼마 전까지 변변한 보람도 보상도 없이 착취당하기만 하던 자신의 대학원 시절이 떠오르기도 했다.

어쩌면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들을 향해 다가간 것은.

"다들, 배가 고픈가?"

"...."

아무도 함부로 대답하지 못했다.

물론 김장철은 그들이 묵언으로 삼킨 침묵의 대답을 이미 알고 있었다.

당연히 배가 고프겠지.

그리고 힘들겠지.

서럽기도 할 테고.

김장철은 말없이 바닥의 돌멩이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힘껏 쥐었다.

 

끄득!

 

돌멩이에 손톱자국이 새겨졌다.

그는 자국이 새겨진 돌멩이를 제일 가까운 곳에 있던 하급 마족에게 내밀었다.

"받아라."

"...예?"

"새참 대신 지급하는 식권이다."

조금 전에 체념한 목소리로 한탄하던, 오직 자식을 위해 살아남으려 애쓰고 있노라 말하던 하급 마족이 깜짝 놀라 김장철을 쳐다보았다.

김장철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 배가 고프겠지. 밭일에 동원되어서도 배를 채우지 못하니 힘들고 억울하겠지. 그래서 주는 것이다. 내가 당장은 너희에게 새참을 지급하지 못하겠지만, 그걸 대신해서 언젠가 반드시, 떳떳하게 새참을 먹을 수 있을 권리를 말이다."

"새참을 먹을... 권리...."

"그래."

"새참이라는 거, 맛있는 겁니까?"

"으음. 지금 이 자리에서 약속하지. 꿀맛이리라고."

"그게 정말이십니까?"

"그래."

김장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진심이었다.

밭에서 땀 흘리다가 먹는 새참이야말로 꿀맛인 법이다. 언젠가는 반드시 이들에게 그 맛을 보여주고 싶었다. 또한, 열심히 일을 하면 정당한 보상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사실을 알려주고도 싶었다.

한데 그때였다.

"저기, 하지만 마왕이시여...?"

하급 마족이 쭈뼛거리는 기색으로 물어왔다.

"새참이 뭔지는 대강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 사실은 궁금한 점이 하나 더 있는데 말입니다...."

"궁금한 점이라. 뭐지?"

"저기, 새참이 맛있다는 말씀도 알겠고... 그걸 약속하시는 것도 알겠고... 농사를 열심히 지어야 한다는 것도 알겠는데...."

"그런데?"

"그게... 심을 것이 있는지가 조금...."

하급 마족이 목을 움츠리며 김장철의 눈치를 살폈다. 실은 주위의 다른 마족들도 비슷한 의문을 느끼고 있던 터였다.

'여기는 버려진 땅인데. 애초에 심을 것도 없는데. 딱히 작물로 삼을 만한 것도 없고. 그렇다고 인간의 땅에서 약탈한 과실이나 씨앗을 따로 비축해둔 것도 아니고.'

그런데 대체 뭘 심겠다는 걸까.

심을 게 있기는 한 걸까.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이곳에는.

이 저주받은 버려진 땅에는.

심을 작물 따윈 애초부터 없었노라고. 그런데 마왕께선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고. 묻고 싶은 심정으로 모두가 김장철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심을 것? 당연히 있지."

"예?"

"있다고. 심을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희미하게 웃어 보이는 마왕.

하급 마족은 눈을 끔벅거렸다.

"있다고 하심은... 어디에...."

"어디긴."

김장철의 미소가 짙어졌다.

심을 작물?

그래.

처음부터 있었다.

나는 이미 보았다.

마왕의 몸에 처음 들어왔던 날.

곳곳에서, 출정식이 거행되던 전당의 어느 구석에서, 그리고 지금도. 너희는 내내 깨닫지 못하였겠지만. 설령 깨달았더라도 그걸 탈 없이 먹을 방법을 모르기에 속수무책이었겠지만.

"네 발아래를 보아라."

"예?"

김장철의 말에 하급 마족이 시선을 내렸다. 덕분에 그는 자신의 발아래에 핀 볼품없는 보랏빛 꽃 한 송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흔하디흔한 꽃.

버려진 땅 곳곳에 피는 꽃.

하지만 굶주림을 해소하는 데에는 아무런 쓸모도 없노라 여겨지던 꽃이었다.

"이건...."

하급 마족은 결코 알 수 없었다.

자신의 발아래에 피어 있는 이 꽃이야말로, 지구 남미의 안데스에서 고대 제국의 자양분이 되어준 존재임을.

바로, 인간의 손에 의해 최초로 작물화가 된 전설적인 2배체의 야생종 감자, 솔라넘 스테노토멈(solanum stenotomum)이라는 사실을.

9화. 야생종이 피워내는 기적 (1)

 

고통스럽다.

누가 고통을 숭고한 감각이라 하였던가. 그 누가 고통을 피치 못할 부끄러운 기쁨이라 일렀나.

만약 지금, 그딴 소리를 지껄인 자가 눈앞에 나타난다면?

자신의 톱날검으로 잘근잘근 다져서 진짜 고통을 가르쳐 주고 싶다는 생각을 품으며 혈염의 사천왕, 아수라트는 실눈을 떴다. 아니,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그리고 정확히 0.1초 후에, 그는 자신의 행동을 뼈저리게 후회해야 했다.

'...빌어...먹을!'

콧구멍 흡기 밸브를 오픈하자마자 후각신경에 강렬한 108단 스파이크 콤보를 선사하는 묵은 퇴비 향기! 한없이 농축되어 지리고 비리고 디지는 암모니아 엑기스의 바이브레이션 프리허그!

'커... 커컥... 컥...!'

삽시간에 몰려오는 후각 테러, 혹은 질식(?)의 고통 속에서 그는 깨달아야 했다.

자신이 생체 피뢰침이 되어 묶인 장소.

이곳이 퇴비 숙성 작업장의 한가운데라는 사실을!

"...."

숨을 쉬기가 싫어졌다.

온종일, 24시간 내내 퇴비 냄새만 맡으며 숨을 쉬어야 한다니. 이제는 눈물 콧물은 물론이고 땀방울과 모공에마저 빌어먹도록 쿰쿰한 퇴비 냄새가 배어 버린 느낌이었다.

이럴 바엔 차라리 크레도스 놈의 블러디 라이트닝을 맞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그건 자신의 선천적이고도 강력한 회복력으로 어떻게든 견뎌낼 수는 있으니까.

그런데 이 냄새는?

그게 안 됐다!

복구는 개뿔.

고통을 받을수록 더 예민해지는 기분만 든다.

이딴 꼴로 살 바엔 차라리 코끼리 똥구멍에서 콩나물 뽑아먹는 신세가 더 나을 것 같다! 그건 배라도 안 고플 테니까!

'크으으, 그냥... 죽이든...가그긁가...!'

아니면 최소한 콧구멍 마개라도 좀 주든가!

비록 패배했다지만.

반기를 들려다가 실패했다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 말이다.

아수라트는 저도 모르게 서러움을 삼켰다. 눈물이 맺히는 눈길을 번득였다. 그리고 원망과 회한, 분노와 후회의 심정을 세트메뉴로 꾹꾹 눌러 담고서 한쪽을 노려보았다.

그곳에 크레도스가 있었다.

아까부터였던가.

저 빌어먹을 마왕 놈이 하급 마족들을 데리고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지금도, 이쪽의 고막을 야물딱지게 쵹쵹 찔러대는 중이기도 하였다.

"발아래에 핀 꽃이 보이지?"

김장철이 물었다.

그의 물음을 받은 하급 마족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걸 뽑아보도록."

"...예?"

"뽑아보라고."

"...."

김장철의 명령에 하급 마족이 쭈뼛쭈뼛 움직였다. 그리고 자신의 발아래에 피어 있는 보라색 꽃의 줄기를 조심스럽게 쥐었다.

"흙 속 줄기 안 끊어지게 살살."

"예, 옙."

하급 마족의 손놀림이 신중해졌다. 혹시나 뿌리를 끊어먹으면 마왕의 분노를 살 수도 있을 테니까. 그랬다간 시체조차 남지 않을 거니까.

"...."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하급 마족은 지금의 상황에 한심함을 느꼈다.

실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마왕의 명에 따라 자신이 파내고 있는 식물. 아니, 잡초. 자신이 이것의 정체를 잘 아는 까닭이었다.

'이건....'

사실 아무 쓸모도 없는 잡초인데.

먹을 수도 없고, 억지로 먹어봤자 더 탈만 나는 독초에 불과한데.

 

...푸스석.

 

하급 마족의 손이 온통 흙투성이가 되었을 무렵이었다. 마침내 보라색 꽃 아래, 흙 속에 감춰져 있던 부분이 모습을 드러냈다.

탁구공보다 살짝 작은 덩어리.

야생종 감자가 알알이 맺혀 있는 덩이줄기였다.

'역시.'

줄기를 뽑아든 하급 마족의 눈길에 실망감이 배어났다. 주변의 나머지 마족 일꾼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똑같은 착잡함을 느껴야 했다.

'마왕께서 새참이며 식권이며, 거창한 듯이 이야기를 하시더니 그 근거가... 겨우 이거....'

실망스러웠다.

사실 이곳에 있는 마족들 중에서 야생 감자를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버려진 땅에 사는 마족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이건 먹지도 못하는 독초에 불과하다고.

차라리 없는 것만도 못하다고.

'어릴 때... 너무 배가 고파서 몇 덩일 파먹었다가 거의 죽을 뻔했는데.'

하급 마족은 씁쓸해지는 눈길로 자신의 손에 들린 야생 감자 덩이줄기를 바라보았다. 어린 시절의 무모했던 시도. 덕분에 당시에 겪어야 했던 고통은 지금도 생생할 지경이었다.

심지어 자신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이걸 먹었다가 죽은 또래 마족도 심심찮게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걸로 농사를 짓겠다고?'

고작 그게 마왕의 계획이었던 건가?

겨우 그러자고, 인간계 침공을 중단시킨 거야?

이따위 독초를 심기 위해서?

우리를 굴려댄 거였어?

"...."

하급 마족은 저도 모르게 새어나오려던 탄식을 가까스로 눌러 삼켰다. 만약, 바로 앞에 무시무시한 마왕이 서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탄식은 물론이고 욕지기도 함께 내뱉었을 것 같았다.

실망스러웠다.

눈앞에 암담해졌다.

독초를 심고 기르겠다는 계획을 위해 마족 모두를 멸망의 길로 몰아가려는 마왕. 심지어 자신의 그런 결정이 얼마나 어리석고 무모한 짓인지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듯한 마왕, 크레도스.

나는.

우리는.

내 자식은.

이제 뭘 믿고 살아가야 하는 걸까.

'차라리 버려진 땅을 등지고... 인간의 땅으로 도망이라도 쳐야 할까.'

그랬다간 인간들의 사냥감이 되어 참혹한 죽음을 맞이할 뿐이겠지. 하지만 어찌 보면 차라리 그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최소한 뭔가를 먹고 죽을 수 있을 테니까. 하다못해 길가의 풀이나 작은 열매의 맛이라도 보고 죽게 될 테니까.

깨끗한 물마저도 구하기 어려운 이곳에서, 끔찍한 퇴비 냄새나 맡으며, 희망도 없는 독초나 기르다가, 결국엔 굶주리고 지쳐 쓰러져 죽는 꼴은... 면할 수 있을 테니까.

"...하아."

결국, 밀어닥치는 실망감과 암울함을 견디지 못한 하급 마족이 저도 모르게 나지막한 한숨을 내뱉고 말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김장철은 태연했다.

자신의 명령에 따라 야생 감자를 뽑아든 하급 마족과, 나머지 녀석들이 모두 엄청나게 실망하는 기색을 다 보고 있음에도 그러하였다.

아니, 오히려 그는 모두의 반응을 보며 내심 쓴웃음을 머금기까지 했다.

'쯧쯧. 놔두면 아예 울겠네. 울겠어.'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거다.'

김장철은 자신만만했다.

언제부터?

처음부터 그랬다.

마왕 크레도스의 몸에 들어왔던 날, 출정식이 거행되던 파괴의 전당에서 보았다. 드넓은 전당 구석구석에 수줍게 피어 있던 초라한 작은 꽃을. 보랏빛 야생 감자의 증거를.

그걸 알아본 순간이었던가.

거대한 퍼즐이 머릿속에서 순식간에 조립되었더랬다.

'저거, 솔라넘 스테노토멈.... 안데스의 고산지대에서 가장 처음 재배화(domestication)에 성공한, 야생종에 가장 가까운 그 감자 종이 확실해.'

다시 보아도 그러했다.

한데 저것이 파괴의 전당은 물론이고 마왕성 인근 곳곳에서 보였다. 그럼에도 아무도 뜯어내거나 채취한 흔적이 보이지가 않았다.

덕분에 깨달을 수 있었다.

버려진 땅의 마족은 야생 감자의 독성을 없애는 방법을 모른다고. 남미 중앙 안데스의 고지대, 티티카카 호수 일대에 살았던 케추아족(Quechuas) 등이 활용했던 야생 감자 무독화의 기술을 얻지 못한 듯하다고.

그래서 야생 감자를 먹을 줄 모르는 것이라고.

'하지만... 나는 할 수 있어.'

자신이 지닌 지식이라면.

그걸 제대로 활용한다면.

충분히 가능하겠다고.

해낼 수 있겠노라고.

희망의 빛이 보였다.

게다가 마침, 이곳의 기후마저도 계획을 실행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아무리 봐도 여기, 안데스 산맥 고지대와 너무나 흡사해.'

그건 이미 게임을 하면서도 조금씩 짐작했던 바였다.

마왕 크레도스.

그가 도사리는 마왕성.

차빈 데 우안타르(Chavín de Huántar).

이 버려진 땅의 가장 깊은 지역으로 오기 위해선?

다른 지역을 모두 클리어해야 했다. 그 후에 끝없는 능선을 오르는 맵을 거쳐야만 비로소 마왕성 지역에 진입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변화하는 풍경을 게임 화면을 통해 일찍이 보았던 자신이었다. 그러면서 짐작했고, 마왕의 몸에 들어와서는 피부로 실감했다.

'여기 마왕성 일대는 버려진 땅에서도 해발고도가 가장 높은 곳이야. 대략 짐작으로는 해발 4천 미터 가량. 게다가 엄청나게 건조해. 이 정도면 아마 습도가 20% 남짓일 거고, 일교차마저 어마어마하지. 낮에는 20도를 훌쩍 넘어서 살짝 더운데, 밤이면 영하 10도는 우습게 찍는 수준이니까.'

피부가 쩍쩍 갈라지는 건조함!

온탕과 냉탕을 방불케 하는 일교차!

한마디로 고산지대 기후 중에서도 지랄맞은 날씨!

그런데 그게 중앙 안테스 산맥 티티카카 호수 인근의 기후와 너무나 유사했다. 또한, 이 지랄맞은 기후가 바로 자신이 활용할 무기이기도 했다.

'...이런 극악의 기후 조건을 지혜롭게 활용했던 케추아족처럼 말이지.'

김장철은 고개를 들었다.

마족들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실망감을 애써 감추는 모습들이었다.

"...이제부터 다들."

그들을 향해 말했다.

"이런 거 100줄기만 더 뽑아오도록."

"예?"

"실시."

굵고 짧은 명령!

까라면 까야 하는 마족의 규율!

마왕인 그의 한마디에 하급 마족들이 주저하면서도 즉각 움직였다. 그리고 주위를 돌아다니며 야생 감자 줄기를 조심조심 파내기 시작하였다.

덕분에 야생 감자 100줄기를 금방 모을 수 있었다.

"다들 고생했다."

그 누구도 칭찬에 얼굴을 펴지 못했다. 모두는 여전히 야생 감자를 재배하겠다는 이쪽의 계획에 절망감과 암울함을 알차게 느끼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상관없다.

이제 곧, 실망감이 희망으로 바뀔 테니까.

내가, 그렇게 만들어 줄 거니까.

"그리고 다들, 걱정이 많겠지."

"...."

이쪽의 말이 조금 뜻밖이었던 걸까.

몇몇 하급 마족이 의아한 눈길로 고개를 들었다.

그들을 향해 희미하게 웃어 주었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먹지도 못할 독초를 심는 거냐고. 마왕 놈이 드디어 정신이 나가 버린 거냐고 생각 중이겠지. 안 그런가?"

"예."

"방금 대답한 놈 누구?"

"...죄송합니다."

제피로스가 멋쩍은 얼굴로 손을 들었다.

녀석을 살포시 무시했다.

그리고 할 말을 이어나갔다.

"모두의 그런 마음을 나는 잘 안다. 그래서다. 앞으로 우리가 재배하게 될 이 야생 감자가, 충분히 먹을 수 있는 작물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려는 것은 말이다. 그리고 나는, 설명을 하기보다는 체험을 시켜주는 쪽을 선호하는 편이지."

"...."

체험이라니.

대체 뭘까.

혹시 죽기 직전까지 저걸 강제로 입에 쑤셔 넣고 쪼밥쪼밥 씹게 만들면서 '저는 행복합니다!'라고 외치게 만들려는 걸까. 그렇게 우리 모두를 단련(?)시키려는 건 아니겠지, 설마.

마왕의 말을 듣던 모두는 무의식중에 떠올린, 실현 가능성이 충분한 시나리오에 4번 경추를 움찔거렸다.

그 순간이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제부터, 야생종 감자로 시험 시식용 추뇨(chuno)를 만드는 알찬 시간을 보낼 것이다."

김장철의 입이 열렸다.

고대의 안데스인들이 개발한 야생종 감자의 기적.

버려진 땅의 기아를 해결할 기적의 첫걸음이자, 훗날 그를 해피 포인트 갑부로 만들어 줄 전설의 맛도리 가공식품. 더 나아가 버려진 땅의 특산물로 인간계에서 공전의 히트를 치게 될, 추뇨 생산이 선언되었다.

그리고 그 선언을 멀찍이에서 듣던 생체 피뢰침, 아수라트는 눈물을 찔끔 머금으며 생각했다.

추뇬지 뭔지, 이젠 나 좀 풀어주면 안 되겠냐고 x발.

10화. 야생종이 피워내는 기적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