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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 - 10-20

10화. 야생종이 피워내는 기적 (2)

 

'추뇨라는 건 대체 뭘까.'

마왕의 부관, 제피로스는 눈매를 가늘게 떴다. 그리고 퇴비밭 옆에 쪼그려 앉아 있는 자신의 주군을 쳐다보았다.

'야생종 감자로... 시험 시식용 추뇨를 만든다고?'

추뇨라.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어떻게 생긴 건지도 모르겠다.

주군이 말하는 걸로 봐선 음식이라는 건 짐작이 가는데.

'...실제로 그런 게 있기는... 한가...?'

의구심이 들었다.

선뜻 믿음이 가지 않았다.

사실 요즘 주군의 모든 행동거지가 다 그렇긴 했다.

'너무나 다정해지셨어. 모든 일을 공포로 처리하던 때와는 정반대일 만큼. 물론 여전히 얼굴 생김새나 분위기는 더없이 살벌하긴 하지만... 그래도....'

친절해졌다.

자신을 대하는 모습이 그러했다.

하급 마족들을 대할 때는 더욱 그랬다.

예전의 크레도스였다면?

하급 마족들이 자신 앞에서 쭈뼛거리는 모습을 보이기만 해도 그 자리에서 갈아 죽여 피웅덩이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것이 마왕. 모든 마족의 정점에 군림하는 자. 버려진 땅을 지배하는 자의 응당한 권리이자 권위인 법이니까.

한데 이제는 다르다.

예전엔 상상할 수도 없었다.

지금처럼, 이렇게, 땅바닥에 쪼그려 앉아서, 야생종 감자를 바닥에 정성껏 널고 있는 마왕의 모습이라는 건 말이다.

"...."

제피로스는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왕의 생각지도 못한 솔선수범(?) 사태에 어쩔 줄을 몰라 하는 하급 마족들이 보였다. 다들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러다가 갑자기 마왕이 자신들을 갈가리 찢어서 죽일까 봐 그러는 것이겠지.

혹은....

'나처럼 추뇨라는 것이 전혀 믿음이 가지 않아서일 수도 있고.'

솔직히 안 믿긴다.

주군이 야생종 감자라고 부르는 저 잡초의 덩이줄기. 저건 음식도 아니다. 애초에 먹을 수 없는 것이었다.

몇 알만 삼켜도 극심한 복통을 겪어야 하고, 때로는 죽어야 하는, 쓸데없는 독초일 뿐이니까.

'그런데... 저런다고 될까?'

제피로스는 더욱 가느다랗게 뜬 눈으로 주군을 지켜보았다. 가만히 보니 주군은 야생종 감자를 아무렇게나 널어놓는 것이 아니었다. 나름 가지런하게, 간격을 벌려서, 서로 겹치거나 맞닿지 않게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어쩌면 그래서였을 것이다.

제피로스가 저도 모르게 입을 연 것은. 주군의 곁에서, 주군의 모든 행동과 명령을 기록하는 자신의 본분을 잠시 잊고서, 감히, 대뜸 질문을 꺼낸 것은.

"주군. 지금 무엇을 하시는지, 감히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어. 괜찮아. 보면 알잖냐. 감자 널어놓는 중인 거."

주군은 다행히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별것 아닌 듯,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래야 애들 물이 잘 빠지거든."

"물...이라니요?"

"어, 설명하기 복잡한데. 이래야 독이 없어져."

"독이 없어진단 말입니까?"

"음. 이렇게 제법 오래 방치하면?"

"...."

제피로스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결국엔 참지 못하고 반문하고 말았다.

"주군의 말씀은 즉, 햇볕에 말리시려는 겁니까?"

"어. 반은 맞아."

"하지만 그랬다간 밤엔 얼어붙을 텐데요."

"어. 훌륭하네. 나머지 반을 맞췄어."

"예?"

제피로스의 눈썹이 다시금 꿈틀거렸다.

"하지만 주군, 낮에 햇볕에 말렸다가 밤엔 얼리고, 또 낮에 햇볕에 녹이고를 반복하면... 그 감자 말입니다. 엉망진창이 되는 거 아닙니까?"

"맞아. 엉망진창이 될 거야."

"...."

"그러라고 이러는 거야."

"...."

"이런 내가 이상해?"

"네. 이상하십니다."

"그래. 거짓말은 안 해서 좋네."

"...."

결국, 제피로스는 입을 다물었고, 김장철은 의미심장한 미소만 머금었다.

그리고 정말로 며칠이 흘렀다.

정확히는 다섯 번의 해가 뜨고, 다섯 번의 달이 졌다. 그동안 야생종 감자는 밤에 얼었다가 낮엔 녹기를 반복하며 엉망진창으로 흐물흐물해졌다.

덕분에 그걸 지켜보는 제피로스와 퇴비밭의 하급 마족들의 표정도 함께 엉망진창으로 찌푸려져 갔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던 까닭이었다.

'저런 걸' 먹는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비현실적으로만 여겨져서. 한편으로는 기만처럼도 느껴져서.

"...."

그러나 주군은 여전히 태연한 표정이시다.

제피로스는 약간의 초조함을 느꼈다.

상황이 점점 심상치 않다는 직감.

하급 마족들 사이에 불만이 팽배하게 번지는 기류가 온몸으로 느껴졌다.

'...이건 위험해.'

주군이 강력하다고 해도.

마왕의 권위를 지녔다 하여도.

버려진 땅의 모든 마족들이 들고일어난다면?

그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사천왕이 민심을 등에 업고 함께 주군을 친다면... 그때는 주군으로서도 역부족이시겠지.'

최근 주군에게 충실한 모습을 보이는 바할은 모르겠다.

하지만 나머지 셋은?

아수라트와 하르토크, 시르케가 다함께 반기를 든다면? 버려진 땅의 절대다수인 하급 마족들이 모조리 그들을 지지하며 함께 봉기한다면?

주군도 무너질 것이다.

"...."

제발 그런 사태는 벌어지지 않아야 할 텐데. 그런데 어째서 자꾸만 희망이 사라지는 기분일까.

아주 흐물흐물 만신창이가 된 야생종 감자들을 바라보며, 제피로스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내심 염원했다.

주군께 정말로 그럴듯한 계획이 있기를. 저 형편없는 몰골의 감자를 정말로 멋들어지게 살려내어 모두의 불안이 기우로 끝나게 되기를.

...이라고 생각하던 무렵이었던가.

"바할, 마왕의 부름을 받고 왔다!"

난데없이 웅장한 외침이 고막을 푹 찔러왔다.

과연 고개를 돌려보니, 바할의 커다란 덩치가 이쪽으로 쿵쿵 뛰어오고 있었다.

"그래. 시간 딱 맞게 왔구만."

주군이 바할을 반겼다.

그리고 흐물텅한 몰골의 감자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바할, 저거 보이지?"

"보인다!"

"응, 그래. 저거 밟아."

"...벍?"

"밟으라고."

"...바할, 똥 밟기 싫다!"

"쓰읍, 똥 아니거든? 감자거든?"

"그래도 마왕이 어제 싸놓은 똥 같이 생겼다!"

"나 저런 똥 안 싸는데?"

"그래도 싫다!"

"쯧. 똥 아니야. 감자야. 먹을 거야. 게다가 밟을 때 흙 묻지 말라고 특별히 바위 위에 옮겨다가 새로 널어놓기까지 했잖아?"

"바할은 그런 거 모른다! 바위고 뭐고, 왜 바할이 밟아야 하는 건가아!"

"그래야 안 아프고 맛있게 먹을 수 있으니까?"

"...안 밟으면 바할 때린다는 뜻인가?"

"아니, 그게 아니고."

"바할, 이해가 안 된다!"

"쯧, 그럼 들어봐."

김장철은 스읍 숨을 끌어모았다.

촵촵, 입술을 적시는 것도 잠시.

그의 혓바닥이 풀악셀을 밟았다.

"야생 감자에는 솔라닌(solanine)이라는 알칼로이드 배당체가 함유되어 있어. 이건 야생 감자가 포식자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합성하는 생물독인데, 체중 70킬로그램의 성인이 210~420밀리그램 정도만 먹어도 50% 확률로 사망, 즉, 절반의 확률로 염라대왕한테 진로상담을 받을 수 있게 되는 맹독이라는 거야."

"...믉?"

"그러니까 독을 없애야지. 그런데 솔라닌은 세포 내부의 액포에 존재해. 그래서 감자를 곱게 짓이겨 밟으면 세포벽이 파괴되면서 솔라닌이 액포의 수분과 함께 흘러나오게 되는 거야. 그걸 이제 다시 햇볕에 말려주면? 독성이 싹 증발된다는 거다. 알겠어?"

"...바할, 머리 터진다!"

"응, 더 터지게 해줄까?"

"바할, 잘못했다!"

"그럼 밟자?"

"바할, 밟는다!"

 

쿵쿵쿵!

 

어쩐지 안색이 살짝 하얗게 질린 바할이 재빨리 움직였다. 야생 감자를 허겁지겁 밟기 시작했다.

 

쿠와앙! 콰즙!

 

바할의 전신 스톰핑!

...에 짓눌린 감자가 나노 단위로 짜부가 되었다. 세포벽이고 액포고 뭐고 다 터져서 솔라닌 독소가 아주 그냥 사방팔방으로 다 흘러나왔다.

그 모습을 보는 김장철의 입가에는?

환한 함박미소가 맺혔다.

'아이고, 잘한다!'

볼수록 흐뭇했다.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이곳, 마왕성 차빈 데 우안타르 일대의 기후가 안데스 중부 고지대와 흡사해서 정말로 다행이야.'

운이 좋았다.

덕분에 고대의 안데스 원주민이 활용했던 전통의 방식 그대로, 야생 감자의 독성을 제거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안데스 고지대 티티카카 호수 일대는 일교차가 지랄맞을 정도로 지독하지. 밤에는 영하로 꽁꽁 얼었다가, 낮이면 초여름 더위가 느껴질 정도니까.'

덕분에 밤엔 얼었다가.

낮에는 사르르 녹았다가.

감자를 널어놓아 그 과정을 겪게 하는 것만으로도 엉망진창 흐물흐물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 상태에서 꼬깃꼬깃 밟으면?

감자 조직이 손쉽게 뭉개지며 세포벽이 망가지고, 솔라닌이 한 많은 세상을 등지고서 칠성장어 승천댄스를 추며 머나먼 하늘로 휘발되는 전통의 원리!

'후우, 감자 만세.'

김장철은 솔라닌 휘발에 박차를 가했다. 바할이 짓밟고 뭉갠 감자를 며칠간 더 얼리고 녹이고 말렸다. 추가로 한 번 더 밟고, 또 얼리고 녹였다. 그리고 마지막엔 바싹 말렸다.

하여 마침내 완성되었다.

"그래. 이것이 버려진 땅 최초의 추뇨다."

"...."

"그리고 나는 이제부터, 이 기념비적인 추뇨를 너희에게 시식시키려 한다."

"...."

김장철의 앞에 놓인 100조각의 추뇨!

그걸 바라보는 하급 마족들의 표정이 마지못해 희미하게 썩어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추뇨의 모습이 너무나 볼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런 걸... 먹으라고?'

'시식? 이거, 시식 맞아?'

'그냥... 말린 똥 같은데?'

'내 겨드랑이가 저거보다 더 맛있을 듯....'

일단 한눈으로 봐도 도저히 먹을 것처럼 보이지가 않았다. 저걸 먹을 바엔 차라리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사탕 삼아 핥는 게 훨씬 감미로울 것 같았다.

게다가 모두는 알고 있었다.

'저거, 어차피 독초로 만든 거잖아.'

'그럼 독이 그대로 있을 건데.'

'게다가 난 봤어. 바할 님이 저거 짓밟기 직전에... 퇴비밭을 그대로 가로질러서 뛰어왔어.'

'퇴비 다 묻은 발바닥으로 저걸.... 우우웁... 오옯....'

'그래도 안 먹으면... 죽이겠지?'

'하지만... 진짜 먹기 싫은데....'

'맛도 없고 독까지 있는 거 먹고서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죽을 바엔... 차라리... 분노한 마왕의 손에 단숨에 죽는 게 편하지 않을까.'

모두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눈가에 번민이 떠올랐다.

시식이라니.

진심으로 내키지가 않았다.

물론 김장철도 하급 마족들의 그러한 기색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 녀석들....'

다만 화는 나지 않았다.

그저, 내키지 않는 음식을 앞에 두고 있는 저들의 표정을 보며 어린 시절 어느 날의 자신을 문득 떠올렸을 뿐.

"...."

열두 살이었던 때였나.

하루는 피자가 너무나 먹고 싶었다.

친구들이 다 먹어봤다는, 그런데 자신은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었던, 피자가 너무나 먹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떼를 썼다.

할머니를 졸랐더랬다.

자신을 홀로 키워주신 할머니는 역정을 내셨다. 우리 형편에 그럴 돈이 어디 있느냐고. 나중에 공부 잘해서 대학 가면 그때 실컷 먹으라고.

그 말을 듣고 울었다.

서러워서 밤새 베개를 끌어안았다.

그런데 다음 날이었던가.

생일이었던 그날,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할머니가 직접 만드신 피자를 데워놓고서 기다리고 계셨다.

처음엔 기뻤다.

다음엔 실망했다.

피자가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접시에 놓인 것은 자신이 알던 피자와 너무나 달랐다.

그냥 부침개 비슷한 밀가루 반죽에, 대파와 계란 노른자, 고추를 송송 썰어서 올린... 그걸 누가 피자라고 부를 수 있을까.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이내 깨달을 수 있었다.

밥상 옆에 놓인, 어딘가 꼬깃꼬깃하던, 그래서 한눈에 보아도 어디선가 주워왔구나 싶은, 피자 가게 광고 전단지를 보면서였다.

'당시의 할머니는....'

피자가 어떤 음식인지 전혀 모르셨던 거다. 그래도 손주놈이 먹고 싶다고 하니까. 마침 손주 생일이기도 하니까. 어떻게든 피자를 비슷하게 만들어 보시려고 애를 쓰셨던 거다.

그래서 전단지를 가져와서 나름 궁리를 하신 거였다.

자신이 아는 선에서 이해한 대로.

최대한 비슷하게라도 해보시려.

밤새 옆에서 이불 덮어쓰고 울던 손주 얼굴에 웃음꽃 한 떨기나마 피워내시기 위해.

손가락까지 데어가며 피자를 닮은 전을 부치신 거겠지.

"...."

갑자기 왜 그때 생각이 나버린 걸까.

어째서, 눈물을 참으며, 환하게 웃으며, 맛없던 할머니표 부침개 피자를 맛있게 먹었던 그날의 일이 떠올라 버린 걸까.

'그래, 너희도 비슷한 기분인 거겠지.'

처음 이상한 피자를 보고서 실망했던 어린 시절의 내 마음.

당시의 당혹감과 실망감.

그런 걸 느끼는 거겠지.

김장철은 훈훈하게 웃으며 하급 마족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언젠가, 열두 살 생일날의 자신을 반기며 할머니가 따스하게 해주셨던 말씀을 입에 담았다.

"차린 건 없어도 맛있게 먹어라."

"...!"

하급 마족들의 동공이 16비트 자진모리장단으로 흔들렸다. 그리고 6번 척추에 소름이 돋는 감각을 느꼈다.

모두는 깨달(?)았다.

'...차린 게 없어도 맛있게 먹으라고?'

그건 즉....

'우리 기분이 어떤지는 모르겠고, 상관하기도 싫고, 맛있게 안 먹으면, 상상할 수도 없을 끔찍한 일을 당할 거니까 알아서 처신하라는, 뭐, 그런 거야?'

그런 거다.

확실하다.

이쪽을 보며 흐뭇하게 웃는 마왕의 소름 끼치는 표정을 보니까, 진짜로 딱 그거 맞다!

"...!"

하급 마족들의 뇌리에 경보음이 띠요띠요 울렸다.

그때부터였다.

생존본능의 근원을 건드리는 공포심이 괴식에 대한 거부감을 압도했다. 모두의 손이 빛의 속도로 움직였다. 말라비틀어진 추뇨를 집어 들었다. 김장철이 눈짓으로 가리키는 소금통에 콕 찍었다. 입으로 가져갔다.

씹었다.

 

뽜삭?

 

"...어?"

그 순간, 하급 마족 일동은 느껴야 하였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혓바닥 미뢰돌기 위에서 농부르기니 무르익을라고 벼벤다토르 논두렁 슈퍼차저처럼 질주하는, 고소짭짤 맛도리 심포지엄 오케스트라 하모니의 물결을.

그리고 그와 함께.

 

...딩동!

 

[당신의 마왕군 수하 일부가 강렬한 맛도리 행복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최초의 해피 포인트(Happy Point)가 적립됩니다!]

 

더없이 반가운 메시지가 김장철의 눈앞을 야물딱지게 채우기 시작하였다.

11화. 야생종이 피워내는 기적 (3)

 

행복이란 무엇일까.

생각해도 모르겠다.

고민해도 알 수가 없다.

지난 며칠 내내 그러하였다.

아마도 앞으로도 제법, 아니, 어쩌면 아주 오래 그럴지도 모르겠다.

"...."

레벨 9990의 NPC, 묵은지는 시선을 내렸다.

피웅덩이.

바닥에 흥건하게 널린 피웅덩이가 선명하게 보였다. 당연하다. 방금 만들어진 것이니까. 자신의 손에 의해서.

"후우."

얼마나 더 걸어야 버려진 땅을 벗어날 수 있을까. 그 얼마나 더 헤매어야 인간의 마을에 도착할 수 있을까. 그때까지 또 얼마나 많은 적을 부수고, 피웅덩이로 만들어야 할까.

역시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것이 하나 있긴 하다.

이제는 살육과 투쟁이 지긋지긋해졌다는 것. 사명의 손길을 잃은 자신에겐 그 모든 것들이 의미가 없어져 버렸다는 것.

"...."

그 사이, 바닥의 핏물이 이쪽으로 느릿하게 흘러왔다. 저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신발에 피를 묻히지 않아서. 앞으로 새길 발자국에 피 냄새를 배게 하지 않아서.

'다시는....'

무언가와 끝없이 싸우는 삶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아마도 열아홉 번이었을 거듭된 삶.

희미하게 떠오르는 전생의 기억들.

그때의 행동을 반복하기 싫었다.

"...."

그러니 가자.

무의미한 투쟁이 없는 곳으로.

앞으로의 삶을 평온하게 이끌어낼 장소로.

아직은 어디인지 모르겠지만.

그 언젠가 내 삶의 안식이 깃들 집으로.

"...가자."

어둑한 암굴 속.

아마도 버려진 땅의 바깥으로 향하고 있을 경계. 어쩌면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을 보금자리. 다만 지금은 어딘지 알 수 없는 종착지.

그곳을 향한 묵은지의 걸음이 이어졌다.

 

 

행복이란 무엇일까.

앞을 보니까 알겠다.

눈앞을 팍팍 채우는 메시지.

그걸 보니까 제대로 실감이 난다.

아마도 앞으로도 종종, 아니, 어쩌면 제법 자주 이럴지도 모르겠다.

"...."

김장철은 눈길을 들었다.

메시지창.

눈앞을 가득 채운 메시지창이 선명하게 보였다. 당연하다. 방금 떠오른 것이니까. 이쪽이 세운 업적에 의해서.

 

딩동!

 

[당신의 마왕군 수하 일부가 강렬한 맛도리 행복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들이 느끼는 행복감은 모두 당신이 선사한 것입니다.]

[최초의 해피 포인트(Happy Point)가 적립됩니다.]

[해피 포인트 51점이 적립되었습니다.]

 

[현재 당신이 보유 중인 해피 포인트 : 51]

 

'후아.'

진짜였구나, 해피 포인트.

사실은 그동안 긴가민가했다.

해안가 기암절벽에서 바할을 구한 직후, 해피 포인트 메시지를 처음 접했던 때부터였을 것이다.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선뜻 믿음이 가질 않았다. 확인을 해보고 싶었다. 한데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여기 버려진 땅에 사는 놈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전부 행복지수가 개박살이 나 있었으니까.'

다들 주린 배를 움켜쥐고 있기가 기본!

못 먹어서 누렇게 뜬 얼굴이 디폴트!

웃음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매일!

당연히 행복감을 느끼는 놈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해피 포인트를 쌓는 건 택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확인도 할 겸, 감자 농사에 대한 확신도 심어줄 겸해서 추뇨를 만든 건데.'

이 정도 반응이면 대박이다.

덕분에 해피 포인트를 51이나 얻었다.

마왕 크레도스의 능력치 일부를 구매하기에 충분한 포인트였다.

'좋아. 이건 이따가 밤에, 혼자 있을 때 사용해보는 걸로 하고... 일단 지금은....'

김장철은 하급 마족들의 반응부터 살펴보았다.

하나같이 다들 감격해서 울고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다.

감자는 맛있으니까.

감자는 복덩이니까.

감자는 귀여우니까.

농담이냐고?

아니, 진심이다.

만약 누군가가, 중부 안데스 고지의 볼리비아 농부 호날드 곤잘레스 씨(41세, 남, 독신)에게 찾아가 한밤에 볼따구를 짭짭짭 두드려 깨우면서 형님형님 감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냐고 다짜고짜 물어봐도 당연하게 들을 대답일 것이다.

게다가 이들 하급 마족들은?

더할 것이다.

왜냐.

'쫄쫄 굶다가 오랜만에 사람 음식을 먹은 거니까!'

사실 추뇨 자체는 아주 맛있는 음식은 아니긴 하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감자를 동결건조한, 감자 말랭이에 지나지 않는다.

해서 추뇨는 다양한 양념과 함께 사용해야 진가를 드러낸다. 건조된 음식인 만큼, 양념을 라면 면발이 국물 먹듯이 쪽쪽 흡수해서 혓바닥 융털돌기에 다이렉트 패스를 때려넣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양념을 만들 재료가 없었다.

해서 소금만 팍팍 쳤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어흑...! 그흑...!"

"...후, 하업!"

"쫍쫍쫍!"

다들 목이 마를 텐데도, 입안이 엄청 텁텁해졌을 텐데도, 조금이라도 더 맛을 음미하려고 집중하고 있었다. 개중에 성급하게 추뇨를 삼켜 버린 놈들은 제 손가락에 묻은 걸 쪽쪽 빨고 있기도 했다.

각자가 지급받은 추뇨가 고작 두 알에 지나지 않음에도, 한 알의 크기가 방울토마토와 의형제를 맺을 정도밖에 안 됨에도 그러했다.

솔직히 조금 의외였다.

좋아할 거라고 예상하기는 했는데.

이 정도로 눈물까지 흘리며 행복해할 줄은 몰랐다.

"...."

여기 하급 마족들, 그래도 마왕성 근처에 배치된 놈들이라서 나름 잡몹 중에서는 고렙인 놈들인데. 그래서 처음 이 게임을 할 때는 이놈들 하나하나가 전부 공포의 대상이었는데.

그런데 이 기분은 뭘까.

왜 자꾸 묘한 감상이 치미는 건데.

추뇨... 조금 더 만들어 줄 걸 그랬나.

"쯧."

김장철은 불현듯 떠오른 미묘한 감정을 재빨리 털어냈다. 그리고 냉철해진 얼굴로 모두를 향해 물었다.

"다들, 먹을 만한가?"

"...예, 옙, 마왕님!"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감격한 이들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서 기분이 더 이상해졌다.

김장철은 짐짓 턱을 치켜들며 물었다.

"그래서, 아직도 야생종 감자가 의심스러운 놈은?"

"...."

"있나?"

"없습니다아!"

"그래? 대답이 잘 안 들리는데?"

"으어없습니드아아!"

"진심으로?"

"그렇스으읍니드아아!"

하급 마족들이 진심이 담긴 두성을 발사했다. 그들은 실제로 놀람과 경이로움을 함께 느끼고 있었다.

추뇨가 맛있어서?

그것도 맞았다.

이곳에 동원된 하급 마족들 중에서는 거의 한 달을 굶은 이들도 있었다. 제아무리 기아에 단련된 마족이라 해도 충분히 한계를 느낄 수준의 굶주림이었다.

그런 와중에, 말린 감자라 해도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입에 넣게 되었다. 심지어 소금으로 간까지 잘 맞춘 감자였다!

행복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장소에서.

꿈도 꾸어보지 못했던 이 순간에.

무언가 멀쩡한 것을 입에 넣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품지 못하였더랬다. 최소한 음식이라고 불릴 수 있을 정상적인 맛을 느끼면서 배를 채울 수 있을 거라고도 생각 못 하였더랬다.

게다가 배가 은근 불렀다.

작디작은 추뇨였지만, 일단 뱃속에 들어가자 건조음식답게 수분을 빨아들이면서 부피가 팍팍 늘어났다.

덕분에 위장 가득 충만해지는 포만감의 물결! 이 광활한 우주에서 아무 존재 가치도 없을 것만 같던 자신에게 주어진 배부름이라는 생소하고도 반가운 감각!

그뿐만이 아니었다.

'입안이... 얼얼하지가 않아.'

추뇨를 두 알이나 먹었는데 입안이 멀쩡했다.

실로 이상한 일이었다.

전에 배고픔을 못 견뎌서 이 야생종 감자를 캐먹었던 때에는 씹자마자 얼얼한 감각이 입안 가득 퍼졌는데. 그걸 가까스로 참으며 두어 알을 먹은 뒤로는 엄청난 복통에 시달려야 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멀쩡했다.

그렇다.

마왕께서 하셨던 호언장담이, 하나 빠짐없이 사실이었던 것이다. 저분의 아무 의미 없는 것만 같던 감자를 엉망진창으로 말리고 짓밟고 하던 행동들에, 전부 깊은 뜻이 있었던 것이다.

'...마왕님, 최고!'

'마왕님, 역시 능력자셨어....'

'우리 마왕님, 이렇게 보니까 좀 잘생기신 것 같기도?'

추뇨의 성은(?)을 입은 하급 마족 50인. 그들의 김장철을 향한 눈길에 콩깍지 한 겹이 살포시 덧씌워졌다.

김장철은 그런 녀석들의 기색을 놓치지 않았다.

"그래. 너희의 마음은 잘 알겠다. 감자, 썩 나쁘진 않지?"

"그렇습니드아아!"

"그럼 이제부터 너희가 뭘 해야 할까."

"...?"

김장철이 의미심장한 눈웃음을 지었다.

"다들 이 사실을 널리 전해야겠지?"

"...!"

"이제부터 옆집, 앞집, 뒷집, 층간소음 때문에 얼굴 붉히고 지내던 윗집에도 팍팍 소문을 내는 것이다. 야생종 감자를 맛있게, 탈 없이 먹을 방법이 있노라고. 내가 그렇게 해주겠노라고. 그러니 이제부터 야생종 감자를 열심히 캐내어 마왕성으로 가지고 와야 한다고."

"아, 알겠습...."

"목소리."

"알겠습니드아아-!"

"좋아. 성과가 좋은 녀석들에게는 특별히 더 많은 추뇨가 지급될 것이다. 그럼 이만. 해산."

김장철이 손짓했다.

하급 마족들이 상기된 얼굴로 흩어졌다.

그때까지 곁에서 말없이 지켜보던 제피로스가 입을 열었다.

"...다들 걸음이 바쁜 것을 보니, 열심히 소문을 낼 기세로군요."

"그렇겠지."

"혹시 처음부터 다 계산하신 거였습니까?"

"뭐, 대강은."

"이 맛도 말입니까?"

 

...꼬도독!

 

제피로스가 추뇨 한 조각을 야물딱지게 씹으며 물어왔다. 그런 녀석의 표정엔 약간의 당혹감과 의문이 서려 있었다.

"추뇨라는 거,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이런 맛이 날 줄은 몰랐습니다."

"몰랐어?"

"예. 엉망진창으로 흐물거리던 감자를 바할 장군이 짓밟아댈 때는 말이지요."

"기대를 전혀 안 했다는 소리로 들리네."

"바할 장군의 발 냄새는 향긋한 편은 아니니까요."

"야, 그게 다 손맛이야."

"발맛 아닙니까?"

"어쨌든-"

김장철은 콧김을 풍 뿜어냈다.

"덕분에 다들 야생종 감자에 대한 신뢰가 생겼겠지. 소문을 낼 거고. 그거면 돼."

"예. 아마도 소문을 접한 이들이 기대감을 품고서 야생종 감자를 열심히 캐겠지요."

"그리고 마왕성으로 바리바리 싸들고 오겠지."

"그걸 추뇨로 만들어 지급하시려는 겁니까?"

"일부는."

"일부...라시면?"

"전부 다 추뇨로 만들어 버리면 내년엔 뭐 먹고 사냐."

"아, 그럼...."

"짐작했어?"

"예. 일부는 추뇨를 만들어 당장의 식량으로 사용하고, 나머지는 모두 그동안 준비한 밭에 심으시려는 겁니까?"

"그렇지. 바로 그거지."

역시 제피로스는 똘똘해서 말이 잘 통한다. 김장철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심어서, 키우고, 불려야지."

"그리고 그 일부를 다시 추뇨로 만들고, 나머지를 또...."

"맞아. 그게 농사 아니겠냐."

바로 그거다.

그것만 잘되면?

쫄쫄 굶을 걱정은 사라진다.

그것이 바로 김장철의 계획이었다.

한데....

"넌 나한테 뭐, 할 말 없냐?"

"예?"

"뭐, 감격했다거나. 감동을 받았다거나, 다른 하급 마족들처럼 대강 그런 거."

제피로스에게 물었다.

녀석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리고 여전히 특유의 냉랭한 얼굴로 수첩을 꺼내 들었다.

"...마왕력 320년 x월 xx일, 마왕 크레도스, 은근슬쩍 기대하는 얼굴로 감격했다거나 감동 받은 거 없느냐고 물어오시다...."

"엥?"

"...대꾸 안 해드리고 실록에 기록을 이어 나가자, 노골적으로 실망한 기색을 드러내며, '엥?'이라고 반응하셨음...."

"너, 뭐 하나?"

"...보시면 아실 텐데요."

"혹시 내 행동거지를 전부 기록하는 거?"

"예."

"어째서?"

"실록을 통해 마왕의 일거수일투족을 빠짐없이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저의 주요 업무 중의 하나이니까 말입니다."

"주요 업무? 실록? 마왕의 언행을 전부 기록으로 남긴다고?"

"예. 모르셨습니까?"

"...."

몰랐다.

전혀 몰랐다.

김장철은 황당함을 느꼈다.

"그게 뭐야. 혹시 조선왕조실록이라도 쓰세요?"

"조선왕조실록이 뭡니까?"

"...."

"일단 제가 집필하는 실록의 이름은 마왕통치실록입니다만."

"쯧. 뻔하고 지루한 네이밍이구만."

"그리고 이 실록의 내용은 영원히 박제되어 버려진 땅의 기록소에 보관됩니다. 누구나 열람 가능한 형태로 말이지요."

"...."

"...라는 말을 들은 마왕, 별로 안 어울리는 멋있는 표정을 유지하려고 애를 쓰는 게 전부 티가 났음...."

"그런 거 기록하지 마!"

"...라고 빼액 외치셨음...."

"...."

"빡친 듯이 눈을 질끈 감으심...."

"...."

김장철은 묵언 수행을 하는 먹먹한 심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반면, 제피로스는 내심 흐뭇하게 웃었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했다. 아까, 처음 추뇨를 먹었을 땐 뜻밖에도 행복했다고. 하여 감사했노라고.

그날부터였다.

마왕성, 차빈 데 우안타르.

굶주림과 절망만이 가득하던 이 땅에서, 처음으로 희망을 엿본 마족들이 자발적으로 야생종 감자를 싸그리 채취하기 시작하였다.

 

그렇기에 모두는 몰랐다.

자신들의 감자를 채취하는 모습이, 역심을 품은 마왕군 1성주 사르툴의 정찰귀에게 염탐되고 있음을.

12화. 우렁각시를 갈갈갈 (1)

 

"위대하신 1성주 사르툴 님께 영광을. 마왕성으로 파견한 정찰귀로부터의 보고를 올려드립니다."

"...."

어둑한 실내.

검은 해골로 뒤덮인 의자.

그 위에 실체 없는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다만, 그것은 단순한 그림자가 아니었다. 일렁이는 그림자 속에서 한 쌍의 눈길이 가느다랗게 뜨였다. 그리고 방금 자신의 앞에 몸을 낮춘 부관을 굽어보았다.

"...."

그림자로 자신을 감싼 마왕군의 1성주, 사르툴은 생각했다.

그래.

마왕성 차빈 데 우안타르.

그곳으로 정찰귀를 보냈지.

마왕 크레도스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서. 코앞에 두었던 인간계 침공을 돌연 중지시킨 그의 의중을 간파하기 위하여.

그 사이, 부관의 보고가 이어졌다.

"우선, 마왕 크레도스는 정말로 출정과 관련된 모든 활동을 중단하였습니다. 또한, 그 결정에 반대하는 사천왕을 제압하였으며, 그중에서도 자신과 가장 날카롭게 대립각을 세우며 나선 아수라트를 본보기로 말뚝에 묶었습니다."

"...."

형벌이로군.

가엾은 아수라트.

크레도스는 잔혹한 성품의 소유자인 만큼, 좀처럼 아수라트를 용서하지 않겠지. 어쩌면 아수라트는 시체가 되어서야 자신을 묶은 말뚝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하지만 사르툴은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버려진 땅에 죽음이 전파되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그만큼 망자가 늘어날 테니까. 떠도는 망자는 결국 자신의 군단에 편입될 터이니까.

1성주는 흐뭇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이어지는 보고를 들었다.

"또한, 크레도스는 나머지 사천왕과 일부 마족들을 동원하여 '퇴비'라는 것을 정성껏 만들어 쌓아두었고, 독초로 알려진 감자를 캐내어 안전하게 먹을 방법을 연구하였다는 보고입니다."

"...뭣?"

그게 무슨 소리일까.

퇴비?

감자를 안전하게 먹어?

사르툴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게,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주군이시여. 다수의 정찰귀가 목격한 내용입니다."

"...계속하도록."

"예. 또한, 최근에는 크레도스의 명령을 받은 하급 마족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야생종 감자를 채집하고 있음이 목격되었습니다. 이는 분명...."

"재배를 하려는 것이겠지."

크레도스 자신이 선포한 바와 같이.

정말로 농사라는 것을 시도하기 위하여.

"...그래서?"

"가장 최근의 염탐에서 관찰된 바에 따르자면, 이미 상당한 양의 감자가 마왕성에 모이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크레도스는 감자를 심을 밭이라는 것을 조성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는 보고입니다. 이상입니다."

"흐음."

1성주 사르툴은 난감함을 느꼈다.

'설마 크레도스의 시도가 정말로 진척을 보일 줄이야.'

문득, 얼마 전의 일이 떠올랐다.

인간계 침공.

그 대업을 앞두고서, 마왕군의 본대에 합류하기 위하여, 휘하 1성 군단의 준비 상태를 최종적으로 점검하던 무렵이었던가.

갑작스러운 급보가 날아왔더랬다.

인간계 침공이 중지되었다고.

아니, 전면 취소되었다고.

마왕 크레도스가 이상한 선포를 하였노라고 말이다.

'...농사라니.'

지금 생각해도 황당하기만 했다.

농사를 짓겠다는 마왕 크레도스의 선포는 당시에도 믿기 어려웠다. 그저 핑계로만 느껴졌다. 막상 침공을 실행할 상황이 되자 크레도스가 겁을 먹은 것이리라고. 하여 농사 따위의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둘러대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당시의 자신은....

'한편으로는 기뻤지.'

솔직한 심정이었다.

애초에 인간계 침공이 탐탁지만은 않았던 자신이었다. 하지만 마왕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던 탓에 침공군 합류를 준비하던 자신이기도 했다.

한데 침공이 취소되었다니.

그 소식이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버려진 땅에 주저앉아서 말라 죽어갈수록... 그렇게 죽음이 퍼져 나가 망자가 늘어날수록... 나의 군단만큼은 더더욱 강성해질 터이니까.'

사르툴의 눈길이 가늘어졌다.

자신의 군단은 모두 망자로 구성되어 있다.

누군가는 영혼만 남은 채로.

또 누군가는 육신만 남아서.

윤회의 축복을 박탈당한 채 끝없이 봉사한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군단이 지닌 특성이었다.

그래서였다.

자신이 마왕성과 다른 성주들 사이의 소식을 차단한 것은. 고지대에 우뚝 선 마왕성 직할령을 호위하듯, 혹은 포위하듯 감싸고 있는 자신의 지리적 특성을 이용한 것은.

"...."

덕분에 2성주나 3성주, 4성주는 마왕의 인간계 침공 중단 결정과 농사 선포를 아직 까맣게 모르고 있겠지.

그래야 한다.

이 상황이 최대한 유지되어야 한다.

겁쟁이 크레도스가 침공을 주저하는 채로. 나머지 성주들이 이 상황을 모르는 채로. 모두가 엉거주춤하게 헛된 시간을 보내야 한다.

그러면....

'그동안 더 많은 마족이 굶어 죽을 테고.'

마왕군의 본대에서, 나머지 성주들의 군단에서, 굶어 죽는 마족이 속출할 것이다. 그렇게 죽은 마족의 영혼은 이 버려진 땅을 떠도는 망령이 될 것이다.

그때 자신이 그 망령들을 불러들이면 된다.

그것이 자신의 특기니까.

망령들을 휘하의 군단에 편입시키는 것이다. 그만큼 자신의 세력은 강성해질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 기세가 마왕군의 본대를 넘어설 것이다. 일찌감치 체념하였던 마왕의 권좌를, 다시금 넘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확신하였는데.

가능성이 있노라 자신하였는데.

그런데....

'설마, 크레도스의 농사 선언이 허풍이 아니었을 줄이야.'

이건 정말로 예상 못 했던 상황이었다.

그저 변명이라고 치부했던 농사 선언.

그걸 크레도스가 정말로 실행할 줄은 몰랐다. 심지어 성과를 보이기까지 할 줄은 더더욱 몰랐다.

1성주 사르툴은 전에 없던 초조함을 느꼈다.

'이대로는 안 된다.'

크레도스의 농사가 성공하면 모든 것이 어그러진다. 자신의 계획 또한 무너진다. 그건 싫다. 여기까지 온 이상, 끝을 보아야 한다.

"...이제부터 잘 듣고 실행하도록."

깊은 고민의 결과.

사르툴의 눈길이 부관을 향하였다. 그의 입으로부터, 마왕성의 감자 농사를 망가뜨릴 치명적인 명령이 내뱉어졌다.

그리고 잠시 후, 1성주의 명령을 받은 부관이 수하들을 이끌고서 버려진 땅의 북서쪽으로 향하였다.

마왕성과 감자밭이 있는 방향이었다.

 

 

사실 버려진 땅은 북서쪽을 향해 뻗은, 존나 큰 면봉 대가리처럼 생겼다.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그렇다.

그것이 엄연한 사실이니까.

지도만 슬쩍 봐도 알 수 있는 팩트니까.

"...라지만, 어째서 다른 성주들한테서 답장이 없는 거냐?"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연락병이 제대로 출발한 건 맞고?"

"그건 확실합니다."

"그럼 이상한데. 쓰읍."

김장철은 쓰려지는 입맛을 다셨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 최초의 추뇨를 만들고 시식회(?)를 성공리에 마친 직후였다. 이곳 마왕성의 소식을 버려진 땅의 다른 성주들에게 전달하는 연락병을 보냈다.

자신의 명령서와 함께였다.

'여기 밥 있다고. 추뇨 받으러 올 놈들 넉넉히 보내라고 일러뒀는데.'

다른 성주들이 다스리는 지역의 마족들을 위해서였다.

"쯧. 큰일이다. 큰일이야. 왜 답장이 안 오는 거지?"

"걱정이 되시는 겁니까?"

"당연하지."

제피로스의 물음에 김장철은 콧김을 풍 내뿜었다.

"인간계 침공이 갑자기 중단되는 바람에 다들 당황했을 거 아니냐. 비축한 식량도 슬슬 바닥을 드러낼 거고."

"확실히 그렇겠지요."

"그렇지. 그러니까 여기서 추뇨라도 만들어서 보내줘야지."

"우리가 농사를 마치고 첫 수확을 할 때까지 버티게 해 줄 식량인 겁니까?"

"맞아. 바로 그거."

역시 제피로스는 똘똘해서 눈치가 빠르다.

김장철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기대하던 침공이 중단돼서 불만일 테니까. 당장 배가 고플 테니까. 그런데 먹을 것도 없고. 그러면 불만이 터지는 거거든."

"하지만 굳이 여기서 만든 추뇨를 힘들게 보낼 필요가 있을까요?"

"무슨 뜻이야?"

"그냥 각 지방에 추뇨 제조법을 알려주면 되는 것 아닙니까?"

"아니. 그건 불가능해."

"어째서입니까?"

"다른 지방은 추뇨를 만들 환경이 안 되니까."

사실이었다.

추뇨는 이곳 마왕성이나 안데스 고지대와 같은, 지랄맞은 일교차와 건조한 기후를 지닌 곳에서만 만들 수 있다.

버려진 땅의 다른 지역에서는? 불가능하다. 기후가 다르니까. 아마 야생종 감자마저도 찾아보기 어렵겠지.

"후우. 그런데 왜들 답장이 안 오냐고...."

김장철은 동남쪽을 바라보았다. 문득, 게임을 하면서 수없이 보았던 버려진 땅의 지도가 떠올랐다.

북서를 향해 뻗은 거대한 면봉 대가리.

그 북서쪽 고지대, 면봉 끄트머리에 마왕성이 있었다.

반면, 마왕성 동남쪽은?

온통 깎아지른 절벽이 마왕성을 둘러싸고 있다. 그 절벽을 통과하지 않고는 버려진 땅의 다른 지역으로 갈 수가 없다.

더없이 험난한 절벽 지대.

망자의 단애.

그곳이 바로 1성주인 망자의 군주, 사르툴의 구역이었다.

'쓰읍. 혹시 사르툴 그놈이 내 연락병들 다 짜른 거 아냐?'

잠깐이지만 슬쩍 의심도 들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며칠만 더 기다려보면 답장이 오겠지.'

일단은 기다려보자.

당장은 더 급한 일이 있으니까.

'마침 감자 채집도 마무리가 되기도 했고.'

성공적인 추뇨 시식회 덕분이었다.

마왕 직할령의 하급 마족 대부분이 자발적으로 움직여 주었다. 다들 혈안이 되어서 야생종 감자를 채집했다. 그리고 마왕성으로 바리바리 싸들고 왔다.

덕분에 마왕성 창고에 파종을 앞둔 야생종 씨감자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라는 덕분에 할 일도 태산이겠구만."

"예?"

"이제 퇴비도 다 묵혀냈고. 심을 씨감자도 확보됐고. 그러니까 하는 소리야."

"그냥... 감자를 심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당연히 아니지, 이 사람아."

김장철의 입가에 쓴웃음이 맺혔다.

"농사가 장난이야? 퇴비는 왜 만들었겠냐. 저거 다 뿌려야 해요. 그렇다고 뿌리면 끝나냐? 아니지. 흙이랑 섞어야지. 그런데 흙이 그냥 섞여? 역시나 아니지. 힘 써가면서 땅 자체를 죄다 갈아엎어야지. 그런데 우리가 농기계가 있냐, 소가 있냐. 그럼 누가 퇴비 뿌리고 땅을 갈아야 할까?"

"...다 함께 직접 해야 하는 겁니까?"

"그렇지. 그런데 하급 마족들? 상태를 보니까 좀 글렀어요. 죄다 굶어가지고 애들이 아주 그냥 비리비리해. 밭 갈라고 시켰다간 반나절 만에 시체부터 옮길 판이야. 안 그러냐?"

"흠, 확실히 다들 쇠약한 상태이긴 합니다."

"그렇지? 그래서 큰일이다. 일손이 너무 모자라."

사실이었다.

다들 비리비리해서 일손은 한정적인데, 밭은 너무나 넓었다. 솔직히 이걸 언제 다 하나 싶었다.

'가뜩이나 시간도 없는데.'

김장철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시간 싸움이다.

버려진 땅의 마족들이 언제까지고 첫 수확을 기다려 주진 않을 것이다. 다들 배가 고플 테니까.

'이럴 때 경운기라도 몇 대 있으면 밭갈이 뚝딱인 건데.'

아쉬웠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겠다.

"뭐, 아쉬운 대로 직접 해야지. 사천왕도 동원하고. 여차하면 너도."

"...제가요?"

"어."

"왜요?"

"까라면 까야 하니까?"

"...라고 폭력적이며 불합리한 눈빛으로 말씀하셨음...."

"이럴 때만 그런 거 기록하지 말라고...."

"죄송합니다. 주요 업무라서."

"쓰읍. 아닌 거 같은데. 핑계인 거 같은데."

"라고 의심의 눈길을 드러내셨음...."

"...."

하아.

말을 말자.

그럴 바엔 며칠 전에 얻었던 해피 포인트를 어느 능력치에 투자할지나 더 고민해보자.

'...라지만 아마도, 체력에 투자하는 편이 좋겠지.'

이제부터 밭을 갈려면 체력이 엄청나게 필요할 테니까. 게다가 갈아야 할 밭의 면적이 어마어마하니까.

아마도 녹초가 될 테니까.

"...."

하이고.

이 넓은 땅에 언제 퇴비 다 뿌리냐.

밭은 또 언제 다 파뒤집고 갈아엎냐.

생각할수록 솔직히 좀 막막해졌다.

하지만 별수 없다.

할 일은 해야 하는 법이니까.

'...그럼 일단, 오늘은 이만 쉴까.'

내일부터는 땀을 많이 흘려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 체력을 아껴두는 것 또한 중요하겠지.

나름의 각오를 다진 김장철은 제피로스를 이끌고 마왕성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잠시 후.

 

...스르륵.

 

어느새 저물기 시작한 노을 사이로.

불길한 그림자가 감자밭 곳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1성주, 사르툴의 부관 피카미르와 그의 수하들이었다.

"...."

피카미르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쪽에 대규모로 쌓인 엄청난 양의 퇴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 너머에 광활하게 펼쳐진, 밭으로 쓰일 땅과 함께였다.

그걸 보는 순간.

피카미르는 주군인 1성주가 내린 명령을 떠올렸다.

'크레도스가 준비한 모든 것을 망치라 명하셨지.'

그렇다면 자신이 할 일은 명확하다.

크레도스가 준비한 모든 것.

막대하게 쌓아둔 퇴비.

그리고 밭으로 쓰일 땅.

둘 모두를 한꺼번에 망치려면?

"다들, 잘 들어라."

그가 수하들을 향해 사악하게 속삭였다.

"이제부터 우리는 이곳을 파괴한다.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은 동이 트기까지의 단 하룻밤이다."

"...그럼,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간단하다."

수하의 물음.

피카미르가 명했다.

"저들이 기껏 만들어둔 퇴비라는 것을 사용하지도 못하도록 골고루 흩뿌려버려라. 그리고 밭으로 쓰일 땅은... 모조리, 철저하게 파뒤집고 갈아엎어 버리는 것이다."

피카미르의 입가에 서린 사악한 웃음이 짙어졌다.

13화. 우렁각시를 갈갈갈 (2)

 

농사는 중단되어야 한다.

이곳 버려진 땅은 저주받은 황량한 대지.

이따위 환경에서 농사 같은 게 성공할 리가 없다.

그런 건 인간들이나 하는 짓이니까.

우리 마족에겐 어울리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모든 것을 철저하게 부숴 버려야 한다.

그리고 이 땅의 모든 마족이 죽어 우리와 같은 몰골로 나락에 떨어져야 한다. 윤회의 축복을 박탈당한 채로, 끝없이 지상계를 떠도는 망령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내가 조금은 덜 불운해질 테니까.

그러니까 농사는 망해야 한다.

반드시!

마왕군 1성주의 심복, 피카미르는 굳은 눈길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감자밭으로 쓰이기 위해 마련된 드넓은 땅.

한쪽에 어마어마하게 쌓여 있는 퇴비.

덕분에 코가 아릴 지경이었다.

"...."

순간, 피카미르는 생각했다.

나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는데.

그래서 육신을 잃은 상태인데.

당연히 코를 지니고 있지도 않은데.

한데 어째서 이 쾨쾨한 냄새 때문에 괴로움을 느끼는 걸까.

"저기, 장군?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뜻밖에도 자신이 냄새를 '맡고 있다' 라는 사실에 피카미르가 약간의 당혹감을 느끼려던 무렵이었다. 때마침, 그를 따르던 수하 하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정말로 이상하다는 걸 잘 알지만... 그게... 냄새가 나는 것 같습니다."

"...."

피카미르는 흠칫했다.

그리고 말없이 수하를 쳐다보았다.

'너도?'라는 눈빛으로.

오랜 시간 그를 따랐던 수하 역시 그의 눈빛이 뜻하는 바를 알아채었다.

"혹시 장군께서도 그러십니까?"

"...으음, 그렇다. 놀랍고 황당하지만."

"솔직히, 너무 끔찍합니다."

"그래. 있지도 않은 코가 떨어져 나갈 것 같군."

"마치 제 온몸에 냄새가 들러붙는 듯한 기분입니다."

"맞습니다, 장군. 큰일입니다. 우린 목욕도 못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돌아갔다가, 냄새가 완전히 배어 버려서 따돌림이라도 당하면 어떡합니까?"

"...쯧!"

피카미르가 눈살을 찌푸리며 사나운 눈길을 보냈다.

움찔한 수하들이 입을 다물었다.

피카미르가 말했다.

"다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나도 안다. 끔찍하지. 지독해. 이렇게 악랄한 냄새는 나도 살아서도, 죽어서도 처음이야."

솔직한 진심이었다.

그는 눈꼬리가 파르르 떨리는 심정으로 지독한 악취의 근원, 퇴비 무더기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우리에겐 사명이 있다."

피카미르의 목소리가 비장해졌다.

"주군께서 명하셨다. 이 땅에서 행해지는, 마왕 크레도스가 시도하려는 농사를 좌절시켜야 한다고. 그가 농사를 위해 일군 모든 것을 파괴해야 한다고."

"...."

"한데 너희의 지금 모습을 보아라. 너희는 고작 이 정도 악취 때문에 그 숭고한 사명을 잊었단 말인가? 그것이 너희가 지녔노라 자부하던 충성과 긍지의 전부란 말이더냐? 아니다. 우리는 그래서는 아니 된다. 우리는 반드시... 잠깐만... 오에엑...."

"...."

"어윽, 씨, 냄새... 오애애액...."

"...."

"...쿨룩! 퉥퉤! 아무튼, 우리는 이제부터 주군께 받은 명을 실행한다. 그러니 더는 징징거리지 말도록."

"알겠습니다, 장군. 그럼 뭐부터 하면 될까요?"

"저 지독한 퇴비라는 것부터."

헛구역질을 간신히 가라앉힌 피카미르가 퇴비를 가리켰다.

"이토록 엄청난 악취로 미루어 저 퇴비라는 것이 지독한 독성을 지니고 있는 듯하군."

"그럼 대체... 뭣에 쓰려고 만든 걸까요?"

"아마도 불순한 의도로 농작물을 노리고서 접근하는 이들을 퇴치하기 위한 무기로 개발한 거겠지."

"...과연!"

"지당한 말씀이십니다."

피카미르의 수하들이 탄복했다.

듣고 보니 정말로 그럴듯했다.

이토록 엄청나게 지독한 냄새를 지닌 무더기라니. 적을 퇴치하는 용도 외의 쓰임새를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

물론 개중에는 색다른(?) 추측을 하는 수하도 있긴 했지만.

"...저기, 그런데 말입니다. 장군? 제 생각에는 어쩌면 퇴비 이거, 밭에 뿌리기 위해서 만든 게 아닐까요?"

"뭣?"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어쩌면 퇴비에 포함된 각종 영양소 같은 것들이 식물이 자라나는 데에 쓰이는 양분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

"죄, 죄송합니다.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와하하핫! 쓸데없고 터무니없는 의견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재미나는 상상이었다."

"그, 그렇습니까...."

"그렇지. 실로 기발한 상상력이로군. 그대는 장차 이야기꾼의 길을 걷기에도 재능이 충분하겠어."

"감사합니다, 장군."

"괜찮다. 자책하지 말도록. 가까이에 있는 것만으로도 끔찍해지는 이런 것을 양분으로 삼아 자라나는 식물이라니. 지옥에나 어울릴 법한 이야기지만, 그래도 참신한 공상이긴 했으니까."

"...."

"하지만 이제부터는 일을 해야 할 때다. 다들 퇴비부터 처리하자."

"어떻게 처리하면 되겠습니까?"

"밭으로 쓰일 모든 곳에 뿌린다."

피카미르의 목소리에 스산한 독기가 스몄다.

그가 인정사정없는 말투로 짓씹듯 명했다.

"침입자를 퇴치하기 위해 만든 비장의 무기가, 자신이 만든 밭에 모조리 뿌려져 버린 상황을 상상해 보는 거다. 어떠한가. 크레도스가 느낄 분노와 상실감이."

"엄청날 것 같습니다."

"그렇지? 실행하도록."

"예!"

도합 300구의 특공조 망령이 퇴비 무더기에 달라붙었다. 각자 망자의 마나를 일으켜 물리력을 행사하였다. 퇴비 무더기를 한 아름씩 끌어안고 집어들었다.

곧이어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헛구역질 소리는 필연적인 옵션이었다.

"...오, 오애애액-"

"구웨에엑...."

"오옥, 오오옥, 오오오옹오옥...."

"끄르르르르... 뿌다아알갸-!"

그러나 모두는 참았다.

주군이 내린 사명을 위하여.

1성 군단의 희망찬 미래를 위해서.

맹렬하게 치밀어 오르는 헛구역질을 애써 억눌렀다.

피카미르가 장렬하게 외쳤다.

"뿌려라! 최대한 골고루! 넓게! 인정사정없이 철저하게!"

"...!"

모두가 묵언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움직였다.

넘치는 악의!

충만한 적개심!

터질 듯한 증오!

모든 종류의 사나운 감정을 싣고서, 가을철 할머니집 메주처럼 꼬실꼬실하게 묵은 퇴비가 드넓은 대지에 힘차게 뿌려졌다. 가끔씩 헛구역질을 참지 못해 실제로 무언가를 게워내는 소리는 덤이었다.

"다들 참아라...!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퇴비를 다 뿌렸을 무렵, 피카미르가 만신창이가 된 온몸을 털어내며 명했다.

"이제는 밭이다. 밭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다."

"퇴비만으로는... 부족했던 겁니까?"

"당연하지!"

피카미르의 눈동자에 귀신 같은 퍼런 불길이 피어났다.

"지독한 퇴비를 밭에 뿌린 걸로 끝일까? 아니다. 그래선 안 된다. 우리는 그저 밭의 겉면에만 퇴비를 뿌린 것일 뿐! 생각을 해보거라. 만약, 크레도스가 밭의 위쪽 흙만 퇴비와 함께 걷어내어 버린다면 말이다.... 우리의 이 피와 땀과 노력이 모두 헛수고로 돌아갈 것이 아니겠느냐."

"...오오, 과연."

"장군님다운 혜안이십니다."

피카미르의 말에 모두는 다시금 탄복했다.

역시나 장군의 말에 설득력이 있었다.

아마도 침입자를 퇴치하기 위해 만든 것일 독한 퇴비. 이걸 밭에 뿌리기만 한다고 해서 끝일까? 그 밭이 망하는 것일까?

아니.

뿌린 것은 걷어내기만 하면 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제부터 밭을 헤집어 버리는 것이다!"

"저 독한 퇴비가 흙 속에 아주 철저하게 깃들어 버리도록 말입니까?"

"그렇지. 바로 그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제아무리 크레도스라도 이 땅을 살려내지 못하겠지. 이곳을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농사 또한 심각한 차질을 빚게 될 것이고 말이다."

지독한 퇴비가 깃들어 버린 땅.

깊은 곳까지 철저하게 오염된 땅.

이런 곳에서 어떻게 농사를 짓겠는가.

피카미르는 자신의 계략에 매우 흡족해졌다.

그리고 명령했다.

"이제는 다들 움직여라. 시간이 없다. 한 걸음이라도 더 움직여서 땅을 헤집어라. 갈아엎어라. 한 뼘의 남겨두는 공간도 없이. 철저하게 말이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모두의 사기가 드높이 치솟았다.

이미 퇴비를 뿌리며 버린(?) 몸이었다.

이제는 더 사릴 것도 없었다.

300구의 망령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땅속으로 스르륵 스며들었다.

그 상태에서 전신에 마나를 돌렸다. 순간적인 물리력을 갖추며 몸을 회전시켰다. 그리고 밭을 갈며 이동했다.

 

...콰콰콰콰콱!

 

지표면에서부터 약 1미터 깊이까지의 흙을 믹서기처럼 골고루 섞어 버리는 생체, 아니, 망령 드릴!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헉, 허억!"

"히, 힘들어! 이젠... 한계입니다, 장군!"

"참아라. 견디고 버텨라. 우리의 숭고한 사명을 떠올려라!"

"...우오오오옷!"

특공조 300구의 망령들이 다시금 의지를 불태웠다. 마지막 남은 체력과 마나를 모두 쥐어짜내었다. 흙 속으로 파고들고, 마나를 돌리고, 몸을 회전시키며, 전진했다.

더욱 빠르게.

더욱 강렬하게.

더더욱 치열하게!

모두의 마력이 급격히 고갈되었다.

그러나 아무도 멈추지 않았다.

숭고한 사명을 위하여.

군단의 미래를 위해서.

마지막 한 톨의 마나까지 모조리 소진했다.

그리고 장렬하게 승천하기 시작하였다.

"...자, 장군... 저는... 여기까지입니다...."

"저도... 이제는...."

"그동안 장군을 모실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반짝.

 

모든 생명력을 불사른 하루살이처럼.

마지막 심지를 불태운 최후의 촛불처럼.

특공조의 망령들이 하나둘씩 연기처럼 흩어졌다. 하늘로 올라갔다. 한계를 넘어선 지나친 혹사 때문에 강제로 승천을 당한 것이었다.

피카미르는 충직한 부하들이 떠나는 숭고한 모습을 차례차례 눈에 담았다. 그의 눈가에 한 방울의 눈물이 맺혔다. 자신의 사명을 다하고서 떠나는 이들에 대한 헌사는 남자의 눈물로 다만 충분할 뿐!

"...."

마침내 모든 부하를 떠나보내고 홀로 남은 피카미르는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희미하게 밝아오는 동쪽 하늘.

그 아래, 엉망진창으로 갈아엎어진 드넓은 대지가 보였다. 그 모든 곳에서 깊게 배어 올라오는 쾨쾨한 퇴비 냄새는 덤이었다.

"...."

나의 충직한 수하들이여.

아니, 진정한 용사들이여.

그대들의 희생은 헛되지 않았노라.

그러니 염치없게 살아남은 나는, 이제부터 우리가 행한 임무의 결과를 두 눈으로 지켜보며, 후세의 모든 망령에게 전하겠노라.

그대들의 희생으로 쌓아 올린 업적의 탑이 얼마나 빛이 났는지를. 그 얼마나 원대한 결과를 이끌어냈는지를. 내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고, 주군께 전하여, 그대들의 이름을 더없이 드높여 주겠노라.

 

...스르륵.

 

피카미르는 떠나간 부하들에 대한 슬픔과 자랑스러움을 동시에 느끼며 바위그늘 속으로 스며들어 숨었다.

그리고 기다렸다.

아침이 더 밝기를. 마왕 크레도스가 이곳으로 오기를. 그리하여 엉망이 된 자신의 밭을 목도하고는 비통한 분노로 절규하기를.

기대했다.

염원했다.

덕분에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기다리던 순간을 맞이했다.

절대로 상상하지 못했던 형태로.

전혀 대비하지 못한 후방으로부터.

 

덥석!

 

무언가, 엄청난 손아귀가, 무지막지한 힘으로, 피카미르의 뒷덜미를 콱, 붙잡아 왔다.

피카미르의 눈이 경악으로 한껏 벌어졌다.

그 순간이었다.

"웬 우렁각시가 요기 숨어있네에?"

"...!"

이쪽의 얼굴 옆에 나란히 스윽 나오는 옆얼굴. 꿈에서 봐도 엄마부터 찾고 싶어질 더러운 인상. 심지어 이쪽을 째릿 쳐다보는 살벌한 곁눈질까지!

'마왕... 크레...도스...?'

확실했다.

그걸 깨닫는 순간.

...오싹!

소름 한 바가지가 피카미르의 어깨 위에서 자비 없는 트월킹을 추기 시작했다.

14화. 우렁각시를 갈갈갈 (3)

 

...오싹!

소름이 확 돋았다.

차가운 물을 덮어쓴 기분.

삽시간에 치미는 당혹스러움.

'어, 어떻...게?'

피카미르는 경악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 자신의 뒷덜미를 움켜쥐고 있는 손아귀. 이쪽의 어깨 위로 스윽 내민 머리통. 덕분에 부담스러울 정도로 가까이에서 직관(?)하게 된 옆통수.

분명 마왕 크레도스였다.

그래서 더 이해가 안 됐다.

'나는... 기척을 죽이고서 완벽하게 숨어 있었는데... 어떻게?'

자신은 육신이 없는 유령이다.

마나의 힘을 덧씌워야만 한시적으로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존재다. 덕분에 작정하고 기척을 숨기면? 어지간한 이들은 자신의 기척은 물론이고, 존재감조차 알아차릴 수가 없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한 번에... 날 찾아냈어....'

이쪽의 기척을 느낀 걸까.

거짓말.

불가능하다.

제아무리 마왕이라도 그렇다.

'정말로 대체... 어떻게?'

피카미르는 자신의 멘탈이 실시간으로 쑴펑쑴펑 증발됨을 느끼며 마왕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마왕, 김장철도 그를 쳐다보았다.

"안녕?"

"...!"

더없이 흔들리는 피카미르의 눈동자.

김장철이 맑디맑게 생긋 웃었다.

"지금 내가 널 어떻게 잡았는지 궁금하지? 이해가 막 안 되고 그렇지?"

"...!"

"간단해."

"...?"

"내가 만든 퇴비 냄새가 이렇게 풀풀 집중적으로 나는데, 기척이고 뭐고 따로 감지할 필요가 있었겠냐?"

"...!"

피카미르의 가슴이 다시금 철렁.

김장철은 놈의 목덜미를 더욱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리고 새삼스럽게 떠올렸다.

조금 전에 자신이 느꼈던 기쁨과 위기감을.

'처음에는... 어이가 없으면서도 기뻤지.'

1분 전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은 막대한 중압감을 느끼며 감자밭으로 나왔더랬다. 이른 아침부터 각오도 다졌더랬다.

오늘부터 밭갈이를 시작할 예정인 까닭이었다.

잘해보자고.

힘들어도 꼼꼼히 하자고.

하급 마족들을 무리하지 않을 정도로만 굴리면서 자신이 최대한 움직이며 커버를 해보자고.

스스로를 향해 다짐했었다.

그런데 웬걸.

밭이 싹 달라져 있었다.

너무나도 꼼꼼하게 뿌려진 퇴비! 동네 지렁이와 두더지 자치회에서도 기립박수를 받을 정도로 완벽하게 갈아엎어진 밭!

그야말로 자신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던 감자밭의 준비 상태였다. 그게 갑자기, 현실이 되어 버린 상황을 목격하고 말았다.

말문이 막혔다.

솔직히 기뻤다.

공짜는 착하니까.

공짜는 맛있으니까.

공짜는 훌륭하니까.

그거만 밝히다가 머리가 벗겨져도 상관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공짜니까!

행복했다. 더할 나위 없이 즐거웠다. 어린애도 아닌데 산타 할아버지한테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위기감이 느껴졌다.

'누구지?'

가슴 가득 들어찬 기쁨의 크기만큼 확 느껴진 위기감과 의심. 그걸 자각한 순간, 주위를 휙휙 둘러보았던가.

'하룻밤 사이에 누군가가 밭을 갈았다. 공짜로? 우렁각시라서? 아니. 세상은 동화가 아니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 분명 누군가가 갈았는데. 그게 우리 애들일까? 아니. 시키지도 않은 일을 이렇게 정성껏 할 놈은 우리 애들 중에는 없다. 사천왕은 더더욱 아니고. 딱히 흙투성이가 됐거나 피곤해 보이는 놈도 없어. 그렇다면 이건 분명 외부인이 벌인 짓이다.'

외부인.

거기서부터 착착 물살을 탔던 추리.

'외부인이라. 어디? 가장 가까운 곳은 1성주의 구역. 여기서 제일 가깝지. 게다가 1성 군단은 전부 언데드와 유령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래. 놈들이라면 기척 없이 와서 일을 벌이는 게 가능하지. 어떻게 밭을 갈아엎은 걸까. 유령화 상태에서 땅에 스며서 물리력을 행사하면 되나? 그랬겠지. 그런데 왜? 호의로? 날 도우려고? 아니. 돕기 위한 것이었다면 이런 식은 아니었을 텐데.'

몰래 와서 돕고 간다?

공짜로?

선의를 베푼다고?

심지어 마왕군 사이에서?

말도 안 된다.

세상에 그런 일은 없다. 불가능하다. 차라리 점박이 하이에나가 정장 입고 출근해서 탕비실 맥심 커피가 떨어졌다며 투덜거리는 일이 더 현실성 충만할 것 같다.

'그러니까 이거, 호의가 아니야. 해코지를 하려는 거였겠지. 그런데 이놈들, 농사에 대해 아예 몰랐던 것 같군. 딴에는 퇴비를 죄다 뿌리고 밭을 갈아엎으면 농사에 방해가 된다고 여겼던 건가. 아마 그랬던 거 같고. 그런데 해코지를 위해서 이런 짓을 했으면? 그냥 얌전하게 돌아가진 않았겠지. 분명 내 반응을 확인하려고 숨어 있겠지. 날 엿보기 위해서. 멀지 않은 곳에.'

멀지 않은 곳.

거기까지 결론을 도출한 것이 20초쯤 전이었다. 그렇게 일단 결론을 뽑아내자, 공짜 밭갈이를 해준 우렁각시(?)를 찾는 일은 순식간이었다.

"너는 말이다. 내가 셀프로 만든 퇴비 냄새를 못 맡을 거라고 생각한 건가?"

"...!"

"어휴. 냄새야. 아주 뱄네, 뱄어. 얼마나 열심히 뿌려댔으면. 쯧쯧."

"...크, 크읏!"

비로소 피카미르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그리고 전신의 마나를 흐트러뜨렸다. 몸의 형태를 흐물흐물하게 바꾸었다.

그만이 지니고 있는 특수한 기술.

도주에 최적화된 은밀한 비기.

전신 유체화를 사용했다.

 

...샤스르륵!

 

피카미르의 형태가 순식간에 흐릿해졌다. 부서져 흘러내리는 모래처럼, 혹은 태풍주의보가 내려진 날에 내뿜어진 담배 연기처럼.

단숨에 흩어졌다.

김장철의 손아귀를 벗어났다.

피카미르는 내심 환호했다.

'됐다!'

어서 주군께 돌아가 보고를!

밭을 망가뜨리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최후의 순간에 덜미를 잡혔노라고. 정체가 발각되었노라고. 마왕에게 주군의 의도를 간파할 빌미를 주게 되었노라고.

보고를 해야 한다.

보고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희망(?)은 순식간에 날아가고 말았다. 난데없이 안면에 꽂힌, 짜릿한 펀치와 함께였다.

"썬더 펀치-!"

 

뿌카학!

 

"...!"

김장철의 주먹이 작렬했다.

피카미르의 얼굴이 와드득 뭉개졌다. 바닥에 처박혔다.

"...크! 커허억!"

단 한 방.

주먹질 한 방에 정신이 멍해졌다.

반대로 몸은 감전이라도 된 듯이 저릿저릿해졌다. 아니, 실제로도 저릿거렸다. 덕분에 유체화가 풀려 버리고 말았을 정도로.

"어, 어떻...?"

어떻게?

대체 어떻게?

피카미르는 당황하고 말았다.

그로선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유체화는 단순히 형태만 흐트러지는 기술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온몸이 유체가 되어 연기처럼 만질 수도, 잡을 수도 없게 되는 비기였다.

주먹질?

그런 걸로는 때릴 수 없다.

설령 마나를 싣는다 해도 그렇다.

연기의 일부를 때린다고 해서 그 연기를 잡을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그럴수록 오히려 연기는 더욱 흩어져 버리고 마는 법이니까.

'그런데... 어떻게.... 아니, 일단 도망부터....'

지금은 이유를 추측할 때가 아니다.

도망치는 것만이 최우선이다.

정신을 수습한 피카미르는 다시금 유체화를 사용하려 했다. 한데 그 순간, 그는 보아야 했다.

"후으웁!"

숨을 들이마시며 주먹을 뒤로 당기는 김장철의 모습을. 꽉 말아쥔 그의 주먹에 가득 묻은 피를. 아니, 김장철이 셀프로 긁어서 만든 상처를.

"...!"

저거, 설마.

주먹에 묻은 뻘건 저거.

마왕이 스스로 낸 상처?

거기서 흘러나오는 선혈?

그러니까... 마왕의 피?

마왕 크레도스의 가장 흉악한 기술, 핏빛의 전격 폭풍을 불러온다는... 그거?

...라고 생각한 순간.

김장철의 주먹이 인정도 자비도 에누리도 할부도 없이 다짜고짜 쇄도해 왔다.

"썬더 펀치이-!"

 

빠가학! 빠지직!

 

"...크가갹띾갸!"

확실해졌다.

맞는 순간, 주먹에 묻은 마왕의 피가 맹렬한 전격을 일으켰다. 주먹질이 닿지 않는 연기고 자시고 필요 없이 주먹이 훑고 지나가는 범위를 모조리 감전시켰다.

단순한 감전이 아니었다.

마왕의 태생적 권능.

그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힘이 깃든 항거 불능의 감전이었다.

"커! 커거럭걱! 크... 캬훍...!"

두 번이나 감전된 피카미르의 유체화가 완전히 풀렸다. 흐물해졌던 형태도 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제야 피카미르는 실감했다.

'망했다....'

이제 도망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유체화? 더는 시전이 되지가 않았다. 그렇다면 맞서 싸워야 할까. 마왕 크레도스와?

"...."

아니.

그것도 불가능하겠지.

그렇다면 내게 남은 최선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겠다! 설령 소멸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진심을 담아 각오했다.

주군을 위하여.

충성심을 불태웠다.

그리고 이제부터 자신에게 내려질 가혹한 심문을 대비했다.

하지만....

"썬더 펀치!"

 

빠카학!

 

"썬더 펀치! 썬더 펀치!"

 

빠칵! 뿌칵!

 

"...!"

계속해서 끔찍한 펀치가 쏟아졌다. 전신이 산 채로 튀겨지는 기분. 고통. 그 속에서 피카미르는 더욱 이를 꽉 깨물었다.

어떤 것도 말하지 않으리라고.

독한 고문에 시달린다 하여도, 끝끝내 주군을 위한 충정을 지켜내리라고. 모진 시련과 고통이라도, 능히 감내하리라고.

다짐하고 각오하며 기다렸다.

여기에 어떤 목적으로 왔고, 무엇을 위해 밭을 망가뜨렸으며, 이 모든 것이 누구의 지시냐며 캐물을 마왕의 질문을.

그런데....

"썬더 펀치! 썬더 펀치!"

 

뻐칵! 뿌크확!

 

"썬더 펀치이-!"

 

빠가각!

 

"...!"

이상했다.

이건 정말로, 이상했다!

'왜?'

심문을 안 하는 거지?

'어째서?'

질문을 안 던지는 거지?

실시간으로 전기 주먹구이(?)에 튀겨지며, 피카미르는 당혹감을 머금어야 했다.

마왕이 뭐라도 물어야 하는데.

그게 정상인 건데.

그래야 자신이 버티고 입을 다물며 뭐라도 숭고하게 불태우고 자시고를 하는 건데.

그런데....

"썬더 펀치이-!"

"...!"

마왕은 질문을 던질 생각이 아예 없어 보였다. 끝없이 미친놈처럼 주먹질만 꽂아오고 있었다!

'그만해, 미친놈아!'

피카미르는 울고 싶어졌다.

하지만 김장철은 주먹질을 멈추지 않았다.

단순히 패는 손맛이 좋아서?

아니었다.

'이놈은 이렇게 안 하면 바로 도망치니까.'

피카미르를 보는 김장철의 눈길이 가늘어졌다. 사실 그는 피카미르를 보자마자 정체를 알아챌 수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놈, 1성주가 지배하는 망자의 단애 지역... 거기서 등장하는 중간보스였지.'

게임 후반부에 마주치는 유령 타입의 적들.

그중에서도 중간 보스의 포지션!

엄청나게 난해한 공략 난이도를 지닌 놈이었다. 덕분에 1회차 플레이를 하던 때에는 다른 보스보다 이놈에게 제일 많이 죽었을 정도였다.

'좀처럼 때릴 수도 없고, 다 잡았다 싶으면 유체화를 쓰면서 유령처럼 도망가고, 순식간에 피 다 채워서 다시 덤벼오고....'

당시엔 어떻게 잡아야 할지 감도 안 잡혔다. 실제로 자신도 거의 포기할 뻔했더랬다. 그러다가 간신히, 우연히 공략법을 찾아냈던가.

'전격 마법을 주위에 깔아서 함정처럼 써먹어야 했어.'

감전.

그것이 답이었다.

놈의 유체화가 풀렸으니까.

그러고서야 간신히, 정말로 간신히 놈을 잡았던 기억이 났다.

그래서였다.

'이놈은 조금이라도 여지를 주면 안 돼.'

아주 그냥 초주검이 될 때까지.

아예 죽기 직전까지 지져야 한다.

혼수상태에 빠져야 제대로 대답을 하는 놈이다. 아무리 맵을 뒤져도 찾을 수 없던 1성주의 행방. 그걸 술술 불던 게임 속의 그 장면처럼 말이다.

 

...뿌카칵! 뻐칵! 파치직!

 

쉴 틈 없이 때렸다.

오른쪽으로 패고 왼쪽으로 팼다.

앞면에서 패고 뒤통수도 또 팼다.

위 아래 위위 아래.

머리 어깨 무릎 발 무릎 발.

구분 없이 무한정으로 팼다.

그러다 보니 은근 힘이 들고 지쳤다.

그걸 느끼자마자 시스템창을 열었다.

 

딩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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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 : 20% (+10% 구매 = 50 포인트)]

 

[현재 보유 중인 해피 포인트 : 51]

 

'...체력!'

지난번에 얻어서 묵히고 있던 해피 포인트를 사용했다.

반응은 곧바로 왔다.

 

딩동동!

 

[당신은 체력을 선택하였습니다.]

[50 해피 포인트가 차감됩니다.]

[당신이 활용할 수 있는 체력의 한도가 10% 상승합니다.]

[체력 : 20% -> 30%]

[만약 100%를 달성할 시, 당신은 마왕 크레도스의 해당 능력을 100% 완벽하게 이끌어내어 사용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현재 보유 중인 해피 포인트 : 1]

 

...후우욱?

 

'우옷!'

체력을 선택하자마자 뱃속이 확 든든해졌다. 활기가 살아났다. 원기가 회복되었다. 주먹질에 힘이 돌아왔다. 다시금 힘차게 내질렀다!

"썬더 펀치이이-!"

 

파츠직!

 

"...!"

더욱 강력해진 주먹질!

피카미르는 한결 업그레이드(?)된 고통에 입을 쩍 벌렸다. 그는 자신의 각오를 더욱 독하게 다지기 위해 악을 쓰기 시작했다.

"크아악! 아무것도... 말하지 않겠...다아!"

"안 물었어! 썬더!"

"푸크학! 나를 우습게 보지 마라! 내 이름이야말로...!"

"펀치!"

"피카...!"

"뭐? 이 x끼야, 저작권! 저작권!"

 

빠직! 뻐크헉!

 

"...!"

그걸로 끝이었다.

1성주의 충직한 심복, 피카미르.

그의 의식이 아득한 혼절의 세계로 떨어졌다.

그때부터였다.

비로소 그의 입이 술술 열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주군인 1성주가 무엇을 바라는지. 하여 어떤 일을 꾸미고 실행하는 중인지.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실토한 것은 덤이었다.

마치, 수면내시경을 받는 사람이 무의식중에 온갖 이야기를 술술 꺼내는 듯한 광경, 혹은 성과(?)였다.

15화. 농병대 창설 (1)

 

"음냐리... 음냠냐아...."

"후우."

"냐음냐리... 냐음냐냐아...."

"하아."

"냐리냐리냘라셩...."

"어휴, 씨!"

빠악!

"피카아... 아그르르륵...."

"...."

돌겠다.

화딱지가 나서 저도 모르게 날린 딱밤에 거품을 물어 버린 유령장군 피카미르. 한때 1성주의 충직한 심복이자 오른팔이었던 놈의 본격 혼절한 모습을 보며 김장철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그리고 곁을 돌아보았다.

"방금, 잘 들었지?"

"네, 마왕이시여."

"감상이 어때?"

"보통 사태가 아니라고 느꼈습니다."

제피로스가 안경테를 추켜올리며 말했다.

"피카미르 장군의 자백이 사실이라면 이건 명백한 1성주의 반역 행위라 할 수 있겠지요."

"아무래도 그렇지?"

"네. 성주들에게 보낸 마왕의 전령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명령서마저 강탈하고 차단했지요. 덕분에 1성주를 제외한 나머지 성주들은 마왕께서 선포하신 농사 선언도, 그 의도도 전혀 모르고 있을 것입니다."

"쯧. 다들 초조하게 손가락이나 빨고 있겠네."

"인간계를 향해 출정하는 우리의 본대를 여전히 기다리고 있겠지요. 합류할 만반의 준비를 갖춘 상태로 말입니다."

"...후우."

김장철은 다시금 한숨을 내뱉었다.

제피로스가 물었다.

"하면 이제부터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지?"

"글쎄. 제피로스, 네가 보기에는?"

"마왕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서라도 1성주를 처벌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네."

제피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현재 마왕께서 처한 상황은 결코 좋지 못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멀쩡하게 잘 준비하던 인간계 침공을 돌연 취소한 것도 그렇고, 덕분에 모든 마족들이 버려진 땅에 주저앉아 더 길어진 배고픔을 감당하고 있는 상황이지요."

"흐음."

"만약, 예정대로 인간계를 침공했다면 지금쯤은 다들 인간의 도시를 약탈하며 얻은 식량으로 배부르고 행복하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겠지요. 그런 미래가 좌절된 것입니다. 덕분에 다들 말은 안 하지만, 이미 불만이 상당한 상황입니다. 그저 독이 가득한 야생 감자를 어떻게든 먹을 수 있게 됐다는 사실에 조금 더 참고 있는 것일 뿐이고 말입니다. 이걸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하자면?"

"다들 아수라트 대신에 마왕님을 기둥에 묶어서 피뢰침으로 쓰다가 너덜너덜해지면 곱게 갈아서 밭의 퇴비로 뿌리고 싶은 심정들이랄까요."

"...."

"제 표현이 다소 과격했습니까?"

"어, 음, 제법?"

"죄송합니다. 주의하겠습니다."

"어.... 앞으로 그래 주면 좋겠네."

"...라고 똥 씹은 듯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씀하셨음."

"쓰읍? 또 적는다. 또. 또."

"저의 의무이니까 말입니다."

"아니, 의무인 건 알겠는데."

김장철은 조금은 억울해진 기분으로 말했다.

"그 기록의 의무라는 거, 내가 멋있는 말이나 행동을 했을 때도 좀 티 내면서 적어주면 안 되나?"

"안 됩니다."

"어째서?"

"제 마음이니까요."

"...."

"싫으시면 저를 해고하시고 다른 이를 이 자리에 앉히시면 해결될 일이긴 합니다만...."

"...하아. 그래,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하세요."

김장철의 한숨이 짙어졌다.

사실 제피로스는 못 자른다.

그나마 믿을 수 있는 마족 중에 제일 똘똘한 놈이니까.

"어쨌건 그럼, 1성주의 영역인 망자의 단애를 언제 정벌할 생각이신지?"

제피로스가 특유의 냉랭건조한 눈빛으로 물어왔다. 아마 녀석은 이쪽이 1성주를 반드시 칠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긴.'

지금 상황에서는 그게 최선이라 여기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 녀석의 말대로 인간계 침공을 중단한 덕분에 이쪽의 권위가 흔들바위 트월킹 추듯이 흔들리고 있으니까.

한데 대놓고 반역을 시도하는 1성주를 내버려둔다면? 그나마 남은 권위마저 한 많은 세상의 한 줌 다이옥신처럼 사르르 증발해서 사라질 테니까.

하지만....

"아니. 단애 정벌은 하지 않는다."

"네?"

제피로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말씀은...."

"지금 1성주를 치는 것엔 실익이 없어."

김장철은 잘라내듯 말했다.

사실이었다.

'망자의 단애로 쳐들어가도, 거길 완전히 정벌해도, 사태의 원인인 1성주는 못 잡으니까.'

무려 19회차나 공략했던 이 게임 속 세상.

이곳의 규칙은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다.

그 경험으로 미루어 이것만은 확실했다.

"자, 내가 하나 물어보자. 망자의 단애가 어떤 지형으로 구성되어 있지?"

"깎아지른 절벽과 수직 사다리, 그 사이를 잇는 한 뼘 너비의 잔도, 그리고 절벽 내부에 개미집처럼 얽힌 암굴 통로입니다."

"그렇지? 그런데 1성주는 유령이지?"

"그렇습니다."

"유령은 벽이고 천장이고 마음만 먹으면 마음대로 통과할 수 있지?"

"그렇... 아."

제피로스가 깨달았다는 듯이 눈을 반짝였다.

"그렇다면 마왕께서는, 단애로 쳐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1성주를 이쪽으로 끌어들이시려는 것입니까?"

"바로 그거지."

역시 제피로스와는 말이 잘 통한다.

김장철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1성주는 기본적으로 유령이야. 덕분에 대부분의 지형을 자유롭게 통과할 수 있고. 그런데 망자의 단애는 수직 절벽과 깎아지른 잔도, 사다리, 미로처럼 얽힌 암굴투성이인 지역이지. 한데 과연, 거기서 1성주를 잡을 수 있을까?"

절대로 못 잡는다.

그건 이 게임, 팔라딘 오브 블러드를 수없이 플레이하면서도 절감했던 부분이었다.

제아무리 자신이 고인물이라 해도 그건 못 했다. 망자의 단애 지역 보스인 1성주는 단애 지역 안에서는 절대로 못 잡는다는 모순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항상 놈을 낚아서 단애 밖으로 끌어내야 했다. 그것이 팔라딘 오브 블러드의 정식 스토리 라인이기도 했고.

물론 그것은 이번에도 마찬가지이리라.

"그러니까 놈을 제대로 잡아서 박살을 내려면, 낚아서 단애 밖으로 끌어내야 해."

"과연. 일리가 있는 말씀이십니다. 이렇게 듣고 보니 마왕께서도 조금 다르게 보이시는군요."

"...음? 평소에 내가 어떻게 보였길래?"

"기록자의 마음을 내려놓고서 솔직하게 말씀드릴까요?"

"원한다면?"

"그냥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이셨습니다."

"어?"

"그리고 많은 문제를 무식한 폭력과 공포로만 해결하셨지요."

"...."

"매번 그러다가 일이 틀어지면 애꿎은 부하들 탓을 하며 몇몇을 본보기로 죽이기도 하셨고 말입니다."

"...."

"그것이 사실입니다. 혹시 본인의 행동을 망각하신 건 아니겠지요?"

"...."

"정말로 혹여나 망각하신 거라면 여기, 당시의 기록을 살짝 보여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

마왕 크레도스야.

너 그동안 어떻게 살아먹은 거냐. 대체 왜 내가 너 때문에 이딴 소리를 들어야 하는 건데.

김장철은 반박하고 싶은 억하심정을 꾹 눌렀다. 그리고 마왕의 지위를 누리며 온갖 폭군질(?)을 일삼았을 크레도스를 조용히 원망했다.

"...쯧, 아무튼. 놈을 끌어내서 잡는다. 그걸 기본으로 깔아야 해."

"하면 1성주를 끌어낼 특별한 방법이 있으십니까?"

제피로스가 물었다.

방금 충언을 빙자한 악담을 퍼부었던 것과 달리, 제피로스는 내심 놀라고 있었다.

'이분이... 정말로 내가 아는 크레도스가 맞을까?'

보면 볼수록 이상했다.

예전의 크레도스는 이렇지 않았는데.

지성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는데.

조금만 수틀리면 일단 피부터 뿌리고 보는 공포의 존재, 그 자체였는데.

"...."

한데 어째서 계속 기대감을 품게 만드는 걸까.

정말로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제피로스는 일말의 기대를 품었다. 그리고 기다렸다. 요즘 부쩍 달라진 마왕 크레도스. 그가 1성주를 끌어낼 어떤 기발한 계책을 꺼내 들지를.

한데 뜻밖에도, 마왕의 입에서 뜻밖의 소리가 나왔다.

"특별한 방법? 없어."

"네?"

"없다고."

"그럼...."

"농사나 계속 지어야지. 별수 있나?"

"...."

"그러면 놈이 초조해질 거고. 알아서 단애에서 기어나올걸?"

"어째서...."

"어째서긴. 생각을 해봐라. 1성주 그놈이 원하는 게 뭔데? 우리 농사가 망해서 죄다 쫄쫄 굶다가 죽는 거 아니냐?"

"네. 그렇... 아."

"이제 좀 감이 잡혔어?"

"네. 확실히."

제피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의 농사가 원활하게 진행되는 것이 가장 특별하고도 강력한 수단인 것이로군요."

"맞아. 바로 그거지. 우리 감자가 팍팍 자란다? 드넓은 밭이 수확물로 가득 찬다? 그럼 1성주는 초조해서 팔짝 뛸걸?"

"역시."

제피로스는 내심 감탄했다. 가장 평범한 수단이 때로는 가장 특별하고도 강력한 비책이 될 수 있음을 실감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너 왜 이건 안 적냐?"

"네?"

"방금 내 말에 감탄했지?"

"아뇨. 그닥."

"쓰읍? 감탄하는 기색이었는데?"

"잘못 보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무튼. 왜 안 쓰냐고."

"기록 말입니까?"

"어. 내가 무슨 언행을 하든 다 기록으로 남긴다며. 지금은 왜 안 그러는데."

"...라고 뒤끝 쪼잔한 얼굴로 따지듯이 말씀하셨음."

"...."

"보통 아주 중요한 순간을 현장에서 바로 기록하고, 나머지 일상의 사소한 일들은 빠짐없이 기억을 해두었다가 저녁에 정리하며 한꺼번에 쓰는 편입니다."

"그러니까, 방금까지 내가 말했던 그 강력한 비책이 그냥 사소한 수준의 일들이었다?"

"...라고 좀생이처럼 시시콜콜 항의하셨음."

"...."

말을 말자, 말을 말어.

결국, 포기(?)한 김장철은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1성주를 낚아낼 자신의 가장 강력한 비책, 농사 프로젝트를 더욱 힘차게 진행했다.

심지어 그것만이 아니었다.

김장철은 1성주를 위한 작고 특별한 팬서비스(?)를 개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마 지금도 이곳을 염탐하고 있을 1성주. 그의 복장을 터뜨리다 못해 멘탈을 벌렁벌렁 트리플악셀을 뛰도록 하기에 충분할 이벤트, 혹은 도발 행위였다.

 

 

분명 도발의 성과가 나올 때가 되었는데.

어째서 돌아오지 않는 것일까, 피카미르는. 어찌하여 소식이 없는 것일까, 나의 충직한 심복은.

"...."

버려진 땅의 1성주, 사르툴은 아주 약간의 초조함을 느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그가 반투명한 몸을 파묻은 권좌. 그 위로 뚫린 천창을 통해 달의 일부가 엿보였다.

이지러진 달.

벌써 사흘째다.

장군 피카미르를 마왕성으로 보낸 것이. 가장 아끼는 심복에게 크레도스의 밭을 파괴하라 명하였던 것이.

한데 어찌하여, 세 번째의 달이 떠오른 이때까지도 소식이 없단 말인가.

"...."

설마 실패한 것은 아니겠지?

불안감이 슬며시 고개를 치켜들 무렵이었다.

 

...츠르륵!

 

그의 권좌 앞에 놓인 수정구가 빛나기 시작했다. 마왕성 곳곳에 보낸 정찰귀. 그들과 연결된 연락용 수정구였다.

1성주는 눈을 가늘게 뜨며 수정구를 주시했다. 이윽고 정찰귀가 실시간으로 보내는 영상이 수정구에 떠올랐다.

한데 그 광경은....

"...으음?"

수정구 속의 쌩라이브(?) 영상을 본 1성주는 순간 자신의 눈두덩을 거칠게 비빌 뻔하였다. 한편으로는 자신에게 노안이 생겼나, 라는 의심을 아스라이 품어 보기도 하였다.

이유는 하나.

'어째서... 피카미르가 기둥에 묶여 있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좀처럼 믿기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리 보고 저리 보고 거꾸로 보아도 그러했다.

감자밭 한가운데에 생뚱맞게 우뚝 세워진 기둥. 그 기둥에 야물딱지게 꽁꽁 묶인 이는 분명 자신의 심복, 유령장군 피카미르가 확실했으니까.

'이게 무슨...'

어이가 없었다.

한데 그때, 정찰귀가 시선을 돌렸다. 정찰귀의 시선을 따라, 피카미르가 묶인 기둥 주위의 상황이 수정구에 비추어졌다. 그걸 본 1성주는 안 그래도 사라지던 어이가 아예 원자 단위로 흩어지는 기분을 만끽해야 했다.

'축제가 열리고 있다고...?'

그러했다.

그것은 분명 축제였다.

기둥에 묶인 피카미르 주위로 하급 마족들이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었다. 어떤 놈은 깃발을 흔들고 있기도 했다.

1성주는 깃발에 쓰인 글귀를 찬찬히 읽었다.

"(경) ...2대 피뢰침... 취임식... (축)...?"

피뢰침?

취임식?

설마, 피카미르가?

나의 충직한 심복이?

새로운 피뢰침이라고?

"...."

그 참상을 쌩라이브(?)로 직관한 순간, 1성주 사르툴은 저도 모르게 분노의 어금니를 빡세게 깨물고야 말았다, 까득!

한데 김장철의 도발 행위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니. 시작에 불과했다.

16화. 농병대 창설 (2)

"말뚝을 세워라!"

"...."

아스라이 들려오는 마왕의 포효.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마족들의 기척.

그 소리를 들으며 사천왕, 아수라트는 눈을 떴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 오늘인가.'

그렇다.

마침내, 오늘이다.

길고도 긴 나날이었다.

매일 찌릿찌릿했던 고통.

눈을 감을 때도.

눈물이 흐를 때도.

6번 척추를 지져오던 강렬한 짜릿통.

그것뿐이었던가.

퇴비 냄새는 또 어떠했나.

'....'

이미 후각은 멸망했다. 향기? 그게 뭐였더라. 한때는 내 코도 아름다운 향을 맡기도 하였는데. 분명 그런 나날이 있었는데.

그런데 이제는 평범한 공기와 바람의 향이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냥 이 세상의 공기란 전부 퇴비 지린내로 이루어진 게 아닐까, 라는 생각만 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도 끝이다.

오늘로써 안녕이다.

이제 곧, 나를 대신할 새로운 생체 피뢰침(?)이 생겨날 테니까! 그러면 나는 자연히 해방될 테니까! 마침내! 오늘에야말로!

"...후우."

아수라트는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반가운 깃발이 보였다.

 

[(경) 2대 피뢰침 취임식 (축)]

 

...그래.

꿈이 아닌 거야.

정말로 현실인 거야.

선명한 글씨를 담고서 나부끼는 저 깃발도. 내 옆에 드높이 세워지고 있는 새로운 말뚝도.

그 말뚝에 단단히 고정된 옆 동네, 1성 군단의 장군 피카미르의 모습도, 전부!

'후후... 후후후...!'

기뻤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니, 실제로도 찔끔 났다.

"으으읍! 읍읍! 으읍읍!"

옆에 세워진 말뚝에서 피카미르가 무어라 끙끙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놈이 절박한 얼굴과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아수라트는 정겹게 웃었다.

'후후. 당황스럽겠지.'

같은 꼴을 먼저 겪은 선배(?)인 자신은 지금 피카미르의 심정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한눈에 딱 봐도 엄청 그을린 피카미르의 전신. 분명 크레도스의 번개에 지져졌겠지. 덕분에 완전히 너덜너덜 무력해진 거겠지.

'그 상황에서 말뚝에 매달린다는 거... 끔찍하거든.'

물론 거기서 끝이 아니다.

더한 일이 펼쳐진다.

그건 바로....

"멍석을 말아라!"

마왕의 포효가 울려 퍼졌다.

그 순간, 아수라트의 입가에 눈물 섞인 미소가 맺혔다.

'아아, 이제야!'

해방되는구나.

그동안 날 묶고 있던 멍석.

전전대 마왕이 성전교단에서 약탈했다는 마족 전용 구속구. 정식 명칭은 '타락한 자의 정화포'인가 뭔가인데 이름이 복잡하다며 크레도스는 그냥 '멍석'이라고 줄여서 부르는 이 끔찍하고 악랄한 물건.

이놈에게서 해방되는 날이!

'마침내 오는구나아!'

아수라트는 전율에 가까운 환희를 느끼며 기대했다.

이제부터 하급 마족들이 우르르 달려오겠지. 예전에 날 묶었던 때와 반대로, 내 몸을 둘둘 말고 있는 멍석을 풀어내겠지. 그리고 피카미르에게 그걸 씌울 거야.

그러면 난 해방이다.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어.

더는 생체 피뢰침 신세로 버둥거리지 않아도 돼! ...라고 생각하며 기대감으로 가슴을 콩닥콩닥 부풀리던 순간이었다.

"멍석! 멍석!"

"멍석! 새 멍석!"

"말자! 돌돌돌! 새 멍석!"

하급 마족들이 이쪽으로 오지 않았다. 엉뚱한 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이쪽을 돌돌 말고 있는 것과 똑같은 모양의 멍석을 집어 들었다!

"...!"

어?

어째서?

왜 때문에?

'똑같은 멍석이... 하나 더 있는 건데?'

이게... 맞아?

저거... 짝퉁 아니야?

아수라트는 자신이 접수한 시각정보를 부정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현실은 잔혹했다. 새로운 멍석이 피카미르를 결혼 30년 차 프로 주부의 솜씨처럼 빈틈없이 돌돌돌 랩핑했다.

그걸로 끝이었다.

마왕이 뭐라뭐라 연설을 하고.

마족들이 무어라 환호하는 듯하다가.

다들 뒤도 안 보고 우르르 떠나갔다.

 

...휘이이잉.

 

불어온 삭풍이 버려진 땅에 먼지를 일으켰다. 한 차례 자욱하게 피어난 먼지가 멍석말이로 나란히 매달린 아수라트와 피카미르의 볼을 어루만...지진 않고 찰싹찰싸닥 때리고 지나갔다.

"...."

하, 인생.

아수라트는 그제야 깨달았다. 2대 피뢰침이 취임한다고 해서, 꼭 1대가 퇴임하란 법은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또 하나를 깨달았다. 마왕의 뒤끝이 자신의 상상 이상으로 질기고 지독하다는 냉혹한 진실을.

'....'

혈염의 사천왕.

한때는 만인의 공포였던 존재.

아수라트는 눈물이 차올라서 고개를 들었다.

흐르지 못하게 또 살짝 웃었다.

내가 왜 이러는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오늘 했던 모든 기대는 저 하늘 위로.

딱 한 번만 품었던 기대.

울면서 할 줄은 몰랐던 실망까지, 모두.

'...이게 뭐라고. 나도... 아이유, 참....'

끝내 참지 못한 눈물이 아수라트의 얼굴을 서러운 닭똥처럼 똥똥 적셨다.

 

 

'좋은 날이군, 좋은 날이야!'

 

...빠직!

 

수정구가 산산이 부서졌다.

1성주 사르툴은 분노가 가시지 않은 눈매를 뒤늦게 실룩거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 이 수정구. 비싼 건데.

"...."

어쨌거나 수정구는 더 있다.

지금 중요한 문제는 마왕, 크레도스 놈이 이쪽의 계획을 모두 알아 버렸다는 것이다.

'피카미르, 이놈....'

1성주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심복 피카미르가 전시되듯 말뚝에 내걸렸다. 그건 즉, 마왕이 피카미르로부터 알아낼 정보를 전부 뽑아냈다는 뜻이리라. 그러니 쓰고 난 잡동사니처럼 보란 듯이 내걸어 버린 것일 테고.

"...."

멍청한 피카미르 놈.

지금껏 오른팔로 삼아 아껴 주었더니.

이토록 쉽게 모든 비밀을 누설해?

"쯧."

괘씸해졌다.

당분간은 왼손잡이로 살아볼까 싶어질 정도였다.

하지만 역시나 지금 중요한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마왕 크레도스. 놈이 나를 낚아내려 들고 있군.'

느낄 수 있었다.

피카미르를 보란 듯이 내걸어 버린 저 행동은 명백한 도발이다. 이쪽을 격분시키려는 수작이겠지. 그래서 단애 밖으로 끌어내려는 것이겠지.

그러나....

'내가 그렇게 쉽게 흔들릴 줄 아는가, 마왕이여.'

1성주 사르툴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자신이 지배하는 이곳 망자의 단애.

이 구역에서의 자신은 무적이다.

그 누구에게도 잡히지 않는다.

한데 자신이 왜 밖으로 나가겠는가.

'어차피 이건 내가 이기는 인내심 싸움이다. 마왕 크레도스, 네놈이 아무리 나를 긁어대어도, 나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1성주는 자신있게 웃었다.

자신은 절대 도발에 넘어가지 않는다고. 이건 자신이 무조건 이기는 싸움이라고.

진심으로 확신했다.

적어도, 김장철이 농사 전문 마족 부대인 '농병대 청년회'를 창설하고, 창설 기념으로 피뢰침 2호 피카미르 앞에서 추뇨 회식을 벌이기 전까지는, 확실히 그렇긴 했다.

 

우적우적, 와작와작!

 

"...."

아이고, 잘들 먹는다.

 

와그작와그작, 꿀꺼덕꿀떡!

 

"...."

저 추뇨라는 거, 그렇게나 맛있는 걸까.

그래서 저렇게들 후후 불어가면서도, 입가에 검댕을 잔뜩 묻혀가면서도 즐겁게 웃으며 먹을 수 있는 걸까.

모르겠다.

어째서 이런 기분인 건지.

왜 저 모습들을 보며 속이 부글부글 끓는 건지.

1성주 사르툴은 정찰귀가 보내온 영상을 보며 무의식중에 이를 꽉 깨물었다.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스스로의 감정을 다스렸다.

괜찮다고.

뻔한 도발이라고.

이런 정도에 넘어가지 말자고.

...다짐하던 순간.

정찰귀의 수정구가 누군가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며 비추었다. 갓 구운 추뇨를 너무나 행복하고 복스럽게 씹어대는 마왕, 크레도스의 얼굴을, 리얼하기 그지없는 풀샷으로.

 

쩝쩝쩝! 쩌접쩝! 쯔업쯔업쯔어업, 쩝쩝!

 

"...."

 

콰아앙!

 

요란하게, 노골적으로 쩝쩝대며 감자를 먹는 마왕의 작태(?)를 본 순간, 사르툴은 저도 모르게 주먹으로 수정구를 내리쳐 박살 내고야 말았다.

그리고 결심했다.

이대론 안 되겠다고.

어쩔 수 없이, 움직여야겠다고.

 

 

아무래도 안 되겠다.

이건 어쩔 수가 없겠다.

"...."

마침내 버려진 땅의 중심을 벗어난 직후.

이 저주받은 대지의 변경에 도달했을 무렵.

레벨 9990의 NPC, 묵은지는 처음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귀를 기울였다.

어디선가 서글픈 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좀... 도와... 주...."

처음엔 무시하려 했다.

하지만 어쩐지 신경이 쓰였다.

혹시 모험가를 홀려서 잡아먹는 몬스터일까. 그렇다 해도 내겐 위험하지 않겠지. 그럼 확인이라도 해볼까.

잠시 고민하던 묵은지는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덕분에 발견할 수 있었다. 몬스터가 아닌, 진짜로 조난을 당한 몰골의 두 사람을.

"...엇?"

이쪽을 향해 눈을 휘둥그레 뜨는 두 사람.

한 사람은 은발의 미청년이었다. 그 옆의 갈색머리는 감자 같은 인상이었다. 둘 모두 엉망진창인 행색. 그중에서도 특히 은발의 미청년은 다리가 부러졌는지, 어설픈 부목을 댄 다리를 부여잡고서 아예 주저앉아 있었다.

"사, 사람이다! 도와주십쇼!"

감자 같은 인상의 갈색머리가 다급하게 외쳤다.

묵은지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이곳은 아직 버려진 땅인데.

그런데 몬스터나 마족이 아닌 인간이라니.

이런 자들과 여기서 마주치고, 심지어 대화까지 나누고 있는 자신이라니.

"...."

한 번도 이런 건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아니, 지난 열아홉 번의 생에서도 모두.

그때였다.

"고, 고블린! 놈들의 습격을 받았습니다요. 식량이고 뭐고 다 빼앗기고 놈들의 굴에 끌려가서... 죽임을 당하기 직전에 겨우 도망쳐 나왔지 뭡니까요. 그런데 도련님의 다리는 부러졌고, 저는 부축을 하려고 애를 썼지만 탈진해 버려서... 흐흑...!"

거의 포기하고 있던 희망의 끈을 붙잡았노라 여긴 걸까.

갈색머리가 울먹이며 말했다.

아무리 봐도 거짓은 아닌 듯했다.

묵은지는 잠시 고민했다.

도와주어야 할까.

모르겠다.

하지만 외면하기는... 싫다. 이들은 내가 스무 번째의 삶을 거쳐서야 겨우 만난, 처음으로 만난 '사람'이니까.

결심한 묵은지는 그들을 향해 다가가 눈높이를 맞추어 주었다.

"그랬던 거라면, 많이 힘들었겠군."

"크흑.... 그, 그랬습니다요...."

"그럼, 어떻게 도와주면 될지."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가까운 도시나 마을까지 좀...."

"데려다 주길 바라는 건가?"

"예! 옙! 감사합니다요! 정말로 감사합니다요!"

갈색머리가 울었다.

은발 미청년이 감사의 눈빛을 보내어 왔다.

...그래.

이런 만남도 운명이라면 운명인 거겠지.

그 언젠가 열아홉 번에 걸친 유혈과 살육의 생을 거쳐온 나. 그런 내게 누군가를 향한 온정을 베풀 기회가 생긴 상황.

어찌 보면 이것은....

'살육의 업보를 씻을 기회인 걸까.'

어쩌면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문득 떠오른 생각.

그 끝자락에서 묵은지는 따스하게 웃었다.

그리고 이들을 돕겠노라 다시금 결심하며 물었다.

"그럼, 당분간 동행이 될 테니 통성명부터 나누도록 하지. 나의 이름은 묵은지. 그쪽은?"

"아, 저희는...."

갈색머리가 황급히 눈물을 닦아내며 씨익 웃었다.

"이분은 제가 모시는 고귀한 귀족이신 엘비하 아스라한 도련님이시고, 저는 도련님의 몸종인 드이로 프론테라입니다요."

17화. 맞고 자란 싹이 아름답다 (1)

 

그나저나 묵은지는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이러다 갑자기 확 들이닥치는 건 아닐까.

그러면 난 진짜 한 큐에 적혈구 무침 고깃덩이 되는 건데.

에이 설마.

인간계 침공도 중단했으니까 그런 일은 없겠지.

제발 없어야 하는데.

없으면... 좋겠는데.

'후우.'

잠시 떠오른 상념.

궁금한 만큼의 불안감.

김장철은 나직한 한숨을 내뱉...을 뻔하다가 집어삼켰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어둠. 한밤의 어둑한 하늘 아래. 커다란 건물의 윤곽이 보였다.

감자 저장고였다.

"...."

그래.

난 지금 매복 중이었지.

이 매복의 목적은....

 

[정말로 그들이 올까요?]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제피로스 녀석이 수첩을 내밀어 왔다. 새하얀 여백 한쪽을 수놓은 녀석의 의문. 정말로 '그들'이 오겠느냐는 의구심.

녀석을 향해 작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당연하지.'

온다.

놈들은 온다.

그럴 수밖에 없다.

농병대를 창설했다.

한껏 도발을 시전했다.

2호 피뢰침이 된 피카미르 주위로 오순도순 둘러앉아 더없이 행복한 얼굴로 추뇨를 씹어댔다. 이쪽의 식량 사정이 갈수록 나아질 것임을 강조한 노골적인 퍼포먼스(?)였다.

덕분에 1성주는 제법 초조해졌을 것이다.

'자신의 예상과는 다르게 우리 쪽 농사가 쉽게 망하진 않을 거라는 사실을 조금은 실감하게 됐겠지.'

지금처럼 단애에 틀어박혀 있어 봤자 소용이 없으리란 사실 또한.

그러니 이제는 놈이 슬슬 수하들을 보낼 것이다.

아마도 놈들의 목표는....

'여기, 감자 저장고일 테고.'

김장철은 눈짓으로 저장고를 가리켰다.

제피로스가 수첩에 뭔가를 슥슥 썼다.

 

[역시, 힘들여 채집한 감자를 망가뜨리면 우리의 농사를 망칠 수 있다고 여길 거란 뜻입니까?]

 

'그래.'

확실하다.

여기 말고는 건드릴 곳이 없다.

감자밭?

어차피 아직 감자를 심지도 않았다.

그곳을 갈아엎는 게 소용이 없다는 건 이제 1성주도 충분히 알 것이다. 그러니 테러를 벌일 곳은 저장고의 감자밖에 없다.

'그 테러를 벌이러 올 놈들을 박살 내면 돼.'

그 후엔 감자를 심는 것이다.

1성주에게 보란 듯이.

심으면 되는데.

"...."

감자 싹은 언제쯤 날까.

계획을 점검하던 김장철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머금었다. 채집을 마친 지 넉넉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직 싹이 나지 않고 있는 감자. 그 걱정이 새삼스럽게 떠오른 까닭이었다.

'...생각보다 감자 싹이 안 올라오고 있어.'

싹이 나야 감자를 심을 수 있을 텐데.

사실 감자 덩이는 그냥 캐낸다고 바로 씨감자로 심을 수 있는 게 아니다. 휴면이라는 감자의 특성 때문이었다.

'감자 덩이는 행복하게 땅속에서 꺄르륵거리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난폭한 마족들이 땅을 파내서 감자를 강제로 끄집어내 버렸답니다. 감자는 몹시 놀랐어요. 그리고 기절해 깊은 잠에 빠져 버렸죠. 그 언젠가 달콤한 입맞춤으로 자신을 깨워줄 왕자님... 아니, 휴면이 끝나게 될 날을 기약하며 말이죠.'

...라고 설명하면 될까.

말 그대로, 땅에서 캐낸 감자는 충격(?)을 받는다. 모든 생체 리듬이 정지된다. 잠에 빠지는 것이다.

그것이 휴면이다.

이때는 아무리 조건을 맞춰도 싹이 자라나지 않는다. 땅에 심어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심을 수가 없고, 심어서도 안 된다.

지금, 저장고에 가득 쌓아둔 야생종 감자가 그런 상태였다.

"...."

원래 밭갈이를 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휴면이 풀릴 거라 예상했는데. 그렇게 타이밍을 맞추려 했는데.

그런데 뜻밖에도 공짜로, 초고속으로 밭갈이를 끝내게 되면서 새로운 고민거리를 떠안게 된 김장철이었다.

'쯧.... 밭갈이가 끝났는데... 왜 심지를 못하니!'

아쉽고 또 아쉬웠다.

물론 감자의 휴면을 앞당겨 깨우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중이기는 했다. 시간마다 농병대 마족들을 저장고에 밀어넣고 스쿼트를 시켰다.

덕분에 저장고의 온도가 23℃ 가량으로 따끈따끈해졌다. 감자의 휴면타파가 앞당겨지는 온도였다.

'사실은 4℃ 정도의 저온에 2~3주쯤 보관하다가 따끈하고 어두운 곳으로 확 옮기면 휴면이 더 빨리 끝나긴 할 텐데.'

아쉽게도 그 방법은 사용할 수가 없었다.

얼음의 칼날을 지닌 사천왕 시르케.

그 녀석이 저장고의 냉방기(?)로 봉사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

확 팰 수도 없고.

자칫 그랬다가 빡친 시르케가 하르토크와 연합해서 덤비기라도 하면... 감당이 안 될 테니까.

'앞으로도 당분간은 사천왕과 직접적으로 충돌하는 사태는 최대한 피해야 해.'

몸 사리며 살자.

가늘고 길게 가자.

김장철은 스스로를 향한 다짐을 되새겼다. 최소한 사천왕 두 명의 연합을 혼자 버텨내고 제압할 수 있을 때까지는 몸을 사리자고. 아수라트도 그때쯤이나 되어서야 풀어주자고.

...라고 생각하던 무렵이었다.

 

슈룩, 슈루룩....

 

'음?'

저장고 방향에서 뭔가가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이내 희뿌옇고 반투명한 실루엣 다수가 저장고를 향해 모여드는 모습도 보였다.

동시에 곁의 제피로스가 수첩에 뭔가를 파바박 바쁘게 썼다.

 

[온 것 같습니다!]

 

'...응, 나도 알아.'

김장철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자 보였다.

어느새 저장고에 빼곡히 모인 희뿌연 형체들. 바라보고 있자니 느껴지는 오싹한 한기. 그리고 조금씩 식별되는 구체적인 모습.

'머리가... 셋?'

확실했다.

몸은 평범한(?) 유령인데, 머리가 셋이 달린 놈들이었다. 그걸 보니 더욱 오싹해...지진 않았다.

오히려 반가운 기분이 샤라락 들었다.

'이놈들, 1성 군단 최정예 몹인 삼면귀잖아?'

김장철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낯선 놈들이 아니었다.

아니, 너무나 익숙한 놈들이었다.

이 세계를 이루는 게임, 팔라딘 오브 블러드를 플레이하면서 지긋지긋하도록 마주친 놈들이기 때문이었다.

'1성주가 가장 아끼는 최정예 병력이자 친위대 같은 놈들이지.'

놈들의 숫자는 정확하게 108마리.

유령의 특성을 갖춘 데다가 머리가 셋이나 달려 처치하기가 까다로운 놈들이었다. 시야에 사각이 없어서 거의 모든 공격에 실시간으로 반응을 했다. 심지어 머리 셋을 한꺼번에 타격해야 대미지가 들어간다는 지랄맞은 특성까지 지녔다.

그뿐일까.

자체의 피통과 공격력이 어마어마했다. 심지어 항상 108마리가 모여서 다녔다. 따로따로 잡을 방법? 없었다. 덕분에 처음 만났을 때는 공략법 자체가 막막할 정도였다.

'...라지만, 지금은 다르지.'

김장철의 입가에 서린 미소가 짙어졌다.

삼면귀고 뭐고 자신에게는 한낱 몹일 뿐이다.

게다가 1성주가 무려 자신의 친위대인 삼면귀를 보냈다는 사실도 반가웠다. 앞서 밭갈이 테러를 감행했던 장군 피카미르가 1성주의 오른팔이라면, 이 삼면귀들이야말로 1성주의 왼팔이나 같은 놈들이니까.

'그만큼 초조해지셨다는 거지.'

농병대의 도발이 생각보다 약빨이 좋았구나.

김장철은 어쩐지 뿌듯(?)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제피로스, 사천왕 바할, 농병대원들에게 눈짓으로 명령했다.

'작전 시작.'

명을 받은 모두가 약속한 대로 움직였다.

농병대 마족들이 제피로스와 바할의 지휘에 따라 조용히 움직였다. 감자 저장고를 빈틈없이 포위했다.

그리고 김장철이 홀로 움직였다.

감자 저장고를 향하여.

다가갔다.

문을 열었다.

저장고로 들어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문을 닫았다.

 

드르륵, 탁.

 

"...."

앞서 저장고의 벽을 통과해 들어와 있던 삼면귀들의 모습이 보였다. 마침 놈들은 가득 쌓인 감자를 내리쳐 짓이기려던 중이었다.

"일동. 동작 그만."

"...!"

삼면귀들이 흠칫.

이쪽을 돌아보았다.

이윽고 이쪽의 정체를 알아보는 순간.

"크, 크레도스?"

"...마왕?"

놈들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아마 당황한 거겠지.

설마하니 저장고에 숨어들자마자 들킬 거라곤 생각 못 했을 테니까. 심지어 하급 마족 따위가 아닌, 마왕과 다이렉트로 떡하니 마주치게 될 줄은 더더욱 몰랐을 테고.

뭐, 상관없다.

어차피 이놈들은 여기서 다 끝장이 날 테니까. 오늘, 1성주는 아끼던 심복에 이어 최정예 친위대마저 잃게 될 테니까.

"너희들, 혹시 그거 아냐."

김장철이 천천히 말했다.

"내가 좀 포기를 모르는 편이야. 꾸준하고 진득하게 밀어붙여. 그렇게 인내심으로 한 땀 한 땀 싸우는 거... 그게 농사의 기본이거든."

"...뭐?"

삼면귀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왕이 지금 무슨 난데없이 씻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는 걸까.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김장철은 개의치 않았다.

"요약하자면-"

어느새 그의 손이 천천히 움직였다.

"인내심이."

 

...철컥!

 

그의 손이 저장고 문의 빗장을 걸었다. 그러고도 그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농부를."

 

철컥...!

 

문 위쪽의 잠금쇠가 잠겼다.

"만든다."

 

...철커덕!

 

아래쪽 마지막 잠금장치가 쇳소리를 냈다.

순식간에 3중으로 잠긴 저장고 문.

이로써 완벽하게 폐쇄된 공간 안에서, 108마리 삼면귀를 바라보는 김장철의 눈동자가 묘하게 희번덕거렸다.

"오늘, 너희를 시작으로 1성주의 기반을 하나씩 차근차근 농약 치고 잡초 뽑듯이 솎아낼 거라는 뜻이지. 놈이 완전히 무너질 때까지."

"...하?"

삼면귀들의 얼굴에서 당혹감이 사라졌다.

그들은 비로소 상황을 이해했다.

나름 마왕이 함정을 판 것 같은데.

그래서 자신들을 잡겠다는 것 같은데.

그런데 정작 자신들의 특성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겨우 문을 잠근 걸로 우리를 다 가둔 듯이 군다고?'

'웃기는군, 크그큭!'

상황을 깨달을수록 절로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자신만만해진 삼면귀들이 일제히 전신을 흐릿하게 만들며 두둥실 떠올랐다. 그리고 108마리 모두가 동시에 똑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농락해 주지!'

제아무리 마왕이라도 자신들의 특성을 잘 모른다면 모두를 한꺼번에 잡지는 못한다. 기껏해야 난잡하게 허우적대는 술래잡기 끝에 몇몇을 죽이는 것이 다겠지.

'우린 유령이니까!'

'벽이고 지붕이고 다 통과할 수 있으니까!'

'그런 우리를 잡는다고?'

'할 수 있으면 해보라지, 크큭!'

치고 빠지면 된다.

마왕이 몇몇을 잡기 위해 비효율적으로 애를 쓰는 사이에, 나머지가 감자를 망가뜨리면 된다. 그러면 주군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이 땅의 모두가 굶어 죽는 날이 오리라. 모두가 우리와 같이 죽음의 구렁텅이를 배회하게 되는, 기쁨의 순간이 다가올 것이다!

'카하하하학!'

반투명해진 108마리 삼면귀가 사방으로 어지럽게 날아올랐다.

누군가는 벽으로.

또 어떤 놈은 지붕 속으로.

마왕을 농락하듯 저장고 곳곳으로 스며들었다.

한데 그 순간이었다.

'...어? 뭐지, 이 냄새는?'

벽에 스며든 어느 삼면귀가 흠칫했다.

희미한 비린내가 벽에서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벽과 지붕 곳곳에 빼곡하게 묻은 검붉은 자국들도 보였다. 아까 저장고 안으로 침투를 하던 때에는 감자라는 목표에 집중하느라 미처 깨닫지 못했던 사소한 점이었다.

'이거, 혹시?'

'피...?'

'설마, 마왕의?'

확실했다.

뒤늦은 깨달음.

비로소 느껴지는 섬뜩함.

그 순간, 김장철이 저장고 벽면을 손으로 짚었다. 그의 입가에 사나운 미소가 맺혔다. 저장고 내부의 벽과 천장에 야물딱지게 뿌려둔 자신의 혈액이 감지되었다.

"내가 말했잖냐."

한결 짙어지는 난폭한 미소.

거친 수확을 앞두고서 번득이는 눈동자.

"너희를 시작으로 다 솎아내 버릴 거라고."

...파츠직-!

김장철이 마력을 일으키는 순간.

벽면과 지붕에 뿌려진 그의 혈액이 농약 치듯이 거친 스파크를 방출했다.

18화. 맞고 자란 싹이 아름답다 (2)

...파츠직!

전기가 찌리릿.

백만 볼트 통닭구이.

우리 동네 전기구이 통닭집 이름이었지.

두 마리에 5천 원.

남들은 싸다던 가격.

우리 집 형편엔 숨 막히던 가격.

그래도 할머니 칠순 때는 먹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고 해야 할까. 그런데 어째서 오늘따라 유독 그 통닭 생각이 나는 걸까.

지금은 내가 직접 지지는(?) 입장이 되어서 그런가.

"...."

라고 생각하며 김장철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상황을 재빠르게 파악했다.

'됐다!'

방금 벽을 짚은 자신의 손.

이 손바닥에 미리 상처를 내어 두었다. 거기서 흘러나온 혈액으로 블러디 라이트닝을 사용했다. 강렬한 스파크가 벽에 미리 잔뜩 뿌려둔 혈흔을 따라 번졌다.

 

...파크츳!

 

벽을 따라.

천장을 타고.

곳곳에 스몄던 삼면귀를 향해.

강렬한 전격의 권능이 뿌려졌다.

'...!'

삼면귀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자신들이 어떤 실수를 했는지, 자신들이 어떠한 착각을 했는지, 비로소 깨달았지만 사태는 이미 너무나 늦은 후였다.

'미, 미친...!'

'우리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줄 알았더니!'

'...반대였어!'

'마왕 놈, 우리를 너무 잘....'

'...크하아아아아악!'

나름 마왕을 농락하겠답시고 벽면과 지붕으로 스며들었던 삼면귀들이 일제히 고통에 몸부림쳤다. 빠져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한도를 초월한 강렬한 타격이 모든 행동의 자유를 앗아갔다.

영혼의 본질마저 태우는 듯한 충격.

그 어떤 항거도 불가능할 타격.

"...!"

심대한 타격을 받은 삼면귀들이 지붕과 벽면에서 떨어져 나왔다. 마치 졸지에 에프킬라 샤워(?)를 당한 모기처럼, 바닥으로 우수수 널브러져 꿈틀거렸다.

덕분에 김장철은....

'어?'

흠칫했다.

그리고 심각한 의문을 느꼈다.

'이놈들, 왜 안 죽었지?'

그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삼면귀들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삼면귀들이 화답하듯 바닥에서 경련했다.

금방 죽을 것 같지만, 그래도 죽지는 않은 모습.

게임 용어로 말하자면 '딸피'인 상태.

그걸 보자마자 김장철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ㅈ됐네?'

한 번에 모조리 죽일 수 있을 줄 알았다.

한데 아니었다.

이유는?

두 가지로 추측이 가능했다.

'아직 내가 크레도스의 마력을 20퍼센트만 사용할 수 있어서... 제 위력이 안 나온 건가. 그리고....'

전격이 벽면과 지붕을 타고 흐르며 위력이 분산된 것 같았다.

하여 삼면귀들이 일격에 죽지 않았다.

그럼 다시 라이트닝을 쓸까?

아니.

'방금 일격으로 벽이랑 지붕에 뿌려둔 혈액이 다 탔어.'

그건 1회용이었다.

재활용이 안 된다.

그리고....

"...카하아아아악!"

딸피 상태로 바닥에서 꿈틀거리던 삼면귀들이 괴성을 질러댔다. 전신을 벌떡벌떡거리며 칼침 맞은 아나콘다처럼 날뛰기 시작했다. 색도 붉어졌다.

김장철에겐 낯설지 않은 현상이었다.

'식령.'

 

까드득!

 

김장철은 이를 갈았다.

'식령'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자마자 땅을 박찼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식령으로 변이를 일으키는 삼면귀에게 달려들었다. 놈의 머리 셋을 연달아 두드렸다.

 

뻑! 퍼컥! 빠각!

 

"...케헥!"

식령으로 변이 중이던 삼면귀가 막타(?)를 먹었다. 마침내 연기처럼 흩어지며 소멸했다.

그러나 나머지 놈들은 아니었다.

"캬하아아악!"

"크르륵! 카륵!"

무력하게 경련하던 삼면귀는 이제 없었다. 대신 이곳에는 107마리의, 딸피 상태에서 폭주하는 식령만이 드글거릴 뿐!

"...!"

심각하다.

이건 안 좋다.

보자마자 김장철은 깨달았다.

'하필이면, 어째서 라이트닝이 딱 식령 만들기 좋은 정도로 들어간 거냐....'

아예 죽이든가.

차라리 좀 덜 아프게 들어가든가.

그랬다면 이놈들, 식령이 되진 않았을 텐데.

하지만 이제 와서 한탄을 한들 바뀌는 것은 없다. 최대한 빠르게 이 상황을 수습하는 것이 최선일 뿐.

 

콰작!

 

김장철은 저장고 문을 부수고 나왔다.

그리고 저장고를 포위하고 있던 농병대원과 바할 등을 향해 외쳤다.

"식령이다! 전원! 전투 준비!"

1성 군단병의 고유특성인 식령.

그걸 모르고 있다간 당한다.

식령은 그런 존재다.

식령 상태가 되면 이성이고 뭐고 다 사라진다.

오직 맹목적인 본능만 남아서 주위의 생명체를 탐지한다. 그리고 탐지된 생명체의 몸을 빼앗는다. 빙의해서 목표물의 육신을 강탈하고, 생명력을 앗아간다.

그러면?

희생자는 급속도로 노화를 겪는다.

대신 식령은 체력을 빵빵하게 채운다. 심지어 희생자의 특성 한 가지를 훔쳐낸다. 그러고서야 희생자의 육신을 빈껍데기 버리듯이 내팽개치고 빠져나오게 된다.

체력을 완전히 풀피까지 채우고서.

"...."

그것이 1성 군단 지역, 망자의 단애 공략 난이도가 지랄맞은 이유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지금, 놈들의 그 특성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었다.

"카하아아악!"

"...흐카학!"

완전히 변이를 마친 107마리의 식령들이 사방으로 날뛰기 시작했다. 근거리에서 탐지되는 탐스러운 생명력. 농병대 마족 청년회의 싱싱한 생명을 감지하고 달려들었다. 한 입이라도 더 뜯어먹으려는 피라냐 떼처럼.

김장철을 향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키햐아아악!"

"이런 미친! 썬더!"

 

빠작!

 

김장철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식령 일곱 마리를 순식간에 처리했다. 놈들의 공격 패턴은 이미 줄줄이 꿰고 있었다. 덕분에 아무 피해 없이 일곱 마리를 정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머지 녀석들은?

'괜찮을까?'

걱정스러운 심정.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발견할 수 있었다.

"바할! 싸운다아!"

 

후콰하하학-!

 

바할의 무식하게 큰 쌍날도끼가 공간을 통째로 휩쓸었다. 횡으로 몰아친 무식하고도 파괴적인 공격에 식령 네 마리가 손에 손잡고 승천을 체험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우리는! 뭐다?"

"농병대! 청년회!"

"우리는! 어떻다?"

"큐티 앤드 섹시!"

 

콰아앙!

 

곳곳에서 농병대 청년회원들이 날뛰고 있었다. 자신들을 잡아먹을 듯이 달려드는 식령을 향해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식령보다 더 악귀 같은 얼굴로 맹공을 퍼부었다.

덕분에 살기등등하게 달려들던 식령들은....

"카하아아악... 케엑?"

 

...투확!

 

농병대 청년 마족이 입으로 뿜어낸 불길에 속절없이 녹아내렸다. 또 어떤 식령은 농병대원의 손톱에 갈기갈기 찢겼다. 심지어 역으로 물어뜯기는 식령도 보였다.

즉, 농병대원들은 식령들에게 결코 밀리지 않았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압도하고 있었다!

그걸 보며 김장철은 새삼스러운 사실을 깨달았다.

"아."

그러고 보니까 우리 농병대원들.

게임에서도 엄청 고렙 몹이었지.

사실은 여기 '차빈 데 우안타르'가 마왕 크레도스의 직할령이니까. 게임에선 마지막 스테이지, 그러니까 1성주의 망자의 단애보다 상위 난이도의 구역이니까.

식령이고 뭐고.

농병대원들이 쉽사리 밀리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 제피로스는?'

문득, 잔소리만 틱틱 던져대는 부관 놈이 떠올랐다. 녀석의 레벨이 고작 15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함께.

'어디 있지?'

김장철은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주위를 살폈다. 그런데 제피로스가 보이지 않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바할 옆에 딱 붙어 있었는데. 계속 그렇게 있으라고 명해뒀는데. 이 상황에서 대체 어딜 간 걸까.

"이봐! 제피로스는?"

바할에게 달려가 물었다.

식령 셋을 짓밟는 데 열중하던 바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바할, 모르겠다!"

"야! 네가 모르면 어떡해!"

"하지만 바할! 열심히 싸우다 보니까 모르겠다!"

"싸우기 전에는? 네 옆에 있긴 했냐?"

"그렇다!"

"그럼 싸운 직후엔?"

"모른다! 바할! 이놈들이 달려들길래 도끼 휘둘렀다! 오랜만에 싸워서 즐겁다!"

"...."

김장철의 표정이 굳었다.

싸우기 직전까지는 바할의 곁에 찰싸닥 붙어 있었다는 제피로스. 그리고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앞뒤 안 보고 도끼를 푸확 휘둘러 버렸다는 바할.

그럼....

'설마.'

제피로스 녀석, 바할의 공격에 휩쓸린 건 아니겠지?

'그럼 안 되는데.'

성가시긴 해도 그나마 마왕군 중에서 믿을 만한 두뇌가 제피로스였다. 게다가 호시탐탐 이쪽의 목숨을 노리곤 하는 사천왕에 비하면 함께 있어도 안심이 되는, 몇 안 되는 말동무이기도 했는데.

'젠장.'

초조해졌다.

다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바할의 도끼질에 동강 난 제피로스의 몸뚱이 조각 같은 건 근처에 보이지 않았다. 대신 다른 요상한 것이 눈에 띄긴 했지만.

'...으음?'

저만치.

서른 걸음쯤 떨어진 곳.

그곳의 바닥에서 뭔가가 반짝거리는 게 보였다. 은근 익숙한 실루엣. 안경이었다. 한쪽 알이 박살 난.

 

타앗!

 

보자마자 그쪽으로 뛰었다.

확실하다.

제피로스가 쓰던 안경이다.

'그럼 녀석은?'

바할이 싸우는 지점.

안경이 발견된 장소.

둘 사이를 잇는 직선.

그쪽으로 쭈욱 달려갔다. 사방을 둘러보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간절하게 바라는 심정으로. 덕분에 곧 발견할 수 있었다.

식령에게 잡아먹히기 직전인 제피로스를.

"...!"

이마에서 피를 흘리는 제피로스.

아마도 바할의 공격에 휘말린 거였겠지. 그 상황에서 가까스로 반갈죽, 아니, 치명상을 면하고, 대신 여기까지 날려와 추락한 듯했다.

그런 상태에서 식령의 눈에 띄어 버렸던 걸까.

"제피로스!"

달려가며 외쳤다.

녀석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녀석의 창백한 얼굴. 거대하게 벌어진 식령의 아가리가 녀석을 통째로 삼키기 직전이었다.

'미친!'

늦었다.

곧 먹힐 판국이다.

그런데 너무 멀다.

구하고 싶은데.

살려야 하는데.

'블러디 라이트닝? 아니. 멀어. 범위 밖이다. 게다가 이미 식령과 제피로스가 너무 붙어 있어서 자칫 제피로스까지 당할 수 있어. 그러면... 어떻게?'

힘껏 달렸다.

머리를 굴렸다.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아직은 너무나 먼 거리.

잡아먹히기 직전인 제피로스.

녀석을 구할 방법이 없을까.

구하고 싶은데.

도저히 방법이.

'젠장!'

다급해졌다.

뭐라도 해야 한다.

어떻게든 타격을 줘야 한다.

식령은 사납지만 딸피니까.

한 대만 제대로 때리면 되니까.

그러니까....

급한 김에 손을 뻗었다.

바닥의 아무거나 주워들었다.

힘껏 내던졌다.

"제발-!"

 

콰하학!

 

김장철이 급한 김에 주워든 물건.

짱돌인 줄 알았지만 사실은 다른 물건.

저장고 근처를 굴러다니던 감자 덩이가 힘차게 날았다. 절박한 심정이 담긴 포심 패스트볼의 궤적을 그려냈다. 제피로스를 완전히 잡아먹기 직전이던 식령의 뒤통수에 아름다운 스트라이크존을 형성하며 꽂혔다.

심지어 머리 셋을 쓰리 쿠션으로.

빠빠박!

"...카학?"

뜻밖의 막타(?)가 가해진 그 순간.

엄연한 '생명체'인 감자 덩이에 식령이 반강제로 빙의되어 상큼하게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츄릅!

19화. 맞고 자란 싹이 아름답다 (3)

 

"...카학?"

뜻밖의 막타가 가해진 그 순간.

식령이 되어 날뛰고 있던 삼면귀 71호는 저도 모르게 여섯 개의 눈을 부릅떴다. 뒤통수에 가해진 충격. 덕분에 0.1초쯤 아주 잠깐 돌아온 제정신. 실낱같은 이성 속에서 느낀 위기. 그리고 계산까지.

'나... 이대로 소멸하는 거야?'

그럴 것 같다.

식령 상태는 강력한 만큼 불안정하니까. 톡 건드리면 부러지는 칼날과도 같으니까. 그런데 불의의 일격을 맞아 버렸다. 뒤통수에 제대로. 머리 셋에 한꺼번에.

엄청난 대미지가 느껴졌다.

위기감도 함께 느껴졌다.

불현듯 두려워졌다.

'또 죽는 거... 싫은데....'

먼 과거, 한때 버려진 땅을 주름잡던 마족 시절의 죽음이 떠올랐다. 고통스러웠다. 한데 오늘 다시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니. 이걸로 완전히 끝일 거라니. 싫었다. 어떻게든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한데 그때였다.

'...어?'

사라지기 직전인 영혼의 불꽃. 그 끝자락에서 삼면귀 71호는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그리고 뜻밖의 희망을 느꼈다.

방금 자신의 뒤통수를 쓰리 쿠션으로 강타했던 물체로부터였다.

'생명력이... 느껴진다!'

아주 희미하고 미미한 생명력이었다.

종류가 뭔지는 모르겠다.

알아볼 겨를도 없었다.

다만 확실했다. 이거라면 살 수 있다고. 완전한 소멸은 면할 수 있을 거라고.

 

...츄르릅!

 

작고도 유일한 희망을 감지한 순간, 삼면귀 71호는 자신의 뒤통수를 강타한 '생명체'에 깃들기로 결심했다. 실행했다. 식령으로서의 본능을 한껏 발휘했다.

거칠고 사납게.

잔학하게.

대상의 생명력을 착취하기 위한 빙의를 감행한 것이었다.

 

퍼엉!

 

삼면귀 71호가 감자에 깃들었다.

그리고 톡 데구르르 떨어졌다.

'됐다!'

71호는 환호했다.

성공이다.

어쨌건 생명체에 빙의하는 데에 성공했으니까. 이제는 회복을 위해....

'흐으읍! 카하아아악!'

감자의 생명력을 한껏 빨아들였다.

졸지에 식령에게 육신(?)을 빼앗긴 감자가 강제적이고도 급진적인 노화를 겪었다. 덕분에 삼면귀 71호는 어느 정도의 생명력을 회복했다. 생명력 착취 대상인 감자로부터 특징 하나까지 흡수했다. 그리고 미련 없이 감자를 버리고서 빠져나왔다.

 

...콰학!

 

생명력을 회복하며 감자에서 뛰쳐나온 삼면귀 71호가 기세등등하게 솟구쳤다. 그리고 정확히 1초 후에 바닥으로 하찮게 떨어졌다.

 

톡, 데구르르....

 

그걸로 끝이었다.

그가 감자로부터 흡수한 특성.

식물인간, 아니, '식물유령' 상태가 되어 버린 까닭이었다.

"...."

움직이지도 못하게 된 삼면귀가 당황했다. 그걸 지켜보던 김장철은 더 당황했다.

"엥?"

조금 어이가 없어졌다.

'뭐지.'

눈을 끔벅끔벅. 김장철은 방금 자신이 급한 김에 던졌던 감자덩이와, 그 옆에 나란히 식물유령 상태가 되어 반듯하게 누워 있는 삼면귀 71호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천천히 다가갔다.

"야?"

"...."

"어이?"

"...."

"대답도 못 하냐?"

 

찰싹! 찰싹!

 

옆에 쪼그려 앉아서 확인차 싸다구도 가볍게 때려보았다. 하지만 졸지에 식물유령이 된 삼면귀 71호는 전혀 반응하지 못했다.

"하. 하핫?"

김장철은 그만 웃어 버렸다.

비로소 상황을 조금 알 것 같았다.

자신이 급한 김에 던졌던 감자 덩이.

요 작은 알맹이가 막타를 친 것도 모자라, 식령이 환장하는 생명체로 판정이 된 것 같다고. 마치 ㅍ켓몬 가두는 ㅍ켓볼처럼, 식령을 쏙 흡수해 버린 듯하다고.

'이게 말이 돼?'

누군가가 이야기를 해줬다면 절대 안 믿었을 것이다.

생각할수록 헛웃음이 나왔다.

"그나저나, 괜찮나?"

"...예, 마왕이시여."

제피로스도 황당해하는 기색이었다. 녀석을 일으켜주었다. 다행히 녀석은 크게 다친 곳은 없는 듯했다.

비로소 김장철은 마음을 놓았다.

'다행이다....'

어디까지나 자신의 지시를 받고 움직이던 제피로스였다. 만약 녀석이 여기서 죽거나 크게 다쳤다면?

그건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이 된다. 자신은 마왕이고, 마왕은 마족의 왕이며, 왕은 리더이고, 리더는 책임을 지는 사람인 거니까.

'정말 다행이야.'

대학원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자신이 겪은 교수들은 대체로 책임을 지지 않았다.

자신을 믿고 따르는 연구원들을 진심으로 아끼는 경우?

거의 없었다. 그저 도구로만 여겼다. 자신의 명성을 편리하게 유지시켜주는 일꾼. 혹은 눈먼 연구비로 배를 채울 수 있게 해주는 노예.

"...."

안 그런 분들도 있다는 거 안다. 존경을 받을 훌륭한 분들이 많다는 사실도 안다. 하지만 어쩌겠어. 자신은 운이 없었는데. 그런 분을 만나지 못했는데.

'나는 그런 놈들처럼 굴지 말자.'

나를 따르는 녀석들이 귀하다는 거, 마음에 새기며 살자. 그러니까... 제피로스 요 녀석을 구하기 위해 진정 귀하디귀한 감자를 무려 한 덩이나 희생시켰다는 사실에 너무 가슴 아파하지 말자.

'...크흑!'

상념과 다짐의 끄트머리에서 김장철은 새삼 쑴펑쑴펑 솟구치는 비애감을 느꼈다. 제피로스를 구해서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못내 아쉽고 끝내 아까웠다.

'아이고 내 감자!'

무려 한 덩이다.

이걸로 소금을 쳐서 찐감자를 만들었다면? 얇게 썰고 튀겨서 감자칩을 만들었다면? 하다못해 추뇨로 만들어서 아무 마족에게나 먹였다면?

'유용하게 쓰였겠지. 해피 포인트가 돼서 나한테 알차게 적립됐겠지. 그런데 그게... 날아갔네. 저 멀리. 영원히.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식령에게 빙의돼서 생명력을 빨려 버렸다.

급속 노화까지 겪어 버렸다.

아마도 망가졌겠지.

처참하게.

끔찍하게.

이렇....

'...어?'

감자가 겪었을 참상(?)을 생각하며 침통한 심정으로 감자를 살피던 김장철은 멈칫했다. 그리고 이 순간 자신이 내뱉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던 한마디를,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싹이... 났네?"

처음엔 잘못 본 줄 알았다.

한데 보고 또 봐도 진짜였다.

자신이 던졌던 감자.

식령에게 먹혔던 감자.

급속 노화를 겪은 감자가....

싹이 났다!

"...허?"

이거, 진짜인가.

믿기지가 않았다.

'싹은커녕, 완전 휴면상태였을 텐데?'

저장고의 모든 감자가 그러했다. 하여 조금이라도 휴면을 일찍 깨우려고 애를 쓰고 고민하던 차이기도 했다.

이 감자도 마찬가지였다. 아까 던지려고 집어 들었을 때는 그저 맨들맨들하기만 했으니까.

그런데....

'고작 1분도 안 되는 그 사이에... 휴면이 끝나고 싹이 났다고?'

휴면이 타파되었다.

감자의 생육이 재개되었다.

심지어, 그걸 넘어서서 싹까지 돋아났다!

감자를 땅에 심기 전에, 일부러 싹을 어느 정도 키운 뒤에 파종을 함으로써 흑지병 등의 병원균 침입을 방지하는 농사방법인 '산광최아(散光催芽)'의 단계까지 단숨에 도달한 것이었다!

'이건....'

미쳤다, 미쳤어.

그런데 대체 어떻게?

"...."

믿기지 않는 상황 속에서 김장철의 전두엽 대뇌피질이 풀가동 되었다. 그가 자신의 손아귀 속 싹이 자라난 감자와, 여전히 식물유령 상태로 바닥에 누워 있는 삼면귀 71호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덕분에 퍼즐이 착착 맞추어졌다.

'아마도.'

삼면귀 때문이겠지.

놈이 식령 상태로 감자에 깃들어서.

생명력을 빨아들이며 강제로 노화를 시켜서.

"...."

휴면상태는 생리작용이 중지되어 있다는 뜻.

노화란 생리작용이 강제로 가속된다는 뜻.

덕분에....

'휴면 중이던 감자의 생리작용이 노화를 겪으며 강제로 가속됐고, 덕분에 휴면이 끝나고 산광최아까지 도달한 거라고?'

엉뚱한 가설이 세워졌다.

말이 안 된다.

그런데 말이 된다.

어이가 없지만 확인은 해봐야겠다.

김장철은 주위의 상황을 살폈다.

아직도 진압되지 않은 몇몇 삼면귀가 식령 상태에서 날뛰고 있었다. 농병대 마족 청년회원들은 놈들을 때려잡기 위해 더 열심히 날뛰는 중이기도 했다.

 

스윽.

 

그들에게 다가갔다.

바닥을 둘러보았다.

난리통에 바닥으로 흩어진 감자덩이들이 보였다.

하나같이 휴면 상태로 매끈매끈한 녀석들이었다.

그래.

딱 좋다.

확인을 해보기에는.

"...."

집어 들었다.

신중하게 조준했다.

그리고 힘찬 와인드업!

 

...투확!

 

마왕의 육체가 지닌 힘을 싣고서, 감자덩이가 시속 170킬로미터의 속도로 빨랫줄처럼 팽팽하고 아름다운 궤적을 그렸다. 공간을 갈랐다.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이 봤다면 당장 고백부터 박았을 완벽한 로케이션을 선보이며 꽂혔다.

심지어 쓰리 쿠션으로.

 

빠바빡!

 

"...!"

난데없이 뒤통수를 맞은 또 한 마리의 식령, 삼면귀 23호가 존재감의 위기를 느꼈다. 소멸만은 면하고 싶다는 공포, 절박감, 그 속에서 결단을 내렸다. 감자에 깃들었다. 생명력을 빨아들였다. 감자를 노화시켰다.

그러자 감자에서 싹눈이 돋아났다.

 

...뿅!

 

"만세에-!"

곧장 후다닥 달려가서 그 모습을 확인한 김장철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또 다른 감자를 집어 들었다.

아직 남은 식령은 총 다섯 마리.

놈들을 향해 감자를 투척했다.

그랬더니....

 

뿅! 뾰뵤뵹! 뾰뵹!

 

감자에 맞은 식령들이 앞서와 똑같은 과정을 거쳤다. 그 결과, 놈들은 식물유령이 되었고, 감자에는 예외 없이 싹이 자라났다! 무럭무럭! 쑴펑쑴펑!

 

부들부들....

 

자신이 짐작한 엉뚱한 가설.

그 결과를 거듭 확인한 김장철의 어깨가 딱히 있어 본 적도 없는 썸녀한테 온 메시지 진동처럼 파르르 떨렸다. 격정을 참을 수가 없었다.

'휴면.... 그놈의 휴면....'

당장 감자를 심고 싶었는데.

그래야 조금이라도 빨리 이곳의 기아를 해결할 수 있는 건데. 사천왕과 마족들의 불만이 잠재워지고, 인간계를 침공하지 않을 수 있는 건데. 결과적으로 자신의 목숨도 안전해지는 건데.

그놈의 휴면 때문에 심을 수가 없었다.

답답했고, 초조했다.

한데 이제는 아니다.

싹이 났다.

물리적인 휴면 타파 방법?

화학적인 휴면 타파 이론?

자신이 그동안 알아 왔던 그 어떤 방법보다도 빠르고, 확실한 새로운 비법(?)이 밝혀졌다.

'나이스. 초필살 나이스!'

이거면 된다.

이제는 할 수 있다.

감자를 심을 수 있다.

방금 찾아낸 이 방법을 동원한다면, 당장 오늘이라도 저장고 모든 감자의 싹을 틔워내고 밭에 폭폭 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야."

김장철이 몸을 돌렸다.

거친 전투 직후에 숨을 고르는 농병대 마족 청년회원들을 돌아보았다.

"다들, 지금 당장, 저장고에 있는 감자 싹싹 다 챙겨라."

"예?"

농병대원들이 의아한 듯이 되물었다.

김장철의 입가에 보람차고도 사악한 웃음꽃이 활짝 피어났다.

"그거 전부 싸들고 1성주 놈이 있는 단애로 쳐들어... 아니, 싹 틔우러 가자고."

20화. 감자 싹은 비트를 싣고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