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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 - 20-30

20화. 감자 싹은 비트를 싣고 (1)

 

"막다른 길에! 몰리면?"

"옷을! 벗어라!"

"나아갈 길이! 막히면?"

"옷을! 벗어라!"

"그러면! 우리는?"

"쑴펑쑴펑! 나아가리라!"

김장철이 물었다.

농병대가 외쳤다.

그리고 김장철이 더욱 소리높여 물었다.

"다들! 지난 며칠의 맹훈련을 기억하고 있겠지?"

"물론입니드악!"

"엎드려!"

"엎드려억!"

처척!

김장철의 외침이 떨어지기 무섭게, 감자 빵빵한 배낭을 짊어진 300인의 농병대가 팔다리를 좌악 펴고서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마치 무더운 여름날, 찹찹한 바닥 장판과 혼연일체가 되어 몸을 식히는 듯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장판이나 타일 깔린 방바닥이 아니었다.

마왕성 직할령의 끝자락.

1성주의 구역인 망자의 단애 초입, 깎아지른 절벽 꼭대기에 모두가 몸을 엎드린 순간.

"탈의!"

김장철이 외쳤다.

농병대 청년회 300인이 일제히, 몸뚱이에 유일하게 걸치고 있던 옷, 아니, 속옷을 벗었다. 다만 그들은 손을 쓰지 않았다. 꿈틀거리는 둔근과 허벅지의 움직임만으로 뱀이 허물 벗듯 무릎 아래까지 벗어내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스르륵.

 

바닥에 엎드려 있던 농병대원들의 몸이 절반 가까이 땅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지면의 흙을 헤치면서?

아니.

흙은 조금도 밀려나지 않았다.

마치 유령이 벽을 통과하는 듯한 광경.

바로 김장철이 파도치던 해안 암벽에서 버그를 이용해 선보였던 '글리치'였다.

김장철이 또 외쳤다.

"몸 뒤집으면서 착의!"

 

...꿈틀!

 

모두가 외침에 반응하여 다시금 꿈틀거렸다.

인벤토리 창을 이용해서 순식간에 옷을 입고 벗는 김장철보다는 한참 느렸지만, 그럼에도 다들 꿈틀거리는 동작만으로 몸을 파전처럼 뒤집으며 속옷을 입는 데에 성공했다.

그러자 모두의 몸이 절벽 속으로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물론 김장철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제부터 구호에 맞춰서! 벗고! 입으며! 나를! 따른다!"

"...읍읍!"

농병대원들이 숨을 참으며 묵음으로 함성을 내질렀다.

선두에서 그들을 인도하며, 김장철은 내심 주먹을 불끈 쥐었다. 됐다. 된다. 지난 며칠의 특훈이 효과가 있다. 이러면 할 수 있다.

바로....

 

 

"단애의 중심부를 한 번에 치는 거다."

"...예?"

며칠 전이었던가.

식령에게 감자를 던져 맞추면 감자의 싹을 틔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날이었던가.

이쪽의 말에 의아한 듯, 제피로스가 눈썹을 치켜떴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무슨 말씀이긴."

당시 이쪽은 피식 웃음을 머금었던가.

그리고 이렇게 대꾸했던 것 같다.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 단애를 정벌하면 두 가지 큰 이득이 생기게 됐어. 하나. 단애 바깥의 버려진 땅에서 대기하고 있을 2성주, 3성주, 4성주와 연락을 재개할 수 있지. 둘. 감자 싹을 초고속으로 틔울 수 있어. 그런데 안 쳐들어갈 이유가?"

"...하지만 방금 말입니다. 단애의 중심부를 한 번에 친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요."

"어. 그랬지."

"그게 가능합니까?"

"당연히 불가능하지."

다시금 피식 흘러나오는 웃음.

"야. 생각을 해봐라. 그게 가능하겠냐? 지형은 지랄맞지. 거길 지키는 놈들은 죄다 절벽이든 암굴이든 뽁뽁이든 다 통과하는 유령이지. 그런데 거길 정면으로 쳐서 중심부까지 들어간다? 공성전의 신도 그건 불가능해. 그게 말이 되나? 응?"

"당연히 안 되는데, 된다는 듯이 말씀하시니까 걱정이 되어서 말입니다."

"우리 농병대의 미래가?"

"마왕님의 현실감각이 말입니다."

"...."

"하지만 뭔가 방법이 있으니까 그렇게 말씀하신 거겠지요?"

"야. 사람을 말로 팼으면 잠깐 숨은 돌리게 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

"지금 숨 쉬고 계시잖습니까?"

"...뭐, 그렇긴 한데. 쯧. 아무튼-"

말을 말자, 말을 말아.

녀석을 한 차례 흘겨보아주며 말했다.

"내가 해안 절벽을 올라가는 모습을 봤겠지?"

"네."

"어땠지?"

"추하고 망측했습니다."

"...."

"민망하며 구질구질하기도 했지요."

"...."

"어디 가서 저분이 우리 마왕님이라고 말하는 게 일생일대의 흑역사가 되지 않을까 걱정됐을 정도로 말입니다."

"...."

"하지만 나름 파격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이었다고는 말해두고 싶기도 합니다만...."

"팰 거 다 패고 마지막에 뱀발처럼 칭찬 붙이네?"

"솔직하고 냉정한 평가입니다."

"앞쪽의 혹평이? 뒤쪽의 칭찬이?"

"그건 마왕께서 판단하시지요."

"쓰읍. 확. 모가지를."

"해고하시겠습니까?"

"...에휴. 됐다. 됐어. 아무튼, 그 추하고 망측하면서도 민망하고 구질구질한 기술을 농병대에게 가르칠 거다. 그거면 힘겨운 공방전을 치르지 않고도 단숨에 들어갈 수 있어. 단애의 중심부까지."

"혹시 중심부에 있을 무언가를 노리시는 겁니까?"

"정답."

역시 제피로스 녀석의 눈치란.

만족스러운 미소가 절로 나왔다.

"단애의 중심부. 그중에서도 가장 깊은 최심부. 그곳에 빙령의 심장이 있으니까."

"빙령의... 심장이요?"

"그래."

이 세계를 이루는 게임, 팔라딘 오브 블러드를 수없이 플레이하며 접했던 설정을 떠올리며 말했다.

"아마 이름은 들어봤겠지? 1성 군단의 가장 중요한 아티팩트라고 말이야."

"네. 하지만 정확한 용도까지는...."

"1성 군단병들을 속박하는 장치야."

"네?"

"정확히 말하자면, 이 버려진 땅에서 죽는 모든 이들의 영혼을 1성 군단에 속박하는 아티팩트라고 해야겠지."

"그럼, 그 아티팩트를 확보하면...."

"1성 군단병들이 순식간에 성불과 윤회의 길로 돌아가겠지. 즉, 1성 군단을 단숨에 와해시킬 수 있다는 뜻이고."

"1성주가 난리가 나겠군요."

"그걸 되찾으려고 전 병력을 동원해서 우릴 포위하겠지. 그때 다 때려잡는 거야. 놈들이 스스로 모여줬을 때."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물론."

당연히 된다.

이쪽에겐 방법이 있으니까.

그 믿음은 며칠 전에도, 오늘 이 순간에도, 변함이 없다.

 

...푸화악!

 

"흡! 하아!"

김장철은 상념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옷을 입으며 몸을 일으켰다.

바닥의 픽셀을 뚫고서 스르륵 솟아난 그가 드넓은 지하 공동에 우뚝 섰다.

'우리 애들은?'

농병대원들은 잘 따라왔을까.

걱정되는 마음으로 돌아보는 것도 잠시.

 

...푸확! 푸확확!

 

"흡! 파학!"

"허! 파하!"

바닥 곳곳에서 농병대원들이 속옷을 챙겨입으며 힘차게 솟구쳤다. 그리고 새파래진 안색으로 헐떡여댔다.

그 머릿수가 바할까지 포함하여 정확히 301명이 되는 걸 보고서야 비로소, 김장철의 잘근거리던 입매에 안도의 미소가 맺혔다.

다들 잘 따라와 줬구나.

멋지게 해냈구나.

다행이다, 정말로.

'훗. 나란 녀석.'

이게 다 자신이 단애의 맵을 모조리 달달 외우고 있는 덕분이다. 그러니까 300명이나 되는 인원이 침투를 하면서도 경비에게 들키지 않으면서, 중간중간 호흡을 할 수 있을 통로가 적절히 배치된 루트를 짤 수 있었지.

"...."

하지만 자화자찬은 적당히.

김장철은 풀어지려던 마음을 다잡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엄청나게 넓은 지하 공간. 드문드문 밝혀진 창백한 조명을 따라 희미하게 보이는 매끈하고 둥근 천장.

기억 속 모습과 동일한 광경.

망자의 단애의 최심부였다.

"...."

마왕성도 그랬는데. 이곳 세계의 풍경을 화면으로 보던 것과 실제 눈으로 접하는 건 느낌이 많이 다르구나. 잠깐이지만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이곳에....'

그는 열아홉 번에 걸쳐 단애를 샅샅이 헤집고 다녔던 기억을 떠올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가 향하는 공동의 중심부.

그곳에 서리로 뒤덮인 제단이 보였다. 제단 위에서 냉기를 풀풀 뿜어내는 농구공 크기의 정육면체 큐브도 보였다.

1성 군단의 아티팩트, 빙령의 심장이었다.

그걸 향해 다가갔다.

살을 헤집는 한기가 느껴졌다.

개의치 않고 손을 뻗었다.

큐브, 빙령의 심장을 집어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콰오오오오오오오!

 

공동 전체에서 굉음에 가까운 경보가 울렸다. 창백하던 조명이 일거에 검붉게 변했다. 긴장한 농병대원들이 어깨를 움츠렸다.

반면, 김장철은 빙긋 웃기만 했다.

그리고 내심 생각했다.

이제 경보까지 터뜨렸으니, 아마 1성주의 복장도 팡팡 터질 거라고.

물론 그의 예측은 정확했다.

 

 

"집결! 전원... 집결하라!"

 

콰오오오오오!

 

고막을 터뜨릴 듯이 울려대는 경보. 그 사이로 마왕군 1성주, 사르툴의 노호성이 거칠게 울려 퍼졌다.

그의 명을 받은 유령 병사들이 진격했다. 단애의 중심부. 그곳에서도 가장 깊은 심처. 최심부의 공동을 향해서였다.

집결은 순식간이었다.

수천의 유령병사들이 벽을 통과하고, 천장을 내달렸다. 공동에 도착했다.

덕분에 모두가 목격할 수 있었다. 자신들의 1성 군단에게 가장 중요한 보물이 침입자의 손에 들려 있다는 사실을. 그 침입자의 정체가 마왕 크레도스라는 사실 또한.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병력을 집결시킨 1성주는 내심 기절초풍할 노릇이었다. 직접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이야 유령이니까 단애의 모든 지형을 제약 없이 통과할 수 있다지만, 마왕과 놈의 수하들이 어떻게?

"...."

아무리 궁리해도 비결이 짐작도 되지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1성주는 거센 트월킹을 추며 흔들리던 멘탈을 꽉 부여잡았다. 그리고 우렁차게 외쳤다.

"마왕 크레도스, 이 겁쟁이여!"

이쪽의 외침을 들은 걸까.

마왕 크레도스가 한 손을 들어 보였다. 마치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지인에게 손인사를 하는 것처럼, 태연자약하기 그지없게.

"...."

그 모습이 1성주를 다시금 울컥(?)하게 했다.

그가 외쳤다.

"버려진 땅의 모두가 심혈을 기울여 준비하던 인간계 침공을 제멋대로 중지시킨 것도 모자라! 이제는 희망도 기약도 없는 농사를 핑계로 모두를 멸망의 길로 몰아가려는 파렴치하고 배은망덕한 자여! 오늘은 어쩌자고 여기로 들어와 행패를 부리는 것인가!"

 

것인가...! 인가아...! 가아...!

 

모두에게 들으란 듯이 쩌렁쩌렁 외쳤다.

반면, 마왕은 이쪽의 외침에 별다른 대꾸도 하지 않았다. 대신에 마치 보라는 듯이 손에 든 큐브, 빙령의 심장을 가리켰을 뿐.

"...하."

1성주는 코웃음을 쳤다.

마왕 크레도스가 뭘 노리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래. 빙령의 심장을 멈춰서 내 군단을 와해시키려는 것이겠지. 그러니 지금 그토록 기고만장한 것일 테지.'

아마도 승리를 손에 거머쥐었노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마왕은. 망자의 단애를 손쉽게 정벌했노라 자만하고 있을 것이다, 저놈은.

'그 생각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착각이었는지, 곧 깨닫게 해주마.'

 

...까득!

 

1성주가 이를 갈았다.

그리고 눈짓으로 명령했다.

명을 받은 1성 군단병 전체가 즉각 반응했다.

 

키에에에에엑-!

 

삶을 잃은 영혼들.

죽음에 발을 걸친 망자들.

그 수천의 원혼이 공동에 빼곡히 들어찼다. 그리고 마왕과 농병대 일당을 포위했다.

그야말로 쥐새끼 한 마리조차 살려 보낼 생각이 없어 보이는, 잔인하도록 철저한 죽음의 포위망이었다.

"한 놈도 살려두지 말도록."

1성주가 짓씹듯이 말했다.

유령 군단의 스산한 압박이 시작되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1성주는 확신했다.

'오늘 이곳이 네놈의 무덤이 될 것이다, 크레도스.'

확실하다.

마왕 크레도스가 아무리 강력하다 한들, 여기까지 제멋대로 들어왔다가 포위된 이상 절대로 살아서 빠져나갈 순 없다.

제아무리 마왕이라도 고작 300명의 수하로 수천의 유령 군단을 감당할 순 없을 테니까. 군단의 파상공세 앞에선 성난 개미 떼 앞의 덩치 큰 먹잇감이 될 뿐이니까.

'게다가... 네놈은 기껏 손에 쥔 빙령의 심장을 다룰 줄도 모를 테지.'

그건 오직 1성주이자 망자의 주인인 나만이 알고 있는 비법이니까. 크레도스, 네놈은 자신이 빙령의 심장을 제어할 줄 모른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깨닫고는 절망에 빠져 허우적거리겠지.

'그러니 겁도 없이 여기까지 들어오진 말았어야지, 후후후.'

키아아아아악-!

유령 군단의 물결이 마왕 일행을 완전히 뒤덮었다.

1성주가 더없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아니, 웃으려던 순간이었다.

...딸깍?

문득, 그는 유령군단의 물결 속에서 유유히 울려 퍼진, 자신만이 알고 있는, 지금 들려올 리가 없을 거라고 믿었던, 들려와서도 안 되는, 어쩐지 불길하고도 똑 부러지는 소리를 고막으로 접수하게 되었다.

김장철이 빙령의 심장을 완벽하게 제어하는 소리였다.

21화. 감자 싹은 비트를 싣고 (2)

 

딸깍?

온 세상에 울리는 맑고 고운 소리.

빙령의 심장이 제대로 작동되는 소리.

그와 함께, 정육면체 모양인 빙령의 심장 윗면에 빛이 났다. 액정이 켜졌다. 복잡한 고대어 문양이 떠올랐다. 현재의 말로 번역한다면, [잠금해제 패턴을 입력해 주세요] 라는 뜻의 문양이었다.

그걸 본 순간, 김장철은 보글거리는 희열과 함께 살짝 눈을 감았다.

'하아. 나이스.'

다행이다.

내 기억이 정확했구나.

문득, 떠올랐다.

자신이 수없이 플레이했던 게임, 팔라딘 오브 블러드. 이 게임을 19회 진행하면서 열아홉 번을 보았던, 빙령의 심장이 작동하는 모습의 시네마틱 컷씬.

지금도 눈에 선했다.

'1성주 보스전을 클리어하면 자동으로 나오던 컷씬이었지....'

찰칵찰칵, 철커덕철컥, 마치 큐브를 조립하듯, 1성주의 소멸에 반응하여 빙령의 심장이 스스로 제어모드로 진입하는 모습의 컷씬이었던가.

그 과정이 아주 자세하게 나왔더랬다.

그걸 열아홉 번이나 보았다.

덕분에 모든 순서를 외울 수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스르륵!

 

김장철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빙령의 심장 윗면의 패널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그리고 복잡한 잠금해제 패턴을 그려냈다. 오른쪽으로 두 칸, 아래로 한 칸, 왼쪽으로 한 칸, 다시 오른쪽, 왼쪽, 위, 아래, 위, 위, 아래.

그리하여 마침내....

 

...촤앙!

 

빙령의 심장 전체에서 빛이 쏟아져 나왔다. 위쪽 패널에는 더없이 반가운 고대어 문양이 떠올랐다.

해석한다면, [제어모드가 활성화되었습니다] 라는 뜻의 글귀였다.

'됐다!'

해냈다.

그렇다면 이제는?

저지를 때다.

'작동 OFF!'

제어모드 활성화를 확인하자마자 손을 움직였다. 화면 오른쪽에 있는 두 버튼 가운에 아래쪽의 것을 눌렀다.

 

딸깍!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빙령의 심장이 정지됩니다.]

 

...키유으우우웅... 시무룩....

 

빙령의 심장에서 쏟아져 나오던 빛이 사라졌다. 한여름 방구석에 에어컨 대신 가보로 두고 싶어질 만큼 쑴펑쑴펑 뿜어져 나오던 냉기도 끊겼다. 작동이 중지된 것이었다.

동시에 그동안 빙령의 심장이 1성 군단의 유령 병사들에게 행사하던 강력한 속박의 힘이 사라졌다.

그 파급력은 엄청났다.

"...카하악?"

"크그그하앙...?"

김장철과 농병대를 향해 돌진하던 1성 군단의 유령 병사들이 모조리 공중에서 급정거를 시전했다. 그리고 한 놈의 예외도 없이 똑같은 순간에 똑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나는... 누구지?'

궁금해졌다.

이상했다.

혼란스러웠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흘러가는가. 이 드넓은 우주에서 나는 어찌하여 육신을 잃은 채로 이곳을 방황하고 있단 말인가. 이것이 옳은가. 이것이 순리인가. 어째서 피자에는 파인애플을 올려야 하는가. 된장찌개에 딸기잼을 넣으면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대체 언제쯤 모솔 신세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그러니까 삶과 죽음은 무엇이 먼저인가. 돌고 도는 세상. 그래도 태어나서 공기는 마셔봤으니까 한잔해. 달디달고 달디단 에스프레소 더블샷 제로 막걸리도 좋잖아.

'그러니까... 나는....'

'죽었어. 분명해.'

'그런데 어째서... 윤회를 안 하고 있었던 거지?'

'아아.... 지옥왕님 진로상담 마렵다.'

'그럼, 갈까....'

 

스르르...!

 

1성 군단 유령 병사들 전원이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이 죽었음에도 구천을 떠돌고 있었음을. 응당 돌아가야 했을 윤회의 고리로 들어가지 않고서, 엉뚱한 이곳에서 방황하고 있었던 것임을.

그러니까, 자신이 성불하여 승천함이 마땅한 섭리임을.

'후우.... 한 많은 삶이었다....'

'다음 생에는 연애, 꼭 해볼래....'

'하지만 지금은 일단 윤회를 하러....'

'가즈아아....'

혼란이 가라앉았다.

마음이 평화로워졌다.

스르르 눈을 감았다.

모든 번뇌와 집착, 여한을 내려놓았다. 깨끗하게 시작될 새로운 삶을 기대하며 스르르 위로 떠올랐다.

깨달음이 불러온 성불과 승천의 과정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어허? 승천하려고? 그건 아직 안 되지!'

1성 군단병들의 심경 변화(?)를 지켜보던 김장철이 빙령의 심장을 다시 매만졌다. 꺼진 패널을 두 번 톡톡 두드렸다. 화면이 켜졌다. 그리고 오른쪽에 있는 두 버튼 중에 위의 것을 야물딱지게 눌렀다.

'너희들이 다 성불하면, 어? 감자 싹은 누가 틔우냐고, 어?'

 

딸깍?

 

[빙령의 심장이 작동합니다.]

 

...키이이이이잉! 빵긋!

 

꺼졌던 빙령의 심장이 다시 빛을 쏟아내었다. 한여름 무더위가 몰려올 때마다 찬양받는 시즌 한정 절대유일신, 에어컨의 창시자 윌리스 헤어블런 캐리어 선생도 기립박수를 칠 냉기가 욕망의 정주행을 하며 무럭무럭 쏟아져 나왔다.

동시에 1성 군단 유령병사들에 대한 속박의 힘도 되살아났다.

"...캬흐악!"

"카그가하각!"

잠깐 정체성(?)을 되찾았던 유령들이 다시금 혼란에 휩싸였다. 성불의 경지에서 강제로 끌려나왔다. 승천이 취소되었다.

'...커그헉, 커걱, 나, 나는...?'

어느 유령병사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힘껏 흔들었다.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방금, 분명, 잠깐이었지만 엄청나게 편해졌던 것 같았는데. 그런데 그게 뭔지 모르겠다. 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저 1성주님의 명령을 받들어 침입자들에게 돌격하고 있었을 뿐인데. 아. 그래. 돌격. 그런데 왜 내가 멈춰 있지? 어서....

'돌격을 해야....'

겨우 자신의 임무를 떠올리는 순간이었다.

"타격조!"

어디선가 우렁찬 외침이 들려왔다.

분명 기억에 있는 목소리였다.

두렵고 존경스러운 1성주님?

아니.

'마왕, 크레도스....'

의 목소리였던 거 같은데.

그런데 타격조라니?

그게....

'무슨 뜻?'

일까, 라며 얼결에 고개를 들었다.

덕분에 유령병사는 보아야 했다.

자신의 마빡을 향해 수직으로 내리꽂혀 오고 있는 뇌수적출기, 혹은 대가리 크러셔, 흔히 곡괭이라고 불리는 물체의 모습을.

 

뽀각!

 

곡괭이가 유령병사의 미간에 꽂혔다.

오직 유령을 타격할 목적으로 마나까지 씌워둔 곡괭이였다.

"...!"

순식간에 쓰나미처럼 덮친 대타격!

유령병사의 의식이 한큐에 삭제되었다.

거의 소멸의 단계에 놓이며 딸피 상태로 허덕이게 되었다. 덕분에 온몸이 붉게 변했다. 격렬한 경련도 시작되었다. 소멸을 앞둔 상태에서 발동하는, 1성 군단병들의 발악적인 패시브 스킬, 식령화가 시작된 까닭이었다.

"...카하악!"

이성이 사라졌다.

탐욕스러운 본능만 남았다.

부족해진 생명력을 채워야 한다.

게걸스러운 눈길로 주변의 생명을 지닌 존재들을 탐색했다.

한데 그때였다.

"투척조오!"

또다시 울려 퍼진 외침.

동시에 알차게 날아오는 감자덩이.

 

...태애앵!

 

탁구공 크기의 야생종 감자 한 덩이가 식령의 옆통수를 태앵 하고 맞추었다.

그 순간, 식령은 느꼈다.

아아. 내 옆통수를 맞춘 생명의 향기.

그렇다.

그것은 분명 생명이었다.

식령이 되어 사나운 본능에 이성을 맡긴 가련한 자신에게 처음으로 손을 내밀어 준 생명, 그 따스한 온기.

이것을 어찌 거부할까.

어찌 밀어낼까.

이리도 향긋한 포테이토의 온정을.

'...그...르륵...?'

그때부터였다.

자신에게 선뜻 접촉(?)을 전개한 생명력을 감지한 식령이 본능에 따라 움직였다.

감자에 깃들었다.

감자의 생명력을 흡수했다.

감자를 쭉쭉 노화시켰다.

감자에 싹이 돋아났다, 뽁↗

 

톡, 토도독....

 

싹이 돋아난 감자가 바닥을 굴렀다.

감자의 생명력을 빨아들이고 식령 상태에서 벗어난 유령병사가 식물유령 상태가 되어 평온한 얼굴로 드러누웠다.

한데 한꺼번에 그렇게 된 유령병사의 숫자가 정확히 150구에 달했다.

"이게, 무슨...!"

나머지 1성 군단병들은 당황했다.

잠깐 정체성의 빡센 혼란을 겪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150구의 동료가 빡, 태앵, 토도독, 하더니 식물유령 상태로 무력해진 까닭이었다.

그러나 김장철은 그들에게 사태를 파악할 틈을 주지 않았다.

'다시 OFF!'

 

딸깍!

 

[빙령의 심장이 정지됩니다.]

 

"...!"

다시금 찾아온 대혼란.

어김없이 시작된 성불과 승천 절차.

하지만 그 마무리는 허락하지 않는 김장철의 더러운 심보까지.

'이번엔 ON!'

 

딸깍!

 

[빙령의 심장이 작동합니다.]

 

"...카하아아악!"

"타격조!"

 

뽀각!

 

"투척조!"

 

태애앵!

 

또다시 생산(?)된 150개의 싹 튼 감자!

그때부터였다.

김장철은 같은 과정을 수없이 반복했다.

빙령의 심장을 껐다가 켰다.

혼란에 빠진 1성 군단병들의 마빡에 곡괭이를 심어주고, 식령이 되어 날뛰기 직전에 감자를 던져 맞추었다.

그걸 반복할 때마다 싹 튼 감자가 쑴펑쑴펑 불어났다.

150개, 300개, 450개, 900개, 1500개....

김장철이 행복해졌다.

하지만 누군가가 말했던가.

내가 슬픈 건 어찌어찌 참을 수 있어도, 내 원수가 행복한 건 절대로 참을 수 없는 법이라고.

"크레도스으...!"

1성주의 심보가 그러했다.

자신의 군단이 순식간에, 어처구니가 없는 형태로 와해되고 있음을 직감한 1성주가 거칠게 달려나왔다. 마왕이 휘두르는 빙령의 심장의 폭거를 막겠다는 듯이. 비장하게. 김장철과 몇 걸음의 거리에서 마주 섰다.

그리고 숨 쉴 틈도 없이 자신의 비기부터 쏟아내었다.

"타핫!"

두 손을 내밀었다.

엄지와 검지를 총 쏘는 모양으로 펼쳤다.

서로 교차해서 사각형을 그려냈다.

'제발, 한 번에...!'

1성주는 간절히 외치며 손가락으로 그린 직사각형의 도형 속에 자신의 적, 김장철의 모습을 조준했다. 담았다. 그의 집중력이 최고조를 찍었다.

그리고 마나로 김장철의 모습을 찍었다.

 

찰칵!

 

'됐다!'

1성주의 눈길에 잔혹한 빛이 떠올랐다.

그 직후, 1성주의 모습에 변화가 일어났다.

 

...꿀렁!

 

전신이 출렁거렸다.

액체처럼 흐물거리며 무너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강대한 마나의 스파크와 함께 일어섰다.

김장철, 아니, 김장철이 깃든 크레도스의 모습을 하고서.

"...크하아악!"

마왕의 육체를 고스란히 복사한 1성주가 사나운 포효를 터뜨렸다. 그런 그의 눈길은 이미 거친 환희와 난폭한 확신으로 젖어 있었다.

'했다, 해냈다, 이 멍청한 크레도스 놈! 크하핫!'

이제는 이겼다.

1성주는 확신했다.

이유는 지극히 간단했다.

'나는 복사한 순간의 상대가 발휘하는 육체적 능력을 100퍼센트의 컨디션 상태로 항상 유지하니까!'

그것이 자신의 비기였다.

또한, 그것이 이 비기의 공포스러운 점이었다.

'하지만 크레도스! 네놈은 아니겠지! 매 순간 100퍼센트의 컨디션을 유지할 수는 없겠지! 누구에게나 그것이 당연한 법!'

어떤 존재도 그럴 수가 없다.

반면 자신은?

그걸 해낼 수 있다.

그 상태에서 싸운다면?

무조건 필승이다.

'그렇다고 네놈이 몇 초 사이에 갑자기 강해질 수도 없는 노릇이겠지. 그러니 빙령의 심장을 손에 넣었다고 해서, 어찌어찌 그걸 조작할 수 있게 됐다고 해서, 잠깐 방심하여 네 모습의 복사를 쉽사리 허용한 네놈의 패배다!'

마왕 크레도스의 모습을 한 1성주가 웃었다. 그 모습을 보며 김장철도 푸근하게 마주 웃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응, 아니야.'

딸깍.

김장철은 느긋하게 시스템창을 열었다.

그리고 선택했다.

해피 포인트 사용 메뉴를.

그중에서도 능력치 구매 메뉴를.

22화. 해피 포인트의 위력 (1)

 

딸깍!

[당신은 해피 포인트 사용 메뉴를 선택하였습니다.]

[이 창에서 당신은 적립된 해피 포인트를 사용하여 각종 능력치를 구매할 수 있습니다.]

눈앞에 떠오르는 알찬 메시지.

그 아래로 보이는 해피 포인트까지.

[현재 보유 중인 해피 포인트 : 302]

어느새 포인트가 제법 모여 있었다. 무리도 아니었다. 사실 일부러 쌓아두기만 했으니까. 오늘, 지금, 이런 순간에, 이렇게 쓰려고, 차곡차곡 모아둔 거니까.

"...."

깊은 산 속 옹달샘에서 용암처럼 솟구치는 뿌듯함을 느끼며, 김장철은 눈길을 들었다. 눈앞에 떠오른 시스템창 너머, 이쪽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1성주 사르툴이 보였다.

'지금 즐겨둬라.'

아마 다 이겼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자신의 비기인 복제 스킬을 손쉽게 성공시켜서. 이제는 정말로 손쉽게 이쪽을 꺾을 수 있겠노라고.

확신하며 기뻐하는 거겠지.

'하긴.'

그럴 법도 하다.

문득, 게임 속 1성주 사르툴의 특성이 떠올랐다.

놈은 상대의 능력과 장비를 그대로 복사하는 놈이었다. 마치 포x몬에 나오는 메x몽처럼, 조건만 맞으면 상대의 능력을 그대로 베껴서 미러전을 걸어오는 것이었다.

심지어 놈에겐 더 악랄한 설정이 추가로 있었다.

그건 바로....

'AI의 힘을 빌려서, 베껴낸 상대의 최적의 움직임과 대응을 항상 구현한다는 거였지.'

거울은 거울인데 완벽한 거울.

언제나 풀컨디션인 나와의 대결.

포샵에 조명빨까지 다 세운 인생 셀카와, 실제 내 얼굴을 마주 갖다 대는 듯한 절망감까지!

덕분에 처음 만났을 땐 얼마나 당황스럽던지. 그야말로 넘을 수 없는 벽을 만난 기분이었다. 실제로도 그때가 거의 게임을 접을 뻔한 위기였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엔 파훼법을 찾아냈다.

처음엔 꼼수였다.

장비를 다 벗고 들어가서 놈에게 복사를 당한 다음에 장비를 걸치는 식으로 농락했다.

나중엔 실력으로 이겨냈다.

최적의 움직임이고 뭐고, 놈의 반응 자체를 픽셀 단위로 쪼개서 감지하고 판단하며 정면에서 찍어눌렀다.

그리고 지금은?

'더 강한 힘으로.'

부숴 버려야겠다.

 

...파하악!

 

빼곡하게 떠오른 시스템창의 글자 너머로, 돌진해 오는 1성주의 모습이 보였다.

"크레도스으-!"

"...!"

어느새 코앞까지 쇄도해 온 1성주.

놈이 크레도스의 얼굴로 외치며 검지를 휘둘러 왔다.

 

츠카학!

 

놈의 손톱이 죽 늘어나며 공간을 가로로 저며냈다. 핏빛 혈선이 허공에 그려졌다. 이윽고 혈선을 따라 붉은 뇌격이 회오리쳤다.

 

...파츠칵!

 

'흡!'

순간적으로 반응하며 뇌격의 범위에서 물러났다. 아슬아슬했다. 머리칼 끄트머리에서 탄 냄새가 올라왔다. 하지만 1성주는 이쪽에게 쉴 틈을 주지 않았다.

 

후욱!

 

"...!"

어느새 몸을 낮추며 허리 아래로 접근한 1성주.

벌써 두 팔을 치켜올릴 준비를 마친 모습.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크레도스의 패턴과 똑같네.'

역시 놈이 자신만만한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레도스는 마족 중의 최강자, 마왕이니까. 그 모습을 고스란히 복제했으니 승리를 확신했겠지.

'하지만 말이다....'

놈이 간과한 사실이 있다.

그건 바로, 이쪽이 이 세상에서 크레도스를 가장 잘 때려잡는 사람이라는 것.

 

촤학!

 

1성주가 두 팔을 각각 엇박으로 치켜올리며 솟구쳐 왔다.

일견 보기에는 세로로 범위를 휩쓰는 듯한 공격.

하지만 이건 옆으로 피하면 죽는다.

뒤로 피하면 더 확정적으로 죽는다.

수많은 기억과 경험이 말해주고 있다.

그러니까 이건....

 

뻐억!

 

순간적으로 판단을 마친 김장철이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어깨빵(?)으로 1성주의 안면을 끊어쳤다.

"...트업!"

이쪽의 대응이 뜻밖이었던 걸까. 공격이 끊긴 1성주가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그 틈에 김장철은 시선을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눈꺼풀 깜빡으로 클릭!

 

딩동!

 

[당신은 민첩 능력치를 선택하였습니다.]

[50 해피 포인트가 차감됩니다.]

[당신이 활용할 수 있는 민첩의 한도가 10% 상승합니다.]

[민첩 : 20% -> 30%]

[만약 능력치의 한도를 100%까지 달성할 시, 당신은 마왕 크레도스의 해당 능력을 100% 완벽하게 이끌어내어 제한 없이 사용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현재 보유 중인 해피 포인트 : 252]

 

잠깐의 반격으로 만든 숨구멍.

그 틈에 능력치 하나를 잽싸게 올렸다.

그러자 반응이 곧바로 왔다.

 

...후욱!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덕분에 쏟아져 들어오는 1성주의 공세에 한결 더 신속하게 반응할 수 있었다.

"...크아앗!"

놈이 좌우로 빠르게 움직이며 접근했다. 두 팔을 일정한 패턴으로 그리며 휘저었다. 한데 그 손등에 상처가 나 있었다. 상처에서부터 뿌려지는 피. 이쪽을 중심으로 두고서 새겨지는 파괴적 혈선.

그리고....

"블러디 라이트닝!"

파츳!

 

그 순간, 김장철도 똑같이 피묻은 손을 휘둘렀다.

정신력과 마력 능력치를 10%씩 구매하면서.

"블러디 라이트닝!"

마주 외쳤다.

 

...파츠카가각-!

 

김장철과 1성주.

똑같이 크레도스의 모습을 지닌 두 존재.

두 줄기의 블러디 라이트닝이 서로 충돌했다. 그리고 김장철의 전격이 1성주의 것을 압도했다.

 

파츠지지직!

 

"...크하아아아가악!"

강렬한 전격에 휩싸인 1성주가 온몸을 떨었다.

'어떻게...?'

내가, 밀렸지?

똑같은 마력으로 동일한 기술을 사용한 것일 텐데, 정말로 어떻게?

믿기지가 않았다.

이해도 되지 않았다.

물론 그는 꿈에조차 몰랐다.

자신이 복제한 크레도스의 몸이 본래의 능력들을 20%까지만 발휘할 수 있는 반쪽이 상태였다는 사실을. 반면, 자신이 상대하는 김장철은 시시각각 그 능력의 한도를 구매해서 끌어올리고 있다는 사실 또한.

"커그... 헉!"

간신히 기절하지 않은 1성주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러나 김장철은 그를 순순히 놓아둘 생각이 없었다.

 

덥썩!

 

김장철의 손아귀가 1성주의 목을 움켜쥐었다. 동시에 그가 눈짓으로 또 하나의 능력치를 구매했다.

근력이었다.

 

...꽈득!

 

1성주보다 1.5배 우월해진 근력이 불끈!

"커억...!"

버둥거리며 고통스러워하는 1성주.

그때,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딩동!

 

[당신은 해피 포인트를 활용하여 다섯 가지 능력치 모두를 골고루 상승시키고, 즉석에서 적절하게 활용하는 경험을 완수하였습니다. 이는 앞으로 이어질 당신의 무한한 성장의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당신의 성취가 당신에게 새로운 경지의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성장 퀘스트 : 능력치 올려올려! 완료 보상]

[스킬 : 농기구 세트 소환 (이/가) 개화 가능 스킬 목록에 등록됩니다. (개화 비용 : 100 해피 포인트)]

[현재 보유 중인 해피 포인트 : 102]

 

"엥?"

농기구 세트 소환이라니.

제법 뜻밖의 내용이었다.

마치, 이쪽이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누군가가 알고서 일부러 던져준 듯한 스킬이었다.

"...."

혹시 무슨 절대자 같은 존재가 이쪽을 지켜보는 걸까. 혹은 이쪽이 추구하는 목적에 맞춤으로 생성된 스킬인 걸까.

모르겠다.

다만, 지금은 딴생각에 정신을 팔 때가 아니다.

'이건 나중에.'

따로 자세히 살펴보면 된다.

그러니 지금은....

'이놈, 1성주부터.'

슬슬 마무리를 해야 할 때다.

김장철은 오른 주먹을 자신의 갑옷에 갖다대었다. 그리고 뾰족뾰족한 장식이 나 있는 면에 대고 확 비볐다.

주먹 피부가 까지며 피가 났다.

몰려오는 따가움.

그만큼 치미는 울분.

그 마음을 한껏 담아 1성주의 안면을 후려쳤다.

"썬더 펀치-!"

 

빠칵! 파츠직!

 

모든 면에서의 압도, 그 자체.

일순간에 몰아닥친 대타격.

마침내 1성주의 눈이 풀렸다.

'...커, 커억.... 어째...서?'

크레도스가 자신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걸까.

이상했다.

자신은 크레도스의 100% 컨디션을 발휘하는 중인데. 그런데 항상 그럴 수가 없는 크레도스가 어떻게, 이토록 자신을 압도할 수 있는 걸까.

'이겨야... 하는데.... 그래야....'

버려진 땅의 모든 놈들이 굶어 죽을 수 있는데. 그렇게 죽는 모두가 유령이 되어 내 군단에 종속될 텐데.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군단이 강성해질 텐데. 마침내 내가 버려진 땅의 진정한 패왕이자 마왕으로 거듭날 텐데.

억울했다.

스스로가 너무나 불쌍했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1성주가 발악하듯 외쳤다.

김장철의 안면을 향해 힘 빠진 주먹을 휘둘렀다.

 

빠악.

 

처음으로 적중한 공격.

김장철의 고개가 살짝 돌아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츠즈즈즈즈즈....

 

김장철의 천천히 되돌아온 고개가, 착 가라앉은 냉랭한 눈길이, 1성주의 안면에 고정되었다.

"너, 지금 자신이 불쌍하다고 생각하고 있지?"

"...뭐?"

"그렇잖아. 야망을 이루기까지 딱 한 걸음 남은 줄 알았는데. 그게 무너져서. 자신이 불쌍하다고. 맞지?"

"...."

"맞네. 그런데 말이다. 지금 이 순간에 진짜로 불쌍한 사람이 누군지 알아?"

"무슨...?"

1성주는 멈칫했다.

지금 크레도스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혹시 뭐, 저기 있는, 이런 곳까지 목숨을 걸고 용감하게 들어온 300명의 농병대가 진짜 불쌍한 존재들이고 뭐고, 그런 말을 하려는 건가?

'....'

어쩌면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저놈들도 엄연한 생명이니까.

이 빌어먹을 버려진 땅에서 태어났다는 불운, 단지 그 불운을 멍에로 짊어지고서 끝끝내 살아가려 버둥거리고 애를 쓰는 존재들이니까.

저놈들 앞에선 함부로 스스로를 불쌍해할 자격이 없다고, 그런 말을 하려는 걸까. 그것이 마왕이 하고 싶은 말일까.

'나는....'

1성주는 회한에 잠겼다.

그저 이 땅을 지배하고 싶었다.

자신도 마왕의 자리에 오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기회가 없었다.

크레도스를 복제하는 것?

시도부터가 쉽지 않았다.

아니, 거의 불가능했다.

오늘 성공한 것도 크레도스가 방심한 덕분에 이루어진,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여 내심 야망을 포기하고 있었다.

주어진 대로만 살자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기회를 잡게 되었다.

어쩌면 가능할 것 같다고.

될 수 있을 것 같노라고.

잠깐이나마 희망을 품었더랬다.

하여 주어진 본분을 망각하고 이런 일을 벌였던 건가, 나는.

'그럼 그동안의 나는....'

대체 무슨 일을 저지른 걸까.

어떤 일을 저지르려던 거였을까.

자그마한 회한이 1성주의 가슴에 스몄다.

그 순간이었다.

뜻밖의 외침이 1성주의 고막에 콱 박힌 것은.

"누구긴 누구야. 살아보자고 뭐 좀 해보려는데 사방에서 태클 맞아대는 내가 제일 불쌍하지 이 새x야! 내가! 썬더어-!"

 

뻐큥!

 

"...!"

그걸로 끝이었다.

1성주의 뒤통수가 지면에 틀어박혔다.

복제가 풀려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것도 모자라 순식간에 빈사 상태에 놓였다.

"커거...거헉...!"

식령화가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그 순간, 김장철의 손이 튼실한 감자 한 덩이를 보람차게 집어들었다.

23화. 해피 포인트의 위력 (2)

 

감자.

감자는 맛있다.

감자는 알차다.

감자는 예쁘다.

그러니까 감자로 누군가를 패는 건 합법이다.

왜냐고.

맛있고, 알차고, 예쁘니까.

 

빠악!

 

김장철의 손에 들린 감자 덩이가 1성주의 미간에 딱 꽂혔다. 이미 딸피 상태로 식령화 되는 중이던 1성주가 전신을 흠칫 떨었다.

"...!"

그 순간, 1성주는 느꼈다.

'나는....'

이제 끝인 걸까.

여타의 수하들과 달리, 식령화가 진행되었음에도 이성을 완전히 잃지는 않은 1성주였다. 덕분에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끝이다.

더는 방법이 없다.

이미 너무나 큰 타격을 받아 식령이 되어 버렸다. 그 상태에서 감자에 얻어맞았다. 맞자마자 느낄 수 있었다. 감자에 깃들어 있는 생명력을.

하여 배가 고파졌다.

저 생명력이 탐났다.

식령으로서의 본능이 외쳤다.

지금 당장 느껴지는 생명력을 향해 달려들라고. 저 싱싱한 감자를 차지하라고. 생명력을 빨아먹으라고. 그러면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회복할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아니.'

1성주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그는 직감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본능이 외치는 유혹에 넘어가면 안 된다.

이대로 감자에 깃들어 버리면?

'모든 것이 끝나겠지.'

마왕 크레도스는 자비로운 자가 아니다. 하물며 반역을 저지른 자신에게 온정을 베풀까? 아니. 절대로.

'한데 식령 상태에서 회복할 기회를 주기 위해 나를 감자로 내리쳤을까? 아니. 절대로 아니지,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러니까 감자는 함정이다.

돌이켜보면 아까도 목격하였지 않았던가.

'내 군단병들이....'

식령 상태에서 감자에 얻어맞아 식물처럼 드러누워 버리는 광경을 이미 똑똑히 보고 말았다. 그러니까 이건, 자신도 똑같은 꼴로 만들려는 크레도스의 흉계인 것이다.

'나를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신세로 만들려는 것이야.'

넘어가선 안 된다.

감자의 유혹을 참아야 한다.

1성주는 이를 꽉 깨물며 다짐했다.

그러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배가 고프면 냉장고를 찾듯.

배가 아프면 화장실로 가듯.

생명력이 느껴지면 탐하고 싶은 것이 식령의 본능이었다.

유일한 본능.

하여 더욱 강렬한 본능.

본디 본능은 억누르기 힘들기에 본능이라 불리는 것.

'...그으으으윽! 그으읏!'

1성주는 남은 이성을 모조리 끌어모아 본능에 저항했다. 유혹을 거부하려 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감자를 향한 끌림을 느꼈다. 감자는 맛있으니까. 알차니까. 예쁘니까.

'이런... 말도 안... 되는...!'

이렇게 끝날 수는 없다.

1성주는 몰려오는 절망감을 느끼며 발악했다. 그러는 한편으로 탄식하며 깨달았다. 자신의 이성이 패배할 것임을. 결국엔 식령 상태의 본능에 무릎 꿇을 것임을.

'나는....'

이대로 고분고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해야 할까.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꼴이 되어 농락을 당해야 할까.

'...아니.'

그건 싫었다.

차라리 깔끔하게 소멸하는 쪽이 훨씬 나을 것 같았다.

다만....

'혼자 소멸당하는 건... 억울하지.'

 

...까득!

 

1성주가 이를 갈았다.

그리고 두 눈을 빛냈다.

처절한 현실 인식.

뒤이은 비열한 다짐.

'나만... 죽을 수는 없다!'

죽으려면.

이왕 소멸당하는 것이라면.

이곳에 있는 모두를 함께 데려가리라.

결심한 1성주가 고개를 확 치켜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내면을 묶고 있던 최후의 무언가를 풀어 버렸다.

 

...덜컥.

 

그걸로 충분했다.

"...카! 카하아아악!"

1성주의 흰자위가 붉게 물들었다. 눈동자가 사라졌다. 온몸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부풀었다. 마치 풍선처럼. 당장 터질 것처럼.

"...!"

김장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귀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흠칫 떨렸다. 마치 고라니처럼. 당장 차에 치일 자신의 운명을 깨달은 것처럼.

'어 x발?'

식령 상태에서 난데없이 시작된 1성주의 급변화.

김장철은 그걸 보자마자 깨달을 수 있었다.

'이거, 자폭 시퀀스인데?'

확실하다.

열아홉 번 봤으니까.

언제?

1성주를 단애 밖으로 끌어내서 벌이는 2차 보스전에서. 그 보스전의 마지막 순간에. 반드시, 항상 나오던 시퀀스가 바로 지금과 같은 1성주의 자폭이었다.

그래서 김장철은 어이가 없어짐을 느꼈다.

'어째서?'

이건 말이 안 된다.

당연하다.

게임, 팔라딘 오브 블러드의 2차 보스전에서는 1성주가 식령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식령이 되기도 전에, 전투에서 패배로 내몰리자 발작을 하며 자폭을 시도했었다.

'심지어 이놈, 자폭을 시도하면서 이렇게 외치는데. 이대로 자폭을 해도 자신은 넝마가 되어 식령 상태로 살아남을 거라고. 그때 함께 넝마가 된 네놈의 생명력을 흡수해주마, 라고.'

즉, 1성주의 자폭은 죽음의 수단이 아닌, 최후의 반격의 수단이다.

자신은 식령이 되고.

상대는 넝마가 되고.

그 상태에서 상대의 생명력을 흡수하고.

결국엔 상대를 무력화시키면서 자신은 회복해서 멀쩡해지는, 그런 악랄한 패턴이었다.

'그런데 그걸... 식령 상태에서 쓴다고?'

이러면 1성주는 자폭하는 순간 완전히 소멸 확정이다. 그래서 사실 안심하고 있었다. 이놈이 식령 상태에서는 자폭할 리가 없다고. 오히려 안전할 거라고.

'그래서 일부러... 자폭할 틈이 없도록 빠르고 강한 타격으로 단숨에 식령으로 만든 건데.'

자폭을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한데 식령 상태에서 자폭을 감행하다니.

이건 그로서도 완전히 예상 밖의 상황이었다.

'미친 거 아닌가?'

이건 다 죽자는 소리다.

이놈이 여기서 자폭 시퀀스를 완성하는 순간, 여기 있는 농병대원 모두가 죽을 것이다.

'차라리 여기가 1성주 2차 보스전이 치러지는 곳처럼 탁 트인 장소이기라도 했으면....'

농병대에게 도망치라고 외쳐볼 텐데.

여기서는 그것도 불가능했다.

'터지는 순간 여기, 다 무너질 거니까. 전원 생매장 당하겠지.'

옷 벗고 글리치를 쓰면서 최대한 멀리 도망치기? 무리다. 농병대의 글리치 속도로는 폭발과 이후 이어질 붕괴로부터 안전한 곳까지 거리를 벌리려면 한세월이 걸릴 테니까.

'그럼 어떡해야 하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기억 속 서랍을 모조리 열었다.

가장 먼저 참고한 기억은 게임 속 같은 상황에서의 대응법이었다.

'그래. 1성주. 저놈이 자폭을 감행하는 2차전. 그 보스전의 마지막에 자폭에 대응하는 방법이 둘 있었지.'

떠올랐다.

하나는 자폭 시퀀스가 시작되자마자 이동기를 써서 아주 멀리,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거리를 최대한 벌리고, 엄폐가 가능한 바위 뒤에 숨고, 방어 스킬과 물약을 쏟아부으며 버티는 방법이었다.

저렙 시절에 실제로 톡톡히 효과를 봤던 정석 공략법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안 돼. 여긴 지하라서 그만큼 거리를 벌릴 공간도 없고, 물약은커녕 당장 먹을 감자도 모자라.'

당연히 첫 번째 방법은 기각.

그럼 두 번째는?

"...."

김장철은 자신의 행복지수가 한껏 추락하는 것을 느꼈다.

이유는 간단했다.

두 번째 방법의 현실성이 앞엣것보다 떨어지는 까닭이었다.

'두 번째 방법. 그건 2차 보스전 장소 근처에 있는 대형 마력분쇄기에 저놈을 넣고 가루 단위로 갈아 버리는 건데....'

분쇄기의 압도적인 분해력!

그 앞에선 자폭 시퀀스고 뭐고 없었다.

폭발하기 전에 가루로 만들어 버린다는 심플한 선택지였다. 하지만 그건 지금은 불가능하다. 애초에 마력분쇄기는 마왕성 별관에 있는 물건이니까.

여긴 그런 비슷한 게 있지도 않....

 

...어?

 

'잠깐만.'

생각의 꼬리를 이어가던 김장철은 흠칫했다.

순간 떠오른 가느다란 실마리.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희망.

'마력분쇄기 비슷한... 물건?'

지금은 당연히 없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아니다.

있다.

아니.

있게 할 수 있다.

어떻게?

'농기구 세트... 소환....'

무의식중에 중얼거렸다.

문득, 아까 보고 휙 넘겼던 메시지가 떠올랐다.

능력치 상승 퀘스트 보상이라고. 개화 가능한 스킬 목록에 새로 등록이 됐노라고. 하지만 당시엔 중요하게 여기진 않았지. 그냥 농기구 세트 소환일 뿐이라고 여겼지. 지금은 이게 쓰일 일이 없을 거라고.

그렇게만 생각했는데.

"...."

다시 생각해보니 아니다.

농기구 세트 소환이라면.

그게 정말로 내가 아는 농기구를 풀세트로 소환하는 기술인 거라면.

어쩌면... '그것'이 있을지도....

'정말로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아니. 가능해야 한다.

아마도 이것이 마지막 희망일 수도 있을 테니까. 지금으로선 더 나은 가능성은 보이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카하아아악!"

 

불끈!

 

상념을 비집고 들어오는 거친 포효성.

붉게 물들었던 1성주의 몸이 점점 어두워지는 것이 보였다. 기억 속 2차 보스전의 모습과 똑같았다. 덕분에 알 수 있었다.

'폭발까지 남은 시간은 대략... 2분 정도.'

1성주의 몸이 완전히 검은색이 되면 터진다.

그 전에 승부를 봐야 한다.

 

두근!

 

격해진 심장 소리가 고막을 때려왔다.

시스템 창을 열었다.

 

딩동!

 

[해피 포인트 사용 메뉴를 오픈합니다.]

[개화 가능 스킬 목록을 검색합니다.]

[스킬 : 농기구 세트 소환 (개화 비용 : 100 해피 포인트)]

 

[현재 보유 중인 해피 포인트 : 102]

 

'있다. 정말로 있어.'

스킬 목록에 떠오른 농기구 세트 소환

아까 안내받은 메시지 내용 그대로였다.

망설일 것 없이 손을 움직였다.

스킬 옆의 '개화' 버튼을 눌렀다.

 

딩동!

 

[100 해피 포인트가 차감됩니다.]

[농기구 세트 소환 스킬이 개화되었습니다.]

[스킬명 : 농기구 세트 소환 (Lv.1)]

[장소에 상관없이 농기구 세트를 소환합니다. 소환되는 농기구의 퀄리티는 스킬의 레벨에 따라 개량 및 현대화될 수 있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해피 포인트 : 2]

 

'...됐다.'

처음 해보는 스킬 개화.

의외로 어렵지 않았다.

동시에 머릿속으로 새로운 정보가 밀려 들어왔다. 아니. 그것은 정보라기보다는 감각이 새겨지는 과정이었다. 이를테면, 방금 개화한 스킬을 발동하려면 이렇게....

'하면 되는 거라고?'

 

콰악!

 

두 발로 땅을 디뎠다.

허리에 힘을 콱 주었다.

숨을 들이마셨다가.

허공을 향하여.

힘껏 내질렀다.

"풍작! 기원!"

쩌렁쩌렁 울리는 외마디!

머릿속에도 휘몰아치는 메시지!

 

[스킬 : 농기구 세트 소환 (Lv.1) 을 발동합니다!]

 

그 순간이었다.

 

...번쩍!

 

저 멀리 위쪽, 수십 미터는 될 공동의 천장이 있는 어느 공간에서 섬광이 번쩍였다. 공간이 열렸다. 열린 공간으로부터 무언가가 세차게 떨어져 내려왔다.

 

콰아앙-!

 

지면에 틀어박힐 듯이.

유성이 하늘을 가르고 내려오듯이.

수십 자루의 다양한 농기구가 빽빽하게 꽂힌 거대한 '의자'가 내려왔다.

아니, 강림했다.

하지만 김장철은 놀라지 않았다.

지금은 놀라는 것도 사치인 상황.

오히려 그는 더욱 집중력을 불태우며 의자에 꽂힌 농기구들을 재빠르게 살폈다. 자신이 바라는 '그것'을 찾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없어?'

보이지가 않았다.

의자에 괭이며 삽이며 도리깨며 수많은 전통 농기구가 꽂혀 있었지만, 지금 필요한 '그것'만큼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가 않았다.

'망할....'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안 되는 건가.

어찌할 수 없는 막막함이 몰려오려던 때였다.

 

번쩍-!

 

"...!"

다시 한 번, 위쪽의 공간이 열렸다.

그리고 또 다른 덩어리 하나가 세차게 떨어져 내려왔다.

 

쿠아아아아, 콰앙-!

 

여타의 농기구들과는 실루엣부터 확연히 다른 육중한 무언가가 김장철 앞에 떨어졌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운석처럼 지면을 깨부수며 내리꽂혔다.

김장철이 그토록 바랐던 농기구. 무엇이든 분쇄하고 갈아 버리는 무식하게 거대하고 흉포한 덩어리.

맷돌이었다.

24화. 해피 포인트의 위력 (3)

 

맷돌은 육중하다.

그래서 불편하다.

한때는 전통 농가의 필수품이었던 맷돌. 그러나 이제는 믹서기에게 자리를 내어준 비운의 농기구가 바로 맷돌이었다.

하지만 맷돌은 믹서기와 다르다.

직접 맷돌을 써본 사람은 안다.

'믹서기와로 갈아낸 것과 비교해보면 입자의 결이 다르지.'

훨씬 부드럽다.

훨씬 곱게 갈린다.

하지만 더럽게 불편하다.

자리는 얼마나 많이 차지하는지.

또 워낙 무거워서 한 번 옮기는 데에도 큰마음을 먹어야 한다.

덕분에 이제는 맷돌을 갖춘 가정이 거의, 아니, 그냥 아주 멸종해 버렸지만....

'아이고 이 예쁜 것!'

김장철은 아니었다.

낙하의 강렬했던 충돌.

그 결과로 자욱하게 피어난 흙먼지.

하지만 김장철은 시야를 가리는 짙은 먼지 속에서도 맷돌을 단숨에 알아볼 수 있었다. 손을 뻗었다. 맷돌 위쪽으로 올라와 있는 손잡이, '맷손'이 잡혔다.

 

처척!

 

손에 착 감기는 맷손의 감촉이 너무나 좋았다. 적당한 무게감이 딱 알맞게 느껴졌다. 당겼다. 묵직한, 아니, 육중한 맷돌 본체가 확 품에 안겨왔다.

 

철퍽!

 

'이 정도면 윗돌과 아랫돌 모두 지름이 80센티쯤 되나?'

맷돌치고도 엄청나게 큰 놈이었다.

그래서 더 마음에 들었다.

크다는 건 무겁다는 뜻.

무겁다는 것은 곧?

 

...터벅, 터벅.

 

김장철이 맷돌의 무게만큼 묵직해진 걸음을 옮겼다.

그가 향하는 곳에 1성주가 있었다.

이제는 거의 암적색으로 변한 1성주의 모습. 자폭 시퀀스의 완성과 폭발까지 대략 1분 좀 넘게 남았을까.

"...야."

묵직한 저음으로 1성주를 불렀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겠다. 어차피 자신은 끝났다고 여기는 거고, 기왕 끝나는 김에 혼자 죽는 건 싫다는 거겠지?"

"...."

1성주는 대답이 없었다.

놈을 향해 계속 말했다.

"그래서 여기 있는 모두를 다 함께 끌고 들어가겠다는 거지? 소멸의 길동무로 말이다."

"...."

"그래. 대답하지 마라. 어차피 물귀신 같은 놈한테서 정상적인 대답을 들을 기대는 하지도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후욱.

 

맷돌을 힘껏 들어 올렸다.

큰 맷돌이라서 무거웠다.

무거워서 더 마음에 들었다.

무거운 만큼....

'더 아프게 때려줄 수 있다는 뜻이니까!'

 

콰아앙-!

 

"...!"

맷돌에 대갈통이 찍힌 1성주!

놈이 일격에 개구리처럼 뻗었다.

놈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들어 올렸다. 맷돌 위쪽의 곡식을 넣는 구멍에 놈의 머리를 대고 내리눌렀다.

"...크! 거걱! 카흑!"

1성주가 버둥거렸다.

하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더 세게. 힘껏. 누르고 밀어 넣었다. 근본적으로 육신이 없는 유령이기에, 물렁물렁한 반 유체 상태인 1성주의 머리가 곡식 구멍으로 점점 찌그러지며 밀려들어 갔다.

"...자, 잠깐만!"

그제야 자신이 무슨 일을 당할지를 대강 깨달은 걸까. 혹은, 이제부터 뭔가 혹독한 일을 당할 거라는 예감 정도는 느낀 걸까. 놈이 다급하게 외쳤다.

하지만 대꾸해주지 않았다.

그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계속 밀어 넣었다.

"그, 그만! 자폭을... 멈추겠다! 그러니까 그만!"

1성주의 외침이 한결 급박해졌다.

"미안하다! 아니,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끝이야?"

"아니, 그건 아니지만!"

"그럼 자폭부터 중단하든가."

"...!"

"안 되지? 하고 싶어도 불가능하지?"

"그건...."

"사과를 하면서도 거짓말을 섞었네? 말장난했네?"

"잠깐만!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리고 난 네놈이 하려는 자폭, 무조건 멈춰야 해. 나야 어떻게 비벼보면 안 죽고 혼자서 빠져나갈 가능성도 있겠지만, 날 따라온 놈들은 그게 불가능할 거라서."

"저... 하급 마족들 말입니까!"

"그래. 내가 데리고 온 농병대원들."

1성주 놈을 향해 말했다.

"나만 믿고서 위험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들어온 놈들이야. 그런데 내가 저놈들을 뽑은 기준이 뭔지 알아?"

"그걸 제가 어떻게...."

"특별히 체격이 좋고, 미친놈 성향이 다분하고... 뭐 그런 것도 있었지만 제일 중요한 점이 하나 더 있었어. 그게 뭔지 아냐고."

"모, 모릅니다!"

1성주가 다급한 척을 하며 빼액 외쳤다.

하지만 사실 그는 겉으로 보이는 태도와 달리 급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지금 상황이 반가웠다.

마왕이 멍청하게 말을 걸어주어서. 이러는 동안에 자폭 시퀀스의 완성까지 시간을 벌 수 있을 듯해서.

끝끝내 모두를 죽음의 길로 끌어내릴 희망이 보였다.

행복했다.

즐거웠다.

그 순간, 김장철의 입에서 뜻밖의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애 아빠들이야."

"...예?"

1성주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애 아빠라니?

누, 누가?

너무나 황당한 소리라서 내심 품고 있던 음울한 환희마저도 잠깐 잊었을 정도였다.

"그게... 무슨 소리...."

"저기 300명. 전부 애 아빠들이라고. 아내가 만삭인 놈. 이제 막 옹알이하는 아들 둔 놈. 배밀이 하는 딸 가진 놈. 계획과 다르게 덜컥 쌍둥이를 얻어 버린 놈. 어제 아들이 첫 걸음마하는 모습을 보면서 눈물 펑펑 쏟아내고 온 놈까지."

"...."

"그런 놈들만 골라서 농병대로 뽑은 거야. 일부러 그랬어. 남들보다 열심히 일할 거니까. 어떤 일이 있어도, 아무리 힘들어도 포기 안 할 거니까. 보통 사람은 포기를 해도, 아빠는 포기를 안 하는 법이거든."

"그러니까, 그게 무슨...."

"...그러니까, 나는, 300가정의 가장들을 전부 살려서 집에 데려가야 한단 말이다!"

 

콰악!

 

맷돌에 1성주를 밀어 넣는 김장철의 손에, 팔뚝에, 어깨에, 전신에, 힘이 콱 들어갔다. 1성주와 대화를 나누는 척으로 숨을 고르면서 응축했던 마력을 단숨에 쏟아부었다.

1성주는 그 갑작스러운 압력을 버틸 수가 없었다.

"...!"

그나마 머리만 절반쯤 밀려들어 간 채로 버티던 1성주의 몸이 통째로 짓눌리고 찌그러져 맷돌 구멍에 들어갔다.

허리와 하체까지 전부.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런....'

그제야 1성주는 깨달았다.

둘 사이에 잠시 오간 대화를 내심 반가워했던 자신. 그게 실수였음을. 자신이 대화로 시간을 벌었다고 생각하는 사이에, 마왕이 이쪽을 끝장낼 힘을 응축하고 있었던 것임을.

"아, 안 돼!"

맷돌 속으로 완전히 구겨진 1성주가 다급히 외쳤다.

그러나 그 순간, 이미 맷돌 손잡이 맷손을 꽉 움켜쥔 김장철이 차갑게 일갈했다.

"안 되긴 개뿔."

"...어?"

"잘 가라."

 

...똑!

 

김장철이 맷돌 속으로 자신의 피 한 방울을 떨어뜨렸다. 맷돌 전체에 마왕의 피가 불러온 붉은 뇌전이 깃들었다.

그 직후, 맷손과 맷돌을 움켜쥔 김장철의 손아귀가, 팔이, 어깨가, 전신이, 움직였다. 근육이 폭발적인 힘을 뿜어냈다.

맷돌이 힘차게 돌아갔다.

모든 것을 갈아 버릴 기세로!

 

콰과가가가갈갈가가각갈갈갈갈-!

 

"...!"

1성주의 모든 것이 맷돌 속에서 분해되기 시작하였다.

애원조차 해보지 못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그걸로 완전한 끝이었다.

자폭 시퀀스의 완료를 고작 3초 남짓 남긴 채, 1성주는 마나 단위로 분해되어 세상에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후욱.

 

거칠게 회전하던 맷돌이 멈추었다.

김장철의 입에서 나지막한 숨이 흘러나왔다.

그 모습을 보던 300인의 농병대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들의 마왕이.

농병대장님이자 마왕성 청년회장님이.

마침내 1성주를 꺾었음을. 난공불락이라 일컬어지던 망자의 단애를 단 한 명의 피해도 없이 정벌하였음을.

"...우와아아아악!"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함성을 터뜨렸다.

그리고 모두는 환호하며 확신했다.

'살았다....'

'우리 아가, 플루트야! 조금만 기다려. 아빠 곧 집에 갈게.'

사실은 두려웠다.

솔직히 무서웠다.

망자의 단애는 더없는 험지였다. 한데 고작 300명으로 단애를 정벌하겠다는 계획을 들었을 땐 내심 철렁했다. 마왕이 미친 건 아닌가 싶었다.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까. 불안하기도 했다.

그래도 참았다.

마왕이 함께라서?

마왕을 믿었기에?

아니.

모두가 아이를 위해서였다.

언젠가 진짜로 농사를 시작하게 되면, 정말로 수확의 계절을 맞이하게 되면, 그날이 오면, 농병대원의 가족에게 가장 많은 첫 감자를 지급하겠다던 마왕의 약속.

그 약속 하나 때문이었다.

그 약속만 지켜지면.

현실이 된다면.

자신의 아이가 더는 굶지 않아도 될 거라는 희망. 오직 그것 하나만을 바라보며 농병대에 지원했고, 바보 같은 구호를 부끄러움 없이 외쳤으며, 속옷을 입었다 벗었다 꾸물거리며 땅을 파고드는 민망한 연습을 기꺼이 소화할 수 있었다.

아이를 위해선 힘든 것도, 부끄러운 것도, 민망한 것도 없는 법이니까.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농사.... 어쩌면, 이제는, 정말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왕의 약속이 현실이 될 것 같다. 제발 그렇게 되면 좋겠다.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김장철을 바라보았다.

한데 그 순간이었다.

 

딩동!

 

'으음?'

강렬한 맷돌 돌리기를 마무리하고서 숨을 고르는 김장철의 눈앞으로, 뜻밖의 메시지가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당신은 망자의 단애의 주인, 보스 캐릭터 '1성주 사르툴'을 20회에 걸쳐 공략하는 위업을 달성하였습니다.]

 

'...뭐?'

20회?

사르툴 공략을?

김장철은 흠칫했다.

지금 떠오른 메시지가 품은 뜻을 이해한 까닭이었다.

'잠깐만. 20회 공략? 그럼 저 말은 곧... 내가 한국에서 게임으로 클리어했던 19회차의 경력(?)이 전부 지금, 여기 현실의 나한테도 승계되고 있다는 뜻인 건가?'

아무래도 그런 듯했다.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던 자신, 김장철.

마왕의 몸으로 살게 된 자신, 김장철.

둘을 별개가 아닌, 하나의 존재로 본다는 뜻인 걸까.

'아무래도 그런 거 같은데.'

그래야 방금 메시지가 말이 된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하지만 더 생각할 겨를은 주어지지 않았다.

 

딩동동!

 

[1성주 20회 공략 보상]

[히든 이벤트 발동]

[아티펙트, '빙령의 심장'이 본연의 모습을 당신 앞에 드러냅니다.]

 

철컥! 철커덕! 찰칵칵!

 

메시지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1성주를 상대하느라 잠깐 바할에게 맡겨두었던 빙령의 심장에서 기묘한 쇳소리가 연달아 울리기 시작했다.

"어? 어어어? 이거! 이상하다!"

바할이 놀라서 허둥거렸다.

녀석에게서 빙령의 심장을 넘겨받았다.

그러는 사이에도 빙령의 심장은 멈추지 않았다. 급기야 뿜어내던 냉기를 역으로 흡수하기까지 했다.

 

철컥! 철커덕! 철걱!

 

안에서 기계장치가 움직이는 걸까.

이러다가 뚜껑(?)이라도 열릴 것 같은 기세인데.

곧, 그 추측이 현실이 되었다.

 

...찰칵!

 

돌연, 맑은 소리와 함께 빙령의 심장 윗면이 활짝 열렸다.

덕분에 드러난 내부.

그 안쪽에는....

"어?"

김장철은 저도 모르게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드래...곤?"

냉기에 휩싸인.

아마도 냉기의 근원일 듯한.

새하얗게 얼어붙은 자그마한 형체.

크기는 겨우 말티즈 정도쯤 될까.

웅크린 아기 드래곤이었다.

녀석의 위쪽에는 음각으로 정교하게 새겨진 글씨도 보였다. 아마도 이름일 것이라 생각하며, 김장철은 글씨를 천천히 읽었다.

"...티라...누스."

장차, 그의 품에서 자라나 용왕 베르키스의 아버지가 될, 전설적 반신급 드래곤, 태용왕 티라누스와의 첫 만남이었다.

25화. 씨감자, Ready (1)

 

"티봉!"

"...하아."

"티보봉!"

"...하아아."

 

와장창!

 

인생은 하드코어한 시궁창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알려주는 찰진 파열음.

또 하나의 도자기가 박살이 났다.

저거, 전전대 마왕이 약탈해온 물건이라고 들었는데. 뭐 어쩔 수 없지. 그래. 어쩔 수가 없어. 이게 다....

'내 업보지. 내 업보야.'

김장철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그리고 방금 도자기가 깨진 사건 현장(?)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새하얀 아기 드래곤이 볼을 뿌웁 부풀리며 잔뜩 토라진 눈길을 마주 보내어 왔다.

"티봉!"

"...."

그래.

저 녀석.

빙결의 심장 속에서 발견된 저 아기 드래곤, 아니, 드래곤 새끼. 말이라곤 지지리도 안 듣는 어린이, 아니, 드래곤 새.끼.

이름이....

"티라누스야?"

"티봉?"

"여긴 네가 먹을 만한 거 진짜로 없는데. 이제 좀 얌전해지면 안 될까?"

"티보봉!"

티라누스가 고개를 팍팍 저었다.

어림도 없다는 표정이다.

급기야 녀석은 자그마한 앞발바닥 보드라운 젤리로 자신의 뽕뽕한 배를 뾱뾱 쳐 보였다.

"티봉! 티보봉! 봉!"

"...어, 네가 배가 고프다는 건 알겠는데. 그래서 셀프로라도 먹을 걸 찾고 싶다는 것도 알겠는데."

"티보봉! 뽕!"

"그래서 먹을 거, 줬잖아?"

사실이었다.

맹세코 정말이다.

그러니까 어젯밤이었던가.

1성주가 소멸하고, 나머지 1성 군단도 함께 성불했다. 물론 그냥 보내지는 않았다. 아직 남은 감자는 많았으니까. 덕분에 수천 알의 싹 튼 감자를 얻어낼 수 있었다.

그 후엔?

단애에 약간의 경비대 병력만을 임시로 남겨두고 마왕성으로 돌아왔다. 물론 저 티봉이, 아니, 티라누스라는 아기 드래곤을 데리고서.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왜... 도대체 왜... 금화를 주는데 먹지를 못하니.... 왜....'

김장철은 여전히 자신의 손에 쥐여져 있는 금화 몇 닢을 바라보았다. 아까 제피로스 녀석의 조언에 따라 티라누스에게 먹이려 했던 금화였다.

"...."

분명 제피로스가 말했는데.

새끼 드래곤은 일반적인 음식물이 아닌 금은보화를 먹는다고. 그래야 배를 불리고 성장할 수 있노라고. 한데 저 티라누스라는 녀석은 엄청 굶주린 상태인 것 같다고. 시급히 금은보화를 먹이지 않으면 흉포해질 수도 있겠노라고.

그 조언을 듣자마자 전전대 마왕이 남겨두었다는 약탈품 창고를 뒤졌다. 텅텅 빈 창고에서 그나마 금화 몇 닢을 긁어모아다가 소중하게 쥐고서 돌아왔던가.

그리고 녀석에게 먹이려 했는데....

 

까득, 우물우물....

 

"...퉤!"

라는 것이 녀석의 반응이었다.

그러니까, 금화 구석탱이를 딱 한 입만 베어 물고는, 몇 번 씹어보다가 오만상을 다 찌푸리며 뱉어내 버린 것이었다.

그러고는 내내 저 모양이다.

"티보봉! 티봉!"

녀석이 통실한 꼬리를 위아래로 세차게 움직이며 바닥을 탕탕 쳤다. 역시나 불만이 가득한 표정. 좀 더 먹을 만한 걸 내놓으라는 노골적인 시위였다.

"...."

갑자기 트라우마가 떠오른다.

그래.

대학원 시절, 교수님 아들내미가 딱 저랬지. 나만 만나면 무슨 집안 솔거노비 대하듯이 형아 이거 해죠 형아 저거 해죠 아주 난리 부르스였지, 아마.

김장철은 갑작스럽게 쑴펑쑴펑 솟구치는 회한을 느끼며 말했다.

"...어이."

"티봉?"

"그냥 좀, 얌전히 금화 먹어주면 안 될까?"

"티봉!"

"입맛에 안 맞는다고?"

"티!"

"하마터면 토할 뻔했다고?"

"봉!"

"그래도 참고 먹어보면 어때?"

"씨봉!"

"...."

방금 뭐지.

들으면 안 될 소리를 잠깐 달팽이관으로 접수한 거 같은데.

'쓰읍. 이놈, 입맛이 초고급인 건가. 그냥 금화로는 안 되는 거야? 꼭 24k여야만 하는 거야?'

난감해졌다.

사실 마왕성엔 변변찮은 금은보화가 없었다. 24k는커녕, 전전대 마왕이 인간 세상에서 약탈한 물건의 잔재, 혹은 찌꺼기들만 간간히 남아 있을 따름이었다.

한데 이 아기 드래곤은 딱 봐도 엄청나게 굶주린 상태로 보였다.

하긴 그럴 법도 했다.

얼어붙은 채로 빙령의 심장에 갇혀 있었으니까. 그렇게 갇혀 있었던 세월의 길이를 짐작할 수도 없을 정도니까.

'이 녀석, 실제로는 몇 살일까.'

 

와당탕! 콰직!

 

또다시 먹을 것을 찾겠다며 사방으로 날뛰는 티라누스, 아니, 티봉이. 녀석의 도약 발사대(?)가 되어 박살 나는 탁자를 보며 김장철은 생각에 잠겼다.

티봉이는 겉으로 보기엔 생후 1년도 안 되어 보였다.

잘 쳐줘 봤자 생후 6개월?

아니, 5개월쯤?

하지만 실제 나이는 그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최소 수십 년, 어쩌면 몇백 년쯤 굶다가 깨어난 셈이니까. 엄청나게 허기가 지겠지.'

그러니 저렇듯 난리를 치는 것일 테고.

 

콰그작!

 

"...."

안 되겠다.

이대로 뒀다간 여기, 마왕의 권좌 주변이 아주 그냥 아파트 분리수거날 쓰레기장 모습으로 전락할 것 같다.

"티봉아? 그럼, 먹을 거 많이 있을 곳으로 가볼래?"

"...티봉?"

"그래. 여기로. 나 따라올래?"

"티봉!"

녀석이 눈을 반짝이며 이쪽을 쫄레쫄레 따라왔다. 그 모습이 영락없는 새하얗고 뽀송뽀송한 강아지 같았다.

쓴웃음이 흘러나오려는 걸 참으며 복도를 거쳐, 계단을 오르고, 모퉁이를 지나, 뒤뜰 늪을 건너, 어둠의 동굴 속 멀리 그대... 아니, 약탈품 창고 문을 열었다.

 

끼이이익....

 

"자, 여기가 버려진 땅에서 가장 값비싼 물건들이 보관된 곳이야."

"티봉?"

"둘러볼래?"

"티봉!"

어쩔 수가 없겠다.

입맛 취향이 문제인 거라면, 당사자(?)가 직접 메뉴를 고르는 것이 제일일 테니까. 그런 생각으로 티봉이를 약탈품 창고로 들여보냈다.

물론 걱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여기 진짜 변변한 거 없는데.'

제발 마음에 들어라.

제발 입맛에 맞는 거 찾아라.

김장철은 상사에게 결재서류를 올린 기분으로, 혹은 시험 결과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티봉이의 작은 뒤태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빌었다.

하지만....

"티봉?"

"...."

"티보봉? 티봉? 봉?"

티봉이가 당황스럽고 어이가 없다는 눈길을 보내어 왔다. 마치, 겨우 이게 최선이냐는 듯한.

"...어, 진짜로 이게 최선이긴 한데."

"티보옹...."

"입맛에 맞는 게 없어?"

"티봉...."

"그래도 일단 뭐라도 좀 먹으면 괜찮아지지 않을까?"

"티보봉...."

티봉이가 자리에 푹 주저앉았다.

아까부터 한참을 설치더니 이제는 힘이 다 빠진 걸까. 자그마한 걸음으로 터덜터덜 돌아오더니 이쪽의 발등에 턱을 괴며 털썩, 엎드리는 것이 아닌가.

"티보옹... 티보봉...."

"어, 굶어 죽을 거 같아?"

"티봉...."

"야, 이거 금화라도 그냥 눈 딱 감고 먹으면 안 돼?"

"티보옹...."

"토할 거라고?"

"티봉...."

"...."

미치겠네.

이놈의 입맛 취향을 어떻게 맞추라는 건지.

갑자기 덜컥 떠맡아 버린 아기 드래곤 때문에 김장철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그냥 확, 빙령의 심장 속으로 다시 얼려서 넣어 버릴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그건 이제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

빙령의 심장은 이 녀석을 내어놓고 난 뒤에 그대로 얼음가루로 부스러져 사라졌으니까.

"하아. 돌겠네."

그렇다고 이걸 버릴 수도 없고. 그래도 드래곤이니까 잘만 키우면 어마어마한 도움이 될 건데.

'어휴. 처음 발견했을 때는 로또 주운 기분이었는데 진짜.'

설마하니 이렇게 골칫덩이가 될 줄이야.

아니, 그보단.

'이러다 이 녀석, 굶어 죽는 거 아닐까.'

이대로면 좀 위험해질 수도 있겠다.

김장철은 뒤통수를 벅벅벅 긁었다.

걱정은 되는데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가 않았다.

'...잠깐 바람이라도 쐬자.'

축 늘어진 티봉이를 안아 들었다.

마왕성 밖으로 나왔다.

성 앞뜰의 탁 트인 황무지에선 농병대원들이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밭갈이가 끝난 밭의 마지막 형태를 잡는 작업이 한창인 까닭이었다.

"우리의 마왕이시자! 농병대장이시자! 청년회장이신 크레도스 님께서 일찍이 알려주신 숙지사항을 잊지 마라! 감자 심을 두둑 자리는 두툼하게! 너비는 세 뼘! 높이는 한 뼘!"

"너비는 세 뼘! 높이는 한 뼘!"

농병대원들이 알아서 외치는 구호.

하지만 일사불란한 구호와 달리 작업 속도는 그리 빠르지 못했다. 곳곳에서 농병대원들의 볼멘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는 건 덤이었다.

"그런데... 으아아, 무슨... 돌멩이가 이렇게 많어!"

"여기도 돌멩이, 저기도 돌멩이...!"

"이거, 돌멩이 골라내다가 하루 다 가겠지 말입니다?"

"어제도 이랬는데, 크아아아아!"

"화가 난다아!"

곳곳에서 화딱지 뒤집히는 곡소리(?)가 터져 나왔다.

사실은 그럴 만도 했다.

여긴 대대로 농경지로 쓰인 땅이 아니니까. 역사상 단 한 번도 농사가 이루어진 적이 없는, 말 그대로의 쌩황무지에 퇴비를 뿌린 곳이니까. 그걸 사상 최초로 밭으로 쓰려는 중이니까.

그러니까 잔돌멩이가 수두룩한 것은 당연지사.

그걸 일일이 솎아내어야 하는 것도 당연지사.

힘이 들지만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과정이었다.

'후우, 다들 힘내라.'

다들 먹고 살자고 이러는 거니까.

진짜 다들 조금만 참고 힘내자.

김장철은 응원하는 마음으로 농병대원들의 구슬땀을 바라보았다.

한데 그때였다.

"...티봉?"

품속에서 늘어져 있던 티봉이가 꼬물거리는가 싶더니 작고 동그란 머리를 들었다. 농병대원들의 아우성 때문에 깬 걸까. 녀석이 농병대원들이 있는 쪽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티보옹...?"

혹시 흥미를 느끼는 걸까.

어느새 녀석은 숨도 쉬지 않고서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렇게, 농병대원과 그들이 구슬땀을 흘리는 감자밭을 빤히 주시했다.

"너 뭘 그렇게 집중하면서 보냐?"

조금은 의아해졌다.

웃음이 나왔다.

"그래 봤자 저긴 네가 먹을 게 딱히 없...."

 

파아악!

 

"억?"

말이 끝나기도 전에, 티봉이가 품을 박차고 튀어 나갔다!

어디로?

감자밭으로!

"어? 어어? 야!"

황급히 녀석을 잡으러 뛰어갔다.

그런데 도저히 잡을 수가 없었다.

너무... 빨랐다!

"야! 거기 서! 스토옵!"

감자밭으로 오도도 뛰어가는 녀석의 뒷모습. 가까워지지가 않았다. 얼마나 빠른 걸까.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녀석과 감자밭의 거리가 삽시간에 좁혀졌다.

'미친!'

불길한 예감이 팍 하고 뇌리에 꽂혔다.

녀석, 설마하니 또 먹을 걸 찾겠답시고 감자밭을 엉망으로 만들려는 건 아니겠지?

...라고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티봉!"

티봉이가 감자밭에 도착하자마자 어느 농병대원에게 몸을 날렸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농병대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엇?"

 

파앗!

 

티봉이가 농병대원 옆을 스쳐 지나갔다. 동시에 농병대원이 방금 막 흙바닥에서 골라내어 손에 쥐고 있던 돌멩이를 낚아챘다.

그리고 급정거!

 

...쿠과과과곽!

 

"티보봉! 봉!"

돌멩이를 손에 넣은 티봉이가 아기자기한 나름의 드리프트를 선보이며 자리에 멈추었다. 그리고 농병대원에게서 빼앗은 돌멩이를 쳐다보았다.

그 눈길이 올망졸망 반짝반짝.

마치 어릴 때 처음 돈까스와 마주했던 내 표정이 저랬을까 싶은....

 

까독!

 

미처 말릴 틈도 없이, 녀석이 돌멩이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씹었다. 오도독, 오도독, 까도독, 오도독.

"티보봉! 티봉!"

"...."

한 입이 아니다.

두 입, 세 입, 마무리까지 야물딱지게.

"꿀꺽, 티봉!"

마침내 돌멩이 하나를 완전히 씹어 삼킨 티봉이가 만족도 10,000%의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쬐끄마한 콧구멍을 콩콩거리며 주위를 부산하게 탐색하기 시작했다.

"티봉? 티보봉! 봉!"

 

뽀작!

 

녀석이 다른 돌멩이를 밭에서 뽑아냈다.

그리고 다시 먹방을 시작했다.

"뽀봉봉! 티봉!"

 

오도독, 까도독!

 

"...."

비로소 김장철은 깨달을 수 있었다.

'이 녀석, 24k를 밝히는 금수저가 아니라....'

흙수저.

아니, 돌수저였던 건가.

어이가 없었다.

그때였다.

"티보옹?"

두 개째의 돌멩이를 야물딱지게 씹어 삼킨 티봉이가 이쪽을 향해 반짝반짝 망울진 눈길을 올려보내어 왔다.

그리고 물었다.

"티봉? 티보봉?"

"...어? 여기 밭에 있는 돌멩이, 다 먹어도 되냐고?"

"티보봉! 티봉?"

"무, 물론이지?"

"티봉!"

자그마한 얼굴 가득 웃음꽃이 피었다.

티봉이.

본명은 티라누스.

생물학적 나이는 3개월, 남아 드래곤.

녀석이 고성능 흙고르개이자, 농병대 마스코트 대원으로 정식 취직하게 되었다.

덕분에 김장철은 감자 농사를 위한 다음 단계에 착수할 수 있었다.

'좋아. 이걸로 감자밭의 돌멩이 정리 걱정은 끝났고. 그럼 이제부터는....'

...사천왕 시르케, 너다.

의미심장한 그의 시선이 혹한의 칼날을 지닌 사천왕을 정조준하기 시작하였다.

26화. 씨감자, Ready (2)

 

혹한의 칼날, 시르케.

여섯 줄기의 검광이 번득이는 순간, 그녀의 앞에 선 어떠한 대적자도 버티지 못한다는, 버려진 땅의 손꼽히는 강자.

하지만 그녀는 요즘 울적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울화가 쌓여 있었다.

"...."

대체 언제까지 저런 짓을 구경해야 하는 걸까. 대체 언제까지 나는 여기 틀어박혀 있어야 할까.

모르겠다.

그래서 더 갑갑하다.

'정말로 대체....'

 

까드득!

 

시르케는 이를 갈며 발코니 아래의 광경을 내려다보았다. 마왕성 앞뜰. 붉디붉은 황량한 대지. 그 한쪽에 옹기종기 모인 이들이 보였다.

'크레도스....'

마왕 크레도스와 최근 그가 조직한 농병대, 그리고 얼마 전에 크레도스가 주워온(?) 아기 드래곤이었다.

'행복해 보이는구나.'

그래서 더욱 한심하구나.

우리 버려진 땅의 마족들은 시시각각 멸망의 구렁텅이로 떨어지고 있는데. 원래라면 인간계를 침공하여 수많은 피로 목을 축이고 기름진 살점을 뜯어 먹었어야 했을 위대한 마족이, 형편없는 꼴로 말라비틀어지고 있는데.

크레도스, 네놈은 무엇이 그리도 즐겁단 말인가.

'게다가....'

더럽다.

아무것도 없는 흙바닥을 파헤치며 즐겁게 시시덕거리는 꼬락서니라니. 저런 게 내가 사천왕으로서 모시는 마왕이라니.

마왕 크레도스가 새삼 한심했다.

그만큼 자신은 더 한심하게 느껴졌다.

자연히 먼발치의 크레도스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에 한층 서늘한 한기가 서렸다.

한데 그때였다.

'...음?'

울분과 원망, 비난과 질책의 눈길로 크레도스를 한참 노려보던 중이었던가. 갑자기 크레도스가 고개를 휙, 이쪽을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흠칫.

 

확실하게 마주쳤다.

한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쪽과 눈이 마주친 크레도스가 어깨를 으쓱이는가 싶더니 걸어오기 시작했다.

"...."

무슨 수작이지.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급기야 마왕 크레도스가 이쪽으로 투두두두 뛰어오는 것이 아닌가.

"...."

진짜, 뭐 하자는 거지.

그녀는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솔직히 당장 여섯 자루의 검을 뽑아들고 크레도스를 난도질해 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크레도스는 더 나아가 마왕성 안으로 들어오는가 싶더니 잠시 후에 이쪽의 방문을 두드리기까지 했다!

 

똑똑똑.

 

"나다. 들어가도 될까?"

"...싫다면요?"

"어, 그래도 들어가고 싶은데."

"놀랄 일이로군요. 천하의 마왕께서 수하의 방에 들어오기 전에 허락을 구하는 진풍경이라니."

"그냥 매너라고 쳐주면 안 될까?"

"말장난이나 나눌 기분이 아닙니다."

"어, 항상 기분이 안 좋아 보이긴 해."

"항상 그런 건 아닙니다만."

"내가 볼 땐 항상 그렇던데."

"그럼 제 기분이 안 좋은 원인이 무언지 이제는 잘 아시겠군요."

"나 때문이야?"

"굳이 말을 해야겠습니까?"

"어, 그래서 들어가면 안 돼?"

"안 된다면요?"

"그냥 이대로 이야기 나눌까?"

"닫힌 문을 사이에 두고서요? 마왕과 사천왕이?"

"...그림이 좀 이상하긴 하네."

"당연하지요."

"쓰읍. 문 열어."

"열고 들어오시죠."

"어, 그래."

 

 

끼이익.

 

이내 문을 열고 들어오는 크레도스.

그 모습이 뭐랄까, 묘하게 쭈뼛거리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비단 이쪽의 착각일까.

"...마왕께서 무슨 일로 이렇게 저를 찾아오신 건지."

시르케는 새삼 한심해지는 기분을 누르며 물었다. 그리고 나름 몇 가지 예상을 해보았다. 마왕이 이렇듯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말이다.

'왜 날 찾아온 거지? 이상한데.'

혹시 이제라도 인간계 침공을 재개할 명분을 의논하려는 걸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시작하겠다던 농사는 아직 작물 하나 심지 못했으니까. 한데 이제 와서 다시 인간계 침공을 재개하겠다고 선포하기엔 체면이 서지 않을 테니까.

자신의 권위가 손상되지 않을, 그러면서도 자연스럽게 농사를 그만두고 전쟁을 시작할 적당한 명분을 의논하려는 것이겠지.

'제발.'

그런 것이었으면 좋겠다.

시르케는 진심으로 바랐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2초 뒤, 마왕의 부탁을 들은 순간, 그녀가 저도 모르게 여섯 자루의 칼날을 스컹 뽑을 뻔했던 것은.

"어, 그러니까, 시르케? 씨감자 좀 잘라주지 않을래?"

"...."

진심으로 벨 뻔했다.

마왕의 부탁이 이어졌다.

"어, 그러니까 이게 뭐냐면 말야. 이제 밭갈이도 끝냈고, 감자 싹도 다 났고, 감자밭 조성도 마무리 중이거든? 그래서 남은 마지막 준비 과정이야."

"씨감자인지 뭔지를 자르는 게 말입니까?"

"어. 그렇지. 이게 제일 중요한 거야. 씨감자를 자르면서 씨눈을 어떻게 살리는가에 따라서 나중에 수확량이 달라질 수 있는 거라서."

"씨감자를 자르는 일이라."

"으음, 엄청 중요한 일이지."

"그토록 중요한 일이라면 왜 제게 맡기시려는 겁니까?"

"어?"

"마왕께서 최근 애지중지하시는 농병대에게 시키면 될 일이 아닙니까?"

물었다.

사실 당연한 일이 아닌가 싶었다.

자신은 버려진 땅의 사천왕이었다.

지금껏 무수한 적을 베어 넘겼고, 앞으로도 수많은 적과 대적할 마족의 칼날이다.

한데 그 칼날로, 고작, 씨감자나 자르라니.

'....'

생각하자 새삼 차가운 분노가 서렸다.

한데 그런 이쪽의 마음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마왕은 어울리지 않게도 진지한 얼굴로 이렇게 대꾸하는 것이 아닌가.

"중요하니까 너한테 맡기겠다는 거잖아."

"...."

"게다가 이건 네 도움이 반드시 필요한 일이야."

"...어째서지요?"

"너야말로 버려진 땅에서 가장 예리하고 깨끗한 칼날을 지니고 있으니까."

"네?"

대답과 함께 마왕이 가리킨 손길.

그 끝에 자신의 여섯 자루 얼음 칼날이 있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그게... 무슨 뜻이지요?"

"가장 훌륭한 칼날을 쓰고 싶다는 말이다. 감자 농사의 가장 중요한 준비 단계에서."

"...."

"이게 이상한가?"

"...."

이상하다.

매우 이상하다!

내 칼날은 적의 피를 머금을 때 비로소 진가를 발휘하는 법이라고. 오직 그것만을 위해 존재했고, 앞으로도 존재할 예리함이라고.

서늘하게 항변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반 박자 앞서서 입을 열기 시작한 마왕 때문이었다.

"들어봐, 시르케."

"...듣고 있습니다만."

"나는 버려진 땅이 바뀌었으면 좋겠어."

"네?"

"바꾸고 싶다고. 여기선 어떤 것도 키울 수 없다고, 우린 풍요와 거리가 먼 운명이라고, 앞으로도 내내 그러할 거라고. 미리부터 체념하고, 그 체념을 받아들인 채로, 평생을 살아가는 이곳의 공기를 말이야."

"그게 무슨...."

"너, 하급 마족들의 집에 가본 적이 있나?"

"...딱히 없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난 최근에 가봤어."

"...."

마왕은.

크레도스는 뭘 말하려는 걸까.

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걸까.

"뭐랄까. 조금 아프더라."

"...네?"

"아팠다고. 기분이."

"...."

"그냥 단순히 불쌍해서? 찢어지게 가난하고, 비쩍 마른 모습을 보며 동정심을 느껴서? 아니. 그냥 뭐랄까. 예전의 내가 떠오르더라고."

"무슨...."

시르케는 어이가 없었다.

예전의 자신?

비실거리는 하급 마족들을 구덩이에 넣고 갈아 죽여서 피를 마시던 자신을 말하는 건가?

그녀가 황당해하는 사이, 김장철의 진지한 말이 이어졌다.

"그저 내 분을 풀려고, 스트레스를 해소하려고, 수없이 죽이기만 했던 내가 뭐랄까. 그땐 왜 그랬나 싶은 기분이 들더라고."

"...."

"예전에 봤던 이곳 녀석들의 모습과 지금 곁에서 보는 이곳 녀석들의 모습이 너무 많이 달라서. 사실은 이랬던 거구나 싶어서. 예전엔 볼 수 없었던 것들을 이제야 조금씩 발견하고 보는 중이라서."

"...."

"그래서야. 바꾸고 싶다. 피골이 상접한 모두를 건강하고 윤기나게 바꿔주고 싶다. 모두의 혈색을 파릇파릇하게 살려주고 싶다. 그게 최근, 내가 이곳을 둘러보며 나름 품게 된 새로운 목표야."

그래야 더는 인간계를 침공하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 그래야 묵은지 그놈이 버려진 땅에 관심을 끌 테니까. 그래야 내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엔딩을 맞이할 수 있을 테니까.

김장철은 진심을 담아서 말했다.

시르케는 그의 말을 이해했다.

조금은 이상한 방향으로.

"...."

아하.

마왕 크레도스 이놈.

마족들을 포동포동하게 살찌워서 더 맛있게 잡아먹고 피를 짜내겠다는 거로구나.

 

오싹.

 

설마하니 크레도스가 이런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니. 시르케는 저도 모르게 살짝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러자 자신이 모시는 마왕이 조금은 다르게 보였다.

'여전히... 악랄해.'

그리고 그 악랄함으로, 인간계가 아닌 버려진 땅을 비옥하게 만들어서 꽉꽉 짜먹을 궁리를 하는 거였구나. 농사 또한 그 계획의 일부에 불과한 거였어.

"...알겠습니다."

그녀는 무의식중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최근에 좀 이상해진 듯한 마왕 크레도스가 사실은, 예전보다 더 무시무시하게 변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예감이 든 까닭이었다.

'일단은... 좀 지켜봐야겠군.'

이럴 때 괜히 잘못 찍히면(?) 피뢰침 신세로 전락한 아수라트보다 더한 꼴을 당할지도 모른다.

그녀는 3번 경추에 스멀스멀 배어나는 위기감을 느끼며 한발 물러서기로 결심했다. 하여 마왕을 따라 감자 저장고로 내려갔다.

한데 저장고에는....

'뭐지? 이 거창한 준비는?'

저장고에 들어선 순간, 그녀는 흠칫했다.

싹이 튼 감자가 한쪽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뭐, 그 정도는 익히 예상하던 바였다. 반면 그 옆에 놓인 것들은 좀 뜻밖이었다.

 

보글보글.

 

커다란 솥이 여섯 개나 놓여 있었다.

모락모락, 보글거리는 김이 피어났다.

심지어 새하얀 헝겊도 한가득 쌓여 있었다.

'저건... 뭐지?'

보글거리는 솥과 깨끗한 헝겊의 산이라.

의아했다.

뭐에 쓰이는 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때였다.

"자, 여기 앉아."

 

팡팡!

 

"...."

그녀는 마왕이 가리키는 곳에 앉았다.

그리고 마왕의 설명을 들었다.

"이제부터 감자를 자르는 거야. 그런데 감자 자르는 데에도 요령이 있어. 감자마다 싹이 난 숫자가 다르거든? 싹이 세 개 이하가 있다? 그러면 자르지 마. 그 이상이다? 그럼 잘린 양쪽에 씨눈 숫자가 비슷하게 분배되도록 칼질을 해야 해. 알겠지?"

"싹이 아주 많으면요?"

"한쪽에만 싹이 몰빵되지 않게만, 알아서 취향껏 잘라."

"그럼 지금 시작하면 됩니까?"

"어. 시작하자."

마왕이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시르케는 이따위 일, 순식간에 해치우자고 마음을 먹었다.

'5분 안에 끝내주지.'

자신이라면 할 수 있다.

너무나 손쉬운 일이다.

바로 이렇게....

 

...스채애앵!

 

그녀의 두 손이 검집에서 두 자루 얼음 칼날을 빼들었다. 등에서 돋아난 얼음 관절이 네 자루의 칼날을 번득였다.

그녀는 감자의 산더미를 향해 돌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폭풍 같은 연격으로 모든 감자를 조각내리라 다짐을 하며....

"잠깐! 스톱!"

"...!"

막 돌격을 하려는 순간.

김장철이 그녀를 막아섰다.

"지금 뭐 하려는 거야?"

"네? 감자를 자르려고...."

"한꺼번에 와사사사 자르려고 했지?"

"그야 당연히...."

"미쳤어? 감자 싹 다 죽일 일 있어? 응? 일 똑바로 안 할래?"

"그,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씩 잘라. 차근차근. 하나씩."

"...."

이놈 모가지부터 차근차근 잘라 버릴까.

시르케는 저도 모르게 울컥했다.

하지만 마왕의 얼굴을 보자 그 울컥함도 자연스럽게 가라앉았다. 역시나 정면에서 대적하며 노려보기엔 뭐랄까.

저 면상....

부담스럽달까. 혹은 생긴 것 때문에 꿈에 나올 것 같아서 소름이 돋았달까. 아무튼 일대일로 맞서기는 좀 그랬다.

"...."

결국, 그녀는 얌전히 앉았다.

그리고 김장철이 건네주는 감자 여섯 덩이를 받았다. 허공에 띄웠다. 스칵칵! 여섯 덩이의 감자가 순식간에 열두 조각으로 변했다.

"그래. 잘하네. 이제 칼날 좀 내밀어 봐."

"네?"

"얼른."

"...."

마왕 크레도스 이놈, 이번엔 또 무슨 수작이지.

이딴 짓거리, 빨리 끝내고 싶은데.

그런데 왜 칼날을....

"얼른. 말 안 들려?"

"...."

돌아 버릴 것 같다.

시르케는 환장하는 기분을 느끼며 여섯 자루의 칼날을 내밀었다. 그리고 잠시 후, 마왕이 보인 뜻밖의 행동에 생애 가장 큰 충격을 느껴야 했다.

마왕이 보인 행동.

그 뜻밖의 행동이 무엇이었냐면....

"아이고, 칼날에 흙이랑 감자즙 다 묻었네...."

"...!"

마왕이!

자신의 칼날을 하나씩 붙잡고!

끓는 물에 조심스럽게 담갔다가!

깨끗한 헝겊으로 일일이 닦아주었다!

심지어 정성스럽게!

무려 꼼꼼하게!

"...."

무, 무슨.

지금, 무슨 짓을.

"아, 깨끗해졌다. 자, 감자. 잘라."

"...아, 네?"

"얼른."

"...."

 

파사삭!

 

또다시 여섯 덩이를 열두 조각으로.

그리고 또다시....

"어휴. 또 흙이랑 즙 묻은 거 좀 봐."

"...."

"깨끗하게 해줘야지. 룰루루."

"...."

또 끓는 물에 담갔다가, 닦아준다.

여전히 정성스러운 손길로.

자신의 칼날을 꼼꼼하게.

더없이 세심한 눈길로.

"...."

대체 이게 무슨....

평소의 자신보다 더 깔끔을 떨어대는 크레도스라니. 그런 깔끔함으로 자신을 챙겨주는 모습이라니.

이건 너무나 취향을 직격해 버리는....

시르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묘한 기분을 느껴 버렸다.

물론 김장철은?

그딴 거 없었다.

당연했다.

그가 정말로 시르케의 칼날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데에만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야 감자가 병에 안 걸리거든!'

사실이었다.

원래 감자를 자를 때는 가급적 이렇게 칼날 소독을 일일이 해줘야 한다. 안 그러면 어느 감자에 있을지도 모를 병균이나 바이러스가, 칼날에 묻어서 다른 감자들에게 싹 퍼지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시작부터 한 해 농사 망하는 거고.'

그런 사태가 벌어져선 안 된다.

진짜로 망하고 죽는 거다.

절대로 그럴 순 없다.

김장철은 그러한 일념으로 시르케의 칼날을 끓는 물에 지지고, 헝겊으로 닦아 주었다.

그러나 시르케가 그런 속사정을 알 리가 없었다.

하여 그녀는....

'미쳤어. 미쳤어. 마왕 크레도스 이 인간, 아니, 이놈, 미쳤어. 진짜 미친 거 아냐?'

잔뜩 찡그린 얼굴이 저도 모르게, 살짝 발그레해져 버렸다.

27화. 비용 절감의 매직 (1)

 

'미쳤어. 미쳤나봐. 마왕 크레도스 이 인간, 아니, 이놈, 진짜 미친 거 아냐?'

시르케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어이가 없었다.

황당하기만 했다.

한편으로는 당혹스럽기도 했고.

"...."

신경 쓰지 말자.

우선은 씨감자 자르기인지 뭔지, 이 일만 후딱 끝내자. 그럼 오늘은 크레도스와 더 부대끼지 않아도 되겠지.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할 것 같으니까.

그때부터였다.

그녀는 씨감자 자르는 일에만 정신을 집중했다.

여섯 개의 칼날을 2개 조로 나누었다. 셋은 자르고, 셋은 마왕에게 맡기고. 맡겼던 셋으로 또 자르고, 잘랐던 셋은 마왕에게 맡기고.

그 과정이 반복되며 점점 숙달되었다.

기계처럼 착착.

정확하게 슉슉.

덕분에 김장철도 흐뭇해졌다.

'...그래. 이거지, 시르케! 이래서 너를 부른 거거든!'

아주 그냥 공장 돌아가듯이 숭숭성성 잘리는 씨감자! 그 와중에도 칼날 소독은 철저하게 이루어지는 이 깔끔한 공정!

이것이 바로 효율!

'그리고 비용 절감이지!'

비용 절감.

그것이 평소 대학원 시절부터 김장철이 품었던 첫 번째 철칙이자, 모토이자, 인생관이자, 가훈이며, 장래희망이고, 이상향이었다.

사실 농업에 몸을 담은 이상 당연한 이야기였다.

농사는 소꿉놀이가 아니다.

힐링과는 거리가 먼 전쟁이다.

비정한 현실이며, 냉혹한 자본주의의 세계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에서만 해도 1년에 얼마나 많은 농가가 적자를 감당하지 못해 신음하는지. 얼마나 많은 농업인이 빚에 허덕이는지. 실상을 안다면 누구나 기겁할 테니까.

'그래서야. 농사의 기본은 절약. 무조건 비용 절감이지.'

그걸 못하면 망한다.

똑같은 비료를 써도 얼마나 싼 것으로 효율을 뽑아내는지. 얼마나 저렴한 재료로 영양분 빵빵한 액비를 우려낼 수 있는지. 비싼 농약을 최대한 덜 뿌리면서도 병충해를 막을 수 있는지.

그런 기본에서부터 생사가 갈린다.

그것이 바로 농사의 현실이었다.

지금 또한 그러했다.

'만약 오늘 씨감자 자르기에 시르케를 동원하지 못했다면... 어쩔 수 없이 농병대를 불러야 했겠지.'

최소 수십 명은 불러야 했을 것이다.

그래야 시르케 하나와 비슷한 속도를 '겨우' 냈을 것이다.

반면 비용은?

훨씬 많이 들었겠지.

'새참은 공짜가 아니니까.'

김장철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요즘 농병대를 동원할 때마다 의무적으로 지급하는 새참은 당연하게도 추뇨였다.

한데 그 추뇨는 절대로 공짜로 얻어진 게 아니다. 오히려 엄청 귀한 자원이다. 버려진 땅의, 자신을 따르는 모든 마족이 성공적인 첫 감자 수확까지 버텨야 할 생명줄이다.

그러니까 최대한 아껴야 하는 것이 당연지사.

'게다가 여기 마족들... 대략 사나흘에 탁구공 크기의 추뇨 하나만 먹어도 굶어 죽진 않으니까.'

그건 자신이 직접 이곳에서 지내며 알게 된 사실이었다.

이곳의 마족들은 굶주림에 엄청나게 강했다.

가장 독하게 다이어트를 하는 인간?

비교도 되지 않았다.

한국에 던져놓으면?

열흘에 돈까스 한 덩이만 먹여도 잘 살아남을 정도였다. 가히 바퀴벌레와 능히 자웅을 겨룰 수준이라 할 수 있었다.

사실 이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그렇게 잘 버티지 못한 놈들은 진작에 다 굶어 죽었으니까.'

이곳 버려진 땅은 척박한 곳이다.

척박하다 못해 아무것도 없는 곳이다.

그런 이곳에서 수십, 수백 세대를 버티며 살아남은 이들이 오죽하겠는가.

'그러니까... 농병대에게도 매일 새참을 줄 필요는 없어. 새참도 최대한 아껴야지. 그러려면 가능한 사천왕을 많이 굴려야 하고. 사천왕은 혼자서 많은 일을 하면서도 입은 하나니까. 얼마나 좋아.'

그래서일까.

눈앞에서 씨감자를 기계처럼 숭겅숭겅 잘라대는 시르케. 덕분에 오늘만 해도 최소 수십 덩이의 추뇨를 절약하게 해준 시르케가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

앞으로 뭐 자를 일 있으면 무조건 얘 시켜야지.

김장철은 다짐하고 또 다짐하며 그윽한 눈으로 시르케를 쳐다보았다. 시르케의 칼날을 더욱 정성껏 닦아 주었다.

감자 더 잘 자르라고.

대신 병균은 절대로 옮기지 말라고.

금고에 고이 숨겨둔 금송아지 닦듯이. 마침내 24개월을 채운 청약통장을 흐뭇하고도 꼼꼼하게 살펴보듯이. 혹은 처음으로 받은 아르바이트 월급을 거듭 확인하듯이. 정성껏 살펴보고, 확인하고, 또 닦았다.

덕분에(?) 씨감자 자르기가 수월하게 끝났다. 성공적인 비용 절감의 실현이라는 아름다운 결과와 함께였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원래 농사라는 일은 끝이 없는 법.

비용 절감의 길 또한 끝이 없는 법!

"...그래서 하는 말인데, 저기 다 자른 감자를 반그늘에 널어놓은 거 보이지? 저게 아물이라는 거야. 앞으로 닷새 정도는 잘린 감자를 저렇게 널어놓을 거거든."

"...."

"그래야 감자가 진정이 돼요. 네가 감자 입장이라고 생각해봐. 잘 있다가, 난데없이 반갈죽... 아니, 반토막이 났어. 아프겠어, 안 아프겠어? 완전 아프겠지? 그런데 그 상태에서 바로 흙에 푹, 하고 심어 버리면 따갑겠어, 안 따갑겠어? 완전 따갑겠지?"

"...."

"야. 대답 안 하냐?"

"...크읏."

김장철의 물음에 사천왕, 아수라트가 얼굴을 와락 찡그렸다. 그리고 원망이 담긴 이글거리는 눈길로 김장철을 쏘아보았다.

"...."

여전히 자신을 말뚝에 매달아 놓은 마왕.

심지어 매일 질소고정이니 뭐니 영문도 모를 말을 외쳐대며 자신을 벼락으로 지져대는 마왕. 지금은 또 설렁설렁 다가와서는 뭔지도 모를 소리를 지껄여대는 마왕.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물론 김장철은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잘린 감자 단면이 아물 때까지 시간을 주는 거야. 상처가 잘 아물고 나서 심어야 흙 속의 병균이나 해충한테 피해를 덜 입거든."

"...."

"또 대답을 안 하네. 쓰읍. 혹시 나한테 삐친 거라도 있어?"

"...."

당연하지!

아니, 고작 삐친 게 아니라!

'차라리... 날 죽여....'

아수라트는 암울한 원망의 눈길로 김장철을 노려보았다. 그는 마왕이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스스로의 처지가 절망스러웠다.

사실은 괴로웠다.

아프고 힘들었다.

벌써 얼마나 여기에 묶여 있었던 걸까.

앞으로는 얼마나 더 묶여 있어야 할까.

모르겠다.

하여 더 암울했다.

그래도 얼마 전까지는 1성 군단의 장군, 피카미르가 2대 피뢰침으로서 곁에 함께 매달려 있었는데.

그런데 이제는 아니었다.

1성 군단이 와해되던 날, 1성주가 소멸한 순간, 피카미르는 연기처럼 흩어지며 승천해 버렸으니까.

"...."

다시금 혼자가 되어 고통받는 외로움.

그럼에도 좀처럼 죽을 수도 없는 질긴 목숨.

요즘만큼은 압도적인 회복 능력을 특기로 지닌 자신의 특성이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어쩌면 그래서였을 것이다.

아수라트가 독한 마음을 품은 것은.

마왕을 향해 작정하고서 독설의 급발진 풀악셀을 밟은 것은.

"대답? 내게서 무슨 대답을 듣길 바라지? 칭찬이라도 듣고 싶은 건가? 응? 아니면, 요즘 들어서 은근히 퇴보해 버린 네놈의 벼락 위력을 품평해 주기라도 바라나, 크레도스?"

"...엥?"

"놀라는 척하지 마. 사실은 크레도스, 요즘 내가 매일 네놈의 벼락을 맞으면서 느끼게 된 건데 말이지. 네놈, 실력이 퇴보한 건 아닌가? 어쩐지 네놈의 벼락이 예전보다 아프지가 않아서 말이다. 설마하니 이젠 날 죽일 실력조차 안 되는 건 아니겠지? 응?"

...그러니까, 이젠 좀 죽여줘.

차라리 깨끗하게 끝내줘.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렇게라도 빌고 싶었다. 하지만 마지막 남은 한 조각의 자존심 때문에라도 그럴 수는 없었다.

하여 더욱 표독하게 마왕을 도발했다.

"그래, 맞아. 이젠 알겠군. 크레도스 네놈, 사실은 날 죽일 수 없게 된 거야. 실력이 퇴보해서, 날 죽이고 싶어도 못 죽이게 된 거지. 원래는 날 여기에 묶어두고서, 본보기로 처형을 하려 했지만 실패한 거야. 하지만 그걸 티를 낼 수가 없어서, 티가 나면 약해졌다는 사실을 들킬까 불안해서, 그래서 피뢰침이니 뭐니 하는 구실을 붙인 거겠지. 맞지? 그렇지?"

"...."

"거 봐. 대답을 못 하는 걸 보니까 맞군. 안 그런가? 날 죽일 실력도, 배짱도, 용기도 없는 크레도스여. 그런 자신이 한심하지 않나? 응?"

그러니까, 화를 내어줘.

이젠 날 깔끔하게 보내줘.

바라고 또 바라며 한바탕 독설을 퍼부은 아수라트는 마왕의 반응을 살폈다.

그리고 고대했다.

제발 마왕이 분노를 터뜨려 주기를.

그 손끝에 피어나는 벼락으로 자신의 질긴 목숨을 끊어서 이 고통의 사슬을 거두어 주기를.

한데....

"뭔 뚱딴지같은 소리야?"

"...뭣?"

"나 오늘 너 풀어주러 온 건데. 혹시 싫어?"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마왕은.

방금 내가 들은 말은 뭐였을까, 대체.

'날... 풀어준다고?'

믿기지가 않았다.

오히려 헛웃음이 나왔다.

또 마왕이 자신을 농락하는구나 싶어서, 독설을 내뱉으려던 순간이었다.

"끙차."

마왕이 말뚝을 타고 올라왔다. 손을 뻗어왔다. 그리고....

 

투둑.

 

멍석이 풀렸다.

그동안 자신을 묶고 있던 멍석이 너무나 간단하게....

"...엇?"

 

털썩!

 

멍석에서 풀려난 아수라트가 말뚝 아래로 철푸덕 떨어졌다. 오랜만에 풀려난 팔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서 앞으로 고꾸라지며 흙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말았다.

덕분에, 실감이 확 났다.

'뭐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어째서 눈앞이 캄캄한 걸까.

어째서 흙냄새가 확 나는 걸까.

어째서 입안에 흙이 들어온 거지.

그러니까.

나는....

"...!"

황급히 얼굴을 들었다.

바로 앞에 군림하듯 우뚝 선 이가 보였다.

마왕, 크레도스였다.

"어때? 이젠 좀 실감이 나?"

"...."

"아직도 실감이 안 나?"

"...."

모르겠다.

이게 현실인지.

혹은 꿈에 불과한지.

아수라트는 고개를 내렸다.

바닥을 짚은 자신의 손등이 보였다. 손에 힘을 주었다. 흙을 파고드는 손가락. 손끝에서 선명하게 느껴지는 감각. 부서지는 흙. 감촉. 습기까지. 모두.

 

...뚝. 뚝.

 

손등에 떨어지는 저 투명한 액체는 뭘까.

설마 내가 흘리는 눈물인 건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그래서 더,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나, 아니... 저, 저를...!"

정말로 풀어주신 겁니까.

이제는 용서하신 겁니까.

저, 이제는 피뢰침이 아닌 겁니까.

다시 사천왕의 지위를 돌려받는 겁니까.

정말로, 그런 것입니까.

격동하는 가슴으로, 메여오는 목으로, 뜨거워진 눈시울로, 마왕을 향해 물었다. 묻고 싶었다.

그런 마음을 알아준 걸까.

마왕이 인자하게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용서? 아닌데?"

"...엣."

"내가? 나한테 개긴 너를? 왜?"

"...."

"나는 그냥 비용 절감 때문에 이러는 건데?"

"...."

그게... 무슨....

아수라트의 격동할 뻔했던 가슴이 짜게 식었다. 메여오던 목이 황당함으로 채워졌다. 뜨거워지던 눈시울이 팍 메말랐다.

김장철이 말했다.

"비용 절감. 몰라? 여기 너 묶여 있으려면 이 말뚝, 계속 박아둬야 하잖아? 안 그래?"

"그, 그렇습...."

"그렇지? 그런데 생각을 해보자고. 이거, 공간 낭비 아닌가?"

"...에?"

"공간 낭비 맞잖아. 말뚝 박아놓은 여기도 밭인데. 감자 심어야 하는 자린데. 이 말뚝 뽑으면 그만큼 감자를 더 심을 수 있는 건데. 낭비 아니겠냐고."

"그건 확실히...."

"그렇지? 네가 생각해도 그렇지?"

"예, 그렇...."

"게다가 너 온종일 묶여 있으면, 또 매일 농병대원 두 명은 옆에 붙여서 감시도 해야 하잖냐. 따지고 보면 그거도 낭비거든. 어쨌거나 너 감시하는 것도 근무고 업무인데. 그럼 걔들 새참 챙겨줘야지 않겠냐. 안 그래?"

"...."

"그러니까 너 풀어주는 거야. 말뚝 뽑고 감자 하나라도 더 심으려고. 너 감시할 인력한테 들어갈 새참 아끼려고. 이게 다 비용 절감인 거거든. 그래서 이제부터 너도 출퇴근직으로 전환되는 거고."

"예?"

아수라트는 흠칫했다.

'출...퇴근?'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그런데 어쩐지 듣자마자 고막에서부터 청각신경을 거쳐 대뇌피질까지 모조리 쌔한 소름이 돋는 단어랄까.

"저기, 출퇴근이라는 게 도대체...."

"뭐긴. 출퇴근이 출퇴근이지. 내일 아침부터 늦지 않게 '여기로' 출근 잘 하라고."

"예? 그럼, 여기로 출근이라는 걸 하면...."

"뭘 하면 되냐고?"

"예."

"뭘 하긴. 피뢰침 해야지."

"...."

"출근하면 여기서 손들고 서 있으라고. 이렇게. 벼락 꽂히기 딱 좋게. 기왕이면 알아서 틈틈히 자세 연구도 좀 하고."

"...."

"싫어? 그런데 어떡하냐. 너보다 벼락 찰지게 잘 맞는 놈이 또 없는데."

"...."

"혹시 출퇴근직 마음에 안 들어? 다시 매달릴 거야?"

"...!"

 

도리도리!

 

"그러니까 출퇴근, 내일부터 잘하자?"

"...."

한때 버려진 땅의 모든 이들을 벌벌 떨게 했던 혈염의 사천왕, 아수라트.

졸지에 밀당식 희망고문(?)을 당한 그는 깨달았다. 비용 절감의 혹독한 모토 아래에서는 용서고 자비고 찾을 길이 없다는 사실을.

 

물론 김장철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놀부와 스크루지, 집ㄱ사장마저 벤치마킹을 진지하게 고려할 그의 본격적인 비용 절감은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28화. 비용 절감의 매직 (2)

 

"후으, 후욱! 이제... 드디어 끝인 겁니까요?"

"아니다. 이건 시작일 뿐이야."

"그럼 대체, 하으악, 흐윽, 언제쯤 끝이 보일까요?"

"글쎄다."

귀족 도련님과 몸종.

아스라한 공자와 몸종 프론테라.

두 사람이 힘겹게 나누는 이야기를 들으며 묵은지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자 길이 보였다. 가장 능숙한 길잡이도 간신히 목적지를 잃지 않을, 세차게 불어오는 황무지 모래바람 속의 길이.

"이쪽인 것 같은데."

"후욱, 하, 고맙습니다요."

"...."

간신히 뒤를 따라오는 몸종 프론테라.

그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숨도 매우 거칠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제 체중과 별로 차이가 나지도 않는, 다리가 부러진 도련님을 업고서, 며칠째 황무지를 걷고 있으니 말이다.

"제법 힘들어 보이는데. 잠시라도 내게 맡기는 건?"

묵은지가 보다못해 물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몸종, 드이로 프론테라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아이고, 그건 안 됩니다요."

"어째서?"

혹시 모시는 도련님을 위한 충성심 때문일까.

혹은 아직도 이쪽을 온전히 믿지 못함일까.

설마 이쪽이 제 도련님을 업고서 도망이라도 칠까 봐? 그렇게 납치 사태라도 벌어질까 봐?

그건 아닌 듯했다.

"저희 도련님이... 후우, 후욱, 제 등짝이 아니면 도통 만족을 못 하십니다요."

"등짝? 그쪽의 것이 아니면?"

"예."

"그쪽의 등짝이 어떻길래?"

"편하오. 이루 말할 수 없이."

이번 대답은 몸종이 아닌, 아스라한 도련님에게서 돌아왔다. 몸종 프론테라가 그토록 극진히 모시는 도련님, 엘비하 아스라한이 자랑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몸이 편한 것은 물론이고, 마음마저 든든해지오. 마치 나만을 위해 만들어진 등짝 같다고나 할까."

"후우욱, 훅, 가, 감사합니다요, 도련님."

"아니다. 오히려 내가 고맙지. 세상은 어찌 이런 훌륭한 등짝을 만들었을까."

"이게 다... 후욱, 훅, 도련님이 타고나신 복이 아니겠습니까요."

"그런가. 아니야. 나는 행운이 우연히 주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 그렇습니까요, 도련님?"

"그렇지. 내가 이번 생에서 너를 통해 얻는 수많은 편리함과 안락함은 언젠가 너의 후손, 혹은 너의 다음 생애에 반드시 보상으로 주어질 것이야."

"하악, 학.... 그, 꼭 그러면 좋겠지 말입니다요. 기왕이면 많은 돈으로다가...."

"부유함이라. 그것도 참으로 좋겠구나. 그럼 이만 이쯤에서 쉬었다 갈까?"

"드, 듣던 중에... 쒸익, 후쓰힉, 반가운 말씀입니다요."

아니나 다를까.

이제 몸종 프론테라의 얼굴은 붉은빛을 넘어서서(?) 새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곧 있으면 파란색으로 변하고, 풀썩 쓰러지겠지.

그걸 보던 묵은지는 뭐랄까.

'안타깝군.'

진심으로 몸종 프론테라가 안타까웠다.

어째서?

'쉬게 해주고 싶은데.'

어쩐지 그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조금만 더 걷지. 100미터만 더 가면 마을이 나올 것 같아서."

"예에?"

몸종 드이로 프론테라가 반가움과 억울함과 힘들어 죽겠음과 그걸 왜 하필 지금 말하냐는 힐난의 모든 감정을 뒤섞은 눈빛을 보내어 왔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겠다.

묵은지는 몸종의 눈빛을 외면하며 도련님 쪽을 쳐다보았다.

"근처에 마을이 있다 해도 이곳은 여전히 훤히 노출된 황무지의 한가운데라서 쉬는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고."

그 말 또한 사실이었다.

이곳은 변경이라 해도 여전히 버려진 땅이었다. 실제로 지난 며칠 사이에만 몬스터에게 습격을 받은 것이 여덟 번이나 되었을 정도였다.

"그럼... 근처에 있다는 마을도 규모가 크지는 않겠구려. 맞소?"

"맞아. 기색으로 보아서 추방자들이 모인 곳 같은데."

"그래도 그 정도면 비바람을 피할 암굴 정도는 있겠구려. 자, 드이로?"

"...예에, 도련니임."

"힘이 들겠지만 조금만 더 움직이자꾸나."

"...."

"드이로?"

"...에휴. 저 말입니다요. 다시 태어나면 진짜로 돈 많이 벌 겁니다요."

"그래. 꼭 그러도록 하려무나."

"그리고 도련님네 후손을 아주 마구잡이로 부려먹고 또...."

"응?"

"아, 아닙니다요."

"뭐가 아니지? 내가 방금 뭔가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것 같아서 하는 말인...."

"어서 가십시다요! 끙차!"

몸종 프론테라가 땀에 젖은 갈색 머리칼 아래로 콧김을 풍 뿜어내며 힘찬(?) 걸음을 옮겼다. 그에게 업힌 아스라한 공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얼버무린다 해도 분명히 들은 것 같단 말이야. 내 후손을 부려먹겠다고. 맞지?"

"아이고 우리 도련님 다리만 다치신 줄 알았는데 귀도 안 좋아지셨나 보지 말입니다요."

"허허. 네가 나를 아주 반편이 취급을 하는구나?"

"아이고 제가 감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요?"

"지금 그러고 있지 않느냐?"

"설마요?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십니다요."

"흐음, 억울하다는 건가?"

"물론이지 말입니다요."

"하긴. 이토록 충실한 네가 그럴 리는 없겠지."

"당연한 말씀이시지 말입니다요."

"그래. 괜찮다. 후손이든 뭐든 그게 뭐가 중요하겠느냐. 지금 네가 나에게 이토록 충실한 걸로 이미 충분한 것을."

"헤헤, 알아주시니 감사합니다요."

"하하. 네가 다음 생에 부자가 되는 게 꿈이라면, 나는 다음 생에는 세상에서 제일 튼튼한 몸으로 태어나는 것을 꿈으로 삼아봐야겠구나."

"혹시 소드마스터, 뭐 그런 얼토당토않은 꿈을 꿔보시는 겁니까요?"

"왜? 그러면 안 되겠느냐?"

"안 될 것은 없지만...."

"없지만?"

"헤헤헷, 언젠가 제 머나먼 후손이 돈 많이 벌어서 도련님의 후손인 소드마스터를 막 부려먹으면 참 좋겠...."

"뭐?"

"아, 아닙니다요."

"방금 또 이상한 소릴 들은 것 같은데?"

"잘못 들으셨지 말입니다요."

"아닌데? 분명히 들었는데?"

"아이고, 또 귀 안 좋아지셨네, 우리 도련님. 어서 가십시다요, 끙차!"

"...."

은근 인자해서 다 받아주는 도련님.

충실한데 영악해서 살살 기어오르는 몸종.

둘의 아웅다웅과 나란히 걸으며 묵은지는 문득 생각했다.

'인간, 아니, 사람들은 다 이런 건가.'

서로를 향해 농담을 나누고.

실없이 웃으며 서로를 돕고.

그렇게 살아가는 건가.

'그러고 보니....'

묵은지는 고개를 들었다.

새삼스러운 깨달음이 다가왔다.

'나는 앞선 열아홉 번의 생애를 모두 합쳐도, 나와 같은 사람들이 사는 세상으로는 한 번도 다가가 보질 못했구나.'

처음인 셈이다.

사람들의 마을에 가는 것이.

자그마한 자각이 뇌리를 톡톡 두드렸다.

그와 함께 추방자들의 촌락이 점차 가까워졌다.

암굴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이쪽을 살피는 사람들의 모습. 서로를 부르는 목소리.

묵은지의 가슴이 기대감과 걱정을 함께 담고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쿠와앙!

 

땅이 울렸다.

가슴이 뛰었다.

땅울림과 함께, 농병대원들의 2심방 2심실이 쿵 하고 뛰었다.

모두가 분명히 두 눈으로 목격한 까닭이었다.

자신들의 마왕님이.

농병대장이자 청년회장님이.

하늘을 향해 한 손을 들어 올리는 모습을.

그러자마자 상공에서 공간의 틈새가 열리는 광경을.

틈새를 통해 떨어져 내려온 거대한 의자가 땅에 꽂히는 장관을!

"...우오오오오!"

농기구가 빽빽하게 꽂힌, 실로 기이하게 압도적인 외관의 의자였다.

김장철이 외쳤다.

"이제부터 들어라. 오늘 우리는 씨감자를 심을 것이다. 그러나 농병대원 300명이 모두 참가하지는 않는다."

그의 외침에 300명의 농병대원들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모두의 머릿속에 똑같은 의문이 살포시 떠올랐다.

'300명이 다 참가하는 건 아니라고?'

'그런데 왜 300명 전원을 집합시켰지?'

김장철이 다시 외쳤다.

"여기, 방금 내가 소환한 농기구 세트 중에 오늘 반드시, 유용하게 쓰이게 될 농기구 몇 가지가 있다. 이제부터 여러분 중에서, 정확하게 그 농기구를 뽑아든 자만이 오늘의 씨감자 심기 작업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

농병대원들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들은 방금 들은 선언의 뜻을 단번에 깨달았다.

'어?'

'적합한 농기구를 고른 놈만 일할 수 있다고?'

'아닌 놈들은? 그냥 집에 가는 거야?'

'그럼... 새참을 못 받는 거네?'

그렇다.

일을 해야 새참이 나오는 법!

일을 못 하는 자에게는 국물도 없는 법!

"내가 셋을 외치면, 각자 농기구를 선택한다. 하나둘셋!"

"...!"

김장철이 숨도 안 쉬고 셋을 외쳤다.

농병대원들이 반사적으로 땅을 박차고 달려가 농기구 세트 의자에 달려들었다.

"내가 먼저야!"

"이건 내 거야!"

"으아악 밀지 말라고!"

"아무거나 일단 잡아!"

한바탕 선착순 골라골라 폭풍세일의 현장이 지나갔다. 의자에 빽뺵하게 꽂혀 있던 농기구가 순식간에 품절(?)되었다. 김장철이 씩씩대며 농기구를 잡고 있는 농병대원들을 한차례 스윽 쳐다보았다.

"너, 너, 그리고 너."

손가락으로 척척.

순식간에 스무 명의 농병대원을 지목했다.

운 좋게 호미와 족답식 가래, 극젱이, 삽 등등을 집어든 이들이었다.

"너희가 오늘 나와 작업을 함께한다."

"...!"

"나머지는, 으음, 안타깝지만 규칙은 규칙이라."

"...."

선택받은 자와 그렇지 못한 자.

두 그룹 사이에 희비가 엇갈렸다.

선택받은 이들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환희의 감격. 오늘 제대로 새참을 받을 수 있겠다는 희망. 새참을 받으면 다 먹지 말고 남겨서 집에 가져가 아내와 아이들에게 먹여야겠다는 다짐까지.

기쁨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반면, 선택받지 못한 이들의 어깨가 처졌다.

실망과 낙담. 오늘은 굶을 수밖에 없겠다는 한탄. 운 나쁘고 능력 없는 아빠 때문에 오늘도 굶어야 할 아이들을 떠올리자 스며오는 서글픔.

절로 고개가 떨구어졌다.

한데 그때였다.

마왕님의 입에서 뜻밖의 선언이 나왔다.

"그럼에도 일손은 언제나 모자란 법이다. 하여 묻겠다. 적합하지 않은 농기구를 집어든 이들이여. 혹시 너희는 맨손으로라도 나와 함께 작업에 동참할 의지가 있나?"

"...!"

"있다면 앞으로 나서라. 그 의지를 높이 사서 얼마든지 작업에 참여시켜 주겠다. 단, 맨손으로 참여하는 이들에게 새참으로 지급되는 추뇨는 한 개가 아니라 반쪽이 될 것이다. 아무래도 적합한 농기구로 작업하는 이들보다 작업량이 떨어질 테니까. 어떤가. 그래도 함께하겠는가?"

"...무, 물론입니다! 마왕님!"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입니다, 농병대장님!"

"참여하게만 해주십시오, 청년회장님!"

"감사합니다, 형님, 아니, 아빠!"

"난 오빠라고 부를래!"

"...여기 변태가 있다아!"

실망의 나락에 빠져가던 탈락 농병대원 전원이 앞다투어 맨손 참여의 의지를 불태웠다. 이렇게 추뇨 반쪽이나마 건져서 다행이라고. 오늘 자신은 굶더라도 가족의 입에 풀칠은 할 수 있게 되어서 안심이라고.

그렇게 제대로 된 농기구를 집어든 이들과, 맨손으로 참여하게 된 이들 모두가 만족했다.

김장철도 매우 만족했다.

'...후우, 이걸로 비상식량 아꼈다.'

사실 오늘 작업은 처음부터 모두를 참여시킬 생각이었다. 어차피 마족의 강인한 육체능력을 고려했을 때, 감자를 심는 작업에는 특별히 도구가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호미를 쓰건 맨손으로 푹푹 찌르건 감자 심을 정도로 땅 파는 건 똑같이 쉬울 거니까.'

한데 그렇다고 그냥 모두를 작업시키면?

새참으로 추뇨 300개를 소모해야 했을 터였다.

하지만, 이렇게 고도의 추첨제(?) 방식을 동원하면?

'추뇨 하나를 온전히 받는 대원이 스물, 그리고 반쪽 추뇨를 받는 대원이 이백팔십. 계산하면 오늘 새참으로 소모되는 추뇨는 총 160개.'

...무려 140개의 추뇨를 아끼게 됐다!

물론 사기를 치는 것 같아서 미안하긴 했다!

그러나 정말로 어쩔 수가 없었다!

'최대한 아껴야 해. 감자가 무사히 수확될 때까지 버티려면 이래도 빠듯하니까.'

그것이 비정한 현실이었다.

하여 대원들의 마음을 다치게 하지 않으면서, 교묘한 방법으로 추뇨를 절약한 김장철이었다.

"...."

미안하다, 모두들.

그래도 다 굶어 죽지 말자고 이러는 거니까.

혹시나 눈치채게 되더라도 조금만 이해해 주라.

김장철은 독한 마음을 애써 다잡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미안한 심정을 담아 농병대원들의 감자 심기 작업을 감독했다.

그러는 한편으로 또 다른 걱정도 들었다.

'그러고 보면 이제 슬슬 올 때가 됐는데.'

그는 감자밭 너머 동남쪽을 바라보았다.

망자의 단애를 정벌하여 1성주의 봉쇄를 푼 직후, 단애 바깥 버려진 땅의 나머지 성주들을 향해 전령을 보낸 방향이었다.

'지금쯤 내가 보낸 인간계 침공 중지와 농사 선언을 모두 전해 받았을 거란 말이지.'

그런데 다들 아직껏 답이 없다.

적어도 단애 바로 바깥에 있어서 거리상 가장 가까운 2성주에게서는 답이 올 때가 확실히 지났을 텐데. 그럼에도 여전히....

그때였다.

 

...투두두두두!

 

마치 이쪽의 심정을 알아주기라도 하듯, 드넓은 감자밭 너머 동남쪽에서부터 희미한 땅울림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가까워졌다. 요란한 흙먼지와 함께였다.

그리고 잠시 후, 식충식물의 모습을 한 마족이 달려와 뿌리를 무릎 대신 꿇었다.

"마왕 크레도스 님을 뵙습니다!"

얼마나 급하게 달려온 걸까.

온몸이 흙먼지에 뒤덮여 엉망진창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곳곳이 수액투성이였다. 심지어 나뭇가지는 절반 이상 잘려 있었다. 그럼에도 상처를 제대로 치료하지 못한 모습이기도 했다.

김장철의 눈길이 가늘어졌다.

'이거... 쌔한데?'

그는 엉망진창인 마족의 정체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당연했다. 게임을 하며 지겹도록 잡아본 놈이니까.

'이놈, 2성 군단병이잖아. 그런데 왜 만신창이가 돼서 달려온 거지?'

혹시 무슨 난리라도 벌어진 걸까.

불길한 예감을 느끼는 순간.

"버려진 땅의 합당한 주인이신 마왕 크레도스 님께 2성주의 전언을 고합니다. 현재 2성 군단은 3성 군단의 전면적이고도 기습적인 침공을 받아 붕괴의 위기에 처하여 있습니다. 하여, 저의 주군이신 2성주께서는 마왕 크레도스 님의 지원군을 애타게 바라고 계십니다."

"...뭐 x발?"

2성 군단 전령의 입에서, 아빠가 친척 빚보증을 섰다는 것과 동급으로 느껴질, 혹은 엄마가 다단계에 인생을 걸었다는 사태와 대등하게 체감될, 날벼락 같은 소식이 튀어나왔다.

29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방법 (1)

 

두 마리의 토끼 잡기.

승진하고 로또 당첨되고.

바론 잡고 소개팅 애프터 받고.

노령연금 받는 김에 닫힌 성장판도 열고.

둘 모두를 한꺼번에 해내면 참 좋은 일들이다.

하지만 그걸 해내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에, 사람들은 말하곤 한다.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는 것은 무리라고.

하나는 포기하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아니, 그게 현명한 거라고.

어쩌면,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인지도 모르겠다.

"...끄응."

마왕의 권좌에 앉은 김장철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뒷골이 절로 지끈거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3성주 그놈 그거, 미친 거 아냐?'

문득, 아까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한창 농병대를 데리고서 씨감자를 심던 중이었던가. 동남쪽에서 전령이 달려왔다. 2성주가 보낸 전령이었다.

한데 전령이 전한 소식이....

"3성주 그놈은 왜, 2성주를 패고 있는 거냐고. 왜."

기습적인 공격이었단다.

전면적인 침공이었단다.

그래서 2성 군단이 확 밀렸다고도 했다.

"아마 2성주도 나름 저항을 시도했겠지만, 대대적인 기습을 당하며 한번 기울어진 전황을 뒤집기에는 무리였을 겁니다. 원래부터도 2성주와 3성주가 거느린 군단의 전력은 거의 동일했으니까 말입니다."

"뭐, 그랬겠지."

제피로스의 건조한 목소리.

녀석의 첨언에 대꾸하며 김장철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아니, 그래도. 이건 좀 심하지 않나? 어째 내가 인간계 침공 중단과 농사 선언을 담은 전령을 보내자마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냐고."

"아마도 주군께서 그런 내용의 전령을 보내셨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하아. 쓰읍."

"3성주는 마왕님의 선언을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라 여겼을 테지요."

"내가 약해졌거나 겁을 먹고서 인간계 침공을 포기하고 어쩌고저쩌고... 또 뭐 그런 거?"

"네."

제피로스가 숨도 안 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김장철은 씁쓸한 기분으로 녀석의 조언을 귀에 담았다.

"3성주는 야망이 큰 자입니다. 결코 누군가의 밑에서 고분고분 고개를 숙이는 법이 없지요. 주군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주군께서 마왕의 권좌를 차지한 직후에도 반항을 했던 3성주를 직접 제압하여 권위를 확실히 세우셨고 말입니다."

"뭐... 그랬... 지?"

"네. 이번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3성주는 이번 일을 기회로 삼아 평소에도 앙숙처럼 지냈던 2성주를 제거하고, 2성 군단을 흡수하여 세력을 불리려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버려진 땅을 다 집어삼키려 한다? 그놈이?"

"최소한 이곳 마왕성과, 난공불락의 험지인 망자의 단애를 제외한 버려진 땅의 나머지 구역을 모두 손에 넣으려는 의도는 확실해 보입니다."

"...."

김장철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돌아가는 사정은 확실히 알겠다.

'뭐, 게임에서도 여러 차례 언급됐으니까. 3성주가 야심가라는 것도. 2성주와 사이가 나쁘다는 것도.'

그래도 설마하니 이렇게 바로 일을 터뜨릴 줄은 몰랐는데.

김장철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만약에 말이야. 내가 다시 전령을 보낸다면, 3성주가 내 말을 듣고 군단의 진격을 멈출 가능성은?"

"없습니다."

"쓰읍. 매정하게 말하네."

"지금은 헛된 희망보다 냉철한 현실 인식이 필요한 때니까요."

"...."

"3성주가 주군께서 보낸 전령의 말을 따를 자였다면, 애초에 2성 군단을 상대로 전면전을 벌이는 일도 저지르지 않았을 겁니다."

"...하긴. 그 말은 맞긴 해."

"그럼 이제 어떡하실 겁니까?"

"그게 고민이다. 고민이야."

김장철은 미간을 콱 찡그렸다.

제피로스가 냉정하게 물어왔다.

"앞뒤 없이 날뛰는 3성주를 이대로 두실 겁니까?"

"그건 물론 아니지...."

"그렇다면 당장 직속군을 동원하셔야 합니다."

"나도 알고는 있는데."

"주군께서 직접 3성주를 제압하셔야 하고요."

"어. 그것도 알아."

"그런데 뭐가 문제입니까?"

"감자 농사."

"...."

이쪽이 딱 잘라서 꺼낸 대답.

이번에는 제피로스의 말문이 막혔다.

녀석을 향해 물었다.

"이봐, 제피로스. 너 말이야. 여기 마왕성에 있는 마족 중에 제일 똘똘하지?"

"제 입으로 그런 말씀을 드리기에는 조금 낯부끄럽지만, 엄연한 사실입니다. 제가 제일 똑똑합니다. 제가 제일 영민합니다. 제가 제일 머리가 좋습니다."

"...그런 말은 굳이 세 번씩이나 강조 안 해도 되는데."

"하지만 저는 똑똑하니까요."

"그래. 좋겠다. 그런데 그렇게나 똑똑하신 제피로스 씨? 혹시 감자 농사 지을 줄 아세요?"

"모릅니다."

"대답은 시원해서 좋네."

"어쨌거나 사실이니까요."

"그래. 그렇지. 너는 감자 농사를 지을 줄 모르지. 여기 마왕성에서 제일 똑똑한 너도 감자 농사에 대해선 아무것도 몰라. 아는 게 없어. 백지상태야."

"...그런 말은 굳이 세 번씩이나 강조 안 하셔도 되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너는 모르잖아? 감자 농사."

"...."

제피로스 녀석이 입을 다물었다.

녀석을 딱 가리키며 말했다.

"너, 감자 농사 지을 줄 몰라. 사천왕? 더 모르지. 그렇다고 농병대는 알겠냐? 아니. 걔들도 아예 몰라. 이게 무슨 뜻인지 알어?"

"...주군께서 3성주를 정벌하기 위해 자리를 비우게 되면, 기껏 시작된 감자 농사가 망할 거라는 뜻이로군요. 맞습니까?"

"어. 딩동댕."

김장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문제다.

그게 딜레마다.

그게 지금 자신이 잡아야 하는 두 마리 토끼의 실체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내가 감자 농사 안 망하려고 여기 눌러앉아 있으면? 날뛰는 3성주를 놔두고, 그래서 2성주가 뚝배기... 아니, 대갈통이 깨져서 죽으면? 2성 군단이 3성 군단에게 흡수되면? 어떻게 되겠냐."

"아마 주군께서 지닌 마왕으로서의 모든 권위가 사라질 것입니다. 버려진 땅의 모든 마족들은 깨닫게 되겠지요. 마왕은 날뛰는 3성주를 제어할 의지가 없구나. 그럴 힘도 없구나. 이제는 그 누구도 마왕의 권위에 보호받지 못하는 세상이 왔구나, 라고 말입니다."

"그렇지. 각자도생, 군웅할거의 전국시대가 열리는 거야, 아주."

바로 그거다.

3성주를 놔두면 마왕으로서의 권위 상실.

버려진 땅 전체가 군웅할거 시대로 돌입.

그렇다고 3성주를 박살 내러 움직이면?

감자 농사가 망하고 전부 굶어 죽는 엔딩.

"...."

미치겠다.

둘 중의 어느 것도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쓰읍. 그렇다고 단순돌격만 아는 바할에게 군단을 맡겨서 지원을 보낼 수도 없고. 다른 사천왕한테 군단을 맡겼다간 내 목이 숭겅 썰릴 거 같고.'

김장철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겨우 씨감자까지 심었는데. 마침내 제대로 농사 시작인데. 어째서 행복하지 못해애."

"하지만 선택을 하셔야 합니다."

"그렇겠지?"

"네. 여기서 마왕의 권좌를 고민의자처럼 활용하며 시간을 보내어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을 테지요."

"쓰읍. 말이 참 신랄하네."

"결단이 필요한 순간이니까요."

"...결단이라."

김장철은 표정을 굳혔다.

둘 중의 하나.

두 마리의 토끼.

그러나 어느 하나도 포기해서는 안 되는 상황.

하지만 둘을 모두 실현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

'...이라지만, 생각하자. 떠올려라, 김장철. 쉽게 포기하지 말자고.'

포기하면 끝이다.

체념하면 손해다.

안 되는 것 같아도 계속 부딪치면 뚫린다.

그게 자신이 살아온 삶이었다.

할머니 손에 키워지며 찢어지게 가난했어도 장학금에 아르바이트까지 병행하며 대학을 마치고 대학원까지 올라왔다. 게임조차도 그렇게 했다. 길이 보이지 않아도 들이대며 끝끝내 없는 길을 만들어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여기 붙어서 감자 농사를 하면서도, 먼 곳에 있는 3성주를 박살 내러 다녀올 방법.... 뭐가 있을까.... 대체 뭐가....'

머리를 굴렸다.

대뇌피질에 불을 지폈다.

자신이 아는 이 게임 속 세계의 설정들.

자신이 플레이하며 알아낸 정보들.

그 모든 것들을 끄집어냈다.

머릿속에서 조립했다.

모든 종류의 가능성을 타진했다.

가능과 불가능의 영역을 뒤섞었다.

그리고 마침내, 떠올렸다.

"...."

있다.

불가능해 보이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방법이.

그걸 해낼 수도 있을 유일한 가능성이.

 

벌떡.

 

해결책의 실마리를 엿본 김장철은 즉시 몸을 일으켰다.

제피로스 녀석이 물어왔다.

"주군? 어딜 가시려는 겁니까?"

"버려진 우물."

통칭, 우물.

그건 이 세계를 이루는 게임, 팔라딘 오브 블러드의 세이브 포인트의 역할을 하는 장소였다. 또한, 맵 곳곳에 퍼져서 빠른 맵 이동을 가능하게 해주는, 일종의 포털이기도 했다.

'한 지역마다 하나씩 있었지, 버려진 우물. 그건 이곳 마왕성도 마찬가지였고.'

김장철은 기억을 더듬었다.

마왕성에 있는 우물.

그건 마왕의 권좌가 있는 장소에서 아래층. 가장 구석진 버려진 밀실에 마련되어 있었다. 한편으로는 그곳이 마왕 크레도스와의 최종보스전 직전의 마지막 세이브 포인트이기도 했고.

'가보자. 가능성이 크지는 않지만... 그래도 시도는 해봐야 해.'

그게 만약 게임 속에서처럼 작동한다면?

순식간에 3성주나 2성주의 영역에 있는 우물로 이동할 수 있다.

그러면?

모든 고민이 해결된다.

아침에 감자밭에 물 주고, 점심에 저쪽 우물로 건너가서 3성주 패고, 다시 저녁에는 마왕성 우물로 돌아와서 감자밭을 둘러보며 보람찬(?) 하루를 마칠 수도 있는 것이다!

'제발. 제발 돼라. 제발.'

김장철은 해본 적도 없는 기도를 부처님 예수님 알라신께 공평하게 올리며 복도를 가로질렀다. 계단을 내려갔다. 모퉁이를 돌아 거미줄과 먼지 가득 쌓인 외딴 방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찾지 않는 버려진 밀실.

그곳에 우물이 있었다.

"...."

우물은 게임을 하며 보던 모습과 똑같았다.

버려졌다는 이름에 걸맞게 음침했다. 조금의 물기조차 없이 메마른 채 황량하기만 했다.

비활성화 상태인 까닭이었다.

'아직 아무도 이걸 일깨우지 않은 상태인 거야. 그리고 플레이어가 다가가면... 비로소 빛이 나며 활성화가 되는 거지. 그때부터는 이걸 세이브 포인트 겸 맵 이동 스팟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거고.'

그러니까 활성화가 되어야 한다.

자신이 다가갔을 때 우물이 빛을 뿜으며 반응을 보여야 한다.

'제발. 제발...!'

김장철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우물에 다가섰다.

게임 플레이를 하던 때처럼.

한 걸음. 두 걸음.

바로 앞까지.

하지만.

"...."

우물은 빛을 발하지 않았다.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비활성화 상태로 침묵했다.

"야? 어이? 이봐?"

 

툭툭.

 

초조한 마음을 못 누르고 우물 가장자리를 툭툭 건드려보기도 했다.

한데 그럼에도 마찬가지였다.

깨어나지 않았다.

"...."

안 되는 건가.

내가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아니라서.

마왕 크레도스의 몸뚱이를 지니고 있어서.

그래서 아무 반응도 안 보이는 건가.

'하아.'

잠깐이마나 희망을 엿보았는데.

실망감이 확 몰려왔다.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한데 그때였다.

"...티봉?"

마침 잠에서 깨어난 걸까.

품속에서 뭔가가 꼬물딱거리는 감촉이 느껴졌다. 이쪽의 품속에 꼬물꼬물 들어와 낮잠을 자던 티봉이가 깨어난 듯했다.

"티봉? 티보봉...?"

이내 밖으로 자그마한 얼굴을 쏙 내미는 티봉이. 아직 잠이 덜 깬 걸까. 반쯤 감긴 눈으로 기어 나오던 녀석이 손을 헛디뎠다. 그리고 똑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티봉!"

 

찰푸닥.

 

잡아줄 틈도 없었다.

녀석이 찹쌀떡 같은 볼따구로 우물 가장자리에 착지(?)를 하고 말았다. 챱.

그 순간이었다.

 

...화아악!

 

마치 거짓말 같은 우연처럼.

혹은 필연을 빙자한 행운처럼.

티봉이와 접촉한 우물이 신비로운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30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방법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