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배덕의 권좌 (2)
콰학-!
무언가가 솟구쳤다.
처음엔 착각인 줄 알았다.
혹은 벌써 잠이 든 건가 싶었다.
요즘 너무 피곤했어서.
신경 쓸 일이 많았기에.
뒤늦게 풀린 긴장 때문에 순식간에 잠이 들어 버린 건 아닐까. 그래서 이런 험한 꿈을 꾸는 건 아닐까. 잠깐 그렇게 생각을 해볼까도 싶었는데.
"...!"
착각 같은 거, 아니다.
꿈 따위는 더욱 아니다.
'크엇?'
김장철은 기겁했다.
권좌 아래쪽, 바닥을 깨부수며 솟구친 거대한 줄기.
굵기만 해도 1미터는 넘을 듯했다.
그런데 유연했다. 초거대 아나콘다처럼 구불구불 솟구쳐 휘어지며 권좌와 이쪽을 휘감아 왔다.
당장에라도 으깨 버릴 듯이!
투칵!
위기를 느낀 순간이었다.
전력으로 권좌를 박찼다.
몸을 솟구쳤다.
그 직후, 아래에서 뭔가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권좌가 부서진 걸까. 그렇겠지. 그래도 그동안 불편한 수면이나마 지켜주던 권좌였는데. 다음 권좌는 좀 더 인체공학적인 걸로 마련하면 좋겠....
그때였다.
덜컥!
"흡?"
무언가가 발목을 휘감았다.
아래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콰아앙-!
"...!"
바닥에 패대기쳐진 걸까.
비명도 나오지가 않았다.
온몸이 으스러진 건지.
목숨은 붙어 있는 건지.
잠깐 눈앞이 새까맣게 변했다.
잠시 후 돌아온 시야 속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어지러웠다.
귓가에 울리는 이명.
뒤이어 몰려오는 낯선 감각. 고통. 전신의 뼈가 어긋나 버린 듯한. 혹은, 온몸의 근육이 갈가리 결 따라 찢긴 듯한.
"...크! 윽!"
감각이 돌아오자마자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제대로 일어날 수가 없었다. 발목이 여전히 아까 그 줄기에 붙잡혀 있었다.
비로소 줄기의 모양을 제대로 보았다.
'이건....'
그냥 나무줄기가 아니다.
파리지옥.
거대한 경첩 같은 구조물.
한번 물리면, 그 안에 갇히면,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는, 식충식물의 대표적 무기.
그게 나무줄기 끄트머리에 달려 있었다. 그리고 이쪽의 발목을 꽉 물고 있었다. 마치 쥐잡이 트랩처럼. 죽을 때까지 놓아주지 않을 기세로.
한데 파리지옥의 모양새가 낯설지가 않았다.
분명 어디선가 봤다.
그것도 최근에.
그건 바로.
'...2성주?'
그래.
2성주가 지닌 15개쯤 되는 나뭇가지.
그 끄트머리에 저런 파리지옥이니, 끈끈이주걱이니 하는 식충식물의 것들이 잔뜩 달려 있었지. 하지만 그건 이렇게 크진 않았는데. 작정하면 사람도 삼킬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라고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콰합!
"...!"
발목을 물고 있던 파리지옥이 입을 확 벌렸다.
혹시 이쪽의 발목만으로는 만족을 못 한 걸까.
이쪽을 아예 통째로 집어삼켜 가둘 듯이, 거대한 포식 맹수의 아가리처럼 전신을 덮쳐왔다!
"흡!"
반사적으로 옆으로 굴렀다.
그 직후, 거대 파리지옥이 바닥을 갈아엎으며 옆을 스쳐 지나갔다. 식은땀이 흘렀다. 동시에 다시금 익숙한 감각을 느꼈다.
그건 바로....
'방금 파리지옥 공격 그거, 게임 속 2성주의 패턴인데?'
단지 크기와 파괴의 규모가 거대해졌을 뿐.
패턴 자체는 큰 차이가 없어 보였다.
그렇다는 뜻은....
'이거, 진짜 2성주라고?'
어째서?
어떻게?
김장철은 재빨리 뒤로 물러나며 거리를 벌렸다.
그 순간, 홀 바닥 곳곳에서 다섯 갈래의 줄기가 추가로 솟구쳤다.
하나같이 무식하게 거대한 줄기. 성난 독사처럼 일제히 이쪽을 노려보는 파리지옥과 끈끈이주걱, 그 밖의 살벌한 육식성 트랩의 향연.
덕분에 확실해졌다.
'맞네, 2성주.'
어쩐지 그날, 눈빛이 좀 이상하더라니. 딱 남의 연구에 숟가락 얹으려는 교수들 같은 눈빛이더라니.
'그런데... 대체 어떻게?'
이렇게까지 거대해진 걸까.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답을 구할 틈은 없었다.
팅팅 불어난 우동 면발이 그릇을 꽉 채우듯, 바닥에서 솟구친 우람한 가지 여섯 갈래가 홀을 완전히 꽉 채워 버렸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파괴의 춤을 추기 시작했다.
물론 목표는 이쪽이었다.
"젠장!"
콰작-!
부서진다.
홀이 부서진다.
천장이 무너진다.
바닥이 내려앉는다.
넘어진 기둥 사이로 보이는 붕괴의 확연한 전조.
실시간으로 벌어지는 파괴의 향연 속에서, 2성주 플라누스는 사납게 웃었다. 그리고 자신의 줄기들이 전해주는 감각을 고스란히 느끼며 내심 환호했다.
'...그래, 이 힘이야!'
짜릿했다.
쾌감이 몰려왔다.
역시, 딴마음을 품길 잘했다.
단애 아래로 내려가는 척을 하면서,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어 땅속으로 뿌리를 뻗길, 정말로 잘했다!
'그냥 넘어가기엔... 너무나 탐이 났으니까!'
마왕이 정성껏 꾸려낸 감자밭.
오직 식물의 성장만을 위해 집중적으로 개발된 토지.
그걸 보는 순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냥 넘어갈 수도 없었다.
단애 아래로 발길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그대로 멈추었다.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웅크렸다.
땅속으로 뿌리를 뻗어내었더랬다.
멀리.
더 멀리.
영양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그토록 목말랐던 비옥함을 향하여.
그 모든 것이 갖추어진 마왕성이 있는 곳으로.
땅속을 통해서 뿌리를 뻗었다.
반쯤 죽음을 각오한 일이었다.
뿌리는 공짜로 길어지는 게 아니었다.
가지와 줄기, 식충용 잎사귀 구조물의 영양을 전부 뿌리로 돌렸다. 온몸이 말라비틀어져 죽어가는 느낌. 그러나 독한 마음을 품고서 참아낸 시간들.
그것은 도박이었을까.
혹은 결단이었을까.
그 끝에 마침내 닿았다.
감자밭의 가장자리.
그곳의 비옥한 땅에 뿌리 끝을 꽂을 수 있었다.
그때부터였다.
발악하며 애를 썼다.
일찌감치 식충식물로 진화한 지 수백 년째. 뿌리로 무언가를 섭취한다는 행위 자체가 익숙하지 않은 자신이었다.
그러나 이미 저지른 일이었다.
물러설 길은 없었다.
말라죽느냐.
섭취하느냐.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뿌리로 흙 속 영양을 섭취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성공했다.
처음에는 조금씩.
익숙해지며 더 많이.
능숙해진 뒤부터는 마구잡이로.
감자밭의 양분을 빨아들였다. 땅속 알감자도 예외가 아니었다. 감자가 품고 있는 영양까지, 감자 줄기와 잎에 있는 것들까지 무차별로 흡수했다.
그 서슬에 감자 줄기와 이파리가 누렇게 떴다. 한데 그게 마침 감자꽃이 떨어지며 감자잎이 자연스럽게 누래지는 시기와 겹친 듯했다.
마왕이 그렇게 말했다.
원래 이때가 잎이 누렇게 뜨는 시기라고.
2성주의 입장에선 우연치고는 대단한 행운이었다. 덕분에 밭의 양분을 약탈하면서도 들키지 않았다.
무사히 힘을 키울 수 있었다.
지금, 이렇듯, 마왕을 압도할 수 있을 정도로!
투콰앙!
홀이 무너졌다.
마왕성의 한 축이 붕괴했다.
폭발적으로 피어나는 흙먼지.
그 혼돈의 사이를 비집고서 2성주의 거대한 가지가 마구잡이로 날뛰었다. 열다섯 줄기 모두가 솟구쳤다. 사방을 때리고, 헤집고, 갈아뭉갰다.
그 사이에서 김장철은 용케도 버텨냈다.
"크읏...!"
미치겠다.
김장철은 연신 진땀을 흘리며 몸을 솟구쳤다.
붕괴하는 돌더미를 밟고 뛰었다. 착지한 곳이 다시 무너졌다. 바닥과 함께 아래로 쑥 꺼지는 전신. 얼핏 엿보이는 시커먼 아래쪽.
이대로 저기 빠지면 죽겠지.
수백, 수천 톤의 구조물에 생매장당하면서.
"...!"
그건 사양이다.
다시 뛰었다.
옆으로 몸을 날렸다.
붕괴의 범위를 벗어나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후우웅-!
이쪽의 의도를 읽은 걸까. 2성주의 거대한 가지 하나가 이쪽을 후려치기 위해 가로로 휘둘러져 왔다.
아니, 공간 전체를 휩쓸어 왔다!
"...!"
미친.
뻐억-!
"...컥!"
피하지 못했다.
피할 겨를이 없었다.
제대로 디딜 바닥도 없었으니까.
'이런....'
전신을 때려오는 충격.
초거대 각목에 맞은 듯한 아득함.
하지만 김장철은 정신을 잃지 않았다. 날려가면서도 균형을 잡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생각했다.
'바닥만... 좀 제대로 되면...!'
피하거나 맞서는 등의 대응을 할 수 있을 텐데.
한데 장소가 너무나 좋지 못했다.
실시간으로 붕괴하는 마왕성.
그 중심에서 생매장을 당할 판국.
이 와중에 거대해진 2성주의 광역 패턴을 상대해야 한다니.
'이건....'
가능한 걸까.
내가, 할 수 있는 걸까.
게임 속이었다면 가능했을 텐데.
수십, 수백 번을 죽고 또 도전하며 파훼법을 찾아냈을 텐데.
하지만 이건 게임이 아니다.
엄연한 현실이다.
그래서.
"...그게 뭐!"
콰앙!
김장철은 붕괴 중인 어느 바닥에 착지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이대로는 답이 없다고.
반격만이 살길이라고.
쯔저걱!
손등을 긁었다.
선연한 고통과 함께 솟구치는 피.
그 사이에서 덮쳐오는 세 줄기의 거대한 나뭇가지.
그걸 향해 마주 돌진했다.
콰학-!
굴렀다. 피했다. 도약했다.
눈을 부릅뜨고.
살기를 감지하며.
기억 속 2성주의 패턴을 떠올렸다. 단지 크기가 거대해졌을 뿐. 공격 패턴의 기본적인 구조는 달라진 것이 없음을 느꼈다.
남은 것은 응용.
그 사이의 허점을 노렸다.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틈새를 파고들었다. 쇄도해 오는 공세. 흘려냈다. 비켜섰다. 물러나는 척하고. 바닥면의 붕괴 순서를 느끼며. 솟구쳤다. 떨어져 내려오는 천장. 몸을 뒤집었다. 천장을 박찼다. 아래로 쇄도했다.
그곳.
붕괴하며 내려앉는 마왕성의 기단부 아래.
지하의 어둠 속에 도사린 2성주의 본체 줄기가 엿보였다.
"...!"
찾았다.
놈의 코어.
줄기와 뿌리가 이어지는 중심부.
가까워졌다. 급속도로. 닿을 만큼. 타격할 만큼.
'조금만 더....'
더 가까이. 확실할 정도로. 더욱 세차게. 낙석을 박찼다. 탄력을 얻었다. 더욱 빠르게. 내리꽂히듯. 파고들었다.
'조금만... 더!'
이쪽의 의도를 깨달은 걸까.
줄기에 자리한 놈의 얼굴 표정이 바뀌었다.
다급해졌다.
놈이 방어를 위해 황급히 움직였다.
하지만 늦었다. 이쪽이 반 박자 빠르다. 네 패턴은 알고 있으니까. 모양새는 조금 달라졌지만. 이런 식으로 열아홉 번을 죽였으니까.
이번에도.
'됐다!'
손을 뻗었다. 손등 가득 흐르는 선혈. 그 속에 마력을 실었다. 2성주. 놈의 코어를 향하여. 뿌려냈....
뻐억!
"...!"
뿌린 걸까, 나는.
성공적으로 해낸 걸까, 내가.
그런데 어째서 기분이 멍해지는 걸까.
대체 왜. 눈앞이 흐려지는 걸까.
왜?
나는....
낙석에 깔려서 추락하고 있는 걸까.
'...미친.'
김장철은 비로소 깨달았다.
실패했다.
2성주에게 먹이려 했던 회심의 일격.
블러디 라이트닝을 제대로 뿌리기 직전에.
붕괴하여 위에서 덮쳐온 낙석에 당해 버린 걸까, 나는.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조금만....'
더 하면 되는 거였는데.
될 수 있는 거였는데.
닿을 수도 있었는데.
그런데 모자랐다.
이쪽의 실력이?
아니.
약간의 운이.
단지, 그것 때문에.
'망할.'
끝없는 추락.
뒤이어지는 충격.
땅속 깊이 틀어박히는 감각.
그리고 위에서 덮쳐오는 수천, 수만 톤의 암석과 흙더미.
"...!"
웃기게도 주마등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순간 김장철을 덮쳐온 것은 어둠.
지독한 굉음과 어둠뿐이었다.
파츳!
그가 일으키려 했던 선혈의 뇌전은 붕괴가 끝난 후에야, 까마득한 지하의 흙더미 속에서 터졌다.
혼절한 그의 몸을 감싸고서.
그의 몸을 짓누르던 암석과 흙더미를 폭발적으로 태워가며.
그리고, 그 불운한 매몰 속 뒤늦은 뇌전의 일격이, 김장철에게 뜻밖의 변화를 가져오기 시작하였다.
41화. 의지로 심어내는 씨앗 (1)
나는 땅속 깊이 잠든 씨앗.
언젠가 피어날 순간을 기다리는 기약자.
기약 없는 기다림에도 눈을 감지 않는 잠든 자.
그렇기에 나는....
...파츳!
전격의 불꽃이 피어났다.
가만히 그러쥔 주먹에서.
손등 할퀴어 흘려낸 선혈에서.
어느새 둔감해진 고통의 끝자락에서.
피어난 전격의 불꽃이 손등을, 주먹을, 팔뚝을, 어깨를, 가슴을 타고 올라왔다. 전신을 감쌌다. 자극하고, 찔렀다.
아프게. 선연하게.
명징하여 잠을 일깨우는, 그런 일격.
"...커헉!"
눈이 번쩍 뜨였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없었다.
오직 캄캄한 어둠의 속삭임.
그 속에서 토해내는 밭은 숨결.
전신이 크게 들썩이는 순간, 가슴속에서도 시계추가 떨어졌다.
쿵.
꺼져가던 생명.
쿵.
멈추어가던 심장의 시간을 다시 흐르게 만들었다.
쿵.
의식을 일깨웠다.
"쿠, 쿨룩! 커헉...!"
김장철은 괴로운 기침을 토해냈다.
순식간에 당한 생매장의 상황.
한꺼번에 받은 거대한 충격.
멈추기 직전이었던 그의 심장이, 뒤늦게 터진 블러디 라이트닝의 충격으로 가까스로 깨어났다. 거의 꺼져가던 의식과 함께였다.
의식을 되찾자마자 느낀 첫 번째 감각은 고통이었다.
"쿠, 쿠헉! 크, 컥!"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온통 갑갑한 어둠. 캄캄한 압박.
온몸이 수천 장의 젖은 수건에 깔린 기분이었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몸을 비트는 것도 힘겨웠다. 격한 기침만 계속 나왔다. 그런데 기침을 할 때마다 입과 코 안으로 흙이 잔뜩 들어왔다.
들어오라는 숨결 대신.
마시고 싶은 공기 대신.
"커, 크훕! 컥! 쿨룩-!"
머리를 흔들며 기침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갑갑했다. 숨을 쉬고 싶었다. 한데 불가능했다. 이러다간 폐부까지 전부 흙으로 들어차게 되는 건 아닐까.
갑작스러운 고통과 혼란.
나는 어떻게 된 걸까.
대체 왜 이런 상황인 걸까.
그래.
추락했지.
붕괴하는 마왕성 지하로.
무너지는 건물과 지반 아래로.
그런 내 위로 수만 톤은 넘을 흙과 건물 잔해가 쏟아져 내렸고.
그러니까 나는....
'...생매장.'
깨달음이 번쩍.
공포심이 고개를 들었다.
초월적인 막막함과 절망감.
어떻게든 해야 한다는 다급함.
그 와중에도 숨은 쉬지 못하는 고통.
온통 캄캄한 어둠 속에서의 압박감과 폐쇄감.
"...후흡! 큽! 흐훕!"
본능적으로 격해지려는 호흡을 가까스로 골랐다. 날뛰려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를 썼다.
직감할 수 있었다.
지금 공포에 잠식당하면 죽는다.
당황해서 버둥거리다간 끝장이 난다.
어떻게든 정신을 차려야 한다.
어떻게든 이성을 붙들어야 한다.
그러니까 나는....
'장비 인벤토리!'
자신이 처한 상황을 명확히 인지하고, 이 상황이 안겨주는 공포심과 그 결말을 직감한 순간이었다. 간신히 냉정함의 끝자락을 거머쥔 김장철은 속으로 외쳤다.
그러자 떠올랐다.
딩동!
시스템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자체적으로 빛을 발하였다.
그 빛이 주변을 희미하게나마 밝혔다.
온통 흙과 돌, 부서진 건물 잔해로 가득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거라도 보이는 게 어디인가.
캄캄한 어둠보다는 그나마 낫다.
마음의 위안을 얻었다.
물론 그는 단순히 마음의 위안만 얻자고 시스템창을 켠 것이 아니었다.
'전신 탈의!'
걸친 것들을 한꺼번에 해제했다. 그리고 고대했다. 옷 입었다가 벗기. 게임의 버그를 활용한 글리치가 발동되기를.
'그것만 되면....'
생매장이건 뭐건 어떻게든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땅속에 매몰된 건물 잔해 틈새에 생긴 공간으로 피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공간을 징검다리로 삼아 지상까지 올라갈 수도 있을 것이다.
고대했다.
한데 그 순간이었다.
"쿨럭! 크흡, 컥!"
글리치가 발동되지 않았다.
더 정확히는 옷이 벗겨지지가 않았다!
'어째서?'
의아한 낭패감이 가슴을 쿵 때렸다.
뜻밖의 메시지가 눈앞을 채워왔다.
딩동!
[사용자의 체력이 한계치 이하로 소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자동 착의/탈의 기능의 사용에 제한이 걸립니다.]
'이런....'
가슴이 철렁했다.
동시에 떠올랐다.
실제로 게임 속에서도 이랬다.
소위 말하는 실피, 딸피 등등의 극도로 낮은 체력 상태에서는 장비 탈착에도 평소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극도로 지친 상태에서의 움직임을 현실적으로 구현하기 위한 시스템이라고 했던가.
'그게 왜 하필... 지금....'
쓸데없이 현실적이다.
덕분에 죽게 생겼다.
암담한 낭패감.
막막한 절망감.
하지만 죽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죽기는 싫었다.
어떻게든 살고 싶다. 아무도 모르는 이런 곳에서, 누구도 발견하지 못할 곳에서, 이렇게 갇혀서 죽는 건... 싫다!
'젠장. 젠장. 젠장!'
무서웠다.
버둥거렸다.
수천수만 톤의 흙더미 속에서.
조금이라도 움직여보기 위해서.
몸으로 흙을 밀어냈다. 팔로 흙을 파헤쳤다. 고개를 앞뒤로 움직였다. 조금씩 공간이 생겨났다. 숨을 쉴 여유도 생겨났다.
"후읍...!"
너무나 소중한 한모금의 공기. 숨결. 호흡.
다시 움직였다.
이렇게 계속 반복하면 되지 않을까. 움직여서 공간을 만들고. 호흡을 하고. 다시 흙을 파헤치고. 전진하며. 공간을 만들어. 숨을 마시고, 내뱉으며,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
"후! 흡! 흐읍!"
급하게.
서두르지 말고.
차근차근 하나씩.
해내자고 다짐했다.
그렇게 계속 움직였다.
착실하게 전진했다.
그 와중에 생뚱맞은 걱정도 들었다.
'마왕성이 다 무너진 거면... 다른 놈들은 무사할까.'
제피로스라든가.
사천왕이라든가.
농병대원이라든가.
티봉이도 그렇고.
혹시나 다들 파묻혀 버린 건 아닐까. 지금 나처럼 생매장의 위기에 몰려서 버둥거리고 있는 건 아닐까.
'그건... 아니면 좋겠는데.'
다들 나름 좋은 녀석들인데.
알고 보면 괜찮은 구석이 많은 놈들인데.
그러니까 다들 무사했으면 좋겠다. 나만 이걸 겪고 있는 거면 좋겠다. 마왕성 본성만 무너진 거라서 나만 혼자 쏙 파묻혀서 개고생을 하고 있는 거면 좋겠다.
제발.
그러길.
바라며.
"흐훕! 훕! 허읍!"
계속해서 움직였다.
점점 요령이 붙어갔다.
더욱 많은 흙이 파헤쳐졌다.
몸이 쑥쑥 앞으로 나아갔다.
숨을 쉬기가 점점 수월해졌다.
희망이 보였다.
저기,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빛처럼.
저기, 아득하게, 손짓하는 희망처럼.
'보인다...!'
출구다.
저기까지만 가면 된다.
손에, 발에, 전신에 활력이 돌아왔다.
더 힘껏 흙을 파헤치며 전진했다.
기쁘게 뛰는 심장을 느꼈다.
호흡을 한껏 들이마셨다.
손을 뻗었다.
출구.
그곳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빛을 향하여.
"쿨룩...."
앞으로 내뻗은 김장철의 손이 늘어졌다.
사실은 여전히 땅속 깊이 파묻힌 상태에서. 처음 눈을 뜨고 의식을 되찾은 그 자리, 그곳에 그대로 파묻힌 채로.
간신히 몇 센티만 버둥거린 팔다리에서 힘이 빠졌다. 너무 오래 산소를 마시지 못한 호흡기가 경련했다. 눈이 감겼다. 의식이 흐려졌다.
'나는....'
분명 출구를 봤는데.
그냥, 착각이었던 건가.
희망의 신기루를 본 걸까.
그러니까 나는....
땅속 깊이 잠든 씨앗.
언젠가 피어날 순간을 고대하는 서약자.
대가 없는 서약에도 겨울을 인내하는 인도자.
그렇기에 나는....
...파츳!
전격의 불꽃이 피어났다.
버둥거리느라 생겨난 생채기에서.
새로이 흘려낸 선혈의 끝자락에서.
어느새 희미해진 희망의 잔해 속에서.
피어난 전격의 불꽃이 손톱 뽑힌 자리를, 손바닥을, 팔뚝을, 어깨를, 가슴을 타고 올라왔다. 전신을 휘감았다. 찌르고, 후벼팠다.
고통스럽게. 선명하게.
엄격한 채찍질로써 잠을 일깨우는, 그런 일격으로.
"...커헉!"
다시 눈이 번쩍 뜨였다.
여전히 보이는 것은 없었다.
다시금 캄캄한 어둠의 읊조림.
그 속에서 거머쥐는 삶에 대한 미련.
"...쿠, 쿨룩! 크흡, 컥!"
김장철은 아까보다 더한 고통을 느끼며 버둥거렸다.
새삼 상황을 눈치챌 수 있었다.
'나, 아직 안 죽은... 건가.'
아무래도 그런 듯했다.
조금 전까지 살겠다며 격렬하게 버둥거려서. 주제에 또 힘은 좋아서. 하여 버둥거림이 한껏 격했던 터라.
흙을 파헤치는 와중에 손톱이 뽑힌 듯했다. 거기서 흘러나온 피가 뇌전을 일으킨 듯했다.
'그게...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든 건가.'
웃기는 일이다.
이런 식으로 두 번이나 살아나다니.
그래서 이런 고통을 또 겪어야 한다니.
'고통을 겪기 위해 다시 살아난 것 같잖아, 이러면.'
어이가 없었다.
시린 깨달음이 몰려왔다.
너무나 고통스럽고 괴롭지만.
그렇기에 잔혹하기 이를 데가 없지만.
어떻게든 살아날 방법이 보이는 것 같다고.
"...."
나, 그래도 아까보다 몇 센티미터는 전진한 것 같다. 정신을 잃기 직전까지 필사적으로 버둥거리며 적어도 한 뼘은 전진한 것 같다.
'그 끝에 혼절하며 죽음의 단계를 밟아갔지만....'
그 전에 발악하며 흘린 피가 날 살린 것 같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는.
'방금까지 한 짓을 계속 반복하면, 살아날 수 있을까.'
아무래도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안 해도 어차피 반드시 죽는다.
그렇다면 해보는 게 낫겠다.
"...."
수백 번을 거듭해야 할까.
수천 번쯤 반복하면 될까.
덜컥 막막해졌다.
두렵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새 몸은 발악을 준비하고 있었다.
추하더라고.
구차하더라도.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그 언젠가 누릴 미래를 거머쥘 수 있다면.
'...기꺼이!'
까드득!
짓씹듯 꽉 다무는 어금니.
여기서 끝날 수는 없다는 다짐.
그때부터였다.
파헤쳤다.
단 몇 센티에 불과해도 상관없었다.막혀오는 호흡. 전신이 짓눌리는 압박감. 그 속에서 움직였다. 필사적으로. 결사적으로. 전진하려 애를 썼다.
손끝이 갈렸다.
손톱이 빠졌다.
상관하지 않았다.
숨이 막힐 때까지, 발악하며 버둥거렸다.
그리고 호흡이 끊겼다.
"커흡...."
전신이 축 늘어졌다.
아까보다 10센티쯤 전진한 자리에서. 여전히 파묻힌 채로. 팔다리에서 힘이 빠졌다. 경련하던 심장이 멈추어 갔다.
눈이 풀렸다.
의식이 흐릿해졌다.
'이거....'
너무 힘들다.
진짜 괴롭다.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부디, 그러면 좋겠는데.
그러니까 나는....
'할머니, 우린 이렇게 힘든데 왜 계속 살아요?'
...문득, 아득하게 떠오르는 기억.
초등학교 4학년 때였을까.
하루는 할머니께 물었던가.
우린 왜 사느냐고.
너무 힘든데.
엄마 아빠도 없고.
할머니는 매일 고생하고.
일어나는 아침이 괴롭고.
우린 힘들기 위해서 사는 거냐고.
반 친구들한테 거지새끼라고 심하게 놀림 받았던 날 저녁에, 펑펑 울며 그렇게 물었던 것 같다.
그때 뭐라셨더라, 할머니는.
그래.
내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글쎄다. 이 할미는 씨앗 하나 심으려고 사는 거 같구만.'
그렇게 말씀하셨던가.
하여 그땐 몰랐다.
그 씨앗이라는 게 뭔지. 왜 그토록 애틋한 눈으로 날 바라보셨던 건지.
그때의 나는.
그리고 지금의 나는.
그러니까 앞으로의 나는....
땅속 깊이 잠든 씨앗.
언젠가 피어날 순간을 희망하는 맹약자.
희망 없는 맹약에도 물러서지 않는 수호자.
그렇기에 나는....
...파츳!
아스라이 터지는 전격.
그 속에서 김장철은 희미하게 보았다.
[당신은 오직 살아남겠다는 일념으로, 거듭되는 죽음과 소생의 고통을 감내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생존을 위한 당신의 본능이 신체의 마나를 한계 이상으로 순환시키고 있습니다.]
[결코 꺾이지 않는 의지의 반복이 기적을 불러옵니다.]
[기적이 새로운 희망을 안겨줍니다.]
[당신의 가슴속에 유례없는 거대한 가능성이 아로새겨집니다.]
[마나시드(Mana Seed) 시스템이 개화하였습니다.]
42화. 의지로 심어내는 씨앗 (2)
[마나시드(Mana Seed) 시스템이 개화하였습니다.]
딩동....
아스라이 울리는 소리.
그러나 귓가에는 닿지 않는 소리.
김장철은 상반신을 움찔거렸다.
소리에 반응해서는 아니었다.
...파츳!
또다시 뒤늦게 터진 뇌전.
강렬한 충격이 심장을 옥죄었다.
끊어진 시간의 자락을 되돌렸다.
멈추기 직전이었던 심장이 다시금 뛰었다.
꺼져가던 본능적 의지에 불이 붙었다.
퍼석!
움직였다.
의식은 이미 흐려졌으되, 의지는 아직 또렷했다.
살아날 것이다.
이곳에서 살아서 나갈 것이다.
그걸 위해서라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심장이 멈추고 뛰기를 반복한다 하여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단 몇 센티에 불과하더라도.
고작 한 뼘에 지나지 않더라도.
조금씩.
더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의 팔다리가 움직였다. 발악하듯 버둥거렸다. 흙을 헤치고, 잔해를 밀어내며, 억지로 공간을 만들었다. 의식이 완전히 날아간 상황에서도 그러했다.
그동안 메시지가 계속해서 그의 눈앞에 떠올랐다.
딩동....
[당신의 가슴에 마나시드가 생성됩니다.]
[마나시드는 당신이 지닌 모든 능력치를 일정 배율로 증폭시킵니다.]
[마나시드를 지니게 된 당신은, 언젠가 먼 훗날에 거목으로 자라나 찬란한 꽃을 피워낼 씨앗처럼, 성장의 한계선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마나시드는 해피포인트 투자뿐만이 아닌, 당신이 축적하는 행동과 경험에 의하여 성장할 수도 있습니다.]
퍼석...! 퍼서석!
계속해서 떠오르는 메시지.
상관없이 움직이는 팔다리.
여전히 눈은 감은 채로.
그 무엇도 듣지 못하는 채로.
하염없이 버둥거리며 전진하는 육체.
그 끝에 고갈되는 호흡과 멈추는 심장.
"커헉...."
김장철의 움직임이 다시금 멎었다.
그러나 그가 버둥거리며 몸에 새겨낸 생채기가, 그곳에서 흘러나온 핏방울의 의지가, 그에게 포기와 안식을 허락하지 않았다.
파츳!
새로 흘려낸 선혈에 뇌전이 깃들었다.
그의 전신을 선명한 의지로 일깨웠다.
...두근!
다시금 심장이 깨어났다.
메시지가 영혼을 두드렸다.
[당신은 다섯 번째 가사상태와 다섯 번째의 기적적인 부활을 경험하였습니다.]
[이러한 경험이 당신의 육체와 영혼을 담금질하고 있습니다.]
[마나시드가 성장합니다.]
[마나시드 : 씨앗 단계 (Lv. 2)]
[현재 마나시드의 능력치 증폭 배율 : 1.2배]
[마나시드에 의해 증폭된 힘이 당신의 육체에 폭발적인 활력을 공급합니다.]
여전히 김장철은 메시지를 보지 못하였다.
이미 끈을 놓아버린 의식은 소리를 듣지도 못했다. 그저 정신을 잃기 직전에 품었던 의지를 끈질기게 이어갈 뿐.
...퍼석!
다시금 손이 움직였다.
더욱 힘차게 전진했다.
이윽고 고갈되었다.
심장이 멈추었다.
흘려낸 피가 뇌전을 머금었다.
섬광. 부활. 그리고 다시 버둥거림.
그때마다 새로운 메시지가 그의 성장을 알려왔다.
아무도 보지 못하는.
그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하는.
초라하지만 위대한 가능성을 품은 메시지가, 붕괴된 마왕성 지하 152미터 지점의 어느 공간을 아스라이 밝혔다.
♣
"...불을 밝혀!"
"여기! 여기부터!"
"제발, 누가 좀! 꺼내줘요!"
아비규환의 밤이었다.
모두가 소리를 쳐댔다.
서로에게 비명이 날아들었다.
누군가는 뛰고, 누군가는 울며, 또 누군가는 소중한 이를 잔해 속에서 건지고자 필사적이었다.
그 속에서 제피로스는, 망연한 기분을 필사적으로 짓누르며 아기 드래곤, 티봉이를 안아 들었다. 그리고 깨달아야 했다.
"티봉?"
티봉이가 떨고 있다.
아니, 떨리는 건 녀석은 안은 내 팔인가.
어째서?
"주군...."
분명, 보아 버렸다.
자신이 모시던 마왕 크레도스의 모습이 아득한 무저갱 아래로 사라지는 것을. 붕괴하는 마왕성 지반 아래로 추락하는 것을. 추락한 주군의 위로 절망적인 규모의 잔해와 토사가 쏟아져 내리던 것까지.
"...."
무사할까.
살아 있을까.
아니.
그럴 가능성이라도... 있을까.
그때였다.
쿠르릉!
망연자실한 기분을 곱씹고 있는 와중에 발아래에서 돌연한 굉음이 울렸다. 순식간에 흔들리는 지반. 무너지는 균형.
그리고...아래로 쑥 꺼지는 전신.
"...!"
가슴이 철렁했다.
깨달았다.
늦었다고.
어딘가로 몸을 피하기에도.
무언가로 손을 뻗어보기에도.
'이런....'
설마 발밑이 갑자기 무너질 줄은 몰랐는데.
제피로스는 섬뜩한 예감을 느끼며 어떻게든 티봉이라도 안전한 곳으로 던지려 했다.
그때였다.
"바할! 제피로스 구한다!"
덥썩!
돌연 뻗어온 우악스러운 손아귀가 목을 통째로 틀어쥐었다.
숨이 콱 막혔다.
목이 부러질 것 같았다.
저절로 부릅떠지는 눈. 사천왕 바할이 보였다. 이쪽의 목을 한 손에 움켜쥐고서 공중에 대롱대롱 흔들어대고 있는.
"컥! 커걱...!"
"티, 티보옹...!"
버둥거렸다.
하지만 바할은 상관하지 않는 듯했다.
오히려 이쪽을 향해 인심 좋게 웃으며 외치기까지 했다.
"바할! 제피로스 안전한 곳으로 옮긴다!"
콰앙-!
어딘가로 도약하는 바할.
여전히 그 손에 목이 잡힌 채 매달려 버둥거리는 이쪽.
제피로스는 거의 질식하기 직전이 되어서야 바할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커, 커흑! 쿨룩! 콜록!"
이곳은 어디일까.
마왕성 앞뜰인가.
아무래도 그런 듯하다고 생각하며 제피로스는 주위를 살폈다.
그야말로 사방이 엉망이었다.
갑작스러운 마왕성 붕괴의 여파가 앞뜰에까지 닿아 있었다. 곳곳의 지반에 금이 가 있고, 어딘가는 불쑥 치솟았으며, 또 어딘가는 쑥 꺼져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곳에서 비명과 다급한 외침이 혼돈에 가까운 패턴으로 터져 나오고 있었다.
"바할! 마왕님 보고 싶다! 마왕께선 어디에 있나!"
다그치듯 물어오는 바할.
제피로스는 미간을 찡그렸다.
그리고 사실을 숨김 없이 말했다.
"마왕께선... 당하셨습니다."
"당하다니?"
"거대한 식물 줄기의 기습을 받아서...."
그때였다.
돌연, 지축이 울었다.
마왕성이 있던 지반 전체가 흔들렸다.
단순한 붕괴의 후폭풍?
아니었다.
제피로스는 깨달을 수 있었다.
"저건...."
거대한 실루엣이 땅속에서 올라왔다.
무너진 마왕성에 필적할 크기. 압도적인 위세. 높다란 줄기가. 파괴적인 가지가. 그 끝에 매달린 수없이 기괴한 부속지의 물결이. 파멸의 거목처럼 우뚝 섰다.
"바할! 이상한 거 발견했다! 저거, 2성주 닮았다!"
"...."
닮은 게 아니라, 2성주가 맞다.
제피로스는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그건 어느새 근처로 달려온 나머지 사천왕들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제일 먼저 질문을 던져온 이는 하르토크였다.
"마왕께서는? 어디에 계신가."
"...."
"대답. 어서!"
"...당하셨습니다."
"뭐?"
"아마도... 저것에게...."
제피로스가 가리킨 곳.
그곳에 세계수처럼 거대한 위용을 드러낸 2성주가 있었다.
그걸 본 하르토크의 표정이 굳었다.
얼음의 칼날, 시르케가 말했다.
"그럼 2성주가, 권좌를 빼앗은 건가."
"힘으로...? 크레도스를 몰아냈다고?"
아수라트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반문했다.
하지만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은 딱히 필요가 없었다. 모두가 눈으로 답을 보고 있으니까. 더는 설명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때였다.
쿠구구....
마왕성 대신 군림하듯 우뚝 선 거목, 2성주가 눈을 떴다. 그리고 자신의 줄기 아래에서 혼란에 빠져 바삐 움직이는 모든 마족을 굽어보았다.
벌레 무리를 쳐다보듯이.
혹은 창틀에 낀 먼지를 내려다보듯이.
"...."
웃기는 일이다.
하찮기도 하다.
겨우 성 하나가 무너졌다고.
거기에 몇 놈쯤 깔려 버렸다고.
저리도 호들갑을 떨어대는 모습이라니.
한심하고 가련했다.
한쪽에 보이는 사천왕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옆쪽, 밭 언저리의 말뚝에 묶인 3성주의 모습도 그러했다.
모두가 경악한 눈빛으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또 재미있게 느껴졌다.
'그래. 혼란스럽겠지. 크레도스가 어떻게 됐는지도 궁금하겠지.'
크레도스는 이미 죽었다.
2성주는 확신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무저갱에 빠졌다.
그 위로 막대한 토사와 잔해가 덮였다.
제아무리 크레도스라도 절대 살아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
"...."
물론 놈의 시체를 찾아내어 확인을 하는 것이 최상이겠지. 하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쉽지 않아 보였다.
수십, 수백만 톤의 흙더미 속에서 고작 시체 하나. 그걸 찾느니 차라리 모래사장에서 바늘 하나를 찾는 것이 더 빠를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뻔하게 죽었을 놈의 시체를 찾는 것보다 훨씬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 있기도 했다.
그건 바로....
'갑작스러운 마왕의 죽음과 몰락으로 몰려온 권력의 공백. 그것을 내가 거머쥐는 것.'
그러하다.
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안 된다.
모두가 크레도스의 죽음과 몰락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는 지금, 확실한 쐐기를 박아야 한다. 자신이 모든 것을 거머쥐었음을 버려진 땅 전체에 알려야 한다.
그것이 전대의 마왕을 제거하고 권좌를 차지한 새 마왕이 해야 할 첫 번째 일이니까.
"모두는 들으라."
...으라!
...라!
나직하게 내뱉은 한마디.
그것만으로도 일대의 공기가 폭발적으로 요동쳤다. 사천왕을 제외한 모든 마족들이 묵직하고도 깊은 굉음에 귀를 틀어막으며 괴로워했다. 티봉이도 기겁해서 제피로스의 품속에 얼굴을 꼬옥 묻었다.
2성주의 선언이 이어졌다.
"내가 방금, 크레도스를 죽였다."
쿠구구구...!
2성주의 거대한 가지 하나가 지상을 향해 뻗어갔다. 처참하게 부서져 지면에 틀어박힌 첨탑 하나를 들어 올렸다.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자신의 힘과 권위를 실감하도록.
"이제 내가 새로운 마왕이며, 권좌의 합당한 주인이다."
"...."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마른침을 삼키며 2성주의 선언을 지켜만 볼 뿐.
"하여 이 자리에서 선언하노니. 이제부터 나는 버려진 땅의 주인으로서, 너희가 정성껏 가꾼 밭을 밑거름으로 삼아, 신적 존재로 거듭날 것이다."
콰드득...!
들어 올려진 첨탑이 으스러지기 시작했다.
"또한 그렇게 얻은 힘으로 내가, 너희를 인간계 침공이라는 피와 학살의 낙원으로 인도해 주겠노라."
콰득!
첨탑이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모두는 전율 속에서 침묵했다.
또한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아까까지 자신들이 섬겼던 마왕, 크레도스가 죽은 것 같다고. 그를 죽인 2성주가 새로운 마왕으로 등극한 것 같노라고.
그리고 이제... 농사가 취소되고, 인간계 침공이 재개되리라고.
"...."
사천왕들 또한 그 사실을 깨달았다.
농사 중단.
인간계 침공 재개.
그토록 염원했던.
그토록 바라왔던.
꿈에서도 나올 만큼 기원했던.
소원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만약 현실이 된다면 이보다 기쁜 일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정말로 이상했다.
'어째서... 왜...?'
하르토크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그토록 염원했던 일들이 현실이 되었는데....'
시르케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막상 이렇게 되니까....'
바할이 주먹을 꽉 쥐었다.
'별로... 기쁘지가 않은 거지?'
아수라트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리고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왜 오히려... 화가 나는 거지...?'
43화. 우리의 진정한 마왕은 (1)
정말로 이상한 일이다.
너무나 이상한 일이다.
그토록 바랐던 일인데.
꿈에조차 소망했던 상황인데.
어째서 내키지가 않는 것일까.
어찌하여 기쁘지도 않은 것일까.
대체 어쩌자고 나는....
"...."
하르토크는 입을 꽉 다물었다. 그리고 스스로의 내면에서 피어나는 혼란스러운 감정을 직시했다.
"...."
여전히 모르겠다.
점점 더 모르겠다.
어째서 이런 기분이 드는 건지.
왜 이토록 화가 나고 참담한 심정이 고개를 치켜드는 건지.
정말로 모르겠다.
"...."
문득 돌아본 뒤쪽.
드넓게 펼쳐진 감자밭.
누렇게 뜬 채로 넘어진 감자 줄기들.
저곳에 안개를 만들어 물을 뿌리며 나는 행복했던가. 혹은 오래도록 염원했으나 포기한 인간계 침공을 내내 아쉬워하였던가.
모르겠다.
그게 내가 원한 것이었는지.
내가 진정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정녕코, 애를 써보아도 모르겠다.
"...."
시르케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리고 자신의 가슴속에 피어나는 불편하고 불쾌한 심정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
정말 이상하기가 짝이 없다.
왜 이상한지 모르겠기에 더 이상하다.
고작 감자밭 따위일 뿐인데.
전에는 관심도 없는 일이었는데.
그런데 대체 왜.
대관절 어쩌자고.
저곳에 심어진 씨감자 하나하나를 자르던 날의 일들이 떠오르는 건지. 그날의 귀찮았던 기분과, 그럼에도 자르기를 끝내고 나서 남몰래 느꼈던 자그마한 뿌듯함이 새삼스럽게 가슴 한쪽에 맺혀오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왜 이런 기분인 건지.
어째서 계속 화가 나는 건지.
정녕코, 애를 써도 알 수가 없다.
"...."
바할은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그리고 스스로의 내면에서 폭발하려는 불만을 느끼고는 당황했다.
"...."
그래서, 감자 수확은?
마왕이 그랬는데.
감자, 수확하면 배부르게 살 수 있다고. 더는 배고픔에 밤잠을 설치지 않아도 될 거라고.
그런데 그걸 멈추고 인간계 침공?
그러면... 더 배불러질 수 있을까?
아니. 안 그럴 거 같은데.
추뇨. 맛있었는데.
그리고 마왕 크레도스.
날 구해줬는데.
"...."
아수라트는 콧등을 찡그렸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울컥하려는 마음을 가까스로 다잡았다.
"...."
너무나 불쾌하다.
그런데 무엇이 불쾌한지 모르겠다.
내가 수없이 벼락을 맞아가며 질소인지 뭔지를 고정한 밭이 사라지게 될 거라서? 혹은, 그동안의 노력과 땀이 전부 소용없던 것으로 치부될 상황이라서?
모르겠다.
애를 써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더 화가 나고, 불쾌하다.
할 수만 있다면 소리라도 지르고 싶을 정도로.
정녕코, 화가 난다.
그때였다.
...쿠우웅!
2성주의 거대한 나뭇가지가 지면을 내리찍었다. 전신이 흔들릴 정도의 굉음과 진동이 땅을 타고 몰려왔다.
그 자극이 사천왕의 정신을 퍼뜩 일깨웠다. 그리고 자신들이 살아온 이곳, 버려진 땅의 오랜 규율을 상기시켰다.
그렇다.
이곳은 버려진 땅.
굶주린 마족의 세상.
이곳에서는 강한 자의 말이 법이다.
마왕의 의지가 곧 절대적인 명령이다.
그걸 따르지 않는다면 살아남을 수 없는 곳.
그러한 곳이 바로 여기, 버려진 땅이 아닌가.
"...."
하르토크와 시르케.
바할과 아수라트.
사천왕들은 새삼스러운 규율을 떠올리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크레도스를 쓰러뜨린 2성주를 향하여. 힘을 증명한 이를 향하여. 권좌에 대한 존경과 복종의 의미를 담아.
"...새로운 마왕의 탄생을 진심으로 경하드리옵나이다!"
외쳤다.
가슴이 아닌 목으로.
마음이 아닌 머리로.
그러면서도 생각했다.
왜 이런 말을 외쳐야 하는지.
고민해보아도 정녕코 모르겠다고.
그런 내가 조금... 이상해진 것 같다고.
♣
이상한 일이었다, 그것은.
감자밭을 둘러보지 않게 된 아침은. 눈을 떴는데 감자밭으로 달려가지 않게 된 하루의 시작은.
정말로, 이상하기가 짝이 없는 것이었다.
사천왕이 그렇게 생각했다.
농병대가 그렇게 느끼었다.
마왕성의 모두가 실감했다.
농사가 끝났다고.
침공의 계절이 돌아왔다고.
콰드득...! 콰드득...!
마왕성이 무너진 자리에 우뚝 군림한 2성주의 거체.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2성주의 몸은 '그날' 이후로도 나날이 더욱 거대해졌다.
모두가 굳이 입에 담지 않았지만, 사실은 알고 있었다.
땅에 박은 2성주의 뿌리가 어느 쪽을 향하고 있는지. 어디로부터 저토록 몸을 불려낼 양분을 빨아들이고 있는지를.
"...."
2성주의 줄기가 굵어질수록.
나뭇가지가 무성해지고 높아질수록.
마왕성을 둘러싼 감자밭은 점점 시들어갔다. 농병대원들의 표정에서도 활력이 사라져갔다. 아니, 이제 그들은 농병대원조차도 아니게 되었다.
"...농병대를 해체한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마왕성을 대신하여 우뚝 선 거목. 그 줄기 한쪽을 움푹하게 만들어 스스로 마련한 공간.
그곳에 새로운 권좌가 놓였다.
권좌 위에는 목각인형이 앉았다.
"이런 내가 이상한가?"
목각인형의 형상을 빌린 플라누스가 물었다.
얼마 전까진 크레도스를 모셨던.
오늘날에는 새 마왕 플라누스를 모시게 된.
부관이자 기록관 제피로스가 무표정을 유지하며 대답했다.
"농병대를 해체하겠다는 계획에 대한 조언을 구하는 질문이신지, 혹은 제게 명령을 내리기 편하도록 만들어낸 인형의 모습이 이상한지를 묻는 질문인지, 어느 쪽의 대답을 구하시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흐음. 양쪽 모두라면?"
"인형의 모습은 무난하십니다. 저로서는 대화를 나누기가 한결 편하기도 하고 말입니다."
"다행이군. 그럼 농병대의 해체는?"
"이상하지 않습니다. 농사의 중단과 인간계 침공 재개를 선포하신 이상, 농병대라는 조직은 이제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말입니다."
"흐음. 그거 다행이군."
목각인형의 형상을 빌린 플라누스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리고 물었다.
"하면, 창고에 보관 중이라는 추뇨라는 것을 군량으로 징발하는 것은 어떤가."
"네?"
"추뇨 말이다. 크레도스가 만들어둔 말라비틀어진 감자."
"그건...."
"양이 넉넉하지는 않더군. 하지만 보탬은 되겠어. 인간계 침공을 위해 원정에 오르는 군단의 몇 끼 식량 정도로는 말이야."
"...."
제피로스는 입을 다물었다.
2성주, 아니, 새로운 마왕으로 등극한 플라누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제피로스는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순간 많은 고민이 머릿속을 채웠다.
침묵해야 할까.
아마도.
그것이 옳겠지.
마왕의 말은 곧 법이자 규율이니까.
오직 그것만이 버려진 땅의 오랜 규칙이었으니까.
가장 강한 자의 의견.
그것만이 가치가 있으니까.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됩니다."
제피로스는 저도 모르게 내뱉고 말았다. 그리고 후회했다. 하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안 된다니?"
이쪽을 돌아보는 2성주. 그 목각인형의 얼굴이 노골적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이미 내친걸음이다.
제피로스는 작심하고서 말했다.
"감자를 수확할 시기까지 간신히 버틸 수 있도록, 마왕성 마족들의 인구와 식사량을 세심하게 감안하며 생산한 추뇨입니다. 결코 넉넉한 양이 아닙니다. 함부로 낭비하면 얼마 버티지도 못하고서 동이 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추뇨를 군량으로 징발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또 있습니다. 원정군이 떠나고 난 뒤에 이곳에 남겨질 늙거나 어린 마족들 때문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식량을 구할 능력이 없습니다. 한데 비상식량으로 쓰여야 할 추뇨까지 사라진다면, 얼마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그게 무슨 문제라도 되나?"
"예?"
"그게 문제가 되는 거냐고 물었다."
"...."
끼이익.
2성주의 목각인형이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권좌에서 일어섰다.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감정이 없는 눈동자.
그걸 보는 순간 새삼스럽게 깨달을 수 있었다. 이자는, 크레도스 님과 근본부터가 다르다고.
"군량이 금방 소모되는 것이 무슨 문제인가. 추뇨가 소모된 후에 원정군이 겪게 될 굶주림? 해결법은 간단하지. 원정군 중에서 약한 놈들을 적당히 추려내고 죽여서 나눠 먹으면 돼. 이곳에 남을 늙고 어린 마족들? 약한 것들이 죽는 건 당연한 법칙 아닌가? 그 와중에 독한 것들은 먼저 죽은 것들의 시체를 파먹으며 어떻게든 살아남겠지. 그렇지 않나?"
"하지만...."
"그것이 버려진 땅의 섭리이며 규칙이다. 그걸 잊었는가?"
"...."
그래.
잊고 있었다.
지금까지, 적어도 최근의 과거까지는 그게 당연한 일이었다.
크레도스 님이 변하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 모두는 당연한 것처럼 그렇게 살아왔고, 죽어가며, 친구와 가족의 살을 피눈물 머금고서 씹어 삼켜야 했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지만.
그럼에도.
"크레도스 님은...."
그걸 바꾸려 하셨습니다. 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터컥!
"...!"
미처 말을 끝맺기도 전이었다.
2성주의 목각인형이 손을 뻗어왔다. 목줄을 틀어쥐었다. 숨이 콱 막혔다. 이대로 목이 부러지는 건 아닐까.
버둥거렸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그놈의 크레도스, 크레도스. 시끄럽군. 성가시기도 하고."
"...크, 컥!"
"그렇게 크레도스가 그리운가? 그러면 놈을 만나러 가는 것이 좋겠는데."
"...!"
"아무래도 이곳의 놈들은 아직 크레도스를 잊지 못하는 것 같군. 그러니 보여줄 수밖에. 누가 합당한 권좌의 주인인지. 누가 이곳을 공포로 지배하는지. 네놈들 같은 버러지가 누구를 섬겨야 하는지를. 그래서 결정했다."
"쿠... 흡...!"
"이제부터 크레도스의 이름을 함부로 거론하는 자는 죽는다. 그리고 나는 네놈을 그 첫 본보기로 삼을 것이다. 기왕이면 마왕성의 모두가 보는 앞에서."
"...!"
숨을 쉴 수가 없다. 괴롭다.
정신이 아득해진다.
제피로스는 기절하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해서 버텼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제피로스의 몸이 금방 축 늘어졌다.
2성주의 목각인형이 그런 제피로스를 질질 끌며 어디론가로 걸어갔다. 거대하게 우뚝 선 자신의 줄기. 그 줄기 중간에서부터 허공으로 길게 뻗어나온, 모두를 내려다보기 좋은 연단을 향해서였다.
이내 연단의 끄트머리에 선 2성주가 아래를 굽어보았다. 그리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모든 마족들을 향해 선언했다.
"실로 불운한 일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야. 감히 내 앞에서, 강자의 규율에 따라 제거된 전대의 패배자 크레도스의 이름을 함부로 언급하는 이가 있었다. 하여 나는, 버려진 땅의 법칙을 올바르게 세우고자, 이 버러지의 공개처형을 명하는 바이다."
2성주의 목각인형이 손을 털었다.
잡혀 있던 제피로스를 연단 아래로 던졌다.
그리고 말했다.
"그놈을 받아라, 사천왕 아수라트."
"...!"
지목당한 아수라트가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수십 미터의 높이에서 떨어져 내려오는 제피로스를 두 눈에 담았다.
'이게 무슨....'
상황인 걸까.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일단 땅을 박찼다.
높이 뛰어올라 손을 뻗었다.
제피로스를 무사히 받아 안았다.
그렇게 땅에 내려서는 순간, 2성주의 명령이 들려왔다.
"내 친히 아수라트, 그대를 처형인으로 지목하노니. 모두가 보는 앞에서 무엄한 반역자의 몸을 다섯 조각으로 잘라 죽여라."
"뭣...?"
죽이라고?
제피로스를?
여기서, 내 손으로?
"...."
아수라트는 당혹스러운 심정으로 눈길을 들었다. 마침 2성주의 목각인형도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눈길이 얽혔다.
덕분에 깨달았다.
농담이 아니다. 진짜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걸까.
알 수가 없었다.
이해할 수도 없었다.
솔직히 저 명령을 따르고 싶지 않았다.
하여 그런 자신이 더 이상하게 느껴졌다.
"...."
정말 이상하다.
2성주가 마왕이 됐는데.
합당한 권좌의 주인인데.
그러니까 2성주의 말을 들어야 하는데.
그것이 버려진 땅의 오랜 규율인데.
어째서, 대체 왜.
'...그러기가... 싫은 거지?'
대체 어쩌자고 나는 망설이는 걸까. 내가 피뢰침으로 매달려 있던 시절에 제피로스가 가끔씩 날 챙겨줘서? 처음 만들어진 추뇨를 몰래 챙겨주기도 해서?
모르겠다.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리고 더러워졌다.
'왜?'
마왕의 명이 마음에 안 드는 건지.
어째서 거듭하여 화가 나는 건지.
2성주의 밑거름이 되어 시들어가고 있는 감자밭? 그렇게 중단되어 버린 농사 때문에? 아니면, 강한 자의 명령이면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규율 때문에?
'...전엔 나도 그러지 않았나?'
그러하였더랬다.
하여 힘을 추종했다.
그런데... 이제는 모르겠다.
과연 그게 옳은 것인지.
꼭 그래야만 하는 건지.
그러니까 나는....
"...그 명령, 거두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2성주의 목각인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금 뭐라 그랬지?"
"...제피로스를 죽이라는 명령, 거두어 주시면 안 되겠느냐 물었습니다."
"어째서?"
"그게... 모르겠습니다."
"모르겠다니?"
"그냥, 그렇습니다. 꼭 죽여야 하는 건지. 이게 맞는 건지...."
아수라트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심정이었다. 자신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제피로스를 죽이기 싫습니다. 꼭 그래야만 하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이유? 당연히 있지. 내가 명령을 했지 않나."
"...."
"내가 명령했다. 버려진 땅의 주인이며, 권좌의 지배자인 내가. 그것이 이유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하지만...."
"내 명령을 거부할 셈인가?"
"...."
아수라트는 말문이 막혔다.
마왕이 명령했다.
그렇다면 따르는 것이 옳다.
그것이 버려진 땅의 규율이니까.
"하지만, 그것 외의 다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다른 이유는 애초부터 필요가 없다."
"어째서 다른 이유가 필요 없는 겁니까?"
"감히 내 명령을 거부하겠다는 건가?"
"...."
"어리석군, 아수라트여. 다시 한번 기회를 주겠다. 제피로스를 다섯 조각으로 잘라 죽여라. 지금. 당장."
"...싫습니다."
"마지막 기회다. 죽여라."
"싫습니다."
"죽여라."
"...싫다고 했잖아!"
저도 모르게 욱해서.
아수라트가 솔직한 심정을 터뜨려 버렸다.
44화. 우리의 진정한 마왕은 (2)
"...싫다고 했잖아!"
질러 버렸다.
저도 모르게 욱해서.
하여 솔직한 심정으로.
한편으로는 뒤늦게 철렁한 심정으로.
"...."
잠깐만.
방금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아수라트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니, 삼키려 했다. 그런데 그게 잘 안 됐다. 오히려 딸꾹질이 올라와 버렸다.
"...히끕!"
너무나 놀라 버려서.
스스로의 행동이 어이가 없어서.
그래서 긴장을 한 걸까.
'망할.'
아수라트는 떨리는 눈동자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하급 마족들의 휘둥그레진 눈길.
나머지 사천왕들의 경악한 표정.
저 멀리에 매달린 피뢰침 3호... 아니, 3성주마저도 어이가 없다는 눈길을 보내어 오고 있었다.
곁에 쓰러져 있던 제피로스도 마찬가지였다.
"아수라트 님...?"
"...."
젠장.
나도 알아.
내가 미친 짓을 했다는 거.
나도 알고 있으니까 왜 그랬냐는 식으로 묻지 말라고. 그런 눈빛으로 보지도 말라고. 이미 2성주, 저 자식이 쏘아보는 눈빛만으로도 부담돼서 미칠 거 같으니까.
'어떡하지?'
순간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당장 납작 엎드려볼까.
실수를 했다고, 요즘 컨디션이 너무 안 좋았다고, 그래서 잠깐 정신이 나갔던 것 같다고, 잠깐 착각을 하고 말았다고, 그렇게 빌어볼까 싶었다.
'그게... 제일 낫겠지?'
굴욕적이며 치욕스럽기는 하다.
그래도 비참하게 죽는 것보단 낫다.
그래.
빌자.
차라리 그 방법이....
그때였다.
"흐음, 마지막 기회를 걷어찼군, 아수라트."
"...."
네?
아니.
저기, 그게 아니고....
"나의 명령을 거부하는 자에게는 오직 죽음뿐. 하여 명하노니."
"저기...."
잠깐만요.
이거 결정이 너무 빠른 것 같....
"아수라트의 사천왕 지위를 박탈하고, 동시에 공개처형을 명한다. 하르토크!"
"...."
망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
아수라트는 떨리는 눈길을 돌렸다.
지목을 받은 사천왕, 하르토크가 걸어오고 있었다. 너무나 망설임 없는 걸음으로. 거침없이. 척척척. 다가와서 곁에 섰다.
"부르셨습니까."
"그렇다. 하르토크여. 사천왕의 수좌인 그대에게 명하노니, 나의 권위를 정면으로 거역한 아수라트와 제피로스를 다섯 조각으로 나누어 그 본보기를 모두에게 보이도록 하라."
2성주의 명이 떨어졌다.
그걸 듣는 순간, 아수라트는 이를 질끈 깨물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결국 이렇게 되었구나, 라고.
'하.'
헛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후회는 없었다.
'뭐, 어차피 마음에 안 들긴 했어.'
이유는 여전히 모르겠다.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자꾸만 기분이 이상했고, 화가 났다. 모두가 공들인 감자밭이 저 꼴이 되어서? 그동안 밭에 쏟아낸 땀과 애정이 부정당하는 기분이라서?
어쩌면 그런 건지도.
'그래.... 이런 최후도 나쁘지는 않겠지.'
아수라트는 자세를 낮추며 톱날 대검을 뽑을 준비를 갖추었다. 2성주의 명을 받들어 자신을 죽이려는 하르토크에 맞서기 위해서였다.
'하르토크, 네놈이 내 최후의 상대가 될 줄은 몰랐는데.'
놈은 주저 없이 나를 죽이려 들겠지.
원래부터 교활한 놈이니까.
대세를 잘 읽는 놈이니까.
지금은 2성주의 명령이라면 껌뻑 죽는 척하며 열심히 따를 것이다. 나를 죽이려 들 것이다. 그리고 이곳의 어느 누구도 그런 나를 돕지 않을 것이고.
'그래, 와라!'
전신의 투기를 버럭 일으키려는 순간이었다.
하르토크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왔다.
"사천왕 아수라트와 보좌관 제피로스를 처형하라고 명하신다면, 거부합니다."
"...어?"
아수라트는 멈칫했다.
하르토크는 여전히 2성주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차가운 눈길. 평소와 다름없는. 아니, 어쩐지 평소보다 훨씬 차가워진 듯한 눈길이었다.
"합리적인 이유가 없는 명령입니다. 그런 명령은 따를 수 없습니다."
"무슨...."
2성주의 목각인형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하르토크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더 원론적으로 말하자면, 현재 주장하시는 농사 중단과 인간계 침공 정책에도 저는 협조하지 못하겠습니다."
"뭐... 뭣?"
"역시나 합당한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실익 또한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인간계를 침공하려는 대업을 꿈꾼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굶주림을 극복하는 것.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알게 됐습니다. 굳이 인간계를 침공하지 않아도, 피투성이 학살과 약탈을 자행하지 않아도, 배고프지 않을 방법이 있다는 걸 말입니다."
"무슨...."
"그것이 농사입니다. 크레도스 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
2성주가 침묵했다.
하르토크의 말이 이어졌다.
"처음에는 저희도 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서서히 믿게 되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농사에 대한 크레도스 님의 태도와 자세가, 마음이, 전부 진심이라는 걸 느꼈기 때문입니다."
"...감히!"
"그리하여 우리 모두는 어느 순간부터 생각하게 됐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앞으론 우리도, 인간계의 평범한 인간들처럼 땅을 일구어가며 소소하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입니다. 더는 누군가를 죽일 필요 없이. 더는 친구와 가족의 생살을 피눈물로 씹어먹을 필요 없이."
"내 명을! 내 권위를! 거부하겠다는 것인가!"
"이유 없는 명령과 강요뿐인 권위를 거부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르토크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 순간이었다.
"...맞아. 게다가 크레도스는 이런 식으로 협박을 섞어가며 일을 추진하진 않았지."
냉랭한 목소리가 흘러와 하르토크의 말에 힘을 보태었다. 그리고 어느새 하르토크, 아수라트와 나란히 섰다.
사천왕, 시르케였다.
그녀가 말했다.
"크레도스는 그랬어. 때론 막무가내처럼 보였지만, 그가 추진하는 일에는 전부 이유가 있었거든. 그것도 자신만을 위한 게 아닌, 우리 모두를 이롭게 하는 이유가."
"...네놈마저!"
"왜? 내가 이유도 없이 무작정 널 따를 거라고 생각했나, 2성주 플라누스?"
"성주가 아니다! 나를 그렇게 부르지 마라!"
"마왕이라고? 그렇게 불러 달라고?"
"이건 명령이다!"
"방금 하르토크가 우리를 대표해서 이유 없는 명령은 안 따른다고 말했을 텐데. 벌써 잊어 버렸어? 보기보다 기억력이 안 좋나 봐?"
"죽고 싶은가!"
"바할! 죽기 싫다! 그런데 2성주가 더 싫다!"
쿠콰앙!
굉음과 함께 바할이 시르케의 곁에 착지했다. 그리고 외쳤다.
"크레도스는 우리 보살펴줬다! 그런데 너는 아니다! 윽박지르기만 한다!"
"...지금 네 목소리가 더 크고 귀 아파."
"시르케! 미안하다! 아무튼-!"
후우웅!
바할이 거대 도끼를 치켜들며 외쳤다.
"크레도스는! 우리 배부르게 해준다고 했다! 감자 많이많이 먹여준다고 했다! 그 약속 거의 지켰다!"
외침이 모두의 귓가에 스몄다.
가슴에 배어들었다.
기억을 불러왔다.
농병대원들은 생각했다.
약속.
그래.
우리는 약속을 했지.
애들이랑 약속을 했어.
이 아빠가 열심히 일하면 너희가 배고프지 않게 될 거라고. 다음 달엔 맛있는 감자로 저녁을 먹을 수 있게 해주겠다고.
그렇게 약속했는데.
그런데.
"...빌어먹을! 내 감자밭 살려내!"
"저게 뭐야! 누렇게 다 떠가지고!"
"내가 매일 보살폈는데!"
"나도 아침 저녁으로 잎사귀 하나 상한 거라도 있나 매일 살펴봤는데!"
"그런데 누가 그걸! 함부로! 다 빨아먹으라 그랬냐고! 누가!"
"이럴 거면 허락이라도 받든가아악!"
"힘 세면 다냐고! 어!"
농병대원들의 가슴에 불이 붙었다.
분노와 울분.
그동안 놀란 가슴에 참아왔던, 억눌러 왔던 감정이 일거에 터졌다. 사천왕들의 뒤에 나란히 섰다.
일사불란하게.
대오정연하게.
모두가 같은 목소리와 같은 눈빛으로 2성주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하르토크가 모두를 대표하였다.
"우리 마족은. 농병대는. 사천왕은. 마왕을 보필하기 위해 존재하는 마왕의 권속이다. 그러나 너는, 우리의 마왕이 아니다."
하르토크의 단호한 선언이 떨어졌다.
2성주 플라누스의 눈에 살기가 맺혔다.
플라누스는 생각했다.
"...."
화가 난다.
일견으론 이해도 된다.
저들이 왜 저러는 것인지.
저들이 왜 감히 반항하는지.
'...그래. 저 버러지들이 아직 내 힘을 피부로 실감하지를 못해서 저러는 것이겠지.'
그렇다.
이곳은 버려진 땅.
오직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약육강식의 세상.
이곳에서는 강한 자의 말이 곧 권위이며, 법칙이다. 그것만이 이 땅의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섭리이며, 규율이다.
한데 내가 너무 물렀다.
저들에게 압도적인 힘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 것 같다.
그러한 만큼....
'시끄러운 것들은 힘으로 찍어누르면 그만이지.'
그러면 금세 고분고분해질 것이다.
그것이 세상의 진리니까.
버려진 땅의 순리니까.
...콰드득!
결심한 2성주가 움직였다.
거대한 줄기가 희미하게 꿈틀거렸다.
그리고 2성주의 응징은, 그것으로 이미 충분했다.
쿠르르릉!
"...!"
지면이 흔들렸다.
지축이 뒤틀렸다.
사천왕을 비롯한 모두가 모인 자리.
그 아래에서부터 수백 줄기의 뿌리가 치솟았다!
"...헛?"
피할 틈도 없었다.
모두가 딛고 선 지면 자체가 예고도 없이 붕괴하며 쑥 꺼졌다. 지면에서 치솟은 뿌리가 다리를 휘감고 허리를 낚아챘다. 가슴과 목을 비틀었다.
"커, 커헉!"
대부분의 농병대원들이 일거에 무력화되었다. 뒤늦게 버둥거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물론 모두가 당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지면으로부터의 기습을 피한 이도 있었다.
사천왕들이었다.
"크하아앗!"
아수라트가 톱날 대검을 휘둘렀다. 뿌리 세 가닥이 썰려나갔다.
그 곁에서 바할이 도끼를 내리쳤다. 시르케의 얼음 칼날이 종횡무진 춤을 추었다. 하르토크의 마력이 실린 아홉 가닥 안개 채찍이 공간을 저며냈다.
치열하고도 처절한 분투였다.
그들을 덮치려던 뿌리들이 잠시 주춤했다.
하지만, 단지 그것뿐이었다.
후와아아악-!
위쪽에서부터 압도적인 규모의 그림자가 사천왕을 덮쳤다. 모두가 반사적으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굵기만 30미터가 넘을 나뭇가지가 위에서 자신을 덮쳐오고 있음을.
"미친...."
시르케가 중얼거리는 순간.
나뭇가지가 사천왕을 내리쳤다.
...!
너무나 큰 굉음에 청각이 먹혔다.
모든 감각이 일순간 차단되었다.
폭발적으로 피어난 흙먼지.
이후에는 그 누구의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거대한 나뭇가지가 움직이며 내는, 나무 비틀리는 기괴한 소음만이 고막을 꺼드득, 꺼드득, 긁어낼 뿐.
뿌리줄기에 사로잡힌 농병대는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그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치미는 절망감과 무력감을 느꼈다. 그리고 다들 사천왕이 무사하기만을 바라며 눈을 부릅뜰 뿐이었다.
이내 흙먼지가 걷혔다.
참상이 드러났다.
"...그, 끄극...."
그나마 신음이라도 내뱉는 이는 아수라트가 유일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강력한 회복력 덕분이었다.
'다른 놈들은...?'
만신창이가 된 아수라트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보았다. 자신보다 더한 꼴이 되어 쓰러져 있는 하르토크와 시르케, 바할의 모습을.
"...."
살아는 있는 건가.
다행히 미약한 숨이라도 쉬는 건가.
하지만... 이제는 희망이 없는 거겠지.
'그러게, 다들 왜 나서가지고.'
그리고 나는 왜 아까, 쓸데없이 성질을 부린 걸까.
선뜻 자신의 곁에 서 주었던 동료들에게 미안해졌다. 고마웠다. 그래서 더 미안해졌다. 하여 어금니를 질끈 깨물었다.
저들에게 미안해서라도.
제일 처음 나섰던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까드득!
필사적으로 고통을 참아내며 바닥을 짚었다.
상반신을 일으켰다.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이쪽을 내려다보는 2성주. 놈의 오만한 눈빛. 순간 울컥했다. 하지만 참았다. 대신 고개를 숙였다.
"...나, 나를 죽이고, 나머지는...."
살려줘.
제발, 그렇게 해줘.
간청하는 심정이었다.
자존심도 필요 없었다.
그런 뜻이 통한 것일까.
끄드득, 꺼드득...!
2성주의 나뭇가지 하나가 뻗어왔다. 머리를 움켜쥐었다. 들어 올렸다.
"커흑...!"
아팠다.
목이 뽑힐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죽이진 않겠지.
대신....
'그만큼, 아프겠지?'
아수라트는 쓰라린 웃음을 머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무섭고 두렵다. 울고 싶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겠다. 참아야겠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마지막까지 의연하게.
"산 채로 천천히, 갈가리 찢길 준비는 됐나?"
"...."
미친.
그따위 준비가 됐을 리가.
절로 쓴웃음이 맺히려 했다.
2성주의 물음에 고개를 가로젓고도 싶었다.
하지만 그럴 힘이 없었다.
하여 눈만 깜빡였다.
2성주의 거대한 줄기에 새겨진 거대한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좋다. 훌륭한 본보기가 되어 주길 기대하지."
"...."
제발.
덜 아프게 끝나기를.
형편없는 비명만 지르지 않기를.
아수라트가 질끈 감은 눈꺼풀 속에서 스스로를 향해 기도하는 순간이었다.
"...훌륭한 본보기는 개뿔. 누가 허락도 없이 내 1호 피뢰침 건드리라고 했지?"
어딘가 살벌하게 빡친.
그렇기에 놀랍고 반가운.
김장철의 목소리가 스산하게 들려왔다.
45화. 우리의 진정한 마왕은 (3)
"...훌륭한 본보기는 개뿔. 누가 허락도 없이 내 1호 피뢰침 건드리라고 했지?"
어디선가 들려온 목소리.
어딘가 살벌하게 물들은.
그렇기에 놀랍고도 섬뜩한.
그러니까, 이건....
'크레도스?'
2성주, 플라누스는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다음 순간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
들리지 말아야 할 목소리가 들렸다.
들려올 리가 없는 목소리를 들었다.
혹시 내 귀가 잘못된 걸까.
혹은 착각을 일으킨 걸까.
'설마.'
크레도스라니.
놈이 살아서 돌아왔을 리가 없다.
그 상황에서 살아남았을 리도 없다.
2성주는 의심 가득한 시선을 주위로 돌렸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농병대를 자처하는 하급 마족들은 여전히 자신의 뿌리에 제압되어 있었다. 날뛰던 사천왕들은 모조리 쓰려졌으며, 아수라트는 자신의 줄기에 들어 올려져 있었다.
그 외의 다른 이는 보이지 않았다.
'....'
잘못 들은 것인가.
사천왕, 아수라트는 만신창이가 된 채로 생각했다.
아주 잠깐 반가웠다고.
아주 잠깐 희망을 보았던 것 같다고.
하지만 전부 착각이었던 것 같노라고. 이래서 헛된 희망은 함부로 품으면 안 되는 법이라고.
'그럼 그렇지....'
푹 숙여지는 고개 아래에서 아수라트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생각을 해보니 크레도스가 돌아올 리가 없다. 당연한 소리다. 이렇게나 거대해진 2성주가 권좌를 거머쥐었는데. 그런 2성주에게 이미 박살이 났을 텐데.
'어찌어찌 겨우 운 좋게 살아났다고 해도... 와 봤자 2성주에게 진짜로 죽임을 당할 게 뻔한데. 그런데 여기로 돌아올 리가 없잖아? 바보도 아니고.'
조금이라도 머리가 돌아간다면.
일말의 지능이라도 지니고 있다면.
기적적으로 살아났더라도 멀리 도망쳐 잠적할 것이다. 그게 정상이다. 자신이 크레도스라도 그랬을 테니까.
그러니까....
'내가 아직 목숨에 미련이 많았나 보네.'
그래서 헛된 희망을 품었던 거다.
아주 일말의 기적이라도 바랐던 거다.
하지만 그런 바람 따위, 소용없는 거겠지.
그렇게 결국, 나는 오늘 여기서 최후를 맞이하....
"...티봉?"
아수라트의 쓴웃음이 자조적인 체념으로 변하려던 순간이었다.
저 아래, 어딘가에서 아기 드래곤의 소리가 들려왔다. 아까부터 일어난 난리통에도 다행히 무사했던, 그 와중에 어쩔 줄을 몰라 하던 티라누스의 목소리였다.
마치 무언가를 발견한 듯한.
그 대상이 아빠라도 되는 듯한.
그런 목소리로.
"티보봉? 티봉? 티보옹!"
토도돗!
달려나갔다.
아직 채 걷히지 않은 흙먼지가 이는 곳으로.
무너진 지반을 야물딱지게 폴짝 건너뛰어.
앞을 가로막는 돌부리를 걷어차 부수며.
"티봉!"
흙먼지를 향해 힘껏 뛰어올랐다.
그러자 흙먼지 속에서 뻗어 나온 두 팔이 티봉이를 반갑게 받아 안았다. 그제야 흙먼지가 걷혔다. 티봉이를 안은 이의 가슴이, 어깨가, 얼굴이, 서서히 드러났다.
"우리 티봉이, 무사했구나?"
"티봉!"
티라누스는 그렁그렁해진 눈망울로 김장철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와. 우리 아빠, 평소엔 진짜 살벌하게 못생긴 인상이라고 느꼈는데. 그래도 상황에 따라선 오늘처럼 이렇게 살짝 멋있어(?) 보일 수도 있구나.
"티보봉! 티봉!"
"하하. 그래. 나도 반가워."
"티봉! 티보보보봉!"
"어어, 그래. 아이고 도골도골 잘도 구른다 우리 티봉이. 그래도 궁디 팡팡은 나중에. 응?"
"티보보보보봉!"
"으으, 그래. 미안. 지금 하자. 팡팡. 팡팡팡?"
"티봉! 티보봉!"
티봉이가 매우 만족(?)했다.
김장철이 티봉이를 안으며 시선을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향한 2성주의 경악이 담긴 눈길을 마주했다.
"...."
2성주는 자신의 줄기 속 수관이 모조리 움츠러드는 기분을 느꼈다. 솔직히 진심으로 놀란 까닭이었다.
'크레도스....'
진짜 크레도스다.
거짓말 같지만.
믿기지 않지만.
보고 또 보아도 진짜다.
"대체 어떻게...?"
그 붕괴와 매몰의 상황에서 살아남은 걸까. 직접 보면서도 황당했다. 어이가 없었다.
그런 심정은 김장철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글쎄. 나도 잘 기억이 나질 않아서."
김장철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자니 문득, 조금씩 떠올랐다.
온통 캄캄하게 짓눌리던 생매장의 순간.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다 의식을 잃던 찰나. 희망을 보았던가. 하지만 그것은 생존을 향한 갈망이 빚어낸 신기루에 불과하였던가.
그렇게 자신은 죽어갔더랬다.
호흡이 막히고, 심장이 멈추었더랬다.
솔직히 그 뒤로는 기억이 없다.
마치 꿈을 꾼 것처럼 희미했다.
계속해서 움직였던 것도 같다.
거듭하여 발악을 했던 것도 같다.
단지 그 와중에 절대로 놓지 않았던 단 하나의 생각이 있었던 것도 같다.
자신은 마치 깊은 땅속에 심어진 씨앗 같다고.
그러니 여기선 죽지 않겠다고.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고.
싹을 틔워내고 말리라고.
그런 생각을 품었던가, 자신은. 그 목표 하나만을 가슴에 새기며 무의식적으로 저항하였던가.
그러다가 의식을 찾았을 무렵엔, 어느새 자신은 지하의 원룸 같은 공간에 누워 있었다. 붕괴된 마왕성의 기둥 따위들이 얽히며 그 틈새에 생겨난, 흙으로 채워지지 않은 에어포켓 같은 공간이었다.
"...."
거기서 눈을 떴을 때는 만신창이였다. 온몸이 다 아팠다. 그 통증 덕분에 실감할 수 있었다. 살았구나. 적어도 아직은 죽지 않았구나.
그곳에서 잠시 쉬며 기력을 회복했다.
회복하는 동안 밀린 메시지를 읽었다.
덕분에 의식을 잃은 동안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마나시드....'
가슴에 생성된 마나의 씨앗.
게임을 하면서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설정이었다. 마왕 크레도스에게도, 용사 묵은지에게도, 그 어떤 캐릭터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던 요소였다.
한데 그런 것이 자신에게 생겼다.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오직 살기 위해 버둥거렸던 시간.
그 행동이 계기가 된 것이라 짐작할 뿐.
하지만 어쨌건, 그 마나시드가 자신을 살렸다.
하여 활용했다.
처음엔 어설펐다.
그러나 점점 익숙해졌다.
혈안 스킬도 도움이 되었다.
자신을 둘러싼 흙을 노려보며 파악했다. 다른 에어포켓이 어느 방향의 어느 정도 거리에 있는지. 파악한 뒤에 움직였다.
흙을 파내고, 마나시드로 기력을 회복하고, 다시 파내며 전진했다. 그렇게, 붕괴된 마왕성 지하 곳곳에 생성된 에어포켓을 징검다리로 삼았다.
천천히.
한 걸음씩.
지상을 향해 올라왔다.
그리고 마침내 지금, 며칠 만에 햇볕을 쬐게 된 것이었다.
"...."
솔직히 지금도 만신창이다.
대체 며칠을 굶은 건지.
그 얼마나 쉬지 못한 건지.
흙을 파내느라 혹사당한 손은 아예 문드러졌다. 피딱지가 없는 성한 곳을 찾기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좋네.'
김장철은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눈을 감았다. 그런 자신을 환영하듯, 곳곳에서 환호성이 들려왔다.
"크, 크레도스 님이다! 정말로 크레도스 님이야!"
"우리의 마왕께서 돌아오셨다!"
"농병대장님! 보고 싶었습니다!"
"저희는 어찌 돼도 좋으니까, 제발 감자밭 좀 살려주세요!"
"제발요! 다음 달엔 감자로 배부른 저녁 먹을 수 있을 거라고 딸아이랑 약속했습니다!"
농병대원들의 외침.
진솔해서 더 간절한.
그래서 외면할 수가 없어지는.
갖가지 외침들이 어깨에 차곡차곡 쌓였다.
그 무게를 느끼며 김장철은 눈을 떴다.
"...크레도스."
거대한 줄기에 새겨진 2성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아까와 같은 당혹감은 이제 사라져 있었다. 아니, 사실은 오히려 이 상황이 반가운 2성주였다.
"고맙구나, 크레도스. 기적적으로 살아난 주제에, 제 발로 이렇게 내 앞에까지 나타나 주다니 말이다."
"...."
"그렇잖아도 저 버러지들이 나의 합당한 권위를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하던 참이었다. 무슨 감자밭인지 뭔지에 대해 미련을 가지는 것도 같고. 네놈이 어찌어찌 보살펴 줬다는 그 알량한 행동을 잊지 못하던 것도 같고 해서 말이지."
"...."
"웃기는 일이지 않나? 버려진 땅에서 살아가는 버러지들이. 항상 굶주려 서로를 잡아먹으며 연명하는 벌레 같은 것들이. 주제에 가장 강력한 존재를 앞에 두고서도 그 힘이 주는 규율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사실이."
"...."
"그런데 마침 네가 나타나 준 것이다, 크레도스."
"...."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내가 어째서 너에게 고맙다는 것인지, 잘 알겠지?"
"...."
물론 잘 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날 공식적으로 죽여서, 자신의 권위를 확고하게 다질 기회를 얻었다는 뜻이겠지. 그래서 친히(?) 이렇게 죽으러 와 준 이쪽에게 고맙다는 것일 테고.
'하.'
김장철은 어이가 없어졌다.
그래도 별다른 대꾸를 하진 않았다. 그는 쓸데없고 소모적인 기싸움을 하기보다는 지금 더 필요한 일을 행동으로 옮겼다.
터벅, 터벅.
천천히 걸었다.
무너진 지반을 밟고.
흩어지는 흙먼지 사이를 지나.
쓰러진 사천왕들에게 다가갔다.
"다행히 다들, 죽진 않았구나."
"...."
쓰러진 하르토크는 실눈을 떴다. 한쪽 무릎을 꿇고서 자신의 상태를 살펴보는 마왕 크레도스. 자신을 바라보는 마왕의 눈길. 그 속에 배어 있는 걱정이라는 감정.
"어...서... 도...."
망치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여기서 이러고 있다간 죽는다고.
아무리 당신이라도 저렇게 거대해진 2성주를 감당할 수는 없을 거라고.
말하고 싶었다.
외치고 싶었다.
그런데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다급해졌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답답해서.
초조해서.
무서워서.
이러는 자신이 이상해서.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어서. 그럼에도 불안하고 걱정이 되어서.
소리치고 싶었다.
시르케와 바할도 마찬가지였다.
"크, 크윽.... 멍청...한.... 당장...."
"마왕! 도망...!"
만신창이가 되어 쓰러진 세 사천왕이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내려 애를 썼다. 그런 심정은 허공에 높이 들린 아수라트도, 2성주의 뿌리에 제압당해 있던 제피로스와 농병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비로소 모두가 깨달았다.
이곳이 마왕, 크레도스가 죽게 될 장소임을.
오늘이 마왕, 크레도스의 최후의 시간이 될 것임을.
'아, 안 되는데....'
'차라리 도망을 쳐요, 좀!'
처음엔 반가웠다.
마왕이 무사해서.
그가 돌아와 주어서.
반갑고, 놀랍고, 희망을 본 것 같았다.
하지만 조금만 지나보니, 2성주가 흡족하게 지껄이는 말을 듣다 보니, 이건 뭔가 잘못된 상황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건... 절대로 좋은 상황이 아니다! 오히려 위험한 상황이다! 이렇게 우리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마왕이 2성주에게 죽어 버리면, 그 죽음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면.
'우린... 저 2성주를 진짜 마왕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게다가, 당신은 우리 하급 마족을 처음으로 혹독하지 않게 대해준 존재란 말이야.'
'그런 당신이 당하는 모습 같은 거, 보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제발.'
'도망쳐, 당장!'
'제발 부탁이니까!'
'겁먹어서 비겁한 모습이라도 좋으니까!'
'당신 목숨부터 좀 챙기라고 제발!'
모두가 한마음으로 외쳤다. 기력이 다하여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지언정, 뿌리에 휘감겨 입마저 움직일 수 없을 지경일지언정, 하여 그 어떤 외침조차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을지언정.
마음속의 외침만은 같았다.
간절해진 눈빛 또한 같았다.
그러나 현실은 냉정했으며, 냉혹했다.
"그럼 이제, 내 손에 죽을 시간이다. 크레도스여."
...후와학!
거대한 나뭇가지가 김장철을 향해 떨어져 내려왔다.
그 아래의 김장철은 피할 틈도 없었다.
투콰앙-!
"...!"
지축이 울렸다.
대지가 포효했다.
폭발적인 흙먼지가 피어났다.
아수라트의, 농병대원들의, 제피로스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모두가 똑같이 생각했다.
못 피했다고.
죽었을 거라고.
그 자리에 있던 세 사천왕과 함께, 끔찍한 최후를 맞이했을 것이라고.
'됐다.'
2성주의 눈동자에 잔혹한 미소가 스몄다.
그는 확실하게 느꼈다.
크레도스를 내리친 나뭇가지.
그곳으로 제대로 된 감각이 왔다.
자그마한 무언가가 짓눌리는 느낌이.
짓눌리다 못해 엄청난 충격을 받아 짓뭉개지던 느낌이.
이걸, 다른 놈들은 손맛이라고 부르던가.
"하...하하... 크하핫...!"
비로소 2성주는 확신했다.
자신이 크레도스를 죽였다.
이로써 전대 마왕의 죽음이 공식화되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오직 자신만이 버려진 땅의 오롯한 주인이다!
...라고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아 씨. 콜록콜록. 이게 뒈질라고 진짜."
폭발적으로 피어난 흙먼지 속에서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투덜거림도 흘러나왔다.
그 직후였다.
2성주는 무언가 아주 자그마한 것이 자신의 나뭇가지 아래쪽을 움켜쥐는 희미한 감각을, 나뭇가지가 들어 올려져 옆으로 확 치워지는 감각을 느꼈다!
쿠웅!
'어?'
있을 리가 없는 일이다.
수백 톤은 넘을 자신의 거대한 나뭇가지가?
나무막대 치워지듯이 '옆으로' 치워진다고?
'어떻게?'
라고 생각하는 순간.
파아앗...!
무언가 자그마한 실루엣이 흙먼지를 꿰뚫고 솟구쳐 올라왔다. 자신의 면전을 향하여. 동일한 눈높이까지. 올라와서 살벌한 눈빛을 번득였다.
"야."
김장철이었다.
"너, 내가 대학원에서 식물 키우고 보살피는 일만 주구장창 연구했던 거, 알고는 있냐?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크레도스는. 그리고 어째서, 무식하게 커다랗고 둥그런 돌덩이를 치켜들고 있는 걸까, 저놈은.
"그걸 반대로 해석하면, 식물을 효과적으로 조지고 작살 내는 방법에도 전문가란 소리야, 내가."
"그게...."
진짜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는 반문은 꺼낼 수도 없었다. 미처 그러기 전에, 김장철의 외침이 먼저 터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어금니 꽉 깨물라고, 이 배은망덕한 장작 x끼야!"
뻐걱!
"...!"
사상 최초로 포효하게 된 마나시드가.
그 최대 출력의 힘을 고스란히 실은 강타가.
맷돌에 실려 2성주의 약점 부위인 미간에 내리꽂혔다.
46화. 함께이기에 강력한 (1)
뻐걱!
온 세상이 울렸다.
아니, 우는 것은 나인가.
세상의 첫 포효는 어떤 소리였을까.
세계의 마지막 통곡은 어떤 울림일까.
모르겠다.
나는.
당신은.
모두는.
하여 이 느낌은.
"...!"
김장철은 전율했다.
2성주를 향해 뛰어오른 순간. 드높이 솟구쳐 일격을 내리친 순간. 손으로 전해져 오는 반발력이, 그 느낌의 생소함이, 놀라움이 그를 진심으로 놀라게 했다.
동시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게... 맞아?'
암만 봐도 아닌 거 같다.
이건 지나치게 불합리하다.
그러니까, 누군가를 내리쳤다고 해서 이런 손맛이 느껴진다는 건....
'2성주 이놈, 약점을 맞았다곤 해도... 이러다가 한 방에 죽는 거 아냐?'
잠깐 걱정이 팍 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콰드드득!
미간을 얻어맞은 2성주의 거대한 몸체가 통째로 휘청거렸다.
뒤로 넘어가려는 줄기.
그 와중에 부릅뜨고 있는 눈.
한데 초점이 거의 풀려 있었다. 진짜 이대로 죽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
2성주는 아득한 충격 속에서 환상을 보았다. 자신의 머리 위에서 아름다운 꽃 수만 송이가 피어나는 꿈이었다.
그러나 꿈은 짧았다.
현실은 더욱 차가웠다.
이내 실감이 나는 충격과 공포.
그 속에서 2성주는 깨달아야 했다.
'크레도스가... 이렇게 강력하다고?'
믿기지가 않았다.
자신이 어찌 대응도 못 하고서 일격을 허용했다는 사실이.
그 일격.
단 한 방에 이 정도로 충격을 받아 휘청이고 있다는 사실도. 앞으로 몇 대를 더 버틸 수 있을지, 스스로도 자신이 없다는 사실 또한.
"...."
이게 맞나.
이게 옳은 건가.
이거 사기 아닌가.
얻어맞은 일격의 고통이 체감될수록, 이 세상이 온통 불합리로 가득한 공간으로 느껴질 지경이었다. 한편으로는 전심전력으로 궁금해졌다.
'어떻게?'
크레도스가 이런 힘을 낼 수 있단 말인가.
분명 생매장을 당해 죽었어야 했을 놈이.
어떻게 살아나서 이런 괴력을 보인단 말인가.
2성주는 가까스로 눈동자의 초점을 되찾으며 시선을 던졌다. 방금, 자신을 향해 무식강렬한 맷돌 내리치기를 선보인 김장철을 향해서.
'어떻게긴!'
2성주의 시선을 읽은 김장철이 사납게 웃었다. 그리고 한쪽으로 눈길을 던졌다. 방금, 눈앞에 선명하게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를 향해서.
딩동!
[마나시드 옵션 스킬, <영양 집중>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영양 집중은 지닌 모든 스탯을 일시적으로 재분배하여 하나의 스탯으로 몰아줄 수 있는 기능입니다. (하루 1회 사용 가능, 1회 기능 활성화 시간 10분)]
[현재 당신은 '근력'을 선택하였습니다.]
[당신이 지배하고 있는 크레도스 육신의 모든 능력이 '근력'으로 전환됩니다.]
[마나 시드(씨앗 단계 Lv. 3)의 영향으로 모든 스탯이 1.3배 증폭됩니다.]
[현재 적용 스탯]
[근력 : 254.8]
[그 외 스탯 : 1.3]
[영양 집중 옵션의 남은 활성화 시간 : 9분 21초]
영양 집중.
목숨을 걸고서 땅을 파헤치고 올라오던 막바지 무렵이었던가.
당시 마나시드의 레벨이 3으로 오르면서 얻어낸 옵션이었다. 그리고 이 옵션의 활용이, 지금 자신을 살렸다. 방금과 같은 괴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해주면서였다.
'아무리 2성주가 폭렙을 해서 거대해졌어도... 내가 크레도스의 온전한 스탯을 다 발휘하지 못하는 반쪽이 상태라고 해도... 모든 스탯을 하나로 몰빵하고 마나시드로 뻥튀기까지 하면 무시할 수는 없는 수치가 나오니까!'
덕분에 2성주의 기습적인 내리치기를 받아낼 수 있었다. 자신과 근처의 사천왕들을 보호할 수 있었고, 2성주가 내리친 거대한 줄기를 옆으로 밀어낼 수도 있었다.
또한, 막대한 근력으로 단번에 높이 솟구쳤으며, 그 힘을 맷돌에 실어서 2성주에게 제대로 타격을 먹일 수도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때리는 부위도 세심하게 선정(?)했다.
바로 2성주의 약점 부위인 미간의 옹이였다.
'그러니까....'
승기는 잡았을 때 쭈욱 분위기를 이어가야 한다.
한 대 때렸다고 방심하면 안 된다. 상대가 비틀거린다고 안심해서도 안 된다. 이럴 때 제대로 끝장을 내야 한다.
쇠뿔도 단김에 빼듯이. 와이프에게 플레이스태숑 구입을 허락받자마자 쇼핑몰 결제 버튼을 연타하듯이. 엄마와의 용돈 인상 협상에 진전을 보이자마자 즉시 지급을 요구하듯이.
그렇게 물이 들어올 때에 노를 젓고, 뱃사공이 정원초과로 모이자마자 에베레스트 정복을 시작하듯이.
김장철은 발을 굴렀다.
타앗!
비틀거리는 2성주의 나뭇가지를 밟고 다시금 솟구쳤다. 맷돌을 치켜들었다. 겨누었다. 2성주의 아픈 미간을. 한 번 때렸던 곳을.
'한 방 더!'
투콰앙-!
"...!"
이번엔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2성주의 눈이 완전히 풀렸다.
몸체를 지지하던 뿌리도 풀렸다.
마왕성 만큼 거대하던 줄기가 기울어졌다.
트드득...! 쯔거거걱...!
그림자가 천천히 흔들렸다.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처음엔 완만하게. 서서히 급격하게. 기울고, 넘어졌다.
...!
지축이 울렸다.
대지가 떨렸다.
감자밭에 드리웠던 거대한 그림자가 걷혔다. 2성주의 뿌리가 힘없이 늘어지면서, 뿌리 끝에 붙들려 있던 농병대원들이 모두 풀려났다.
"저게... 무슨....'
모두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눈으로 상황을 보면서도 그러했다.
사실 이런 광경을 보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그저 마왕님이 다시 살아 돌아와서 기뻤다가, 잠시 후에는 걱정스러운 마음만 와락 들었는데.
해서 무서웠는데.
여기서 마왕님이 쓰러질까 봐. 2성주의 지배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될까 봐.
그저 두렵고 걱정스러웠을 뿐이었는데.
그런데....
'이게... 맞아?'
농병대 전원이, 쓰러지는 2성주에게서 가까스로 탈출한 아수라트가, 간신히 뜬 실눈으로 상황을 바라보던 하르토크와 시르케, 바할이, 먼발치에 피뢰침으로 묶여 있던 3성주 라스터가, 그리고 제피로스까지도.
모두가 같은 경악을 느꼈다.
그리고 곧 깨달았다.
자신들이 느낀 경악은 시작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크! 커허억! 컥!"
폭발적인 굉음과 흙먼지를 일으키며 넘어졌던 2성주가 버둥거리며 눈을 떴다.
그는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 상황이 받아들여지지도 않았다.
'내가... 왜?'
누워 있는 걸까.
어째서 뿌리가 풀려 버린 걸까.
왜?
어쩌다가?
아, 그래.
나는.
'...크레도스!'
놈에게 연달아 미간을 강타당했지.
그래서 쓰러졌다고, 내가?
이렇게? 형편없이? 볼썽사나운 몰골로?
꾸드득!
그의 거대한 나뭇가지들이 섬뜩한 소리를 내며 지면을 짚었다. 줄기를 일으켰다. 어느새 김장철을 돌아보는 2성주의 두 눈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크레! 도스으-!"
인정할 수 없다.
자신은 강하다.
버려진 땅에서 가장 강대한 존재가 되었다.
그것이 사실이다. 유일한 진실이다. 그래야만 한다. 자신이 영양을 다 흡수했으니까. 이만큼 거대해졌으니까. 모두를 지배할 자격을 갖추었으니까.
그것이 바로 버려진 땅의 규율이니까!
그래야만 하니까!
"그런데!"
어떻게!
감히 네놈이!
콰하아아악-!
몸을 일으킨 2성주의 모든 가지와 뿌리가 가시처럼 버럭 일어섰다. 오직 단 하나의 존재, 김장철만을 노리고서 모든 악의를 드러냈다.
그리고, 쏟아졌다.
"...죽어!"
나뭇가지로 내리찍었다. 휘둘렀다. 긁어냈다. 후려치고, 휩쓸었다. 거대한 잎새를 지면으로 뿌렸다. 폭발시켰다. 독성의 폭격. 오염되는 일대. 지면 아래에서 뿌리가 솟구쳤다. 공간을 얽었다. 조였다. 부러뜨리고 터뜨렸다.
"네놈만 죽으면!"
모든 일이 정상적으로 돌아갈 것이다. 감히 내게 대적하는 자가 사라질 것이다. 모두가 나를 진정한 마왕으로 인정하고 머리를 조아릴 것이다.
네놈만 죽으면.
네놈만 사라지면.
네놈을 죽일 수만 있다면!
'다른 건 필요 없어어억!'
2성주의 눈에 핏발이 맺혔다.
자신이 지상으로 쏟아붓는 맹공.
거침없는 강타에 부서지는 지면.
쉼 없는 연타에 피어나는 흙먼지.
그 속에서 난리가 난 하급 마족들이 보였다. 스스로를 농병대라고 부르는 놈들이었던가.
웃기는 소리다.
하찮고도 가당찮은 것들이다.
그래. 벌레 같은 놈들. 미물과 다를 바 없는 놈들.
그런 주제에 살려고, 살아남아 보겠다고, 이리저리 바쁘게 날뛰고 있다. 소리를 지르고, 서로를 부둥켜안고, 잡아당기며,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기를 쓰고 있다.
하지만....
'상관없어!'
저런 것들, 다 죽어도 상관없다. 크레도스, 그놈만 죽일 수 있다면 아무래도 괜찮다.
아니. 더 많이 죽으면 더욱 좋다.
저 버러지들이 많이 죽어나갈수록 나머지 살아남은 놈들은 더욱 두려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복종하겠지.
그러니까....
'죽어! 죽으란 말이다!'
콰드컥!
맹목적인 공격이 이어졌다.
결코 멈추지 않고서.
더욱 철저하게.
하여 매정하게.
오직 크레도스 하나만을 죽이겠다는 목적 하나로. 나머지는 다 죽어도 상관없다는 일념을 품고서.
찍고, 가르고, 휘돌리고, 찔렀다.
올려치고, 짓누르고, 돌려치고, 갈아 버렸다.
덕분에 그동안 김장철은 발바닥과 2심방 2심실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녀야 했다.
2성주의 공격이 너무나 매서워서?
아니었다.
자신 외의 다른 사천왕과 제피로스, 농병대들이 위험해졌음을 직감한 까닭이었다.
'...저 미친놈이!'
까드득!
거침없이 쏟아지는 2성주의 맹공. 오직 이쪽을 죽이기 위해서 사력을 쏟아붓는 모습.
그걸 위해서라면 지형이고 농병대고 걸리는 건 다 부수고 없애겠다는 아집이 엿보였다. 그걸 느낀 순간 절로 이가 갈렸다.
'자기 배때기 불리려고 연구실 애들 갈아 넣던 꼰대들이랑 똑같잖아....'
그건 싫다.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그렇게 갈아 넣어졌으니까.
지긋지긋하도록 이용당했으니까.
그때 매일 다짐했으니까.
혹시나 나중에 내가 저 자리에 올라가면, 저런 위치에 서게 되면, 자신만은 저러지 말자고. 먹어도 다 같이 먹고, 굶어도 다 같이 굶어가며 함께 하자고.
꼭 그렇게 해보자고.
지금의 마음을, 다짐을 잊지 말자고.
그러니까....
'젠장!'
콰앙-!
땅을 박찼다.
막강한 근력으로 섬전처럼 튀어 나갔다. 손을 뻗었다. 그곳에 도망치다 발목이 접질려 쓰러진 농병대원이 보였다.
"인마! 일어나!"
덥석!
대원의 뒷덜미를 잡았다.
놀란 눈길로 돌아보는 농병대원.
유달리 키가 큰 꺽다리 녀석이었다. 딸아이한테 추뇨를 가져다줬더니 무척 좋아하더라며 울먹인 적 있는 놈이었던가. 딸아이 이름이 뭐였더라. 플루토? 플루트? 그런 이름이었던 거 같은데.
모르겠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플루트네 아빠! 착지! 잘해라!"
꺽다리 대원, 플루트 아빠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겨누었다.
멀리. 아주 멀리. 2성주의 공격이 닿지 않을 범위 바깥 지점. 해서 나름 안전한 곳. 퇴비 더미를 잔뜩 쌓아둔 장소. 그렇기에 던져졌다가 떨어져도 크게 다치지는 않을 그런 곳을 향하여.
콰하악-!
던졌다.
플루트네 아빠가 버둥거리며 날아갔다.
그 직후, 2성주의 거대한 가지 한 가닥이 빗자루처럼 땅을 갈아엎고 휩쓸면서 쇄도해 왔다.
피할 곳? 일견 보기엔 없어 보였다.
하지만 이쪽에게는 살짝 보였다.
눈에 익은 게임 속 2성주의 공격 패턴과 거의 똑같은 공세였기 때문이었다.
'패턴은 똑같다. 단지 규모와 위력만 커졌을 뿐!'
머릿속이 파파팍 돌아갔다.
주위를 재빠르게 살폈다.
아직 피신시키지 못한 농병대원들이 보였다. 저놈들을 일일이 퇴비밭으로 던져서 구할 수 있을까.
아니. 그러기엔 시간이 모자랄 것이다.
그렇다면....
'...해보자!'
타닷!
움직였다.
급하지도 않게.
느리지도 않게.
가장 적절한 속도로.
지면을 휩쓸며 달려오는 거대한 가지를 향해 마주 달려갔다. 2성주의 이번 휩쓸기 공격 패턴에서 공격 판정이 가장 약해지는 지점을 향하여, 뛰다가 가장 적절한 순간에 멈추었다. 그리고 지면에 두 다리를 고정하듯 섰다.
쿠웅-!
무게중심을 낮추었다.
손을 당겼다.
영양집중으로 몰빵한 근력 스탯. 그걸 다시 1.3배로 증폭한 마나시드의 효율. 그것만을 믿으며. 자신이 기억하는 2성주의 패턴이 그대로이길 바라며.
내질렀다.
터커엉-!
오른쪽 손날을 바깥으로 펼치며 후려쳤다. 시내버스 굵기의 가지와 충돌했다. 손이 뻐근해졌다. 가지가 부러지며 튕겨 나갔다.
이쪽의 뒤에서 비명을 지르며 웅크리던 농병대원들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녀석들을 향해 호통쳤다.
"굴러! 이쪽으로! 내가 멈추라고 할 때까지!"
"...!"
진심을 담아 내지른 목소리가 닿았음일까. 그 외침에 담긴 다급함을 느꼈음일까.
다행히도 이쪽의 근처에 있던 모든 농병대원이 곧바로 바닥을 굴렀다. 이쪽이 가리킨 방향을 향해서. 망설임 없이.
구르자마자 곳곳의 지면이 부서졌다. 부서진 자리에서 거대한 송곳 같은 뿌리가 솟구쳤다. 하지만 혼신의 힘을 다해서 구르는 농병대원들을 맞추지는 못했다.
김장철의 외침이 이어졌다.
"일어나서! 앞으로 다섯 번 전력 점프! 뛰어!"
"...!"
뛰었다.
수백 명의 인원이 동시에. 김장철의 구령에 따라 오묘한 엇박자를 타고서, 다함께 비슷한 높이로.
뛰는 동안 2성주가 뿌린 잎사귀가 지면 곳곳에 꽂혔다. 폭발했다. 맹독성 안개가 지면에 자욱하게 깔렸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퍼엉!
잎사귀가 폭발할 때 모두가 뛰어올랐다.
푸슈스-!
맹독성 안개가 자욱해질 무렵, 모두가 도약의 최고점에 도달해서 신선한 공기를 마셨다. 그리고 착지했다. 그 사이, 맹독성 안개는 이미 바람에 흩어져 살상력을 잃어버린 채였다.
"뛰어!"
모두가 또 뛰었다.
그 직후, 잎사귀가 폭발했다.
그렇게 다섯 번을 뛰고, 공중에서 숨을 야물딱지게 호옵 마시고 착지하며, 다섯 번의 맹독성 폭발을 아무런 피해 없이 피해냈다.
덕분에 모두는 깨달았다.
'우리가... 저렇게나 엄청난 2성주의 공격을 이렇게 간단히 피해냈다고?'
'뭐지? 왜 이렇게 쉬운 거지?'
'이거, 마왕님 덕분인 건가? 그렇지?'
스스로를 향한 경악.
그보다 더욱 커지는, 김장철을 향한 경외의 감정.
"정신 놓지 마! 이번에는 뒤로 둠칫둠칫! 구령에 맞춰서 한 걸음씩 물러난다! 무섭다고 빠르게 움직이지 말고! 정확한 박자로!"
"...!"
다시금 이어지는 경이로운 단체 엇박자 회피.
그걸 이끌어내는 김장철의 확고한 리드.
버려진 땅의 영원불멸한 트렌드가 될, 농병대 공식 '농사준비체조'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47화. 함께이기에 강력한 (2)
체조는 이롭다.
체조는 화끈하다.
체조는 매력적이다.
전에는 아무도 그런 말을 믿지 않았다. 당연한 소리였다. 체조 따위가 뭐라고. 단체로 맞춰서 율동을 추는 것 따위가 대체 뭐라고. 다들 그렇게 생각하면서만 살았다.
체조는 지겹다.
체조는 지루하다.
체조는 무가치하다.
이제는 아무도 그런 말을 믿지 않게 되었다. 이 역시 당연한 소리였다. 감히 체조를 폄하해? 단체로 리듬 맞춰서 움직이는 게 얼마나 유익하고 짜릿한데. 다들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갈 예약 버튼을 연타하게 되었다.
지금, 바로 이 순간, 2성주의 쏟아지는 맹공을,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 움직임으로 회피하면서 말이다.
쿠확!
꽃망울이 떨어져 내려왔다.
일견 보기에는 아름다운 광경.
그러나 떨어진 수백 덩이의 꽃망울은 지면에 닿자마자 폭발했다. 환각성 꽃가루를 사방으로 흩뿌렸다.
하지만 아무도 당하지 않았다. 모두가 적절한 다섯 걸음 간격으로. 일제히 똑같은 엇박자와 동작으로 물러섰다.
"한 걸음 뛰고!"
"홉!"
"두 걸음 돌리고!"
"호오옵!"
"세 걸음 앞으로!"
"홉! 홉!"
"제자리! 둠칫둠칫!"
"훕! 호옵! 훕! 호옵!"
펑! 퍼펑! 콰학!
문자 그대로 살인적인 폭발이 사방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그때마다 농병대원들은 김장철의 리드에 맞추어 뒤로 물러났다가, 시계 방향으로 돌며 걸었다가, 앞으로 나아갔다가, 제자리에서 궁디를 씰룩거렸다.
덕분에 아무도 폭발의 범위에 휩쓸리지 않았다. 국지적인 폭풍을 일으킨 환각성 가루의 연무는 그들의 어깨와 무릎을 아주 살짝씩만 스쳤을 뿐. 실질적인 대미지를 전혀 입히지 못했다.
이어진 2성주의 공격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허리 숙이고!"
"홉!"
후우웅!
2성주의 거대한 뿌리가 발끈하듯 공간을 휩쓸고 지나갔다. 맹렬한 폭풍이 농병대원들의 숙여진 등짝 위를 가볍게 스치고 지나갔다.
등짝이 시원해졌다.
모두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아아 후련한 바람에 흩날리는 땀방울. 시원하기도 하여라.
"이거 못 하는 놈 없겠지! 일어나며 백 덤블링!"
"흐옵!"
"흐입?"
이번엔 누군가가 삑사리(?)를 냈다. 매일 굶어댄 주제에 똥배가 나온 어느 농병대원이었다.
똥배 대원이 백덤블링을 하려다가 실패했다. 도약의 높이가 살짝 모자랐다. 그 순간, 바닥에서 솟구친 뿌리가 똥배 대원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헛?"
똥배 대원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아. 난 이렇게 가는구나. 평소에 몸 관리 좀 해둘걸. 후회는 늦고, 참사는 빨랐다.
그런 것처럼 보였다.
김장철의 손길이 뻗어오기 직전까지는, 분명 그랬다.
"힘 빼, 인마!"
처억!
"...!"
때맞추어 뻗어온 김장철의 손길이 똥배 대원의 허리를 툭, 밀어주었다.
덕분에 살짝 부족하던 도약의 높이가 충족되었다. 똥배 대원의 회전에 탄력이 붙었다. 백덤블링이 완성되었다.
투컥!
바닥에서 솟구친 뿌리가 아슬아슬하게 똥배 대원을 놓쳤다.
김장철의 외침이 이어졌다.
"방심하지 말고! 이번엔 빠르게! 좌로 2보 짠짠! 우로 3보 딴따단!"
"짠짠! 딴따단!"
투퍽! 콰퍼퍽!
그것은 실로 기묘하고 오묘한 엇박자의 연속 동작이었다.
2성주의 중심 줄기에 매달린 수백 가닥의 넝쿨이 채찍처럼 뻗어왔다. 지면을 때려댔다. 그러나 역시 이번에도 땅바닥만 헛쳤다.
개중에 엇박자를 따라가지 못해 스텝이 꼬인 농병대원이 몇몇 있었지만, 그때마다 김장철이 적절하게 끼어들어서 공격을 튕겨내거나, 농병대원의 몸을 톡 밀어서 회피를 도와준 덕분이었다.
"...!"
그때마다 농병대원들의 가슴에는 짙고 또렷한 하트가 따악!
모두는 생각했다.
우리 마왕님.
대체 어쩌면 이럴 수가 있을까.
사실 자기 혼자 살려면 얼마든지 살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렇게 하는 게 훨씬 편할 텐데. 그게 확실한데.
그런데 굳이 힘들고 귀찮아도 여기에서 자신들과 함께 고난을 헤쳐가고 있다. 모두가 다치거나 죽지 않도록 보살피고 있다.
모두를 위해서.
우리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그러니까... 우릴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저분을 위해서라도 잘 피해내야 해!'
'못 피하면 안 된다. 내가 다치면 저분의 노고가 헛된 것이 되는 거야. 그러니까 반드시 살아남는다. 다치지 않는다!'
'크레도스 님을 실망시켜 드리고 싶지 않아!'
모두가 이를 갈았다.
집중력을 드높였다.
하나가 되어갔다.
김장철의 구령에.
옆 동료의 움직임에.
모든 정신을 모았다.
걸음과 동작마다 심혈을 기울였다.
그 마음이, 집중력이, 흘려낸 땀방울이, 기적 같은 필연을 불러왔다. 쏟아지는 맹격. 피해냈다. 흘려냈다. 거기엔 평소 감자밭에서 보냈던 노동의 시간이 뜻밖의 도움이 되었다.
"숙이고! 일어나고!"
"뒤로! 뒤로! 앞으로!"
그동안은 다들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은 모두가 서로의 구령과 박자에 동작을 맞추는 일에 매우 능숙해져 있는 상태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농병대원들이 감자밭에서 일하면서 매일 하던 일이 바로, 구령에 맞추어 함께 움직이는 일이었던 까닭이었다.
"바닥에 펀치! 구멍 만들고! 쪼그려!"
"후압!"
"짧은 도약! 공중에서 무릎 당겨서 끌어안고! 엉덩이 착지!"
"끄악!"
"오른쪽으로 구르면서! 궁디 털고!"
"훕훕!"
농병대원들이 하나가 되어갔다.
김장철의 리드에도 신이 들렸다.
모두가 작두를 타듯이 몰입했다.
한층 자욱해지는 흙먼지. 그럴수록 옆 동료의 움직임과 구령을 등불로 삼아. 등대로 삼아. 나의 길을 나아가며. 동료의 길을 끌어주며.
혼신의 힘을 다해서 움직였다.
더욱 힘차게 목이 터져라 외쳤다.
덕분에 2성주는 조금씩 깨달아야 했다.
'뭐지...?'
반드시 크레도스를 죽이겠다는 일념. 그걸 위해서라면 이곳에 있는 놈들 따위 다 휩쓸려 죽어도 상관없다던 아집.
오직 그 생각만으로 폭격과도 같은 공격을 쏟아내고 있던 2성주였다. 덕분에 일대의 구역 전체에 엄청난 흙먼지가 피어났다.
하여 몰랐다.
흙먼지 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상상하지도, 예상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조금씩 알겠다.
'이게... 무슨....'
여전히 자욱한 흙먼지.
그 사이를 아스라이 뚫고 올라오는 힘찬 외침들. 하나가 된 구령. 그래서 더욱 또렷하게 들려오는 단체 함성.
2성주는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음을 느꼈다.
'무슨.... 크레도스, 네놈은 대체, 뭐란 말이냐....'
비로소 상황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저 크레도스, 그놈이 혼자서 이쪽의 공격을 감당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자신과 똑같이 벌레 같은 아랫것들이야 다 죽건 말건 이쪽의 공격을 피하고 막는 데에만 골몰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모두를 이끌고 있었다.
믿기지 않는 짓거리를 해가면서.
더욱 믿을 수 없는 결과를 이끌어내면서.
단 한 놈도 죽지도, 다치지도 않도록 지휘라는 것을 하고 있었다! 무려 미쳐 날뛰며 폭격을 퍼붓는 자신을 상대로!
"...."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나는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미친.'
어쩌면 크레도스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한 존재였던 걸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혼자서 내 공격을 피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보란 듯이 저런 버러지들까지 다 챙겨가며 내 공격을 감당한 것이니까.
게다가 아까 날 타격했던 힘까지 떠올린다면 더더욱....
'...아니야!'
2성주는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자신은 사상 최대의 영양을 흡수한 상태. 덕분에 이렇게나 거대해지고 강력해진 상태다.
그런데 크레도스가 자신보다 강하다니?
그건 말이 안 된다. 저건 단지 저놈이 교활한 꾀를 부린 결과일 것이다.
'알량한 속임수가 아닌 진정한 결과는 힘이 말해주는 법!'
카드득!
2성주의 메인 줄기 속 수관이 모조리 조여졌다.
힘을 모았다.
발작적으로 솟구치는 분노. 이런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울분. 그 모든 감정을 모아서 터뜨렸다.
"...크워어어어억!"
쿠우우웅-!
2성주의 뿌리가 지축을 흔들었다. 그와 동시에 2성주의 잎새가 모조리 붉게 물들어 단풍이 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걸 본 김장철은....
"지금! 모두!"
2성주의 변화를 가장 빠르게 감지했다.
그는 변화의 정체를 제일 먼저 알아차릴 수 있었다.
'...2페이즈!'
2성주 보스전의 2막.
놈의 공격을 연속으로 피해내다 보면 놈이 발끈하며 스스로 체력을 깎아 버리곤 했다.
그러면 시작되는 2페이즈. 이전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악랄한 공격 패턴과 속도, 광범위한 광역기가 마구잡이로 첨가되는 지옥의 전투.
그러나....
'마침내!'
김장철은 오히려 환호했다.
제발 빨리 좀 시작해라.
그 마음으로 이 순간만을 기다린 그였다.
행여나 1페이즈에서 다치거나 죽는 농병대원이 나올까 봐 전심전력으로 노심초사했다.
하여 빌었다.
2페이즈 빨리 좀 시작하자고.
그것만 시작되면 다 살 수 있다고.
"전원! 돌격!"
외쳤다.
모두의 귀에 콱 틀어박히도록.
영문을 몰라도 일단 따라오도록.
소리치며 달렸다.
환호를 머금었다.
너무나 치명적이고 위력적인 2페이즈.
그럼에도 모두가 더 안전해졌다는 확신. 그건 바로, 놈의 2페이즈에 의외의 허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달려! 최대한 빠르게! 놈한테! 바짝 붙어라!"
"...!"
농병대원들은 처음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존경하는 마왕님이자 친애하는 농병대장께서 제일 앞장서서 달려가고 있었다.
다름 아닌 2성주에게.
저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적에게.
가장 먼저 달려가더니 두 팔을 벌렸다. 2성주의 거대한 줄기에 춉 달라붙었다. 오뉴월의 매미처럼. 구성지게 울었, 아니, 목청을 드높였다.
"뭐하냐! 빨리빨리!"
"...!"
진짜다.
진심이시다.
그렇다면 확실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마왕께선 언제나 그랬으니까. 그가 보이는 미친 듯한 행동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었으니까. 나중에 보면 저분이 다 옳았으니까. 이번에도 그렇겠지.
"흐아압!"
춉! 챱! 쪽!
농병대원들이 앞다투어 2성주의 메인 줄기에 달라붙었다. 어느샌가 슬그머니 농병대 단체 체조에 합류했던 하르토크와 시르케도, 바할도, 아수라트와 제피로스, 피뢰침에서 풀려난 3성주도 마찬가지였다.
그 직후, 2성주 플라누스의 본격적인 2페이즈가 개막되었다.
...콰아아아아!
완전히 붉게 물든 단풍.
파괴의 화신이 된 듯이 움직이는 2성주.
2성주의 줄기에 달라붙은 채 그 모습을 본 모두는 깨달았다. 이곳이 제일 안전한 곳임을. 마왕을 따라 2성주에게 달라붙지 않았다면, 아까와 같은 체조로는 저걸 절대로 피하지 못했을 것임을.
그 사실을 머리로 이해하고, 몸으로 실감하는 순간, 김장철이 외쳤다.
"뭐해! 때려! 부숴!"
"...!"
고막에 콱 박히는 확신의 외침.
그와 함께 터지는 거대한 울림.
마왕께서 맷돌을 휘두르고 계셨다.
2성주를 두드려 패고 계셨다.
콱, 콰직, 2성주의 정수리가 실시간으로 터져나갔다. 그걸 목격한 모두의 가슴이 날뛰었다. 직감했다. 그렇다. 이제부터가 반격의 시간이다.
"다들! 공겨억-!"
어느새 농병대 수석조장으로서의 정체성(?)을 새삼스럽게 자각한 하르토크가 소리쳤다. 바할이 포효했다. 시르케가 여섯 자루의 검을 뽑았다. 아수라트가 톱날 대검을 휘둘렀다. 3성주의 집게날이 번득였다.
그리고 농병대원들이 각자의 수제 농기구를 불끈 쥐었다.
"하나아-!"
"홉!"
콰앙-!
체조는 이롭다.
"두우울-!"
"훕!"
투컹-!
체조는 화끈하다.
"세에엣!"
"합!"
콰드걱-!
체조는 매력적이다.
전에는 아무도 그런 말을 믿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체조 따위가 뭐라고. 단체로 맞춰서 율동을 추는 우스꽝스러운 짓거리가 대체 뭐라고. 다들 그렇게만 여기면서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다시 하나!"
"홉!"
콰앙-!
체조는 지겹다.
"두우울-!"
"훕!"
투캉-!
체조는 지루하다.
"세에엣-!"
"합!"
콰컥-!
체조는 무가치하다.
이제는 아무도 그따위 폄하를 믿지 않게 되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감히 우리의 준비체조를?
비난해?
단체로 리듬에 맞춰서 움직이는 게 얼마나 유익하고 화끈한데. 손맛은 또 얼마나 죽여주는데. 마왕성만큼 커다란 2성주가 실시간으로 우리 손에 쓰러지기도 하는 건데. 그러니까 어, 좀 좋아할 수도 있지.
"...!"
2성주의 눈이 경악으로 벌어졌다.
2페이즈의 광기에 젖어 있던 그는 비로소 깨달았다.
'나... 나는...!'
버려진 땅의 가장 강력한 존재가 된 줄 알았는데. 비로소 모두의 위에 군림할 자격을 얻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착각이었다.
그걸 이제야 알게 되었다.
'나느은...!'
실시간으로 부서지는 전신.
개미떼에게 박살 나는 사냥감.
거대한 만큼 오히려 부서질 곳도 많은, 장작 덩어리.
"...!"
2성주의 허우적거림이 격해졌다.
마지막 미련을 놓지 못하듯. 끝내 거머쥐지 못한 야망을 향해 손짓하듯. 허우적거리고, 그러쥐려 애를 썼다.
...!
약탈의 나무가 드리우던 그늘에, 마침내 회생불가의 균열이 새겨지기 시작하였다.
48화. 함께이기에 강력한 (3)
농병대는 강하다.
마왕성의 마족이라서?
게임 최종 스테이지의 몬스터라서?
아니.
그들에게는 지키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잃을 것이 많았다. 잃고 싶지 않은 것은 더 많았다.
"감자밭! 내 감자밭!"
"내가! 저거 키우려고! 얼마나 애썼는데에!"
"감히 내 밭을! 우리 아들은 이제 젖 떼고 나면 뭐 먹으라고!"
"우리 딸애랑 약속했단 말이다!"
"난 결혼 1주년 저녁 식탁에 찐 감자 올려두고 둘이서 오순도순 소금 찍어 먹자고 꼭꼭 다짐했는데!"
"내 감자밭 돌려내!"
"살려내!"
누군가는 이렇게 말하곤 한다. 잃을 것 없는 자들이 무서운 법이라고. 무슨 짓이든 거리낌 없이 저지르곤 한다고.
하지만 사람들은 모른다.
진정으로 지키고 싶은 것을 잃을 위기에 처했을 때. 그럴 때에 사람이든 마족이든 얼마나 독해질 수 있는지. 그 얼마나 필사적으로 처절해질 수 있는지를.
"우리 엄마! 오늘도 굶으셨는데!"
"걸음마 시작한 내 아들은 이틀째 배곯으며 울고 있다고-!"
콱! 콰직!
사방에서 거친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보다 더한 파열음이 찢겨 나왔다.
"...!"
2성주의 눈이 경악으로 벌어졌다.
'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모든 잠재능력을 다 끌어내던 2성주였다. 이곳 일대를 전부 초토화하리라고. 크레도스는 물론이고, 놈을 따르는 건방진 하급 마족들을 전부 쓸어 버리리라고.
그렇게 다짐하며 자신의 모든 잎을 단풍으로 물들였는데. 본능에 새겨진 파괴의 능력을 처음으로 부르려던 참이었는데. 하여 마침내 모두에게 죽음을 선사하려 하였는데.
아무도 겁을 먹지 않았다.
오히려 눈이 뒤집혀서 달려들었다!
콰작! 콱!
놈들의 무엇이.
버러지처럼 하찮은 놈들의 그 어떤 감정이.
이렇게 막강한 힘을 낼 수 있는 걸까.
터컥!
"...!"
2성주의 가장 커다란 나뭇가지 하나가 통째로 잘렸다. 굉음과 함께 지상으로 떨어졌다. 2성주가 고통으로 몸부림쳤다.
"크오오오오오-!"
지상을 향해 발악에 가까운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정작 그 지상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여 2성주는 그 누구도 죽이지 못했다. 오히려 자신의 몸에 달라붙은 사천왕과 농병대원들의 분노만 더 일으켰을 뿐이었다.
"이놈이 감자밭 망쳐놓는다!"
"어딜 감히!"
"때려! 부숴!"
"으아아아아!"
콱! 콰작! 콰컥!
"...!"
농병대의 공격이 더욱 광포해졌다. 2성주의 몸에 쌓이는 타격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져 갔다. 그럴수록 2성주가 더 버둥거렸다. 농병대의 움직임도 격해졌다.
"나... 나는...!"
2성주의 다급한 외침이 터졌다.
그러나 퍼져 나가지는 못했다.
가로막혔다. 농병대의 함성에. 분노의 포효에. 밟히고. 뜯기고. 부서지고. 파헤쳐지며. 잘리고. 산산조각이 났다.
"...!"
2성주가 마지막으로 외친 단말마의 내용을 알아듣는 이는 없었다. 딱히 관심을 갖는 이도 없었다.
모두는 생각했다.
나의 밭을 망치는 놈.
내 가족의 생계를 위협하는 놈.
먹고 사는 일을 앗아가려는 놈.
그런 놈은 그저 무찌를 뿐.
나의 소중한 것을 지킬 뿐.
...!
2성주의 거체가 흔들렸다. 그러나 농병대의 공격은 끝나지 않았다. 더욱 거세어졌다.
"몰아쳐!"
"멈추지 마!"
"끝이 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기세를 탄 아수라트가 외쳤다. 하르토크가 2성주의 줄기에 새겨진 균열 부위를 가리켰다. 시르케의 검날이 번득였다. 바할의 근육이 쉴 틈 없이 불끈거렸다. 농병대의 함성이 더욱 커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
2성주의 거체가 발작적으로 크게 꿈틀거렸다.
그것이 끝이었다.
최후의 꿈틀거림이 멎는 순간, 2성주의 전신이 생기를 잃었다. 수십만 장의 잎사귀가 모조리 회색으로 빛이 바랬다.
파사사사사....
메마른 잎이 떨어졌다.
한 장.
두 장.
마침내 모두.
가지가 수분을 잃고 말라비틀어졌다. 줄기에서 떨어져 나왔다. 지상과의 충돌을 견디지 못하고 퍼석 가루가 되어 바스러졌다.
줄기 또한 마찬가지였다. 생기를 잃은 2성주의 줄기는 자체의 막대한 무게를 버틸 내구력 또한 잃었다.
콰드득...!
불길한 파열음이 밑동에서 울리는 순간. 붕괴가 시작되었다. 삽시간에. 부질없이. 무너졌다. 자체의 중량에 짓눌렸다. 스러졌다. 감자밭에 흩뿌려졌다.
약탈의 나무가 드리우던 그늘이 걷혔다.
오랜만의 햇볕이 감자밭을 어루만졌다.
잠시 마왕의 권좌를 차지했던 2성주.
그의 완전한 몰락이자 최후였다.
그 순간이었다.
...딩동!
아릿한 알림음이 김장철의 귓가에 울렸다.
[당신은 마나시드의 옵션 스킬, <영양 집중>을 최초로 사용하여 강적 <2성주 플라누스>를 격퇴하는 데에 성공하였습니다.]
[이러한 업적이 당신의 마나시드에 귀중한 경험 자산으로 축적되어 마나시드를 성장시킵니다.]
[마나시드의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마나시드(씨앗 단계 Lv.4)]
[마나시드의 스탯 증폭률이 1.4배로 증가하였습니다.]
...후우웅.
바람이 불어왔다.
땀에 젖은 머리칼이 흔들렸다.
그 속에서 김장철은 좀처럼 미소를 짓지 못했다. 2성주라는 강력한 적은 물리쳤음에도, 그 과정에서 사상자가 없었음에도, 자신의 마나시드가 또 한 차례 성장을 하였음에도 그러했다.
"...."
사실은 웃고 싶어도 웃을 수가 없었다. 아니. 애를 써도 웃음이 나오지가 않았다.
"이... 이겼다아-!"
"와아아아아!"
"우리가 해냈다!"
"크하하하하핫! 크하핫!"
사방에서 들려오는 농병대원들의 환호성. 함성.
아수라트가 시르케의 손을 잡고 덩실덩실 웃어댔다. 당황한 시르케가 사납게 눈을 흘겼다. 그러나 아수라트의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하르토크는 농병대원들에게 이끌려 얼결에 구호를 외치고 있었고, 바할은 숨을 헐떡이며 주저앉은 제피로스를 토닥이고 있었다.
그리고 품에서는 티봉이가 고개를 쏙 내밀고서 해맑은 눈길로 이쪽의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티보봉? 티봉?"
"...."
그럼에도 웃지를 못하겠다.
마냥 마음 편하게 웃기에는.
당장의 승리에 그저 기뻐하기에는.
잃은 것이 너무나 뼈아픈 까닭이었다.
'감자밭....'
김장철은 쓰라린 눈길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승리의 기쁨에 한껏 달아오른 농병대원들. 그들의 너머로 펼쳐진 감자밭이 눈에 들어왔다.
곳곳이 망가져 있었다.
움푹 파인 것은 예사였다. 아예 통째로 갈아엎어진 곳마저 보였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2성주와의 난리통에도 무사한 곳은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멀쩡한 것은 아니었다. 감자 줄기며 잎이 전부 누렇게 떠서 쓰러져 있었다.
"...."
문득, 얼마 전에 하르토크와 농병대원들이 호들갑을 떨었던 때가 떠올랐다. 감자 잎이 누렇게 변하고 있다고. 줄기가 쓰러질 거 같다고.
그때 나는 뭐랬더라.
'괜찮다고 했지. 원래 그런 거라고. 땅속 알감자가 영양을 먹어서 그러는 거라고.'
그런 줄 알았는데.
그렇듯 자연스러운 과정인 줄 알았는데.
한데 아니었다.
진실은 달랐다.
2성주, 그놈이 뿌리를 뻗어와서 기생충처럼 영양을 죄다 훔쳐먹고 있었던 거다.
"...."
그렇다면 땅속 알감자의 상태는 어떨까.
보기 싫어졌다.
보고 싶은데, 확인하기가 두려워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확인을 미룰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자신에게는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책임이 또 있었다.
"후우."
김장철은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새삼스럽게 떠올렸다.
자신이 이곳의 농병대장임을.
자신이 감자밭을 만든 사람임을.
'그 말은 곧, 감자밭의 성패도, 거기에 묶인 모두의 운명도 내 책임이라는 뜻이야.'
자신이 인간계 침공을 중단시켰다. 자신이 감자 농사를 시작했고, 모두를 따라오게 했다. 그렇다면 감자밭에서 흘린 모두의 땀방울과, 그에 따른 보상은 모두 자신의 책임이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책임을 져야 한다.
모두를 다독이고, 다시 일어날 수 있게 길을 제시해야 한다.
'...해보자.'
사실은 두려웠다.
감자밭이 저토록 망가진 상황에서, 그럼에도 모두가 자신을 따라줄지. 자신이 없었다. 이런 일, 이렇게 모두를 이끄는 짓 따위, 딱히 해본 적도 없었으니까.
"다들, 고생이 많았다."
모두를 향해 말했다.
그제야 잦아드는 함성과 환호성.
이쪽을 향해 모이는 시선들.
그리고 이내 멈칫하는 표정들.
"아...."
비로소 현실을 자각한 것일까. 도취된 승리의 기쁨 너머에 내내 존재하던, 파괴된 감자밭이라는 결과가 눈에 들어온 걸까.
아무래도 그런 듯했다.
사천왕의, 농병대원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입이 다물어졌다. 차마 숨기지 못한 깊은 당혹감과 상실감. 허망한 슬픔.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았다.
이쪽도 똑같으니까.
같은 심정이니까.
그래서였다.
"그리고 다들, 우리가 어떤 결과를 받아들게 되었는지 눈으로 보고 있겠지. 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
모두가 다음 말을 기다리는 게 보였다.
문득, 덜컥 불안해졌다.
감자 농사가 끝장이 난 것 같다고. 만신창이 승리 끝에 얻은 것이 하나도 없노라고.
그 사실을 어떻게 포장해서 말해주어야 할까. 어떻게 해야 모두가 느낄 실망과 상실감을 달래줄 수 있을까.
내가 비난을 듣는 건 괜찮은데.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데.
날 믿고.
날 따르며.
여기까지 온 모두를 어떻게 책임을 져야 할까. 그 생각이 들자 갑자기 가슴이 갑갑해졌다. 다음 말이 좀처럼 나오지가 않았다.
한데 그때였다.
"저기, 마왕님?"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하나 망설이고 있는데, 농병대원 중의 하나가 쭈뼛쭈뼛 손을 들었다. 아까 난리통에 이쪽이 구해줬던 플루트네 아빠 대원이었다.
그가 말했다.
"제가 감히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말입니다요. 그래도 말씀을 드려보자면... 괜찮습니다."
"...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일까.
플루트네 아빠의 말이 이어졌다.
"그러니까 말입니다요. 그게, 으음, 저희 일단 살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농사는 또 지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만약에 오늘 죽거나 크게 다쳤다면 다음 농사는 꿈도 못 꿨을 겁니다. 그러니 저희는 오늘을 무사히 넘긴 걸로도 만족합니다. 게다가 그게 전부 마왕님 덕분이고 말입니다."
"...."
"하면 감자, 언제 다시 심으면 될까요?"
"...."
김장철은 모두를 돌아보았다.
같은 눈빛. 같은 표정.
그렇게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위로하듯이. 괜찮다고 말해주듯이.
그런 덕분이었을까.
저도 모르게 코끝이 찡해졌다. 설마하니 저들에게 이런 식의 위로를 받을 줄은 몰랐기에. 뜻밖이라서. 가슴이 울려서.
하지만...
"쓰읍. 무슨 다 망한 것처럼 말을 하고 있어, 어!"
김장철은 눈가로 번지려는 찡함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짐짓 정색을 하고서 꼰대처럼 호통을 쳤다.
"아직 농사 안 끝났어. 망하지도 않았다. 원래 농사가 다 이런 거야. 땅 일구며 살다 보면 이런저런 일 다 있는 거라고."
사실이 그렇다.
태풍. 홍수. 가뭄. 물가의 변동.
그 밖의 갖가지 일들에 전부 영향을 받는 게 농사다. 그런 것들 때문에 1년 치 농사를 허망하게 망치는 일도 허다한 게 이 바닥이다.
"그러니까 우리 손 밖의 일 때문에 조금 힘들어졌다고 주저앉으면 안 돼. 그거까지 전부 100점까지 채우려고 들어서도 안 돼. 알겠어? 우리는 80점까지만 한다. 나머지 20점은 하늘이 채워주는 거야. 그럼 지금 우리가 채워야 하는 80점은 뭘까?"
사실은 지금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었다.
너무 애쓰지 말라고.
혼자 다 짊어지려고 들지도 말라고.
할 수 있는 만큼의 범위 안에서 힘내고, 그래도 힘이 들 때면 곁에 있는 이들과 함께 가라고.
짐짓 괜찮은 척.
자신만은 냉철한 척.
그렇게 모두를 향해 말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나마 안 망가진 밭의 감자를 캐는 거다. 알겠어?"
"...!"
"파보기 전에는 모르는 거야. 생각보다 땅속 감자들은 멀쩡할 수 있는 거야. 눈으로 확인도 안 했는데 뭘 벌써 실망들을 해? 그러니까 다들 어깨 펴고! 힘내고! 어! 알겠어?"
"바할! 마왕 눈 그렁그렁해지는 거 본 거 같다!"
"...닥쳐! 일해!"
빽 내지르며 닦달했다.
감자밭을 향해 달려가는 농병대원들.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뒤늦게야 눈가를 몰래 훔쳤다. 그러자니 다시 한숨이 나왔다.
'진짜.'
다시 감자 농사 시작하려면... 쟤들 어떡하지. 다들 또 쫄쫄 굶어야 할 텐데. 남은 비축용 추뇨도 얼마 안 남았는데. 다들 어떻게 먹여 살려야 하지.
모두의 앞에서 떠든 것과는 달리, 속은 여전히 암담했다. 걱정이 태산이었다. 어깨가 무거워졌다.
한데 그때였다.
"...어? 어어!"
감자밭을 캐기 시작한 농병대원들에게서 이상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마, 마왕님! 여기! 이것 좀 보십시오!"
"...."
다급한 외침.
무슨 일일까.
더 심각해질 일이 또 있는 걸까.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걸 느끼며 얼른 달려갔다. 그리고 보고야 말았다.
"대체 무슨 일인... 어?"
플루트네 아빠 대원이 가리키는 곳을 확인한 김장철은 저도 모르게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말았다.
그곳에 감자가 있었다.
수박보다 큰 슈퍼 알감자 덩어리가.
49화. 수확의 계절 (1)
감자는 큼지막하다.
큼지막한 감자는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
쪄 먹어도 좋고. 구워 먹어도 좋고. 튀겨 먹어도 좋고. 소금을 뿌려도 맛있고. 설탕을 찍어도 꿀맛이고. 온갖 요리법을 두근두근 상상하고, 기대하게 만든다.
그런데 감자의 크기가 상식을 초월하면?
그때부터는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그럴 때는 기대감이 아니라....
'미친 거 아냐?'
김장철은 기대에 앞서 경악부터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농병대원들이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를 듣고 달려온 현장. 도착하자마자 본 것이 수박보다 큰 감자인 까닭이었다.
'대체 어떻게?'
처음엔 눈을 의심했다.
다음엔 정신을 의심했다.
내가 요즘 스트레스가 심했나.
하긴. 그럴 법도 했지.
말 그대로 감자 농사에 목숨을 걸었으니까. 그런데 얼토당토않은 2성주가 나타나서 깽판을 부려댔으니까. 하마터면 죽을 뻔도 했으니까.
그러니까 이건....
"밭에서 제대로 키운 감자라는 게... 원래 이런 겁니까, 마왕님?"
"...."
혼란에 빠져 있던 와중에 귓가를 콕 찔러오는 플루트네 아빠 대원의 물음. 그 소리에 김장철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아빠 대원이 파낸 땅속 감자를 최대한 냉철한 시각으로 쳐다보았다.
"...."
암만 봐도 이건 감자가 아니다. 수박으로 쳐도 최소 8킬로그램, 아니, 9킬로그램 이상급이다.
그럼 혹시 돌연변이라거나 뭐, 그런 걸까.
"꺼내 보자."
확인을 좀 해봐야겠다.
이쪽의 말에 대원들이 부산해졌다. 감자가 워낙 크니까 파내는 데에도 시간이 제법 걸렸다. 그리고 초거대 슈퍼 울트라 감자의 완전한 위용(?)이 드러났다.
그런데 그때였다.
"어?"
땅을 파내던 플루트네 아빠 대원이 또 이상한 소리를 냈다. 그리고 이쪽을 돌아보며 조금은 멍해진 투로 말했다.
"...또 있는데요?"
"뭐?"
"그게, 또... 있습니다...?"
"설마?"
"그 설마가... 맞는 것 같지 말입니다?"
"...."
아빠 대원을 옆으로 밀쳤다. 그러자 보였다. 방금 캐낸 슈퍼 감자, 그 아래로 줄줄이 비엔나처럼 딸려 있는 또 다른 슈퍼 감자의 모습이!
"...."
똑같다.
앞서의 놈과 거의 같은 크기다.
아니, 얘는 좀 울퉁불퉁해서 살짝 더 커 보이기까지 하는데.
"쓰읍. 내가 요즘 몸이 허해졌나."
찰싹! 찰싸닥!
김장철은 저도 모르게 제 뺨을 챱챱 때렸다. 그럼에도 헛것(?)은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게 실화라고?'
어이가 없었다.
그건 농병대원들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저기, 마왕님...?"
"어."
"이거, 밭감자가 원래 이런 겁니까?"
"응 아니야."
"아니라구요?"
"어."
감자가 이런 거면 세상 모든 농업을 감자가 제패했겠지. 그러니까 이건....
"계속 파보자. 아니, 비켜. 내가 판다."
김장철은 직접 손을 움직였다.
퍼석! 퍼석!
흙을 파내는 손길.
드러나는 초거대 슈퍼 감자의 위용.
점점 급해져 가는 주위 농병대원들의 숨결.
퍼숙, 퍼석!
두 번째 감자가 완전히 캐내어졌다. 그런데 그 옆에 다른 감자가 또 보였다. 역시나 압도적으로 거대한. 그래서 공룡이 먹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
퍼석! 퍼서석!
계속 나왔다.
셋, 넷, 다섯, 여덟, 열여섯, 스물. 그러고도 끊임없이 칙칙폭폭 한없이 이어지는 기차놀이처럼. 끝도 모르고서.
'미친.'
이제 확실해졌다.
한두 개가 아닌 거다.
아니, 이 밭의 모든 감자가 이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근, 두근!
저도 모르게 가슴이 쿵쿵 뛰어댔다. 솟구치려는 흥분. 폭삭 망했다고 생각했던 절망의 끝에서 마주한, 뜻밖의 초대박 행진.
하지만 김장철은 기쁨에 날뛰려는 정신을 가까스로 다잡았다. 그리고 냉철한 분석을 위해 눈을 부릅떴다.
'흐읍!'
캐내어진 슈퍼 감자를 노려보았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서. 200초 동안. 안구에 툭툭 선 핏발이 2열 종대로 차차착 늘어설 때까지.
그러자 곧, 반응이 왔다.
딩동!
[혈안 스킬이 발동됩니다.]
[당신이 노려본 대상 : 슈퍼 감자]
[슈퍼 감자의 현재 상태와 앞으로의 변화를 예측합니다.]
[원래 이 감자는 평범하게 줄기에 맺힌 양분 덩어리였습니다. 또한, 5cm 가량의 사이즈를 지닌 지극히 평범한 감자였습니다. 그러나 최근 2성주 플라누스의 뿌리에 간섭을 받아 대량의 양분을 빼앗겨 방울토마토보다 작게 쪼그라드는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
그랬던 건가.
한데 어떻게 이렇게 커진 걸까. 김장철은 뒤이어 떠오르는 메시지 속 사연을 꼼꼼하게 읽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최근, 이 밭에서 양분을 훔쳐 가던 2성주 플라누스가 갑작스러운 죽음과 소멸을 맞이하였습니다. 그 최후의 순간까지도 2성주 플라누스는 이곳에 드리운 뿌리를 치우지 않고 있었으며, 그의 죽음 직후, 그가 드리우던 뿌리는 땅속에서 급속히 썩고 삭으며 그동안 흡수했던 양분을 역으로 감자밭에 토해냈습니다.]
...아하.
[덕분에 이 감자는 대량의 양분을 순식간에 흡수할 수 있었으며, 그만큼 덩치를 불려낼 수 있었습니다. 이 감자는 그 사실에 매우 자랑스러워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러한 마음은 변하지 않을 예정입니다.]
"...."
알겠다.
2성주, 그놈 덕분(?)이었던 거구나.
'이게 전화위복이라는 건가.'
단순한 돌연변이가 아니었다.
우연도 아니었다.
2성주가 가져온 파괴와 약탈. 그걸 극복하고 이겨낸 끝에 돌아온, 기적 같은 필연인 셈이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걱정할 필요가 없겠다. 모두가 맞이한 이 결과를 순수하게 기뻐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다들, 잘 들어라."
김장철은 몸을 일으켰다.
여러 감정이 섞인 시선이 모여들었다.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무는 농병대원들.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품은 아수라트. 침착하려고 애쓰는 기색이 역력한 하르토크.
반쯤 옆으로 돌아서 있지만 이쪽으로 귀를 쫑긋거리는 게 티가 나는 시르케. 슈퍼 감자를 보며 그저 침을 꼴깍꼴깍 넘겨대는 바할. 그리고 티봉이의 부축(?)을 받으면서도 이쪽의 선언에 귀를 기울이는 제피로스까지.
그런 모두를 향해 말했다.
"원래 감자를 캐면 이런 거냐고 물었지. 그에 대한 답을 주자면, 아니다."
"...!"
"원래 감자는 이런 것이 아니다. 다들 우리가 심었던 감자의 크기를 기억하겠지? 원래는 심은 대로 돌아오는 것이 농사의 이치다. 그런데... 이런 결과가 돌아왔다. 너무나 커다랗고, 그만큼 알찬 결과가 말이다."
"그럼... 주군?"
제피로스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혹시, 풍작인 겁니까?"
"그래."
하여 너무나 기쁜.
이토록이나 벅찬.
"우리의 감자 농사는... 풍작이다!"
"...!"
누구의 입에서 제일 먼저 환호성이 터져 나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벅차오르는 환희.
웃음과 함성.
월드컵 결승전에서 추가시간을 1분 남겨놓고 역전골을 넣으면 이 정도로 열기가 끓어오를까.
모르겠다.
어느샌가 모두가 서로의 틈바구니에 뒤섞여서 의미도 모를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으니까. 그저 옆에 있는 대원들과 서로를 얼싸안고, 환호성을 내지르고, 덩실덩실 제자리에서 뜀뛰었으니까.
김장철은 그런 모두를 한참이나 흡족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혼자만의 기쁨을 조용히 누렸다.
"...."
살았다.
해냈다.
처음엔 그저 막막하기만 했는데. 정말로 이럴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들지 않았는데. 그저 살아남기 위한 도박을 감행하는 심정 그 자체였는데.
한데 이렇게까지 흘러올 줄은 몰랐다.
이 정도의 결과를 이끌어낼 줄도 몰랐다.
'후우. 그러니까....'
이럴 때일수록 냉철해야 한다.
풀어지면 곤란해진다.
그러니 목소리를 가다듬고. 모두를 향해. 엄격하게. 딱 선을 긋듯이.
"다들 주목. 진정한 풍작은 수확과 보관을 위한 과정까지 마쳐야 완성되는 법이다. 거기서도 일은 끝나지 않아. 보관한 작물을 어떻게 분배해서 처리할지도 감안을 해야... 어억?"
모두의 흥분을 진정시키려던 시도는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누군가가 이쪽을 확 끌어당겼다. 놀라서 쳐다보니 바할이었다.
"바할! 기쁘다!"
"어? 어어? 너 뭐하냐?"
"바할! 마왕님 잡고 덩실덩실!"
"이거... 놔, 인마아어억!"
후우웅!
난데없는 자이언트 스윙!
아니, 얼싸안겨 빙글빙글 회전목마!
김장철은 버둥거렸다.
하지만 그의 수난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건 시작일 뿐이었다.
"주군. 이럴 때면 인간들은 헹가래라는 것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으으, 목에 담이... 응?"
"전전대 마왕이 인간계를 침공하던 시대에 남겨진, 인간들의 풍습기록서에 적혀 있던 내용입니다."
바할에게서 겨우 벗어나 목을 주무르려는데 제피로스가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녀석이 안경을 차갑게 번득. 냉정한 말투로 태연하게 술술.
"성공적인 일의 결과에 가장 큰 공훈을 지닌 리더를 허공에 던지는 풍습이라더군요. 딱 지금과 같은 순간에 필요한 아름답고 활기찬 풍습이랄까요."
"...뭐어?"
"딱 대십시오."
"어? 어어? 야? 야야! 어어!"
제피로스가 눈짓했다.
모두가 달려들었다.
팔다리가 잡혔다. 버둥거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순식간에 들어 올려졌다. 당혹스럽고 황당했다. 저도 모르게 어이없는 웃음이 나왔다.
'정말로 헹가래? 내가?'
헹가래라니.
살면서 처음이었다.
그런데 그 장소가 마족들이 득시글거리는 버려진 땅의 중심이라니. 내게 헹가래를 해주는 이들이 최정예 사천왕과 마족들이라니.
'...하.'
이런 것도, 나쁘진 않네.
문득,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함께 고생했던 순간들도 떠올랐다.
뭔가 울컥. 콧등이 아릿해지는 낯설고도 묘한 기분. 그렇기에 자꾸만 웃음이 번지고야 마는, 그런 말랑하고 요상한 느낌까지.
"하나! 둘! 던져!"
푸확-!
"...!"
혹시 당신은 헹가래로 상공 828미터 부르즈 할리파 최상층 높이까지 내던져진 적이 있나요. 먼 훗날 그런 질문을 받게 된다면, 이제는 '예스'라고 말할 자격(?)이 생긴 것 같다.
"하. 진짜."
계속해서 웃음이 나온다.
저도 모르게 무방비해져 버리는, 이런 높은 곳에서라면 저 녀석들이 못 볼 테니까 더욱 마음껏 풀어져 버려서 흘러나오게 되는, 그런 바보 같은 웃음이.
후우웅!
행복한 상승의 정점.
이어지는 짜릿한 하강.
김장철은 웃음을 거두질 못하며 아래쪽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보였다. 자신을 헹가래로 내던진 녀석들이 할 일 마쳤다는 듯이 뿔뿔이 흩어지고 있는 광경을.
"자, 헹가래는 여기까지입니다."
"바할! 떨어지는 마왕님 받고 싶다!"
"안 됩니다."
"왜 안 되냐, 제피로스! 이유를 모르겠다!"
"전전대 마왕이 남긴 인간 풍습서에는 '공적을 세운 이를 흥겹게 위로 던진다'라고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던진 이를 받는다는 내용은 따로 쓰여 있지가 않아요."
"그, 그런가!"
"그렇습니다. 즉, 헹가래는 '던지는' 행위까지만 하고 마쳐야 한다는 뜻이겠지요."
"바할! 이해했다!"
...그런 거 이해하지 마! 애초에 다 틀린 분석 따위, 믿지도 마! 흩어지지 마! 돌아와! 인마! 야! 잠깐만!
김장철은 빠르게 하강, 아니, 추락하며 버둥거렸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모두가 제피로스의 잘못된 분석을 굳게 믿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이쪽의 추락을 돕기(?) 위해 다섯 발짝씩이나 물러나 주었다.
덕분에 휑하니 빈 지면이 보였다.
이쪽의 추락을 야물딱지게 받아줄 지면이.
"...야아아아아! 이 새x들아아아아-!"
잠시 후, 김장철의 악다구니가 쿵, 소리에 묻혔다.
여름, 아니, 수확철이었다.
♣
활기찬 감자 수확이 시작되었다.
물론 김장철은 수확이 마무리될 때까지도 농병대의 지휘체계를 견고하게 유지했다.
"다들! 감자 수확할 때의 주의점을 명심하라!"
"예엡!"
하르토크가 외쳤다.
"하나! 캐내는 과정에서 감자 표면에 상처가 나지 않도록 주의한다. 둘! 캐낸 감자는 그늘에서 두어 시간을 말린 후에 어두운 곳에 보관한다! 이는 감자가 햇볕에 노출되어 녹색으로 변하며 솔라닌 등의 유독한 알칼로이드 배당체를 합성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오옷, 역시 농병대 수석조장님!"
모두가 하르토크의 유식함에 감탄했다.
마왕에게서 몰래 사전교육(?)을 받은 하르토크의 콧대가 높아지며 행복지수가 남몰래 상한가를 찍었다.
덕분에 감자 수확 작업은 호조 그 자체!
아수라트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시르케는 손에 더러운 흙이 묻는다며 질색을 하면서도 감자 캐내는 일손을 멈추지 않았다.
바할은 몰래 생감자를 씹어먹으려다가 딱 걸려서 감자밭 구석에 가서 손들고 벌을 섰다. 그 모습에 3성주가 고소하다는 웃음을 흘리며 감자 캐기에 열중했다.
하여 김장철이 물었다.
"어이? 이보세요? 랍스터 씨?"
"...."
"3성주님? 똑똑똑?"
"...."
"댁이 왜 여기서 감자를 캐고 계셔?"
"...."
"댁은 피뢰침 아니었나? 응?"
"...."
지난 2성주의 난리통에 자신을 묶던 말뚝이 파괴된 이후, 은근슬쩍 자연스럽게 농병대에 뒤섞여서 피뢰침 신세를 벗어나려던 3성주가 김장철에게 딱 걸렸다.
그걸 알아챈 아수라트가 바람처럼 달려왔다.
"감히! 허락도 없이! 신성한 피뢰침의 의무를 저버리다니! 마왕님! 이런 놈은 아주 크게 혼쭐을 내야 합니다!"
"...라고 우리 출퇴근직 피뢰침 1호가 말씀하시는데?"
"그렇습니다! 어딜 감히! 말뚝직 주제에 하늘 같은 출퇴근직과 나란히 감자를 캐려고! 어!"
"...라고 하시는데?"
"이건 명백한 근무지 이탈 행위입니다!"
"...라고 하시니 나도 어쩔 수가 없겠네?"
김장철이 빵긋 웃었다.
아수라트가 씨근대며 만족했다.
3성주의 얼굴에 짙은 암운이 드리워졌다.
그러는 사이에도 슈퍼 감자가 나날이 저장고를 채워갔다. 2성주의 난동 때문에 망가진 밭의 손실을 만회하고도 충분한 양이었다.
덕분에 모두의 얼굴에 석가모니보다 더 자애로운 미소가 연일 배어날 무렵, 먼 길을 달려온 4성주의 전령이 임시 마왕성에 도착했다.
김장철의 농사 선언을 들은 4성주가, 끓어오르는 충정과 책임감을 느끼며 홀로 인간계를 향한 침공의 깃발을 들어 올렸다는 소식과 함께였다.
50화. 수확의 계절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