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방법 (2)
...화아악!
우물에 빛이 깃들었다.
메마른 바닥에서 찰랑이는 물소리가 났다.
언제부터?
티봉이가 볼따구로 우물가에 착지를 한 순간부터.
"이게 무슨...."
김장철은 어이가 없어졌다.
혹시나 해서 우물이 작동하나 확인하려 했는데. 그 결과 실패했다고 생각했는데. 막 실망하고 좌절하려던 참이었는데.
절대 깨어나지 않을 것 같던 우물을, 티봉이가 일깨워 버렸다!
'이게 말이 돼?'
안 된다.
절대로 안 된다.
터무니없는 소리다.
게임을 하면서 우물이 드래곤에게 반응했다는 소리는 한 번도 못 들어봤다.
그런 설정?
보지도 못했다.
당연한 소리다. 드래곤은 플레이어가 아니니까. 시스템상 고급 몬스터일 뿐이니까.
하지만.
'...딱히 이유는 상관없나.'
지금은 우물이 깨어났다는 점이 훨씬 중요하다. 그러니까 확인을 더 해야 한다. 김장철은 당혹감을 누르며 티봉이를 내려다보았다.
"저기, 티봉아?"
"티봉?"
"우물에서 빛이 나니까 예쁘다, 그치?"
"티봉!"
"그럼 나랑 같이 우물 구경해볼래?"
"티보봉? 티봉?"
"우물 안쪽은 더 예쁠 것 같아서."
"티! 뽀봉!"
이제 막 나기 시작한 송곳니를 빼꼼 드러내며 활짝 웃는 티봉이.
녀석을 강아지 안듯이 안아 들었다. 우물에 다가갔다. 안쪽을 굽어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바싹 메말라 있던 우물 내부가 은빛 액체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손을 뻗었다.
게임에서처럼.
우물을 사용해서 맵 이동을 하던 때처럼.
찰방.
손끝을 적시는 은빛 액체.
그 순간이었다.
후욱!
"...!"
온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아니, 그런 듯한 착각이 일었다.
이내 우물이 있던 방이, 마왕성이, 버려진 땅 전체가, 발아래로 지도가 되어 펼쳐졌다.
너무나 익숙한 화면.
맵 이동 화면이었다.
'헉.'
진짜 됐다.
그런데 이거, 3D 효과 장난 없네.
김장철은 두근거림을 억누르며 버려진 땅의 전체 지도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버려진 땅에서 활성화가 된 우물이 아직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후우. 역시. 티봉이가 방금 깨운 마왕성의 우물만 빛이 나는 상태인 거구나.'
다른 우물은 모두 흑백으로 처리되어 있는 게 보였다.
아직 깨어나지 않은 탓이다.
그러니 지금 단계에선 사용할 수가 없다. 맵 이동으로 건너가는 거? 당연히 안 된다. 출구가 될 우물이 깨어나지 않은 상태니까.
'맵 이동을 써먹으려면 다른 우물도 깨워야 한다는 거로구만.'
딱 게임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럼 이만 맵 이동 창을 끄자.
...라고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후우욱!
이쪽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걸까.
맵 이동 화면이 너무나 순식간에 꺼졌다.
"...!"
온몸이 지상으로 내리꽂혔다.
발아래에 펼쳐졌던 지형이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자이언트 자이로드롭에 태워진 것처럼, 버려진 땅 전체가, 마왕성이, 우물이 있던 방이, 삽시간에, 눈앞으로 화악!
'끄기야아아앏!'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물론 몸이 땅에 처박히는 등의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빼꼼 뜬 실눈 사이로 들어오는 풍경은 우물이 밝혀진 작은 방의 평범한 모습일 뿐이었다.
대신 지독한 멀미와 현기증이 몰려왔다.
"...오애애액."
장난이 아니다.
진짜로 자이로드롭을 100번 연속으로 탄 것처럼 속이 뒤집혔다. 그렇듯 헛구역질을 게워내는 한편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이거, 진짜다.'
정말로 티봉이가 우물을 제대로 깨웠다.
비결?
여전히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버려진 땅의 나머지 우물들도 티봉이를 데려가면 깨울 수 있다는 것.
'그럼, 가야겠지?'
특히 지금 당장 급한 곳부터.
2성주의 본거지인 쇠락의 늪지 중심부로.
후딱 가서 그쪽의 우물을 일깨우고, 맵 이동을 써서 여기로 칼퇴근을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 보람찬(?) 계획이 착착 세워지던 중이었다.
"주군? 이건... 뭡니까?"
떠듬거리는 목소리가 고막을 콕 두드려 왔다.돌아보니 얼떨떨한 눈길로 우물을 살피는 제피로스가 보였다. 아무래도 녀석은 활성화가 된 우물을 처음 보는 것 같았다.
"겉으로는 은은해 보이지만, 엄청난 양의 마나가 꿈틀거리는 게 느껴집니다. 대체 이건 뭡니까, 주군?"
"나도 잘 몰라. 그런데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 같다."
"유용하게, 라시면?"
"쓰읍. 설명하긴 귀찮고. 티봉아?"
"티봉?"
"제피로스 삼촌한테 잠깐 안겨볼래?"
"티보봉?"
"잠깐이면 돼."
"티보옹...."
"왜? 저 삼촌 무서워?"
"티봉...."
"아. 역시 인상이 까칠해서 그런 거야?"
"티보봉...."
"괜찮아. 안 잡아먹어. 혹시나 우리 티봉이 괴롭히면 내가 저 삼촌 혼내줄게."
"티봉?"
"응, 약속."
"...당사자가 옆에서 듣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주군."
"어 몰라. 일단 얘 안아봐."
"...."
제피로스에게 티봉이를 안겼다.
그리고 말했다.
"이제 우물에 다가가서, 안에 차 있는 액체에 손을 담가."
"이렇게 말입니... 어억?"
후와악!
제피로스의 모습이 우물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우물로 맵 이동을 하는 당사자는 하늘 높이 떠오른다는 느낌을 받지만, 제3자가 볼 때는 저렇게 우물 속으로 들어가는 거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후.
제피로스와 티봉이가 우물 밖으로 나왔다.
후욱!
"어때?"
"...."
"헛구역질 올라오지?"
"...."
"괜찮아. 해도 돼. 오애애액, 하고."
"...흠흠, 괜찮습니다."
"어? 헛구역질 안 해?"
"안 합니다."
"그걸 참았어?"
"딱히 참고 말고 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만."
"쓰읍. 아깝다."
"...뭐가 말입니까?"
"아니다, 쯧."
"그나저나, 설마 이 우물, 버려진 땅의 다른 지역으로 통하는 일종의 포털인 겁니까?"
"딩동댕. 핵심을 바로 눈치챘네."
"다만 아직 출구가 될 반대편이 열리지 않아서 이용을 못 하는 것이겠고 말입니다."
"역시나 딩동댕. 참 똑똑하단 말이야. 그러니까 가자."
"...예?"
"안 따라올 거야? 계속 여기 있을래?"
"...."
어딜 가자는 걸까.
제피로스는 일단 자신이 모시는 주군을 따라나섰다.
김장철이 거침없이 걸었다.
우물방을 나섰다.
마왕성에서 나왔다.
감자밭을 지나쳤다.
그러는 와중에 김장철은 보았다.
감자밭 곳곳에 죽치고 앉아 있는 농병대원들의 모습이었다.
"...."
저놈들, 뭐 하는 걸까.
혹시 이상한 짓이라도?
잠깐 의심이 들었다.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러자 청각이 확장되었다.
덕분에 들려온 농병대원들의 첫소리는, 짙은 한숨이었다.
"후우우...."
"왜 또 한숨이야."
"형님, 한숨이 안 나오게 생겼습니까."
"아 그러니까 왜."
"싹이 안 올라오지 않습니까."
"좀 기다려 봐. 올라올 거야."
"씨감자를 심으면 싹이 흙 위로 자라나서 올라올 거라고 했는데...."
"며칠 걸린다고 했어, 인마."
"그래도 좀 빨리 올라올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쓰읍. 내 생각도 그렇긴 한데."
"그러니까 걱정인 겁니다. 이대로 싹이 하나도 안 올라오면 어떡하죠?"
"어떡하긴. 마왕께서 알아서 해주시겠지."
"...그래서 더 무섭습니다."
"뭐가 무서운 건데."
"인간계 침공은 중단했고. 대신 감자를 키우기로 했고. 그래서 이것만 바라보게 됐잖습니까."
"그렇지...."
"그러니까 생각을 해 보십시오. 침공이고 뭐고 다 포기하고 여기에만 매달리게 된 건데, 이게 실패하면 말입니다. 우리는 그렇다 치고, 우리만 바라보는 애들은 뭘 먹고 살아야 하는 겁니까?"
"후우."
"그래서 그런지 사실 요즘 잠이 안 옵니다."
"...네 마음 안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그래."
"그렇죠?"
"응. 우린 이제 이것밖에 없는 거야. 그러니까...."
"감자 농사, 망하면 안 됩니다. 진짜로요."
"동감이다...."
"...."
김장철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한숨.
초조한 두런거림.
모두가 비슷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우린 이제 이것밖에 없다고. 감자 농사가 마지막 희망이라고. 그런데 왜 싹이 안 올라오는 거냐고. 뭐가 잘못된 건 아니냐고.
문득, 숙연해졌다.
'너희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구나.'
아니, 어쩌면 더욱 무거운 마음일 터다. 이쪽보다 훨씬 절박한 마음일 수도 있다.
부모니까.
가장이니까.
책임져야 할 이들을 짊어진 어깨니까.
"...."
그 마음, 잊지도, 저버리지도 않겠다.
새삼스러운 다짐을 가슴에 새기며 계속 걸었다.
감자밭을 벗어났다.
동남쪽으로 향했다.
이윽고 마왕성 영역의 끄트머리가 다가왔다.
망자의 단애 초입, 깎아지른 수직의 절벽 꼭대기였다.
"후우, 여기가 내려가기 딱 좋겠네."
"...네?"
이쪽을 따라온 제피로스가 미간을 찡그리는 게 보였다.
녀석이 물어왔다.
"여기서, 내려간다니요?"
"2성주네 본거지로. 3성 군단한테 포위돼서 위험하다잖아. 도와줘야지."
"지금, 바로 말입니까?"
"어. 지금 바로. 그럼 미룰 이유가 있어?"
없다.
우물 포털을 써먹을 방법을 찾았으니까.
제피로스는 당혹감을 억누르며 대답했다.
"으음, 미룰 이유가 없다는 건 알겠습니다. 그럼, 마왕성의 병력은...."
"안 데려갈 건데?"
"네?"
"걔들을 왜 데려가. 감자밭 지켜야지, 걔들은."
"그럼, 주군 혼자 내려가시려고요?"
"응? 아닌데. 너도 데려갈 건데?"
"...저를요?"
"응."
"...왜요?"
"객관적인 목격자나 증인이 필요하잖아. 내가 3성주를 박살 내고 2성주를 돕는 모습을 똑똑히 보고, 돌아와서는 사천왕이랑 농병대원들한테 널리 알려야지, 네가. 그래야 내 권위가 살아날 거라며."
"...."
맞다.
맞는 말이긴 한데.
"그래도 저와 주군 둘만 내려가는 건 너무 위험합니다."
"아닌데. 셋인데. 티봉이까지."
"...."
제피로스는 할 말을 잃었다.
그러다 황급히 덧붙였다.
"으음, 하지만 주군? 이대로 곧장 단애 아래로 내려가시겠다는 건 알겠는데, 소수정예를 추구하신다는 것도 알겠는데, 그래도 이렇게 자리를 비우시면 그동안 감자 농사는 어떻게...."
"어 괜찮아. 아무리 늦어도 대략 내일 이 시간이면 2성주네 일 다 끝내고 마왕성에 돌아와서 배 긁고 있을 계획이야."
"...네?"
그게, 가능한 겁니까?
진심으로 묻고 싶었다.
자신의 상식으로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주군? 아직 우물을 통한 이동은 불가능한 상황이니 걸어서 아래로 내려가셔야 합니다. 그렇게 내려간다고 가정했을 때, 2성주의 본거지인 쇠락의 늪지까지 도달하려면 아무리 빨라도 사흘은 걸립니다. 그것도, 단애 내부의 가장 짧은 지름길만 이용했을 경우를 가정해도 말입니다."
"어, 그건 무난한 길로 내려갈 때 얘기고."
"...더 빠른 길이 있다는 겁니까?"
"응."
"어디에 말입니까?"
"여기에."
"여긴 길이 없는 낭떠러지 끝입니다만."
"그러니까 여기가 제일 빠르다니까?"
"어떻게 말입니까?"
"어떻게긴 뭘 어떻게야. 이렇게지."
뻔뻔하게 대꾸하시는 주군.
그 속내가 짐작이 되지 않았다.
그때, 주군이 손을 들어 올렸다.
손길이 가리키는 위쪽 공간이 열렸다.
농기구가 가득 꽂혀 있는 거대한 의자가 떨어져 내려와 절벽 끄트머리에 꽂혔다.
쿠쾅!
"...."
대체 뭘 하려는 걸까, 주군은.
제피로스가 얼떨떨해하는 순간이었다.
김장철이 움직였다.
오면서 챙긴 천 뭉치를 꺼냈다.
의자에 쿠션처럼 빵빵하게 깔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서 제피로스를 덥석.
"엇?"
잡고 의자 쿠션에 앉혔다.
"주군? 지금 무슨...."
"꽉 잡아라, 안 떨어지게!"
제피로스를 앉힌 의자를 통째로 들었다. 낭떠러지를 향해 몸을 돌렸다. 녀석이 무어라 항변하기도 전에 던졌다. 빠꾸 없이 아득한 낭떠러지로.
투확!
"...!"
의자에 실린 채 순식간에 던져지는 제피로스의 모습.
이쪽을 바라보는 녀석의 얼굴.
눈빛으로 욕을 하는 걸까.
뭐, 상관없다.
어차피 밑에 도착하면 금방 또 볼 거니까.
원망은 그때 듣지, 뭐.
콰앙!
때마침 의자보다 한 타이밍 늦게 떨어져 내려온 맷돌.
맷돌 위에도 쿠션(?)을 깔았다.
그리고 맷돌을 잡고 뛰었다.
낭떠러지 바깥으로.
...파아악!
맷돌에 올라탔다.
수직으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앞서 의자에 실려 떨어지고 있는 제피로스 녀석을 향해 외쳐 주었다.
"안심해! 이렇게 가면 3일이 아니라 3분 안에 도착할 거거든!"
"...!"
제피로스는 진심으로 따져 묻고 싶었다.
안심?
안시이임?
31화. 고인물의 스피드런 (1)
어이가 없다.
이럴 때는 황당하다는 말을 써야 할까.
혹은, 절망감에 눈앞이 캄캄해진다는 말을 해야 할까.
그도 아니라면, 그냥 생각이라는 걸 하지 말아 버려야 할까.
모르겠다.
정말로, 모르겠다.
"...."
콰아아아아!
제피로스는 힘겹게 실눈을 떴다.
아래쪽에서 미친 듯이 불어오는 바람. 온몸을 뒤흔드는 폭풍에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하여그저 자신을 싣고 있는, 농기구로 가득한 의자를 간신히 붙들고서 매달릴 뿐.
"...이거! 괜찮은 겁니까!"
소리쳐 물었다.
한데 그 외침마저도 바람소리에 묻힌 걸까.
바로 위쪽, 맷돌에 몸을 싣고서 함께 낙하 중인 주군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
돌아 버리겠다.
제피로스는 순간 느껴지는 울컥함을 간신히 억누르며 주위를 살폈다.
아래에서 위로 재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의 연속.
깎아지른 절벽이 고속으로 스쳐갔다.
위쪽을 향해 멀어졌다.
그만큼 몸은 더 아래로 떨어졌다.
그게 벌써 1분째다.
'괜찮은 걸까.'
진지하게 걱정이 된다.
함께 절벽 아래로의 투신을 감행 중인 주군의 표정이 태연자약하기에, 그 불안감이 더욱 커져 버린다.
'이해가 되지 않아.'
아무리 좋게 생각해 보려 해도, 주군의 지금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너무나 무모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다 무모하게만 보였다.
'이렇게 뛰어내리면... 빨리 도착할 수는 있겠지. 2성주의 영역인 쇠락의 늪지는 단애 바로 아래에 있으니까. 마왕성과는 수직적인 거리가 멀 뿐, 수평적인 거리는 오히려 아주 가까운 편이니까. 하지만... 이런 식으로 내려가서 과연 무사할 수 있을까?'
진지한 의구심이 들었다.
이렇듯 전격적인 다이빙?
물론 빨리 도착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 결과 시체가 되더라도 일단 도착한 걸로 칠 수는 있을 테니까.
'아무리 아래가 늪지라고 해도... 대부분은 무릎 깊이도 안 되는 얕은 곳일 뿐인데.'
심지어 쇠락의 늪지는 대부분이 유독한 지대다. 개중에는 잘못 빠지면 즉시 온몸이 녹아내리는 곳마저 있을 정도다.
그런데 이렇듯 아무런 대책도 없이, 까마득한 높이에서 뛰어내리다니.
"...."
생각이라는 게 있는 걸까.
아니, 설령 운 좋게 다치지 않고서 내려간다고 해도....
'그 뒤엔 어쩌려는 거지?'
2성 군단의 전령이 알려준 소식이 떠올랐다.
이미 3성 군단이 늪지의 대부분을 장악했다고 했다. 2성주와 2성 군단의 패잔병들은 본거지인 가시나무 성채에 틀어박혀 간신히 버티고 있다고도 했다.
그럼 지금 아래쪽, 늪지는 3성 군단병들로 가득할 텐데.
'거길... 혼자서 어떻게?'
주군이 아무리 강해도.
제아무리 마왕이라 해도.
과연 무사할 수 있을까.
"야! 무슨 생각을 그렇게 많이 하냐!"
"...."
나란히 추락하며 말을 걸어대는 주군. 1분쯤 뒤면 목숨이 끝장날지도 모를 상황인데. 어쩐 일인지 아무런 걱정도 없는 무사태평한 기색이었다.
"겁나냐!"
"네."
당신의 무모함이 겁납니다.
하지만 뒷말은 꺼낼 수 없었다.
"괜찮아! 안 죽어!"
"...."
"의자만 꽉 잡으면 돼!"
"...."
"가장 깊은 곳으로 떨어질 거거든!"
"...."
깊은 곳?
설마 늪지에서?
잠깐 의아해졌다.
답은 곧 드러났다.
"다 왔다! 의자 잡고! 웅크려!"
"...!"
주군의 외침에 아래를 쳐다보았다.
아래쪽에 뭔가 시커먼 것이 보였다.
심지어 점점, 아니, 급속도로 커졌다.
처음에는 뭔가 싶었다.
그러다가 깨달을 수 있었다.
"...!"
물이다.
그것도 시커멓게 보일 정도로 깊은 물.
깨달음과 동시에, 엄청난 충격이 전신을 때려왔다.
콰아앙-!
...이거, 물에 빠지는 소리가 맞는 걸까.
아무래도 뭔가 잘못된 거 같은데.
제피로스는 아득해지는 감각 속에서도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덕분에 볼 수 있었다. 사방에 퍼지는 의자의 잔해. 그리고 소용돌이치는 주변의 물결. 그 속에 휩쓸려 힘없이 흐느적거리는 자신의 손.
이쪽을 향해 물살을 헤치며 손을 뻗어오는 주군의 모습까지.
푸확!
"...!"
수면 위로 얼굴이 내밀어졌다.
신선한 공기가 목구멍을 치고 들어왔다.
"쿠, 쿨럭! 컥!"
"역시 안 죽었네? 다행이다, 야."
"쿨룩, 콜록!"
주군의 손에 이끌려 물가로 나올 수 있었다. 온몸에 힘이 없었다. 그런데 주군은 뭐가 그리도 만족스러운 걸까.
"전에도 여기서 몇 번 뛰어봤거든. 역시 계산이 딱 맞네."
"...."
전에도... 몇 번?
"말했잖냐. 이 웅덩이가 쇠락의 늪지에서 수심이 제일 깊은 장소라고. 덕분에 유독 성분도 그나마 덜한 편이고."
"...."
뭘까, 주군은.
내가 아는 주군은, 마왕 크레도스는, 항상 단애 안쪽의 길을 통해 사흘을 걸려 늪지에 도착했는데. 이런 과격, 아니, 미친 방식을 저지르는 모습, 한 번도 못 봤는데.
하지만 그런 의문을 표할 틈은 없었다.
격한 기침이 간신히 가라앉을 무렵, 주군이 몸을 일으키며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이제부터 달릴 거야. 낙오되지 않게, 잘 보고 그대로 따라와라."
"...네?"
"스피드런이다."
"그게 무슨...."
얼떨떨하게 되물으려던 순간이었다.
파아앗!
주군이 뛰기 시작했다.
웅덩이에서 이어지는 얕은 수로를 따라, 내달렸다.
제피로스도 엉겁결에 뒤를 따라 뛰었다.
덕분에 그때부터 볼 수 있었다.
주군이 달려가는 경로.
그 앞에 놓인 모든 위험 요소가 어이가 없을 정도로 차례차례 돌파되는 모습을.
'저게... 무슨....'
달린다.
내달린다.
얕은 수로를 지나.
썩은 나뭇등걸을 박찼다.
"카학!"
나뭇등걸 그늘에 몸을 숨기고 있던 독개구리가 입을 벌렸다. 주군을 삼키려 들었다. 그러나 실패했다. 어느새 주군의 손에 들린 것은 나뭇등걸에서 비틀어 뽑아낸 나뭇가지. 찍었다. 아래로. 가지의 뾰족한 부위로.
콰작!
독개구리의 소리 없는 비명.
튀어 오르는 선혈을 뒤로하고 몸을 날리는 주군.
맹독성 늪에 착지했다.
그러나 몸은 젖지 않았다.
자그마한 바위에 정확히 내려앉은 덕분이었다.
바위를 박찼다.
거침없는 걸음.
주군의 발이 내려서는 곳마다 전에는 보이지 않던, 탁한 수면에 가려져 있던 바위가 착착 밟혔다. 마치 징검다리처럼. 흡사 미리 준비되기라도 한 것처럼. 혹은, 말도 안 되지만 주군이 이곳의 사소한 돌멩이 하나까지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파앗!
김장철은 다시금 도약했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재빠르게 계산했다.
'오케이. 여섯 번째 징검다리에서 뛰었으니까... 여기!'
선명하게 살아나는 기억.
19회차나 진행했던 게임.
그때마다 강박적으로, 가장 구석진 곳까지 모든 맵을 밝히느라 탐사했던 자신. 심지어 그런 짓을 회차마다 10번씩 꼭꼭 채웠던 과거의 자신!
그래서 이곳을 무려 190번이나 탈탈 털어댄 미친놈이었던 자신!
'...을 매우 칭찬해!'
스륵!
도약한 김장철은 옆으로 발을 뻗었다.
집에서 냉장고 문을 닫을 때 손을 쓰기 귀찮아서 발로 스윽 미는 것 같은, 매우매우 성의 없는 동작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효율적이었다.
1퍼센트의 낭비도 없는 고인물의 발짓!
그 발짓에 투둑, 하고 끊어지는 허공의 거미줄!
"...케에엑?"
늪지 징검다리 위에 함정을 파고서 기다리던 맹독성 거미가 당황했다. 여덟 갈래의 다리를 허우적거렸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첨벙!
2미터 크기의 거미가 늪지에 떨어졌다.
그것 자체만으로 훌륭한 발판이 되어 주었다.
콰작!
거미 머리를 밟았다.
도약했다.
충격으로 기절한 거미가 축 늘어졌다.
그 사이에 부유성 수초 뭉치에 내려선 김장철이 다시 달렸다.
"이쪽으로!"
"...!"
그의 뒤를 따르는 제피로스는 숨이 턱에 닿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걸음을 늦출 수가 없었다. 늦추면 주군과 멀어질 테고, 그만큼 주군의 행동을 따라 하며 안전하게 달리기가 어려워질 테니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혼란스러웠다.
예전의 일이 떠올랐다.
주군이 마왕의 권좌를 차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던가. 주군을 모시고 이곳 늪지로 내려온 적이 있었다.
그때의 주군은, 이렇지 않았다.
2성주의 안내를 받으며 안전한 곳으로만 다녔더랬다.
적어도, 최소한, 지금처럼, 자기 앞마당에서 벌거벗고 내달리는 미친놈(?)처럼 굴지는 않았다.
그 사이에도 김장철의 질주는 계속되었다.
"훕! 후훕! 홉!"
뛰고, 구르고, 내딛고, 돌아섰다.
맹독 지대를 넘었다.
매복한 몬스터를 역이용했다.
이중 삼중의 악랄한 함정을 비웃었다.
몸을 비틀고, 확 멈추었다가, 달리고, 돌파했다.
어느새 맹독 지대가 끝났다.
그나마 독성이 덜한 늪지가 펼쳐졌다.
거기부터 3성 군단병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치, 침입자다!"
"막아라!"
"자, 잠깐만? 침입자가...."
"크레...도스?"
2성주의 본거지인 성채를 포위하고 있던 3성 군단병들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외곽의 놈들이 가장 처음으로 김장철을 맞이(?)했다. 처음에는 무슨 침입자인가 싶다가, 이내 그의 정체를 깨달았다.
덕분에 경악했다.
그리고 돌파당했다.
"비켜! 제피로스? 여기부턴 나랑 바짝 붙어서 따라오고!"
"...!"
뿌칵!
김장철의 단호한 손짓!
3성 군단병과 만나게 된 장소는 게임을 하던 때와 달라지긴 했다. 원래는 화산지대인 3성주의 구역에서나 출몰하던 놈들이니까.
그럼에도 김장철에겐 아무 상관이 없었다. 이미 수천 번은 넘게 족쳐본 놈들인 덕분이었다.
이놈들의 패턴?
너무나 익숙했다.
아니, 익숙하다 못해 친근했다.
덕분에 학식으로 나오던 돈까스 써는 것보다 훨씬 수월하게 놈들을 돌파할 수 있었다.
콰각! 칵! 콰칵!
용암지대에서 단련된 3성 군단병의 갑각도 소용없었다. 어떤 적이라도 찢어발길 그들의 우람한 집게발도 무용지물이었다.
피하고, 후려쳤다.
흘려내고, 걷어찼다.
찍어누르고, 도약했다.
최소한의 동작으로 쭉쭉 나아갔다.
여전히 별것 아니라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무감정하다 못해 무감각한 눈빛으로, 능숙하다 못해 성의마저 없게 느껴지는 몸짓으로.
그럼에도 너무나 빠르고, 거침이 없었다.
어떤 군단병도 김장철을 0.5초 이상 잡아두지 못했다. 모두가 돌파당했다. 3성 군단의 포위망이 외곽에서부터 갈라졌다. 중심을 향하여. 거침없이. 멈춤도 없이. 직선으로. 곧게 그려진 돌파의 끄트머리.
그곳에 3성주가 있었다.
"후욱! 후욱! 네가 3성주지? 화면으로 보던 것보다 실물이 더 낫네. 아무튼, 후욱, 이렇게 만나니까 반갑다?"
"...."
3성주, 라스터는 할 말을 잃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크레도스가 왜 여기서 나와?'
여기서 마왕과 마주하게 되다니.
그의 입장에선 너무나 뜬금없었다.
꿈에조차 상상도 못했던 상황이었다.
아니, 상상을 하는 게 비상식적인 상황이었다.
3성주는 당혹감을 추스르며 물었다.
"설마 혼자 온 것이오?"
"응. 어쩌다 보니까 상황이 이렇게 됐네."
"내 군단을... 단독으로 돌파했다고?"
"어. 내가 좀 바쁘거든."
"죽으러 온 거요?"
"내가 자살할 관상으로 보여?"
"관상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미친 것처럼은 보이는데 말이오."
"미친 건 너지, 이 미친놈아. 내가 다같이 잘 살자고 농사 좀 지어 보겠다는데, 협조까지 바라진 않아도 이런 식으로 깽판, 아니, 내전을 일으켜? 응?"
"내전이라. 나는 겁을 먹은 그대가 포기한 인간계 침공의 대업을 이어갈 생각일 뿐이오만."
"대업은 개뿔."
"...."
"뭐, 여기서 네가 쉽게 설득될 것 같지도 않고. 내가 시간이 많은 것도 아니고. 바쁘니까 후딱 끝내자. 덤벼."
"자신, 있겠소?"
3성주가 김장철을 향해 자세를 잡고 섰다.
그의 전신을 기사의 갑옷처럼 감싼 갑각이 서늘한 빛을 머금었다. 철퇴와 가위를 하나로 합친 듯한 집게손 한 쌍이 살벌하게 벌어졌다.
김장철의 입가에 비웃음이 배어났다.
"랍스터 한 마리 잡는데 자신감까지야."
그의 비웃음이 짙어졌다.
"너 같은 놈 잡는 데는 손도 필요 없어. 발만 써준다."
"발로만? 날 모욕할 셈이오? 아무리 마왕이라 해도 자신감이 지나치시군."
"말 뿐인 자신감인지는 직접 확인해 보시든가."
"...."
3성주, 라스터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내심 확신했다.
마왕 크레도스가 미친 게 확실하다고.
'자존심은 다소 상하지만, 오늘 승리의 마신이 나를 향해 웃어 주시는구나.'
마왕 크레도스는 현재 단독으로 군단을 돌파하느라 많이 지친 상태. 그런데 손을 쓰지 않고, 발만 쓰며 자신과 승부를 가리겠다니.
망발도 저런 망발이 없다.
실로 자만심의 극치라 할 만하다.
"...좋소. 그 조건, 받아들이리다."
그리하여 이 승부, 오만한 그대의 목을 전리품으로 챙기리다.
철걱!
3성주가 투지를 불태우며 자세를 잡았다.
그 순간, 김장철이 지면을 박찼다.
파앗!
"...!"
3성주의 눈이 빛났다.
자신을 향해 돌진해 오는 마왕.
크레도스의 두 발을 주시했다.
'어떤 식으로 들어올 텐가, 크레도스여!'
손은 쓰지 않는다 하였다.
오직 발만 쓴다 하였다.
그러니 아래만 주시하면 첫 공격을 쉽게 간파할 수 있을 터!
...라고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앞발 펀치!"
뿌칵!
찰진 타격음과 함께, 김장철의 주먹이 3성주의 죽빵을 돌려 버렸다.
32화. 고인물의 스피드런 (2)
"앞발 펀치!"
뿌칵!
"...!"
이상하다.
이 세상은 좀 이상한 것 같다.
그러니까 뭐가 이상하냐고?
3성주는 저도 모르게 어금니를 까득 깨물었다.
'어째서... 손이 앞발이 되는 거지?'
혼란스러웠다.
솔직히 처음엔 자신이 무슨 짓을 당한 건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마왕의 다리만 집중해서 노려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크레도스가 약속했으니까.
손을 쓰지 않겠다고.
오직 발만 쓰겠다고.
마왕의 명예를 걸고서 스스로 약조했으니까.
그래서 발만 대비했던 건데....
'앞발... 펀치?'
언제부터 마왕의 손이 앞발로 불리게 된 걸까.
아니.
앞발이 맞긴 한가.
그건 보통 동물들한테나 붙이는 이름 아닌가.
그것보다는 크레도스 이놈, 양심이라는 거, 살아는 있는 건가.
"...크어어억!"
흐릿한 상념 속에서 불현듯 피어난 분노와 위기감.
3성주는 흐려져 가던 눈을 부릅떴다.
이럴 때가 아니다.
이렇게 당할 수는 없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황급히 균형을 잡았다.
쿠웅! 쿵! 쿵!
위태로운 뒷걸음질.
간신히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어질어질한 감각은 사라지지 않았다.
방금 입은 불의의 타격이 생각보다 컸던 까닭이었다.
"...크레도스! 이게, 무슨!"
항변하려 했다.
이건 잘못됐다고.
그쪽이 먼저 서약한 것이 아니었느냐고.
진심으로 마왕의 명예를 향해 따져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다시금 마왕의 주먹이 날아왔기 때문이었다.
"또 앞발 펀치!"
슈화악-!
"...!"
크레도스 이놈, 진심이다.
조금 전의 주먹질이 우연이나 실수가 아니었던 거다.
지금 세차게 날아오는 주먹이 내는 파공성. 저 일격에 가득 담긴 살기가 그걸 말해 준다. 이건, 진심과 고의, 혹은 악의로 잔뜩 채워진 공격이라고.
"크읏!"
3성주는 집게발을 들었다.
쇄도해 오는 마왕의 주먹을 막으려 했다.
한데 그때였다.
"...인 척하면서 뒷발 차기!"
화악!
날아오던 마왕의 주먹이 쏙 사라졌다.
대신 아래쪽에서 발차기가 훅 올라왔다.
이쪽의 벌어진 사타구니.
그 정중앙을 향하여.
'아, 안....'
거긴 잘못 맞으면 알집(?)이 깨져 버려.
...라는 찰나의 애원도 소용이 없었다.
뿌컥!
"...!"
아아. 어머니.
어째서 사타구니 사이를 맞았는데 귀에서 삐- 소리가 들리는 걸까요.
우리네 무상한 인생은 어디에서 흘러와 어디로 흘러가는가. 이 고통뿐인 삶의 원인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나의 고통. 그래. 고통은 나의 것. 나의 것들로부터 비롯되는 것. 나의 것들을 하나씩 덜어내면 고통 또한 사라짐인가.
그것이 비움인가.
이제 영영 채울 수 없게 된 내 알집처럼.
모든 것을 놓아줌으로써 번뇌를 잊을 수 있겠지.
그렇겠지.
그러하겠지.
그러니까....
"...흐그흐으읍.!"
잠깐 해탈(?)을 할 뻔했던 3성주는 의식을 일깨우는 끔찍한 고통을 느끼며 엉덩이를 뒤로 뺐다. 무릎을 펼 수가 없었다. 온몸의 갑각에 돋을 리 없는 소름이 와락 돋아났다. 눈물도 찔끔 났다.
억울했다.
이건 좀 아닌 것 같았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크레-! 도스으-!"
여전히 가시지 않는 알집의 고통.
그 속에서 3성주가 버럭 포효했다.
연달아 당한 변칙 공격에 다시는 당하지 않으리라는 다짐과 함께, 완연한 전투태세를 불태웠다.
하지만 그의 태세 정비는 다소 늦은 것이었다.
김장철은 이미 진즉부터 완벽한 전투태세였으니까. 아까 3성주와 대면한 그 순간부터 모든 감각을 전투에 불태우고 있었으니까.
"...훕!"
김장철의 두 눈이 빛났다.
그가 도약했다.
포효하는 3성주의 왼쪽 측면을 파고들었다.
그런 그의 머릿속에는 게임을 통해 열아홉 번에 걸쳐 잡아냈던 3성주의 모든 특성과 패턴이 착착 떠오르고 있었다.
'이놈은 정면 대결로 가면 절대로 안 돼.'
문득, 1회차의 팔라딘 오브 블러드를 플레이하던 때가 기억났다. 당시 3성주와 처음 보스전을 치렀을 때는 얼마나 당황했던지.
'아무리 때려도 소용이 없었지.'
대미지가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모든 공격이 갑각에 튕겨 나왔다.
심지어 놈의 집게발은 어떠하였던가.
전방의 거의 모든 범위를 180도 휩쓰는 연속 공격을 펼쳐댔다. 육중한 갑각에 비해 연계 공격의 속도는 토가 나올 정도로 빨랐다.
그래서 죽고 또 죽고.
도전하고 또 도전하고.
마침내 공략법의 실마리를 찾아냈던 것이 189번째의 도전에서였다.
'그때 나는....'
비로소 이놈의 약점을 알아냈던 것 같다.
그건 바로.
우뚝!
"미안하다!"
3성주의 측면으로 파고들던 김장철은 돌연, 걸음을 멈추었다. 아예 그 자리에 우뚝 섰다. 그리고 외쳤다.
미안하다고.
"...뭣?"
이쪽의 돌진에 대비하며 움직이던 3성주가 멈칫했다. 놈의 안면 가득 떠오른 황당한 표정. 눈빛. 그래. 당황스럽겠지. 뜬금없겠지.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사과를 받으니까 말이야.
"미안...하다고?"
"그래."
김장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미안한 표정을 얼굴 가득 장전했다.
"내가 잠깐 승부에 눈이 멀었던 것 같다. 그래서 해선 안 되는 비겁한 짓을 너한테 벌였구나. 진심으로 미안하다."
"...."
"이런 나의 사과를 기사답게 받아 줄 수 있겠나."
"...."
"마왕의 이름을 걸고, 고개 숙여 사과하마."
"후우...."
3성주의 전투태세를 가득 담고 있던 집게발이 스르르 내려갔다. 이쪽을 노려보던 3성주의 굳은 표정이 살짝 풀어졌다.
"좋다. 나 라스터는 그대 마왕 크레도스의 진정성 있는 사과를 받아들이며 앞으로의 승부를 기사답게...."
"치르긴 뭘 치러! 사과 펀치!"
뿌컥!
"...!"
3성주의 죽빵이 또 홱 돌아갔다.
타격에 덜컥 흔들리는 놈의 눈빛.
원망스러운 눈길로 이쪽을 노려보는 눈동자.
그걸 보며 김장철은 쓴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미안한데 어쩌겠냐. 이게 너 잡는 공략법인데.'
실제로 그러했다.
게임 속 3성주 라스터 경은 정면에서 정직하게 대결하면 탱크, 그 자체였다. 빈틈을 찾을 수 없는 갑각의 방어력. 한 대만 맞아도 억 소리가 나오는 공격력. 심지어 속도마저 느린 편이 아닌, 움직이는 지상 요새와도 같았다.
하지만 약점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그건 바로 이놈의 성격.'
정직했다.
순수한 무인 그 자체였다.
심지어 마족답지 않게 기사도의 철저한 신봉자이기까지 했다.
덕분에 거짓말과 기만에 취약했다.
'그래서 게임에선 특수한 아이템과 마법을 써야 했지.'
이쪽과 똑같은 환영을 만드는 아이템인 모방의 안개. 그리고 순간적으로 이쪽의 기척을 지우는 마법.
두 가지를 함께 사용해야 했다.
환영을 미끼로 만들어서 보내면?
동시에 이쪽의 기척을 숨겨 버리면?
놈은 십중팔구 환영에 정신이 팔리곤 했다.
그때 뒤통수를 치면 됐다.
혹은 뒤통수를 칠 타이밍을 놓치면?
놈이 이쪽을 찾느라 두리번거릴 때 타격을 가하면 됐다.
'...이놈은 몸에 힘을 주고 있을 때 방어력이 확 올라가는 특징이 있었으니까.'
하여 잠깐이라도 집중력을 잃으면?
전투태세가 살짝이나마 느슨해지면?
특유의 방어력이 급감했다.
그때가 타격 찬스였다.
바로 지금처럼.
"뭐? 내가 포기한 인간계 침공을 이어가겠다고? 그래서 대의를 따르고자 2성주를 침공했어? 웃기고 있네!"
빠각!
비틀거리는 놈의 머리를 한 대 더 후려쳤다.
"크허흑!"
놈에게서 묵직한 신음성이 나왔다.
순간 김장철은 눈치를 챘다.
놈의 집중력이 돌아왔음을.
재빨리 뒤로 빠졌다.
그 직후.
후우웅-!
놈의 집게발이 코앞을 스치듯 가로질렀다.
걸리는 모든 것을 잡고 분쇄하며 으깨 버리는 일격!
'후아.'
역시 장난이 아니다.
절대로 방심할 놈이 아니다.
"하지만! 크레도스으! 네놈은 버려진 땅의 모두가 숙원처럼 품고서 준비하던 기나긴 시간을 무위로 돌렸다! 오늘도 버려진 땅의 마족들이 먹을 것을 찾지 못해 서로를 잡아먹거나, 그러지 못하는 이들은 굶어서 쓰러져 가고 있음을 그대는 알지 못하는가!"
"알지. 그러니까 농사를 짓겠다는 거잖아?"
"되지도 않는 핑계를!"
콰아아!
3성주가 순식간에 앞으로 돌진해 왔다.
그러나 김장철에겐 그 동작이 다 보였다. 아예 프레임 단위로 분석하던 놈의 패턴. 그때와 판박이처럼 똑같은 동작인 까닭이었다.
스윽, 콰앙!
피했다.
스으윽, 후우웅!
흘려냈다.
그리고 놈의 갑각을 슬쩍 보았다.
'주황색.'
아까보다 좀 더 붉어졌다.
이제 조금만 더 하면.
'그 타이밍'이 올 것이다.
놈을 일격에 보낼 수 있는 타이밍이.
...라고 생각하며 김장철은 갑자기 눈가를 감싸 쥐었다.
"크아앗!"
그럴듯한 추임새(?)부터 좀 섞어주고.
원통하다는 듯한 원망의 멘트를 발사했다.
"누, 눈에 진흙을 뿌리다니! 이런...! 비겁한!"
"...뭣?"
우뚝!
공격해오던 3성주가 황급히 동작을 멈추었다.
손가락 틈새로 보이는 놈의 모습. 얼굴.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억울하다는 눈빛도 가득했다.
놈이 다급하게 외쳤다.
"나는 승부에 임하며 그런 비겁한 짓은 하지 않는...."
"다는 건 잘 알지!"
빠컥!
"...!"
다시금 타격을 받고서 홱 돌아가는 3성주의 안면.
그러자 얼굴 주위를 둘러싼 놈의 투구 같은 갑각이, 전신을 갑옷처럼 감싼 갑각이, 한결 붉어졌다. 완전한 핏빛으로 물들었다.
이윽고 놈이 고개가 돌아간 상태에서 움직임을 우뚝 멈추었다.
마치 스산한 석상처럼.
터지기 직전의 활화산처럼.
...쿠구구구구!
3성주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놈에게서 흘러나오는 강렬한 투기!
주위의 지면마저 땅울음을 토해냈다.
그걸 보자마자였다.
김장철은 뒤로 확 물러났다.
쿠확-!
동시에 3성주의 등줄기 갑각 척추를 따라 기다란 균열이 생겨났다. 용암과도 같은 펄펄 끓는 체액이 터져 나왔다.
균열이 벌어졌다.
그 속에서 이글거리는 새 육체가 틈새를 비집고 나오기 시작했다.
김장철이 익히 잘 아는 모습이었다.
'시작됐네, 2페이즈.'
게임에서 3성주의 체력이 절반 이하로 떨어지면 발동하는 2페이즈 모드.
놈이 갑각을 벗고 탈피를 거치며 훨씬 우람해진다. 강력해진다. 광전사 모드로 변한다.
그나마 약점이던 순진한 기사도?
없어진다.
그 어떤 기만도 통하지 않는다. 그때부터는 페이크 없이 순수한 실력으로만 놈을 상대해야 한다.
"...크워어어억!"
3성주가 탈피를 진행하며 포효했다.
그리고 붉어진 눈길로 김장철을 노려보았다.
'감히...! 감히!'
자신을 연거푸 속인 마왕.
비겁한 짓만 저지른 크레도스.
이건 정당한 승부가 아니다.
마왕으로서 해선 안 되는 짓이다.
어떻게 생각해도 용서할 수가 없었다.
반드시 찢어 죽이리라.
다짐하는 순간이었다.
스윽.
마왕이 허공을 향해 손을 들었다.
혹시 또 무슨 기만술을 쓰려는 걸까.
하지만 그따위 얕은수는 이제 통하지 않....
쿠와앙-!
크레도스를 비웃으려는 찰나였다.
난데없이 하늘에서 공간이 열렸다. 열린 공간에서 거대한 의자가 떨어져 내려왔다. 생전 처음 보는 온갖 도구가 빽빽하게 꽂혀 있는, 실로 기이한 이형의 의자였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뒤이어 동그랗게 생긴 커다란 돌덩이도 마왕 앞에 쿵, 떨어졌다.
"옳거니."
뭐가 좋은지 씨익 웃는 마왕.
돌덩이를 집어드는 크레도스.
이윽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놈의 모습.
'무슨...?'
3성주의 눈길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그는 진심으로 말하고 싶었다.
나 지금 탈피 중이라고.
아직 탈피가 안 끝났다고.
탈피를 할 때가 제일 취약한 순간이라고. 그러니까 제대로 승부를 치르려면 탈피, 끝날 때까지 기다려 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탈피 중이라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런데 마왕이 계속 척척척 다가왔다!
너무나 거침없게!
바로 앞까지!
다가와서!
저 무식해 보이는 돌덩이를!
두 손으로 치켜들면서 빵긋!
웃으며 이쪽의 정수리를 겨냥했다!
"원래 게임에선 2페이즈 변신 장면, 시네마틱 영상이라서 패드 쥔 채로 멍하니 화면만 봐야 했거든. 그런데 말이야, 역시 여기는 현실이라서 그런지 좀 다르네?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네? 그럼 굳이 귀찮게 기다려줄 필요 없잖아? 변신 장면 보호법, 그딴 건 없는 게 현실이니까. 안 그래?"
"...!"
아니!
안 그래!
전혀 안 그래!
잠깐만!
잠깐마아안!
눈빛으로 애원했다.
이건 좀 아닌 거 같다고.
이거 이래도 되는 거냐고.
너 지금 아주 잘못된 짓을 하는 거라고.
사회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넘어선 안 되는 선이 있는 거라고. 우린 그걸 지켜가며 살아갈 때에야 비로소 아름다운 사회를 이룩할 수 있는 거 아니겠냐고.
소리쳐 강조하고 싶었다.
그런데 탈피 중이라서.
아직 탈피가 다 끝나지 않아서.
입이 마음대로 열리지가 않았다!
"할 말 있으면 말을 해, 이 반란군 놈의 x키야!"
후우웅-!
"...!"
정수리를 향해 떨어져 내려오는 무식한 돌덩이, 맷돌.
위기의 순간, 3성주가 간신히 머리 탈피를 마쳤다.
다급히 외쳤다.
"말!"
빡!
그걸로 끝이었다.
탈피가 끝난 직후라 아직 야들야들한 3성주의 정수리에 맷돌의 은총이 꽂혔다. 묵직하고도 심대한 타격력이 고스란히 크리티컬로 들어간 것은 물론이었다.
"...!"
3성주의 눈이 풀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3성 군단병들의 눈빛 또한 몹시 흔들렸다.
33화. 고인물의 스피드런 (3)
우리의 성주님은 무적이시다.
어떤 공격에도 뚫리지 않는 갑각을 지니셨으니까. 그 갑각의 견고함과 두꺼움은 우리 군단병 중의 그 누구도 감히 필적할 수가 없으니까. 비교조차 불허할 정도로 튼튼하시니까.
그렇기에 우리의 성주님, 라스터 경은 불멸이시다.
이 세상의 어떠한 공격도 그를 아프게 할 수 없고, 어떠한 타격도 그를 무릎 꿇릴 수조차 없다.
그것이 3성 군단의 진리!
그것이 3성 군단의 위력!
...이라고 모두가 생각해왔다.
그것이 당연한 진리인 줄만 알았다.
오늘, 이곳에 있는 3성 군단병 모두가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전부 그러하였다.
그런데, 오늘 그들이 믿던 세상이, 하늘이, 무너졌다.
빠악!
3성주의 정수리를 강타한 맷돌!
전두엽을 후려친 묵직하고도 심대한 타격!
'커어...억...!'
3성주의 눈이 풀렸다.
다리도 함께 풀렸다.
그는 필사적으로 정신을 차리려 애를 썼다.
'아, 안....'
되는데.
이대로 쓰러질 수는 없는데.
이제야 겨우 탈피를 마쳤는데.
이제부터가 진짜 내 실력인 건데.
저 비겁하기 짝이 없는 마왕 놈을... 영원히 몰아내고 2성 군단의 병력을 흡수한 다음에 인간계를 향해 보무도 당당한 정복의 깃발을 들어올려야 하는 건데.
그것이, 오직 그것만이 옳게 된 미래의 일일 텐데.
'그런데... 어째...서...?'
나는 쓰러지고 있는 것일까.
이토록 무력하게.
아무런 저항도 못 하고서.
마치,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쿠우웅!
3성주가 큰대자를 그리며 뒤로 넘어가는 순간, 거목이 쓰러지는 듯한 육중한 울림이 지면을 타고 모두의 가슴을 때렸다.
"...."
정적이 내려앉았다.
혼절한 3성주 라스터도.
이 전투를 지켜본 3성 군단병들도.
본거지의 성벽을 사수하던 2성 군단병들도.
바로 뒤에서 조마조마함을 느끼던 제피로스도.
모두가 충격적인 전율을 느끼며 침묵에 빠졌다.
그 속에서 김장철이 움직였다.
"후우, 끙차."
숨을 골랐다.
손을 뻗었다.
뻗어 버린 3성주의 한쪽 다리를 잡았다.
놈을 질질 끌면서 한쪽으로 걸어갔다.
그쪽에 있던 3성 군단병들이 주춤주춤 물러났다. 자연히 길이 생겨났다. 그 사이를 지나갔다. 그동안 어느 누구도 김장철을 막아설 생각을 떠올리지 못하였다.
그렇게 유유자적 포위망을 통과했다.
성문 앞에 도착했다.
똑똑.
성문에 노크를 했다.
이윽고 반응이 왔다.
끼이이익....
성문이 쭈뼛쭈뼛 열렸다.
그 틈새로 성문을 연 2성 군단병들의 모습이 보였다.
아마 그들도 똑똑히 목격한 것이겠지.
그리고 깨달은 것이겠지.
이쪽이 방금 3성주를 어떻게 박살을 냈는지. 그런 이쪽의 노크(?)를 무시하면 자신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도.
열린 성문 안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3성주를 질질 끌면서.
주춤주춤 물러서는 2성 군단병들의 시선을 받으면서.
성내로 입장하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뒤를 힐끗 돌아보며 불렀다.
"제피로스?"
"...네?"
"뭐해. 계속 거기 있을 거냐."
"예에?"
"어여 들어와."
"아, 예."
끼이익, 텅.
제피로스 녀석이 들어온 직후에 야물딱지게 닫힌 성문.
김장철은 다시금 움직였다. 질질질. 혼절한 3성주를 끌면서. 그런 이쪽의 모습을 홀린 듯이 구경하며 뒤를 따르는 2성 군단병들에 둘러싸인 채로.
성 안뜰을 지났다.
계단을 올랐다.
성문 위쪽 성루에 올랐다.
그곳에 버려진 우물이 있었다.
2성주의 영역인 쇠락의 늪지.
이곳 지역을 대표하는 포털 포인트였다.
"후우."
다행이다.
갑작스럽게 이곳을 덮친 전란의 한가운데에서도 우물은 무사했다. 조금의 손상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작동도 무리 없이 가능하겠지.
"자, 티봉아?"
김장철은 자신의 품속을 향해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러자 곧, 안쪽에서 꼼질거리는 반응이 돌아왔다.
"끄뀨응? 티보옹?"
녀석, 곤히 자고 있었던 걸까. 이쪽이 격렬한 전투를 치르는 와중에도 태평하게 잘 수 있다니. 역시 아기는 아기다.
김장철은 아빠미소를 지으며 티봉이를 조심스레 꺼냈다. 그리고 잠이 덜 깬 티봉이를 두 손으로 소중히 안아 든 채, 녀석의 뽕뽕한 궁디를 우물 테두리에 살짝 갖다 대었다, 챱.
...화아악!
우물이 깨어났다.
빛을 머금은 우물 안으로 손을 뻗었다. 그 와중에 제피로스를 향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제피로스? 이놈 집게 잡어. 여기 남겨지기 싫으면."
"아, 옙."
제피로스가 재빨리 3성주의 집게를 잡았다. 김장철이 싱긋 웃으며 성문 아래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안녕히 계셔들, 여러분? 난 이 늪지의 모든 용건과 볼일을 마치고 내 농사를 하러 떠날 거야."
그의 작별인사가 끝난 순간.
파아앗!
티봉이가 제일 먼저.
다음으론 티봉이를 감싸안은 김장철이.
그에게 다리를 잡힌 상태인 3성주가.
3성주의 집게를 꼭 쥔 제피로스가.
차례로 우물의 빛으로 빨려 들어갔다.
...후욱.
완전히 사라진 일행.
그걸 멍하니 올려다보던 모두들.
다음 순간, 3성 군단병들은 일제히 깨달았다.
자신들의 사령관인 3성주가 마왕에게 날치기 같은 납치를 당했다는 사실을.
♣
...후와아악!
몸이 붕붕.
정신도 붕붕.
멘탈도 붕붕붕.
어디론가 떠오른다.
어딘가로 쓸려간다.
아아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크레...도스으.... 이... 비겁한....'
버려진 땅의 3성주, 라스터는 실눈을 간신히 떴다.
어지러웠다.
온몸을 휘감은 은빛 물결. 그 속에서 전신이 둥둥 떠오른 느낌. 어딘가로 옮겨지는 듯한 기이한 감각까지도.
그게 모조리 현기증이 되었다.
속이 뒤집혔다.
당장 토할 것 같....
"우웁, 웁...!"
참을 수가 없었다.
한데 그때였다.
쿠당탕!
허공에 떠 있는 듯하던 감각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전신의 무게감이 돌아왔다. 동시에 차가운 돌바닥이 얼굴을 때려왔다.
"...컥!"
순식간에 엄습해 온 현실의 통증.
올라오던 헛구역질이 쏙 들어갔다.
귓가로 쑥 들어오는 일침과 함께였다.
"깬 거 다 안다. 눈 떠라."
"...."
3성주는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덕분에 볼 수 있었다.
'크레도스....'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마왕, 크레도스.
아까 저놈에게 당했던 일들이 떠올랐다. 온갖 비겁한 수에 죄다 당했다. 심지어 변신 중에 엄청난 돌덩이로 정수리를 내리 찍히기까지 했다.
"...."
내 정수리는 무사한 걸까. 혹시 갑각투구 자체가 찌그러져 버린 건 아닐까. 그러면 안 되는데. 곤란한데. 우리 엄마 최고 자랑이 내 두상 예쁘다는 거였는데.
불현듯 떠오른 걱정에 3성주는 자신의 정수리를 매만졌다.
김장철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배어났다.
"안 찌그러졌어, 인마."
"...."
"또 거짓말일까 봐?"
"...당연하지."
3성주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까 당했던 거짓말과 기만질의 퍼레이드를 생각하면? 이젠 마왕이 공기로 숨을 쉰다는 말을 해도 일말의 믿음조차 생겨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나저나 여긴....'
어디일까.
3성주는 착잡한 눈길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둑하고 황량한 실내. 일견 평범하게 보이지만 안쪽에 희미한 은빛이 서린 우물.
대략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이 마왕성으로 끌려왔다는 사실을.
'어떻게....'
자신이 침공하고 있던 2성주의 본거지, 늪지의 성채에서부터 까마득한 단애를 올라 순식간에 마왕성까지 온 걸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난 이제 끝이겠구나.'
무려 마왕에게 반기를 들었다.
마왕이 보낸 전령을 감금했다.
멋대로 군단을 움직였다.
이웃한 2성주의 영역을 침공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반역인데, 심지어 마왕과 맞서 싸우기까지 했다.
"...이제 날 어떻게 할 생각인가, 크레도스여."
아마 죽이겠지.
가장 처참한 방법으로.
최대한 잔혹한 수단으로.
모두에게 본보기가 될 끔찍한 죽음과 불명예를 선사할 것이다.
하지만 3성주 라스터는 두렵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화가 났다.
"그래... 날 유린하려는 것인가. 하여 한심하군. 버려진 땅의 모두가 심혈을 기울여 준비하고 고대하였던, 300여 년 만에 이루어질 수 있었을 인간계 대침공이라는 대업을 제멋대로 외면해 버린 그대가."
"...."
"하여 겁쟁이 크레도스여. 그대는 그토록 겁을 집어먹고서 이곳에 틀어박혀 있을 심산인가? 그러면 무언가가 나아지는가? 이 땅의 숙원이던 굶주림과 빈곤으로부터의 해방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 것인가, 정녕?"
"...."
"아니. 그건 아니겠지. 그렇기에 나는 원통함을 금할 수가 없다. 그대와 같은 옹졸하고 비루한 이가 나보다 강한 힘을 지닌 채로 마왕의 권좌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버려진 땅의, 이곳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의 운명을 틀어쥐고 있다는 현실이."
"...."
"그러니 어서 죽여라. 더는 나를 모욕하지 마라, 크레도스여. 그 누구에게도 진정한 지도자로 인정받지 못할 비루한 마왕이여."
"...쓰읍. 듣자듣자 하니까 좀, 말이 심하네."
"뭣?"
독설을 퍼붓던 3성주 라스터는 멈칫했다.
뭐가 심하다는 걸까.
자신은 오직 진실만을 날카롭게 헤집었을 뿐인데.
3성주는 비록 힘이 없어 무릎은 꿇고 있을지언정, 눈빛만은 날카롭게 벼려내며 김장철을 노려보았다.
반면, 김장철은 난감한 웃음을 머금어 버렸다.
"됐다. 구차하게 설명해서 뭐하겠냐. 1등석에서 직접 보면 차차 알겠지."
"...."
직접 보라고?
1등석에서?
그게 대체....
'무슨 소리지?'
3성주로서는 뜻을 짐작할 수가 없는 뚱딴지같은 말이었다.
하지만 김장철은 상관하지 않았다.
그저 별다른 미사여구 없이, 3성주의 한쪽 발목을 턱 잡았다. 그리고 3성주를 질질 끌며 우물방을 나섰다. 복도를 건넜다. 계단을 오르고, 모퉁이를 돌고, 문을 건너, 마왕성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감자밭 옆의 공터에 새 말뚝을 세우며 제피로스를 돌아보았다.
턱!
"멍석은?"
"여기 있습니다."
"오케이. 고마워?"
"별말씀을."
눈치 빠른 제피로스가 알아서 샤샥 챙겨준 멍석을 받아들었다. 여전히 타격에서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3성주를 멍석 위에 눕혔다.
그리고 굴렸다.
김밥 말듯이.
후루룩?
"...!"
그 순간, 3성주는 전신에서 힘이 쭈욱 빠지는 기이한 무력감을 느껴야 했다.
그걸로 끝이었다.
사주팔자에도, 별자리 운세에도, 혈액형 검사나 MBTI 테스트 결과로도 예정되어 있지 않았던 멍석랩핑(?)을 당한 3성주는 그대로 말뚝에 매달렸다.
공식적인 3대 피뢰침의 탄생이었다.
덕분에 농병대 마족들이 환호했다.
시르케는 기겁했고, 바할은 흥분했으며, 아수라트는 새로운 후배(?)의 등장에 내심 기뻐하면서도 오소소 돋는 소름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단 한 명.
사천왕 하르토크만은 조금 달랐다.
마족 중에서 가장 음험한 안개의 대공.
그는 무려 하루 만에 3성주를 생포해서 피뢰침으로 매달아 버린 김장철의 위용에도 쉽사리 압도당하지 않았다. 감탄하지도, 복종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도 못했다.
역심.
그는 여전히 호시탐탐 김장철의 권좌를 노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까맣게 몰랐다.
이제부터 김장철이 자신을 어떻게 구워삶고, 데치고, 짤짤 흔들어대며 공략할 것인지를. 그 결과, 가까운 미래의 자신이 김장철의 가장 충실한 충성충성 팬클럽 회장이 되어 버리리라는 진실을.
34화. 칭찬은 모략가도 춤추게 한다 (1)
...으드득.
마음에 들지 않는다.
요즘 마왕성의 분위기가.
최근 돌아가는 이곳의 모습이.
전부 다 마음에 들지가 않는다.
"후우."
3성주가 새로운 피뢰침으로 매달리게 되었다는 소식. 그 충격적인 사실을 확인하고자 몸소 감자밭까지 나온 하르토크는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었군.'
3성주가 확실하다.
하여 이해가 되지 않았다.
2성 군단의 전령이 3성주의 늪지 침공 소식을 알린 지가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3성주가 이렇듯, 여기에 묶여 있을 수 있는가.
아니.
없다.
불가능하다.
상식적으로 그렇다.
이곳 마왕성에서 망자의 단애를 거쳐서 쇠락의 늪지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려면? 최소 엿새, 넉넉히 잡으면 열흘은 족히 걸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군단을 거느리고 있었을 3성주를... 순식간에 제압까지 해서 생포하고 마왕성까지 돌아왔다고? 게다가... 그 모든 일을 하루도 안 걸려서 해치웠다고?'
어떻게?
비결이 뭐였을까.
궁리하고 짐작해도 모르겠다.
절로 머리가 지끈거려 왔다.
게다가 더 골치 아픈 일은 따로 있었다.
"후우... 후우욱...!"
심각한 고민에 잠겨 있는 사이, 누군가가 괴상한 숨소리를 내며 옆을 지나쳐 갔다. 감히 사천왕의 곁을 허락도 없이 이렇듯 요란하게 지나가는 마족은 누구일까.
눈길을 쏘아 보냈다.
아수라트였다.
어쩐지 얼굴이 좀 창백하게 질린 상태인.
"하, 하하.... 새 피뢰침.... 내 후임이... 들어왔군, 후후... 하흐흐...."
"...."
전혀 기뻐하는 모양새가 아니다.
오히려 멍석말이로 매달린 3성주의 모습을 보며, 자신이 겪었던 지난날의 악몽을 새삼스럽게 떠올리는 것 같았다.
한심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저런 것도 사천왕이라고....'
하르토크는 비틀거리며 멀어지는 아수라트의 뒷모습을 향해 노골적으로 경멸의 눈길을 보냈다. 생각할수록 한심하고,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비단 아수라트 하나만?
아니.
솔직하게 말하자면....
자신을 제외한 이곳의 모두가 한심했다!
'바할, 그 힘만 센 돌멍청이는 진즉 크레도스에게 꼬리를 쳤지. 아수라트? 말할 것도 없어. 피뢰침으로 출퇴근인지 뭔지를 하게 된 이후로는 크레도스와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게 됐고. 그래도 그나마 시르케, 그 얼음미치광이만큼은 사천왕다운 자존심을 나름 지키고는 있다고 믿었는데....'
결국엔 아니었다.
씨감자를 자르는 작업에 동원된 날 이후로, 크레도스에 대한 시르케의 태도마저 어쩐지 석연찮은 구석이 생겼다.
뭐랄까.
어딘가 좀 맹해졌다고 해야 할까.
혹은, 물러졌다고 말해야 할지도.
"...."
멍청한 놈들.
하등하고 열등한 놈들.
자신 같은 남다르고 우월한 존재가, 그따위 무능한 놈들과 같은 사천왕으로 묶이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개탄스러운 하르토크였다.
'그러니... 언젠가는 내가 마왕의 권좌를 차지할 것이야. 그리하여 내가 네놈들보다 얼마나 우월한 존재인지를 확실하게 증명해 보일 것이다.'
그날이 오면.
언젠가 그날이 오면.
모두가 자신의 진가를 알아보게 되리라.
이 썩은 동태눈깔 같은 놈들만 득실거리는 버려진 땅에서 비로소, 자신의 진정한 가치가 모두에게 널리널리 알려지게 될 것이다.
'그날만 오면!'
으드득!
하르토크는 새삼 다짐하며 이를 갈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토크?"
으드득! 드득!
"...르토크? 뭐하냐?"
으드드득!
"하르토크? 혹시 이 갈아? 잠꼬대해?"
"...."
누군가가 반복해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
잠시 혼자만의 상념 속에서 불만을 애태우고 갈아내고 깎아내던 하르토크는 뒤늦게야 그 소리를 들었다.
번쩍 정신이 들었다.
고개를 들었다.
덕분에 볼 수 있었다.
자신을 향해 말을 걸어오고 있는 마왕, 크레도스의 까칠하고도 엄격한 표정을.
"흠, 설명 제대로 안 듣나? 집중 좀 해. 이제부터 내가 설명할 눈따기, 이거 감자 농사에서 정말 중요한 건데. 그래서 사천왕 전원과 농병대까지 전부 소집한 거잖나, 내가."
"...아, 예."
그랬던가.
대체 언제?
'....'
아무래도, 자신이 이곳에 우두커니 서 있는 사이에 모두가 주위로 소집당한 것 같았다. 그러니까 바할과 시르케, 아수라트와 농병대원들이 주변에 정연하게 도열해 있는 거겠지. 나를 중심으로.
'열등한 멍청이들의 중심이라.'
다시금 이런 상황이, 이곳에 서 있는 자신이, 모두가 한심하게 느껴지는 하르토크였다.
하지만 그가 새삼스러운 현타(?)에 몸부림치는 사이에도 김장철의 농사 교육은 착착 이어지고 있었다.
"자아, 다들 이제는 알겠다시피, 곧 감자 싹이 흙 위로 올라오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눈따기라는 것을 해야 한다. 그러니 감자 농사가 안 망하려면 여기에 있는 모두가 눈따기 요령을 잘 배워둬야겠지?"
김장철이 엄숙하게 말했다.
바할이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바할, 눈따기 자신 있다! 어느 놈의 눈깔을 파내면 되는 건가!"
"허? 허허? 내가 말한 눈따기는 그런 눈깔 파내기가 아니야."
김장철이 피식 웃으며 감자밭을 가리켰다.
"이제 곧 올라올 싹을 다듬는 걸 말하는 거지."
"바할, 싹 잘 다듬는다!"
"그래. 그러길 바라고 있어."
"바할, 싹 다 자른다!"
"어허. 그러면 안 되고."
"바할, 모르겠다!"
"그럼 일단 설명을 좀 들어."
"바할, 듣는다!"
"...그래. 일단 미리 알려주자면, 보통은 씨감자 하나에서 적게는 셋, 많게는 대여섯 개까지 싹줄기가 올라오게 될 거다. 그럼 그게 좋은 걸까, 아닌 걸까?"
"많으면 바할, 기쁘다!"
"쓰읍. 그러면 곤란한데."
"바할, 모르겠다!"
"적당히 적어야 좋은 거야. 너무 많으면 줄여야 하는 거고."
"바할, 어렵다!"
"...."
다시금 김장철의 입가에 서리는 쓴웃음.
그 문답을 보며 하르토크는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나 한심했다.
멍청하고 답답한 바할도.
그런 바할에게까지 이해를 시키려는 마왕 크레도스도.
'....'
나는 언제까지 이 멍청한 놈들의 한심한 짓거리에 장단을 맞추어 주어야 하는 걸까. 대체 언제까지 열등한 것들과 뒤섞여 똑같은 취급을 받아야 하는 걸까.
한심하다.
이놈들도.
나도.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 크레도스가 말하는 감자 눈따기라는 거.
줄기가 너무 많으면 좋지 않다고 말하는 거.
어째서 그러는 건지 자신은 대강 눈치로 알 것 같은데. 그런데 다른 놈들은 아무도 짐작을 못 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거나 멍하니 입을 헤 벌리고 있다는 사실이 답답했다.
한심했다.
분통이 터졌다.
어쩌면 그래서였을 것이었다.
가만히 있던 하르토크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연 것은. 자신이 내심 짐작하고 있던 답을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것은.
"...아무래도 줄기가 너무 많으면 먹어야 하는 덩어리인 뿌리 쪽 감자로 가는 양분을 줄기에게 빼앗겨서, 그걸 방지하려는 것 같은데."
"오?"
"...."
"방금 중얼거린 거, 누구?"
"...."
아뿔싸.
하르토크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옆에 있던 바할이 버럭 외치며 일러바친(?) 덕분이었다.
"바할, 들었다! 하르토크가 중얼거렸다!"
"오? 하르토크가?"
"...."
마왕 크레도스의 꽂혀오는 시선.
뭔가 뜻밖이라는 듯이, 놀란 듯이 보내어 오는 눈길.
그 눈빛이 불편했다.
새삼 한심하고 짜증이 났다.
'고작 그걸 맞췄다고 그런 눈빛을 보내는 건가? 감히, 나를 평가라도 할 것처럼?'
...울컥!
순간 하르토크는 속에서 올라오는 천불을 느꼈다.
멍청한 바할 따위에게나 보낼 하찮은 칭찬의 눈빛을 감히 자신에게 던져대고 있다니. 자신을 이따위로 취급하다니.
억울했다.
하여 저도 모르게 울컥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자신을 증명하고자.
자신이 열등한 것들과는 다름을 내보이고자.
오직 그 생각만으로 목소리를 다듬었다.
"그거, 생각보다 간단한 원리인 것 같은데 말입니다. 어차피 감자는 흙 속의 뿌리에 생긴 덩어리를 먹는 것이니까, 먹지도 않는 줄기가 너무 많아지면 감자 덩어리가 크게 자라지 못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오오, 그리고?"
"그러니까 적당히 줄기를 솎아내서 적정량을 유지하는 것이겠지요."
"오오, 몇 개쯤?"
"제 생각에는 두 줄기 정도가 적당할 것 같습니다. 쓸데없는 양분의 낭비를 방지하는 목적만 생각한다면 줄기를 하나만 남기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그랬다가 자칫 사고나 실수로 하나뿐인 줄기가 꺾이거나 다치면 그 뿌리의 감자는 죽어 버릴 테니까 말입니다."
"오오, 그래서 안전빵으로 줄기를 두 개쯤 남기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렇습니다."
"그게 하르토크, 네가 짐작한 눈따기라는 거지?"
"뭐, 그렇습니다만."
하르토크는 말을 마치며 뒤늦게 후회했다.
의도치 않게 나서 버렸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묘하게 후련했다.
한없이 답답한 멍청이들.
한심하고 덜떨어진 놈들.
이놈들과 자신이 확실하게 다르다는 것을 제대로 말할 수 있어서, 그럴 순간을 잠시나마 맞이했다는 생각에, 시원했고, 후련했다.
'...라지만, 멍청하기로는 다른 놈들과 똑같은 크레도스도 별반 다를 것 없겠지. 농사에 대한 경험이 없는 내가 상황과 문답의 방향을 보며 짐작하고 추론한 이 결론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크레도스가 알 턱이 있을까.
아니.
모르겠지.
똑같이 한심한 놈이니까.
한결같이 멍청한 부류니까.
그러니까....
"하르토크? 제법인데? 완전 제대로 정답이잖아?"
"...예?"
뭣?
지금, 크레도스가 뭐라고 한 거지?
뜻밖의 상황에 하르토크는 조금 얼떨떨해졌다.
그 사이에도 김장철의 칭찬이 이어졌다.
"그러니까 말이야. 이건 진짜 대단한 거야. 혹시 하르토크? 농사를 지어본 적이 있어?"
"...어, 없습니다."
"이야. 이거? 이거 참. 그럼 더 대단한 건데."
"그, 그렇습니...까...."
"당연하지. 지금 눈따기에 대해서 설명을 듣기도 전에, 내가 말해준 상황과 나누는 문답의 방향을 보면서 나름으로 짐작하고 추론해서 정답까지 스스로 결론을 만들었다는 거잖아?"
"...."
하르토크는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조금 당혹스러웠다.
이럴 땐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난 그저 떠오르는 걸 말했을 뿐인데.
뻔히 보이는 답을 아무도 찾지 못하는 것 같아서. 그런 상황이 그저 답답하고 한심해서. 못 참고 몇 마디를 꺼냈을 뿐인 건데.
그런데 어째서 내게, 이렇게들....
"자아. 다들, 들었나? 방금 우리의 사천왕 하르토크가 실로 대단한 추론 능력을 통해 눈따기의 요점과 핵심을 정확하게 말해주었다. 그러니 다들, 모범을 보인 하르토크를 향해 박수."
짝짝짝!
"...."
쏟아지는 박수.
옆에서 엄지를 치켜올리는 멍청이 바할.
뜻밖에도 자신을 공개적으로 추켜올려 준 크레도스까지.
하르토크는 이 모든 상황이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뜻밖에도.
'내, 내가, 왜... 기쁜 거지? 어째서 고작 이런... 칭찬 따위로...?'
귀략과 음모의 사천왕.
가장 오만한 인물로 평가받는 마족.
하르토크는 쏟아지는 칭찬 샤워에 기뻐하는 자신의 모습 때문에 더욱 당황하고 말았다.
35화. 칭찬은 모략가도 춤추게 한다 (2)
'어째서? 왜? 나는....'
기쁜 걸까.
이런 멍청이들이 보내는 박수에.
한심하기 짝이 없는 놈들 앞에서 받은 칭찬에.
고작 이따위 일이 뭐라고.
기뻐서 가슴이 두근거린 것일까.
'말도 안 돼.'
하르토크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정체 모를 모종의 위기감이 빡 솟구쳤다.
이대로 분위기에 휩쓸리면 안 된다고. 열등한 것들의 사탕발림에 넘어가선 안 된다고. 이런 놈들의 칭찬과 인정 따위, 하등 쓸모도 없는 거라고.
스스로를 향해 다짐했다.
냉철한 정신을 다잡았다.
그런데... 그게 쉽지가 않았다!
"그럼 하르토크? 내친김에 하나 더 묻고 싶은데."
"...물으십시오, 마왕이시여."
"이제 감자 싹이 올라오는 시기가 되면, 감자밭에 뭐가 생길 수 있을까?"
"으음...."
"짐작되는 거 있어?"
"혹시, 감자와 상관이 없는 다른 풀... 잡초 같은 것들입니까?"
"오오, 그런 짐작을 떠올린 근거는?"
"아무래도 감자밭 자체가 감자가 잘 자라도록 인공적으로 조성된 환경이니까 말입니다. 영양분이 될 퇴비를 잔뜩 뿌렸고, 흙을 갈아엎어서 공기와 물이 잘 순환하도록 만들었고, 성장에 방해가 될 잡석도 전부 골라냈지요."
"오오, 그래서?"
"감자가 잘 자란다는 건, 감자와 같은 식물인 다른 풀들도 잘 자라는 환경이라는 뜻일 테고 말입니다."
"오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감자 싹을 제외한 다른 잡초는 전부... 뽑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오오, 그렇게 생각한 근거는?
"감자밭이 아무리 잘 조성된 환경이라도... 밭이 머금고 있는 수분이나 영양의 총량에는 한계가 있을 테니까 말이지요. 그런데 잡초를 놔두면 그놈들이 감자가 먹어야 할 영양과 수분을 빼앗을 것 같아서...."
"정다압! 박수와 환호! 발사!"
"와아아아아아!"
짝짝짝짝짝!
또다시 쏟아지는 우레와 같은 함성.
고막이 두쿵두쿵거려지는 박수까지.
"자아. 다들 들었겠지? 우리의 지혜로운 사천왕, 하르토크가 또 완벽한 정답을 말했다. 심지어 농사에 대한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본인의 뛰어난 사고능력과 분석력을 활용한 추론을 통해서 말이다."
모두를 돌아보는 마왕.
그리고 자신을 가리키는 마왕.
"하여 나는 기쁘다. 이토록 지혜롭고 현명한 이가 우리의 사천왕이라는 것이. 자랑스럽고 든든하다. 이런 이가 우리와 함께 흙을 만지고, 감자를 키우는 일에 앞장설 수 있으리라는 사실이."
"...."
마왕은.
크레도스는.
뭘 말하고 싶은 걸까.
하르토크는 어쩔 수 없이 두근거리는 가슴을 느꼈다. 이런 기분, 너무나 이상했다. 낯설었다. 그런데 나쁘지가 않았다.
어째서?
왜?
'내가 지닌 우월함을... 인정하고 있어.'
그것도 모두가 보는 앞에서. 다른 멍청한 사천왕이 함께한 자리에서. 공식적으로 인정을 하고, 선언까지 해주고 있다.
심지어 마왕 본인의 입으로!
"...."
묘한 기분이 자꾸만 들었다.
당혹스러우면서도, 자꾸 입꼬리가 올라가려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마왕의 기분 좋은 선언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하여 나는 이 자리에서 선언한다. 이제부터 나는 하르토크에게 공식적인 농병대 수석조장의 자리를 일임할 것이다. 그렇기에 묻노니, 하르토크여?"
"...예, 마왕이시여."
"그대는 내가 수여하는 농병대 수석조장의 막중한 임무를 기꺼이 맡아 주겠는가?"
"...."
농병대... 수석조장.
그건 어떤 자리인 걸까.
남들보다 좀 더 나은 자리일까.
내 우월한 능력에 걸맞은, 그런 자리일까.
하르토크는 잠깐 망설였다.
한데 그런 이쪽의 망설임을 짐작했음일까.
마왕 크레도스가 희미하게 웃으며 선언했다.
"대저 농병대 수석조장이라 함은, 나를 제외한 농병대의 최고 책임자가 되는 자리일 것이며, 또한, 사천왕 중의 공식적인 수장이 됨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
눈이 휘둥그레졌다.
놀라서 옆을 쳐다보았다.
제일 먼저 눈이 마주친 이는 시르케였다.
네가? 라는 놀란 눈빛을 보내고 있는 시르케. 아수라트도 별다를 것이 없었다. 믿기지 않는 기색이었다. 바할은 뭐...무슨 상황인지 이해도 못 하고 있는 것 같지만.
"...."
다른 사천왕의 반응을 보니 확실히 알겠다.
모두가 시기하고 있는 것일 테지.
인정하기 싫어 발버둥치는 것일 테고.
'하등한 네놈들 따위보다 내가 훨씬 우월하다는 걸... 이제야, 비로소, 모두가 알기 시작하겠구나.'
...찌르르.
묘한 쾌감이 뒷덜미를 감싸왔다.
기뻤다.
오랜 염원.
묵고 묵은 갈망.
그 응어리가 비로소 조금은 풀리는 느낌이었다.
"하여 다시 묻노니, 사천왕 하르토크여. 그대는 나의 제안을 받아들여 농병대 수석조장이 되겠는가?"
"...맡겨주신 사명을 충실히 이행하겠습니다."
하르토크는 홀린 듯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다시금 쏟아지는 환호. 갈채.
덕분에 퍼뜩 드는 제정신.
'....'
내가 왜 고개를 숙였지?
내가 왜 제안을 받았지?
나는 언젠가 마왕의 권좌를 차지해서 하등한 것들을 발아래에 두고 싶었는데. 누가 훨씬 우월한 존재인지 모두가 비로소 알게 되길 바랐는데.
그런데 내가 왜 농병대 수석조장 자리 따위를....
"...."
모르겠다.
어째서인지.
왜 이 상황이 기쁜 건지.
전혀 모르겠어서 더 당황스럽다.
그렇게 하르토크는 예전에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자신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던, 새로운 유형의 행복(?)을 처음으로 맛보았다.
그 순간이었다.
딩동!
하르토크가 순수하고도 뜻밖인 행복을 느끼는 순간, 김장철의 눈앞에 뜻밖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당신의 공개적인 칭찬에 인정욕구를 자극받은 하르토크가 순수한 행복감을 느꼈습니다.]
[해피포인트 1점이 적립됩니다.]
[현재 당신이 보유 중인 해피포인트 : 252]
'...어?'
뜬금없는 메시지였다.
한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당신은 최근 심리전을 통하여 두 번의 거대한 이득을 이끌어내었습니다.]
[당신은 3성주 라스터의 강직하고 올곧으며 순진한 심리를 이용하여 전투를 일방적인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또한, 당신은 하르토크의 내면에 깊숙히 자리하고 있던 인정욕구를 자극하고 충족시킴으로써, 하르토크가 당신에게 지니고 있던 반감의 상당 부분을 덜어내는 첫걸음을 떼었습니다.]
[이렇듯 상대의 심리를 적절하게 파악하고 활용하여 실질적인 이득으로 이끌어낸 연속된 경험이 당신의 스킬 트리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이러한 영향력에 따라, 당신에게 새로운 스킬이 주어집니다.]
[스킬 : 혈안 (이/가) 개화 가능 스킬 목록에 등록되었습니다. (개화 비용 : 200 해피포인트)]
"...."
새로운 스킬이라니.
전혀 생각지 못한 보상이었다.
'그냥, 하르토크 놈이 써먹을 데가 많을 거 같아서. 그리고 은근 농사일에 재능이 있을 거 같아서. 그래서 비위 좀 맞춰 준 거였는데.'
하여 칭찬으로 살살 마음을 녹였다.
한데 이런 보상이 돌아올 줄이야.
'그나저나, 혈안?'
어떤 스킬인 걸까.
궁금해졌다.
최소한 열어두면 손해는 아닐 것 같았다.
'마침 쌓인 해피포인트도 적당하고.'
사천왕과 농병대를 해산시킨 뒤, 김장철은 스킬 개화 메뉴를 열었다.
딩동!
[해피포인트 사용 메뉴를 오픈합니다.]
[개화 가능 스킬 목록을 검색합니다.]
[스킬 : 혈안 (개화 비용 : 200 해피포인트)]
[현재 보유 중인 해피포인트 : 252]
"...."
그래, 해 보자.
눈짓으로 개화 버튼을 눌렀다.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딩동동!
[200 해피포인트가 차감됩니다.]
[현재 보유 중인 해피포인트 : 52]
[혈안 스킬이 개화되었습니다.]
[스킬명 : 혈안 (Lv.1)]
[발동 시 상대의 현재 상태와 심리를 간파합니다. 또한, 향후 6시간 동안 상대의 심리에 생겨날 변화 또한 일부 예상할 수 있습니다.]
[발동 조건 : 200초간 상대를 응시하며 한 번도 눈을 깜빡이지 않아야 함.]
[향후 스킬 레벨이 상승할 시 - 발동 조건 완화, 심리 파악 적중도 상승, 미래 심리 예측시간 연장 가능]
"...."
김장철은 잠깐 눈을 끔벅거렸다.
그리고 곧 깨달아야 했다.
'미친. 대박.'
상대의 심리를 파악한단다.
심지어 이후에 무슨 생각을 품을지도 한정적으로나마 예상할 수 있단다!
'이거 완전 관심법이잖아?'
장난이 아니다.
제대로 활용한다면?
그야말로 무궁무진하게 쓰일 수 있겠다.
이 정도면 투자한 200 해피포인트가 전혀 아깝지 않았다.
'물론 발동 조건이 조금 빡세 보이기는 하지만.'
200초.
그동안 상대를 주시하며 한 번도 눈을 깜빡이지 않아야 함.
"...."
그게 가능할까.
일단 시험이라도 해 볼까.
"제피로스?"
"네, 주군."
"이제부터 내가 널 좀 째려볼 거야."
"...네?"
"그냥, 가만히 서 있으라고."
"...."
어이가 없는 기색을 애써 감추는 제피로스.
그런 녀석을 째려보았다.
"흡."
5초.
10초.
20초.
점점 눈알이 빡빡해졌다.
30초.
40초.
눈알이 에어프라이기에 던져진 기분이 들었다.
50초.
60초.
80초.
'...그갸갸아악!'
맺히던 눈물이 증발했다. 안구에 사포가 낀 것 같다. 이대로도 괜찮은 걸까. 내 눈알, 사라지는 거 아닐까.
100초.
110초.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래도 참았다.
이제 와서 실패하면 지금까지 참느라 빡빡해진 눈알에게 너무나 미안해질 것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200초.
...퍼엉!
안구 안쪽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터지는 느낌이 났다. 아마 실핏줄이겠지. 아아. 이래서 이 스킬 이름이 '혈안'인 거구나.
라는 생각이 문득 떠오른 순간이었다.
딩동!
구원의 종소리처럼 다가오는 알림음.
모래처럼 빡빡해진 안구 앞에 떠오르는 메시지.
[혈안(Lv.1) 스킬이 발동됩니다.]
[주시 대상 : 제피로스]
[제피로스의 현재 상태와 심리, 향후 6시간 동안 변화할 심리를 간파합니다.]
[제피로스는 현재 심드렁한 상태입니다. 또한, 당신의 실핏줄 터진 눈을 보며 이런 생각을 품고 있습니다. 한심하군.]
"...."
[향후 6시간 동안, 제피로스는 약간의 의무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유는 오늘 기록할 일지를 아직 작성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오늘은 마왕이 자신을 200초 동안 주시하며 셀프로 안구 실핏줄을 터뜨리는 진기명기를 선보인 날이기에, 마왕실록에 써둘 것이 더 많이 생겼다며 평소보다 더욱 뜨거운 사명감을 불태울 예정입니다.]
'그런 사명감 불태우지 마!'
김장철은 뻑뻑해진 눈을 황급히 비볐다.
그리고 내심 환호했다.
스킬의 설명이 진짜였다.
이거, 레벨 좀 올리고 잘 키우면 정말로 효자 스킬이 될 떡잎이 보였다.
'그럼 혹시 같은 마족이 아니라 다른 대상한테도 가능한가?'
예를 들자면, 드래곤 같은.
완전한 이형의 생명체들.
그들에게도 통할까.
되면 더 대박인 건데.
우당탕!
마침 시험해볼 적당한 녀석이 옆에서 뛰어다니고 있었다.
아기 드래곤, 티라누스였다.
"티봉아?"
우당탕! 쿵탕!
"티봉아아? 감자밭엔 들어가지 말고."
와다다다다!
뭐가 또 그렇게 신이 났는지. 혹은 처음으로 우물을 사용해서 맵 이동을 한 경험이 근사했던 건지.
티봉이는 잔뜩 흥분한 채로 가만히 있지를 않았다. 연신 뛰어다녔다. 이리 뛰고. 저리 구르고. 또 우다다다 달리고.
"...."
뭐, 그래도 해 보자.
부릅!
티봉이를 주시했다.
죽어도 눈을 감지 않겠노라 다짐하며.
고속으로 뛰어대는 티봉이를 눈빛으로 추적했다.
10초.
30초.
60초.
90초.
그리고... 200초!
'크아아!'
또 해냈다.
벌써부터 안구건조증이 도지는 것 같은 기분이지만, 그래도 어쨌건 해냈다!
'자아, 보여줘!'
딩동!
[혈안(Lv.1) 스킬이 발동됩니다.]
[주시 대상 : 근처의 하늘]
'...어?'
김장철은 흠칫했다.
하늘?
티봉이가 아니라?
'설마, 티봉이가 정신없이 빠르게 움직이는 통에... 시선 판정이 티봉이가 아니라 배경에 있던 하늘로 잡힌 건가?'
아무래도 그런 듯했다.
그런데 그 뜻은 바로....
[당신이 위치한 지역 하늘의 현재 상태와, 향후 6시간 동안 변화할 요소를 간파합니다.]
'이게... 무슨....'
뒤이어 눈앞에 떠오르는 정보들.
그걸 보며 김장철은 깨달았다.
자신이 오늘 개화한 스킬, 혈안의 뜻밖의 활용법.
그건 바로 농업인에게 너무나 중요한 정보이자 동반자, 일기예보였다.
36화. 마왕께서 지켜보고 계십니다 (1)
쿠르릉...!
혹시 비라도 오려나.
어디선가 들려온 뇌우성.
그 소리에 묵은지는 눈을 떴다.
"...."
꿈을 꾸었나.
그 꿈속에서마저 유혈의 한가운데에 있었던가, 나는. 제아무리 벗으려 해도 벗어낼 수 없는 혈겁의 중심에 있었던가, 나는.
그리하여 울며 애원했던가.
모르겠다.
지난 열아홉 번의 삶.
오직 투쟁과 살육만으로 점철되었던 삶.
나는 그 과거의 삶으로부터 벗어난 걸까.
부디, 그런 것이면 좋겠다.
부스럭.
때마침 암굴 출입구의 거적이 젖혀졌다.
거적 너머로 보이는 익숙한 얼굴.
"어? 일어나셨슴까?"
몸종 프론테라가 사람 좋게 웃었다.
"정오가 다 되어갑니다요. 어서 나오십셔. 식사, 하셔야지요."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
큰일이다.
전에는 아침에 해가 뜨면 꼬박꼬박 일어났는데. 아니, 근처에서 사소한 소리만 들려도 번개처럼 눈을 뜨곤 했는데.
"...."
나는, 무뎌진 걸까.
모르겠다.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묵은지는 상념을 털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로 주섬주섬 챙겨입을 옷은 딱히 없었다. 온통 핑크핑크 하늘하늘한 마법소녀 복장. 그걸 그대로 입은 채 잠들었던 거니까.
"그런데 입고 계신 그 옷 말입니다요."
암굴을 나서려니, 앞장서던 몸종 프론테라가 넌지시 물어왔다.
"혹시... 갈아입을 생각은 없으신 겁니까요?"
"...."
딱히.
그럴 필요는 느끼지 못했다.
더없이 편하니까.
몸에 꼭 맞으니까.
지금까지는 그렇게만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달라졌다고 해야 할까.
"아무래도 여기 추방자촌 사람들이 조금... 뭐랄까, 불편해하는 것 같지 말입니다요. 불안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말입죠."
"내 복장이... 그렇게 보이나."
"아유, 저는 아닙니다요."
"아니라고?"
"예. 저는 편견 없는 사람입니다요."
"편견?"
"옙. 옷이 뭐가 대수겠습니까요. 사람이 그저 돈만 따박따박 잘 벌면 됩지요. 헤헤헤."
"하지만 인생은 돈이 다가 아닐 텐데."
"어유. 무슨 큰일 날 소리를. 다가 맞습니다요."
"협소한 인생관이로군."
"실리적이라고 불러주십쇼. 적어도 제겐 그렇습니다요."
"그런가."
"예. 아무튼, 여기 사람들이 조금 불안해하는 것 같지 말입니다요."
"내 복장이... 뭐, 그럴 수도 있겠군."
묵은지는 자신의 복장을 내려다보았다.
근육질 허벅지를 절반만 덮은 하늘하늘 프릴 스커트. 그 위로 샤방샤방한 핑크빛 레이스가 달린 쫄쫄이 상의. 어깨에 들어간 솜사탕 같은 뽕은 또 어떠한가. 게다가 자신의 손에 들린 요술소녀 하트하트 마법봉은 뭐란 말인가.
"...."
하지만 이건 그냥 옷이 아니다.
앞선 열아홉 번의 삶.
그 삶에서 내내 자신을 이끌었던 사명의 손길이 입혀준, 엄청난 성력이 깃들어 있는 옷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
문득, 사흘 전의 일이 떠올랐다.
이곳 추방자촌에 도착했던 때의 일이었다.
거의 쫓겨날 뻔했다.
자신의 복장 때문이었다.
그때 촌민들이 이쪽을 보자마자 돌을 던지며 외쳤던가.
이 변태! 우리 마을에서 썩 꺼져! 라고.
"...."
나름 아팠다.
마음이 아팠다.
스무 번째의 삶 만에 맞이한, 인간 촌락과의 첫 조우였는데.
"그나마 저희 도련님이 잘생기신 덕분에 오해를 풀 수 있었고 마을에서 쉬어갈 수는 있게 됐지만 말입죠."
"그래. 그건 다행이었지."
아무래도 안 되겠다.
성력을 머금은 이 옷.
아깝지만 이제는....
"벗어야겠군. 혹시 갈아입을 옷이 있을까?"
"아이고, 그 말씀만 기다렸습니다요."
샤샥!
이쪽의 말이 떨어지자마자였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몸종 프론테라가 손에 쥔 보따리를 능숙하게 풀어헤쳤다. 그리고 낡았지만 평범한 웃옷과 바지를 꺼냈다.
"부담 느끼지 마십셔. 여기 사람들한테 공짜로 받아둔 겁니다요."
"...고맙군."
지금 복장으로 식사를 하러 갔다간 또 촌락민들의 불안(?)해하는 눈빛을 받아야 하겠지. 그건 내 일행이 된 도련님과 몸종에게도 좋은 일은 아닐 테고.
"후우."
결심한 묵은지는 상의를 잡아당겼다.
단호한 마음으로 단숨에 벗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꽈즛?
"어?"
벗겨지지가 않았다.
벗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당겨도 그랬다.
마치 피부에 달라붙은 것처럼.
혹은 떨쳐낼 수 없는 운명처럼.
아무리 애를 써도 벗을 수가 없었다!
"이게... 무슨...."
쿠르릉-!
어느새 가까워진 뇌우성이 머리 위에서 번쩍 울었다.
♣
콰르릉!
머릿속에 번개가 쳤다.
아니, 전구가 반짝 켜졌다.
[혈안(Lv.1) 스킬이 발동됩니다.]
[주시 대상 : 근처의 하늘]
'이게... 무슨.'
김장철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떡 집어삼켰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늘 얻은 혈안 스킬.
이걸 시험해보고자 티봉이를 노려봤던 건데.
그런데 티봉이가 하도 날뛰는 바람에, 조준(?)이 틀어진 건지 하늘을 째려본 걸로 판정이 났다. 그래서... 하늘의 변화를 파악하게 되었다!
'이거, 미친 거 아냐?
어이가 없었다.
실감이 안 났다.
그런데 진짜였다.
딩동!
상큼한 알림음.
함께 떠오르는 수많은 정보들.
[주시 대상 : 근처의 하늘]
[당신이 위치한 지역 대기층의 현재 상태와, 향후 6시간 동안 변화할 요소를 파악합니다.]
[현재 기온 : 23.3℃] [습도 : 21%] [풍향 : 동북동] [현재 풍속 : 1.2(m/s)] [누적강수량 : 0.0mm] [강수확률 : 0%]
[6시간 후의 기온] - [14.6℃] [습도 : 23%] [풍향 : 동북동] [예상 풍속 : 1.5(m/s)] [누적강수량 : 0.0mm] [강수확률 : 0%]
[대체적으로 맑고 건조하며 쾌청한 날씨가 이어지겠으나, 때때로 돌발적이고도 강력한 돌풍이 예상됩니다. 근처를 지나는 어린 마족이나 소형 마수는 돌풍에 날려가지 않도록 주의해 주세요.]
"...."
김장철은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단번에 깨달았다.
이건....
'일기예보잖아?'
그렇다.
아무리 봐도, 거꾸로 봐도, 발가락에 난 티눈으로 봐도 이건 일기예보였다!
'미친.'
가슴이 쿵덕쿵덕 뛰었다.
혈안이라는, 제법 유용해 보이는 스킬을 얻었구나 했는데. 그런데 이건 제법 유용한 정도가 아닐 것 같다.
아니, 이건 제대로....
'대박.'
하늘을 노려보면 일기예보가 발동된다니.
이건 농사를 짓고 있는 자신에게 천군만마나 다름없는 횡재였다. 농사와 날씨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었다.
'당연하지. 오늘 날씨가 어떨지. 내일 비가 올지 말지. 그걸 봐야 오늘 농약을 뿌릴지. 뭘 할지를 계획할 수 있는 거니까.'
그렇기에 모든 농업인은 일기예보에 민감하다.
자신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곳에 와서도 내내 그러했다.
감자 농사를 추진하면서도 내심 초조했다. 처음 겪어보는 낯선 환경과 기후. 이곳의 날씨를 제대로 예측할 수가 없었기에, 언제나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라는 것도 안녕이구나.'
아직은 6시간 이후까지만 볼 수 있지만, 이걸 계속 키워가면? 내일, 모레, 다음 주의 날씨도 낭낭하게 예보할 수 있겠지.
김장철은 감개무량한 심정으로 눈앞에 떠오른 일기예보를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아래쪽에 첨언되어 있는 안내문이 눈에 들어왔다.
돌풍 예보였다.
'어린애들이 위험할 수 있다라.'
그건 안 되지.
그러고 보니까 문득 떠올랐다.
마왕성이 있는 이곳, 차빈 데 우안타르.
게임 속에서도 이곳에서 전투를 치르다 보면 갑작스러운 랜덤성 돌풍이 몰아치는 때가 있었다.
그냥 강한 바람 정도가 아니었다.
제대로 휘말리면 하늘로 확 휘말려 올라갔다가 추락하곤 했다.
그러면 어김없이 낙사 판정.
문제는 토네이도에 가까운 돌풍이 언제 어디로 불어올지, 아무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자주는 아닌데, 운 나쁘게 걸리면 게임 난이도가 확 올라갔지. 특히 고렙이 되기 전, 피통이 작던 시절엔 돌풍 때문에 진짜 힘들었어.'
대략 3회차 정도까지는 돌풍 때문에 고생을 했던 기억이 났다.
한데 그게 곧 불어올 예정이라니.
"...제피로스?"
"네, 주군."
"하르토크 좀 불러줄래?"
"지금 이곳으로 말입니까?"
"어. 당장."
제피로스가 마왕성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곧, 하르토크를 데리고서 감자밭으로 돌아왔다.
"마왕께서 제게 무슨 볼일이신지...."
갑자기 불려 나와서 그런 걸까.
하르토크는 조금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그를 향해 말했다.
"돌풍이 불어올 것 같다."
"...예?"
"알고 있을 텐데? 가끔씩 불어오곤 하는 골치 아픈 돌풍 말이야."
"예, 알고 있습니다. 한데 그게 무슨 상관이신지...."
하르토크는 의아함을 느꼈다.
마왕이 무슨 일로 자신을 부른 건가 싶었다.
그런데 고작 돌풍 때문이라니.
'그거야 그저 조금 귀찮은 소용돌이일 뿐인데. 겨우 그런 일로 날 부른 건가?'
그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돌풍은 물론 위험하긴 하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아니다.
마왕에게도 더 아닐 것이다.
그런 바람 따위에 피해를 입을 리가 만무하니까.
한데 그때였다.
"아이들이 위험해질 거야."
"...예?"
"그러니까 농병대 전원에게, 농병대의 수석조장으로서 전달하라고. 앞으로 두어 시간 동안은 돌발적인 돌풍이 불어올 것 같으니까, 각 가정의 아이들의 외출을 제한하고, 부득이하게 외출할 경우에는 어른과 꼭 붙어서 나오라고 말이다."
"그걸 제가 왜...."
하르토크는 더욱 의아해졌다.
그런 전달사항이 있다면 그냥, 마왕이 직접 전하면 되는 것 아닌가. 어째서 구태여 자신에게 일을 맡기는 걸까.
...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는 마왕에게서 뜻밖의 대답을 들어야 했다.
"이번 일로 아이들이 안전해지면, 농병대원들이 우리의 현명한 수석조장을 더욱 우러르고 존경하게 될 것이 아닌가."
"...."
"그리고 더 많은 이들이 우리의 신임 수석조장이 얼마나 뛰어난 존재인지를 제대로 알게 되겠지."
"...."
"안 그런가?"
"어, 그... 그렇습니다."
"그렇겠지? 나도 그러길 바라고 있어."
"...."
하르토크의 심장이 아주 몰래, 살짝 콩닥거렸다.
김장철의 말이 이어졌다.
"믿고 있다. 잘 전달해 주기를. 아 그리고, 아이들을 집으로 보낸 후에 농병대원들은 전원 감자밭으로 집합. 돌풍이 밭으로 들이닥칠 사태를 대비한다."
"아, 알겠습니다."
"그럼 가보도록."
"예. 그런데... 저기...."
"으음?"
"어쨰서, 아까부터 그렇게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서 저를 빤히 쳐다보시는 건지...."
"음? 그냥."
"...."
"가봐. 얼른."
하르토크는 묻고 싶은 게 많아졌다.
어째서 자신을 이렇듯 우대해주기 시작한 것인지.
그리고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는 돌풍의 존재를 어떻게 예상하고 있는 건지. 그 예상을 과연 믿을 수 있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어.'
물러나는 하르토크의 미간 주름이 깊어졌다.
언젠가부터 달라지기 시작한 마왕, 크레도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말로 모르겠다.
그리고 여섯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세 번의 돌풍이 몰아쳤다.
하지만 어떤 마족 아이도 죽지 않았다.
감자밭 또한 피해 없이 무사할 수 있었다.
김장철은 그 공로를 몽땅 하르토크에게 돌렸다.
"우리의 현명한 신임 수석조장이! 무려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던 돌풍을 예상하고! 모두에게 적절한 준비를 지시함으로써! 다가올 수 있었던 모든 불운과 피해를 막아냈노라. 그러니 모두! 우리의 자랑스럽고 유능한 신임 수석조장 하르토크를 향해! 감사와 존경의 박수! 짝! 짝! 짝!"
짝! 짝! 짝!
모두의 성대한 갈채를 받는 순간이었다.
그동안 마왕을 적대시했던 계략가 하르토크.
그의 내적 성취감이, 사회적 인정욕구가, 일신의 행복지수가, 김장철을 향한 일편단심 충성충성을 외치며 정점의 클라이막스를 콕 찍어 버렸다.
영원토록 김장철만 바라볼, 온리 장철바라기 충신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37화. 마왕께서 지켜보고 계십니다 (2)
그가 보인다.
어딜 보아도.
고갤 돌려도.
이젠 자꾸만 그가 보인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만' 보인다.
"...."
하르토크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다간 자신도 모르게, '앗 주군이닷'이라는 식의 멍청한 혼잣말을 흘려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
바보 같다.
멍청하기가 그지없다.
어리석고 어이없는 일이다.
스스로도 믿기지가 않는다.
그런데, 이유는 모르겠는데.
'이 짓을... 멈출 수가 없어....'
그래서 미칠 것 같았다.
그때였다.
"앗, 수석조장님이시다!"
"수석조장님! 마왕님의 지시대로 북주기를 하고 있는데... 이거 이렇게 하는 게 맞습니까?"
"좀 살펴봐 주십시오!"
한창 정체성(?)의 번뇌에 빠져 있던 무렵이었다. 그를 발견한 농병대원들이 반갑게 외쳤다. 그 태도가 다시금 하르토크를 혼란스럽게 했다.
"...."
자신을 반갑게 불러주는 하급 마족들의 모습이라.
예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었다.
자신은 사천왕.
군림하는 자.
공포의 존재.
그런 자신과 조우할 때마다 하급 마족들은 고개를 바닥에 박고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것이 당연했다.
버려진 땅은 힘이 법인 세상. 강한 자의 의지가 모든 규칙에 우선하는 세계. 이곳에서 자신은 모든 하급 마족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아니, 그 생살여탈권은 똑같다.
한데 하급 마족들의 저 태도란....
"수석조장님! 여기, 북주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흙을 이 정도만 덮으면 되는 겁니까?"
"...."
마치 어미를 향해 부리를 벌리고서 밥을 달라고 지저귀는 아기새 같다. 다들, 하나같이 그런 태도로 이쪽을 애타게 부르고 있다. 심지어 입가에는 웃음마저 띠고서.
...힐끗.
하르토크는 눈길을 슬쩍 옆으로 옮겼다.
그곳에 자신의 마왕, 주군, 크레도스가 있었다.
한데 마왕께서도 이쪽의 눈짓을 느꼈음일까.
...찡긋.
주군께서, 이쪽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이셨다!
"...."
쿠와앙.
저 눈짓은 윤허(?)의 뜻.
그러니까, 아까 넌지시 알려준 대로 하라는 뜻.
"크흠, 흠!"
주군의 신호를 받은 하르토크는 짐짓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자신을 반갑고 애타게 부르는 농병대원들에게 다가갔다.
"그래, 다들 무슨 일로 나를 이렇게나 찾는 거지?"
"북주기가 어렵습니다!"
"줄기 이거, 요만큼만 덮으면 되는 걸까요?"
농병대원들이 저마다 곤란한 얼굴로 앞다투어 물어왔다. 녀석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매만지고 있던 감자 줄기의 밑동을 가리키고 있었다.
"흐음."
하르토크가 그곳을 살폈다.
감자 줄기 아래쪽에 봉긋하게 쌓인 흙더미.
방금 농병대원들이 쌓아 올린 것으로 보였다.
그걸 보자니, 아까 마왕께서 따로 넌지시 알려주며 꼭 외워두라 신신당부했던 지식들이 떠올랐다.
"흐음, 다들 이만하면 잘 덮은 것 같은데?"
"그, 그렇습니까?"
반색하는 농병대원.
하르토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북주기라는 것을 처음 해보는 것이니 어색하고 헷갈릴 만하지. 하지만 북주기의 목적이 무엇인가. 땅속의 알감자가 성장하면서 흙 위로 드러나 햇볕에 노출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 아닌가."
"그, 그렇습니다!"
"그렇지. 알감자가 직사광선에 노출되면 녹색으로 변하고, 동시에 알싸한 맛과 독성을 품어 버려서 식용으로는 쓸 수가 없게 되어 버리니까. 그걸 방지하고자 자라나는 감자 위에 흙을 두둑하게 쌓아두는 것이 북주기가 아닌가."
"역시,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 줄기에 덮은 흙은? 자네가 보기엔 어떻지?"
"딱... 적당해 보입니다?"
"내가 봐도 그러하군. 훌륭해. 계속 이렇게만 하게."
"가, 감사합니다!"
이쪽을 보는 농병대원들의 눈빛.
하나같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노골적인 존경의 감정을 내비치고 있었다.
마치, '역시! 우리의 현명하신 수석조장님!'이라고 외치는 듯이 말이다.
"...."
찌르르....
하르토크의 가슴에 무형의 쾌감이 몰아쳤다.
그러자 다시금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자신을 향한 마왕의 배려가 말이다.
'사실은 나도 북주기라는 거, 전혀 몰랐는데.'
솔직히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다.
그런데 마왕께서 따로 자신을 부르셨다.
그리고 북주기에 대한 강의를 해주셨다.
덕분에 알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농병대원들 앞에서 지식을 뽐내며 으쓱거릴 수 있게도 되었다.
한데 마왕께서는 아무런 티를 내지 않으신다.
마치, 자신이 이쪽을 교육한 적이 없다는 듯이!
"...."
아아, 마왕 크레도스여.
나의 주군이시여.
제가 몰랐습니다.
당신의 이 깊은 뜻을.
당신이 품은 이 배려를.
조금도 모르고서, 함부로 삿된 마음으로 당신을 대하였던 저를, 부디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옵소서.
하르토크는 감사의 마음과 짜릿한 허영을 함께 만끽하며 감자밭을 돌았다. 그때마다 농병대원들이 아기새가 지저귀듯 '수석조장님!'을 찾아댔다. 역시나 그때마다 하르토크의 대뇌피질에서 도파민이 팡팡 터졌음은 물론이었다.
그리고, 김장철은 그런 하르토크를 말없이,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서 쳐다보고 있었다.
딩동!
상쾌한 알림음.
함께 떠오르는 메시지.
[혈안(Lv.1) 스킬이 발동됩니다.]
[주시 대상 : 하르토크]
[하르토크의 현재 상태와 심리, 향후 6시간 동안 변화할 심리를 간파합니다.]
[하르토크는 정서적으로 매우 고양된 상태입니다. 그동안 메말라 있던 사회적 인정욕구에 도파민 샤워를 당하고 있는 그는, 오늘 자신을 찾는 이가 사라질 때까지 의욕적으로, 끝없이, 감자밭을 시찰할 것입니다.]
"핫."
웃음이 나왔다.
제대로다.
딱 좋다.
'설마하니 하르토크에게 저런 면이 있었을 줄은.'
모략가인 줄만 알았던 하르토크.
게임에서도 가장 악랄한 패턴을 보유한 하르토크.
그저 냉혹하고 오만한 성격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래서 녀석이 감화될 일도, 친해질 일도 딱히 없을 거라고 여겼는데.
기대 자체를 하지 않았는데.
'조금은 뜻밖이라고 해야 하나.'
알고 보니 인정욕구에 목말라 있던 엘리트라니.
생각보다 인간적인 면이었다.
그걸 활용했다.
가려운 곳을 살살 긁어주듯. 혹은 버스에 탔는데 잔액 부족이 떠서 쩔쩔매는 사람에게 도움의 손길을 넌지시 건네듯.
그렇게 슬쩍 치켜세움을 시전했을 뿐이었다.
한데 효과가 생각보다 엄청났다.
'그 효과를 당장 확인할 수 있어서 더 좋고.'
김장철은 핏발이 선 눈두덩을 손등으로 비벼대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어쩌다 보니 얻게 된 '혈안' 스킬.
이건 쓰면 쓸수록 유용했다.
일기예보를 시전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주변인들의 심리를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이 너무나 좋았다.
물론 단점이 없는 건 아니긴 했지만.
...따다닥, 딱, 따닥, 딱...!
눈두덩을 비비고 있는데 옆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싶어서 돌아보니 아수라트였다. 어쩐지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한.
"...왜 그러냐?"
"아,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왜 자꾸 신경 쓰이게 옆에서 이를 딱딱 부딪쳐대는 거냐고."
"어, 그건, 날씨가 좀 추워서...."
"춥기는 개뿔. 해가 머리 위에 떠 있는데?"
"...."
"혹시 나 때문이냐?"
"아닙니다!"
화들짝 놀라며 대답하는 아수라트.
아무래도 이쪽 때문이 맞는 것 같다.
특히, 아마도....
"내가 하르토크를 계속 빤히 쳐다봐서 그러는 거야? 그런 내 모습이 이상해?"
"이, 상하지 않습니다."
"그래? 그런데 너는 왜 북주기를 안 하냐?"
"예?"
"다들 하는 북주기 작업, 왜 안 하냐고."
"어, 그건... 방금까지 하고 있었...."
"있었는데? 지금은?"
"...하겠습니다."
아수라트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밭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보자니 뭐랄까.
"스톱."
녀석을 불러세웠다.
그리고 명령했다.
"잠깐 거기 움직이지 말고 서 있어봐."
"예?"
"쓰읍."
"...."
우물쭈물하며 선 아수라트.
한때 유혈의 사천왕이라 불렸던, 가장 공포스러웠던 존재.
녀석을 빤히 쳐다보았다.
눈에 핏발이 서도록.
200초 동안.
"...."
이쪽의 눈빛을 받으며 더욱 창백해지는 아수라트의 낯빛.
하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딩동!
[혈안(Lv.1) 스킬이 발동됩니다.]
[주시 대상 : 아수라트]
[아수라트의 현재 상태와 심리, 향후 6시간 동안 변화할 심리를 간파합니다.]
[아수라트는 당신에게 겁을 먹고서 정서적으로 매우 위축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또한, 지금은 북주기 작업 때문에 일어났다 앉았다를 반복하느라 다리가 아프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향후 그는 아픈 다리를 움켜쥐며, 회복의 권능을 지닌 자신이 왜 이렇게 아픈 걸 못 참는 걸까, 라고 스스로를 자책하게 될 것입니다.]
"...."
또, 조금은, 뜻밖이다.
김장철은 혈안 스킬의 결과창을 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뭐야. 아수라트 이 녀석, 엄살쟁이였어?'
여타 마족과의 비교를 불허하는 경이로운 회복력. 야차처럼 살벌하게 맞딜을 하는 전투 스타일.
그래서 이놈, 무통증 환자는 아닐까 라고 생각했는데.
한데 까보니까(?) 반대였다.
'이놈... 사실은 매번 아프고 힘든 거 싫다고 속으로 징징거리고 있던 거야?'
아무래도 그랬던 것 같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이봐, 아수라트."
"예, 옙?"
"벼락, 맞기 싫지?"
"...."
"싫잖아. 다 알고 있어."
"...."
"그래서 하는 말인데. 오늘 여기부터 저어기까지 혼자서 북주기 다 해내면 말이다. 내일까진 피뢰침 면제권 줄게."
"...예?"
"아무래도 피뢰침으로 매달려서 벼락을 맞는 것보다는 밭일을 하면서 무릎이 좀 시큰거리는 쪽이 낫지 않을까. 안 그래?"
"그, 그렇... 습니다?"
"그렇지?"
"예, 옙."
두근... 두근....
아수라트는 기대감으로 두근두근 설레어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문득, 생각했다.
'어, 왜지. 왜 갑자기 이런 제안을... 왜 나한테 잘해주는 거지?'
혹시 또 무슨 꼬투리를 잡으려는 건가.
아니면 그냥, 뭘 잘못 먹었나.
선뜻 짐작이 되지 않았다.
예측도 안 되었다.
하지만 확실한 게 하나 있긴 했다.
그건 바로, 오늘 북주기 작업을 열심히 하면 내일까지는 벼락을 맞지 않아도 될 거라는 사실.
"...당장 하겠습니다!"
저도 모르게 솟구치는 의욕을 느끼며, 아수라트가 감자 줄기 밑동에 흙을 덮어갔다. 지치는 줄도 모르고서 구슬땀을 흘렸다. 톡톡, 떨어진 땀과 정성이 햇볕 아래에서 영글어갔다.
시간이 흘렀다.
두어 번의 추가적인 북주기 작업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감자밭에 꽃이 피었다.
농병대의 눈에도 감격이 피어났다.
'꽃이다....'
'이렇게 많은 꽃이....'
'내가 이런 말을 입에 담을 줄은 몰랐지만....'
예뻤다.
아름다웠다.
하여 믿기지가 않았다.
아무것도 자라지 못하는 버려진 땅.
그렇게만 믿으며 살아왔던 자신들의 땅.
헛된 희망이라 여기며 이곳을 일구었더랬다.
과연 이게 가능할까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수많은 의구심.
더 많은 조바심.
불안에 노심초사했던 날들.
때로는 싹이 트기를 바랐고.
혹여나 줄기가 넘어질까 걱정했고.
그러다 끝내 수확 없는 계절을 맞이할까.
한때의 희망이 헛된 회한으로 끝이 날까.
가족의 주린 배를 바라보며 얼마나 애가 탔는지.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눈물이, 환희가, 흘렀다.
"...!"
손을 잡고서.
누군가는 얼싸안고서.
밭에 피어나기 시작한 꽃을 맞이하였다.
농병대원들도.
냉혹한 사천왕들도.
모두가 한마음이었다.
그리고 그걸 보던 김장철이 한마디 했다.
"야, 뭣들 허냐? 꽃 따자."
"...."
"뭘 그렇게 쳐다봐. 따야지. 안 따면 저놈의 꽃이 알감자에 갈 양분 다 빨아먹을 건데?"
"...."
"예쁜 게 밥 먹여주냐?"
"...."
감격의 와중에 찬물이 촵.
낭만의 물결에 일침이 챱.
모두는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자신들의 마왕이 극한의 효율충이라는 냉혹한 진실을.
38화. 마왕께서 지켜보고 계십니다 (3)
낭만은 아름답다.
모두의 가슴을 촉촉하게 적신다.
때로는 구성원의 마음을 하나로 모은다.
그렇기에 낭만이 모두에게 칭송받을 수 있....
"기는 개뿔."
"...."
"낭만? 그게 뭔데? 다들 꽃 안 따?"
"...."
농무룩.
농병대원들의 어깨가 추욱 쳐졌다.
그리고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품었다.
하아.
아무것도 못 자라던 땅에서 제대로 키운 첫 작물인데. 내 손으로 키우고 피워낸 인생, 아니, 마생 첫 꽃인데.
좀 구경한다고 닳나.
하루만 늦게 따면 안 되나.
그래도 정도는 괜찮을 거 같은데.
하지만 김장철에게는 택도 없는 소리였다.
"자, 다들 복창한다. 꽃을 안 따면 땅속의 알감자가 작아진다!"
"꽃을 안 따면... 땅속의 알감자가 작아진다아...."
"목소리가 작다. 꽃을 안 따면 집에 있는 내 새끼가 굶는다!"
"...!"
"그러니까 다들 실시!"
파파팍!
농병대원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집에 있는 내 새끼.
하루가 다르게 쑥쑥 크는 내 새끼.
고놈이 배를 곯는다고?
배고파서 찡찡 운다고?
그건 못 참지.
다들 감자밭으로 돌진했다. 줄기마다 하늘하늘 피어난 꽃을 거침없이 떼어냈다.
물론 한편으로는 여전히 남아 있는 감성적 낭만에 눈물을 찔끔 머금긴 했다. 솔직히 아까웠다. 너무 예뻤으니까.
그건 사천왕도 마찬가지였다.
"...."
쓰읍.
그냥 따서 다 버리기엔 좀 많이 아까운데.
하르토크는 농병대원들의 손길에 이슬ㅌ톡처럼 톡톡 따여 가는 꽃을 보며 생각했다. 자신이 이런 생각을 품을 줄은 몰랐지만. 그게 좀 이상하고 어색하지만.
솔직한 감상이 그랬다.
예쁘다고. 이 버려진 땅에서 볼 줄은 몰랐던 광경이라고. 그래서 조금 더 보고 싶고, 아깝노라고.
그런 기분은 나머지 사천왕들도 비슷했다.
"...."
아수라트는 생각했다.
저거, 내가 다리 아프게 쪼그려 앉아가면서 피워낸 꽃인데. 몇 송이만 따로 빼돌릴까. 어쩌면 저거, 달여서 먹으면 근육통에 제법 효과가 있을지도.
"...."
시르케는 생각했다.
저 꽃들 저거, 전부 내가 직접 열심히 정성껏 자른 씨감자에서 피어난 결과물인데. 지금 당장이라도 마왕을 말려볼까. 아니면 화를 내볼까. 그도 아니라면 몇 송이 꺾어다가 방에 장식할까. 아냐. 괜히 그랬다가 방만 지저분해질지도.
"...."
바할은 생각했다.
아, 배고파.
그리고 제피로스가 말했다.
"주군?"
"어."
"효율을 추구하시는 모습은 좋습니다."
"응 칭찬 고마워."
"하지만 한편으로는 모두의 사기가 떨어지고 있는데 말입니다."
"응 그런가."
"예, 확실히."
"꽃을 놔두면 알감자가 작아질 건데도? 수확량이 줄어들 건데도?"
"그래도 약간의 융통성을 발휘해보심은 어떨까요."
"어떤 융통성?"
"효율을 위해 대부분의 꽃은 따서 제거하되, 감상용으로 몇 송이 정도는 남겨 두는 건 어떨까 합니다만."
"흐음. 감상용이라."
"주제넘은 말씀이었다면 미리 송구합니다."
"송구하긴. 본심도 아니면서."
"들켰습니까?"
"뻔뻔도 하셔라."
김장철은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리고 지시했다.
"나, 마왕 크레도스는 꽃을 예뻐하고 사랑하는 모두의 마음에 감탄했다. 또한, 모두의 아름다운 마음씨를 존중하기로 결심했다. 하여 감자꽃을 남기는 것을 허락한다."
"...!"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
이게 실화인가. 웅성웅성.
방금 제대로 들은 거 맞니. 수군수군.
세상에 우리 마왕님이 어쩐 일로. 조잘조잘.
다들 점심시간 매점 오픈런을 뛰는 전투력 극강의 여고생처럼 놀라워하며 재잘거렸다.
한데 그때였다.
모두의 야물딱지게 설레고 부푸는 기대감에 찬물을 확 끼얹는 김장철의 드리프트성 발언이 이어졌다.
"딱 한 송이다."
"...!"
"감자밭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딱 한 송이만 남기는 것을 허락한다."
"...!"
미친.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모두는 마왕에게 따져 묻고 싶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럴 수는 없었다.
하여 모두가 고심을 거듭했다.
딱 한 송이.
감자밭에서 제일 예쁜 한 놈.
어떤 녀석을 남겨야 할까.
이거 실화인가. 웅성웅성.
방금 내 귀가 접수한 소리가 맞나. 투덜투덜.
역시나 우리 마왕님이 그럼 그렇지. 시벌시벌.
다들 금요일 저녁의 청천벽력같은 사내 전체회식(전원 강제 참석) 공지를 들은 무기력한 직장인들처럼 스트레스에 절은 얼굴로 투덜거렸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까라면 까야 하는 것이 조직의 법칙!
강자의 말이 곧 진리인 것이 버려진 땅의 규율!
사천왕과 농병대 전원이 머리를 모았다.
지혜를 보탰다.
눈썰미를 뽐냈다.
감자밭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 한 송이를 마침내 골라내어 남겼다. 드넓고 광활한 밭 전체에서 그놈, 딱 한 송이만.
"후우...."
모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유일하게 남은 한 떨기 감자꽃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모두의 마음이 하나가 되었다.
그래.
네가 우리의 희망이구나.
우리가 피워내어 살아남은 마지막 한 송이.
오직 너만이, 작고 가녀린 꽃잎으로나마 버려진 땅의 황폐함을 씻어주고 있구나.
"...."
가슴이 찡해졌다.
눈물샘이 뻐근해졌다.
그 순간이었다.
"앗? 돌풍이다."
휘오오, 푸화아아아-!
김장철의 말과 함께, 마왕성 차빈 데 우안타르 지역 특유의 돌풍이 갑작스럽게 생겨났다. 감자밭 일부를 펄럭펄럭 뒤흔들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자리가 마지막 한 송이 감자꽃이 남아 있던 자리였다.
푸휘이이이...!
갑작스럽게 나타났던 돌풍이 갑작스럽게 사라졌다. 정성껏 남겨 두었던 감자꽃이 정타를 맞고 사라졌다.
"...."
가슴이 뻐근해졌다.
눈물샘이 찡해졌다.
김장철이 태연하게 말했다.
"감자꽃 시즌 끝. 종료. 땅땅땅."
"...."
"자아, 다들 일하자, 일."
"...."
"야야. 꽃은 어차피 내년에도 펴."
"...."
"그리고 그 꽃은 모두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거야. 오케이?"
"...."
"하르토크! 물 뿌려라! 내가 뭐랬지!"
"꼬, 꽃이 피는 이 시기가 제일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 어째서?"
"알감자가 실하게 크기 위해서는 다량의 수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취. 바로 그거지!"
"...."
하르토크는 저도 모르게 울먹이며 안개를 불러일으켰다.
왜인지 모르겠는데 슬펐다. 고작 꽃 한 송이 때문에 서러웠다. 이런 자신이 이상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랬다. 다른 사천왕들과 농병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김장철만은 예외였다.
"아이고 날씨 좋다아. 딱 맞게 돌풍도 딱딱 불어주고. 먹지도 못할 꽃도 똑똑 떼다 주고."
"...."
나빠.
너무해.
해서 서러웠다.
그래도 어쩔 수가 없다.
먹고 살려면 일을 해야 하니까.
감자 농사, 망하면 절대로 안 되니까.
모두의 가슴속에 맺혀 멍울지는 회한 서린 한숨! 그와 함께 땅속 알감자가 토실토실 야물딱지게 영글어갔다.
그리고 그날 오후, 뜻밖의 인물이 마왕성을 방문했다.
쇠락의 늪지의 주인.
2성주, 플라누스였다.
♣
"...어, 그래. 감사 인사를 하려고 여기까지 왔다고?"
"그렇습니다. 마왕이시여. 또한, 늪지를 침범하였던 3성 군단의 잔당을 모두 몰아내었기에, 그 일 또한 보고를 드리기 위함입니다."
꾸드득...!
이곳은 마왕의 권좌가 있는 홀.
2성주 플라누스가 육중한 몸을 굽혔다.
그러자 그의 몸통이 나무 비틀리는 소리를 냈다. 당연한 일이었다. 2성주의 몸 자체가 나무줄기였으니까.
"...."
김장철은 흥미 돋는 시선으로 2성주를 바라보았다.
'3성주도 그렇더니, 실물이 훨씬 위압감이 있네.'
실제로도 그랬다.
게임을 하며 화면을 통해서 보던 모습.
그것과 실물로 맞닥뜨렸을 때 주는 느낌.
둘의 차이는 어마어마했다.
특히 눈앞의 2성주는 더더욱 그랬다.
'식충식물 컨셉이라서 그런가.'
땅을 딛고 걷는 여덟 갈래의 뿌리.
그 위로 놓인 육중하고 견고한 줄기 몸통.
몸통에 상흔처럼 새겨진 옹이구멍과 비틀린 굴곡이 눈코입을 이루고 있었다.
게다가 열다섯 개의 가지 끝에는 식충식물 특유의 다양한 구조물이 달렸다. 네펜데스의 통발이라거나, 파리지옥의 가시 트랩이나, 끈끈이주걱의 끈끈이 같은 것들 말이다.
'살벌하구만.'
사실 2성주가 이런 모습인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2성주의 구역인 쇠락의 늪지.
그곳이 유독성 물질로 오염된 지대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평범한 땅이나 습지에서처럼 정상적으로 영양을 흡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저렇게 뒤틀리고, 비틀어진 모습의 육식성 식물이 되어 버린 것이겠지. 2성주도. 그가 이끄는 2성 군단병들도. 모두.
"...."
뭐, 어쨌건.
게임 속에서 2성 군단 지역을 휘젓던 기억의 감상은 여기까지. 잠깐 불러일으켰던 셀프 상념에서 벗어난 김장철은 2성주를 향해 물었다.
"그래서 용건은? 그게 끝?"
"...예?"
"다른 용건은 더 없고?"
"아... 예. 그렇습니다."
"나한테 감사를 하려고 그 깎아지른 단애를 올라왔다고?"
"그렇습니다, 마왕이시여."
"후우. 지극정성이네."
"당연한 감사일 뿐입니다. 마왕께서 시의적절하게 도착하여 구원해 주시지 않으셨다면, 저와 저의 군단은 지금쯤 3성주의 발아래에서 목숨을 구걸하고 있었을 터이니까 말입니다."
"아냐아냐. 그래도 좀 더 잘 버틸 수 있었을 거야."
"아닙니다. 저희는 정말로 절박했습니다."
"에이씨. 부담스럽게스리."
"그래도 감사의 마음은 받아주시지요."
"말로만?"
"예?"
"...으음, 아니다. 됐다."
김장철은 어색하게 웃어 버렸다.
그리고 잠깐 생각했다.
짜식, 그거.
빈손이 뭐냐, 빈손이.
감사를 하려면 과일바구니나 음료수, 아니, 하다못해 비타500만 세트라도 좀 사들고 와야 하는 거 아닌가.
새삼스럽게 사무치는 K-예절에 대한 그리움!
김장철은 자연스럽게 쑴펑쑴펑 피어나려는 김치 유교맨의 태생적 습성(?)을 애써 억누르며 말했다.
"그래도 이렇게 감사를 표해준다니, 나로서도 고맙군. 든든하고."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마왕이시여."
"그래. 그럼 용건을 다 봤으니 이제 내려가야겠군."
"예, 그럴 생각입니다."
"내가 배웅하도록 하지."
"예? 어찌 제가 감히 마왕님의 배웅을...."
"괜찮아. 근처까지만."
"아, 예...."
내가 배웅을 하려는 건 결코 네가 빈손으로 와서가 아니다. 절대로, 빈손으로 온 네가 살짝 아니꼬워서 확실하게 쫓아내려고 이러는 건 더더욱 아니다.
김장철은 사람 좋게 웃으며 2성주를 마왕성 밖으로 배웅했다. 드넓은 감자밭을 지나쳤다. 그동안 감자밭을 둘러보는 2성주의 눈길에 연신 감탄이 배어났다.
"이런... 밭을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버려진 땅에서 말입니다."
"그런가?"
"예. 아까 처음 올라와서 봤을 때는 저도 모르게 한참 넋을 놓고 있었습니다."
"많이 놀랐나 보군."
"예. 여긴 버려진 땅이니까요."
그렇다.
여긴 버려진 땅이니까.
밭이라는 것이 생길 줄은 몰랐다. 하여 마왕의 농사 선언도 그저 핑계일 줄로만 알았다.
인간계 침공을 중단하는 것을 변명하려는 핑계.
고작 그런 것일 줄 알았는데.
그러했는데.
설마하니 마왕 크레도스가 정말로 농사를 지어낼 줄이야. 심지어 이렇게 비옥한 밭을 일구어낼 줄이야.
이렇게 확인하러 와보길 잘했구나.
"...."
2성주는 가만히 생각했다.
내가 지내던 맹독성 늪과는 달리 너무나 비옥해 보이는 토지. 영양과 생명력으로 충만한 땅.
만약....
내가 이 비옥한 땅을 독차지하게 된다면.... 비루해진 내 뿌리로나마 이 땅의 양분을 빨아들일 수만 있다면....
'내가 버려진 땅의 그 어떤 이보다도, 크레도스보다도 더 강력해질 수 있을 텐데.'
그러면 내가, 권좌를 차지할 수도 있을 텐데.
"...."
꽈득!
저도 모르게 피어난 욕심.
몰래 품어보게 되는 역심.
하지만 그 순간의 2성주, 플라누스는 몰랐다.
겉으로는 충직하고 예의 바르게 행동한 자신. 그러나 입으로는 감사를 표하면서도 빈손으로 와 버린 자신.
하여 살짝 빈또가 상해 버린 마왕의 눈길이, 이미 수십 초 넘게 깜빡이지 않고서 자신을 향해 있다는 날카로운 사실을.
39화. 배덕의 권좌 (1)
진실의 기록은 종종 날카롭다.
그것이 영광의 역사라 할지라도.
혹은 퇴락의 기록에 불과하여도.
"...."
2성주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열다섯 갈래의 가지를 부르르 떨었다.
오늘, 예기치 않게 목격해 버린 마왕성의 풍경. 설마 진짜일까 싶었는데 엄연한 사실인 감자밭.
상상 밖의 비옥한 풍경 때문이었다.
문득, 2성주는 자신의 묘목 시절을 떠올렸다.
'천 년 전, 그 시절 쇠락의 늪지는... 맹독성 늪지대가 아니었지.'
푸르렀다.
청명했다.
쇠락의 늪지가 아닌, 은반의 호수라 불리던 시절.
맑디맑은 호수에 수백 종의 물고기와 생물이 어우러져 살았더랬다. 덕분에 당시까지만 해도 호수는 버려진 땅의 가장 풍족한 땅이자, 모든 마족의 먹거리를 생산하는 보고와도 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전전대 2성주의 욕심, 혹은 지나친 의욕이 모든 것을 망쳤던가.
전전대의 2성주는 생각했다. 호수가 맑고 어자원이 풍부한 것은 맞는데, 물고기의 씨알이 너무 작은 것 같다고. 좀 큼직한 어종이 풍부해지면 좋겠다고.
하여 인간계의 카일 강에서 큰 물고기를 구해왔더랬다.
이름은 카일 농어.
성체의 몸길이 5미터에, 체중은 1톤까지 육박하는 괴물 어종. 그놈들을 호수에 풀었다. 그놈들이 호수에 퍼졌다.
재앙의 시작이었다.
원래 호수에 서식하던 자그마한 생물들은 카일 농어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농어를 피하는 방법도 몰랐다.
속수무책으로 사냥당했다.
멸종했다.
수십 종의 생물들이 차례차례.
그렇게, 호수의 먹이사슬 생태계가 뿌리부터 박살이 났다.
특히, 멸종된 어느 생물은 호수의 독성 수초를 먹으며 살아갔더랬다. 그 생물이 사라지자 독성 수초가 호수에 무한정으로 증식하게 되었다.
호수에 독이 퍼졌다.
죽음의 물이 되어갔다.
'결국... 100년이 흘렀을 무렵엔 독성을 중화할 생물들도 카일 농어에게 잡아먹혀 멸종됐고, 먹이가 없어진 그 카일 농어마저 멸종해 버렸지....'
그렇게 호수는 끈적한 맹독성 늪이 되어 버렸다.
그것이 자신의 묘목 시절, 약 900년 전의 일이었다.
"...."
2성주는 회한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기에 그는 두 가지 사실을 몰랐다.
한 가지는 바로, 자신이 겪은 호수의 일이 현실 지구의 아프리카 빅토리아 호수에서 영국인들이 저지른 파괴적 생태계 교란행위와 거의 똑같다는 것이었다.
나머지 한 가지는 바로, 속으로 딴마음을 품기 시작한 자신을, 마왕이 수십 초째 눈도 깜빡이지 않고서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쓰읍. 이놈 이거, 아무래도 좀 이상한데?'
정말로 이상하다.
아니, 좀 수상하다.
김장철은 의심이 쑴펑쑴펑 배어나는 눈길로 2성주의 옆모습을 째릿 쳐다보았다.
혈안 스킬의 발동을 위해서.
몰려오는 안구건조증을 참아내면서였다.
'진짜 좀 이상해. 특히 눈빛이 그렇단 말이지.'
감자밭을 둘러보는 2성주의 눈빛.
정말로 심상치가 않았다.
한편으로는 익숙한(?) 눈빛이었다.
저런 눈빛을 어디서 봤더라.
그래. 맞다.
교수들.
내 연구성과에 숟가락만 착 올리려던 교수들이 저런 눈빛을 보이곤 했지.
그러니까 저건 그거다.
조별과제에서 공짜로 버스를 타려는 놈. 혹은 남의 떡이 커 보이는 놈. 그래서 뭔가를 날로 처먹으며 욕망의 정주행을 달리려는, 그런 놈이 종종 보이곤 하는 눈빛.
"...."
설마.
내 감자밭을?
깊은 산 속 옹달샘처럼 쑹컹쑹컹 솟구치는 의심!
한데 그때였다.
휘우우웅!
"...!"
바람이 불어왔다.
흙먼지를 몰고 왔다.
대략 130초쯤 깜빡이지 않고 있던 김장철의 안구에 흙먼지를 확 뿌렸다.
눈을 감을 수가 없으니 피할 수도 없었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고 말았다.
"읏!"
"왜 그러십니까?"
"아, 잠깐. 눈에 먼지가 들어가서."
김장철은 황급히 눈을 떴다. 하지만 이미 혈안 스킬은 발동이 취소가 되어 버린 후였다.
2성주가 공손하고 예의 바른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이제 그만 들어가십시오, 마왕이시여. 여기까지 저를 배웅해 주신 것만으로도 더없는 영광입니다."
"어, 계속 더 같이 가도 되는데."
"아닙니다. 이미 충분히 멀리 나왔습니다. 저는 이만 내려가 보겠습니다."
"...그래."
2성주가 정중히 예를 표했다. 그 몸짓과 표정으로만 보면 이렇게 충직한 놈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좀 더 찜찜해졌다.
속마음을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게 잘 되지가 않았다.
'어오, 빌어먹을 흙먼지!'
그냥 평소 상태에서도 200초 동안 눈을 안 깜빡이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물며 지금처럼 흙먼지가 왕창 들어와 버린 직후면?
거의 불가능했다.
200초는커녕 20초도 뜨고 있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런 이쪽의 애타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인사를 마친 2성주는 단애를 향해 멀어져 갔다. 식물의 외형과 다르게 생각보다 제법 빠른 속도였다.
"...쯧."
결국, 김장철은 혈안 시전을 포기했다.이미 거리가 너무 멀어졌다.
이제 와서 점처럼 작아진 놈의 모습을 200초 동안 노려봐도, 결국엔 초점이 하늘에 잡혀 일기예보만 시전될 테니까.
'저놈 암만 봐도 눈빛이 슬쩍 이상하고 꼬롬하고 그랬는데. 뭐, 일 생기면 또 늪지로 다이빙 뛰어서 장작패기 하면 되겠지.'
지금 뒷북 치듯이 쫓아가 혈안을 시전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안 되는 일은 잊는 게 정신건강에 좋다.
대신 지금 할 일에 집중하는 게 최선이다.
김장철은 소중한 감자밭을 향해 걸음을 돌렸다.
♣
시간이 쭉쭉 흘렀다.
꽃 따기가 끝난 감자밭에 매일 넉넉한 물이 뿌려졌다.
농병대 수석조장이 된 하르토크는 그 누구보다도 물 뿌리기에 적극적이었다.
당연했다.
그가 자신의 특기인 안개를 일으켜 밭을 촉촉하게 적실 때마다, 농병대원들이 그의 이름을 소리높여 환호했으니까.
뿌려지는 안개의 양만큼.
감자밭이 촉촉해지는 만큼.
하르토크의 자존감이 탱글탱글하게 부풀었다. 도파민 파티 행복지수가 극적으로 상승했다. 마왕의 권좌를 노리겠다는 야망이 칠성장어 승천댄스를 추며 사라져갔다.
감자밭에 진심인 이는 이제 하르토크뿐만이 아니었다.
"하르토크. 너만 물을 뿌릴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안개를 뿌리는 하르토크 옆에서, 시르케가 자신의 얼음 칼날을 스르릉 뽑아내며 말했다. 그리고 감자밭 주위를 빠르게 걸으며 여섯 자루의 얼음칼날을 허공에 휘둘러댔다.
스사삭! 츠스삭! 츠삭!
얼음칼날이 공간을 가를 때마다 주위의 공기가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공기 중의 수분이 응결되었다. 응결된 수분이 지면으로 내려와 감자잎과 줄기에 맺혔다.
그 진기명기를 목격한 바할이 외쳤다.
"시르케! 위험하게 감자밭에서 칼춤 춘다아! 바할! 감자밭 지킨다!"
콰앙-!
시르케의 행동에 바할이 기겁했다.
저러다 행여나 칼날이 감자 이파리를 다치게 할까. 검기에 줄기가 상하지 않을까. 나름 위기(?)를 감지한 바할이 시르케에게 돌진했다.
덕분에 진정한 위기를 느껴 버린 아수라트가 나섰다.
"바할, 이 미친놈이!"
감자밭을 가로지르며 쑥대밭을 만들기 직전, 아수라트가 앞을 가로막았다. 바할과 부딪, 아니, 덤프트럭 교통사고를 당했다. 사지를 나풀거리며 튕겨 날아갔다.
투컹!
"...커억!"
"어? 연약한 아수라트! 다쳤다! 바할! 구한다!"
"저리 가! 공주님 안듯이 안지 마! 미친놈아!"
"아수라트! 무사하다! 바할! 기쁘다!"
"놓으라고!"
"바할! 놓는다!"
"...컥! 후욱, 이 멍청한 놈이."
"아수라트, 아직 아픈가?"
"당연하지, 미친놈아!"
"그래서 감자잎처럼 얼굴이 누렇게 뜬 건가?"
"내 얼굴이 어디가 누런... 뭐?"
"아수라트! 얼굴 누렇다! 시들어가는 감자 이파리 같다!"
"...잠깐만? 뭐? 감자 잎이, 누렇다고?"
"그렇다!"
"어느 감자 잎이...."
아수라트는 바할의 외침에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감자 잎이 누렇게 떠서 시들고 있다고? 뭐지. 거짓말인가. 아닌데. 바할은 멍청해서 거짓말도 잘 못하는 놈인데.
그런데.
"...어? 어어?"
있다.
바할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까 진짜 있다.
놈의 말대로... 누렇게 뜬 잎이 보인다!
"비상! 비사아앙!"
아수라트가 다급하게 외쳤다.
신경전을 벌이던 하르토크와 시르케가 달려왔다. 표정이 심각해졌다.
농병대원들 사이에도 동요가 일어났다. 감자 잎이, 멀쩡하던 감자 이파리가... 정말로 누렇게 떴다! 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당장 시들어 버릴 것처럼!
"...이라는 보고가 빗발치고 있습니다, 주군."
"응. 그래서?"
"사천왕 전원이 심각한 기색으로 면담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응. 그리고?"
"거의 모든 농병대원들이 매우 겁을 먹고 있으며, 일부 대원들은 흉작의 공포와 불안감에 휩싸인 나머지 그 자리에 주저앉아 통곡하는 이도 속출하고 있습니다."
"음. 그렇군."
"주군?"
"어. 왜."
"어째서 태평하신 겁니까?"
제피로스는 진심으로 물었다.
방금 마왕에게 올린 자신의 보고.
그건 결코 장난도, 농담도 아니었다.
현재 마왕성의 모든 마족들이 크게 동요하는, 초유의 심각한 사태였다.
"감자잎이 눈에 띌 정도로 누렇게 변했습니다. 처음에는 한두 줄기만 그런 듯했는데,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누렇게 뜨는 현상이 감자밭 전체로 번져나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응. 그럴 거야."
"이건 그저 가볍게 치부할 일이 아닌... 예?"
"그럴 거라고."
"...."
주군의 저 심드렁한 대답.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말투. 표정. 눈빛.
저건 대체 무슨 뜻일까.
"예상하고 계셨던 겁니까?"
"으음."
"어떻게 말입니까?"
묘한 일이다.
조금 전, 보고를 올리러 걸음을 재촉할 때만 해도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는데. 사천왕과 농병대가 그랬던 것처럼 걱정이 잔뜩 들었는데.
그런데 지금 주군의 태도를 보니까 안심이 된다.
누렇게 시들어가는 감자밭?
별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이러면 안 되는데.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런데 주군께서 여전히 태평한 모습이어서. 그런 모습을 보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렇게... 안심이 된다고?'
나는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어느새 주군을 이렇게나 믿게 된 걸까.
모르겠다.
이 믿음에 얼마나 기대어야 하는 건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때였다.
김장철이 여전히 심드렁한 투로 말했다.
"원래 그런 거야. 땅속 줄기에 맺힌 알감자가 영양을 쭉쭉 빨아먹으니까. 그러니까 잎이고 줄기고 전부 누렇게 뜨는 거지."
"...오히려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뜻이신 겁니까?"
"그렇지. 말하자면 수확의 시기가 무르익어간다는 신호랄까."
"수확...."
"그러니까 다들 호들갑 떨지 말고.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하지도 말고. 알감자가 튼실하게 맺히기를 기원하라고 전해."
"...알겠습니다. 그런데, 주군?"
"으음?"
"'원래' 이런 거라는 말씀은... 전에도 감자를 수확한 적이 있으신 겁니까?"
"...."
"주군?"
"쓰읍. 당연히 없지."
"그런데 이런 사실을 어떻게...."
"알았느냐고? 전에 말했잖아? 꿈에서 강의 듣는다. 왜. 이상해?"
"예. 충분히 이상합니다."
"그럼 그렇게 마왕실록에 쓰든가."
"당연히 기록으로 남길 겁니다."
"그래. 그럼 가서 일 보셔. 다들 안심시켜 주고."
"...알겠습니다, 그럼."
탁.
문이 닫혔다.
제피로스가 떠난 권좌에 홀로 남았다.
권좌에 몸을 기대며 김장철은 생각했다.
'암만 생각해도 이 권좌, 너무 불편해.'
농담이 아니다.
진짜다.
사실은 감자가 누렇게 뜨는 것보다 이게 더 심각한 문제다. 이유는 간단하다. 마왕에겐 침실도, 침대도 따로 없기 때문이었다!
"...."
역대 마왕들은 그럼, 침대도 없이 이 권좌에 앉아서 먹고 자고를 다 했던 걸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이곳에 온 이후로 자신도 계속 그렇게 지내고 있으니까.
'침대 하나 짜야겠어. 기왕이면 킹 사이즈로.'
매일 권좌에 구겨져서(?) 잠드는 삶.
내 허리 디스크는 무사한 걸까.
아니, 일단 감자 수확부터 신경 쓰자.
침대를 마련하는 건 그다음에....
...스르르.
문득, 눈이 감겨왔다.
전신이 조금 나른해졌다.
감자가 영글어간다는 소식을 들어서일까.
마침내 수확이 코앞으로 다가왔다는 사실 때문일까.
내내 조여져 있던 신경이 조금은 풀어지는 느낌이 왔다. 함께 졸음도 몰려왔다.
생각해보니 이곳에 온 뒤로 한 번에 두 시간 이상을 자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권좌가 불편한 탓도 있었지만, 매일 잔뜩 긴장한 채로 지낸 탓이 더욱 큰 거겠지.
그러니까.
'조금은... 눈 좀 붙일까.'
어쩌면 오늘은 편안한 꿈을 꿀 것 같다. 기왕이면 행복했던 기억을 잠시나마 엿보게 해주는 꿈이었으면 좋겠다.
돌아가신 할머니라든가.
가난해지기 전의 아주 어린 시절이라든가.
딱 한 번 가봤던 가족여행의 기억이라든가.
뭐, 조금은 궁상맞고 뻔하지만, 그래서 더 의미가 있는, 그런 추억들. 돌이켜볼 때마다 행복해지는. 그래서 꿈속이 아닌 맨정신으로는 상대적으로 서글퍼져서 잘 안 돌아보게 되어 버린, 그런 나날들.
그런 꿈이 다가와 주기를 바라던 순간이었다.
투콰학-!
"...!"
권좌 아래 바닥을 부수고 솟구친, 거대한 파리지옥 줄기가 전신을 휘감아 왔다.
40화. 배덕의 권좌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