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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 - 30-40

30화 마스터의 제자입니다.

나도, 칼도, 서로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하지만 아지트에 온 순간, 긴장이 풀리면서 짙은 피로감이 몰려왔다.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우리는 잠자리에 들었다.

시원한 들판, 밤하늘에는 별빛이 쏟아졌다. 조금 전까지 지옥을 경험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눈꺼풀이 스르륵 감겼는데, 엘튼이 주변 경계를 위해 암살자들을 호출하는 모습이 보였다.

저들을 믿고 자도 괜찮은 걸까. 뒤통수치면 답이 없는데, 사실 알아도 답이 없는 건 똑같았다.

드르렁―!

"...."

멀찍이서 대차게 코를 골며 자는 칼이 보인다.

괜한 걱정을 한 건가?

난 한숨을 내쉬며 두 눈을 감았다.

"하암!"

라웁 숲에서 악몽 같았던 첫날이 지나갔다.

걱정했던 것이 무안할 만큼 평화로운 아침을 맞이했다.

시원한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개울가 소리.

새 지저귐을 따라 시선을 돌리니, 따스한 햇볕이 나를 반겼다.

그동안 벌어진 일들이 전부 꿈처럼 느껴질 정도.

이곳은 키메라만 없으면 평범한 숲과 같았다.

'간만에 여유네.'

푹신한 풀에서 뒹굴거리며 여유를 즐기고 있는데, 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위에 걸터앉은 채 그는 엘튼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순찰조가 복귀했습니다."

"상황은?"

"제법 많이 살아남았습니다. 숨은 이들이 많아서 정확한 수는 파악이 힘든데. 오십 정도 될 것 같습니다."

"오십? 꽤 살아남았네."

"전처럼 움직일까요?"

칼은 턱을 긁적이며 고민했다.

그동안은 방관을 유지한 채 새로 유입된 이들에게 정보만 얻어내며 조용히 지내왔다. 갇힌 이들과 다툴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일단은 그렇게 하자."

"일단은… 입니까?"

"알다시피 상황이 변했거든."

"저자 때문입니까?"

칼은 미소로 답했다.

무언의 긍정.

언제든 포지션이 바뀔 수 있다는 말이 나왔다.

엘튼은 한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언제 일어났는지 들판 위에서 꼼지락거리는 알이란 인간이 보였다.

'저자에게서 뭘 보신 거지?'

괜찮은 실력이지만, 칼 님의 행동에 변화를 줄 만큼은 아니었다. 결정적인 무언가가 있다는 뜻인데, 그게 뭔지 궁금했다.

"녀석의 소지품은?"

"아무래도 확인이 힘들 것 같습니다."

"정말?"

엘튼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칼은 의외라는 듯 바라봤다.

어젯밤에 녀석이 자는 동안, 가방을 확인해보라고 지시했는데, 전혀 건들지 못한 것이다.

"접근조차 못 했다고? 네가?"

"기척 감지가 무척 뛰어납니다. 일정 거리 안쪽으로 접근하면 무의식적으로 반응을 보이는데, 더 접근하면 깰 것 같아서 포기했습니다."

"그럼, 일행에게 물어본 것은?"

"다들 모른다고 답했습니다."

일행 대부분은 과거 크룩스 출신들이었다. 그래서 저 알이란 녀석의 신상명세를 파악하려고 했는데, 일행 중 아는 자가 한 명도 없었다.

"그럼 최근 1년 사이에 들어온 신입이란 뜻이잖아. 저 실력이 신입이라고?"

"정 의심스러우면 확인해볼까요?"

엘튼의 성격상 그 확인 과정이 부드러울 리 없다. 칼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건들지 마. 일단 지켜만 보자고."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말했잖아. 목숨을 빚졌다고. 좋게 좋게 가자고."

"…사실이었습니까?"

"뭐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야. 내가 사람 보는 눈은 확실하잖아. 기다려봐."

엘튼은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곤 물러났다.

사람 보는 눈만큼은 눈앞의 사내를 따를 자가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칼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더니 손을 흔들었다. 엘튼은 뒤를 돌아봤다. 알이란 사내가 다가오고 있었다.

"코를 골며 잘도 자던데."

"누가 말입니까? 제가요?"

"몰랐나? 조심해야 할 거야. 코골이 하는 암살자치고 오래 사는 걸 못 봤으니까."

"혹시 나이가 몇입니까?"

"이제 마흔 중반 정도 됐지? 왜 묻나?"

"오래 사셨네요."

"…?"

칼이 의문을 표하며 엘튼을 바라보자, 엘튼은 살짝 시선을 피했다.

이 아저씨, 진짜 모르는 걸까? 아무도 코골이를 얘기 안 해줬다고?

잡생각을 털어내며 배를 쓰다듬었다. 두 사람에게 먼저 접근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배고프다.

"먹을 거 없습니까?"

"그럴 줄 알고 준비해놨지."

"정말입니까?"

"따라와."

칼의 안내를 받은 곳에는 이미 다른 이들이 자리를 잡고 식사 중이었다.

한쪽에 큰불이 피워져 있었는데, 칼은 그곳으로 나를 안내했다. 불 속에서 노릇노릇 구워지고 있는 멧돼지 뒷다리가 보이자 절로 군침이 흘러나왔다.

엘튼은 다른 일행이 있는 바로 옆자리로 옮겨갔고, 나와 칼, 단둘이서 식사 자리를 가졌다.

칼이 구워진 부위를 단검으로 잘라 건넸는데, 맛이 기가 막혔다.

난 아기새처럼 칼이 주는 고기를 받아먹었다. 잠시 후, 잘 구워진 고기를 후후 불며 칼에게 가볍게 말을 던졌다.

"이곳 경험을 듣고 싶습니다."

"이곳? 이 빌어먹을 곳은 왜?"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대신 칼도 궁금한 것을 물어보시죠."

"질문을 주고받자는 건가?"

"네."

"제법 땡기는 제안이네. 좋아."

칼은 쿡 찍어 올린 고기를 내려놨다.

두 달 하고 보름의 기억.

떠올릴수록 밥맛 떨어지는 기억이라, 오늘 식사는 다 했다고 생각했다.

칼은 덤덤히 실험체 감옥의 경험을 풀어냈다.

난 조용히 식사하며 그 이야기를 경청했다.

재밌었다.

소설 주요 등장인물의 외전을 듣는 느낌이랄까.

칼과 그 주변 사람들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진 기분이었다.

그 효과로 인해 소설 스토리와 칼의 이야기가 연결되며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됐다.

'크룩스 시절 때 입지가 꽤나 높았나 보네.'

추적을 피해 라웁 숲까지 오는 동안 그를 따랐던 암살자들이 상당히 많았다.

그 정도면 크룩스 내 파벌이 있는 간부급은 되어야 한다. 하긴 붐(Boom)에 대한 정확한 정보에 접근하려면 단장급 정도로는 안 된다.

예전에 내게 벌레를 먹인 사내만 봐도 단장보다 훨씬 강했다.

칼도 그 이상의 무력을 지녔을 것이다. 한쪽 팔을 잃기 전까진.

'복수심을 품을 만하네.'

함께한 동료들이 다수 죽고, 한쪽 팔도 잃었다.

마스터를 죽이고 싶었겠지.

칼은 그 복수의 대안으로 학살자를 선택했던 것 같다.

칼은 마스터의 죽음을 원했고, 학살자는 에토르 점령 후 다음 욕망을 채워 줄 뛰어난 말을 원했으니까.

크룩스의 본진이 에토르에 자리했기에 둘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고, 맹약이란 긴 인연으로 이어진 것이다.

'정예로 이뤄진 소수 암살자 집단을 대동하고 학살자 앞에 나타났다고 했지.'

난 주변에서 식사하는 암살자들을 둘러봤다.

실험체 감옥에서 살아남은 저들은 지옥에서 벼려진 실력자들이었다. 엘튼을 보니 저들이 칼의 정예 전력인 것 같았다.

엘튼은 칼의 호위 암살자로 끝까지 함께했던 등장인물이었으니까.

긴 상념도 잠시,

칼이 괴물을 피하는 방법에 대해 입을 열고 있을 때, 그가 내뱉은 한 단어에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베텔의 독?"

"표정을 보니 베텔의 독을 아는 눈치인데, 알고 있나?"

"이거 아닙니까?"

난 가방에서 병 하나를 꺼냈다. 이곳으로 처음 흘러왔을 때, 도적들에게 강탈한 보랏빛을 띤 병이었다.

병을 살핀 칼은 두 눈을 반짝였다.

"베텔의 독이 맞아. 어디서 구했지?"

"괴물 습격 때 주변에 제법 굴러다니더군요. 일부 도적들의 품에도 있길래 혹시나 하고 족족 챙겨놨습니다."

사실대로 말하면 벌거벗은 도적들을 말해야 하는데, 숨기는 게 좋았다. 그들 때문에 칼 일행이 좋은 꼴을 못 봤으니까.

"얼마나 더 있지?"

가방에서 십여 개의 병들을 쏟아내자, 칼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반응을 보니, 꼭 필요했던 물건처럼 보였다.

"그 난리에 용케 구했어."

"필요한 겁니까?"

"생존 물품이니 많을수록 좋지."

"생존 물품? 이게 말입니까?"

"이 독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지?"

"심장에 부담을 주는 독으로 알고 있습니다."

"맞아. 독을 알고 있다니 설명하기가 쉽겠어. 베텔의 독을 일정량 복용한 뒤 숨어 있으면 괴물들의 표적에서 벗어날 수 있어."

"발견하지 못한다는 겁니까?"

"심장 활동이 비약적으로 줄어들면 죽은 것으로 판단하는 모양이야. 괴물들의 시선을 받지 않더군."

"도적들은 이 사실을 몰랐습니까?"

"알아도 마나 유저가 아니면 사용할 수 없어. 심장이 멈추면 죽을 테니까."

"아…."

설마 그런 효과가 있을 줄 몰랐다. 그저 심장에 타격을 주는 단순한 독인 줄 알았는데.

소설 속에서도 얻지 못했던 정보.

하지만 이 독의 진짜 정보는 지금부터였다.

"이 독 때문에 내 인생이 단단히 꼬였지."

"독 때문에 말입니까?"

"붐(Boom)의 해제법과 관련 있는 독이거든."

"...!"

붐의 해제법.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정보였다.

난 다급히 물었다.

"호, 혹시 치료제입니까?"

"치료제는 아니야. 하지만 치료에 꼭 필요한 독이지."

난 심장을 꽉 움켜잡았다. 베텔의 독은 심장의 박동을 급격히 줄여준다. 그 효과가 벌레에게 어떤 자극을 주는 모양이었다.

칼이 이 정보를 내게 알려준 의도가 뭘까.

그냥 알려줬을 리 없다.

"...."

난 흔들리는 불꽃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칼은 조용히 고기를 썰어 내 앞에 놔줬고, 난 말없이 고기를 집어 먹었다.

잠시 후, 난 칼의 얼굴을 응시했다.

"이 이야기를 제게 한 이유가 뭡니까?"

"그 전에 내 질문에 답해야지. 나만 이야기하면 억울하잖아."

"물어보시죠."

"크룩스에서 누구 밑에 있었지?"

"...."

"신입이란 결론에 이르렀는데, 1년 신입치고 터무니없이 강해. 이유가 뭘까 고민해봤지."

"답이 나왔습니까?"

칼은 대답 대신 단검을 들고 고기를 잘랐다.

불꽃에 붉게 물든 험상궂은 얼굴, 그 얼굴에 묻은 재 가루가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코를 훔치며 고깃덩어리를 자르는데, 얼핏 보면 우둔한 곰처럼 보였다.

하지만 난 칼이란 인물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인물이다. 아니, 칼 자신보다 더 잘 알지도 모른다.

칼의 심리 상태나 행동 이유를 소설을 통해 전부 알고 있었으니까.

칼은 곰 가죽을 둘러쓴 여우다.

그것도 아주 노련한.

이럴 땐 돌려 말하는 것보다 정면 돌파가 답이었다.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

"붐(Boom)."

크룩스의 악질적인 벌레 폭탄. 붐(Boom).

붐을 언급하며 칼의 빈 소맷자락을 가리키자, 칼의 표정이 빠르게 굳었다. 그러곤 코웃음 치곤 나를 날카롭게 바라봤다.

"연기가 타고났는데? 역시나 나에 대해 알고 있었어."

"크룩스 1급 암살 대상, 칼 바스타인."

"하!"

"수년 전 붐(Boom)의 해제 방법을 알아낸 죄로 척살령이 내려졌다고 들었습니다."

"누구에게 들었지? 붐과 관련된 정보는 기밀일 텐데."

"크룩스 내에서 금줄을 잡고 있었습니다."

"금줄? 누구 밑에 있었지?"

"마스터(Master)."

"…뭐?"

"마스터의 제자입니다."

난 흘러가는 듯 답했지만, 주변 분위기가 삽시간에 가라앉았다.

엘튼을 시작으로 그 주변에서 식사하던 암살자들이 천천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마스터의 직계라는 게 이들에겐 주적과도 같은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귀도 밝네. 먹는 척하면서 다 듣고 있었잖아.

오직 칼만이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저 덤덤한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잠시 후, 칼이 가볍게 손을 들자, 암살자들은 다가오는 것을 멈추고 지켜봤다. 칼에 대한 믿음이 상상 이상으로 높은 것 같았다.

"간부도 아니고, 마스터라… 대답 잘해야 할 거다."

"제자가 됐고, 버려졌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이유는?"

"반푼이 신비 각성자."

"?"

"전 실패작입니다."

31화 특성 개화자

최악의 마나 감응력.

마스터의 시선에선 실패작이 맞았다. 신비를 각성했어도 등급 잠재력이 꽝이면 무특성 3성보다 못한 존재였으니까.

"역시, 그 황금빛이...."

슬라임을 죽이고 자신을 구한 신비한 빛무리.

칼은 그 황금빛이 내가 가진 신비 능력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난 칼의 착각을 부정하지 않았다.

들킨 능력을 신비 능력으로 둔갑시키는 것이 맞았다. 인챈트 능력을 굳이 오픈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신체에 각인된 고대 문양이기에 가능한 속임수였다.

"신비 능력을 각성하고, 마스터의 선택을 받았습니다."

"그게 1년 전이다?"

칼처럼 나도 내 스토리를 풀어냈다. 물론, 진짜 나의 스토리가 아닌 이 몸의 스토리였다.

마스터의 선택을 받고 수련했던 기억.

버려진 이유까지.

마나 과실 세 개를 복용하고도 아직 1성에 머물고 있다는 내용에선 칼도 혀를 내둘렀다.

최악의 가성비.

"그 돈이면 3성 암살자도 키울 돈인데, 나라도 버리겠어."

"당사자 앞에서 할 말입니까?"

"그럼 여전히 1성이란 소리인데."

칼은 내 몸을 쭉 훑어봤다. 그러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1성인데, 1성 같지 않단 말이지."

칼의 눈이 틀린 건 아니었다.

마나는 1성에 불과하지만, 난 특별한 능력들을 지니고 있었다.

정신 방벽과 인챈트, 그리고 고대 문양까지.

모두 내 목숨을 한 번 이상 살려준 능력들이고, 고작 1성이 지니기엔 터무니없이 큰 힘이었다.

그렇다고 내 등급보다 높은 이들을 이길 수 있느냐?

도네콜린트는 상황이 특수했던 것이고, 대부분은 힘들 것이라 봤다.

주어진 능력들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등급의 한계일지도 모른다.

인챈트도, 고대 문양도, 전부 반쪽짜리처럼 느껴졌다.

칼은 단검을 만지작거리며 나를 응시했다. 멀찍이 서서 지시를 기다리는 암살자들이 보인다.

살기가 느껴졌는데, 칼이 신호를 보내면 당장 죽이러 올 것 같아서 살 떨리긴 했다.

하지만 확신했다.

칼은 나를 죽이지 못한다.

일단 내가 한 말에는 거짓이 없다.

그 완벽한 증거가 바로,

"붐(Boom)이 아니었다면 넌 지금 죽었어."

"알고 있습니다. 버려진 패의 증거니까요."

붐(Boom)의 희생자라는 것.

칼을 설득하는 데 이만큼 확실한 카드가 또 있을까?

처음으로 벌레 새끼한테 고마움을 느꼈다.

이젠 쐐기를 박아야 할 차례.

다음 포지션이 중요했다.

"전 마스터의 죽음을 그 누구보다 갈망합니다. 크룩스의 몰락까지도."

"...."

"이곳을 벗어난다면 꼭 '복수'할 겁니다."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마스터의 죽음과 크룩스의 몰락은 현재 칼이 마음속으로 가장 갈망하는 목표였다.

복수.

목표의 일치성을 언급하는 건 신뢰를 주기 좋다.

같은 적을 둔 동료라 어필하는 것이다.

내 눈을 말없이 응시하는 칼이 보인다. 시선이 살짝 부담스러웠지만, 난 단단한 눈빛으로 칼을 마주 봤다.

"애써 만든 친구를 잃을 순 없지."

그 말이 떨어진 순간 암살자들의 살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다행히 말이 먹혔다.

"부탁이 있다고 했지? 붐(Boom)인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칼은 고기를 한 점 썰어 입에 넣었다. 한동안 우물우물거리던 그가 음식을 삼키곤 입을 열었다.

"붐을 제거하는 데 도움을 주지. 대신 당장 들어야 할 게 있다."

"뭡니까?"

"진짜 이름이 뭐지?"

칼의 질문에 난 주변을 둘러봤다. 그 모습에 칼이 손을 흔들자, 암살자들은 거리를 벌렸다.

'그럴 의도로 둘러본 건 아니었는데.'

내 이름이 뭐라고.

그렇게 내 이름이 듣고 싶은 건가?

"아서, 아서 클레이튼입니다."

"칼 바스타인이다."

이 통성명을 통해 칼과 더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같은 적을 둔 동료로 인정받은 건가.

칼은 다시 고기를 먹기 좋게 잘라서 놔줬다.

이젠 먹으면 체할 것 같은데.

그래도 애써 맛있는 척 집어 먹었다.

'두 번째인가?'

배덕의 기사, 록터 펠리스의 뒤를 이어 내 진짜 이름을 들은 두 번째 인물.

어째 주요 인물들과 하나둘 엮이는 느낌이다.

난 남은 고기를 입에 모조리 욱여넣었다.

식사 시간이 끝났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밤이 되었다.

이른 시간이지만 난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생체 마석을 시간 내서 살펴보려고 했는데, 칼과 대화하느라 진이 다 빠졌다.

암살자들의 살기가 워낙 살벌했어야지.

지금은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밤하늘에 뜬 별빛을 보며 생각했다.

"이것 참...."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하루하루가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다.

아주 좆같았다.

* * *

다음 날, 물고기를 잡아다가 식사를 준비했다. 자급자족이라더니, TV에서만 보던 정글 서바이벌을 내가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민첩한 몸놀림 덕에 사냥은 성공했는데,

"불은 어떻게 피우지?"

어제 일로 부탁하기가 어색해서 마른 풀때기를 붙들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데, 칼이 다가왔다.

"뭐 하나?"

"불 피우는데요?"

"난 또 춤추는 줄 알았지."

"...."

칼은 피식 웃고는 엘튼을 불렀다.

갑자기 그 녀석은 왜?

잠시 후, 엘튼이 모습을 드러내더니 단검을 들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살벌하게 왜 이래.

엘튼은 내가 붙들고 있던 풀때기를 단검으로 가볍게 찔렀다.

순간 단검에 변화가 일어났다.

화르륵―

"...."

허무하게 타오르는 불씨.

여태껏 한 행동들이 다 뻘짓으로 취급되는 결과물을 보며 멍하니 서 있는데, 칼이 엘튼의 어깨를 다독거리며 말을 해왔다.

"우리 불 담당이지. 신기하지?"

"…3성, '특성 개화자'입니까?"

"함께하는 이상 숨길 수 없으니 엘튼의 속성 계열만 밝히는 거야. 그렇게만 알고 있어."

마나 유저로 각성하면 1성으로 취급되며, 2성, 3성, 숫자가 높아질수록 등급 차이를 보이게 된다.

등급 분포는 당연히 피라미드 구조.

위쪽으로 향할수록 폭은 급격히 좁아졌다.

소설에선 이 피라미드 구조를 꽃의 성장 과정으로 묘사했는데, 1성은 새싹, 2성은 꽃봉오리, 3성은 '개화'로 표현됐다.

개화(開花)!

마나 유저의 일생(一生)이 특성과 무특성으로 갈리는 단계.

이 중 선택받은 소수만 '특성 개화자'로 각성한다. 물론, 난 엘튼의 개화 특성을 이미 알고 있었다.

'불꽃검 엘튼.'

암살 대상은 재 가루만 남긴다는 엘튼의 위명이었다.

그리고,

"칼 님도 3성입니까?"

"내가 그렇게 세 보이나?"

"약한 자는 머리가 될 수 없다. 암살자 세상의 격언이죠."

"부인할 수 없겠는데? 뭐, 3성 비슷하다고 해두지."

3성과 비슷하다라.

답이 애매했다.

과거에는 그 이상이었는데 한쪽 팔을 잃으면서 3성으로 떨어졌다고 해석하면 되나?

"칼 님도 특성 개화자입니까?"

"난 운이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라서."

"그렇습니까?"

난 고개를 끄덕이곤 불씨를 태워 큰불을 만든 후 물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거짓말이다.

난 그의 개화 특성을 알고 있었으니까.

'위기 감별사.'

그는 위험의 경중을 파악할 수 있는 감각 계열의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수년간 이어진 크룩스의 고된 추적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게 해준 능력.

특성 개화자인 두 사람을 보니, 문득 나는 어떻게 될지 궁금해졌다.

3성이 됐을 때, 로또가 터질 확률이 얼마나 될까.

'힘들겠지?'

워낙 불운 덩어리로 취급되는 터라,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아니, 마나 감응력이 최악인 나에겐 3성도 아직 요원했다.

가성비가 워낙 쓰레기라서 말이지.

'아, 그것도 확인해봐야 하는데.'

가방에 넣어둔 생체 마석을 떠올렸다.

내 쓰레기 같은 몸뚱이에 희망의 불씨를 피워줄 물건인지 확인해봐야 했다.

혼자 있을 시간과 장소가 필요한데.

그때 칼이 용무가 있었는지 말을 꺼냈다.

"시간이 필요해."

"...네?"

"시술하려면 준비 시간이 필요하다고."

"바로 가능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팔찌가 없어졌어."

"팔찌? 그게 뭡니까?"

"벌레를 제거하려면 그 팔찌가 꼭 필요해. 내 것을 없애려고 예전에 제작한 물건인데, 슬라임에게 먹히면서 어딘가 흘린 것 같아. 찾으려면 시간이 제법 걸릴 거야."

"팔찌가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팔찌를 제작할 마법사를 찾아가야지."

팔찌가 없으면 이곳에서 시술을 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팔찌가 숲에 있길 기도해야 하나.

"팔찌만 찾으면 됩니까?"

"베텔의 독을 시술에 맞게 손봐야겠지. 기다려봐. 팔찌를 찾으면 금방이니까."

"저, 근데…."

"뭐, 할 말 있나?"

"아직 대가를 말하지 않았습니다만?"

"대가?"

"시술의 대가 말입니다. 그것 때문에 어젯밤에 운을 뗀 거 아닙니까?"

"아, 그럴 의도로 말을 꺼낸 건 맞지. 네 폭탄 발언 때문에 깜빡했지만."

"원하는 게 뭡니까?"

부담스러운 부탁이면 곤란한데.

"필요 없어."

"네?"

"대가는 이미 받았으니까."

노릇하게 익은 물고기를 보고 있던 나는 두 눈을 끔뻑이며 칼을 올려다봤다.

이건 또 무슨 소리래.

"네가 말한 복수. 왠지 너랑 있으면 내가 원하는 것을 쉽게 이룰 것 같거든."

"감입니까?"

"내가 감이 뛰어나긴 하지."

칼은 씨익 웃으며 험상궂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무서워, 이 아저씨야.

그리고 이건 내 복수가 아니라 당신 복수잖아.

결국, 복수를 위해 대가 없이 치료해주겠다는 뜻이었다.

어차피 크룩스와 적대 사이니 상관없으려나.

어째 학살자가 아니라 나를 통해 복수하려는 모습인데, 부담스럽다.

난 다 구워진 물고기를 빤히 바라봤다.

식욕이 뚝 떨어졌다.

* * *

엘튼은 일행과 함께 팔찌를 찾으러 자리를 비웠고, 칼은 일부 암살자들 곁에 머물러 있었다.

함께 움직일 땐 몰랐는데, 부상자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모두 셋으로 복면을 쓰고 있어서 얼굴 확인은 힘들었고, 칼이 그 셋을 치료하며 돌보고 있었다.

하긴 칼도 스스로 미끼를 자청하면서 크고 작은 상처를 입었지.

난 그에게 다가갔다.

이대로 빈둥거리고 있기엔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괴물들이 언제 또 나타날까요?"

"그건 인간들이 채워지는 시간에 따라 달라. 급격히 공간이 차버리면 저번처럼 갑작스레 나타나기도 하지."

"그럼 지금은 안전하다는 소리네요."

"한동안은 조용할 거야."

"그럼 이 주변에 동굴이나 시선을 피할 장소가 있습니까?"

"그런 곳은 왜?"

"개인적으로 알아볼 게 있습니다."

"우리 사이에 비밀이 있다니 섭섭한데."

"나중에 알려드리겠습니다."

"뭐, 그렇다면야…."

칼은 어깨를 으쓱이곤 한쪽 숲을 가리켰다.

"동굴은 없어. 하지만 갈대숲이 빽빽한 장소는 있지. 사람들이 찾기 힘든 곳이야."

"감사합니다."

"멀리는 나가지 마. 뒈지면 곤란하니까."

"괴물 말고 위험할 게 또 있습니까?"

"인간."

칼은 내게 폭죽 같은 걸 건넸다. 긴급 신호탄이었다.

"괴물보다 인간들이 더 무서워. 강하면 강력한 대로, 약하면 약한 대로 위협적이지. 감정이란 약점을 이용하거든. 특히 너같이 기준 없는 녀석은 먹잇감으로 딱이지."

"...기준? 무슨 기준 말입니까?"

"피를 보는 기준. 이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그 기준을 잘 정해야 할 거야. 너무 무르면 죽기 십상이고, 너무 타이트하면 적이 많아지니까."

기준이라.

깊이 생각해본 적 없는 주제였는데, 칼의 조언을 듣고 깨닫는 바가 있었다.

"칼의 기준은 뭡니까?"

"복수. 난 복수를 위해선 적과도 손을 잡을 수도, 죽이는 대상도 가리지 않아."

"...."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굳이 고민할 필요가 없는 문제였다.

'살아남는 것.'

내 기준은 초반에 이미 정해져 있었으니까.

32화 광렙은 무슨

발을 떼기 전, 문득 떠오른 생각에 한 가지를 더 물었다.

"붉은 보석을 아십니까?"

"붉은 보석? 그게 뭐지?"

"괴물들의 몸속에 박혀 있는 반짝이는 돌 같은 겁니다."

"괴물 몸속에 그런 게 있다고?"

칼의 반응에 난 미간을 좁혔다. 칼은 두 달이 넘는 기간 동안 키메라와 수차례 맞닥뜨린 인물이었다.

도망만 친 것이 아니라면 분명 잡기도 했을 텐데.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물어본 건데, 칼은 생체 마석의 존재를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키메… 아니 괴물들의 몸속을 확인해본 적이 없습니까?"

"당연히 없지. 기회가 없었으니까."

"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 눈치 못 챘나?"

칼은 짧게 혀를 차곤 주변을 쭉 둘러봤다. 그러곤 내게 물었다.

"어제 나와 함께 오는 동안 괴물들의 시체를 본 적 있어?"

"…아!"

칼의 말에 잊고 있었던 소설 내용이 떠올랐다.

죽은 키메라를 들고 사라지는 키메라들의 습성.

생체 마석의 존재를 최대한 숨기기 위한 도미닉의 명령 체계인데, 학살자의 모략으로 마석의 존재가 너무 쉽게 드러나서 깜빡하고 있었다.

"근데 붉은 보석에 대해 왜 묻는 거지?"

"아는 게 있나 해서요."

"지금 가지고 있어?"

"네."

주머니에서 마석을 꺼내 칼에게 던지자, 칼은 마석을 살펴보곤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상황에서 괴물의 시체를 가르고 있었다고? 제정신이야?"

"호기심이죠. 베텔의 독도 챙기지 않았습니까?"

"혹시 도벽이 있나? 미리 말해. 나중에 들키면 곤란해질 테니까."

칼은 마석을 돌려주며 가보라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이 마석의 효능을 안다면 저런 반응을 보이기 힘들 텐데. 뭐, 칼에겐 큰 도움이 안 되는 물건이니 상관없으려나.

난 자리를 털고 일어나, 칼이 알려준 장소로 향했다.

내 키보다 큰 갈대숲이 눈앞에 펼쳐졌다.

갈대들을 헤치고 칼이 알려준 방향으로 계속 이동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근처로 접근해 온다면 바로 알 수 있는 소리라서 마음에 들었다. 이동하길 잠시, 갈대숲 중심에 제법 큰 공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칼이 말한 장소였다.

"괜찮네."

주변을 둘러보니 사방이 빽빽한 갈대로 채워져 있었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나는 주머니에서 마석들을 털어냈다.

붉은 보석들이 바닥을 뒹굴었다. 그중에 보랏빛을 띤 보석도 있었다. 거대 슬라임에게서 얻은 것인데, 기존 마석에서 흘러나오는 기운보다 짙었다.

'상급 키메라에게 쓰는 건가?'

붉은 보석 열 개, 보랏빛 보석 한 개.

일단 구성은 차고 넘치는데, 이걸 어찌해야 한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한 개의 붉은 보석을 잡고 단검 자루로 내려찍기 시작했다.

작은 알갱이가 될 때까지 난 쉴 새 없이 마석을 빻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주먹 크기의 마석이 모래 알갱이처럼 변했다.

난 그중 일부를 조심스레 움켜쥐었다.

반 개 분량 정도 되려나?

후―

이래도 되나?

소설 내용을 상기하며 한 짓이긴 한데, 단순히 읽었던 내용과 지금껏 경험했던 현실은 천지 차이였다.

뭐 하나 제대로 흘러간 게 있어야지. 이러다 진짜 뒈지는 건 아니겠지?

'어차피 대안은 없어.'

짧게 숨을 내쉰 뒤 난 가루를 그대로 입에 털어 넣었다.

목구멍이 따끔거리자 인상이 구겨졌다. 하지만 곧 부드럽게 녹아내리며 속으로 흘러내렸다.

잠시 후, 불같은 기운이 가슴에서 용트림 쳤다. 동시에 활성화되는 마나 감각.

뜨거운 기운과 마나가 한데 섞이며 온몸을 누볐다.

난 제자리에 선 채 긴장한 표정으로 짙어진 기운의 흐름을 느꼈다.

생체 마석은 마나 과실보다 더 큰 효능을 지닌 마나 촉매제다. 제약이 있다면 3성 이상에겐 효과가 없다는 것.

마석의 기운이 3성 이상의 마나에는 무력화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인데, 반대로 1성이나 2성에는 엄청난 효과를 보였다.

'치명적인 부작용만 뺀다면 말이지.'

마석의 기운이 3성급보단 약하지만, 그 이하보단 강하다.

즉, 마석의 기운에 잡아먹힐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팔다리, 몸통을 지나 느릿느릿 움직이는 끈적한 기운.

잠시 후, 그 기운이 척추를 타고 머리 위로 올라왔다. 그 기세가 무척 매섭다. 난 주먹을 꽉 쥐었다.

온다!

쾅―!

"컥!"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코를 닦으니 피가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끈거리는 두통과 함께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짙은 고양감과 흥분, 쾌락이 올라왔다. 살의가 일어났다. 살점을 찢고, 먹고, 부수고 싶다.

다급히 손톱을 확인했다.

열 개의 손톱이 모두 붉다.

부작용 현상.

반 개가 이 정도라고?

시발, 한 번에 너무 많이 복용했나?

손톱은 곧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피의 갈증 현상.

낭패 어린 표정으로 갈증을 억누른 채 주먹을 부르르 움켜쥐었다.

다행이라면 손톱이 붉어져도 이성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신 방벽이 보호해 주는 건가?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데, 오른쪽 손등에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끈적한 느낌이 아닌 부드럽고 시원한 기운.

'고대 문양!'

부르지도 않았는데, 은은하게 빛을 흘리며 지시를 기다리고 있다. 설마, 마석의 기운에 반응을 보인 건가.

번쩍―

빛을 소환한 순간, 기다렸다는 듯 황금빛이 내 몸을 부드럽게 휘감았다. 동시에 찾아온 그때의 첫 느낌!

처음 문양을 얻었을 때의 포근함이 느껴지더니, 폭주하던 기운이 안정되어 갔다.

흥분이 가라앉고, 갈증이 사라졌다.

피 묻은 붉은 손톱은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아왔다.

할 일을 마쳤다는 듯, 다시 문양으로 빨려 들어가는 황금 빛무리. 그 빛을 보며 난 무심코 한 단어를 내뱉었다.

"...정화(淨化)?"

불순과 악에 반응하는 정화의 기운.

내가 느낀 고대 문양의 능력이었다.

"하, 시발...."

긴장이 풀리자,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온몸이 축축했다. 광인이 될 수 있겠단 두려움에 식은땀을 흘린 모양이었다.

생체 마석의 부작용.

이 유혹적인 물건은 초반에 가파른 등급 성장을 약속하지만, 잡아먹히면 피의 갈증으로 허덕이는 광인 신세로 전락한다.

훗날 수백 수천의 광인을 만들어낸 악마의 보석.

다만, 한 개는 극복 가능하다고 알려졌는데, 고작 반 개에 부작용을 겪다니.

'1성이라서 그런 건가.'

2성과 달리, 1성은 복용 그 자체가 위험 수위인 것 같았다.

'이젠 두려울 게 없어졌지만.'

정신 방벽으로 이성을 붙잡고, 문양의 힘으로 부작용을 없애면 몇 개라도 마석을 흡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생각한 대로만 흘러간다면?

3성까진 고속 프리패스가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광렙 시간이었다.

* * *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칼 일행이 팔찌를 찾는 동안, 나는 마석 흡수에 집중했다.

안전장치가 있는데, 굳이 흡수에 주저할 필요가 없었다.

대신 흡수하고 나면 짙은 탈력감이 찾아왔는데, 그땐 하루를 마무리하고 아지트로 돌아와 휴식을 취했다.

흡수량은 하루에 한 개가 적당했다. 벌써 세 개를 흡수했는데 마나량이 늘어난 게 확연히 느껴졌다.

그럼에도 절로 욕설이 흘러나왔다.

'진짜 가성비 개 쓰레기네.'

소설에선 한 개의 마석만 복용해도 부작용만 버티면 등급이 오르는 악마의 보석처럼 표현되어 있는데, 난 세 개를 처먹어도 여전히 1성에 머물고 있었다.

쌍욕이 나왔지만, 며칠 내로는 2성에 오를 것 같아서 묵묵히 하루하루를 보냈다.

마석 흡입을 시작한 지 다섯째 날이 지났다.

오늘도 하루 분량을 흡수하곤 아지트로 돌아와 칼을 찾았다.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루틴. 그리고 질문.

"어제 했던 이야기나 마저 해주시죠."

"또? 왜 자꾸 귀찮게 구는 거야?"

"시술이 늦어지니까 그렇죠."

"뒈질 뻔한 경험을 이야기하는 게 얼마나 좆같은 일인지 알아? 엘튼이랑 놀라고."

"저 타 죽는 거 보시려고요?"

난 남은 시간에 칼을 집요히 괴롭혔다.

칼은 십수 년간 죽음과 싸워 지냈던 인물이다. 그 몸에 새겨진 상처들만 봐도 그의 굴곡진 인생이 보인다고 해야 하나.

'위기 감별사'란 특성이 괜히 생긴 게 아닐 거다.

그만큼 칼은 위기관리 능력과 상황 처세술이 뛰어났다.

난 그를 통해 이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우고자 했다.

칼은 무척 귀찮은 듯 툴툴댔지만, 이야기할 때만큼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내 태도 때문이다.

이래 봬도 열띤 교육열로는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대한민국 인재였다. 배우고자 하는 열망이 남다르니, 가르치는 맛이 날 거다.

확실히 칼은 좋은 스승이었다.

* * *

"광렙은 무슨, 렙업 한번 더럽게 더디네."

일주일이 지났을 때, 난 드디어 2성에 올랐다.

마석을 무려 여섯 개나 복용하고 이룬 쾌거였다.

마스터가 날 버린 이유를 피부로 팍팍 느낄 수 있었다.

이 몸뚱이의 마나 감응력은 진짜 쓰레기였다.

우웅―!

난 눈부시게 빛나는 단검을 응시했다. 인챈트에 담긴 날카로움이 훨씬 뚜렷해졌다.

익힌 속성이 있다면 여기에 덧씌울 수 있을 것 같은데, 속성을 배우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돈과 시간만 있다면 익힐 수 있는 속성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양의 빛도 더욱 진해진 것 같고.'

빛의 범위도 기존보다 배는 늘었다.

1성에서 2성이 된 것뿐인데, 능력의 차이가 확연히 달라졌다.

확실히 좋은 일이긴 한데, 왜 한숨이 먼저 나올까.

"3성이 두렵다. 시발."

남은 마석으로는 불가능할 것 같고, 보랏빛 마석에 기대를 걸고 있는데, 어찌 될지 잘 모르겠다.

마석을 또 모아야 하나.

솔직히 얼마나 더 처먹어야 할지 감도 안 왔다.

난 생각을 털어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으니, 오늘은 일찍 아지트로 돌아가 칼을 더 괴롭혀줄 생각이었다.

이제 그도 은근히 괴롭힘당하는 걸 즐기는 느낌인데 말이지.

부스럭― 부스럭―

그때 멀찍이서 갈대 마찰 소리가 들려왔다. 난 인상을 구기곤 소리가 난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까아아아악!"

여인의 비명 소리.

절박하게 외치며, 반쯤 찢어진 옷을 붙잡고 도망가는 여인이 보였다.

미모가 제법 반반해서 한눈에 띌 정도였다.

난 갈대숲 사이에 숨은 채 그 모습을 심드렁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저년은 저기서 또 저 지랄이네."

"사, 살려주세요!"

도움을 구하는 애처로운 목소리.

난 가만히 그 상황을 지켜봤다.

"무, 무슨 일입니까!?"

"도와드리겠습니다!"

잠시 후, 여인의 외침을 듣고 사내들이 숲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나, 또 걸려들었다.

사내 셋으로 구성된 파티였는데, 용병으로 보였다. 그들은 여인을 발견하곤 한달음에 여인 곁으로 몰려들었다.

찢긴 여인의 옷자락에 눈을 흘기며 만지작거리는데, 좋은 의도로 다가온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고 여인에게 동정을 느끼느냐?

"또 낚였네."

내 말이 끝난 순간, 여인이 흐느끼듯 주저앉았다. 순간, 여인이 땅속으로 사라졌다. 용병들이 당황하고 있는데, 사방에서 쇳소리가 들려왔다.

파파파팍―!

화살 세례였다.

33화 너 지금 실수하는 거야

"끄아악!"

"무, 뭐… 큭!"

사방에서 쏟아지는 화살에 용병들은 제대로 된 저항도 못 해보고 쓰러졌다.

둘은 죽고, 한 명은 피를 흘린 채 바닥을 기었다.

잠시 후, 갈대숲 사이에서 활을 멘 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스락거리던 인기척들이 저들이었다.

새로 흘러들어 온 도적 떼였는데, 며칠 전부터 갈대숲 주변에 덫을 놓고 금품을 털거나 사람을 잡아갔다.

두목으로 보이는 자가 성큼성큼 모습을 드러냈다.

우람한 덩치를 지닌 녀석이었는데, 땅속에서 나온 여인을 보자 헤죽헤죽 웃으며 여인에게 달라붙어 아양을 떨었다.

서너 번 본 광경인데 저 물고 빠는 행동은 영 적응이 안 된단 말이지.

그나저나, 실험체 감옥에서 도적질이라.

내 눈에는 철창에 갇힌 실험용 쥐가 재롱을 떠는 것으로 보였다.

'다 부질없는 짓이지.'

이곳 처지를 아직 몰라서 벌거숭이처럼 놀고 있는데, 조만간 사라질 녀석들이었다.

전처럼 무시하고 지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대화 소리가 내 발걸음을 잠시 세웠다.

"오! 이게 뭐야. 묵직한 금덩이잖아!"

"끄윽! 다, 다 드리겠습니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이 금덩이에 뭐라고 적혀 있는 거냐? 글 읽을 줄 아는 사람?"

"마르샤 가문이라고 적혀 있는뎁쇼?"

"마르샤? 대상인이잖아?"

"혹시 대상인의 직인 같은 거 아닐까요? 딱 봐도 금패 같은데."

"직인? 그 귀한 게 왜 이 녀석 품에 있어. 가짜 아니야?"

"글쎄요. 금은 진짜 아닙니까?"

"맞아."

금패를 살짝 물어본 두목이 고개를 끄덕이자, 도적들이 단검을 들고 용병에게 다가갔다.

주, 죽는다!

용병은 묻지 않아도 모든 것을 토설했다.

"저, 저희는 마르샤 대상인이 고용했던 용병들입니다! 그 물건은 죽은 대상인의 품에서 훔쳐 온 겁니다!"

"대상인이 죽어? 네깟 놈들이 어떻게?"

"저, 저희가 한 짓이 아닙니다."

"그럼 누군데?"

"…블라이어가의 기사들."

블라이어가(家)의 기사들.

학살자 가문의 기사란 소리에 내 몸은 본능처럼 움직였다. 난 갈대숲을 빠르게 가로질렀다.

카멜 블레이저의 소식이라.

이건 못 참지.

바스락― 바스락―!

거칠게 흔들리는 갈대의 움직임.

"누, 누구냐!?"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도적들이 다급히 몸을 틀고 시위를 당겼다.

난 양손에 단검을 움켜쥐었다. 마나를 머금은 단검이 미세하게 울어댔다.

"소, 쏴!!!"

갈대숲을 뚫고 나온 순간, 도적들이 시위를 놓았다. 매서운 기세로 화살 세례가 쏟아졌다. 입을 꽉 다문 나는 단검을 벼락같이 휘둘렀다.

카카카캉―!

"...!"

부서지고 튀어 오르는 화살 파편들.

화살을 튕겨낸 나는 파편 사이로 매섭게 돌진했다.

"고, 괴물!"

"…한 놈뿐이다! 공격해!"

칼 일행 앞에선 고작 2성뿐인 실력이다.

하지만,

'도적들 앞에선 괴물이지.'

큰 도끼를 쳐들며 바락바락 외치는 두목이 보였다.

난 단검을 들어 올렸다.

아지트로 가기 전에 잠깐 볼일이 생겼다.

* * *

"끄아아악!"

"...으흑!"

스무 명의 도적 떼가 무너지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도 예상했던 바였다.

다만, 의외인 건 도망치는 도적들이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다.

피를 흘리면서도 그들은 악착같이 싸웠다. 저번에 벌거벗겼던 도적 떼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뭐지, 이것들?

단순한 도적과 느낌이 달랐다.

겁을 줘서 내쫓으려고 했는데, 의도치 않게 손에 피를 많이 묻혔다.

습격자인 내가 잠시 당황했을 정도.

결국, 난 두목을 죽여야 했다.

푹―!

"크, 크룩!"

두목의 목에 박힌 단검을 거칠게 뽑아내며 물러났다.

피로 질척이는 바닥.

주변은 고통과 신음으로 가득했고, 도적들은 피투성이가 된 채 일어나지 못했다.

대부분 살려놨는데, 두목의 경우는 마나를 쓰는 노련한 놈이라 어쩔 수 없었다.

난 두목의 품을 뒤졌다.

붉은 포션.

전리품으로 회복 물약을 챙긴 뒤 베인 상처에 천천히 부었다.

워낙 매섭게 달라붙어서 팔과 다리에 자잘한 상처들이 생겼다.

시체 앞에서 상처 치료라니, 나도 이 세상 사람이 다 됐다.

죽은 두목 옆에서 벌벌 떨고 있는 여인이 보였다.

"저, 전 시키는 대로만 했어요! 정말이에요!"

"...."

"사… 살려주세요!"

줄곧 도적 떼에게 잡혀 끌려다녔다는 기구한 이야기.

울고 불며 목숨을 구걸하는데, 난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봤다. 잠시 후, 난 주변을 둘러보곤 한 곳을 조용히 가리켰다.

"쭉 가면 큰 산채가 보일 거다. 가라."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더는 이곳으로 오지 마."

고개를 수차례 끄덕인 여인은 내가 가리킨 방향으로 도망치듯 사라졌고, 그런 여인을 보며 고민하던 나는 생각을 털고 용병에게 시선을 돌렸다.

애초에 목적은 이 용병이 가진 정보였기 때문이다.

내가 다가가자, 용병은 새하얗게 질린 채 바닥을 박박 기었다.

"사, 살려주십시오!"

"묻는 말에만 대답해. 그러면 살려준다."

"네, 네!"

용병을 통해 블라이어 기사들의 정체를 파악했다.

마르샤 대상인의 저택을 습격하고 불태운 뒤 사라진 기사들.

인상착의를 들어보니, 리옹이 이끄는 카멜의 친위대들 같았다.

'마르샤가 수집하던 아티팩트를 노린 거야.'

학살자가 잠들어 있는 고대 아티팩트 사냥에 나선 것이다. 이미 예상했던 내용이라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불탄 저택 위치를 들어보니, 내가 알려준 '그'의 교섭 장소와 멀지 않은 곳이었다.

'손에 닿는 것들은 모조리 쓸어 담고 있겠지.'

학살자의 성격상 대부분 강탈로 이뤄질 것이고, 마르샤의 경우처럼 많은 이들이 죽어 나갔을 것이다.

난 그 횡액에서 살아남은 용병을 바라봤다.

"용케 살아남았네."

"저, 전 숲으로 도망친 것밖에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그러니까."

라웁 숲 쪽으로 도망치다니 운이 좋은 놈이었다.

'카멜이 라웁 숲 접근 금지령을 내렸을 테지.'

도미닉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기에 충돌을 피하려는 것이다.

도미닉이 날뛰기 시작했으니, 슬슬 학살자도 이에 맞춰서 일을 도모하려고 할 텐데.

내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허억!"

용병의 호흡이 갑자기 가빠지더니, 얼굴이 시꺼멓게 죽어갔다.

녀석의 운은 여기까지였다.

"크웩!"

가슴을 움켜잡더니 검은 피를 쏟아냈다. 스스로 목을 움켜잡고 몸을 꼬며 고통스럽게 비명을 질러댄다.

난 쓰게 웃으며 그 모습을 지켜봤다.

역시, 쉽게 가긴 글렀나?

잠시 후, 몸을 뒤틀던 용병이 축 늘어졌다.

갑작스럽게 용병이 죽어버린 상황이지만, 난 침묵했다.

어째 싸한 느낌이 들더라니.

"깔깔깔깔!"

뒤쪽에서 여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경박한 웃음이었는데, 조금 전 겁먹고 도망친 여인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찢어진 옷 대신 검정 로브를 걸치고 있었는데,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왜 돌아왔지?"

"더는 눈치 볼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죽은 용병처럼 내게도 무슨 꼼수를 부린 모양인데, 맞나?"

"눈치가 빠르네. 곧 내게 살려달라고 빌게 될 거야."

"그건 뭐지? 나랑 인형 놀이 하자는 건 아닐 테고."

그녀의 손에는 작은 인형이 두 개 들려 있었는데, 하나는 갈가리 찢겨 있었다.

여인은 기분 좋게 웃으며 잔혹하게 죽은 용병과 찢긴 인형을 가리켰다.

"어때? 다음은 네 차례인데."

"흑주술사였나?"

"흥! 알아도 이미 늦었어."

내가 단검을 들어 올리자, 여인은 남은 인형을 거칠게 움켜잡았다. 순간, 내 몸을 옥죄는 감각이 느껴졌다. 역시나, 그 이질적인 기운이 흑주술과 관련되어 있던 거였나?

주술을 걸려면 매개체가 필요하다. 그 매개체는,

"도적들의 무기에 저주를 걸어놨구나."

"알아도 이미 늦었어. 주술이 완성됐거든."

"저 도적들도 세뇌한 건가? 어쩐지 너무 겁대가리가 없더라."

"멍청한 건지, 겁이 없는 건지, 상황 파악이 전혀 안 되나 보지?"

"...."

"기회를 줄게. 넌 저 쓰레기들보다 쓸만할 것 같거든."

"기회?"

그녀는 작은 나무 상자에서 작은 벌레를 꺼냈다.

꿈틀거리는 벌레.

시발, 갑자기 기분이 더러워졌다.

"먹어. 그럼 목숨은 살려주지."

"…너 지금 실수하는 거야. 내가 벌레 먹인 놈들에겐 악감정이 아주 많거든."

"죽고 싶나 봐?"

"아줌마는 내 취향이 아니라서 말이지."

그녀의 입가가 비틀렸다.

인형을 움켜잡은 여인의 손이 검게 물들었다.

그 순간 내 몸속에 있던 이질적인 기운이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저주의 기운.

그 기운이 내 몸을 지배하기 위해 꿈틀대자, 난 고대 문양을 개방했다.

처음 도적들의 무기에 상처를 입었을 때, 이질적인 기운이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물론, 큰 걱정은 들지 않았다.

이것보다 더 끈적하고 더러운 마석의 기운을 흡수하다 보니, 문양의 사용 방법에 감이 오기 시작했거든.

난 문양의 힘을 한 단어로 정의했다.

정화(淨化).

손등에서 황금빛이 쏟아진 순간, 날뛰던 기운이 짓눌리더니 삽시간에 사라졌다.

"끼아아악!"

여인은 비명을 지르며 인형을 떨어트렸다. 피를 울컥 토해내며 비틀대는데, 주술이 깨진 반발력에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내가 천천히 다가가자, 그녀는 두려운 듯 물러났다.

"바, 방금 그거 뭐지? 대체 뭘 한 거냐!?"

처음 떨면서 그녀가 살려달라 빌었을 때, 겁먹은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때 느꼈다. 이년 뭔가 있구나.

"연기 연습 좀 더 해야겠어."

"벌레 주제에!"

그녀의 두 눈이 붉게 물들었다.

도적들처럼 날 세뇌하려는 주술이 펼쳐졌다.

눈빛을 마주한 순간, 진득한 두통이 느껴졌다.

이거 어디선가 많이 당해봤던 건데.

카멜의 감옥에서 흑주술사들에게 둘러싸였던 악몽이 떠오르자 미간이 절로 구겨졌다.

서서 대치한 것도 잠시, 여인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질리며 일그러졌다.

반대로 내 표정은 여유롭게 풀렸다.

정신 압박이 렌구아보다 훨씬 약했다. 계속 내 정신을 압박하려고 한다면 그 결과가 불 보듯 뻔해서 그녀를 제지하려고 빠르게 움직였다.

내 행동에 조급함을 느낀 걸까.

그녀가 결국 모든 힘을 개방했다.

"주, 죽어!!!!!!"

퍼억―!

그녀의 머리가 터져버렸다.

몸체만 남은 시신은 곧 축 늘어졌다.

난 죽은 여인을 잠시 응시했다.

정신 방벽.

타인의 정신을 지배하고 조롱하려는 흑주술사들에겐 천적 같은 능력이었다.

빌어먹을, 물어볼 게 있었는데.

"하...."

난 짙게 한숨을 내쉬곤 단검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봤다. 두려움에 흠칫 떠는 도적들이 보인다.

그녀가 죽자, 세뇌가 풀리면서 제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개 같은 년. 그냥 가지 왜 돌아와서.'

머리 없는 그녀에게 원망을 쏟아내던 나는 단검을 움켜잡고 도적들에게 걸어갔다.

칼 바스타인에게 살아남는 법을 배웠다.

특히, 피의 기준.

이곳에서 내 힘을 본 자들을 살려둘 순 없다.

내 생존과 직결된 일이었으니까.

* * *

"늦었네?"

"일이 좀 있었습니다."

"많이도 죽였어."

"어떻게 알았습니까?"

"피 냄새가 짙어서."

"피 냄새?"

칼의 말에 몸 냄새를 킁킁 맡아봤다. 물가에서 씻고 온 상태인데도, 칼은 정확하게 피 냄새를 맡았다.

개코인 건가?

아니면 위기 감별사의 능력?

난 조금 전 벌어진 일을 칼에게 간략히 전했다.

"실력 있는 흑주술사는 아니었던 모양이야. 이딴 곳에 흘러들어 와서 인간 사냥이나 할 정도면. 이름도 몰라?"

"아, 그게...."

뭘 물어볼 틈을 줬어야지. 그렇다고 정신 방벽에 대해 말해줄 수는 없으니 어색하게 머리만 긁적였다.

칼은 내가 건넨 황금패를 살펴보고 있었다.

"마르샤가의 직인이 맞아. 욕심 많은 돼지였는데, 이렇게 골로 가버렸네."

"마르샤 대상인을 아십니까?"

"암살 의뢰를 몇 번 받은 적이 있어. 골동품 수집에 광적인 늙은이였지."

불행하게도 그 골동품 중에 카멜이 눈독 들인 물건이 있었다.

카멜 블레이저의 상징과도 같은 물건.

'용아(龍牙)의 망토.'

카리스마형 군주인 녀석의 존재감을 더욱 부각시켜주는 아티팩트였다.

우선순위로 강탈할 아티팩트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범인이 블라이어의 성주라고? 네가 말했던 암살 대상?"

"네."

"주변 귀족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을 텐데. 마르샤가 보호비로 뿌린 돈이 제법 많거든."

귀족들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쏠렸을 때를 노렸을 것이다.

지금쯤 도미닉이 풀어놓은 키메라 군단에 정신이 없을 테니까.

직인을 내게 건네며 칼은 입맛을 다셨다.

"바깥도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모양인데?"

"키메라들의 습격을 기회로 보는 이들이 나타난 거죠."

정확히 이들이 아니고 학살자의 독식이라고 봐야 했다. 이 사건을 통해 가장 큰 이득을 챙기는 인물이니까.

"엮일 일 없는 블라이어 성주 따윈 신경 쓰지 말고, 일에 집중하자고."

"뭐, 그러죠."

"저리 가. 피 냄새 때문에 어지러우니까."

"수십 년 경력의 암살자가 할 말은 아니네요."

난 자리로 돌아왔다.

들판에 누워 잠시 생각에 잠겼다.

칼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학살자와 엮일 일이 없다고?

'아주 제대로 엮여있지.'

칼은 자신의 미래를 모르니 하는 말이다. 알았다면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조만간 학살자가 움직일 거야.'

이건 챕터1 주인공인 학살자의 세력 성장에 엄청난 도움을 주는 메인이벤트, '백(百) 개의 심장'이었으니까.

34화 마셔. 고통은 없을 거야.

토바른의 영지들은 라웁 숲을 중심으로 퍼져 있고, 라웁 숲 사이에서 키메라 군단이 난리를 피울수록 카멜에게 유리했다.

회귀자인 그는 도미닉 후아튼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움직이는 시기가 나 때문에 다소 늦춰지긴 했는데.'

내가 더미로 만든 존재, '그'.

갈대숲에서 만난 용병을 통해 카멜이 현재 '그'를 만나기 위해 교섭 장소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와 교섭을 위해 카멜은 움직일 수밖에 없었을 거다. 학살자는 '그'란 존재를 매우 경계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난 카멜에게 건넸던 지도를 떠올렸다.

카멜이 그곳에 도착해도 '그'는 없다. 대신 내가 보낸 '편지'를 받겠지.

'편지는 잘 전달했겠지?'

검은 장미에 1만 골드짜리 의뢰를 신청하면서, 남은 잔돈으로 편지 의뢰를 부탁했는데, 펜리는 푼돈 의뢰 따윈 듣고 싶지 않다며 쫓아냈다.

다행히 푸른 장미의 마담인 넬라가 그 제안을 수락했는데, 그 조건으로 잔돈과 5층에서 환불한 금액까지 몽땅 빼앗겼다.

'엘프가 돈독 오르니까. 더 무서워.'

천 골드 이상을 건넨 배달 의뢰다 보니 학살자의 눈을 피해 잘 전달했을 것이다.

편지는 카멜이 위화감을 느낄 만한 내용으로 꽉꽉 채워 넣었다. 읽어보는 순간 꽤나 놀랄 거다.

'다만, 편지를 읽고 놈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감이 안 온단 말이지.'

카멜 블레이저는 등장하는 악당 중에 지능이 가장 뛰어난 놈이었다.

늘 파격적인 행보를 보이는 놈이라, 섣불리 예측했다간 뒤통수 맞기 십상이었다.

그저 나와 관련된 상황만 빼고 스토리의 큰 틀만 생각해야 했다. 카멜의 목적은 토바른의 전역을 손에 넣는 것이었으니까.

'놈은 나만큼이나 도미닉 후아튼에 대해 잘 아는 인물이야.'

분명 키메라 군단을 이용해 에토르 가문을 도모하려고 할 텐데, 아쉽게도 지금 처지에선 이를 방해할 방법이 없었다.

그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데, 건너 숲에서 엘튼이 일행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난 그 모습에 벌떡 일어났다.

엘튼이 칼에게 건네는 장신구가 보였다.

흙먼지가 잔뜩 묻은 팔찌.

칼이 말한 팔찌를 찾은 모양이었다.

"이게 그 팔찌입니까?"

"그래, 소식이 없어서 걱정이 들 찰나였는데 다행이야."

확실히 다행이었다.

팔찌를 찾지 못했으면 칼이 아는 마법사에게 제작을 다시 맡겨야 했는데, 그 시기를 기약하기 힘들었다.

예상한 것과 달리, 별다른 특징이 없는 팔찌였다. 도시 상점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투박한 디자인. 다른 점이라면 팔찌 안쪽 면에 마법 룬어가 깨알만 한 글자로 새겨져 있었다.

"겉보기에는 평범해 보여도, 마법 아티팩트다."

"이 팔찌가 벌레를 죽일 수 있다고요?"

"그래. 벌레 제거용으로 제작된 거야. 다만, 시간이 걸려. 벌레를 단칼에 죽이는 게 아니라 말려 죽이는 거니까."

"어떻게요?"

"일단 선택해. 오른손이야? 왼손이야?"

오른손은 고대 문양이 각인되어 있어서 난 왼손을 선택했다.

"벌레를 네 왼쪽 손목으로 옮길 거야."

"그게 가능합니까?"

"충분히."

"굳이 옮기는 이유가 뭡니까?"

"팔찌를 채워야 하니까."

팔찌에 벌레를 죽이는 마법이 걸려 있다고 했다.

기간을 물어보니 한 달 정도는 차고 있어야 한다나.

"근데, 정말 안전한 겁니까?"

벌레도 죽기 전에는 꿈틀댄다고 하지 않던가.

칼의 휑한 소맷자락을 바라보며 묻자, 칼은 피식 웃으며 헐렁한 소매를 흔들었다.

"이건 내 선택에 따른 결과야. 팔찌랑 상관없어."

나도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크룩스의 추적대를 따돌리기 위해 스스로 팔찌를 풀고 붐(Boom)을 터트린 일을.

엘튼과 그 휘하 암살자들이 칼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과 관련이 있었다. 저들을 탈출시키기 위한 희생이었으니까.

'학살자와 칼이 다른 점이지.'

학살자에게 수하란 욕망을 채워줄 도구에 불과하지만, 칼은 자신의 사람이라 확신이 들면 책임을 진다.

내가 칼과 친해지려는 이유였다.

칼의 생존 버스에 좀 타보고 싶었다.

"왜, 불안해?"

"뭐, 그 정도는 아닌데."

"정 불안하면 옮긴 후 벌레를 터트려버려. 위력은 보증하지. 웬만한 녀석들은 다 죽을걸?"

"제 팔은요?"

"시원하게 날아가겠지. 더럽게 아프긴 한데, 날 봐. 어쨌든 살아있잖아."

취소다.

생존 버스는 무슨.

내 안위는 내가 직접 챙겨야 할 것 같았다.

"용케 살아남았네요."

"운이 좋긴 했지. 함께한 이들이 많았으니까."

"전부 크룩스 출신입니까?"

내가 엘튼과 그 주변의 암살자들을 둘러보자, 칼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분 붐(Boom)의 희생자 리스트에 올라온 녀석들이야. 도망칠 때 전부 데리고 나왔지. 그 덕에 개고생 좀 했지만."

칼은 엘튼에게 베텔의 독을 가져오게 했다.

엘튼이 가져다준 병은 기존 베텔의 독과 달랐다. 보랏빛이 아닌 분홍빛을 띤 병이었다.

시술에 맞게 제작한 독이라고 했다. 칼은 병을 흔들며 내게 물었다.

"시술, 바로 할 거지?"

"네. 찜찜한 건 얼른 털어버리는 성격이라."

"자리 깔고 누워."

이 벌레 새끼가 생존의 위협을 느낀 건가?

심장이 간질거렸다.

자리야 따로 구할 필요가 없었다. 난 칼이 쉬던 장소에 자리를 잡고 편히 누웠다.

칼이 병뚜껑을 땄는데, 병에서 시큼한 향기가 흘러나왔다.

저 예쁜 분홍빛 비주얼에 걸레 빤 썩은 냄새라니 어째 불안한데.

칼이 냄새를 맡고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자, 더 불안해졌다.

"벌레가 심장에 자리하는 이유는 심장 박동 때문이야. 진폭이 일정하게 느껴지는 장소에 둥지를 틀도록 훈련되어 있거든. 그런데 만약 심장 박동이 죽은 듯이 느려지면 어떻게 될까?"

"다른 곳을 찾아 움직인다는 겁니까?"

"정확히 둥지 이전이지."

"원하는 부위로 어떻게 이동시키는 겁니까?"

"압박과 자극."

칼은 길고 두꺼운 천을 꺼내더니, 내 왼쪽 손목을 칭칭 감기 시작했다.

강하게 옥죄는 압박감과 함께 짙은 맥동이 느껴졌다. 칼은 약초를 꺼내더니 잘게 빻아 천 위에 꾹꾹 눌러 붙였다.

뜨거운 감각과 함께 맥박의 세기가 더욱 강해진 느낌이 들었다. 눈을 감으니 손목 맥박이 북소리처럼 크게 들려왔다.

칼은 내 입술 위로 병을 가져왔다.

"마셔. 고통은 없을 거야."

"…대사 한번 살벌하네요."

"맛도 살벌하지."

험악한 인상이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어째 분위기가 장기를 떼서 파는 인간 백정 놈의 대사 같은데.

괜찮겠지?

난 그대로 병을 받아 마셨다.

시큼한 향기가 코끝을 찔렀다. 맛도 참으로 역겹다.

꾸역꾸역 삼키는데 순간 의문이 들었다. 시술 시간은 얼마나 걸리는 거지?

근데 묻지 못했다.

의식이 날아갔으니까.

* * *

"주군, 리옹입니다."

"들어와."

끼익― 귀에 걸리는 낡은 소리가 울렸다. 리옹은 너덜너덜한 문짝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주군이 이런 누추한 장소에 오래도록 머문다는 사실이 무척 불쾌한 표정이었다.

나른한 눈빛으로 창밖을 응시하던 검은 머리의 사내.

작은 테이블에 올려진 찻잔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잔이 전혀 줄지 않았다.

그 모습에 리옹은 주군이 고민에 빠져있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됐지?"

"구했습니다."

그제야 사내, 카멜이 리옹을 올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눈짓으로 테이블을 가리키자, 리옹은 공손히 한쪽 무릎을 꿇고는 자신이 가져온 상자를 올려놨다.

카멜이 상자를 열자, 검은빛의 매끈한 망토가 모습을 드러냈다.

용아(龍牙)의 망토.

마법 방어력과 함께 착용자의 존재감을 올려주는 고대 아티팩트였다.

"마르샤 대상인은?"

"정리했습니다."

"피를 많이 흘렸겠어."

"터무니없는 가격을 불러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욕심 많은 돼지가 탐낼 만한 물건은 아니지. 뒤처리는?"

"접촉했던 증인들은 모두 제거했고, 흔적이 남을 만한 저택과 창고는 모두 불태웠습니다. 용병 일부가 도망쳤는데, 증인으로 세우기엔 비루한 놈들이라 무시해도 될 것 같습니다."

"깔끔하네. 역시 리옹이야."

카멜은 용아의 망토를 몸에 둘렀다. 그 순간 방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리옹은 주군에서 흘러나오는 위압감에 살짝 고개를 숙였다.

카멜은 용아의 망토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걸로 끝이었다. 더는 걸친 망토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세상에 이보다 좋은 물건은 넘쳤고, 자신은 여전히 배가 고팠으니까.

"이 마을 아무래도 미심쩍어."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렌구아는 도착했나?"

"바깥에서 대기 중입니다."

"주술사들의 둥지에서 몇이나 데려왔지?"

"다섯입니다."

"슬슬 시작해볼까."

고개를 끄덕인 카멜은 천천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는 창가를 향해 다가서더니, 길게 기지개를 켰다.

창가로 비치는 풍경은 작은 시골 마을을 연상케 했다.

전달자가 건네준 지도대로 '그'를 보기 위해 마을에 도착한 카멜은 사흘 정도 이곳에 조용히 머물렀다.

하지만 '그'는 결국 나타나지 않았고, 대신 편지 한 장을 전달받았다.

편지 내용은 그의 심기를 무척 거슬리게 했다.

다음 만남을 기약하자니.

감히 자신을 바람맞힌 인간은 회귀를 통틀어 처음이었다.

카멜은 바로 떠나지 않고 며칠을 더 묵었다.

며칠 동안 창밖을 통해 마을 사람들을 구경했다. 그러면서 묘한 이질감을 느끼게 됐다.

그 이질감이 뭔지 오늘 확인해보고 싶었다. 주술사들이 도착했으니 움직인다.

"마을 전체를 봉쇄하고, 단 한 명도 빼놓지 말고 붙잡아라."

"충."

"렌구아에게 작업을 지시해."

"무슨 작업을 원하십니까?"

카멜은 식은 찻잔을 홀짝이며 말을 이었다.

"마을 사람들의 기억을 뽑아야겠다."

* * *

"아악!"

"도, 도망쳐!"

조용했던 마을에 때아닌 비명이 터져 나왔다. 불쑥 나타난 검을 든 사내들이 마을을 이 잡듯이 뒤지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카멜이 데려온 정예 친위대로 전원 마나 유저로 이뤄져 있었다.

그 기세를 마주한 마을 사람들은 대항할 엄두도 못 낸 채, 여관으로 모조리 끌려왔다.

그들은 여관 1층 구석에 몰린 채 벌벌 떨었다.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는 모습.

쿵!

"...!"

그 정적 사이로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위층 계단에서 검은 망토를 흩날리며 한 사내가 조용히 내려왔는데, 짙은 위압감 때문인지, 마을 사람들은 그를 감히 올려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수그린 채 움츠러들었다.

그가 1층으로 내려오자, 둘러싼 이들이 고개 숙여 그를 맞이했다. 카멜은 리옹을 바라봤다.

"전부인가?"

"128명. 그 외는 없는 것 같습니다."

"촌장은?"

리옹이 손짓하자, 기사들은 한 사내를 질질 끌고 왔다. 마흔 후반으로 보이는 사내였는데, 촌장치곤 젊어 보이는 나이였다.

카멜 앞에 엎드린 채 촌장은 벌벌 떨면서 고개를 떨궜다. 그래도 할 말은 있는지, 용기 내어 더듬거리듯 입을 열었다.

"누, 누구십니까?"

"이곳에 볼일이 있는 사람."

"이곳은 에토르 가문에 보호세를 내는 정식 마을입니다. 누구신지 모르겠지만, 톰자엘 자작님이 두렵지 않으십니까?"

"아아, 그 늙은 너구리에게 보호세를 내고 있었나? 그 늙은이가 이곳까지 발을 담그고 있을 줄 몰랐는데."

"그 무슨 불경한…."

"이 마을 뒤에 누가 있지?"

"무, 무슨 말씀이신지… 여긴 에토르의 주인이신 톰자엘…."

"걸음걸이가 달라."

"...."

"마을 사람들의 발걸음이 평범한데 이상하게 거슬려. 내가 자주 보던 그 느낌이더라고."

카멜은 촌장을 빤히 내려다봤다. 촌장은 바짝 엎드린 채 벌벌 떨고 있었다.

하지만,

"암살자."

순간 덜덜 떨던 촌장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그 모습에 카멜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35화 편지

"난 그 누구보다 두려움에 떠는 인간 군상을 많이 봐왔지. 그런데, 잡혀 온 이들의 벌벌 떠는 모습이 왜 같잖아 보일까?"

"...."

"연기 그만해. 역겨우니까."

엎드린 촌장의 얼굴이 불쑥 올라왔다. 인형처럼 표정 없는 얼굴. 촌장의 시선이 카멜을 향한 순간, 리옹의 검이 벼락처럼 움직였다.

촤악―

핏방울이 허공에 흩어지며 양팔이 떨어져 나갔다.

잘린 상처 부위가 새하얗게 얼어붙으며 괴사하기 시작했다. 리옹의 특성, 칼바람의 냉기(冷氣)에 노출된 흔적.

생포를 위해 특성을 사용했는데, 촌장은 비명도 없이 그대로 카멜에게 몸을 튕겼다.

"죽어!!!"

촌장의 가슴이 불룩불룩 송곳처럼 튀어나오더니 전신에 실핏줄이 퍼지며 몸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카멜은 코웃음을 치며 망토로 몸을 가렸고, 리옹이 앞을 막아서며 팔을 뻗었다. 리옹의 손가락에서 푸른빛이 번뜩였다.

푸른 반지.

콰아아아아아앙―!!!!!!

폭음과 함께 살점과 뼛조각이 사방으로 터져나갔다. 폭발에 휩쓸린 마을 사람들 일부가 처참한 몰골로 비명횡사했다.

위이이잉―!!

폭발을 막아선 리옹은 무표정한 얼굴로 방패를 내려놨다.

팔뚝에 생성된 푸른빛으로 이뤄진 카이트 실드(Kite Shield).

일주일 전 주군이 하사한 '네메시스의 얼음 방패'였다. 살점이 덕지덕지 묻은 방패를 본 리옹은 미간을 살짝 좁히며 방패를 다시 들었다. 사방에서 짙은 살기가 쏟아졌다.

폭발이 신호탄이 된 듯, 피로 흥건한 바닥을 밟고 마을 사람들이 돌진해왔다.

날렵한 몸놀림으로 모두가 카멜을 먹잇감처럼 노리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포위된 리옹은 자세를 잡으며 으르렁거렸다.

"렌구아, 뭐 하나!"

리옹의 타박에 1층 중심으로 거대한 핏빛 마법진이 생성됐다.

공간 전체가 붉은빛으로 채워졌다. 그 기운이 예사롭지 않자, 마을 사람들, 아니 암살자들은 더욱 다급히 카멜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렸다.

순간,

꿀렁―!

마법진 안에서 촉수처럼 뻗어 나온 수십 수백의 붉은 넝쿨. 넝쿨은 인간의 핏줄을 닮아 혐오스러웠다. 살아있는 듯 꿀렁거리며 넝쿨들은 삽시간에 암살자들을 낚아채며 공간 전체를 붉게 물들였다.

마치 거미가 먹잇감을 매달아 놓은 것처럼 암살자들은 붉은 넝쿨에 매달려 벽 이곳저곳에 꼬치처럼 달라붙었다.

백여 구의 꼬치가 붉은 벽을 수놓았다.

으....

벽 사방에서 신음이 흘러나오고, 꼬치가 된 이들은 꼼짝도 하지 못한 채 눈동자만 뒤룩뒤룩 굴렸다. 잠시 후, 기사들 뒤쪽에서 어두운 로브를 걸친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렌구아와 주술사들이었다.

렌구아는 카멜에게 다가와 예를 표했다.

카멜은 형체조차 사라진 촌장의 시신을 훑어보곤 짧게 혀를 찼다.

"붐(Boom)? 설마 크룩스 놈들이었나?"

회귀 전 자신의 얼굴에 큰 상처를 안겨준 자살 폭탄.

붐(Boom)은 카멜도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와 관련된 마을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어찌하시겠습니까?"

리옹이 의자를 가져오자, 카멜은 의자에 앉아 잠시 고민했다. 그러곤 렌구아를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렌구아는 고개를 숙인 뒤 꼬치가 된 암살자들에게 다가갔다. 그 뒤로 주술사들이 따랐다. 그들의 손에는 기억을 뽑아낼 주술 도구가 들려 있었다.

"끄아아아아악―!!!!"

"아아악! 아악―!!!"

처절한 비명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주술사들은 꼬치에 묶인 암살자들을 하나씩 붙들고 기억을 뽑아냈다. 눈, 코, 귀에서 피가 흐르고, 피를 토하듯 비명을 질러댔지만, 주술사들은 암살자가 죽든 말든 느린 몸짓으로 뇌리에 담긴 기억을 구슬 장치에 담았다.

"촌장이 죽은 게 아쉬워. 쓸만한 기억이 있었을 텐데."

"죄송합니다."

"리옹, 그대 잘못이 아니다. 붐(Boom)은 나도 예상 못 했거든. 세뇌당한 놈을 산 채로 잡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 차나 한잔 부탁하지. 목이 마르군."

"충."

리옹이 자리를 비우자, 카멜은 의자에 편히 앉아 품을 뒤적거렸다. 편지를 꺼낸 그는 다시 편지를 읽었다.

'그'가 보낸 편지.

벌써 여러 번 읽은 편지였지만, 카멜은 시간이 날 때마다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그'의 심리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거슬려, 거슬린단 말이지."

편지의 한 문구에서 멈춘 카멜은 미간을 구겼다. 감정 표현이 절제된 그가 고작 문장 한 줄에 짜증의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검은 망토는 당신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

사흘 전에 읽은 편지 내용이다. 검은 망토라…. 카멜은 자신의 망토를 바라봤다.

용아(龍牙)의 망토.

조금 전 리옹이 대상인 마르샤를 죽이고 가져온 고대 아티팩트였다. 놈은 자신이 용아(龍牙)의 망토를 얻을 것을 알고 있는 듯 말하고 있었다.

리옹이 찻잔을 건넸다.

주변은 고통과 비명으로 지옥이 펼쳐졌지만, 카멜은 덤덤히 티타임을 즐겼다.

"또 읽으십니까?"

"예언을 듣는 듯한 편지라서 말이야. 아주 기분이 더러워."

"그는 이곳에 없는 것일까요?"

"내 일거수일투족을 알고 있는 듯한 내용이 적혀 있어. 실제로 그런 느낌이 강하고. 분명 내 주변을 감시하는 듯한데, 찾아보면 없단 말이지."

결과만 보자면 '그'와의 교섭은 연기되었다.

동맹 표시는 잘 전달받았지만, 전달자로 보낸 이가 실종됐다는 이유였다.

문제는 납치를 지시한 카멜 본인도 현재 그 전달자의 위치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감시자 소식은 아직이지?"

"아무래도 당한 것 같습니다."

"케플린은 4성 기사야. 그가 당했다면 그 전달자 주변에 조력자가 있었다는 뜻인데. '그'가 전달자 실종을 핑계로 교섭을 미루고 있어. 날 가지고 노는 것일까?"

"벤을 붙이는 게 아니었는데, 죄송합니다."

"큰 기대는 안 했어. 방심을 유도하려고 붙인 미끼니까. 다만, 전달자를 도운 조력자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 아쉽군."

둘은 며칠 전 홀로 돌아온 벤을 떠올렸다. 전달자를 놓쳤고 함께 움직였던 이들이 전부 죽었다는 소식을 전했는데, 렌구아를 시켜 벤의 기억을 뽑아봤지만, 기절해 있었는지, 협곡에 있었을 당시의 필요한 기억들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알아낸 사실은 전달자 놈이 동맹 표시로 불을 지른 뒤 벤의 뒤통수를 치고 도망쳤다는 것 정도.

분명 케플린이 뒤를 쫓아갔을 텐데 지금껏 소식이 없었다는 건 리옹 말대로 당한 것 같았다.

"이 편지를 전달한 놈도 비렁뱅이라 그 흔적을 찾을 길이 없고, 알아낸 것이라곤 이곳이 크룩스와 관련된 마을이란 것뿐이야. '그'는 무슨 의도로 이곳을 교섭 장소로 정한 거지?"

카멜의 물음에 리옹은 답하지 않았다. 주군이 원하는 건 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물음을 던지고 답을 찾아가는 방식.

주군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풀 때 주로 쓰던 방식이었다.

"짜증 나는군."

"...."

그럼에도 주군의 입에서 답이 아닌 짜증이란 단어만 흘러나온다는 건 리옹에게도 생소한 경험이었다.

잠시 후, 작업을 끝낸 렌구아가 정보를 정리해 카멜에게 보고했다.

"역시, 크룩스의 비밀 거점이었나?"

"주요 거점 같습니다. 크룩스에 관한 굵직한 정보가 제법 많습니다."

"'그'와 관련된 정보는?"

"'그'와 관련된 기억은 전혀 없었습니다. 대신, 그 전달자 놈이 이 마을에 머물다 간 흔적이 있습니다."

"전달자가?"

카멜이 처음으로 큰 관심을 보이자, 렌구아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곤 말을 이었다.

"암살 준비를 위해 잠시 머물렀던 것 같습니다. 처형당한 암살자 전원이 머문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은밀히 전달자에게 접근한 존재가 하나 더 있는 것 같습니다."

"정확하게."

"단둘이 마을 창고에서 만났다는 정보가 있는데, 전달자와 접선한 인물이 누군지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제 예상으로는 크룩스의 간부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되는데…."

"단둘이 창고에서 만났다라."

카멜은 조용히 편지를 바라봤다.

'추신'이라고 적힌 마지막 문장.

[이곳 음식점 빵과 수프 맛이 괜찮습니다. 떠나기 전에 한번 드셔보시길.]

"...."

처음에는 이게 무슨 개소리인가 했다.

그런데 내용을 보니, 이 마을에 방문했다는 것을 대놓고 알려준 셈이다.

전달자와 접선한 존재가 '그'일 확률도 배제할 수 없었다.

'무슨 장난질이지?'

놈의 의도를 읽기가 어려웠다. 그렇다고 편지의 내용이 거짓이냐? 그건 아니었다.

[일방적으로 교섭을 연기했으니, 좋은 정보 하나를 알려드리죠. '메케릭의 비약'이라고 그대의 영지, 블라이어 하렘가에 연금 비약을 연구하는 마법사가 있습니다. 그 비약을 얻고 싶다면....]

메케릭의 비약은 자신이 이미 마법사를 죽이고 리옹에게 복용시켰다. 그 효과로 리옹은 현재 5성에 오른 상태.

이미 써버린 쓸모없는 정보였지만, 이 정보는 진짜였다.

'나에 대한 정보만 아는 게 아니야.'

어떤 방식으로 정보를 알아내는 거지?

'그'에 관해 떠올릴수록 답은커녕 의문만 계속 늘어갔다.

한 존재에게 이토록 궁금증이 생긴 적이 있었을까.

'그'를 어떻게든 죽이고 싶단 갈망이 스멀스멀 차올랐다.

카멜은 두 눈을 감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흥분하는 감정을 가라앉혀야 한다. '그'를 떠올릴 때면 이상하게 감정이 불같이 타올랐다.

카멜은 그런 자신의 감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다시금 짜증이 올라왔다.

"리옹."

"네."

"떠날 것이다. 준비해."

"그럼, 이곳은...."

카멜은 의자에서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사방에서 얕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자비를 바라는 눈빛.

"전부 태워버려."

하지만 그는 구원자가 아닌, 학살자였다.

* * *

화르르륵―!

마을이 거세게 불타올랐다.

어둑한 밤하늘, 불씨를 담은 재 가루들이 허공을 가득 채우며 떠올랐다. 뿌연 연기 아래, 카멜은 검게 타버린 마을을 둘러보곤 마차에 올랐다. 말을 탄 리옹이 마차 호위에 나섰고, 그 뒤로 서른 기의 말이 줄을 섰다.

마차가 출발하기 전, 카멜은 창문을 연 뒤 누군가를 찾았다.

"렌구아."

"예, 주군."

"그대는 주술사 전원을 데리고 라웁 숲으로 가라. 그곳에서 키메라를 사냥하고 마석을 수집해."

"도미닉이 나타나면 어찌할까요?"

"지금쯤 놈은 베네타 영지 근처에 있을 테니 만날 일은 없을 거다. 혹여 만나게 되더라도 교전은 무조건 피해라. 놈과 부딪치지 마."

"알겠습니다."

"마석이 목표량에 이르면 에토르를 중심으로 마석을 풀면서 한 가지 소문을 흘려. 생체 마석이 마나 유저의 경지를 올려주는 보물이라고."

"알겠습니다."

렌구아는 이미 주군을 통해 생체 마석에 대한 부작용을 전해 들었기 때문에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크룩스 본진이 에토르에 있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접선 방법도 알아냈습니다."

"마석에 관한 작업이 끝나는 대로 에토르에 남아 크룩스와 관련된 정보를 수집해. 언제든 처리할 수 있게."

"크룩스를 지우실 생각입니까?"

"상황을 보고 판단하겠다."

크룩스는 저번에 이용해 먹은 암살 조직이지만, 변변치 않아 무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관련되어 있다면 다르다. '그'와 관련된 조직인지 우선 파악한 후 결정할 생각이었다.

렌구아를 따라 주술사들이 라웁 숲으로 떠나고, 마차는 출발했다. 덜컹거리는 마차에 홀로 앉아 카멜은 '도네콜린트'를 떠올렸다.

'소식이 전혀 없어. 너무 조용해.'

지금쯤 세이렌의 비명에 관한 '신명'이 소문으로 돌며 귀에 들어와야 하는데, 도네콜린트는 땅으로 푹 꺼진 것처럼 존재 자체가 사라져 버렸다.

영입을 위해 움직였던 모든 행동이 헛수고가 된 것이다.

미래가 또 뒤틀렸다.

36화 광의의 예언자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카멜은 기억을 더듬어 올라갔다. 곧 첨탑 꼭대기에서 봤던 전달자를 떠올릴 수 있었다.

이름조차 모르는 하찮은 암살자 놈.

그 만남부터 미래가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카멜은 미래가 뒤틀린 원인으로 '그'를 떠올렸다. 자신의 다음 행보를 예측할 수도 있는 존재.

수를 읽힐 수 있으니 어려운 상대였다.

'어떻게 상대해야 할까.'

고민하던 카멜은 곧 한 가지 방책을 떠올렸다.

"의외성밖에 없나?"

'그'의 예측을 벗어나려면 변수가 필요했다. 그조차 예측하지 못할 변수 말이다.

그는 에토르를 떠올렸다.

토바른 전역을 손아귀에 넣고 세력 확장을 꿈꾸려면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하는 땅.

과거에는 에토르를 점령하는 데만 3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부친과 형제.

이들을 정리하고 블라이어를 정비하는데 긴 시간을 잡아먹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8개월.'

하지만 앞으로 계획한 밑그림대로 흘러간다면 에토르는 8개월 뒤에 자신의 수중에 떨어진다. 회귀 전과 비교하면 엄청난 속도인 셈이다.

그럼에도 카멜의 표정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무리를 좀 해야겠어."

카멜은 큰 피해를 보더라도 점령 시기를 앞당겨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의 예측에서 벗어나려면 '의외성'이 필요했고, 시간으로 상황을 뒤틀면 수많은 변수를 불러올 수 있었다.

얼마나 앞당겨야 할까?

'4개월 안에 에토르의 성벽에 깃발을 꽂는다.'

절반의 시간을 줄인다.

수많은 피가 흐르겠지만, 미묘하게 계획이 계속 삐거덕거리는 느낌이라, 강행할 필요성을 느꼈다.

카멜은 마차를 툭툭 두드렸다. 리옹이 말을 몰고 다가오자, 카멜은 창문을 열고 물었다.

"'광의의 예언자'는 어디쯤 있지?"

"정보원의 소식대로라면 엘레토르 성곽을 넘어가기 전에 만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차를 버리고 움직인다."

"네? 하지만...."

"서둘러라. 리옹."

갑작스러운 지시에 리옹은 살짝 당황했지만, 곧 표정을 고치고 수하에게 주군의 말을 가져오게 했다.

"이럇!"

카멜은 거칠게 말을 몰았다.

계획을 앞당기려면 기존의 일부터 빠르게 처리해야 했다.

그중 광의의 예언자와의 만남은 앞으로 계획을 정하는 데 꼭 필요한 일이었다. 지금이 아니면 쉽게 만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라서 서둘러야 했다.

시끄러운 말발굽 소리를 뒤로한 채 카멜 일행은 쉬지 않고 엘레토르 성곽이 위치한 북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반나절을 쉬지 않고 이동했다.

어둠으로 물들었던 숲이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했다. 동이 트며, 색 바랜 성곽을 비추었는데, 그 길이가 끝도 없이 펼쳐졌다.

엘레토르 성곽.

토바른 지역의 북쪽 경계를 가르는 상징이었다. 그 성곽에 도착하기 전, 카멜 일행은 대규모의 행렬과 마주했다.

"멈춰라!"

리옹이 앞서가던 행렬을 가로막았다. 선두에서 움직이던 마차는 무척이나 화려했는데, 한눈에 봐도 높은 신분의 사람이 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잠시 후, 뒤늦게 리옹 곁으로 카멜이 기사들을 이끌고 나타나자, 마차를 호위하던 기사들이 일제히 무기를 뽑아 들었다.

"제때 맞춰서 왔군."

카멜은 마차에 달린 깃발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엘레토르 성곽 너머부턴 오르도르의 숲이 펼쳐진다. 초대받지 못한 자는 들어갈 수 없는 마녀들의 숲.

다행히 성곽을 넘어가기 전에 예언자의 마차를 잡을 수 있었다.

카멜은 리옹이 건넨 손수건을 받아 땀을 닦았다. 체력적으로 무리했다. 하지만 꼭 만나야 할 인물이 앞에 있었다.

"누구신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마차를 대표하는 덩치 큰 기사가 카멜 앞에 다가왔다. 중무장한 기사였는데, 한눈에 봐도 강해 보였다.

'리옹이 감당할 수준인가?'

눈앞의 기사들은 오르도르 숲 너머에 자리한 클라크 대공의 기사들. 대공의 직계 기사들이 약할 리 없겠지만, 손꼽히는 정도는 아니었다.

대공의 영지는 기사보단 마법사들의 영향력이 월등히 강한 곳이었으니까.

실력이 궁금했지만, 그럴 기회는 없을 것 같았다.

자신은 '손님' 입장에서 예언자를 찾아온 것이니까.

"답을 구하고자 왔다."

"답에는 대가가 따릅니다."

기사의 말에 카멜이 손을 까닥이자, 뒤쪽에서 리옹이 작은 상자를 가져왔다. 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황금이 가득 들어있었다.

황금을 확인한 순간, 팽팽했던 대치가 삽시간에 누그러졌다.

예언자의 손님.

대가만 확실하다면 신분은 중요치 않았다. 그것이 대공이 정한 기준이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기사는 고개를 살짝 숙인 뒤 마차로 돌아갔다.

잠시 후, 마차 문이 열리더니 천으로 눈을 가린 노인이 시종들의 부축을 받고 천천히 걸어 나왔다.

광의의 예언자.

그의 예언 능력은 토바른을 넘어 왕국 전역까지 퍼질 정도로 유명했는데, 그 능력을 빌리려면 천문학적인 황금이 필요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예언자를 한 번이라도 보기 위해 황금을 아끼지 않았다.

2년에 한 번, 예언자는 클라크 대공의 부탁으로 손님들을 찾아가 황금을 받고 예언을 봐줬는데, 지금이 딱 그 시기였다.

"인연이 아닌 이가 찾아왔구려."

"...."

카멜은 눈앞의 노인을 처음 본다.

회귀하지 않았더라면 만나보지 못했을 인연. 예언자는 그것을 느끼고 있는 건가?

카멜은 준비해둔 의자에 앉아 예언자를 마주 봤다.

"예언자는 이름이 없나?"

"답을 구하는 것이오?"

예언자의 답에는 황금이 든다. 카멜은 피식 웃고는 말을 이었다.

"관두지. 내가 답을 구하는 건 사람의 생사다. 혹시 알 수 있나?"

"나와 만난 적이 없다면 불가능하오."

카멜은 짧게 혀를 찼다. 전달자 놈과 감시자 케플린의 생사를 확인해볼 수단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럼, 내 죽음은? 내 죽음에 관해 예언해 줄 수 있나?"

미래가 뒤틀린 탓에 확인이 필요했다.

예언자는 카멜 앞에서 구슬을 만지작거렸다. 잠시 후 떨림과 함께 주황색으로 빛나는 구슬,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죽음의 손길은 보이지 않소. 당분간은."

"당분간은? 그게 무슨 뜻이지?"

"그대의 행동에 따라 향후 언제든 미래가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이오. 내가 말해줄 수 있는 건, 근 시일의 죽음뿐이지."

"죽음이 보인다면 피할 수 있나?"

"피할 수도, 피하지 못할 수도 있소. 다만, 피한다면 그대의 가치만큼 대가를 치를 것이오."

"대가? 무슨 대가?"

"그대에게 소중한 것."

카멜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리옹은 그 표정에서 주군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감히, 누가 나에게 소중한 것을 가져간단 말이냐."

예언자는 그저 말없이 하늘을 가리켰다. 그게 신이 될 수도, 하늘이 될 수도, 운명이 될 수도 있다는 애매한 답과 함께.

"답변이 불성실해."

"사실만 말하는 것이오."

만족스러운 답변은 아니었지만, 그 정도면 충분했다. 계획에 당장은 큰 위협이 없다는 뜻이었으니까.

"묻고 싶은 게 또 있는데."

"답을 구하려면 대가를 내놓으시오."

"참으로 비싼 입이야. 당신."

카멜이 리옹을 바라보자, 리옹은 또 다른 상자를 예언자 앞에 내려놓았다.

"근래에 받은 '신명'이 있나?"

"음, 하나가 있소만...."

무슨 이유인지 예언자는 그것에 관해 말하기 싫은 표정이었다.

"그 주인의 생사를 확인할 수 있나?"

"할 수 있소. 신명은 특별하니까. 답을 원하시오?"

카멜이 고개를 끄덕이자, 예언자는 구슬을 살피더니, 잠시 후 구슬에서 손을 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있소."

카멜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다행히 살아있나?'

그는 도네콜린트가 살아있다고 판단했다.

생사를 확인했으니, 찾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 카멜은 확인차 물었다.

"신명의 내용을 듣고 싶다."

"신명은 신이 주신 계시, 무분별한 발설로 세상에 영향을 준다면 큰 대가를 받게 된다는 것을 아시오?"

"그 두 눈이 실명된 것처럼 말인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지."

"...."

"선택권은 그대에게 없는 것을 알고 있다."

카멜의 지시에 리옹은 세 개의 상자를 기사에게 가져갔다. 황금이야 금광 개발만 끝나면 천문학적으로 얻을 수 있다. 굳이 아낄 필요가 없었다.

상자를 확인한 기사는 예언자 옆에 섰다.

"손님께서 답을 원하십니다."

"…하지만."

"그대는 대공께 죄인임을 잊지 마십시오."

무미건조한 기사의 말에 예언자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천을 가린 눈으로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그 모습에 카멜은 묻고 싶었다.

스스로의 죽음도 볼 수 있냐고.

"내가 말해줄 수 있는 건 신명의 내용 중 한 줄뿐이요. 나머지는 보이지 않아."

"신명이 보이지 않는다고?"

"이유는 묻지 마시오. 나도 처음 겪는 일이니까."

"...."

카멜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혹의 감정이 스쳐 갔다. 도네콜린트의 신명은 모두가 알 만큼 널리 퍼진 신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광의의 예언자조차 보지 못하는 신명이라니.

갑자기 '그'가 떠오른 건 왜일까?

"말하라!"

그가 원하는 답은 도네콜린트의 신명, '세이렌의 비명'이었다.

재촉 섞인 언성으로 답을 구하자, 예언자는 빛나는 구슬을 만지작거렸다.

시력은 잃었지만, 그의 뇌리에는 구슬에 내려진 신명의 글자가 또렷이 박혔다. 그중 대부분이 해석이 안 되는 글자였다. 신명의 글귀 중 가장 밑단의 내용만 해석한 것이 고작이었다.

예언자는 궁금했다.

운명의 아케인이나 마녀 릴리도 이 신명을 전부 해석할 수 있을까.

그건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라면 절대 이 신명을 발설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이것을 계기로 죽음이 찾아올 수도 있겠지만, 죄인에겐 선택지가 없었다.

예언자의 입이 떨리듯 열렸다.

[XX XXXX – XX XX XXX]

[X XX XX.]

[세이렌의 찬가.]

"세이렌의 찬가."

카멜의 표정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비명이 아닌 찬가?!

신명의 주인이 바뀌었다.

* * *

월급쟁이로 팍팍하게 살아가던 내게 하루 중 가장 소중하고 행복한 시간을 고르라면 잠을 청하는 때였다.

바스락거리는 보드란 이불 촉감 아래, 소설 악당들이 강해지면 벌어지는 일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그 꿀 같은 시간.

그 시간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아서, 퇴근길은 언제나 발걸음이 가벼웠다.

다만, 새벽이 되어 스마트폰을 끄고 눈을 감을 때면 그 환상은 와장창 깨진다. 잠이 들고 깰 때는 어찌나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가던지.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만 봐도 기분이 더러웠다.

아, 출근 시간이다.

'아오, 시발 꿈!'

의식이 돌아오고, 햇살 사이로 비추는 풍경이 커튼이 아니라 숲 한복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회사를 안 나가도 된다는 이 안도감.

이딴 사실 하나로 행복감을 느껴야 하는 신세가 참으로 기가 막혔지만, 이 순간만큼은 즐기고 싶었다.

소설 속에 떨어진 이후 처음으로 긴 꿈을 꾸었다. 평범한 회사원의 삶이 그려졌고, 전까지 난 그렇게 살아왔다.

되새겨 보니, 현실의 삶은 확실히 재미는 없지만, 소소한 행복과 안정감이 있었다.

세렝게티 정글에 뚝 떨어져 보니, 그때가 좋았구나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래도 출근 시간이 싫은 것을 보면 어떻게 월급쟁이로 살았는지 몰라. 끙!"

몸을 일으키려는데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거지?

주변을 둘러보니, 사람이 없었다.

칼을 찾기 위해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데 왼쪽 손목에 턱― 거슬리는 감촉이 느껴졌다. 손을 올려보니, 손목에 두꺼운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검은색 바탕의 투박한 팔찌.

팔찌를 보니 시술이 성공리에 끝난 것 같았다.

37화 백(百) 개의 심장

발걸음을 떼는데 힘이 쭉 빠진 듯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너무 쉬어서 근육이 말라버린 건가?

꼬르르륵―

뱃가죽이 달라붙을 정도로 배가 고팠다.

기분 탓이 아니었다.

상당 시간 오래 누워 있던 게 분명했다.

'아, 치킨 뜯고 싶다.'

꿈 때문인지, 배달 어플로 자주 시켜 먹던 치킨 콤보 세트가 떠올랐다.

기름에 바사삭 튀긴 현대의 맛.

오늘 같은 날 육즙이 흐르는 고기 맛 좀 봐야 하는데.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며 나무숲 사이를 거닐고 있는데, 머리 위로 검은 그림자가 뚝 떨어졌다.

"정신이 언제 돌아올까 싶었는데, 오늘이었나?"

익숙한 기척과 목소리.

칼이었다.

난 칼이 떨어진 나무 위를 올려다봤다.

높다. 아파트 5층 정도 높이?

그런데, 떨어질 때 충격은커녕 소리도 잘 안 들렸다.

그만큼 몸이 가벼워졌다는 뜻.

"컨디션은 전부 회복하신 겁니까?"

"충분히 쉬었으니까."

"제가 꽤 오래 누워있었나 보네요."

"벌레의 움직임이 예상보다 더뎠어. 일주일이 흘렀다."

일주일?

어째 뼈마디 전신이 쑤신다고 했더니, 무려 일주일이나 정신을 잃고 있었다. 그리고 인간이 일주일을 굶어도 이리 멀쩡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됐다.

"의식도 없는 환자만 놔두고 전부 어딜 간 겁니까?"

"반경을 늘려서 경계를 세운 것뿐이야. 아지트는 안전해."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약간 귀찮아지긴 했지."

"네?"

칼은 따라오라는 손짓을 한 뒤 앞장서서 걸었다.

방향을 보니 아지트로 다시 가려는 것 같았다.

난 그 뒤를 따르며 물었다.

"시술은 잘됐습니까?"

"성공했어. 팔찌 보이지?"

"네."

"벌레는 팔목에 안착했어. 팔찌가 벌레의 생명력을 갉아먹기 시작할 거야. 말라 죽을 때까지 눈치채지 못할 양으로."

"무슨 마법이길래."

"라이프 드레인(Life Drain), 대상의 생명력을 갈취하는 흑마법이야. 무시무시한 흑마법이지만, 팔찌에 걸린 수준은 벌레조차 간지럼을 탈 정도지."

"용케 이런 걸 만들어줬네요."

"흑마법사지만 나름 선을 지키는 녀석과 알고 지내고 있거든."

한 달 동안 벌레 한 마리를 죽일 수 있는 미니멈 라이프 드레인이라니, 신박하긴 했다.

벌레에게 자극을 주지 않고 제거하는 방식인데, 칼이 말한 대로 딱 붐(Boom) 제거용 아티팩트 같았다.

이걸 생각하고 제작하다니.

그 흑마법사가 누굴까.

"배고프지?"

그 의문은 곧 칼의 물음에 눈 녹듯이 사라졌다.

"당연한 걸 왜 묻습니까? 고기 없습니까?"

"그 비슷한 건 있지."

아지트로 복귀한 칼은 작은 주머니를 건넸다.

그 안에는 마른 육포가 잔뜩 담겨 있었다.

육즙은 없지만, 이게 어디냐.

난 자리를 잡고 허겁지겁 육포를 입에 욱여넣었다. 역시 배고프면 뭐든 맛있는 것 같았다.

칼은 말없이 내 모습을 한동안 지켜봤다. 그 시선에 먹던 육포를 꿀떡 삼키곤 입을 열었다.

"뭡니까? 물어보고 싶은 게."

"눈치는 귀신이라니까. 엘튼의 눈치가 네놈의 반만 닮았으면 바랄 게 없을 텐데."

"눈치보단 믿음이 더 중요한 거 아닙니까?"

"쓰다 버릴 패라면 믿음만으로 충분하지. 하지만 평생 곁에 둘 녀석이라면 믿음 가지곤 부족해. 높은 위치에 있다면 더더욱."

"눈치가 왜 중요합니까?"

"그 어떤 조건보다 생존과 직결되는 덕목이니까. 우린 암살자야. 표적 중에 암살자보다 약한 자는 없어. 늘 강한 상대를 두고 눈치 싸움을 벌여야 하지."

"기다리느냐, 사냥하느냐, 도주하느냐. 타이밍을 잘 재라는 말이군요."

"맞아. 그 찰나가 생사를 가르지."

내 답에 칼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서 클레이튼.'

칼은 눈앞의 사내를 응시했다.

물주머니를 벌컥벌컥 마시면서도 배가 고픈지 움켜쥔 육포 덩어리만 노려보는 녀석.

짧은 시간이지만, 녀석과 다양한 주제로 대화하며 시간을 보냈다.

처음에는 달라붙어서 꼬치꼬치 따지고, 이것저것 물어보길 반복해서 짜증이 났는데 시간이 갈수록 그 대화에 재미를 느꼈다.

'대화가 통한다.'

40년 경험의 노련한 자신과 사고 능력이 비슷한 눈높이에 있다는 뜻이다.

고등 교육을 받은 것 같지 않았는데 판단에 대한 계산이 빨랐고, 사회 경험이 풍부했다.

거기에 눈치와 빠른 이해력까지.

오랜만에 욕심이 나는 인재를 만났다.

한번 제대로 키워보고 싶을 정도.

"2성에 올랐던데."

"아, 시술 당일에 각성했습니다. 깜빡하고 얘기를 못 했는데, 어떻게 아신 겁니까?"

"그 덕에 시술이 오래 걸렸으니까."

"네? 그게 문제가 됐습니까?"

"1성에 맞춰서 양 조절을 했거든. 마나가 돌면 베텔의 독이 해독되는 거 알고 있지? 독이 중화되는 바람에 벌레의 움직임에 이상이 생겼어."

"아."

이 문제를 생각지 못했다.

설마, 2성 각성이 시술에 방해가 될 줄이야.

급히 더 많은 독을 투여해 문제를 해결했지만, 그 부작용으로 일주일 동안 의식을 잃었던 것 같았다.

위험할 뻔했는데, 운이 좋았다.

아니, 칼이 관심을 쏟았기 때문이겠지.

난 다시 한번 칼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목숨을 빚졌네요. 감사합니다."

"뭐, 나도 네 덕에 살아남았으니까. 슬라임 배 속 경험은 정말이지 끔찍했거든."

"끔찍하긴 했죠."

육포 주머니가 비워지는 동안, 우린 가볍게 대화를 주고받았다. 잠시 후, 칼은 망설이더니 내게 질문을 던졌다.

"여기서 벗어나면 갈 곳이 있나?"

영입 제안.

난 그 물음에 바로 답하지 못했다. 그런 나를 보며 칼이 말을 이었다.

"갈 곳이 없다면 우리 조직으로 들어와. 공공의 적을 두고 있으니 협력 관계 그 이상도 가능할 것 같은데."

"죄송합니다."

하지만 곧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칼과 깊은 인연을 맺는 건 반길 만한 일이지만, 조직에 들어가는 것과는 별개 일이었다.

어딘가에 소속되면 움직임에 제한이 생기니 피하는 게 맞았다.

암살자의 몸으로 빙의했지만, 난 암살자로 끝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 소설의 끝자락까지 살아남으려면 그 누구보다 강해져야 했으니까.

내 뜻에 칼이 아쉬운 눈빛을 보냈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곧장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네가 각성한 신비 능력, 언제쯤 알려줄 거지?"

"지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번에 칼이 내 진짜 이름을 물었을 때 신비 능력에 관해서도 언급했었다. 하지만 당시엔 고대 문양의 정확한 능력을 알지 못해서 며칠 시간을 달라고 했다.

고대 문양의 능력.

생체 마석을 흡수하고, 저번에 흑주술사인 여인을 상대하면서 고대 문양에 대해 많은 것을 파악했다.

칼은 여전히 고대 문양을 신비의 능력으로 착각하고 있었지만, 그 착각을 바로잡을 생각은 없었다.

내 신비 능력인 인챈트는 히든카드로 남겨둘 생각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힘 일부를 숨기라고 가르친 것이 칼이니 나중에 밝혀지더라도 이해해 줄 것이다.

"정화(淨化)?"

"네, 불안정하거나, 불순한 기운을 억누르거나, 제거하는 능력입니다."

"그런 특성은 성직자나 사제 계열의 능력인데 혹시 신을 모시나?"

"전 무신론자인데요?"

"…무신론자? 실존하는 신을 부정하다니. 웃기는 놈이네. 악마가 씌었다고 사제들이 거품을 물고 달려들겠어."

무신론자인 게 여기선 문제가 되려나?

사제나 성직자가 신의 힘을 빌려 기적을 일으키는 세상이니, 그럴 수도 있겠단 판단이 들었다.

마녀사냥은 사양인데.

신이라도 하나 골라서 모셔야 하나?

소설 속 신들에 대해 잠시 생각하는데, 칼이 대뜸 물었다.

"그럼, 치료는?"

"치료요?"

"능력으로 자신 말고 타인도 치료할 수 있냐고 묻는 거야."

아군에게 능력을 사용한다라.

일단 내 능력은 사제의 능력과 그 성질이 달랐다. 치료에 집중된 사제의 능력과 달리, 내 능력은 그보다 더 광범위했기 때문이다.

물리적인 것을 넘어, 정신 쪽에도 효과를 보인다고 해야 하나?

"잘 모르겠지만,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래?"

저번에 여인이 내게 건 저주도 제거했으니, 타인에게 걸린 저주도 치료가 가능할 것 같았다.

"능력 사용 횟수는?"

"유지 시간은 얼마나 되지?"

"능력의 범위는?"

칼은 내 능력에 관해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고, 난 숨김없이 알려줬다.

칼이 엘튼의 불 특성을 말해줬듯이 내 능력도 함께 생활하는 한, 숨길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다. 숨기면 의심만 살 뿐이니, 착실하게 답하는 게 맞았다.

마지막에는 나뭇가지로 바닥에 큰 원을 그렸다.

빛무리의 범위.

원의 면적을 살피며 칼은 고민스런 표정을 지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아지트 바깥이 소란스럽다고 했다. 이 타이밍에 내 능력을 물어본 게 바깥 일과 관련이 있나?

잠시 후, 칼은 짧게 혀를 차며 말했다.

"네 능력을 빌려도, 다 같이 탈출하는 건 힘들겠어."

"탈출이요?"

"일단 바깥 상황을 알려줄게. 사람들이 무서운 속도로 흘러들어 오고 있다. 도적 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도적 때보다 상황이 더 심각하다고?

그럼 도미닉이 아예 대놓고 영지 주변 마을을 털고 있다는 말이잖아.

의식이 없는 일주일 사이에 벌써 그 시기가 된 건가?

"괴물들의 정확한 정체는 키메라야.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생체 병기지."

"도미닉의 정보가 거기까지 퍼졌습니까?"

"더 있지. 클라크 대공의 직속 마탑 출신으로 몬스터의 생체 조직을 연구하던 뛰어난 생체 공학자였던 모양이야. 지금은 인간까지 재료로 쓰는 미치광이 마법사가 됐지만."

내 예상이 맞았다.

도미닉의 신상과 그가 부리는 키메라들의 자세한 정보가 토바른 전 지역에 퍼지고 있었다.

그 원인은 두 가지일 것이다.

'학살자가 움직였다.'

하나는 학살자가 생체 마석에 관한 소문을 퍼트린 것이고, 다른 하나는 베네타와 관련되어 있었다.

"혹시 잡혀 온 이들 중에 이종이 있었습니까?"

"이종?"

칼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사흘 전부터 이종들이 보이기 시작했어. 지금은 그 수가 제법 돼."

"혹시 이종 중에 엘프를 보셨습니까?"

"엘프는 없었어."

여성 엘프가 나오길 바랐는데, 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곳에 엘프 자체가 없다라.

그럼, 이곳이 아닌 또 다른 실험체 감옥에 그 엘프가 갇혀 있다는 건데.

"그건 왜 묻는 거지?"

"알아볼 게 있어서요. 이곳에 앞으로 이종들의 비율이 빠르게 올라갈 것 같거든요."

"이종들이?... 설마?"

칼은 내 말에서 숨은 뜻을 파악한 눈치였다.

"베네타인가? 도미닉이 그곳을 습격하고 있어?"

토바른 지역에서 이종들이 뭉쳐 사는 곳은 베네타뿐이다. 도미닉이 키메라 군단을 이끌고 베네타 주변 마을을 휘젓고 있다는 뜻이었다.

도미닉이 이종을 노리는 이유는 인간을 재료로 한 연구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종 사냥.

그 결과, 한 사건이 터졌다.

'엘프 샤르바딘 실종사건.'

샤르바딘은 베네타의 군주 도르네프의 여인이다.

푸른 장미 5층에서 도르네프의 질기고 긴 구애를 받고 혼인한 미모의 엘프 말이다.

이 실종 사건으로 샤르바딘과 접점이 있는 베네타와 검은 장미가 움직이게 된다.

그 결과의 끝은 두 세력의 공멸(共滅).

'이미 한 차례 부딪쳤을지도.'

훗날, 학살자는 토바른 전체를 손아귀에 넣게 되는데, 그 기회를 만들어준 인물이 바로 도미닉 후아튼이었다.

토바른의 3강으로 불리는 블라이어, 에토르 그리고 베네타의 힘의 균형을 무너트린 미치광이 마법사의 등장.

한숨 자고 일어난 사이, 학살자의 버프 이벤트인 '백(百) 개의 심장'이 시작된 것 같았다.

38화 한 번쯤 믿어보시죠

"이상해."

"뭐가 말입니까?"

"도미닉이 베네타 주변을 휘젓고 있다면 지금 흘러들어 오는 인간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이종들보다 인간들의 유입 수가 압도적으로 많다고."

"숲 전역을 키메라들이 휘젓고 있다고 생각 안 해보셨습니까?"

"라웁 숲 전역에 키메라가?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라웁 숲은 토바른 중심부에 자리한 거대한 숲이다. 토바른 3강 외에 수많은 영지가 라웁 숲 외곽에 자리하고 있는데, 지금 도미닉이 하는 짓은 한마디로,

"놈이 토바른 전체와 싸우겠다는 말과 같아. 이해돼?"

"키메라의 수를 정확히 아십니까?"

"수백 마리는 되겠지. 그래도 숲 전역을 누비기엔 터무니없이 적어."

"이상하지 않습니까?"

"뭐가 말이지?"

"한 마법사가 그 많은 키메라를 제작하는 동안, 어째서 아무도 이를 눈치채지 못했을까요?"

"...."

"이곳은 들어올 순 있어도 나갈 순 없습니다. 잡혀 온 후에야 키메라의 존재를 눈치챈다는 뜻이죠."

"그게 키메라의 수와 무슨 상관이지?"

"만약 이런 곳이 한 군데가 아니라면?"

"…뭐?"

칼이 놀란 듯 벌떡 일어났다.

내가 말한 의도를 드디어 알아챈 것 같았다.

"이 같은 곳이 한 곳이 아니라고?"

"숲 전체, 도적들의 씨가 말랐다고 했죠? 근데 저번에 잡혀 온 도적들은 천도 안 되는 수였습니다."

"...."

"전역의 어중이떠중이 도적들을 다 합친다면 만 단위는 넘을 겁니다. 숲 전역의 도적 떼가 사라졌는데, 잡혀 온 숫자가 천 명도 안 된다는 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이곳 말고 다른 곳으로 끌려갔다는 건가?"

"최소 다섯 군데 이상,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라웁 숲에는 실험체 감옥이 다섯 군데 이상 존재했다.

수거를 위해 들이닥친 키메라의 수보다 바깥에 다섯 배 이상의 키메라 군단이 더 있다는 뜻이고, 그 수라면 충분히 라웁 숲 전역을 커버할 수 있었다.

칼은 내 말에 망치를 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곳 같은 장소가 또 존재한다고?

생각지 못했다.

'작은 소문이라도 들렸을 법한데?'

다섯 군데 이상이라면 실종된 이들이 상당했을 텐데, 왜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지?

칼은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도적이야. 도적 떼를 눈가림으로 이용했어. 숲에 깔린 도적 소굴만 해도 엄청날 테니까. 소문이 나더라도 도적들의 짓으로 감춰진 거야."

"그 도적 떼조차 현재는 모두 몰살당한 상태죠."

"빌어먹을, 더는 숨지 않겠다는 뜻인가? 실력에 자신이 있는 거라고, 웬만한 전력으로는 자신을 잡을 수 없다고 판단했겠지. 네 말이 맞아. 그럼 지금 잡혀 온 이들의 수가 이해가 돼. 키메라가 그렇게 많았다고?"

"더 많을지도 모르죠."

"…제길, 근데 왜 도미닉은 베네타로 간 거지? 이종과 관련이 있는 건가?"

난 속으로 깜짝 놀랐다.

나야 소설 내용을 본 것이니, 도미닉의 상황을 대략적으로 알고 있지만, 칼은 아니었다.

내가 준 힌트만으로 칼은 도미닉에 관한 퍼즐을 사실에 가까이 맞히고 있었다.

힌트를 주면 바로 알아채는 통찰력.

사람 보는 눈이 까다롭다는 학살자가 칼을 끝까지 곁에 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군이면 누구보다 든든하고, 적이면 무조건 죽여야 하는 상대.'

이 아저씨와 더 친해져야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게 이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법이었으니까.

"탈출 후에 기쁨이 아니라 목숨을 부지할 궁리부터 해야겠어. 네 말대로라면 숲 전체에 키메라들이 잔뜩 깔렸다는 뜻이니까."

"아까 말했던 탈출은 뭡니까? 고민을 많이 하던 눈치였는데."

"네 능력을 이용해 볼까 했지."

"능력이요?"

"키메라에게 붙잡힌 후 탈출할 계획을 세워봤어. 네 능력 범위 안에선 키메라들을 떼어놓을 수 있을 테니까."

키메라를 매개체로 마법진을 빠져나간 후 능력을 사용해 숲을 벗어나는 방법.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습니다."

"나도 알아."

잡힌 일행이 다 같이 움직인다는 보장도 없었고, 정신 계열의 키메라나, 저번 슬라임처럼 특수한 놈에게 잡힌다면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다.

그 무엇보다,

'도미닉에게 내 능력이 노출되면 곤란해.'

키메라에게 천적이 될 수 있는 능력.

잘못 노출되면 최우선 제거 대상이 될 수 있다.

진짜 뭐 빠지게 도망만 다니다가 뒈질 수도 있다는 뜻이다.

능력은 가장 결정적인 상황에서 써야 한다.

한 번에 심장을 꿰뚫는 날카로운 비수처럼 말이다.

단순히 도주용으로 노출하기엔 너무 아까웠다.

하지만, 칼이 말해준 방법이 전혀 쓸모없는 건 아니었다.

안 걸리면 그만이었다.

그 조건은 간단했다.

"혼자 탈출하는 건 가능하겠네요."

"...."

내 말에 칼은 잠시 침묵했다. 그도 느낀 것이다. 내가 탈출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칼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설마 배신?'이라는 물음표가 머리 위로 그려졌는데, 난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 그렇게 의리 없는 놈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치고 뒤통수 안 치는 놈이 없었지."

"험하게 사셨네요."

"이 바닥이 아주 개똥 같아서 말이지. 괜히 말했어."

하긴, 이 세상이 좀 팍팍해야지.

"한 번쯤 믿어보시죠."

"이곳을 탈출한다면 믿어보지."

"탈출할 수 있을 겁니다."

고개는 끄덕였지만, 칼의 표정이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날 강제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 난감해졌다고 판단했겠지.

'탈출에 도움이 될 사건이 발생할 텐데. 그게 뭐지?'

저리 세상 다 산 노인처럼 탈출을 고민하고 있지만, 칼은 결국 이곳을 벗어나 에토르로 향한다. 지금 칼의 반응을 보니, 탈출에 대한 뚜렷한 방법이 없어 보였다. 스스로는 탈출이 힘들다고 판단했으니, 내 능력을 이용할 방법을 떠올린 것이겠지.

설마 탈출을 도와주는 조력자가 있었나?

아니면 내가 모르는 또 다른 사건?

의문을 품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어디 가?"

"일주일 내내 누워 있었잖아요. 몸이 굳어서 풀어줄 겸, 갈대밭으로 갑니다."

"오래 머물지는 마. 아무래도 곧 터질 것 같으니까."

"이제 열흘 됐는데, 벌써요?"

"말했잖아. 흘러들어 오는 수가 심상치 않다고. 당장 키메라들이 들이닥쳐도 이상할 게 없어. 몰려오기 전에 대비해놔야 해."

"알겠습니다."

엘프가 나타나면 곧장 알려달라는 말을 남기고 난 아지트를 벗어났다.

해야 할 일과 생각해야 할 일이 생겼다.

정리가 좀 필요했다.

* * *

"헉. 헉. 헉…."

거친 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갈대들이 바람과 부딪히며 바스락거렸다. 듣기 좋은 소리라 땀이 식을 때까지 귀를 기울이며 잠시 호흡을 골랐다.

일주일 동안 누워있었더니,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몇 차례 더 움직이며 몸을 적응시켜놔야 할 것 같았다.

'회사 다닐 땐 숨쉬기 운동이면 충분했는데.'

이런 철저한 몸 관리는 살기 위한 발악이라고 보면 된다.

생존 본능이 위대하긴 위대했다.

한숨을 내쉬곤 몸을 일으키며 단검을 움켜잡았다.

지이잉―!

마나에 반응하는 단검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붉은 보석은 이제 소용없을 것 같고.'

이곳에 오자마자 마석부터 흡수해보았다. 2성에 올랐으니, 더 많은 마석을 흡수할 수 있겠단 기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기대한 대로 마석을 여럿 흡수했는데도 탈력감이 찾아오지 않았다. 해서 남은 붉은 보석을 모조리 부숴서 복용했는데, 황당하게도 내 기대는 와장창 깨져 버렸다.

그 많은 보석을 흡수했는데도 아무런 자극이 없었기 때문이다.

붉은 보석이 마나 촉매제로서의 역할을 전혀 못 하고 있었다.

'분명 소설에선 2성까지 통했는데, 뭐가 문제지?'

고민은 길지 않았다.

마석에 문제가 없다면 결국 내 몸이 문제란 뜻이니까.

내 몸뚱이의 마나 감응력.

이젠 이 정도 촉매제론 턱도 없다는 거냐?

그때부터 난 붉은 보석에 미련을 버리고 다른 것에 집중했다.

'보랏빛 보석은 통하려나?'

샘플로 하나가 있으니, 복용해 보면 효과를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전에 몸을 풀어서 몸 컨디션을 최고로 올려놓을 생각이었다.

저번에 제거한 도적들의 시신 때문인지, 접근하는 존재가 없었다.

눈치 볼 필요 없이 난 마나를 개방하고 갈대숲 공터를 활보하기 시작했다. 땀이 온몸을 적시고 몸이 만족스럽게 풀렸을 때, 난 품에서 보랏빛 보석을 꺼냈다.

붉은 것보다 순도 높은 기운을 지닌 생체 마석.

난 이것에 기대를 걸었다.

푸읍!

입에서 터져 나오는 핏물을 애써 삼켰다.

보랏빛 보석을 빻아 소량을 입에 털어 넣고 벌어진 일이었다. 손으로 양어깨를 꽉 움켜잡고 있었는데, 손톱이 파고들면서 피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커커커컥!"

결국, 난 피를 한 움큼 쏟아냈다.

쌍코피도 주르륵 흘러나왔다.

어깨에 파인 상처를 의식도 못 할 만큼 고통스러웠다. 신경독에 당한 것처럼 온몸의 신경이 가닥가닥 끊어지는 것 같았다.

'…시발!'

욕이 절로 새어 나왔다.

붉은 보석은 보랏빛 보석에 비하면 순한 양이었다.

이놈은 흡사 본능에 미친 짐승 같았다.

복용한 순간부터 이성이 흐릿해지고, 마나가 온몸을 갈가리 찢을 것처럼 미쳐 날뛰기 시작하는데, 정신 방벽과 정화 능력이 아니었다면 미치거나, 온몸이 터져서 죽었을 것이다.

이건 인간이 복용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다.

진짜 오늘만큼은 내 능력에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영원할 것 같았던 고통이 사라졌다.

난 질질 흘린 침을 닦을 생각도 못 하고 바닥에 멍하니 엎드려 있었다.

탈력감은 무슨, 전기 고문을 한 시간 정도 받는 것 같았다.

피카츄의 백만 볼트 공격이 이런 맛일까.

"효, 효과는 죽이는데...."

전보다 진득해진 기운.

몸 안에 휘도는 마나가 제법 거세다.

3성으로 가는 희망을 보긴 했는데, 이 끔찍한 고통을 또 감내해야 한다는 사실에 신음이 절로 나왔다.

남은 양을 보니, 서너 번은 더 가능할 것 같은데.

이것으론 부족하겠지?

쉽게 얻는 것에는 대가가 있다는 건가.

또 복용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정신을 차린 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곤 가루 주머니를 챙겼다.

"...하."

아지트로 돌아온 나는 한숨과 함께 자리에 철퍼덕 누웠다.

탈력감보다 더 지독한 무력감이 나를 찾아왔다.

보라색 보석을 복용한 후유증.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는데, 지금은 그냥 쉬고 싶었다.

두 눈을 감은 순간, 내 의식은 저편으로 날아갔다.

* * *

"이봐."

"...."

"어서 일어나라."

머리를 세차게 두드리는 감각에 겨우 잠에서 깼다. 부스스 눈을 뜨니, 시퍼런 단검이 내 머리를 겨누고 있었다.

설마 그걸로 때린 거야?

난 눈살을 찌푸리며 일어났다.

복면을 썼지만, 호리호리한 체구.

한눈에 단검의 주인을 알아볼 수 있었다.

불꽃검 엘튼이었다.

"깨우는 방법 좀 바꾸지? 머리에 구멍 나겠어."

"몸에 문제 있나? 못 일어나던데."

"내가?"

"이번에도 안 일어나면 머리에 구멍을 내려고 했다."

"...."

이 녀석이라면 진짜 그렇게 했을 거 같은데.

난 한숨을 내쉬며 가볍게 몸을 풀었다. 몸을 살피니 다행히 큰 문제는 없었다.

약간 피로감이 느껴지는 정도?

마석의 효과는 확실한데, 생각보다 피로감이 심한 모양이었다.

"내가 얼마나 잤지?"

"반나절 정도."

"머리에 구멍을 낼 정도로 급한 일이 뭔데?"

엘튼은 대답 대신 단검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처음에는 뭔가 싶었는데, 흠칫하곤 청각에 집중했다.

으어― 으어― 으어―

아지트 숲 너머에서 흘러나오는 괴상한 괴음.

듣기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저번에 천여 명의 도적들을 한순간에 쓸어간 재앙의 소리였으니 당연했다.

"...설마."

내가 엘튼을 바라보자, 그는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키메라들이 나타났다.

39화 베네타의 재앙, 아레나 후아튼

짝―!

두 뺨을 매섭게 때렸다.

얼얼함과 함께 몽롱했던 정신이 번쩍 돌아왔다.

"상황은?"

"여유가 있는 편이다."

"코앞에서 키메라 소리가 들리는데?"

사방에서 괴성이 흘러나오고, 숲 전체가 흔들리는 것이 당장에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엘튼은 고개를 흔들었다.

"산채 쪽이 첫 번째다. 우린 그다음이야."

산채는 가장 피해야 하는 장소라고 칼이 말했었다. 새로 유입된 이들을 미끼로 시간을 버는 장소라 했지?

엘튼의 말처럼 들려오던 괴성은 점점 멀어졌고, 숲의 움직임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잠시 후,

끄아아아악―!

산채 방향 멀찍이서 비명이 하나둘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키메라 군단의 수거 작업이 시작된 모양이었다.

"자, 받아."

엘튼은 내게 보랏빛 병을 건넸다.

베텔의 독이다. 이 독을 복용하고 쥐 죽은 듯 숨어 있으면 키메라의 눈을 피할 수 있다.

칼 일행에겐 목숨 줄 같은 물건.

하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물건이었다.

'사용할 일이 있을까?'

내겐 고대 문양의 힘이 있다.

키메라에게 잡혀갈 걱정은 없을 거란 뜻이며, 오히려 난 이 힘을 통해 키메라를 어떤 식으로 사냥할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강해지기 위해선 보랏빛 마석이 더 필요했고, 그 마석을 지닌 키메라는 보통 키메라보다 훨씬 강력했다.

간을 보다가 사냥할만하다 느끼면 시도해볼 계획이었다. 그래서 혼자 움직이는 방향으로 생각을 정리해두었는데, 엘튼이 갑자기 함께하자며 곁에 머물렀다.

"난 숨을 생각이 없어."

"상관없다."

"혹시 칼의 명령이냐?"

"널 보호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역시, 엘튼 스스로 이런 판단을 내렸을 리 없지.

난 짧게 한숨을 내쉬곤 칼을 찾았다. 칼은 일행을 빠르게 모으고 있었다.

칼이 이곳을 아지트로 삼은 이유는 이곳에 숨을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칼은 현재 짐을 챙기고 있는데, 이쪽으론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불안했나 보네.'

나 홀로 탈출해버릴까 봐, 엘튼을 붙인 것이다. 아마 엘튼도 그에 대해서 언질을 받았을 거다.

"감시하라냐?"

"...."

"너한테 말해봤자지."

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칼에게 걸어갔다. 내가 다가가자 칼은 입맛을 다시곤 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왜 왔는지 아는 눈치.

알면서도 붙인 게 분명했다.

신뢰를 보이려면 말보단 행동이지.

"이 팔찌를 벗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어떻게 되긴, 벌레가 죽지 않겠지."

"다시 심장으로 이동한다거나, 터진다거나 그런 거 없습니까?"

칼이 고개를 끄덕이자, 난 팔찌를 풀어 칼에게 툭 던졌다. 얼떨결에 팔찌를 건네받은 칼은 살짝 벙찐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무슨 짓이야?"

"팔찌는 이따가 다시 받아 가겠습니다. 저번처럼 잊어먹지나 마세요."

"...."

힘겹게 칼과 신뢰를 쌓아놨는데, 그 인연을 포기하는 건 어리석은 선택이다. 탈출은 진짜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을 때나 고려할 일이었다.

칼은 말없이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내 행동에 생각이 많아진 표정이었다.

"한 번쯤 믿어보라니까요. 가보겠습니다. 머리털 안 보이게 잘 숨어 계세요."

"엘튼을 데려가."

"제가 뭘 할 줄 알고요."

"이곳저곳 휘젓고 다니면서 도둑질이나 하겠지."

"암살자 말고 돗자리나 까시죠. 돈 많이 버실 것 같은데."

"딴소리 말고 데리고 다녀. 나한테 한번 믿어보라고 했지? 엘튼은 내게 그런 녀석이다."

숨긴 능력을 엘튼에게 보여도 문제가 없을 거란 믿음이었다. 칼이 저렇게 믿을 정도면 입이 무거운 인물이란 소리겠지?

'하긴 고지식한 성격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긴 하지.'

불꽃검 엘튼은 학살자도 탐을 냈던 인물이다. 하지만 학살자가 내민 그 어떤 유혹도 마다하고 끝까지 칼을 모시며 그 곁을 지켰다.

암살자보단 기사에 어울리는 인물.

데려갈까?

엘튼을 두고 잠시 고민했다.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잖아?'

능력을 숨길 필요가 없다면 혼자보단 두 명이 키메라를 사냥하기 수월했다. 게다가 엘튼은 자신보다 더 강한 실력자.

안전도 보장받고, 힘도 빌릴 수 있는 믿음직한 조력자를 구하는 게 어디 쉬울까.

"알겠습니다."

"잘 생각했어."

칼은 미소를 짓곤 팔찌를 내게 다시 던졌다. 멀뚱히 그를 바라보자, 칼은 등을 돌리고 성큼 걸어갔다. 나름 멋져 보이는 퇴장이긴 한데 말이지.

난 그런 칼의 어깨를 다시 붙잡았다.

"왜?"

"제 가방이요."

"...."

주술사 도네콜린트를 죽이고 강탈한 가방은 뛰어난 충격 흡수와 방수, 내열 기능이 탑재된 마법 물품이었다.

칼이 유독 탐을 냈는데 살펴본다고 하더니, 지금껏 감감무소식이었다.

"가방이 나한테 있었나?"

"등에 메고 있으면서 그런 말씀 하시면 섭섭하죠."

"큼!"

달라고 안 하면 끝까지 안 줄 생각이었나 보다.

보라색 마석은 주먹 크기라 보관하려면 가방이 필수였다. 난 가방을 뺏다시피 가져와서 안을 살폈다. 그러곤 칼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내 시선에 칼은 헛기침하곤 품에서 마녀의 목걸이와 마법 스크롤을 꺼냈다.

"도둑으로 전직하실 생각입니까?"

"신기한 물건들이라 잠깐 살펴본 것뿐이야."

"...."

"그 스크롤은 뭐에 쓰는 거지? 별다른 마력이 느껴지지 않던데."

난 진회색 스크롤을 만지작거렸다.

찢는 순간, 나비 떼가 허공을 수놓는 축제용 환상 스크롤.

공격용으로는 1도 상관없는 관상용 마법이 담긴 것인데, 베네타의 마법 상점에서 구매하고 잠시 잊고 있었다.

"생존 물품이요."

"뭐? 생존?"

"그런 게 있습니다."

난 스크롤을 가방 안에 쑤셔 넣었다. 혹시나 해서 준비한 건데, 쓸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석궁을 등에 메고, 볼트 꾸러미를 허리춤에 찼다. 칼은 미련이 남은 듯 가방에 시선을 한 번 주고 등을 돌렸는데, 난 그 어깨를 다시 붙잡았다.

"...."

칼이 말없이 노려보자 난 한 가지를 더 말했다. 이건 단순한 감이었다.

"붉은색 마석은 괜찮은데, 그 외의 것은 모두 제 겁니다."

칼은 어이없는 눈빛으로 엘튼을 바라봤다. 엘튼이 억울한 듯 고개를 강하게 흔들었다.

칼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돗자리는 내가 아니라 네가 깔아야겠는데? 내가 그 소문에 관심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

"엘튼을 자꾸 붙여준다고 할 때부터요."

"그 소문 말이야. 알려준 적이 없는데?"

"저도 귀가 있거든요? 여튼 그렇게 알고 가겠습니다."

"자, 잠깐만!"

난 칼의 부름을 무시하고 반대편 숲으로 빠르게 달렸다. 뒤를 돌아보니 엘튼이 불만 어린 표정으로 따라붙었다.

시기상 소문이 퍼질 타이밍이기도 했고, 칼이 집요하게 엘튼을 붙이려고 해서 찔러봤는데, 역시나 칼이 생체 마석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학살자가 퍼트린 소문이 칼의 귀까지 들어갔다는 건, 마석에 관한 소문이 에토르에 퍼질 대로 퍼졌다는 뜻인데.'

―마나 각성에 엄청난 효능을 보이는 마나 촉매제.

악마의 보석.

이 소문으로 에토르는 지금 생체 마석 수집에 눈이 돌아간 상태일 것이다.

다만, 10명 중 7명 정도가 광인(狂人)으로 전락해 미쳐 날뛴다는 치명적인 내용이 빠져 있었다.

학살자가 심은 탐욕과 무지의 씨앗이 에토르 영지 내에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에토르에겐 몰락의 징조였다.

왼쪽 손목에 팔찌를 도로 차며 생각에 잠겼다.

'에토르까지 숲에 진입하면 도미닉은 도주각을 잡을 거야.'

토바른의 3강.

블라이어, 에토르, 베네타의 3방위 압박은 아무리 도미닉이라도 버티기 어렵다.

'도미닉이 키메라 군단을 한곳에 집결시키고, 계승자의 신전으로 시선을 돌리는 타이밍.'

그때가 내가 끼어들 최고의 타이밍이었다.

난 비명이 터져 나오는 방향으로 더욱 박차를 가했다.

아직 그 타이밍이 도래하려면 시간이 남았다.

그 시간 안에,

'3성에 올라야 해.'

어둠이 찾아온 밤.

드넓은 숲 그림자 사이로 나와 엘튼은 빠르게 스며들었다.

* * *

에토르에서 하루 남짓 거리에 있는 라웁 숲의 동남쪽 숲.

차르륵―

중년인은 책장을 부드럽게 넘겼다. 안경이 살짝 흘러내리자, 안경을 바로 세운 그는 다시 책에 집중했다.

숲 사이, 작은 바위에 편히 걸터앉아 독서하는 모습만 본다면, 산책 도중 여유를 즐기는 취미처럼 보였다.

하지만,

"고, 괴...! 끄아아악―!"

"사, 살려줘!"

비명이 가득한 숲에서 홀로 책을 읽으며 여유를 즐기는 모습은 눈앞의 참극과 큰 괴리감을 느끼게 했다.

콰작―! 콰자작―!

살점 뜯기는 소리.

핏방울이 안경에 튀자, 중년인은 두 눈을 깜빡이곤 안경을 벗었다. 안경을 로브 자락에 쓱쓱 닦으며 중년인, 아니 도미닉은 주변을 둘러봤다.

세상이 온통 붉다.

찢긴 살점과 흘러내린 핏물은 이 주변 숲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뚫리면 다 죽어! 다 죽는다고!"

"마, 막아!!!"

발악 섞인 처절한 외침.

도미닉의 시선은 소리가 난 곳에 닿았다.

키메라 군단에 빽빽이 포위된 대규모 용병단이 보였다. 키메라를 노리고 들어왔다가 역으로 포위된 자들. 쉴 새 없이 죽였는데도 대략 2백 정도가 살아남아 악착같이 저항했다.

"인간들의 생존 욕구인가?"

도미닉의 눈에 그들은 덫에 걸린 쥐새끼들처럼 보였다. 아니, 곧 실험체로 쓰일 실험쥐들인가?

하늘을 잠시 올려다본 그는 안경을 고쳐 쓰고 책에 다시금 집중했다. 정리되려면 시간이 조금 더 걸릴 것 같았다.

콰아아앙―!!

갑자기 용병단 사이에서 폭음이 터져 나왔다. 용병들의 정신과 체력을 야금야금 빼앗던 키메라 일부가 바깥으로 튕겨 나와 도미닉 근처에 처박혔다.

"...."

즉사한 키메라들의 상처를 확인한 도미닉은 천천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의 시선은 방금 전 폭음이 터진 곳에 닿아있었다. 포위망 일부가 누군가의 공격에 틈을 보였다.

그 틈 사이로 키메라 체액을 뒤집어쓴 용병 하나가 벼락같이 튀어나왔다.

포위망이 뚫렸다.

"타앗―!"

용병이 휘두른 검에 키메라들은 두부 썰리듯 잘려 나갔다.

검신을 타고 흘러나오는 붉은 아지랑이, 유형화된 오라.

"쥐새끼들 사이에 늑대가 있었나?"

4성 용병이 무리 안에 있었다.

"다, 단장님이 빠져나가셨다! 조금만 버텨!"

"저 미치광이만 죽이면 희망이 있다고!"

희망에 찬 용병들은 의지를 불태우며 버티기 시작했다. 그 사이, 용병 단장은 온몸에 아지랑이를 퍼트리며 도미닉을 향해 매섭게 쇄도했다.

도미닉을 노려보던 단장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검 자루를 까득 움켜잡았다.

"이 개자식! 다 말하면 살려준다고 했잖아!"

"살려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포위된 이들 중에 죽은 이가 있습니까?"

"우릴 지치게 한 뒤 어쩌려고!?"

"영생을 누리게 해드리겠습니다."

"뭐, 영생?"

"키메라와 한 몸이 된다면 영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영원히."

"미, 미친 새끼가!!!!"

의뢰주와 의뢰 목적을 말하면 살려주겠다고 한 약속은 결국 거짓말이었다.

용병은 마나를 터트리며 도미닉의 심장을 향해 검 끝을 내밀었다.

도미닉은 살짝 뒤로 물러서며 입술을 나직이 달싹였다.

"아레나."

그 부름에 펑퍼짐한 로브를 걸친 인영이 도미닉 앞을 막아섰다.

늘어트린 양 로브 자락은 맨손이었고, 도미닉보다 작고 왜소했다.

살벌한 용병의 기세 앞에서 로브가 들춰지는 순간, 소녀가 얼굴을 비쳤다.

무표정의 소녀.

아레나 후아튼이었다.

40화 어디 실력 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