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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LDAFTERF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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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nopsis

Chapter 1 - 1

멸망 이후의 세계

Prologue. 카르페디엠

"야, 지금부터 과거로 돌아가겠다는 새끼들은 다 내 손에 뒤진다. 알겠냐?"

―인류 최후의 결사대, "카르페디엠"의 기록 中 발췌

*

거대한 탑에 의해 어둠 속에 가려진 하늘.

곳곳에서 폐허가 된 건물들.

간헐적으로 들리는 비명들과 신음.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포연(砲煙).

그리고 이어지는 침묵.

설명해 무엇하랴.

말 그대로 이곳은 멸망 이후의 세계다.

그리고 어쩌면 여러분들도 이미 잘 알고 있는 이야기다.

일일이 설명하기도 귀찮으니까 아래의 연표를 확인하면 더욱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2018년.

서울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모든 도시 상공에 소위 "악몽의 탑(Nightmare tower)"이라 불리는 초거대 구조물이 등장······.

막상 연표를 통해 설명하려니 그게 더 귀찮은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게다가 21세기 초 유행했던 장르 소설들이 이와 비슷한 종류의 이야기를 마구 찍어 대고 있는데, 굳이 여기서 또 비슷한 이야기를 줄줄이 나열할 필요가 있는가.

그래도 정말 이렇게 끝내 버리면 심심하니까, 조금만 더 이야기를 끌어 보도록 하자.

어쨌든 인류라는 종이 이런 꼴이 되어 버린 것에 대해 약간의 변명거리는 늘어놓아 봐야 하지 않겠는가.

시작은 누구나 알고 있듯 탑이었다.

2018년. 평화로운 도시 상공에 "악몽의 탑"이라 불리는 초거대 구조물이 등장했다.

정작 탑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인류는 기다렸다는 듯이 제멋대로 종말론을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아포칼립스니 카타스트로피니 하는 이야기들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탑이 인류를 불렀다.

'인류의 멸망을 막고 싶으면 탑의 소환에 응하라'는 구체적으로 비현실적인 메시지였다는데, 놀랍게도 이 메시지에 수십만의 인류가 응답했다.

타워 워커(Tower walker).

약칭 '워커(Walker)'라 불리는 자들.

그들은 탑의 '메시지'를 받고 소환에 응해, 시련에 대항할 힘과 자격을 얻었다.

실로 고무적인 일이었다.

인구 비율을 따져 보면 만 명 중 한 명도 채 안 되는 꼴이지만, 그래도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인류를 위해 두 팔 걷고 나서겠다는 사람이 그렇게 많았다는 게.

물론 "악몽의 탑"에서 유출된 공략 보상들을 생각해 보면, 이들 모두가 그런 선한 의도만으로 탑에 뛰어든 것은 아니었겠지만.

하여간 이야기를 계속해 보면, 이 희한한 탑의 부름을 받아 탑의 전장에 뛰어든 사람들은 시스템(System)의 가호를 받아 마치 게임을 하듯 아이템과 스킬들을 얻고, 그것들을 이용해 "악몽의 탑" 내부 공략을 진행할 수 있었다.

초기의 인류는 적극적이지 않았다.

탑 속에 무슨 위험이 있을지도 모르고, 탑이 말한 '인류의 멸망'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무얼 가리키는지도 몰랐으니까.

그 와중에 '제1차 타워 임팩트'가 발생했다.

탑에서 풀려난 괴수들에 의해 지상의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세계 인구의 삼분의 일이 소멸했다.

이제 여기서부터는 설명해도 지루할 뿐이다.

인류를 등에 업은 워커들이 탑을 올라가며 공략을 지속해 나간다는, 그런 흔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흔한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2023년.

전생 아이템, 「회귀의 돌」 발견...

회귀의 돌.

척, 보면 탁, 하고 감이 오는 네이밍 센스다.

이제 다들 이게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차렸을 것이다. 맞다. 모두가 아주 잘 아는 바로 그 이야기다.

세계가 싸그리 망하려고 할 때, 운 좋게 어떤 아이템을 발견한 주인공이 "에라 모르겠다"하고 아이템을 사용했더니 과거로 돌아가 있었더라는, 그런 이야기.

소설에나 등장하는 이야기가, 2023년에 발견된 아이템 「회귀의 돌」을 통해 현실이 되었다.

다만 여기에는 조금 문제가 있었다.

"젠장, 이렇게 된 이상 회귀다!"

"그래, 어차피 이번 생은 망했어!"

"나도!"

"씨발, 나도다!"

바로, 너무 많이 과거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재환은 빛무리처럼 변해 공중으로 떠오르는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저기 또 가네."

"······."

"이제 저 녀석들이 마지막이지?"

"그럴 거야."

옆에서 함께 그 광경을 지켜보던 윤환이 답했다.

그들은 탑의 98층 벽면에 기대서서, 창공을 뚫고 멀어지는 빛무리들을 함께 보았다.

멀어지는 빛무리는 유성처럼 아름다웠다.

새로운 생을 향해, 희망을 품고 사라지는 빛.

그들은 이제 폐허 같은 시간을 모두 잊고, 과거로 돌아가 미래가 보장된 삶을 시작할 것이다.

모든 것을 아는 삶. 안전한 삶.

타인의 미래를 도둑질해 얻은, 쉬운 삶을.

"좋겠네."

"좋기는."

물론 재환도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아예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었다.

각자 억울한 사정들이 있겠지.

모두가 이 세계의 '주인공'이 되고 싶겠지.

그러나 재환은 궁금했다. 떠나는 주인공들은, 단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보았을까.

그들이 버린 세계를.

그리고 그들이 버린 세계에서 여전히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들의 운명을.

탑에서 「회귀의 돌」이 발견된 직후부터 지금까지 벌써 10년의 시간이 흘렀다.

죽은 워커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워커들은 죄다 과거로 갔다. 적게는 수천, 많게는 수만에 이르는 워커들이 현재를 포기하고 과거를 택했다.

「회귀의 돌」은 탑 77층의 공략 보상이었다.

78층으로 가는 입구 전체를 가로막은 거대한 돌. 이것이 아이템이라는 것은, 다들 합심해서 돌을 깨부수던 중에야 깨달았다.

회귀의 돌의 아이템 설명은 다음과 같았다.

+

[아이템 정보]

명칭 : 회귀의 돌

등급 : 전설

설명 : 시간을 되돌려 사용자를 탑에 막 소환된 무렵의 과거로 돌려보낸다. 사용자의 현재 기억은 온전히 유지된다. 쪼개서 사용할 수 있다.

+

처음에는 다들 믿지 않았다. 과거로 돌아가는 아이템이 있다니, 탑에서 나온 아이템들이 아무리 상식을 초월하는 것들이라 해도 그런 아이템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한편으로 흔들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워커들은 모두 탑이 제공하는 놀라운 아이템과 스킬로 인간을 초월한 영역을 맛본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워커들은 자신이 원했던 스킬이나 아이템들을 가지는 대신, 차선 혹은 차악의 길을 택한 자들이기도 했다.

그들은 강렬한 유혹을 느꼈다.

만약, 미래를 모두 알고 있는 상태로 이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쪼개서 써도 된다니······. 이 크기라면 정말 많은 사람들이 아이템을 사용할 수 있겠군요."

제일 처음 「회귀의 돌」을 사용한 사람은 선발 공략대였던 "블레이드 워커(Blade walker)"의 대표, 소드패닉(Sword panic) 황인찬이었다.

"혹시 거짓말일 수도 있으니까, 제가 한번 사용해 보고 여러분들께 알려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소드패닉의 마지막 말이 되었다.

그때 재환도 그 자리에 있었다.

다들 바보였다.

생각해 보면 말이 안 된다는 걸 왜 몰랐을까. 일단 과거로 한번 가 보고 알려 주겠다니, 그건 곧 죽는 사람이 '제가 지금 죽어 보고 그게 뭔지 알려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과거로 간 인간이 어떻게 되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죽음을 겪은 후 돌아온 인간이 없는 것처럼.

소드패닉 황인찬이 사라진 후 사람들은 난리가 났다.

"정말이냐, 과거로 간 게 맞냐."

의문을 품는 사람들도 있었고, 이때다 싶어 부서진 「회귀의 돌」 조각을 몰래 자신의 인벤토리에 집어넣는 자들도 있었다.

황인찬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궁금해졌다.

어째서 과거로 돌아간 황인찬은 다시 이 세계에 나타나지 않는가? 왜 이 세계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가?

그 물음에 선발대의 유일한 일본인이자, 중학교 과학 선생이었던 사카모토가 답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사카모토는 다중우주론과 평행우주론을 비롯한 유수의 과학 이론을 동원하여 사태를 설명했는데, 가장 저명한 이론에 따르자면 현 사태는 '우주의 시간 분기가 갈라져 버린 상태'였다.

즉, 황인찬이 과거로 사라진 순간 우리들의 세계와 황인찬의 세계는 완전히 갈라져 버렸다는 것이 설명의 요지였다.

"과거로 간 황인찬의 세계선과 우리의 세계선이 갈라져서, 그와는 다시 만날 수 없게 된 것이지요."

선발대는 다들 과학에 대해 쥐뿔도 모르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황인찬이 과거로 갔다고 해서 이 세계가 변하지는 않는다.

"이보게 일본인 선생, 혹시 황인찬이 과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갔을 가능성은 없는가?"

"이 돌의 설명을 보십시오. 과거로 돌려보낸다고 적혀 있지 않습니까? 제가 아는 한, 탑의 아이템들은 단 한 번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 말에 몇몇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 생각에 이 돌은 우리를 모두 다른 세계선의 지구로 보내줄 겁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가설이니까, 이 돌을 사용한 사람들이 모두 같은 시간 분기로 떨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요. 이 탑의 아이템들은 우리의 상식을 초월하는 것들이니까요."

정신을 차렸을 때는 선발대 중 반 이상이 「회귀의 돌」을 사용해 과거로 떠난 후였다.

다들 선발대인 만큼 욕심이 많았다. 혹시나 같은 시간 분기로 떨어진다면, 과거로 돌아간 자들은 서로 경쟁을 하게 된다. 늦는 사람은 늦는 만큼 손해를 본다. 누구도 손해 보고 싶진 않았으리라.

그때부터 인류는 입에 '과거 회귀'를 달고 살았다.

여기서도 과거 회귀 저기서도 과거 회귀.

전부 과거로 돌아가 무엇을 할지에 대한 생각들뿐이었다.

너무 늦게 과거로 가면 손해 보는 거 아닌가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선발대가 조금 더 위층까지 공략한 후에 돌아가야 이득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재빠르게 「회귀의 돌」을 선점하여 아래층 워커들에게 판매하는 자들도 있었으며, 심지어는 타워가 열린 후 지금까지의 역사를 총망라해 소책자로 판매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 와중에 두 번의 타워 임팩트가 연달아 발생했다.

타워가 폭주해 지상에 괴물들을 쏟아내는 대재앙, 타워 임팩트. 타워 임팩트에 의해 워커가 아닌 지상의 모든 존재는 거의 말살당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남은 워커들의 선택은 둘 중 하나였다.

어떤 대가를 지불해서라도 「회귀의 돌」을 손에 넣어 과거로 가거나, 아니면 여기에 남아서 죽거나.

재환은 둘 중 어느 쪽도 아니었다.

"······제발 그만 좀 가라. 니들 다 과거로 가 버리면 이 세계는 어쩔 건데?"

최강의 선발대 "블레이드 워커"의 해체에도 굴하지 않고, 재환과 몇몇 동료들은 계속해서 위층으로 올라갔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85층에서 재환은 한 번 막혔다.

간신히 버텨 오던 동료들의 대부분이 죽어 버렸다. 사람들의 눈에 체념이 깃들었다. 더는 올라갈 수 없었다.

재환은 1층부터 올라오는 후발대를 하나하나 설득하고, 독려하며 정예를 양성했다. 「회귀의 돌」에 이끌리지 않고 이 세계를 지킬 사람만을 골라 뽑았다.

인류 최후의 결사대 "카르페디엠"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과거로 가지 않고 현재에 남아, 이 현재를 지켜나가고자 했던 워커들이 모인 최후의 선발대.

재환은 그들을 이끌고 마(魔)의 85층을 돌파했다.

오르고 또 올랐다.

가끔 사망자가 발생했고, 우연히 「회귀의 돌」 조각을 얻어 과거로 가는 자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재환은 꿋꿋이 올랐다.

그렇게 이제 98층이었다.

재환은 과거로 간 워커들을 원망했다.

그들 중 절반만 가지 않았더라면. 아니, 하다못해 선발대 녀석들이라도 가지 않았더라면, 세계가 이 꼴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인류는 오래 버텼다.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병들었지만, 그럼에도 이겨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무리였다.

남은 "카르페디엠"은 이제 두 명뿐이다.

그럼에도 재환은 포기하지 않았다.

"가자, 윤환아."

그들이 알기로 탑은 100층이 끝이었다.

이제 남은 공략 층수는 단 2층.

2층만 공략하면, 이 지옥 같은 시간도 끝난다.

인류는 해방된다.

이 세계는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재환은 그렇게 믿었다. 아니, 믿었었다.

"윤환아?"

대답이 없다.

"김윤환."

재환과 함께 남은 인류 최후의 결사대.

스마일 나이트(Smile knight), 김윤환.

무슨 일을 당하든 언제나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는 그를 보고, 동료들은 스마일 나이트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그런데 그 스마일 나이트가, 웬일인지 웃고 있지 않았다.

"설마······."

대체 저 돌이 어디서 나온 걸까.

재환은 윤환의 손에 쥐어져 있는 작은 돌조각을 보며 물었다.

"너..., 설마 회귀할 생각이냐?"

믿을 수 없었다.

윤환이 말없이 고개를 떨어트렸다. 당장이라도 덤벼들 것처럼 윤환을 노려보던 재환은, 무슨 생각이었는지 홱 등을 돌렸다.

"가라."

"미안하다, 재환아."

"빨리 꺼져. 마음 바뀌기 전에."

재환은 홀로 99층의 문을 향해 걸어갔다.

윤환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믿고 따라올 수 있었던 등이었다.

99층의 문이 서서히 열리고 재환이 반쯤 사라졌을 무렵, 윤환이 비틀거리며 탑의 기둥에 몸을 기댔다.

호흡이 점점 가빠왔다.

흐트러진 케이프 사이로 피가 흐른다. 윤환의 가슴 어귀에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98층의 보스였던 마수 길티카스의 작품이었다.

포션 따위로 어떻게 비벼볼 수 있는 부상이 아니었다. 레어 클래스의 사제가 와야만 치료할 수 있을 상처. 그러나 이 세계에 사제 따윈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의 가장 친한 친구는 한눈에 알아보았을 것이다.

자신이 쥐고 있는 이 돌은 「회귀의 돌」이 아니라, 그저 평범한 돌멩이일 뿐이라는 걸.

윤환은 그 평범한 돌을 힘껏 쥐어 보았다. 손목이 부르르 떨리며 차갑고 모진 감촉이 느껴졌다. 오직 이 세계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각이었다.

그는 이것을 재환에게 배웠다.

한없이 보잘것없는 이 돌에 대해. 서슴없이 과거로 돌아가는 수많은 인간들로 인해 볼품없어진 이 삶을 꽉 쥔 채, 놓지 않는 법에 대해 배웠다.

그것은 참 어려운 일이었다.

윤환의 몸이 탑의 바깥쪽을 향하고 섰다.

"이 세계에 네가 있어서 참 다행이다, 재환아."

기울어진 그의 몸이 탑 아래로 떨어지는 순간, 99층의 입구를 열던 재환의 몸이 잠깐이지만 멈췄다.

그는 오른손을 들어 묵묵히 얼굴을 닦았다.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었고, 무엇인가가 스러지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끝내 뒤돌아보지는 않았다.

그는 홀로 99층을 향해 올라섰다.

그의 세계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pisode 1. 백억 번의 찌르기 (1)

삼십 년이 지났다. 아득한 시간이었다.

그 삼십 년을, 재환은 홀로 99층에서 보냈다.

몇 번이나 죽을 뻔했더라.

1층부터 99층까지 올라오면서 생사의 위기를 골백번은 넘겼음에도, 99층에서 재환은 다른 모든 층수를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이 죽을 뻔했다.

99층의 보스, 빙룡 벨키서스.

'잊혀진 대지'에서 왔다는 이 드래곤의 숨결은 한계치까지 성장한 재환의 냉기 저항으로도 감당하기 어려웠다.

어디 그뿐이랴.

드래곤의 단단한 비늘 때문에 재환은 몇 번이나 검이 부러지고 갑옷이 뭉개졌다. 다른 워커들이 버리고 간 장비들이 없었더라면 진즉에 포기했을지도 몰랐다.

특히 85층에서 얻은 진룡검(鎭龍劍).

윤환이 놓고 간 빙마(氷魔)의 갑옷.

그리고 죽은 서율이 그에게 준 화왕(火王)의 팔찌가 큰 도움이 되었다.

한서율.

재환은 모처럼 그녀의 이름을 떠올렸다. 서율은 77층에 도착하기 전에 죽었다.

*

"재환 군, 또 도전할 셈인가?"

아토포스의 대장장이, 제이가 물었다.

50층의 보스였던 괴룡 알테미너스를 멸하고 개척된 마을, 아토포스(Atopos).

아토포스가 막 움틀 무렵만 해도 인류는 괜찮았다. 최전선의 워커들이 매일 같이 죽거나 부상당해서 실려 내려왔지만, 사람들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사제들은 응급 구조대를 신설해 전투 불능에 빠진 공략대를 구조하러 다녔고, 공방(工房)의 대장장이들은 인류를 위해 싸우는 공략대를 위해 무료로 장비를 수리해 주기도 했다.

영감 제이의 〈제이스 공방〉은 그런 공방 중에서도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던 곳이었다.

제이는 이제 아토포스에 남은 마지막 대장장이다.

"재환 군?"

"어, 응. 미안. 뭐라고 했지?"

"또 도전할 셈인지 물었다네."

제이의 희끗희끗한 수염을 잠시 바라보던 재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야지. 이번에는 정말 깰 수 있을 것 같거든."

"그래? 정말인가?"

"응, 틀림없어."

거짓말이었다. 턱도 없었다. 얼마나 걸릴지, 클리어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턱도 없다고 생각했던 건 언제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제이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제이는 외국인이었다.

탑에 올라온 후에는 모국어는 의미가 없어져서 다들 탑의 공용어를 사용했지만, 타 문화권에 대한 이질감은 언어가 통일된 후에도 여전히 만연했다. 하지만 재환은 제이가 남 같지 않았다.

제이는 재환이 맡긴 진룡검을 두들기며 지나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요즘은 더 이상 아래층에서 물자들이 올라오질 않는다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드물지만 광물 공급이 있었는데 말이지."

재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주일 전, 재환은 1층부터 99층까지를 모조리 탐색하고 왔다.

살아 있는 사람은 없었다.

1층 소환장에서 일주일 정도 죽치고 대기도 해 보았지만, 추가로 소환되어 올라오는 사람도 없었다. 아마 지상의 인류가 멸종했다는 뜻이겠거니 싶었다.

그럴 만도 했다.

재환은 지금이 서기 몇 년인지 모른다. 타워 임팩트가 수차례 발생했다는 메시지가 있었으니, 살아남은 인류가 있는 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대신, 재환은 히든 피스로 추정되는 어떤 단서 하나를 발견하는 성과를 올렸다.

과거 「회귀의 돌」이 막고 있었던 77층에서 78층으로 가는 통로에는 다음과 같은 낙서가 남겨져 있었다.

―탑 속의 탑, 악몽 속의 악몽.

그게 무슨 뜻인지, 재환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하긴, 이 탑에 그가 알지 못하는 것들이 어디 한둘이던가.

"그저께는 〈하이렌 포션〉의 할멈이 사라졌다네."

"아, 하이렌이······."

〈하이렌 포션〉의 하이렌은 〈제이스 공방〉의 제이와 함께 아토포스에 마지막 남은 지원형 워커였다. 재환에게 처음으로 포션 제조법을 알려준 여인.

탑에 들어온 자들은 나이를 먹지 않으니, 그들이 사라졌다면 둘 중 하나다.

과거로 갔거나, 아니면 탑 아래로 뛰어내렸거나.

재환은 하이렌은 그중 어느 쪽인지 궁금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어느 쪽이든 마찬가지였다.

재환은 늙은 제이의 눈을 바라보았다. 눈그늘 아래에 드리워진 감정을 읽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어쩌면, 제이를 볼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다.

"제이, 내게 블랙스미스 스킬을 알려주지 않겠어?"

그 말에 망치질 소리가 잠시 멎었다. 두 사람의 눈빛이 잠시 허공에서 교차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제이가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재환도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제이는 다시 망치질을 시작했다.

*

다시 99층.

빙룡 벨키서스는 또다시 찾아온 인간을 보며 감탄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대단한 인간이다. 이 탑이 만들어진 이래 단 한 번도, 홀로 99층에 도전한 인간은 없었다.

재환이 피식 웃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를 인정하는 존재가 같은 인간이 아니라 저 괴물이라는 게.

"널 죽일 때가 되면 아쉬워서 어쩌냐."

―안됐지만 그건 불가능하다, 인간.

"그렇지도 않을걸. 얼마 전부터 네가 자랑하는 비늘에도 슬슬 금이 가고 있거든."

빙룡이 그르르, 하고 거칠게 울었다. 재환의 검이 빙룡의 본체를 향했다.

단순한 기본 공격. '찌르기'였다.

―또 그 공격인가.

"아쉽지만 이것밖에 할 줄 몰라서 말이지."

재환은 다른 이들보다 늦게 탑의 공략을 시작한 편이었다. 때문에 히든 스킬이라든가, 히든 클래스를 습득할 기회를 번번이 놓치고 말았다.

그래서 재환은 다른 모든 스킬들을 깔끔하게 포기하고 찌르기 하나에 전념했다.

찌르고, 찌르고, 또 찌르고.

그렇게 오천만 번 정도 적을 찔러서, 사람들이 그를 '근성 찌르기의 재환'이라고 부를 무렵이었을까.

재환은 자신의 '찌르기'가 변화하는 것을 느꼈다.

더 빠르게, 그리고 더 정확하게.

찌르기가 강해졌다.

육천만 번, 칠천만 번······ 그리고 일억 번.

그 결과, 재환의 '기본 공격'인 찌르기는, 어지간한 히든 스킬 못지않은 공격력을 가지게 되었다.

게다가 '스킬'이 아니다 보니, 딱히 영력이 소비되지 않아서 아무리 사용해도 지치질 않았다.

하나, 그런 재환의 찌르기로도 99층의 빙룡을 상대하기엔 벅찼다. 비늘 한 점을 잡아 수십, 수백 번을 찔러야 간신히 생채기 정도를 낼 수 있었다.

그런데 가끔은, 찌르기 한 방으로도 치명상을 줄 수 있었다.

아, 또 보인다.

재환의 눈동자가 탁해지더니, 찌르기가 묘한 기세를 품기 시작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그럼에도 피할 수 없는 찌르기.

빙룡이 고통스런 울음을 내질렀다.

언제부터였을까.

백만 번, 혹은 천만 번에 한 번 정도. 찌르기를 계속해서 반복하던 재환의 눈앞에 희미한 선(線) 같은 것이 나타났다.

재환은 무의식중에 그 선을 따라갔다.

무사히 그 선을 이어 내는 것에 성공하기만 하면, 재환은 일반적인 찌르기의 수백, 수천 배에 달하는 타격을 입힐 수 있었다.

...이번에도 부족했군.

빙룡의 주둥이에 모인 숨결이 탑을 가득 채운다. 이미 몸이 넝마가 된 재환에게는 치명적인 일격이었다. 체력이 제로를 향해 달려갔다.

재환은 사력을 다해 브레스를 피했다.

―안타깝구나, 인간이여. 너 같은 인간이 열 명만 더 있었더라면, 이 나를 꺾을 수도 있었을 텐데.

"닥쳐."

―무지한 너의 동족들이 「몽마의 돌」에 눈이 멀지만 않았더라도, 네 종족의 운명은 완전히 뒤바뀌었을 것을.

"몽마의 돌? 그게 무슨 소리지?"

빙룡은 대답하지 않았다. 거대한 발톱이 그를 향해 날아들었다.

"······다시 온다."

재환은 백 스텝을 밟으며 달아났다.

빙룡은 그를 붙잡지 않았다.

*

다시 일 년, 또 일 년이 더 지났다.

금방 사냥할 수 있을 것 같았던 빙룡은 오랫동안 쓰러지지 않았다. 금이 간 비늘 아래에는 또 다른 비늘이 있었다.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하이렌에게 포션 제조법을 배워 두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군."

혼잣말은 멍청한 녀석들이나 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혼잣말이 늘었다.

수십 년 전에는 동료들과 함께 사냥했던 길을 다시 걸으며, 재환은 자주 동료들에 관해 생각했다.

언젠가, 윤환은 그런 질문을 했다.

"이 탑에 얼마나 오래 있어야 할지 생각해 봤어?"

윤환은 사람들로 가득한 50층 마을의 정경을 내다보며 말을 이었다.

"서울에서 살았던 시간이 가끔 거짓말처럼 느껴져. 어쩌면 이 탑에서의 삶이 우리의 진짜 인생이 될지도 몰라."

"설마 그렇게 오래 있겠냐?"

"모르지."

그렇게 말하던 윤환은 이제 없다.

재환은 과거로 돌아간 동료들에 관해서도 생각했다.

소드 패닉은 여전히 턱수염을 기르고, 사카모토는 꼬장꼬장한 과학 이론들을 설파하고 있을까.

알 수 없었다. 아무것도 알 수 없었기에, 재환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위로 올라가는 것뿐이었다.

"지난번에 맡긴 장비일세."

"고마워, 다녀올게."

제이가 꽤 오래 버텨주지 않았다면, 재환은 일찍이 미쳐버렸을지도 모른다.

일 년, 그리고 이 년.

침묵 속에 흘러가는 시간을 느끼며, 재환은 가끔 제이와 대화를 나누었다.

"고향 생각이 아득하구만."

"당신 고향이 어딘데?"

"플로리다일세."

"난 서울이야."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며, 재환은 제이의 블랙 스미스 기술을 배웠다. 하이렌이 남긴 제조법을 복기했으며, 그가 아닌 다른 인류가 남긴 유산들을 익히고 또 익혔다.

"이제 하이렌 뺨치는 솜씨군."

"아직 멀었어."

"블랙 스미스는 조금 더 연마해야겠는데."

"당신보다 잘하기 전까지는 죽지 말라고, 제이."

담금질을 조정하면서, 재환은 농담을 던졌다.

반듯한 칼날의 표면에 유일한 흠결처럼 남은 점. 그 점을 제외하면, 이미 재환의 솜씨는 제이 못지않게 훌륭한 수준이었다.

재환이 재련한 검을 보며, 제이는 특유의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었다.

찌르기가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서, 재환은 하루의 수련 시간을 대폭 늘렸다.

찌르고, 찌르고, 또 찌르고.

하이렌이 남긴 포션 제조법을 익히거나 제이에게 블랙 스미스 스킬을 배우는 시간을 제외하면, 재환은 온종일 찌르기를 훈련했다. 다른 스킬을 배우기는 늦었기에, 그가 행하는 것은 오직 찌르기뿐이었다.

일 년, 이 년, 삼 년.

시간은 차곡차곡 재환의 새카만 어깨 위로 쌓였다. 장비를 스스로 수리할 수 있게 되면서, 제이를 보는 날이 조금씩 줄어들었다.

찌르기를 반복하고, 99층에 도전하고, 다시 찌르기를 반복하고. 가끔은 과거의 정념에 휩쓸리거나 회의감이 뇌리를 사로잡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모든 인류가 사라진 뒤, 혼자 남은 그가 탑의 마지막 층을 보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재환은 생각했다. 의미는 있다. 모두가 버리고 떠난 세계라도, 여전히 의미는 남아있다. 아직 지나간 시간을 기억하는 그가 이곳에 있으니까.

여전히, 세계를 향해 찌르기를 반복하는 자신이 있으니까.

그렇게 그가 찌르는 대상이 빙룡인지, 드래곤인지, 과거의 원념인지, 아니면 자기 자신인지 재환 스스로도 알 수 없을 때쯤.

눈앞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Episode 1. 백억 번의 찌르기 (2)

[전설의 재림! '빙룡왕 벨키서스'를 홀로 사냥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혼자 힘으로 불가능한'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신규 타이틀! '99층의 악몽'을 획득하였습니다.]

[아이템 「빙룡검(氷龍劍)」을 획득하였습니다.]

[사용자의 레벨이 한계치에 도달했습니다.]

[사용자의 체력이 한계치에 도달했습니다.]

[사용자의 무력이 한계치에 도달했습니다.]

[사용자의 민첩이 한계치에 도달했습니다.]

재환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 강대했던 빙룡의 거체가 쓰러져 있었다.

―인정한다, 너는 정말 대단한 녀석이다.

허공에 흩어져 가는 빙룡을 보며, 재환은 자신도 모르게 팔을 뻗었다.

"잠깐, 기다려!"

동공이 탁해져 가는 빙룡 벨키서스가 마지막으로 재환 쪽을 돌아보았다. 재환은 몇 번이고 입을 열었다 닫았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다. 이제 그의 삶은 인간보다 저 괴물과 함께 보낸 시간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머뭇거렸을까. 재환이 가까스로 내뱉은 말은 다음과 같았다.

"대답해. 「몽마의 돌」이란 게 대체 뭐지?"

그런 재환의 모습에, 어느새 반 이상 부서진 빙룡이 웃었다. 마치 그와 함께 보낸 시간을 기억하듯, 혹은 그런 그를 동정하기라도 하듯이.

―과거로 사라진 인간들이 궁금한 모양이군.

"그들은 정말 이 세계의 과거로 간 건가?"

―너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모든 것은 마지막 층에서 알게 될 거다.

빙룡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재환은 빙룡의 몸피가 은빛 가루가 되어 완전히 소멸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지막 층으로 가는 입구가 보였다.

빙룡을 잡는 것도 이렇게 힘들었는데, 마지막 층에는 또 얼마나 대단한 녀석이 기다리고 있을지 재환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그래도 재환은 멈추지 않았다.

"100"

재환은 문에 적힌 숫자를 확인했다. 먼지 속에 덮인 그 숫자를 손으로 쓸어 보았다. 지난 수십 년간 탑에서 있었던 온갖 기억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제이가 알면 분명 기뻐하겠지.'

제이의 환한 미소가 눈앞에 선연했다.

재환은 100층의 문을 열어 젖혔다.

*

탑의 100층은 언젠가 재환이 재난 영화에서 본 최첨단 상황실의 정경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런 상황실의 수십, 수백 배는 되는 규모였다. 수만 개에 달하는 홀로그램 패널들이 화면을 바꿔 가며 타워의 곳곳을 비추고 있었다. 개중에는 재환의 모습을 비추는 화면도 있었다.

얼빠진 표정이었다.

"어이쿠, 벌써 오셨네. 당연히 마을 다녀오실 줄 알았더니."

긴장하며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아아, 그렇게 긴장하지 말고 있어요. 깜빡하고 중요 메시지 발송을 안 했으니까, 잠시만 거기서 기다려요. 이게 겉으로 보기에는 좋아 보여도 사실은 골동품이라 귀찮은 구석들이 있어서."

잠시 후, 눈앞에 어떤 화면이 떠올랐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294월드 최초로 튜토리얼 게임을 모두 클리어하였습니다.]

[당신의 놀라운 업적은 불멸의 도서관 '아카식 레코드'에 기록되며, 이 기록은 오직 "위대한 땅"의 군주들, 그리고 신들만이 열람할 수 있도록 영구히 보존될 것입니다.]

재환의 머릿속에 혼란이 몰아쳤다.

이게 무슨 소리지?

튜토리얼 게임?

지금까지 했던 것이 모두 튜토리얼 게임이었다고?

허공에 두둥실 떠 있던 홀로그램 패널들 사이에서 인영(人影)이 걸어 나왔다.

"휴우, 다 끝났네······. 어라."

걸어 나오던 인영이 재환과 눈을 마주쳤다.

"이야아아! 드디어 당신을 직접 보는군요!"

호들갑을 떠는 인영은 인간의 몸에 정장을 입고서 사자 머리를 한 괴이한 모습이었다. 게다가 사자 머리에 얹힌 저 중절모는 또 뭐란 말인가?

사자 머리가 말했다.

"서프라이즈! 나 정말 놀랐다니까요. 혼자서 튜토리얼의 100층까지 도달하다니, 이제껏 단 한 번도 없던 일이거든!"

"······대체 무슨 장난이지?"

"크으, 그 까칠한 말투. 과연 "위대한 땅" 군주들의 관심을 독차지한 존재답네요!"

"네놈은 뭐냐?"

"아하, 소개가 늦었군요."

사자 머리는 갈기 사이에 조그맣게 얹혀 있던 중절모를 벗으며, 깍듯한 자세로 인사를 했다.

"저는 악마 비스트레인. 당신이 방금 클리어한 "악몽의 탑"의 주인이자, 294월드 튜토리얼 게임의 마스터입니다."

게임. 그것도 튜토리얼 게임이란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인류가 멸종해 버린 이 모든 상황이, 게임이라고.

순간 재환의 눈빛이 흐려졌다. 온갖 감정들이 날뛰고 있었다. 이 현실을 받아들이려는 자아와, 주체하지 못하고 풀려 버린 감정들이 서로 맞서 싸우고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재환의 눈빛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아니, 전보다 훨씬 더 냉철하고 이성적인 눈빛으로 변했다.

"어라, 회복이 빠르시네요?"

재환은 무표정한 얼굴로 비스트레인을 보았다.

이 정도 충격도 극복하지 못한다면 그는 혼자서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

"이게 튜토리얼이라는 건, 혹시 본 게임이 남아 있다는 뜻인가?"

"크, 이해력도 좋으셔. 거참 특이하네요. 운 좋게 여기까지 올라온 자들은 대개 제정신이 아니라서 대뜸 칼부터 뽑으시던데."

"본 게임은 또 뭐지?"

"말 그대로 본 게임이죠."

비스트레인의 사자 머리가 괴이한 웃음소리를 냈다.

탓, 하고 손가락 튕기는 소리와 함께 홀로그램 패널이 일제히 어떤 화면들을 띄웠다.

〈탑 1층〉

웅성거리는 사람들 속에 서 있는 재환의 모습.

"뭐야, 이거 꼭 게임 같은데?"

재환이 처음으로 이 게임에 소환되었을 때다.

〈탑 7층〉

파티를 맺고 서 있는 세 사람.

누군가가 이야기한다.

"저는 윤환이라고 합니다. 옆에 얘는 서율이고."

처음으로 윤환과 서율을 만났을 때다.

〈탑 32층〉

그림자 동굴의 시련을 이겨 내고 한 달 만에 나온 재환은 꾀죄죄한 모습이다.

그의 '찌르기'가 처음으로 성장했을 때다.

〈탑 54층〉

재환, 그리고 그를 둘러싼 사람들.

"안녕하세요, 재환이라고 합니다. 대한민국의 서울 출신이고, 클래스는 검사입니다."

최강의 선발대 "블레이드 워커"에 들어갔을 때다.

〈탑 66층〉

보스 몬스터 서큐버스와 싸우던 중, 재환은 문득 그의 곁에 있는 한 여인을 흘끗 본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던 때다.

〈탑 76층〉

언데드의 뼈가 쌓인 한가운데에서 재환은 한 여인을 가슴에 안은 채 절규하고 있다.

데스나이트의 공격에 서율을 잃었을 때다.

〈탑 77층〉

빛무리가 되어 흩어지는 사람들.

격렬한 분노.

「회귀의 돌」이 발견되고, "블레이드 워커"가 해체되었을 때다.

〈탑 85층〉

마의 층을 클리어한 사람들의 함성.

최후의 결사대 "카르페디엠"이 결성되었을 때다.

〈탑 98층〉

마수 길티카스.

······윤환을 잃고 혼자가 되었을 때다.

〈탑 99층〉

바로 얼마 전, 빙룡을 혼자서 사냥했을 때다.

재환은 멍하니 그 화면들을 보았다.

지금까지 자신이 해 왔던 모든 행동과 말들이 이곳에서 기록되고 있었다. 비스트레인이 박수를 쳤다.

"장장 30여 년에 걸친 대단한 드라마였죠. 당신이 있어서 너무나 즐거웠습니다. 여기서 매일매일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다 보면, 당신 같은 이야기가 간절해지거든요. 모르긴 몰라도 "위대한 땅"의 군주들도 당신의 활약상을 보며 질질 짰을 겁니다."

위대한 땅. 군주. 그로서는 모르는 이야기들뿐이었다. 재환은 분노를 감추며 말했다.

"하고 싶은 얘기가 뭐냐?"

"간단합니다. 당신은 이 모든 게임을 다시 한번 더 할 수 있습니다."

비스트레인은 계속해서 말했다.

"그것도 이곳에서 있었던 모든 기억을 가지고서 말이죠. 튜토리얼 게임을 클리어한 당신에게만 특별히 주어지는 특전입니다. 하하, 정말이지 대단한 혜택이지 않습니까? 당신 세계에서는 판타지 소설에나 나오던 일이지요. 모든 기억을 가진 채로 처음부터 시작하는 절대자! 어떻습니까? 벌써부터 기대되지 않습니까?"

재환은 망연해졌다.

보상이라 했다.

탑의 최종 보상은 인류의 구원이 아니었던가.

아니, 생각해 보면 악몽의 탑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나?

없었다.

탑은 '최종 보상'에 대해 한마디도 한 적이 없다.

그건 인류의 희망 사항일 뿐이었다.

사람들은 생각했던 것이다. 수많은 콘텐츠에서 으레 그랬듯 탑을 클리어하면 인류가 탑의 공포에서 해방되거나,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주어질 것이라고.

마른하늘에 갑자기 인류의 목표가 발생했고, 인류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걸 공략하는 것뿐이었다.

지금 그 공략의 보상이 재환의 눈앞에 있었다.

오직 재환 단 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보상이.

"설마 지금까지 했던 짓을 다시 한번 되풀이하라는 거냐?"

"뭐, 비슷합니다!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요."

재환은 저 짐승 대가리가 지껄이는 소리를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지금까지 이 세계를 지키기 위해서 싸워 왔다. 모두가 버린 이 세계를 지키는 일.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세계를 포기하지 않는 일.

그것이 이 끔찍한 탑에서 그를 인간으로 살아남게끔 만든 긍지였다. 그런데 탑을 모두 클리어한 보상은, 이제 이 세계를 포기하라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건, 날 과거로 돌려보내겠다는 소리군."

재환의 목소리가 얼어붙고 있었다.

"잘 알고 있을 텐데. 나는 과거로는 가지 않는다."

그런데 비스트레인이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과거? 과거 말씀이십니까?"

"그래."

사자의 입에서 광기 어린 웃음이 터졌다.

"뭐가 그렇게 웃기지?"

"하하하핫! 그러고 보니 그랬지요. 당신은 절대로 과거로 돌아가지 않는 종류의 인간이지요. 그러지 않았더라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테니까요. 아하하핫!"

비스트레인은 그렇게 한참이나 더 웃어 댔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마법처럼 뚝 웃음을 그치고서는,

"명증하고 잔혹한 사실을 하나 알려드리죠."

기계처럼 섬뜩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탑의 어떤 아이템으로도, 심지어 바깥 세계― "위대한 땅"에 있는 어떤 아이템으로도, 과거로 돌아갈 방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Episode 1. 백억 번의 찌르기 (3)

재환의 입이 벌어졌다.

"무슨 소리지? 이 탑에는 이미 과거로 갈 수 있는 아이템이 존재하고 있을 텐······."

순간 가슴이 서늘해졌다.

비스트레인은 말했다. 이곳에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비스트레인은 이렇게도 말했다. 재환은 이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도 있다고.

모순이었다.

그런데 재환은 그 모순을 화해시킬 단 한 가지의 방법을 알고 있었다.

탑의 66층.

그곳에서 재환은 몽마(夢魔)의 열화판인 하급 서큐버스와 맞선 적이 있었다.

66층을 공략하기 위해 선발대는 정말 많은 시간을 허비해야 했다.

서큐버스가 만든 고도의 환상 세계. 정신력이 약한 자들일수록 서큐버스의 환술에 쉽게 무너졌다.

66층은 인간을 짐승으로 만드는 곳이었다.

서큐버스가 만든 환술에 빠진 워커들은 서로를 무참하게 능욕하고 살해했다.

재환 역시 몽마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역시도 하마터면 서큐버스의 환술에 당할 뻔했으니까.

"몽마의 돌."

재환의 말에, 비스트레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어떻게 그 아이템을 알고 있죠? 그건 탑 안에서 얻을 수 없는 정보일 텐데."

"빙룡이 알려 주더군."

"이런이런, 곤란하네요, 정말. 그건 아직 당신이 알면 안 되는 정보라고요."

비스트레인이 작게 중얼거렸다.

······이래서 AI 알고리즘을 잘 짜야 한다니까. 무턱대고 괴수를 마구 찍어 내니까 이런 변수가 생기잖아. 빌어먹을 「제작자」 놈들 같으니.

웅얼거리는 비스트레인을 보며 재환이 입을 열었다.

"회귀의 돌을 사용한 사람들은 과거로 간 게 아니었군."

비스트레인은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이내 결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뭐, 당신은 혼자서 이 탑을 클리어한 최초의 워커니까, 들을 자격은 되겠죠. 그렇습니다. 당신 생각이 맞습니다."

비스트레인이 탓, 하고 다시 손가락을 튕기자, 홀로그램 패널의 화면들이 일제히 바뀌었다.

"당신들이 탑의 77층에서 발견한 아이템은 「회귀의 돌」이 아니라, 「몽마의 돌」입니다. 돌을 사용한 자는 몽마가 만든 꿈에 갇혀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되는, 굉장히 특수한 아이템이죠."

허공의 홀로그램 패널들 속에 수많은 워커들이 있었다.

소드패닉 황인찬, 과학 교사 사카모토······.

과거로 갔다고 알려진 모든 이들이 그곳에 있었다. 그들은 몽마의 꿈에 갇혀서, 끝나지 않는 꿈에 취해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는 중이었다.

비스트레인은 그 광경이 재미난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 저들은 정말로 과거로 돌아갔으니까요."

재환은 말없이 화면을 응시했다.

어떤 의미에서 녀석의 말은 맞았다.

저곳의 인간들은, 모두 현재를 포기하고 과거로 돌아간 자들이었다. 타인과의 관계를 쉽게 도려낸 자들. '타인이 보는 세계'를 무시하고 '자신이 보는 세계'만을 중요시한 자들이었다.

그들에게 과거로 돌아가는 것과 몽마의 꿈을 꾸는 일은, 그리 다른 일이 아닌지도 모른다.

"후후, 지금 생각해도 294월드의 인간들은 정말 이상합니다. 77층 이전까지만 해도, 당신들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수많은 월드에서 이 탑에 도전했지만, 당신들처럼 우수한 성적으로 탑을 돌파한 이들은 없었어요. 마치 이런 종류의 게임을 오래전부터 준비해 온 것처럼 굉장했지요."

분명 그랬다.

77층 이전까지는 말이다.

"그대로 게임이 계속 진행된다면 튜토리얼 게임이 너무 싱거워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했지요. 이거 "악몽의 탑"이 만들어진 이래 역대급의 위기였다고나 할까, 그런데 정말이지 이야기란 끝까지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모르는 거라니까요."

홀로그램 화면은, 일제히 「회귀의 돌」을 사용하는 인간들을 비추고 있었다. 빛무리로 화해 어딘가로 날아가는 인간들. 스스로 시간의 노예가 되어 버린 자들.

"과거로 돌아가는 것에 그토록 집착하는 종족은, 아마 당신들뿐일 겁니다."

오직 과거의 회한에만 집착하는 종족. 그 말이 재환의 가슴 깊은 곳을 찔렀다. 재환은 빛무리가 되어 사라지는 사람들의 영상을 보았다. 몇 번이나 보고, 또 보았던 광경이었다.

그 순간, 재환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스쳤다.

"자, 이 정도면 궁금증은 대강 풀리셨을 테니, 본론으로······."

재환이 비스트레인의 말을 잘랐다.

"너는 내게 다시 게임을 시작하게 만들 셈인 거로군."

"하하, 이제 귀가 좀 트이셨나요?"

"물론 날 과거로 돌려보내지는 않고서 말이야."

"그렇습니다. 그 방법은······."

그러자 재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녀석 덕분에 이 탑의 정체를 알았다."

"예?"

재환은 오래전부터 궁금했다.

어느 날, 창공을 꿰뚫고 나타난 거대한 탑.

그리고 뒤이어 날아든 정체불명의 메시지.

[축하합니다! 당신은 "악몽의 탑"의 의지로 이 세계를 구할 '타워 워커'로 지목되었습니다. 소환에 응하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그는 그때 소환에 응했다.

그래서 이곳에 있었다.

재환은 척척 걸음을 옮겨 탑의 내벽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차가운 돌의 감촉이 그대로 전해졌다.

어느새 지구보다 이 탑 안에서 더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그 오랜 세월 동안, 그는 한 번도 이처럼 커다란 오브젝트를 '아이템'이라고 인식해 본 적이 없었다.

이제 인식을 바꿀 차례였다. 재환은 가만히 눈을 감고 탑에 집중했다. 탑을 상상했다. 그가 오래도록 걸어 올라온 이 탑의 모든 것을 상상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머리가 지끈, 하더니 무엇인가가 그의 안에서 깨져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윽고 그의 눈앞에 아이템의 이름이 출력되었다.

+

[아이템 정보]

명칭 : 악몽의 탑-튜토리얼 모드

설명 : 가칭 '후회의 성채'. 악몽 제작자인 몽마 뮬라크의 2호작이다. 탑의 소환에 응한 자를 몽마의 꿈속에 빠뜨린다.

+

"이 탑은, 거대한 「몽마의 돌」이었어."

재환이 말했다.

"나는 이미 탑이 만든 '몽마의 꿈' 속에 들어와 있었던 거다. 오래 전, 탑의 제안에 동의해 소환되었던 바로 그 순간부터."

한순간 적막이 내려앉았다.

비스트레인은 얼굴이 보이지 않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흐느끼는 듯 몸을 부들부들 떨더니, 이내 고개를 뒤로 젖혔다.

"하하, 하하하핫! 아하하하하하핫!"

비스트레인은 탑이 떠나갈듯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에는, 이제 묘한 노기 같은 것이 함께 느껴졌다.

"이거 대박인데 정말. 당신은 몇 번이고 나를 놀라게 하는군요."

비스트레인이 탓, 하고 손가락을 튕기자, 홀로그램 패널의 화면이 다시 바뀌었다. 줄곧 탑의 안에서 일어나는 일만을 보여주었던 패널이, 이제 탑의 바깥 정경을 비추고 있었다.

재환은 망연해졌다.

지구는, 멀쩡히 남아 있었다. 도시도, 사람들도. 타워 임팩트에 의해 멸절했으리라 생각했는데, 세계는 무사했다.

"보시면 알겠지만, 당신의 동료들은 죽지 않았습니다. '본 게임'도 시작 안 했는데, 그렇게 쉽게 죽어 버리면 곤란하잖아요?"

비스트레인은 계속해서 말했다.

"후후, 아무도 죽지 않았다니, 놀랍지 않습니까? '가족' 또는 '친구'라는 독특한 무리가 존재하는 당신들에게는 좋은 소식일 거라 생각합니다만."

워커로 보이는 사람들은 모두 거대한 의료기관에서 돌보아지고 있었다. 아마 정부 차원에서 손을 쓰고 있는 듯했다. 병석에 누워 있는 환자 중에는 재환 자신의 모습도 있었다.

믿을 수 없게도, 몹시 평안한 얼굴이었다.

수십 년이 지났을 텐데도, 지구에 있는 재환의 얼굴은 전혀 늙지 않은 채였다.

"이곳에서는 수십 년의 세월이었지만, 당신 세계의 시간으로는 이제 고작 한 달 남짓이 지났을 뿐입니다."

재환은 어렵지 않게 그 말을 납득했다.

이곳은 몽마의 꿈속. 이곳에서 몇백 년이 흘러도, 바깥에서는 그저 찰나일 뿐이라는 것.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악마 비스트레인이 보여주는 홀로그램 패널을 신뢰할 때의 이야기라는 것을 재환은 잘 알고 있었다.

재환에게는 진실을 판별할 힘이 없었다.

비스트레인의 말 중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재환은 알지 못한다. 게다가 상대는 이미 인간을 속인 전적도 있다.

패널의 화면이 일제히 꺼졌다.

"이거 생각보다 시간을 너무 많이 지체해 버렸군요. 어쨌든 저의 제안이 당신에게는 아무것도 손해될 것이 없다는 걸 이제 충분히 아셨겠죠?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게임을 다시 시작하는 것뿐이에요."

비스트레인은 개운한 얼굴로 허공에 무언가를 입력했다.

"휴우, 즐거웠습니다, 그동안."

재환의 시야에 무엇인가가 떠올랐다.

[게임마스터가 튜토리얼 게임을 완전히 종료하려고 합니다. 당신은 고향인 294월드로 귀환할 수 있으며, 어떤 기억도 잃지 않은 채로 본 게임에 참가할 수 있습니다. 이 제안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재환은 그 화면을 잠시 보다가, 뭔가를 선택했다.

―제안을 거절하였습니다.

Episode 1. 백억 번의 찌르기 (4)

"······뭡니까?"

비스트레인의 사자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아하, 그렇군요. 단순히 기억만 가지고 나가는 건 보상으로 짜다 이거죠?"

비스트레인이 탁, 하고 이마를 짚으며 유쾌하게 미소 지었다.

"좋습니다. 당신이라면 그럴 자격이 있죠. 뭘 원합니까? 히든 아이템? 히든 스킬? 아니면 히든 클래스의 정보?"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러면 왜······."

비스트레인의 얼굴이 처음으로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난 너를 사냥하고 다음 층으로 갈 거다."

그 말에 비스트레인의 표정이 어색하게 굳어졌다.

"다음 층······. 다음 층 말입니까? 그런 건 없습니다. 여기가 탑의 끝이에요. 어째서 다음 층 같은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죠?"

"네놈 말은 이제 믿지 않기로 했으니까."

"하아, 설마 저를 믿지 못하시는 겁니까? 이렇게나 많은 증거를 보여줬는데도······."

비스트레인이 피곤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소용없습니다. 당신은 내게 절대로 이길 수 없어요. 겨우 튜토리얼 게임을 클리어 한 당신과 나 사이에는 인간과 드래곤만큼이나 커다란 격차가 있거든요."

재환은 85층에서 얻은 진룡검과, 99층에서 얻은 빙룡검을 양손에 각각 그러쥐며 대답했다.

"그거 별거 아닌 격차로군그래."

*

일흔두 번.

재환은 4개월 동안 비스트레인에게 일흔두 번 도전했고, 단 한 번의 생채기조차 내지 못했다. 그리고 전투가 끝나면 거의 불구가 되어 돌아왔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비스트레인은 그를 죽이지 않았다.

재환은 탑의 100층까지 올라오며 쌓아 온 그의 모든 역량을 사용했고, 모든 방법을 총동원했다.

그러나 상대가 되질 않았다. 그는 비스트레인을 건드릴 수조차 없었다.

재환은 〈하이렌 포션〉에 남아 있던 포션을 꺼내 상처에 치덕치덕 바르고, 신전의 창고에서 남은 성수를 꺼내 몸을 푸욱 담갔다. 피로가 빠르게 해소되었다.

뒤이어 그는 〈제이스 공방〉에도 방문했다.

"제이, 나 왔어."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비스트레인에게 처음으로 패하고 50층 아토포스로 돌아왔을 때, 이미 〈제이스 공방〉은 텅 비어 있었다.

이럴 때를 대비해 제이에게서 틈틈이 블랙스미스 스킬을 배워왔다. 하지만 정말 이런 날이 오니 실감이 나질 않았다.

가지런히 정비된 도구들과, 앞으로도 몇십 년은 더 쓸 수 있을 법한 재환 전용 예비 장비들.

재환은 제이가 즐겨 두드리던 망치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공방에 있던 마지막 동료가 떠났다.

이제 정말 혼자다.

재환은 제이의 망치를 집어 들었다.

*

탑의 100층.

비스트레인은 홀로그램 패널을 통해 망치를 두들기는 재환을 보며, 손톱을 잘근잘근 씹는 중이었다.

이런 곤란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위대한 땅"에 무사히 적응할 수 있도록 상품을 훈련시키는 재배(栽培)의 과정.

비스트레인은 그 과정을 관리 및 담당하는 「재배자」였다.

...참아야 해. 저놈은 팔아야 될 내 「상품」이야. 그것도 아주 특상품.

다른 월드에도 몇 번이고 "악몽의 탑"을 설치한 적이 있었지만, 지금과 같은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도대체 왜 본 게임을 안 하겠다는 거지? 지가 갖고 싶은 거 다 주겠다는데.

고작 워커 하나 때문에 재배 과정 전체에 차질을 겪게 생겼다. 비스트레인은 끙, 하는 소리를 내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상품의 재배는 크게 두 과정으로 나뉜다.

'튜토리얼 게임'을 통해 좋은 상품들을 가려내는 「1차 재배」.

그리고 심혈을 기울여 골라낸 상품들을 '본 게임'을 통해 본격적으로 성장시키는 「2차 재배」.

'튜토리얼 게임'인 「1차 재배」는 식물로 치자면 좋은 씨앗을 엄선하는 과정이었고, '본 게임'인 「2차 재배」는 엄선된 씨앗을 물과 비료를 주어 키우는 과정이었다.

비스트레인은 지금 재환 하나 때문에 벌써 넉 달째 2차 재배를 시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홀로그램 패널에서는 그의 신경을 긁어대는 똑같은 박자의 소음이 계속해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까앙- 까앙-

망치로 칼을 두들기는 소리였다. 마치 누구보고 들으라는 것처럼, 소리는 점점 더 커져갔다.

덕분에 비스트레인은 하루에도 몇 번씩 재환을 쳐 죽여 버리고 게임을 강제로 끝내고 싶은 욕심에 사로잡혔다.

그냥 눈 딱 감고 해치울까? 하지만 여기서 죽여 버리면 수확자들이 싫어할 텐데.

"악몽의 탑"은 소위 「제작자」라 불리는 '몽마'들이 꿈의 덩어리를 빚어 만들어 낸 것으로, 위대한 땅의 중심에 위치한 거대 나무 환상수(幻想樹)의 줄기로부터 공급받은 에너지로 구동하게끔 되어 있었다.

쉽게 말해, 이 탑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모두 "환상수"가 제공하는 꿈이다.

즉, 탑 안이 꿈의 세계인만큼 특수한 방법을 동원하지 않는 한 이곳에서 죽는다고 해서 '정말로' 영혼이 소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모르는 일이었다.

악마로서 세 번의 탈피(脫皮)를 거치면서 무력으로 치면 무려 '3차 적응자'에 준하는 힘을 얻은 비스트레인과, 아직 '1차 적응'은커녕 이제 막 튜토리얼을 통과한 재환 사이에는 엄청난 영격(靈格)의 차이가 있었다.

잘못 죽였다가는 상품이 영혼에 엄청난 손상을 입어 반병신이 된 채 본 게임에 출전하는 수가 있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의 고객들인 「수확자」, 즉 "위대한 땅"의 군주들이 진노할 것이었다.

재환을 점찍어둔 군주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혹여나 상품의 경매가가 높아질까 미리 옵션거래를 제의하는 이들이 있을 정도였으니.

혼자의 힘으로 99층을 클리어한 워커.

물질계 전체를 뒤져 보아도 전무후무한 업적이었다.

특히나 이 '탑'이 어떤 탑인지를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몽마 녀석들한테 속아서 이런 쓰레기 탑을 사 와 가지고. 제어장치가 뭐 이 따위야?"

비스트레인이 운용하는 "악몽의 탑"은 몽마들이 만든 탑 중에서도 1세대에 속하는 것이었다.

"상품의 동의 없이는 게임을 종료할 수 없다니,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시스템이로군."

근래에 나온 3세대 탑으로 게임을 열었다면 이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3세대의 탑들은 상품의 손상 없이 튜토리얼 게임을 강제로 종료하는 것이 가능하니까.

그렇지만 이제 와 뭘 어쩌겠는가.

가난이 죄다.

어떻게든 저렴한 가격에 쓸 탑을 알아보다가 마지막으로 찾은 물건이 이것이었다.

무려 「거장」급의 몽마가 직접 만든 탑이라기에 홀랑 속아서 사 왔다.

그런데 뜯어보니 연식을 짐작할 수도 없는 골동품인데다, 거장급 몽마가 만든 것은 맞지만 정작 그 몽마가 거장의 호칭을 얻기 전에 시험작으로 만든 작품이었다. 일단 정상적으로 작동은 하니까 쓰고는 있지만, 여러모로 자잘한 문제들이 많았다.

"...이번 일이 끝나면 반드시 따져 물어야지."

비스트레인은 자신에게 탑을 판매한 거래소를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

그리고 다시 한 달이 지났다.

"이보세요, 지치지도 않습니까?"

비스트레인은 하품을 하며 재환의 공격을 가볍게 받아 넘겼다. 재환의 찌르기가 비스트레인의 본체를 노리고 곳곳에서 날아들었지만, 공격은 사자머리의 털 끝 하나도 건드리지 못했다.

"순순히 본 게임을 시작해 주면 당신도 좋고 나도 좋습니다. 당신네 월드 속담으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인데, 대체 왜 안 하겠다는 거죠?"

재환은 대답하지 않는다.

"빙룡을 잡은 경험 때문에 큰 착각을 하는 모양인데, 정말 소용없다니까요. 걘 열화판 괴수고, 난 진짜 악마거든요? 당신이 나랑 정 싸우고 싶다면 본 게임을 마치고 "위대한 땅"에 가서 적어도 수십 년은 더 굴러야 돼요."

재환은 말없이 검을 내질렀다.

"아 대답 좀 해 봐요, 제발. 뭘 원하는 거예요? 히든 아이템도 주고 히든 스킬도 주겠다잖아요!"

비스트레인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어째서 이런 무의미한 깽판을 치는가?

그러나 재환의 알 수 없는 행동들은 그저 무의미한 깽판이 아니었다.

지난 석 달 동안, 재환은 결코 놀고 있지 않았다.

재환이 아직까지도 튜토리얼 게임을 포기하지 않고 있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Episode 1. 백억 번의 찌르기 (5)

첫 번째로, 비스트레인의 생각과는 다르게 재환의 영혼은 변화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

[사용자 정보]

이름 : 재환

레벨 : 100 (한계치에 도달했습니다!)

타이틀 : (EX) 99층의 악몽

클래스 : 검사

고유 능력 : (EX) 근성

[스테이터스 정보]

힘 : 100 (한계치에 도달했습니다!)

민첩 : 100 (한계치에 도달했습니다!)

체력 : 100 (한계치에 도달했습니다!)

의지 : 100 (한계치에 도달했습니다!)

마력 : 100 (한계치에 도달했습니다!)

+

인터페이스 시스템을 통해 호출한 사용자 정보.

재환은 지난 세월 동안 사용자 정보에 표시되는 모든 수치의 극한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렇게 삼십 년. 결국 모든 수치는 정점을 찍었다. 숫자들은 그가 노력해 온 역사 그 자체였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 재환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삶이라는 게, 정말 이런 수치들로 정의될 수 있는 것일까.'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재환의 눈에 이상한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환각인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어느 순간, 재환은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이 이 세계의 본질을 이루는 무엇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들은 고운 입자이기도 했다가, 울퉁불퉁한 각설탕들 같기도 했다가, 패널의 화소 같기도 했다가 하며 매번 다른 형태와 구조를 취했다.

찌르기의 움직임이 불안해진 것도 그때부터였다.

재환은 기본 스킬 '찌르기'를 사용할 때마다 묘한 위화감 같은 것을 느꼈다. 하나의 동작으로 굳어져 완성되어 있던 찌르기가 재환의 안에서 풀어져 나가고 있었다.

재환은 찌르기를 반복할 때마다 자신이 잊고 있던 어떤 '감각'이 깨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살아 있다'는 감각이었다.

재환은 이 능력을 편의상 「의심」이라 이름 붙였다.

세계를 해체하고 본질을 파고드는 시선.

그것이 「의심」의 힘이었다.

그러나 재환은 아직 이 「의심」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잘 알지 못하고 있었다.

스팟- 터업!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재환의 진룡검이 비스트레인의 손아귀에 너무도 쉽게 무력화된다.

비스트레인이 짜증난 목소리로 말했다.

"이봐요, 재환 씨. 대답 좀 해보시죠."

여전히 재환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 이거 미치겠네, 진짜."

비스트레인이 씩씩거리며 성을 냈다.

"과거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고 하잖아요. 그냥 튜토리얼을 끝내고 본 게임을 시작하는 것뿐이라고요!"

재환이 튜토리얼을 끝내지 않는 두 번째 이유.

그것은 바로 눈앞에 있는 악마, 비스트레인이었다.

어느 순간, 재환은 비스트레인이 자신을 결코 죽일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녀석은 재환을 강제할 수 없는 어떤 상황에 처해 있었다.

재환의 허락을 구하지 않고 게임을 종료한다거나, 이 자리에서 바로 재환을 죽이지 않는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탑을 열었다면 얼마든지 닫을 수도 있을 텐데, 비스트레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하지 못하는 어떤 이유가 분명히 있었다.

그러니 재환에게 있어 비스트레인은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는 좋은 선생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비스트레인에게 끊임없이 도전함으로써, 그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더욱 빠르게 적응해나갈 수 있었다.

그렇게 재환이 점차 여유를 찾아갈수록, 애가 타는 것은 비스트레인 쪽이었다.

미치겠네. 조금 있으면 납기일도 다가오는데······.

그러면 뭘 하는가.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재환을 보채는 일뿐인 것을.

"이보세요, 재환 씨! 대답 좀 해 보세요. 예?"

"무슨 말을 하라는 거지?"

비스트레인에게 붙잡힌 칼을 힘 주어 빼낸 재환이 물었다.

"하, 드디어 말을 하시네. 한 달째 아무 말씀도 안 하셔서 정신에 이상이 생긴 줄 알았잖아요. 소중한 상품에 흠결이라도······ 아니아니, 이게 아니라."

비스트레인이 말을 더듬었다.

"좋아요. 당신이 원하는 걸 말해 봐요. 뭐든 들어줄 테니까. 날 쓰러뜨리고 다음 층으로 가겠다는 둥 헛소리는 집어치우시고요."

그 말을 들은 재환이 처음으로 휘두르던 검을 멈추었다.

걸렸군.

자신에게 칼자루가 넘어왔다는 사실을 안 이후부터, 재환은 줄곧 오늘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지난 한 달은 그 칼날을 더욱 날카롭게 벼리기 위한 기간이었다. 재환은 기다렸다. 놈이 자신의 불안감을 견디지 못해서 스스로 미끼를 물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럼 뭘 좀 물어보고 싶은데."

"엇, 무엇이죠?"

비스트레인의 얼굴이 화색을 띄었다.

"드디어 협상의 여지가 생긴 건가요?"

"그건 네가 하는 걸 봐서."

비스트레인의 표정이 엉망으로 구겨졌다.

*

한참이나 고민하던 비스트레인은, 결국 한숨을 푹푹 쉬더니 다음과 같은 서두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놀라지 마십시오, 재환 씨. 당신들의 우주는 사실 하나의 차원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알고 있다."

"······어, 알고 계셨습니까? 그럴 리가?"

재환이 인상을 찌푸렸다.

"날 바보로 아는 거냐?"

물론 재환도 우주에 관해 잘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과학 지식은 함께 탑을 올랐던 과학교사 사카모토에게 들은 것뿐이었다.

그때 그는 여러 종류의 물리학 이론을 들었다.

평행 우주론, 다중 우주론, 초끈 이론······.

물론 과학에 전혀 문외한인 재환으로서는 그냥 그런 것이 있구나, 할 정도일 뿐이었다. 고도로 발달된 우주론은 인문학도인 재환에게 있어 마법과 거의 분간되지 않는 어떤 것에 가까웠으니까.

"그러니까 네 녀석 말을 종합하면, 이 우주의 차원은 "위대한 땅"과 무수한 "변경"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거지?"

"그렇습니다."

비스트레인의 말에 따르면 우주는 "위대한 땅"이라 불리는 하나의 주류 차원과 그 아래로 가지처럼 뻗어 나간 무수한 변경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지구는 그 무수한 변경에 흩어진 차원계의 작은 행성 중 하나였다. 비스트레인은 이 지구의 이름을 '294월드'라고 칭했다.

한참 설명을 듣던 재환이 비스트레인의 말을 일축했다.

"이 "악몽의 탑"은 각 월드의 워커들이 "위대한 땅"으로 넘어가기 위한 일종의 적응 과정이었군."

"그렇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튜토리얼과 본 게임을 모두 통과한 워커들만이, "위대한 땅"의 대지를 밟을 수 있다는 거고."

"그렇습니다. 역시 이해가 빠르시군요."

비스트레인은 일부러 '재배'라든가 '수확'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런 이야기를 들은 상품이 어떤 상태가 되고 마는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재환이 계속해서 물었다.

"너희가 말하는 「적응」이라는 게 대체 뭐지? 강해지는 걸 말하는 거냐?"

비스트레인이 고개를 저었다.

"위대한 땅의 "인터페이스 시스템"에 익숙해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혹시 스킬이나 아이템을 얻고, 스테이터스를 찍는 일 말이냐?"

"쉽게 말하면 그렇습니다."

비스트레인이 미소를 지었다.

"곧바로 "위대한 땅"으로 나아간 종족들은 대부분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해 곧잘 죽어나가고 맙니다. 그걸 방지하기 위해 이 "악몽의 탑"이라는 것이 생겨난 것이지요. 탑에 내장된 '튜토리얼 게임'과 '본 게임'을 미리 치러 봄으로써, "위대한 땅"의 시스템을 습득하고 또 생존율을 높이는 것입니다. 저와 같은 악마들은 그러한 게임을 돕는 보조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비스트레인은 자신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는 재환의 모습을 보며 조마조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감탄하고 있었다. 이런 이야기들을 들으며 이렇게나 침착한 상품은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지금껏 그가 재배해 온 상품들은 세계의 비밀을 알게 되는 순간 현실을 부정하거나 정신이 분열되어 미쳐 날뛰게 마련이었다.

그런데 눈앞의 재환은 굉장히 태연하게 그의 이야기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마치 이 게임을 위해 태어난 존재이기라도 한 것처럼.

비스트레인은 그 사실이 무척 만족스러웠다.

"뭐 하나만 물어보지."

"그러십시오."

"너는 왜 '이런 짓'을 하는 거냐?"

재환의 질문에 비스트레인이 쓰게 웃었다. 사실 이 문답이 시작될 때부터, 비스트레인은 이 질문이 나올 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스트레인은 수백 년에 걸친 세월 동안 많은 상품들을 재배해 왔다. 개중 어떤 이는 "위대한 땅"의 강자가 되었고, 어떤 이는 죽어서 영혼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그런데 그 모든 상품들은 하나같이 그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

―당신은 왜 '이런 짓'을 하는가.

비스트레인이 의뭉스레 고개를 까딱였다.

"질문의 의도를 모르겠군요. 당신은 제가 왜 "악몽의 탑"을 운영하고 있는지가 궁금한 것입니까?"

"그래."

"글쎄요. 저는 당신이 정말 궁금한 건 그게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비스트레인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궁금한 것은 '제가 왜 악몽의 탑을 운영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왜 제가 그 무수한 변경들 중 하필 당신의 월드에 악몽의 탑을 소환했는가'가 아닙니까?"

Episode 1. 백억 번의 찌르기 (6)

재환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는 재환을 보며 비스트레인은 즐거워졌다. 이제 곧 그가 제일 좋아하는 순간이 찾아올 것이었기 때문에.

"사실 이유는 없습니다. 당신의 월드가 선택된 것은 그저 우연이에요."

그저 우연히 태어난 커다란 비극.

대부분의 상품들은 그걸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들은 어째서 자신의 종족이 그런 운명에 처해야 하는지 궁금해 했고, 그 원인을 찾으려 했다.

죄, 운명, 신.

무엇이든 결부시켜 가며 이 비극의 원인을 찾으려 들었다. 그러나 이유는 없었다.

모든 것은 그저 우연이었으니까.

"······우연?"

"그렇습니다. 그저 우연히 당신의 월드가 발견되었고, 악몽의 탑이 소환되었고, 게임이 시작되었을 뿐입니다. 거기에 원인이나 이유 같은 건 없어요. 그저 그렇게 흘러가도록 되어 있었던 것뿐입니다. 마치 당신이나 내가 왜 이 세계에 태어났는지를 알 수 없는 것처럼 말이지요."

비스트레인은 계속해서 말했다.

"어쩌면 당신은 운이 없다고 생각하고 계시겠죠. 왜 평화로운 당신의 세계에 하필 저와 같은 악마가 나타나서, 악몽의 탑 따위를 세우고 당신의 종족을 비참하게 죽어가게 만들었는지, 몹시 원망스럽겠죠."

재환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딱히 제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해서 당신들이 영원히 살 수 있었던 건 아니지 않습니까? 어차피 당신들은 죽었을 거예요. 규모는 다르겠지만 마찬가지로 우발적인 사고나 자연재해가 일어났을 수도 있습니다. 운 좋게 그것들을 모두 피해갔더라도 어쩔 수 없는 노화로 인해 결국은 죽어갔겠지요. 우주의 모든 존재, 모든 종족들은 죽게 됩니다. 자신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자연스럽게 말이죠."

비스트레인은 고조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이 부분이 클라이맥스였다.

그는 이제 피할 수 없는 진실과 직면한 상품의 표정을 보게 될 것이었다. 죽음과 같은 우연에 절망하고, 끝내는 그 절망을 납득하고야 마는 상품의 얼굴을 보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비스트레인이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당신들은 오히려 운이 좋은 편인 겁니다. 이 우연으로 인해 당신은 새로운 세계로 도약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무가치한 죽음을 가치 있게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아무것도 모르는 변경의 미개한 존재로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땅으로 진출하여 놀라운 업적에 도전함으로써 당신의 이름을······"

"충분히 알겠으니까, 따분한 얘기는 이제 그만하지."

"······예?"

비스트레인은 잠시 자신의 귀를 의심해야 했다.

"내가 궁금한 건 그딴 게 아냐."

"그럼 대체······."

"말귀를 잘 못 알아듣는 모양인데, 다시 말해 주마."

"그, 그러십시오."

어느새 대화의 주도권이 넘어가고 있었다.

"내가 궁금한 건 네가 우리 월드를 선택한 게 우연이니 어쩌니하는 형이상학적인 얘기가 아니라, '어째서 네가 악몽의 탑 같은 것을 운영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일을 하면 네겐 무슨 보상이 있는 거지?"

"그, 그건······."

비스트레인은 당황했다. 대체 어찌 되먹은 상품인가 싶었다. 자신의 달변을 듣고도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대화의 허를 정확히 꿰뚫는 질문을 잘도 던지고 있었으니까.

"······그, 그냥 일종의 자원 봉사 같은 겁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니까 제가 하고 있는 것이지요. 하하."

그 어색한 웃음에 재환이 눈을 좁혔다.

자원 봉사라.

재환은 비스트레인의 머리 위를 먼지처럼 떠도는 입자들을 보며 생각했다.

「의심」의 능력이 보다 강화되면서 재환은 입자들의 종류를 세심하게 분별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떤 입자는 가만히 제자리를 지키지만, 어떤 입자는 활발하게 돌아다닌다.

그중에서도 비스트레인의 주변을 맴도는 입자들은 특히 재환의 눈에 띄었다.

입자들은 비스트레인을 톡톡 건드리며 특정한 배열들을 취했다가, 일정한 배열을 구축하게 되면 탑 바깥을 향해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재환의 눈에, 그 입자들의 배열은 일종의 문자열처럼 보였다.

마치, 비스트레인이 먼 곳의 누군가와 대화라도 나누고 있는 것처럼.

'군주··· ······가 당신에게 메시지···보내······'

'상품 ······재배······ 수확······ 아직 ······'

'······절대로 놈을 죽여서는······'

'···한······땅······ 당신······게 ········· 대화······'

'······더 이상 지체할 수는······ 하지만 ······'

재환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가. 다시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지."

"알겠습니다."

비스트레인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일전에 네가 '군주'라는 녀석들을 언급한 적이 있지."

"그렇습니다."

아직 본 게임도 마치지 않은 상품과 이렇게 긴 대화를 나누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비스트레인은 혹시나 자신이 재배니 수확이니 상품이니 하는 말을 지껄이게 될까 봐 조마조마했다.

"그 녀석들은 대체 뭐지? 왕인가?"

"비슷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군주들은 "위대한 땅"의 지배자들입니다. 본 게임을 클리어하고 "위대한 땅"으로 진입한 자들은 보통 군주들에게 스카우트를 받게 됩니다."

"······스카우트?"

재환이 관심을 보이는 듯하자, 비스트레인이 눈을 번뜩였다. "위대한 땅"의 군주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상품은 이제껏 없었다. 어떤 군주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미래가 달라지게 되니까.

비스트레인이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물론 모든 존재들이 스카우트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강자들에 한해서지요. 하지만 제 탑을 클리어한 당신이라면, 틀림없이 강한 군주의 휘하에 들어가게 될 겁니다."

상품에게 자부심을 불어넣는 것.

그것이 첫 번째 단계다.

그런데 재환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비스트레인은 초조한 심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만약 제 말에 따라 주신다면, 저 비스트레인은 악마의 명예를 걸고 반드시 당신의 미래를 보장해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재환 씨가 훌륭한 군주의 휘하에 들어갈 수 있게끔 온 힘을 다해 도울 것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재환 씨가 본 게임에 순순히 참가해 주실 때의 이야기지만요."

보험 외판원 같은 소리를 하고 있군.

재환이 입꼬리를 무심하게 꿈틀거렸다.

"네가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떻게 보증하지?"

뭔가 입질이 왔다고 생각했는지, 비스트레인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뭐, 믿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이렇게까지 알려드렸는데도 제 말을 믿지 않으신다면 저로서도 어쩔 방법이 없지요."

"알겠다. 네 말대로 하지."

"드디어 결심이 서셨습니까?"

"정확히 열흘 뒤다. 그때 이곳을 나가겠다."

Episode 1. 백억 번의 찌르기 (7)

그로부터 9일 뒤.

악마 비스트레인은 100층의 바닥에 드러누워 홀로그램 패널을 보며 차마 듣지 못할 욕설을 내뱉는 중이었다. 홀로그램 패널에는, 말할 것도 없이 재환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하하, 씨발······."

홀로그램 속의 재환은 여전히 망치질 중이었다.

대앵- 대앵-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저 악마 같은 새끼."

비스트레인의 옆에는 재환이 추가로 요청한 "위대한 땅"의 정보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물론 재배나 재배 과정, 상품이나 수확자 등에 관한 언급들은 쏙 빠져 있는, 어떤 의미에서는 반쪽짜리 정보였다.

부디 저 눈치 빠른 놈이 아무것도 몰라야 할 텐데.

악마 비스트레인.

악마 랭킹 8,152위의 중급 악마이자, 「농락의 신사」라는 별명을 가진 존재.

그런 고상한 별명의 악마가, 하찮은 인간 하나에게 이런 수모를 겪고 있었다. 동료 악마들이 봤다면 수백 년은 놀림감이 될 일이었다.

수확자 측에서 온 메시지만 아니었더라도 일이 이렇게까지 꼬이지는 않았으리라.

[절대 상품을 죽이지 말고 본 게임에 투입시키시오. 극악의 난이도인 1세대의 탑을 혼자서 클리어한 것은 위대한 땅 내에서도 희귀한 업적이니, 제대로 재배만 해낸다면 특등급의 상품이 될 게 틀림없소. 하지만 당신의 관리 소홀로 인해 상품의 영체에 약간의 흠집이라도 생긴다면, 이번에는 물론이고 앞으로도 당신과는 절대로 거래하지 않겠소.]

조금만 참으면 된다. 이제 거의 다 왔으니까.

비스트레인은 홀로그램 패널을 조정해, 탑 내의 화면이 아닌 다른 화면을 호출했다.

[통신 네트워크 '리틀 브라더'를 가동합니다.]

비스트레인은 히죽 웃으며 중얼거렸다.

"어디 보자, 이번엔 어떤 영상을 보여줄까? 그렇지, 녀석이 빙룡을 죽였던 마지막 영상이 좋겠군."

294월드에 설치된 "악몽의 탑"은 악마 비스트레인의 입장에서도 커다란 도박이었다. 그리고 그 도박은 이제 대박의 예감을 풀풀 풍기고 있다. 이번 건만 어떻게 잘 성공하면 그도 네 번째 탈피를 마치고 더 강력한 악마로 발돋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좀 더 뻗대다 보면 어느새 「빅브라더(Big brother)」의 눈에도 들어서 공직 재배자로 채용되어 평생 먹고 살 걱정 없이 호사스런 생활을 누릴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비스트레인은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지금도 「빅 브라더」 산하의 통신 네트워크인 '리틀 브라더(Little brother)'를 통해서 그에게 수많은 메시지들이 날아들고 있었기에.

[파멸의 군주 '지크프리트'가 당신이 올린 영상을 좋아합니다.]

[황금의 군주 '아이닉스'가 당신이 올린 영상을 좋아합니다.]

[불사의 군주 '아브락사스'가 당신에게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숲의 군주 '일리오네스'가 당신에게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

"와하핫! 군주 자식들, 좋아 죽는구만!"

물론 군주들이 직접 '좋아요'를 누르거나, 메시지를 보낸 것은 아니었다.

무릇 군주란 그리 가벼운 존재가 아니니까.

분명 군주들의 이름을 대행하는 수하들이 대신 메시지를 보낸 것이리라.

하지만 그게 어디인가.

그들의 메시지는 곧 군주들의 의지나 다름없었다.

말인즉, 위대한 땅의 모든 군주들이 그의 재배를 주목하고 있다는 뜻이다.

악마의 일생에서 한 번 올까 말까 한 천운.

294월드인 지구를 발견했을 때, 비스트레인은 자신이 그 천운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294월드는 그의 재배를 위협할 수 있는 모든 위험으로부터 안전했다. 같은 재배자인 천사들의 입김이 닿지 않는 곳이었으며, 무엇보다 「빅 브라더」와 통신이 가능한 곳이어서 정식 허가를 받아 작업을 시작하는데 아무런 문제도 없는, 금싸라기 같은 장소.

그는 곧장 「빅 브라더」에게 재배 허가를 받은 후, 탑의 제작자인 몽마들에게 찾아갔다.

"생각할수록 열 받네. 빌어먹을 몽마 놈들."

평소라면 그렇게까지 몽마들에게 아부를 떨지는 않았을 것이다.

보통의 「재배」라면 몽마들이 대여하는 탑을 빌려서 사용하고 가져다주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중급 악마까지야 근검절약하며 살아왔지만, 이제 그도 슬슬 상급 악마가 될 준비를 시작해야 했다.

「전문 재배자」라 불리는 상급 악마가 되어서까지 매번 탑을 빌리러 다녀서야 자존심이 살지 않는 것이다.

자신만의 탑을 가지는 것.

그것은 모든 악마들의 로망이었다.

가성비가 좋은 탑을 구입하기 위해 그는 몽마 연놈들의 온갖 시답잖은 부탁들을 들어주었고, 과분한 대가를 지불했다.

그런 노고를 마다하고 간신히 얻어낸 탑.

그것이 바로, 거장 급 제작자인 몽마 뮬라크의 '2호 탑'이었다.

비록 몽마 뮬라크가 아직 거장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을 때 만든 탑이고, 연식이 불분명할 정도로 오래된 탑이기는 했지만, 제어장치가 구식이라는 것만 빼면 성능도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거장의 탑에서 재배한 상품이라면 군주들도 흔쾌히 만족할 것이었다.

그런데 그의 행운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294월드의 인류는 그의 생각보다도 훨씬 더 뛰어난 상품들이었다.

그들은 마치 오래전부터 이런 종류의 게임을 준비해 오기라도 한 것처럼 엄청난 적응도를 보여주었다. '적응도'는 "위대한 땅"의 진정한 강자인 「적응자」의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핵심이 되는 재능이었다.

비스트레인은 지금껏 '인류'의 계통수에 속하는 여러 상품들을 본 적이 있었지만, 이처럼 빠르게 게임에 적응하는 인간들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행운은 정확히 인류가 77층에 오르기 전까지만 계속되었다.

그로서는 도저히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 77층에서 벌어졌다. 상품의 대부분이 77층의 함정에 빠져 대거 탈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비스트레인은 경악했다.

'아니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비스트레인은 거의 절망적인 심정이 되었다.

'회귀의 돌이라니? 그런 등신 같은 아이템은 탑의 매뉴얼에도 없었다고!'

재환의 앞에서야 마치 '회귀의 돌'이 모두 의도된 계획의 일부였던 것처럼 말했지만, 사실 '회귀의 돌'은 그가 의도한 탑의 구성품이 아니었다.

거장 중에서도 괴짜인 몽마 뮬라크가 만든 탑이라서 걱정은 했지만, 설마 그딴 기괴한 콘텐츠가 포함되어 있는 탑일 줄이야.

당장이라도 탑의 제어권을 사용해 아이템을 없애 버리고 싶었지만, 만일 계약 중인 수확자가 재배 기록을 열람해 상품들이 좋은 성과를 내도록 조작을 가했다는 사실을 알아채기라도 한다면, 재배자로서 그의 신망은 바닥에 떨어지고 말 것이었다.

'과거 회귀'라는 유혹 앞에서 자신이 살아가는 '현재'를 쉽게 배반하는 종족.

"위대한 땅"의 군주들은 그런 겁쟁이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전쟁의 피바람 속에서 살아가는 "위대한 땅"의 존재들에게는 과거도 미래도 없다.

그들의 신(神)은 오직 현재뿐이다.

하나둘씩 과거 회귀를 선택하는 인간들을 보며, 비스트레인은 생각했다.

그의 인생, 아니 마생(魔生)은 이제 끝났다고.

탑을 구입할 때 진 빚을 갚을 길이 없어졌다. 당분간 재배 따위는 버려두고 어디서 휴면이라도 해야 하나 싶었다.

아직 남아 있는 상품들이 있긴 했지만, 탑을 클리어 하기에는 지나치게 적은 숫자였다.

절망한 비스트레인은 홧김에 탑의 시간 배율을 최대치로 설정해 놓은 후, 탑의 제어 층을 비워 놓은 채로 영혼주(靈魂酒)를 마구 퍼마시고 다녔다.

처음에는 하루 이틀 정도만 비울 생각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몇 주를 내리 자 버리고 말았다.

"위대한 땅"에서는 몇 주 남짓한 시간이었지만, 탑 안에서는 수십 년에 달하는 시간. 탑 안에는 이제 살아있는 상품이 아무도 없을 것이 자명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아직 재배가 끝나지 않고 있었다.

비스트레인은 숙취에 찌든 몸으로 홀로그램 패널에 저장된 영상들을 빠르게 돌려 보았다.

하루··· 이틀··· 일주일··· 1년··· 10년··· 30년.

그리고 살아남은 한 인간.

비스트레인은 경악했다.

평균적인 상품들은 악몽의 탑에서 10년을 채 버티지 못한다. 정신이 붕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눈앞의 상품은 무려 30년을 탑에서 버텼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이 탑의 99층을 클리어하기 직전까지 와 있었다. 영혼도 아주 깨끗하다.

비스트레인은 전율 속에서 깨달았다.

됐어! 됐다! 이놈이야! 이놈이라고!

극악의 난이도인 1세대 탑의 마지막 층을 혼자 힘으로 클리어하는 일.

물질계 전체를 뒤져 봐도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비스트레인이 상품의 개차반 같은 행동을 모두 묵인해주고 있는 것도 모두 그 때문이었다.

얼마에 팔릴지 짐작도 가지 않는 귀한 상품이다.

혹여나 흠집이라도 나면 곤란한 일이 아닌가.

[불꽃의 신 '이그니스'가 당신에게 일대일 대화를 신청하셨습니다. 승낙하시겠습니까?]

"응? 이그니스?"

비스트레인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맙소사, 설마 신들까지?"

군주들이 자신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 상품들을 요구 하듯, 신들 또한 자신의 화신(化身), 즉 대행자들을 엄선하기 위해 상품들을 필요로 한다.

다만 신들은 자신들을 위한 상품을 키울 재배자― 물질계에서는 「천사」라고 불리는 이들과 이미 협정 교류를 맺고 있었다.

군주들은 「악마」와, 그리고 신들은 「천사」와 거래하는 것.

그것이 이 업계의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그런데 그 규칙이 지금 깨진 것이다.

['이그니스' 님과의 대화를 승낙합니다.]

[불꽃의 신 '이그니스'가 왜 이렇게 승낙이 늦냐고 타박합니다.]

"어떤 대행자시기에 이렇게 무례하십니까?"

비스트레인은 기분이 상했다. 아무리 신의 아이디를 빌린 대행자라고 해도, 기본적인 상도덕이라는 것이 있다.

[불꽃의 신 '이그니스'가 나라고 말합니다.]

"아니. 그러니까 누구시길래."

[불꽃의 신 '이그니스'가 아이디 보면 모르냐고 짜증을 냅니다.]

아니 잠깐, 설마.

"혹시 이그니스 본인이십니까?"

[불꽃의 신 '이그니스'가 불편함을 드러냅니다.]

[불꽃의 신 '이그니스'가 지금 자신을 무시하는 것인지 묻습니다.]

"아, 아닙니다. 제가 어찌 감히!"

[불꽃의 신 '이그니스'가 네가 올린 영상을 봤다고 말합니다.]

"보셨습니까!"

[불꽃의 신 '이그니스'가 솔직히 말하라고 충고합니다.]

"예. 당연하죠. 솔직은 악마의 덕목인데요."

[불꽃의 신 '이그니스'가 왜 탑을 조작한 거냐고 묻습니다.]

"조작이요?"

[불꽃의 신 '이그니스'가 인간이 혼자서 1세대 탑을 깰 리가 없다고 확신합니다.]

"조작 아닌데요."

[불꽃의 신 '이그니스'가 어디가 얘기 안 할 테니 솔직히 말하라고 협박합니다.]

"아니라니까요?"

[불꽃의 신 '이그니스'가 그래서 얼마에 팔 거냐고 묻습니다.]

"안 팔 건데요."

[불꽃의 신 '이그니스'가 ■발 얼마에 팔 건데, 얼마에 팔 거냐고, 얼마면 되는―]

[대화를 종료합니다.]

[불꽃의 신 '이그니스' 님이 당신에게 메시지를 발송하였습니다.]

[불꽃의 신 '이그니스' 님이 당신에게 메시지를 발송하였습니다.]

[불꽃의 신 '이그니스' 님이 당신에게 메시지를 발송하였습니다.]

....

[통신 네트워크 "리틀 브라더"를 종료합니다.]

비스트레인은 심장이 벌렁벌렁했다.

'엿됐다. 설마 신들까지 녀석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을 줄이야. 그것도 이그니스 같은······.'

이그니스라면 신들 가운데에서도 상위권에 들어가는 신. 그만큼 이번 상품의 가치가 높다는 이야기였다.

특상품? 아니, 특특상품이다.

가슴이 조금 진정되자 비스트레인은 벌써 4차 탈피를 마친 상급 악마라도 된 양, 다시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내일이 약속한 날이었다.

*

다음 날, 탑의 100층.

재환은 비스트레인이 제공해준 정보들을 꼼꼼하게 점검하고 암기했다. 비스트레인이 물었다.

"끝나셨습니까?"

"그래. 고맙군."

비스트레인은 거의 환호성을 지를 뻔했다.

드디어.

비스트레인은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가다듬으며 말했다.

"후후, 다 외우셨으면 이제 시작하시겠습니까?"

"그러지."

비스트레인이 허공에 뭔가를 입력했다. 그러자, 이전에도 봤던 익숙한 창이 떠올랐다.

[게임마스터가 튜토리얼 퀘스트를 종료하려고 합니다. 당신은 당신의 고향인 294월드로 귀환할 수 있으며, 어떤 기억도 잃지 않은 채로 본 게임에 참가할 수 있습니다. 제안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그리고 재환은 진룡검을 뽑았다.

"······무슨 짓이죠?"

"보면 알 텐데."

―제안을 거절하였습니다.

"나는 지금부터 너를 사냥할 거다."

Episode 1. 백억 번의 찌르기 (8)

비스트레인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더니, 이마를 짚었다.

"하아··· 뭔가 이럴지도 모른다고 예상은 했지만. 당신 같은 존재는 정말 처음 봅니다."

"여기까지 오면서도 비슷한 얘길 많이 들었지."

양손에 쥔 진룡검과 빙룡검에 날카로운 기운이 깃들었다. 재환의 강맹한 영력이 칼끝에 모여들고 있었다.

"그리고 이게 내 답이다."

비스트레인이 포기했다는 듯 양손을 들었다.

"아이고, 맘대로 하십쇼, 맘대로."

재환의 검이 비스트레인을 향해 쇄도했다.

다음 순간.

아래쪽에서 기묘한 원형의 마법진이 빛나더니, 뭔가가 순식간에 자라나 재환의 몸을 칭칭 감아 구속했다. 탑의 91층에서 번식하는 식물, 블랙 아이언 우드였다.

"진즉에 이렇게 해 버렸으면 서로 편했을 텐데. 안 그렇습니까?"

"······뭘 어쩔 셈이지? 어차피 내 승낙이 없으면 이 게임은 끝낼 수 없을 텐데?"

"뭐, 다 방법이 있지 않겠습니까?"

"날 고문할 셈이로군."

"······하하."

"여기까지 올라오면서 지옥이란 지옥은 다 보았다. 내가 고문 같은 것에 당할 것 같냐?"

"후후, 그래요. 물론 그렇겠죠."

비스트레인이 능글맞게 웃었다.

"사실 저는 당신에게 승낙 받는 것 따위는 오래전에 포기했습니다."

"뭐?"

"이번에는 제가 당신에게 한번 물어보죠. 당신, 어째서 이 튜토리얼 게임이 무한정 계속될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설마······."

"후후, 바로 그 설마입니다.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게임이 종료된 경우는 없었습니다만, 이 "악몽의 탑"은 튜토리얼이 끝난 후 100일이 지나면 자동으로 게임이 종료되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 빌어먹을 인간 때문에 납품 보고가 많이 지체되기는 했지만.

비스트레인은 속으로만 생각했다.

"제가 굳이 열흘을 더 기다려 준 건, 가능한 안전하고 자연스러운 형태로 게임을 종료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신이 혹시 모를 쓸데없는 짓을 벌이지 않도록 만들기 위해서 말이죠. 그러니 재환 씨는 거기 붙잡혀 계시다가, 얌전히 본 게임에 참가하시면 됩니다."

비스트레인의 말은 거짓말이 아닌 듯했다.

실제로 아까부터 탑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작은 진동 같은 것이 탑의 곳곳에서 느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 게임이 끝나려는 징조이리라.

비스트레인은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재환을 보며 묘한 승리감을 느꼈다. 비록 계획이 어그러지기는 했지만, 이 인간도 더 이상 발작하지 않고 조용히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런데 그때.

"악마 비스트레인."

"예?"

""위대한 땅"에서는 '농락의 신사'라고 불리는 존재. 맞나?"

"······맞습니다만, 어떻게 알았습니까?"

"지금까지 784년의 세월을 살아왔고, 총 128곳의 월드를 오가며 그곳의 종족들을 대상으로 추악한 「재배」를 계속해 왔지. 훌륭한 군주를 소개시켜 주느니 어쩌니하는 헛소리로 약을 팔아가면서 말이야."

"대체 어떻게...?"

비스트레인의 눈빛이 불신으로 물들었다.

"왜, 네가 재배하던 「상품」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놀라운 모양이지?"

"당신, 대체······."

"너는 아마 칠흑의 군주라는 수확자에게 나를 떠넘길 생각이겠지? 그 대가로 너는 너의 4차 탈피 과정에 필요한 막대한 보상을 받고."

재환은 탑의 천장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지난 100일간 갈고 닦아온 「의심」이 비로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의심하고 또 의심한 끝에 간신히 가 닿은 세계의 본질.

탑을 떠돌며 재잘거리는 입자들. 재환은 그것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의심은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었고,

새로운 세계는 그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칠흑의 군주님, 곧 1차 재배가 끝납니다. 계약 선금은······]

[······이번 상품은 아주 특등급입니다. 784년을 살면서 이런 상품은 처음 봅니다······]

[······이번 거래가 끝나면 저도 4차 탈피를 끝내 상급 악마가 됩니다. 만약 이번 재배를 끝까지 제게 맡겨 주신다면······]

....

"······당신, 도대체 누굽니까?"

"누구긴. 네가 여기서 수십 년간 키워온 상품이지."

재환은 자신을 구속하고 있던 입자들의 결합력이 점차 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의심」의 또 다른 힘이었다. 의심하고 또 의심한 끝에, 물질의 존재 구조를 부정하여 조금씩 해체하는 것.

"더 이상은 아니겠지만."

공간을 가르며 날아드는 두 개의 검.

간신히 피해냈지만, 비스트레인의 왼쪽 팔뚝에는 긴 생채기가 남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상대는 이제 막 튜토리얼을 클리어한 애송이였다.

비스트레인은 3차 탈피를 마친 악마.

그에게 생채기라도 내기 위해서는 최소한 1차 적응자 수준은 되어야 한다.

'설마, 과적응자?'

과적응자(過適應子).

상식을 벗어난 성장을 거듭하는 상품을 이르는 말.

'어찌 내 탑에서 과적응자가······.'

본 게임이라면 모를까, 이제껏 튜토리얼에서 과적응자가 나온 사례가 있었던가. 과적응은 "위대한 땅"에서도 무려 최상급에 속하는 재능.

칠흑의 군주가 기뻐하는 모습이 눈에 선연했다.

'그래 봤자 아직 1차 적응자 수준. 조금만 버티고 있으면 게임은 끝날 거야.'

비스트레인은 이를 악물었다.

"이런 짓을 해도 소용없습니다! 어차피 당신은 본 게임에 참가해야만 합니다! 내게 이런 짓을 하면, 오히려 당신에게는 큰 손해입니다!"

"그건 두고 봐야 알 일이지."

재환의 특기가 빙룡검의 끝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찌르기.

그것을 아직도 '찌르기'라 부를 수 있을까.

동작의 적합성에서부터 힘의 움직임에 이르기까지.

그가 '찌르기'라 믿어왔던 동작의 모든 것을 「의심」 하고, 또 「의심」한 결과물.

그리하여 그는 깨닫게 되었다.

더 이상 의심할 곳이 없을 때, 인간이 어떤 상태에 도달하게 되는지를.

그는 찌르기를 「이해」 했다.

그것은 이제 찌르기가 아니었다.

하나의 빛살, 혹은 섬광이라 불러야 할 무엇.

비스트레인의 몸에서 핏물이 터져 나왔다.

그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설마 2차 적응?"

이 속도, 이 파괴력.

2차 적응자의 수준에 이르지 않는다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모든 재배의 역사를 통틀어, 튜토리얼에서 2차 적응자가 나온 경우는 열 손가락에 꼽았다.

이제 비스트레인도 방심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정말 재환이 2차 적응에 도달했다면 비스트레인도 물질계에 링크된 본체의 힘을 사용해야 했다.

비스트레인은 급하게 동조율을 팔십 퍼센트까지 끌어올려 본신의 힘을 빌려왔다. 엄청난 양의 영력이 비스트레인의 육신을 휘감았다. 비스트레인의 몸에서 검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3차 탈피를 마친 악마의 본신이었다.

악마의 3차 탈피가 3차 적응에 흔히 비견되곤 하지만, 사실은 조금 차이가 있었다. 대부분의 적응자는 같은 단계의 악마를 결코 이길 수 없다.

똑같은 단계라고 해도, 인간과 악마 사이에는 현격한 세월의 격차가 있기 때문이었다.

비스트레인의 손에서 돋아난 거대한 클로(Claw)가 순식간에 재환의 몸을 엉망으로 헤집었다. 힘에서도, 전투 센스에서도 압도적으로 밀린다.

수백 년을 살아온 악마의 저력은 만만치 않다.

재환의 몸에서 핏줄기가 쏟아져 나오고, 체력은 순식간에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순순히 항복하시지요!"

재환은 비스트레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기운에 다리가 후들거릴 지경이었다.

과연 악마라는 건 엄청난 놈들이었다.

어쩌면 이기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탑을 구성하는 입자의 배열도 거의 붕괴 직전에 이르러 있었다.

이대로 끝나는 건가.

재환은 마지막까지 찌르기를 이어갔다.

그 근성이 재환을 이 자리에 있게 했다.

계속해서 찌르고, 또 찌르고.

지금까지 얼마나 그렇게 찔러왔을까.

십억 번, 아니면 이십억 번?

그 답을 아는 것은, 오직 재환의 육체뿐이었다.

9999999991···

9999999992···

....

9999999998···

9999999999···

10000000000!

....

그 순간, 재환의 눈에 이상한 실선이 보였다.

이전에도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탑의 99층에서 빙룡과 싸웠을 때.

생명의 위기 속에서도 찌르기를 이어가야 했을 때.

그는 드물게 저 희미한 선을 발견해 왔다.

선을 발견할 때마다, 부지중에 그 선을 좇아 검을 휘둘러 왔다. 모든 것을 잊을 때 비로소 보이는 어떤 것.

그런가.

재환은 전율로 몸을 떨었다.

날아드는 클로 앞에 그는 몸을 내맡겼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잊었다.

그가 배워온 것. 익혀온 것. 믿어온 것.

그 모든 상식과 통념들.

지금껏 자신도 모르게 '당연하다' 여겼던 그 모든 것들을, 그는 가만히 놓아주었다. 강한 힘을 내는 끝없는 숫자들. 수치와 계수들. 심지어는 그것들의 노예가 되어 있었던 자신의 마음까지도.

그러자 그의 육신이 분해되기 시작했다.

재환의 몸에 덕지덕지 붙어 있던 데이터들이 부서져 나가고 있었다. 무력, 체력, 정신, 민첩.... 그의 신체를 구성하고 있던 스테이터스 데이터들. 그가 익힌 모든 스킬들과 정보 구성체들.

인간이라는 존재를 수치화하고 있던 모든 것이, 재환의 몸에서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완전한 「망아(忘我)」의 상태.

분해된 육신의 입자들이 환히 빛나며 사라지자, 재환의 몸에는 순수한 영혼의 본질만이 남았다. 그는 완전히 새로 태어난 느낌이었다. 그는 더 이상 데이터가 아니었고, 우연히 존재하는 확률이 아니었다. 그는 살아 있는 인간이었다. 재환은 생각했다.

그랬구나. 지금까지 나는 제대로 된 인간이 아니었다.

재환의 몸에서 눈부신 빛이 터져 나왔다.

비스트레인은 입을 딱 벌린 채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려 784년을 살아온 그조차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맙소사. 저건 대체?"

비스트레인은 자신이 지금껏 뭔가를 착각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저것은 「적응」이 아니다.

이 세계에는 「적응」 보다 더 위험한 무언가가 있다.

모두가 말하기를 꺼려하고 기피하는 어떤 상태.

위대한 땅을 뒤흔드는 정도가 아니라, 위대한 땅 전체를 파괴할 수 있는 무시무시한 힘.

위대한 땅의 존재들은 그것을 이렇게 불렀다.

「각성(覺醒)」

Episode 1. 백억 번의 찌르기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