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6. 절망신의 (1)
「······하여간 그 영감 때문에 한동안 그런 게 유행했었지. 기본 베기를 십억 번 반복하면 무슨 깨달음을 얻어서 엄청 강해진다든가 뭐라든가.」
―「균열」 제 3단장, 이마이 카즈키.
*
절망신의 청허.
"혼돈" 안에서 그에 관한 소문을 들어보지 못한 이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혼돈에서 '망자 베기'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아마 절망(絶忘)이라는 칭호가 그보다 잘 어울리는 의원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리라.
물론 그가 단순히 의원으로서만 이름값을 드높이는가 하면 그것은 또 아니었다.
―듣자 하니, 신의의 무력은 혼돈 십방의 방주급에 필적한다더군.
괴이한 청허의 내력은 혼돈을 떠도는 호사가들의 가십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듣자 하니 '심연의 강자'라던데.
―예전에 「균열」의 일원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더군.
―거장의 탑을 클리어했다는 소문이 있던데?
물론 진실은 알 수 없었다. 청허가 자신의 이야기를 공석에서 떠든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청허에 관한 소문은 조금씩 사소한 것들로 일축되어 갔다.
베기만 할 줄 아는 괴짜 노인이라든가.
색을 밝혀서 여자만 치료해 주는 영감이라든가.
사실 절망신의의 절망은, 그가 언제나 절망(切望)하고 있기에 붙은 별명이라든가······.
"신의께서 절망하고 계신다!"
무릎을 꿇은 청허를 보며 의료담당관은 그 소문이 맞았음을 새삼 확인하는 중이었다.
멸마대주가 신의를 부축하며 물었다.
"신의! 성주는 어쩌고 이곳에 오셨습니까?"
"지금 미인이 죽게 생겼는데 무슨 성주 타령이냐?"
"그게 무슨...."
어안이 벙벙해진 멸마대주를 뒤로 한 청허가 재환을 노려보았다.
"야! 이제 어쩔 거냐? 네놈 때문에 망자 베기를 모두 망치고 말았다! 게다가 칼이 이 꼴이 되었으니······."
산산이 조각난 청허의 검. 청허의 망자 베기는 오직 사각수 이상의 검으로만 펼칠 수 있는 신기였다.
그때, 청허의 표정이 변했다.
"오옷, 네 녀석! 좋은 것을 가지고 있구만?"
순식간에 달려든 청허가 눈을 빛냈다.
"가르낙의 뿔이라."
오각수 가르낙의 기운을 지닌 칼. 그간 오각수의 뿔로 만든 칼을 전혀 보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칼집까지 통째로 가르낙의 뿔로 만들어진 경우는 청허도 처음 보았다.
가르낙은 그만큼 강하고 흉폭한 각수였으니까.
청허는 허락도 없이 검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
"호오라, 어린놈이."
허공에서 붙들린 자신의 손목을 보며, 청허가 쓰게 웃었다. 자신의 평범 베기를 막아냈을 때 평범한 놈이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젊은 놈의 실력이 생각보다도 제법이었다.
"만약 이 칼을 빌려 준다면."
"응?"
"이 칼을 빌려 준다면, 저 여자를 살릴 수 있나?"
청허가 눈을 끔뻑였다.
"당연하지! 이 몸이라면!"
재환은 말없이 독불을 칼집 채 건네주었다.
청허는 조금 놀랐다.
그와 사내가 만난 것은 처음이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무기를 내준단 말인가? 아주 실력에 자신이 있지 않고서야....
하긴,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좋은 검이긴 한데, 꼭 제 주인을 닮았구만."
검을 뒤집어 보던 청허가 킬킬 웃었다. 독불은 노인의 손길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웅웅,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잠시 후, 청허의 눈자위가 점차 하얗게 물들기 시작했다. 밑그림을 그리듯, 노인의 검이 천천히 허공을 그어갔다. 장내의 모든 것이 고요하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재환은 백지처럼 물들어가는 세계를 바라보았다.
아까 그 환술인가.
노인의 검이 움직일 때마다 세계의 정경에 흰빛이 더해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한참이나 지켜보던 재환은, 뒤늦게야 뭔가를 깨달았다.
아니다.
저것은 저급한 환술 따위가 아니다.
저것은, 노인이 보는 세계였다.
새하얀 백지 위에 선이 흐려져 가는 미노가 있었다.
노인은 고명한 화가처럼 미노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의심의 불편함도 이해의 탁월함도 없다. 그저 그 자체로 계속되는 응시. 이쪽에서 한 번 보고, 저쪽에서 한 번 보고.
이윽고 노인은 독불을 붓처럼 들고 섰다.
그는 미노의 선을 다시 그려 넣기 시작했다. 유려한 움직임. 마치 수백 년간 하나의 그림만을 그려온 사람처럼 자연스러운 손놀림이었다.
그 움직임을 보며 재환은 이상한 기분에 젖어 갔다.
부드러우면서도 거침없는 손놀림이었다.
때로는 격렬하게, 또 때로는 여유롭게.
그러나 무뎌지지는 않게.
미노의 영혼이 다시 세계에 새겨져 갔다.
노인의 한 획이 더해질 때마다, 재환은 마음이 울렁거렸다. 오직 하나의 획을 긋기 위해 평생을 바쳐온 삶이, 그 곡진한 선의 전부에 켜켜이 배어 있었다.
그가 살아온 삶을 연상시키지만, 분명하게도 다른 궤적을 가진 역사.
다시 노인의 손이 움직였다.
획은 미노의 코를 그리고, 미노의 입술을 그렸다. 가슴의 굴곡을 그릴 때는 더욱 신중했다. 노인의 춤사위를 따라 백색의 세계도 일렁이며 춤을 추었다.
노래 같았다.
대단한 감동은 없지만, 그저 보고 듣는 것만으로 위안이 되는 노래. 어느덧 노인의 춤사위가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갑자기 노인이 독불을 놓치며 엎어졌다.
"아이고, 힘들어서 못 하겠네."
신들린 듯 춤을 추던 청허가 갑자기 대자로 뻗었다.
"니미럴, 영력이 딸려."
미노의 덧칠은 아직 불안정한 상태였다. 조금만 더 하면 끝나는 그림이라는 걸 재환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노인은 일어설 기력조차 없어 보였다.
"빌어먹을 성주 놈만 아니었더라도······."
세계가 흔들리고 있었다.
재환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대로 저 그림이 완성되지 못한다면, '망자 베기'라는 것은 실현되지 않는다는 것을. 노인의 지친 눈동자. 재환은 잠시 망설였다.
나는 베기는 못한다.
하지만.
설령 흉내 내기에 불과할지라도.
재환은 노인을 대신해 독불을 집어 들었다.
주변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경악과 만류, 무의미한 소음들.
시끄럽다.
재환은 눈을 감았다. 세계를 「의심」하던 그의 정신이, 「이해」를 갈망하던 그의 영혼이 숨을 죽였다. 완고하게 조여 있던 마음이 가만히 풀렸다.
그런가. 이런 느낌인가.
다시 눈을 뜨자 도화지처럼 하얀 세계가 펼쳐졌다.
경악한 눈빛을 한 청허와 잠들어 있는 미노가 있었다.
편안하다.
그는 처음으로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검을 들었다.
백색의 세계가 그를 받아들였다.
이 공간에 무엇이든 그려 넣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세밀한 점묘화를 그리듯, 재환의 독불이 허공을 찍었다.
그는 미노를 떠올렸다. 그녀를 만난 것은 며칠 되지 않았지만, 그 사이에 미노는 그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장난기 많고, 고집이 센 사람. 암살자임에도 유약한 사람. 배신하지 않는 사람. 그를 싫어하는 사람.
그리고······.
사람을 믿는 사람.
재환은 숨 한 번 들이쉬지 않고 손을 놀렸다. 행여나 그 짧은 시간 동안 그가 아는 미노가 없어질까 두려운 사람처럼.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완성된 것 같긴 한데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돌연 재환이 뭔가를 떠올렸다.
그가 본 적은 없었으나, 우연히 알게 된 어떤 것.
재환은 미노의 오른쪽 가슴 위에 작은 점 하나를 찍었다. 산소가 부족해진 까닭에 시야가 까마득하다. 가만히 숨을 몰아쉰 재환이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런 건 또 언제 봤어요?"
환히 웃는 미노가 그의 눈앞에 서 있었다.
그 눈빛을 보며, 어쩌면 재환은 잠깐이나마 생각했다.
어쩌면.
어쩌면 아무도 죽지 않고 세계를 멸망시킬 방법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젓는다.
그런 방법이 있을 리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재환은 아직도 자신이 백지의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건가 싶었다.
주변의 모두가 침묵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제임스는 눈을 비비고 있었고 의료대원들은 측정기를 든 손을 바르르 떨고 있었다. 클레어는 넋을 놓은 채 미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검은 혈관이 점차 가라앉고 있었다. 누군가가 외쳤다.
"망자화가 멈췄습니다!"
"오, 오염도가 떨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절망신의 청허는 충격에 빠진 얼굴이었다.
"대체 어찌······."
청허의 망자 베기는 한 번 보고 따라 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니었다. 그것은 '스킬'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적응자들이 가르침을 구했으나 아무도 익히지 못했던 기술. 그것이 망자 베기였다.
"······옹졸한 기세가 조금은 사라졌구만."
재환을 유심히 바라보던 청허가 중얼거렸다. 고슴도치마냥 공격적으로 뻗어 있던 재환의 기세가 약간 누그러져 있었다. 분명 종전의 일이 그의 내면을 변화시킨 것이리라.
"그래봤자 다섯 살짜리가 열 살짜리가 된 정도에 불과한 것 같긴 한데."
청허가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입술을 실룩였다.
"그나저나 자넨 대체 누군가? 망자 베기는 어찌 사용한 거고?"
거기까지 말하던 청허가 말을 바꾸었다. 아까 재환이 보여준 움직임은 엄밀히 말해서 '베기'의 자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니, 망자 찌르기라고 해야겠군. 아무튼 그런 걸 어디서 배운 거냐?"
그 말에 멸마대주가 깜짝 놀라 물었다.
"저자가 사용한 게 정말 '망자 베기'와 같은 것입니까?"
"인정하긴 싫지만, 그래."
"그렇다는 것은······!"
멸마대주의 표정을 보며 청허의 눈빛이 복잡하게 물들었다. 멸마대주는 이 고르곤 성채에서 누구보다 충성스런 인물 중 하나였다.
무려 천년의 세월을 살아온 청허였다. 그러니 아직 백 년도 채 되지 않은 애송이 대주의 생각을 읽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대주, 진정하게. 우린 아직 저자의 정체도 알지 못해."
"하지만 신의께서 직접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만약 망자 베기를 할 수 있는 이가 한 명만 더 있다면 성주님을 구할 수도 있을 거라고."
"그건······."
청허가 곤란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확실히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냥 지나가듯 던진 말을 설마 기억하고 있을 줄이야.
설마 진짜 망자 베기를 쓸 수 있는 놈이 있으리라고 누가 알았겠냐고.
멸마대주가 표정을 굳혔다.
"신의, 성주님의 목숨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성주의 목숨이라는 말에 청허가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한숨을 지었다. 그러더니 입술이 뻐끔거렸다.
[대주, 내가 각성자라는 건 알고 있겠지? 비록 완전한 형태는 아니라지만······.]
각성자(覺醒子).
그 말에 멸마대주의 몸이 경직되었다.
"위대한 땅"에서 날고 긴 이들 중 각성자라는 말을 모르는 자가 있을까.
시스템의 규칙에서 벗어난 규격 외의 존재이자, 적응을 거부함으로써 강대한 힘을 얻은 극소수의 초강자들.
"위대한 땅" 전체를 놓고 보아도 '각성자'로 알려진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12지대를 횡행하는 극소수의 초강자들, 그리고 「빅 브라더」에 의해 위험 단체로 지정된 「균열」의 일부 단장들 정도일까.
그러나 멸마대주는 그들 말고도 몇몇 각성자가 더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령 지금 그의 눈앞에 선 이 노인.
비록 12지대의 군주들이나 「균열」의 단장들에 비하면 처진다고 하지만 그래도 각성자는 각성자다. 절망신의 청허가 고르곤 성채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다른 성채들은 함부로 고르곤을 노리지 못한다.
[만약 저자도 각성자라면 어쩔 셈인가?]
Episode 6. 절망신의 (2)
청허의 말에 멸마대주가 눈을 크게 떴다.
[그게 정말입니까?]
[그렇다네. 게다가 정체도 소속도 불분명한 각성자야.]
등줄기에 전율이 일었다. 성채에 각성자가 나타났다는 것은 그만큼이나 심각한 사안이다. 각성자들은 "혼돈"의 세력 구도를 완전히 뒤엎을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설마 「균열」입니까?]
멸마대주가 경계하는 목소리를 냈다.
[지금으로선 알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네.]
그때, 천막의 입구가 거세게 펄럭이며 진청색 무복의 사내들이 등장했다.
멸마대주는 그들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내총관을 받드는 수호집단, 암영대(暗影隊)였다. 심지어 맨 앞에 서있는 것은 암영대의 수장인 암영대주.
[저놈들이 여기 왜······.]
암영대는 딱히 망자 소탕과는 관계없는 부대였다. 오직 성주와 내총관의 밀명을 받는 독자적인 부대.
저벅저벅 걸어온 암영대주는 그대로 재환 앞에 멈춰 서더니 예를 취했다.
"암영대주가 녹명의 사자를 뵙습니다."
녹명의 사자?
그 말에 청허와 멸마대주가 서로를 쳐다보았다.
"귀인께서는 부디 저희와 함께 내성으로 가 주십시오. 아시다시피, 성주님의 목숨이...."
묵묵히 대사를 읊어가던 암영대주가 갑자기 말꼬리를 흐렸다.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음? 멸마대주가 왜 여기에······. 신의까지?"
암영대주가 기겁한 얼굴로 청허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청허도 멸마대주도 이미 암영대주 따위는 까맣게 잊은 채였다. 재환의 얼굴을 바라보는 둘은 정확히 똑같은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놈, 대체 누구지?
그들이 깊은 고심에 잠겨든 사이, 암영대주가 다시 한번 무릎을 꿇은 채 말했다.
"귀인, 부탁드립니다. 저희와 함께 가주십시오. 고르곤 성채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재환이 고르곤 내성으로, 그것도 집무실까지 순순히 따라온 것에는 모두 이유가 있었다.
―몽마를 찾는다고?
고르곤 성채는 넓다. 아무리 몽마가 희귀하고 보기 드문 존재라고 해도, 잘 찾아보면 이 성채 내에 하나쯤은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메이칼의 말이었다.
―내성의 관리부에 가서 내 이름을 대고 내가 만든 칼집을 보여주게. 그러면 출입 관리 기록부를 열람할 수 있을 걸세.
과연 메이칼의 말대로 출입 기록부를 살펴본다면 몽마의 현재 위치를 알 수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처음에는 그 말대로 할 생각이었다. 도중에 이런저런 일들이 없었더라면, 또 내성에서 직접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진즉에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차라리 잘된 것일지도 모른다.
눈앞의 중년인은 한눈에 봐도 관리부장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높은 고관대작임에 틀림없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몽마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는 것이 더욱 수월해질 수도 있었다.
재환은 중년인의 외모를 가만히 뜯어보았다.
단정하게 깎은 콧수염과 중후한 턱선, 지혜롭게 빛나는 눈동자. 군사(軍師)의 상(相)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한다면 이 사람은 정확히 그에 부합할 것이었다.
겉으로만 봐서는 사십 대 중반 정도로밖에 안 보이는 나이였지만, 전신에서 느껴지는 강함은 그가 상당히 오래된 영혼이라는 것을 방증하고 있었다.
"일단 용건으로 들어가기 전에 제 소개부터 드려야 할 것 같군요. 제 이름은 유르헨 치버. 이곳 '고르곤 성채'의 내총관을 맡고 있는 사람입니다."
"재환이다."
그 짧은 소개에 유르헨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과연 신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군요."
곁에 있던 절망신의 청허가 "것 봐라, 저딴 놈이라니까"하고 중얼거렸다. 유르헨이 말했다.
"하지만 알고 계시겠지요. 저희가 궁금해하는 건 당신의 이름이 아닙니다."
"그렇겠지."
"재환 씨,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재환 씨는 녹명가의 사자입니까?"
"아니."
"역시 그렇군요."
유르헨의 표정에는 일말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그에 놀란 것은 오히려 그의 옆에 있던 멸마대주였다.
"녹명가의 사자가 아니셨습니까?!"
"아니라고 말했잖아."
청허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이죽거렸다.
"어이 애송아. 이번엔 내가 물어보자. 네가 녹명가가 아니라면 대체 그 '망혼석'들은 어디서 난 것이냐?"
청허는 재환의 손에서 굴러다니는 망혼석을 노려보며 말했다. 재환이 대답했다.
"주웠다."
"그걸 믿으라는 거냐? 원래 그걸 가지고 있던 주인들은 어떻게 됐는데?"
"죽었다."
"죽어? 누가 감히 오대 세가의 가솔들을······."
"내가 죽였어."
그 말에 멸마대주가 입을 딱 벌렸다.
벌떡 일어나려는 청허를 말린 것은 내총관 유르헨이었다.
"흥분하지 마십시오, 신의."
침착한 그의 태도에는 재환마저 감탄할 어떤 기품이 있었다.
"저, 저놈이 세가의 식솔들을 다 죽였다지 않나!"
"우리는 아직 재환 씨와 녹명가 사이에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
"일단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제 생각엔 재환 씨에게 무슨 사정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유르헨이 재환을 향해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재환이 입을 열었다.
"그놈들이 먼저 덤볐어. 내가 가진 뿔을 빼앗으려고 했지. 그래서 상대해 준 것뿐이야."
"뿔? 지금 그 말을 믿으라고―"
발끈한 청허의 목소리와 함께 재환의 배낭에서 마지막 남은 가르낙의 뿔 하나가 나왔다. 그러자 청허의 입이 다물어졌다.
가르낙의 뿔. 백 마디의 설명을 대신할 귀물이었다.
유르헨의 입이 열렸다.
"그랬군요."
녹명가는 재료에 대한 탐욕이 강한 집단이다. 인간 하나가 가르낙의 뿔 같은 고급 재료를 가지고 다녔다면, 충분히 시빗거리가 생길 가능성이 있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싸우다 그들을 죽였다면 딱히 뭐라고 나무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거기까지 듣다 보니 유르헨은 궁금해졌다.
그렇다면 이 사내는, 어쩌다가 녹명가라는 오해까지 받아가며 여기로 오게 된 것일까.
"혹시 재환 씨의 이야기를 좀 더 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어려울 것 없지."
재환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렇군요. 제가 재환 씨 말을 한 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양손에 깍지를 낀 채 턱을 괸 유르헨이 입을 열었다.
"하나, 재환 씨는 '우연히' 어떤 일에 휘말려 이곳 "혼돈"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재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둘, 재환 씨는 '우연히' 녹명가들로부터 그 망혼석들을 손에 넣어 이 성채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재환이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셋, 재환 씨는 '우연히' 이번 사태에 휘말려 신의를 만나게 되었고, 처음 보는 신의의 망자 베기를 시험 삼아 따라 해 보았습니다."
재환이 마지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그 말에 옆에서 사태를 지켜보던 청허가 답답하다는 인상을 썼다.
"······내총관. 진짜 저놈 말을 믿는 건 아니겠지?"
"믿습니다만."
"자네, 성주가 없어지는 바람에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닌가?"
청허의 말에 유르헨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신의."
"왜?"
"누군가에게 신뢰를 얻으려면 먼저 그 사람을 신뢰해야 하는 법입니다."
단박에 신의를 꿀 먹은 벙어리로 만든 유르헨이 다시 재환을 바라보았다.
"재환 씨. 실례가 안 된다면 몇 가지를 더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좋아."
"그럼 첫 번째 질문입니다. 지금 당신의 육체는 살아 있는 상태입니다. 맞습니까?"
망혼석을 굴리던 재환의 손가락이 순간 굳었다.
재환은 "악몽의 탑" 본 게임에 돌입하기 전, 영혼 상태로 "혼돈"에 진입했다. 그러니 그의 육신은 아직도 지구에 남아 있는 상태였다.
문제는, 그 사실을 아는 이는 이 세계에 재환 혼자라는 것이었다.
"······어떻게 알았지?"
"재환 씨께서 직접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우연히 어떤 일에 휘말려 "혼돈"에 들어왔다'라고."
"그랬지."
"그거 아십니까? "혼돈"에서는 아무도 자신의 '죽음'을 그런 식으로 표현하지 않습니다."
감각이 대단히 날카로운 사내였다.
"그럼 두 번째 질문입니다. 당신에게는 혹시 정체를 밝히고 싶지 않은 어떤 이유가 있는 것입니까?"
재환은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맞아."
"혹시 누군가의 위협 때문입니까?"
"그럴 수도, 아닐 수도."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는 뜻이군요."
흐음, 하고 테이블을 톡톡 두들기던 유르헨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나 사과드려야 할 게 있습니다."
"뭐지?"
"사실, 지난 나흘간 제 부하들은 당신을 가까이에서 감시해 왔습니다."
"알고 있다."
"역시 알고 계셨군요."
재환은 얼마 전 〈황혼 어스름〉 근처에서 은신하고 있던 진청색 무복의 사내를 떠올렸다. 살짝 찌르기로 목을 쳐서 기절시켰던 사내. 아마 내총관의 부하였으리라.
"당신의 실력이 너무 뛰어나 감시가 힘들었지만 아주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
"저희가 알아낸 사실이 몇 가지 있는데 혹시 듣고 싶으십니까?"
"말해봐."
유르헨의 헌앙한 눈빛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이 문서는 당신이 성채에 들어온 후 일어난 사건들을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앞에 놓여 있던 문서를 들어 보였다.
문서에는 〈표적 일지〉라는 말이 쓰여 있었다.
+
첫째 날.
표적, 북쪽 검문소장 칼튼과 충돌.
표적, 망혼석을 함부로 꺼내어 주민 동요.
표적, 뒷골목에서 건달패 격퇴.
표적, 황혼 어스름 무단 침입 후 부공방장 협박.
표적, 황혼 어스름 사흘간 불법 점거(이 과정에서 약 일억 팔천만 호른의 재산 피해 발생).
표적, SS급 재료 '가르낙의 뿔' 가공 돌입.
....셋째 날.
표적, 북부 노점거리 대파(大破). 예상 추정 피해 사천만 호른.
표적, 잔야 삼형제 및 금천방과 조우(북쪽 검문소장 외 14명 중상).
표적, 잔야 삼형제 및 금천방원 척살.
표적, 중형 망자와 조우.
표적, 중형 망자 사살(이 과정에서 약 삼천만 호른의 재산 피해 발생).
표적, 신의와 조우.
표적, 신의의 절기인 '망자 베기'를 사용(중요).
....표적 위험 등급 : SS
표적 무력 수치 : 측정 불가.
파악된 재산 피해 : 약 3억 8천만 호른.
+
"혹시 이런 사람을 두고 뭐라고 부르는지, 당신은 알고 계십니까?"
옆에서 가만히 보고 있던 신의가 끼어들었다.
"미친놈."
멸마대주도 한마디를 거들었다.
"원, 영웅인지 악당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분이시군요."
유르헨이 빙긋 웃음을 지었다.
"그렇습니다. 누군가는 당신을 영웅이라 할 것이고, 또 누군가는 당신을 악당이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당신을 그저 미친놈이라고 부르겠지요.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각자 다른 이름으로 부를 것입니다."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던 유르헨의 손끝이 멎었다.
"저는 당신 같은 사람들을 '주인공'이라고 부릅니다."
청허가 눈을 부라렸다.
"그냥 미친놈이라니깐!"
"어디까지나 비유로서 그렇다는 겁니다. 주변의 어떤 룰에도 구속되지 않고,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주인공'밖엔 없지 않겠습니까?"
유르헨은 청허를 무시하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러한 '주인공'들에게는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혹시 무엇인지 아십니까?"
"...몰라."
"바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는 것입니다."
재환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나흘간 조사한 결과치고는 조악하게 짝이 없군."
"인정합니다. 심지어 조사한 내용에도 문제가 있었으니까요."
"······?"
"그게, 사람들은 당신에 대해 전혀 모르더군요."
유르헨이 계속해서 말했다.
"자신의 힘에 취한 강자들은 무심코 정보를 흘리고 다니게 마련입니다. 어렵게 강함을 성취한 자들일수록 더욱 그러하죠. 출생이라든가, 신분이라든가, 성공신화라든가. 설령 본인이 털어놓지 않더라도 주변 사람들이 주절거리는 과정에서 그런 이야기들은 퍼지게 마련인데······."
재환은 잠자코 이야기를 들었다.
"정말 희한하게도, 당신에 관해서는 이름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알려진 것이 없었습니다. 이곳 혼돈에서도, 위대한 땅에서도 말이죠. 이름만 알면 얼마든지 적응자 정보를 조회할 수 있는 성채의 관리 시스템으로도 당신에 관한 정보는 조회가 되질 않습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알고 계십니까?"
재환은 대답하지 않았다.
유르헨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누군가가 당신에 관한 정보를 차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
"당신이 알려지지 않게끔 보호하고 있다는 것이죠. 어떤 목적에서든 말입니다."
재환이 숨을 죽였다.
"그리고 제 생각에 당신의 정보를 감추고 있는 세력은 당신에게 호의적이진 않은 것 같더군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정보를 조작할 수 있을 만큼 커다란 힘을 가진 세력이 당신의 '배후'라면, 고작 증명서 때문에 북쪽 검문소에서 곤란한 일을 치르진 않았을 테니까요."
재환은 그의 추리에 진심으로 놀랐다.
"제 결론을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당신은 '우연히' 이 "혼돈"으로 도망쳐 오게 된, 어떤 거대한 세력으로부터 쫓기고 있는 '주인공'입니다."
"······."
"어떻습니까, 제가 완성한 이야기가?"
재환은 솔직하게 감탄했다.
심지어 유르헨의 말은 재환의 생각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었다.
슬슬 '칠흑의 군주'라는 놈이 움직일 때가 됐지.
지금쯤이면 군주들도 그와 계약한 재배자와 상품에 어떤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눈치챘으리라. 그렇다면 뭔가 본격적인 조치에 들어갔을 가능성이 컸다.
아마 정보 차단은 그런 조치의 일부일 것이다. 어쩌면 조만간 놈들이 이곳으로 들이닥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재환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이야기가 너무 돌아왔는데, 사실 제가 드리고 싶은 제안은 간단한 겁니다."
내총관 유르헨이 말했다.
"고르곤 성채가 당신을 보호해 주겠습니다."
"보호?"
"당신의 신분도, 정체도 묻지 않겠습니다. 성채에 입힌 손해도 청구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이 성채에 머무르는 한 당신의 안전을 보장하겠습니다. 당신은 그 대가로 한 가지 부탁만 들어주시면 됩니다."
재환은 그 부탁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여기까지 오면서 곳곳에서 엿들은 밀어들. 그리고 이 내성의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어떤 강대한 영압이 그 '부탁'의 내용을 이미 누설하고 있었다.
그리고 유르헨이 입을 열었다.
"저희 성주님을 구해 주십시오."
Episode 6. 절망신의 (3)
그로부터 두 시간 뒤. 재환은 청허와 함께 내성의 별궁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시중을 담당한 암영대의 여인이 말했다.
"당분간은 이 방에서 묵으시면 됩니다. 자세한 안내는 별궁의 시종들이 도와줄 것입니다."
"알겠다."
"그리고 일전에 물어보신 북쪽 검문소장과 여성분은 회복세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북쪽 검문소장은 회복까지 약 이 주, 여성분은 약 삼 개월 정도가 걸린다고 의료담당관이 전해 왔습니다."
"고맙군."
"또 무슨 일이 생긴다면 불러주십시오."
자신을 흑화라 소개한 여인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재환이 청허 쪽을 보며 물었다.
"그쪽도 그만 가지."
"네 녀석에게 궁금한 게 있다. 잠깐 나를 좀 따라와라."
어딘가 심통 맞은 목소리였다.
잠시 고민하던 재환이 청허를 따라 발을 움직였다.
성긴 벽감마다 놓인 칸델라의 불빛. 청허가 향한 곳은 별궁의 지하였다.
어둠 속을 거니는 동안, 재환은 내총관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너희 고르곤 성채는 위대한 땅의 12군주와 대적할 수 있을 만큼 강한가?
―설마 당신을 쫓는 것이 12군주 측입니까?
―그중 하나일 수도 있다.
그 말에 유르헨은 한참이나 고심하다가 다음과 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군주와 대적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군주뿐입니다.
―그럼 나를 숨겨 주면 손해를 볼 텐데.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잘됐군요.
―왜지?
―군주들은 "혼돈"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직접 관여할 수 없게 되어있으니까요.
상념이 깨진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다 왔다."
걸음을 멈춘 청허를 보며, 재환이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생각이지?"
별궁의 지하에는 거대한 연무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한쪽 벽면에는 병장기들이 걸려 있고, 다른 쪽 벽면에는 간단한 더미들이 마련된 연무장. 아마 내성의 무사들이 수련을 위해 사용하는 장소인 듯했다.
"애송아. 내가 보기에 네 녀석은 「균열」이 아니다. 네 녀석의 기세는 몹시 사납지만, 그놈들처럼 기계적이지는 않아."
청허가 가시 돋친 재환의 기세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군주들의 수하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네 녀석에게서 12지대 중 어느 곳의 기운도 느껴지지 않거든."
연무장의 한쪽 구석에서 검을 수련하던 호위무사들이 청허를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라 자리를 비켰다.
"균열 측도 군주 측도 아닌 각성자인데, 나는 모르는 각성자라······."
청허가 무사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지."
청허가 재환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물었다.
"애송아. 혹시 너는 「거장」의 탑을 클리어한 녀석이냐?"
순간 재환의 표정을 읽은 청허가 씩 웃었다.
"역시나로군."
"······영감, 뭔가 알고 있나?"
"아는 만큼은 알지."
재환이 입을 열려는 순간, 청허가 검을 뽑았다.
"한판 붙어 보자, 애송아."
"······."
"너의 찌르기와 나의 베기, 둘 중에 누가 무엇이 더 강한지 우열을 가려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
재환도 독불을 뽑았다. 사실 재환도 궁금했던 참이었다. 이 노인은 혼돈에 온 이래 처음으로 그가 상대할 만한 적수였다.
찌르기만을 반복해 온 그였기에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노인은 자신과 동류다. 자신이 평생 찌르기만을 해 왔듯, 이 노인은 평생 베기만을 해왔다.
어쩌면, 그보다도 훨씬 아득한 시간 동안.
"덤벼라, 애송아. 만약 날 이긴다면 네 궁금증 따윈 얼마든지 풀어 주마."
청허가 클클 웃으며 덧붙였다.
"아마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말이다."
***
"위대한 땅"의 12지대 중 제 5지대인 '강철 지대'는 그 이름답게 모든 대지가 강철로 뒤덮인 지역이었다.
"위대한 땅"의 시인들이 남긴 시구 중에는 이러한 강철 지대를 흥미롭게 표현한 것들이 제법 있었다.
돌도 강철.
나무도 강철.
풀도 강철.
그대의 마음도 강철.
내 눈물이 철철.
―유프라테스 著, '강철 지대의 여인들' 中
조금 과장스럽기는 하지만 시구 그대로 강철 지대는 어디에서나 강철을 쉽게 야금(冶金)할 수 있을 만큼 광물 류의 유통이 활발한 편이었다.
덕분에 "위대한 땅"에서 이름깨나 날리는 유명 공방들은 너도나도 5지대와 가까운 곳에 터를 잡게 되었다. 호사가들은 5지대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모든 무기의 고향이라고나 할까.
유명 공방들이 몰리면서 몽마들의 왕래가 많아지고, 몽마들의 왕래가 많아지다 보니 재배용 탑이라든가 무구류의 거래도 급증했다.
그러니 강철 지대가 "위대한 땅"의 주요 지대 중 하나로 성장하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그런데 왜일까.
정작 그 강철 지대의 지배자는 오늘 영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형형한 인상의 노인이 입을 열었다.
"다시 말해 봐라."
"······."
"칠흑 놈이 뭘 어쨌다고?"
노인의 앞에 부복한 수석비서가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노인은 그럴 만한 존재였다. 5지대의 주인이자, '휘지 않는 강철'이라 불리는 이.
"위대한 땅"에서 그를 모르는 이가 있을까.
"위대한 땅"에 진입한 후 약 80년 만에 최고위급 적응자들을 모조리 꺾고 위대한 자의 최강자에 자리매김한 5지대의 괴물.
강철의 군주 허유.
그것이 노인의 이름이었다.
허유는 그의 눈앞에 부복하고 있는 수석비서를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자자, 긴장하지 말고 다시 정리해 보거라. 칠흑의 군주가 뭘 꾸미고 있다고?"
칠흑의 군주는 5지대의 바로 옆 지대인 9지대를 다스리는 군주였다.
이름은 제롬.
음험하고 잔인한 성격 탓에 군주로 등극하기 이전부터 허유와는 자주 부딪치곤 했던 이였다.
9지대와는 슬슬 부딪칠 때도 됐다.
안 그래도 최근 몇 년간 9지대의 준동이 심상치 않던 차였다.
다른 지대에서 수배 중인 적응자들을 무작정 받아들이는가 하면,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중하위급 재배자들에게 손을 내밀어 「상품」의 거래량을 세 배 이상 늘렸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갑자기 군사력을 대거 확충하고 있다는 것.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뜻이다.
정황상으로 봤을 때, 첫 번째 표적은 9지대에 바로 면하고 있는 7지대나, 허유의 5지대가 될 공산이 컸다.
수석비서가 덜덜 떨며 입을 열었다.
"아, 알아본 바에 따르면 칠흑의 군주가 "혼돈" 쪽에 연락을 취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혼돈? 혼돈은 왜?"
뜬금없는 이야기에 허유는 조금 놀랐다.
제295차 대군주 협정에 따라 위대한 땅의 모든 군주들은 "혼돈"의 일에 관여하지 않기로 밀약이 맺어져 있던 까닭이었다.
"저, 그게 이야기가 좀 복잡합니다만······."
앨런은 준비해 온 자료가 있는 듯 "리틀 브라더"를 호출하여 홀로그램 패널에 영상을 띄웠다.
강철의 군주 허유는 패널의 영상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저게 뭐?"
영상은 허유도 익히 아는 것이었다. 무적응자가 혼자 힘으로 빙룡을 잡는 영상. 근 몇 주간 「99층 솔로 클리어 영상」이니 뭐니 하는 제목으로 한창 떠돌았던 영상이었다.
빙룡을 향해 찌르기를 퍼붓는 사내의 모습.
언젠가 비서감이 저놈을 꼭 스카우트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던 것이 떠올랐다. 상품 거래나 적응자 영입에 관한 건은 전적으로 비서감에게 맡겨 두었기 때문에 마음대로 하라고 말했던 것 같다.
하지만 결국 조작 영상으로 판명되었다고 들었는데.
한때 "리틀 브라더" 네트워크의 베스트 동영상을 석권하던 저 영상은 상품을 재배하던 재배자가 종적을 감추며 진위가 모호해졌다.
지금까지도 여러 공방의 몽마들은 이 영상을 놓고 조작이니 아니니 하는 시답잖은 문제로 온종일 가열 찬 토론을 벌인다고 들었다.
"저 영상 속의 상품이, 9지대의 칠흑의 군주가 계약 중이던 상품이었다고 합니다."
"뭐?"
그 말에 허유가 다시 상품을 유심히 보았다.
잠깐, 설마······.
빙룡을 공격할 때마다 찌르기에서 묘한 기세가 풍긴다. 몹시 희미하긴 하지만 그도 익히 알고 있는 어떤 기운이었다.
······튜토리얼에서 각성자라고?
강철의 군주 본인도 "위대한 땅"에서 상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대단한 각성자였지만, 튜토리얼에서 각성을 이루지는 못했다. 허유가 다급히 캐물었다.
"이 상품, 지금 어디 있지?"
그 말에 우물쭈물하던 수석비서가 입을 열었다.
"탈출했다고 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튜토리얼 클리어를 거부하고 탑의 천장을 부순 다음, 환상수를 경유해 "혼돈" 쪽으로 도망갔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허유는 자신이 뭔가를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100층에서 재배자가 빤히 눈 뜨고 있었을 텐데 어떻게 그런 짓을 해?"
"재배자를 죽였답니다."
"······농담이겠지?"
"저, 저도 믿기지가 않지만 칠흑의 군주 측에서는 이미 그렇게 확신하고 있는 듯합니다."
허유는 말을 잃었다.
그 정도면 확실히 가치를 측량할 수 없는 상품이었다. 아마 칠흑의 군주 측에서도 눈에 불을 켜고 상품의 행방을 쫓고 있으리라.
어쩐지 일이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한데 9지대 놈들이 "혼돈" 쪽에 연줄이 있었나?"
"그에 관해 드릴 말씀이 있는데.... 칠흑의 군주는 오래전부터 "혼돈"의 일에 관여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예. 혼돈 십방 중 몇몇 곳이 칠흑의 군주 측과 꾸준히 접촉하고 있었습니다."
허유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칠흑.
허유는 이 일을 다른 군주들에게 공표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깐 고민했다. 마땅히 알린다고 해서 다른 군주들이 곧장 팔을 걷고 나설 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허유도 잘 알았기 때문이다.
5지대와 7지대, 9지대가 모여 있는 "위대한 땅" 동부를 제외한 전역은 현재 피 튀기는 전쟁 국면에 돌입해 있다.
지금 9지대의 칠흑이 밀약을 어겼다는 이유로 그를 지탄할 군주가 있을지, 허유는 선뜻 확신할 수 없었다.
"이 정보는 또 누가 알고 있지?"
"아직은 9지대 안에서만 도는 이야기인 듯합니다. 하지만 7지대 측에서도 밀정을 심어 두었을 테니, 어쩌면 지금쯤 7지대도······."
확실히 5지대인 자신들이 알았다면 7지대라고 모를 리가 없다. 7지대는 불사의 군주 아브락사스의 영토다.
잠시 고민하던 허유가 입을 열었다.
"몽마 조합에 정식으로 공문을 보내서 「좁은 문」의 사용권을 요청해라."
좁은 문.
위장 죽음의 방식을 통해 생자(生者)를 사자로 둔갑시키는 보물. 오대 세가나 몽마들은 이 「좁은 문」을 통해서 살아 있는 상태로 "혼돈"을 왕래할 수 있었다.
"설마 혼돈에 관여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냥 지켜보기만 할 거다. 사태가 돌아가는 걸 봐야 하니까."
"······누구를 보내시렵니까?"
"금일급 정예 무사 열. 그리고 혜영을 보내."
강철 지대 무사들의 계급은 크게 다섯 갈래로 나누어진다.
아다만티움, 플래티넘, 금, 은, 동.
여기에 각 계급마다 일급부터 오급까지의 세부 계급이 또 있다.
금일급이라면 적응자 레벨로 따져 보았을 때 최소 5차 수준의 적응자였다.
게다가 금일급 무사들의 대장인 혜영은 그 무력 수준만 놓고 봤을 때도 금급의 윗 서열인 플래티넘 급에도 결코 밀리지 않았다.
"확실히 해 두는 거다. 일이 어떻게 돌아갈지 모르니까."
"아, 알겠습니다."
물러가는 수석비서를 보며, 허유는 간만에 짧은 회상에 잠겼다.
혼돈이라······.
각성자가 된 뒤 무디어져 있던 허유의 눈빛에 모처럼 그리움 비슷한 정서가 스쳤다.
혼돈에는 허유의 오랜 친구가 있었다.
한때 그와 거장의 탑을 클리어하고, 위대한 땅에서 등을 맞대고 싸웠던 동료. 그들의 고향에서는 화타라고 불리었고, 혼돈에서는 절망신의라고 불리는 이.
"청허, 잘 있으려나."
비록 각성의 길이 갈라지면서 서로 뜻이 맞지 않아 헤어지긴 했지만 지금도 강철의 군주는 청허를 종종 떠올리곤 했다. 인간을 버리고 완전한 각성자가 될 바에 차라리 인간으로 남겠다고 말했던― 결국 인간의 존엄을 지키며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던 그의 친구.
"그 개차반 같은 성격만 아니었더라도 오래 살았을 친구인데."
철없던 시절의 모험을 떠올리던 허유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거기서는 조용히 지내고 있겠지."
*
양 눈이 시퍼렇게 멍든 청허가, 퉁퉁 부은 두 눈을 거의 뜨지도 못한 채 말했다.
"...야, 다시 붙어 보자."
Episode 6. 절망신의 (4)
청허는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는 "혼돈" 최고의 명의, 절망신의였다.
또 호사가들의 말마따나, 그는 이 "혼돈"에서 몇 안 되는 '심연의 강자'였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에겐 비범한 과거가 있었다.
그는 12764월드에서 무려 거장의 탑을 클리어하고 위대한 땅에 진출한 강자였다.
위대한 땅에서 12764월드를 모르는 이는 거의 없다.
월드명 중원(中原).
보통은 무림(武林)이라 통칭되는 세계.
위대한 땅에서도 '무림 출신'이라고 하면 일단 한 수 접어주고 들어갈 만큼 무림의 위세는 대단했다.
5지대의 군주인 '강철의 허유'를 배출해 낸, '전설의 세대'라 불리는 존재들을 탄생시킨 곳. 청허는 그 몇 안 되는 '전설의 세대' 중 하나였다.
"이미 승부는 난 것 같은데, 영감."
재환이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이미 청허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기품 있던 흑색 도포는 죄다 걸레짝이 되어 버렸고, 쓰고 있던 방갓은 반으로 똑 쪼개졌다. 독불과 부딪친 연무장의 예비용 칼날은 이미 스무 자루가 넘게 부러져 있었다. 독불의 칼집을 뽑지 않고 싸웠는데도 이 모양이었다.
"나는 아직 필살 기술을 쓰지 않았다, 애송아!"
"······."
"이걸 쓰면 네놈은 확실히 죽는다! 그게 걱정되어서 안 쓰고 있는 것뿐이야!"
아까부터 저 소리였다.
평범 베기 10연격인가를 할 때부터 저랬다.
"영감은 나한테 이길 수 없어."
"해 보지 않고는 모르는 일이다."
"당신은 나보다 약해."
약하다?
그 말에 청허가 코를 스윽 닦으며 피식 웃었다. 코 밑에 묻어 있던 은빛 가루가 흩날렸다.
"버르장머리 하고는, 너 몇 살이냐?"
"아마 60살 정도."
"난 몇 살일 것 같으냐?"
"······글쎄. 한 200살?"
재환은 대충 때려 맞추듯 말했다. 그러자 청허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틀렸다."
"몇 살인데?"
"천 살이다!"
이번에는 재환도 조금 놀랐다. 설마 그렇게나 늙었을 줄은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재환은 자신이 천 살쯤 된다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이제 너와 나의 차이를 알겠느냐?"
"······."
"네놈이 고작 60년 동안 찌르기를 아무리 많이 했어도 천 년이나 베기를 한 나에겐 이길 수 없단 말이다."
"내가 실제로 찌르기를 한 건 40년 정도야."
"아무튼!"
청허가 떼를 쓰듯 말했다.
"네놈은 나한테 절대로 못 이겨!"
재환이 미심쩍은 투로 물었다.
"정말 천 년이나 베기를 했어?"
"그렇다!"
"내가 보기엔 10년 정도밖에 안 되는 것 같은데."
그 말에 청허가 폭발했다.
악몽의 탑에서도, 위대한 땅에서도, 이곳 혼돈과 심연에서도······. 그는 단 하나의 베기만을 반복하고 또 반복해왔다.
물론 천 년간 매일 열심히 했다고 말하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 놀기도 했고, 빈둥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대체로는 열심히 했다.
정확히 1초에 한 번씩 정자세로 휘두르는 베기.
청허는 매일 8시간씩 그런 베기를 반복해 왔다.
그렇게 백 년쯤 되던 어느 날.
청허는 마침내 십억 번의 베기를 달성했다.
온몸에 충만히 차오르는 각성의 기운.
적응의 힘을 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경지로 접어들던 그 순간을, 청허는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었다.
10억 번을 달성한 이후부터는 그다지 열심히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해온 것을 합치면 50억 번은 족히 넘을 것이다.
50억 번의 베기.
그 베기가 만들어 낸 기적이 청허의 검신에 집약되고 있었다.
재환도 뭔가를 눈치챘는지 자세를 바꾸었다. 지금까지와는 완연히 다른, 엄청난 기술이 펼쳐지려 하고 있었다.
청허가 이를 갈 듯 소리쳤다.
"어디 이걸 맞고도 그런 말이 나오는가 보자!"
전신의 기감을 위협하는 날카로운 기운.
그 웅장한 영력에 재환의 눈이 좁혀졌다.
강하다.
그리고 청허의 검이 움직였다. 유려하고 빠른, 동시에 강대한 힘을 품은 검세. 이 연무장을 날려 버릴 수도 있을 만한 엄청난 에너지가 쇄도하고 있었다.
뒤이어 검과 검이 부딪치며 광풍이 몰아쳤다. 무사들이 질겁하며 달아났고, 둔중한 지진이 별궁 전체를 크게 울렸다.
재환은 방금 충돌로 인해 무려 일곱 걸음 이상 물러나 있었다. 청허와 충돌한 오른팔이 약간 저릿했다.
반면 청허는 세 걸음 정도만 물러난 채로 연무장의 중앙에 버티고 서 있었다.
"으하하하하핫! 거봐라! 내가 안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
"애송이가 제법이구나. 사실 네놈이 죽을까봐 조마조마했다."
청허는 재환이 별다른 상처가 없다는 것에 상당히 놀란 듯했다. 그러나 더 놀란 것은 재환이었다.
이 노인이 상당한 강자라는 것을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방금 재환이 사용한 것은 무려 '보통 찌르기'였다. 그런데 보통 찌르기를 쓰고도 이 정도로 밀린 것이다. 재환이 물었다.
"그 기술은 이름이 뭐지? 제법 강하더군."
"비범 베기다."
청허가 허리에 손을 척 얹은 채로 '비범'을 유독 강조하며 말했다. 이미 승부에서 이긴 듯한 태도였다.
"네놈의 기술도 제법 쓸 만하던데 그건 이름이 뭐냐?"
"보통 찌르기."
그 말에 청허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보통이라니, 실로 오만한 이름이구나. 그딴 이름을 붙이면 마치 그 기술보다 더 센 기술이라도 있는 것 같지 않으냐?"
"있어."
청허가 못 들은 척 껄껄 웃었다.
"애송이 네 기술에는 특별히 내가 이름을 다시 붙여 주마. 지금부터 그 기술의 이름은 '비범 찌르기'다. 그러니 앞으로는······."
"있다니까."
청허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뭐가 자꾸 더 있다는 것이냐?"
"더 센 기술이 있다고."
재환은 검을 고쳐 잡았다. 아직 혼돈에서는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기술이었다.
갑작스레 찾아온 적막. 청허는 눈앞에서 느껴지는 살기에 자기도 모르게 기감을 돋우었다. 어디선가 몰려드는 바람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이게 무슨······."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청허는 저와 같은 힘을 잘 알고 있었다.
혼돈 십방의 방주들?
아니다.
혼돈의 사대 성주들?
그들도 아니다.
그것은 마치, 망자를 연상시키는 힘이었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망자도 각성자도 이 세계의 규칙을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그들이 사용하는 힘은 서로 닮은 구석이 있으니까.
문제는 힘의 종류가 아니라, 힘의 세기였다.
청허는 모처럼 "심연"의 입구를 향하던 젊은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열매」를 찾기 위해 떠났던 여정.
결국 혼돈의 중심에 있는 「망자의 궁」에서 '혼돈의 왕'과 조우했던 그 날의 기억.
혼돈의 유일왕(唯一王).
모든 것을 파괴하는 재해.
물론 눈앞의 사내는 그 '왕'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청허는 재환을 보며 혼돈의 왕과 마주했던 공포를 떠올려야 했다.
저런 걸 벨 수 있을까?
청허의 몸이 떨렸다.
인간이 어떻게 저런 걸 벨 수 있단 말인가?
결국 공포를 못 이긴 청허가 입을 떼었다.
"자, 잠깐! 잠깐만!"
저 끔찍한 기술이 펼쳐진 후의 광경이 그의 뇌리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모든 것이 파괴된 수라장. 그 수라장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왕의 그림자.
"잠깐 기다려라!"
저 기술을 쓰면 이 별궁이 날아간다. 아니, 별궁만이 아니다. 내성의 절반 이상이 날아가 버릴 것이다. 어쩌면 그것도 모자라서······.
"그걸 써선 안 된다!"
재환은 칼자루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결국 청허가 달려가서 매달리듯 그를 붙잡았다.
"내, 내가! 내가 졌다, 이놈아!"
그제야 재환은 자세를 풀었다.
청허는 간신히 숨만 몰아쉬었다.
"허억, 허억. 대체 어떻게 된 놈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방금 본 것이 착각이라 믿고 싶었다. 고작 40년 동안 찌르기를 한 놈이 그런 찌르기를 만들어 냈다고? 청허는 믿을 수가 없었다.
"인정 못 한다."
"뭘?"
"너는 나를 속였다."
재환이 의아한 눈길로 청허를 보았다.
"너는 내게 60년을 살았다고 했다."
"맞아. 60년을 살았어."
"그리고 40년간 찌르기를 했다고 했지."
"40년간 찌르기를 했지."
청허가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개소리 마라! 너는 최소한 2천 년은 살았을 것이다!"
"아니라는 걸 영감도 잘 알 텐데."
청허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사실이었다. 2천 년이나 살아온 강자를 청허가 모를 리가 없으니까.
"고작 40년간 찌르기를 몇 번이나 했다고 그런······."
질문인 줄 알았는지, 재환이 선뜻 대답해왔다.
"100억 번 정도."
"헛소리 마라!"
산술적으로 말이 안 되는 횟수였다. 40년은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1초에 한 번씩 찌르기를 한다고 쳐도 10억 번을 겨우 채우는 세월이다.
그런데 100억 번이라니?
"대체 어떻게 40년간 100억 번을 했다는 것이냐?"
"열심히 하면 돼."
"개소리! 개소리다!"
청허는 재빨리 머릿속으로 숫자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이, 이······."
오랜만에 머리를 쓰려니 계산이 잘 되지 않았다.
결국 청허는 옆에서 멍하니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무사 하나를 불러 계산을 시켰다.
"계산 끝났습니다!"
"그래, 말해 봐라."
"사십 년간 100억 번의 찌르기를 하려면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잔다는 가정 하에 1초에 약 7.9번의 찌르기를 해야 합니다."
무사는 자신이 왜 이런 짓을 해야 하는지 영문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청허가 되물었다.
"1초에 일곱 번을 해도 불가능하단 말이지?"
"예, 불가능합니다."
"자네 생각엔 인간이 1초에 여덟 번씩 찌르기를 하면서 40년이나 살 수 있을 것 같나?"
"불가능합니다. 정신이 미쳐버리는 건 둘째 치고, 물리적으로도 불가능합니다."
청허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재환을 보았다.
"봐라! 말도 안 된다고 하지 않으냐!"
결국 재환이 입을 열었다.
"영감."
"왜!"
"영감은 1초에 여덟 번 벨 수 있지 않아?"
"물론 할 수 있지!"
"그럼 영감도 하면 되잖아."
"단순히 그런 문제가 아니지 않으냐! 그걸 계속해서 해낸다는 것은······!"
"하면 돼."
"안 된다!"
옥신각신하는 둘을 보며 무사는 억지를 쓰는 게 어느 쪽인지 도통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영감, 나는 1초에 여덟 번이 아니라 백 번이라도 찌를 수 있어."
"그러니까 그런 문제가······."
"천 번도 가능하지."
"······갑자기 무슨 헛소리냐? 대체 어떻게 1초에 천 번을 찌를 수 있다는 거냐?"
"어째서 검으로만 찔러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 말을 듣는 순간, 재환을 보던 청허의 눈빛에 깨달음 비슷한 것이 스쳐갔다. 그 깨달음은 이내 깊은 불신의 형태로 바뀌었다.
"잠깐, 설마······."
처음 재환을 보았을 때부터 느껴졌던 어떤 기운이 있었다.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예리한 가시 같은 기운.
지금까지 청허는 그 기운이 단지 재환의 성정을 반영하는 어떤 것이라 믿어 왔다.
가까이서 보자 그 기운은 매우 촘촘하고 세밀한, 수천수만의 가시처럼 보였다.
청허는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재환의 전신에서 예리하게 피어오르는 그 뾰족한 기운에 손을 갖다 대어 보았다.
은빛 피가 흘러나왔다.
그제야 청허는 깨달았다.
그것은 기세도 아니었고, 기운도 아니었다.
그것은 찌르기였다.
심상(心狀)의 형태를 넘어서, 하나의 형상(形狀)으로 자리 잡은 찌르기. 수많은 찌르기를 통해서 마침내 찌르기 그 자체가 되어 버린 사내.
"이럴 수가, 애송이 너는······."
이 세계에 대한 가공할 적의(敵意).
사내의 100억 번은 그 증오의 산물이었다.
이 사내는 지금도 매초 이 세계를 향해서 무수한 찌르기를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재환이 입을 열었다.
"말했잖아. 100억 번이라고."
갑자기 현기증이 몰려온 청허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믿을 수가 없었다. 이런 짓을 하는 사람이 어떻게 제정신일 수 있다는 말인가?
아니, 생각해 보니 이놈은······.
하루 동안 너무 많은 심력을 쏟은 청허는 갑자기 모든 것을 알 것만 같은 기분 속에서 까무룩 정신을 잃고 말았다.
Episode 6. 절망신의 (5)
그리고 잠시 후, 청허가 눈을 떴다.
"노인 공경 따윈 모르는 놈."
칼집에 맞은 눈덩이가 아직도 아팠다.
그럼에도 청허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아직 지지 않았다. 승부는 살아 있는 동안 계속되는 거니까."
재환은 가만히 청허를 바라보았다.
천 년이나 베기를 하며 살아온 노인이라 했다. 이만한 고집 없이는 불가능한 세월이었을 것이다.
"내가 천년을 살면서 깨달은 게 하나 있지."
"······?"
"결국엔 살아남는 놈이 이긴다는 거다."
"영감은 이미 죽었잖아?"
"천년 뒤에도 네가 살아 있다면 나의 패배를 인정하마."
재환은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품속에서 종이를 꺼냈다.
청허의 표정이 구겨졌다. 그 종이는 사실 대결이 시작되기 직전 청허가 제안한 '서약서'였다.
"이 종이, 잊었어?"
"······."
서약서를 발견한 청허의 표정이 사색이 되었다.
재환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그것을 읽었다.
"여기 뭔가 적혀 있는데 말이지. 나 절망신의 청허는 주어진 결과에 따라, 서약서의 내용을 충실히 이행할 것을 혼돈의 모든 미인들과 나 자신의 명예를 걸고 맹세······."
"젠장! 알았다! 알았어!"
승부에 패배한 쪽은 무엇이든 승자가 원하는 소원을 들어줄 것.
그것이 기록된 서약의 내용이었다.
"그래서 소원이 무엇이냐? 혹시나 나를 노예로 쓰겠다거나 하는 것이라면 절대 들어줄 수 없다."
"그딴 건 아냐. 당신 같은 노예 필요 없어."
"뭐, 뭐라?!"
"내 요구는 간단해. 내가 하는 질문들에 성심성의껏 답해줄 것. 그게 전부다."
뜻밖에도 소소한 요구에, 잠시 미심쩍어하던 청허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것도 아니고, 그저 질문이라면야 대답 못 해줄 것도 없었다.
"뭐, 좋다."
서약서에서 환하게 솟아난 빛이 재환과 절망신의의 몸에 흡수되었다. 서약의 이행이 시작된 것이다.
재환이 입을 열었다.
"영감, 거장의 탑이라는 게 대체 뭐지?"
거장의 탑. 일순 청허의 눈빛이 아득해졌다.
"애송아. 악몽의 탑이 뭔지는 알고 있겠지?"
재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악몽의 탑.
이 세계에 온 존재라면 그 탑을 모를 수 없었다. 그들을 이 세계에 끌어온 비극의 시작이 바로 그 탑이니까.
이 세계에는 '몽마'라는 종족이 있고, 그들은 '악몽의 탑'이라는 것을 만든다.
악몽의 탑.
어떤 의미에서 그보다 더 어울리는 이름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상품으로 치부되는 모든 존재에게 그 탑은 악몽 그 자체니까.
"몽마 놈들이 만든 탑에는 등급이 있다. S급부터 F급까지. 보통 「명장」이라든가 「도제」급의 몽마들이 만든 탑이 이러한 등급들을 받지."
메이칼에게도 들은 적이 있는 이야기였다.
오직 '단 하나의 완벽한 탑'을 만드는 것을 평생의 과업으로 삼는 종족인 몽마.
「명장」과 「도제」는 그들에게 헌정되는 칭호의 일종이었다.
무수한 명장과 도제들이 만든 탑은 몽마들의 조합인 "클리셰"에 의해 평가되며, 재배의 용이성과 재배 상품의 품질― 즉 전체적인 상업성을 면밀하게 고려해 그 등급이 결정된다고, 메이칼은 말했었다.
"보통의 몽마들은 A급 이상의 탑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지. 한 번 A급의 탑을 만들고 나면 조합에서 「명장」으로 인정받아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위대한 땅"의 재배자들에게 탑을 대여해 주는 것만으로도 평생 먹고 살 걱정이 없게 되거든."
위대한 땅의 귀족이라는 몽마들도 먹고 살 걱정은 해야 하는 모양이었다. 어쩐지 우스운 이야기였다.
"그런데 몽마들 중에는 탑의 상업성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존재들이 있다."
"돈을 많이 번 놈들인가 보군."
"비슷하지. 「도제」일 적에 이미 S급의 탑을 만들어 내서, 더 이상 상업적인 탑을 제작할 필요가 없게 된 놈들이다."
메이칼도 말했었다. 재능이라는 것은 인간뿐만 아니라 몽마들 사이에서도 해당되는 것이라고. 그 뛰어나다는 몽마들 중에도, 엄청난 재능을 가진 덕에 일찍이 「명장」의 정점에 오른 녀석들이 있다고.
"이 세계는 그들을 「거장」이라 부른다."
모든 몽마들의 정점.
13명의 「거장」.
"그럼 거장의 탑이라는 건 그놈들이 만든 탑들을 지칭하는 건가?"
"아니. 거장이 만들었다고 무조건 거장의 탑이라 부르는 건 아니야. 그놈들이 만든 탑 중에서도 「재배」와 전혀 상관없는 목적에서 만들어진 '특이한 탑'들만이 거장의 탑이라 불린다."
"왜 그런 탑들을 만든 거지?"
"이유는 나도 모르지. 거장들이 뭔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는 녀석들은 아무도 없어. 거장들은 하나 같이 '세계의 진실'을 탐구한다는 놈들이니까."
세계의 진실.
재환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청허가 계속해서 말했다.
"확실한 건 두 가지뿐이다. 이 위대한 땅 전역에는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 소수의 '거장의 탑'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탑을 클리어한 이들 중 드물게 '각성자'라 불리는 초월적 존재들이 나타난다는 것."
"말하는 걸 보니 영감도 '거장의 탑' 출신인 모양이군."
"그래."
청허가 씩 웃었다. 거장의 탑을 클리어한 것이 대단한 자랑거리라도 되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거장 '멜빌'의 4호 탑을 나왔다. 세상에는 「모비딕」이라고 알려져 있는 탑이지."
청허의 눈빛에 그림자 같은 것이 드리워졌다.
"1층부터 거대한 흰고래가 나타나는 탑이었지. 지금에야 우스운 난이도지만, 그때의 내겐 재앙 같은 탑이었다. 무림의 많은 고수들이 죽었고······. 내가 그 탑을 클리어한 것은 거의 기적이었지."
흰 고래라.
역시 탑이라는 건 한 가지 형태로만 만들어지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보아하니 네놈도 거장의 탑 출신인 것 같은데, 누가 만든 탑을 나왔지? 멜빌? 호르헤? 아니면 스칼지?"
거장들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름들.
재환이 입을 열었다.
"뮬라크. 그런 이름이었다."
재환은 처음으로 탑을 '아이템'으로 인식했을 때 나타났던 정보창을 떠올렸다. 그때 아이템의 정보창에는 분명 이렇게 쓰여 있었다.
―가칭 '후회의 성채'. 악몽의 제작자인 몽마 「뮬라크」의 2호작이다. 탑의 소환에 응한 자를 제작된 몽마의 꿈속에 빠뜨린다.
"...뮬라크라고? 허, 설마 뮬라크의 탑을 클리어한 각성자가 있을 줄이야······."
"뮬라크라는 자를 알고 있나?"
청허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내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는 "심연"에서 그를 만난 적이 있다."
"만난 적이 있다고?"
"엄밀히 말하면 만난 것이 아니라······."
청허는 잠시 머뭇거리다 표현을 바꾸었다.
"함께 다녔다고 말해야겠지."
청허는 뭔가를 헤아리는 듯 깊은 감회에 젖은 모습이었다. 그의 표정에서 재환은 '뮬라크'라는 이름이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조금은 어림할 수 있었다.
"허허, 그리운 날들이군."
결코 녹록하지 않았던 천년. 그 시간이 하나하나의 장면이 되어 청허의 무뎌진 망막 위를 흐르고 있었다.
그때 청허는 젊었고 패기에 넘쳤으며,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많은 동료가 있었고, 세계를 향한 끝나지 않는 호기심이 있었다.
희망이 있었다.
재환은 구태여 채근하지 않았다. 청허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노인이 살아온 천 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청허가 입을 열었다.
"나가서 좀 걷지."
*
선선한 밤공기가 폐부를 적셨다. 노점 거리를 걷는 동안 청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재환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자자, 한 잔들 하고 갑쇼!"
거리 곳곳에서 음식 냄새가 퍼지고 있었다. 주로 각수의 육류를 특수한 방법으로 가공한 꼬치들이었고, 옥수수나 바나나를 닮은 작물을 곁들인 것도 보였다. 어쩌면 이곳에서도 농사라는 게 행해지는지도 모른다.
농사라.
재환은 조금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왜냐하면 재환이 알기로, 혼돈에서는 딱히 음식을 챙겨 먹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는 이곳에 와 삼십 일 가까이 음식을 먹지 않았지만, 허기를 느낀 적이 없었다.
음식을 파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우울한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단순히 삶이 힘겹다거나 하는 표정들이 아니었다. 그보다도 더 본질적인 뭔가가 이들에게 결락되어 있는 느낌이 들었다. 재환의 생각을 읽은 듯 청허가 물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든 모양이군? 어째, 다들 살아 있는 것 같지가 않지."
"이미 죽은 사람들이니까."
그 말에 청허가 인상을 썼다.
"인간은 스스로 죽음을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결코 죽었다고 말할 수 없어."
재환은 새삼 이 세계의 '죽음'이 자신이 아는 '죽음'과는 다르다는 것을 실감했다.
청허의 말이 맞았다.
"혼돈"의 사람들에겐 아직 영혼이 남아 있다. 이곳 주민들에게도 이곳 나름의 생활이란 게 있는 것이다. 게다가 미노의 말에 따르면 이곳의 사람들은 희박한 확률로 다시 살아날 수도 있다고 했다.
"여기도 원래부터 이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청허가 막 "혼돈"에 왔을 때만 해도 고르곤 성채는 이 정도로 삭막하지 않았다.
"원래 "혼돈"은 축복의 세계였다. 위대한 땅의 전쟁에 지친 영혼들이 달콤한 휴식을 취하는 공간이었지."
혼돈의 사람들은 늙지 않는다.
먹지 않아도 죽지 않는다.
모든 존재는 자신의 삶에서 해방됨으로써 도리어 삶을 되찾았다.
전사들은 검과 활을 놓았다.
음유시인들은 전쟁이 아닌 평화를 노래했다.
"그때는 영혼 오염에 걸린 사람들도 지금보다 훨씬 적었고."
약자들은 서로 협력해서 각수들을 사냥했고, 뿔을 가루로 내어 서로 나눠 가졌다. 위대한 땅에서는 불가능했던 동맹이 이루어졌고, 종족들은 연대를 이루었다. 대부분의 존재들은 이곳의 삶에 만족하며 살아갔다.
정확히 말해,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그랬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Episode 6. 절망신의 (6)
걸음을 멈춘 청허가 야외 주점 의자에 털썩 걸터앉았다. 재환은 잠시 망설이다가 일단 청허의 곁에 앉았다. 청허는 멋대로 술과 안주를 주문하며 말했다.
"크핫, 가게가 망해서 슬프겠구나."
누구를 향해 말하는 것인가 싶었는데, 탕― 하고 도마에 칼을 놓는 소리와 함께 대답이 돌아왔다.
"신경 끄쇼, 영감."
뜻밖에도 야외 주점의 주인은 미노와 함께 있었던 클레어라는 여인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 거리는 낮에 사건이 터졌던 북부 노점 거리였다.
청허가 킬킬 웃었다.
"당분간은 야외 노점으로 가는 거냐?"
"어쩔 수 없지. 어떤 녀석이 내 가게를 박살 내놨으니."
"낮에 그런 일을 당하고도 가게를 열다니, 아주 돈에 환장했구만."
"술이나 처먹어, 영감."
클레어는 재환 쪽을 흘끗 보고는 음식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각수 양념 꼬치 한 대접과 일각주 한 병이 나왔다.
"크으, 좋구만."
병째로 술을 들이켠 청허가 깊은 트림을 뱉으며 말했다.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혼돈은 원래 평화로운 곳이었다는 얘기까지."
"아아, 그랬지."
청허가 씁쓸하게 웃었다.
"몹시 평화로웠지, 그때는."
평화.
의아한 말이었다. 청허의 말대로 모든 것이 평화로운 곳이었다면, 모두가 영원 속에서 안락함을 누리는 세계였다면, 왜 "혼돈"은 이렇게까지 몰린 것인가.
"굳이 말하자면 모든 원흉은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지."
청허는 자신의 술잔을 흔들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는 연거푸 병나발을 불더니 안주를 집어 먹었다.
먹고 마시고, 다시 먹고 마시고.
"······무슨 말이지?"
자꾸 술을 마시는 것으로 봐서 술과 관련된 일이 아닐까, 간신히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곳곳에서 술에 취해 시비가 붙은 주정뱅이들의 고함이 들려왔다. 술이라······.
재환이 입을 열었다.
"술에 취해서 다들 싸우기라도 한 건가?"
그 말에 청허가 입으로 술을 뿜더니 껄껄 웃기 시작했다.
"크하하핫! 차라리 그랬다면 다행이겠지!"
클레어가 더러운 영감이라며 짜증을 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아직 어린놈이라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소매로 입을 쓱 훔친 청허가 말을 이었다.
"하긴, 한평생 찌르기만 백억 번 한 녀석이 인생에 대해 알면 얼마나 알겠는고."
"인생?"
"네놈은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느냐? 이곳에서는 음식 같은 것을 먹을 필요가 없다."
혼돈의 사람들은 굳이 음식을 먹을 필요가 없었다.
이곳에서는 굶어 죽지 않으니까.
그런데도 이들은 끼니때가 되면 밥을 먹는다. 마치 그게 당연하다는 것처럼.
"게다가 술이란 것도 이 모양이다. 이곳의 술은 절대 취하지 않아. 그저 비슷한 구색만 낼 뿐이지."
재환은 일각주라 불리는 술을 한 모금 따라 마셔 보았다. 순간적으로 알코올의 향이 퍼지기는 했지만 정말로 취하는 느낌은 없었다. 이 술들은 향만 비슷하게 흉내 낸 논알콜 음료나 마찬가지였다.
재환은 돌연 의문이 들었다.
"그럼 저들은 대체 뭐지?"
재환의 시선이 가 닿은 곳에 잔뜩 취기가 올라 서로의 멱살을 붙잡고 흔드는 예의 주정뱅이들이 있었다.
"네놈 생각엔 뭔 거 같으냐?"
"취객들 같은데······."
"취객? 취하지 않는 술을 마시고서 말이냐?"
재환은 가슴 속 어딘가가 서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다시 한번 주정뱅이들을 자세히 관찰했다. 분명 얼굴도 붉어져 있고, 흥분해 있으며, 콧김도 뿜고 있다. 하지만······.
저 풍경에는 중요한 무언가가 빠져 있었다.
취한 사람들의 눈빛이라기엔 지나치게 명정한 눈동자.
재환은 그제야 깨달았다. 그들은 취한 흉내를 내고 있는 것뿐이었다.
왜.
취하지 않는 술을 말없이 들이켜는 청허를 보며, 또 취기 없는 드잡이질을 반복하는 사람들을 보며, 재환은 차츰 그 해답을 알 것 같은 기분이 되어 갔다.
영원의 삶.
죽음도 없고, 전쟁도 없던 평화로운 세계.
누구였을까. '죽음'이 있는 삶의 간절함을 처음으로 그리워한 것은. 재환이 말했다.
"생을 흉내 내는 건가······."
죽음이 있는 유한한 삶.
이상한 일이었다.
죽음에서 벗어나자 죽음이 있는 삶이 그리워지다니.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그럼에도 재환은 그 심정을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저들은 '진짜 인생'을 다시 한번 살고 싶어졌던 것이다.
육체가 있고, 심장이 뛰는 삶. 음식을 먹지 않으면 죽고, 술을 마시면 취하는 삶. 그들은 그런 삶에 다시 한번 취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청허가 클클 웃으며 말했다.
"그래, 맞다. 진짜 인생. 바로 그게 원흉이었지. 어느 날, 이 혼돈에도 '진짜'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나타난 거다."
청허는 일각주를 한 병 더 주문하며 말을 이었다.
"물론 엄밀히 말하자면, 그 '진짜'를 그리워하는 이들은 수천, 수만 년 전에도 있었다. 다만 그 수가 많지 않았을 뿐."
"······갑자기 많아진 건가?"
"쌓인 거지. 아득한 세월 동안."
그때까지 혼돈에서 세월을 쌓은 존재들이 취하는 행동은 둘 중 하나였다. 어느 날 혼자서 성채를 나와 조용히 영멸(永滅)하거나, "심연"의 입구가 있는 혼돈의 중심부를 향해 돌아오지 않는 여행을 떠나거나.
그런데 어느 날, 새로운 행동을 취한 사람들이 나타났다.
영원의 삶에 염증을 느낀 사람들. 진짜를 그리워한 사람들이 모여서 일을 계획한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바로 '심연 원정대'였지. 다시 진짜 삶을 되찾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만든, 불가능을 꿈꾸는 원정대."
청허의 깊어진 눈을 보며, 재환은 불현듯 깨달았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이 노인은 한때 그 원정대의 일원이었던 것이다.
"왜 하필 심연으로 향한 거지?"
"「열매」를 찾기 위해서."
"열매?"
"「부활의 열매」를 말하는 거다. 보통 「열매」라고 통칭되지."
그제야 재환은 종종 의심을 통해 들려오던 「열매」라는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미노의 말마따나, 이 세계에는 사자(死者)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단 한 가지의 방법이 존재했다.
"심연"의 끝, 환상수의 가지에 매달려 있다는 부활의 열매를 먹는 것.
심연 원정은 그 열매를 찾기 위한 여정이었다.
"그땐 나도 젊었지. 겨우 150살밖에 안 됐었으니까. 마침 각성도 했겠다, 두려울 것이 없는 나이였다."
"그래서 심연 원정대에 참가했던 건가?"
"맞아."
재환은 150살의 청허를 머릿속으로 그려 보았다. 물론 잘 그려지지 않았다. 그때도 청허는 분명 노인이었을 터다. 그렇게 생각하자니, 청허가 말하는 젊음 운운이 어쩐지 기이하게 여겨졌다. 이 노인은 '젊었던 시절'부터 이미 노인이었던 것이다.
그때, 뭔가가 떠오른 재환이 입을 열었다.
"혹시 뮬라크와 함께 했다는 게 그건가?"
청허가 제법이라는 듯 눈을 흘겨 뜨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몽마 '뮬라크'는 내가 참가했던 심연 원정대에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원정대를 이끄는 대장이었지."
*
청허는 지금도 그 시절의 일을 어제 일처럼 기억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심연 원정대에 지원하고 뮬라크를 만났던 시절의 일.
―각성자라, 흥미롭군요.
그것이 청허를 만난 뮬라크가 처음으로 던진 말이었다.
―게다가 감정을 버리지 않은 채로 불완전한 각성을 하시다니······. 정말 특이한 각성의 길을 걸으시는군요. 힘드시겠습니다.
청허는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 말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각성의 길을 걷는 자는 모두 어느 순간에 이르면 인간으로서의 자아를 버려야만 한다. 진정한 세계를 보기 위한 대가라고나 할까.
하지만 청허는 여전히 '인간'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는 함께 각성한 동료들보다 뒤처졌고 약해졌다. 그래서 죽었다. 혼돈으로 왔다.
―쓸데없는 소리는 집어치워.
―죄송합니다. 불편한 화제였나 보군요.
불편?
어디 화제만이 불편할까. 사실 청허는 뮬라크를 보는 순간부터 불쾌한 심경을 감출 수가 없었다.
청허 역시 「상품」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위대한 땅에서 수십 년을 살았지만, 악몽의 탑과 관련된 존재들에 대한 증오심은 여전했다.
그 증거로 위대한 땅을 여행하는 내내 청허는 만나는 악마들을 모조리 족치며 살아왔다.
그러나 아직 몽마는 죽인 적이 없었다.
―몽마가 "심연"에는 무슨 일로 가는 거지? 골방에 처박혀서 탑이나 만들던 놈들이.
그가 알기로 눈앞의 몽마는 죽은 존재도 아니었다. 뮬라크는 몽마들의 보물인 「좁은 문」을 통해서 생자(生者)인 채 "혼돈"에 들어왔던 것이다.
―「재배」의 일로 기분이 상하신 모양이군요.
뮬라크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에 관해서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모든 몽마를 대표해서 제가 사과한다고 해도 소용없겠지요.
―집어치워라.
―평생 제가 짊어지고 가야 할 업이라 생각합니다.
탑을 만든 것을 후회하는 몽마라니, 당연히 조롱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몽마는 들어본 적도 없으니까.
―믿지 않으시겠지만, 제가 이 "환상수"에 들어오게 된 것도, "심연"으로 가게 된 것도 바로 그 '탑' 때문입니다.
―뭐?
그리고 다음 순간 뮬라크가 했던 말을 청허는 지금까지도 잊지 못했다.
―모든 「재배」를 끝내는 것. 그게 제가 이 '원정'에 참가하게 된 목적입니다.
거기까지 이야기를 듣던 재환이 물었다.
"모든 「재배」를 끝낸다?"
"음, 분명 그렇게 말했지. 정말 특이한 놈이었다고나 할까······."
"원정은 성공했나?"
"일단은 성공했다고 봐야겠지. 나는 도중에 뒤처지는 바람에 "심연"의 초입까지밖에 가보지 못했지만······. 뮬라크는 환상수의 꼭대기에 도달한 것 같더군."
"그걸 어떻게 알지?"
"가지에서 「열매」가 떨어지기 시작했거든."
하늘에서 수많은 열매가 떨어지던 그 광경을 청허는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했다.
그들에게 희망을 되돌려 줄 황금빛 유성우의 향연.
"운이 좋았다고 해야겠지. 덕분에 원정대는 제각기 열매를 한 아름씩 안고 "혼돈"으로 돌아올 수 있었으니까."
"그랬군."
그런데 거기까지 듣다 보니 이상한 점이 있었다. 원정의 성공으로 「열매」라는 걸 얻었다면 이 노인은 왜 아직도 "혼돈"에 남아 있는 것인가?
그때 대화에 끼어든 이가 있었다. 클레어였다.
"죽었어도 말은 똑바로 해야지 영감. 원정이 성공했다고?"
"네년이 웬일로 조용한가 싶었다."
"그 원정은 실패했어. 영감도 인정하는 바 아니었어?"
"······그때 살아 있지도 않았던 녀석이 뭘 안다고."
인상을 구긴 클레어가 다른 테이블로 안주를 날랐다. 청허가 에잉, 하며 술을 들이켰다. 재환이 물었다.
"원정이 실패했다니 무슨 뜻이지?"
"뭐, 말 그대로다. 그 원정은 실패했어."
"방금은 성공했다고 하지 않았나?"
"······「열매」를 얻는 데까지는 성공했지."
함의는 명백했다. 열매를 가지고 오는 도중,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다는 뜻이다.
""혼돈"으로 돌아오는 입구에서 우릴 기다린 놈들이 있었다."
기진맥진한 청허와 원정대를 기다리고 있었던 자들. 오랜 세월 동안 "혼돈"에 머물렀지만 "심연"으로 들어갈 용기는 없었던 자들. 그럼에도 원정대의 그 누구보다도 강했던 이들. 청허가 말했다.
"위대한 땅의 역대 군주들과 가주들이었지."
청허의 잔잔한 눈빛에 처음으로 분노 비슷한 감정이 스쳤다. 수백 년 전의 일임에도 청허는 아직 그 순간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원정대에는 사성의 성주들도 있었고 십방의 방주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덤벼도 놈들을 이길 수는 없었어. 솔직히 말해서 상대도 안 됐지."
무시무시한 힘의 차이. 차원이 다른 영압. 평생을 쫓아가도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아득한 세월의 간극.
술잔을 쥔 청허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열매」를 빼앗긴 거로군."
Episode 6. 절망신의 (7)
청허는 한동안 말없이 일각주를 들이켰다. 분명 취하지 않는 술일 텐데도 청허의 동공은 점차 탁해지고 있었다. 심지어 목소리도 어딘가 꼬부라졌다.
"놈들은 지금도 죽을 때마다 그때 얻은 열매들로 되살아나고 있다. 아예 놈들을 위한 "재생궁(再生宮)"이라는 장소가 따로 있을 정도지. 군주나 오대 세가의 수뇌들은 죽으면 그곳의 소환장으로 가게 되어 있어. 그리고 순서를 기다렸다가 다시 되살아나는 거야."
"······그렇군."
"클클.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는 녀석들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던 거지. 빌어먹을."
재환은 새삼 "혼돈"의 거리를 둘러보았다.
무기력한 우울감이 만연한 거리.
거리의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이 세상에는 분명 「열매」라는 것이 있고 그것을 이용해 부활하는 자들도 있다는 것을.
그러나 동시에 사람들은 알고 있다. 그들이 원하는 '진짜 삶'은, 그 망할 「열매」는, 언제나 그들의 영혼이 결코 닿지 못하는 장소에 있다는 것을.
그래서 그들은 절망한 것이다.
재환은 잠시 사람들을 바라보다 물었다.
"그럼 뮬라크는 어떻게 됐지."
"...."
""환상수"의 꼭대기에서 녀석은 뭘 본 거지?"
반복된 물음에도, 청허는 대답이 없었다.
재환은 청허 쪽을 돌아보았다.
"어이, 영감."
재환이 청허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이건 또 무슨 장난인가 싶었다. 청허가 테이블에 코를 박은 채로 완전히 뻗어 있었다.
혼돈의 술에 취기가 없다고 한 것은 영감 본인이 아니었나? 그렇다면 이 영감은 대체 왜 뻗은 것인가?
"소용없어. 저 영감은 정말로 취하거든."
어느새 돌아와 접시를 닦던 클레어가 말했다.
"······취해?"
"이유는 모르겠지만 저 영감은 술을 마시면 정말로 뻗어 버려. 아무도 안 취하는 술을 마시고 취하다니, 정말이지 대단한 능력이라고나 할까."
재환은 코까지 붉어진 채 드르렁드르렁 코를 고는 청허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얼굴의 주름 하나하나에 배인 세월이 있었다.
천년을 살아온 사람의 얼굴.
그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어쩐지 마음이 이상해졌다.
어쩌면.
천 년 동안 가짜 인생을 연기해 온 자는, '가짜'를 '진짜'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되는 것은 아닐까.
클레어가 입을 열었다.
"뮬라크에 관한 이야기가 궁금한 거지?"
"당신도 뮬라크에 대해 알고 있나?"
"이 고르곤 성채에 「심연 원정대」에 관해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저 영감이 허구한 날 취해서 지껄이는 이야기니까."
클레어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몽마는 사라졌어."
"사라졌다고?"
"원정이 끝난 이후 그 몽마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거든."
클레어는 잠시 사이를 두고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영감한테 듣기로는 그 몽마가 무슨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던데······."
"그게 뭐지?"
"뭐라더라······."
접시를 벅벅 닦으며 한참이나 생각하던 클레어가 이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실패했습니다."
그 말의 어조가 너무나 그럴듯해서, 재환은 순간 이 여자가 뮬라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맞아. 그런 말이었어. 나는 실패했습니다. 그렇게 말했다지."
실패했다······.
의미가 불분명한 말이었으나, 짐작할 길이 전혀 없는 말도 아니었다.
재환은 생각했다. 심연의 끝에 도달한 뮬라크는 무슨 일인가를 겪었고, 「열매」는 얻었으나 「재배」는 막지 못한 것은 아닐까.
"그게 전부인가?"
"음, 그다음에 뭔가가 더 있었는데······."
클레어는 깍둑썰기를 반복하며 계속해서 뭔가를 골몰하는 듯했으나,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때, 노점의 옆 좌석에 누가 쓰러지듯 걸터앉는 것이 보였다. 아까 뒤쪽에서 드잡이질을 벌이던 주정뱅이 중 하나였다.
"하, 이 영감님 또 취하셨구만."
어딘가 익숙한 얼굴이었다. 자세히 보니, 그는 얼마 전 북쪽 검문소에서 재환과 시비가 붙었던 경비병이었다.
이름이 제임스라고 했던가.
마침 잘됐다는 듯, 클레어가 입을 열었다.
"어이, 주정뱅이."
"뭐요."
"혹시 몽마 뮬라크가 남겼다는 말, 아는 거 없냐?"
"뮬라크? 「재배」를 끝내겠다고 설치던 그 미친 몽마?"
"그래 인마."
"그거 이 영감님이 지어낸 소설 아뇨? 세상에 그딴 몽마가 어디 있어?"
팬으로 머리를 얻어맞은 제임스는 돌연 뭔가가 생각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나는 실패했지만, 동시에 실패하지는 않았다······. 이거 말하는 거 아뇨?"
"아아, 맞아! 그거!"
"젠장 더럽게 아프네. 근데 그건 왜 묻는 거요?"
"지금 네 옆에 있는 놈이 궁금해하기에."
그 말에 제임스가 재환 쪽을 흘끗 바라보았다.
"어, 구면이네."
정말 모르고 있었다는 듯, 뻔뻔한 인사였다. 제임스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을 이었다.
"안 그래도 찾아다녔다. 며칠 전에 네 녀석 때문에 당한 것만 생각하면······."
제임스가 이를 갈듯 중얼거렸다. 분위기로 봐서는 또 귀찮은 일이 생길 느낌이었다. 또 드잡이질을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제임스의 입에서 뜻밖의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아까 낮에는 고마웠다."
제임스는 재환의 시선을 피하며 말을 이었다.
"소장님 이야기다. 네가 아니었으면 우리 소장님은 죽었을 테니까."
잠시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제임스는 청허가 마시던 술을 빼앗아 벌컥벌컥 들이켜더니 클레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줌마. 여기 이 친구 술값은 내가 내지. 얼마 내면 돼?"
"집어치워. 어차피 저놈한테 술값 받을 생각 없으니까."
"하하, 뭐야. 아줌마도 양심은 있는 모양이지?"
"행패 부리지 말고 꺼져."
제임스가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이, 뭐 하는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고르곤에 들어올 땐 무조건 북쪽으로 들어오도록 해라. 이제 얼굴도 아니까 증명서 같은 건 받지 않으마."
그는 어쩐지 멋있는 포즈로 뒤돌아서면서 작은 목소리로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물론 우리 소장님한텐 비밀이다."
흔해 빠진 이름의 제임스가 조금씩 멀어져 간다.
신경질적인 클레어의 도마질 소리와, 곤히 잠든 청허의 코 고는 소리가 번갈아 가며 들려왔다.
먹을 필요가 없는 음식들이 만들어지는 소리. 마셔도 취하지 않는 술을 들이켜는 소리도 들려왔다.
그 어떤 구원도 남지 않은 세계.
진짜가 없는 곳에서 진짜를 연기하는 소리들. 아름다운 음악이나 듣기 좋은 멜로디는 아니었으나, 간절함이 사라져 버린 세계에서 여전히 삶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내는 소리였다.
뭘까, 이 느낌은.
재환은 자신의 기분이 낯설었다.
이 기분은 「이해」가 아니었다.
정확히는 오해라든가, 착각에 가까울 것이다.
―부디 이 세계를 포기하지 말아 줘요.
그걸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재환은 그 순간 뭔가를 이해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때 멀리서 누군가가 다급한 표정으로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재환도 익히 알고 있는 남자였다.
멸마대주?
그는 반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부하들을 이끌고 노점 거리를 휩쓰는 중이었다.
"신의! 어디 계십니까! 신의!"
잠시 후, 재환과 청허를 발견한 멸마대주가 숨을 몰아쉬며 다가왔다.
"귀인도 함께 계셨습니까?"
멸마대주는 재환에게 눈인사를 하더니 청허를 바라보았다.
"하, 빌어먹을! 이런 꼴이시니 연락이 안 되셨군. 신의! 일어나 보십시오! 신의!"
아무리 흔들어도 청허는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재환이 멸마대주를 향해 물었다.
"무슨 일이지?"
"성주님께서 갑자기 폭주하셨습니다. 보통 일주일 단위로 있는 일인데, 오늘은 기이하게도······."
아마 성주와 관련해 청허만이 해결할 수 있는 어떤 일이 터진 모양이었다.
다음 순간, 내성 쪽에서 작은 폭발음이 들렸다.
멸마대주의 안색이 하얗게 바뀌었다.
"이런······!"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사악하고 강력한 기운. 잔야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영압. 아니, 지금까지 재환이 상대한 그 누구보다도 더 강대한 힘이었다.
재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랬나. 성주는 그런 상태였군.
사실 유르헨이 '성주를 구해 달라'라는 말을 했을 때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구해 달라'라는 말의 뉘앙스가, 어쩐지 무력과 관련된 게 아닌 것처럼 느껴졌던 까닭이다.
내성의 아래쪽······ 지하인가.
재환은 「의심」 통해 내성을 들여다보았다. 이렇게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특이하게 생긴 성채였다. 마치 거대한 짐승의 뱃속 같다고나 할까. 짐승의 뱃속에서도 가장 깊은 곳. 저 아득한 기저에서 뭔가가 아른거리고 있었다.
「의심」을 통해서도 읽을 수 없는 검은 형체.
흐느적거리는 촉수와 거대한 입을 가진 괴물.
재환은 그 형체가 무엇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망자.
그랬다.
고르곤의 성주는 지금 망자화가 진행 중이었던 것이다.
까마득한 지하에서부터 전해지는 진동.
무언가 끔찍한 것이 눈을 뜨려 하고 있었다.
불온한 기운이 넘실거리는 내성을 보던 멸마대주가 뭔가 결심한 듯 재환 쪽을 보았다.
"귀인! 귀인께서도 '망자 베기'가 가능하시지 않습니까?"
재환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그냥 흉내만 낸 것뿐이야. 난 절대 이 영감처럼 할 수 없다. 배운다면 모를까······."
그 말에 멸마대주의 낯빛이 창백하게 물들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성주님이······."
이제 믿을 것은 신의뿐이었다. 그리고 신의는 취한 채 너부러져 있었다.
그때, 재환의 기감에 어떤 영압들이 잡혔다.
내성을 향해 움직이는 무수한 영압들.
영압들이 품은 기운은 재환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낮의 금천방이란 놈들인가.
재환은 늘어진 청허를 업고 멸마대주와 함께 내성 쪽으로 달렸다.
내성 쪽에 가까워질수록 대단한 영압이 느껴졌다. 낮에 느꼈던 영압의 수십 배는 되는 듯했다.
아마도 이것이 성주란 자의 진짜 힘이리라.
"성주는 어떤 사람이었지?"
뜻밖의 질문이었는지, 멸마대주가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좋은 분이셨죠."
좋은 사람이라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성채의 마지막 희망이라든가, 위대한 고르곤의 주인이라든가 하는 이야기도.
"성주님은 고르곤의 살아 있는 신화였습니다. 신의와 함께 「심연 원정대」에 참가했던 몇 안 되는 분이시니까요."
"심연 원정대?"
재환이 다음 말을 잇기도 전에 누군가가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하나같이 움직임이 날렵하고 재빠른 것이, 평범한 강자들이 아니었다. 그들 중 누군가가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네놈이 '망자 베기'를 한다는 녀석이냐?"
이어서 재환의 「의심」에 밀어들이 걸려들었다.
[이놈이 확실한가?]
[확실해. 낮에 내총관과 접촉하는 걸 봤어.]
[겉으로 봐서는 그냥 무적응자인데. 이런 놈이 망자 베기를 한다고?]
[사실 나도 헛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명령이 떨어졌으니 죽여야지. 불쌍한 녀석, 완전 개죽음이군.]
그들을 본 멸마대주의 표정이 기이해졌다.
"절각대주(折角隊主)에 방각대주(防角隊主)까지? 여긴 무슨 일인가? 자네들은 외성 담당이 아닌가?"
"오랜만이군. 멸마대주."
멸마대와 암영대가 내성 소속이라면, '절각대'와 '방각대'는 외성에 배치된 대대들이었다.
내성의 대대들보다 수준은 떨어지지만, 전면전이라면 멸마대나 암영대에도 결코 밀리지 않는 정예들.
눈앞의 두 사내는 그 대대의 수장들이었다.
"길을 비켜 주게. 자네들도 알지 않은가? 한시가 급한 상황일세."
"그건 곤란하다."
"어째서?"
"명령이다.
""명령? 누구의 명령 말이냐."
절각대주와 방각대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멸마대주는 그 침묵의 의미를 바로 알아들었다.
"네놈들, 지금 역천(逆天)을 하겠다는 뜻이냐?"
"역천이라······."
절각대주가 가늘게 웃었다.
언제부터였을까. 그들의 팔에 황색의 완장이 펄럭이고 있었다.
"우리에게 하늘은 오직 금천(禁天)뿐이다."
Episode 7. 고르곤의 주인 (1)
「하늘이 열리자 벼락이 쏟아지고
비바람을 동반한 북풍이 몰아쳤지
고르곤 처녀들의 치마가 모두 뒤집어졌다네
그 광경을 다시 한 번만 볼 수 있다면···」
―시인 유프라테스 著, 「세게 찌르기」 中
***
금천.
그 말이 지시하는 바가 너무나 명백하여 멸마대주는 콧수염을 부르르 떨었다.
"설마 금천방이 성채 내부까지 마수를 뻗쳤을 줄은 몰랐군."
멸마대주는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았다. 5차 적응자의 웅장한 영력이 터져 나왔다.
암영대주와 함께 대주들 중 최고로 손꼽히는 실력자가 그였다. 설령 절각대주와 방각대주가 함께 덤벼들어도 그에게는 이길 수 없었다.
지금까지는 그랬다.
"외성 녀석들이 많이 컸구나. 내가 누구인지 알고 덤비는 거냐?"
"멸마대주, 아직도 우리가 예전 같다고 생각하면 곤란하지."
멸마대주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가 알기로 절각대주와 방각대주는 4차 적응자 수준이었다.
그런데 지금 흘러나오는 저 영력은 5차 적응자인 자신에게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수준이었다.
"어떻게······."
재환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들에게서 풍기는 사이한 기운은 낮에 잔야라는 놈이 보여 준 그것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었다.
망자를 닮은 힘.
그대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5차 적응자가 둘이나 달려들자 제아무리 멸마대주라도 감당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틈을 노리는 절각대와 방각대의 지원도 만만치 않았다.
결국 피를 토하며 물러선 멸마대주가 재환의 앞을 막으며 소리쳤다.
"귀인! 달아나시오. 여긴 어떻게든 내가······!"
"이것 좀 들고 있어."
"예?"
멸마대주는 갑작스레 무거워진 등에 깜짝 놀랐다. 코를 고는 신의가 어느새 등에 얹혀 있었다.
재환은 손목을 풀며 앞으로 나섰다.
"말했지만 나는 사람 살리는 건 잘 못 해. 그건 그 영감 몫이야."
예상치 못한 상황에 잠시 주춤하던 방각대와 절각대가 이내 재환을 포위하듯 둘러쌌다.
필두에 서 있는 대주들이 서로를 향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재환은 그들을 보며 조용히 독불을 뽑았다.
"하지만 죽이는 쪽이라면 얘기가 다르지."
*
내성의 지하 감옥.
내총관 유르헨은 착잡한 표정으로 감옥 안쪽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신의가 늦다.
각수의 뿔로 만들어진 내성 감옥의 쇠창살이 부서져 나뒹굴고 있었다. 입구로 가는 문에서 사악한 기운이 넘실거리며 흘러나왔다.
저 안에 무엇이 있는지, 유르헨은 잘 알고 있었다.
한때 고르곤의 성주였던 이. 혼돈의 유일왕(唯一王)을 제외하면 가장 왕의 칭호에 가까웠던 남자.
그러나 이제는 혼돈 최악의 망자로 거듭날지도 모르는 괴물.
그 존재가 저 안에 있었다.
유르헨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성 지하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이 성채의 최고 관료들뿐이었다.
내총관 유르헨과 외총관 마이한을 필두로, 내외성의 하부 조직을 담당하는 열 명의 각주(角主) 전원이 와 있었다.
유르헨은 그들 하나하나를 유심히 살피며 생각했다.
어째서 성주가 지금 폭주한 것일까.
현재 성주의 영혼은 신의의 '망자 베기'로도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심각하게 오염된 상태였다. 하지만 '망자 베기'의 효과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어서, 한 번 '망자 베기'를 하고 나면 적어도 일주일은 버틸 수가 있었다.
성주의 강대한 정신력 덕분이었다.
오염의 정도가 지나쳐 완전한 회복은 불가능했지만, 망자가 되는 것은 아슬아슬하게 면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일이 터지고 말았다.
"아직 망자 베기를 한 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신의가 다녀간 것은 오늘 아침의 일이었다. 망자화 속도가 느려지는 것도, 기운이 잦아드는 것도 모두 확인했다.
그런데 어째서?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유르헨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한 달만 더 버티면 성주를 치료할 수도 있었다.
원래라면 시도조차 할 수 없을 계획이 오늘 막 수립된 상황이었다. 모두 재환이라는 의문의 사내 덕택이었다. 신의는 말했다.
―지금 당장은 무리다. 그놈의 망자 베기는 아직 흉내만 내는 수준이야. 하지만 한 달 뒤라면 기대해 볼 만하겠지.
유르헨은 이 고르곤에 찾아온 기적에 감사했다.
―한 번도 시도해 본 적은 없지만 두 명이라면 가능할지도 몰라. 더군다나 그 녀석이라면······.
유르헨이 해야 할 일은 이제 시간을 버는 것뿐이었다. 외총관과 각주들의 압력으로부터 어떻게든 한 달이라는 시간을 버는 것.
그러나 그가 벌 수 있었던 시간은 하루도 채 되지 않았다.
유르헨은 날카로운 눈으로 각주들을 노려보았다.
설마 이들 중 재환 씨의 존재를 아는 이가 있단 말인가?
유르헨은 이미 성채 내에 배신자가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반년 전, 외성 시찰을 나갔던 성주가 난데없이 영혼 오염에 걸려 실려 왔을 때부터 그러했다.
"내총관, 무슨 할 말이라도?"
유르헨의 시선을 받은 외총관 마이한이 말을 걸어왔다. 이곳에서 유르헨 다음으로 성주를 오랫동안 보필한 관료이자, 차기 성주에 가장 가까운 이.
무덤덤한 표정의 외총관은 속내를 읽을 수가 없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싱거운 대답에 외총관이 입술을 실룩이며 말했다.
"다들 긴장하시오. 중요한 국면이니까."
총관들의 눈치만 살피던 각주들이 침을 삼켰다. 모두 고르곤에서는 내로라하는 적응자들이었지만, 지금만큼은 긴장한 티가 역력했다.
서슴없이 발걸음을 옮기는 외총관을 유르헨이 붙잡았다.
"위험합니다. 신의가 오면 돌입하시지요."
"이 이상 지체하면 우리 고르곤은 끝장이오."
"어차피 신의가 없으면 망자 베기를 할 수 없습니다. 성주를 죽이기라도 할 셈입니까?"
"성주를? 우리가 모두 달려들어도 성주를 이길 수 없다는 걸 잘 알지 않소."
"그럼 왜······."
"방법이 있소."
방법?
그 말에 각주들 몇몇이 웅성거렸다. 그러나 대부분은 태연한 얼굴이었다. 마치 지금부터 무슨 일이 벌어질지 잘 알고 있는 사람들처럼.
"「망자 봉인」을 실시하겠소."
"안 됩니다! 그건 마지막 수단입니다!"
"더 늦으면 돌이킬 수 없소."
「망자 봉인」.
강력한 힘을 가졌던 영혼이 오염되어 망자가 되려 할 때, 그 영력만이라도 보존하기 위해 사용하는 최후의 수단. 망자 봉인은 이 세계에서 오직 녹명가만이 가능하다고 알려진 비술이었다.
"하지만 망자를 봉인할 망혼석이 없지 않습니까?"
"내총관, 모두 알고 있으니 이제 숨기지 마시게."
외총관이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망혼석을 가지고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으니까."
그 말에 유르헨의 안색이 급변했다.
...대체 어떻게?
잠시 후, 감옥의 바깥쪽에서 몇몇 인원들이 검은색 상자를 들고 나타났다. 유르헨은 그 상자를 알고 있었다.
낮에 재환으로부터 받은, 망혼석이 들어 있는 상자였다.
망혼석에서 흘러나오는 오염의 기운을 피하기 위해, 상자는 영력에 의해 허공을 부유하는 채로 옮겨지고 있었다.
유르헨은 상자를 옮기는 자의 얼굴을 바로 알아보았다.
"암영대주?"
설마 자신의 명령을 받는 수족이 배신자였을 줄이야. 유르헨으로서는 생각조차 못한 일이었다.
암영대주는 유르헨의 시선을 피한 채로 외총관에게 망혼석을 양도했다.
"고르곤의 미래가 걸린 일이오. 어찌 이런 것을 숨겨 놓고 독점하려 하셨소?"
유르헨은 당신들을 의심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지금으로서는 명분이 없었다.
성주는 폭주했고, 신의는 오지 않는다. 남은 방법은 최후의 수단인 「망자 봉인」 뿐. 그러니 외총관의 주장은 정당했다.
"성주가 정말 망자가 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내총관도 잘 알지 않소."
고르곤의 성주는 혼돈 안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 그가 망자가 된다면, 성채 고르곤의 찬란한 역사는 오늘이 마지막 날이 될 것이다.
"성주를 초대형 망자로 만들 속셈은 아니시겠지?"
초대형 망자. 혼돈의 재앙이라 불리는 괴물들. 무수한 망자들을 수족으로 끌고 다니며, 휩쓸고 지나가면 모든 것이 폐허가 되어 버린다는 재해.
"그, 그런 일만은 막아야 합니다!"
외총관의 말에 경도되었는지 중립을 지키던 몇몇 각주들도 목소리를 냈다.
유르헨은 간신히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쓰며 말했다.
"「망자 봉인」은 녹명가만이 할 수 있는 비술입니다. 망혼석이 있다고 해서,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걱정 마시오. 마침 내가 비술을 익힌 이들을 데려왔으니."
암영대주의 뒤쪽에서 두건을 깊게 눌러 쓰고 얼굴에 붕대를 감은 존재들이 나타났다. 하나 같이 요사스러운 영압을 풍기는 자들이었다.
"저들은 녹명가가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지만, 봉인 정도라면 문제없소."
유르헨이 입술을 깨물었다.
뭔가가 잘못되고 있었다.
만약 이대로 망자 봉인이 시행되면 봉인된 성주의 영력은 고스란히 망혼석으로 빨려 들어갈 것이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그 망혼석을 누가 갖게 될 것인가의 문제가 남아 있었다.
"혼돈"에는 작위의 세습이 없다. 성주의 망혼석을 노리는 세력들이 나타날 것이고, 각주들 사이에서도 분쟁이 벌어질 것이다.
성주의 특별한 영력을 계승한다는 것은 단순히 혼돈의 최강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다거나, 성주의 작위를 갖게 되는 것에 그치는 일이 아니었다.
성주의 영력을 가지는 이는 수호각수(守護角獸) 고르곤의 주인이 된다.
만약, 엄한 자에게 고르곤이 넘어가기라도 한다면······.
그때, 붕대 인간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서더니 망혼석을 집었다.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녹명의 존재가 아닌데 망혼석을 집었다면, 결론은 하나뿐.
오염을 다루는 이들? 설마······.
유르헨의 머릿속에 성주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스쳐갔다.
―영혼 오염을 다룰 수 있는 자들이 나타났소.
성주는 그들에 관해 조사하던 도중, 영혼이 오염되어 실려 왔다. 유르헨은 외총관을 바라보았다.
설마 외총관이?
유르헨은 주변 상황을 살폈다. 체념한 기색인 두엇의 각주들을 제외하면, 모든 각주들의 표정이 침착했다.
유르헨은 그제야 깨달았다. 이미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아아, 이제 고르곤은······!
붕대 인간들과 함께 감옥 안쪽으로 들어선 외총관이 스킬을 사용해 지하를 밝혔다. 환한 광구(光球)가 뱅글뱅글 맴돌며 지하 감옥의 천장에 자리 잡았다.
뼈와 거죽만 남은 비참한 몰골의 성주가 보였다.
검게 변한 성주의 피부 위로 새카만 혈관이 꿈틀대며 날뛰고 있었다. 한때 고르곤의 전설이었던 남자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유르헨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미안합니다, 성주.
그리고 다음 순간, 유르헨은 가공할 풍압과 함께 앞으로 나동그라졌다.
빛이 있었고, 성채의 벽면이 좌우 벽면이 동시에 터져 나갔다.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찌나 강렬한 폭발이었는지 후폭풍에 휩쓸린 붕대 인간들이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당황한 각주들과 외총관이 고함을 질렀다. 천장에 뚫린 커다란 구멍을 통해 누군가가 내려오고 있었다.
오직 유르헨만이 흩날리는 먼지 속의 인물을 알아보았다.
"재환 씨?"
청허를 업은 재환이 그곳에 서 있었다.
Episode 7. 고르곤의 주인 (2)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외총관 마이한이었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바닥을 나뒹구는 부하들을 보며 외총관 마이한이 분노로 몸을 떨었다.
이제 「망자 봉인」이 코앞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나타난 사내놈 하나가 계획을 무참히 박살내고 있었다.
"대체 웬 놈이냐!"
"외총관, 이제 연기는 그만두시오."
재환의 뒤쪽에 서 있던 멸마대주가 소리쳤다.
"당신의 역천은 이미 만천하에 드러났소."
그 말에 각주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외총관이 딱딱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역천? 무슨 근거로 그런 망발을 일삼는가?"
"시치미 떼도 소용없소."
인상을 찌푸린 멸마대주는 옆구리에 사람 하나씩을 끼고 있었다. 외총관도 익히 알고 있는 자들이었다.
"이미 다른 대주들이 모두 불었으니까."
외총관은 바닥에 내던져진 방각대주와 절각대주를 바라보며 눈을 좁혔다.
"외, 외총관님······!"
엉망으로 두들겨 맞은 그들은 이미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다. 압도적인 무력에 의해 짓이겨진 모습.
외총관 마이한은 조금 놀랐다.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다고?
절각대주나 방각대주의 무력은 지금의 멸마대주에게 밀리지 않는다. 심지어 두 사람과 2개 대대가 함께라면, 설령 신의라고 해도 막아낼 수 있는 병력이었다.
빌어먹을, 대체 무슨 일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놈들 때문에 다 된 밥에 재를 뿌리게 생겼다는 것이다. 외총관 마이한의 눈빛이 차갑게 물들었다.
"죄송······."
절각대주가 낮은 신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절각대주와 방각대주의 몸이 동시에 폭발했다. 깜짝 놀란 멸마대주가 다가갔을 때 이미 둘은 숨이 끊어진 채였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요, 외총관!"
"내가 한 일이 아니오."
외총관이 어깨를 으쓱했다.
"자신들의 배신이 드러나자 스스로 자결한 게 아닌가 싶은데."
"말도 안 되는!"
"쓸데없는 모함으로 끌 시간 따윈 없소. 자, 「망자 봉인」을 계속하라!"
그 말에 술렁이던 좌중이 순식간에 진정되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 중요한 것은 성주였다. 몇몇 각주들이 달래듯 입을 열었다.
"멸마대주,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먼저 성주님의 봉인이 끝난 후에―"
멸마대주가 악을 썼다.
"다들 정신 차리십시오! 역천입니다! 지금 외총관은 역천의 죄인이란 말입니다! 이대로 망자 봉인이 진행된다면 외총관의 의도대로―"
"멸마대주를 끌어내!"
암영대주를 비롯한 수십의 암영대가 멸마대주와 재환 쪽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재환은 묵묵히 그 꼴을 보고 있다가 곁에 서 있던 유르헨을 향해 입을 열었다.
"개판이로군."
"······죄송합니다."
유르헨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재환의 한 마디로 유르헨은 깨달았다. 눈앞의 사내는 이미 이 성채의 모든 전말을 파악했다는 것을.
재환이 입을 열었다.
"너는 내게 거짓 약속을 했다."
"······."
"고르곤은 내 신변을 보장해 줄 수 없어."
유르헨의 심장이 쿵 내려앉은 눈빛이었다.
"그 말씀은······."
처음 그들이 맺은 계약은 재환이 성주를 살려 주는 대가로, 고르곤이 재환의 신변을 보호해준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고르곤이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되었으니, 자연히 재환도 유르헨을 도울 이유가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재환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왔다.
"약속 내용을 바꾸지."
"예?"
"성주를 살려 주고, 저기 있는 배신자들도 모조리 죽여 주겠다."
생각지도 못한 말이어서, 유르헨은 멍하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선두의 암영대 몇이 재환을 향해 달려들었다. 재환이 가볍게 그들의 공격을 쳐내자, 암영대원들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나가떨어졌다. 유르헨은 그 광경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그 대신 저 영감을 나한테 줘."
재환은 바닥에 대충 던져 놓은 청허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다시 날아드는 칼날 몇 개를 박살 낸 재환이 말을 이었다.
"원정대를 창설할 수 있게 도와줘."
원정대.
그 말을 듣는 순간 유르헨은 갑자기 가슴이 뛰었다. 왜인지는 모른다. 어쩌면 그 '원정대'라는 단어의 이면에 담긴 어떤 의미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심연 원정대」를 다시 창설할 거다."
유르헨의 머릿속에서 찰나의 시간이 영겁처럼 흘러갔다.
문득 성주의 얼굴이 떠올랐다. 원정대에서 가까스로 살아 돌아온 성주. 수백 년을 후회하고 고통스러워하며 살아갔던 성주······.
―유르헨, 이곳 사람들은 희망이 필요해. 무엇에도 지지 않을 압도적인 희망이.
유르헨은 재환의 등을 보면서 생각했다. 어쩌면 저자가, 성주가 오래도록 기다려온 그 희망은 아닐까.
"이건 충분히 지킬 수 있는 약속 같으니 어기지 마라."
자기도 모르게 "좋습니다"라는 대답을 했다는 것을, 유르헨은 재환의 대답을 들은 후에야 깨달았다.
그리고 재환의 독불이 불을 뿜었다.
그간의 답답함을 모두 날려 버리겠다는 듯, 호쾌한 찌르기의 연발.
"뭐, 뭐냐!"
"크아아아악!"
한 번의 찌르기에 두어 명의 암영대가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당황한 암영대주가 대형을 새로 짜며 명령을 내렸다.
"모두 한꺼번에 달려들어!"
이어서 재환의 앞에 있던 수십 명의 암영대가 한꺼번에 증발했다. 재환의 보통 찌르기가 시작된 것이다.
쿠구구구.
둔중한 묵빛이 사방을 덮음과 동시에, 암영대의 절반이 그 자리에서 소각되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얼을 빼고 있던 각주 두엇이 전투 불능이 되어 나가떨어졌다.
묵빛은 내성의 외벽을 관통해 그대로 하늘로 사라졌다.
순식간에 하반신을 잃어버린 암영대주가 불신 가득한 눈빛으로 자신의 몸뚱이를 보며 입을 뻐끔거렸다. 하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암영대주의 몸이 하얀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암영대와 5차 적응자인 암영대주를 단칼에 가루로 만들어 버린 무시무시한 기술. 장내는 경악에 휩싸였다. 간신히 검을 휘둘러 폭발을 막아낸 외총관 마이한이 숨을 몰아쉬었다.
저놈이었군.
안 그래도 이야기는 들었다. 망자가 된 잔야를 찌르기 한 방으로 보내버린 놈이 있다고. 하지만 그 보고를 한 녀석이 거짓말로 유명한 색마 흑설랑이어서, 마이한은 그 이야기를 귀담아듣지 않았었다.
그런데 녀석의 말이 사실이었다.
마이한은 자신이 밀려난 거리를 보았다. 바닥에 깊은 상흔이 남겨져 있었다. 적어도 방금 공격으로 다섯 걸음 이상을 밀려났다.
암영대를 한 방에 날려 버리고도 모자라 자신을 다섯 걸음이나 물러나게 했다.
예사 수준이 아니었다.
자신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이다.
7차 적응을 눈앞에 둔 자신을 이렇게나 몰아붙일 수 있는 상대는 고르곤에서도 오직 신의뿐이었다.
외총관 마이한은 잽싸게 태세를 바꾸었다.
"대체 이게 무슨 짓이오? 귀인은 대체 누구시기에 성스러운 행사를······."
살기 어린 재환의 눈빛에 마이한은 말을 채 맺지 못한 채 한 걸음을 물러났다.
...기세에 눌렸다고? 6차 적응의 끝에 다다른 내가?
곳곳에서 날아드는 밀어가 재환의 「의심」을 통해 들려오고 있었다.
[수석 장로님, 어쩌면 좋습니까? 이대로 계획을 속행해도······.]
[「망자 봉인」을 진행하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이 차선책을 택해야······.]
[지금 당장 흑운을 살포해야 합니다!]
[고르곤의 모든 존재를 절멸시키더라도······.]
"마이한 켈더그란."
자신의 이름을 호명하는 그 목소리에, 마이한은 어깨를 움찔 떨었다.
"고르곤 성채의 외총관이자, 금천방의 수석 장로."
그 말에 처음으로 마이한의 안색이 변했다. 대체 어떻게 눈앞의 사내가 그의 이름과 소속을 알고 있는가.
"나는 너희가 무슨 짓을 벌이려는지, 어떤 원리로 영혼을 감염시키는지는 잘 몰라."
사내가 다가오자, 마이한은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하나는 알지. 나는 너 같은 놈들을 좋아한다는 거야."
"조, 좋아하다니 무슨 소리요?"
가공할 살기가 감도는 사내의 검을 보며 마이한은 발악하듯 검을 그러쥐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지금 여기서 이 사내를 막지 못하면, 모든 계획이 틀어지고 말 것이란 사실을.
"해치워!"
영력을 모아 터뜨린 외총관의 외침과 함께, 일곱 명의 각주들이 동시에 검을 뽑았다. 배신자들이 자진해서 본색을 드러낸 것이었다.
거의 비슷한 속도로 내성 감옥의 입구를 통해 무수한 금천방의 병력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멸마대주와 유르헨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저런 병력이라면 신의나 십방의 주인이 오더라도 막아낼 수 없었다. 6차 적응자 하나와 5차 적응자 일곱의 합공. 거기다 수백에 달하는 3차 적응자들까지.
그런데 왜일까.
"정말 고마운 일이지."
재환의 표정은 즐거워 보였다.
"너희 같은 놈들이 있어서."
힘껏 쥐어진 독불이 포효하듯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이 세계를 안심하고 멸망시킬 수가 있어."
그 표정과 마주한 순간 마이한은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거의 동시에, 아무것도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어떤 거대한 것이 밀려오고 있었다.
생각이 이어지기도 전에 그는 무언가에 휩쓸려 나갔다. 내성의 천장을 모조리 날려버리고, 첨탑을 분쇄하며 하늘로 치솟은 거대한 빛줄기.
빛줄기는 벼락처럼 솟아올라 밤하늘에 거대한 균열을 일으켰다. 균열 사이로 흘러나온 빛이 일시적으로 밤의 어둠을 걷었다.
그 굉음에 놀란 고르곤의 주민들이 집에서 뛰쳐나와 하늘을 보았다.
하늘에서 별빛이 떨어지고 있었다.
산란하는 별빛의 조각들이 내성에 작렬하고 있었다. 내성으로 돌입하던 금천방의 병력들이 별빛을 맞고 하나둘씩 가루로 산화했다. 휘몰아치는 바람 속에 하이얀 영혼들이 흩날렸다.
재환의 세게 찌르기가 처음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
잠시 후, 가라앉은 먼지 속에서 외총관 마이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주변에 있던 각주들과 금천방들은 모두 궤멸되었다.
외총관 마이한은 자신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종전의 격돌에서 양팔과 양다리를 모두 잃었다. 장기를 구성하던 영체의 반 이상이 날아갔다.
"크허헉······. 어디서 이런, 괴물 같은······."
찢어진 성대는 제대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늦었다. 이미 이 고르곤은······, 성주는······!"
외총관 마이한은 그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절명했다.
재환이 그의 목에 검을 꽂은 것이다.
은빛 가루 속에서 검을 뽑아 든 재환이 뒤쪽에 너부러진 청허를 걷어찼다.
"영감, 이제 일어나. 늦었다."
"끄응, 이게 무슨 난리냐? ···그새 한바탕 크게 벌인 모양이구나 애송아."
내성 감옥에 설치된 경보기가 삑삑거리며 울리고 있었다.
[경고! 대상의 영혼 오염도가 99.9%를 돌파했습니다! 망자화가 시작됩니다!]
[경고! 망자화 중인 대상의 영력 수치가 지나치게 높습니다!]
[시스템이 대상의 위험 계수를 측정합니다.]
...
[······측정 중입니다······. 측정이 불가능합니다!]
[시스템 판정, 초대형 망자로 판명!]
[고르곤 자동 경보 알람을 가동합니다!]
뒤이어 외성 쪽에서 사이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고르곤 하나가 발령되었다는 소리와, 고르곤 전역의 주민들의 대피를 요하는 목소리.
한숨을 내쉰 청허가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옆에서 돕기만 해라."
"······."
"네 '찌르기'는 사람을 살리기엔 너무 날카로우니까."
그 말과 함께 청허가 자신의 검을 들었다. 허공에 붓으로 글씨를 쓰듯 검이 움직였다.
세계가 백색으로 물들어간다.
오염에 의해 사라지려는 영혼을 세계에 다시 새겨 넣는 성명절기. 망자 베기가 시작된 것이다.
검게 타오르는 성주의 영혼이 백지의 중심에 있었다.
성주가 잊은 기억들이 청허에 의해 다시 새겨지고 있었다. 어둠이 꿈틀거릴 때마다, 청허의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맺혔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성주가 감았던 눈을 떴다.
한없이 탁한 눈빛.
저 아득한 무저갱의 어둠을 담은 깊이.
청허가 돌연 몇 걸음을 물러섰다.
"...영감?"
영혼이 눈을 떴다는 것은 이성을 되찾았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청허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뭔가가 잘못되었다. 성주가 아니라, 뭔가 다른 것이······."
성주의 불길한 안광 속에서, 재환도 뭔가를 깨달았다. 지금 그들의 눈앞에 있는 존재는 일개 인간이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거대한 힘을 품고 있었다. 성주의 눈동자에 서서히 빛이 감돌았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이내 자신의 말라비틀어진 몸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청허는 알 수 있었다.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것은, 성주가 아니었다.
[놀랍군. 설마 이 몸을 통해 강림하게 될 줄이야······. 결국 이자도 망자가 되었는가.]
재환은 성주의 몸이 빠르게 회복되는 것을 보았다. 마른 살점에 광택이 돌았고, 어마어마한 영력이 성주의 몸을 뒤덮고 있었다. 재환은 저런 기운을 처음 보았다. 성주의 영혼 이면에 있는 어떤 거대한 그림자.
...망자인가?
「의심」을 사용하자, 아득한 어둠 속에 선 존재가 보였다.
눈앞의 존재는 인간이 아니었다. 망자에 가깝기는 했지만, 망자는 아니었다. 그것은 살아 있거나 죽은 것이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무생물의 일종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그것은 지금까지 말한 그 모든 것을 합친 무언가처럼 보였다.
재환은 저것을 무어라 불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세계'와 같은 존재였다.
[익숙한 얼굴이 또 보이는군.]
옆을 보니 청허가 떨고 있었다. 완연한 공포에 젖은 눈빛이었다.
[어째서 아직도 "혼돈"에 남아 있는 것인가? 불완전한 각성자여.]
"호, 혼돈의 왕······."
청허의 말에 불현듯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재환이 알기로 혼돈의 최강자는 사성의 성주들, 그리고 십방의 방주들이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왕'이라는 칭호를 지닌 이는 없었다.
재환은 이제 그 이유를 알았다.
저런 것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누구도 왕이 될 수 없는 "혼돈"에서 유일하게 왕의 칭호를 가진 자.
청허가 중얼거렸다.
"유일왕 카타스트로피······."
청허는 눈앞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구백 년 전에 저 끔찍한 것을 마주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일왕, 카타스트로피(Catastrophe).
모든 망자들의 왕이자, 혼돈의 중심에 있는 「망자의 궁」의 주인.
"심연"으로 가는 문을 열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왜 아직 "혼돈"을 떠나지 않은 거지. 이 구차한 세계를 지키기 위함인가.]
담담히 내뱉는 목소리에 영혼이 울린다. 청각을 가진 존재라면 누구든 그 목소리를 듣고 제정신을 차릴 수 없을 것이었다.
유일왕은 청허가 만든 백색의 세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새카만 어둠에 백지가 순식간에 검게 물들었다.
[너는 이미 "심연"에서 원하는 것을 찾지 않았던가?]
모든 기력이 빨려 나간 청허가 털썩 주저앉았다. 하나의 영혼이 감당할 수 없는 한계치를 넘어선 것이다.
그때, 유일왕의 눈이 재환을 향했다.
[흥미롭구나. 완전한 각성을 했음에도 인간의 마음을 지닌 존재라.]
재환은 자기도 모르게 독불의 칼자루를 꽉 쥐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손이 자신의 통제를 떠나 있었다. 긴장하고 있다는 뜻이다. 재환이 입을 열었다.
"영감, 실패한 거지?"
무엇이 실패했는지는 물을 필요도 없었다.
덜덜 떨리는 턱으로 청허는 재환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이 사내는 저것을 보고도 무사하단 말인가?
어떻게 망자의 왕 앞에서 이토록 오연하고 당당할 수 있단 말인가?
재환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저걸 죽일 생각인데."
Episode 7. 고르곤의 주인 (3)
재환의 말에 유일왕이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흥미로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의아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분노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한 얼굴.
[나를 죽이겠다고?]
산을 무너트리고 대지를 울리는 존재감.
[이 나를 말이냐?]
청허는 일어날 생각조차 못 하고 있었다. 무려 각성자인 청허를 꼼짝 못 하게 만드는 위압감.
인간은 자기보다 조금 강한 상대를 만나면 질투를 한다. 훨씬 강한 상대를 만나면 좌절하며, 압도적으로 강한 상대를 만나면 경외감을 갖는다.
그러나 강함이라는 말로 수사할 수 없는 상대를 만나면 어떨까.
자신의 인지를 벗어난 존재. 존재의 격이 너무나 달라 완전한 불가해로 내비치는 존재를 만났을 때―
인간이 공포를 느끼는 것은 그때다.
무한히 펼쳐진 무지의 공포 앞에 섰을 때, 인간은 비로소 깨닫게 된다. 자신이 그저 이 불확실한 세계의 하찮은 편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청허는 그 사실을 잘 알았다. 잘 알았기에,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어째서 이 사내는 저런 불가해 앞에서 이처럼 태연할 수 있는 것인가.
유일왕은 가만히 재환을 들여다보았다.
청허는 그 대치를 바라보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러나 그대로 두고 볼 수만도 없었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해 밀어를 짜내었다. 설령 성주를 잃을지언정, 재환을 이곳에서 개죽음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애송아! 미친 짓이다! 저것은 죽인다거나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재환은 말없이 찌르기 자세를 취했다.
[저건······. 저건 그런 존재가 아니란 말이다!]
"영감."
청허가 벌벌 떨며 재환을 바라보았다.
"겁먹지 마."
그것은 자신감의 표현이라든가 확신이 아니다.
그저 담담한 사실의 토로.
"이길 수 있으니까."
어디선가 괴이쩍은 소리가 들려왔다. 그 음의 높낮이가 너무나 기이했던 탓에 청허는 잠시 후에야 그것이 웃음소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유일왕이 웃고 있었다.
[구백 년 전에 찾아왔던 몽마 이후 너처럼 재미있는 녀석은 처음이다.]
청허는 그가 말하는 몽마가 누구인지 알았다.
구백 년 전 「심연 원정대」를 이끌었던 전설의 몽마.
"환상수"의 끝을 확인한 신화적인 존재.
그러나 그 뮬라크조차 저 유일왕을 어쩔 수는 없었다.
물론 그때 뮬라크가 상대한 것은 유일왕의 본체였고,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은 성주의 몸을 통해 강림한 유일왕의 분신체에 불과했다.
그러나 청허는 확신했다.
혼돈 십방의 방주들이라 해도 저 분신체를 상대할 수는 없다. 유일왕은 그런 존재였다.
[얼마든지 덤벼 보아라. 인간의 마음을 가진 어리석은 각성자여.]
유일왕의 손에서 희미한 빛이 나더니 새카만 안개를 연상시키는 어둡고 투명한 칼날이 나타났다.
「공허검(空虛劍)」.
청허는 떨리는 어깨를 잡아 가까스로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심연으로 가는 입구에서 원정대의 절반을 한순간에 망자로 만들어버린 무시무시한 병기.
저 무기를 다시 보게 될 줄이야······.
그리고 둘의 검이 동시에 움직였다. 백색의 세계가 크게 흔들렸다.
"허엇!"
얼굴이 터져 나갈 듯한 풍압을 그대로 얻어맞은 청허가 한 바퀴 나뒹굴었다.
유일왕이 말했다.
[너와 같은 눈빛을 본 적이 있다. 너는 "심연"으로 가려는 자로구나.]
그 말에 청허는 깜짝 놀랐다.
저 애송이가 심연으로 가고자 한다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애송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아직도 이 세계의 끝에 도달하려는 이가 있는가.]
재환은 유일왕의 말을 무시하고 검을 바로 잡았다.
본격적인 찌르기가 시작되었다.
유일왕은 경탄과 함께 그 찌르기를 받아냈다.
청허는 그들이 격검을 통해 다른 세계로 진입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로서는 결코 알 수 없는 세계가 저 둘의 검이 닿는 곳에서 막 열리려 하고 있었다.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 아직은 구백 년 전의 그 몽마보다도 못해.]
유일왕의 움직임이 점차 가속화되고 있었다.
실제로 재환은 아직까지 유일왕에게 단 한 번의 공격도 성공시키지 못한 채였다. 유일왕은 그의 살짝 찌르기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재환은 독불에 기세를 집중시켰다. 무려 백만 번의 찌르기에 담긴 기운을 단 한 번의 찌르기에 집중시켜서 쏘아 보내는 기술.
보통 찌르기.
그러나 공간마저 일그러뜨리는 보통 찌르기가 지나간 곳에 이미 유일왕은 없었다.
섬뜩한 감각이 스쳐간다.
재환은 거의 반사적으로 허리를 틀었다.
재환이 그 공격을 피한 것은 거의 기적이었다. 바로 한 뼘 옆의 바닥이 처참하게 갈라져 있었다.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공허검이 스쳐간 재환의 어깻죽지 부분이 검게 변색하고 있었다.
[오염이라는 건 시간의 질병이지.]
재환은 「의심」을 통해 자신의 어깻죽지를 재빨리 살폈다. 그리고 놀랐다. 어깻죽지의 시간만이 급속도로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수십 년? 어쩌면 수백 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그렇군. 이것이 망자화의 원리였나.
시간을 견디지 못한 영혼이 노화되는 현상.
오염의 원인은 바로 시간 그 자체였다.
재환은 노화된 영혼 일부를 피부 밖으로 배출했다. 그러자 오염된 영혼의 찌꺼기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유일왕이 놀랍다는 듯 중얼거렸다.
[스치기만 해도 망자가 될 터인데······. 대단한 영혼이구나.]
만족한 듯한 유일왕의 웃음은 다음 순간 마법처럼 사라졌다.
[하지만 그뿐.]
유일왕의 몸속에서 또 다른 공허검들이 솟아 나왔다. 무려 열 개에 달하는 숫자.
그러나 재환은 물러서지 않았다.
보통 찌르기 10연발.
허공을 격하고 날아드는 묵색 빛의 향연. 공허검과 찌르기가 정면에서 충돌했다. 독불이 사나운 울음을 터뜨렸다.
[몽마 놈이 만든 장난감치고는 훌륭하구나.]
길쭉해진 공허검의 칼날이 재환의 허벅지 바깥쪽을 스쳤다. 재환은 오염이 진행되려는 영혼의 일부를 그냥 베어냈다.
놀랍도록 강한 상대였다.
싸울수록 유일왕이라는 자의 끝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의심」을 아무리 사용해도 놈의 약점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의심」이 먹히지 않으니 「이해」는 무용했다.
재환이 알 수 있는 유일한 사실은 눈앞의 존재가 그로서는 가늠할 수도 없는 긴 세월을 살아왔다는 것뿐.
「망아」
재환의 몸에서 강력한 아우라가 발산했다.
청허가 만든 백색의 세계가 지워져 가며 새로운 세계로 변하고 있었다.
그 변화를 보던 청허의 몸이 다시 한번 경련했다.
진정한 각성의 힘.
모든 각성자들은 자신만의 「고유 세계」를 가지고 있다.
세계의 모습은 그들이 각성할 때 얻은 키워드를 통해 구체화되며, 강력한 각성자일수록 더 많은 존재를 자신의 '고유 세계' 속에 끌어들일 수 있다.
고유 세계는 각성자의 이상을 반영한다.
청허가 만든 백색의 「백각계(白刻界)」 또한 그러했다. 사라진 이들을 기억하고자 하는 청허의 이상이 그러한 세계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그리고 재환의 세계를 본 청허의 감상은 다음과 같았다.
지옥이로구나.
이 녀석은 지금껏 지옥에 살고 있었구나.
세계에 대한 증오와 분노로 이루어진 세계.
그리하여 모든 세계를 지워 버린 세계.
발아래 드리워진 대지에 무수한 칼날들이 박혀 있었다. 칼날들 사이로 뜨거운 용암이 흘렀다. 하늘에는 소름 끼치는 눈이 달처럼 떠 있었다. 날아든 까마귀 떼가 눈을 쪼고, 쏟아지는 핏물은 다시 용암에 섞여 들어갔다.
[이것이 너의 이상인가. 놀랍다. 무척이나 흥미롭구나.]
유일왕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격앙되었다.
세계의 끝에서 검과 검이 맞부딪쳤다.
그것은 검격의 교환이었으나 치열한 논변이었다.
검이 움직일 때마다 재환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기분이었다.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수천 마디가 넘는 대화들이 검이 맞닿을 때마다 오가고 있었다.
[삶의 무가치함과 덧없음을 깨닫고도 증오를 포기하지 않는 자여.]
유일왕은 경탄을 아끼지 않았다.
[나는 수십만 년 동안 '세계'를 구축한 존재들을 종종 보아왔다. 그들은 각자 궁금증을 가지고 이 나무의 꼭대기를 향해 올라갔지.]
유일왕 카타스트로피는 날아드는 찌르기를 쳐 내며 끊임없이 말들을 토해냈다.
[너는 이런 세계를 끌어안은 채로 그곳에서 무슨 답을 찾으려 하는가? 너의 질문은 대체 무엇인가?]
재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유일왕 카타스트로피는 알아들었다는 눈빛을 했다.
[그런가. 이 세계 자체가 너의 질문인가.]
독불과 공허검이 다시 한 번 맞부딪쳤다.
[격멸? 섬멸? 아니면 멸절? 어울리지 않는다!]
찌르기의 속도가 점점 더 빨라져 간다.
[멸망. 이 세계에 어울리는 이름은 그뿐이구나.]
마침내 찌르기가 극한에 이르렀다.
[실로 오만하구나. 한낱 인간이 "환상수"의 존재 가치를 묻고 있는 것인가? 자신의 세계로 하여금, "환상수"가 존속할 가치가 있는지를 질문하고 있는 것인가?]
그 말에 재환이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무슨 헛소릴 하는 건지 모르겠군."
[뭐라?]
재환은 대답 대신 있는 힘껏 독불을 내뻗었다.
세계가 굉음을 내질렀다.
100억 번이 넘는 찌르기의 정화.
그의 세게 찌르기가 펼쳐진 것이다.
세계를 꿰뚫는 빛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폭풍이 지나간 곳에 성주의 앙상한 몸이 남아 있었다. 살점이 파헤쳐진 몸에는 뼈가 드러나 있었고 충격을 이겨내지 못했는지 왼쪽 팔과 오른쪽 다리가 사라져 있었다.
[······그런가. 질문이 아니란 말이지.]
유일왕의 목소리에 분노가 흐르고 있었다.
[광오한 자여.]
강력한 망자의 힘이 상처 입은 성주의 몸을 회복시켰다. 떨어진 팔과 다리가 다시 재생되고 온몸의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었다. 기적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능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유일왕은 놀랐다.
눈앞에 있어야 할 재환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어서 유일왕은 자신의 뒤쪽에서 뭔가가 끊어지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대체 무슨······?]
세게 찌르기는 대군(對軍)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술. 강력한 개인을 상대로 효율이 좋은 기술이 아니었다. 따라서 처음부터 재환은 세게 찌르기로 그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세게 찌르기는 그저 시간을 벌기 위한 눈속임이었을 뿐이다.
이 녀석은 죽일 수 없는 존재다. 세게 찌르기보다 강력한 기술을 쓰더라도······.
재환이 강력한 힘을 사용할수록 손상되는 것은 성주의 영혼뿐이었다.
유일왕은 성주의 영혼을 매개로 이곳에 강림한 상태. 애초에 본체가 이곳에 있질 않으니 죽일 수 없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유일왕과 성주 사이를 잇는 링크를 끊는 것.재환은 탑의 100층에서 비스트레인의 영혼과 육체를 잇는 선을 절단한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것 또한 가능하리라 믿었다. 이번에는 영혼과 육체의 관계가 영혼과 영혼의 관계로 바뀌었을 뿐이다.
세게 찌르기를 막아내느라 유일왕이 정신이 팔린 사이, 재환은 자신의 모든 집중력을 「의심」으로 돌렸다. 그러자 끝이 보이지 않는 유일왕의 어둠 사이로 한 가닥의 희미한 선(線)이 보였다.
[어떻게 이 기술을······?]
유일왕은 처음으로 경악한 목소리를 냈다.
[······설마, 「균열」의 기술이라니.]
성주에게 기생해 있던 유일왕의 힘이 조금씩 거두어지고 있었다. 망자의 기운이 스러져 가며 성주의 상처 입은 영혼이 돌아오고 있었다.
강림이 해제되는 것이다.
유일왕 카타스트로피가 재환을 노려보며 말했다.
[멸망을 살아가는 존재여. "심연"으로 가는 입구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겠다.]
성주의 영혼이 줄이 끊어진 인형처럼 자리에 주저앉았다. 재환이 깊게 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끝났나.
성공을 확신할 수 없는 모험이었다. 그만큼이나 강대한 적이었다. 그대로 정면승부를 냈다면 그라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더 강해져야 했다.
찌르기만으로는 부족하다. 심연으로 올라가 저런 적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기술이 필요했다.
대군이 아니라 대인을 상대하기에 적합한 새로운 기술들이······.
망자의 기운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재환이 청허 쪽을 돌아보았다.
"이봐, 영감."
청허가 너부러진 채 기절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유르헨을 포함한 다른 이들도 정신을 잃은 채였다.
누군가의 밀어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자네······. 잠깐 이리 와 주겠나.]
재환이 다시 독불을 꼬나 쥐었다.
"아직 안 죽었나?"
[나는 유일왕이 아닐세.]
숨이 끊어져 가는 희미한 영압. 재환은 그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보았다.
"성주?"
[망자가 된 상태였지만, 자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유일왕에 맞선 그 패기······.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하고 있네.]
간신히 밀어가 이어졌다.
[내겐 시간이 별로 없어. 미안하지만 부탁 하나만 함세. 청허나 유르헨, 둘 중 하나라도 주변에 있다면 불러와 줄 수······.]
"둘 다 기절했다."
탄식하는 성주의 영혼은 잠시 뭔가를 고민하는 듯하더니 재환을 불렀다.
[이리 가까이 와 줄 수 있겠나?]
재환은 성주를 향해 다가갔다. 성주는 마지막 힘을 내뻗어 재환의 손목을 붙잡았다. 재환이 불쾌한 듯 손목을 당겼다. 하지만 성주의 손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몸과 영혼이 스러져가는 사람의 것 같지 않았다.
[어쩌면..., 이제 고르곤도 변화할 때가 온 건지도 모르지. 부디 받아주시게.]
재환은 강력한 힘이 자신의 몸속으로 흘러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성주의 영력이었다.
하나 평범한 영력은 아니었다. 성주의 영력이 스며든 재환의 왼쪽 팔에 검은 뱀의 문양이 나타났다.
[자네에게서 익숙한 기운이 느껴지는군. 그리운 기억들이 떠올라.]
성주는 재환에게서 무언가를 느낀 것인지, 마지막 순간 만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부디, 인간의 마음을 잊지 말게.]
성주는 그대로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왼팔에 새겨진 검은 뱀의 문양이 살아 움직이는 듯 꿈틀거렸다.
뒤쪽에서 청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맙소사."
청허는 넋이 나간 얼굴로 재환의 왼팔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르헨과 멸마대주를 비롯한 내성의 인원들도 하나둘씩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재환의 검은 뱀이 희미한 은빛을 내뿜었다.
"저, 저것은······!"
재환은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것인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유르헨을 비롯한 내성의 관료들이 하나둘씩 재환의 앞에 다가오더니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셋이 되었다. 열, 스물, 서른······.
무슨 일인가 싶어 달려온 다른 모든 관료들마저 재환의 왼팔을 보고서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고르곤 전체가 재환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 열의 맨 앞에서, 한 남자가 입을 열었다.
"유르헨 치버, 고르곤의 새로운 성주를 뵙습니다."
Episode 7. 고르곤의 주인 (4)
재환이 성주의 직위를 물려받은 후 이틀이 지났다.
그 이틀간, 내성에서는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다. 새로운 인사 발령 문제로 관료들은 서로 드잡이질을 벌였고, 새로운 성주에게 인사를 한다는 명목 하에 무수한 클랜의 수장들이 내성의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내총관 유르헨은 그 모든 방문을 거절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인사발령이니 친선방문이니 하는 것들이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성의 별실에서는 이틀째 똑같은 이야기가 반복되고 있었고, 성주의 의자에 걸터앉은 재환은 여유롭게 독불에게 먹이를 주는 중이었다.
와자작― 와자작―
유르헨이 입을 열었다.
"성주님."
"난 성주가 아냐."
"이젠 성주님이십니다."
"말했잖아, 안 한다고."
"약속이랑 다르시지 않습니까."
"약속? 약속은 너희가 지켜야지. 난 다 지켰어."
"약속 내용을 잊으신 모양인데, 다시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새 메모까지 해 놓았는지 유르헨이 품속에서 작은 종이를 꺼내 보여주었다.
+
〈재환이 약속한 것〉
* 성주를 살린다.
* 배신자들을 죽인다.
〈유르헨이 약속한 것〉
* 심연 원정대의 모집을 돕는다.
+
그 메모지를 보던 재환이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성주가 죽었으니까 나보고 물어내란 거냐?"
"뭐, 비슷합니다."
그렇게 말하니까 할 말이 없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은 사실이니까.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재환이 말했다.
"잠깐만, 근데 이제 내가 '성주'랬잖아."
"그렇습니다."
"본래 성주는 죽었지만 새로운 성주인 내가 있으니, 그 항목은 해결된 거 아냐?"
그 말을 들은 유르헨이 빙긋 웃었다.
"맞습니다. 해결됐습니다."
재환은 약간 미심쩍은 투로 말했다.
"그럼 약속을 지킨 거잖아."
"그렇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지키셔야 하지요."
"······뭔 소리야?"
"본인 입으로 스스로 성주라고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그랬지."
유르헨은 말없이 종이를 가리켰다.
+
* 성주를 살린다.
+
묵묵히 종이를 들여다보던 재환이 인상을 찌푸렸다.
젠장, 그게 그렇게 되나.
엄밀히 말해 재환은 저 약속 내용을 지키지 못했다. 왜냐하면 살려야 할 성주가 죽어 버렸으니까.
그래서 억지를 부렸다. 성주라는 '사람'은 죽었지만, 성주라는 '직위'는 살렸으니 괜찮은 것이 아니냐, 하고.
자충수였다.
그 말을 지키기 위해서는 재환 자신이 앞으로도 '살아 있는 성주'로서 존재해야 했기 때문이다.
즉, 재환은 앞으로도 성주의 임무를 수행해야만 했다.
"난 이런 곳에 얽매여 있을 시간이 없어."
재환은 권력이나 명예에 관심이 없었다.
"나는 "심연"으로 가야 한다."
정착하는 것은 약해지고, 약해진 것은 부패한다.
결국 떠날 수 없게 만든다.
"성주 자리는 너에게 주겠어."
"안 됩니다."
뜻밖에도 유르헨이 강경하게 고개를 저었다.
"성주님 말고는 누구도 성주가 될 수 없습니다."
"왜지?"
"고르곤이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재환은 유르헨이 말한 '고르곤'이라는 것이 성채를 말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왼팔에 새겨진 검은 뱀의 문양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유르헨은 그 문양을 '고르곤'이라 칭한 적이 있었다.
...이게 날 선택했다고?
유르헨이 계속해서 말했다.
"고르곤의 성주가 바뀌는 때는 오직 성주가 임종에 다다랐을 때뿐입니다. 물려주고 싶다고 마음대로 물려줄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재환은 당장이라도 내성을 뛰쳐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고르곤의 문양을 이어받는 순간 성주가 남긴 기억의 일부가 재환에게 들어온 까닭이었다. 성주를 잃은 성채가 어떻게 되는지, 재환은 이제 잘 알고 있었다.
빌어먹을.
그렇다고 순순히 성주 직을 맡아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재환은 유르헨이 가득 쌓아 놓은 각종 고르곤 법률 서적들과 결재서류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30년 동안 찌르기만 해 온 사람이 감당하기엔 터무니없는 것들이었다.
"오늘 안에 결재해 주셔야 할 서류들입니다. 그리고 이건······."
유르헨이 뭐라 뭐라 말을 시작했다. 물론 재환은 하나도 듣지 않았다. 재환은 눈앞에 놓인 법률 서적 하나를 펼쳐서 뒤적거려 보았다. 하나 같이 머리 아픈 내용뿐이었다.
고르곤 특별법 11조 43항. 길거리에서 성주를 모욕하면 태형에 처한다.
고르곤 특별법 11조 44항. 길거리에서 성주를 두 번 모욕한 이는 영혼 절단형에 처한다.
고르곤 특별법 11조 45항. 길거리에서 성주를 세 번 모욕한 이는 영멸형에 처한다.
특별법에는 특히 성주와 관련된 것들이 많았다. 이따위 법률들이 잘도 존재하는 것을 보면 역대 성주들이 얼마나 모욕이라는 것에 민감하게 대응해왔는지를 잘 알 수 있었다.
······이래서 다들 성주에 대해 좋은 말만 했는지도 모르겠군.
모욕했다간 죽으니까 좋은 사람이라 말할밖에.
재환은 역대 성주들이 남긴 조언들도 살펴보았다.
한참을 고르던 재환이 집어든 것은 제17대 성주였던 '아르바트'가 남긴 『좋은 성주가 되는 101가지 방법』이라는 책이었다.
101가지나 담겨 있는 것 치곤 굉장히 얇은 책이다.
약간 과장해서 손톱 두께나 될까 의심스러운 볼륨의 책이었다. 재환은 책을 펼쳤다.
―축하한다! 이 책을 집어 들었다는 것은 그대가 새로운 성주가 되었다는 뜻이겠지!
책은 그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아아, 그대의 고민에 깊이 공감한다. 어떻게 하면 이 고르곤을 더욱 훌륭한 성채로 만들 수 있을 것인가! 분명 그대는 그런 고민 속에서 힘겨운 밤낮을 보내고 있겠지.
물론 그런 고민 따윈 전혀 하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안심하라! 사실 그대는 엄청난 행운을 거머쥔 것이다. 왜냐하면 성주가 된 자가 해야 할 일은 단 한 가지뿐이기 때문이다.
어쩐지 재미있어지려는 것 같아서, 재환은 한 장을 더 넘겼다.
―그것은 향락을 즐기는 것이다.
재환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잠깐 멈칫했다.
―즉, 좋은 성주란 잘 노는 성주를 말한다.
이건 또 무슨 헛소리인가 싶었다.
―그대는 내 말이 의아할 것이다. 하지만 명심하라. 그대가 할 일은 오직 하나. 꿀을 빠는 것이다. 법률은 법률부에 맡기고, 치안은 집행부에 맡겨라. 결재는 비서감을 뽑아 대행하도록 해라. 내각은 내총관에게 맡기고, 외각은 외총관에게 맡겨라. 그럼 알아서 잘들 한다.
이야기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대는 이상하다 여기겠지. 어째서 성주가 된 자에게 이런 괴상한 조언을 권하는지. 그러나 이것을 알아두기 바란다. 이 조언은 내가 처음으로 권고하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선대의 성주들로부터 거슬러 내려온 현명한 조언임을.
...역대 성주들은 모두 게으름뱅이였나?
―혼돈에서 과도한 열정은 병을 부른다. 역대 성주들 중 절반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빅 브라더」의 통계에 따르면 혼돈에서 가장 자살률이 높은 직업 중 하나는 바로 성주다. 그럼 나머지 절반은 무엇으로 죽었냐고? 나머지 절반은 과로로 죽었다. 정확히는 과로로 인한 '영혼 오염' 때문에. 그대도 알다시피 지나친 과로는 영혼의 오염을 촉진시킨다.
장난스럽게 시작했던 책의 필체는 조금씩 진심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러니 이 조언은 그대를 위한 것이자, 고르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부디 그대는 욕심을 부리지 말라. 무언가를 바꾸려고 하지 말라. 자신을 소모시키지 말라.
재환은 17대 성주의 깊은 무기력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 책을 쓰는 내내 성주는 괴로웠을 것이다.
―"혼돈"은 그대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다. 성주의 직위까지 오른 그대라면 잘 알 것이다. 이곳에서 변화가 얼마나 무용한 것인지. 이곳의 모두는 잘 알고 있다. 이 세계는 변할 수 없다는 것을. 그렇기에 이 세계에 필요한 것은 변화가 아니라 연명(延命)이다.
책은 어느새 마지막 페이지로 접어들고 있었다.
―성주라는 자리는 그런 것이다. 변화가 아닌 연명. 소수의 변화가 아니라 다수의 생존을 위해 고요히 있어야 하는 존재. 사람들은 그대의 존재만으로 그대에게 고마워할 것이다. 그대가 있다는 것만으로 안정감을 느낄 것이며, 그대가 있다는 것만으로 안도하게 될 것이다. 물론 지겨운 나날을 살게 되겠지만 그 누가 이를 나쁜 일이라 비난할 수 있을까?
마지막 문단에서는 꽤 오래 머무른 흔적들이 발견되었다.
―그러니 그대는 그저 가만히 있으라.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저 살아만 있으라. 그대의 생각보다 이 일은 중요하다. 좋은 성주가 되기 위한 101가지 방법 같은 것은 없다. 혼돈에서 좋은 성주란 가만히 있는 성주뿐이다. 살아남으라. 아무것도 하지 말고, 운명이 마침내 그대의 영혼을 앗아갈 때까지 살아남고 또 살아남으라! 이것이 내가 그대에게 해 주고 싶은 조언의 전부다.
책은 그렇게 끝이 났다. 재환은 17대 성주가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를 이해했다.
그런가, 이곳에서 성주란 그런 존재였나.
연명을 위해 희망을 거세하는 존재.
다수의 삶을 위해 변화를 막는 존재.
하지만 그런 것을 삶이라 할 수 있는가.
재환은 혼돈의 사람들에게 깊이 뿌리 박혀 있는 절망의 정서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미 성주부터가 이 모양이다. 물론 이들도 처음부터 이런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다.
한때는 희망이 있었고, 열정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어느 순간 만나 버린 것이다. 무슨 짓을 해도, 어떤 일을 벌여도 결코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이 있다는 것을. 그들은 그 벽 앞에서 절망하고 절망한 끝에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이다.
"저기, 성주님?"
유르헨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성주님! 듣고 계십니까?"
"듣고 있어."
"...대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시는 겁니까?"
"이 성채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그 깜짝 놀란 유르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본격적으로 성주를 하시기로 마음먹으신 겁니까?"
"그건 아니지만, 본격적으로 뭔가를 해 볼 마음이 들긴 했지."
재환은 17대 성주가 남긴 책을 착, 하고 소리 나게 덮으며 말을 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고르곤의 성주가 될 생각이 없다."
유르헨이 저건 또 무슨 선언인가 싶은 얼굴로 재환을 보았다.
"대신, 이렇게 해 주마."
재환은 잠시 사이를 두고 말을 이었다.
"나는 고르곤의 '성주'를 없애겠다."
유르헨은 한순간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눈빛이었다.
"······예?"
표정이 복잡해진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일까?
"설마 자살하시겠다는 뜻입니까?"
유르헨은 이해가 가질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고작 성주가 하기 싫다는 이유로 자살하는 인간이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아니, 이 사람이라면······.
유르헨은 재환을 유심히 바라보며 생각했다.
재환은 그가 한 번도 보지 못한 종류의 인간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튈지도 모른다. 구속을 싫어하고 세계를 증오하는 자. 이런 자라면, 그런 같잖은 이유로 자살을 시도할지도······.
"무슨 헛소리야?"
"...그럴 리가 없겠죠. 죄송하지만, 말씀하신 바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재환이 그것도 못 알아들었냐는 듯한 눈빛을 했다. 자존심이 상한 유르헨이 대거리하려는 찰나, 재환의 입이 열렸다.
"성주라는 직위는 '성채'가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지."
"예, 뭐.... 아니, 예?"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생각하던 유르헨이 깜짝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그건 '고르곤 성채'를 없애겠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만. 고르곤의 백성들을 몰살시키겠다는 말씀은 아니시겠지요?"
어처구니없는 생각이었다. 보통이라면 유르헨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문제는, 눈앞의 사내는 보통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 사내라면 진짜로 그런 짓을 할지도 모른다.
그러자 재환이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무슨 악마라도 되는 줄 알아?"
"그럼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재환은 바로 답변하는 대신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유르헨, 성채라는 게 뭔지 알고 있어?"
성채가 무엇이냐고?
우스운 질문이었다. 그는 이백 년이나 이 성채에 머물렀다. 성채가 무엇인지 그보다 잘 알고 있는 이는 고르곤 전체를 뒤져도 많지 않을 것이다.
유르헨은 곧장 대답했다.
"성채란 요새(要塞)입니다."
"그럼 요새는 뭐야?"
"군사 시설입니다."
"군사 시설이란 뭐지?"
계속해서 말꼬리를 잡고 이어지는 질문에, 유르헨이 인상을 찌푸렸다. 성주는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유르헨은 못마땅한 심정으로 대답했다.
"적군으로부터 아군을 보호하는 건축물을 말합니다."
재환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의 네 말을 요약하자면, 성채란 결국 적군으로부터 아군을 지키는 건축물이라는 거로군."
"······그렇게 됩니다."
"그럼 만약 '적군'이라는 게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면?"
"예?"
"누구도 그 성채를 침략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지 묻고 있는 거야."
"그야...."
적군이 없다면, 군사 시설은 존속할 필요가 없다. 군사 시설의 가치를 잃은 요새는 요새가 아니고, 요새의 기능을 상실한 성채는 성채라 불릴 수 없다.
즉, 성채의 존재 이유 자체가 사라지는 셈이다.
거대한 벽의 필요성을 상실한 이들은 성채의 구속에서 풀려나 자유롭게 "혼돈"을 방랑하게 될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유르헨이 멈칫했다.
"그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아니, 가능해."
유르헨은 멍하니 재환을 쳐다보았다. 지금 성주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알고 있는 걸까.
재환은 그런 유르헨의 의문에 별일 아니라는듯,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내가 혼돈을 통일할 거니까."
Episode 7. 고르곤의 주인 (5)
"혼돈"에는 장례식이 없다.
장례식이란 기본적으로 생자(生者)들을 위한 것이다. 산 자들이 죽은 이를 추모한다는 목적 아래 모여 자신의 삶을 반추하고, 죽음이라는 아득한 개념을 상상해보는 일. 언젠가 찾아올 죽음 앞에서 자신의 삶을 더욱 간절하게 만드는 의식.
그것이 바로 장례식이었다.
"혼돈"의 모든 이는 이미 죽었다. 운이 좋은 누군가는 장례가 치러졌을 것이고, 대부분은 전장에서 까마귀들의 밥이 되었을 것이다.
딱히 어느 쪽이라고 해서 좋고 나쁠 것도 없었다. 어차피 그곳의 모두는 자신의 장례에 대해 알지 못하니까.
물론 그런 "혼돈"에 영멸한 이들을 위한 의식이 아예 없는가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재환이 성주가 된 지 사흘째 되던 날.
고르곤 내성의 연회장에서는 영멸한 이들을 위한 의식이 행해지고 있었다.
「소리 증폭」 스킬이 걸린 단상 위에서 내총관 유르헨이 입을 벌려 뭔가를 읽기 시작했다.
"아이멜 그로셰크가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묻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그는 이 세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육신도 영혼도 없이, 그는 몇 가지 기억을 남긴 채로 환상수의 양분이 되었습니다."
흘혼제(䛥魂祭). "혼돈"에서 영멸한 이를 온전히 떠나보내기 위한 의식의 이름이다.
"우리는 이제 아이멜 그로셰크를 잊을 것입니다. 그를 위해 마지막으로 그에 관해 이야기할 것입니다.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해서, 더 이상 남은 이야기가 없도록 만들 것입니다."
장례가 죽은 이를 기억하기 위해 행해진다면 흘혼은 죽은 이를 지우기 위해 행해진다.
흘혼이 거행되는 내내 영혼의 이야기는 떠들어지고 또 떠들어지며, 흘혼이 끝난 후엔 두 번 다시 언급되지 않는다.
그것이 "혼돈"을 떠난 이에게 "혼돈"이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인 것이다.
재환은 영정 하나 없는 이 흘혼제에 참가하고서야 성주의 진짜 이름을 알게 되었다.
아이멜 그로셰크.
전장에서는 '고르곤의 주인'이라 불리었던 이.
그리고 그에게 이 성채를 맡기고 떠난 이.
빌어먹을 노인네.
재환은 이 자리가 불편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름도 모르던 노인네한테 손 한 번 잡혔더니 갑자기 성주가 되어버렸다.
단상 위에서 연설문을 읽던 내총관 유르헨이 종종 재환을 향해 간절한 시선을 보내왔다.
―성주님, 제발 참가해 주십시오. 단 한 번이라도 좋습니다. 그래도 지금은 성주시지 않습니까?
눈을 글썽이는 유르헨은, 재환이 이곳에 온 것이 썩 감동스러운 듯했다. 아마 본인의 간곡한 설득이 먹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재환이 흘혼제 같은 귀찮은 행사에 굳이 참여한 것은 다른 목적이 있었다.
재환은 흘혼제에 참석한 인원들을 두루 살폈다.
"혼돈"의 각 성채에서 사자들이 다녀갔고, 혼돈 십방의 방주들이 위로의 의미에서 각수의 뿔 따위를 보내왔다. 부방주나 수석장로들은 직접 참석하여 위문 인사를 건네 왔다.
성주의 흘혼제에 참석하려는 인파는 내성 밖까지 줄이 이어지고 있었다. 연회에 참석하지 못한 일반 주민들은 주점에서 일각주를 들이켜며 각자의 시간을 가졌다.
누구도 통곡하거나 울지 않았고.
모두가 성주의 이야기를 했다.
그 모습을 보며 청허가 클클 웃었다. 구백 년을 함께한 오랜 친우를 보낸 것 치고는 태연한 얼굴이었다. 이각주를 들이켜는 그의 눈빛에 종종 세월의 그림자가 스쳤다.
"내가 보기엔 보통의 장례식이랑 다를 게 없어. 죽은 것들이 살아 있는 놈들 흉내 내기는."
"가짜 술에 취하는 영감이 할 소린 아닌데."
"이건 그런 놀이인 게다."
청허는 그렇게 말하며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천 년쯤 살게 되면 영멸은 딱히 슬픈 일도 아니지. 평생 갈망하던 삶에서 해방된 거니까."
영멸한 자는 삶을 그리워할 수 없다. 완전한 죽음을 맞이한 이가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할 수 없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토록 갈망하던 것을 영원히 잃어버린 자들만이 비로소 평안을 찾는다.
모순만이 구원인 세계에서 사람들은 춤을 추고 노래를 했다.
청허도 병나발을 불며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껄껄 웃으며 그런 청허를 둘러싸고 함께 노래를 불렀다.
재환은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유르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흘혼에 참석하기 전 유르헨은 그런 말을 했었다.
―흘혼제는 일주일 동안 치러질 겁니다.
연회장의 곳곳에서 그를 노려보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저놈은 또 뭔가― 싶은 시선을 보내는 이도 있었고, 흥미롭다는 눈빛을 보내는 이들도 있었다.
―성주의 자리가 세습되지 않는다곤 하지만, 완전한 외인(外人)이 성주의 자리에 오른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아마 십방에서 보낸 사자들이리라.
개중에는 꽤 강렬한 기감을 발산하는 자들도 있었다. 「의심」을 통해 그들이 나누는 밀어가 쉴 새 없이 들려왔다.
한꺼번에 다수가 밀어를 주고받는 것으로 봐서, 최상급 밀어 스킬인 「다중 밀어」가 펼쳐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군. 저렇게 젊은 영혼이 성주가 되었다고?]
[아직 100년도 안 살았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100년도 안 산 애송이가 성주라니.... 유르헨이 또 뭔갈 꾸미는 거 아닌가?]
아예 대놓고 중얼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한 판 붙어보고 싶게 생겼는걸?"
연회장의 구석에서 와인 잔을 든 여인이 중얼거렸다. 보랏빛 드레스에 면사포를 걸친 여인은, 면사포 너머로 재환의 모습을 흘끔거리고 있었다. 그때, 그녀의 등 뒤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클클, 신녀방(神女房)의 부방주께서도 오셨는가?"
"······신의 영감탱이, 아직 살아 있었어?"
"역시 미인은 죽어도 500년은 탱탱하구만."
"영감은 여전히 쭈글쭈글하고."
피식 웃으며 인상을 찌푸린 신녀방의 부방주가 재환을 향해 턱짓을 했다.
"근데 진짜 저게 새 성주야?"
"그렇게 됐다."
"젊어 보이는데."
"오래 헛산 늙은이보다는 뭔갈 기대해 볼만하지."
"어느 정도야?"
"내 젊은 시절 정도는 된다."
"영감 젊었을 때 별로 안 강했던 거 같은데."
"침대 위에선 강했지. 확인시켜 줘?"
"상한 걸 별로 안 좋아해서."
"저쪽 얘기다."
청허가 눈짓한 곳에 웬 푸짐한 중년인이 재환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신녀방 부방주의 눈동자가 빛났다.
[학림방의 늙은 너구리인가. 재밌겠네. 어느 쪽에 걸 거야?]
[내기는 성립할 수 있을 때 거는 거지.]
[...아까부터 자꾸 무슨....]
[보기나 해라, 계집애야.]
청허와 신녀방의 부방주가 티격태격하는 사이, 중년인은 어느새 재환의 코앞까지 다가가 있었다.
"그쪽이 새로 등극한 성주시오?"
왜인지 고까운 어투. 턱살이 푸짐하고 배가 불룩한 사내는 말 그대로 살찐 너구리를 닮은 모습이었다.
"맞아."
"허허, 굉장히 젊어 보이시는구려! 나이를 물어봐도 되겠소?"
너구리와 재환의 대치를 눈치챘는지, 십방의 다른 인사들도 어느덧 흥미진진한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또 시작이구만 저 너구리 자식!]
[하여간 천년 가까이 산 놈들은 다 저 모양이지.]
[쉿, 옆에 신의가 있다네.]
[아차.]
「의심」을 통해 들려오는 말들로 미루어 보아, 눈앞의 너구리는 굉장히 오랜 세월을 살아온 모양이었다.
"대충 60살 정도."
"60?"
너구리가 의심스럽다는 듯 되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그리고 난리가 났다.
[육순? 완전 어린애잖아? 영감, 저 녀석 대체 뭐야?]
신녀방의 부방주가 물었다.
청허는 그런 부방주의 손을 은근하게 잡으며 말했다.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알 생각도 하지 말고. 무서운 녀석이거든.]
[근데 손은 왜 잡아? 뒈지고 싶어?]
[내가 무서워서 그런다.]
너구리 사내가 계속해서 말했다.
"혹시 전 성주의 아들이시오?"
"뭐?"
"아아, 혹시 고르곤에 「세습제도」라는 게 생긴 건가 싶어서 말이오."
둘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사자들이 다시 술렁였다.
[아들이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늙은 너구리가 너무 무례하구만. 아무리 젊은 성주라 해도······.]
[학림 새끼들은 먹물만 처먹고 속이 배배 꼬였나.]
[뭐, 대놓고 욕하는 것보단 낫지 않겠소?]
"혼돈"의 제도에 무지한 재환은 뒤늦게야 상대방이 자신을 모욕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전 성주와 재환의 나이 차이는 900살이 넘는다.
아들일 수도 없고, 설령 아들이라 해도 문제다.
고르곤을 포함한 모든 혼돈의 성채에는 세습 제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말은 그럴듯하게 지껄였지만, 그에 담긴 의미는 너무나 노골적이었다.
너 같은 애송이가 성주가 되려면 세습이 있지 않고서야 불가능하다.
청허가 혀를 차며 클클 웃었다.
[늙은 너구리가 자칫하면 여기서 흘혼을 치르게 생겼구만.]
[...손 놓으라니까.]
너구리 사내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아무튼 잘 부탁하오. 소인은 학림방의 부방주, 장일한이라 하오."
학림방? 재환은 「의심」을 통해 학림방에 관해 떠드는 이야기들을 읽어냈다.
듣자 하니 학림방이라는 곳은 혼돈 십방 중 중위권에 해당하는 방파의 이름인 모양이었다.
"난 재환이다."
재환은 장일한의 악수를 받아 주었다.
장일한은 손이 맞닿는 순간, 낮은 웃음을 지었다. 그 순간 재환의 영력 수치가 확인된 까닭이었다.
정말 소문대로 무적응자였을 줄이야.
장일한은 학림방주의 지령을 떠올렸다.
―구워삶든 쪄 죽이든 뭘 해서라도 고르곤에 지부 개설권을 따오시오. 도대체 4대 성채 중 한 곳에 학림의 지부가 없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요?
현재 고르곤 성채에 학림의 지부가 없는 것은 전적으로 부방주인 장일한의 책임이었다.
십 년 전, 고르곤을 찾아왔다가 당했던 수모를 장일한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북쪽 검문소에서 뇌물로 경비병들을 매수하다가 칼튼인가 뭔가 하는 검문소장이랑 한판 붙는 바람에 생긴 일이었다.
적당히 뇌물을 더 얹어 주면 별일 아니랍시고 넘어갈 줄 알았는데 오히려 사태가 커져 버렸다. 칼튼이란 놈이 아예 성주에게 직속으로 보고를 올려버린 것이다.
―대놓고 뇌물을 쓰는 데다, 경비대와 함부로 분란을 일으키는 방파의 지부를 어찌 받아 줄 수 있겠소?
부하를 보면 상관의 인품을 알 수 있다 했던가. 고르곤 성주도 검문소장만큼이나 꽉 막힌 사람이었다.
그렇게 고르곤 진출을 위해 기다리고 또 기다린 십 년.마침내 장일한은 고르곤에 간신히 재입성했다. 물론 이번에는 뇌물을 쓰지 않았다. 뇌물도 쓰지 않고 협상을 해야 하다니, 이것은 먹물도 없이 글씨를 쓰라는 말이 아닌가?
그딴 생각을 하면서 고르곤에 진입한 장일한을 반긴 것은 무척 낯선 광경이었다.
성주는 죽었고 북쪽 검문소장이라는 놈은 병실에 드러누워 있단다.
거기다 웬 애송이가 새로운 성주랍시고 앉아 있는 것을 확인했을 때, 장일한의 기쁨은 거의 극에 달했다.
혹시 하늘이 주신 기회인가?
먹물은 물론이고 붓이 없어도 글씨를 쓸 수 있을 듯한 자신감이 생겨났다. 자신감이 돌아오자 뒤늦게 따라오는 것은 자존심이었다.
아무리 지부개설권을 따내기 위해서라 해도, 이런 애송이 앞에서까지 빌빌댈 수는 없지.
무려 800년에 달하는 삶을 살아온 장일한은 안다.
언제나 비굴함만이 협상의 왕도는 아니다.
수많은 전장을 거쳐 왔고, 더러운 권력의 뒤안길에서 이리저리 치여 본 그였기에 알 수 있었다. 상대가 약자일 경우, 협상보다는 협박이 훨씬 더 효과적이다.
장일한이 재환의 손을 꽉 쥐며 스킬을 발동시킨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최상급 진법(陳法) 스킬.
「지옥팔문(地獄八門)」
지옥팔문은 학림방의 수뇌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비전 스킬이었다. 오직 상대방과의 피부 접촉을 통해서만 발동시킬 수 있는 최고급 진법 스킬.
한 번 이 진법 속에 갇힌 이는 "위대한 땅"의 무수한 괴수들을 형상화한 환영 속에 갇히게 되며, 진법술사가 진법을 해제하기 전까지는 결코 진법 속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된다.
장일한은 지옥팔문 중 삼문(三門)까지를 빠르게 개방했다. 삼문이라면 적룡 티아매트가 존재하는 발열지옥.아마 눈앞의 애송이 성주는 지금쯤 타오르는 지옥불 속에서 티아매트에게 한창 쫓겨 다니고 있을 터였다.
비릿하게 웃은 장일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디 한 번 몸부림쳐 봐라.
Episode 7. 고르곤의 주인 (6)
지옥팔문을 겪은 이들이 모두 어떤 꼴이 되는지, 장일한은 잘 알고 있었다.
환영 속에서 살려 달라고 울고불고 난리를 치다가 최후에는 정신이 망가져서 진법술사의 노예가 되고 마는 무시무시한 진법.
이 지옥팔문의 가장 무서운 점은 은폐성이었다.
즉, 시전자와 대상자를 제외한 외부의 인사들에게는 진법이 들킬 일이 없다는 뜻이었다.
물론 이곳에는 혼돈의 강자들이 모인 만큼, 학림방의 지옥팔문에 대해 일가견이 있는 자들도 있었다.
재환과 비슷한 방식으로 지옥팔문에 당한 적이 있는 자들이 곳곳에서 입을 열었다.
[저 자식 지옥팔문 쓴 거 아냐?]
[그런 잔학무도한 짓을―]
[60살짜리 어린애한테 너무하는군.]
몇몇은 장일한에게 직접 밀어를 보내기도 했다.
[그만둬라, 장일한! 네놈이 아무리 학림방의 부방주라 해도 상대는 성주다!]
장일한이 인상을 썼다.
늙은이들이 귀찮게 하는구만.
물론 장일한은 그만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
지옥팔문을 성공시켜 성주만 꺾어 놓으면, 고르곤 지부 개설권쯤은 구렁이 담 넘어가듯 따낼 수 있게 된다.
장일한은 밀려드는 밀어들을 뒤로하고 영력을 집중시켰다. 재환과 맞잡은 장일한의 손에서 조금씩 땀이 나기 시작했다.
슬슬 반응이 올 때가 됐는데.
뭔가 이상했다.
다른 이도 아니고, 무려 6차 적응자인 자신이 펼친 지옥팔문이다. 십방의 강자들이라 해도 반응이 올 시기가 지난 것이다. 한데 재환이라는 사내의 표정에는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맞잡은 장일한의 오른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설마, 숨겨둔 한 수가 있었나? 아니면 삼문까진 괜찮다 이건가? ...좋다, 그렇다면 이건 어떠냐.
장일한은 단숨에 지옥팔문의 육문(六門)까지 개방을 마쳤다. 육문 개방은 그가 허용할 수 있는 지옥팔문의 최대치이기도 했다.
설령 그와 동급의 고차 적응자라 해도, 육문을 아무런 타격 없이 버텨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육문은 빙한지옥으로, 잊혀진 땅의 괴수인 빙룡왕 벨키서스가 존재하는 곳이었다. 익히 스승을 통해 지옥팔문을 겪어본 장일한조차 치를 떨 정도의 괴물. 육문에 빠진 자는 몸이 얼어붙는 한기와 벨키서스의 공포 앞에서 천천히 정신이 붕괴해갈 것이다.
장일한은 과도한 영력 소모로 인해 비지땀을 줄줄 흘리면서도 줄곧 미소를 잃지 않았다.
...어떠냐, 애송이 성주야.
그렇게 5분쯤 지났을까. 슬슬 때가 됐나 싶었던 장일한이 슬그머니 손을 빼내려는 순간.
재환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혼돈"은 악수법이 특이하군."
"응? 아니.... 예?"
"이제 그만 손을 놓지?"
"아, 그, 그렇지. 미안하오."
그 평온한 어조에 장일한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설마 지옥팔문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은 것인가? 그 '빙룡왕'을 보고도 멀쩡하다고? 그럴 리가 없었다. 진법은 제대로 펼쳐졌다.
그렇다면.
...설마 지옥팔문을 견뎌냈단 건가?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지옥팔문은 생문(生門)이 없는 진법이다. 진법술사가 진법을 해제하지 않는 이상, 진법을 뚫고 나올 방법은 하나뿐이다. 진법에 정면으로 맞서서 팔문의 공포를 이겨내는 것.
그런 일이 가능할 리 없다.
손을 놓는 순간, 장일한은 순간적으로 찾아온 현기증에 비틀거렸다. 그리고 잠시 후, 장일한의 눈에 헛것이 보였다.
"뭐, 뭐냐."
찰나였지만 장일한은 세상의 정경이 바뀌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미칠 듯이 심장이 뛰었다. 방금 그게 대체 뭐란 말인가? 학림방주의 지옥팔문을 겪었을 때도 이런 느낌은 아니었다.
어떻게 저런 풍경이······?
저것이야말로 지옥도(地獄道)라는 말이 어울리는 광경이 아닌가.
정신을 차렸을 때 장일한은 연회장의 바닥에 주저앉아 부들거리며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 양반 갑자기 왜 저래?]
[설마 지옥팔문이 해체된 건가?]
재환은 묵묵히 그를 내려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성주를 모욕했으니 원래는 태형에 처해야겠지만 봐주는 거다. 다음부턴 조심해라."
"대, 대체 당신은······."
그 모습을 본 청허의 입술이 실룩거렸다.
"뭐야, 저게 끝이야? 시시하구만."
모처럼 재미난 구경을 하는 줄 알았던 청허가 시큰둥한 목소리를 냈다.
재환의 성격에 저런 일을 당한다면 상대방을 마구 찔러 날려 버릴 줄 알았는데, 그 결과가 생각보다 소박했다.
아마 자신의 고유 세계를 잠깐 보여주는 것으로 끝난 듯한데, 그가 아는 재환이라면 저 정도로 끝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기이했다. 예의도 배려도 쥐뿔도 없는 저 천둥벌거숭이가 한 번 참았다니.
...애송이, 뭔가 꾸미고 있는 거냐?
마땅히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나지 않자, 청허는 도리어 불안한 심경이 되었다.
멀리서 유르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음 순서로 성주님의 취임사가 있겠습니다!"
취임사? 청허의 표정이 야릇해졌다.
이번 흘혼제는 흘혼과 취임을 겸한 행사이긴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저 녀석이 취임사를?
뭔가 재미있는 일이 생길 것 같긴 한데, 한편으론 굉장히 불길한 느낌도 들었다.
재환은 망설임 없이 유르헨이 있던 단상으로 올라갔다. 연회장의 모두가 단상 위에 선 젊은 성주에게 집중했다.
"내 이름은 재환이다. 이번에 고르곤의 성주가 됐다."
누군가가 실소를 터뜨렸고, 또 누군가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따위로 시작하는 취임사는 들어 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몇몇 방파의 인사들은 그의 취임사에 몹시 흥미로운 눈길을 보냈다.
아무리 그가 새로운 성주가 되었다고 해도, 연회장에 모인 이들은 혼돈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한 실력자들이다. 그런 강자들이 우글거리는 곳에서 저따위로 서두를 연다는 것 자체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나는 아이멜 그로셰크가 누구인지 모른다. 그가 무슨 일을 했는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또 어떤 성주였는지도 모른다. 솔직히 말해 내가 알 바도 아니다."
그야말로 충격적인 취임사였다.
곁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유르헨의 광대가 떨리고 있었다.
"당신들이 나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어. 젊은 놈이 갑자기 성주가 되어서 이렇게 저렇게 떠드는 게 심히 보기 좋지 않겠지. 아마 당신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코웃음을 치던 이들도 재환의 연설에 조금씩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재환은 분명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보아하니 지닌 영압도 형편없고, 나이도 어린 것 같은데 저런 놈이 대체 어떻게 성주가 된 거지? 틀림없다. 저놈은 쥐뿔도 없는 놈인데 분명 운이 좋아서 성주가 되었구나. 그래, 이해한다. 심지어 놀랍게도 당신들 생각이 맞다. 실제로 나는 아무 생각도 없었는데 그냥 갑자기 성주가 됐거든."
그 말에 누군가는 얼굴이 붉어졌고, 누군가는 헛기침을 했으며, 또 누군가는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을 깔깔대던 신녀방의 부방주가 청허의 어깨를 붙잡고 물었다.
"영감, 저거 대체 뭐 하는 놈이야?"
신녀방의 부방주가 옆을 돌아보자, 청허는 바보같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재환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당신들은 내가 성주가 된 것이 못마땅하고, 나도 성주 따위는 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당신들의 불만과 내 고충을 종합하여 모두가 만족할 결과를 만들 수 있을까? 그렇게 30초 정도 고민한 결과, 나는 해결책을 찾아냈다."
해결책? 뜻밖의 말에 좌중이 웅성거렸다.
재환은 좌중들이 충분히 떠들고 또 진정될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가 말을 이었다.
"나는 오늘부로 성주를 그만둔다."
그 말에 누군가가 마른침을 삼켰고, 또 누군가는 작은 비명을 질렀다. 쾅, 하고 테이블을 박차고 일어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모두의 심정은 한결같았다.
지금,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가?
한쪽에서 넋을 놓고 있던 청허가 중얼거렸다.
"망할, 취임사가 아니라 퇴임사였구만."
불안하게 들끓던 좌중 사이에서 질문이 쏟아졌다.
"진정들 하고, 한 명씩 말하지. 거기 번개 머리 영감부터."
그 말에 혼돈 십방 중 하나인 뇌신방의 수석 장로가 붉으락푸르락하는 얼굴로 물었다.
"이보시오, 성주. 지금 진심으로 하는 소립니까?"
"그래."
"그게 무슨 의미인지 제대로 알고 계신 겁니까?"
"당연하지."
"······지금 성주는 성주의 자리를 포기하고 죽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성주가 성주의 자격을 양도한다는 것은 죽음을 선택하겠다는 말과 같다. 성주의 자격은 임종을 앞두었을 때만 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재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허, 왜 그런 어리석은 짓을······."
재환의 말에 흥미가 생겼는지, 곳곳에서 질문이 쏟아졌다. 재환은 가장 핵심적인 질문부터 답해 주기로 했다.
"그러면 새로운 성주의 선출 방식은 어떻게 결정할 겁니까?"
"일대일로 나를 쓰러뜨리는 자에게 성주의 자리를 주겠다. 누구든 나를 먼저 쓰러뜨리는 자가 성주의 자리를 갖는다."
일대일 대결.
막연했던 이야기에 세부가 생겨나자 좌중의 동요도 커졌다. 재환이 진심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누군가가 커다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핫! 정말로 호쾌한 성주가 나타났군. 아이멜이 정말 대단한 사내를 선택했어!"
웃음소리에 담긴 강맹한 영력에 다들 기가 죽었다.
그는 '남해방(南海房)'의 방주인 카이만이었다.
십방의 사자들이 수군거렸다.
"이런, 남해방주도 와 있었나?"
"하기사, 남해방주는 고르곤 전 성주와 제법 친분이 있었으니······."
그런 카이만을 일별한 재환이 다시 말했다.
"기한은 한 달이다. 십방이든, 다른 성채든, 하여간 누구든 좋다. 한 달 안에 일대일로 나를 쓰러뜨리기만 하면 그자에게 성주 자리를 넘겨 주마."
"그게 전부인가? 다른 조건은 없나?"
카이만이 모두를 대표해서 물었다.
"물론 있지. 이렇게만 말해 두면 내가 너무 불리하니까, 한 가지 조건을 덧붙이겠다."
"조건? 그게 뭐지?"
"승부에서 질 경우, 모든 도전자는 내가 시키는 명령을 반드시 수행해야만 한다."
그 말에 좌중 일부가 반발을 일으켰다.
그들은 혼돈 십방의 수뇌들이었다.
혼돈 십방이 어떤 존재인가. 명실공히 혼돈의 최강 집단이 아닌가.
아무리 고르곤 성채의 성주라고 해도 그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는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궁금하기도 했다. 대체 무슨 명령을 내릴 속셈이기에 저자는 성주의 자리와 자신의 목숨을 거는 것일까?
남해방주 카이만이 물었다.
"그 명령이라는 게 뭔지, 물어 봐도 되겠나?"
그러자 재환이 입을 열었다.
"내게 패배한 자들은 모두, 두 달 뒤 출발하게 될 「심연 원정대」의 일원이 될 것이다."
Episode 8. 최후의 낭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