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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 - 7

*

「······초대형 망자 「마그리트」가 퇴치된 후 열흘이 지났다. 그간 고르곤 성채에는 몇 가지 큰 변화가 있었다. 가장 큰 변화는 성채의 주민들이었다. 나는 거리를 지나가던 한 노인에게 말을 걸어 보았다······」

「긴급 메모」 스킬을 통해 메모를 타이핑하던 "이달의 혼돈" 수습기자 레니우스는, 돌연 고개를 들며 다음과 같이 물었다.

"그러니까 영감님께서 생각하시기에, 그 사건 이후 고르곤에 나타난 제일 큰 변화는 뭡니까?"

레니우스의 질문을 받은 이는 커다란 각수의 뿔을 어깨에 짊어진 근육질의 노인이었다.

어느 공방에서 직공이라도 하는 모양인지, 노인의 허리춤에는 끌과 망치가 매달려 있었다. 직접 뿔을 운반하고 있는 걸 보면 그리 높은 직위는 아니리라. 열흘 전의 사건에 대해 묻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상대였다.

노인이 대답했다.

"살기 좋아졌어."

"정확히 어떻게 좋아진 겁니까?"

"어떻게라.... 뭐, 살림살이가 좀 폈다는 얘기지."

며칠 사이, 고르곤의 경제는 대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혼돈 십방 중 여섯이 본거지를 고르곤 성채로 옮긴 것이 컸다. "혼돈"의 내로라하는 수많은 강자들이 고르곤에 집결하자 각수의 뿔을 비롯한 주요 자원들의 공급이 자연히 급증했다.

"살림이 폈다기에는 상황이 많이 심각한데요."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 고르곤의 외경은 그야말로 처참한 모습이었다. 초대형 망자 「마그리트」를 퇴치하며 입은 피해로 외성은 반파되었고, 상당수의 주민들이 터전을 잃었다. 많은 영혼들이 영멸의 길을 걸었다.

한데 그런 비극을 겪은 장소치고 고르곤의 분위기는 밝았다. 부서진 집을 수리하는 사람들의 눈빛은 부드러웠고, 함께 각수의 뿔을 나누는 이들의 목소리는 묘하게 들떠 있었다. "혼돈"의 그 어느 성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뭐, 기자 양반은 「파도의 길」을 보지 못했으니 그리 말할 수도 있겠지."

「파도(波濤)의 길」.

한줄기 검광(劍光)에 의해 망자들로 이루어진 칠흑의 파도가 갈라진 사건. 수습기자 레니우스도 들은 바가 있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위대한 시인 유프라테스는 그 광경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고 한다.

―마치 대자연(大自然)이 한 명의 인간 앞에 무릎을 꿇는 듯했다.

애송이 기자인 그로서는 아리송한 노릇이었다. 한 인간이 망자들로 이루어진 파도에 '길'을 내다니, 그게 있을 수 있는 일이란 말인가?

「파도의 길」이 열렸던 날. 고르곤에는 수습기자 레니우스의 선배들― 즉 "이달의 혼돈" 소속 기자들이 다수 몰려와 있었다.

그날 선배 기자들이 남긴 마지막 메시지들은 다음과 같았다.

―때로는 스스로 몇 줄의 기사가 되어야 할 때가 있다.

그들은 대체 무엇에 홀렸는지, 모조리 「파도의 길」에 몸을 던졌고, 망자들과 싸웠다.

그리고 죽었다.

그것이 말단 기자인 레니우스가 이곳에 파견된 전말이었다.

······그날 사람들은 대체 무엇을 본 것일까.

그날 무슨 일이 있었기에, 고르곤의 주민들은 이처럼 낯선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일까.

"아무튼 고르곤은 살기 좋아졌소. 나 같은 무지렁이가 말할 수 있는 건 그게 전부요."

아리송한 말이었다. 근육질 노인은 그 말을 남기며 각수의 뿔을 짊어지고서 작은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막사 입구에는 '의료원'이라는 명패가 붙어 있었다.

레니우스는 무심결에 노인을 따라 들어갔다.

"어이, 새 뿔이다."

"오셨습니까!"

곳곳에서 달려온 의료원들이 뿔의 상태를 가늠했다.

"이런, 사각수의 뿔이로군요. 이건 저희 힘으로 가공해낼 수가······."

"그래서 내가 직접 왔잖은가."

껄껄 웃던 근육질 노인이 끌과 망치를 들고서 뿔을 으깨기 시작했다. 망치 끝에서 흘러내린 뿔의 입자들이 하얀 종이 위에 고스란히 떨어졌다. 의료진들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감탄한 것은 레니우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수습기자에 불과한 그도 사각수의 뿔이 얼마나 단단한 물질인지는 안다. 그런 뿔을 가루로 만드는 것은 상당한 수준의 장인이 아니면 불가능한 기술이었다.

평범한 노인이 아니었단 말인가?

레니우스의 궁금증은 곧 의료진들이 흘린 찬사에 의해 해소되었다.

"역시 부공방장님의 「가공」은······!"

"정말 대단하십니다."

노인의 「가공」에 의해 분쇄된 약들은 투병 중이던 환자들의 입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어허, 약 흘리니까 말하지 마세요."

레니우스는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사각수의 뿔을 약으로 공급하다니. 다른 성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설마 지금 무상으로 약을 나눠 주시는 겁니까?"

"응? 아아, 그렇소."

환자들은 모두 「무적응자」 수준의 환자들이었다. 「무적응자」들이 사각수의 뿔로 만든 약을 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왜 이런 일을 하는 겁니까? 사각수 급의 약을 무상으로 공급하게 된다면 내성의 재정이······."

"성주께서 직접 각수를 사냥해 오시니까 상관없소."

"...성주께서 직접?"

"그렇소. 한 번 나갈 때마다 수백 마리씩 잡아 오시더군. 덕분에 의료원에 뿔이 끊길 일은 없소."

레니우스는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지 의아했다. 성주가 각수를 사냥하다니, 그게 대체 무슨 경우란 말인가?

노인이 시큰둥한 말투로 대답했다.

"백날 설명해 봐야 소용없어, 기자 양반. 여기서 살아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니까."

레니우스는 노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이 우연히 말을 걸게 된 이 노인이 누구인지 이제 알게 되었다.

〈황혼 어스름〉의 부공방장, 메이칼 가르나드.

가르낙의 뿔을 가공할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며, 고르곤 최고의 직공이라 불리는 자.

그런 노인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의 이름을 레니우스는 알고 있었다. 알았기에 믿을 수 없었다. 그것은 이 혼돈에서 가장 낯선 감정이었기 때문이다.

―살기 좋아졌어.

이곳 "혼돈"에서 백 년 이상 존재했던 이들은 '산다'라는 동사를 쉽게 쓰지 않는다. 그 말 자체가 이미 모순인 까닭이다.

그런데 150년을 산 메이칼 가르나드가 그런 표현을 사용했다.

레니우스는 「긴급 메모」를 뒤적여, 자신이 처음으로 이 기사를 담당 받았을 때 정했던 기사의 헤드라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고르곤 성주, 그는 혼돈의 구원인가, 아니면 재앙인가?」

레니우스는 조용히 기사의 헤드라인을 지웠다.

다시 고개를 든 레니우스는 의료원의 정경을, 고르곤의 거리를 내다보았다. 미소 짓는 사람들의 모습. 부서진 가게를 고치고, 다친 이들을 돌보며 고양된 사람들의 표정.

레니우스는 그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살피다가, 자신의 손끝이 알 수 없는 충만감에 휩싸여 떨리는 것을 느꼈다.

기적 같은 구원도, 모든 것을 끝낼 재앙도 아닌 것.

혹은 그러한 구원과 재앙을 모두 포함하는 것.

무엇으로 향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어디론가 향할 수 있다는 가능성 그 자체.

그 순간 레니우스는 번개 같은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곧바로 자신이 얻은 깨달음을 자신의 「긴급 메모」에 써넣었다.

「고르곤의 주민들이 살아가기 시작했다.」

자신이 쓴 문장임에도 불구하고, 레니우스는 그 문장이 정확히 어떤 의미를 품고 있는 것인지 잘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그 말이 품은 가치가 아주 중요한 무엇이라는 것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문장은 앞으로의 "혼돈"을 설명할 아주 중요한 서두가 될 것이다. 기자로서의 예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쿠구구구.

한창 들떠 있던 레니우스의 사고를 멈춘 것은 내성 쪽에서 갑작스레 들려온 폭음이었다. 내성의 외벽에서 짙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긴장한 표정의 레니우스에게 메이칼이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최근 자주 있는 일이지."

저만한 폭음은 고차 적응자들이 영력 대결을 펼치지 않고서야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레니우스의 머릿속에 몇 가지 시나리오들이 빠르게 스쳐갔다.

그러고 보니 혼돈 십방 중 여섯이 고르곤에 본거지를 두었다고 했지.

어쩐지 너무 조용하다 싶었다. 하나의 성채에 십방이 세 개만 있어도 성채는 십방 간의 세력 다툼으로 시끌벅적해진다. 그런데 현재 고르곤에는 십방 중 무려 여섯이 모여 있다.

"십방 사이에 전쟁이 벌어진 겁니까?"

"전쟁?"

그 말에 메이칼은 무슨 유쾌한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껄껄 웃었다.

"저것도 전쟁이라면 전쟁이겠지."

내성 외벽을 뚫고 하늘하늘 날아가는 혼돈의 방주들을 바라보며, 메이칼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오늘은 다섯이군."

*

고르곤 내성의 연무장.

재환에게 이리저리 얻어맞아 얼굴 곳곳이 시퍼렇게 변한 방주들은 얌전히 무릎을 꿇은 채로 재환의 앞에 도열해 있었다.

"약해."

방주들은 수치심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제껏 그들에게 그런 말을 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수백 년 동안 대체 뭣들 한 거냐."

뭐라 반박하고 싶은데 도저히 명분이 없었다.

방금 그들은 2석인 무극방주를 제외한 다섯이 한꺼번에 덤볐음에도 불구하고 처참한 패배를 맛본 참이었다.

다섯 중에서 가장 먼저 나가떨어졌던 뇌신방주 윤용은 재환의 찌르기를 되새기며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윤용, 너는 발만 빠르다."

뇌신방주 윤용이 고개를 숙였다.

재환은 다른 방주들을 향해서도 한마디씩을 첨언했다.

"강황은 파괴력은 강한데 속도가 느려."

화왕방주 강황이 불만스럽게 입술을 실룩였다.

"자극령은 민첩하고 센스가 있지만 지구력이 형편없어."

신녀방주 자극령이 입술을 깨물었다.

"제갈명, 너는 수를 쓰기 전에 생각이 너무 많다."

학림방주 제갈명이 머쓱한 듯 머리를 긁었다.

"카이만, 당신은 이 중에선 제일 낫다. 기본기도 출중해. 딱히 단점이 없지. 하지만 그건 거꾸로 말하면 특출난 장점도 없다는 뜻이야."

남해방주 카이만은 그 평가를 순순히 수긍하는 듯했다.

재환의 시선은 마지막으로 방주들 전부를 향했다.

"그리고 너희는 공통적인 문제가 하나 있다. 그게 뭔지 알아?"

방주들이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재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제대로 노력도 안 하고 이미 뭔가가 되어 있다는 거야."

방주들의 표정이 무참히 구겨졌다.

그리고 약간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구경하던 두 노인이 있었다. 무극방주 신무극과 절망신의 청허였다.

"옳은 소리군."

"애송이 덕분에 속이 다 시원하구만."

청허가 낄낄거렸다. 언제고 젊은 십방주 놈들을 모아 크게 조져 주고 싶은 생각이 있었는데, 그 비원이 오늘에서야 이루어진 것이다.

"거기 영감들도 천년 산 것 치곤 너무 약해."

청허가 입가를 실룩거렸다.

"······시벌."

하지만 청허는 딱히 대거리하지 않았다. 그 역시 재환의 기준에 수긍하는 차였기 때문이다. 청허의 기준에서도 현재의 「심연 원정대」는 심히 불만족스러운 전력이었다.

정확히는, 900년 전보다도 훨씬 못한 수준이었다.

900년 전에도 혼돈 십방은 있었다. 그리고 당시 십방주들의 무력 수준은 전원이 7차 적응자 수준이었고, 상위의 5석은 8차 적응자였다. 심지어 당시 제1석이었던 전대 천룡방주는 9차 적응자였다.

그리고 원정대장 몽마 뮬라크는 9차 적응자조차 상회하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강자들조차 힘겨워 한 원정.

"심연"은 그런 괴물들이 사는 곳이었다.

"다들, 최근 있었던 토벌전 기억하지?"

"기억합니다."

뇌신방주가 대답했다.

재환이 말하는 '토벌전'이란 사흘 전 있었던 '금천방 북쪽 지부 토벌전'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때 너희들 중 절반이 크게 다치거나 심지어는 죽을 뻔했다."

재환의 말에 뇌신방주와 화왕방주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사흘 전 있었던 토벌전에서, 6차 적응자인 뇌신방주는 거의 죽을 뻔했고, 7차 적응자인 제갈명도 큰 상처를 입었다.

금천방의 본부인 만티코어를 친 것도 아니고, 고작 북쪽 지부 연합을 없애는 데 그만한 손해를 입었다.

망귀객(忘鬼客).

영혼의 절반만이 망자화됨으로써, 망자의 힘과 인간의 이성을 동시에 가진 살인 병기들. 그들을 상대하고서야 십방주들은 성채 만티코어가 어떻게 한낱 방파 하나에게 함락된 것인지를 이해했다.

하나하나가 6차 적응자에 비견될 만큼 강력한 병기. 그런 병기들이 수백 구나 있었기에, 금천방은 만티코어를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것이다.

소문으로는 서쪽 성채 가루다 또한 비슷한 형태로 난전을 치르고 있다는 얘기도 있었다.

"고작 방파 하나 상대하는 데도 이 모양인데, 어떻게 '원정'을 떠나겠어?"

한심하다는 듯한 목소리에 십방주들이 고개를 숙였다.

"오늘부터 일주일간 특훈을 실시한다."

그 말에 십방주들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특훈?

그들은 재환의 말을 이해했으나, 한편으로는 납득할 수 없었다. 강해져야 한다는 건 알겠다. 그리고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도 알겠다.

하지만 일주일이라. 고작 일주일만으로 어떻게 강해진단 말인가? 일행을 대표해서 손을 든 것은 학림방주 제갈명이었다.

"성주님, 질문 하나만 해도 되겠습니까?"

"해봐."

"성주님도 아시다시피, 이곳에 모인 십방주들은 모두 '적응자'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어서 십방주 중 몇몇은 제갈명이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의아한 얼굴이었다.

"알고 있어."

"그렇다면 이것도 알고 계시겠군요. '적응 차수'라는 것은 단숨에 도약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 말입니다."

적응 차수.

총 1단계부터 15단계까지.

적응자들의 등급을 나누는 숫자.

제갈명이 말을 계속했다.

"재능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보통 무적응자가 1차 적응자가 되기까지는 10년의 세월이 걸립니다. 다시 1차 적응자가 2차 적응자가 되기까지는 20년의 세월이 걸리지요. 2차 적응자가 3차 적응자가 되려면 40년이 걸리고, 3차 적응자가 4차 적응자가 되려면 다시 80년의 세월이 걸립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인간은 4차 적응자가 되기도 전에 목숨을 잃지요."

적응 차수는 일반적으로 단계가 상승할 때마다 특정한 계기가 없는 한 두 배 이상의 수련 시일을 요구한다. 4차 적응이 '고차 적응자'라고 불리는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150년의 세월 동안 '적응자'로 살아남을 수 있는 인간이 그리 많지 않은 까닭이다.

"그나마도 단순한 시간의 축적을 통해 올라설 수 있는 경지는 7차가 한계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인간으로 도달할 수 있는 한계는 7차'라는 말이 생긴 것도 그 때문이지요."

십방주들은 모두 혼돈에서 내로라하는 기재들이다. 그런 기재들이었기에 남들보다 더 빨리 6차, 또는 7차 적응에 올라설 수 있었던 것.

그러나 그들은 명백히 깨닫고 있었다. 이것이 그들의 한계라는 것을.재환이 물었다.

"그래서?"

"성주님이 각성자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각성자.

그 말에 십방주들의 표정이 다양하게 변했다.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을 한 자도 있었고, 경악한 얼굴을 한 자도 있었다.

재환이 대답했다.

"그래. 나를 두고 그렇게 부르더군."

어차피 이제 숨길 생각도 없었다.

그러자 제갈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저는 각성자들에 관해 거의 아는 바가 없습니다. 사실 저뿐만이 아니라 누구라도 마찬가지겠지요."

'적응' 그리고 '적응자'에 관해서는 널리 알려진 사실들이 많다. 가령 적응이 총 15단계로 이루어져 있다든가, 적응의 특정 단계에 이르면 어떤 힘을 얻게 된다든가······. 그러나 '각성'은 다르다. 대체 어떤 원리로, 또 어떤 방식으로 수련해야 '각성'에 도달할 수 있는지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제가 알고 있는 것은 각성자들에 관한 몇 가지 소문들뿐입니다. 듣기로 각성자들은 꾸준한 축적이 아니라, 갑작스러운 깨달음을 통해서 또 다른 단계로 도약한다고들 하더군요."

재환은 자신이 처음으로 「망아」를 얻었을 때를 떠올렸다. 확실히 그렇다. 시스템의 껍질을 벗고 완전한 '자신'이 되던 순간. 깨달음의 축적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결국 「망아」를 만드는 것은 압도적인 감정의 폭발이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비워내고 새로이 구성하던 순간의 폭발감. 그것이 각성의 원천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성주님은 저희가 적응자라는 것도 알고 계시고, 갑자기 강해질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계시지요."

"그래."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군요."

학림방주 제갈명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혹시 성주님께서는 저희를 '각성자'로 만드시려는 겁니까?"

Episode 9. 삼성회동(三城會同) (2)

"위대한 땅"의 사가들은 '각성자'라는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시스템을 벗어난 이레귤러.

이처럼 노골적으로 드러난 이단성(異端性) 때문인지, 각성자에 대한 일반적인 평판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실제로 활동 중인 각성자 중 다수가 테러 단체 「균열」의 소속원이라는 것도, 그런 인식에 크게 기여했다.

참고로 「균열」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다음과 같았다.

―걸핏하면 세계에 불안을 조성하는 놈들.

그러나 이처럼 배타적인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위대한 땅"에서 각성자의 가치는 보통의 적응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다.

압도적인 강함과 희귀성.

12지대의 군주들은 각성자들을 영입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으며, 매우 드물긴 하지만 군주 본인이 각성자인 경우도 있었다.

방주들 사이에 퍼진 정보에 의하면, 현 고르곤의 성주인 재환 또한 그런 각성자들 중의 하나였다.

그런 재환이 '특훈'을 하잔다.

그러니 십방주들의 표정에 묘한 기대감이 서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맞아. 나는 너희를 각성자로 만들 생각이다."

그 말에 방주 중 몇몇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그러나 재환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은 채였다.

"하지만 너희 모두를 각성자로 만들 생각은 없다."

"어째서입니까?"

"너희들 중엔 분명 각성을 원하지 않는 이들이 있을 테니까."

재환은 얼마 전 청허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애송이 너도 겪어 봤으니 알겠지만, 평범한 존재가 완전한 '각성'에 오르기 위해서는 총 세 가지 단계를 거쳐야만 한다.

각성의 첫 번째 단계.

그것은 그들이 지금까지 살아온 '적응'의 세계를 부수는 것이었다. 기존의 각성자들은 이 과정을 「해체(解體)」라는 이름으로 불렀다(이것은 재환의 용어로는 「의심」에 해당하는 단계였다).

자신이 바라보는 세계'에 대한 고정관념을 부숨으로써, 그들이 살아온 생이 실은 수많은 수치들에 의해 합의된 삶이었음을 깨닫는 것.

이 단계에 오른 이들은 세계를 「해체」하여 그 본질을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된다. 세계를 구성하는 무수한 숫자와 입자들― 단단한 돌멩이처럼 견고하던 세계의 구성 원리가 그들의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각성의 제1단계 「해체」였다.

재환은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며 그를 올려다보는 방주들을 쓱 훑어보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희들 중 대부분은 각성을 깨닫기엔 너무 오래 살았다."

너무 오래 살았다고?

뇌신방주가 의아한 기색으로 물었다.

"성주님 말씀을 잘 이해하질 못하겠습니다만."

"아마 우리가 이 세계의 시스템에 지나치게 익숙해져 있다는 의미 같군요."

대답한 것은 신녀방주 자극령이었다. "혼돈"의 지낭(智囊)이라는 별명답게, 그녀는 재환의 말을 단번에 이해했다. 그러나 뇌신방주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자극령이 한숨을 푹 내쉬며 첨언했다.

"스킬이나 스테이터스와 같은 시스템의 혜택들을 너무 오래 누려왔다는 뜻이에요."

"아아, 그런 뜻이었습니까!"

"······뇌신, 그런 이해력으로 잘도 십방주의 자리에 올랐네요."

뇌신방주 윤용이 머쓱하니 웃으며 답했다.

"흠흠, 머리야 어쨌건 저도 과적응자입니다."

과적응자. 적응자들 중 스킬이라든가 인터페이스 시스템에 관해 과도한 수준의 친화도를 보이는 자들.

소위 '시스템의 축복을 받았다'라는 말로 일축되는 이 '과적응자'들은 평범한 적응자들에 비해 적은 시간을 투자해 높은 적응 차수에 오를 수 있었다.

재능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적게는 10배에서 많게는 100배 이상 빠른 성장 속도를 가진 자들.

12군주들 중 대부분이 이러한 '과적응자'의 정점에 있는 존재인만큼, 과적응자 역시도 "위대한 땅"에서는 희귀한 재능이었다.

"멍청한 놈. 여기 과적응자 아닌 녀석이 어디 있느냐?"

화왕방주 강황이 뇌신방주 윤용에게 꿀밤을 먹이며 말했다.

강황의 말대로 십방주 정도 되면 과적응자 아닌 이가 없었다. 비록 최상급 적응의 자질은 아닐지라도, 모두 중급 이상은 되는 자질들이었다. 애초에 그만한 자질이 없고서야 십방주의 자리에 오를 턱이 없었다.

그때, 남해방주 카이만이 입을 열었다.

"나는 과적응자가 아니오."

남해방주 카이만. 그는 십방주 모두가 가지고 있는 적응의 축복을 받지 못했다.

구백 년의 삶을 살아오는 동안, 카이만은 순수한 노력만으로 7차 적응이라는 높은 차수에 오른 인물이었다.

그런 카이만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그리고 성주, 나는 이미 준비가 되어 있소."

"쉽지 않을 거다."

"그건 신녀방주의 말처럼 우리가 이 세계의 시스템에 너무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오?"

"그래."

"그런 문제라면 걱정하지 마시오."

남해방주 카이만이 서슬 퍼런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더 강해질 수만 있다면, 나는 얼마든지 내 '세계'를 버릴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남해방주.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알고 말하는 건가요?"

신녀방주 자극령이 날카롭게 물었다.

"우리가 지금까지 쌓아온 시간을 모두 내버린다는 것과 같은 의미에요. 당신은 지금까지 쌓아온 스킬과 스테이터스를 모두 휴지 조각처럼 버릴 수 있다는 건가요?"

그녀의 말에 반응한 것은 의외로 카이만이 아니라 다른 방주들이었다. 적게는 이백 살에서 많게는 천 살이 넘는 시간을 살아온 방주들.

강해지기 위해서 온갖 고행을 거쳐 왔고, 최상급 스킬 하나를 손에 넣기 위해서 평생을 분투해온 자들. 그런 자들에게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을 포기하라니. 그것은 자살을 권고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확실히 그건 조금······."

중얼거린 것은 화왕방주 강황이었다. 뇌신방주 윤용 또한 동의하는 기색이었다.

재환은 그들의 표정을 살피며 생각했다.

그렇겠지.

어느 정도는 이런 반응을 예상했다.

각성은 불완전하고 확실하지 않은 길이었다. 이미 안정된 궤도에 오른 고차 적응자들이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각성의 길을 고집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 모험을 하기에, 고차 적응자들은 기존의 시스템에 너무나 익숙해졌다. 그들이 시스템인지, 시스템이 그들인지 모를 만큼.

남해방주 카이만이 자극령을 향해 입을 열었다.

"스킬이든 뭐든, 나는 모든 걸 버릴 준비가 되어 있다. 군주 놈들을 향한 증오만 제외하고 말이지."

무시무시한 살기가 느껴지는 말이었다.

잠깐 어깨를 움츠렸던 신녀방주 자극령이 재차 입을 열었다.

"단순히 스킬이나 스테이터스를 잃는 문제로만 끝날 것이 아니에요! 900년 이상 살아온 남해방주 당신이라면 잘 알고 있을 텐데요? 각성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말이에요."

"······."

"설마 「대실종(大失踪)」을 잊어버린 건 아니겠죠?"

그 말에 몇몇 방주들은 안색이 변했고, 또 몇몇 방주들은 그게 뭔가, 싶은 표정을 지었다.

물론 재환은 후자였다.

재환을 대신해 입을 연 것은 뇌신방주였다.

"대실종? 그게 뭡니까?"

아무래도 다른 방주들에 비해 살아온 시간이 짧은 뇌신방주는 역사학적 식견이 부족한 편이었다.

자극령이 슬며시 입술을 깨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보다 연로하신 방주님들은 모두 알고 계시겠지만, '각성자'가 지금처럼 공포의 대명사가 된 데에는 계기가 있어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모든 것은 「균열」의 등장과 함께 시작되었죠."

「균열」.

이번만큼은 모든 방주들의 안색이 희게 질렸다.

"위대한 땅"에서 그 단체의 이름을 모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칠백 년 전, 갑자기 "위대한 땅"에 나타났어요."

지금도 "위대한 땅"의 무수한 강자들은 당시의 일을 공포로 기억하고 있었다.

―우리는 「재배」와 싸울 것이다.

칠백 년 전. 테러 단체 「균열」은 그러한 선언과 함께 갑작스레 세상에 등장했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들의 섣부른 선언은 "위대한 땅"의 무수한 군주들의 분노를 샀다. 선언에 제일 크게 반발했던 것은 당시 4지대의 군주였던 마이할트였다.

마이할트는 각성자의 소문을 믿지 않는 군주 중 하나였다.

―각성자인지 뭔지 하는 놈들은 새끼손가락 하나로도 죽여 줄 수 있다.

호언이 퍼진 다음 날.

4지대의 군주 마이할트는 자신의 침소에서 새끼손가락이 잘린 채로 발견되었다. 심지어 그의 새끼손가락은 마이할트의 심장 어림에 박혀 있었다.

"위대한 땅"이 「균열」을 두려워하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비록 12지대 중 최약체이며 그 자격을 의심받던 4지대의 군주라고는 하지만, 군주 하나를 그의 침소에서 격살할 정도의 능력을 갖춘 집단.

심지어 사건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균열」은 다음과 같이 공표했다.

―누구나 각성자가 될 수 있다. 각성자가 되고 싶은 자, '잊혀진 땅'으로 오라.

"위대한 땅"은 동요했다.

4지대의 군주가 격살된 직후였기에 더욱 그러했다.

각성자에 관한 소문이 "위대한 땅"에 들끓었고, 몇몇 적응자들은 정말로 자신이 각성자가 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에 부풀었다.

―세계를 부정하라.

적응자들은 「균열」의 본거지가 있다는 잊혀진 땅으로 모여들었다. 족히 수만 명에 이르는 인파였다.

이상한 점은, 이후의 일에 관해 알려진 사실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그 해, 잊혀진 땅에 모여든 수만 명의 인파는 말 그대로 증발해 버렸다.

누군가는 그들 중 일부가 각성자가 되었다고 말했다. 또 누군가는 그들이 광인이 되었다고, 또는 「균열」에서 행하는 끔찍한 실험에 쓰인 후 무참히 버려졌다고 말했다.

무성한 것은 소문들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균열」은 조용해졌고, 소문들도 사라졌다. 행방불명된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것이 「대실종」이라 알려진 사건의 전말이었다.

"당시 잊혀진 땅으로 향했던 이들 중에는 "위대한 땅"에서 저와 함께했던 동료들도 있었어요."

어느새 방주들은 자극령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방주들조차도 「대실종」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기회는 드물었기 때문이다.

"그들 중에는 잊혀진 땅에서 각성자가 되어 돌아온 이들도 있었죠. 그들의 말로는 '1단계 각성'에 불과하다고 했지만요."

어느새 재환도 자극령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지금까지 청허 이외의 각성자를 만난 적이 없는 재환에게는 흥미로운 화제였다.

"그들은 어떻게 됐지?"

"···모두 자살했어요."

방주 중 몇몇이 신음을 흘렸다.

"그들은 모두 심한 정신 분열을 앓았어요. 광증에 시달리는 이들도 있었고, 기억을 통째로 잃어버린 이들도 있었죠. 모두 그 증상은 달랐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어요."

"그게 뭐지?"

"자신이 누구인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는 거예요."

화왕방주 강황이 입을 열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겠다니, 그게 무슨 뜻이오?"

"...말 그대로예요. 지금까지 설명했잖아요. 그러니까―"

"자신을 설명하는 데는 이름만으로도 충분하지. 나는 화왕방주 강황이오. 그걸 모르는 사람이 있는가?"

신녀방주는 그런 강황을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말했다.

"성주, 벌써 한 명은 각성자 후보에서 탈락인 것 같군요."

강황이 뭐라고 대거리하려는 찰나, 재환이 입을 열었다.

"자극령. 일단 두 가지만 확실하게 말해 두지."

"무엇을······."

"첫째, 나는 「균열」이 아니다."

그 말에 신녀방주 자극령이 작게 입을 벌렸다.

사실 자극령이 「균열」에 관한 화제를 꺼낸 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행동이었다. 그녀는 에둘러 재환의 출신을 알아보려 했다.

"위대한 땅"에서는 누구나 '각성자'라는 말을 들으면 「균열」부터 떠올리게 되어 있다. 그러나 「균열」은 함께하기엔 너무나 위험한 단체였다. 「균열」에 함부로 가담했다간 12지대의 군주들은 물론이거니와, 시스템을 총괄하는 존재인 「빅 브라더」의 원한을 살 수도 있었다.

실제로 재환의 말을 듣고 몇몇 방주들의 얼굴에 안도의 기색이 스쳤다.

"둘째, 너희 말대로 '각성'은 위험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너희를 억지로 각성자로 만들 생각이 없다."

"그 말은······."

"각성에 관해서는 따로 지원자를 받겠다."

재환은 카이만 쪽을 흘끗 바라보며 말했다.

자극령이 다시 물었다.

"그럼 각성을 거부하는 이들은 어쩔 셈이죠?"

"그들도 강하게 만든다."

"어떻게요?"

"적응 차수를 높일 거다."

자극령은 조금 실망한 눈빛이었다. 뭔가 특별한 대답이 나올 거라고 기대했는데, 의외로 재환의 계획이 너무 평범했던 것이다.

게다가 그 계획에는 치명적인 문제도 있었다.

"고작 일주일 만에 말인가요?"

"그래."

"그건 불가능해요."

"왜지?"

자극령은 재환을 흉내 내듯 입을 열었다.

"첫 번째 문제는 '시간'이에요."

6차, 혹은 7차 적응자가 되는 데만 수백 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지금 그들에게 주어진 기간은 고작 일주일이다.

"그 문제는 해결할 수 있다."

"······어떻게요?"

재환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방주들 모두를 향해 말했다.

"모두 따라와라."

재환과 방주들이 도착한 곳은 내성의 배후에 위치한 커다란 공터였다.

공터에는 좌우로 큰 부피를 차지하고 있는 1층짜리 원형 건축물이 있었는데, 그 모습이 꼭 거대한 나무의 밑동을 닮아 있었다.

직공으로 보이는 자들은 바삐 움직이며 건축물의 곳곳을 손보거나 다듬고 있었다.

"각수의 뿔로 만들어진 건물이로군."

방주 중에는 건물의 표면을 만져보고 감탄을 연발하는 이들도 있었다.

일행 중 놀라지 않은 것은 오직 청허뿐이었다. 청허는 일주일 전부터 이 장소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셨소, 성주."

직공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앞으로 나왔다. 팔에 불거진 근육이 무척 인상적인 노인이었다.

"새벽의 장인?"

"황혼 어스름의 부공방장이 왜 여기에······."

근육질 노인은 바로 〈황혼 어스름〉의 부공방장인 메이칼 가르나드였다.

재환이 물었다.

"시공은 끝났나?"

"거의 마무리 단계요. 일주일 만에 급하게 만든 거라 조금 시원찮긴 하지만, 성능 자체는 괜찮소. 다만······."

"다만?"

"오염도의 제어가 원활하지 않소."

"그건 괜찮아. 뿔이 많으니까."

재환은 건축물의 외관을 슥 훑어보더니 물었다.

"지금 시동이 가능한가?"

"가능하오."

"그럼 이들에게 보여주지."

고개를 끄덕인 메이칼이 건축물 외부에 설치된 제어판을 건드렸다. 그는 어쩐지 감격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 생전에 이걸 만들 수 있을 줄은 몰랐소이다."

"지금껏 도전하지 않았을 뿐이지, 당신 혼자서도 충분히 만들 수 있었어."

"고맙소, 성주."

메이칼이 희미하게 웃었다. 위잉― 하는 소리와 함께 건물 전체에 불이 들어오더니, 잠시 후 재환과 방주들의 눈앞에 어떤 메시지가 떠올랐다.

[소환에 응하시겠습니까?]

살아서 이 메시지를 다시 볼 줄은 몰랐다.

재환이 메시지에 응답하자, 방주들도 엉겁결에 그를 따라 했다.

다음 순간, 재환과 방주들은 다른 장소에 있었다.

방주들은 그 장소가 건축물의 내부라는 것을 깨달았다. 익숙한 감각이 그들의 뇌리를 덮어오고 있었다.

아주 오래된 기시감.

의식의 깊은 곳에 묻힌, 낡은 자물쇠가 채워진 기억의 상자가 무분별하게 들썩이고 있었다.

그들은 이 장소를 알고 있었다.

어찌 이 장소를 잊을 수 있겠는가.

누군가가 탄식처럼 중얼거렸다.

"악몽의 탑······."

뒤이어 그들의 눈앞에 작은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악몽의 탑, 카르페디엠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Episode 9. 삼성회동(三城會同) (3)

"악몽의 탑" 카르페디엠.

「카르페디엠 프로젝트」라 이름 붙인 이 계획을 재환이 결심한 것은 약 일주일 전의 일이었다.

시일로 따지자면 초대형 망자 「마그리트」가 소멸하고 난 직후였다.

―애송아, 진심이냐? 지금껏 몽마가 아닌 존재가 '탑'을 만든 전례는 없었다.

"악몽의 탑"은 몽마들의 전유물이었다.

오직 몽마만이 만들 수 있으며, 몽마만이 개조할 수 있는 탑.

다른 상위 종족인 악마나 천사들 역시 이 탑의 제어 시스템에 어느 정도 간섭은 할 수 있으나, 실질적인 제작을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몽마뿐이었다.

그런데 인간이 탑의 제작에 도전하다니. 몽마들이 들었다면 영락없이 비웃음의 대상이 될 일이었다.

―괜찮아. 메이칼이라면 할 수 있어. 그리고 완전한 탑을 만드는 것도 아니고 일 층만 제작하는 거야.

―일 층만?

―시간 속도 제어만 가능한 수준이면 돼. 많은 걸 바라지는 않으니까.

그렇게 〈황혼 어스름〉의 전 직공이 투입된 후 일주일. "악몽의 탑" 카르페디엠은 처음으로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

"설마 인간의 힘으로 악몽의 탑을 만들 줄이야."

"1층 밖에 없는 탑이라고 해도 정말 놀랍소."

무한히 뻗어 나간 하늘과 끝이 없는 지평선을 제외하면 별다를 것 없는 내부였지만, 그것만으로도 놀라운 경이였다.

탑을 만든다는 것은 곧 하나의 세계를 직조하는 일이었다. 세계 전체를 조감해낼 수 있는 능력. 그리고 정교한 세부를 재현해 낼 풍부한 상상력이 없다면 불가능한 업적. 그렇기에 지금까지 탑의 제작은 특화된 상상력을 가진 몽마에게만 허락된 과제였다.

오죽하면 수백만 년에 달하는 "위대한 땅"의 역사상 단 한 번도 몽마 이외의 종족이 탑을 만들어낸 일이 없었을까.

그런데 지금, 그들의 눈앞에는 '인간이 만든 탑'이 존재하고 있었다. 곳곳에서 감탄을 연발하는 방주들을 보며 재환은 생각했다.

고생 좀 했지.

일주일 동안, 재환 역시 메이칼과 함께 밤낮으로 탑의 제작에 골몰했다. 그가 「상품」으로서 겪었던 기억과, 장인으로서 오래도록 수련해 온 메이칼의 경험이 없었더라면 결코 만들 수 없었을 탑이었다.

그 과정에서 재환은 몽마라는 종족에 관해서도 여러 가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특히나 몽마들이 사용한다는 「가공」과 같은 스킬은 재환이 사용하는 '각성'의 힘과 무척 닮아 있는 부분이 있었다.

처음으로 '각성'의 힘을 얻은 것은 몽마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나의 세계를 만드는 자들은, 반드시 그 세계의 본질을 직관할 수밖에 없으니까. 어쩌면 몽마들은 이 세계의 부조리에 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종족일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탑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있으며, 「재배」라는 게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도 잘 알고 있을 터다. 그런 종족이었기에 뮬라크처럼 「재배」를 끝내겠다고 선언하는 몽마가 나타날 수도 있었던 것이리라.

학림방주 제갈명이 감격스럽다는 목소리를 냈다.

"감개무량합니다. 「재배」 당하기 위함이 아니라, 「재배」를 부수기 위해 이곳에 다시 오다니······."

"저, 저도. 제가 말하고 싶었던 게 그겁니다!"

뇌신방주 윤용도 흥분한 기색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격앙된 마음을 진정시킨 방주들이 재환을 바라보며 그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앞으로 모든 수련은 이곳에서 이루어진다."

재환은 상기된 얼굴의 방주들을 하나하나 눈여겨 살피며 말을 이었다.

"이미 짐작하고 있겠지만 이 탑 안에서는 시간이 일백 배 정도 느리게 흘러간다. 즉, 혼돈에서의 하루는 이곳에서 백 일이다. 거기에 일주일의 기간을 고려한다면 너희는 총 700일, 약 2년에 가까운 시간을 벌 수 있게 된다."

2년.

그것이 방주들이 갖게 된 새로운 시간이었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이 느려진 만큼 역설적으로 시간의 밀도는 올라간다. 즉, 이곳에서 바깥과 같은 시간을 보내도 영혼이 느끼는 피로도가 차원이 다를 거란 얘기다."

"영혼 오염이 빨라질 거란 얘기로군요."

눈치 빠른 제갈명이 말했다.

"그래. 영혼 오염도는 느려진 시간의 배율에 반비례해서 상승할 거다. 더군다나 너희처럼 오래 산 영혼들이라면 더욱 그렇겠지. 더 이상은 튜토리얼에 참가했을 때처럼 젊은 영혼들이 아니니까."

감각이 예민한 방주들은 재환의 경고를 이미 체감하고 있었다. 막강한 정신력 덕에 오염에 내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오염도는 평소에 비해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상승하고 있었다.

"그럴 때를 대비해서 이 탑에는 영혼 오염도가 80% 이상을 돌파할 시에 자동 로그아웃되는 기능이 부가되어 있다. 로그아웃 후에는 곧바로 각수의 뿔을 섭취할 수 있게끔 상시 준비가 되어 있으니 오염에 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야말로 세심한 배려가 아닐 수 없었다. 재환을 마냥 무뚝뚝하고 냉정한 사내라고만 생각했던 몇몇 방주들은 새삼 달라진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이제 각성에 지원할 자들과 지원하지 않을 이들을 나누겠다."

방주들은 선택의 시간이 다가왔음을 깨달았다.

"각성에 지원하고 싶은 이들은 내 오른편에, 그리고 단순히 적응 차수만을 높이고 싶은 이들은 내 왼편에 서면 된다."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남해방주 카이만이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걸음을 옮겨 재환의 오른편에 섰다.

재환이 입을 열었다.

"다시 말하지만, 죽을 수도 있다."

"죽더라도 후회하지 않소."

카이만의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내게 조금이라도 성장 가능성이 남아 있다면 그건 각성뿐일 테니까."

다른 방주들과는 달리 과적응자도 아닌 카이만은 수십 년 전부터 '적응자'로서 자신이 한계에 부딪쳤음을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요 며칠 동안 재환과 몇 번이고 격전을 치르면서 깨달은 바도 있었다.

그가 힘겹게 쌓아온 900년이, 고작 50년도 채 살지 않은 사내에게 부서지는 충격은 굳건한 정신력의 카이만으로서도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그럼에도 카이만은 이겨냈다. 오히려 더 강해질 기회가 생겼다고 생각하기로 한 것이다. 각성자의 진정한 힘에 관해 알게 되면서 그의 결심은 더욱 확고해졌다.

각성자는 보유 영력의 한계치에 구애받지 않는다.

며칠 사이 카이만이 알게 된 가장 놀라운 사실이 바로 그것이었다.

재환이 사용하는 기술들은 모두 가공할 영력을 소비함에도, 정작 재환이 가진 영력은 적응자 기준에서는 「무적응자」 수준에 불과했다.

최소 10차 적응자가 되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

적응자들 또한 10차 적응자가 되면 보유한 영력이 체내에서 폭발하면서 소위 「무한회로(無限回路)」라 불리는 초월적인 능력을 얻게 된다. 아무리 많은 영력을 사용해도 영력이 줄어들질 않는 것이다.

그런데 각성자는 이미 3단계 수준에서 그와 맞먹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적응자들의 무한회로와는 원리가 다른 듯했지만, 무한에 가까운 영력을 끌어다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했다.

적응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10차 적응자가 되느냐, 아니면 각성의 길에 도전하여 3단계 각성자가 되느냐.

선택의 기로에서 카이만은 망설임 없이 후자를 선택했다. 전자는 최상급 과적응자들도 도달하기 힘든 경지였지만, 후자라면 그에게도 가능성이 있었다.

더군다나 그에게는 재환이라는 든든한 후원자도 있지 않은가.

"군주 놈들에게 한 방 먹여줄 수만 있다면 나는 뭐든 하겠소."

"좋아."

그렇게 첫 번째 지원자가 나타나자, 방주들 사이에서 불편한 기류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괜히 지원 안 했다가 손해 보면 어쩌나?'

'잘못 지원했다가 실패하기라도 한다면······.'

방주들의 얼굴에 드러난 감정들은 너무나 노골적이어서 차마 보는 이가 부끄러워질 지경이었다.

곁에 있던 청허가 쯧쯧 혀를 찼다.

그때, 신녀방주 자극령이 입을 열었다.

"성주,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좋을 대로."

"당신이 가르칠 '각성'의 방식은 보증된 것인가요?"

그 물음에 몇몇 방주들이 침을 삼켰다. 어쩌면 그 질문은 바로 이 시점에서 가장 주효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재환은 곧바로 대답했다.

"아니."

"보증되지도 않은 길을 우리에게 걸으라 하는 건가요?"

"겨우 50년을 살아온 나도 해냈다. 그런데 너희는 못 하겠다는 건가?"

신녀방주 자극령이 살짝 벌어졌던 입을 다물었다.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 그러나 자존심이 상했다는 이유로 선뜻 지원할 만큼 만만한 일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녀에게는 「대실종」을 통해 미쳐 버린 각성자들을 본 기억도 있었다.

재환이 다시 말했다.

"위험하니까 스스로 선택하라고 한 거다. "심연"에 들어가면 분명 이보다 더한 일도 있을 테니까."

"그 녀석 말이 맞다."

말을 받은 것은 구석에서 실실 웃으며 사태를 지켜보던 청허였다.

"지금 너희 수준으로는 "심연" 초입은커녕 "심연"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망자의 궁"조차 통과하지 못한다."

망자의 궁.

"혼돈" 최악의 재해인 유일왕 카타스트로피가 기거하는 곳이자, 무수한 숫자의 대형 망자들의 돌아다니는 "혼돈"의 금역.

방주들은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지는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만약 각성에 성공하면 저희는 얼마나 강해질 수 있는 겁니까?"

그 질문을 한 것은 학림방주 제갈명이었다.

"무사히 각성이 끝나면 너희는 지금의 나와 비슷한 수준의 힘을 얻을 수 있게 될 거다."

"······정말입니까?"

"그렇다."

재환과 동일한 수준의 힘이라는 말에 방주들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초대형 망자 「거꾸로 걷는 마그리트」를 꺾고, 망자의 파도를 일격에 갈라 버리는 힘....

"그렇지만 각성에 성공할 확률은 높지 않다. 짐작건대······."

"너희 중 하나라도 각성에 성공한다면 솔직히 기적이지."

이번에도 말을 받은 것은 청허였다.

"아까 「대실종」이니 뭐니 하며 떠드는 걸 들었으니 알겠지만, 그 대단한 「균열」에서도 각성자의 양산에는 실패했다. 수만 명의 인파 중 각성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0.01 퍼센트도 채 되지 않는다. 그나마도 대부분 정신적 충격을 견디지 못해서 자살하거나 미쳐서 죽고 말았지."

마치 그 일에 관해 잘 알고 있기라도 한 듯한 말투였다. 그럴 법도 했다. 청허는 무려 천 년에 달하는 삶을 살아온 존재였으니까. 칠백 년 전 있었던 「대실종」에 관해 알고 있어도 하등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럼에도 나와 성주가 너희를 각성자로 만들고자 하는 것은, 그 정도의 힘이 없으면 앞으로의 원정에서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꼭 각성자가 되어야만 강해지는 것은 아닐 텐데요. 제가 알기로 9차 적응자가 된다면 3단계 각성자와 비슷한 힘을 낼 수 있다고 들었어요."

자극령의 말에 청허가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대답했다.

"······까다롭게 구는구먼. 뭐, 틀린 말은 아니다. 문제는 고작 7차에 오른 너희가 어떻게 9차 적응자가 될 것인가, 하는 거지만."

"그 문제를 고민할 건 제가 아닌 것 같은데요."

자극령은 재환 쪽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성주는 각성을 거부하는 이들의 '적응 차수'를 어떻게 높일 생각이죠?"

각성은 각성자인 재환과 청허가 도와서 어찌어찌 해나간다고 치자. 하지만 나머지 적응자들은 어떻게 강하게 만들 것인가?

"내가 듣기로 너희 정도의 고차 적응자들이 강해지기 위해서는 새로운 스킬을 익혀 숙련도를 높이거나, 일정량의 깨달음 수치를 충족시키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더군."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단순히 새로운 스킬만으로는 안 돼요. 최상급 스킬이어야만 하죠."

7차 적응자쯤 되면 영력을 상승시키는 것만으로는 적응 차수를 올리는 것에 한계가 오기 시작한다. 시스템은 단순히 영력의 총량이 증가하는 것만으로 적응 차수를 연산하지 않기 때문이다.

재환이 대답했다.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도 준비되어 있다."

"······뭐죠? 최상급 스킬북을 잔뜩 구해 놓기라도 했나요?"

"위대한 땅"에서도 오대세가나 12지대 군주들의 레기온이 아니라면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구하기 어려운 것이 최상급 스킬이다.

이곳의 여섯 방주조차 그런 최상급 스킬들을 셋 이상 익힌 이들은 드물었다. 세가의 금고를 털기라도 하지 않는 이상, 최상급 스킬들을 입수해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꼭 스킬북일 필요는 없지. 선생에게 배우면 돼."

선생? 신녀방주 자극령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확실히 스킬은 스킬북 이외에도 개인 전승의 형태로 전수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목숨과도 같은 최상급 스킬들을 누가 함부로 전수해 주겠는가?

그리고 이 "혼돈"에 무려 십방주 급에게 스킬을 가르칠 수 있는 선생이 누가 있단 말인가?

"누가 감히 우리를 가르칠 수 있다는 거죠?"

"선생은 여기에 있다."

자극령이 흠칫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재환과 여섯 방주들, 그리고 청허뿐이었다.

"설마 당신이 스킬을 가르치겠단 건가요?"

"아니."

"그럼 대체 누가······."

그 순간, 자극령은 뭔가를 깨닫고서 입을 딱 벌렸다. 왜 그런 생각을 지금까지 하지 못했는지 이상할 지경이었다.

재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는 서로의 스킬을 배울 것이다. 너희를 가르치는 선생은 너희 자신이다."

Episode 9. 삼성회동(三城會同) (4)

방주들은 제각각 '적응팀'과 '각성팀'으로 나누어 훈련을 시작했다.

'적응팀'은 탑의 1층에서, '각성팀'은 새로이 증축된 탑의 2층에서 훈련을 지속했다.

적응팀을 이끄는 것은 8차 적응자인 무극방주 신무극이었다. 신무극은 서로의 스킬을 배우거나 욕지거리를 내뱉는 방주들을 보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성주 생각대로 잘 될는지 모르겠군.

그 자존심 강한 방주들을 한데 모아 놓고, 서로의 스킬을 가르치게 만드는 발상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막상 탑 안에 들어온 방주들은 서로의 스킬을 열심히 배우기보다는 자신의 스킬이 더 뛰어나다는 것을 자랑하기에 바빴다.

"······감히 신녀방의 스킬들을 무시하는 건가요?"

"흥, 신녀방이 아무리 빨라 봐야, 내 뇌신지기의 속도를 따라올 수는 없소!"

"속도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파괴력이야! 그리고 파괴력이라면 당연히 화왕이지!"

무극은 서로에게 열을 올리며 무기를 겨누는 방주들을 보며 혀를 쯧쯧 찼다.

"한심한 놈들. 통 발전이 없어."

그나마 '적응팀'에서 제일 열심인 이는 학림방주 제갈명이었다. 원래 각성팀이었던 그는 적응팀으로 와서 오히려 빠른 성취를 보이고 있었다.

"정말 죽겠소이다. 무극방주께서는 이 스킬을 대체 얼마나 수련해온 겁니까?"

"사백 년."

제갈명이 현재 수련 중인 기술은 무극방주의 최상급 스킬인 창천검형(蒼天劍形)이었다. "혼돈"에서도 손에 꼽는 파괴력을 가진 스킬인 동시에, 기존의 최상급 스킬들 중에서도 상위권에 위치한 스킬.

9차 이상의 적응자들이 사용하는 초월급 스킬에는 못 미치지만, 그 아래 수준에서는 최고의 스킬임에 틀림없었다.

"뭐, 그래도 각성팀에 있을 때보다는 할 만한 것 같습니다."

제갈명은 휘두르던 검을 갈무리하며 말했다.

처음부터 적응팀에 이처럼 사람이 많았던 것은 아니었다. 신녀방주 자극령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훈련이 막 시작되었을 때 인원이 몰린 것은 오히려 각성팀 쪽으로, 여섯 방주들 중 무려 넷이 참가할 정도였다.

그러나 "혼돈" 시간 기준으로 하루도 채 못 되어 네 명의 방주 중 세 명이 팀에서 이탈하고 말았다.

그리고 제갈명은 이탈한 세 명 중의 하나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 짓입니다."

학림방주 제갈명은 나쁜 기억이 떠오른 듯 손끝을 부르르 떨며 중얼거렸다.

*

아무것도 없는 허공. 캄캄한 하늘을 수놓는 외로운 검광이 있었다. 정확한 자세, 규칙적이고 반복적으로 수행되는 외로운 검극의 움직임. 검을 쥔 중년인은 허공을 향해 같은 찌르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속도를 높여라, 카이만."

재환의 목소리에 카이만의 손끝이 더욱 빨라졌다. 정연했지만 동시에 놀라운 빠르기를 가진 찌르기였다. 그는 가진 영력을 모조리 발출하여 찌르기의 속도를 높이고 있었다.

몇 번이나 이 짓을 반복한 것인지 모른다.

십만 번? 백만 번?

아니다. 지금쯤이면 족히 천만 번은 채웠으리라. 밤낮도 없이 반복해서 찌르기를 해왔으니, 여덟 자리 숫자를 넘어섰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만한 속도와 지속력으로 찌르기를 반복하는 것은 막대한 영력을 가진 카이만으로서도 힘든 일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카이만이 지친 영압을 갈무리하며 입을 열었다.

"정말 이런 식으로 강해질 수 있는 겁니까?"

"지금쯤이면 스스로 느낄 수 있을 텐데."

그 말이 맞았다.

얼마 전 남해방주 카이만은 각성의 1차 관문을 돌파했다. 그 순간 변화하던 세계의 모습을 카이만은 잊지 못했다.

「의심」이라는 키워드를 얻는 순간 다르게 비치던 세계의 모습. 오래도록 적응의 세계에서 살아왔던 카이만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강렬한 정신적 충격에도 그가 미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재환 덕분이었다. 먼저 이 길을 걸었던 재환의 도움이 있었기에, 그는 간신히 자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카이만은 절망신의 청허의 말을 떠올렸다.

―성주를 믿어라. 각성에 한해서는 나보다 그 녀석이 낫다.

재환이 입을 열었다.

"자세가 흔들린다. 바로 잡아."

"죄송합니다."

"아직도 불안한가? 다른 적응자들을 꺾지 못할까 봐?"

"······그렇습니다."

어느새 카이만은 공손한 말투를 사용하고 있었다.

각성의 길을 걷기 시작하며 그는 나이를 떠나 재환을 스승으로 인정했다.

"제가 재능이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카이만은 아래층에서 한창 수련에 열중하고 있을 다른 방주들을 떠올렸다. 어쩌면 지금쯤 그들은 8차 적응의 단계를 향해 나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성주께서는 제가 정말 해낼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믿어."

처음부터 재환은 첫 번째 각성자가 남해방주가 될 거라 믿고 있었다. 과적응의 축복을 받은 다른 방주들과는 달리, 남해방주는 순수한 노력만으로 자신의 삶을 이끌어 왔다.

꾸준함과 성실함. 존재를 각성으로 이끄는 힘은 재능이 아니라 의지에 달려 있었다.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강인한 의지를 가진 존재만이 각성의 벽을 넘어설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남해방주 카이만은 방주 중 각성에 가장 적합한 재목이었다.

"그러니까 너도 나를 믿어라."

확신을 주는 목소리. 카이만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찌르기를 반복했다. 애초에 믿음이 없었더라면 여기까지 올 수도 없었을 것이다.

성주는 대체 어떤 경험을 했기에, 저렇게 강해진 것일까.

카이만은 이내 고개를 흔들어 잡념을 털었다.

새로운 세계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

깊은 밤이 내려앉은 내성의 첨탑.

어둑한 첨탑의 난간에는 허리에 사슬을 감은 여자가 걸터앉아 있었다. 얼마 전 토너먼트에 참가해 '사슬 낫 여자'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이였다.

"...술맛 좋고."

여자는 다리를 난간 아래로 늘어뜨린 채 오른손에 쥔 술병을 가만히 흔들었다. 꽤 취기가 도는 듯 그녀의 볼에 옅은 홍조가 피어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혼돈"의 사자(死者)들은 결코 취할 수 없음에도, 여자는 정말로 취한 모습이었으니까.

그녀는 몽롱한 눈빛으로 첨탑 아래쪽에 시선을 고정했다. 내성의 후원에 위치한 거대한 건축물. 술 한 모금을 더 들이킨 그녀가 피식거리며 말했다.

"카르페디엠이라."

가끔 오염도가 높아진 몇몇 방주들이 각수의 뿔로 만든 약을 와자작 씹고는 다시 탑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일분일초가 아깝다는 움직임들.

"...다들 열심이네. 수백 년이나 살았는데도 아직 뭔가 바꿀 수 있다고 믿나 봐. 바보같이."

여자의 말에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그럼에도 여자는 어둠 속을 향해 계속해서 말했다.

"그래서, 저게 당신이 발견한 새로운 '희망'이야?"

어둠 속에서 대답이 돌아온 것은 잠시 후의 일이었다.

"······설하, 대체 무슨 수작이냐?"

"수작이라니, 섭섭하네. 오랜만에 만난 건데 야박하게?"

설하라 불린 사슬 낫의 여인이 자신의 뒤편을 흘겨보며 물었다.

언제부터였을까. 그곳에 하나의 신형이 일렁이고 있었다. 신형은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발까지 내려오는 흑색의 기품 있는 장삼. 절망신의 청허였다.

설하가 웃으며 말했다.

"사부, 조금은 더 따뜻하게 대해 줘."

"너에게 그딴 호칭으로 불릴 생각은 없다."

"성깔은."

"왜 네가 여기 있는 거냐?"

"일이 있어."

그 말에 청허가 안색을 굳혔다.

"말했을 텐데. 나는 「균열」에 돌아갈 생각이 없다고."

"아, 정색하지 마. 사부는 정색하면 더 늙어 보이니까."

설하가 킥킥 웃으며 술병을 흔들었다.

"한 잔 할래?"

"싫다."

"왜 이래? 술이랑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던 양반이."

청허는 대답 대신 물었다.

"열주(裂主)는 잘 있냐?"

"잘 있어. 요즘도 가끔 당신 얘기를 해."

"웃기는 소리."

"나도 사부가 그립고."

"거짓말 마라."

"응."

설하가 웃으며 말했다. 하얗게 웃는 그녀의 눈빛에는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래도 돌아와 사부, 모두가 당신을 기다려."

"나는 돌아가지 않는다."

"왜?"

"인간 같지도 않은 놈들과 함께할 수는 없으니까."

설하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당신은 늘 그 소리였지. 그놈의 인간. 그래도 인간을 포기해선 안 된다― 라고."

"「균열」은 인간을 저버렸다."

"그렇지 않아. 우리도 인간을 위해 싸워. 정확히는 우리만이 인간을 위해 싸우지."

"아니, 「대실종」 이후 균열은 이미 끝장났다. 너희는 목적도 이상도 잃어버린 유명무실한 단체일 뿐이야."

설하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을 이었다.

"사부는 그런 말할 자격 없어."

이어지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알 수 없는 격정이 담겨 있었다.

"왜냐하면 그 빌어먹을 「대실종」을 계획한 이들 중 하나는 당신이었잖아?"

"······그건 사실과 다르다."

"물론 당신이 원한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었지. 그렇지만 당신은 결과적으로 「대실종」을 막지 않았어. 더 정확히 말하자면 「대실종」을 방관했지."

"······."

"뭐, 나는 고맙게 생각해. 사부가 아니었으면 지금의 나는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청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말없이 설하의 얼굴을 보았다. 칠백 년 전, 「대실종」에서 살아남은 작은 여자아이의 얼굴이 그의 망막 위를 스쳤다.

"사부, 그거 알아? 요즘도 균열 애들 중에는 사부가 가르쳐 준 방법으로 각성하려는 애들이 있어. 재능도 빽도 없는 애들이지."

"······."

"그 애들은 강해지기 위해서 서로를 향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검을 휘둘러. 그렇게 검을 휘둘러서― 서로를 죽이고 또 죽이는 거야."

"······."

"그렇게 수백만 번, 수천만 번쯤 검을 휘둘러서 친구들을 모두 죽이고 나면 처음 검을 잡았던 이유를 차츰 잊게 돼. 일억 번쯤 검을 휘두르고 나면 슬슬 정신이 붕괴해서 자기 목에 검을 꽂는 녀석들도 생겨. 그들 중 극소수만이 살아남아서 10억 번에 도달하지. 그들은 삶과 죽음에 무감해지고, 인간을 벗어난 곳에서 세계를 볼 수 있게 돼. 그제야 그들은 각성의 첫 번째 키워드인 「해체」를 얻는 거야."

"······그건 잘못된 키워드였다."

"또 그 소리. 완전한 각성자가 되지도 못한 당신이 뭘 알아?"

"알 수 있다. 내가 만든 방식으로 각성 3단계에 오른 존재들을 봤으니까."

"아니, 겁쟁이인 당신은 몰라."

그 말에 청허의 주변이 새하얀 백색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청허의 고유 세계, 백각계가 펼쳐진 것이다. 여차하면 각성의 힘으로 승부를 보겠다는 강렬한 위협이었다.

"여전하네, 이 '고유 세계'는."

화선지 같은 청허의 고유 세계를 보며, 설하가 조소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겁 많은 당신은, 기껏 만든 '고유 세계'에 아무것도 그려 넣지 못했지."

다음 순간, 백각계의 곳곳에 뇌전이 내리치기 시작했다. 설하의 사슬 낫이 풀려나고 있었다. 뇌전을 맞은 청허의 고유세계가 찢겨 나가자, 백색의 바탕 위로 새로운 고유세계가 물들기 시작했다.

청허는 자신의 주변에서 강렬하게 피어오르는 지독한 혈향을 맡았다.

시산혈해(屍山血海).

핏빛으로 물든 세계. 수만 명의 시체. 바다를 이루는 혈흔. 청허는 이 고유 세계가 어디에서 비롯된 광경인지 금세 눈치챘다.

"어때? 사부가 만든 걸작을 보는 느낌이?"

청허가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단지 세계가 충돌한 것만으로도 그는 심대한 타격을 받았다.

청허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단장이 되었다고는 들었다. 3차 각성에 도달한 거냐?"

"3차? 겨우?"

무시무시한 기세에 청허는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엄청난 압력이 청허의 전신을 내리누르고 있었다. 청허는 파랗게 변한 입술을 깨문 채 온 힘을 다해 그 세계에 저항했다. 설하는 주저앉은 채 고개를 들지 못하는 청허를 보며 말했다.

"사부, '산 사람'이 '죽은 사람' 흉내 내는 거 아냐. 그만 「균열」로 돌아가자."

"······."

"사부도 잘 알고 있잖아. 혼돈에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어. 아니, 세계는 바뀌지 않아."

그 말에 청허가 고개를 들었다.

"바뀔 수 있다."

"뭐?"

"바뀔 수 있다고 했다."

청허의 눈빛에 어떤 열기 같은 것이 스쳤다. 설하는 그 열감에 데이기라도 한 것처럼 순간적으로 한 걸음을 물러섰다.

탑의 바깥쪽에 불빛이 들어오며 한 사내가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Episode 9. 삼성회동(三城會同) (5)

재환은 탑의 외벽에 붙어 있는 시간 제어 장치를 조정하기 시작했다. 조정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재환은 설하와 청허가 있는 내성 첨탑 쪽을 잠시간 바라보더니, 이내 관심 없다는 듯 탑 안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보던 설하가 입을 열었다.

"저 녀석이야?"

"······."

"저자가 당신을 바꾼 거냐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청허가 설하에게 말했다.

"...술이나 한 잔 줘 봐라."

잠시 머뭇거리던 설하가 청허에게 술을 건넸다.

잠시 후, 취기가 오른 그의 안색이 불콰하게 물들었다. 둘은 오래도록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다.

그러나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것이 있었다.

설하의 눈빛에 한가득 불신이 차올랐다. 그녀는 눈앞의 노인이, 아직도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그래서일까, 괜한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고 말이 툭 튀어나왔다.

"나 당신을 죽이려고 왔어."

청허는 잠시 설하의 눈을 바라보았다.

마음이 사라진 여자의 눈빛.

청허는 그 눈빛에 담긴 진심을 가늠하는 듯하더니 이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럼 죽여."

"근데 생각이 조금 바뀌었어."

설하는 악몽의 탑 카르페디엠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 같거든."

"방해할 셈이냐?"

"방해?"

설하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마치 모든 미래를 알고 있기라도 한 듯한 웃음이었다.

"당신은 실패할 거야. 900년 전에 "혼돈"에서 그랬고, 또 700년 전에 "위대한 땅"에서 그랬던 것처럼. 우리를 버리고, 다시 이곳으로 도망쳐 온 것처럼."

"글쎄, 이번엔 좀 다를 거다."

천 년 동안 누구보다 깊은 절망에 물들어 있었던 노인이 저런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을 「균열」의 제2단장 유설하는 인정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난 노인이 절망 끝에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균열」이 당신들을 지켜볼 거야."

차가운 목소리와 함께 설하의 신형이 사라졌다. 서늘한 밤바람이 외로이 남은 노인의 뺨을 적셨다.

홀로 남은 청허는 그녀가 남긴 술을 들이켜며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술 맛 좋구만."

*

탑에 들어온 이후 시간 감각을 완전히 상실한 카이만은, 정확히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 좀처럼 가늠이 되질 않았다.

기억은 드문드문 남아 있었다. 반복된 찌르기. 그리고 재환과 함께 하는 대련.

카이만은 900년의 세월을 벗어던지고 재환의 세계를 배웠다.

그러던 어느 순간.

카이만은 각성의 두 번째 키워드인 「이해」를 넘어서, 마침내 세 번째 키워드인 「망아」에 도달했다. 극한까지 몰아붙인 영혼이 찢어지며, 그의 자아가 새롭게 태어나고 있었다. 세계를 의심하고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 이 세계에 길든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는 단계.

얼마나 많은 찌르기를 반복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1억 번? 10억 번? 어쩌면 100억 번에 달할지도 모른다.

시간으로 따지자면 말도 안 되는 횟수였지만, 카이만은 실제로 자신이 그만한 횟수의 찌르기를 반복했다고 믿었다.

어느 순간 그는 세계의 모든 것을 잊었고, 수치를 잊었으며, 스킬을 잊었다.

수련이 끝난 카이만이 눈을 떴다.

"축하한다."

눈앞에 재환의 모습이 있었다. 카이만은 재환의 모습을 보며 일순 아득한 심정이 되었다. 지금까지 잘 알지 못했던 재환의 격이 강렬하게 전신을 죄어오고 있었다.

...성주의 힘을 가늠할 수가 없다.

청허의 말에 따르면 재환 역시 3단계 각성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이만은 재환과 자신 사이에 거대한 벽이 있는 것을 느꼈다.

그 벽을 느끼는 순간, 카이만은 갑자기 불안한 마음이 앞섰다.

"저는 정말 강해진 것이 맞습니까?"

"상당히."

"하지만 고작 2년의 시간으로······."

"2년?"

그 물음에 카이만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우리가 있는 2층은 다른 방주들이 존재하는 1층과는 시간 배율이 달라."

"그럼 얼마나 시간이 흐른 것입니까?"

재환은 그 질문에 답하는 대신 카이만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직접 힘을 확인해 봐."

*

악몽의 탑 "카르페디엠"이 존재하는 내성의 후원(後苑).

한 무리의 인파들이 모여 수런거리고 있었다. 대부분은 내성 관료들과 각주들을 포함해, 고르곤 성채의 요직에 있는 이들이었다.

그들의 중심에 서 있던 유르헨은 초조한 표정으로 카르페디엠의 소환문(召還門)을 바라보고 있었다.

"...드디어 오늘이군."

오늘은 성주를 포함한 「심연 원정대」가 일주일의 수련을 끝내고 돌아오는 날이었다. 혼돈에서는 고작 일주일이지만, 저 탑 안에서는 2년의 시간이 흘렀을 것이다.

2년.

얼핏 짧은 시간 같지만 돌이켜 보면 마냥 그렇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그 괴물 같은 성주가 방주들과 함께 들어갔다.

유르헨의 곁에 있던 멸마대주가 물었다.

"성주께서 삼성회동 전까지는 돌아오시겠지요?"

삼성회동(三城會同).

오늘 오후에 있을 행사의 이름이었다. 금일 고르곤에는 성채 만티코어를 제외한 삼성 ―고르곤, 가루다, 드라이어드― 의 성주들이 모여 작은 행사를 개최할 예정이었다.

문제는 이 행사가 고르곤이 원해서 주최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오실 거라 믿어야지."

어쩌면 드라이어드나 가루다의 성주가 노린 것 또한 그 지점일 것이다. 삼성회동의 제의가 들어온 것은 성주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벌어진 일이었으니까.

겉으로는 금천방에게 점령당한 「만티코어」의 문제를 논의하자는 것이었으나, 진짜 목적이 무엇일지는 빤했다.

역시, 심연 원정대를 노리는 거겠지.

"혼돈"에 이만한 수준의 전력이 모인 것은 90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혼돈 십방 중 여섯이 복속된 데다, 성주와 절망신의 청허를 포함해 무려 두 명의 각성자가 있었다. 조금만 더 전열을 가다듬고 착실하게 준비한다면 정말 성주가 말한 대로 '혼돈 통일'이 가능할지도 모르는 전력이었다.

그만한 전력이 모였으니 어찌 탐이 나지 않을 수 있을까.

다른 성주들의 속셈을 간파한 유르헨은 최대한 삼성회동을 미루어 보려 했으나 상대방 측에서는 안하무인이었다.

―"혼돈" 전체의 안위가 걸린 일이오! 어찌 더 미룰 수 있겠소?

거절 의사를 표명하기도 전에 가루다의 사절단이 출발했다는 전서응이 날아왔다.

그리고 유르헨은 깨달았다. 이미 저쪽에서는 모든 계산을 끝냈다는 사실을.

성주님, 빨리 돌아오셔야 합니다.

다른 이들도 아니고 성주급이다. 그리고 "혼돈"에서 성주들을 상대할 수 있는 것은 같은 성주뿐이다.

······아니지, 엄밀히 따지면 '같은 성주'는 아니다.

유르헨은 무뚝뚝하지만 신뢰감 있는 재환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러자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가 안정되어가는 것을 느꼈다.

삼성회동은 눈앞이고, 금천방의 위협도 받고 있다.

"위대한 땅"의 몇몇 군주들이 "혼돈"의 기이한 분위기를 눈치채기 시작했고, 어쩌면 지금쯤 "재생궁"에도 심연 원정대의 소문이 흘러 들어갔을 것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끔찍한 일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재환을 생각하고 있으면, 유르헨은 불안하지 않았다. 그라면 무슨 일이 생겨도 어떻게든 해결해 줄 것이라는 기이한 믿음 같은 것이 있었다.

비단 유르헨만이 그런 것은 아니리라.

지금 이 후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다림의 진풍경이 그 신뢰의 증거였다.

재환의 귀환 시각이 되자마자 칼튼과 클레어, 메이칼을 포함한 각주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후원으로 몰려와 카르페디엠의 소환문 쪽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기대 어린 눈빛을 한 이도 있고, 유르헨처럼 살짝 불안한 눈빛을 한 이도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마음은 같았다.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유르헨은 돌연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후원의 쪽문이 과하게 삐걱대며 내성의 문지기들이 우르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문지기 중 선두에 있던 이가 다급한 목소리로 유르헨을 찾았다.

"내총관님!"

문지기의 표정을 본 순간 유르헨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곧바로 깨달았다. 생각보다 일찍 성주들이 도착한 것이다.

때마침 카르페디엠의 소환문에서도 환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방주들이 돌아오고 있었다.

*

일이 터진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 후, 화왕방주 강황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내성의 회의실. 한참이나 진행되던 삼성회동에 묵묵히 참관하던 화왕방주 강황은 불현듯 쾅, 하고 테이블을 내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니까 지금 당신들 말은 우리 성주를 원정대장으로 인정할 수 없다, 그런 거 아뇨?"

"그런 뜻이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냐? 듣자 하니 그 소리구먼!"

곁에서 이야기를 듣던 뇌신방주 윤용도 거센 기파를 내뿌리며 소리쳤다.

"원정대장 선출의 공정성? 심연 원정대가 만들어질 때까지 잠자코 있던 치들이 공정성은 무슨 공정성이오?"

"무엄하군, 뇌신!"

"무엄은 쥐뿔."

뇌신방주 윤용은 분개한 얼굴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를 포함해 대부분의 방주들이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럴 법도 한 것이, 지금 드라이어드와 가루다의 관계자라는 연놈들이 와서 은근슬쩍 지껄이는 소리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현 원정대의 체계는 너무 불안정하다!

―혼돈 외부의 인사에게 대장직을 맡기는 것은 불안 요소가 크다!

―현 성주는 정체가 불분명하다!

―고르곤만의 독단으로 원정대를 창설하는 것은 사성협약의 규칙에 어긋난다!

깨어진 지가 오래인 구닥다리 사성협약을 들고 나오는 것 하며, 논제와는 관계없는 성주의 정체를 캐묻는 것 하며, 어느 하나 현안인 '금천방 사태'와는 관계없는 것들뿐이었다.

어느새 토론은 만티코어나 금천방과는 아득히 먼 곳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런 식의 전개가 될 줄 알고는 있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내총관 유르헨은 당혹을 금치 못했다.

"저, 분위기가 조금 격앙되는 듯한데 다들 진정하시고 본래 화제로······."

재빠르게 나선 유르헨이 분위기를 무마해 보려 했으나, 돌연 등장한 가루다 성주의 선언과 함께 삼성회동의 갈등 양상은 정점을 찍고 말았다.

"그래. 말이 나온 김에 그냥 이야기하도록 하지. 당신들 말이 맞소. 본 성주는 「심연 원정대」를 이끌 원정대장을 공정한 심사 끝에 다시 뽑아야 한다고 제언하는 바요."

설마 이토록 노골적으로 말을 꺼내올 줄이야.

더욱이 그 말을 꺼낸 이가 성채 가루다의 성주인 냉혈금존(冷血金尊) 갈휘동이라는 점은 유르헨의 의심을 더욱 증폭시켰다.

...이상하군.

가루다 성채는 현재 금천방으로 인해 골치를 앓고 있는 곳이었다. 성채 만티코어가 함락된 이후, 금천방의 공세는 곧장 가루다를 향했다. 그 때문에 가루다 성주 갈휘동은 누구보다 금천방에 관한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처지였다.

"가루다 성주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주장이 아예 일리가 없다고 단언하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군요."

드라이어드 성주 아이사 린드크로프마저 가루다 측을 거들자 분위기는 더욱 심각해졌다.

유르헨은 침음했다. 삼성회동이 처음 계획될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고는 느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성주들 간에 사전 협약이 철저하게 맺어져 있을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더 이상의 발언권을 내주는 것은 위험하다.

그러나 유르헨이 채 입을 열기도 전에, 아이사 린드크로프의 시선이 유르헨을 향했다.

"게다가 삼성회동의 자리에 고르곤 성주가 참석하지 않았다는 점도 의아하군요. 성주는 어디로 간 거죠? 회담 통보는 정상적으로 받으셨을 텐데요."

"맞소. 고르곤 성주는 어디 간 거요?"

사실 현 삼성회동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그것이었다.

수련에 참가했던 '적응팀'의 방주들이 전원 귀환했음에도, 아직 재환과 남해방주 카이만, 그리고 청허는 돌아올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덕분에 고르곤은 결정권자가 부재하게 되었고, 삼성회동은 일방적으로 휘둘리는 양상이 되었다. 그러니 그 꼴을 보다 못한 원정대의 다른 방주들이 분개하며 끼어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제일 먼저 대거리를 한 것은 제갈명이었다.

"성주께서는 일이 있어 늦소. 성주 대행은 내총관께서 맡고 계시니, 이대로 회담을 진행해도 충분할 듯합니다만."

"흠, 학림방주가 고르곤의 편을 들다니 놀랍소이다."

가루다 성주 갈휘동이 조소하듯 말을 이었다.

"십방 중 여섯이 고르곤의 휘하에 들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믿지 않았소. 심지어 혼돈제일군사라 불리는 학림방주 당신까지."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질 않소. 대체 무슨 꿍꿍이들이요?"

가루다 성주는 정말 모르겠다는 투로 십방주들의 면면을 일별했다.

"꿍꿍이가 아니라―"

"고르곤 성주는 고작 50년밖에 살지 않은 애송이라 들었소."

어딘지 익숙한 전개에 십방주 몇몇이 조용히 이마를 덮었다. 그리고 이마를 덮지 않은 이들은 고요히 눈빛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지금 제정신들인 거요? 그 애송이 하나를 믿고 '심연 원정대'를 꾸리자고? 심지어 그 작자에게 '원정대장'을 맡기자고?"

아차 싶었던 유르헨이 분위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입을 열려는 찰나,

"어이, 다시 지껄여 보시지."

어느새 칼을 뽑아든 화왕방주 강황이 가루다 성주 측을 향해 검극을 겨누었다.

그리고 진심으로 기다렸다는 듯, 가루다 성주 갈휘동이 희게 웃었다.

"이제야 진짜 회동이 시작되는군."

Episode 9. 삼성회동(三城會同) (6)

그리고 그것이, 지금 연무장에 두 세력이 나란히 도열하게 된 이유였다.

일촉즉발의 상황을 남겨둔 두 세력의 사이에서, 드라이어드 성주가 곤란하다는 듯 중재를 계속했다.

"부디 양측 모두 진정하세요. 이미 혼돈은 충분히 시끄러운 상황이에요. 더 이상의 무력 다툼은 현명하지 못합니다."

"드라이어드 성주,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싸움이오."

가루다 성주, 냉혈금존 갈휘동은 전혀 양보할 기세가 아니었다.

"이대로 정체도 모르는 애송이에게 "혼돈"을 내줄 셈이오? 혼돈 십방주들을 보시오. 다들 지금 제정신이 아니오."

"지금 말 다했소?"

펄펄 끓는 화왕방주에 이어 이번에는 뇌신방주 윤용까지 앞으로 나섰다. 거기에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던 학림방주 제갈명까지 한마디를 보탰다.

"확실히 묵과할 수 없는 발언이로군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재환을 아니꼽게 보던 방주들이 이토록 변화하다니, 사태를 지켜보는 유르헨으로서는 묘한 기분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놀라운 것은 그뿐이 아니었다.

...이것이 수련의 성과인가. 대단한 기파다.

흉흉하게 흘러가는 사태와는 별개로, 방주들 하나하나를 면밀하게 관찰할수록 유르헨은 감탄을 숨길 수 없었다.

일주일간의 수련은 헛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서로의 스킬을 배운 방주들의 기세는 일주일 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강해져 있었다.

가장 약했던 뇌신방주 윤용조차, 이제는 십방주다운 기백을 드러내고 있었다. 턱걸이로 아슬아슬하게 서열에 끼던 그도 이제 오롯한 십방주가 된 것이다.

"그래서, 지금 그쪽은 우리 성주가 '원정대장'을 맡는 게 내키지 않는다, 그거 아뇨?"

"뭐, 굳이 말하자면 그렇지."

"대장을 바꾸고 싶다면 먼저 우리를 상대해야 할 거요. 우린 대장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거든."

뇌신방주 윤용이 앞으로 나서며 검을 뽑자, 가루다 측에서도 누군가가 앞으로 나왔다. 놀랍게도 가루다 성주 본인이었다.

원숙한 8차 적응자.

냉혈금존 갈휘동.

얼마 전까지 6차 적응자에 지나지 않았던 뇌신방주 윤용이 상대하기엔 상당한 강적이었다.

그러나 뇌신방주는 물러서지 않았다. 갈휘동이 차갑게 웃으며 윤용을 향해 손짓을 했다.

"선수를 양보하지."

하나 윤용의 검이 움직인 순간, 갈휘동의 여유는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허공을 격하고 날아든 뇌신지기가 갈휘동의 사방에서 내리 꽂혀왔다. 6차 적응자의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위력이었다.

7차 적응자.

고작 일주일 사이, 윤용은 한 차수를 도약했다. 극성에 이른 윤용의 뇌신지기는 그의 의지에 따라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갈휘동의 사방을 압박해왔다.

"...고작 이 정도로!"

갈휘동은 금세 여유를 되찾았다. 뭐니 뭐니 해도 그는 8차 적응자였다. 적응자는 한 차수를 도약할 때마다 판이할 정도로 힘의 차이가 커진다. 그리고 갈휘동은 7차 적응자 서넛이 한꺼번에 달려들어도 상대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힘을 지닌 적응자였다.

그는 자신의 주력 스킬인 유성금륜(流星金輪)을 펼쳤다.

갈휘동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금빛의 고리들이 살기를 뿌리며 뇌신방주를 향해 쏟아졌다.

8차 적응자의 영력이 담긴 금륜들이 무지막지한 회전력으로 뇌신지기와 충돌하자, 뇌신지기는 흔적도 없이 산화하고 말았다.

윤용은 살짝 어두워진 얼굴로 몇 걸음을 물러났다.

뇌신지기를 소멸시킨 갈휘동의 금륜은 조금도 힘을 잃지 않은 채였다. 오히려 더욱 환한 빛을 흩뿌리며 사위를 현란하게 뒤덮고 있었다. 뇌신지기만으로는 막아낼 수 없는 공격이었다.

그때, 뇌신방주의 검극에서 화르륵 불길이 일었다. 그 스킬이 무엇인지 아는 갈휘동은 안색이 대변했다.

"화왕검?"

화왕십팔검(火王十八劍).

속도 면에서는 뇌신지기를 따라올 수 없지만, 파괴력 면에서는 갈휘동의 유성금륜조차 압도하는 스킬이 뇌신방주의 손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설마 서로에게 스킬을 가르쳤단 말인가?

그제야 갈휘동은 수십 년이나 6차 적응자로 알려져 있었던 뇌신방주가 어떻게 7차의 벽을 넘을 수 있었는지 이해했다.

십방주의 스킬들은 하나하나가 최상급이다. 그런 스킬들을 닥치는 대로 익혔는데도 급속도로 성장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쪽이 더 이상한 것이다.

"자신의 스킬을 그렇게 함부로 내주다니! 십방주들은 자존심마저 버렸는가!"

"자존심이 밥 먹여 줍디까?"

막대한 영력의 격차에도 불구하고, 불꽃과 충돌한 유성금륜들은 빛을 뿌리며 녹아내렸다. 금륜의 내구도가 화왕십팔검의 열기를 견디지 못한 것이다.

영력의 격차가 스킬 간의 상성(相性) 때문에 상쇄되고 있었다. 화왕십팔검이 줄기줄기 뿜어대는 불꽃이 뇌신방주의 앞에 방어막처럼 생성되었다. 갈휘동이 이를 악물었다.

그래 봤자 일주일이다. 일주일 동안 스킬을 배워 봤자 얼마나 배웠겠는가.

갈휘동은 다시 한번 유성금륜을 펼쳤다.

"가라!"

그의 손에서 뻗어 나온 금륜들이 일정한 군진을 이루며 날아가기 시작했다. 금륜들은 쐐기 형태로 화왕의 불길 속으로 진군했다. 선두의 금륜들이 타오르는 대가로, 후미에 있던 금륜들은 불길의 벽 속에서 살아남았다.

그 기지에 감탄한 몇몇 중인들이 감탄사를 흘렸다.

"과연 가루다 성주로군. 저 일격은 피할 수 없겠어."

그러나 갈휘동은 자신이 펼친 회심의 일격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곧 깨달았다. 불꽃이 꺼진 자리에 뇌신방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갈휘동은 순간 주변의 정경이 뿌옇게 흐려져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은형팔진(隱形八陣)까지?"

흐린 안개를 생성해 상대방의 시야를 차단하는 최상급의 진법 스킬. 그것은 지옥팔문과 함께 학림방주가 자랑하는 최상급 스킬 중 하나였다.

"대체 최상급 스킬들을 얼마나 많이 배운 거냐!"

잠시 후, 은형팔진의 곳곳에서 뇌신지기와 화왕십팔검이 동시에 날아들었다. 갈휘동은 황급히 금륜들을 날렸으나, 어느새 조금씩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막대한 영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스킬들의 적절한 조합 앞에서 그의 유성금륜은 조금씩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결국 갈휘동은 구명절초를 펼쳤다.

유성금륜의 절초, 만해금륜(萬海金輪)이 거친 안개 속을 뚫고 사방으로 날아갔다. 마치 수백 개의 유성우가 그의 몸에서 산출되는 듯한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그때, 그의 배후에서 한 인물이 유령처럼 나타났다. 은형팔진의 안개 속에 숨어 있던 뇌신방주 윤용이었다.

윤용의 검극에 맺힌 영압을 확인한 갈휘동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갈휘동은 그 스킬이 무엇인지 곧바로 알아보았다.

그 스킬은, 혼돈 최강의 스킬이라 불리는 검술이었다.

창천검형(蒼天劍形).

무극방주 신무극의 주력 스킬인 창천검형이 지금 뇌신방주의 손끝에서 펼쳐지려 하고 있었다. 갈휘동은 자신의 금륜이 저 스킬을 받아낼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결국 그걸 써야 하는가.

갈휘동의 소매가 펄럭이며, 그의 왼팔 위로 새하얀 새의 형상을 한 문신이 나타났다.

혼돈의 성주라면 모두가 가지고 있는 문신.

문신은 삽시간에 환한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멈추어라!"

창공을 흔드는 웅장한 영력이 연무장을 휩쓸었다. 창천검형을 펼치던 뇌신방주 윤용도, 왼팔의 문신에 손을 대고 있던 갈휘동도 인상을 굳힌 채로 행동을 멈추었다.

웅장한 영력의 주인은 다름 아닌 무극방주 신무극이었다.

"지금 수호각수를 사용하려는 건가?"

"······."

"수호각수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이 아닐 텐데."

그야말로 적절한 개입이었다. 만약 승부가 계속되었더라면, 뇌신방주 윤용은 패했을 것이다.

신무극은 갈휘동의 왼팔에서 하얗게 빛나는 문신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가루다는 그만 집어넣으시게. 대 망자용 병기를 여기서 쓸 참인가?"

입가를 실룩이던 갈휘동은 분하다는 표정으로 소매를 내리더니, 등을 홱 돌려 자신의 진영으로 사라졌다.

"······내가 졌소."

갈휘동의 패배 선언이 떨어지자마자, 고르곤 측 무사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몰아쳤다. 7차 적응자가 8차 적응자를 이기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심지어 상대는 무려 성주급이었다.

첫 번째 대결을 지켜보며 몸이 근질근질해졌는지, 화왕방주 강황이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다음 차례는 나야!"

"아니, 나요!"

학림방주 제갈명도 빠지지 않았다.

그러자 뇌신방주 윤용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십니까! 아직 제 차례가 끝나지 않았―"

그리고 다음 순간, 셋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말없이 연무장의 중심으로 나선 이가 있었던 까닭이다. 윤용은 그의 등장을 보고서 조용히 뒤쪽으로 신형을 물렸다. 그럴만한 상대였다. 곳곳에서 묘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길게 끌고 싶지 않군."

무극방주, 창천검 신무극이 직접 나섰다.

재환과 청허를 제외하면 고르곤 성채의 최고 강자인 무극방주 신무극. 그가 싸우고자 한다면 감히 누가 말릴 수 있을까. 그의 힘을 잘 아는 방주들은 조용히 뒤로 물러날 뿐이었다.

신무극은 형형한 눈빛으로 가루다와 드라이어드 진영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누가 본인을 상대하겠는가? 갈휘동? 아니면 아이사 린드크로프, 당신인가?"

냉혈금존 갈휘동의 표정이 구겨졌다. 아이사 린드크로프 역시 침묵한 채로 대답하지 않았다.

무극방주 신무극의 무력은 그 정도였다. 일대일 전투에서는 제1석인 천룡방주조차 그를 꺾을 수 없다고 알려진 초강자. 그가 바로 신무극이었다. 같은 8차 적응자 중에서 그를 당할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때, 누군가가 움직였다.

"······신녀방주? 무슨 짓인가?"

신녀방주 자극령이 신형을 움직여 연무장의 중심을 향해 뛰어들었다.

"날 상대하겠다는 건가?"

"제가요? 설마요."

자극령은 하얗게 웃으며 연무장의 중심을 그대로 가로질러 가루다 진영 쪽에 섰다.

그 모습을 본 학림방주 제갈명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지금 뭘 하는 겁니까?"

"보시는 대로에요. 편을 옮긴 거죠."

무극방주가 직접 나선 마당에 갑자기 편을 옮기다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아무리 남쪽 성채 드라이어드 출신이고, 또 드라이어드 성주인 아이사 린드크로프와 친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아무래도 이쪽이 승리할 확률이 더 높아 보이거든요."

그 말에 방주들이 동시에 분노를 터뜨렸다,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학림방주 제갈명이었다.

"당신이 고르곤 성주님께 반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가요?"

"하지만 당신도 무극방주의 실력은 잘 알지 않습니까? 당신들은 결코 원정대장을 바꿀 수 없습니다."

2년의 수련으로 강해진 신녀방주가 저쪽에 붙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다른 방주들이라고 결코 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니까. 자극령이 입을 열었다.

"글쎄요.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제갈명이 무어라 입을 열려는 찰나, 누군가가 연무장의 맞은편 문을 열고 등장했다. 그는 드라이어드 성주와 가루다 성주의 곁을 그대로 가로질러 연무장의 중심까지 도달했다.

"무극방주, 당신은 내가 상대하지."

그는 수려한 용모에 사람 좋은 인상을 가진 미중년이었다. 그런데 그의 모습을 본 몇몇 방주들이 경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심지어 그 무표정한 무극방주조차 깜짝 놀란 얼굴이었다.

"당신은······."

유르헨은 새로이 나타난 미중년을 보고서야, 삼성회동을 기획한 이가 누구인지를 깨달았다.

배후가 있으리라고 생각은 했다.

저 사이 나쁜 가루다와 드라이어드가 협력하고 있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금천방에 시달리던 가루다 성채를 구해내고, 저 현명한 드라이어드 성주를 굴복시킬 수 있는 존재. 그럴 만한 존재는 애초에 하나밖에 없었다.

'군주의 격'을 가진 이만이 내뿜을 수 있는 강렬한 영압이 장내를 질식시킬 듯 몰아치고 있었다.

Episode 9. 삼성회동(三城會同)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