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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6 - 6

Episode 8. 최후의 낭만 (1)

「때로는 눈앞의 권력보다 먼 낭만에 마음이 더 끌리는 법이지. 하지만 그때는 아무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어. 아직 자신의 마음속에 그런 순수함이 남아 있다는 걸.... 그걸 인정하는 순간, 더 커다란 절망 속에 매몰될까 봐 다들 두려웠거든.」

―제18대 남해방주 카이만

***

문제의 '성주 퇴임 선언' 사건 이후 일주일.

"혼돈"에는 다음과 같은 선전 구호가 번져 나갔다.

―성주가 되고 싶은 자, 누구든 도전하라! 단, 패배한 자는 심연으로 갈 것이다!

새로이 등극한 고르곤 성주의 선언은 무뎌져 있던 혼돈인들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누구나 실력만 있으면 성주가 될 수 있다는 것.

혼돈을 떠도는 강자들에겐 대단한 유혹이 아닐 수 없었다. 거기다 성주가 「무적응자」라는 괴이쩍은 소문도 그에 한몫을 했다.

"그럴 리가 있겠냐? 성주가 된 사람이 어떻게 「무적응자」일 수가 있어?"

"진짜라니까! 십방의 부방주들이랑 수석장로들이 직접 영력 체크를 해 봤댔어!"

소문은 일파만파로 번져 나갔다.

"대체 무적응자가 어떻게 성주가 된 거지?"

"어쩌면 "재생궁" 쪽에서 나온 인물은 아닐까?"

"설마. "재생궁"의 군주나 세가들은 혼돈에 관여하지 않기로 했잖아."

성주의 의중을 의심하는 이들도 있었다.

"대체 무슨 속셈이지?"

자신이 지면 성주 직을 내놓겠다고 말하고서, 돌연 이겼을 때의 조건을 내걸었다.

정상적인 영혼이라면 영멸을 두려워하게 마련이다. 더군다나 60년 밖에 못 산 영혼이라면 더욱 그러했다.

저렇게 젊은 영혼이 자신의 목숨을 내걸고 내기를 한다면, 결론은 하나뿐이다.

내기에서 반드시 이길 자신이 있다는 것.

그래서 십방의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했다.

'혹시 수호각수(守護角獸)를 쓰려는 게 아닐까?'

만약 수호각수를 움직인다면 십방의 방주들이라고 해도 승부를 장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또 생각해 보면, 정정당당한 일대일 대결이라고 미리 못 박았으니, 성주의 직권으로 움직일 수 있는 수호각수를 사용할 리는 없었다. 애초에 수호각수는 대인을 상대하기 위해 존재하는 병기가 아니니까.

사람들의 의견은 가장 가능성이 큰 한 가지로 좁혀졌다.

"······이번 성주는 미친놈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사람은 제정신이 아닌 것에 더 열광하게 마련이었다. 혼돈의 인간들도 마찬가지였다. "재생궁"이 등장한 이후 부활의 희망을 잃어버렸던 혼돈인들의 마음에 낯선 순풍이 불고 있었다.

"일단 고르곤으로 간다!"

그때까지도 혼돈인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의 마음에 불이 붙은 진짜 이유는, 승리 시의 조건 때문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

내성 시찰을 마친 유르헨은 내성의 정문을 향하며 생각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이냐.

고르곤에서 '성주'를 없애겠다는 포부를 밝혔을 때는 혹시나 싶었다. 혼돈을 통일하겠다는 말도 안 되는 선언을 했을 때까지도 설마설마했다. 괴상한 발걸음으로 단상대에 올라갈 때까지도 불길하긴 했지만 지켜볼 수 있었다.

유르헨은 믿었다. 재환이 아니라 전 성주를 믿었다.

이 사내는 전 성주가 인정한 사람이다.

아무리 희한한 짓을 하더라도 결국 그는 고르곤의 성주인 것이다. 절대 고르곤의 미래에 해가 될 짓은―

"문을 열어 달라!"

"우리도 성주와 싸울 자격이 있다!"

"성주는 약속을 지켜라아―!"

안 할 거라고....

"젠장."

내성 앞에 몰려든 인파를 본 유르헨이 이마를 부여잡았다.

"성주, 대체 무슨 생각이십니까."

내성 앞에 줄을 선 이들은 어림잡아도 물경 사천을 넘어섰다. 외성까지 합치면 족히 이만이 넘는다는 보고도 있었다. 고르곤의 여관들은 때 아닌 호황을 누리고 있었고, 황급히 민박으로 생업을 전환한 주민들도 얼굴에 웃음꽃이 만연했다.

"쌉니다, 싸요! 하루 숙박에 일각수 뿔 반 개!"

보통 일각수 뿔 반 개는 화폐가치로 따졌을 때 30만 호른 정도 된다. 그리고 30만 호른이면 어지간한 여관에서 일주일을 넉넉히 묵을 수 있는 가격이었다. 그런데 고작 민박이 하루에 일각수 뿔 반 개를 받아 처먹고 있다. 말도 안 되는 폭리인 것이다.

"일주일 미리 끊지."

"하핫, 감사합니다!"

문제는 성주의 자리를 노리고 온 이들에게 30만 호른쯤은 돈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찾아온 이들 하나하나가 혼돈에서 내로라하는 강자들이었다. 일각수쯤이야 스킬 두어 방에 졸면서도 잡을 수 있는 이들.

내성의 전경을 살피던 내총관 유르헨의 표정이 조금씩 묘해졌다.

좋아해야 하는 건지 말아야 하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외부 인사들이 줄을 지어 입성하고 있으니 성채 내부의 관광 수익이 급증하는 것은 당연지사. 이들이 오래 머무를수록 고르곤 성채가 누릴 관광 특수는 더욱 커지게 될 것이다.

"...설마 이런 것까지 예측하신 건가?"

새로운 성주가 부임하면 성채의 시스템이 한바탕 홍역을 치르는 것은 정상적인 일이었다.

내·외성의 정치·행정·군사 조직을 담당하는 각주들을 새로 보임하고, 산하기관들을 재조정하며, 성채 내부의 행정 제도를 재정비하는 것만으로도 무지막지한 예산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런 식이면, 빠진 국고를 다시 채우는 것도 순식간일 것이다.

도대체 성주를 하려는 것인지 성주를 없애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긴 성주가 정확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이 누가 있으랴.

"하아······."

홀로 푸념을 늘어놓던 유르헨의 눈에 내성 입구를 지키던 경비병의 모습이 들어왔다. 경비병들은 책자 같은 것을 돌려 보며 한창 낄낄대던 중이었다.

"지금 무엇들 하는 것이냐?"

갑작스러운 내총관의 일갈에 내성 경비병들의 어깨가 빳빳하게 굳어졌다.

성주가 바뀌면서 군기가 빠진 까닭일까.

내성을 다스리던 각주 다섯 중 넷이 죽어 버렸으니 그럴 법도 했지만, 이건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성을 지키는 경비대가 이토록 허술하다니.

이럴 때일수록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

내총관 유르헨은 경비병들을 일벌백계하겠다는 심경으로 「법령」을 읊기 시작했다. 칼튼에게 상급 스킬 「법령」을 가르친 이가 바로 유르헨이었다.

고르곤의 관료들 모두가 두려워하는 힘.

쏟아지는 법률의 향연에 경비병들의 눈이 홱홱 돌아가고 있었다. 몸을 뒤틀며 괴로워하거나 바닥에 머리를 쿵쿵 찧는 이들도 있었다.

"으아아아! 제발 살려 주십시오!"

"잘못했습니다, 내총관님!"

내총관 유르헨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경비병들의 손에 쥐어져 있던 책자를 빼앗았다. 이놈들이 보고 낄낄댈 만한 것이라면 도색 잡지가 틀림없을 거로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평범한 월간지였다. 이어 유르헨의 눈이 부릅떠졌다.

『이달의 혼돈』

+

특집기사 1. 고르곤 성주, 취임사를 겸한 충격적인 퇴임사.

특집기사 2. 고르곤 성주, "혼돈 십방주 따위 손가락 하나로도 찔러 죽일 수 있어" 그의 진의는 무엇인가?

특별 인터뷰. "난 고르곤 성주랑 한 판 떠본 적 있다" 의문의 베기 초고수, 고르곤 성주에 대해 폭로하다.

+

월간지를 쥔 유르헨의 손끝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아니, 성주님. 이런 말은 또 언제...."

『이달의 혼돈』은 혼돈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월간지였다. 일단 책에 실린 이상 기사가 사실이든 아니든 십방 간부들의 분노는 정해진 것이었다.

더욱 신경 쓰이는 것은 '특별 인터뷰'로 발행된 기사였다.

유르헨은 문제의 페이지를 재빨리 펼쳤다.

성주님과 한판 붙었다니, 그럴 리가.

성주와 싸우기는 고사하고, 성주 근처에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통제하는 상황일진데.

페이지를 펼치자 스킬로 제작된 홀로그램 영상이 두둥실 떠올랐다. 홀로그램 화면 속에서는 인터뷰어와 가면을 쓴 게스트 하나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달의 혼돈』의 특별 인터뷰 코너를 맡은 인터뷰어 마이샤크입니다. 오늘은 특별한 게스트를 모셨습니다. 바로 장안의 화제인 '고르곤 성주'와 대결해 본 적이 있다는 분이신데요. 다들 아시다시피, 새로 부임한 고르곤 성주의 정체에 관해서는 공개된 사실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혼돈 십방주 급의 강자라는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무적응자라는 이야기도 있는 상황이죠. 일단 사실 확인을 위해 먼저 게스트의 소개를······

―잠깐만. 이거 하면 진짜로 신녀방 애들이랑 술 한잔 할 수 있는 거냐?

―저······. 영감님, 그 이야기는 조금 후에······.

잠시 영상이 끊겼다.

―하하, 잠깐 방송에 착오가 있었습니다. 일단 본인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나는 '베기 초고수'라고 한다.

가면을 쓴 게스트를 보던 유르헨의 눈이 작아졌다.

······누가 봐도 신의님인데, 이거.

인터뷰는 계속되고 있었다.

―놀랍군요! 고르곤 성주님의 기술이 '찌르기'밖에 없단 말인가요?

―그래.

―베기 초고수님은 '베기'밖에 못하시고요?

―난 다른 것도 할 수 있지만, 그놈이랑 싸울 때는 베기만 했지.

―베기와 찌르기의 대결이라니! 대단하군요!

―뭘 좀 아는구만? 정말 대단한 대결이었지, 암.

―저희 조사팀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베기 초고수'님이 패배하셨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

―뭐? 지긴 누가 져!

'베기 초고수'가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인터뷰어가 흥미롭다는 듯 마이크를 가까이 대었다.

―그건 비긴 거지 진 게 아니야!

―비겼다면 어떻게······.

―엄밀히 말하면 나의 승리라고 봐도 무방하지. 왜냐하면 나는 비장의 수를 아껴두고 있었으니까. 아무튼 계속 싸웠다면 내가 이겼을 거야!

이후 인터뷰가 산으로 가려는 낌새가 보이자, 인터뷰어가 적절한 선에서 답변을 끊으며 가장 중요한 질문을 유도했다.

―그렇다면 '베기 초고수'님께서 보시기에 현 성주님의 무력은 어느 정도입니까?

그 말에 '베기 초고수'가 확신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이 말을 하기 위해서 줄곧 기다렸다는 듯이.

―글쎄, 그놈은 혼돈 십방 전원이 와도 못 이겨.

―그, 그렇다면 그 말은 베기 초고수께서도 십방 전원을 상대할 수 있단 말씀이십니까?

―아, 아니 뭐······.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화면을 보던 유르헨의 손이 부들거리다 못해 파들거리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시는 겁니까, 신의 어르신.

유르헨도 재환이 강하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혼돈 십방 전원을 들먹이다니? 이건 이미 사실 여부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유르헨은 냉큼 내성의 성주실로 달려갔다.

그곳에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이 있을 것이었다.

"성주 님!"

문을 박차고 들어간 집무실 안에서 누군가가 법률 서적과 행정 서류를 가득 쌓아놓고 도장을 찍고 있었다. 유르헨은 씩씩거리며 다가갔다. 그러나 테이블 앞에 당도한 순간, 유르헨은 눈앞에 앉아 있는 이가 성주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네가 왜 여기 있나?"

화사한 금빛 머리칼에 어깻죽지에 일렁이는 천족의 은빛 아우라.

순간 유르헨의 머릿속에 짧은 기억이 스쳤다. 귀찮은 듯 법률 서적을 넘기던 재환의 모습.

―이걸 어떻게 하나하나 다 읽고 결재해? 내총관이 좀 하지?

―법률 문서에 결재할 수 있는 사람은 성주님과 법령을 담당하는 내각주뿐입니다.

그 말에 재환의 안색이 밝아졌다.

―법령을 담당하는 내각이 어딘데?

―제3 내각, 법령각입니다.

―내각주가 누구지?

―며칠 전에 성주님께서 찔러 죽이셨습니다.

―아.

재환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뭔가를 골몰하는 듯 인상을 찌푸리던 재환의 안색이 활짝 펴진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잠깐, 그 녀석이 있었지.

그리고 지금 유르헨은 성주가 말한 '그 녀석'이 누구인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내총관님."

머리와 몸통에 붕대를 칭칭 감은 칼튼이 지친 표정으로 도장을 쥔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

그 녀석은 잘하고 있으려나.

재환은 지금쯤 열심히 서류에 도장을 찍고 있을 칼튼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처음부터 칼튼을 고르곤의 십각(十角) 중 법령각주로 보임시킬 생각은 아니었다. 그는 바로 며칠 전에 큰 부상으로 입원한 상태였으니까.

―칼튼님! 이렇게 자세를 취해 보세요!

―역시, 너무 잘생겼어!

―좋아. 다음 조각품은 「촉수 망자 칼튼」이다!

그날 재환이 병실에 가지만 않았더라면, 칼튼은 평화롭게 휴식을 취하며 열혈 예술가들의 작품 모델이 될 수 있었으리라.

재환은 성주의 권한으로 압수해 온 조각품 「망자 칼튼」을 향해 찌르기를 날리며 생각했다.

이제 슬슬 감이 올 것 같은데.

재환은 연무장에서 한창 찌르기 훈련에 몰두하는 중이었다.

멀찍이 떨어진 연무장의 바닥에는 「촉수 망자 칼튼」을 비롯해 「타락한 천사 칼튼」, 「망자에게 당하는 칼튼」 등의 칼튼 망자 컬렉션 조각품들이 죄다 찌르기를 맞고 가루가 되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청허가 입을 열었다.

"애송아, 이게 다 얼만지는 알고 있는 거냐?"

"알 게 뭐야."

"쯧쯧, 성주라는 놈이 이렇게 세상 물정을 몰라서야. 요즘 계집애들 사이에서 이게 얼마나 유행인데...."

청허는 혀를 차며 조각품 중 몇 개를 슬그머니 집어 품속에 넣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던 재환이 입을 열었다.

"영감."

"왜?"

"새로운 기술이 완성된 것 같다."

"정말이냐?"

사실 재환과 청허가 연무장에 있었던 이유는 함께 새로운 기술을 창안하기 위함이었다.

유일왕 카타스트로피와 대결한 후, 재환은 새로운 기술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세 종류의 찌르기만으로도 충분했지만, 이제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기존에 그가 사용하던 '세게 찌르기'는 강력하긴 하지만 사용 반경이 지나치게 넓어 단일 적을 상대로는 적절하지 않았다.

벌써 닷새째, 재환과 청허는 내성의 연무장에 내려와 서로의 기술을 교환하는 중이었다.

"그럼 이제 수련은 필요 없는 거냐?"

"이제 괜찮아."

"쳇, 그러냐."

청허는 조금 아쉬운 눈치였다. 지난 닷새는 재환뿐 아니라 청허에게도 유익한 시간이었으니까.

평생 베기만 한 자와, 찌르기만 한 자의 교류.

수천 합을 나누는 동안, 청허의 '베기'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두었다.

재환이 말했다.

"뭐, 영감 베기는 충분히 봤거든."

"호, 그래? 이제 베기도 찌르기만큼 하는 모양이지?"

자존심이 상한 청허가 비꼬듯 물었다. 그러자 재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은."

청허가 작게 실소했다.

"평생 찌르기만 하던 녀석이 무슨! 베기가 그렇게 쉽게 되는 줄 아냐?"

"그 세게 베기인가 하는 건 좀 더 연습해야 되겠지만...."

"세게 베기가 아니라 비범 베기다!"

재환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살짝 베기 정도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아."

"살짝 베기가 아니라 평범 베기······, 뭐라?"

"이거잖아. 살짝 베기."

재환은 왼발을 성큼 물러서더니, 앞으로 발을 내디디며 허공에 일직선을 그었다. 별다른 특별함이 느껴지지 않는, 말 그대로 살짝 허공에 검을 긋는 느낌.

피식 웃은 청허가 입을 열었다.

"무슨 그따위 수준의 베기로 감히 이 몸의 '평범 베기'에―"

그리고 다음 순간, 재환의 검이 지나간 허공에서 쩌저적, 하고 뭔가가 찢어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Episode 8. 최후의 낭만 (2)

"아직 영감만큼은 아니지만."

응축된 풍압에, 공간이 뒤틀리는 소리.청허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확실히 청허 자신이 사용하는 베기보다 격이 조금 떨어지기는 했다. 그러나 말 그대로 미묘한 차이일 뿐이었다.

그가 무려 1억 번이나 벤 후에야 간신히 터득한 평범 베기였다. 그런 베기를 눈앞의 사내는 닷새 만에 터득했다.

"대체 어떻게 한 거냐?"

재환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청허는 어렴풋이 그 방법을 알 것도 같았다. 최근 재환의 기세가 달라졌다는 것을 청허도 느끼고 있었다. 뾰족한 송곳 같은 느낌에서 날카로운 칼날 같은 감각으로. 칼만 안 들었다 뿐이지, 다가갔다간 실제로 베일 수 있는 기세였다.

어쩌면 재환은 지금도 세상을 향해 수천 번의 '베기'를 연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걸 이용해서 새 기술을 만들었어."

"새로운 기술? 대체 어떤 베기냐?"

"베기는 아니고 찌르기인데."

청허의 눈빛이 다시 변했다.

"베기를 배웠는데 찌르기를 만들었다고?"

"대강 이런 느낌으로."

재환이 가볍게 손을 풀 듯 자세를 취해 보았다.

확실히 찌르기는 찌르기인데, 베기의 묘가 깃들어 있는 찌르기였다. 자세만 취했을 뿐이나, 각성자인 청허는 그 기술에 담긴 잠재력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청허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잠깐! 그거, 기술명은 정했느냐?"

"아직."

"내 베기를 훔쳐서 만들었으니, 당연히 내가 짓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느냐?"

그 당당한 권리 주장에 재환은 살짝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말해보라는 듯 턱짓을 했다.

"「청허 찌르기」 어떠냐?"

"...그 기술명처럼 만들어 줄까?"

"허허, 이놈이 보자보자하니까―"

재환이 독불을 뽑은 것은 순식간이었다.

베기의 묘를 지닌 찌르기.

재환의 손목이 나선형으로 움직이며 순간적으로 영력이 응축되고 있었다. 손이 거대한 원을 그림과 동시에, 베기의 곡선이 쐐기형으로 한 점을 향해 모여들기 시작했다.

질겁한 청허가 혼비백산했다.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재환의 검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지, 진짜 공격하는 거냐? 노인 공경도 모르는 놈아!"

나선을 그리며 회전하는 검풍이 연무장을 반파하며 회오리치듯 날아갔다. 막대한 폭풍으로부터 간신히 몸을 피한 청허가 입을 딱 벌렸다.

"저딴 게 무슨 대인 기술이냐!"

구석에서 연무하던 무사들이 후폭풍에 휩쓸려 비명을 질렀다. 심지어 기술의 후폭풍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재환의 검풍은 그대로 용오름처럼 위로 치솟더니, 이내 연무장의 천장을 뚫고 올라갔다.

그리고 잠시 후, 누군가의 비명이 들려왔다.

*

[이쪽이다.]

왼쪽 어깨에 뇌신(雷神)이라는 문구를 써넣은 황색 야행복의 적응자들이 내성의 지하로 숨어들고 있었다.

[연무장에 성주가 있다는 게 확실하겠지?]

[확실합니다.]

그들은 혼돈 십방의 제9석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뇌신방의 일당들이었다. 무리의 중심에 있는 이는 뇌신방주 윤용.

[다시 묻겠다. 수석 장로의 보고는 확실한 건가?]

수석장로의 급보를 받고 고르곤에 입성한 것이 벌써 사흘 전의 일이었다. 지금쯤 다른 방주들도 하나둘 내성에 도착했을 것이다. 아직 성채가 잠잠한 것으로 보아, 십방 중 누구도 성주 측과 전면전을 벌이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확실합니다. 성주 본인이 성주 직을 내걸었다고 합니다.]

수석 장로의 말에 따르면 성주의 영력 수치는 「무적응자」 수준이었다. 뇌신방주는 이것이 함정이라는 사실을 바로 눈치챘다.

분명 고르곤 측에서 뭔가 비겁한 수를 준비한 것이다.

얼마든지 덤비라고 해 놓고서, 내총관이라는 놈이 내성 정문을 통제하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물론 은신과 암습에 능한 뇌신방주에게, 그 정도 경비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고르곤 성주는 분명히 말했다.

일대일 대결이기만 하면 된다고.

그렇다면 암습도 대결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뇌신방은 흑림방과 함께 혼돈 십방 중에서도 암살에 최적화된 스킬을 사용하는 방파. 그는 그 뇌신방의 수장인 뇌신방주였다.

상대가 누구든, 그가 마음먹고 암살을 기도한다면 성주라도 피해갈 수 없었다.

뇌신방주는 품속의 단검을 꾹 눌러 쥐며 웃었다. 드디어, 그의 오랜 꿈을 펼칠 기회가 왔다. 그리고 그 시작은 고르곤 성채의 성주가 될 것이다.

비겁하다고 말해도 좋았다. 그에겐 이 '암습'이야말로, 진정한 일대일 대결―

[바, 방주님! 크아아아아악!]

부하의 비명이 들려온 것과, 바닥을 뚫고 올라온 폭풍이 그를 덮친 것은 거의 동시였다. 최상급 스킬 뇌신지기를 끌어올리지도 못할 만큼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뇌신방주를 비롯한 열댓 명의 적응자들은 비명과 함께 그대로 혼절했다.

잠시 후, 청허가 벽에 처박힌 뇌신방주를 끄집어내며 말했다.

"뭐야 이거. 뇌신방주 아냐?"

뇌신방주의 다리가 그에 대답이라도 하듯 찌릿찌릿 꿈틀거렸다. 재환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무래도 첫 번째 원정대원이 영입된 것 같군."

*

혼돈(混沌) 십방(十房).

거대한 혼돈을 지배하는 열 개의 방파를 지칭하는 단어.

그러나 십방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십방'은 아니었다. 십방 사이에도 엄연히 서열이라는 것이 있다.

제1석부터 제10석까지.

이러한 서열은 각 방파를 대표하는 방주 간의 비무나 방파 사이의 전쟁을 통해 결정되곤 했다.

뇌신방(雷神房)은 그러한 혼돈 십방 중 제9석을 차지한 방파였다.

십방의 9석과 10석이 비교적 교체가 잦은 편이라곤 해도, 십방이 괜히 십방은 아니었다.

게다가 뇌신방은 "이달의 혼돈"에도 몇 번이나 소개될 만큼 굉장한 성장력으로 단숨에 십방까지 올라선, 큰 규모의 방파였다.

'여기까지 오는데 정확히 100년이 걸렸다.'

뇌신방주 윤용은 혼돈의 십방주 중에서는 굉장히 젊은 편에 속했다.

올해로 207세가 된 뇌신방주 윤용은 한때 "위대한 땅"의 오대세가 중 하나인 유운가(流雲家)의 가솔이었다.

사실 엄밀히 따지자면 가솔이라기보다는 하인이란 말이 어울렸고, 정확히는 하인 중에서도 최하급에 속하는 노비였다.

그래도 윤용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함께 탑을 클리어한 동료들이 전장의 고기 방패로 팔려나간 현실을 고려하면, 「무적응자」 수준의 영력을 가진 윤용이 세가의 노비가 되어서라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기적이라는 말로밖엔 설명할 수가 없었다.

윤용은 자신의 분수를 알았고, 그 분수에 맞게 열심히 살았다.

죽지 않고 살기 위해, 죽는 것보다 못한 삶을 꾸역꾸역 이어 나갔다.

100년 즈음 일했을 무렵, 동료였던 대부분의 노비들이 죽었다. 윤용은 살아남았다. 그는 집사장의 신임을 얻어 정식 하인의 신분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정식 하인이 되던 날, 윤용은 처음으로 자신의 운명에 항거했다.

앞으로도 남은 평생을 이렇게 살 수는 없다.

윤용은 자신이 쌓은 백 년의 신뢰를 팔아, 유운가의 비급고를 털었다. 삼엄한 경비를 헤치고 그가 훔칠 수 있었던 스킬은 유운가의 비급들 중에서도 겨우 중급에 속하는 스킬이었지만, 그럼에도 그 스킬은 "위대한 땅" 전체에서는 최상급 스킬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유운가의 뇌신공(雷神功).

스킬을 익히는 동시에 뇌신지기가 전신을 관통하여 전신의 세포를 젊게 만들어 주며, 스킬의 숙련도가 8성을 넘어설 시 뇌신의 힘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게 된다는 유운가의 비학(秘學).

비록 뇌신공을 훔친 대가로 20여 년간 유운가의 적응자들에게 쫓겨 다니다 결국 참살당하는 최후를 맞긴 했지만, 이 뇌신공 덕분에 그는 "혼돈" 십방의 말석을 꿰찰 수 있었다.

단 100년 만에 혼돈 십방 중 9석의 자리에 올라서는 쾌거. 역대 혼돈의 역사를 뒤져 봐도 거의 선례를 찾아보기 힘든 기록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눈앞에는, 그 100년의 절반 정도를 살아왔다는 사내가 서 있었다.

그리고 사내의 직위는 무려 "혼돈"의 '성주'였다.

도대체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황망해 있는 뇌신방주 윤용에게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쯧쯧, 어쩌다가 너 같은 녀석이 첫 번째가 됐는지."

"······."

"하여간 평소에도 잔머리만 굴려 대더니 결국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신의께서는 왜 여기에 계신 겁니까?"

"너 같은 놈들도 치료해줄 사람이 필요할 거 아니냐."

뇌신방주가 충격에서 금방 깨어날 수 있었던 것은 청허의 치료 덕분이었다. 괜히 혼돈 제일의 신의가 아니었다.

"저 인간, 대체 누굽니까?"

뇌신방주 윤용은 천장에 구멍이 뚫린 연무장의 중심에 서서 찌르기를 반복하는 재환을 보며 물었다.

"고르곤 성주잖냐."

"혼돈은 물론이고 위대한 땅에서도 저런 자의 소문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건 뭐 나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묻는 겁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말이 안 되지."

청허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저놈은 모든 게 말이 안 돼."

그 말에 윤용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제껏 절망신의가 그런 식으로 표현한 자가 있었던가. 이것이 백 년짜리 호승심인지, 아니면 늙은 무인의 자존심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다시 싸우면 제가 이길 수 있습니다."

이대로는, 도저히 승패를 납득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저, 이래 봬도 뇌신방주입니다. 아까는 방심해서 당했지만······."

"얌전히 무릎 꿇은 녀석이 잘도 조잘대는구나."

청허의 빈정거림에 뇌신방주 윤용이 자세를 양반다리로 고쳐 앉으며 소리쳤다.

"아무튼 이건 무횹니다! 비겁하게 싸우기도 전에 기습하는 게 어디 있습니까?"

"먼저 암살하려고 침투한 쪽이 누군데? 뻔뻔한 놈이네, 이거."

청허의 말에 뇌신방주의 머리카락이 번개 모양으로 일어섰다.

"암살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그때, 연무장의 가운데에 있던 재환이 입을 열었다.

"좋아."

기대하지도 않았던 재환의 말에, 뇌신방주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좋다고 하심은?"

"다시 덤벼 봐."

재환은 말없이 독불을 뽑았다. 뇌신방주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분명, 아까 그가 맞은 공격은 신의의 것이 틀림없으렸다.

오래전 뇌신방주는 절망신의의 '베기'를 본 적이 있었다. 혼돈 십방주들의 최상급 스킬에 버금가는 베기. 그가 맞았던 검풍은 신의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이번에는 정정당당한 승부입니다."

품에서 단도 두 자루를 꺼낸 윤용이 쐐기를 박듯 말했다.

그는 전신에서 곧장 뇌신지기를 끌어 올렸다.

"그러든가."

"후후, 약속하셨으니 이젠 후회해도 늦었습니다."

불쌍한 애송이 성주가 아직 자기 분수를 모르는 모양인데, 이번에야말로 방심하지 않는다.

자신의 최상급 스킬인 뇌신공을 극한까지 끌어 올려서, 단번에 도륙을 내버릴 것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크아아아아앗!"

하늘 높이 날아가는 뇌신방주를 보며 청허가 혀를 쯧쯧 찼다.

"요즘은 하늘을 볼 일이 많구만."

Episode 8. 최후의 낭만 (3)

이튿날. 뇌신방주가 '아슬아슬하게' 성주에게 패배했다는 소문이 고르곤 전역을 강타했다.

"운이 좋았구나, 애송아. 처음부터 강한 방파에서 습격했다면 일이 순탄치 않을 수도 있었다."

"누가 와도 상관없었어."

"네놈이야 당연히 그렇겠지만, 네놈의 목적은 단순히 녀석들을 박살 내는 게 전부가 아니지 않으냐?"

그게 무슨 뜻이냐는 듯 바라보는 재환을 향해 청허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 이제 보니 네놈은 생각이란 게 없구나. 만약 제1석인 천룡방이나 제2석인 무극방이 먼저 왔다면 어떻게 됐을 거 같으냐?"

"음...."

"네가 그들부터 꺾게 된다면, 자연히 3석부터 10석까지의 방주들은 몸을 사릴 수밖에 없게 된다."

1석과 2석의 방주가 패한 상황이라면, 3석 이하의 방주들이 재환을 이길 수 있을 턱이 없다.

하지만 패한 것이 9석인 뇌신방주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왜냐하면 뇌신방주는 십방주 중에서도 최하위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첫 상대가 제9석인 뇌신방주였던 것은 재환에게 있어서 행운이었다.

"뭐, 진짜로 천룡방주나 무극방주가 왔다면, 아무리 네놈이라도 이렇게는―"

허공에 그림자가 일렁이더니 뇌신방주가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소문내고 왔습니다."

눈두덩이 부은 채로 입술을 비죽이는 뇌신방주를 향해 청허가 킬킬 웃었다.

"잘했다. 아슬아슬하게, 라는 말도 꼭 포함했겠지?"

"아무렴요."

9석에 랭크된 뇌신방주의 적응 차수는 6차였다. 십방 중 중상위권에 속하는 방파의 부방주에 해당하는 실력. 그 정도의 실력자가 '아슬아슬하게' 패했다. 말인즉, 지금쯤 성주의 실력은 '6차 적응자'와 비등비등한 수준이라고 소문이 났을 거란 얘기다.

6차 적응자라면 결코 약한 실력은 아니다.

그러나 십방의 주인이나 성주가 되기에 적절한 무력인가, 하고 묻는다면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십방 중 7석인 신녀방의 방주만 해도 7차 적응자 수준의 무력 수위를 자랑하며, 다른 성채의 성주들이 무려 8차 적응자라는 것을 고려하면, 6차는 비교적 별 볼 일 없는 수준인 것이다.

뇌신방주 윤용이 땅이 꺼지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소문이 이렇게 나면 다른 십방들이 어떻게 나올지 모릅니다."

"저 녀석 실력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느냐?"

"그건 그렇지만...."

뇌신방주는 심경이 복잡했다.

소문을 낸 것 자체는 그의 입장에서도 나쁠 것이 없는 일이었다. 만약 다른 십방주들이 나타나서 성주를 쓰러뜨려 준다면, 비록 성주 자리는 차지하지 못한다 해도 「심연 원정대」의 일원이 될 일은 없게 된다.

문제는 누가 저 고르곤 성주를 쓰러뜨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천룡방주나 무극방주라면 어떨까.

제1석인 천룡방주나 제2석인 무극방주의 실력은 뇌신방주 자신보다 최소 두 수는 위였다.

하지만 그들이 저 사내를 쓰러뜨릴 수 있을까? 뇌신방주는 이상하게도 그림이 그려지질 않았다.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다른 십방주들이라면 분명 쓰러뜨릴 수 있을 거다.

이미 십방주들 중 몇몇이 고르곤 성채 내에 들어와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지금쯤 슬슬 눈치만 보던 십방 중 여럿이 내성 쪽으로 우르르 몰려들고 있으리라.

신의, 성주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십방 전체와 싸울 수는 없을 거요.

뇌신방주 윤용은 그런 생각을 하며 청허 쪽을 흘끗거렸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허?"

겨우 207년을 살았을 뿐이지만, 뇌신방주도 절망신의 청허에 관해 웬만큼은 알고 있었다.

전설적인 「심연 원정대」의 일원이었던 사내. 「열매」를 얻어 "혼돈"을 구원하기 위해 앞장섰던 이. 거대한 절망 앞에 부딪쳐 모든 것을 상실한 인간.

혼돈에서 절망신의보다 절망을 잘 아는 이는 존재하지 않으리라.

그런데 저 표정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홀로 묵묵히 찌르기를 반복하는 재환을 보는 청허의 표정은 뭐랄까, 절망과는 매우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런 뇌신방주의 마음을 읽었는지 청허가 입을 열었다.

"애송아, 너는 운이 좋은 것이다. 진짜 절망을 알기도 전에 저 녀석을 보게 되었으니."

뇌신방주는 묻고 싶었다. 대체 저 사내의 어떤 점에서 그런 가능성을 엿본 것인지.

그때, 누군가가 연무장의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대결을 신청하러 왔소, 고르곤 성주!"

혼돈 십방 중 제8석을 차지한 화왕방주 강황과 제5석을 차지한 남해방주 카이만이었다.

"화왕 놈이 웬일로 늦나 했더니."

청허가 안타까운 눈길로 그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오늘 여럿 골병 나게 생겼구만."

*

승부가 나기까지는 십여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화왕방의 방주답게 불같은 성격의 강황은 패도적인 불길을 주렁주렁 뿜어 대며 연무장을 불바다로 만들더니, 찌르기 몇 방을 얻어맞고서 대자로 뻗어 버렸다.

그나마 오랜 시간을 버틴 것은 남해방주인 카이만으로, 카이만은 재환과 무려 오십 합을 겨루었다.

"내가 졌소, 성주."

재환은 새로 만든 기술을 쓰지 않았다. 아직 힘 조절이 불가한 까닭이었다. 싸우는 내내 그가 사용한 것은 살짝 찌르기와 보통 찌르기뿐이었다.

"좋은 승부였다."

재환은 남해방주 카이만의 실력에 조금 놀랐다.

아직 6차 적응자에 머물러 있는 다른 두 방주와 달리, 남해방주 카이만은 원숙한 수준의 7차 적응자였다.

재환은 남해방주 카이만의 본 실력이 절망신의 청허에 비해 크게 뒤떨어지지 않는 수준이라고 판단했다.

"본 실력을 모두 보여주지 않았군."

"그건 성주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카이만이 유쾌하게 웃어 젖혔다.

"끝까지 싸우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게 있소."

카이만은 흡족한 듯 읍을 하고는 다른 방주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한쪽에서 청허에게 치료를 받던 화왕방주 강황이 입으로 연신 불길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 성질머리는 여전하구나, 강황."

"고맙소이다, 신의."

화왕방주 강황이 투덜거리며 말했다.

"뇌신방주 저 개 같은 자식. 뭐? 아슬아슬하게 패해?"

"클클, 누굴 탓하는 거냐? 진 놈이 잘못이지."

"젠장."

뇌신방주 윤용은 아까부터 무얼 그리 골몰하는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침내 치료가 끝나고, 세 명의 방주가 한자리에 모였다. 그들은 뭔가를 의논하려는 듯 재환과 청허와는 멀찍이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섰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뇌신방주 윤용이었다.

"저기, 어르신들. 혹시 십방중 또 누가 오고 있는지 아십니까?"

"학림과 신녀가 오고 있다더군."

대답한 것은 제5석, 남해방주 카이만이었다.

"제6석인 학림. 그리고 제7석인 신녀라······."

뇌신방주 윤용은 생각에 잠겼다.

제5석인 남해방주가 제압당한 마당에, 그들이라고 해서 성주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제1석인 천룡이나 제3석인 흑림은 아직 기별이 없습니까?"

"그들에 관해서라면 뇌신방주 네가 더 잘 알 것 아니냐?"

남해방주 카이만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천룡방과 흑림방은 제9석인 뇌신방과 같은 성채인 「만티코어」에 본거지를 두고 있었다.

한데 뇌신방주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뇌신, 왜 그러느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건 그렇고, 두 방주님은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승부에 패했으니 그들은 꼼짝없이 심연 원정대가 되어야만 했다. 하지만 대체 누가 그런 선택을 하고 싶겠는가? 그때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처음부터 「심연 원정대」가 될 생각으로 이곳에 왔다."

남해방주 카이만이었다.

"남해방주, 진심이시오?"

화왕방주 강황이 의심스럽다는 듯 되물었다.

"물론이다."

"허······."

화왕방주 강황은 새삼 남해방주 카이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떠올렸다.

고르곤 전 성주 아이멜의 절친한 친우이자, 당시 실력이 모자랐던 까닭에 「심연 원정대」의 일원이 되지 못했던 자.

그는 900년 전 있었던 「심연 원정대」의 최후를 눈앞에서 본 자였다.

"어차피 조만간 심연에 가 볼 생각이었다."

남해방주 카이만은 올해로 954년을 살았다. 분명 그 아득한 세월 동안 홀로 절치부심하며 칼을 갈아왔으리라. 화왕방주는 그런 카이만이 감탄스러웠다.

"900년을 살아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나 보구려."

"화왕은 어쩔 셈이지?"

"뭐, 승부에 졌으니 어쩔 수 없지 않겠소."

화왕방주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곧이어 뇌신방주 윤용 쪽을 바라보았다.

"뇌신, 너는?"

"저는 방금 마음을 정했습니다."

"마음을 정해? 무슨?"

뇌신방주 윤용은 화왕방주와 남해방주에게 꾸벅 읍을 하고는 곧바로 재환을 향해 다가갔다. 화왕방주가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저 녀석,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성주랑 한 판 더 붙으려고······?"

남해방주 카이만도 이기지 못한 성주였다. 하지만 어린 뇌신방주라면 치기를 부릴 법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이 뇌신방주 윤용! 지금 이 시간부로 고르곤 성주 재환님께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합니다."

멀리서 그 광경을 바라보던 화왕방주 강황이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재환이 입을 열었다.

"아니, 충성까진 필요 없는데."

"······아닙니다!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죽어서도 충성하겠습니다!"

"이미 죽었잖아."

뇌신방주는 아예 무릎까지 꿇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청허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속셈이냐, 뇌신 애송아."

내기 승부에서 졌다고 한들, 십방의 방주라는 놈이 이렇게 쉽게 고개를 숙이고 들어올 리가 없었다. 제9석인 뇌신방이라고 해도 명색이 십방 중 하나인데.

"딱히 아무런 속셈도 없습니다! 저는 그저 성주님의 무력에 크게 감복하여······!"

"개소리 말고."

뇌신방주는 억울한 표정이었다. 툭 치면 눈물이라도 쏟을 듯 그렁그렁한 얼굴. 207살짜리 얼굴이라기엔 믿을 수 없을 만큼 순박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청허의 눈빛은 완고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쳇."

뇌신방주가 입술을 비죽였다. 연기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 모습을 보던 재환이 입을 열었다.

"난 원정대원이 필요할 뿐이야. 충신은 필요 없다."

"제겐 그거나 그거나 같은 소립니다."

"그게 어떻게 같은 소리냐?"

청허가 재차 끼어들었다.

뇌신방주 윤용은 청허의 얼굴을 가만히 살피다가, 미심쩍은 기색으로 물었다.

"······신의, 아직 아무것도 못 들으신 겁니까?"

"뭘 말이냐?"

뇌신방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이내 재환을 향해 말했다.

"아무튼 고르곤 성주님, 절 가솔로 좀 받아 주십쇼. 하다못해 대주 같은 직위를 줘도 괜찮으니까."

"가솔? 무슨 소리냐?"

"아, 비급 같은 거 안 훔칠 테니까 좀 받아 주십쇼. 그리고 기왕이면 제 부하들도······."

청허가 눈에 쌍심지를 켰다.

"명색이 방주인 놈이. 뇌신방은 어쩌고 그런 헛소릴 하는 거냐?"

"후우······. 뇌신방······. 뇌신방 말입니까?"

뇌신방주 윤용은 어딘가 화가 난 듯, 또 한편으로는 허탈한 듯한 표정을 짓더니 다음과 같이 말했다.

"「뇌신방」이라는 방파는 이제 혼돈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뭔 소릴 하는 거냐? 그럼 저놈들은 뭔데?"

연무장의 한쪽 구석에 쭈그리고 있던 뇌신방의 일원들이 청허의 시선을 받고 한껏 몸을 움츠렸다.

한참이나 머뭇거리던 뇌신방주는 한숨과 함께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뇌신방은 일주일 전에 이미 멸방(滅房)했습니다. 살아남은 이는 저를 비롯해 저기 있는 일곱뿐입니다."

Episode 8. 최후의 낭만 (4)

소수 정예를 끌고 성채에 잠입해 암살을 꾀한다.

아무리 뇌신방주 윤용이라도, 평소라면 시도하지 않을 일이었다. 설령 고르곤 성주의 무력 수준이 진짜로 「무적응자」라 해도, 성주의 주변에는 절망신의 청허가 있었다. 고작 9석에 자리한 뇌신방주로서는 어떻게 비벼볼 상대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뇌신방주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러니까, 뇌신방이 망했다는 거냐?"

"예."

"대체 언제?"

"말씀드렸다시피 일주일 전입니다."

청허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

"상황을 요약하자면 이런 거로군."

"······."

"마침 뇌신방이 망했는데 때마침 고르곤 성채에서 일대일 대결로 새로운 성주를 뽑겠다는 선언을 했고, 네놈은 어차피 모 아니면 도라는 심정으로 성주의 자리를 노리고 이곳에 왔다."

"거의 비슷합니다."

"그런데 막상 와서 싸워 봤더니 참패해 버렸고."

"참패했습니다."

"방파는 망했고, 성주도 못 되었다. 그래서 갈 곳이 없으니 받아 달라. 그거냐?"

"예."

"이거 완전 양심도 없는 놈 아냐?"

"뭐, 그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만······."

우물쭈물하는 뇌신방주를 보던 청허의 눈이 좁혀지더니, 이내 쯧쯧― 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대체 왜 그런 거짓말을 하는 거냐?"

"예?"

"너는 뇌신방이 일주일 전에 망했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소문이 안 났다고?"

다른 방파도 아니고 혼돈 십방 중 하나가 망했다.

"혼돈"은 "위대한 땅"에 비해 시스템의 사용이 불안정하여 전서응이나 전서구 등 메시징(Messaging) 스킬의 효율이 생각보다 좋지 않은 편이지만, 그렇다고 쳐도 일주일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기간이었다.

"「만티코어」와 「고르곤」 사이의 거리를 감안하더라도 일주일은 지나치게 길군."

대화를 지켜보던 남해방주 카이만도 한마디를 거들었다. 뇌신방주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은 채로 말을 이었다.

"믿지 못하시겠지만 사실입니다. 그리고 소식이 아직 퍼지지 않은 것은 아마―"

입맛을 다시던 뇌신방주가 말꼬리를 간신히 이어갔다.

"정보가 차단됐기 때문입니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청허가 불신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혼돈"에서 정보를 차단한다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한두 방파가 작당하듯 모여서 '자 이제 정보를 차단해 보자'라고 마음먹는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란 뜻이다.

뇌신방이 정말로 멸방했다면 그와 동시에 무수한 전서응들이 하늘을 날았을 것이다. 그 전서응들을 대체 무슨 수로 통제한단 말인가? 누군가가 사격 스킬로 전서응을 하나하나 다 쏴서 떨어뜨리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만한 정보를 차단하는 것은 성채 자체에서 움직이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다. 스킬 시스템을 통제하여 메시징 스킬을 차단하지 않는 이상······."

그런데 뇌신방주의 표정이 이상했다. 분노에 떠는 것 같기도 하고, 슬픔에 젖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뭔가를 인정해야만 한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나 괴로운 사람의 얼굴.

"신의, 제 몸을 한 번 스캔해 보시지요."

"뭐? 갑자기 왜?"

"스캔해 보시면 알게 되실 겁니다."

청허는 어쩐지 불쾌한 눈으로 뇌신방주의 몸을 스캔했다. 당사자의 허락 하에 이루어진 스캔이었기 때문에, 청허는 뇌신방주의 영혼 오염도와 영력 현황, 스킬 정보 전반에 관한 모든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오, 뇌신방주 애송이, 꽤 괜찮은 스킬도 있······, 응? 이게 뭐야?"

청허의 표정이 갑자기 미묘하게 바뀌었다.

"장거리 메시징 스킬들이 왜 모두 봉인되어 있어?"

말 그대로였다.

뇌신방주는 현재 전서구나 전서응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장거리 메시징 스킬에 금제가 걸린 상태였다.

뇌신방주는 만티코어 성채의 소속원이었다. 그런 소속원의 장거리 메시징 스킬을 차단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이는 세상에 오직 단 한 사람.

만티코어 성주뿐이다.

"현재 만티코어의 모든 인원이 이런 상태인 거냐?"

"그렇습니다."

"왜? 만티코어 성주한테 역천이라도 저지른 거냐?"

혼돈 십방 중 하나가 멸방했다. 그런데 성채에서 장거리 메시징 스킬을 차단해버렸다. 주변의 도움을 완전히 배제하겠다는 의미, 뇌신방 일당을 만티코어에서 완전히 멸절시키겠다는 뜻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이쯤 되면 뇌신방주가 만티코어에서 살아나온 것 자체가 용한 상황이었다.

뇌신방주가 여전히 침묵하자, 청허가 재차 물었다.

"만티코어 소속이라면 제1석인 천룡과 제3석인 흑림도 있을 텐데. 둘 중 어느 쪽이냐? 성채가 단독으로 너희를 공격하진 않았을 거 아니냐."

카이만도 거들었다.

"천룡방과 흑림방은 뇌신방과 관계가 나쁘지 않았을 텐데?"

뇌신방주는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청허가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아니면 다른 성채의 십방인가? 흠.... 1석과 3석의 묵인을 얻어내고, 성채 만티코어의 협조를 받아낼 만한 방파가 있다고?"

"2석인 무극방이 있지 않습니까?"

"무극방은 고르곤 성채 소속이야. 창천검이 움직였다면 내가 모를 리가 없다."

결국 사태는 다시 오리무중이었다.

가만히 대화의 추이를 지켜보던 화왕방주 강황이 답답하다는 듯 소리쳤다.

"거참 그만들 떠드시고 저놈 얘기 좀 들어 봅시다! 결국 진실을 아는 것은 저놈뿐이지 않소?"

"그건 그렇지. 어서 얘기해 보거라."

"이 답답한 놈아! 속 시원히 좀 말해 봐라! 십방의 방주라는 놈이 이렇게 뜸만 들여서야―"

콧김을 훅훅 뱉던 강황이 재차 다그쳤다.

"대체 누가 네놈 방파를 쳐부순 거냐? 말을 해야 도와주든 말든 할 거 아니냐? 보아하니 복수해 주십사 찾아온 것 같은데."

"······도와줄 생각도 없으시면서 뭘 그러십니까."

"뭣이? 무슨 그런 섭섭한 소릴 하는 게냐. 네가 부탁한다면 당연히 이 몸의 화왕방도―"

"화왕방 하나로는 무립니다."

화왕방 하나로는 무리다?

그 말에 잠자코 있던 남해방주 카이만이 시험 삼아 이렇게 말해 보았다.

"그럼 남해방이 도와준다면 어떤가?"

"부족합니다."

제8석과 제5석이 도와준다는데도 부족하다. 대체 적이 누구기에 그런 말을 하는 것일까.

"제가 고르곤 성주님의 휘하에 들어가려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제가 상대하려는 적은 십방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상대할 수가 없습니다."

십방의 힘만으로 상대할 수 없는 적.

묵묵히 사태를 지켜보던 재환이 처음으로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고르곤이 힘을 빌려준다면 상대할 수 있는 적인가?"

"잘 모르겠습니다."

하나의 성채가 움직인다는데도 상대하기 어렵다고?

이 "혼돈"에 그런 단체가 있단 말인가?

"적이 대체 누구냐?"

"말하면 믿어 주실 겁니까?"

"지금이 믿고 안 믿고를 따질 때냐?"

화왕방주 강황은 열불이 나는 듯 입에서 불길마저 토할 기세였다. 한참이나 망설이던 뇌신방주는 결국 체념한 듯 입을 열었다.

"...금천방입니다."

"뭐? 지금 장난치는 거냐?"

화왕방주의 눈에 노기가 깃들었다.

"너는 그 말에 책임을 져야 할 거다."

혼돈 십방 중 제10석인 금천방이 흉수라니. 누구라도 동의할 수 없는 말이었다.

"최근 금천방의 세력이 커지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하지만 남해방과 화왕방의 힘을 합친 것보다도 그들의 세력이 강하다는 말만큼은 결코 흘려들을 수가 없군."

남해방주 카이만의 목소리도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자 뇌신방주가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남해방과 화왕방이라······. 제가 말을 실수했군요. 다시 한번 정확하게 말씀드리지요."

"이제 와 말을 바꿀 셈이냐?"

어느새 화왕방주 강황이 칼을 뽑고 있었다.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뇌신방주가 말했다.

"제5석과 제8석인 남해방과 화왕방이 아니라, 제1석과 제3석인 천룡방과 흑림방이 합세하더라도, 금천방에게는 이길 수 없습니다."

"네 이놈!"

달려드는 화왕방주의 칼을 저지한 것은 뜻밖에도 카이만이었다. 카이만은 격앙된 와중에도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미 천룡방과 흑림방이 금천방과 싸우기라도 했다는 말로 들리는군."

의미심장하게 끄덕이는 뇌신방주의 고개가 떨리고 있었다. 달려들던 화왕방주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게 무슨······!"

"방주님들이 이러실까봐 제가 쉽게 이야기를 못 꺼냈던 겁니다.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왜 제가 천룡방이나 흑림방에는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왜 제가 이 먼 고르곤까지 찾아와서, 이런 이야기를 꺼내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뇌신방주 윤용의 눈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화를 내던 화왕방주도, 분노를 삭이던 남해방주도 이때만큼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207년을 살아온 사내의 눈물이었다.

"설마, 천룡방과 흑림방까지 당했단 말인가?"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혼돈 십방 중 세 개 방파가 하루아침에 당했다고? 이제껏 "혼돈" 역사상 그런 일이 일어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 둘만이 아닙니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성채 「만티코어」는 일주일 전 금천방에게 완전히 함락당했습니다."

***

성채 「만티코어」의 성좌에 황색 도포의 소년이 거만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소년의 발아래로는 일주일 전까지 「만티코어」 성주였던 자의 머리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성주 녀석들, 정신력이 제법이야. 결국 수호각수는 못 얻었군. 제길."

소년은 짜증난다는 듯 만티코어 전 성주의 머리를 발로 으깨버렸다. 터져 흐른 은빛 피는 이내 하얀 가루가 되어 찬연히 흩어졌다.

금천방주 임진홍.

약 30년 전, 이 "혼돈"에 혜성처럼 나타나서 중하위권 클랜들을 평정하며 단숨에 십방주의 자리까지 올라간 소년. 「과적응자」라는 소문도 있었고, 거장의 탑을 클리어한 전설의 세대라는 소문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정체를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의 앞에 부복한 사내가 물었다.

"방주님. 보고를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래."

"먼저 천룡방과 흑림방 건부터······."

"좋도록."

보고자가 홀로그램 패널을 열어 성채 내부의 소요 지역을 입력하자, 실시간 전투 영상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거대한 입과 촉수를 가진 괴물들이 혼돈 십방의 강자들을 마구 유린하고 있었다.

―크아아악!

―살려 줘······!

패널의 가장자리에는 현재 전투가 진행 중인 곳과 전투가 끝난 곳, 그리고 양측 전력의 손실 정도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도표가 있었다.

금천방주는 그 표를 흘끗 바라보고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안에 모두 정리되겠군."

"맡겨 주십시오."

"방주들은 어떻게 됐지?"

"천룡방주는 사지를 절단한 채로 뇌옥에 구속했습니다. 흑림방주는 아직 패거리들과 함께 응전 중입니다만...."

"누가 상대하고 있지?"

"저희 측 부방주와 장로들이 직접 나섰습니다."

"그럼 곧 끝나겠군."

"예."

딱히 뭘 한 것도 아닌데, 수하들이 몸을 떨며 고개를 숙였다.

"참, 뇌신방주는 잡았어?"

"그게······, 죄송합니다."

"역시 그렇게 됐나."

임진홍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 「만티코어 탈취 계획」 중 유일하게 실패한 것. 그것은 바로 뇌신방주 윤용을 놓친 것이었다.

"설마 방주들이 곧장 협력해 올 줄이야."

만티코어 내성이 함락되고, 성채 내부의 출입 시스템이 통제되자마자 방주들은 곧장 협공을 가해왔다.

특히 제3석인 흑림방주의 역량이 대단했다.

―혼돈의 배신자여. 혼돈은 오늘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흑림방주는 만티코어에서 가장 주법이 빠른 뇌신방주를 성채 밖으로 빼돌리는 데 성공했다. 그게 벌써 일주일 전의 일이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됐어. 놈이 어디로 도망갔는지는 파악했나?"

"그게······. 아마 고르곤인 듯합니다."

"고르곤이라."

일이 번거롭게 됐다. 최근 고르곤에 관한 소식은 금천방주도 익히 알고 있었다.

성주의 자리를 걸고 「심연 원정대」를 모집하는 미친놈이 등장했다지.

우스운 일이었다. 아직도 이 "혼돈"에 그런 생각을 하는 자가 남았을 줄이야.

"...칠흑의 군주를 볼 낯이 없게 되었군."

이번 만티코어 함락 작전은, 비밀리에 12지대 군주의 지원까지 받아가며 실행한 계획이었다.

이른바 '혼돈 통일 계획'.

금천방주의 계획대로였다면 성채 「고르곤」은 성채 「만티코어」와 함께 지금쯤 함락되었어야 했다.

고르곤 함락을 위해 투입된 전력은 무려 금천방 총 전력의 2할. 무려 5할의 전력이 투입된 만티코어에 비하면 다소 열세였지만, 금천방주는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다.

...수석 장로가 당하지만 않았더라도.

고르곤의 일은 수석 장로 마이한에게 일임한 상태였다.

오랜 세월 초석부터 쌓아둔 결실을 보는 것이었기에, 들인 공으로만 치면 고르곤 쪽이 만티코어보다 더 오래되었다.

그런데도 실패했다. 그것도 단 한 사내의 등장으로.

재환이라 했던가.

홀연히 나타나 일천에 달하는 금천방의 정예병들을 학살한 남자.

듣자 하니 절망신의 청허와 비슷하거나 앞서는 수준의 무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했다. 찌르기 하나만으로 모든 적들을 찔러 죽였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보나 마나 거짓말이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좌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임진홍은 홀로그램 패널을 호출해 최근 부하가 보낸 영상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영상에는 재환이 찌르기를 통해 망자가 된 잔야를 격살하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딘가 익숙한 생김새인데."

그때, 내성을 담당하는 장로 중 하나가 허겁지겁 회의실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칠흑의 군주 측에서 메시지를 보내왔습니다."

"군주님이? 무슨 일이시지?"

칠흑의 군주 제롬은 금천방주의 가장 큰 후원자였다.

장로가 창을 띄우려고 하자, 임진홍이 귀찮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간단히 요약해."

"내용상으로는 지난번 메시지와 같습니다."

"아아, 그 도망간 「상품」 찾아달라는 내용?"

"그렇습니다."

"망할. 자기들이 관리 실패한 상품을 왜 우리한테 찾아 달라 말라야? 일단 알았다고 전해."

"알겠습니다."

장로가 읍을 하며 물러가자, 임진홍은 의자의 손잡이를 톡톡 두들기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얼마나 지났을까, 금천방주 임진홍이 입을 열었다.

"니들이 생각해도 말이 안 되지 않냐?"

"예?"

"웬 「상품」 하나가 튜토리얼 게임 도중 탑의 재배자를 죽이고 탑을 부순 뒤에 "혼돈"으로 나왔단다. 이게 상식적으로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마, 말이 안 됩니다!"

"그렇지. 정신이 나간 거지. 그딴 일이 가능할 리가 없잖아."

금천방주의 말에도 수하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비지땀을 닦기에 바빴다.

아무리 상대가 주군이라지만, 위대한 땅의 군주에 대해 저렇게 함부로 떠들어 대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금천방주가 강하다고 해도, 군주란 자들은 격의 차원이 다른 강자들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뇌신방주가 고르곤으로 달아났다는 이야기까지 했습니다."

"그래? 그럼 놈은 내버려 둬도 상관없다."

"예? 하지만······."

"마침 십방의 방주들도 몰려들고 있다니, 오히려 잘됐군."

금천방주 임진홍은 수석 장로 마이한이 마지막으로 남긴 보고를 기억하고 있었다.

만에 하나 고르곤 탈취 계획이 실패할 경우, 자동적으로 시행되도록 예정되어 있었던 계획.

―고르곤 멸절을 시행하겠습니다.

수석 장로 마이한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소식이 끊겼다. 그가 마지막으로 무슨 일을 벌였을지, 금천방주 임진홍은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고르곤 성채에서 퍼져 나오는 극악한 망자의 기운. 제법 거리가 있는 만티코어 성채에서도 임진홍은 그 힘을 아주 예민하게 느낄 수 있었다.

마의 8차 적응을 넘어 9차 적응을 앞둔 임진홍마저도 떨게 만드는 강력한 영압.

유일왕 카타스트로피.

비록 강림한 카타스트로피의 기운은 금세 사라졌지만, 카타스트로피의 진짜 무서운 점은 강림 그 자체가 아니었다.

금천방주 임진홍이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유일왕 카타스트로피가 왜 재해(災害)라 불리는지, 놈들은 이제 똑똑히 알게 될 것이다."

Episode 8. 최후의 낭만 (5)

고르곤 내성의 연무장.

두 명의 방주들과 재환, 그리고 청허 앞에서 긴 이야기를 끝낸 뇌신방주가 면목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하여,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뇌신방주의 이야기가 끝나자, 좌중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지난 천 년간 성채 하나가 이런 식으로 무력하게 함락된 적은 없었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군."

"금천방이 몇 년 사이 그렇게 커졌단 말인가? 만티코어 전체를 통제할 정도로?"

화왕방주와 남해방주가 한 마디씩 거들었다.

줄곧 입을 다물고 있었던 재환도 입을 열었다.

"금천방이 대체 어떤 녀석들인데?"

"혼돈 십방 중 제10석이오. 십방 중에선 제일 약하다고 보면 되지."

화왕방주 강황이 대답했다.

"그런 방파가 성채 하나를 함락시켰으니 이상하다는 거요. 솔직히 나는 아직도 저놈 말이 믿기지가 않소."

"아무래도 뇌신방주 녀석의 말이 사실인 것 같다."

갑자기 끼어든 청허에게, 강황이 께름칙하다는 듯 되물었다.

"신의께서 그걸 어떻게 아시오?"

"금천방은 고르곤도 노렸었으니까."

그 말에 뭔가 떠오른 것이 있는지 강황의 안색이 급변했다.

"설마 일주일 전 내성에서 있었던 소요 사태가 금천방 때문이었소?"

금천방의 수석장로인 마이한의 음모를 막아내고, 성주가 교체된 지 아직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날, 재환이 막지 않았더라면 고르곤 또한 금천방의 손에 넘어갔을 것이다.

남해방주 카이만도 말을 보탰다.

"내 생각도 같다. 방금 만티코어 쪽의 남해방 지부와 연락이 두절되었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허······. 하지만 금천방이 대체 어떻게 그런 강대한 힘을 손에 넣었단 말인가."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뇌신방주가 입을 열었다.

"어떤 뒷배를 타고 있는 건진 잘 모르겠지만, 놈들을 후원하는 세력이 있는 건 확실합니다."

혼돈 십방 급의 집단을 후원할 수 있는 세력이라면 답은 정해져 있다.

뇌신방주는 의문에 쐐기를 박듯 말을 이었다.

"아마 12지대의 군주들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그럴 리가 없다. 군주들은 더 이상 혼돈에 관여하지 않기로 했을 텐데!"

"하지만 군주들이 아니고서야 누가 혼돈 십방급 세력을 후원할 수 있겠습니까?"

"현재 "위대한 땅"은 전역이 전쟁 중이라고 들었다. 그 틈을 타서 누군가가 "혼돈"의 정세에 관여하려 들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재생궁"에 연락을 취해 보는 게 어떻겠소?"

화왕방주 강황의 말에 카이만이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재생궁" 놈들의 도움을 받으란 말인가?"

"재생궁".

군주들과 오대세가의 부활처이자, "혼돈"의 모든 「열매」를 관리하는 집단.

군주와 오대세가의 관할에 있는 만큼, 그곳을 관리하는 인사들 역시 군주와 오대세가의 소속원들이었다. 화왕방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쨌든 12지대 중 하나가 개입한 것이라면, 협정을 어긴 것이지 않소이까?"

900년 전, 「심연 원정대」로부터 열매를 강탈했던 "재생궁"의 군주들은 열매를 그들이 가져가는 대신 "혼돈"과 한 가지 조약을 맺었다.

앞으로 "위대한 땅"의 군주들과 오대세가는 "혼돈"의 정세에 일체 개입하지 않겠다는 조약.

"위대한 땅"에서는 제295차 대군주 협정이라 알려진 것이었다.

"확실히 협정을 어긴 것이기는 하지만······."

"놈들에게 이 일에 관해 추궁해야 하오!"

"하지만 아직 심증뿐이야. 명백한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연락을 취하는 것도 문제고, 무엇보다······."

남해방주 카이만이 이를 갈며 소리쳤다.

"나는 놈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글거리는 카이만의 눈빛을 본 강황이 속으로 혀를 찼다.

확실히 그럴 법도 하다. 눈앞의 사내라면, 싸우다 죽으면 죽었지 결코 "재생궁"의 도움을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만약, 재생궁 놈들이 한통속이라면 어쩔 텐가."

"그건······."

거기까진 생각해 보지 않았는지 화왕방주 강황이 입을 다물었다. 연무장 내에 초조한 분위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청허가 재환을 향해 물었다.

"생각보다 일이 커졌다. 이제 어쩔 거냐?"

"뭘?"

"만티코어가 함락되고 십방 중 셋이 복속되었다. 만약 네 녀석의 계획을 계속 이어 나가다간······."

"전쟁이 벌어지겠지."

전쟁. 그 두 음절이 가지는 무게를 청허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혼돈에 전쟁이라 부를 만한 규모의 전투가 벌어진 것은 벌써 900년 전의 일이었다.

「심연 원정대」와 "재생궁"의 전쟁. 군주와 세가의 잔당들에게 무수한 혼돈의 영혼들이 휩쓸려 나간 그 날의 기억.

"상관없어. 오히려 수고를 덜었으니 잘 됐지."

"뭐?"

"어차피 싸워야 할 적들이다."

그 말에 뇌신방주와 남해방주가 깜짝 놀랐다.

"그 말씀은······?"

"만티코어를 치겠다는 소리요?"

재환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했다.

청허가 질렸다는 듯 물었다.

"설마 너는 정말로 혼돈을 통일할 셈인 게냐?"

"그래."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남해방주 카이만도 대소했다.

"크하하하핫! 성주, 진심이시오? 혼돈을 통일하겠다고?"

"진심이다."

카이만이 웃음을 뚝 그쳤다. 대화를 지켜보던 청허도 표정이 굳어졌다. 유르헨에게 이야기를 들어 어렴풋이 알고 있긴 했지만, 정말로 그딴 생각을 품고 있을 줄은 몰랐다.

―성주님은 혼돈을 통일하고 모든 적을 배제함으로써 성주직을 내려놓으시려는 것 같습니다. 성채가 없으면 성주도 필요 없게 될 테니까요.

혼돈 통일은 4대 성채와 십방을 복속시키는 것과는 완전히 그 궤를 달리하는 말이었다. 왜냐하면 4대 성채와 십방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강한 적이 혼돈에는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재생궁".

900년 전의 일을 통해, 청허는 누구보다 그들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었다. 청허가 말했다.

"지금의 네 실력으론 무리다."

"해 보지 않고는 모르지."

청허는 가끔 재환의 저 자신감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도 재환이 강한 것은 알고 있다.

재환은 각성자다.

그리고 각성자라는 존재는, 그만한 자신감을 내비쳐도 될 만큼 충분히 대단한 존재였다. 청허처럼 불완전한 각성자조차 "위대한 땅"에 가면 귀족 대우를 받을 수 있다. 하물며 그보다 강력한 재환이야 오죽할까.

"애송아, 전쟁이란 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네가 아무리 강해도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 있어."

사가(史家)들은 전쟁을 무수한 형태로 정의한다.

누군가는 전쟁이 사기(士氣)라고 말한다. 수적으로 밀리는 상황에서도 뛰어난 사기로 승리하는 사례가 역사에는 비일비재하기 때문이었다.

또 누군가는 전쟁을 전술이라 말한다. 무수한 세부 국면에서 승리한 자가 최종적으로 승리하기 때문이었다.

전쟁은 곧 보급이라 말하는 자도 있었다. 장기전으로 갈 시 결국 전쟁의 생명줄이 보급인 까닭이었다.

전술과 전략. 모략과 배신. 적재적소의 병력 배치와 알맞은 상황판단들. 그 모든 것을 합친 것이 곧 전쟁이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재환이 입을 열었다.

"상관없어."

"뭐라?"

"그래서 영감이 있는 거잖아."

청허의 늙수그레한 눈동자가 동그랗게 변했다.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영감 말대로 나는 경험도 없고, 살아온 생도 짧다. 하지만 상관없어. 영감이 있으니까."

"내, 내가 언제 네놈과 함께한다고······!"

"아니었나?"

그 말에 왜 울컥, 하는 마음이 들고 마는지 청허는 잘 알 수 없었다. 고작 60살 먹은 애송이에게 이런 기분이 들다니. 청허는 고개를 돌려 표정을 숨겼다.

재환은 말없이 몸을 돌려 세 명의 방주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당신들."

재환의 시선을 받은 방주들이 순간 한 발짝 물러섰다. 그의 시선에 담긴 무언가를 엿본 까닭이었다.

"혼돈"에 머무르는 긴 시간 동안, 그들이 까맣게 잊고 있었던 반짝이는 어떤 것.

"들었다시피, 나는 단순히 「심연 원정대」를 모집하려는 것이 아니야. 먼저 "혼돈"을 통일할 거고, 900년 전에 너희들에게서 열매를 빼앗아 간 "재생궁"을 부술 거다. 「심연 원정대」가 출발하는 것은 그다음이야.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은 그런 일을 함께할 수 있는 진짜 동료다."

누군가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만약 함께할 자신이 없다면, 그만 떠나도 좋아. 오늘 있었던 모든 일을 잊어라. 그리고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라."

그 순간 방주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자의가 아니었다.

그들이 살아온 수많은 시간의 무게. 그들이 외면해온 삶의 무게가 그들의 어깨와 머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가장 먼저 고개를 든 것은 남해방주 카이만이었다.

"만약 우리 중 아무도 돕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셈이오?"

"그럼 혼자서 해야지."

"혼자선 안 된다고 하지 않았소?"

"나는."

재환은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혼자서 여기까지 왔다."

그 말에 카이만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는 가만히 허공을 바라보더니, 잠시 후 실성한 사람처럼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좋소. 나는 성주와 함께하겠소. 심연이든 재생궁이든. 어디까지라도 당신을 따라가리다."

"남해방주!"

당황한 강황이 소리쳤다.

"나 카이만, 이곳에 올 때 이미 남해방주의 자리는 내려놓을 각오로 왔소. 성주께서 먼저 말하지 않았더라면 오히려 실망했을 거요."

"저도 마찬가집니다."

뇌신방주 윤용도 군신의 예를 갖추며 말했다.

"이 뇌신방주 윤용, 이미 성주님의 충실한 그림자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런 건 필요 없다니까."

"전 이미 성주님과 한 몸입니다!"

이내 모두의 시선은 강황에게 향했다.

"으, 크흠······. 나는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했소."

사실 강황의 반응이야말로 상식적인 것이었다. 재환에 대해 무얼 안다고 그의 제안을 덥석 수락한단 말인가? 그것도 일파의 방주씩이나 되는 작자들이.

"솔직히 나는 성주의 그릇이 「심연 원정대」를 이끌 만한 정도인지 확신할 수가 없소."

화왕방주답게 직설적인 말이었다.

"성주가 싸우려는 적들은 너무나 강하오. 잘못 달려들었다가는 싸워 보기는커녕 전원이 개죽음할 수도 있소."

"그렇겠지."

"나는 성주가 스스로의 그릇을 증명해 주길 원하오."

"무엇으로?"

"이미 알겠지만, 현재 고르곤에는 총 여섯 명의 방주들이 와 있소."

"여섯 명? 너희 말고 또 누가 있지?"

"원래부터 고르곤에 터를 두고 있는 제2석 무극방과, 서쪽 성채인 가루다에서 온 제 제6석 학림방. 그리고 남해방과 함께 올라왔을 제7석 신녀방······."

"성주 자리 해먹겠다고 많이도 몰려왔구만."

끼어든 청허의 말에 화왕방주가 끙, 하고 인상을 썼다.

"아무튼 나머지 삼방주의 인정을 받으시오. 그러면 나 역시 당신을 인정하겠소."

"클클, 강황. 너무 비겁한 것 아니냐?"

"······하지만 반드시 필요한 일이오. 신의께서도 알 것 아니오? 심연 원정대를 이끌고 싶다면 그 정도는 할 수 있어야 하오."

단순히 누군가를 꺾는 일과, 그들에게 인정을 받는 일은 완전히 다르다. 더군다나 그 대상이 방금 강황이 말한 셋이라면, 더욱 그러했다.

방파로서는 제2석이지만 방주 개인의 무력으로는 최강이라 평가받는 무극방주.

무력에서는 밀리지만 지략에서는 누구보다 앞선다고 불리는 제6석 학림방주.

십방 중 가장 고결한 품성을 가져 인망만큼은 십방 제일이라 불리는 제7석 신녀방주.

그 셋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면 혼돈의 그 누구라도 재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러자 재환이 입을 열었다.

"좋아. 그렇게 하도록 하지."

순순히 조건을 받아들이자, 강황은 조금 당황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재환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은 채였다.

"하지만 나도 조건이 있다."

"조건?"

"내가 너희들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면, 너희들 역시도 내 인정을 받을 필요가 있겠지."

"무슨 인정 말이요?"

화왕방주가 아니꼽다는 듯한 투로 되물었다. 그들은 이미 혼돈 최강의 십방주다. 그 이상 무슨 인정이 필요하단 말인가?

"나는 십방주니 뭐니 하는 허울은 믿지 않는다. 내게 필요한 것은 진짜 강자야."

자존심이 상한 강황이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재환의 말이 이어졌다.

"토너먼트를 열 거다."

"토너먼트?"

"성주의 자리를 걸고 싸우는 토너먼트다. 그것만 걸면 아쉬울 테니, 이것도 따로 걸지."

재환의 차원 배낭 속에서 거무튀튀한 뿔 하나가 등장했다. 마지막 남은 가르낙의 뿔이었다.

남해방주 카이만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그대가 꺼내 놓는 것은 항상 놀랍군. 과연."

재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토너먼트의 8강 안에 들어라. 그것이 내가 너희를 인정하는 조건이다. 너희들의 시험은 그다음에 받도록 하지."

화왕방주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물들었다. 감히 십방의 방주들을 시험하겠다니.

한편 화왕방주와는 달리 남해방주 카이만은 흥미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확실히 성주 말이 맞소. 혼돈 십방주라고 해서 혼돈에서 제일 강하다는 증명은 될 수 없지. 토너먼트는 언제부터 시작되는 거요?"

"남해방주! 대체 무슨······."

"강황. 누군가를 시험하고 싶다면 우리가 먼저 시험할 자격이 있음을 증명해야 하지 않겠는가?"

화왕방주가 입을 다물자, 모두가 재환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글쎄, 언제부터냐고 말한다면······."

멀리서 누군가가 연무장을 향해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강력한 영압이었지만 십방의 일원은 아니었다.

하지만 연무장의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이였다.

"성주님!"

내총관 유르헨의 목소리였다. 재환도 그쪽을 보며 말했다.

"이미 시작되고 있다고 해야 할 것 같은데."

내총관 유르헨은 머리끝까지 화가 난 표정으로 자신의 손에 쥐어진 전단지를 흔들고 있었다.

+

성주의 자리를 원하는 자라면 누구나 오라!

제1회 고르곤 토너먼트 개최!

금일 18시부터 예선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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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고르곤 토너먼트의 시작이었다.

*

혼돈의 남부, 거해(巨海) 지대.

혼돈의 남쪽으로 내려간 적응자들이 만날 수 있는 것은 대륙이 아니라 바다다.

제294월드의 에게해를 닮은 이 바다는 독특하게도 초록색으로 일렁이는 수면을 가지고 있는데, 이 수면은 식물의 표피였다.적응자들은 이 표피를 두고 '바다의 길'이라 불렀다. 표피들을 밟고서 거해 지대를 여행하거나, 곳곳에서 출몰하는 바다 각수들을 사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거해 지대의 중심부로 내려갈수록 식물의 표피층은 더욱 두꺼워지는데, 중심에는 "혼돈"의 적응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유명한 성채가 자리 잡고 있었다.

남쪽 성채, 드라이어드(Dryad).

성벽부터 시작해서 첨탑까지 모두 수상 식물의 군락으로 이루어진 이 성채는, 식물형 수호각수 드라이어드가 거해의 수분을 빨아들여 생산한 줄기와 분비물로 이루어진 천혜의 요새였다.

쿠구구구구.

내성에 웅크리고 있던 드라이어드가 거체를 펴자, 줄기들이 일제히 하늘로 치솟았다.

그 줄기 끝에는 한 여인이 살포시 앉아 있었는데, 그녀가 바로 성채 드라이어드의 성주였다.

"드라이어드. 아무래도 나쁜 일이 벌어지려는 것 같군요."

그녀의 말에 응답하듯, 수호각수 드라이어드가 줄기를 꿈틀거렸다.

치파오를 연상시키는 파란색 드레스. 긴 비녀를 꽂아 올림머리를 고정한 하얀 피부의 여인은 줄기의 끝에 돋아난 작은 잎을 매만지며 먼 지평선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바라보는 곳은 혼돈의 북쪽 대륙.

성채 고르곤이 있는 곳이었다.

최상급 스킬, 「천리안」.

무려 수만 킬로미터나 떨어진 적의 동태까지 관측할 수 있는 그녀의 천리안에, 고르곤 성채가 있는 방향으로 거동하는 괴이한 것들이 포착되었다. 그녀는 그 괴물들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보았다.

"어째서 초대형 망자가······?"

망자의 왕이라 불리는 유일왕 카타스트로피에게는 세 명의 수족들이 있었다.

소위 '초대형 망자', 혹은 '3대 망자'라고 불리는 존재들. 한때 "혼돈"의 최강자들이었으나 영혼이 오염되어 망자가 되어 버린 괴물들.

혼돈의 십방주들이 달려들어도 막을 수 없다고 알려진 무시무시한 괴물 중 하나가, 고르곤 성채를 향해 거동하고 있었다.

거꾸로 걷는 마그리트.

드라이어드 성주 역시 그 망자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마그리트 또한 한때는 혼돈 4대 성채의 성주였기 때문이다.

가랑이의 아래쪽에 얼굴이 달리고, 팔과 다리의 위치가 완전히 바뀐 초대형 망자 마그리트는 촉수들을 일렁이며 대열의 선두에서 무수한 망자들을 이끌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마그리트의 눈동자가 수천 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드라이어드 쪽을 향했다.

"크흑...!"

드라이어드의 성주의 입가에 은빛 피가 흐르며 천리안이 강제로 종료되었다.

안색이 창백해진 드라이어드 성주가 가슴을 붙잡은 채 입술의 은빛을 닦았다.

"고르곤 성주에게 알려야겠군요."

마침 성채 드라이어드 출신인 남해방주와 신녀방주가 고르곤으로 향한 상황.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드라이어드 성주, 아이사 린드크로프는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메시징 스킬을 사용했다.

창공을 향해 떠오른 푸른 매가 고르곤을 향해 날갯짓을 시작했다.

Episode 8. 최후의 낭만 (6)

고르곤 내성의 회의실.새로 임명된 세 명의 내각주들은 내총관 유르헨의 날카로운 시선을 받고서 제각기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허허, 성주님도 다 생각이 있으시지 않겠습니까."

특히 새로이 보안각주로 임명된 멸마대주 자히르는 기쁨을 감출 수가 없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유르헨의 표정은 심각했다.

"대체 그분이 무슨 생각이 있다는 겁니까?"

"험험. 그야 뭐, 우리 같은 이들은 알 수 없는 깊은 뜻이...."

"자히르. 사태는 심각합니다. 혼돈 전역의 강자들이 고르곤으로 몰려들고 있단 말입니다."

"알고는 있습니다만······."

이미 고르곤 외성은 포화 상태였다. 토너먼트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강자들의 대결을 보기 위한 인파의 이동이 시작되었다. 고르곤 주변의 텔레포트 역참들은 연일 밀려드는 적응자들을 감당하지 못해 몸살을 앓고 있었고, 각 성문의 검문소는 줄지어 선 적응자들의 신분을 일일이 확인하기 위해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물론 북쪽 검문소는 예외였다.

―으하핫! 다들 싸게 싸게 들어오십쇼!

북쪽 검문소장이었던 칼튼 제비어가 고르곤 내각의 법각주로 보임되면서, 자연히 소장 보좌였던 제임스가 북쪽 검문소의 임시 소장이 되었다.

덕택에 북쪽 검문소의 경비병들은 넘쳐흐르는 뇌물의 바다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아직 법각주의 자리가 낯선 칼튼은 종종 들려오는 북쪽 검문소의 소식에 이맛살을 찌푸릴 따름이었다.

"칼튼 법각주는 할 말 없습니까?"

"...예?"

"이 상황에 대해서 뭐 할 말 없냔 말입니다."

칼튼을 보던 유르헨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식 내각 회의는 거치지 않았으나 토너먼트 개최 자체가 법령을 어긴 것은 아니었다. 비상시에는 내각 회의를 거치지 않더라도 과반수 이상의 각주들이 동의한다면 30억 호른 이상의 재정을 소비하는 중요 정책안들을 얼마든지 통과시킬 수 있다.

그리고 놀랍게도, 재환은 과반수의 동의를 얻었다.

어떻게?

간단했다. 재환이 성주가 되던 날 고르곤 내각을 담당하던 각주 다섯 중 넷이 소멸했고, 하나는 불구가 되었다. 그러니 실질적으로 고르곤에는 내각이 부재하는 상황이었다.

재환은 그 틈에 세 명의 인원을 보안각주, 법각주, 재정각주로 배치했다. 애초에 모든 인물이 재환의 측근으로 임명되었으니 모든 사안이 얼렁뚱땅 통과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잠시 생각하던 칼튼이 입을 열었다.

"내총관께서는 성주님의 판단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가 봅니다."

"...개인적인 호오의 문제가 아니라 원칙의 문제입니다. 법각주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원칙. 그놈의 원칙. 당신들은 언제까지 원칙 타령만 해 댈 거야?"

대화에 끼어든 이는 새로 임명된 재정각주였다.

유르헨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모든 체제는 원칙을 기반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내각의 일에 대해 무지한 재정각주는 잘 모르시겠지만 말입니다."

유르헨은 새로 임명된 재정각주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멸마대주 자히르가 보안각을 맡고, 북쪽 검문소장 칼튼이 법각을 맡은 것까진 그렇다고 치자.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은가.

고르곤이 아무리 비상사태라 해도, 고작 2차 적응자 수준의 술집 아낙이 무슨 재정각을 담당한단 말인가?

닷새 전, 성주가 저 클레어란 이름의 여인을 재정각주랍시고 데려왔던 순간을 유르헨은 지금도 기억했다.

―내가 보기엔 주점이나 고르곤 성채나 똑같아. 어느 쪽이 더 노골적이냐의 차이일 뿐.

클레어가 재정각을 담당한 후 재정각의 인사개편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재환의 직권을 대행한 클레어는 고차 적응자들에게 붙어 기생하는 고위 관료들을 과감하게 쳐냈고, 모든 재정 정책을 고르곤의 '일반 주민'의 시선에 맞추었다. 내각에 아무런 연줄이 없는 클레어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반발은 엄청났다.

그 증거로 지금도 내성의 집무실에는 온갖 클랜과 고차 적응자들의 항의 메시지가 무지막지하게 쌓여 가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성주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지만.

"뭘 모르는 건 고지식한 내총관 나리 같은데."

예의라고는 알코올과 함께 증발시켜 버린 듯한 그 말투에 유르헨의 표정이 당혹스럽게 변했다.

"성주의 정책에 불만인 모양인데, 내총관 나리는 그 정책이 어떤 가치들을 창출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어?"

"가치 창출...?"

"그래, 가치 창출. 술집 주인이라고 무시하는 건 아니지?"

"아니, 그게······."

"딱 그런 표정이구만."

뭔가 페이스가 말리고 있음을 감지한 유르헨이 입을 다물었다. 클레어가 계속해서 말했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 곧 돈이 모이는 법이야. 그리고 지금 고르곤은 토너먼트 개최를 통해 역대급의 인파를 맞이하고 있다고."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만."

"알고 있는 사람이 그딴 식으로 얘길 해? 내가 보기엔 전혀 모르는 얼굴인데?"

"······."

"예를 들어 보지. 나리가 질겁한 그 토너먼트. 그 토너먼트가 고르곤의 어디에서 열리고 있는지, 나리는 알고 있어?"

"아직 거기까지는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외성의 북쪽 노점 거리야."

"북쪽 노점 거리?"

북쪽 노점 거리라면 며칠 전 금천방 사태 때 시설들이 모두 파괴되어 주민들이 생활권을 잃어버린 거리였다.

"잠깐만요.... 설마?"

클레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자리를 잃어버린 노점 거리의 주민들이 토너먼트의 보조 진행 요원으로 일하고 있다 이거야."

유르헨은 깜짝 놀랐다. 토너먼트가 진행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토너먼트 진행에 필요한 인력과 장소를 그런 식으로 확보할 줄은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나리는 며칠 전 금천방 사태 때 입은 성채의 손실 금액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겠지?"

"대충 130억 호른 정도인 걸로······."

"그렇지. 정확히는 128억 7천 8백만 호른."

유르헨은 새삼스런 눈으로 클레어를 보았다. 이 여인은 대체 언제 그런 정보들을 조사했단 말인가? 그러나 아직 놀라기는 일렀다.

"그럼 나리는 이번 토너먼트 개최를 통해 이틀간 성채가 얻은 수익이 얼마인지도 알고 계실까?"

"그건 아직 조사 중인 거로······."

"총 132억 8천만 호른! 그것도 지난 이틀간 번 순수익만 그렇다는 소리지. 여기에 잠재수익을 더하면 얼마나 더 커질지는 아무도 몰라."

유르헨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지난 이틀간 고르곤은 지금껏 입었던 손해를 모조리 만회했다는 뜻이 된다.

아니 그보다, 이 여인은 어떻게 벌써 그 액수들을 조사했단 말인가.

클레어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뭘 그렇게 놀라? 난 이승에서도 저승에서도 술집만 운영한 사람이야. 돈 계산하고 술주정 부리는 버러지들 상대하는 게 일과였다고."

클레어는 품속을 뒤져 담뱃대 하나를 꺼냈다. 온갖 강짜를 부려대는 사내들 앞에서도 기죽지 않고 살아온 노익장다운 여유였다. 담뱃대 끝에서 일각수의 가루가 희뿌옇게 타올랐다.

"나는 성주가 뭘 하고 싶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어. 정말로 「심연 원정대」를 꾸릴 건지, 아니면 혼돈 전체를 상대로 전쟁을 할 건지······. 하지만 하나는 확실히 알 것 같아."

클레어는 보안각주 자히르의 얼굴과 법각주 칼튼의 얼굴을 한 번씩 일별하고는, 마지막으로 내총관 유르헨의 얼굴을 마주하며 말을 이었다.

"이제 "혼돈"은 바뀔 거야."

유르헨은 클레어의 눈빛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어떤 감정을 읽었다. "혼돈"을 살아가는 대부분이 오래전에 잃어버렸던 감정이었다. 자세히 보니 칼튼과 자히르 또한 비슷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유르헨은 그 감정의 이름을 잘 알고 있었다.

성주, 대체 우리에게 무엇을 품게 하려 하시는 겁니까.

수백 년간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일.

유르헨은 불안해졌다. 이 변화, 이 가능성, 이 모든 것들을 가능케 하는 한 존재가 두려워졌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번지는 마음속의 흥분을 억누르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

토너먼트는 사흘간의 강행군으로 순식간에 예선과 본선을 마치고 16강까지 진행되었다.

고르곤 성채에 왕림하는 것이 늦은 이들은 따로 마련된 와일드카드를 통해 승부에 참전할 수 있었다.

그렇게 사흘.

쉴 틈 없이 빠듯한 일정으로 진행된 토너먼트는 어느덧 대목으로 치달았다.

"사흘 만에 16강이라니. 너무 진행이 빠르군."

목소리의 주인은 무극방주, 창천검 신무극이었다.

제2석인 무극방의 정예들이 그의 뒤로 도열해 있었다. 정예 하나하나가 갖춘 일신의 무력은 족히 4차에서 5차를 넘나드는 수준. 하나하나가 무서운 기세의 강자들이었지만, 그들 모두의 기세를 합친다 해도 창천검 신무극 한 사람을 넘지는 못했다.

창천검 신무극은 그런 인물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중년인이지만 실제 나이는 천 살을 넘긴 고르곤의 최고령자 중 하나.

신무극은 절망신의 청허, 그리고 강철의 군주 허유와 마찬가지로 12764월드 '중원' 출신의 인물이었다. 그는 고향 무림에서도 천하 5대 검객에 손꼽혔던 고수이기도 했다.

"강황 놈이 괜한 수를 써서 이렇게 된 게야."

신무극은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예선전부터 죄다 죽여 버리겠다고 불길을 뿜으며 날뛰는 바람에 5차 적응을 넘지 못한 녀석들은 죄다 기권 선언을 했지 뭔가."

"누군가 했더니."

신무극이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더니 반가운 얼굴을 했다.

"오랜만이군, 청허."

"간만이다, 무극."

청허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둘 사이에 날카로운 기류가 발생했다. 허공에서 충돌한 날카로운 살기에 인근의 적응자들이 몸을 떨었다.

각성자인 청허와 고차 적응자인 신무극이 기세를 통해 서로의 힘을 시험해 본 것이다.

잠시 후, 청허가 감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새 또 발전이 있었나 보군."

"자네도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신무극 역시 청허의 기세에서 뭔가를 느낀 듯했다.

주변을 긴장케 하던 기류가 사라지자 곳곳에서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창천검 어르신이잖아?"

"절망신의도 왔어!"

혼돈의 최강자로 손꼽히는 창천검과 절망신의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게 되다니. 몇몇 사람들은 거의 감동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청허가 수염을 매만지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의외구나, 무극. 싸움을 좋아하는 네가 대회에 참가하지 않다니."

"나는 대결을 좋아하는 거지, 저런 개싸움을 좋아하는 게 아니야."

"클클, 강황이 들으면 또 불을 뿜겠구만."

무대 위에서는 화왕방주 강황과 묘령의 여인이 한창 대결을 펼치고 있었다. 16강의 마지막 대결이었다.

강황의 최상급 스킬인 염마도(炎魔刀)가 무분별한 불길을 대회장 곳곳에 뿌려 놓았으나, 야행복을 두른 묘령의 여인은 놀라운 신법으로 그 불길을 모두 피해냈다.

그 신법을 보던 청허가 입을 열었다.

"젊은 여식이 제법이군. 누군지 알겠는가?"

"글쎄. 신녀방은 아닌 듯한데······. 익숙한 신법이로군."

"쯧쯧, 자네 정말로 늙어버린 건가. 저거, 그놈의 청운신보(靑雲神步) 아닌가."

"청운신보라고?"

무공명에 잠깐 망연해졌던 신무극이 퍼뜩 대답했다.

"설마, 강철 녀석의 스킬인가?"

"그래."

확신조의 말에 신무극의 눈빛이 복잡해졌다.

그들이 말하는 '강철'이라면 하나뿐이었다. 그들과 함께 중원에서 탑을 클리어하고 "위대한 땅"에 진출한, 한때 그들의 친우였던 자. 강철의 군주 허유.

"어째서 허유의 수하가 이곳에 있는 건가?"

"모르지. 확실한 건 군주들 중 이 대회에 꿍꿍이를 가진 녀석들이 있다는 거야."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승부가 났다. 강황의 염마도가 여인의 칼날에 부딪쳐 미끄러지더니 한순간 방향을 잃었다. 이어진 여인의 반격에 강황은 그대로 배를 얻어맞고 장외로 나뒹굴었다. 혼돈 십방주 강황의 충격적인 패배에 곳곳에서 환호가 들끓었다.

"우오오옷! 강황이 졌다아아아!"

창천검 신무극이 눈살을 찌푸렸다.

"강황 녀석, 배가 불렀구만."

"평소 수련을 게을리 한 대가인 게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장내가 시끄러워지며 16강을 마무리한다는 멘트가 흘러나왔다.

8강까지 잠시 인터벌이 있을 줄 알았는데, 어디선가 허겁지겁 달려온 보안각주 자히르가 마이크를 붙잡더니 곧바로 사회를 보기 시작했다.

―자, 드디어 여러분이 기다리고 기다리시던 8강전이 시작됩니다!

잠깐 쉬면서 주변을 돌아볼 생각이었던 신무극이 눈살을 찌푸렸다.

"너무 서두르는 거 아닌가?"

"성주 성격이 급해서 그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무슨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관객의 함성은 무대 위로 올라온 한 사내의 등장과 함께 잦아들었다. 곳곳에서 그를 알아본 사람들이 한마디씩 대거리를 했다.

"학림방주로군."

혼돈 제일의 문사들이 모여 만들었다는 방파 학림방. 그중에서도 제일의 기재라 불리는 사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학림방의 주인인 학림방주 제갈명이었다.

그는 여유로운 모습으로 관중석을 쓱 훑어보더니 신무극과 청허를 발견하고는 오만한 표정으로 싱긋 눈웃음을 지었다.

"건방진 놈이 인사랍시고 눈만 껌뻑이는군. 나중에 한 대 쥐어패 줘야겠어."

"참게. 아직 400살밖에 안 먹은 녀석이야."

잠시 후, 무대의 반대편이 열리며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다. 관중석의 환호가 더 커졌다. 새로운 인물 또한 학림방주에게 전혀 꿀리지 않는 자였기 때문이다.

청허가 킬킬 웃었다.

"날 대신해서 패 줄 놈이 나왔구만."

학림방주의 상대는 작금의 고르곤에서 가장 유명한 사내였다. 신무극이 침음하듯 말했다.

"저자가 새로운 성주로군."

"그래."

"대진표에 한 자리가 비어 있더니, 성주가 직접 참여하는 구조였을 줄이야."

무대 위에 올라서 간단하게 몸을 푸는 재환의 모습을 보며 신무극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한 일이군. 자네와 비슷한 기운이 느껴지는데······. 혹시, 자네 제자인가?"

"제자?"

다음 순간, 무대에서 폭음이 울려 퍼지며 누군가가 하늘 위로 솟구치는 모습이 보였다. 양 눈이 큼지막하게 부풀어 더 이상 눈웃음을 칠 수 없게 된 학림방주가 회오리치며 하늘을 날고 있었다.

"으아아아아아악!"

그 광경을 올려다보며 청허가 입을 열었다.

"······저런 괴물이 내 제자일 리가 있겠냐?"

Episode 8. 최후의 낭만 (7)

"혼돈"에는 그런 말이 있다.

―"위대한 땅"에 사명씨가 있다면 "혼돈"에는 제갈명이 있다.

"위대한 땅"에서 지략으로는 최고봉이라 손꼽히는 사명세가의 가솔들과 견줄 수 있다는 유일한 군사.

조금 과장이 섞이기는 했으나, 혼돈제일군사라 불리는 학림방주 제갈명은 그런 인물이었다.

저놈이 바로 그 '성주'라 이거지.

그런 인물이었기에, 그는 눈앞의 사내를 쉽게 인정할 수가 없었다. 어려서부터 천재였고, 악몽의 탑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으며, 위대한 땅에서는 사명세가에 밀리기는 했어도 나름대로 알아주는 군사였던 그다.

혼돈에 와서도 뇌신방주와 더불어 최단 시간에 십방주의 자리에 오름으로써 그야말로 탄탄대로의 삶을 달려온 남자. 자기보다 잘난 놈은 있어도 자기보다 천재는 없다는 자신감 하나로 살아온 사내. 그게 바로 제갈명이었다.

그런 그의 자존심이 오늘 처음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일주일 만에 고르곤의 성주가 되었다고?

미리 화왕방주 강황에게 귀띔으로 듣기는 했다.

혼돈을 통일하고 "재생궁"과 싸우겠다고 선언한 자. 900년 전에 사라진 「심연 원정대」를 다시 만들겠다고 말한 자. 아직 60년밖에 안 살았다는 자.

어느 것 하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제갈명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주, 당신의 계획에 대해선 익히 들었소."

"······."

"하지만 그건 무리요. 지금의 당신은 대군주는커녕 대군주의 직속 군주들인 군장(軍匠)이나 무장(武將), 하물며 중장(中將)조차 이기지 못할 테니까."

제갈명이 굳이 이 귀찮은 대회에 나온 것은 그런 충고를 해 주기 위함이었다.

"혼돈에 당신 같은 이가 처음인 줄 아시오? 200년 전에도 있었고, 300년 전에도 있었소. 그들이 모두 어떻게 됐는지 알고 있으시오?"

제갈명은 긴장감을 위해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다 죽었소이다."

수십만 년. 혹은 수백만 년.어쩌면 수억 년.

얼마나 오랫동안 존재해왔는지, 그 세월의 시초를 헤아릴 수조차 없을 만큼 오래된 곳이 혼돈이다. 그런 장소에 어찌 한 번도 혁명가가 없었겠는가?

위대한 뜻을 품은 영웅이 없었겠는가?

있었다.

사람들에게 희망을 품게 하고, 잃어버린 삶에 대한 기대를 품게 만든 자들.

기대를 품은 사람들은 그들과 함께 심연 속으로 떠났다. 그리고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다.

제갈명은 혼돈에서 사백 년을 버텼다. 사백 년을 버텼기에, 그는 말할 수 있었다.

"당신은 우리가 바보라서 이 세계를 내버려 둔다고 생각하시오?"

절망의 수호자는 누구보다 그 절망을 깊이 이해한 자들이며, 세계의 부조리를 지키는 자는 누구보다 그 부조리에 희생당한 자들이다.

제갈명은 세계가 변할 수 없는 이유를 안다.

그들은 이 세계의 절망에 너무나 깊이 물들었다.

희망을 가지는 것이 두려워진 사람들. 혹시나 찾아올 더 큰 절망 때문에 눈앞의 희망을 몇 번이고 짓밟아 온 사람들.

그래서 그들은 희망을 품지 않고, 세계에 순응하는 법을 배웠다. 변화를 거부하는 법을 익혔다.

어디로도 흐르지 않는 삶.

그것이 이 "혼돈"의 끝에서 간신히 터득한 삶의 방식이었다.

그러기를 수백여 년. 지금 제갈명의 눈앞에는 또 다른 절망이 희망의 탈을 뒤집어쓴 채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오늘 제갈명이 해야 할 일은 그 싹이 더 큰 절망으로 자라나기 전에 미리 짓밟아 두는 것이었다.

"기억하시오, 성주. 이 세계는 이제 변할 수 없소. 아무도 그것을 바라지 않소."

제갈명의 독문병기인 칠채금선(七債禽扇)이 활짝 펼쳐졌다. 동시에 적의 모든 정보를 읽어낼 수 있는 최상급 스킬인 제갈명의 '천자의 눈'이 붉은빛을 내뿜었다.

[시스템 오류! 사용자 정보를 읽을 수 없습니다.]

[시스템 오류! 사용자 정보를 읽을 수 없습니다.]

"...뭐라?"

제갈명은 당황했다. 그리고 재환이 말했다.

"이제 다 떠들었어?"

"...예?"

"한 번만 더 떠들면 그땐 진짜 죽는다."

재환의 독불이 움직였다. 조금의 머뭇거림도 찾아볼 수 없는 깔끔한 움직임. 정말이지 호쾌한 검이었다.

"허어억! 크어어억!"

제갈명은 그림자조차 볼 수 없는 검에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기 시작했다.

"자, 잠깐! 잠깐!"

이렇게 두들겨 맞은 것이 대체 언제 적 일이던가. 제갈세가의 막내였던 시절, 아버지께 맞은 회초리의 아픔이 이랬던가.

그의 낡은 절망을 탓하지도, 섣부른 두려움을 탓하지도 않는 일격. 무언가를 강요하지도 훈계하지도 않지만, 마음 깊은 곳 어딘가가 쓰려오는 일격.

몹시 아픈 일격.

창공이 빙그르르 돈다고 느꼈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둔중한 통증이 배를 사정없이 두드렸다. 순수하게 들이닥치는 그 고통에 우습게도 학림방주는 조금 감탄하고 말았다.

구, 군장이나 무장급은 아니라도, 중장 정도는 될지도....

뒤이어 한발 늦은 통증이 그의 입을 통해 증명되었다.

"크아아아악!"

학림방주의 몸이 하늘을 날았다.

*

관중석의 모두가 하얗게 질렸다.

지금 자신들이 보고 있는 광경이 진짜인지 인지부조화를 겪고 있는 얼굴들. 무지막지한 무력 앞에서 그들의 상식이 깨어져 나가고 있었다.

―저, 정말이지 대단한 실력입니다! 성주께서 학림방주를 찌르기로 쓰러뜨리셨습니다!

사회자의 말을 듣고서야 관중들은 자신이 보는 광경이 착각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허공에서 팽그르르 돌던 학림방주의 신형이 뒤집힌 채로 무대 위에 떨어졌다.

그 소리가 신호라도 되는 양, 곳곳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고르곤 성주 최고다아―!"

"와아아아아아아!"

재환이 사용한 기술은 얼마 전 그가 청허와 함께 창안한 기술인 「나선살(螺線殺)」이었다.

나선 찌르기로 할 것인지 나선 베기로 할 것인지를 두고 청허와 싸우고 있던 것을 카이만이 끼어들어 지어준 이름이었다.

―찌르기나 베기나 결국 적을 죽이는 기술이니까 '살'을 붙여서 '나선살'이라고 하면 어떻겠소?

재환은 그런 카이만을 떠올리며 쓰러진 학림방주를 바라보았다.

같은 7차 적응자라도 수준 차이가 있는 모양이군.

분명 남해방주 카이만과 학림방주 제갈명은 같은 7차 적응자라고 들었다. 하지만 막상 싸워보니 학림방주는 기껏해야 뇌신방주나 화왕방주보다 비슷하거나 조금 나은 정도에 불과했다.

기대 이하라고나 할까.

청허에게 듣기로 "재생궁"의 대기자 중에는 재환 자신을 뛰어넘는 무력을 지닌 이들도 있다고 했다. 거기에 "심연"으로 넘어가면 그야말로 천외천의 존재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혼돈 최강자라는 십방주들이 이 모양이라면, 차라리 혼자 가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재환이 독불을 집어넣으려는 순간, 바닥에 쓰러져 있던 제갈명이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자, 잠깐만! 아직이오!"

재환은 그런 제갈명을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그만 됐어."

그 말에 제갈명의 표정이 비참함으로 물들었다.

"...."

승부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내내 떠든 것은 제갈명 쪽이었다. 그리고 눈앞의 사내가 한 일이라고는 그를 아주 힘껏 두드려 패고 패배의 낙인을 찍은 것뿐이었다.

참을 수 없이 부조리하고 폭력적인 결말이었다. 평소라면 절대로 이런 승부를 '패배'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평소라면 말이다.

혼돈제일군사 제갈명은 자신의 패배감을 인정할 수 없었다. 인정해서는 안 되었다. 이 감정을 인정하는 순간, 지금껏 살아온 그의 400년은 통째로 부정당할 것이다.

"내게 이겼다고 생각하시오?"

재환은 대답하지 않았다. 생각하고 말 것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학림방주가 뜻밖의 말을 했다.

"성주는 비겁하오."

"...비겁?"

"성주는 흘혼제에서 스스로 공표했던 연설 내용을 기억하고 계시오?"

물론 기억한다. 직접 말했으니까.

그러나 지금 제갈명이 그 내용 중 어떤 부분을 꼬투리 잡으려는 것인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

"기한은 한 달이다. 십방이든, 다른 성채든, 하여간 누구든 좋다. 한 달 안에 일대일로 나를 쓰러뜨리기만 하면 그자에게 성주 자리를 넘겨 주마······. 분명 그렇게 말하지 않았소?"

"그랬지."

토씨 하나 틀리지 않는 대사.

순간 재환은 제갈명이 노리는 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성주는 일대일 대결이라고만 했지, 그 대결의 방식은 정하지 않았던 거요."

확실히 그 말이 맞았다. 애초에 그런 세심한 지점까지 신경 쓴 연설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성주와 무력 대결을 하러 온 것이 아니오."

"그럼?"

"나는 지략으로 일대일 대결을 치르고 싶소. 이미 무력 대결로 성주가 한 번 승리했으니,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도 승부해야 공평한 것 아니겠소?"

논리정연한 말이었으나 어딘가 구차한 데가 있는 논리였다. 모처럼 오른 열기에 찬물을 들이붓는 격이랄까. 관중석에서 야유가 터져 나왔다.

"추잡하다 학림방주!"

"졌으면 졌다고 말해라!"

관중석의 맨 앞에 있던 청허도 혀를 쯧쯧 찼다.

"내 저놈 저럴 줄 알았지."

"그렇군. 과연 학림방주다운 비겁함이야."

무극방주 신무극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지략 대결이라면 승부를 가리기가 힘들 텐데."

"보나마나 그 '놀이'를 하려 들겠지."

"놀이?"

"왜, 있잖은가. 저놈이 제일 잘하는 놀이."

청허는 그 '놀이'라는 걸 아는 모양인지 까드득 이를 갈고 있었다.

"군사 나부랭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놀이지."

"아, 설마?"

신무극도 그게 뭔지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래도 보는 맛은 있겠군."

뒤이어 관중들 사이에서 함성이 커졌다.

재환이 학림방주의 '지략 대결'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재환의 승낙과 동시에 무대 위에서 변화가 시작되었다.

고도의 환술. 이내 무대의 표면이 유사처럼 스르르 빨려 들어가더니 곳곳에서 산악 지형들이 나타났고, 작은 강줄기를 사이에 두고 언덕들이 드문드문 솟아났다.

안개가 낀 지역도 있었고 아닌 지역도 있었다. 산악 지대의 바깥쪽으로는 초원 지대가 에둘러 펼쳐져 있었고, 더 가장자리로 나아가면 사막이 나오는 형태였다.

마치 지역 하나를 일정한 비율에 따라 축소해 놓은 듯한 모양새랄까. 뒤이어 어떤 메시지가 스르르 허공에 떠올랐다.

[전술진법(戰術陣法)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리고 재환의 눈앞에만 떠오른 메시지도 있었다.

[초심자시군요. 상단의 매뉴얼을 확인하시면 조작법과 놀이의 규칙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재환은 '매뉴얼'이라 불린 버튼을 누르며 물었다.

"······이건 뭐지?"

설마 지략 승부라는 게 진법 승부였단 말인가?

재환은 조금 당황했다. 그렇다면 패착이 아닐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재환은 지금이라도 지략 대결을 취소하고 눈앞의 제갈명을 날려 버릴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살기를 읽었는지, 제갈명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입을 열었다.

"말이 진법이지, 쉽게 말하면 일종의 놀이라 할 수 있소."

입가에 어색한 미소를 띤 제갈명이 말을 이었다.

"정확히는 13명의 「거장」 중 하나인 몽마 '마르스'가 만든 놀이지. 듣자 하니 "변경"의 어느 월드에서 유행하던 게임에 영감을 받아서 만들었다고 하오. 실제로 놀이의 완성도가 매우 뛰어나서 "위대한 땅"의 지략가들이 즐겨 하는 놀이기도 하고······."

그리고, 내가 제일 잘하는 게임이기도 하지.

제갈명은 이어진 뒷말을 털어놓지 않았다.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뭐, 처음이라고 해도 딱히 어려운 게임은 아니오. 자신의 병력을 생산하고 관리하여, 잘 배치해서 싸우면 끝인 놀이지."

그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던 재환은 매뉴얼을 읽으며 건성으로 대답해왔다.

"음, 생각보다 간단하군."

그 여유에 제갈명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디까지 그 오만이 계속될지, 한번 보자고.

사실 여기까지 왔다면 게임은 끝난 거나 다름없었다. 앞으로 펼쳐질 미래를 아는지 모르는지, 재환은 그저 평온한 눈길이었다.

제갈명은 그런 재환을 보며 생각했다.

미안하지만 이미 승부는 났소, 성주. 나는 전술진법 대결에서 한 번도 져 본 적이 없거든.

그러나 그 똑똑한 제갈명도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사실 알래도 결코 알 수 없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매뉴얼을 읽던 재환의 눈빛에 떠오른 묘한 감정을 제갈명이 무슨 수로 알 수 있었으랴.

...어느 "변경"의 게임을 모티프로 해서 만들었다고?

재환의 입가가 작게 실룩였다. 그 "변경"이 어디를 말하는 것인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재환은 전술진법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재환은 이 '전술진법'과 똑같은 게임을 족히 수만 판은 플레이해 보았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재환의 고향, 그것도 재환 세대의 또래들은 누구나 그 게임을 수천 판씩 플레이해 본 경험이 있었다.

······몽마라는 것들은 대체 뭘 하는 놈들이지? 이건 그냥 표절 수준이잖아.

전술진법.

13명의 「거장」들 중 하나인 '유희(遊戱)의 마르스'가, "위대한 땅" 군사들의 전술 및 전략 훈련을 고양시키기 위해 만들었다는 희대의 게임.

세 개의 종족과 그 종족 간의 갈등으로 인해 벌어지는 전쟁을 메인 시나리오로 담고 있으며, 실시간으로 자원을 비축하고 병력을 생산하여 적군의 건축물을 모두 파괴하면 승리하게 되는 전술 게임.

이와 정확히 똑같은 시스템의 게임을 재환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재환의 고향에서 이 게임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지형으로 선택해도 괜찮겠소?"

"좋을 대로."

제갈명이 선택한 전장도를 보던 재환의 눈빛이 다시 한 번 빛났다.

[제갈명님께서 '잃어버린 정원'을 전술진법의 전장으로 선택하셨습니다.]

재환이 태어나고 자란 나라를 몰랐다는 것.

그것이 오늘 학림방주 제갈명의 가장 큰 불운이었다.

Episode 8. 최후의 낭만 (8)

길게 이어질 줄 알았던 승부의 향방은 순식간에 정해졌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에 관중들은 모두 경악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당신은 패배하였습니다!]

자신의 눈앞에 떠 있는 메시지를 확인한 학림방주 제갈명이 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체,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제갈명은 자신에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불과 십 분 전까지만 해도 그는 이 게임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전술진법. 인간, 망자. 그리고 각수의 세 종족이 서로 건물을 짓고 병력을 생산하여 상대방을 침공함으로써 승패를 겨루는 전략 게임.

게임 시작과 동시에 제갈명은 영혼이 오염된 종족인 '망자'를 선택했다. 후반으로 갈수록 강력한 종족이자, 초중반에도 얼마든지 승부수를 던질 수 있는 종족인 망자. 그에 비해 재환이 선택한 종족은 '인간'이었다.

제갈명은 속으로 재환의 선택을 비웃었다. 인간 종족은 전술진법의 세 종족 중 최약체로 평가받기 때문이었다.

하긴, 초심자니까 잘 모르겠지.

그러나 재환이 '인간' 종족을 선택한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는 것을 제갈명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만약 재환이 게임의 매뉴얼을 읽지 않았더라면, 또 「의심」을 통해서 게임의 시스템을 읽어내지 않았더라면, 애초부터 이 승부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귀찮기도 했고, 불필요하게 지략 대결 따위를 하지 않아도 찌르기 한 방이면 끝낼 수 있는 상대였으니까.

그러나 전술진법의 모티프가 되는 게임을 알게 되자, 재환은 이 승부를 계속해 보고 싶어졌다.

역시 이 게임의 모티프는······.

그의 고향을 상기시키는 게임.

재환은 찰나였지만 낡은 과거의 향수에 젖었다.

그에게도 평범한 삶을 누리던 시절이 있었다.

종족명과 스토리만 바뀌었을 뿐, 유닛의 개별 운용 방식이라든가 유닛 간 상성은 지구의 특정 게임과 지나치게 흡사했다.

"위대한 땅"의 거장이라는 몽마들이 한낱 "변경"의 게임을 표절해 오다니. 어쩌면 몽마들이란 존재는 지금껏 재환이 생각해 온 존재들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들일지도 모른다.

······30년 만이라 그런지 쉽지 않네.

재환은 농부들을 운용해 자원을 채취하고, 병사를 양성하는 막사를 건설했다.

아무래도 마우스와 키보드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보니, 조작법이 상당히 까다로웠다. 전술진법은 조작기기가 없는 대신 영력으로 이어진 실선을 이용해 유닛 하나하나를 조종하는 식이어서 재환에겐 낯선 부분도 없잖았다.

됐다. 오래 끌 생각도 없고.

경기가 시작된 지 5분 즈음 흘렀을까. 타이밍이 됐다 싶을 때 재환은 과감하게 공격을 감행했다. 놀랍게도 그가 이끌고 간 병력은 자원을 채취하던 농부 열댓 명과 막사 건물에서 막 훈련된 1차 적응자 두어 명이 전부였다.

그의 예상치 못한 돌발행동에 전술진법을 좀 아는 관중들은 깜짝 놀랐다.

"아니, 무슨 저런 공격을?"

훈수를 방지하기 위한 차음막이 씌워져 있었기에 제갈명은 관중들의 반응을 알 수 없었다. 그는 일꾼들을 조작해 이것저것 건물을 짓는 데만도 정신이 없었다.

제갈명의 전략은 간단했다.

일단 초석을 다진 뒤, 압도적인 물량으로 잠재운다.

그리고 30초 뒤.

자신의 본진에 난입한 인간의 농부들과 1차 적응자들을 본 제갈명의 표정이 사색이 되었다.

낫과 곡괭이를 든 농부들이 그의 망자 일꾼들을 모조리 찍어 죽이고 있었다.

"대, 대체 무슨 짓이냐!"

아직 제대로 된 병력이 양성되기도 전이었다. 모름지기 군사의 전략과 전술이라는 건 어느 정도 기반이 갖추어졌을 때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재환이 선택한 것은 그가 아는 상식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농부를 공격에 사용하다니?

그뿐만이 아니었다.

재환은 마치 제갈명의 기지가 자신의 본진이라도 되는 양, 대놓고 구축물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전술진법에서 '망루'라고 알려진 방어용 구축물이었다.

방어 구축물을 공격용으로 사용한다고?

제갈명은 재빨리 생산한 소형 망자들로 구축물의 건설을 막아보려 했지만, 이미 사태는 늦은 뒤였다.

막 생산되어 달려온 1차 적응자들이 재빨리 망루 위에 올라가서 화살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망루를 올라가지 못하는 소형 망자들은 이빨로 망루의 밑동을 갉작이다가 비참하게 영멸당하고 말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망루들의 숫자는 늘어만 갔다.

마침내 제갈명의 본진 안에 '세 개의 망루'가 만들어졌을 때, 그리고 그 망루 속에 숨은 1차 적응자들이 화살을 쏘아 망자의 궁을 부수기 시작했을 때, 제갈명은 자신이 패배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슨 이따위 전략이······!"

넋이 나간 얼굴의 제갈명을 보던 재환이 쓴웃음을 지었다.

하긴, 이곳의 인간들이 이런 전략을 알 리가 없다.

전술진법의 모티프가 되는 게임에서 이 전략을 썼다면, 심지어 이런 무대에서 사용했다면 죽도록 욕을 먹었을 것이다. 한국인들은 이렇게 게임이 빨리 끝나는 걸 좋아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여기서는 다르다.

"우오오오오오!"

경기 결과가 허공에 전시되며 관중들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제갈명의 분노한 얼굴이 보였다.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원래 게임 시작 후 10분간은 서로 침범하지 않는 것이 예의 아닙니까?"

"예의?"

"보, 보통은 10분간 각자 생산 건물을 짓고 자원을 캐는 게 정석으로······!"

"그런 게 규칙에 있나?"

제갈명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물론 그런 규칙은 없었다.

"그럼 상관없잖아."

대답할 말이 없었다.

대체 이 자는 무엇이란 말인가.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가 아는 모든 정석에서 벗어난 자. 상식과 논리의 저편에 있는 자. 그렇기에 어떤 방법으로도 그 한계를 재단할 수 없는 자.

당해낼 수가 없구나.

제갈명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혼돈제일군사 제갈명이, 처음으로 자신의 지략이 모자람을 인정하는 순간이었다.

이상하게도, 그것을 인정하고 나자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마치 지난 400년간 이 순간을 기다리며 살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제가 졌습니다."

*

8강의 1차전이 끝나고 잠시 쉬는 시간이 돌아왔다.

관중석에 있던 청허와 신무극이 재환을 향해 다가왔다.

"무서운 녀석일세. 역시 땀 한 방울 안 흘리는구만."

"겨우 게임 한 판 했다고 땀은."

"전술진법은 대체 언제 배운 거냐? 자나 깨나 찌르기밖에 모르는 녀석인 줄 알았는데."

"내가 살았던 세계와 인연이 있는 게임이야."

길게 말하기 싫다는 투였다.

재환의 눈이 청허의 곁에 있던 무극방주를 향했다.

"거기, 꽤 강해 보이는데."

혼돈에 있어 감히 그 누가 무극방주를 그딴 식으로 지칭할 수 있으랴. 어쩐지 유쾌해진 청허가 클클 웃으며 말했다.

"나랑 비교하면 어느 쪽이 우위인 것 같냐?"

"글쎄."

청허는 지금껏 재환이 만난 존재 중에서는 유일왕 카타스트로피를 제외하면 최고의 강자였다. 그런데 이 노인도 그런 청허와 거의 비등한 수준이었다.

"한판 붙어 볼까?"

"첫 인사가 무척이나 과격한 친구로군."

표정이 굳어진 신무극을 향해 청허가 웃었다.

"내가 말했잖아. 저 녀석은 노인을 공경하는 게 아니라 공격하는 놈이라고."

그 말에 재환이 토를 달았다.

"이곳 노인들은 노약자는커녕 온통 노강자들뿐인데, 굳이 배려할 필요는 없지."

"봤냐? 한 마디도 안 지는 녀석이야."

겉으로는 툴툴거리는 청허였지만, 그 말투엔 정겨움이 묻어 있었다. 그것을 감지한 신무극의 눈빛도 묘하게 바뀌었다.

900년 전 「심연 원정대」가 붕괴한 이래로, 청허가 지금처럼 즐겁게 대화하는 모습을 신무극은 본 적이 없었다.

...심연 원정대라.

심연 원정대는 무극방주 신무극에게도 뼈아픈 역사가 있는 단어였다. 그 역시 900년 전, 심연 원정대의 일원이었으니까.

"청허."

"왜."

"...아무것도 아니다."

900년 전의 원정대장이었던 몽마 뮬라크.

"혼돈"에 꿈과 희망을 주었으나 결국 절망의 상징으로 남아 버린 존재.

신무극은 재환을 보며 생각했다.

과연 이 사내가 뮬라크를 대신할 수 있을까.

900년 전, 원정대가 「열매」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뮬라크의 공이었다. 결코 물러설 줄 모르는 그의 정의와, 눈부신 지혜와, 압도적인 무력이 없었더라면 그들은 「열매」를 구경조차 하지 못했을 테니까.

무극방주 신무극은 종전의 대결을 지켜보며 재환의 경지를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었다.

학림방주의 말처럼 군장이나 무장급은 아니지만, 중장급은 될지도 모른다.

군장과 무장, 그리고 중장.

12지대를 다스리는 열두 명의 대군주의 바로 아래에 위치한 직속 군주들의 계급. 말이 아래 계급이지 실제로 무장급 정도만 되어도 거의 천외천(天外天)의 무력을 발휘한다.

일격에 산을 으깨고 해일을 일으키는 괴물들이다.

12군주들의 수하로 있기에 이빨을 드러내지 않을 뿐이지, 그들 역시 이미 '군주의 격'을 획득한 적응자들인 것이다.

12군주들의 레기온에서 독립해 자신만의 레기온을 세울 수도 있는 존재들.

좀처럼 죽는 경우도 드물어서 "재생궁"의 최상위권 대기자 중 무장급 이상은 찾아보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아니, 무장이 다 뭔가. 당장 중장급만 오더라도 성채 하나 박살 내는 것은 일도 아닐진대.

혼돈의 십방주가 달려들어도 이길 수 없는 것이 "위대한 땅"의 중장들이다. 그런데 눈앞의 사내는 그런 중장급과 비견될 만했다.

잠재성만 놓고 봤을 때는 뮬라크 이상일지도 모른다.

영혼은 세월이 쌓여 갈수록 그 성장이 더디어지고, 사고가 굳는다. 한데 눈앞의 사내는 아직도 젊었다.

거기다 지략만큼은 "혼돈"에서 최고라는 학림방주를 그의 주종목에서 꺾었다.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인품이라면 어떨까.

솔직히 말해서, 신무극은 눈앞의 사내에게서 올곧은 정의감을 느낄 수가 없었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방식이나 쓰는 말투만 봐도 그랬다. 원숙하고 자애로운 성품을 가지고 있던 뮬라크와는 완전히 반대다.

게다가 이 엄청난 증오.

사내에게서 느껴지는 증오는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심상을 넘어서 하나의 형상이 되어 버린 감정. 게다가 이 증오는 정말 한결같게도 이 세계를 향하고 있었다.

누구도 가리키지 않기에 오히려 모두를 가리키는 증오.

그 증오의 모양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신무극은 미세한 현기증과 함께 주변의 풍경이 일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청허의 친우인 그는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놀란 신무극이 청허에게 밀어를 날렸다.

[혹시 저 친구도 각성자인가?]

[눈치채는 게 늦구만.]

청허의 말에 신무극이 침음했다.

[······놀랍군. "혼돈"에 자네 말고 또 각성자가 있을 줄이야.]

[솔직히 말해서 불완전한 나랑은 비교가 안 돼.]

그 자존심 강한 청허가 이렇게 말하다니, 신무극은 다시 재환의 모습을 꼼꼼히 살폈다. 청허가 말을 이었다.

[저 녀석은 완전한 각성자다.]

[완전한 각성자? 3단계 각성의 벽을 넘은 자란 얘긴가?]

[그래.]

그 말을 들은 신무극의 안색이 변했다. 단순히 재환의 경지에 놀라서가 아니었다.

각성자. 그것도 3단계를 넘어선 각성자들에게는 공통의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2단계 각성에 머무르고 있는 청허는 단순히 수련이 부족해서 3단계 각성을 돌파하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돌파하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편이 정확했다.

[3단계를 넘었다면, 저 사내는 이미 인간성을 상실했을 가능성이······.]

그때, 8강전의 개막을 알리는 사회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자리에서 몸을 풀던 재환이 다시 무대를 향해 움직였다. 청허가 의아한 투로 물었다.

"어딜 가느냐? 네 차례도 아니지 않으냐?"

"싸우러 가야지."

"싸우러?"

"생각해 봤는데, 8강전을 일일이 기다리는 건 시간 낭비야. 내가 보기에 지금 남은 녀석들끼리 서로 붙게 되면 경기 당 한나절씩은 싸울 것 같거든."

8강전까지 온 이들은 다들 비슷비슷한 수준의 실력자들뿐이었다. 방금 탈락한 학림방주를 제하면, 남해방주 카이만과 뇌신방주 윤용을 포함해 총 여섯 명의 참가자가 남았다.

재환은 남은 참가자들의 수준을 「의심」을 통해 탐색해 보았다.

그럭저럭 강해 보이는 이는 건 저 여자와 저 여자, 그리고 저 여자인가.

남해방주 카이만과 뇌신방주 윤용을 빼면 주의해서 볼 만한 자는 신녀방주로 추정되는 면사포의 여인과 화왕방주 강황을 꺾은 검은 야행복의 여인, 그리고 검은색 사슬낫을 허리에 둘둘 감은 긴 포니테일의 여인 정도였다. 그 외에도 신녀방의 부방주라는 여자가 하나 있긴 했지만, 한눈에 봐도 다른 셋에 비해서는 격이 떨어졌다.

그중에서도 재환이 제일 눈여겨본 이는 사슬낫 여자였다.

그녀는 와일드카드로 진출한 이였는데, 정체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재환의 「의심」으로도 읽어낼 수 없는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죄다 여자다.

아마도 이게 "혼돈"이라는 뜻이리라. 성별이나 노화에 따른 육체적 제약을 떠난 강자들이 군림하는 세상. 어떤 의미에서 이 세계는 그가 살던 지구보다도 공평한 데가 있었다.

재환은 청허의 곁에 있는 신무극 쪽을 흘끗 돌아보며 생각했다.

지금은 저 영감이 제일 탐나긴 한데.

아직 고차 적응자들과의 대련 경험이 부족한 재환으로서는, 다른 승부를 모두 미뤄 두고서라도 신무극과 먼저 붙어 보고 싶었다. 그만큼 무극방주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강력했다. 그러나 대회에 참여하지 않은 자를 구태여 닦달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 슬슬 끝내 볼까.

지체 없이 무대 위로 올라간 재환은 8강 2차전에 관해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보안 각주를 향해 다가가 곧장 마이크를 빼앗았다.

―모두 잘 들어라.

난데없는 성주의 난입에 관중석에서 동요가 일었다.

―이미 참가자들의 실력은 충분히 봤고, 그 수준들도 잘 알았다.

발언 기회가 있을 때마다 좌충우돌 사고를 쳐대는 고르곤 성주였다. 낌새를 눈치챈 기자들이 관중석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어이 신입, 빨리 녹취 스킬 켜!"

연이어 셔터를 찍는 소리가 들려왔다. 복장들로 미루어 보아 "이달의 혼돈" 소속 기자들일 가능성이 높았다. 이번 재환의 발언을 특집으로 포장해 대대적으로 터뜨릴 궁리였다.

무대 위의 여인이 목소리를 낸 것은 그때였다.

"잠깐만요, 지금 이게 무슨 짓이죠?"

그녀는 무대 한쪽에서 대결을 기다리고 있던 신녀방주였다.

원래 8강 2차전은 신녀방주와 사슬낫 여인의 대결이었다. 그런데 갑작스레 등장한 성주 때문에 뭔가 일이 터지려 하고 있었다.

재환은 그런 신녀방주를 흘끗 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슬슬 싸움 구경하는 것도 지루하고 하니, 이쯤에서 대회 진행 방식을 조금 바꿔볼까 해서.

"아니 잠깐만요! 누구 맘대로 그런 짓을 하겠다는 건가요?"

―내 마음대로.

신녀방주의 면사포 안쪽에서 고요한 분노가 느껴졌다.

"부당하게 짝이 없는 발언이군요."

―부당하지. 인정한다.

너무 순순히 인정해서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이미 8강까지 흘러온 마당에 진행 방식을 어떻게 바꾸겠다는 거죠?"

―일대일 대결의 원칙을 삭제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는 자였다. 설마 이제 와서 성주 자리를 내놓기가 싫어진 걸까?

생각에 잠겨 있던 신녀방주가 입을 열었다.

"그건 세력전을 하자는 뜻인가요?"

일대일 대결이 아닌데 승부를 겨루고자 한다면 세력전밖에는 없다. 하지만 현재 남은 인원은 총 일곱. 세력전을 하기에는 팀의 형평성이 맞지 않았다. 재환이 입을 열었다.

―뭐,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겠지.

"그건 곤란해요. 그 방식에는 문제가 있으니까요."

―무슨 문제?

"팀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의 문제. 그리고······."

말을 끄는 신녀방주의 목소리가 스산하게 변했다.

"우승자를 어떻게 가릴 것인가의 문제."

다시 말해, 누가 성주의 자리를 가질 것인가의 문제였다. 설령 한쪽 팀이 세력전에서 승리한다고 해도, 최후에 성주가 되는 것은 한 명뿐이다. 그 한 명을 가릴 방법은 결국 일대일 대결뿐인 것이다.

―내 말을 뭔가 오해한 듯한데. 일대일 대결을 하지 않겠다는 뜻은 조잡하게 팀을 나눠 토너먼트를 진행하자는 이야기가 아니야.

"그럼 대체······."

―팀은 하나뿐이다. 나를 제외한 너희들 여섯 명이 한 팀이 되는 거지.

신녀방주는 재환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세력전을 하면서 팀이 하나라니? 그러면 팀이 없는 고르곤 성주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나는 혼자다.

차갑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신녀방주는 순간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재환이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그녀는 지금 막 이해했다.

―나 혼자, 너희들 모두와 싸우겠다는 이야기다.

Episode 8. 최후의 낭만 (9)

"약속하지. 너희들 중 누구라도 먼저 나를 쓰러뜨리는 자에게 기꺼이 성주의 자리를 넘기겠다."

재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이달의 혼돈" 소속 기자들이 움직였다.

특보다. 이건 특보야!

혼돈 십방주를 포함한 강자 여섯과 성주 하나의 싸움.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대결이 지금 막 펼쳐지려 하고 있었다.

어찌 이보다 더 광오할 수 있을까.

이야기에 굶주린 "혼돈"의 인간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충만한 자극이었다.

관중석에서 이제까지의 모든 환호성을 다 합친 것보다 더 큰 함성이 터져 나왔다. 하나 그의 행동에 우려를 표하는 이들 또한 있었다.

"성주란 사람이 너무 성급하시구려!"

아무리 새 고르곤 성주의 무위가 대단하다 한들, 8강에 진출한 여섯 명을 한꺼번에 상대할 수 있을까?

만약 이들을 홀로 쓰러뜨릴 수 있는 이가 등장한다면 "혼돈"에는 사상 초유의 강자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강자의 출현은 곧 혼돈의 지각변동을 의미했다.

「심연 원정대」를 만들겠다고 선언한 성주의 무위를 확인할 기회. 사람들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재환이 의도한 정경이었다.

굳이 십방주들의 반발을 사면서, 또 관객들의 주의를 끌어가면서까지 재환이 귀찮은 쇼맨십을 보이는 이유가 있었다.

지금 재환에게 필요한 것은 사람들의 신뢰였다.

그리고 악몽의 탑에서 "카르페디엠"을 이끄는 동안, 재환에게는 이런 상황에 대한 약간의 노하우가 생겼다.

큰 신뢰는 관계의 깊이에 의존하고, 관계의 깊이는 다시 시간의 축적으로부터 만들어진다. 그러나 충분한 시간을 축적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어떻게 신뢰를 쌓아야 할까. 그럴 때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압도적인 능력이었다.

어지간한 능력으로는 안 된다.

오로지 '압도적인 능력'.

보는 이들로부터 충분한 경외감을 끌어낼 만한 신위. 그만한 연출을 보여줄 수 있다면 시간의 부재에서 오는 신뢰의 깊이는 맹목적인 기대감으로 대체될 수 있었다.

그리고 8강 진출자 전체와의 대결은, 그러한 광경을 보여주기에 안성맞춤의 전장이었다.

무대의 한쪽에 서 있던 사슬낫의 여자가 유쾌하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핫! 뭔가 싶었는데, 이것 참."

아까 재환의 「의심」으로도 읽을 수 없었던 사슬낫의 여자. 재환은 그녀의 웃음에 자연스레 기감을 돋우었다.

지금까지 「의심」으로 그 수준을 파악할 수 없었던 것은 청허 이상의 강자들뿐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저 사슬낫의 여자 또한 최소 청허 수준의 강자일 것이란 뜻이었다.

가장 주의해야 할 인물. 사슬낫 여자는 고양이 같은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어쩐지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 같더라니까."

사슬낫 여자는 뚜벅뚜벅 재환을 향해 일직선으로 걸어갔다. 한 치의 망설임도 머뭇거림도 없는 걸음걸이에 관객들 모두가 긴장했다.

여자는 재환의 코앞에서 멈춰 섰다. 조금만 더 가까이 가면 입술이 닿을 만큼 아슬아슬한 거리였다.

"당신, 정말 내 마음에 쏙 드는걸. 지금 죽이긴 너무 아까워."

재환은 그녀를 밀쳐내지 않았다. 살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던 까닭이다.

사슬낫 여자는 재환의 귓가에 달콤한 숨을 불어 넣듯 속삭였다.

"그러니 이번엔 여기까지만."

"포기하겠다고?"

"응."

의외였다. 성주의 자리가 눈앞에 있는데, 게다가 숫자상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임에도 포기를 선언하다니. 당황한 사회자가 황급히 예비 마이크를 잡았다.

―8강 진출자 중 한 명이 갑작스런 기권을 선언했습니다! 성주의 자리가 탐나지 않는 것일까요?

사슬낫의 여자는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성주의 자리 따위, 그녀에겐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니라는 것처럼.

"괜히 더 귀찮은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거든. 그리고······."

그녀의 마지막 말은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입술이 취한 모양을 재환은 놓치지 않았다. 여자의 입 모양은 정확히 다음과 같은 문장을 담고 있었다.

―곧 '그게' 나타날 테니까.

안타깝게도 재환은 여자의 말에 대해 오래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사슬낫 여자의 기권 선언과 함께 대회장에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보였던 까닭이다.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뇌신방주 윤용이었다.

"흠흠. 성주님. 저도 이쯤에서 기권하겠습니다. 승부의 공평성은 둘째 치고서라도, 지금의 제 실력으로는 성주님을 당할 재간이 없을 것 같군요."

이미 재환에게 당해 허공에서 빙글빙글 춤을 추었던 경험이 있는 그다. 또다시 같은 곤욕을 치르고 싶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약속한 8강에는 진출했으니, 이미 재환의 합격 기준치는 만족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재환이 원하지 않는 바였다.

...뇌신방주, 약삭빠른 녀석이군.

비참한 꼴을 당하지 않으면서, 약간의 양보로 실리를 취할 수 있는 선택을 했다.

설령 당신의 밑으로 들어가더라도 자신의 명성을 제물로 바치지는 않겠다는 것. 그런데 전연 뜻밖의 인물도 함께 항복 의사를 표명해왔다.

"소인의 실력이 성주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함을 순순히 인정하오. 성주의 자신감에 깊은 신뢰를 보내며, 소인은 이쯤에서 패배를 받아들이겠소."

마찬가지로 8강 진출자 중 하나였던 남해방주 카이만이었다. 관중석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 '남해방주'가 항복했다고?"

"말도 안 돼."

혼돈 십방주 중에서도 특유의 호탕하고 정의로운 성품으로 인정받는 카이만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가 타고난 승부사라는 것 또한 널리 알려진 사실. 그런 카이만이 싸워 보지도 않고 패배를 인정하다니?

재환이 슬그머니 인상을 찌푸렸다.

곤란하다.

뇌신방주 윤용이라면 이렇게 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설마 그 남해방주 카이만마저 이럴 줄이야.

눈이 마주친 카이만이 조용히 읍을 해왔다.

뇌신방주와 같은 생각에서 그런 건 아닌 것 같지만······.

카이만의 경우, 뇌신방주와는 달리 이 대결이 공정하지 못하다는 생각에서 한발 물러서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어떤 의도로 꺼낸 말이든, 지금의 재환이 의도하던 그림은 아니었다.

"뭔가 이상한데? 이거 단체로 짜고 치는 거 아냐?"

관객 중 누군가가 사태에 대해 의심을 제기했다. 재환이 우려하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뇌신방주 윤용과 남해방주 카이만이 이미 재환과 싸워 본 경험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관객들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세 명이 연달아 항복을 선언하자, 남은 인원도 세 명이 되었다. 신녀방의 방주와 부방주, 그리고 강황을 패배시켰던 야행복의 여인.

재환은 생각했다. 이래서야 저 셋을 굴복시켜도 만족스런 그림이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한다....

"그것 참 안타깝네요 성주, 원하시는 대로 일이 풀리시지 않으셨으니."

살짝 비꼬듯이 입을 연 것은 신녀방주 자극령(紫吇寧)이었다. 재환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뭐, 아쉬운 대로 셋이라도 덤벼 보던지."

"······정말 오만방자의 끝을 달리시는군요. 다들 성주 체면을 생각해서 빠져 준 것 같은데."

자극령의 목소리가 희미한 노기를 띠고 있었다.

[방주, 그냥 이참에 본때를 보여주죠.]

보랏빛 옷을 걸친 신녀방의 부방주가 밀어를 날렸다. 그녀는 처음부터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자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우리의 합격을 받아낼 수 있을 리 없어요.]

6차 적응자 수준의 부방주는 재환의 강함을 제대로 측량할 안목이 없었다. 그러나 어쩌면 제대로 된 안목이 있었더라도, 그녀는 지금과 매한가지였을지도 모른다.

[자중하세요, 부방주.]

신녀방주 자극령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당신도 알고 있잖아요? 애초에 우리는 성주와 싸우러 온 것이 아니에요.]

[그렇기는 하지만······.]

그 이야기를 엿듣던 재환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의심」은 이럴 때 정말이지 유용하게 쓰인다.

싸우러 온 것이 아니다.

그럼 목적이 뭘까.

뒤이어 신녀방주는 화왕방주 강황을 쓰러뜨렸던 야행복 여인에게도 말을 걸기 시작했다. 듣자 하니 미리 이야기된 사이인 듯했다.

[혜영 대주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좀 더 지켜보려고 합니다.]

혜영이라 불린 야행복 여인이 대답했다.

신녀방주가 다시 물었다.

[금천방주의 뒤에 누가 있기에 강철의 군주께서 움직이신 거죠?]

[일전에도 말씀드린 것 같지만, 거기까진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방주께서는 이 일에 너무 깊이 개입하려 들지 마십시오. 저희가 부탁드린 일만 잘 수행해주시면 됩니다.]

고요함 속에서도 절도가 느껴지는 목소리.

신녀방주는 약간이지만 자존심이 상한 기색으로 대꾸했다.

[······알았어요. 제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죠?]

[우리는 성주의 성품을 알고 싶습니다.]

성품? 지나치게 막연한 말이었다. 애초에 무엇을 두고 성품이라 규정할 수 있단 말인가. 한 사람이 가진 융통성? 사고방식? 사람을 대하는 태도? 가진 사상이나 야망? 열거하자면 밑도 끝도 없이 장황한 말이었다.

그러나 신녀방주는 그 장황함의 본질에 있는 의도를 순식간에 꿰뚫어 보았다.

[그가 장기 말로 얼마나 유용한지를 따지시겠다는 거군요.]

[군주께서는 신녀방주의 도움을 결코 가벼이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고르곤 성주가 당신들의 조건에 부합하는 인물이 아니라면 어쩔 셈이지요?]

그 말에 잠시 적막이 이어졌다.

혜영 대주는 뭔가를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듯하더니, 신녀방주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땐 새로운 인물을 뽑아야겠지요. 방주의 지혜를 믿습니다.]

면사포 뒤에 숨겨진 신녀방주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맑고 침착한 목소리였다. 신녀방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밀어가 끝나고, 신녀방주를 비롯한 세 여인이 재환 쪽을 바라보았다. 재환도 그들을 마주보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자극령이었다.

"고르곤 성주, 저희는 당신과 다툴 마음이 없습니다."

"항복 선언인가?"

"그 표현은 잘못된 것 같군요. 다툴 마음이 없는 것과 백기를 드는 건 다른 얘기니까요."

"무슨 뜻이지?"

"일전에 성주는 이렇게 말했었죠. '자신과의 일대일 대결에서 패배한 자는 「심연 원정대」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고."

뭔가 익숙한 상황이 반복되고 있었다. 재환은 살짝 짜증난 투로 물었다.

"설마 그쪽도 학림방주가 했던 것처럼 '일대일 대결'이라는 말로 꼬투리 잡을 셈인가? 무력 대결이 아니라 다른 거로 승부하자고?"

"아뇨, 그런 말을 하려는 게 아니에요."

"그럼?"

면사포 너머에서 신녀방주가 가만히 미소 짓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우리는 당신에게 패배하지 않겠어요."

"무슨 말이지?"

'패배하지 않았다'가 아니라, '패배하지 않겠다'였다.

건조한 현재형의 서술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명확한 의지가 담긴 발언이었다.

신녀방주가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리는 지금 자발적으로 「심연 원정대」에 들어가겠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

동 시각, 고르곤 내성의 집무실에 전서응이 도착했다. 커다란 덩치에 화려한 깃털을 가진 전서응.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메시지를 받으러 오는 이가 없자 전서응이 거친 울음을 내뱉었다.

"한참 바쁜 와중에 누가······. 응?"

전서응의 깃털을 본 유르헨의 안색이 대변했다. 푸른색 전서응은 오직 일분일초를 앞다투는 소식을 전할 때만 사용되는 전서응이었기 때문이다.

[드라이어드 성주, 아이사 린드크로프]

전서응은 남쪽 성채의 성주로부터 온 것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맙소사."

메시지의 내용을 확인한 유르헨의 손이 불길하게 떨렸다. 황망해진 그의 동공이 창문 쪽을 향했다. 고르곤의 남쪽 하늘이 시야에 들어왔다.

하늘에 드리워진 암운.

아직은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었으나,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한 속도로 뭔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한 세계를 멸절시킬 수 있을 만큼 거대한 악의.

"혼돈"이 낳은 절망의 군세가 고르곤 성채를 향해 몰려오고 있었다.

Episode 8. 최후의 낭만 (10)

이제 와서 자발적으로 「심연 원정대」에 참여하겠다고? 도통 의중을 알 수 없는 발언이었다.

"무슨 속셈이지?"

"······속셈이라뇨?"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는 투로 고개를 갸웃거린 것은 오히려 신녀방주 쪽이었다.

""혼돈"의 사람들에게 삶을 되돌려주기 위한 여정에, '속셈'까지 필요한가요?"

관중석의 곳곳에서 동조하는 의견이 나왔다. 신녀방주의 말이 관중들의 마음속에 있던 어떤 연약한 부분을 건드렸던 것이다.

물론 모두가 그런 반응을 보인 것은 아니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요, 신녀방주."

"아직 승부 중이지 않소. 어서 칼을 뽑으시오!"

고상한 이상(理想)보다는 당장의 승부를 보고 싶어 하는 이들의 목소리.

재환이 어깨를 으쓱하며 신녀방주 쪽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신녀방주의 표정은 침착했다.

"아무래도 성주께서는 이 대회의 본래 목적을 잊고 계신 것 같군요."

"본래 목적?"

"그래요."

기실 그녀의 말은 재환만을 향한 것은 아니었다.

"여기까지 왔으니 터놓고 이야기해 보죠. 성주는 처음부터 우리에게 성주 자리를 내놓을 생각이 조금도 없었어요. 그렇지 않은가요?"

"...."

"왜냐하면 애초부터 이 대회는 '새로운 고르곤 성주'의 선출이 아니라, '심연 원정대'의 모집을 위해 개최된 것이니까요."

관중석에서 희미한 술렁거림이 퍼져 나갔다.

신녀방주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솔직히 성주의 방식에 감탄했어요. 900년 전 「심연 원정대」가 실패한 이래, 누구도 이런 거창한 일을 계획한 이가 없었으니까요. 그것도 자신의 목숨을 걸어가면서까지 일을 추진하다니, 성주의 행동력에는 정말이지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가 없네요."

신녀방주가 빙그르 몸을 돌렸다. 그녀는 이제 재환을 등진 채로 관중석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기에 본녀는 지금 이 자리에 함께할 수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워요. 여기 관중석에 계신 다른 모든 분들 또한 마찬가지겠죠."

그녀의 목소리에는 소리 증폭 스킬이 걸려 있었다. 이 대화를 관중 전체가 듣게 만들려는 것이었다. 수만에 이르는 혼돈의 강자들이 그녀에게 이목을 집중하고 있었다.

"만약 이 대회가 단순히 '새로운 성주'를 선출하기 위해 만들어진 자리였다면,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몰려들진 않았을 거예요. 대회에 출전할 자격이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관중석에 앉아 계신 분들이 바로 그 증거죠."

신녀방주의 눈길이 아주 잠깐 신무극과 청허에게 머물렀다.

"여러분은 단순히 '성주의 자리'가 궁금해서 이곳에 온 게 아니에요."

그 순간 신녀방주는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면사포를 벗어 던졌다.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관중들이 숨을 삼켰다.

관중석의 좌측에서 우측으로.

신녀방주의 시선이 천천히 움직였다.

관중석에 앉은 사람들의 고개가 파도치고 있었다. 그녀와 시선이 마주친 모든 이들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사람의 속내를 꿰뚫어 보고, 그들의 내면에 있는 가장 정의로운 부분을 돌아보게 만드는 시선.

신녀방주 자극령의 최상급 스킬.

「정의(正義)의 눈」이 가진 공능이었다.

신녀방주는 묘한 현기가 뒤섞인 목소리로 재차 입을 열었다.

"저는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여러분들의 솔직한 속내를 듣고 싶어요. 여러분들을 여기까지 오게끔 만든 말은 「고르곤의 새로운 성주」인가요, 아니면 「심연 원정대」인가요?"

그 질문은 신녀방주의 청아한 목소리로 포장되어 군중 하나하나의 마음속 깊은 곳을 두드렸다.

사람들의 표정이 하나둘씩 변해가고 있었다.

어쩌면 사람들은 알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처음부터 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이었다는 사실을.

신녀방주의 말과는 달리 관중석에 모여든 이들 중에는 뜨내기들도 있었고, 단지 화끈한 승부를 보기 위해 모여든 치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질문이 떨어진 순간, 관중들은 그들이 이곳까지 오게 된 각자의 목적이 하나의 원대한 이상으로 수렴되고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혼돈이 그토록 원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 누구나 바라마지 않았으나 차마 도달할 수 없었던 목표였다.

신녀방주가 입을 열었다.

"본녀는 아직 이 "혼돈"이 낭만을 잊지 않았다고 믿고 싶어요."

그것이 쐐기였다.

"혼돈"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꿈꾸는 최후의 낭만.

관중 중 누군가가 읊조리듯 중얼거렸다.

"심연 원정대······."

무작위로 흩어지던 웅성거림이 하나둘씩 제대로 된 목소리를 이루기 시작했다.

"신녀방주의 말이 맞아."

"우리가 진짜 보고 싶었던 건······!"

곳곳에서 그녀의 지지자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한 노인은 이렇게 말했다.

"신녀방주의 말에 동의하오. 나는 겨우 싸움박질이나 보려고 이 먼 북쪽까지 행차한 건 아니외다."

관중석 전체에 도달할 만큼 웅장한 영력이 깃든 목소리. 노인의 정체를 깨달은 관중들이 수군거렸다.

"군자검이다!"

거해 지대의 군자검(君子劍) 한명관.

무소속 낭인으로서 혼돈 십방주 급의 무력을 가졌다고 평가받는 강자인 동시에, 온화로운 성품으로 만인의 존경을 받는 노인. 군자검 한명관은 그런 이였다.

하나 재환은 그런 군자검과 신녀방주 사이에 눈빛 교환이 이루어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한통속인가.

신녀방주가 군자검의 말을 받았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공연한 '내분'이 아니라, 진정한 목표를 위한 '화합'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본녀는 고르곤 성주께 이 대회를 즉각 중단할 것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신녀방주가 진정 노리던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미 대회는 충분한 목적을 이루었거든요. 지금 이곳에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심연 원정대」에 기꺼이 참가할 수만의 영혼들이 모여 있으니까요."

이제 주도권은 신녀방주에게 완전히 넘어갔다.

그녀는 대회를 개최한 재환의 의도를 칭찬하면서도, 과정상에서 벌어지는 불필요한 소요를 과감하게 지적하고 분쇄함으로써, 대회의 결과물인 「심연 원정대」가 마치 자신의 공인 양 가져가는 것에 거의 성공하고 있었다.

신녀방주의 홍채에서 맑은 빛이 일렁였다.

"하지만 여러분, 기뻐하기는 아직 일러요. 우리에겐 아직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으니까요."

관중들 중 누군가가 물었다.

"그게 뭐요?"

그러자 신녀방주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바로 누가 원정대장이 될 것이냐, 하는 문제."

거기까지 이야기를 듣던 청허가 눈살을 찌푸렸다.

"저 계집애가 수를 쓰는군."

곁에 있던 무극방주도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

"최상급 화술 스킬인 「은밀한 기만」에 「혹세무민(惑世誣民)」까지······."

부족한 근거나 논리적 비약들을 톤과 어조의 곡예로 무마시키는 최상급의 화술 스킬들. 아까부터 들려오는 신녀방주의 목소리에는 그러한 최상급 스킬의 힘이 짙게 깔려 있었다.

그녀의 화술에 당하지 않은 것은 그녀보다 강한 7차 이상의 적응자들뿐이었다.

그때, 관중석에서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아까 관중석에서 말을 받았던 군자검 한명관이었다.

"그럼 신녀방주는 누가 '원정대장'의 자리에 가장 어울린다고 보시오?"

"본녀는 이 모든 일을 추진한 고르곤 성주께서 원정대장 자리를 맡아 주셨으면 해요."

그 말에 관중들이 감탄사를 보냈다.

관중들의 신임을 한 몸에 받는 지금이라면, 그녀 스스로 원정대장의 자리를 자처하더라도 누구 하나 나무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신녀방주는 기꺼이 자신의 욕심을 내려놓고 고르곤 성주에게 원정대장 자리를 양보한 것이다.

"이 노구는 반대외다."

입을 연 것은 군자검 한명관이었다.

"나는 성주를 신뢰할 수 없소."

그러자 군자검의 주변에 있던 관중들이 반발했다.

신녀방주 자극령이 관중들을 제지하며 물었다.

"왜 그러시는 거죠? 고르곤 성주는 원정대장의 자리를 맡기에 충분한 사람이에요."

"물론 노구도 일정 부분 그 말에 동의하오."

군자검 한명관이 말을 이었다.

"혼돈 십방주들을 상회하는 무력에, 학림방주를 뛰어넘는 지략. "혼돈"의 역사 전체를 돌아보아도, 현 고르곤 성주만한 기재를 찾아보기는 힘들 것이오."

한 사람에게 쏟아지기엔 과분할 정도의 극찬이었다.

"그러면 군자검께서는 왜 반대하시는 거지요?"

"원정대장은 뛰어난 무력과 지략만으로 수행할 수 있는 직위가 아니기 때문이오."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군자검 한명관의 말이었다.

그는 900년 전 「심연 원정대」에 참가하지는 못했으나, 당시 「심연 원정대」의 창설을 직접 목도했던 몇 안 되는 영혼 중 하나였다.

신녀방주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그럼 군자검께서는 원정대장의 자질에 또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인품이오."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

"강한 무력은 장수가 대행할 수 있고, 깊은 지략은 군사가 보충할 수 있소. 하지만 인품은 다르오. 수많은 대원을 품을 수 있는 그릇. 원정대장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그것이라 생각하오."

"그 말씀은, 고르곤 성주의 인품이 원정대장을 떠맡기에 적절하지 않다는 뜻인가요?"

직설적인 물음에 모두의 시선이 군자검에게 집중되었다. 그러나 군자검은 영리하게도 질문에 정면으로 맞서는 대신, 교묘하게 말을 돌렸다.

"노구는 이곳까지 오면서 고르곤 성주에 관한 몇 가지 소문을 들었소이다."

"소문이요? 어떤 소문을 말씀하시는 거죠?"

"듣자 하니 고르곤 성주께서는 아직 살아온 세월이 반백 년밖에 되지 않는데다가, "혼돈"에 나타난 지는 한 달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고 하더구려."

관중석이 수선스러워졌다. 그 소문들에 관해서는 관중들 또한 익히 들은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신녀방주가 군자검을 대신해 재환에게 물었다.

"고르곤 성주, 저 말이 사실인가요?"

"틀린 말은 아니지."

재환은 순순히 대답했다. 그와 동시에 관중들 사이에 커다란 동요가 흘렀다. 혼란은 곧 명백한 말들로 정제되었다.

"허, 그건 조금 문제가 있군."

"반백 년도 살지 않은 애송이에게 원정대를 맡길 수는······."

고요한 반감이 관중들 사이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혼돈"의 기준에서는 지나치게 어린 재환의 나이가 발목을 붙잡은 것이다. 신녀방주가 말했다.

"군자검, 당신의 주장은 일견 타당성이 있어요. 대부분 경우 짧은 세월은 깊은 지혜를 담보하지 못하게 마련이니까요. 하지만―"

군자검 한명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녀방주가 계속해서 말했다.

"고작 '세월'을 꼬투리로 그의 인품을 깎아내리는 것은 실례예요. 우리는 고르곤 성주가 살아온 50년이 어떤 시간인지 모르니까요."

이만하면 사기극도 대규모였다.

관중석 사이에서 다시 한번 신녀방주의 인품을 찬양하는 말들이 떠돌았다. 군자검 한명관이 말했다.

"신녀방주의 말에 동의하오. 하지만 노구는 여전히 고르곤 성주의 검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오."

"검증이라. 글쎄요. 하지만 한 사람의 인품이라는 것을 대체 누가 어떻게 검증할 수 있겠어요?"

"노구는 신녀방주께서 그 일을 맡아 줄 수 있다고 생각하외다."

"제가요? 어떻게 말이죠?"

"성주와 정의문답을 하는 것이 어떻겠소?"

정의문답(正義問答).

"혼돈"에서 신녀방주 자극령의 정의문답을 모르는 이는 드물었다.

특히 "혼돈"의 고차 적응자들은 다음 적응 차수로 도약하기 위한 '깨달음 수치'를 채우려고 일부러 신녀방주에게 정의문답을 요청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녀의 정의문답은 적응자들을 심마(心魔)에 빠뜨리지만, 돌파한 이들에게는 막대한 양의 깨달음 수치를 안겨 주었기 때문이다.

관중들 중 누군가가 소리쳤다.

"과연, 정의문답이라면 인품을 판단하기에 부족함이 없을지도 모르겠군!"

"어서 정의문답을 하시오!"

몇몇이 나서서 선동을 시작하자, 관중들의 분위기도 그쪽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신녀방주가 마지 못하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정말, 어쩔 수 없군요. 여러분들께서 원하신다면야······."

신녀방주는 희미한 미소를 짓더니 재환 쪽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정작 성주의 의사는 묻지도 않고 우리끼리 너무 떠들었군요. 죄송해요, 성주. 성주는 어떠신가요. 원정대장의 자리를 맡아 줄 생각이 있으신가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재환은 대답이 없었다.

대신 그는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멀리서 다가오는 암운이 재환의 투명한 망막에 잡혔다. 희미하게 떠도는 불온한 공기. 재환은 이와 비슷한 공기를 이미 접해본 경험이 있었다.

멀리서 재환을 지켜보던 청허가 침음을 흘렸다.

"저 계집애한테 완전히 당해 버렸구만. 이제 어쩔 거냐 애송아."

어어, 하는 사이에 사태가 여기까지 와버렸다.

지금 재환이 평소처럼 검을 뽑아서 다 날려 버린다면, 「심연 원정대」는 완전히 물 건너가 버릴 것이 자명했다. 수하들을 모조리 찔러 죽이는 원정대장을 따르고 싶은 이는 아무도 없을 테니까.

그렇다고 신녀방주 자극령의 제안에 동의하면 재환은 꼼짝없이 인품을 시험받아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재환이 입을 열었다.

Episode 8. 최후의 낭만 (11)

"좋다."

"그 말씀은, 정의문답을 받아들이시겠다는 건가요?"

신녀방주의 눈빛이 빛났다. 걸려들었다는 표정. 재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뭘 어떻게 하면 되지?"

"간단해요. 제가 하는 질문에 대답만 하시면 되는 거니까요."

신녀방주는 생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모두들― 잠시 눈을 감아 주시겠어요?"

재환을 비롯한 모든 관중이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서 주변의 정경이 변화하는 것이 느껴졌다. 차가운 한기가 흐른다.

정의문답이 시작된 것이다.

눈을 떴을 때, 재환은 자신이 망망대해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정확히 말하면 경기장 전체가 대해로 변해 있었다.

또 환술인가.

관중들이 신기하다는 듯 감탄사를 터뜨렸다.

신녀방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 정의문답의 무대는 제가 거주하는 '거해 지대'예요. 아시다시피 성채 드라이어드 바깥은 모두 이런 험해(險海)로 이루어져 있어요. 그러니 보시는 것처럼 배가 난파되는 일도 종종 발생하죠."

높은 파랑과 무성한 암초들. 심지어 무대의 중앙에는 이미 난파된 배 한 척도 보였다. 탑승객이었던 인간들이 바닷속에 빠져 고통스레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사, 살려 줘!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승객은 거해의 추위 속에서 곧 숨이 다해 영멸하고 말았다. 환술이라기엔 지나치게 생생한 그 현장감에 관객들이 몸을 떨었다.

구조선이 나타난 것은 잠시 후의 일이었다. 총 10인승의 구조선이 하나둘씩 사람들을 구조했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생존자 중 대부분을 태우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어쩌지? 한 사람을 더 태워야 하는데.

총 10인승의 구조선.

그리고 아직 타지 못한 한 사람.

선원들이 소리쳤다.

―하지만 저자를 태우면 배는 침몰하고 말아.

―버려야 해. 살 사람은 살아야지!

돌연 정신을 차렸을 때, 재환은 어느새 자신이 구조선의 선장 역할을 맡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선원 중 하나가 그에게 매달렸다.

―선장님! 어서 선택해야 합니다!

재환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닫혔다.

그런가. 이게 정의문답이었군.

희미하게 웃는 신녀방주의 모습이 보였다.

재환의 눈앞에 선택지들이 스르르 떠오르고 있었다.

+

1. "살 사람은 살아야지! 한 명은 포기한다!"

2. "한 사람도 포기할 수 없다! 설령 침몰하더라도 그를 태운다!"

+

엄밀히 말해, 정의문답에는 답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다. 어떤 것을 선택하든, 무언가를 포기해야만 하는 문답.

재환이 1번을 선택하면 누군가는 그의 비정함을 탓할 것이고, 그렇다고 2번을 선택하면 누군가는 그의 판단력을 탓할 것이다.

어느 선택지를 택하든 '원정대장'으로서 재환의 자질은 공격받게 되는 것이다. 처음부터 교묘하게 계획된 함정이었다.

"고르곤 성주, 어떻게 하실 건가요?"

재환은 선택지들을 가만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3번을 택하겠다."

"······네? 그런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아요."

재환이 고개를 저으며 다시 한번 말했다.

"3번이다. 모두를 살리고, 배도 침몰하게 두지 않는다."

순간 신녀방주의 안색이 변했다.

사실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 대부분의 정의문답과는 달리, 신녀방주가 낸 이번 문답에는 '정답'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이 문답에는 숨겨진 3번 선택지가 실제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오직 스스로 해답을 찾았을 때 떠오르게 되는 3번 선택지가.

+

3. "누구도 포기할 수 없다. 저자를 구하고, 한 명씩 돌아가면서 물에 들어간다! 다른 구조대가 올 때까지 버티는 것이다!"

+

'인간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모두를 구할 '판단력'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

신녀방주는 재환이 1번 또는 2번을 선택했을 때 이 해답을 보여줌으로써 그의 능력을 깎아내릴 생각이었다. 거기까지만 해도 여론은 자연히 자신의 편을 들 테니까. 그런데 계획이 꼬이게 생겼다.

설마, 3번을 찾아냈다고?

신녀방주는 떨리는 기색을 감추며 물었다.

"일단 들어나 보죠. 당신이 선택한 3번 선택지라는 건 대체 무엇인가요?"

그러자 재환이 말했다.

"저 사람들이 죽는 건 '바다'가 존재하기 때문이겠지?"

"······아무래도 그렇겠죠?"

"그럼 바다를 갈라 버린다."

신녀방주가 머리를 한 대 맞은 표정을 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 인간은?

진지한 대답을 해도 모자랄 판에, 그런 헛소리를 지껄이다니? 당황해서 판단력을 잃은 건가?

그리고 다음 순간, 재환의 독불이 움직였다.

신녀방주가 소리쳤다.

"잠깐만요, 지금 무슨!"

재환의 손끝으로 무지막지한 풍압이 몰려들더니, 섬광 같은 찌르기가 발출했다.

뒤이어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환술로 만들어진 정의문답의 바다가 거대한 풍파를 일으키며 갈라졌다.

―바다가 갈라지고 있다!

―맙소사, 어떻게 저런 기적이!

―이, 이제 살았어! 감사합니다, 선장님!

구조선의 승객들이 눈물을 흘리며 재환을 부둥켜안았다.

[시스템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정의문답이 종료됩니다.]

정의문답의 환술 세계가 붕괴하고, 대회장이 원래의 형태를 되찾았다. 눈앞에서 벌어진 일에 관객들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들이었다.

재환의 찌르기에 머리가 산발이 된 신녀방주가 소리쳤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인가요, 성주!"

화가 난 신녀방주를 비롯해 신녀방의 인원들이 칼자루를 뽑았다. 그런데 재환의 표정이 이상했다.

"이제 장난은 그만두지."

신녀방주 자극령이 몸을 움찔 떨었다. 재환의 언동에서 심상치 않은 기백을 느낀 것이다.

고르곤 내성에서 방송이 터져 나왔다.

[고르곤 내성에서 알립니다! 고르곤 내성에서 알립니다!]

[현 시간 부로 외성에서 진행되던 모든 행사가 취소되며, 성문이 봉쇄됩니다!]

[고르곤 전역에 '고르곤 하나'를 발령합니다.]

[모든 주민들은 신속히 북쪽 거리로 대피해주시기 바랍니다.]

'고르곤 하나'라면 고르곤 성채에서 발령하는 최고 경계 태세에 해당하는 경보였다. 성의 존폐가 우려될 시에 발령되는 경보. 그것이 '고르곤 하나'였다.

관중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번져 나갔다.

불안과 초조, 호기심이 뒤섞인 목소리들.

"무슨 일이야?"

"망자들이 나타났다는군."

"망자라고?"

관중석이 혼돈과 광기로 뒤덮여 가고 있었다.

아수라장의 중심에서 재환의 귓가에 유르헨의 밀어가 꽂혔다.

[성주님, 지금 당장 남쪽 성문으로 와 주십시오.]

재환은 말없이 남쪽 성문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에 뭔가를 눈치챈 십방주를 비롯한 강자들 또한 재환을 따라 신형을 움직였다.

잠시 후, "혼돈"을 대표하는 강자들은 남쪽 성채의 흉벽 위에 섰다. 그들은 동시에 똑같은 광경을 목격했고, 같은 것을 느꼈다. 그리고 말을 잊었다.

남쪽 숲 지대가 새카맣게 물들어 있었다.

꾸물거리는 망자들이 움직일 때마다 영혼을 가진 모든 것들이 부서져 가고 있었다. 숲지대 곳곳에서 울부짖던 각수들이 망자들의 군세에 뒤덮여 흔적도 없이 스러졌다. 마치 검은 해일이 숲을 뒤덮으며 밀려오는 듯했다.

해일이 부딪친 성의 외벽이 비명을 질러댔다.

그 비일상적인 풍경 속에서 신녀방주 자극령은 새삼 자신이 성채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아······.

이 거대한 높이의 흉벽은 각수들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저 검은 해일의 중심에 이 흉벽을 건설케 만든 원흉이 존재하고 있었다.

"무극, 옆에 있나?"

"있네."

청허의 말에, 신무극이 대답했다.

"900년 전이 떠오르는 광경이야. 그렇지 않나?"

"망자의 궁에 갔을 때를 말하는 건가?"

"그래."

신무극은 새삼 900년 전의 원정을 상기했다.

「심연 원정대」에 참가했던 그들은, 900년 전 지금과 같은 광경을 이미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도대체 '거꾸로 걷는 마그리트'가 왜 여기에 있는 건가?"

이 높은 흉벽을 쌓게끔 만든 원흉.

3대 망자 중 하나, 거꾸로 걷는 마그리트.

"혼돈" 전체를 공포케 하는 재앙의 이름.

청허는 얼마 전 내성에 유일왕 카타스트로피가 강림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망자들은 같은 망자를 부르는 습성이 있다.

중형 망자가 나타난 자리에는 소형 망자가 몰려들고, 대형 망자가 나타난 자리에는 중형 망자가 몰려든다.

그리고 고르곤 내성에는 망자의 왕이라 부르는 카타스트로피가 나타났었다.

"어쩌면 오늘 여기서 죽을지도 모르겠군요."

뇌신방주 윤용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큭큭, 저런 것도 감당 못하면서 「심연 원정대」엔 어떻게 참여하려고 했냐?"

"화왕방주 님도 지금 다리가 부들거리고 계십니다만."

"시끄럽다."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청허가 피식 웃었다.

뇌신방주도 화왕방주도 900년 전에는 태어나지도 않았던 애송이들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이 이 "혼돈"의 주역이 되었다.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 시답잖은 농담을 나누는 이들. 숙연한 표정으로 전방을 응시하는 이들.

청허는 그들 하나하나의 얼굴을 보며 감회에 젖었다.

죽기 전에 다시 한 번 이 광경을 보게 될 줄이야.

무극(無極), 남해(南海), 학림(學林), 신녀(神女), 화왕(火王), 그리고 뇌신(雷神)까지.

혼돈 십방 중 여섯이 이 자리에 모였다.

족히 수만은 되어 보일 듯한 소형 망자와 중형 망자들의 군세가 그들의 눈앞에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하나하나가 7차 적응자에 준하는 대형 망자만 10기가 넘고, 그들의 배후에는 초대형 망자인 '거꾸로 걷는 마그리트'까지 있었다.

마그리트의 존재감을 감당하지 못한 몇몇 강자들이 성벽에서 손을 떼고 북쪽으로 몸을 날렸다. 개중에는 군자검이라 불리며 칭송받던 한명관도 끼어 있었다.

그들은 아는 것이다.

이 싸움은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이제 고르곤 성채는 멸망할 것이라는 사실을.

누군가는 죽을 것이고, 누군가는 간신히 살아남을 것이다.

마그리트를 대면한 순간 혼돈의 강자들은 각자의 정의문답을 선택했다. 청허는 그들을 붙잡을 수 없었다.

자신의 삶을 택한 사람들을 어찌 비난할 수 있을까.

거꾸로 걷는 마그리트가 다가오고 있었다.

땅에서 검은 빗줄기가 솟아오르더니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중력이 일그러지며 전방의 사람들이 허공에 떠오르고, 시야가 반전되었다. 초대형 망자 마그리트의 권능, '초현실'이 발현된 것이다.

입술을 달싹이던 적응자들도, 비장의 각오를 다지던 십방주들도 일순간 몸을 웅크렸다. 모두가 겁먹은 태아들 같았다.

어느새 눈앞까지 다가온 망자들의 군세를 향해 어느 누구도 무기를 뻗지 못했다.

고개조차 들 수 없는 가공할 두려움.

마그리트의 입에서 발출된 검은색 광선에 몇몇 강자들이 먼지로 화했다. 개중에는 달아나던 군자검 한명관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무력하다.

너무나 무력하다.

어떤 선택을 해도 무용한 세계.이런 세계에서 무슨 정의문답을 한단 말인가.

선택지 자체가 없는 세계에서, 무슨 해답을 찾고, 무슨 희망을 갈구한단 말인가.

그때, 웅크린 사람들의 곁눈으로 한 자루의 칼이 들어왔다.

검고 길쭉한 칼이었다.

너무나 외롭고.

또 너무나 고독한 칼이었다.

칼은 주저앉은 사람들의 곁을 무심히 지나, 서슴없이 망자들의 군세를 향해 다가갔다. 지독한 공포 속에서 간신히 고개를 치켜든 신녀방주는 우연히 그 모습을 보았다.

안 돼······. 그녀는 오감이 일그러진 세계에서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그러나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말려야 하는데, 말릴 수가 없었다.

하늘 높이 솟아오른 검은빛 해일이 사내를 향해 짓쳐왔다.

신녀방주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꼭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신녀방주 자극령은 평생토록 잊을 수 없을 광경과 마주했다.

검은 해일이 하얗게 갈라지고 있었다.

단 한 줄기의 빛이 해일을 가르며 길을 내고 있었다. 초현실이 붕괴하고 있었다. 일그러졌던 오감이 되돌아오고, 중력이 제자리를 찾고 있었다.

저 두려운 망자, 거꾸로 걷는 마그리트가 끔찍한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그럼 바다를 갈라 버리면 돼.

망연히 바닥에 주저앉은 신녀방주의 머릿속으로 재환의 대답이 맴돌았다. 신녀방주뿐만이 아니었다.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같은 심경이었다.

남해방주도, 학림방주도, 뇌신방주도, 화왕방주도.

모두가 그 순간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저것이 바로 이 '불가능한 세계'에 대한 '불가능한 대답'이라는 것을. 누군가가 몸을 떨었고, 누군가가 신음을 토했다. 그리고 누군가는 어쩐지 그립다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치에 맞지 않아."

검을 꽂은 채로 마그리트의 영압을 버티던 무극방주 신무극이 말했다. 그러자 누군가가 대답했다.

"이치에 맞지 않지."

"지극히 무모하다."

"무모하지."

청허가 웃었다.

"무모하기에, 한없이 순수한 대답이지."

누구나 알고 있지만 할 수 없는 대답. 현실이라는 괴물에 매몰되어 오답으로 치부되어 온 대답.

청허는 홀로 칠흑의 바다에 맞서 길을 내는 사내의 등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저 무모함을 지키기로 했네."

검을 뽑은 청허가 갈라진 검은 해일을 향해 걸어갔다.

"······그런가."

무극은 안다.

저 길은 '불가능한 길'이다. 당장의 기적에 현혹되어 빨려 들어간다면 결코 돌아올 수 없게 되는 길이다.

그럼에도 무극은 대답했다.

"그렇다면 나도 함께하지."

무극방주의 검이 거친 노호성을 터뜨렸다. 창천의 강대한 영력이 검에 깃들며, 망자의 해일이 쪽빛 검세에 찢겨 나갔다.

그러나 끝없이 몰려오는 망자들이 갈라진 바다의 길을 다시 채워가고 있었다.

그때, 좁혀지는 길을 지켜낸 이들이 있었다.

"······십방주 체면이 말이 아니로군."

"부끄럽습니다."

남해방주 카이만과 학림방주 제갈명이었다.

선두에서 재환이 터놓은 길을 청허가, 청허가 지켜낸 길을 다시 무극이 지켰다. 무극이 지킨 길은 또 다른 십방주들이 맞서서 넓히고 있었다.

모두 무언가에 홀린 듯한 얼굴들이었다.

불가능한 길.

그 길을 지켜내기 위해 검을 휘두르며, 그들은 조금씩 어떤 이야기의 일부가 되고 있었다.

혼돈이 수백만 년 동안 기다려 온 이야기. 설령 모든 것이 다시 한번 절망으로 귀결될지라도, 끝까지 지켜보고 싶은 그런 이야기.

그 이야기의 끝자락에 간신히 탑승한 뇌신방주가 어쩐지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화왕방주 님?"

"왜. 바쁘니까 말 걸지 마!"

"이런 말하긴 좀 부끄럽지만, 그래도 누군가에게 꼭 말하고 싶은 기분이라서 말입니다."

"뭔데."

"지금 저, 멋지지 않습니까?"

소형 망자 열댓 기가 화왕방주의 검극에 스러졌다. 뒤이어 달려든 망자의 대열이 뇌신방주의 뇌신지기에 가루가 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망자가 남아 있었다. 베고, 베고, 또 벤다.

길의 후미를 지키던 화왕방주도 서서히 피로가 쌓여가기 시작했다.

길이 조금씩 좁아지고 있다.

지킬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든다.

그럼에도 나아간다. 설령 이 길이 여기서 끝날지라도, 이 길을 지킨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환청일까? 문득 뒤를 돌아본 화왕방주의 눈빛이 흔들렸다.

잠시 후, 다시 앞을 본 화왕방주의 눈빛에는 의심의 그림자가 없었다. 그는 안심하고 눈앞의 망자들을 베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확신했다.

이 길은 지켜질 것이다.

왜냐하면, 고르곤 전체가 그들의 길을 지키기 위해 달려 나오고 있었으니까.

*

그리고 일주일 뒤.3대 망자 「마그리트」가 소멸했다는 소식이 "혼돈" 전역을 강타했다.

Episode 9. 삼성회동(三城會同) (1)

「결국 모든 것은 삶의 문제다.」

―"이달의 혼돈" 수습기자, 레니우스 벨

*

서쪽 성채 만티코어.

초대형 망자 「마그리트」가 소멸했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금천방주 임진홍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뭔 개소리야?"

그럴 리가 없었다.

초대형 망자가 어떤 존재인가.

"위대한 땅"의 기준으로 무려 9차 적응자 수준, 계급으로 치면 최소 중장급의 인사들이 나서야 비로소 상대할 수 있는 괴물.

"혼돈"에도 고작 3기밖에 존재하지 않는 무시무시한 괴물이 바로 초대형 망자인 것이다.

"그럴 리가 없잖아."

금천방주 임진홍은 재차 사실 확인을 요청했다.

금천방의 정보조직들이 고르곤의 사건 조사를 위해 총동원되었다.

그리고 나흘 뒤, 고르곤 인근의 금천방 북쪽 지부가 모조리 궤멸했다는 소식이 금천방주에게 전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