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1. 백억 번의 찌르기 (9)
설마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게 아니고서야 눈앞의 괴현상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저게 각성이 아니라면 대체 뭐란 말인가?
하지만 멀거니 경악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무수히 늘어난 검의 빛살들이 비스트레인 자신을 노리고 날아드는 중이었으니까.
받아치는 무게감이 현격히 증가하고 있었다.
그는 정신없이 클로를 휘둘러 빛살들을 막아냈다.
막고, 막고 또 막고.
그렇게 모두 막아냈다고 생각했을 때, 비스트레인은 이미 자신이 당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이게 대체 무슨?"
존재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갑작스레 찾아왔다. 비스트레인의 몸에는 어떤 치명적인 상처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대체 어디를 공격당한 걸까.
"걱정 마라. 아마 죽진 않을 거다. 어쩌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울지도 모르지만."
재환이 공격한 것은 비스트레인의 영혼이 아니라, 탑의 바깥에서 들어와 그의 영혼으로 이어진 어떤 선(線)이었다.
재환은 모르고 있었지만, 그 선은 "위대한 땅"에서는 링크(Link), 또는 송과선(松科腺)이라 부르는 것이었다.
육신과 영혼을 이어주는 선.
재환의 찌르기에 의해 그 선은 거의 넝마가 된 채 끊어져 있었다.
크아아아아아아!
비스트레인은 끔찍한 통증 속에 몸부림쳤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잘 들어라."
숨을 크게 들이켠 재환이 말을 시작했다.
"인간은 네 녀석들의 생각처럼 사고 팔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레벨이니 스테이터스니 하는 같잖은 잣대를 이용해 멋대로 수치화하고, 값을 매길 수 있는 상품이 아니란 얘기다."
이제 "악몽의 탑"은 눈에 보일 정도로 격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재환은 계속해서 말했다.
"나는 더 이상 네놈들이 깔아 놓은 시나리오대로 따라가지 않는다. 나는 여길 부수고 다음 층으로 올라갈 거다. 그렇게 오르고 또 올라가서, 네 녀석들이 만들어 놓은 빌어먹을 세계의 멸망을 보고야 말겠다."
비스트레인은 이제 자신이 만든 상품에게서 두려움을 느꼈다. 4차 이상의 고차(高次) 적응자조차, 눈앞의 재환과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망아」의 경지에 오른 각성자.
시스템에 의해 수치화되지 않고, 그 무엇으로도 재단되지 않는 존재가 되어 버린 자.
탑의 주인인 비스트레인의 눈으로도 재환의 능력치는 읽히지 않았다.
+
[사용자 정보]
이름 : ??????????????
타이틀 : ??????????????
클래스 : ??????????????
고유 능력 : ??????????????
보유 스킬 : ??????????????
+
고통 속에서 비스트레인은 소리쳤다.
"제발 그만 두십시오, 제발! 다음 층······ 다음 층 같은 건 없습니다!"
"아니, 있어. 다음 층은."
그간 재환이 '다음 층'을 운운하며 비스트레인을 공격해 왔던 것은, 괜한 오기 때문이 아니었다.
"반드시 있어."
1층에서 99층까지.
재환은 언젠가 남은 생존자가 있을까 싶어 탑의 곳곳을 뒤지다, 탑의 78층 통로에서 다음과 같은 낙서를 발견했었다.
「탑 속의 탑. 악몽 속의 악몽.」
단서는 또 있었다.
탑의 66층. 서큐버스의 의자 뒤편에는 이런 낙서가 새겨져 있다.
「결국 모든 악몽의 탑은 "환상수"의 꼭대기에 있는 '최초의 악몽'의 모방에 불과하다. 요즘 작품을 만들 때마다 내가 하는 생각은 오직 하나뿐이다. 최초의 악몽의 힘을 빌려 쓰는 한, 나는 매번 똑같은 난관에 봉착할 뿐이라는 것. 내가 만든 무수한 탑들은 단지 "환상수"의 꼭대기에 있을 '최초의 악몽'을 유지하기 위한, 한낱 '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마치 어느 예술가의 고뇌 같은 낙서.
재환은 혹시나 이 낙서들이 탑 내에 존재하는 히든 피스의 단서가 아닐까 싶어 틈틈이 메모해 두었다.
비슷한 낙서는 47층에도 있다.
「그래서 나는 감히 이런 불경한 생각에 도달하고 만다. 진정한 창조(創造)의 비밀을 엿보기 위해서, 우리는 위대한 땅의 핵심인 이 "환상수"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줄기'와 '가지'를 거쳐서 도착한 "환상수"의 꼭대기에서, 우리는 '최초의 악몽'과 직접 마주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당시에는 이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이 낙서들은 100층에 도달하기 전까지 재환이 미처 풀지 못한, 탑의 비밀이기도 했다.
하지만 탑의 정체를 깨달은 후부터, 재환에게 이 낙서들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재환은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이것은 이 "악몽의 탑"을 만든 '거장'의 낙서라는 것을.
물론 그가 가진 지식만으로 낙서에 담긴 비유와 상징을 온전히 해독하는 것은 무리였다. 하지만 전혀 소득이 없었는가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탑 속의 탑, 악몽 속의 악몽.
환상수의 뿌리와 줄기, 그리고 가지.
그 꼭대기에 있을 '최초의 악몽'.
이 모든 것은 단 한 가지 사실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 세계는 연결되어 있다.
지금은 그저 가설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충분히 확인할 가치가 있는 가설이었다.
재환은 100층의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그곳을 향해 찌르기를 사용했다. 탑의 천장에 실금이 가기 시작했다. 비스트레인이 절규했다.
"안 돼! 내 탑! 우아아!"
다시 한번, 그리고 또 다시 한번.
「의심」을 통해, 재환은 분명하게 보았다.
이 탑을 구성하는 입자들과, 그 입자들을 결속시키는 에너지의 움직임. 보이지 않는 위쪽에서 끊임없이 아래로 내려오는 거대한 에너지의 흐름.
상류에서 하류로.
끝내는 망망대해로 퍼져 나가는 아득한 산란. 그리고 이곳은 그 대해(大海)의 최말단이었다.
재환은 확신했다. 이 흐름을 따라가면, 반드시 이 세계의 비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100층은, 탑의 끝이 아니라고.
"여기가 뿌리라면, 줄기도 있겠지."
재환의 공격에 천장이 차츰 무너져 내리며, 틈 사이로 하얀빛이 새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안 됩니다! 그 입구로 나가면 당신은 다시는······!"
"잘 있어라."
비스트레인의 의도대로, 언젠가 그는 본 게임에 참가해야만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가진 정보도 부족하고, 가진 무력도 약하다.
당장 악마 비스트레인 하나를 상대하는 것조차 버겁지 않은가.
그는 더 많은 것을 알아야 했고, 더 강해져야 했다.
하얀 빛이 재환을 감싸 안는다.
그 빛의 중심으로 재환은 뛰어들었다.
그는 과거로 가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이 떠난 세계로도 돌아가지 않는다.
그가 선택한 세계는 언제나 현재.
바로 살아있는 지금 이 순간.
그는 그렇게 자신의 생을 향해 나아갔다.
*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1차 재배」 도중 각성자가 발생한 것도 모자라, 그 각성자가 탑을 뚫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비스트레인은 재환이 사라지는 모습을 허망하게 지켜보다가, 힘겹게 몸을 움직여 홀로그램 패널을 실행했다.
'어서 「빅 브라더」에게 이 사실을······.'
그러나 때는 너무 늦었다.
이미 튜토리얼 게임이 붕괴하고 있었다.
게다가 통신도 두절되어 있다.
'젠장, 설마? 안 돼······. 안 된다고!'
육신과 영혼을 잇는 링크가 끊기면서 외부와의 통신이 완전히 단절되어버렸다. 그의 영혼은 지금 "환상수"에 완전히 갇혀버린 채였다.
링크가 끊긴 영혼이 붕괴하는 세계 안에 머무르게 되면, 영혼은 세계와 함께 소멸한다.
'이렇게 끝날 수는 없어······!'
그는 「빅 브라더」에게 보낼 메시지 작성을 취소하고, 재환이 사라진 빛의 통로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악몽의 탑"이 붕괴했다.
[튜토리얼 게임의 내역을 정산합니다.]
[정산 중······.]
[정산 도중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정산이 실패했습니다.]
[현재 "악몽의 탑" 안에 남은 워커를 검색합니다.]
[검색 중······.]
[현재 "악몽의 탑" 안에 워커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
[게임 클리어 실패!]
[튜토리얼 게임이 완전히 종료되었습니다.]
Episode 2. 몰살의 마녀 (1)
「강해지고 싶다면 환상수를 올라가라. 단, 네가 미치지 않을 자신만 있다면 말이다.」
―강철의 군주, 허유
***
끝이 보이지 않는 우림이었다.
시야를 밀도 있게 채운 숲의 활엽수림들.
이글거리는 태양의 열기가 전신에 달라붙어 하얀 알갱이로 말라붙어 갔다.
얼마나 헤맸을까.
재환은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내며 주변을 살폈다.
드디어 찾았다.
수풀의 능선을 따라 나 있는 누군가의 발자국. 재환의 것과 흡사한 모양이었다. 설령 인간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이족 보행을 하는 어떤 무리들이 남긴 것이 틀림없었다.
"악몽의 탑"을 부수고 나온 지 어느새 한 달.
그동안 재환은 이 끝이 보이지 않는 우림을 계속해서 여행해 왔다.
이곳이 정확히 어딘지는 모른다.
악마 놈이 지껄여 대던 "위대한 땅"의 어딘가가 아닐까 추측하긴 했으나, 지명을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처음에는 숲의 열기 때문에 비스트레인이 준 정보에 나온 "위대한 땅"의 12지대 중 가장 덥다는 '화염 지대'가 아닐까 했는데, 계속 걷다 보니 아닌 것 같았다. 화염 지대의 명물이라는 '불타는 나무'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뭐라도 마주치다 보면 알게 되겠지.
재환은 그런 생각으로 계속해서 걷고 또 걸었다.
종종 이 세계의 괴수들과 마주치기도 했는데, 이곳의 괴수들은 탑의 괴수들과 구별되는 특징이 하나 있었다. 바로 모든 개체에 '뿔'이 달려 있다는 것이었다.
적게는 한 개에서부터, 많게는 다섯 개까지.
지금까지 만난 괴수 중 제일 강했던 녀석은 머리에 뿔 다섯 개를 박은 늑대였다. 녀석은 찌르기를 맞고도 한 방에 죽지 않았다. 한참이나 배를 잡고 낑낑대던 늑대는 몇 방의 찌르기를 더 얻어맞고서야 그대로 절명했다.
...여기 괴수들은 모두 약한 건가?
빙룡을 잡는 데만 수십 년이 걸렸던 기억 때문일까. 재환은 자신이 강해진 것인지, 아니면 이곳의 괴수들이 약한 것인지 잘 가늠이 되지 않았다.
물론 재환이 그동안 괴수들만 만나왔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얼마 전, 재환은 지성체로 보이는 정체불명의 무리와 조우한 적이 있었다.
고대의 수도승들처럼 하얀 예복 같은 것을 두른 이족(異族)의 무리였는데, 초록색 피부에 머리에는 곤충처럼 더듬이가 한 쌍씩 돋아나 있는, 기이한 모양새였다.
"하찮은 인간■■■■ 따위가 ■■■."
"어째서 ■■■ 불쾌한 ■■."
무슨 말인지는 알아듣기 힘들었지만(정확히는 알아듣기 싫은 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어쨌든 멀쩡히 옷도 갖춰 입은 녀석들이고, 또 모처럼 만난 지적 생명체였다. 그래서 재환은 그들과 의사소통을 해 보려고 꽤나 노력했다.
하지만 「의심」을 발동시켜도 그들의 언어 구조를 잘 파악할 수가 없었다. 먼저 달려든 것은 무리의 선두에 있던 이족들이었다.
"■■■ 뿔! ■■."
손가락질하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자신이 허리춤에 차고 다니는 괴수의 뿔을 말하는 것 같았다. 얼마 전 뿔이 다섯 개 박힌 늑대를 죽이고 얻은 것이었다.
"이거?"
"■■ 인간 따위■■■ 오각수의 뿔■■■."
"그렇지. 난 인간이고, 이건 뿔이다."
어째 말이 좀 통하는 것도 같다.
"■■■ 뿔!"
이족들 중 몇몇이 재환을 향해 다가왔다.
미끈한 더듬이들이 흔들리며 다가오자 재환은 경계심을 느꼈다.
"잠깐만. 너무 가까이 오지 마라."
"■■■."
뭐라고 하는 건지 전혀 모르겠다.
뿔이 어쩌고 하는 것 같긴 한데.
고민하던 재환이 뿔을 흔들며 말했다.
"좋다. 이걸 줄 테니까, 여기가 어딘지······."
갑자기 이족들이 칼을 뽑아 달려들었다.
단순한 위협이 아니었다. 명백한 살의를 가진 칼날의 움직임.
재환은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망연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태양 비슷한 게 떠 있었다.
날이 참 덥다.
"이봐."
한 번 피하고.
"더듬이들."
두 번 피하고.
"한 번만 더 그러면 죽인다."
세 번 피하고.
"죽어라."
잠시 후, 이족들은 모조리 수풀 속에 드러누워 있었다. 푸른 피를 흘리던 이족들의 육신은 가루가 되어 소멸했다.
재환은 마지막 남은 이족의 더듬이를 손가락으로 잡아당기며 물었다.
"여긴 어디냐?"
"어떻■■■ 인간 따위■■■."
쭈우우욱!
"여긴 어디냐고."
"환상수 ■■■ 혼돈······■■■ 게게게겍!"
쭈우우욱!
"알아듣게 말해. 너흰 누구냐? 악마냐?"
"■■■ 우리는 위대한 녹명의■■■······."
쭈우우욱!
"알아듣게 말해."
"흐어어, 흐어어어."
쭈우우욱!
쭈우우욱!
쭈우우욱!
그렇게 얼마나 잡아당겼을까. 마침내 이족의 눈이 하얗게 돌아갔다. 그리고 재환은 이족의 말을 정확히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인간. 죽인다. 반드시."
그것이 이족의 마지막 말이었다.
이족은 스스로의 혀를 깨물어 삼키더니, 이내 하얀 가루가 되어 흩어지고 말았다.
...제법 강단이 있는 놈들이었나.
마치 다시 살아 날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과감한 자살. 재환은 그 의지력에 조금 감탄해서 죽은 이족의 더듬이 조각을 숲속 둔덕에 꽂아 주었다.
아쉽게도 이족들에게선 별다른 정보는 얻지 못했다. 그래도 약간의 수확은 있었다.
바로 이족 무리의 봇짐 속에 있던 전리품들이었다.
대부분은 쓸모를 알 수 없는 것들이었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꽤 유용했는데, 지금 재환이 등허리에 매달고 있는 작은 주머니가 그것이었다. 「의심」을 통해 분석해 본 결과 주머니의 아이템 정보는 다음과 같았다.
+
[아이템 정보]
이름 : 작은 차원 배낭
설명 : 아공간을 이용해 다량의 짐을 싣는다. 최대 2입방미터의 공간을 제공한다.
+
왜인지 "악몽의 탑"에서 빠져나온 후로 재환은 인벤토리를 비롯해 인터페이스 시스템이 제공하는 거의 모든 편의 기능들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비스트레인의 말에 따르면 인터페이스 시스템은 "위대한 땅"을 비롯한 차원계 전역에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라 했는데.
어쩌면 탑을 나오기 직전에 겪은 기묘한 경험 때문인지도 모른다.
육신의 모든 것이 분해되고 새롭게 채워지던 감각.
「의심」을 사용해 아이템 정보를 봐야 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인터페이스의 소멸로 기본 스킬인 [아이템 감정]까지 못 쓰게 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런 재환에게 차원 배낭은 그야말로 시기적절하게 나타난 아이템이었다.
재환은 이족들이 남긴 알 수 없는 물건들을 배낭 안에 모두 챙겨 담았다.
이건 뭐지? 보석인가?
원래 보석 세공이라도 하는 녀석들인지, 이족들은 잘 깎인 수정 같은 것을 하나씩 갖고 있었다. 청색의 수정이 제일 많았고, 그다음이 적색이었다. 흑색도 둘 정도 있었는데, 그건 마지막까지 그가 더듬이를 잡아 당겼던 이족의 짐에서 나온 것이었다.
어쩌면 꽤 귀한 물건인지도 모른다.
재환은 그것들을 모두 배낭에 담았다.
나머지는 버려야 하나.
이족들이 걸치고 있던 장비들은 배낭 안에 넣기에 그 부피가 너무 컸다. 이것들을 어떻게 처분할까 고민하던 차. 갑자기 재환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빙룡검이 웅웅, 하고 울었다.
"또냐?"
웅웅.
"알았다."
영문은 모르겠지만, "악몽의 탑"을 빠져나오고 나서부터 빙룡검의 상태가 이상해졌다. 투명한 검신에 흐린 검은 빛이 돌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자아(自我)라도 생긴 건지 툭하면 웅웅 울어대곤 했다.
특히, 지금처럼 배가 고플 때면 더욱.
재환은 빙룡검을 뽑아 더미처럼 쌓인 장비들 위에 꽂았다. 빙룡검의 칼날이 입처럼 쪼개지더니, 이족들의 장비를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마치 걸신들린 요괴 같은 것이 깃들기라도 한 것처럼······.
재환은 그걸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장비들을 먹어 치울 때마다 검의 색깔은 더욱 영롱한 검은 빛으로 변해 갔다.
"흐음······."
빙룡검의 변화에 대해 짐작 가는 바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아직은 심증뿐이기에 내버려 두기로 했다.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으니까.
이족들을 죽이고 얻은 마지막 소득.
그것은 바로 이 '숲지대'의 지도였다.
지구의 것과는 독도법이 다르고, 조악하게 만들어진 것이라 해독하기는 어려웠지만, 「의심」을 사용하면 되었기에 별문제는 없었다.
그는 지도의 이름을 읽어 보았다.
환...상수? 혼...돈? 이렇게 읽는 게 맞나.
지도의 상단부에는 "환상수(幻想樹)-혼돈(混沌)"이라고만 쓰여 있었다. 그러고 보니 탑의 제작자인 뮬라크가 남긴 낙서에도 '환상수'라는 말이 등장했었다.
「······내가 만든 탑들은 단지 "환상수"의 꼭대기에 있을 '최초의 악몽'을 유지하기 위한, 한낱 '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그렇다면 그가 부수고 나온 악몽의 탑은 "환상수"라는 나무와 연결된 어떤 장소일 가능성이 컸다.
즉, 악몽의 탑을 뚫고 나와 마주한 이 장소 또한, "환상수"와 매우 가깝거나 밀접한 관련이 있는 장소일 것이다.
확실한 것은 이 장소가 비스트레인이 준 정보에는 없는 지역이라는 것이었다.
...곤란하군.
아마 이족 무리들은 지도의 X 표시가 쳐져 있는 어떤 장소를 향해 움직이는 중이었던 모양이다. 짐작건대 군락이나 마을일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재환은 한참이나 지도를 본 후에야 간신히 자신의 위치를 어렴풋이 특정해 낼 수 있었다.
일단은 이곳의 정보가 필요하다.
얼마간은 운이 좋아서 약한 적들만 만나왔지만, 앞으로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모두 저 뿔 짐승들이나 녹색 이족들처럼 약하지는 않을 테니까. 이곳의 주민들을 만나서 최대한 많은 정보를 얻는 것이 급선무였다.
새로운 세계인만큼 초보자가 되었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게 앞으로의 생존에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그게 이 세계와 타협하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세계에 대해 알아가되 세계와 타협하지 않는 것.
그것이 악몽의 탑을 깨고 나오며 그가 세운 대원칙이었다.
어쩌면 그처럼 탑을 부수고 나온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재환은 가능하면 살아있는 인간을 보고 싶었다. 자신처럼 긴 악몽을 견뎌내고 마침내 '상품'에서 벗어난 인간들이 이곳에 있을 터였다.
언젠가 비스트레인도 말한 적이 있었다.
'인류라는 종은 "변경"에 제법 많이 흩어져 있습니다. 294월드의 인류는 그중의 하나일 뿐이지요.'
녀석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가 발을 디딘 이 세계에도 상당수의 인간이 이미 존재하고 있을 터였다. 그것도 탑을 클리어한 인간들이.
재환은 궁금했다.
탑을 탈출한 인간들은 어떤 행색을 하고,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탑을 나온 이후의 인간들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게 되는지.
그렇게 얼마나 헤맸을까.
널찍한 활엽수의 잎을 치우던 재환이 멈춰 섰다.
찾았다.
발자국이 이어진 방향에서 병장기 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발견했던 발자국의 주인공들이 틀림없었다.
수풀 사이로 네댓 명의 일행이 대형을 갖춘 채 익숙한 뿔 괴수를 사냥하는 모습이 보였다.
인간들이었다.
Episode 2. 몰살의 마녀 (2)
클랜 레드 폭스의 간부, 강훈은 오늘 기분이 꽤 좋았다. 오랜만에 쓸 만한 사냥감이 걸렸기 때문이다.
"다들 포지션 제대로 지키고, 연습한 대로만 해."
"옙!"
강훈의 말에 팀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괴수를 포위했다. 그들이 상대하고 있는 것은 뿔이 하나 달린 중형의 괴물이었다.
일각수(一角獸).
뿔의 개수에 따라 일각수, 이각수 등의 명칭이 붙는 이 괴물들은, 웬만큼 위대한 땅에서 굴러본 「적응자」가 아니면 상대하기 힘든 괴수들이었다.
보통은 한 사람의 '1차 적응자'가 일각수 한 마리를 상대할 수 있다.
그리고 현재 팀 내에 1차 적응자는 강훈 한 사람뿐이었다.
'아직은 내가 없어도 되겠는데.'
각수 사냥꾼들은 보통 다섯을 한 조로 일각수 한 마리를 무난히 상대할 수 있게끔 파티를 꾸린다.
그런데 이 파티는 조금 특별했다.
파티원 다섯 중 강훈을 포함한 네 명은 사냥 전문 클랜인 '레드 폭스'의 멤버였기 때문이다.
강훈을 제외하고는 전원이 1차 적응자도 안 되는 수준이었지만, 팀을 짜서 일각수를 사냥하는 것에는 이미 도가 튼 녀석들이었다. 곧 있으면 다들 1차 적응자로 거듭날 인재들이기도 했다.
[리더, 정말 속행하실 겁니까?]
[그래.]
[하지만 저 여자, 뭔가 배경이 있는 것 같은데······.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걱정하지 마라. 내가 책임진다.]
강훈은 그의 옆에서 파르르 떨고 있는 여자를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그녀는 이 파티의 유일한 이방인이었다.
흑색 로브로 몸을 감싸고는 있지만, 그 미모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로브 사이로 언뜻 드러나는 선홍색 머리카락과 새하얀 피부. 특히나 눈에 가는 것은 여자가 종종 실수로 내비치는 장신구와 아이템들이었다. 하나같이 고급품들이 아닌 것이 없었다.
사냥 전문 클랜 레드 폭스.
그들이 사냥하는 것은 사실 괴수가 아니라 같은 '적응자'라는 사실은, 이 근방을 주름잡는 고차 적응자들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사냥감 하나가 그들의 손아귀에 제 발로 들어온 것이다.
걸리는 점이 있다면 여자의 소속과 배경이 확실치가 않다는 것이었지만, 강훈은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파티에 가입시킬 때 영력 측정기를 미리 돌려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 봤자 「무적응자」 수준의 여자다. 배경이 있어 봤자지.'
저 아이템들도 보나 마나 자신의 미모로 다른 여행자들을 홀려 뜯어낸 것일 터. 로브 표면으로 드러나는 여자의 육감적인 굴곡을 살피던 강훈의 눈빛이 탐욕으로 물들었다.
'지금까지야 그런 게 먹혔는지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네 생각대로 안 될 거다.'
그때, 뭔가를 실수한 여자가 비명을 질렀다.
"어머, 죄송해요!"
"...괜찮습니다."
자신의 가죽 갑옷에 박힌 단검을 뽑은 강훈이 웃으며 말했다.
'이년이.'
사냥에 나선 것이 처음인지, 여자의 행동거지는 실수투성이였다. 포지션이 엉망인 것은 물론이고, 공격 타이밍을 잘못 잡아서 지금처럼 아군을 공격하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 싸우고 있는 일각수를 이쪽으로 데려온 것도 여자였다.
'귀여우니까 한 번은 봐 준다.'
그런데 잠시 후, 무슨 짓을 한 것인지 여자가 일각수 한 마리를 더 몰고 왔다.
"읏! 죄송해요!"
"괜찮습니다. 오히려 잘됐군. 한꺼번에 죽이자고!"
두 마리까지는 해볼 만하다.
강훈은 1단계의 막바지에 이른 적응자였기에, 일각수 두 마리 정도는 혼자서 상대하는 것이 가능했다. 심심했는데 오히려 잘됐다 싶었다.
일각수도 잡고, 여자도 잡고.
그때까진 모든 것이 괜찮았다. 어디까지나 일각수가 세 마리가 되기 전까지는 그랬다는 얘기다. 세 번째 일각수를 몰아온 여자가 또 말했다.
"아앗, 죄송해요!"
"······조심해, 다음부터는."
강훈은 약간 정색했다.일
각수 세 마리는 그도 상대하기 벅찬 수준이었다.
'도대체 뭐지?'
그 짧은 사이 일각수가 세 마리가 되었다. 대체 어디서 일각수들을 자꾸 불러오는 것인지,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그나마 일각수니까 다행이지, 혹여 이각수(二角獸)라도 나타난다면······.
"죄송해요오―!"
손을 팔랑팔랑 흔들며 달려오는 여자의 뒤를 성난 괴수가 쫓고 있었다. 커다란 활엽수를 뭉개며 나타난 거체. 체고가 십피트는 족히 되어 보였다.
게다가 머리로 돋아난 '두 개'의 건장한 뿔.
'······저 망할 년이?'
*
그리고 재환은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저러다 다 죽겠는데.
뿔 한 개짜리 괴수랑은 그럭저럭 맞서 싸우는 듯하더니, 뿔 두 개짜리 괴수가 나타나자 죄다 나가떨어지고 있다.
재환은 조금 실망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 '탑'을 졸업한 녀석들이면 다들 엄청난 실력자들일 거라 생각했는데.... 싸우는 꼴들을 보니 탑을 어떻게 클리어한 것인지조차 의문일 지경이었다.
거기에 행동거지가 묘한 저 여자.
사냥을 하려는 건지, 사냥을 망치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저 중에서 저 여자가 제일 세 보이는데. 서로 사이가 안 좋은가?
재환은 고민했다. 도와주고 싶긴 한데, 정확히 무슨 상황인지 모르니 쉽게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일단 조금만 더 지켜보자.
*
흙먼지와 함께 마침내 세 마리의 일각수가 쓰러졌다. 그야말로 혼신을 다한 싸움이었다.
'이제 저놈만 남았나.'
강훈이 1단계 막바지에 이른 적응자가 아니었더라면, 또 눈앞의 이각수가 덜 자란 개체가 아니었더라면, 몇 번은 죽어 나갔을 전투였다.
클랜 마스터의 도움으로 상위 클랜인 「화왕방(火王房)」에서 중급 스킬을 구비해 두었던 것도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중급 스킬, 「화왕의 숨결」.
적응자의 검에 은은한 염화(炎火)를 불러일으킴으로써 전투력을 배가시키는 「화왕의 숨결」은 아직 영력을 검에 입힐 수 없는 1차 적응자들에게는 그야말로 황송한 위력의 스킬이었다. 이 스킬이 있었기에 강훈은 여기까지 버틸 수 있었다.
과도한 영력 소비에 현기증이 일었지만, 조금만 더 버티면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다들 조금만 더 버텨라! 저 녀석도 한계야!"
지친 이각수가 경계심 어린 태도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이각수라니, 정말이지 뜻밖의 수확이었다.
굳이 여자의 아이템이 아니더라도, 이각수의 뿔을 가져갈 수만 있다면······.
"저도 도울게요! 이얍!"
"크헉?"
강훈은 자신의 허벅지에 꽂힌 여자의 단검을 보며 부들부들 떨었다. 여자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하핫, 죄송해요!"
"이 씨발년아!"
"씨발년? 너무하시네요. 도우려고 한 건데!"
달려오는 이각수.
날아드는 뿔.
카앙, 하는 소리와 함께 강훈의 검이 부러졌다.
이각수의 그림자가 강훈의 전신을 뒤덮었다.
"젠자아아아아앙!"
그리고 다음 순간.
눈부신 빛살 같은 것이 숲을 일직선으로 가로질렀다. 강훈을 향해 달려들던 이각수의 거체가 일순간 방향을 잃더니 굉음을 내며 무너져 내렸다.
푸화하학!
이각수의 몸에서 터져 나온 푸른 체액이 강훈의 얼굴을 적셨다. 강훈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볕을 가리던 이각수의 거대한 몸피가 사라지자 흑색의 아우라가 넘실거리는 검신(劍身)이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기분 나쁠 정도로 섬뜩한 예기가 깃든 칼.
한눈에 봐도 대단한 명검이었다.
이어서 그 검의 주인이 눈부신 태양빛 아래 모습을 드러냈을 때, 강훈은 탄식을 금치 못했다.
어디 수십 년쯤 골방에 처박혀 있다가 나온 양 허름한 모습. 명검의 주인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너저분한 몰골의 사내였다.
강훈은 그 몰골을 황망히 올려다보다가 불현듯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누, 누구십니까?"
그리고 그 말은, 재환의 귀에 다음과 같이 들렸다.
"■■누■구■■?!"
정말이지 쉬운 일이 하나도 없다고, 재환은 생각했다.
*
잠시 후, 재환은 일행과 간단한 의사소통을 나누는 것에 성공했다. 「의심」을 한계치까지 사용한 결과였다.
"저기, 재환 님이라고 하셨습니까?"
"응."
"그냥 지나가던 행인이시라고요?"
"응."
"게다가 이곳 말도 못하시고요?"
"응."
"이상하군요. 여기서 언어 장벽이 발생하는 경우는 극히 드문 일인데······."
"뭐."
"...그런데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이각수 사체를 저희 파티가 가져도?"
"응."
"무르기 없습니다?"
"응."
"하핫, 쿨하기도 하시지!"
껄껄 웃어젖히는 강훈은 기분이 무척 좋았다.
당연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오늘 무려 이각수를 사냥했다. 게다가 그 사체를 온전히 양도받았다.
"으하하핫, 으하하하핫!"
재환은 그런 강훈을 가만히 보다가 말했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그야 좋을 수밖에요! 무려 이각수입니다! 이각수 모르십니까?"
"응."
"······하하핫! 농담도!"
일각수 파티로 이각수를 잡았다. 정말이지 신의 축복이 깃들지 않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무적응자는 상처를 입히는 것조차 힘들고, 1차 적응자도 전력을 기울여야 타격을 줄 수 있는 괴수. 그게 이각수다. 그들 파티의 전투력을 모두 합쳐도 이각수를 사냥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절대로' 불가능했다.
단순히 근성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시스템이 통계화시킨 그들의 능력치 정보를 합산하자면, 그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저 이각수를 사냥할 수 없었다.
"이곳에서 저 정도 괴물은 어느 정도로 강한 거지?"
"뭐.... 저희한테야 강력한 괴수지만, 저희 클랜장쯤 되면 쉽게 때려잡는 녀석이죠."
그 말을 하는 강훈의 표정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클랜인 레드 폭스는 이 근방에서는 최고의 상승세를 자랑하는 중형 클랜이었기 때문이다.
"클랜장이라는 사람은 강한 편인가?"
"...설마 진짜로 모르셔서 물으시는 겁니까? '레드 폭스' 들어 보신 적 없으십니까?"
"응."
강훈의 눈썹이 조금 꿈틀거렸다.
"근데 아까부터 반말이신데. 진짜로 말이 서투르신 건 맞습니까?"
"응."
"허...."
강훈은 꾸역꾸역 올라오는 화를 참으며 애써 웃었다. 영 기분이 상하기는 했지만, 오늘 얻은 소득에 비하면 이 정도를 인내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이각수를 잡았으니, 아마 그는 이번 사냥을 끝내고 돌아가면 2차 적응자로 격상될 것이다.
한편, 파티의 맨 뒤에서 그 꼴을 지켜보던 실수투성이 여자는 배가 아팠다.
전투가 지속되는 내내 무려 세 마리나 되는 각수들을 추가로 끌고 온 여자. 얼핏 모자란 것처럼 굴었던 그녀는, 예상대로 평범한 여인이 아니었다.
'아휴, 진짜 아까워 죽겠네.'
혼돈십방(混沌十房) 중 흑림방(黑林房)의 암살자, 미노(美露).
그녀는 암살자들 사이에서 '몰살의 마녀'라고 알려져 있는 인물이었다.
'몰살의 마녀'가 겨우 '일각수 파티'에 들어간다?
알 만한 사람이 들었다면 껄껄 웃을 일이었다.
그녀는 혼자서 삼각수까지 상대할 수 있는 상당한 수준의 적응자였으니까. 그런 그녀가 일각수 파티에 가입했다면, 그 이유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하필 이런 의뢰를 받아 가지고.'
미노는 얼마 전, 한 적응자로부터 레드 폭스의 일각수 파티를 처리해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문제는 이게 흑림방을 통해 공식적으로 들어온 의뢰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흑림방에 소속된 암살자들은 원칙적으로 개인 의뢰를 받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그녀가 직접 손을 쓰지 않고, 귀찮게 괴수들을 끌고 왔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면 곤란했기 때문에.
'아, 진짜······. 이각수면 전부 끝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고유 스킬 「유인」은 그녀에게 '몰살의 마녀'라는 별명을 안겨 준 능력이었다. 이 스킬 덕분에 그녀는 주변에 있는 괴수들을 손쉽게 자신의 근처로 끌어올 수 있었고, 지금까지 몇 번이나 이런 식으로 '인간 사냥꾼'들을 처리해 왔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였고, 순조로웠다.
자신을 '지나가는 행인'이라고 주장하는 저 인간이 나타나 이각수를 때려잡기 전까지는 말이다.
'지나가는 행인 같은 소리 하네....'
미노는 강훈과 사내들이 어깨에 둘러 멘 이각수의 사체를 흘끗 보았다.
이각수를 관통하던 검신의 모습이,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했다. 다른 녀석들은 제대로 못 본 모양이지만, 미노는 아주 가까운 위치에서 그 일격을 보았다.
물론 사내가 이각수를 사냥했다는 사실 자체는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이각수를 죽일 수 있는 자들은 혼돈을 뒤지면 꽤 찾을 수 있으니까.
문제는 사내가 이각수를 죽인 방법이었다.
사내는, 이각수를 그냥 '찔러서' 죽였다.
Episode 2. 몰살의 마녀 (3)
스킬을 쓰지 않은 채 이각수를 죽이는 일.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미노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대부분의 적응자들에게 불가능한 일이었다. 혼돈 십방의 방주들 정도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엄청난 수준의 강자가 왜 이런 곳에 있단 말인가?
"재환 씨라고 하셨죠?"
그녀가 사내를 향해 성큼 다가가자, 주변의 레드 폭스들이 진저리를 치며 서너 걸음을 물러났다.
아마 자신이 사내에게 호감을 보인다 생각한 모양이었다. 지금으로서는 편리한 오해였다.
"응."
"혹시 명가에서 오신 분이신가요?"
'명가'라는 말에 레드 폭스들의 눈빛도 묘하게 바뀌었다. 이 땅에서 '명가'라 함은 가리키는 바가 명백했기 때문이다.
"간혹 "위대한 땅"에서 온 명가의 자제분들이 유희 삼아 이곳을 들른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혹시―"
사내는 그 말에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미노도 당연히 명가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명가 출신들은 대개 무리 지어 움직이는 데다, 입은 옷부터 화려해서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명가를 들먹이며 사내의 곁에 붙어선 것은,
―스킬, 「정밀 탐색」을 발동합니다.
바로 이 스킬을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스킬, 「정밀 탐색」이 실패했습니다.
...이 거리에서 탐색이 실패했다고? 희한한 일이지만, 방호 메시지가 뜨질 않은 걸 보면 정신 방벽계 스킬의 영향은 아니었다. 아마 지금 "인터페이스 시스템"이 좀 불안정한 모양인데.
이를 악문 미노는 다른 탐색 수단을 준비하며 사내의 행색을 다시 살폈다.
제일 눈에 띄는 것은 사내의 투박한 걸음새.
이상한 일이었다. 이각수를 한 방에 찔러 죽일 강자라면, 당연히 좋은 보법이나 주법을 익혔어야 하는데.
보법이나 주법 스킬은 생존에 가장 중요한 스킬이었다. 자신보다 강한 상대를 만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갈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내는 그런 종류의 스킬을 전혀 익힌 것 같지 않았다.
더욱 이상한 일은, 그다음에 일어났다.
―해당 인물의 영력 수치는 '0'입니다.
무심코 사용해 본 영력 측정기에 믿을 수 없는 숫자가 떠올랐다.
보유 영력이 0이라는 것은, "위대한 땅"의 방식으로 말하자면 다음과 같은 의미였다.
이 사내는, 「무적응자」다.
"여기서 잠시 쉬었다 갑시다."
리더인 강훈이 세 명의 사내를 이끌고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곧 강훈 쪽에서 영력으로 빚은 매가 하늘을 날았다.
전서응(傳書鷹) 스킬.
오늘의 수확을 클랜에 보고하는 모양이었다. 미노는 재환과 함께 베어진 나무의 둥치에 걸터앉았다.
내려앉은 침묵.
미노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당신, 정체가 뭐죠?"
흑림방은 정확한 의뢰 수행을 위해 소속된 암살자들에게 전용 측정기를 제공한다. 혹시나 암살 대상이 실력을 숨기고 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기량을 조절할 수 있는 고차 적응자들조차 피해갈 수 없는 흑림방의 측정기. 측정기에 찍힌 사내의 영력 계수는 이곳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아래였다.
"그쪽이 이각수를 한 방에 잡는 걸 봤어요."
꽤 의미심장한 서두라고 생각했는데 대답이 없었다. 너무 성급하게 몰아붙였나 싶어 미노는 좀 더 예의를 차리기로 했다.
"단순한 찌르기로 이각수를 죽일 수 있는 적응자는 "혼돈" 전체를 뒤져도 거의 찾을 수 없어요. 대체 어디에서 온 누구신가요?"
"······"혼돈"이 뭐지?"
미노는 잠시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그리고 툭 쏘아붙이듯 물었다.
"지금 나랑 장난치자는 건가요?"
"아니."
"그런데 왜 그런 말을 해요?"
"모르니까."
"...뭘 모르는데요? "혼돈"을 모른다고요?"
"응."
""혼돈"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여길 와요?"
그 물음에 사내가 인상을 쓰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어요?"
침묵하는 사내를 보며, 미노는 그제야 이 사태를 눈치챘다.
언어 장벽이 있는 사내라 했다.
그러니 '혼돈'이나 '정체' 같은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음, 그러니까."
미노는 '정체'라는 말을 쉽게 설명해보려 했다.
그런데 쉽지가 않았다. 그녀 역시 그 단어를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녀가 아는 '정체'라는 말은, 지극히 "시스템"에 근거한 개별 정보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름과 능력치, 소속 정보 따위가 기입되어 있는 상태창.
"그러니까아...."
자신의 상태창을 보여줄 수 있다면 '정체'라는 말을 설명하는 데 큰 도움이 되겠지만, 적응자들 사이에서 개별 정보를 공개하는 것은 금기시되는 일이었다.
스킬이나 스테이터스 수치를 공개하는 것은 자신의 약점을 대놓고 전시하는 것과 별다를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녀는 흑림방의 암살자였다.
결국 미노는 대외용으로 만들어 둔 가상 신분증을 골라서 보여주기로 했다.
"그러니까 어디 보자...."
그동안 많은 신분증을 만들어 왔지만 이런 상황을 대비한 신분증은 만든 적이 없었기에, 미노는 조금 당혹스러웠다. 그래서일까.
"이게 내 정체······."
미노의 손가락이 '대외용4'로 향했다.
그런데 그 순간, 사내와 마주하고 있던 신분증 화면이 오류를 일으켰다. 덕분에 미노의 손가락은 '대외용4'가 아니라 그 옆의 '시크릿7'을 누르고 말았다.
+
이름 : 한미노
키 : 165cm
몸무게 : 47kg
신체 특징 : 왼쪽 눈가의 미인점, 오른쪽 가슴 안쪽의 작은 반점
취미 : 독서
좋아하는 타입 : 착한 남자, 낮져밤져
+
재환이 고개를 상태창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이런 건 궁금하지 않은데."
"으아아아앗! 아니, 잠깐만! 이거 잘못된 거―"
"그다지 정체랄 것도 없어 보이는군."
이건 살롱에 숨어 있던 표적을 암살하려고 만든 가짜 신분증― 이라는 말을 하려던 미노는 흠칫 말을 멈췄다. 이 인간에게 그런 것까지 설명해 줄 필요가 있을까? 아니, 그보다 지금 더 중요한 걸 놓친 것 같은데.
"...잠깐만요. 당신 '정체'가 무슨 뜻인지 아주 잘 알고 있잖아요!"
"모른다곤 안 했는데."
"갑자기 말씀도 잘하시네? 지금까지 날 속인 거예요?"
"내가?"
"적당히 하고 빨리 당신 정체를 밝혀요!"
빽 소리 지르는 미노를 보며, 재환이 입술을 실룩였다. 사실 재환이 대답을 망설였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정체(正體).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재환의 내부에서 뭔가가 진탕되었던 것이다. 재환은 자신을 무엇이라 말해야 할지 잘 가늠할 수가 없었다.
아직 지구에 있을 적, 그는 누군가의 아들이자 누군가의 친구였다. 대학교에 다녔고, 잠깐이지만 동아리에 소속되어본 적도 있었다. 취직을 고민했고, 때로 국가의 시국을 걱정하기도 했으며, 미래에 대한 여러 가지 고민도 했다.
탑에 들어온 이후, 그는 그런 것들을 잃어버렸다.
대신 새로운 동료와, 새로운 기억들을 얻었다.
윤환, 서율, 제이······.
하지만 튜토리얼이 끝나면서 그들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끔찍했던 과거를 기억하는 이는 이제 자신뿐이었다. 함께했던 동료들은 여전히 지구의 어딘가에 살아있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더 이상 예전의 동료들이 아니었다. 그들 중 누구도 재환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렇게 모든 것이 떠나갔다.
과거도, 미래도, 사람도.
그런데도 아직 이곳에 살아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기억이 안 나."
그것은 재환이 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한 대답이었다.
한없이 정직하고, 한없이 외로운 대답.
물론, 그 대답은 미노에게 완전히 다른 의미로 들렸다.
"얼씨구. '심연의 강자' 나셨네."
"······?"
"그거 '심연의 강자'들이 늘 하는 말이잖아요. '도무지 기억이 안 나.'"
"심연의 강자?"
"아, 그것도 모른다는 설정이신가. 컨셉 되게 치밀하네. 근데 그거 알아요? 그 정도 실력으로 '심연의 강자' 행세를 하기엔―"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하려는 순간, 재환이 쥐고 있던 칼이 갑자기 웅웅 울기 시작했다.
그 검명에 미노도 깜짝 놀라 말을 잃었다. 범상치 않은 칼이라는 건 알아보았지만, 그렇다고 칼이 울기까지 하다니?
더욱 놀라운 일은 그다음에 벌어졌다.
"알았으니까 그만 보채."
재환은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배낭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뒤이어 칼의 검신이 주둥이처럼 쫘악 벌어지더니, 재환이 준 물건을 으적으적 갉아먹기 시작했다.
미노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정령 무기?
Episode 2. 몰살의 마녀 (4)
다른 아이템들을 먹고 성장하는, "위대한 땅"에서도 극히 소수만이 가지고 있다는 정령 무기. 말로만 들었지 미노도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다.
만약 저 아이템이 정령 무기라면, 사내의 이해할 수 없는 강함도 이해가 갔다.
이각수를 기본 찌르기로 죽이는 일.
정령 무기의 무지막지한 공격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역시나 이각수를 죽인 것은 저 사내의 실력이 아니라, 칼의 힘이었던 것이다.
미노는 반사적으로 강훈을 비롯한 레드 폭스 쪽을 일별하고는, 재환을 향해 말했다.
"그거 빨리 집어넣어요."
사내의 정체가 뭐건 간에, 정령 무기씩이나 되는 것을 다른 이들 앞에서 함부로 내놓고 다니는 것 자체가 모험에 미숙하다는 방증이었다.
정령 무기가 강력한 것은 맞지만, 무기 의존도가 높은 적응자는 함정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확실하다. 이 사내가 누구인진 모르겠지만, 그는 금방 살해당할 것이다.
물론 미노와는 관계없는 일이었다.
그녀야 이번 의뢰만 수행하면 그만이었으니까.
...분명, 그랬어야 하는데.
멀리서 레드 폭스 일당이 돌아오고 있었다.
이야기가 잘 끝났는지 희희낙락한 얼굴들.
미노는 아직도 정령 무기를 먹이고 있는 재환의 앞을 재빨리 막아서면서, 천연덕스럽게 재환의 양손을 붙잡았다.
"와― 같은 고향 출신을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네요. 재환 씨! 분명 그때 그 재환 씨 맞죠?"
훅 거리감을 좁히며 다가온 그녀를 보며 재환이 재빨리 팔을 빼내려 했지만, 미노는 집요했다.
"그때, 분명 같이 악몽의 탑 클리어하고 헤어졌는데. 어느 지역으로 가셨다고 하셨죠? 제가 기억이 잘 안 나서."
재환은 낯간지러운 목소리로 자신에게 얼굴을 들이미는 미노를 바라보았다. 미노가 계속해서 말했다.
"나중에 말씀 주신다고 하셔놓고, 연락도 없으셔서 섭섭했어요. 그래도 이렇게 다시 만난 거 보면 인연은 인연인가 봐요."
"나는 그런 적이―"
재환은 이건 뭔가 싶은 눈으로 미노를 올려다보았다. 감탄할 만큼 천연덕스러운 표정의 여자. 순간 재환은 미노가 자신의 빙룡검을 걷어차 뒤쪽의 봇짐 사이로 숨기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뭔가가 떠올랐다.
아. 그런가.
멀리서 다가오는 레드 폭스. 그리고 열심히 눈빛으로 뭔가를 이야기하는 여자. 순간 머릿속으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밀어] 스킬이었다.
"아, 기억을 잃으셨군요. 그럴 수 있죠."
[당신 컨셉 지켜줄 테니까, 제발 헛소리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요. 괜히 저 녀석들한테 주목 받기 싫으면.]
오랫동안 사람들을 만나지 않아서, 이런 감각을 잊고 있었다. 그렇지.
이게 '파티 플레이'라는 거였지.
무지한 여행자들은 이용당하고, 버려지고, 죽는 '파티 플레이'. 이미 악몽의 탑에서 지독하게 겪어본 그것. 그렇기에 여자의 행동은, 정말로 의외였다.
생각해 보면 서율을 처음 만났을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 같았다.
...이제는 잘 기억도 나지 않지만.
"저런, 기억을 잃으셨던 겁니까? 그래서 말이 서투르셨군요."
어느새 근처까지 다가온 파티장 강훈이 빙긋 웃으며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를 향해 미노가 태연히 대꾸했다.
"그렇다네요. "혼돈"에 막 들어온 사람들에게 기억 상실은 종종 있는 일이니까요."
그 말에 강훈이 이해한다는 듯 웃었다.
"하긴, 혼돈에 오는 게 충격적인 일이긴 하지."
"도중에 오줌을 지리는 녀석들도 있다니까. 그쪽도 그러셨나 보네."
강훈 일행들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재환을 보며 이죽거렸다.
재환의 입장에서는 의아한 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탑을 부수고 나오는 경험이 오줌을 지릴 정도는 아니었는데.
미노가 첨언했다.
"단순히 "혼돈"에 와서 그런 게 아니라, 어쩌면 '심연의 강자'이실지도 모르죠. '심연의 강자'들은 대개 기억상실을 앓고 있으니까요."
"심연의 강자? 원, 하하! 농담도."
강훈이 과장된 웃음을 터트렸다.
어쨌거나, 나름대로 시선 돌리기엔 성공한 모양이었다. 눈이 마주친 미노에게서 밀어가 들려왔다.
[나한테 빚진 거예요.]
반달처럼 휜 웃음이었다.
*
그리고 잠시 후, 재환은 그 웃음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었다. 참고로 그동안 재환이 미노로부터 들은 정보는 다음과 같았다.
하나, 이 파티의 멤버들은 극악무도한 범죄자들이라는 것.
둘, 현재 미노는 일신상의 이유로 이 파티를 반드시 '몰살'시켜야만 한다는 것.
셋, 현재 미노는 역시 일신상의 이유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낼 수가 없다는 것.
넷, 이 파티를 오늘 밤 해치우지 않으면, 죽는 것은 미노와 재환이 될 거라는 것.
결국 이야기를 종합하면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같은 편이 되자는 얘긴가?'
재환의 입 모양을 읽은 미노가 밀어로 답했다.
[이미 같은 편이죠.]
'죽이는 건 내가 하란 소리군.'
하지만 순순히 들어주기엔 뭔가가 찜찜했다.
얼핏 보기에도 질이 나쁜 녀석들이란 것은 알겠지만, 선입견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건 옳지 않았다. 탑의 대장장이였던 제이도 첫인상은 험악했지만 좋은 사람이었다.
[녀석들은 반드시 움직일 거예요. 내가 숨긴다고 숨겼는데, 백 퍼센트 들켰어요. 정령 무기고 아니고를 떠나서 당신 무기를 반드시 노릴 거라고요. 당신 컨셉도 안 믿는 것 같고.]
'그래서?'
[먼저 습격하는 게 답이라는 거죠. 당신은 무기가 좋으니 먼저 습격하기만 하면 필승이에요.]
'싫다면?'
[...도망갈 거라면 빨리 가는 게 좋을 거예요. 당신 주법으론 순식간에 따라잡힐 테니까.]
그리고 밤이 찾아왔다.
날이 어두워졌으니 노숙을 하자고 제안한 것은 리더 강훈이었다. 지도에 따르면 조금만 더 가면 마을이었다. 그런데도 강훈은 밤중에 움직이는 것은 각수들의 신경을 자극할 수 있어 위험하다는 핑계를 대며 노숙을 제안했다.
재환은 잠든 척하며 「의심」을 사용했다.
그러자 밀어로 나누는 대화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리더, 정말입니까?]
[그래. 혹시나 해서 아까 살펴봤는데, 틀림없는 '정령 무기'다.]
재환은 속으로 혀를 찼다. 여자의 생각이 맞았다.
[정령 무기라면······.]
[다른 장비들을 먹어치워서 성장하는 무기지. 위대한 땅에서는 군주들이나 사용한다는 고가의 무기야.]
[...군주들이 사용하는 무기라고요? 그럼 혹시 저 녀석―]
'정령 무기'라는 건 빙룡검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조금 의외였다. 비스트레인이 준 정보에 따르면, "악몽의 탑"에서 나오는 아이템들은 "위대한 땅"의 수집품들에 비해 거의 쓰레기나 다름없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고작 이 칼 하나 때문에 혈안이 되어 있다고?
[군주는 절대로 아냐. 혼돈에 군주가 나타났다면 벌써 이 일대가 뒤집혔겠지.]
[군주가 아니라고 해도 강한 녀석입니다. 이각수를 한 방에 죽이는 걸 보셨잖습니까.]
[네 녀석은 정말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강훈이 비웃듯 말했다.
[저 녀석이 이각수를 어떻게 죽이는지 봤냐?]
[그건.... 뭐가 슈팟, 하고.]
[저 녀석은 찌르기로 이각수를 죽였다.]
[예?]
사내가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당연히 그럴 수가 없지. 내가 장담하건대, 찌르기로 이각수를 일격에 죽일 수 있는 자는, "혼돈" 전체를 뒤져도 열 손가락에 꼽을 거다.]
[그, 그럼 엄청난 강자란 말씀이십니까?!]
[너 정말 답답하구나······. 야, 거기 너 놀지 말고 측정기나 켜서 저 자식 영력 한번 재 봐.]
[알겠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어라? 리더. 저 녀석 영력이 무적응자 수준입니다. 심지어 저보다도 낮아요.]
[그렇지?]
강훈이 클클 웃었다.
[그럼 저 녀석, 대체 어떻게 이각수를 죽인 겁니까?]
[너 처음에 우리가 뭐로 이야기를 시작했는지 벌써 잊어버렸냐?]
[어······설마?!]
[바로 그 설마다.]
입을 쩍 벌리는 사내들의 모습.
[정령 무기란 게 그렇게 강하단 말씀이십니까?]
[내가 알기로 정령무기 정도 되는 물건은 "심연"에 들어가야 구할 수 있는 아티팩트다. 너도 심연에 대해 들어는 봤겠지?]
[환상수의 '가지'라 불리는 그 "심연" 말씀하시는 거 아닙니까?]
[그렇지. 바로 그 심연이다.]
[과연, '가지'의 심연이라니······!]
무슨 심오한 얘기를 떠드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내들이 뭔가를 오해하고 있는 건 확실했다.
그나저나 '가지'라....
탑의 메모에는 "악몽의 탑"이 '뿌리'라고 적혀 있었다. "심연"이라는 곳이 '가지'라면, '줄기'도 어디엔가 있다는 뜻인데.
[대장은 '가지'에 가보셨습니까?]
[그럴 리가 있겠냐. 잘못 올라갔다간 곧바로 영멸 당한다. 그냥 '줄기'에서 만족해. "혼돈"도 나름대로 살만한 곳이야.]
그렇군. 여기가 '줄기'인 "혼돈"인가. 잠깐만. 그럼 "위대한 땅"은 또 어딜 가리키는 말인 거지?
[리더, 그렇다면 이놈은 대체 어떻게 정령 무기를 얻은 겁니까?]
[혹시 명가 출신 적응자일 가능성은 없겠습니까? 정령 무기 같은 걸 가지고 있다면 충분히 그럴 가능성도 있습니다.]
[명가 출신들은 혼돈에 방문하기 전에 미리 기별을 넣게 되어 있어. 내가 알기로 제일 최근에 기별을 넣은 가문은 녹명가(綠螟家) 놈들인데, 저 녀석의 어디가 녹명가 같냐?]
[그러네요. 녹명가 녀석들은 머리에 더듬이 같은 게 있다고 들었는데요.]
강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리고 녀석이 명가 출신이 아닌 결정적인 증거가 있다.]
[그게 뭡니까?]
[냄새다.]
[냄새 말입니까?]
[녀석한테서 묘한 냄새가 나지 않냐?]
[설마, 이건······?]
코를 툭툭 건드려 보던 강훈이 씨익 웃었다.
[그래. 꿈 내음이지.]
[꿈 내음은 '뿌리'나 '가지' 쪽에서만 나는 건데······. 그렇다면 이 녀석은 둘 중 하나입니다. 「심연의 강자」거나, 아니면 초보자거나. 어쩌면 아까 그 여자 말대로―]
재환은 반사적으로 자신의 팔을 킁킁거렸다.
설마 그런 냄새가 날 줄은 몰랐다.
[당연히 심연의 강자일 리는 없지. 심연의 강자가 무적응자라니, 말이 안 되잖아.]
[그렇다면 저 녀석은....]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지만, 이미 답이 나온 분위기였다. 욕망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자는 어쩌실 겁니까?]
[알아서 처리해. 지금은 이쪽이 더 중요하니까.]
[흐, 그렇다면 여자 쪽은 저희가 맡겠습니다.]
조용히 사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노의 말은 맞았다.
이놈들은 나쁜 놈들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너무 노골적으로 맞아떨어지니 허탈한 데가 있었다. 기대하진 않았다고 해서 씁쓸함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어차피 삶이란 건 이런 식이다.
내내 그러지 않았던가.
그때, 뭔가가 재환에게 굴러와 부딪쳤다.
"어머."
촉촉한 느낌과 함께 오른쪽 손목에 여자의 손이 겹쳐졌다.
"여기에 계신 줄 몰랐네요, 재환 씨. 응큼하기도 해라."
[뭐 해요! 저놈들 움직이는데!]
"어머! 재환 씨! 저놈들이 칼을 들고 있어요. 꺄아악! 살려 줘요!"
[치사하게 이제 와서 약속을 안 지킬 셈이에요?]
원래의 계획은 이쯤에서 재환이 정해진 대사를 읊고 싸우는 것이었다. 참고로 원래 재환이 읊도록 예정되어 있던 대사는 다음과 같았다.
'때맞춰 모든 게 기억났다! 후후, 난 네놈들을 벌하기 위해 온 「심연의 강자」다!'
상식적으로 그따위 대사를 읊을 리가 없었다.
[저놈들 칼 뽑고 달려오잖아요! 싸우든가 튀든가 결정해요, 빨리!]
미노가 다급하게 외쳤다.
재환은 그저 어깨를 으쓱했다.
엄밀히 말해서, 재환은 약속한 적도 없었다. 모든 것은 미노 혼자서 일방적으로 통보한 것일 뿐이었다.
칼날이 허공을 날았다.
"연놈들을 죽여!"
당황한 미노가 재환을 안은 채 한 바퀴를 굴렀다. 방금 전까지 그들이 있던 바닥에 칼날이 꽂혔다.
미노가 소리쳤다.
"어서 무기를 꺼내요! 그 까만 칼 있잖아요! 그걸로 놈들을 해치우라고요!"
"없는데."
"네?"
"없다고."
재환은 말없이 등 뒤를 눈짓했다. 재환의 시선을 따라가던 미노의 눈이 부릅떠졌다.
아니, 저게 왜 저기에?
"아까 그쪽이 봇짐 속에 꽂아놨잖아."
"...그걸 아직도 안 찾아왔어요?"
"자꾸 밥 달라니까 귀찮아서."
"아니, 대체 어떻게 된 인간이―"
당연히 그런 이유로 안 찾아왔을 리는 없다.
사실 재환이 칼을 내버려 둔 것은 전혀 다른 이유 때문이었으니까.
봇짐 속에서 천천히 빙룡검을 뽑아 든 강훈은 희희낙락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재환이 씩 웃으며 미노 쪽을 보았다.
이제야 이 여자 진짜 실력을 볼 수 있겠군.
Episode 2. 몰살의 마녀 (5)
강훈을 비롯하여 칼을 든 사내들이 미노의 주변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얌전히 있으라고. 곧 기분 좋게 해줄 테니까."
미노는 눈을 질끈 감은 채 고개를 숙였다.
언뜻 보기에는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의 표정 같았다. 그러나 흑림방의 암살자들은 알고 있었다. 그녀가 그 표정을 지었을 때, 그녀의 앞에 있는 적들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미노의 손이 움직인 것은 세 명의 사내가 달려드는 것과 거의 동시였다.
출수(出手)를 알 수 없을 정도의 빠르기.
강훈을 제외한 세 명의 사내는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부르르 떨더니, 자리에 그대로 고꾸라졌다. 사내들의 가슴팍에 단검이 하나씩 꽂혀 있었다.
"미안. 너무 세게 던졌네. 나 좀 열 받아서 말야."
싱긋 웃는 미노의 말투가 스산하게 변했다.
"괴수 몰이도 실패하고··· 협력자는 말도 안 듣고··· 정령 무기는 엄한 놈이 들고 있고.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네?"
천진한 웃음이었지만, 강훈은 심장이 떨려오는 느낌이었다.
"그 칼, 그만 주인한테 돌려주지그래?"
"······싫다면?"
"잘 모르나 본데, 주제넘게 그런 걸 들고 있으면 반드시 나쁜 일을 당한다고."
"저런 놈보다야 내가 이 칼에 훨씬 어울리지."
"그렇게 생각해? 그럼 별수 없지."
미노가 검은 로브를 벗어 던지자, 안쪽에서 흑색 야행복이 등장했다. 야행복의 옷깃 속에서 일곱 자루의 단검이 스르르 떠올랐다.
"너는 지금부터 아주 나쁜 일을 당하게 될 거야."
강훈이 그런 그녀를 잠시 보고 있더니, 어딘가 허탈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몰살의 마녀'였군."
"뭐야, 알고 있었어?"
"······모를 수가 없지. 애초에 그렇게나 쉽게 괴수들을 유인해 오는데, 모르는 게 이상한 거다."
이를 가는 듯한 강훈의 목소리.
미노가 이마를 딱 짚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하아, 미치겠네. 우리 방주한테 또 무슨 소릴 들으려나······. 뭐, 다 죽여 버리면 되니까."
분명 무적응자였을 미노에게서 상당한 수준의 적응자들만이 발출할 수 있는 영압(靈壓)이 터져 나왔다.
강훈이 침음했다.
"흑림방의 암살자들은 영압을 임의로 조절할 수 있다더니, 사실이었군."
"조무래기 주제에 제법 많이 알고 있네?"
"······대체 누가 흑림방에 의뢰를 한 거지?"
"누가 의뢰했든 무슨 상관이야? 니들이 뭣도 모르는 무적응자를 하도 잡아 죽여 대서 너넬 죽여 달라는 자들이 혼돈에는 차고 넘치는 걸."
"무슨, 겨우 그런 녀석들 때문에 흑림방이 움직일 리가―"
그렇게 중얼거리던 강훈이 퍼뜩 뭔가를 깨달은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이 의뢰는 네가 개인적으로 받은 것이냐?"
"...내가 대답할 의무가 있나?"
"만약 그렇다면 너는 결코 '우리'를 상대할 수 없다, 몰살의 마녀."
"뭐?"
미노는 주변의 기세가 묘하게 바뀌어 가는 것을 느꼈다. 아까부터 이 근방 풀숲의 공기가 수상하기는 했다.
주변에서 상당한 숫자의 영압들이 느껴진 것이다.
그러나 마을이 멀지 않은 거리였고, 영압들 자체도 뿔뿔이 산개한 형태여서 그냥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그 적응자들의 무리가 점차 하나의 점으로 집결하고 있었다.
"흑림방의 마녀에, 이각수를 한 방에 죽인 인간이 나타났는데, 내가 아무도 부르지 않았을 것 같아?"
"설마······."
불침번을 서던 강훈이 전서응을 날리던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강훈이 클클 웃었다.
"뭐, 정령 무기를 쉽게 손에 넣을 줄 알았더라면 이렇게 많이 부르지는 않았겠지만."
어둠이 내려앉은 밤. 무성한 활엽수림 위로 검은 그림자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수십이 넘는 인원이었다. 최소 1차 적응자 이상. 소수지만 2차 적응자들의 모습도 보였다.
심지어 어둠 속에서 나타난 이들 중에는 미노가 일대일로 붙어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인물도 하나 끼어 있었다.
흑색 두건으로 머리를 덮고, 검은색 여우 모피를 엮어 망토처럼 걸친 사내였다.
"설마 검은 여우, 당신까지 온 거야?"
"몰살의 마녀."
"요즘 한가한가 보네."
"영광으로 생각하도록. 그대를 사냥하기 위해 붉은 여우의 절반이 모였으니."
검은 여우 클랜트.
이 근방에서 그의 이름을 모르는 자는 많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막강한 힘을 가진 3차 적응자이자, 동시에 레드 폭스의 클랜 마스터였기 때문이다.
"······정말 빌어먹게도 영광스럽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상황은 매우 안 좋았다.
살기등등한 대치가 이어졌다.
누구 하나가 먼저 움직이는 순간, 전투는 시작될 것이다. 적의 숫자를 어렴풋이 파악한 미노가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로 물었다.
"거기 심연의 강자님. 있어?"
그러자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있다."
"이제 와 이렇게 말해서 유감이지만, 미안해."
"······."
"심연의 강자가 레드 폭스 일당을 해치웠다. 뭐 그런 그림을 좀 만들어 보고 싶었거든."
"알고 있다."
"······그래?"
의외라는 미노의 목소리에, 재환이 기계적인 목소리로 어떤 대사를 읊었다.
"때맞춰 모든 게 기억났다! 후후, 난 네놈들을 벌하기 위해 온 「심연의 강자」다!"
"······뭐야, 그거 진짜 외웠어?"
"대사를 좀 더 멋있게 잘 써줬다면 기꺼이 읊었을지도 모르지."
미노가 싱긋 웃었다.
"어쩐지 협력을 잘 안 해 주더라. 물론 일방적으로 강요한 내 잘못이겠지만 말이야."
장난스레 미소 짓는 미노였지만, 목소리만큼은 진지했다.
"진심으로 미안하게 생각해."
많은 감정이 담겨 있는 말이었다.
재환은 미노의 뒷모습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재환도 알고 있다. 이 여자에게 그다지 악의는 없었다는 걸. 굳이 따지자면, 그녀는 재환의 생존을 돕는 쪽이었으니까. 미노가 입술을 깨물며 덧붙였다.
"지금이라도 빨리 도망가."
"왜?"
"나는 당신을 지켜 주지 못할 테니까."
그 말을 하며, 미노는 등 뒤로 뭔가를 던졌다. 재환은 자신을 향해 날아온 물건을 붙잡은 채 물었다.
"이게 뭐지?"
"귀환석이야. 사용하면 가까운 성채로 달아날 수 있어. 하나밖에 없으니 당신이라도 그걸 써."
"너는?"
미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재환은 가만히 '귀환석'이라는 물건을 내려다보았다. 어쩐지 익숙한 생김새였다. 전체적인 모양새가 그가 제일 싫어하는 어떤 돌을 닮았다.
하지만 이 돌은 과거로 가는 돌이 아니었다.
이 돌은 누군가의 현재를 살리는 돌이었다.
이 돌은, 어떻게든 오늘을 살아남아 내일을 향해 나아가려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돌이었다.
윤환.
재환은 모처럼 친구의 이름을 떠올렸다.
탑의 98층에서, 그가 구하지 못한 친구의 이름.
그때 윤환도 돌을 쥐고 있었다.
윤환은 그것이 「회귀의 돌」이라는 것처럼 굴었지만, 사실 그때의 재환 또한 알고 있었다.
그 돌은, 어디로도 가지 못하는 돌이라는 걸.
만약 그때 이 돌을 윤환의 손에 쥐여 줄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만약에······.
재환은 무심코 귀환석을 꾸욱 쥐어 보았다.
마치 그 돌이, 그가 얻은 소중한 해답이라도 되는 듯이. 그러자 돌의 감촉이 살아 있는 것처럼 그의 손아귀에 감겨들었다. 재환이 입을 열었다.
"뭐 하나만 물어보지."
"······뭐? 지금?"
"만약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너는 과거로 돌아갈 건가?"
미노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상황에서 꼭 그런 걸 물어봐야 해?"
정말이지 어떻게 된 인간이냐는 듯 웃으며, 미노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마치 그딴 질문에 고민 따윈 필요하지 않다는 듯이.
"당연히, 절대로 안 가지."
"왜지?"
"나, 정말 열심히 살았거든."
어떤 설명도 덧붙이지 않았지만, 그 순간 재환은 그녀가 살아온 삶 전체를 느낄 수 있었다.
"난 죽어도 오늘 죽어. 절대 과거로는 안 가."
왜일까.
오늘 죽는다는 그 말에 저도 모르게 심장이 뛰는 것은.
그녀는 알까. 방금 그녀가 무심코 뱉은 대답으로 인해 그녀의 모든 운명이 바뀔 것이라는 사실을.
재환은 미노의 어깨를 탁 짚더니 성큼성큼 앞으로 나섰다.
미노는 멍하니 그 등을 지켜보았다.
그녀에게는 살 떨리는 한 걸음을, 그는 정말이지 잘도 걸어 나갔다. 마치 저 막대한 살기들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너는 오늘 죽지 않아."
*
...방금 저 인간이 뭐라고 한 거지?
미노가 정신을 차린 것은 잠시 후의 일이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기억상실증이 아니라, 아예 미쳐 버렸나?
게다가 무슨 낯 뜨거운 대사를 잘도... 이번엔 그런 컨셉인 건가?
"잠깐, 당신 칼도 없잖아!"
"한 자루 더 있다."
재환의 차원 배낭 속에서 한 자루의 칼이 스르르 빠져나왔다.
악몽의 탑 88층에서 얻었던 진룡검이었다.
미노가 외쳤다.
"겨우 그런 칼로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투가 시작되었다.
수풀의 곳곳에 숨어 있던 적응자들이 쾌속하게 달려들었다.
각기 다른 병장기들의 연수 합격. 그들 중에는 까다로운 스킬을 보유한 자들도 있었다.
미노는 그 스킬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화왕십사류(火王十四流).
"혼돈"의 십대 방파인 화왕방(火王房)의 대표적인 공격 스킬 중 하나였다. 극한까지 수련하면 검에서 화려한 불길이 일며 주변을 일거에 소탕할 수 있게 된다는 중급의 검술 스킬. 그것이 바로 화왕십사류였다. 미노의 안색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화왕방이 하위 클랜들에게 스킬을 팔고 있다는 게 정말이었어...."
숲이 불바다가 되고 있었다. 모든 것을 불태우고 집어삼키는 화왕의 불꽃. 불길 속에서 미친 여우들이 날뛰고 있었다. 열기의 중심에서, 적들을 마주한 재환은 조용히 준비 자세를 취했다.
미노는 재환이 무엇을 하려는지 알았다.
잘 알았기에 말려야 했다.
아무리 정령 무기가 강하다고 해도, 동급의 스킬 없이는 화왕십사류를 당해낼 수 없다.
그러나 다음 순간, 미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아니, 자신의 모든 오감을 의심해야 했다.
바로 눈앞에서 시간의 규칙이 부서지고 있었다.
미노는 잠깐이지만 그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재환을 향해 다가오는 모든 칼날이 느려지는 모습을. 다시, 그 칼날의 숲을 유영하듯 미끄러지는 재환의 움직임을.
······꿈이라도 꾸는 걸까.
한 방만 맞으면 나가떨어질 것 같은 재환의 육신에, 그 어떤 공격도 닿지 않고 있었다. 재환은 마치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 같았다.
「의심」
그 칼날들의 중심에서, 재환이 바라보는 길이 있었다. 오직 이 세계를 의심하는 자에게만 보이는, 한없이 올곧고 단정한 검의 길.
그 길 위로 재환의 검이 움직였다.
찌르기였다.
Episode 2. 몰살의 마녀 (6)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찌르기.
유려하진 않지만 정확한 박자로 흘러가는 음악처럼, 검극은 적들의 몸에 닿았다 멀어졌다. 벼락같은 섬광이 번쩍이며 어둠을 물들였다.
달려들던 대여섯 명의 레드 폭스 클랜원들은 비명과 함께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개자식! 죽여!"
당황한 레드 폭스 일당들이 여럿씩 짝을 지어 공격의 방위를 늘렸다. 화왕십사류의 폭격이 동서남북 사방위에서 재환을 노려왔다. 화왕십사류의 절초인 십자화형(十字火刑)이 동시에 펼쳐진 것이다.
열십자를 이루는 불의 감옥.
재환이 아니라 누구라도 꼼짝없이 당할 일격이었다.
의기양양한 레드 폭스 일당의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잠시 후, 불길 속에서 재환의 모습이 일렁이듯 나타났다.
"······어떻게?"
재환은 폭염에 거의 타격을 받지 않은 채로 서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이해」
기세를 잃어가는 화왕십사류의 불길이 재환의 검 끝에 소용돌이치며 모여들고 있었다. 마치, 원래부터 재환의 검에서 뻗어 나온 불길인 것처럼.
무언가 엄청난 일이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섬뜩한 예감을 받은 레드 폭스의 클랜 마스터, 검은 여우 클랜트가 다급히 외쳤다.
"모두 피해라!"
검극에서 찌르기가 펼쳐진다.
아니, 그런 것을 찌르기라 부를 수 있을까.
대기의 산소가 응축되며 순간적으로 정적이 찾아왔다.
그 짧은 침묵 속에서 검은 여우 클랜트를 비롯한 모든 적응자들은 호흡이 곤란해지며 폐가 수축하는 느낌을 받았다.
3차 적응자인 클랜트는 살면서 몇 번인가 이런 순간을 겪은 적이 있었다.
바로, 혼돈의 최강자로 손꼽히는 십대방주(十大房主)들의 앞에 섰을 때였다.
응축된 산소가 폭발하며 불의 길이 열리자, 숲과 사람이 한 데 엉켜 폭풍 속에 휘말렸다. 부서진 나무 조각들과 장비들이 비산했다. 비명은 굉음 속에 묻혀버렸다.
불길이 지나간 곳에 남은 것은 까맣게 탄 폐허뿐이었다. 잔불이 남은 나무 하나가 쿵, 하는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미노는 그 모든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깨달았다.
저 재환이라는 사내가 쉽게 이각수의 사체를 양보한 것은 그가 바보라서가 아니었다.
모두의 앞에서 정령 무기를 꺼내고, 먹이를 주고, 내팽개쳐 놓고 있었던 것은 그가 허술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무수한 적응자들에게 둘러싸여도 도망가지 않은 것은, 그가 위험에 둔감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너무나 강하기 때문이었다.
간신히 나무 위로 몸을 피한 검은 여우 클랜트가 넋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저런 놈이 대체 어디서 나왔지?"
그들이 계획한 '마녀 사냥'에 웬 정령 무기를 든 애송이 하나가 나타났다는 수상쩍은 보고를 받긴 했다.
그런데 막상 와 보니 웬 괴물이 있다.
화왕십사류를 막아낸 것으로도 모자라, 그 스킬을 해체하고 기세를 되돌려 주었다. 방금 그 한 방으로 전투원의 대다수가 불구가 되고 말았다.
중급 수준의 스킬을 영력으로 무화(無化)하는 것은 숙련된 수준의 3차 적응자라면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스킬을 해체한 후 저런 식으로 응용하는 것은 클랜트도 들어본 일이 없었다.
대체 어떤 수준의 적응자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이, 이럴 리가 없습니다!"
클랜트의 시선을 받은 강훈이 말을 더듬었다.
"모두 철수한다."
강훈이 이를 악물었다.
"저에게 정령 무기가 있습니다. 이각수를 한 방에 죽인 이 무기라면, 저 녀석을 이길 수 있습니다!"
클랜트는 강훈이 '정령 무기'라 주장하는 흑색 검을 흘끗 보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무리다. 실력 차이가 너무 커."
"그렇지 않습니다!"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매섭게 눈을 뜬 강훈은, 클랜트를 등지고서 재환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불길을 헤치며 다가오는 재환의 모습이 보인다.
강훈은 곧바로 자신의 필살 스킬을 사용했다.
고작 찌르기로도 이각수를 죽인 칼이었다.
이것이라면 반드시―
그러나 혼신을 담은 일격은 너무나 쉽게 빗나갔다.
발악하듯 휘두르는 검.
헛되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연이어 울려 퍼졌다.
압도적인 전투력의 차이. 점차 손아귀에 힘이 빠져 갔다.
스킬이 덧씌워진 강훈의 칼날은, 재환의 손아귀에 힘없이 붙들렸다.
어째서?
강훈의 머릿속으로 주마등처럼 과거의 일들이 스쳤다.
탑을 졸업하고, 죽을 고비를 넘겨 가며 "위대한 땅"을 헤매다 마침내 이 "혼돈"에 도착했던 일.
죽어라 스킬을 수련하고, 죽어라 스테이터스를 쌓았던 일.
레드 폭스에 가입해 적응자 사냥을 했던 일.
적응자들에게서 손가락질을 받고, 비열하다며 욕을 먹어가면서도 어떻게든 여기까지 왔던, 그 모든 시간들.
힘들게 견뎌온 시간이었다.
그렇기에 더욱 이해가 가질 않았다.
측정기를 통해 확인했던 재환의 영력 수치를 강훈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대상 영력 보유량 : 154]
1차 적응자의 평균이 1,000인 걸 감안하면, 그야말로 형편없는 영력 수치.
그의 눈앞에 있는 적은, 틀림없는 무적응자였다.
"대체 어떻게 그런 수치로······."
공허한 중얼거림에, 마치 그의 속내가 보이기라도 하듯 재환의 두 눈이 깊어졌다.
수치(數値).
오랜만에 듣는 말이었다.
그 수치 하나를 올리기 위해서, 레벨 하나를 올리기 위해서 애썼던 시절이 재환에게도 있었다.
지옥 같은 탑의 나날들.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강한 아이템을 가지려고, 조금이라도 더 높은 스테이터스를 가져 보려고 어떻게든 고군분투했던 시절.
재환은 강훈을 이해했다.
이해했기에 그는 말할 수 있었다.
"그래서 네가 약한 거야."
"······뭐?"
한 걸음, 두 걸음.
재환이 앞으로 다가올 때마다, 강훈은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는 재환의 눈빛에 담긴 심연(深淵)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은 그가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숫자나 설명으로 나열될 수 없는 것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강훈은 어느새 무릎을 꿇고 있었다. 재환은 손을 내밀어 강훈의 손에서 검을 빼앗았다. 그리고 칼자루를 몸통 쪽으로 당기는 동시에, 달아나는 레드 폭스 일당들을 검극으로 겨누었다.
찌르기.
이제까지와는 달리 진지하고 엄숙한 자세였다.
마치 찌르기는 이렇게 하는 것이라고 보여주기라도 하는 듯이.
강훈은 이제부터 무슨 일이 벌어질지 잘 알고 있는 사람처럼 몸을 떨었다.
"······너, 너는 대체 뭐냐."
강훈의 눈이 절망으로 물듦과 동시에, 빛살이 쏘아져 나간다.
강렬하고도 섬뜩한, 마치 세계 전체를 겨냥하는 듯한 힘.
멀찍이 달아나고 있던 클랜트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이미 늦은 후였다.
"말도 안 되는······."
가슴을 꿰뚫린 클랜트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풀숲 곳곳에서 비슷한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그것이 강훈이 마지막으로 본 광경이었다.
*
어두운 밤. 드문드문 별빛이 내리는 숲속.
타오르는 모닥불과, 종종 튀는 불씨들.
검은 하늘을 보며, 미노는 모처럼 오래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미노, 너는 지나치게 암살자답지 않아."
그것은 미노가 처음으로 의뢰에 실패한 날, 흑림방주에게 들은 말이었다.
그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미노가 의뢰에 실패할 때마다 흑림방주에게 듣는 말이기도 했다.
방주는 언제나 말했다.
그 인간적인 유약함이, 언제고 그녀를 죽일 것이라고.
미노는 그 말을 부정하고 싶었다.
그래서 규정 위반이라는 걸 잘 알면서도, 여기저기서 개인 의뢰를 마구 받아 해치워 왔다.
그것도 악적들을 토벌하는 힘든 의뢰로만 골라서. 어쩌면 그 악적들의 비정함에서 뭔가를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하나로.
그렇게 반년. 온갖 범죄자들의 파티를 모조리 섬멸하는 동안, 그녀는 '몰살의 마녀'라는 허명을 얻었다.
그런데 오늘, 미노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방주. 그거 알아? 오늘은 암살자답지 않게 살아서, 내가 살았다는 거."
미노는 가까운 나무 둥치에 기대어 있는 재환을 보았다. 묵묵히 자신의 검에 장비를 먹이는 사내의 모습. 볼수록 기이한 사내가 아닐 수 없었다.
대체 이자는 누굴까.
사내가 보여준 화려한 전투가 뇌리에서 잊히질 않았다. 그런 무위는 지금껏 본 적이 없었다. 도망가라며 귀환석을 건네줬던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질 정도로 굉장한 무위였다.
"이봐요."
결국, 한참이나 망설이던 미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당신 진짜 정체가 뭐예요? 정말 심연의 강자인 건 아니죠?"
재환은 잠깐 그녀를 쳐다보더니, 다시 자신의 검으로 시선을 옮겼다.
"왜 갑자기 경어를 쓰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미노는 끈기를 가지고 다시 입을 열었다.
"······나 진짜 궁금한데, 말해 주면 안 돼요?"
미노를 보며 재환이 무슨 생각을 떠올렸는지 피식 웃었다. 그러더니 말했다.
"그쪽은 내 정체를 이미 알고 있어."
"······네?"
"벌써 잊어버린 거야?"
섭섭하다는 표정이다. 미노는 혼란에 빠졌다.
벌써 말해 줬다고? 대체 언제 말해 준 거지?
그러나 아무리 떠올려 보아도 생각이 나질 않는다.
그렇게 한참을 골몰하고 있자, 재환이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기억상실증이라도 걸린 모양이군. 그쪽도 '심연의 강자'인가?"
"네?"
낮의 일을 떠올린 미노가 어이없다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쪼잔하네요."
재환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아까 내가 준 귀환석이나 돌려줘요."
"없어."
"네? 왜요?"
"잃어버렸거든."
"그게 얼마나 비싼 건데 잃어버려요?"
옆에서 따박따박 쏘아 대는 미노를 보며, 재환은 묵묵히 검에 장비를 먹이기 시작했다. 와자작 와자작 하는 소리가 미노의 목소리와 조화롭게 섞여 묘한 앙상블을 자아냈다. 그 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기묘하게도 조금씩 평화로운 기분이 되어갔다.
뭐라 표현해야 할까.
정말 낯설게도, 그 순간 재환은 자신이 오래전에 잃어버린 어떤 시간 속으로 되돌아온 기분이었다.
재환은 잠시 빙룡검을 옆에 세워 두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듬성한 활엽수의 사각으로 새카만 밤하늘이 펼쳐졌다.
신비한 일이었다.
이곳에서도 밤하늘이 보이고.
별이 보이다니.
어쩌면 그가 탑 속에서 수십 년간 찾아 헤맨 것은 저 밤하늘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이 비현실적인 세계에서 자신이 인간임을 증명해 줄 어떤 것.
"내 정체가 그렇게 궁금해?"
재환의 그 말에, 따발따발 떠들어 대던 미노가 마법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럼 한 번만 알려줄 테니까 잘 들어."
갑자기 말 잘 듣는 어린아이라도 된 양, 미노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인간이야."
"······지금 장난쳐요?"
화를 내려는데, 이번에는 재환이 물었다.
"원하던 대답이 아닌가?"
"당연하죠! 그건 보면 아는 건데."
"그것 말고는 뭘 더 이야기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으려던 미노는, 문득 재환의 옆모습을 보고서 말을 잊고 말았다.
이렇게 외로운 사람의 표정을 본 적이 있었던가.
밤하늘의 별빛 사이로 새근거리는 숨소리와 웅웅거리는 검의 울음이 고르게 울려 퍼졌다.
별빛 아래에서 재환은 조용히 자신의 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았다. 손끝에 작은 돌 하나가 걸려들었다.
작지만 정교한 감촉.
차갑지만 단단한 현실.
아무리 귀환해도 그저 현실로만 가는 돌.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은 언제나 현실뿐이라고 말하는 듯한, 그런 돌.
그 돌의 확고한 감촉 속에서 재환은 모처럼 오래된 시절의 꿈을 꾸었다. 아직 악몽의 탑이 나타나지 않았던 시절, 그래서 누구도 회귀하지 않았던 시절의 꿈. 때론 힘들고 때론 절망적이었지만, 누구도 과거로 달아나지 않았기에 좋았던, 그런 시절의 꿈을.
탑에서 탈출한 후 한 달.
재환은 그렇게 자신이 아닌 인간을 만났다.
Episode 3. 은빛 구속 (1)
「혼돈 한 번 못 들어가 본 놈이 위대한 땅에 대해 뭘 안다고 지껄여? ······뭐? 나도 물론 안 들어가 봤지.」
―나태의 군주 가이나크.
*
다음 날 아침. 재환은 미노로부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근처를 배회하는 사냥꾼들과 '각수'라 불리는 이 지역 특유의 몬스터들에 대한 정보, 유독 이끼가 많이 끼어 도약하기 어려운 바위들의 위치까지.
그런데 재환이 무엇보다 궁금한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네 얘길 해 봐."
미노는 얼떨떨한 얼굴로 말을 멈췄다.
"무슨 이야기요?"
재환은 다시 한번 입을 열어 또박또박 말했다.
"네가 악몽의 탑을 클리어했을 때의 이야기. 그걸 좀 듣고 싶은데."
적적한 여로. 길은 많이 남았는데 시간은 붕 뜨는 만큼, 새로운 화제를 꺼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미노가 장난스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미 알고 있잖아요? 우리 같은 악몽의 탑 출신이잖아요."
"어제까지는 그랬지."
"...꼭 들어야겠어요?"
미노가 살포시 인상을 썼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누구도 자신이 「상품」이었던 시절을 기억하고 싶은 이는 없으니까.
오죽하면 "악몽의 탑"을 '악몽의 탑'이라 부르지 않고 환상수의 '뿌리'라 간접적으로 지칭하는 사람들이 더 많을까.
악몽의 탑을 클리어하고도 8년이 흘렀지만, 지금도 미노는 종종 악몽을 꿨다.
빌어먹을 "환상수"의 '뿌리'에서 살아나온 꿈.
"구해 준 보답으로 듣고 싶다면."
"······그래요. 여기서 보답하지 않으면 구해 준 목숨도 도로 앗아갈 사람 같으니."
미노는 잠시 말을 고르는 듯 사이를 두더니, 다음과 같은 말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르칼'. 그곳이 제가 태어난 곳의 이름이에요."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미노의 고향인 7651월드에 "악몽의 탑"이 등장했다.
이제 탑의 외양은 정확히 생각나지 않았다.
기억나는 것은 그녀가 살았던 세계가 평범했듯 그녀의 세계에 찾아온 탑 또한 평범했다는 것뿐이다.
대량 재배를 위해 '양산형'으로 제작된 악몽의 탑.
그러나 탑이 양산형이라고 해서, 그 탑에서 사람들이 겪은 삶과 죽음까지 양산형이라는 말은 아니었다.
그곳의 죽음은 모두 진짜였고.
그곳의 고통도 모두 진짜였다.
그렇게 기적적으로 도달한 탑의 100층.
그곳에서 미노와 고향의 동료들은 탑의 「재배자」인 '악마'를 만났다.
지루한 눈빛으로 그들을 쓱 훑어본 악마가 남긴 말을, 그들의 삶과 죽음을 '쓰레기'로 치부하던 악마의 한마디를, 미노는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었다.
―아아, 이거 곤란하군. 전원 「무적응자」라니.
울창한 활엽수림 지대가 바람에 흩날리며 무성한 잎사귀들을 흔들어댔다. 자칫하면 길을 잃을지도 모르는 완연한 숲속. 재환이 목소리를 냈다.
"그 이후엔 어떻게 됐지?"
미노가 입술을 깨물었다. 내키지 않는 눈치였다. 재환이 다시 물었다.
"더 말해 주긴 힘든가?"
"······별로 재미있는 이야긴 아닐 텐데요."
"상관없어."
"그냥 뻔한 이야기예요. 평범한 소녀가 뿌리를 나와서, "위대한 땅"에서 구르고 또 구르는, 그런 흔한 이야기죠."
"위대한 땅"에 처음 발을 내디뎠을 때의 환희를 미노는 지금도 잊지 못했다.
당시, 악마는 이렇게 말했다.
―위대한 땅에서 돈이나 학력 따윈 모두 무의미하다. 그곳의 가치는, 오직 더 높은 '숫자' 뿐이니까.
오랜 악몽에서 벗어나 마침내 내디딘 약속된 기회의 땅. 미노는 이제 모든 게 잘 풀릴 줄 알았다.
탑에서 얻은 아이템과 스킬들로, 떵떵거리며 살아갈 일만 남은 줄 알았다.
착각이었다.
―사, 살려 줘!
―도망쳐라 미노야!
―제발, 제발!
빗발치는 피와 죽음의 향연 속에서, 미노는 곁에 있던 동료들이 죽어가는 것을 실시간으로 목격해야 했다.
돈이나 학력이 무의미한 세상.
어떤 의미에서 그 말은 맞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위대한 땅이 악마가 줄곧 말해온 '유토피아'라는 뜻은 아니었다.
―강해져야 해. 더, 더, 더 강해져야 해.
그곳에서 미노는 돈 대신 스킬을 모아야 했고, 학력 대신 영력을 쌓아야 했다. 더 높은 적응차수(適應次數)는 출신 성분을 대신했다.
더 많은.
더 높은.
더 강력한.
그리고 미노는 그 모든 수사들과 어울리지 않는 「무적응자」였다. 약한 스킬과, 적은 영력을 가진 먹이사슬의 최하위 계층.
전장의 화살받이.
고차 적응자들의 노리개.
죽거나, 죽음보다도 못한 삶.
미노는 언제나 도망치고 또 도망치는 쪽이었다.
거기까지 이야기를 이어가던 미노는 잠시 입을 다문 채로 하늘을 노려보았다. 재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 뒤는 당신도 다 아는 이야기예요. "혼돈"에 오게 된 사람들 사정이야 모두 빤한 거니까요."
"······."
"당신도 정말 잔인한 구석이 있네요. 처음 보는 사람한테 이런 이야길 하게 만들다니."
"미안하군. 꼭 듣고 싶었거든."
사실 재환이 궁금한 것은 '미노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는 그저 악몽의 탑을 클리어한 적응자들의 '일반적인 이야기'가 궁금했을 뿐이었다.
어쩌다 보니 미노에게는 잔인한 일이 되어버렸지만, 이제와 스스로의 섬세함을 나무라며 되돌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는 이제 결코 섬세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됐어요. 은혜 갚은 셈 치죠. 오랜만에 이야기해서 그런가, 생각보단 힘들지 않네요. 시간이 흘러가긴 했나 봐요."
이야기를 끝낸 미노는 오히려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마치 오랜 후에 보려고 묵혀 두었던 장편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 사람처럼.
하나의 숲이 끝나고, 새로운 숲이 시작되었다.
녹엽이 두꺼운 활엽수림 대신, 성기고 잎이 얇은 상록수림 지대가 나타났다. 그러자 미노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당신 차례죠?"
"내 차례?"
"공평하게 해야죠. 내가 말했으면 당신도 말해 줘야지."
"구해준 은혜 갚은 셈 치자며? 그걸로 끝나는 거 아니었나?"
"응? 무슨 소리예요? 기억이 안 나는데."
재환은 슬며시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직도 내 정체가 궁금한 건가?"
"그냥 당신 이야기가 듣고 싶은 거예요."
말도 하기 나름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 사람의 정체를 구성하는 것은 곧 '이야기'다. 이야기를 듣다 보면, 정체라는 것은 자연스레 드러나게 마련이니까.
여우라는 말은 붉은 여우들보다 이 여자에게 더 어울릴지 모르겠다고, 재환은 생각했다.
"잊었나? 기억이 안 난다고 했을 텐데."
"정말 기억이 안 나요? 대충 보니까 '심연의 강자'는 아니신 거 같고, 혹시 혼돈에 들어온 충격으로 기억을 잃으신 건가?"
"비슷해."
내키는 대로 대답했지만,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재환은 제정신이 아닌 채로 이곳으로 넘어왔고, 그래서 이곳에 대한 정보가 없는 것이니까.
그런데 재환의 말에 미노의 표정이 묘해졌다.
뭐랄까, 그것은―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진심으로 누군가를 부러워하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정말 부러운 일이네요."
"뭐?"
"정말 부러워요, 그 기억이 없는 당신이."
"기억 상실이 뭐가 부럽다는 거지?"
"아마 이곳에 있는 대부분이 당신을 부러워할걸요."
"왜?"
"그건······."
멀리서 성채(城砦)의 첨탑 같은 것이 조그마니 보이기 시작했다. 듬성듬성해진 상록의 잎사귀 사이로 큼지막한 흉벽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느새 목적지가 가까워진 것이다. 재환이 물었다.
"저곳이 "위대한 땅"인가?"
"...뭔 뚱딴지같은 소리예요?"
"악마에게 들었다. '탑'을 졸업하면 "위대한 땅"에서 군주들의 수하로 들어가 생활하게 된다고."
미노는 그런 재환이 황당하다는 듯 한참이나 눈을 깜빡거리다가 물었다.
"악마가 해 준 말이 틀렸나?"
"아니, 틀린 말은 아닌데.... 당신 뭔가 착각해도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
"맙소사, "혼돈"에 들어올 적의 기억만 없는 게 아니라, "위대한 땅"의 기억까지 다 까먹으신 모양이네."
"무슨 소리지?"
어느새 표정을 바꾼 미노가 흉벽을 가리키며 말했다.
"다시 말해 주지만 여긴 "위대한 땅"이 아니라 "혼돈"이고.... 저기는 '고르곤 성채'라는 곳이에요. 이 근방에선 가장 큰 성이죠."
그 휘황한 성의 외양을 보며, 재환은 기분이 조금 이상해졌다.
무리와 공동체를 이루고, 성채 따위를 지으며 살아가는 자들이 이곳에도 존재하는 것이다. 적어도, 이 땅 또한 최소한의 생존 환경이 보장된 곳이란 이야기겠지.
"악몽의 탑을 클리어하면 바로 "위대한 땅"으로 나오는 게 아니었나?"
"보통은 그렇죠."
"그럼 왜 나는 "혼돈"에 있는 거지? 그리고 너는―"
순간 미노의 눈빛이 흔들렸다. 마치, 그 질문만은 하지 말라는 듯이.
"왜 이곳에 오게 된 거지?"
미노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그녀에게만 시간이 아주 느릿하게 흐르는 것처럼, 서늘하고 차가운 공기가 주변을 머물렀다.
"일단, 당신의 기억상실이 정말이라 생각하고 대답해 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녀는 이제껏 본 적이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절대로, 다른 사람한테는 그런 질문 하지 말아요. 우리가 왜 "혼돈"에 있냐니. 자기가 뭘 물은 건지 알게 되면 아주 후회하게 될걸요."
미노는 그렇게 말하더니 저벅저벅 앞서 걸어갔다.
길었던 수풀림이 완전히 끝나며 중세풍의 거대한 성벽이 완연한 모습을 드러냈다.
어디서도 저렇게 커다란 성채는 본 적이 없었다.
인류가 힘을 모아 탑의 50층에 건설했던 아토포스도 저 성채에 비하면 그저 시골 촌락 수준에 불과했다.
성벽의 외곽에 새겨진 다채로운 문양과 보수의 흔적들은 성의 역사가 꽤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한참이나 그 성벽을 올려다보던 재환이 고개를 내렸을 때, 성의 입구 근처에서 특이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거대한 원형의 마법진이 그려진 장소.
마법진을 본 순간, 재환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그와 비슷한 장소를 알고 있었다. 저곳은-
"으으, 주, 죽고 싶지 않아!"
"살려 줘! 살려 줘!"
"악몽의 탑" 1층의 '소환장'과 똑같은 구조였다.
허름한 마법진 위에 발가벗겨진 사람들이 떨고 있었다. 가슴을 붙들고 울고 있는 사람들도 있고,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마치 치명적인 공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처참한 얼굴들. 반면 어떤 사람들은 잠든 것처럼 평안해 보였다.
등줄기가 삐걱거리는 느낌이었다.
모두가 다른 표정이었지만, 사실 모두 같은 표정으로 설명될 수 있는 얼굴들이었다.
그리고 재환은, 사람들이 언제 그 표정들을 짓게 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원형 마법진이 빛을 내며, 또 다른 사람들이 마법진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나신의 몸으로 공포에 젖어, 바들바들 떠는 사람들.
비명, 절규, 아득한 고독과 절망들······.
등줄기로 서서히 소름이 올라왔다.
"이제 알겠어요? 당신이 나한테 뭘 물었던 건지?"
형언할 수 없이 괴로운 목소리로 미노가 말했다.
"······왜 "혼돈"에 오게 되었냐니, 이곳의 누구에게도 그런 질문은 하지 말아요."
그 말을 하며, 미노는 품속에서 단도 하나를 꺼내 자신의 새끼손가락 끝을 살짝 베어 보였다. 손가락 끝에 맺힌 은색 방울이 점점이 흩어져 허공으로 떨어졌다. 방울은 이내 허공에서 빛의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이 세계에서, 영혼은 은색 입자로 흩어진다.
별로 놀라운 사실도 아니었다. 튜토리얼 게임에 있을 때도 알고 있었던 것이고, 이곳에 와서도 레드 폭스를 죽이며 본 장면이었으니까.
놀라운 사실이 아니었기에, 지금껏 재환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본래 육체라는 것은 피를 흘리고, 내장을 토하며 비참하게 죽어가는 물질이라는 것을.
결코, 은빛 가루가 되어 흩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그제야 재환은 이 세계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런가. 이 세계의 사람들은 이미······."
어딘가 슬픈 눈빛으로 소환장 쪽을 바라보고 있는 재환에게, 미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환영해요. 죽은 자들의 세계. "혼돈"에 오신 것을."
Episode 3. 은빛 구속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