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권 10화
180화
관자놀이를 타고 땀이 흘러내린다.
질끈 묶은 머리도 땀범벅이었다.
이렇게 지칠 때까지 움직였던 것 이 언제였던가.
조수아가 미간을 찡그렸다.
부러진 한쪽 팔에서 느껴지는 고 통이 상당했다.
서두르지 않으면 뒤에서 쫓아오는 마신 추종자에게 제압당하거나,
즉사하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아마도 마신 추종자들은 자신을 죽일 것 같지는 않았다.
그들이 진정 원하는 건 자신이 아닌 신유준이었으니.
정보를 얻어 내고 인질로 삼겠지.
그럴 수는 없었다.
만약, 잡히면 그 남자에게 또 폐를 끼치게 된다.
그녀는 죽으면 죽었지, 남도 아니고은인에 가까운 신유준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조수아가 필사적으로 달리면서 생각했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신유준과 떨어지고 나서 얼마 지 나지 않았을 때 마신 추종자들이 나타났다.
유준과 파티 사냥으로 레벨이 많 이 오른 조수아가 버거울 정도로 마신 추종자들은 강했다.
조수아는 마신 추종자 한 명을 죽이고 도주했지만, 팔에 큰 부상을 입고 말았다.
심지어 상처 지연의 저주까지 걸 려 포션으로도 치료가 되지 않는 상태.
절대 긍정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그래도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건, 도망가면서 죽인 땅굴의 포식자에게서 특이한 아이템 한 개를 얻었 다는 것이다.
[동기화 구슬]
등급 : 유물
옵션 : 정보가 없습니다.
유물 등급의 아이템!
그녀는 유물 등급이 있다는 걸 이번에 처음 알았다.
문제는 사용처를 모른다는 것.
혹시나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아이템일까,
도망가면서 마력을 불어 넣거나 흔들고 던지고 깨물고 다 해 봤지만,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소용없다! 얌전히 잡혀!"
동기화 구슬에 관심을 쏟을 때가 아니었다.
뒤까지 바짝 따라온 마신 추종자 가 한 명 있었다.
조수아가 마력을 끌어 올렸다.
"주인님. 알이 엄청 요란스럽습니다."
"알아. 저 블랙 요드라는 놈 때 문인 거 같은데 혹시 이 아이템이 신수의 알이었던 건가?"
신수의 알이 왜 어스 드래곤의 둥지 근처에 있었던 거지?
블랙 요드는 시스템이 경고했던 내용대로 유준을 찾아왔다.
정확히는 제단 위의 검은 돌이 내는 마력 파장 때문이었다.
녀석의 흉흉한 안광이유준 일행을 훑고 지나갔다.
블랙 요드는 드레이크와 비슷한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다만, 드레이크보다는 훨씬 거대 하며 드래곤보다는 비교적 왜소했다.
외견만 놓고 보면 반쪽짜리 드래 곤이라고도 불리는 어스 드래곤보 다는 확실히 강해 보였다,
"네놈들. 거기서 당장 나와라."
"웅? 말도 해?"
블랙 요드가 굵고 낮은 목소리로 말을 했다.
신기한 건 입을 전혀 움직이지 않고 말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이상하게 생각할 것도 없는 것이, 생명체가 아닌 파라네트와 타파골도 말은 할 수 있었다.
심지어 파라네트는 말솜씨가 날 이 갈수록 유창해졌다.
신수가 말을 한다고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나오라는 말 못 들었는가?"
"명령?"
더 이상의 경고는 없었다.
블랙 요드가 입에서 칠흑색의에너지를 뿜었다.
우우웅.
일자로 발사된에너지의 부피가 점차 커지더니, 근방 일대를 뒤덮는 크기가 되었다.
피할 곳이 완전히 없어진 것이다.
블랙 요드의 칠흑에너지는 당장
실드를 만들어 낸다고해서 막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미친…."
유준의 실드라고 해도 버티기 힘 든, 순도 높고 강력한 기운이었다.
파라네트의 공간 이동 마법을 사용하기에도 이미 늦은 상황.
이럴 때 필요한 스킬은 바로 초 집중이었다.
초집중 (EX+).
시간이 천천히 흐르기 시작했다.
유준이 검을 휘둘렀다.
쾌검 (SSS).
검이 움직이는 속도가 점점 빨라 졌다.
유준의 눈으로도 좇을 수 없을 속도로 휘둘러졌다.
검술 (EX).
검의 궤적이 한 치의 흔들림도없이 일정하게 되었다.
거기서 유준은 방향을 조금씩 틀었다.
웅. 우웅.
검이 바람을 가르고, 공기가 찢 어지는 듯한 파공성이 울려 퍼졌다.
유준의 주위로 희미한 형체가 생 기기 시작했다.
검에 마력을 불어 넣었다.
그러자 얇은 막이 생겼고, 그 크기가 점점 커졌다.
순식간에 일행 모두를 덮는 크기 가 된 푸른 막.
유준의 손이 쉬지 않고 움직였다.
푸른 막의 색이 진해져 완전히 파란색이 되는 그 순간.
[검술의 경지가 절정에 뛰어넘었습니다!]
[검술의 이치나 기예의 경지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검막(SSS) 스킬이 생성되었습니다.]
[불가능한 업적!]
[스킬 보석(중)을 획득합니다.]
번뜩이는 기지로 스킬을 하나 만들어 낸 유준은 얼떨떨한 얼굴로
검을 내려다봤다.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스킬을 만들어 버렸다.
스킬 보석까지 공짜로 받다니.
솔직히 기가 막혔다.
그렇게 얻고 싶어도 구해지지 않 던 아이템이, 검 몇 번 휘두르니 업적 보상으로 주어지다니.
허무하다면 허무하지만, 죽 쒀서 개 준 것이 아니니 불평할 일도 아니었다.
그때, 블랙 요드가 발사한 기운
이 도달했다.
분명 블랙 요드의 공격은 유준에게 도달하기까지 1초 남짓.
그 말은 즉, 유준은 검막이라는 새로운 기술을 불과 1초도 되지 않는 아주 짧은 시간만 만들어 냈다는 것이 된다.
콰앙!
검막과 블랙 요드의에너지가 충 돌했다.
그 후 펼쳐진 광경은 놀라웠다.
블랙 요드의에너지가 막힌 것뿐 만이 아니라, 검에 갈려 흩어져 버렸다.
주변은 초토화되었지만, 유준 일 행 근처로는 칠흑색의에너지가 삽 시간에 사라졌다.
블랙 요드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 했다.
"무슨 짓을 한 거지?"
한결같은 적들의 반응에 유준은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검을 들고 블랙 요드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오지 마라."
블랙 요드가 거대한 꼬리를 바닥에 내리쳤다.
접근하면 꼬리로 후려치겠다는 의도인 거 같은데.
유준의 눈에는 그 모습이 겁 많은 강아지가 두려움을 숨기기 위해 짖으며 경계하는 것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오지 말래도!"
콰앙! 쾅!
꼬리로 바닥을 치는 소리가 장난 아니게 컸다.
확실히 덩칫값은 하네.
'타고 다니면 멋있을 거 같긴 하다.'
RPG 게임을 즐기는 유저라면 탈 것에 대한 로망이 없을 수가 없다.
'날개도 있으니 딱인데.'
하지만 아쉽게도 선행 과제를 달 성하기 위해선 블랙 요드를 죽여야 했다.
그것만 아니었어도 어떻게든 테 이밍하려고 했을 것이다.
유준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블랙 요드가 위협 사격을 행했다.
칠흑색의에너지를 다시 입에서 쏘아 낸 것이다.
그는 당연히 검막 스킬을 사용했다.
이번엔 정식으로 스킬로 등록된 검막은 전보다 효과가 훨씬 좋아졌다.
스킬의 위력을 증가시키는 아이템과 칭호들 덕분이었다.
퍼센트가 수백 단위로 증가하니, 검막의 범위는 이전보다 몇 배가 늘어났다.
거리도 가까웠던 탓에 블랙 요드 의 칠혹색 브레스가 완전히 소멸해 버렸다.
"마, 말도 안 돼!"
블랙 요드는 가장 자신 있었던 브레스가 두 번이나 막히자, 날개를 펼치고 도주했다.
현명한 선택이다.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적을 앞에 두고 끝까지 싸우는 건 목숨을 버 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허나, 도망친다고해서 유의미한 결과를 남길 수도 없었다.
점멸을 쓴 유준이 검으로 블랙 요드의 목을 베고 지나갔다.
땅에 안정적으로 착지한 그는 추락하는 블랙 요드를 향해 검을 겨눴다.
혹시나 목을 잘리고도 살아 있을까 했는데, 괜한 기우에 불과했다.
[수백 년을 살아온 신수 '블랙 요드'를 일격에 처치했습니다!]
[믿을 수 없는 업적!]
['신수의 혼(블랙 요드)'을 획득 합니다.]
[이벤트 종료 후, 막대한 보상이 주어집니다.]
레벨이 오르지 않는게 너무 아쉬웠다.
블랙 요드가 자신의 공격 한 번에 죽기는 했지만, 절대 약한 적이 아니었다.
그가 본 건 브레스뿐이지만, 그 것만으로도 지금껏 봐 온 그 누구 보다도 강하다고 확신할 수 있다.
만약 이벤트가 아니었다면, 레 벨이 어마어마하게 올랐으리라.
'뭐, 마지막에 보답받으면 장땡 이지.'
일단 지금 얻은 아이템은 두 개.
스킬 보석과 신수의 혼이다.
'업적 보상으로 얻은 스킬 보석은 초집중에 쓰자.'
검막은 무척 좋은 능력이지만, 초집중 스킬에 투자하는 것이 더 좋은 선택이었다.
이번에 검막을 만들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초집중 덕분이었다.
'괜히 EX+등급이 아니었지.'
이미 효과를 톡톡히 본 스킬을 더 극대화하는 방식.
초집중 스킬이 원래 좋은 건 알 고 있었는데, 스킬 생성에도 도움을 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집중력을 한계 이상으로 끌어내 주는 스킬이니까, 어떻게 보면 만 능에 가까워.'
거기까지 생각한 유준은 뜸들이 지 않고 초집중 스킬에 보석을 사용했다.
[스킬 보석(중)을 사용했습니다.]
[초집중 (EX+) → 초집중 (EX++)]
기대했던 대로 스킬의 등급이 한 개 증가했다.
EX++.
유일하게 고대 마법만이 그 등급 이었는데, 이번에 하나가 더 추가 되었다.
'초집중도 자주 활용해야겠어.'
스킬 사용 후의 피로함도 예전보 다는 훨씬 덜한 것 같았다.
확실히 등급이 높으니 부작용이 줄어든 모양이다.
블랙 요드를 상대하기 위해 인벤 토리에 잠시 넣어 뒀던 '정체를 알 수 없는 알'이 격렬하게 움직였다.
"또 이러네."
그러나 알은 신수의 사체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었다.
또 다른 아이템인 신수의 혼.
'정체를 알 수 없는 알'은 하염없이 신수의 혼을 갈망하고 있었다.
'이게 뭐길래?'
유준은 블랙 요드를 잡고 얻은 신수의 혼의 정보부터 살펴봤다.
[신수의 혼(블랙 요드)]
등급 : 초월
옵션 : 블랙 요드의 혼이 담겨 있는 돌입니다.
"초월..."
신수의 혼이 초월 등급이라는 사 실에 기뻤지만, 그의 얼굴에 이내 실망감이 자리 잡았다.
'효과가 따로 안 나와 있네.'
용도를 모르면 당장 쓸모가 없었다.
유준은 결국 정체를 알 수 없는 알로 시선을 돌렸다.
"네 부화랑 관련되어있는 거냐?"
그가 알에 대고 물었다.
파라네트가 이상하게 봤다.
"주, 주인님? 누구랑 대화하는 겁니까?"
" 알."
"저, 죄송합니다만..., 알은 말을 못 합니다. 확실해요."
"내가 바보냐? 그것도 모르게."
"그럼 왜 말을 거셨습니까?"
"녀석이 뭘 원하는지 알 거 같으니까. 신수의 혼을 원하지? 너?"
그의 말에 알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어? 진짜 의사소통이 되는 겁니까?"
"응."
"저도 해 봐도 되나요?"
"뭘 해?"
" 대화요."
"응? 하고 싶으면 해 봐."
"예!"
파라네트가 엉덩이를 들썩이며 알에게 다가갔다.
녀석이 알의 위쪽에 조심스레 손을 올렸다.
"어이. 네가 장차 주인님의 세 번째 종이 될 거 같은데 내가 경고 하나 하지."
알은 당연하지만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혼란스러운지 알이 흔들리 기만 했다.
파라네트가 말을 이어 나갔다.
"선배 예우를 깍듯이 하라. 그게 우리 그룹의 첫 번째 철칙이다. 누 가 선배인지는 안 봐도 자명한 일. 나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잘 알겠지? 만약 그 철칙을 지키지 않는다면...
"너 뭐 하냐?"
유준이 파라네트의 뒤통수에 대 고 물었다.
파라네트가 비굴한 웃음을 지으 며 고개를 돌렸다.
"주인님. 조기교육이 얼마나 중 요한지 잘 아시잖습니까? 첫 장에 기강을 잡아 놓지 않으면 놈이 언 제 하극상을 일으킬지 모릅니다."
"그냥 네가 더 위에 서고 싶은 게 아니고?"
"...에,에이제가 어떻게 주인 님 위에 서겠습니까?"
"나보다 위에 선다는 말은 안 했는데."
파라네트가 눈밭에 머리를 박았다.
"죄송합니다!"
"뭐가 미안한데?"
"제가 감히 불경한 생각을 했습니다."
"내 뒤통수 치려고 했어?"
"그건 절대 아닙니다!"
"그럼?"
"그저 주인님보다 강해졌으면 좋겠다고 염원했던 게 다입니다."
"그게 그거 아니야? 나보다 강해져서 어쩌려고?"
"주인님을 지켜 드릴 겁니다! 그 누구도 손댈 수 없게요!"
"말은 번지르르하게 잘하네."
"정말입니다! 믿어 주십시오!"
파라네트가 땀을 삐질삐질 홀리 면서 대답했다.
...얘 근데 뼈밖에 없으면서 땀은 도대체 어디서 나는 거야?
피식 웃은 유준은 파라네트의 어 깨를 툭툭 두들겼다.
역시 파라네트의 충성도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나저나... 이건 어쩌지.'
유준은 신수의 혼을 들고 고민에 빠졌다.
당장 사용법을 모른다.
그런데 신화 등급의 알이 신수의 혼을 원하고 있다.
"에라, 모르겠다."
고민해도 답은 안 나온다.
유준은 알에 신수의 혼을 가져다 댔다.
내 인벤토리가 이상하다
- 8권 11화
181 화
시간이 흘렀다.
알의 미세하게 깨진 틈 사이에서은은한 빛이 흘러나왔다.
신수의 혼은 사라진 지 오래.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결과가 나 타날 터였다.
유준은 그동안 아까 읽지 않고 넘겼던 홀로그램 메시지를 다시 띄웠다.
[선행 과제를 모두 달성하셨습니다!]
[극빙석은 빙궁의 시련을 클리어 할 시에 얻을 수 있습니다.]
[현재 시련의 난이도는 EX등급 입니다.]
"이번엔 또 시련이냐."
끝이 없네.
아니지.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작정 극빙석을 찾으라는 것보 다, 명확한 목표를 제시해 주는 것
이 플레이어 입장에서는 편했다.
그 난이도가 EX등급이라는게 문제였지만.
보통 등급 시련이나 던전이라고 하면 최상위 랭커들 여럿이 도전해야 간신히 깰 수 있는 수준이다.
그런데 드드도 SSS도 아닌 EX등급이라니.
극빙석을 얻으면 도대체 어떤 걸 주려고 이렇게 극악의 시련을 설계 한 걸까.
보상이 장난 아닐 것 같았다.
"주, 주인님! 이것 좀 보십쇼! 알 이 깨지고 있습니다!"
유준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파라네트의 말대로 알이 반쯤 깨져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균열이 점차 번져 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쩌적! 쩌저적!
['정체를 알 수 없는 알'이 블랙 요드의 흔을 머금었습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알'이 블랙 요드의 혼을 완전히 흡수했습니다!]
[잠재력의 한계가 사라집니다.]
[잠재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알'이 부화 합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알'이 당신을 주인으로 인식합니다.]
[새로운 신수의 이름을 정해 주십시오.]
"오...
일단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메시지가 많이 떠 기분이 좋긴 했다.
부정적인 내용은 하나도 없었다.
'그럼 애초에 알의 정체가 신수였던 거야?'
신수에게 더 요란하게 반응했던 이유가 그거였나.
그런데 이해가 안 가는 점이 하 나 있었다.
왜 신수가 어스 드래곤의 둥지에 있었냐는 것이다.
심지어 어스 드래곤을 잡은 장소는 심연이었다.
솔직히 이곳과는 하등의 연관도 없었다.
'단순히 신수가 여기 있어서 반
응한 거라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데.'
그렇다면 탐색 반경이 너무나도 넓지 않은가.
어찌 됐든 잘 풀렸으니 다행이다.
그때였다.
"끽!"
이름 없는 신수가 알에서 나와 모습을 드러냈다.
신수의 생김새는 유준의 예상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블랙 요드의 혼을 머금어 비슷하
게 생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순백색의 털을 가진 작은 생명 체.
전체적으로 둥글둥글한 몸이었다.
동그랗고 커다란 두 눈에 코는 강아지 코와 닮아있다.
그리고 그 코와 입 주변에는 가 늘고 검은 털이 십수 개가 달려 있었다.
'뭔가 귀엽게 생겼네.'
이 신수와 닮은 동물이 생각났다.
'하프물범이잖아.'
미세하게 다르긴 하지만, 거의 비슷했다.
하프물범을 닮은 신수가 큰 눈을 연신 깜빡였다.
무한의 탑이 지구에 있을 때 여 러 개의 하프물범 동영상을 본 기 억이 있다.
그때 잠깐 하프물범의 귀여움에 빠졌었지.
'신수치고는 많이 약해 보이는데.'
성체가 아니라서 그런지 크기도
매우 작은 편이었다.
유약해 보이는 생김새 때문에 강 할 것 같다는 인상이 전혀 없었다.
그냥 게임에서 데리고 다니는 아 기자기한 펫 정도의 느낌이었다.
"아빠!"
그때 신수가 유준을 당황스럽게 만드는 말을 꺼냈다.
"...뭐라고?"
"아빠! 보고 싶었어요!"
"우리가 언제 만난 적이 있었던가?"
"쭉 같이 있었잖아요."
"넌 알에 있을 때부터 기억이 있는 거야?"
"네! 당연하죠!"
왠지 갓 태어난 주제에 말이유 창하다 했다.
"내가 널 불에 구우려 했던 것도 기억이 나니?"
"네!"
"미안하다."
"괜찮아요!"
해맑게 웃는 하프물범에 유준은 죄를 지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래서 외형이 중요하구나.'
"유준...아. 너 아이가 있었어?"
옆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 고 개를 돌려 보니, 마누엘라가 충격을 받은 얼굴로 서 있었다.
"당연히 없지."
"다행이다...
"왜 다행이야?"
"으, 응? 신경 쓰지마!"
" 뭐야."
유준은 부화한 신수를 바라봤다.
시스템이 얘 이름을 정해 주라고 했었지.
"네 이름은 하프다."
"마음에 들어요, 아빠."
"너 혹시 예스맨이니?"
"네? 그게 뭐예요?"
"아니야."
순종적인 신수라서 편하긴 할 것 같았다.
'신수는 소환수랑 다르게 죽으면 끝인 건가?'
소환과 역소환의 개념이 없었다.
소중히 다뤄야 할 것 같았다.
'상태창도 한번 봐야겠네.'
유준이 파라네트에게 그랬던 것 처럼 하프의 상태창을 열람하려고 했다.
그런데 열리지 않았다.
아니, 상태창이 없다고 하는게 정확했다.
'신수는 상태창이 따로 없는 건가?'
소환수와는 개념이 많이 다른 듯 했다.
상태창이 없는 것만 보면 몬스터와 더 흡사한 편.
"하프. 네 능력이 뭔지 알려 줄 수 있어?"
"블랙 요드가 사용한 브레스요. 그거 쓸 수 있어요."
" 정말?"
"제가 더 세요, 아빠."
"블랙 요드보다?"
"네!"
"*.....그래?"
솔직히 안 믿겼다.
블랙 요드가 사용한 칠흑의 브레 스는 유준이 실드를 만들어도 막을 수 없는 아주 강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블랙 요드보다 더 강력한 브레스를 사용할 수 있다니?
"한번 보여줄래?"
"네!"
하프의 입이 어마어마하게 커졌다.
그 안에서 느껴지는 파동에 유준 이 화들짝 놀랐다.
녀석의 얼굴이 향하는 방향이 이 상했다.
"잠깐만! 여기 말고 반대쪽으로!"
"네! 알겠어요!"
눈 한 번 깜빡이는 순간.
우웅.
콰아아아앙!
산 중턱에서 쏘아진 브레스.
다행히 바깥을 향해 쐈기에 주변에 큰 피해는 없었다.
어마어마한 크기의에너지가 하 늘에 퍼졌다.
파팡! 파파팡!
폭죽 터지는 소리와는 비교 불가능한 크기의 폭음이 귓가를 때렸다.
"어때요?"
칭찬을 바라는 듯한 하프의 말 투.
유준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강하구나, 너."
"헤헷
그나저나 털이 복슬복슬해서 만 질 때의 느낌이 좋았다.
이거 중독되는데.
"다른 능력도 있어?"
"아직은 없어요!"
"아직은? 나중에는 생긴다는 거야?"
"네! 그리고 아빠가 강해질 때마 다 저도 강해져요. 방금 쏜 브레스 의 위력이 강한 것도 아빠 덕분이죠."
"그렇구나."
아마도 자신의 공격력이나 능력치에 큰 영향을 받는 듯했다.
하여튼 하프는 신수로서의 능력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게다가 그가 강해질 때마다 신수 의 능력도 세진다고 했다.
유준에 비해서 하프가 절대 뒤처 질 일은 없는 것이다.
그 점만 봐도 만족스러웠다.
'문제는 신수는 아이템을 착용할 수 없다는 건가.'
그건 아쉬운 부분이었다.
레벨이 따로 없으니 아이템 착용 이 불가능했다.
아이템만 착용할 수 있었으면, 어쩌면 자신보다도 공격력이 높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유준은 문득 마누엘라를 바라봤다.
그를 쳐다보고 있던 마누엘라와 자연스레 눈이 마주쳤다.
"왜, 왜?"
생각해 보니, 마누엘라에게도 아이템을 주기로 했었지.
그녀가 자신에게 준 도움도 적지 않았다.
애초에, 초월의 돌을 찾은 것도 그녀의 덕분이고 돌발 이벤트에서 만물상점과 VIP 상점을 찾아 주기 도 했다.
마누엘라에게 받은 게 너무 많아 서 입 닦고 가만히 있기엔 양심이 찔렸다.
"줄 게 있어."
"으응? 뭘?"
"기다려 봐."
유준이 인벤토리를 열었다.
'어떤 아이템을 주는게 좋을까.'
마누엘라는 마법과 저주 능력에 특화되어 있었다.
대신에 신체 능력이 동 레벨 플레이어들에 비해 뒤떨어지는 편이었다.
'약점을 보완하는게 나을까, 아니면 장점을 극대화하는게 좋을까.'
고민하긴 했지만, 사실 답은 정
해져 있었다.
'약점을 보완해 봤자 나한테는 크게 도움이 안 돼.'
반면에 그녀의 마법과 저주 능력 이 발전하게 되면 유준에게도 큰 도움이 될 확률이 높았다.
유준은 마법 능력과 관련된 신화 아이템들을 각 부위별로 꺼냈다.
'장신구도 주자.'
어차피 남는게 신화 아이템 장 비였다.
솔직히 이러한 아이템들을 그가 더 이상 쓸 일이 없었다.
기껏 써 봐야 블랙마켓에 파는 정도인데, 돈도 넘치도록 있었다.
마지막으로 망토까지 꺼낸 유준 이 마누엘라에게 건네주었다.
"...이게 다 뭐야?"
"빌려줄게. 확인해 봐."
"으응."
아이템들의 정보를 일일이 확인 한 마누엘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착용 레벨 제한이 500.
전부 신화 등급 아이템이다.
심지어 방어구에는 세트 옵션이 붙어 있기까지 했다.
"...이걸 날 줘?"
"빌려주는 거라니까."
사실 말이 빌려주는 거지, 같이 다니는 이상 그녀의 것이나 다름없었다.
따로 계약으로 강제하는 것도 아니고.
유준의 말뜻을 이해한 마누엘라 가 머뭇거렸다.
"왜?"
"너무 과분해서.... 이렇게 많 이 줘도 되는 거야?"
"네가 제대로 활용해서 나 도와 주면 되지. 그럼 서로 이득 아니야?"
"그, 그치!"
그 후에도 마누엘라는 계속 망설 이는 모습을 보이다가 유준이 정색 하며 건네는 순간 조용히 받아들였다.
"고, 고마워! 꼭 보답할게!"
"오냐"
그때였다.
"주인님."
파라네트가 불렀다.
"너? 넌 왜?"
"저도 500레벨이 넘어서, 허허."
"그래서?"
"크흠... 마녀가 좋은 장비를 받았더군요? 제가 레벨이 낮을 때 받았던 아이템들보다 더 좋아보입니 다...
"아, 네 장비를 꼭 업그레이드해야겠다? 그런 뜻이야?"
"꼭 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서도... 주인님을 제대로지키기 위 해선 필요할지도 모르고요. 아니, 사실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꼭 달 라는 건 아니고... 이제 주인님께
서 결정하실 일이지요. 하지만 더 뛰어난 장비가 있으면 아무래도 좋겠죠!"
"뭐라는 거야. 받고 싶으면 받고 싶다고 해."
"받고 싶습니다!"
사실 파라네트에게 빌려줬던 아이템도 괜찮은 아이템들이다.
하지만 착용 제한 레벨도 500보 다는 낮고, 유준의 기준으로 최상 급 아이템은 아니었다.
급을 매기자면 딱 중상 정도.
파라네트도 요즘 활약을 잘하고 있으니, 장비를 교체시켜 주었다.
새로운 장비로 탈바꿈한 파라네 트가 실실 웃었다.
"좋아?"
"좋습니다! 행복합니다!"
"밥값은 해라."
"물론이지요! 헛헛."
이벤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극빙석을 찾아야 비로소 제대로 된 보상을 받을 수 있을 터.
'그 시련이라는게 뭔지도 궁금 하고.'
EX급 시련.
그가 겪었던 그 어떤 이벤트나 시련보다 힘들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 기대감이 부풀어 올랐다.
그만큼 보상도 커질 테니.
우선 시련을 받기 위해선 빙궁을 찾아야 한다.
"빙궁이 어디 있을까."
"근처에 있지 않을까요, 주인 님?"
"설산에?"
"설산...은 아닌 거 같습니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이미 설산을 올라오면서 주변을 둘러봐 둔 상황.
빙궁으로 보이는 무언가는 없었다.
"타파골."
"예."
"어딘지 알겠어?"
"예."
"안내해."
"알겠습니다."
타파골이 있어 다행이다.
너무 편하지 않은가.
시간도 절약할 수 있고.
녀석이 없었으면 설원을 다 뒤지 고 다녀야 했을 것이다.
'이게 내비게이션의 편리함인가.'
확실히 타파골이 있고 없고의 차 이가 컸다.
'결국, 내 곁엔 나한테 쓸모 있는 존재만 남게 되는구나.'
물론 곁에 없는 이들 중에, 주동 현과 던전을 잘 찾는 김희윤인가, 김예지, 김희연, 인가도 있긴 했다.
유준 일행은 타파골의 안내를 받아 편안하게 빙궁이 있는 곳에 도 달할 수 있었다.
빙궁은 설산에서 5km 정도 떨어 진 곳에 자리했다,
사실 유준에게 그리 먼 거리는 아니지만, 시야를 가리는 눈 폭풍 때문에 위치를 알 수 없었다.
길잡이 골렘인 타파골이 금방 찾을 수 있던 것도 거리가 가깝기 때 문이었다.
빙궁은 무척 거대했다.
말 그대로 얼음으로 된 궁전이었는데, 멈추지 않고 부는 강력한 눈
폭풍에도 무너지지 않을 정도로 튼 튼해 보였다.
그 순간이었다.
지이잉-!
유준은 주머니 안에 넣어둔 동기화 구슬에서 진동이 일고 있음을 느꼈다.
"또?"
내 인벤토리가 이상하다
- 8권 12화
182화
동기화 구슬이 원래 이렇게 구하기 쉬운 거였나?
이 정도면 진즉에 몇 개는 더 발견되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도 했었지만, 대체로 동기화 구슬은 아주 위험한 지역에 만 있었다.
그 근처에 서식하는 포식자나 몬 스터만 봐도 알 수 있다.
국왕의 침실은 예외지만, 어떻게
보면 그곳도 위험한 곳이었다.
"후...
빙궁 안은 오히려 바깥보다 한기 가 더 그득했다.
불의 정수를 섭취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여실히 느껴질 정도.
물론, 불의 정수 아이템이 사기 적인 효과를 지닌 만큼 춥다고 느 끼진 않았다.
"느껴지는 기척은 없는데..."
"시련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빙궁 자체가 시련은 아닌 것 같네."
시련을 주는 어떤 장치가 있는 걸 수도 있었다.
유준과 타파골, 파라네트가 흩어 졌다.
일단 빙궁에 큰 위협 요소가 없었고, 소환수는 죽어도 부활하는 것이 가능해 홀로 움직이게 둬도 되었다.
마누엘라와 하프는 유준과 같이 다녔다.
특히 하프.
녀석은 강력한 공격 스킬이 있는데다가, 잠재력이 무궁무진하여 죽
지 않도록 항상 보호해야 했다.
빙궁의 내부는 넓었다.
그렇다고 주야장천 뒤지고 다녀 야 할 만큼 방대하지는 않았다.
유준은 시련보다도 동기화 구슬에 더 관심이 있었다.
'동기화 구슬부터 찾자.'
정해진 시간 내에 시련을 받아야 하는 건 아니었으니, 여유를 가져 도 되었다.
동기화 구슬이 한번 진동한 순 간, 다른 동기화 구슬을 찾는 일은 누워서 떡 먹기보다 쉬웠다.
진동이 강해지는 대로 움직이면 그만이었으니까.
유준은 동기화 구슬이 이끄는 대 로 걸음을 옮겼다.
어느 순간 발을 멈춘 유준이 고 개를 갸웃했다.
이상한 게 보였다.
'포털?'
워프 포털이 있었다.
그것도 아주 큰, 복잡하고 정교 한 문양이 그려진 포털이었다.
포털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은 어 마어마한 양의 유동 마력을 머금고 있었다.
'여기 정체가 뭐지?'
누군가가 만들어 낸 듯한 빙궁이 있었고 그 안에는 그가 처음 보는 규모의 마법 포털이 있었다.
고대 마법(EX十十)으로 인해 마법에 대한 지식이 매우 풍부한 그로 서도 만들 엄두가 안 나는 마법진 과 포털.
상대적 박탈감이 들 정도로 마법 진의 수준이 대단했다.
도대체 어떤 마법사가 만들어 낸 건지….
'마법 관련 스킬이나 특성을 더 익혀야 하나?'
고대 마법 스킬과 마법 이해 특 성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걸까.
'아니지.'
어차피 지금 능력치는 충분히 높은 편이었다.
높다 뿐일까, 그 누구와도 견줄 수 없을 정도의 수치를 기록하고 있었다.
스킬과 특성은 언젠가는 얻게 될 터.
마음을 느긋하게 먹을 필요가 있었다.
유준이 이글 아이 스카우터를 착 용하고 주변을 탐색했다.
동기화 구슬.
동기화 구슬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 여기 근처에 있어야 하는데.'
그러다 동기화 구슬보다 더 큰 구슬 하나를 발견했다.
'...봉인 구슬?'
절대 봉인의 구슬.
이게 왜 여기 있는 거지?
유준이 황급히 인벤토리를 열었다.
혹시나 자신이 떨어뜨렸나 싶어 서 열어 본 것이었지만, 인벤토리에 절대 봉인의 구슬이 떡하니 있었다.
"이건 뭐야, 그럼."
이 귀한 아이템이 왜 이렇게 누 추한 곳에?
"나야 땡큐지."
이렇게 주인없이 떨어진 물건은 별도의 결계가 없고선 소유권을 가져올 수 있었다.
시간이 오래 흘렀다면 무조건이다.
유준은 냉큼 절대 봉인의 구슬을 주워들었다.
'다행히 소유권이 상실됐군.'
예상했던 대로다.
입가에 웃음꽃이 만개한 유준이 절대 봉인의 구슬을 만지작거렸다.
' 잠깐...'
혹시 봉인 구슬의 안에 누군가가 봉인되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문득들었다.
유준이 곰곰이 생각하다가 봉인을 풀어 버렸다.
봉인 구슬에서 누군가가 쏙 튀어 나왔다.
160cm 정도 되는 신장에 익숙한 생김새를 지닌 존재.
' 인간이잖아?'
눈가가 퀭하고 피골이 상접해 있었다.
그래서 처음엔 고블린인가 싶었 으나 자세히 보니 인간이 맞다.
'절대 봉인의 구슬은 구하기 진짜 어려운 아이템인데.'
과금 아이템은 아니지만, 오히려 과금 아이템보다도 더 구하기 어려
울 정도로 귀한 아이템이다.
유준조차 단 한 개만을 보유하고 있을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절대 봉인의 구슬을 구할 수 있는 장소는 단 한 곳. 그 위치도 나 말고는 모를 텐데.'
그렇다고 그 장소를 시간이 지나 도 다른 플레이어들이 절대 못 찾는다는 보장이 없으니, 절대 봉인 의 구슬이 한 개 더 있는 것쯤이야 그리 이상할 것도 없었다.
구슬이 무한의 탑에 더 풀려 있을 수도 있고 말이다.
'뭐 감사히 받아야지.'
유준은 기절해 있는 인간의 품속을 뒤졌다.
'꽤 좋은 장비를 갖고 있네.'
장비가 전부 전설 등급이었다.
게다가 세트 아이템.
이 정도의 장비를 갖추고 있는 플레이어는 극히 드물었다.
그러다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큰 주머니 한 개를 발견했다.
'뭐지? 두둑한데.'
내용물을 살펴보기 위해 주머니 끈을 푼 유준이 입을 벌렸다.
"이게 다 뭐야...
경악스럽게도, 주머니 안에는 무 언가의 귀였던 것들이 절단된 채로 있었다.
한두 개가 아니다.
최소 수십 개.
"뭐 하는 놈이지?"
아이템이 아니라, 그냥 귀를 잘 라서 보관하고 있었던 거 같다.
당연히 이해가 안 갔다.
'이상한 수집욕을 가진 건가?'
유준이 기절해 있는 남자를 바라 봤다.
뱀눈에 옹졸한 입 때문인지 얼굴
도 묘하게 비호감이었다.
그러나 녀석은 상상하던 것 이상 이었다.
주머니가 끝이 아니다.
등 쪽에는 주머니보다 더 큰 가 방도 있었다.
가방도 열어 보니, 여기도 귀가 가득 차 있었다.
심지어 귀들의 생김새가 천차만 별로 달랐다.
'종족별로 수집한 건가?'
이놈이 얼마나 사이코에 변태인 지는 잘 알았다.
괜히 절대 봉인의 구슬에 갇혀 있던 게 아닌 모양.
이런 흉악무도한 자는 평생 갇혀 있어도 할 말이 없었다.
'실제로 내 봉인 구슬에도 아주 끔찍한 인성 파탄자인 콜치가 갇혀 있지.'
콜치가 얼마나 끔찍하냐면, 무려 마신 추종자 집단에 속해 있다.
또한 자신의 말에 곧장 대답해주 지 않고, 집단에 대한 의리를 끝까지 지킨 아주 잔인하고 자비가 없는 범죄자 녀석이었다.
마신 추종자는 어떤 이유로도 그
안에 속해 있다는 것만으로 용서받을 수 없었다.
적어도 유준은 그렇게 생각했다.
"으음... 여, 여긴 어디?"
변태가 깨어났다.
유준이 얼굴을 가까이들이댔다.
"누, 누구냐!"
"넌 누군데?"
"미우라 겐신. 그게 내 이름이다."
"응? 너 일본인이야?"
"그렇다만."
일본인이 왜 있는 거지?
왠지 좀 다르게 생겼다 싶더라 니.
혹시 한국에 거주하던 일본인인 건가?
그럼 이해는 간다.
무한의 탑에 소환된 이들 중에 외국인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니까.
"너 왜 갇혀 있었어?"
미우라 겐신은 한동안 혼란스러 워하다가 유준이 뺨을 때리자 정신 이 번쩍 들었는지 눈을 크게 떴다.
"거긴 도대체 뭐였지? 너무 괴로
워 죽는 줄 알았다. 난 분명 그 괴물 같은 놈에게서 도망쳐 한국 서버로 오려고 했었는데.... 차라리 죽는게 나을 정도였어. 그나저나 엄청 오랜 시간이 흐른 것처럼 정 신이 멍하군...
"잠깐. 한국? 한국 서버라니? 일 본 서버도 있다는 말이야?"
"그, 그래. 나도 안 지는 얼마 안 됐어."
듣다 보니 너무 황당한 얘기였다.
그럼 이게 현실이 아닌 게임처럼
누군가에 의해 운영, 관리되고 있다는 것 아닌가.
비약적인 해석일 수도 있겠지만, 만약 그런 거라면....
녀석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다.
"겐신이라고 했지?"
"그래."
"일단 동기화 구슬부터 내놔."
"네가 뭔데 명령을 하는 거지?"
"네 주인이지. 다시 그곳으로 들 어가고 싶어?"
"...어이가 없군. 내가 누구인
줄 아는가? 검의 신이라고 불리는 미우라 겐신 님이시다."
"와, 오그라들어."
무슨 말투가 저러지.
통역이 되어 한차례 순화된 것일 텐데도 저 정도면... 답도 없었다.
유준은 미우라 겐신을 절대 봉인 의 구슬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곧바로 소환했다.
"흐억, 헉!"
미우라 겐신이 거친 숨을 몰아쉬 다가 유준에게 검을 들고 달려들었다.
유준은 검등으로 겐신의 검을 쳐 내고 녀석의 옆구리를 두 번 후려쳤다.
빠악! 빡!
"컥!"
"동기화 구슬 어디 있어?"
"나, 나도 모른다! 아니, 모릅니다! 그런 아이템!"
"모른다고? 너한테 있다고 하는데?"
동기화 구슬의 진동은 미우라 겐 신에게 다가갈수록 커졌다.
녀석이 소지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인벤토리 잘 확인해 봐."
"예, 예!"
단 한 수로 실력의 차이를 깨달은 미우라 겐신이 고분고분해졌다.
"여, 여기 있습니다!"
"있으면서 왜 숨겼어?"
... 아니, 저 이런 아이템이제 인벤토리에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정말입니다! 거짓말아니에요!"
"몰랐다고?"
"예! 그런데 그건 왜 원하시는 겁니까? 보니까 아무 효과도 없는거 같던데..."
"네가 알 것 없다."
유준인 겐신에게서 얻은 동기화 구슬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동기화가 다시 시작되었다는 메 시지가 나타났다.
그때 파라네트가 헐레벌떡 뛰어 왔다.
"주인님!"
"왜."
"찾았습니다!"
" 뭘?"
"시련을 주는 석상이 있습니다! 갑자기 저한테 말을 걸어서 깜짝 놀랐는데요. 귀를 기울여서 들어 보니까 뭐, 어려운데 도전할 거냐 고 그런 식으로 얘기를 하더라고요?"
"어디 있어?"
"저만 따라오십시오! 하핫!"
한 건 해냈다고 생각했는지, 파라네트가 의기양양한 발걸음으로 앞서 걸었다.
얼마나 신났으면, 미우라 겐신의 존재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웃기는 놈이네.'
녀석이 도움이 된 건 분명한 사 실이다.
유준은 멍한 얼굴로 서 있는 미 우라 겐신을 절대 봉인의 구슬에 집어넣었다.
"뭐, 뭐 하는 거...!"
말을 끝맺지 못한 미우라 겐신은 다시 고통의 방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런 놈을 배려해 줄 필요는 없지.'
딱 봐도 나쁜 놈이었다.
어쩌면 가장 중요할지도 모를 얘
기는 여유가 있을 때 제대로 들어 볼 생각이었다.
유준은 타파골을 호출하고 파라네트를 따라나섰다.
시련을 준다는 석상은 빙궁의 끝 쪽에 있었다.
의욕이 넘쳐 끝쪽까지 달려가 살 펴본 덕분에 파라네트가 제일 먼저 발견했던 모양이다.
석상은 검과 방패를 든 전사의 모습이었는데, 높이가 족히 4m는 될 법해 보였다.
이윽고 석상에서 굵고 낮은 음성 이 들려왔다.
-그대들에게 먼저 묻고 싶은 것 이 있다.
-그대들이 수락만 한다면 곧바로 EX등급의 시련을 받을 수 있다.
-매우 고되고, 힘들 것이다. 그 대들을 객관적으로 판단해 봤을 때 성공 확률은 이 할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
-시련에 성공하지 못하면 죽음 뿐, 살아날 길은 없다.
-따라서 기회는 한 번. 시련에 도전하겠는가?
목숨을 소중히 하라는 석상의 따 뜻한 마음은 충분히 전해졌다.
유준은 한 치의 망설임도없이 대답했다.
"도전한다."
- 입장.
눈앞이 새하얘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새로운 풍 경이 펼쳐지고 누군가의 끙끙 앓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아주 먼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
하지만 초인적인 육체 능력을 지 닌 유준은 그 소리를 또렷하게들을 수 있었다.
그가 귀를 기울였다.
"찾았대?"
"아니. 워낙 신출귀몰한 놈이어 야지. 마법사답게 요리조리 잘 도 망 다니는 것 같더군."
"그리 강한 것 같지도 않던데, 어찌 우리가 그리 고전했는지 이해 가잘 안가."
"원래는 강했어. 어느 순간을 기 점으로 급격히 약해진 것뿐이지."
"클, 놈이 허둥지둥 도망가던 광 경이 아직도 눈에 선하게 그려지는 군. 아주 쌤통이야."
"곧 잡히겠지. 흑기사단이 출동 했잖은가."
"하긴 그 괴물들이라면 그 괴상 하게 생긴 토끼 마법사 정도는 쉽 게 포획할 수 있겠네."
아주 멀리서 엿듣던 유준이 눈을 크게 떴다.
토끼 마법사.
분명 흔한 존재는 아니었다.
국왕 칼튼과 왕자 시리우스의 생 김새가 토끼 그 자체였으니까.
신기하게도 지하 왕국에는 토끼 가 별로 없었다.
아니, 국왕과 왕자를 제외하면 한번도 못 봤다.
어쩌면 토끼 종족이 왕족을 상징 하는 요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제누스?'
내 인벤토리가 이상하다
_ 8권 13화
183화
나름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왕족들만 토끼의 외형을 지녔다면, 제누스도 마찬가지로 토끼처럼 생겼을 확률이 높았다.
게다가 마법사라고 하지 않았던가.
시리우스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언급했던 제누스.
녀석은 제누스가 지하 왕국에서 가장 뛰어난 마법사라고 했다.
거기다 그는 행방불명이 된 상태.
우연이라고 하기엔 아귀가 딱딱 들어맞았다.
제누스는 아직 살아 있다.
'동굴에 키메라들을 만들어 배치 해 둔 것도 제누스겠네, 그럼.'
그는 혼자서 이벤트를 독차지하 려고 했었던 것 같다.
'난이도 문제도 컸겠지.'
두 명 더 늘어났다는 것만으로 난이도가 대폭 상승했다.
파티 상태라는 것도 한몫 크게 했고.
'덕분에 보상이 커졌으니, 참가 인원이 많은 건 오히려 좋은 일이야.'
물론 EX급 시련을 깰 수 있어야 만 의미가 있는 가정이었다.
유준은 대화를 듣느라 여념이 없어 방치해 둔 홀로그램 메시지를 띄웠다.
[플레이어는 둘 중 하나를 선택 할 수 있습니다.]
[1. 제국을 무너뜨리는 것(EX)]
[2. 제국과 힘을 합쳐 제2 외세 의 침략을 막아 내는 것????)]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클리어 보상도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시스템 메시지가 의미하는 바는 간단명료했다.
두 가지 선택지가 있는데, 난이 도가 높은 걸 선택하면 더 좋은 보상을 주겠다는 뜻.
'그런데... 어느 쪽이 더 쉬운 거지?'
내용만 보면 두 번째 선택지가
더 쉬워 보인다.
거리가 상당함에도 이곳까지 제구의 힘이 여실히 느껴졌다.
일개 병사의 무력이 말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기사나 마법사들의 수준은 말할 필요도 없고.
그런 제국과 힘을 합친다면 천군 만마를 얻은 느낌이겠지.
그러나 난이도가 물음표로 표시 된 것이 마음에 걸렸다.
'거기다 제2 외세에 대한 정보를 전혀 주지 않은 것도 좀 수상하기 도 하고...
게이머로서의 감은 2번이 훨씬 어려울 것이라 말하고 있었다.
'어려운게 2번이라면... 2번을 선택하는게 낫겠지.'
애초에 보상 때문에라도 좀 더 어려운 길을 선택할 생각이었다.
'난이도가 물음표인 게 조금 불 안하긴 하지만...
그만큼 어려운 것이었으면 좋겠다.
유준이 불안한 건, 2번 선택지가 쉬운 길일 경우였다.
'아니겠지.'
그는 본인의 감을 믿기로 했다.
'그런데... 내가 직접 움직여야 하는 건가?'
홀로그램으로 떠오른 선택지를 눌러 당장 고를 수 없었다.
스스로 움직여서 결정해야 하는 것 같았다.
문제는, 제국이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높은 확률로 그러겠지.
'그냥 제국을 통째로 쓸어버릴까.'
아니지. 참아야 한다.
더 큰 보상을 얻기 위해선.
좋은 생각이 났다.
'제국한테 아이템 좀 뜯어내자.'
기왕 제국과 힘을 합칠 거라면 얻을 건 잔뜩 얻어내는게 낫지 않겠는가.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시 도해 봐서 나쁠 건 없었다.
유준은 착용한 장비를 재점검하고 걸음을 옮겼다.
마누엘라와 파라네트 그리고 타 파골이 그 뒤를 따랐다.
'이거 뒤에 너무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느낌인데.'
특히 파라네트와 타파골.
이 둘은 눈에 띄어도 너무 띄었다.
"너네 들어가 있어."
"예?!"
"이따가 일 잘 풀리면 소환할게."
"알겠습니다...
파라네트가 자연스럽게 자기 스 스로 사라졌다.
유준은 타파골을 역소환시키고 생각했다.
'파라네트는 보면 볼수록 신기하네.'
어떻게 스스로 역소환을 당할 수 있지?
공간 이동 마법을 쓴 것도 아니다.
소환수의 소환, 역소환은 시스템 과 관련된 부분일 텐데.
'깊게 생각하지 말자.'
머리만 아플 뿐이다.
그는 당장 할 일이 산더미로 널 려 있었다.
유준과 마누엘라가 병영, 막사들
이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가던 그때였다.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기척이 느 껴져 유준이 검집에서 검을 꺼내 들었다.
고개를 올려 하늘을 보니, 한 플레이어가 있었다.
붉은 망토를 두른 토끼 수인족이었다.
"수인족?"
"그쪽은 인간..?"
서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누스지?"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았지?"
"척하면 척이지."
"...뭐, 내가 왕국에서 유명하 긴 하니까, 알아보는 것도 이상할 건 없겠군."
"맞아."
"인간이 여긴 웬일이지?"
"시련 때문에 왔지."
"...그대가 침입자였군."
"수상한 동굴이 있으면 들어간다. 플레이어라면 당연한 거 아니야?"
"키메라들은 어떻게 됐지?"
"전부 반갈죽이 됐지."
" 반갈죽?"
"반으로 갈라져서 죽었다고."
"...우리 왕국에 그런 말이 있었나?"
"모를 만도 하지. 요즘 인간들 사이에서만 유행하는 말이야."
키메라들이 전멸했다고 한 유준의 말에도 제누스는 아무렇지 않은 듯한 태도를 보였다.
"그렇다면 그대는지하 왕국 출 신이 아니로군?"
"당연하지."
제누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대 때문에 내가 어떤 처지에 놓였는지 아는가?"
"어떻게 됐는데?"
"제국의 전력이 너무나도 막강해 진 탓에 극빙석을 눈앞에 두고 후 퇴해야 했다."
"눈앞에 뒀다고?"
"말이 그렇다는 거지. 거의 다 찾아갈 무렵이었다는 말이다."
"과장이 심하시네. 그나저나 날 왜 찾아온 거야?"
"시련이 답도없이 어려워졌으니
까. 그대도 여기까지 온 걸 보면 보통 강자는 아닐 터. 손을 잡아야겠다고 판단을 했다."
"나랑? 나 때문에 시련이 어려워 졌다며? 원망스럽지는 않아?"
유준의 말에 제누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원망한다고 한들 그게 현재의 나한테 도움이 되지는 않지. 더군 다나 자칫하면 시련에 갇힐 수도 있는 상황이다. 한낱 감정에 휘말 려 일을 망칠 수는 없는 노릇. 그 래서 도움을 요처오하는 거다."
"날 믿을 수는 있겠어?"
"믿고 자시고 힘을 합치지 않으면 시련은 절대 못 깨."
"왜 단언하지?"
"병사들을 직접 상대해 봤으니까. 이전의 녀석들과는 달라. 전보 다 적어도 수십 배는 강해진 느낌이다. 내 능력으로 이제는 기사 둘, 셋 상대하는 것도 버거운 수준이야."
"아, 진짜? 그럼 쟤들은 어떡 해?"
유준이 손가락으로 어느 곳을 가 리 켰다.
제누스가 고개를 돌려 확인해 봤
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쟤들이라니? 지금 장난치는 건가?"
"다시 봐 봐."
찰그락. 찰각.
쇳소리가 불규칙적으로 들려왔다.
소리가 크지는 않지만,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들을 정도는 되었다.
제누스가 눈을 크게 떴다.
"...설마 기사인가?"
"그런 듯. 갑옷이 좀 멋있긴 하네."
갑옷과 투구 등 모든 장비를 흑 색으로 도배한 기사들 수십이 접근 하고 있었다.
기사들이 어느 정도 가까워졌을 때 제누스가 경악했다.
"미, 미친. 그냥 기사가 아니잖아."
"응? 그냥 기사가 아니면 뭔데?"
"흑기사단이다. 놈들은 난이도가 올라가기 전에도 한 명 한 명이 일 당백 수준에 가까웠다. 여럿을 상 대하는게 버거워서 디버프 마법을 사용해 간신히 떨쳐 낸 게 다였지."
"지금은 더 강해졌겠네?"
"...불운하게도. 그렇지."
"왜 불운이야. 같은 팀이 강하다는 건데."
제누스는 처음엔 유준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다가 이내 깨닫고는 입을 벌렸다.
"설마 두 번째 선택지를 고른 건가?"
"아직 고르진 않았지. 그럴 예정 이긴 해도."
"...그건 미친 짓이야."
"왜?"
"외세의 침략을 막는 건 난이도가 SS등급이었다. 제국을 무너뜨 리는게 드급. 난이도가 고작 두 단계 높은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보이는 것 이상으로 그 차이는 크다."
"응? 난 제국을 무너뜨리는게 EX급으로 나오던데."
"...뭐?"
"외세의 침략을 막는 건 난이도가 표시조차 안 됐어."
제누스 덕분에 확실해진 것이 있다.
두 번째 선택지의 난이도가 더 높다는 것.
유준이 결정을 내렸다.
무조건 외세의 침략을 막는다.
그 의견을 제누스에게 피력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제누스가 황당을 넘어서 분노했다.
"너 정신 나갔어? 아니면 겁이 없는 건가? 죽어도 상관없다는 심 보인가?"
"야, 내 목숨이야. 내가 알아서 챙겨."
"네가 죽으면 시련을 클리어할
확률은 영에 수렴한다. 그건 너도 알 텐데?"
"알지."
"그런데도 제국의 편에 서겠다는 건가?"
"응."
"이유를 물어보고 싶군."
"보상이 더 크잖아."
"...단지 그 이유 때문이라고?"
"그럼 뭐가 더 있는데?"
천하태평.
제누스가 보는 유준은 그 말로도
부족했다.
아니면 본인의 실력에 엄청난 자 신감이 있다든지.
그러나 아무리 봐도 오만에 불과 했다.
제국을 무너뜨리는 것도 힘을 합 치면 가능할까 싶은데, 그보다 몇 배는 어려울 게 뻔한 길로 가겠다 니?
아니.
이제는 첫 번째 선택지도 EX등 급이 되었다는 걸 알아 버렸다.
가망이 없었다.
"진짜로 제국의 편에 설 건가? 몇 배는 어려운 일에 도전하겠다고?"
"웅."
"미쳤군. 난 빠지겠다. 헛된 일에 목숨을 버리고 싶지 않아."
"후회하지마. 그 말."
유준이 의미심장하게 남긴 말에 제누스가 코웃음을쳤다.
그 와중에 흑기사단이 도착했다.
" 저놈이군."
"아까 놓쳤던 토끼 놈이 맞아."
"포획하라고 했던가?"
"응. 대신 죽이지만 말라더군."
"쉽네."
스무 명은 될 법한 수의 흑기사 들.
확실히 그들이 내뿜는 기세는 장 난이 없었다.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대기가 진 동하는 수준이었다.
'저렇게 강한 놈들이 기사나 하고 있어?'
이곳이 가상 공간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는데, 기사들의 무력이 터무 니가 없었다.
제누스도 여실히 느꼈는지 식은 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봐라. 제국과 한편이 되면 저놈 들보다 훨씬 강한 놈들이 쳐들어오는 거다. 그래도 변함이 없는가?"
유준은 일언지하에 딱 잘라 말했다.
"응."
"...무모한 인간이군."
"정 못 믿겠으면. 직접 보고 판단해. 지금 너보고 싸우라고는 안 할 테니까."
"그게 무슨...
유준이 앞에 나섰다.
"넌 뭐야."
" 인간?"
흑기사들이유준을 위아래로 훑 어봤다.
장비만 보고도 쉽지 않은 상대라고 생각했는지, 전부 창이나, 방패, 검 따위를 꺼내 들었다.
"응? 전부 오크야?"
제국의 흑기사단은 오크들로 구 성되어 있었다.
물론, 쉽게 볼 수 있는 오크 종 족은 아니었다.
인간을 닮은 생김새에 오크의 들 창코, 부리부리한 눈매 그리고 두 꺼운 입술 같은 특징들이 있었다.
'하프 오크 같은데.'
유준이 뒤를 돌아봤다.
"제누스. 일반 병사들도 오크 종 족이었어?"
"그래."
"알았어."
제국이라는게 오크들의 제국이었던 건가.
뭐든 상관없었다.
두 번째 선택지를 고르기로 마음
먹은 순간, 저들은 적이 아니었다.
'죽이지 않고 제압한다.'
한 명이라도 죽이는 순간, 제국 과의 관계를 우호로 돌리는 건 어 려운 일이 될 수 있었다.
그 점을 명심하며 유준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겁대가리를 상실했군."
"감히 인간이...
그때 흑기사단의 단장이 입을 열었다.
"다들 홍분을 가라앉혀라. 인간을 보는 건 실로 오랜만이 아닌가.
저놈은 이쁘장하게 생겼으니 우리 노예로 삼아 실컷 괴롭혀 주자고."
"좋습니다!"
"인간 노예라니! 부흐훗."
"야. 잠깐만."
유준이미간을 찌푸렸다.
"나보고 한 말이냐?"
"뭐가?"
"이쁘다고 한 거."
"그래. 너 참 곱상하니 잘생겼다. 아, 고맙다는 말을 미리 해 두마. 네놈 덕분에 오늘 우리 단원들이 즐거운 밤을 보낼 수 있겠어."
"미친놈들."
소름이 돋았다.
살인, 아니 살해 충동이 일었다.
미우라 겐신보다도 더러운 변태들이 아닌가.
심지어 오크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수컷들이었다.
자신을 강제로 범하려는 생각을 품다니, 가만히 둘 수 없었다.
'봉인 구슬로 혼내줘야겠군.'
유준이 절대 봉인의 구슬을 꺼냈다.
생각해 보니 때마침 절대 봉인의 구슬에 갇혀 있는 것도 오크 종족 콜치가 아니던가.
'이런 기막힌 우연이 다 있나.'
유준은 흑기사들과 친구가 될 여 지가 있는 콜치의 봉인을 당장 풀 어 버렸다.
내 인벤토리가 이상하다
- 8권 14화
184화
콜치.
지하 왕국의 왕궁.
그것도 국왕의 침소에서 마주쳤 던 마신 추종자 중 한 명이었다.
심지어 오크 종족.
흑기사들 모두가 하프이긴 해도 오크로 이뤄져 있으니, 좋은 만남 이 성사될 것 같았다.
"흐어...허."
그런데 묘했다.
봉인의 구슬에서 빠져나온 콜치 가 이상한 소리를 냈다.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들뜬 듯한 묘한 소리.
그 소리가 의미하는 바를 깨달은 유준이미간을 찡그렸다.
'드럽게 더럽네.'
유준이 싸늘한 눈빛으로 콜치를 내려다봤다.
녀석은 웃고 있었다.
"더 줘... 더 해 줘! 날 구슬에 다시 넣어 줘!"
이건 생각이상이다.
설마 지금까지의 고통을 즐겼던 건가?
'이런 미친놈.'
오크들은 전부 다 이런 건가?
문득 이종족 연합의 안내인 역할 로 왔었던 팔치오가 떠올랐다.
그는 정중하고 멀쩡한 오크였다.
팔치오 덕분에 오크에 대한 이미 지가 좋게 바뀌었었는데….
콜치와 흑기사들이 오크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홀라당 벗겨 버렸다.
콜치의 추잡한 모습에 제누스나 흑기사들도 황당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갑자기 오크 하나가 풀밭에 벌러 덩 누워 몸을 배배 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덩치도 크다.
징그.러움이 웃어넘길 수준이 아니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눈만 버렸다.
"쟤는 뭐야?"
"순혈 같은데?"
"순혈 오크는 멸종하지 않았던가?"
"그러게?"
유준은 콜치를 다시 봉인 구슬에 넣어 버렸다.
콜치가 좋아할 만한 짓을 해주고 싶진 않지만, 녀석을 보고 있는 것 이 더 고역이었다.
그는 흑기사들이 한눈 팔려있는 사이 기습적으로 흑기사들에게 접 근했다.
그가 노리는 건 선두에 있는 흑 기사단장의 머리였다.
아무런 스킬도 쓰지 않고 육체 능력만으로 빠르게 뻗어진 검.
흑기사단장은 그 속도에 당황하 며 바닥을 굴렀다.
"공격! 보통 놈이 아니니 절대 일대일로 붙지 말고 합격을 하도 록!"
간신히 공격을 피해 낸 흑기사단 장이 소리쳤다.
그는 유준의 기습을 보고 그가 보통 인물이 아님을 깨달았다.
단원들에게 전진을 명령하고, 그는 그 속에 숨어서 유준의 틈을 노렸다.
유준에게 다섯이나 되는 흑기사 가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실력좀 볼까.'
어차피 같은 편이 될 처지다.
죽일 수는 없으니, 느긋하게 상 대하기로 마음먹었다.
스킬을 쓰지 않고, 오로지 검 하 나만으로 싸웠다.
가볍게 검을 휘두르고, 날아오는 공격을 막았다.
카앙! 캉! 콰직!
흑기사들의 무기는 최소 전설 등 급.
그것도 상등급 이상의 무기들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유준의 검과 충돌하면 두 번 이상 버티질 못했다.
"이, 이게 무슨...
"내 철퇴!"
반으로 잘리거나, 완전히 박살이 나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나마 두 번이나 버티는 것도 흑기사들의 육체 능력과 기술이 출 중하기 때문이었다.
유준은 허점이 드러난 흑기사들 의 머리를 검 등으로쳤다.
힘 조절을 했기에 흑기사들이 절 명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빠악! 빡!
흑기사 두 명이 동시에 쓰러졌다.
강한 충격을 머리에 맞고 혼절한 것.
흑기사들은 당황하지 않았다.
뒤에서 대기하던 흑기사 두 명이 쓰러진 흑기사들을 대신해 자리를 잡았다.
'꽤 빡세네.'
유준은 검술 특성조차 제대로 활용하지 않고 전투에 임하고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휘두르다 검에 현 묘함이 담기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육체 능력을 활용한 공격이었다.
굳이 이렇게 하는 건, 검술 특성에 도움받지 않고 어느 정도로 싸 울 수 있는지 궁금해서였다.
마침 적당한 상대가 수십이 나타 났으니, 이만한 기회가 없다고 생각했다.
'검술 특성이 컸구나.'
확실히 차이는 느껴졌다.
검술(EX)의 도움을 받을 때와
받지 않을 때와의 차이.
비유를 들자면, EX등급의 검술 특성은 그 존재만으로도 게임에서 핵을 쓰는 것과도 같았다.
그런 검술 특성의 효과를 최대한 억제하고 전투를 하니, 많이 답답 한 건 사실이었다.
'그래도 능력치랑 장비가 깡패여서 다행이지.'
그리고 혹기사들을 상대하다 보니,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었다.
이곳이 가상 공간이라는 것.
혹기사들을 직접 상대해보니 힘 만 센 깡통들과 겨루는 느낌이었다.
기술의 현묘함이나
반쪽짜리 강자들인 마신 추종자 들보다 더했다.
사실 난이도가 상승하면 갑자기 강해진다는 것부터 좀 수상하긴 했다.
'그래도 여기서 죽으면 끝일 확 률이 높아.'
이번 이벤트는 죽어도 부활할 수 있는 여타 이벤트들과는 달랐다.
제누스도 그걸 알기에 필사적으로 자신에게 매달렸던 것이리라.
콰앙! 쾅!
유준과 충돌한 흑기사들이 수시 로 튕겨 나갔다.
그 누구도 일격을 제대로 받아 내는 이가 없었다.
압도적인 근력.
눈으로도 좇기 힘든 날렵함.
강력한 공격력을 지닌 검.
이 삼박자가 고루 갖춰지니 아무리 흑기사들이라고 하더라도 버텨 낼 수가 없었다.
"도대체... 누구지?"
"강해도 너무 강하잖아, 시X."
"근데 우리 일부러 안 죽이고 있는 거 같은데?"
"갖고 노는 거지. 염병. 인간 주 제에 기분 더럽게 하네."
"단장님! 어떻게 합니까?"
10분이 지나도록 상황이 변하지 않자, 혹기사들의 의지가 많이 꺾였다.
그 강한 혹기사단장도 답을 못 찾고 있었다.
분명 저 인간은 허점투성이였다.
마구잡이로 검을 휘두르는 것 같았다.
동시에 모순되는 말이지만, 도무
지 들어갈 틈이 보이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그 어떤 시뮬레이션을 돌려 봐도 결과는 항상 같았다.
카운터를 맞고 즉사 혹은 기절.
'이유는 모르겠지만, 우릴 죽일 생각은 없어 보이는군. 그나마 다 행이야.'
검을 휘두르는 동작에서 딱 보였다.
적당한 세기로, 죽지 않을 정도 로만 흑기사들을 패고 있었다.
다만, 유준도 쉬운 싸움을 하는 건 아니었다.
'검술 특성 도움없이 싸우려니까, 머리가 다 아프네.'
정신력이 금방 소모되는 느낌이 라고 해야 할까.
검술 특성이 없을 때의 한계는 알았다.
'나보다 약한 적은 어찌저찌해서 상대할 수 있겠지만... 비등비등 하거나 강한 적을 상대로는 무력하게 당할 수도 있겠어.'
물론, 그런 적을 찾는게 더 쉽 지 않을 것이다.
모든 능력치가 만을 넘는 플레이어가 몇이나 되겠는가.
그처럼 최상급 신화 장비로 온몸을 도배해 놓지 않는 이상, 어림도 없었다.
제누스의 목울대가 빳빳하게 세 워졌다.
원래 줄행랑을 치려던 그는,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감을 깨닫고 태 세를 바꿨다.
'저놈 뭐야? 왜 저렇게 세?'
별것없이 검을 휘두르는 것 같은데도, 흑기사들이 맥을 못 추었다.
정확히는 농락을 당했다.
마법사인 그가 봐도, 흑기사들이 애를 먹고 있다는 걸 확연히 알 수 있을 정도.
'장비가 좋아서 그런가?'
제누스가 고개를 흔들었다.
장비도 장비지만, 육체에 내재된 힘이 남달랐다.
한 번의 공격을 행할 때 담기는 묵직함이 흑기사들과 비교할 수가 없는 수준이었다.
'나조차 혹기사 둘 이상을 상대로는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데
저 인간은 흑기사들 여럿에게 둘 러싸이고도 너무나 여유로웠다.
흑기사 한 명이 또 기절했다.
그럼에도 남은 혹기사의 수는 열 둘.
우웅!
그때였다.
유준의 기세가 달라졌다.
마력을 쓰거나, 스킬을 사용한 것 같지도 않은데 움직임이 크게 변했다.
'잠깐, 그러고 보니까 마력도 안 쓰고 있었잖아?'
미친.
욕지거리가 절로 나왔다.
이걸 왜 이제야 인지했지?
저 남자는지금까지 마력을 한 줌도 사용하지 않았다.
오로지 검과 육체 능력만으로 제 누스가 괴물이라고 생각했던 흑기 사들을 상대했던 것이다.
'실력이 좋은 걸 떠나서, 간이 얼마나 큰 거야?'
흑기사들을 상대하는 건 이번이
처음일 텐데, 초장부터 모험 수를 던진다고?
솔직히 제누스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는 생존이 항상 1순위였고, 그 래서 이렇게 강해질 수 있었다.
'나와는 사고방식부터가 달라.'
파바박! 콰앙!
그 순간이었다.
유준이 검을 휘두를 때의 위력이 전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으로 강해 졌다.
검술 특성을 활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유준의 검은 전과는 차원이 다른 위력을 낼 수 있었다.
그의 검격에 열둘의 흑기사가 순 식간에 나자빠졌다.
죽지는 않았다. 전부 정신을 잃었을 뿐, 미약하게 숨을 내뱉고 있었다.
그래서 제누스는 유준이 더 대단 하다고 생각했다.
열 명이 넘는 적들을 죽이는 것 보다 제압하는 것이 몇 배는 더 어 려운 일이었으니까.
전투 가능한 인원은 흑기사단장 뿌
"뭐 해? 안 덤비고."
유준의 말에 혹기사단장이 입을 꾹 다물었다.
단원들이 로테이션을 돌리면서 저 남자를 지치게 하고 있다고 여 겼는데,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생각이었다.
그는 전혀 지치지 않았다.
지치기는커녕, 제대로 힘을 발휘
하지도 않은 상태였다.
죽여선 안 될 적이어서 힘 조절을 하느라고 심적으로 고생 좀 한 정도.
"네놈... 정체가 뭐냐."
"그걸 왜 이제야 물어? 아까는 별 상스러운 말을 하면서 입맛까지 다시더니."
그때 얼마나 수치스러웠는지.
제국 쪽 기사들만 아니었어도 진 작 죽이고도 남았을 것이다.
"원하는게 뭐지? 죽이지 않고 제압만 한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맞아.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황제 어디 있어?"
"...뭐라?"
"황제 어디 있냐고. 얘기 좀 나 눠 보고 싶어서. 뭐, 도를 믿으라는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
"폐하는 네 친구가 아니다."
"알아. 근데 적도 아니잖아. 서로 얼굴 붉히면서 보고 싶지 않으니까, 바로 안내해 줄 수 있겠어?"
유준의 말에 흑기사단장이 헛웃 음을 지었다.
당돌해도 너무 당돌한 것이 아닌가?
"네가 강하긴 하나, 제국의 전력은 우리 흑기사단이 전부가 아니다. 우리보다 강한 플레이어들이 수두 룩하게 있지."
"그럼그럼. 당연히 그렇겠지. 그런데 그 많은 플레이어들을 일일이 다 팰 수는 없잖아. 그니까 바로 황제를 보자고 하는 거야."
"...어마어마한 자신감이군."
"평화롭게 가자."
유준이 검을들이밀었다.
검 끝을 마주한 혹기사단장이 침을 꿀꺽 삼켰다.
"잠시만 시간을 줬으면 한다."
"물론이지."
흑기사단장이 메신저를 열었다.
그에겐 결정을 내릴 권한이 없었다.
그나마 희망적인 건, 이곳의 상황을 제국 쪽에서도 파악했을 거라는 점이다.
어떻게든 대답을 주겠지.
시간이 흘렀다.
"언제까지 기다려?"
"마침 대답이 왔다."
"뭐라고 왔는데."
"...직접 보고 싶다는군."
"누가?"
"폐하께서."
"오, 그래? 현명한 양반이네."
"...쯧."
유준의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혹기사단장의 표정이 밝지는 않았다.
"안내해."
제국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저기...
"누구세요?"
"제누스인데...
"그게 누구였더라."
유준의 퉁명스러운 태도에 제누 스가 식은땀을 삐질 홀렸다.
"내가 경솔했다."
"도망치려는 거 다 봤는데."
"그, 그래. 내 안목이 낮은 탓이었지."
"그런데 왜 따라오세요?"
"...미안하대도."
"됐어, 인마. 너 어차피 제국이랑 편 먹기 싫다며?"
"그, 그건 그대의 무력을 확실히 파악하지 못했을 때였고! 지금은 확실히 알았다."
" 뭘?"
"그대와 내가 힘을 합친다면, 어
쩌면 두 번째 선택지도 해볼 만하 다는 것…."
"거기서 넌 빼야지. 양심 도둑맞았냐."
"아니, 이럴 때일수록 힘을 합쳐 야...
"나 혼자서도 충분한데. 뭐 하러 힘을 합쳐? 너 별로 도움도 안 될 거 같은데."
"날 얕보고 있군. 나는 네 생각 보다 다재다능하다."
"다재다능? 지나가던 마누엘라가 웃겠다."
"뭐, 뭐어? 왜 갑자기 날 가지고
그래? 너무해…."
마누엘라가 울먹였다.
"그냥 비유를 든 거지. 넌 내게 정말 없어선 안 되는 존재야."
"저, 정말?"
"당연하지. 언제 내가 거짓말하는 거 봤어?"
"음."
"...최근엔 안 했던 거 같은데?"
"했어."
"그랬나? 그렇다면 미안하다."
"나,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제누스의 말에 머리를 긁적이던 유준이제누스에게 말했다.
"네가 제누스가 아니라 제우스였으면 생각 좀 해 봤을 텐데. 아쉽 게 됐네."
" 제우스?"
"넌 몰라도 돼."
"진짜 부탁이다! 날 받아 주면 안 되겠는가?"
"네가 뭐가 이쁘다고?"
"내... 본인 입으로 이런 말 하 긴 뭐하지만, 시리우스에 비등비등 하게 왕국 내에서 최고의 귀여움을
담당하고 있긴 하다."
"정말 네 입으로 말할 얘기는 아니긴 하네. 많이 추했어."
걸으면서 계속 무심하게 툭툭 내 뱉은 유준을 제누스는 끈질기게 따라갔다.
유준이 걸음을 멈추며 한마디 했다.
"조건이 있어."
"조건? 말 만해라. 다 따를 용의 가 있다."
"동기화 구슬 내놔."
분명 시리우스가 제누스에게서 동기화 구슬을 받았다고 했다.
유준은 그 사실을 잊지 않고 머 릿속에 새겨두고 있었다.
내 인벤토리가 이상하다
- 8권 15화
185화
제누스가 당황한 듯 입을 오물거렸다.
"왜? 못 주겠어? 싫음 말고."
"그대가 동기화 구슬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시리우스가 알려 주던데?"
"...시리우스가?"
제누스가 한탄했다.
시리우스가 나이도 어리고 한 나
라의 왕자답지 않게 천진난만한 면 이 있기는 하다.
그렇다고 자신이 어렵게 구해 줬 던 동기화 구슬에 대해 그리 떠벌 리고 다닐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네가 준 거니까 잘 알 거 아니야."
"맞다. 내가 녀석에게 구슬을 줬지."
"왜 줬어?"
"도통 용도를 알 수가 없었으니까. 처음엔 유물 등급이라는 것에 현혹되어 삼 년 동안 온갖 곳을 돌 아다녔다. 동기화 구슬에 대한 단
서를 얻기 위해서. 소득은 없었다. 그래서 시리우스에게 준 거지. 녀 석은 여기저기 쏘다니는 걸 좋아하니까, 어떻게 동기화 구슬이라는 아이템을 활용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
활용법을 모르는 건가?
하긴, 지금 자신 말고는 동기화 구슬의 효과를 본 사람이 없었다.
인벤토리와 무과금즐겜러의 인벤 토리가 연결되어 있어 유준에게만 동기화 구슬의 효력이제대로 발휘 되었을 뿐.
정확히는 그가 일방적으로 아이
템을 뺏어 오는 것이었지만.
"너 지금 동기화 구슬 있어, 없어?"
" 없다."
"이런…그럼 쓸모가 없잖아. 동 기화 구슬은 어디서 구했었는데?"
"반쯤 무너진 유적을 발굴하다가 발견했다."
유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누스는 나와 같이 갈 수... 없습니다. 안타깝게 됐네요."
"뭐? 내가 이렇게 빌었는데도 안 된단 말이냐?"
"60초 후에 공개하지 않은 걸 다 행으로 알아."
"...뜻 모를 소리만 하는군. 내 어떻게든 동기화 구슬을 찾아서 줄 터이니, 이번 한 번만 같이할 수 없나?"
"왜 그렇게 매달려? 내가 알아서 깨 주면 너도 나갈 수 있잖아."
"나도 보상 좀 받아야지...
"이런 뻔뻔한 친구를 봤나."
"허헛. 좀 봐주게 친구!"
"내가 왜 친구야?"
"조, 존댓말이라도 할까?"
"등가교환이라고 알아?"
"응."
"오는게 있어야 가는게 있지 않겠어?"
유준의 능글능글한 미소를 본 제 누스가 아무 말없이 인벤토리를 열었다.
그는 인벤토리에서 꺼낸 무언가를 품에 숨기더니, 헛기침을 몇 번 했다.
그러다 의미심장한 미소까지 지었다.
"내 진짜 아끼던 것이었는데, 이
걸 주겠다. 네가 나와 함께하는 조 건으로."
"뭔데?"
"특성 보석."
"..오?"
구미가 확 당기게 하는 말이었다.
특성 보석이라니.
얻고 싶어도 어디서 구할 방도가 없는 아이템이 아니던가.
"등급은?"
"중."
"나쁘지 않네."
"나쁘지 않은 수준이 아니지! 이 게 얼마나 귀한 아이템인데! 혹시 한 번도 얻어 본 적이 없는 건가? 그런 거지? 응?"
"내놔."
"일단 확답부터!"
"알았어. 캐리해 줄 테니까 빨리 줘. 현기증 나려고 그래."
"분명 알았다고 했다? 응?"
그때 유준의 손이 섬광과도 같은 속도로 움직였다.
제누스가 숨기고 있던 특성 보석
이 그렇게 유준의 수중에 들어오게 되었다.
"아, 아니... 뭐야."
눈 뜨고 코 베인 제누스가 얼떨 떨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 봤다.
민첩이 아무리 높아도 그렇지, 움직임을 채 인지하기도 전에 물건을 빼앗다니?
"고맙다. 유용하게 잘 쓰마."
"이런..."
사랑하는 애인을 뺏기는 기분이 이러할까.
애초에 주기로 했던 물건이었음에도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그래도 저자와 함께하는 건 결 코 나쁜 선택이 아니야.'
시련의 기여도가 낮으면 어떤 일 이 벌어질지 모르니, 만일을 위한 대비는 해 두는 것이 좋았다.
그리고 유준과 흑기사들 간의 전 투를 보며 유준이 얼마나 강력한 존재인지 뇌에 제대로 각인되었다.
'어차피 어떤 선택을 하든 도박에 가까워. 좀 더 가능성 있는 쪽에 투자를 하는게 맞지.'
제누스는 항상 비교적 안전한 길
을 선택해 왔다.
덕분에 살아남았고, 이렇게 강해 졌다.
생존력 강한 그의 감은 유준을 따라가야 한다고 열렬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특성 보석이 절대 아깝지 않은 선택이 되기를.
그가 간절히 빌었다.
유준은 혹기사들의 뒤를 따르며 절대 봉인 구슬을 매만졌다.
이 안에 콜치가 있다.
콜치가 곤혹스러운 짓을해서 당 황해서 다시 봉인 구슬에 넣어 버 렸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너무 껄 끄러웠다.
오크인 콜치 놈은 절대 봉인의 구슬에 갇혀 있는 걸 좋아하지 않았던가.
마신 추종자에게 벌은커녕 되레 포상을 준 것 같아서 기분이 썩 좋 지는 않았다.
'빨리 교체해 줄 친구를 찾아야겠네.'
다른 절대 봉인의 구슬 한 개에
도 극악무도한 악인이 있었다.
미우라 겐신.
죽인 자의 귀를 수집하는 변태적 인 취미를 가지고 있는 놈이었다.
'일본 서버와 관련된 얘기도 들 어야 하는데,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네.'
여태까지 증가장 어려운 시련이 될지도 모른다.
높은 확률로 그렇겠지.
목숨이 위험할 수 있다는 자각도 있었다.
그런데도 그의 표정은 밝았다.
'도대체 얼마나 좋은 보상을 주 려고.... '
유준은 벌써 보상을 받을 생각부 터 하고 있었다.
시련의 난이도는 안중에도 없는 듯한 모습.
"다들 노려보는데."
"그, 그러게. 다들 당장이라도 달 려들 기세야...
마누엘라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유준의 등 뒤에 딱 달라붙었다.
제국 병사들의 날카로운 시선이 일제히 꽂히고 있는 탓이었다.
시선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제국의 유명한 흑기사단이 직접 안내하는 손님들이었으니까.
심지어 제국의 적이었던 제누스 가 뻔뻔스럽게 얼굴을들이민 것이 컸다.
그가 죽인 제국의 병사들만 수천에 달했다.
"우리 제누스가 사고를 많이 치 고 다녔네."
"크, 크흠."
"너 이대로라면 암살당할 기세인 데 거의?"
"...이해한다. 저들의 입장에서는 내가 무척 가증스럽겠지."
"잘 아니까 다행이네. 네 목숨은 알아서 챙겨라."
"그, 그래."
내심 지켜 준다는 발언을 기대했 던 제누스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굳게 닫혀 있던 성문이 열렸다.
혹기사단장을 선두로 한 행렬은 모세의 기적을 만들어 냈다.
병사고, 제국민들이고 우수수 자 리를 떴다.
유준은 그사이에 제누스가 줬던 특성 보석(중)을 꺼냈다.
'빨리 써 버리자.'
특성 보석을 쓸 만한 특성은 두 개 정도.
평정심(S)과 쾌검(SSS).
'쾌검의 등급이 더 높긴 해도... 실질적으로 내게 도움을 많 이 줬던 건 평정심이야.'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 함께해 왔던 특성.
기존의 능력이 너무 좋아서 그간 등한시했던 것도 같았다.
유준이 금방 결정을 내렸다.
'평정심에 쓰자.'
그가 쾌검이 아닌 평정심에 투자 하려는 것에는 그 외에도 이유가 있었다.
제2 외세의 침략을 막는 것.
제국을 무너뜨리는 것보다 몇 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EX등급 난이도 판정을 받은 제구이 못 막아 낼 정도로 강력한 적들이들이닥친다는 건 웃어넘길 만 한 게 아니었다.
시스템이 측정 불가능하다는 판
정을 내린 난이도의 선택지였다.
대비는 확실하게 하고 싶었다.
그 대비란 바로 평정심 특성을 발전시키는 것.
'지금 나에게 가장 위협이 될 수 있는 건 형상 변환 능력과 S급 평 정심을 뚫을 위력의 정신 계열 공 격.'
저주에는 완벽에 가까운 저항 능력이 있으니 크게 걱정되지는 않고, 정신 공격 계열이 문제였다.
유준은 곧바로 특성 보석을 사용 했다.
[평정심 (S) → 평정심 (SS)]
유준이 눈을 크게 떴다.
'SS 등급?'
이건 예상외인데.
플러스 하나 붙고 끝날 줄 알았는데, 그 이상의 결과가 나왔다.
어쩌면 그의 막대한 행운이 또 한 번 크게 작용한 것이 아닐까.
유준은 상태창을 열어 다시 확 인해 봤다.
평정심(SS) - 보석(중)
역시 제대로 등급이 올라 있었다.
보석 효과까지 더하면 SS+라고 봐도 무방한 수준.
유준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무언가 마음이 더 차분해진 것 같은 느낌도 있었다.
'평정심 특성이 있다고 마냥 감 정이 메마르게 되는 것도 아닌 거 같고.'
유준 일행이 황궁에 들어섰다.
수많은 인파를 헤치고 온 탓에 다들 정신적으로지쳐 있었다.
특히 제누스의 상태가 심했는데, 그는 제국민들 모두에게 따가운 눈 초리를 받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지하 왕국에서 모두에게 선망의 시선만을 받아 온 제누 스였다.
이런 취급이 익숙하지가 않았다.
"괜히 따라왔지?"
유준의 말에 제누스가 고개를 저었다.
"안 따라왔으면 더 후회했을 거다. 죽기는 싫으니."
"그래. 개똥밭을 굴러도 저승보 단 이승이 나으니까."
"오, 좋은 말이군. 내가 나중에 써먹어도 될까?"
"...그러렴."
황궁은 무지막지하게 컸다.
휘황찬란한 금들로 도배된 거대한 황궁.
황궁을 만드는데 돈을 얼마나 치덕치덕 바른 걸까.
내부로 들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고가의 그림들은 기본이고 정교 하게 깎인 조각품들과 예술 장식품들이 가는 곳마다 장식되어있었다.
"진짜 사치의 끝판왕이구나, 여 기가."
대륙의 그 어느 곳보다도 향유 (卓有)와 부가 넘치는 것 같았다.
황궁 안에 있는 기사들의 장비 수준도 미쳤다.
신화 등급을 착용한 기사도 가끔 보일 정도였으니.
'가상 공간이라서 그런가? 장비 들도 말이 안 되는데.'
대륙에 만약 저런 기사들을 지닌 세력이 있었으면, 진작 판도가 바 뀌고도 남았을 터.
그 정도로 제국의 전력은 막강했다.
제국을 무너뜨리는게 EX등급 난이도라는 시스템의 안내가 결코 허황된 것이 아니었다.
제누스도 유준과 같은 감상평을 남겼다.
"미쳤군. 도저히 혼자서 어떻게 해볼 수준이 아니었어."
물론, 유준이 시련에 갑자기 난 입하지만 않았어도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련 클리어를 목전에 두고 있었 던 제누스로서는 억울할 수밖에 없는 일.
그러나 어쩌겠는가.
유준이 자신보다 훨씬 강한 것을.
꼬우면 강해지는 수밖에 없다.
유준 일행은 바로 황제를 만날 수는 없었다.
안전 문제도 있고, 황제를 알현 하려면 준비할 게 많은 모양이었다.
그들은 귀빈실로 안내받았다.
말이 귀빈실이지, 거의 자그마한 저택 하나의 크기였다.
사치품이 많은 건 물론이고, 곳 곳에 심어 놓은 화분에서도 좋은 향기가 풍겨 왔다.
거기다 맛있는 음식들까지 차려져 있는 상황.
만찬을 눈앞에 둔 유준의 눈이 돌아갔다.
"냄새 미쳤다."
그는 강화 예티 고기를 구워 먹으면서 음식의 맛, 또 그 맛이 주는 즐거움에 대해서 깊게 고찰했었다.
얼른 레벨을 올려 강해지는 것도 좋기는 하다.
그렇다고 너무 빡빡하게 살 필요는 없잖은가.
그간 성장이라는 것에 혈안이 되어 많은 것들을 놓치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누엘라와 제누스도 눈이 휘둥 그레져 있었다.
아주 크고 길쭉한 탁자에 차려진 갖가지 음식들.
거기서 풍겨 나오는 냄새가 사람을 환장하도록 만들었다.
"이거 우리 먹으라고 준비해 둔 건가?"
"그래."
혹기사단장이 무미건조하게 대답 했다.
"황제는?"
"폐하께선 남은 용무를 마무리하
고 거동하신다고 하셨다."
"그럼 어쩔 수없이 여기 음식들을 먹는 수밖에 없네. 우리 바쁜데, 후우...
"음식이 마뜩잖다면, 당장 치우겠다."
흑기사단장의 말에 유준이 식겁 했다.
"아니아니. 요리를 만들어 준 사 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그건."
유준의 서슬 퍼런 눈빛을 마주한 흑기사단장.
그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 덕였다.
"알았다. 아, 그리고…"
"부족하면 말하라고? 더 갖다 준 다고? 알았어."
내 인벤토리가 이상하다
- 8권 16화
186화
만찬을 즐긴 유준 일행은 30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황제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황실 최고 전력의 마법사와 기사들이 매서운 눈으로 유준 일행을 바라봤다.
그리고 정면에는 편안한 자세로 앉아 있는 황제가 있었다.
쭉 깔린 레드카펫을 걷다가, 기 사 한 명이 나와 제지했다.
"더 이상의 접근은 불허한다."
" 오냐."
유준이 황제의 면면을 살펴봤다.
황제 또한 흑기사들과 마찬가지 로 인간과 오크가 섞인 듯한 오크 종족이었는데, 웬만한 오크들보다 오히려 젊음을 더 유지하고 있었다.
'꽤 강한가 보네.'
플레이어는 늙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는 매우 천천히 노 화가 진행되었다.
그래서 겉으로 살아온 세월을 파 악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웠다.
"만나서 반갑군."
"나도 반가워."
"감히...!"
유준의 불손한 말투에 몇몇 기사들이 발끈했다.
황제가 손을 들어 그들을 저지했다.
" 괜찮다."
"하지만...
"내 말에 토를 다는 건가? 저자는 그대들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 의 강자가 아니야. 가만히 지켜보 고 있게."
황제의 단호한 어조에 기사들이 잠잠해졌다.
"원하는게 뭔가? 나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던데."
"곧 제국을 침략할 세력이 있다는 거. 알고 있어?"
"*.....흐음."
황제가 자신의 옆에 시립해 있는 마법사를 바라봤다.
하렌.
그녀는 미래 예지가 가능한 플레 이어인 동시에 제국에서 가장 뛰어
난 마법사이기도 했다.
하렌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 일은 이미 예견된 일. 그러 므로 대비도 확실히 해 놓은 상태 다, 인간."
마법사의 말에 유준이 고개를 저었다.
"제국의 힘만으로는 못 막아."
"그걸 어떻게 단정하지?"
"감? 예견되었다고 했으니 너도 알고 있는 거 아니었어?"
"...그래."
이번엔 황제가 대답했다.
"곧 제국이 멸망할 위기를 앞두고 있지. 하렌의 예언은 단 한 번 도 빗나간 적이 없으니, 그 미래 또한 확정된 것. 최선을 다하긴 하겠으나, 제국의 멸망을 막을 수 없 다는 건 알고 있네."
" 폐하...
마법사와 기사들이 탄식했다.
황제 본인의 입으로 제국의 멸망을 확정 짓다니.
일말의 희망마저 남기지 않는 말 이 아닌가.
황제는 주변의 반응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대가 도움을 주겠다는 말인가?"
"제국이 멸망하는 걸 막아 줄게."
"그대가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 네만, 혼자 힘으로 제국의 멸망을 불러오는 적들을 해결할 수 있겠는가?"
"어차피 너네도 가만히 있을 건 아니잖아."
"그렇긴 하지. 헌데 그대는 아까 질문에 대답해 주지 않았네. 도와 주는 조건으로 원하는게 뭔가?"
"아이템."
"아이템...?"
"웅. 아이템 줘."
"어떤 아이템을 말하는 거지?"
"제국이 가진 것 중에 가장 좋은 거로 줬으면 좋겠는데."
"듣자 하니, 이놈이!"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한 기사가 노호(怒號) 했다.
그.러나 그런 기사와는 대조되게 황제는 태연자약한 모습이었다.
"그만. 그의 말이 일리가 있다. 제국의 멸망을 막을 수 있다면, 그 깟 아이템이 뭐가 중요하단 말이냐.
그대가 만족할 만한 아이템은 준비 할 수 있다. 다만... 실력을 직접 보고 싶군."
"대련하자는 거지? 좋아. 상대는?"
"하렌과 황실 기사단장 둘일세."
"저희 둘이나 나섭니까?"
하렌이 이해 못 하겠다는 듯 물었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을 위기에서 구해 내려면 적어도 황실의 각 분야 일인자들 둘을 거뜬히 상대할 수 있는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나?"
황제가 유준을 보며 물었다.
"당연하지. 여기 있는 오크들 다 덤벼도 상관없어."
"...으음."
오만하다시피 한 그의 말에 황제 도 살짝 당황했다.
"구, 굳이 그럴 필요는 없겠지. 둘이면 실력 확인은 제대로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네."
마법사 하렌과 황실 기사단장 콘 테가 나란히 섰다.
그들은 다 덤벼도 상관없다는 유
준의 말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눈에 열의가 가득 차 있었다.
"바로 시작할게."
유준이 움직였다.
그는 적당히 할 생각이 없었다.
황제를 설득하려면, 또 좋은 아이템을 받으려면 압도적으로 강한 모습을 보여 줘야 했다.
시야에서 사라진 유준.
하렌과 콘테가 당황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나마신체 능력이 뛰어난 콘테는 눈앞에 나타난 유준을 봤지만,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꽈앙!
검등으로 콘테의 투구를 거세게 후려쳤다.
신화 등급의 투구가 우그러지며, 콘테의 거대한 몸이 쓰러졌다.
하렌이 급하게 블링크를 사용하 며 거리를 벌렸다.
유준이 점멸을 사용했다.
하렌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전에 유준의 검날이 본인의 목을 향해 있었다.
투명 상태를 푼 유준이 입을 열었다.
"더 해?"
"아, 아니."
그가 검을 거둬들이며 황제를 바 라봤다.
"됐지?"
"...잠깐만 기다려 보게."
황제가 눈을 감았다.
그도 강한 무력을 지닌 플레이어.
황실 기사단장 콘테와 비등비등 한 실력의 소유자였다.
그런데 이게 뭔가.
방금의 전투 장면을 복기할 수가 없었다.
워낙 유준의 움직임이 빨라 눈으로 좇을 수도 없었기에.
처음엔 블링크와 같은 기술을 사용한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다.
그랬으면 콘테가 미리 대응할 수 있었을 터.
마력의 도움없이, 오로지 신체 능력만으로 저런 속도를 냈기에 콘 테가 무력하게 당한 것이었다.
충격을 받은 건 비단 황제뿐만이
아니었다.
하렌과 콘테가 황제의 오만한 손 님의 코를 뭉개 주리라 생각했던 기사와 마법사들.
그들도 눈앞에 펼쳐진 비현실적 인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단장님이 당한 거야?"
"어떻게 이런…"
"오 단장님이 떨어지다니, 아니, 패배하다니..."
결과는 부정할 수 없었다.
거짓된 환상이 아니었다.
황제가 인정했다.
"그대가 강하다는 건 확실하군."
"아이템 줄 거지?"
"침략을 무사히 막아 내면 줘도 되겠나? 그대가 아이템만 받고 떠 나 버리면...
"무슨 말인지 알아. 그럼 하나 제안할게. 아이템 한 개만 먼저 줘. 일이 끝나면 추가로 더 받고. 어 때?"
"...여러 개를 달라 이 말인가?"
"이 큰 나라의 멸망을 막는 건데 그깟 아이템이 뭐가 중요하냐며? 이왕 줄 거면 더 줘야지. 거기다 아이템을 받아서 내 무력이 더 향
상되면 제국에도 긍정적인 거 아닌가?"
"...알겠다."
유준이 협박해 일방적으로 이득을 취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건 서로 윈윈이 될 수밖에 없는 거래였다.
설령 그가 제국의 아이템을 다 가져가더라도, 제2 외세의 침략을 큰 피해없이 막아 주기만 하면 제구으로서도 이득이었다.
그걸 알기에 황제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아이템 좀 보여 줄 수 있어?"
"그러지."
황제가 거뭇거뭇한 수염 자국이 있는 오크를 불렀다.
귓가에 몇 마디 속삭이더니, 오 크가 우렁차게 대답하고 사라졌다.
그 오크는 열 개가량의 아이템을 가져왔다.
마음에 드는 아이템은 총 세 개였다.
정확히는 쓸모 있는 아이템이라고 해야겠지.
행운 각인서.
장시간 숙성된 선단.
중화된 베히모스의 피.
베히모스의 피는 이미 사용했던 터라, 중복 사용이 불가능한 아이템.
심지어 남은 걸 파라네트에게도 줬기에 지금으로선 필요가 없었다.
'나중에 받게 되면 마누엘라를 주는게 낫겠군.'
유준이 황제를 바라봤다.
"혹시 동기화 구슬은 없어?"
"그게 뭐지?"
"몰라?"
"그렇다."
"그럼 됐어. 먼저 이걸로 줘."
유준이 선택한 건 행운 각인서였다.
무기술 각인서로 크나큰 효과를 본 유준은 당연히 각인서에 눈길이 먼저 갈 수밖에 없었다.
선단에도 혹했지만, 일단 지금 가장 중요한 건 행운을 올리는 것 이었다.
나중에 장시간 숙성된 선단을 섭 취했을 때, 행운이 높을수록 좋은 특성이 나올 확률이 높았다.
[행운 각인서 Ⅰ]
등급 : 無
옵션 : 행운이 증가합니다. 각인 서는 상태창에 각인되며, 중복되는 효과의 각인서는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이 좋은 걸 황제는 왜 안 쓰고 있었지?'
행운이 얼마나 좋은 건지 잘 모르는 건가?
아니면 이미 사용해 중복되어 사
용하지 않은 걸까?
어찌 됐든 유준에게는 잘된 일이었다.
'행운을 또 올릴 수 있을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나머지 아이템들은 일이 끝나면 주도록 하지. 그래도 괜찮나?"
"웅. 걱정하지 말고 보관만 잘해 줘."
자신감이 흘러넘치는 유준의 모습.
황제는 안심이 되는 걸 느꼈다.
거만한 태도에 예의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인간이었지만 실력 하 나는 확실하지 않은가.
또 그런 플레이어가 같이 싸워 준다고 하니 이보다 더 든든할 수 가 없었다.
"그런데 예언이 실행되는 날짜가 언제야?"
"내일일세."
"내일? 시간은?"
"이른 아침이라고 하더군."
"진짜 얼마 안 남았잖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지. 때마침 그대가 와 주지 않았다면
제국의 멸망을 절대 막지 못했을 걸세. 물론, 그대가 있다고해서 꼭 막는다는 보장도 없다네. 하렌은 제국의 멸망을 예견했으니까."
유준은 일행과 함께 귀빈실로 이 동했다.
그때 제누스가 엄지를 치켜들었다.
"뭐 해?"
"너 대단하다고."
" 뭐가?"
"강한 건 알고 있었는데 황제 앞에서 그런 깡이 있을 줄은 몰랐다."
"에이, 별 시답잖은 얘기를 하고 있어."
굳이 황제한테 예의를 차릴 필요 가 있나 싶었다.
그런다고 상황이 더 나아지는 것도, 나빠지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어차피 가상공간이기도 하고.'
설령 가상공간이 아니라고 하더 라도 이런 격식을 차리는 건 그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여기는 한국이 아니다.
무한의 탑이지.
힘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그런 세상.
무력이 곧 권력.
허리를 굽히는 것도 약자나 하는 짓이었다.
시간이 흘렀다.
제2 외세의 침략.
그 두 번째 선택지가 자동으로 선택될 때가 다가왔다.
수많은 병사들이 성벽 근처로 모 여들었다.
제국은 제2 외세가 어디서습격을 해 오는지는 미리 알 수 있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동쪽에서 먹구름 이 밀려오며 시커먼 군단이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적들이 도무지 어떤 종족 인지 알 수가 없었다.
생소했다.
지구인인 유준의 식견으로 보면 SF 영화에서나 보던 외계인들이 실 제로 나타난 것 같달까.
흉측한 외형의 촉수 괴물들은 기 본이고, 기존의 상식을 파괴하는 생김새의 생물체들도 있었다.
닿기만 해도 오염될 것만 같은 그런 놈들.
제국의 병사들이 넋을 놓았다.
"미쳤...
"저걸 어떻게 상대해."
"몬스터는 맞지?"
"저런 놈들이 어디에 숨어 있었 던 거야?"
빠른 속도로 몰려오는 검은색의 물결을 보고 있자니, 흡사 재앙 혹은 자연재해가 몰려오는 듯했다.
모두가 긴장하는 그때, 제국 쪽에서 선제공격을 취했다.
광활하다는 말이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많은 화염 마법들이 하늘을 수놓았다.
하늘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대기와 지면을 뜨겁게 달구는 열 기.
검은 군단은 그런 열기에도 전 진, 또 전진했다.
이윽고 화염 마법이 지반을 강타 했다.
콰콰콰쾅! 콰콰쾅!
"끼이이익!"
"캭! 캬악!"
몇몇 괴물들의 비명이 섞인 폭음 이 전장에 울렸다.
화염은 빠른 속도로 퍼져, 초원 이 불에 휩싸였다.
그러던 어느 순간 제국 플레이어 들은 세상이 정지되는 느낌을 받았다.
영원과도 같았던 1초가 흐르고.
모든 화재가 진압되었다.
"뭐지...?"
"응?"
마치 화염 마법이 애초부터 만들 어지지 않았던 것처럼 흔적도없이 사라졌다.
제2 외세가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다급해진 제국 쪽 마법사들이 각 자 최고 화력의 마법을 퍼부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모든 마법이 일소(一捕)되었다.
유준의 옆에 서 있던 제누스가 경악했다.
"저 많은 마법을 한 번에 캔슬하는게... 말이 돼?"
"캔슬이 아닐걸."
"그럼?"
"몰라. 스킬이라도 썼겠지."
"...그런 스킬이 있어?"
"그것도 모르지. 한 가지 확실한 건, 우리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스킬들이 이 세상에 훨씬 많다는 거야."
"그럼 어쩌지? 마법이 전혀 안 통하는 거 같은데. 기사들이 나서 야 하나?"
"무턱대고 나선다고 해결되는 건 없어."
"그럼?"
"문제의 원인을 찾아서 제거해야지."
내 인벤토리가 이상하다
- 8권 17화
187화
제누스가 눈을 크게 떴다.
"문제의 원인이라면, 마법을 없 애는 놈을 말하는 건가?"
"어."
"그놈을 무슨 수로 찾아내지? 내 나름대로 탐색 마법을 사용해 봤는데, 감도 안 잡혀."
"그게 개나 소나 가능했으면, 시 련 난이도가 물음표로 책정되지도 않았을걸."
"설마..."
"내가 갈 거야."
유준이 장비를 점검했다.
어디 파손된 장비도 없고, 완벽에 가까운 상태였다.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봤다.
'가볍네.'
컨디션도 매우 좋았다.
"어깨 위에 그건 뭐지?"
"아, 얘? 하프야. 신수."
제누스의 질문에 유준이 별것 아
니라는 듯 대답했다.
"시, 신수? 죽은 듯 가만히 있어 서 인형인 줄 알았다."
"신수가 뭔지 좀 알아?"
"아니. 나도 전설 속 생물이라는 것만 알고, 실제로 본 건 이번이 처음이다."
"별로 신기해하는 눈치는 아닌데."
"그야... 움직이질 않으니까."
"응."
하프는 부화한 이래로 잠만 자고 있었다.
브레스를 쏜 탓인가?
그게 아니면 원래 잠이 많은 걸 수도 있다.
'부화한 지 얼마 안 됐으니, 이해 해 줘야지.'
당장은 도움이 되지 않더라도 크 게 상관은 없었다.
'내가 강해지기만 하면 돼.'
하프의 말에 의하면 신수의 강함은 자신의 무력에서 나온다.
억지로 신수를 육성하려고 할 필 요가 없는 것.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은 편했다.
"무한정 마법을 제거하진 못할 거다! 더 퍼부어!"
"마력 아끼지마! 황제 폐하께서 마력 포션을 최대한 지원해 주신다 고 하셨다!"
"마, 마력 포션요? 그럼 망설일 이유가 없지!"
불가사의한 일이 벌어졌음에도 마법사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콰콰콰쾅!
세 번째 마법 포격이 이어졌다.
오히려 처음보다 위력이 몇 배는 세졌다.
상황을 지켜보던 고위급 마법사들이 참전한 것이다.
우웅-.
그러나 마법 포격의 세기가 강해 졌다고해서 결과가 달라지지는 않았다.
한 번의 진동과 함께 마법이 일 시에 소멸했다.
"간격을 두고 마법을 발사해! 한 번에 포격하지 말고! 위력도 좀 줄 이고!"
"예!"
하렌이 답답했는지 마법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세 번이나 연이어 마법이 캔슬되고, 검은 군단의 진격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이번엔 쉬지 않고 마법이 날아갔다.
콰쾅! 쾅!
전체적인 위력은 줄었지만, 지속 력이 높아졌다.
하렌의 생각이제대로 들어맞았다.
"이번엔 없다!"
"통했어!"
몇몇 괴수들이 마법에 정통으로 맞고 쓰러졌다.
하지만 그래 봐야 몇 마리 정도다.
검은 군단은 헤아릴 수 없을 정 도로 수가 많았다.
콰콰쾅! 쾅!
우웅-.
마법의 위력이 좀 세지는가 싶으면 어김없이 전장에 존재한 모든 마법이 소멸했다.
그렇다고 마법의 위력을 줄여 버 리면, 검은 군단에 큰 피해를 입히 기가 어려웠다.
이도 저도 못 하는 상황.
하렌이 입을 질끈 깨물었다.
'마법을 상쇄시키는 적을 죽여야 하는데...
마법이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는지금, 하렌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믿을 건, 콘테와 저 인간밖에 없어.'
그녀의 시선이 자연스레 유준이
있는 곳을 향했다.
성벽의 가장 높은 곳에 선 유준.
그는 검은 군단이 있는 아래를 유심히 바라보더니, 자세를 잡고 도약했다.
높은 곳까지 뛰어오른 그가 곧장 플라이 마법을 사용했다.
그런데 비행 속도가 예사롭지 않았다.
일반 마법사들의 플라이 마법과는 차원이 다른 속도로 앞으로 나 아갔다.
'무, 무슨.... 마력이 얼마나 높 길래?'
하렌이유례없을 정도로 당황했다.
그녀는 뛰어난 마법사인 만큼, 유준의 마법 다루는 솜씨가 어느 정도인지 단번에 안 것이다.
"와..."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마법적인 능력까지 뛰어날 줄이야….
하렌과 콘테가 그에게 제압당할 때, 그는 마법을 전혀 쓰지 않았다.
'마법까지 잘 다루면 어쩌자는 거야.'
플레이어에겐 직업이라는 개념이 따로 없다.
모든 스킬과 특성을 익힐 기회가 열려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마법과 무기를 골고루 잘 다루는 사람도 적지는 않다.
'그렇다고 해도 검과 마법 둘 다 극의 경지에 달해 있는 건... 눈으로 보고도 믿기가 어렵네.'
이럴 때가 아님에도 그에게서 도 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검은 군단과 충돌하며 또 어떤 놀라움을 선사할지 궁금했다.
유준은 상공에서 매의 눈으로 전장을 굽어봤다.
'왜 죄다 냄새나게 생긴 거 같지.'
착각이 아니었다.
괴수들에게서 지하수, 그것도 상당히 오염된 지하수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 지독했던 냄새가 희미해진 걸
보면 벌써 코가 마비된 모양이다.
'이거 무서운 놈들이네.... 생화 학 무기가 기본 패시브로 장착되어 있잖아.'
냄새는 검은 괴수들에게서만 나는게 아니다.
괴수들에게서 흘러나오는 액체가 흙바닥에 스며들어, 전장 전체에서 고약한 냄새가 풍겨 오고 있었다.
'어우, 여긴 아무리 생각해도 오 래 있을 곳이 못 된다.'
위생 때문에 밑으로 내려가는게 꺼려질 줄이야.
이글 아이 스카우터를 착용했다.
그리고 제국 쪽에서 큰 마법이 날아올 때까지 투명 반지를 끼고 대기했다.
'메시지를 보내 놔야겠군.'
그런데 하렌과 콘테와는 메신저 추가가 되어 있지 않았다.
어쩔 수없이유일하게 메신저 교환이 되어 있는 황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신유준 : 마법 좀 세게 날리라고 해.]
황제는 대답이 없었다.
대신 행동으로 보여 줬다.
하늘에 거대한 운석이 생성되었다.
곧바로 추락하기 시작한 운석.
'저거면 되겠지.'
유준은 기감을 널리 퍼뜨렸다.
시각, 촉각, 후각...은 마비됐으니 제외하고 느껴지는 모든 감각에 집중했다.
이글 아이 스카우터를 착용한 덕에 이 넓은 전장이 한눈에 들어오는 듯했다.
그때 황제의 운석 마법이 상쇄되었다.
유준이 눈을 가늘게 떴다.
분명, 마력의 파장이 엷게 퍼졌다.
멀리 있을 때는 느낄 수 없을 정 도로 아주 미약한 파장이었으나, 검은 군단의 위에 있는지금은 알 수 있었다.
유준은 그 파장을 좇았다.
마력 파장이 발생한 곳은 검은 군단 한가운데에 있었다.
유준이 빠르게 움직였다.
괴수들의 길고 단단한 촉수 수천 개가 유준의 몸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투명 반지도 소용이 없군.'
민첩 능력치가 높아 웬만해선 안 들킬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오산이었던 모양.
괜히 어려운 선택지가 아니었다.
검은 군단은 유준이라는 존재를 인식한 후로, 진격을 멈추고 끈질 기게 공격을 감행해 왔다.
도무지 피할 공간이 없을 정도로 촉수들이 가득 찼다.
'피할 곳이 없으면 만들면 그만 이지.'
유준은 검을 휘둘러 수십 개의 촉수를 잘라 냈다.
그러나 촉수의 수는 유준의 상상 이상으로 많았다.
파지직. 파즛.
뇌전이 뿜어지는 촉수가 잘라지는 즉시, 새로운 촉수가 자리를 차 지한 것이다.
'이대론 안 되겠다.'
사실 이럴 땐 마법이 직빵이긴 하다.
아무리 검술이 능통하다 해도 범 위 측면에선 마법을 이기기란 힘들다.
하지만 그의 마법은 위력이 강해 '누군가'에 의해 상쇄될 확률이 높았다.
대규모 범위 마법은 봉쇄된 것이 나 마찬가지.
그런 상황에서 유준은 '검막'을 사용했다.
검이 빠르게 휘둘러지기 시작하 며, 투명한 막이 생겼다.
검에 마력이 씌워졌다.
석! 서걱!
절삭음이 쉬지 않고 들려왔다.
접근하는 촉수가 한 개도 예외없이 모조리 잘려나갔다.
"끼이이익!"
"깍! 까악!"
괴수들이 고통에 찬 괴성을 질렀다.
유준은 거기서 한술 더 떴다.
비행 마법으로 이동하면서 검막을 펼친 것이다.
그저 검막만 쓰는 것보다 몇 배는 어려운 작업이었는데, 유준은
해냈다.
그의 머리가 무척 비상하거나, 재능이 월등해서가 아니었다.
스킬 '초집중(EX+)' 덕분이었다.
초집중은 일시적이나마 그를 세 상에 둘도 없는 천재로 만들어 주었다.
이동과 동시에 검막으로 모든 공 격을 차단하는 유준을 막을 괴수는 없었다.
서걱! 석!
겁도없이 덤벼드는 소형 괴수들은 순식간에 육체가 수십 조각으로 나뉘어 소멸했다.
'검막 이거 진짜 좋네.'
게임에서 만렙 캐릭터로 무적 기 술을 쓰고 전장을 휩쓰는 느낌이었다.
검막 안에 있으니 위기의식이 생 기려야 생길 수가 없었다.
쾌검(SSS) 특성이 검막의 위력을 한층 더 높여 주었다.
'쾌검 덕분에 검막의 빈틈이 없어졌어.'
본래 검막은 약점이 아예 없는 기술은 아니었다.
분명 파고들 허점은 있었고, 실
제로 동등한 실력을 지닌 적에게 간파당할 확률이 높았다.
그러나 그러한 허점조차 쾌검 특 성으로 완벽하게 보완할 수 있었다.
본래 속검도 그리 나쁜 특성이 아니었는데, 등급이 오르고 쾌검으로 진화까지 해 버렸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검막에서 쾌검 특성이 차지하는 몫이 컸다.
'특성 보석을 쾌검에 쓸 걸 그랬나?'
잠시 그런 생각도 들 정도였다.
유준이 고개를 저었다.
평정심은 언제고 그에게 큰 도움 이 될 특성이었다.
아니, 항상 그를 보조하고 있었다.
평정심에 특성 보석을 사용한 것 이 후회되지는 않았다.
지금 온통 괴수들로 둘러싸인 이 곳에서도 태평스럽게 검을 휘두를 수 있는 건 평정심의 영향이 컸다.
아무리 그가 강하다고 하더라도, 그는 몇 달 전까지 평범한 대학생 이었다.
물론 게임에 수십억이라는 돈을 쓴 것부터가 평범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기도 하지만, 그가 싸움이나 전투에 관해 문외한이었던 것은 분 명했다.
그런데 그는 무한의 탑에 비정상 적인 속도로 적응했다.
지금만 보더라도 그렇다.
아무리 숙련된 플레이어라고 할 지라도 작금의 상황에선 마냥 태연 하게 있기는 힘들었다.
무시무시한 생김새의 괴수들.
심지어 한 마리, 한 마리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하다.
그런 놈들이 포위하고 있는데 멀 쩡하게 돌아다니는게 오히려 이상
한 일이었다.
이 모든 게 평정심 덕이 아니면 뭐겠는가.
서걱! 서걱!
슬슬 손목과 팔이 저렸다.
체력 능력치가 매우 높긴 해도, 검막과 같은 고난이도 기술을 장시간 펼치니 육체에 무리가 안 갈 수 가 없었다.
그래도 아직은 버틸 수 있는 정 도.
'좀만 더.'
마력 파장이 퍼졌던 곳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유준은 비행 속도를 더 높였다.
속도가 늘어난 만큼 검막을 유지 하는 것이 더 어려워졌지만, 그의 기술 숙련도는 실시간으로 상승하고 있었다.
검막 스킬의 사용이 중단되는 일은 없었다.
목적했던 곳에 도착한 유준은 특 이하게 생긴 한 괴수를 발견했다.
' 저놈이군.'
일정 규모 이상의 마법을 전부 없었던 것으로 돌려 버리는, 말도 안 되는 능력을 사용하는 괴수.
예상외로 크기가 매우 작았다.
기껏해야 성인 남성 정도의 크기.
다만, 머리가 엄청 크고 몸집이 작았다.
가분수라는 말이 절로 떠오르는 외형이었다.
그때 제국 쪽에서 다시 마법이 날아왔다.
또 한 번의 마력 파장이 엷지만, 넓게 퍼졌다.
유준이 특정한 괴수가 마법을 없 애 버린 것.
'확실해.'
확신이 선 순간, 망설임은 없었다.
검막을 멈추고 점멸을 사용했다.
순식간에 괴수의 뒤로 이동한 유준이 검을 뻗었다.
푹!
"끄룩...
유준의 검이 두부 가르듯, 괴수 의 뒤통수를 뚫고 들어갔다.
범상치 않은 능력을 사용하긴 해 도 맷집이 뛰어나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가 황제에게 다시 메시지를 보 내려다 말았다.
'나 바보인가? 내가 쓰면 되잖 아?'
유준은 황제처럼 메테오 마법을 사용했다.
황제가 소환한 운석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운석이 하 늘에 생성되었다.
자연스레 괴수들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하지만 패닉에 빠지거나 당황스 러워하는 괴수는 없었다.
그러려니 하며 바라보기만 할뿐 이었다.
'설마....'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하던가.
옛말에 틀린 거 하나 없다더니.
하늘에서 추락하던 거대한 운석 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내 인벤토리가 이상하다
- 8권 18화
188화
역시 한 놈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게 끝이었으면, 애초에 어려운 시련이라고 하지도 않았겠지.'
유준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거 좀 길어지겠는데.'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마력 파장을 뿜어내는 괴수의 수 가 정해져 있으면 다행이다.
만약 방금 잡은 괴수의 능력이 다른 괴수에게 옮겨 가기라도 한다면?
그게 무한정 가능하면, 마법은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계속 봉쇄되어있는 셈이다.
지금처럼 일일이 잡아 죽이는 건 큰 의미가 없었다.
'가정이긴 해도 느낌이 좋지 않아.'
그가 이런 추측을 하는 건 이유 가 있었다.
방금의 괴수를 죽이기 전, 괴수 의 몸이 굳어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 유준의 존재를 인지했음에 도 피하려거나 도망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검은 군단 내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괴수가 그렇게 쉽게 목숨을 포기하려 한다?
그건 좀 이상했다.
'혹시 모르니까 한 놈만 더 잡아 보자.'
그가 짓쳐들어오는 촉수들을 막 기 위해 검막을 사용한 그때 문제 가 또 발생했다.
마누엘라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마누엘라 : 유준아. 여기 배신 자.]
[마누엘라 : 마법사 세 명이 갑 자기 다른 마법사들을 기습 공격해서 수십 명이나 되는 마법사가 목 숨을 잃었어.]
슬쩍 보니, 제국의 성벽 안쪽에 서 회색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신유준 : 갑자기 공격한 이유는 뭔지 알겠어?]
[마누엘라 : 그것까진 모르겠는데 마법사들이 좀 이상한 거 같기는 해. 눈에 초점이 없고 좀비처럼 기괴하게 움직이고 있어.]
[.신유준 : 수습이 될 거 같아?]
[마누엘라 : 그게... 더 큰 문 제가 생겨서 힘들 거 같아. 그 콘 테라는 기사단장도 그 세 명의 마법사처럼 변했어.]
[*신유준 : 아군을 공격하고 있다는 거지?]
[마누엘라 : 웅.]
[*신유준 : 그럼 네가 알아서 처 리해 봐.]
[마누엘라 : 내, 내가?]
[*신유준 : 난 바빠.]
[마누엘라 : 나 혼자는 힘들지 않을까?]
[*신유준 : 대신 파라네트 보내 줄게.]
유준은 파라네트를 소환했다.
"가서 마누엘라 좀 도와줘."
"알겠습니다!"
마누엘라에게 저쪽 일을 맡긴 이유는 간단했다.
저번에 준 장빗값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녀에게 준 신화 등급 아이템 들.
전부 500레벨 착용 제한에 사기 적인 성능인 장비들만 엄선해서 줬었다.
특히 마법과 관련된 옵션을 지닌 아이템만 줬기에 그녀의 마법적인 능력은 많은 발전을 이뤘을 것이다.
아마도 일취월장이라는 말로도 모자라지 않을까.
무력에 있어 장비가 가지는 비중은 그만큼 컸다.
'알아서 잘하겠지.'
그가 해야 할 일은 따로 있었다.
'부디 내 생각과는 달라야 할 텐데.'
유준은 마력 파장이 희미하게 남 아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시간 단축을 위해서 점멸까지 연 달아 사용하며 거리를 좁혔다.
주변에 자리한 괴수들이 그를 공 격했지만, 검막을 사용하는 유준은 무적과도 같았다.
콰직! 카가각!
그 어떤 공격도 유준에게 피해를
입힐 수 없었다.
강력한에너지를 발출하는 괴수 도 있었지만,에너지 형태의 공격 조차 검막에 분쇄되었다.
'찾았다.'
아까 죽였던 괴수와 똑같이 생긴 괴수가 있었다.
여기서 유준은 일말의 희망을 품었다.
'이렇게 생긴 놈들만 마법 상쇄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거였으면 좋겠는데.'
유준이 땅에 내려서려는 순간,
"끼릭...
괴수가 그를 발견했다.
그 순간,
괴수의 몸이 허물어졌다.
"...뭐야?"
유준이 무언가를 행해서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무래도 예상이제대로 들어맞은 듯했다.
'마법 상쇄를 하는 건 한 놈일 수도 있겠어. 그 대신 계속 몸을 옮겨 다니는 거라면...
보통 까다로운게 아니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비효율적인 걸 떠나서 마법 상쇄 능력을 가진 괴수를 잡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만 했다.
"아아악!"
"코, 콘테 님! 갑자기 무슨 짓입니까?"
"커 헉!"
이름 좀 날린 마법사 세 명을 선 두로, 황실 기사단장 콘테가 돌변 해 아군들을 공격했다.
특히, 근처에 있던 황실 기사단 원들의 피해가 컸다.
제국의 막강한 전력이라고 할 수 있는 황실 기사단의 피해는 제국 전체 전력의 누수라고 볼 수 있다.
마법사 셋과 콘테의 변화는 시작에 불과했다.
이상하게 변한 기사와 마법사들 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기 시작 했다.
병사는 멀쩡한데, 정예라고 할 수 있는 이들만 변한 것이다.
하렌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분명 뭔가가 있어. 지금 상황만 보면 세뇌가 진행되고 있는 거 같은데.'
그녀는 확신했다.
제국의 기사와 마법사들은 세뇌를 당한 것이다.
'그런데 누가?'
주위를 둘러봐도, 의심쩍은 존재 가 없었다.
아니면 아주 멀리서 세뇌 작업을 진행한 걸까?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세뇌 마법은 효과가 확실한 만 큼, 발동 조건도 매우 까다로운 편 이었다.
거리가 멀면 멀수록 실패 확률이 높았다.
이런 식으로 정예 전력만 골라서 세뇌를 진행할 수는 없었다.
내부에 적이 있다.
분명히....
하렌이 다중 캐스팅을 통해 폭주 하는 마법사들을 천천히 제압해 나 갔다.
제국에서 마법과 마법 싸움으로 그녀를 제압할 상대는 황제를 제외 하곤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진짜 문제는 기사들과 콘테였다.
그들을 막는 멀쩡한 상태의 기사들이 콘테와 충돌하는 즉시, 우수 수 떨어져 나갔다.
심지어 세뇌당하기 전보다 더 힘 이 강해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와 같은 플레이어가 그렇게 느꼈다면, 절대 착각이 아닐 터.
실제로 무력이 동등했던 기사들 간의 충돌에서도 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났다.
'그 인간이 와야 하는데.'
자신과 콘테를 아주 손쉽게 제압 했던 신유준이라는 플레이어.
신유준만 있었더라면.
이 사태를 금방 수습할 수 있었을 텐데.
'더 위험하고 중요한 일을 하고 있으니, 지금 그의 도움을 바라는건 억지야.'
하렌이 마력 포션을 꺼내는 그때였다.
거대한 전차와도 같았던 콘테를 막아서는 한 언데드가 있었다.
"어디 주인님께 패배한 개가 이 리도 설치느냐! 주제도 모르고!"
파라네트였다.
위풍당당하게 등장한 파라네트가 콘테를 막아섰다.
콘테가 파라네트를 향해 검을 휘 둘렀다.
파라네트가 만근추를 사용해 몸을 단단하게 만들었다.
카앙!
장검과 파라네트의 몸이 부딪치 자, 검이 완전히 박살이 났다.
파라네트도 무사한 건 아니었지만, 그는 언데드.
금방 파손된 부분이 복구되었다.
"몸통...만근추!"
파라네트가 필살기인 공격 스킬 콤보를 사용했다.
꽈아앙-!
"컥!"
엄청난 충격에 콘테의 입에서 절 로 곡소리가 나왔다.
멀리까지 튕겨 나간 그를, 파라네트는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공간 이동을 사용해 콘테의 뒤로 이동한 파라네트.
"몸통만근추!"
콰아앙!
뒤에서 가해진 충격에 이번엔 콘 테가 앞으로 세게 고꾸라졌다.
"저 언데드는 뭐야?"
"같은 편이겠지?"
"아군인 거 같긴 하네."
"우리도 도와야 하는 거 아니야?"
제국 병사들이 파라네트를 아군으로 인식했다.
우웅!
세뇌된 마법사들이 빈틈이 생긴 파라네트에게 마법으로 집중 포격을 가했다.
그때 조용히 지켜보던 마누엘라 가 나섰다.
두꺼운 실드를 세 겹이나 둘렀다.
푸른 방어막을 두들긴 마법들은
결국 실드를 뚫지 못하고 소멸했다.
마누엘라는 증가한 마력량에 내 심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고 세뇌 된 마법사들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마력 억류의 저주.
마법사들에겐 치명적인 저주이다.
마법사들은 보통 마력 억류의 저 주를 대비해 놓기에 큰 효과를 보 기 어렵지만, 신화 등급의 아이템 덕분인지 마법사들 모두에게 저주 가 통했다.
그것으로 전투가 끝이 났다.
마법을 쓰지 못하는 마법사가 할수 있는 건 없었다.
잠깐이지만, 성벽 근처에 정적이 맴돌았다.
마누엘라와 파라네트가 나서자 삽시간에 상황이 정리된 것이다.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고 빠르게 끝나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다 끝난 것 같으니 전 주인님에게 먼저 가 보겠습니다. 마님."
"내, 내가 왜 마님이야?"
"그럼 뭐라고 부를까요?"
"...그냥 아무렇게나 편하게 불 러."
"내심 마님이라고 부르는 걸 원 하는 거겠죠? 다 압니다요."
"아니야!"
마누엘라가 소리쳤지만, 이미 파라네트는 공간 이동으로 사라진 후였다.
세 번째 특이 괴수를 잡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괴수가 몸을 옮 겨 간 뒤여서 큰 의미는 없었다.
유준이 답답한 한숨을 내쉬었다.
'귀찮게 하네.'
가장 확실해 보이는 방법은, 특 이 괴수가 자신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할 때, 기습해서 죽여 버리는 것이다.
그럼 육체 전환도 이뤄지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그런데 그게 쉬울 것 같지는 않았다.
괴수들 간의 감각이나 시야 공유 가 이뤄지는 것인지, 유준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파악했다.
그리고 근처까지 왔다 싶으면 바로 유체 이탈인지 뭔지를해서 몸을 빠져나갔다.
약이 오르는 수법이지만, 그로서 도 마땅한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유준이 특이 괴수를 두고 난처해 하는 와중에 검은 군단이 결국 성 벽에 도달했다.
처음엔 성벽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던 제국은 괴수들이 성벽을들이박는 순간, 성벽에 금이 가
기 시작하자 생각을 달리했다.
무너지기 전에 병사들을 투입해 괴수들과 전투를 벌이게 한 것이다.
유준의 난입으로 난이도가 오르 면서 병사들의 무력 수준이 대폭 상승했지만, 제국의 전력만 강해진 게 아니다.
그 이상으로 강해진 것이제2 외 세, 즉 검은 군단이었다.
괴수들에게 찢어 발겨지는 병사 들의 비명이 여기까지 들려오는 듯 했다.
'역시 인벤토리를 써야겠지.'
당장이라도 인벤토리를 열고 싶
지만,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괴수들이 틈을 안 주는 것이다. 두 손으로 검막을 펼치고 있는 동안에는 인벤토리를 열 수가 없었다.
'거리를 벌려야겠다.'
그가 그런 마음을 먹은 순간. 파라네트가 등장했다.
"주인님! 해치우고 왔습니다!"
"오, 잘됐다. 너 여기 맡아."
" 예?"
파라네트가 되묻는 그때 유준의 신형이 사라졌다.
점멸을 사용해 괴수들에게 포위 가 된 이곳을 빠져나간 것이다.
"어어?"
파라네트는 무서운 기세로 뻗어 지는 수천 개의 촉수를 보며 생각 했다.
'X됐다!'
공간 이동을 쓰기엔 너무나도 늦은상황.
그렇다고 만근추 하나로 자신의 몸이 저 수많은 촉수 공격을 버텨 낼 것 같지도 않았다.
'역소환!'
파라네트가 스스로 역소환을 행 해 위기를 벗어났다.
괴수들의 공격이 서로 부딪치려 다 한순간에 멈췄다.
그러고는 동시에 다음 타깃을 향 해 움직였다.
한 치의 오차도없이 딱딱 들어 맞는 움직임이었다.
진격하는 간격까지도 일정했다.
마치 누군가 조종이라도 하는 것 처럼.
플라이로 아주 높은 상공까지 올라온 유준이 인벤토리를 열었다.
"어우, 포션부터 하나 빨자."
하도 검을 휘둘러 댔더니, 전신 이 저릿저릿했다.
초인적인 육체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무한정 검을 휘두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체력 능력치가 10,000이 넘는데 도 이러면 말 다 했지.'
중급 체력 포션의 마개를 열어 벌컥벌컥들이켰다.
단숨에 바닥을 보인 포션.
온몸이 시원해지는 느낌과 함께 신체 컨디션이 급격히 좋아졌다.
"좀 살 것 같네."
급한 불은 껐다.
이제 특이 괴수를 처리할 아이템을 꺼낼 차례였다.
내 인벤토리가 이상하다
- 8권 19화
189화
어떤 아이템을 꺼내야 잘 활용했 다는 소리를들을까.
유준이 고심했다.
그러다 인벤토리에서 한 아이템을 꺼냈다.
'이게 통할지 안 통할지는 모르겠는데...
시도해서 후회하는 것보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아서 후회할 확률이 더 높다.
가능성 있어 보이는 것이라면 뭐 든 다 해 봐야 했다.
[타깃 지정 스크롤]
등급 : 無
옵션 : 타깃을 지정해, 고정 공 격, 추격이 가능합니다.
타깃 지정 스크롤은 게임에서 무척 많은 몬스터들이 있을 때, 특정 몬스터만을 잡거나 포획하기 위해 쓰이던 아이템이었다.
'이게 여기서도 효과가 제대로
나올지는 미지수지만...
수량이 넉넉한 아이템이니 아끼 지 않고 사용하기로 했다.
'일단 타깃을 지정하려면 그놈을 찾아야 하는데...
찾고 나서 타깃이 몸을 옮긴 뒤에도 스크롤의 효과가 남아 있느냐 가 관건이었다.
유준이 눈을 감았다.
검은 군단을 감쌀 정도로 감각 범위를 확장했다.
수많은 괴수들의 기척이 감각에 잡혔다.
그러다 뒤늦게 깨달은 것이 하나 있었는데,
'...녀석들끼리 의사소통을 안 하고 있잖아?'
생각해 보니 괴수들은 본인의 뜻을 전하기 위한 소리를 낸 적이 없었다.
있더라도 고통을 참지 못하고 비 명을 지르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외계 생명 체들은 뇌파로 대화를 나누기라도 한단 말인가?
'저놈들이 누구며, 또 제국을습 격하는 이유를 모르겠네. 또 이곳
도 누군가가 준비한 스테이지에 불 과한 것도 같고...
방금 깨달은 것과 모든 괴수가 시야를 공유하는 것에서 유추할 수 있는게 하나 있다.
이 많은 괴수들을 총괄하는 존재 가 따로 있다는 것.
그게 아니고선, 괴수들이 하나가 된 것처럼 움직일 리가 없었다.
조종하는 것이든, 명령을 내리는 것이든 둘 중 하나인 건 확실했다.
타깃 지정 스크롤을 가죽 주머니에 대충 넣어 둔 유준은 다시 이동 했다.
괴수들의 맹공격을 뚫고, 특이 괴수를 멀리서 발견한 후 멈췄다.
더 이상 가까이 다가가면 특이 괴수가 또 몸을 옮겨 갈 공산이 있었다.
그 사실을 인지한 유준은 제자리에서 타깃 지정 스크롤을 꺼냈다.
타깃 지정 스크롤은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사용 가능했다.
녀석이 눈치채기 전에 스크롤을 얼른 찢어 버렸다.
착!
[타깃을 지정합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무언가를 더 할 필요는 없었다.
성공적으로 특이 괴수에게 타깃 지정이 되었다.
반투명한 빨간 과녁 표시가 특이 괴수에게 자리 잡았다.
타깃 지정 스크롤의 좋은 점은, 타깃이 된 당사자는 그러한 사실이 나 낌새를 전혀 모른다는 것이었다.
특이 괴수의 신경이 곤두서 있긴 해도, 이 정도 거리면 들킬 염려가
없었다.
유준이 마력을 끌어 올렸다.
급하게 많은 양의 마력을 퍼 오 진 않았다.
혹시나 특이 괴수가 수상하게 여 기면, 먼 길을 돌아가야 할 수도 있었다.
그 점을 유의해서 마력을 천천히,은밀하게 손끝으로 모았다.
사실 마음 같아선 고대 마법을 쓰고 싶었지만, 특이 괴수가 눈치 챌 확률이 높았다.
무엇보다도 마법이 상쇄되어 버 리면 애써 행한 공격이 무용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다.
마법이 아닌 자신만의에너지를 사용하는 것.
유준은 응축된 마력에 혼돈을 담았다.
그가 지닌 혼돈의 수치는 130.
다른 능력치와 비교해 적어 보일 지는 몰라도, 혼돈 자체가 가진 힘을 생각하면 결코 낮은 수치는 아니었다.
'130이나 되는 혼돈을 쏟아붓는 건 이번이 처음인데.'
기대감이 생겼다.
혼돈은 그에게 실망을 안겨다 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손가락에 마력과 섞인 혼돈이 담 겼다.
유준이 지닌 마력의 순도도 무시 할 게 못 되었다.
위력만 놓고 보면, 혼돈과 비교 해도 그리 뒤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다만 부가 효과에서 차이는 있었다.
혼돈은 상대방의 격을 무시할 수 있고, 상처를 회복하는 걸 막기도 한다.
포션을 아무리 퍼부어도 일정 시간이 지나지 않으면, 재생되지 않는 것이다.
절대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신 계에서 봤던 신과도 같은 강자를 만났을 때.
그때가 '혼돈'이제힘을 온전히 발휘하는 날이 될 것이다.
유준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만큼 혼돈에 거는 기대가 큰 바, 이번에도 그 기대에 부응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유준은 마지막으로 이글 아이 스
카우터를 꺼내 착용했다.
제대로 명중시키기 위해 보조하는 용도였다.
"후우.…"
준비는 끝이 났다.
왼손 검지에 혼돈과 마력이 섞 인, 핵폭탄급의에너지가 담겼다.
이제 쏘기만 하면 된다.
이렇게 장거리에서 저격하는 건 처음이지만, 왠지 모르게 성공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타이밍.
타이밍이 중요했다.
유준이 초집중(EX++) 스킬을 사용했다.
세상이 느려지는 감각과 함께 머 리가 맑아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또한, 초집중이라는 이름에 걸맞 게 1초를 수십, 수백으로 쪼갠 듯 선명하게 집중할 수 있었다.
특이 괴수를 겨냥한 손에서 응축 된에너지가 발사되었다.
지잉.
콰아아아앙!
일직선으로 뻗어진 혼돈과 마력 이 섞인에너지.
정확히 특이 괴수의 머리 부분을 뚫고 지나갔다.
"쓰러뜨렸나?"
유준이 자기도 모르게 깔아선 안 될 복선을 깔아 버렸지만, 쓰러진 특이 괴수에게서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가 빠른 속도로 전장을 내달렸다.
괴수들의 공격은 전부 무시했다.
워낙 빨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괴수들의 공격이 적중하는 빈도수 가 적었다.
콰앙! 쾅!
몇몇 공격이유준의 갑옷을 두드 리긴 했으나, 그의 방어력이 높은 탓에 충격이 대폭 완화되었다.
"응?"
뭐야.
하나도 안 아프잖아.
'괜히 힘만 빼고 다녔나?'
피해가 거의 없는 걸 보니 검막을 쓴 게 헛고생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야. 장비라도 아끼는게 낫지.'
혹시나 장비가 파손되기라도 하 면 그만큼 성가신 게 또 없다.
검막의 숙련도가 상승한 걸 생각 하면, 오히려 잘한 일이었다.
그가 순식간에 특이 괴수의 사체 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머리의 반이 사라진 특이 괴수.
보는 것만으로는 본체가 빠져나 갔는지 확인이 되지 않았다.
'방법이 다 있지.'
유준이 고대 마법으로 블리자드 스톰을 사용했다.
'이번에도 없애나 보자.'
대규모 범위 마법 블리자드 스 톰.
그가 펼치면 기본 마법인 파이어 볼조차 보통 마법사의 헬파이어와 도 같은 위력을 냈다.
그런 그가 블리자드 스톰을 사용 하니, 장관이었다.
괴수들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거대한 고드 름이 얼어붙은 괴수들을 강타했다.
콰자자작! 콰작!
유준이 눈을 크게 떴다.
마법 상쇄가 이뤄지지 않았다.
대규모의 마법을 썼고, 실제로 괴수들이 큰 피해를 입었는데도 아무런 대처가 없었다.
그렇다는 건.
그가 특이 괴수를 제대로 죽였다는 뜻이 된다.
'타깃 지정 스크롤의 효과도 사라졌어.'
확실히 처리한 모양이었다.
아무리 봐도 타깃 지정 스크롤 덕분인 것 같지는 않지만...,
어찌 됐든 일이 잘 풀렸으니 되었다.
유준은 특이 괴수의 사체를 챙기 고 빠르게 괴수들 사이에서 빠져나 왔다.
특이 괴수의 사체를 챙긴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혹시나 부활할 가능성도 염두에 둔 것이다.
비행 속도가 전과는 비교할 수없이 빨라져 파라네트의 공간 이동 이 따로 필요 없었다.
순식간에 제국에 도착한 유준은 마누엘라에게 다가가 전황을 물어 봤다.
"어때?"
"보다시피 밀리고 있어. 일반 괴 수랑 병사들 간의 싸움이 성립이 안 되는 것도 있고, 마법도 안 통 하고 ...."
"마법은 써도 돼. 이제."
"응?"
"처리했어."
마누엘라는 유준이 블리자드 스 톰을 쓴 걸 못 본 모양이다.
정신이 없는 상황이니 그럴 수 있다.
"그나저나…, 좋지 않은데."
주위를 둘러보니 부상자가 많았다.
특히 마법사들의 피해가 컸는데, 무방비한 상태에서 세뇌된 마법사 들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했기 때문 이었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마법사들 상당수가 목숨을 잃은 것은 크나큰 손실이었다.
황제도 전쟁에 참여했다.
오크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본 인의 무력을 믿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유준이 보기엔 매우 무모 한 행동이었다.
"콘테는 어떻게 됐어?"
"한번 무력화되면서 세뇌가 풀렸어. 마법사들도 멀쩡해진 콘테가 일일이 기절시켜 세뇌를 풀었고."
"그건 다행이네."
보통 세뇌는 단순 기절로 풀리지는 않는데, 아무래도 발동 조건이 간단한 대신에 제약도 강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황제는 왜 저런대?"
"몸이 근질근질하다고 했다던데? 들어 보니까 젊었을 때 엄청난 전 쟁광이었대. 그 누구도 못 말릴 정 도여서 주변인들도 그러려니 하더라."
"전쟁광?"
유준이 헛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전쟁광이라고 하더라도 제국의 버팀목이라고도 할 수 있는 황제가 직접 전투에 참여하는 건 좀 과하지 않나?
'제2 외세가 온다고 말할 때는 심란해 보이더니, 다 연기였나?'
유준은 그리 멀리 있지 않은 황 제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지?"
그의 접근을 알아차린 황제가 물었다.
"그냥 들어가 있어."
"어딜 말이냐?"
"황궁."
"왜지?"
"괜히 죽으면 귀찮아지잖아. 네 가 죽기라도 해 봐. 병사들만 사기 떨어지겠어? 기사나 마법사들도 똑 같지. 그런 일이 벌어지면 될 것도 안 돼."
"어딜 가도 위험한 건 매한가지다. 방금 세뇌를 당한 이들이 있듯, 황궁에서도 변장에 능통한 놈들이 내 목숨을 노려 살수를 펼쳤었다."
"...암살 위협이 있었다는 거야?"
"그래. 뛰어난 기사와 마법사들이 대거 전장에 나가 있는지금, 황궁에 있는게 더 위험하다고 봤다. 그래서 전장에 나선 것이야."
"용케 안 죽고 살았네?"
황제가 차게 웃었다.
"제국에 알려진 내 실력은 한참 이나 과소평가되어 있다. 고작 이런 괴수들에게 당할 정도로 약하진 않아."
"그런 것 같긴 해."
유준은 황제의 무력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콘테와 하렌.
제국의 두 축이라는 말이 있는 둘조차 황제라면 단숨에 쓰러뜨릴 수 있을 것 같다.
힘을 왜 숨기고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이유가 있겠지.
만약 제2 외세를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제국을 무너뜨리는 선택지를 택했다면 최종 보스는 황제가 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 정도로 황제의 무력은 다른 이들보다 월등한 편이었다.
'괴수들 다수를 상대로도 이길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그러나 위험 변수라는 건 어디에 나 존재했다.
황제가 무적도 아니고, 자신보다 강한 것도 아니다.
그가 죽을 확률이 절대 낮지는 않다는 뜻.
마음대로 돌아다니게 둘 수는 없었다.
"알아본 건가?"
황제는 자신의 무력을 짐작하는 유준의 말에 놀란 듯 눈을 휘둥그
레 떴다.
"네가 제국에서 가장 강한 건 알겠는데. 그 정도로는 안전하다고 장담할 수 없어."
"적이 얼마나 강대하고 무서운 놈들인지는 잘 알고 있다. 조심하도록 하지. 걱정해 준 건 고맙군."
"걱정이 아니라 네가 죽으면 귀 찮아져서 그래. 어떻게 될진 너도 알잖아?"
황제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 덕였다.
"그래서 말인데..."
유준이 황제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건넸다.
"나한테 좋은 방법이 있어."
"좋은 방법? 무슨 좋은 방법?"
"다른 괴수들에게 공격받지 않 게, 숨어 있는 거지."
"...아까 내 말을 못 들은 건가? 지금 상황엔 어딜 가더라도 안전한 곳은 없다고 했을 텐데."
"아니야. 있어."
유준이 능청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의심쩍은 얼굴로 바라보는 황제.
"아주 안전하고, 편안하고 안락 하고 좋은 곳이야. 여기에 있으면 절대 죽을 걱정은 안 해도 돼. 장 담하지."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다는게 문제지만.
뒷말을 간신히 삼켰다.
입이 근질거리지만, 황제의 의심을 살 만한 말은 삼가는게 좋다.
"어디지?"
"이 구슬."
유준이 콜치가 봉인되어있는 '절 대 봉인의 구슬'을 꺼내 보여줬다.
황제가 불길한 예감에 흠칫했다.
"왜 그래? 치과라도 가는 어린애 처럼."
"느낌이 좋지 않다."
황제의 감이 좋았다.
절대 봉인의 구슬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저렇게 오들오들 떨 정도 로 불안해하다니.
어느 날 불현듯 부모님에게 돈가 스 먹으러 가자는 소리를 들은 중 학생 아들의 모습을 연상케 했다.
"들어가 있어. 너한테 손해가 되
는 제안은 아니야. 확실히 말하지."
"어차피 난 너한테 보상도 받아 야 하잖아. 뭘 의심하는 거야."
"...알았다."
황제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설득에 성공한 유준의 입가가 올라갔다.
내 인벤토리가 이상하다
- 8권 20화
190화
유준이 절대 봉인의 구슬을 꺼냈다.
미우라 겐신이 아닌, 콜치가 있는 구슬이었다.
콜치가 튀어나오자마자, 애벌레 처럼 꿈틀거렸다.
녀석은 역시나 쾌감을 느끼는 듯 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유준의 검이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움직였다.
푹!
본래라면 격 차이 때문에 금방 상처가 수복되어야 하나, 유준의 검 끝에는 혼돈이 담겨 있었다.
콜치는 그대로 절명했다.
"바, 방금 그건 뭔가?"
황제가 살짝 당황한 듯 물었다.
"아, 원래 다른 곳에 살던 놈인데. 얘가 악명이 자자하고, 나쁜 놈이라서 잠깐 가둬 두고 있었어."
"그런 자를 가두는 곳에 날 넣으 려는 건가, 지금?"
"오해하지마. 지옥 같은 곳은
아니니까."
"...잠깐. 지옥이라니? 지옥이 라니?"
"여기 갇혀 있던 애가 좋아하고 있던 거 봤지?"
실제로 콜치는 절대 봉인의 구슬에서 나을 때 황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봤다면 봉인 구슬에 갇히는 것이 마냥 나쁜 게 아니라는걸알 거다.
물론, 유준 본인은 절대 봉인의 구슬에 들어갈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곳에 들어갔던 놈들이 어떤 꼴 로 나왔는지 이미 다 봤으니까.
어떤 위기가 찾아온들 죽는 한이 있더라도 봉인의 구슬은 사양이었다.
평정심 특성은 정신을 다잡게 도 와줄지언정 고통을 줄여 주지는 않았다.
유준은 자신도 못 들어갈 봉인 구슬을 황제에게 권하고 있는 것이다.
"빨리 들어가자. 시간 없어. 이러 고 있는 와중에도 병사들이 수십씩 죽고 있잖아."
" 알겠다."
황제는 의심의 눈초리를 하면서 도 순순히 절대 봉인의 구슬에 들 어갔다.
그의 말을 듣는 것이 최선의 판단임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안전하다는 유준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안 것이다.
황제가 절대 봉인의 구슬에 들어 간 걸 확인한 유준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걸리적거리는 요소 하나를 제거 했다.'
황제가 죽지 않도록 하는 것.
난감했던 문제를 아이템 한 개로 해결한 것이다.
차라리 안 보이면 상관이 없다만, 위기에 처해 있는 모습을 보이 면 유준도 전투에 온전히 집중할 수가 없다.
그래서 황제에겐 미안하지만, 절 대 봉인의 구슬에 집어넣은 건 현 명한 선택이었다.
유준이 높이 솟아올라 주위를 둘 러봤다.
'상황이….'
마누엘라는 괴수들에게 저주를 퍼붓고, 아군에게는 가호와 버프를 거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녀가 큰 활약을 하고 있음에도 괴수들의 전진을 막을 수가 없었다.
콰쾅! 쾅!
"어억!"
"끄아아아악!"
"아, 안 돼 요르치!"
괴수 한 마리가 휘두른 촉수에 병사 십수 명이 쓸려나갔다.
반면, 병사들의 공격에 괴수가 입는 피해는 전무〈全無)하다시피
했다.
일반 병사 백이 붙어도 괴수 하 나를 처리하지 못하는 것이다.
조금의 예외도 없었다.
괴수는 단 한 마리도 쓰러지지 않았다.
병사들로는 괴수를 상대할 수 없다.
하렌이 소리쳤다.
"마법사들! 뭐 해! 마법 안 쓰 고!"
"하지만...
"이제 써도 돼! 그 문제는 해결
됐다! 아까처럼은 되지 않을 거야!"
하렌의 말에 마법사들이 강력한 속성 마법을 여럿 생성했다.
온갖 속성 마법이 괴수들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쏟아졌다.
콰콰콰쾅! 콰쾅! 쩌저적!
"끼릭!"
"끼이익!"
마법 포격에 괴수들의 진격이 주 춤해졌다.
확실히 마법사들의 화력은 무시 할 게 못 되었다.
그 단단한 외피를 지닌 괴수들이
타격을 입고 쓰러져 갔다.
허나, 죽은 괴수는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대부분이 금세 상처를 회복하며 다시금 돌진했다.
병사들이 연신 후퇴를 거듭했다.
별다른 계획없이 괴수들과 맞부 딪치는 건 맨땅에 헤딩을 하는 것 보다도 멍청한 짓이었다.
'전력 보존이 중요해.'
여기서 병사들의 피해가 더 커져 서 좋을 게 없었다.
그렇게 판단한 유준이 성벽에서
뛰어내렸다.
선두에 선 괴수의 더듬이에서 유준을 향해 강력한 파동이 쏘아졌다.
기존에 사용하지 않았던 공격 방 식.
유준을 강력한 적으로 인식했기 때문인지 숨겨 둔 수를 쓴 모양이다.
그는 가볍게 검을 휘둘러 파동을 흩뜨려 놓았다.
그 직후, 땅을 박차 괴수의 머리 위까지 뛰어올랐다.
후웅!
검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그었다.
서걱!
괴수의 몸통과 비교해 무척이나 작은 유준의 검이 괴수를 정확히 반으로 잘라 버렸다.
" 끼룩...
"뭐야. 갈매기냐?"
얼마나 질긴 생명력을 지녔는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반으로 잘랐음에도 소리를 낸다.
미간을 찌푸린 유준이 다음 타깃을 찾았다.
아니, 사실 찾을 필요도 없었다.
수십 마리에 해당하는 괴수들이 동시에 유준을 노리고 달려들었으니까.
그 순간에 유준이 검막을 펼쳤다.
그의 몸을 덮는 반투명하면서도 푸른 막.
막을 덮치는 촉수 수천 다발이 잘려나갔다.
"끼릭! 끼이익!"
"끼아아악!"
괴수들의 가래 끓는 끔찍한 괴성 이 전장을 뒤덮었다.
유준은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괴 수들에게로 돌진했다.
검막을 유지한 채 빠른 속도로 달려드는 그를 본 괴수들이 기겁했다.
그러나 피하기엔 늦었다.
그그극! 슥!
닿는 순간, 모든 걸 갈아 버리는 검막에 괴수들은 아무런 반격도 할 수 없었다.
방어와 동시에 공격을 하는데, 심지어 상대방의 공격력과 방어력 수치가 하늘을 뚫는 수준이었다.
유준은 일개 괴수가 감당하기엔 너무나도 거대한 벽이었다.
그는 괴수들을 가뿐하게 처리하 면서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기여도나 점수 같은 게 있으면 좋겠는데.'
지금 잡는 괴수가 최종 보상에 영향을 준다면 기꺼이 괴수들을 혼 자 다 잡을 용의가 있었다.
'실제로 그럴 확률이 높겠지.'
모든 이벤트가 그러했듯, 이벤트에서의 업적은 매우 중요했다.
괴수 몇 마리를 더 잡느냐, 아니
냐로 보상의 급이 갈릴 수도 있었고, 처치 수에 따른 추가 보상이 주어질 수도 있었다.
고로 괴수 처치에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끼리이익!"
"끼익!"
마법을 상쇄시키는 괴수 외에도, 별 해괴한 능력을 가진 괴수들도 종종 보였다.
상대방의 시야를 가리거나, 움직 임을 제약하거나. 몸을 마비시키거나. 감각을 교란하거나.
하지만 결과는 크게 다를 건 없었다.
일반 괴수와는 다른 능력을 지닌 특이 괴수들도 유준의 검에 닿아 흔적도없이 사라졌다.
"지금이 기회다!"
"돌격! 돌격하라!"
"조지! 쟤부터 조져!"
"조지여! 힘을 내라!"
그의 활약에 힘입어, 기사와 마법사들이 전장에 투입되었다.
비교적 약한 병사들로 괴수들의 체력을 빼는 큰 의미 없는 소모전 이 끝나고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기사와 마법사들도 꽤 활약했다.
이미 유준이 한바탕 괴수들을 쓸 어버린 덕이 컸지만,
그들도 EX등급 난이도 판정에 큰 영향을 끼친 이들이다.
기사와 마법사들이 합동하니, 괴 수들도 어렵지 않게 간간이 처리할 수 있었다.
점차 괴수의 수가 줄었다.
반나절이 채 흐르기도 전에 제국은 괴수들을 전멸시킬 수 있었다.
병사를 비롯한 기사와 마법사들,
더 나아가 귀족들까지 환호했다.
"드, 드디어!"
"이겼다! 우리가 이겼어!"
"저 인간... 누군진 몰라도 진짜 대단하네. 혼자서 괴수를 몇 마 릴 잡은 거야?"
"최소 수천은 잡았을걸. 저기 혼 자서 반은 쓸고 들어갔잖아. 첨에 괴수가 얼마나 많았는데...
"이야, 난 놈은 난 놈.이다."
"언제 봤다고 난 놈이래? 유난 그만 떨어."
"유난 안 떨게 생겼냐? 영웅이라
는 말도 실례일 정도로 제국을 위 해 싸워 줬는데."
결과물이 겉으로 드러나니, 유준을 칭송하는 자가 많아졌다.
유준은 괴수들을 상대로 제국이 전쟁에서 승리하게끔 만든 일등 공 신이다.
당연한 반응이다.
'황제가 죽을 일은 없었겠는데.'
유준은 큰 바위에 걸터앉아 쉬고 있었다.
지치지는 않았다.
쉴 틈없이 스킬을 사용한 탓에
약간 피곤할 뿐이다.
그런 그의 앞에 홀로그램 메시지 가 떠올랐다.
[첫 번째 웨이브를 무사히 막아 냈습니다.]
[두 번째 웨이브까지 30분 남았습니다.]
첫 번째 웨이브의 종료.
그리고 두 번째 웨이브의 시작을 알리는 메시지였다.
"왜 이리 쉽나 했다...
유준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 숨을 내쉬었다.
분명 제국의 힘만으로는 막아 내 기 힘든 수준의 적들이었지만, EX 등급을 .훌쩍 뛰어넘는 난이도라는 생각은 안 들었다.
그래서 그다음이 있을 거라는 것 정도는 대충 예상은 했었다.
문제는 병사, 기사, 마법사들이었다.
다 끝났다고 안도하던 그들은 두 번째 웨이브가 곧 온다는 말에 절 망했다.
"이게 뭐냐."
"하아…."
"가망이 있긴 한 거야?"
"죽을힘을 다했는데..."
"말 똑바로 해. 저 인간 플레이어 없었으면 죽을 둥 살 둥 해 봤 자, 막지도 못했을 거야."
그렇게 좋아했던 것이 거짓말처 럼 제국의 분위기가 금세 축 처지 며 암울해졌다.
"자, 자, 다들 알다시피 아직 끝 난 거 아니니까 얼른 준비해!"
아까만 해도 세뇌에 걸려 아군을 공격했던 콘테가 외쳤다.
황실 기사단원들이 그의 뻔뻔함에 처음엔 어이없어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뇌에 걸렸던 것이 그의 잘못은 아니다.
거기다 부정적인 생각만 하면 상황은 더 나빠지기만 할 터.
기운을 차려서 다음 웨이브를 대 비할 계획을 짜는 것이 훨씬 더 건 설적인 생각이었다.
"읏차.... 마지막까지 힘내서 싸우자. 우리만 믿고 있을 가족들을 생각하자고."
"나 방어구 다 망가졌는데, 큰일이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두 번째 웨 이브가 시작되었다.
일단 첫 번째 웨이브와 눈에 띄 게 달라진 점이 있었다.
거대한 괴수들이 보이지 않았다.
삼십.
두 번째 웨이브가 시작하면서 나 타난 적의 숫자였다.
마족과도 같이 혈관이 도드라져 보일 정도로 창백하고 얇은 피부에, 온몸에 털이 없는 존재들이었다.
매끈한 피부를 지닌 그들은 실오
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알몸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선정적인 느낌은 전혀 없었다.
생식기도 없었을뿐더러, 얼굴에 표정이 드러나 있지도 않고, 마치 인공 생명체 같았다.
그렇다고 놈들이 모두 똑같은 외 형을 지닌 건 아니었다.
정확히, 체격이제각각이었다.
그증가장 덩치가 큰 건 선두에 서 있는 놈이었는데, 다른 녀석들 보다 최소 세 배는 커 보였다.
'저놈이 대장이군.'
느껴지는 기운이 확실히 남달랐다.
그 뒤에 있는 존재들도 상당하고.
'진짜 끝이 없네.'
좀 강해졌다 싶으면, 자신의 목 숨을 위협할 만한 적들이 연이어 나타난다.
그가 제 발로 사지에 들어가는 느낌이 없잖아 있긴 하지만,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두 번째 웨이브입니다. 적의 수는 많지 않습니다.]
[단, '호크'들은 개개인의 능력이 매우 뛰어나니 이 점 유의하십시오.]
"호크라는 이름이었군요."
어느새 소환된 파라네트가 중얼 거렸다.
"내가 널 소환한 기억이 없는데."
"하도 안 불러 주셔서 나왔습니 다요."
"너 아까도 스스로 들어가지 않았었냐?"
"그렇긴 합니다만. 위기를 피하기 위함이었죠. 저의 빠른 판단 덕 분에 지금 이렇게 주인님을 보좌할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보좌해 달라고는 안 했는데."
그때였다.
유준의 눈앞에 인벤토리 동기화 가 완료되었다는 메시지가 나타났다.
[현재 동기화율 108%]
' 이제야?'
동기화 속도가 전보다 느리긴 했는데, 이제 완료가 된 모양이다.
'갈수록 시간이 더 걸리는 건가?'
좋지 않은 소식이다.
동기화가 늦어져서 좋을 게 없었다.
업데이트가 빨라야 아이템 배송 도 빠르지 않겠는가.
하여튼 동기화율이 올랐다.
저번엔 아이템이 전송되지 않았으니, 이번에는 인벤토리에 새로운 아이템이 생기지 않았을까?
지금은 기대를 해 봐도 될 만한 상황.
유준은 뜸들이지 않고 인벤토리를 열었다.
내 인벤토리가 이상하다
- 8권 21화
191 화
'호크'라는 이름을 가진 강력한 적들이 코앞까지 다가왔으나, 유준은 지금 새로 생겼을 아이템이 더 중요했다.
그러나 이대로 호크들을 방치했다간, 제국이 금방 무너지리란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유준은 초집중(EX++) 스킬을 사용했다.
그의 인지 속도가 전과 비교할수 없게 빨라졌다.
인벤토리를 연 유준의 눈이 바쁘게 움직였다.
기존에 있던 아이템들의 배치는 비상해진 머리로 다 외워 둔 상황.
그 덕분에 인벤토리 동기화로 전송된 아이템들을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이번엔 총 다섯 개네.'
적은 숫자.
허나 실망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오히려 환희에 젖어 있었다.
저번에 전송된 아이템보다 숫자는 적었지만, 급이 다른 아이템들이 왔기 때문이었다.
후웅!
아이템의 옵션을 제대로 읽어 보 려는 그 찰나였다.
언제 다가왔는지, 호크 셋이유준을 향해 주먹을 뻗어 왔다.
유준은 정확히 검을 세 번 휘둘 러 호크 셋을 날려 버렸다.
'검이 안 들어갔어?'
호크들의 주먹에는 상처가 없었다.
분명 그의 검과 충돌해서 멀쩡할 수 있는 건 격이 다른 상대뿐.
'나보다 격이 높다는 건가.'
자존심이 상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레벨이 낮다고 약한 건 절대 아니었으니까.
유준은 어깨 위에 있는 자신의 신수 '하프'를 힐끗 봤다.
'하프가 위험할 수도 있겠는데.'
혼돈을 사용하면 호크를 쉽게 처 리할 수 있겠지만, 혼돈은 무한정 뽑아낼 수 있는 기운이 아니었다.
금방 소진될 확률이 높았다.
호크들이 격이 높기만 하면 다행 이지만, 불행하게도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한번 맞부딪쳐 보고 알았다.
아까 그 괴수들이랑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한 놈들이구나.
"아니. 아이템 볼 시간은 좀 줘 야지."
유준의 불평에 아랑곳하지 않고 호크들은 이번에 다섯이 한꺼번에 덤벼들었다.
'왜 나만 노린대?'
호크들도 혹시 괴수들의 기억을 이어받거나, 혹은 공유하고 있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누군가의 명령에 따르고 있는 걸 수도 있었다.
이유가 어떤 것이든, 자신을 노 린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명확했다.
"이런 호크 아이들...
몇 없는 이 즐거운 시간을 방해 하다니.
열받았지만, 최대한 순화해서 말 했다.
보는 눈이 많아서 함부로 욕지거
리를 내뱉기가 좀 그랬다.
유준은 똑같이 갚아 주기로 했다.
달려드는 호크들에게 공간 장악을 사용했다.
다섯 명의 호크가 동시에 몸이 속박되었다.
무형의 기운이지만, 그 좋은 신 체 능력을 가진 호크들이 공간 장 악 마법에 당해 꼼짝도 못 했다.
그러나 혼돈이 담기지 않은 공간 장악이었기에, 호크들에게 대미지를 주지는 못했다.
'좀 더 시간이 지나면 저것도 풀
고 나오겠지.'
대기하고 있던 호크들이 빈자리를 채우며 유준을 공격하기 위해 접근했다.
콘테를 비롯한 기사들이 열 명이 나 되는 호크들을 막아섰다.
호크가 콘테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그를 지나쳐 가려 했다.
"어딜!"
콘테가 호크에게 검을 휘둘렀다.
호크가 검을 향해 마주 주먹을 뻗었다.
콰앙!
"무, 무슨 힘이...!"
놀랍게도 호크의 주먹과 충돌한 콘테의 검이 멀리 튕겨 나갔다.
당황한 콘테에게 호크 두 명이 동시에 발을 뻗었다.
"커헉!"
무방비 상태였던 콘테가 복부를 얻어맞고 날아갔다.
제국 제일의 기사라고 불리는 콘 테.
그런 그가 호크에게 무력하게 당 하는 걸 본 기사들의 충격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콘테가 갑작스레 나타났던 인간 플레이어에게 패배했던 것도 엄청 난 충격을 안겨다 주었는데, 똑같이 생긴 30명의 적이 전부 호크보 다 강하다니?
한 명 정도야 이해를 하지, 30명 이나 되는 적이 자신들의 우상이었 던 콘테를 무너뜨렸다는 것.
기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기엔 충분한 사유였다.
"껴들지마!"
유준이 외쳤다.
기사와 마법사들이 흠칫했다.
"황궁 안에 들어가는 놈들만 막아.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잡을 테니까."
그의 말을 거역하는 플레이어는 없었다.
유준은 검을 세게 꽉 쥐었다.
'마법, 즉 공간 장악으로는 호크들을 죽일 수 없다.'
그렇다면 장기인 검으로 승부 보는 수밖에 없었다.
놈들은 격이 높아서 일격을 가하 려면 검에 '혼돈'이 담겨 있어야만 했다.
문제는, '혼돈'이 한정되어 있다는 것.
텅 비어 버린 혼돈이 다시 차기 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최대한 아껴 써야 한다.'
유준은 호크들이 만만치 않은 상 대들이라는 걸 인정했다.
'혼돈이 없으면 죽일 수 없는 적들이야.'
혼돈이 아니면 절대 봉인의 구슬 로 봉인해 두는 수밖에 없는데,
절대 봉인의 구슬을 활용하기엔
적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호크가 땅을 박참과 동시에 유준도움직였다.
막 쇄도해 오던 호크의 목에 유준의 검이 꽂혔다.
절묘한 타이밍에 이루어진 공격 이었기에, 호크는 미처 인지하지도 못하고 숨이 끊겼다.
'남은 혼돈은 120...
검에 섞어야 하는 혼돈의 최소 수치는 10.
그 아래 수치로는 호크들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남은 호크의 수는 스물아홉.
그때 여섯 정도의 호크가 제국 마법사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유준이 막아서려는 그때, 또 다 른 호크들도 유준을 막아서기 위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유준은 검을 휘두르며 공간 장악 마법을 사용했다.
공간 장악은 제국의 마법사들을 노리는 호크들의 주위에 자리 잡았다.
잠깐에 불과하지만, 호크들의 몸을 묶은 유준은 눈앞의 적들과 난 투를 벌였다.
카캉! 캉! 쾅
그는 절대 혼돈을 남발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호크를 상대할 때는 검에 마력만을 담았다.
그러다 호크를 죽일 기회가 생기 면 혼돈을 섞어 처리했다.
푹!
'두 명째.'
이제 두 명.
아직 갈 길이 멀었다.
호크를 상대할 때 까다로운 점은 또 있었다.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뿐이랴, 그 흔한 방어구 같은 것도 없었다.
플레이어들과는 다르게 아이템을 미착용하고 있는 것.
그런데도 베기 쉽다거나, 약하다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단단했다.
호크들은 몸 자체가 무기인 셈이다.
그래서 유준은 자신의 막강한 공 격력을 십분 활용할 수 없었다.
목이나, 머리라고해서 피부가
더 연한 것이 아니었다.
만약 그의 공격력이 지금과 같이 높지 않았다면, '혼돈'이 있더라도 호크를 쓰러뜨리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을 것이다.
십수 명의 호크들이 쉴 새없이 맹공을 퍼부었다.
유준은 그들의 공격을 막아 내느 라 급급했다.
'검막이 통할까?'
격이 높아 공격이 통하지 않는 상대에게는 사용해 보지 않았는데.
쿠응! 쾅! 쾅!
검이 찌잉 하고 울렸다.
지금은 이것저것 가릴 때가 아니었다.
검막 스킬이 발동되었다.
무려 SS등급의 검막 스킬.
실제 효과보다 등급이 많이 과소 평가된 스킬이다.
유준이 생각하기엔 '천마신공'이 나 '공간 이동'과 같은 스킬들보다 도 더 등급이 높아야 했다.
물론 유준의 공격력이 너무나 높은 덕에 검막의 효과가 증폭된 것 뿐이지만,
검막이 웬만한 스킬들과 비교할 수 없는 선상에 있는 건 사실이었다.
콰콰캉! 카카캉!
검막이 호크들의 모든 공격을 막 아 냈다.
손목이 살짝 아렸다.
그러나 그걸 제외하면 아무런 문 제가 없다.
유준은 검막을 유지하면서 슬쩍 주위를 둘러봤다.
공간 장악이 풀려 가고 있다.
다시 만든다고 하더라도 호크들
은 공간 장악 마법에 적응해 금방 빠져나올 터.
더 묶어 두는 건 의미가 없었다.
"파라네트! 네가 막고 있어!"
"예?!"
유준은 내친김에 타파골까지 소환했다.
타파골은 상황의 위급함을 알고 스스로 거대화를 시전했다.
쿠구궁.
거대화.
초고층 빌딩 한 채 크기의 타파 골이 전장에 자리했다.
제국의 플레이어들은 그 위압적 인 광경에 현재의 긴박한 상황도 잊고 입을 떡 벌렸다.
"뭐, 뭐야 저건? 왜 저렇게 커?"
"...워."
"저렇게 큰 건물은 처음 보는데."
"바보냐. 저거 건물 아니야, 골렘 이잖아."
"뭐? 골렘?"
그런 제국의 플레이어들과 다르 게 호크들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애초에 감정이 없는 존재들 같았다.
그때, 호크들의 대장 격인 덩치 큰 호크가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그 안에 숨어 있기만 할 거지?"
유준에게 한 말이었다.
검막을 사용하는 그를 도발하는 발언.
"너 말도 할 수 있었구나? 그런 데 넌 왜 구경만 하고 있어?"
유준의 질문에 대장 호크는 말이 없었다.
그저 팔짱을 끼고 상황을 지켜보 기만 했다.
'뭐야 먼저 말 걸어놓고….'
웃긴 녀석이네.
'그나저나 제국을 무너뜨릴 생각이 없나?'
다른 호크들은 모르겠지만, 대장 호크는 오로지 유준만 적으로 인식 하고 있는 느낌이 강했다.
유준은 대장 호크의 눈동자가 바 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 보인다.
'나를 분석하고 있군.'
그가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대장 호크는 자신의 사사로운 몸 짓 하나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자신의 무력을 대강은 알아본 듯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 정도로 경계 할 리가 없었다.
유준도 마찬가지로 대장 호크를 주시했다.
지금 검막으로 막아 내고 있는 호크들이야, 시간이 좀 걸릴 뿐이 지 쉽게 죽일 수 있는 적들이었다.
그러나 대장 호크는 달랐다.
그의 감이 위험하다는 경고를 계속해서 보내오고 있었다.
콰앙!
그때 파라네트가 만근추, 몸통박 치기로 호크 하나를 호쾌하게 날려 보냈다.
격 때문에 대미지를 줄 수는 없었지만, 밀어내는 것은 가능했다.
콰쾅! 쾅!
장비를 업그레이드해 줬기 때문 일까.
파라네트는 전보다 기민한 움직 임으로 호크들이 다가오는 족족 날 려 보냈다.
타파골도 마찬가지다.
덩치가 워낙 큰 탓에 어그로가 많이 끌려 호크들 여럿은 기본으로 달고 있었다.
'제법인데?'
그러나 오랜 시간을 버틸 수는 없었다.
해결법을 찾아야 했다.
그럼에도 호크는 많았다.
호크 두 명만 성벽 안으로 들어 가도 제국이 멸망까지 몰릴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상황은 너무나도 안 좋았다.
"아빠!"
그때 하프가 깨어났다.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말을 하는 하프.
" 일어났어?"
"네! 그런데 아빠!"
"웅?"
"제가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 요!"
"뭘 해결해?"
"호크들요!"
"자고 있던 거 아니었어?"
"상황은 다 알아요!"
"...그래? 그런데 어떻게 해결 한다는 거야?"
"헷. 직접 보여 줄게요!"
하프가 오랜만에 깨어나더니, 무척이나 활기차게 대답했다.
녀석은 유준의 앞에서 공격을 퍼 붓는 호크들을 향해 입을 딱 벌렸다.
하프의 커진 입안으로 막대한에너지가 모이기 시작했다.
'...미친.'
그에너지가 지닌 힘을 파악한 유준이 경악했다.
'전보다 더 세졌잖아? 내가 더 강해졌었나?'
그때 하프가 한계까지 응축된에너지를 발사했다.
콰콰콰콰쾅!
정확히 유준의 앞 지점부터 엄청 난 폭발이 일었다.
하프의 브레스는 블랙 요드가 뿜었던 브레스와는 비교할 수 없는 위력이었다.
그렇게 호크 열둘이 흔적도없이
사라졌다.
격의 차이에 의해 다시 몸이 재생될 줄 알았으나, 사라진 호크들은 되돌아오지 않았다.
"하프. 이게 뭐야?"
"어때요? 아빠! 더 강해졌죠, 저?"
"...확실히 그렇긴 한데, 어떻 게 죽인 거야? 격의 차이 때문에 힘들 텐데?"
"격요? 아... 그거요. 아빠 능력 좀 빌렸어요."
"응?"
하프의 말에 유준이 고개를 갸웃 했다가 곧 하프의 말이 무얼 의미 했는지 깨달았다.
체내에 있는 '혼돈'의 수치가 60 까지 줄어든 것이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하프의 브레스가 강력한 건 그렇 다 쳐도, 유준만 사용할 수 있는 '혼돈'을 빌려다 쓴다니?
시스템적으로 자신과 하프가 연 결되어 있기라도 한 건가?
"죄송해요. 멋대로 써서."
"아니, 괜찮아."
유준이 인자한 미소를 지어 주며 대답했다.
'대박이다.'
이건 절대 기분 나빠 할 일이 아니었다.
하프가 자신에게 해가 될 짓을 할 리가 없다.
도움이 되면 되었지.
이제 남은 호크는 열여섯.
아쉽게도 대장 호크는 낌새를 느 끼고 미리 피해 하프의 브레스에 적중되지 않았다.
내 인벤토리가 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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