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쓰러진 지 하루 뒤, 제라드는 다시 깨어났다. 그때 레펜하르트 일행은 지원군의 호위를 받으며 아라난 그라드로 향하고 있었다. 숙영지의 모닥불을 앞에 두고 레펜하르트는 대뜸 질문부터 던졌다.
"어쩐 일로 오신 겁니까, 사부?"
따지듯 묻는 것은 아니었다. 제라드의 등장은 분명 기적이나 다름없는 행운이었다. 그가 없었으면 입을 피해는 상상도 하기 싫을 정도다. 당연히 매우 고마워하고 있다.
그저 순수한 의문이었다.
레펜하르트가 아는 짐 언브레이커블은 제자가 위험에 처했다고 구하러 온다거나 하는 그런 소심한 문파가 아닌 것이다.
딱히 제자의 생명을 신경 쓰지 않아서가 아니라, '짐 언브레이커블의 후계자라면 그 어떤 위험이 닥쳐도 굳건히 헤쳐 나갈 것이다!'라는 굳은 신뢰가 있기 때문이다. 어지간한 볼일이 아니고서는 제라드가 자신을 찾을 리가 없었다.
"음...."
제자의 질문에 제라드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숙영지 내에는 오크와 드워프, 인간으로 이루어진 병사들이 저마다 불을 피우고 잠자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제라드가 수염을 쓰다듬더니 감탄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네 소문은 오가며 들었다. 제법 희한한 짓을 하고 다닌다고 하더구나? 노예 것들 모아다 사람 취급 하면서 왕국도 세웠다며?"
"아, 예... 그냥 어쩌다 보니...."
레펜하르트가 뜨끔한 표정으로 제라드의 눈치를 보았다.
생각해 보니 아무리 그의 사부라지만, 제라드는 엄연히 이종족에 대한 편견 속에서 살아온 이 시대의 인간이었다. 상식인이라면 분명 노예들을 데려다 희한한 짓 하며 질서를 어지럽힌다고 화를 낼 것이었다.
그렇다. 상식인이라면.
"잘했다!"
짝!
제라드가 호쾌하게 레펜하르트의 등을 두들겼다. 그리고 캑캑대는 제자를 향해 흡족한 미소를 보냈다.
"암! 짐 언브레이커블이 사고를 치면 이 정도 스케일은 되어야지! 허허허!"
레펜하르트는 멍하니 그의 사부를 바라보았다. 어째 전혀 화를 내는 눈치가 아니었다. 오히려 꽤 기분 좋아 보이기까지 한다?
"어, 사부... 혹시 사부도 이종족들을 사람으로 느끼게 되셨습니까?"
레펜하르트가 은근 기대를 하며 물었다. 그동안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혹시나 제라드도 그의 사상에 감화된 것일까?
물론 그것은 짐 언브레이커블을 너무 무시하는 처사였다. 제라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사람?"
어째 표정이 뭔 소리 하는지 도통 못 알아듣겠다는 듯했다. 레펜하르트가 풀어서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혹시 사부도 엘프나 오크 들을 인간처럼 사람으로 대하게 되셨나 해서...."
얼토당토않다는 듯 제라드가 대꾸했다.
"무슨 소리냐? 어차피 다 똑같이 약한 것들 아니냐? 인간이나, 이종족이나 그게 그거지."
그렇다.
제라드는 이종족을 사람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었다. 인간도 사람으로 안 보고 있었던 것이다!
딱히 제라드가 약자를 사람 취급 안 하는 흉악한 인간이라는 소리가 아니라, 그에게 있어 짐 언브레이커블 수준의 강자가 아니면 죄다 거기서 거기인 허약한 존재인 것이다. 레펜하르트와는 다른 의미로 그는 모든 종족을 평등하게 대하고 있었다.
"자고로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최소한 맨몸으로 칼날 정도는 튕겨야지!"
"음, 그렇군요...."
레펜하르트는 반성했다. 제라드를 상대로 상식을 떠올린 것이 잘못이었다. 원래 그의 사부는 저런 인간이었다.
어쨌거나 제라드는 현재 안타레스 백국이 꽤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뭔 짓을 하건 통 크게만 하면 되는 거야! 우리 무문이 오랫동안 권왕이니 권황이니 불리긴 했는데, 실제로 왕 된 놈은 너밖에 없다. 장하다, 제자야!"
"아, 감사합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레펜하르트는 고민했다. 이걸 좋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아, 그런데 진짜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설마 저 보고 싶어서 왔을 리는 절대 없을 테고."
"응? 내가 네놈을 왜 보고 싶어 하느냐?"
과연, 역시 저런 인간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갑자기 제라드가 안색을 굳히더니 물었다.
"제자야."
"네, 사부."
"너 요새 이상한 데 원한 진 것 있느냐?"
레펜하르트는 잠시 신음했다.
"원한이라... 좀 많이 지긴 했죠?"
대륙 각지에서 노예 훔쳤지, 연금술사 길드마다 털어 가며 트롤 빼냈지, 차탄 공국의 수도를 깡그리 불태우고 멀쩡한 협곡도 하나 뭉갰다.
당장 어제만 해도 대륙 최강의 국가, 신성 바슈탈론 제국 황제의 속을 시원하게 긁어 놓고 오러 유저 셋을 황천으로 보내지 않았던가?
이 정도 해 놓고 원한 진 데가 없을 거라 생각하면 바보 중의 바보다.
하지만 제라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거 말고. 그러니까 좀 괴상한 놈들한테 빚진 거 있냐고."
"네?"
그러자 제라드가 천천히 설명했다.
레펜하르트를 하산시킨 뒤 제라드는 우선 바실리 왕국 수도의 본 저택으로 돌아가 반년 정도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선언한 대로 대륙을 돌아다니며 또 다른 후계자가 있지 않을까 찾아 다녔다. 레펜하르트, 그러니까 어린 테스론을 찾아 헤맬 때와 달리 이번엔 마음이 느긋하기에 그냥 유람 다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돌아다니며 놀고 있었는데....
"얼마 전부터 이상한 놈들이 자꾸 덤비지 뭐냐? 그것도 실력은 쥐뿔도 없으면서 아티팩트는 하나 같이 처음 보는 초특급 품이더구나."
젊은 시절 던전 탐사자로 이름 높았던 제라드는 그만큼 아티팩트를 보는 눈도 높았다. 그가 본 저 '이상한 놈'들의 무구는 절대 현세에 있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참 신기하다 싶었지. 그래서 왜 시비 거냐고 물으니까 제자 잘못 둔 걸 탓하라나? 그리고 대뜸 날 죽이려 들더구나."
"그래서 어떻게 되셨습니까?"
"어떻게 되긴? 조졌지."
제라드가 별 괴상한 질문 다 듣는다는 듯 대꾸했다. 아니, 조졌으니까 자신이 여기 있지 설마 그놈들이 성공했으면 그가 이 자리에 있을까?
물론 레펜하르트는 그걸 몰라서 물어본 것이 아니었다. 단지 그는 전생에도, 그리고 현생에도 저 비슷한 이야기를 겪은 적이 있는 것이다.
"아뇨, 그러니까 혹시 다른 이야기는 없었나 해서요. 어디에서 왔다든가...."
"아니? 나도 궁금해서 붙잡아서 물어볼까 했는데, 잡히는 순간 혀 깨물고 펑펑 죽더라고. 에잉, 제 목숨 아까운 줄도 모르는 것들 같으니."
혀를 차는 제라드를 향해 레펜하르트가 다급히 물었다.
"그, 그럼 아티팩트는요?"
"응? 그냥 녹아 버리던데?"
레펜하르트가 황당해하며 되물었다,
"엥? 녹다뇨? 그게 한여름 뙤약볕 받은 얼음사탕도 아닌데 왜 녹습니까?"
"아, 녹았으니 녹았다고 했지! 지가 알아서 녹는데 나보고 어쩌라고? 설마 내가 그거 꿀꺽 먹고 제자 놈 앞에서 오리발 내밀겠냐?"
제라드가 버럭 성을 내며 레펜하르트에게 꿀밤을 날렸다.
꽝!
동작은 꿀밤인데 폭음이 터졌다. 제라드 딴에는 제자에 대한 사랑의 꿀밤이었지만, 그걸 맞은 레펜하르트는 그 순간 땅으로 10센티미터쯤 푹 꺼졌다.
물론 짐 언브레이커블의 육체는 땅으로 10센티미터 꺼지는 정도는 그냥 '사랑의 꿀밤'으로 받아들인다. 덤덤하게 엉덩이를 떼 고쳐 앉으며 레펜하르트가 잠시 생각했다.
'하긴, 자체 파괴 술식이 내장되어 있으면 그럴 수도 있겠군.'
전생에서 암살자 죽이고 아티팩트 챙길 때는 AMP 쇼크웨이브 덕에 아예 모든 마법을 정지시켜 버렸으니 문제없이 챙길 수 있었다. 하지만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암살자들이 자신의 죽음을 대비해 적의 손에 아티팩트가 들어가지 않도록 자폭 코드를 준비했다는 것은 그리 어색한 이야기가 아니다.
'어라? 그럼 왜 제이드의 블링크 부츠는 안 녹은 거지?'
또 다른 의문이 머릿속을 맴돈다. 생각에 잠긴 레펜하르트를 보며 제라드가 손을 내저었다.
"뭐, 아티팩트는 다 녹아 버리기에 궁금해서 옷이나 좀 뒤졌는데 이런 것 밖에 없더라. 혹시 아는 표식이냐?"
제라드의 손에서 은빛 물체가 우수수 떨어졌다. 레펜하르트가 안광을 빛냈다.
'어? 저건?'
은빛 엠블렘 덩어리를 제자에게 보여주며 제라드가 혀를 찼다.
"하여튼, 자꾸 네놈 팔면서 덤비는 놈이 많아서 그냥 궁금해서 와 본 거다. 뭔 일인지 모르겠지만 빚진 거 있으면 얼른 갚아라, 제자야. 우리 무문이 쪼잔하게 빚이나 지고 다녀서야 되겠느냐?"
"아, 뭐 그런 건 절대 아닙니다만...."
"하긴, 눈치 보니까 네 녀석도 모르는 것 같구나."
제라드가 홀가분한 얼굴로 어깨를 털었다.
"별일 있는 건 아니다. 호기심에 근처 온 김에 들른 것뿐이었는데, 그래도 잘 왔구나! 바나텔 녀석과 시원하게 한판 붙어 보기도 했고. 아오! 조졌으면 훨씬 시원했을 텐데!"
"아, 네, 하하하...."
꾸러미에 은빛 엠블렘을 집어넣으며 레펜하르트는 어색하게 웃었다. 이미 사부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그의 의식은 모조리 이 은빛 엠블렘들에 집중해 있었다.
☆ ☆ ☆
☆ ☆ ☆
백왕궁 가이라크의 회랑.
당시를 상기하며 레펜하르트는 손에 쥔 꾸러미를 내려다보았다. 안에 가득 든 엠블렘들이 반짝반짝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가 품에서 다른 엠블렘을 꺼냈다. 제이드로부터 얻은 것이었다.
둘을 비교해 보니 완전히 똑같았다.
이건 절대 우연의 일치라고는 할 수 없다.
'분명히 뭔가 있어.'
심각한 얼굴로 엠블렘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어라? 형님, 그거 어디서 나셨습니까?"
초췌한 얼굴로 러스가 곁으로 다가왔다. 내내 실란의 치유술에 시달리다 이제야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레펜하르트가 엠블렘을 들어 보이며 물었다.
"왜? 아는 물건이야?"
"아뇨, 아는 건 아닌데...."
러스가 고개를 저으며 자신 없는 목소리를 흘렸다.
"예전에 아버지 집무실에서 한번 봤던 것 같기도... 확실하진 않습니다. 어릴 때 본 거라...."
레펜하르트가 눈을 빛냈다.
"혹시 이것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나?"
"그게, 아버지께서도 자세히 알려 주진 않으셨습니다. 가주에게만 전해지는 것이라고... 그냥 테네스 가문의 후계자라면 이 엠블렘의 주인이 나타날 경우 그 명에 충실히 따라야 한다는 말만 하셨습니다."
"테네스 백작가 정도 되는 가문이 명에 충실히 따라야 한다고? 그럼 그라임 왕가의 것인가? 아니, 하지만 문장이 다른데?"
"그건 저도 아버지께 여쭈어 봤었는데, 그라임 왕가와 연관은 있지만 왕가는 아니라 하셨습니다. 더 이상은 가문의 비밀이라 알려 주실 수 없다고...."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테네스 백작가의 후계자는 엄연히 유서스, 하지만 현 테네스의 가주인 폴트 백작은 워낙 사이러스를 총애하는 것이다. 그래서 후계자가 아님에도 저 정도까지 가르쳐 준 것이리라.
어쨌거나, 좋은 정보다. 이 정도 단편적인 정보라도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바슈탈론의 아크라이트 가문에 이어, 그라임의 테네스 가문과도 연관이 있단 말이지? 카를에게 줄 정보가 더 늘었군.'
레펜하르트가 빙그레 웃었다.
"고맙다, 러스. 덕분에 큰 도움이 되었군."
"네? 아니, 그게 뭐기에?"
"이게 뭔지 모르니까 큰 도움이 되었다는 거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다.
회랑을 통해 우락부락한 덩치에 검은 수염이 얼굴을 가득 덮은 사내가 우아한 예복 차림으로 걸어왔다. 참으로 안 어울리는 복장임에도 또 신기하게 잘 어울리는 사내, 안타레스 백국의 재상 카를이었다.
"절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백왕님."
가슴에 손을 올린 채 카를이 가볍게 예를 올렸다.
"아아, 부탁할 일이 있어서 불렀소만...."
말을 하다 말고 레펜하르트는 카를을 보며 혀를 찼다.
현재 그는 수염으로 덮인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수척한 기색이 역력했다. 양 뺨은 홀쭉하게 들어가고 눈 밑에 다크 서클도 진하게 새겨져 있었다.
전부 바나텔과 제라드의 난동으로 인한 후유증이었다.
저 괴수 대결전으로 인해 안타레스 백국이 잃은 것은 그저 성 하나가 다가 아니었다. 사실 백왕성은 어차피 철거해야 할 성이었으니 그리 아까울 것도 없었다.
문제는 그 안에 가득 들어 있던 각종 행정 서류였다.
원래 일국을 다스리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금은보화가 아니다. 오히려 각 지역의 물산을 기록하고 인구 조사를 한 저 행정 서류들이 더 큰 보물이다. 그래서 제대로 된 장수라면 타국의 영역을 점령했을 때 보물 창고보다는 오히려 행정 서류실부터 제압하곤 한다.
카를도 그걸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행정 서류는 두꺼운 암벽으로 둘러싼 지하실에 잘 보관해 두고 있었다. 설사 백왕성이 통째로 함락되더라도 입구만 닫으면 어느 누구도 알아채지 못하도록.
하지만 천하의 카를이라도 설마 백왕성이 주춧돌 하나 안 남기고 싹 쓸려 갈 줄은 상상치 못했던 것이다. 하긴, 상식이 있다면 상상 못 하는 게 정상이긴 하다.
수하들 교육을 잘 시켜서 도망친 행정관들이 상당수의 서류를 건져 오긴 했지만, 그렇다 해도 빠진 부분이 워낙 방대했다. 덕분에 현재 카를을 비롯한 백국 행정부는 며칠째 잠도 제대로 못 자며 미비 서류 보충 작업에 한창이었다. 틸라 역시 카를을 보조하며 함께 날밤을 지새우고 있으니, 커플이 사이좋게 다크 서클을 달고 산 지 벌써 일주일째였다.
"...여전히 많이 바쁜가?"
피곤에 찌들어 보이는 카를을 보니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냥 나중에 시킬까 라며 레펜하르트가 고민하던 차였다.
"괜찮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카를이 손을 저으며 용건을 물었다. 주저하다 레펜하르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이드의 일, 테스론 일행이 갑자기 들고 온 아티팩트 등에 대해 차분히 듣고 있던 카를이 문득 눈을 빛냈다.
"흐음?"
크리스틴이 입에 담은 '은의 현자'라는 단어에서였다.
"이 은빛 엠블렘은 모르겠지만... 은의 현자라면 저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응? 그런가?"
놀란 레펜하르트와 러스를 번갈아 살피며 카를이 이야기를 꺼냈다.
"전 크로방스의 국왕, 고트린 1세와 텔리온 왕자의 사고에 대해섭니다."
크로방스 내전의 시발점이 된 고트린 1세와 텔리온 왕자의 갑작스러운 죽음.
그들의 죽음은 자연스럽지 않은 부분이 많았다.
당장 일국의 국왕과 왕위 계승자가 보름 간격으로 이유 모를 병에 걸려 죽은 것부터가 이상했다. 당시 예순이 넘었던 고트린 1세야 노환으로 사망했다손 치더라도, 20대의 팔팔한 청년인 텔리온 왕자가 보름도 안 되어 비슷한 증상을 보이며 죽었다는 것은 누가 봐도 어색했다.
"그래서 초기에는 고트린 폐하의 정책에 반대하던 이들이 암살했다는 설이 유력했지요."
카를의 말에 의하면 크로방스의 전 국왕, 고트린 1세는 드워프에 대해 새로운 정책을 준비 중이었다고 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드워프들의 건축술과 기술력에 관심을 가졌고, 그래서 그들을 정식으로 국가 구성원으로 받아들일 경우의 이득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누가 뭐래도 수동적으로 움직일 뿐인 노예와 능동적으로 일에 나서는 자유인의 업무 효율은 크게 차이가 난다. 크로방스 내의 드워프를 정식 국민으로 편입하게 되면 일단 기술적, 건축적 면에서 큰 발전을 기대할 수 있고 또 지방 귀족의 세력도 상당히 꺾을 수 있으니 자연적으로 왕권 강화에도 지대한 힘이 된다.
유벨 왕자가 괜히 어릴 때 드워프 여인 피니아를 보모로 삼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비록 모든 종족은 아니라지만, 적어도 고트린 1세는 드워프만큼은 다른 눈으로 보았던 것이다. 텔리온 왕자 역시 같은 시각을 지니고 있었다.
"저 정책은 귀족들의 기득권을 위협하기도 하고 또 세이어 교단의 가르침에도 반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의문의 사고 이후 상당 기간 그에 대한 조사가 들어갔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조사해도 암살당했다는 흔적이 없어, 왕실도 결국 자연사라 판정했습니다."
카를의 설명에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카를을 향해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자네는 그걸 믿지 않았겠군?"
카를도 웃으며 대꾸했다.
"우연도 정도가 있지요. 일국의 왕과 왕위 계승자가 보름 단위로 죽어 가는 게 어디가 자연사란 말입니까?"
내전이 일어난 후, 카를은 카르사스 공자로서 왕위 계승 후보에 올랐다. 하지만 아무리 그 덕에 왕위에 가까워졌다곤 해도, 그는 성격상 미심쩍은 부분을 그냥 두고 넘길 수 있는 타입이 아니었다. 나름 돈과 사람을 풀어 상당히 뒷조사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캐내도 나오는 게 없더군요. 단지 그 와중에 은의 현자라는 조직이 있어, 암살을 주도했다는 식의 루머 비슷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저것이 전부였고 더 조사해 봐도 나오는 것이 없어 결국은 무시할 수밖에 없었지요. 슬슬 내전에 치열해져 따로 사람을 쓸 여유도 없어지기도 했고요."
설명을 마치며 카를이 은빛 엠블렘을 찬찬히 어루만졌다. 그의 눈동자가 강렬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것이 있다면 한 번 더 조사해 볼 필요가 있겠군요."
'책사'의 표정이 되어 카를이 엠블렘들을 회수했다. 저 표정의 카를은 실로 믿음직스러운 존재다.
레펜하르트가 만족하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럼 부탁하네, 카를 재상."
카를이 무릎을 굽히고 가슴에 손을 올렸다. 정식으로 주군에게 명을 받는 예를 취한 것이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백왕님."
때마침 제라드가 목을 매만지며 안쪽으로 들어오다 그 광경을 보았다. 그가 레펜하르트를 보더니 감탄을 터트렸다.
"오오! 제자야!"
"몸은 다 푸셨습니까, 사부?"
제라드에게 인사를 건네면서도 레펜하르트는 잠깐 의아해했다. 아니, 왜 뜬금없이 감탄사는 내뱉으시나?
제라드가 레펜하르트를 위아래로 보더니 히죽 웃었다.
"너, 진짜 왕 같다."
"왕 맞습니다만... 왜 그렇게 보십니까?"
"신기해서. 우리 무문에 왕 노릇 할 정도로 머리 좋은 놈이 나오다니, 역시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구나."
"아, 예...."
짐 언브레이커블 자신조차도 스스로 무식한 건 알고 있었구나. 새삼 깨달으며 레펜하르트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내가 마법사란 것까지 아시면 기겁하시겠군.'
다행인지 불행인지, 제라드는 바나텔과 싸우느라 정신이 없어 레펜하르트가 마법 쓰는 광경까진 보지 못했다. 뭐, 그렇다 해도 결국은 들키겠지만. 그때는 어떤 핑계를 대야 하나 레펜하르트가 고민하던 참이었다.
제라드가 그를 살펴보더니 갑자기 씨익 웃었다.
"쪼그매서 걱정했는데 이젠 제법 사내다운 티가 나는구나. 그래, 우리 무문이 그렇게 조그마할 리가 없지."
만족스럽다는 듯 웃고 있는 사부를 보며 레펜하르트는 인상을 썼다.
결국, 요 몇 년 사이 그의 신장은 2미터를 돌파해 버렸던 것이다! 현재 2미터 하고도 5센티미터 정도 더 큰 상태다. 근육도 더 커진 바람에 체중도 불어서, 슬슬 150킬로그램 가까이 나가고 있었다.
"휴우...."
"잉? 왜 한숨을 쉬느냐?"
"네? 아, 아뇨! 아직도 이것밖에 안 컸나 싶어 슬퍼서요."
잽싸게 딴소리를 하는 레펜하르트를 보며 제라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왜 왔느냐? 나 찾았다고 하던데?"
그제야 용건이 떠오른 레펜하르트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사부님께 부탁드릴 것이 있어서 말입니다."
☆ ☆ ☆
검성 바나텔과 타국 오러 유저의 침략은 레펜하르트에게 크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제플린 해방 작전은 세인의 추측처럼 무턱대고 뒷생각 없이 일으킨 것이 아니다. 철저하게 각국의 정치적 상황을 고려해, 현 안타레스 백국의 힘으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는 판단이 서서 시행한 일이었다.
실제로 대부분의 대륙 각국은 카를의 계산대로 움직이지 않았던가? 바슈탈론 제국이나 세이어 교단이 적으로 돌아설 것임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 해도 대륙 정세상 당장 어떻게 못 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 세상은 계획대로만 돌아가는 것이 아니었다.
분명 바슈탈론 제국은 군대를 움직여 전쟁을 하지는 못했지만, 대신 군대나 다름없는 존재인 검성 바나텔과 열 명의 오러 유저라는 패를 꺼내 들었다. 이쪽에서 제라드라는, 스스로도 예상 못 했던 조커가 있지 않았다면 일격에 털려 버렸을 강력한 패다.
역시 강력한 힘의 존재는 어떤 모략도, 정치도 뛰어넘는다. 당장 전생의 레펜하르트 자신이 그런 존재가 아니었던가?
후일을 대비하기 위해서는 역시 검성 바나텔과 동급의 강자인 권황 제라드의 힘이 필요한 것이다. 제라드라는 강력한 무력 억제력이 있다면 10서클의 힘을 되찾을 때까지 충분히 시간을 벌 수 있으리라.
"...그래서, 안타레스 백국이 안정될 때까지 만이라도 사부님이 여기 좀 머물러주시면서 보호해 주시면 어떨까 해서요."
레펜하르트의 말에 제라드가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저것들을 지켜 달라고?"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며 한쪽 눈을 치켜떴다.
"내가 뭐하러?"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는 사부를 보며, 레펜하르트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짐 언브레이커블의 특성상, 제자가 뭔 일에 처하건 무관심하다는 건 안다. 하지만 자신을 지켜 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부하들 좀 보호해 달라는 것도 탐탁지 않게 여길 줄은 몰랐다.
'그래도 워낙 제자를 아끼니 이 정도 부탁은 들어줄 줄 알았는데.'
티 안 나게 표정 관리를 하며 레펜하르트가 제라드를 달랬다.
"새 제자 찾느라 바쁘신 건 압니다만... 새 제자 찾는 것보다 있는 제자 잘 간수하는 것이 짐 언브레이커블의 무맥을 잇는 데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아니, 그러니까 그게 이거랑 무슨 상관이냐고?"
레펜하르트는 당황했다.
어째 상황이 예상했던 것과 달랐다. 제라드는 귀찮다거나 쩨쩨하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라, 아예 왜 그러야 하는지 이해조차 못 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하산해 놓고 다시 사부 찾는 건 좀 쪽팔리지 않느냐? 사내새끼라면 응당 자기 힘으로 모든 것을 헤쳐 나가야지!"
"그런 문제가 아니라...."
박수도 반대편이 마주 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다. 사고방식이 전혀 다른 이를 상대하고 있자니 이쪽의 사고가 마비되는 기분이다.
"아, 그러니까 그게...."
뭐라 말해야 할지 애매해하는 레펜하르트를 보며 카를이 고개를 저었다.
"쯧쯧...."
그의 주군은 짐 언브레이커블의 후계자면서도, 아직도 자신의 무문에 대해 저리 모르나? 카를이 한 발 나서서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권황이시여."
"오, 카를 재상!"
카를이 말을 걸자 제라드가 반색을 했다. 안 그래도 그는 '문관' 주제에 몸을 단련하는 카를을 대견하게 여기고 있었다. 뭐, 짐 언브레이커블에 비하면 여전히 수수깡 같은 몸이지만 그래도 됨됨이가 기특하지 않은가?
카를이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아라난 그라드에 머무실 동안 백왕궁 호위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이는 권왕 레펜하르트가 아닌 안타레스 백국의 이름으로 드리는 의뢰입니다."
레펜하르트가 눈을 껌뻑였다. 아까 자신이 부탁한 거랑 같은 소리잖아, 저거?
그때 카를이 한마디 더 이었다.
"숙식 제공에 일당 금화 백 닢입니다."
일당 금화 백 닢이면, 월 삼천 닢. 실로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제라드가 벙그레 웃더니 바로 대답했다.
"좋다!"
제자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은 사부로서 행할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무맥을 잇는 것이 중요하다지만, 이미 하산한 제자 계속 돌보는 건 제자의 앞날에도 도움이 안 되고 또 어미가 다 큰 자식 치마폭에 감싸는 것처럼 '남자답지 않은 과보호'다. 사나이다움을 강조하는 짐 언브레이커블에서는 있을 수 없는 수치다!
하지만 일국의 의뢰를 받아 '약한 자'를 보호하는 것은 오히려 남자답고 멋진 일인 것이다.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다!
제라드가 카를에게 손짓을 했다.
"어서 계약서나 가져오게. 몇 달 계약으로 할까? 계약금은? 선불로 오천은 땡겨 줘야겠는데?"
뭐랄까, 사내다움을 강조하는 주제에 또 보통 무인들이 기피하는 돈 문제는 철저히 챙긴다. 하지만 이것이 제자 키우는 데 떼돈 드는 짐 언브레이커블의 상식이었다.
"기껏 힘쓰면서 제 몫도 못 받으면 그게 무슨 남자냐? 호구지. 남자라면 자고로 자기 밥그릇은 철저하게 챙겨야 하는 법이다! 그나저나 녀석, 진짜 돈 많이 벌었구나? 참으로 대견하기 그지없다, 하하하!"
레펜하르트 등을 두들기며 제라드는 호탕하게 웃었다. 캑캑대며 레펜하르트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럴듯한 것 같기도 하고 뭔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역시 저 무문을 이해하려면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 그럼 내 숙소를 어디로 할까? 이왕이면 널찍하고 광장 가까운 방 잡아야지. 그래야 저 오크 녀석들 재롱부릴 때마다 가르침 주기가 편하겠지? 등을 중얼거리며 제라드가 황궁 여기저기를 살펴보았다.
레펜하르트가 슬그머니 카를을 보며 향상된 메시지 마법을 썼다. 제라드의 가공할 청력이면 아무리 귓속말을 해 봐야 다 들을 것이 빤하니 아예 마법을 쓴 것이다.
'그런데... 우리 예산이 그 정도가 되오?'
매월 금화 삼천 닢이면 족히 군대 오천 명을 한 달 동안 유지할 거액이었다. 실제로 크로방스 내전의 판도를 바꿨을 때 레펜하르트가 쓴 액수가 저쯤인 것이다. 뭐, 당시엔 인플레 효과를 크게 봤었지만 어쨌건 결코 작은 액수는 아니다.
카를이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향상된 메시지 마법은 쌍방 통행이라, 카를의 목소리도 마법으로 레펜하르트에게 전달되었다.
'그 정도 예산은 빼낼 수 있습니다. 검성 바나텔에게 바슈탈론 제국이 매달 내리는 액수가 금화 천 닢이라 들었습니다. 권황 제라드 정도 되는 초인을 고용하는 비용으로는 결코 비싼 것이 아니지요.'
'하지만 매월 금화 삼천이라니, 족히 군대 오천 명은 유지할 거액 아닌가?'
'네, 고작 병사 오천이지요. 엄청 싼 거잖습니까?'
'어, 생각해 보니 그렇긴 하네.'
안타레스 백왕성이 있던 자리에 새롭게 생긴 호수를 떠올리면, 확실히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다.
잠시 기다리는 사이 시종 하나가 잽싸게 양피지를 들고 왔다.
카를이 즉석에서 일필휘지로 계약서를 작성했다.
제라드가 사인한 뒤 자기 측 계약서를 품에 챙겼다.
이걸로, 권황 제라드는 한시적이지만 공식적으로 안타레스 백국의 호위 무장이 되었다.
"좋아, 이 기회에 인간 말고 딴 놈들 중에도 쓸 만한 애 있나 찾아봐야겠군. 내 이제껏 대륙 돌아다니면서 이종족들은 신경 써 본 적이 없거든. 이거 참 색다른 기회로구먼."
휘적휘적 회랑을 떠나며 제라드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멀어지는 사부를 향해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숙였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사부."
"오냐, 걱정 마라! 일단 맡은 이상 책임은 다 한다!"
손을 흔들며 제라드가 회랑 저편으로 사라져 갔다. 허리를 펴면서 레펜하르트는 굳게 결심했다.
'빨리 사방신의 유물부터 찾으러 가야겠다. 저 양반 계속 고용하다간 백국 재정이 거덜 나겠어!'
회귀한 이래 이토록 전생의 힘이 그립긴 처음이었다.
근검절약을 위해서, 어서 10서클의 힘을 되찾아야 한다!
4
안타레스 백왕성이 아라난 그라드로 천도한 지도 어언 한 달째.
슬슬 백왕궁 가이라크는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미비한 서류를 모두 보완한 카를의 행정 업무도 다시 궤도에 올라섰고 틸라를 비롯한 내궁부의 여인들도 새로운 왕궁 생활에 적응했다.
백왕궁 가이라크의 내부 공사 역시 급한 대로 숙소부터 먼저 건축한 덕에 더 이상 천막생활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아직 여기저기 미완공된 부분이 남아 있지만 왕궁으로서의 기본적인 기능은 갖추게 된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러스와 타시드도 병상을 털고 일어났다.
"자, 갑니다! 형님!"
백왕궁 서쪽에 마련된 거대한 연무대, 그곳에서 레펜하르트와 러스가 오러를 끌어 올린 채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옆에선 타시드가 참마도, 다카르를 든 채 둘의 대결을 유심히 바라보는 중이었다.
늦여름이지만 장마철이라 그런지 날씨가 꽤 선선했다. 두 사람의 머리 위로 흐릿한 회색 구름이 서서히 흘러갔다.
레펜하르트가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대꾸했다.
"좋아, 준비됐다! 덤벼 봐!"
며칠째 누워 있다 겨우 완치된 러스와 타시드는 우선 근질근질한 몸부터 풀었다.
이미 백왕성에서 오러 유저의 '난동'을 뼈저리게 겪은 카를이다. 그래서 가이라크에 마련된 이 '오러 유저 전용 연무대'는 그들의 위력을 정확히 계산해 온갖 마법 결계와 아티팩트로 충격 흡수가 가능하도록 만든 곳이었다. 덕분에 여기서는 마음껏 날뛰어도 틸라에게 구박받을 일이 전혀 없었다.
뭐, 그 대신 카를이 바가지를 좀 긁히긴 했지만.
-아직 개간할 데 많이 남았는데! 카를 미워요!
솔직히 카를 입장에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개간한답시고 오러 유저 전부 수도 비웠다가 그 타이밍에 적이라도 쳐들어오면 어쩌란 말인가? 되도록 아라난 그라드에 오러 유저들을 상주시켜야 급습에 대비할 수 있는 것이다.
"반월참! 잔월!"
러스가 길게 횡으로 베어 가며 블레이드 오러를 뿌렸다. 반달 형태의 오러 참격이 뿌려지며 허공에 머물러 레펜하르트의 사방을 점유한다.
푸른 블레이드 오러를 내리그으며 러스가 기술을 완성했다.
"굉천월광!"
할라인 왕국의 오러 유저 카메룬 경의 고유 오러 스킬, 굉천월광이 완벽하게 그의 손에서 재현되었다. 푸르른 섬광이 레펜하르트를 직격했다. 그가 두 팔을 앞으로 모으며 방어 형태를 취했다.
"스파이럴 가드!"
콰콰쾅!
폭음이 울리고 흙먼지가 피었다. 스파이럴 가드를 펼쳤음에도 레펜하르트의 거구가 뒤로 10여 미터 이상 밀려났다.
잠시 후, 레펜하르트가 팔을 털며 흡족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거, 기간틱 블레이드보다 더 센데? 완전히 네 것으로 만들었군, 러스."
"그래도 형님의 스파이럴 가드는 못 뚫네요. 아직 갈 길이 멀어요."
겸손을 떨면서도 러스의 얼굴에는 싱글벙글 웃음기가 돌고 있었다.
몸이 낫자마자 러스는 타시드와 함께 연무대로 달려가 새로 '훔친' 기술 터득에 열정을 불살랐다.
이번 사태로 건진 오러 스킬이 대체 몇 개던가?
검성 바나텔의 오러 스킬이야 있으나 마나 하니 제외하더라도, 열 종류나 되는 새로운 오러 스킬을 대거 입수한 것이다. 열심히 베껴다 자기 스타일에 맞게 변환하고 타시드에게도 가르쳐 주는 등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원 주인이 보면 땅을 치고 통곡할 일이었다.
그리고, 러스는 새로 얻은 기술 외에 원래 있는 기술을 심화시키는 것 역시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럼 형님, 이번엔 조심하시길. 이건 피할 수 없는 공격입니다."
"대비하고 있어. 해 봐."
"좌측 허벅지로 가겠습니다!"
미리 공격 위치까지 알려 준 뒤, 러스가 검을 들고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제자리에서 길게 횡 베기를 날렸다.
"허공검, 호라이즌!"
푸른 블레이드 오러가 번쩍이며 이내 사라진다. 동시에 레펜하르트의 왼쪽 허벅지 위에서 섬광이 뿜어 나왔다.
파앗!
레펜하르트의 바지가 찢어졌다. 하지만 피가 튀지는 않았다.
러스가 혀를 찼다.
"역시, 맞힐 순 있는데 형님의 육체를 벨 수는 없군요."
타시드도 옆에서 보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으음, 대단한 기술이긴 한데 위력이 너무...."
러스의 허공검은 확실히 팬텀 블레이드 이상의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참격을 연속으로 날리고 그 도중 오러의 위치를 바꾸는 수준을 벗어나 아예 허공을 뛰어넘어 그 자리에만 오러를 적중시키는 공격이다. 오러 유저의 상식을 초월하는, 기적이라 칭해도 좋은 엄청난 기술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있었다.
공간을 뛰어넘는 데 너무 많은 힘을 소모해 참격의 위력 자체는 기본적인 블레이드 오러 수준을 넘지 못했던 것이다. 일반인이나 평범한 오러 유저 정도라면 충분히 통하겠지만 레펜하르트 정도의 강자에게는 먹히지 않는다.
레펜하르트가 허벅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래도 대단한 기술이 아닌가? 이젠 오러양만 높이면 되는 문제잖아?"
"기량이란 게 그렇게 쉽게 오르는 게 아니니까 문제지요."
러스가 한숨을 쉬었다.
레펜하르트 말고도 러스는 이니야며 아틸카, 칼켄 등 백국의 최강자들을 상대로 허공검 수행을 위한 대련을 요청했다.
아틸카 상대로는 꽤 잘 먹혔다. 실란의 치유 능력을 믿고 독하게 손을 쓴 공격이어서, 시작하자마자 그의 왼팔에 꽤나 깊은 상처를 낼 수 있었다.
그래, 분명 먹히긴 먹혔다.
-오, 놀라운 기술이군!
감탄과 동시에 아틸카가 바로 상처를 재생해 버린 것이다.
아틸카쯤 되면 목이 잘려도 주워서 도로 붙이면 아무는 수준이다. 그러니 상처에 잔존 오러를 남겨 재생력을 방해해야 하는데, 허공검의 위력으로는 도저히 치명상을 줄 수가 없었다. 결국 흠씬 두들겨 맞았다.
이니야와 칼켄에게는 그래도 처음에는 먹혔다. 아무리 강력한 오러 가드를 펼쳐도 러스의 허공검은 공간을 넘고 근육 안쪽의 장기만을 공격할 수 있었다. 일격에 두 사람의 폐를 압박해 숨을 캑캑대게 할 수 있었다.
이니야도 칼켄도 아낌없는 칭찬을 퍼부었다.
-대단해요! 달인의 기술이에요!
-훌륭하다! 카루가 러스! 상상도 못 해 본 공격이었다!
그런데 두 번은 안 통했다.
-다 좋은데, 자세가 너무 노골적이지 않나요?
-그 허공검이란 거, 시작 전에 나 뭔가 날린다라는 티를 너무 내는데? 알고 있는 사람이면 얌전히 맞아 줄 리가 없겠어.
한번 견식하고 나니 두 사람 다 허공검을 쓸 틈 자체를 주지 않았다. 결국 또 작신작신 두들겨 맞았다.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저었다.
"기습이면 모를까, 실전에서 쓰기엔 아직 좀 일러 보인다. 두 사람 말이 맞아. 이니야의 앱솔루트 스피어나 칼켄의 날벼락 떨구기처럼, 뭔지는 몰라도 위험한 기술이라는 경각심은 확실히 느껴지거든? 생사를 건 싸움에서 오러 유저라면 누구나 그 기술을 발동하기 전에 가로막으려 들 거다."
러스도 납득하는 표정이었다. 유서스는 오러 유저가 아니라서 잘도 먹혀 줬지만 아직 실전에서 쓰기엔 미숙한 점이 많은 것이다. 결국 다른 사람의 '궁극기'처럼 그걸 발동하기 위한 기량 자체를 갖추고 있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그래도 이게 아니면...."
검을 쥐며 러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아직도 검성 바나텔의 힘을 기억하고 있었다.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던 그 절대적인 패배감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그 검성 바나텔에게 유일하게 통용되었던 것이 이 허공검이었다. 이게 아니면, 그 악몽 같은 괴물을 이길 방법이 없다!
고민하는 러스를 보며 레펜하르트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그 허공검으로 왜 블레이드 오러만 공간 점프를 시키는 거야? 실검으로 공간을 뛰어넘으면 안 되나?"
러스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러가 아니라 실검을요? 맙소사, 그건 진짜 신의 영역 아닙니까?"
에너지체인 오러를 이용해 공간을 뛰어넘는 것만 해도 현재의 상식을 초월한 기적이다. 이니야의 물질 변환도 오러를 물질화시켜 안개나 영수로 만드는 것이지, 물질을 다른 물질로 변환시키지는 못한다.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이니야는 진짜 신이 될 수도 있겠지. 돌을 빵으로 만들고 납을 황금으로 만드는, 진정한 신의 영역.
"에너지체인 오러를 공간 이동시키는 거랑, 물질인 실검을 공간 이동시키는 것은 완전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게 가능할 리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는 러스를 보며 레펜하르트가 어깨를 으쓱였다.
"애당초 오러를 공간 이동 시키는 것도 말도 안 되는 짓 아닌가? 그런데 왜 그건 가능하고 이건 불가능하다는 거지?"
"아...?"
뭔가 깨달았다는 표정으로 러스가 멍한 얼굴을 했다. 그걸 보며 레펜하르트가 속으로 웃었다.
'황당해할 것 없다, 러스. 네 녀석은 분명 미래에 그 경지에 다다를 테니까.'
전생의 검성, 사이러스의 허공검은 공간을 다룰 수 있었다.
단순히 에너지체인 오러를 공간 이동시키는 수준을 벗어나, 분명 물질인 실검으로 공간을 벨 수 있었다!
검성 사이러스의 가장 무서운 점은 저것이었다. 실존하는 질료가 공간을 넘는다는 것은 에너지체인 오러의 공간 이동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실검이 공간을 넘는 순간, 그는 공간 자체를 절단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어떤 마법도, 궁극의 물질도 공간 그 자체를 갈라 버리는 사이러스의 허공검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가장 단단하다는 진금 엘드릴, 짐 언브레이커블의 육체, 심지어 마왕 레펜하르트의 다중 마법 장벽마저도 저 검은 막을 수 없었다.
위력 따위는 의미가 없었다. 일단 스치면 무조건 베이는 무적의 참격이었다.
전생을 떠올리며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부르르 떨었다.
'떠올려 보니 새삼 그 악랄함에 치가 떨리는군. 그나마 사방 몇 미터의 협소한 영역에서만 가능해서 상대할 수 있었지....'
그래서 레펜하르트도 절대 사이러스의 반경 10미터 이내로 들어가지 않으려 노력하며 그를 상대했다. 일단 영역 안에 들어서면 무조건 존재 자체가 잘려 버리니까.
과거를 떠올리며 레펜하르트는 러스를 훔쳐보았다. 그는 여전히 뭔가를 궁리하며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 이걸 가르쳐 줬다고 당장 러스가 과거의 경지에 들어서지는 못하겠지. 하지만 화두가 던져졌으니 언젠가 그의 속에서 화려하게 개화하리라.
'그것도 전생 때보다 좀 더 빨리.'
자리를 떠나며 레펜하르트가 러스를 격려했다.
"그럼, 고민 좀 해 보라고."
한참 후에야, 러스가 한숨을 푹 쉬었다.
"아, 모르겠다. 뭔가 감이 온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말 몇 마디 들었다고 갑자기 눈앞에 깨달음이 펼쳐질 만큼 저 경지는 얕지 않은 것이다. 결국 포기하고 러스는 타시드에게 눈짓을 했다.
"야, 한판 더 붙자."
타시드가 흥분한 얼굴로 참마도를 든 채 다가왔다.
"러스! 그거 진짜 신기하다! 나도 한번 맛보자!"
"오냐...."
순진무구한 친우의 눈망울을 보며 러스가 사악하게 웃었다.
안 그래도 기껏 터득한 기술 너무 안 먹혀서 이래저래 자신감이 없어진 터였다. 타시드나 패면서 자신감 좀 되찾아야겠다!
"허공검, 호라이즌!"
역시, 타시드는 아무런 반항도 못하고 이내 두들겨 맞았다.
"캑!"
절삭력을 빼고 휘두르는 거라 그냥 몽둥이나 다름없는 블레이드 오러였다. 하지만 몽둥이도 맞으면 아픈 건 똑같다.
퍽! 퍽! 퍼버버벅!
신 나게 달려든 타시드의 표정이 구겨지는 데는 채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캑! 크억! 뭐 이런 게 다 있나?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잖아!"
'미안하네, 친구. 나도 새 기술 익힌 보람 좀 느껴 보세.'
그저 만만한 것이 타시드라, 러스는 계속 허공검을 날리며 타시드를 두들겨 댔다. 그래도 타시드를 패고 있으니 좀 위안이 되었다.
그러던 중인데....
"으랏차!"
"어?"
타시드가 러스의 허공검을 도중에 막아 냈다. 참격을 날려 그 부분을 노린 바로 그 순간, 몸을 틀며 도로 튕겨 낸 것이다.
황당해하며 러스가 계속 허공검을 날렸다. 그런데, 어째 점점 타시드가 공격을 막아내는 횟수가 많아진다?
"얍! 얍! 으랏차! 어, 이거 재밌네?"
전혀 기척이 없는 러스의 허공검이 점점 더 타시드의 참마도에 가로막혔다.
황당한 일이었다. 허공검 자체는 전혀 궤도를 예측할 수가 없다. 레펜하르트며 칼켄, 심지어는 기교파인 아틸카나 이니야조차도 허공검의 발동 자체를 가로막았을 뿐, 일단 날린 허공검을 막을 순 없었다.
'그런데 저놈은 이걸 왜 막는 거야?'
당황한 러스가 검을 거두고 물었다.
"야... 너 어떻게 막았냐? 혹시 나한테 무슨 버릇 같은 거라도 있어?"
타시드가 맹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냥...."
"그냥 뭐?"
타시드가 옆구리를 가리켰다. 방금 러스가 허공검을 날린, 그리고 타시드가 공격을 가로막았던 위치다.
"그냥 여기를 때릴 것 같더라고."
"그걸 어떻게 눈치챈 건데?"
타시드가 맹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에... 감으로?"
☆ ☆ ☆
퍼틴 고원의 깊은 산속, 아스티노플 공작 별장의 뒷산.
"빛나라, 파천破天의 성광, 아케인 블래스터!"
낭랑한 외침과 함께 찬란한 빛이 하늘로 솟구쳤다. 솟구친 섬광이 구름층을 뚫고 넓게 파문을 생성했다. 구름이 둥글게 밀려가며 사이로 햇살이 비쳤다.
"후후후...."
허공에 뻗은 손을 거두며 흑발의 사내, 테스론이 웃었다. 아름다운 얼굴 위로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옆에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적금발의 여인, 필레나가 기뻐하며 손뼉을 쳤다.
"굉장해! 테스론! 결국 8서클의 벽을 넘었구나!"
얼마나 감격했는지 필레나는 눈가에 눈물마저 맺혀 있었다.
현재 테스론의 나이는 20대 중반, 인류 역사를 통틀어 저 나이에 8서클에 들어선 마법사는 한 명도 없다. 그녀의 소꿉친구는 드디어 당당한 대마법사가 된 것이다!
"역시 테스론이야... 오러 유저이면서 대마법사의 경지에까지 오르다니...."
몽롱한 얼굴로 필레나는 테스론에게 경외의 시선을 보냈다. 테스론이 어깨를 들썩이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뭐, 별거 아니지. 이 정도는."
이는 테스론 자신의 재능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마왕의 육체 덕분에 이룩한 경지다. 딱히 자랑스러울 일도 없는 것이다.
필레나의 얼굴이 더더욱 발그레해졌다. 세상에, 대마법사가 되고도 저토록 겸손하다니? 역시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답다.
"나, 나도 더 열심히 노력해야지!"
주먹을 꼭 쥐며 필레나는 다짐했다.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고도 흥분하지 않고 차분하게 주위를 둘러보는 모습은 같은 마법사로서 본받을 가치가 있었다.
테스론이 하늘을 살피며 방금 날린 아케인 블래스터의 각도와 위력을 점검한 뒤, 손을 털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너도 많이 늘었어, 필레나. 벌써 7서클 중반에는 다다른 것 같은데?"
필레나가 부끄러운 듯 몸을 꼬았다.
"다 테스론 덕이지, 뭐. 아직 멀었어."
"흐음."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테스론은 필레나를 훑어보았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동경과 애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헐렁한 로브로 감춰져 있지만 그럼에도 부드러운 몸매가 제법 드러났다.
문득 욕구가 느껴졌다.
'으음, 그러고 보니 이 시간대로 돌아온 이후 여자를 안아 보지 못했군.'
필레나의 나이는 현재 20대 후반, 10대 소녀다운 풋풋함은 없지만 한창 여인으로서 무르익을 나이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애가 워낙 순진하다 보니 나이에 안 맞게 풋풋한 느낌도 꽤 든다. 얼굴도 절세 미녀라 할 정도는 아니지만 분명 애교 있는 인상이다.
"너, 예쁘구나, 필레나."
뜬금없는 테스론의 발언에 필레나가 놀라 눈을 뜬다.
"테스론? 지금 무슨 말을...."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테스론이 필레나의 얼굴을 요목조목 살폈다.
'슬슬 덮칠까? 몸도 이 정도면 뭐....'
예전에야 육체가 워낙 부실했으니 양심상(?) 필레나를 내버려 두었다. 짐 언브레이커블은 '식스 팩 없는 자, 여인 앞에서 감히 옷을 벗지 마라!'라는 오만방자한 사상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여인을 안기에 충분한 자격이 있는 몸이 되었다. 두께야 당연히 예전과 비교가 안 되지만 그래도 탄탄한 몸매만큼은 어디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수준이다.
'좋아, 그럼 어디....'
테스론이 히죽 웃으며 필레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필레나가 흠칫 놀라더니 이내 몸을 움츠리며 테스론의 눈치를 보았다.
"테, 테스론?"
"가만있어."
진지하게 말하며 테스론이 필레나에게 얼굴을 가까이 했다.
필레나의 얼굴이 더더욱 빨개졌다. 쿡 찌르면 붉은 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다. 심장이 미칠 듯이 요동을 쳤다.
'어, 어머나... 혹시 키스하려고?'
하늘은 파랗고 공기는 맑았고 햇살은 곱게 내리쬐어 보석처럼 반짝반짝 부서지고 있었다.
첫 키스를 하기에 충분히 로맨틱한 분위기였다. 아케인 블래스터로 주변 대기를 싹 날린 덕에 생긴 현상이지만, 어쨌거나 날씨 자체는 분명 좋았다.
두근두근하며 필레나가 눈을 감았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달뜬 숨이 흘러나왔다.
"아...."
하지만 필레나가 현재 테스론의 속생각을 읽었더라면 아마도 기겁했을 것이다. 테스론은 그저 키스로 끝내려는 게 아니라, 그걸 시작으로 삼으려는 수작이었으니까.
이 짐승 같은 인간은 벌건 대낮에, 사방 훤히 뚫린 데서 대놓고 '어른의 유희'를 저지를 셈이었던 것이다!
아무리 짐 언브레이커블, 남들보다 반밖에 옷 안 입고 사는 무문이라지만 과한 면이 없지 않다. 하지만 어차피 이 주위엔 그들 말고는 아무도 없고 크리스틴은 몇백 미터 떨어진 곳에서 따로 수련 중이었다. 볼 사람 아무도 없는데 뭔 상관이겠냐는 것이 테스론의 지론이었다.
그렇다 해도 처녀를 앞에 두고 그 자리에서 끝까지 가려 하다니, 그야말로 마초를 넘어 금수禽獸의 길이라 하겠다.
그렇게 필레나는 두근두근하며 키스를 기다리고....
'테스론....'
테스론은 어깨를 잡은 자세 그대로 껍질을 홀랑 벗기려는 차였다.
'어라?'
그의 손이 갑자기 멈췄다. 막 시식(?)하려는데 갑자기 그의 육체가 의지와 달리 그녀의 옷깃을 잘 보듬어 준 것이다.
'내가 왜 이러지?'
가슴 한구석이 저릿저릿하며 왠지 기분이 싱숭생숭하다. 평생 처음 느껴 보는 기분이었다.
테스론은 당황했다.
'너무 오래 굶어서 이런가?'
원래 전생의 테스론은 금욕과 거리가 먼, 속된 말로 '땡기면 일단 풀고 보는' 타입이었다. 물론 더러운 강간범처럼 길가는 여자 아무나 붙잡고 덮쳤다는 소리가 아니라 사창가 같은 곳을 이용했단 소리다.
그리고, 굳이 사창가 창녀들이 아니더라도 테스론은 여자에 궁한 적이 별로 없었다.
강력한 오러 유저이면서 육체 또한 굴강했던 그는 귀족가 유부녀들의 불륜 선호 대상 제 1위였다. 닳고 닳은 귀족가 부인들은 그가 지나갈 때마다 눈웃음을 쳤고 테스론도 대흉근을 씰룩거려 답했다. 뭔가 상상해 보면 참 엽기적인 광경이겠다만, 본인은 그게 뭐가 이상한지 전혀 못 느꼈으니 별문제는 없었다.
그렇게 그는 마음껏 여자를 후리며 평생을 살았다. 사랑이니 애정이니 하는 것은 한 여자밖에 못 건지는 약해 빠진 것들이 자기 위안할 때나 하는 단어라 여겼다.
딱히 테스론이 천성이 못 되어서라기보다는, 원래 짐 언브레이커블은 전통적으로 저런 분위기였다. 이래서 가정교육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필레나의 표정은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테스론이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저 표정을 본 순간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더 손이 나아가지 않는다.
'뭐야? 왜 이러는 거야, 내가?'
극도로 당황하며 테스론은 애써 숨을 골랐다. 그리고 필레나의 뺨에 살짝 키스했다.
그녀가 눈을 뜨더니 배시시 웃었다.
"어머, 테스론."
우아한 미소를 잘생긴 얼굴 위로 띄우며 테스론이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필레나, 넌 정말 많은 도움이 되고 있어. 고맙다."
별로 의식하지도 않았는데 왠지 호구 같은 말투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러니까, 세상 기준으로는 신사다운 말투란 소리다.
필레나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으, 으응."
한 번 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뒤 테스론은 등을 돌렸다. 연무장을 벗어나 저택으로 내려가기 위해서였다. 필레나가 허겁지겁 뒤를 따랐다.
"가, 같이 가! 테스론!"
걸음을 옮기며 테스론이 그녀 몰래 바드득 이를 갈았다.
'마왕, 이 자식!'
이 육체는 마왕의 것, 그렇다면 이 문제 또한 마왕의 것일 터다.
'불능이었나!'
☆ ☆ ☆
"오해다!"
자신의 집무실 의자에서 잠시 졸고 있던 레펜하르트가 버럭 소리치며 눈을 떴다.
막 안으로 들어서던 시리스며 러스, 실란과 타시드가 어리둥절해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세요, 레펜하르트 님?"
"뭐예요, 레펜 씨?"
"괜찮으십니까, 형님?"
"은인이여?"
현재 그들은 가이라크 중앙궁, 레펜하르트의 집무실에 모여 있었다. 시급하게 가야 할 곳이 있다며 레펜하르트가 그들을 불러 모은 것이다.
그래서 기껏 집무실에 들어섰더니, 얌전히 졸고 있던 레펜하르트가 뜬금없이 저런 괴상한 소리를 외쳐 댄다.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레펜하르트가 멍하니 눈을 껌뻑였다.
"어... 뭔가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무슨 꿈이었는데요?"
실란의 질문에 레펜하르트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몰라, 기억은 안 나. 그런데 굉장히 용납해서는 안 될 오해를 산 기분이...."
"기억 안 나는 거 보니 개꿈이겠네요."
단언하는 시리스를 보며 레펜하르트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것치곤 기분이 좀...."
러스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화제를 바꿨다.
"그나저나 형님, 우릴 찾으셨다고 들었는데, 무슨 일입니까?"
정신이 든 레펜하르트가 자세를 바로 했다. 진지한 표정으로 그가 네 사람을 보며 말했다.
"가야 할 곳이 있어."
실란이 표정을 읽고 마저 듣기도 전에 말했다.
"표정을 보니, 던전인가 보네요?"
그동안 함께 다닌 던전이 워낙 많다 보니 그냥 분위기만으로도 용건을 짐작해버린다.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꼭 찾아야 할 것이 있거든. 그런데 마켈린은?"
"연락했으니 곧 올 겁니다. 그런데 실란도 있는데 굳이 마켈린 공을 불러야 합니까? 그분 요새 엄청 바쁘시던데...."
대답하며 러스가 혀를 찼다.
요새 백왕궁 가이라크에서 가장 한가한 사람을 뽑으라면 아마도 러스일 것이다. 카를은 물론이고 시리스며 타시드, 아틸카, 마켈린 등 대부분의 이종족 수장들은 때 아닌 이른 천도의 후유증에 몸살을 앓고 있었다.
아무리 안정이 되었다 해도 일국의 수도를 옮기는 일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차분히 공사를 완공하며 점진적으로 수도를 옮겨야 하는데, 갑자기 백왕성이 날아가 버려 급히 이사를 하게 되었으니 일이 적을 리가 없었다.
다들 관련된 동족의 일을 처리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심지어는 실란도 새로운 필라넨스 신전의 대주교 일을 보느라, 요즘은 그곳에서 살고 있어 얼굴 보기 힘들었다.
그래서 레펜하르트가 불렀을 때 러스는 화색이 되어 달려왔다. 몸은 근질근질한데 놀아 줄 사람 하나 없어 심심해하던 참이었으니까.
"어지간한 일이면 실란 혼자서도 충분히 감당될 것 같은데...."
요즘 들어 점점 녹초가 되어 가는 마켈린을 떠올리며 러스가 혼잣말을 했다. 실란이 쌍심지를 켰다.
"나도 나름 할 일 많거든요?"
"아니, 실란 네가 놀고 있다는 소리는 아니고...."
쩔쩔매는 러스를 향해 실란이 눈을 흘겼다. 참 '사내'와는 거리가 먼 모습이어서 레펜하르트는 헛웃음을 흘렸다.
'아니, 쟤는 그토록 남자다워지게 근육 훈련을 시키고 있는데 왜 아직도 저런 모습인 거야?'
분명 근육이 붙긴 붙었다. 키도 많이 컸다. 이젠 적어도 예전처럼 어린 소녀로는 절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사내답냐 하면 그것도 좀 애매한 것이....
'어째 애가 점점 색기가 도는 것 같기도 하고....'
뭐랄까, 분명 여자다운 면은 많이 벗어났는데... 그런데도 묘하게 중성적인 느낌인 것이다. 참 저걸 뭐라 해야 할지....
어쨌건 지금 중요한 용건은 실란의 색기가 아니다. 정신을 차리고 레펜하르트가 본론으로 돌아왔다.
"이번엔 실란과 마켈린, 둘 다 필요해. 그런 던전이라서 말이야."
막 설명을 이으려 할 때였다. 갑자기 시리스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레펜하르트 님."
"응?"
"전 빼 주시면 안 될까요?"
조용한 목소리, 하지만 단호한 의지가 깃든 목소리였다. 당황하며 레펜하르트는 시리스를 올려다보았다.
"왜, 왜 그래, 시리스?"
"그냥... 혼자서 좀 생각할 것이 있어서요."
레펜하르트는 눈을 껌뻑였다. 그러고 보면 요새 들어 시리스의 분위기가 좀 이상하긴 했다. 왠지 말수도 적어진 것 같고 표정도 가끔 수심이 얼핏 비쳤다. 안 그래도 무슨 일 있냐고 물어볼까 고민도 했었다.
하지만 딱히 사람들과 거리를 두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일도 충실히 하고 있어, 뭐가 문제라고 딱 꼬집어 낼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냥 기분 탓이라고만 여겼는데....
시리스가 차분한 얼굴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아니더라도 이니야 씨가 있잖아요."
"그건 곤란한데. 정령술이 필요한 문제라서 말이야."
"이니야 씨의 정령술로는 안 되는 건가요?"
"아니, 그건 아니지만...."
레펜하르트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상하다, 얘가 왜 저러지?'
"그럼, 이번에는 전 좀 빼 주세요."
시리스가 다소곳하게 고개를 숙였다. 혹시 자신에게 화가 났나 싶어 표정을 살펴보았지만, 온화하고 차분한 것이 그런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무슨 일 있니, 시리스?"
시리스가 살짝 미소 지으며 손을 저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일이 바빠서 자리 비우기가 좀 그래요."
목례한 뒤 시리스가 집무실에서 물러났다.
"이니야 씨를 불러올게요. 죄송해요."
"아, 그래."
떠나가는 시리스를 보며 레펜하르트는 뺨을 긁었다.
'흐음....'
확실히 지금의 시리스는 바빴다. 엘븐 포레스트에 구출한 엘프들을 안주시키는 한편, 엘프 부족을 아라난 그라드로 이주시키며 다른 종족과 중재하는 것도 그녀의 역할이었다.
반면, 이니야는 여전히 놀고 있었다!
유능한 부관, 세르펠에게 족장 업무도 몽땅 맡기고 허구한 날 가이라크 주위를 맴돈다. 그러다가 레펜하르트가 조금만 한가해 보인다 싶으면 귀신같이 나타나 마사지니 안마니 대련이니 요리니 온갖 것을 들고 와 '고마움의 표시'를 하는데, 솔직히 레펜하르트도 슬슬 좀 과한 것 같다며 의심을 하는 처지였다.
생각해 보면 굳이 노는 이니야 놔두고 바쁜 시리스를 데리고 갈 이유가 없다.
그런데도 레펜하르트가 그녀를 부른 것은 그냥 전생의 습관 때문이었다. 전생 때 던전 탐사는 항상 시리스, 타시드와 함께 했었다. 그렇다 보니 현생에도 무심코 던전 갈 일 있으면 저들부터 부르게 된다.
'하지만 시리스 입장에서는 자기에게만 자꾸 일 떠맡기는 걸로 느껴질 법도 했겠군.'
가슴을 쓸어내리며 레펜하르트는 앞으로는 시리스도 적당히 풀어 줘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다 문득 타시드를 바라보았다. 그 역시 시리스와 같은 처지다.
"아, 타시드. 그러고 보니 자네도 가기 힘들겠군?"
"아니오! 가겠소! 꼭 데려가 주시오!"
타시드가 울부짖었다.
"응? 남은 일은? 자네 쪽은 일이 별로 없나?"
오크 쪽 관리하는 것도 꽤 업무량이 많을 텐데? 의아해하는 레펜하르트를 보며 타시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일단 자리 비우면 카를이 알아서 다 해 준단 말이오!"
순간 그 자리의 모든 사람이 한 가지 생각을 공유했다.
'불쌍한 카를....'
지금도 업무에 치여 사는데, 한 종족의 대표라는 놈이 업무 덜어 줄 생각은 못 할망정 저따위 소리나 하고 있다니?
하지만 타시드도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솔직히 나보다 훨씬 잘 처리하던데 왜 굳이 내가...."
오크치고는 상당히 유식하지만, 그래 봤자 타시드는 오크였다.
인간 밑에서 기본적인 개념을 배웠기에 그럭저럭 행정 일을 맡을 순 있었지만 그래도 한계가 있었다. 대부분의 일은 카를과 행정관이 다 하고 타시드는 그냥 도장 찍고 오크들에게 선포하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그마저도 충분히 벅찼다. 그냥 카를이 전담해 버리는 것이 업무 효율은 몇십 배나 좋은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오크 일을 인간에게 전담시킬 수는 없잖냐? 네가 일 생겼을 때 임시로 맡는 것이야 문제가 없지만."
"그건 이해하고 있지만...."
타시드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그러던 중이었다. 문 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이내 벌컥 문이 열리더니 얼굴 가득 화색을 띤 보랏빛 머리의 엘프가 집무실로 난입했다.
"어머나! 레펜하르트 님! 제가 필요하시다면서요? 뭐든 시켜 주세요!"
허겁지겁 달려왔는지 그 풍만한 가슴이 호흡에 맞춰 보기 좋게 흔들리고 있었다. 레펜하르트가 살짝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그도 어쩔 수 없는 남자였다.
"아, 예...."
잠시 후, 마켈린도 집무실로 들어섰다.
"저 찾으셨습니까, 레펜하르트 님?"
모든 멤버가 모이자 레펜하르트가 입을 열었다.
"사방신의 유물을 찾으러 가야겠습니다."
원래는 8서클 이상의 마법이 있어야 갈 수 있는 곳, 하지만 아직 레펜하르트는 7서클 후반에 머무르고 있다.
"그런 이유로, 여러분 모두의 힘이 필요합니다."
5
집무실을 떠난 시리스는 자신의 거주지, 청월궁으로 돌아왔다.
백왕궁 가이라크를 세우며 레펜하르트는 통 크게 청월궁 하나를 통째로 시리스에게 떼어 주었다. 수십 개의 침실과 거실, 집무실이며 각종 용도의 방이 들어 있는 화려한 궁이었다. 궁은 고사하고 그냥 손님 방 하나 내준 이니야와 비교하면 확실히 차이가 보이는 대우였다.
딱히 이니야를 푸대접한다는 소린 아니다. 시리스는 엘프 전체를 관리해야 하는 만큼 이 정도 공간은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 해도 레펜하르트가 시리스를 아낀다는 사실만큼은 틀림없었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시리스가 문을 걸어 잠갔다.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아...."
그래, 그의 사랑은 분명 크다.
그의 헌신은 결코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그런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었다.
시리스가 옷장에서 커다란 나뭇가지 하나를 꺼냈다. 세계수 니힐렌의 정이 깃든 가지였다.
원래는 시리스가 주인인 마법의 활이었던 세계수 니힐렌, 하지만 여전히 그 안에는 그녀가 주인으로 각인된 니힐렌의 코어 부분이 남아 있다. 그 코어 일부를 떼어 시리스는 계속 니힐렌과의 계약을 유지하며 정령술을 익히고 있었다.
두 번째 세계수 제룬팅이 싹이 트고 나서 시리스의 정령술 수준은 더더욱 높아졌다. 이대로라면 무난히, 그녀는 옛날 엘프의 전설 속에 나오는 위대한 대정령사의 경지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모자라.'
언젠가는 레펜하르트 말대로 최강의 엘프, 광기의 발렌시아가 될지도 모른다. 정령술과 마법, 검술에 모두 정통해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는 너무 늦다. 이미 레펜하르트는 대륙 전체를 상대하고 있었다. 전생 때보다 20년 가까이 이른 시기다. 여기서 20년을 더 기다릴 수는 없다.
시리스가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강해져야 해...."
이니야는 물론, 다른 이들의 힘 역시 감히 그녀가 따라갈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나마 비슷한 수준이었던 타시드도 오러를 각성하며 어느새 그녀를 훌쩍 뛰어넘어 초인이 되어 버렸다.
도대체 정령술만으로 어떻게 저 경지에 이를 수 있는지 짐작이 가질 않았다. 그래서 슬그머니 레펜하르트에게 묻기도 했다.
-엘프는 정령술이 있어 오러 각성에 관심이 그리 없다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나요? 아무리 정령술을 갈고닦아도 오러의 힘을 따라갈 수는 없어 보이는데?
레펜하르트는 대답했다.
-7대 정령을 모두 사용하게 되면, 새로운 정령술의 경지가 열리게 되거든.
시리스가 쥐고 있던 니힐렌의 가지에서 희미한 빛이 떠올랐다. 그녀가 중얼거렸다.
"지, 수, 화, 풍, 명, 암, 뢰...."
세계수를 지탱하고 세상의 흐름을 제어하는 일곱 가지 속성의 정령력. 전생의 그녀는 이 모든 것을 익혀 오러 유저를 능가하는 힘을 손에 얻었다고 했다.
일곱 세계수로부터 흘러나오는 일곱 정령력.
모든 조화의 근원이 되는 이 일곱 속성은 합일하면 종국에는 하나의 속성으로 화한다. 저 모든 변화를 감당해 내는 하나의 속성은 생명력, 일곱 정령력이 융합해 하나가 되니 그것은 결국 거대한 생명의 기운이 된다.
바로 생명기, 오러다.
이것이 옛날 엘프들이 오러 각성에 관심이 없는 이유였다. 죽어라 없는 체력 탈진해 가며 수행을 쌓아 오러를 각성하지 않아도, 정령술이 궁극에 달하면 오러와 동일한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니힐렌의 가지를 든 채 시리스가 굳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일곱 정령력을 합일하면, 오러의 힘을 얻게 된다."
결국 정령 융합을 이용해 전생의 시리스는 오러를 쓸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뭐, 오러와는 좀 달라 따로 엘리멘트란 명칭으로 불렸다고 했는데 어쨌건 지금의 시리스가 듣기엔 그냥 오러였다.
하지만 그 힘은 결코 안정된 것이 아니었다. 설명을 해 주면서도 레펜하르트는 저 정령융합을 크게 경계했다.
-옛날과 달리 지금의 세계수는 하나로 통일되어 있지 않아. 전생 때도 그랬지. 일곱 세계수를 세우고 연동해서 비슷한 효과를 냈을 뿐이야. 그렇다 보니 진짜 세계수 엘븐하임만큼 속성의 통일성이 보장되지 않았다.
근원이 되는 세계수가 통일되어 있지 않다 보니 정령 융합 엘리멘트의 힘도 안정화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전생의 시리스는 상당히 감정적으로 문제가 있었다고 했다.
'평소에는 멀쩡하지만 전투만 돌입하면 피와 살육에 미친 광전사가 되었다던가?'
당시 인간들이 괜히 시리스를 광기의 발렌시아라 부르며 두려워한 것이 아니었다. 그나마 평소에 멀쩡했던 것도 높은 마법의 경지, 그리고 오랜 시간 차근차근 여유를 두고 융합을 시도해 간신히 이성을 유지한 덕이었다.
-그러니까 시리스, 지금은 절대 정령 융합은 생각도 하지 마. 알겠지? 일단 세계수 다 심고 나면 저절로 될 테니까.
레펜하르트의 당부를 떠올리며 시리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죄송해요, 레펜하르트 님.'
그의 당부는 알고 있었지만, 시간이 없었다.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강해져야 했다. 그래야 그의 곁에 당당히 설 수 있다!
붉은 입술 사이로 낭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불의 이그나시스, 물의 로시아, 바람의 사라나, 대지의 테라투스...."
저마다 급이 다른 정령이 제각기 기운을 형성하며 현세에 소환된다.
"빛의 리디, 어둠의 샤이드, 우레의 우다르 묠니르...."
시리스의 침실 가득, 정령의 형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 ☆ ☆
같은 시각, 아스티노플 공작 별장.
테스론은 테이블에 앉아 필레나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제 대마법사가 되었잖아, 테스론? 그럼 다시 권왕을 해치우러 가는 거야?"
다중 복제의 지팡이를 매만지며 필레나가 눈을 빛냈다. 테스론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직은 때가 아니다. 이쪽 전력이 너무 약화되었어."
"그건 그렇네, 스테반 경도 잃었고 유서스 경도 없고...."
테네스 백작가로 돌아간 유서스는 아직도 요양 중이었다.
비록 두 다리가 잘렸지만 그의 부상은 테스론에 비하면 상당히 가벼운 편이었다. 그래서 리커버리 캡슐에 보름 정도 신세를 지는 것만으로 다시 두 발을 재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유서스 본인이 아직 새로 생긴 두 발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경계가 연결되려면 아직도 시간이 한참 필요해, 일단 저택으로 돌아가 재활 훈련에 열중이라 들었다.
스테반의 죽음은 어느 곳에도 알려지지 않았다.
알티온 후작가는 이미 스테반이 주색잡기에 빠졌을 때 반쯤 그를 포기했다. 그렇다 보니 갑자기 사라져도 무슨 변을 당한 것이라곤 여기지 않았다. 가문의 힘으로 사람을 풀어 이리저리 찾아다니고는 있었지만, 제플린에서 난동을 부린 그 흑기사가 스테반이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역시 테스론이랑 나, 크리스틴 경만으로는 무리겠지?"
"사부... 아니, 권황 제라드야 피한다 치더라도 레펜하르트는 최소한 수하 대여섯 명과 함께 돌아다닌다. 지금 전력으론 위험해."
냉철하게 테스론은 상황을 파악했다. 필레나가 걱정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그럼 어떻게 해?"
"힘을 더 키워야지. 그래서 다시 그곳을 가 볼까 해. 기억 나? 예전에 한창 은의 현자 명으로 대륙 각지를 돌아다닐 때 들렀던 남부의...."
당시 테스론 일행이 은의 현자의 명령으로 처리한 것은 프리즈랜드의 마법사 할 일행뿐만이 아니다. 그 외에도 대륙 여기저기를 다니며 임무를 수행했던 적이 있다.
"응? 거기? 하지만 그때는 실패했었잖아?"
당시를 떠올리며 필레나가 의아해하는 눈빛을 보였다.
아직도 기억이 난다.
하늘을 뒤덮는 울창한 밀림과 숨이 턱턱 막힐 듯한 폭염, 그리고 유황이 끓어오르는 거대한 화염 늪 위에 세워진 칠흑의 철문.
온갖 짓을 다 해 보았지만 결국 그 입구의 결계를 깨지 못하고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테스론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야, 그때는 8서클에 들지 못했었으니까."
"8서클에 들면 뭐가 달라지는 거야?"
"아마도?"
그는 애매하게 대꾸했다.
전생의 기억 덕에 그곳의 결계를 뚫기 위해서 8서클 이상의 마법이 필요하다는 정보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상세한 내용은 전혀 모른다. 아무리 8서클에 들었다 해서 다시 가서 돌파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은 좀 무모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테스론은 될 것이라 확신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될 거야, 분명."
"응, 테스론이 된다면 분명 되겠지."
신뢰를 보내며 필레나가 동의했다. 테스론이 잠시 고민에 잠겼다.
'하지만 셋만으로 그곳을 가야 하나? 역시 좀 위험하긴 하겠는데....'
그렇게 고민하던 중이었다. 인기척을 느끼고 테스론이 고개를 돌렸다.
"세렐라인이 왔군."
이내, 방문을 열고 은발 머리의 소녀가 사뿐한 걸음으로 방 안에 들어섰다.
"오랜만이에요, 테스론 경."
"어서 오십시오, 수호자 세렐라인. 오늘은 어쩐 일로...."
질문을 이으려던 테스론의 말문이 순간 막혔다. 세렐라인의 뒤로 한 청년이 따라 들어오고 있었다.
낯익은 청년이었다. 화려한 금발에 잘생긴 외모, 온화하고 착해 보이는 인상의 저 사내는 테스론도 잘 아는 이였다.
'제이드?'
입 밖에 절로 튀어나오려던 이름을 테스론은 간신히 삼켰다. 지금 그가 제이드를 알아보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일 테니까.
세렐라인이 제이드를 보며 테스론을 소개했다.
"새로운 동지입니다. 인사하세요. 이분은 현자 레스틴, 속명 테스론 경입니다."
제이드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현자 제스, 속명 제이드 아크라이트라 합니다. 위명은 이미 들었습니다, 테스론 경. 권왕 레펜하르트를 상대로 박빙의 승부를 펼치셨다고 하더군요?"
전생의 친구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상대하려니 참 기분이 묘하다. 테스론은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자기소개를 했다.
"테스론입니다. 태양탑의 미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제이드 아크라이트는 현 시대에서도 꽤 유명인이다. 특히 마법사에게는. 얼굴은 몰라도 그의 이름 정도는 아는 척하는 것이 자연스럽겠지.
이후 필레나도 자기소개를 했다. 세렐라인이 방 밖으로 손짓하며 말을 이었다.
"아, 그리고 동지가 한 명 더 있어요. 들어와, RX-13."
금발 벽안의 청년이 안으로 들어섰다. 제이드와 맞먹을 정도로 화려한 외모를 지닌, 잘생긴 20대 초반의 청년이었다.
그를 본 순간 너무 놀라 테스론은 자기도 모르게 속마음을 입 밖으로 꺼내 버렸다.
"...알렉스?"
제이드 만큼이나 잘 아는 얼굴이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전생 때 할라인 왕국의 왕자로서 오러와 마법, 신성력을 모두 갖추어 세상으로부터 용사라 불렸던 이, 마왕 레펜하르트와의 최후의 전투에서 함께 싸웠던 알렉스 폰 할라인이 아닌가?
'말도 안 돼! 어떻게 알렉스가 지금 시대에?'
전생의 사투 당시 알렉스는 20대 초반의 청년이었다. 성녀 엘린과 마찬가지로, 지금 시기라면 태어나지도 않았을 존재인 것이다!
"...."
있을 수 없는 존재를 본 테스론은 경악해 말문을 잃었다. 다행히 세렐라인은 그의 실수를 달리 해석한 모양이었다.
그녀가 빙그레 웃었다.
"알렉스가 아니라 알, 엑스예요."
제이드가 쓴웃음을 지으며 첨언했다.
"어차피 은의 현자 내에서도 알렉스라고 부르잖습니까? 그거, 발음 어렵다니까요?"
"하긴, 그런가요?"
세렐라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 테스론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뭔가에 굉장히 놀란 얼굴이다.
"왜 그러시죠, 테스론 경?"
아차 싶어 테스론이 재빨리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 머리를 굴려 핑곗거리를 찾아냈다. 역시 마왕의 두뇌, 금방 핑곗거리가 떠올랐다.
"아, 아닙니다. 그냥 조금 놀라서요. 저 청년 몸에 오러와 신성력, 마력이 모두 느껴져서...."
"안목이 대단하시군요. 하긴 테스론 경도 오러와 마력을 함께 지니고 계시니."
"하지만 마법과 신성력은 반발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전생 때는 못 느낀 것이지만, 생각해 보니 그때나 지금이나 알렉스의 존재는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마침 잘됐다 싶어 테스론이 물었다.
"이론상 오러와 마력, 오러와 신성력은 함께 지닐 수 있어도 마력과 신성력을 동시에 가질 수는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네, 그래서 고대에서는 그 세 힘을 모두 감당할 수 있는 특별한 존재를 연구한 듯합니다. 그리고 결국, 자연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존재를 인공적으로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지요. 그것이 재활성화 완전변이체Reinvocated Xenogenesis, RX 시리즈입니다."
그녀가 무표정하게 서 있는 금발 벽안 청년을 가리켰다.
"그리고 이 아이가 RX 시리즈의 열세 번째 탄생작. RX-13(알엑스-써틴)이지요."
"으음...."
애써 놀란 가슴을 달래며 테스론은 알렉스, 그러니까 RX-13을 바라보았다.
분명 전생의 알렉스와 똑같이 생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세히 보니 확연히 다른 점이 눈에 들어왔다.
일단 외모는 같아도 풍기는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무엇보다 눈앞의 이 알렉스는 그가 아는 쾌활하고 정의감 넘치는 용맹한 청년이 아니었다. 마치 인형처럼, 아무 감정이 없어 보였다.
'그럼 당시의 알렉스와는 다른 존재인 건가? 가만, 그럼 은의 현자는 일국의 왕자까지 멋대로 바꿔 버린 거였어? 이 작자들 진짜....'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겉으로는 전혀 티를 내지 않는다.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세렐라인이 자신만만하게 물었다.
"제이드 공의 명성이야 이미 아실 터. 저 아이 또한 큰 전력이 되어 줄 겁니다. 이제 다시 권왕을 노릴 수 있겠지요?"
테스론이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그 전에 찾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권왕을 해치우는 데 큰 힘이 될 기물이죠."
"기물? 아티팩트인가요? 필요하다면 비슷한 물품을 제가 찾아볼 수 있는데."
"아뇨. 이건 꼭 찾아야 합니다. 이유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만...."
사실은 말할 수 없는 게 아니라, 말할 게 없다 쪽에 가깝다. 테스론도 왜 이토록 간절히 사방신의 유물부터 찾아야 한다고 느끼는지 설명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무인에게 직감은, 때로는 어떤 정보보다도 더 큰 힘을 발휘한다.
세렐라인이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전투를 하는 것은 테스론 경이니까요. 그대가 필요하다고 느꼈다면 그럴 이유가 있겠지요? 그자를 처리하기 위해서라면 상관없습니다."
의외로 흔쾌한 반응이었다.
그녀도 현장과 탁상, 실무자와 관리자의 차이쯤은 잘 알고 있었다. 필요하다면 실무자의 의견에 힘을 실어 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비록 겉보기엔 어리지만, 세렐라인은 벌써 80년 가까이 살아온 이였으니까.
제이드도 어깨를 으쓱이며 동의했다.
"손발도 맞춰 보지 않고 바로 그자에게 덤비는 것도 좀 불안하지 않습니까? 던전 탐사라면 호흡을 맞추는 좋은 기회가 될 겁니다."
권왕 레펜하르트에게 호되게 당했던 제이드였다. 아직도 가끔, 그때 당한 기억이 악몽이 되어 꿈에 나타나곤 한다. 조금이라도 승률을 높이겠다는데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그 기물이란 게 어디 있습니까? 던전인가요?"
"그 던전의 위치는? 기물의 정체에 대해서 정보를 들을 수 있을까요?"
세렐라인과 제이드가 연달아 질문을 던졌다.
테스론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남쪽의 대수해大樹海, 플룬탄pluntan. 인간의 접근을 불허하는 그 열대 우림 깊숙한 화산지에 '녹아내린 늪molten morass'이란 던전이 있습니다. 혹시 들어 보셨습니까?"
세렐라인이 고개를 저었다.
"처음 듣는 장소군요."
아무리 정보력이 좋은 은의 현자라지만 대륙의 던전을 전부 파악하지는 못한다. 그들의 정보는 어디까지나 현세의 인간들을 훔쳐보며 얻은 것, 무슨 각 대륙 던전 지도 같은 것을 보유한 게 아니란 소리다.
새로운 던전이 미지의 영역이기는 세상 사람들이나 은의 현자나 마찬가지였다. 단지 은의 현자는 도중에 정보며 기물을 가로채 그토록 많은 아티팩트를 보유하고 있을 뿐이었다.
"녹아내린 늪이라... 고문서에 나온 명칭인가 보죠?"
대부분의 던전 정보는 어딘가의 고문서에서 얻는 경우가 많다. 세렐라인은 당연히 테스론도 그럴 거라 여겼다. 뭐, 진실은 전생의 마왕이 멋대로 붙인 이름이라는 것이지만 그 사실을 대놓고 말할 수야 없지.
오해도록 놔둔 채 테스론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곳이 바로 제 목표입니다."
<12권에서 계속>
12권
제40장 녹아내린 늪molten morass
1
대수해大樹海, 플룬탄pluntan.
대륙 최남단에 위치한 이 거대한 열대 우림은 대륙을 종단하는 대하大河, 쥬란 강이 형성한 거대한 삼각주에 위치해 있었다. 할라인 왕국과 테이칸 왕국 사이에 위치해 반도 형태로 튀어나온 지형으로 그 면적만도 족히 할라인 왕국의 절반 가까이 된다. 고온 다습한 기후에 접근을 불허하는 수림과 독충, 몬스터들이 들끓어 인간들도 정글 초입에서나 간신히 터전을 꾸릴 뿐, 깊숙한 곳은 감히 들어서지 못한 곳이다.
사우나를 연상케 하는 폭염과 무더위로 가득한 열대 우림, 그 속에서 한 무리의 일행이 정글을 헤치며 나아가고 있었다.
왜에에엥! 왱왱왱!
"으아, 이놈의 벌레들!"
얼굴에 달라붙는 정체불명의 날파리를 떨쳐 내며 실란은 치를 떨었다.
그는 평소처럼 성직자 복장이 아닌, 얇은 상의에 반바지만을 입은 간편한 차림새였다. 이 무더위 속에서 전신을 덮는 법복을 입었다간 당장 탈수증으로 쓰러지는 것이다.
역시나, 팔다리를 훤히 드러낸 차림으로 러스가 옆에서 헉헉거렸다.
"아, 진짜 덥다...."
그 역시 갑옷이고 뭐고 다 내팽개친 채 실란과 비슷한 복장을 하고 있었었다. 이 열대 우림의 무더위는 그의 굳건한 기사도마저 꺾어 버렸던 것이다. 그나마 흉부에 오크제 레더 아머를 걸친 것이 기사로서의 마지막 양심이었다.
러스와 함께 걷고 있던 거구의 오크, 타시드가 뻐드렁니 사이로 연신 넋 빠진 음성을 흘려 댔다.
"으, 끈적끈적해... 기분 나빠... 끈적끈적해...."
타시드는 아예 반바지만 입은 채 상체를 홀랑 벗고 우람한 녹색 근육을 드러내고 있었다.
페틀랜드 오지의 황야, 사막이나 다름없는 그곳에서 자란 타시드는 더위에 꽤 강한 편이었다. 하지만 이곳의 더위는 단지 더울 뿐 아니라 습기마저 지독했다.
전신이 끈적끈적한 것이 실로 불쾌한 기분이다. 절로 치가 떨린다.
"으으, 괜히 따라온다고 했나? 아녀, 그래도 도장 찍는 것보단 낫지."
그들 뒤에서 따르고 있는 것은 새하얀 수염의 늙은 드워프, 마켈린이었다. 두 사람과 달리 알 포트의 법복을 제대로 챙겨 입은 마켈린이 이마의 땀을 훔치며 미간을 찌푸렸다.
"후우, 더운 거야 별문제 없지만 확실히 이 곤충들은 견디기 힘들구려...."
용광로의 열기에 익숙한 드워프들은 다른 종족보다 열에 대한 내성이 월등히 강하다. 대장장이 출신은 아니지만 마켈린 역시 드워프답게 더위나 습기에는 잘 견디고 있었다. 그렇지만 사정없이 덤벼드는 이 벌레들만은 도저히 감당이 안 된다.
옷자락을 열심히 부치며 마켈린도 득실대는 날파리 떼를 열심히 쳐 냈다.
"저리 가라, 이놈들아!"
다들 처음 겪어 보는 이 열대 우림의 환경에 치를 떨고 있었다. 특히나 추운 지방 출신인 이니야는 아예 발작 직전이었다.
"크아악! 더워!"
안 그래도 평소 차림이 꽤 야한 이니야다. 현재 그녀는 '입었다'라기보다는, '벗는 도중이다'에 가까운 차림을 하고 있었다. 어깨까지 드러나는 민소매 상의에 배꼽조차 드러내고, 치마 역시 무릎 위로 한참 올라간 채였다.
놀라운 미모를 지닌 이니야가 저런 어마어마한 차림을 하고 있으니 일행의 남성 제군 모두 초반에는 참으로 가슴이 설레었다. 러스나 실란은 물론―아무리 외모가 저 모양이라도 실란은 어엿한 스무 살 사내놈이다― 여색에 무던한 레펜하르트마저 얼굴을 붉힐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도 예전 이야기.
이 쪄 죽을 것 같은 더위 속에서는 잘 빠진 여인의 나신도 그냥 '불쾌한 체온 덩어리'인 것이다. 다들 진이 빠져 이니야가 헐벗건 말건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다.
"못 참겠어!"
결국 폭발한 이니야가 은빛 오러를 끌어냈다.
사아아아!
냉기를 띤 오러가 그녀의 주위를 삽시간에 에워쌌다. 벌레들이 윙윙대며 그녀를 피해 도망간다.
"앗! 이니야 씨, 또 발작했다!"
눈을 빛내며 실란이 잽싸게 이니야 곁으로 달라붙었다. 그녀의 다리 옆에 쪼그려 앉아 냉기 속에 몸을 담그고 몸을 부르르 떤다.
실란의 표정이 몽롱해졌다.
"아, 시원하다...."
옆에서 러스가 한없이 부러운 표정으로 실란을 바라보았다.
차마 체면이 있어 얌전히 있지만, 마음 같아선 그도 이니야의 반대편 다리에 매달리고 싶었다. 타시드 역시 비슷한 심정이었다.
"으음...."
"흠흠흠...."
두 사람 다 슬금슬금 이니야에게 다가갔다.
실란처럼 대놓고 달라붙지는 못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몸이 그녀 근처로 향한다. 조금이라도 저 냉기의 세례에 몸을 맡기고 싶은 것이다.
당연히 이니야는 쌍심지를 켰지만.
"아! 더워요! 저리 가욧!"
왜 오라는 레펜하르트는 안 오고 엄한 사내놈들이 달라붙는가? 이니야가 불만스러운 눈으로 앞장선 거구의 근육질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는 짝 갈라진 등 근육을 여실히 드러내며 수풀을 짓밟고 있었다.
은근한 눈빛을 보내며 이니야가 손짓을 했다.
"저기, 레펜하르트 님? 안 더우세요?"
나 시원해요! 완전 시원해요! 자, 이리로 오세요~라는 의미를 가득 담은 손짓이었다. 레펜하르트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체력 보존에 신경 쓰세요, 이니야. 앞으로도 갈 길이 멉니다."
확실히, 워낙 더위가 가공하여 잠깐 냉기를 뿜어 봤자 이내 허공으로 사그라진다. 그렇다고 하루 종일 오러를 발산하고 있을 수도 없는 것이다.
무심한 그의 반응에 이니야가 손가락을 꼬았다.
'히잉, 레펜하르트 님이 더워하시면 지칠 때까지 힘 쓸 수 있는데!'
정작 레펜하르트는 그녀의 냉기에도 그리 관심이 없어 보였다. 이니야가 입술을 삐죽이며 냉기의 오러를 거뒀다.
'치이....'
잠깐의 천국이 끝나고 다시 폭염 지옥이 펼쳐졌다. 다들 헉헉대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사실 레펜하르트는 다른 이들에 비해 꽤나 이 환경을 잘 견디고 있었다.
'아, 좋다! 이 육체 최고!'
물론 그도 전신에 상당한 땀을 흘리고는 있었다. 하지만 짐 언브레이커블의 단련된 육체는 이 정도 더위는 그냥 '적당히 따듯한 수준'으로 느끼는 것이다.
몰려드는 날벌레들도 그에겐 별문제가 없었다. 창칼도 안 들어가는 육체인데 거기다 침 꽂을 수 있는 날벌레가 있다면 아마도 그 곤충종이 세상을 제패했겠지.
'예전 왔을 때에 비하면 천양지차구먼.'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며 레펜하르트는 흐뭇해했다.
예전에 여기 왔을 때는 정말 쪄 죽는 줄 알았다. 허약하기 짝이 없던 전생의 육체는 궁극 생존 주문, 서바이벌을 전신에 걸고서도 더위를 못 이겨 탈진하기 일쑤였다. 결국 시리스와 타시드가 그를 번갈아 업어 가며 간신히 밀림 지대를 통과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지!'
그때처럼 구차하게 업혀 갈 필요 없다! 남자답게 자기 발로 척척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싱글벙글하며 레펜하르트는 계속 걸음을 옮겼다. 보이는 수풀을 적당히 쳐 내니 금세 사람 지나갈 만한 길이 완성되었다. 이렇게 앞에서 레펜하르트가 공성차처럼 모든 수풀을 쳐 내며 길을 뚫어 주지 않았다면 맨팔, 맨다리를 드러낸 뒷사람들 대부분이 풀에 쓸리고 베였을 것이다.
열대 우림에서는 각종 덩굴식물이 삼림의 수관부樹冠部를 덮기 때문에 바닥 부분이 어두워 풀 종류는 잘 자라지 못한다. 덕분에 길을 뚫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어쨌거나, 대부분이 기진맥진한 열대의 강행군이었다. 그런데 저 앞에서 혼자 신 나서 날뛰는 이가 하나 있었다.
"이쪽이에요! 이쪽, 이쪽!"
푸른 피부의 트롤 소녀가 나무 위에서 쏙 내려와 머리를 내밀었다. 아틸카의 파구루, 티티마였다.
실란이 혀를 내둘렀다.
"...저거 아주 신이 났네."
원래 이곳, 열대 우림 플룬탄은 트롤들의 주요 서식지였다. 지금은 대다수의 트롤 부족이 안타레스 백국으로 이주했지만 티티마의 출신 부족도 원래는 이 밀림에서 살고 있었다. 그녀 입장에서는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니 당연히 신 날 수밖에.
"백왕님! 저 앞에 개울이 하나 있어요!"
미리 앞쪽을 살펴보고 온 티티마가 손짓을 했다.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쟤, 데려오길 잘했네."
원래 티티마는 데려올 생각이 없었다.
만약 이 열대 우림이 처음 오는 장소라면 길 안내를 위해서라도 트롤 구루 한 명쯤은 대동했겠지. 하지만 그는 이미 전생에 여기 와 본 몸이었다. 굳이 길안내가 필요치 않은 것이다. 단지 실란이 온다고 하니 자신도 떨어질 수 없다며 티티마가 찰거머리처럼 매달리는 바람에 굳이 거부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막상 티티마를 대동해 보니 참으로 편했다.
노려하게 길을 찾고 먹을 만한 식수며 과일 등도 귀신같이 알아내는 데다가 쉴 수 있는 휴식지도 착착 안내한다. 다른 사람들은 지금도 죽겠다고 노래를 부르고 있지만 사실 전생에 비하면 이거 엄청나게 편하게 이동하는 편이다.
'예전엔 진짜 힘들게 지나친 거였군. 그때도 길잡이 하나쯤 고용할 걸 그랬나?'
그러나 인간 길잡이는 결코 이렇게 깊이 들어오려 하지 않았고, 트롤과는 지금처럼 깊은 친분을 쌓기 전이었으니 당시의 레펜하르트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뒤를 돌아보며 레펜하르트가 말했다.
"조금만 더 가서 쉽시다."
일행의 표정이 밝아졌다. 원숭이처럼 나무 사이를 뛰어 일행에게 돌아온 티티마가 물었다.
"백왕님, 점심도 먹을 거죠?"
"그럴 건데, 왜?"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반문했다. 그러자 눈을 빛내며 티티마가 실란에게 손짓했다.
"실란! 실란!"
"응? 왜?"
그녀가 방금 뛰어온 밀림 저편을 가리켰다.
"잠깐 혼자서 저쪽으로 가 봐."
"응?"
의아해하며 실란이 졸랑졸랑 앞으로 나섰다. 티티마가 방긋 웃으며 다시 나무 위로 몸을 날렸다. 다른 이들이 제 자리에 서서 멀뚱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일행에서 떨어진 실란이 정글을 헤치며 나아간다. 일행과 20미터 정도 떨어졌을 바로 그때였다.
사아아!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거대한 뱀 한 마리가 나무에서 떨어져 실란을 덮쳤다!
"으아악!"
놀란 실란이 비명을 질렀다. 레펜하르트며 다른 오러 유저들도 화들짝 놀랐다. 분명 기감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갑자기 저런 마수가 튀어나오다니?
야생의 포식자는 보통 무리에서 낙오된 약자를 노리는 법이다. 실란이 따로 행동하자 버려졌다 판단한 것이다.
"앗! 실란!"
막 레펜하르트며 이니야가 실란을 구하려 몸을 날리려던 차였다. 실란을 머리부터 삼키려던 왕구렁이 위로 티티마가 단검을 든 채 떨어졌다.
"잘 먹겠습니다!"
외침과 함께 티티마가 뱀의 두개골을 정통으로 찔렀다. 정확히 급소를 찔렀는지 그 커다란 뱀이 일순 꿈틀대더니 이내 축 늘어졌다.
"...으으."
바짝 얼어 있던 실란이 바들바들 떨며 고개를 돌렸다. 창백해진 얼굴로 실란이 버럭 호통을 쳤다.
"야! 티티마! 너 지금 사람을 미끼로 쓴 거야?"
착지하며 티티마가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잘했어! 실란!"
☆ ☆ ☆
3천 종이 넘는 수목이 자라는 열대우림, 플룬탄. 이곳에는 높이가 70미터 가까이 되는 나무며 잎이 10미터에 이르는 야자류도 많다. 레펜하르트 일행은 그런 큰 나무 밑에 임시 휴식처를 만들었다. 가지를 꺾어 뼈대를 세우고 거대한 잎으로 가림막을 세우니, 그럭저럭 쓸 만한 그늘이 만들어졌다.
녹초가 된 일행이 그늘을 찾아 몸을 뉘였다. 레펜하르트가 마법으로 간단한 결계를 쳐 더위와 벌레를 못 들어오게 막았다.
그동안 티티마가 신바람을 내며 왕구렁이 고기를 다듬었다.
"랄라라...."
트롤들은 나무 한 그루도 함부로 태우지 않는다. 그래서 현재 그녀는 죽은 나뭇가지를 모아 토막 낸 왕구렁이 고기를 꿰어 세우고 주술적인 화염으로 익히고 있었다. 따로 연료를 때는 것이 아니니 그리 연기가 나지도 않았다.
이내 기름진 뱀 고기 향이 사방으로 퍼졌다.
"흠흠...."
"오오...."
누워 있던 사람들이 코를 벌름거리기 시작했다. 다들 그동안 보존육과 비스킷, 간간히 티티마가 따오는 열대 과일로 끼니를 때우던 차였다.
휴대 식량마다 레펜하르트가 장기 보존 마법을 걸어 두긴 했지만, 이 마법은 부패 속도를 늦추게 하는 것이라 결국 시간이 지나면 맛도 떨어지고 수분도 날아간다. 역시 갓 잡은 고기와는 비교가 안 되는 것이다.
오랜만에 싱싱한 고기를 보니 절로 침이 고였다. 러스가 향을 음미하며 중얼거렸다.
"기막힌 냄새로군."
타시드도 기대에 차 웃으며 대꾸했다.
"간만에 야들야들한 고기를 먹겠군."
마켈린, 레펜하르트도 손을 비비며 곧 이을 만찬을 기대하고 있었다. 이니야가 연신 입맛을 다셨다.
뱀 뜯어 먹는 엘프라니, 어째 좀 이상한 느낌도 들겠지만 원래 스티리아 일족은 북해에서 바다사자며 물고기 잡아먹고 해초 뜯어 먹으며 살던 일족이다. 바다뱀도 날로 회 쳐 먹는 판에 구운 뱀 고기 정도로 비위 상할 리가 있나?
반면, 실란은 여전히 이를 갈며 티티마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으, 내 다시는 네 말 믿나 봐라...."
"왜 그래, 실란? 남자답게 굴고 싶다며?"
"난 남자답게 되고 싶은 거지, 왕구렁이 똥이 되고 싶은 게 아니거든?"
"일족의 식료를 위해 미끼가 되는 건 가장 사내다운 일인데?"
티티마는 눈을 깜빡이며 이해 못 할 표정을 지었다.
'아니, 입만 열면 남자 취급 해 달라고 노래를 부르기에 제대로 사내 취급을 해 줬더니 왜 화를 내는 거야?'
이래서 문화 차이란 무서운 것이다.
"싫으면 실란은 먹지 마."
"안 먹긴 왜 안 먹어?"
화는 화고, 고기는 고기다. 게다가 이 왕구렁이 잡는 데 가장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이 실란, 자신이 아닌가?
"먹어도 남들보다 많이 먹어야지! 암!"
이윽고 뱀 고기가 다 익었다. 즐거운 식사 시간이 펼쳐졌다. 다들 야자 잎사귀에 주저앉아 뱀 고기며 과일과 빵 등을 먹었다.
고기를 씹다 말고 문득 마켈린이 말했다.
"벌써 아라난 그라드를 떠난 지 23일째군요."
백왕궁 가이라크에서 출발한 레펜하르트 일행은 일단 글로텐 산맥 안쪽에 위치한 클로이 포털로 향했다. 거기서 그랜드 포지를 경유, 세텔라드 사막 인근에 위치한 티다엔 포털로 공간을 넘은 뒤 할라인 왕국으로 들어가 배를 타고 이곳까지 왔다. 이들의 이동 속도라면 길어도 보름이면 족했을 여정이다.
레펜하르트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빨리 온 셈이지 않나, 마켈린."
예전과 달리 이제는 레펜하르트도 그렇고, 다른 이종족들도 워낙 유명인이 되어놔서 함부로 얼굴을 드러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밀수꾼이 쓰는 루트를 이용하다 보니 시간이 더 걸렸다.
티티마가 빵에 뱀 고기를 끼워 한입 물었다.
"아앙! 음, 맛있다!"
눈치를 보며 러스와 타시드도 따라 했다. 마른 빵이지만 뱀 고기의 기름기가 스며드니 한층 부드러워졌다.
말랑말랑해진 빵조각을 베어 물며 러스가 질문했다.
"얼마나 더 가야 합니까?"
잠시 계산을 해본 레펜하르트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한 보름 정도?"
순간 일행의 안색이 바뀌었다. 아니, 이 상태로 보름을 더 가야 한단 말인가?
특히 이니야는 아주 사색이 되었다. 레펜하르트가 일행을 달랬다.
"중간에 에레카카 부족에 들를 수 있으니 좀 나을 거다. 거기서 좀 쉬고 체력을 회복한 뒤 다시 움직일 거니까."
에레카카 부족은 아직 안타레스 백국으로 이주하지 않고 이 열대우림에 남아 있는 트롤 부족이었다. 티티마가 주술 잠자리를 날려 미리 그들의 행보를 알렸으니 지금쯤 자신들이 도착하길 기다리며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으리라.
'저 생각은 나도 미처 못 했었는데. 역시 티티마 잘 데려왔어.'
대견한 눈으로 티티마를 바라보며 레펜하르트도 식사를 이었다. 문득 마켈린이 남들 몰래 레펜하르트에게 속삭였다.
'아, 그런데 레펜하르트 님. 그 사방신의 유물이란 걸 찾으면 전생의 힘을 완전히 되찾으실 수 있는 겁니까?'
레펜하르트가 찾으려는 고대의 아티팩트, 사방신의 유물.
그에 대해서는 이미 백국을 출발할 때 설명을 들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 아티팩트는 일종의 마력 충전제 같은 것으로, 한 개인의 허용량을 훨씬 능가하는 어마어마한 마력이 응집되어 있는 기물이라 했다.
다만 다른 마력 충전제와 다른 점이 있었다.
사방신의 유물은 지닌 마력의 속성이 언제나 외부와 조화를 이루었다.
다른 아티팩트라면 마나 드레인을 걸어 마력을 흡수한다 하더라도 시전자가 일단 소화시켜 자신의 마력으로 변환해야 비로소 마법을 구사할 원동력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사방신의 유물은 그런 변환 과정 없이 시전자의 고유 마력 흐름에 스스로 맞추어 마나를 보태 준다.
즉, 마법사의 마나 허용량과 상관없이 외부 마력으로 존재하면서도 자신의 것처럼 그 힘을 빌려 마법을 구사할 수 있는 것이다.
대다수의 마법사는 마력과 경지가 함께 오르니, 저 유물을 손에 넣더라도 있는 마법을 여러 번 쓸 수는 있을지언정 더 높은 경지의 마법까지 쓰게 해 주진 않는다. 하지만 현재 레펜하르트의 문제는 경지에 비해 마력이 지나치게 낮은 것이 아닌가? 사방신의 유물이 있다면 당장이라도 왕년의 마법을 문제없이 쓸 수 있게 된다!
'전생 때도 그걸 이용해 10서클의 경지에 오르시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고 들었는데....'
기대 어린 마켈린을 보며 레펜하르트가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어찌 될지는 나도 잘 모르겠소. 상황이 그때랑 많이 달라서.'
당시 10서클을 연구하던 레펜하르트는 상당히 많은 주문을 개발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가 고금 제일의 천재라도 결국 인간, 지닌 마력에 한계가 있었다. 개발해 놓고도 시험해 보지 못하는 주문이 태반이었다.
그때 사용한 것이 저 사방신의 유물이었다. 지닌 마력 이상의 주문도 사방신의 유물을 이용해 마력을 빌리면 충분히 구사할 수 있었다.
나중에 레펜하르트가 10서클 궁극 주문 중의 하나 '마나 리플레인'을 개발해 사용한 마력의 90퍼센트를 체내로 되돌리는 술식을 이용하게 된 후로는 그리 쓰지 않게 되었지만, 그렇다 해도 내내 많은 도움을 받았던 아티팩트였다. 최후의 싸움 때 대륙의 강자 5인을 상대하면서도 저 사방신의 유물이 있었기에 그토록 오랫동안 버틸 수 있었다.
'분명 사방신의 유물이 있으면 마력 모자라 못 쓰던 마법들도 대거 구사할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이 육체의 마력 허용량이 너무 낮거든? 그래서 지금 수준으로 사방신의 유물에 내 마력을 각인시킬 수 있을지 모르겠소.'
'하지만 충분히 기대해 볼 만은 하겠지요?'
은근한 어조로 묻는 마켈린을 보며 레펜하르트가 씩 웃었다.
'뭐, 시도할 가치는 충분히 있지 않겠소?'
그러던 중이었다. 여전히 삐친 얼굴로 고기를 우물거리던 실란이 문득 생각났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 레펜 씨? 그 사방신의 유물이란 거요. 그거 그 '사방신'이랑 관련이 있는 건가요?"
러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아는 척을 했다.
"사방신이라면, 섬김받지 않는 사방의 수호성수를 말하는 거지? 예전 신학 책에서 잠깐 본 기억이 있는데."
"그렇죠. 저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실란이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했다.
인간이 믿는 신들로는 주신 세이어와 열두 신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륙에 열세 개의 교단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동의 신룡神龍, 바메트.
서의 천호天虎, 파르가.
남을 수호하는 불멸의 사타르.
북을 지배하는 얼어붙은 티아논.
세상을 가호하나 인간의 의지를 존중하지 않는 이 짐승 신들은 하나의 인격체가 아닌 자연 그 자체라 믿어지기에 따로 섬기는 교단이 없었다.
"신룡 바메트가 화염구를 토하면 천호 파르가가 그걸 받아 가지고 노니, 그로써 해가 떠오르고 지노라. 바메트가 눈을 감으면 밤이 오고 천호 파르가가 포효하면 새벽이 오니 이로써 낮과 밤이 이어지는도다. 신룡이 어둠의 공허를 달리니 그의 구슬이 달이 되어 밤을 밝히고, 천호의 이빨이 한없이 빛나 별이 되어 반짝이리라."
낮과 밤의 순환을 기록한 신학의 내용이다. 실란이 말을 이었다.
"불멸의 사타르가 날갯짓하니 열기가 세상을 타고 오르며 얼어붙은 티아논이 숨을 내쉬니 냉기가 세상을 휩쓸며 내린다. 이것이 여름이 남에서 오고 겨울이 북에서 오는 까닭이라, 이들의 가호로 사계절이 순환하노라."
마켈린이 눈을 반짝이며 실란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었다. 그가 중얼거렸다.
"처음 듣는 이야기군."
"드워프들에겐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지 않나요?"
실란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마켈린은 그보다 훨씬 고위의 성직자였다. 그런데 그도 모르는 지식이 있었나?
마켈린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알 포트의 가르침은 온전히 전해지지 않아 우리들 사이에서도 빠진 것이 많으니까. 다른 신의 이야기까지 귀 기울일 여력이 없었지."
실란이 움찔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왠지 드워프의 아픈 역사를 건드린 기분이었다.
실란이 슬쩍 화제를 바꾸며 레펜하르트에게 다시 물었다.
"하여튼 그 사방신이랑 상관있는 건가요?"
"글쎄?"
레펜하르트는 머리를 긁었다.
이 사방신의 유물이라는 이름은 전생에 그가 직접 붙인 것이었다.
던전에서 발견되는 아티팩트는 저마다 이름이 붙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했다.
성광검 메사이어 같은 경우는 아예 기물 자체에 고대어로 메사이어란 이름이 붙어 있었던 경우다. 마갑 엘드라드 역시 갑옷의 안쪽에 이름이 암각으로 새겨져 있다. 그걸 발견한 이가 붙인 이름이 아니라, 원래 고대부터 그런 명칭으로 불렸던 케이스다.
반면 엘류시온의 목소리처럼 딱히 지칭할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이 경우에는 발견자가 적당히 상황에 맞춰 명명한다. 엘류시온의 목소리란 이름도 던전 엘류시온에서 발견되었고, 또 초기 연구 단계에서 자꾸 이상한 환청이 들려 레펜하르트가 직접 붙인 이름이었다.
던전 또한 마찬가지였다.
입구에 던전의 이름이 붙어 있는 경우도 있고, 없는 경우도 있다. 물론 생각해 보면 입구에 붙은 이름이 그 던전을 칭한다는 보장은 없다. 그냥 당시 그 던전을 소유하고 있던 고대인의 이름이거나, 아니면 전혀 상관없는 명칭일 수도 있으니까.
그렇듯 사방신의 유물 역시 따로 명칭이 있던 것이 아니었다. 그냥 사방 수호 성수의 그림이 새겨져 있기에 그렇게 이름 붙였을 뿐. 당시에 연구해 봤지만 사방신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는 레펜하르트도 결국 알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저 사정을 다 말하려면 전생의 이야기까지 꺼내야 할 터, 레펜하르트가 대충 말을 얼버무렸다.
"무슨 상관이야? 성능만 좋으면 됐지. 자, 충분히 쉬고 배도 채웠으니 다시 출발하자고!"
먹고 쉬는 사이 벌써 해가 중천에 떠올랐다. 밀림의 하루는 짧다. 해가 떠 있을 때 최대한 많이 이동해야 한다.
"크으, 다시 움직여야 하나."
"할 수 없지, 뭐."
"자, 다들 힘냅시다!"
다른 이들도 인상을 구기며 저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사흘 뒤, 우거진 밀림 사이로 한 무리의 거지 떼가 나타났다. 뭐, 예전엔 일국의 왕이니 위대한 신의 지상 대리자니 일족의 족장이니 했던 거 같은데 지금은 더도 덜도 말고 그냥 거지 떼였다.
자기 몸을 살펴보며 실란이 울상을 지었다.
"우우, 씻고 싶어...."
윤기 나던 붉은 머리칼은 뭔가 다른 의미로 윤기가 돌고 있고, 뽀얗던 피부는 땡볕에 그을려 까무잡잡하다. 거기에 팔다리는 진흙투성이고 옷에도 풀물이며 벌레 잡은 흔적이 가득하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이니야가 하소연을 흘렸다.
"아, 시원한 물에 목욕 한 번만 해 봤으면...."
"그러게 말입니다...."
곁에 있던 러스가 격한 동의의 표정을 지었다. 물론 타시드는 격한 공포의 표정을 지으며 한 발 물러섰지만.
레펜하르트 일행 정도의 체력과 강인함이라면 사실 아무리 밀림이 우거진다 해도 신체적으로 문제가 생길 만큼 지치진 않는다.
명색이 오러 유저, 초인적인 힘을 지닌 이들이다. 그저 정신적으로 감당하기 귀찮을 뿐이지 육체적으로는 딱히 문제는 없다. 이제까지 오면서 투덜거렸던 것은 사실 반쯤 엄살이었다. 평범한 탐험가였다면 아직도 밀림 초입에서 헤매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초월적인 오러의 힘과 신의 축복도 때 타는 건 막을 수 없는 것이다!
러스는 다리 밑에서 손 내밀면 한밑천 잡을 꼴로 변해 있었고 타시드는 슬슬 칼켄과 스탈라가 친아들로 여길 행색이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녹색 피부에 하도 진흙이 묻어 검붉어 보인다는 소리다.
이니야는 오직 여인의 근성 하나로 패시브 오러를 이용, 어떻게 새하얀 피부는 지켰지만 대신 걸친 옷은 심히 꾀죄죄했다. 마켈린의 신성한 법복도 이미 걸레가 된 지 오래였다. 그 와중에도 알 포트가 내린 신성한 수염만은 반질반질 순백의 빛을 발하고 있었는데, 그 괴리감 때문에 더 괴상해 보일 지경이었다.
선두에서 걷고 있던 레펜하르트가 일행을 독려했다. 그 역시 광산에서 사흘쯤 땅 파다 나온 듯한 몰골이었다.
"자자, 기운들 내요. 조금만 더 가면 에레카카 부족의 마을이 나올 겁니다."
이니야의 표정이 살짝 밝아졌다.
트롤들은 흙을 주로 다루는 문화 특성상 항아리나 목욕통 등을 쉽게 만든다. 그리고 트롤 구루들도 전신에 문양을 그리고 지우는 일이 잦다 보니 몸을 꽤 자주 씻는다. 그 문양 역시 주술적 힘의 일부라 그때그때 바꿔 줘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트롤들 사이에선 꽤나 목욕 문화가 발달되어 있었다.
에레카카 부족으로 가면 제대로 몸을 씻을 수 있을 거란 희망이 있다. 모두의 발걸음이 절로 빨라졌다.
티티마의 인도를 받아 반나절을 더 밀림을 뚫으니 겨우 밀림 사이로 공터가 비쳤다. 실란이 환한 표정으로 수풀을 뛰쳐나갔다.
"와아... 아?"
막 마을을 본 순간이었다.
실란의 움직임이 멎었다. 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이, 이건...."
앞장 선 티티마는 이미 창백해진 안색이 되어 제자리에 석상처럼 굳었다. 다른 이들도 같은 표정이 되어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수림 사이에 펼쳐진 트롤들의 마을, 그곳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2
마을 곳곳이 불타고 무너져 폐허처럼 보였다. 사방에 트롤의 시체가 널려 있고 바닥이 붉은 피로 흥건했다. 그 참혹한 광경에 티티마가 트롤어로 비명을 질렀다.
"제카 오제브! 아와프라타!"
'오, 맙소사! 대지 어머니여!'라는 의미였다. 사색이 되어 티티마가 달려 나갔다. 정신을 차린 레펜하르트가 바로 뒤를 따르며 소리쳤다.
"생존자가 있나 찾아봅시다!"
허겁지겁 다른 이들도 마을로 뛰어들어 갔다.
트롤들은 대부분 갈가리 찢겨 죽어 있었다. 이 참상은 아이와 여인조차 가리지 않았다. 채 몇 살 되지도 않은 어리디어린 아이들의 시체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광경은 그야말로 목불인견이었다.
이니야가 분노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대체 어떤 놈이 이런 끔찍한 짓을!"
설사 사냥꾼이 산짐승을 만나도 새끼는 살려 두는 법이다. 대체 이 어린 트롤들이 무슨 죄가 있어 이토록 잔인한 죽음을 맞아야 한단 말인가?
모두들 치를 떨었다. 어깨를 들썩이며 애써 러스가 흥분을 가라앉혔다.
"후우, 후우... 아무래도 플룬탄에 들어온 이들이 우리뿐만이 아닌 것 같군요."
애써 머리를 식히며 레펜하르트 일행은 폐허를 살펴보았다.
실란이 중얼거렸다.
"마물 사냥꾼일까요?"
할라인 왕국에선 대수해 플룬탄 초입에 들어가 트롤을 사냥하는 마물 사냥꾼이 꽤 많았다. 성공하는 이는 그리 없지만 트롤 하나만 잡아도 대박이니 인생 역전을 꿈꾸는 이들이 제법 되었다.
타시드가 고개를 저었다.
"잘은 모르지만, 그들이 이렇게 깊이 들어오는 경우는 없다고 들었다."
러스도 동의를 표했다.
"타시드 말이 맞아. 그리고 마물 사냥꾼이면 이렇게 학살을 할 이유가 없지."
마물 사냥꾼이 트롤을 노리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그들의 피를 탐해서다. 살려서 연금술사 길드로 끌고 가야 비로소 돈이 된다. 그런데 이 귀한 트롤의 피를 함부로 땅에 흘려 둘 까닭이 없다.
"정말 마물 사냥꾼의 소행이라면, 트롤 구루나 사내들은 몰라도 아이나 여인까지 죽일 필요는 없었겠지. 데려가면 큰돈이 될 텐데."
"그러네요. 그럼 대체 왜?"
실란과 러스의 대화를 듣던 이니야가 슬쩍 레펜하르트에게 다가갔다.
"레펜하르트 님."
"예?"
그녀가 마을 곳곳에 파헤쳐진 땅덩이를 가리켰다.
"이거, 오러 흔적이에요."
"그렇습니까?"
레펜하르트가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사람에게 쓴 상태가 아니라 땅을 파헤친 것에 불과해 그의 안목으로는 구별이 힘들었다. 새삼 이니야의 경지가 높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이니야가 확신하며 다시 말했다.
"확실해요. 오러, 그것도 그냥 블레이드 오러가 아니라 일종의 융합 형태의 오러예요. 아무래도 레펜하르트 님의 뇌전권이나 폭염권이랑 비슷한 느낌인데...."
레펜하르트가 인상을 썼다. 현재 마법과 오러를 모두 경지까지 올린 이는 그가 알기론 둘밖에 없었다.
레펜하르트 자신과 테스론.
'하지만 테스론이 벌써 오러와 마법을 융합해서 쓰지는 못할 텐데?'
설사 테스론이 자신의 두뇌를 완벽하게 소화했다 한들 오러-마법 융합이 가능할 리 없었다. 권마합신의 술식은 10서클의 경지에 든 과거의 경험이 있었기에 창안이 가능했던 것이다. 아무리 자신의 두뇌를 지녔다 한들 그 지식과 지혜 없이는 어림없는 이야기다.
인상을 쓴 그의 태도를 의구심으로 받아들였는지 이니야가 불퉁한 표정을 지으며 첨언했다.
"분명해요. 정체까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순수한 오러 스킬이 아닌 것만은 틀림없어요. 저도 정령술과 오러를 융합해 쓰잖아요? 그래서 확실히 알 수 있어요."
"당신의 안목을 의심한다는 게 아닙니다, 이니야. 그냥 놀라워서 그래요."
그녀를 달래며 레펜하르트는 생각했다.
'오러와 마법의 융합이라?'
그게 가능한 건 현생에서 그가 알기론 레펜하르트 자신뿐이다.
'아, 전생에는 또 있긴 했군. 그 용사인가 뭔가 하던 놈.'
오러에 마법, 신성력까지 융합해서 구사하던 할라인 왕국의 왕자, 알렉스 폰 할라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세 가지 힘을 모두 다루는 용사 알렉스의 능력은 제법 놀라웠다. 마법과 오러, 신성력을 합일시켜 기존의 몇 배나 되는 위력을 보이곤 했다. 전생의 레펜하르트도 대체 어떻게 저게 가능한지 한동안 궁금해했던 적이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마법과 신성력의 융합만큼은 마왕인 그조차도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영역이었으니까.
하지만 알렉스는 마법과 오러, 신성력 개개의 숙련도 자체는 그리 높지 않았다. 덕분에 위력이 증폭되어 봤자 초월적인 권능을 보이거나 하진 않았다. 융합 방식 역시 별로 효율적이지 않았다. 레펜하르트의 권마합신에 비하면 쓸데없이 낭비되는 힘이 너무 많았다.
'확실히 대륙 최강의 5인에 끼기엔 충분했지만, 그 다섯 중에선 제일 떨어지는 것이 그놈이었지.'
알렉스가 일행의 리더 격이긴 했지만, 무력으로는 검성 사이러스나 권왕 테스론에 비해 손색이 많았기에 당시의 레펜하르트에겐 그리 두려운 적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동안 무심코 잊고 살았다.
'그런데 이걸 보니 또 생각나네.'
그러나 레펜하르트는 이내 알렉스의 존재를 뇌리에서 지웠다.
현 시간대를 생각해 보면 성녀 엘린과 용사 알렉스는 존재할 수가 없었다. 엘린이야 실란만 잘 챙기면 나타날 일이 없을 테고, 알렉스도 당시 나이가 20대 초반이었으니 아직 태어났을 리가 없다.
'역시 새로운 적인가?'
레펜하르트는 트롤 시체들 사이에서 숨을 고르고 있는 티티마를 바라보았다.
아틸카의 후계자답게, 그녀는 어느새 흥분을 가라앉히고 차분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비록 분노하지만 격정에 휘둘리지는 않는다. 정신문화를 추구하는 트롤 구루의 상식이다. 그저 슬픔을 담아 차분하게 상황을 살펴볼 뿐.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간 자, 그 영혼에 평안 있으리니...."
진혼의 노래를 중얼거리며 티티마가 어린 트롤 아이들의 시신을 어루만진다. 그 시신에 남은 상흔을 보며 레펜하르트는 확신했다. 오러 흔적은 몰라도 저 트롤들의 시신에 남은 마법의 흔적은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피를 매개로 발동하는 8서클의 연계 주문, 체인 오브 제노사이더.'
이 주문이라면 트롤의 재생력을 역행시켜 일거에 대량 살상을 할 수 있다.
'8서클의 대마법사에, 오러-마법 융합이 가능한 오러 능력자란 말이지? 이런 자들이 예전에 있었던가?'
한참을 고민했지만 레펜하르트는 그런 이들을 떠올릴 수 없었다. 시대도 다르고 세상은 넓으니 그가 모르는 강자가 있다 해서 이상할 것은 전혀 없다.
아무래도 자신이 모르는 새로운 강자인 모양이다. 그렇게 결론 내리며 레펜하르트는 고민을 멈추고 눈앞의 일로 돌아왔다.
"어쨌거나 이들을 이대로 놔둘 수는 없겠군...."
고개를 돌려 일행을 보며 레펜하르트가 말했다.
"간단하게 장례라도 치러 줘야 할 것 같소만?"
다른 일행들도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다. 이니야며 마켈린, 타시드가 저마다 대꾸했다.
"그러죠. 어서 땅을 파야겠네요."
"그보단 검불을 모아 화장할 준비를 합시다."
"높은 솟대를 세우고 시신을 매달아야지요. 저들의 영혼이 새가 되어 날아갈 수 있도록."
전통적으로 엘프는 매장, 드워프는 화장, 오크는 풍장을 하다 보니 저마다 대답이 달랐다. 일동 모두가 티티마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트롤은 장례식을 어떻게 치르나?
티티마가 마을을 둘러보며 인상을 썼다.
"끙, 저 혼자서 이 많은 분들을 다 먹을 순 없겠는데요?"
실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머, 먹어?"
레펜하르트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 맞다... 트롤은 식인장을 하지, 참."
실란의 안색이 이제 창백해지다 못해 사색이 되었다.
"식인이라니, 설마 사람을 먹...는단 말이에요?"
혹시 티티마가 자기를 따라다니는 것이 살이 야들야들 부드러워 보여서 그런가? 응? 그런 거야?
벌벌 떠는 실란을 향해 레펜하르트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조금 개념이 달라. 살아 있는 사람 잡아먹는 건 트롤에게도 끔찍한 일이 맞으니까 걱정하지 마."
성인이 된 트롤은 워낙 재생력이 강해 쉽게 죽지 않는다. 돌림병이 돌거나 재해를 만나거나 해도 한꺼번에 시신이 생기는 경우가 거의 없어, 대부분 늙고 쇠해져 자연스레 죽음을 맞는다.
그리고 그렇게 일족 내에 죽은 자가 생기면, 트롤들은 전통적으로 죽은 이의 시체를 일족끼리 나눠 먹는 풍습이 있었다. 트롤 문화 특유의 사자死者를 기리는 방식이었다.
자연의 모든 것은 순환하니 그리함으로써 죽은 이의 피와 살이 자신 속에서 살아 숨 쉬며 함께한다고 믿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죽은 이의 피와 살을 먹음으로써 그 재생력이 먹은 트롤들에게 옮겨가 힘을 더하니, 나름 합리적인 이유도 있었다.
티티마가 난감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이들은 땅에 묻어도 되지만, 다른 분들은 제대로 영혼을 기려야 할 텐데...."
물론 이유가 어찌 되건 인간이 보기엔 기겁하며 치를 떨 야만스러운 행위였다.
막대에 시체를 매달아 새가 쪼아 먹게 놔두는 오크의 풍장만 해도 인간이 보기엔 끔찍한 광경이다. 심지어 동족의 시신을 먹다니?
역시 트롤이 대대로 몬스터로 알려진 이유가 있었다. 다른 종족에 비해서도 트롤은 인간의 문화와 동떨어진 부분이 너무 많은 것이다.
그래도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모두 타문화에 대한 존중을 아는 이들, 대놓고 끔찍하다는 표정은 짓지 않았다. 어찌해야 하나 레펜하르트가 고민하던 차였다.
"아틸카 님이 전에 말씀하셨어요.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이들은 우리의 피와 살이 되어야 하지만, 사고로 죽은 자들은 한恨의 저주를 풀기 위해 불로써 정화해야 한다고."
티티마가 일행에게 뒤로 물러나 달라 주문했다. 일행 모두가 마을에서 벗어나 밀림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마을 전체를 바라보며 티티마가 양손을 활짝 펼쳤다. 손가락의 각 마디를 튀기며 기이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대지 어머니, 한숨 토하네. 날아오른 새의 깃털이 낮 태양의 혀를 탐하리. 이는 깨끗함이요 순결함이로다...."
라라라라....
나직한 허밍과 함께 티티마의 좌우로 주술적 불길이 일어났다. 불길이 땅 위를 달리며 마을을 길게 에워싼다.
화르륵!
불길이 마을 전체를 뒤덮었다. 그 참혹한 광경이 불 속에 파묻히며 사라져 갔다.
실란과 마켈린이 저마다 자신의 신에게 저들의 평안을 빌었다.
"알 포트의 이름으로 비노니, 당신들의 영혼이 안식에 들기를."
"필라넨스시여, 저들의 영혼이 고통 없는 곳에서 사랑받으며 영원케 하소서."
이글거리는 불길을 앞에 둔 채 레펜하르트가 인상을 썼다. 불빛을 받은 구릿빛 근육이 시뻘겋게 번들거렸다.
'누구냐? 대체 어떤 놈들이 이런 지독한 짓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