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에레카카 부족 마을로부터 서쪽으로 80킬로미터쯤 떨어진 밀림 속.
덩굴을 헤치며 한 무리의 일행이 걷고 있었다. 흑발의 잘생긴 청년을 중심으로 남녀 혼성으로 이루어진 인간 일행이었다.
일행 중 한 명, 적금발의 주근깨 여인이 앞장선 청년에게 시무룩한 음성을 보냈다.
"테스론, 그들을 꼭 다 죽여야 할 필요가 있었어? 새끼들도 있던데...."
흑발의 청년, 테스론이 단호하게 대꾸했다.
"해충 박멸 같은 것이지. 신경 쓰지 마, 필레나.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하지만...."
필레나가 어깨를 움츠리며 말미를 흐렸다. 뒤에서 걷고 있던 잘생긴 금발의 청년, 제이드가 빙그레 웃으며 그녀를 달랬다.
"집안에 쥐가 발견되었는데 아직 어리다고 놔두었다간 금방 새끼 쳐서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습니까? 싹 박멸해야 집안이 깨끗해지는 법이지요. 그리고 덕분에 전투 호흡을 꽤 맞추지 않았습니까?"
"그건 알지만요...."
입술을 동그랗게 말며 필레나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성인 남자 트롤들은 워낙 흉악하게 생겨 죽이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하나 트롤 아이나 여인들은 트롤다운 특성이 약하다 보니 그리 인간과 다르게 생기지 않은 것이다. 겉보기엔 그냥 피부만 파란 특이한 생김새의 인간처럼 보인다. 별로 몬스터란 느낌이 들지 않았다.
"우웅...."
필레나는 이내 머리를 흔들며 찝찝함을 떨쳤다. 테스론 말대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문득 제이드가 앞을 향해 소리쳤다.
"알렉스! 길을 뚫어 주게!"
화려한 미모의 금발 청년이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그리고 검을 뽑아 빛을 발한다. 청년, 알렉스의 검이 블레이드 오러를 발하며 푸르게 빛나더니 이내 검은 마나로 뒤덮이고 순백의 성력과 어우러졌다.
"헙!"
기합을 터트리며 눈앞의 밀림을 향해 알렉스가 검을 뻗었다.
콰아아앙!
폭음과 함께 수목과 풀이 통째로 날아가며 20미터 정도의 탄탄대로가 뚫렸다. 그 광경을 보며 제이드가 싱긋 웃었다.
"과연 쓸 만하군."
검을 거둔 알렉스가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테스론이 인상을 썼다.
"하지만 인간이란 느낌은 안 듭니다만."
"당연하지요. 인간이 아니니까."
새삼스레 무슨 소리냔 얼굴로 제이드가 대꾸했다. 테스론이 뺨을 긁었다.
"그렇지만...."
전생의 용사, 알렉스는 함께 마왕과 대적하던 소중한 동료였다. 그의 용기와 의지, 특히 인류를 위한 희생정신은 나이 든 테스론과 사이러스조차도 탄복할 정도였다.
아무리 전생의 알렉스와 저 RX-13이 같은 사람이 아니란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같은 얼굴을 한 이가 저렇게 인형처럼 굴고 있으니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으음, 계속 갑시다."
상념을 떨쳐 내며 테스론은 계속 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걸었을까?
우르릉!
조금 전까지 맑더니 갑자기 천둥이 치며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무성한 나무 위로 쏟아진 소나기가 작은 개울을 삽시간에 거대한 강으로 만들어 버렸다.
"좀 전까지 햇볕이 내리쬐었는데 그새 소나기가 와? 이곳 날씨는 정말 개판이군."
콸콸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흘러가는 흙탕물의 강을 보며 테스론이 혀를 찼다.
"마법으로 날아서 건너가 버릴까요, 제이드 공?"
그는 이제 8서클의 대마법사였다. 비행이 가능한 플라이 주문 역시 사용할 수 있다.
"급한 여정도 아닌데 굳이 마력을 소모할 필요는 없지요. 빗속에서 비행 마법을 쓰려면 평소보다 훨씬 많은 마력이 필요하다 들었습니다. 일단 비가 그치길 기다립시다."
뒤에 서 있던 필레나가 바로 무한의 주머니에서 작은 막대기 하나를 꺼냈다.
"쉴 자리 만들게, 테스론."
막대기를 적당한 평지에 꽂고 발동시키니 이내 커다란 천막이 되었다. 또한 천막 안쪽에 새하얀 구슬이 빛을 발하며 바로 냉기를 발산하며 주위 습기를 제거하자 순식간에 덥고 습하던 천막 안쪽이 봄처럼 청량한 공기로 가득 찼다.
2미터에 달하는 거구의 여인, 크리스틴이 숨을 헐떡이며 잽싸게 안으로 들어갔다.
"아, 이제 좀 살 것 같네요."
따라 들어가며 제이드가 부드럽게 웃었다.
"이 정도면 굉장히 편하게 지나가고 있는 겁니다, 크리스틴 경. 이 장비들이 없었다면 훨씬 고생이 심했을걸요?"
예전, 테스론과 이곳을 한번 들렀던 필레나가 격렬히 동의했다.
"그건 그래요. 과연 은의 시대 기물, 특히 이 옷은 정말 좋던데요? 대체 무슨 소재일까? 하나 얻었으면 좋겠는데."
자신의 옷을 살펴보며 필레나가 아쉬운 소리를 냈다. 테스론이 진지하게 타박했다.
"그거 금기 물품이야. 반납해야 된다고. 괜히 눈독 들이지 마."
"나도 알아. 그냥 좋다 이거지."
이 무더위 속에서 평소 차림을 할 수 없는 것은 이들 또한 마찬가지다. 성기사인 크리스틴도, 마법사인 필레나나 제이드도 평소의 갑옷이나 로브를 벗고 열대에 맞는 복장을 하고 있다.
하지만 테스론 일행은 레펜하르트 쪽과는 좀 차림이 달랐다.
밀림에서는 모든 것이 무성하게 번식한다. 혹자는 나무마다 과실이 주렁주렁 열리고 사시사철 따듯한 밀림에서는 먹을 것, 입을 것 걱정이 없을 거라 생각하는데 사실 이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사람이 살기 좋다는 소리는 온갖 벌레며 맹수, 기생충, 거머리, 전염성 세균들에게도 살기 좋은 기후란 소리다. 그에 대한 철저한 대비가 필요한 것이다.
현재 테스론 일행은 모두 갈색 천으로 된 질긴 상·하의, 그 안에 검은 타이즈를 입어 팔다리는 물론 전신을 모두 감싼 상태였다. 이 무더위에 온몸을 싸매고 있으면 아무리 오러 유저라도 더위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을 텐데, 체력이 그리 좋지 않은 여인들조차 그리 힘들어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모두 그들이 걸친 검은 타이즈, 플레스텍스 슈트 덕분이었다.
레펜하르트 일행이 밀림에 대한 지식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도 나름 열대 기후에 맞춰 준비를 해 왔다. 하지만 그들의 지식은 밀림의 토착민이나 트롤의 것, 결국 그들과 비슷한 옷차림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트롤들도 벗고 살기는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저건 레펜하르트 일행이 워낙 초월적인 강자여서 가능한 것이지 실은 적절한 옷차림을 갖출 필요가 있다. 특히 편한 신발과 다리 보호대는 필수다. 물론 현 시대의 천 수준으로는 팔다리를 보호하려다 오히려 체온을 높여 탈수증에 시달리게 할 수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만....
"플레스텍스 슈트라...."
테스론이 팔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은의 시대 기물을 쓸 수 있는 그들은 굳이 저런 고생을 할 필요가 없었다.
"확실히 좋긴 좋지, 이거."
이 플레스텍스 슈트는 은의 시대 소재답게 충분한 통기성과 내구성을 유지하면서, 가벼운 냉기 마법으로 외부 더위로 일부 차단해 주며 진흙이나 때가 묻을 경우 자동으로 털어 내는 기능까지 있었다.
테스론이 옷을 매만지며 뇌까렸다.
"역시 은의 현자에겐 별게 다 있단 말이야. 난 이번에도 '온기의 목걸이' 같은 거 줄 줄 알았는데."
"그건 냉기에 대한 저항을 높이는 아티팩트라서 열대에서는 그리 쓸모가 없지요."
제이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필레나가 물었다.
"그럼 반대 효과가 있는 목걸이는 없나요? 냉기의 목걸이 같은."
"그런 건 없어요. 은의 현자는 아티팩트 개발자가 아니라 그저 고대의 수혜자일 뿐, 필요하다고 편의대로 만들 수 있는 처지가 아니죠."
솨아아아!
천막 밖에서 소나기 지나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빗소리를 듣다 말고 제이드가 질문을 던졌다.
"얼마나 더 가야 합니까?"
대수해, 플룬탄은 지도조차 없는지라 오직 테스론의 안내만 믿고 따라가야 한다. 테스론이 전생의 정보를 떠올렸다.
"이 이동 속도라면, 앞으로 사흘 안에 도착할 겁니다."
대꾸하며 테스론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래, 레펜하르트보다 선수 쳐야지. 뭔지는 몰라도 마왕의 보물이라고까지 불리던 아티팩트니까."
필레나가 용케 그의 혼잣말을 들었다. 입술을 귓가로 가져가며 그녀가 속삭였다.
"혹시그 자도 여기 있지 않을까?"
얼토당토않다는 듯 테스론이 고개를 저었다.
"에이, 설마 그렇게까지 우연이 겹치려고?"
☆ ☆ ☆
폐허가 된 에레카카 부족 마을을 떠난 지 닷새째.
레펜하르트 일행은 드디어 원시 우림을 벗어나 열대의 고지대에 접어들었다. 지대가 높아지며 더위가 가시고 점점 기온이 내려간다. 주위 환경도 열대라기보다는 완연한 산악 지형으로 변한다.
열대를 벗어나자 더위도 습기도, 벌레의 습격도 한풀 꺾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결코 안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 고지대는 대수해 플룬탄의 중심에 위치한 거대한 화산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대륙 최대의 화산, 레단트 웨일Redant wail.
레단티의 통곡이란 이름이 붙은 이 활화산은 평범하게 형성된 것이 아니다. 고대 은의 시대의 폭주로 인해 형성된 화산이라 일대가 전부 혼탁한 마나의 폭풍 지대다.
열대 우림에서도 어지간한 마수들은 오러 유저의 기감조차 속일 만큼 특이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이곳에 비하면 약과였다. 이곳의 독충들은 설마 오러 유저라도 한번 물리면 상당히 고생을 해야 하며, 마켈린이나 실란의 해독 주문으로도 쉽게 독성이 풀리지 않는 지독한 놈들투성이였다.
그래서 밀림에선 가만있었던 레펜하르트도 이 지역에서는 독충에 대한 대책을 철저히 하고 있었다.
파직! 파직! 파지직!
일행이 움직일 때마다 주위에서 전격이 튀며 구워진 벌레 시체들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레펜하르트가 일행 주위에 설치한 광범위 전하결계電荷結界 덕분이었다.
구워지는 독충 시체를 보며 실란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거 있으면 진작 쓰지 그랬어요?"
그랬으면 밀림에서 그 고생은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 아닌가? 실란의 불만에 레펜하르트가 쓰게 웃었다.
"함부로 마력을 낭비할 수는 없으니까. 상황에 맞추는 것뿐이야."
마법은 공짜가 아니다. 단순히 불편하다고 막 낭비할 순 없는 것이다.
그때는 그냥 벌레들 좀 물려도 상관없으니 최대한 마력을 아꼈다. 지금은 마력 소모보다 독충에 물리는 쪽이 더 리스크가 크니까 쓰는 것이고.
"마법은 분명 만능萬能이지만, 전능全能은 아니라고."
이해는 하지만 그래도 그간의 고생을 생각하니 묘하게 억울했다. 실란이 입을 삐죽이며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고지대를 한참 지나니 저 멀리 거대한 화산이 보였다. 레단트 웨일 화산이었다. 다행히 분화 시기가 아닌지 연기를 뿜고 있지는 않았다.
그 밑에는 역청이 물과 섞여 유황 거품을 피워 올리는 검은 늪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늪을 보며 마켈린이 질린 목소리를 냈다.
"으, 혹시 저기를 지나가야 합니까?"
드워프답게 강인한 마켈린이지만 그에게도 두려운 것이 있었다. 바로 늪이나 개울, 호수 같은 곳이다. 신장이 짧은 드워프에겐 다른 종족이 그냥 적당히 허리 담그고 지나갈 만한 깊이의 늪도 익사 위험이 다분한 것이다.
레펜하르트가 헛웃음을 흘리며 대꾸했다.
"걱정 마시오, 마켈린. 다 왔으니까."
늪을 가로지르지 않고 레펜하르트가 가장자리를 따라 좀 더 걸었다. 그렇게 1킬로미터쯤 더 걷자 늪 가장자리에 솟아 있는 거대한 바위 언덕이 눈에 들어왔다. 언덕에 가까이 가던 이니야가 긴장했다.
언덕 사이의 거암괴석들, 그 사이로 좁은 틈이 나 있었다. 바위에 비해 좁다는 것이지 사람 두세 명이 어깨를 마주하고 지나가기에 충분히 큰 틈이긴 했다. 그 틈에서 섬뜩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호오, 여기가 그곳입니까?"
마켈린이 바로 알아챘다.
애당초 드워프의 본거지, 그랜드 포지는 옛날에는 던전이었다. 지금도 그랜드 포지 외곽에는 아직 이계와 연결되어 접근이 위험한 던전 일부가 남아 있다. 이 기운은 마켈린에게 꽤나 익숙한 것이었다.
"그렇소, 사방신의 유물이 있는 몰튼 모라스 던전, 그 입구라오."
주먹을 매만지며 레펜하르트가 말을 이었다.
"뭐, 정확히 말하면 정식 입구는 아니고 던전 벽에 생긴 틈 같은 거지만."
3
바위에 난 틈새는 겉보기에는 그냥 평범해 보였다. 하지만 안으로 몇십 미터 정도 들어가니 기이한 공간이 나왔다.
사람 열댓 명이 서 있기에 충분한 공동, 그곳에 커다란 석벽 일부 드러나 있었다. 석벽에 사람 하나가 간신히 지나갈 만한 구멍이 뚫려 그 위로 무지갯빛 기운이 아롱져 빛을 냈다. 러스가 검을 뽑으며 물었다.
"저 기운을 흩어 버리면 되는 겁니까, 형님?"
레펜하르트가 피식거리며 대답했다.
"할 수 있으면 어디 해 봐."
러스는 바로 블레이드 오러를 뿜었다. 푸른 오러가 무지갯빛 광막과 충돌하더니 이내 사라져 버렸다. 오러 자체가 저 광막과 융합되며 아무 힘도 쓰지 못한 것이다. 러스가 눈을 찡그렸다.
"이거...."
"힘으로 될 거였으면 내가 직접 했겠지?"
대부분의 던전은 구조물 자체에 강력한 차원 시공 결계가 설치되어 있다. 은의 시대 고대인들이 일부러 설치한 게 아니라, 던전이 이계와 현세에 걸쳐 있다 보니 방위 시스템이 오작동을 일으켜 현세의 물리력을 던전 전체로 분산시키는 것이다.
이 차원 결계를 힘으로 뚫으려면 물리력의 분산 허용치 이상의 위력으로 때려 박는 수밖에 없다. 뭐, 레펜하르트의 캘러미티 혼이라면 허용치 이상의 위력도 충분히 낼 수 있었지만 그 경우 던전 전체가 붕괴되어 버린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다.
그래서 던전의 문을 열려면 현세의 던전 방위 시스템에 개입할 수 있는 마법의 힘이 필수였다. 던전 자체는 이차원異次元에 걸쳐 있어도 그 시스템의 조작 코어는 분명 현실에 존재하니 외부에서 마법으로 조작할 수 있다. 물론, 그만한 수준이 되었을 경우의 이야기지만.
"어지간한 던전은 그동안 내 마법으로도 충분히 열 수 있었지만...."
광막을 살펴보며 레펜하르트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던전과 달리 이곳, 몰튼 모라스 던전은 저 결계의 위력이 한층 강했다. 웬만한 수준의 마법으로는 씨도 먹히지 않을 정도였다. 던전 입구에 설치된 결계의 코어를 해제하려면 9서클의 절대 해제 술식 '앱솔루트 디스펠'을 날리거나, 적어도 8서클의 집중 해제 술식 '코어 로드 디스펠'을 연발해 사방의 시스템을 순차 해제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예전엔 그냥 한 방에 해지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9서클은 고사하고 8서클도 못 쓰는 처지니, 원.'
그래서 그동안 이곳에 올 엄두를 못 냈다. 와 봐야 문도 못 열 게 뻔했으니까.
하지만 권마합신을 터득한 이후 레펜하르트는 새로운 편법을 떠올릴 수 있었다. 정식 입구의 결계 코어는 여전히 건드릴 수 없지만, 던전 간의 틈새를 잠시 열어 진입할 방법은 있었던 것이다.
일단 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다시 나오는 것은 별문제가 아니다. 내부 시스템 조작을 통해 쉽게 밖으로 돌아올 수 있다.
레펜하르트가 어깨를 풀며 광막 앞으로 나섰다.
"실란, 마켈린, 이니야, 위치로."
레펜하르트의 좌우로 실란과 마켈린이 자리를 옮겼다. 이니야도 진중한 얼굴로 레펜하르트의 등 뒤에 섰다. 사각 형태로 선 동료들의 위치를 확인한 뒤 레펜하르트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후우, 실제로 될까 모르겠네? 실패해도 너무 원망하지는 말게들."
농기 어린 레펜하르트의 말에 실란이 대단히 진지하게 대꾸했다.
"두 번은 안 올 거예요. 이 빌어먹을 동네."
"그럼 이번에 반드시 성공시켜야겠군!"
레펜하르트가 양손을 들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렐 파스트 레 헤라 라운드...."
엄청나게 긴 주문이었다. 스펠 영창만 거의 1분 가까이 지속되었다. 레펜하르트의 양손에 희미한 보랏빛 영기가 맺히기 시작했다. 그가 양손을 가슴께로 모았다.
"권마합신!"
황금빛 오러가 피어올라 보랏빛 영기와 뒤섞이며 기이한 빛을 발했다. 실란과 마켈린이 동시에 신성력을 끌어 올렸다.
"필라넨스시여!"
"알 포트여!"
신의 이름을 외치며 각자 분홍빛과 은빛의 성광을 뿜어냈다. 레펜하르트가 양팔을 좌우로 길게 뻗었다. 권마합신에 의해 오러와 융합된 마력이 가는 빛을 뻗어 내 실란과 마켈린의 성광에 닿았다.
웅웅웅웅!
마력과 신성력이 반발하며 대기가 떨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터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융합될 수 없는 저 두 기운을 레펜하르트의 오러가 중개하며 억제하고 있는 것이다.
레펜하르트가 희열을 느끼며 외쳤다.
"좋아! 되는군!"
수염을 부들부들 떨며 마켈린이 버럭 소리쳤다. 상당히 힘든 표정이었다.
"아, 이거야 원래 연습 많이 했던 것이니 당연히 되겠지요! 빨리 진행이나 하십시오!"
"알았소!"
레펜하르트가 등 뒤로 눈짓했다. 긴장하고 있던 이니야가 바로 정령술을 구사했다.
"로시아, 내 손에 임해 줘요! 샤이드, 내 인도에 따라요!"
물의 정령, 로시아와 어둠의 정령, 샤이드가 동시에 소환되어 그녀의 손짓에 따라 레펜하르트에게로 흘렀다. 마력과 오러, 성광이 합일된 양손에 각자 물과 어둠의 정령력이 깃들었다.
레펜하르트는 양손을 다시 합쳤다. 순백의 빛이 뿜어 나오며 자욱한 냉기가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대기의 진동이 점점 더 거세진다. 그리 넓지도 않은 공동이다 보니 그 기세만으로 천장 여기저기서 돌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레펜하르트가 눈을 빛내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간다!"
광막을 향해 그가 전신을 들이밀었다. 코앞까지 전진하며 몸을 회전시켜 양 주먹으로 번갈아 광막을 후려갈긴다!
"제로 임팩트!"
쾅쾅!
두 차례의 폭음이 울리며 광막 전체가 크게 파문을 그렸다. 동시에 광막이 좌우로 갈라지며 현세와 연결된 석벽 너머의 공간이 천천히 드러났다. 러스와 타시드가 환호를 터트렸다.
"오!"
"됐다!"
두 사람 다, 이거 실패하면 나중에 여기 또 와야 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리고 있었다. 절로 환호가 나왔다. 레펜하르트가 다급히 소리쳤다.
"자! 다들 뛰어들어!"
☆ ☆ ☆
마법은 만능에 가까워 시전자에 따라 다양하게 응용할 수 있다. 차원 시공 결계를 해지하기 위해서는 그 복잡한 결계 속성에 일일이 개입해 모든 술식을 반전시켜야 하는데, 그것이 가능한 건 오직 마법뿐이다.
하지만 현 시대의 마법은 결코 시간과 공간, 물질에 개입할 수 없다. 그래서 레펜하르트는 신성력의 힘을 빌리는 편법을 떠올렸다.
신의 힘으로 현세에 내려지는 성스러운 힘, 신성력은 그 위력과 상관없이 마법 같은 구조적 한계가 없었다. 9서클의 대마법사도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가장 위계가 낮은 신관도 인간의 상처를 되돌리는 '시간 개입'을 할 수 있다. 그래 봤자 찰과상이나 낮게 하는 정도지만 그 본질을 따지면 분명 시간을 거스르는 행위다.
즉, 신성력의 힘은 차원 시공 결계 중 '시간' 결계에 해당하는 부분을 무시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신성한 힘은 응용할 수가 없다. 성직자는 분명 '기적'을 일으키지만, 그 기적은 신이 정한 것이지 성직자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성직자의 힘만으로는 결계의 술식에 맞춰 해제하는 성력 운용이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마법으로 성력을 재가공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이 모든 기운과 융합 가능한 생명기, 오러였다. 권마합신으로 오러와 마법을 융합해 성력과의 반발력을 누른 뒤 마력 흐름으로 성력을 이끄는 것이다. 신성력과 마법의 반발이 너무 크다 보니 실란 한 명으로는 힘이 모자랐다. 하지만 마켈린의 권능까지 합치니 충분히 계산만큼의 위력이 나왔다.
그러나 성력으로 시간 결계를 무시한다 해도 여전히 공간 결계란 부분이 남는다. 그래서 레펜하르트는 여기에 정령력을 추가했다.
엘프의 정령술은 마법사의 소환술과는 방식이 전혀 달랐다.
마법사가 정령이나 이계의 악마를 소환하는 것은, 공간을 자유자재로 여닫아 그들을 현세로 꺼내 오는 방식이 아니다. 공간을 뛰어넘는 힘은 정령이나 이계의 악마가 가진 본연의 능력이고 마법사는 계약을 통해 그들의 사고를 억제해 명령을 내리는 것뿐이다. 레펜하르트의 10서클 궁극 소환 주문, 일만의 악마를 부르는 '헬 오브 더 월드'도 본질을 따지면 마찬가지였다.
반면, 엘프의 정령술은 자연스럽게 '친구'인 정령을 '현세'로 이동시키는 권능이었다.
공간에 직접 개입해 정령을 불러오는 그 능력은 어찌 보면 트롤의 주술과도 비슷한 점이 있다. 이론과 원리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감각을 통해서 공간을 다루는 것이다. 트롤 구루들이 그냥 감으로 물질 변환을 하는 것처럼. 응용이 안 된다는 점에선 신성력과도 비슷하다 하겠다.
어쨌거나 확실한 것은 정령력은 분명 공간을 무시하는 속성이 있다는 점이었다. 신성력처럼 마력과의 반발이 크지도 않아 이니야 한 명으로도 충분했다. 이로서 차원 시공 결계 중 '공간'에 해당하는 부분도 해결이 되었다.
남은 것은 이 융합된 권능에 방향성을 주어 한 점으로 이끄는 것뿐.
여기서 짐 언브레이커블의 오러가 빛을 발했다. 모든 기운을 담은 오러로 제로 임팩트를 날려 타격을 관통시킨다. 그러면 시공을 초월한 그의 타격이 던전 내부에서 외부로 충격을 발하며 차원의 기류를 일순간 흩어 이계와 현세를 연결하게 되리라!
이 모든 것이 이론상의 이야기였다. 사실 레펜하르트도 될 거라는 확신은 없었다. 하지만....
"역시 난 천재야, 후후후."
어두운 통로를 두리번거리며 레펜하르트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티티마가 손가락질을 하며 순진하게 외쳤다.
"우와! 백왕님! 그 태도 재수 없어요! 아틸카 님은 항상 겸손하라고 하셨는데!"
실란도 말은 안 하지만 비슷한 표정이었다. 대단한 건 인정하겠지만, 역시 몸 좋은 양반이 머리도 좋은 걸 보니 배알이 꼴린다. 게다가 그 사실을 스스로 내세울 건 또 뭔가? 러스며 타시드, 마켈린도 '참 저 양반 뻔뻔하구나.'라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반면, 이니야는 얼굴을 붉힌 채 레펜하르트에게 뜨거운 시선을 보내는 중이었다.
"역시 레펜하르트 님은 천재세요! 아아!"
가지고만 있었으면 등 뒤로 꽃가루도 뿌릴 기세였다. 진지하게 감탄하는 이니야를 보며 레펜하르트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농담을 한 건데 그렇게 나오면 그것도 좀...."
진지한 저 표정을 보니 오히려 놀림당하는 기분이다. 머쓱해하며 레펜하르트는 일행을 돌아보았다.
"다들 잘 들어왔지?"
마켈린이 무릎을 주무르며 구시렁댔다.
"생각보다 더 힘이 드는구려, 아이고, 무릎 관절이야."
러스가 묘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기도를 올려서 성력을 쓴 건데 왜 무릎이 아파요?"
"자네는 젊어서 모르지? 기도도 체력을 요구하는 법이라네."
"하지만 실란은...."
"쟤는 젊잖아!"
하여튼, 다들 무사히 몰튼 모라스 던전 내부로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너비 5미터에 높이 4미터 정도의 석벽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통로였다. 이미 광막은 보이지 않았다. 그 틈새는 물리적인 구멍이 아닌 일종의 차원 균열, 시공 결계를 뚫은 순간 내부에서는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일행의 앞에 놓인 어두운 통로를 바라보며 실란이 레펜하르트를 불렀다.
"자, 레펜 씨!"
러스와 타시드도 활짝 웃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형님!"
"은인이여!"
셋이서 동시에 한 목소리를 냈다.
"공략본 내놔요!"
이들은 이미 레펜하르트와 몇 번이나 던전 탐사를 한 적이 있는 것이다. 그때마다 레펜하르트의 정보로 큰 이득을 본 바 있다. 함정이니 출몰하는 마물이니 하는 정보를 다 알고 있으면 그 던전의 난이도는 대폭 하락한다. 이번에도 전처럼 '재미나고 짭짤한 던전 탐사'를 기대하며 세 사람이 눈을 반짝거렸다.
레펜하르트가 떨떠름한 얼굴로 머리를 긁었다.
"어, 없는데?"
"엥?"
"그게 왜 없습니까, 형님?"
러스와 타시드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레펜하르트가 어색하게 웃었다.
"나, 여기는 처음 와 보는데...."
실란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예전에도 처음 가 본다면서 착착 공략 내놓았잖아요?"
"그러니까 여긴 원래 알던 루트가 아닌지라...."
이전에 탐사했던 던전들은 전부 레펜하르트가 예전 조사를 끝냈던 던전이었다. 그래서 사부 제라드를 팔아서 정보를 척척 내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쪽 루트는 레펜하르트도 처음이었던 것이다.
전생 때는 마법만으로도 입구를 열 수 있으니 정면 루트로 향했었다. 하지만 이곳은 입구와 정반대 지역, 틈새로 들어온 것이라 미처 조사하지 못한 영역이었다. 저 차원 균열 역시 던전 외부에서 발견했을 뿐이지 직접 들어와 본 것이 아니어서 그도 전혀 정보가 없었다.
대체 뭔 소리 하나 아리송해하던 티티마가 문득 긴장하며 통로 저편을 바라보았다.
"앗! 악령 나타났는데요?"
어둠 속에서 희끄무레한 형체가 으스스한 소리를 내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레이스며 스펙터 등, 하나만으로도 마을 한두 개쯤은 폐허로 만들 강력한 악령들이었다. 섬뜩한 사기가 냉기에 섞여 이쪽으로 밀려오고 있었다.
"산 자여...."
"죽음의 세례를 받을지어다...."
"원통하고 원통하다...."
아쉬운 듯 입술을 매만지며 실란이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그러니까, 여기는 공략본 없다 이거죠?"
그리고 바로 눈을 빛냈다. 가슴의 성표를 빛내며 실란이 오른손을 들어 기도를 올렸다.
"필라넨스시여! 저들을 정화하소서!"
번쩍.
통로 가득 분홍빛 성광이 해일처럼 밀려갔다. 한 방에 수십의 악령들이 아침햇살 맞은 이슬처럼 녹아내렸다. 참으로 어마어마한 신성력이었다. 악령을 상대하기 위해 한창 긴장하던 이니야가 기겁했다.
"뭐, 뭐야? 어떻게 저걸 한 방에?"
인간 세상 떠돌아다니며 고위 성직자도 제법 만나 본 그녀였지만 이토록 엄청난 권능은 처음 보았다. 새삼스러운 눈으로 이니야가 실란을 바라보았다.
'얘, 그냥 몸 부실한 멸치 소년이 아니었구나!'
실란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럼 그냥 가죠, 뭐."
☆ ☆ ☆
푸른 악마가 광포하게 포효했다.
"크아아아!"
회색 악령이 냉기의 손톱을 섬뜩하게 휘둘러댔다.
"카카카카!"
3미터가 넘는 거구의 악마들이 수십 개체씩이나 나타나 통로를 통해 폭풍처럼 밀려왔다. 전신이 푸른 근육으로 덮여 있고 흉악한 힘줄이 돋아나 실로 끔찍한 모습이었다.
악령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수많은 악령들이 벽을 통해 영체를 내밀고 칼날 같은 손톱으로 벽을 긁어 대며 쇠 긁는 소리를 흘려 댔다.
하나하나가 보통 던전의 수호자로 있기에 충분한 고위 마물들이었다. 역시 몰튼 모라스 던전은 다른 곳에 비해 뒤틀림이 격심하다 보니 출몰하는 마물들도 차원이 다른 것이다. 보통 사람뿐 아니라 단련된 기사라도, 저 마물들을 보는 순간 공포에 질려 주저앉았으리라.
하지만 레펜하르트 일행은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차원이 다르기는 이쪽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실란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기도를 올렸다.
"필라넨스시여! 그릇된 존재를 지울 성스러운 빛을 허하소서!"
마켈린도 성표를 내밀며 신성 주문을 외웠다.
"알 포트여! 저들을 정명한 곳으로 돌려보낼 힘을 주소서!"
분홍빛 성광이 통로 좌측으로 뻗어 갔다. 수많은 악령들이 성광에 뒤덮였다.
은색 성광도 통로 우측을 향해 터졌다. 수십의 악마들이 은빛의 물결에 떠밀려 갔다.
불길 만난 짚단처럼 악령과 악마들이 일제히 휩쓸리며 처절한 비명을 질러 댔다.
"크아아악!"
"크오오오!"
마켈린이 한쪽 눈을 치켜뜨며 실란을 힐끔거렸다. 어린 나이에 제법 위력이 강하지 않은가?
"호오?"
실란도 눈을 흘기며 마켈린을 노려보았다. 이쪽은 그래도 악령이 몇 마리 남았는데, 저쪽은 소환되어 실체가 있는 고위 악마조차도 한 방에 현세에서 지워 버렸다!
'우와, 센데?'
경쟁심을 불태우며 실란이 눈을 불살랐다. 위대한 여신, 필라넨스의 신관인 그가 알 포트의 신관에게 질 수는 없다!
또다시 악령과 마물이 출몰해 달려온다. 실란이 눈을 빛내며 다시 기도를 올렸다.
"필라넨스시여! 당신의 종이 청원합니다! 거하게 한 방 더!"
거의, 식당가서 메뉴 주문하는 수준의 기도문이 터졌다. 하지만 여신의 실란 사랑은 지극하기 그지없어 저것만으로도 분홍빛 성광이 더더욱 거세지며 마물들을 휩쓸었다.
'어쭈?'
늙은 드워프, 마켈린의 안색도 변했다. 알 포트의 지상 대리자인 자신이 다른 신의 신관에게 밀려서야 알 포트에 대한 모독이다!
"알 포트여! 본때를 보이소서!"
알 포트의 마켈린 사랑도 실란 못지않았던 모양이다. 잘도 저따위 기도로 알 포트의 축복이 내려졌다. 은빛 성광이 폭발하며 통로 구석구석까지 스며들었다.
"꾸에엑!"
"으갸갸갹!"
또 한 무리의 불쌍한 마물들이 이걸로 승천해 버렸다. 절규와 비명을 무심히 넘기며 두 프리스트가 계속 걸음을 옮겼다. 둘의 독한(?) 기도문도 계속 이어졌다.
"필라넨스 님, 모자라요! 좀 더!"
"알 포트시여, 좀 더 쓰시지요? 져서야 쓰겄습니까?"
슬슬 신께 청원하는 신관이라기보다는, 빚 받으러 온 사채업자스러워지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그래도 성광은 잘도 불어나 던전 안쪽을 싹싹 훑어 주고 있었다. 이건 뭐, 거의 소독 수준이었다. 러스며 타시드가 신바람을 내며 뒤에서 응원했다.
"잘한다, 실란!"
"대단해요, 마켈린 공!"
은빛 성광에 휩싸인 채 마켈린이 빙그레 웃었다.
"젊은 친구가 제법이군!"
분홍빛 성광을 끌어낸 채 실란도 웃으며 답했다.
"비록 어리지만 신심은 결코 지지 않아요!"
저따위 기도문 읊으면서 신심 타령하는 것도 좀 이상한 것 같지만, 이곳에 굳이 그 사실을 지적하는 이는 없었다.
앞장선 두 성직자를 보며 레펜하르트가 혀를 내둘렀다.
'역시 이쪽 계열에선 성직자가 최강이네.'
전생 때의 그도 물론 그리 어렵지 않게 이곳을 탐사했다. 강력한 정령술사인 시리스와 오러 유저 타시드, 그리고 이미 9서클을 마스터한 그의 힘은 아무리 몰튼 모라스 던전이라도 큰 위협을 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간단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나름 긴장하며 열심히 싸우고 물리쳐서 끝까지 갔었다. 반면 지금은 그냥 성직자 앞세운 것만으로 모든 악마며 악령들이 벌레처럼 쓸려가는 것이다.
'예전에는 마켈린 없이 와서 미처 몰랐지.'
물론, 모든 마물이 프리스트의 터닝 계열 주문만으로 처리되는 것은 아니다. 이계의 악마나 악령 말고도 몰튼 모라스 던전에는 광포한 마력의 영향으로 뒤틀린 마물 또한 많았다.
통로를 지나자 거대한 전당이 나오며 물질계에 소속된 몬스터들이 일행을 맞이했다. 팔 네 개, 머리가 두 개 달린 거인 무리가 고함을 치며 덤벼들었다.
"크아아아!"
에틴이라 부르는 변종 오우거들이었다. 에틴들이 나타나자 마켈린과 실란이 뒤로 물러섰다. 현세에 속하는 저들에겐 신관의 터닝 주문이 먹히지 않는다.
대신, 그동안 놀고 있던 전사 계열들이 앞으로 나섰다.
"라라라라!"
실란의 강화 주문을 받은 티티마가 에틴의 머리 위로 몸을 날렸고.
"오러 크로스!"
"가라! 나의 맹우, 다카르!"
러스와 타시드가 블레이드 오러를 뿜어대며 돌진했다. 이니야와 레펜하르트도 웃으며 합류했다. 아무리 에틴이 강력한 마물이라지만, 현재 일행의 실력이라면 러스 혼자서도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이다. 수십의 에틴들이 정리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에틴 무리를 모두 물리치자 실란이 뒤를 돌아보며 습관적으로 물었다.
"얼마나 더 가야 돼요?"
"모른다니까?"
실소하며 레펜하르트는 대답했다. 원래 던전 탐사는 미지를 앞에 두고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조금씩 개척해 나가는 과정이다. 그런데 그동안 다들 너무 편하게 살아서 그냥 물어보면 척척 대답이 나오는 줄 아는 것이다.
'쩝, 애들한테 안 좋은 버릇 들였네.'
레펜하르트는 전당의 형태를 살폈다. 처음 오는 곳이지만 그렇다 해도 같은 던전 내의 구조물이다. 그가 알고 있는 정식 루트와 건축 양식상 비슷한 부분이 있어 대충 감은 잡을 수 있다.
"보니까 지저 4층까지는 내려온 것 같은데...."
그때였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트롤 소녀가 손을 흔들며 일행을 불렀다.
"저기 표지판 같은 게 붙어 있어요!"
"잘 찾았다, 티티마."
티티마는 석벽에 붙어 있는 커다란 철판을 가리키고 있었다. 레펜하르트가 곧바로 그쪽으로 달려갔다. 만약 이 내부의 간략도 같은 것이라면 그것만으로도 큰 정보가 되는 것이다. 다른 이들도 재빨리 뒤를 따랐다.
기대 어린 눈으로 표지판을 들여다보면 이니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표지판이 아닌 것 같은데?"
던전 탐사는 쥐뿔도 모르지만, 그래도 지도 볼 줄은 아는 이니야다. 보통 간략도라면 최소한의 도형은 그려져 있어야 할 것 아닌가? 하지만 이 철판에는 오직 정체불명의 문장만 가득 쓰여 있을 뿐이었다.
마켈린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라는지 모르겠군요. 분명 우리 일족의 고대어 같기는 한데...."
알 포트의 지상 대리자로서, 그는 드워프의 고대어에도 상당히 능통했다.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드워프 쪽 고대어가 맞소. 힐 드워프 계열의 고대어인 케란어라서 마켈린, 자네는 모르겠군."
그랜드 포지의 드워프들은 마운틴 드워프 쪽 계열에 속해서 마켈린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은 워낙 드워프 숫자가 줄어 굳이 민족을 나누지 않지만, 예전에는 드워프들도 인간처럼 다양한 민족과 국가로 갈려 있었다고 했다.
레펜하르트가 철판을 차분히 살펴보았다. 어지간한 고대어는 전부 습득했던 그라 시간은 좀 걸려도 어떻게 읽을 수 있었다. 머릿속에서 차분히 해독해 가던 레펜하르트가 순간 안색을 굳혔다.
'어라?'
타시드가 호기심을 보이며 물었다.
"뭐라고 쓰여 있습니까?"
레펜하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너무 머릿속이 복잡해서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왜 이게 여기 적혀 있는 거지?'
철판에 새겨진 고대어, 그 문장은 너무도 익숙한 것이었다.
정명한 법칙을 비틀어 운명의 눈을 속이는 자.
흐름을 거슬러 역천의 법 아래 머물지어다.
주의하라, 시공을 뒤트는 자여.
이는 용납될 수 없는 세계의 그릇됨이라.
레펜하르트를 이 시간대로 이동시킨 이름 모를 고대의 아티팩트이자 그가 임의로 이름 붙인 작은 보석, 시공의 눈.
'그 시공 회귀 주문 발동 언령이잖아, 이건?'
상세한 부분은 다르지만, 그래도 큰 줄기가 되는 문장과 단어는 대부분 일치한다.
'아니, 이게 왜 사방신의 유물이 있는 이 던전에 쓰여 있어?'
시공의 눈을 발견한 던전과 이곳, 몰튼 모라스는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지리도 위치도, 심지어는 관련된 단어조차도 없었다. 적어도 전생 때는 그렇게 판단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는 분명 너무도 밀접해 보이는 글귀가 쓰여 있다....
멍한 레펜하르트의 표정에 이니야가 걱정스러운 기색을 비쳤다.
"왜 그러세요, 레펜하르트 님?"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제야 정신이 들어 레펜하르트는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철판으로 손을 뻗었다.
'혹시 모르니....'
레펜하르트가 철판을 잡고 힘을 주었다. 무슨 보호 마법 같은 것이 걸려 있는 것은 아니었는지, 의외로 간단히 떨어졌다.
무한의 주머니 중 입구가 넓은 것을 골라 레펜하르트가 철판을 넣었다. 일단 챙겨 두었다가 나중에 천천히 조사해 볼 속셈이었다.
"아, 그냥 좀 모르는 고대어 단어가 섞여 있어서... 일단 계속 갑시다."
☆ ☆ ☆
이후, 레펜하르트 일행은 파죽지세로 몰튼 모라스 던전을 공략해 갔다.
일행 전원이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강력한 오러 유저에 최고위 성직자도 둘이나 되는 데다, 레펜하르트 본인도 뛰어난 던전 탐사자며 7서클의 마법사에 오러 유저다. 이 정도 강자들이 굳이 던전 탐사에 뛰어드는 경우는 그리 없으니, 공략본이 있건 없건 별로 진행에 어려움이 없었다.
그렇게 7층까지 내려갔을 때였다.
벽면의 마력 회로를 점검하며, 레펜하르트는 그가 알고 있는 지식과 주위를 비교해 던전 전체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문득 레펜하르트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마력 회로가 발동된 부분이 두 곳이라?'
방어 시스템은 외부의 침입을 감지하고 그에 따라 반응한다. 원래의 시스템과 달리 지금은 이계의 오염으로 온갖 악마와 마물들이 들끓게 되었지만, 그래도 시스템의 기본 구동 구조는 동일하다.
그런데 현재 마력 회로에서는 레펜하르트 일행이 있는 위치 말고도, 다른 곳에서도 회로를 발동시킨 흔적이 보였다. 던전 반대편, 그가 전생에 지나쳤던 정식 루트 쪽이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레펜하르트가 긴장한 얼굴로 일행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침착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이곳에 들어온 불청객이 우리뿐만이 아닌 것 같아."
마켈린이 물었다.
"무슨 의미이십니까, 레펜하르트 님?"
레펜하르트가 손가락을 들어 천장을 가리켰다.
"누군가가, 지금 이 던전 다른 곳에서 탐사를 진행하고 있소."
4
후끈한 열기가 감도는 복도 속에서 악마와 악령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악마와 악령이 출몰하면 강력한 사기로 인한 냉기를 뿜어내지만, 이 몰튼 모라스 던전은 화산 속에 위치하기 때문에 깊이 들어갈수록 점점 더 열기가 높아져 음산한 냉기쯤은 바로 지워 버린다.
"크아아아!"
포효하는 악마를 앞에 두고 한 쌍의 남녀가 나섰다. 금발의 미청년, 알렉스가 무표정한 얼굴로 오른손을 들어 앞을 겨눴다.
"세이어여, 힘을 주소서!"
순백의 성광이 악마들을 휩쓸었다. 뒤따른 장신의 미녀, 크리스틴도 기도를 이었다.
"세이어시여! 그릇된 저들을 멸할 빛을 내리소서!"
순백의 성광이 정화의 힘을 담고 복도를 가득 메웠다. 몰려오던 악마와 악령들의 기세가 일순 주춤해졌다. 하지만 이계로 사라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알렉스나 크리스틴이나 순수한 프리스트가 아닌 성기사 계열이어서 기도에 담긴 신성력이 그리 높지 않은 것이다.
둘이 합쳐 봐야 실란 한 명만도 못한 수준이었다. 역시 레펜하르트 일행에 비해 테스론 쪽은 성직자의 권능이 미약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차원이 다른 힘을 지니고 있기는 테스론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적들의 움직임이 멎었군."
순백의 성광이 악마와 악령들을 일거에 쓸어버리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잠시 움직임을 제어하기엔 충분했다. 제이드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주문을 영창했다.
"북풍의 바람이여! 검풍이 되어 내 적을 쳐라! 프리즌 블레이드 스톰!"
눈보라가 일어나 열기를 눌렀다. 수십 개의 얼음 칼날이 소용돌이치며 악마들에게 쇄도했다. 성광에 묶인 악마들의 피부가 얼어붙기 시작했다.
필레나도 양손을 모으며 마법을 이었다.
"북풍의 바람! 가루 되어 휘날려 권능 떨치리! 프리즌 크리스탈 스톰!"
제이드가 흩뿌린 냉기 폭풍, 그 얼음 조각이 더욱 기세를 발하며 복도 가득 눈보라를 일으켰다. 제이드의 마법에 은근슬쩍 편승해 위력을 더욱 높인 것이다. 둘 다 7서클의 빙계 마법이어서 응용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좋아, 내 차례인가?"
테스론이 쐐기를 박으려는 듯 정면으로 손을 뻗었다. 미리 영창해 둔 마법이 시동어와 함께 쏟아졌다.
"플라즈마 템페스트!"
8서클 섬광 마법, 플라즈마 템페스트가 복도를 치달리며 모든 것을 쓸어버린다. 정확히 위력을 조절한 것이라 복도에는 섬광이 닿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열기만으로 석벽이 달구어져 시뻘건 빛을 발했다.
콰콰쾅!
폭음이 울리며 순식간에 악마와 악령들이 재가 되어 흩날렸다. 처절한 절규가 복도 가득 메아리쳤다.
"으아아!"
"크어어억!"
악마의 천적이라면 분명 성직자가 1위겠지만, 바로 밑에는 마법사가 자리하고 있다. 7서클의 마법사가 둘에 8서클을 돌파한 대마법사까지 있으니 아무리 마물들이 강해도 상대가 될 리 있나?
싹 쓸린 복도를 보며 필레나가 제이드에게 감탄을 던졌다.
"역시 명불허전이네요, 제이드 공! 굉장한 마력이에요!"
칭찬임에도 불구하고 제이드의 안색은 그리 좋지 않았다. 7서클의 경지에 든 것은 그나 필레나나 마찬가지였다. 마력 자체야 제이드가 좀 더 높았지만 힘의 집중이나 관통력, 등은 오히려 그녀가 위다. 그러니 보다 출력이 적은 마법으로도 동일한 효과를 내지 않았는가?
'저런 천한 년이 저 정도 경지에까지 오르다니?'
위대한 혈통 속에서 재능을 타고 태어나 금지된 지식마저 습득해 이 경지에 오른 그였다. 필레나 '따위'가 자신과 동급이라는 것이 고까울 리 없는 것이다.
게다가 테스론을 보면 더더욱 기분이 나쁘다.
'저자는 대체 뭔데 오러 유저인 주제에 마법마저 저 경지에 이른 건가?'
오러 유저임에도 테스론은 모든 면에서 제이드를 능가하는 마법사였다. 경지도, 마력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나마 센스는 좀 부족한 것 같지만 그렇다 해도 열등감이 느껴지지 않을 수 없다.
무심코 음산한 표정이 떠올랐다.
'이놈들, 위험한데....'
제이드는 미래에 최강의 대마법사가 될 거라 칭송받는 이였다. 그런 자신에게 저 둘의 존재는 지극히 위협이다. 자기도 모르게 제이드의 눈동자에 살기가 스쳐 지나갔다.
그때 테스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오러 유저답게 살기에 민감하게 반응한 것이다. 제이드가 재빨리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는 대외적으로 온화하고 선량한 이미지를 유지하고 있었다. 저 정도 강자들 앞에서 함부로 본색을 보이면 곤란하지.
태연한 어조로 제이드가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테스론 경?"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오. 그냥 착각인가?"
테스론이 어색해하며 고개를 저었다. 제이드가 재빨리 화제를 바꿨다.
"그나저나 상당한 수준이더군요, 이 던전? 평범한 던전 탐사대였다면 초입에서 전멸했을 것 같습니다."
역시나, 기대했던 대로 테스론은 바로 표정을 바꿨다.
"이 정도 전력이니까 올 수 있었지요. 모두의 힘 덕분입니다."
방금 일은 완전히 잊은 듯해서, 제이드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이유는 모르겠지만 저자는 내게 꽤나 호의를 품고 있군.'
그 덕에 그의 흑심은 전혀 들키지 않은 듯하다.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테스론은 다시 지나친 지형을 양피지에 새기며 던전 지도를 만드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원래 이런 지도 제작은 리더가 직접 할 일은 아니었다. 보통은 따로 고용한 도적 출신 탐사자나 전사 계열이 맡곤 한다. 하지만 지금 이 일행 중 던전 탐사 경험이 있는 것은 테스론뿐이라 그가 다 할 수밖에 없었다.
안심하며 제이드가 말을 이었다.
"이곳에 들어온 지 벌써 이틀째인데... 얼마나 더 가야 할지 모르겠군요."
테스론이 대답했다.
"이 정도면 던전 탐사치고는 꽤 빠른 편입니다만?"
이곳, 몰튼 모라스 던전에 대해 테스론이 알고 있는 정보는 던전의 위치와 그 끝에 사방신의 유물이 있다는 것 정도다. 내부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것이 없다. 그러니 완전 처음 탐사하듯 하나하나 조심스레 진행해야 한다.
비록 탐사 루트는 다르다지만, 한번 다녀 보았기에 비교할 정보가 있는 레펜하르트 쪽에 비하면 아무래도 테스론 쪽은 진행이 더뎠다. 저쪽보다 이틀이나 먼저 왔는데 아직 반나절 정도밖에 앞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저쪽의 존재를 아직 눈치채지 못했으니 굳이 서두를 필요가 못 느꼈다는 이유도 있었다.
그리고 구성원의 문제에서도 테스론 쪽은 좀 불리한 부분이 있었다.
☆ ☆ ☆
"크아아아!"
"카오오오!"
괴성을 지르며 악마와 악령이 등을 돌린 채 도망쳤다. 전부 앞장서서 걷고 있는 저 두 성직자 때문이었다.
이들이 뿜어 대는 분홍색과 은색의 성광이 보일 때마다 악령들이 감히 덤비지도 못하고 알아서 어둠 속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마치 랜턴을 비출 때마다 그림자가 사라지는 것 같은 형국이었다.
실란이 마켈린을 돌아보며 감탄했다.
"진작 이럴 걸 그랬네요? 이쪽이 더 편하네."
"겁 줘서 쫓아내는 쪽이 훨씬 힘이 덜 들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마켈린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한동안은 마물들을 이계로 돌려보내며 전진한 그들이었다. 하지만 워낙 출몰하는 마물이 많다 보니 너무 힘 낭비가 심한 것이다. 다행히 실란과 마켈린의 신성력은 가공하기 그지없어 아직도 여유가 많이 남아 있다. 하지만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는데 힘을 아끼지 않는 것은 바보짓이다.
그래서 마켈린이 이 방법을 제안했다.
-굳이 전부 승천시키려 하지 말고, 성광만으로 겁줘서 접근만 막는 게 나을 것 같네.
그랜드 포지 외곽에선 여전히 악마와 악령이 자주 출몰한다. 던전 탐사 경험은 없지만, 악마와 악령들을 상대하며 지하를 조사한다는 부분만 따로 놓고 보면 마켈린도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었다.
전투를 배제하고 겁만 줘서 쫓으니 진행 속도가 월등히 빨라졌다. 마법 전력이 높은 테스론 일행에겐 불가능한 짓이었다. 마력은 신성력과 달리 이계의 마물이 가진 근원적인 공포를 흔들 수가 없으니까.
덕분에 레펜하르트 일행은 반나절 만에 몰튼 모라스 던전을 절반 이상 주파하고 있었다. 그렇게 복도와 전당을 지나쳐 한참을 내려간 후였다.
후우우우....
들끓는 공기 소리와 함께 레펜하르트 일행의 눈앞에 커다란 다리가 보였다.
밑에 용암의 강이 흐르는, 수십 미터 높이의 장대한 다리였다. 다리 주위로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공동이 있어 벽면 곳곳에 마그마의 폭포를 드리우고 있었다. 시뻘건 용암이 아래로 흐를 때마다 후끈한 열기가 다리 위를 맴돌았다. 조심스레 레펜하르트가 다른 이들을 이끌고 다리를 반쯤 지났을 때였다.
콰앙!
용암이 폭발하며 수십 개의 불덩이가 날아올랐다. 불덩이가 다리 위로 착지하며 거대한 사람의 형태로 화했다. 실란이 눈을 반짝였다.
"어, 저거?"
상당히 자주 본 불꽃 거인이었다. 바로 단하임 일족이 주로 불러 대는 단골 정령, 불의 이그나시스가 아닌가?
"멈춰라!"
"허락받지 않은 침입자들아!"
수십 개체의 이그나시스가 화염을 일렁이며 길을 막았다. 하나하나의 크기가 평소 엘프들이 불러 대던 이그나시스에 비해 세 배도 넘어 보였다.
러스와 타시드가 긴장하며 검과 도를 뽑았다. 그동안 많은 던전을 다녀 봤지만 정령을 상대해 본 적은 없었다. 과연 어느 정도 위력을 지녔을지 감이 오질 않았다.
레펜하르트도 조심하라며 등 뒤로 손짓했다.
"이건 이계의 오염 때문에 생긴 게 아니라 원래 이곳 방어 시스템의 일부야. 신성력은 통하지 않는다."
과연, 변질되지 않은 방어 시스템답게 이 이그나시스들은 다른 마물처럼 무턱대고 공격하지 않았다. 앞장 선 가장 거대한 불의 거인이 일행에게 경고했다.
"그대들은 허락의 징표가 없으니 이곳을 지날 수 없다. 만약 경고를 무시하면 마그마의 분노를 맛보게 될 것이다!"
일행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눈을 껌벅였다. 고대어로 말한 것이라서 알아들은 이는 레펜하르트밖에 없었다. 이니야가 전의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해치울까요, 레펜하르트 님?"
안 그래도 주위가 워낙 덥다 보니 불쾌지수가 하늘까지 치솟은 그녀였다. 호전적인 태도를 보이는 이니야를 향해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귀에다 뭔가를 속삭였다. 이야기를 들은 이니야가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었다.
"에, 그게 먹혀요?"
"해 보세요. 먹힐 겁니다."
자신만만한 레펜하르트의 태도에 이니야가 긴가민가하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헛기침을 하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흠흠."
이내, 이니야가 천진난만한 소녀의 표정을 한 채 맑은 목소리를 토했다.
"이그나시스, 사랑스러운 우리의 친구여!"
바람이 휘감기는 듯한 청량한 목소리였다. 이니야가 우아한 포즈로 팔을 들어 가슴을 감쌌다. 나긋나긋한 태도하며 표정이 어떤 더러움도 모르고 자라난 성처녀를 연상케 한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니야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아름답고 순결한 여인이었다.
"저를 기억하시나요?"
평소 그녀의 행태를 아는 러스며 실란, 타시드가 부르르 떨었다. 여자의 내숭은 무죄라지만 지금 이니야의 가증스러움은 족히 무기징역 정도는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용케 이그나시스들에게는 먹힌 모양이었다.
"정령의 친구여, 그대를 알아볼 수 있다."
이그나시스의 기세가 눈에 띄게 꺾였다. 이니야가 호소하듯 말을 이었다.
"기억하신다면 친구로서 간청하겠어요. 우리를 그냥 보내주실 수 없나요?"
눈을 초롱초롱 뜨며 이니야가 이그나시스를 지긋이 올려다보았다. 타시드가 못 참겠다는 듯 옆구리를 벅벅 긁었다.
이그나시스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우리의 업이 가혹하다곤 하나 우정을 저버릴 수는 없는 노릇."
"잠들겠다."
"우리는 그대들을 본 적이 없다."
불꽃의 거인들이 흐릿해지며 허공에 녹아 사라진다. 이니야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어, 정말 되네?"
완전히 불의 기운이 사라지자 그토록 천진한 표정을 짓고 있던 이니야의 얼굴이 왕창 일그러졌다.
"우에, 오글거려...."
얼마나 오글거렸는지, 하도 입술을 삐죽거려 입 돌아간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쓴웃음을 지으며 레펜하르트가 칭찬을 건넸다.
"잘했습니다, 이니야. 연기력이 좋으시군요."
전생 때는 시리스에게 시킨 짓이었는데, 기대했던 것보다 이니야가 훌륭히 '사랑스러운 정령의 친구' 역을 소화해 낸 것이다.
"어머나, 별말씀을요. 그냥 시킨 대로 했을 뿐인걸요?"
또다시 가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이니야가 애교를 부린다. 이젠 마켈린조차도 몸을 벅벅 긁기 시작했다. 비교적 저 작태를 자주 본 러스와 실란만이 그러려니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열기가 사라진 다리를 건너며 레펜하르트가 히죽 웃었다.
'역시 엘프가 있으니 편하긴 편하네.'
☆ ☆ ☆
반면 테스론 일행은 아주 불꽃 튀게 싸우고 있었다.
"물러서라, 이방인들이여."
이그나시스의 경고를 테스론 일행은 심플하게 답해 주었다.
"프로즌 오브!"
정중한 경고에 대뜸 마법을 날렸으니 그 대가가 어찌 작을쏜가?
"마그마의 분노를 맛보아라!"
수십 개체의 이그나시스가 미친 듯이 덤벼들었고, 테스론 일행도 기다렸다는 듯 맞받아쳤다.
"어디 어설픈 불의 정령 따위가!"
"제가 움직임을 막을게요!"
제이드와 필레나의 빙계 주문이 펑펑 날아가고.
"세이어여, 힘을 주소서!"
크리스틴이 성광검 메사이어에 신성검을 발동시켜 마구 휘두른다.
"알렉스! 좌측에서 협공하게!"
"알았다."
테스론의 명령에 따라 알렉스가 바로 검을 들고 움직여 이그나시스의 왼편을 사정없이 몰아쳤다. 이 이그나시스들은 엘프들이 소환한 것보다 몇 배나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어 테스론 일행들에게도 그리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오러와 마법, 신성력을 총동원하며 한참 동안이나 전투를 벌였다.
모든 이그나시스들을 물리친 뒤 테스론이 이마의 땀을 닦았다.
"이거, 꽤나 귀찮은 놈들이 많은데."
딱히 위기 상황에 처할 만큼 강한 놈들은 아니었다. 테스론 혼자 왔다거나 크리스틴, 필레나만 대동했을 때라면 꽤 고생할 법도 했겠지만, 제이드와 알렉스가 가세하니 어지간한 적도 쉽사리 처리할 수 있었다.
'특히 알렉스의 힘은 대단하군.'
무표정한 얼굴로 따라오는 알렉스를 힐끔거리며 테스론은 속으로 감탄했다.
현재 알렉스의 실력은 그가 기억하는 전생의 용사, 알렉스와 거의 차이가 없었다. 오러도 마력도 신성력의 수준도 흡사했다. 단지 그때에 비해 경험이 떨어지고 감성이 없어 전술적으로 취약할 뿐이다.
'저 정도면 정말 큰 도움이 되겠어.'
당시의 용사 알렉스가 테스론 자신이나 검성 사이러스에 비해 약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두 사람과 비교했을 때고, 객관적으로 볼 때는 그 역시 초인이었다. 아무리 일국의 왕자이고 삼위일체라는 신기한 능력을 쓴다지만 어지간한 실력으로는 대륙 최강의 5인에 끼었겠는가? 분명 마왕과의 최후 전투에 참가할 만한 강자 중 강자였다.
저 RX-13은 그때의 알렉스와 기량만으로는 필적한다. 순수한 위력만으로는 현재의 테스론보다 훨씬 우위였다.
'물론 전투가 오직 기량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니 실제로 붙어 보기 전엔 승패를 장담할 수 없겠지만....'
하여튼, 현재 테스론 일행의 힘이면 크게 험한 꼴 볼 일은 절대 없다. 그러나 악령이니 악마니 마물이니 정령이니, 나타나는 족족 물리치면서 나아가다 보니 시간이 많이 잡아먹히는 것만은 피할 수 없었다.
테스론 일행은 다리를 건너 계속 이동했다.
커다란 쇠사슬로 이어진 다리 끝에 용암 사이로 거대한 바위기둥이 건물처럼 우뚝 솟은 것이 보였다. 그 기둥 위쪽에는 족히 수십 미터에 달하는 커다란 건축물이 세워져 있었다.
마치 신전이나 회장처럼 같은 저 건축물 뒤쪽에 있는 순백의 매끈한 성벽, 그걸 보며 테스론이 눈을 반짝였다.
'아무래도 저기가 이 던전의 코어 같군.'
던전 안쪽을 맴도는 이계의 기운, 그 흐름을 느끼면 대략적인 중추의 위치와 방향 정도는 파악할 수 있다. 처음 던전을 탐사할 때 목표를 정하는 방법이다. 확실히 이 몰튼 모라스의 모든 사기는 저 성벽 뒤를 중심으로 회오리치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며 테스론이 일행들에게 말했다.
"거의 다 왔군요. 일단 안에서 좀 휴식을 취하고 마지막 관문을 공략하지요."
건물 안쪽은 텅 빈 광장이었다. 원래 용도는 알 수 없지만 넓이 수십 미터에 달하는 커다란 홀에 두꺼운 기둥만 세워져 있었다. 벽의 창문 너머로는 용암 폭포가 시뻘건 빛을 발하며 안쪽을 달구었다.
필레나가 무한의 주머니를 뒤져 막대 하나를 꺼냈다. 밀림에서 자주 애용했던 휴대용 마법 천막이었다. 비록 건물 안이라고는 해도 워낙 주위 열기가 심해 제대로 휴식하려면 마법 천막의 냉기를 빌릴 필요가 있었다.
후다닥 천막을 친 뒤 필레나가 식기를 꺼내며 물었다.
"테스론, 밥할까?"
"그래, 든든하게 먹고 움직여야지."
이번에도 크리스틴이 제일 먼저 천막 안으로 뛰어들었다. 밥 짓는 필레나 도울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크리스틴의 이기심은 천하일품이라, 제 몸 편하기 전에는 남 도와야 한다는 개념이 절대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뭐, 필레나도 그녀에겐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으니 아무 말 없이 솥부터 설치했다. 어차피 크리스틴 말고 제이드나 테스론도 돕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무뚝뚝해 보였던 알렉스가 요리를 도와주었다.
"나는 불을 피우겠다."
뭔가 선언하는 듯한 말투와 함께 알렉스가 옆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절도 있는 자세로 마법의 불을 바닥에 피웠다. 용변 보는 자세로 절도를 지킬 수 있다니, 저것도 나름 굉장한 재주다 싶어 필레나가 키득거렸다.
"필레나? 왜 웃는가?"
"아니, 아무것도 아녜요."
콧노래를 부르며 필레나는 요리를 시작했다.
아쿠아 드레인 마법을 구사, 주위의 수증기로부터 수분을 추출해 식수를 만든다. 그렇게 솥에 물을 채운 뒤 무한의 주머니에서 싱싱한 과일과 갓 딴 채소, 도축 직후의 신선한 고깃덩이를 꺼내며 그녀가 감탄했다.
"아, 이거 하나쯤은 달라면 주지 않을까? 진짜 탐나는데."
일반적으로 유통되는 무한의 주머니는 어디까지나 현세의 공간을 왜곡시켜 줄 뿐이다. 부피나 무게를 배율에 맞춰 줄여 주긴 하지만 그 내부에서도 시간은 동일하게 지나간다. 무한의 주머니에 식량을 들고 다닌다고 안에서 썩지 않는 건 아니란 소리다. 그래서 무한의 주머니를 지닌 여행자들도 이동식량은 언제나 건조식이나, 마법이 걸린 장기 보존식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은의 현자가 준 이 무한의 주머니는 달랐다. 아예 강렬한 물질 동결의 권능이 담겨 있어 내용물을 넣었던 상태 그대로 반영구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요리가 취미인 필레나에게는 진짜, 그까짓 플레스텍스 슈트보다 100배는 더 탐나는 마도구였다.
'이게 있으면 언제나 테스론에게 맛있는 거 만들어 줄 수 있을 텐데!'
물론 그녀도 큰 기대하고 던진 질문은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테스론이 단호하게 대꾸했다.
"반납해야 돼."
"알고 있어, 흥!"
솥에서 스튜가 보글보글 끓기 시작했다. 따로 냄비를 마련해 필레나는 미리 반죽한 밀가루로 빵도 구웠다. 신선한 과일을 썰어 빵에 끼워 넣고 꿀을 바른다. 얼려 놓은 자고새 고기를 해동해 불에 얹으니 이내 고소한 냄새가 사방에 진동했다.
테스론이 포크를 들고 솥 옆으로 와 앉았다.
"음, 좋은 냄새."
알렉스도 나이프를 들고 무표정하게 중얼거렸다.
"영양 보충이 필요하다."
손끝 하나 돕지 않은 주제에 제이드와 크리스틴도 어슬렁어슬렁 천막에서 기어 나왔다. 스튜를 국자로 휘저으며 필레나가 웃었다.
"다들 식사하세요."
그렇게 막 스튜를 나눠 주려던 참이었다. 그들이 들어왔던 건물 반대편 입구, 그쪽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다.
"말했잖아? 여기서부터는 아는 길이라고. 이제 곧 쉴 만한 곳이 나올 거야."
"거긴 좀 시원해요, 레펜 씨?"
"쉴 만하다고 했지 시원하다곤 안 했다, 실란."
"으으, 마법 좀 쓰면 안 되나요?"
"알았어, 자리 풀면 적당히 결계 하나쯤 쳐 줄게."
"좋죠, 그런데 이거 무슨 냄새지? 되게 맛있는 냄새가 나네?"
곧이어 우락부락한 거구의 사내가 한 무리의 일행을 이끌고 홀 안으로 들어섰다. 홀 안에 가로막는 벽은 하나 없이, 바로 그쪽 일행과 테스론 일행이 눈을 마주쳤다.
"엥?"
"어라?"
양쪽이 저마다 멍한 표정을 지었다. 레펜하르트는 멀뚱히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너무도 낯익은 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있었다.
"...테스론?"
숟가락을 든 채 테스론도 눈을 멀뚱하게 껌벅였다.
"...레펜하르트?"
제41장 사방신의 유물
1
두 일행은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았다.
평소처럼 긴장하고 있었다면 양쪽 모두 오러 유저가 있으니 기감으로 상대의 존재를 눈치챘으리라. 하지만 테스론 일행은 밥하느라 정신없었고, 레펜하르트 일행도 드디어 아는 곳이 나왔다는 기쁨 때문에 완전히 긴장을 푼 상태였다.
덕분에 전혀 예측 못 한 상황에서 두 일행이 조우하게 되었다. 너무 뜬금없다보니 순간 경계심조차도 들지 않았다.
쪼그려 앉아 스튜에 국자를 넣은 채 필레나가 눈을 깜빡였다.
"...에?"
맹한 얼굴로 실란이 중얼거렸다.
"어, 저 사람들...."
두 일행 모두 서로를 바라보며 눈만 껌뻑껌뻑....
뒤늦게 테스론이 기겁하며 몸을 일으켰다.
"레펜하르트!"
제이드며 크리스틴 등, 다른 이들도 허겁지겁 일어나 경계심을 높였다. 국자를 든 채 필레나가 당황해 테스론을 불렀다.
"테, 테스론?"
테스론이 포크를 던지고 검을 꺼냈다.
"레펜하르트! 네놈이 어떻게 여기에?"
"...다시 만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군, 테스론. 용케도 멀쩡하구나."
"안타레스 백국에 처박혀 있을 줄 알았는데 이상한 곳에서 만나게 되었군, 레펜하르트? 이곳에는 대체 무슨 용무지?"
"내가 할 소리다, 테스론. 왜 네놈이 여기 있나?"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교차했다. 싸늘한 기운이 두 일행 사이로 피어났다. 잠시 주저하다 테스론이 대답했다.
"던전 탐사하는데 무슨 이유가 있겠나? 당연히 쓸 만한 아티팩트를 찾을 수 있을까 싶어 왔지. 네놈을 죽이기 위해서!"
사실은 사방신의 유물을 노리고 온 것이지만 굳이 자신의 정보를 적에게 알릴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러는 네놈은 왜 여기 있지, 레펜하르트?"
"나 역시 던전 탐사가로서 탐사를 왔을 뿐이지."
레펜하르트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테스론이 왜 이곳에 있는지 뻔히 짐작이 갔다. 전생에 그는, 사방신의 유물을 찾고 나서 굳이 몰튼 모라스 던전의 위치를 기밀로 하지 않았다. 대놓고 마탑에 공표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수하들에겐 제법 정보를 흘렸다. 전생의 권왕 테스론이라면 그 정도 정보쯤은 입수했겠지.
눈을 찌푸리며 레펜하르트가 테스론을 노려보았다.
'의뭉스러운 놈, 보나 마나 사방신의 유물 찾으러 왔으면서!'
테스론도 긴장하며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역시 마왕도 사방신의 유물을 찾으러 온 거로군.'
두 사람의 살기가 점점 짙어지자 다른 일행들도 긴장하며 전투태세를 취했다. 이니야와 러스, 타시드가 검을 뽑고 티티마도 양손에 단검을 쥔다. 실란도 기도를 올릴 준비를 했다. 마켈린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저 청년이 테스론이군... 원래 레펜하르트 님의...."
다른 이들과 달리 티티마와 마켈린은 저들을 처음 본다. 티티마가 의아해했다.
"응? 레펜하르트 님의 뭐요?"
"아니, 아무것도 아닐세."
전신의 기운을 서서히 끌어 올리며 레펜하르트가 테스론 일행의 면면을 훑어보았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역시 소꿉친구 필레나였다.
'그때는 어이없게 놓쳤었지. 쯧, 늙으면 어릴 적의 소꿉친구가 그리도 반갑다더니....'
경계를 굳히며 레펜하르트는 다른 일행도 살펴보았다. 보고 있자니 참 구면들뿐이었다. 필레나에 크리스틴, 제이드에 알렉스까지....
'엥? 알렉스?'
기겁하며 레펜하르트는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말도 안 된다. 어떻게 용사 알렉스가 이곳에? 그냥 얼굴만 닮은 자인가 싶었는데, 그렇게 보기엔 너무 똑같이 생겼다. 풍기는 분위기도 거의 흡사하다!
"저놈이 어떻게...."
당황하는 레펜하르트를 보며 테스론은 속으로 웃었다. 자신도 놀랐으니 그가 안 놀랄 리가 없지. 레펜하르트의 집중력이 일순 흔들린 걸 보며 테스론이 일행 전원에게 메시지 마법을 발동했다.
'저자가 노리는 것은 우리와 같소! 먼저 손에 넣어야 합니다!'
바로 알아듣고 필레나가 메시지를 돌려보냈다.
'먼저 가, 테스론! 여기는 우리가 막을 테니까!'
의사가 통일되자 바로 테스론이 마법을 발동했다.
"스톰 라이트!"
눈부신 빛이 광풍을 동반하며 홀 안에 몰아쳤다. 레펜하르트 일행이 당황해 뒤로 물러서는 찰나, 테스론이 대뜸 몸을 날렸다. 홀 반대편의 위치한, 석벽으로 향하는 출구를 향해서였다.
"윽!"
그제야 상황을 눈치챈 레펜하르트가 다급하게 뒤쫓으려 참이었다. 알렉스가 블레이드 오러를 휘두르며 그 앞을 막았다.
"못 간다!"
청람색 블레이드 오러가 길게 장막을 드리우며 파괴의 힘을 떨쳤다. 바닥이 파헤쳐지며 돌가루가 튀었다. 레펜하르트의 움직임이 일순 멎었다. 그때 러스와 타시드가 각자 푸른색과 청록색 오러를 휘두르며 알렉스에게 쇄도했다.
"어림없다!"
"은인이여! 저자를 쫓으시오!"
눈치 빠르기는 레펜하르트 일행 쪽도 만만치 않다. 러스와 타시드가 알렉스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니야가 바로 북해의 숨결을 발동했다.
사아아아!
냉기의 안개가 홀 바닥을 타고 흘렀다. 안개가 저 멀리 뛰어가는 테스론을 덮치려는 찰나, 제이드가 바로 마법을 발동시켜 냉기를 억제했다. 레이피어를 뽑아 들고 이니야가 대뜸 제이드에게 달려가 블레이드 오러를 날렸다. 은색의 검광이 제이드를 직격하는 순간이었다.
"블링크!"
외침과 함께 제이드의 모습이 사라지며 20미터 저편에 나타났다. 이니야가 눈을 크게 떴다.
'이건 시리스 양의?'
그동안 스펠 영창을 끝낸 필레나가 일행 전체에게 광역 마법을 쏘아 댔다.
"매스 포톤 드라이버!"
수십 줄기 빛의 섬광이 머리위로 쏟아진다. 마켈린이 알 포트의 신명神名을 외치며 일행 전원에게 강력한 항마의 장벽을 씌워 주었다. 섬광이 광막에 부딪쳐 폭발했다. 메사이어를 휘두르며 크리스틴이 마켈린에게 덤벼들었다.
"죽어라! 늙은 난쟁이 놈!"
트롤 주술로 신체를 강화한 티티마가 단검을 들고 크리스틴을 가로막았다. 실란이 티티마를 향해 성호를 그으며 온갖 신성 주문을 걸어 주었다.
순식간에 난전이 벌어졌다. 블레이드 오러가 연신 파문을 뿜고 마법이 난무하며 성광이 회오리쳐 홀 안을 가득 메웠다.
그 틈새로 레펜하르트는 몸을 던졌다. 어서 선수 친 테스론을 쫓아가야 했다.
석벽 쪽 출구로 몸을 던지며 그가 소리쳤다.
"뒤를 부탁한다!"
☆ ☆ ☆
석벽 안쪽은 사방 4미터 정도의 통로로 이루어져 있었다. 연신 바닥을 박차며 레펜하르트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복도를 주파했다. 잠시 후, 저 멀리서 달리고 있는 테스론의 뒷모습이 보였다.
"이놈! 테스론!"
고함을 터트리며 레펜하르트가 바로 마법을 던졌다. 십여 개의 끈끈한 마력의 거미줄을 생성되어 테스론의 발치로 날아갔다.
"벌써 쫓아왔나?"
달리면서 테스론이 스펠 영창을 시작했다. 정신 고양을 이루고 나니 마법 집중력도 한층 높아져 이젠 무빙 캐스팅도 가능한 수준이었다. 영창을 끝마친 테스론이 등 뒤로 손을 뻗었다.
"매스 디스펠!"
마력의 거미줄이 이내 해제 주문에 의해 녹아내렸다. 역시 저급한 수준의 마법이라 바로 해제가 되어 버린다. 답답해진 레펜하르트가 좀 더 고위 주문을 준비했다.
"델 라드 피레아, 솟구치는 마력의 넝쿨이여, 내 적을 감싸라! 제로 시드 인탱글!"
테스론처럼 무빙 캐스팅이 아니라 이동하는 발걸음 자체를 수인, 소매틱 삼아 캐스팅을 하는 것이었다. 굳이 따지면 족인이랄까?
달리는 테스론의 앞으로 빛이 발하며 수십 줄기의 촉수가 뻗어 나왔다. 저거면 먹히겠지 싶어 레펜하르트가 히죽 웃을 때였다.
"코어 로드 디스펠!"
타이밍 좋게 테스론이 고위 해제 주문을 날려 촉수들을 싹 날렸다. 보나마나 다음 마법이 날아올 걸 짐작하고 미리 영창 중이었던 것이다.
"엉? 8서클?"
저자식이 어느새 8서클에 다다랐단 말인가? 이쪽은 아직 7서클의 벽도 못 넘었는데!
'아니, 생각해 보니 당연하군. 저놈이 8서클을 돌파했으니 이곳에 올 수 있었겠지.'
역시 마력 펑펑 쌓이는 자신의 몸다웠다. 이를 갈며 레펜하르트가 더더욱 속도를 높였다.
"내 머리 가져가서 신 나게 쓰는 모양인데, 나도 네 녀석 몸 신 나게 쓰고 있거든!"
본격적으로 힘을 쓰니 점점 거리가 줄어든다. 테스론이 혀를 찼다.
"쳇, 역시 신체 능력 차이가 너무 나."
달리는 그대로 몸을 뒤로 날리며 테스론이 블레이드 오러를 뻗었다. 싯누런 오러가 회오리의 창이 되어 날아든다. 스파이럴 가드를 응용한 테스론만의 오러 스킬, 스파이럴 블레이드였다.
"흥!"
레펜하르트는 코웃음을 쳤다. 굳이 스피드를 줄일 것도 없었다. 그냥 스파이럴 가드로 튕겨 내면 된다!
폭주하는 황소처럼 오러를 튕겨 내며 레펜하르트가 계속 접근해 왔다. 테스론이 다급하게 마법을 이었다.
"플레임 캐논 & 프리즌 빔 & 소닉 버스터!"
세 종류 마법이 동시에 발동되어 레펜하르트에게 날아들었다. 하나하나가 6서클에 해당하는 강력한 주문이었다. 레펜하르트가 조금 놀랐다.
"트리플 캐스팅인가?"
그동안 마법의 경지를 한층 높인 모양이다. 새삼 현재의 자신과 테스론의 두뇌 차이가 실감이 났다.
콰콰콰콰!
좁은 복도를 가득 메우며, 화염의 광탄과 냉기의 섬광, 사물을 박살 내는 강렬한 초음파의 일격이 일제히 쏟아진다. 스파이럴 가드로 튕길 수야 있겠지만, 저 정도라면 아무래도 속도가 늦춰질 수밖에 없다.
스파이럴 가드를 펼친 채 레펜하르트가 빠르게 대응 마법을 준비했다.
"디스펠 & 인챈트 플레임!"
해제 마법과 폭염권과 동시에 준비하며 레펜하르트가 양 주먹을 뻗었다. 해제 마법으로 화염의 광탄을 해소하며 동시에 폭염권으로 냉기의 섬광을 녹여 버린다. 소닉 버스터는 스파이럴 가드로 그냥 때워 버렸다.
위력을 분산시켜 방어하며 레펜하르트는 조금도 속력이 떨어지지 않은 채 테스론의 뒤를 바짝 쫓았다. 테스론이 기가 차 중얼거렸다.
"맙소사, 더블 캐스팅?"
비록 적이지만 새삼 감탄이 나왔다.
'내 머리로 저게 돼? 역시 인간의 잠재력은 무궁무진한가?'
뭐, 사실 잠재력이 무궁무진하다기보다는 그만큼 레펜하르트가 억지로 개조했다는 쪽이 옳겠다.
엘류시온의 목소리로 열심히 수행한 덕에 분명 레펜하르트의 두뇌는 엄청나게 발달했다. 심지어 더블 캐스팅이 될 정도로.
하도 레펜하르트가 자기 원래 머리와 비교해서 쓸모없다고 타박하는데, 사실 현재 '테스론 헤드'면 충분히 천재 축에 드는 것이다. 원 테스론의 두뇌에 비하면 원숭이가 인간이 된 수준이라고 해도 무방할 터였다.
'슬픈 점은,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단련이 되어서 그나마 이 정도라는 것이지만.'
원래 테스론의 머리도 그럭저럭 일반인 수준은 되었지만 마법사가 되려면 일반인이 보기엔 천재 수준이어야 가능하다. 하물며 그 마법사들조차도 기겁한 원 레펜하르트의 두뇌는 오죽할까?
여전히 그의 영혼이 담은 지식을 소화하기엔 한참 모자란 수준인 것이다. 앞으로 몇십 년을 계속 이렇게 단련하면 결국은 어느 정도 예전의 능력을 되찾겠지만....
'고작 몇 년으론 역시 무리지.'
속으로 구시렁대며 레펜하르트는 열심히 테스론을 추적했다. 쉴 새 없이 이동하며 연신 오러와 마법을 서로에게 퍼부어 댄다. 두 사람이 지나갈 때마다 복도 여기저기서 악마며 악령들이 출몰했다.
"크아아! 이곳은...."
"산 자여... 죽여 주...."
그럴듯하게 나타나서 뭔가 그럴듯한 말을 하려 하긴 했는데, 두 사람의 스피드가 너무 빨랐다. 막 출몰해 뭘 해 보기도 전에 레펜하르트와 테스론이 휙휙 지나가버린다. 닭 쫒던 개꼴이 된 악마와 악령들이 뒤늦게 포효하며 두 사람을 쫓아갔다.
물론 쫓아가 봤자 좋은 꼴 볼 일은 없었다.
"에잉! 귀찮게! 기격포!"
뒤쫓아 오는 놈들은 레펜하르트의 기격포 맞고 펑펑 날아갔고.
"하찮은 놈들이 감히! 스파이럴 블레이드!"
앞에서 막는 놈들은 테스론의 블레이드 오러에 척척 썰려갔다.
그렇게 주위의 악령들을 날파리 취급하며 두 사람은 계속 복도를 따라 추격전을 벌였다.
"어디까지 도망칠 셈이냐, 테스론!"
"도망치다니? 어디까지나 반대쪽으로 전진하고 있는 것뿐이다!"
그렇게 한참을 내달린 후였다. 드디어 복도가 끝나고 거대한 공간이 나왔다. 새하얀 벽면으로 사방이 뒤덮인, 높이만 족히 수십 미터에 달하는 넓은 전당이었다.
틈새 여기저기서 용암이 흘러내리고 바닥 일부는 무너져 밑으로 흐르는 마그마의 열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그 끝에 위치한 것은 용도를 알 수 없는 커다란 조형물이었다. 파이프 오르간과 테이블, 왕궁의 옥좌를 뒤섞으면 저런 형태가 아닐까 싶다.
전당에 들어서자 테스론이 눈을 빛내며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레펜하르트도 속도를 늦췄다.
"흥! 더 이상 도망치는 건 관뒀나?"
"아니, 이 정도 공간이면 굳이 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뿐."
테스론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레펜하르트도 더 이상 거리를 좁히지 않고 경각심을 높였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위험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 8서클까지 돌파한 모양인데, 그래 봤자 권마합신을 터득한 그의 적수는 못 된다.
"아다만드릴 슈트라 했던가? 그것도 박살 났는데 뭐로 상대할 셈이지?"
"확실히 그 아티팩트는 더 이상 없지. 하지만!"
테스론이 갑자기 품에서 작은 보석 하나를 꺼내 허공에 던졌다.
"소환!"
빛이 터지며 복잡한 마법진이 허공에 그려졌다. 이내 육중한 황금빛 덩어리가 마법진을 통해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엔 또 아다만드릴 슈트인가 했는데, 그건 아니었다. 전장 3미터 정도의, 웅크린 마수를 조각한 듯한 괴이한 형태였다.
레펜하르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저건 또 뭐야?'
기물도 기물이지만, 저 소환 방식이 더 흥미롭다. 공간 이동? 아니다. 멀리서 이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저 보석을 매개체로 공간을 접어 아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 사물을 넣는 방식이다.
아공간을 다루다니, 은의 시대 유물 중에서도 극히 보기 드문 권능이다.
'저런 기물이 또 있다니!'
그렇게 잠깐 마법사의 호기심에 정신이 팔린 사이, 테스론이 조각상에 손을 뻗었다. 아차 싶어 레펜하르트가 주먹을 들었다.
"그렇게 놔둘 것 같으냐!"
뭔지는 모르겠지만 분위기 보아하니 아다만드릴 슈트와 비슷한 계통일 터였다. 그렇다면 장착하게 놔두는 것은 바보짓이다. 레펜하르트가 바로 기격탄을 날려 허공의 조각상을 후려갈겼다.
꽝!
조각상이 그대로 밀려나가 저만치 바닥을 나뒹굴었다. 텅텅 깡통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히죽 웃으며 레펜하르트가 테스론에게 덤벼들었다.
"아무리 강력한 아티팩트라도 입지 않으면 무용지물!"
폭풍처럼 치달리며 바로 펀치를 내뻗는다. 테스론이 검을 던지고 양손을 가슴 앞에 모았다. 오러 실드를 만들고 그 위에 강력한 마법의 역장을 드리운다!
"포스 배리어!"
황금빛 오러가 분출하며 테스론의 광막을 두들겼다. 광막이 이내 깨지며 테스론의 몸이 뒤로 날려 갔다. 레펜하르트가 후속타를 위해 재차 몸을 날리려던 순간이었다.
콰앙!
저만치 날아가 뒹굴던 조각상이 갑자기 폭염을 분출하며 날아올랐다. 제 멋대로 허공을 날더니 대뜸 레펜하르트를 향해 수십 개의 섬광을 뿜어 댔다.
"엥?"
아무런 조짐도 없이 저 혼자서 움직였다? 당황한 레펜하르트가 스파이럴 가드로 공격을 막았다. 폭발과 함께 그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그동안 조각상이 어느새 테스론에게 근접했다.
날려간 테스론이 차갑게 웃으며 사지를 활짝 펼쳤다.
"와라! 드래고닉 발러 아머!"
위이잉!
금속음이 울리며 조각상이 일순 산산이 분해됐다. 흩어진 조각상의 파편이 스스로 테스론의 전신으로 날아가 달라붙었다. 조각끼리 서로 연결되고 이음새를 메우며 거대한 형상으로 화했다.
충격에서 벗어난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들었다.
이미 그 자리에 테스론은 없었다.
있는 것은 전장 4미터가 넘는 거대한 금속 거체. 전신이 금빛으로 빛나는 괴수의 형태뿐.
바닥을 내디딘 네 다리에 섬뜩한 발톱이 빛을 발한다. 커다란 동체엔 황금색 껍질이 두껍게 뒤덮여 있다. 긴 목 위에 달린 것은 뱀의 머리, 하지만 양쪽으로 난 커다란 뿔은 그것이 단순한 뱀이 아님을 보여 준다.
오지의 유명한 마물, 드레이크와 같은 형상이었다. 하지만 드레이크와 확연히 다른 점이 있었으니 바로 등 뒤로 돋아난 두 장의 커다란 날개였다. 박쥐 날개를 연상케 하는 두 금속 날개가 활짝 펼쳐졌다.
"크아아아!"
전설 속의 마수, 드래곤의 형상이 레펜하르트의 눈앞에서 포효하고 있었다.
☆ ☆ ☆
거대한 황금의 드래곤이 된 테스론이 높은 곳에서 두 눈을 반짝였다.
"자, 레펜하르트! 이제 네놈도 끝이다!"
레펜하르트는 놀란 눈으로 테스론을 올려다보았다. 전설 속 드래곤처럼 몇 백 미터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크기는 아니었지만, 확실히 저 4미터가 넘는 거체는 위압감이 있었다. 신장 2미터의 그에게조차도.
'저건 또 어디서 구한 거야? 진짜 신기하네.'
두렵다는 듯 레펜하르트가 질문했다.
"...설마 네놈이 방금 크아아아~라고 울부짖은 건 아니겠지, 테스론? 짐승 갑옷 입었다고 머릿속도 짐승이 됐냐?"
드래곤의 이빨 사이로 당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이건 그냥 드래고닉 아머 시동 소리다! 내가 낸 소리가 아니라고!"
이를 갈며 테스론이 움직였다. 여기서 마왕의 심리전에 휘말리면 자신만 손해였다. 드래곤이 입을 벌리더니 이내 불길을 토해 냈다.
콰콰콰콰!
시뻘건 화염이 일직선으로 레펜하르트에게 날아갔다. 살짝 옆으로 뛰어 간단히 공격을 피하며 레펜하르트도 몸을 날렸다. 허공에서 그가 핀잔을 던졌다.
"이 유치한 공격은 뭐냐?"
위력은 둘째 치고, 그냥 직선으로 불길을 내뿜을 뿐이니 피하기가 너무 쉬운 것이다. 레펜하르트가 바로 드래곤의 동체에 앞차기를 꽂아 넣었다.
콰앙!
폭발이 일어나며 레펜하르트가 뒤로 튕겨 나갔다. 그 순간 테스론이 오러 가드를 펼쳐 타격 부위를 감싼 것이었다. 스파이럴 가드는 아니었는데도 간단히 레펜하르트의 킥이 막혔다.
"아다만드릴 슈트보다 더 단단하군!"
역시 같은 재질이더라도 구조상 인간 형체인 아다만드릴 슈트보다 저 짐승 형태가 더 튼튼하다. 테스론이 바로 반격에 들어갔다.
"죽어라! 마왕!"
앞발을 휘두르며 테스론이 레펜하르트의 좌우를 후려갈겼다. 두 팔을 들어 공격을 막자 이내 꼬리를 휘둘러 추가타를 날린다. 튼튼한 육체를 믿고 레펜하르트가 그대로 공격을 받았다. 꼬리가 가슴을 때리며 그의 몸이 뒤로 주르륵 밀렸다.
"크윽!"
강철 같은 육체인데도 충격이 있다. 살짝 신음을 흘리며 레펜하르트가 바로 몸을 날렸다. 낮은 자세로 빠르게 파고들며 긴 목을 향해 강렬한 훅을 날린다!
"제로 임팩트!"
드래곤을 관통해 내부의 테스론에게 충격을 가할 셈이었다. 하지만 아다만드릴 슈트처럼 이 드래고닉 아머도 충격 흡수 능력이 있는 모양인지, 타격이 갑옷 전체로 퍼져나가며 드래곤의 거체가 흔들렸다.
"소용없다! 마왕!"
"흠, 기본은 아다만드릴 슈트랑 비슷하군. 갑옷 상대하는 감각은 안 되나?"
냉철히 상대를 분석하며 레펜하르트가 공격을 이었다.
"타아아앗!"
연달아 좌우 훅과 스트레이트 펀치를 연계하며 폭풍처럼 돌진한다.
텅텅텅텅!
덩치에 비해 속은 꽤나 비었는지 쇳소리가 연달아 울려 퍼졌다. 테스론이 허둥지둥 앞발을 휘두르고 꼬리를 날리며 날갯짓을 했다. 사방에서 인간의 것이 아닌 공격이 들어왔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쉽게 그 모든 공격을 계속 피하며 반격했다.
"뭐냐? 이 쓸모없는 아티팩트는?"
공격이 너무 단순하다. 이래서야 그냥 보통 골렘과 다른 점이 하나도 없지 않은가? 도대체 왜 굳이 안에 기어들어 간 거야?
"차라리 그 아다만드릴 슈트가 더 강했다! 테스론!"
아다만드릴 슈트를 걸친 테스론은 확실히 대단했다. 왕년의 힘을 모두 되찾은 정도는 아니었지만 분명 짐 언브레이커블의 모든 기술을 구사하며 강렬한 위력을 보였다.
반면 이 드래곤 형태는 아무 짝에 쓸모가 없는 것이다!
겉보기엔 강해 보이고 위압적일지 모르겠는데, 그래 봤자 네 발 짐승에 날개 달아 놓은 형태다. 제일 중요한 테스론의 경험, 짐 언브레이커블의 체술은 하나도 쓸 수가 없다. 그저 아티팩트의 힘과 내구도만 믿고 억지로 휘둘러 대는데 그런 단순한 공격에 맞기엔 현재 레펜하르트의 체술 수준이 너무 높았다.
"연환 기격탄!"
꼬리치기를 피해 날아오른 레펜하르트가 드래곤의 전신에 오러를 쏘아 댔다. 공격을 채 피하지 못하고 모조리 맞은 채 드래곤이 뒤로 주르륵 밀렸다. 테스론이 신음을 터트렸다.
"크, 크윽!"
신체 형태가 다르니 아무리 일체화되었다 해도 스파이럴 가드를 쓸 수가 없다. 감각이 너무 다른 것이다. 밀린 테스론을 보며 레펜하르트가 비아냥을 던졌다.
"쯧쯧, 그냥 아다만드릴 슈트나 들고 오지 그랬나?"
드래곤이 고개를 들었다. 날카로운 이빨 사이로 으드득 인간이 이 가는 음향이 흘러나왔다.
'젠장! 누군 몰라서 이러는 줄 아나? 있었으면 나도 그거 들고 왔지!'
아다만드릴 슈트를 대신해 은의 수호자가 내린 기물, 드래고닉 발러 아머.
이는 아다만드릴 슈트처럼 고대에서 연구한 장착형 골렘 중 하나였다. 기본적으론 아다만드릴 슈트와 같은 계통의 물건이다. 솔직히 테스론도 은의 시대 고대인이 왜 이 따위 장착형 골렘을 만들었는지는 이해 못 하고 있었다.
'아니, 개한테 입힐 것도 아니고 사람 쓸 물건인데 뭐하러 사족 보행체를 만든 거야? 그 재료로 아다만드릴 슈트나 하나 더 만들지!'
여기서 일반인과 엔지니어의 감각 차이가 나온다. 일반인은 쓸 만한 물건 하나 만들면 그거나 계속 만들면 된다고 여기지만 엔지니어의 마인드는 다르다. 괜찮은 거 하나 만들면 그걸 응용해서 어떻게든 새로운 걸 만들고 싶어 하는 것이다. 고대나 지금이나 엔지니어의 사고방식은 그리 큰 변화가 없다.
어쨌거나, 아쉽게도 은의 현자는 개발자가 아닌 수탐자다. 입맛대로 적합한 무구가 척척 나오는 게 아니란 소리다. 아다만드릴 슈트는 하나뿐이라 날아간 시점에서 끝이었다. 그래서 대신 비슷한 무구인 이 드래고닉 발러 아머를 받은 것인데....
"이런 쓸모없는 아티팩트를 믿은 거였나, 테스론?"
의기양양하게 호통을 치며 레펜하르트는 계속 테스론을 공격했다. 온갖 펀치와 킥, 오러와 마법이 화려하게 드래곤 형태의 테스론을 두들겨 댔다. 움직임이 둔하니 때리는 족족 다 맞아 준다. 참 신 나는 샌드백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워낙 단단하다 보니 아무리 공격을 퍼부어도 갑옷에 금 정도나 갈 뿐 치명타를 가하긴 힘들다.
'그래도 반격당할 걱정이 없으니 두드리다 보면 부서지겠지?'
레펜하르트는 느긋하게 계속 연타를 날렸다. 테스론은 여전히 드래곤 형태로 허우적대고 있었다. 기다란 주둥이 사이로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크윽! 이거 이렇게 하는 거였는데? 그때 한번 연습해 봤는데?"
레펜하르트는 어리둥절했다.
'뭐 하는 거야, 도대체?'
아까부터 계속 저런 식으로 중얼대는데 이해를 못 하겠다.
그러던 중이었다. 갑자기 테스론이 쾌재를 외쳤다.
"아, 이거군!"
"응?"
휘이이잉!
갑자기 드래곤이 크게 날갯짓하며 광풍을 일으켰다. 단순한 바람이 아니라 오러가 깃든 것이라 레펜하르트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싯누런 오러 바람에서 잽싸게 그가 자세를 가다듬는 동안이었다.
위이이잉!
또다시 기계음이 들렸다. 동시에 드래곤이 일어섰다!
개나 고양이가 먹이 받아먹듯이 뒷다리로 땅을 디딘 채 상체를 들어 올린 것이다. 또한 갑옷 전체가 기이하게 뒤틀리고 부품 여기저기가 변환하며 형태 전체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뭉툭하던 몸체가 압축되며 가늘어진다. 앞다리가 긴 팔로 변하며 손가락이 길어져 인간의 손 형태로 변한다. 앞으로 늘어졌던 목이 척추를 따라 꼿꼿이 선다. 엉덩이 쪽이 들어가고 뒷다리가 직선으로 뻗어 전신을 받친다.
레펜하르트가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변신했어?"
이미 더 이상 테스론은 드래곤의 모습이 아니었다. 인간과 드래곤을 합친 듯한, 용인의 형태가 되었다.
테스론이 소리쳤다.
"됐다! 드라칸 모드!"
신장이 3미터가 넘는 거대한 용인이 되어, 테스론이 자세를 취했다. 짐 언브레이커블의 기본자세로 그가 주먹을 내밀었다.
"스파이럴 가드!"
우우웅!
용인의 전신으로 싯누런 오러가 회오리쳤다.
"좋아! 되는군!"
테스론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껄껄 웃었다.
"후후, 잠깐 기분 좋았겠지, 레펜하르트? 하지만 장난은 여기까지다!"
레펜하르트가 허탈하게 웃었다.
"뭐냐, 그건? 애들 장난감으로 주면 참 좋아하겠군."
하지만 그의 안색은 아까처럼 여유롭지 않았다. 테스론이 인간 형태가 되면 더 이상 안심할 수가 없다. 아다만드릴 슈트 상태처럼 본신의 힘을 모조리 쓸 수 있다!
긴장하며 레펜하르트가 자세를 잡았다. 땅을 박차며 테스론이 앞으로 나섰다.
"네놈은 그 장난감에 죽는 거다! 레펜하르트!"
오러를 가득 머금은 금속의 펀치가 섬광처럼 날아들었다.
"타아아앗!"
레펜하르트도 기합을 터트리며 마주 스트레이트를 날렸다. 펀치와 펀치가 허공에서 맞붙으며 장대한 오러 파문이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2
두 줄기 섬광이 공간을 휘감았다. 금색과 진황색 오러가 연달아 충돌해 파괴의 빛을 떨쳤다. 팔뚝이 서로 얽힌 채 레펜하르트와 용인 형태의 테스론이 허공에서 맞붙었다. 오러를 이글거리며 레펜하르트가 외쳤다.
"에레카카 부족의 참상이 네놈 짓이었구나, 테스론!"
"에레카카? 아, 그 흉악한 트롤 놈들 이야기인가?"
분노하며 레펜하르트가 킥을 날리려 했다. 무릎을 들어 올려 상대의 시야 뒤쪽으로 올려치는 하이 킥이었다.
"평화롭게 살던 이들에게 무슨 참혹한 짓을!"
서로의 팔뚝이 얽혀 있으니 이내 테스론도 레펜하르트의 움직임을 눈치챘다.
"흥!"
테스론이 바로 레펜하르트의 정강이를 걷어차 공격을 막았다. 일종의 스톱 킥이다. 보디블로를 날리며 그가 비아냥거렸다.
"몬스터 떼를 발견했는데 그럼 처리하지, 안 하겠나?"
황금빛 금속 장갑이 복부를 강타했다. 복근에 힘을 줘 레펜하르트가 보디 블로를 버텨 냈다. 하지만 워낙 괴력의 펀치다 보니 몸이 뒤로 주르륵 밀렸다.
"크윽!"
간신히 자세를 바로잡으며 레펜하르트는 애써 머리를 식혔다. 흥분해 날뛰는 것은 전투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재차 주먹을 겨눈 채 레펜하르트가 문득 물었다.
"용케도 그 부상을 수습했더군, 테스론. 교황급 성직자라도 만났나 보지?"
잠깐 멈칫하더니 테스론이 말을 돌렸다.
"흥! 네놈에게 내 사정을 말해 줄 필요는 없지!"
레펜하르트의 눈동자에 호기심의 감정이 살짝 떠올랐다.
'흐음?'
당시 권마합신 캘러미티 혼을 맞은 테스론의 부상은 자연적으로는 완치가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아무리 요양을 하더라도 전신불수가 되었을 심각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건 신관의 힘을 빌리면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잔여 오러 때문에 바로 낫게 하진 못했겠지만 시간을 들여 차분히 치유술을 받으면 충분히 완치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어째 신관이 아닌 다른 힘을 빌렸다는 뉘앙스인데?'
강력한 신관은 드물지만, 그렇다고 없지도 않다. 굳이 숨길 이유가 없는 것이다.
'역시 뭔가 있나? 제이드가 두 발 멀쩡한 걸 보고 의심을 하긴 했지만.'
그때 기합을 터트리며 테스론이 노도와 같은 공격을 이었다.
"죽어라, 마왕!"
3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금속 용인이 좌우 스트레이트를 뻗어 낸다. 싯누런 오러를 머금은 권격이 폭풍처럼 쏟아진다. 근접전이라 스파이럴 가드는 소용이 없었다. 서로 스파이럴 가드를 구사하니 발동해 봤자 바로 테스론에 의해 파해되어 버린다.
열심히 양손을 놀려 레펜하르트는 펀치를 흘렸다. 그렇게 공방을 나누며 은근슬쩍 테스론을 떠보았다.
"...제이드와 함께 왔더군?"
메탈 드라칸의 이빨 사이로 시큰둥한 대꾸가 돌아왔다.
"전생의 친구를 다시 만난 것이 뭐가 이상한가? 네놈도 마찬가지거늘!"
확실히 레펜하르트도 예전의 동료 열심히 모으고 다녔으니 그리 이상할 것은 없다. 검성 사이러스는 레펜하르트가 선수 쳤고, 성녀 엘린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으니 그나마 남아 있는 전생의 동료, 빛의 마도사 제이드를 찾을 수밖에 없었겠지.
하지만 역시 말투에서 뭔가 숨기는 기색이 느껴진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레펜하르트가 질문을 이었다.
"알렉스는 이상하지. 저놈이 왜 이 시대에 있는 거지?"
"궁금하면 스스로 알아보시지?"
어째 자신도 궁금해 하는 투의 뉘앙스는 아니다. 말인즉슨, 테스론은 왜 알렉스가 이 시대에 존재하는지 알고 있다는 소리다. 레펜하르트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때 테스론이 고함을 터트렸다.
"여기서 내 손에 살아 돌아가면 말이다!"
3미터의 용인이 연거푸 돌려차기를 날렸다. 오러가 금속질 두 다리에 휘감기며 광풍처럼 날아든다. 그 끝에는 용의 그것처럼 날카로운 발톱도 달려 있다. 허리를 접어 공격을 피하며 레펜하르트는 이를 갈았다. 신장이 3미터나 되니 다리도 저쪽이 훨씬 길다. 공격 범위가 너무 차이가 났다.
간신히 공격을 피한 레펜하르트가 치 떨린다는 듯 중얼거렸다.
"정말 이런 아티팩트를 잘도 얻어다 쓰는구나. 심지어 필레나도 굉장한 걸 들고 왔던데. 대체 무슨 수를 쓴 거냐?"
물론 테스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은의 현자의 존재는 결코 외부로 발설해서는 안 될 기밀 중의 기밀인 것이다.
"제 돈 주고 사려면 일국의 보물 창고를 탈탈 털어도 모자랄 판인데... 그런 것 같지도 않고 말이야...."
말하다 말고 레펜하르트가 묘한 표정을 짓더니, 문득 두렵다는 듯 테스론을 노려보았다. 야릇한 눈빛을 보내며 그가 물었다.
"헉! 네놈 설마 내 몸 팔아서 여기저기 대 주고 저런 거 얻은 거냐? 하긴, 예전부터 내 미모가 워낙 대단해서 여기저기 탐하는 놈들이 꽤 많긴 했지, 음."
"뭐, 뭣이 어째?"
순간 테스론의 혈압이 머리끝까지 상승했다. 지금 레펜하르트는 말 몇 마디로 짐 언브레이커블의 정당한 후계자인 자신을 남색가 취급한 것이다! 이는 실로 모욕 중에서도 최악의 모욕이다!
"무슨 개소리냐! 전부 네놈을 해치우기 위해서 받은 것뿐이다! 어디까지나 동등한 거래였다고!"
발끈해 테스론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레펜하르트가 빙긋 웃었다.
'그래, 받은 거라, 이거지?'
역시 그의 가설이 들어맞은 것 같다. 말투 보니 분명 저 아티팩트들, 어디선가 받았다. 그것도 일행이 아주 세트로! 즉, 어딘가에 아티팩트 재어 놓고 사는 놈들이 분명 있단 소리다!
"아차!"
테스론도 이내 말실수를 눈치챘는지 입을 다물었다. 버벅대다가 그가 눈을 부라렸다.
"상관없다! 이 자리에서 죽여 버리면 그만이지!"
3미터의 용인이 아가리를 벌렸다. 이빨 사이에서 홍염이 비치더니, 이내 포효가 터져 나왔다.
"크아아아!"
가공할 불길이 섬광이 되어 직선으로 뻗어 왔다. 레펜하르트가 잽싸게 몸을 틀어 공세를 피하는 순간이었다. 테스론이 따라붙으며 펀치를 날렸다. 좌우 훅으로 시선을 끈 뒤 사각에서 뻗어 오르는 어퍼컷!
"컥!"
강렬한 어퍼컷이 레펜하르트의 턱에 작렬했다. 순간 정신이 혼미해졌다. 애써 정신을 차리며 레펜하르트는 허겁지겁 반격했다.
라이트 펀치 후 이어지는 좌우 미들킥 연타, 하지만 테스론은 어느새 사정권 밖으로 빠진 후였다. 역시 아티팩트의 힘을 빌린 테스론은 오러만으로는 이기기 힘든 상대였다. 캘러미티 혼 5중첩의 경지에 다다라 많이 수준이 높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역시 모자라다. 레펜하르트가 양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인챈트 프리즌 & 윈드 블로우!"
두 주먹에서 냉기와 바람이 일어나 황금빛 오러와 융합하며 빛을 발했다. 드디어 오러-마법 융합 술식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바람의 주먹을 뻗으며 레펜하르트가 소리쳤다.
"질풍기격탄!"
오러와 풍계 마력이 융합되며 몇 배나 위력이 증폭한다. 최강의 금속, 진금 엘드릴조차도 우그러뜨릴 강력한 파괴의 힘이다. 평소 기격탄의 세 배가 넘는 황금빛 오러가 소용돌이치며 테스론에게 날아들었다.
콰콰콰콰!
테스론이 기다렸다는 듯 받아쳤다.
"그래, 언제 쓰나 했다!"
3미터의 금속체 용인이 머리를 높이 쳐들었다. 안쪽에서 테스론의 목소리가 들렸다.
"발동! 스펠 리플렉션!"
드래고닉 발러 아머의 황금빛 표면 위로 복잡한 문양이 떠오르며 빛을 발했다. 질풍기격탄이 적중하는 순간, 그대로 반사되며 도로 레펜하르트에게 날아갔다!
"윽?"
당황하며 레펜하르트가 팔을 휘둘렀다.
"풍혈권!"
질풍기격탄이 바람의 마력을 담은 주먹과 부딪치며 폭발했다. 굉음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폭연 사이로 레펜하르트가 손목을 매만지며 인상을 썼다. 간신히 튕기긴 했지만 손목이 뻐근했다.
"...반사 계열 마법 각인인가?"
의기양양하게 테스론이 껄껄 웃었다.
"네놈의 마법은 이미 보았는데 그에 대한 대비도 안 했을까? 드래고닉 발러 아머에는 이미 대對마법 처리가 되어 있다! 6서클 이하의 모든 주문은 전부 반사되지! 네놈은 아직 7서클에 머무를 뿐이었지, 아마?"
확실히 7서클 마법까지 융합해 전투에서 쓰기엔 시전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레펜하르트는 혀를 찼다.
"용케도 머리를 굴렸구나."
"그때와는 다르다! 그때와는!"
통쾌하게 외치며 테스론이 재차 공격해 왔다. 레펜하르트도 다시 마법권으로 반격했다. 연달아 마법을 실어 오러와 함께 날려 보지만, 그때마다 용인의 표면에서 반사되며 돌아올 뿐이다.
잠시 뒤로 밀리던 레펜하르트가 갑자기 피식 웃었다.
"과연, 나쁘지 않은 방식이군."
밀리는 주제에 여유를 보이는 그의 태도에 테스론이 인상을 썼다. 레펜하르트가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테스론. 정말 주입식으로만 마법을 익혔군? 그 정도 경지면 이 정도쯤은 당연히 알아차릴 줄 알았는데."
"무슨 소리지?"
레펜하르트가 손가락을 튀겼다. 1서클의 가장 하위 마법, 윈드가 테스론에게 날아갔다가 도로 반사되어 돌아왔다. 레펜하르트가 그대로 돌아온 윈드 마법을 맞았다.
휘이익!
갈색 머리칼이 잠깐 흔들렸다. 윈드는 딱히 공격 마법도 아니고, 그냥 풍계 마법에 대해 감을 잡기 위한 기초 주문이다. 위력이랄 것도 없는 산들바람인 것이다. 일반인에게도 상해를 주지 못하는데 하물며 레펜하르트의 육체엔 어림도 없다.
레펜하르트가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이래도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나?"
테스론이 눈을 껌뻑였다. 정말로 모르겠다.
"그래도 모르겠으면 몸으로 알게 해 주마!"
양손에 풍혈권과 빙결권을 머금은 채 레펜하르트가 테스론에게 돌격했다. 테스론도 반격에 나섰다. 주먹이 오가고 금속 펀치가 레펜하르트를 강타했다.
"큭!"
오러 가드로 충격을 버티며 그가 반격에 나섰다. 테스론의 가슴을 향해 강철 같은 주먹이 뻗어 나갔다.
"윈드 & 아케인 볼트!"
콰앙!
아케인 볼트와 융합된 마법권이 그대로 적중하며 폭음을 울렸다. 갑옷 일부가 눈에 뜨일 정도로 우그러지며 극심한 충격이 온다. 테스론이 순간 신음을 흘렸다.
"크윽!"
레펜하르트의 공격이 이어졌다. 펀치와 킥을 날리며 마법을 집중해 오러에 실어 공세를 퍼붓는다. 그때마다 폭음이 울리고 갑옷 여기저기가 일그러진다. 테스론이 허겁지겁 손발을 놀렸지만 위력이 너무 세 반격도 힘들었다.
'이, 이런 제길!'
놀랍게도 레펜하르트의 마법권이 마법 반사경의 힘을 뚫고 있었다. 그렇게 접근하며 레펜하르트가 손을 뻗어 테스론의 팔뚝을 잡았다.
체술은 테스론이 몇 수나 위, 관절 기술 역시 마찬가지다. 바로 손목을 비틀며 잡힌 부위를 풀어내려 할 때였다.
레펜하르트가 다시 더블 캐스팅을 영창했다.
"윈드 & 빙결권!"
산들바람이 불며 레펜하르트의 손에서 냉기가 흘러나와 잡힌 팔뚝을 얼려 버렸다. 테스론이 눈을 부릅떴다.
또다! 또 반사경이 저 빙계 마법을 반사 못했다!
관절기로 얼음을 깰 순 없으니 꼼짝 못하고 잡혀 버렸다. 레펜하르트가 기합을 터트렸다.
"타아아아!"
3미터나 되는 용인을 붙잡은 채 레펜하르트가 몸을 크게 휘둘렀다. 상대를 들고 회전하며 점점 더 원심력을 싣는다. 회전이 정점에 달한 순간, 레펜하르트가 테스론을 크게 내던졌다.
"래리어트 스윙!"
테스론의 거체가 유성처럼 공동 윗벽으로 날아갔다. 그대로 벽에 꽂히며 폭발이 일어났다. 얼마나 강하게 부딪쳤는지 주위에 크레이터가 파일 정도였다.
테스론을 던진 뒤 레펜하르트가 비아냥거렸다.
"이제 뭐가 문제인지 알겠나?"
벽에 파묻힌 채 테스론이 신음을 흘렸다.
"...이런 문제가 있었나."
왜 반사경이 힘을 쓰지 못했는지 알았다. 지금 레펜하르트는 모든 마법권 공격전에 단순한 윈드 마법을 동반해 먼저 반사경에 날린 것이다. 그리고 반사경이 윈드 마법을 되돌리는 그 순간 마법권을 꽂아 넣었다.
마치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처럼, 레펜하르트가 친절하게 설명까지 해 주었다.
"리플렉션의 마법 반사는 원래 딜레이가 있거든? 일단 하나 튕기면 다음 마법 튕기는 데 1초는 걸려. 그럼 별로 대응이 어렵지 않지."
물론 이 수법이 가능하려면 더블 캐스팅이 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붙는다.
'그나마 이 정도까지 연산력이 좋아져서 다행이지만.'
레펜하르트는 저 딜레이를 확인하기 위해 초반에 몇 대 맞아 준 것이다. 테스론이 혀를 찼다. 드래고닉 발러 아머를 받고, 이 반사경의 존재를 확인한 뒤 이번에야말로 간단히 레펜하르트를 처리할 수 있다고 여겼는데....
'보자마자 바로 파해법을 생각해 낼 줄이야!'
역시 마왕은 마왕이었다. 테스론이 벽에서 몸을 빼내 다시 바닥에 착지했다. 그가 차갑게 웃었다.
"역시 세상에 쉬운 일은 없군...."
테스론이 재차 살기를 끌어 올렸다.
"하지만 반사경의 힘이 없더라도 네놈이 여기서 죽는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 ☆ ☆
레펜하르트와 테스론은 치열하게 싸우며 몇 차례나 공방을 나눴다. 반사경이 쓸모없다 해도 드래고닉 발러 아머를 입은 테스론의 힘은 여전히 만만치 않았다. 마법까지 쓰며 융합된 파괴력을 구사해도 체술에서 밀리니 레펜하르트도 쉽게 승기를 잡을 수가 없었다.
팽팽한 접전 속에서 테스론이 인상을 썼다.
'크윽, 역시 마왕처럼은 안 되나?'
아까부터 그는 레펜하르트처럼 전투 도중 마법을 쓸 타이밍을 노리고 있었다. 그도 이젠 8서클의 대마법사, 강력한 마법의 힘을 빌리면 승부를 뒤엎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도저히 타이밍을 알 수가 없었다.
비록 뛰어난 마왕의 두뇌로 경지 자체는 쑥쑥 올릴 수 있었지만, 경지와 경험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골방에서 마법 익힌 거나 다름없는 테스론은 마법사들의 전투, 마전魔戰에 대해서는 완전히 젬병이다. 대체 언제 어떻게 마법을 구사해야 적절한 위력을 보일 수 있는지 전혀 아는 바가 없는 것이다.
반면 레펜하르트는 무술가로서도 많은 전투를 겪어 왔다. 이 차이는 실로 컸다.
"이번에는 살아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테스론!"
기세등등하게 레펜하르트가 연신 마법권을 퍼부었다. 그토록 강인한 장착형 골렘의 전신 여기저기가 찌그러지고 파이며 충격이 본체까지 와 닿는다.
"큭! 크윽!"
흘러나오는 테스론의 신음이 점점 횟수가 잦아졌다.
'하지만 여기서 질 수는 없지....'
마왕을 살려 보낼 수는 없다. 결코 그럴 수는 없다!
"질 수 없다! 더 이상 인류의 미래를 가로막게 두진 않겠어!"
"또 그 헛소리냐? 여전하구나, 테스론! 그래, 네놈 말대로라면 인간은 계속 제 밥그릇 챙기기 위해서 남을 억눌러야겠군?"
갑자기 테스론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단지 그뿐이라면 나도 이토록 두려워하진 않을 터다!"
"음?"
"그대 말이 옳다 치자! 그래서 이종족들이 인간과 동등하게 공존하게 되었다 치자!"
테스론이 서늘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외려 저들이 대륙의 주도권을 쥐면 인간의 존립이 위태로워진다는 생각은 안 해 본 건가?"
은의 현자로부터 진실의 일부를 들었다. 그들이 행하는 일에 대해 이런저런 의문을 가지기도 했다. 그 행위가 과도하여 인류를 약하게 만들었다는 점은 그도 인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은의 현자의 존재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은의 현자가 저렇게 음지에서 인류를 수호하고 이종족에 대한 인식을 유지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노예가 아닌 이종족들은 인간에게 동경의 대상이 될 요소를 너무도 많이 가지고 있다."
엘프의 수명과 미모.
오크의 강인한 육체와 전투력.
드워프의 뛰어난 기술이며 트롤의 재생력.
"이종족들이 노예였기에, 몬스터였기에 인간은 자부심을 가지고 여기까지 발전할 수 있었다. 그 자부심이 깨져 버리면 인류는 하위 종족으로 굴러 떨어지게 될지도 모른다. 저런 건 생각해 보지 않았나, 마왕?"
지금 이종족들은 약자다. 억압받는 입장이다. 그렇기에 레펜하르트는 저들의 장점만을, 저들의 딱한 사정만을 보고 있다.
하지만 테스론의 생각은 달랐다. 저들이 약자에서 벗어나, 저 가공할 종족 능력으로 만약 대륙의 패권을 주도한다면 현재의 인간들처럼 인류를 노예로 부리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어디 있단 말인가?
"레펜하르트, 그대는 항상 이종족들도 인간과 똑같은 사람이라고 주장했지? 그럼 묻겠다. 입장이 역전되었을 때 저들이 인류를 동등한 존재로 대우할 것 같나, 아니면 노예로 부릴 것 같나? 후자 쪽이 아무래도 '사람'의 본성에 가깝다고 생각지 않나?"
레펜하르트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는 이내 표정을 폈다. 쓴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너는 인류를 위한다면서 정작 인류의 능력은 믿지 않는구나, 테스론. 인류는 강하다. 그 누구보다도 이 내가 그 사실을 실감하고 있다."
고금 최강의 마법사로 모든 이종족을 규합하고 강대한 힘을 떨쳤던 레펜하르트다. 그러고도 결국 그는 인류의 손에 죽음을 당했다.
"난 내 동족의 힘을 믿는다. 충분히 저들과 공존하고 소통하며 함께 문명을 키워 갈 것이다."
웃기는 아이러니였다.
인류의 가능성을 불신하기에 테스론은 인류를 지키려 한다.
인류의 능력을 믿기에 레펜하르트는 이종족 편을 들고 있다.
"문제는 지금 같은 시대다! 이 정체가 계속되면 인류는 바보가 된다! 썩은 물에 고인 것처럼 현재에 안주할 뿐이다!"
레펜하르트의 외침에 테스론이 속으로 웃었다. 솔직히 저 부분만큼은 그도 동감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떻단 말인가?
"그래?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고 거기에 집어 던져 강인한 존재만 살아남는 것이 인류의 발전이냐? 꼭 그렇게 해야만 인간이 발전할 수 있단 말이냐?"
기껏 잡은 패권이다. 인류의 선조들이 피 흘리며 얻은 승리, 그로 인해 얻은 현실이었다. 이 현실을 되돌리려는 것은 피 흘리며 죽어 간 선조들에 대한 모욕이다.
"인류는 보호받을 자격이 있다!"
각오를 다지며 테스론이 고함을 쳤다.
"이번에야말로 네놈의 숨통을 끊겠다! 마왕!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
살의를 더욱 키우며 레펜하르트도 마주 고함쳤다.
"좋다! 더 이상 말도 안 통하는 놈이랑 실랑이할 생각 없다! 걱정 마라! 이번엔 쓸데없는 헛짓거리 안 하고 바로 죽여 줄 테니까!"
레펜하르트의 전신에서 황금빛 오러가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그가 테스론의 품속 깊숙이 파고들며 무릎을 굽혔다. 그리고 호쾌한 어퍼컷을 날렸다.
"골디언 어퍼!"
황금빛 기둥이 솟구치며 용인 상태의 테스론이 그대로 허공으로 튕겨 올랐다. 제라드나 레펜하르트가 흥분하면 무심코 하늘 찌르곤 했던 바로 그 기술이었다.
금속질 몸체 여기저기가 금이 쩍쩍 가며 테스론이 허공으로 10여 미터 이상 떠올랐다.
"으윽!"
충격 속에서 애써 스파이럴 가드로 몸을 보호하며 테스론이 무심코 상념을 흘렸다. 멈추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물론 허공에서 갑자기 정지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날개가 달려 있지 않다면. 그리고 테스론은 날개가 없다.
하지만 드래고닉 발러 아머는 날개가 있었다.
파아앗!
황금빛 날개가 활짝 펼쳐지며 테스론이 허공에 멈췄다. 그가 멍한 음성을 흘렸다.
"어?"
갑자기 머릿속에 기이한 정보가 입력되고 있었다. 드래고닉 발러 아머의 정식 사용법을 정신파로 알려 주는 원래 기능의 일부였다.
사실은 이 아티팩트를 착용할 시 자동으로 행해지는 일인데, 이제까진 테스론의 정신력이 너무 강해 접근이 막혔었다. 그런데 방금 잠깐 집중력이 흩어지며 겨우 접근이 허용되었던 것이다.
"하하...."
그토록 애매하던 사용법이 확실하게 이해되는 걸 느끼며 테스론은 잠시 기막혀했다.
'처음부터 이랬으면 그 고생 안 했을 텐데!'
과연 세상 모든 일은 장단점이 함께한다더니, 정신력이 높다고 다 좋은 건 아닌 듯싶었다.
날개를 편 채 허공에 떠 있는 3미터의 드라칸을 보며 레펜하르트가 눈살을 찌푸렸다.
'뭐 하는 거지?'
현재의 테스론은 8서클의 대마법사다. 비행 주문 플라이 정도는 익혔을 테니 허공에 떠 있는 건 별로 이상할 게 없다.
하지만 플라이 마법은 빠르게 비행 궤도를 바꾸기가 힘들다. 마력만 받쳐 준다면 새보다 더 빨리 나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급선회나 급상승, 급하강 등의 곡예비행은 불가능한 것이다.
이 공동이 상당히 넓다곤 하지만 그래도 갇힌 공간이었다. 사방이 뚫린 하늘이면 모를까 이렇게 사방에 막힌 곳에서 플라이로 비행했다간 제 속도 못 이기고 벽에 처박힐 게 뻔했다.
'저놈, 아무리 주입식으로 마법 익혔다지만 그런 것도 모르나?'
기막혀하며 레펜하르트가 다시 몸을 날렸다. 마법 술식, 질풍권으로 오러 스킬을 발동하며 그가 펀치를 날렸다.
"에어로 스트레이트!"
황금빛 회오리가 스크류처럼 일어 올라 테스론을 직격했다. 그 순간, 테스론이 갑자기 변형했다!
위이잉!
회오리에 휘말리며 동시에 허리가 구부러지고 아머의 파편이 다시 재조립된다. 도로 드래곤 형태가 되더니 테스론이 무서운 속도로 공동 내를 날아다녔다.
쌔애애액!
요란한 파공음이 울려 퍼졌다. 날개를 활짝 편 드래곤이 수십 차례나 공동 안을 회전하며 비행했다. 레펜하르트가 연신 질풍 기격포를 쏘아 댔지만 그때마다 S자로 비행하며 모든 공격을 가뿐히 피한다.
레펜하르트는 당황했다. 플라이 마법으로는 절대 보일 수 없는 고도의 비행 능력이었다.
"받아 보아라, 레펜하르트!"
드래곤이 입을 벌리고 불을 뿜었다. 붉은 섬광이 바닥을 태우며 레펜하르트를 덮친다. 불꽃을 피해 레펜하르트가 옆으로 몸을 던지자, 드래곤의 주위에 온갖 마법진이 생성되며 재차 폭격을 가했다.
수십 개의 폭염 마법이 공동 바닥을 쉴 새 없이 두들겨댔다. 정신없이 피하고 때로는 막아 내며 레펜하르트가 혀를 찼다.
"뭐야, 저거 저런 기능도 있었나?"
테스론이 고대의 엔지니어를 불만스러워하긴 했는데, 그들이 마냥 바보라서 이런 식의 장착형 골렘을 만든 것은 아니다. 이 정도 아티팩트를 디자인할 정도 엔지니어가 바보일 리가 있나?
용인 형태일 때는 사용자의 모든 움직임을 100퍼센트 재현해야 하기 때문에 술식 여유가 없다. 하지만 사족 보행체인 드래곤 모드라면 술식이 꽤 남으니 이렇듯 외부 폭격 형태로 바꿀 수 있었다. 애초에 근접 전투용과 장거리 폭격용을 나눠 상황에 맞춰 싸울 수 있게 만든 것이다.
게다가 이 드래곤 모드의 장점은 그뿐이 아니었다.
"하! 이거라면 되겠군!"
허공을 날며 테스론이 쾌재를 올렸다. 비행 자체는 그의 의지지만 균형 제어나 관성 제어는 드래고닉 발러 아머가 대신 해 주기 때문에 그는 지금 상당히 집중력에 여유가 있었다. 무빙 캐스팅이 가능할 정도로!
"뎀 라이드 플라트 파라! 만물을 사르는 불꽃이여! 내 적을 치는 억겁의 창이 되라! 플레게톤!"
8서클 섬멸 주문, 플레게톤이 작열했다. 직격당한 암석이 순식간에 녹아내리며 증발할 정도의 위력이었다. 레펜하르트가 기겁하며 피했다. 치를 떨며 그가 소리쳤다.
"멀리서 날아만 다니겠다 이거냐? 그럼 캘러미티 혼으로 깔끔하게 날려 주마!"
그러자 테스론이 날개를 반 접더니 무시무시한 속도로 레펜하르트에게 날아왔다. 저대로 캘러미티 혼을 완성하게 놔둘 수는 없는 것이다.
쌔애애액!
마치 화살이나 투창처럼 드래곤이 공기를 찢고 똑바로 돌진한다. 가공할 속도지만 궤도가 너무 단순하다. 투우를 하듯 레펜하르트가 옆으로 몸을 날려 공격을 피했다.
"걸렸구나!"
애초에 캘러미티 혼을 날리는 척한 것은 속임수일 뿐, 이대로 옆에서 후려갈기면 끝장이다!
막 레펜하르트가 데스 카운터를 날리려던 차였다. 드래곤이 땅에 곤두박질치는 그 순간 또다시 변형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사지가 재조립되며 도로 용인 형태로 변하더니 앞구르기를 하며 벌떡 일어나는 게 아닌가?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되는 빠른 변신 속도였다.
"타앗!"
테스론이 몸을 일으키며 돌진하는 레펜하르트를 돌려 찼다. 옆구리에 킥을 얻어맞고 레펜하르트가 옆으로 날려 갔다.
"크윽!"
"익숙해지니 이 짓도 할 만하군!"
드라칸 모드로 테스론이 레펜하르트에게 달려들었다. 정신없이 얻어맞다가 레펜하르트도 마법권을 휘두르며 반격에 나섰다.
"인챈트 라이트닝! 뇌전권!"
전격이 번뜩이는 순간 테스론이 허공으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 다시 드래곤 모드로 변신해 이어지는 추격타를 피해 쌩 날아가 버린다. 거리를 띄운 뒤 또다시 멀리서 융단 폭격! 온갖 마법과 용의 숨결이 레펜하르트의 주위를 무수히 두들겨댔다.
쾅! 쾅! 콰콰콰쾅!
생전 처음 보는 수법이라 순간 대응할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역지사지라더니, 그동안 이종족들에게 시달리던 인간 기사들의 심정이 뼈저리게 이해가 갔다.
폭발 속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레펜하르트가 이를 갈았다.
"젠장! 이런 식의 싸움도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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