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테스론은 계속 레펜하르트를 몰아붙였다.
드래곤 모드로 마법을 퍼부으며 멀리서 궁지에 몬 뒤, 드라칸 모드로 치명타를 노린다. 그러다 반격당할 것 같으면 다시 드래곤이 되어 멀리 날아간 다음 느긋하게 체력을 회복한다. 쉴 새 없이 밀리는 레펜하르트만 죽을 맛이었다.
"플레게톤! 인시너레이트! 아케인 스트라이크!"
일단 안정적으로 마법을 쓸 여유가 생기자 가공할 연산력을 바탕으로 테스론은 온갖 고위 주문을 쉴 새 없이 남발했다. 정신 고양을 이룬 현재의 그는 과거의 젊은 레펜하르트와 비교해도 그리 떨어지지 않는 위력의 마법을 구사하고 있었다.
쾅! 쾅! 콰콰쾅!
연이은 폭발에 공동 여기저기가 붕괴되며 용암 섞인 암괴 덩어리를 떨어트렸다. 발밑이 쉬지 않고 흔들렸다.
레펜하르트가 눈동자를 좌우로 굴렸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도저히 이 넓은 공동 안에서는 저놈을 상대할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좌우를 살펴보던 중이었다. 문득 공동 한가운데 위치한 거대한 조형물이 들어왔다.
복잡기괴한 형태로 세워진 거대한 조형물,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박혀 있는 납작한 형상의 30센티미터 정도의 물체.
그것은 얼핏 금속판처럼 보였다. 표면 곳곳에 복잡한 금속선이 미로처럼 촘촘히 박혔고 그 위로 정체불명의 돌기들이 가득 붙어 있었다. 금속판 네 귀퉁이에 새겨진 용과 호랑이, 그리고 화염의 새와 얼음의 거북 형상이 눈에 들어왔다.
'사방신의 유물!'
레펜하르트는 슬쩍 테스론의 눈치를 보았다. 그는 지금 드래곤 형태가 되어 공동 높은 곳을 맴돌고 있었다.
'그래, 생각해 보면 굳이 여기서 저놈을 상대할 필요는 없잖아?'
레펜하르트가 허공에 주먹을 뻗으며 소리쳤다.
"클라우드 킬!"
주먹질이 소매틱이 되어, 오러의 빛이 찬란히 뻗어나며 녹색 구름이 사방으로 퍼져 갔다. 독 구름을 생성하는 그 마법을 보며 테스론이 순간 의아해했다.
'뭐 하는 거야?'
드래고닉 발러 아머는 자체 정화 기능이 있어 저따위 독 구름은 전혀 내부로 스며들 수가 없다. 그리고 클라우드 킬은 4서클의 비교적 낮은 중독 주문, 오러 유저라면 그냥 맨몸으로도 얼마든지 버틸 수 있는 마법이었다.
자욱한 구름이 퍼지며 레펜하르트의 모습이 일순 가려졌다.
'연막작전인가?'
테스론이 긴장하며 경계하던 차였다. 구름 속에서 커다란 그림자가 빠르게 조형물 쪽으로 향했다. 잽싸게 조형물에서 뭔가를 떼더니 이내 출입구 쪽 복도로 매섭게 돌진한다!
"아차! 사방신의 유물!"
기겁하며 테스론이 스피드를 높였다. 드래곤이 독 구름을 가르며 날쌔게 출구 쪽으로 쇄도했다.
"어림없다, 이놈!"
통로의 너비는 4미터, 드래곤 모드로는 들어가기 힘든 크기다. 테스론은 다시 드라칸 형태로 변신해 통로로 뛰어들었다. 순간 테스론의 표정이 굳었다.
"윽?"
레펜하르트가 폭염권을 뒤로 뻗은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플레임 스트레이트!"
적색의 화염이 휘감긴 황금빛 섬광이 테스론을 직격했다. 폭발이 일어나며 통로 전체가 뒤흔들렸다. 통로가 통째로 우르르 무너지며 황금빛 드래곤이 무너진 통로에 파묻혔다.
'이 정도로 놈이 죽을 리야 없겠지만....'
레펜하르트가 씨익 웃으며 다시 뒤로 몸을 날렸다.
"시간은 벌 수 있겠지!"
☆ ☆ ☆
밖에 남은 레펜하르트와 테스론 일행, 전당 쪽의 난전은 팽팽한 접전을 이루고 있었다.
인원수는 레펜하르트 일행 쪽이 더 많다. 저쪽은 네 명인 데 비해 이쪽은 여섯 명이니까. 하지만 생각보다 테스론 일당 쪽의 실력이 만만치 않았다.
"세이어여, 힘을 주소서! 폭염이여 내 손에 깃들라, 플레어!"
신성 주문과 마법을 함께 구사하며 알렉스가 블레이드 오러를 떨쳤다. 결코 융합될 수 없다는 마력과 신력이 오러라는 매개체를 통해 한 점으로 집중하며 이니야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영원의 빙벽!"
레이피어를 세로로 세운 채 이니야가 오러를 떨쳤다. 냉기의 오러가 겹겹이 그녀를 감싸며 커다란 얼음 방패가 되어 검격을 막았다.
방패가 깨지며 은빛 가루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간신히 공격을 피한 이니야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놈, 까다로운데....'
놀랍게도 저 알렉스라는 청년은 저 어린 나이에 엘프 중 최강의 무인인 이니야와 맞상대를 하고 있었다.
물론 실력 자체는 역시 이니야에 비해 상당히 떨어진다. 오러 유저의 수준으로만 치면 검성 바나텔과 함께 쳐들어왔던 대륙의 강자들 정도? 하지만 마법과 신성력을 함께 구사하니 쉽게 제압하기가 힘들었다. 그녀 입장에서는 난생 처음 보는 전법이었으니까.
오러 스킬과 검술은 이니야가 압도하지만 중간중간 마법과 신성 주문을 구사하니 치명적인 일격을 날리기가 힘들어 쉽게 결판이 나지 않았다. 이니야가 패배할 일이야 없겠지만, 적어도 알렉스는 그녀를 물고 늘어질 정도의 수준은 충분히 되는 것이다.
"동토의 칼날!"
은빛 오러의 칼날이 섬광처럼 날아든다. 알렉스가 블레이드 오러를 휘두르며 또 마법과 신성 주문을 발동시켰다.
"드리워라! 아케인 실드! 세이어여! 빛을 내리소서!"
강렬한 은색 블레이드 오러가 아케인 실드를 부수고 쏘아졌다. 하나 이미 그 위력은 상당히 감소한 후였다. 알렉스가 공격을 받아치며 신성한 섬광을 몇 줄기나 쏘아 냈다. 오러와 달리 마법과 달리 신성 주문은 시전자 주위의 공간에서 무작위로 생성되어 날아드는 것이라 미리 공격 궤도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피하며 계속 파고들기 힘들다는 소리다.
연격을 포기하고 섬광을 일일이 쳐 내며 이니야가 치를 떨었다.
"아, 진짜 귀찮은 싸움 방식이잖아!"
이대로 장기전으로 가 패턴을 파악하고 나면 결국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도 같다만, 역시 단기 결전은 무리다. 그렇게 이니야와 알렉스는 연신 공방을 주고받았다.
다른 쪽도 비슷했다. 러스와 타시드는 온갖 아티팩트로 도배한 제이드를 제대로 붙잡지 못하고 있었고, 실란과 티티마는 메사이어를 휘두르는 크리스틴을 힘겹게 상대한다. 마켈린은 그 드높은 신성력으로 다중 복제의 지팡이를 휘두르는 필레나를 억제하고 있었지만, 그 탓에 양쪽 모두 발이 묶인 상태였다.
그렇게 정신없이 싸워 대고 있던 중이었다.
콰앙!
석벽 쪽 통로에서 폭음이 들리며 레펜하르트가 뛰쳐나왔다. 전당으로 들어서자마자 그가 다시 통로 쪽으로 주먹을 내질렀다.
"테라 스트레이트!"
암석 계열 마법과 오러가 융합되어 광범위한 대지 파괴의 힘이 된다. 통로가 무너지며 출구가 막혔다. 마켈린을 상대하던 필레나가 놀라 외쳤다.
"테, 테스론은?"
레펜하르트가 몸을 빙글 돌리더니 알렉스며 제이드 등을 노리고 허공에 펀치를 찔렀다.
"폭염 기격탄, 연환!"
수십 개의 폭염 기격탄이 산탄처럼 발사돼 네 사람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알렉스와 크리스틴이 허겁지겁 공격을 피했다. 필레나가 마법의 장벽을 쳐 막고 제이드가 블링크로 범위 밖으로 빠져나갔다.
두 일행이 좌우로 갈라지며 전투가 소강 상대가 되었다. 러스가 소리쳤다.
"어떻게 된 겁니까, 형님!"
레펜하르트가 왼손에 든 사방신의 유물을 흔들며 소리 높여 대꾸했다.
"건질 거 건졌어! 이제 여기 볼일 없다!"
테스론 쪽 일행의 안색이 굳었다. 설마 테스론이 당한 건가?
제이드가 눈을 부라렸다.
"보내 줄 것 같으냐, 권왕! 광폭섬!"
그가 오른손을 허공에 휘둘렀다. 강렬한 섬광이 캐스팅조차 없이 레펜하르트에게 쏘아졌다. 새롭게 들고 온 아티팩트, 광폭의 팔찌의 힘이었다.
예전에 보았던 단절의 검과 맞먹는 위력이라 감히 스파이럴 가드로 맞받아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몸을 틀어 피하며 레펜하르트가 펀치를 뻗었다.
"기격파!"
넓게 퍼진 황금빛 오러 파장이 허공을 뒤덮었다. 그 순간 제이드가 사라졌다.
"블링크!"
그리고 20미터 밖에서 나타난다. 레펜하르트가 인상을 썼다.
"또 저거냐?"
거리를 벌린 제이드가 다시 광폭섬을 쏘아 댔다. 예전에도 저러더니 저게 제이드의 단골 수법인 것 같았다. 전처럼 아발란시 킥으로 싹 쓸어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때와 달리 지금은 주위에 동료가 있다. 잘못하면 이들도 휩쓸린다.
잠시 대응책이 떠오르지 않아 레펜하르트가 공격을 피하고만 있는 사이였다. 러스가 검을 뽑으며 협공했다.
"허공검, 호라이즌!"
러스의 블레이드 오러가 공간을 뛰어넘어 작렬했다. 하지만 이미 제이드는 그 자리에 없었다. 러스가 검을 뽑자마자 바로 또 블링크로 도망친 것이다.
역시 현재 러스의 허공검은 너무 사전 동작이 길어 미리 알아차리기가 어렵지 않다. 입맛을 다시는 러스를 뒤로한 채 타시드가 나섰다.
"가라! 다카르!"
쌔애액!
참마도가 허공을 가르며 스스로 날아가 제이드를 쫓는다. 역시나 제이드가 공간 이동으로 공격을 피했다. 바로 그때였다.
참마도를 던진 타시드가 무심코 몸을 옆으로 날렸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손등을 휘둘렀다.
절묘한 타이밍으로 그 순간 그 장소에 제이드가 나타났다.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타시드의 철퇴 같은 주먹이 제이드의 어깨를 후려갈겼다!
"커억!"
비명을 지르며 제이드가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러스가 경악해 타시드를 돌아보았다.
"야! 너, 어떻게 알았어?"
주먹을 휘두른 자세 그대로 타시드가 눈을 껌뻑거렸다. 본인도 대체 자기가 뭐 했는지 이해 못 하겠다는 얼굴이었다.
"...글쎄?"
아무리 맨주먹으로 휘둘렀다곤 하나 오러 유저의 일격이다. 제이드는 저 한 방으로 전투 불능이 되어 버렸다. 그대로 혼절한 것이다.
어쨌거나, 기껏 잡은 놈 그대로 놔줄 순 없다. 러스가 쾌재를 부르며 나뒹군 제이드에게 블레이드 오러를 뻗었다. 그때 알렉스가 끼어들며 러스의 공격을 걷었다.
"아니 된다!"
말투는 웃기지만 위력은 웃기지 않다. 러스가 뒤로 튕겨 났다. 그 틈에 알렉스가 기절한 제이드의 뒷목을 잡고 끌어냈다. 제이드를 등 뒤로 밀친 채 검을 겨누며 경계 태세를 갖춘다.
필레나를 견제하며 마켈린이 물었다.
"그자를 해치운 겁니까, 레펜하르트 님?"
"해치운 건 아니지만 당분간은 발이 묶였을 거요!"
빠져나오며 레펜하르트는 계속 공격을 날려 통로 곳곳을 붕괴시켰다. 테스론도 강력한 마법사이니 테라 계열 마법으로 파헤치고 나올 순 있겠지만, 그러려면 족히 10분은 걸릴 터였다.
레펜하르트가 일행에게 소리쳤다.
"저들을 처리하고 빠져나갑...."
막 외치는 도중이었다. 갑자기 석벽 쪽에서 굉음이 들렸다.
두두두두!
석벽 여기저기서 흙먼지가 떨어지며 미세하게 진동한다. 그러더니 이내 폭발이 일어나며 구멍이 뻥 뚫렸다.
콰앙!
황금빛의 드라칸이 석벽을 뚫고 날아올랐다. 우렁찬 외침이 전당을 가득 메웠다.
"놓치지 않겠다, 레펜하르트!"
필레나가 기뻐하며 소리쳤다.
"테스론!"
"켁! 저놈?"
용인의 주위로는 싯누런 회전의 오러가 끝이 뾰족하게 모여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예전 제플린에서 한번 보았던 수법이다. 지금 테스론은 스파이럴 가드를 드릴 형태로 펼쳐 땅을 그냥 뚫으며 날아온 것이다.
"젠장! 저 생각은 못 했네."
테스론이 허공에서 몸을 뒤틀며 드래곤 모드로 변했다. 그 상태로 드래곤이 입을 열었다.
"아케인 블래스터!"
8서클 최강의 섬광 주문, 아케인 블래스터가 레펜하르트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마음의 빈틈을 노린 공격이라 미처 피할 타이밍이 아니었다. 무심코 레펜하르트가 양 팔뚝을 들며 스파이럴 가드를 쓰려던 찰나였다.
'아차!'
지금 그는 사방신의 유물을 들고 있었다. 이대로 공격을 받아 버리면 자신이야 버틸지 몰라도 사방신의 유물은 어찌 될지 모른다.
"젠장!"
잽싸게 등을 돌리며 레펜하르트는 유물을 감싸고 옆으로 뛰었다. 스파이럴 가드 대신 온갖 마법의 장벽이 그를 감쌌다. 섬광이 레펜하르트를 스치며 지나가 폭발했다.
콰아아앙!
일격에 전당 절반이 날아가고 용암이 흐르는 공동 외곽이 드러났다. 스친 아케인 블래스터가 용암 폭포에 적중해 폭음을 일궜다. 사방으로 튄 용암이 불비가 되어 내렸다.
시뻘건 빛이 번들거리는 전당 속에서 레펜하르트가 신음을 흘렸다. 간신히 피하긴 했지만 그 탓에 등 쪽이 화끈거렸다.
아케인 블래스터라면 레펜하르트도 전생에 성문 부수거나 성벽 무너뜨릴 때 애용하던 강력한 주문이다. 그만큼 파괴력도 가공하다. 강철 같은 육체가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군데군데 피를 흘리고 있었다. 꽤나 심각한 상처였다.
"으음...."
신음을 흘리며 레펜하르트가 비틀거렸다. 테스론도 다시 드라칸 형태가 되어 전당 바닥에 착지했다. 주먹을 들어 자세를 갖추며 레펜하르트의 손에 들린 금속판을 힐끔거렸다. 직접 본 건 처음이지만 저 형태는 들은 적이 있다.
"저게 사방신의 유물이군."
테스론이 주먹을 허리 뒤로 가져갔다. 다섯 개의 오러 파문이 떠올라 드라칸의 금속 팔뚝을 휘감았다. 순간 기겁해 레펜하르트가 소리쳤다.
"잠깐! 지금 뭐 하려고?"
테스론이 기세등등하게 외쳤다.
"왜? 사방신의 유물 때문에 네놈을 공격 못 할 줄 알았나?"
어차피 그가 사방신의 유물을 찾으려 한 것은 마왕의 손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냥 여기서 마왕을 죽여 버리면 굳이 유물을 탐낼 필요가 없는 것이다.
"바보짓 했구나, 레펜하르트! 그 통로에서 그냥 캘러미티 혼을 날렸다면 날 쓰러뜨릴 수도 있었을 것을!"
통로에서 기습한 일을 지적하며 테스론이 비웃었다. 레펜하르트가 눈을 부릅떴다.
"그, 그게 아니라!"
그 와중에도 테스론의 캘러미티 혼은 완성되고 있었다. 어이없게도 레펜하르트는 맞서서 캘러미티 혼을 준비하지 않았다. 그저 연신 당황하는 표정만 보일 뿐이다. 잠깐 의아했지만 테스론은 이내 잡념을 머리에서 지웠다.
그리고, 눈앞의 '인류의 적'을 향해 5중첩 캘러미티 혼을 장대하게 쏘아 냈다.
"캘러미티 혼!"
"이 미친놈!"
레펜하르트의 비명과 함께 싯누런 오러가 파괴의 섬광이 되어 쏘아진다. 사색이 된 러스가 한 발 앞으로 내밀며 허공을 크게 베었다.
"허공검, 호라이즌!"
드라칸의 목에 푸른 섬광이 튀었다. 러스의 블레이드 오러가 공간을 뛰어넘어 드라칸의 목을 친 것이다.
만약 드래고닉 발러 아머가 평범한 마갑이었다면 이걸로 일격에 목이 잘렸으리라. 하지만 장착형 고렘 시리즈는 단순한 갑옷이 아니라 아티팩트의 에너지를 시전자와 동화해 자신의 육체처럼 만들어 주는 기물 중의 기물이다. 짐 언브레이커블의 육체처럼 내외가 모두 충실한 에너지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그래서 테스론도 목이 베이지 않고 대신 몽둥이로 맞은 것처럼 육중한 통증만을 느꼈다.
"윽!"
하지만, 그 덕분에 캘러미티 혼이 살짝 뒤틀렸다.
콰콰콰쾅!
레펜하르트 일행을 뒤덮으려던 싯누런 섬광이 궤도를 뒤틀며 공동 아래쪽으로 향했다. 파괴의 힘이 용암의 강에 파묻히며 웅장한 폭발을 일으켰다. 공동 전체가 진동하며 굉음이 메아리쳤다.
주먹을 거두며 테스론이 인상을 썼다.
"크윽, 사이러스가 벌써 허공검을 익혔어?"
알렉스가 블레이드 오러를 날려 러스를 도로 뒤로 밀어냈다. 테스론이 다시 캘러미티 혼을 준비하려 했다.
콰아앙!
갑자기 공동 여기저기가 터지며 용암이 분출했다. 가공할 열기가 공기를 후끈 달구었다. 점점 발밑의 진동이 거세지며 지진이 일어나 세상이 흔들린다. 그 자리의 모두가 당황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당장이라도 공동이 무너질 듯한 광경이었다.
레펜하르트가 욕을 퍼부었다.
"이 멍청한 놈아! 여기서 캘러미티 혼을 쓰면 어떡해! 여긴 화산 속이라고!"
레펜하르트가 바보라서 스트레이트 캐논으로 테스론을 저지하기만 한 것이 아니다. 캘러미티 혼의 위력은 너무 가공한 데다가 조절이 되지도 않는다. 그런 엄청난 에너지가 만약 용맥을 자극하기라도 하면 안 그래도 불안한 화산이 분화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저쪽에서도 캘러미티 혼 안 쓴 건데! 쓰는 척 페인트만 건 건데! 그걸 저 정신 나간 놈이 대뜸 갈겨 버리다니!'
발밑을 흐르는 용암의 강이 폭풍을 만난 것처럼 요동쳤다. 시뻘건 열기의 파도가 쉴 새 없이 몰아친다. 주위를 둘러보며 테스론도 잠시 당황했다. 하지만 그는 이내 침착함을 되찾았다.
"그럼 더욱 빨리 네놈을 해치우고 빠져나가야겠구나, 마왕!"
테스론이 다시 허리 뒤로 주먹을 가져갔다. 이니야가 허겁지겁 은색 오러를 흩뿌렸다. 러스와 타시드도 반격에 나섰다. 삼색의 블레이드 오러가 드라칸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테스론이 외쳤다.
"막아! 알렉스!"
"알았다."
앞을 가로막고 알렉스가 전신에서 빛을 발했다. 마력과 신성력, 오러가 융합되어 삼위일체의 강력한 오러 실드가 펼쳐졌다. 양측의 오러가 충돌해 파문을 일으켰다. 그 여파로 공동이 더더욱 흔들리며 용암의 강 여기저기서 불기둥이 치솟았다.
콰콰쾅!
"젠장!"
레펜하르트도 몸을 날렸다. 냉기와 질풍을 양손에 머금은 채 연달아 기격탄을 쏘아 냈다. 수십 개의 기격탄이 테스론의 주위를 감쌌다. 캘러미티 혼을 포기하고 테스론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순간 레펜하르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지했나?'
그때였다. 허공의 테스론이 빙글 몸을 돌렸다. 드라칸의 발밑에 빛의 마법진이 생기며 두 다리를 굳건히 박쳤다.
레펜하르트는 경악했다. 대지를 디딘 것처럼 안정적인 자세가 된 것이다.
테스론이 히죽 웃었다.
"끝이다, 레펜하르트."
다섯 개의 오러 파문이 한 점으로 수렴되며 허공을 가격했다.
"캘러미티 혼!"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은 짐 언브레이커블 최강의 비기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레펜하르트를 노리고 쇄도했다!
☆ ☆ ☆
눈앞이 진황색으로 물든다.
5중첩 캘러미티 혼, 그 절대적인 파괴의 힘이 빛이 되어 날아온다.
상쇄시키기엔 이미 늦었다. 권마합신은 물론, 그냥 캘러미티 혼을 준비할 여유조차 없다.
마법 장벽으로도 소용없다. 4중첩 캘러미티 혼으로 상쇄시키고 온갖 다중 역장결계를 펼치고도 채 막지 못했던 일격이었다. 이제 와서 마법만으로 막는 것은 어림없는 소리다. 어떤 마법을 펼쳐도 저 죽음의 일격은 막을 수 없다!
"크윽!"
절대적 죽음의 빛을 눈앞에 둔 레펜하르트가 이를 갈았다. 아직 빠져나갈 방법이 딱 하나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정상적인 마법사라면 결코 선택하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살다 보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해야 할 때가 있는 법....
'밑져야 본전이다!'
이래 죽건 저래 죽건 마찬가지라면 시도나 해 보고 죽겠다!
레펜하르트가 사방신의 유물을 든 왼손에 정신을 집중하며 소리쳤다.
"동조동기화!"
사방신의 유물, 그곳에 새겨진 온갖 금속 회로가 빛을 발했다. 돌기가 진동하며 강렬한 에너지가 흘러나와 레펜하르트의 의지에 깃들었다.
세상을 뒤흔들 강대한 마력이 그의 것이 된다.
죽음을 앞에 두고 주마등이 펼쳐지며 영혼이 지닌 모든 지식과 지혜가 일순 폭주한다.
두뇌에 과부하가 걸리며 성능 이상의 연산이 연거푸 일어나 뇌신경을 바짝바짝 태운다.
머리 가득 섬광과 전격이 튀며 극심한 고통이 일어난다.
주위를 감싸는 모든 마나가 그의 통제하에 들어온다.
이 모든 것이 찰나의 순간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날아드는 5중첩 캘러미티 혼, 그것을 향해 오른손가락을 내밀며 레펜하르트가 힘겹게 중얼거렸다.
"대이적 마법, 인피니티 게이트."
공간이 갈라지며 모든 마법의 경지를 뛰어넘은 위대한 10서클의 권능이 발동했다.
4
어둠의 장막이 펼쳐졌다. 모든 빛을 빨아들일 듯 순결한 어둠이었다.
어둠이 빛의 섬광을 받아 냈다. 섬광이 어둠의 장막 위를 미끄러지며 한 점으로 맹렬히 흡수되었다. 캘러미티 혼의 모든 파괴력이 어둠에 휩싸여 소멸을 시작했다. 그 장대한 파괴력이 모조리 어둠으로 스며들며 한 톨의 힘조차 현세에 남기지 않는다.
광풍이 휘몰아쳐 전당을 가득 메웠다. 흩날리는 머리칼 사이로 눈앞의 광경을 보며 필레나가 입을 쩍 벌렸다.
"...이공간을 열었어?"
그토록 가공하던 캘러미티 혼의 모든 파괴력이 자연스럽게 어둠 속 아공간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시간과 공간, 물질의 근원을 흔드는 것은 인간에게 허락된 힘이 아니다.
그야말로 신의 힘이 아닌가!
"맙소사...."
테스론의 안색도 사색이 되었다. 저 초월역장, 인피니티 게이트는 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잊을 수가 없었다. 전생의 자신이 날렸던 7중첩 캘러미티 혼을 허무하게 집어삼키던 저 어둠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말도 안 돼! 마왕이 힘을 되찾았어?'
순간 레펜하르트가 칠공에서 피를 흘렸다. 굳건하던 강철의 육체 여기저기가 갈라지며 분수처럼 선혈이 튀었다. 앙다문 입에서 극심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으으으...."
원래 사방신의 유물은 온갖 동기화, 동조화를 걸쳐 시전자의 마력을 각인시켜야 비로소 사용할 수 있는 기물이었다. 그래서 전생의 레펜하르트도 사방신의 유물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사흘 동안 의식을 거행했었다.
그런 의식 없이 대뜸 마력을 끌어낸 현재, 레펜하르트의 상태는 심각하기 그지없었다. 안 그래도 전생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미약한 마력 허용량만을 지닌 육체다. 동조화 되지 않은 마력이 연신 체내의 마력과 충돌해 날뛰며 육체를 갈가리 찢어발긴다.
'제, 제기랄! 역시 부작용이 장난이 아니야....'
전생의 육체라면 당장이라도 붉은 가루가 되어 산산이 흩어졌으리라. 하지만 과연 짐 언브레이커블의 육체였다. 이 무식할 정도로 강력한 육체가 모든 오러를 불처럼 피워 올리며 사방신의 유물에 저항해 형태를 보존하고 있었다.
"타아아앗!"
기합을 토하며 레펜하르트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굉장히 오래 기절한 것 같은 기분이지만 사실은 한순간에 불과했다.
'사, 살았나?'
레펜하르트는 테스론을 노려보았다. 그는 캘러미티 혼을 날린 자세 그대로 굳어 있었다. 애써 붕괴 직전의 육체를 움직이며 레펜하르트가 주먹을 허리 뒤로 가져갔다.
빈사 상태의 육체가 경고를 발하며 극심한 통증의 신호로 뇌를 태운다. 레펜하르트는 이를 악물었다. 심기체가 완벽해야 겨우 구사 가능한 짐 언브레이커블의 최종 비의, 그것을 오로지 강력한 정신력과 집중력만으로 성공시킨다.
우우웅!
다섯 개의 오러 고리가 피투성이 팔뚝을 휘감았다.
"권마합신...."
마력이 일어 올라 오러와 융합했다.
이미 테스론 때문에 용맥은 폭주한 상태였다. 여기서 또 캘러미티 혼을 날리면 당장이라도 화산이 분화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은 그걸 두려워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여기서 끝낸다!"
"비, 빌어먹을!"
경악한 테스론의 전신으로 온갖 마력 장벽이 펼쳐졌다. 동시에 레펜하르트가 주먹을 길게 뻗었다.
"캘러미티 혼!"
우르릉!
뇌성과 함께 여섯 개의 고리가 한 점으로 수렴되며 날아갔다. 모든 마력 장벽이 허무하게 깨지며 녹아내렸다. 조금도 상쇄되지 않은, 모든 파괴력을 온전히 담은 황금빛 오러가 굉음을 토하며 테스론의 시야를 뒤덮었다.
"아...."
눈앞이 하얗게 퇴색된다. 온통 새하얀 그 세상 속에서 한 사내가 주먹을 내밀고 있었다.
갈색 머리에 우락부락한 근육을 지닌 거구의 사내.
마왕이면서 동시에 과거의 자신이다.
마왕을 향해 주먹을 날리던 바로 그때의 자신이 지금 눈앞에서 죽음의 빛을 날리고 있었다.
무심코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하하하...."
재앙의 뿔이 테스론을 꿰뚫었다.
콰콰콰쾅!
굉음과 함께 3미터에 달하는 드라칸의 육체가 일거에 박살 났다. 산산조각 난 파편 사이로 인간의 살점이 흩어져 피 안개를 뿌렸다. 황금의 섬광이 공동을 뚫고 날아가며 연신 사방을 뒤흔들었다. 용암이 더더욱 날뛰고 암벽이 무너져 거대한 암괴 덩어리가 쉴 새 없이 떨어져 내렸다.
이윽고 황금빛이 사라졌다. 공동 벽에 끝이 보이지 않는 동굴이 뻥 뚫렸다. 실로 가공할 위력, 이 압도적인 파괴 앞에 모두가 침묵할 때였다.
파편이 떨어졌다. 박살 난 드래고닉 발러 아머의 부품이었다. 그 사이로 피와 살이 비처럼 내린다. 뭔가가 필레나의 발치에 떨어져 굴렀다.
그녀가 벌벌 떨며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아...."
한 남자의 머리가 발치에 있었다. 목 아래쪽을 모두 잃은, 쇄골 일부만 간신히 남은 흑발 청년의 머리가 눈을 부릅뜬 채 죽은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테스론?"
필레나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녀가 잘린 머리를 향해 떨리는 손을 뻗었다.
믿을 수 없었다. 도저히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안 돼...."
그토록 사랑하는 이, 그토록 경외하는 사내의 얼굴이 손아귀에 잡혔다. 이 모든 것이 현실이었다.
한 여인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다. 영혼이 찢어지는 듯한 처절한 절규가 용암 사이로 메아리쳤다.
"아아아아악!"
☆ ☆ ☆
"크으윽!"
레펜하르트가 머리를 붙잡고 비명을 토했다. 이니야가 허겁지겁 달려가 그를 부축했다.
"레펜하르트 님!"
테스론의 육체를 날리는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지독한 두통이 그를 덮쳤다. 온갖 고통에 익숙할 대로 익숙한 그조차도 처음 겪어 보는 격통이었다.
혼절조차 못 한 채 격통에 몸부림치며 레펜하르트가 이를 악물었다. 이빨 사이로 핏물이 흘러나왔다.
'뭐야, 왜 이러지? 역시 지금 이 두뇌로 10서클은 무리였나?'
10서클 마법을 구사한 것은 실로 천운이었다. 동조화도, 동기화도 제대로 되지 않은 데다가 현재 그의 두뇌로는 아무리 마력이 받쳐 준다 해도 10서클 마법을 즉시 시전하는 것은 어림도 없는 것이다. 인피니티 게이트는 10서클 중에선 비교적 연산이 간단해 전생 때는 즉시 시전이 가능했지만, 현재의 연산력이라면 족히 10~20초는 걸렸어야 정상이었다.
그걸 오로지 영혼에 깃든 깨달음만으로 억지로 두뇌를 과부하시켜 발동했으니, 이토록 심각한 두통이 생기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뇌성마비가 오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그렇게 판단하며 레펙하르트가 구토를 했다.
"우욱...."
울컥 피를 토하고 나서야 겨우 진정이 된다.
숨을 헐떡이며 그는 고개를 들었다.
필레나가 마치 인형 같은 표정이 된 채 죽은 테스론의 머리를 껴안고 주저앉아 있었다. 넋이 나갔다는 표현은 흔히 쓰지만, 과연 정말로 넋 나갈 정도의 큰 충격을 받는 일이 얼마나 있을까? 어찌나 처절한 얼굴이었는지 순간 공포마저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레펜하르트는 허탈한 얼굴로 필레나의 가슴에 안긴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분명 생사를 건 전투에서 이겼는데 전혀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깊은 슬픔이 몰려왔다.
이제, 그는 자신의 진실된 육체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잘 가라... 내 육체여....'
끝없는 상실감이 심장을 타고 휘돈다. 애써 눈을 질끈 감으며 레펜하르트는 호흡을 골랐다. 러스며 실란 등 다른 일행들도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그에게 달려왔다.
"형님!"
"괜찮아요, 레펜 씨?"
비틀거리며 레펜하르트가 몸을 일으켰다. 상대 쪽 일행을 보며 그가 중얼거렸다.
"저들을 마저 제압해야 해... 대체 어디서 이런 아티팩트를 얻었는지 알아야...."
러스며 타시드, 이니야가 고개를 끄덕인 뒤 상대편 일행을 바라보았다. 테스론은 죽고 제이드는 기절했으며 필레나는 넋이 나갔으니, 이제 저쪽에 남은 전력은 둘뿐이었다.
크리스틴이 덜덜 떨며 메사이어를 겨눴다.
"이, 이 더러운 이단자들이 감히!"
알렉스도 무표정한 얼굴로 전투 자세를 취했다. 그가 차가운 목소리로 필레나에게 말했다.
"그는 죽었다, 필레나."
테스론의 머리를 껴안은 채 필레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니라고! 그럴 리가 없어!"
그녀가 머리를 흔들자 테스론의 피가 무릎을 적시며 붉게 물들었다. 알렉스가 눈을 껌뻑이더니 여전히 무뚝뚝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사람은 몸통 없이 머리만으로 살 수 없다."
필레나는 듣지 않았다. 그저 품 안의 테스론, 그 머리를 더더욱 껴안을 뿐이었다.
"아냐! 죽지 않았어! 테스론은 죽지 않았어!"
비명이 터졌다.
"아아악!"
알렉스가 크리스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끔찍한 여인의 절규가 아우성치는데도 그는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그녀는 미친 것 같다. 전투에 임할 상황이 아니다."
"아아아아악!"
러스와 타시드, 이니야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잔당들을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바로 그 순간.
콰앙!
레펜하르트의 캘러미티 혼이 뚫어 놓은 거대한 동굴로부터 무시무시한 굵기의 용암이 쏟아져 나왔다. 용암이 전당을 통째로 뒤덮으며 시뻘건 불길의 강이 두 일행 사이로 격류가 되어 흐르기 시작했다.
이니야가 기겁하며 뒤로 몸을 날려 용암을 피했다.
"윽!"
시뻘건 증기가 피어올라 시야를 막는다. 자욱한 연기 사이로 테스론 일행의 모습이 흐릿해졌다. 용암의 강이 중간에 가로막고 있으니 더 공격을 하기가 힘들다.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저었다.
"할 수 없군."
점점 더 진동이 거세지더니, 이제 전당이 통째로 옆으로 기울었다. 전당을 받치고 있던 기둥이 무너지는 것이다. 실란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일단 여기를 빠져나가요!"
이미 사방은 용암과 불구덩이로 가득했다. 러스와 타시드가 양옆에서 레펜하르트를 부축했다. 이니야가 전신의 오러를 끌어 올리며 강렬한 냉기를 사방으로 펼쳤다. 북해의 숨결이 주위를 감싸며 사이로 길을 텄다.
"다들 이곳으로!"
전당을 뛰어나가 다리를 건너는 순간, 결국 천장이 통째로 붕괴됐다. 천지가 요동치며 용암의 강이 분출을 계속해 전설 속의 용처럼 날뛴다. 다리를 건넌 레펜하르트 일행이 막 지저 입구로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콰아아앙!
결국 자극받은 용맥이 더 이상 힘을 참지 못하고 폭발해 버렸다. 강대한 압력이 화구를 타고 오르며 등 뒤가 시뻘겋게 달구어졌다.
압력을 받은 용암이 통로를 메우며 치고 올라온다. 급해진 타시드가 레펜하르트를 업었다. 티티마와 러스도 각자 발이 느린 실란과 마켈린을 짊어졌다. 이니야가 계속 등 뒤로 냉기의 오러를 흩뿌리며 소리쳤다.
"멈추지 말고 달려요!"
일행 모두가 전력을 다 해 통로를 주파하며 위로 올라갔다. 흐릿해지는 시야 속에서도 레펜하르트가 애써 정신을 유지하며 길안내를 했다.
"저기 끝에서 오른쪽... 그리고 거기서 세 갈래 길이 나오면 제일 왼쪽으로... 우리가 들어온 길로 가면 안 돼... 그곳은 출구가 없으니...."
러스의 등에 업혀 있던 마켈린이 소리쳤다.
"레펜하르트 님! 혹시 여기서 바로 탈출하는 방법 같은 것 없습니까? 네? 휙 공간을 뛰어넘는다든가."
힘든 와중에도 레펜하르트가 대꾸했다.
"없소, 그딴 방법...."
사방신의 유물을 손에 넣고 그 힘으로 잠깐 10서클을 발동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지금 레펜하르트는 만신창이인 것이다. 여기서 다시 또 다른 마법을 쓰는 것은 절대 무리였다.
그리고, 설사 쓸 수 있다 하더라도 살아 있는 개체를 공간 이동시키는 마법은 전생의 레펜하르트조차도 채 개발할 수 없었다.
당장 여기서 빠져나갈 방법은 그저 하나뿐이다.
"그러니까 뛰시오, 발에 땀나도록...."
농조 어린 말을 마지막으로 결국 레펜하르트는 기절해 버렸다. 그를 업은 타시드가 더욱 다리에 힘을 줬다.
"허어업!"
청록색 오러를 전신에 감은 채 타시드가 몸을 날렸다. 마켈린과 실란이 기도를 올리며 모두에게 축복을 내렸다.
"알 포트여! 이들을 굽어살피소서!"
"필라넨스시여! 이들에게 지치지 않는 힘을 주소서!"
오러 유저에게 신성 강화 주문은 그리 통하지 않지만, 그래도 치유와 체력 회복 쪽은 제법 먹힌다. 활기를 얻은 이들이 저마다 청색과 은색을 흩뿌리며 전력을 다해 땅 위로 달려갔다.
☆ ☆ ☆
대륙 최대의 화산, 레단트 웨일.
그곳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피어오르던 연기가 일순 붉은 숨결을 토하며 천지에 굉음을 토했다. 화산이 분화한 것이다.
하늘이 검게 물들고 시뻘건 용암덩어리가 유성이 되어 고지대는 물론, 밀림 일대까지 떨어져 불길을 피웠다. 용암의 강이 대지를 덮고 불길이 사방으로 몰아쳤다. 먼지 폭풍이 화산재를 가득 담고 고지대와 밀림 일대를 뒤덮었다.
그야말로 지옥과도 같은 풍경, 그곳에 한 무리의 일행이 달리고 있었다. 흐르는 용암 사이를 새처럼 뛰어넘고 때로는 백색의 안개로 몸을 감싸며 정신없이 고지대 아래쪽으로 달린다.
얼마나 달렸을까?
어느 정도 주위 대기가 식었다. 타시드가 숨을 헐떡였다. 오러 유저인 그가 힘겨워할 정도니, 이들이 얼마나 미친 듯이 달렸는지 증명이 되고도 남으리라.
다들 화산재를 잔뜩 뒤집어써 시꺼먼 상태였다. 실란이 문득 키득거렸다. 전부 굴뚝 청소라도 하고 나온 듯한 몰골이다.
"왜 웃어요, 실란?"
이니야가 삐친 얼굴로 핀잔을 던졌다. 레펜하르트가 저 멀리 불을 뿜는 화산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잘도 저기서 빠져나왔군...."
도중에 기절을 한번 했지만 그는 다시 정신을 차린 상태였다. 만약 계속 기절해 있었다면 설사 출구를 찾았다 해도 빠져나오는 법을 모르니 모두 그 자리에 파묻혔을 것이다.
혀를 내두르며 새삼 안도하던 마켈린이 문득 물었다.
"그러고 보니... 그자들은 저곳에 파묻혔을까요?"
"그럴 것 같지는 않소만...."
레펜하르트가 미심쩍다는 듯 대꾸했다. 그는 예전에 제이드와 필레나가 귀환의 깃털을 쓰는 걸 보았다. 아마 이번에도 그 기물을 들고 왔겠지?
'음, 마나 기류가 이렇게 헝클어져 있는데 잘 발동이 되었을까? 아무리 고대의 아티팩트라지만....'
걱정을 하다 레펜하르트는 머쓱해졌다. 그래도 소꿉친구라고 걱정을 하긴 했지만, 지금의 필레나는 누가 뭐래도 그의 적인 것이다. 게다가 테스론의 머리를 껴안고 있던 그 모습을 떠올리면....
'그녀는 절대 나를 용서하지 않겠지....'
테스론은 그렇다 치고, 그때 필레나도 이번처럼 상대할 수 있을까?
레펜하르트는 애써 잡념을 떨쳤다. 그리고 미소 지으며 왼손에 든 사방신의 유물을 바라보았다. 그 필사의 도주 속에서, 심지어 기절도 한번 했는데도 그는 이 아티팩트를 결코 놓지 않았다.
"그래도 고생한 보람이 있어 다행이군."
빙그레 웃으며 사방신의 유물을 들어보였다.
"이제, 과거의 힘을 되찾을 수 있어."
제42장 안타레스 공국
1
레펜하르트가 대수림 플룬탄에서 돌아온 지 석 달 후.
크로방스 왕도 크로틴의 성스러운 홀, 브라스티나에서 거창한 행사가 열리는 중이었다.
청명한 가을 하늘이 홀 안 가득 맑은 빛을 뿌린다. 도열해 있는 수많은 귀족과 기사들 앞에서 금발 녹안의 소년이 황금의 왕관을 쓰고 당당히 섰다.
크로방스의 국왕, 유벨 2세가 왕가의 인장을 내밀며 엄숙히 선언했다.
"이로써 왕국 내의 모든 엘프와 드워프, 오크, 트롤은 모두 크로방스 왕국의 진정한 국민이 되었음을 선포하노라!"
귀족과 기사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외쳤다.
"진정한 왕의 명을 받드옵니다! 유벨 폐하, 만세!"
환호하는 신하들을 유벨은 차분히 둘러보았다. 저들 중엔 진심으로 이 정책을 찬동하는 이도 있었고, 마지못해 따르는 척하는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적어도 지금 이 순간, 이 이종족 해방 정책이 정식으로 선포되었다는 점이다.
유벨이 힐끔 왕좌 옆에 서 있는 작은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연인, 피니아가 감개무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드디어 해냈어, 피니아.'
유벨의 아버지, 전 국왕 고트린 1세는 원래부터 드워프에 대한 해방 정책을 준비 중이었다. 고트린 1세가 급사하는 바람에 크로방스 내전이 일어나 그 정책도 물거품이 되나 했지만, 유벨은 왕위에 앉자마자 다시 정책을 재개할 준비를 했던 것이다.
드워프뿐 아니라 모든 이종족으로 정책의 영역을 넓히고, 정책을 찬동하는 귀족들을 끌어모으고 반대파를 숙청하며, 유벨은 몇 년에 걸쳐 차근차근 터전을 닦아 왔다. 그리고 결국 꿈을 이루는 데 성공했다.
유벨 2세가 손을 들었다. 환호가 수그러졌다.
유벨이 엄숙하게 외쳤다.
"안타레스 백작은 앞으로 나오라."
화려한 예복을 입은 거구의 사내가 걸어 나와 무릎 꿇었다. 그를 향해 유벨이 다시 한 번 왕가의 인장을 내밀었다.
"이 정책을 시행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그대를 치하하노라! 이로써 크로방스 왕국은 번영의 길을 닦게 되었으니, 그 공이 실로 적지 않도다!"
"모두가 폐하의 은덕 때문이옵니다."
안타레스 백작, 레펜하르트가 겸양을 표했다. 하지만 여기 모인 모두가 진실을 알고 있었다. 레펜하르트가 없었더라면 아무리 유벨 2세가 노력했다 한들 이종족 해방 정책이 시행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걸.
강력한 무력과 재력이 뒷받침된 안타레스 백국은 그 이름 높은 검성 바나텔과 다른 오러 유저의 협공조차 물리치며 그 위세를 대륙 전역에 떨쳤다. 심지어 권황 제라드마저 같은 편으로 끌어들였으니, 이제 안타레스 백국은 당당히 다른 나라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대국이었다. 분명 형식상으로는 크로방스의 속국인데도 오히려 크로방스 왕국보다도 더 강해진 것이다.
보통 자신의 신하가 이렇게 강해지면 국왕 된 입장에서 경계하는 법이다. 한 산에서 두 마리의 호랑이가 살 수 없고, 두 제왕이 한 자리에 설 수는 없다. 실제로 유벨의 신하들 중 많은 이들이 진심으로 레펜하르트의 존재를 경계해야 한다며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유벨과 레펜하르트의 관계는 그 상식조차 깨고 있었다.
애당초 유벨은 감히 레펜하르트를 자신의 경쟁자로 여기지도 않았다. 처음부터 그는 저 거구의 사내가 얼마나 강력하고 영리하며 엄청난 세력을 지녔는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형식상 자치령이라며 국토 일부를 던져 주고 신하로 삼긴 했지만, 본인 감각으로는 전혀 자기 밑이라는 인식이 없었달까? 유벨이 본 레펜하르트는 너무나 거인이라―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감히 그를 상대로 권력 욕심을 낼 수가 없었다.
어리석은 권력욕에서 벗어난 유벨에게 레펜하르트는, 같은 꿈을 꾸는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동지였다.
레펜하르트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유벨과 시선이 마주쳤다.
'결국 성공했군, 유벨.'
'모두 그대의 덕이지요.'
유벨이 추진하는 이종족 해방 정책을 레펜하르트는 전력으로 도왔다. 반대파를 숙청하고 여론을 조작하고 중도 귀족들을 설득하는 대부분의 일을 한 것이 레펜하르트였다. (뭐, 정확히는 카를이 했지만.)
왕국 최고의 권력자 둘이 사심 없이 사이좋게 손을 잡았으니 반대파가 힘을 쓸 수 있을 리가 없다. 제법 반발이 있었지만 결국 모두 눌러 버렸다.
또한 레펜하르트가 누른 것은 귀족의 반발뿐만이 아니었다. 카를의 조언을 따라 그는 속세의 세력 말고 종교 문제에 있어서도 충실히 밑작업을 해 두었다.
크로방스에서 가장 세력이 큰 것은 물론 레단티 교단이지만 세이어 교단의 위세도 만만치 않다. 정책이 알려지자 당연히 세이어 교단에서는 신을 모독하는 짓이라며 길길이 날뛰었다.
그 반발을 억누른 것이 바로 안타레스 백국의 로비를 받은 레단티와 필라넨스, 두 교단이었다.
안 그래도 세이어 교단을 누를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던 레단티 교단이었다. 그런데 양국의 국왕이 절호의 기회를 주었으니 이 찬스를 놓칠 이유가 없다. 대놓고 세이어 교단의 교리에 반대하는 선언을 선포했다.
-레단티의 가르침에 의하면, 여신께선 사람을 축복하시어 대지를 경작하고 그 소산을 먹으라 하셨음이로다. 짐승은 결코 대지를 경작치 않으며 그저 여신의 은총을 훔칠 뿐이니 대지의 소산을 거두는 자는 곧 사람임을 의미하는 바, 저들이 사람이라는 명확한 증명이 될 것이다!
엘프나 드워프는 물론, 유목 생활 중심인 오크나 자연 동화적 삶을 사는 트롤들도 텃밭 정도는 가꾼다. 이제껏 적용된 적은 없었지만, 레단티의 교리에 따르면 이들도 틀림없는 사람이었다.
필라넨스 교단 쪽은 안타레스 대주교 실란의 주도하에 일이 진행되었다. 교단의 현자들에게 조언을 구하고 교단 본산의 허락을 받아 실란도 세상에 선포했다.
-필라넨스의 가르침에 의하면, 짐승은 오직 육욕만으로 교미할 뿐이나 사람은 사랑으로 그 후손을 낳는다. 저들은 정신적인 교감을 통해 배우자를 얻고 그 사랑으로 아이를 낳아 기르니 이는 저들이 사람이라는 분명한 증명이다!
인식의 변화와 제도적 뒷받침, 그리고 종교적 근거가 확립된 이종족 해방 정책은 결국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 순간부터 더 이상 크로방스 왕국의 이종족들은 노예가 아니었다. 당당한 자유인으로서, 일국의 국민의 권리를 얻게 되었다.
신성한 홀, 브라스티나.
그곳에서 선 유벨이 위엄 있는 태도로 레펜하르트에게 손짓했다.
"일어서시오, 안타레스 백작."
거구의 사내가 허리를 곧게 펴고 몸을 일으켰다. 그저 서 있을 뿐인데도 위풍당당함이 홀을 가득 메우는 듯하다.
유벨 2세가 왕가의 인장을 내밀며 선언했다.
"그의 공을 치하하며 크로방스의 이름으로 안타레스 백작에게 공작위를 내린다. 이제 그는 안타레스 공작이니 그의 영지 또한 안타레스 공국이라 칭하노라!"
☆ ☆ ☆
푸른 가을 하늘이 맑게 빛나는 안타레스 공국의 새로운 왕도.
아라난 그라드는 축제 분위기로 한창이었다. 그들의 왕, 레펜하르트가 정식으로 공작위를 받았음을 축하하는 것이다.
거리마다 맥주와 포도주가 오가고 춤과 음악이 넘쳐흐른다. 각지에서 몰려온 유랑 극단이 거리에서 공연을 펼치고 각 술집이며 식당에서는 간이 테이블까지 내놓으며 몇 배나 불어난 손님들을 맞이해 호황에 즐거워한다.
지붕 위로 꽃가루가 날리며 웅장한 퍼레이드도 이어졌다. 천을 짜서 만든 큰 모형이 대로를 지나갔다. 원숭이를 닮은 검사 노인을 후련하게 두들겨 패는 근육질 거구 노인의 모습을 담은 모형이었다.
그 웅장한 퍼레이드는 왕궁 가이라크, 레펜하르트의 개인실에서도 똑똑히 보였다. 퍼레이드 모형을 보며 레펜하르트가 혀를 찼다.
"저거... 검성 바나텔이 보면 난리 나는 거 아닌가 몰라? 뭐, 사부는 좋아하시는 것 같았으니 상관없으려나."
어쨌거나 레펜하르트는 흐뭇한 눈으로 축제의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인간도 엘프도 드워프도 오크도 트롤도, 다섯 종족이 모두 어우러져 흥겹게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예전 안타레스 제국 시절에는 없던 광경이었다.
"역시 축제를 열길 잘한 것 같군."
마법사였던 전생의 레펜하르트는 축제 따위에 전혀 의미를 두지 못했던 것이다. 일하다 지치면 휴식을 취해야지, 왜 노는데 또 힘을 빼느냐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사실 이번에도 쓸데없는 짓이라며 축제 열자는 카를을 만류하려고 했었다.
-내가 공왕이 된 걸 일부러 국민들에게 축하시키다니, 좀 웃기는 일 아니오?
축제 하나 진행하려면 돈도 상당히 많이 든다. 안 그래도 제라드에게 나가는 월급 때문에 재정도 좋지 않은데 쓸데없이 돈 쓸 필요 있나? 물론 그동안 이종족의 특산물이 전 대륙으로 팔려 안타레스의 재정이 상당히 풍요로워지긴 했다만....
하지만 카를이 단호히 반대했다.
-뭔가 착각하시는 모양인데, 딱히 공왕님 축하하는 거 아니거든요? 그냥 놀 기회가 생기는 걸 좋아하는 겁니다만?
이런 국가적 행사가 국민들을 얼마나 단결시키는지 잘 아는 카를이다. 무릇 지배자라면 국민들에게 적당히 핑계를 대고 숨통 틔울 기회를 주어야 하는 것이다.
-빵과 놀이, 이것이 국민을 다스리는 가장 어리석은 지배자의 행태라고는 하지요. 그렇다고 현명한 지배자가 빵과 놀이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당연히 저것도 제공하고, 또 다른 것 역시 베풀어야 한다는 의미지요.
그래서 카를은 꽉 짜인 재정 계획 속에서도 용케 따로 축제 예산을 마련했다. 어떻게 저 예산을 다 만드는 건지 레펜하르트도 신기해할 정도였다. 행정부에서는 저 카를의 절묘한 솜씨를 두고 '우리 재상님은 연금술사!'라는 말도 한다고 했다.
그렇게 카를은 계획을 짜고 축제를 열었다. 이름 하여 '안타레스 건국제'였다. 생긴 지 몇 년이나 된 나라인데 이제 와서 건국이라고 하는 것도 좀 웃기지 않나 싶지만, 카를은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핑계는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건 놀 기회가 생기는 것이라니까요? 세상 모든 사람들이 공왕님처럼 오직 목표만을 향해 달려가는 삶을 살지는 않습니다. 보통 사람은 놀 때 놀고, 쉴 때 쉬어야 다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레펜하르트 본인도 자신이 세상의 보편적인 인식에서 좀 벗어나 있다는 건 인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태 카를은 틀린 말 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를 믿고 일을 추진했다.
"과연, 카를은 빈말 하지 않는군."
모두가 어우러지는 저 모습은, 그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즐거운 광경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다 레펜하르트가 창문에서 시선을 뗐다.
'놀 사람은 놀게 놔두고, 난 내 할 일 해야지, 음.'
지금 레펜하르트는 평소처럼 웃통을 벗고 바지만 입은 채였다. 언제부터 이게 평소 차림이 됐는지 모르겠다. 한숨을 쉬며 자신의 금속 허리띠를 내려다보았다.
드워프의 솜씨로 가공한 이 미스릴제 허리띠는 그가 온갖 마법을 걸어 특정한 기능을 갖춘 마도구다. 바로 허리띠 옆에 붙은 작은 무한의 주머니, 그 안에 들어 있는 사방신의 유물을 활용하는 기능이었다. 주머니 입구에는 작은 사슬이 빠져나와 허리띠와 연결되어 있었다.
사방신의 유물은 가로세로 30센티미터 정도의 커다란 금속판 형태다. 그냥 들고 다니기에는 너무 휴대가 불편하다. 그래서 전생 때도 이렇게 무한의 주머니 안에 넣어 부피를 줄인 뒤 마력선으로 연결해 들고 다니는 방식을 애용했다.
단지 그때는 목에 걸고 다녔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웃통 벗고 싸우는 경우가 많으니 목에 거는 건 좀 위험하지. 공격받을 수도 있고."
그래서 허리띠 형태로 가공한 것이다. 뭐, 현 실력으로는 그때처럼 목걸이 크기로까지 사이즈를 줄이기가 힘들다는 이유도 있긴 했다.
레펜하르트가 허공에 손을 들었다. 수인을 맺으며 차분하게 스펠 영창을 시작했다.
잠시 후, 마법이 발동됐다.
"아케인 블래스터!"
창문 너머로 무지갯빛 섬광이 뻗어 나가 아라난 그라드의 상공을 스쳐 지나갔다. 굉음이 우르릉 울렸다. 축제 중이던 시민들이 잠시 놀라 허공을 바라보았지만, 이내 다시 환호를 터트렸다.
"오오!"
"와아, 예쁘다!"
아무래도 축하용 마법이라도 터트린 줄 아는 눈치였다. 하긴, 아케인 블래스터가 알록달록 예쁘긴 하다. 레펜하르트도 이걸 아니까 대놓고 마법을 구사한 것이다.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음, 8서클도 문제없고."
그가 다시 마법을 준비했다. 이번에는 9서클 광역 폭렬 주문, 프로미넌스 템페스트였다. 수백 개의 불꽃이 허공으로 날아올라 화려하게 폭발했다. 또다시 시민들이 좋아라 날뛰었다.
"이왕 마법 연습 할 거 시민들에게 서비스도 하고, 좋잖아?"
저 정도 상공에서 폭발하면 아무리 9서클 마법이라도 아무 피해도 줄 수 없다. 그저 예쁘게 불꽃만 사방으로 튈 뿐.
레펜하르트가 손을 거두었다. 9서클 마법도 이제 큰 문제없이 구사가 가능했다. 절로 가슴이 뿌듯했다.
"7서클에서 빌빌댄 게 엊그제 같은데 바로 9서클까지 되찾아 버렸네."
어차피 몰라서 못 쓰던 마법이 아니었다. 그놈의 마력이 모자라 여태껏 고생한 게 아니던가?
비록 예전보다 연산 속도가 조금 느리긴 하지만, 이 테스론 헤드도 충분히 발달될 대로 발달되었다. 마력만 받쳐 주면 단숨에 9서클 마스터의 경지에 드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뭐, 여기까지야 당연한 거고. 문제는 이다음이지.'
침착하게 레펜하르트가 정신을 집중했다. 양손을 들어 올리며 천천히 주문을 외운다. 그의 허리띠를 통해 사방신의 유물이 마력을 공급한다.
현재 그의 마력 허용량을 압도적으로 뛰어넘는 어마어마한 마력이 가상의 구상 공간을 마련하고 마치 레펜하르트의 마력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연동된다.
이것이 사방신의 유물이 지닌 최고의 강점이다. 그릇이 작은 현재의 레펜하르트에게 억지로 마력을 부어 넣어 봤자 넘치기만 할 뿐이다. 하지만 사방신의 유물은 마력을 부어 넣는 대신 또 다른 가상의 그릇을 만들기 때문에 허용된 마력 이상의 마법도 구사 가능하게 만들어 준다.
외부의 마력을 자신의 것처럼 느끼며, 레펜하르트가 10서클의 권능을 발동했다.
"대이적 마법, 인피니티 게이트."
어둠의 공간이 눈앞에 활짝 열렸다. 그렇게 잠시 아공간을 유지하다 레펜하르트가 마법을 거두었다. 그리고 다시 10서클 마법을 발동했다.
"대이적 마법, 인피니티 게이트."
그렇게 초월역장을 세 번 연달아 펼치고 나니 더 이상 사방신의 유물이 마력을 허락하지 않았다. 레펜하르트가 입맛을 다셨다.
"쩝, 벌써 석 달째 동조동기화 중인데 참 말 안 듣네, 이거."
사방신의 유물이 담은 마력은 그야말로 무한대에 가까웠다. 아무리 퍼내 써도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레펜하르트도 대체, 고대에 무슨 이유로 이런 무지막지한 아티팩트를 만들었는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무한의 마력을 레펜하르트가 전부 꺼내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동조화, 동기화가 끝난 영역까지만 마력을 허락하는 것이다.
전생에서 레펜하르트가 사방신의 유물을 소화한 영역은 고작 5퍼센트 정도, 그것만으로도 그는 본신 마력의 두 배 가까운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전생의 그는 고유 마력만으로도 대륙 2위의 마법사, 9서클 마스터였던 빛의 마도사 제이드의 두 배에 달했었다. 게다가 10서클 대이적 마법, 마나 리플레인으로 90퍼센트의 사용 마나를 되돌려 받았으니 효율로 따지면 거의 제이드의 마흔 배에 달하는 마력을 지녔다 하겠다.
괜히 레펜하르트가 고금 최악의 마왕으로 공포의 대상이 된 것이 아니다. 대륙 2위부터 100위까지의 모든 마법사의 마력을 합친 것보다 오히려 더 많은 마법을 구사할 수 있었으니, 과연 마왕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은 권능이다.
당시에도 사천왕이며 이종족들 탈출시키느라 10서클 마법 펑펑 쓴 후가 아니었다면, 아무리 상대가 대륙 최강의 5인이더라도 패배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땐 참 좋았는데."
반면 현재의 레펜하르트가 동기화시킨 영역은 고작 0.5퍼센트에 불과했다. 물론 이 정도로도 현재 고유 마력의 백 배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힘이었다. 깨달음과 경지를 통해 억지로 서클을 올리긴 했지만, 지금 그는 누가 뭐래도 7서클 수준의 마법사다. 고유 마력도 딱 그 수준일 수밖에 없다.
허리띠를 내려다보며 레펜하르트가 툴툴거렸다.
"이 마력 수준으로는... 인피니티 게이트 세 번 쓰면 고갈이구먼. 사방신의 유물 동조동기화 영역에 마력 도로 찰 때까지 일주일은 걸리고."
그나마 인피니티 게이트가 10서클치고는 마력 소모량이 적은 편이라 세 번이나 쓸 수 있는 것이다. 어지간한 10서클 마법은 한 번 쓰면 그냥 끝일 것 같다.
"마나 리플레인은 고유 마력만으로 발동하는 거라 아예 시전이 불가능하고... 이걸로 뉴클리어 버스트나 헬 오브 더 월드는 턱도 없고... 고유 마력까지 총동원해서 바닥까지 긁으면 그럭저럭 미티어 폴까지는 가능하려나?"
사방신의 유물을 얻고 금방 과거의 힘을 되찾을 줄 알았는데, 역시 세상살이 만만치가 않다.
그는 예전 자신을 당당하게 소개할 수 있었다.
-나는 10서클의 종사자, 레펜하르트다!
그런데 지금은 소개문을 이렇게 바꿔야 할 판이었다.
-나는 주 1회 10서클 대마법사, 레펜하르트다! 아, 경우에 따라서 주 3회까진 될 수도 있다!
상당히 구차한 소개문이 되어 버린다. 레펜하르트는 입맛을 다셨다.
'뭔가 좀 더 연구하면 방법이 있을 것도 같은데... 아, 그때 연구 좀 더 할걸!'
전생 때는 딱히 마력에 아쉬운 적이 없어 사방신의 유물을 연구하다 말았다. 한 5퍼센트쯤 동기화시키고 이쯤이면 됐다 싶어 손을 놔 버렸다. 당시엔 제국 경영이며 인류의 침략 등 워낙 바쁜 일이 많아 차분히 연구에만 몰두할 상황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되고 나니 새삼 아쉬움이 몰려온다.
'뭐, 대신 육체가 엄청나게 좋아졌으니 억울할 건 없지.'
애써 자신을 위로하며 레펜하르트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래, 그대로 테스론의 육체를 얻었으니 큰 손해는 아니다....
"윽!"
순간 레펜하르트가 이마를 짚었다. 테스론을 떠올린 순간 또다시 두통이 밀려왔다.
'또냐....'
테스론을 죽인 후부터다. 그때부터 수시로 이런 통증이 엄습한다. 주로 그를 떠올릴 경우 생기는 일이다.
'왜 이러지? 역시 내 육체를 박살 낸 것 때문에 무의식에 뭔가 문제가 생긴 건가?'
생각해 보면 그는 자신의 육체를 자기 손으로 부숴 버렸다. 일종의 자살을 한 셈이니 역시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은 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건가?'
잠시 후 두통이 사라졌다.
"으음...."
근심 어린 표정으로 레펜하르트는 이마를 매만졌다. 역시 두통이 신경 쓰이긴 했지만, 당장 어찌할 방도가 없다. 이미 실란이나 마켈린을 찾아가 신성치료도 받아 봤지만 전혀 효과가 없었다.
방법도 없는 일 고민해 봐야 시간 낭비일 뿐이다.
'그래, 그놈은 죽었다. 내 육체도 죽었어. 다 끝난 일이다. 그냥 정신적 충격이 아직 남아서 그 후유증이 나타나는 걸 거야.'
실제로 테스론을 죽인 후 두통만 생긴 것만은 아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예전보다 훨씬 머리가 맑아진 점도 있다.
레펜하르트는 잡념을 거두었다. 그리고 다시 허리띠를 바라보며 사방신의 유물을 새롭게 동기화할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그렇게 계속 새로운 방식을 궁리하던 중이었다.
"레펜하르트 님?"
방문이 열리며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백금발에 갈색 피부를 지닌 아리따운 미소녀 엘프가 생글생글 웃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아, 시리스? 어쩐 일이야?"
2
시리스가 사뿐사뿐 걸음을 옮기며 주저앉은 레펜하르트 곁으로 다가왔다. 양손을 뒷짐 진 채 다리를 꼬며 걸어오는데, 묘하게 아양 떠는 것처럼 보였다.
"많이 바쁘세요?"
애교 어린 음성을 흘리며 시리스가 등 뒤에서 레펜하르트를 껴안았다. 새하얀 손가락이 그의 가슴을 부드럽게 더듬었다.
다시 한 번 말하겠는데, 현재 레펜하르트는 웃통을 깠다. 맨가슴이란 소리다. 벗은 것만 봐도 얼굴 붉히던 애가 대놓고 사내의 맨살을 어루만지다니?
레펜하르트가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어, 응. 뭐 좀 고민 중이긴 했는데...."
"흐응, 그렇구나."
싱긋 웃으며 시리스가 두꺼운 레펜하르트의 목덜미에 머리를 얹는다. 예전엔 목 근육 두꺼운 거 싫다더니, 좀 태도가 이상하다. 그녀의 숨결이 레펜하르트의 귓가에 맴돌았다.
"무슨 일이니, 시리스?"
"그냥 뭐 하시나 궁금해서요. 왜요? 오면 안 되나요?"
"아니, 뭐, 그건 아니지만...."
레펜하르트는 떨떠름한 얼굴로 시리스를 힐끔거렸다. 청순한 소녀의 얼굴 위로 묘하게 요염한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처음 보는 표정은 아니었다. 전생 때, 연인이었던 그녀가 둘이서 사랑을 나눌 때 짓곤 하던 바로 그 표정이다.
분명 그립고 사랑스러운 얼굴.
하지만, 지금은 너무 어색하다.
'얘가 요새 왜 이러지?'
사방신의 유물을 찾으러 가기 전만 해도 이렇지 않았다. 그때도 왠지 모르게 수심이 느껴지긴 했지만 딱히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애가 완전히 변해 버렸다!
항상 무뚝뚝하고 싸늘했던 애가, 갑자기 눈웃음을 치는가 하면 엉덩이를 살랑거리며 걷기도 하고, 요새는 아예 이렇게 스킨십까지 시도한다!
'아, 물론 좋기야 좋지만.'
시리스와 이런 사이가 되는 것은 레펜하르트도 항상 꿈꿔 온 일이다. 하지만 애가 이렇게 갑자기 변할 수도 있는 건가?
솔직히 걱정이 돼서 슬쩍 틸라며 플로라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뭐가 걱정이세요, 공왕님? 시리스 양은 저래 봬도 아직 10대 소녀라고요.
-질풍노도 못 들어 봤어요? 질풍노도? 원래 저 나이 때는 다 그렇답니다. 갑자기 쌀쌀맞다가 또 갑자기 애교도 부리고 그래요.
-그나저나 시리스 양도 제법이네요.
-역시 이니야 씨가 나타나서 걱정이 되었겠죠? 호호호.
여인네들의 수다로 변질될 기미가 보여 잽싸게 도망치긴 했지만, 하여튼 두 사람 다 별걱정 다 한다는 말투였다.
'원래 저 나이 때 소녀들은 다 이런가?'
전생 때는 이미 여인이 된 후 만났는지라 이 나이 때의 시리스가 뭔 생각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생각해 보면 별 큰일도 아닌 것 같고....
'그래도 마냥 좋아하기엔 좀 찜찜한데....'
"왜 그러세요? 레펜하르트 님? 혹시 싫으세요?"
"아니, 그건 아닌데...."
몸을 찰싹 붙인 채 시리스가 고양이처럼 애교를 부린다. 레펜하르트는 당황했다. 그녀의 가슴이 등 뒤로 느껴지고 있었다.
"으음...."
여자 가슴 좀 느껴진다고 당황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레펜하르트가 사춘기 소년도 아니고, 전생 때 이미 시리스랑 갈 데까지 갔었는데 그 정도로 부끄러워 할 리가 있나? 정말 걱정이 되어서였다.
'애가 뭘 잘못 먹었나?'
그때였다.
"레펜하르트 님!"
문이 벌컥 열리며 보랏빛 머리의 엘프 미녀가 방 안에 난입했다. 보통 난입이라는 단어는 전투 도중 뛰어들 때 주로 쓰니 일상에는 안 어울리는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난입'이라는 단어가 매우 잘 어울리는 기세였다.
방 안의 두 사람을 본 이니야의 두 눈에 불꽃이 튀었다. 이미 기감으로 시리스가 방 안에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저 포즈는 대체!
'저년이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어머? 이니야 씨? 어서 오세요."
이니야가 들어왔음에도 시리스는 레펜하르트의 목을 껴안은 채 고개만 돌리고 있었다. 갑자기 방안의 온도가 싸늘하게 내려갔다. 바람도 없는데 이니야의 머리칼이 천천히 휘날렸다.
"호, 호호호... 시리스 양... 여기엔 어쩐 일로...."
"당연히 레펜하르트 님 보러 왔죠."
따박따박 대꾸하는 시리스였다. 이니야가 애써 음성을 가다듬었다.
"그, 그렇군요. 그런데 레펜하르트 님은 지금 바쁘시지 않았나요?"
아까부터 기감으로 레펜하르트가 마학 연구를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그래서 들어가고 싶은 마음도 꾹 참고 밖에서 서성대고 있었는데!
'왜 레펜하르트 님은 화도 안 내시는 거야?'
지극히 억울해져 이니야가 눈을 부라렸다. 시리스도 눈가를 가늘게 모으고 이니야를 노려봤다. 사이에 낀 레펜하르트만 그저 황당할 뿐이다.
'시리스도 그렇고 이니야 양도 그렇고 왜 저러지?'
저래서야 꼭 질투하는 것 같지만 설마 그럴 리는 없고.
이니야가 자신을 마음에 두었을 거라곤 생각도 못한 레펜하르트였다. 당연히 이 상황도 이해가 가지 않을 수밖에.
어쨌거나 레펜하르트는 고민했다. 그는 지금 한창 사방신의 유물에 대해 궁리하던 중이었다. 한창 연구 중이다가 끊긴 셈인데, 솔직히 말하면 마저 연구나 계속하고 싶었다.
머리를 벅벅 긁으며 조심스레 말했다.
"저기, 나 연구 좀 마저 하면 안 될까?"
그러자 두 여인 모두 몸을 흠칫 떨었다.
시리스가 슬그머니 목을 감싼 팔을 풀었다. 이니야가 조신하게 손을 모으더니 도로 방을 나섰다. 시리스도 종종걸음으로 뒤를 따랐다.
살포시 방문이 닫히고 다시 방 안에 레펜하르트만 홀로 남았다.
다시 한 번 머리를 긁으며 레펜하르트가 눈을 껌뻑였다.
"...뭐였지?"
하지만 그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조용해지자 다시 사방신의 유물 쪽으로 생각이 쏠린 것이다. 다시 머릿속으로 마학 이론을 조합하며 아까 하던 고민을 잇는다.
'음, 예전에 쓰던 동기동조화는 지금 몸에는 안 맞아. 역시 새로운 방식을 찾아야 하는데....'
그새 두 여인의 존재를 잊은 채, 마법사 레펜하르트는 자신만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 ☆ ☆
방 밖으로 나온 이니야가 시리스를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흐음,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그나마 예전에는 소심하게 방해만 하던 애가, 요즘 들어서는 아주 적극적으로 구애 공세를 펼치고 있는 것이다. 듣자하니 자신이 오기 전에는 저런 태도가 아니었다던데....
'그럼 왜 이제 와서 이래? 나 엿 먹이겠다는 거야, 뭐야?'
눈빛이 파괴력을 지닌다면 오리하르콘도 썰어 버릴 듯한 가공할 안광이 시리스의 전신을 뾰족뾰족 찔렀다. 하지만 시리스는 태연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태연하게 받아칠 뿐이다.
"왜 그러세요, 이니야 씨?"
겉으로는 순진한 표정을 가장하는데, 참으로 뻔뻔하기도 하지.
이니야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가요, 시리스 양?"
두 여인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서로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긴 했지만, 그래 봤자 서로 엘프다. 엘프의 정령 교감으로 어느 정도 상대의 감정을 눈치챌 수 있는 것이다.
이니야가 눈을 부라렸다.
'이년이 이제 숟가락 꽂는 걸로 모자라 밥통째 들고 튀려고?'
시리스도 눈을 흘겼다.
'내가 질 줄 알아?'
예전과 달리 애가 이상하게 반항적이 되었다. 이니야가 최종 비기를 시전했다. 시리스의 가슴께를 빤히 본 것이다.
흠칫하며 시리스가 몸을 떨었다.
"왜 그런 눈으로 봐요?"
이니야가 생글생글 웃었다.
"아, 그냥 레펜하르트 님 같은 듬직한 남성이라면 좀 더 성숙한 여인을 좋아하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필살기를 날린 뒤 이니야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반격이 돌아왔다.
"저런, 뭘 모르시네요? 남자들 중에는 너무 가슴 큰 것보다는 한 손에 폭 들어오는 아담한 가슴을 좋아하는 경우도 있답니다."
확실히 시리스 역시 전체적으로 균형 잡힌 미소녀였다. 그녀의 갈색 피부 역시, 이니야와 달리 풋풋하면서도 생기발랄한 느낌이 있다.
하지만, 역시 이니야의 연륜이 한 수 위였다.
"아, 한 손에 폭 들어가야 한다 이거죠?"
"...?"
"레펜하르트 님의 한 손에?"
"아?"
순간 시리스는 당황했다. 그러고 보니 레펜하르트의 신체 사이즈를 생각 못했다. 신장 2미터가 넘고 체중이 150킬로그램이 넘는 거구다. 당연히 손아귀도 무지막지하다!
'헉!'
이니야의 저 풍만한 가슴도 그 인간 손아귀에 들어가면 그냥 아담한 수준일 것 같았다.
"호호호!"
통쾌한 웃음을 터트리며 이니야는 시리스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통로를 돌아 시리스와 멀어진 뒤 도로 침울하게 주저앉았다.
'왜 처웃고 앉았냐, 나? 어차피 쫓겨난 건 마찬가진데.'
아, 정말 남자 유혹하기 힘들다. 이니야가 한숨을 푹 쉬었다.
한편, 시리스는 계속 차가운 눈으로 이니야가 사라진 통로 저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이었다. 갑자기 요부 같던 그녀의 표정이 소녀의 그것으로 돌아오며 시리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어, 어머나!'
그제야 자신이 한 행위가 부끄러워진다. 양 뺨을 감싸며 시리스는 털썩 주저앉았다.
'내, 내가 왜 그랬지?'
조금 전까지의 그녀가 마치 자신과 다른 사람인 것처럼 느껴진다. 이번이 처음인 것도 아니다. 요즘 들어 몇 번이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개방적인 태도를 보이곤 했다.
계속 얼굴을 붉힌 채 시리스가 중얼거렸다.
"나... 요새 왜 이러지...."
☆ ☆ ☆
왕궁 가이라크 서쪽의 한 연무장.
연무장 한복판에서 거구의 근육질 노인이 가부좌를 튼 채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문득 노인이 눈을 떴다. 황금빛 안광이 뿜어 나왔다.
"허어업!"
노인이 벌떡 일어나며 허공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찬란한 금색의 오러가 뿜어 나가 상공으로 치솟더니, 허공에서 회전해 다시 노인에게로 떨어진다.
노인이 가슴을 활짝 펴더니 모든 오러 가드를 거둔 채 맨몸으로 떨어지는 오러 기둥을 정통으로 맞았다.
콰아아앙!
폭음과 함께 연무장이 통째로 뒤흔들렸다. 잠시 후, 빛이 사라지며 연기 속에서 노인이 걸어 나왔다. 저 폭발 속에서도 흠집 하나 생기지 않은 모습이었다. 목을 매만지며 노인이 뇌까렸다.
"으어, 시원하다."
오러를 맞아 놓고 한다는 소리가 무슨 온천 들어갔다 나온 것 같다. 그때 연무장 저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훈련 중이십니까, 사부?"
거구의 노인, 제라드가 고개를 돌렸다. 애제자 레펜하르트가 연무장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제라드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허허, 이 따위가 무슨 훈련? 그냥 몸이 뻐근해서 푼 것뿐이다."
"아, 물론 그러시겠죠."
레펜하르트는 어이없어하며 방금 폭발한 연무장 바닥을 바라보았다. 카를이 비싼 돈 들여서 대 물리 처리를 한 연무장인데, 아주 파괴 흔적이 예쁘게 남아 있다.
'저런 걸 맞고 한다는 소리가 그냥 몸 뻐근해서 푼 거라니!'
"뭘 그런 눈으로 보느냐, 제자야? 너도 하는 짓이잖아?"
"전 이렇게 무식하게 안 합니다. 그냥 연환 기격탄이나 날리고 만다고요."
어디까지나 상식을 추구하는 레펜하르트는, 몸 풀 때 가볍게 연환 기격탄을 날려 전신을 두들기곤 했다. 이렇게 무식하게 오러를 퍼붓지는 않는 것이다!
물론 남들이 보기엔 그놈이 그놈이었다. 지나가던 왕궁 시종들이 흠칫 떨더니 종종 걸음으로 재빨리 지나갔다.
"제자 탐색은 잘되십니까, 사부?"
공식적으로 안타레스 공국 호위 무장이 된 제라드는 계속 아라난 그라드에 머물고 있었다.
어차피 적이 쳐들어오기 전까지는 할 일이 없는 제라드다. 그래서 이종족 중 혹시 짐 언브레이커블의 무문이 될 만한 놈이 있을까 열심히 뒤지고 있었던 것이다.
제라드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전체적인 수준은 그래도 인간보다 나은데... 그래 봤자 그놈이 그놈이더라."
애초에 엘프 쪽은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제라드는 일단 오크부터 훑고 지나갔다. 확실히 오크들은 그 특성상 인간에 비해 월등한 재능이 많았다. 괜히 전투 종족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꽤 기대를 했는데, 그래도 좀 모자라."
오크 아이들 중에는 과연 뛰어난 육체를 지닌 이들이 제법 보였지만 여전히 짐 언브레이커블 기준에는 못 미쳤던 것이다.
"그, 그렇습니까?"
레펜하르트는 혀를 내둘렀다. 전투 종족이라는 오크조차도 짐 언브레이커블의 기준을 통과 못하다니, 새삼 이 육체가 얼마나 무식 괴팍한 것인지 실감이 났다.
"그 칼켄이나 타시드란 아이는 그래도 좀 가능성이 보이던데... 애들이 너무 커 버렸어. 게다가 오크는 너무 빨리 자라지 않느냐? 몸 제대로 만들기도 전에 성인이 되어 버리니 과연 될지 모르겠다."
레펜하르트는 살짝 실망했다. 내심 제라드가 오크들 중 쓸 만한 이들을 골라 가르치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상상도 했던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실로 어마어마한 전력이 될 테니 은근 기대도 했다.
'오크 언브레이커블 군단은 역시 무린가, 쳇.'
수십 명의 오크가 스파이럴 가드를 휘감고 황금빛 오러를 쏘아 대는 장대한 광경은 역시 비현실적인 망상이었던 모양이다.
"아, 그럼 트롤은요? 트롤도 육체 능력은 오크 못지않은데?"
"그쪽?"
제라드가 고개를 저었다.
"걔들은 안 돼. 두세 대만 때려도 바로 미쳐서 날뛰더라."
그렇다. 트롤에겐 생명이 경각에 달했을 때 발동하는 종족 특기, 광폭화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짐 언브레이커블의 수련법은 생명을 경각까지 몰아붙여 완벽한 신체를 만드는 방식이다.
'...맙소사, 난 그럼 트롤이 광폭화할 정도의 타격을 몇 년씩 맞고 살았단 말이냐?'
소름이 돋아 레펜하르트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뭐, 그렇다고 제라드가 트롤 줄초상 냈다는 소리는 아니다. 그냥 깔끔하게 한 방 먹여 기절시켰겠지. 전생의 그도 수하의 트롤이 실수로 광폭화하면 같은 수법으로 제압했었으니까.
입맛을 다시며 제라드가 구시렁댔다.
"그래서 요새는 드워프 쪽을 찾아보고 있다. 너무 조그매서 될까 모르겠다만, 뭐 작은 거야 키우면 되는 거니까."
순간 짜리몽땅한 체구에 신장 2.5미터의 드워프가 수염을 휘날리며 호탕하게 웃는 광경이 떠올랐다.
'그건 그거대로 무섭겠는데.'
"그런데 이쪽은 영 애들 찾기가 힘들더라."
드워프 일족이 아이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드워프 어미들이 제라드만 나타나면 기겁을 하고 애를 숨겼던 것이다.
처음에는 제라드의 드넓은 가슴에 눈 돌아갔던 드워프 여인들이다. 하지만 짐 언브레이커블의 수련법이 알려지자 다들 애 숨기기 바빴다.
안 그래도 수명이 길다 보니 손이 귀한 드워프였다. 저런 생고문에 소중한 아이를 갖다 바칠 수는 없다!
제라드의 흉명이 대체 어떻게 퍼졌는지, 요즘 아라난 그라드의 드워프들 사이에선 말 안 듣는 아이들에게 '너! 그렇게 엄마 말 안 들으면 제라드 님이 잡아간다!' 라는 식으로 겁도 주고 있었다.
"이 좋은 가르침을 널리 퍼트리고 싶은데 왜 이리 인재가 없는지...."
하소연하는 사부를 보며 레펜하르트가 위로의 말을 건넸다.
"기운 내십쇼, 사부. 찾다 보면 언젠가는 나오겠죠."
제라드가 눈을 뜨더니 핀잔을 던졌다.
"응? 네가 기운을 내야지, 왜 내가 내느냐? 무맥을 이을 의무는 너한테 있다? 난 의무 다 했어!"
설마 레펜하르트가 무맥을 잇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눈곱만큼도 없어 보였다. 짐 언브레이커블에는, 자신의 후계자라면 이 자랑스러운 가르침을 반드시 후세에 전할 거라는 철통같은 믿음이 있는 것이다.
레펜하르트가 머리를 긁었다.
'그건 그러네. 으음, 찾긴 찾아야 할 텐데.'
제라드가 콧방귀를 켜며 제자를 타박했다.
"아직 젊으니 안 급하지? 나도 그랬다. 늙어 봐라, 조급해질걸?"
솔직히 머릿속은 레펜하르트도 충분히 늙었다. 대충 흘려듣고 있는데 제라드가 물었다.
"아, 그런데 왜 왔느냐, 제자야?"
레펜하르트가 용건을 꺼냈다.
"사부님께 6중첩 캘러미티 혼에 대한 단초를 얻을 수 있을까 해서입니다."
"응? 아니 5중첩 뚫어 줬음 됐지, 뭘 또 가르쳐 달라고?"
"그냥 한 번만 보여 달라고요. 감이라도 잡게."
8중첩은 보긴 했는데, 그건 너무 천외천이라 봐도 뭐가 뭔지 모르겠더라.
레펜하르트의 말에 제라드가 잠시 고민했다. 누누이 말하지만 짐 언브레이커블은 이미 하산한 제자는 당당한 한 사람의 권사로 인정한다. 계속 가르침을 내리는 것은 과보호라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가르침을 내리는 것도 아니고 그냥 옆에서 보겠다는데, 그것도 마다할 이유는 없을 것 같지?'
제라드가 주먹을 쥐었다. 노끈 같은 힘줄이 팔뚝 위로 뱀처럼 불끈거렸다. 성냥을 그으면 불이 붙을 듯한 우람한 이두박근이 부풀어 올랐다. 팔뚝의 움직임에 따라 근육이 깊게 파이고, 또 도드라졌다.
"기다려라, 제자야. 금방 보여 주마."
우우웅!
무시무시한 황금빛 오러가 폭풍처럼 피어올랐다. 레펜하르트가 기겁하며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실로 어마어마한 기운이었다. 제라드의 굵은 팔뚝 위로 여덟 개의 오러 파문이 선명하게 빛났다.
'아니, 6중첩 보여 달랬더니 이 양반이 왜 갑자기 8중첩을....'
그때 문득 떠올랐다.
'윽! 그러고 보니 이 캘러미티 혼, 원래 조절 안 되는 거였잖아?'
애당초 캘러미티 혼은 중첩 수 골라서 날릴 수 있는 기술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그도 하이브리드 캘러미티 혼 술식을 따로 개발하지 않았던가?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부탁이었다.
순간 의문이 들었다.
'아니 그럼 대체 사부는 어떻게 보여 주시겠다는 거지?'
꽈아아아앙!
8중첩 캘러미티 혼이 왕궁의 상공을 뚫고 장대하게 뻗어 올랐다.
축제 축하용 마법도 어느 정도지, 이건 너무 거하다. 재주 피우던 광대가 줄에서 떨어지고 퍼레이드가 일순 멈췄다. 자던 애가 경기 일으키고 웃고 떠들던 아낙들이 창백해져 왕궁 가이라크를 바라보았다.
다시 제라드가 허공에 주먹질을 했다.
"캘러미티 혼!"
꽈아아아앙!
그렇게 제라드는 연달아 허공에 캘러미티 혼을 갈겨 댔다. 한 방, 한 방 갈겨댈 때마다 구름이 휙휙 밀려나 다섯 방쯤 되니 아예 아라난 그라드 상공에 조각구름 하나 남지 않아 버렸다.
자세를 취한 채 제라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음, 됐다. 하나 낮췄어."
이번엔 7중첩 캘러미티 혼이 날아갔다. 이 무식한 양반은, 스스로 중첩 수 조절이 안 되니까 '에라, 그럼 오러양 다 떨어질 때까지 갈겨 대지, 뭐.'라는 단순한 생각을 해 버린 것이다!
7중첩 캘러미티 혼이 또다시 허공을 뻥뻥 꿰뚫었다. 푸른 하늘에 뇌성벽력이 쉴 새 없이 울려 퍼졌다.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아, 내가 뭔 짓 한 거냐?'
레펜하르트는 반성하고 또 반성했다. 아라난 그라드의 시민에게 참 못 할 짓을 해 버렸다. 축제 즐겁게 즐기다 이게 웬 봉변인가?
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처음에 놀랐던 시민들도 이제는 오히려 좋아하고 있었다. 황금빛 오러가 짐 언브레이커블의 색채라는 것은 어지간히 유명한 이야기였다. 그런 빛이 연달아 죽죽 뻗으니 아마도 축제를 축하하는 의미일 거라 받아들인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시내에서는 이런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오오! 공왕님께서 직접 손을 쓰시나 봐!"
"천만에! 저 색과 굵기를 보게! 저건 권황 제라드 님이라네!"
"똑같이 황금색인데 뭐가 다르오?"
"저쪽이 좀 더 순금색이야."
금은방을 하는 중년 사내의 예리한 안목이었다.
하여튼, 그렇게 7중첩 캘러미티 혼을 연달아 날리고 나니 어지간한 제라드라도 상당히 녹초가 되었다. 체력도 체력이지만 전신의 오러양이 상당히 감소했음이 느껴진다. 제라드가 숨을 헐떡이며 중얼거렸다.
"어, 이제 슬슬 되겠다. 잘 봐라, 제자야."
제라드의 팔뚝 위로 여섯 개의 오러 파문이 떠올라 한 점으로 모였다. 그가 허공을 강하게 찔렀다.
"캘러미티 혼!"
레펜하르트가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아! 저런 식인가!'
여섯 개의 오러 고리, 그것이 어떻게 수렴되고 어떻게 회전하며 어떤 방식으로 흘러가는지를 두 눈으로 똑똑히 새긴다.
잠시 후 팔을 거둔 제라드가 피곤해하며 레펜하르트를 돌아보았다.
"음, 원하니까 보여 주긴 했다만... 뭐 좀 건졌냐? 솔직히 이거 한 번 본다고 뭐가 어떻게 되지는 않을 텐데?"
"아닙니다, 사부.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제라드는 눈을 껌뻑였다. 이놈의 제자가 사부 부려 먹은 게 미안해 빈말로 감사하나 싶었는데, 표정이 어째 진심인 것 같았다.
'이거 봤다고 뭐가 달라진다는 거지?'
하지만 짐 언브레이커블은 쿨 가이를 지향하는 바, 여기서 사부가 제자에게 코치코치 캐묻는 것은 구차한 일이다. 그는 금세 호기심을 잊었다.
"그럼 뭐가 됐든 열심히 해 보거라, 제자야."
손을 흔들며 제라드는 호방한 태도로 연무장 밖으로 걸어 나갔다. 레펜하르트가 다시 한 번 그의 등에 대고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사부!"
제라드의 의문처럼, 그저 한번 시전하는 걸 보았다고 바로 뭔가를 얻을 만큼 캘러미티 혼은 만만한 기술이 아니다. 당연히 레펜하르트도 무술적인 면에선 딱히 얻은 것이 없었다.
하지만 마법이라는 측면에선 달랐다.
'과연, 예상대로군.'
제대로 된 오러 고리의 운용 방식을 몰라 이제까지는 그냥 마법으로 한 점에 수렴하기만 했다. 그러나 이젠 제대로 된 6중첩 캘러미티 혼을 보았다. 그것이 어떤 식으로 파괴의 힘을 낳는지도 확실히 알아냈다.
허리춤에 찬 사방신의 유물을 매만지며, 레펜하르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권마합신으로 6중첩 캘러미티 혼을 구현할 수 있겠어!'
3
안타레스 건국제는 닷새 동안 진행되고 있었다.
거리에서는 온갖 행사가 공짜로 벌어져 시민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했다. 가난한 이들에게도 축제의 행복은 공평하게 돌아갔다. 관청에서 무료로 빵과 피복류를 나누어 주고, 각 신전에서도 문을 활짝 열고 자선과 봉사에 나섰다.
마켈린이 이끄는 알 포트 교단이 정식으로 신전을 열었고 원래부터 이 지역에서 강세였던 레단티 교단, 그리고 새롭게 신흥 세력으로 떠오른 필라넨스 교단도 질세라 영업(?)을 뛰고 있었다.
분홍빛으로 예쁘게 단장한 필라넨스 신전, 그 앞 광장에 수많은 인파가 모여 있다. 인간뿐 아니라 각 이종족들도 많아 구성원이 다양했다. 자고로 이성에게 사랑받고 싶어 하는 것은 종족 공통인 것이다.
그 앞에 아름다운 미모의 신관 한 명이 붉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성광을 뿜어 대고 있었다. 안타레스 교구의 대주교, 실란 필 마르시스였다.
"필라넨스시여, 이들에게 당신의 은총을 베풀어 주소서!"
그동안의 고련이 헛되지 않아 실란은 이제 늘씬한 키에 백옥 같은 피부, 차분한 눈매에 성숙한 미모를 뽐내는 청년이 되어 있었다. 묘사에 주목하라. 분명 단어는 '청년'이지만 설명은 어째 '미녀'쪽에 가깝다.
실란의 핑크빛 성광이 수많은 인파 위로 뿌려졌다. 여신의 축복이 그들을 감싸자 모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올렸다. 사랑하는 이와 이어질 수 있기를 원하는 기원이다. 덤으로 요통, 치통, 생리통 등 자잘한 병을 앓고 있는 이들도 적당히 치유가 되었다.
사람들이 감격하며 실란을 칭송했다.
"감사합니다, 대주교님."
"고맙습니다, 실란 님."
"오오, 성녀시여!"
실란의 칭호를 들은 다른 필라넨스 신관들이 풉 웃음을 터트렸다. 바실리 왕국에서 이적해 안타레스 교구로 온 이들이었다.
순간 찬란하던 성광에 빠직 금이 갔다.
"남자거든요!"
울상을 지으며 실란이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사람들은 연신 '성녀 실란'을 연호할 뿐이었다. 저 아리따운 미청년을 놀려 먹고 반응을 즐기는 것도 축제의 즐거움 중 하나였다. 개중 좀 순진한 필라넨스 신관 몇 명은 실란을 향해 존경의 눈빛을 보냈다.
'아! 대주교씩이나 되는 높은 신분임에도 저리 민중의 사랑을 받으시다니! 과연 저 어린 나이에 대주교의 자리에 오를 만한 분이로다!'
물론 실란은 전혀 기쁘지 않았다.
'아, 울고 싶다....'
하지만 어쩌랴? 그는 누가 뭐래도 여성들이 부러워할 면을 전부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날씬한 허리며 잘 빠진 팔다리에 매끄러운 피부,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며 비단결 같은 머리카락에 놀라운 미모까지. 심지어는 나이가 스물인데 수염 한 올 없다.
법복으로도 채 가려지지 않는 자신의 가는 허리를 내려다보며 실란이 인상을 썼다.
"아우, 이놈의 허리는 왜 군살도 안 붙는 거야?"
세상 인류의 절반이 치를 떨며 욕할 천인공노할 소리를 태연히도 해 대는 실란이었다.
미사를 끝내고 이제 아이들을 상대하는 시간이 되었다. 모든 신관들이 아이들에게 사탕이며 쿠키를 나누어 주었다.
아이들에겐 종족 구별이고 뭐고 없다. 그냥 마음에 들면 친구고 아니면 나쁜 놈일 뿐. 귀여운 엘프며 드워프, 인간 아이들이 손에 손을 잡고 줄을 섰다.
오크와 트롤 아기들도 질세라 대열에 합류했다. 과자를 받고 다들 방긋 웃으며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넨다.
"고맙습니다, 성녀님!"
"감사해요, 실란 언니!"
"잘 먹을게요, 실란 누나!"
열심히 놀림당하며 실란이 울상을 지었다.
"오빠다! 오빠라고 불러!"
전혀 먹히지 않았다. 이래서 어른은 아이들의 거울이라 하는 것 같았다. 안 좋은 건 참 귀신같이 배운다.
개중에는 진지하게 당황하는 아이들도 있어 실란의 여린 가슴을 더더욱 찢어 놓고 있었다.
"엥? 오빠 아닌데? 언닌데? 우리 언니보다 더 예쁘게 생겼는데?"
저 말 하는 아이가 엘프 소녀라는 점이 더욱 서글펐다. 실란이 억지로 웃었다. 분명 눈은 웃고 있는데 입가가 푸들푸들 떨렸다. 실란이 팔뚝을 들어 보였다.
"무슨 소리니? 이 오빠의 근육이 보이지 않니?"
이래 봬도 예전보다 몇 배나 두꺼워진 팔뚝인데!
하지만 아이들에겐 전혀 설득력이 없어 보인 모양이었다.
"아닌데. 근육은 저런 건데."
엘프 소녀가 진지하게 다른 쪽을 가리켰다. 그쪽에는 우락부락한 근육질 대머리 사내들이 아이들에게 과자를 나누어주고 있었다. 필라넨스를 섬기는 몽크들이었다.
입술을 삐죽이며 실란이 엉뚱한 데 화풀이를 했다.
"저분들 좀 딴 데 보내요! 비교되잖아!"
괜히 불벼락 맞은 몽크들이 실란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아무리 나이는 어려도 실란은 그들보다 훨씬 지위가 높은 신관인 것이다. 참고로 필라넨스 교단에선 몽크승의 직급이 그리 높지 않다. 뭐, 하루 이틀 당하는 일도 아닌지라 다들 덤덤한 표정이었다.
"으음, 대주교께서 또 발작하셨군."
"아니, 남자다워 보이려면 머리라도 좀 짧게 깎으시든가...."
"붉은 머리를 허리까지 드리워 놓고 남자로 안 봐 준다고 난리 치는 이유는 또 뭐래?"
사실 실란도 몰라서 머리 기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단발도 해 봤고 빡빡머리도 해 봤다. 그런데 다음 날이면 도로 장발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필라넨스 교단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도 유례가 없는 괴사였다. 교단의 현명한 이들이 토론도 나눠 봤지만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나마 가장 가능성 높은 가설이 '여신께서 그를 사랑하사, 그의 외모에 어울리는 헤어스타일을 내려 주심이 틀림없다!'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았지만 당장 '신이 내려 주신 수염'을 자랑스레 쓰다듬는 마켈린이 있었으니 아주 근거 없는 소리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요샌 실란도 그냥 헤어스타일은 포기하고 근육 단련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창 아이들을 상대하고 있을 때였다. 문득 거리 저편을 바라보며 실란이 눈을 크게 떴다.
'어라?'
인파 사이로 두 남녀가 걸어오고 있었다. 2미터가 넘는 거구의 근육질 사내가 어색한 얼굴로 걸음을 옮기고, 백금발에 갈색 피부의 엘프 소녀가 두꺼운 팔뚝에 반쯤 매달리듯 달라붙어 있다. 표정에 아양이 가득한 것이 마치 주인에게 달라붙은 고양이를 보는 듯했다.
아이들이 저 남녀를 보더니 아는 척을 했다.
"앗! 폐하시다!"
"시리스 님이시네?"
실란이 눈을 빛냈다.
'오잉? 레펜 씨랑 시리스가 데이트라도 하나?'
시리스와 레펜하르트가 실란을 보더니 손을 흔들었다. 실란도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지나치는 두 사람을 보며 실란이 엄지손가락을 척 내밀었다.
'좋아! 시리스 파이팅!'
아, 드디어 시리스가 레펜하르트의 마음을 받아들였나? 실란이 기뻐하며 진심어린 기도를 올렸다.
'필라넨스시여, 저들의 사랑을 보살펴 주소서. 그래서 제발 이놈의 소문 좀 가라앉게 하소서!'
아무래도 필라넨스께서, 전자는 몰라도 후자는 별로 들어주실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온갖 종족의 소녀들이 다급하게 실란을 재촉했다.
"어떡해요, 실란 님?"
"저러다 시리스 님에게 폐하를 빼앗기겠어요!"
또다시 실란이 발작했다.
"애당초 그런 사이 아니거든!"
현기증이 나 실란은 이마를 짚었다. 아, 이러다가 아예 역사에 남는 거 아냐? 안타레스 공왕의 애첩으로? 주먹을 꾹 쥐고 다짐, 또 다짐했다.
'행사 끝나면 바로 카를 씨 찾아가서 같이 운동해야겠다!'
☆ ☆ ☆
아라난 그라드는 수많은 인파로 북적이고 있었다. 하지만 레펜하르트와 시리스는 전혀 인파에 시달리지 않고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앗! 폐하시다!"
"레펜하르트 폐하!"
"시리스 님도 계시네!"
모두가 그들을 알아보고 허리를 숙이며 알아서 길을 내주었다. 레펜하르트는 그 외모 자체가 이미 이름표인 것이다. 다른 나라 왕처럼 굳이 자기 얼굴 화폐에 박지 않아도 그를 못 알아볼 국민은 없다.
일국의 왕이 호위병 하나 없이 돌아다니는 것을 이상하게 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본인이 곧 군대인데 무슨 호위병이 필요할까? 뒷골목의 소매치기나 깡패들도 레펜하르트가 나타난 순간 기겁하며 도망가기 바빴다.
둘은 그렇게 거리를 거닐며 즐겁게 축제를 구경했다.
거리 좌우로 엘프들이 옷가게를 열고 아리따운 옷감을 진열하고 있었다. 드워프들이 차린 무기점이며 철물점, 대장간 등도 열기를 뿜고 있다. 오크 특유의 가죽 제품들을 내놓은 상회도 있었다.
오크는 그리 경제관념이 없는지라, 직원은 오크지만 점주는 인간이었다. 타오반 상회의 입김이 들어간 상회가 오크들로부터 물건을 떼 와서 파는 것이다. 간간이 푸른 피부의 트롤들이 가판대를 열고 도자기를 늘어놓은 모습도 보였다.
엘프와 드워프야 그렇다 치고, 오크와 트롤이 버젓이 대낮에 거리를 돌아다니는데도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는 이가 없다. 인간들 역시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물건을 구경하고 또 흥정을 한다.
그 모습을 보며 레펜하르트가 아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말 많이 변했군."
팔짱을 끼 채 시리스가 애교를 부리며 대꾸했다.
"전부 레펜하르트 님 덕분이죠. 정말 대단하세요!"
"고, 고맙구나."
레펜하르트는 어색해하는 얼굴로 시리스를 내려다보았다.
오늘 아침의 일이었다. 갑자기 시리스가 그의 방으로 난입하더니 대뜸 둘이서만 시내 구경을 하자고 조른 것이다.
시리스 말이라면 뭐든 들어주고 싶은 레펜하르트다. 사실 그가 전생에 이종족 구하겠다고 날뛴 것도 사실 근본적인 이유를 따지고 보면 시리스 때문이 아니던가? 그녀를 사랑하다 보니 세상도 그녀를 사랑하기를 원했고, 그러다 보니 점점 사고방식도 바뀌어 종국에는 저런 대업을 일으켰다.
마누라가 예쁘니 처갓집 기둥까지 예뻐서 마왕이 되어 버리다니? 통이 큰 건지 소시민적인 것인지 참 애매하다 하겠다.
그런 그녀가 먼저 데이트 신청을 하니 당연히 좋았다. 당장 하던 일 죄다 미루고 시리스랑 둘이서 시내로 나섰다. 물론 밀린 일을 처리하는 것은 또 카를이었다.
하지만, 좋은 건 좋은 거라도 역시 어색한 것은 어색한 것이다.
'으음, 변한 모습이 좋긴 한데 그래도 너무 갑작스러워서 원....'
지금 시리스는 평소와 달리 얇은 천으로 몸을 감싸고 날씬한 팔다리를 내놓은, 엘프 특유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끈으로만 연결되어 있어 양어깨가 훤히 드러나고 치마도 너무 짧아 허벅지가 여실히 보인다. 상당히 야한 옷차림이랄까?
저런 도발적인 차림으로 살살 애교를 부리며 달라붙는데, 좋긴 좋지만 역시 걱정도 된다.
레펜하르트를 올려다보며 시리스가 순진하게 눈을 깜빡였다.
"왜 그러세요, 레펜하르트 님?"
전생 때의 표정, 전생 때의 감미로운 목소리였다. 금세 고민을 잊고 레펜하르트가 싱글벙글 웃었다.
"네가 너무 예뻐서 그렇단다, 시리스."
여전히 순진무구한 표정을 유지한 채, 시리스가 속으로 쾌재를 외쳤다.
'좋아! 역시 플로라 씨 말이 틀리지 않구나!'
☆ ☆ ☆
이니야에게 치명타―그러니까 가슴 사이즈 문제―를 맞은 시리스는 고민했다. 홀로 고민하니 해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플로라를 찾아가 상의했다.
반색하며 플로라가 그녀를 맞이했다.
"인간 남성이라면 제가 전문이죠! 잘 찾아오셨어요!"
비록 시리스가 그녀의 상관이고, 또 모든 엘프들이 존경하는 수장이긴 하지만 그래도 여인으로서는 플로라가 한참 인생 선배다. 어떻게 해야 레펜하르트를 유혹할 수 있겠냐는 말에 기뻐하며 조언을 주었다.
"일단 데이트를 신청하세요. 어디 놀러가고 싶다고 하세요."
"...별로 놀러가고 싶은 데는 없는데요?"
업무도 바빠 죽겠는데 뭘 놀러가? 뜨악해하는 시리스를 플로라가 근엄하게 꾸짖었다.
"중요한 건 행선지가 아니에요! 그분과 함께 하는 게 중요한 거죠! 안 그래도 축제 기간이잖아요? 함께 축제를 즐기고 싶다고 하세요!"
듣고 보니 맞는 말 같았다. 진지하게 시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플로라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뭐 입을지는 결정했나요?"
"네? 뭘 입다뇨?"
그냥 평소처럼 입고 칼 차면 되는 거 아닌가? 시리스가 어리둥절해했다. 플로라가 또다시 준엄한 호통을 쳤다.
"당연히 예쁜 옷으로 유혹해야죠! 제가 골라 줄게요!"
그러더니 대뜸 얇고 노출도가 높은 엘프 전통 복장을 들고 온 것이다.
"인간 남성은 무조건 야한 옷에 환장을 해요. 이거면 분명 먹힐 거예요!"
예전 같으면 기겁하며 손을 저었을 시리스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주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어 옷을 받았다.
"이거 입으면 된다 이거죠?"
"물론 그것만으로는 모자라죠! 승부 속옷! 이게 제일 중요한 거예요!"
또다시 플로라가 야시시한 천 조각을 들고 왔다.
"무조건 도장부터 찍고 봐야 한다니까요? 남자는 단순해서 일단 밤만 같이 보내면 사랑하게 마련이에요!"
분명 조언은 조언인데, 꽤나 상식에서 뒤틀린 면이 있었다. 남자 잘못 걸리면 몸만 주고 버림받기 딱 좋은 조언이라 하겠다. 애초에 성노로 살았던 플로라가 제대로 된 연애관을 가질 리 없는 것이다.
하지만 시리스는 그저 고개만 끄덕끄덕.
"그렇군요."
그녀도 노예로 살던 처지였으니 제법 어릴 적에 들었던 이야기와 비슷했다. 납득이 쏙쏙 갔다. 플로라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 폐하께서 가끔 한숨 쉬시는 거 보고 가슴 아팠는데 다행이에요."
옷가지를 쥐여 주며 플로라가 시리스를 격려했다.
"굴러온 돌에 지지 말아요!"
☆ ☆ ☆
"에헤헤!"
웃으며 시리스가 다시 몸을 밀착했다. 마냥 귀여운지 레펜하르트도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렇게 적당히 거리 구경을 하고 있자니 슬슬 출출해졌다. 시리스가 말했다.
"레펜하르트 님! 이번에 새로 생긴 식당 있는데 거기가 맛이 꽤 좋대요."
"그래, 가 보자꾸나."
그녀의 의견에 따라 발걸음을 돌려 조금 걷고 있을 때였다. 축제 분위기가 한창인 거리 한구석에서, 허름한 로브 차림의 중년 사내 하나가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깨어나시오, 인간들이어! 어찌 저 더러운 놈들이 우리와 같은 사람이란 말이오? 사악한 이단의 현혹에 놀아나지 마시오! 세이어의 천벌이 내릴 것이오!"
상당히 신경질적인 인상의 말라깽이 사내였다. 미약하긴 하지만 신성력이 느껴진다. 레펜하르트가 인상을 썼다.
'세이어의 신관인가?'
현재 아라난 그라드에는 알 포트와 레단티, 필라넨스 말고도 다른 교단도 작게나마 진출한 상태였다. 하지만 세이어 교단은 없었다. 세이어의 교리는 이종족이 노예라고 명시되어 있어 안타레스 공국 입장에서는 결코 용납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순례자 형식으로 저렇게 들어온 모양인데....
"깨어나시오! 세이어의 아들딸들이여!"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곤 있는데, 그리 관심을 두는 이들은 없었다. 다들 고개만 저으며 슬슬 피할 뿐이었다. 잠시 후 도시 경비대가 달려와 그를 체포했다. 고성방가죄였다. 끌려가며 사내가 계속 소리쳤다.
"천벌을 받을 것이다! 천벌을!"
지나가던 레단티의 신관들이 그 모습을 보더니 고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안 그래도 그동안 독선적인 세이어 교단에 이래저래 치인 게 많은 그들이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레펜하르트가 시리스를 돌아보았다.
"쯧, 역시 저런 자들이 없어질 수는 없구나."
관심 없다는 듯 그녀가 아양을 떨었다.
"배고파요. 어서 식당이나 가요!"
"응, 그래...."
아라난 그라드의 식당 대부분은 인간이 운영하고 있었다.
각 종족마다 뛰어난 특기가 있긴 하지만 이종족이 결코 인간을 따라오지 못하는 분야가 있는데 바로 창조적인 영역, 특히 요리다. 그냥 굽거나 삶거나, 생으로 먹는 것이 고작인 이종족과 달리 인간은 온갖 다양한 방법으로 요리 문화를 발전시켜 온 것이다.
맛난 요리로 배도 채우고 즐겁게 수다도 떨며 두 사람은 데이트를 즐겼다. 새로운 왕도 곳곳을 돌아다니며 구경도 신 나게 했다.
해가 저물고 붉은 저녁놀이 넓게 드리우는 시간대.
낙낙하게 논 두 사람은 도시 남쪽의 동산에 올라 아라난 그라드의 정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위에 주저앉아 레펜하르트가 중얼거렸다.
"결국 여기까지 왔구나...."
전생의 제국 수도, 레펜하임이 떠오른다.
모든 종족이 화합해 살던, 전화로 불살라져 이제는 레펜하르트의 기억에만 존재하는 도시.
하지만 그는 결국 여기까지 해냈다. 뿌듯함이 가슴속 깊이 밀려 올라왔다.
시리스가 살며시 레펜하르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앞으로 더욱 변할 거예요. 아라난 그라드도, 그리고 세상도."
"그래야겠지."
아련한 빛이 감도는 레펜하르트의 옆얼굴을 보며 시리스는 은근슬쩍 기회를 노렸다. 플로라 말대로 나름 분위기가 잡힌 것 같았다. 그녀는 힐끔 자신의 가슴께를 바라보았다.
'좋아! 승부 속옷도 입었어!'
"레펜하르트 님...."
말꼬리를 늘리며 시리스가 얼굴을 가져갔다. 순진한 눈망울을 반짝이며 숨결이 느껴지는 거리까지 가까이 한다.
분위기를 눈치 챘는지, 레펜하르트도 시리스의 어깨를 붙잡았다.
"시리스...."
시리스의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그녀가 가쁜 숨을 흘리며 눈을 감았다.
"네, 레펜하르트 님...."
눈을 감고 도톰한 입술을 모은다. 살짝 떨리는 어깨를 더욱 움츠리며 부끄러운 듯, 하지만 모든 것을 승낙한다는 태도로 순순히 고개를 든다.
목소리가 들렸다.
"사랑한다, 시리스."
그이의 숨결이 뜨겁도록 느껴졌다. 시리스의 얼굴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그리고....
쪽!
레펜하르트가 시리스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했다.
'엥?'
시리스는 당황해 눈을 떴다. 뭔가 예상 시나리오랑 좀 많이 달랐다.
황당해하며 시리스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막상 말을 하려니 뭐라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여기서 뭐라고 말해야 한단 말인가? 조준 빗나갔다고?
레펜하르트가 상냥하게 시리스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10년만 기다려 다오, 나의 시리스. 네가 성인이 되는 날, 모두의 축복 속에서 행복한 결혼식을 치르자."
황당해 시리스가 눈만 깜빡깜빡했다.
'...10년?'
그렇다. 그녀는 아직 미성년자였다....
현재 시리스의 나이는 일흔네 살, 엘프는 여든다섯 살쯤에 성인식을 하니 인간으로 치면 아직 소녀인 셈이다. 바른생활 마왕 레펜하르트 씨는 결코 미성년자 성 착취를 하는 변태가 아니었던 것이다!
바지를 털며 레펜하르트가 태연하게 몸을 일으켰다.
"자, 그럼 가이라크로 돌아갈까?"
'어, 잠깐....'
얼떨결에 따라 일어나며 시리스가 연신 눈을 감았다 떴다.
'아니, 그럼 10년 동안 키스 한번 안 하겠다는 거야?'
당연했다. 아동 성 착취는 범죄 중의 범죄인 것이다.
...하지만 시리스의 수명은 인간의 네 배.
"...."
입을 멍하니 벌린 시리스를 보며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니, 시리스?"
"아, 아뇨. 아무것도...."
대수롭잖게 여기며 레펜하르트가 그녀를 재촉했다.
"자, 어서 돌아가자. 카를이 또 발작할라."
여자 마음은 쥐뿔도 모른 채 레펜하르트가 농담까지 건네며 웃었다. 뭐, 본인이야 드디어 시리스가 마음을 허락했으니 마냥 좋겠지.
하지만 온갖 각오 다지고 여기까지 온 그녀는 뭐가 되나?
시리스의 두 눈이 불길을 뿜었다. 양 눈가가 매섭게 치고 올라간다. 그녀가 차갑게 대꾸했다.
"그래요! 네! 어서 돌아가서 마저 일이나 해요!"
휑하니 몸을 돌리고 시리스가 앞장서 척척 걸어가 버린다. 레펜하르트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쟤 또 왜 저래?'
아, 이래서 사춘기 소녀들은 이해 불가한 존재라고 하나 보다.
"가, 같이 가!"
잽싸게 시리스 뒤를 따라 레펜하르트도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문득 등 뒤를 돌아보았다. 사실 아까부터 그는 기감으로 이 근처의 인기척을 느끼고 있었다.
'이니야가 왜 여기 있지? 혼자서 수련이라도 하나?'
☆ ☆ ☆
서늘한 냉기가 사방으로 맴돈다. 냉무가 뒤덮이며 잎사귀가 바짝바짝 마르고 바위 위로 서리가 낀다.
마치 전설의 마녀가 강림한 듯한 그 섬뜩한 광경 속에서, 정말 전설의 마녀가 아닐까 싶은 표정으로 옷자락을 물어뜯고 있는 한 엘프 미녀가 있었다. 뒤늦게 레펜하르트의 소식을 듣고 허겁지겁 염탐을 온 이니야였다.
멀어지는 시리스와 레펜하르트를 보며 이니야가 쌍심지를 켰다.
'아니, 저, 저 요망한 것이!'
마른 오징어도 아닌데 옷자락을 잘근잘근 씹으며 그녀는 치를 떨었다. 잠깐 방심한 사이 시리스가 먼저 선수를 쳐 버린 것이다!
"얌전한 북극곰 빙산 먼저 오른다더니!"
살던 곳이 북해다 보니 살짝 속담이 와전된 감이 좀 있었다.
하여튼, 기껏 열심히 공 들이고 있는데 후발 주자―적어도 본인 생각으로는―인 시리스가 어느새 팍 치고 올라온 것이다.
큰일이었다. 이쪽은 그토록 눈치를 줘도 아직도 아무 반응이 없는데!
'아, 나도 저렇게 노골적으로 나가야 하나?'
하지만 철저한 남성관을 가지고 있는 이니야는, 데이트 신청이나 고백은 반드시 남자가 먼저 해야 한다는 굳은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그동안도 노골적으로 덤비지 않고 은근히 분위기만 피우지 않았던가? (이니야 딴에는 자신이 전혀 노골적으로 대시하지 않았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이니야는 표정을 풀었다. 시리스가 꽤나 강수를 놓긴 했지만, 다행히도 아직 그녀에겐 기회가 남아 있다.
'10년이란 말이지?'
귀를 쫑긋 세우며 이니야가 눈을 빛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할 시간이다. 뭐, 요새는 제라드니 바나텔이니 하는 양반들 때문에 초 단위로 강산이 변하긴 했는데, 어쨌건 10년은 충분히 긴 시간이다.
"그래, 10년은 이르지, 호호홋!"
역시 레펜하르트는 성숙한 여인을 좋아한다! 자신만만하게 이니야가 입가를 가리고 웃었다.
절대 저런 애송이 계집에게 '그이'를 빼앗기지 않겠다!
4
러스가 무릎 꿇고 외쳤다.
"가르침을 청합니다!"
옆에서 타시드도 같은 모습으로 외침을 이었다.
"가르침을 청하오! 투신이시여!"
그들 앞에 선 제라드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오늘도 할 일 없이 빈둥대며 예의 '오러 마사지'를 즐기는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두 사람이 다가오더니 대뜸 무릎을 꿇은 것이다.
제라드가 손을 내저었다.
"응? 짐 언브레이커블에 들어오고 싶은 게냐? 하지만 네놈들 자질로는 안 돼. 나이도 너무 먹었고."
"그게 아닙니다, 제라드 님. 저는 그저 강해지고 싶은 것입니다."
러스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사실 러스는 스승이 필요 없는 타입이다. 어떤 기술이건 보기만 하면 따라 할 수 있고 제멋대로 검을 휘둘러도 전혀 이치에 어긋남이 없는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그였다. 기술적인 측면에서, 그를 가르칠 수 있는 이는 세상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그가 최강은 아니었다. 세상엔 그보다 더한 강자가 너무도 많았다.
대륙 최연소 오러 유저로 이름 높은 러스였다. 하지만 러스는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당장 레펜하르트만 해도 그보다 어리지만 놀라운 강자가 아닌가? 더구나 몰튼 모라스 던전에서 만난 테스론과 알렉스의 존재는 충격이었다.
둘 다 그보다 어린 20대의 청년이었다. 특히 알렉스는 아무리 봐도 20대 초반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이니야와 동등한 힘을 보였다. 현재 러스로서는 감히 상대할 엄두를 못 내는 최강의 엘프 오러 유저인 그녀와 갓 소년기에서 벗어난 청년이 동수를 이룬 것이다!
스스로가 너무나 부끄러웠다. 최연소 오러 유저라는 명성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도 뼈저리게 느꼈다. 강해지고 싶었다. 기술적인 면뿐이 아닌, 기본부터 토대를 쌓아 진정한 강자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제라드를 찾아온 것이다. 누가 뭐래도 제라드는 러스가 본 가장 뛰어난 무인이었으니까.
제라드가 목을 매만졌다.
"글쎄? 너무 가는 길이 달라서 내가 뭘 가르쳐 줄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솔직히 네놈 하는 짓거리는 내가 봐도 신기하던데?"
러스의 허공검은 제라드에게도 경악스러운 기술이었다. 대체 뭘 어떻게 해야 저딴 짓이 가능한지 짐작도 안 간다.
러스가 진지하게 외침을 이었다.
"기술이 아닌 기량을 높이고 싶습니다. 기교뿐이 아니라 모든 점에서 완성된 검사가 되고 싶습니다!"
타시드는 아무래도 러스 만큼의 말주변이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의지를 표명하는 것은 간단했다.
"저도요!"
둘 다 눈빛에 의지와 각오가 명확히 보였다. 제라드가 어색해하다가 확인차 다시 물었다.
"그래, 기술이 아니라 기량을 높이고 싶다 이거지? 한마디로 기본 능력 자체를 다시 단련하고 싶다고?"
"그렇습니다, 제라드 님!"
"저도요!"
제라드는 잠시 생각했다. 짐 언브레이커블의 기술은 특유의 육체가 있어야 구현 가능한 것이라 가르쳐 주고 싶어도 어차피 불가능하다. 하지만 기본기를 단련시켜 주는 것이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적당히 강도 좀 낮춰서 굴리면 되겠지?'
호쾌하게 제라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당분간 내가 손을 봐 주마! 나를 사부라 부를 필요는 없다! 나의 제자는 레펜하르트, 그 녀석뿐이니까! 하지만 스승이라 부르는 것은 허락하마!"
사부와 스승이 뭔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다. 무슨 어둠의 다크도 아니고... 어쨌거나 허락을 받은 러스와 타시드가 기뻐하며 대답했다.
"네, 스승님이라 부르겠습니다!"
"저도요!"
☆ ☆ ☆
레펜하르트는 엘프 여인, 유스티아와 왕궁 가이라크의 회랑을 걷고 있었다. 플로라가 카를 전담이 된 후 새롭게 맞이한 비서였다. 한창 걸음을 옮기는데 갑자기 왕궁 저편에 살아 있는 뭔가의 목을 따는 듯한 비명이 들려왔다.
"으아아아아악!"
"끄어어어어억!"
어리둥절하며 레펜하르트가 중얼거렸다.
"어디서 돼지를 잡나?"
비서, 유스티아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러스 경과 타시드 경이옵니다, 폐하."
"엥? 걔들이 왜 왕궁 한복판에서 비명을 질러?"
유스티아가 공손하게 대답을 이었다.
"얼마 전, 권황님께 가르침을 청하였다 들었습니다. 권황님께서도 받아들이시고, 두 사람을 지도하신다고...."
레펜하르트가 기가 막혀 웃었다.
"...걔들이 미쳤구나."
아무리 강해지고 싶다지만 그렇다고 제라드를 찾아가다니... 레펜하르트는 잠시 두 '바보'에게 애도를 표했다.
"뭐, 설마 죽이진 않겠지."
신경 끄고 레펜하르트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는 지금 가이라크 중심에 위치한 알현실로 향하고 있었다. 다른 나라에서 도망친 이들 중 한 명이 그를 꼭 만나고 싶다고 했다는 것이다.
안타레스 공국과 크로방스 왕국이 이종족 해방 정책을 선포한 후, 대륙 각 지의 반응은 다양했다. 수많은 의견이 난립해 그 정당성을 두고 다퉜다. 극단적으로는 이런 의견도 있었다.
-엘프나 드워프가 사람이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인간과 비슷하게 생겼다는 이유로 어찌 저것들을 사람 취급할 수 있단 말이냐! 그 논리대로라면 오우거나 놀, 고블린 같은 몬스터도 사람이라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이 의견은 이종족 해방 정책 반대파에서조차도 어이없어하는 주장이었다.
원래 대륙에는 인간과 엘프, 드워프, 오크, 트롤 말고도 오우거며 놀, 고블린 같은 하위 아인종도 서식하고 있다. 전생 때의 레펜하르트는 전쟁에서 밀리자 저런 몬스터들을 정신계 마법으로 제어해 군세를 포함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다른 나라에서 군견을 키우는 것과 비슷한 것이지, 저것들도 사람으로 대했다는 소린 아니었다.
현 시대의 인간들은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비슷한 아인종으로 여기고 있었지만, 사실 '사람에 속하는 이종족'과 아인종은 확실히 다르다.
아인종은 사람에 속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사람과 비슷하다는 뜻일 뿐이다. 몬스터에 비하면 어느 정도 도구도 쓰고 간단한 언어도 구사하지만, 그 행위는 이성이라기보다는 본능으로 행하는 것이어서 역시 분류상 몬스터에 속한다. 영장류 쪽으로 치면 원숭이monky와 유인원ape 정도 차이랄까?
어느 정도 학식이 있는 이라면 이종족과 아인종의 차이를 확실히 인지하는 것이다.
하여튼, 저런 의견마저 나올 정도로 이 '이종족 해방 정책'의 소문은 널리 퍼졌다. 그리고 그 덕에 대륙 각지에서 안타레스 공국으로 이주해 오는 이들의 숫자도 상당히 늘었다. 대부분 이종족과 교분을 가진 인간들이었다.
"이곳이라면, 제 이상을 펼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와 제 아내가 안주할 땅이라 들었습니다."
생각보다 세상에는, 이종족들이 노예가 아닌 사람이라 믿는 이들의 숫자가 제법 많았다. 레펜하르트조차도 '아니 세상에 이렇게 생각 트인 인간들이 많았어? 그런데 대체 전생에서 이 사람들 다 어디 있었던 거야?' 라고 의아해할 정도였다.
사정은 제각각, 물론 엘프나 드워프 여인과 사랑에 빠진 이들이 제일 많았지만 그중에는 현 시대가 이상하다고 느끼는 지식인들도 꽤 되었다. 상당한 인재들이 안타레스 공국으로 유입된 것이다. 그런 이들 중 레펜하르트를 알현하고 자신의 재능을 알리려는 이들도 꽤 많았다.
"새로운 정책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날 중용한다면 공국의 미래를 이끌 비전을 제시하겠소!"
뭐, 모두가 인재들인 것만은 아니었다. 분명 같은 신념을 가진 것은 좋지만, 사실 자신의 생각이 트였다고 생각하는 놈들치고 거만하지 않은 놈들이 없다. 입만 산 놈들이 대부분이랄까?
현실로 뭔가를 이룰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입으로만 떠들어 대는 놈들, 그것도 다른 나라에서는 세인들의 눈이 두려워 잠자코 있다가 이제야 입 놀리는 이들인 것이다. 이러쿵저러쿵 개똥철학과 이론을 펼치긴 하지만 정작 쓸모가 있냐 하면 그건 또 애매하다.
그래도 안타레스 공국 입장에선 이들의 존재 역시 달가웠다. 입도 놀리지 않는 놈들보다는 입이라도 놀리는 놈들이 더 나으니까.
그래서 대충 받아들이고, 그들을 만나는 일은 사람 보는 안목 높은 카를에게 전담시켰다. 자꾸 카를에게만 떠맡겨 좀 미안하기도 했지만 워낙 시키는 족족 척척 처리하니 자꾸 시키게 되었다.
덕분에 요새는 통 이주민을 알현할 일이 없었는데....
"어지간한 건 자기 선에서 끝내는 카를이 어쩐 일로 나를 불렀지?"
☆ ☆ ☆
알현실에는 카를과 틸라가 한 엘프 여인을 마주한 채 레펜하르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레펜하르트가 안으로 들어서며 물었다.
"무슨 일이오, 카를 재상?"
"아, 이 여인이 폐하를 꼭 뵈어야 한다는군요. 이미 구면이라고 해서...."
"응, 구면?"
의아해하며 레펜하르트는 옥좌에 가 앉았다. 그리고 차분히 무릎 꿇은 엘프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다지 낯익은 느낌은 아니었다.
'누구지?'
그때 여인이 고개를 들었다. 공손한 목소리가 들렸다.
"안타레스의 제왕을 뵈옵니다."
"아, 그대는...."
카를이 물었다.
"정말 아는 사람입니까, 폐하?"
레펜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을 본 순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처음 하산했을 때 만났던 스테반의 슬레이어, 렐시아가 아닌가? 분명 스테반이 테스론 일행에게 합류한 후로는 통 보이지 않았었는데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이야.
렐시아가 슬그머니 레펜하르트의 눈치를 보았다. 그제야 정신이 들어 레펜하르트가 손짓을 했다.
"이, 일어서시오. 그런데 대체 어쩐 일로...."
허리를 펴고 일어나 렐시아가 레펜하르트를 응시했다. 진지한 목소리로 그녀가 또박또박 입을 열었다.
"안타레스 공국에 의탁하고자 찾아왔습니다. 해방자 레펜하르트 님."
예전에도 이렇게 노예였다가 도망쳐 온 이들은 제법 많았다. 그러니 렐시아가 그를 찾은 것은 그리 신기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의아해했다. 슬레이어의 세뇌교육은 실로 놀라워, 어지간해서는 그 충성심이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실제로 전에 만났을 때의 렐시아는 그야말로 스테반을 위해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을 것처럼 굴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배반했다?'
더구나 레펜하르트는 그녀의 주인, 스테반을 죽인 바로 그 장본인이 아닌가?
의문 섞인 눈빛을 읽었는지 렐시아가 말을 이었다.
"제 주인은 이미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 전부터 저는 버림받았지요. 주인이 날 버렸으니, 내가 그를 버린다 해서 뭐가 이상할까요?"
그녀가 진심을 토하며 눈을 빛냈다.
"더 이상 누군가의 노예로 살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왔어요. 받아 주신다면 무슨 일이든 시키는 대로 해내겠습니다."
"그런가...."
레펜하르트가 틸라를 향해 눈짓했다. 보통 상황이라면 당연히 의심을 할 만한 상황이다. 일단 감시하면서 이래저래 상황을 알아보아야겠지.
하지만 이곳에선 그럴 필요가 없다. 진실의 소리를 듣는 드워프가 있으니까.
틸라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에게서 진실의 소리가 들립니다. 거짓이 아니에요."
레펜하르트가 빙그레 웃었다. 그가 퍼트린 이종족 해방 사상, 그것이 이제 세뇌된 슬레이어에게 영향을 미칠 정도가 된 것이다. 물론 렐시아는 워낙 특이한 케이스라 이렇게 된 것이고, 보통 슬레이어들은 여전히 맹목적으로 주인에게 충성하겠지만 그래도 이것은 큰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기뻐하며 레펜하르트가 그녀를 맞이했다.
"반갑소, 렐시아 양. 안타레스 공국은 그대를 환영합니다. 얼마든지 이곳에서 자유롭게 살도록 해요. 머무를 곳을 원한다면 엘븐 포레스트에 자리를 마련해 줄 수도 있습니다."
렐시아가 살짝 난처해하며 대답했다.
"그보다는 왕궁에서 머물면 안 될까요, 폐하? 비록 주인을 떠났지만 역시, 동족들 사이에서 살기엔 조금 꺼려지는 면이 있어서요."
이해할 수 있는 요구였다.
확실히 슬레이어는 노예 경매장에서부터 일반 엘프들과는 다른 커리큘럼으로 교육을 받는다. 엘프들 사이에서도 이질적인 삶을 산 렐시아에게 아무리 동족이라지만, 바로 엘프들 사이에 끼어 사는 것은 힘들 것이다.
"그걸 원한다면 그렇게 하시오."
흔쾌히 승낙하며 레펜하르트가 틸라를 돌아보았다.
"틸라 양?"
틸라가 미소를 지었다.
"진실을 말하고 있으니 반대할 이유가 없지요. 시녀 자리를 알아볼게요."
렐시아가 우아하게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폐하!"
기뻐하는 렐시아를 내려다보며 레펜하르트는 흐뭇하게 웃었다. 점점 그의 꿈이 실현되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미처 모르고 있었다.
고개 숙인 렐시아, 그녀의 얼굴에는 조금 전까지의 감격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는 것을.
그저 차갑게 굳은 얼굴로, 서늘한 눈빛을 흘리며 이를 악물고 있을 뿐이라는 걸.
제43장 모두가 똑같은 사람이다
1
크로방스와 안타레스의 '이종족 해방 선언'으로 인해 세상은 확실히 변했다. 이제 적어도 저 두 나라 내에서 모든 이종족들은 인간과 동등한 권리를 가졌다. 인간들은 새로운 정책을 받아들이고 이종족들을 더 이상 노예가 아닌 사람으로 대하게 되었다.
그렇다. 겉으로는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사람은 그리 쉽게 돌변하지 않는다.
국민은 체스판 위의 말이 아니다. 위의 명령대로 완벽하게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는 소리다. 왕국의 권력자들 눈에는 이제 인간과 이종족들이 화합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렇다 해도 그 정책이 구석구석까지 완벽하게 스며든 것은 아니었다.
안타레스 공국 남부의 주요 교역 도시 자루드.
수많은 행상이 오가는 이 도시의 한 술집에서 폭행이 일어나고 있었다.
"어딜 감히 드워프 따위가!"
"난쟁이 주제에 감히 인간님의 술집에 들어 와?"
십여 명의 건장한 남자들이 술에 취해 드워프 한 명을 짓밟고 있었다. 구둣발에 짓밟히며 드워프가 신음을 흘려댔다.
"아고고, 나가겠소! 나간단 말이오!"
그는 한때 크로방스의 한 귀족의 노예로 살다가 이번에 자유의 몸이 된 드워프였다. 다른 일족과 달리 자유로운 세상을 보고 싶어 드워프 제 무기며 도구들을 짊어지고 행상으로 나섰던 것이다.
먼 길을 걸어 자루드로 돌아와 가볍게 맥주 한잔 하려고 아무 술집이나 찾은 것이 화근이었다.
레펜하르트며 각 이종족의 수장들이 버티고 있는 아라난 그라드와 달리, 교역 도시 자루드는 원래부터 크로방스의 주요 교역 도시로 역사가 깊은 곳이다. 아무리 안타레스 이종족의 소문이 퍼지고, 또 정책이 선포되었다 해도 여전히 뿌리 깊은 편견이 남아 있는 이들이 있었다.
"건방지게 난쟁이 따위가 감히 우리랑 합석을 하려고 해?"
"세상이 변했다고 아주 주제 파악을 못 하는구나!"
얼큰하게 취한 이들이 흥분해 계속 쓰러진 드워프를 짓밟는다. 전사의 혈통을 타고나지 않은 드워프는 대지 공명의 힘도 없는, 그저 단단한 체구의 키 작은 사람일 뿐이다. 죽도록 두들겨 패고 나서야 취한 이들이 드워프를 들어 술집 밖으로 내던졌다.
"꺼져라! 미천한 난쟁이 놈!"
"자, 가서 다시 술이나 한잔 하세!"
취객들이 껄껄대며 다시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흙바닥을 뒹굴며 드워프가 닭똥 같은 눈물을 펑펑 흘렸다.
"어흐흐흑!"
세상이 변했다곤 하지만, 사람은 변하지 않았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비단 교역 도시 자루드뿐만이 아니었다. 전 국민의 수에 비하면 비록 소수지만 여전히 이종족을 고깝게 보는 시선은 존재했다. 국법이 지엄해 감히 드러내질 못할 뿐이다. 홀로 다니거나 소수로 다니던 이종족 행인이 갑작스러운 습격을 받는 일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다.
주로 오크와 드워프가 그 대상이었다.
아무래도 엘프는 인간이 보기에도 아름다워 크게 반발심을 느끼지 않는다. 트롤은 워낙 수가 적고 자신들의 마을에서 잘 나오지 않으며, 돌아다니는 이들은 강력한 힘을 지닌 구루뿐이니 딱히 습격받을 일이 없다.
하지만 비교적 수가 많으면서도 인간과 확연히 다른 외모를 지닌, 게다가 그리 부러워할 외모가 아닌 오크와 드워프에 대한 차별은 엄연히 존재했다.
인간인 이상 외모에 구애받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아무리 이종족이라고 해 봤자 머리 굳은 이들에게 오크는 못생긴 괴물이고 드워프는 못생긴 난쟁이일 뿐인 것이다. 크로방스와 안타레스 관청에서 추가 인원까지 보충하며 차별을 막기 위해 사력을 다했지만 모든 지역에 국가의 손이 닿지는 않았다.
그리고 차별이 일어나는 것은 오색의 도시, 아라난 그라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 ☆ ☆
아라난 그라드의 거리를 한 연인이 걷고 있었다. 젊은 인간 청년과 아리따운 미모의 엘프 여인이었다. 사이좋게 손을 잡은 채 인간 청년이 엘프 여인에게 다정하게 말했다.
"꿈만 같아, 질레인. 당당히 널 내 아내라 말할 수 있다니."
"저도요, 헬바트 님."
감미로운 음성으로 엘프 여인이 대꾸했다. 인간 청년이 쯧쯧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헬바트 님이라니? 이젠 여보라고 불러야지?"
"...여보."
그들은 탄압을 피해 이곳 아라난 그라드로 이주해 온 이들이었다. 이곳에선 두 사람의 사랑을 당당히 인정해 준다. 이미 그들은 필라넨스 신전에서 조촐한 결혼식을 올리고 꿈에도 그리던 떳떳한 부부가 되었다.
"사랑해, 질레인."
인간 청년이 엘프 여인의 뺨에 키스하며 즐거워했다. 엘프 여인도 행복해하며 남자에게 달라붙었다. 그렇게 거리를 걷고 있는데, 갑자기 한 무리의 복면 쓴 이들이 나타났다. 흠칫 놀라 청년이 여인을 감싸며 물었다.
"응? 뉘시오?"
복면을 쓰고 있지만 뾰족한 귀가 확실히 드러났다. 즉, 이들은 엘프 남자들인 것이다. 당황하며 인간 청년이 재차 물었다.
"대체 무슨 일로...."
제일 앞에 선 엘프 청년이 호통을 쳤다.
"비열한 인간 놈! 언제까지고 그런 더러운 수작질을 할 셈이냐!"
"수작질이라니, 그게 무슨...."
당황한 인간 청년을 엘프들이 모여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쓰러져 인간 청년이 비명을 질렀다.
"억! 어억! 살려...."
연신 발길질을 하며 엘프 청년들이 이를 갈았다.
"천벌이다! 인간 놈아!"
"아직도 엘프가 네놈의 더러운 노리개로 보이나 본데...."
"그 썩은 머릿속을 뜯어고쳐 주마!"
두들겨 맞으며 인간 청년이 신음을 흘렸다.
"아, 아니오! 나는 진정으로 그녀를 사랑해서...."
엘프 여인, 질레인이 울상을 지으며 동족 청년들에게 매달렸다.
"하지 말아요! 제 남편이란 말이에요!"
짝!
엘프 청년이 질레인의 뺨을 강하게 후려쳤다. 여인이 바닥에 쓰러졌다.
"더러운 창녀 같으니!"
"수치도 모르는구나!"
"인간들과 놀아나고도 선조께 부끄럽지 않느냐?"
얼마나 두들겨 맞았는지, 결국 인간 청년이 혼절해 버렸다. 엘프 여인이 엉엉 울며 다시 소리쳤다.
"그러지 마요! 정말 제 남편이란 말이에요!"
그러자 이번엔 엘프 남자들이 여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다시 따귀가 날아갔다. 여인이 뺨을 감싸고 쓰러졌다.
"수치도 모르고 다리를 벌린 벌이다!"
"교훈을 얻었기를 바란다. 창녀 같은 년!"
걸레처럼 널브러진 인간 청년을 향해 차가운 시선을 보낸 뒤 엘프 청년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말했다.
"갑시다, 동지들! 아직도 인간의 세뇌에 빠진 동족의 여인들이 많소. 그들에게 교훈을 내려야 하오!"
"물론입니다!"
"아직도 우리 종족을 노리개로 보는 더러운 인간 놈들이 많으니, 결코 쉴 수 없지!"
그때 저 멀리서 호각 소리가 들렸다. 엘프 청년들이 당황했다.
"윽? 도시 경비대다!"
"도망쳐!"
쓰러진 인간 청년의 머리를 한 번 더 걷어찬 뒤, 엘프 청년들이 우르르 거리 너머로 사라졌다. 질레인이 엉금엉금 기어가 남편에게 다가갔다. 펑펑 울며 쓰러진 남편을 흔들고 또 흔들었다.
"여보, 일어나세요! 여보오...!"
도시 반대편에서는 가판대를 차린 트롤 행상 하나가 한 인간 중년인과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이거 사 간 그날 깨졌단 말이오! 어디서 불량품을 팔아!"
"인간! 그것은 불량품이 아니다! 감히 내 솜씨를 모욕하려는 거냐!"
"아니, 모욕이고 뭐고 집에 들고 간 그날 깨졌다니까?"
사실은 중년인의 실수로 깬 것이 맞았다. 집에 들고 가 장식해 놓았는데, 어린 아들이 실수로 가지고 놀다 깨 먹은 것이다. 비싼 돈 주고 사 온 것이 하루 만에 깨지니 돈이 아까워 이리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이 인간이 진짜...."
말다툼이 격해지자 트롤의 표정도 점점 일그러졌다. 사실 트롤은 그리 격한 성품이 아니며, 꽤나 인내심이 강하고 평화로운 종족이다. 하지만 눈앞에서 진상 떠는 중년인을 보고 있자니 자기도 모르게 잠시 울컥했다. 그래서 무심코 손을 휘둘렀다.
휘익!
인간으로 치면 멱살을 잡는 정도의 가벼운 행동이었다. 단, 그것은 트롤 기준에서나 그렇다. 중년인의 오른팔이 싹둑 잘려 나갔다.
"아?"
순간 멍해진 중년인이 비명을 터트리며 주저앉았다.
"으, 으아아악!"
트롤이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원래 트롤들은 다툼이 있으면 팔다리 하나쯤 자르는 것은 예사였다. 재생력이 있으니 그 정도는 그리 심한 부상이 아닌 것이다. 그냥 멱살 잡고 시위하는 것과 같은 감각이다.
하지만, 다른 종족에게는 생사가 오가는 심각한 부상이었다.
트롤이 발을 동동 굴렀다. 잠시 후 레단티의 신관이 달려와 부상자를 돌봤다. 치안대도 달려와 트롤을 체포해 갔다.
"실수요! 그냥 실수일 뿐이라니까!"
억울하다며 트롤이 하소연했지만, 멀쩡한 팔 잘라 놓고 억울하다 소리쳐 봐야 설득력이 없었다. 팔 잘린 중년인의 비명이 하늘 위로 아우성쳤다.
"으아아악!"
안타레스 공국의 한 지방 도시.
한 무리의 오크 청년들이 술집으로 들어오며 왁자지껄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다들 노예로 살다 이번 정책으로 인해 해방된 이들이었다. 우락부락한 오크들이 술집으로 들어오자 다른 인간들이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시끄러운 것도 시끄러운 것이지만, 그들 몸에서 너무 냄새가 났던 것이다.
오크 사내 중 하나가 고개를 돌리더니 눈을 부라렸다.
"인간들! 왜 보나?"
오크답게 단순한 어휘, 하지만 워낙 목소리가 살벌하다. 술을 마시던 인간들이 움찔거리며 눈을 피했다.
오크들이 자리를 잡고 자기들끼리 신 나게 떠들기 시작했다. 심지어 서빙 하는 웨이트리스의 치마도 마구 걷어 올렸다.
"흐헤헤!"
"여자다!"
"꺄아악!
웨이트리스가 울상을 지은 채 도망갔다. 오크들의 횡포가 너무 심하니 중년인 하나가 눈살을 찌푸리며 일어났다. 그가 점잖게 한마디 건넸다.
"조용히 술이나 먹을 것이지, 그게 무슨 횡포인가?"
딱히 천시하는 어조가 아니었다. 나이 많은 이로서 청년에게 할 법한 말투였다. 하지만 오크들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꺼져라, 인간!"
오크 하나가 대뜸 중년인을 후려갈겼다. 비명이 터지고 술집 안이 순식간에 소란해졌다. 오크들이 뻐드렁니를 드러내며 오크어로 으르렁거렸다.
"흥! 아직도 우리가 노예인 줄 아는 거냐!"
"이젠 네놈들을 두들겨 패도 우릴 혼낼 주인이 없다 이거야!"
"더 이상 인간들에게 빌빌댈 필요가 없어! 우리 세상이 왔다고!"
죄 없는 이를 폭행하고도 오크들은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도로 술집에 주저앉아 빨리 술 내오라며 소리만 지를 뿐이었다.
잠시 후, 도시 치안대가 들이닥쳤다. 겁먹은 주인이 재빨리 연락한 것이다.
선두에 선 것은 치안대장 차발타, 검투사 출신의 오크였다. 동족을 체포하려는 그를 보며 오크들이 화를 냈다.
"왜 우리를 잡아가나?"
"저들도 이랬다! 우리도 그럴 거다!"
묵직한 펀치를 한 방씩 날리며 오크 보안관이 인상을 썼다.
"시끄러워, 이 병신들아!"
그는 백국 초기, 타시드에 의해 구출된 검투사 중 한 명이었다. 그 후 오크의 전통을 이어받아 스피리츠 웨폰을 터득하고 전사의 자격까지 얻었다.
자부심 있는 차발타에게 이 오크들은 같은 동족이지만 정말 쓰레기였다. 긍지도 명예도 모르고, 그저 자유로워졌으니 마음대로 해도 된다며 짐승처럼 굴 뿐이다.
잠시 후 오크들이 줄줄이 묶여 끌려 나갔다. 그 와중에도 그들은 억울하다며 소리치고 있었다. 그 한심한 광경을 보며 차발타가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비록 동족이라지만, 오크는 그가 보기에도 너무 무식하고 난폭한 놈들이 많았다. 이래서야 노예로 살아도 싼 놈들이 아닌가?
"이런 놈들이 점점 늘고 있으니... 윗분들도 고생이 많으시겠군."
☆ ☆ ☆
각지에서 올라오는 보고를 받으며 카를은 머리를 싸맸다. 역시 아무리 법을 공표했어도 사람들의 인식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끙, 골치 아프군요."
여전히 이종족을 노예로 보는 인간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종족을 학대했다.
자유와 방종을 구별하지 못하는 풀려난 이종족들은 대놓고 인간에게 자기들이 당한 것처럼 똑같이 대하려 했다.
"그러게 말일세, 카를 재상."
카를 앞에 마주 앉은 마켈린도 함께 미간을 찌푸렸다.
인간을 대표하는 카를 재상.
드워프뿐 아니라 모든 이종족들의 존경을 받는 하이 프리스트 마켈린.
이 둘은 안타레스 공국을 지탱하는 양 기둥과도 같았다. 하지만 지금 벌어지는 일들은 이 둘이라도 어떻게 손 쓸 수 없는 것이었다.
카를이 서류를 손가락으로 넘겼다.
"인간과 이종족의 불화는 예상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현재 불협화음을 내고 있는 것은 학대한 인간과, 학대받는 이종족들뿐이 아니었다.
똑같이 노예 생활을 하고 있었다지만 엘프와 드워프, 오크와 트롤은 엄연히 다른 종족이고 다른 문화를 지니고 있다. 서로 다른 이들이 서로 얽히니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자유로워진 엘프들은 오크며 드워프, 트롤들을 무식하고 야만적이며 난폭하다 여겨 멸시했다.
자유로워진 드워프들은 딱히 다른 종족에 대한 편견은 없었지만, 사는 환경이 너무 달랐다. 드워프의 특성상 그들은 소음 공해라 할 정도로 시끄럽게 무기를 제련하며 마구 연기를 피우고 살았다. 드워프 말고 다른 종족은 도저히 함께 살 수 없을 정도였다.
특히 트롤과 드워프의 관계는 최악이었다. 드워프는 대장장이 일을 위해 석탄과 목재를 마구 땐다. 자연을 사랑하는 트롤들로서는 기겁할 파괴 행위인 것이다. 같은 의미로 엘프도 드워프를 좋아하지 않았다. 문화적 차이로 인한 작은 분쟁이 끊이질 않았다.
오크들은 특유의 난폭함 때문에 모든 종족과 사고를 종종 일으켰다. 특히 검투사 출신이나 오지의 자유로운 오크 중에는 노예 출신 오크들을 같은 동족으로 여기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인간처럼, 아니 인간보다 더 천시하며 학대하기도 했다. 오크는 어디까지나 강자를 숭상한다. 그런 이들에게 '약자'는 학대해도 좋은 존재인 것이다.
문화와 인식 차이로 사고가 나고, 노예 출신과 자유로운 오지 출신의 차이로 싸움이 벌어지고, 인간과 이종족의 역사로 또 문제가 생긴다.
카를과 타시드. 시리스, 아틸카와 마켈린이 열심히 중재하고 동족들을 교육했지만 이는 단시간에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카를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폐하를 뵈어야겠습니다."
☆ ☆ ☆
왕궁 가이라크의 공왕 집무실.
그곳에서 레페하르트는 굳은 얼굴로 카를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를이 단호하게 말했다.
"현행법을 개정해야 합니다!"
현재의 안타레스 공국법은 모든 종족을 동등하게 대우하고 각 종족의 문화를 최대한 존중해 최대한 공평하게 만든 법이었다. 이상 자체는 아주 좋았다. 하지만 현실적이진 않았다.
"각 종족마다 가치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니, 법률 역시 그에 맞춰야 합니다. 당장 현재의 형벌은 각 종족에 따라 유리한 부분과 불리한 부분이 너무 차이가 납니다."
중대한 범죄를 지었을 때 손발을 자르는 것은, 다른 종족에겐 충분히 범죄 억제력이 있는 공포스러운 형벌이다. 하지만 트롤에겐 그냥 매 몇 대 맞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범죄에 따라 감옥에 넣고 노역을 시키는 것은 다른 종족에게는 충분히 형벌이지만 드워프들에게는 평소 생활이나 다름이 없다.
이런 식으로, 모두에게 공평한 법이라지만 그 법은 실제로 공평하지 않았다. 처벌의 범위나 강도 역시 너무 약했다. 애초에 저 법은 각 종족이 서로 존중하며 화합한다는 것을 가정하고 만든 법인 것이다.
레펜하르트가 난처해하며 되물었다.
"그렇다고 사형의 영역을 넓힐 수도 없지 않은가?"
카를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필요하다면 해야 합니다."
모든 종족에게 공통적으로 드리워진 두려움은 죽음뿐이다.
"법은 지엄한 것이어야 합니다. 진정한 국가는 법의 공평성을 중시하지 그 형벌의 강도를 낮추려 하지 않습니다. 폐하께서 국민들을 아끼는 마음은 잘 알지만...."
잠시 말문을 흐리다 카를이 다시 말했다.
"지금 레펜하르트 님의 태도는 인군도, 성군도, 현군도 아닙니다. 그냥 물러 터진 것일 뿐이지요."
레펜하르트의 표정이 더없이 창백해졌다. 그의 입매가 꿈틀거렸다. 카를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리 레펜하르트가 신하들의 말을 잘 들어 준다지만 방금의 간언은 너무한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이 정도가 아니면 난 이분을 주군으로 여기지도 않았을 터다.'
과연, 레펜하르트는 카를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잠깐 울컥하긴 했지만 이내 카를의 말이 타당함을 인정했다.
"아프지만... 옳은 지적이군...."
전생과 다른 길을 가려 했다. 그러다 보니 전생 때처럼 냉혹하게 손쓰는 일을 최대한 피하려 했다. 하지만 이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알겠네. 잠시 고민할 시간을 주게."
카를이 차분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여기까지가 신하인 그의 의무였다. 이 이후는 레펜하르트의 뜻에 따를 뿐이다.
"폭언을 용서하십시오, 폐하. 하지만 이는 그냥 두고 볼 일이 아닙니다."
"알겠네."
카를이 다시 집무실을 나갔다. 홀로 남아 레펜하르트는 한숨을 쉬었다.
"후우우...."
이종족의 수가 적을 땐 이런 일이 없었다.
다들 억압 속에서도 명예와 긍지를 지키던 이들이었다. 고결한 영혼을 유지하고, 어려운 삶 속에서도 의지 견정으로 살아가던 이들이었다. 구출되어 자유로워진 이들도 그들의 분위기를 본받아 위대한 조상의 문화를 따라 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수가 많아지자, 저들이 더 이상 '약자'가 아니게 되자 이야기가 달라졌다.
일단 인간과 동등한 위치에 선 이들은, 하는 짓도 인간과 별 차이가 없었다. 똑같이 서로를 질시하고 무시하고 천대하고 학대하고 미워했다.
그래, 전생 때도 이런 일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심하진 않았는데...."
레펜하르트는 고민했다. 현재 안타레스 공국의 국법은 전생의 제국법과 같은 것이었다. 그때는 이 법으로도 그리 큰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
'역시 그때와 건국 시간이 너무 달라서 그런 건가?'
그때는 이처럼 급박하게 나라를 세우지 않았다. 이종족을 규합하고 조금씩 구출하고 점점 인구를 늘리며 점진적으로 제국의 위치까지 올랐다. 화합할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지금 일어나는 사태는 너무 심하다....
"으음...."
그때 집무실에 마켈린이 들어왔다.
"고민하고 계시는 듯하군요, 레펜하르트 님."
"안 할 수가 없지 않소?"
퉁명스레 대꾸하며 레펜하르트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아무리 시대가 다르다지만 왜 이렇게까지 차이가 나는 건지...."
"전 짐작이 갑니다만?"
"그렇소?"
레펜하르트가 마켈린을 빤히 바라보았다. 알 포트가 내려 준 순백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마켈린이 진지하게 말했다.
"종종 제게 말씀해주셨지요. 레펜하르트 님의 전생, 안타레스 제국에 대해서."
"그랬지. 그때는 이 정도는 아니었소, 분명."
"당연한 이야기지요."
마켈린이 말을 이었다.
"당시의 안타레스 제국은, 누가 뭐래도 종족 별로 계급이 확실히 나뉘어 있지 않았습니까?"
레펜하르트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요? 나는 분명 모두를 동등하게 대했거늘."
"그야, 법적으로는 그렇지요. 나뉜 것은 계급이라기보다는 직종이었고 법적으로는 모두 평등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동등하다고 외쳐 봐야 농민과 그들을 관리하는 행정관이 같습니까? 상점의 주인과 하인이 같은 지위일까요? 법적, 도덕적으로 평등하다고 선언해 봐야 직업에 따라 위아래는 생기는 법입니다."
마켈린이 헛웃음을 흘렸다.
"제가 들은 안타레스 제국은 누가 뭐래도, 인간이라는 최하층민이 있는 나라였습니다. 동등하게 대했다고 믿는 레펜하르트 님 입에서 들은 것이 이 정도니 실제로는 더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공통으로 학대할 '인간'이라는 대상이 있었으니 이종족들끼리 크게 다툼이 없었던 것도 이해가 갑니다. 원래 사람은 공통의 적이 있을 때 단결하니까요."
레펜하르트가 신음을 흘렸다. 마켈린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비수가 되어 날아드는 것 같았다.
"물론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겠지만요."
"다른 이유도 있단 말이오?"
"네, 레펜하르트 님이라는 존재 말입니다."
전생의 레펜하르트는 10서클의 대마법사, 누가 뭐래도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은 마왕이었다. 반면 지금의 레펜하르트는 인간의 한계를 '살짝' 뛰어넘은 정도인 것이다.
"전 레펜하르트 님의 마법을 실제로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제플린 공략 이야기는 들었지요. 솔직히 이야기를 들은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고 공포가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그 시대에, 직접 그 힘을 본 이들은 오죽하겠습니까?"
전생의 마왕, 레펜하르트는 분명 전 인류가 공포로 떨었던 대상이었다. 그리고 그 공포를 느낀 것은 인류만이 아니었다.
같은 편인 이종족에게조차도 공포스러운 힘이었다. 손짓 한 번에 산이 날아가고 외침 한 번에 하늘의 별이 떨어지는, 심지어 그러고도 전혀 힘든 기색 하나 보이지 않는 마왕의 모습은 적아를 막론하고 두렵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전생 때와 지금의 레펜하르트는 성격도 상당히 바뀐 편이었다.
제플린의 사례나 침략해 온 타국의 적을 몰살시킬 때처럼, 전생의 레펜하르트는 일단 상대를 적이라 인식하고 나면 지독하게 냉혹해지는 자였다. 그리고 마법사답게 그의 기준은 편협하기 그지없었다. 그 적아의 기준이 만약 자신들에게 돌아오게 된다면 어쩔 것인가? 같은 안타레스 제국민이라도 그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당시에는 레펜하르트 님이 절대적 공포의 대상으로 국민들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법과 도덕을 훨씬 뛰어넘는 압도적인 억제력이지요.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지 않습니까?"
"그럼 어쩌란 말이오? 지금이라도 10서클 마법을 선보일까?"
'미티어 폴 정도라면 주 1회는 가능한데....'
레펜하르트가 그 생각을 하며 묻자 마켈린이 기막히단 얼굴을 했다. 누가 마법사 아니랄까 봐 꼭 저런 식으로 생각이 도나?
"그게 아니라, 두려움의 대상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국가는 어버이와 같습니다. 자식 된 입장에서 존경과 경외, 두려움 동시에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 좋은 어버이지요. 그래야 자식을 바른 길로 이끌 수 있을 테니."
그런 의미에서 마켈린은 카를의 법 개정을 찬성하고 있었다. 교육과 사상 변화로 국민들이 변하길 기다리는 것은 너무 늦다. 그동안 무수한 억울한 피해자가 속출할 테니까.
"원래 건국 초기에 굳건한 법으로 국민들을 다스리는 것은 인간들에게도 상식으로 받아들여진다고 알고 있습니다. 저 역시 카를 재상의 제안에 찬성합니다."
"으음...."
레펜하르트가 다시금 신음을 흘렸다. 마켈린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채 마켈린이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레펜하르트 님은 항상 말씀하셨죠. 모두가 똑같은 사람이라고."
늙은 드워프가 고개를 들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저 강자와 약자라는 입장의 차이가 있었을 뿐이지요. 아마 입장이 역전되었었다면, 추악한 성품의 드워프 종족이 고결한 인간을 지배하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현자의 눈동자를 빛내며 그가 단언했다.
"우리도, 인간과 그리 다를 것이 없습니다."
2
현재 안타레스 공국에 살고 있는 이종족들은 모두 크고 작은 문제를 안고 있다. 억압받고 살다 겨우 해방된 이들이니, 변한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부분이 없을 리 없다.
그중 가장 심각한 부분이 있었다.
바로 오크와 엘프의 성비였다.
인간에게 있어 오크 여성과 엘프 남성은 노예로의 가치가 없었다. 그렇다 보니 키우는데 돈 들이지 않고 죽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자유로워진 엘프들의 남녀 성비는 1:10에 가까웠다. 반면 오크의 남녀 성비는 10:1이었다.
남자만 너무 많은 종족과 여자만 너무 많은 종족.
이 두 종족이 한데 어울려 사니 결국 예정된 문제가 터져 버렸다. 남자가 남아도는 노예 출신 오크들이 성욕을 참지 못하고 엘프 여인을 강간한 것이다.
자유로운 오크와 엘프들이 어울려 살 땐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다.
오크 기준에서 다른 종족의 여성은 다들 '비만'이었다. 아무리 몸매가 늘씬해봐야 근육이 없으면 뚱뚱이 취급하는 것이 오크다. 그렇다 보니 총각 오크들도 엘프나 드워프 여인을 넘보는 일은 전혀 없었다. 트롤 여성 쪽은 꽤 심미관이 맞았지만, 워낙 숫자가 적어 만날 일도 별로 없었다.
그리고 원래 전통의 오크들은 여성을 존중했다. 남자라면 당연히 여인의 선택을 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것이 그들의 문화였다. 보다 자연의 법칙에 가깝달까? 여인을 힘으로 제압하는 것은 남자가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불명예로 취급받았다.
하지만 인간에게 물든 노예 출신 오크들에겐 그 위대한 조상의 문화가 전해지지 않았다. 미의식 역시 인간에 가까워졌다. 또한, 인간이 언제나 마음대로 엘프 여자를 강간하는 것을 쉽게 보아 왔다.
그렇다 보니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오크들이 생긴 것이다.
"어차피 엘프들은 변변찮은 남자도 없지 않나? 과부로 늙을 불쌍한 여자들에게 남자 맛을 보여 주는 게 뭐가 잘못이란 말이야?"
아라난 그라드, 오크 지구.
수십 명의 오크를 앞에 두고 한 무리의 엘프가 모여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당장 그 간악한 자들을 불러내시오!"
단하임 일족의 수장, 렐하드였다. 그는 지금 일족으로 받아들인 노예 출신 엘프 여인들을 대변해 이 자리에 왔다. 얼마 전, 여섯 명의 오크에게 강간당한 여인들이었다.
렐하드 앞에 선 이는 회색 오크의 수장, 오러 유저 하다툼이었다. 그는 제플린 공략 시절, 렐하드와 함께 도적단인 척 꾸미고 함께 노예들을 구출한 적이 있었다. 서로 아는 사이라 평소엔 꽤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다.
하지만, 지금은 하다툼의 표정도 그리 좋지 않았다. 그가 힐끔 등 뒤에 무릎 꿇은 여섯 명의 오크들을 바라보았다. 모두 죽도록 두들겨 맞았는지 전신이 알록달록했다.
하다툼이 곤란하다는 듯 말했다.
"으음, 내 말하지 않았소? 이놈들은 이미 벌을 받았다고."
렐하드의 표정이 더더욱 살벌해졌다.
"여인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주고 어찌 매타작으로 벌이 끝난다 말이오! 목을 베어도 모자랄 것을!"
하다툼의 표정도 점점 구겨졌다.
"아니, 그럼 저들을 죽여야 한단 말이오? 저놈들이 엘프들을 죽이기라도 했소? 저 병신들이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사실 그쪽 여인들이 무슨 큰 부상을 입은 것도 아니잖소?"
두 종족 간의 문화 차이가 빚은 일이었다.
분명 오크들은 여인의 선택을 중시하지만, 그렇다고 여인의 정조까지 중시하지는 않았다.
오크들에게 있어 여인은 평생 살아가며 수십 명의 남자를 고를 수 있었다. 남자들도 처녀보다는 오히려 경험 많은 여인을 선호했다. 애를 많이 낳았다는 것은 그만큼 생산력이 입증되었다는 증거니까. 오크 여인에게 있어 처녀성이란 그저 성인이 되지 않았다는 의미일 뿐이며, 빨리 버릴수록 자랑스러운 행위인 것이다.
반면 엘프는 일부일처제를 고집하며 한 남자를 사랑하면 평생을 함께한다. 인간의 네 배나 되는 수명을 지닌 그들이니만큼 결혼에 대한 의식도 매우 굳다. 여인이 남편 아닌 다른 이에게 정조를 빼앗긴다는 것은 죽는 것보다 더한 수치이며 모욕이다.
"무, 무슨 그런...."
렐하드가 분노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감히 여인을 죽음보다 못한 꼴로 만들고 저런 뻔뻔한 소릴 하다니!
"거참, 억지가 너무 심하군!"
하다툼도 성질을 내며 투기를 피워 올렸다. 아니, 세상에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이쪽이 목숨을 앗은 것도 아닌데, 그 대가로 생명을 요구하다니 이 무슨 불합리한 요구인가!
양쪽의 살기가 점점 짙어지기 시작했다. 렐하드가 분노를 못 참고 이그나시스를 발동시켰다.
"이 뻔뻔한 작자들!"
하다툼도 블레이드 오러를 끌어 올렸다.
"어디서 개수작을 부리는 게야!"
오러와 불의 정령이 사방을 찬란하게 빛낸다. 각 부족의 두 수장이 눈을 부라리며 서로를 공격하려던 참이었다.
"양쪽 다 멈추세요!"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누군가가 가운데로 뛰어들었다. 백금발을 휘날리며 오른손으로 물의 정령을 소환해 이그나시스를 밀어내고 검을 떨쳐 블레이드 오러를 가로막는다.
콰쾅!
폭발이 일어나며 하다툼과 렐하드가 한 발자국씩 뒤로 밀렸다. 렐하드가 놀라 눈을 껌뻑였다.
"시, 시리스?"
방금 이그나시스를 밀어낸 힘은 렐하드의 몇 배나 되는 것이었다. 아니, 저 아이의 정령술이 이렇게까지 강해졌단 말인가?
"어? 시리스 양?"
하다툼도 경악했다. 현재 시리스의 시미터에는 희미한 백색 빛이 맴돌고 있었다. 그 빛이 간단히 그의 블레이드 오러를 막아 낸 것이다. 설마 오러인가 싶었는데,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비슷한 듯하면서도 뭔가 달랐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저 백색 빛이 오러 못지않은 힘을 지녔다는 사실이다.
양쪽을 제압한 채 시리스가 눈에 쌍심지를 켰다.
"이 문제는 당신들이 정할 일이 아니에요!"
렐하드와 하다툼이 동시에 억울하다며 소리쳤다.
"무슨 소리입니까, 시리스! 그대도 여인이라면 저들의 아픔을 잘 알 것을!"
비록 일족의 후예이지만, 시리스는 대외적으로 엘프의 수장이었다. 그래서 렐하드도 일단 존댓말을 썼다.
"아니, 같은 엘프라고 편드는 거요? 어차피 그 여인들은 노예 출신! 처녀도 아니었잖소! 그런데 죽음으로 갚으라는 게 말이 되오?"
서로의 기준이 너무 다르니 말이 통하지 않는다. 시리스가 눈에 살기를 띠었다. 울컥 짜증이 밀려올라왔다. 이유 모를 살의가 마구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 귀찮은 것들이... 다 죽여 버릴까?'
순간 시리스는 흠칫하며 정신을 차렸다.
'내가 방금 무슨 생각을 한 거야?'
등 뒤로 소름이 끼쳤다. 방금 한 생각이 정말 자신의 것이었는지 의심이 들었다. 머릿속에서 누군가가 사악하게 속삭이는 듯한 감각이었다.
"하아...."
애써 숨을 고르며 시리스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좌우를 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누구 편을 들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그저 중재를 하러 온 것뿐이에요. 이 일을 판단하는 것은 레펜하르트 님께 맡겨야 한다고 생각해요."
렐하드와 하다툼의 기세가 누그러졌다. 레펜하르트라면 그들 모두의 은인이었다. 그가 내린 결론이라면 양쪽 모두 납득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좋소."
"좋다!"
렐하드와 하다툼이 동시에 무기를 거두었다. 뒤에 서 있던 엘프와 오크 전사들도 분위기를 보며 전의를 거두기 시작했다.
시리스가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쉴 때였다.
"틀렸어요, 시리스 양."
갑자기 오크들의 천막 위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렐하드와 하다툼, 시리스가 놀라며 그쪽을 바라보았다. 특히 하다툼의 경악은 대단했다.
'누구지? 아무런 기척도 못 느꼈는데?'
보랏빛 머리의 미녀 엘프가 천막 위에 고고히 서 있었다. 표정은 차갑기 그지없고 눈빛은 오만하게 좌중을 오시한다. 시리스가 흠칫 놀랐다. 언제나 레펜하르트를 졸졸 따라다니며 바보짓만 하던 그 이니야였다.
"이, 이니야 씨?"
지금의 이니야는 시리스가 아는 그녀가 아니었다. 그 누구보다도 강렬한 위압감과 존재감을 사방에 과시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눈의 여왕이라는 별칭이 부끄럽지 않을 당당한 모습이다.
"세상에는 물러서도 되는 것이 있고, 물러설 수 없는 것이 있지요."
도도한 목소리를 흘리며 이니야가 사뿐히 레이피어를 뽑았다. 그녀의 전신에서 냉기와 살기가 더더욱 강렬하게 흘러나왔다. 모인 이들이 모두 부르르 떨 때였다.
휘익!
갑자기 그녀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리고 바로 비명이 터졌다.
"아악!"
"으악!"
"커억!"
하다툼이 놀라 고개를 돌렸다. 이니야가 그의 눈을 간단히도 속이며 단숨에 등 뒤로 돌아가 무릎 꿇은 오크 강간범 셋의 머리를 날려 버린 것이다!
세 줄기 피분수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오크들이 당황해 뒷걸음질 쳤다. 이니야의 레이피어가 다시 춤을 췄다. 남은 세 강간범의 목을 마저 칠 셈이었다.
"이런!"
하다툼이 당황해 몸을 날렸다. 블레이드 오러를 뿌려 공격을 막아 내며 그가 소리쳤다.
"무슨 짓이냐! 이들은 우리 일족! 그 생사도 우리가 결정한다!"
이니야가 사뿐히 검을 돌렸다. 하다툼의 공격이 궤도를 바꾸며 엉뚱한 데로 흘러가 버렸다. 단숨에 이니야가 접근하며 상대의 목덜미에 레이피어를 겨누었다. 섬뜩한 냉기가 예기를 동반하며 목젖에 닿았다. 하다툼의 움직임이 딱 멈췄다.
"으윽!"
이니야는 오크 최강의 투사, 칼켄과 맞먹는 최고위 오러 유저다. 아무래도 하다툼의 실력이 좀 떨어지는 것이다.
검을 겨눈 채 이니야가 입을 열었다.
"알아 두거라. 우리는 서로 다르다."
하다툼뿐 아니라 모든 오크들을 향해 그녀가 말했다.
"서로 다른 이들에겐 그 가치도 서로 다른 법. 세상엔 죽음보다 더한 가치를 가진 것도 있다. 네놈들이 범한 것이 그것이다."
엘프로서, 일족의 수장으로서의 권위를 담아 이니야가 단호하게 말을 맺었다.
"그것을 존중해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너희를 존중하지 않을 것이다."
잠시 후, 아스레일과 아틸카가 경비대를 이끌고 오크 지구로 달려왔다. 사고 소식을 듣고 허겁지겁 온 것이었다. 목이 날아간 오크 강간범들의 시체를 보며 아틸카가 혀를 찼다. 시체에 새하얗게 냉기가 맺혀 있었으니, 누가 이들을 죽였는지 안 봐도 뻔했다.
"쯧...."
아스레일이 살아남은 세 오크를 체포해 꽁꽁 묶었다. 관청으로 이송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다 문득 이니야를 보며 당황했다.
"으음, 이니야 님...."
오크 강간범이야 그 죄가 확실하니 당연히 체포한다. 하지만 저 오크들을 죽인 이니야는 어찌해야 하나? 어쨌거나 국법을 무시하고 재판도 없이 바로 살인을 저지른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스티리아 일족의 수장이며 강력한 오러 유저인 이니야를 감히 체포해도 될지 모르겠다.
그때, 이니야가 빙그레 웃으며 양손을 내밀었다.
"체포하세요. 국민을 살해한 것은 분명 중죄이니까."
아스레일이 질겁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어찌 이니야 님을 묶을 수 있겠습니까? 도망가실 분도 아니고...."
이니야를 일개 범죄자처럼 묶어서 데려간다고? 아스레일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침착했다.
"법은 법이니까요. 묶으세요."
아스레일이 조심스레 이니야의 두 팔을 살짝 묶었다. 너무 살짝 묶어 이건 뭐, 조금만 힘을 줘도 풀릴 지경이었다. 하긴, 그녀의 능력이라면 설사 꽁꽁 묶는다 해도 줄째로 끊는 것은 일도 아닐 테니 별 의미 없는 짓이긴 했다.
그러고도 이니야의 모습이 신경 쓰이는지 아스레일이 망토를 벗어 묶인 이니야의 양 팔목을 가렸다. 그제야 좀 안정이 되었는지 그가 나직이 말했다.
"별일 없을 겁니다, 이니야 님. 누가 뭐래도 저놈들은 범죄자이니까요."
이니야를 데리고 아스레일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조금 전까지의 차갑고 엄격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그녀가 눈웃음을 치며 너스레를 떨었다.
"아, 사고 쳐 버렸다아... 히잉, 레펜하르트 님이 미워하시면 어쩌지?"
멀어져가는 이니야의 뒷모습을 시리스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비록 시기하는 상대라지만, 지금의 이니야만큼은 도저히 질투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 ☆ ☆
무단으로 오크들의 목숨을 취한 이니야의 처벌은 꽤나 가벼운 것이었다. 그녀의 지위도 있고, 또 대상이 무고한 것도 아니었기에 일주일간 연금되는 형벌이 내려졌다.
오크 쪽에서도 의외로 반발은 없었다. 오히려 하다툼 같은 경우 그녀를 옹호하고 나섰다.
"나는 투사 이니야를 원망하지 않는다. 그녀는 옳은 일을 했다."
애당초 하다툼도 저 오크 강간범들이 좋아서 비호한 것이 아니다. 그저 동족을 다스리는 입장에서 타당한 벌이라 생각했을 뿐. 이니야의 강경한 태도를 보고 나니 그제야 저놈들이 얼마나 큰 범죄를 저질렀는지 이해하게 된 것이다.
오크들은 솔직 담백한 부분이 있어 인간처럼 자존심 문제로 권세 다툼을 하지는 않으며,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 줄 때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이니야의 '주장'은 오크 입장에서도 이해하기 쉬운 것이었다.
다음 날 오후.
아라난 그라드의 광장에 공식으로 처형식이 벌어졌다. 수많은 인파가 처형식을 구경하기 위해 광장으로 모여 있었다.
처벌은 죄를 다스리는 것에도 목적이 있지만, 만인에게 공표함으로써 추후의 범죄를 예방하는 목적이 사실은 더욱 강하다. 추후에도 이런 사건을 벌이는 자는 확실하게 사형당한다는 것을 보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광장 앞 관청 2층의 테라스에 안타레스 공국의 지도층들이 나타났다.
공왕 레펜하르트며 카를, 각 종족의 대표인 시리스, 타시드, 아틸카, 마켈린 등이 앞장서고 그 뒤로 이번 사건의 당사자 종족 대리인 렐하드와 하다툼이 모습을 드러냈다.
카를이 엄숙한 목소리로 죄인들의 죄를 나열했다. 그리고 외쳤다.
"...그리하여 이들에게 사형을 언도한다! 죄인들을 끌어내라!"
세 명의 오크들이 오랏줄에 묶인 채 끌려 나왔다. 엘프 여인들을 덮칠 때의 당당함은 어디로 갔는지, 다들 잔뜩 두들겨 맞고 겁을 집어먹은 모습이었다.
오크들이 처형대 위에 묶였다. 형틀 위에 강제로 엎드리게 해 몸을 고정시킨다. 섬뜩한 칼을 든 오크 망나니가 도신에 술을 뿌렸다.
강간범들이 기겁해 소리쳤다.
"살려 주십쇼!"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용서를!"
인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주로 드워프와 엘프, 트롤들은 당연하다는 반응이었다. 인간과 오크들도 여성들은 그럴 줄 알았다며 멸시의 눈빛만을 보냈다.
반면 인간과 오크 남자들은 당혹하는 기색이었다.
"어, 진짜 죽이네...."
"아니, 강간 좀 했다고 죽일 것까지는...."
"정말로 목을 치는 거야?"
그들의 반응을 예리하게 살피며 카를은 눈살을 찌푸렸다.
'역시, 좀 더 일찍 이렇게 했어야 했어.'
카를이 등 뒤로 눈짓을 보냈다.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섰다. 그가 테라스에 모습을 드러내자 묶인 오크 강간범들이 소리쳤다.
"살려 주십시오! 폐하!"
"다시는 안 이럴게요!"
오크어로 외친 것이라 다른 종족 귀에는 으르렁대는 걸로만 들렸다. 과연 흉악범들이라며 여인들이 치를 떨었다.
레펜하르크가 굳은 얼굴로 손을 들었다.
"처형하라!"
오크 망나니가 칼을 들고 눈알을 굴리며 묶인 죄수들에게 다가갔다. 죄수들의 표정이 더욱 사색이 되었다. 정말 죽는구나 생각하니 다들 악이 받쳐 소리치기 시작했다.
"이렇게 죽일 거면 왜 구해 준 거냐?"
"네가 뭔데 우리를 멋대로 죽여! 이 나쁜 새끼들!"
"누가 우리를 구해 달라고 했냐? 엉? 자유롭게 해 달라고 했냐고? 그대로 살았으면 아무 일 없었을 거 아냐!"
악을 쓰는 죄수들의 외침이 처형대 위로 아우성쳤다. 레펜하르트는 무심한 얼굴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오크 망나니의 대도가 칼춤을 췄다.
휘이익!
"아아아악!"
비명과 함께 잘린 머리 하나가 바구니에 풀썩 떨어졌다. 남은 오크 강간범들이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레펜하르트를 노려보았다. 증오, 오직 증오만이 담긴 눈빛이었다.
"저주받아라! 더러운 인간!"
단말마의 외침을 터트리며 또 하나의 머리가 떨어져 나갔다. 오크 망나니의 솜씨는 대단했다. 세 명의 목을 치는데 조금도 힘든 기색 없이 마저 칼을 놀린다.
뎅겅!
마지막 오크 강간범의 목도 잘려 나갔다. 부릅뜬 두 눈에 공포와 증오가 가득했다. 광장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적막을 깨고, 카를이 선언했다.
"이상, 처형식을 마친다!"
3
왕궁 가이라크의 서쪽 탑.
이니야는 왕실 감옥이 위치된 그 탑 지하실에 감금되어 있었다. 감옥답게 빛도 잘 들어오지 않는 음습한 곳이지만, 그녀는 딱히 지내는 데 불편함을 못 느끼고 있었다.
애당초 빙산 위에서도 잘만 드러누워 자던 이니야다. 북해는 특히나 햇볕이 부족하니, 어두운 감옥이라지만 그리 일조량이 부족한 것도 아니다.
간수들도 그녀에겐 지극히 정중하게 대했다. 그녀가 왜 이곳에 들어왔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고, 설사 죄수를 막 다루는 성질 더러운 간수라도 감히 이니야를 해코지하진 못했다.
지금 이니야는 그냥 비무장 상태로, 평범한 돌 감옥 안에 갇혀 있었다. 오러 유저의 힘이라면 맨손으로도 간단히 벽을 허물거나 창살을 휘고 나가는 것이 가능하다. 수틀리면 당장이라도 간수 목 서너 개쯤은 쉽게 딸 수 있는 죄수에게 누가 감히 함부로 대하겠는가?
정말 오러 유저를 감금하려면 최소 감옥 주위에 삼중의 결계 마법진을 치고, 죄수의 목에도 오러에 반응해 바로 독침을 꽂는 마법의 형틀 정도는 채워야 한다. 현재 이니야의 처우는 이 감금 생활이 어디까지나 형식적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렇게 아무런 제약 없는 감옥 생활을 하는 이니야는 지금, 얌전히 쪼그려 앉아 수를 놓고 있었다.
"아, 이거 어렵네."
아무리 편한 감옥 생활이라지만 감옥은 감옥. 문제가 있긴 있었다.
너무너무 심심했던 것이다. 그래서 스티리아 일족으로부터 수놓는 도구 받아서 깨작깨작 시간을 때우는 이니야였다.
원래 엘프는 전통적으로 직조에 강하다. 특히 엘프들의 자수는 인간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아름답고 정교하기로 유명한데, 이는 엘프 특유의 긴 수명과도 연관이 있었다.
자고로 시간 때우는 데는 자수가 제일인 것이다! 군대에서도 고참 병사들은 할 일 없을 때 빈둥빈둥 자수나 하면서 시간 때우지 않는가?
워낙 오래 사는 양반들이고 또 천성적으로 격한 성품이 아니다 보니 엘프는 남녀 할 것 없이 자수에 익숙했다. 마찬가지로 오래 사는 드워프들이 건물에 쓸데없을 정도로 장식을 붙이는 것과 비슷한 감각이랄까?
하여튼, 엘프 여인이라면 아름다운 수를 놓을 줄 알아야 훌륭한 여성으로 취급받는다. 그리고 이니야는 무술에 너무 치중하느라 그동안 여인의 덕목에 대해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이제껏 굳이 저런 것에 신경 써야 할 만큼 마음에 든 남자가 없었던 것이다. 누누이 말하지만, 이니야는 레펜하르트를 만나기 전까지 세상 모든 남자들에게 절망하고 있었다.
'언제까지 사기 칠 순 없잖아? 마침 시간도 남아도는데 이때 연습이나 해야지.'
정신을 집중하며 이니야가 연신 바느질을 했다.
너무 집중한 탓일까? 살짝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는지 바늘이 툭 부러졌다. 저래 봬도 무쇠를 담금질해 만든 바늘인데 참 쉽게도 부러져 버린다.
"앗! 또 부러졌어! 웬 바늘이 이렇게 약한 거야? 드워프한테 부탁해서 미스릴로 만들어 달라고 해 볼까?"
구시렁대며 이니야가 바늘을 옆으로 휙 던졌다. 옆에는 부러진 바늘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 바늘 산을 보며 그녀는 한숨을 푹 쉬었다.
"아, 오러는 밀리미터 단위로도 운용할 수 있는데 바느질은 왜 이리 힘든 걸까? 앞으로는 수놓는 여인들은 모두 존경해야지."
새 바늘을 꺼내 들고 이니야가 다시 정신을 집중했다.
듣자하니 시리스는 요리면 요리, 가사면 가사, 바느질이면 바느질 할 것 없이 모두 능통하다 했다. 거기에 질 수는 없다!
"흠흐흠...."
콧노래까지 불러 가며 이니야는 계속 들고 있는 천에 수를 놓았다.
처음엔 장갑 만들려고 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짐 언브레이커블의 권사는 장갑 따위 안 끼고 살았다.
그래서 목도리로 바꿀까 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레펜하르트가 추위 타는 건 본 적 없는 것 같았다.
언제나 웃통 까고 반쯤 벗고 다니는 양반이다. 물론 이니야 보기에 매우 좋긴 했지만, 막상 선물을 하려니 옷을 고를 수가 없는 것이다! 이건 뭐, 일상적으로 입고 다니는 게 있어야지?
물론 국왕답게 예를 차릴 때야 근사한 예복 입고 다니지만, 솔직히 그 정도의 고급품은 지금 그녀의 솜씨로는 턱도 없었다.
그래서 이니야는 결심했다.
"팬티 만들어 드려야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레펜하르트가 언제나 입고 다니는 건 팬티 정도밖에 없다.
그렇게 깨작깨작 바느질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간수 한 명이 다가와 정중히 말을 건넸다.
"이니야 님,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어마? 레펜하르트 님이?"
화들짝 놀라며 이니야가 잽싸게 몸을 일으켰다.
옷매무새를 다듬고 있는데 통로 저편에서 거구의 사내가 들어왔다.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레펜하르트였다.
이니야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세요, 레펜하르트 님."
감옥을 둘러보며 레펜하르트가 한탄을 흘렸다.
"내가 미욱해 이런 꼴을 당하게 해 미안합니다."
밝게 웃으며 이니야가 오히려 그를 달랬다.
"괜찮아요, 전혀 불편한 점 없는걸요?"
빈말이 아니고, 정말로 불편한 점이 없었다.
렐하드가 특별히 넣어 준 침상은 물론 감옥답게 겉으론 수수하지만, 매트리스며 이불의 재질이 엘븐 실크로 만들어 안락하고 따듯한 물건이었다. 바닥에는 사죄의 의미라며 하다툼이 특별히 보낸 가죽 카페트가 깔려 있어 돌바닥의 온기를 확실하게 차단하고 있다. 식사도 카를이 특별히 챙겨 왕실 요리사가 직접 조리한 것이 제공되었다.
운신의 자유가 없다는 점만 제외하면, 그냥 휴양 생활이나 다름없을 정도였다.
'심심하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그것도 이제는 해결했고!'
진심으로 한 답변이니 당연히 상대에게도 전해진다. 레펜하르트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고마운 말씀이군요, 이니야."
창살을 사이에 둔 채, 두 사람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안에 갇혀 사는 이니야에게 세상 돌아가는 일을 전해 주는 것이다.
그러던 중, 오늘 있었던 처형식 이야기가 나왔다.
"그 오크들은 오늘 오후에 처형되었습니다."
"그런 것치곤, 별로 표정이 밝지 않으신 건 같네요?"
다정한 그녀의 목소리에 레펜하르트가 무심코 한숨을 쉬었다.
"과연 잘한 짓인지 의문이 듭니다."
중범죄를 엄히 다스리는 것은 좋다. 하지만 사형은 한번 저지르면 돌이킬 수 없는 제도였다. 지금이야 범죄 사실이 명확히 하니 별문제가 없지만, 만약 앞으로 계속 이 제도를 유지하며 만약 억울한 이가 생겨나면 어떻게 되는가?
레펜하르트의 말에 이니야가 어리둥절해했다. 그의 말은 인간뿐 아니라 이종족에게조차 너무 생소한 감각이었다.
세상은 어차피 억울한 법이다.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 최대한 법에 여유를 둬 버리면 그만큼 범죄자가 늘어나지 않겠는가? 그러니 억울한 자가 생긴다 해도 무시하고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 현 시대의 사고방식이다.
"그리고 그들의 마지막 말도 일리는 있지요. 만약 내가 이런 일을 벌이지 않았다면, 비록 노예로 살지언정 그들은 죽지 않았을 겁니다. 범죄를 저지를 일도 없었겠지요."
말하다 말고 문득 레펜하르트는 실소를 흘렸다. 원래 이렇게까지 깊은 속내를 드러낼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꺼내다 보니 분위기가 그렇게 흘렀다.
"아니, 신경 쓰지 마세요. 쓸데없는 이야기를 해 버렸군요."
이니야의 눈빛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녀 역시 일족을 이끄는 자, 사람 위에 선다는 것이 어떤 것이 아는 여인이었다. 비록 규모는 다를지언정 레펜하르트의 고민이 이해가 갔다.
"올바른 말씀이긴 한데...."
눈의 여왕이 되어, 그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옳은 말씀은 아니네요."
어리둥절해하는 레펜하르트를 향해 그녀가 말을 이었다.
"올바름과 옳음, 그릇됨과 틀림은 비슷해 보이면서도 같지 않지요. 레펜하르트 님은 분명 좋은 분이시지만, 세상일은 좋은 의도로도 얼마든지 추악한 결과를 낳더군요."
레펜하르트가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좋은 의도로 낳은 추악한 결과? 그런 거라면 레펜하르트를 따라갈 이는 고금을 통틀어 몇 없을 것이다. 마왕으로 군림하던 그 때문에 죽어 간 이가 몇십만 명이던가?
"순서를 지키세요, 레펜하르트 님. 당장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하려고 하지 마세요. 사람을 다스리는 일은 마법 같지 않습니다. 정령과 달리 사람은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지요. 마법도 그렇겠지요? 잘은 모르지만 술식을 짜고 마력을 흘리면 언제나 같은 결과가 나오겠지요? 하지만 사람은 마법과 다르지요."
"그렇긴 하지요...."
이니야가 눈웃음을 쳤다. 그녀가 차분한 목소리로 그를 격려했다.
"당연히 해야 할 일. 올바른 일은 아닐지 몰라도, 옳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레펜하르트 님은 잘하고 계신 거예요."
레펜하르트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잠시 실소했다. 이게 무슨 꼴인가? 감옥에 있는 그녀를 위로하러 왔다가 도리어 위로를 받다니?
레펜하르트가 몸을 일으켰다. 할 일이 많으니 언제고 이니야와 수다만 떨고 있을 순 없다.
"조금만 더 참아 줘요, 이니야. 곧 나가게 될 테니."
"어마? 전 좀 더 여기 있어도 되는데요?"
마음의 짐을 덜어 주는 그녀의 대답에 레펜하르트는 포근함을 느꼈다.
뭐, 이니야는 그런 의도로 말한 게 아니라 진심이었지만. 아직 익혀야 할 자수가 많아서 솔직히 '일주일쯤 더 있다 나갈까?'란 생각도 하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이니야. 훨씬 기분이 나아졌군요."
이니야의 눈빛이 빛났다.
'오잉?'
이유는 모르겠지만 레펜하르트의 눈빛이 대단히 부드럽다? 예전과 달리 애정도 깃들어 있는 것 같다?
'내가 뭘 했지?'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이니야는 슬쩍 수놓던 천을 꺼냈다. 기회가 왔으니 이때 선물 건넬 생각이었다.
"아, 그리고 이거... 부끄러운 솜씨지만...."
아리따운 미녀가 몸을 꼬며 부끄러운 듯 팬티(!)를 내민다. 레펜하르트는 당황했다.
'하는 짓과 선물이 매치가 안 되잖아! 아니, 부끄러워하고 있으니 어울린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그거랑은 좀 다르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당혹하면서도 레펜하르트는 일단 팬티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그곳에 수놓인 무늬를 보며 다시 한 번 당황했다.
워낙 삐뚤빼뚤이라 알아보기 참 난해하긴 한데, 대충 보니 보랏빛 갈기를 휘날리는 괴상한 마수의 그림인 것 같았다.
'이건 어디 사는 몬스터인가?'
이니야가 부끄러워했다.
"제 얼굴이에요."
레펜하르트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 입 밖으로 꺼냈으면 큰일 날 뻔했다!
'잠깐, 그럼 자기 얼굴을 엉덩이로 깔아뭉개라고?'
전생 때도 느낀 거지만 역시 이니야는 이해하기 힘들다. 어쨌거나 선물은 선물이니 고마움을 표하며 받아 들었다. 이니야가 손가락을 꼬면서 말을 이었다.
"혹시 부여 마법 거실까 싶어서 특별히 마력과 궁합이 좋다는 아플린 초로 뽑은 실로 수를 놓았어요. 인간 중에는 팬티에 안티 임포텐츠라는 마법을 걸어 효과를 높인 마법사도 있다기에...."
은근슬쩍 야한 말을 끼우며 레펜하르트의 반응을 의도하는 이니야였다. 슬프게도 레펜하르트는 야한 쪽이 아니라 마법 쪽에 반응했지만.
'엥? 안티 임포텐츠?'
뭔지는 아는 마법이다. 성 불구가 되도록 거는 저주를 역행해 발기부전을 치료하도록 하는 부여술 계열 마법.
'그런데... 그걸 팬티에 거는 게 의미가 있나? 어차피 거사 치르려면 벗어야 하잖아?'
아무래도 그 마법 구상한 마법사가 경험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선물받았으니 인사는 해야 한다. 레펜하르트가 다시 한 번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잘 쓸게요."
"안녕히 가세요!"
감옥을 나서는 레펜하르트 뒤로 이니야가 환하게 손을 흔들었다. 죄수라기엔 지나치게 해맑은 표정이었다.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 이니야가 신 나라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좋아! 미움 안 받았어! 선물도 건넸어!'
☆ ☆ ☆
3
테스론은 계속 레펜하르트를 몰아붙였다.
드래곤 모드로 마법을 퍼부으며 멀리서 궁지에 몬 뒤, 드라칸 모드로 치명타를 노린다. 그러다 반격당할 것 같으면 다시 드래곤이 되어 멀리 날아간 다음 느긋하게 체력을 회복한다. 쉴 새 없이 밀리는 레펜하르트만 죽을 맛이었다.
"플레게톤! 인시너레이트! 아케인 스트라이크!"
일단 안정적으로 마법을 쓸 여유가 생기자 가공할 연산력을 바탕으로 테스론은 온갖 고위 주문을 쉴 새 없이 남발했다. 정신 고양을 이룬 현재의 그는 과거의 젊은 레펜하르트와 비교해도 그리 떨어지지 않는 위력의 마법을 구사하고 있었다.
쾅! 쾅! 콰콰쾅!
연이은 폭발에 공동 여기저기가 붕괴되며 용암 섞인 암괴 덩어리를 떨어트렸다. 발밑이 쉬지 않고 흔들렸다.
레펜하르트가 눈동자를 좌우로 굴렸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도저히 이 넓은 공동 안에서는 저놈을 상대할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좌우를 살펴보던 중이었다. 문득 공동 한가운데 위치한 거대한 조형물이 들어왔다.
복잡기괴한 형태로 세워진 거대한 조형물,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박혀 있는 납작한 형상의 30센티미터 정도의 물체.
그것은 얼핏 금속판처럼 보였다. 표면 곳곳에 복잡한 금속선이 미로처럼 촘촘히 박혔고 그 위로 정체불명의 돌기들이 가득 붙어 있었다. 금속판 네 귀퉁이에 새겨진 용과 호랑이, 그리고 화염의 새와 얼음의 거북 형상이 눈에 들어왔다.
'사방신의 유물!'
레펜하르트는 슬쩍 테스론의 눈치를 보았다. 그는 지금 드래곤 형태가 되어 공동 높은 곳을 맴돌고 있었다.
'그래, 생각해 보면 굳이 여기서 저놈을 상대할 필요는 없잖아?'
레펜하르트가 허공에 주먹을 뻗으며 소리쳤다.
"클라우드 킬!"
주먹질이 소매틱이 되어, 오러의 빛이 찬란히 뻗어나며 녹색 구름이 사방으로 퍼져 갔다. 독 구름을 생성하는 그 마법을 보며 테스론이 순간 의아해했다.
'뭐 하는 거야?'
드래고닉 발러 아머는 자체 정화 기능이 있어 저따위 독 구름은 전혀 내부로 스며들 수가 없다. 그리고 클라우드 킬은 4서클의 비교적 낮은 중독 주문, 오러 유저라면 그냥 맨몸으로도 얼마든지 버틸 수 있는 마법이었다.
자욱한 구름이 퍼지며 레펜하르트의 모습이 일순 가려졌다.
'연막작전인가?'
테스론이 긴장하며 경계하던 차였다. 구름 속에서 커다란 그림자가 빠르게 조형물 쪽으로 향했다. 잽싸게 조형물에서 뭔가를 떼더니 이내 출입구 쪽 복도로 매섭게 돌진한다!
"아차! 사방신의 유물!"
기겁하며 테스론이 스피드를 높였다. 드래곤이 독 구름을 가르며 날쌔게 출구 쪽으로 쇄도했다.
"어림없다, 이놈!"
통로의 너비는 4미터, 드래곤 모드로는 들어가기 힘든 크기다. 테스론은 다시 드라칸 형태로 변신해 통로로 뛰어들었다. 순간 테스론의 표정이 굳었다.
"윽?"
레펜하르트가 폭염권을 뒤로 뻗은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플레임 스트레이트!"
적색의 화염이 휘감긴 황금빛 섬광이 테스론을 직격했다. 폭발이 일어나며 통로 전체가 뒤흔들렸다. 통로가 통째로 우르르 무너지며 황금빛 드래곤이 무너진 통로에 파묻혔다.
'이 정도로 놈이 죽을 리야 없겠지만....'
레펜하르트가 씨익 웃으며 다시 뒤로 몸을 날렸다.
"시간은 벌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