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러스가 당혹스러운 듯 물었다.
"스승? 그대는 검성 바나텔의 제자였소?"
키린트의 스타일은 아무리 봐도 우직함이랑 거리가 멀었다. 우직함에 있어 신의 경지조차 초월한 바나텔의 제자로는 도저히 뵈지 않는다.
과연, 키린트가 고개를 저었다.
"그분은 하늘이 선택한 진정한 강자. 세상 그 누구도 그분을 사부라 칭할 자격이 없다."
순간 키린트의 두 눈에 경외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바나텔 님은 그럼에도 불민한 나에게 도움을 주시고 스승이라 칭하도록 허락하셨지."
"...사부는 안 되지만 스승은 된다고?"
어이없다는 러스의 반응에 키린트는 그럴 줄 알았다는 태도를 보였다.
저것이 남들이 듣기에 웃기는 소리란 건 그도 잘 알았다. 하지만 키린트에겐 분명 자랑스러운 호칭이다.
그런데 어째 러스의 표정이 기묘했다. 어이없기는 한데, 그게 우습다기보다는 공교롭다에 가까운 표정이랄까?
"...왜 그런 표정을 짓지?"
"아니, 그냥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소리다 싶어서... 끼리끼리 놀다 보면 저런 것도 닮는 건가?"
"...?"
의문이 떠올랐지만 키린트는 더 말을 섞지 않았다. 지금 그들이 느긋하게 수다나 떨고 있을 사이는 아니니까.
"받아 봐라!"
제국검 제2식, 내려 베기에 이은 올려치기가 키린트의 손에 의해 펼쳐졌다. 동작 자체는 단순하지만 그 속에 담긴 블레이드 오러는 키린트가 그간 고련에 고련을 거듭한 막대한 거력을 담고 있었다.
'감히 받아치지 못할 터, 피하는 순간 바로 네 목이 날아간다!'
키린트의 이 노림수는 알고도 당할 수밖에 없는 외통수 격인 수법이었다. 그야말로 기량에서 압도하는 자만이 구사할 수 있는 수법인 것이다.
그런데, 러스가 키린트의 예상을 뒤엎었다.
"흥!"
코웃음을 치며 러스는 피하긴 커녕, 오히려 함께 내려 베기를 시전했다!
콰아아앙!
푸른 블레이드 오러가 은청색 블레이드 오러와 부딪쳤다.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강대한 파문이 사방으로 퍼지며 두 검사가 동시에 튕기듯 뒤로 물러났다.
처음으로 키린트의 입에서 짙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크윽!"
애써 자세를 바로 하는 키린트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러스의 내려 베기, 그 속에 담긴 힘은 결코 그에 뒤떨어지지 않았다. 충분히 강력한, 심지가 굳은 일격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이는 오직 노력을 통해 기량을 갈고 닦을 때만이 가능한 것인데?'
키린트의 심정을 들여다보기라도 했는지, 러스가 자신만만하게 대꾸했다.
"댁만 천재로 태어난 게 아냐. 나도 천재란 게 얼마나 인생 허술하게 살 수 있는지 잘 알고 있거든?"
러스가 다시금 자세를 잡았다. 이번엔 그도 평소의 무형의 검세가 아니었다.
분명 자유분방한 기세를 풍기고는 있지만 어디까지나 기본에 충실하며 오랜 세월 검증되었음이 분명한 격조 높은 검세, 바로 눈의 여왕 이니야의 검술이었다.
차가운 기운을 어깨 위로 흩뿌리며 러스가 조롱하듯 말했다.
"그쪽은 좋은 집안에서 곱게 자라서 재능만으로도 편히 살 수 있었나 본데, 난 재능만 믿기에는 너무 삶이 팍팍했거든?"
제대로 된 검술 한 조각 얻지 못해 내려 베기만 10년을 해 왔던 러스다.
기껏 오러를 각성해도 옆에 있는 것이 전설의 무문, 짐 언브레이커블이었다.
겨우 좀 마음에 드는 기술 개발해도 주위의 온갖 이종족 괴수들로부터 이리저리 채이고 살았다.
대륙 최연소 오러 각성자라는 자부심조차도 테스론, 알렉스 등에게 깨진 지 오래다.
"기량? 기본기? 그게 제일 중요하다는 것쯤은 나도 잘 안다고!"
러스가 몸을 날렸다. 블레이드 오러가 바람을 가르며 키린트를 쇄도했다. 키린트도 검을 들어 막았다.
수차례나 오러가 맞부딪치며 파문이 일었다. 일격, 일격을 마주할 때마다 검을 쥔 두 손이 저려 왔다.
키린트는 이를 악물었다. 이는 절대 천재의 검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노력, 또 노력한 인간의 검이었다. 그것도 혼자만의 노력이 아닌, 누군가 절대적 강자의 손길이 닿은 듯한 흔들림 없는 기량이다!
러스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그래, 잘 알지! 기본기 중요한 거! 그래서 그런 미친 짓도 했지! 젠장, 내가 미쳤지! 내가 왜 그 양반에게 가르침을 달라고 했을까?"
일단 흥분하고 나니 제라드의 밑에서 당해 왔던 그동안의 고생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 지독한 꼴까지 당하며 기본기를 닦았는데, 거기다 기본기나 익히란 소리 들으면 사람이 화가 안 날 리가 있나?
"어디 확인해 보시지! 과연 내가 재능만 믿는 어리석은 천재인지!"
2
키린트와 사이러스는 성벽 위를 치달리며 백중세로 싸웠다.
서로가 튼튼한 검술의 기본 위에 자유로운 검격을 날려 공방일체의 자세를 구축하며, 동시에 온갖 화려한 오러 스킬을 난무한다. 서로가 서로의 기술을 베껴 대며 찬란한 블레이드 오러를 흩뿌리는데 둘 다 지구력 또한 장난이 아니라 쉽게 지치지도 않는다.
키린트를 상대하며 러스가 고민했다.
'어쩌지, 허공검을 꺼내야 하나?'
키린트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비기를 써야 할까?'
러스의 허공검처럼, 키린트 역시 남들에게서 베낀 것이 아닌 자신만의 오러 스킬이 있다.
그의 오러는 중력을 조작하는 권능을 지니고 있었다.
단순한 일격에 거악 같은 무게를 실을 수도 있으며, 몸을 깃털처럼 가볍게 해 상대의 공세를 흘릴 수도 있다. 일정 범위 내에서 중력을 역전시키거나 오히려 고중력을 가해 상대를 압박하는 것도 가능하다.
키린트의 중력검 앞에 상대한 적들은 가공할 압박을 느끼며 강제로 무릎을 꿇게 된다. 이것이 바로 그가 중압의 기사라는 칭호를 얻은 이유였다.
하지만 러스나 키린트나 함부로 비기를 꺼내 들지 못했다.
양쪽 모두 같은 이유였다.
'혹시 이것마저 저놈이 베껴 버리면....'
러스의 허공검이나 키린트의 중력검이나, 그들 스스로도 카피할 수 없을 만큼 고도의 기술이었다. 그러니 설마 이것마저 베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은 그들 자신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자신이 못한다고 해서 상대방도 못하란 법은 없지 않은가?
'허공검을 빼앗기면 더 이상 상대할 방법이 없어!'
'설마 싶지만 중력검마저 카피당하면 그땐 대책이 없다.'
스타일이 비슷하니 생각도 비슷하게 흘러간다. 결국 결정적인 일격 없이 둘 모두 소모적인 싸움을 계속 할 수밖에 없었다.
☆ ☆ ☆
한편, 성벽 아래에서는 또 다른 사투가 한창 벌어지고 있었다.
"죽어라! 이 더러운 오크!"
제국 오러 유저, 모스 경이 암회색 블레이드 오러를 휘두르며 참격을 쏘아 댔다. 상대의 참격을 튕겨 내며 타시드는 힐끔 성벽 위를 바라보았다.
노력에 노력을 거듭한, 하늘이 내린 두 천재들.
그들의 사투는 성벽 밑에서 보고 있던 타시드에게도 경외심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저들은 여전히 저 화려한 공방을 주고받으면서도 성벽과 수직으로 서 있는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거참, 저러고 멀미도 안 나나?"
키린트도 키린트지만, 새삼 러스가 얼마나 천재인지 실감이 드는 타시드였다. 비록 대련 때야 워낙 서로 익숙해서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는 타시드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저런 짓은 할 자신이 없었다.
"잘도 서로의 기술 베껴 대네? 난 대여섯 번은 봐야 겨우 감 잡겠던데."
게다가 저 중첩의 장막이라 했던가? 오러를 복잡하게 엮어 방어력을 극도로 높이는 저 수법은 솔직히 가르쳐 줘도 할 자신이 없었다.
타고난 천재인 타시드는 굉천월광이나 기간틱 블레이드 같은 류의 오러 스킬은 그래도 연습하면 쉽게 따라할 수 있었다. 사실 인간 기준에서나 타시드가 강검사지, 오크 투사 중에서는 세련되고 정교한 검술을 지닌 기교 위주 검사에 속한다. 그의 또 하나의 스승, 대모 스탈라처럼.
하지만 폭풍의 연검 같은 고도의 오러 운용은 역시 무리였다. 분명 몇 번 보면 어찌하는지 이해는 할 수 있겠지만, 자기 손으로 행하기엔 역시 세심함이 부족한 것이다.
"어휴, 나도 부족에선 천재 소리 제법 들었었는데 러스 저 자식이랑 비교하면 영 둔한 것 같단 말이지."
안 그래도 스탈라에게 둔하다며 잔소리 듣는 처지라 더더욱 우울한 처지의 타시드였다. 의기소침해져 그는 계속 성벽 위를 힐끔거렸다.
...문제는, 그가 지금 한가하게 자리 깔고 구경하며 감탄하는 처지가 아니란 점이었다.
"으윽! 이 괴물 같은 오크 놈!"
"대체 어떻게 이런 오크가 세상에 있을 수가!"
타시드를 상대하고 있는 두 오러 유저는 지금 누구처럼 느긋하게 성벽 위나 바라보며 감탄사 늘어놓을 처지가 아니었다.
그들에겐 눈앞의 오크나 제국 유수의 천재 검사 키린트나 별 차이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키린트보다 이 녹색 피부의 오크가 더 강한 것 같았다!
"타앗! 블레이드 랩소디!"
"천검난무!"
프레드릭과 모스가 저마다 자신의 고유 기술로 타시드를 압박했다. 하지만 타시드는 당황하지 않았다.
"허업!"
참마도 다카르를 교묘하게 놀리며 타시드의 청록색 블레이드 오러가 좌우로 뻗었다.
그 공세가 절묘하게 두 기술의 시발점을 찔러 기술의 맥을 끊는다. 제대로 위력이 붙기도 전에 흩어진 두 참격, 그 사이를 노리며 타시드가 연격을 퍼부었다.
푸른 전갈의 습격!
좌우 횡 베기가 두 오러 유저를 동시에 노렸다. 두 사람 다 허겁지겁 공세를 막는 찰나, 타시드의 기술이 이어졌다.
내려찍는 전갈의 꼬리!
검세가 허공에서 변화해 유성우처럼 머리 위로 쏟아진다. 감당키 어려워 프레드릭과 모스가 정신없이 뒤로 밀렸다.
두 사람 모두 신체 여기저기에 생채기가 나며 피가 흘렀다. 상처 자체는 옅지만 오러의 중압감 때문에 마치 몽둥이로 두들겨 맞은 듯 전신이 뻐근하다.
"크윽, 이것도 먹히지 않는가?"
"마치 내 기술을 미리 알고 있는 것 같잖아, 이건!"
밀린 프레드릭과 모스가 이를 갈았다.
아까부터 이런 상황이었다. 어떤 공격을 해도 저 건장한 오크는 마치 미리 예상하기라도 했듯 도중에 반격을 해 대고 있었다. 오러양이 제국 오러 유저 측이 더 높기에 카운터를 먹고도 별 피해는 없었지만, 기술적 측면에서 노골적으로 읽혔다는 것은 역시 정신적 타격이 크다.
게다가 더더욱 굴욕적인 부분은....
"야, 천재다. 진짜 둘 다 천재네."
타시드는 그 와중에도 계속 성벽 위를 힐끔거리며 이쪽에 집중을 하지 않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나마 타시드가 오크어로 중얼거리고 있어 망정이지, 만약 알아들었다면 울화통 터져 뒷목 잡고 쓰러졌을지도 모르겠다.
계속 곁눈질을 하는 타시드의 태도에 보다 못한 제국의 오러 유저, 모스 경이 버럭 호통을 쳤다.
"기사도도 모르는 비천한 오크 놈 같으니! 네놈도 검을 쥐었다면 눈앞의 상대를 존중해라!"
그러자 타시드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인간의 기사도를 굳이 그가 지킬 이유는 없지만 오크 전사의 전통 또한 눈앞의 대적자에게 집중하지 않음은 큰 무례다. 원래 타시드도 이런 성격은 아니었는데 근묵자흑, 먹을 가까이 하면 검어진다고 하도 러스와 오래 어울리다 보니 절로 신기한 기술 보면 그쪽에 신경 쓰는 습관이 붙어 버렸다.
'으윽, 나의 실수로다.'
바로 성벽에서 시선을 떼고 타시드가 정중히 사과를 건넸다. 이번엔 혼잣말이 아니라서, 오크어가 아닌 마법 목걸이로 인해 번역된 공용어였다.
"미안하오, 나의 과오를 용서해 주시오."
모스 경이 숨을 씩씩거리며 중얼거렸다.
"이 자식, 어떻게 기술을 모조리 읽는 거지?"
"안력과 반사 신경이 그리 좋은가?"
"검세야 그럴 수도 있겠지만 어떻게 오러 스킬마저 미리 막는단 말이오? 그것은 기감으로도 안 되는 것이거늘?"
모스 경의 분통에 프레드릭 경이 쓴웃음을 지었다.
"키린트 경은 막았잖나?"
"그럼 저 따위 오크가 키린트 경과 동급의 천재란 말이오? 말도 안 되는!"
"확실히... 키린트 경과는 좀 다른 느낌이지만...."
동료의 투덜거림에 프레드릭은 고민했다. 타시드의 저 기이한 짓거리는 천재, 키린트를 상대할 때와는 좀 달랐다.
키린트는 기술을 한 번 보자마자 바로 이해, 두 번을 허용하지 않는 타입이었다.
하지만 타시드는 달랐다. 저 오크는 아예 처음 한 번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쪽의 기술을 모두 파악해 버리는 것도 아닌 듯하다. 그렇다면 맥을 끊을 때 바로 결정타를 날렸을 터, 하지만 맥을 끊는 것 이상의 공격은 하지 않는단 말이지?'
비교적 침착한 성품인 프레드릭은 이 상황에서도 그럭저럭 심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혈질인 모스는 달랐다. 오크 따위에게 밀리는 자신이 도저히 용납이 안 되었는지 얼굴을 시뻘겋게 달구며 대뜸 반격에 들어갔다.
"이 비천한 노예 새끼가!"
모스의 오러 스킬이 막 뻗어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너무 마음이 급했던 나머지 블레이드 오러의 제어가 일순 흩어지며 제어된 힘이 엉뚱한 데로 흩어져 버렸다.
모스 경의 안색이 굳었다.
'아차! 실수다!'
그런데, 하필 뒤틀어진 블레이드 오러가 허공에서 휘어 타시드의 등 뒤로 날아들었다. 노리질 않았는데 엉뚱하게 회검류 기술이 된 셈이었다. 그야말로 천운이다.
'이거 운이 따르는군!'
모스 경은 당황했지만 프레드릭 경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애초에 노리지도 않은 기술이니 예측이 될 리가 없다. 바로 공격에 합세하려 무릎을 굽히는 찰나였다.
"흥! 어금니 막기!"
콧방귀를 켜며 타시드가 대뜸 허리를 비틀어 대지로 대검을 크게 그어 넣었다.
콰콰쾅!
청록색 오러가 간헐천처럼 분출하며 타시드의 등 뒤를 가로막았다. 대족장 칼켄의 비기를 적절한 순간에 구사한 것이다.
순간 프레드릭이 두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마, 말도 안 돼!'
애당초 실수한 기술을 예측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사전 동작도, 오러의 흐름도 모두 측면 공격을 위한 것이었다. 그저 제어가 벗어나 배후 공격이 되었을 뿐.
그런데 타시드는 그걸 간단히 알아챘다.
'단순히 상대 공격에 반응한 것이 아니야. 분명 모스 경이 실수하기 전에 먼저 움직였어!'
상대가 어떤 식으로 나오건 이후 이어질 공격을 알아채는 능력.
프레드릭 경은 저 능력에 대해 문헌에서 본 적이 있었다.
"전투 예지!"
☆ ☆ ☆
300년 전의 검성, 아인츠발트의 비기.
전투 예지.
그것은 인간에게는 결코 허락되지 않는다는 시간과 공간, 물질 중 시간 그 자체에 개입하는 초월적인 오러 스킬이었다.
"말도 안 돼... 오크 따위가 그런 기술을 터득했을 리가...."
검성 아인츠발트는 전투에 인해 3초 전의 모든 공격을 '미리' 볼 수 있었다. 예측 따위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절대적인 예지, 반드시 일어나고야 마는 사실을 시간을 뛰어넘어 미리 알아차리는 능력이다.
이것이 전생의 오크 대전사, 타시드가 검성 사이러스와 동등하게 싸울 수 있던 진정한 이유였다.
공간을 다루는 검성 사이러스를 상대로 오크 대전사 타시드는 시간을 초월하는 안목으로 맞섰다. 무술에 대해 잘 모르던 당시의 레펜하르트는 그냥 감 좋아서 막은 줄 알았지만, 사실 허공검이 감 좀 좋다고 막을 수 있는 레벨의 기술은 결코 아니다. 오크 대전사 타시드는 확실히 검성 사이러스와 같은 위치, 비슷한 깨달음을 지닌 진정한 강자였던 것이다.
비록 현재 타시드의 전투 예지는 전생과 비교하면 미약할 뿐이지만 그렇다 해도 두 오러 유저를 상대하기엔 충분하다.
프레드릭이 전율하며 중얼거렸다.
"전투 예지라니... 그것은 인간에게 허락된 힘이 아니거늘...."
전투 예지의 힘은 검성 아인츠발트 이후 세상에 나온 적이 없었다. 기술의 난이도도 난이도지만, 그 부작용이 너무 심각해 설사 단초를 잡았던 오러 유저라도 제대로 익히질 못한 기술이었다.
예지 능력, 이는 분명 반칙적으로 강한 능력이지만 그만큼 감각을 크게 훼손한다. 온갖 공격이 난무하는 복잡한 검투 속에서 현재와 미래의 환영이 공존하는데, 그것을 구별하기에 인간의 뇌는 너무나 섬세한 것이다.
능력을 계속 사용할수록 뇌는 환영을 인식하고 그에 적응하며 점점 더 고도로 예민해진다. 종국엔 전투가 아닌 일상에서조차 환영과 실체를 구별하지 못하게 되니 극도의 정체성 혼란과 우울증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검성으로 이름 높았던 아인츠발트도 저 능력을 개화한 이후 3년이 채 못 되어 미쳐서 자살해버렸다.
미래를 보는 것은 그만큼의 대가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어리석구나, 전투 예지는 검사라면 손대어선 안 될 광기의 검이거늘!"
프레드릭 경이 고함을 터트렸다.
타시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전투 예지? 뭐야, 그건 또?"
"네놈이 보고 있는 미래의 환영 말이다! 그걸 보고도 맨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으냐?"
타시드가 눈을 껌뻑였다. 그제야 프레드릭이 뭔 소리 하는지 알아들은 것이다.
"아, 뭔 짓 할지 대충 보이긴 하는데 그게 뭐?"
이걸로 확신할 수 있었다. 저 오크는 정말로 시간을 초월하는 능력이 있다.
대단하고 또 감탄스러운 능력이지만, 프레드릭의 표정은 오히려 밝아졌다.
'정말 전투 예지라면 방법이 있지!'
검성 아인츠발트의 문헌을 통해, 그는 전투 예지를 상대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일격의 파괴력이 아니라, 공세의 숫자를 크게 늘려 버리면 된다. 그렇다면 미래의 환영도 그 수가 월등히 많아질 것이고, 그만큼 그 힘을 다루는 타시드에겐 극도의 심적 부담이 될 테니까.
프레드릭의 검세가 더욱 그 수를 늘렸다. 상황을 알아챈 모스 경도 재빨리 합류했다.
자신만만하게 프레드릭이 고함쳤다.
"어리석구나, 오크야! 언제까지 그 힘을 다룰 수 있을 것 같으냐?"
무수히 쏟아지는 미래의 환영, 인간이라면 그 끝없이 이어지는 시간의 파편 속에서 허우적대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런데... 어째 상황이 기대했던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다루긴 뭘 다뤄? 그냥 보이니까 막는 건데."
공세가 늘건 줄건, 타시드는 전혀 부담 없이 감당하고 있었다.
분명 현재와 미래의 환영이 공존하고 있을 텐데 표정에 한 치의 혼란도 없어 보인다. 뭐, 살짝 우울한 감은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저 위에서 놀고 있는 두 천재에 대한 자격지심 때문일 뿐이다.
그렇게 몇 번이나 다량의 검격을 퍼부었지만, 타시드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무난히 막아 내며 적절하게 반격을 할 뿐이다.
오히려 프레드릭이 당황해 버렸다.
"이 오크 놈은 미래의 환영을 보면서도 자아를 유지할 수 있단 말인가?"
전투 예지는 분명 인간에게 허락된 기술이 아니었다. 창조적이고 창의적이며, 상상력이 뛰어나 보이지 않는 존재를 볼 수 있는 인간에게는.
하지만 오크는 그 정도로 머리가 좋지 않은 것이다.
애초에 보이지도 않는 신을 믿지 않고, 분명 존재했던 조상들을 믿는 오크다. 미래의 환영이 보인다고 진짜인지 가짜인지 고민할 만큼 우울한 성격도 아니다. 그리고 타시드는 분명 오크치곤 머리가 좋았지만, 그래 봤자 오크였다.
보이면 보이는가 보다, 안 보이면 그런가 보다, 대충대충 넘어가는 오크에게 자아 정체성의 흔들림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쉽게 말해, 이것이 예지인지 그냥 감인지 구별 못 할 만큼 멍청한 것이다!
"정체성 의문? 씨발, 내가 내 팔로 내 검 들고 잘 싸우는데 뭔 의문이 있어?"
타시드는 전혀 고민도 고뇌도 없이 전투 예지를 막 쓰면서도 뇌에 조금도 부담을 느끼질 않았다. 애초에 부담을 느낄 만큼 섬세한 뇌도 아니고.
그 덕에 전투 예지가 100퍼센트 들어맞지도 않았지만....
"윽!"
모스 경의 블레이드 오러가 타시드의 어깨를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워낙 환영이 많다 보니 보면서도 구별을 못 한 탓이었다.
모스 경이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어떠냐! 오크! 네 전투 예지가 무적이 아님을 알겠느냐?"
타시드는 개의치 않았다. 어깨의 상처는 가볍게 스친 것으로, 전투에 지장이 없는 수준이었다. 오크 전사는 이 정도는 상처로 치지 않는다.
"아, 감 잘못 잡았네?"
이러고 신경 끈다. 그리고 다시 전투에 매진한다.
"싸우다 보면 당연히 칼침 맞게 마련이지, 살짝 긁어 놓고 뭘 그리 저리 잘난 척을 한대?"
환청이나 환각도 머리가 받쳐 줘야 생기는 것이다. 환청도 기분 탓, 환각도 기분 탓이라며 대충대충 넘겨 버리는 타시드에게 스트레스란 존재하지 않았다. 마음껏 미래의 환영을 보며 두 오러 유저를 상대했다.
"이 방법은 안 되겠군."
결국 프레드릭과 모스는 검세를 바꾸었다. 무수히 공세를 퍼붓는 것은 시행하는 입장에서도 체력 소모가 너무 커 오래 할 짓이 아니었다.
'난격이 통하지 않는다면 역시 남은 방법은 하나뿐인가?'
전투 예지를 쓰는 자에게 기교는 통하지 않는다. 알면서도 막거나 피할 수 없는 외통수의 일격, 즉 순수한 힘으로 밀어붙일 수밖에 없다!
그 사실을 깨달은 프레드릭과 모스가 암담한 표정을 지었다.
'...힘으로?'
'오크를 상대로?'
자신의 허벅지보다도 두꺼워 보이는 팔뚝에, 어디서 대들보를 뽑아온 것 같은 참마도를 몇십 분째 휘두르면서도 지친 기색 하나 없는 저 우락부락한 오크를 힘으로 밀어붙여야 한다고?
"...."
두 오러 유저는 승부를 포기했다. 대신 방어에 치중하며 타시드의 발을 묶는 데 최선을 다하는 방식으로 싸움을 바꿨다.
일단 상대가 저렇게 나오니 타시드도 필살의 일격을 먹이기가 어려웠다. 일대일이라면 벌써 승부가 났겠지만, 전투 예지를 통해 카운터 일격을 넣어도 다른 한쪽이 커버해 주니 알면서도 놓칠 수밖에 없다.
"타아앗!"
"허업!"
기합을 연신 터트리며 세 오러 유저는 계속 공방을 주고받았다.
3
성벽 위와 아래에서 양측의 오러 유저가 사투를 벌이는 와중에도, 전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제국의 공세 속에서 조금씩 타한 요새군의 피해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화살 비에는 거의 무적이던 드워프의 '강철의 지붕'도 날아드는 마법에 대해선 그리 유효하지 못했다. 성벽 곳곳에 시체가 늘어났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타한 요새는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며 결코 적의 발길을 허용하지 않았다. 상황을 지켜보던 제국군 지맨 사령관은 인상을 썼다.
'이거 안 되겠군.'
제국이 자랑하는 중장보병, 기사와 동급의 갑주를 갖춘 채 돌진하는 이 보병들은 특히나 공성에 탁월한 힘을 발한다. 화살도 떨어지는 돌덩이도 몸으로 버티는 방어력을 갖춘 존재들이니까.
그 중장보병이 전혀 밀어붙이지 못하고 있다. 연신 돌을 맞고 창에 찔리며 사다리에서 떨어져 바닥을 뒹군다.
모두 저 성 위의 철벽, 드워프 전사들 때문이었다. 특히나 그중에서도 유달리 눈에 띠는 이, 바로 블레이드 오러를 휘두르며 성벽 이곳저곳을 종횡무진하는 저 드워프 전사 때문에!
"한 놈도 올라오지 못하게 해라! 모조리 떨궈 버려!"
드워프 오러 유저, 말로이드는 거대한 대검으로 성벽을 죽죽 긁어 가며 걸린 사다리니 갈고리밧줄이니 하는 것들을 모조리 쓸어 내고 있었다. 낙석이나 화살도 버텨 내는 중장보병이지만 말로이드의 오러가 쓸고 갈 때마다 맥없이 성벽 아래로 떨어질 뿐이었다.
두꺼운 갑주 덕에 죽은 이는 많지 않지만 대신 부상자가 즐비하다. 슬슬 저들을 거두지 않으면 저 부상자는 곧 사망자로 변하리라.
"퇴군의 뿔피리를 울려라! 이 이상의 희생을 낼 순 없다!"
어리석은 장수라면 조금만 더 밀어붙이라며 닦달했을지 모르겠다만, 지맨 사령관은 냉철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아무리 병력의 질이 높더라도 제국군이 수적으로 열세라는 점은 명백했다. 지금은 병력을 아낄 때였다.
부우우웅!
지맨의 명이 떨어지자 바로 제국군의 움직임이 변했다. 궁병대가 화살을 쏘고 방패수들이 후진에서 앞으로 나와 선두에 선 중장보병의 앞을 가로막으며 천천히 후퇴를 시작했다.
"음?"
뿔피리 소리에 한창 검투에 열중하던 키린트가 힐끗 제국군 진지를 바라보았다.
'퇴각인가? 아무래도 오늘의 공격은 실패한 모양이군.'
명령이 떨어졌으니 키린트 자신도 이곳에 계속 머무를 수 없다. 아쉬워하며 그가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러스가 눈을 부라리며 달려들었다.
"누가 달아나게 놔둘 것 같나?"
반격하며 키린트가 매섭게 소리쳤다
"누가 달아난다는 거냐!"
말은 저렇게 했지만, 여기서 아군과 함께 퇴각하지 않으면 적진 한복판에 고립되는 처지가 되어 버린다.
아무리 오러 유저라도 적진 한복판에 뚝 떨어져 살아남을 가능성은 적다. 아니, 사실 키린트 혼자라면 그래도 살아남겠지만 그 적진에 동급의 오러 유저가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이 자리에서 결판을 내겠다!"
고함을 터트리며 러스의 공세가 더욱 매서워졌다. 푸른 블레이드 오러로 사방을 차단하며 키린트의 퇴로를 가로막는다. 키린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쳇, 쉽게 보내 주지 않겠다 이건가? 하긴, 나 같아도 저렇게 나섰겠지만.'
보아하니 성벽 밑, 녹색 오크 오러 유저와 싸우는 프레드릭 경과 모스 경도 쉽사리 발을 빼지 못하는 눈치였다. 서로의 실력은 백중지세, 먼저 등을 돌리기엔 너무 위험도가 크다.
하지만 키린트는 그리 난처해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제국군에는 이런 상황을 대비한 다양한 대처법이 있다.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저 멀리에서 원호 공격이 들어왔다.
"나는 위대한 힘의 사역자, 정명된 이치에 따라 힘을 행사하노라! 아케인 포스 스트라이크!"
진지 안쪽에서 지맨 사령관과 함께 이 자리에 온 바슈탈론 마법병단 제 3대장, 9서클의 대마법사 론타리온이 융단 폭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강력한 8서클 섬광 주문이 수십 줄기로 뻗어와 러스와 타시드를 노렸다.
"윽?"
"이런!"
다급하게 둘 모두 오러 가드를 펼치며 파괴의 섬광을 막아 냈다. 거리가 워낙 멀어 위력이 많이 반감했음에도 불구, 사방에서 폭발이 일어나며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다.
콰콰콰쾅!
황급히 크로방스 마법병단도 아군 오러 유저를 보호하기 위해 움직였다. 방어 마력장을 펼치고 날아드는 섬광 주문에 광계 반사 마법을 시전했다.
오러 가드를 펼친 채 타시드가 눈을 껌뻑였다.
"어? 공격이 좀 덜한데?"
러스가 눈을 빛냈다.
"좋아! 이 틈에 간다! 이대로 저자를 보내 줄 순 없어!"
적 측 오러 유저를 해치운다는 것은 이후 전쟁에 있어 크게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는 셈이다. 기껏 기회가 왔는데 놓치기엔 너무 아깝다.
마법 폭격이 잦아드는 것 같아 러스와 타시드가 재차 후퇴하는 제국 오러 유저들을 쫓으려 했다.
그러나, 과연 9서클의 대마법사는 만만치 않았다.
"흐음, 그렇게는 안 되지?"
백발을 휘날리며 자색 로브 차림의 노인, 론타리온이 양손을 허공에 휘저었다. 빠르게 수인을 맺으며 연달아 연계 마법을 시전한다.
"디스펠! 안티 매직 실드! 브로큰 에리어! 바람이여, 동토의 힘을 내 손에 담아 적을 치는 강력한 설풍이 되라! 블리저드 스톰!"
온갖 항마 주문이 크로방스의 마법 역장을 해체하고 동시에 영역 장악 주문이 광계 반사 주문을 파훼한다. 뒤이어 국지적인 눈보라가 러스와 타시드를 노리고 불어닥치니, 금방 팔다리가 얼어붙기 시작했다.
"크윽!"
"젠장!"
오러로 몸을 보호하기에 냉기에 대한 직접적인 피해는 입지 않지만, 순식간에 겉옷이며 갑주에 서리가 끼며 얼어붙어 움직임이 제한되었다.
두 사람의 움직임이 느려진 틈에 거리를 벌린 제국 오러 유저들은 무사히 아군 진지로 퇴각했다. 닭 쫓던 개가 된 심정으로 타시드와 러스가 이를 갈았다.
"제길! 놓쳤다!"
"우리 쪽 마법사는 뭐 하고 있는 거야?"
크로방스 마법병단을 타박하는 두 사람이었지만, 사실 크로방스 측 마법사도 놀고 있지는 않았다. 계속 두 사람을 원호하며 해제 마법을 날리고 있었다.
그저 마법사로서 수준 차가 너무 심했을 뿐이다.
"으, 역시 우리 측 실력으로 저자를 상대하기는 벅찬가...."
요새 높은 곳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타한 총사령관, 갈린 백작이 혀를 찼다.
현재 타한 요새의 마법병단장은 마법사 자크라스, 7서클 후반의 종사자로 고위 마법사의 위계를 가진 자였다. 요새 최강의 마법사이자 전투를 상당히 경험해 본 노련한 이지만, 아무래도 대마법사 론타리온에 비하면 많이 밀리는 감이 있었다.
'오러 유저의 전력은 그럭저럭 맞는데, 마법 전력이 너무 떨어지는군.'
현재 크로방스 왕국 최강의 마법사는 9서클 초반의 종사자인 왕실 마법사 에스타리드로 국왕 유벨 2세와 함께 파루간 요새에 머물고 있다. 그 외에 크로방스 왕국에 대마법사의 위계를 지닌 이는 아바드 가문의 8서클 종사자, 리스터뿐인데 그는 가문과 함께 불참전 선언을 해 왔다.
반면 제국군은 대마법사의 위계를 지닌 이만 넷이나 있었다. 심지어 지금 상대하는 대마법사 론타리온은 9서클 중반의 종사자, 크로방스 최강의 마법사 에스타리드보다도 오히려 윗줄에 있는 자인 것이다.
불꽃과 연기를 피워 올리는 타한 요새 곳곳을 살펴보며 갈린 백작이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화살비와 공성 병력은 드워프 부대가 확실하게 막아 주었으니, 저 상흔 대부분은 적들의 마법 공격에 의한 것이었다.
"요새 마법진의 힘을 빌리고도 이런 피해를 내다니...."
마법사는 오랜 시간 준비한 자신의 영역, 마법진 내에선 서클 이상의 힘을 낸다. 4, 5서클 마법사라도 마법진의 힘을 빌리면 6, 7서클 마법사와 자웅을 결할 수 있을 정도다. 그리고 타한 요새는 제클릭 경에 의해 방어 마법진의 유지, 보수를 결코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번 농성전에도 최고의 위력을 발휘해 주었다.
'아니, 그나마 오랜 세월 준비해 두었던 타한 요새의 마법진이 있기에 9서클 대마법사를 상대로도 여기까지 버텼다고 할 수 있으려나.'
그러는 동안 제국군은 착실히 타한 요새에서 물러나고 있었다. 요새군 쪽도 마법을 날리고 화살을 쏘아 보았지만, 퇴각하는 와중에도 전혀 진열이 흩어지지 않으니 거의 피해를 주지 못했다.
"적들이 물러난다!"
"우, 우리가 이긴 건가?"
"그, 글쎄...."
분명 요새 방어에 성공했건만 타한 요새군의 사기는 그리 높지 않았다. 퇴각하는 제국군의 전력은 공격 전과 거의 차이가 없어 보였다. 고작해야 몇십 단위의 시체만을 남긴 채 깔끔히 물러난 것이다.
병사들이 기가 막혀 중얼거렸다.
"젠장, 죽도록 싸운 것 같은데 저것밖에 못 죽였단 말이야?"
"저게 제국의 진짜 힘인가...."
물러나는 제국군의 진열 뒤로 한 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확성 마법의 힘을 빌려 기사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타한 요새를 향해 외쳤다.
"축하한다! 이단자들아! 오늘은 그대들이 승리했구나!"
기사가 껄껄 웃으며 마저 소리쳤다.
"내일 또 보자! 하하하하핫!"
그러자 제국군 전체에서 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래! 내일 보자! 이놈들!"
"한숨 자고 다시 들이 받아 주마!"
퇴각하는 도중임에도 제국군의 사기는 전혀 떨어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타한 요새군을 조롱하는 분위기이기까지 했다. 멀쩡한 제국병도 부상자도 모두 한마음이 되어 고함을 질러댔다.
"어디 내일도 한번 아등바등 버티어 보거라!"
"크하하하!"
당연한 분위기였다.
비록 공성은 실패했지만, 제국군의 사망자는 이백이 채 되지 않는다. 워낙 병사 개개인의 기량이 높고 무장 상태 역시 뛰어나다 보니 그 혹독한 공성전 속에서도 부상자는 많을지언정 죽은 이는 거의 없는 것이다.
부상자라도 팔다리를 잘라야 할 정도의 중상자는 얼마 없었다. 세이어 신관의 힘을 빌리면 하루 만에 완치될 수준이었다. 실질적인 피해는 거의 없는 편이다.
하지만 타한 요새는 오늘 하루만 천에 가까운 목숨을 잃었다. 성벽 쪽은 차라리 드워프들 덕에 방어가 튼튼해 그렇게까지 피해가 크진 않았는데, 문제는 제국군의 마법 공격이었다. 크로방스의 마력장을 돌파한 온갖 마법에 의해 후위의 병사들이 오히려 큰 피해를 입었다.
"...."
즐비한 시체 사이에서 망연자실한 타한 요새군을 보며 킬리언 경이 이를 갈았다. 이대로 있다간 사기가 바닥까지 떨어질 상황이었다.
"부관! 승리의 나팔을 불어라! 오늘은 우리의 승리다!"
나팔 소리가 요새를 뒤덮었다. 기사들 몇몇이 분위기를 선동했다.
"이겼다!"
"승리했다!"
"제국 놈들을 물리쳤다!"
그제야 병사들도 조금 안색이 밝아졌다. 하나 둘 선동에 따라 승리의 외침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이겼다!"
"제국 놈들아! 이것이 크로방스의 힘이다!"
하지만 외침 속에서도 병사들의 얼굴 한구석에는 여전히 수심이 남아 있었다. 이것을 과연 승리라고 할 수 있는가?
킬리언 경이 허겁지겁 재차 소리쳤다.
"기운을 내라! 크로방스의 용사들이어! 제국이라도 영원히 쳐들어올 수는 없다! 딱 보름, 보름만 버틴다면 우리의 승리다! 크로방스의 이름으로 약속하노라!"
그제야 요새군의 표정도 펴졌다.
"보름?"
"그래, 보름 정도라면...."
킬리언 경은 원래 타한 요새의 사령관으로 오래 복무해 온, 병사들의 신뢰를 받는 무인이다. 그리고 제클릭 경의 부관으로서 결코 허언은 하지 않는 성품이기도 했다.
킬리언 경이 보름을 약속한다면, 정말 보름만 버티면 된다는 소리다!
"후우...."
간신히 사기를 유지하는 데 성공한 킬리언 경이 한숨을 푹 쉬었다. 보름을 약속한 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는 성품상 병사들에게 거짓을 약속할 수 없다.
하지만, 보름만 버티면 어째서 제국군이 물러나는지에 대해선 킬리언 경도 모르고 있었다. 그가 들은 국왕, 유벨 2세의 명령은 하나뿐이다.
-보름 동안 타한 요새를 사수하라. 그동안 제국의 국경 침범을 허하지 않는다면 크로방스의 승리가 될 것이다.
킬리언 경은 새삼 국왕의 명령을 되새겨 보며 의아해했다.
비록 가을이긴 하지만, 겨울이 되려면 아직도 한 달 반은 남았다. 그러니 겨울이 다가온다는 이유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도대체 무슨 수를 쓰기에, 보름이 지나면 제국군이 스스로 물러난다는 것인가?'
하지만 그는 이내 상념을 접었다. 어차피 뭔가 정치적인 이유겠지? 그는 무인이었고 지시받은 명령에 충실한 것을 자부심으로 삼는 자였다.
'보름을 지키라 명받았다면, 그 보름 동안 결코 이 요새를 내주지 않겠다!'
각오를 다지며 사나운 얼굴로 킬리언 경은 회의실로 돌아갔다. 오늘의 피해를 추산하고 내일에 대한 대비를 하기 위하여.
☆ ☆ ☆
크로방스 서부 국경 전역에서 타한 요새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제스턴 요새도, 라카스 요새도 많은 피해를 입었을지언정 굳건히 요새를 사수해 냈다.
제국군이 그토록 믿었던 강력한 오러 유저들은 안타레스에서 원군으로 온 이종족 오러 유저에 의해 전부 발이 묶였다. 수성守城의 달인이나 다름없는 드워프 전사들, 그리고 오크 전사들 역시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훈련도가 떨어지는 크로방스 병사들의 선두에 서서 용맹하게 요새를 방어했다.
하지만 이는 도저히 승리라 할 수 없는 것이었다.
타한 요새와 마찬가지로, 제스턴과 라카스를 공략한 제국군 역시 피해는 크지 않았다.
오랜 세월 갈고닦은 제국의 정규군은 강력했다. 그들을 지휘하는 지휘관 역시 노련하고 현명하기 그지없었다.
적절한 순간, 승산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지휘관들은 미련 없이 군대를 퇴각시켰고 거의 손상 없이 병력을 보전했다.
그에 비해 징집병이 대부분인 크로방스 군은 상당한 피해를 보았다.
전투의 프로페셔널인 안타레스의 이종족 전사들은 그리 피해가 없었지만, 일반 보병들은 이야기가 달랐다. 단 하루 만에 삼천에 가까운 목숨이 비명에 가 버린 것이다.
3대 요새와 달리 아직 제국의 본진이 도달하지 않은 파루간 요새.
그 회의실에서 유벨 2세가 휘하의 장수, 참모와 함께 보고를 들으며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정말 피해가 크구려."
아무리 서류상의 숫자일 뿐이라지만, 하루 만에 정병 삼천을 잃었으니 정신적으로 타격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유벨 2세가 한숨을 푹 쉬었다.
"과연, 이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크로방스 작전 참모장이 국왕에게 위로를 건넸다.
"너무 심려치 마옵소서, 폐하. 첫 접전이라 예상보다 피해가 많았지만, 그렇다고 승패가 갈린 것은 아니옵니다."
다른 참모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첫 전투에서 죽은 이들은 처음 징집된 경험 없는 이가 대부분, 아까운 생명을 잃은 것은 안타깝지만 냉철하게 볼 때 그리 큰 전력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남은 병력은 원래 요새 주둔군과 크로방스 내전을 통해 단련된 병사들입니다. 첫날과 같은 피해가 계속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유벨이 한쪽 눈을 치켜뜨고 미심쩍다는 시선을 참모부를 향해 보냈다.
'이 양반들이 진심으로 하는 소린가, 아니면 나 듣기 좋으라고 이러는 건가?'
어릴 적부터 진실의 목소리를 듣는 드워프 여인, 피니아와 함께한 유벨은 국왕이 되어서도 듣기 좋은 아첨에 휘둘리지 않는 현명함을 지니게 되었다. 단지 이게 부작용도 있었는데, 모든 신하의 말에 진짜인지 아부인지 의심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유벨이 은근슬쩍 회의실에서 좀 떨어진 곳에 서 있는 피니아에게 눈짓을 보냈다.
'이거 진짜야?'
국왕이 된 후 어지간하면 피니아의 의견을 묻지 않게 된 유벨이다. 아무래도 국왕이 되어서까지 사사건건 그녀에게 진위 파악을 부탁하게 되면 스스로의 판단력이 길러지지 않는 것이다. (사실은 피니아가 저 이유로 구박을 하게 되어 못 묻게 된 것이지만.)
'그렇지만 지금은 위기 상황이니 괜찮겠지?'
유벨의 눈짓에 피니아가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그제야 유벨의 표정도 밝아졌다. 확실히 그의 참모부는 빈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유벨 2세의 치하 동안, 워낙 아부라면 치를 떠는 유벨 때문에 그의 신하들은 국왕의 기분에 아랑곳 않고 바른말만 하는 버릇이 붙어 있었다. 아무리 기분 나쁜 말을 해도 그것이 사실이라면 유벨은 결코 노하지 않았으니까.
"그대들의 말을 들으니 한결 마음이 놓이는구려."
"예, 폐하. 그리고 안타레스의 이종족 전사들 또한 오늘 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양측이 손잡고 싸우는 첫 전투, 보고에 따르면 아무래도 어긋나는 부분이 좀 있었다 합니다. 하지만 이제 확실히 손발이 맞게 되었으니 피해를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그렇군, 어떻게든 보름은 버틸 수 있다 이거군?"
"예, 폐하."
대답하며 참모장이 문득 근심어린 얼굴을 했다.
"오히려 안타레스 공국 쪽이 걱정이옵니다. 우리 쪽에 강력한 오러 유저를 다수 원조해 주었으니 이는 우방으로서 훌륭한 태도, 실로 고마운 일이지만 그 탓에 바실리 왕국군과의 전투에 차질이 생기지 않을지...."
"그 보름이라는 시일은 안타레스가 약속한 것, 공국이 무너지면 서부 전선 역시 미래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건 그렇지...."
권왕 레펜하르트의 강력함은 그 누구보다도 신뢰하는 유벨이다. 국왕 된 입장이라 티를 낼 수는 없지만, 같은 남자로서 경외를 느끼고도 있었다.
세상 그 누구보다도 강력한, 그야말로 수천 년의 세월을 보낸 거악 같은 사내.
단순히 육체의 강력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육체의 강함이라면 지금 요새에서 놀고 계시는 권황 제라드가 훨씬 강할 테니까.
하지만 레펜하르트에게는 육체를 초월한 강인함이 느껴졌다. 절대적인 자신감과 흔들림 없는 정신력, 그리고 의지.
그런 그가 패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그래, 레펜하르트 공 혼자라면....'
하지만 이것은 전쟁, 레펜하르트만의 싸움이 아니라 국가 간의 거대한 전쟁이다.
과연 안타레스 공국이 바실리 왕국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바실리 왕국 뿐 아니라 전 대륙에서 모인 일만의 신성군에 그 위세 높은 세이어 교단이 합세한 저 거대한 세력을, 크로방스에 대다수의 오러 유저와 이종족 전사들을 보내 버린 안타레스 공국이 과연 막아 낼 수 있을까?
가슴이 먹먹해졌다.
창밖을 내다보며 유벨은 남쪽, 보이지 않는 안타레스 공국의 정경을 떠올렸다.
'레펜하르트 공, 그쪽은 잘되고 있는 거요?'
제47장 안타레스 남부 전선
1
바실리 왕국과 안타레스 공국을 가르는 국경 지대, 재쿼드 평원.
바실리의 대군은 험준한 라키드 산맥을 피해 이곳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라키드 산맥은 바실리의 북부와 동부를 크게 아우르는 타원형의 산맥, 몬스터 출몰이 잦아 도저히 군대가 진군할 수 있는 지형이 아니었다. 소수라면 모를까, 수만 단위의 대군이 지날 수 있는 지형은 아니다.
"그런 만큼 안타레스 공국 쪽도 전혀 방어를 하지 않을 텐데... 별동대를 꾸려서 라키드 산맥 쪽을 노리면 안 될까? 그러면 놈들의 수도를 바로 노릴 수 있을 것 같은데."
길게 대열을 늘려 진군하는 수만의 바실리 왕국군, 그 중심에서 남들보다 배나 큰 백마를 탄 우아한 인상의 중년 검사가 있었다. 바실리 왕국이 자랑하는 오러 유저, 이번 안타레스 정벌군의 총사령관을 맡은 에그라드 경이었다.
에그라드 경의 말에 부관 겸 참모인 아쉬르 경이 고개를 저었다.
"라키드 산맥은 도저히 군대가 지날 곳이 아닙니다. 만약 그곳으로 진군하려다간 적지에 들어서기도 전에 병사의 태반은 잃을 것이옵니다."
"그럼 산맥의 지형을 감당할 만한 정예병을 꾸리면 될 것 아닌가?"
연이은 에그라드 경의 질문에 부관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에휴....'
에그라드 경은 분명 강력한 오러 유저로 바실리의 모든 기사들의 존경을 받는 훌륭한 무인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훌륭한 지휘관임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평생 검만을 수행해 왔기에 전략, 전술에 대해선 일개 기사만도 못한 타입이었다.
그런 양반이 대뜸 대군의 총사령관을 맡아 놓으니 어떻게든 기책을 발휘, 역사에 남을 멋진 전술을 펼치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야 역사책 보면 산맥 넘어 빈집 털이 들어간 명장들 이야기가 워낙 자주 나오니 그럴 만도 하겠지. 하지만 그 명장들이 역사에 남은 것은 다 이유가 있다.
"분명 옛 명장 중엔 그런 기책을 발휘, 승리를 거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시대에는 통하지 않는 방식입니다, 사령관 각하."
"어째서? 잘 먹힐 것 같은데?"
한심하다는 듯 참모가 대꾸했다.
"지금은 마법 통신이 있지 않습니까?"
마탑이 존재하지 않아 실시간 통신이 불가능했던 옛날에는 저렇게 정보 전달 속도의 차이를 이용한 기습이 가능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지간한 마법사라면 마탑을 통해 정보를 전할 수 있는 마법의 전성시대다.
"우리 바실리 왕국도 그렇지만, 현재 대륙의 모든 국가는 산맥이나 황야 같은 험준한 지형에도 정규 마법사와 소규모 부대를 상주시키고 있습니다. 예전처럼 이쪽이 산맥을 넘는다는 소식이 적측에 알려지기도 전에 기습전을 할 수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럼 그 마법사와 소규모 부대를 연락 전에 해치워 버리면 될 것 아닌가?"
"예전처럼 전령에 의한 소식 전달 체제라면 그게 되지요. 부대 주둔지를 몰래 접근해 포위해 버리면 전령이 빠져나오지 못할 테니까요. 전서구도 모두 사냥해 버리면 되고."
참모가 피곤하다는 듯 설명을 이었다.
"그렇지만 마법사가 마탑에 수정구 통신을 보내는 걸 막을 방법은 없습니다. 있다면 아예 주둔지 주변의 마나 흐름을 통째로 헝클어 재밍 신호를 보내는 것뿐인데, 그게 가능하면 이미 대마법사입니다. 대마법사가 과연 그런 임무를 맡으려 할까요? 사령관 각하의 말씀은 오러 유저만 동원해서 기습전을 벌이자는 소리나 다름없는데, 그 정도 소규모 정예면 굳이 산맥을 넘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얼굴 가리고 상인들 틈에 섞여 국경 넘어 버리면 되는데 말입니다."
산맥을 넘은 기습전은, 상대가 대비할 시간적 여유를 줘 버리면 끝장이다. 만약 정보가 미리 알려진다면 상대는 미리 산맥 기슭에 군대를 옮겨 놓고 산맥 넘느라 지칠 대로 지친 병력을 쉽사리 학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군. 요새 저런 전술이 나오지 않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 이건가?"
에그라드 경은 분명 전략, 전술에 문외한이었고 공명심도 강했지만 그렇다고 어리석은 이는 아니었다.
따박따박 말대꾸하는 부관이 괘씸하긴 했지만 그의 주장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아쉬워하며 바로 자신의 기책(?)을 접었다.
그러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음, 그럼 현 시대에서는 산맥을 통한 기습전은 절대 먹히지 않는가, 부관?"
"그렇다고 봐야겠지요."
부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따지자면 한 가지 경우는 있겠습니다. 원래부터 산맥에 살아 지형에 익숙한 산악 민족이 군대를 꾸려서 평지와 다름없는 속도로 산맥을 통해 진군한다면, 저 기책도 먹히겠지요. 산맥에서 시간을 잡아먹지 않는다면 군대가 이동할 틈을 주기도 전에 수도에 타격을 가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자 에그라드 경이 헛웃음을 지었다.
"몇십 명도 잘 안 모이는 산악 민족이 군대를 꾸린다? 거기에 산맥에서 평지를 달리는 말과 같은 속도로 진군해야 한다? 한마디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이거군?"
"그렇지요."
"알아들었다, 아쉬르 경."
말고삐를 잡아채며 에그라드 경이 활기차게 말했다.
"괜찮다, 그것 외에도 몇 가지 생각해 둔 것이 있으니! 그 기책들은 안타레스 놈들을 맞이해 천천히 풀어 보도록 하지!"
아무래도 에그라드 경은 '역사에 남을 명장'의 꿈을 포기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의기양양한 에그라드 경을 향해 부관은 불안한 시선을 보냈다.
'아니, 그냥 참모부가 정한대로 작전 수행하셨으면 좋겠는데 말입니다....'
새삼 바슈탈론 제국이 부러워지는 아쉬르 경이었다.
오랜 세월 체계가 잡힌 바슈탈론 제국군은 설사 오러 유저라 한들 바로 군대의 지휘를 맡기지 않았다.
제국은 적재적소에 인재를 배분하는 것을 무엇보다 미덕으로 삼는다.
군대의 지휘는 인정받은 베테랑 지휘관이 참모부와 상의해서 결정하며, 설사 오러 유저라도 전시만큼은 그 사령관의 명령에는 복종하는 것이 제국의 분위기였다. 실제로 타한 요새를 공략한 제국군 제3대대도 키린트 경을 비롯, 강력한 오러 유저가 셋이나 있지만 지휘관은 지맨 사령관이지 않았는가?
황태자 길리우스가 제국군 총사령관으로 역임한 것도 그가 단순히 황태자이기 때문이 아니다. 길리우스는 황태자이지만 이미 제국의 유수한 전략, 전술가에게 사사했고 그 뛰어남을 인정받은 후였다.
만약 그에게 지휘관의 재능이 없었다면 아무리 황태자라지만 황제는 결코 지휘봉을 건네지 않았을 것이고, 또 황태자도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반면 바실리 왕국군의 지휘 체계는 철저히 혈통과 가문에 따라 이루어져 있었다. 바실리의 참모부 역시 유능한 인재들이 잔뜩 모여 있었지만 최종 결정은 어디까지나 총사령관 에그라드 경이나 전통 깊은 대귀족 출신의 부대 사령관이 맡는 것이다.
이래서야 사령관이 잠깐 흥분해 판단력이 흐려지면 이길 전쟁도 지는 경우가 생긴다.
부관, 아쉬르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조국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역시 제국은 제국이야. 칭제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지? 우리나라 국왕처럼 괴상한 이유로 전쟁 일으키지도 않고 말이야.'
무인으로서 명예를 높일 무대가 마련된 것은 물론 달갑다. 하지만 이 전쟁의 이유는 솔직히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다.
제국의 참전 명분은 얼마나 그럴듯한가?
무려 신의 뜻에 따라 행하는 신성한 이유가 아닌가?
그에 비해 바실리 왕국은....
'세상에, 자국의 오러 유저를 죽였다고 전쟁을 일으키다니?'
그것도 저쪽이 먼저 손쓴 것이 아니라 이쪽이 덤벼 놓고 반격받아 죽은 것 아닌가?
현 바실리 국왕이 상당히 치졸한 성격이란 것은 흘러 들어 알고 있었지만, 국민 된 입장에서 솔직히 부끄러운 이유가 아닐 수 없다.
'도대체 신하들은 뭐 하는 거야? 폐하 좀 안 말리고?'
아쉬르는 모르고 있었지만, 바실리 왕국의 신하들은 국왕의 저 치졸한 전쟁 선언을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적극 동조했다.
신하 전원이 치졸하고 치사한 성품이어서는 물론 아니었다. 그랬으면 나라가 제대로 유지되지도 않았겠지. 한 나라의 국왕이 길길이 날뛸 수는 있겠지만, 그 신하 모두가 감정적으로 동조할 수는 없는 것이다.
비록 명분은 저런 것이지만 실상 바실리 왕국의 이 정벌에는 진정한 의미가 있었다.
안타레스 공국의 급성장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안타레스 공국은 크로방스와 바실리에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 그리고 크로방스와 상당히 끈끈하게 맺어져 있는 사이다.
처음에는 신흥 국가가 커져 봤자지, 하고 신경도 안 썼는데 고작 몇 년 사이에 무시무시하게 성장을 해 버렸다. 역사적으로 볼 때 지나치게 강해진 국가가 옆 나라 그냥 내버려 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한 다리 건너 불구경 중인 다른 나라들과 달리 바실리에게는 발등에 떨어진 불인 셈이다.
또, 레펜하르트의 출신도 문제가 되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바실리 왕국 출신이 세운 나라니만큼 오히려 친근감을 가질 법도 하겠다.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보통 사람일 경우 이야기다.
짐 언브레이커블이라면 남의 말 안 듣기로 대륙 제일, 하늘 아래 저 혼자 잘났다며 천상천하 근육 독존을 외치는 괴상망측한 무문.
지상 최강의 마초가 나라를 세웠는데 그 나라가 온화하고 평화로운 성향일 것이라 어찌 기대할 수 있을까? 옆 나라 된 입장에서 심히 불안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역대 권왕 치고 고향 신경 쓰는 놈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심지어 전전대 권왕이었던 라스탈은 라스틸 공국 출신 주제에 당시 라스틸 공왕의 목을 부담 없이 분질렀던 무뢰한이었다. (무려 라스탈이란 이름도 부모가 조국에 충성하라며 국명 따서 지어 준 이름이었는데!)
감정과 상황이 결합되니 바실리의 신하들 모두가 정벌을 찬성했다. 길길이 날뛰던 바실리 국왕이야 웬일로 이번엔 신하들이 모두 자기 말에 찬성하니 좋아라 할 뿐이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저런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앞날을 위해서라도 이번 전쟁은 결코 패배해서는 안 된다."
백마를 몰며 에그라드 경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아쉬르야 저기까지 생각지 못했지만, 에그라드 경은 저 정도는 충분히 짐작했다. 그는 비록 전략, 전술에는 약하지만 타고난 귀족답게 오히려 저런 정치적 흐름은 쉽사리 파악하고 있었다.
말을 몰다 말고 에그라드 경이 문득 물었다.
"엘드릴 가드는 얼마나 남았는가?"
아쉬르 경이 잽싸게 대답했다.
"앞으로 사흘 거리입니다, 사령관 각하."
오랜 세월 갈고닦은 크로방스 서부 국경 방어진과 달리 안타레스 공국의 남부 전선은 조촐했다. 재쿼드 평야의 끝자락, 테르마니아 관도와 연결되는 좁은 협곡에 세워진 요새, 엘드릴 가드가 전부다. 국가의 연륜이 적다 보니 그 이상은 무리였다.
엘드릴 가드를 부수게 되면 그 이후에는 가로막는 것이 없다. 바로 수도, 아라난 그라드까지 진군할 수 있다.
그런 만큼 안타레스 공국의 총력을 기울여 세운 강력무비한 요새였지만....
"엘드릴 가드라니, 이름 한번 거창하기도 하지."
요새의 명칭을 떠올리며 에그라드 경은 비웃음을 흘렸다. 진금 엘드릴, 지상 최강의 금속 이름을 요새에 붙이다니? 대륙 유수의, 철통같은 방어를 자랑하는 역사 깊은 요새들도 감히 하지 않는 짓이다.
"신흥 국가답게 패기만 넘치는 거죠."
"흥, 패기만으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음을 보여 주마, 안타레스! 감히 바실리를 상대로 이런 무모한 짓을 하다니."
에그라드 경이 문득 눈동자에 분한 빛을 띠었다.
그들은 이미 안타레스의 강력한 전력 대부분이 크로방스 서부 전선으로 차출되었음을 알고 있었다. 자신들이 진군함을 알면서도 저런 짓을 한다는 것은 바실리 왕국을 심히 무시하는 처사가 아니겠는가?
자신만만하게 에그라드 경이 중얼거렸다.
"과연 오만한 짐 언브레이커블. 권왕 레펜하르트여, 바실리 왕국의 힘을 보여주겠다!"
☆ ☆ ☆
제국보다 하루 늦게 안타레스의 국경을 넘은 바실리 연합군은, 재쿼드 평야 끝자락에서 부대를 셋으로 나누었다.
일찌감치 요충지를 선점하고 요새끼리 강력한 연대를 꾸린 크로방스 서부 국경선과 달리 아직 역사가 짧은 안타레스 남부 국경은 그렇게까지 완벽하지 않다.
엘드릴 가드는 분명 수도 아라난 그라드의 관문이라 불리는 중요한 요새고, 그곳을 뚫리게 될 경우 바로 왕도까지 진격이 가능하다. 하지만 크로방스 서부 국경처럼 돌아갈 길이 없는 것도 아닌 것이다.
엘드릴 가드가 위치한 협곡 좌우는 높은 고원 지대, 군대가 진격하기 쉽지 않은 지형이지만 돌아서 못 갈 정도로 험준하지도 않았다. 기동력이 뛰어난 정예로 구성된 부대라면 엘드릴 가드의 손이 닿지 않는 범위에서 크게 돌아 수도 정복을 도모할 수 있다.
그래서 바실리 연합군은 사만 오천의 정병으로 엘드릴 가드를 향해 진군하는 한편 일만의 신성군을 요새 서쪽 고원으로, 오천의 세이어 성기사단에 오천의 보병을 더해 동쪽 고원으로 보냈다. 어차피 연합군, 지휘 계통이 통일되지 않아 함께 싸워 봤자 손발이 맞지도 않을 테니 이쪽이 훨씬 각 부대의 힘을 극대화할 수 있는 포진이었다.
엘드릴 가드로부터 60여 킬로미터 떨어진 한 고원 지대. 사천 명 정도의 인간과 이종족 혼성 병력이 고원 입구에 포진한 채 다가오는 기마부대의 흙먼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휘날리는 안타레스의 깃발 아래, 아스레일 경이 적군을 보며 중얼거렸다.
"과연, 카를 각하의 예측대로 신성군이 이쪽으로 향했군."
적이 세 부대로 갈라질 것이라는 것, 그리고 그 구성원이 바실리 본진과 신성군, 성기사단으로 나뉠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예측이다. 너무 뻔한 이야기니까. 군사학을 겉핥기로 배운 아스레일조차도 저 정도는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신성군이 이 서쪽 고원으로 향하고, 성기사단이 동쪽으로 향할 줄 알았을까?
'설마 반반 확률로 찍으신 건 아니겠지?'
잠깐 딴생각을 하다 아스레일은 스스로가 어이없어 피식 웃었다.
카를은 정확하게 신성군의 성향과 병력에 맞춰 이쪽에 군대를 보냈다. 세이어의 성기사단 역시 마찬가지, 만약 대충 찍은 것이었다면 이토록 확신을 담아 부대 운용을 하진 않았겠지.
'대체 어떻게 아신 걸까?'
☆ ☆ ☆
국경이 침공당하기 며칠 전, 아라난 그라드의 황성 가이라크.
레펜하르트는 아스레일과 같은 의문을 카일에게 던지고 있었다.
"대체 신성군이 동쪽으로 향할 것이라는 거요? 솔직히 어느 부대가 그쪽으로 향해도 별 차이 없어 보였는데? 군사학을 깊이 공부하면 그런 것도 보이나?"
카를이 고개를 저었다.
"군사학에 저런 게 있을 리가 있습니까? 공왕님 말씀대로 군사학적으로 볼 땐 둘 다 반반 확률이지요."
"그럼?"
"제가 신경 쓴 쪽은 전략적인 이치가 아닙니다. 각 부대 지휘관의 발언력 쪽이지요."
바실리 연합군을 담당하는 세 축, 바실리 본군의 에그라드 경과 신성군의 이라나드 공작, 그리고 성기사단의 크리스틴 경은 공식적으로는 동등한 지위다. 지휘 계통상으로 저 셋은 동맹 관계일 뿐이며 상하 관계가 성립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 봤자 살아온 세월이 다르고 지닌 경험, 나이가 다른데 상하 관계가 성립되지 않을 리 있겠습니까?"
카를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비웃듯 말했다.
"일단, 저 셋 중 가장 잘나가는 양반은 누가 뭐래도 이라나드 공작입니다. 에그라드 경이 아무리 바실리에서 큰소리쳐 봤자 왕족도 아닌 방계 귀족, 오러 유저가 되어 큰소리치긴 하지만 가문 자체는 그리 볼 것이 없습니다."
잠시 숨을 고른 뒤 말을 잇는다.
"크리스틴 경은 더더욱 그렇지요. 덩치만 컸지 이제 겨우 20대 후반의 여인, 발언력이 아무래도 약하지요. 사실 명성이나 실력이나 이라나드 공작은 고사하고 신성군 부사령관 유서스 경보다도 밑이니까요."
카를이 지도를 가리켰다.
"현재 아라난 그라드를 도모하기 가장 좋은 위치는 엘드릴 가드 동쪽으로 우회해 프란트 고원을 경유하는 것입니다. 잘만 된다면 최단 시간에 아라난 그라드에 도착할 수 있지요. 반면 엘드릴 가드 서쪽은 라키드 산맥의 지류가 중간에 뻗어 있어 아무래도 진군이 느릴 수밖에 없습니다."
레펜하르트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래서?"
"그러니까, 이쪽 진군로를 차지하는 부대가 제일 공을 세울 확률이 높다, 이 말씀입니다. 아라난 그라드에 첫 입성하는 부대라면 그 영광 역시 이 전쟁에서 제일 빛날 테니까요."
"과연... 공적을 탐하는 지휘관이라면 모두 이쪽 진군로를 택하고 싶어 할 것이라 이거군?"
"그렇습니다."
카를은 빙그레 웃었다.
"들은 대로라면 이라나드 공작은 그리 공적에 연연하지 않는 성품,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그에게 선택지가 없습니다. 이라나드 공작의 휘하에 있는 일만의 신성군은 원래 그의 부하가 아니라 대륙 각지에서 모인 기사들입니다. 지휘해야 하는 공작 입장에서는 저들에게 전장의 명예를 안겨 줄 의무가 있으니, 공적을 탐하지 않을 수 없지요."
"크리스틴 경도 마찬가지일 테고?"
"네, 아마 에그라드 경도 내심 엘드릴 요새 공략은 수하에게 맡기고 별동대를 꾸려 동쪽 진군로를 택하고 싶었을 겁니다. 요새 공략은 굳이 그가 없어도 가능한 일이니."
이는 실제로 군사 회의 당시 에그라드 경과 이라나드 공작, 크리스틴 경 사이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셋 모두 동부 진군로로 향하고 싶어 했고, 또 자신이 그곳으로 향하겠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머나먼 아라난 그라드에 앉아, 카를은 마치 눈으로 보기라도 한 것처럼 바실리 연합군 내의 속사정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모두가 원하는 것이 같으면, 결국 발언력 센 쪽이 이기기 마련이지요."
이해한 레펜하르트가 너털웃음을 흘렸다.
"쉽게 말해서, 남은 두 사람은 짬밥에서 밀린다 이거지?"
"속된 말로 표현하면 그거죠, 뭐."
고개를 주억거리던 레펜하르트가 문득 물었다.
"어, 그럼 그냥 요새 무시하고 전부 동쪽 우회로로 향하는 것 아닌가, 혹시? 이야기 듣고 보니 그쪽이 제일 좋아 보이는데."
"그건 아닙니다. 동쪽 우회로가 가치가 생기는 것은 어디까지나 엘드릴 요새에 안타레스의 본군이 위치하고, 또 아라난 그라드 방비를 위해 라키드 산맥으로도 군대를 보낼 때의 이야기입니다. 지금 바실리 연합군은 매가 양 날개를 펼치고 부리로 목표를 쪼아 대는 형국, 그중 오른 날개가 가장 강하다고 해서 몸통과 왼 날개 없이 매가 날 수 있겠습니까?"
마치 학생에게 설명하듯, 카를이 차분히 말을 이었다.
"일단 이라나드 공작이 동쪽 우회로로 향한 이상 에그라드 경과 크리스틴 경은 다른 쪽 포진을 차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엘드릴 요새의 중요성을 생각할 때 그곳에 오러 유저급이 없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요. 상황이 저렇게 되면 저들은 저리 움직일 수밖에 없는 겁니다. 뭐, 정말 레펜하르트 님 말씀대로 움직여 주는 바보들이라면 이 전쟁, 고생도 안 하겠습니다만 그렇게까지는 기대할 수 없지요?"
"뭔가 복잡하구만."
레펜하르트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차라리 마법이 쉽지, 저런 걸 죄다 신경 쓰면서 어떻게 사는지 모르겠네?'
카를이 별것 아니란 듯 어깨를 으쓱였다.
"재차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전쟁은 사람이 하는 것이니까요. 사람 자체가 복잡한 존재인데, 그 사람이 하는 전쟁이 복잡하지 않을 리 있겠습니까?"
2
신의 뜻에 따라, 대륙 각지에서 신성한 의무를 다하기 위해 모인 일만의 명예로운 기사들.
그들 앞에 서서 중후한 인상의 중년 기사가 검을 뽑아 들었다.
"위대한 세이어의 용사들이여!"
화려한 은빛 갑옷이 햇살을 받아 찬란하게 빛난다. 눈처럼 새하얀 백마 위에서 중년 기사, 이라나드 공작은 찬란한 블레이드 오러를 뿜어냈다. 보랏빛 검광이 기둥처럼 솟구쳐 모인 모든 기사들의 시야를 밝혔다.
"간악한 이단자, 노예로 지음받은 비천한 것들이 감히 그분의 뜻을 거역했도다!"
말을 몰며 진열 앞을 차례로 이동한다. 그때마다 모인 기사들의 눈빛에 투지가 피어오른다. 이라나드 공작이 쩌렁쩌렁한 외침을 터트렸다.
"그분의 종으로서 어찌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렁찬 함성이 터졌다.
"세이어여!"
"세이어를 위하여!"
"그분을 위해 검을 들겠소!"
말들이 투레질을 하며 전의를 불사른다. 비록 대륙 각지에서 모인, 저마다 제각각의 개성을 지닌 기사며 기사단들이지만 지금 이순간만은 모두 한마음 한뜻이 되어 하나로 뭉친다.
세이어!
세이어를 위하여!
☆ ☆ ☆
"흥, 세이어 따위야 내 알 바 아니지."
아군 진지의 분위기를 살피던 황금빛 갑옷의 기사가 나직하게 투덜거렸다. 감히 대놓고 할 말이 아닌지라 입 속으로 웅얼거리는 수준이지만, 어쨌거나 그가 딱히 불타는 신앙심 때문에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님은 명백했다.
전혀 세이어에 대한 신앙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신성군 부사령관의 지위를 차지한 이 기사, 그라임의 유서스 경을 향해 부관이 말을 건넸다.
"심기가 불편해 보이십니다, 단장님."
부관은 왜 유서스가 저런 표정을 짓는지 잘 알고 있었다.
"빌어먹을 러스 자식...."
적진을 보며 유서스는 이를 바득 갈았다.
그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존재를 용납할 수 없는 자신의 이복동생, 사이러스를 해치우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은의 현자에게 협력했고, 가문을 떠나 테스론을 따르며 대륙을 떠돌았다.
하지만 결과는 영 신통치 않았다.
기껏 새로운 힘을 얻어 봤자 러스에게 비참하게 당하기만 했다.
기껏 믿었던 테스론은 권왕 레펜하르트의 손에 죽어 버렸다.
도저히 일대일, 정예들끼리의 전투로는 러스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만을 확인했을 뿐이다.
그래서 기꺼이 성전에 참가했다. 전장이라면, 군대와 군대가 붙는 전쟁터라면 러스를 이길 자신이 있었다. 검사라면 모를까, 지휘관으로서는 분명 그가 러스보다 우위에 있을 것이 확실하기에.
그런데, 막상 와 보니 러스는 상대측에 있지도 않은 것이다!
듣자 하니 바슈탈론 제국과 상대하기 위해 크로방스 쪽으로 가 버렸다 한다. 기껏 이번 기회를 기다린 유서스에겐 실로 분통 터지는 일이었다.
이해한다는 듯 부관이 유서스를 달랬다.
"진정하십시오. 저희도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그 반역자에게 테네스의 천벌을 가할 기회를 놓치다니."
유서스를 따르는 테네스 기사단 또한 이 기회에 가문을 배신한 이를 벌할 기회를 놓친 걸 아쉬워했다. 이미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강자가 된 러스를 상대로 참 속 편하게도 말하고 있다 하겠다. 여전히 이들에게 러스는 배신자, 반역자, 그리고 가문의 천덕꾸러기일 뿐인 것이다.
다른 기사도 나서서 유서스를 위로했다.
"러스 본인을 벌하지 못함은 아쉬우나, 안타레스 공왕 역시 테네스 가문에 죄를 지은 몸. 안타레스가 무너지는 것 역시 배신자에 대한 벌이 될 것입니다."
배신자 러스만큼이나 테네스 기사단은 권왕 레펜하르트도 증오하고 있었다.
레펜하르트가 권왕으로 이름을 날린 시초는 바로 황금기사 유서스의 패배 덕이었다. 기사의 명예를 걸고 복수를 달성해야 할 상대, 하물며 그는 배신자 러스를 거두어 자신의 심복으로 삼아 버렸다.
테네스 가문으로서는 명예가 땅에 떨어지는 사건인 것이다.
수하들의 위로에 유서스의 안색이 조금 밝아졌다.
"그렇지. 안타레스 공국이 무너지면 그 배신자도 갈 곳이 없을 터, 그때 단죄해도 늦지 않다."
잡념을 떨치고 유서스는 눈앞의 적에 집중했다. 고원 위쪽에 포진하고 있는, 러스만큼이나 증오스러운 안타레스의 이종족들을 향해.
마검 엘드란을 뽑아 들며 유서스가 투지를 불태웠다.
"오늘은 저들을 벌할 때로다!"
☆ ☆ ☆
이라나드 공작이 신성군의 사기를 드높이며 투기의 외침을 터트리는 바로 그때.
안타레스군은 진중한 태도로 지휘관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중이었다.
"안타레스의 용사들이여!"
이백의 안타레스 기사단, 그리고 공국 각지에서 모인 구백의 인간 경장기병들.
이들은 지금 굳은 얼굴로 창칼을 쥔 손에 힘을 주고 있었다.
눈앞의 신성군, 일만 병력은 실로 거대해 보였다. 하나하나가 이름난 기사단이며 강력한 무장과 갑주를 걸친 이들, 그에 비해 이쪽은 안타레스 기사단과 경장기병 모두가 가죽과 사슬을 섞어 입은 가벼운 차림이다.
병사들을 향해 아스레일 경이 질문을 던졌다.
"저들이 두려운가?"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딱딱하게 굳은 병사들의 표정은 대답을 한 것이나 다름없다.
아스레일 경이 문득 웃었다.
"나도 두렵다."
웃으며 그가 신성군 쪽에 턱짓을 했다.
"저들의 갑옷은 우리보다 두껍고, 저들의 숫자는 우리보다 월등히 많다. 저들의 전투 경험 역시 우리보다 월등히 높겠지!"
기병들이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왜 전투 직전에 지휘관이 힘 빠지는 소리를 한다냐?
"하지만 저 두꺼운 갑옷이 우리 갑옷보다 튼튼한 것은 아니다!"
아스레일이 망토를 걷었다. 경장기병과 똑같은 갑옷이 드러났다.
"믿어라! 그대들의 갑옷은 쓸데없이 무겁기만 한 저들의 갑옷에 비할 것이 아니다!"
아스레일이 부관에게 눈짓을 보냈다. 부관이 석궁을 준비하더니, 이내 아스레일에게 쏘았다. 병사들이 흠칫하던 찰나였다.
티잉!
놀랍게도 석궁의 화살이 가죽과 사슬을 엮은 아스레일의 가슴 갑옷을 뚫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자랑스레 아스레일이 주먹을 들어 올렸다.
"인간의 손으론 결코 이런 갑옷을 만들지 못한다! 우리는 저들과 마찬가지로 튼튼하며, 또 저들보다 몇 배나 가볍고 빠른 것이다!"
현재 그들이 입고 있는 경장갑은 일반적인 갑주가 아니었다. 바로 오크와 드워프의 기술력이 총동원되어 제작된, 새로운 형태의 갑주였다.
오크의 가죽 갑옷은 질기기 이를 데 없어 어지간한 강궁으로도 쉽사리 뚫리지 않는다. 하지만 베기 공격에는 가죽인 이상 취약할 수밖에 없다.
드워프의 사슬 갑옷은 그 강도가 인간의 것과 비교가 안 되어, 어지간한 명검으로도 썰리지 않는다. 하지만 사슬인 이상 찌르기에는 취약할 수밖에 없다.
두 종족이 함께 어울리게 되며, 드워프 대장장이와 오크 무기아비는 서로 기술 교류를 나누었다. 장인 정신은 종족조차도 초월하는 것, 두 종족의 명장들은 새로운 기술 앞에 기꺼이 손을 합쳤다.
그래서 나온 것이 가볍고 튼튼하면서도 운신에 전혀 제약이 없는 이 신형 경장 갑주였다.
아스레일의 시위에 기병들의 안색이 밝아졌다.
신성군과 안타레스 기병들의 실력은 확실히 차이가 난다.
그러나 신성군과 안타레스 기병들의 말은 별 차이가 없다.
그렇다면, 보다 가벼운 쪽이 월등한 기동력을 가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병사들의 공포가 점점 사그라졌다.
"어차피 안타레스는 신흥 국가! 고작 생긴 지 몇 년 되지도 않는 나라에 충성심을 다해 목숨을 바치라는 소리 따윈 하지 않는다!"
곧 전투를 앞둔 지휘관 치곤 꽤나 개성 넘치는 연설이라 하겠다. 국가의 녹을 먹는 이가 충성하지 말란 소릴 하다니?
그때 아스레일이 검을 들어 신성군을 가리켰다.
"그대들 모두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겠지? 저놈들에게 우리가 패하면 그땐 우리 친지, 가족이 모두 죽는다!"
병사들의 얼굴에 투지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알겠느냐! 저놈들은 세이어의 광신도다! 우리를 같은 인간으로 보지도 않는다 말이다! 세이어의 법에 따르면 이단자는 죽이고 강간해도 전혀 죄가 아니다! 명심하라! 놈들은 분명 그럴 것이다!"
신흥 국가다 보니 다들 국가에 대한 자부심이나 자긍심은 그리 없는 편이다.
하지만 가족, 친지, 사랑하는 이에 대한 감정은 어느 나라 사람이건 다를 바가 없다.
병사들의 안색에서 공포가 완전히 사라졌다. 아스레일이 검을 뽑아 높게 쳐들었다.
"그대들은 그대의 가족이 그런 꼴을 당하게 두겠는가?"
기병들이 일제히 호응했다.
"결코 아니오!"
"모조리 죽여 버리겠어!"
"안타레스!"
"안타레스를 위하여!"
☆ ☆ ☆
한편, 오크 투사 하다툼은 아스레일의 저 연설을 감명 깊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 씨발, 폼 난다."
오크들에게도 전투에 앞서 일장 연설을 하는 전통은 있다. 특히나 대족장 칼켄은 오크 중에서도 말발이 받쳐 주어, 그의 연설을 들으면 가장 겁쟁이 오크도 광전사처럼 날뛰게 된다는 평을 듣고 있었다.
비록 일족의 족장이긴 하지만, 그리 말발이 없는 편인 하다툼에게는 항상 부러웠던 점이었다.
"에, 나도 저런 거 해 볼까...?"
뻐드렁니를 매만지며 하다툼도 어슬렁어슬렁 오크 전사들 앞으로 다가갔다. 자기도 뭔가 아스레일처럼 폼 나는 연설 하고 환호받고 싶었다.
주먹을 쥔 채 하다툼이 고함을 터트렸다.
"위대한 오크의 전사들이어!"
오크 전사들이 일제히 그를 바라보았다. 하다툼이 머리를 굴렸다.
'자, 일단 시선은 잡았는데....'
역시 안 하던 짓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막상 뭔가 말을 하려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실제로 오크 전사들도 '저 양반, 뭐 잘못 먹었나? 갑자기 왜 저래?'라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어우 씨...."
에라, 더 이상 아무 말도 안 떠오른다.
결국 하다툼은 포기하고 하던 대로 나갔다.
"씨발, 싸우는 데 무슨 이유가 있어? 그냥 싸우는 거지!"
그러더니 대뜸 자신의 애병을 뽑아 들고 전사의 포효를 터트린다.
"크아아아! 가자! 피의 축제다!"
"우와아아아!"
검을 든 채 오크들이 일제히 울부짖었다.
사실 하다툼 본인은 모르고 있었지만, 그의 이 호쾌한 '세 마디 연설'은 대족장 칼켄만큼이나 오크들의 호응을 얻고 있었다. 이 얼마나 단순하면서도 가슴 속의 호기를 부르는 외침이란 말인가?
아스레일이 손을 아래로 내저었다.
"전군 돌격!"
요란한 굉음과 함께, 사천의 기병이 일제히 고원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3
정면 돌격에 나선 사천의 안타레스군, 그들을 상대로 신성군은 중장갑을 두른 기사들을 앞세웠다. 그라임과 할라인, 그리고 테이칸 왕국에서 명성을 떨치는 전통의 기사들이 거창을 내세우며 마주 돌격했다.
기사도 전투의 꽃, 랜스 차징이었다.
"저 어리석은 이단자들에게 본때를 보여 주겠다!"
제일 선두에 선 그라임의 기사, 제폴드 경이 호기로운 고함과 함께 아스레일 경과 격돌했다. 서로 랜스 차징을 하며 스치는 그 순간!
"커억!"
놀랍게도 노련한 제폴드 경이 아직 젊은 아스레일에게 쓰러져 버렸다.
그뿐이 아니었다.
안타레스 기사단 거의 전원이 랜스 차징에서 우위를 차지했다!
보고 있던 이라나드 공작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무슨? 어떻게 저런 경갑주로 저런 안정감이?"
안타레스 기사단의 경장갑은 분명 신성군의 중장갑 못지않은 강도를 자랑하는 제품이다. 하지만 그래도 틀림없는 경장갑, 무게에 있어서는 뒤떨어진다. 동시에 부딪친다면 보다 무거운 쪽이 이기는 것이 세상 이치일진대 어째서?
일제히 낙마하는 신성군 기사단을 지나치며 안타레스 기사단조차 너무 쉬워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 뭐 이래?"
"이거 할 만하네?"
"가볍잖아!"
"뭐야? 이름만 높았지 붙어 보니 별것 아닌데?"
다른 기사단들처럼 안타레스 기사단도 평소 열심히 수행을 쌓았다. 특히 기사도의 꽃이라는 랜스 차징을 열심히 수련했다.
...오크 울프 라이더들이랑.
애당초 체급이 다르고 근력이 다른, 본격적으로 붙으면 열 명이서 한 명 감당하기도 힘든 것이 바로 오크 라이더들이다. 상대적으로 체중도 근력도 심각하게 뒤떨어지는 안타레스 기사단이 오크 라이더를 상대로 랜스 차징을 성공하기 위해서는 보통 솜씨로는 무리였다.
상대의 균형을 일격에 흩을 수 있는, 바늘구멍을 꿰뚫을 정도로 정확 무비한 차징.
몇 배의 체중 차이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흔들림 없는 안정적인 자세.
몇 초 사이의 허점을 정확하게 노릴 수 있는 빈틈없는 안력과 판단력.
이 모든 것이 갖춰져야 겨우 울프 라이더에게 랜스 차징을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타점이 빗나가거나 랜스를 찌르는 타이밍이 어긋나면 바로 울프 라이더는 균형을 회복할 뿐 결코 쓰러지지 않는다.
워낙 가혹한 수행 환경이었다.
항시 괴물들만 상대하던 나날이었다.
괴물들만 상대하다 같은 인간을 만나니, 이건 뭐 수련 기사를 상대하는 기분이다.
타타타탕!
또다시 한 무리 기사단이 안타레스 기사단과 충돌했다.
또다시 신성군 기사단이 일제히 랜스에 부딪혀 낙마해 버렸다.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신성군 진영까지 파고드는 안타레스 기사단의 기세에 이라나드 공작이 혀를 찼다. 오러 유저의 안목으로도 감탄이 나올 만큼 철두철미하게 기본에 충실한 랜스 차징이었다. 저래서야 중장갑을 믿고 있는 신성군 기사들이 상대가 될 리가 없다.
"아니, 저놈들은 밥 먹고 저거만 연습했나...."
반감탄 반황당을 담아 이라나드 공작이 중얼거렸다.
그런데, 본의 아니게 이라나드 공작은 핵심을 꿰뚫은 셈이 되었다.
두 번이나 돌파당하며 안타레스 기사단은 순식간에 신성군 본진까지 도달했다. 속도를 줄이며 물러나려는 안타레스 기사단을 대기하고 있던 신성군 기사들이 뛰쳐나와 포위망을 구축했다.
아무리 돌파력이 강해도 워낙 상대 병력이 많았다. 안타레스 기사들이 뛰쳐나온 신성군 기사들과 뒤섞이며 난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으윽!"
"젠장, 역시 강하군!"
일단 난전이 벌어지자, 랜스 차징에는 달인급 경지를 보이던 안타레스 기사들이 검투에는 그리 신성군을 누르지 못했다. 사방에서 팽팽한 접전이 벌어졌다. 개중에는 밀리는 이들도 상당히 많았다.
상황을 지켜보며 아스레일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크으, 역시 랜스 차징에 비해 다른 쪽은 아직 부실한가? 하긴, 랜스 차징 수행하기만도 벅차 하루가 다 가곤 했으니....'
...정말로 안타레스 기사단은 랜스 차징밖에 연습하지 않았던 것이다.
세상일 모두 장단점이 있다. 가혹한 수행 환경은 거꾸로 말하면 하나 제대로 하기도 벅차다는 의미도 된다.
일단 랜스 차징이라도 우위에 서야 검투를 하건 창술을 익히건 하지? 울프 라이더를 상대하던 안타레스 기사단은 랜스 차징 외 다른 기량까지 키울 만큼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예술적이기까지 한 안타레스 기사단의 랜스 차징에 기겁한 신성군 기사단도, 일단 상대의 검술 솜씨를 보고 나니 도로 기가 살았다. 용맹하게 무기를 휘두르며 맞서기 시작했다.
"뭐야, 이놈들? 발 멈추니까 별것도 아니잖아!"
"모조리 썰어 주마!"
돌진할 때는 대륙 그 누구보다 용맹해 보이던 안타레스 기사단은 일단 적진에 도착하고 나니 도로 평범한 기사단이 되어 사방의 칼질에 허우적대게 되었다.
물론, 카를은 이것까지 예상하고 부대를 꾸렸다. 타이밍 좋게 경장기병이 기사단의 뒤를 따랐다.
"가자! 기사 분들을 도와라!"
안타레스 기사들과 달리 이 경장기병대는 모두 용병이나 수행 중의 검사, 혹은 페틀랜드에서 항복한 유목민 전사들로 이루어져 있다. 거창 돌격에는 전혀 솜씨가 없지만 마상 검술에 있어서는 오히려 안타레스 기사들보다 월등한 솜씨를 지닌 이들이다.
챙챙챙!
전장 곳곳에서 칼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 틈에 안타레스 기사단이 적진에서 이탈했다. 신성군 기사들도 열심히 쫓아갔지만 애초에 입은 갑옷의 무게가 너무 다르다. 말을 아무리 달려도 점점 거리가 벌어진다.
그렇게 다시 거리를 벌린 안타레스 기사단이 크게 회선하며 도로 돌진을 시작했다.
일단 거리가 벌어지면 다시 랜스 차징을 쓸 수 있다!
"크어억!"
"크아악!"
랜스 차징'만' 달인인 안타레스 기사단의 거창 돌격에 뒤쫓던 신성군 기사들 수십이 목숨을 잃었다. 사방에서 혈화가 피고 혈향이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적들을 쓰러뜨리고 스쳐 지나가며 안타레스 기사들이 깨달음을 얻은 표정을 지었다.
"크, 이래서 가벼운 갑옷 입힌 거였군."
"우린 그냥 이 짓이나 계속해야겠는데?"
그래, 어차피 우린 검술은 별로다.
그러니 닥치고 랜스 차징!
치고 빠지기를 계속하며 안타레스 기사단은 계속 신성군 기사 진을 유린해 댔다. 살짝 편중된 감은 있지만, 어쨌거나 드디어 일국을 대표하는 기사단다운 무위를 떨치는 안타레스 기사단이었다.
☆ ☆ ☆
"크윽, 저것들이 저런 실력을 보일 줄이야."
별로 전력으로 여기지도 않았던 안타레스 기사단의 의외의 활약에 이라나드 공작은 당황했다. 하지만 그도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무인 중의 무인이다. 잽싸게 대처법을 떠올려 대응했다.
"카밀, 도플러, 막시밀리안의 기사들이여! 그대들의 방패가 필요하오!"
호령과 함께 이백 명 정도로 이루어진 기사단 셋이 안타레스의 거창 돌격 앞을 가로막았다. 모두 경험 많은 기사답게 함축적인 이라나드 공작의 명을 바로 이해하고 실행에 옮겼다.
타타탕!
쇳소리가 연거푸 울리며 안타레스 기사단이 신성군의 세 기사단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무도 쓰러지지 않고 말을 돌려 다시 이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안타레스 기사들 사이에서 당혹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윽?"
"이런 식으로 나오다니!"
"기사 주제에 이런 부끄러운 짓을!"
지금 카밀과 도플러, 막시밀리안의 기사들은 같이 랜스 차징을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타워 실드로 상대의 공격을 흘리는 데만 집중한 것이다.
아무리 상대의 공세가 바늘처럼 예리하더라도, 거대한 방패로 못 막을 정도로 신성군 기사들의 기량이 낮지는 않다. 상대가 공격을 포기하고 이런 식으로 방어만 굳히면 예술적인 안타레스 기사단의 랜스 차징도 무용이 되어 버린다.
그렇게 간신히 안타레스 기사단의 발을 묶은 뒤, 이라나드 공작은 진정한 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차피 진짜 위험한 놈들은 저놈들이지.'
오크 오러 유저 하다툼이 이끄는 회색 솔개 부족의 울프 라이더 300기와 흙 멧돼지 부족의 보어 라이더 200기, 그 외에 각 오크 부족이 선별한 다양한 오크 라이더 1천 기가 신성군 좌우를 매섭게 몰아친다.
"위대한 조상님들께 피의 제물을!"
"피의 제물을 바쳐라!"
그 뒤를 천오백 명의 오크 보병이 맹렬히 뒤쫓고 있었다.
모두 아직 전사의 칭호를 받지 못한 오크 부족원들, 하지만 자유로운 오크 부족에서는 전사가 아닌 이들도 전투의 베테랑들이다. 성인이 되자마자 오크 스카우터가 되어 황야를 떠돌며 전사의 꿈을 키워 온 이들이니까.
"심장이 터질 때까지 싸워라!"
"심장이 터질 때까지 싸워라!"
"조상님이 우리를 가호하리라!"
비록 두 발로 뛰고 있지만, 거친 황야에서 달리기라면 이력이 난 오크들이다. 인간 보병과는 비교가 안 되는 스피드로 신성군을 향해 돌진해 갔다.
선두의 하다툼이 호쾌하게 자신의 양날 도끼를 허공으로 날렸다.
"크하하하! 가라, 아크라!"
뒤따르던 정규 오크 라이더들도 저마다 애병을 허공에 날리며 공세를 취했다. 귀신 붙은 칼이라며 대륙 전역에 그 흉명이 자자한 오크들의 스피리츠 웨폰이었다.
휘이이익!
멋대로 허공을 나부끼는 수백 자루의 검 아래, 흉폭하게 돌진하는 오크 라이더의 섬뜩한 광경.
그 가공할 모습 앞에 이라나드 공작은 오히려 눈을 빛냈다. 크로방스 내전에서 이름난 기사들조차 맥없이 당하고 말았던, 익히 들어온 안타레스 오크의 공격 형태였다.
'하지만 더 이상은 통하지 않는다!'
기다렸다는 듯 이라나드 공작이 반격에 나섰다.
"가라! 세이어의 용사들아! 준비했던 대로 저 천한 것들에게 인류의 힘을 보여 주어라!"
신성군 본진 일부가 갈라지며, 준비된 한 무리의 부대가 출격했다. 전원 두꺼운 중갑으로 무장한 기사들이었다.
천에 가까운 그 병력을 보며 하다툼이 코웃음을 쳤다.
"겁쟁이처럼 철옷 속에 숨어서 진정한 전사를 당해 낼 수 있겠느냐!"
하다툼의 도끼, 아크라가 허공을 날아 중갑 기사들을 노렸다.
그 순간이었다.
"허업!"
돌진하던 기사들이 모두 정면에 두꺼운 방패를 들더니 날아온 무기들을 강렬하게 쳐 냈다.
타앙!
방패 치기에 적중한 아크라가 허공에서 휘청거리며 잠시 움직임이 느려졌다. 동시에 기사가 방패를 들지 않은 다른 쪽 손으로 갈고리 사슬을 던져 느려진 아크라를 얽맸다.
채애앵!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아크라를 봉쇄한 기사가 손에 든 무거운 방패에 갈고리 사슬 끝을 연결해 바닥에 던졌다. 그 손놀림이 보통 빠른 것이 아니어, 한두 번 연습한 솜씨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갈고리 사슬과 연결된 육중한 방패가 전장의 진창 위에 푸욱 처박힌다. 방패의 무게에 얽매여 자유롭게 허공을 날던 아크라가 발이 묶여 버렸다!
"윽!"
하다툼은 당황했다. 그의 애병뿐 아니라 오크 라이더들의 스피리츠 웨폰 대부분이 똑같은 수법에 당하고 있었다.
이제 오크들의 무기는 더 이상 자유롭게 허공을 나는 귀신 붙은 칼이 아니다. 그저 사슬로 인해 땅에 얽매인 떠 있는 무기일 뿐!
기사들이 통쾌한 듯 외쳤다.
"보았느냐, 더러운 오크들아!"
"그따위 조잡한 수가 언제까지 통할 줄 알았느냐!"
생전 처음 당해 본 수법에 오크 라이더들 사이에 동요가 일었다. 방패를 버리고 가벼워진 기사들이 검을 들고 맹렬히 그들을 덮쳐 갔다.
"죽여주마!"
무기를 자유롭게 허공에서 조종하는 오크들만의 비기, 스피리츠 웨폰.
이는 분명 강력하기 그지없는 능력이지만 동시에 약점도 있다.
지금처럼 날린 무기가 제압당하면 오크들은 전부 맨손이 되어 버린다!
"크아아악!"
"커억!"
맨손 무술에도 소양이 깊은 오크 전사들이지만 신성군 기사들도 전투로 잔뼈가 굵은 몸, 무기도 없이 대항할 만큼 만만한 적은 결코 아니다. 무기를 봉인당한 오크 라이더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져 가기 시작했다.
"젠장! 와라, 아크라!"
바득바득 이를 갈며 하다툼이 사슬에 묶인 도끼를 향해 손짓했다. 도끼, 아크라의 양날이 황동의 블레이드 오러를 뿜으며 간단히 사슬을 잘라 내고 하다툼의 손아귀로 돌아왔다.
"감히 나의 친우를!"
분노하며 하다툼이 블레이드 오러를 흩뿌렸다. 일격에 세 기사의 몸통이 두 동강 나며 전장에 피를 뿌렸다.
도끼를 회수한 뒤 하다툼은 주위를 살폈다. 그 자신이야 오러 유저라 블레이드 오러로 사슬을 끊고 무기를 되찾을 수 있었지만 다른 오크들에게는 무리인 이야기였다.
밀리는 전황을 보며 하다툼이 난처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우, 재상 말 들을걸."
☆ ☆ ☆
출진에 앞서 카를은 오크의 스피리츠 웨폰 사용을 염려했다.
-스피리츠 웨폰은 강력한 기술이지만 다수의 전장에서는 역시 약점이 뚜렷합니다. 2인 1조로 분담해 무기와 오크 라이더 각자를 상대하는 수법도 있을 수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무기 자체를 봉쇄하는 방법은 그리 어렵지 않아요. 그냥 쇠 그물에 무거운 추 달아서 던져 버리기만 해도 스피리츠 웨폰은 움직임이 극히 제약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카를은 어지간하면 스피리츠 웨폰 없이 싸우길 권장했다.
-어차피 오크 라이더는 무기만 휘둘러도 충분히 강합니다. 굳이 위험 부담을 안을 필요는 없을 것이라 판단됩니다만....
당시 하다툼을 비롯한 오크 족장들은 카를의 말을 한 귀로 흘려 넘겼다.
-크하하! 카를 재상! 우리의 무기는 우리의 수족이자 영혼이라네! 허약한 인간 따위가 어찌 자유로운 영혼을 포박할 수 있을까?
-그럼 만일을 대비해 보조 무기라도 들고 가심이....
-나의 영혼은 하나, 그러므로 나의 무기도 하나뿐이다! 어찌 영혼을 소통한 친우를 배신하고 다른 무기를 등에 짊어질 수 있단 말인가!
오크들의 저 똥고집에 결국 카를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오크 전사의 진정한 강함은 스피리츠 웨폰을 사용하는 전투 스타일에서 나오니, 그것을 봉인하면 강함도 크게 깎인다. 함부로 쓰지 말라고 할 입장도 아니긴 했다.
하여튼, 그런 이유로 카를의 조언을 무시한 채 대뜸 전장에 들어섰는데....
"크윽! 인간 놈들!"
"감히 나의 친우를!"
그 대가가 이것이었다.
물론 오크는 무기가 없다고 그 용맹함이 퇴색하지 않는다. 맨손, 맨주먹으로도 오크 라이더들은 필사적으로 기사들을 상대했다.
하지만 맨주먹으로 창 든 놈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역시나, 돌격의 기세는 꺾인 지 오래고 혼탁한 난전 속에서 점점 오크 라이더의 비명만이 그 수를 더하고 있었다.
보다 못한 경장기병들이 동료 오크 라이더에게 고함도 질러 보았다.
"일단 무기를 회수하시오! 어찌 맨주먹으로 검 쥔 자를 상대하려는 거요?"
문제는 이놈의 오크란 종자들이 일단 전투 모드 들어가면 그저 돌진, 돌격, 용맹하게 다 때려 부수고 나아가는 것밖에 모른다는 점이었다.
무기가 없으면 주먹으로!
주먹이 잘리면 발길질로!
발도 잘리면 몸통 박치기!
이도 저도 없으면 죽어서 유령이 되어 저주라도 퍼부으리라!
이것이 오크 전사들의 미덕이니, 무기가 없다고 눈앞의 적에게 등을 돌릴 리가 없다. 뭐, 덕분에 맨손으로도 용케 기사들을 상대해 크게 전황이 기울지 않았다는 장점도 있긴 했지만 어쨌거나 시간이 지날수록 불리해질 것은 자명했다.
'아으, 미치겠네!'
블레이드 오러를 휘둘러 적진을 누비며 하다툼은 고민에 빠졌다.
그도 경장기병의 말대로 지금은 무기부터 되찾아야 한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동족들이 그럴 리 없다는 것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씨발, 나 같아도 저랬을 테니까!'
지금 하다툼도 애병을 회수했으니 도로 냉정을 되찾은 것이지, 만약 오러 유저가 아니었다면 저들처럼 맨주먹으로 기사들에게 덤볐을 것이다. 원래 오크 전사란 그런 종자들인 것이다.
그때, 구원의 외침이 들려왔다.
"안타레스의 오크들! 뛰어난 용맹을 지닌 형제들이여!"
또 한 차례의 랜스 차징으로 신성군의 좌측을 흩어 놓은 안타레스 기사단, 그 단장인 아스레일이었다.
"그대들의 영혼의 친구가 사슬에 묶여 있소! 이를 구하지 않고 어찌 전사를 자처할 수 있단 말이오?"
말이란 게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같은 말이라도 저렇게 하니 뉘앙스가 바뀌었다. 이미 피가 머리끝까지 오른 오크들이었지만 저 말을 듣고 보니 또 그럴듯했다.
단 하나 밖에 없는 소중한 영혼의 친구가 사슬에 묶여 있는데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과연 어디 있겠는가?
냉정을 되찾았다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냥, 들끓는 투지의 대상이 바뀌었을 뿐이다. 하여튼 단순한 종자들이었다.
"나의 친우여!"
"그 족쇄에서 풀어 주겠다!"
오크 라이더의 움직임이 변했다. 다들 눈앞의 상대 대신 자신의 무기를 회수하기 위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챙! 챙그랑! 차창!
애초에 자물쇠 걸어 잠근 것도 아니고 그냥 사슬에 묶어 방패 매달았을 뿐이다. 스피리츠 웨폰의 움직임과 힘으로는 무리더라도 직접 손으로 들고 흔들면 그리 풀기 어렵지도 않다.
하나 둘 자신의 애병을 되찾고 본격적으로 기사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어, 고맙다, 아스레일 경!"
하다툼이 진심으로 감사를 건넸다. 그 자신도 오크지만, 저런 식으로 동족들을 이끌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정말 천만다행이었다.
쓴웃음을 지으며 아스레일도 먼 거리에서 목례로 답했다.
"오크들과는 워낙 오래 어울렸으니...."
안 그래도 이종족과 자주 어울렸던 아스레일이다. 중간에서 중재자 역할을 한 적도 많다.
특히 기사단장이라는 직책상, 그가 자주 만난 것은 역시 오크였다.
엘프는 아무래도 병력의 질은 높아도 수가 적고, 드워프는 수성 전문이다 보니 기사의 업무와 별로 겹칠 일이 많지 않다. 트롤 주술사들은 허구한 날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해서 아직도 좀 이해하기 힘들고.
기사와 사상도 비슷하고 전투를 숭앙하는 오크야말로 아스레일이 가장 오래 어울린 이종족들이다. 슬슬 저 종자들을 상대하는 수법만큼은 달인의 경지에 오른 아스레일이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전장은 계속 팽팽한 양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다시 무기를 쥔 오크 라이더지만 그렇다고 쉽게 기사들을 베어 넘기지는 못했다. 오크들이 무기를 되찾았다고 기사들이 동요하지도 않았다.
기사들 입장에서는 무기를 회수하고 다시 싸우는 쪽이 오히려 상식이었으니까. 차라리 맨주먹으로 덤빌 때 더 당황했었다.
"크아아아!"
"모가지를 비틀어 조상님께 바치겠다!"
전사의 포효를 터트리며 돌진하는 오크 라이더를 상대로 기사들은 정면으로 부딪히지 않았다. 노련한 기마술로 교묘히 좌우로 갈라지며 검을 휘둘러 오크 라이더의 측면을 노린다. 말의 다리나 보병을 상대하는 방식, 플랭크였다.
전황을 지켜보며 이라나드 공작이 미소를 지었다.
'좋아, 잘되고 있군. 저 무식한 괴물들을 상대로 정면 돌격을 할 필요는 없지.'
안타레스 기사단은 그래도 기사의 소양을 갖추기 위해 오크 라이더 상대로 차징 수행을 쌓았지만, 사실 오크 라이더를 진짜로 이기려면 굳이 무식하게 들이받을 필요는 전혀 없다. 힘도 체급도 압도적으로 우위인 상대로 정면 상대를 할 이유가 뭐가 있는가?
그냥 돌아가서 베면 된다.
이제껏 이 방법을 못 쓴 이유는 검을 허공으로 날리는 오크들의 기술 때문에 선회 도중 반격받았기 때문인데, 이젠 저 수법이 봉쇄된 것이다.
다다다다!
말발굽 소리를 요란하게 울리며 신성군 기사들이 질서 정연하게 오크 라이더의 좌우로 포진했다. 다이어울프가 광포하게 포효하며 말들을 겁줬지만 별로 먹히지 않았다. 이미 신성군은 다이어울프에 대비, 몬스터들을 포획해 마구간 옆에 가둬 놓음으로써 군마에게 맹수의 존재를 익숙하게 한 후였다.
"세이어를 위하여!"
"저 천한 것들을 모조리 베어 버려라!"
인류의 무지로 인해 얻었던 오크 라이더의 이점 대부분이 사라지니 남은 것은 순수한 실력의 승부뿐이다. 그리고 신성군의 기사들은 모두 대륙 곳곳에서 전투와 던전 탐사들을 통해 경험을 쌓은 베테랑들, 결코 오크 전사와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았다.
전황이 전개되며 점점 더 양측의 피해가 커져 갔다. 소중한 동족 전사들이 자꾸 쓰러지는 걸 본 하다툼이 분노로 거대한 함성을 터트렸다.
"으아아아아!"
쩌렁쩌렁한 전투 포효가 파문을 일어 전장을 뒤덮는다. 맹수에게 익숙해진 말들조차 공포로 투레질을 하고 용맹한 기사들이 순간 몸이 떨리며 손이 굳는다.
그렇게 분위기를 바꾸며 하다툼은 도끼를 높이 쳐들었다.
이제까지는 오크 부대를 이끌기 위해 선두에서 싸웠지만 이렇게 된 이상 흐름을 바꿀 필요가 있다. 그리고 오러 유저는 단신으로도 전장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존재!
황동색 블레이드 오러를 전력으로 끌어내며 그가 붉은 눈동자를 붉혔다.
"다 죽여 버리겠다!"
다이어울프를 몰며 하다툼이 단신으로 적진을 가르고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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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의 전장 한쪽에서 황동색 빛이 높이 솟구친다.
이나라드 공작과 함께 본진에서 대기 중이던 부관이 입을 열었다.
"오크 오러 유저가 본격적으로 날뛰기 시작했군요. 어쩌시겠습니까, 각하?"
정석대로라면 여기서 같은 오러 유저, 이라나드 공작이 저 자의 기세를 꺾어 주어야 한다.
"아니면 유서스 경을 투입시키시겠습니까?"
황금기사 유서스 역시 마검사임에도 능히 오러 유저를 상대할 수 있는 강자다.
하지만 이라나드 공작은 두 의견 모두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다른 오러 유저가 또 있을 수 있으니 아직은 함부로 움직일 수 없지."
공작이 문득 차갑게 웃었다.
"그리고 저 어리석은 것들에게, 기사의 힘을 보여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라나드 공작이 손짓하자 푸른 깃발이 올라갔다. 본진이 좌우로 갈라지며 한 무리의 군세가 하다툼을 향해 쏟아져 나왔다.
분명 기사단이었지만, 동시에 일반적인 기사들의 모습과는 다른 이들이었다.
말을 탄 이는 일부뿐이고 일부는 가벼운 경장에 기형의 무기를 든, 신관과 마법사 몇 명까지 대동한 혼성 부대. 이는 전혀 기사답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이 시대의 기사에게 있어서는 지극히 기사다운 모습이었다.
바로 던전 탐사를 하며 강력한 악마나 마물을 상대할 때의 기사단의 모습이다!
"가라! 헤스테리아 기사단!"
☆ ☆ ☆
두꺼운 방패를 든 이들이 말을 몰고 정면으로 하다툼에게 돌진했다.
"흥! 건방진 것들!"
조소하며 하다툼이 크게 오러를 늘려 베었다. 10여 미터 가까이 늘어난 블레이드 오러가 10여 기의 기사들을 동시에 후려쳤다.
바로 그때, 세이어의 신관들이 기도문을 올리며 성광의 빛을 그들에게 쏘았다.
"세이어여, 당신의 종들을 가호하소서!"
성광이 기사들의 방패에 머무르며 블레이드 오러와 충돌했다. 빛이 번쩍이며 방패가 모조리 깨져 나가고 기사들이 일제히 신음을 흘리며 낙마했다.
"크윽!"
"으윽!"
궁극의 파괴의 빛, 블레이드 오러는 아무리 신관의 축복을 받았다 해도 일개 기사가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하다툼은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저것들이?'
일제히 휩쓸어 버리긴 했지만, 손맛이 없었다.
방패는 부술 수 있었지만 저들의 갑옷은 여전히 멀쩡했다.
낙마는 시킬 수 있었지만 저들의 육체는 여전히 멀쩡했다.
떨어지는 순간 절묘하게 낙법으로 몸을 지킨 것이다. 그 신속함은 애초에 이들이 날려 갈 것을 미리 각오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굴러떨어지자마자 바로 일어선 기사들이 등에서 다시 방패를 꺼내 들었다. 아까보다 배나 두꺼워 보이는 방패였다. 선두에 선 방패 기사가 고함을 질렀다.
"2대대, 가라!"
그물과 활 등을 든 기사들이 뛰어와 하다툼의 주위를 감쌌다. 촉에 끈적끈적한 약물이 발린 화살을 쏘아대고 사방에서 쇠그물을 던져 댄다.
"이이익! 이까짓 그물 따위!"
신경질적으로 도끼를 휘두르며 하다툼이 날아오는 쇠그물을 모조리 잘라 냈다. 날아오는 화살들 역시 오러를 각성한 하다툼의 시야를 벗어나진 못했다. 몽땅 허공에서 격추되어 버렸다.
"약한 놈들이 모여 잔재주를 피우는구나!"
호통을 치며 하다툼은 바로 방패 기사들을 향해 돌진했다. 단숨에 저들을 베어 버리고 그 뒤에 있는 귀찮은 것들을 모조리 도륙할 셈이었다.
"타앗!"
전력을 다해 휘두른 블레이드 오러가 방패 기사들을 일제히 후려갈겼다. 그 두꺼운 방패가 단숨에 절반 가까이 파였다. 하지만 부서지지는 않았다.
처음엔 마상에서 써야 했기에 상대적으로 얇고 가벼운 방패, 하지만 지금 든 것은 두 손으로 간신히 드는, 심지어 재질도 그냥 강철이 아닌 진철 아다만티움 합금 방패다.
두께도 재질도 다르니 강도도 차원이 다르다. 거기에 신관들의 가호도 깃들어 있으니, 만물을 베어 버린다는 블레이드 오러조차도 훌륭히 막아 냈다.
"이, 이놈들이!"
당황하며 하다툼이 연신 검광을 뿌려 댔다. 하지만 그리 효과가 없었다.
"제길!"
"버텨라!"
신음을 흘리면서도 기사들은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앞에서 막아 주는 진철의 방패를 도움삼아 계속 공세가 들어온다. 투창이 날아오고 화살이 쏘아지며 갈고리가 발치를 노리고 긴 창이 찔러 든다.
아무리 오러 유저라도 이 모든 공격을 계속 감당할 수는 없다. 답답해진 하다툼이 발을 굴렸다.
'에이, 상대하지 말고 뒷놈들부터 처리하자!'
그렇게 방패 기사들을 뛰어넘으려던 찰라, 허공에 뜬 하다툼을 향해 또 다른 공격이 들어왔다.
"폭염, 떨어져 울부짖는다! 플레임 스크라이크!"
"뇌성 울려 대지를 떨친다! 라이트닝 볼트!"
후위에 선 여섯 명의 마법사들이 일제히 불꽃과 벽력의 마법을 쏘아 하다툼을 노렸다. 오러 가드로 마법을 방어했지만, 덕분에 도로 포위진 안쪽에 갇혀 버렸다.
"흥! 아무리 오러를 써 봤자 오크는 오크!"
"그냥 몬스터일 뿐이다!"
"마물 사냥이라면 이쪽도 이골이 났다고!"
공세를 더욱 매섭게 몰아치며 기사들이 사기가 올라 소리쳐 댔다.
"쉽지 않을 것이다, 오크여."
덫에 걸린 맹수처럼 날뛰는 하다툼을 보며 이라나드 공작은 턱을 매만졌다.
"지금은 던전에서 악마나 마물을 상대하는 식으로 변형되었지만, 저 방식은 원래 평범한 인간이 오러 유저라는 초인과 대항하기 위해 생긴 전법이니까."
☆ ☆ ☆
현 시대의 인간은 분명 오크나 드워프 같은 이종족을 상대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그들이 처음 적이 되었을 때 아무것도 못하고 무지로 인해 패배하기만 했다.
하지만 오러 유저라면 현 시대의 인간에게도 대단히 익숙한 존재다.
당연히 그를 상대할 전법 역시 오랜 세월 개발되어 있는 것이다.
크로방스 내전에서, 유벨 2세가 한때 카르사스 군을 상대로 우위를 점한 이유도 이것이었다.
비록 휘하에 오러 유저가 한 명도 없었지만 재력적으로 우위인 유벨군은 다양한 '던전 탐사용 장비'를 사들여 휘하 기사단을 훈련, 테츠발트 경과 스피리어스 경의 발을 훌륭히 묶으며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곤 했다. 이 방식이 워낙 장비값이 많이 들어―애당초 장비 부서질 것을 각오하고 들이대는 전법이니까― 대흉년 이후 돈 떨어지고 나서 급격하게 밀렸을 뿐이다.
"크윽! 크으윽!"
포위망에 갇힌 하다툼의 안색이 점점 안 좋아졌다. 조금씩 전신에 상처가 늘어난다. 작지만 확실하게, 그의 진을 빼며 점점 수렁으로 몰아넣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하다툼은 여전히 용맹하게 기사단을 상대로 분투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며 부관이 혀를 찼다.
"아무리 몬스터나 다름없는 것들이라지만 그래도 역시 오러 유저군요. 악마나 마물처럼 쉽게 당해 주진 않을 듯합니다."
저 전법이 분명 일반 기사도 훈련에 따라 오러 유저를 상대하게 해 주기는 한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저 전법에 죽은 오러 유저의 수는 거의 없다.
저 전법의 약점은 아무래도 결정력이 약해, 오러 유저를 몰아붙일 순 있지만 목숨을 거둘 힘은 없다는 점이었다.
던전의 악마는 본능만으로 움직이거나 설사 이성이 있다 해도 유적에 묶여 정해진 대로만 움직이는 놈들뿐, 그래서 저 방식으로 해치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성이 있고 상황에 따라 대처할 능력이 있는 오러 유저가 상대라면 고작해야 발을 묶는 것이 전부다. 그래서 유벨군도 결국 테츠발트나 스피리어스를 해치우지 못하고 전황을 유리하게 이끄는 데만 써먹었다.
"상관없다."
개의치 않아 하며 이라나드 공작이 진지 저쪽으로 손짓했다.
"발을 묶는 것으로 충분해. 그동안 이쪽은 마음껏 힘을 쓸 수 있을 테니!"
부우우웅!
출진의 뿔피리가 불며 여태껏 대기하고 있던 한 무리의 기사들이 일제히 전장으로 투입되었다. 선두에 선 이는 찬란한 황금 갑옷으로 전신을 감싼 기사, 그라임의 황금기사 유서스가 드디어 나선 것이다.
"울어라, 엘드란!"
황금의 검을 휘두르니 찬란한 빛이 파괴의 섬광이 되어 오크 라이더의 진영을 직격한다. 마검 엘드란 최강 술식, 엘드릴의 빛이었다.
콰콰콰쾅!
단 일격에 수십 기의 오크 라이더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져 갔다. 그 뒤를 테네스 기사단이 무자비한 말발굽으로 밟고 지나갔다. 선두에 선 유서스가 연신 마법을 뿌리고 검을 휘두르니 아무리 강력한 오크 전사라도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았다.
무수한 피를 뿌리며 유서스는 단숨에 돌진해 적의 진영을 돌파했다. 시체의 산을 쌓으며 유서스는 호쾌하게 웃었다.
"으하하하! 천한 놈들아! 네놈들에게 헛바람을 집어넣은 레펜하르트를 원망하거라!"
☆ ☆ ☆
황금기사 유서스의 등장으로 인해 전황은 크게 바뀌었다. 그럭저럭 팽팽하게 유지되던 안타레스군이 급속도로 밀리며 점점 피해가 커지기 시작했다. 오러 유저 하다툼이 발이 묶이니, 온갖 고위 마법을 난사하며 오러 유저와 동급의 움직임으로 날뛰는 유서스를 잡을 수 있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이겼군요."
상황을 지켜보던 부관이 의기양양해하며 말했다.
이라나드 공작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안타레스 놈들의 전력이 이 정도일 리 없다."
신성군 일만에 대항해 이곳을 지키던 안타레스군은 사천, 일단 수적으로 너무 열세다. 이쪽의 움직임은 안타레스도 파악했을 터인데 고작 저 병력만을 배치했을 것 같진 않다.
이것이 아직도 이라나드 공작이 움직이지 않는 이유였다. 그가 보기에, 신성군을 상대로 안타레스 공국이 고작 오러 유저 한 명만을 투입했을 리는 없었던 것이다.
공작의 우려에 부관이 반문했다.
"그 정도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요? 이제까지의 안타레스의 전적을 보면, 저들의 힘은 언제나 숫자 이상의 결과를 내놓았었습니다. 실제로 오크 라이더도 대비하지 않았다면 능히 신성군 기사 수 명을 홀로 감당할 수 있었을 테고요. 아마도 이번에도 같은 결과를 기대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만."
납득할 수 있는 의견이었다. 실제로 이제껏 안타레스 공국의 이종족 전사들은 항상 일당백의 힘을 보이곤 했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카를 재상이란 자의 수완으로 볼 때 그럴 것 같지는 않단 말이지."
안타레스의 재상 카를에 대해선 이라나드 공작도 익히 들었다. 정치적, 경제적, 외교적, 군사적인 측면 모두에 천재적인 능력을 보이는 수완가가 바로 그다.
'그 작자 때문에 은의 현자도 한동안 발이 묶이지 않았던가? 잘도 각 왕국들을 구워삶았으니.'
그라임의 고위 귀족이자 동시에 은의 현자 소속, 현자 아펙투스이기도 한 이라나드 공작이기에 그는 카를의 존재를 경시하지 않았다. 이제껏 보인 솜씨만으로도 절대 그가 저런 어리석은 판단을 내릴 것이라 기대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 오만한 권왕조차도 그자의 말이라면 무조건 들어준다고 했으니.'
이라나드 공작이 검자루를 쥐며 눈을 부라렸다.
"분명 어딘가에 원군이 있을 거다. 그렇지 않고서는 말이 되지 않아!"
"하지만 이 주위를 모두 정찰했음에도 아무런 병력도 발견하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정찰병도 수색 마법사도 모두 확인한 후입니다만?"
"오지의 노예 종족에겐 아직 우리가 모르는 기이한 능력이 많이 있다."
전황뿐 아니라 그 너머, 고원과 숲의 움직임을 유심히 살피며 이라나드 공작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이곳의 중요성을 생각한다면 지금 당장 권왕 레펜하르트 본인이 이곳에 나타난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결코 방심해서는 안 될 것이야!"
"네, 각하!"
부관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빛이 떠올라 있었다.
'공작께서 걱정이 과하시군. 짐승만도 못한 것들이 무슨...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것 아닌가?'
바로 그때였다.
전장 좌측으로 10여 킬로미터쯤 떨어진 낮은 숲, 그 숲이 일제히 흔들리며 기이한 소음이 들려왔다.
우우우웅!
흔들리는 숲 속에서 수많은 그림자가 창궐했다. 그림자들이 일제히 하늘 위로 팔을 들더니, 시위를 당겼다.
수많은 화살비가 갑자기 신성군의 본진 뒤쪽을 노리고 쏟아 내린다.
"으윽?"
"컥!"
"아니, 대체 무슨 일이야!"
당황한 신성군 후위가 혼란스러워진다. 혼란 속에서 이라나드 공작만이 냉정을 지킨 채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법사 헤일! 적들을 파악하게!"
"예, 각하!"
마법사가 재빠르게 원견 주문을 시전해 숲의 영상을 수뇌부에게 띄웠다.
허공에 빛의 영상이 떠올랐다. 숲의 높은 나무 위, 수백 명의 호리호리한 사람들이 활을 들고 있는 모습이 비쳤다.
모두가 뾰족하고 긴 귀를 지닌,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이들.
엘프들이었다.
부관이 눈이 휘둥그레 뜨며 놀랐다.
"무슨? 저곳은 이미 두 번이나 정찰을 한 곳인데!"
결코 정찰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특히나 저 숲은 전장 바로 옆에 붙어 있어 안타레스 측이 매복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마법사까지 동원해 혹시 모를 기습을 철저히 대비했다.
심지어 지금도 저 숲 위에는 마법사들이 띄워 놓은 옵저버가 항시 병력 움직임을 감시 중이다.
그런데 어떻게 저기에서 저들이 튀어나온단 말인가?
"어찌 된 건가, 마법사 헤일? 명령대로 옵저버를 띄우지 않았나?"
젊은 마법사가 당황하며 애써 항변했다.
"아닙니다! 저는 지금도 꾸준히 옵저버를 운용 중입니다!"
"그럼 왜 저들이 저기 있느냔 말이다!"
억울함 가득한 눈으로 마법사가 더듬거렸다.
"그, 그게 모르겠습니다. 분명히 없었어요. 아무도 없었는데... 갑자기 옵저버에 수백의 인원이 순간 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나타났는데... 나, 난 분명 제대로 마법을 시전했는데, 절대 실수하지 않았는데...."
자신의 지식 밖의 것을 보았을 때 마법사는 극도로 당황한다. 패닉에 빠진 마법사 헤일을 무시하며 이라나드 공작이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이유는 모르겠지만 저놈들은 저런 짓도 할 수 있다는 거다."
또 한차례의 화살 비가 신성군을 강타했다. 이번엔 전원 방패를 들어 제대로 막아 인적 피해가 없었다. 하지만 말들은 달랐다. 여기저기 화살을 맞은 군마가 날뛰기 시작했다. 귀한 군마를 잃은 기사들이 분통을 터트렸다.
"뭐야, 저놈들은!"
"밤일이나 잘하면 될 것들이 건방지게 화살을 날리다니!"
그래도 신성군 대부분은 화살 비에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워낙 무장이 두꺼워 화살 정도로는 이들에게 치명상을 줄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반격에 나섰다.
"브레인, 타질, 안타니악 기사단! 저들에게 본때를 보여 주어라!"
팔백의 기사들이 기다렸다는 듯 숲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미 이 사태를 예상하고 있던 이라나드 공작은 미리 기사단 셋을 따로 추려 후방에 대기시키고 있었다.
보고 있던 부관이 화색을 띠었다.
"각하의 선견지명에 절로 감탄이 나오는군요! 이제 안전한 곳에서 화살이나 쏘아 대던 엘프 따윈 전혀 적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흐음, 그야 저들이 그렇게 나와 주면 편하겠지만...."
화살에 의한 기습만으로는 매복의 묘리를 제대로 살릴 수 없다. 어디까지나 화살로 교란 후 근접 부대로 정면 승부를 보아야 신성군의 대열이 흩어지며, 그리 해야 전방의 안타레스군과도 연계해 포위망을 구축할 수 있을 테니까.
"이제껏 잘도 노예들을 부려 댄 그 카를 재상이 저들을 제대로 쓰지 않을 리가 없지."
과연, 이라나드 공작의 예측대로 화살로 적진을 교란하자마자 엘프들이 숲에서 뛰쳐나왔다.
기존의 안타레스군과 달리 전원 보병으로 탈것 따윈 타지 않은 상태지만 그 속도가 무시무시할 정도로 빠르다. 도저히 두 발로 뛰는 것이라곤 믿기지 않는, 오크 스카우터와 비견해도 떨어지지 않는 돌진력이었다.
"실프여, 내 몸에 깃드세요!"
"그대의 바람에 내 두 발을 맡깁니다!"
엘프들은 전원 전신에 보이지 않는 회오리를 휘감고 있었다. 바람의 정령 실프를 이용해 몸을 가볍게 하고 질주력을 높인 것이다.
그렇게 용맹스럽게 달려오는 칠백의 엘프 군대, 그 선두에 반투명한 빛의 순록을 탄 여장수가 있었다.
"가라, 나의 일족들이여!"
보랏빛 머리칼을 바람에 휘날리며 날카로운 한 자루 검에 눈부신 은색 광채를 휘감은 놀라운 미모의 엘프 여인.
그녀를 본 순간 냉철함을 유지하던 이라나드 공작이 흥분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엘프 여인은!"
현존하는 유일한 엘프 오러 유저.
그리고 바실리의 왈그란 경을 죽임으로써 그 강력함을 증명하여, 이 전쟁의 실질적 시발점이 된 여인.
인간에게도 저 강력한 엘프 오러 유저의 명성은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진 이후다. 엘프를 천시하는 인간조차도 이 여인만큼은 그녀에게 붙은 왕의 칭호를 인정치 않을 수 없었다.
이라나드 공작이 투지를 불사르며 검을 뽑았다.
"눈의 여왕, 이니야!"
제48장 초인들의 전쟁
1
적진을 향해 오러로 이루어진 순록을 내달리며, 이니야가 허공에 검을 흩뿌렸다.
"북해의 숨결!"
사아아아!
냉기의 안개가 그녀를 중심으로 넓게 펼쳐지기 시작했다. 마치 의지가 있는 살아 있는 생물처럼, 안개가 교묘히 엘프들을 피해 달려오는 기사들을 덮쳐 갔다.
"크윽!"
"허억!"
순식간에 기사들의 중갑이 새하얗게 서리가 끼며 얼어붙었다. 갑작스러운 추위에 말들의 움직임이 크게 둔화되며 돌진하던 기세가 크게 떨어졌다.
"지금이다! 나의 일족, 나의 자매들이여!"
이니야가 검을 들어 기사단을 겨누며 용맹하게 외쳤다.
"레펜하르트 님을 위해 저들을 섬멸하라!"
용맹하게 돌진하던 보랏빛 머리의 엘프 병사들이 순간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엘프들의 미래를 위해서겠죠, 족장님.'
'대놓고 자기 남자 챙기기라니?'
'하긴, 저분 노처녀 시절이 길긴 길었지.'
말이야 어쨌건 이 전쟁의 중요성은 엘프들 역시 이미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이성적인 면이 강한 엘프들은 딱히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 것이다. 족장씩이나 되는 양반이 대놓고 자기 남자 이름을 부르짖어도 다들 아랑곳 않고 전투에 임하기 시작했다.
기사단과의 거리가 좁아지자 엘프들이 저마다 검을 휘두르며 낭랑한 음성을 토했다.
"내 손에 임해 줘요, 로시아."
"나의 친구, 샤이드. 나와 함께 싸워요."
엘프의 정령술은 오크들의 스피리츠 웨폰처럼 뜨거운 열혈 담긴 포효로 발동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전투의 흥분이 가슴을 뜨겁게 한다 하더라도, 정령을 다룰 때만큼은 친애와 우정으로 대해야 한다.
혼탁한 전장에 아름다운 정령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아아아아아아!
안 그래도 남자의 비율이 적다 보니 엘프 병력은 남녀 혼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남자들도 여자처럼 하나같이 미끈한 외모, 전장과 어울리지 않는 그 모습으로 정령을 부르는 엘프의 모습은 아름답다기보다는 차라리 섬뜩하다.
기사들의 표정이 굳었다.
"이, 이것들이!"
"무슨 사이한 짓을 하려는 것이냐!"
정령의 기운이 사방에서 휘몰아치며 수백 개체의 물의 정령 로시아와 어둠의 정령 샤이드가 기사단에게 쏘아졌다. 정령술로 상대의 시선을 교란하며 엘프들이 일제히 마상의 기사들에게 몸을 날렸다.
"타아앗!"
엘프들은 하나같이 몸이 가볍고 날렵하다. 성노로만 자란, 아무런 군사 훈련을 받지 않은 엘프 여인조차도 서전트 점프 2미터가 가능할 정도로 날렵한 종족이다.
하물며 이 자리의 스티리아 일족은 모두 가혹한 북해의 환경 속에서 수많은 몬스터들과 싸우며 생존해 온 전투의 달인들.
대부분의 엘프 병사들이 저 높은 마상 위로 쉽게도 점프해 올랐다. 기사들도 반격했지만 날렵한 몸놀림으로 공격을 흘리며 오히려 상대의 등 뒤에 걸터앉는다.
순식간에 기사 한 명의 배후를 장악한 뒤 이니야의 부관, 세르펠이 단검으로 상대의 목을 길게 그었다.
"엘디아여, 용서하소서!"
기사의 목이 반 이상 베여 피를 뿌렸다. 반쯤 잘린 목을 덜렁거리며 기사의 시체가 땅에 떨어진다.
전장 곳곳에서 비슷한 광경이 연출되었다. 병사라기보다는 오히려 암살자의 모습으로, 엘프들이 기사의 목을 베고 말 위를 뛰어다닌다.
그리고 그 선두에 선 이는 눈의 여왕, 이니야.
"동토의 칼날!"
화려한 검풍과 함께 은빛 블레이드 오러를 뿌린다. 그녀는 단숨에 돌진한 기사단 수십을 베어 넘기며 적진을 가로질렀다. 완전히 진형이 와해된 기사들을 뒤따르는 엘프들이 처리하며 함성을 질러 댔다.
"엘디아여!"
"엘프의 미래를 위해!"
"그리고 우리 족장님 빨리 시집 좀!"
마지막 구령은 어째 좀 괘씸했지만, 어쨌거나 그녀의 일족은 훌륭히 신성군 배후를 흩어 놓고 있었다. 한시름 놓은 이니야가 저쪽, 아스레일과 하다툼이 이끄는 부대 쪽을 힐끔거렸다.
'저쪽은 어떻지?'
이니야의 참전으로 인해 신성군 전방의 사기도 크게 흔들렸다. 한동안 밀린 것처럼 보이던 안타레스군도 다시 기세를 가다듬고 맞서고 있었다.
황금기사 유서스가 여전히 엘드릴의 빛을 흩뿌리며 광범위한 파괴력으로 아군을 해치우고 있지만, 그 밖에는 팽팽한 국면을 유지 중이었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니야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히 늦지 않은 모양이다, 조금 헷갈렸는데.'
☆ ☆ ☆
신성군 배후를 기습하기 위해 이니야는 이백의 스티리아 일족 정병에 대륙 각지에서 모인 다양한 엘프 일족의 전사 오백을 이끌고 전장 좌측의 숲에 매복하고 있었다.
칠백이나 되는 병력이 매복하고 있음에도 전혀 적들의 정찰에 걸리지 않은 이유는 바로 스티리아 일족이 자랑하는 북해의 정령술 덕분이었다.
스티리아 일족은 주로 물과 어둠의 정령을 이용해 냉기를 다루는 부족.
이들은 어둠의 정령을 이용해 완벽하게 몸을 숨길 수 있다. 시각은 물론 마법이나 기감조차도 속이는 완벽한 은신술이다.
실제로 이니야가 처음 안타레스와 접할 때, 오러 유저인 칼켄이나 그토록 기감이 좋은 러스조차도 계곡 위에 숨은 스티리아 일족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정도다. 고작 해야 5서클의 정규 마법사가 띄운 옵저버 정도로는 저들을 파악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몸을 숨긴 채 이니야는 카를의 말대로 기습할 타이밍만을 재고 있었다.
-안타레스는 적들에 비해 병력이 적지요. 그러니 제대로 기습의 묘리를 살려야 합니다.
일만의 신성군에 대비해 카를이 운용할 수 있는 부대는 오천이 한계였다. 현 안타레스의 국력상 그 이상은 무리였던 것이다.
수적 열세를 뒤엎으려면 절묘한 작전이 필수, 그래서 카를은 단순한 포위 공격 대신 기습에 의한 전세 역전을 노렸다.
-반드시 아스레일과 하다툼 부대가 몰아치거나, 혹은 완전히 밀리는 상황을 맞춰야 합니다. 그냥 전투가 시작되었을 때 배후를 노린다면 평범한 양면 공격이 될 뿐. 그래서는 적측도 간단히 반격합니다. 병력에서 우위에 있으니 전방 부대는 전방을 상대하고 후방 부대는 후방을 상대하면 그만이니까요. 상대 진영의 의식이 몽땅 한쪽으로 쏠리는 바로 그때를 노려야 하는 겁니다.
현명한 이니야는 바로 이해했다.
-무술의 카운터 같은 이치로군?
카운터 공격은 단순히 상대의 힘에 이쪽 힘을 실어 두 배로 돌려주기에 그토록 강한 일격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상대의 의식, 공격에 전념하느라 방어에 소홀해진 마음의 틈새를 노리기에 일격에 쓰러트릴 수 있는 것이다.
이해한 이니야를 향해 카를은 기습해야 할 정확한 타이밍도 알려 주었다.
-가장 좋은 시기는 오크 라이더들이 기사들을 몰아치며 적진을 와해시킬 때입니다만, 아마도 그런 좋은 기회는 오지 않을 겁니다.
똥고집 오크들이 끝끝내 스피리츠 웨폰을 쓰겠다 우겼으니, 카를은 오크 라이더들이 전투를 개시하자마자 바로 밀릴 것임을 예측하고 있었다.
-아마도 초반에 꽤 당황하며 밀리겠지요. 신성군 쪽은 승기를 잡았으니 신 나서 몰아칠 테고. 바로 그때 기습을 하십시오. 아무리 대기하고 있는 부대가 있다 해도 그런 상황에서는 의식이 전방에 쏠리게 됩니다. 거기서 갑자기 배후 부대가 나타나면 반응이 쉽지 않지요. 지휘관도 당황할 테고, 만약 지휘관이 당황치 않고 제대로 반격 명령을 내린다 해도 따르는 병력의 움직임이 원활하지 않을 테니까요.
군사학에선 초보적 수준인 매복, 기습 작전이지만 카를은 성공을 확신했다.
너무나도 매복하기 좋은 위치의 숲을 신성군이 미리 정찰하지 않을 리 없다. 그리고 적이 없다는 것을 확신한 후에는 반드시 방심하게 되는 것이다. 스티리아 일족의 은신술은 그만큼 반칙적이었다.
흠잡을 데 없는 작전이었고, 그래서 이니야도 그대로 따랐다. 그리고 계속 기습할 기회를 노렸다.
문제는 여기서 카를조차도 예상 못한 사태가 일어났다는 점이다.
'저 무식한 종자들이 설마 무기 회수할 생각도 안 하고 맨주먹으로 덤빌 줄이야?'
이니야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분명 카를 말대로 오크 라이더들이 일순 무기를 제압당하긴 했다. 그런데 또 밀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맨주먹 붉은 피, 뜨거운 열혈로 대뜸 기사단과 붙어 버렸다.
천하의 카를이라도 설마 오크가 저토록 무식할 줄은 미처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들은 대로 상황이 전개되지 않고 저게 몰아치는 것인지 아니면 밀리는 것인지 애매한 상황이 되었다. 그래서 이니야도 이게 맞는 타이밍인지 아닌지 헷갈려 배후 공격을 시도할 타이밍을 놓쳤다.
덕분에 상당한 아군의 피를 흘린 후에야 합공하는 형국이 되어 버렸지만....
'그래도 아주 효과가 없진 않아!'
늦기는 했지만, 어쨌건 이니야는 분명 안타레스군이 밀리는 타이밍에 뛰쳐나왔다. 덕분에 전방의 기사들도 배후 기습에 당황해 집중력을 잃었으니 그럭저럭 기습의 묘리는 살렸다 할 수 있으리라.
후방의 신성군은 암살자처럼 신출귀몰하게 전장을 날뛰는 스티리아 일족의 빠른 기동력에 휩쓸려 일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이니야는 순록의 머리를 돌렸다. 이 틈에 저쪽을 도와야 했다.
'일단 저자를 처리해야지.'
저 멀리서 날뛰는 황금기사 유서스, 저 강력한 마검사를 막으려면 역시 오러 유저가 아니면 안 된다. 하다툼이 덫에 걸려 허우적대고 있는 지금 그녀만이 유서스를 막을 수 있는 존재다.
"세르펠, 지휘를 맡기겠다!"
"예, 족장님!"
부관에게 명을 내리며 이니야가 막 오러의 순록을 달리려 할 때였다.
"타아아앗!"
우렁찬 기합과 함께 적진 중심에서 보라색 블레이드 오러가 허공을 꿰뚫었다. 동시에 눈부신 백마를 탄 중년 기사가 뛰쳐나오며 고함을 터트렸다.
"당황하지 마라, 세이어의 용사들이어! 저 마녀는 이 몸이 상대한다!"
☆ ☆ ☆
난전 속에서 이라나드 공작은 연신 말을 달리며 좌우로 참격을 날렸다. 오러 유저의 능력은 과연 가공해, 날렵한 스티리아 일족조차 채 반응도 못 하고 목이 날아갔다. 순식간에 십여 명의 엘프들을 학살하며 공작이 기사들에게 소리쳤다.
"흥분하지 마라! 이미 예상했던 것 아닌가! 훈련받은 대로 움직여라!"
그제야 기사들도 냉정을 되찾고 반격에 나섰다.
매복 공격이 있을 것임은 이미 공작의 말에 따라 예상했다. 그저, 아무리 정찰해도 보이지 않는 적이 어찌 매복을 하냐 싶어 정신적으로 방심했을 뿐.
일단 냉정을 되찾고 나니 기사들도 미리 준비한 작전대로 엘프 병력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경험 많은 기사들이 사방에서 소리 질러 후학들을 일깨웠다.
"저들에게 현혹되지 마라! 그저 움직임이 기묘하고 공격 범위가 넓은 것뿐, 공격 자체는 강하지 않다!"
"하피들을 상대한다는 기분으로 싸워라! 그럼 별것 아니다!"
정신없이 하늘을 날아다니며 공격하는 하피와 점프력으로 상대의 뒤를 노리는 엘프의 전투 방식은 비슷한 데가 있다. 물론 기술의 교묘함에서 크게 차이가 나니 하피 따위와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좋아! 슬슬 보인다!"
"잠깐 날뛰었지만 끝이다! 어딜 감히 엘프 따위가!"
일단 상대하는 감각을 되찾고 나니 엘프의 빠른 몸놀림도 아주 감당 못할 수준은 아니다. 피 흘리는 기사들의 수가 빠르게 줄었다. 동시에 스티리아 일족의 피해가 커지기 시작했다.
이거 유서스 잡으러 갈 때가 아니었다. 당황한 이니야가 검을 휘둘러 다시금 오러 스킬을 발휘했다.
"북해의 숨결!"
냉기의 안개가 혼란한 전장 전역을 뒤덮어 갔다. 그녀의 오러 스킬, 북해의 숨결은 강력한 냉기로 적의 움직임을 제어하며 그 범위 또한 대단하다. 게다가 적아가 섞인 속에서도 적군만 골라 얼리는 놀라운 제어력 또한 갖추고 있다.
사아아아!
안개가 퍼지며 다시 기사들의 기세가 꺾였다. 세이어의 신관들이 신성 주문을 발동하며 막으려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으윽! 어찌 세이어의 가호가 먹히지 않는단 말인가!"
"마법의 안개라면 모두 막을 수 있거늘!"
이라나드 공작이 혀를 찼다.
'끄응, 역시 저 수법은 어떻게 대처법이 없군.'
이니야의 저 초월적인 오러 스킬에 대해선 이미 그 정보가 공작에게도 알려져 있다. 차탄 공국 등 여기저기서 막 써 댔으니 몸소 당한 이들도 꽤 많았다.
문제는, 알면서도 막을 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신성 가호도 통하지 않고 마법적인 방어도 안 통한다. 정령술은 마법과 다른 원리, 다른 차원의 기술이라 디스펠이나 안티 매직 계열의 대마법 방어에 전혀 가로막히지 않는 것이다. 오러와 정령을 융합해 현세의 물질적 현상으로 바꾸는,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저 오러 스킬에 편법 따윈 통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기사들 몸에 불을 지를 수도 없고....'
결국 방법은 하나뿐이다.
'시전자 본인을 처리할밖에!'
연신 말을 박차며 이라나드 공작은 엘프 진영을 그대로 돌파했다. 보랏빛 블레이드 오러를 길게 뻗어 내며 공작이 소리쳤다.
"안타레스의 엘프 오러 유저! 그라임의 이라나드가 그대를 상대한다!"
2
쌔애애액!
블레이드 오러가 파공음을 울리며 쇄도한다. 예사롭지 않은 기세, 다른 데 신경 팔면서 상대할 만큼 만만한 공격이 아니었다. 북해의 숨결을 거둔 뒤 이니야도 정신을 가다듬어 반격했다.
파아앙!
보라색과 은색의 오러가 허공에 충돌해 파문을 일으켰다. 그 파문 사이로 이라나드 공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니야를 노려보며 이라나드 공작이 조용히 백마에서 내렸다.
보통 하마下馬하는 것은 상대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것.
하지만 오러 유저의 대결에서 말을 포기하는 것은 다른 의미를 지닌다.
말에 올라타서는 모든 기량을 발휘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오러 유저라는 초인의 숙명, 이제부터 전력을 다하겠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으음...."
이라나드 공작의 강함을 느낀 이니야도 표정을 굳히며 순록에서 내렸다. 오러로 이루어진 영수가 허공에서 녹아들듯 사라졌다.
'신기한 수법이군.'
그 모습에 잠시 감탄한 이라나드가 차분한 눈으로 이니야를 바라보았다.
"그라임의 이라나드라 하오."
"스티리아의 이니야다."
오만한 표정으로 이니야는 존대조차 없이 대꾸했다. 하지만 공작은 방약무인하다 느끼지 못했다.
차가운 빙벽처럼 유유하면서도 굳건히 흐르는 저 오러는 이니야가 얼마나 강자인지 증명하고 있다. 저 싸늘하면서도 놀라운 미모에는 역시 저 도도한 모습이 극히 어울린다.
'과연, 눈의 여왕이라 불릴 만한 기세로다.'
하지만 이라나드 공작 또한 그라임 왕국 최강의 오러 유저로 오랜 세월 명성을 떨쳐 온 몸이다!
"내 그대를 존중해 예의를 갖췄거늘, 그런 반응인가? 역시 엘프는 어쩔 수 없는 천한 것들이군!"
오만하기로는 공작 역시 조예가 깊은 것이다. 바로 태도를 바꾸며 공작이 자세를 잡았다.
이니야가 코웃음을 켜며 마주 검을 노렸다.
"서로 죽일 처지에 예의는 얼어 죽을? 그 심장에 구멍 뚫은 후엔 마음껏 예의를 차려 주지!"
투기가 두 사람 사이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더니, 이내 폭풍이 되어 사방으로 불어 닥쳤다.
"죽여 주마! 엘프!"
"흥! 누구 마음대로?"
두 오러 유저가 살기를 띤 채 서로에게 돌진했다.
☆ ☆ ☆
하다툼은 여전히 허우적대고 있었다.
"어림없다, 오크 놈!"
"세이어께서 보고 계신다!"
"우리가 물러설 것 같으냐!"
선두의 방패 기사들은 아무리 오러로 후려 패도 처맞으면서 끝끝내 버티고 있었고, 뒤에 선 치사한 것들은 기사도 부르짖는 주제에 마음껏 활이며 창이며 그물이며 끈끈이 등을 던져 대고 있다. 그렇다고 위로 점프하면 마법이 날아와 격추시켜 버린다.
"씨발! 이 짜증 나는 놈들!"
아까부터 몇 번이나 터트린 욕설을 재차 터트리며 하다툼은 초조해했다.
이들의 포위진은 단단했지만, 날카롭진 않았다. 공격 자체는 부실해 딱히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가 아니다. 상대에게 집중하는 것이 오크 전사의 전통이라지만 이런 치사한 놈들을 '상대'로 여기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래서 하다툼은 아까부터 힐끔힐끔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이니야가 이끄는 스티리아 일족이 합세하며 전황은 다시금 바뀌었다. 오크 라이더야 원래 아군이 밀리건 말건 항시 사기충천한 놈들이니 별 효과가 없었지만, 인간은 달랐다.
분위기에 오락가락하는 것이 인간이란 종자의 특징인 바, 사기가 떨어지면 지닌 실력의 반도 못 발휘하다가도 사기가 오르면 실력의 두 배도 우습게 발휘하는 것이 인간이다.
이니야의 참전으로 아스레일이 이끄는 경장기병의 사기가 크게 올라 오히려 기사들을 몰아치고 있었다.
한창 사기가 오른 그들의 실력은 오크 라이더와 비교해도 오히려 떨어지지 않는 수준이었다. 아니, 오히려 신성군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대항하는 오크 라이더보다 오히려 더 전공을 세우고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역시 전황은 밀리고 있었다.
저 멀리서 날뛰고 있는 누리끼리한 마법 기사 한 놈 때문에!
'검 든 놈이 치졸하게 마법을 쓰다니! 저러고도 부끄럽지도 않단 말인가!'
황금기사 유서스는 여전히 파죽지세, 걸리적거릴 것 없이 적진을 마음껏 누비며 마법을 난사하고 참격을 뿌려 대고 있다.
사기 오른 경장기병도, 용맹한 오크 라이더도 저자의 검에 걸리면 한 줌의 고혼이 될 뿐이었다. 불굴의 용기만으로는 커버할 수 없을 만큼 실력 차가 너무 컸다.
'아, 큰일났네! 이러다 애들 다 죽겠네!'
하지만 저자와 맞설 유일한 강자인 자신은 이 요상한 덫에 갇혀 허둥대고 있을 뿐.
울화통이 터져 하다툼이 분노를 터트렸다.
"네놈들도 전사라면 당당하게 싸워라! 이 무슨 쪼잔한 짓이냐!"
당연히 기사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몬스터를 상대로 정당함을 논하다니, 언어도단!"
"그런데 저 오크는 참 말 잘하네. 발음도 또렷하고."
"안타레스 오크들은 저렇게 말발 좋은 놈들이 많다더군. 신기한 것들이야."
진형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상대에 대한 의문을 논할 정도가 된 기사들이었다. 살다 살다 말발 좋단 소리 처음 들어 본 하다툼이 기가 막혀 헛웃음을 흘렸다. 하필 처음 듣는 찬사(?)가 적에 의해서라니, 실로 서글픈 이야기다.
여하튼 지금 당장 유서스를 막을 이는 안타레스군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 현실.
'이럴 줄 알았으면 킨지르도 같이 왔음 딱 좋았겠는데.'
안타레스에 합류하기 전부터 친하게 지낸 맹우를 떠올리며 하다툼은 아쉬워했다. 그렇다고 크로방스 서부 국경으로 향한 킨지르가 이 자리에 나타날 리는 만무.
답답해진 하다툼이 애꿎은 카를에게 원망을 던졌다.
'뭐야! 재상! 우리 둘이면 된다며!'
카를은 신성군에 대비해 안타레스 기사단과 오러 유저 이니야, 하다툼을 투입했다. 그리고 그 이상의 오러 유저는 투입하지 않았다.
아무리 오러 유저를 빵틀에서 찍어 낸다는 평마저 듣는 안타레스 공국이지만, 그렇다고 정말로 오러 유저가 널려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수가 딱 정해져 있는 것이다.
크로방스의 서부 국경에 필요한 오러 유저를 보내고, 어떻게든 안타레스 공국 측에도 필요 전력을 남기기 위해 카를은 머리를 쥐어짜며 고심했다. 전력은 제한되어 있고 적측은 강력하니 적재적소에 병력을 운용하지 않으면 도저히 승산이 없는 전쟁이었다.
이쪽에 이니야와 하다툼을 투입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이니야는 누가 뭐래도 현 안타레스 공국 최강자 중 한 명, 그라임 왕국 최강의 오러 유저를 상대하려면 그녀 정도 실력자는 되어야 했다. 하다툼이 상대적으로 좀 떨어지긴 하지만 유서스도 제대로 된 오러 유저는 아니니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카를 나름대로는 아슬아슬하게 힘의 균형을 맞춘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카를이라도 전장의 모든 것을 다 예측할 수는 없으니, 하다툼이 발이 묶이며 유서스를 감당할 이가 아무도 남지 않게 되어 버렸다.
"크하하하! 벌레 같은 놈들!"
신 나게 날뛰며 살육의 쾌감에 젖은 저 황금기사를 보며 하다툼이 허탈한 신음을 흘렸다. 이래서야 자신을 믿고 이곳에 보낸 카를을 볼 면목이 없다.
'아, 부끄럽도다!'
☆ ☆ ☆
이라나드 공작은 오러 유저이며 동시에 그라임의 왕족이기도 하다. 왕족으로 태어나 제왕학을 배운 그의 기품은 검술에도 깃들어 있어 그를 강검사 계열로 키워 주었다.
강력한 위력과 품격으로 적을 압도하며 반격의 틈조차 주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그가 익힌 그라임 왕가의 검술, 제왕검의 묘리였다. 흔들림 없는 안정적인 자세 속에서 뻗어 나오는 파괴적인 검세 앞에 수많은 적수가 여태 무릎을 꿇었다.
"제왕의 일격!"
중후하기까지 한 참격을 날리며 이라나드 공작이 이니야의 정면을 베어 갔다.
단순한 베기처럼 보이지만, 저 보랏빛 블레이드 오러 주위로는 보이지 않는 오러의 기류가 복잡하게 얽혀 올가미처럼 따라오고 있다. 오러에 머금은 속박력으로 상대에게 회피를 허용치 않고 막은 상대를 무기째 베어 버리는 이라나드 공작의 오러 스킬, 제왕의 일격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그 강력한 속박력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흥!"
조소와 함께 이니야가 공세의 주위로 검화를 피웠다. 은색 블레이드 오러가 냉기를 담은 눈꽃이 되어 제왕의 일격에 담긴 속박력을 하나하나, 깔끔하게도 해체해 버린다.
그러고 나면 남은 것은 그저 단순한 베기일 뿐, 버들가지처럼 살랑대며 이니야는 쉽게도 스텝을 밟아 공세를 피했다.
"백야의 눈보라!"
이번엔 이니야가 반격에 나섰다. 화려한 검풍이 설화를 머금고 피어나 사방에서 예리한 찌르기를 동반해 불어온다. 오러 가드로 몸을 지키지만 예리함이 너무 높아 가드가 자꾸 뚫린다. 전신에 옅은 자상을 입은 채 이라나드 공작이 뒤로 물러섰다.
"크으으윽!"
오러 가드 덕에 상처는 얕았지만, 그래도 갑주 여기저기에 금이 가고 그 사이로 붉은 핏물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누가 봐도 이니야의 우위였다.
둘의 전투는 아까부터 이런 양상을 띠고 있었다.
이니야의 화려한 검세와 오러 운용은 굳건한 바위 같은 이라나드 공작의 틈새를 정확히 노릴 정도로 정밀했다. 반면 이라나드 공작의 일격은 그녀의 기교 앞에 대부분의 힘을 잃고 빗나갈 뿐이다.
"그대도 상당한 강자, 하지만 아직 내 상대는 아니다."
오만한 이니야의 말에 이라나드 공작은 수치로 미간을 찌푸렸다.
'제길, 아무리 명성은 들었지만 고작 엘프, 그것도 여인이 이 정도일 줄이야....'
눈의 여왕 이니야가 바실리의 왈그란과 자유 기사 크로아틀, 두 오러 유저를 일격에 쓰러뜨리고 그중 한 명을 황천으로 보내기까지 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결코 방심하지 않았다. 상대가 엘프라는 사실을 잊고 그저 순수한 무인의 마음가짐으로 이니야를 상대했다.
그런데도 실력에서 밀린다. 그라임 왕국 최강의 검사인 자신이!
'크윽! 질 수는 없다!'
각오를 다지며 이라나드 공작이 재차 덤벼들었다. 이니야도 맞서 싸웠다. 검투가 이어지고 오러가 사방으로 뻗어 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패색이 짙어지는 쪽은 이라나드 공작이었다.
'어찌 이런 검세가? 전혀 틈이 없지 않은가!'
아무리 전력을 다해도 저 교묘한 검세는 자꾸 방어를 뚫고 전신에 자상을 남긴다. 신체 여기저기에서 피를 흘린 채 공작은 암담해했다.
"크으으윽!"
이대로라면 질 판이었다. 물론 그에게도 상황을 뒤엎을 궁극의 오러 스킬, 제왕의 진군이 있었지만 이니야가 통 구사할 틈을 안 주니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기술이었다.
원래 오러 유저끼리는 궁극기로 승부를 보는 것보단 이렇게 지닌 기량으로 점점 승패가 갈리는 경우가 더 흔한 것이다. 짐 언브레이커블이나 일격의 미학을 추구하는 오크, 대지 공명의 힘을 쓰는 드워프가 특이한 것일 뿐.
결국 이니야의 일격이 이라나드 공작의 어깨와 허벅지를 동시에 베어 버렸다.
"타앗!"
피를 뿌리며 이라나드 공작이 엉거주춤 뒤로 물러섰다. 오러를 운용해 간신히 한 다리로 서서 무릎을 꿇는 굴욕은 면했지만, 좌반신 전체가 움직이질 않았다.
변명할 여지조차 없는 패배였다.
"끝내겠다!"
차가운 외침과 함께 이니야가 몸을 날렸다. 이대로 적의 수장의 목을 베어 전투를 끝내겠다는 심산이었다.
바로 그 순간, 한 줄기 황금의 빛이 이라나드 공작을 살렸다.
"울어라, 엘드란!"
마검 엘드란의 최강 술식, 엘드릴의 빛이었다. 공작의 위기를 감지한 유서스가 그새 전장을 떠나 이곳으로 달려온 것이다.
가공할 파괴의 빛이 이니야의 좌측을 노리고 정확히 날아들었다. 이대로 공작을 노리다간 저 빛에 직격할 판이라 이니야도 어쩔 수 없이 검 끝을 돌렸다.
검을 십자로 그으며 그녀가 소리쳤다.
"영원의 빙벽!"
냉기를 담은 오러가 물질 변환의 힘을 담아 실체를 지닌 거대한 얼음 방벽이 되었다. 황금의 빛이 방벽과 충돌하며 대폭발이 일어났다.
콰아앙!
얼음 파편이 사방으로 흩날리며 빛 가루를 뿌린다. 그렇게 둘 사이를 벌리며 유서스가 말을 탄 채 중간에 뛰어들었다.
피 흘리는 공작을 향해 유서스가 다급히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각하?"
"아, 덕분에 살았다, 유서스 경."
감사를 표하며 공작은 이니야를 바라보았다. 잠시 물러난 그녀는 다시 살기를 띠며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유서스의 기습에 잠시 당황하긴 했지만, 생각해 보면 이는 오히려 호기였다. 전방에서 날뛰던 유서스가 제 발로 이곳에 와 주었으니 찾아갈 수고를 덜은 것이다.
"마침 잘됐군. 둘 다 이 자리에서 처리해 주겠어!"
그녀의 외침에 이라나드 공작이 화급히 소리쳤다.
"세이어의 용사들이여! 저 마녀를 막아라!"
기사들이 일제히 이니야에게 달려든다. 블레이드 오러를 휘둘러 선두의 기사 다섯을 동시에 베어 넘기며 그녀가 조소를 던졌다.
"목숨이 아까워 부하들의 힘을 빌리느냐? 그러고도 그대가 전사라 자처할 수 있는가?"
살짝 수치스러운 표정으로 공작이 중얼거렸다.
"그야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전쟁에서 패할 수도 없는 것 아닌가?"
잠깐 패배의 치욕에 휩싸인 이라나드 공작이었지만, 그는 어느새 냉정을 되찾고 있었다.
어차피 그는 이종족들의 힘에 대해 충분히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을 무시하지도 않았다. 패배로 인해 입은 자존심의 상처도 남들보다 훨씬 작은 편이었다.
이니야에게 덤벼드는 기사들을 향해 공작이 소리쳤다.
"세이어의 기사들이여! 저 마녀는 이미 충분히 지쳤다! 더 이상 이제까지의 무위는 보이지 못할 것이다!"
비록 패하긴 했지만, 역시 그라임 최강의 기사란 명성은 거저먹은 것이 아니다. 이라나드 공작은 밀리는 와중에도 착실히 이니야의 체력을 갉아먹었고 또 기감을 통해 그 사실을 알아채고 있었다.
상대가 지쳤다는 소리에 기사들의 사기가 올라갔다. 상대는 이라나드 공작마저 패퇴시킨 강력한 오러 유저, 만약 저 엘프 여인의 목을 벤다면 그 이상의 전공은 없을 터였다.
"저 년의 목은 캠벨 기사단이 갖겠다!"
"무슨! 그것은 페이난의 차지다!"
☆ ☆ ☆
기사단의 명예를 걸고 기사들이 이니야를 포위해 정신없이 공세를 퍼부었다. 평소 보이던 오러 유저에 대한 두려움도 보이지 않는 광경이었다.
거기에 이라나드 공작은 떡밥을 하나 더 놓았다.
"저 여인의 목을 베는 자에겐 백작의 작위를 내리겠다! 그라임의 이라나드 공작가가 보증한다! 저 여인에게 작은 상처를 내기만 해도 금화 천 닢을 하사하겠다!"
기사뿐 아니라, 보병들마저 탐욕으로 눈이 벌게져 덤벼들기 시작했다.
이니야가 조롱하며 좌우로 오러를 뿌렸다.
"헛된 욕심에 목숨을 거는 거냐? 어리석은 놈들!"
지쳤다 해도 오러 유저는 오러 유저, 단숨에 포위한 기사 수십이 피를 뿌리며 동강 나 날아갔다. 실로 무시무시한 무용. 평소라면 맥없이 당한 동료들의 모습에 바로 기세가 꺾였을 것이다.
그러나, 재차 말하지만 인간은 분위기에 참 잘 휩쓸리는 종자들이다.
"으아아!"
"저년을 죽이면 나도 백작이다!"
"스치기만 해도 금화 천 닢이야!"
평소라면 블레이드 오러만 봐도 벌벌 떨던 이들이 지금은 공포를 잊고 계속 덤벼든다. 동료가 죽어도 아랑곳 않는다. 그저 눈앞의 여인에게 창칼을 찌를 생각으로 뇌가 마비되어 있다.
"크윽!"
끝없이 몰려오는 병력, 사방에서 찔러오는 공세 속에서 이니야의 검세도 점점 기세를 잃었다. 오러 스킬을 쓰기도 쉽지 않았다. 어떤 오러 스킬이라도 아주 잠깐의 발동 시간은 필요한데, 이런 난전 속에서는 그럴 틈이 없다.
물론 이니야쯤 되면 단순한 블레이드 오러라도 가공할 위력을 낸다.
"타아앗!"
기합과 함께 또다시 그녀의 은빛 오러가 넓게 휘둘러졌다. 또다시 10여 미터 반경에 피의 꽃이 피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적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점점 이니야가 궁지에 몰리기 시작했다.
'이, 이런!'
일격에 강철도 베고 반경 10여 미터를 싹 쓸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 오러 유저라는 초인,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녀 역시 사람이고 찌르면 피가 나는 육체를 지닌 몸이다.
아무리 주위를 쓸어 봤자 바로 다른 이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창을 찔러 댄다. 강력한 오러 가드로 몸을 보호한 오러 유저는 기사의 차징조차도 막을 수 있지만 그 오러 가드조차도 전신, 모든 범위를 균일하게 덮는 것은 아니다. 오러 유저의 의식에 따라 강하고 약한 부분이 나뉘어 있다.
"으으...."
점점 의식 밖에서 자꾸 엉뚱한 일격이 방어를 뚫고 들어와 이니야는 신음을 흘렸다.
기감도 없는 일개 기사가 이니야의 오러 가드 속 강약을 파악할 수 있을 리 없겠지만, 그 공격이 무수히 이어지면 이야기가 다르다.
눈 감고 다트를 던져도 수십, 수백 번을 던진다면 결국 한 번은 중앙을 꿰뚫게 마련.
"크윽!"
필연적 우연에 의해, 한 보병의 눈먼 검이 그녀의 옆구리를 시원하게 긁었다.
대륙의 격언은 과연 틀리지 않았다.
전장의 눈먼 검은 설사 오러 유저라도 피할 수 없다....
"스, 스쳤다! 금화 천 닢이다!"
물론 이 보병의 외침은 그대로 유언이 되었다. 이니야가 바로 그의 목을 시원하게 날려 버렸으니까. 저 격언은 오러 유저 찌른 눈먼 검이 그 후 어떻게 된다는 것까지는 말해 주지 않은 것이다.
"흥!"
콧방귀를 뀌며 이니야는 또 한 차례 블레이드 오러를 길게 늘려 주위를 모조리 쓸어내렸다. 일격에 수십의 목숨이 피를 뿌리며 사라졌다.
그렇게 잠시 공터를 만들었지만 이니야는 휴식을 취하지 못했다. 피에 취하고 탐욕에 취하고 명예에 취한 신성군은 저 가공할 무위 앞에서도 거리낌 없이 재차 덤벼들고 있었다.
"죽어라! 엘프 마녀!"
이니야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
'이 독한 놈들....'
손에 쥔 검이 무겁게 느껴진다. 호흡도 가빠 온다. 주위를 둘러보니 그녀의 일족 역시 그리 상황이 좋지 않았다.
체력과 지구력이 떨어진다는 것은 이니야뿐 아니라 엘프라는 종족 자체의 약점, 초반에는 매섭게 내달린 엘프 병력은 슬슬 체력이 떨어지며 기사들에게 밀리는 중이었다.
그 가운데에는 황금기사 유서스가 있었다.
"아이스 볼트, 프레임 애로우! 라이트닝 스톰!"
이라나드 공작을 구해낸 유서스는 바로 이니야를 상대하지 않았다.
'나는 상대가 안 된다.'
일대일로 붙어 봤자 승부가 뻔하다. 평소라면 이대로 물러서는 것이 기사의 수치겠지만 지금은 전쟁터, 굳이 그가 이니야와의 대결을 피한다 해도 딱히 명예롭지 못한 행위가 아니었다. 오히려 아군의 승리를 위해 자신의 욕심을 버렸으니 찬사받을 행위였다.
뭐, 상대가 러스나 레펜하르트였다면 승패를 도외시하고 덤볐겠지. 하지만 이니야는 까놓고 말해 별로 자주 만난 적도 없는 상대, 딱히 감정이랄 것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유서스는 부담 없이 이니야를 기사들에게 맡긴 채 후방의 엘프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울부짖어라, 엘드란!"
엘드란에 각인된 마법을 난사하며 마음껏 학살의 정경을 그린다. 역시 전장에서 다수를 상대하는 데는 오러 유저보다 마검사가 훨씬 효율이 좋다. 신성군의 승리를 위해서는, 유서스가 이렇게 행동하는 쪽이 옳은 것이다.
모든 것이 카를이 세운 작전과는 동떨어진 상황이었다.
이니야가 한탄했다.
'크, 이래서 초반에 적장의 목을 베었어야 했는데!'
원래 카를의 작전은 속전속결. 엘프의 저질 체력을 잘 아는 카를은 결코 전투를 길게 끌지 않도록 다짐, 또 다짐했다.
하지만 역시 전장은 예상대로 돌아가 주질 않는다.
평범한 인간처럼 이종족을 무시하지 않은 이라나드 공작의 노련한 지휘는 속전속결의 기회를 앗아 갔다. 이대로 난전이 된다면 결국 수적으로 열세인 안타레스군의 패배다.
그리고, 지금 이니야는 전쟁의 승패를 걱정할 상황이 아니었다.
"목을 내놓아라! 마녀!"
"아으, 제발 스치기만 해라!"
대륙의 유수한 역사 속에서 대오러 유저용 전법에 죽은 오러 유저는 그리 많지 않다. 그렇지만 전장의 혼란에 휩쓸려 일개 창칼에 죽은 이는 의외로 많다.
이니야 역시 탐욕으로 가득한 인간들의 공격 앞에 목숨조차 위태로운 처지, 이대로라면 오러를 각성한 무인답지 않게 하찮은 칼에 맞아 죽을 판이었다.
'빌어먹을!'
점점 가빠지는 호흡 속에서 그녀는 문득 죽음을 직감했다. 동시에 한 남자의 얼굴이 머리에 떠올랐다.
평생 처음 만난 완벽한 남자.
생전 처음으로 그녀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던 거구의 사내.
아련함이 가슴 한구석을 맴돌았다.
'레펜....'
그러나 이니야는 이내 머리를 흔들어 뇌리 속 사내의 그림자를 떨쳤다.
'흥! 잡념 따위!'
그녀는 검을 쥔 전사였다.
검에 매진해 오러를 각성한, 전사의 길을 걷는 자였다.
그런 자신이 죽음을 앞에 두고 마치 일개 아녀자처럼 남자의 얼굴 따위를 떠올리는 부끄러운 짓은 허용할 수 없었다.
결코 레펜하르트 '따위'를 떠올려 이제껏 쌓아 올린 전사의 긍지를 버릴 수는 없다!
"동토의 칼날!"
잡념을 버린 채 이니야가 마지막 힘을 끌어 올렸다. 싸늘한 표정 위로 냉기를 가득 뿌리며 살기를 사방으로 퍼트린다. 눈의 여왕이라는 칭호처럼, 그녀는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도 실로 여왕다운 모습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오라! 인간들아! 와서 내 목을 가져가 보아라!"
오러를 폭발시켜 주위 수십 미터를 피바다로 만들며 그녀가 잔혹하게 소리쳤다.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사기충천한 신성군은 물러서지 않는다. 그저 달려들고 또 달려들 뿐.
지친 이니야를 포위한 채 신성군이 함성을 질렀다.
"으아아아!"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 함성이 비명으로 이어졌다.
"...아아아아악!"
하늘에서 빛이 떨어졌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거대한 아홉 줄기의 빛의 기둥, 그것이 그녀를 둘러싼 모든 병력을 한 번에 날려 버리며 가공할 폭발을 일으켰다.
콰아아앙!
놀란 이니야가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어머?'
허공에서 외침이 들려왔다.
"연환 기격포!"
해가 떠오른 것 같은 찬란한 황금의 섬광 속, 거구의 사내가 허공에 떠올라 주먹을 내뻗는다. 단 일격에 빛의 대포가 쏘아져 대지를 거죽째 벗겨 내며 광풍을 동반한다.
갑작스레 나타난 그를 보며 신성군의 안색이 바뀌었다. 허공을 올려다본 유서스가 놀람과 증오를 담아 소리쳤다.
"레펜하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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