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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0 - 30

☆ ☆ ☆

짙은 어둠이 깔린 한밤중, 제라드는 가이라크의 정원을 걷고 있었다.

딱히 정원의 아름다움을 견식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짐 언브레이커블에 그런 '계집' 같은 취미를 지닌 이는 없는 것이다.

그가 이쪽으로 온 이유는 진짜 단순하게, 숙소를 향해 빙 돌아가기 싫으니 그냥 직선으로 횡단하자는 의미일 뿐이었다.

중간에 있는 건물이 안타레스 공국의 왕, 레펜하르트의 집무용 궁이라는 것은 그에겐 전혀 신경 쓸 문제가 아니었다. 아무리 왕이니 공작이니 해 봤자 제라드에게 있어서는 '제자'일 뿐이었으니까. 실제로 경비병들도 감히 그를 제지하진 못했다.

그렇게 정원을 가로지르고 있는데, 저 위쪽 탑의 테라스에서 제자의 모습이 보이는 게 아닌가? 뭐, 평소라면 신경 끄고 숙소 가서 잤겠지만 어째 오늘따라 제자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집무실 테라스에 나온 레펜하르트가 의자에 걸터앉아 와인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표정도 영 칙칙한 것이 아무래도 기분이 꿀꿀한 모양이었다.

'저 녀석, 날씨도 좋은데 왜 청승이지?'

제라드는 의아해했다. 좋은 술 마셨으면 기분이 좋아야지, 왜 저런 표정을 지어? 호기심에 제라드가 발끝에 힘을 주었다.

휙!

제라드의 거구가 가뿐히 허공으로 날아올라 테라스에 안착했다. 200킬로그램 가까운 거구가 날아오르는데 먼지 한 톨 일지 않았다. 참으로 가공할 몸놀림이었다.

사부의 모습을 본 레펜하르트가 기겁해 사레가 들렸다.

"켁! 사, 사부! 어쩐 일로?"

"네놈 여기서 뭐 하냐?"

그 웅장한 체구로 쪼그려 앉은 채, 제라드가 눈알을 굴렸다. 레펜하르트가 술병을 들어보였다.

"뭐 하긴요? 술 먹죠."

"취하지도 않는 걸 왜 굳이 먹어?"

짐 언브레이커블의 가공할 육체는 오크 특산의 독주조차도 물처럼 마시게 만든다. 와인 따위는 포도 주스와 동일어인 것이다.

"아, 좀 취하고 싶은 기분이어서...."

레펜하르트가 머리를 긁적였다. 확실히 그도 지금 '내가 무슨 뻘짓 하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던 참이었다.

"그냥 고민이 있어서 술 몇 잔 마신 것뿐입니다."

제자의 말에 제라드는 인상을 썼다. 제자 놈이 머리가 좋은 건 좋은데, 그렇다 보니 저런 역대 권왕들은 안 하던 짓까지 한다.

'쯔쯔, 생각 많은 것들은 근심도 많다더니....'

제라드는 잠시 고민했다.

'제자가 근심하고 있으니 사부로서 뭔가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육체적인 면에서야 이미 하산한 제자이니 더 신경 쓸 필요가 없다. 하지만 정신적인 면은 어떨까? 역대 계승자치고 정신적으로 낑낑대던 놈이 거의 없다 보니 사례도 없었다.

고민하다 제라드가 물었다.

"무슨 짜증 나는 일이 있어 그리 면상을 찌푸리고 있는 게냐?"

"그냥, 사람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사람이지, 거기에 고민할 게 뭐가 있다고?"

레펜하르트가 피식 웃었다. 그래도 사부라고 나름 제자 챙겨 주는 것이 고맙긴 하다.

"그냥 사람의 본성이라든가, 뭐 그런 이야기입니다. 사부도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 만나면 비슷한 고민 해 보지 않으셨습니까?"

제라드는 그런 고민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때리면 다 설설 기어. 몇 대 맞으면 다 말 듣게 되어 있어."

과연 짐 언브레이커블. 사고방식 한번 단순하기도 하다.

레펜하르트가 기가 차 되물었다.

"맞고도 말 안 듣는 사람은요?"

"그때쯤 되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시체지."

무조건 패면 된다. 패면 다 말 듣게 되어 있다는 것이 제라드의 지론이었다. 순간 레펜하르트는 이니야의 표현을 이해해 버렸다. 과연, 옳은 말이긴 한데 올바른 말은 아니다.

"몇몇 개인은 그렇겠지요. 하지만 집단은 그렇게 안 되지 않습니까?"

"그럼 집단을 패면 되지!"

"전 인류는요? 전 인류가 대상이라면?"

"그땐 전 인류를 패면 된다!"

한 치의 의심조차 없이 제라드가 단언했다. 레펜하르트가 입을 쩍 벌렸다.

전 인류가 말을 안 들으면 전 인류를 때려 주겠다!

이것이 바로 짐 언브레이커블의 패기!

"...."

그저 물어본 놈이 병신이었다.

'하지만 아주 틀린 말씀도 아니시군.'

저렇게까지 극단으로 가서야 안 되겠지만, 확실히 제라드의 말에도 일리는 있다.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 때로는 힘으로, 강제적으로라도 뜻을 관철시킬 필요가 있다. 예전 마켈린이 말한 게 바로 이것이 아닌가?

좀 더 단순하지만, 그만큼 확실하게 가슴에 와 닿는 표현이다.

"하하...."

웃음을 흘리는 레펜하르트를 보며 제라드도 히죽거렸다.

역시 짐 언브레이커블의 가르침은 위대하다. 보라! 나름 머리 굴리는 이 녀석의 고민도 결국 이 위대한 가르침에 바로 격침되지 않았는가!

"허허허! 좀 기분이 풀렸느냐, 제자야?"

"글쎄요, 풀렸달까 뭐랄까...."

애매해하는 레펜하르트의 등짝을 펑펑 두들기며 제라드가 껄껄 웃었다.

"세상살이 별거 없다! 그냥 열심히 살면서 못된 놈 패 주다 보면 알아서 잘 흘러가게 되어 있어! 나머지는 하늘에 맡겨라! 그쯤 되면 하늘이 알아서 나머지는 챙겨 준단다!"

참 현명한 건지 무식한 건지 애매한 말씀이었다. 레펜하르트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제라드가 다시 테라스 아래로 몸을 날렸다.

"그럼 청승 그만 떨고 잠이나 처자!"

"네, 사부도 안녕히 주무세...."

레펜하르트가 저녁 인사를 채 올리기도 전에 제라드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참으로 바람 같은 영감이었다.

☆ ☆ ☆

제라드로부터 크나큰 가르침(?)을 받은 레펜하르트는 다시 집무실로 들어갔다. 어쨌거나 가슴 한구석이 후련해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집무용 테이블에 앉아 레펜하르트를 서류를 집어 들었다. 카를이 제출한 새 법안에 대한 것이었다.

"많이 고민했지만...."

레펜하르트가 우아한 필치로 서류에 사인했다. 새 법안을 인정한 것이다.

"역시 지금은 그들이 옳아."

한결 가뿐해진 얼굴로 레펜하르트는 의자에 몸을 기댔다. 이제 내일 카를을 불러 새 법안을 공표시켜야겠다.

그렇게 쉬고 있는데 비서가 들어섰다.

"폐하, 카를 재상이 알현을 청합니다."

"응? 카를이? 이 늦은 밤에 웬일이지?"

의아해하며 레펜하르트가 손짓을 했다. 비서, 유스티아가 나가고 잠시 후 카를이 안으로 들어왔다. 안색이 딱딱하게 굳은 것이 상당히 고민이 심한 듯했다.

사인한 서류를 들어 보이며 레펜하르트가 웃었다.

"어서 오시게, 카를 재상. 안 그래도 내일 이걸 건넬 생각이었는데...."

서류를 받아 든 카를의 표정이 살짝 밝아졌다.

"아, 결정하셨습니까? 다행입니다, 폐하. 이로써 보다 질서가 잡힐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표정이 풀리진 않는다. 단순히 새 법안에 대한 고민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사실은 법안 문제 때문에 찾아뵌 것이 아닙니다."

현재 카를의 표정은 고민이나 근심보다는, 긴장했다는 쪽에 가까워 보였다. 덩달아 긴장하며 레펜하르트가 다시 질문했다.

"...무슨 일이기에, 카를 재상?"

"결국, 예상했던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상했던 일이라면...."

레펜하르트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었다. 서류를 챙기며 카를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바실리 왕국이 선전포고를 해 왔습니다. 바슈탈론 제국이 바실리와 군사 동맹을 맺었고, 차탄 공국이 보급을 책임지고 동맹에 참가했습니다."

레펜하르트는 눈을 감았다.

결국 올 것이 와 버렸다. 카를의 능력으로 최대한 미루고 미루며 힘을 키울 시간을 벌었지만, 역시 이 정도가 한계였다.

"전쟁인가...."

크로방스 왕국과 안타레스 공국의 '이종족 해방 정책'을 본 대륙 모든 국가는 만류와 협박을 보냈다.

더 이상 질서를 흔들지 말라고. 계속 이대로 어긋난 길을 간다면 좌시할 수만은 없다고.

그걸 무시하고 여기까지 강행한 이상, 이는 필연적인 결과다.

카를의 말이 이어졌다.

"그라임과 테이칸, 할라인은 여전히 중립입니다. 하지만 왕실 대신 세이어 교단이 움직였습니다. 각국에 소속된 세이어 교도들을 움직여 크로방스와 우리나라를 벌해야 한다며 자발적인 움직임을 유도했더군요."

"세이어 교단?"

"예, 현재 각국의 세이어 교도들은 이 전쟁을 성전聖戰이라 부르며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크루세이더라 칭하며, 바실리 왕국에 참전을 요청하고 있다 합니다."

카를은 차분히 정세를 설명했다.

안타레스 백국 시절부터, 그는 대륙 각지에 첩자를 보내 각국의 상황을 염탐하고 있었다. 안타레스의 국력이 높아지고 공국이 된 지금 그 정보망은 더욱 굳건해졌다.

검성 바나텔 때처럼 강자 몇 명이서만 비밀리에 움직이는 것이야 도저히 잡아낼 방법이 없다지만, 지금처럼 대규모 군대를 일으키는 일은 충분히 첩보망을 통해 미리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후우...."

레펜하르트는 한숨을 쉬었다. 그나마 전생처럼 모든 인간의 나라를 전부 적대하는 최악의 상황은 피했다. 하지만 여전히 이는 중대한 문제다.

레펜하르트가 진지한 눈으로 카를을 바라보았다.

"우리의 준비는 어떻소, 카를 재상?"

카를의 표정에 긴장과 함께, 자신만만해하는 빛 또한 떠올랐다.

"몇 년 전부터 대비하고 있던 일입니다. 이제 와서 준비를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지요."

두 사람이 희미하게 미소를 교환했다.

이내 미소를 지우며 카를이 음울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많은 피가 흐르겠지요. 실로 많은 피가...."

레펜하르트가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그가 허리춤의 주머니를 어루만졌다.

정확히는, 그 안에 담긴 사방신의 유물을.

"그 피를 줄이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겠지."

<13권에서 계속>

13권

제44장 크루세이더

1

테네스 저택은 소란에 차 있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늙은 집사의 외침을 뒤로한 채 요란한 구둣발 소리가 복도를 메웠다. 한 무리의 건장한 기사들이 중무장을 하고 기세등등하게 복도를 걷고 있었다.

"문을 열어라!"

선두에 선 금발의 사내가 손짓을 하자 이내 커다란 백양목 문이 벌컥 열리며 단아한 거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테네스 저택의 가주 전용 거실이었다.

선두에 선 남자가 멋대로 안으로 들어섰다. 한 가문의 가주실에 디디는 발걸음이라기엔 지나치게 무례한 태도였다. 뒤이은 기사들 역시 만만치 않게 무도한 표정으로 뒤를 따랐다.

거실 안에는 60대의 노인과 50대의 고운 귀부인이 침입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겁에 질린 것으로 보이는 귀부인에 비해, 노인의 표정은 허탈하기 그지없는 듯했다.

노인이 선두에 선 남자, 자신의 아들을 보며 힘없이 물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유서스?"

금발의 기사, 유서스가 차갑게 웃으며 노인을 바라보았다.

"무슨 대답을 원하십니까, 아버지?"

당대 테네스 가문의 가주, 폴트 테네스 백작이 허망한 목소리로 질문을 이었다.

"이거 설마 가주직을 계승하는 중입니다, 따위의 상황인 게냐, 유서스?"

"용건을 알고 계시니 다행이군요, 아버지."

찬란한 황금 갑옷, 테네스 가문의 보물인 마갑 엘드라드를 걸친 채 유서스는 천천히 폴트 백작의 앞으로 다가갔다.

폴트 백작은 주름진 눈으로 주위를 살펴보았다.

이미 테네스 기사단의 전원이 이 반란에 참여한 듯 보였다. 가신들 역시 보이지 않았다. 유서스에게 포섭되었음이 분명했다.

분명 자신이 가주임에도 불구하고, 이 테네스 저택 내에서 그의 편은 단 한 명도 남지 않은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겠지. 이미 유서스가 엘드라드를 물려받은 지 15년이 넘었으니....'

그래서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유서스는 이미 흔들림 없는 후계자의 지위를 고수하고 있었으며, 가주로서의 권리 또한 대부분 가지고 있었다. 요 몇 년간 기사 수행을 하느라 바깥으로 떠돌아다니긴 했지만, 그렇다 해도 그는 경쟁자가 없는 몸이었다.

"설마 사이러스 녀석 때문에 이러는 것이냐? 아니,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인데...."

질문을 하다 말고 폴트 백작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둘째 아들 사이러스가 오러 유저로 각성하고 또 안타레스 공국에서 위명을 떨치는 중이긴 하다. 대륙 최연소 오러 유저로 맹활약을 펼치는 아들의 소식을 들으며 흐뭇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이러스를 유서스 대신 후계자로 삼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일단 사이러스는 명실공이 테네스 백작가의 반역자다. 후계자인 유서스를 암살하려 한 그 과오는 오러 유저가 되었다고 쉽게 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는 전적으로 유서스가 뒤집어씌운 누명이지만, 테네스 가문은 그 사실을 전적으로 믿고 있었다. 심지어는 사이러스를 편애하는 폴트 백작이나 자기 배 아파서 낳은 백작 부인조차도....

'사이러스가 제 형을 노렸단 말인가? 하긴... 그 녀석 성격이면 그럴 법도....'

'제 새끼긴 하지만, 우리 러스가 그렇게 성격이 좋은 편은 아니니까요, 여보.'

라는 반응을 보이며 유서스의 말을 믿어 버렸다.

러스가 레펜하르트 만나서 참 많이 사람 되긴 했는데, 그 전까진 분명 자타가 공인하는 음침한 아웃사이더였던 것이다. 이래서 사람은 평소에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설사 사이러스에게 과오가 없다 해도 그가 후계자가 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아무리 지닌 바 재능이 뛰어나다 할지라도 귀족가에게 있어 혈통이란 그 무엇보다도 우선되는 부분이다. 유서스가 심각한 결함이 있다면 모를까, 그 역시 오러 유저만은 못하지만 그라임의 황금기사로 충분히 명성을 떨치고 있으니 굳이 위기의식을 느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물론 가신들 중에는 사이러스에게 속죄의 기회를 주고 가문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견도 있긴 했지만....'

오러 유저의 길을 잃은 테네스 백작가에 사이러스의 존재는 귀하다. 당연히 저런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이는 그리 실현 가능성이 없었다. 일단 가문 내에서도 반대하는 의견도 많았고 또, 사이러스 입장에서도 저것은 이제 그리 매력적인 제안이 아니었다.

'솔직히 객관적으로 볼 때 그 녀석이 굳이 가문에 돌아올 이유가 없으니까.'

러스 본인은 별로 못 느끼고 있었지만, 사실 외부에서 보기에 그는 어마어마하게 출세한 축에 속하고 있었다.

현재 사이러스는 떠오르는 신예 강국 안타레스의 주요 개국공신이며 공왕 레펜하르트와 호형호제를 하는 최측근 중의 최측근이었다. 개국 초기다 보니 안타레스 공국 내 위계질서가 제대로 정해지지 않아 작위는 아직 없는 듯했지만, 일단 안정만 되면 최소 백작쯤은 먹고 들어갈 위치였다.

안타레스 공국에 그대로 있으면 국왕의 의동생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권력자가 될 수 있는데 테네스 가문으로 돌아오면 그라임 왕국의 무수한 귀족가 중 하나, 그것도 가주도 아니고 그냥 일원이 될 뿐이다. 수구초심도 정도껏이지 이쯤 되면 돌아오는 쪽이 바보가 될 판이다.

'절대 돌아올 리가 없지.'

폴트 백작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귀족가의 사정은 비정한 것이라 살다 보면 아들이 아버지를 시해하는 일도 곧장 일어나곤 한다. 폴트 백작도 귀족으로 나고 자라나 그 사실은 잘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이리 재고 저리 재어 봐도 현재 유서스의 지위는 확고부동한 것이다. 도저히 이런 일을 일으킬 이유가 없었다. 가능성이 없는 일이기에 전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래서 이토록 맥없이 당해 버렸다.

폴트 백작이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이미 테네스의 가주나 다름이 없다, 유서스. 대체 왜 이러는 것이냐?"

유서스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버지."

"이젠 가주라 부르지도 않는구나."

"네, 아버지."

씁쓸해하는 폴트 백작을 향해 유서스가 말을 이었다.

"아버지께서 성전 참가를 반대하지 않으셨다면 저도 이러진 않았을 겁니다."

딱딱한 아들의 목소리에 폴트 백작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성전? 설마 바슈탈론 제국에서 주장하는 그 전쟁 말이냐?"

바슈탈론 제국과 세이어 교단이 크로방스 왕국과 안타레스 공국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했다는 소문은 폴트 백작도 들었다. 그라임 왕국의 귀족인 그에게는 전혀 상관없는 소식이기에 그냥 이 기회에 시세 변동이 있을 테니 물자나 좀 비축해 놓아야겠구나 생각하며 넘어갔다.

그런데 왜 유서스가 저 이야기를 꺼낸단 말인가?

"아니, 그 성전이 우리랑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어이없어하는 폴트 백작을 향해 유서스가 노성을 터트렸다.

"세이어께서 모든 인간을 굽어살피시는데 어찌 상관이 없단 말입니까!"

"아니, 우리 가문이 언제 그렇게 세이어 교단이랑 친했다고...."

폴트 백작의 표정이 더더욱 일그러졌다.

테네스 가문이 가까이 하는 교단은 그라임 왕국에서 가장 교세가 큰 창공의 여신, 에어리어스 교단이었다. 실제로 테네스 기사단이 던전 탐사를 나서거나 기타 일로 출타할 때 도움을 받는 신관들도 에어리어스 교단 출신들이었다. 세이어 신전 역시 영지 내에 있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영지민들을 상대할 뿐이고, 테네스 가문의 관혼상제 같은 큰 행사는 에어리어스 교단이 주관하곤 했다.

황당해하는 폴트 백작을 향해 유서스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변하셨군요. 그들의 명이 떨어지면 반드시 행해야 한다고 말씀해 주신 것은 아버지셨거늘...."

"으음?"

멍한 표정을 짓는 아버지를 보며 유서스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그토록 러스를 아낀다 이 말이지요....'

은의 현자의 요청이 있음에도 그것을 거부하다니, 이는 러스가 있는 안타레스 공국을 적대하고 싶지 않다는 명백한 표현이 아닌가?

하지만 보는 눈이 많은 이곳에서 은의 현자를 입에 담을 수는 없다. 유서스는 침묵을 지킨 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아버지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침묵한 채 싸늘한 시선을 보내는 유서스의 모습에 폴트 백작이 더더욱 당황했다.

'명? 무슨 명령이 있었다는 게야?'

사실은 여기서 살짝 오해가 있었다.

유서스는 지금, 폴트 백작이 은의 현자가 보낸 협조 요청을 정면으로 거역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미 은의 현자는 이번 성전에 대비해 크루세이더로서 봉기해 달라며 대륙에 흩어진 그들의 협력자 가문 전체에 협조 요청을 보냈다. 크로방스 왕국 내의 협력자 가문이 일어나는 것은 너무 노골적이라 은의 현자의 존재가 드러날 가능성이 있으므로 그냥 전쟁 불참 요청만 보냈지만, 다른 나라에는 모두 은밀하게 연락이 간 상태였다.

테네스 가문 역시 은의 협력자 가문 중 하나, 당연히 연락이 안 왔을 리 없었다. 그런데도 저런 태도를 보인다는 것은 러스를 너무 아껴 가문의 전통조차도 무시하겠다는 처사가 아닌가?

유서스로서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젠장, 아직도 그놈의 러스를 저토록 편애하시나! 그 자식이 있는 나라와 싸우는 것도 허락지 않겠다 이거지?'

그런데 사실, 폴트 백작은 은의 현자로부터 아무 소식도 받지 못했다.

딱히 은의 현자가 테네스 가문을 의심하거나 해서가 아니었다. 그냥, 단순히 인원 절약 차원이었다.

아무리 전 세계를 뒤흔드는 강력한 은의 현자라도 그 본질은 틀림없이 비밀결사다. 그리고 비밀결사는 그 특성상 구성원이 적을 수밖에 없다.

당하는 입장에서야 쥐도 새도 모르게 연락 넣고 사라지는 은의 현자의 신출귀몰함에 감동, 감탄하겠지만 행하는 입장에선 이게 꽤 고생인 것이다.

고대의 아티팩트를 마음껏 이용해 대륙 이곳저곳을 마구 오갈 수 있다 해도 그 실행자는 분명 실존하는 사람이었다. 인원은 적은데 우편배달(?)할 장소는 대륙 전역, 그렇다면 굳이 불필요한 장소까지 서신을 보낼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테네스 가문은 이미 은의 협력자인 유서스가 이 정보를 알고 있으니 '굳이 서신을 보낼 필요 없는 불필요한 장소'에 속하는 것이다.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은 유서스는 굳이 저런 이야기를 폴트 백작에게 하지 않았고, 어련히 소식이 갔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래서 당당히 성전을 주장했다.

아무 소식도 듣지 못한 폴트 백작에게 저 성전은 전혀 타당한 이유가 없는 주장이었다. 그래서 당연히 성전 참가를 반대했다.

자고로 모든 가정불화의 근원은 대화 단절이라.

서로 대화가 없으니 그저 감정만 쌓여 으르렁대게 되게 되었다. 아들만 으르렁대고 아버지 쪽은 아무것도 모른 채 가정 화목한 줄 착각하고 있었다는 점을 보면 거대한 귀족가, 테네스 가문도 결국 대부분의 가정과 다를 것 하나 없었다.

그리고 결국, 이렇게 극단적인 상황까지 오게 된 것이다.

"유, 유서스!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게냐?"

당황한 폴트 백작이 아들을 불렀다. 하지만 유서스는 더 이상 아버지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의 대화를 거부한 채 유서스가 등을 돌렸다. 그리고 수하들에게 명을 내렸다.

"아버님을 북쪽 당으로 모셔라!"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가 백작 부부의 주위에 도열했다. 백작 부인, 러스의 어미인 에이리가 두려워하며 폴트 백작의 품에 안겼다.

"여, 여보. 대체 어떻게 되는 건가요?"

"아무 걱정 마시오, 부인. 별일 없을 것이니...."

"하, 하지만...."

벌벌 떠는 귀부인을 보며 유서스의 인상이 더욱 일그러졌다. 증오스러운 러스의 어미, 저 여인 때문의 어머니와 자신이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던가? 마음 같아서는 당장 저잣거리로 내쳐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귀족이었고 또한 기사였다. 비록 이런 상황이 되었지만 정도를 지나치게 벗어날 수는 없다. 어쨌거나 현재 그녀는 폴트 백작이 선택한 귀족가의 부인이었다. 그렇다면 그 정도 대접은 해 주어야 했다.

'젠장!'

들끓는 속을 애써 감추며 유서스가 고함을 질렀다.

"당장 저분들을 모셔가라!"

"예! 단장님!"

명을 받은 수하들이 질서 정연하게 백작 부부를 데리고 방 밖으로 나섰다. 남은 기사들이 일제히 무릎 꿇고 유서스를 향해 소리쳤다.

"새로운 가주님께 검의 충성을!"

"새로운 가주님께 검의 충성을!"

스르릉!

유서스가 마검 엘드란을 뽑아 들었다. 찬란한 황금빛이 방안을 가득 메웠다.

검을 든 채 유서스가 당당히 선언했다.

"가주로서 첫 번째 명을 내린다! 지금 시간부로 테네스 가문은 세이어의 뜻에 따라 신성한 검의 길을 걷노라!"

부복한 기사들 역시 고개를 들고 소리쳤다.

"세이어를 위하여!"

"세이어를 위하여!"

테네스 가문이 정식으로 성전에 참가하는 순간이었다.

☆ ☆ ☆

대륙 곳곳에서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가주가 바뀌는 극단적인 상황은 테네스 가문뿐이었지만, 수많은 기사 가문들이 검을 높이 들고 세이어의 뜻에 호응해 신성한 전쟁에 참여하기로 뜻을 표했다.

세이어를 제외한 다른 교단들은 당황했다. 분명 그리 세이어와 교류도 없던 가문들이 갑자기 성전에 참가하겠다며 나선 것이다.

그러나 딱히 이해 못 할 일도 아니었다. 명분이야 어찌 되었건 전쟁은 참가한 이들에게 부와 명예를 가져다주는 법이고, 기사들은 전쟁 속에서 비로소 존재 가치를 인정받는 법이니까.

다른 교단 입장에서 그리 달가운 현상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만류할 명분이 있지도 않다. 세이어 교단을 제외한 다른 교단에선 적당히 침묵하며 상황을 두고 보는 쪽으로 움직였다.

그러는 동안 대륙 곳곳에서 성전의 기치를 든 크루세이더의 군세가 바실리 왕국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 군세의 합이 무려 기사 일만, 종자며 마부, 시종 등 비전투원을 더하며 더욱 거대한 규모였다.

바실리 왕국에서 이들을 맞이해 합동 정벌군을 꾸몄다. 오만의 바실리 왕국군을 동원하고 사령관으로 이름 높은 기사이자 오러 유저, 바실리 왕국의 에그라드 경이 나섰다.

바실리 왕국에 적을 올렸던 오러 유저는 세 명.

최강의 오러 유저인 왕국 기사단장 탈로스 경은 국왕을 지키기 위해 수도에 남았고 왈그란 경은 얼마 전 안타레스와의 전투에서 죽음을 당했으니, 에그라드 경은 바실리가 내놓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카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때를 맞춰 바슈탈론 제국도 움직였다. 차탄 공국을 경유해 이름 높은 제국기사단이 삼만의 병력을 이끌고 직접 나섰다.

바실리 왕국보다 병력은 적지만, 결코 제국의 전력을 무시할 수 있는 이들은 없었다. 제국기사단을 지휘하는 것은 제국의 황태자 길리우스였으며 검성 바나텔을 비롯해 무려 8인의 오러 유저가 참가했다. 바슈탈론 제국이 이번 전쟁을 얼마나 중시하는지 여실히 보여 주는 부분이었다.

또한 자세한 것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제국과 세이어 교단에서는 정해진 소속이 없는 자유 무인 출신의 오러 유저 또한 거액을 들여 대거 고용했다고 한다.

흉흉한 소문이 대륙 전역을 떠돌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안타레스 공국의 멸망을 점쳤다. 아무리 강력한 신예 군사 국가라지만 역시 전통의 강호, 바슈탈론 제국의 저력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으로 보였다.

그렇게, 대륙 서쪽에 전란의 바람이 점점 더 거칠게 불어오고 있었다.

☆ ☆ ☆

험준한 글로텐 산맥 서부, 페틀랜드.

황량한 황야 위를 몇 필의 말들이 먼지를 일으키며 달리고 있었다. 저마다 번쩍이는 미스릴 갑옷으로 무장한 이들의 선두에는 한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4색으로 나뉘고 중앙에 황금빛 주먹이 그려진 문양이 그려진 깃발, 대륙 역사상 가장 알아보기 쉽고 또 가장 촌스럽다는 평을 받고 있는 권왕 레펜하르트의 문장이었다.

이 깃발을 당당히 들고 있는 이들은 바로 안타레스 기사단, 그 선두에 선 것은 기사단장 아스레일이었다. 그는 지금 재상 카를로부터 중요한 임무를 받고 산맥 서부의 페틀랜드로 향하는 중이었다.

"좀 더 힘내라! 곧 목적지가 보일 것이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수하들을 향해 아스레일이 독려를 날렸다.

과연 글로텐 산맥의 험준함은 대단했다. 페틀랜드의 황량함 역시 보통이 아니었다. 괜히 그 오래 시간 인간의 왕국이 이 땅을 침략하려 들지 않은 것이 아니다. 애초에 이곳은 사람 살 곳이 못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황량한 땅 한가운데에, 지금 거대한 도시가 건설되고 있었다.

"오, 저곳이...."

얼마나 달렸을까? 드디어 도시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자 아스레일이 살짝 신음을 흘렸다. 그것은 감탄이기도 하며, 동시에 황당함이 깃든 신음이었다.

그것은 엄연한 도시였다.

하지만 일반적인 모습의 도시는 아니었다.

거대한 괴수의 뼈와 바위로 성벽을 올린 그 속에 투박한 바위 건물과 거대한 천막들이 즐비하다. 분명 가죽으로 만든 천막이지만, 과연 저것을 천막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제법 세상을 떠돈 아스레일이었지만, 세상에 5층 천막 따위가 존재할 것이라곤 상상도 해 보지 못했다.

"대체 저건 무슨 수로 세운 거야?"

수하의 말에 공감의 표정을 지으며 아스레일이 대답했다.

"천막의 형태를 했지만 이동이 가능한 것은 아니겠지. 아마도 뼈대는 바위나 목재로 세우고 그 위에 가죽을 덧댄 것 같다. 하지만 정말 웅장하군."

거대한 몬스터 수십 마리를 잡아야 겨우 저것에 붙일 가죽이 나오리라.

가죽이라고 해서 무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방패보다 더 큰 비늘이 촘촘히 붙어 있는 벽면이며, 바위보다 두꺼워 보이는 각질의 가죽으로 올린 지붕은 인간의 성과 비교해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내구성을 자랑하고 있었다.

아스레일이 감탄을 흘렸다.

"저곳이 오크라트인가...."

오크라트.

푸른 곰 부족이 주축이 되어 페틀랜드를 떠돌던 스물일곱 개 오크 부족이 모두 뭉치고, 드워프들을 초빙해 건축술을 조언 받아 만들어 낸 오크들만의 도시였다.

아스레일 일행은 더욱 말을 달려 성문으로 향했다. 성문 역시 보통 상식적인 나무 문이 아니었다. 아마도 무슨 거대한 괴수의 갈비뼈를 통째로 이용한 듯한 뼈 문, 그 사이에 가죽과 강철을 덧붙여 강인한 느낌이 물씬 난다.

입구에 서 있던 수문장 오크가 인상을 쓰며 앞으로 나섰다.

"서라! 인간!"

아스레일이 바로 깃발을 가리키며 대꾸했다.

"안타레스의 사절이오!"

수문장 오크들이 바로 반색을 했다.

"그 깃발! 형제 인간이다!"

"금주먹 깃발 든 인간, 우리 형제다! 환영한다!"

투박한 공용어와 함께 바로 성문이 열렸다. 안타레스 기사단도 속력을 줄이며 오크라트 안으로 들어섰다.

오크라트 내에는 수많은 오크들이 살아가고 있었다. 모두들 생업에 몰두하다 안타레스 기사들을 보고 흠칫 놀라더니, 이내 그 깃발을 보고 안심한 듯 다시 하던 일로 돌아갔다. 천천히 말을 몰며 아스레일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크들의 유목 문화와 달리 가옥들 대부분이 대지에 뿌리박혀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죽을 다루는 그들의 문화를 버리고 드워프나 인간처럼 돌과 나무로 만든 집을 세운 것도 아니다. 기틀은 나무나 뼈를 쓰고 가죽을 덧대어, 대부분의 건물들이 고정된 거대 천막 같은 형태로 지어져 있었다.

비록 임무를 띠고 온 몸이지만 역시 이런 기이한 도시를 보니 관광하는 기분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아스레일이 중얼거렸다.

"확실히 이들이 문화가 다르다는 실감이 나는군."

수하들 역시 비슷한 표정이었다. 정신없이 주위를 힐끔거리다 수하 중 한 명이 아스레일에게 물었다.

"그랜드 포지와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단장님?"

안타레스 기사단의 단장으로서, 아스레일은 그랜드 포지에 들른 경험이 있었다. 드워프들의 그 웅장한 도시를 보며 기가 질린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랜드 포지는 정말 웅장했지. 나 자신이 너무도 작게 느껴지는 거대한 도시였어."

오크라트를 돌아보며 아스레일이 말을 이었다.

"규모는 아무래도 그랜드 포지만 못하지만, 대신 오크라트는 정말 야성적인 느낌이군. 이곳에서 살기만 해도 절로 강해질 것 같은 기분이야."

"엘프나 트롤들의 도시도 한번 보고 싶군요. 그쪽도 많이 건설되었다던데...."

"엘븐하임와 트로리아드 말이지? 그쪽은 한 번도 못 봤군."

오크들처럼 엘프와 트롤들 역시 각자 자신들의 도시를 건설하고 있었다.

엘븐 포레스트는 이미 세계수를 중심으로 수많은 가옥이 올려져, 하나의 거대 공중 도시 엘븐하임이 되었다. 트롤들 역시 구출한 수많은 트롤 구루들의 힘으로 막대한 양의 세멘테리움을 정제, 수많은 지구라트로 이루어진 광대한 도시 트로리아드를 건설 중이다.

어쨌거나 그들은 막중한 임무를 띠고 이곳에 온 바, 관광 기분이나 낼 때가 아니었다. 정신을 차리고 아스레일 일행은 다시 말을 몰았다.

오크라트 중앙 지역으로 가니 5층 높이의 거대한 천막 성이 나타났다. 그곳에서 전투 멧돼지, 배틀보어를 탄 녹색 오크가 환한 웃음으로 그들을 맞이했다.

"오! 아스레일 경! 오랜 만이오!"

"오랜만입니다, 카루가 킨지르."

흙 멧돼지 일족의 족장이자 오러 유저이기도 한 킨지르는 레펜하르트가 만들어 준 통역 목걸이를 끼고 있기에 유창한 공용어를 할 수 있었다. 전원 하마하자 오크 몇 명이 나와 말 고삐를 쥐고 말들을 마구간으로 옮겼다.

킨지르가 반가워하며 성안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이 험한 곳까지 어쩐 일이시오, 아스레일 경?"

"스탈라 대모께 중요한 서신을 전하러 왔습니다."

스물일곱 개 오크 부족이 선출한 대족장 칼켄은 현재 아라난 그라드에서 타시드와 함께 오크 무리들을 다스리고 있었다. 그래서 현재 오크라트는 오크의 전통에 따라 아내인 스탈라가 대족장 대리로서 통치하는 중이었다.

"그럼 전령을 보낼 것이지 어찌 아스레일 경이 직접?"

"이곳까지 올 수 있는 전령이 어디 있습니까?"

의아해하는 킨지르를 보며 아스레일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상대적으로 평가가 낮다 해도 안타레스 기사단은 공식적으로 일국을 대표하는 기사단이다. 이런 서신 전달이나 할 정도로 지위가 낮지는 않은 것이다. 특히나 단장인 아스레일은 더더욱.

하지만 글로텐 산맥을 넘어 페틀랜드까지 오는 행보는 결코 만만치 않다. 일개 전령을 보냈다간 사흘도 안 되어 글로텐 산맥에 출몰하는 몬스터들의 밥이 되리라.

사실 이곳까지 전령으로 보내졌다는 것 자체가 안타레스 기사단이 상당히 뛰어난 무력을 지녔음을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이제 전령 노릇을 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으니 다행이죠."

함께 온 기사, 아스레일의 부관 고스탄 경이 너스레를 떨었다. 안타레스 초기만 해도 이 전령 역할은 푸른 곰 부족의 울프 라이더들만이 맡을 수 있었다. 그 당시의 안타레스 기사단은 너무 약해서 글로텐 산맥을 넘을 힘조차 없었으니까.

그 굴욕을 씻기 위해 필사적으로 수행한 이들이었다.

원래 목표가 높으면 그만큼 실력도 더욱 오르기 마련이다. 주위에 강력한 이종족 전사들이 즐비했던 안타레스 기사단이기에 비교 대상 역시 높고 높았다. 덕분에 현재 그들은 어지간한 타 왕국의 정예 기사단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 실력자로 탈바꿈해 있었다.

"아직 무대가 없어 실력을 보이진 못했지만...."

아스레일이 기대 어린 눈빛을 지었다.

"조만간, 무대가 생길 테니까요."

킨지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어쨌거나, 스탈라 대모를 찾아오셨다니 안내를 해야겠군."

"어디 계십니까?"

킨지르가 뒷마당을 가리키며 이해하기 힘든 대답을 했다.

"대모님은 지금 아기들 수유授乳하며 수행修行 중이시라네."

"...네?"

멍한 얼굴로 아스레일은 킨지르의 뒤를 따랐다.

'수유하며 수행 중?'

참 이해하기 힘들었다. 수유라면 그, 애들 젖 준다는 소리가 아닌가?

아스레일은 스탈라가 오크 중에서도 미녀 중 미녀이며 그 풍만한 가슴으로 수많은 오크 아기들의 젖을 먹인 위대한 유모라는 사실을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인간 상식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원래 오크들 사이에선 강한 여자의 젖을 물고 자란 아기는 강한 전사가 된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체질 좋은 아기들을 골라 여전사가 젖을 물리는 풍습이 있었다. 오크 어미로서는 가장 큰 영예 중 하나며, 아기를 칭찬하는 극찬의 행동 중 하나다.

그러니 스탈라가 유모 역할을 한다는 것은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일 만했다.

그런데 수행은 또 뭔가?

'아니, 수유랑 수행이 동시 진행이 되는 행위였나? 그게 말이 돼?'

같이 '수' 자로 시작한다지만 뉘앙스는 천양지차, 아스레일은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킨지르가 공용어에 익숙하지 않아 말을 실수했다고 여겼다.

☆ ☆ ☆

3분 뒤, 뒷마당.

"어...."

아스레일은 입을 쩍 벌렸다.

세상은 역시 만만치 않다. 그의 상식을 초월하는 광경은 얼마든지 있다.

지금 뒷마당에서, 근육질의 오크 여인이 분명 '수유'와 '수행'을 동시에 하고 있었다!

"타아앗!"

날카로운 단검을 양손에 쥔 채 스탈라가 날렵하게 허공을 찔러 댔다. 허리를 비틀며 그 회전력을 실어 양손으로 찌르기를 날리는 그 모습은 같은 무인으로서 분명 감탄이 나올 모습이었다.

...문제는 그녀의 가슴이 그대로 노출되어 양쪽 유방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종족이 다르지만 엄연히 여인의 유방, 똑바로 바라보기엔 남자로서 참 부끄러운 광경이리라. 하지만 아스레일은 눈을 떼지 못했다.

스탈라의 양쪽 유방에 갓 태어난 듯한 오크 아기 두 명이 필사적으로 매달린 채 젖을 빨고 있었으니까!

"에... 저건 대체?"

여인이 아이 젖 주는 모습에는 보통 경건함이 느껴진다는데, 저걸 보면 경건은 전혀 없고 오히려 강건, 불굴, 극강 등의 이미지만 떠오른다. 멍한 아스레일의 목소리에 다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킨지르가 허허롭게 대꾸했다.

"그래서 내가 말했잖소. 수유하며 수행 중이시라고...."

스탈라의 기합이 이어졌다.

"허업!"

검광이 허공을 갈랐다. 그 격렬한 움직임에 왼쪽 유방에 매달려 있던 아기가 결국 손을 놓고 떨어져 버렸다.

땅에 처박힌 오크 아기가 우렁찬 울음을 터트렸다.

"으아앙!"

"저, 저런!"

흠칫하며 아스레일이 나서려던 찰나였다. 스탈라가 움직임을 멈추더니, 아기를 내려다보며 벽력같은 외침을 터트렸다.

"일어나라! 푸른 곰의 아이라면 스스로의 힘으로 먹을 것을 쟁취해라!"

열혈 넘치는 호통이 오크 아기의 머리 위로 쏟아진다.

뚝!

오크 아기가 울음을 그치더니 주먹을 불끈 쥔 채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뭐, 아기 표정이 결연한지 아닌지 알게 뭐냐마는, 일단 분위기는 그래 보였다.

종종종!

아기가 그 고사리 손으로 스탈라의 종아리를 붙잡더니 록 클라이밍이라도 하는 것처럼 열심히 스탈라를 타고 올랐다.

이윽고 아기가 그녀의 가슴께에 도착해 젖을 물었다. 성취감과 포만감을 느끼며 오크 아기가 다시 젖을 빨기 시작했다.

스탈라가 기뻐하며 아기를 칭찬했다.

"장하구나! 푸른 곰의 아이라면 응당 그 정도 근성은 있어야지!"

아기도 기쁜 듯 환하게 웃었다.

아스레일만 기가 막혀 입을 못 다물 뿐이었다.

'맙소사, 이게 오크들의 양육법인가?'

나름 오크의 문화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다 자부하는 아스레일이었지만, 저 모습은 통 적응이 되질 않았다.

그때 뒷마당에 모여 있던 다른 오크 여인들이 소리를 질렀다. 아마도 저 아기들의 어미인 모양이었다.

"아이고, 대모님!"

"그러다 애 잡겠어요!"

"무슨 소리야? 애들은 원래 강하게 키워야 돼!"

스탈라의 대꾸를 들으며 아스레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군. 내가 오크들을 잘못 이해한 건 아니었어.'

그냥 스탈라가 이상한 것이었다. 역시 오크도 사람이었다.

"놀랐소, 아스레일 경?"

"상당히요."

"우리도 놀랐소. 왜 푸른 곰 부족이 최강의 오크들인지 알 것 같더구려."

역시 저게 오크 전통 문화는 아닌 거구나.

"전, 오크들은 다들 저렇게 애를 키우는 줄 알았습니다."

킨지르가 정색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우린 저렇게 무식하지 않소!"

오크들 사이에서 무식하단 소리를 들으려면 어지간한 경지로는 힘들다.

"...대모님께서 교육이 꽤 가혹하시군요."

왜 타시드를 비롯한 그가 아는 오크들이 스탈라의 훈련 이야기만 나오면 사색이 되었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기한테 저렇게 대할 정도면 성인에겐 오죽하겠나.'

그때, 스탈라가 아스레일을 돌아보았다.

"아스레일 경, 왔으면 용건을 말하시게. 아까부터 거기 서서 뭐 하시나?"

역시 오러 유저답게 그녀는 아스레일 일행이 나타나자마자 바로 알아챈 것이다.

아스레일이 아차하며 부관에게 손짓했다. 부관이 서신을 꺼내 앞으로 나섰다.

"공왕님의 전언을 전하고자 왔습니다."

잠시 후, 서신을 읽은 스탈라의 눈빛이 빛났다. 사냥감을 눈앞에 둔 맹수의 눈빛이었다.

그녀가 기쁜 듯 외쳤다.

"오! 축제로군!"

"아니, 전쟁입니다만... 축제는 얼마 전에 이미 했습니다."

혹시 잘못 읽었나 싶어 아스레일의 부관이 바로 첨언했다. 하지만 이는 호전적인 오크들의 성격을 미처 파악하지 못한 인간의 판단일 뿐이다.

이미 알아들은 아스레일이 부관에게 가만있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스탈라가 뻐드렁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래, 그러니까 축제. 괜히 길바닥에 금 뿌리는 이상한 짓 말고 진짜 축제."

킨지르도 전언을 보더니 눈을 빛냈다.

"당장 다른 부족에 연락을 취해야겠군요."

"부탁하네, 카루가 킨지르. 남편은 이미 신이 나 있겠군?"

오크어로 대화하며 두 오크 투사들은 흉흉한 웃음을 띠었다.

그래, 축제다.

오크들의 축제는 피를 뿌린다!

2

안타레스 공국 수도, 아라난 그라드

그 중심에 위치한 왕성 가이라크의 한 집무실에서 지금 두 거구의 남자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정보가 어느 정도 모였습니다, 공왕님."

테이블에 앉아 서류를 검토하며 거구의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딱 벌어진 어깨에 드넓은 가슴, 얼굴 가득 기르던 수염도 이제 길이가 제법 되어 가슴께까지 늘어져 있다. 드워프들 사이에서도 '참으로 아름다운 수염이로다!'라는 찬사를 받고 있는 이 외모의 주인공은 물론 안타레스 공국의 재상, 카를이었다.

한때 미남자로서 뭇 여성들의 여심을 한껏 흔들었던 기사 중의 기사, 카르사스 공자는 이제 이 지경까지 와 버린 것이다. 뭐, 본인은 만족하고 있으니 별문제는 없겠지만.

"길리우스 황태자가 이끄는 바슈탈론 제국군은 이미 차탄 공국을 통과해 크로방스 서부 국경까지 진군한 상태입니다. 바실리 왕국 측은 신성군과의 지휘 계통 조율 때문에...."

"음? 신성군?"

카를의 보고에 마주 앉은 사내가 문득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카를보다 더더욱 벌어진 어깨에 드넓다 못해 광활하기까지 한 가슴팍을 자랑하는―다행히 수염은 없는― 어마어마한 거구의 사내, 현 안타레스의 공왕이자 이름 높은 권사, 권왕 레펜하르트였다.

이 근육덩어리 거인들이 안타레스 공국에서 가장 뛰어난 두뇌를 가진 두 사람이라니, 참으로 아이러니라 아니할 수 없겠다.

레펜하르트의 질문에 카를이 피식 웃었다.

"세이어 교단에 호응해 일어선 대륙 각지의 기사단들 말입니다. 자신들을 신성군, 혹은 크루세이더라 부르더군요."

"별것에 다 신성을 갖다 붙이는구먼."

"말인들 뭘 못하겠습니까? 하여튼 바실리 왕국 측은 저런 문제로 조금 진군이 늦어 아직 바실리 북부 쪽에 머물러 있습니다만, 거리가 가깝다 보니 안타레스 남부 국경선에 다다르는 시간은 서로 비슷할 것이라 판단됩니다."

"정말이지 재상의 예측과 한 치도 빗나가지 않는군. 신기하기까지 하네."

서류를 둘러보며 레펜하르트는 혀를 내둘렀다.

바슈탈론 제국이 선전포고를 하고 세이어 교단이 성전의 기치를 들어 올린 이래, 카를은 바로 정보를 수집해 적진의 진군 예측 경로를 산출해 냈다.

뭐, 여기까지는 그리 신기할 것이 없었다. 아무리 땅덩이가 넓다 하더라도 대군이 이동할 수 있는 경로는 한정되어 있다. 상대할 군대의 세력만 대충 알면 어디로 진군해 올 것인지 파악하는 것은 초보적인 군사학 수준이다.

신기한 부분은 시간마저 정확하게 맞췄다는 점이었다.

언제 집결하고 언제 출발하며, 어느 정도 속도로 행군해 언제 국경에 도달할지까지 카를은 모두 예상해 놓았는데, 현재까지 그의 예상은 거의 틀리지 않았다. 시간 단위의 오차는 있을지언정 하루 단위의 오차는 없을 정도로 정확한 예측이었다.

"저쪽 수뇌부에 스파이라도 심어 놓은 거요? 대체 어떻게 이렇게까지 딱딱 맞지?"

감탄하는 레펜하르트를 보며 카를이 별거 아니란 표정을 지었다.

"별로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전쟁이 시작한다면 그때부터는 각자 상황에 맞춰 전술을 구상할 테지만, 지금은 그저 행군일 뿐이지 않습니까? 군사학을 공부한 이라면 가장 효율적인 이동을 원할 터, 그렇다면 이 정도는 예상할 수 있지요."

"아니, 그건 나도 아는데... 그렇다 해도 지휘관의 실력에 따라 어느 정도 차이는 있을 것 아니오? 그런데도 이리 시간이 맞으니 신기하다는 것이지."

카를이 뭐 그리 신기하냐는 듯 말을 이었다.

"상대가 수만의 대군이니까요. 지휘관의 실력에 따라 행군 속도가 차이 나는 것은 수백에 수천 사이의 병력에 한해서나 생기는 일입니다. 만 단위의 거대 군세라면 총지휘관이 누구건 그리 쉽게 개인의 역량으로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이치에 맞게 실리를 따지며 움직이게 되지요. 지휘관이라면 누구든 병사의 피로도, 보급선의 보존 등을 따지지 않을 수가 없으니까요."

"그, 그런가...?"

레펜하르트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전생 때 수십만의 이종족 군세를 거느렸던 그였지만 레펜하르트는 저런 걸 신경 쓴 적이 없었다. 막상 카를 덕에 제대로 된 전술, 전략을 접하게 되니 당시에 참 얼마나 엉망으로 군대를 운용했었는지 새삼 실감이 났다.

'끙, 이러니까 결국 졌지.'

전생 때, 이종족들도 전술적인 측면에서는 결코 인간에게 뒤지지 않았다. 수백 단위의 전투가 벌어지면 오크도 드워프도 엘프도 트롤도, 모두 교묘한 전술로써 전쟁에 임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국지적인 전술의 국면이고 포괄적인 전략 측면으로 보면 이야기가 달랐다.

온갖 기상천외한 전술을 동원해 봐야 이종족들의 전략적 목표는 항상 거기서 거기였다.

오크들은 그저 무작정 돌진했고, 드워프는 그저 죽자고 방어만 했으며, 엘프들은 눈이 벌게지도록 정령만 던져 댔고 트롤들은 열심히 주술적인 춤을 추며 뼈다귀만 휘둘렀다.

그러다가 마왕 레펜하르트가 하늘 위에서 짠하고 나타나면 게임 끝,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고 그동안 못 버티면 지는 것이다.

참으로 전략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상황이라 하겠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지.'

레펜하르트는 눈앞의 근육질 수염남을 향해 신뢰의 눈빛을 보냈다. 비록 근육과 수염에 잔뜩 가려 있지만 누가 뭐래도 저 속에 담긴 두뇌는 당대 최고의 책사임이 분명하니까.

"...?"

갑자기 저 양반이 왜 저런 끈적끈적한 눈빛을 보내나?

카를은 잠시 흠칫 떨었다. 하지만 이내 신경을 껐다. 뭐, 하루 이틀 있는 일도 아니고.

바로 카를이 다음 용건으로 화제를 옮겼다.

"바슈탈론 제국의 전력은 정병 삼만, 기사 일만에 중장보병 일만, 궁병과 기타 편제로 일만인 상당히 기형적인 형태입니다."

레펜하르트도 이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기사 일만이라면 십만 정도의 군세가 뒤를 받치는 것이 상식이다.

카를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현 전쟁의 성격을 생각하면 타당한 편제입니다. 제국과 크로방스 왕국의 거리는 적지 않고, 병력은 그 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비용도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니까요. 바슈탈론 제국 단독의 원정이라면 더 많은 보병이 필요하겠지만 그들은 지금 바실리 왕국과 연대하고 있습니다. 바실리 왕국의 오만 병력 중 기사의 숫자는 삼천 정도, 사만 칠천 정도의 일반 보병이 뒤를 받쳐 주고 있으니 제국 측에서는 정예만을 꾸려 출격시키는 것이 합당하겠지요."

"그렇겠지. 사실 보병의 존재 가치는 전투보다는 점령 지역 유지에 있으니까."

오러 유저는 일반 보병 수백 명에 맞먹는 전투력을 지닌다. 기사 한 명의 전력 역시 보병 수십 명과 맞먹는다.

하지만 오러 유저나 기사들이 일반 보병보다 수백 배나 밥을 먹고 옷을 입는 것은 아닌 것이다. 보급을 생각한다면 정예만을 꾸려 보내는 이 상황이 타당하다. 어차피 수백 배씩 밥 준비하고 무기 준비해야 하는 보병 쪽은 바실리 왕국이 담당해 주고 있으니까.

"어차피 진짜 전력은 이들이지요."

카를이 서류를 넘겼다. 그가 침을 한번 삼킨 뒤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슈탈론 제국군 쪽에 현재 참전한 것으로 알려진 오러 유저의 숫자는 여덟, 검성 바나텔을 비롯한 제국기사단의 최정예들입니다."

"제국의 오러 유저가 총 열 명이라 하지 않았나? 상당히 무리했군그래."

저 정도면 제국의 전력이 총출동한 것이나 다름없다. 카를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쪽 오러 유저의 전력이 대부분 공개되었으니까요. 상식이 있다면 이 정도 준비는 하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우리도 이 정도는 예상했던 바이고."

카를이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말을 이었다.

"문제는 이쪽입니다."

카를의 목소리에 맞춰 서류를 보던 레펜하르트의 안색이 살짝 굳었다.

"...제국 마법병단이로군."

"네, 80인의 고위 마법사에 300인의 정규 마법사로 이루어진 제국 마법병단 세 개 단이 모두 투입되었습니다. 대마법사의 위계를 지닌 이들도 넷이나 참전했지요. 이 정도면 태양탑이 통째로 출동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더군요."

전쟁은 몰라도 마법만큼은 레펜하르트의 전공 분야다.

레펜하르트는 계속 안색을 굳힌 채 서류철을 넘겼다.

"...키란트에 바록, 론타리온에 파킨스인가? 이거야 원, 유명인 총출동이군."

모두 8, 9서클의 경지에 다다른 제국 소속 태양탑의 대마법사들이었다. 전생 때 어릴 적의 레펜하르트가 동경하던 이들이기도 하다. 뭐, 서른 넘어서며 바로 앞질러 버려 동경의 기간이 상당히 짧긴 했지만 어쨌건 무시 못 할 강자 중의 강자들이다.

게다가, 문제는 이 마법병단의 총지휘자가 유명인 중의 유명인이라는 점이었다.

"드레자 이 영감이 마법병단장을 맡았나? 제국인도 아닌 양반이 왜 낀 거야?"

드레자 레판스틴.

올해 세수 일흔셋의 노인인 이 마법사는 라스틸 공국의 왕실 마법사이며 동시에 당대 최고, 최강의 마법사였다.

그는 현존하는 유일한 9서클의 '마스터'인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마스터급은 골치 아픈데...."

같은 오러 유저라도 실력 차이가 확연하듯, 마법사 역시 같은 서클이라도 수행자와 마스터의 차이는 상당히 크다. 9서클 마스터인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아는 레펜하르트였다. 절로 안색이 어두워졌다.

"강력한 마법사는 단신으로도 전쟁에 수많은 변수를 불어 넣을 수 있으니까요. 쉽지 않은 상대일 겁니다."

카를의 말에 레펜하르트가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 무식하게도 동원했군, 바슈탈론 황제. 제국기사단의 오러 유저 대다수에 검성으로 모자라 9서클의 마스터에 태양탑을 통째로 뽑아 오다니."

"확실한 승리를 위해서겠지요. 안타레스 공국은 분명 강력하지만, 노골적인 약점이 있으니까요."

신흥 국사 강국으로 이름 높은 안타레스 공국, 수많은 오러 유저의 존재로 각국의 부러움을 사고 있는 안타레스에도 심각한 문제점이 있었다.

바로, 마법 전력이 지나치게 취약하다는 점이었다.

"아무래도 우리나라는 마법사가 너무 없지요."

"그렇지, 세상천지 어디에 고작 5서클의 왕실 마법사가 어디 있겠나?"

카를과 레펜하르트는 헛웃음을 지으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안타레스 공국 역시 다른 나라처럼 마법병단이 있다. 레펜하르트가 직접 가르친 드워프 마법사들과 3대 학회에 속하지 못하고 자력으로 마법의 길을 걷는 방랑 마법사들을 모아 만든 마법병단이었다.

숫자는 이백 명 정도로 제법 되었지만, 문제는 그 실력이었다.

대다수의 드워프 마법사들은 아직도 3서클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 정규 마법사조차 되지 못할 견습 수준의 실력이다.

애초에 드워프나 엘프처럼 수명이 긴 종족들은 배움의 속도가 너무 느린 것이다. 그나마 저 진도도 저들이 드워프치고는 천재에 속하는 마법사였고, 또 가르치는 이가 고금 최강의 마법사 레펜하르트였기에 간신히 가능한 결과였다.

그리고 인간들로 이루어진 방랑 마법사 출신들은, 아직 그 충성도나 사상이 보장되지 않았기에 함부로 마법적 지식을 전수해 줄 수가 없었다. 레펜하르트 입장에서 쉽게 신뢰할 수 없는 이들, 그렇기에 아직까지는 간접적으로 마법 이론을 전수하며 조율하는 단계다. 구색은 갖췄지만 실전에 투입할 레벨이 아니었다.

덕분에 현재 마법병단의 최고위 마법사는 현 안타레스 마법병단장이자 왕실 마법사, 5서클 후반의 경지에 이른 마법사 웨스틴이었다.

웃기는 상황이었다. 레펜하르트야 열외로 치더라도, 시리스마저 이미 6서클 후반에 다다랐다. 그런데 왕실 마법사란 작자가 고작 5서클이라니? 타국에서 볼 때 노골적인 약점이 아닐 수 없었다.

"끙, 이럴 줄 알았으면 마탑이라도 하나 세우고 본격적으로 마법사 양성을 할 걸 그랬나?"

레펜하르트의 마법적 지식과 지혜, 경지를 감안해 마탑을 세우고 본격적으로 후진 양성을 시도한다면 아마도 대륙의 관용구가 3대에서 4대 마법 학회로 바뀌겠지.

"뭐, 그랬다면 마법 전력이야 꽤 늘었겠습니다만...."

카를도 납득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레펜하르트의 마법적 경지에 대해 잘 모르는 그였지만 지금껏 단편적으로 보인 지식만을 조합해도 레펜하르트는 최소 대마법사였다. 대륙의 관용구를 바꿀 정도라곤 생각지 않지만, 상당히 효과가 있었을 것이라는 점은 부인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껏 그러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공왕님은 대외적으론 무식한 권사신데, 그런 짓을 했다간 안타레스의 이점을 빼앗기게 됩니다."

짐 언브레이커블의 무식 전설로 여태 안타레스 공국이 얻은 이득이 얼마인가? 마법 전력을 위해 포기하기엔 너무도 아까운 이점이다.

"알고 있소. 그냥 답답해서 해 본 소리지."

툴툴대는 주군을 향해 카를이 달래듯 웃음을 건넸다.

"너무 심려치는 마십시오. 마법 전력은 약하지만, 마법사에 대한 대응법은 다들 착실히 익혔으니 어떻게든 될 겁니다. 저도 따지고 보면 공왕님의 제자 아닙니까?"

카를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빙그레 웃었다.

레펜하르트도 그를 보며 마주 웃었다.

"많이 가르치긴 했는데, 사실 제대로 효과 본 것은 자네와 시리스 정도지."

전생 때도 그랬듯이, 레펜하르트는 현생에도 시간 나는 대로 주변 지인들에게 마법을 가르쳤다.

시리스야 예전부터 꾸준히 가르쳐 와 이제 경지에 이른 마법사가 되었다. 그리고 마켈린과 아틸카에게도 전생 때처럼 틈틈이 마법 지식을 전수했다.

물론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직접 마법을 구사할 수 있는 이는 시리스 한 명뿐이다. 마켈린과 아틸카는 어디까지나 마법에 대한 지식을 습득할 뿐, 마법사가 된 것은 아니다.

신성력은 마력과 충돌하니 마켈린이 직접 마법을 구사할 순 없고, 트롤 주술도 신성력 정도는 아니지만 마법과 그리 궁합이 좋질 않다. 하지만 마법을 쓸 수 없더라도 그 지식을 얻고 이론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마법사를 상대할 때 굉장히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는 셈이다.

타시드 경우, 이번 생애엔 애초에 가르치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결과가 뻔하니까.

대신 이니야를 가르쳤는데....

-으아, 못하겠는데요....

아무래도 한 분야에 절대적 재능을 지닌 이는 그만큼 다른 영역에 취약한 모양이었다. 시리스처럼 엘류시온의 목소리로 연산력을 높이고 거의 주입식에 가깝게 마법 감각을 가르쳤는데도 그녀는 마법을 쓰지 못했다. 고금 최강의 마법사와 상식을 초월한 고대의 아티팩트로도 커버가 안 될 만큼 그녀는 재능이 없었던 것이다.

솔직히 정령술과 오러가 그 정도 수준인데 굳이 마법 익힐 이유가 없기도 하다. 그래서 이니야도 마법의 총론 정도만 이해해 대對마법사 전투에 대한 개념 정도만 잡는 정도로 끝냈다.

또한 이번 생애의 레펜하르트는 인간 동료도 잊지 않았다. 카를이며 실란, 러스에게도 틈나는 대로 마법 지식을 전수했다. 신관인 실란이나 타고난 검사인 러스는 마켈린이나 이니야와 마찬가지로 대마법사전에 대한 개념을 잡는 정도로 끝냈지만 카를은 달랐다.

"그 기물, 정말 좋더군요. 엘류시온의 목소리라고 하던가요?"

시리스와 마찬가지로 엘류시온의 목소리로 연산력을 높인 카를은 벌써 3서클의 마법까지 구사하는 견습 마법사 수준이 되어 있었다.

재상의 업무 다 보고, 틈틈이 밤일 대비로 허리 단련하고, 기사로서의 버릇 때문에 가끔 검도 휘두르며, 그래서 침대에 눕기 전 잠시 머리도 식힐(!) 겸 마법서를 들여다본 정도인데 저 수준이다. 이래서 원래 머리 좋은 놈은 뭘 해도 된다고 하는 모양이었다.

"마법 전력은 낮지만 엘프 정령군의 정령술은 충분히 마법과 비견될 만큼 범용적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렐하드 공과 이니야 양에게도 따로 전략을 전해놓았으니 어떻게든 될 겁니다."

레펜하르트를 안심시키며 카를이 들고 있던 서류철을 놓았다. 그리고 이번엔 커다란 지도를 테이블 위에 펼쳤다.

레펜하르트가 눈을 빛냈다.

"오? 드디어 안타레스 전도가 완성되었는가?"

"예, 다행히 시기를 맞출 수 있었습니다."

카를이 꺼낸 것은 대륙 서부 전역을 정확하게 그려놓은 군사 지도였다.

보통 여행용 지도는 대략적인 방위와 거리 정도가 두루뭉술하게 그려져 있어 그리 신뢰도가 높지 않지만, 전쟁에 임해 그런 지도를 사용하는 것은 실로 곤란하다. 각국에서도 그런 이유로 군사용 지도는 거액을 들여 정확하게 제작하며, 또한 그 모든 지도는 국가 기밀로써 엄중히 관리된다.

카를이 펼친 이 지도는 그런 군사 지도들과 비교해도 월등할 정도로 뛰어나게 제작된 것이었다. 일단 거리와 축적이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정확한 데다가, 이 지도는 타국의 군사 지도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었다.

지도 옆에 서책 하나를 꺼내들며 카를이 감탄사를 흘렸다.

"트롤들에게 이런 재주가 있을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서책에는 안타레스와 크로방스 전역의 각 지형에 따른 기상 변화와 국지적인 지형 변화가 모두 예측되어 적혀 있었다. 쉽게 말해 어느 지역에 어느 시기에 비가 오고, 안개가 끼고, 샘이 마르고 무더위가 찾아오며 폭설이 내릴 지까지를 전부 예상한 기상 예보집이었다.

모두 흙을 숭상하고 자연을 숭배하는 트롤 주술사들의 작품이었다.

자연의 흐름에 민감한 트롤 구루들은 봄이 오면 여름을 예상하고 가을을 파악하며 겨울을 준비할 수 있다. 물론 구루들의 능력도 한계는 있어 한 해 단위로만 예상이 가능했지만, 그렇다 해도 무시무시한 능력이 아닐 수 없었다.

카를이 혀를 내둘렀다.

"...정말이지 반칙이란 느낌마저 듭니다."

전쟁을 수행함에 있어 기상 변화가 얼마나 큰 변수가 되는지 잘 아는 카를이다. 전쟁 도중 언제 비가 오고, 언제 날씨가 궂어질지 알 수 있다니? 책사에게 있어 이 정보는 황금과도 맞바꿀 수 없는 귀중한 것이다.

반면 레펜하르트는 그저 눈만 껌뻑일 뿐이었다.

'듣고 보니 확실히 그렇단 말이지. 난 왜 전생 때는 저 생각을 못 했을까?'

그야, 당시의 레펜하르트는 마음만 먹으면 기상 변화를 자기 손으로 바꿔 버릴 수 있었으니 신경 쓸 이유가 없었겠지.

카를이 지도 위에 각국의 부대를 형상화한 모형을 올려놓기 시작했다.

"일단 바슈탈론 제국군의 전력은 둘로 나뉘었습니다."

삼만의 병력 모형이 크로방스 왕국 서부 국경, 차탄 공국와의 국경선 위에 놓였다.

"황태자 길리우스가 직접 지휘하는 삼만 제국군은 서쪽으로 진군할 예정입니다. 검성 바나텔을 비롯한 여덟 오러 유저 역시 모두 이쪽에 포진하고 있지요. 하지만 마법병단은 둘로 나뉘었더군요."

3대대의 마법병단 중 1대대가 뒤로 빠졌다.

"9서클의 마스터, 드레자가 지휘하는 마법병단 한 개 대대와 세이어의 신관들 절반은 이쪽이 아닌 바실리 왕국 쪽에 지원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흐음, 바실리 왕국 쪽 마법 전력이 취약하니 당연한 조치일 테지. 하지만 오러 유저를 모두 크로방스 쪽으로 보냈는가?"

레펜하르트는 의아해했다. 황제의 목표는 크로방스가 아니라 안타레스 아니었던가?

"바실리 왕국 쪽도 만만치는 않으니까요."

대꾸하며 카를이 이번엔 안타레스 공국 남부 국경, 바실리 왕국 북부에 모형을 포진시켰다.

"바실리 왕국군의 정병 오만과 오러 유저 에그라드 경이 남쪽에서 치고 올라옵니다. 거기에 신성군의 일만 기사들이 합쳤지요."

"오러 유저 한 명인가? 하긴, 지금 바실리 왕국에 더 이상의 오러 유저는 없겠지."

그나마 세 명 있던 중 한 명을 이니야가 죽여 버렸으니까.

"대신 신성군을 지휘하는 이가 그라임 왕국 최강의 오러 유저, 이라나드 공작입니다."

"그라임의 이라나드 공작?"

마법사 외에는 잘 모르는 레펜하르트지만, 이라나드 공작의 이름은 알고 있었다. 그라임 왕국 최대의 재력과 권력을 지닌 귀족이며 왕위 계승 서열 7위의 오러 유저, 전생 때 그라임 왕국군의 총사령관으로 안타레스 제국을 매섭게 몰아치던 장수 중 한 명이다.

누가 뭐래도 확고한 그라임 왕국의 2인자가, 전혀 득 될 것 없어 뵈는 성전에 참가한 것이다.

황당해하며 레펜하르트가 뇌까렸다.

"...그 양반, 세이어의 신도도 아닌 걸로 아는데? 왜 성전에 참가했지?"

카를도 동감의 뜻을 표했다.

"저도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라 따로 조사 중입니다만, 어쨌건 참전한 것은 확실합니다. 그리고 유명한 그라임의 황금기사, 유서스 경이 부사령관으로 신성군을 통솔하고 있습니다."

"황금기사야, 워낙 이쪽에 맺힌 게 많으니 빠졌다면 더 이상했겠지."

레펜하르트가 조소를 흘렸다. 카를이 고개를 저었다.

"대수롭잖게 볼 일이 아닙니다. 물론 황금기사와 공왕님이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비록 레펜하르트에게 치이고 러스에게 썰리는 등 그동안 몹쓸 꼴 많이 당한 유서스지만, 그렇다 해도 그는 분명 대륙 최강의 마검사이며 오러 유저와 비등한 전력이다.

"마검사는 그 특성상 오러 유저와의 대결보다는 다수와 다수가 붙는 전쟁터에서 더욱 위력적인 존재입니다. 오러 유저와 동급의 존재가 대마법사처럼 마법을 써 댈 테니까요."

"뭐, 무시한다는 소리는 아닐세. 그냥 예상했던 대로라는 거지."

"그리고 세이어의 성기사단 오천도 바실리 왕국 쪽에 지원하는 모양입니다. 지휘관으로 요 근래 유명세를 떨친 성기사, 크리스틴 경이 맡았다는군요."

"...낯익은 얼굴이 자꾸 보이는군. 보쌈이 안 되니까 강탈을 노렸나?"

"아니, 굳이 실란 대주교의 일이 아니더라도 크리스틴 경은 분명 세이어 교단 최강의 성기사입니다만... 레펜하르트 님이 보기엔 그놈이 그놈 같아 보일지 몰라도 크리스틴 경은 강력한 전력입니다. 솔직히 전성기의 저보다도 훨씬 강한데요?"

그동안의 만남이 실란 납치, 실란 보쌈, 실란 스토킹뿐이라 영 퇴색되는 감이 없지 않지만 크리스틴은 사실 대륙 전역에서 이름을 떨치는 강자 중 하나인 것이다. 크로방스 왕국 내에서만 조촐하게(?) 명성을 떨치던 기사 중의 기사, 카르사스 공자보다는 확실히 윗줄의 강자다.

겸손을 표하는 카를을 향해 레펜하르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냈다.

"내 감각으로는 검을 놓았다고 주장하는 지금의 자네가 예전보다 훨씬 강해진 것 같은데, 카를 재상?"

손을 내두르며 카를이 얼토당토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에이, 그야 체력이나 근력은 그때보다 낫겠지만 검을 놓은 지가 몇 년인데요. 상대도 안 될 겁니다."

"요즘도 가끔 수행하는 모양이던데?"

"그야 습관이니까... 하지만 언제나 상대도 되지 않고 깨질 뿐인데요? 그나마 맞상대가 가능한 것은 아스레일 경이나 탈카타 근위대장 정도인데."

문득 턱수염을 매만지며 카를이 뿌듯한 웃음을 지었다.

"음, 그래도 요즘은 틸라 양의 도끼는 제법 막을 수 있게 되었군요."

레펜하르트는 실소했다.

날아오는 거대한 바위를 허공에서 둘로 쪼개는 틸라의 도끼를 인간의 몸으로 막았다는 것이 대단한 위업이라는 생각은 안 드는 모양이었다. 하긴, 주변의 인간이 레펜하르트니 러스니 제라드니 하는 괴수들뿐이니 그럴 법도 하겠다.

"여하튼, 딴소리는 그만하고 계속 말씀드리겠습니다."

카를이 정색하고 다시 모형에 손을 가져갔다.

"신성군과 세이어 성기사단이 합류한 바실리 왕국 측 전력은 육만 오천, 일단 알려진 오러 유저가 둘에 오러 유저급 마검사와 성기사가 둘이지요. 오러 유저끼리의 대결에서야 밀리겠습니다만, 일반적인 기사가 상대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저 둘 역시 그냥 오러 유저급 전력이라 봐도 무방합니다. 어차피 전장에서는 비슷한 힘을 발휘할 테니까요."

카를이 제국 마법병단의 모형 하나를 바실리 왕국 북부에 놓았다.

"여기에 9서클의 마스터, 드레자가 붙었지요. 마법사의 힘을 감안하면 바실리 왕국 측 전력도 결코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레펜하르트가 전도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미간을 찌푸리며 그가 중얼거렸다.

"그렇다지만 크로방스 서부 국경은 검성 바나텔에 오러 유저 여덟, 그리고 마법병단 2대대에 세이어의 정예 신관단. 그에 비해 바실리 왕국 쪽은 확실히 약한 감이 있어."

대마법사 드레자의 존재를 제외하면 바실리 왕국의 정예 전력은 오러 유저 둘에 반 오러 유저 둘이 고작이다. 역시 힘의 불균형이 심하다.

"아마도 세이어 교단이 고용한 자유 기사 출신 오러 유저들이 대거 바실리 왕국 쪽으로 참전할 것이라 예상되고 있습니다. 뭐, 그렇다 해도 확실히 크로방스 쪽에 총 전력을 보내는 것처럼 보이는 구도지요."

레펜하르트는 머리를 긁었다. 통 이해가 가지 않는 구도였다.

"황제가 미워하는 것은 나 아니었나? 왜 크로방스를 멸망시키려 하는 거지?"

카를이 고개를 저었다.

"얼핏 보면 그리 보이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닙니다."

"그럼?"

"이렇게 된 이상, 안타레스 공국은 상당수의 오러 유저를 크로방스 왕국 측에 참전시켜야 하니까요."

현재 크로방스 왕국의 오러 유저는 고작 세 명이다. 당연히 우방으로서 안타레스 공국이 도움을 줘야 한다.

특히나 검성 바나텔을 상대할 수 있는 이는 단 두 명뿐, 권황 제라드와 9서클의 마스터 레펜하르트뿐이었다. 마법사임을 감춰야 하는 레펜하르트의 특성상 사실은 제라드 혼자뿐이라고 하는 것이 맞는 표현일 터다.

"그렇군. 이렇게 된 이상 사부님이며 러스, 타시드 등 대다수의 오러 유저는 크로방스 서부 국경으로 향해야겠군?"

"그렇지요. 현재 제국군의 포진은 날카로운 한 자루 창입니다. 크로방스 영토를 점령할 생각은 전혀 없지요. 그저 폭풍처럼 밀고 갈 뿐입니다. 정예 위주로 구성되어 있으니 적진 한 복판에서 보급이 끊길 일도 없겠지요. 하지만 크로방스 왕국의 수도가 점령되고 유벨 녀석의 목이 떨어지면 안타레스 공국은 대륙 내에서 고립되어 버리게 됩니다."

전술, 전략의 개념이 약한 레펜하르트지만 그렇다고 결코 머리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바로 카를의 말을 이해했다.

"반면 바실리 왕국 측은 보병 중심에 다수의 기사단, 착실히 영토를 점유하며 전진하려는 포진이군. 안타레스의 손발을 다 자르겠다는 거군."

황제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안타레스나 크로방스의 멸망, 혹은 레펜하르트의 목이 아니다.

바로 안타레스 공국이 추구하는 이종족 우대 정책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정책은 아무리 레펜하르트가 살아남아 봤자 나라가 없어지면 사라질 정책이다.

"우리 측 주요 전력을 크로방스 수비를 위해 보내고, 적은 전력만 남아 있는 안타레스 공국 자체를 노릴 셈이군. 아무리 나 혼자 날뛰어 봐야 홀로 영토 전체를 지킬 수는 없으니."

레펜하르트는 자기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비록 스케일이 상당히 다르긴 하지만 이 전략 자체는 이미 한번 맛본 바가 있었다.

바로 전생 때 패배를 맛보았던, 인류 연합군이 취했던 전략이 아닌가?

'이 수법을 또 당하게 될 줄이야....'

이 전략의 강점은 바로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공국 자체를 노리는 줄 뻔히 알면서도 레펜하르트는 크로방스 왕국으로 오러 유저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크로방스 왕국이 무너지면 결국 안타레스 공국의 정책도 제대로 유지되지 못할뿐더러 대륙 전역에서 겨우 바뀌어 가던 이종족에 대한 인식도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게 될 테니까.

지도 위의 모형을 정리하며 카를이 말을 이었다.

"제법 잘 짠 전략입니다. 영토 쟁취나 국가 멸망 같은 목표가 아닌 이상 이 방식이 최선이니까요. 아마 저라도 반대 상황이라면 이런 식으로 전략을 짰을 겁니다."

'짰을 겁니다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저렇게 했었지, 당신.'

씁쓸해하며 레펜하르트는 카를을 바라보았다. 전생의 카르사스 대왕이 했던 짓이 새삼 떠올랐다.

"검성 바나텔이 크로방스 공격 쪽에 가담한 것도 이런 이유지요. 안타레스 공국으로부터 권황 제라드를 떼어 놓으려는 겁니다. 대신 레펜하르트 님을 확실히 상대하기 위한 카드로 대마법사 드레자를 투입한 것이지요."

검성과 권황은 규격 외의 초월적인 강자, 아무리 대마법사 드레자라지만 권황 제라드를 상대로는 승산이 확실치 않다. 반면 레펜하르트를 상대라면 확실히 처리할 수 있다고 판단될 것이다.

"과연, 듣고 보니 상당히 합리적인 포진이군."

잠깐 안색이 어두워졌지만, 레펜하르트는 이내 표정을 밝혔다. 전생 때는 분명 이 전략으로 당했었다. 눈앞에 앉아 있는 카를, 바로 카르사스 대왕에 의해서.

하지만 그 카르사스 대왕이 이제는 이쪽 편이 아닌가?

"상대할 방법은 있는 거겠지, 카를 재상?"

당연하다는 듯 카를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법이 없었다면 벌써 화해 문서 작성하고 있었겠지요. 패배가 확실한데 승부를 주장하는 책사는 없습니다. 그것은 본능적인 무장들이나 하는 일이지요."

전력적인 열세는 확실하다. 하지만 안타레스 공국의 이종족들은 현 대륙의 인간들이 가지지 못한 수많은 이점들이 있었다. 비록 몇몇은 크로방스 내전으로 인해 알려졌지만, 그렇다 해도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 훨씬 많았고 카를은 그 모든 정보를 이미 입수해 파악을 끝냈다.

반면 제국 측 움직임은 상식적인 인간의 군사학에 따르고 있다. 카를이 모르는 부분이 없다는 의미다.

기대하는 눈으로 레펜하르트가 물었다.

"그럼 우리가 이길 수 있겠군?"

"아쉽게도 그렇게 장담할 수는 없군요. 세상에 승패가 확실한 전쟁은 없습니다. 승패가 확실하다면 보통 전쟁 자체가 일어나지 않거나 학살이 일어날 뿐이니까요."

아무리 이점이 많다 해도 전략적 약세는 그 모든 것을 덮는 법이다. 그래서 카를은 현재 승패를 반반으로 점치고 있었다.

카를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지지는 않을 것이라 봅니다. '권왕이 아닌' 레펜하르트 님이 계시는 이상에는 말이죠. 아, 그런데 정말 그거, 되는 겁니까? 솔직히 듣고도 믿기지 않는데...."

카를이 말한 '그거'를 알아들은 레펜하르트가 자신 있게 대답했다.

"두 번은 무리지만, 한 번은 확실하다."

"다행이군요."

카를이 빙그레 웃었다.

"덕분에 많은 피를 흘리지 않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

3

바슈탈론 제국군이 침공해 온다!

그것도 그냥 제국군이 아니라 수많은 오러 유저에 검성 바나텔이 포함되고 온갖 기묘한 술수를 부리는 강력한 대마법사들이 다수 참전한, 무려 제국의 황태자가 직접 참전한 친정이다!

이 소식은 크로방스 국민들을 크게 동요시켰다.

이미 한차례의 내전을 겪은 국민들이었다. 그나마 크로방스 내전은 자국민들끼리의 싸움이라 군대에 의한 수탈은 그리 많지 않았다. 사실 대흉년 때문에 수탈할 것이 남지도 않았었고.

하지만 지금 쳐들어오는 이들은 타국의 군대다. 크로방스 국민들에 대한 어떠한 자비도 없을 터였다. 남자는 보는 대로 죽음당하고 여자는 강간당하며 아이들은 모두 고아가 되어 황량한 세상을 떠돌게 되리라.

공포에 질려 국민들은 국왕, 유벨 2세를 원망했다. 왜 굳이 이종족 우대 정책 같은 이상한 정책을 세워 왕국을 도탄으로 빠트리는지에 대해 원망의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는 이내 바뀌었다.

안타레스 공국의 강력 무비한 오러 유저들이 대거 크로방스를 원조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내전에서 강력함을 떨친 드워프며 오크 오러 유저는 물론이고, 그 유명한 스피리어스 경을 베어 명성을 높인 사이러스 경 등이 군세를 이끌고 크로방스 서부 국경으로 향했다.

무엇보다 들끓던 민심을 가라앉힌 것은 그 오러 유저 중 한 사람의 이름이었다.

"권황 제라드 님께서 직접 오셨다는군!"

"그렇다면 검성 바나텔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어!"

뭐, 검성과 권황의 전투를 지켜본 사람은 그 둘의 전투가 사실은 제일 두려워해야 할 부분이란 걸 잘 알 것이다. 하지만 일반 국민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저쪽에 검성이 있다면 이쪽에는 권황이 있다!

이 사실만으로도 국민들의 공포는 상당히 가라앉았다. 서부 국경이 뚫리지 않는다면 그들이 두려워할 일도 없었다.

게다가, 유벨 2세는 여기에 쐐기를 박아 확실히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일조했다.

☆ ☆ ☆

크로방스 서부 국경의 거대 요새, 파루간.

국경을 따라 세워진 3대 요새인 제스턴, 타한, 라카스를 아우르는 서부 국경지의 요충지였다.

그 요새의 중심에 세워진 거대한 병영의 한 방에서, 금발 머리의 한 청년이 작은 소녀의 도움을 받아 갑옷을 입고 있었다.

청년의 등 뒤로 돌아가 미스릴 갑옷의 매듭을 묶어 주며 소녀가 물었다.

"꼭 직접 참전할 필요가 있어, 유벨?"

청년은 바로 크로방스 왕국의 현 국왕, 유벨 2세였다. 유벨이 소녀, 사실은 몇십 살이나 먹은 성숙한 드워프 여인인 피니아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저쪽도 황태자가 직접 나섰는데, 이쪽도 국왕이 나가 주지 않으면 아무래도 사기에 영향이 있지."

뭐, 굳이 이런 이유만은 아니었다. 이게 무슨 카드 게임도 아닌데 저쪽이 황태자 카드를 꺼냈다고 굳이 국왕 카드로 맞받아 칠 이유는 없으니까.

하지만 유벨은 이번 전쟁에 직접 나설 이유가 있었다. 민심을 달래는 목적도 있었고, 군사의 사기를 올리기 위함도 있지만 그보다는....

"역시, 이 정도는 해 줘야 앞으로 국왕 짓 무난히 해 먹을 수 있지 않겠어? 안 그래도 전쟁까지 일으킨 왕이 되어 버렸는데 말이야."

갑옷을 완전히 입고 유벨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너스레를 떨었다.

한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기 위해서는 그만큼 모범을 보여야 한다. 특히 한 나라의 왕은 더더욱 그렇다. 왕은 용맹하고 현명하며 인자하고 엄격해야 한다.

그동안의 치세를 통해 유벨은 제법 현명함과 인자함, 엄격함을 보였다. 피니아의 도움과 타고난 총명함으로 그는 크로방스 역사상에서도 상당히 수위에 드는 훌륭한 통치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용맹함만큼은 보이고 싶어도 쉽게 보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전쟁터라는 무대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고대의 왕은 수시로 맹수를 단독으로 상대하며 신하들에게 용맹을 보이는 의식을 하기도 하지 않았는가?

뭐, 그러다 맹수에게 물려 죽은 왕이 하도 많이 생기고 그때마다 나라가 흔들리는 통에 저 의식은 유야무야 없어졌지만, 그렇다 해도 용맹을 과시하는 중요함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이유로, 유벨은 왕으로서 전장에 서서 자신의 용맹을 증명해야 했다. 이후 통치를 감안할 때 꼭 필요한 행위인 것이다.

"뭐, 앞으로도 모든 전쟁을 계속 내가 나설 필요야 없지. 하지만 이번은 처음이고, 그래서 의미가 있어. 아마 길리우스 황태자도 같은 이유로 친정에 나선 것일걸? 제국이라는 거대한 국가의 후계자가 되려면 이번 기회는 놓칠 수 없는 무대일 테니까."

유벨이 빙그레 웃으며 피니아의 머리칼을 매만졌다.

"너무 걱정하지 마, 피니아. 믿음직한 분이 나를 지켜 주고 있으니."

때마침 밖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건장한 50대 중반의 중년 사내가 안으로 들어섰다.

유벨이 사내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잘 부탁하오. 하츠버겐 경."

테츠발트가 죽은 이후 크로방스 최강의 기사로 왕실 기사단장을 역임하고 있는 오러 유저, 하츠버겐 경이었다. 내전 때는 어느 한쪽에 마음을 주지 못해 중립을 지키고 있었으나 정통한 왕이 나타나자 바로 충성을 맹세, 지금은 그 누구보다 믿을 수 있는 유벨 2세의 심복이었다.

"크로방스 최강의 오러 유저가 날 지켜 준다. 또 서부의 철벽 제클릭 경도 있지. 그란디아드 경이 불참한 것은 아쉽지만, 날 걱정할 필요는 없어, 피니아."

크로방스의 3대 오러 유저 중 한 명, 그란디아드 경은 이번에도 크로방스 내전 때처럼 병을 이유로 전쟁에 참가하지 않았다.

하츠버겐 경이 유벨에게 말을 걸었다.

"내전 때는 그란디아드 경도 저처럼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해 병을 핑계 댄다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움직이지 못하는 걸 보면 정말 어디가 안 좋은 모양이군요."

"뭐, 오러 유저도 사람이니 병 정도는 걸릴 수 있지 않겠소?"

"거의 안 걸립니다만, 사실 일단 걸리면 일반인보다 처리가 골치 아프지요. 신성력의 힘에 기댈 수가 없으니."

신관의 힘을 빌릴 수 없는 오러 유저는 일단 병에 걸리면 오로지 자력으로만 병상에서 일어나야 한다. 그래서 유벨도 하츠버겐도 딱히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크로방스 내전 때와 달리, 이번엔 크로방스가 제국에 패할 경우 그란디아드 경이 얻는 이득이 전혀 없는 것이다.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란디아드 가문도 불참한 것은 역시 괘씸해."

유벨이 잠시 투덜거렸다.

오러 유저 그란디아드 경뿐 아니라 그의 가문 역시 이번에 도저히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며 왕실에 사죄의 의사를 밝혔다.

그란디아드 가문뿐이 아니었다. 크로방스의 몇몇 전통 깊은 대귀족 또한 그 뒤를 따랐다. 병력이 아쉬운 크로방스 왕국 입장에서는 제법 타격이 컸다.

"하지만 대흉년으로 인해 가문이 흔들린다는데 뭐라 할 수가 있어야지? 사실 틀린 말도 아니고."

저 대귀족들이 무슨 속셈으로 국가의 존망이 걸린 일전을 감히 불참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저들이 내세운 명분은 납득할 만한 것이었다.

몇 년 전 크로방스 전역을 휩쓴 대흉년은 아직도 그 여파를 왕국 곳곳에 남기고 있었다. 전통 깊은 대귀족이라는 것은 그만큼 넓은 농토를 지니고 있다는 의미, 당연히 피해도 제일 클 수밖에 없다.

젊은 국왕을 달래며 하츠버겐 경이 빙그레 웃었다.

"일단은 눈앞의 위기를 피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폐하께서 승리의 깃발을 올리고 당당히 귀환하시면 그들의 입지도 좁아질 수밖에 없지요. 그들에 대한 처분은 그 이후 하셔도 충분합니다."

"그대 말이 옳소, 하츠버겐 경."

기분이 풀린 유벨이 마주 웃었다. 하츠버겐 경을 향해 여전히 걱정스러운 기색을 지우지 않은 피니아가 조심스레 고개를 숙였다.

"그럼, 폐하를 부탁드립니다."

사내가 피니아를 보더니 애매한 반 존대를 쓰며 입을 열었다.

"걱정 말게, 피니아 양. 폐하는 내 목숨 다 바쳐 지킬 것이니."

드워프에 대한 인권이 보장된 이래 피니아는 이제 정식으로 왕의 애첩의 지위를 얻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오랜 습관이 쉽게 사라질 리 없으니 여전히 왕실 대다수는 피니아를 어찌 대할지 몰라 애매해하고 있었다.

어쨌거나 그의 충성심은 믿을 수 있다. 피니아의 표정이 한결 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바로 밝아지진 않았다.

"그래도 전쟁터는...."

하츠버겐 경의 강함은 알고 있다. 유벨이 참전한다 해도 선두에 서서 돌격하는 것도 아니다. 확률적으로 볼 때 유벨에게 무슨 일이 생길 가능성은 낮다.

하지만 그럼에도 피니아는 근심 어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드워프 전사로서 그녀는 어릴 적부터 유벨을 단련시켜 왔다. 어디 내세워도 꿀리지 않을 강한 기사로 자라났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전장은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는 혼돈의 구역이다. 아무리 강한 기사도, 심지어 오러 유저나 대마법사라도 아차 하는 사이 눈먼 보병의 창에 찔려 죽음 당하는 일이 생기는 곳이 바로 전장이다.

"전쟁터의 눈먼 검은 아무도 피할 수 없다...라는 격언도 있어, 유벨."

유벨과 하츠버겐이 문득 눈빛을 마주했다. 두 사람 다 공교롭다는 얼굴이었다. 힐끔 창밖을 내다보며 유벨이 반문했다.

"그 격언에 후렴구 붙은 것도 알고 있잖아, 피니아?"

확실히 저 격언에는 후반부가 있다.

전쟁터의 눈먼 검은 아무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짐 언브레이커블의 육체는 눈먼 검도 뚫을 수 없다....

하츠버겐 경이 창밖의 한 첨탑으로 시선을 향하며 경외 어린 음성을 흘렸다.

"저분이 계시니,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첨탑 위에는 거구의, 노구라는 단어를 민망하게 만드는 불굴의 육체를 지닌 한 노인이 백발을 휘날리며 서 있었다.

대륙의 격언조차 바꿔 버린 무문, 짐 언브레이커블.

그 당대의 계승자이며 대륙 최강의 권사.

권황 제라드가 첨탑 위에서 지평선 너머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 ☆ ☆

뾰족한 첨탑, 사람은 고사하고 새에게조차도 아찔해 보이는 그 좁은 지지대 위를 제라드는 마치 평지처럼 편안하게 선 채 요새를 둘러보고 있었다.

턱을 매만지며 제라드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후후, 내가 참 제자 하나는 잘 두었지."

현재 제라드는 안타레스 공국과의 계약으로 왕국의 수호 무장 지위를 지니고 있다. 그러니 평소라면 아라난 그라드에서 머물러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검성 바나텔의 출진이 알려지자 레펜하르트가 그를 상대하기 위해 제라드에게 요청을 한 것이다.

-사부님, 계약 조건과는 좀 다르지만 크로방스 쪽으로 좀 가 주셨으면... 아? 벌써 짐 챙기고 계시네요?

-당연하지, 그럼 바나텔 그놈이 오는데 내가 여기서 궁뎅이 붙이고 있을 줄 알았느냐?

사부와 제자가 뜻이 일치하니 어찌 일처리가 빠르지 않을쏜가?

제라드는 신바람을 내며 바로 이곳 파루간 요새로 달려왔다. 물론 그 와중에 카를 재상과 협상을 해 돈을 더 뜯어낸 것은 물론이었다.

-재상, 출장비.

-...출장비 받으시는 것이었습니까?

-당연한 것 아닌가?

짐 언브레이커블의 아름다운 전통 중 하나는 사제지간에도 에누리가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제라드는 안타레스 공국과의 계약에서도 칼같이 정가를 지켰다. 제자가 왕인 나라라고 결코 할인가로 해 주지 않았던 것이다. 제 몫 못 챙기는 남자는 진정한 사내가 아니라는 것이 바로 짐 언브레이커블의 오랜 모토였다.

"가욋돈도 벌고 바나텔 그놈도 조지고, 일석이조지. 후후후."

피눈물 흘리는 안타레스 재무부의 원망을 뒤로한 채 제라드는 싱글벙글 웃었다.

곧 다가올 라이벌과의 결판을 떠올리니 벌써부터 근육이 불끈불끈 솟고 온 몸에 열기가 도는 기분이었다.

"자, 와라! 바나텔! 이번에야 말로 승부를 보자!"

그렇게 제라드가 한창 혼자 열을 내고 있을 때였다.

등 뒤로 한 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승님?"

30대 초반의 젊은 기사가 지붕을 타고 첨탑 위에 올라 있었다.

사부라는 호칭은 거절당했지만 스승이라 부르는 것은 허락된 남자, 사이러스였다. 웃기는 구별법이지만 자주 부르다 보니 그것도 익숙해져서, 이젠 러스도 제라드를 자연스레 스승이라 칭하고 있었다.

"너도 올라왔구나, 러스."

"예."

제라드는 무심코 다가오는 러스의 발치를 바라보았다.

첨탑의 특성상 그 지붕은 심각하게 가파르다. 가장 높은 곳을 제라드가 차지하고 있으니 사실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러스는 마치 평지를 걷는 것처럼 가파른 지붕 위에 태연히 서 있었다. 오러를 응용해 두 발과 지붕을 붙여 버린 것이다.

'저건 어떻게 하는 거야? 재주도 좋네.'

천하의 권황 제라드라도 저런 짓은 불가능했다.

그는 지금 고도의 육체 제어를 통해 균형을 잡고 있는 것이었다. 대단한 신체 능력이지만 경험 많은 오러 유저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원래 짐 언브레이커블 자체가 고도의 오러 운용과는 거리가 먼 무문이기도 하다.

반면 러스가 보이는 저 재주는 어지간한 베테랑 오러 유저라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속성 변화로 오러에 접착력을 부여하며 동시에 오러의 위력을 제한해 지붕의 파손을 막고 중력의 흐름 일부를 변화시켜야 가능한 고도의 재주다.

신기해하며 제라드가 물었다.

"너, 그거 어떻게 한 거냐?"

"예? 그냥 안 미끄러지려고 오러로 발바닥 붙였는데요?"

타고난 천재인 러스에겐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이쯤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그냥 원하면 할 수 있는 수준이다. 실제로 본인도 무심코 그냥 하는 것이지 남에게 가르치라고 하면 못할 짓이었다.

어쨌거나 그렇게 척척 걸음을 옮기며 러스가 의아해했다.

"그런데 여기서 뭐 하십니까?"

요새 도착해 짐 풀고서 갑자기 사라지더니 느닷없이 이 위에 올라와 있으니 이상하지 않을 리가 있나? 원래 첨탑 꼭대기는 깃발 휘날리라고 만든 곳이지 사람 올라가라고 있는 곳이 아니다.

"쯧쯧...."

러스의 의문에 제라드는 혀를 찼다.

이 무기명 제자가 여러모로 재능도 넘치고 노력도 열심이라 좋긴 한데, 역시 아직 어리긴 어리다. 남자의 도리를 아직 모르는 걸 보니.

가슴을 활짝 펼치며 제라드가 가르침을 내렸다.

"원래 잘난 사내는 높은 곳에 위치해 주는 것이 도리다!"

"...왜요?"

"못난 놈은 여기 올라올 재주가 없기 때문이지!"

"...."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러려니 하며 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저런 무문인데 토 달아 봐야 무엇하리?

첨탑 옆에 매달려 러스도 요새 밖을 바라보았다.

숲과 평원이 펼쳐진 드넓은 서부 국경, 그 지평선 너머로 지금 바슈탈론 제국군이 달려오고 있을 것이다.

휘이익.

바람이 불어와 러스의 머리칼을 날렸다. 서쪽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었다.

감정을 담아 러스가 중얼거렸다.

"전란을 담은 바람이로군요."

"...전란을 담긴 개뿔. 바람이 그냥 바람이지. 세상에 어느 바람이 사람들 분위기 봐서 불어 주는 경우가 있다더냐?"

"그래도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남자답지 않습니까?"

"그건 또 그러네?"

뭔가 깨달은 표정으로 제라드가 눈을 껌뻑였다. 피식 웃으며 러스는 파루간 요새 안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크로방스 서부 최대의 국경 요새, 파루간.

그곳은 이미 수많은 병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바슈탈론 제국군에 대비하기 위해 크로방스 왕국은 총 전력을 서부 국경으로 집결시켰다. 정병 오만에 각 지에서 모인 충성스러운 기사단과 하츠버겐 경과 제클릭 경 등 크로방스의 3대 오러 유저 중 두 명도 모두 서부 국경에 모였다.

국왕 유벨 2세가 이곳에 있는 만큼 왕실 기사단장인 하츠버겐 경이 굳이 왕도에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모두 출격할 수 있었다.

평소엔 마탑에서 엉덩이 뗄 줄을 모르던 크로방스 마법병단 또한 출격했다. 9서클의 대마법사, 크로방스 왕실 마법사인 에스타리드도 이 자리에 왔다. 내전 당시엔 중립을 지키던 크로방스의 진정한 강자들, 하지만 타국의 침략 앞에선 모두가 힘을 합친 것이다.

수많은 병사들과, 수많은 크로방스 기사 가문의 깃발들이 요새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 모습에 러스가 감탄을 흘렸다.

'장관이군.'

이제 저 군세는 네 부대로 나뉘어 주력은 파루간 요새에 남고 세 부대는 각자 연계된 국경 요새, 제스턴, 타한, 라카스로 흩어지게 될 것이다.

문득 제라드가 물었다.

"넌 어디로 배치받았냐?"

"타시드, 말로이드 경과 함께 타한 요새로 갑니다."

제국군의 침략에 대비해 이미 안타레스의 오러 유저 다수는 이곳 크로방스 서부 국경에 와 있었다. 인간과 드워프, 오크와 엘프며 트롤로 이루어진 이종족 혼성 연합군도 일만에 가까운 병력을 꾸려 요새 밖에 진지를 치고 출진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

요새 너머로 피어오르는 이종족 진지의 연기를 보다 말고 제라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러스에게 말했다.

"조심하거라, 러스. 아무리 오러 유저라도 정신 팔리면 칼 맞으면 훅 가는 법이니라."

"안 어울리게 걱정해 주시는 겁니까? 제자 건강에 신경 쓰는 타입으로는 안 보이셨는데 말입니다?"

기가 막혀 러스가 건방진 어투로 반박했다. 언제 자기들 몸에 그리 신경을 썼다고?

'조금이라도 우리 몸에 신경을 썼다면 그런 무자비한 구타를 할 수 있겠냐!'

하지만 제라드는 진심이었다.

"내 제자면 걱정 안 하겠는데, 네 녀석들은 물렁살이잖냐? 너도 그렇고 타시드도 그렇고... 한눈 팔다 한칼 맞으면 훅 갈 놈들을 전쟁터에 보내자니 걱정이 안 될 수가 있겠냐? 쯧쯧."

"...."

뭐,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자는 도중 칼 맞아도 생채기 좀 나고 마는 짐 언브레이커블의 무인이 아닌 이상, 오러 유저라도 전장의 칼은 항시 조심해야 한다.

러스도 표정을 바꾸고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조심하겠습니다, 스승님."

그리고 투지를 담아 씨익 웃었다.

"하지만 몸 사리고 있을 생각도 없군요."

제라드가 만족스럽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전쟁이건 뭐건 결국 스케일만 다르지 다 같은 싸움이다. 긴장하지 말고 방심하지 말고 즐기면서 살아남는 것! 이것만 지켜도 싸우다 죽어 나자빠질 일은 없느니라!"

러스의 등을 퍽 치며 제라드가 호통을 쳤다.

"자! 가거라! 비록 위대한 가르침을 주진 못했지만 네 녀석들도 엄연히 내 제자니라! 내 제자가 어디 가서 맞는 꼴은 없을 것이라 믿는다!"

신뢰 가득한 스승의 외침이었다.

물론 대답은 없었다.

"컥! 여기 첨탑 위...!"

저 아래로 떨어지며 러스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멀어졌다. 간신히 붙어 있는데 그 괴력으로 쳐 버렸으니 떨어지는 것이 당연하지.

"하하하하!"

제라드는 껄껄 웃었다. 어차피 오러 유저씩이나 되는데 고작 첨탑 위에서 떨어진다고 어떻게 될 리도 없으니까.

과연, 저 아래 러스가 사뿐히 착지하더니 투덜대며 요새 쪽으로 걸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따스한 시선을 보내며 제라드가 중얼거렸다.

"그럼 잘 갔다 오너라, 나의 또 다른 제자들아."

제45장 크로방스 서부 전선

1

차탄 공국 동부, 진달트 평원.

수많은 군대가 황량한 대지 위에 진을 구축하는 중이었다. 진지 곳곳에 제국의 깃발이 힘차게 휘날린다. 그 수많은 깃발 한가운데에 위치한 거대한 야전 천막에서, 화려한 금빛 갑옷을 입은 40대의 중년인이 참모장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보고하라."

오만한 말투로 중년인, 현 바슈탈론 제국의 유일한 후계자이며 황태자의 지위를 지닌 길리우스가 손짓을 했다. 염소수염의 사내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현재 크로방스 쪽은 총 오만의 정병을 동원, 서부 국경의 네 요새에 분산 포진한 것으로 보입니다."

"요새의 상태는 어떤가?"

"튼튼합니다. 비축 식량도 전투 물자도 모자람이 없습니다. 원래 크로방스 왕국은 전통적으로 차탄 공국과 앙숙이라 서부 국경을 방비하는 데 소홀함이 없었습니다."

"내전의 영향은 보이지 않던가?"

"서부 국경을 담당하던 총사령관은 크로방스의 오러 유저, 제클릭 경입니다. 그는 내전 도중에도 중립을 지키며 오직 국경 수비에만 신경 쓰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내전의 영향은 없다고 보는 쪽이 옳습니다."

길리우스 황태자가 턱을 매만지며 제클릭 경을 평했다.

"나라 꼴이 어찌 되건 자기 일만 하는 타입인가? 성실하고 우직하겠군."

"과연 영명하십니다, 황태자 전하. 실제로 제클릭 경은 그 성실함과 우직함으로 검술을 수행해 오러를 각성한 케이스라 알려져 있습니다."

염소수염 참모가 호들갑을 떨며 말을 받았다. 까놓고 말해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인물평이지만, 원래 윗사람 모실 때는 적절히 아부를 하는 것 또한 세상 살아가는 비결인 법이다.

과연 길리우스 황태자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흠흠, 그럴 줄 알았느니라. 그래, 저쪽의 주요 정예들의 면모는 어떠하더냐?"

"쉽게 말해 총력전이옵니다, 전하."

염소수염 참모는 차분히 크로방스의 전력을 설명했다. 크로방스의 오러 유저 두 명과 대마법사, 왕실 기사단과 마법병단이 모두 출전했다는 설명에 길리우스가 태연한 얼굴을 했다.

"예상했던 대로군. 국왕이 직접 지휘하니 당연한 이야기일 터다."

유벨 2세가 직접 참전한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었다.

제국군의 세력은 강대하다. 크로방스의 전력을 다해도 모자랄 판이다. 하지만 모든 전력을 서부로 보내 버리면 수도와 국왕을 보호할 병력이 남지 않는다. 반란의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

그럴 바엔 아예 국왕도 함께 서부 국경에 머무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만약 반란이 일어나도 국왕과 군대가 멀쩡하다면 바로 수습할 수 있을 테니까.

"게다가 지금 크로방스의 배후를 칠 만한 세력도 남아 있지 않고 말이지."

원래 크로방스 동부 국경, 글로텐 산맥은 온갖 몬스터와 산악 민족 세력에 의해 항시 신경을 써야 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야기가 달랐다. 이미 글로텐 산맥은 안타레스의 이종족이 몽땅 차지했으며 그 너머 페틀랜드까지 세력을 뻗친 바 있다.

배후랄 것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충분히 서부에만 모든 신경을 곤두세울 수 있었다.

"단지 오러 유저 그란디아드 경의 불참은 우리도 예상치 못한 부분입니다. 정말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인지, 아니면 크로방스 측에서 뭔가를 꾸미고 있는 것인지...."

오러 유저가 한 명 준다는 것은 전력적으로 볼 때 거의 대부대 하나가 통째로 사라진 것과 같은 효과를 준다. 다급한 처지의 크로방스 왕국이 귀한 오러 유저를 놀린다는 것은 역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참모장의 말에 길리우스는 속으로 웃었다.

'과연, 은의 현자가 잘해 주었군.'

손을 내저으며 황태자가 단언했다.

"그란디아드 경은 참전하지 않는다."

"어찌 확신하시는지?"

"그대는 알 필요는 없지. 어쨌건 함정 따위는 아니다. 신경 쓰지 말라고 다른 참모부에게도 전하라."

"알겠습니다, 전하."

영문은 모르겠지만 참모장은 동의하며 명에 따랐다. 황태자가 아니라면 아닌 것이다. 제국 황실의 권위는 그 정도로 넓고 깊었다.

"어차피 이쯤은 다 알고 있던 이야기니라, 참모장. 빨리 다음 건으로 넘어가게."

길리우스 황태자가 지겹다는 듯 재촉을 했다. 참모장이 긴장하며 말을 빨리했다.

"무, 물론입니다. 전하. 역시 중요한 것은 안타레스의 원군 세력인데...."

참모장이 침을 꿀꺽 삼키고 입을 열었다.

"기대했던 대로 파루간 요새에서 권황 제라드의 존재가 확인되었습니다."

참 확인하기도 쉬웠다. 첩자를 보내거나 내부 정찰을 할 것도 없었다.

그냥, 요새 첨탑 위에 보란 듯이 올라가 있었으니까.

"바나텔 공이 좋아하시겠군. 그 외엔?"

어차피 제라드가 나타날 것은 모두가 예측한 대로다.

"대륙 최연소 오러 유저, 사이러스 경의 존재도 파악되었습니다."

"바나텔 공의 피를 본 그자 말이지? 차세대 검성으로 유력하다는...."

바나텔의 목에 칼침을 놓은 이래 사이러스의 평가는 급등했다. 마치 바나텔이 제라드의 피를 처음 본 후 결국 검성으로 추대된 것처럼, 이제 세인들은 그를 바나텔에 이은 차세대 검성이 될 거라 기대하고 있었다.

"키린트 경도 좋아하겠군. 안 그런가?"

길리우스 황태자가 빙그레 웃었다. 참모장도 마주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사이러스 경이 나타나기 전까진 모두들 키린트 경을 차세대 검성으로 낙점 짓고 있었으니까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어 하지 않으실 겁니다."

"호쾌한 검투를 볼 수 있겠군. 키린트 경을 그쪽에 보내 주게."

"명하신 대로 행하겠나이다, 전하."

잠시 기대하는 눈빛을 짓더니 길리우스가 마저 질문했다.

"그리고 노예 종족 놈들 쪽은 어떤가? 안타레스 공국에는 오러를 쓰는 건방진 노예들이 다수 있다던데."

그러자 참모장의 안색이 살짝 굳었다.

"아쉽게도... 노예 종족 쪽의 전력은 아직 확실히 파악되지 않았습니다. 일단 드워프와 오크 오러 유저는 분명 와 있는 듯했습니다만...."

순간 황태자의 언성에 노기가 띠었다.

"이미 전쟁이 코앞이거늘 무슨 소리인가? 제국의 첩보 능력이 그것밖에 되지 않는가?"

"그, 그것이... 아무래도 노예 놈들은 기존 첩보 방식으로는 알아보기가 힘든지라...."

정보력에 있어 대륙 제일이라는 바슈탈론 제국이지만, 그렇다 해도 그 방식 자체는 다른 나라와 전혀 다를 것이 없다.

첩자를 내부에 투입하거나 은밀히 변장한 이들을 보내 수소문을 들어 파악하는 방식. 제국이 대륙 제일인 이유는, 저 첩자의 규모가 최대이기 때문이지 뭔가 제국만의 특별한 기술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리고 이 방식으로 인간인 제라드나 사이러스의 존재는 분명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런데 노예 종족 놈들은 이게 좀 어렵습니다."

참모장이 허겁지겁 변명을 늘어놓았다.

"인간과 달리 드워프나 오크들은 얼굴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보니... 크로방스 측의 병사들도 누가 오러 유저이고 누가 보통 병사인지 구별을 못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기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작전 수뇌부 정도 되어야 알 수 있을 텐데 아무리 그래도 거기에 첩자를 심어 놓기는 지난한 일인지라...."

"...듣고 보니 그렇겠군."

인간 오러 유저라면 저절로 정체가 양쪽에 알려질 수밖에 없었다. 일반 병사들도 충분히 얼굴을 알아볼 수 있으니까. 자존심 강한 오러 유저들은 죄 지은 것처럼 얼굴 가리고 정체 숨긴 채 진지를 돌아다니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이종족의 경우, 똑같이 진지에 돌아다녀도 알아볼 방법이 없다.

"드워프나 오크 무리에 인간 첩자를 투입시킬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짐승 같은 노예 놈들을 첩자 교육 시켜서 투입시킬 수도 없고 말이지."

"그렇습니다, 전하."

"어쩔 수 없는 일임을 이해했노라, 참모장."

"감사합니다, 전하!"

화색이 되어 참모장이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조금 기운을 얻어 말을 이었다.

"그래도 엘프 오러 유저나 상아어금니가 없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리고 칼켄이라는 오크 놈들의 수괴가 있는 것도 확인되었습니다."

"그것은 용케 알아냈군?"

"비교적 용모가 특이한 것들인지라...."

사실 타시드나 하다툼, 킨지르 같은 오크 오러 유저는 겉보기로는 보통 오크 전사들과 구별이 쉽지 않다. 분명 크고 강력해 보이지만 그래도 다들 비슷해 보인달까?

하지만 신장이 2.3미터의 우악스러운 거구, 대족장 칼켄 정도는 인간도 알아 볼 수 있는 것이다. 엘프답지 않게 가슴이 큰 이니야나 거대한 어금니로 확연히 구별되는 아틸카처럼.

턱을 만지며 길리우스가 머릿속으로 셈을 했다.

"일단 알려진 것만으로 크로방스의 오러 유저가 둘에, 안타레스의 오러 유저가 셋이군."

"예, 하지만 분명 더 있겠지요."

"제국 측 오러 유저라면 저쪽도 파악했을 터, 최소 알려지지 않은 오러 쓰는 노예 놈들이 서너 명은 더 있다고 봐야겠군."

"일단 참모부는 다섯 정도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바실리 왕국 쪽도 대비하지 않을 수 없을 테니, 안타레스 공국으로서도 그 이상의 전력 차출은 불가할 것이라 판단됩니다."

"그럼 크로방스 측의 오러 유저는 모두 열인가? 우리 측 오러 유저보다 둘이나 많군?"

"예, 알려진 대로는 말입니다. 하지만 저쪽도 우리 측에 숨겨진 전력이 있다는 것쯤은 예상했을 테니 저 정도는 준비했을 겁니다."

현재 제국에 속한 자유 오러 유저의 거취는 알려져 있지 않다. 크로방스나 안타레스나 그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으리라.

"납득할 수 있도다. 저쪽도 아주 바보는 아닐 테니까."

"실제로 안타레스의 재상, 카를이란 자는 상당한 수완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리석을 것이란 기대는 할 수 없겠지요."

카를의 이야기가 나오자 문득 길리우스가 눈을 빛냈다.

"신기하단 말이야. 어디서 그런 인물이 갑자기 튀어나왔는지... 아무리 낭중지추라는 속담이 있다지만, 세상에 인재가 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일은 없는 법인데...."

안타레스의 재상, 카를에 대해서는 전 대륙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안타레스 공국은 분명 신흥 세력이다. 국왕 레펜하르트나 사이러스 같은 강력한 오러 유저는 물론 수많은 강력한 이종족 전사들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나타나 일국을 세워 버렸으니까.

하지만 저들의 존재는 캐고 들면 그래도 이해할 수 있었다.

레펜하르트는 그 유명한 무문, 짐 언브레이커블의 후계자이고 사이러스는 명문 검가 테네스의 일원이었다. 그 강함의 근원이 있다는 의미다. 이종족 전사들 역시 오지에서 살아가던 몬스터들이라 간주하면 그 강력함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저 카를이란 자만은 도저히 근원을 알 수가 없었다.

행정학, 군사학, 정치학뿐 아니라 전략, 전술에도 능통하며 통치학에도 뛰어나다. 사실 말만 레펜하르트가 국왕이지 안타레스 공국은 사실 카를이 다스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동안의 정보를 통해 제국도 이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다.

"그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지닌 자는 홀로 생겨나지 않는 법이거늘."

지식은 서적을 통해 혼자 쌓을 수도 있지만 지혜는 선인의 위업을 통해 얻는 것, 그동안 빛을 보지 못했다고는 쳐도 어디서 수학했으며 어떤 식으로 공부했는지 정도는 뒷조사를 하면 알아낼 수 있어야 했다.

"설사 재야에 묻혀 있던 이들이라도, 함께 동문수학하던 이 정도는 알아낼 수 있어야 하는데 이상할 정도로 알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힘없는 참모장의 말에 길리우스가 기책이라도 떠오른 듯 입을 열었다.

"흐음, 원래 크로방스에 그런 인재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단지 신분을 숨기고 다른 사람인 척하고 있다면?"

"현재 알려진 바로는 전혀 일치되는 인물이 없습니다."

참모장이 바로 대답했다.

정식 참모도 아닌 길리우스가 떠올린 생각을 전문가들이 못 떠올렸을 리 없다. 이미 제일 먼저 조사해 본 것이다. 그 뛰어난 제국의 정보력으로도 차마 현재의 카를과 미청년 카르사스가 동일인이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계속 정보를 모으고 있으니 조만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길리우스가 허리를 펴고 의자에 몸을 깊숙이 뉘었다.

"뭐, 되었느니라. 알아내면 좋지만 몰라도 그만이다. 시체는 더 이상 지혜를 쏟을 수 없을 테니까."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며 길리우스가 화제를 바꿔 물었다.

"우리 군의 상태는 어떠한가?"

"황태자 전하와 함께하는 전쟁입니다. 모두가 사기충천, 당장이라도 출진할 수 있습니다."

"바실리 왕국 쪽은?"

"마법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이미 안타레스 남부 국경까지 진군, 시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좋군."

이제 양쪽에서 몰아칠 모든 준비가 갖추어졌다.

길리우스가 목을 꺾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말했다.

"전군에 알려라. 내일 아침 동이 틀 때, 일제히 국경을 넘겠노라고!"

"명을 받들겠습니다, 전하!"

참모장이 무릎을 꿇고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오만한 태도로 자리에 선 채 길리우스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성전이니 신성군이니 갖다 붙였지만 창칼 든 무리가 부딪치는 본질은 언제나 같다.

강자가 약자를 수탈하고 그 피로 배를 불리는 것.

"자, 전쟁이다!"

2

크로방스 서부 국경의 한 숲 속.

제국군 제 3연대는 숲 속에 진을 치고 막 저녁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들의 임무는 이곳에서 14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크로방스 왕국의 요새, 타한을 정찰하는 것. 요새의 수비 상황과 전력 파악이 이들의 목적이었다.

이미 한차례 소규모 정찰병들을 여럿 보내 요새 곳곳을 파악했다. 적당히 철수 준비를 하던 중 갑자기 숲 속에 짙은 안개가 끼어 진지를 구축한 것이었다. 이 정도로 짙은 안개라면 부대의 모습을 감추기에 충분할 테니까.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병사들이 천막에 주저앉아 열심히 배를 채웠다. 늦가을인 데다 안개도 끼고 또 수풀의 그림자 밑이다 보니 공기가 상당히 찼다.

젊은 병사 중 하나가 투덜거렸다.

"으음, 더운 국물이 마시고 싶네요."

나이든 병사가 젊은이를 타박했다.

"닥치고 먹게. 연기 피우면 국물 마실 입도 안 남아 있을걸?"

정찰 부대의 임무 특성상 불을 피울 수 없기에 다들 차가운 빵과 딱딱한 건육으로 배를 채울 수밖에 없다.

"그건 알고 있지만 말이죠, 이 정도 안개면 연기 피워도 모를 것 같은데."

"자네 목을 걸고 장담할 수 있는 이야기인가, 그것?"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제국의 젊은 병사는 투덜거리며 남은 빵을 입에 넣었다. 그리고 허리춤을 매만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먹은 것도 없는데 오줌만 자꾸 마렵네."

"긴장해서 그런 게야. 자네 이번이 첫 출전이지?"

"흥! 누가 긴장했다고 그러는 거요? 그냥 물을 많이 마셔서 그렇소!"

"어, 그래, 그래."

나이든 병사가 비웃음을 던진다.

"조심해! 안개가 너무 끼어 한 치 앞도 안 보인다! 이런 날씨라면 적이 나타나도 알아채기 힘들어!"

"말도 안 되는 소리! 크로방스 놈들이 지금 안개 끼는 줄 어찌 알고 여기 때맞춰 나타난답니까?"

젊은 제국병은 투덜대며 그대로 근처 나무 그늘 아래로 향했다.

나무 뒤로 숨어 바지를 내리자 소변 줄기가 시원스레 나무등치를 때렸다.

"어, 시원하... 응?"

순간 젊은 병사의 동공이 커다래졌다.

어둑어둑한 수풀 저편, 그곳에 섬뜩하리만치 빛나는 두 개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산속에서 살던 병사였기에 그것이 무엇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바로 맹수, 그것도 늑대의 눈빛이다.

"그런데... 뭔 눈빛이 호랑이만 한 거야?"

병사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 눈빛은 무려 병사의 눈높이와도 비슷한 위치에 있었다. 늑대가 이족 보행을 하는 동물이 아닌 이상, 정상적이라면 저 위치에 있을 리가 없다.

그보다 더 문제는 그 눈빛보다 더 높은 곳에 또 다른 눈빛이 빛을 발하며 그를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었다.

"저건...."

순간 바람이 불었다.

바람이 숲을 스치며 가지를 흔들어 잠시 드리운 그림자를 걷었다.

크르르릉....

으르렁대는 맹수의 소리.

병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맹수의 등 위에 탄 흉악한 얼굴이 병사를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첫 번째 사냥감이군."

병사가 알고 있던 노예들과는 전혀 다른 존재.

그 강함과 흉폭함으로 전 대륙에 공포의 명성을 떨치고 있는 이들.

안타레스의 오크들이었다.

"울프 라이...."

병사가 막 고함을 지르려던 차였다. 순간 그의 목이 피를 뿌리며 허공으로 날아갔다.

다이어울프를 탄 오크가 검에 묻은 피를 떨쳐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말 때맞춰 안개가 끼는군."

숲 전체가 흔들리며 수많은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 정도 규모의 부대가 근처까지 왔음에도 제국군 진지는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이 짙은 안개가 모든 것을 감춰 준 것이다.

선두에 선 울프 라이더, 전신이 흉터투성이인 강인한 인상의 오크가 검을 높이 들며 소리쳤다.

"가자! 위대한 형제들이여! 조상님들께 피의 제물을 바치자!"

"크하하하!"

"조상님들께 피의 제물을!"

"심장이 터질 때까지 싸워라!"

"탈카타 대장을 따라라!"

포효를 터트리며 울프 라이더들이 물밀듯이 밀려와 제국군 진지를 덮쳐 갔다. 한창 식사 중이던 병사들이 혼비백산이 되어 창칼을 들고 일어섰다.

"뭐, 뭐야?"

"으악! 적습이다!"

"안타레스 오크들이다!"

부대장이 기겁하며 갑옷도 채 입지 않고 튀어나왔다.

"저놈들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안개는 몇 날 며칠을 계속 끼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늘 새벽부터 끼기 시작한 잠시 형성된 안개일 뿐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 틈에 저들이 이곳까지 왔단 말인가?

"마치...저들이 안개를 부른 것 같지 않은가?"

다이어울프를 탄 오크 전사들이 잔혹하게 진지 여기저기를 누볐다. 병사들이며 기사들이 애써 무기를 들고 반격했지만 소용없었다. 이미 기습을 제대로 당한 데다가, 이 울프 라이더들의 실력은 그 자체만으로도 이들보다 훨씬 우위에 있었다.

"가라, 스칸달!"

울프 라이더의 대장, 탈카타가 자신의 대검을 던지며 혼을 담아 그 이름을 외쳤다. 다른 울프 라이더 역시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가라, 타르막!"

"날아라! 오루카!"

수많은 검들이 저절로 허공에 떠올라 전장 여기저기를 누비며 병사들의 피와 살을 베어 버린다.

"으아악!"

"귀신 붙은 칼이다!"

"안타레스 오크다!"

허공을 한 바퀴 휘저은 대검, 스칸달이 호선을 그리고 주인 탈카타의 손아귀로 돌아온다. 대검을 쥐고 다이어울프를 몰며 탈카타가 좌우로 참격을 날렸다.

서걱!

"커억!"

으어어억!"

두 명의 병사를 동시에 베어가며 탈카타가 호통을 쳐댔다.

"모두 죽여라! 한 놈도 살려 두지 마라!"

곳곳에서 살육전이 벌어졌다.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제국병들이 무기를 버리고 숲 여기저기로 정신없이 도주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부대장의 목을 든 채 탈카타가 호쾌하게 웃었다.

"으하하! 이것이 진정한 오크 전사의 힘이다!"

다른 오크 전사들 역시 흥분한 얼굴로 고함을 질러 댔다. 모두가 색색의 피부를 지닌, 한 일족이 아닌 다양한 오크들이 모인 부대였다. 바로 탈카타를 비롯해 대륙 전역에서 구출된 오크 검투사들이었던 것이다.

한때는 인간의 노예로 비참한 삶을 살며 서로에게 칼을 찔러 댔던 이들.

이제 이들은 위대한 검의 영혼을 깨닫고 맹수와 소통하며 자신의 무기와 대화하는 진정한 오크 전사가 되어 있었다.

즐비한 시체 위에서 탈카타가 포효했다.

"외쳐라! 우리가 승리했도다!"

"크아아!"

"조상님께 피의 제물을!"

"조상님께 피의 제물을!"

제국 침략 전쟁.

그 첫 번째 전투는 크로방스 연합군의 승리였다.

☆ ☆ ☆

쾅!

"바퀴벌레 같은 놈들이 또!"

제국군 제 3대 사령관, 지맨은 분통을 터트리며 막사 테이블을 강하게 내리쳤다.

"또 그놈의 늑대 탄 오크 놈들인가?"

부관이 마찬가지로 분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번엔 크눕 경의 부대가 당했습니다."

현재 바슈탈론 제국군은 네 부대로 나뉘어 각자 크로방스 서부 국경 요새로 진군하고 있었다.

원래 강력한 군세를 구축하고 있다면 굳이 힘을 나누어 각개격파될 위험을 무릅쓸 이유가 없다. 하지만 크로방스 서부 국경의 방비 상태는 제국군으로 하여금 전력 분산을 강제하고 있었다.

파루간 요새로부터 양팔을 뻗어 나간 것처럼 남북의 요충지에 세워진 세 요새.

제스턴, 타한, 라카스.

그 위로는 얼어붙은 동토와 깎아지른 은빛 산맥이 있으니 저 네 요새는 크로방스 서부 국경을 철통같이 지키는 강력한 성벽이었다.

고대의 인간 제국 중에는 단순 무식하게 국경 전부를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쌓는 어리석은 군주도 있었다 하지만, 사실 국경을 방어하는 데 그런 엄청난 성벽은 필요 없다. 저런 성벽은 쳐들어오는 적에 비해 이쪽의 기동력이 현저히 떨어질 때나 쓸모 있는 법이다.

기동력이 받쳐 준다면, 적절한 지형적 요충지에 튼튼한 요새를 세우고 군대의 기동력을 이용해 광범위한 영역을 방비하는 것이 제일 효율적이다.

적이 쳐들어오면 싸우러 나서면 된다.

적의 군세가 강력해 평원에서의 전투가 불가능하다면 농성을 준비하면 된다.

적들이 요새를 노리면 맞서 싸우는 것이고, 요새를 포기한다면 출전해 기습하고 다시 요새로 돌아가면 되는 것이다. 땅바닥에 진지치고 선잠 자는 침략군과 요새의 자기 방 침대에서 편한 잠자고 다음 날 아침 다시 출전하는 요새군, 어느 쪽이 사기가 높을 지는 말하나 마나다.

물론 요새를 무시하고 우회하는 전법도 있긴 하다. 농성하는 요새에 대비해 일부 군세를 남기고 바로 수도를 노리는 수법으로 승리를 거둔 장수도 인류 역사 속에 제법 있다.

하지만 크로방스 서부 국경 방어선은 그런 방식이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단 하나의 요새라면 저 방식이 통하겠지만 크로방스 서부 국경은 파루간을 머리 삼아 세 개의 요새가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체처럼 긴밀히 연계되는 위치에 세워져 있었다.

모든 요새의 지형적 위치가 사리에 맞고 방어 범위가 절묘하게 겹쳐져 있으니 제국군도 저 요새들을 무시한 채 바로 파루간을 공략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간 세 요새로부터 바로 지원군이 와 앞뒤로 적을 맞이하는 포위 상황에 처하는 것이다.

네 요새가 방어하는 범위는 국경 같은 한 줄의 선이 아니라 몇십 킬로미터에 달하는 광대한 면적의 지형이다. 만약 제국군이 요새를 무시한 채 그대로 진격한다면, 방어 지역을 진군하는 내내 크로방스 연합군은 요새에 주둔한 채 매일 치고 빠지는 수법으로 제국군을 말려 죽일 수 있으리라.

그렇게 되면 결국 방어선을 돌파해 봤자 제국군은 기진맥진할 것이고, 지친 제국군을 크로방스 연합군은 간단히 뒤를 노려 승리를 거둘 수 있다.

제국군 참모부도 바보는 아닌지라, 저 요새들을 점령하지 못하면 승리는 있을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정예 중의 정예로 이루어진 제국군, 네 부대로 나뉜다 해도 계산상 각 요새의 전력보다 월등히 높았기에 굳이 한 부대를 유지하는 위험을 무릅쓸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제국군 3대 사령관 지맨도 승리를 장담하며 타한 요새로 진군하고 있었는데....

"이러다간 요새에 도착하기도 전에 사기가 꺾이겠어!"

행군하는 내내 제국군은 기습을 받아야 했다. 저 간악한 크로방스 연합군은 기사다운 정정당당한 결투 대신 비열한 기습을 행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것도 자신의 손은 더럽히지 않고 노예 놈들을 쓰다니!"

"노예 놈들이라고 무시하기엔 피해가 너무 큽니다."

오크의 울프 라이더에 의해 입은 피해가 벌써 천 단위였다. 심야나 짙은 안개, 흐린 날만을 골라 나타나 빠른 기습 후 잽싸게 도주해 버리는 저 울프 라이더들은 제국군의 기동력으로 쫓기가 불가능했다.

"아무래도 말들은 기후에 민감한지라... 다이어울프처럼 흙탕물에서도 평소처럼 달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흙탕물이나 우천 시조차 개의치 않고 달리는 말들은 보통 명마 대열에 끼이며 귀한 존재들이다. 반면 다이어울프는 원래 산악을 뛰어다니던 야생적인 맹수, 비가 오건 눈이 오건 천둥이 치건 신경 안 쓰는 무감각한 몬스터인 것이다.

지맨 사령관이 인상을 쓰며 물었다.

"참모부에서는 왜 이런 걸 미리 파악하지 못했나? 다이어울프의 습성에 대해서는 그들도 이미 파악이 끝났을 터인데?"

제국의 참모진은 유능하다. 대륙 제일의 국가에서 가장 머리 좋은 인간들만 골라 뽑은, 엘리트 중 엘리트다. 안타레스 오크들이 다이어울프를 타고 다닌다는 것도 이미 어지간히 알려진 사실, 이런 상황쯤은 당연히 파악할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부관은 난처해할 뿐이었다.

"그것이... 다이어울프의 지구력으로는 이런 작전이 불가능했었는지라...."

다이어울프는 분명 강력한 맹수이며 말에 비해 여러모로 전장에 유리한 점이 많다. 하지만 분명 약점도 있었다.

일단 인간이 길들이기가 불가능하다는 점, 또한 고기를 먹기에 농업 문화에서는 유지가 너무 어렵다는 점도 있었지만 제일 큰 문제는 육식동물과 초식동물의 차이였다.

자연계에서 사자는 영양을 사냥한다. 사람들은 사자가 무섭게 치달려 영양의 목을 무는 광경만을 떠올리지만, 사실 그 사자는 그 영양을 사냥하기에 앞서 수십 마리의 영양을 놓친 후다.

순간적인 폭발력, 사나운 기세, 돌격력은 분명 다이어울프가 위지만 지구력이나 장거리 질주력은 도저히 말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타한 요새와 현재 제국군의 위치는 도저히 한나절에 왕복할 거리가 아닙니다. 말이라면 가능하겠지만 다이어울프의 지구력으로 그 거리는 무리지요. 그러니 미리 출격해 저희 진군 위치에 매복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부관이 황당해하며 말을 이었다.

"거기서 원하는 흐린 날씨가 안 나타나면 소규모 울프 라이더들은 그냥 진군하는 제국군의 밥이 될 뿐입니다. 실제로는 시행할 수 없는 작전이란 말입니다."

울프 라이더가 이토록 기습에 성과를 보인 것은 철저히 말들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날씨만을 노렸기 때문이었다.

만약 날씨가 맑았다면?

말만 제대로 움직여 주었다면 제국군의 대규모 기마부대는 간단히 소규모의 울프 라이더들을 격퇴할 수 있었으리라.

울프 라이더는 도망도 갈 수가 없다. 다이어울프가 전력으로 달리는 시간은 고작해야 십여 분에 불과하지만 말은 그 몇십 배나 되는 시간을 꾸준히 내달릴 수 있으니까.

"한마디로 말도 안 되는 도박 같은 작전입니다."

"...그런데 그 도박이 먹히고 있지 않은가?"

지맨의 타박에 부관이 힘없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마도 이 일대의 기후를 잘 아는 현지인을 이용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한 지역에서 오래 살아온 현명한 노인들은 그날 날씨만 봐도 다음 날 비가 올지, 해가 쨍쨍하게 뜰지 알아낼 수 있다고 한다. 뭐,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민간의 감각에 한해서다. 실제로 저 노인이 100퍼센트 완벽하게 일기를 맞힌다는 소리가 아닌 것이다. 두세 번 틀리다가도 한 번만 맞으면 사람들은 대충 날씨를 맞힌 걸로 봐 주니까.

지맨 사령관은 기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불확실한 것으로 전쟁을 치르는 바보들이라니...."

"제대로 된 전략가가 할 짓은 아니지만, 어차피 상대가 어리석은 오크란 걸 감안하면 그럴듯합니다. 그냥 이제까지는 운이 좋았겠지요."

부관의 설명에 지맨 사령관은 만족했다. 현 상황은 저런 식으로밖에는 도저히 합리적인 설명이 되지 않았으니까.

여기서 어리석은 사령관이라면 '언제까지고 운이 계속 될 리 없으니, 만약 맑은 날씨에 그놈들이 나타난다면 모두 도륙해라!'라는 명령을 내릴 것이다.

하지만 지맨은 대륙 제일의 영토와 인구를 지닌 대제국 바슈탈론에서도 고르고 고른 무인이었다.

혈통과 인맥이 있어야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는 귀족 중심 체제라는 것은 바슈탈론 제국도 마찬가지지만, 제국 정도 되면 혈통과 인맥이 받쳐 주는 귀족의 숫자도 어마어마하게 많다. 거기서 고르고 고른 이들 중 유능하지 않은 이는 없는 것이다.

"놈들의 운이 나쁘다면 그냥 물리치면 그만일 터, 굳이 신경 쓸 이유도 없다.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운이 따라 줄 가능성도 있겠지."

지맨 사령관이 부관에게 명령을 내렸다.

"전군, 중장보병을 내세워 이제부터 3교대로 보초를 선다. 말들을 쉬게 하고 대신 방어선을 굳게 둘러 습격에 항시 대비하라."

기습을 막을 수 없다면, 언제 기습이 닥쳐도 대비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춘다.

물론 이렇게 하면 맑은 날씨에 울프 라이더가 나타나도 추격전을 못 하게 되는 문제가 생기니 코앞에서 적을 놓치는 굴욕을 당하게 되지만....

"어차피 우리 목표는 타한 요새다. 놈들이 아무리 날뛰어 봐야 타한 요새를 벗어나진 못할 터, 보복은 그때 가서 하면 된다. 중간에 쓸데없이 병력을 소모할 이유는 없지."

눈앞의 감정에 휘말리지 않고 지맨은 냉철하게 판단을 내렸다.

전혀 흠잡을 곳이 없는 대처였다. 부관도 깊이 승복했다.

"그대로 시행하겠습니다, 각하."

☆ ☆ ☆

크로방스 서부 국경 요새. 타한.

검은 암석과 벽돌로 높게 쌓아 올린 이 거대한 요새 성곽에서 두 명의 남자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잘생긴 미청년 인간 검사와 녹색 피부의 우락부락한 오크 청년, 그래도 오크치고는 상당히 현명해 보이는 눈빛을 지닌 이였다.

"탈카타 쪽은 아무래도 더 이상 재미를 못 볼 것 같다더군, 러스."

"벌써 제국이 대처를 했나? 빠르네."

러스는 성벽 너머를 보며 혀를 찼다. 현재 그는 휘하의 안타레스 기사단 십 기에 인간 정병 오백을 거느리고 타한 요새에 합류해 있었다.

푸른 곰 부족의 전사 백을 거느리고 함께 합류한 타시드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제 또 한 번 들이닥쳤는데, 다들 목책 두르고 방패 들고 버티고 있어 얼쩡거리다 그냥 왔다더군. 그 정도로 버티고 있으면 날씨가 어쨌거나 못 뚫지."

"일기 예보로 재미 보는 것도 여기까진가? 너무 짧은데."

러스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비록 그리 깊이 공부하진 않았지만, 기사로 자라며 그 역시 초보적인 군사학은 익혀 두고 있었다. 전장에서의 기후 변화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쯤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소리다.

그래서 카를로부터 이 일대의 기후를 미리 알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좋아했던가? 그런데 역시 제국은 만만치 않았다.

"고작 서너 번 써먹었는데 바로 대처했단 말이지, 쳇."

"제국군이 설마 우리가 미리 기상을 알고 습격한다는 걸 알아챈 것은 아니겠지?"

"그런 건 아니야. 그냥 날씨가 어찌 되건 상관없는 가장 안전한 길을 택한 거지. 괄괄한 성격의 무인이면 하지 않을 선택지인데...."

그리고 무인의 성격은 보통 괄괄하다. 그런 성격이 아니었으면 보통 칼 밥 먹는 길을 택하진 않을 테니까.

"아무래도 저쪽 사령관도 상당히 유능한 모양이군."

현재 타한 요새로 진군 중인 제국군의 병력은 오륙천 정도로 파악되고 있었다. 반면 타한 요새의 주둔군은 일만, 농성 측이 공성보다 세 배 가까이 유리하다는 점을 파악하면 타한 요새의 승리를 낙점해도 좋으리라.

그러나 러스는 긴장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수적으로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병력의 질이 너무 달라."

비록 그간 울프 라이더의 습격으로 인해 천에 가까운 사상자를 냈다지만, 제국군 입장에서 그는 그리 큰 손실이 아니었다. 잃은 병력 대부분이 평범한 보병들. 제국군의 진짜 전력인 기사와 중장보병, 강궁병 등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반면 타한 요새의 일만 병력 중 구천은 평범한 보병이다. 일개 보병이 활을 쏜다고 정예 궁병이 되지도 않고 말을 탄다고 제대로 된 기마병이 되는 것도 아니니, 정예 전력을 파악하면 여전히 이쪽의 열세였다.

근심을 감추지 않는 친우의 표정에 타시드가 등을 툭 쳤다.

"뭐, 요새 방어는 저쪽이 알아서 잘해 주지 않겠어?"

타시드의 시선이 요새 반대쪽 성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많은 드워프 전사들이 인간 병사들을 지휘하며 요새 곳곳을 강화시키고 있었다. 드워프 오러 유저, 말로이드와 함께 온 그랜드 포지의 전사들이었다.

드워프 전사들이 열심히 인간 병사들에게 손짓하며 함께 돌들을 성벽으로 나른다. 투석전 대비용 돌들이다.

드워프 전사들을 지휘하는 말로이드, 그가 드워프와 인간 병사 모두에게 고함을 질렀다.

"다들 복창! 짱돌은 목숨이다!"

"짱돌은 목숨이다!"

"무심코 던진 짱돌에 제국군은 죽는다!"

"무심코 던진 짱돌에 제국군은 죽는다!"

드워프들이 진지하게 복창하니 인간 병사들도 분위기에 휩쓸려 함께한다. 웃기는 소리를 진지하게 따라 하니 전투를 대비해 한껏 긴장해 있는 이들도 어깨에 힘이 조금 풀린다.

말로이드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병사들을 독려했다.

"그려! 아, 공성 별거 아냐! 원래 돌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떨어지는 것이고! 떨어진 돌 맞으면 사람은 죽는 것이여!"

"그, 그렇군요! 허허허!"

인간 병사 하나가 웃음을 터트렸다. 다른 병사들도 함께 웃었다. 그 모습에 러스가 기가 막혀 중얼거렸다.

"거참, 전쟁 한번 단순하게도 만드네."

타시드가 눈을 껌뻑였다.

"틀린 말도 아니잖나? 그리고 저거, 효과 좋다고."

사기라는 것은 꼭 반드시 적의 목을 따고 그 피를 뿌리겠다는 각오로만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 이렇듯 긴장을 풀어 주는 것도 사기를 올리는 한 방편이다.

여하튼, 저런 식으로 타한 요새는 곳곳이 드워프 전사들의 손길이 닿아 한층 더 강력하게 변하는 중이었다. 타시드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방어 하면 역시 드워프지. 모의전에서 푸른 곰 전사들의 진군도 막은 양반들인데? 저 방어선은 우리 일족의 전사들도 못 뚫어."

"대신 드워프 쪽도 방어만 하지 푸른 곰의 울프 라이더를 쫓질 못했었지. 그야말로 모순이라는 고사성어 그대로군."

제국군의 발길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 당장이라도 적들의 군세가 저 평원 위로 모습을 드러낼 것 같다.

손가락을 쥐락펴락 하며 러스가 흥분을 삭이고 있을 때였다.

"러스 경, 타시드 경, 작전 회의에 참가할 시간이오!"

갑옷을 완벽히 걸쳐 입은 중년인이 성벽 위로 올라와 그들을 부르고 있었다. 러스가 송구스러워하며 놀라 고개를 숙였다.

"아, 갈린 사령관님. 그냥 전령을 보내시지 어찌 사령관께서 직접...."

중년인은 바로 타한 요새 방어 연합군을 총괄하는 갈린 백작이었다.

원래 타한 요새 주둔 사령관은 오러 유저 제클릭 경의 충성스러운 수하, 킬리언 경이지만 안타레스의 원군과 연합한 지금은 새로운 지휘 체계가 필요하기에 유벨 2세로부터 정식으로 임명받은 것이었다.

갈린 백작, 한때는 남작이었던 중년인이 너스레를 떨며 대답했다.

"다들 내일의 전투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데 어찌 사령관이라고 전령을 쓰는 호사를 누리겠소? 무슨 먼 거리도 아니고 그냥 요새 안인데. 게다가 난 할 일도 없잖소?"

실제로 갈린 백작은 현재 별로 할 일이 없었다. 그는 딱히 뛰어난 무인도 아니고 대단한 전략가도 아닌 것이다.

그가 이 요새의 총사령관을 맡은 이유는 전적으로 하나뿐이었다.

바로 안타레스 공국과 교류가 깊으며 크로방스 쪽에도 신망이 깊다는 것.

한때 옆 영지, 체타스 남작가에 의해 멸문할 뻔했던 갈린 남작가는 안타레스의 공왕, 레펜하르트에 의해 구원받고 오히려 더 큰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그 인연으로 유벨 2세의 눈에 든 그는 크로방스 정계 내에서 활약해 백작의 위계를 받은 지금, 그는 양 국의 외교를 조율하는 중요한 다리 중 하나였다.

그런 갈린 백작이기에 카를이 선택한 것이었다.

아무리 양국의 분위기가 화목하다 할지라도 서로 다른 군대가 연합하는데 문제가 없을 수 없다. 원래 타한 요새 주둔 사령관인 킬리언 경을 무시하고 안타레스 측이 지휘 체계를 잡는다는 것은 주객전도, 지나친 명예 침해다.

하지만 사이러스나 타시드, 말로이드 같은 오러 유저를 킬리언 경 밑으로 넣을 수도 없는 것이다. 아무래도 지휘를 마음 편히 할 수가 없을 테니까.

반면 갈린 백작은 양쪽 모두에게 호감을 얻고 있고 또 연장자의 위엄도 있었다. 어차피 전략 자체는 카를이 다 짜 놓은 것, 그때그때 상황 맞춰서 실행하기만 하면 되니 필요한 것은 양쪽 모두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다독일 사람뿐인 것이다.

타한 요새뿐 아니라 모든 요새의 지휘 체계는 이렇듯 카를에 의해 절묘한 인원 배치가 되어 있었다. 모두 크로방스와 안타레스 양국으로부터 불만이 없는 인선이었다. 사소한 것까지도 놓치지 않는 카를의 세심함이 돋보이는 부분이었다.

"갑시다."

"네, 사령관님."

갈린 백작을 따라 러스와 타시드가 성벽을 내려왔다. 미리 갈린 백작이 먼저 들렀었는지, 이미 말로이드도 성벽 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함께 회의실로 향하며 타시드가 물었다.

"킬리언 경은 이미 회의실에 가 있습니까?"

영지전의 인연 이후, 갈린 백작은 수시로 안타레스 공국을 들락거리며 안면을 익혀 왔다. 타시드 역시 몇 번이나 대화를 나눈 적이 있어 서로 익숙했다.

갈린 백작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 친구야 항상 성실하니까. 상사 닮아서 그런가? 제클릭 경의 수하는 모두 성격이 비슷해 보이더구려."

"깐깐해 보이긴 합디다, 음."

회의실로 들어서자 목석같은 딱딱한 인상의 장년인이 그들을 맞이했다. 원래 타한 요새 주둔군 사령관 킬리언 경이었다.

테이블로 안내하며 그가 정중하게 말을 건넸다.

"어서 오시오, 사이러스 경, 타시드 경, 말로이드 경."

러스뿐 아니라 오크인 타시드와 드워프인 말로이드에게도 그는 거리낌 없이 경의 칭호를 붙였다. 그에 대한 어색함도 없었다. 이종족을 같은 사람처럼 대하는 분위기가 충분히 널리 퍼졌다는 증거였다.

모두가 탁자에 앉자 킬리언 경이 작전 지도를 펼쳤다.

"정찰이 돌아왔소. 드디어 제국군이 하루 거리까지 진군했음이 확인되었소."

이미 모든 준비는 갖춰져 있다.

이미 모든 대응 전략도 짜여 있다.

남은 것은 마음의 각오를 다지는 것뿐.

킬리언 경이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뇌까렸다.

"내일 아침, 제국군이 타한 요새를 공략해 올 것이오."

3

"함성을 질러라!"

수천의 함성이 천지를 흔들었다. 타한 요새를 둘러싸고 수천의 제국군이 창칼을 드높이며 사기를 북돋기 시작했다. 세이어의 신관 하나가 제국군 진지에서 나타나 확성 마법으로 전군에 외침을 전달했다.

"세이어께서 그대들을 가호한다! 주신께서 승리를 약속하셨으니 패배란 있을 수 없다! 바슈탈론의 용사들이여! 세이어께 그대들의 용기를 보여라!"

동시에 신성한 빛이 수천이나 되는 제국군 전체를 뒤덮었다. 제국군에 소속된 세이어의 신관들이 용맹과 강인함을 부여하는 신성 주문을 구사한 것이다.

화아아앗!

눈부신 빛이 전신을 감싸며 세상 전체가 세이어의 은총으로 가득해진다.

보라!

신께서 굽어살핀다!

제국군 병사들의 사기가 끝 모르고 올라갔다. 그만큼 이 세이어의 빛은 강렬했다. 타한 요새 주위가 모두 빛으로 둘러싸인 듯한 장관이었다.

그 찬란한 위명을 내려다보며 러스가 구시렁거렸다.

"...그냥 빛만 요란하지 저거 효과는 거의 없잖아? 기껏해야 기침 좀 덜 하고 콧물 좀 덜 나는 정도겠구먼."

실란과 워낙 오래 함께 다녀 그도 제법 신성 주문에 대한 지식이 깊었다. 저 화려 무비한 성스러운 빛은 보는 그대로 퍼포먼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교황급도 아니고 평범한 신관 몇십 명이서 저런 엄청난 영역을 감당하려면 그만큼 신성 주문의 효력은 낮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저 신성 주문 자체에는 분명 용기를 끌어 올리는 효과가 있겠지만 물 한 항아리에 술 한 방울 타면 냄새도 나지 않는 법, 저 병사들의 사기는 전적으로 분위기 덕이다.

"하지만 어쨌거나 결과는 같겠지."

착각이건 진짜건 병사들은 용기를 얻었다. 그럼 저 신성 주문도 진짜가 된 셈이다. 제국군 쪽도 애당초 저 효과를 기대했을 터, 이대로 기세에서 밀릴 수는 없다.

과연, 타한 요새 쪽에서도 신성한 빛이 솟구쳐 올랐다. 레단티의 신관과 알포트를 섬기는 드워프 신관들이 함께 손을 쓴 것이다.

"이 땅은 우리의 것, 이 대지를 범하려는 제국군에 여신의 진노가 쏟아지리라!"

레단티의 신관들 역시 비슷한 퍼포먼스를 하며 타한 요새군 전체에 신성한 빛을 쬐여 주었다. 뭐, 드워프 신관들은 딱히 할 말이 없어 그냥 광원 효과만 보탰지만.

파아앗!

양측 모두에 신성한 힘이 깃들었다. 양쪽 모두 신들이 굽어살핌이 증명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인간들의 싸움.

제국군 3대 사령관 지맨이 지휘검을 휘두르며 개전을 선포했다.

"돌진하라! 제국의 용사들아! 저 간악한 이들의 성벽을 뭉개 버려라!"

함성과 함께 수많은 병력이 해일처럼 타한 요새로 밀려오기 시작했다.

☆ ☆ ☆

바슈탈론 제국군은 일단 공성전의 정석대로 움직였다.

화살을 성벽 위로 쏴 대어 성벽 위 방어선을 혼란시키며, 동시에 수많은 사다리와 갈고리 밧줄을 요새 성벽 위에 건다.

타한 요새의 반응도 만만치 않았다. 평범한 보병들이지만 화살비를 두려워하지 않고 모두 돌멩이를 던지고 화살을 마주 쏘아 댔다.

직업 군인도 아닌 징집병인 이들에게 이런 놀라운 용기가 생겨난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믿을 만한 이들이 화살을 위에서 모두 막아 주고 있었으니까.

"죄다 쳐 내 줄 테니까 안심하고 짱돌만 던져!"

보병들 사이로 그랜드 포지의 드워프들이 군데군데 포진해 커다란 철우산 같은 것을 휘두르고 있었다.

타한 요새 성벽 사방에 수백 개의 철우산이 우뚝 서서 깃발처럼 좌우로 정신없이 흔들린다. 그야말로 휴가 나온 파라솔 해변 같은 몰골이다. 지맨 사령관이 기가 막혀 중얼거렸다.

"저, 저건 뭐야? 저 무슨 해괴망측한 짓거리냐?"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전법, 바로 드워프 전통 화살 대응법인 '강철의 지붕'이었다. 저런 커다란 철우산이 머리 위를 단단히 지켜 주고 있으니 쏟아지는 화살 비도 거의 소용이 없다. 징집병들이 안심하고 눈앞의 적만 상대할 수 있는 이유였다.

그렇게 제국군 측이 당황하는 동안, 드워프 전사들이 열심히 철우산을 휘두르며 서로 중얼거렸다.

"그것참, 인간들은 왜 이 수법을 안 쓰지?"

"그러게? 화살 막기 딱 좋은데."

당연히 인간들의 전쟁에 이런 방법이 나오지 않은 이유가 있다. 이 철우산은 생긴 것은 딱 우산이지만 재질이 잘 단련된 드워프제 강철, 그 크기도 어마어마해 지름이 거의 2미터에 다다르고 높이는 3미터에 가깝다.

일반적인 인간이라면 감히 들 엄두도 못 낼 무게인 것이다. 대지 공명의 힘이 아니더라도 인간의 몇 배나 되는 괴력과 지구력을 지닌 드워프 전사들에게나 가능한 짓이다.

뭐, 실제로 들 힘이 있는 병사가 있다 할지라도 비효율적이긴 마찬가지다.

"아니, 뭐하러 귀한 철로 저런 걸 만든 거지? 저기 들어갈 강철이면 기사단 두셋에 모두 플레이트 아머를 입히고도 남겠군."

황당해하며 길리우스가 중얼거렸다. 인구가 적고 상대적으로 금속 생산량은 많은 드워프와 인구가 썩어 나는 인간의 인식 차이였다.

어쨌거나 화살 비가 소용없어진 것을 보며 부관이 혀를 찼다.

"쳇, 예전 전쟁에서 나무 방패를 높이 올려 저런 짓을 하는 경우는 봤지만 별 소용이 없는 방식인데...."

인간도 바보는 아니다. 드워프처럼 철로는 무리더라도, 나무를 이용해 비슷한 수법을 시도한 적은 물론 역사적으로 있었다.

하지만 금방 사라진 이유는 역시 손이 많이 가고 재료가 많이 든다는 이유였다. 어차피 갑옷 입은 기사에겐 화살이 크게 위험하지 않다. 화살을 두려워하는 건 일개 병사일 뿐.

일개 병사를 위해 일부러 물자를 들여 나무 방패를 만드느니, 그냥 희생을 감수하고 그 여력으로 기사를 강화하는 쪽이 귀족 입장에선 훨씬 편한 것이다. 어차피 평민의 목숨 따위 흔하게 널려 있는 것일 뿐이니까!

"이대로는 화살만 낭비하겠군. 궁병을 물려라! 일단 성벽 위를 정리해야겠다!"

보다 못한 지맨 사령관이 강궁병을 철수시켰다. 공성전의 정석이라면 이후 공성차나 투석기가 나서야겠지만 먼 거리를 원정 온 바슈탈론 제국군은 그런 부피 크고 거추장스러운 공성병기를 준비하지 않았다.

세상에는 그보다 훨씬 위력적이고 범용적이며, 운송에 힘이 거의 들지 않는 공성 병기가 존재한다. 밥 몇 끼 먹이고 마차 몇 대만 준비해 주면 되는 그런 병기다.

"마법사들을 불러라!"

"알겠습니다, 각하!"

전령이 명을 받아 진지 저편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제국군 진지 위에서 몇몇 사람의 그림자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태양탑의 마법사, 바슈탈론 마법병단이었다.

"마법사인가? 결국 나왔군!"

킬리언 경이 이를 악물며 등 뒤로 손짓했다. 병사 하나가 깃발을 높이 올리자 요새 안쪽 첨탑마다 두세 명의 로브 차림 사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크로방스 마법병단이었다.

바슈탈론의 마법사들이 허공에 몸을 띄운 채 저마다 영창을 시작했다.

"나는 불길을 사로잡는 자, 화염의 칼날로 적을 치노라! 플레임 블레이드!"

"불꽃이여, 적을 사르는 파괴의 노래가 되리! 매스 파이어볼!"

수십 개의 회전하는 불의 칼날이 타한 요새로 날아들었다. 그 뒤를 수많은 화염구가 뒤따랐다. 마법사들의 전매특허나 다름없는 가장 유명한 마법. 파괴 마법의 대표 격이며 가장 흔한, 그리고 가장 효율적인 공격 마법 파이어볼이었다.

타한 요새의 첨탑 위 마법사들도 빠르게 대처했다.

"대기여, 울어라! 눈물 흘려 근원의 불길을 잡을지니! 아쿠아 월!"

"이는 근원된 힘의 역전이니 모든 것이 순리대로 흐르리라! 디스펠 매직!"

크로방스의 마법사들이 저마다 자신 있는 마법으로 적의 공세를 막았다. 물의 장막이 펼쳐져 화염구를 허공에서 폭발시키고 해제 마법의 힘이 회전하는 불의 칼날을 흩어 허공에 열기를 뿌렸다.

그렇다 해도 공격하는 측에 비해 방어하는 측은 모든 것에 완전히 대응할 수 없는 법, 몇몇 놓친 화염 마법들이 성벽 여기저기를 강타했다.

쾅! 쾅! 콰콰쾅!

굴지의 요새인 만큼 타한 요새 역시 성벽과 성문에 강력한 대 마법 처리가 되어 있었다. 폭발이 일어남에도 요새 자체는 조금 그슬리기만 할 뿐 크게 손상을 입지 않았다.

하지만 병사들은 달랐다. 열풍과 폭염에 휩싸이며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어억!"

"으아아악!"

불길이 사방에서 치솟아 살타는 냄새를 뿌린다. 첨탑 위의 마법사들이 이를 갈며 공격 주문을 준비해 요새 밖으로 흩뿌렸다.

불길과 전격, 강력한 마법의 화살이 정신없이 오갔다. 대부분 서로의 마법 방어장에 막혀 허공에서 소멸되었지만 미처 막지 못한 마법들이 서로의 진지를 두들겨 댔다. 사방에 폭음과 비명, 함성과 절규가 메아리쳤다.

한층 혼란스러워진 전장을 보며 부관이 혀를 찼다.

"역시 저쪽에도 마법사가 있으면 마법에 의한 공성 능력은 큰 효과가 없군요."

동감을 표하며 지맨 사령관이 뇌까렸다.

"조금 무리해서라도 공성 병기를 들고 올 걸 그랬나?"

물론 말은 저렇게 해도, 지맨은 현 상황에서 공성기가 별 의미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공성기가 효과를 발휘하는 전장은 어디까지나 강력한 마법사나 오러 유저가 없는 국지전에 한해서이다. 지금 같은 국가 간 전쟁, 각국의 대마법사와 오러 유저가 모두 나서는 상황이라면 제대로 움직이기 힘든 공성기는 꺼내자마자 바로 오러와 마법의 밥이 될 뿐이다.

그렇다 해도 마법전으로 인해 전장은 극히 혼란스러운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그 혼란은 공격 쪽인 제국군보다 방어 쪽인 타한 요새군 쪽이 더 심했다. 제국군은 타한 요새라는 확고한 목표가 있는 반면, 요새군은 사방이 적이라 목표가 너무 많았으니까.

요새의 방어선이 흔들리는 걸 파악한 지맨 사령관이 씨익 웃었다.

"때가 되었군."

☆ ☆ ☆

전장의 화염이 점점 거세진다. 수많은 병사의 목숨을 땔감 삼아 대지를 피로 적시며 이글이글 타오른다.

"제길, 아직인가?"

성벽 위에서 날아오는 화살을 튕겨 내며 러스와 타시드가 초조하게 제국군 진지 쪽을 바라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전장으로 돌격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들은 지키는 입장, 제국군 오러 유저의 존재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요새를 비웠을 때 반대쪽에서 오러 유저가 나타나 성벽을 노린다며 맥없이 진지를 내줘 버리는 것이다.

오러 유저는 모든 상황에 대비할 수 있으며 대적할 자가 거의 없는, 카드 게임으로 치면 조커 카드와도 같은 존재다. 저쪽이 패를 보이지 않는 이상 이쪽도 꾹 참고 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러던 중이었다.

우우우웅!

제국군 진지 한쪽에서 눈부신 빛이 솟구쳤다. 강렬한 예기를 담은 은청색의 빛이 전장을 밝히며 무서운 속도로 요새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블레이드 오러!"

"오러 유저다!"

타한 요새군에서 당황 섞인 외침이 터져 나왔다.

은청색의 빛을 손에 쥔 채 30대 후반의 기사가 말을 몰고 전장으로 난입해 사방으로 오러를 흩뿌려 댔다. 순식간에 몰려있던 병력 대다수가 싹 쓸리며 혼잡한 전장 중심에 공터가 생겨났다.

제국군이 그 은청색의 빛을 알아보고 환호했다.

"중압의 기사, 키린트 경의 빛이다!"

드디어 제국군에서 오러 유저를 투입한 것이다.

곧바로 적색과 암회색의 블레이드 오러가 뒤이어 솟구치며 키린트의 뒤를 따랐다. 세 오러 유저 모두 성벽 한쪽을 노리며 무서운 기세로 돌진해 갔다.

성벽 점유를 노리는 것이었다.

오러 유저 모두가 레펜하르트나 안타레스의 오크 투사처럼 성문, 성벽을 통째로 날리는 파괴력을 보일 수는 없다. 상대적으로 약해서가 아니다. 이는 강약의 문제가 아니라 지닌 검술이나 성향의 문제, 거창을 휘두르는 타고난 괴력의 무사가 작은 단검을 예리하게 다루는 전사를 꼭 이긴다는 법은 없는 것이다.

타한 요새의 성문과 성벽은 그 자체로 강력한 석벽으로 이루어져 있는 데다가 강력한 대 물리 마법까지 걸려 있다. 아무리 오러 유저라도 오직 일격의 파괴에만 신경 쓰는 타입이 아닌 이상은 부수기가 쉽지 않으리라.

하지만, 성벽 위로 올라가 그 위를 지키는 병력을 싹 쓸어버리는 것은 어떤 타입의 오러 유저라도 할 수 있다!

바슈탈론 제국의 세 오러 유저가 달리는 기세 그대로 말 위에서 몸을 날렸다. 앞장선 오러 유저, 키린트 경이 용맹한 외침을 터트렸다.

"제국의 용사들아! 이 몸이 길을 트겠다!"

뒤 이은 두 오러 유저, 같은 제국 기사단인 프레드릭 경과 모스 경도 함께 소리쳤다.

"우리를 따르라!"

그대로 성벽으로 날아가며 블레이드 오러를 흩뿌리니 사방이 박살 나며 흙먼지가 피어오른다. 주위를 정리하며 오러 유저들이 성벽을 맨땅처럼 가볍게 박차고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러스와 타시드도 화색을 띠며 성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드디어 나왔군!"

"안 그래도 몸살 날 지경이었다!"

푸르디푸른 블레이드 오러와 선명한 청록색 검광을 무기에 머금은 채 둘은 곧장 상대를 향해 돌진했다. 성벽을 비스듬히 타고 달리며 러스와 타시드가 동시에 참격으로 허공을 갈랐다.

"반월참!"

러스의 블레이드 오러가 초승달 형태로 변해 키린트 경을 노리고 쏘아졌다.

"나도 반월참!"

질세라 타시드도 남은 두 오러 유저를 향해 오러 스킬을 발동했다.

날강도 러스가 날름 빼먹은 카메룬 경의 비기, 반월참은 타시드도 이제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다 친구 잘 둔 덕이라 하겠다.

휘이이익!

반월참의 섬광이 호선을 그리며 날아든다. 제국의 두 오러 유저가 황급히 블레이드 오러를 뻗어 공세를 튕겨 냈다.

콰쾅!

그러나 그 대가로 균형이 흐트러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도로 성벽 아래로 떨어지는 두 사람을 향해 타시드가 으르렁대며 쫓아갔다.

"안 놓친다!"

반면, 키린트 경은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다. 자세가 무너진 것은 마찬가지지만 그는 그 순간 두 발로 오러를 운용, 성벽에 찰싹 달라붙어 버렸던 것이다.

"어?"

신기해하며 러스도 같은 방식으로 성벽 위에 달라붙어 섰다.

기괴한 광경이었다. 분명 성벽은 대지와 수직으로 서 있거늘 두 오러 유저는 그 수직 성벽 위를 마치 지면인 양 자연스럽게 발 디디고 있었다.

"으윽! 저거...."

"오러 유저는 저런 것도 할 수 있나?"

"유, 유령 같아...."

근처의 병사들이 그 모습에 두려워하며 뒤로 물러서니, 자연스레 두 사람 주위에 공터가 생겼다.

대지와 수평으로 선 채, 러스가 키린트 경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키린트가 무심코 러스의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대단하군, 이런 짓 할 줄 아는 것은 나뿐인 줄 알았는데."

러스가 코웃음을 치며 한쪽 발을 들어보였다.

"흥, 이게 뭐가 어렵다고 잘난 척이오?"

중력과 수평이 된 채 한 발까지 들었음에도 자세가 전혀 무너지지 않는다. 키린트는 속으로 감탄했다. 저런 짓은 가르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저 녀석도 천재군.'

검을 겨눈 채 키린트는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아무리 전장 한복판이라지만 기사의 대결에는 필요한 예의를 지킬 의무가 있으니까.

"바슈탈론의 키린트다."

"테네스의 검을 이은 안타레스의 기사, 사이러스라 하오."

'과연, 저자가 그....

러스의 이름을 들은 키린트가 차가운 미소를 입가에 떠올랐다.

"반갑군, 사이러스 경. 대륙 최연소 오러 유저의 명성은 제국에까지 들려오고 있지."

"중압의 기사, 그 위명은 익히 들었소."

러스도 기사답게 정중한 어조로 예의를 차렸다. 하지만 표정과 달리 그의 속내는 그리 편치 않았다.

'쳇, 아직도 내 칭호는 대륙 최연소밖에 없는 건가?'

대륙 최연소 오러 각성이란 것이 분명 대단한 기록이긴 하지만, 이는 반대로 말하면 아직 애송이라는 의미도 가지는 것이다. 이미 오러 각성한 지 몇 년이나 지난 지금까지 들을 칭호는 아니다.

저쪽은 중압의 기사라는 그럴듯한 칭호가 있는데....

'난 왜 저런 식의 칭호가 안 붙는 거야?'

러스는 속으로 툴툴거렸다

원래 인간은 이름 붙이기를 좋아하는 종자인지라, 어느 정도 명성을 날리는 기사라면 당연히 이런저런 칭호가 붙기 마련이다. 심지어는 오러 유저가 아니었던 스테반조차 단호의 기사라는 칭호가 있지 않았던가?

검성이니 권왕이니 하는 어마어마한 것까지는 안 바라도, 그럴듯한 칭호 하나쯤은 기대하고 있던 러스다. 겉보기엔 싸늘한 인상이지만 은근 세간 시선을 신경 쓰는 성격이었달까? 뭐, 원래 어릴 적부터 무시당하고 살면 보통 공명심을 안 바랄 수가 없긴 하다.

'그런데 영 칭호가 안 붙는다 말이지? 아직도 안 유명한가, 나?'

내심 실망하는 러스였지만, 사실 이는 그의 유명세 탓이 아니었다.

세인들은 물론 러스에게도 칭호를 붙여 주고 싶었다. 이미 그 실력이 증명된 강력한 오러 유저, 게다가 바나텔의 피를 보며 차세대 검성으로 새롭게 떠오르는 신성이기까지 하다. 유명하지 않다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문제는, 딱히 무슨 칭호를 붙여야 할지 세인들도 애매해한다는 점이었다.

칭호를 붙이려거든 뭔가 개성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러스는 분명 대단한 강자이고 천재적인 검술가지만, 뭐랄까 기술에 개성이 없어 보이는 것이다. 쓰는 기술은 죄다 여기저기서 베껴 댄 남의 기술뿐인데, 그렇다고 따라쟁이 기사나 앵무새 기사 같은 호칭을 붙일 순 없는 노릇이다.

반면 러스만의 비기, 허공검은 개성이 너무 넘쳐서 문제였다.

당한 바나텔조차도 뭘 당했는지 모를 정도로 초월적인 비기, 그냥 뭐가 번쩍하고 목이 날아가는데 일반인은 물론이고 어지간한 오러 유저조차도 저게 뭔지 알아볼 재주가 없다.

이런 이유로 허공검을 창시하고 은근 '허공의 기사'나 '공허의 기사' 같은 칭호를 기대하고 있던 러스는 계속 대륙 최연소란 소리만을 듣고 살아야 했다. 이래서 너무 잘나도 문제라는 말이 있는 것 같았다.

'흥! 상관없다! 제국의 오러 유저마저 베어 버리면 그때는 싫어도 유명해질 수밖에 없을 테니!'

투지를 피어 올리며 러스가 먼저 공격에 나섰다.

"타아앗!"

제46장 세상은 넓고 천재는 많다!

1

쌔애액!

푸른 블레이드 오러가 파공음을 울리며 현란하게 흩뿌려졌다. 사방의 급소를 향해 파괴의 섬광이 날아든다. 키린트도 재빨리 검을 들어 공격을 막았다.

"타앗!"

퍼지는 오러 파문 속에서 러스가 계속 참격을 퍼부었다.

위인가 하면 옆이고, 아래인가 하면 휘어지며 등 뒤를 노리는 자유분방한 검격이 연신 키린트를 몰아붙였다. 러스 특유의 형태가 없는 자유로운 검술, 마음대로 검을 휘둘러도 그 이치가 어긋나지 않는 천재만의 검술이다.

반면 키린트는 철저히 제국 검술을 응용해 맞상대하고 있었다. 기본에 충실하게 자세를 유지하며 언제라도 다음 공격을 이을 수 있도록 모든 검격이 올올히 뿌려져 이어진다. 자유의 극과 격식의 극에 달한 두 달인의 검이 연달아 허공에 맞붙었다.

키린트가 감탄을 터트렸다.

"제법이구나!"

그러나 감탄과 달리, 키린트는 예측하기 힘든 자유분방한 러스의 검술을 무난히 막아 내고 있었다. 점점 러스의 안색이 굳어 갔다.

키린트가 문득 비웃음을 흘렸다.

"그렇지, 천재란 것들의 검은 대체로 이런 식이지!"

동시에 키린트의 검술이 바뀌었다. 기본에 충실하던 제국검에서 갑자기 온갖 변칙적인 궤도로 검이 날아온다.

"으윽!"

당황하며 러스는 뒤로 물러섰다.

낯선, 동시에 낯익은 검술이었다. 한 번도 상대해 본 적은 없지만 모를 수가 없는 타입의 검술, 바로 러스 자신의 것과 흡사하지 않은가?

맹렬히 러스를 몰아붙이며 키린트가 차갑게 소리쳤다.

"나 역시 그대가 나타나기 전에는 최연소 오러 유저라 불렸다!"

키린트가 오러 유저로 각성한 것은 서른한 살 때의 일, 러스 이전만 해도 저 최연소 타이틀은 바로 그가 가지고 있었다.

"어린놈이 재능만으로 오러를 각성하면 보통 검술은 이따위가 되기 마련이지!"

자신의 무기에 자신이 당하는 꼴이 된 러스가 당황하며 계속 뒷걸음질을 쳤다. 이대로 밀리다간 도저히 승기를 잡을 수 없다!

이를 악물며 러스가 자세를 고쳐 오러 스킬을 발동했다.

"질풍 찌르기!"

푸른 블레이드 오러가 회오리치며 키린트의 검광 전체를 뒤덮는다. 기세를 꺾으며 러스가 바로 후속타를 날렸다.

"혈풍의 베기!"

찌르기와 베기의 연계가 폭풍의 칼날이 되어 몰아친다.

"폭풍의 연검!"

칼날 폭풍이 오러의 빛을 발하며 혼란스럽게 키린트의 사방을 에워쌌다. 테이칸 왕국의 오러 유저, 웨를 경이 자랑하는 3단 연계기가 완벽하게 러스의 손에서 펼쳐진 것이다.

"이건 제법이구나!"

이번 기술은 위력이 심상치 않았다. 기본에 충실하게 발동된 제대로 된 오러 스킬이었다. 잽싸게 키린트도 방어에 나섰다.

"중첩의 장막!"

은청색 오러가 올올히 풀리더니 허공에서 가로세로로 엮였다. 마치 씨실과 날실로 천을 잣듯이, 오러를 세밀하게 갈라 장막을 만든 것이다.

콰콰콰쾅!

폭음과 함께 칼날 폭풍이 오러 장막에 가로막혔다.

일반적인 오러 실드라면 뚫렸겠지만, 중첩의 장막은 모든 오러를 겹겹이 중첩해 구조적으로 보강하며 몇 배나 뛰어난 강도와 탄력성을 부여한다. 두꺼운 가죽조끼는 화살이 가볍게 뚫지만 여러 겹의 비단은 뚫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폭풍의 연검을 날린 러스가 눈을 빛냈다.

'호오? 저런 식의 방어법도 있었나?'

하지만 돛에 바람 불면 뒤로 밀리는 것이 자연의 이치, 방어는 했으되 키린트는 연신 뒷걸음질을 치며 밀리게 되었다.

수세에서 벗어난 러스가 희미하게 미소를 띠었다. 승기도 잡았을뿐더러 새 기술도 하나 건졌다!

그때였다.

"이게... 이렇게 하는 건가?"

숨을 고른 키린트가 검을 들어 찌르기를 날렸다.

"질풍의 찌르기!"

은청색 블레이드 오러가 회오리치며 날아든다!

러스는 기겁했다. 자신이 보기에도 완벽한 질풍 찌르기였다.

"그리고, 이렇게였지? 혈풍의 베기!"

찌르기와 베기가 연계되며 태풍이 일어나 러스에게 불어 닥쳤다.

"폭풍의 연검!"

놀랍게도 키린트는 지금, 러스가 딱 한 번 선보인 웨를 경의 비기를 완벽하게 재현해 거꾸로 몰아친 것이다. 허구한 날 자기가 했던 짓, 남에게 당하니 그야말로 역지사지라 하겠다.

당황 속에서 러스가 무의식중에 검을 놀려 허공에 블레이드 오러를 뿌렸다.

"중첩의 장막!"

다급하다 보니 무심코 키린트가 했던 방식대로 방어한 것이다. 과연 누가 천재 아니랄까 봐 저 세밀한 오러 운용이 필요한 기술을, 러스는 딱 한 번 보고 그대로 베껴 내 허공에 재현했다. 이번엔 러스가 바람 맞은 돛단배가 되어 뒤로 밀렸다.

겨우 균형을 잡은 러스가 놀란 눈으로 키린트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한 번 보고 내 기술을...."

웃기는 건, 키린트도 똑같은 표정으로 똑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어떻게 한 번 보고 내 기술을...."

둘 다 당황한 나머지 잠시 공방이 멈췄다. 그동안도 타한 요새와 바슈탈론 제국군은 여전히 전투에 한창이다. 소란스러운 전장의 성벽 가운데, 두 사람은 서로를 당황한 채 바라보았다.

키린트가 신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그냥 비슷한 천재 정도가 아니었다 이거지...."

러스도 마주 신음하며 말했다.

"...아예 동류라 이건가?"

☆ ☆ ☆

제국의 명문 검가, 라테반 가문에서 태어난 키린트는 어릴 적부터 스승이 없었다.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그는 어떤 검술이라도 한 번 보면 따라 할 수 있었고 어떤 기술이라도 재현할 수 있었다.

덕분에 어린 키린트는 그리 열심히 검술을 수행하지 않았다. 잔소리가 심하면 가끔 연무장에 모습을 드러낼 뿐, 허구한 날 딴 짓하며 놀 뿐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강했다. 단지 재능만으로도 명문 검가, 라테반 가문의 그 누구도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재능을 인정받은 키린트는 이례적으로 어린, 스물이란 나이에 제국 기사단 입단을 허락받았다. 그리고 30대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오러를 각성하는 행운을 얻었다. 워낙 재능을 타고나다 보니 별로 열심히 수행하지도 않았는데 오러 유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만큼, 갓 오러 유저가 되었을 때의 키린트는 오만하기 그지없는 청년이었다.

그의 뛰어난 재능은 검술뿐 아니라 오러 스킬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오러양만 허용한다면, 어지간한 오러 스킬은 보자마자 바로 구사할 수 있었다. 제국 내의 경험 많은 오러 유저라도 그를 슬그머니 피해 다녔다. 승패는 둘째 치고, 자신의 기술을 훔칠 수 있는 상대를 좋아할 이는 아무도 없다.

세상에 그를 막을 이는 없었다. 있다면 오직 시간뿐, 나이가 들며 오러양만 늘어나면 저절로 대륙 최강의 무인이 될 수 있을 것이라 호언장담하던 시절이었다.

그때 그는 만났다.

한동안 은거하고 있던, 그토록 명성 높은 현 대륙 최강의 검사, 검성 바나텔을.

당시 바나텔은 숙적 제라드와의 재대결을 위해 신기술, 아포칼립스 스팅거를 연마 중이라 속세와의 연락을 끊고 있었다. 그래서 입단한 지 몇 년인 키린트도 미처 그를 만난 적이 없었다.

아무리 키린트라지만 자신이 검성 바나텔과 비견되는 것은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애당초 바나텔은 그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명성을 떨쳐온 전설의 검성인 것이다.

하지만 바나텔을 존경하지도 않았다. 그냥 먼저 태어나 먼저 강해졌을 뿐인 선배 무인이라 여겼다.

바나텔은 그런 키린트를 좋게 보지 않았다.

그는 철저히 조국을 사랑하고, 세이어를 찬양하는 바슈탈론 제국인이었다. 타국의 후배 오러 유저라면 싹수가 보이건 말건 가차 없이 죽여 버리곤 했지만, 제국의 후배 무인일 경우 마치 자신이 스승이라도 된 양 신경을 쓰곤 했다. 본인이 제자를 둘 수 없는 타입의 무인이기에 더더욱 그런 성향이 강했을 것이다.

그런 바나텔에게 키린트의 나태함은 도저히 두고 볼 수준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느 날, 바나텔이 그를 불렀다.

-한번 붙어 보자꾸나, 키린트. 네 실력이 보고 싶다.

애당초 그가 바나텔의 상대가 될 리 없다. 그래서 키린트는 정중히 거절했다. 속으로 '이놈의 노인네가 노망났나, 왜 새파랗게 어린 후배를 핍박하려 하는 거야?'라며 구시렁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바나텔은 조건을 걸었다.

-모든 힘으로 덤벼 봐라. 나는 딱, 네가 쓸 수 있는 수준의 오러양만을 쓰겠다.

키린트는 내심 비웃었다.

바나텔이 전설의 검성이자, 동시에 전설의 둔재라는 사실은 그리 비밀이 아니다. 그가 검성으로서 인간을 초월한 존재로 존경받는 것은 오로지 저 무지막지한 오러양 때문이 아니던가?

그 오러양을 동일하게 맞춘다면 그는 어떤 오러 유저도 이기지 못하리라. 하물며 오러양이 낮은 상태에서도 제국의 강자를 수시로 격파해 온 키린트의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젊은 치기도 있고 해서, 키린트는 자신만만하게 검을 들었다.

자신의 화려하고 자유분방한 검술을 마음껏 펼쳤다. 그동안 익혀온 제국 각 오러 유저들의 비기도 완벽하게 구사했다.

...죽도록 두들겨 맞았다.

바나텔이 그 넘치는 오러로 키린트를 핍박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딱, 키린트만큼의 오러양만을 썼던 것이다.

무형의 극에 다다른, 예측할 수 없는 그의 검술은 단순 무식한 바나텔의 제국검을 뚫을 수 없었다. 단순한 검술이라도 상대보다 빠르고, 강하고, 정확하면 어떤 공격이건 막을 수 있다. 아무리 온갖 페인트를 섞어 공격해도 상대의 반응이 그 페인트 모션까지 모조리 감당할 정도로 빠르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반면 키린트는 바나텔의 공격을 피하지 못했다.

뻔히 아는 궤적, 뻔히 아는 공격이지만 막으면 막은 채로 무너져 버리고 피하려 들기엔 몸이 너무 느렸다. 이제껏 모든 공격을 예측하고 먼저 피해 온 키린트였지만, 아예 검격 자체를 무자비하게 퍼부어 융단 폭격을 해버리면 피하고 말고도 없다.

기본기.

기본적인 기량.

이것이 너무도 차이가 났다. 걸레처럼 널브러진 키린트에게 바나텔은 차가운 한마디를 남겼다.

-달걀을 아무리 화려하게 던져 봐야, 바위에 부딪히면 깨진다, 애송이.

그제야 키린트는 자신의 문제를 깨달았다.

넘치는 재능으로 그동안 많은 적수를 물리쳐 왔지만 사실 그는 체력, 스피드, 근력 같은 측면에서 너무 떨어졌다.

차라리 그에게 졌던 다른 기사들, 기본기를 단련한 그들이라면 오히려 바나텔과 좋은 승부를 벌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와 달리 매일매일 수행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니까.

허탈해하는 키린트를 향해 바나텔은 가차 없이 꾸짖었다.

-그렇게 그냥 살아도 네 녀석은 강하겠지. 그럭저럭 이름난 오러 유저 수준은 유지할 수 있을 게다. 하지만 그게 네 녀석의 목표냐? 더 높은 곳을 바라볼 수 있음에도 그 자리에서 만족하겠다는 거냐?

차가우면서도, 동시에 따듯한 한마디를 남기고 그는 그대로 떠났다.

-바슈탈론 제국은 언제나 최강이어야 한다. 나는 검성의 지위가 내 사후에도 제국에 머물고 있는 것을 보고 싶구나.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이후 미친 듯이 기본기를 닦는 데 열중했다.

안 그래도 타고난 재능이 과했던 키린트다. 거기에 이제 노력이라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붙은 것이다. 고작 2년 정도였지만, 키린트는 순식간에 경험 많은 나이 든 제국 오러 유저들을 따라잡았다.

그러나 키린트는 만족하지 않았다.

여태까지와 달리, 검성이란 목표는 너무도 높았으니까.

다른 무인들보다 상대적으로 강해서는 검성의 칭호를 얻을 수 없다. 저것은 오직 대륙의 무인을 철저히 압도하는 절대 강자만이 가질 수 있는 칭호다.

그리고 그런 키린트를 보며 대륙의 무인들은 조심스레 그를 차세대 검성으로 칭했다. 재능만으로도 상대할 자가 없었던 이가, 그 누구보다도 노력한다면 과연 누가 감히 상대할 수 있겠는가?

바슈탈론 제국은 대륙 최강이다.

그러므로 제국 최강의 검사는 대륙 최강의 검사이어야 한다.

대륙 최강의 검사의 칭호, 검성은 바슈탈론 제국의 것이다!

이 믿음만으로 여태껏 달려온 키린트였다.

그런데 지금, 또 다른 차세대 검성 후보가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 ☆ ☆

성벽 위를 치달리며 러스가 허공에 검을 휘둘렀다.

"반월참! 잔월!"

검의 궤적을 따라 초승달 형태의 블레이드 오러가 허공에 응집되어 맺힌다. 그렇게 공중에 머무는 자신의 오러를 향해 러스가 일격을 날렸다.

"굉천월광!"

수십 개의 달빛이 비처럼 쏟아진다. 키린트가 양팔을 가슴으로 모으며 오러를 끌어냈다.

"레이븐 실드!"

은청색의 날개가 겹겹이 피어올라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굉천월광의 빛을 차단했다.

은청색의 날개에 레이븐, 까마귀라는 이름이 붙는 것이 좀 어색하겠지만 이는 원래 바실리 출신의 자유 오러 유저, 크로아틀 경의 비기로 원본은 회색의 날개가 펼쳐져 저런 이름이 붙었다.

지금 키린트는 방금 러스가 구사한 레이븐 실드를 보자마자 카피해 자신의 것으로 만든 것이다.

"저, 저 자식이 남의 기술을!"

멀쩡한 오러 스킬 눈앞에서 도둑맞은 러스가 이를 갈았다. 슬슬 적반하장의 격을 넘어서 장물아비 자기 집 털린 분위기였다.

키린트가 피식 웃으며 기술을 이었다.

"반월참, 잔월! 굉천월광!"

똑같은 공격이 러스에게 돌아갔다. 이번엔 러스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방어에 나섰다.

"미라쥬!"

러스의 몸체가 흐릿해지더니 굉천월광이 그의 형상 주위로 미끄러지며 엉뚱한 데로 휘었다. 방금 전 키린트가 구사한, 오러에 매끄러운 속성을 부여하며 반발력으로 상대 블레이드 오러의 궤도를 뒤트는 오러 가드 스킬, 미라쥬였다.

뭐, 어차피 저 기술 미라쥬도 원래는 테이칸 왕국의 오러 유저, 모라이스 경의 것이었다. 예전 검을 나눈 적이 있어 그때 훔친 것이니 키린트 입장에서는 도둑맞는다고 딱히 속 쓰릴 일도 없다. (속 쓰려하는 러스의 경우, 아무래도 젊다 보니 그런 경향이 좀 있었다.)

키린트가 조롱하듯 뇌까렸다.

"원숭이처럼 잘도 따라 하는군."

기가 막혀 러스가 핀잔을 흘렸다.

"댁이 할 소리는 아니지, 선배 원숭이 양반?"

서로가 서로의 기술을 카피해 대며 둘은 그렇게 싸워 댔다. 어느 정도 공방을 주고받으니 서로의 기술도 슬슬 밑천이 떨어져 갔다.

검을 섞는 와중에도 양쪽 모두 바슈탈론 제국의 오러 스킬이나 안타레스의 이종족 오러 스킬은 전혀 구사하지 않았던 것이다. 현재 적으로 마주하고 있는데, 상대에게 아군의 기술을 함부로 노출했다가 이후 원래 주인이 불리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으니까.

검을 휘두르며 키린트가 비아냥을 던졌다.

"슬슬 기술이 반복되는데?"

러스도 비웃음을 담아 대꾸해주었다.

"그쪽이야말로 아까부터 같은 기술만 반복하고 있는 것 같소만?"

역시 양쪽 다 동류다 보니 스타일도 비슷해서 쉽게 결판이 나질 않는다. 동시에 서로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또 그에 따라 똑같이 반응하다 보니 그야말로 짜고 치는 도박, 혹은 미리 수를 맞춘 검무처럼 되어 버렸다.

하지만 키린트는 그리 다급해하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껏 이런 식으로 싸운 이유는 상대, 사이러스의 재능을 알아보고 싶어 한 짓일 뿐이다.

'천재다. 진짜 천재야, 거의 나만큼이나.'

말하고 보니 자화자찬도 이런 자화자찬이 없다. 그렇지만 키린트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천재'라는 단어는 칭찬의 용도로 쓰이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내가 천재라 잘 알지. 천재란 족속은 원래 그 바닥이 얕디얕은 법이거든.'

타고난 천재는 노력하지 않는다.

노력하지 않아도 모든 것을 손에 넣을 수 있기에.

이를 가리켜 혹자는 '사자는 수행하지 않아도 강하다!'라든가 '진정한 강자는 수련하지 않는다. 수련은 오직 약자만이 하는 것!' 따위로 미화하는 경우도 있는 모양이지만 키린트는 진실을 알고 있었다.

'사자가 수행을 안 하니까, 그렇게 영양을 자주 놓치는 것 아니겠냐?'

키린트의 눈빛이 바뀌었다.

갑자기 그의 스타일도 바뀌었다.

진중한 자세, 거악처럼 뿌리내린 분위기에 차분히 가라앉은 오러의 흐름.

제국검의 자세로 돌아오며 키린트가 차갑게 중얼거렸다.

"나는 천재라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바나텔 스승님 덕분에 눈을 뜰 수 있었다."

단순하면서도 호쾌한, 순수한 블레이드 오러가 러스를 향해 뻗어 갔다. 단지 그것뿐이라면 러스도 손쉽게 피하거나 걷어 낼 수 있었겠지만 그 블레이드 오러의 끝은 미세하게 흔들리며 러스의 모든 움직임에 반응하고 있다.

"어디 피해 봐라!"

자유와 격식의 융합, 키린트는 자신의 천재적인 재능으로 제국검을 완벽히 구사하며 그 검격의 방향을 자유분방한 그의 검술로 컨트롤하는 것이다.

"이, 이런!"

천하의 러스라도 피할 방법이 없는 일격이었다. 오러 가드 스킬을 쓸 겨를도 없었다. 억지로 몸을 틀며 러스는 간신히 검을 들어 공격을 흘렸다.

파지직!

오러 파문이 퍼져 나가며 은청색 전격이 튀었다. 동시에 러스가 뒤로 10여 미터 가까이 날려 갔다. 간신히 자세를 잡고 착지했지만, 막은 두 팔은 저려 왔다.

딱딱하게 굳은 러스를 보며 키린트는 전의를 더더욱 불태웠다.

그에게 있어 이 결전은 단순히 제국의 전쟁뿐만이 아니었다.

이는 차후의 검성, 그 칭호를 얻을 자격을 가진 이를 가리는 결투이기도 하다!

"스승님의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다음 검성의 칭호는 내가 제국으로 가져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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