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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2 - 22

3

제플린 남부의 반파된 시가지.

그곳에서 황금의 기사가 푸른 검사를 상대로 광소를 터트리고 있었다.

"하하하핫!"

통쾌한 웃음을 터트리며 유서스는 계속 대검을 휘둘렀다.

엘드란이 연달아 섬광을 뿌린다. 빛의 궤적이 스치는 곳마다 도로가 녹으며 후끈한 증기를 피운다.

벌써 스무 번도 넘게 날아오는 엘드릴의 빛을 보며 러스가 치를 떨었다.

"아오! 저놈의 마력은 대체 언제쯤 고갈되는 거야?"

러스 역시 테네스 가문 출신, 마갑 엘드라드에 대해 제법 알고 있었다.

원래 엘드라드의 마력 저장량으로 엘드릴의 빛을 구사하는 것은 다섯 번 정도가 한계.

'그래서 계속 피하다 보면 기회가 올 거라 생각했는데....'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엘드릴의 빛을 풋워크로 피하며 러스는 계속 도망 다녔다. 섬광이 러스가 있던 자리를 직격하며 폭음을 울려 댔다.

유서스가 비아냥을 던졌다.

"언제까지 피하기만 할 셈이냐, 러스!"

"쳇!"

조소를 받으면서도 계속 러스는 몸을 빼는 데 집중했다.

유서스의 움직임 자체는 그리 달라진 것이 없다. 그러니 공격 자체를 적중시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파괴력을 모아 블레이드 오러를 날려도 저 두꺼운, 숫제 공처럼 보일 정도로 두터운 황금 갑옷이 모든 충격을 흡수해 버린다.

아무리 반격을 해도 먹히질 않으니 달리 선택지가 없는 것이다.

또다시 엘드릴의 빛이 러스의 좌측을 스치고 지나간다. 공격을 비껴 내며 러스가 검을 연속으로 찔러 댔다.

"세븐 스타즈!"

일곱 개의 오러가 유성처럼 날아가 유서스의 가슴에 별이 되어 박힌다. 일곱 개의 별이 연동되며 폭발을 일으키는 바로 그 순간, 러스가 곧바로 공격을 이었다.

"기간틱 블레이드!"

청색의 블레이드 오러가 길게 늘어나며 유서스의 흉갑을 노리고 날아든다. 세븐 스타즈의 폭발에 기간틱 블레이드의 파괴력을 중첩시켜 몇 배나 되는 파괴력을 낼 속셈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러스의 기대대로 흘러가 주질 않았다.

가슴에 푸른 오러의 별이 박힌 채 유서스가 계속 앞으로 나섰다. 허공에 대검을 휘두르며 또다시 섬광을 날린다.

"울부짖어라! 엘드란!"

엘드릴의 빛은 유서스가 지닌 궁극기, 비록 스파이럴 가드를 펼치지 않았다곤 해도 일격에 레펜하르트를 중상에 빠지게 했던 무시무시한 기술이다. 도저히 기간틱 블레이드 정도로는 상쇄가 불가능, 어쩔 수 없이 러스는 혀를 차며 옆으로 몸을 던졌다.

콰아앙!

폭발의 연기 속에서 애써 시야를 확보하며 러스는 툴툴거렸다.

'아, 진짜 틈이 안 나네.'

일격의 파괴력으로는 도저히 유서스의 갑옷을 부술 수가 없다. 그래서 강타의 연타로 파괴력을 쌓아 부술 생각이었는데, 그조차도 영 계획대로 되지를 않는다. 한 방 날리고 다음 공격을 준비하는 사이 바로 저 엘드릴의 빛이 날아오는 것이다.

'차라리 예전처럼 다양하게 공격해 오면 틈이 날 텐데....'

원래 유서스는 온갖 다양한 마법을 병용하며 화려한 연속 공격을 날리는 스타일이었다.

화려한 공격이란 것은 구사하는 입장에서도 꽤 허점이 생기는 법이다. 그리고 러스의 현 실력이라면 충분히 유서스의 복잡 다양한 공격의 틈새를 찾아 파고들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유서스의 전법은 아주 단순했다. 평생 익힌 검술이며 마갑 활용법은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그저 달려들면서 엘드릴의 빛만을 연달아 날릴 뿐이다.

단순한 마법이나 블레이드 오러의 연속타 정도면 러스도 회피와 동시에 반격을 노릴 수 있겠지만, 아예 최강기만 뻥뻥 때려 버리니 피하기 바빠 도저히 반격할 틈이 없다. 일격의 파괴력이 너무 높아 그 여파만으로도 상당한 피해를 주니까.

공격을 피하며 러스가 악을 써댔다.

"유서스, 이 미친 작자야! 그동안 익힌 검술은 어디다 팔아먹고 이 무슨 무식한 짓거리야?"

광기로 눈을 번들거리며 유서스가 마주 소리쳤다.

"검술을 익히는 것은 승리하기 위한 것, 이것이 네놈을 해치우기 위한 최선의 방법일 뿐이다!"

러스가 표정을 구겼다.

"끄응, 틀린 말은 아니네."

확실히 적절한 전법이라 인정치 않을 순 없었다. 기교로 맞붙는다면 아무리 유서스가 날고뛰어 봤자 러스의 상대가 될 수는 없을 테니까.

현재 러스의 검술은 가히 경지에 이르렀다. 타고난 재능에 풍부한 경험, 게다가 요 몇 달 새로운 검술의 경지를 엿보게 되어―그러니까 이니야 검술 열심히 훔쳤다는 소리다― 더더욱 실력이 올라간 후다.

파워 타입인 레펜하르트나 오크, 드워프 오러 유저들은 말할 것도 없고, 나름 기교파인 스탈라조차도 경험이 풍부해 오러 운용법이 다양할 뿐이지 검술의 기교 자체는 러스보다 밑이다. 트롤 구루, 아틸카의 기교는 러스 이상이지만 그는 오러 능력자가 아니다.

이니야를 제외하면 러스는 검술만으로는 현재 안타레스 백국 최강의 오러 유저인 것이다.

'뭐, 이니야 씨 빼곤 죄다 기교보단 파워에 매달리는 양반들뿐이라 순서가 의미는 없지만 말이지....'

하지만 저런 무식한 멧돼지 전술로 나오면 기교고 뭐고 없다.

때릴 테면 때려라, 맞아 봤자 안 아프다.

잘도 피하고 있지만 죽자고 휘두르다보면 언젠가는 한 방 맞겠지?

한 방만 맞으면 아주 엿 되는 거야.

지금 유서스의 전법이 딱 저 모양인데, 상식적으로는 병신 짓이지만 저 무식한 아티팩트의 힘이 그걸 가능하게 해 준다. 내구력도 내구력이지만, 벌써 궁극기라는 엘드릴의 빛을 서른 번 이상 날렸음에도 불구하고 섬광의 위력이 전혀 떨어지지 않았다.

껄껄 웃으며 유서스가 계속 러스를 압박해갔다.

"으하하! 고작 이 정도로 테네스의 검을 자처하는 거냐! 이 비천한 놈!"

공세를 피하며 러스가 비난을 던졌다.

"아티팩트의 힘을 빌리는 주제에 잘도 잘난 척을 하는구나, 유서스! 네놈은 수치도 모르느냐?"

유서스의 안색이 일그러졌다.

마검사로 살아오며 실로 무수히 들었던 소리.

하지만 정작 러스에게 듣고 나니 혈압이 절로 올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부끄러워서인지, 분노해서인지는 유서스 본인도 알 수 없었다.

"흥! 도구를 사용하는 걸 비난하려면 네놈도 검을 버렸어야지!"

애써 비난을 받아치며 유서스가 계속 참격을 뿌려 댔다.

러스의 표정이 점점 창백해졌다. 이렇게까지 밀리다 보니 슬슬 숨이 가빠 왔다.

"헉, 허억...."

점점 회피에 여유가 없어진다. 어떻게든 유서스의 접근을 막고 숨을 골라야 한다.

하지만 어지간한 공격으로는 접근을 막기는커녕, 늦추기도 힘들다.

'기간틱 블레이드도 안 통하고, 세븐 스타즈도 안 통하고....'

점점 거리를 좁히는 유서스를 보며 러스가 '에라, 모르겠다.'하는 심정으로 검을 등 뒤로 뻗었다.

그리고 포효를 터트렸다.

"으아아아아!"

푸른 블레이드 오러가 폭발하듯 빛을 발했다. 그대로 러스는 검을 내리그었다.

"벼락 떨구기!"

블레이드 오러가 한 줄기 번개가 되어 뇌성을 발했다. 푸른 섬광이 뒤틀린 각도로 유서스를 직격했다.

우르르릉!

하지만 유서스의 황금 갑옷에는 조금의 흠집도 나지 않았다. 제대로 힘이 집중되지 않은 푸른 뇌전이 갑옷에 튕겨 사방으로 비산했다. 엇나간 전격이 좌우의 가옥을 두들기며 폭발을 일으켰다.

러스는 혀를 찼다. 혹시나 해서 구사해 보긴 했지만....

'쳇, 이건 기간틱 블레이드만도 못하네.'

칼켄의 벼락 떨구기는 오러와 육체를 합일하며 구사하는 기술, 오러 운용법을 그대로 따라 한다 해도 칼켄의 단련될 대로 단련된 육체 없이는 제 위력이 나오지 않는다. 인간인 러스로서는 기껏 카피해 봤자 칼켄처럼 모든 위력을 한 점에 집중시킬 수가 없는 것이다.

'역시 형님이나 칼켄 공에겐 배울 게 없구먼.'

파워 타입이 아니라 기교 위주의 러스에게 무식하게 힘으로 밀어붙이는 저 두 사람의 기술은 베껴 봤자다.

그런데, 엉뚱한 데서 쓸모가 있었다.

"크하하! 이젠 쓸데없는 짓까지 하는구... 푸헉!"

빗나간 벼락 떨구기를 맞은 좌우 가옥이 붕괴되며 유서스를 덮쳐 버린 것이다. 산사태가 일어난 것처럼 무너진 가옥의 파편이 와르르 유서스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파편 더미를 헤치고 나오며 유서스가 이를 갈았다.

"이 자식, 이 따위 잔재주를!"

러스가 눈을 멀뚱거렸다.

'어라? 이런 기대하지도 않았던 효과가?'

뭐, 그래 봤자 치명타는 고사하고 상처도 못 주었으니 별 의미는 없다. 그냥 시간 좀 번 것에 불과하달까?

덕분에 잠시 전투가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잽싸게 숨을 고르며 러스는 주변 상황을 살폈다.

'다른 쪽은 어떻지?'

둘의 전투 탓에 이미 주변은 초토화된 상태였다.

탈주 노예들은 광장에서 벗어나 거리 곳곳에 숨어 있었고 말로이드와 제플린 나이츠 역시 유서스의 공격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말로이드가 잘 싸우고는 있었지만, 아무래도 다섯 명을 동시에 상대하다 보니 쉽사리 승기를 잡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말로이드 경의 지원을 기대하긴 힘들겠고....'

러스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몸에 쌓인 파편들을 털어 낸 유서스가 다시 거리를 좁혀 오고 있었다.

'한 번 더 건물로 깔아뭉개 봐? 그나마 먹힌 거라곤 그것밖에 없는데.'

다행히 아까부터 주위의 건물에는 아무 인기척도 없었다. 다들 진작 집 버리고 도망간 지 오래였다.

원래 오러 유저의 전투를 보면 세 블록쯤 물러서서 그림자도 비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이 시대의 상식이었다. 싸우는 여파만으로도 근처 건물 한두 개쯤은 우습게 부숴 버리는 괴수들이니까. 그러니 설사 건물을 부순다 해도 인명 피해가 더 일어날 일은 없었다.

하지만 러스는 이내 포기했다. 아까는 심적으로 전혀 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무방비 상태라 유서스도 발을 멈췄지만, 이미 알고 있으면 먹힐 리가 없다.

'어차피 정교한 공격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무대포로 밀어붙이는 식인데, 건물이 무너지건 말건 돌진하면 그만일 테지.'

엘드란을 든 채 유서스가 차갑게 뇌까렸다.

"움직임이 둔해졌구나, 러스! 아무리 네놈이라도 슬슬 지치는 모양이지?"

반박할 수가 없었다. 비록 숨을 골랐다고는 해도 여전히 기혈의 흐름이 불안정했다. 블레이드 오러 역시 아까에 비해 훨씬 위세가 약해져 있다.

"시끄럿!"

악을 쓰며 러스가 몸을 날렸다. 유서스도 다시 섬광을 쏟아 댔다. 섬광이 대지를 몇 번이나 불사르고 푸른 블레이드 오러가 황금 갑옷을 수십 차례 두들겼다.

엘드릴의 빛, 그 파괴의 섬광이 조금씩 러스를 스치고 지나가기 시작했다.

폭음이 쉴 새 없이 울렸다. 러스의 전신이 조금씩 피로 물든다. 이대로 밀리다간 아무것도 못 하겠다 싶어 그는 이를 악물었다.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뿐인가....'

아무리 두꺼운 갑옷으로 전신을 감싸고 있다지만, 심지어는 갑옷의 틈새조차도 알 수 없는 소재로 막혀 있다지만 딱 하나 허점은 남아 있었다.

'저 투구의 눈 부분.'

저기만큼은 아무리 고대의 기물이라도 뚫어 놓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엘드릴의 빛을 피하며 러스는 정신을 집중했다.

눈을 공격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급소를 피하게 되어 있다. 게다가 유서스는 전투에 문외한도 아니고 단련된 기사다. 아무리 러스의 기교가 뛰어나다 한들, 대놓고 공격하면 방어 정도야 쉽게 하겠지.

방법은 하나뿐, 유서스의 인식 밖에서 보이지 않는 공격을 하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러스에겐 그런 기술이 있었다.

'팬텀 블레이드라면....'

공간을 뛰어넘는 러스의 궁극기, 일단 성공하면 회피가 불가능한 이 기술이라면 설사 유서스라도 피하거나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 일단 성공만 하면.

'크으, 너무 성공률이 낮아서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 둔 건데....'

대신 실패하면 끝장이다. 딜레이가 너무 커 엘드릴의 빛을 정통으로 맞게 된다.

그동안 구사한 팬텀 블레이드는 실패해도 기척과 실체가 분리되는 부작용 덕분에 꽤나 재미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유서스는 오러 유저가 아니니 기감 따위 없다. 어차피 눈으로 공격 파악하는 놈이니 기척과 실체를 분리해 봐야 먹힐 리가 없는 것이다.

제대로, 완벽하게 성공해야 한다!

러스는 침을 삼켰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전신의 오러를 운용했다.

웅웅웅.

푸른 블레이드 오러가 미세한 소음을 내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뭐냐, 러스? 이제 아예 포기한 거냐!"

유서스의 공세가 더욱 거세졌다. 러스는 계속 공격을 피하며 기회를 노렸다. 섬광이 정면으로 날아오는 순간, 러스가 허공에 몸을 던지며 참격을 뿌렸다.

"팬텀 블레이드!"

블레이드 오러가 공간을 뛰어넘어 유서스의 눈을 정확하게 가격했다.

'성공이다!'

미소는 바로 사라졌다.

타앙!

공간을 뛰어넘은 그의 오러가 유서스의 눈 부위, 바로 앞에서 가로막혔다. 실은 저 눈구멍은 구멍이 아니었던 것이다. 러스는 미처 모르고 있었지만, 수정처럼 투명한 소재로 단단히 감싼 상태였다.

"뭐 한 거냐?"

황당해하며 유서스가 엘드릴의 빛을 쏘았다.

오러 유저가 아닌 유서스는 러스가 얼마나 굉장한 짓을 했는지 알아차릴 재간이 없었다. 당연히 놀라거나 해서 공격할 찬스를 놓치거나 할 리도 없는 것이다. 모르는 게 약이랄까?

파앗!

섬광이 눈앞을 가득 메운다. 팬텀 블레이드에 전력을 다한 후라 도저히 피할 여력이 없다. 오러를 죄다 방어로 돌리며 러스는 애써 몸을 비틀었다.

'지, 직격타는 피해야 해!'

콰아아앙!

엘드릴의 빛이 러스의 전신을 뒤덮으며 화려하게 폭발했다.

"크으으윽!"

☆ ☆ ☆

비명을 흘리며 러스는 10여 미터 넘게 뒤로 날려 갔다. 하지만 쓰러지진 않았다. 허공에서 팽이처럼 빙빙 돌며 간신히 바닥에 착지한다.

피투성이가 된 채 러스가 고개를 들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몰골이었지만 눈빛만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유서스가 경악하며 중얼거렸다.

"맙소사... 이걸 맞고도 서 있단 말인가?"

러스가 힘없이 웃었다.

"아, 다행히 주위에 충격 흘리기의 달인이 있어서 말이야."

방금의 회피법은 눈의 여왕 이니야가 칼켄과 싸울 때 선보인 기술이었다. 그때 유심히 봐 두었던 것이 이렇게 한 목숨 살릴 줄이야.

'아니, 아직 살렸다고 하긴 이른가?'

역시 엘드릴의 빛의 위력은 굉장하다. 간신히 직격타는 피했지만 그 대가로 전신의 오러 방어가 죄다 날아가 버렸다.

오른팔과 오른 다리도 반쯤 마비되어 움직이기 힘들다. 애써 태연한 척은 하고 있지만 눈앞이 핑핑 도는 것이 당장이라도 기절하고 싶은 마음이다.

하지만 기절했다간, 지금 이를 갈며 숨통을 끊으려 다가오는 유서스의 제물이 될 뿐!

"엘드릴의 빛을 맞고도 살아남아? 역시 네놈은 살려 둘 수 없는 놈이다, 러스."

증오와 분노로 가득 찬 유서스의 얼굴을 보며 러스는 다급해했다.

'기술, 기술 뭐 없냐? 이 위기를 빠져나갈 그런 거?'

그동안 만났던 모든 오러 유저의 얼굴이 러스의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레펜하르트, 카다마이트, 칼켄, 스탈라....

모두 굉장한 전사이자 오러 능력자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쓸 만한 기술은 없다.

초조했다. 입안의 침이 바짝바짝 말랐다. 눈앞에 다가오는 금빛의 사신邪神을 보며 러스가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렸다.

'에잉, 쓸모없는 작자들....'

여태 남의 기술 신 나게 훔쳐다 써 놓고 참으로 적반하장도 유분수라 하겠다. 배은망덕하다는 유서스의 발언도 아주 근거가 없진 않은 것 같았다.

유서스가 점점 더 거리를 좁혀 왔다.

엘드란이 머리 위로 치켜 올려졌다.

"죽어라, 비천한 놈!"

강렬한 마력이 대검 끝에 맺히며 빛을 발한다. 퍼지는 빛이 마치 안개 속의 달빛처럼 흙먼지를 통해 직선으로 뻗어 간다.

그래, 안개 속의 달빛처럼....

'...안개?'

갑자기 러스의 두 눈동자가 몽롱하게 변했다.

주위가 느려졌다. 모든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동시에 환영이 떠올랐다.

퍼져 가는 새하얀 냉기의 안개, 모든 것을 얼려 버리는 그 이해 불가했던 이니야의 오러 스킬.

'북해의 숨결....'

어지간한 건 전부 몇 번만 보면 이해할 수 있었던 러스지만, 저 오러 스킬만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냉기를 깃들게 하는 것이야 정령술의 힘이니 차치하고라도, 그 무수한 오러 입자를 만들어 내 광범위하게 흩뿌리는 방법은 아무리 연습해도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니야에게 직접 물어보기도 했다.

원래 엘프는 드워프나 오크완 달리 비의를 아무에게나 전수하는 문화가 아니다. 하지만 레펜하르트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였는지 이니야도 흔쾌히 가르쳐 주었다.

단지 문제는....

'어떻게 하냐고요? 음, 물은 얼음도 될 수 있고 수증기가 되어 보이지 않게도 되잖아요? 만물은 변화하는 것이니 그 변화를 몸에 담아 그대의 삶 속에 녹이는 거예요. 그리고 그 심상을 오러로 구현하면 돼요.'

본인 딴에는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건데, 남이 듣기엔 헛소리도 이런 헛소리가 없었다.

뭐, 러스도 이해는 했다. 그 역시 팬텀 블레이드의 용법을 남에게 설명하라고 하면 어떤 식으로 말해야 할지 감도 안 잡히니까. 깨달음이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 이후 시간 날 때마다 시도를 해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오러를 입자로 나누는 것은 불가능했다. 최대한 오러를 잘게 나누어 봤자 그 한계는 모래알 정도, 도저히 입자화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컨트롤하는 것도 모래알 대여섯 개 정도에 불과했다.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오러를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게 입자화하는 것도 말도 안 되는 경지인데, 안개가 될 정도로 무수히 많은 오러 입자를 일일이 컨트롤한다고? 설사 신이라 해도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이니야는 분명 그 불가능한 짓을 하고 있다,

말이 되질 않는다.

'그래, 말이 되질 않아. 북해의 숨결은....'

문득 의아해졌다.

왜 기술 명칭이 '숨결'일까? 오러 입자를 움직이는 기술이라면 가루나 먼지 쪽이 어울리는 이름일 것 같은데. 그냥 겉모양만 치더라도 안개란 이름이 더 어울릴 텐데.

"아!"

갑자기 꽉 막혀 있던 것이 무너지며 머릿속에 폭포처럼 뭔가가 쏟아졌다. 영감의 폭포가 흐릿하던 모든 것을 쓸어버리기 시작했다.

알았다.

이니야는 입자를 하나, 하나 컨트롤하는 것이 아니다. 그녀뿐 아니라 그 누구도 그런 무시무시한 짓은 불가능하다.

'그래, 그녀는 오러를 잘게 나누어 입자화한 것이 아니었어.'

그 기술의 명칭은 바로 북해의 '숨결'.

세상 모든 사람들은 숨을 쉰다. 숨을 들이마시며 삶에 필요한 공기를 들이마시고, 필요 없는 공기를 내뱉는다. 들이마실 때의 공기와 내뱉을 때의 공기, 그것은 호흡을 통해 전혀 다른 공기가 되어 세상으로 돌아간다.

숨결을 마시고 내뱉는다는 것은 곧, 세상의 공기 일부분을 전혀 다른 성질로 바꾼다는 것.

'그녀는 오러라는 현상을 안개라는 현상으로 바꾸고 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고 러스는 전율했다.

이니야의 오러는 물질 변환이 된다!

입자 하나하나를 다루는 것이 아니다. 생명기, 오러라는 기운 형태를 안개라는 형태로 물질 변환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개라는 거대한 덩어리를 찰흙 놀이 하듯 이리저리 매만지는 것이 바로 그녀가 냉기의 안개를 다룰 수 있는 비법이다.

마법으로는 결코 제어 불가능하다는 3대 요소, 시간과 공간과 물질.

이니야는 오러의 힘만으로 그 3대 요소 중 하나인 물질 변환의 일부를 구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 그렇구나....'

이해의 영역을 넘어 직관이 벼락처럼 뇌리 여기저기를 널뛴다.

과정을 건너뛰어 해답을 깨친다.

러스 역시 3대 요소 중 하나인 공간 제어의 일부를 오러의 힘만으로 구현하고 있다. 일단 깨달음을 얻고 나니 자신에게 무엇이 부족했는지 저절로 이해가 갔다.

바보짓을 하고 있었다.

팬텀 블레이드라고?

애당초 명칭이 잘못되었다.

기술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그 기술의 이미지를 보다 명확히 하기 위함이다. 그럼으로써 그 기술을 연마하면 할수록 이미지가 굳어지며 위력도 강해진다.

그런데, 과연 러스가 원한 것이 환영의 검이었나?

아니다.

그가 원한 것은 환영처럼 눈을 속이는 검이 아니라 진정으로 공간을 희롱하는 검.

'내가 바란 것은....'

어디에도 존재하고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허공과도 같은 공허한 검.'

바라는 순간 베어 버리고 바라지 않으면 그저 빛처럼 통과해 지나가 버리는 마음의 검.

러스가 검을 고쳐 들고 눈앞의 유서스를 바라보았다.

"죽어라, 비천한 놈!"

생각은 길었지만, 사실 그 시간은 찰나에 불과했다. 유서스가 검을 내려쳤다. 검이 휘둘러지며 강대한 마력이 요동쳤다.

빙그레 웃으며 러스도 마주 검을 들었다.

뇌리 속의 심상이 언어로 규정되며, 그동안 생각해 본 적도 없던 기술 명칭이 자연스럽게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허공검, 호라이즌...."

그래, 입 밖으로 꺼내고 보니 알겠다.

이게 옳다.

이게 바른 명칭이다.

아득한 수평선은 분명 눈에 보이면서도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것. 아무리 다가가고 또 다가가도 그 끝에는 또 다른 머나먼 수평선이 존재할 뿐.

허공을 뛰어넘어, 공허한 검을 들어 존재하지 않는 것의 존재를 벤다!

파아앗!

러스의 블레이드 오러가 사라졌다. 동시에 유서스의 양 무릎에 섬광이 번뜩였다. 두꺼운 갑옷 속에 선혈이 가득 차 쏟아졌다.

투구 속에서 처절한 절규가 희미하게 들렸다.

"...크아악!"

4

유서스는 피 웅덩이 위에 쓰러져 있었다.

'뭐야,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격통 속에서 신음하며 유서스는 애써 흐릿해지는 정신을 다잡았다.

상황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분명 이 갑옷은 러스의 모든 공격을 받아치는 절세의 무구였다. 그리고 여전히 그의 두 다리를 감싸는 황금 갑옷에는 조금의 흠집도 없었다.

하지만 그 갑옷에 의해 보호받고 있는 그의 육체는 달랐다. 무릎 아래가 깔끔하게 잘린 것이 보이지 않아도 고통이 되어 여실히 느껴진다.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무술 중에는 분명 갑옷 위로 타격을 가해 충격을 뚫어 내부를 파괴하는 기술이 있긴 하다. 벽돌을 여러 장 쌓아 놓고 중간의 벽돌만 부순다든가 하는 식으로. 레펜하르트의 제로 임팩트가 바로 그런 식이다.

유서스의 새로운 갑주, 엘드릴 기간투스는 그런 류의 기술까지 대비해 모든 충격을 갑옷 자체로 해소하는 기능이 있었다. 안 그랬으면 아무리 갑옷이 단단하다 해도 여태 유서스가 그렇게 멀쩡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러스의 공격은 그런 식이 아니었다. 지금의 일격은 아예 갑옷 자체를 무시하고 그의 본체만을 잘라 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거지....'

무릎 아래로부터 격통을 느끼며 유서스는 연신 비명을 토하고 또 토했다.

"크으으윽!"

러스는 반개한 눈으로 쓰러진 유서스를 바라보았다. 비록 눈은 유서스에게 향해 있지만 그의 의식은 여전히 각성의 여운에 빠져 있었다.

'이것이 진짜 공간을 뛰어넘는다는 것....'

느낄 수 있었다.

그의 검, 그의 블레이드 오러가 공간을 뛰어넘는 것을.

팬텀 블레이드처럼 단순히 공간의 위치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그가 바랐던 부분만을 잘라 버리는 것을.

아무리 강력한 갑옷으로 몸을 보호해도 이 검 앞에선 의미가 없다. 갑옷을 무시하고 내부의 본체만을 벨 수 있으니까. 지금은 다리를 통째로 베었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근육과 힘줄을 놔둔 채 뼈만 잘라 낼 수도 있을 것이다.

스스로의 깨달음에 러스는 전율했다.

'이 검을, 완벽하게 다룰 수만 있다면....'

그의 검은 세상 그 누구도 피하지 못하는 필살의 검이 된다!

러스의 입꼬리가 좌우로 올라갔다. 그의 두 눈이 오만하게 빛났다.

"공간을 뛰어넘는 검을 과연 누가 당할 수 있을 것인가? 휘두르면 무조건 명중할 텐데! 으하하하하!"

러스의 마음이 자만으로 가득 차 광소를 막 터트리려던 찰나였다. 갑자기 뇌리로 누군가의 모습이 영상이 되어 스쳐 지나갔다.

두꺼운 대흉근을 불끈거리며 창칼을 태연하게 받아치는 근육질 거인, 레펜하르트였다.

"어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생각해 보니 이거, 레펜하르트에겐 여전히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무조건 명중하는 기술이라고?

지금은 뭐, 명중을 못 시켜서 레펜하르트에게 맞고 다니던가?

아무리 베어 봐야 안 먹히니까 문제 아닌가?

갑옷을 무시하고 본체를 베는 것도 의미가 없다. 본체가 곧 갑옷인데 어쩌라고?

뼈와 근육을 무시하고 내장만 베는 것도 저 끔찍한 짐 언브레이커블의 후예에겐 소용없다. 위장과 십이지장으로도 오러 가드를 펼치는 해괴망측한 무문이니까.

본인의 기량이 통째로 올라가 블레이드 오러만으로도 저 가공할 육체에 치명타를 줄 수 있을 정도가 아니면, 그저 기교뿐인 허공검만으로는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머리가 차갑게 식고 나니 그제야 현실이 보였다.

'형님에게 통하지 않는다면 칼켄 공에게도 그리....'

짐 언브레이커블 정도는 아니지만 오크 특유의 강건한 육체를 지닌 칼켄의 육체는 보통 단단한 것이 아니다. 허공검이 명중한다 해도 특유의 파괴력으로 충분히 밀어붙일 수 있겠지.

스탈라도, 이니야도, 아틸카도... 여전히 그보다 높은 경지에 이른 무인들이었다. 아무리 새로운 경지를 깨달았다 하지만 그는 아직 갈 길이 멀었다.

피시식....

자만심이 풍선 바람 빠지듯 사라져 버렸다. 러스의 안색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니, 이거 잘났다고 웃을 정도는 아니구나, 나....'

러스 본인은 미처 모르고 있었지만, 이는 꽤나 바람직한 현상이었다.

대부분의 오러 유저들은 각성을 통해 새로운 경지에 들어서고도 한참 동안이나 그 경지를 답습하는 법이다. 그 놀라운 깨달음에 흥분해 기껏 들어선 경지를 잊고 희열에 몸을 맡겨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무문이 마음을 다스리고 자신을 추스르는 가르침을 내리지만 러스는 워낙 타고난 천재다 보니 그런 쪽은 영 취약했다. 아마도 그대로 자만심에 몸을 맡겼다면 기껏 붙잡은 허공검을 다시 익히는 데 몇 년이 더 걸렸을지도 모른다.

흥분이 사라지며 다시 허공검을 휘둘렀을 때의 감각이 전신을 휘감았다. 러스는 차분하게 그 감각을 되새겼다.

어리석은 짓을 할 뻔했다.

'나는 아직 오만할 자격이 없다.'

러스는 유서스 쪽으로 신경을 돌렸다. 두 다리가 잘린 그는 땅 위에 엎드린 채 애써 상반신을 일으키고 있었다.

"크윽, 크으윽, 내가 저런 놈에게... 저런 비천한 놈에게...."

비참한 몰골로 땅 위를 기면서도 눈빛만은 여전히 증오로 불타오른다.

'마무리를 할 시간이군.'

러스는 검을 고쳐 쥐었다. 이제 한 번만 더 허공검을 뿌리면, 공간을 뛰어넘어 목을 치면 유서스와의 인연도 이대로 끝날 것이다.

러스의 살기를 눈치챘는지 유서스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가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크크크, 좋다! 죽여라! 이 천한 놈아!"

저런 몰골이 되고도 그의 살의는 수그러들 줄 몰랐다. 대단한 정신력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한때 유서스에게 인정받고 싶어 죽어라 검을 휘두르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만 해도 유서스는 분명 기사 중의 기사, 러스의 우상이었다. 비록 그 우상이 오로지 냉대와 멸시만으로 그를 대한다 해도.

하지만 그 기사 중의 기사가, 질투에 눈이 멀어 친동생의 배에 칼을 꽂은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미 둘의 관계는 화해할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둘 중 하나가 죽기 전에는 결코 이 인연은 끝나지 않는다.

'그래, 죽여야 해.'

휘익!

러스가 검을 뿌렸다. 블레이드 오러가 번뜩였다. 죽음을 각오하며 유서스는 눈을 감았다.

'빌어먹을!'

콰앙!

블레이드 오러가 땅을 파헤쳤다. 유서스가 의아해하며 눈을 떴다.

러스의 오러는 그를 노리지 않았다. 대신 유서스의 목 옆 부분을 겨냥하고 스쳐 지나갔을 뿐.

러스가 검을 거두었다. 그가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죽이지 않겠어."

유서스의 눈에 핏발이 섰다. 분노로 인해 이빨이 딱딱 떨렸다.

"...주, 죽이지 않겠다고?"

"그래, 엘드라드라면 힐링 마법도 각인되어 있지? 부상을 추슬러. 어차피 잘린 다리는 못 붙이겠지만 출혈로 죽는 건 피할 수 있을 거다."

유서스의 전신이 부들부들 떨렸다.

감히, 감히 더러운 계집의 배에서 태어난 놈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 불쌍하다는 듯한, 안쓰럽다는 듯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 네놈 따위가 감히 나를 동정해?"

"당신이 좋아서 살려 두는 것이 아니야."

싸늘한 대꾸가 돌아왔다.

"테네스 가문을 위해서다. 당신이 죽으면 형수님은 어떻게 되지? 당신도 귀족이니 이 일의 중대함을 잘 알고 있을 텐데?"

그러자 유서스의 안색이 살짝 굳었다.

현재 그에겐 아직 자식이 없다. 그가 죽어 버리면 테네스의 핏줄은 러스밖에 남지 않는다. 하지만 러스는 사생아, 혈통에 흠이 있는 만큼 자식을 낳는다 해도 귀족의 피가 흐려진다. 테네스 백작가의 권위가 약해지는 것이다.

"당신이 가문을 떠난 지 오래되었다는 소린 나도 들었어. 불쌍한 형수님, 그동안 계속 독수공방 생과부 신세셨겠군."

조롱을 던지며 러스는 발걸음을 돌렸다. 유서스에게 등을 보인 채 그가 무심하게 말을 이었다.

"두 다리가 잘렸으니 더 이상 나를 노릴 수도 없겠지? 가서 조카나 만들어. 앉은뱅이 신세라도 밤일에는 지장 없을 테니까."

쓰러진 유서스를 뒤로한 채 러스는 어둠 속을 걸었다. 뒤에서 증오로 점철된 외침이 들려왔다.

"러스! 이 개자식! 죽인다! 반드시 죽여 버리겠어!"

☆ ☆ ☆

밤바람을 가르며 러스는 몸을 날렸다. 저만치서 말로이드가 제플린 나이츠를 상대로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보였다. 시간을 끌 처지가 아니니 어서 말로이드와 합류해서 저들을 처리해야 한다.

땅을 박차고 달리며 러스는 문득 피식거렸다.

'내가 언제부터 형수 찾았다고 저런 핑계를 대긴....'

솔직히 말하면 형수 얼굴도 잘 기억 안 난다. 뭐, 만날 일이 있었어야지?

유서스의 아내는 귀족가 여인치고는 꽤 온화하고 착한 성품이었기에 딱히 러스를 멸시하거나 냉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남편의 의향을 무시하고 시동생으로 여기며 아끼거나 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유서스의 뜻을 존중해 그녀 역시 러스를 무덤덤하게 없는 사람처럼 대해 왔다. 당연히 얼굴 볼 일도 거의 없었다.

그리고 말은 저렇게 했지만 실은 더 이상 가문에 대한 미련도 그리 남지 않았다.

한동안은 가문으로 돌아가기 위해 애를 썼다. 이름난 검사, 명성 높은 오러 유저가 되어 가문으로 돌아가 당당하게 가족의 일원으로 인정받는 것만이 러스의 목표였다.

하지만 정작 명성을 얻고 나니 그토록 크게 보였던 가문이 실제로는 별것도 아니란 걸 깨달은 것이다.

백작의 작위?

러스가 크로방스 내전에서 유벨 2세로부터 받은 작위가 백작이다. 가문으로 돌아가야 한다며 거절하긴 했지만,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백작이 될 수 있다.

가문의 인정?

러스는 이미 대륙 역사상 최연소 오러 유저로 이름을 널리 떨쳤다. (사실은 레펜하르트가 최연소지만, 어째 러스보다 레펜하르트가 연하라고 믿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굳이 테네스 가문이 인정하지 않아도 이미 세상이 러스를 강자 중의 강자, 검사 중의 검사로 인정해 주고 있다.

현재 러스는 전혀 아쉬운 처지가 아닌 것이다. 오히려 오러 각성의 길을 잃은 테네스 백작가 쪽이 아쉬우면 아쉽겠지.

'그렇다고 가문으로 돌아갈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곳은 여전히 그의 뿌리였고, 또 그의 어머니가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틈틈이 가문에 대한 소식은 정기적으로 사람을 써 듣고 있었다.

하지만 딱히 급하게 돌아갈 이유도 없는 것이다.

무슨 옛날이야기처럼 천한 핏줄인 그의 어머니, 에이리가 가문 내에서 모진 핍박을 받고 있다면 러스도 당장 그녀를 구하기 위해 돌아갔겠지.

하지만 러스의 아버지, 폴트 테네스 백작은 진정으로 어머니를 사랑하고 아끼고 있었다. 어머니 앞에만 서면 그 냉혹하던 양반이 얼굴에 웃음꽃이 피며 민망할 정도로 헤죽거리는 것이, 아들인 자신이 보기에도 낯부끄러울 지경이다. (오죽하면 유서스가 저리 이를 득득 갈겠는가?)

어머니 역시 얌전하고 조용한 성품이라 가문 내 귀족들은 싫어할지언정, 시종이나 하녀들은 그녀를 존중하고 잘 보살펴 주고 있었다. 사랑하는 남편과 조용하고 안락하게, 행복한 삶을 살고 있으니 딱히 걱정할 일이 없다. (그저 울화통 터져 죽은 유서스의 어미만 불쌍할 뿐이다.)

반면, 레펜하르트 곁에 머무는 것은 너무도 즐거웠다.

그곳에는 형제처럼 따르는 이가 있었고 항시 검을 나눌 수 있는 상대가 있었다. 친구라 부를 만한 이도 생겼다. 자신의 모자란 부분을 채워 줄 강자들도 득실거렸다.

죄다 이종족이란 것만 제외하면, 그들이 바로 러스가 바라던 이상적인 가족이었다.

이미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은 러스에게 테네스 가문은 이제 출신지 이상의 의미는 없다. 그러니 저런 이유로 후한이 될 것이 분명한 유서스를 살려 둔다는 것은 말이 되질 않는다.

'그래, 사실 유서스를 살려 둘 이유 따윈 없지.'

그런데 왠지 죽일 수가 없었다. 이걸로 나중에 엄청 후회할 거란 생각이 강하게 드는데도, 차마 손이 나가질 않았다.

'역시 죽여야 했나?'

러스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아니, 그랬다면 처음부터 목을 날렸겠지.'

공간을 뛰어넘는 허공검이라면 다리를 베나 목을 베나 별 차이가 없다. 마음만 먹으면 한 번에 목을 노려 절명시킬 수도 있었다.

그런데 왜 못 죽였을까?

왜?

모르겠다.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것이 사람 마음이라더니, 정말 그렇구나. 남은 고사하고 나 자신의 마음조차 모르겠으니.'

고개를 저으며 러스는 제플린 나이츠를 향해 몸을 던졌다. 말로이드와 맞붙고 있던 제플린 나이츠의 후방에서 푸른 블레이드 오러가 번뜩이며 검의 궤적을 뿌려 댔다.

간신히 말로이드와 평수를 이루던 제플린 나이츠다. 거기에 러스까지 가세하니 순식간에 상황이 판가름 났다. 두 오러 유저가 합공을 시작한 지 채 몇 분 되지도 않아 다섯 명의 제플린 나이츠가 피를 뿌리며 거리 위로 쓰러졌다.

러스를 향해 말로이드가 벙긋 웃었다.

"고맙네, 러스. 이놈들 생각보다 세더라고."

"시간이 없습니다, 말로이드 경. 어서 움직이지요."

"그러세."

믿었던 황금기사도, 제플린 나이츠도 모조리 쓰러지자 안타레스 이종족 전사들과 싸우던 차탄 군대들의 사기도 바로 사라졌다. 여기서 주시해야 할 점은 사기가 떨어진 게 아니라 사라졌다는 점이다.

과연 차탄 나라 군대라는 관용구는 헛된 명성이 아니었다. 조금 불리해진다 싶으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정신없이 도망가 버렸다.

도주로가 확보되자 안타레스 전사들이 다시 탈주 노예들을 안내하며 걸음을 옮겼다. 주위를 경계하며 러스도 그들 뒤를 따랐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러스가 문득 인상을 찌푸렸다.

"응?"

정신없이 싸우느라 몰랐는데, 일행 중 한 명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라? 실란은 어디 갔지?"

제34장 Exodus

1

실란은 울부짖고 있었다.

"아, 필라넨스시여!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

그리고 신장 2미터, 어지간한 성인 장정도 눈 아래로 깔아 볼 장신의 미녀가 그를 옆구리에 낀 채 거리를 달리고 있었다. 실란의 피앙세, 세이어로부터 혼약을 약속받은 여인, 크리스틴이었다.

크리스틴이 실란을 내려다보더니 방그레 웃었다.

"아, 실란. 세이어께서 보우하시어 당신을 구출할 수 있게 되었군요!"

"이게 무슨 구출이야? 보쌈이지!"

실란은 이를 갈며 몸부림을 쳤다. 그냥 몸부림친 정도가 아니라 어떻게든 빠져나가기 위해 손발이 닿는 대로 열심히 그녀를 두들겼다. 여성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은 필라넨스의 가르침에 크게 위배되는 것이지만, 여성도 여성 나름이었다.

열심히 크리스틴의 옆구리며 허벅지를 주먹으로 치고 발로 걷어찼다. 발버둥을 치며 속으로 악도 써 댔다.

그토록 단련해 온 나의 근육이여!

힘을 다오!

이 여자로부터 빠져나갈 힘을!

"아이, 실란도 참. 품에 안겼다고 부끄러워하긴."

당연히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절망하며 실란이 재차 소리쳤다.

"사람 살...."

크리스틴이 오른손으로 실란의 입을 막았다. 성기사답지 않게 손이 매끈하고 하얬다. 섬섬옥수라 칭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물론 사이즈가 사이즈인지라, 입을 막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실란의 머리통이 통째로 잡혔지만.

"읍읍읍!"

안면이 통째로 가로막힌 실란이 연신 몸을 바동댔다. 그녀가 상냥하게 속삭였다.

"쉿, 조용히 하세요, 내 사랑. 잘못하면 저 몬스터들에게 들켜요."

'난 제발 들키고 싶다고!'

울상 짓는 실란을 옆에 낀 채 크리스틴은 계속 제플린의 골목을 달렸다. 골목길을 따라 도는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 위로 희열의 표정이 떠올랐다.

'아, 드디어 이 사람이 내 품에 돌아왔어!'

테스론과 일행이 된 크리스틴 역시 은의 현자로부터 저들을 상대할 수 있는 강력한 아티팩트를 받았다. 그리고 레펜하르트 일행을 막기 위해 제플린으로 투입되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그녀도 저 탈주 노예 무리 중 하나를 막고 있어야 했다. 그것이 세렐라인으로부터 받은 명령이었다.

하지만 세렐라인은 미처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의 주특기 중 하나가 남의 말 흘려들어 제멋대로 해석하기란 점이라는 걸.

분명 탈주 노예 무리를 막으라 했지만, 오늘도 크리스틴은 자의적으로 해석했다.

'아, 저들 중에서 실란을 찾으라는 거구나!'

그래서 노예들이 도망을 치건 말건 실란이 보이지 않으면 무시하고 다른 곳으로 향했다. 뭐, 유서스도 지정된 위치 무시하고 러스만 찾아다녔으니 딱히 그녀만을 비난할 수도 없기는 하다.

이게 테스론 일행의 반응이 그토록 늦었던 이유였다.

스테반은 레펜하르트만 찾아다녔고, 유서스는 러스만, 크리스틴은 실란만 찾아다녔으니 제 시간 맞출 수 있을 리가 있나?

그렇게 제플린 시내를 이리저리 뒤지고 다니다 결국 찾을 수 있었다. 수많은 탈주 노예들 틈에서, 황금기사와 러스의 대결을 지켜보며 초조해하는 사랑하는 임의 얼굴을!

'오오오!'

크리스틴은 감격했다.

이 넓은 제플린에서 한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터였다. 그런데도 이렇게 조우했으니 이것이야말로 세이어의 인도하심이 아닌가!

사실은, 야밤이라 인적이 없으니 요란스러운 곳만 찾아다니면 되는 데다가 현재 그녀의 움직임이라면 제플린을 가로지르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으니 그냥 만날 만해서 만났다고 하는 쪽이 옳다. 하지만 그녀는 신의 인도라 굳게 믿었다.

운이 계속 따라 주는지, 실란 주위에 그 근육질 괴물- 그러니까 레펜하르트도 없었다. 다른 놈들도 다들 전투에 정신이 팔려 실란에게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다. 실란도 신성 주문을 난사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절호의 기회였다.

슬그머니 뒤로 가 잽싸게 캐치했다. 어미 고양이가 새끼 물어 가듯 뒷덜미 잡고 바로 골목으로 날랐다.

워낙 난전이라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즐거운 마음으로 실란과 포옹(?)한 채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실란을 옆구리에 낀 채 크리스틴은 계속 달렸다. 탈주한 노예 무리들을 피해 골목과 골목을 누비며 차탄 왕궁으로 향한다.

"돌아가요, 실란. 우리의 사랑의 보금자리로."

'그런 거 만든 기억 없거든?'

"말로만 듣던 사랑의 도피를 하게 되다니, 우리 사랑이 더욱 깊어지는 것 같아요, 실란."

'사랑의 도피가 아니라 납치 후 도주겠지!'

물론 실란의 대꾸는 속으로만 흘러나왔다. 저 커다란 손으로 입이 꽉 막혀 있었으니까.

실란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하도 발버둥을 쳐 탈진한 탓에 이젠 악을 쓸 기운도 없었다. 그저 속으로 욕설을 뱉고 또 뱉는 수밖에.

'젠장! 이대로 끌려갈 순 없어! 뭔가 방법이 없나? 아무나 좀 이 근처 안 지나가 주나?'

그렇게 막 크리스틴이 골목 하나를 돌 때였다.

건물 위쪽에서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 어린 성자님?"

크리스틴과 실란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달을 뒤로한 채 누군가의 실루엣이 비치고 있었다.

170센티미터 정도 되는 신장에 안쓰러워 보일 만큼 깡마른 몸, 짧은 치마와 헝겊으로 가슴과 하체만을 간신히 가린 야성적인 차림이다. 전신은 푸른 피부로 덮여 있고 그 위로 온갖 다양한 문양이 그려져 있다. 방울처럼 커다란 눈망울에 오똑한 콧날, 도톰한 입술 사이로 작은 어금니가 살짝 드러난다.

트롤 여성, 그것도 아직 성숙이 채 끝나지 않은 소녀였다.

수십 가닥으로 땋은 머리채를 흔들며 트롤 소녀가 몸을 던졌다. 가볍게 바닥에 착지하며 소녀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여기서 뭐 하세요?"

얼마나 눈치가 없는 건지, 입까지 막혀 붙잡혀 있는 실란을 보고도 트롤 소녀는 멍청한 표정으로 고개만 갸웃거리고 있었다.

"아바바밥!"

기도 막히고 입도 막혀, 실란은 다급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아니, 척 봐도 납치되는 것처럼 안 보이냐? 응?'

누군지는 모르겠다만 트롤인 만큼 분명 적은 아닐 터다. 실란이 계속 읍읍거리며 눈빛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빨리 도망가서 아무나 좀 불러와!'

다급한 표정으로 크리스틴을 바라보고, 인상을 쓰고, 최대한 불쌍한 눈동자로 트롤 소녀를 응시한다. 소리 없는 아우성을 눈빛에 담아 계속 보낸다.

실란의 표정이 어찌나 절실했는지, 이 둔한 트롤 소녀도 눈빛이 바뀌었다.

"아? 적이군요!"

아니, 그럼 당연히 제플린에서 이종족이랑 안타레스 백국 인간들 빼면 다 적이지, 그걸 이제 깨달았나?

등 뒤에서 뼈로 만든 두 자루 단검을 꺼내 들며 소녀가 날카롭게 외쳤다.

"어린 성자님을 내려놓아라! 인간!"

실란의 눈동자에 절망의 빛이 떠올랐다.

크리스틴이 비록 정신에 심각한 문제가 있긴 하지만, 적어도 실력만큼은 어디 내놓아도 떨어지지 않는 훌륭한 성기사다. 일개 트롤, 그것도 저런 작은 소녀가 홀로 감당할 상대가 아닌 것이다. (신장 170센티미터면 트롤 기준으로는 충분히 작다.)

당장 도망가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덤비려 하다니? 게코도마뱀 드래곤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딱 그 짝이다.

'야! 네가 왜 싸워? 빨리 지원군을 불러오라니까!'

슬프게도 실란의 소리 없는 외침은 저 트롤 소녀에게 닿지 않았다.

주제 파악도 못 하고 트롤 소녀가 당장이라도 덤벼들 듯 자세를 낮춘다. 크리스틴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트롤 암놈이네? 저런 게 왜 도시 안에 있지?"

몬스터로 이름 높은 트롤을 눈앞에 두면서도 크리스틴은 전혀 긴장한 얼굴이 아니었다. 그녀 개인이 트롤 한둘쯤은 충분히 해치울 수 있는 강력한 성기사인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는 눈앞의 트롤이 여성이었다는 부분이 더 컸다.

대부분의 자연계 생물들이 그렇듯, 트롤 역시 여성보다 남성이 훨씬 화려하다. 트롤 특유의 특징인 거친 피부라던가 매부리코, 광대뼈며 주걱턱 등 모든 점이 남성 쪽이 훨씬 잘 발달되어 있다.

간단히 말해서 트롤 여성은 남성에 비해 그리 무섭게 생기지 않은 것이다.

야밤에 만나면 레펜하르트도 가끔 흠칫거리는 트롤 남자들에 비해 트롤 여인들은 대부분이 온건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특히나 이 트롤 소녀는 피부도 매끈하고 광대뼈나 주걱턱 등의 특징도 거의 없어, 인간의 미적 기준으로 봐도 꽤나 예쁘장한 외모였다.

아무리 상대가 트롤이라지만, 가냘파 보이는 어린 소녀가 단검 들고 설쳐 봤자 긴장할 리가 있나?

크리스틴이 헛웃음을 흘리며 실란의 입에서 손을 떼어 검을 뽑았다.

"하? 이젠 별 쓸데없는 것도 날뛰네?"

덕분에 입이 자유로워진 실란이 고함을 쳤다.

"도망가! 도망가라고!"

하지만 이미 때가 늦어, 크리스틴의 검이 발도하며 쏜살같이 트롤 소녀를 향해 날아갔다. 일격에 목을 날리고 다시 제 갈 길 갈 셈이다. 이어질 참상을 떠올리며 실란이 욕설을 뱉었다.

"젠장!"

갑자기 트롤 소녀가 머리를 흔들며 춤을 추었다. 낭랑한 가사가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내 몸이 크게 자라, 노간주나무 푸름을 띤 삼림을 발로 찬단다!"

타앙!

트롤 소녀의 단검이 십자로 교차하며 크리스틴의 찌르기를 가로막았다. 놀랍게도 트롤 소녀는 저 날씬한 체구로도 크리스틴의 일격을 무리 없이 감당하고 있었다. 실란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오잉?"

그뿐 아니라 바로 역공에 들어간다!

"아아아아!"

기이한 허밍을 날리며 트롤 소녀가 크리스틴을 찔러 갔다. 두 자루 단검이 춤을 추며 크리스틴의 몸통을 노린다. 정신이 번쩍 든 크리스틴이 진지하게 마주 검을 휘둘렀다.

챙챙챙!

순식간에 수십 차례의 검격이 오간다. 춤을 추는 듯한 기묘한 움직임으로 계속 크리스틴의 시야를 희롱하며, 허리와 손목을 튕겨 기이한 각도에서 단검을 찔러 간다.

처음 보는 움직임에 크리스틴도 미처 반격을 못하고 수세에 밀렸다.

"윽! 뭐, 뭐야, 이건?"

뒷걸음질 치는 크리스틴을 향해 트롤 소녀가 손가락질을 했다.

"드러난 핏줄 펄떡이니 그 짐 무거워 뒤뚱거리리!"

갑자기 크리스틴의 팔이 멋대로 움직여 실란을 놓쳐 버렸다. 풀려난 실란이 바닥에 떨어져 데굴데굴 굴렀다.

바닥을 구르는 실란의 모습에 크리스틴이 걱정 가득한 비명을 질렀다.

"꺅! 실란! 혹시 다쳤어요? 내가 그런 게 아니에요!"

물론 실란은 이게 웬 떡이냐 싶어 바로 빠져나왔다. 일어날 겨를도 없이 네 발로 후다닥 기어 최대한 몸을 뺐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재차 실란을 줍지(?) 못했다. 트롤 소녀가 그럴 틈을 주지 않고 다시 공세를 퍼부은 것이다.

"아라라라라!"

낭랑한 허밍과 함께 두 자루 단검이 어지럽게 시야를 희롱한다. 크리스틴이 양손으로 검을 쥐고 진지하게 공세를 맞받아쳤다. 역시 명색이 성기사라, 그러고 나니 다시 트롤 소녀가 뒤로 밀린다.

"이 괴물이 감히!"

고함을 지르며 크리스틴이 횡 베기를 날렸다. 검격을 피해 트롤 소녀가 허공으로 점프했다. 공중제비를 넘으며 사뿐히 착지하는 모습이 고양이도 울고 갈 정도로 날렵해 보인다. 멀어진 트롤 소녀를 향해 크리스틴이 비통한 외침을 터트렸다.

"감히 실란을 다치게 하다니!"

"...?"

트롤 소녀가 두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크리스틴의 목소리에 어찌나 진심이 함뿍 담겨 있는지, 순간 '내가 잘못했나?'란 생각마저 들었다.

실란을 돌아보며 소녀가 자신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다쳤어요? 혹시 적이 아니라든가...."

정색을 하며 실란이 손을 저었다.

"완전 멀쩡하거든요! 신경 쓰지 않아도 되거든요! 저 여자는 틀림없는 적이거든요!"

트롤 소녀가 해실거리며 웃었다.

"아, 다행이다. 실수한 줄 알았네. 제가 워낙 눈치가 없어서요, 에헤헤."

본인조차 자각할 정도면 진짜 눈치가 없긴 없는 모양이었다. 그제야 정신이 든 실란이 트롤 소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누구세요?"

방금 그녀가 쓴 술수는 실란도 알아볼 수 있었다.

트롤 주술이다.

저렇게 어린 소녀가 주술사일 거라곤 미처 생각을 못해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잘 보니 트롤 구루의 특징인 긴 어금니도 입술 사이로 삐죽 나와 있었다.

'혹시 저 애도 트롤 주술사인가?'

"아, 어린 성자님은 날 모르시겠구나."

트롤 소녀가 방긋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어린 성자님. 아틸카님의 파구루, 티티마라고 합니다."

파구루라면 후계자를 뜻하는 트롤어.

실란은 놀랐다.

'저렇게 어린 소녀가 아틸카의 후계자?'

☆ ☆ ☆

오크들은 조상을 섬기기에 믿고 따르는 신이 없다.

그리고 트롤들은 다른 의미로 믿고 따르는 종족신이 없었다.

트롤들은 자연 그 자체를 숭배하며 세상의 흐름 자체를 숭상하는 이들. 그들은 다른 종족처럼 신이라는 하나의 '인격적' 존재를 절대적인 신앙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자연은 자연 그 자체로 그 속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 그 속에 낮과 밤, 빛과 어둠, 평온과 혼돈, 불꽃과 폭포가 함께한다.

구별하지 않고, 구분하지 않고, 모든 것을 인식해 근본을 추구하는 것이 트롤의 정신문화.

그래서 트롤에게는 전사나 신관, 마법사 등의 지위를 나누는 의미가 없다. 오로지 한없이 자연에 가까워지려는 주술사, 구루가 있을 뿐.

자연의 흐름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올바른 삶이니, 가장 자연에 가까운 구루의 가르침이 곧 삶의 방식이자 목표다. 구루의 가르침대로 따르면 모든 것이 형통하다.

트롤들의 모든 삶이 트롤 구루의 주술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집을 짓고 번식을 하고 양식을 얻는 모든 행위에 주술의 힘이 필요하다. 트롤 주술사는 부족을 지키는 전사요, 병든 아이를 고치는 의사이며 부족의 정신을 책임지는 신관이며 제사장이었고 부족의 운명을 이끄는 왕이다.

그만큼 트롤 구루들은 막중한 책임과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후계자 역시 보통 신중히 고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보통 구루도 아닌 아틸카, 트롤들 사이에서도 존경받는 대구루의 후계자라고?

"헤에...."

실란은 티티마를 바라보며 혀를 내둘렀다. 트롤답게 키는 늘씬하니 크지만, 말라 보이는 팔다리며 가냘픈 허리가 전혀 강해 보이지 않았다. 하긴, 트롤들 대부분이 저런 체형이긴 하다. 아틸카가 특이하게 몸이 두꺼운 것이지.

'그래도 아틸카의 뒤를 이을 정도면 엄청 우락부락하고 강인한 거구의 트롤일 줄 알았는데....'

"왜 그러세요, 어린 성자님?"

빤히 자신을 바라보는 실란의 눈빛에 티티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실란이 아차 하며 손을 저었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그냥 실란이라고 불러 주세요. 어린 성자라니, 원...."

성자라니, 참으로 부담스러운 칭호인 것이다. 뭐, 진짜 부담스러운 부분은 '성자' 쪽이 아니라 '어린' 쪽이지만.

'내 나이가 이제 스물인데 아직도 어리단 소리나 듣고 있어야겠냐!'

티티마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았어! 실란!"

'아니, 반말하라곤 안 했는데....'

상대가 말 놓았는데 이쪽만 존대하긴 억울하다. 실란도 은근슬쩍 말을 놓았다.

"하여튼 저 여자는 적이야, 적. 알았지?"

혹시 착각이라도 할까 봐, 손가락질까지 해 가며 다시 한 번 강조하는 실란이었다.

"응! 저 여자, 적!"

한편, 크리스틴은 검을 쥔 채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고 있었다. 달아난 실란이 갑자기 저 트롤 계집을 보더니 정신 못 차리고 마냥 쳐다보고만 있었던 것이다.

'이래서 남자는 한눈 못 팔게 꽉 잡고 있어야 한다는 거구나!'

크리스틴은 납득했다. 과연, 꽉 잡고 있다가 놓치니 바로 저렇게 딴눈을 팔지 않는가? 뭔가 물리적인 부분과 정신적인 부분을 대단히 혼동하고 있는 것 같지만, 원래 크리스틴은 그런 여자였다.

"네년이 감히 우리 실란을 홀리는구나!"

노성을 터트리며 크리스틴이 티티마에게 달려들었다. 보통 사람 같으면 크리스틴의 뚱딴지같은 말에 어리둥절할 법도 했겠지만, 티티마 역시 어지간히 눈치 없는 타입이다 보니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실란이 적이라고 했으면 적이겠지, 뭐.

"오로로로...."

주술적인 가락을 흘리며 티티마도 마주 덤볐다. 크리스틴의 검과 티티마의 단검이 허공에서 몇 번이나 교차했다.

둘의 자세는 그야말로 극과 극이었다.

강맹하고 절도 있는 크리스틴의 참격이 빛을 뿌리면, 기묘한 주술력을 몸에 담아 티티마가 공세를 흘린다. 크리스틴이 검 한 자루로 모든 변화와 힘을 끌어내면 티티마는 단검조차 신체의 일부로 삼아 전신을 이용해 반격한다. 단검뿐 아니라 팔꿈치며 발차기, 가끔은 박치기까지 써 가며 공격을 퍼붓는다.

크리스틴과 호각으로 싸우는 티티마를 보며 실란은 감탄했다.

"우와...."

세이어의 성기사라면 대륙의 각 교단에서도 알아주는 정예 중 정예다. 그리고 크리스틴은 그들 중에서도 실력을 인정받은 강자, 그런데 티티마는 저 어린 나이로도 조금도 밀리지 않고 오히려 가끔은 몰아붙이기까지 하고 있었다.

'아틸카의 후계자라더니 과연....'

공방을 주고받던 크리스틴의 표정이 점점 더 구겨졌다.

"이익, 내가 이따위 괴물에게!"

이름난 검사도 아니고,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트롤 잡년이 나타나서 감히 앞을 막다니? 극도로 분노하며 크리스틴이 크게 숨을 들이켰다.

"흐읍!"

그리고 순간적으로 전신의 힘을 몇 배나 증폭시켜 쏟아 낸다!

"타아아앗!"

단검을 교차해 공격을 막는 순간 티티마가 신음을 흘렸다.

"크윽?"

갑자기 검력이 몇 배나 늘었다?

당황하며 티티마는 최대한 몸을 날려 검압을 흘렸다. 자세를 가다듬으며 그녀는 경각심을 높였다. 얼마나 강한 검력이었는지 풍압만으로도 피부 여기저기가 찢겨 피가 흐르고 있었다. 물론 트롤다운 재생력으로 금방 아물긴 했지만, 충격을 받은 두 팔은 여전히 저려 온다.

"우와! 저 인간! 세네?"

크리스틴의 인상이 더더욱 험악해졌다. 자신의 일격을 맞고도 나가떨어지긴커녕 감탄까지 내뱉어? 그녀가 숨을 거칠게 쉬며 흥분해 중얼거렸다.

"이렇게 된 이상...."

그녀가 손에 든 검을 도로 허리에 찼다.

"고작 트롤 따위를 베기엔 아까운 검이지만...."

그리고 다른 검을 뽑아 들었다.

"이걸로 상대해 주마!"

스르릉!

검을 뽑는 순간 섬뜩한 쇳소리가 울렸다. 실란이 눈을 번쩍 떴다. 검의 형태가 예사롭지 않았다.

"저건?"

눈부신 은색의 검신, 자루는 평범하지만 검막 부분이 고도로 세공되어 화려함을 뽐낸다. 검을 쥔 순간 검신에서 문양이 빛을 발하며 크리스틴을 감쌌다.

그녀가 소리쳤다.

"세이어시여, 제게 당신의 축복을!"

검을 통해 그녀의 전신으로 강력한 신성력이 주입되기 시작했다. 마치 최고위 프리스트에게서 축복을 받은 것처럼, 크리스틴의 모든 신체 능력이 한계까지 올라간다!

그녀가 검을 떨치며 외침을 이었다.

"세이어시여, 당신의 검을 빛나게 하소서!"

순백의 빛이 검신을 따라 흐르며 찬란한 빛을 내뿜었다. 세이어의 성기사들이 쓰는 소드 스킬, 신성검이었다. 그것도 예전의 신성검과는 느껴지는 기운이 차원이 다르다. 오러 유저의 블레이드 오러와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강렬한 기운이다.

웅웅웅!

굉음을 떨치는 신성검을 들어 올리며 크리스틴이 티티마에게 소리쳤다.

"갈가리 찢어 죽여 주마! 더러운 트롤 새끼!"

검신에 새겨진 문양을 보며 실란은 저 검의 정체를 깨달았다.

"성광검 메사이어?"

2

성광검 메사이어.

이 이름난 명검이 세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130년 전의 유명한 성자, 창공의 여신 에어리어스의 프리스트였던 노디스의 손에서였다.

검사도 아닌 프리스트가 아무리 명검을 쥐어 봤자 강해질 리가 없다. 하지만 노디스는 하급 프리스트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검의 힘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구해 명성을 떨쳤는데, 이는 메사이어의 특이한 성질 덕분이었다.

성광검 메사이어는 주인의 능력을 강화시킨다.

이렇게만 적어 놓으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이는 놀라운 효능이었다.

검사가 사용하면 신체 능력이 상승하고 마법사가 사용하면 마력이 높아지며 성직자가 사용하면 신성력이 강화된다. 사용자가 어떤 종류의 힘을 쓰건 간에, 메사이어는 그에 맞춰서 힘을 강화시켜 주는 것이다. 그야말로 절대적인 범용성이랄까?

첫 주인인 노디스가 프리스트이기도 했고, 또 그가 사심 없이 검의 힘으로 사람들을 도우며 살았기에 이 검은 성광검 메사이어라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사후, 성광검 메사이어는 점점 잊혔다.

메사이어의 강화 능력, 그 한계 탓이었다.

분명 메사이어는 사용자의 능력을 강화시켜 주었다. 그러나 그 한계도 분명했다.

쓰는 사람의 기량이 받쳐 준다면 오러 유저급 힘도 부여해 주지만, 그렇다고 오러 유저로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 하급 마법사에게 강대한 마력을 줄 수는 있지만, 그래 봤자 대마법사의 마력에는 미치지 못했다.

즉 오러 유저나 대마법사, 주교급 신관쯤 되는 진짜 강자에게는 그 증폭력이 효과가 없다.

진짜 강자에게는 아무 쓸모도 없지만, 어중간한 이에게는 강자의 힘을 부여해 준다. 이 특성 탓에 메사이어는 온갖 이류 무인들의 표적이 되었고, 수없이 주인을 바꾸고 또 바꿨다. 그리고 이 아귀다툼 속에서 결국 종적을 감춰 버렸다.

100여 년 이상 역사 속에서 사라졌던 검, 비록 한계가 있다지만 유서스의 마갑 엘드라드와 동급인 초특급 아티팩트가 바로 저 성광검 메사이어다.

실란이 놀라 중얼거렸다.

"크리스틴이 어디서 저걸 구한 거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