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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3 - 23

☆ ☆ ☆

테스론이나 유서스, 스테반처럼 세렐라인은 크리스틴에게도 적당한 아티팩트를 챙겨 주려 했다. 하지만 정작 목록을 살펴보니 문제가 있었다.

신성력은 마력과 반발하는 법이다. 그런데 은의 현자가 가진 기물 대부분은 강력한 마법으로 발동하는 아티팩트들이었다. 성기사인 크리스틴이 쓸 수 있는 물건이 없었다.

그렇게 고민하다 문득 세렐라인이 발견한 것이 바로 일반 창고 구석에서 썩고 있던 성광검 메사이어였다.

역사 속에선 엄청난 물건 취급받고 있지만, 사실 은의 현자 입장에서 메사이어는 별로 높은 등급의 기물이 아니었다. 위력이 문제가 아니라 그 증폭 특성이 현 인류에게 알려져도 별문제가 없기 때문이었다.

성광검 메사이어의 높은 범용성은 인간의 신체에 개입해 개조함으로써 능력을 증폭시키는 방식이 아니었다. 그냥, 메사이어 안에 온갖 종류의 기운이 다 들어가 있어 쓰는 사람에 맞게 그때그때 걸맞은 힘을 더해 주는 방식이었다.

누구든 사용할 수 있도록 처음부터 다목적 증폭용으로 만든 검, 구동 원리만 놓고 보면 유서스의 마갑 엘드라드와 전혀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애초에 금지 물품이었으면 역사에 이름을 알리지도 못했겠지. 은의 현자도 우연히 손에 들어와 보관하고 있을 뿐이었지, 딱히 외부 유출을 막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뭐, 그렇다 해도 성광검 메사이어의 위력 자체는 웬만한 금단의 아티팩트 못지않다. 전신을 강화한 크리스틴이 기합을 터트리며 몸을 날렸다.

"타아앗!"

티티마도 주술을 발동시키며 공격을 막았다.

타아앙!

순백의 신성검이 교차한 단검과 마주하는 순간, 티티마의 가느다란 몸이 뒤로 크게 밀려났다.

"어어?"

티티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단 일격이었는데 그녀가 애지중지하는 단검이 절반 가까이 파여 있었다.

화들짝 놀라는 티티마를 노리고 연격이 이어졌다. 순백의 섬광이 연거푸 예기를 뿌리며 트롤 소녀의 전신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윽! 으윽!"

아까와는 힘도 스피드도 비교가 되질 않는다. 애써 피하는 티티마의 전신이 상처투성이가 되어 갔다. 애써 피하곤 있었지만 너무 공세가 빨라 계속 어깨며 허벅지가 근육째 베어진다. 그녀가 트롤이라 재생력이 있어 망정이지, 다른 종족 같았으면 벌써 쓰러질 중상이었다.

정신없이 몰리며 티티마가 눈을 연신 깜빡였다.

'에? 이 인간 갑자기 너무 세졌다? 뭐가 이래?'

메사이어를 티티마에게 겨누며 크리스틴이 오만한 목소리를 토해 냈다.

"호호홋! 이는 위대한 은의 현자께서 우리의 사랑을 위해 내려 준 검! 이 검에 의해 죽는 걸 영광으로 알아라, 트롤!"

역시 크리스틴은 개념이 없었다. 흥분하고 나니 절대 발설해선 안 된다는 은의 현자의 존재도 막 입에 담아 버린 것이다.

과연, 그 순간 실란이 눈을 반짝였다.

'응? 은의 현자?'

처음 들어 보는 칭호였다. 하지만 성광검 메사이어를 줄 정도면 보통 인물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여하튼, 일단은 눈앞의 위기부터 처리해야 할 터.

실란은 차분히 크리스틴과 티티마의 전투를 살펴보았다. 과연 성광검 메사이어의 힘은 듣던 대로 굉장했다. 아까까지는 박빙의 승부를 결하던 티티마가 삽시간에 패색을 띠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오러 유저급은 아닌데?'

쓰는 사람의 기량에 따라 다르다더니, 확실히 그 정도는 아니다. 저 정도면 그냥 교황급 성직자가 축복을 내린 정도? 오러의 신체 강화력과 비교하면 손색이 좀 많아 보인다.

'저 정도라면!'

실란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손을 모으며 신성 주문을 외운다.

"필라넨스시여! 당신의 종에게 사자의 용맹을 허락하소서! 검 든 두 팔에 거인의 힘이 깃들고 그 눈이 매처럼 매서워지며 두 다리가 굳센 수소가 되어 적을 치게 하소서!"

온갖 강화 주문이 실란의 막강한 신성력을 바탕으로 티티마에게 쏟아졌다. 아틸카쯤 되면 주술에 의한 신체 능력 증폭도가 신성 주문을 월등하게 뛰어넘으니 아무 소용도 없겠지만....

"오잉?"

역시 티티마에겐 꽤나 먹혀 든 모양이었다. 그녀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몸이 가볍네?"

만면에 화색을 띠며 티티마가 크리스틴의 공격을 피해 냈다. 월등히 스피드가 빨라져, 크리스틴의 움직임을 따라잡으며 반격까지 한다. 티티마의 단검이 크리스틴의 신성검을 후려갈겼다.

타앙!

되려 크리스틴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티티마가 다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

"힘도 세졌네?"

"이, 더러운 트롤 주제에!"

크리스틴이 욕설을 외치며 메사이어를 내리쳤다. 검에 맺힌 순백의 기운, 신성검이 티티마의 단검을 통째로 자를 듯 날아들었다.

실란이 신성 주문을 외쳤다.

"필라넨스시여! 당신의 종에게 강철의 검을!"

두 자루 단검에 분홍빛 성광이 번쩍였다. 티티마가 단검을 교차해 신성검을 막았다. 그리고 입술을 동그랗게 모았다.

"검도 단단해졌네?"

분명 아까는 절반 가까이 박히던 신성검을 단검이 무난히 막아 낸다. 분명 현재 크리스틴의 신성검은 블레이드 오러와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았지만, 티티마의 주술력에 실란의 신성력이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니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역시! 내 신성력으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어!'

신기해하는 티티마를 향해 실란이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보조해 줄 테니 해치워, 티티마!"

"응!"

목소리에 활기를 띠며 티티마가 신이 난 듯 크리스틴을 몰아치기 시작했다. 신성력을 계속 끌어내며 실란이 눈을 빛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프리스트 전투력 없다고 물로 보는데...."

양손에 신성력을 모아 티티마를 가리키며 실란이 이를 갈았다.

"어디, 몸빵 생긴 프리스트가 얼마나 무서운지 한번 맛보라고!"

☆ ☆ ☆

"아라라라...."

주술적인 허밍을 날리며 티티마는 연신 크리스틴을 몰아붙였다.

정신없이 좌우로 몸을 날리며 복잡한 풋워크를 발휘해 상대를 현혹시킨 뒤, 예상치 못한 각도에서 검을 뿌린다. 그야말로 고양이과 맹수를 연상케 하는 날렵한 움직임이었다.

"이이익!"

신경질을 내며 크리스틴이 연거푸 참격을 뿌렸다. 연속 사선 베기로 거리를 벌린 뒤 머리 치기! 티티마가 막 머리 위로 단검을 교차해 막으려던 찰나였다.

크리스틴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페인트다!'

손목을 꺾어 검의 궤적을 바꾼다. 메사이어가 춤을 추며 단숨에 티티마의 옆구리로 향했다.

그때였다. 티티마가 어리둥절해하며 몸을 틀어 옆구리를 방어했다. 검이 서로 부딪히며 튕겼다.

"쳇, 알아차렸나?"

하지만 티티마의 표정을 보니, 자신도 어떻게 막은 건지 모르는 눈치다.

"엥? 이거 뭐임?"

멀리서 보조하던 실란이 씨익 웃었다.

"좋아, 먹혔어! 다음 간다!"

온갖 다양한 전투를 경험해 본 실란이다. 크리스틴의 검의 흐름만 보고도 그녀가 페인트를 건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물론 실란이 검사도 아니니 실제로 노리는 부분이 어디인지까지는 알아챌 수 없다. 하지만 그거면 충분하다.

크리스틴이 다시 페인트를 걸며 티티마를 노렸다. 타이밍을 맞춰 실란도 신성 주문을 걸었다.

"필라넨스시여! 당신의 종에게 섬광의 축복을!"

페인트에 티티마가 막 속아 넘어가려는 순간, 전신 감각이 예리해지며 상대의 검이 다른 곳으로 향하는 걸 육체가 알아챈다. 미처 티티마가 머리로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여 진짜 공격을 막아 낸다.

타앙!

적절하게 실란이 그 순간만 티티마의 전신 감각을 고도로 증폭시킨 것이다. 물론 그 상태로를 계속 유지하면 그녀의 신경이 감당할 수 없으니 잠깐, 아주 잠깐 페인트가 걸리는 그 순간만을 노린다!

"진짜 프리스트라면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만 보조해 주는 법!"

티티마가 감탄한 얼굴로 실란을 힐끔거렸다.

"오왕...."

진짜 신기했다. 자신의 몸이 이토록 날렵하게 움직이다니? 이토록 강인한 공격을 퍼부을 수 있다니? 심지어 상대의 속임수조차도 꿰뚫어 보게 해 주는 것이 아닌가?

'이거 굉장해!'

트롤 주술은 철저히 개인적이기 때문에 이처럼 남을 강화시켜 주는 경우는 티티마도 처음 겪어 본 것이다. 실란이 고함을 질렀다.

"신성력 아낌없이 퍼 줄 테니까 마음껏 싸워!"

"응! 이거 좋아!"

반쯤 희열에 차 티티마는 계속 크리스틴을 공격했다.

아틸카에게 배웠던, 하지만 기량이 모자라 제대로 구사하지 못했던 온갖 체술이 자연스레 풀려나온다. 게다가 아무리 움직여도 지치지도 않는다!

'굉장해! 굉장해! 굉장해!'

티티마는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그토록 이해가 가지 않았던 아틸카의 가르침들이 쏙쏙 머리에 박혀 들고 있었다.

전신이 고무로 된 것처럼 탄력적으로 움직이는 그녀의 공세에 크리스틴이 결국 어깨를 허용했다. 티티마의 단검이 그녀의 어깨 근육을 깊숙이 베어 갔다.

"크으윽!"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선 크리스틴이 이를 갈았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라면 진다. 과연 실란의 신성력은 엄청나다.

'성광검 메사이어를 쓰고도 감당할 수가 없을 정도라니....'

크리스틴이 실란을 노려보며 버럭 소리를 쳤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바람을 피우고 싶나요, 실란?"

그녀의 헛소리는 주야장천 들어 왔지만, 그래도 들을 때마다 새롭다. 실란이 기가 막혀 입을 뻐끔거렸다.

'바람? 뭔 바람?'

갑자기 크리스틴이 뭔가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군요! 이 정도는 이겨 낼 수 있어야 당신 곁에 설 자격이 있다는 거군요!"

주먹을 쥐며 부르르 떨더니 두 눈 가득 각오를 담아 소리친다.

"강해질게요! 당신의 인정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그리곤 뒤를 돌더니, 그대로 제플린 거리 저편으로 달려가 버렸다.

"...."

너무 상황이 황당해서 티티마는 후속타도 안 날리고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만 보았다. 순간, 상대가 도망간다는 느낌조차 안 들었던 것이다.

"...뭐라는 거야?"

"신경 꺼, 원래 저래...."

한숨을 푹 쉬며 실란은 어깨를 늘어트렸다. 이번 위기는 간신히 넘겼지만, 나중에 또 이런 일이 터질 걸 생각하니 암담했다. 아, 언제쯤 밤잠 편히 자 볼 수 있으려나?

'어쨌거나, 구해 준 것에 대한 감사는 해야지.'

단검을 도로 허리에 차는 티티마를 보며 실란이 인사를 건넸다.

"고마워, 티티마. 덕분에 살았어."

티티마가 실란을 빤히 바라보았다. 푸른 얼굴 위로 황금빛 눈동자가 반짝인다. 묘하게 동공이 가늘어지더니 그녀가 실란에게 몸을 날렸다.

"실란! 너 좋아!"

고양이처럼 폴짝 뛰더니, 대뜸 실란의 가슴에 얼굴을 가져간다.

"에엑?"

이건 또 뭔 소리야? 실란이 당황하며 티티마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무릎을 굽힌 채 정말 고양이처럼 계속 비비적거리고 있었다.

"너 좋아! 굉장해!"

'얘, 왜 이래?'

실란은 몰랐지만, 원래 트롤 소녀들에게는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을 경우 이렇게 냄새를 묻혀 자신의 소유라 주장하는 습성이 있었다.

'얘 옆에 있으면 왠지 주술이 잘돼! 이거 좋아!'

실란의 얼굴이 빨개졌다. 아무리 종족이 다르다지만 티티마는 엄연히 여자아이였다. 그것도 작은 천 조각으로 가슴과 하체만 간신히 가린.

벌거벗은 것이나 다름없는 또래 소녀가 계속 몸을 비벼 오는데 당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아니, 저기...."

하지만 티티마는 실란이 당황하건 말건 여기 비비적, 저기 비비적.

그렇게 열심히 실란을 자신의 '사유물'이라 주장한 뒤에야 티티마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됐다! 이제 이거 내 거!'

간신히 당황을 가라앉히며 실란이 그녀를 재촉했다.

"빨리 빠져나가자. 다른 사람들은 벌써 다들 제플린 떠났겠다."

"응!"

고개를 끄덕이며 티티마가 훌쩍 뛰어올랐다. 한걸음에 건물 옥상까지 올라간 그녀가 아래를 향해 손짓했다.

"자, 실란도 올라와."

기가 막혀 실란이 입술을 내밀었다.

지금 티티마가 올라간 건물의 높이는 무려 3층.

"...야, 내가 무슨 수로 거길 올라가?"

"엥? 못해?"

"사다리의 존재를 무시하지 마! 보통 사람은 자기 허리 높이까지도 못 뛰는 게 원래 정상이야!"

주위에 워낙 제자리 뛰기 10여 미터쯤 우습게 하는 괴수들이 득실거려서 그렇지, 사실은 날개도 없는 것들이 집이며 성벽 폴짝폴짝 뛰어넘는 게 비정상이다.

"그건 알지만, 실란 넌 보통 사람이 아니잖아?"

티티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금 전 그녀의 능력을 몇 배나 오르게 해 준 실란이 보통 사람이라고 우기는 것은 좀 이상하다.

실란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 원래 프리스트란 게 남 좋은 일만 해 주는 직종이거든."

성직자의 고귀한 자기희생 정신을 쉽게도 평가 절하하며 실란은 한숨을 쉬었다.

의아해하며 티티마는 다시 땅 위로 내려왔다. 잘은 모르겠지만 못한다니 못하는 거겠지, 뭐.

"그럼 들릴래, 업힐래?"

순간 실란은 감동했다.

이 자상한 배려라니! 이제까지 그를 들고 다닌 것들치고 이런 거 묻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다들 입 달린 보따리 취급하며 대뜸 들고 날랐을 뿐이다.

"아, 왠지 눈물 날 것 같다."

"...?"

이해 못 하겠다는 듯 눈알만 굴리고 있는 티티마를 향해 실란이 손을 벌렸다.

"업어 주라."

보통 소년이라면 자기 또래 소녀에게 업혀 가는 것에 수치를 느낄 법도 했겠다. 하지만 실란은 그 정도로 수치를 느끼기엔 너무 잦은 '들림'을 당한 것이다. 이제 와서 업혀 가는 것 정도는 전혀 거리낌이 없다.

"응!"

티티마가 실란을 업고 다시 몸을 날렸다.

과연 아틸카의 수제자, 실란을 업고도 움직임이 전혀 둔해진 기색이 없었다. 그래도 업혀 가는 주제에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는지라 실란이 다시 신성 주문을 준비했다.

"필라넨스시여, 당신의 종을 보살피사 산양처럼 끝없이 뛰게 하소서!"

분홍빛 성광이 티티마의 전신을 감싸며 놀라운 활력을 가져다준다. 티티마가 환하게 웃었다.

"와아, 역시 이거 신기해."

폴짝! 폴짝! 폴짝!

실란을 업은 티티마가 개구리처럼 건물을 뛰어넘으며 제플린의 새벽하늘 속으로 사라져 갔다.

3

차탄 공국 북부의 콜른 협곡.

제플린으로부터 1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이곳은, 수백 미터 높이의 좌우 절벽이 100킬로미터 넘게 이어져 있는 거대한 규모의 협곡이었다. 차탄 공국 북부부터 크로방스 왕국 동부의 가란 평야까지 연결되며 한때는 크로방스로 향하는 주요 교역로로 이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차탄 공국이 생기고 따로 정규 도로를 설치하게 되자, 현재는 인적이 완전히 끊겨 가끔 밀수꾼들만이 몰래 드나들 뿐인 불모지가 되어 있었다.

협곡이 내려다보이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 커다란 어금니를 지닌 근육질의 트롤이 아래를 바라보며 감탄을 흘렸다.

"이렇게 모여 있으니 실로 장관이로군."

인적 없는 거친 황야만이 펼쳐져 있던 협곡 어귀에 지금 수천이 넘는 대규모 인파가 모여 있었다. 제플린에서 탈주한 이종족 노예들과 그들을 구출한 안타레스 백국의 정예들이었다.

비록 계절은 한여름이었지만 차탄 공국이 워낙 대륙 북부에 위치해 있다 보니 아침 공기는 여전히 차다. 수많은 엘프와 오크, 드워프들이 수백 개의 모닥불 앞에 모여 앉아 몸을 녹이며 밤새 강행군으로 인한 피로를 달랜다. 허름하나마 천막을 치고 임시 거처를 꾸며 체력이 약한 아이들을 돌보는 이들도 있다. 나눠 준 비상식량을 불에 올려놓고 간단히 요기를 하는 자들도 보인다.

모두들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럼에도 얼굴은 하나같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들뜬 표정들이었다.

어금니를 매만지며 아틸카가 눈을 빛냈다.

'얼추 셈해 보니, 다들 합류한 듯하군.'

이 콜른 협곡 입구가 바로 '안타레스 백국 동족 해방군'이 제플린 탈주 후 합류하기로 정한 지점이었다. 이곳에서 일단 진열을 정비한 뒤 협곡을 통해 크로방스 왕국으로 탈출, 거기서 안타레스 백국으로 향하는 것이 카를이 세운 도주 경로였다.

소규모로 이종족들을 구출할 때야 다이만 던전의 공간 포털 터미널을 이용했지만, 구해야 할 숫자가 수천 단위가 되면 그쪽 경로는 사용할 수가 없다.

온갖 몬스터들이 대거 출몰하는 세텔라드 산맥, 그중에서도 인간의 손길이 닿을 수 없을 정도의 험지 중 험지가 바로 다이만 던전이다. 수천 명을 이끌고 갈 수 있을 장소면 그게 험지냐? 관광지지. 당연히 정상적인 경로를 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틸카가 등 뒤로 손짓을 했다.

"갑시다, 형제들이여."

백여 명 정도 되는 트롤들이 그의 인도에 따라 절벽 틈새의 소로小路를 통해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모두 제플린의 연금술사 길드에 붙잡혀 있던 이들이었다.

높이가 수백 미터에 달하는 절벽, 어지간한 성벽 대여섯 배에 달하는 장대한 지형이다 보니 내려가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뛰어난 신체 능력을 가진 트롤들조차도 한참 후에야 아래쪽으로 도달할 수 있었다.

아틸카와 트롤들을 보며 노예 출신 이종족들이 신기해하는 눈빛을 보냈다.

"어, 트롤이다."

"아, 저들도 있다고 했지, 참."

인간 밑에서 나고 자란 그들에겐 트롤의 모습이 영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개중에는 몬스터가 나타났다며 화들짝 놀라는 이들도 있었다.

"트, 트롤은 몬스터인데!"

"정신 차려요. 인간이 한 말을 아직까지 믿고 있으면 어째요? 트롤이 몬스터면 우리도 여전히 노예게요?"

"어, 그런가...."

엘프 여인의 타박에 오크 사내가 머리를 긁었다. 북적거리는 인파를 헤치고 지나가며 아틸카가 피식 웃었다.

'확실히 많이 변하긴 했군. 예전 같았으면 저렇게 편들어 주는 이들조차 없었을 텐데.'

아틸카는 구출한 트롤들을 데리고 협곡 한쪽 귀퉁이로 향했다.

다른 종족과 달리 트롤은 워낙 몸이 튼튼해, 굳이 모닥불을 피우거나 할 필요가 없다. 그냥 적당한 공터에 모여 주저앉는 것으로 충분했다.

트롤들을 쉬게 한 뒤 아틸카가 함께 온 트롤을 불렀다.

"이들을 부탁하네, 구루 마다가."

"알겠습니다, 구루 아틸카."

상대적으로 작은 어금니를 지닌 깡마른 트롤 사내가 정중히 고개를 끄덕인다. 구출 작전을 함께했던 트롤 구루, 마다가였다. 트롤 구루의 주술력은 그 어금니의 크기에 비례하는 바, 아틸카에 비하면 상당히 격이 낮은 구루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럼, 난 백왕님을 만나 보러 가겠네."

마다가에게 뒤처리를 맡긴 뒤 아틸카는 자리를 떴다.

북적거리는 인파를 헤치며 아틸카는 무리 외곽에 설치된 커다란 막사로 향했다. 막사 앞에서, 녹색 피부의 오크 전사 한 명이 아틸카를 향해 반갑게 손짓을 했다.

"오, 무사했구려, 구루 아틸카!"

흙 멧돼지 일족의 족장이자, 오크의 일곱 오러 유저 중 하나인 킨지르였다. 아틸카가 어금니를 드러내 웃으며 마주 인사를 건넸다.

"무사했군요, 카루가 킨지르."

킨지르는 두 명의 드워프 전사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랜드 포지의 오러 유저, 말로이드와 슬로이틀이었다.

사이좋게 앉아 있는 오크와 드워프를 바라보며 아틸카가 물었다.

"무사했군요, 말로이드, 슬로이틀. 다들 별일 없었습니까?"

말로이드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안쪽의 인파를 바라보았다.

"그럭저럭 계획대로 된 것 같더구려. 다행스러운 일이지."

이번 제플린 동족 해방 작전을 위해 안타레스 백국은 모든 전력을 총동원했다. 각 일족의 정예들은 물론, 오러 유저만도 무려 열 명이나 동원되었다.

인간 중에서는 레펜하르트와 러스.

엘프 오러 유저인 이니야는 물론이요, 드워프들은 그들이 보유한 세 오러 유저 모두를 이 작전에 투입했다. 오크들 역시 하다툼과 타시드, 킨지르, 칼켄 등 네 오러 유저가 참가했고 트롤 쪽도 아틸카며 티티마 등, 강력한 트롤 구루들을 대거 동원했다.

그야말로 안타레스 백국의 사활을 건 대작전이었던 것이다.

슬로이틀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정말 다행이지. 만약 잘못되었으면, 기껏 간판 단 우리나라 그대로 말아먹을 뻔했잖소?"

수천에 달하는 이종족들을 보며 아틸카가 혀를 내둘렀다.

"다들 참으로 고생하셨소. 저 많은 인원을 용케도 다 데리고 나왔군."

킨지르가 턱을 매만지며 너털웃음을 흘렸다.

"카를 재상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뭘. 그 친구 용하더만."

트롤을 구출해야 하는 아틸카 쪽은 운신이 그리 힘들지 않았다. 구해야 할 숫자가 백여 명 정도라, 혼란을 틈타 그냥 아무데로나 탈출하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상대적으로 숫자가 많은 엘프와 오크, 드워프들은 그렇지 않다.

구해야 할 숫자가 너무 많다 보니, 그들을 데리고 나오는 것만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카를은 세밀하게 탈출 경로와 노예들의 숫자, 그들의 이동 속도까지 계산하며 저 병력들을 분산 배치했다.

제플린 동쪽 지구에서는 오러 유저 하다툼과 슬로이틀이 노예들을 이끌었다. 잘카토며 이니야의 부관, 세르펠 등의 도움을 받아 그 일대의 노예 경매장을 모조리 털어 동쪽 성문으로 탈주했다.

서쪽은 이니야와 카다마이트가 시리스며 탈카타의 도움을 받아 서쪽 성문으로 탈주했다.

남쪽은 말로이드와 칼켄, 렐하드가.

북쪽은 타시드와 킨지르, 마켈린 등이 맡았다.

각 종족을 구해야 하는 만큼 구출대에 엘프와 드워프, 오크가 골고루 섞여 있어야 했다. 그러면서 손발이 잘 맞아야 하고 지휘력도 있어야 하며 구출된 이종족들이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이 적절히 나뉘어야 한다. 단순히 전투력 순서대로 나누어서 될 일이 아닌 것이다.

말로야 쉽지만 각 종족의 구성원들 전부의 능력과 성격을 확실하게 파악하지 않으면 힘든 일이다. 카를이 얼마나 사람들을 잘 다루는지 보여 주는 일면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무식한 오크인 킨지르는 카를이 피 말리게 고민한 저 작전 배치를 한마디로 일축시켜 버렸지만.

"음, 역시 그 친구 용해."

단순하면서도 진실을 꿰뚫는 그의 표현에 아틸카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문득 의아해했다.

말하다 보니 어째 말로이드와 슬로이틀의 표정이 어두웠다. 애써 밝은 표정을 짓고는 있지만 한편에 그늘이 보인다.

"그러고 보니... 카다마이트는 어디 가셨소?"

그러자 세 사람의 표정이 숙연해졌다.

킨지르가 술 부대를 들어 올렸다.

"카루가 카다마이트가 대지의 품으로 돌아갔다고 하더군. 이 술은 그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오."

"카다마이트가 자연의 흐름 속으로 들어갔습니까?"

피해가 없을 것이란 생각은 물론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설마 오러 유저를 잃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

말로이드가 씁쓸하게 웃었다.

"알 포트의 신관들이 그의 시체를 수습했소. 시기가 시기이니, 그의 장례는 백국으로 돌아간 후에 치러지게 되겠지."

"...귀한 사람을 잃었군요."

생사는 모두 자연의 흐름을 따름이니, 죽음 앞에서 슬퍼할 이유는 없다는 것이 구루의 가르침.

하지만 상실의 아픔은 트롤에게나 드워프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다.

주술의 기운을 음성에 실어 아틸카가 애도의 말을 건넸다.

"카다마이트는 동족을 위해 명예롭게 싸웠고, 가치 있는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의 영혼은 분명 위대한 자연 속에서 평온을 찾을 것입니다."

담담하면서도 힘이 실린 아틸카의 목소리에 드워프 전사들의 안색이 조금 밝아졌다. 아틸카의 말을 듣고 있으니, 조금씩 슬픔이 가시는 느낌이었다.

"친우를 잃은 그대들의 상실에 애도를 표합니다."

슬로이틀이 감사를 표했다.

"고맙소, 구루 아틸카. 그나저나, 구원자를 뵈러 온 것 아니오? 지금 안에 계시오만."

아틸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킨지르가 막사 쪽을 손가락질했다.

"아까부터 종이 붙잡고 뭔가 하고 계시던데. 들어가 보시구려."

☆ ☆ ☆

레펜하르트는 막사 안에서 한창 인근 지도며 각종 서류를 보며 앞으로의 일을 고민하고 있었다.

"무사히 돌아왔군. 작전은 어떻게 되었나, 아틸카?"

목례한 뒤 아틸카가 보고를 올렸다.

"제플린에 억류되어 있던 저희 동족 백일곱 명, 전원 구출에 성공했습니다. 낙오자도 없고, 이쪽의 피해 역시 전무합니다."

"그나마 트롤들은 피해가 없어 다행이군."

레펜하르트가 한숨을 쉬었다.

그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을 보며 아틸카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왜 레펜하르트가 저런 표정을 하고 있는지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카다마이트에 대한 이야기는 밖에서 들었습니다. 역시 피해가 큽니까?"

레펜하르트가 다시 한 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잃은 것은 카다마이트뿐만이 아니다. 아무리 작전대로 완벽하게 움직였다지만, 그래도 그 와중에 피해가 없을 수는 없다.

트롤이야 워낙 구해야 할 숫자도 적고 소수 정예로 움직여 별 피해가 없었다. 하지만 다른 종족은 그렇지 않았다. 탈출 과정에서 낙오된 이들도 상당했고, 제플린의 병력 탓에 채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은 노예 숫자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각 종족의 정예 중에서도 죽은 이가 꽤 되었다. 탈출 과정에서 제플린의 병력을 가로막다 장렬히 산화한 이들의 숫자가 수백에 달한다.

자유의 기쁨을 누리는 이들 가운데, 상실의 아픔 속에서 애써 눈물을 참고 있는 이들 역시 분명 있는 것이다.

각 종족에서 올라온 보고를 훑어보며 레펜하르트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전체 숫자로 보면 결코 흘린 피의 양이 많다 할 수 없겠지만...."

아틸카가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적게 흘렀어도 피는 피, 그 피를 흘린 자의 아픔은 숫자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겠지요."

"그렇지...."

비록 이니야에게 한 소리 듣긴 했지만, 레펜하르트는 원래 몰인정한 이가 아니다. 비록 서류상이라지만 이토록 많은 피해를 보니 마음이 편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우울해하는 레펜하르트를 향해 아틸카가 곁으로 다가갔다.

"백왕이여, 우리들 가운데 전해지는 노래를 하나 들려 드리지요."

흉악한 어금니 사이로 온화한 노랫가락이 흘러나왔다.

하늘이 뿌린 눈물은 대지의 씨앗을 깨우고

싹 트지 못한 씨앗은 거름 되어 땅을 일깨우네.

개미는 베짱이를 먹고 매미는 땅속에서 일생을 보내니

그 삶은 고단하나 또 아름답도다.

삶으로 생명을 증명하나 또한 죽음으로 삶을 이끎이니

그 흐름 속에 무슨 귀천이 있으리

피고 지고 살고 죽는 모든 것이

뜻대로 행하며 또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그것이 비로소 한 점으로 향하게 되리라.

"아시겠습니까? 인간의 왕이자, 우리의 왕이여."

노래를 마친 아틸카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막사 밖으로 향했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나가 버린 그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레펜하르트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또 시작이네, 저 양반."

잘은 모르겠지만, 어쨌건 기운 내라는 소리인 것 같긴 하다.

쓴웃음을 지은 뒤 레펜하르트는 어깨를 폈다.

"그래, 기운 내야지. 지금 여기서 풀 죽어 있을 팔자는 아니니까."

☆ ☆ ☆

중앙 막사로부터 몇십 미터쯤 떨어진 어느 곳.

러스가 예쁘장한 붉은 머리 소년의 멱살을 붙잡고 짤짤 흔들고 있었다.

"야, 이 자식아! 대체 어디 갔던 거냐?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켁켁, 이것 좀 놔요, 러스 경!"

실란이 사라진 후, 러스는 말로이드와 일단 헤어진 뒤 실란을 찾아 제플린 여기저기를 뒤지고 다녔다. 하지만 제플린은 너무도 넓고, 게다가 대난리가 난 덕에 온갖 병력들이 난무하던 터라―그제야 뇌물 먹은 병사들이 아차 싶어 출동한 것이었다― 수색이 영 쉽지가 않았다.

결국 해가 떠 버려, 더 이상 제플린에 머무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눈물을 머금고 콜른 협곡으로 향했다. 일단 레펜하르트에게 보고한 뒤 혼자서라도 다시 실란을 찾아 제플린에 잠입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막상 협곡으로 와 보니....

"어, 러스 경! 늦었네요?"

라면서 실란이 태연한 얼굴로 손 흔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도 기가 막혀 자기도 모르게 멱살부터 잡게 된 것이다.

"늦었네요? 사람 속 새까맣게 태우고 한다는 소리가 늦었네요?"

그래도 무사하니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러스가 실란을 내려놓았다. 목을 매만지며 실란이 투덜거렸다.

"어휴, 나는 뭐 일부러 그런 줄 알아요? 불가항력이었다구요."

크리스틴에게 걸려서 납치된 것도 억울한데 이걸로 혼까지 나다니? 실란 입장에서는 실로 억울한 이야기인 것이다.

둘은 그렇게 서로를 노려보다 결국 표정을 풀었다.

러스가 피식 웃었다.

"뭔 일 생긴 줄 알았잖아, 인마."

실란도 피식 웃었다. 비록 태도가 과격하긴 했지만, 러스가 얼마나 그를 걱정하고 있었는지 진심이 느껴졌다.

"실제로 뭔 일 생기기도 했어요. 크리스틴한테 보쌈당했었다고요."

러스는 식은땀을 흘렸다. 크리스틴에 대해서는 그도 익히 들어 알고 있다.

"...그, 그거 진짜 큰일 날 뻔했네. 그런데 아까부터 째려보고 있는 쟤는 누구냐?"

실랑이를 벌이는 러스와 실란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한 트롤 소녀가 한껏 몸을 웅크린 채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일단 상황은 지켜보고 있지만, 수틀린다 싶으면 당장이라도 덤빌 것 같은 모양새가 꼭 독 오른 고양이를 보는 느낌이다.

실란이 그녀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아, 쟤 티티마라고 하는데요. 크리스틴한테 잡혔을 때 저 구해 준 애예요. 몰라요, 러스 경? 아틸카 씨의 후계자라던데?"

러스가 눈을 껌뻑거렸다.

"으음, 전에 아틸카 공 만났을 때 옆에 작은 트롤 하나 있는 것은 봤었는데... 솔직히 모르겠다. 트롤들은 아직 통 구별이 안 가서."

"오러 유저씩이나 되면서 그 정도 눈썰미도 없어요?"

"구별 못 한다는 건 아냐. 구별은 가. 단지 누가 누군지 모르겠다는 것뿐이지."

드워프와는 다른 의미로, 트롤들은 인간의 눈으로 구별하기가 힘들었다.

드워프처럼 서로 비슷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너무 달라서 구별이 힘든 것이다.

모든 트롤들은 저마다 독특한 개성의 문신과 장신구로 자신을 치장한다. 구루쯤 되면 그 정도가 더하다.

"다른 줄은 알겠는데, 너무 복잡해서 누가 누군지 모르겠더라고."

형이상학적인 그림 두 개를 걸어 놓으면 누구나 쉽게 구별은 한다. 하지만 따로 한 개씩 걸어 놓고 이게 무슨 그림이냐고 물어보면 어지간히 익숙하지 않은 경우 답할 수가 없는 것이다.

티티마가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러스에게 다가왔다. 어색하게 고개를 숙이며 그녀가 말했다.

"안녕하세요, 사이러스 님. 아틸카님의 파구루, 티티마라고 합니다...만 저, 자기소개한 것 벌써 이걸로 세 번째인데요?"

"...미안하다."

어색해하며 러스가 뒷목을 벅벅 긁었다. 그때 등 뒤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봐, 러스, 실란. 지금 노닥거리고 있을 때가 아닐 텐데? 모두 합류했으니 슬슬 다시 이동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레펜하르트가 홀로 인파 사이를 걸어오고 있었다. 러스와 실란이 머쓱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구출한 이종족 노예들의 인솔은 시리스며 마켈린, 타시드 등 각 종족의 우두머리들이 맡고 있었지만 인간인 러스와 실란에게도 임무는 있었다. 이 수많은 인파를 먹일 식량과 이동하며 쓸 피복류 등을 실은 수십 대의 우마차를 관리, 보호해야 하는 것이다.

"아, 알아요. 안 그래도 준비하려고 했다고요."

"바로 움직일 겁니다, 형님."

러스와 실란이 허겁지겁 우마차가 줄지어 선 쪽으로 향했다. 그 우마차 대열을 바라보며 레펜하르트가 중얼거렸다.

"그럼, 슬슬 거래를 끝마치러 가야겠군."

☆ ☆ ☆

제플린으로부터 탈주한 이종족 노예의 숫자는 가히 수천을 넘어 일만에 육박하고 있다. 여기에 안타레스 백국의 병력까지 포함하면 그 숫자는 더더욱 늘어난다.

이 정도 숫자라면 그저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복잡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단순히 구출했다고 끝이 아니다. 이들을 무사히 안타레스 백국까지 데리고 가는 동안 필요한 식량과 생필품의 숫자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그 대량의 물품을 준비한 30대 중반의 인간 사내, 타오반 상회의 회주 시볼트를 보며 레펜하르트는 다시 한 번 감사를 표했다.

"그대의 조력이 없었다면 이 과업도 불가능했을 터, 모든 종족의 이름으로 감사하는 바입니다."

시볼트가 빙그레 웃으며 손을 저었다.

"그저 상인으로서 행동했을 뿐입니다."

레펜하르트에게 서류를 내밀며 그가 말을 이었다.

"모든 물품을 전달했습니다. 자, 여기 사인을."

물품 목록은 이미 수하들을 시켜 확인을 끝낸 후다.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깃털 펫을 꺼내 시원한 필치로 사인을 마쳤다.

사인을 교환한 뒤 각자 서류를 품에 넣는 걸로 거래가 끝났다. 돌아가려는 시볼트를 보며 문득 레펜하르트가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의뢰한 입장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용케도 이 거래를 승낙하셨더군요."

물품을 싣고 온 타오반 상회의 다른 멤버들은 아직도 저 이종족 인파를 보며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

이 거래를 행하는 것은 사실 차탄 공국에 정면으로 반기를 드는 행위다. 시볼트가 회주로서 인망이 깊고 수하들에 대한 대우도 훌륭했기에 다들 따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걱정마저 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수하들을 보며 시볼트가 어깨를 으쓱였다.

"물론 저도 고민을 좀 하기는 했습니다."

레펜하르트가 타오반 상회를 통해 작전의 개요를 알리고 필요한 물품 조달을 의뢰한 것은 보름 전의 일이었다.

그때 시볼트는 사흘 내내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안타레스 백국이 제플린을 도모한다는 것은 전쟁이나 다름없는 큰 사건이었다. 과연 어떻게 대처해야 상회에 이득이 될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았다.

시볼트가 안정을 추구하는 중소 상인이라면 고민할 필요도 없이 거절했겠지.

하지만 그는 대륙 전체를 아우르는 대상인을 꿈꾸는 자였다.

대상인이 되려면, 돈뿐만이 아니라 세상의 흐름에도 민감해야 하는 법이고 권력자와의 관계 역시 돈독해야 한다.

그리고 타오반 상회가 이토록 성장한 것에는 역시 안타레스 백국의 존재가 제일 크다.

"백왕님은 저희 상회 최대의 고객, 위험이 크다지만 쉽게 포기할 수 있는 끈이 아니지요."

원래 시볼트는 이종족 노예 제도를 딱히 반대하는 것도, 찬성하는 것도 아니었다.

쉽게 말해서 무심했달까? 그냥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니 그런가 보다 하고 남들처럼 행했을 뿐이다.

하지만 노예 제도를 반대하면 레펜하르트라는 유수의 권력자와 수많은 오러 유저, 그리고 안타레스 백국이라는 나라 하나를 등에 업을 수 있다.

반면, 찬성하게 되면 그냥 차탄 공국의 흔한 상인의 하나로 남을 뿐인 것이다.

"솔직히 백왕님이 틀린 말 하시는 것 같지도 않았고요."

안타레스 백국을 세운 이후, 레펜하르트는 주 거래처로 계속 타오반 상회를 이용했다. 그래서 안타레스 백국과의 거래를 통해 시볼트도 수많은 자유로운 이종족들을 보아 왔다.

딱히 레펜하르트의 이종족 해방 사상에 감화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가 틀린 말을 한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니, 이런 저런 이유는 차치하고서라도 사실 시볼트는 레펜하르트라는 인물 자체가 마음에 들었다.

레펜하르트는 신용할 만한 거래 상대였고 남을 배신할 이가 아니었다. 사실 장사를 할 때 신뢰와 금액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상대에 대한 신뢰다.

"문제는 과연 백왕님께서 성공하시느냐였는데...."

시볼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보기엔 도무지 백왕님께서 실패할 것 같지가 않더군요."

작전 자체야 시볼트도 모르니 그게 치밀한지 아닌지 알 바 아니다.

하지만 그는 레펜하르트가 어떤 인물인지 알고 있었다. 그의 휘하에 어떤 굉장한 용자들이 모여 있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이것저것 재어 보니, 레펜하르트가 제플린 공략을 도모한다면 현재 차탄 공국으로는 도저히 그를 막아 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던 것이다.

"만약 백왕님의 저 제플린 해방 작전이 현실성이 없었다면 저도 이러지는 않았을 겁니다. 이 정보 들고 차탄 왕국으로 달려가 보상금 타 먹었을 지도 모르지요."

"그대가 그럴 사람이 아니란 걸 알기에 정보를 알린 거였소만?"

"하긴, 그건 그렇군요."

시볼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상인에게 있어 거래 상대의 신용은 필수 요소다. 말은 저렇게 했지만,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이 저렇게 행동했을 리는 없을 것 같았다.

"어쨌거나, 저는 백왕님을 믿고 판돈을 걸었습니다. 덕분에 많은 이득을 볼 수 있었지요."

"그거 다행이군요."

레펜하르트는 웃었다.

그는 시볼트가 단순히 백국과의 거래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그저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는 정도로 큰 이득을 보았다고 할 리는 없으니까.

이 난리를 미리 알고 있던 시볼트는 백국이 원하는 물품을 조달하는 한편, 다른 쪽으로도 바삐 움직였다.

제플린의 각 노예상인들에게 엄청난 숫자의 노예를 구입하기로 선 계약을 한 것이다. 거래 대금을 환어음을 통한 후불제로 처리하고, 거래가 깨질 경우 대륙 각국에 흩어져 있는 노예상들의 토지를 담보로 맡았다. 타오반 상회의 가용 액수를 넘어서는 액수였기에 만약 레펜하르트가 실패하기라도 했다면 바로 타오반 상회는 무너졌을 것이다.

하지만 시볼트는 레펜하르트를 믿었다. 크로방스 대흉년 때와 마찬가지로.

그리고 그의 믿음은 훌륭히 보상받았다.

이제 시볼트에게 지불할 노예가 없으니 제플린의 노예상들은 토지로 대신 대가를 치러야 한다. 덕분에 타오반 상회는 한 방에 대륙 전역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대상회가 되어 버렸다.

"뭐, 상인의 도리에는 어긋나는 방법이지만, 어차피 제플린의 노예상들은 항시 하던 짓이었습니다. 자기들의 수법에 자신들이 당했으니 자업자득이지요."

레펜하르트는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문득 물었다.

"하지만 이 일로 더 이상 차탄 공국에 머무르기는 힘드실 텐데 달리 생각해둔 것은 있소?"

시볼트가 차분히 대답했다.

"안 그래도 슬슬 이쪽 상회를 정리하고 차탄을 떠날 생각입니다."

어차피 차탄의 상단 대부분은 국경을 넘나드는 무국적 집단에 가깝다. 타오반 상회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제플린에 타오반 본사가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제플린이 대륙에서 가장 번화한 상업 도시이기 때문일 뿐, 시볼트가 무슨 차탄 공국에 애국심이 있어서가 아닌 것이다. 실제로 그는 차탄이 아닌 라스틸 공국 출신이기도 했고.

넙죽 허리를 숙이며 시볼트가 정중히 말을 건넸다.

"앞으로는 크로방스 왕국에 자리를 잡을까 합니다. 백왕님께서 많이 보살펴 주시길 기대하고 있지요."

크로방스의 현 국왕, 유벨 2세가 안타레스의 백왕을 얼마나 총애하는지는 대륙의 상인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총애라기보다는 신뢰하는 동료에 가깝겠지만.

레펜하르트도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최선을 다해 돕겠소. 그것이 우리에게도 이득일 테니."

상대의 대답에 시볼트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보였다.

자고로 돈이란 벌기도 힘들지만 지키기는 더 힘든 법,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부호가 된 그인 만큼 그 지위를 지키기 위해 강한 뒷배경은 필수다. 그런 면에서 안타레스 백국은 대단히 만족스러운 배경이었다.

뭐, 이러다가 안타레스 백국 날아가면 타오반 상회도 같이 날아가겠지만....

'이 정도 판돈을 건 도박인데 그 정도 리스크야 당연히 감수해야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시볼트의 수하들이 출발할 준비를 마쳤다. 상황을 점검한 뒤 시볼트가 작별 인사를 건넸다.

"앞으로도 꾸준한 거래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백왕님. 저희 타오반 상회는 언제나 신뢰와 친절로 고객님께 봉사합니다."

참으로 철저한 상인의 모습이었다.

"그럼 안녕히 가시오."

떠나가는 시볼트 일행의 뒷모습을 보며 레펜하르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저토록 자신을 신뢰해 주니 참 고맙기도 하고, 또 그만큼 가슴이 무겁기도 했다.

이러다 그와 안타레스 백국에게 무슨 일 생기면 시볼트며 저들의 운명도 좋게 흐르지는 않을 것 아닌가? 어쩌면 마왕의 주구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화형이라도 당할지도 모르지.

'아니, 이번엔 그래도 마왕 소리는 안 듣고 있으니 그럴 일은 없으려나?'

어쨌건 새삼 자신의 어깨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올라가 있는지 절실히 느껴졌다.

"아, 진짜 저들도 제대로 보답받고 잘살게 해 주어야 할 텐데...."

중얼거리며 레펜하르트가 다시 막사 쪽으로 돌아가려던 차였다.

콜른 협곡 너머 황야에서 기마 3기가 먼지를 일으키며 맹렬히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말을 몰고 있는 것은 우락부락하게 생긴 세 명의 오크, 정찰을 위해 협곡 너머로 향했던 탈카타와 검투사 출신 오크들이었다.

"백왕님!"

허겁지겁 말을 달린 탈카타가 굴러떨어지듯 말에서 내려 레펜하르트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나이 들었음에도 결코 노쇠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 이 용맹한 오크를 보며 레펜하르트가 눈을 크게 떴다.

탈카타의 얼굴에 평소에 볼 수 없었던 공포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무슨 일인가, 탈카타?"

부복한 채 탈카타가 정신없이 소리쳤다.

"인간의 군대입니다! 제플린에서 추격대를 보낸 것 같습니다!"

4

지평선 너머로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진다. 흙먼지가 구름처럼 피어오르고 대지가 지진이라도 난 듯 연신 요동을 친다.

수천의 군세가 콜른 협곡을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뒤늦게 움직인 제플린의 정규군과 그들을 이끄는 차탄의 왕궁 기사단, 그리고 제플린 나이츠들이었다.

도시 방어 따윈 생각도 안 했는지 아예 전력을 전부 끌고 나온 것이다. 차탄 공국의 귀족층이 얼마나 분노했는지 명백히 보여 주는 광경이었다.

제플린의 군세 너머로 서서히 커다란 협곡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늘을 찌를 듯 솟구친 가파른 좌우 절벽, 그 사이로 검고 깊은 대지의 틈이 입을 벌린다. 아직 아침이라 절벽 위쪽은 여전히 밤안개가 끼어 흐릿하다. 그 아래 모여 있는 수천 명의 이종족 무리가 점차 시야에 들어온다.

군대의 선두에 선 커다란 흑마를 탄 붉은 갑옷의 기사가 손을 들어 올렸다. 차탄 최강의 검사로 칭송받는 오러 유저, 클라트 경이었다.

명령이 떨어지자 진군 속도가 서서히 줄어들었다.

히히힝!

클라트 경은 말을 멈춰 세웠다. 흑마가 투레질을 하며 바닥을 벅벅 긁었다.

곁에 있던 부관이 협곡 어귀를 바라보며 코웃음을 흘렸다.

"흥, 멀리 도망가지도 못할 놈들이 무슨 이런 어이없는 짓을...."

하지만 클라트 경은 부관처럼 속 편히 바라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노예들의 모습이 생각보다 침착해 보이는군."

저들도 눈이 있는데 제플린의 군대를 보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도망친 노예들이 인간의 군대를 만났으니 공포에 질려 우왕좌왕 날뛰어야 정상일 터다. 그런데 의외로 다들 질서 정연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술렁거림이 이 먼 거리에까지 전해질 정도로 다들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런 것치고는 꽤나 차분하게 줄을 맞추어 협곡 안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노예들을 인솔하는 이종족들의 기세 역시 보통이 아니었다. 하나같이 잘 벼린 칼 같은 절도 있는 모습이었다.

클라트 경이 심각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역시, 저들을 탈출시킨 것이 안타레스 백국이 맞나 보군."

수하 기사 중 하나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틀림없습니다. 오러를 써 대는 드워프나 오크들이 안타레스 백국 말고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리고 병사들 중에는 제플린 하늘을 꿰뚫는 황금빛 기둥을 본 자가 한둘이 아닙니다."

부관이 조소를 흘렸다.

"흥! 권왕 정도 되는 작자가 이런 치졸한 짓을 하다니!"

그러자 다른 차탄 왕궁 기사들도 혀를 차며 욕을 해 댔다. 대부분 남의 재산을 힘으로 탈취한 레펜하르트에 대한 비난과, 주제도 모르고 덥석 쫓아간 이종족 노예들의 어리석음에 대한 성토였다.

"이것들이 기껏 보살펴 주었더니 배신을 해?"

"짐승도 아껴 주면 주인을 알아보거늘!"

"짐승만도 못한 것들!"

"저딴 놈들 때문에 꼭두새벽부터 이게 무슨 난리야?"

기껏 명령 내려놓았더니 뇌물 먹고 딴 곳으로 샌 놈들이 하는 말 한번 가관이다. 듣다 못한 클라트 경이 신경질적인 외침을 터트렸다.

"시끄럽다! 저놈들 놓쳐 놓고 뭐 잘났다고 떠들고 있나!"

확실히 잘난 게 없긴 하지. 기사들이며 병사들의 웅성거림이 살짝 잦아들었다. 클라트 경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으, 한심한 놈들.'

다른 기사며 병사들은 이 상황에서도 어서 노예들 도로 잡아가서 면죄부를 받아야겠다는 생각밖에 없는 듯 보인다. 사실 그들이 명령 불복종 죄를 지은 것은 틀림없는 것이다. 워낙 따로 논 놈들이 많다 보니―따지고 보면 제플린 정규군 거의 전원이다― 전부 치죄할 수 없어 이런 식으로 면죄부를 준 것뿐이지.

하지만 클라트 경은 아쉽게도, 그렇게 속 편하게 상황을 지켜볼 수 없을 만큼 제대로 된 기사였다.

콜른 협곡을 바라보며 클라트 경이 긴장으로 땀을 흘렸다.

"젠장, 그 이름 높은 권왕과 맞서 싸워야 한단 말인가?"

비록 같은 오러 유저라지만 권왕과 차탄 제일의 기사는 아무래도 격이 다르다. 게다가 문제는 저곳에 당대의 권왕만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안색을 굳힌 채 클라트 경이 옆으로 말을 몰았다. 온갖 마도구로 전신을 감싼 마검사단, 제플린 나이츠 쪽으로 다가가 차갑게 말을 건넨다.

"제플린 나이츠도 이번만큼은 내 지휘에 따라 주어야겠네. 저놈들이 노예건 아니건 그건 내 알바가 아냐."

평소 클라트 경을 질시하고 있던 제플린 나이츠들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하지만 클라트 경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저놈들이 노예건 아니건, 그건 내 알 바가 아닐세."

크로방스 내전 때 알려진 소문의 절반만 사실이더라도, 저곳에는 당대의 권왕을 비롯한 수많은 오러 유저들이 포진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아는 것은, 저놈들이 오러 유저만 수 명에 병사들도 보통 놈들이 아니란 것뿐이니까!"

제플린 나이츠들의 안색이 더더욱 딱딱해진다. 하지만 감히 클라트 경의 말에 반박하는 이들은 없었다. 평소의 행동을 보면 믿기 힘든 태도였다.

클라트 경이 문득 실소를 흘렸다.

'그러고 보면 참으로 쓰레기들만 남았군.'

이 자리에 있는 제플린 나이츠는 죄다 뇌물 먹고 딴 데 샜다가 뒤늦게 나타난 이들뿐이었다. 착실하게 작전대로 움직인 이들은 전부 안타레스 백국군에 썰려 죽은 것이다. 성실함의 대가로는 참으로 가혹하다 하겠다.

'이런 놈들을 이끌고 이름 높은 권왕의 군대와 싸워야 하다니....'

절로 한숨이 나왔지만, 그래도 주군에게 충성을 맹세한 기사로서 명령에 불복할 수는 없다.

클라트는 애써 표정을 폈다.

'그래도 저쪽은 숫자가 적다. 대부분 탈출한 노예들이고 안타레스의 군세는 얼마 되지 않아. 문제는 오러 유저인데... 그쪽은 제플린 나이츠가 어떻게든 해 주겠지. 저들도 분위기는 파악하고 있을 테니.'

과연, 제플린 나이츠의 부단장, 베네스가 억지로 고개를 숙여 승낙을 표했다. 단장인 브릴트 경이 죽은 지금, 그가 제플린 나이츠의 새로운 수장이었다.

"으음, 그대의 명대로 따르겠소, 클라트 경."

☆ ☆ ☆

발걸음을 바삐 놀리며 레펜하르트가 물었다.

"추격대 규모가 어떻게 되지?"

뒤를 따르며 시리스가 대답했다.

"칠천에서 팔천 사이라고 하더군요. 기사급이 팔백에서 천 사이, 기마병이 이천 정도고 나머지는 보병이라네요."

상대의 전력을 파악한 레펜하르트가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다행이군. 그나마 마법사들은 아직 낚여 있는 모양이야."

차탄 공국의 수도, 제플린.

대륙의 모든 물산이 움직이는 상업의 중심지답게 제플린에는 마법 도구를 다루는 마법사들의 숫자도 적지 않았다.

당장 레펜하르트도 던전 탐사자 시절, 수많은 마법기를 제플린에 갖다 판 적이 있다. 대륙의 온갖 귀한 마도구며 아티팩트를 거래해야 하는 만큼 그 진위를 판가름할 마법사의 존재는 필수불가결인 것이다.

그래서 평시의 제플린은 언제나 이백여 명 정도의 마법사들이 거하고 있었고, 차탄 왕궁에도 대마법사 하질 공을 비롯한 궁정 마도사단이 상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 수많은 마법사들이 싹 다 제플린에서 사라진 후였던 것이다.

레펜하르트에게 가까이 가며 시리스가 살그머니 물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짓을 하신 거예요, 레펜하르트 님?"

"마법사라면 낚이지 않을 수 없는 미끼를 준비해 놓았지."

빙그레 웃으며 레펜하르트가 입을 열었다.

"제플린 남쪽으로 사흘 거리쯤 떨어진 그 마을 기억해, 시리스? 작전 전에 갔었잖아, 우리."

시리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확실히 그때 레펜하르트를 따라 들른 기억이 난다.

레펜하르트가 그녀를 데리고 간 곳은 마을 근처에 버려진 커다란 던전이었다. 아마도 예전에는 제법 이름 있는 던전이었는지 규모가 상당했지만, 이미 털릴 대로 털리고 오랜 세월 버려져 지금은 폐허일 뿐인 곳이었다.

레펜하르트가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거기에 내가 밑천을 좀 풀어 놓았거든. 아마 마법사라면 눈 돌아가지 않을 수 없을걸?"

던전에 들어간 레펜하르트는 무려 사흘에 걸쳐 던전 벽에 온갖 술식이며 알 수 없는 숫자와 고대어를 빼곡하게 새겨 놓았다. 단순히 적어 놓는 것이 아니라, 모든 글자를 죄다 석벽에 음각으로 새긴 것이다.

손가락에 오러를 뿜는 것만으로도 돌벽을 두부처럼 뚫을 수 있는 레펜하르트였기에 가능한 짓이었다. 시리스도 정령술을 이용, 열심히 시키는 대로 옆에서 도왔던 기억이 난다.

시리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때 했던 그 개고생이 그거였어요?"

"젊었을 때 재미 삼아 이런저런 마법 이론을 만들어 놓은 것이 꽤 되거든. 게다가 지금 시대에는 발표되지 않은 3대 학회의 신이론도 여전히 기억하고 있고 말이지. 그걸 죄다 석벽에 적어 놓고 몰래 제플린 쪽 마법사들에게 그 정보를 누출했지."

버려진 던전에 새로운 마법 이론이 나타났다는 소식은 바로 제플린의 마법사들 사이에 퍼졌다. 물론 마법사들도 처음부터 무거운 엉덩이를 들어 올리진 않았다. 당연히 우선은 제자들을 보내 상황을 살펴보게 했다.

하지만 제자들이 떠 온 탁본을 보자 다들 눈이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10서클의 대마법사인 레펜하르트만의 마학 이론, 게다가 향후 30년간 더더욱 발전된 3대 학회의 신이론들이다. 현 시대의 마법사들에게는 실로 기연이나 다름없는 엄청난 자료인 것이다.

탁본을 떠 오는 정도로는 도저히 이론을 전부 이해할 수가 없다. 다른 이들에게 빼앗길세라 다들 허겁지겁 던전으로 향했다. 두꺼운 석벽에 새겨져 있으니 자신이 직접 가는 수밖에 없었다. 한 구절이라도 더 건지기 위해 제자들도 총동원했다. 그중에는 차탄의 왕궁 마법사 하질 공도 끼어 있었다.

그리고 그 던전에 적힌 자료의 양은 이백여 명에 달하는 마법사들 모두를 감당할 만큼 충분히 방대했다. 레펜하르트 본인의 지식도 어마어마한 분량인데, 거기에 향후 30년간 대륙 3대 학회에서 발표된 모든 신이론들까지 죄다 적어 놓았으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아마 제플린의 마법사들은 아직도 던전 벽 붙잡고 앉아 이론 해독하느라 정신없을걸?"

"그게 그거였구나... 어? 그런데 그걸로 제플린의 마법 전력이 더 높아지면 나중에 문제 되는 것 아니에요?"

"내가 그것도 생각 안 했겠니? 중요한 핵심은 죄다 빼놓고 구미 당기는 부분만 교묘히 적어 놓았어. 떡밥만 신 나게 뿌렸으니 붕어들 신 나게 뻐금대고 있겠지?"

장난꾸러기 같은 표정을 지으며 레펜하르트는 혀를 날름 내밀었다.

시리스가 헛웃음을 흘렸다.

전생의 이야기를 들은 그녀는 레펜하르트가 사실 쉰 살 넘은 노인네라는 걸 알고 있다. 그런 주제에 저런 소년 같은 표정이라니?

하여튼 감탄할 만한 일이었다. 제플린의 마법 전력을 싹 날려 버린 저 수법은 확실히 칭찬할 만하다.

"의외로 영리하시네요, 레펜하르트 님."

"의외라니? 나 원래 10서클 마법사였거든?"

억울해하는 레펜하르트를 보며 시리스는 빙긋 웃었다. 입술을 삐죽이며 레펜하르트가 계속 움직였다.

"뭐, 어쨌거나 마법사를 상대할 필요가 없으니 계획에 지장은 없겠지."

걸음을 옮기는 레펜하르트 곁으로 말로이드와 아틸카가 다가왔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으며 드워프 전사가 입을 열었다.

"추격대가 쫓아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구원자여."

"그렇소, 말로이드 경. 계획은?"

"이미 파악이 끝난 지 오래입니다."

이번엔 아틸카가 입을 열었다.

"모두에게 소식을 전달했소, 백왕이시여. 다들 모일 것이오."

뒤이어 다른 오러 유저들도 레펜하르트 곁으로 다가왔다.

러스며 이니야와 슬로이틀, 타시드를 비롯한 오크 오러 유저들도 대열에 합류한다. 러스와 타시드가 눈을 빛내며 무기를 매만졌다.

"준비되었습니다, 형님."

"본때를 보여 줍시다, 은인이여!"

각 종족의 최강자들을 대동한 채 레펜하르트는 콜른 협곡 입구로 향했다.

이미 피난 명령을 내렸음에도 아직 상당한 수의 탈주 노예들이 남아 있었다. 무리의 선두는 슬슬 협곡 깊숙이 들어서 있었지만, 워낙 숫자가 많고 또 협곡의 너비가 좁다 보니 후미는 아직 언저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종족의 인파를 헤치고 나오니 길게 포진한 제플린 추격대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300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진군할 준비를 갖추고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어리석은 노예들아! 당장 반항을 포기하고 투항하라!"

"반항하면 모두 죽여 버리겠다!"

외침이 터져 나올 때마다 채 피하지 못한 노예 출신 이종족들이 공포에 질려 벌벌 떤다. 그때, 그들 뒤에서 우렁찬 외침이 터져 나왔다.

"두려워하지 마라! 저들은 그대들의 머리칼 하나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강렬한 포효가 대기를 떨치고 울렸다. 그 속에 담긴 강대한 기운에 사람들의 공포가 조금씩 사그라졌다. 엘프며 오크, 드워프 들의 눈동자에 공포 대신 선망과 경외의 빛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무리 선두에 우뚝 선 근육질의 거한을 바라보며 제플린 기사 중 한 명이 소리쳤다.

"권왕 레펜하르트!"

☆ ☆ ☆

클라트 경은 당대의 권왕을 직접 만나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딱 벌어진 어깨며 가슴, 조각칼로 새긴 듯한 선명한 근육질의 신체.

수천의 군대 앞에서 갑옷은커녕 평범한 겉옷 하나 걸치지 않고 상체를 드러내며 굴강한 육체를 뽐내는 사내가 세상에 짐 언브레이커블의 권사 말고 또 누가 있겠는가?

'제라드는 여든이 넘은 노인이니, 저자가 당대의 권왕 레펜하르트겠군.'

레펜하르트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앞으로 나섰다.

그의 뒤를 따라 여덟 명의 각 종족 전사들도 앞으로 나섰다.

화르륵!

레펜하르트의 전신으로 황금빛 오러가 피어올랐다.

뒤 따르던 이들도 저마다 블레이드 오러를 끌어 올렸다.

우웅! 부웅! 부우웅!

찬란한 오러의 향연이 콜른 협곡 어귀를 밝혔다. 아홉 줄기 파괴의 빛이 제플린 추격대와 이종족 무리 사이를 완전히 가로막았다.

추격대 속에서 웅성거리는 소음이 커져갔다.

"맙소사, 정말 블레이드 오러다!"

"안타레스의 오러 능력자들이야!"

반면 탈주 노예 무리들은 한결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다들 침착성을 되찾고 차분하게 인솔에 따라 다시 걸음을 옮긴다. 협곡 입구에 남아 있던 탈주 노예 무리들이 점점 추격대의 시야에서 벗어나며 절벽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져 갔다.

클라트의 부관이 그 모습을 보며 성을 냈다.

"저, 저놈들이 도망가는데요, 단장님?"

"상관없다. 저들이 가 봐야 얼마나 갈 수 있겠느냐?"

정식으로 훈련받지도 않은 이들의 이동 속도는 뻔하다. 군대라면 금방 따라잡을 수 있다.

그래서 클라트 경은 노예 무리들의 도주는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레펜하르트에게만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이윽고 모든 노예 무리들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안타레스의 정예병 역시 저들을 인솔하며 협곡 안쪽 깊숙이 몸을 감췄다.

텅 빈 협곡 어귀에 남은 것은 레펜하르트와 여덟 명의 오러 유저뿐.

단지 아홉 명만으로 수천의 군대 앞에 당당히 선 그 모습에 클라트 경은 내심 감탄했다. 노예 종족이라고 무시하기엔 그들의 기세와 존재감이 너무도 컸다.

'허허, 저들을 누가 노예라 할 수 있을까? 실로 무인의 귀감이 아닌가!'

동시에 의문도 느꼈다.

'그런데 설마... 저 아홉 명만으로 우리를 막을 셈인가?'

오러 유저가 일당백의 무력을 지닌 초인인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 해도 단신의 힘으로 군대와 맞서기엔 분명 한계가 있다.

아무리 규모에 비해 콜른 협곡 입구가 좁다지만, 그래도 그 너비는 족히 100여 미터는 된다. 고작 아홉 명으로 입구를 틀어막을 수 있을 리 없으니 결국은 뚫릴 것이고 사방으로 포위당하게 되리라.

일단 포위당하면 아무리 오러 유저라도 혼란 가득한 전장에서는 언젠가 등 뒤의 검을 허용할 수밖에 없다. 전투 내내 오러 방어를 지속시키는 것은 오러양의 소모가 너무 극심해 설사 오러 유저라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기감으로 사방을 파악하는 것은 고도의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라, 장시간 그 감각을 지속시키는 것은 무리다.

오러 방어가 없이도 어지간한 칼은 들어가지도 않는 육체에 무한한 체력을 자랑하는 짐 언브레이커블이라면 모를까, 보통 오러 유저에겐 인해전술 또한 훌륭한 전법이 되어 주는 것이다.

게다가 클라트 경에게는 오러 유저를 상대할 수 있는 제플린 나이츠도 있지 않은가?

저들의 무력시위가 참으로 장관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두려워할 정도도 아니다.

'무슨 생각이지? 형세가 불리하다는 것쯤은 모를 리 없을 텐데?'

어쨌거나, 명을 받은 이상 이대로 계속 대치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클라트 경이 말을 몰고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권왕 레펜하르트! 그대의 강함을 누가 감히 부인하겠소? 하지만 그대의 몸은 하나뿐, 아무리 그대가 강하다 한들 저 노예들을 모두 보호할 수는 없을 것이오! 항복하시오!"

그리고 잠시 저어하다 외침을 이었다.

"아니면, 이대로 노예들을 놓고 물러가시오! 굳이 쫓지 않겠소!"

등 뒤에서 부관이 발끈하며 외쳤다.

"무슨 소립니까, 클라트 경? 저들을 이대로 보내 줄 생각이십니까?"

실소하며 클라트가 목소리를 낮춰 되물었다.

"그럼 누가 저 괴물들을 쫓을 텐가? 자네가? 해 보게, 말리진 않겠네."

안색이 파래져 부관이 입을 다문다. 실소하며 클라트는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수천의 군세로 밀어붙이면 아무리 오러 유저들이라도 결국 해치울 순 있겠지. 하지만 그 경우 이쪽의 피해도 막심한 것이다. 되도록 저 괴물들에게 부하를 밀어 넣는 일만은 사양하고 싶은 것이 클라트의 본심이었다.

물론, 클라트도 정말 레펜하르트가 도망갈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여기서 순순히 물러날 일이었으면 애당초 시작하지도 않았겠지.'

과연, 레펜하르트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이대로 도망가라고?"

주먹을 불끈 쥐며 그가 포효를 터트렸다.

"거절한다!"

단호한 음성이 절벽 좌우에 반사되어 울려 퍼졌다.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클라트 경이 오른손을 들었다.

"...그럴 줄 알았지."

상대는 군대가 아닌 소수의 초인들, 그렇다면 이쪽도 정예를 보내 상대하게 하는 것이 올바른 전법이다.

"제플린 나이츠! 진격하라! 저들에게 차탄의 힘을 보여 주어라!"

오십여 기의 제플린 나이츠가 굉음을 울리며 앞으로 달려 나왔다. 마검과 마갑에 깃든 마법을 발동시켜 자신을 강화하며 황야를 짓밟고 돌진하기 시작했다.

"스트렝스! 헤이스트! 아머 가드!"

"샤프니스! 데몬 아이즈!"

아무리 썩었다지만, 아무리 마검사라 천대받는다지만 제플린 나이츠는 분명 공국 최강의 전력이었다. 타국의 오러 유저에 대항하기 위해 차탄 공국이 심혈을 기울여 키워 낸 정예 중의 정예들, 안타레스의 오러 능력자들이 대단하다 한들 저들을 상대로 피해를 보지 않을 수는 없으리라.

그리고 만약 제플린 나이츠가 패한다 해도 그 뒤엔 오러 유저 클라트가 이끄는 차탄 기사단과 수천의 병력이 있다.

클라트는 승리를 확신했다.

'오러 능력자라도 결코 무적은 아니다!'

그때였다.

달려오는 제플린 나이츠의 존재를 무시한 채, 갑자기 레펜하르트가 좌측으로 시선을 돌렸다.

"러스! 이니야!"

외침이 떨어지자 기다렸다는 듯 러스와 이니야가 튀어 나갔다. 다가오는 제플린 나이츠 쪽이 아니었다. 협곡 좌측의 절벽을 향해서였다.

과연 오러 유저, 둘 다 어지간한 성벽 두세 배 높이인 저 가파른 절벽을 마치 평지처럼 내달리며 순식간에 중턱까지 올라갔다. 수십 미터 위의 암벽에 자리를 잡은 채 두 사람이 블레이드 오러를 길게 내뻗었다.

"세븐 스타즈!"

"동토의 칼날!"

푸른 블레이드 오러가 절벽을 깊숙이 파고들며 빛을 발한다.

은색의 오러가 암석을 깨부수며 빛의 궤적을 남긴다.

이번엔 레펜하르트가 우측으로 고개를 돌렸다.

"말로이드! 슬로이틀!"

두 드워프 전사가 우측 절벽 쪽으로 달려갔다. 이들 역시 오러 유저답게, 드워프의 짧은 다리로도 수십 미터의 거리를 단숨에 주파한다. 절벽 바로 밑에 도달한 말로이드와 슬로이틀이 무기를 꺼내 휘두르며 호쾌한 외침을 토해 냈다.

"으랏차!"

"대지 공명!"

육중한 배틀 해머가 연녹색 오러를 머금고 절벽 아래를 강하게 후려갈긴다.

거대한 대검이 진홍색 오러를 머금고 역류하는 폭포처럼 절벽 위를 길게 그어 올린다.

콰아아앙!

절벽 전체가 흔들리며 흙먼지를 피우기 시작했다.

"타시드! 칼켄! 하다툼! 킨지르!"

오크 오러 유저들도 좌우 절벽을 향해 몸을 날렸다. 타시드와 칼켄이 손을 내밀며 소리쳤다.

"가라, 나의 맹우, 다카르!"

타시드의 참마도가 청록색 블레이드 오러를 발하며 절벽을 쑤시고 들어간다.

"벼락 떨구기!"

칼켄의 대검, 마그눔이 대기를 찢고 뇌성을 발한다. 녹색의 블레이드 오러가 한 줄기 굉뢰가 되어 절벽을 강타한다.

킨지르와 하다툼도 자신의 애병에 블레이드 오러를 머금어 최강의 일격을 날렸다. 진청眞靑과 황동黃銅의 블레이드 오러가 교차하며 폭풍을 일으켰다. 네 줄기 오러의 궤적이 화려하게 절벽 위를 수놓았다.

"뭐, 뭐야!"

"무슨 짓거리지, 도대체?"

황당한 일이 연이어 일어나고 있으니 돌진하던 제플린 나이츠들도 속도를 줄였다. 계속 돌진하자니 영 꺼림칙한 것이다. 다들 당혹스러워하며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여덟 블레이드 오러가 할퀴고 간 콜른 협곡의 양쪽 절벽.

좌우로 쪼개진 그 거대한 대지의 벽 위에 지금 여덟 색의 오러가 파묻혀 빛을 발하고 있었다. 마치 오러를 못처럼 절벽 곳곳에 박아 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 상태로도 모든 블레이드 오러가 끊임없이 요동치며 파괴의 빛을 흩뿌린다. 구속당한 맹수가 당장이라도 사슬을 끊고 날뛰려는 듯하다.

식은땀을 흘리며 클라트가 중얼거렸다.

"...무슨 수작이냐, 권왕...."

레펜하르트가 목을 가다듬더니,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거대한 함성을 터트렸다.

"아-틸-카!"

메아리가 협곡 위쪽까지 울리며 대기가 찌릿찌릿 떨렸다. 절벽 위쪽에서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안개가 낄 정도로 아득한 높이라 오러 유저인 클라트 정도만 간신히 식별할 수 있었다. 우락부락한 두꺼운 근육질에 거대한 어금니를 번뜩이는 트롤 구루, 아틸카였다.

양손에 막대를 쥔 채 서로 두들기며 아틸카가 기이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호수는 울부짖고 뇌성은 고요하네, 여울목이 돌고 돌아 핏빛 홍수 되어 내리니 이는 땅 어머니의 슬픔이로다...."

가락이 이어지며 붉은 안개가 피어오른다. 흐릿한 핏빛 안개가 폭포처럼 협곡을 타고 내려온다. 안개가 닿는 곳마다 바위에 금이 가고 협곡 전체가 진동하며 대지가 신음을 터트린다.

우르르릉!

굉음이 연달아 울려 퍼지며 흔들림이 점점 커져 갔다. 협곡 언저리를 넘어 제플린 추격대가 도열한 곳까지 지진이라도 난 듯 발밑이 요동을 치고 있었다.

그 광대한 혼란 속에서 레펜하르트가 주먹을 들어 올렸다. 그의 호통이 천둥이 되어 달려오는 제플린 나이츠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차탄의 군세에 고한다! 목숨이 아까운 자, 모두 물러서라!"

기세가 꺾인 제플린 나이츠의 진군 속도가 더더욱 더뎌졌다. 클라트가 식은땀을 흘리며 소리쳤다. 불길한 느낌이 등골을 타고 스쳐가고 있었다.

"현혹되지 마라, 제플린 나이츠! 저들은 고작 아홉이다! 계속 돌진하라!"

다시 제플린 나이츠가 말을 박차려는 찰나....

레펜하르트가 들어 올린 오른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전신을 감싼 황금빛 오러, 그것이 주먹으로 집중되며 더더욱 선명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굴강한 팔뚝을 타고 황금의 오러 파문이 생겨난다. 팔뚝부터 어깨에까지, 다섯 오러 파동이 고리를 그리며 연동되어 빛을 발한다.

레펜하르트의 입에서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권마합신...."

또 하나의 빛의 고리가 주먹 앞에 떠오른다. 여섯 빛의 고리가 맹렬히 회전하며 급속히 한 점으로 수렴하는 그 순간.

"타아아앗!"

기합을 터트리며 레펜하르트가 들어 올린 정권을 그대로 땅에 내리 꽂았다.

"캘러미티 혼!"

세상이 통째로 사라지는 듯한 어마어마한 굉음이 대지를 떨쳐 울렸다.

☆ ☆ ☆

황금의 용이 황야를 파헤치며 용틀임한다. 대지가 갈라지며 곳곳에서 황금빛 섬광이 뻗어 나온다.

제플린의 하늘을 밝혔던 빛의 기둥, 6중첩 캘러미티 혼.

콜른의 대지로 파고든 저 가공할 일격은 살아 있는 생물처럼 요동치며 그 힘을 사방으로 떨쳤다. 절벽에 박혀 있던 팔색의 오러가 일제히 폭발하며 그 움직임에 가세했다. 좌우 절벽에 구멍이 뚫리며 형형색색의 빛 무리가 간헐천처럼 터져 나왔다. 쿵쿵거리던 진동음이 점점 커지며 귀가 멍멍해질 정도로 요란한 굉음으로 화했다.

광포하게 날뛰는 아홉 줄기 파괴의 빛, 그것이 아홉 마리 용이 되어 콜른 협곡이라는 알을 깨고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쿠쿠쿠쿵!

협곡 어귀 바로 앞까지 나아갔던 제플린 나이츠, 그들 입에서 두려움 가득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마, 말도 안 돼!"

"저런 일이 세상에 일어날 리가 없어!"

시야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아 있던 절벽이 쩍쩍 갈라지며 자신의 일부를 땅으로 던진다. 수만 톤에 달하는 거석들이 하늘을 뒤덮은 채 쏟아져 내린다.

"달아나!"

"모두 달아나라!"

히이이잉!

말들이 울부짖으며 기수를 내동댕이쳤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이 자리를 벗어나려 사색이 되어 뛰었다.

"으아아!"

"사람 살려!"

콰콰콰콰쾅!

절벽이 무너지며 암벽의 해일이 되어 협곡 어귀, 반경 수백 미터를 휩쓸어 갔다.

먼지와 연기가 파도처럼 솟구쳐 오르고, 무너지고, 안으로 말리고, 거품을 일으키며 대지 위를 치달렸다. 가공할 파괴의 폭풍이 사방으로 불어닥치며 도망가려는 제플린 나이츠를 삽시간에 뒤덮어 버렸다.

"으아아악!"

"아아악!"

비명과 통곡과 아우성이 바람에 실려 휘몰아쳤다. 그리고 그 소음은 더욱 큰 굉음 앞에 허무하게 묻혀 갔다. 조각난 암벽의 잔해들이 기사와 말들을 동시에 깔아뭉개며 쉴 새 없이 협곡 안팎으로 밀려들었다.

갈라지고 솟구친 들판 위로, 대지가 끝없이 요동치고 또 요동을 쳐 댔다.

검게 소용돌이치는 구름 아래, 대기가 비명을 토하고 또 토해 냈다.

잠시 후....

"맙소사...."

"오, 신이시여...."

클라트와 추격대 병사들은 경악과 공포에 사로잡혀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대협곡 콜른.

수천 년의 세월 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던 거대한 협곡이 단 한 사내의 주먹에 의해 그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5

휘이이잉....

먼지바람이 콜른 협곡 위를 휘몰아쳤다.

아니, 저 표현은 사실 틀린 것일 터다. 이미 이곳은 더 이상 '협곡'이 아니었으니까.

자욱한 흙먼지 속에서 클라트 경의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허, 허허허...."

클라트는 눈을 껌벅였다. 도저히 눈앞의 광경이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몇 번이나 눈을 비벼 봐도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수백 미터에 달하는 절벽으로 이루어진 장대한 대협곡, 콜른의 입구.

그 일부가 완전히 붕괴되어 거대한 돌산이 되어 있었다. 더 이상 어귀는 보이지도 않았다. 수만 톤에 해당하는 수많은 바윗덩이들이 차곡차곡 쌓여 완전히 틀어막았다.

제플린 나이츠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전부 저 붕괴된 절벽 아래, 산사태라 부르기조차 민망할 지경인 어마어마한 파괴의 해일에 휩쓸려 파묻혀 버렸다.

하지만 이 자리의 누구도 죽어간 제플린 나이츠에 대해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큼 눈앞의 사태가 비현실적이었던 것이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클라트 경조차도 넋이 나가 있을 정도인데 다른 이들은 오죽할까?

추격대 전원이 그저 입만 쩍 벌린 채 제자리에 서 있었다. 다들 악몽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표정이었다.

"아무리 권왕이라지만 어찌 수백 미터에 달하는 절벽을 무너트린단 말인가?"

저런 일이 가능하다는 것도 놀랍지만, 그보다는 가능하다고 정말 저질러 버린 것이 더 경악스럽다. 상식이 있는 인간이라면 결코 못 할 짓이 아닌가?

"짐 언브레이커블이 단순 무식하단 말은 많이 들었지만 이건 도대체...."

망연자실 속에서 클라트가 문득 레펜하르트의 자취를 찾았다.

'그, 그러고 보니 권왕은 어디 있지?'

주위를 둘러보니 돌산 위쪽, 반쯤 흔적이 남은 좌우 절벽 중턱에 아홉 명의 그림자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대자연을 무시하는 이 무자비한 파괴를 일군 자들, 그들은 차분하고 싸늘한 시선으로 추격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싹 쓸린 제플린 나이츠에 반해 다들 멀쩡하기 그지없는 모습들이었다.

'그 상황에서 몸을 뺐단 말인가? 미리 대비하고 있었다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아득히 높은 곳에 서 있는 저들을 보며 클라트가 허탈한 분노를 터트렸다.

"그래, 저 정도 힘이 있으니 이토록 안하무인으로 굴 수 있었겠지...."

☆ ☆ ☆

클라트는 안타레스의 오러 유저들이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조금 달랐다.

"오메, 이거 진짜 되네...."

돌산 아래를 내려다보며 칼켄이 질린 음성을 흘렸다. 타시드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꾸했다.

"은인께서 없는 말 했겠어요? 되니까 시켰겠지."

하지만 그 타시드도 안색이 질려 있긴 마찬가지였다. 시키는 대로 움직이긴 했지만, 막상 붕괴된 흔적을 보니 스스로도 믿기지가 않았던 것이다.

이니야가 혀를 내두르며 중얼거렸다.

"물론 드워프들이 미리 파악한 협곡의 취약 지점을 노린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참 이건...."

여덞 명의 오러를 절벽의 붕괴점 곳곳에 박아 넣고 캘러미티 혼으로 쐐기를 박아 연동 폭발시켜 강대한 파괴력으로 바꾼다.

일국의 지도를 바꿔 버린 이 어마어마한 연계기는 레펜하르트가 푸른 곰 부족의 대모, 투사 스탈라의 오러 스킬를 보고 구상한 것이었다. 크로방스 내전 때 그녀의 기술에 깊은 감명을 받은 이는 러스뿐이 아니었던 것이다.

스탈라 홀로 쓰던 기술을 아홉 명의 오러 유저가 구사하니 파괴력도 당연히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카다마이트를 잃어 그의 빈자리가 문제 되긴 했지만, 원래 계획에선 4중첩 캘러미티 혼을 날리는 것이었다. 그것을 비록 불완전하다고는 하나 6중첩 캘러미티 혼으로 때려 박아 버리니 모자란 위력도 충분히 메워졌다.

우르르릉....

아직도 여진이 남아 발밑이 흔들린다. 여기저기서 바윗덩이를 굴리고 있는 붕괴 현장을 바라보며 아틸카가 한숨을 토했다.

"허어, 피를 보지 않기 위한 일이었다곤 하나 위대한 자연을 이리도 상처 입히다니, 실로 죄가 크도다."

어쨌든 다들 발밑을 보며 채 말문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오러 유저라지만 엄연히 피와 살을 지닌 사람일진대, 그런 이들 아홉이서 지형 자체를 바꿔 버렸으니 본인들도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없다.

반면 전생 때에도 멀쩡한 산이며 들판, 만년 묵은 빙하 등을 펑펑 날렸던 경험이 있는 레펜하르트는 여전히 차분한 얼굴이었다.

"좋아, 이걸로 추격대의 발은 묶었다. 협곡 외곽으로 돌아가려면 최소 보름은 더 소모될 터, 이쪽 이동이 느리다 해도 그 시간이면 충분히 크로방스 왕국까지 움직일 수 있어. 시간을 벌었군."

원래 카를의 계획은 콜른 협곡으로 탈주 노예들을 이동시키는 한편 안타레스 백국의 정예들을 입구에 배치해 한동안 농성전을 펼치는 것이었다.

제식 훈련을 받은 군대도 아니고 노예로 살아가던 이들이니 아무리 빨리 움직인다 한들 제플린 군대의 추격을 떨칠 수 있을 리가 없다. 누군가는 중간에서 시간을 벌어 줘야 했다.

-하지만 우리 측은 기습에는 능해도 수성에는 약하지요. 남은 자들은 다들 목숨을 내놓아야 할 겁니다. 최대한 피해를 줄이도록 작전을 세웠습니다만, 그래도 예상 피해가 크군요.

카를이 세운 계획은 실로 상식적이며 현실적인 작전이었다. 하지만 피해가 크단 말에 레펜하르트는 바로 작전을 바꿔 버렸다.

-아, 그럼 굳이 여기서 농성할 것이 아니라 그냥 협곡 좌우 절벽을 뭉개서 길을 막아 버리는 건 어떻소? 그냥 길목 자체를 없애 버리면 굳이 잔존 병력 남길 필요도 없고, 피해 없이 시간도 벌 수 있잖소?

당연히 카를도 처음에는 기막혀했다.

-저기, 백왕님. 협곡입니다, 협곡. 인간이 만든 다리라든가 성벽이라든가 하는 게 아닌데 말입니다?

하지만 막상 오러 유저들이며 아틸카의 파괴력을 계산해 보고, 또 드워프들의 조언을 듣고 나니 아주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던 것이다.

단순하게 두드려 대기만 해서야 당연히 오러 유저 백 명이 모인들 멀쩡한 절벽 무너뜨리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겠지.

하지만 안타레스 백국에는 대지의 아들, 드워프가 있었다. 땅 가지고 노는 데는 대륙의 어느 종족보다도 도가 튼 이들의 도움을 받으니 의외로 꽤 현실성이 보였다.

그래서 이 콜른 협곡 붕괴 작전이 준비된 것이다.

-대단하십니다, 백왕님. 남들보다는 제법 머리 잘 돌아간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건 떠올리지도 못했는데. 저도 머리가 많이 굳었나 봅니다, 하하.

씁쓸해하던 카를의 얼굴을 떠올리며 레펜하르트는 무심코 웃었다.

'카를이 머리가 굳어서 못 떠올린 것은 아니지, 사실.'

중간에 산이 있어 방해가 된다면 어떻게든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 일반인의 상식, 그리고 그 우회로 중 최단 루트를 선택해 수고를 덜도록 궁리하는 것이 책사의 방식이다. 만약 마법사나 오러 유저였다면 자신의 힘으로 보다 빠르게 산을 넘는 방법을 찾았겠지.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10서클의 대마법사였다. 이미 뉴클리어 버스트로 산 두어 개쯤 날려 먹은 경험도 있었다.

그런 그였기에 '산이 거추장스럽대? 그럼 치워 버리지.'라는 엽기적인 발상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덕분에 제플린 추격대는 훌륭히 발이 묶였다. 오러 유저인 클라트 경 혼자라면 모를까, 군대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저 돌산을 넘어 협곡에 진입할 수 있을 리 없다. 계속 추격하려면 협곡을 크게 우회해야 하리라.

'뭐, 그 전에 이 광경 보고도 계속 쫓아올 리도 별로 없지 싶지만.'

집단으로 망연자실해 있는 저들을 보며 레펜하르트는 빙그레 웃었다. 이토록 사기를 꺾어 놨으니 한동안 추격당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리라.

레펜하르트는 몸을 돌려 붕괴되지 않은 협곡 저편을 바라보았다. 그사이 꽤나 이동했는지, 탈주 노예 무리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럼 다들 돌아가세!"

일행에게 손짓하며 레펜하르트가 붕괴된 돌산 반대편, 협곡의 어둠으로 몸을 던졌다. 다른 오러 유저들도 하나 둘 아래로 뛰어내렸다. 아홉 개의 그림자가 자욱한 흙먼지를 뚫고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 ☆ ☆

안타레스의 군주, 권왕 레펜하르트가 제플린을 습격해 노예들을 탈출시켰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전 대륙으로 퍼졌다.

예전부터 권왕이 이종족들을 자유로운 인간처럼 대한다는 이야기는 널리 퍼져 있었다. 대륙 각지에서 벌어지는 이종족 노예 탈주 사건의 뒤에 안타레스 백국이 있다는 이야기도 증거만 없었을 뿐, 민중 사이에서는 이미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던 그가 드디어 자신을 드러내고 일을 벌인 것이다!

대륙의 모든 이들이 이 사태에 주목했다.

혹자는 권왕과 안타레스의 강력함에 감탄을 보냈다.

이름 높은 권왕이 신흥 국가 안타레스를 세우고 유서 깊은 부국富國, 차탄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다. 영웅을 꿈꾸는 소시민들에게는 참으로 흥미로운 이야기다.

혹자는 어리석고 무도하며 탐욕스러운 행위라며 강하게 비난했다.

선전포고조차 없이 타국의 수도에 침범해 강제로 재물을 약탈하다니, 이는 실로 비열한 도적 떼나 다름없다. 결코 일국의 왕이자 이름 높은 무인이 취할 태도가 아니다.

혹자는 그 사상의 위험함을 경계했다.

단순히 노예를 탈취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해방시켜 자유를 주고 국민으로 삼는 안타레스 백국의 행보는 대륙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행위다.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일이다.

혹자는 조심스레 그의 행보를 칭송했다.

예전과 달리, 크로방스 내전과 안타레스 백국의 존재로 인해 대륙의 상식도 꽤나 변해 있다. 조금씩 노예 제도에 의문을 품고 있던 이들, 하지만 감히 목소리를 높이지 못했던 이들 사이에서 '해방자 레펜하르트'라는 호칭이 돌기 시작했다.

저마다 다른 사람들의, 저마다 다른 의견들.

하지만 저들 모두 한가지만은 인정하고 있었다.

세상이, 변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제35장 각국의 정세

1

제플린 해방 작전 한 달 후, 안타레스 백왕성의 재상 집무실.

카를은 한창 탈출한 노예 출신 이종족들에 대한 행정적 뒤처리에 열중하고 있었다.

연신 펜촉을 잉크에 적셔 가며 빠른 속도로 서류를 작성해 댄다. 휘갈기는 듯 빠른 속필인데도 필치는 하나같이 우아하고 귀족적이다. 저 필치의 주인이 테이블이 좁아 보일 정도로 우람한 사내라는 것을 감안하면 참으로 어색한 광경이라 하겠다.

하지만 현재 카를의 앞에 놓인 서류의 산들은 그 우람한 덩치조차 가릴 정도로 방대했다. 전부 드워프와 트롤, 엘프와 오크로부터 올라온 보고 서류들이었다. 일만에 가까운 숫자가 유입되었으니 업무량도 장난이 아니었던 것이다.

서류를 훑어보며 카를이 중얼거렸다.

"역시 드워프 쪽이 제일 자리 잡는 게 빠르군."

드워프들은 알 포트의 하이 프리스트, 마켈린의 지도 아래 무사히 백국 내에 자리를 잡았다.

조상의 가르침을 간직하고 있던 드워프들은 비록 노예라 할지라도 자유로운 그랜드 포지의 드워프들과 문화적인 공감대가 남아 있었다. 그들은 여전히 알 포트라는 그들의 신을 섬기고 있으며 노예 생활 속에서도 신앙을 유지하고 있어 대신관 마켈린의 권위를 충분히 존중했다.

"트롤 쪽도 별문제 없는 듯하고."

이미 대륙에 남아 있던 대부분의 트롤 부족은 대부분 안타레스 백국의 비호하에 들어왔다. 덕분에 구출된 트롤들 대다수가 원래 속했던 부족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돌아갈 부족이 없는 이들도 큰 문제는 생기지 않았다.

아틸카가 구출한 트롤들 전원이 주술사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깊은 숲 속에서 인간의 눈을 피해 살아가는 것이 현 시대 트롤의 삶, 평범한 트롤들은 애당초 마을 주변을 멀리 벗어나지 않는다. 오직 구루 수행자들만이 마을의 결계 밖을 벗어나 자연의 가르침을 따르며 수행을 쌓다가 인간과 조우해 붙잡히곤 하는 것이다. 이것이 트롤이 인간들에게 강력한 몬스터로 알려진 이유이기도 했다.

트롤들 사이에서 주술사는 어딜 가도 환영받았다. 기존의 구루들도 새로운 구루가 부족에 영입되는 것을 싫어하는 이는 없었다.

트롤 주술의 가르침이 '동화同化'를 추구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

트롤이 무사히 아이를 낳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술적인 '심장 뽑기 의식'이 필요하다. 그리고 아무리 강력한 재생력을 가진 트롤 구루라도 저 '심장 뽑기 의식'은 결코 녹록한 것이 아니었다. 아틸카 정도 되는 대주술사라면 모를까, 일개 구루는 저 의식 한 번 행할 때마다 일주일씩 앓아눕곤 하는 것이 예사였다. 실력이 낮은 구루 중에는 심장 재생에 실패하고 죽어 버리는 경우도 제법 있었다.

의식을 행해 줄 이가 늘어난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차례가 돌아오는 횟수가 적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 보니 쌍수 들고 환영하면 했지 결코 텃세 같은 것은 부리지 않는 것이다.

뭐, 트롤 구루도 사람인 이상 자신의 지위를 위협하지 않을까 경계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적어도 영입 자체를 거부하는 일은 결코 없다. 그런 이유로 돌아갈 부족이 없는 트롤 구루들도 무난하게 백국에 합류할 수 있었다.

다시 카를이 다음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엘프와 오크 쪽도 생각했던 것보다는 괜찮은 편이군."

구출된 노예 출신 엘프와 오크의 처리는 각자 시리스와 타시드가 맡고 있었다.

영향력이나 권위를 생각하면 이니야나 칼켄이 맡아야 했겠지만, 엘프와 오크 노예는 드워프나 트롤에 비해 너무 인간의 지배에 물들어 있어 옛 조상들의 문화와 단절된 지 오래였다.

렐하드나 이니야, 칼켄이며 스탈라 등 기존의 수장들과 이들 노예 출신들은 너무도 공감대가 없는 것이다. 비록 이니야가 왕년 무술 수행을 하며 인간 세상을 제법 접해 보았다지만, 어디까지나 정체를 숨기고 인간인 척했던 것이니 노예로 살아간 것은 아니다.

그래서 같은 노예 출신이며 인간과 동족 양쪽을 접해 본 시리스와 타시드가 각자 엘프와 오크의 대표자 격이 되었다. 저들과 레펜하르트의 친분도 있고 해서 기존의 수장들도 별 거부감 없이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양쪽 다 나이가 어린 편이라 아틸카나 마켈린처럼 순탄하게 진행하지는 못했지만, 모자란 경험을 레펜하르트와 카를의 도움을 받아 메워 가며 구출한 동족을 안착시키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서류를 결재하며 카를이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살짝 걱정했었는데 제법 잘하네, 둘 다."

하여튼, 참으로 방대한 업무량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아무리 천하의 카를이라 한들 과로로 쓰러지지 않을 수 없으리라.

플로라 등의 엘프 비서들이 많이 업무에 적응하긴 했지만 그래도 원체 배움이 느린 종족이다 보니 아직도 행정 관료로서는 모자란 점이 많았다. 엘프답게 꼼꼼하고 섬세하게 일을 진행하는 것까진 좋은데 단순한 서류 업무 하나를 맡겨도 며칠씩 걸리기 일쑤였다. 일처리가 느려도 너무 느렸다.

하지만 현재 안타레스 백국 행정부는 용케도 이 모든 업무를 감당하고 있었다. 새롭게 들인 부하들 덕분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굵직한 음성이 들렸다.

"베이드입니다, 카를 재상님."

"들어오시오."

집무실 문이 열리며 50대 중년인 한 명이 한 무더기 서류를 들고 방 안에 들어섰다.

"각 종족 동맹들에게서 올라온 추가 보고 정리입니다."

"어디 봅시다."

서류를 간략히 검토한 뒤 카를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잘 처리했군. 수고했소. 다른 이들에게도 치하한다고 전해 주시오, 베이드."

베이드가 고개를 저으며 황송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희가 받은 은혜가 그토록 큰데 어찌 이 정도로 칭찬을 바라겠습니까?"

현재 카를은 휘하에 기존의 엘프 비서 말고도 서른 명 정도의 '제대로 된' 행정관을 두고 있었다. 모두 크로방스 왕국 남부, 체타스 남작령에서 일하던 이들이었다.

레펜하르트가 갈린 남작과 손잡고 일으킨 영지전에 의해 완전히 몰락해 버린 체타스 남작가.

크로방스 왕국의 유력 귀족으로 넓은 영지와 교역 도시 자루드를 다스리고 있던 체타스 남작가는 그만큼 행정을 담당하는 관료의 숫자도 많았다. 그리고 그들은 남작가가 몰락하며 일제히 실업자가 되어 버렸다.

그때 카를은 그들 중 인재를 추려 안타레스 백국의 관료 지위를 주고 고용했다. 혈통제 사회 대부분이 그렇듯 실력이 있음에도 뒷배가 없어 하찮은 일만 하는 이들의 숫자가 꽤 되었다.

능력에 비해 인정받지 못하던 이들이 일국의 행정 중추에 앉게 되었으니, 다들 감격하여 충심으로 안타레스 백국을 위해 일하고 있었다. 눈앞의 중년인, 베이드 역시 그중 한 명이었다.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재상님."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숙인 뒤 베이드가 다시 밖으로 향했다. 카를도 계속 업무에 열중했다.

마지막 한 장을 검토하고 최종 사인을 한 뒤 기지개를 켠다.

"아으, 간신히 끝났군. 이제 운동 좀 할 수 있으려나?"

한차례의 서류 폭풍이 지나가고 겨우 막간의 휴식 시간이 다가왔다. 카를이 숨을 돌리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때 또다시 누군가가 집무실의 문을 두들겼다.

"저기, 재상님."

카를의 전속 비서, 플로라였다. 원래는 레펜하르트의 비서였지만 대부분의 행정 업무가 카를에게로 옮겨진 지금은 재상의 전속이 되어 있었다.

"무슨 일이지, 플로라?"

"백왕님께서 부르십니다. 크로방스 왕국에서 사절단이 도착했다는군요."

"...조금의 쉴 틈도 안 주는군."

카를은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플로라가 재빨리 다가와 외투를 건넸다. 고상한 무늬를 수놓은 정례복이었다. 사절단을 만나야 하니 격식에 맞는 의복을 해야 하는 것이다.

예복을 걸치며 카를이 물었다.

"누가 인솔하고 있다던가?"

"라로스 백작이라고 하던데요."

"윽? 라로스 백작?"

순간 그의 표정이 구겨졌다.

"그 양반, 나랑 구면인데...."

라로스 백작은 카를이 카르사스이던 시절, 페르난도 가문을 몇 번이나 찾은 크로방스의 고위 귀족이었다. 어릴 적부터 봐 온 잘 아는 인물이란 소리다.

기운 없는 음성을 흘리며 카를이 뺨을 긁었다.

"이거 들키지 않으려나?"

한때 레펜하르트가 그에게 걸어 주었던 인상 왜곡 마법은 현재 풀려 있는 상태였다.

마법은 신성 주문과 달리 마력 없이 지속되지 않기 때문에, 언제까지고 마법으로 외모를 바꾸고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화려한 금발이던 수염과 머리는 염색약으로 검게 물들여 놓았지만 이목구비나 눈동자 등은 다시 카르사스이던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아무리 유벨 2세가 레펜하르트를 총애한다지만, 왕위 찬탈을 노린 반역자를 살려 두고 있다는 게 알려지면 절대 그냥 두고 볼 리가 없겠지.

"으음...."

그냥 만나지 말고 레펜하르트에게 전부 맡길까 고민하는 카를의 모습에 플로라가 실소를 흘렸다.

"그건 걱정하실 필요 없을 것 같은데요, 재상님."

사실 현재 카를에게 예전 모습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일단 덥수룩한 수염만으로 얼굴 대부분이 충분히 가려진다. 게다가 그동안 틸라 취향 맞추느라 과하게 근육을 키운 덕택에 체구는 물론이고 인상도 엄청나게 바뀌었다. 아무리 외모 변환 마법이 풀렸다지만, 현재 카를을 보고 왕년의 날렵하던 미남 기사 카르사스를 떠올리기는 결코 쉽지 않다.

"솔직히 말하면 재상님 어머님이 살아 돌아오셔도 과연 알아볼지 아닐지 의문인 판인데요?"

"으음, 그런가?"

여전한 부분이 있다면 눈 정도? 바다처럼 푸르고 청명한 눈동자만이 그가 카르사스임을 증명하고 있는데....

"뭐, 걱정 없겠군."

이야기 중에는 눈빛만 보고도 '아니! 당신은!' 하면서 변장한 사람 척척 알아보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현실에서는 거의 없는 이야기다.

눈빛만 봐도 사람을 알아봐? 그게 가능하면 복면강도는 왜 생겼겠는가? 부모나 연인 정도 되면 알아볼 수도 있겠지만 그냥 지인 정도면 어림없는 소리지.

카를이 안심하며 표정을 풀었다. 그리고 플로라에게 손짓했다.

"그럼 알현실로 가겠다. 집무실 뒷정리 좀 부탁해, 플로라."

"네, 재상님."

☆ ☆ ☆

안타레스 백왕성, 알현실.

화려하지는 않아도 정갈하게 꾸며진 그 방에서 거구의 근육질 사내와, 그보다 더 거구의 근육질 사내 두 명이 삐쩍 마른 50대 중년인을 맞이하고 있었다. 안타레스의 재상 카를과 백왕 레펜하르트였다.

"크로방스의 라로스가 안타레스의 군주를 뵙습니다."

빛바랜 금발 머리를 숙이며 라로스 백작은 레펜하르트에게 정중히 무릎을 꿇었다.

아무리 같은 백작위를 지니고 있다지만 그와 레펜하르트는 결코 동격이 아니다. 차탄이나 라스틸 공국의 공왕에게 같은 공작위를 지녔다고 맞먹으려는 이는 없다. 당연히 일국의 왕을 대하는 예법을 갖추는 것이 예의였다.

뭐, 그게 아니더라도 그냥 비주얼부터가 저절로 무릎을 꿇게 만들지만.

팔뚝이 자기 허벅지보다 더 굵은 사람이 눈앞에 둘이나 있는데도 건방을 떨려면 어지간히 생각이 짧지 않고는 힘든 일인 것이다.

'백왕님이야 원래 유명하지만 대체 저 재상은 뭐 하던 양반이지? 대체 행정 일 하는데 저런 몸이 무슨 필요가 있다고....'

카를을 힐끔거리며 라로스가 딴생각을 할 때였다.

레펜하르트가 일어서라며 손짓을 했다.

"안타레스에 잘 왔네, 라로스 백작. 폐하께서는 안녕하신가?"

흠칫 라로스가 정신을 차리고 품속에서 국왕의 편지를 꺼냈다.

"예, 나라 걱정에 여념이 없으시지만 젊으신 터라 건강이 상하진 않으셨습니다. 여기 서찰을...."

서신을 받아 들고 레펜하르트가 빠르게 읽어갔다.

시종관의 잔소리가 격했는지 서신이 온통 국왕다운 품위와 고상, 우아함으로 포장되어 있긴 했지만, 간단히 요약하면 이런 내용이었다.

안 그래도 차탄 공국 꼴 보기 싫었는데 참 잘했음.

앞으로도 차탄 공국 엿 먹일 일 생기면 연락 바람.

열심히 도와주겠음.

라로스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첨언했다.

"폐하께서는 백왕님의 이번 행보에 크게 만족하고 계십니다."

역사적으로 크로방스 왕국과 차탄 공국의 사이는 그리 좋지 않았다.

농업이 주요 산업인 크로방스 왕국과 상업이 주인 차탄 공국, 쉽게 말해 두 나라의 관계는 1차 생산자인 농민과 물건 떼어 가는 2차 도매상의 그것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도매상이 양심적이라면 그 무엇보다 좋은 관계가 될 수 있겠지만, 차탄 공국이 비양심으로 무장한 것은 온 대륙이 다 안다. 중간에서 온갖 폭리 취하는 저 나라를 크로방스 왕국이 좋게 볼 리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현 정권에 들어서는 완전히 적대 관계로까지 되어 있었다.

유벨 2세와 왕위를 두고 다투다 패한 카르사스 공자 일파는 현재 차탄 공국에 망명한 상태였다.

유벨 2세뿐 아니라 새로이 권력을 잡은 모든 신흥 귀족들에게 저 망명 귀족들의 존재는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크로방스 왕국은 그동안 몇 번이나 차탄 공국에 서신을 보냈고 무시당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크로방스의 귀족들은 분노를 곱씹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제플린 해방 작전을 위해 안타레스 백국에서 길을 빌려 달라는 요청이 왔을 때 반대하는 크로방스의 귀족들은 거의 없었던 것이다.

"저 간악한 차탄 공국에 엿을 먹일 수 있는데 왜 반대하겠습니까?"

노예 제도를 반대하는 듯 보이는 레펜하르트의 행보도 별문제는 되지 않았다. 이미 크로방스 왕국은 이종족을 자유인처럼 대하는 안타레스 백국의 존재를 인정했다. 한 번 허용한 것인데 두 번 못 할 것도 없는 것이다.

서찰을 모두 읽은 뒤 레펜하르트가 말을 건넸다.

"폐하께 안타레스 백국이 호의에 감사한다고 전해 드리게."

"예, 백왕님."

"아, 차탄 공국 쪽 반응은 어떤가?"

"당연히 길길이 날뛰고 있지요."

고소하다는 표정으로 라로스가 미소를 띠었다.

당연하겠지만, 이번 사태에 대한 차탄 공국의 분노는 실로 엄청났다.

수도 제플린을 침범당한 데다가 왕궁이 농락당했고 막대한 재물을 빼앗겼으며 그 와중에 상당한 피해도 입었다. 실로 국치國恥나 다름없는 사건이었다.

극도로 흥분하며 차탄의 공왕, 나틴 2세는 바로 성명을 발표했다.

일국의 왕인 주제에 야만스러운 무뢰배나 도적처럼 제플린을 습격한 권왕 레펜하르트에 대한 비난, 그리고 그를 묵인할 뿐 아니라 탈취한 노예들을 안타레스 백국까지 이송할 수 있게 길을 내어 준 크로방스 왕국에 대한 성토였다.

당장 빼앗아 간 노예들을 내놓고, 피해 액수를 보상하며, 권왕 레펜하르트에게 합당한 정의를 구현하지 않으면 전쟁을 일으키겠노라며 엄포를 놓았다.

"물론 가뿐히 무시했습니다만."

라로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예전 같았으면 크로방스 왕국도 상당히 대처에 걱정을 했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나틴 2세가 저렇게 강하게 나오긴 했지만, 사실 지금 차탄 공국은 감히 전쟁을 시작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이다.

권왕 레펜하르트와 안타레스의 이종족들이 벌인 일로 인해 차탄 공국이 입은 피해는 실로 엄청나다. 수천에 달하는 제플린의 노예들을 빼앗았으며 일국의 수도를 불바다로 만들었고 무수한 병력을 학살했다.

이것만으로도 차탄 공국의 피해액은 천문학적인 숫자, 하지만 가장 심각한 피해는 역시 콜른 협곡 사건이었다. 일국의 지형 자체를 바꿔 버린 그 위업도 대단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그곳에서 차탄 공국의 최강 전력, 제플린 나이츠가 모조리 몰살당했다는 것이었다.

평범한 기사단이라면 설사 주력이 전멸했다 한들 어떻게든 재기할 구석이 있다. 이름 있는 기사단의 일원이라면 은퇴나 죽음을 대비해 종자를 두어 후계를 준비하는 것이 상식이니까. 그리고 제플린 나이츠 역시 만일을 대비해 자신의 후계를 준비해 두고 있었다.

문제는 제플린 나이츠가 마검사 집단이라는 점이었다.

제플린 나이츠의 후계자들도 다른 기사단처럼 충실히 기술과 역량을 키운다. 하지만 그것은 마도구를 다루는 기술과 역량이다. 그런데 현재 제플린 나이츠는 전투 중에 목숨을 잃은 것이 아니었다. 무너진 콜른 협곡, 그 절벽 아래 깔려 죽었다.

단순히 유해를 수습하지 못했다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한 명, 한 명이 보기 드문 아티팩트, 혹은 그에 맞먹는 최고위 마갑과 마검으로 무장한 제플린 나이츠였다. 그들의 모든 무구가 수천만 톤의 돌산 아래 묻혀 버린 것이다.

인간 후계자는 키우면 되지만 사용하던 마도구는 다시 만들기 어렵다. 아무리 막대한 금액을 투자한다 하더라도 제플린 나이츠가 쓰던 수준의 마갑과 마검을 다시 마련하는 일은 결코 쉽지가 않다.

그렇다고 원래 제플린 나이츠의 마도구를 다시 되찾으려니, 산 하나를 통째로 파내야 할 지경이다. 어느 쪽이건, 10~20년 단위로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상업으로 이름 높던 차탄의 경제 역시 크게 흔들렸다.

노예 매매는 차탄의 경제를 책임지는 주 품목 중 하나, 공국을 버티던 다리 하나가 분질러지니 그 여파가 장난이 아니었다.

자고로 경제란 모든 면에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법이다. 무수한 노예상들이 망해 버리니 그와 거래하고 있던 다른 상인들도 연쇄적으로 피해를 보며 무너져 갔다.

막대한 액수의 환어음이 종이 쪼가리가 되어 버리고 그로 인해 망한 상인들이 대거 차탄을 떠나 버렸다. 상업의 나라로 명성 높았던 차탄 공국에는 실로 막대한 타격이었다.

차탄 공국이 이 정도로 무너질 만큼 허약한 나라는 아니었지만, 국력이 크게 깎인 것만은 틀림없는 것이다. 대흉년에서 벗어나 안정을 되찾은 전통의 대국 크로방스와, 이미 강력한 군사력을 증명한 신흥 세력 안타레스는 현재 차탄 공국으로는 상대하기 벅차다.

"오히려 일부 호전적인 귀족 중엔 차탄 공국이 쳐들어와 주기를 기대하고 있는 이들도 있지요. 말씀은 안 하시지만 폐하께서도 은근히 그런 눈치이신 듯하고요."

원래 사절로 오는 이들은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각국의 정세와 연관이 되기 때문에 함부로 확언을 하지 않는다. 그런 라로스가 저렇게까지 말할 정도면, 유벨 2세가 전쟁에 뜻이 있음이 확실하단 소리다.

라로스가 슬쩍 질문을 던졌다.

"그때가 되면, 다시 한 번 안타레스의 그 강력한 전사들을 전장에서 만날 수 있겠지요?"

레펜하르트는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럴 것이오."

환하게 웃으며 라로스가 고개를 조아렸다.

"폐하께서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 ☆ ☆

라로스가 물러가자 알현실에는 레펜하르트와 카를만 남게 되었다.

레펜하르트가 카를을 돌아보며 물었다.

"흐음, 저 정도면 크로방스 왕국은 믿을 만한 동맹이라고 봐도 되겠지?"

"예. 대부분의 크로방스 귀족들은 안타레스 백국에 호의적입니다."

내전 때의 일로 인해 이종족들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된 크로방스 귀족들은 계속 안타레스의 소문을 듣고 지내며 점점 더 생각을 바꿔 갔다.

눈으로 보이는 변화.

그리고 뒤에서 피나게 노력했던 안타레스 백국―정확히는 카를―의 로비와 여론 조작.

그 덕분에 예전에는 레펜하르트를 미친놈 취급했던 이들이, 조금 지나자 그럴 법도 하다고 말을 바꿨고, 지금 와서는 실로 선구자라며 칭송하는 자까지도 나타났다.

뭐, 칭송까진 아니더라도 레펜하르트를 적대하고 싶어 하는 이는 확실히 없었다.

많은 귀족들이, 레펜하르트와 친분이 있던 갈린 남작이 그의 도움으로 유력 귀족으로 거듭나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그렇다 보니 영지 내 노예들을 해방시켜 안타레스 백국으로 보내 레펜하르트와 친분을 돈독히 하려는 자들도 제법 생겨났다. 저 당대의 권왕과 교분을 쌓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인지는 이미 대부분의 귀족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으니까. (레펜하르트 본인도 일부러 그런 뉘앙스를 열심히 풍겼다.)

아직 크로방스의 국법이 이종족의 인권을 보장하지 않기에 겉보기로는 그냥 노예를 무상으로 제공한 것처럼 꾸미긴 했지만 적어도 레펜하르트의 사상 자체는 이해하고 행하는 행동이었다.

적어도 예전처럼, 레펜하르트가 '이들은 내 노예가 아니라 동맹이오!'라고 아무리 외쳐도 '에이, 아까워서 안 팔려고 그러죠? 웃돈 줄 테니 노예 파세요.'라고 마이동풍 놀이를 하는 수준은 지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국왕이 우리 편이잖습니까? 유벨 녀석, 장가가고 싶어서라도 철통같이 백왕님을 지지할 겁니다. 배신할 리가 없죠."

말하다 말고 문득 카를이 키득거렸다.

"생각해 보니 불쌍하군요, 유벨도. 이긴 그 녀석은 아직도 사랑하는 이와 당당히 결합할 수 없는데 패배한 저는 속 편하게 틸라와 사귀고 있으니."

놀리는 카를의 어조에 레펜하르트도 농조로 말을 받았다.

"에이, 자네도 아직 결혼은 못 하지 않나? 장인이 허락을 안 한다며?"

카를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드워프 고집이 명불허전이긴 하더군요."

그리고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눈을 빛냈다.

"하지만 3년이면 됩니다. 3년 안에 그분이 허락하게 만들 자신이 있습니다."

자신만만한 카를의 얼굴에 레펜하르트는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카를은 제플린 공략법을 짤 때의 그 책사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 인간이 대체 무슨 뒷공작을 벌이려고 저런 표정이다냐?

"...되도록 인도적이고 평화로운 방법으로 허락하게 만들길 바라네."

"에이, 틸라 양의 아버님인데 저도 그렇게 악랄한 방법은 별로 안 씁니다."

별로 안 쓴단 소리는, 어쩌다가 쓸 수도 있단 소리 아닌가? 레펜하르트는 황당해하며 카를을 힐끔거렸다.

하지만 이내 그는 시선을 뗐다.

'뭐, 자기가 알아서 잘하겠지.'

"음, 어쨌건 차탄 공국은 됐고... 다른 나라의 반응은 어떤가?"

농조를 거두며 카를이 다시 진지한 얼굴로 돌아왔다.

"잘 처리되었습니다."

2

대륙 북서부를 지배하는 그라임 왕국의 수도, 템페라드.

왕성 델 그라임의 그랜드 홀에서 40대의 장년 사내가 왕좌에 앉아 신하들을 굽어보고 있었다. 현 그라임 왕국의 국왕, 하이드 엘 그라임 2세였다.

왕좌 좌우로 도열한 신하들, 그 앞에 한 중년 귀족이 부복하고 있었다. 안타레스 백국에 사절로 갔던 페론 자작이었다.

"신臣 페론, 폐하의 은혜에 힘입어 무사히 명을 마치고 돌아왔나이다."

왕좌에 앉은 채 하이드 2세가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래, 페론 자작. 안타레스 백국의 답변은 어떻던가?"

권왕 레펜하르트의 제플린 습격 전쟁은 차탄 공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 역시 좌시할 수 없는 문제였다.

제플린 습격전이 단순한 침략 전쟁이었다면 그건 차탄과 안타레스, 양국 간의 문제니 그냥 상황이나 좀 경계 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확실하게 이종족 노예 제도에 반기를 들고 움직이고 있었다. 아무리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니라 해도 대륙의 질서를 흔드는 일이니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다.

게다가 피해 규모가 적고 증거가 없다 뿐이지, 그동안 안타레스 백국에 이종족 노예들을 탈취당한 것은 다른 왕국들도 마찬가지인 입장이다. 제플린의 참변이 언제 자기 일이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라임 왕국은 물론이고 할라인, 바실리, 테이칸 왕국 등의 대국이 저마다 안타레스 백국에 사절을 보내 정치적 압박을 가했다. 라스틸 공국 등 대국들 사이의 소규모 국가들도 정세를 파악하려 한껏 백국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각국의 요구 사항은 대체로 대동소이했다.

차탄 공국처럼 적대적인 태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다들 권왕의 무도함과 국가 간의 도리를 어긴 그 전쟁에 대해 비난을 성토했다. 대륙의 질서를 위해 훔쳐 간 노예들을 차탄 공국에 돌려주고 이종족 노예 제도를 부활시켜야 할 것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레펜하르트를 알현했을 때의 일을 떠올리며 페론 자작이 의외란 표정을 지었다.

"평판과 달리 안타레스의 백왕은 말이 통하는 자더군요."

안타레스 백국은 다른 나라의 사절들을 융숭하게 대접했으며 각국의 요구 역시 성심껏 듣는 자세를 보였다. 차탄 공국의 사절을 문전박대했던 것과는 정반대 태도였다.

-안타레스 백국이 차탄 공국을 도모한 것은 어디까지나 백국의 국민들, 그 가족과 친지 들이 제플린에서 너무도 고통받고 살았기에 행한 일일 뿐이다. 그동안 일어났던 대륙 각국의 노예 탈주 행위에 대해서는 백국과 전혀 무관하며, 전혀 아는 바가 없다. 노예 제도에 대해서는 내정 간섭이니 수용할 수 없으나, 각국의 우려 역시 짐작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안타레스 백국은 향후 더 이상 이런 사태는 벌이지 않겠다. 안타레스 백국은 침략 전쟁을 할 생각이 없으며 대륙의 질서를 존중한다. 차탄 공국 외 다른 나라에 안타레스 백국이 발을 디디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뭐, 잘 보면 교묘히 책임을 회피하는 대답이긴 했다. 요약하자면, 차탄 공국 습격한 일은 전혀 반성하지 않지만 다른 나라의 입장은 존중하겠다 정도?

하지만 이 정도면 다른 왕국 입장에서는 충분히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다. 적대 관계는 차탄 공국 하나에 국한하고, 다른 나라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는 뜻을 확실하게 밝혔다.

안타레스 백국이 힘없는 나라도 아니고, 군사력만 따지면 다른 왕국과도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곳이다. 그런 나라가 저런 반응을 보였다는 것은 국가 간 관계에 있어서는 충분히 저자세를 취했다 할 수 있다.

게다가 안타레스 백국이 준비한 것은 저뿐만이 아니었다.

"들여보내라!"

페론 자작이 손뼉을 쳤다. 홀 안으로 왕실 시종이 커다란 궤짝 몇 개를 들고 들어왔다.

하이드 2세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것은 무언가?"

"권왕 레펜하르트가 폐하께 보내는 예물이옵니다."

페론 자작이 손짓을 하자 시종들이 궤짝을 열고 물러섰다. 궤짝마다 화려한 옷감과 고급스러운 가죽 물품들, 그리고 우아하기 그지없는 도자기며 미스릴제 무기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걸 본 신하들이 놀라 중얼거렸다.

"허어, 대단한 보물들이로다."

마치 달빛으로 짠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고운 빛을 자랑하는 옷감들은 그 유명한 할라인산 비단을 크게 능가해, 귀족인 그들조차 처음 보는 것이었다. 가죽 제품들도 대단히 고급스러웠고 특히나 도자기들은 처음 보는 예술적인 무늬를 뽐내고 있어 실로 보기 드문 명장의 작품으로 보였다. 미스릴제 무기야 이미 그 가치가 정평이 난 것이니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비록 금은보화는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보다도 더 귀하고 가치 있는 물건들이었던 것이다.

페론 자작이 궤짝을 가리키며 말했다.

"비록 사정이 있었다고는 하나 물의를 일으킨 점, 이웃된 이로서 책임을 통감하며 우정의 증표로 보내는 선물이라 하였습니다."

늙은 신하 한 명이 흡족한 듯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저런 물건들을 구하려면 적지 않은 노력을 들였어야 할 터, 역시 천하의 권왕이라도 폐하의 위명 앞에서는 두려움이 없을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허허허."

도열해 있던 다른 신하도 입을 열었다.

"과연 주먹패 출신답군. 기분대로 일 터트렸다가 이제야 정신이 번쩍 든 모양이야."

아무래도 다들, 레펜하르트가 뒷생각 없이 저질렀다가 혼이 나자 몸을 사리고 있다고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물론 상식적인 평범한 국왕이라면 어찌 일국의 행사를 그렇게 가벼이 할 수 있겠냐마는....

"원래 그런 무문 아닌가, 그곳은."

"짐 언브레이커블이면 그럴 만도 하지."

"그 작자들 무식한 게 뭐 하루 이틀 이야기도 아니고...."

대대로 내려온 짐 언브레이커블의 무식 전설은 레펜하르트의 진의를 감추는 데 지대한 공을 하고 있었다.

늙은 신하 한 명이 하이드 2세에게 발언했다.

"과연 명성다운 무식한 행보이나, 앞으로 단단히 확답을 받았으니 더 이상의 분란은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그렇다면 저대로 그냥 내버려 두자는 말인가?"

"그자가 적대한 것은 어디까지나 차탄 공국, 양국의 문제이니 굳이 우리 왕국이 간섭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제 좁은 소견이옵니다, 폐하."

페론 자작도 동의의 뜻을 보였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차탄 공국의 일이 아닙니까? 차탄을 위해 그라임의 피를 흘릴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하이드 2세는 심각한 얼굴로 신하들과, 눈앞에 놓은 예물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신하들 대부분, 이 정도 성의를 보였으니 이대로 넘어가자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다들 안타레스 백국이 겁을 먹고 알아서 기고 있다고 확신하는 눈치였다.

"으음...."

솔직히 하이드 2세가 보기에도 그렇게 보이긴 했다. 눈앞에 쌓인 보물들을 보고 있자니 더더욱 그랬다. 평소라면 그 역시 별생각 없이 이대로 일을 덮어두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가 그라임의 국왕인 동시에, 은의 현자의 일원이라는 점이었다.

'골치 아프군. 이대로 아무것도 안 하면 은의 현자 쪽에서 길길이 날뛸 것 같은데.'

은의 현자에서는 이미 레펜하르트와 관련된 모든 것을 말살시키라는 지령이 내려진 것이다. 하이드 2세 역시 그 일원으로서, 그 명에 충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아무리 그가 일국의 왕이라 해도 타국과의 전쟁을 독단적인 기분만으로 질러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적어도 명분이라도 있어야지 뭘 좀 하겠는데 전쟁을 하기엔 안타레스 백국이 너무 처신을 잘해 버렸다. 당장 하이드 2세 본인조차도 '이 정도면 된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렇다고 신하들에게 은의 현자에 대해 밝힐 수도 없고....

'에잉, 모르겠다. 이런 상황이면 은의 현자들도 이해해 주겠지.'

결국 하이드 2세도 신하들의 뜻에 동의해 버렸다.

"알겠다. 그럼 그렇게 마무리 짓도록 하지."

☆ ☆ ☆

"이걸로 한동안은 시간을 벌 수 있을 겁니다."

카를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라임 왕실에서 벌어진 저 상황은, 비단 저 나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바실리 왕국이며 테이칸, 할라인 등 사절을 보낸 모든 왕국에 같은 성명과 같은 예물이 보내졌다. 그리고 그들 모두 그라임 왕국과 같은 반응을 보였다.

-안타레스 백국의 행위가 국가 간의 도리에 어긋나긴 했지만, 이후 대륙의 질서를 존중하고 성의를 보였으니 이대로 넘어가겠다.

"그렇군...."

레펜하르트는 쓴웃음을 흘렸다.

예전, 전생 때의 마왕 레펜하르트는 대놓고 전 대륙에 노예 해방 선언을 선포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도 그럴 생각이 없었다.

'생각해 보면 바보짓이었지.'

올바른 이상을 앞세워 세상의 이해를 바란 것까지는 좋지만, 사실 저거 '세상아, 나랑 싸우자!'라고 외치는 거나 다름없다. 당연히 경각심을 느낀 각 왕국이 호전적인 반응을 보일 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그때는 나 혼자 제플린을 싹 쓸어버렸으니 더더욱 그랬고.'

고작 한 명의 마법사가 인구 이십만의 대도시를 개박살 내고 인적 없는 폐허로 만들어 놓았는데, 그걸 보고도 경각심을 못 느끼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이번엔 레펜하르트도 '인류도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노예 탈출을 도모했다. 군사를 일으키고 전술, 전략을 이용해 상식적인 선에서 거사를 치렀다.

덕분에 인간들의 반응도 전생 때처럼 격하지 않았다. 콜른 협곡을 무너트린 것에 대해서도 굉장하다는 반응은 보일지언정, 전생 때의 뉴클리어 버스트 사건처럼 대륙의 공포가 되지는 않았다.

바위를 둘로 쪼개는 것과, 바위를 아예 증발시켜 버리는 것은 받아들이는 감각이 크게 차이난다.

바위를 둘로 쪼개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놀라운 위업이지만 바위가 아예 소멸해 버리면 그건 그냥 불가능,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오러의 힘으로 콜른 협곡을 무너트린 것은 같은 오러 유저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뉴클리어 버스트로 산 자체가 사라져 평지가 된다면, 그것은 마법사조차도 이해 못 할 끔찍한 기적인 것이다.

'뭐, 그때는 나도 일반적인 사고방식을 별로 이해하지 못했으니 별수 없었지만.'

전생 때의 레펜하르트는 마법사다 보니 정치적인 감각 같은 것이 거의 없었다. 워낙 뛰어난 재능 탓에 일반 인간들의 생각 같은 것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마켈린 등의 수하들도 인간이 아니다 보니 인간의 반응을 예상하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카를이 있는 것이다.

타고난 재능에 자라 온 환경을 바탕으로, 카를은 능숙하게 대륙 각국에 로비를 해 갔다. 사건 자체를 차탄 공국과 안타레스-크로방스 연합 간의 세력 대결 구도로 여론을 몰아가며 은근슬쩍 노예 제도 반대에 대한 반감을 감추는데, 그 솜씨가 실로 감탄이 나올 만큼 교묘하고 세련된 것이었다.

"지도층이라고 해도 꽤 단순한 면이 있어서요, 이 정도 성의를 보이면 아무래도 적대하는 분위기가 나오기 힘들지요. 뭐, 각국에 보낼 예물 준비하느라 고생을 좀 하긴 했습니다만...."

현재 안타레스 백국의 재정은 꽤나 위태로운 상태였다. 제플린 전역에 광범위하게 뇌물을 먹이고, 또 노예들을 탈출시키기 위한 물품들을 구입하느라 예산 대부분을 소모한 상태다.

"다행히 우리에겐 금은보화 말고도 충분히 먹히는 물건들이 있었으니까요."

각 왕국에 예물로 보낸 물품들은 모두 각 종족의 특산물들이었다. 엘프의 엘븐 실크며 오크의 가죽 세공 제품, 드워프의 무기와 트롤의 도자기는 백국 내에서야 흔한 것이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처음 보는 희귀한 물건들이다.

물론 명색이 일국의 왕에게 보낼 예물이니, 이종족들이 평소에 쓰는 일반적인 물품을 보낼 수는 없다. 당연히 각 종족 내에서도 제법 귀한 취급 받는 고급품들만 골라 보냈다.

"덕분에 물량 확보가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금은보화로 채우는 것보다는 훨씬 싸게 먹혔습니다."

빙그레 웃으며 카를이 말을 맺었다.

"거둔 효과에 비하면 거저나 다름없지요."

레펜하르트가 흡족해하며 카를을 치하했다.

"고생했소, 카를. 그대의 공이 실로 크오."

그리고 문득 미간을 찡그렸다.

"하지만 왠지 사기 치는 것 같아서 좀 찝찝하긴 하군."

분명 안타레스 백국은 각 왕국에 약속을 했다. 더 이상 안타레스 백국이 '침략 전쟁'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뭐, 거짓말은 아니었다. 추후 세력이 더 커지고 대륙 전체에 노예 해방 전쟁의 기치를 올릴 때쯤이면 더 이상 안타레스는 '백국'이 아닐 테니까.

솔직히 말해서 말장난이다. 당당히 세상에 나서던 레펜하르트로서는 꺼림칙하게 느낄 법도 하다.

하지만 카를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상만 가지고 살아가려면 절대적인 힘이 필요하지요. 백왕님께서 원하시는 세상을 만드시려면, 이 정도 타협은 필요하다고 봅니다."

세상의 룰을 바꾸기 위해서는, 세상의 룰에 맞춰 움직여야 할 필요도 있는 것.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의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문득 실소를 흘렸다.

"그런데, 그렇지도 않더군."

"네?"

"아, 타협하지 않겠다는 소리가 아니라...."

손을 내저으며 레펜하르트가 아련한 목소리를 흘렸다.

"절대적인 힘이 있어도, 이상만 가지고는 살 수 없더라고."

카를이 의아해하는 얼굴을 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오. 신경 쓰지 마시게."

레펜하르트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전생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는 지금, 더 이상의 설명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함께 이상을 꿈꾸는 동지들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 오직 마켈린과 시리스에게만 털어놓았던 그의 전생前生.

믿을 수 있는 이들에게조차 비밀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내내 레펜하르트를 괴롭히는 문제였다. 가끔은 속 시원하게 모든 것을 밝히고 싶은 욕구에 시달리기도 했다.

어차피, 여기까지 와서는 전생에 대해 이야기한들 레펜하르트를 미친놈 취급할 사람도 별로 없어 보이니까. 오히려 그로 인해, 그동안 보이던 이해 못 할 행보가 속 시원하게 해결이 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역시 쉽게 꺼낼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예전에는 믿어 주지 않을까 봐서였지만 지금은....

'내가 한 번 실패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 과연 어떤 결과를 낳을지....'

겨우 얻은 신뢰였다.

겨우 여기까지 왔다.

'권왕' 레펜하르트가 쌓아 올린 모든 것을 흔들 수 있는 저 사실을 동지들에게 알리는 것은 역시 쉽게 정할 일이 아니다.

'마켈린도 그냥 알리지 않는 쪽이 더 나을 거라 하긴 했고.'

레펜하르트는 입을 다문 채 그렇게 상념에 잠겼다. 시시각각 표정이 변하는 그를 보며 카를은 조용히 기다렸다. 그러다 문득 입을 열었다.

"뭔가, 제가 모르는 이야기인가 보군요."

"으음? 아, 그냥 개인적인 비밀이라...."

카를이 피식 웃었다.

"아, 개인적인 것치고는 너무 '깊어' 보이는 '그 비밀' 말입니까?"

레펜하르트가 당황한 눈빛을 보였다. 카를이 말을 이었다.

"사실 저도 백왕님께서 꽤나 비밀을 지니고 계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칼켄 공이나 러스 경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지요. 당장 제플린의 마법사들 발 묶어 놓은 수법부터가 저는 아직도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만? 백왕님께서는 그냥 아는 마법사분으로부터 얻어 들은 지식이라 하셨는데, 제가 보기에 그 정도의 지식량은 한두 사람의 머리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으음, 그건...."

말문이 막혀 레펜하르트가 신음을 흘렸다. 카를이 손을 저었다.

"캐묻는 것이 아니니 안심하시길. 저는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소?"

"사실 좋은 책사라면 모든 정보를 알고 있어야 밤잠을 편히 잘 수 있는 법이긴 하지요. 하지만 저는 좀 다르게 생각합니다."

카를이 빙긋 웃었다.

"신하에게 모든 것을 내보이는 왕은 인간미는 있어 보일지 몰라도 왕으로서는 실격일 테니까요. 백왕께서 품으신 뜻을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며 초심을 잃지 않는다면, 저는 그것으로 충분히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레펜하르트의 얼굴이 살짝 밝아졌다.

"...고마운 말이로군. 앞으로도 명심하겠소."

"그저 수하된 이로서의 작은 조언일 뿐입니다."

카를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레펜하르트는 새삼스러운 얼굴로 카를을 바라보았다.

'이 친구가 내 편인 게 정말 다행이군.'

사실, 카를을 살렸을 때만 해도 이 정도로 도움이 될 거라곤 채 생각하지 못했다. 전생 때의 레펜하르트는 마법사답게 정치력이나 외교의 힘에 대해 큰 비중을 두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눈앞의 강자에만 관심을 가졌을 뿐 뒤에서 보좌한 카르사스 대왕에 대해서는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그냥 죽이기 미안해서 살렸을 뿐이었는데 말이야.'

하지만 생각해 보면 전생의 카를은 크로방스 왕국 역사상 이름 높은 현군이며 인류 연합군을 뭉치게 만든 구심점 중 하나였다. 지도자라는 입장에서 볼 때, 개인의 무력만으로 황제가 된 레펜하르트와는 비교하는 것이 부끄러울 정도의 재목인 것이다.

'어쩐지 전생 때 사이도 안 좋은 나라들끼리 잘도 뭉쳐서 덤벼들더라니... 이런 작자가 뒤에서 수를 썼으니 인류 연합군이 그토록 똘똘 뭉칠 수 있었겠지.'

문득 궁금해졌다.

"그러고 보니 묻고 싶군. 카를, 그대도 인간인데 다른 종족들을 위해 세상을 바꾸는 데 거부감은 없소?"

카를이 헛웃음을 흘렸다.

"틸라 양과 사귀는 시점에서 거부감 느끼는 것도 웃기는 소리긴 합니다만?"

"그것도 그러네...."

레펜하르트가 머리를 긁었다. 카를이 쓴웃음을 지었다.

"뭐, 저도 쉽게 결정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이야 이렇지만 한동안 고민도 많이 했지요. 하지만 생각해 보니 별로 고민할 것이 없더군요."

차분한 목소리로 카를이 말을 이었다.

"제가 페르난도 가문의 후계자일 때는 영지민이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꿈꿨습니다. 그때 타 영지의 인간들은 제게는 '다른 종족'이나 마찬가지였지요. 하지만 왕위를 꿈꾸며 '다른 종족'이었던 타 영지민 역시 '크로방스의 국민'이란 이름으로 제 속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꿈꿨지요."

문득 카를이 쓴웃음을 지었다.

"뭐, 백왕님 때문에 그 꿈은 접어야 했지만... 대신 엘프와 드워프, 오크와 트롤 들을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수염 가득한 젊은 재상의 입가에 뚜렷한 미소가 떠올랐다.

"마찬가지더군요. 이종족이라 여겼던 이들이 제 속에서 '사람'이란 이름으로 하나가 되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전 이제 '사람'들이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꿈꾸고 있습니다. 고민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 ☆ ☆

안타레스 백국의 공식 입장에 대해, 대륙 대부분의 나라들은 호의적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모든 국가가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신성 바슈탈론 제국의 현 황제, 레어폴 프라임 바슈탈론 1세.

올해 예순이 넘은 이 노황제는 지금 대단히 분노하며 호통을 치고 있었다.

"모두 불살라라!"

황궁 뒤에 마련된 거대한 연무장, 그곳에서 커다란 모닥불이 불길의 혀를 날름댄다. 그 속에 타고 있는 것은 안타레스 백국으로부터 온 예물들이었다.

화르르륵....

아름다운 색상과 무늬를 자랑하는 엘븐 실크며 오크리시 레더 제품들이 매캐한 연기를 하늘 높이 피워 올렸다. 이미 트롤의 도자기는 전부 깨트려 사금파리로 만들었고 드워프제 무기는 녹여 버렸다.

"흥! 이따위 재물로 눈 가리고 아웅을 하려 하다니!"

노기를 감추지 않은 채 황제가 옆을 돌아보았다. 그 옆에선 신하들이 입가를 가린 채 황제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황제가 물었다.

"그래, 정녕 안타레스 백국은 태도를 굽히지 않겠다더냐?"

백국에 사절로 다녀온 신하 한 명이 고개를 숙였다.

"예, 폐하. 그들은 세이어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죄악의 길을 걷기를 주저치 않았습니다."

타국과 달리, 레어폴 1세는 안타레스 백국의 답변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종족을 다시 노예로 환원하지 않으면 제국의 공적으로 선포하겠다며 강경하게 나갔다.

하지만 안타레스 백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것만큼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며 입장을 공고히 굳혔다.

또 다른 신하 하나가 발언했다.

"세이어께서 말씀하시길, 인간은 그분의 얼을 따라 창조되어 만물의 지배자로 지음받았습니다. 이 가르침을 무시함은 곧 제국에 대한 모욕이니,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일이옵니다, 폐하!"

"실로 옳은 말이로다!"

황제가 흡족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성 바슈탈론 제국, 세이어로부터 칭제를 허락받은 나라답게 국교 역시 세이어 교단이다. 다른 교단을 인정하는 타국과 달리 안타레스 백국의 저 이종족 자유인 제도를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세이어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반기를 드는 행위이니까.

"정벌을 해야 합니다!"

"진정한 세이어의 가르침으로 저들을 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폐하!"

신하 중 일부가 안타레스 백국의 정벌을 주장했다. 비교적 생각이 단순하고 성정이 격한 이들, 대체로 무인이 중심이 된 주전파主戰派였다.

하지만 찬동하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안타레스 백국을 벌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폐하."

어느 정도 현실 감각이 있는 문관들이었다.

무장이 공을 세우기 위해서는 전쟁이 필요하다. 그러니 무장들은 앞뒤 안 가리고 무작정 전쟁부터 부르짖는다.

하지만 문관들은 전쟁이 시작되면 오히려 지닌 지위가 흔들릴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그들 입장에서는 현실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폐하의 분노는 실로 합당하옵니다. 허나 안타레스 백국과 제국 사이의 거리는 너무도 멉니다. 크로방스 왕국이 안타레스와 동맹을 맺고 있으니, 정벌군을 일으키려면 크로방스 역시 적대하거나 바실리 왕국을 경유해야 합니다. 타국과의 관계가 문제될 수 있습니다."

황제가 인상을 썼다. 하지만 분노를 터뜨리지는 않았다.

신하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크로방스야 그렇다 치고, 바실리 왕국을 경유하는 것 역시 쉽게 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바실리 왕국은 차탄 공국이나 라스틸 공국처럼 제국의 입김하에 있는 나라가 아니다. 거기다 대고 '안타레스 백국을 벌하기 위해 그대의 나라를 지나가겠소!'라며 제국의 군대를 이끌고 갈 수는 없는 것이다. 제정신 박힌 나라라면 타국의 군대가 자국 땅을 밟는 것을 인정할 리가 없으니까.

"타국의 입장 역시 제국이 너무 과하게 반응한다는 눈치이옵니다."

바슈탈론 제국과 달리 다른 나라들은 다들 '일단 넘어가자'는 분위기를 보였다. 그리고 황제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하긴, 그동안 차탄 공국이 너무 해 먹긴 했지.'

대륙 제일의 상업 국가, 차탄.

바슈탈론 제국의 비호를 업은 차탄 공국은 그동안 대륙 각국과 중계 무역을 하며 큰 이득을 올렸다. 그리고 그 이득만큼 욕도 먹었다.

자국의 부를 야금야금 좀먹는 차탄 공국의 행위에 분노치 않은 나라는 없었다. 그저 공국의 뒤에 있는 바슈탈론 제국 때문에 대놓고 적대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런 사태가 터지니 다들 속으로 고소해한 것이다. 안타레스 백국이 예뻐서라기보다는, 차탄 공국이 미워서 다들 이대로 레펜하르트의 행위를 인정해 버렸다.

특히나 테이칸 왕국 같은 경우는 아예 공개적으로 안타레스 백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길 바란다며 답례 예물마저 보낼 정도였다.

테이칸 왕국의 수치, 소아 성애자 오러 유저 란타스 경 때문이었다. 시체를 찢어 죽여도 모자랄 저 전설적인 변태를, 차탄 공국은 체포에 협조하긴커녕 오히려 망명을 인정하고 받아들였으니 이후 양국의 관계는 최악이 되었다. 테이칸 왕국민 대부분이 차탄 공국이라고 하면 이를 갈 정도였다.

그런 차탄 공국을 안타레스 백국이 시원하게 엿 먹여 버렸으니, 대놓고 칭찬이야 못 하지만 테이칸 측에서 꽤나 기꺼워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게다가 저 란타스 경이 권왕 레펜하르트의 손에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카를의 로비는 이런 사소한 곳까지 꼼꼼히 닿아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테이칸 왕국의 민심은 확실히 안타레스 백국에 손을 들어 주고 있었다.

"다른 교단의 반응 역시 신경 쓰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대륙 전역에 세이어 교단이 가장 융성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 해도 인간이 믿는 신은 오직 세이어뿐만이 아니다.

대륙의 사방을 가호하는 네 수신獸神.

신룡神龍 바메트. 천호天虎 파르가. 불멸의 사타르. 얼어붙은 티아논.

이 사방신四方神을 제외하고라도 여덟 교단이 대륙 각국에서 교리를 펼치고 있다.

특히 크로방스 왕국의 레단티 교단이나 그라임의 에어리아스 교단, 할라인의 젠트랄 교단과 바실리의 필라넨스 교단 등은, 그 지역에서만큼은 세이어 교단보다 더 발언력이 크다.

"안타레스 백국에는 레단티와 필라넨스의 신관들이 제법 거하고 있습니다. 특히 '어린 성자' 같은 경우에는 아예 백국의 중추에 앉아 있어 필라넨스 교단에서도 크게 신경을 쓰고 있다고 합니다. 이들의 존재를 무시하고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각 교단의 반발을 살 위험이 큽니다."

인간을 가호하는 주신 세이어와 열두 신이라는 관용구는 대륙에 널리 퍼져 있다.

하지만 그것이 세이어 밑에 열두 신이 상하 관계로 있다는 의미는 아닌 것이다.

강이 바다의 부하인가?

강은 강이고, 바다는 바다다. 스케일 크다고 윗대가리가 아니란 소리다. 그저 세이어 교단이 워낙 융성해서 다들 한 수 접어 주는 것뿐이다.

그리고 이종족이 노예라는 가르침은 사실 세이어 교단 말고는 없다. 그냥 대륙 전체의 관습이라 다른 교단에서도 인정하는 것이지.

까놓고 레단티 교단이나 필라넨스 교단이 보기엔 레펜하르트를 적대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오히려 이 기회에 세이어 교단을 치고 올라가 교세를 넓혀야 한다는 강경파도 나오고 있었다.

"현 상황에서 제국이 직접적으로 안타레스 백국을 벌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 사료되옵니다, 폐하."

이어진 신하들의 말에 황제는 속으로 혀를 찼다. 비록 흥분하긴 했지만, 그는 결코 어리석지 않았다.

'권왕이란 자는 대대로 무식이 하늘을 찌른다고 들었는데 용케도 이리 해 놓았군. 그냥 운이 좋은 건가, 아니면 신하를 잘 둔 것인가?'

만약 이 대륙 정세를 안타레스 백국이 의도해 만들어 놓은 것이라면, 실로 보통 일이 아니다. 심지어는 타국에 심어 놓은 은의 협력자며 현자들조차도 '용납 못 하는 건 알지만, 상황상 당장 어떻게 하긴 좀 힘들다.'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을 정도니까.

'끄응, 세렐라인은 대체 뭐 한 거야? 알아서 처리하겠다더니 제플린을 말아먹냐?'

속으로 구시렁대며 황제는 호통을 쳤다.

"그렇다고 저들을 인정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렇다면 그대들은 이대로 눈감아 버리자는 것인가? 세이어께서 지켜보고 계신데 정녕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황제의 호통에 신하들이 입을 닫고 서로 눈치를 보았다.

그때 젊은 무관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신 에길네스, 폐하께 고하고자 합니다."

제국의 유서 깊은 가문, 에길네스 백작가의 당대 가주였다. 에길네스 백작을 향해 황제가 손짓을 했다.

"말하라."

에길네스 백작이 차분히 입을 열었다.

"안타레스 백국은 차탄 공국과 전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습격했을 뿐이지요."

"자세히 고하라."

"안타레스 백국은 넓은 영토와 많은 국민을 지닌 전통적인 대국이 아닙니다. 그저 군사의 질이 높고, 오러 유저가 많을 뿐이지요. 그래서 소규모 정예 부대로 저런 짓을 저질렀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국의 힘은 강대합니다. 안타레스 백국이 할 수 있는데 제국이 못 할 리가 없지요."

황제가 눈을 빛냈다.

에길네스 백작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저들이 행한 방식 그대로 저들을 벌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세이어의 정의에 합당하지 않겠습니까?"

제36장 다가오는 위기

1

열흘 내리 비가 오더니 간만에 날이 개었다. 청명한 여름 하늘이 펼쳐져 젖은 대지를 순식간에 보송보송하게 말렸다.

간만에 뜬 태양 아래 안타레스 백왕성도 분주하게 움직였다. 아낙들은 밀린 빨래를 햇살 아래 널어놓고 마부들은 말들을 운동시켰다. 기사와 병사들도 곰팡이가 피지 않게 하기 위해 무기며 갑옷의 수선에 들어갔다.

백왕성으로부터 5킬로미터쯤 떨어진 인근의 개간지.

그곳에서 러스가 간만에 블레이드 오러를 마음껏 발동하며 대련에 임하고 있었다.

"옆구리입니다, 형님!"

푸른 블레이드 오러가 허공을 가르며 상대의 옆구리를 노린다. 순간 황금빛 오러가 번뜩이며 빛의 칼날을 가로막는다.

"허업!"

오러 방어를 끌어 올리는 것만으로 레펜하르트는 가뿐히 러스의 공격을 받아 냈다. 그동안 무술 수행에도 꽤나 전력을 다했기에 육체도 오러도 수준이 훨씬 높아져 있었다. 기간틱 블레이드 같이 힘을 집중한 기술이 아니라 그냥 날린 정도의 블레이드 오러라면, 굳이 스파이럴 가드를 쓸 필요도 없었다.

"내 차례다! 스트레이트 캐논!"

호통을 치며 레펜하르트가 주먹을 뻗었다. 황금빛 커튼이 러스의 사방을 점유하고 날아들었다. 전력으로 옆으로 몸을 날려 러스가 공세를 피했다. 빗나간 스트레이트 캐논이 대지를 파헤치며 폭음을 울렸다.

콰콰콰쾅!

"에이! 일대일에서 그건 좀 아니죠, 형님! 그건 다 대 일 때 쓰는 기술 아닙니까?"

흙먼지 속에서 러스가 검을 머리 위로 세워 들었다. 그리고 곧바로 내려쳤다.

"기간틱 블레이드!"

아까와는 차원이 다른 위력의 블레이드 오러가 레펜하르트의 가슴을 직격했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스파이럴 가드를 펼치지 않았다.

"걱정마라, 러스! 너 잡으려고 쓴 기술 아니니까!"

흙먼지 속에서 레펜하르트가 살짝 옆으로 몸을 비틀었다. 기간틱 블레이드의 거대한 빛의 칼날이 빗나가며 땅을 파헤쳤다. 또다시 폭음이 울렸다.

러스가 혀를 찼다.

"쳇, 시야 제어용이었군요."

아무리 기감으로 상대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해도 정밀한 거리 조절은 역시 눈으로 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기간틱 블레이드를 흘리며 레펜하르트가 반격에 나섰다.

"연환 기격탄!"

양 주먹을 연달아 휘두르며 수십 개의 황금빛 오러 탄환을 쏘아 댄다. 날아드는 기격탄을 러스가 일일이 검으로 쳐 냈다. 튕겨 나간 기격탄들이 땅 위로 떨어져 또다시 폭발을 일으켰다.

쾅! 쾅! 콰콰쾅!

두 오러 유저의 대결에 주변은 이미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러스도 레펜하르트도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아, 오랜만에 몸 푸니까 좋네요, 형님."

"나도 간만에 기분이 상쾌하군."

비가 오는 내내 안타레스 백왕성의 오러 유저들은 대련을 금지당했다. 현재 백왕성의 안살림을 맡고 있는 틸라의 잔소리 때문이었다.

-아, 힘자랑하다 벽 부수지 말고 다들 좀 얌전히 있어욧!

오러 유저의 힘은 너무도 파괴적이라 실내 연무장 정도로는 감당이 되지 않는 것이다. 연무장 만드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부수는 것은 한순간이다. 그러니 과소비를 막기 위해서라도 실내 대련 때는 오러 사용을 금지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러스와 타시드는 그냥 비 맞으면서 수행을 할까도 고민했다. 둘 다 타고난 무인이다 보니 하루 종일 쉬고 있으면 몸이 근질거려 못 참는 것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사명감에 불타는 틸라에게 제지당했다.

-두 사람 다 비 맞으면서 날뛰지 마요! 옷 상해요! 빨래는 뭐 저절로 되는 건 줄 알아요?

원래는 카를이 백왕성 내의 행정까지 전부 보았었다. 하지만 점점 일이 많아지자 옆에서 틸라도 하나 둘 돕기 시작, 그것이 자연스럽게 업무 인수인계가 되어 버렸다. 부창부수랄까? 백국의 덩치가 이토록 커지고 나니 이제 그녀는 명실공히 백왕성의 시녀장 역할을 하게 되었다.

틸라를 떠올리며 러스가 문득 혀를 내둘렀다.

"틸라 양도 참 알뜰하다니까...."

"그러게 말이다."

두 사람의 오러로 인해 쑥대밭이 된 주위를 둘러보며 레펜하르트도 동감을 표했다.

현재 이들이 대련을 하고 있는 곳은 백왕성 내가 아닌 인근의 개간지, 바위와 잡목들이 즐비해 농토로 쓰기 힘든 곳이다.

평소에 대련하던 장소 대신 이곳에 온 이유는 역시 틸라 때문이었다.

-그냥 허공에 날리는 힘 너무 아깝잖아요? 그거 좀 실용적으로 쓰면 안 되나요?

오러 유저끼리 대련하다 보면 민폐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여기저기 새 나가는 블레이드 오러만으로도 건물 한두 개쯤은 간단히 박살 나는 데다가, 오러끼리 부딪칠 때 일어나는 오러 파문 역시 바위를 부수고 거목을 꺾어 버리는 위력을 지니고 있다.

카를에게 감화되어 상당히 경제적 마인드를 지니게 된 틸라 입장에서는, 이 허공에 날아가는 힘들이 너무 아까웠다. 그래서 레펜하르트에게 진지하게 요구한 것이다. 이왕 오러 써서 대련할 거면, 백왕성 근처의 개간지에서 좀 하라고.

그럼 보나마나 그 일대를 싹 갈아엎어 버릴 테니 그곳이 얼마나 훌륭한 농지가 되겠는가?

-만날 말로만 쑥대밭, 쑥대밭 하지 말고, 정말로 밭 좀 만들어 봐요.

오러 유저를 밭 가는 소로 써먹겠다는 이 아이디어에는 천하의 레펜하르트도 잠시 기겁했다. 아마 타국의 오러 유저였다면 지독한 모욕으로 여기고 벌컥 화를 냈겠지.

하지만 이종족 오러 유저들은 딱히 그런 쪽 권위 의식이 없다 보니 오히려 좋은 생각이라며 찬동한 것이다. 덕분에 다들 대련 장소로 백왕성 근처의 개간지를 고르는 것이 유행이 되어 버렸다.

"그럼 다시 간다, 러스!"

"예! 형님!"

두 사람이 다시 맞붙었다.

황금과 청색의 오러가 또다시 사방을 수놓으며 열심히 땅을 골랐다.

쾅쾅! 으적으적! 우르릉!

밭도 갈고 승부도 겨루며, 참으로 생산적인 대련을 행하는 두 사람.

멀리서 구경하고 있던 이니야가 손을 흔들며 레펜하르트를 응원했다.

"레펜하르트 님, 파이팅!"

곁에 있던 시리스가 아차 하는 표정으로 얼른 뒤를 따른다.

"나, 나도 파이팅!"

그래 놓고 바로 얼굴을 붉히는 것이, 아무래도 부끄럽긴 한 모양이다.

이니야와 시리스의 응원을 보더니 아틸카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백왕님만 응원하면 형평성이 안 맞지 않나? 이보게! 러스 군! 힘내시게!"

타시드도 히죽 웃으며 러스를 응원했다.

"그래, 이 친구야! 한 방 제대로 먹여 보라고!"

러스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저쪽은 아리따운 엘프 여인 둘이서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응원을 해 주고 있는데, 이쪽은 사납게 생긴 트롤과 오크 사내 둘이서 응원을 해 주고 있다?

뭐, 좋은 의미라는 건 알겠는데 목소리가 너무 살벌하다 보니 어째 응원이 아니라 지면 가만 안 두겠다는 협박 같기도 하다.

"...뭔가 묘하게 서러운데, 이거."

러스의 하소연을 하늘이 들었는지, 이번에는 꾀꼬리 같은 맑은 음성의 응원이 들려왔다.

"힘내요! 러스 경!"

엘프 여인들과 비교해도 결코 꿀리지 않는 미모의 소유자, 실란이었다.

"아니, 이건 더 서러운데...."

그래도 응원이라도 해 주면 다행이다. 티티마 같은 경우엔 러스가 대련을 하건 말건 전혀 관심 없이, 햇볕 쬐는 고양이처럼 돗자리 구석에 웅크린 채 도롱도롱 졸고 있었으니까.

"우웅, 조용히 좀 싸우지, 귀 아프다아...."

현재 이곳에 와 있는 이는 러스와 레펜하르트뿐이 아니었다. 평소에 대련을 금지당했던 타시드가 눈을 빛내며 따라왔고, 아틸카 역시 자기도 몸 좀 풀어야겠다며 합류했다.

바늘 가는 데 어찌 실이 가지 않을 수 있을까? 레펜하르트를 따라 이니야가 눈을 빛내며 달라붙었고, 그러자 시리스도 인상을 쓰며 따라왔다.

실란은 그냥 재밌는 구경 하겠다며 끼어들었다. 실란이 움직이자 티티마도 '내 거'에서 떨어지지 않겠다며 졸랑졸랑 뒤를 따랐다.

실란을 제외하면 다들 전사 계열, 비 때문에 그동안 대련을 금지당하기는 서로 마찬가지다. 다른 이들은 이미 한바탕 대련을 통해 몸을 풀어 후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구경하다 말고 이니야가 돗자리 곁에 놓인 바구니에서 연어 샌드위치와 음료를 꺼냈다. 그녀가 직접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점심 도시락이었다.

"다들 드시면서 구경하세요."

이니야가 방긋방긋 웃으며 아틸카와 타시드, 실란이며 티티마에게까지 골고루 샌드위치를 돌렸다. 이들은 모두 레펜하르트와 친분이 깊은 이들, 장수를 노리려면 말부터 쏘라는 실란의 조언을 그녀는 착실히 지키고 있었다.

시리스에게 건넬 때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그렇다고 이 상황에서 그녀만 안 줄 수는 없으니 마저 건넸다.

"시, 시리스 양도 들어요."

"저도 도시락 싸 왔어요."

새침한 표정으로 시리스도 바구니를 하나 꺼내 들었다. 흰 빵에 올리브유, 마늘 소스를 얹은 고기 크로켓에 샐러드를 곁들이고 제법 질 좋은 와인까지 챙겨 왔다. 이니야의 도시락에 비해 훨씬 다양하고 화려해 보인다.

"자, 다들 드세요. ...뭐, 이니야 씨도 드시고 싶으면 드시고?"

돗자리 위에 음식 판이 벌어졌다. 원래는 오러 유저들 간의 대련을 위해 나온 것인데, 뭔가 소풍 분위기가 되어 버렸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이니야와 시리스가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요리 잘하시네요, 이니야 씨."

"시리스 양도요, 호호호."

두 사람 모두 입가는 웃고 있었는데, 어째 눈빛이 따로 놀고 있다.

"...뭔가 춥다."

눈치는 없어도 감은 좋은 타시드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기분 탓일세."

모든 것을 관조하는 현자의 눈으로, 아틸카가 허하게 대꾸했다.

'아무나 파이팅!'

실란은 무책임하게 응원만 하고 있었다.

"하암, 졸리다...."

티티마는 아무 생각 없이 하품만 할 뿐이었다.

어쨌거나, 한가한 분위기인 것은 사실이었다.

쾅! 쾅! 콰콰쾅!

...바로 옆에서 웅장한 폭음이 계속 울리고 있다는 점을 무시하면 말이다.

☆ ☆ ☆

한참 후에야 레펜하르트와 러스가 땀범벅이 되어 돗자리 쪽으로 다가왔다. 그 위에 펼쳐진 음식들을 보며 레펜하르트가 탄성을 질렀다.

"오, 이게 웬 진수성찬이야?"

안 그래도 아침부터 내리 대련을 뛰었더니 보통 허기진 것이 아니었다. 레펜하르트가 허겁지겁 크로켓이며 빵을 입에 넣었다. 손가락을 꼬면서 이니야가 중얼거렸다.

"나, 나도 샌드위치 싸 왔는데...."

물론 짐 언브레이커블의 원대한 위장은 두 여인의 도시락을 모두 포용하고도 남음이 있다. 레펜하르트는 이니야의 샌드위치도 마저 입속에 넣고 씹었다.

우걱우걱 씹어 삼키고 벌컥벌컥 들이켠다.

참으로 호쾌한 그 식사 광경에 시리스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예전부터 가진 불만이지만, 레펜하르트는 지나치게 막되게 밥을 먹는 버릇이 있다.

'아니, 예전엔 우아한 마법사셨다면서 대체 그때 버릇은 다 어디 간 거야?'

뭐, 누구든 짐 언브레이커블 밑에서 4년쯤 밥 먹고 살다 보면 저렇게 될 수밖에 없겠지만.

반면 이니야는 몽롱한 눈빛으로 뺨을 발그레 붉히고 있었다.

'아, 먹는 모습도 너무 사내다워!'

계속 식사를 하며 레펜하르트는 오늘의 대련을 점검했다. 그는 오늘 러스 말고도 이니야며 아틸카, 타시드 등과도 모두 무술을 겨루었다. 그리고 그 모든 전투에서 우세를 점할 수 있었다.

'확실히 실력이 늘었군.'

6중첩이야 야매(?)이니 제외한다손 치더라도, 5중첩 캘러미티 혼을 각성한 것만으로도 모든 신체 능력이며 오러양이 확연하게 늘어났다.

예전만 해도 타시드나 러스는 그렇다 치고 이니야나 아틸카를 상대하기엔 꽤 벅찬 감이 있었다. 특히 아틸카 같은 경우에는 순수한 무술만으로는 세 번 붙어서 한 번 이기기도 어려웠다. 마법까지 같이 써야 겨우 접전이 가능할 정도로 아틸카의 무력은 높았다.

그런데 지금은 마법 없이도 어느 정도 우세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정도면 실로 장족의 발전이라 할 수 있으리라.

'그런데 마력 쪽은 진짜 지지부진이네.'

무술 쪽은 일단 마음잡고 노력하니 노력하는 대로 쑥쑥 실력이 올라가고 있다. 하지만 마력 쪽은 영 굼벵이 걸음이다. 7서클 돌파한 게 언젠데 아직도 마력 증가량은 눈곱만큼, 7서클 마법도 절반 이상 구사가 불가능한 수준이다.

10서클의 깨달음이 있으니 있는 마법 이리저리 꼬아서 새 마법 만드는 건 가능한데, 절대적 레벨을 올리는 것은 역시 시간이 드는 것이다.

레펜하르트는 잠시 고민했다.

아무래도 사방신의 유물을 찾기 전에는 이제 더 이상 단기간에 마력을 올릴 방법이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사방신의 유물이 있는 결계를 통과하려면 최소 8서클의 마법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도 여태껏 손을 못 대고 있었던 것이지만....

'지금은 권마합신이 있으니까.'

이전에는 사용하지 못했던 오러와 마법의 융합 술식, 권마합신을 응용하면 어떻게 될 것 같기도 하다. 레펜하르트는 고민했다.

'슬슬 사방신의 유물을 찾으러 가 볼까? 하지만 막상 갔다가 안 통하면 시간만 낭비하는 건데.'

한편 러스는 실란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실란이 제플린에서 납치되었던 사건에 대해서였다.

"...그렇게 되어서 무사히 탈출은 할 수 있었어요. 티티마 없었음 큰일 날 뻔 했죠, 진짜."

"그래도 티티마 양 실력 정도면 별로 힘든 상대는 아니었을 것 같은데?"

이 자리에 모인 전사들은 모두 아침 내내 서로 대련을 해 보았다. 그 와중에 러스는 티티마와도 검을 섞었다.

오러 유저에 비하면 물론 손색이 많았지만, 그래도 티티마의 실력은 놀라운 수준이었다. 적어도 그가 아는 크리스틴에 비하면 충분히 우세를 점할 수 있어 보였다.

실란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도 않았어요. 그 여자가 어디서 메사이어를 얻어 왔더라고요. 덕분에 저도 힘 좀 썼죠."

러스가 이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면 유서스도 괴상한 아티팩트 들고 나타나긴 했었지. 형님 이야기론 다른 놈들도 뭔가 하나씩 들고 있었다고 했고. 거참, 어디서 그런 걸 구했는지...."

허공검을 터득한 덕에 이길 수는 있었지만, 여전히 당시를 떠올리면 아찔하다. 러스가 혀를 내둘렀다.

그때, 밥을 먹고 있던 레펜하르트가 인상을 쓰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잠깐, 실란. 그거 혹시 성광검 메사이어?"

"알아요? 하긴, 워낙 유명하니까."

하지만 레펜하르트가 놀란 이유는 단순히 크리스틴이 이름난 아티팩트를 손에 넣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성광검 메사이어라면... 시리스가 쓰던 거잖아?'

성광검 메사이어는 레펜하르트가 아직 10서클에 진입하기 전, 대륙을 떠돌 때 얻은 기물이었다. 던전에서 구한 것은 아니고, 할라인 왕국의 몰락 귀족이었던 실니악 남작가에서 하룻밤 묵다가 그 집 창고에서 썩고 있던 걸 발견한 것이었다.

당시의 성광검 메사이어에는 강력한 저주가 걸려 있어 실니악 남작가는 희대의 아티팩트를 보고도 저주받은 검이라며 봉인해 둘 뿐이었다. 그래서 레펜하르트는 적당히 금액을 치르고 메사이어를 구매, 간단히 저주를 풀고 시리스에게 선물했다.

성광검 메사이어는 사용자가 지닌 각종 기운을 골고루 증폭시켜 준다. 쉽게 말해서 능력이 잡다하면 잡다할수록 증폭도도 커진단 소리다. 그런 만큼 검술과 정령술, 마법을 모두 구사하는 시리스에게는 안성맞춤이었다.

증폭도에 한계가 있어 시리스가 경지에 오른 후로는 수하의 엘프 부관에게 줘 버렸지만, 아직 전생 때만큼 강해지지 않은 현재의 그녀에게는 대단히 유용한 기물이다.

그래서 레펜하르트는 이번 생애에도 시간 나는 대로 남작가에 들러서 시리스에게 메사이어를 구해 줄 생각이었다. 그런 이유로 유서스의 마갑 엘드라드를 보고도 별 욕심을 내지 않았던 것이고.

레펜하르트가 신음을 흘리며 머리를 긁었다.

'끄응, 급한 일부터 처리하려 하다 보니 우선순위가 밀려 일단 미뤄 뒀었는데, 그새 딴 놈이 찾아 버렸나.'

전생 때의 그가 실니악 남작가를 들린 나이는 30대 초반, 지금으로부터 몇 년 후의 일이었다. 그전까지는 어느 누구도 그곳에 성광검 메사이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메사이어의 출처에 대해선 레펜하르트도 시리스도 언급한 적이 없었기에 테스론이 그 사실을 알 리도 없었다. 그래서 혹시 다른 자가 메사이어를 채 갈 거라는 걱정은 하지도 않았다.

'또 내가 회귀한 결과로 미래가 뒤틀려서 이런 건가? 역시 다른 일 제쳐 놓고 메사이어부터 찾을 걸 그랬나?'

하지만 그럴 여유는 없었다. 크로방스 내전 같은 경우엔 딱 시기에 맞춰 일어나는 일이라 놓칠 수가 없었다. 늦장 부렸다면 유벨도 잃었을 것이고, 카를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이후 안타레스 백국을 세울 때도 그랬다.

백국이 자리 잡을 때까지는 함부로 밖으로 나설 수가 없었다. 혹여 시간이 생겨도 더 급한 일이 많았다. 아틸카와의 재회나 제플린 노예 해방 전쟁 등은 고작 검 한 자루 얻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었다.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며 레펜하르트는 마음을 편히 먹었다.

레펜하르트가 오직 전생 때의 인연에만 연연했다면 지금의 안타레스 백국도 없었을 터, 그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미래를 바꾸기로 마음먹었다면 바뀐 미래도 수용해야 한다.

'나중에 또 기회가 있겠지.'

성격을 보아하니 크리스틴이 실란을 포기할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인다. 그럼 다시 만날 때 메사이어 회수해서 선물하면 그만이지.

하지만, 그래도 대체 메사이어가 왜 이 시간대에 나타난 것인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생각을 정리하며 레펜하르트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냥 그 떡대 여자가 우연히 실니악 남작가를 들렀었나?"

"응?"

레펜하르트의 혼잣말에 실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크리스틴 말로는 은의 현자가 주었다던데요?"

"은의 현자?"

처음 듣는 명칭이었다.

혹시 실니악 가문이 이번 시간대에는 은의 현자라고 불리나? 하지만 전생의 그, 쫄딱 망해서 비실대던 실니악 가문을 떠올리면 전혀 어울리는 명칭이 아니다.

'아니, 그보다 실니악 남작가에서 얻은 게 아니라면, 성광검 메사이어를 그냥 받았다는 소리인데?'

새로 조우한 테스론 일행은 약속이라도 한 듯 하나같이 강력한 아티팩트들을 들고 나타났다. 정황을 보면, 아무래도 성광검 메사이어도 저 아티팩트들과 출처가 같다는 쪽이 더 그럴듯하다. 저마다 다른 장소에서, 저마다 다른 아티팩트를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발견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제이드 놈도 그렇고.'

레펜하르트의 머릿속에, 제이드가 놓고 간 은빛 엠블렘의 모습이 떠올랐다.

은의 현자.

다량의 아티팩트.

그리고 제이드.

이 모든 것이 관계가 있어 보인다. 물론 너무 정보가 적어 억측에 불과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왠지 본능적으로 그런 느낌이 든다.

이건 결코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라고!

'아무래도 본격적으로 관련 정보를 모아 봐야겠군.'

예전 같았으면 워낙 시급한 일이 많다 보니 따로 신경을 쓰는 일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카를 시키면 알아서 잘하겠지? 아, 역시 그 양반 잘 살려 뒀어.'

히죽거리며 레펜하르트는 어깨를 폈다. 그리고 샌드위치를 마저 씹어 삼키며 생각했다.

'사방신의 유물부터 빨리 찾아야겠네. 그곳의 위치는 테스론도 알고 있으니.'

이제까지는 레펜하르트도 마력이 모자라 사방신의 유물을 거두러 갈 수가 없었다. 테스론도 같은 처지일 것이라 생각해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성광검 메사이어에 대해 듣고 나니 역시 걱정이 된다.

카를 덕분에 예전처럼 백국 내에 급한 일도 많이 없어진 상황이니 여유도 좀 있는 편, 씹고 있던 크로켓을 꿀꺽 삼키며 레펜하르트는 결심했다.

'아라난 그라드 건설지 시찰만 끝내면, 바로 날짜 잡아 움직여야겠다.'

2

대륙의 동쪽을 종단하는 대산맥 글로텐의 서쪽 지류, 아렌드 산맥.

오랜 세월 침식된 이 완만한 산맥 서쪽에 강을 낀 커다란 평원이 있다. 산맥으로부터 흐르는 세린 강을 따라 형성된 지형으로, 안타레스 백왕성으로부터 100여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다. 예전에는 체타스 남작령이었지만 영지전을 통해 백국에 편입된 곳으로, 테르마니아 관도와 세린 강을 끼고 있어 교역 도시 자루드와 바실리 왕국으로 향하는 주요 길목이기도 하다.

그 아렌드 평야의 중부, 세린 강변을 따라 거대한 도시가 건설되고 있었다.

아라난 그라드.

룬어로 오색五色의 도시란 의미를 지닌, 안타레스 백국의 새로운 수도였다.

도시의 정경을 바라본 레펜하르트가 감탄을 터트렸다.

"호오, 이제 거의 도시 형태를 갖췄군? 예전에 봤을 때는 그냥 벌판일 뿐이었는데."

외부 성벽은 이미 대부분 공사를 마쳤으며, 왕궁이며 각 종족들의 대표자가 묶을 공공건물들 역시 건설이 끝나 있었다.

전부 드워프의 손길이 닿아 있어, 거대한 규모에도 불구하고 견고하지 그지없어 보인다. 세린 강변을 따라 설치된 나루터도 완공되고 성문 쪽도 조각상 등의 외부 치장만 덜 되었을 뿐 이미 완성되어 있다.

카를이 흐뭇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인재도 많고 인력도 많았으니까요. 생각보다 진행이 빨랐습니다."

백국 내를 정비하고 안정화시키며 제플린 공략을 짜는 한편, 카를은 새로운 백국의 수도 건설에도 열을 올렸다.

현재 안타레스 백왕성은 사실, 예전 쓰던 겔페인 자작의 성을 약간 수리한 뒤 그대로 눌러앉았을 뿐이다. 원래는 왕국의 일개 지방 귀족이 쓰던 소규모 성이어서 백국의 규모가 커진 지금 왕성으로 쓰기엔 여러 모로 불편함이 많았다. 위치 역시 너무 산맥 인근에 붙어 있어 교통이 불편하고, 또 지형도 일국의 수도라기엔 너무 좁았다.

새롭게 유입된 유민들이며 이종족들에게 일거리를 주기 위해서라도 대규모 공사는 필요했다. 그래서 2년 전부터 조금씩 공사를 시작하고 있었다. 초반에는 인력이 적어 그리 진행이 빠르지 않았지만 점점 더 백국의 인구가 늘며 건설 속도도 가속화되었다. 제플린에서 구출한 노예 출신 이종족들이 대거 투입된 지금은 슬슬 도시가 제 기능을 할 정도까지 완성이 되어 있었다.

레펜하르트가 감탄을 이었다.

"만날 돈 모자라다고 하소연하더니 용케 이 정도까지 예산을 마련했구려."

카를이 힘없이 웃으며 대꾸했다.

"이것까지 하려니 돈이 모자랐던 겁니다. 사실 크로방스 왕국에 빚도 좀 졌습니다. 할 수 없지요. 돈 모자란다고 눈앞의 일을 미루면 국가가 제대로 돌아갈 리가 있겠습니까?"

돈 이야기 나오자 바로 어깨가 축 늘어지며 눈이 퀭해지는 것이, 아무래도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던 것 같았다.

레펜하르트가 웃으며 그를 달랬다.

"슬슬 구해 낸 이들이 자리를 잡고 생산 활동에 들어갔으니 곧 예산도 확보될 거요."

각 종족의 특산물들은 다른 나라에서 상당한 고급품으로 취급받는다. 품질도 품질이지만, 일단 희귀성이 있다 보니 생산원가에 비해 마진을 크게 남길 수 있는 것이다. 이종족들의 특산물은 안타레스 백국이 독점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크로방스 왕국으로 적을 옮긴 타오반 상회와 손을 잡고, 안타레스 백국은 현재 대륙 각지에 엘븐 실크며 오크리시 레더 제품, 트롤제 유리와 도자기 등을 수출하고 있었다. 드워프의 무기와 갑옷은 전쟁을 대비해야 하니 밖으로 유출할 수 없지만 저것들은 사치품이니 얼마든지 내놓을 수 있었다.

카를도 웃으며 다시 표정을 폈다.

"안 그래도, 덕분에 구멍 난 예산을 제법 메울 수 있었습니다."

이종족의 특산품들은 대륙 각지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바슈탈론 제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의 귀족들 사이에서는 안타레스의 엘븐 실크로 옷을 짜고, 오크들의 가죽 외투를 걸치며, 트롤들의 유리와 도자기로 저택을 장식하는 것이 큰 유행으로 번질 정도였다.

안타레스 백국이 대륙 각국에 예물로 이종족의 특산품을 선보인 덕분이었다. 물론 정치적 이유 때문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각국의 귀족층에 백국의 산물을 광고하는 효과도 있었던 것이다.

레펜하르트가 혀를 내두르며 물었다.

"설마, 이 효과까지 노린 거였소?"

태연자약하게 카를이 대꾸했다.

"제대로 된 행정가라면 한 가지 행동으로 여러 결과를 기대할 수 있어야 하니까요."

카를은 그렇게 레펜하르트 일행을 안내하며 거리를 걸었다. 성문을 통과해 아라난 그라드 외곽을 돌며 주변을 시찰한 뒤, 중심 거리 쪽으로 향한다.

시리스가 주위를 보며 감탄사를 흘렸다.

"대단하네요. 제플린과 비교해도 별로 떨어지지 않는 것 같아요."

비록 미완성이긴 하지만 아라난 그라드는 실로 훌륭한 도시였다.

거리의 모든 구획이 잘 구분되어 있고 가파른 곳에는 돌계단도 놓여 있다. 도시 전체가 질서 정연하달까? 곳곳에 우물과 목욕탕을 건설하는 모습도 보였다. 녹지 역시 잘 조성되었다.

"드워프들이 만든다고 해서 엘프가 살기 좀 힘들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모든 시설이 하나 같이 드워프뿐 아니라 모든 종족이 사용하기에 편하도록 만들어졌다. 옛 시대의 드워프는 오직 자기네 종족 신장에만 맞춰 건축을 하기에 사실 다른 종족에게는 좀 불편한 점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현 시대의 드워프들은 이미 오랜 노예 생활 동안, 인간의 기준에 맞춰 건물을 올리는 것 역시 터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득 이니야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아, 그런데 여기에도 세계수 심으실 건가요, 레펜하르트 님?"

엘프의 거처는 보통 세계수를 통해 만들어진다.

"그럼 다른 나라에 너무 눈에 띄지 않겠습니까? 당분간은 아렌드 산맥 안쪽에 세 번째 세계수를 심어 영향력하에만 놓이게 할 생각입니다."

"그 정도면 엘프들도 사는 데 불편함은 없겠네요."

거리가 가까워지자 거대한 건물 사이에 자리 잡은 임시 오두막과 많은 수의 천막들이 보였다. 중요 건물은 완성되었지만 일반적인 건물들은 여전히 공사 중이라 인부들의 거처가 필요한 것이다.

수많은 드워프와 오크들이 열심히 돌을 쪼고 벽돌을 나르며 구슬땀을 흘린다. 그러다 레펜하르트 일행을 보자 흠칫 놀라며 저마다 허리를 숙였다.

"오잉, 백왕님이시다."

"재상님, 또 오셨네."

레펜하르트나 카를이라, 둘 다 실로 범상치 않은 외모다 보니 사방에서 알아보고 인사를 해 댄다. 개중에는 아틸카나 이니야를 알아보는 이도 있었다.

"오, 저분이 트롤의 대구루, 아틸카신가 보군. 듣던 대로 이빨 죽이네."

"엘프 오러 유저 이니야 님이신가? 과연 가슴이...."

둘 다 '특정 부위'가 과하다 보니 이야기만 들어도 확실하게 인상착의가 드러나는 것이다.

시리스와 실란 같은 경우는 아무래도 일반 국민들이 이야기만으로 알아보기는 힘들었다. 사실 실란은 그냥 보면 예쁜 소녀 신관으로밖에 안 보이고 시리스 역시 평범한 엘프 소녀 수준이었으니까.

하지만 레펜하르트와 함께 있으니 그들 역시 여기저기서 아는 척을 했다.

"저분이 신월의 검사님이신가보군."

"그럼 저분이 '그' 어린 성자?"

"그런 듯하이. '그' 어린 성자님이신 듯해."

'그'라는 단어가 굉장히 신경에 거슬렸지만... 실란은 애써 무시하고 씩씩하게 걸음을 옮겼다.

'나 이제 알통도 생겼는데! 왜 아직도 저런 반응인 거야! 쳇!'

슬프게도 티티마를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 트롤이다."

"트롤 여자애네."

"누구지?"

물론 티티마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사람들의 인사를 받아 가며 일행은 계속 거리를 걸었다.

현재 레펜하르트를 따르는 이들은 시리스와 이니야, 아틸카와 실란, 티티마였다.

시리스와 아틸카는 각자 엘프와 트롤의 대표 격으로 시찰에 참가하고 있었다. 건축의 주 인부들이 드워프와 오크라 평소에도 마켈린과 타시드는 이곳을 자주 왕래해 굳이 이번에 올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마켈린은 현재 그랜드 포지로 돌아갔고, 타시드는 러스와 함께 백왕성에 남았다.

이니야 경우에는 딱히 볼일 없이 이번에도 레펜하르트와 함께 있겠다며 따라온 것이었다. 일족마저 내팽개치고 남자 따라다니는 족장의 행태에 분노할 법도 하겠다만, 사실 스티리아 일족은 열심히 이니야를 응원하고 있었다.

-파이팅! 족장님!

-꼭 그 남자 잡아요!

-그리고 이젠 제발 노처녀 히스테리 좀 그만....

뭐, 부관인 세르펠이 워낙 유능한지라 딱히 문제가 없기도 했다.

티티마야 물론 아무 생각 없이 실란이 오니 그냥 따라온 것이었고.

하지만 실란은 확실히 이곳, 아라난 그라드에 볼일이 있었다.

"자, 이곳입니다. 프리스트 실란."

구획 하나를 건너자 카를이 건물 하나를 가리켰다. 실란이 화색을 보였다.

"오오! 크네요!"

그것은 특이하게도 '분홍색'으로 외벽을 칠한 거대한 3층 신전이었다. 저 색상만 봐도 이 신전이 누구를 섬기는지 바로 알 수 있으리라.

이번에 새롭게 신설된 '안타레스 교구'의 필라넨스 대신전이었다.

연신 히죽거리는 실란을 보며 레펜하르트가 혀를 찼다.

"그렇게 좋냐?"

"당연하죠. 나도 이제는 당당한 대주교라고요! 엣헴!"

크로방스 내전과 안타레스 백국 내에서, 실란이 보인 위업은 결코 작지 않았다.

비록 본인이 입만 열면 근육 타령을 해 대서 그렇게 안 보일 뿐이지, 실란은 백국의 주요 건국 공신이며 수많은 이종족에게 필라넨스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한편 전쟁터에서도 많은 명성을 떨쳤다. 이런 인재를 교단에서 어찌 그냥 놔두겠는가?

그래서 필라넨스 교단은 정식으로 교칙을 내려 안타레스 백국에 교구를 마련하고 실란을 교구장, 대주교의 지위로 올려 주었다.

나이를 생각하면 유례가 없는 대출세이지만 워낙 업적도 높고 권왕과의 관계도 좋은 데다 신성력도 충분히 대주교 수준이다. 그런 실란의 대주교 취임을 반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제 신전이 완공되고 공식적으로 수도를 이전하면, 바실리 왕국 쪽에서 실란의 손발이 될 프리스트들을 대거 보내 주기로 약조가 되어 있었다. 처음 레펜하르트를 만났을 때 실란이 꿈꾸었던 것처럼 교단의 역사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게 된 것이다.

"아, 역시 레펜 씨 따라다니길 잘했지."

실란이 흐뭇한 미소를 얼굴 가득 떠올렸다. 다른 이들도 기꺼이 축하해 주었다.

"축하한다, 대주교 실란."

"축하해요."

하여튼, 아라난 그라드를 바라보며 레펜하르트 일행은 모두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이 정도로 훌륭한 도시일 것이라곤 아무도 생각지 못했으니까.

크게 만족하며 레펜하르트가 치하의 말을 건넸다.

"실로 완벽한 도시요, 카를. 정말 수고가 많았소."

하지만 카를은 여전히 불만인 것 같았다.

"완벽하지는 않지요. 역시 수도 이름이 좀 권위가 적은 것이... 레펜하임, 참 좋은 이름인데...."

떨떠름한 표정으로 레펜하르트가 대꾸했다.

"아니, 그건 싫다고 했잖소...."

전생의 안타레스 제국 수도, 레펜하임.

풀이하자면 '레펜하르트의 도시'라는 의미다.

원래 각 나라의 국명은 건국왕의 성을, 수도는 이름을 따는 것이 대륙의 관례다. 우연의 일치로 카를 역시 백국의 수도 이름으로 레펜하임을 주장했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딱 잘라 거절했다.

-그런 쪽팔린 이름을 어떻게 붙여?

전생 때는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이 시간대로 회귀하며 곰곰이 생각하니 영 낯 뜨거운 명칭이었던 것이다. 세상에, 도시에다가 자기 이름을 붙이다니? 권력욕 가득한 독재자나 할 짓이 아닌가?

그리고 레펜하르트는 더 이상 그 홀로 군림하며 이종족들을 다스릴 생각은 없다. 그가 원하는 것은 지배가 아니라 인도다. 그래서 '레펜하임'이라는 얼굴 팔리는 명칭 대신 다섯 종족이 모두 어우러져 살기를 바란다는 의미로 '오색의 도시, 아라난 그라드'라는 이름을 주장했다.

레펜하르트의 고집이 워낙 세서 카를도 결국 승낙은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미련이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레펜하임... 참 좋은 이름인데... 어떻게 설득할 방법이 없네...."

구시렁대며 카를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도시를 모두 보여 주었으니 이제 왕궁 차례였다.

"왕궁은 겉은 완성되었지만 내부는 아직 손댈 데가 많습니다. 그래도 대략적인 파악은 가능할 겁니다."

그렇게 왕궁으로 막 향하려던 중이었다.

저만치서 전령 한 명이 맹렬히 말을 달리며 다가오더니 바로 카를을 불렀다.

"재상님! 자루드에서 급보입니다!"

자루드라면 안타레스 백국의 주요 교역 도시다. 카를이 놀라며 물었다.

"무슨 일인가?"

전령이 잽싸게 품에서 전서를 꺼냈다.

"마탑으로부터 온 서신입니다!"

레펜하르트로부터 마법을 전수받은 드워프 마법병단은 비록 느린 종족이지만 워낙 월등한 스승을 둔 덕에 슬슬 4서클 정규 마법사 수준까지 다다라 있었다.

카를은 그 드워프 마법병단을 백국의 요충지로 보내고 마탑을 세워 마법 통신망 역시 세워 둔 후였다. 아직 실력이 낮아 글자 몇 개밖에 보내지 못하는 수준이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급한 보고는 바로 받을 수 있으니 그 효능이 적지 않았다.

카를이 전서를 받고 나서 안색을 굳혔다.

레펜하르트가 물었다.

"무슨 일인가?"

카를이 레펜하르트에게 전서를 건넸다. 종이를 펼친 순간, 레펜하르트의 표정 역시 굳어 버렸다.

서신은 실로 간단한 글자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뜻은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자 루 드 적 습

☆ ☆ ☆

레펜하르트와 시리스는 정신없이 말을 몰았다. 두 사람이 탄 말은 카를이 고른 준마 중의 준마였지만, 워낙 쉬지 않고 달려온 탓에 전신에서 비 오듯 땀을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결코 속력을 늦추지 않았다.

그만큼 그는 지금 마음이 급했다.

'대체 어디서 쳐들어온 거지? 바실리 왕국? 아니면 바슈탈론 제국?'

교역 도시 자루드는 바실리 왕국과 인접해 있으니 가장 가능성이 높은 곳은 그곳이다. 그러나 바실리 왕국은 안타레스 백국의 입장에 만족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다면 바슈탈론 제국일 가능성도 크다.

'그렇지만 제국이 바실리를 통과해서 군대를 움직일 수 있을 리가 없는데....'

머릿속이 복잡했다.

마탑에서 온 전서는 너무 요약되어 있어 도저히 자세한 사항을 알 수가 없었다. 한시바삐 교역도시 자루드에 도착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이랴!"

레펜하르트는 박차를 가하며 더욱 말을 재촉했다.

말을 달리는 레펜하르트와 시리스, 그들 옆에는 거대한 어금니를 지닌 샤벨 타이거도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달리고 있었다.

전신이 푸른 털로 덮이고 복잡한 문양이 새겨진 이 마수는 트롤 주술로 변신한 아틸카였다. 구루의 가르침은, 부상당해 몸을 가누지 못하는 상태가 아니라면 살아 있는 생물의 등에 올라타는 것을 허용치 않았다.

반대편에선 이니야가 은빛으로 빛나는 새하얀 순록을 타고 따라붙고 있었다.

살아 있는 순록이 아니라 그녀의 오러를 물질 변환시켜 생성한 일종의 영수靈獸였다. 딱히 아틸카처럼 금지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니야도 말을 탈 줄 모르기에 평소 쓰던 이동 수단을 선택한 것이다.

카를과 실란, 티티마는 일단 아라난 그라드에 남았다. 빠르게 움직여야 하니 속도를 따라잡을 수가 없어서였다. 이 셋은 일단 후속대를 모은 뒤 뒤따르기로 되어 있었다.

정신없이 달려 언덕을 넘자 숲이 끝나며 교역 도시 자루드의 모습이 보였다. 시리스가 인상을 썼다.

"이럴 수가...."

자루드의 성벽 일부가 참혹할 정도로 무너져 있었다. 성문도 완전히 박살 난 것이 확연히 보인다.

아틸카가 신음을 흘렸다.

"적이 쳐들어온 것이 확실하군요."

속도를 높여 네 사람은 빠르게 자루드 시를 향했다. 성문 근처로 다가가니 피 흘리며 쓰러진 경비병이며 기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레펜하르트의 안색이 더더욱 굳었다.

"제길...."

성안으로 들어선 뒤 레펜하르트와 시리스는 일단 말에서 내렸다. 혹시 습격을 받을지도 모르니 더 이상 말을 타고 움직일 수는 없었다. 이니야가 영수를 거두었고 아틸카도 변신을 풀고 다시 트롤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네 사람은 주위를 경계하며 시내로 들어섰다.

무너진 성벽이나 박살 난 성문에 비해, 도시 안쪽은 그리 파괴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평소와 똑같아 보이는 광경이다.

시리스가 인상을 썼다.

"적이 보이지 않는데요?"

어째 적의 모습도 없었고, 딱히 군대가 휩쓸고 간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이니야도 동의의 빛을 보였다.

"확실히 군대가 지나갔다면 이렇게 흔적이 남지 않을 리는 없지요."

하지만 분위기는 분명 흉흉했다. 대부분의 시민들이 문을 걸어 잠그고 집에 처박혀 있었다. 창문 틈으로 힐끔 보이는 표정에 공포의 빛이 역력하다.

그리고 분명 성벽과 성문은 파괴되어 있지 않은가?

"으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의문은 자루드 중심에 위치한 거대한 건물, 자루드 시청에 도착한 순간 풀렸다.

높이가 4층에 달하고 면적도 어지간한 성에 육박하는 자루드 시청은 명실공히 자루드 최대의 건축물이었다.

그 시청이 지금 정확하게 반토막 나 있었다.

허물어지거나 부서진 것이 아니었다. 진짜, 무슨 생일 케이크 잘라 놓은 것처럼 딱 절반으로 '쪼개져' 있다. 지진이라도 일어나지 않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자연재해가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저 둘로 쪼개진 시청의 단면은 하나같이 반들반들하기 그지없었으니까.

아틸카가 기가 막혀 중얼거렸다.

"이건 대체...."

이니야가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오러군요."

마법으로는 이렇게까지 집중된 절삭력을 보이기 힘들다. 이런 절단면을 보일 수 있는 것은 오직 블레이드 오러뿐이다.

'하지만 대체 누가?'

파괴력 하나는 자타가 공인하는 짐 언브레이커블도 건물을 통째로 무너트릴 수는 있을지언정, 이렇게 딱 잘라 버릴 수는 없다.

황당해하며 일행은 시청 안쪽으로 들어갔다. 곳곳에 병사들과 기사들의 시체가 즐비했다. 그중에는 자루드의 시장, 행정관 페이론의 시체도 있었다.

레펜하르트가 신음을 흘렸다.

"이자도 죽었나. 제법 유능한 친구였는데...."

사실 잘 알지는 못하는 자였다. 백국의 행정관들은 카를의 지시하에 움직이는 지라 레펜하르트로서는 취임식 때 한번 보았을 뿐이었다. 이곳의 기사와 병사들도 직접 임관시킨 이들이 아니라 대부분 낯이 설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들은 그의 신하였고 그의 책임하에 있던 이들이었다. 분노가 치밀어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레펜하르트가 자기도 모르게 바닥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누구냐! 도대체 어떤 놈이 이런 짓을!"

콰앙!

반토막 난 시청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진동했다. 그때 한쪽에서 작은 음성이 들려왔다.

"궈, 권왕님...."

무너진 기둥 사이에 작은 키의 인간 여인 한 명이 숨어 있었다. 시리스가 재빨리 달려가 그녀를 부축했다.

"그대는?"

"페이론 님의 하녀인 릴리안이라고 합니다."

레펜하르트가 그녀를 다그쳤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그, 그게...."

릴리안이 더듬거리며 설명을 시작했다.

"저도 자세히는 모릅니다. 그냥 갑자기 폭음이 울리고 기사님들이 출동하시면서 피해 있으라 하셔서... 하지만 이 일을 저지른 자들은 보았습니다. 나이 든 노인 한 명과 열 명의 기사들이었는데, 전부 검에서 빛이 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것이 말로만 듣던 오러가 아니었는지...."

레펜하르트와 시리스가 서로를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노인과 열 명의 기사?"

"전원이 오러 유저였다고요?"

릴리안이 아차 하는 표정으로 손짓을 했다.

"그, 그러고 보니 그 노인이 저쪽에 블레이드 오러로 뭔가를 하는 건 보았습니다. 그리고 전부 도시를 떠나 버렸는데...."

일행의 시선이 일제히 릴리안의 손끝 너머로 향했다.

시청 외벽에 새겨진 훼손 자국이 보였다. 워낙 커서 처음엔 몰랐는데 의식을 하고 보니 그 자국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누군가가, 블레이드 오러로 외벽 전체에 글귀를 적어 둔 것이었다.

간악한 이단의 왕을 참하기 위해 검을 드노니

세이어의 이름으로 이 땅에 천벌을 내리노라

-바나텔

레펜하르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바나텔이라면, 그의 스승인 제라드와 함께 이 시대의 최강자로 군림하는 검성劍星이 아닌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레펜하르트가 비명처럼 외쳤다.

"젠장! 백왕성이 위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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