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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 1

권왕전생

1-21권 完

-임경배

1권

프롤로그

대마궁 가이라크의 심장부, 심연의 전당.

지상 최대의 웅장함을 자랑하는 이 거대한 홀 안에 한 무리의 남녀가 모여 있었다.

성별과 나이를 초월해 모인, 모두가 대륙에서 손꼽히는 강자들이었다.

결코 부서지지 않는다는 강철의 육체를 지닌 근육질의 중년 사내, 권왕拳王 테스론.

검 한 자루만 들면 영혼조차 가른다는 대륙 최강의 검사, 검성劍星 사이러스.

무한한 신성력의 소유자, 주신 세이어의 성녀 엘린.

마나의 축복을 받았다는 위대한 빛의 마도사, 제이드 아크라이트.

그리고 이들 앞에 선 금발 벽안의 청년, 할라인 왕국의 왕자이며 검과 마법, 신성력에 모두 능통해 세상으로부터 용사라 불리는 이, 알렉스 폰 할라인.

그들의 시선은 일제히 반대편 계단 위로 향해 있었다. 피처럼 붉은 로브를 걸친 채 무심한 눈으로 그들을 내려다보는 오만한 인상의 중년 사내, 그를 향해 알렉스가 소리를 질렀다.

"그대의 악행도 이제 끝이다, 마왕 레펜하르트!"

마왕 레펜하르트.

암흑제국 안타레스의 제왕이자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최강, 최악의 마도사.

백만의 어둠의 군세를 거느리고 강력한 어둠의 마법을 사역하여 대륙 절반을 불태우고 수백만을 학살한, 그야말로 인세에 강림한 진정한 마신.

저 사악한 마왕을 쓰러뜨리기 위해 수만의 군대가 생명을 던지며 어둠의 군세 사이로 길을 뚫었다. 피를 강처럼 흘리고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면서도 그들은 결코 자신의 생명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그 수많은 영웅적인 희생을 바탕으로 인류가 선택한 최강자들은 이곳 대마궁 가이라크까지 침투하는 데 성공했고, 처절한 사투를 벌인 끝에 결국 마왕의 앞에 섰다.

인류가 선택한 용사, 알렉스 폰 할라인은 벅찬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이어서 외쳤다.

"이제 어둠으로 돌아갈 때가 왔다! 사악한 마왕이여!"

사실 마왕 레펜하르트는 무심한 눈빛을 하고 있지 않았다. 원체 타고난 인상이 차가워 별로 티가 안 나서 그렇지, 지금 그는 대단히 허탈한 눈으로 알렉스 일행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검성 사이러스가 푸른빛이 감도는 롱 소드, 일루미네이터를 빼 들고 소리쳤다.

"마왕 레펜하르트여, 그대를 없애고 이 암흑제국의 역사를 끝내겠다!"

억울했다. 열심히 고생 고생해 가면서 세운 제국이었다. 사흘 동안 고심한 끝에 성좌의 이름을 따 안타레스란 멋진 국명도 붙여 주었다. 그런데 왜 멀쩡한 이름 놔두고 음침하게 암흑제국이라고만 부른단 말인가? 평범하게 아침 되면 해 뜨고 밤 되면 달 뜨는 곳이구먼.

권왕이라 칭송받는 근육질의 중년 거한이 말을 잇는다.

"그대가 없어지면 타락한 몬스터들의 마성도 사라지겠지!"

사라지긴 개뿔. 걔들은 원래 그랬다. 아니, 오우거나 놀, 고블린 같은 놈들이 평소에 착하게 살다가 레펜하르트 때문에 타락한 줄 아나? 그저 예전엔 뭉치지 못해서 감히 인간들을 습격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가 한 짓은 그들을 거두어 '인간들이 쓰는 전술'을 가르쳐 준 것뿐이었다.

평소에는 보이는 족족 도망가거나, 혹시 덤벼들어도 쉽게 죽일 수 있던 놈들이 갑자기 군대처럼 단체 전술을 펼치니까 그걸 가지고 타락했다느니 마성에 젖었다니 하며 난리 치는 모양인데 사실은 전부 인간들이 먼저 하던 짓이거든?

레펜하르트가 지친 목소리로―물론 알렉스 일행은 과연 마왕다운 음침하고 사악한 어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입을 열었다.

"...나의 사천왕들은 모두 쓰러졌나?"

레펜하르트를 따르던 네 종족의 강자들. 오래전부터 그를 따르며 충성과 신뢰를 바쳐 왔던 소중한 부하들. 그들의 안위가 걱정된다.

검성 사이러스가 자랑스레 검을 들고 대꾸했다.

"그렇다. 그 더러운 오크 놈은 내 검의 적수가 되지 못했지."

그토록 용맹하고 전사의 긍지가 드높았던 오크 대전사 타시드를 떠올리며 레펜하르트는 탄식했다.

부족 단위를 이루며 사냥과 채집으로 살아가는 오크들, 야만적이고 단순해 보이지만 그만큼 배신을 모르는 순수한 이들. 거친 자연과 용맹하게 싸우며 약자를 보호하고 강자와 맞서는 것을 긍지로 아는 이 전사의 종족이 왜 몬스터 취급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뭐, 워낙 안 씻고 살기는 하니까 더럽다는 건 딱히 부인 못 하겠지만.

권왕 테스론이 주먹을 쥐어 보이며 말을 받았다.

"그 추악한 괴물 트롤은 자신이 지은 죄의 대가를 받았소."

누구보다도 현명하고 지혜롭던 대주술사, 구루guru 아틸카도 대지의 품으로 돌아간 모양이다.

솔직히 트롤들이 좀 무섭게 생긴 건 인정한다. 우둘투둘한 푸른 피부에 툭 튀어나온 상아 같은 어금니, 레펜하르트조차도 밤길에 아탈라 만나면 흠칫흠칫 놀라곤 했으니 이해는 할 수 있다.

하지만 추악한 괴물이라 불리는 건 어처구니가 없다. 산속 깊은 곳에서 주술 신앙 아래 살아가는 트롤들. 자연이 준 것만을 최소한으로 이용하며, 물질을 소유하는 대신 영혼을 갈고 닦는 그들은 비록 원시적으로 보이긴 해도 뛰어난 정신문화를 지닌 종족이었다. 결코 괴물이라 불릴 이유가 없었다.

성녀 엘린이 조용히 입을 연다.

"암흑신을 섬기던 그 사악한 드워프도 정명한 흐름 속으로 돌아갔지요."

알 포트(AL-Fort)의 하이 프리스트, 마켈린도 결국은 죽었나 보다. 레펜하르트는 혀를 찼다. 언제부터 드워프들의 종족신, 알 포트가 사악한 암흑신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인간을 가호하는 주신 세이어와 열두 신들 외엔 전부 사악한 존재로 취급하는 저 오만함이라니!

빛의 마도사, 제라드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타락한 다크엘프는 나와 싸웠소."

타락한 다크엘프라... 그래, 그녀의 피부가 좀 까무잡잡하긴 하다. 원래 살던 엘프들의 숲을 인간이 모조리 파헤치고 베어 넘기는 바람에, 쫓기고 쫓기다 결국 황량한 황무지까지 가서 살다 보니까 황야의 땡볕에 좀 많이 그을리긴 했다. 선탠 좀 했기로소니 순혈純血의 하이엘프를 다크엘프 취급해 버리냐?

"그리고 내 마법의 적수가 되지 못했지. 후후후."

이어진 제라드의 목소리에 결국 레펜하르트는 두 눈을 감았다.

아, 시리스....

결국 너마저도....

☆ ☆ ☆

원래 레펜하르트는 평범한 대마도사였다. 아니, 대마도사란 시점에서 이미 평범하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예전엔 지금처럼 상식 밖의 어마어마한 마법을 구사하는 존재는 아니었다.

그런 그가 변한 것은 새로운 마법의 경지를 찾아 인간 이외의 종족, 그들의 문화로 눈을 돌렸을 때였다.

주신主神 세이어가 인류를 창조한 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을까?

이미 세상은 인간의 것이었다.

한때 대륙의 패권을 다투었던 이종족들, 엘프며 트롤, 드워프, 오크 들은 모두 그 힘을 잃고 쇠퇴할 대로 쇠퇴한 후였다. 인류는 이종족을 모두 인간들의 체제하에 포함시켰고, 그 결과는 가혹한 것이었다.

인간은 이 이종족들을 자신들과 동일한 지성체로 보지 않았다.

숲의 요정이라 불리던 엘프들은 예쁘고 오래 사는 시종으로 인기가 높았다.

강인한 대지의 아들, 드워프들은 땅 잘 파고 손재주 좋은 노예로 쓸모가 많았다.

긍지 높은 전사의 종족, 오크들은 힘 좋고 무식한 머슴으로 제격이었다.

그나마 트롤들은 그 놀라운 재생력 때문에 노예도 되지 못했다. 잡히는 족족 회 쳐져 힐링 포션의 재료가 될 뿐이었다.

모든 자존심도 긍지도 잃어버린 노예 종족들. 그들의 잊힌 문화 속에서 위대한 비의가 잔뜩 숨어 있다는 걸 깨닫고 레펜하르트가 얼마나 경악했던가?

그는 곧 이종족의 옛 자취를 좇았다. 다행히 모든 이종족들이 인류의 노예가 된 것은 아니었다. 소수긴 해도, 인간의 발길이 아직 닿지 않은 오지에 모여 힘겹게 자신들의 문화를 이어 가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을 만나고, 그들의 문화를 배우고, 그 속에서 엘프의 정령술과 트롤의 주술을 마법과 결합한 레펜하르트는 마법의 새로운 경지를 창안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역사상 최초로 10서클 마법을 구사하는 마법사가 되었다.

그렇게 계속 이종족들과 교류하는 동안 자연히 레펜하르트의 가치관도 변해 갔다. 더 이상 그에게 이종족은 노예가 아니었다. 그렇다 보니 도저히 인간 사회에서 만연하는 참혹한 모습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기회가 되는 족족 이종족 노예들을 구해 냈다. 열심히 힘닿는 대로 살 길도 마련해 주었다.

시간이 지나자 숨어 사는 이종족의 마을이 점점 커져 인간의 눈을 속일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노예로 살던 놈들이 건방지게 마을을 꾸미니 인간의 왕이며 귀족들이 바로 눈독을 들였다. 당장 창칼을 들고 기사단을 앞세워 쳐들어왔다.

공격을 받았으니 당연히 반격을 했다. 이미 상식을 초월해 버린 레펜하르트의 강대한 마법은 군대면 군대, 성벽이면 성벽을 모조리 날릴 수 있었다. 쳐들어온 놈들은 깡그리 날아가 버렸다. 죄책감은 들지 않았다. 먼저 죽이려 들다 죽은 것이니 자업자득이었다. 동정해 줄 이유가 없었다.

적들을 해치우고 나니 죽은 놈들이 보유하던 땅이 놀았다. 그래서 마을을 넓히고 그쪽에도 이종족들을 옮겨 살게 했다.

자꾸 쳐들어오고, 자꾸 쳐부수고, 자꾸 땅이 비고, 자꾸 이사하고.

그러다 보니 슬슬 마을이라기보다는 국가 단위가 되었다. 레펜하르트의 명성이 대륙 전체에 울려 퍼지니 오지에서 숨어 살던 다른 오크나 트롤, 엘프, 드워프 부족들도 좀 얹혀살게 해 달라고 요청을 해왔다. 물론 레펜하르트는 마다하지 않았다. 오는 대로 순순히 다 받아 주었다.

그렇게 4년 정도가 지났다.

바실리 왕국, 테이칸 왕국, 라스틸 공국. 세 나라가 무너지고 그 자리에 안타레스 제국이 생겨났다.

어쩌다 보니 이종족의 나라를 건국하게 된 레펜하르트였지만, 그렇다고 딱히 인간을 증오하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모든 지성체는 평등하다고 믿을 뿐.

그래서 인간을 노예로 삼는다든가 하는 보복성 정책을 펴지는 않았다. 그냥 다른 이종족과 동등하게 국민으로 대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봐 주지 않았다. 레펜하르트가 인간을 증오해 어둠의 군세를 모아 인류를 멸망시키고 세계를 정복하려 한다고 믿었다. 정작 안타레스 제국민들은 오히려 살기 좋아졌다고 느끼고 있었지만, 그마저도 레펜하르트가 사악한 마법으로 국민들을 미혹시켰다고 주장했다.

제국을 세우자 아예 본격적으로 국가 단위의 침략이 이어졌다. 처음엔 한 나라였는데 다음엔 두 나라가 연합하고, 다음엔 아예 3개국 연합군이 쳐들어왔다.

그때마다 레펜하르트는 강대한 마법으로 침략군을 물리쳤다. 점점 인간들의 군세가 늘어나니 상대하기가 힘이 부쳤다. 그래서 지능이 떨어지는 오우거나 놀, 고블린 같은, 사람들로부터 몬스터라 불리는 하위 종족들에게도 손을 뻗어 자신의 군세에 집어넣었다. 다른 이종족들에 비해 지나치게 흉폭하고 제어가 힘든 이들이었지만, 레펜하르트는 그들을 군대로 키우는 데 성공했다. 광범위 정신 제어 마법과 풍족한 식사 제공으로 해낸 일이었다.

이종족의 군세가 날로 불어났다.

전쟁도 점점 스케일이 커져갔다.

그리고 정신 차려 보니 어느새 그는 마왕이라 불리며 대륙의 모든 인간들로부터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 ☆ ☆

레펜하르트는 눈을 떴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그럼에도 흔들림 없는 빛을 담은 다섯 쌍의 눈동자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실로 올곧은 눈빛이었다. 다른 이들이 본다면 신념을 가득 담은 좋은 눈빛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레펜하르트가 보기엔 그것은, 자신들이 정의라 믿어 의심치 않는 지독한 독선과 아집의 눈빛이었다.

금발의 청년, 알렉스가 검을 뽑아 들었다. 화려한 장식이 붙은 왕가의 보검을 겨누며 그가 외쳤다.

"이 검으로 그대로 인해 죽어 간 사람들의 넋을 달래겠다!"

레펜하르트가 침울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그럼 죽어간 엘프나 오크들의 원혼은 누가 달래 주지?"

어이없어하며 알렉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가증스럽구나, 레펜하르트! 그대의 사악한 힘이 아니었다면 그것들이 타락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평화롭게 자기 본분대로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들을 죽인 것 또한 그대가 아니냐!"

소용없다. 아예 대화가 되지 않는다.

저들 눈에 자신은 사악한 마왕일 뿐. 감히 노예의 분수에서 벗어난 이종족은 모두 마성에 젖어 타락한 어둠의 종족일 뿐.

레펜하르트의 검은 눈동자 위로 분노의 빛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피처럼 붉은 로브 위로 보랏빛 영기가 서서히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바라는 대로 마왕이 되어 주마!"

레펜하르트는 전신의 마력을 끌어 올렸다. 무시무시한 기세가 전신을 회오리치며 용솟음친다. 보라색 마력의 빛이 기둥이 되어 하늘을 꿰뚫고 오른다.

동시에 알렉스 일행도 전투태세로 들어갔다. 권왕과 검성의 전신에서 푸른빛과 황금빛의 오러가 피어올랐다. 제이드도 마력을 끌어 올렸고 엘린 역시 성스러운 기운을 방출해 일행을 감쌌다.

알렉스가 검을 들고 마왕에게 돌진하며 기합을 외쳤다.

"타아아앗!"

대륙의 운명을 건 결전이 시작되었다. 강력한 마법의 힘이 사방을 깨부수고 푸른 검광과 황금빛 투기가 폭풍처럼 불어닥쳤다. 그 여파만으로도 홀 천장이 통째로 날아가고 굳건하던 화강암 벽이 모래처럼 무너져 내렸다. 대리석 바닥이 지진이라도 만난 것처럼 갈라지고 곳곳에 마법의 여파로 불길이 일어 뜨거운 열기를 뿌렸다.

그렇게 반시간쯤 지났을 때, 채 공격을 피하지 못한 알렉스가 제일 먼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용사인 주제에 제일 먼저 나가떨어진 것이 좀 어이없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알고 보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검도 잘 쓰고 마법에도 능통하고 신성력마저 보유한 알렉스를 보고 감탄하며 용사란 칭호를 붙여 주었지만 사실 이게 알고 보면 그리 좋은 의미인 것만도 아니다. 한마디로, 세긴 센 것 같은데 저거 대체 뭐가 전공인 건지 영 애매하니까 붙은 칭호라 할 수 있겠다. 좋게 말하면 만능이고 솔직하게 말하면 잡다한 놈. 영웅담에서야 용사가 최후까지 남아 마왕의 마지막 숨통을 끊곤 하지만 현실에선 뭘 하든 한 우물만 파는 놈이 대성하는 법이다.

알렉스가 쓰러져도 남은 이들은 계속 전투에 임했다. 과연 이들은 '한 우물만 판 놈'들 답게 레펜하르트라도 쉽사리 쓰러뜨리기가 힘들었다. 전투가 길어지며 해가 지고 달이 떠올랐다. 각자 자기 분야에서 극의를 본 이들이 모든 기량을 다해 레펜하르트를 공격하고 또 공격했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쓰러지지 않았다. 무한의 마력으로 자신을 보호하며 그는 차분하게 모든 공격을 받아넘겨 연신 치명적 일격을 가했다. 이윽고 성녀 엘린이 쓰러지고, 빛의 마도사 제이드가 혼절하고, 검성 사이러스의 검마저 부러지니 홀 내엔 단 두 사람만 서 있게 되었다.

권왕 테스론, 누구보다도 강력한 육체와 지구력을 가진 그는 홀로 남아도 포기하지 않고 레펜하르트와의 전투를 이어 갔다.

그의 육체는 실로 가공했다. 그의 의지 또한 무시무시했다. 끝없이 쏟아지는 궁극 마법을 피하고, 비껴 내고, 가끔은 전신으로 받아 내 피를 토하고 상처 입으면서도 그는 결코 무릎 꿇지 않았다.

결국 여명의 빛이 머리 위로 비출 때쯤, 무한할 것 같은 레펜하르트의 마력도 바닥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것으로 대륙의 운명을 건 사투의 승패가 갈렸다. 더 이상 마나의 가호를 받지 못하는 레펜하르트는 일반인과 다를 바가 없었고, 테스론은 빈사 상태이나마 아직도 한 방을 날릴 여력이 남아 있었으니까.

"쿨럭, 쿨럭...."

레펜하르트는 기침을 토했다. 폐를 칼로 쑤시는 듯한 통증과 함께 시뻘건 핏덩어리가 기침 사이로 섞여 나왔다.

그는 죽어 가고 있었다. 권왕 테스론의 주먹은 단 일격으로도 그의 육체 기능 대부분을 정지시키는 데 충분했다. 마력으로 간신히 죽음을 미루고는 있지만,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것은 분명했다.

무너진 벽에 기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레펜하르트는 회한 어린 시선으로 새벽하늘을 바라보았다. 점점 눈앞이 흐릿해지고 있었다.

'이대로 죽는 건가....'

후회가 밀려왔다. 이종족을 도운 것에 대한 후회는 아니었다. 그 아름다운 엘프들, 믿음직한 드워프들, 용맹한 오크들, 현명한 트롤들을 도운 사실은 지금도 전혀 후회가 되지 않았다.

후회하는 것은 자신의 어리석음이었다.

너무 수동적으로만 모든 것을 대처했다. 그토록 침략 받아 오면서도 그는 그때마다 반격만 할 뿐, 작정하고 타국을 침공한 적이 거의 없었다. 그 탓에 다른 나라로 하여금 재침공하도록 정비할 여유만 잔뜩 주었다. 경각심을 느낀 나라들이 서로 손잡을 여유도 잔뜩 주었다. 전 대륙이 담합해 자신을 노리는 그때까지도 레펜하르트는, 시간이 지나면 결국 다들 이해해 주지 않겠냐는 낙관적인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 대가가 이것이었다.

도우려면 제대로 도왔어야 했다. 인간들의 반발을 예상하고, 대륙 전체가 자신을 적대할 것임을 예상했어야 했다. 어쩌다 보니 나라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확실하게 계획을 잡아 이종족들을 보호할 강인한 국가를 세웠어야 했다.

마왕이라 불렸다면, 마왕답게 처신해야 했다!

'뭐, 이제 와서 후회해 봤자 소용없지만....'

흐릿한 웃음을 짓는 레펜하르트의 눈에, 기둥에 기대 몸을 일으키는 테스론의 모습이 비쳤다. 그 역시 상처투성이에 피를 가득 뒤집어쓴 몰골이었다. 하지만 그는 살아 있었다. 자신처럼 죽어 가고 있지 않았다.

테스론이 피 묻은 입술을 훔치며 근엄하게 말했다.

"우리의 승리다, 마왕 레펜하르트여."

그래, 너희들이 이겼지. 좋겠다. 승리해서.

비웃을 기운도 없어 레펜하르트는 말없이 눈을 감았다. 그냥 이대로 편안해지고 싶었다.

그때 테스론이 말을 이었다.

"...이제 다른 놈들도 마성에서 벗어나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겠지."

"크윽!"

모든 것을 포기하려고 했는데 저 말을 듣고 나니 도저히 그렇겐 못 하겠다. 마성? 본래의 모습? 노예로 살아가는 것이 그들의 본래의 모습이란 말이냐?

빠드득.

레펜하르트는 이를 갈았다. 체념했던 그의 눈빛에서 정체 모를 열기가 이글거리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생각이 바뀌었다.

못 죽겠다.

억울하고 분통이 터져 이대로는 못 죽겠다!

남은 힘을 쥐어짜 내 레펜하르트는 품에서 작은 보석을 하나 꺼냈다.

이것은 잊힌 고대 유적에서 발견한 마도구, 10서클을 개척한 그조차도 해독을 다 못했을 정도로 강력한 마법이 담겨 있는 아티팩트다.

시공 회귀 주문. 시공을 뒤틀어 시전자의 시간을 되돌려 과거로 보내 주는, 신에게조차 허락되지 않은 세계의 근원을 뒤흔드는 마법.

서클의 개념조차 초월한 마법이다 보니 제대로 발동할 것이란 확신이 없었다. 실패할 경우 시공이 뒤틀려 대륙 전체가 날아갈 가능성도 있었다. 그래서 다 죽어 가면서도 감히 쓸 생각을 못 했다. 하지만....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다....'

빠득빠득 이를 갈며 레펜하르트가 천천히 주문을 외웠다.

"라 페르트 뎀 이스테드 사피아... 나, 정명한 법칙을 비틀어 운명의 눈을 속일지니...."

테스론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설마 이 와중에서까지 레펜하르트가 수작을 부릴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흐름을 거슬러 역천의 법 아래 머물러...."

"어림없다, 이놈!"

다급해진 테스론이 바닥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코앞을 쇄도하는 저 무식한 주먹에 레펜하르트는 다급해졌다. 캐터펄트를 연상케 하는 저 주먹이라면 스치기만 해도 그는 골로 갈 것이다.

레펜하르트가 허겁지겁 주문을 끝맺었다.

"...나, 시공을 뒤트는 자가 되리라!"

보석으로부터 눈부신 빛이 솟구쳤다. 동시에 테스론의 권격이 빛을 뚫고 들어와 레펜하르트의 마력장을 파헤쳤다.

"타아아앗!"

강대한 마력과 황금빛 오러가 뒤섞여 거대한 파문이 되었다. 정명하게 흘러야 할 마력이 오러의 방해로 제멋대로 터져 나가 폭주한다. 마력에 휩싸여 서서히 의식을 잃어 가며 레펜하르트는 되뇌고 또 되뇌었다.

못 죽는다.

절대 이대로는 못 죽는다!

제1장 산속의 수행자

1

침잠된 의식이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오른다. 단절되었던 감각이 다시 깨어난다. 레펜하르트는 눈을 떴다. 어둡던 시야가 밝아지고 흐릿하게나마 사물의 윤곽이 눈에 들어왔다.

지저귀는 새소리가 아련히 귓가를 간질인다. 따스한 아침 햇살이 얼굴을 매만진다. 몸을 감싼 포근한 천의 촉감이 생생하다. 이 소리, 이 따스함, 이 포근함....

'나, 아직 살아 있는 건가?'

레펜하르트는 눈을 껌벅였다. 뭔가 기분이 묘했다. 그냥 푹 자고 일어난 듯한 평범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잠시 후 머리가 맑아지며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그는 권왕 테스론에 의해 다 죽어 가고 있었다. 이렇게 전신에 활력이 넘칠 리가 없었다.

확실했다. 자신은 살아 있었다.

'맙소사, 정말 성공한 건가?'

반도 채 해독하지 못했던 시공 회귀 주문이었다. 그야말로 밑져야 본전이라 무턱대고 시전하긴 했지만, 레펜하르트 본인도 그리 기대하지 않았던 마법이다. 그런데 이 상황을 보면 꽤나 훌륭하게 성공한 것 같지 않은가!

"우와, 내가 아무리 천재라지만 그래도 정말 성공할 줄은 몰랐는데...."

오만한 건지 겸손한 건지 모를 애매한 대사를 내뱉으며 레펜하르트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이 과연 얼마나 과거로 되돌아온 건지 확인을 해야 했다. 그런데....

"대체 여기가 어디지?"

주변을 둘러보던 레펜하르트의 표정이 다시 굳었다. 어째 주변의 모든 것이 지나치게 낯설었다.

통나무로 지은 넓은 방에 가구라고는 옷장 하나와 책상 하나, 그리고 레펜하르트가 누워 있던 커다란 침상이 전부였다. 여기까지는 그냥 소박한 침실처럼 보이겠지만 특이한 것은 방은 싸구려인데 들여놓은 가구들은 하나같이 고급이라는 것이었다. 옷장도 책상도 귀족들이나 쓸 법한 고급스러운 물품이었고 침상도 박달나무로 튼튼하게 짜 맞춰 질 좋은 면을 씌우고 멋지게 금박까지 한 호화품이었다. 심지어는 워낙 고가라 귀족들이나 쓴다는 유리거울마저도 벽 한쪽에 매달려 있었다.

'뭐야, 이건?'

레펜하르트는 당황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런 장소는 기억에 없었다. 시공 회귀 주문이 성공했다면 그는 과거의 어느 한 지점으로 돌아와 있어야 했다. 어린 시절이건 젊은 시절이건 간에, 돌아왔다면 그 장소가 기억 속에 있어야 했다.

단언컨대, 이렇게 언밸런스한 인테리어 속에서 살았던 기억은 결코 없었다.

"끄응...."

레펜하르트는 미간을 짚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혼란 속에서 그는 일어나 거울 앞으로 걸어갔다. 어쨌거나 주문이 먹힌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고... 그럼 문제는 과연 자신이 몇 년이나 과거로 회귀한 건지, 지금이 대체 몇 살 때인지다.

그리고 거울 앞에 선 순간.

"커억!"

레펜하르트는 입을 쩍 벌렸다.

"뭐, 뭐야, 저놈?"

거울 너머로, 갈색 머리를 짧게 깍은 건장한 체구의 소년이 웃통을 벗은 채 자신을 마주 보고 서 있었다. 한 열대여섯 살 정도 되었을까? 얼굴이 너무 앳되어 소년이라고 하긴 했는데, 사실 체구만 보면 어지간한 장정도 울고 갈 거구였다.

키는 족히 다른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 보였고 전신이 탄탄한 근육으로 뒤덮여 있었다. 굳은살이 잔뜩 박혀 있는 투박한 손에 근육질 팔뚝. 두꺼운 이두박근과 삼두박근은 돌처럼 단단해 서로 부딪치면 불꽃이라도 일어날 것 같았고 복근은 아주 네모반듯하게 윤곽이 뚜렷한 것이 이게 정말 사람 배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대리석으로 조각을 해도 저 정도까지 식스 팩을 선명하게 나눠 놓으면 비현실적이라고 욕먹을 것 같았다. 게다가 저렇게 근육질임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8등신의 균형 잡힌 몸을 하고 있어 뚱뚱해 보이거나 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이상적인 무인의 육체랄까?

물론 이상적인 마법사를 추구하는 레펜하르트 눈에는 그저 단순 무식하고 우락부락한 몸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레펜하르트가 무심코 뺨에 손을 올렸다. 거울에 비친 소년도 뺨에 손을 올렸다.

"하... 하하...."

패닉에 빠진 레펜하르트가 헛웃음을 흘렸다. 거울 속의 소년도 헛웃음을 흘렸다.

틀림없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 근육질 소년이 바로 자신이었다!

기가 막힌 얼굴로 레펜하르트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누구냐... 너...."

☆ ☆ ☆

레펜하르트는 연신 거울 앞에서 얼굴을 만져 보았다. 거울 속 순박한 인상의 근육 소년이 자신을 따라 하고 있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어린 시절의 그는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지닌, 차가운 인상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상당히 예쁘장하게 생긴 미소년이기도 했다. 늙어서는 중후한 멋을 풍기는 로맨스 그레이가 되어 숫한 엘프 미녀들의 마음을 홀렸던 전적도 있었다. 젊어서나 늙어서나. 결코 저렇게 미련한 얼굴이었던 적은 없다!

뭐, 사실 따지고 보면 거울 속의 저 소년도 그리 못생긴 얼굴은 아니었다. 단지 미남형이 아니라 호남好男형이랄까? 하지만 원체 본체의 미모도가 높았던 레펜하르트의 눈에는 그냥 머슴이었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레펜하르트는 고민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역시 시공 회귀 주문이 실패한 건가? 그래서 과거의 자신이 아닌, 엉뚱한 놈의 육체로 들어간 건가? 아니, 그럼 아예 여기가 과거가 아닐 수도 있잖아? 혹시 미래의 누군가에게로 영혼만 바뀌어 들어온 건가?

아무리 추리를 해 보려 해도 단서가 전무하니 답이 나올 리 없다. 그렇게 낑낑대고 있는데 문득 레펜하르트의 눈동자가 이색을 띠었다.

'그러고 보니 어째 얼굴이 좀 낯익은 것 같기도....'

이상하다. 왠지 어디선가 본 얼굴인 것 같다.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인데, 분명 생소한데도 묘하게 익숙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저 짙은 갈색 눈썹, 강인해 보이는 눈매, 고집스럽게 닫힌 입가.

그래, 저기서 덩치가 더 커지고, 근육이 더 부풀고, 철사 같은 수염이 턱을 뒤덮으면....

"권왕 테스론?"

그때였다. 문이 벌컥 열리며 웅장한 목소리가 그의 추론을 확실히 뒷받침해 주었다.

"테스론, 이놈아! 해가 중천에 떴다! 어서 나오지 않고 뭐 하는 거냐!"

고개를 돌린 순간, 레펜하르트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허어억!'

소리친 것은 생전 처음 보는 노인이었다. 신장 2.5미터에 터질 듯한 근육이 온몸을 뒤덮어, 저게 사람인지 아니면 석상에 살색 칠한 건지 구분조차 안 가는 저 괴수를 노인이라 칭할 수 있다면 말이다.

노인이 성큼성큼 그에게로 다가왔다. 눈앞을 뒤덮는 근육의 먹구름에 레펜하르트는 기겁했다. 오우거나 미노타우르스 같은 거대 몬스터도 숫하게 다뤘던 그였지만 이 노인은 차원이 달라 보였다. 적당히 지방도 끼고 똥배도 나와 준 그놈들의 육체는 비록 덩치는 커도 그럭저럭 인간미가 있었다. 반면 이 노인은 정말이지 전신이 네모반듯하고 근육선이 뚜렷해 한 치의 불필요한 지방도 없다. 그놈들이 푸석한 사암이라면 이쪽은 단단한 거암 같달까? 그토록 우락부락해 보였던 현 레펜하르트의 육체, 어린 테스론조차도 저 노인에 비교하면 깡마르고 초췌한 소년이었다. 이래서 상대 평가란 무서운 것이다.

눈부신 백발에 은색 수염을 휘날리며 노인이 호쾌하게 웃었다.

"자, 오늘도 즐겁게 하루를 시작해 보자꾸나, 허허허허!"

한때 대륙을 피로 물들였던 공포의 대명사, 마왕 레펜하르트는 고양이 앞의 쥐가 되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누, 누구세요?"

그는 미처 몰랐지만 노인의 정체는 소년 테스론의 사부이자 대륙 최강의 무투가로 이름 높은 당대의 권왕, 제라드 크롬 프로테이스였다.

☆ ☆ ☆

제라드는 오늘도 여느 때처럼 테스론을 수행시키기 위한 하루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 평소와 달리 테스론이 수련장으로 기어 나오질 않았다. 분노한 그는 바로 이 불초 제자를 잡으러 달려갔다. 시간은 금이거늘 어찌 1분인들 낭비할 수가 있단 말인가?

바로 제자의 방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섰는데 제자가 거울 앞에서 몸을 살펴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제라드의 기분은 바로 풀렸다. 아침부터 저렇게 전신 근육을 점검하는 모습을 보니 실로 흐뭇했다. 보다 아름다운 육체를 가꾸기 위해 열중하는 모습을 보니 대견하기도 했다. 그래서 기분 좋게 소리쳤다.

"자, 오늘도 즐겁게 하루를 시작해 보자꾸나, 허허허허!"

그런데 어째 제자의 표정이 이상했다. 평소처럼 이를 득득 갈며 무서운 불길을 피우는 눈이 아니었다.

"누, 누구세요?"

"음? 오늘따라 왠지 나를 모르는 사람처럼 바라보는구나?"

제라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자가 다시 말한다.

"저, 정말로 몰라서 묻는 건데...."

제라드는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정하게 말해 주었다.

"테스론아, 테스론아. 기억상실 핑계는 벌써 두 번이나 써먹지 않았느냐. 그 정도로 안 통한다는 것쯤은 알 텐데? 쯔쯔."

제자가 입을 쩍 벌린다. 기가 막힌다는 표현인 듯했다. 이번엔 제법 표정이 생생한 것이 꽤 실감이 났다. 연기력이 많이 는 것 같았다.

제라드는 혀를 찼다. 하지만 제자를 탓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들의 무문武門, 짐 언브레이커블Gym unbreakable의 수행법이 가혹하다는 것은 제라드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 역시 한창 사부 밑에서 수행할 땐 온갖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도망가려고 수를 썼으니까.

하지만 결국 경지에 오르고 나면 다 이 수련법의 효과를 몸소 느끼며 사부의 심모원려한 뜻에 감동하기 마련이다. 그때까진 억지로라도 제자를 상승의 경지로 이끄는 것이 사부의 책임인 법!

제라드는 바로 손을 뻗어 제자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이미 성인 장정의 체구를 능가한 제자였지만 신장 2.5미터의 그에겐 여전히 작은 소년이었다. 쉽사리 뒷목을 '한 손으로' 붙잡고 들며 제라드가 유쾌하게 말했다.

"자, 수련장으로 가자꾸나!"

☆ ☆ ☆

깊은 산속, 온갖 활엽수가 우거진 그 산 능선 중간쯤에 두 채의 통나무집과 커다란 공터가 하나 있다. 사람들에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대로 대륙 최강의 무투가를 배출해 낸 무문, 짐 언브레이커블이 자리한 곳이다.

레펜하르트는 노인, 제라드에게 뒷목이 잡힌 채 대롱대롱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 그 자세로 공터로 실려 가고 있었던 것이다.

어미에게 물려 이동하는 새끼 고양이의 심정을 절실하게 느끼며 레펜하르트는 발버둥 쳤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대체 뭘 어떻게 한 건지 이 근육 노인네는 그저 한 손만으로도 모든 발버둥을 가뿐히 제압하고 있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레펜하르트의 입은 쉬지 않았다. 그는 마법사였고, 마법사는 모든 일처리를 주둥이로 하는 습관이 깊게 배어 있다.

"이, 이보시오, 노인장!"

"저기요, 영감님!"

"제발 잠시만 제 말 좀 들어 주시면...."

"이봐요! 귀머거리입니까! 사람이 말을 하면 대꾸 좀 해 봐요!"

소용없었다. 이 근육질 노인네는 뭔 소리를 해도 전부 무시하고 있었다. 그것이 아주 당연하다는 태도였다.

공터에 도착하자 제라드가 레펜하르트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일언반구도 없이 대뜸 공터 한가운데 박힌 거대한 나무 말뚝에 묶었다.

"에? 에에?"

두 팔을 뒤로한 채 말뚝에 묶인 레펜하르트는 연신 당황하며 눈을 껌벅였다. 어째 자세가 영 불길해 보였다. 보통, 죄수들 처형할 때 이런 모습을 시키지 않던가? 레펜하르트가 다급하게 막 소리를 지르려던 차였다.

"옜다."

간략한 한마디와 함께 제라드가 그의 입에 재갈을 물려 버렸다.

"읍읍?"

입이 막힌 채 공포에 질린 레펜하르트를 바라보며 제라드가 푸근하게 웃었다. 그리고 공터 저편으로 가더니 커다란 대나무 줄기를 한 아름 들고 왔다.

"자, 그럼 수련을 시작하자꾸나!"

그러더니 대나무 하나를 움켜쥐고 양손에 침을 뱉는다. 레펜하르트의 공포가 더더욱 짙어졌다.

"으으읍!"

제라드가 대나무로 레펜하르트의 복부를 강하게 후려쳤다.

빠악!

"...!"

죽도록 아팠다. 비명을 못 지르니 몇 배는 더 아픈 것 같았다. 레펜하르트는 벌벌 떨며 눈앞의 노인을 바라보았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도대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해할 겨를도 주지 않았다. 곧바로 매질이 이어졌다. 대나무가 허벅지를 때렸다. 역시 죽도록 아팠다. 이번엔 옆구리를 때렸다. 너무 아파서 눈물이 났다. 남부 할라인제 대나무는 강철의 강도와 고무의 탄력성을 모두 겸비해 명성이 드높다. 그 흉악한 물건으로 제라드가 레펜하르트의 전신을 사정없이 두들기기 시작했다.

퍼퍼퍼퍽!

"...으아아으아으압압!"

재갈이 물린 채 레펜하르트는 연신 비명을 지르고 또 질렀다. 매질은 정말이지 쉴 새 없이, 강도 높게 전신의 모든 부위를 골고루, 철저히, 모질게 다지고 있었다. 너무 아파서 억울하다든가 이 상황이 대체 어떻게 된 거냐는 의문 같은 것은 모두 뇌리에서 날아가 버렸다.

'시, 시리스. 나 이대로 가나 보다....'

순간 시리스가 저 푸른 하늘 저편에서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환영이 다 보였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이를 악물었다. 간신히 두 번째 삶을 얻자마자 맞아 죽는다고 생각하니 너무 허망했다. 삶에 대한 끈적끈적한 미련을 안고 그는 애써 흐릿해지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난 못 죽어! 이대로는 절대 못 죽어!'

한편 제라드는 의아해하고 있었다. 어째 제자를 패는 손맛이 조금 달랐다. 여느 때보다 좀 더 쫀득한 느낌이랄까? 평소처럼 육체를 단련하는 특유의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면서 맞고 있다면 이럴 리가 없다.

'진짜로 기억 상실인가?'

별로 신기한 일은 아니었다. 원래 짐 언브레이커블의 수행법이 하도 단순, 무식, 과격한 것이다 보니 종종 단기성 기억상실증이 생기곤 했다. 제라드가 수행받을 때도 두어 번 정도 기억이 날아간 경험이 있었다.

그리고 경험자답게 그는 그 해결책도 잘 알고 있었다.

'패다 보면 다 도로 낫기 마련이지.'

기억을 되돌리는 제일 좋은 방법은, 기억을 날아갔을 때의 경험을 재현하는 것이다. 제라드의 손속이 더욱 매서워졌다.

퍽퍽퍽퍽퍽퍽!

맑은 하늘 아래 북 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실로 심금을 울리는, 영혼이 담긴 북소리였다. 정말로 북에 영혼이 담겼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사, 사람 살려어어어어!'

☆ ☆ ☆

짐 언브레이커블은 대륙에 널린 무문 중에서도 가장 특이한 사상을 지닌 무문이다.

보통 무인들, 기사가 되었건 검사가 되었건 무투가가 되었건 간에 수행 방법의 기본 골자는 변함이 없다. 호흡을 갈고 닦아 육체를 단련하며 여러 기술을 익혀 전체적인 무인으로서의 숙련도를 높이는 것, 이 과정 속에서 그 방법이 천차만별로 갈리고 그에 따라 여러 유파가 생기긴 했지만 적어도 기본 방식은 대체로 비슷하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짐 언브레이커블의 사상은 그 기본을 부인했다.

"일단 완벽한 육체를 만들어라!"

사정없이 매질을 해 대며 제라드가 소리쳤다.

"인간이 무기를 드는 이유는 자신이 약하기 때문이다. 육체가 약하니 갑옷을 입고, 발톱과 이빨이 없으니 검과 창, 도끼를 들어 그것을 대신하려 한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냐!"

맞는 와중에서도 레펜하르트는 의아해했다. 아니, 인간이 도구를 쓰는 것이 왜 어리석단 말인가?

제라드가 바로 답을 주었다.

"그것은 도피다! 자신의 연약함을 극복하지 못한 자의 치졸한 도피인 것이다! 무인이라면 응당 자신의 약한 부분을 단련해 극복해야 하는 법이다!"

레펜하르트는 기가 차서 입을 쩍 벌렸다. 마법사로 살아온 50 평생 이렇게 단순 무식한 사고방식은 처음 접해 보는 것 같았다. 다행히 재갈이 물려 있어 티가 나진 않았다. 제라드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 우선은 부서지지 않는, 완벽한 불굴의 육체를 만들어야 한다."

손은 쉴 새 없이 몽둥이를 휘두르면서도 제라드는 느긋하게 짐 언브레이커블의 사상을 설명해 주었다. 제자가 기억상실에 걸렸으니, 익숙한 이야기를 되풀이하면 좀 더 빨리 기억이 돌아올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짐 언브레이커블은 다른 유파처럼, 육체 단련과 기술 수련을 함께 하는 것을 거부했다. 인간의 수명은 길지 않고 도달해야 할 무의 경지는 높고 높은데, 그렇게 이거저거 찔끔찔끔 해 가지고 어느 세월에 경지에 오르겠냐는 것이다.

"자고로 세상 모든 일은 한 우물만 파는 놈이 결국 대성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일단은 육체부터 완벽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완벽한 육체로 기술 수련을 하면 그때는 육체가 최고조로 활성화되었으니 어느 기술이건 쉽게 습득할 수 있고 나쁜 버릇 들어서 수정하는 시간도 줄일 수 있다는 것이 짐 언브레이커블의 주장이었다. 그리고 그 완벽한 육체를 만드는 첫 번째 단계가 바로 육체를 강철로 바꾸는 것이었다.

"인간은 쇠와 같다. 쇠도 인간도 두드리면 두드릴수록 점점 더 강해지고 단단해지기 마련이다."

'인간이 왜 쇠랑 같아! 시작부터 심각하게 오류가 있어, 당신!'

레펜하르트는 절규했지만, 딱히 제라드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인간의 뼈는 부러질수록 더 단단해지고, 근육 역시 타격을 입을수록 더욱 두꺼워지고 내구성도 높아지는 법이니까. 물론 그것도 어디까지나 다 한계가 있다. 보통 사람이면 그 전에 골병들어 관에 누울 것이다. 하지만....

"너는 내가 고른 제자다. 믿어라. 네 육체는 한계가 없다! 강철이 될 수 있다!"

제라드가 호쾌하게 외쳤다.

모든 인간이 이처럼 단련해서 강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질 좋은 쇠만이 단조하여 강철로 만들 수 있듯, 재질이 받쳐 주는 인간이어야 강철 같은 육체로 변화할 수 있는 법. 그리고 이 제자는 제라드 자신이 전 대륙을 30년 동안 뒤져서 겨우 찾아낸 완벽한 재질의 소유자였다. 인간의 한계를 가뿐히 넘어서는 뼈와 근육을 지닌, 그야말로 짐승 같은 놈이었다.

이 소년을 발견하고 제라드가 얼마나 기뻐했던가!

"이미지해라. 너는 무너지지 않는 거악이다. 어떤 풍상도 너를 흔들리게 할 수 없다."

'아으,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네 속에 있는 대해를 연상해라. 바다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만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스스로 흐르며 광포한 힘을 보여 세상을 덮는다. 그 대해가 네 속에 있다. 바다를 끄집어내라. 그리하여 변하지 않는 육체를 얻어라!"

'바, 바다... 대해....'

처음에는 기가 막혀 어이가 없었지만, 정신없이 맞다 보니 정말 정신이 없어 불만을 가질 여유조차 사라져 버렸다. 레펜하르트는 무의식중에 제라드의 말대로 이미지를 연상했다. 그렇게 하면 조금이나마 아픔이 가셨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대략 세 시간 정도, 태양이 정수리를 넘고서야 제라드의 몽둥이질이 끝을 맺었다. 보람찬 미소를 지으며 제라드가 레펜하르트를 묶은 밧줄과 재갈을 풀었다.

"그럼 쉬고 있거라. 내 준비를 해 두마."

밧줄이 풀리자마자 레펜하르트는 바닥에 철퍼덕 엎어져 버렸다. 예전 같았으면 이렇게 쓰러지면 코피 정도는 족히 났겠지만, 그토록 처맞고도 살아 있는 육신이다 보니 그냥 땅에 엎어진 정도론 흠집도 나지 않았다. 아픔조차 안 느껴졌다.

레펜하르트를 내버려 둔 채 제라드가 성큼성큼 통나무집으로 걸어갔다. 흐릿한 시선으로 그 뒷모습을 보며 레펜하르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안 죽었다. 그렇게 맞고도 안 죽었다!'

그래서 레펜하르트는 자신을 죽인 테스론에게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튼튼해서 고맙다. 정말 고마워! 어흐흐흑!'

애초에 이런 육체가 아니었다면 자신이 이런 꼴을 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란 사실은 이미 뇌리에 남아 있지도 않는 레펜하르트였다.

집으로 들어간 제라드는 창고에서 항시 쓰던 물건을 꺼냈다. 통째로 대리석으로 된, 성인 장정 하나가 푹 잠기고도 남을 거대한 목욕통이었다. 그리고 그는 목욕통에 물을 채웠다.

과연 당대 권왕답게 물 채우는 법도 호쾌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양동이에 물을 떠서 열심히 목욕통으로 옮겼겠지만 이 근육 노괴에게 그런 귀찮은 과정 따윈 필요 없었다. 그냥 목욕통을 통째로 들고 뒤쪽 연못으로 가 푹 담갔다가 꺼내면 땡이었다. 저 거대한―게다가 통째로 대리석인!― 목욕통을 세숫대야 취급하며 가볍게 들어 물을 뜬 뒤, 제라드는 거기다 웬 액체를 드럼째로 들이붓고 온갖 풀들을 넣었다.

그리고 다시 레펜하르트에게로 돌아왔다. 제라드가 하는 짓거리를 유심히 보던 레펜하르트가 공포에 젖어 질문했다.

"뭐, 뭡니까?"

"뭐긴. 쇠를 두드렸으면 식혀야지."

대수롭잖게 대꾸하며 제라드는 레펜하르트의 뒷목을 잡고 들었다. 다시 예의 그 '어미 고양이 새끼 물어 가는 방식'이었다. 이놈의 노인네는 사람 드는 수법을 이것밖에 모르는 것 같았다. 하긴, 근육질 노인네가 근육질 제자를 공주님 안듯이 들고 가면 그것도 나름대로 호러일 것 같기는 하다.

"자, 그럼...."

제자의 뒷목을 잡은 채 제라드가 오러를 운용했다. 황금빛 오러가 일렁이며 솟구치더니 이내 넝마가 된 레펜하르트의 전신으로 스며들었다.

"으, 으윽?"

기묘한 기분에 레펜하르트는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고통 속에서도 그는 자신의 육체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나아 가는 걸 느꼈다. 예전 마법으로 비슷한 효과를 봤었기에 더욱 잘 알 수 있었다. 육체가 활성화되고 전신의 재생력이 증폭되며 어긋난 뼈와 늘어진 인대, 퉁퉁 부은 근육이 원래의 자리를 되찾아 가는 느낌.

쉽게 말해서, 제라드는 지금 오러로 제자의 전신을 치유 및 마사지해 주고 있었다. 짐 언브레커블 특유의 오러는 특히나 육체를 다루는 운용법에 있어 대륙 최강을 자랑해 이런 효능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잠시 오러를 흘려 레펜하르트의 육체를 돌본 뒤 제라드는 제자의 전신을 홀랑 벗겨 버리더니, 입에 커다란 대롱을 물렸다. 물론 여전히 제자의 의사 따윈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이젠 반항할 기분도 안 들어 레펜하르트는 순순히 대롱을 물었다. 뭐, 목욕통에 물 받을 때 대충 짐작하기도 했고.

'아니, 그냥 내가 벗어도 되는데 왜 굳이....'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는 지금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못할 정도로 두들겨 맞은 상태, 스스로 탈의할 기력조차 없다. 딱히 제라드가 어린 소년 제자 옷 벗기는 취미가 있어서 이러는 것은 아니란 소리다.

"자, 그럼 한 시간 뒤에 보자꾸나."

제라드는 레펜하르트를 머리끝까지 목욕통 안에 집어넣고 뚜껑을 덮었다. 뚜껑엔 대롱만 한 사이즈의 구멍이 나 있어 어떻게든 숨을 쉴 수는 있었다. 물속에 둥둥 뜬 채 그는 멍하니 물속을 살펴보았다.

처음엔 몰랐는데, 잘 보니 이거 내용물이 장난이 아니었다.

'맙소사, 힐링 포션에 게렐 초에 페탈스 꽃잎에....'

힐링 포션은 어지간한 마법사 길드에서 주먹만 한 병당 은화 열 닢은 줘야 구입할 수 있는 물건이다. 그걸로 목욕통을 채우다니? 물론 물 좀 많이 타긴 했어도 여기 들어간 힐링 포션의 양을 생각하면 실로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옛 이야기 중에 피부 미용을 위해 우유로 목욕한다는 왕비 이야기가 있는데, 그 왕비가 이 모습을 보면 자신의 검소함을 만방에 자랑해도 될 것 같았다.

게다가 들어간 약초들도 고가품이긴 마찬가지. 하여튼 회복에 좋다는 비싼 약초란 약초는 다 들어가 있었다. 물속에 몸을 담그자 놀라운 속도로 상처가 아물고 육체가 회복되어 가는 것이 느껴진다. 동시에 스스로가 얼마나 강인해졌는지 또한 절실하게 와 닿았다.

'아주 근거가 없는 수련법은 아니었다 이거지....'

죽지 않을 만큼 전신의 근골을 단련한 뒤 오러의 힘과 회복 약수로 빠르게 전신을 치유한다. 이렇게 하니 골병들기 전에 바로 육체가 재생하며 더욱 단단해진다.

'하긴, 이렇게 했으니 소년 테스론의 육체가 지금껏 버텨 왔겠지. 사실 이 정도면 트롤도 맞아 죽을 판인데.'

확실히 합리적인 부분이 있다는 것은 인정할 만했다. 물론 절대 심정적으로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아니,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해 가면서 강해져야 하는 거냐? 남들은 그냥 평범하게 해도 잘만 강해지더만.

'아마도 테스론은 몇 년 전부터 이런 수행을 반복해왔겠지?'

자신의 마법을 그토록 버텨낼 수 있었던 테스론의 저력이 단숨에 이해가 갔다.

"후우...."

대롱 너머로 짙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회복 약수가 전신을 어루만지며 고통이 점점 옅어진다. 이제야 좀 정신이 들며 상황을 파악할 여유가 생긴다.

약수 속에 동동 뜬 채 레펜하르트는 차분히 상념에 잠겼다.

'일단 여기가 과거인 것은 분명하고....'

테스론의 나이를 볼 때 한 30년 정도 전으로 거슬러 올라온 것 같다. 왜 테스론의 육체로 전생했는지도 가설은 있었다. 시공 회귀 주문이 발동하는 바로 그때 테스론의 공격이 마법 사이를 꿰뚫으며 마력이 폭주했었다. 아무래도 그 여파인 것 같다.

'가만있자. 그럼 지금 이 시간대의 나는 어떻게 된 거지?'

레펜하르트의 미간이 짙게 찌푸려졌다.

그럼 이 시간대에는 어린 시절의 레펜하르트도 있는 건가? 한 시공간에 동일한 두 영혼이 존재할 수 있을까? 마법의 상식상 그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마법의 상식으로는 시공을 뒤트는 것도 불가능하긴 마찬가지. 이미 레펜하르트가 시간을 거스른 시점에서 그 상식이란 것도 믿을 수 없는 물건이 되어 버렸다.

'그렇다면....'

왕년 궁극을 바라보았던 마법사의 두뇌가 빠르게 회전했다.

'아무래도 두 가지 가설을 세울 수 있겠군.'

첫 번째는 미래의 레펜하르트의 영혼을 지닌 이 육체와 현재의 소년 레펜하르트가 공존한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어쩌면 지금 내 육체에 권왕 테스론의 영혼이 들어갔을 수도 있다는 것인가?'

레펜하르트는 고민했다. 마법의 극에 달했던 그라 할지라도 어느 쪽이 더 가능성이 높을지는 확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어차피 양쪽 모두 그가 익혀 온 마법의 상식 밖의 일이니까.

'문제는 이것이 현재 어떤 영향을 주게 될 것이냐로군.'

일단 또 하나의 자신이 있을 경우를 생각해 보았다.

동일한 두 영혼이 서로 접촉하게 될 때 어떤 일이 생길지는 아무도 모른다. 영혼의 정체성은 세계를 구성하는 불변의 법칙, 재수 없을 경우 둘 중 한 명의 영혼이 소멸해 버릴 가능성도 있다. 마법사인 레펜하르트는 이 정도 최악의 경우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소년 레펜하르트가 정식 마법사로 활동하게 되는 건 적어도 10년 후에나 일어날 이야기. 과거를 되새겨 보면 지금의 그는 시기상 델피아의 마탑에서 죽어라 공부만 파고 있을 시기였다.

'적어도 당분간은... 서로에게 영향을 줄 일은 없을 것 같고.'

그리고 두 번째의 경우. 테스론이 현재 레펜하르트의 육체를 차지했다면?

테스론 역시 회귀 전생했다면 과거의 기억이 있을 것이고, 자신의 처지에서 레펜하르트의 처지 역시 유추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상당히 높은 확률로 자신을 노릴 것이다.

'음, 이쪽 역시 당장은 큰 문제가 아니려나?'

테스론의 강함은 그 육체에서 비롯되는 것, 그러나 지금 그의 육체는 레펜하르트가 차지했다. 아무리 테스론이 왕년의 경지를 기억하고 있다 해도 기반이 되는 육체가 빈약한 어린 소년 레펜하르트의 것인 이상 당장 권왕으로 돌아오진 못할 것이다.

'적어도 몇 년은 걸리겠지. 아니, 여기 수련하는 꼴을 보면 평생 불가능할지도.'

짐 언브레이커블의 수련법은 절대적으로 스승의 도움이 필수다. 혼자서 수행할 수 있는 방식이 아니다.

'아니야, 테스론 정도의 경지라면 그 상태에서도 스스로 수행법을 찾을 수 있을 지도 모르지.'

생각을 하다 보니 머리가 복잡해진다. 아무래도 어느 쪽이건 확인을 해야 제대로 대처법을 세울 수 있을 것 같다.

'어쨌거나... 일단은... 이 지옥에서 도망치는 게... 급선무인데....'

레펜하르트의 상념이 점점 끊기기 시작했다. 계속 생각을 하고 있자니 육체가 너무 피로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2

정확히 한 시간 뒤, 제라드는 레펜하르트를 목욕탕에서 꺼내 주었다. 그리고 마른 옷가지를 던져 주며 외쳤다.

"제자야! 밥 먹자!"

안 그래도 육신이 낫고 나니 미칠 듯한 허기가 밀려오고 있던 레펜하르트였다. 그래서 그는 반색을 하며 옷을 걸치고 제라드에게 달려갔다. 도망은 도망이고, 지금 당장은 배 속에 뭔가를 넣어 줘야지 안 그러면 도저히 못 버틸 것 같았다.

그리고 방 안에 들어선 레펜하르트는, 더 이상은 놀랄 일이 없을 거라 예상했음에도 불구하고 또 놀라 버렸다.

'밥? 이게?'

제라드의 요리는 호방했다. 그것은 실로 남자의 요리였다.

그냥 돼지 한 마리를 퍽퍽 썰어 솥에 넣고 각종 채소며 곡류 등도 대충대충 솥에 때려 부은 다음 푹 삶는 것이 전부였다. 웬 국자를 하나 던져 주며 제라드가 말했다.

"숟가락 받아라."

밥 먹으라며 내미는 저 솥 안의 액체와 건더기의 무자비한 조합, 스튜인지 뭔지도 의심스러운 물체를 보며 레펜하르트는 심각하게 갈등했다. 이걸 과연 먹어야 하나?

'아니 그보다 이게 지금 1인분인가?'

이 거대한 솥의 내용물을 제라드와 둘이서 먹는 것도 아니었다. 제라드는 이미 자기 앞에 따로 상을 차린 후였다. 그것은 빵과 스프, 고기와 채소가 어우러진 평범한 식단이었다. 양 역시 그냥 평범한 성인 장정 3, 4인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뭐, 사실 저것도 엄청난 양인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상식적인 수준이었다. 제라드의 덩치를 보면 저 정도 먹는다고 뭐라 할 사람도 없다.

그에 비해 레펜하르트 앞에 놓인 솥은 분량부터가 차원이 달랐다. 이 정도면 안타레스 제국 시절, 휘하 오크 소대 하나 정도는 족히 먹이고도 배 두드릴 것 같았다. 설마 이걸 다 먹어야 하나? 남기면 또 아까처럼 패는 거 아냐?

'그, 그래도 일단 먹자....'

기가 막혔지만 레펜하르트는 아무 말 없이 국자(!)를 들었다. 그런데 먹고 나니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딱히 제라드의 솜씨가 좋다는 의미는 아니다. 시장이 반찬이란 말을 몇백 배로 불리면 지금 상황을 설명할 수 있으리라.

기억상실증인 제자를 위한 제라드의 친절한 설명이 뒤를 이었다.

"네 육체는 한계까지 혹사당한 상태다. 그러니 그만큼 보충해 줘야 하는 것이다."

레펜하르트는 정신없이 스튜를 퍼먹었다. 처음엔 이걸 어떻게 혼자 먹나 싶었는데, 일단 수저를 대고 나니 먹어도 먹어도 자꾸 들어갔다. 끝없이 음식을 퍼 넣는 자신의 상황에 스스로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아니, 이게 말이 되나? 질량 불변의 법칙은?'

마법사의 상식이 깨지는 걸 느끼며 레펜하르트는 솥을 싹싹 비웠다. 그야말로 먹는 것과 동시에 소화가 이루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자 제라드가 솥을 치우며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자, 그럼 소화도 시킬 겸 가볍게 뛰자꾸나."

그리고 오후 수련이 시작되었다.

오후 수련은 마법사인 레펜하르트가 보기에도 꽤나 정상적이었다.

우선 한 시간가량 전신에 무거운 쇠뭉치를 달고 산을 한 바퀴 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푸시 업, 아령 물고 윗몸 일으키기, 바위 짊어지고 앉았다 일어나기 등 평범한 건지 아닌지 애매한 육체 단련이 뒤를 이었다. 그 강도가 무식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해가 가는 수련이어서 이번엔 레펜하르트도 얌전히 시키는 대로 따랐다.

물론 그 와중에 몇 번이나 정신을 놓을 것 같았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팔다리가 후들거려도 제라드의 한마디에 바로 기운이 솟았다.

"음? 힘드냐, 제자야? 그냥 오전 수련을 계속 할까?"

"아닙니다아아아아!"

죽도록 처맞느니 바위를 드는 것이 백배 나았다. 레펜하르트의 의욕이 하늘을 찔렀다.

☆ ☆ ☆

해가 지고, 고달픈 하루가 드디어 끝났다. 녹초가 된 레펜하르트를 들어 방 안에 던져 넣은 뒤 제라드가 흐뭇한 얼굴로 밤 인사를 건넸다.

"오늘도 수고했다, 제자야. 내일 보자꾸나."

"아, 안녕히 주무세요... 사부...."

"오냐, 오냐...."

흐뭇한 얼굴로 문을 닫는 제라드를 레펜하르트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참 푸근한 표정이었다. 제자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눈빛이었다.

'저걸 보면 절대 나쁜 사람은 아닌데....'

하지만 사람이 아무리 좋으면 뭘 하나? 머릿속에 처박힌 사상이 악랄하기 짝이 없는데!

'당장 도망간다! 오늘 밤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도망간다!'

레펜하르트는 일단 얌전히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오로지 제라드의 방 불이 꺼지기만을 기다렸다. 녹초가 된 육체가 맹렬히 수면을 요구했지만 그는 가공할 정신력으로 참고 또 참았다. 그는 마법사, 정신력 하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인종이었다.

제라드의 방 불은 금방 꺼졌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깊이 잠들기 전에 함부로 움직일 수야 없지.'

그렇게 한 시간가량 감기는 눈꺼풀을 억지로 뜨며 버틴 후, 드디어 그는 움직였다. 까치발로 조심조심 창문을 열고 조심조심 마당을 지나 건물이 아예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는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제라드의 감각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 수 없으니 결코 경거망동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언덕 하나를 넘은 그 시점.

'뛰자!'

레펜하르트는 산기슭을 향해 맹렬히 달렸다. 과연 단련될 대로 단련된 육체인 덕에 그토록 혹사당하고도 일단 뛰기 시작하니 금방 속도가 붙었다. 어지간한 산짐승도 울고 갈 무서운 속도로 그는 산길을 정신없이 뛰어갔다.

저 무식해 보이는 수행이 사실 합리적이라도 그에겐 의미가 없었다. 어차피 그는 무인이 될 생각이 없다. 그의 머릿속에는 당대 가장 강력했던 마법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대로 다시 한 번 10서클의 궁극 마도사가 되어 안타레스 제국을 재건해야 할 그가 지금 근육 키우고 있을 때냐?

얼마나 뛰었을까? 정신없이 달리는 레펜하르트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희열의 빛이 떠올랐다.

'아! 자유다! 드디어 벗어났다!'

드디어 안도감이 막 가슴 벅차게 올라오려는 바로 그 때!

"제자야, 어디 가니?"

길 앞에서 거구의 노인이 빙그레 웃으며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컥!"

저런 괴물 같은 노인네! 대체 언제 여기 미리 와 있었던 거야! 속으로 비명을 지르는 레펜하르트를 보며 제라드가 빙글빙글 웃었다.

"한 두어 달 도망 안 가더니 결국 가는구나. 이걸로 아홉 번째인가? 한 번만 더 도망가면 두 자리 채울 수 있겠구나."

제자가 도망가도 전혀 놀랍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애초에 테스론도 도망 자주 간 모양이었다. 레펜하르트의 두 어깨가 축 늘어졌다.

"후...."

아무래도 안 되겠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레펜하르트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이보시오, 영감님. 진지하게 할 말이 있소."

제라드가 태연하게 대꾸했다.

"해 봐라."

"난 사실 테스론이란 소년이 아니오. 내 이름은 레펜하르트. 마법사이외다."

그러며 레펜하르트는 진지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자신이 어떻게 이 소년의 육체로 들어오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사실은 절대 밝혀선 안 될 이야기다. 하지만 이미 지옥을 맛본 레펜하르트는 이미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 지금 그가 생각하는 것은 오로지 이곳을 벗어나는 것, 그뿐이었다.

"...이렇게 된 것이오. 그러니 난 당신의 제자가 될 수 없소...."

이야기를 마친 뒤 제라드를 바라보며 레펜하르트는 침을 꿀꺽 삼켰다. 과연 이 이야기를 저 노인이 믿을까? 그리고 만약 믿는다면, 제자의 영혼을 강탈한 사악한 마법사의 존재를 과연 저 노인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런데 의외로 테스론은 이번에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가늘게 뜨며 피식 웃을 뿐이었다.

"오, 이번엔 그런 설정이냐?"

"네?"

"전에는 무슨 이계에서 온 이계인이라며. 그래서 그 몸에 들어갔다며. 드래곤도 만나고 신도 만났다더니."

"에엥?"

"그리고 그 전엔 뭐더라? 전설의 동대륙이란 데서 활약하던 고수였는데 여기로 환생했다고 그러기도 했었지 아마?"

그리고 한 걸음에 레펜하르트의 뒤로 돌아가더니 대뜸 뒷목을 잡고 들어 버렸다. 2.5미터의 거구가 움직이는데도 채 보이지도 않았다. 과연 당대의 권왕다운 무시무시한 몸놀림이었다.

"그래도 이번엔 설정이 좀 더 디테일하구나. 많이 늘었네. 취미로 음유시인 노릇 하는 것도 괜찮겠구나, 제자야."

허공에 들린 채 레펜하르트는 좌절했다. 이것조차 소용이 없다니! 제라드는 연신 피식거리고 있었다. 이미 예전부터 테스론이 이빨을 열심히 까서 비슷한 거짓말을 많이 한 모양이었다.

"자, 어서 돌아가서 자자꾸나. 푹 자야 내일 수련도 버틸 것이 아니냐!"

호탕하게 제자를 들고 돌아가는 노인의 표정에 레펜하르트가 진짜 테스론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한 치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사실 제라드에겐 별 상관없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애초에 그가 원한 건 짐 언브레이커블의 단련법을 견뎌 낼 튼튼한 몸뚱이, 그것뿐이다. 그 내용물이 뭐가 되었든 별 상관없는 것이다!

'이런 빌어먹을!'

그 사실을 깨닫고 레펜하르트는 절망했다. 도무지 이 지옥을 빠져나갈 길이 보이질 않았다. 세상이 모두 암흑이었다. 한밤중이니 당연하지만.

대롱대롱 매달린 채 지옥으로 돌아가며 레펜하르트는 생각을 바꿔 먹었다. 단 하루 동안의 만남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절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제라드란 노인네에겐 어떤 말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조용히 통나무집으로 돌아가며 레펜하르트는 이를 악물고 다짐, 또 다짐했다.

'오늘은 실패했지만 내일은 반드시 도망친다!'

그래, 오늘의 탈옥(?)은 실패했다. 인정해 주마. 하지만 계속 여기에 갇혀 살 거라 생각하진 마라. 잠자리에 내던져지면서도 레펜하르트는 도주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전생에서도 포기를 모르는 남자였다. 너무 포기를 몰라서 마왕으로 불리게 될 정도였다. 그런데 고작 이 정도로 포기할 순 없다!

그리고 다음 날. 또다시 지옥의 아침이 밝아왔다.

"아으아으아아아아아!"

청명한 산속 하늘 위로 소년의 비명이 오늘도 구슬프게 울려 퍼졌다.

☆ ☆ ☆

레펜하르트의 하루 일과는 단순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일단 밥부터 먹는다. 전생한 첫날엔 레펜하르트의 태도가 영 이상하다 보니 벌주는 의미로 그냥 굶기고 수련부터 들어간 제라드였지만, 일단 레펜하르트가 고분고분해지자 착실하게 제자의 몸을 챙겨 주었다.

원래 짐 언브레이커블의 수련법에는 식사 역시 중요한 수행의 일부였다. 고단백 고칼로리에 각종 영양소가 풍부한 이곳의 식사는 영양학적으로 완벽했다. 문제는 맛에 있어서는 전혀 배려를 안 했다는 것이지만.

이게 밥인지 돼지죽인지, 아니면 소가 되새김질하다 뱉은 뜨물인지 구별이 안 가는 아침을 먹고 나면 바로 맞기 시작한다. 그야말로 죽어라 맞는다. 그리고 예의 그 힐링 포션 약초 칵테일 목욕통에 죽은 듯이 담겨 있다가 또 점심을 미친 듯이 먹는다. 여기까지가 오전 수련 끝.

그리고 오후가 되면 강도 높은 근육 훈련 후 무식한 저녁 식사 시간이 이어진다. 저녁 수련 시간은 오전과 동일했다. 죽어라 맞고 목욕하고 밤 되면 그대로 쓰러져 버리는 것이 그의 하루 일과였다.

죽어라 맞고 죽어라 먹고 죽어라 들고 죽은 듯이 자는 것.

마법사로 살아온 레펜하르트에겐 상상도 못할 고난의 시간이었다. 당연히 레펜하르트는 틈만 나면 도망치려 들었다. 차라리 마왕으로 불리는 것이 낫지 이런 혹독한 지옥에서 계속 살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전혀 소용없었다. 저 사부란 작자는 레펜하르트가 무슨 수를 써도 귀신 같이 알아내 그의 도주를 차단하곤 했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이거였다.

"제자야, 나도 사부님 밑에서 수행 받을 때 다 해 본 짓이란다. 나도 다 해 본 짓인데 네 심정을 내가 왜 모르겠느냐. 하지만 조금만 더 참고 견디면 다 보답받는 법이란다."

실제로 짐 언브레이커블에는 130년 동안 차곡차곡 쌓인 '제자 도주 시도 시 사전 차단법'에 대한 노하우가 있었다. 역대 제자치고 꾀병 안 부려 본 놈이 없고 도망 안 가 본 놈이 없는 훌륭한 무문이다 보니 어떤 색다른 시도라도 한 번쯤은 해 본 것이다. 130년어치 노하우가 제자 교육법 매뉴얼에 착실히 반영되어 있어 레펜하르트가 뭔 짓을 해도 다 차단될 수밖에 없었다.

두 달 뒤.

포기를 몰라서 마왕으로까지 불린 남자, 레펜하르트는 결국 도주하겠다는 생각을 버렸다. 평생 쌓아 온 신념마저 저버리게 만들 정도로 제라드의 감시망은 집요했던 것이다. 게다가 운 좋게 도망간다 해도 저 인간 성격이면 대륙 끝까지 쫓아올 것이 뻔했다. 어차피 붙잡혀 돌아갈 바에는....

'차라리 정식으로 허락받고 하산하는 게 낫지.'

다행히 그는 미래의 테스론이 어떤 경지에 올랐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미래의 테스론이 분명히 살아 있음도 확인했다. 즉, 이 몸뚱이는 틀림없이 이 황당한 수련법을 견뎌 내 살아남을 수 있다. 그것도 그냥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무의 지고한 경지, 당대 최강의 무투가가 될 수 있다.

생각해 보면 절대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었다. 미래에 확실히 경지에 오를 것임을 아는데 이 정도 고난쯤 못 참을 것도 없지 않겠는가? 물론 그렇다고 마법사의 길을 포기했다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이왕이면 병약한 마법사보다 근육질의 건강한 마법사가 더 좋은 것 아니겠어?'

생각을 고쳐먹고 레펜하르트는 진지하게 제라드의 가르침에 임하기로 결심했다. 뭐, 사실 진지하고 자시고도 없었다. 그저 눈 딱 감고 이 딱 악물고 죽어라 처맞는 것뿐인데.

'게다가 사실 저 노인네가 나쁜 사람은 아니기도 하고 말이지.'

레펜하르트가 생각을 바꾼 또 하나의 이유는 그를 대하는 제라드의 태도 때문이었다.

제라드는 진심으로, 진정으로 제자를 아끼고 사랑하고 있었다. 정말 성심성의껏 레펜하르트를 교육시키고 있었다. 비록 수련법이 무식하긴 하지만 그 눈동자만큼은 언제나 제자에 대한 애정과 염려로 가득 차 있었다.

그 헌신적인 애정은 레펜하르트로서는 처음 받아 보는 것이었다.

마법사라면 도제에게 마법 한 줄 가르쳐 주며 엄청나게 생색을 낸다. 가장 기초적인 1서클 주문을 배우기 위해서도 최소 3년 동안 스승의 수발만 들면서 노예처럼 살아야 하는 것이 마법사다.

그에 비해 제라드는 오히려 제자의 수발까지 들어 준다. 밥도 스스로 짓고 (그걸 밥 짓는다고 표현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청소도 직접 하고 (청소 할 기운이 남아 있으면 차라리 매 한 대 더 맞고 바위 한 번 더 들라는 것이 제라드의 지론이었다.) 심지어 수업료 같은 것도 없다. 저 밥값, 목욕물값만 해도 천문학적 숫자의 돈이 들어갈 것 같은데 아낌없이 자기 사재를 털어 레펜하르트를 교육시키고 있다.

너무 이상해서 제라드에게 대놓고 물어본 적도 있었다. 대체 뭘 바라고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해 주냐고.

제라드는 무슨 그런 어처구니없는 질문을 하냐는 표정으로 대답해 주었다.

"사부는 곧 부모이다. 그럼 자식 같은 제자에게 모든 것을 해 주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

스승과 도제 관계인 마법사에겐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부모 없이 고아로 자라나 마법사 밑에서 유년기를 보낸 레펜하르트에게 이 애정은 실로 부담스러우면서 동시에 기묘하게 좋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나중엔 도망가려다가도 제라드의 눈빛, 표정을 떠올리고 스스로 접기도 했다.

뭐, 사실 제라드도 이유는 있었다. 그는 무려 30년 만에 겨우 자신의 계승자를 찾아낸 것이다. 이놈의 짐 언브레이커블은 하도 수련법이 무식해서 무문 초기엔 맞아 죽은 제자만 두 자릿수가 넘었다. 그렇다 보니 겨우 얻은 제자를 애지중지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 애지중지라는 게 과도한 폭력이라는 점이 레펜하르트의 슬픔이었지만, 어쨌건 제라드는 진지하게 제자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것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렇게 '사랑이 넘치는 지옥' 속에서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 ☆ ☆

오늘도 레펜하르트는 말뚝에 묶여 맞고 있었다. 슬슬 소년의 티를 벗은 그는 육체 역시 2년 전과 차원이 달라져 있었다. 이제 대나무 정도로는 맞아 봤자 시원하기만 했다. 더 이상 재갈을 물 필요도 없었다. 단련될 대로 단련된 그의 턱 힘은 어떤 재갈이건 씹어 버릴 수 있을 정도로 가공해진 상태였다.

물론 그렇다고 지금의 구타 수련이 고통스럽지 않다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 제라드는 대나무 대신 강철 메이스로 제자를 두드려 패고 있었으니까.

"으, 으윽! 으으윽!"

이를 악 문 채 열심히 레펜하르트는 이미지를 연상했다. 육체를 강화하는 대해의 이미지, 그리고 특유의 호흡법. 맞으면서 이것을 쉴 새 없이 연마해야 그나마 고통이 좀 줄어든다.

그렇게 계속 맞고 있던 무렵이었다.

갑자기 전신에서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한 기묘한 느낌이 치솟았다.

'헉!'

아랫배로부터 뭔가 강렬한 기운이 솟구치더니 단숨에 사지 백배를 타고 흐른다. 그 기운이 전신에 충만하며 가공할 힘이 느껴진다. 레펜하르트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뒤틀었다.

파차창!

그를 묶고 있던 굵은 쇠사슬이 (이미 밧줄 정도로는 레펜하르트의 무식한 힘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박살 나며 두 팔이 자유로워졌다. 레펜하르트는 멍한 얼굴로 자신의 두 팔을 바라보았다. 굳건한 근육 위로 희미한 황금빛의 기운이 맴돌고 있었다.

"이, 이건 대체?"

"으하하하하하!"

제라드가 통쾌하게 웃었다. 그리고 레펜하르트의 어깨를 두드리며 기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축하한다, 제자야. 드디어 오러를 각성했구나."

생명기生命氣, 오러aura.

경지에 다다른 무인은 세계의 기운을 느끼고 그 힘을 체내로 흡수해 자신만의 힘으로 바꿀 수 있다. 달리 아우라라고도 하는 이 힘으로 강화된 육체는 능히 바위를 부수고 성벽을 뛰어넘는 초인적인 힘을 가지게 된다. 또한, 그 오러의 운용에 따라 육체를 재생한다든가 오러 자체를 쏘아 내 원거리 타격을 가하는 등 마치 마법 같은 위력을 보이는 것도 가능하다.

대륙은 넓고 무에 뜻을 둔 무인들도 부지기수지만, 그중 오러를 다루는 경지에까지 오르는 이는 고작해야 만 명 중 하나.

가장 기초적인 오러 운용, 그저 오러를 이용해 신체를 강화시키는 수준만으로도 능히 어지간한 소국의 기사단장급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그만큼 오러 유저란 귀하고 또 강력한 존재다.

'맙소사, 이게 말로만 듣던 그 오러라는 기운인가?'

레펜하르트 본인도 도저히 믿기지 않아 전신을 연신 훑어보았다. 검성 사이러스조차도 20대 후반에나 겨우 오러를 각성했다고 들었다. 그것도 대륙에 유례가 없는 엄청난 진도라며 천재로 칭송받았다. 그런데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은 레펜하르트가 오러를 각성하다니?

하지만 제라드는 당연하다는 표정이었다.

"뭘 그리 놀라느냐? 우리 짐 언브레이커블의 수련법이라면 이 정도는 당연하다. 안 그래도 슬슬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느니라."

하긴, 이 정도로 효과가 좋지 않고서야 굳이 이렇게까지 무식한 단련법을 할 리가 없겠지. 내심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갑자기 제라드가 들고 있던 강철 메이스로 레펜하르트의 복부를 강하게 타격했다.

퍼억!

바위도 부술 파괴력이 복근을 두드리는 걸 레펜하르트는 그저 멀뚱히 보고만 있었다. 확실히 뭐가 와서 부딪히기는 했는데....

제라드가 빙그레 웃었다.

"어떠냐? 이제 이 정도는 아프지도 않지?"

"네, 사부...."

얼빠진 목소리로 레펜하르트가 대꾸했다.

'우와, 그동안 고생한 보람이 있긴 있구나.'

이제까지의 고생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끔찍했던 지옥도 이런 보답을 받을 수 있다면 할 만하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나중에 경지에 오르면 사부에게 감사하게 될 거라더니, 정말 제라드가 빈말 한 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제라드가 자랑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전신을 타격함으로써 육체를 단련하며 동시에 생존 본능을 계속 자극한다. 강인한 생의 의지가 자신의 생명력을 키우고, 그 커진 힘이 결국 오러로 발현되는 것이지. 비록 과정은 고통스럽지만 대륙에서 이보다 더 효율적으로 오러를 각성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어떠냐, 제자야. 이제야 이 수련법의 뛰어남을 알겠느냐?"

제라드는 강철 메이스를 바닥에 던져 버렸다. 이제 더 이상 이런 건 필요가 없었다.

"슬슬 타법 수련을 끝낼 때가 되었구나."

드디어 아픈 시절이 끝났구나! 레펜하르트는 기쁨의 미소를 지었다. 오러를 각성한 것도 기뻤지만, 더 이상 맞을 일이 없겠다는 사실이 더욱 기뻤다.

제라드가 빙그레 웃었다.

"이제 다음 단계로 들어가자꾸나. 기술 수련을 해야지."

아, 이제 좀 정상적인 무술을 배우겠구나. 그렇다면 곧 하산할 수 있겠지? 그는 이 2년 동안 오로지 근육 키우고 맞는 것 외에 한 것이 없었다. 주먹질, 발길질 하나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

레펜하르트가 의욕에 불타며 물었다.

"기술 수련은 뭡니까, 사부?"

제라드가 히죽거리며 주먹을 들어 보였다.

"나랑 자유 대련."

"...."

말문을 잃은 채 레펜하르트는 사부의 주먹을 올려다보았다. 드워프제 강철 해머를 연상케 하는 그 두 주먹에는 눈부신 황금빛 오러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아주 번쩍번쩍한 것이 때깔부터가 레펜하르트의 희미한 오러와는 질이 달라 보였다.

'저걸로 맞으면 얼마나 아플까?'

레펜하르트는 곧 그 해답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

"으아아아아아악!"

정신없이 급소를 파고드는 제라드의 '사랑의 매'를 느끼며 레펜하르트는 좌절했다.

'사랑 넘치는 지옥'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이제 시작이었다.

3

바실리 왕국 남부, 라키드 산맥의 깊은 험지.

깎은 듯이 거대한 절벽 아래 폭포가 떨어지고 그 밑으로 용소龍沼가 생성되어 요란한 물소리를 낸다. 소음과 물보라가 어우러진 물가 옆 공터에서 한 건장한 청년이 허공에 주먹질을 하고 있었다.

"헙!"

간단한 기합과 함께 주먹이 대기를 찢는다. 이어서 연타가 들어간다. 잔상이 남을 정도로 빠른 연속 타격, 동작 또한 완벽했다. 만약 상대가 있었다면 그는 청년의 주먹이 자신의 사방을 빈틈없이 점유하는 걸 보고 좌절해야 했으리라.

이어서 발차기, 돌려차기, 지르기 등 기본 동작이 이어졌다. 연신 스텝을 밟으며 청년의 팔다리가 허공을 희롱했다. 점점 움직임이 복잡해졌다. 지르고 거두고 차올리고 쓸어내리는 그 오묘한 동작 속에는 무인이라면 누구나 경탄해 마지않을 절묘한 수법들이 모두 녹아들어 있었다.

주먹과 발길질이 허공을 가르며 그 풍압만으로 바람이 일어나 회오리친다. 요란한 바람 소리가 공터를 가득 덮는다.

우우우웅!

그렇게 한참을 새도우(허공에 가상의 적을 상상하며 연습하는 수련법)에 투자한 청년이 이윽고 움직임을 멈췄다. 제자리에 선 그가 주먹을 쥐고 절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주먹에서 눈부신 황금빛 오러가 일렁이며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후우우...."

청년이 숨을 골랐다. 전신 근육이 약동하며 부풀어 오른다. 그 상태로 그가 주먹을 뒤로 당기고 자세를 낮추었다. 마치 먹이를 덮치는 맹수를 연상케 하는 모습, 청년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캘러미티 혼."

파아앙!

대기를 찢으며 청년의 전신이 절벽으로 돌입했다. 황금빛 주먹이 뻗어 가며 눈부신 빛의 파문을 일으킨다. 주먹이 연신 대기를 찢고 빛의 파문이 연신 퍼져 나간다. 세 개의 빛의 파문을 주위에 두른 채 청년은 그대로 절벽에 주먹을 내리꽂았다.

콰앙!

폭음과 함께 대기가 진동하며 절벽에 거대한 크레이터가 움푹 파였다. 마치 운석이라도 떨어진 듯한 광경이었다. 직경이 족히 10여 미터는 넘어 보였다.

이어서 빛의 파문이 주먹으로 모여들었다.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파문이 연이어 한 점으로 응축되어 가공할 파괴력으로 변한다. 응축된 오러의 파동이 연이어 절벽을 두들겨 댔다.

콰콰콰쾅!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사방이 요동을 쳤다.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나고 무수한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잠시 후, 먼지가 가라앉은 그 자리엔 분명 3초 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거대한 동굴이 뻥 뚫려 있었다. 워낙 파괴력이 집중되어 관통하다 보니 절벽이 채 무너지지도 않았던 것이다. 한낱 인간의 주먹이 일군 결과라고 보기엔 지나치게 참혹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 이적을 만든 장본인은 정작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숨을 고르며 절벽을 바라보던 청년이 문득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후, 아직도 3중첩이 한계인가? 조금만 더 하면 될 것도 같은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무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청년, 전생한 지 5년이 지나 올해로 스물한 살이 된 레펜하르트였다.

오러를 각성한 지도 벌써 3년째, 반강제적으로 무의 길을 걸어온 레펜하르트도 슬슬 이 산속 생활에 익숙해진 후였다. 제라드도 예전처럼 무식하게 제자를 굴리지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굴리는 강도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지만 레펜하르트 역시 만만치 않게 무식한 몸이 되어버려서 대충 버텨 낼 만해졌다는 것이 옳다.

"이놈의 캘러미티 혼을 4중첩까지 연마해야 어떻게든 여길 빠져나갈 텐데, 끙...."

가벼운 스트레칭으로 천천히 몸을 풀며 레펜하르트는 불만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짐 언브레이커블 최종 비의, 캘러미티 혼Calamity horn.

전신의 힘을 모두 실어 한 점에 집중해 파괴력으로 바꾸는 비전비의의 일격. 오러의 파문이 연달아 수렴되는 그 모습이 마치 한 자루 뿔과 같다 해서 '재앙의 뿔'이란 명칭을 가진 이 기술은 그 난이도가 엄청나 짐 언브레이커블의 체술을 극한까지 이해해야 겨우 가능한 기예였다.

최종적으로 9중첩, 아홉 개의 오러 파문을 끌어낼 경우 신조차도 죽일 수 있다는 가공할 권격. 기억 속의 테스론도 7중첩이 한계였고 당대의 권왕인 제라드조차도 8중첩까지밖에 익히지 못한 이 비기야말로 짐 언브레이커블이 추구하는 무의 궁극점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부는 최소 4중첩이 되어야 하산을 허락한다고 했지...."

목표점이 확실히 보이자 레펜하르트는 적극적으로 수련에 임했다. 제라드도 제자의 태도가 확실히 변하자 예전처럼 옆에 달라붙어 있지 않고 개인 수련 시간을 대폭 늘려 주었다. 지금도 그는 레펜하르트를 홀로 수련하게 놔둔 채 생필품을 보충하기 위해 마을로 내려간 참이었다.

해의 위치를 보며 레펜하르트는 대강 시간을 가늠했다.

'오랜만에 마을에 내려가셨으니 느긋하게 약주라도 한잔 하고 오시려나?'

예전의 제라드는 마을로 내려가지도 않았다. 대신 비싼 돈을 들여 이 깊은 산속까지 물자를 배달시켰다. 언제 제자가 도망갈지 모르니 스물네 시간 옆에서 감시를 해야 했던 것이다. 게다가 원체 제자 수련에 들어가는 물량이 방대해서 수레 몇 대로 옮길 분량이다 보니 아무리 제라드가 덩치 좋고 힘이 세다 해도 그걸 혼자 다 들고 올 순 없었다. (가능이야 하겠지만 보기에 좀 안 좋다.)

하지만 지금은 레펜하르트의 육체가 경지에 이르러 더 이상 회복 약수통도 필요 없고, 오러를 각성해 소모된 기운을 무식한 양의 식사로 채울 필요도 없어진 것이다. 그냥 적당량의 식료나 좀 사 오면 되니 제라드도 요즘은 직접 마을로 오가며 물자 공급을 하고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지금이야말로 기회다 싶어 도망쳤겠지만....'

문득 레펜하르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더 이상 도망칠 생각은 없었다. 이제까지 견뎌 낸 것이 억울해서라도 도망은 못 간다. 여기까지 온 이상 확실하게 인정받고 하산하고 싶었다.

어쨌거나, 몸을 다 푼 레펜하르트는 손발을 털며 공터 가장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 체술 수련은 여기까지 해야겠다."

하산으로 향하는 길목의 마지막에서 붙잡혀 있는 레펜하르트였지만, 그는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무술이나 마법이나 똑같지. 조급해하지 말고 느긋해하지 말 것."

사부도 그러지 않았던가? 세상 모든 일이 결국 같으니 꾸준히 성실하게 노력하는 것이 사실은 지름길인 법이라고. 죽도록 두들겨 패서 강제로 오러에 눈뜨게 하는 대륙 최강의 오러 각성 지름길 수련법을 가진 짐 언브레이커블이 할 소린 아닌 것 같지만.

바위 위로 올라간 레펜하르트는 대충 바닥의 먼지를 쓴 뒤 가부좌를 하고 앉았다. 눈을 감으며 그가 중얼거렸다.

"아무리 무술도 좋지만, 마법 쪽도 소홀히 할 수는 없지."

눈을 감은 채 레펜하르트는 명상meditation에 잠겼다. 전생한 뒤 2년간은 그저 두들겨 맞고 뻗어 있느라 정신이 없어 전생의 마법을 되살릴 엄두도 못 냈던 그였다. 하지만 오러를 각성한 후로는 그럭저럭 개인 시간이 난 덕에 틈틈이 마법 수행을 병행하고 있었다.

"하아아아...."

숨을 깊게 들이쉬며 그는 자신의 정신 속으로 천천히 침잠해 들어갔다. 전생의 그가 익혔던 모든 마법의 경지, 그 위대한 지식을 천천히 되새기는 것이다.

사실 인간의 기억력은 그리 믿음직하지 못하다. 특히 이 육체는 기억력 하나는 대륙 제일이라던 레펜하르트의 원래 두뇌가 아니다. 더구나 초반 2년간은 두들겨 맞느라 정신이 없어 따로 기록하거나 할 엄두도 못 냈다. 기록할 책자 같은 것도 없었다. 10서클에 이르는 방대한 그의 마법 지식을 모조리 활자로 옮기려면 도서관 하나를 가득 채워도 모자랄 것이다.

그렇다 보니 지금쯤 전생의 기억을 꽤 잊었어야 정상이겠지만....

"후우우우...."

간단한 심호흡과 함께 레펜하르트의 머릿속에서 전생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주마등이란 무엇인가?

바로 죽을 때가 닥치면 머릿속에서 과거의 모든 일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레펜하르트는 지난 5년간 수도 없이 주마등을 보고 또 보아 온 몸이었다. 죽을 뻔한 것이 어디 한두 번이었어야지? 매일매일이 사경을 헤매는 나날이었다.

주마등도 하도 자주 보니 슬슬 요령이 생겼다. 그러다 보니 레펜하르트에게 새로운, 조금 괴상한 능력이 생겨났다.

바로 '인공적으로' 주마등을 보는 경지에 다다라 버린 것이다. 원래의 테스론도 가지지 못했던, 마법적인 깨달음을 담은 영혼과 수없이 죽을 뻔하면서도 끝끝내 버텨 낸 근육질 육체가 가져온 실로 우연의 산물이었다.

인위적으로 '인공 주마등'을 뇌리 속에 펼치고 자신의 과거를 관조한다. 그 속에서 마법의 지식을 꺼내, 마치 도서관에서 책을 꺼내 읽듯 찬찬히 살핀다.

레펜하르트가 문득 손을 올려 허공을 휘저었다. 동시에 그의 입에서 나직한 주문이 흘러나왔다.

"델피르 라 스테린, 나 허공을 붙잡아 적을 치는 한 자루 탄환이 되리라...."

마법의 3대 요소는 바로 주문籒文(spell), 수인手印(somatic) 그리고 촉매觸媒(catalysis). 지금 그가 시전하는 마법의 촉매는 공기이므로 따로 준비할 필요가 없다. 연신 수인을 맺으며 한 20여 초 정도 시간을 끌어 간신히 영창을 마친 레펜하르트가 손을 앞으로 내밀며 시동어를 외쳤다.

"에어로 블렛Aero bullet!"

한 줄기 바람의 탄환이 날아가 건너 나무에 부딪혔다. 그렇다. 그냥 부딪혔다. 꺾인 것도, 부러진 것도 아니고 그냥 펑 소리가 나며 조금 흔들리고 말았다.

살짝 흔들리다 마는 나무를 바라보며 레펜하르트가 혀를 찼다.

"이거야 원... 마법은 다 기억나는데 몸이 안 받쳐 주네."

정확히는 마력과 두뇌가 안 받쳐 준다. 깨달음도 되고 지식도 있는데 마력이 영 쌓이질 않고 무엇보다도 연산 능력이 너무 떨어진다. 과거엔 찰나에 시전할 수 있었던 가장 기초적인 1서클 마법, 에어로 블렛조차 지금은 20여 초는 족히 걸린다. 위력도 영 만족스럽지 않다. 이 정도 위력이면 그냥 성인 장정이 조약돌 들어 돌팔매질하는 것과 별 다를 것도 없지 않은가? 뭐, 정확도야 훨씬 높겠지만.

입에서 절로 하소연이 나왔다.

"아오, 이놈의 돌대가리 테스론의 머리로 과연 마법사가 될 수 있으려나?"

하지만 하소연에 비해 레펜하르트는 별로 풀 죽은 얼굴이 아니었다. 그는 전생에 이미 최강의 마법사였고 이에 대한 대처법도 몇 개 생각해 둔 상태였다. 문제는 그러려면 일단 하산을 해야 한다는 점인데....

"어서 4중첩을 완성해 사부의 인정을 받아야지, 끙."

어느새 레펜하르트는 제라드를 자연스럽게 사부라 부르고 있었다. 비록 상황이 꼬여서 생긴 사제지간이라지만, 그는 틀림없이 자신을 단련시키고 위대한 무술의 비밀을 전수해 준 이였다. 사부라 부르기에 충분히 합당했다.

물론 그 과정을 생각하면 여전히 치가 떨리지만.

타법 수련이 끝났다 해도 레펜하르트의 고난은 여전했다. 제라드는 여전히 제자를 애지중지했다. 어찌나 애지중지했으면 한겨울에 얼음물에 집어넣는 것은 수련 축에도 끼지 않았다. 절벽 아래로도 떨어트리고 모닥불에 굽기도 하고 두 팔과 다리를 묶은 채 곰 굴에 던지기도 했다. 오러를 잘 운용하면 근육으로 이빨을 부술 수 있다나? 화산이 근처에 없어서 용암 수련을 못 한다며 아쉬워하는 제라드의 모습은 정녕 악마에 한없이 가까웠다.

'생각해 보면 정말 용케 살아남았지. 괜히 인공 주마등이라는 희대의 비기가 생긴 것이 아니라니까.'

쓴웃음을 연신 흘리며 레펜하르트는 계속 마법을 연습했다. 워낙 마력이 모자라 기초적인 마법밖에 구사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어차피 마법을 다루는 감각을 유지하고 있으면 기회 되는대로 과거의 경지로 돌아갈 방법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델라 디 피아나, 빛의 흐름이여, 그 눈을 속여...."

고요한 산속에서 낭랑한 마법 영창 소리가 은은하게 울리고 있었다.

☆ ☆ ☆

마법 시전 수련을 마치고 마력을 쌓기 위해 한참 명상에 잠겨 있던 중이었다.

"응?"

문득 레펜하르트가 한쪽 눈을 치켜떴다. 뭔가 숲 저편에서 빠르게 이동하는 기척이 느껴지고 있었다. 거리는 한 100미터 정도? 마법사 주제에 감으로 상대를 파악하게 되다니. 뭔가 서글퍼졌지만 그는 계속 정신을 집중했다.

'이 기운은 인간이 아닌데....'

그렇다고 산짐승도 아니다. 분명 두 발로 숲 속을 뛰고 있는 자의 기척이었다. 레펜하르트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기척이 느껴지는 쪽을 바라보았다. 전생한 이래, 제라드 외의 외인을 처음 만나는 그였다. 호기심이 안 생길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숲에서 무엇인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1.6미터 정도의 신장에 납작한 코, 부리부리한 눈과 뻐드렁니를 지닌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인간이 보면 무섭다 하겠지만 그에겐 너무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오크로군."

녹색 피부에 회색 머리칼을 거칠게 기른 작은 오크가 숲에서 뛰쳐나와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오크가 레펜하르트를 보더니 당황한 듯 손에 든 녹슨 칼을 올렸다.

"크르카카 로카타 카라!"

오크의 표정엔 적의가 가득 차 있었다. 그 작고 깡마른 모습에 레펜하르트가 무심코 혀를 찼다.

'아직 소년인 것 같은데....'

보통 오크들의 신장은 인간과 거의 비슷하다. 저 정도 크기면 아마도 서너 살 정도? 전사의 종족인 오크는 태어난 지 5년이면 성년이 되고 젊은 시절이 기니까 대충 나이가 맞을 것이다.

레펜하르트는 흥미를 가지고 오크 소년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사실, 레펜하르트 자신과 비교해서 작고 깡마르다는 것이지 이 오크 소년의 몸 역시 보통은 아니었다. 전신이 잘 단련되고 흉터투성이인 것이 상당히 전투를 겪어 온 전사의 몸이었다. 타고난 용맹을 자랑하는 오크 중에서도, 저 나이에 저 정도 몸이면 상당히 뛰어난 전사의 자질을 가졌다 할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상대평가란 참 무서운 것이다.

'투기장 같은 데서 도망친 건가?'

오크들을 검투사로 키워 서로 죽이게 하고 돈을 걸며 구경하는 유희는 대륙 전역에 퍼져 있었다. 아마 이 오크 소년도 그런 처지인 것 같다.

"크르르...."

아무런 반응 없이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는 레펜하르트의 모습에, 오크 소년의 태도가 조금 누그러졌다. 그가 칼끝을 살짝 내렸다. 하지만 여전히 경계심은 팽배하다. 오크 소년이 차가운 목소리로 레펜하르트에게 말했다.

"인간! 너, 나, 못 본 척한다. 그럼 안 죽인다!"

전생의 기억이 떠오르며 레펜하르트는 유쾌해졌다. 만약 인간이었다면 볼 것도 없이 칼질부터 했겠지? 아, 이 상황에서도 불필요한 살생은 원치 않는 긍지 높은 종족이여.

슬쩍 숲 너머를 바라보았다. 보이진 않지만, 한 무리의 칼 든 자들이 열심히 이쪽으로 뛰어오는 기척이 감각권에 확실히 잡혔다.

'이 소년을 잡으려는 놈들이겠지?'

레펜하르트는 잠시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으르렁대는 괴성을 내뱉었다.

"크라르 옥, 카랄 탈차타?"

오크어였다. 원래 오크의 성대 구조는 인간과 다른지라 인간이 들으면 대부분 으르렁거리는 것으로 들린다. 하지만 해석은 좀 다르다.

"젊은 오크여, 쫒기고 있는가?"

오크 소년의 눈동자에 이채의 빛이 떠올랐다. 소년이 오크어로 마주 물었다.

"인간이 어찌 은총의 언어를 입에 담는가?"

레펜하르트가 간략하게 대꾸했다.

"인연이 있었다."

전생에 마왕으로 군림하며 오크, 엘프, 트롤, 드워프는 물론 오우거나 고블린, 놀들의 유사 언어도 전부 할 줄 알았던 그였다. 오크어쯤은 본고장 발음이 가능했다.

레펜하르트의 또렷한 오크어에 오크 소년도 좀 놀란 모양이었다. 확실하게 누그러진 어조로 그가 중얼거렸다.

"축복받은 인연이군. 그대의 말대로다. 나는 지금 쫓기고 있다."

"내가 그대를 돕고 싶다."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오크 소년이 고개를 저어 거부의 뜻을 밝혔다. 레펜하르트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나를 믿을 수 없나? 아니면 인간의 도움은 받지 않겠다는 뜻인가?"

"그럴리가. 은총의 언어를 아는 그대는 내 형제와 같다. 그 호의가 진실됨 역시 내 영혼이 느낄 수 있다. 그런 형제를 어찌 내 처지로 위험에 처하게 하겠는가?"

레펜하르트는 이 오크 소년이 점점 더 마음에 들었다.

인간들은 그저 으르렁대기만 하는 오크들을 보고 굉장히 야만적이고 짐승 같다고 폄하하겠지만, 사실 그들의 어휘력은 인간과 별 차이가 없다. 단지 성조聲調가 풍부하고 장, 단음으로 의미가 갈라지는 것이 많아 인간이 듣기에 단순한 발음인 것처럼 느껴질 뿐이다. 사실 전 부족민에게 공평하게 교육의 기회를 주는 오크 쪽이 못 배운 인간들보다도 더 풍부한 어휘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이 소년은 그런 오크들 중에서도 상당히 지성적인 말투를 구사하고 있었다. 좋은 혈통을 타고난 것인가?

"나는 그대를 도울 능력이 있다. 그리고 내가 해를 입지도 않는다. 믿어라."

자신만만한 레펜하르트의 태도에 오크 소년의 표정이 흔들렸다. 결국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이 바로 말투를 바꿨다.

"호의를 입겠소, 은인이여."

레펜하르트는 바로 어둠의 장막을 시전했다. 어둠을 불러 시야를 흐리는 간단한 1서클 주문이지만, 으슥하게 그림자 진 곳에 시전하면 오크 소년 하나쯤 숨기는 것은 간단했다.

절벽 아래에 뚫린, 조금 전 직접 만들어 낸 그 동굴에 어둠의 장막을 펼친 뒤 레펜하르트가 소년에게 손짓했다.

"이 속으로 숨으라. 나의 마법이 그대의 자취를 숨겨 줄 것이다."

오크 소년이 놀란 표정을 감추지 않은 채 물었다. 지금 소년은 레펜하르트가 오크 어를 할 때보다도 더 놀라고 있었다.

"마법사였소, 은인?"

"내가 마법사인 것이 그리 이상한가?"

"그 몸으로?"

"...."

하긴, 신장 185센티미터에 전신 근육이 알차게 박혀 있는 지금의 레펜하르트를 보고 마법사라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 피식거리며 레펜하르트는 계속 암흑의 장막으로 손짓을 했다. 잠깐 당황한 오크 소년도 이내 표정을 풀고 장막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럼 그대의 호의, 감사히 받겠소."

장막의 어둠에 몸을 담그며 오크 소년이 문득 피식 웃었다. 그가 레펜하르트를 향해 농조로 말을 건넸다.

"그러고 보니 인간들의 동화에 비슷한 내용이 있었던 것 같군. 미안하게도 엘프들이 목욕하는 장소 같은 건 모르오만?"

마주 웃으며 레펜하르트가 손사래를 쳤다.

"필요 없다, 그런 건. 어서 숨기나 해."

정말이지 꽤나 지적 수준이 높다. 위급한 가운데에서도 긍지가 보이고, 상대의 호의를 받아들인 뒤에는 농담도 건넨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오크 소년의 모습을 보며 레펜하르트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리고 다시 바위 위로 올라가 아무 일도 없었던 척 명상에 잠겼다.

잠시 후, 요란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한 무리의 사내들이 수풀을 헤치고 나타났다. 라키드 산맥 근처에 자리한 크롬 시의 투기장 소속 용병들이었다. 평소 투기장을 관리하며 가끔 도망치는 노예가 생기면 붙잡는 것이 그들의 임무. 그리고 지금 이들은 하나같이 신경질이 날 대로 난 상태였다.

고작 해야 새끼 오크 하나가 도망갔다고 해서 처음에는 별것 아닌 임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 저능한 오크 놈이 이상할 정도로 잔머리를 굴려 그들의 추적을 따돌렸던 것이다. 결국 이 깊은 산속까지 쫓아오게 만들었으니 이가 안 갈릴 수가 없었다.

"짜증나는구먼. 고작 은화 몇 푼 벌자고 이 고생을 해야 하나."

초승달 같은 시미터로 수풀을 거칠게 베어 넘기며 이 무리의 우두머리, 브라이트는 연신 투덜거렸다.

막 수풀을 벗어나 공터로 나오니 웬 청년 하나가 바위 위에 앉아 눈을 감고 있는 것이 보인다. 브라이트가 거친 목소리로 대뜸 물었다.

"어이! 이봐! 여기 오크 새끼 하나 지나가는 거 못 봤나?"

뒤를 따르던 부하 한 명이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알려주면 금화 한 닢을 주마!"

흠칫 놀란 브라이트가 부하를 돌아보며 말렸다.

"야, 뭔 소리 하는 거야?"

새끼 오크 한 마리 가격이 금화 다섯 닢이 채 안 되고, 그들이 받는 보수는 은화로 계산해야 하니 금화 한 닢을 주면 손해 보는 장사인 것이다. 그러나 부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누가 진짜 준답니까? 그냥 정보만 듣고 생 까면 그만이지."

"아, 하긴. 큭큭큭."

그들의 대화에 레펜하르트는 살짝 인상을 썼다. 브라이트 일행은 설마 이 거리에서 이 작은 목소리가 들릴 거라 생각도 못해 안심하고 중얼거리고 있었지만, 청력 역시 엘프 수준으로 발달해 버린 지금의 그에겐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정확히 들리고 있었다.

절로 시큰둥한 대꾸가 흘러나왔다.

"모르겠소만?"

"정말 모르는 거냐?"

브라이트가 미심쩍은 눈으로 레펜하르트를 노려보았다. 흔적을 보면 분명 그 새끼 오크는 이쪽으로 도주했다. 발자국이 아주 명확하게 나 있다.

'그런데 모른다고?'

브라이트는 다시 발자국을 살폈다. 보아하니 발자국이 폭포 아래 개울가까지 닿아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엔, 누가 봐도 숨기 딱 좋게 생긴 동굴이 하나 뚫려 있다.

브라이트가 피식 웃었다.

"저기구먼. 얘들아, 가자."

레펜하르트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러고 보니 발자국을 생각 못 했네.'

예전에 그가 마법을 쓸 땐 자취나 그런 것도 알아서 지워 주는 고위 마법만 쓰다 보니 실수한 것이다. 레펜하르트가 몸을 날려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여기는 내 거처요. 무단으로 들어오게 할 수 없소."

"응?"

감히 '산골 애송이' 주제에 자신의 앞을 가로막아? 브라이트의 쌍심지가 좌우로 치켜 올라갔다.

"아니, 이 새끼가 미쳤나...."

그제야 브라이트는 레펜하르트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미처 몰랐는데 잘 보니 몸이 꽤 좋다. 사실은 꽤 좋은 정도가 아니라 무지막지하게 좋은 것이지만 불행하게도 브라이트에겐 거기까지 알아볼 안목은 없었다.

어쨌거나 척 봐도 근육이 딱 잡힌 것이 한가락 하게 생기긴 했다. 그래도 저쪽은 한 명이고 이쪽은 열 명이 넘으니 두려워할 이유는 전혀 없다. 게다가 현재 레펜하르트의 신장은 185센티미터, 큰 키긴 하지만 비인간적이라 할 정도는 아니다. 만약 예전 테스론처럼 2.3미터의 거구였다면 뒤도 안 보고 도망갔겠지만 현재로선 그렇게까지 위압적이진 않은 것이다.

"야, 이 새끼 뭔가 수상해. 제압해라. 패고 보면 뭔가 나오겠지."

아니면 말고. 이런 산골 애송이쯤 패 버린다 해서 뭐라 할 사람도 주위에 없잖아?

브라이트는 킬킬거렸다. 언제나 약자를 괴롭히고 살았던 그에게, 관계없는 사람에게 억울하게 피해를 준다는 의식은 있지도 않았다.

'이건 뭐, 동정의 여지도 없는 놈들이군.'

인상을 쓰는 레펜하르트를 향해 부하들이 검집째로 검을 들고 다가온다. 그들이 이죽거리며 말을 이었다.

"어이, 애송아. 헛짓거리 그만 하고 얼른 비켜라, 응?"

"새끼, 몸 하난 오라지게 좋은데?"

"뭐, 그래 봤자 칼 맞으면 끝이지."

건들거리며 다가오는 용병들을 바라보던 레펜하르트는 잠시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다시 풀었다. 가볍게 한방씩 먹여 줄까 했는데, 문득 제라드의 말이 떠올랐다.

-네 주먹은 이제 흉기다. 휘두르면 어지간한 놈은 무조건 죽는다고 봐야 한다.

확실히 그는 아직 오러를 제라드처럼 자유롭게 운용하는 경지엔 들지 못했다. 그리고 오러가 없어도 지금 그의 주먹은 쇠망치에 가깝다.

-그럼 어쩝니까, 사부?

-약한 애들에겐 적당히 자비를 베풀어야지.

그래서 레펜하르트는 자비를 베풀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옆에서 뒹굴고 있던 나뭇가지를 하나 집어 들었다. 조금 전 수련의 여파로 부러져 나간 가지였다.

맨주먹이 무기보다 강한 무문, 짐 언브레커블에서는 무기를 드는 것이 곧 자비다.

물론 용병들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이 새끼가 몽둥이를 들었네?"

"한판 붙어 보자고?"

"뭐 좀 배웠다 이거지?"

레펜하르트가 히죽 웃었다. 순간 그의 말투가 바뀌었다.

"안심해라. 이걸로 맞으면 죽지는 않을 거다."

그리고 화려한 봉술이 펼쳐졌다. 순식간에 무수한 몽둥이가 잔상을 남기며 용병들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잘난 척 하던 표정이 싹 사라지고 공포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허, 허억!"

뒤이어 구타음과 비명이 하늘 높이 울려 퍼졌다.

"으에에엑!"

퍼퍼퍼퍼퍽!

짐 언브레이커블은 맨손 체술을 극도로 단련하는 무문이다. 하지만 무기술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바로 봉술이 그것인데, 사실 이 봉술은 상대와 싸우기 위한 용도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제자를 훌륭히 다지기 위해 만들어진 기술인 것이다. 그렇다 보니 방어술은 전무하고 오로지 공격, 그것도 상대의 전신을 골고루, 한 치도 빠짐없이 다지는 데 특화되어 있었다.

"이, 이런! 다 같이 치자!"

동료들이 순식간에 당해 버리자 다른 이들도 놀라며 달려들었다. 칼집에서 칼을 뽑고, 본격적으로 상대를 죽이기 위해 칼을 찔러 온다.

"타아앗!"

그래도 명색이 칼 밥 먹고 산 용병이다 보니 레펜하르트의 빈틈을 발견할 수 있었던 모양이다. 하기야, 방어란 개념이 없는 봉술이니 당연했다. 덤벼든 용병 한 명이 레펜하르트의 옆구리를 강하게 찔렀다. 하지만....

퉁!

강철 검이 튕겨져 휭휭 날아가 저만치 나무에 쿡 박히는 걸 보며 레펜하르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 이게 사람 몸뚱이냐? 정말 내 몸이지만 너무하네.'

애초에 현재 그의 육체는 그 자체로 방패. 무기를 들 정도로 약한 상대라면 방어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레펜하르트 본인도 기가 막힐 지경인데 당하는 입장에선 오죽할까? 옆구리로 칼 튕기는 진기 명기를 보며 용병들은 전의를 상실해 버렸다. 그리고 레펜하르트는 그들에게 자신이 2년간 몸소 겪어 온 경험을 아낌없이 베풀어 주었다. 처절한 비명이 산속 가득 메아리쳤다.

"으악, 으악, 으아악!"

쉴 새 없이 손을 놀리며 레펜하르트가 느긋하게 중얼거렸다. (왠지 제라드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걱정 마라, 죽지는 않는다."

이 봉술의 대단한 점은 절대 상대가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퍼퍼퍼퍽!

"죽지는 않을 거다. 죽지는."

근육을 찢고 힘줄을 끊고 관절이 부러지고 뼈가 박살 나도....

"절대 죽지는 않지."

"으아아아악!"

생각해 보면 이만한 고문법도 없지 싶었다. 나중에 기회 되면 고문법으로 활용해야겠다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동료들 전원이 순식간에 잘 다진 주물럭이 되어 버리자 그제야 브라이트도 눈앞의 이 청년이 보통 놈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으으, 네놈 이름을 밝혀라!"

"밝혀라?"

말투를 듣자 하니 아직 정신 못 차린 것 같다. 레펜하르트는 가볍게 몽둥이를 휘두르며 대뜸 브라이트의 앞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빙글거리며 말했다.

"친구들 다 저 꼴 됐는데 너만 멀쩡하면 안 되겠지?"

브라이트에게도 짐 언브레이커블 특유의 타법 수련이 행해졌다. 그렇게 한 1분쯤 팼을까? 결국 나무 몽둥이가 부러져 버렸다. 오러로 몽둥이를 감싸 보호했다면 이 정도로 부러지지 않았겠지만, 아쉽게도 육체 자체를 단련하는 데 특화되어 있는 그의 오러는 다른 무문처럼 무기에 오러를 덧씌우거나 할 수는 없었다. 세상일엔 다 장단점이 있는 것이다.

매질이 끝나자 그제야 브라이트가 신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사, 살려 주십쇼...."

브라이트는 정신없이 빌고 또 빌었다. 이미 오크 노예를 잡아가야 한다는 생각 따윈 머리에 남아 있지도 않았다. 오로지 이 매타작 지옥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그 모습에서 짙은 옛 향수를 느낀 레펜하르트는 쓴웃음을 지으며 손짓을 했다.

"꺼져."

단순한 한마디였지만 브라이트 일행에겐 구원의 동아줄이다. 다들 정신없이 동료를 부축한 뒤 절뚝거리며 공터를 떠났다. 떠나가는 용병들의 모습을 보며 레펜하르트가 입맛을 다셨다.

'이것 참, 패다 보니 은근히 재미있었는데 아쉽네. 나중에 제자 들여서 본격적으로 패 볼까?'

본인은 미처 못 느끼고 있었지만, 지금 그는 어느새 훌륭하게 짐 언브레이커블의 사상에 물들어 있었다.

☆ ☆ ☆

상황이 끝나자 오크 소년이 장막에서 걸어 나왔다. 소년은 경악한 표정을 숨기지 않고 있었다. 레펜하르트가 설마 이 정도로 강한 전사일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가슴에 손을 얹고 오크 소년이 진심을 담아 감사를 표했다.

"은인이여, 이 생명이 끊어지는 날까지 오늘을 잊지 않겠소. 반드시 은혜를 갚을 것이오."

오크 특유의 어조가 있다 보니 마치 원한을 갚겠다는 것처럼 살벌하게 들리긴 했지만, 진심인 것은 틀림없었다. 신경 쓰지 말라며 손을 내저은 뒤 레펜하르트가 물었다.

"상관없다. 갈 곳은 있나?"

오크 소년이 문득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세상이 모두 인간의 것이니 어찌 갈 곳이 있겠냐마는...."

그러나 그 표정은 곧 강인한 의지로 바뀌었다.

"그래도 대륙은 넓으니 어딘가 이 한 몸 뉘일 곳이 있지 않겠소? 없다 해도 노예로 사느니 떠돌다 죽는 운명을 택할 것이오."

초라한 차림에 상처투성이, 검 역시 녹슬어 있지만 오크 소년의 눈빛에는 전사의 긍지가 가득 담겨 있었다. 레펜하르트가 빙그레 웃었다.

"호기로운 녀석이군."

그리고 잠시 생각하다 말을 이었다.

"라키드 산맥 너머 남동쪽으로 보름쯤 걸어가면 이름 없는 황무지가 나온다.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아 명칭도 붙지 않은 오지 중의 오지, 인간 아닌 종족이 시련의 땅이라 이름 붙인 곳이다."

의아해하는 오크 소년을 향해 그가 말을 이었다.

"그곳으로 가거라. 그곳에 숨어 사는 오크들이 있다 들었다. 푸른 곰 부족이다."

오크 소년의 표정이 눈에 띠게 밝아졌다. 아직 노예가 아닌 동족이 남아 있었던가? 희망에 차 기뻐하던 소년이 갑자기 진지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

레펜하르트가 동요하며 물었다.

"전사가 함부로 고개를 숙여도 되는가?"

가슴에 손을 얹는 것은 경의를 표하는 것, 하지만 고개를 숙이는 것은 절대적 굴복을 의미한다.

소년의 말투가 다시 바뀌었다.

"그대는 나를 구해 주고 새롭게 길까지 열어 주었습니다. 이제 그대는 나의 멘토이니, 기회가 된다면 그대를 위해 검을 들겠습니다."

오크들의 문화로 멘토는 인생의 지도자, 공경하는 자라는 의미가 있다. 인간의 '주인'과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개념인데, 철저히 복종하지만 결코 긍지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점이 노예와는 달랐다. 인간으로 치면 군주와 기사 관계랄까?

하여튼 최상의 예의를 갖췄다 할 수 있다. 그리고 경우에 어긋나지도 않는다. 살짝 감동하는 레펜하르트를 향해 오크 소년이 정중히 물었다.

"은인의 이름을 물어도 되겠습니까?"

"난...."

레펜하르트는 잠시 주저했다. 그는 원래 델피아의 마탑에서 받은 성인 윈스톤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새로운 생이 펼쳐졌으니....

"내 이름은 레펜하르트. 레펜하르트 왈드 안타레스다."

룬어로 왈드 안타레스는 안타레스의 통치자란 의미. 그는 이제부터 저것을 자신의 성으로 쓰기로 결심했다. 그가 걸어야 할 길이 바로 그것이었으니까.

"레펜하르트 왈드 안타레스. 그 이름, 잊지 않겠소."

오크 소년이 어색한 인간 발음으로 레펜하르트의 이름을 되뇌었다. 그리고 발길을 돌리며 작별을 고했다.

"그럼 이만."

"아, 잘 가게."

일단 마음먹으면 주저하지 않는다. 오크 소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남동쪽을 향해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보다 말고 문득 레펜하르트가 외쳤다.

"아, 참! 그대의 이름은?"

생각해 보니 소년의 이름도 묻지 않았다. 멀어져 가며 오크 소년이 소리쳐 답했다.

"나는 크로타의 아들이자 라트의 도끼를 물려받은 자, 타시드라 하오!"

"엉?"

순간 레펜하르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쩐지 아까부터 이상하게 마음에 들고 어색하지도 않다 했더니!

"저 녀석, 타시드였어?"

그의 사천왕 중 하나였던 오크 대전사 타시드.

푸른 곰 부족의 족장이었고 결국 모든 오크들의 대족장이었던 사내.

레펜하르트는 멍하게 오크 소년이 사라진 숲 속을 바라보았다. 소년은 어느새 숲 저편으로 맹렬히 뛰어가고 있었다.

그가 알려 준 길, 그가 가야 할 동족들을 향해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만 바라보며 달려간다.

"신기한 인연이네."

운명의 힘을 새삼 느끼며 레펜하르트는 의아해했다. 혹시 왕년 테스론도 타시드를 만났던 걸까? 하지만 그의 성정을 생각하면 어린 오크를 발견하고 도와주었을 리가 없다. 아마도 레펜하르트가 이 자리를 택함으로서 운명이 꼬인 것 같았다. 사실 이 자리는 무술을 수련하는 데는 그리 유용하지 않으니까. 그는 어디까지나 마법 수련을 위해 이 폭포 옆 공터를 택했다.

하여튼 신기했다.

"하하하...."

절로 미소가 떠오른다. 그리움이 밀려든다. 당장이라도 저 소년의 뒤를 쫓아 그를 붙잡고 싶은 충동이 인다.

하지만 이내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지.'

그의 충실한 부하이자 친우는 지금 자신의 운명을 걷고 있다. 그 길을 방해해선 안 된다. 다행히 그가 알려 준 푸른 곰 부족은 타시드가 원래 있었던 장소, 크게 운명을 뒤틀진 않았을 것이다.

멀어지는 타시드의 기척을 느끼며 레펜하르트는 아련하게 중얼거렸다.

"언젠가 다시 만나자꾸나. 나의 친우, 나의 형제, 용맹한 전사의 후예여."

4

타시드와의 기이한 인연이 있고서 또다시 반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산속은 새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소복이 쌓인 눈이 모든 것을 덮고 그 위로 칼날 같은 겨울바람이 사납게 휘몰아친다. 두껍게 얼어붙은 산속의 호숫가, 입김마저 얼어 버릴 것 같은 그 매서운 추위 속에서 두 남자가 손 속을 나누고 있었다.

"받아 보아라, 제자야!"

거구의 근육질 노인이 웅혼한 정권을 내지른다. 상대적으로 작아 보이는, 하지만 일반인이 보기엔 충분히 거구인 근육질 청년이 정권을 피하며 팔꿈치를 올려 친다.

"이 정도쯤이야!"

얼굴을 쪼개 버릴 듯한 강렬한 엘보 블로우를 가볍게 피하며 노인이 껄껄 웃었다. 이 추위에도 불구, 둘 다 상의는 걸치지도 않은 채 가벼운 반바지만 입은 차림이었다. 보기만 해도 소름이 절로 돋는 모습이었지만 정작 두 사람의 전신은 땀으로 얼룩져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제법이구나!"

감탄사를 외치며 노인, 제라드가 다시 손끝을 세워 제자의 옆구리를 찔러 갔다. 늑골을 부수고 내장을 헤집을 가공할 일격이었다. 저런 걸 부담 없이 날리다니, 모르는 사람이 보면 무슨 사생결단을 내야 할 철천지원수 사이처럼 보이리라.

"헉! 너무한 거 아닙니까, 사부?"

하지만 엄살을 피우면서도 청년, 레펜하르트는 슬쩍 몸을 비트는 것만으로 공격을 흘려 냈다. 그리고 재차 몸을 날려 단숨에 다섯 발의 킥을 제라드의 전신에 꽂았다.

퍼퍼퍼퍼퍽!

요란한 타격음이 울리며 제라드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난다. 허점을 놓치지 않고 레펜하르트는 바로 근접전을 시도, 사정없이 펀치와 킥을 쏟아냈다. 제라드도 가뿐히 공격들을 걷어 내며 반격해 갔다.

"타아앗!"

"허업!"

두 근육질 사제師弟들은 그렇게 한참 동안이나 팽팽한 대결을 벌였다. 어느새 둘 다 전신에 눈부신 황금빛 오러를 감싼 상태였다. 주먹과 발길질이 오가며 그 여파만으로 땅이 파헤쳐져 서리 낀 흙더미가 여기저기 나부낀다. 오러를 각성한 지 슬슬 4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 레펜하르트는 오러를 쓰는 제라드와 대련이 가능할 정도로 무시무시하게 성장해 있었다.

"좋다, 아주 좋아!"

제라드는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레펜하르트를 가르친 지 어느새 10년째, 그의 제자는 기대 이상으로 훌륭한 무투가가 되어 주었다. 뭐, 정확히는 테스론을 한 4년 가르치고 그다음에 레펜하르트를 6년 정도 가르친 것이니 살짝 착각하고 있다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어차피 그에게 제자라 함은 '튼튼한 몸뚱이'를 가리키는 것이므로 딱히 문제는 없다.

"이것도 받아 보아라, 레펜하르트!"

이제 제라드도 자신의 제자를 레펜하르트라고 부르고 있었다.

애가 하도 맞다가 머리가 어떻게 된 건지, 자꾸 자신이 테스론이 아니라 레펜하르트라고 우겼던 것이다. 소중한 제자가 저리도 원하니 그는 흔쾌히 제자의 이름을 레펜하르트로 고쳐 불러 주었다. 이 당대의 권왕께서는, 육체만 튼튼하면 정신은 좀 오락가락해도 된다는 마초적인 대범함을 지니고 있었다.

"흐읍!"

숨을 들이쉬며 제라드가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리고 굵직한 음성을 내뱉었다.

"기격탄氣擊彈!"

순간 황금의 오러가 노인의 주먹에 집중되더니 대포처럼 쏘아졌다. 날아오는 기격탄을 본 레펜하르트의 눈빛이 순간 빛났다. 그가 양팔을 들어 전신을 방어했다. 동시에 오러가 치솟아 나선형으로 회전하며 온몸을 감쌌다.

콰앙!

제라드가 쏜 기격탄이 회전하는 오러에 튕겨 저만치 날아가 대폭발을 일으켰다. 얼어붙어 돌처럼 단단해진 땅이 움푹 파이는 것이 이 기격탄의 위력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흩날리는 파편 속에서 제라드가 웃으며 두 손을 내렸다.

"스파이럴 가드가 경지에 올랐구나."

히죽 웃으며 레펜하르트도 자세를 풀었다. 대련을 마치고 몸을 푸는 제자를 보며 제라드가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좋구나, 상당히 늘었어. 그런데...."

문득 제라드가 눈을 흘기며 레펜하르트의 전신을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탄식했다.

"어째 아직도 이리 작단 말이냐?"

순간 레펜하르트는 헛웃음을 흘렸다. 현재 그의 신장은 1.9미터가 살짝 넘은 상태다. 작기는 개뿔? 전생의 육체에 비하면 머리 하나는 더 크다.

하지만 제라드는 짐 언브레이커블의 문도라면 응당 2미터는 기본으로 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 그의 신장은 2.5미터고 레펜하르트가 전생에 만났던 테스론도 2.3미터는 넘었었다.

"가르쳐 준 호흡법은 제대로 하고 있느냐? 밥도 제대로 챙겨 먹이는데 어째서 이리도 안 크는지 모르겠구나."

자고로 무인, 특히나 권사에게 있어 육체 사이즈 또한 전투력을 결정짓는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니만큼 짐 언브레이커블에는 육체 성장을 촉진시키는 특유의 호흡법과 오러 운용법이 있었다. 레펜하르트가 오러를 깨우친 지 어언 4년이 넘었으니 못해도 지금쯤 2미터는 훌쩍 넘었어야 했다.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제라드를 향해 레펜하르트가 죄송스러운 태도로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래도 체질적인 문제인 듯합니다, 사부."

"그런가? 쩝."

아쉬워하는 제라드를 보던 레펜하르트는 슬그머니 시선을 외면했다.

'미쳤어? 여기서 더 커지라고?'

사실 그는 육체 성장 호흡법을 전혀 하지 않았다. 매일 하는 척하면서 대신 마법적인 명상으로 마력을 모으는 데 치중했다. 지금도 이미 대륙 평균 신장에서 20센티미터는 훌쩍 넘은 몸이다. 여기서 더 커지고 싶은 생각은 절대 없었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신체 건강하고 체술에도 능한 마법사지, 결코 걸어 다니는 석상이 아니다.

'그나마 남은 마지막 인간다움을 버릴 순 없지 않겠습니까요, 사부.'

아쉬운 듯 혀를 차다가 제라드가 몸을 일으켰다. 아쉽긴 하지만 그는 오래 산 사람답게 세상 일이 모두 마음먹은 대로 되지는 않는다는 걸 잘 이해하고 있었다.

'쪼그매도 알차게 튼튼하면 되지, 뭐.'

두 사람은 얼어붙은 호숫가로 자리를 옮겼다. 한겨울의 매서운 추위가 이어진 이 산속의 호숫가는 얼음 두께만 1미터 넘게 단단히 얼어붙어 있었다.

호수 가장자리에 서서 제라드가 레펜하르트에게 손짓했다.

"그럼 마지막 결과를 보자꾸나. 시작하거라!"

"네, 사부."

호흡을 고르며 레펜하르트는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뛰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그동안 익혀 왔던 모든 무의 깨달음을 한 점 주먹에 싣는다.

"캘러미티 혼."

나직한 한마디와 함께 레펜하르트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이어서 황금의 오러가 폭발하며 유성처럼 얼어붙은 호수를 향해 내리꽂힌다.

"타아앗!"

주먹을 내지른다. 오러의 파문이 연달아 이어진다. 하나, 둘, 셋....

'넷!'

네 개의 오러 파문을 몸에 두른 채 레펜하르트는 그대로 얼어붙은 호수를 내리쳤다. 호수 전체가 우직 일그러지며 거대한 구덩이가 움푹 파인다. 대지가 진동하며 빛의 파동이 그의 주먹으로 수렴한다.

웅웅웅웅!

네 줄기 굉음이 울리며 파문이 연달아 호수를 강타했다.

콰콰콰쾅!

집채만 한 얼음 조각이 무수히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솟구친 물줄기가 역류하는 폭포처럼 허공을 때린 뒤 비가 되어 사방으로 내렸다. 단숨에 호수 수량을 3분의 1로 줄여버리는 대파괴를 저지른 레펜하르트는 충격의 반동으로 다시 허공에 떠올라 있었다.

'해냈다! 4중첩 캘러미티 혼!'

얼굴 가득 숨길 수 없는 희열의 빛이 감돌았다. 쏟아지는 물줄기와 얼음 파편 속에서, 그는 통쾌하게 웃었다.

"하하하하!"

짝짝짝짝....

처음으로 그의 사부가 박수를 쳐 준다. 현 레펜하르트의 경지를 확실하게 인정한 것이다. 뿌듯한 감동이 전신으로 흘렀다.

제자리로 돌아온 제자를 보며 제라드가 푸근하게 미소 지었다.

"좋아, 이 정도면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진 않겠다."

맨몸으로 강철검도 튕기고 맨주먹으로 절벽에 구멍도 뚫는 레펜하르트가 어디 가서 맞지 않는 수준이면 결코 사람 살 곳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굳이 따지지 않았다. 드디어 목표를 이룬 지금, 그는 오직 성공의 쾌감만을 한껏 만끽하고 있었다.

흥분한 제자의 모습을 보며 제라드가 만족과 아쉬움을 섞은 나직한 목소리를 흘렸다.

"슬슬, 세상으로 나갈 때가 되었구나...."

☆ ☆ ☆

통나무를 거칠게 깎아 만든 단순한 구조의 마루, 그 윗자리에 제라드가 근엄하게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레펜하르트가 공손히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동안 고생이 많았다, 제자야."

제라드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레펜하르트, 네가 경지에 이르렀으니 이제 네 인생은 너의 것이다. 마음 가는 대로 살아가거라. 선인이 되건 악인이 되건 개의치 않는다. 네가 원하는 삶을 살아라. 그것이 그동안 행했던 수행에 대한 대가다."

짐 언브레이커블에는 다른 무문처럼 무와 심성을 함께 닦아야 한다거나 하는 그런 번지르르한 말치레는 없다. 힘을 얻기 위해 노력한 자, 그 노력의 대가만큼 인생을 즐길 자격이 있다는 것이 이 무문의 사고방식이었다.

그리고 제라드도, 말은 저렇게 해도 진짜로 제자가 치졸한 악당이 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자고로 자신의 아픔을 아는 자는 타인의 아픔도 이해한다 하지 않았던가?

'우리 무문만큼 자신의 아픔을 통렬하게 실감하는 이도 대륙에 별로 없지.'

그래서 그는 제자의 심성에 대해선 전혀 걱정하지 않고 있었다.

"단, 세 가지만 명심하거라."

그리고 제라드는 잠시 헛기침을 했다. 감회가 새로웠던 것이다. 60년 전, 그의 사부가 했던 말을 지금 자신이 제자에게 하고 있다.

"첫 번째, 재물을 모으는 것은 좋지만 되도록 불의한 재물은 취하지 말 거라."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악인이 되어도 좋다면서요?"

제라드는 피식 웃었다. 어쩜 이리도 똑같누. 그도 하산할 때 저 소릴 듣고 똑같은 질문을 했었다. 역시 사람 생각하는 게 다 거기서 거기인 모양이다.

"이왕 악인이 될 거라면 품격 높은 악인이 되란 소리다. 우리 무문의 계승자라면 악인이 되어도 좀 폼 나는 악인이 되어야지."

'괴상한 사상이로세.'

속으로 혀를 차는 레펜하르트를 내려다보며 제라드가 말을 이었다.

"두 번째, 되도록 억울한 이의 편에 서거라. 아까야 악인이 되어도 좋다 했지만, 이왕이면 칭찬받고 사는 게 좋지 않겠느냐?"

예상대로 제자는 이번에도 60년 전 자신과 똑같은 질문을 던진다.

"억울한 자? 약한 자의 편에 서는 게 아니고요?"

제라드는 빙그레 웃으며 사부가 자신에게 했던 대답을 되풀이해 주었다.

"약한 자라 해서 그가 반드시 억울한 자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리고 세상에 너보다 강자는 이제 얼마 없느니 모두가 약자일 터. 그렇다면 대체 무슨 기준으로 강자와 약자를 구별할 셈이냐?"

듣고 보니 그럴듯한 말이었다. 레펜하르트는 납득했다.

"그리고 세 번째, 사실은 이게 가장 중요하다."

문득 제라드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결코 짐 언브레이커블의 무맥武脈이 끊기게 해서는 안 된다. 가장 중요한, 가장 큰 의무이니 너는 반드시 제자를 찾아 이 위대한 가르침을 계승해야 하느니라. 알겠느냐?"

제라드는 근엄한 어조로 신신당부하며 제자에게 다짐을 시켰다. 사실 앞의 두 가지는 그냥 달랑 하나만 말하면 심심하니 덧붙인 곁가지나 다름없었다. 진정 중요한 의무는 단 하나뿐, 바로 제자를 두어 무맥을 잇는 것뿐이다.

레펜하르트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부. 반드시 이행하겠습니다."

대답은 찰떡같이 짝짝 달라붙게 했지만, 그의 속생각은 조금 달랐다. 솔직히 이런 흉악한 가르침은 대가 끊겨도 별로 아쉬울 게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제라드가 그를 수련시키며 들였던 노고를 생각하면 제자를 키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고생도 고생이거니와 돈이 좀 많이 들어야지? 하지만 제라드가 그에게 보여 준 무조건적인 애정이 있기에 대놓고 반대하자니 역시 좀 찜찜하다.

그래서 레펜하르트는 내심 적당히 타협하기로 마음먹었다.

'자질을 가진 아이가 나타난다면, 그리고 제국을 재건하고 여유가 생긴다면 그땐 제자를 키우도록 하지요, 사부. 하지만 약속은 못 드리겠습니다.'

제자의 표정을 중대한 책무를 짊어진 자의 부담감으로 해석했는지 제라드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허, 너무 심각하게 생각할 건 없다. 입맛에 맞는 재질을 가진 아이가 그리 쉽게 찾아질 것 같으냐? 내 너를 만나는 데 30년이 걸렸다. 저 일에 평생을 매달릴 필요는 없다. 그저 네 삶을 살다 인연이 있으면 자질 가진 아이가 보일 것이다. 그것을 놓치지 말거라. 내가 원하는 것은 그것뿐이다."

말을 마치더니 제라드가 곁에 둔 보따리 하나를 던졌다.

"받아라, 대충 옷가지와 여비를 좀 챙겨 넣었다. 당분간 쓸 정도는 될 것이다."

돈 이야기가 나오자 레펜하르트는 반색을 하며 보따리를 받았다. 그리고 슬그머니 보따리에 든 주머니를 풀어 보았다. 은화 서른 닢이 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순간 그는 실망했다.

'엥? 고작 요건가?'

사실 은화 서른 닢이면 어지간한 평민의 반년 치 생활비에 해당하니 결코 적은 돈은 아니다. 하지만....

'챙겨 둔 재산도 많으시면서 좀 더 푸시지, 쩝.'

그가 아는 제라드는 상당한 부자였다. 젊은 시절부터 제라드는 모험가로 대륙을 누비며 각종 고대 유적을 탐사하고 거기서 얻은 아티팩트들을 팔아 엄청난 부를 이루었다. 나이 든 후에도 여러 상회를 통해 재테크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니, 겉보기와 달리 이 근육질 노인은 바실리 왕국 내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부호였던 것이다. 제자 도망 못 가게 감시하느라 이런 인적 드문 곳에 거처를 마련하긴 했지만 사실은 왕국 수도에 근사한 저택도 따로 있었다.

절로 불만 어린 눈빛을 한 레펜하르트를 보며 제라드가 낄낄거렸다.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젊은 놈이건 늙은 놈이건 자고로 주머니가 두둑하면 인간은 게을러지기 마련이다. 돈이 없어야 주먹 쓸 일도 생길 것이고 그래야 네 기량도 더욱 발전할 것 아니겠느냐?"

사실 제라드도 딱히 돈에 연연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하지만 짐 언브레이커블은 제자를 키우는 데 막대한 재물이 들어가므로 역대의 권왕들은 모두 젊은 시절부터 부지런히 재산을 축적해 둘 의무가 있었다. 실제로 그는 지금 레펜하르트를 교육시키며 모아 두었던 재산을 절반 이상 까먹은 후였다.

"그래도 그렇지, 은화 서른 닢은... 쩝."

이해는 하면서도 레펜하르트는 연신 혀를 찼다. 수련할 때 썼던 치유용 목욕물 값도 이것의 열 배는 넘는다.

"그냥 받아라, 좀. 나도 더 주고는 싶은데, 원래 우리 무문엔 하산 시 제자에게 내주는 여비도 미리 책정되어 있다. 내가 하산할 땐 은화 25닢이었어. 그래도 물가 오른 거 감안해서 시가대로 준 거다."

어째 말하다 보니 무슨 머슴 새경 셈하는 말투가 되어 버렸다. 수염을 쓰다듬으며 제라드는 헛기침을 컴컴 해 댔다.

'하여튼, 감동적인 하산 장면에 꼭 셈 타령 들어가는 것도 우리 무문의 전통이라니까. 쩝.'

어쨌거나 주는 것이니 감사히 받아야지. 보따리를 챙기며 레펜하르트가 제라드에게 농담을 걸었다.

"그래도 하산하는 제자에게 선물 하나 안 주십니까?"

"하하핫!"

껄껄 웃더니 제라드가 품에서 양피지 하나를 꺼내 던졌다. 척 받으며 레펜하르트가 물었다.

"뭡니까?"

펼쳐 보니 웬 지도였다. 복잡한 산세의 지형이 양피지 위에 그려져 있고 가운데 X 표시가 되어 있었다. 지도 위쪽에 세텔라드 산맥이라고 친절하게 적힌 것도 보였다. 세탈라드 산맥이라면 대륙 북서부에 위치한 험지다.

"나중에 근처 갈 일 있으면 들러 보아라. 내, 그곳에 작은 선물을 하나 마련해 놓았다."

"사, 사부...."

아무래도 가르침 상 돈으로는 못 주니 이런 편법으로라도 제자를 챙겨 주고 싶어 한 것 같다.

'하여튼 사람은 정말 좋다니까....'

왠지 눈시울이 뜨거워져 레펜하르트는 애써 화제를 돌렸다.

"참, 제가 하산하면 사부님께선 어쩌시렵니까?"

제라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

어차피 이곳은 임시 거처이니 볼 일이 끝난 사부의 행보가 궁금했다. 솔직히 말하면, 되도록 세상 나가서까지 만나고 싶진 않으니 피해 다닐 생각으로 물은 것이었다.

제라드가 느긋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평생의 업을 풀었으니 당분간 세상을 떠돌며 좀 쉬어야겠지. 그리고 혹시 쓸 만한 자질을 가진 아이가 보이면 데리고 와서 또 가르쳐야겠고."

"우리 무문, 일인전승一人傳承이 아니었습니까? 제자를 또 들이시게요?"

"누가 우리 무문이 일인전승이라 했더냐?"

생각해 보니 제라드는 한 번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원체 수련법을 견딜 자질의 소유자가 한 세대에 하나 나오면 기적이다 보니 제자 둘 키울 여력이 안 될 뿐, 짐 언브레이커블은 사실 문호를 널리 열어 놓고 있었다.

필요한 것은 오로지 자질뿐. 심성도 혈통도 가문도 재산도 안 본다. 생각해 보면 엄청나게 공평한 무문 아닌가? 그저 들어오면 다 죽어서 나가니 함부로 들이질 못할 뿐이다.

"사실은 이 좋은 가르침을 대륙 널리 전파하고 싶은데, 다들 너무 허약해서...."

'글쎄, 그 기준이면 세상에 안 허약한 사람 하나도 없다니까요....'

쓴웃음을 지으며 레펜하르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떠날 시간이었다.

"가 보겠습니다, 스승님."

"하산을 축하한다, 제자야."

사나이의 이별은 쿨해야 하는 법. 레펜하르트는 말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공터 너머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요란한 발걸음이 점점 멀어졌다.

"하하하하핫!"

은색 수염을 휘날리며 제라드는 통쾌하게 웃었다.

'사부, 드디어 당신께 받은 은혜를 돌려 드릴 수 있게 되었소.'

제라드는 시린 겨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사부가 하늘 위에서 만족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다시 제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뛰어가던 제자의 발걸음이 조금씩 느려진다.

가다 말고 자꾸 뒤를 돌아본다.

이해할 수 있었다. 그 고난과 고통의 시간 속에서 결국 힘을 손에 넣은 그의 제자가 지금 어떤 심정으로 하산하고 있을지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감격과 아쉬움이 뒤섞인 그 아련한 감정은 그 역시 60년 전 느껴 본 바가 있다.

"가거라, 제자야!"

제라드는 주먹을 들어 허공을 찔렀다.

콰아아앙!

전신에서 황금빛 오러가 일어나 하늘 높이 치솟았다. 빛의 기둥으로 하늘을 가르며 그는 세상으로 나가는 제자를 축복했다.

가거라, 제자야.

이별을 아쉬워하지 마라.

남자답게 앞만 보고 달려가거라.

너는 나의 제자, 지상에서 가장 위대한 가르침의 전수자이니라!

☆ ☆ ☆

'진짜 하산인 건가?'

레펜하르트는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진짜야? 나, 진짜 여기서 풀려난 거야?'

하도 고생을 과하게 했다 보니 도저히 진짜로 하산한다는 사실이 믿기질 않았다. 하도 이 상황만을 꿈꾸고 그리며 살아왔더니 지금도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레펜하르트는 산 아래로 내려가면서도 계속 뒤를 돌아보았다. 당장이라도 저 악마 같은 사부가 뒤쫓아 와서 그의 뒷목을 잡고 '으하하하! 농담 좀 해 봤다. 사실은 다음 단계 수련이 있었느니라!' 하며 광소를 터트릴 것 같았다.

그러는데, 갑자기 사부가 허공에 주먹을 번쩍 들고 애꿎은 하늘을 때려 대는 것이 아닌가?

우르릉!

사람이 허공에 주먹질을 했는데 엉뚱하게 천둥소리가 요란했다. 역시 저 양반은 인간도 아니다. 빛의 기둥이 선명하게 번쩍거리며 여기까지 비춰 왔다.

'어, 엄마야!'

순간 소름이 팍 돋았다. 어째, 내려가기 싫으면 좀 더 같이 지내자는 제스처 같기도 했다. 레펜하르트는 사색이 되어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다다다다!

언덕을 넘어 저 통나무집-이라 쓰고 지옥이라 읽는 저곳의 모습이 사라져도 저 빛의 기둥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그는 미친 듯이 뛰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두 개의 언덕을 지나 세 개의 개울을 넘고 숲 하나를 통째로 가로지른다.

아득히 멀리, 빛의 기둥조차도 보이지 않아 흐릿한 황금색 하늘만 아련한 거리에까지 와서야 레펜하르트는 비로소 뜀박질을 멈췄다.

비로소 실감이 났다.

"빠, 빠져나왔다."

눈물이 왈칵 솟았다.

진짜다. 진짜로 하산했다. 진짜로 저 지옥에서 벗어났다.

"으하하하하!"

그 자리에 서서 레펜하르트는 광소를 터트렸다. 한참을 그렇게 미친 듯이 웃고 나니 조금 정신이 들었다.

'그나저나 할 일이 많군.'

옛 마법의 힘도 되찾아야 하고 현재의 자신, 어린 레펜하르트가 어찌 되었는지도 확인해야 한다. 안타레스 제국을 재건하기 위한 준비도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의 시리스, 이제 곧 만날 수 있겠구나.'

눈을 빛내며 레펜하르트는 산을 내려갔다. 나무 사이에서 사이로 가볍게 뛰어가며 그가 단숨에 숲 저편으로 사라져 갔다.

제2장 고대의 유적

1

화려한 침실.

청금석을 깐 바닥이 잔잔한 빛을 뽐내고 사방의 새하얀 벽은 우아한 그림과 도자기로 장식되어 있다. 비단 카펫이 깔린 침실 한쪽 귀퉁이엔 백금과 보석으로 장식된 테이블이 자리한다.

침실 중앙에 놓인 화려한 침대에서 두 남녀가 서로를 안고 몸을 뉘이고 있었다. 차가운 인상의 잘생긴 중년 남자와 까무잡잡한 피부를 지닌 눈부신 미모의 엘프 여인이었다.

엘프 여인은 남자의 가슴에 머리를 베고 손끝으로 가슴팍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었다. 문득 중년 사내가 입을 열었다.

"왜 자꾸 더듬는 게냐?"

"그냥 좋아서요."

엘프 여인이 배시시 웃었다. 은빛 자수로 장식한 비단이 그녀를 덮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늘씬한 몸매를 감추진 못했다. 사내가 헛웃음을 흘리며 다시 물었다.

"삐쩍 마르기만 한 이 몸이 뭐가 그리 좋단 말이냐?"

여인이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이불이 스르륵 어깨 아래로 미끄러진다. 잔잔한 조명 아래, 잘 닦은 청동 거울 같은 매끈한 피부가 드러난다.

"섬세하고 날카로워 보이잖아요. 한 자루 잘 벼린 칼 같은...."

남자가 쓴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그는 그냥 삐쩍 마른 것이지 한 자루 칼날이니 하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았다.

사내의 두 뺨을 어루만지며 엘프 여인이 얼굴을 가져갔다. 이마에 부드럽게 키스하며 그녀가 속삭였다.

"그냥 엘프 남자들 같아서 좋아요. 그리고 레펜하르트 님의 가치는 그 위대한 정신에 있으니까요."

"허허허...."

중년 사내, 레펜하르트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손짓하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이리 오너라, 시리스."

"네에...."

청동 향로가 은은한 향을 방 안 가득 뿌린다. 부끄러워하며 여인은 사랑하는 남자의 품 안에 살며시 안겼다.

☆ ☆ ☆

바실리 왕국 남부, 크롬 시.

푸른 갈기 여관 2층 객실.

그곳에서 웃통을 벗은 한 청년이 방에 비치된 전신 거울에 몸을 비춰 보고 있었다. 문득 그가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미안해, 시리스... 나, 이런 몸이 되어 버렸어...."

35년 전의 기억 속 과거이자 25년 후의 미래인 그 시절을 생각하며 레펜하르트는 짙게 한숨을 내쉬었다. 잘 벼린 칼은 고사하고, 우악스러운 스톤 골렘을 연상케 하는 이 최종 병기 같은 육체를 보고 있자니 절로 한숨이 나온다.

'이거, 시리스를 다시 만난다 하더라도 날 좋아해 주려나 몰라?'

그래도 마음에 드는 점도 없진 않았다. 원래 엘프들은 기본적으로 인간보다 평균 신장이 큰 편이다. 여성인 시리스도 마찬가지라 전생의 그녀는 8등신의 완벽한 몸매에 훤칠한 키의 소유자였다.

쉽게 말해서 시리스가 전생의 레펜하르트보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더 컸다. 물론 그는 이미 외부의 시선에 구애받지 않는 나이였으니 딱히 신경 쓰진 않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남자다 보니 연인보다 키가 작다는 것이 은근히 콤플렉스였던 것이다.

'이젠 내가 훨씬 더 크지, 후후후.'

좋아하다 말고, 이런 동물적인 부분에서 좋아하는 자신을 깨닫고 레펜하르트는 다시 좌절에 빠졌다. 아무래도 짐 언브레이커블의 사상에 너무 물든 것 같다.

'아, 정신 차려야지.'

혀를 차며 그는 다시 옷을 걸쳤다.

하루도 안 되어 크롬 시에 도착한 그는 무려 하루에 은화 한 닢씩이나 하는 고급스러운 객실을 잡고 오랜만에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사람다운 식사도 하고 정신적 피로도 푸니 정말 세상 살 맛이 났다.

창밖을 내다보니 거리로 몇몇 행인이 오가는 것이 보인다. 겨울 추위에 옷가지를 여미고 종종 걸음으로 오가는 사람들. 특이한 점이라곤 전혀 없는 일상 풍경이지만, 산속에서 6년 가까이 살아온 그에겐 저것조차도 신기해 보일 지경이었다.

"하여튼 세상에 내려오니 좋기는 좋네."

문득 레펜하르트가 품을 뒤졌다. 그리고 돌돌 말린 작은 양피지 하나를 꺼냈다.

"그나저나...."

근처 잡화점에서 구입한 여행자용 대륙 전도全圖를 살펴보며 중얼거렸다.

"지금 시간대라면 분명 시리스는 여기 있을 건데...."

그의 시선이 지도 위쪽으로 향했다. 대륙 북부에 위치한 차탄 공국, 세틀라드 산맥의 지류에 자리 잡은 이 나라는 중간 무역으로 성세를 얻은 교역 국가였다. 그리고 각종 노예 매매가 대륙에서 가장 성행하는 곳이기도 했다.

'시리스....'

레펜하르트는 틈틈이 들었던 그녀의 과거를 떠올렸다.

전생의 연인이었던 하이엘프 여인, 시리스 발렌시아.

대륙 오지의 황야에서 간신히 숨어 살던 엘프들 사이에서 자라난 그녀는 스무 살, 인간으로 치면 고작 대여섯 살 정도의 나이에 노예 사냥꾼에게 붙잡혀 인간들 손에 떨어졌다. 너무 어려 상품 가치가 떨어지던 시리스를 노예 상인은 일단 훈련소로 넘겼고, 노예로서 훈련 받으며 유년기를 보냈다고 들었다.

"전생의 그녀가 백 살이 조금 안 되었었으니 지금이면 한 일흔 살 정도? 인간 기준으로 열예닐곱 살쯤 되었겠네."

결국 나이가 차자 돈 많은 인간에게 팔려 성적 노리개로 살아가던 시리스가 레펜하르트와 만나게 되는 것은 지금으로부터 10년 후,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된 그녀가 다시 웃게 되기까지는 거의 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었다.

사랑하는 여인의 얼굴을 떠올린 레펜하르트는 지도를 움켜쥐며 눈을 부라렸다.

"제국 재건도 좋고 마법을 되살리는 것도 좋지만...."

이게 제일 급하다. 시리스가 앞으로 어떤 꼴을 당할지 뻔히 아는데 어떻게 그냥 놔둘 수 있겠는가? 일단은 최우선적으로 그녀부터 구해 내고 봐야 한다.

"지금이 대륙력 984년, 시리스가 팔려 가려면 1년 정도 남았으니까... 아직은 차탄 공국에 있을 거야."

행보는 정해졌다. 레펜하르트는 지도를 거칠게 품 안에 구겨 넣었다. 그리고 잠시 고민했다.

'어쩔까? 당장 차탄 공국으로 가서 경매장을 박살내고 시리스를 꺼내 올까?'

예전의 레펜하르트였다면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덤으로 고통받는 다른 엘프들도 구할 수 있었겠지. 하지만 위대한 마법의 힘이 없는 지금 저건 너무 부담이 컸다.

뭐, 지금도 경매장 정도야 쉽게 박살 내고 시리스를 구할 수는 있다. 마법사가 아닌 무투가의 힘만으로도 저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그러면 항시 쫓기는 생활을 해야 했다. 마법의 힘을 되찾기 위해서는 되도록 거추장스러운 일을 피하는 게 좋다.

"아무래도 조용히 처리하는 것이 낫겠지? 쩝."

결국 레펜하르트는 시리스를 구매하기로 결심했다. 사랑하는 여인을 돈 주고 산다는 생각을 하니 실로 불쾌해졌지만, 현실이 이러니 어쩔 수가 없었다.

'돈이 필요하겠군.'

그것도 엄청난 금액의 돈이. 엘프 노예의 가격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리고 지금 그는 무일푼에 가깝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별로 돈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는 아직 체제를 바꿀 정도로 강하진 못했지만, 엘프 노예 하나 정도를 운명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할 정도의 힘은 충분히 지니고 있었다.

오러를 각성한 강인한 육체와 경지에 오른 체술,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미래를 알고 있다!

"가만있자, 대륙력 984년이면 분명 토드가...."

기억을 더듬던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분명 여기였어."

바실리 왕국 중부에 위치한, 중앙 가도를 따라 차탄 공국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살짝 벗어나 있는 하탄 산맥.

지도에 표시된 그곳을 바라보며 레펜하르트가 눈을 빛냈다.

☆ ☆ ☆

하탄 산맥 기슭의 작은 산촌, 캐틀 마을.

대부분의 화전민의 마을이 그렇듯, 이곳도 악덕 영주의 가혹한 수탈에서 도망친 이들이 일군 마을이었다. 비좁은 농지를 일구어 아슬아슬하게 입에 풀칠을 해 가며, 가끔 사냥과 채집으로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 하지만 깊은 산속임에도 몬스터의 영역과 살짝 벗어나 있어 비교적 평화로운 곳이기도 했다.

덕분에 빈곤한 평온 속에서 살아가던 이 캐틀 마을 사람들이 때아닌 재앙을 만난 것은 이틀 전이었다.

마을 중심에 위치한 마을 회관 앞.

"위, 위험합니다, 촌장님."

말이 좋아 회관이지 그냥 다른 집들보다 조금 더 큰 통나무집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캐틀 마을에서는 제일 화려한 이 목조 건물 앞에 네 명의 중년인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서 한 노인이 각오를 다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늙을 대로 늙어 얼굴에 삶의 풍상이 가득한, 참으로 볼품없어 보이는 노인이었다.

"난 괜찮네. 아무리 상대가 귀족이라도 할 말은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촌장님...."

걱정과 존경이 뒤섞인 시선을 뒤로하며 노인은 회관 앞에 허리를 숙인 채 말없이 기다렸다. 한참 후에야, 번쩍거리는 갑옷을 걸친 중년 사내가 걸어 나왔다. 올해로 마흔셋이 되는 이 중년인은 대대로 알티온 후작가, 바실리 왕국 내에서도 유서 깊은 가문을 보좌하는 기사, 에드워드 경이었다.

"무슨 일이냐, 촌장?"

노인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눈앞의 '때아닌 재앙'을 올려다보았다.

평화롭던 케틀 마을에 갑자기 나타난 한 무리의 기사들, 화려한 갑옷에 준마를 끌고 이 깊은 산속까지 들어온 이들은 자신이 왕도의 명문가, 알티온 후작가라 소개하며 대뜸 잠시 머무를 거처와 식량을 준비하라고 요구했다.

척 보기만 해도 살벌한 이 기사들 앞에서 고작 산골 촌민들이 감히 반항을 할 수는 없었다. 집 몇 채를 비우고 겨울을 날 식량을 모두 갖다 바쳤다. 스무 채도 안 되는 마을의 통나무집 중 커다란 집 다섯 채와 회관을 몽땅 차지한 뒤 이들은 계속 마을의 식량을 축내며 눌러앉아 있었다. 그야말로 기사 갑옷만 걸쳤지 산적이나 다름없었다. 그나마 기사다운 점은 마을 여인들을 탐하거나 하지 않는 정도?

당연히 마을은 난리가 났다. 잘 살던 자기 집에서 쫓겨난 이들이야 다른 집에 잠시 얹혀산다 치더라도, 저들이 먹어 치우는 식량이 없으면 촌민들은 모두 굶어 죽을 판이었다. 여름이었다면 사냥을 하거나 나무 열매를 따서라도 어떻게든 연명했겠지만 지금은 한겨울이다.

그래서 촌장은 겁먹은 상태로도 어떻게든 이 기사를 찾아온 것이었다. 저들에게서 식량값을 받아 내지 못하면 캐틀 마을은 이대로 전멸이었다.

"저기, 기사님들이 드신 식량을 값을 쳐주셔야...."

"응? 아아."

덜덜 떠는 촌장을 본 에드워드 경은 피식 웃었다. 위대한 기사의 행보에 한 손 거드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지는 못할망정 눈앞의 이익에 급급하다니, 정말 어리석기 짝이 없다. 알티온 후작가의 행보가 영웅담이 되어 음유시인들의 노래에 오르내리면 그 속에 캐틀 마을의 이름도 포함되는 크나큰 영광을 누리게 될 텐데 말이다.

'하여튼 명예도 모르는 천한 것들이란!'

하지만 에드워드는 자신이 관대한 기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품을 뒤져 금화 한 닢을 던져 주었다.

"옜다, 이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촌장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노인의 표정에 에드워드는 턱을 매만지며 자신의 관대함을 한껏 만끽했다.

'하긴, 이런 무지렁이 촌놈들이 어디 금화를 보기나 했겠어?'

그의 생각은 반은 맞고 맞은 틀렸다, 확실히 촌장은 금화를 처음 보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그 표정은 금화에 대한 놀람과 감탄이 아니었다.

"기, 기사님. 이 정도로는 도저히 기사님들이 드신 밥값도 안 나옵니다요...."

"뭣이라?"

순간 에드워드는 두 눈을 부라렸다.

'아니, 이 천한 것이 지금 기사를 상대로 흥정을 하려 한단 말인가?'

어이가 없어 분노가 일었다.

원래 이런 화전민의 마을은 정식으로 영지에 포함되지도 않은 시골 중의 시골, 그러므로 기사가 아무 말 없이 촌민들을 싹 죽이고 약탈해도 법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다. 영주의 보호를 버리고 도망간 것들이니 바실리 왕국의 법도 그들을 가호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것들에게 자비를 베풀었더니 이것들이 감히 흥정을 하려 해?

"네 이놈! 내가 귀족이라 시세도 모를 줄 아느냐?"

그가 이 마을에서 거둔 식량은 극히 질이 떨어져 고작해야 은화 백 닢 가치도 없는 것이었다. 금화 한 닢이면 실로 자비를 베푼 것이다.

"예, 그, 그게 무슨?"

당황하는 노인을 보며 에드워드는 확신했다. 이 더러운 늙은이가, 자신들 같은 화려한 기사들을 보니 아주 한밑천 단단히 뜯어내려는 비열한 생각을 품은 것이 틀림없었다. 감히 천민 주제에 귀족에게 바가지를 씌우려 해?

"기사를 우롱하려 하느냐!"

버럭 화를 내며 에드워는 노인을 한 대 후려쳤다. 뭐, 세게 친 것도 아니었다. 이런 어리석은 촌민이라 해도 바실리 왕국의 국민인 것은 틀림없으니 죽일 순 없었다. 그냥 가볍게 주제 파악을 할 정도면 된다.

"에구구구구!"

비명과 함께 노인이 얼굴을 감싸며 쓰러졌다. 주름진 손가락 사이로 선혈이 줄줄 흘러나왔다.

"촌장님!"

"아이고, 촌장님!"

떨어져 있던 촌민들이 허겁지겁 노인을 부축한다. 그 소란에, 회관 안에서 잘 생긴 20대 후반의 청년 한 명이 걸어 나왔다.

"무슨 일인가, 에드워드 경?"

"아, 별것 아닙니다, 스테반 공자님."

청년이 나오자 에드워드 경이 흠칫 놀라며 정중히 고개를 조아렸다.

알티온 후작가의 차남이자 레판토 자작의 작위를 지닌 이 청년, 스테반 폰 레판토 알티온은 귀족으로서도 그가 섬겨야 할 이였고 기사로서도 그의 상관이었다. 젊은 나이임에도 놀라운 검술을 지녀 '단호斷乎의 기사'란 칭호마저 얻은 이 청년은 이미 바실리 왕국 내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였다.

에드워드가 고개를 숙인 채 정중하게 고했다.

"아니, 천한 것들에게 금전을 좀 하사했더니 모자라다고 난리지 않습니까?"

"얼마나 주었기에?"

스테반은 의아해했다. 그가 아는 에드워드 경은 호탕한 기사여서 결코 사례금을 인색하게 주지 않았을 것이다.

"산골에서 힘들게 사는 이들이 가여워 금화 한 닢을 내려 주었습니다."

"응?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은가?"

현명한 스테반은 곧 상황을 파악했다. 듣고 보니 실로 괘씸했다. 청년의 얼굴에도 분노한 기색이 떠올랐다.

"허, 우리가 취한 분량이면 금화 한 닢으로도 남음이 있을 것인데. 참으로 비열한 것들이로다."

스테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자비를 베풀고도 감사를 받지 못한 수하 기사를 위로했다.

"이래서 천한 것들에게 함부로 자비를 베풀면 안 되는 법이오. 주제도 모르고 기어오르려 하니까."

"공자님 말씀이 옳습니다. 제가 큰 실수를 했군요."

태연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두 기사를 보며 노인은 눈물을 흘렸다.

아니! 운송비랑 인건비는 계산 안 하냐? 니들이 사는 도시에서야 이 정도가 금화 한 닢으로 충분했겠지만 여기서 식량값은 그 스무 배도 넘는단 말이다! 게다가 한겨울이라 식량 구입하려면 목숨 걸고 눈보라를 뚫고 지나가야 한다고!

하지만 촌장은 항변할 수 없었다. 두꺼운 강철 건틀릿에 강타당해 그나마 몇 안 남은 이빨이 몽창 나가 피를 줄줄 흘리고 있는데 어찌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결국 실신한 촌장을 마을 촌민들이 울며 데리고 갔다. 무심한 눈으로 그 뒷모습을 보다가 스테반은 다시 회관 안으로 들어갔다.

통나무로 대충 지어진, 휑하기만 한 회관 안에 놓인 가구는 볼품없는 침대와 테이블, 의자가 전부였다. 전부 이 마을에서 공수한 것이라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스테반은 눈살을 찌푸렸다. 왕도에 있는 그의 침실과 비교하면 이건 창고나 다름없다.

'하지만 진정한 기사라면 흙탕물 속에서도 잠들 수 있는 법이지.'

아, 이런 쓰레기 더미 속에서도 잠을 잘 수 있게 되다니! 스테반은 뿌듯해했다. 진정한 기사가 되어 가고 있는 자신이 대견스러웠다. 이 마을 사람들은 항시 이런 곳에서 산다는 점은 싹 무시했다.

회관 안쪽에 로브를 걸친 30대 중반의 사내가 명상에 잠겨 있었다. 스테반이 그를 불렀다.

"마법사 토드여."

사내가 눈을 뜨고 잽싸게 고개를 조아렸다.

"예, 공자님."

"유적의 위치는 아직이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산세가 험하고 겨울이다 보니 마나 기류가 고르지 못하여...."

난처해하는 토드를 보며 스테반은 한숨을 쉬었다.

"빨리 좀 찾아 주시오."

"예, 공자님."

마법사를 한차례 더 닦달한 뒤 그는 창가로 걸음을 옮겼다. 창틀에 몸을 기대 눈 덮인 산야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분명 이곳이 맞겠지?"

"확실합니다, 공자님."

어느새 곁에 다가온 에드워드 경이 확신에 찬 어조로 대꾸했다.

"이곳이 바로 위대한 검사, 클로드 폰 레오타스 알티온 경께서 묻힌 곳입니다."

☆ ☆ ☆

크롬 시를 출발한 지 사흘째, 레펜하르트는 등에 작은 배낭 하나를 짊어진 채 중앙 가도를 따라 걷고 있었다.

좌우로 펼쳐진 눈 덮인 들판, 간간히 보이는 나무들도 가지가 앙상하다. 바실리 왕국을 십자 형태로 횡, 종단하는 이 중앙 가도는 한겨울이라 그런지 다른 이들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경험 많은 행상들이라도 겨울에 자칫 눈보라를 만나면 길 위에서 객사하는 경우가 허다하니 감히 이 계절에 길을 걷는 여행자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이 미친 몸뚱이야 체력 하나는 끝내주니까."

신경 쓰지 않는 것치고는 꽤나 복장이 충실하다. 그는 두꺼운 털가죽 코트에 목도리까지 두른, 겨울 길을 걷는 모범적인 여행객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사실 현재 그의 육체라면 이 정도 추위쯤은 산들바람이나 다름없으니 굳이 이렇게 방한에 대비한 복장을 입을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한겨울에 셔츠 바람으로 돌아다니면 얼마나 눈길을 끌 것인가? 역대 권왕들이야 근육미도 자랑할 겸 한겨울에도 웃통 벗고 싸돌아다녔다곤 하지만, 인간미가 남아 있다고 자부하는 레펜하르트는 되도록 튀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코트값은 조금 아깝군."

이 옷값으로 은화 열 닢을 내고, 이것저것 여행에 필요한 물품들을 사고 났더니 이제 제라드에게 받은 여비는 절반 이하로 떨어져 있었다.

"그래도 이제 돈이야 금방 벌 수 있을 테니까."

레펜하르트는 실실 웃었다. 전생의 그는 젊은 시절, 대륙 각지를 떠돌며 유적 탐사자로 이름을 드높였다. 그리고 그 정보는 고스란히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다.

즉, 그는 향후 30년 이내에 새롭게 발견되는 모든 유적의 정보를 다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그 유적에서 어떤 물품이 나오는지도 다 알고 있다! 한마디로 돈 되는 유적만 골라 다니며 쏙쏙 알맹이만 빼먹을 수 있는 것이다!

'그나저나 이것 참 우연이구먼.'

뺨을 긁으며 레펜하르트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델피아의 마탑에서 한창 마법을 익히던 어린 시절의 일이었다. 마탑에 소속되어 있던, 유적 탐사를 전문으로 하는 토드란 마법사가 있었다. 어린 레펜하르트를 상당히 귀여워한 그는 마탑에 돌아올 때마다 자신의 무용담을 그에게 이야기해 주었고, 그 속에는 알티온 후작가와 함께 탐사한 하탄 산맥 근처의 유적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그 날짜가 하필 내 하산 날짜랑 딱 겹친단 말이야.'

지금의 빙풍좌의 달 14일이니 토드라면 하탄 산맥 근처 산촌에 머물고 있을 시기였다. 하도 옛날 일이다 보니 정확한 날짜까지 기억하는 건 무리였지만, 희대의 비기 '인공 주마등'이 있는 한 레펜하르트는 언제든지 과거의 일을 정확히 끄집어내 확인할 수 있다.

'분명 토드 이야기 듣고 나이 먹은 다음 나도 직접 탐사 가 봤었지. 음.'

원래 고대의 유적은 대부분 지형이 복잡하기 마련이라 이미 탐사되었다 해도 놓친 부분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 하탄 산맥의 유적 역시 마찬가지여서, 토드 일행이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놓쳤던 지하의 '진짜' 유물들을 챙겨 꽤 큰돈을 만졌던 기억이 났다.

"나온 거 다 팔아서 거의 금화 이천 닢 넘게 벌었으니 꽤 짭짤한 유적이었지, 후후후."

그래서 레펜하르트는 일부러 이쪽으로 행로를 잡았다.

하산 시기가 늦어져 이미 토드 일행이 유적을 털었다 해도 별문제는 없었다. 어차피 지하 쪽 유적은 미탐사되었을 테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다른 유적 찾아가면 그만이다. 차탄 공국으로 가는 길목엔 레펜하르트의 기억 속에만 미발굴된 고가의(?) 유적이 네 개나 더 있었다. 시기가 안 맞았다 해도 돈 버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었다.

단지 굳이 토드의 과거에 끼어들려는 이유는....

'이 기회에 이 시대의 내 몸에 대한 상황도 알아봐야지.'

토드는 어렸던 자신과 상당히 친했으니 이 시대의 레펜하르트에 대해서도 잘 파악하고 있으리라. 그를 만나면 어느 정도 정보를 기대할 수 있다.

그렇게 머릿속으로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며 계속 걷던 중이었다. 슬슬 지평선 너머 새하얀 산맥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눈 덮인 하탄 산맥이었다.

"슬슬 목적지가 보이는군."

레펜하르트는 이동 속도를 올렸다. 그리고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무지막지한 도약력으로 가도를 순식간에 가로지르며 그는 하탄 산맥을 향해 맹렬히 질주하기 시작했다.

한 시간 뒤, 레펜하르트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모습으로 언덕 위에서 작은 산촌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도에서 한참 떨어진 이 하탄 산맥까지 가로지르는 데 30분, 그리고 이 험한 산을 타고 캐틀 마을까지 오는 데 30분 정도밖에 안 걸린 것이다. 말을 타고 달려도 이렇게까지 빨리는 못 온다. 마법사였던 시절이라면 상상도 못 했을 이동 속도였다.

살짝, 아주 살짝 제라드에게 감사하며 레펜하르트는 마을을 살펴보았다.

"기억 그대로네."

캐틀 마을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여전히 허름하고 여전히 초라한 작은 산골 마을이었다. 원래대로라면 20년 뒤에나 이곳에 오게 될 텐데 그때 기억과 지금 광경이 거의 차이가 없다니, 정말 깡촌은 깡촌이다.

들짐승의 습격을 막기 위해 마을을 두른 부실한 목책, 그 안에 통나무집이 스무 채 정도 있고 한 가운데 커다란 회관이 세워져 있다. 그 회관을 노려보며 그는 잠시 정신을 집중했다.

"랄 타라 사키타 본. 매의 눈이 창공을 누빈다. 더블 와처."

시야를 두 배로 늘려 주는 1서클 원견遠見 주문, 더블 와처를 구사하니 회관 내 정경이 꽤 가까이까지 보였다. 좀 더 높은 서클의 주문을 구사했다면 회관 안쪽도 투시해 살필 수 있었겠지만, 아직 그 정도 수준에 오르진 못했다. 대신 레펜하르트는 그 상태로 기척을 감지했다.

'전사의 기운을 가진 인간 남자가 둘, 그리고 보통 남자가 둘. 하나는 소년이군. 그리고 오크가 셋이군. 노예겠지? 그리고 여자의 기척이 하나, 특유의 가벼운 발걸음이 느껴지는 걸 보니 엘프 여성이군. 이놈, 슬레이어Slayer도 데리고 다니나?'

자고로 미녀이면서 전투에도 강한 여검사는 남자들의 로망 중 하나다. 하지만 인간 여인의 경우 아무래도 수준급 전사가 되고 나면 남잔지 여잔지 영 구별이 안 가기 마련이다. 그러나 엘프의 경우는 다르다. 남자건 여자건, 어지간한 전사가 되어도 인간 기준으로 볼 땐 야리야리하고 예쁘장한 외모를 유지하는 것이다.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생기는 것이 세상의 이치인 법. 노예상들이 엘프들 중 재능이 있는 이들을 선별해 특별히 전투 훈련을 시켜 팔기 시작했다.

그것이 '슬레이어'였다.

미모의 여검사 엘프, 밤에는 성노로 쓰고 낮에는 호위로 쓸 수 있으니 효용도도 높고 무엇보다 남성들의 판타지를 충족시켜 준다! 그렇다 보니 어지간히 고위 귀족이라면 슬레이어 하나쯤은 데리고 사는 것이 유행이었다.

'하긴, 후작 가문 정도 되니 전용 슬레이어 하나쯤은 데리고 다니겠지.'

그는 계속 마을을 살폈다. 캐틀 마을 간의 거리는 거의 3~400미터, 이 정도면 아무리 그의 감각이 예민해도 기척을 느낄 수 없다. 그리고 현재의 마법 역시 초보적 수준이라 저기까지는 닿지 않는다. 하지만 무인 특유의 감각과 마법이 결합하니 어지간한 중급 이상의 원견 주문 효과가 나왔다.

'집집마다 전사의 기운을 가진 놈들이 다섯이 더 있군. 들었던 대로네.'

예상대로 알티온 후작가는 저 캐틀 마을에 묵고 있었다. 레펜하르트는 턱을 매만졌다. 단지 돈을 챙길 목적이면 저들을 앞질러 먼저 유적으로 향하거나, 아니면 떠나길 기다려 나중에 가거나 하면 되겠지만 그는 지금 토드에게 정보를 얻어 낼 필요가 있다. 하지만 생면부지의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 '나 당신들 일행에 좀 끼워 주쇼.'라고 해 봐야 미친놈 취급을 당할 뿐이다. 핑계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는 이미 그 핑계를 생각해 두었다.

'어디 보자....'

레펜하르트는 시선을 돌렸다. 마을 외곽의 그럭저럭 큰 통나무집, 그곳에 마을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는 것이 느껴졌다. 당황과 분노의 감정이 강하게 느껴지는 기운이었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 ☆ ☆

캐틀 마을에서 제일가는 사냥꾼, 테드의 오두막에 지금 십여 명의 마을 사람들이 모여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이제 어쩌면 좋단 말이오?"

모두들 얼굴 가득 수심이 깃든 모습이었다. 마을을 점거한 저 알티온인가 뭔가 하는 후작가가 식량과 물품을 빼앗아 가고 촌장님을 두들겨 팬 것도 모자라 다시 과도한 요구를 해 왔던 것이다.

"죽음의 골짜기는 결코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곳인데...."

캐틀 마을로부터 반나절 정도의 거리에 '죽음의 골짜기'라 불리는 금지된 계곡이 하나 있다. 실로 진부하기 짝이 없는 지명이지만 촌사람들이 붙인 이름에 대단한 것을 바라면 안 되는 법이다. 하여튼 근처만 가도 사람들이 족족 죽어 나가다 보니 캐틀 마을 내에선 벌써 몇 세대째 가까이 하면 안 된다는 불문율이 단단히 박힌 곳이었다.

그런데 저 기사 놈들이 거기까지 길 안내를 할 산사람 하나를 보내라며 요청을 한 것이다. 말이 좋아 요청이지 그냥 명령이다. 물론 마을 사람들은 절대 안 된다며 울상을 지어 보았지만....

"놈들이 길잡이를 하나 내놓으라고 하지 않았소? 거절하면 어찌 될지 몰라서 그러오?"

얼굴 반쪽이 퍼렇게 멍든 중년인 하나가 눈두덩을 매만지며 소리를 질렀다. 마을 대표로 가서 울상 짓다가 얻어맞은 흔적이었다.

"촌장님도 저렇게 되셨는데...."

"에잇, 더러운 귀족 놈들."

"입조심하시오! 저들이 들었다간 어찌 될지 모르오?"

"크으윽!"

마을 사람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서럽고 또 서러웠다. 힘이 없어 여기까지 쫓겨 온 더러운 팔자이거늘, 여기에서조차 힘이 없어 이런 꼴을 당하고 만다.

침울한 분위기가 오두막을 가득 메웠다. 한참 후, 제법 건장한 장년인 하나가 각오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내가, 내가 갔다 오겠소."

"테드! 자네가?"

"그래도 우리 마을에서 내가 제일 산을 잘 타잖소. 나 말고는 어차피 갈 사람도 없다는 거 잘 알고 있소."

그러니까 다른 집 놔두고 우리 집에서 이딴 회의를 하고 있는 것이겠지. 테드는 원망의 눈으로 마을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애초에 '네가 가라, 응?'이라는 티를 대놓고 내고 있었으면서 뭔 회의는 회의야?

테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벽에 걸어 놓았던 활을 집어 들었다. 그 당당한 모습에 곁에 서 있던 아낙네와 작은 소녀가 놀라 외쳤다.

"여보!"

"아빠!"

걱정 가득한 가족의 목소리가 들려오니 도로 몸이 굳는다. 테드는 이를 갈았다.

"크윽...."

분위기 타서 남자답게 일어나긴 했는데 정작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가기 싫다. 정말 가기 싫다. 마누라랑 자식 놔두고 그 위험한 곳에 가긴 절대 싫다. 그는 사냥꾼이었고, 그렇기에 죽음의 골짜기에 대한 위험도 누구보다 실감하고 있었다.

활을 집으려다 말고 테드가 주저하자 마을 사람들의 눈빛이 더더욱 반짝반짝 빛난다. 활을 잡아, 테드! 자네는 사나이가 아닌가! 사나이가 한 입으로 두말하면 안 되는 법일세!

어째 슬슬 협박 분위기가 되어 가는 오두막 안, 그렇게 테드가 이도 저도 못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창문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 제가 갈까요?"

"누, 누구요?"

모두 놀라 고개를 돌렸다. 혹시 기사들 중 하나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었나? 다들 안색이 새파래졌다. 안 그래도 더러운 귀족이니 뭐니 욕을 하고 있던 차였다. 저 기사들의 인격을 고려해 볼 때, 그냥 웃고 넘어갈 가능성은 한없이 제로에 수렴한다.

하지만 목소리의 주인공은 기사가 아니었다. 꽤나 날카로운 인상을 한, 두꺼운 코트 차림의 못 보던 청년이었다.

창문을 통해 청년이 태연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지나가던 여행자입니다. 우연히 이야기를 듣게 되어서요."

우연이라니? 세상 어느 여행자가 우연히 남의 집 처마 밑에 고개를 내민다냐? 말도 안 된다는 걸 마을 사람들도 알고 저 여행자도 알았지만, 다들 무시했다.

그보단 여행자가 내뱉은 말이 더 중요했다. 테드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이 근처 지리를 알고 계시오?"

"상당히 잘 알죠."

이미 한 번 와 봤으니까. 그리고 그때의 기억을 인공 주마등으로 깔끔하게 되살렸으니까.

"그럼 정말 죽음의 골짜기로 가겠다는 겁니까?"

"예전에 한번 들어가 본 적이 있어요."

정확히는 20년 후의 미래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지만.

테드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감격의 빛이 떠올랐다.

"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복 받을 거요, 젊은이."

마을 사람들 모두 기쁜 얼굴로 레펜하르트에게 감사를 표했다. 조금만 생각이란 걸 해 보면 무지하게 수상한 상황이란 걸 바로 느낄 텐데, 경계는커녕 대뜸 믿어 버린 것이다. 역시 산골에서 순박하게만 살아온 사람들이라 거기까진 생각이 미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도 순박한 사람들답게 바로 레펜하르트를 걱정해 주긴 했다.

"하지만 죽음의 골짜기에 들어가 살아 돌아온 사람이 없소이다. 정말 괜찮을는지...."

"한번 가 봤다니까요?"

태연한 레펜하르트의 태도에 다들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화색이 된 테드가 허겁지겁 문으로 달려갔다.

"그, 그럼 당장 저들에게 알리겠소이다!"

아무래도 신께서 내려 주신 이 구원자가 마음 바뀌기 전에 얼른 기사들에게 알려서 기정사실로 만들겠다는 심산인 듯했다. 분명 순박하긴 한데, 만만찮게 치사함도 엿보이는 모습이었다.

레펜하르트는 쓴웃음을 지으며 물끄러미 달려가는 중년 사냥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토드에게 들은 이야기대로라면, 저 사냥꾼은 유적 근처까지 가서 결국 몬스터의 습격을 받게 되고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 저 기사들은 이런 무지렁이 촌민의 안위까지 신경 쓰진 않았던 것이다.

'운 좋은 줄 알라고. 죽을 목숨 하나 살려 주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