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억류해 놓은 죄수들이 탈출했다는 걸 알고 잠시 당황하긴 했지만, 유서스는 금방 냉정을 되찾았다.
'어차피 상관없는 문제다.'
그 유물을 훔쳐 간 도둑은 눈앞에 있는 이자다. 그 유물을 가지고 있는―혹은 숨겨 놓았다면 그 위치를 알고 있을― 이도 이자다. 들러리들이 도망을 가건 말건 이자만 제압하면 상황은 끝나는 것이다. 반대로 이자를 제압하지 못한다면, 이 도둑이 동료들을 데리고 가는 것 역시 막을 수가 없다.
'이자만 쓰러트리면 돼!'
유서스는 눈을 빛냈다. 자신에 대한 불신의 눈빛도 이자를 제압하고 나면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이자만 쓰러트리면 모든 일이 해결된다!
"타아앗!"
마검 엘드란을 휘두르며 황금기사가 연거푸 검격을 날린다. 수많은 검광이 허공을 수놓으며 레펜하르트의 사방을 에워싼다.
하지만 상황은 유서스의 바람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애들도 탈출했겠다, 더 이상 시간 끌 필요가 없지...."
레펜하르트는 오러로 양팔을 강화한 채 날아드는 검날을 차분히 쳐 냈다. 그리고 스텝을 밟으며 짧게 펀치를 날리기 시작했다.
큰 동작은 필요 없다. 짧고 강렬하게, 정확한 포인트만을 노려 황금 갑옷 위를 두들긴다. 그때마다 충격파가 몸을 관통해 정확히 타격을 입힌다. 있는 힘껏 풀 스윙으로 펀치를 휘두른다면 설사 진금 엘드릴이라도 우그러트릴 수 있겠지.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짧은 잽만으로도 레펜하르트는 충분히 방어구를 관통해 상대의 몸에 타격을 입힐 수 있으니까.
'이건?'
유서스는 당황했다. 상대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지금까지처럼 큰 동작, 강력한 위력을 선보이며 오러를 한껏 흩뿌리던 모습이 아니다. 정확무비하게 상대만을 노리는, 효율적인 움직임이다.
유서스의 얼굴에 고통의 빛이 짙어졌다. 공방을 주고받을 때마다 점점 육체가 손상된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이미 내장이 두어 차례쯤 뒤집힌 것처럼 울렁이며 전신이 통증을 호소한다.
"크, 크으윽!"
레펜하르트의 공세가 더욱 매서워졌다. 사방에서 날아드는 펀치와 킥이 유서스의 전신을 쉴 새 없이 두들기고 있었다. 정신없이 밀리던 유서스가 문득 눈에 불을 켰다.
'이대로 밀리고만 있을 수는...!'
갑자기 유서스가 검을 크게 들었다. 복부에 보란 듯이 허점이 드러난다. 당연히 레펜하르트도 보란 듯이 후려갈겨 주었다. 충격파가 관통하며 갈비뼈가 와장창 부러진다.
"크윽!"
그러나 이번엔 유서스도 물러나지 않았다. 지독한 고통 속에서도 자세를 흐트러트리지 않고 바로 반격에 나선다. 아예 맞을 것을 각오하고, 몸을 던져 반격 기회를 노린 것이다.
살을 주고 뼈를 베는 정도가 아니라 뼈를 주고 상대의 숨통을 노리는, 실로 결사의 각오!
"울어라! 엘드란!"
마검에 각인된 마법을 일깨우며 유서스는 검을 세워 찌르기를 날렸다. 그의 신형이 섬광처럼 앞으로 쇄도해 갔다.
"하아앗!"
미끄러지듯 삽시간에 거리를 좁히며 황금의 칼날이 매서운 예기를 담아 레펜하르트의 어깨를 노린다. 대비하고 있던 레펜하르트가 재빨리 몸을 틀어 공격을 흘리며 좌장左掌을 뻗어 냈다. 오러가 일렁이며 충격파의 창이 유서스를 덮치는 그 순간.
"나는 수면에 비친 자, 그 모습이 일렁일지니!"
유서스의 몸이 흐릿해지더니 다섯 명으로 분리되었다. 환영 분신 마법, 미러 이미지mirror image였다. 단순한 눈속임이 아니라 다섯 명의 유서스 모두에게 확실한 기척이 느껴진다. 레펜하르트는 속으로 감탄을 흘렸다.
'이 친구, 확실히 오러 유저를 상대하는 법을 잘 알고 있구만. 마법사의 전술에 능숙하잖아?'
단순히 빛을 이용해 환상을 만드는 것 정도가 아니라, 본체의 존재감 역시 마법으로 복사 구현하는 미러 이미지는 오러 유저의 기감으로는 파악이 불가능하다. 레펜하르트도 왕년에 오러 유저를 상대할 때마다 이 마법을 구사해 짭짤하게 재미를 본 적이 있으니 모를 리가 없었다.
'확실히 오러 유저라면 바로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겠지.'
물론 그렇다고 모든 오러 유저에게 통용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존재감이 느껴진다 해도 환영은 환영일 뿐 실존하는 물질이 아닌 법. 검성 사이러스의 경우는 유일한 본체가 공기를 가르는 그 대기의 흐름을 읽어 바로 레펜하르트의 실체를 읽어 냈었다. 하지만 지금 레펜하르트의 기량으로 저런 어마어마한 흉내는 도저히 불가능하고.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쓰러트릴 수 있다!'
확신한 유서스가 최강의 한 수를 끌어냈다.
"깨어나라! 엘드란! 파괴의 빛을 뿌려라!"
다섯 명의 유서스가 다섯 외침을 터트리며 다섯 방향에서 일제히 덤벼든다. 모든 방향에서 확실한 존재감이 느껴진다. 내리꽂는 칼날에 실린 힘은 메트리얼 디스트로이, 오러를 끌어올린 레펜하르트라도 적중하면 일격에 치명상을 입을 8서클 고위 주문.
'하지만 말이지....'
레펜하르트는 조금도 주저치 않고 그들 중 한 명에게 돌진했다. 그리고 칼날을 피하며 유서스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유서스의 표정에 경악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남은 네 개의 칼날이 레펜하르트의 전신을 쑤셔댔지만 모두 허무하게 통과할 뿐. 레펜하르트는 조금의 의심도 없이 확실하게 유서스의 본체만을 골라낸 것이다.
퍼억!
레펜하르트의 주먹이 유서스의 어깨를 강타했다. 피를 뿌리며 유서스가 허공에서 빙글 돈다. 뒤이어 레펜하르트가 길게 뛰어차기를 날렸다. 오러를 실은 돌려 차기가 채찍처럼 허공에서 휘어 정확히 유서스의 목덜미에 적중했다.
"크윽!"
우당탕 하는 쇳소리와 함께 유서스는 바닥을 나뒹굴었다. 입에서 울컥 하고 핏물이 흘렀다.
"쿠, 쿨럭! 어떻게 바로 본체를?"
'기감으로야 파악이 힘들겠지만 마력 패턴이 완전히 다른데 모를 리가 있나?'
검을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키는 유서스를 보며 레펜하르트는 멋쩍은 듯 뺨을 긁었다.
미러 이미지는 어디까지나 마법사가 전사를 상대할 때 쓰는 주문이다. 같은 마법사, 상대가 마력을 읽을 수 있는 자라면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다.
'좀 사기 친 기분이긴 하지만 말이지....'
입가의 피를 훔치며 유서스가 두 눈을 부릅떴다.
"무슨 수를 썼는지 모르겠지만...."
언제나 근엄하던 그의 얼굴이 악귀처럼 잔뜩 일그러졌다.
"테네스의 검은 결코 패하지 않는다!"
유서스가 엘드란을 휘두르며 언령을 연달아 외쳐 댔다. 검으로 안 된다면 마법으로라도!
"폭염, 응집하며 적을 친다!"
수십 개의 파이어 볼이 열기를 뿌리며 날아든다. 더 이상 시간 끌 필요도 없겠다, 일일이 쳐 내기도 귀찮아져 레펜하르트가 오러를 끌어 올렸다. 황금빛 오러를 뿜어내고 그대로 회전! 거대한 빛의 소용돌이가 레펜하르트의 거구를 모조리 감쌌다.
"스파이럴 가드!"
모든 화염구가 사방으로 튕겨 나간다. 당황한 유서스가 바로 다음 주문을 준비했다.
"한설의 안개, 대지를 가린다!"
자욱한 냉기의 안개가 레펜하르트의 사방을 덮어 갔다. 확실히 펀치나 킥으로 안개를 쓰러트릴 수는 없겠지. 하지만 이번에도 레펜하르트의 대응은 똑같았다.
"스파이럴 가드!"
오러의 회오리가 냉기의 안개를 완전히 흩어 버린다. 유서스의 표정이 다급해졌다.
"바람, 화살이 된다! 겨울의 왕, 세상을 덮는다! 부식의 숨결, 허공을 흐른다!"
"스파이럴 가...."
결국 유서스는 폭발해 버렸다.
"아니, 대체 저 기술은 뭔데 종류 안 가리고 다 튕겨 버리는 거야!"
한편, 레펜하르트 역시 자신의 몸을 보며 새삼 혀를 차고 있었다.
'이건 뭐, 어지간한 건 다 스파이럴 가드로 때워지는구먼.'
마법의 속성도 구현 방식도 모두 무시하는 기법이라니? 지금 생각해 보면 테스론도 자신이 날린 마법, 어지간한 건 다 몸으로 때우면서 돌격해왔었다.
'뭐 이런 사기성 기술이 다 있냐?'
새삼 이런 기술을 개발한 짐 언브레이커블의 흉악성에 감탄이 나올 지경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 스파이럴 가드를 쓸 수 있는 오러 유저가 오직 짐 언브레이커블의 문도뿐이라는 점이랄까?
'모든 오러 유저가 이 기법을 쓸 수 있었다면 마법사들은 밥숟가락 놓았겠군.'
이 스파이럴 가드는 다른 오러 유저들은 구현이 불가능하다. 기법의 난이도가 높아서가 아니라, 워낙 무식한 기술이라서.
오러를 육체에 덧씌워 방어력을 높이는 것은 다른 오러 유저들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거기에 회전까지 싣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랬다간 그 힘에 휘말려 자신의 육체가 갈려 나갈 테니까. 그래서 검에 덧씌운 오러, 블레이드 오러를 회전시켜 위력을 증가시키는 이들은 제법 있지만 그걸 육체에까지 응용하는 오러 유저는 없었다.
오직 짐 언브레이커블, 육체가 '무기만큼' 단단한 그들만이 이걸 쓰고도 버틸 수 있는 것이다.
'뭐, 효과가 좋은 만큼 오러 소모량도 장난이 아니지만.'
실제로 조금 오래 유지했더니 은근 피로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역시 세상사 모두 장단점이 있는 법인 것 같다.
더 이상 마법이 날아오지 않자 레펜하르트는 슬그머니 스파이럴 가드를 거두었다. 슬슬 이 싸움을 끝낼 때다. 그는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후딱 이 친구 쓰러트리고 애들과 합류해야겠다.'
웅웅웅!
레펜하르트의 양 주먹이 백열하며 흔들린다. 그때마다 대기를 흔들어 웅장한 음향을 흘린다. 그의 전신에서 강렬한 기세가 솟구치듯 뿜어져 나왔다. 그 모습을 절망 어린 눈으로 보고 있던 유서스가 문득 분에 차 소리 질렀다.
"누구냐?"
"응?"
설마 이 황금빛 오러를 보고도 이제 와서 자신의 정체를 묻는 건가? 레펜하르트가 순간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서스가 다시 소리쳤다.
"뒤에 누가 있냐는 말이다!"
누구냐? 대체 누구의 사주를 받았기에 이 정도의 강자가 테네스 백작가를 적대한단 말인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유서스가 절규를 터트렸다. 물론 레펜하르트에게는 그저 뜬금없는 소리일 뿐이다.
그는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쓰러져 낑낑대는 로트 경이 보였다. 다시 앞을 보며 멍하니 대꾸했다.
"...당신 부관이 있는데?"
"나를 우롱하려는 셈이냐!"
"아니, 지금은 내가 우롱당하는 느낌이다만...."
도대체 뭔 소리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해할 여유는 없는 듯했다. 극도로 분노한 유서스가 최후의 힘을 터트리며 날아올랐으니까.
"으아아아!"
엘드라드에 깃든 마지막 마력을 모두 긁어모아 최후의 일격을 날린다.
"눈을 떠라, 엘드라드! 깨어나라, 엘드란! 만물을 부수는 힘을 내게 허락하라!"
유서스의 모습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황금빛 달이 뜬다. 무시무시한 마력이 엘드란에게로 모여든다. 레펜하르트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때 그거다!'
엘드라드 고유의 마법 술식, 단련을 거듭한 그의 육체를 단숨에 걸레짝으로 만들었던 그 극강의 일격이었다.
우렁찬 외침과 함께 황금빛 달에서 한 줄기 월광이 뻗어왔다.
"엘드릴의 빛!"
너울거리는 황금빛 오로라가 시야를 가득 메운다. 저 기술은 절대 경시할 수 없다. 그가 가진 최강의 카드로 맞서는 것이 안전하다!
판단을 내린 레펜하르트가 무릎을 살짝 굽혔다.
오른 주먹을 뒤로 뺀 채 전신의 오러를 주먹 끝으로 모은다.
전신의 힘을 두 다리에 실어 땅을 박찬다.
콰앙!
순간 그의 거구가 포탄처럼 쏘아 올라졌다. 공간을 찢고, 네 개의 오러 파문을 이끌며 파괴의 창이 되어 파괴의 월광을 향해 일권을 내지른다!
"캘러미티 혼!"
거대한 황금의 뿔이 내리꽂히던 파괴의 빛을 관통했다. 빛이 사방으로 갈라지며 지면을 파헤쳤다. 뒤이어 황금빛 파문이 연달아 한 점으로 모인다. 오러의 파동이 파괴의 빛에 구멍을 뚫고 레펜하르트를 인도한다. 그 끝에 있는 자, 유서스를 향해 레펜하르트는 정확히 정권을 찔러 넣었다.
"타아아앗!"
네 번째 오러 파문, 파괴의 뿔이 지닌 마지막 일격이 유서스의 몸통에 정확히 직격했다. 요란한 쇳소리와 함께 황금빛 파편이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 ☆ ☆
로트 경은 넋 나간 얼굴로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 어떻게...."
다른 테네스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유서스 님이...."
"엘드라드가...."
황금의 파편이 떨어지고 있었다. 현존하는 최강의 마도구, 마갑 엘드라드의 잔해였다. 인간의 힘으로는 결코 해할 수 없다고 믿었던, 진금 엘드릴로 만들어진 갑옷이 지금 박살이 나 사방에 흩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그들의 단장이 쓰러져 있었다. 절대 꺾이지 않으리라 믿었던, 그들의 꿈이자 우상이었던 이가 박살 난 갑옷을 입은 채 피를 흘리며 볼품없이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완전히 혼절했는지 눈을 까뒤집고 흰자위를 한껏 드러낸 모습이, 실로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악몽이었다.
테네스의 검이 꺾였다!
"으음...."
레펜하르트는 살짝 어깨를 움츠린 채 주변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쩌다보니 꽤나 거하게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만....
'좀 미안하긴 하네.'
엘류시온의 목소리를 훔친 것은 그리 미안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저들에게는 불필요한 물건일 테니까. 하지만 마갑 엘드라드를 부순 것은 솔직히 미안했다. 사실 레펜하르트도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단지 막판의 그 마법이 워낙 강력하다 보니 어쩔 수가 없었을 뿐.
그런 그의 눈에 문득 저만치에 떨어진 황금빛 검이 들어왔다. 유서스의 손에서 떨어져 나온 마검 엘드란이었다. 그걸 보니 미안한 감정이 조금 가셨다.
'저게 무사하면 엘드라드도 곧 복구가 되겠군.'
마갑 엘드라드를 구성하는 주요 술식은 모두 마검 엘드란에 속해 있다. 그리고 엘드라드 정도의 최상급 마도구에는 자가 복원 능력도 있었다. 그 술식의 원천인 엘드란이 무사하다면, 파편을 모아 붙여 엘드란과 함께 놔두면 결국 엘드라드도 원상태로 돌아올 것이다.
'한 반년쯤은 걸리겠지만 말이지....'
하여튼 굉장한 마도구다. 새삼 엘드라드의 위력을 실감하며 레펜하르트는 혀를 내둘렀다. 짐 언브레이커블의 최종 비기, 캘러미티 혼을 맞고도 착용자의 생명을 유지할 정도라니. 뭐, 유서스 안 죽게 하려고 모든 위력을 갑옷 쪽에 집중하긴 했지만 그렇다 해도 대단한 것은 대단한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문득 든 생각이 있었다.
'저거 시리스에게 들려 주면 꽤 좋을지도....'
마검 알티온 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알티온 정도야 마법만 되찾으면 얼마든지 찍어 낼 자신이 있었지만 엘드라드는 아니다. 솔직히 전생에서조차도 저만한 마도구는 거의 본 적이 없다. 10서클의 마법을 다룰 때조차 저 정도 수준의 마도구는 만들 엄두도 못 냈다. 저건 은의 시대 유물 중에서도 최상위급이다.
'어차피 엘드라드는 착용자의 신체 조건에 따라 변화하는 기능도 있으니까... 술식을 잠깐만 고치면 시리스 체형에 맞게 변형시킬 수도 있을 것이고....'
마갑 엘드라드가 착용자에 따라 형태가 변하는 범용성이 없었다면, 테네스 백작가가 대대로 물려받지도 못했겠지. 역대의 황금기사 신체 사이즈가 모두 동일한 것도 아닐 텐데.
'앞으로 반년 정도면 갑옷도 완전히 복구될 텐데... 게다가 마갑 엘드라드가 아니더라도 엘드란만으로도 엄청난 마검인 것은 분명하고....'
문득 머릿속에 한 영상이 떠올랐다.
전신에 황금의 갑주를 걸치고 마검을 휘두르며 화려한 검술과 강력한 마법을 연달아 구사하는 아리따운 미녀 엘프 마검사!
무지 잘 어울릴 것 같다....
'으, 으음 탐나잖아, 이거?'
일단 욕심이 생기고 나니 점점 엘드란이 탐이 난다. 레펜하르트가 묘한 눈으로 떨어진 엘드란을 바라보자 로트 경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저자, 역시 엘드란을 탐내는가!'
영지전 등을 벌일 경우, 상대의 무기를 전리품으로 챙겨 가는 것은 기사들 사이에도 흔한 일이다. 그리고 엘드란이라면 정체도 모르는 엘류시온의 목소리와 달리 누구나 인정하는 현 시대 최강의 마도구 중 하나. 욕심을 안 부리는 것이 이상했다.
로트 경은 창백해진 얼굴로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은의 현자에 대해 모르는 그의 입장에서 솔직히 저자가 훔쳐간 유물 따윈 전혀 관심도 없었다. 내심 별일도 아닌 걸 가지고 이렇게 일을 키운 유서스에 대한 의아함도 조금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엘드란은 다르다! 저건 테네스 백작가를 지탱하는 기둥이나 다름없는 힘! 저걸 잃는다면 테네스 백작가는 몰락한다!
그때 레펜하르트는 머리를 저었다.
'아니, 이러면 안 되지.'
어차피 도둑놈이라고 욕먹은 처지긴 하지만, 그래도 레펜하르트에게는 나름대로 명분이 있었다. 하지만 이걸 들고 가면 진짜 도둑놈이 되는 것이다. 아무리 뻔뻔해지자고 결심을 하긴 했다만, 그렇다고 막 나가자는 소리는 아니다.
게다가 이건 테네스 백작가의 신물 중의 신물, 저 가문을 지탱하는 가장 큰 힘이자 명예요, 상징이었다. 엘류시온의 목소리와는 전혀 상황이 다른 것이다. 저걸 들고 가는 순간 테네스 백작가는 모든 힘을 동원하여 그를 추적할 것이다.
즉, 엘드란을 취하려면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을 죽여야 한다.
'그렇게까지 할 이유는 전혀 없지.'
잠깐 탐욕에 흔들렸지만 레펜하르트는 이내 마음을 진정시켰다. 엘드란은 저들의 것이다. 엘류시온의 목소리가 그의 것인 것처럼.
'시리스에게는 전생에서처럼 성광검 메사이어를 챙겨 주면 되니까.'
마음을 굳힌 뒤 레펜하르트는 천천히 걸어가 엘드란을 집어 들었다. 테네스 가문의 모든 이들이 한껏 긴장하는 가운데, 그는 엘드란을 들고 잠시 유서스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혼절해 있는 그를 보며 조금 고민하다, 레펜하르트는 로트 경을 돌아보았다.
그에게 다가가 검을 건네며 레펜하르트가 슬쩍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오, 내게는 너무나 중요한 물건이라 이런 무도한 짓을 저질렀소."
로트 경은 멍한 얼굴로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뭐야? 단지 탐욕만으로 이런 일을 저지른 자가 아니었던가?'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미 테네스 기사단은 궤멸했고, 엘드란을 그냥 들고 간다 한들 제지할 수 있는 이가 아무도 없는데?
잠시 머뭇거리다가 로트 경은 마검 엘드란을 받아 들었다. 조심스레 검을 역수로 쥔다. 이는 그의 주군의 검, 결코 자신이 쥘 수 있는 무구가 아니었으니까.
"그, 그럼 전 이만...."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레펜하르트는 뒷걸음질을 쳤다. 어서 이 불편한 자리를 뜨고 싶었다.
그때였다.
"거기 서라!"
"응?"
상황 다 끝났는데 이제 와서 대체 누가 이리 뒷북을 치시나? 황당해하며 레펜하르트가 시선을 돌렸다.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기사 한 명이 검을 든 채 고함을 치고 있었다.
"아직이다! 아직 테네스의 검은 꺾이지 않았다!"
4
꽤나 젊어 보이는 기사였다. 나이는 20대 후반 정도? 차가운 인상에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며 기사가 레펜하르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검을 겨눈 자세에 절도가 있고 묘하게 걸음걸이가 안정되어 보였다. 레펜하르트가 눈을 껌뻑거렸다.
'저거, 그때 그 바보?'
어디선가 보았다 했더니 어제, 포위망에 갇혔을 때 혼자 설쳐서 그의 탈출에 지대한 도움을 준 고마운 젊은이다.
로트 경이 젊은 기사를 바라보더니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러스?"
러스가 한껏 긴장한 얼굴로 레펜하르트 앞에 섰다. 검 끝에서 예리한 전의가 피어오른다. 확실한 임전 태세, 로트 경이 기막혀하며 외쳤다.
"무슨 짓이냐, 러스!"
레펜하르트를 노려본 채 러스가 대답했다.
"나 역시 테네스의 검입니다. 아직 테네스의 검은 꺾이지 않았습니다!"
투지에 불타는 목소리였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용기를 잃지 않고 검을 드는 그 모습은 정녕 기사의 귀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하지만 로트 경은 그렇게 봐 주지 않았다.
'저 자식! 또 발작했구나!'
아니, 이미 유서스 경조차 쓰러진 와중에 대체 일개 기사가 뭘 할 수 있다는 건가? 기막혀하는 로트 경을 무시한 채 러스가 검을 똑바로 세웠다. 그리고 우렁찬 기합성을 터트리며 레펜하르트에게 돌격해 갔다.
"타아아앗!"
동시에 강렬한 내려 베기 일격! 오러 유저인 그조차 흠칫하게 만든 그 일격이 날아온다. 뭐, 그래 봤자 기술이 뻔한데 못 피할 리가 없다. 슬쩍 몸을 틀어 공격을 피하며 레펜하르트가 쓴웃음을 지었다.
'얘, 원래 이런 성격이었구나.'
어차피 내려 베기 하나밖에 없는 검사였으니 신경 쓸 필요도 없다. 그렇게 속 편하게 생각하던 차였다.
"하압!"
갑자기 내려 벤 기세 그대로 검이 허공에서 춤을 추며 그의 옆구리를 베어 오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그 속도와 기세가 예사롭지 않았다. 순간 허를 찔린 레펜하르트가 다급히 몸을 날렸다.
"헉!"
서걱!
옷자락이 잘리며 살짝 통증이 느껴졌다. 잽싸게 뒤로 뛴 레펜하르트가 놀라며 옆구리를 바라보았다. 잘린 옷자락 사이로 희미하게 핏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물론 피부가 살짝 긁힌 정도지만 확실했다. 지금 저 젊은 기사는 그의 육체에 확실히 상처를 입혔다.
"이건 대체?"
놀라며 레펜하르트는 러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놀랐다.
자세를 잡은 채 검을 겨누고 있는 러스, 그의 롱 소드는 푸르디푸른 빛으로 백열하고 있었다.
"...블레이드 오러?"
☆ ☆ ☆
"뭐야?"
"어떻게 된 거야?"
테네스 기사들이 모두 경악에 차 웅성거린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저 천덕꾸러기였을 뿐이던 러스, 그의 검에서 검 쥔 모든 자들이 꿈꾸는 궁극의 빛이 맺혀 있는 것이다.
로트 경이 입을 쩍 벌린 채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뭐, 뭐냐, 러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여전히 레펜하르트를 노려본 채, 러스가 싸늘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테네스의 검을 되찾았을 뿐입니다."
동시에 러스의 전신에서 알 수 없는 위압감이 흘러나왔다. 더 이상 의심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것들을 억누르는 듯한 저 강렬한 존재감, 그것은 이미 레펜하르트를 통해 질리도록 맛본 그 감각이었다.
틀림없었다. 러스는 확실하게 오러에 각성했다!
로트 경이 경외와 당혹을 담아 신음을 흘렸다.
"맙소사...."
한편, 레펜하르트는 다른 이유로 당혹해하며 러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딱히, 갑자기 새로운 오러 능력자가 적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라거나 해서 당황한 것은 아니었다. 다른 이들이야 신 나게 경악하고 있겠지만 오러 유저인 그는 확실하게 러스의 기량을 감지하고 있었다.
눈앞의 이 젊은 기사는 이제 갓 오러에 각성한 상태였다. 육체를 강화시키는 오러의 운용도 눈에 띄게 서툴고, 블레이드 오러 역시 강약을 반복하는 모습이 제대로 유지할 만큼 숙련되지 않았음이 명확했다.
오러 유저라고 다 비슷한 실력을 지닌 것이 아니다. 이미 오러를 각성한 지 몇 년이 지난 레펜하르트와 비교하면 모든 면에서 뒤떨어진다. 조금 전 방심해서 한 방 스치기는 했다만, 그렇다 해서 레펜하르트가 패할 일은 절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가 당혹해하는 것은 블레이드 오러를 뿜어내는 그의 모습이 지나치게 낯이 익었기 때문이었다.
'어라? 저 블레이드 오러, 어째 색깔이 눈에 익은데?'
오러의 색상은 대륙의 각 무문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대체로 푸른색이나 붉은색 계통이 많지만 녹색이나 보라색 등도 꽤 있다. 실제로 짐 언브레이커블도 황금색이라는 특유의 오러 색상을 지니고 있고.
그리고 푸른색이라고 통틀어 말하긴 하지만, 그것 역시 자세히 보면 꽤나 개인차가 있었다. 검푸른색, 연푸른색, 청람색 등등. 세상에 같은 인간이 있을 리 없으니 오러의 빛 역시 그에 따라 조금씩 개성이 깃들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지금 러스는 상당히 깊이가 느껴지는 짙은 푸른빛의 블레이드 오러를 보이고 있었다. 마치 창공을 연상케 하는 맑고도 깊은 푸르른 오러.
레펜하르트는 저 오러를 본 적이 있었다. 아니, 본 정도가 아니라 여러 번 베이기도 했던 처지였다.
"검성 사이러스?"
일단 상대의 정체를 알아채고 나니 얼굴도 확실히 알아볼 수 있었다. 저 날카로운 눈매, 냉막한 인상에 고집스럽게 다물린 입매까지.
틀림없었다.
그를 그토록 괴롭혔던 대륙 최강의 검사, 검성 사이러스였다.
레펜하르트가 무심코 내뱉은 말에 러스가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당신이 내 본명을?"
그의 풀 네임은 사이러스 폰 테네스. 기사로 서임되며 받은 이름이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를 기사로 인정하지 않았기에 다들 그를 러스라고, 테네스 백작이 내려 준 이름이 아닌 비천한 그의 어미가 부르는 이름으로 칭했을 뿐이다.
당황하는 러스를 보며 레펜하르트가 혀를 찼다.
'거참, 내가 왜 처음에 못 알아봤지? 테네스 후작가 출신이란 걸 알고 있었는데도.'
지금은 황금기사로 유명한 테네스 가문이지만 30년 뒤에는 다르다. 검성이라는 걸출한 검사를 배출한 테네스 가문은 백작가에서 후작가로 승격되며 마도구의 힘을 빌리는 검가라는 오명도 깔끔히 벗은 상태였다. 레펜하르트가 처음 황금기사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잠시 못 알아들은 이유도 이것이었다. 그의 시대에서 황금기사는 이미 잊힌 자였으니까.
그렇게 러스를 빤히 보고 있는데, 갑자기 러스가 얼굴을 붉히며 중얼거렸다.
"...게다가 검성이라니. 그런 어마어마한 칭호는 감히...."
'앗, 부끄러워하고 있다, 저놈.'
하긴, 이제 갓 오러를 각성했는데 선배 입장의 오러 유저가 검성이라는 어마어마한 칭호로 불러 주니 부끄럽지 않을 수 없겠지.
그렇다고 '지금의 너 말고 미래의 너.'라고 하기에도 참 애매한 입장이다. 혀를 차다가 레펜하르트는 그냥 손을 저었다.
"아, 아는 사람이랑 닮아서 착각했다. 신경 쓰지 마라."
그러자 러스의 표정이 눈에 띄게 시무룩해진다.
'앗, 실망하고 있다, 저놈.'
뭐 저리 속마음이 뻔히 보이지? 전생의 검성, 사이러스는 언제나 딱딱한 얼굴에 무심한 눈빛을 지닌, 그야말로 구도자라는 이미지에 어울리는 인상이었다.
'역시 나이 먹으면 사람은 변하게 마련인가.'
어쨌거나 전생의 적과 다시금 조우하니 기분이 묘했다. 복잡한 표정으로 레펜하르트는 재차 자세를 잡았다. 러스도 정신을 차리고 검을 겨누었다. 서로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치는 순간.
"타아앗!"
먼저 몸을 날린 것은 러스였다.
☆ ☆ ☆
푸른 블레이드 오러가 레펜하르트의 머리를 쪼갤 기세로 내려찍힌다. 팔뚝으로 방어하자 오러와 오러가 충돌해 충격파를 낳았다.
파앗!
충돌로 인한 파문이 사방으로 퍼지며 지면을 파헤쳤다. 흔들리는 대기의 진동을 뚫고 레펜하르트가 정권을 찔러 넣었다. 채 피하지 못한 러스가 복부에 일격을 허용한다. 갑옷을 뚫고 충격파가 그의 몸통을 관통했다. 순간 러스의 입에서 기합이 터져 나왔다.
"하압!"
푸른 오러가 잠시 백열하더니 그의 내부로 스며든다. 오러로 내부를 감싸 충격파를 상쇄시킨 것이다. 그리고 바로 좌우 베기 연격!
"헤에?"
살짝 놀라며 레펜하르트는 뒤로 물러나 공세를 피했다. 방어를 무효화시키는 그의 공격을 이렇게 깔끔하게 막아 내다니? 유서스조차도 그냥 충격을 견딘 뒤 엘드라드의 치유 마법을 이용해 몸을 도로 회복시켰을 뿐이다. 레펜하르트조차도 오러로 신체 내부를 보호하는 저 운용법을 익히는데 족히 한 달은 걸렸었다.
'이제 막 각성한 놈이 재주도 좋다.'
혀를 차는 레펜하르트를 향해 러스가 연신 검을 휘둘렀다. 사방팔방에서 블레이드 오러가 웅장한 소음을 내며 레펜하르트를 난자할 듯 쏟아진다. 레펜하르트의 눈동자에 잠시 당황스러운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어라? 이거....'
공격이 읽히지 않았다. 모든 공격이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날아들고 있었다. 도저히 예측이 불가능했다.
무기술이건 맨손 체술이건 간에, 모든 무술은 어느 정도 정립된 이론이 있는 법이다. 오랜 세월 수많은 무인들에 의해 갈고닦인 체계, 레펜하르트 역시 제라드 밑에서 그 정확한 체계를 바탕으로 수행해 왔다.
하지만 러스의 검은 달랐다. 전혀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다. 정해진 자세를 취하지도 않는다. 마치 야생의 짐승처럼 광포하게 날뛸 뿐이다.
상식적이라면 제대로 된 위력도 있을 리 없고, 허점투성이여야 할 움직임이었다.
'그런데 제대로 위력이 나오고 허점도 안 보인단 말이지.'
신기했다. 분명 형식 밖의 움직임임에도 불구하고 힘의 흐름 자체는 제대로, 효율적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분명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 같은데 모든 검격이 적절한 타이밍에, 절묘한 각도로 날아든다. 게다가 그 모든 공격에 푸른 오러가 깃들어 있어 제대로 위력을 싣고 있다.
'그러니까, 그냥 자기 마음대로 휘두르고 있는데 그것이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소리잖아?'
제라드도 말했었다. 무술가 중 가끔 시키는 대로 안 하고 지 꼴리는 대로 휘두르는 놈들이 있다고. 대부분은 병신이라 금방 칼 맞고 죽지만, 개중에는 진짜 천재도 간혹 튀어나오니까 조심하라고.
'과연, 역사상 100년 만에 나올까 말까 한 검의 천재라더니!'
문득 레펜하르트의 표정이 차갑게 바뀌었다.
역시... 이 정도 재능을 타고났으니 검성이라고까지 불렸겠지....
그리고 소중한 수하이자 친우였던 이, 오크 대전사 타시드를 벨 수도 있었겠지!
조금씩 살심이 피어올랐다.
눈앞의 이 청년이 타시드의 원수가 아니라는 것은 안다. 그것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 하지만 그의 기억 속에서 검성 사이러스가 타시드의 원수라는 것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타시드!'
가슴 한구석이 끓어오른다. 레펜하르트가 안색을 굳힌 채 반격에 나섰다.
황금의 오러가 푸른빛을 뒤덮는다. 날아드는 모든 블레이드 오러가 뻗어 오는 주먹에 가로막혀 박살 나 허공으로 흩어진다.
일단 레펜하르트가 공세로 돌아서자 러스는 사정없이 밀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10여 미터 이상 밀린 러스가 절망스러운 얼굴로 신음을 흘렸다.
"으으윽!"
모든 공격이 빗나간다. 수십 번도 넘게 날린 검광이 헛되이 허공만을 가른다.
그리고, 그때마다 반격이 날아온다. 무수한 주먹이 그의 전신을 강타한다. 오러를 끌어내 방어해 보지만 정권에 실린 강렬한 충격파는 그것조차 부수며 육체에 심각한 타격을 입힌다.
"제기랄!"
절로 욕설이 흘러나왔다.
분명 러스의 움직임은 대단했다. 레펜하르트도 채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하지만 공격이란 것이 꼭 예측을 해야만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측이 안 된다? 그럼 그냥 보고 피하면 된다.
일단 레펜하르트가 반격을 시작하자 러스는 제대로 검 한번 휘두르지 못한 채 계속 밀리고 있었다. 분명 러스의 재능은 혀를 내두를 정도로 뛰어난 것이지만, 아쉽게도 기본적인 역량 차이가 너무 심했다.
힘도 스피드도 동체 시력도 반사 신경도, 심지어는 맷집마저도 레펜하르트가 한참 위였다. 오러 운용 역시 순간순간 센스가 돋보이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고르게 유지되지는 않고 있다.
상대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오러의 힘을 손에 넣었어도 전혀 상대가 되질 않았다.
모멸감에 가득 찬 러스가 맹수처럼 울부짖었다.
"나는 테네스의 검이다!"
러스가 검을 머리 위로 세웠다. 블레이드 오러가 푸르게 백열했다. 가장 자신 있는, 가장 오래 수행해 온 내려 베기가 천지를 가를 듯한 기세로 레펜하르트에게 작렬했다.
파아앗!
오러가 대기를 찢으며 뇌성을 울린다. 그러나 그 자리에 이미 레펜하르트는 없었다. 그는 어느새 러스의 좌측으로 돌아가 주먹을 올려치고 있었다.
"헙!"
짧은 기합과 함께 레펜하르트는 러스의 옆구리에 웅장한 어퍼컷을 꽂아 넣었다. 전신의 탄력을 실어, 오러를 폭발시키며 파괴력을 한 점에 집중해 일격을 가한다!
"커어억!"
피를 토하며 러스의 몸뚱이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 ☆ ☆
겨울바람이 부는 켈베른 성내.
그 차디찬 땅바닥 위에서 한 청년 기사가 신음을 흘리고 있다.
"으, 으윽.... 으으윽...."
발치에 토한 핏자국이 가득하고, 몸을 가누지도 못해 비틀거리면서도 청년 기사는 쓰러지지 않았다. 롱 소드를 지팡이 삼아 간신히 버티며 연달아 중얼거린다.
"나, 나는 테네스의 검... 테네스의 검은 꺾이지 않는다...."
이미 승패가 갈렸음에도,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한 육체를 오직 정신력으로만 버티며 무릎 꿇지 않는 청년 기사, 러스의 모습을 레펜하르트는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사이러스....'
사실은 죽일 생각으로 날린 주먹이었다. 유서스나 다른 이들을 상대할 때와 달리, 확실한 살기를 담고 날린 일격이었다.
그러나 러스는 죽지 않았다. 쓰러지지도 않았다. 비록 모든 힘을 소진해, 서 있는 시체나 다름없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의 앞에 서 있었다.
그 모습에 레펜하르트는 갈등했다.
'...마저 손을 써야 하나?'
이대로 저자를 죽이고 싶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든다.
딱히 러스에게 아직 죄가 없기 때문이라는 이유만은 아니었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그의 소중한 이를 해할 가능성이 있는 한, 미리 화근을 제거하는 쪽이 좋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가 아는 타시드, 위대한 전사의 영혼을 가진 오크라면 결코 이런 결과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패배는 자신이 설욕해야 할 몫이라며 오히려 레펜하르트에게 화를 낼 지도 모르겠다.
'타시드라면 진지하게 화를 내겠지, 분명.'
문득 레펜하르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생각해 보면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인데 설욕하고 말고 할 것이나 있나?
게다가 딱히 설욕이 아니더라도 걸리는 점은 남아 있었다. 타시드는 전생에서 수차례나 검성 사이러스와 맞붙었다. 그리고 이 둘은 그때마다 서로의 기량을 겨루며 더더욱 높은 경지에 다다랐다. 타시드가 오크 대전사의 힘을 얻게 된 것은 어쩌면 사이러스 덕일 수도 있다는 의미다. 원래 라이벌이란 그런 존재니까.
그렇다면 여기서 이자를 해하는 것은 타시드의 미래를 헝클어트리는 것이 될지도 모른다.
결국 레펜하르트는 살심을 거두었다.
'그래, 이자는 타시드의 몫이다.'
그가 아는 오크 대전사는 결코 약하지 않다. 상황이 불리해 패했을 뿐, 공평한 대결이라면 결코 검성 사이러스에게도 패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 의무는 타시드에게 공평한 대결 장소를 마련해 주는 것일 터.'
레펜하르트가 천천히 러스에게 다가갔다. 자신을 노려보는 차가운 눈빛에 러스의 안색이 굳었다.
이미 그는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저자가 가볍게 후려갈기기만 해도 그의 목숨은 끊어지리라. 죽음을 직감하며 러스가 눈을 감는 그때였다.
귓가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살려 주마."
러스가 놀라 눈을 떴다. 여전히 차가운, 섬뜩하기까지 한 눈빛으로 상대가 말을 잇고 있었다.
"살아나라. 그리고 더욱 강해져라. 내 친우 타시드를 위해."
"무, 무슨?"
당황하는 러스를 뒤로한 채 레펜하르트가 땅을 박찼다. 그의 거구가 단숨에 허공으로 솟구쳐 외성 쪽으로 날아올랐다. 황금빛 궤적을 남기며 레펜하르트는 내성을 뛰어넘어 무너진 외성 성벽을 가로질렀다. 순식간에 켈베른 성 밖으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러스와 테네스 기사들은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적막이 흘렀다.
적은 사라졌다. 그리고 남은 것은 박살 난 성과 궤멸된 테네스 기사단, 비참하게 쓰러져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그들의 단장뿐.
"아아아아!"
러스가 울부짖으며 검을 내리쳤다. 블레이드 오러가 대지를 파헤치며 웅장한 굉음을 뿜어냈다.
콰아아앙!
비산하는 파편과 자욱한 흙먼지 속에서, 러스는 상처 입은 짐승처럼 길게 울음을 터트렸다.
"으아아아아!"
5
켈베른 성을 나선 레펜하르트는 곧바로 숲을 가로질러 미리 약속된 장소로 향했다. 켈베른 성을 끼고 흐르는 야함 강의 상류, 3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강변이 틸라와 합류하기로 한 곳이었다.
한참을 뛰다 보니 이내 강가에 난 작은 숲 사이로 세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시리스와 실란, 그리고 틸라였다.
"아, 레펜하르트! 무사히 돌아왔네요!"
틸라가 그를 보더니 반가워하며 손을 흔든다. 레펜하르트는 단숨에 몸을 날려 그들 곁으로 다가갔다. 일단 다가가고 보니 시리스도 실란도 어째 표정이 뚱하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억지로 도둑질 좀 하겠다고 설치더니 그것마저 실패해서 두 사람이 고초를 겪게 한 것이다.
레펜하르트가 머쓱해하며 머리를 긁었다.
"다, 다들 무사해서 다행이네...."
갑자기 실란이 환하게 웃었다. 방실거리며 어깨를 으쓱거린다.
"그러게요. 레펜 씨 덕분에 참 흔치 않은 경험을 해 봤죠."
목소리는 참 맑은데 내용은 전혀 아니다. 실란이 계속 방실거리며 말을 이었다.
"순례자로 나서면 온갖 일 겪을 거란 소리는 많이 들었지만, 설마 성직자가 된 몸으로 도둑 취급 받아서 감옥 구경을 해 볼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아! 이래서 세상은 놀라운 일로 가득하다고 하는 거였구나!"
레펜하르트 입장에서야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미, 미안하다."
그래도 그렇게 많이 화가 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두 사람 다 바로 표정이 풀렸으니까. 정말 화가 났다기보다는, 단순히 한 소리 하고 싶었던 것 같았다.
"어쨌거나 다들 무사해서 다행이다."
실란이 혀를 찼다.
"별일 없기야 했지만, 사실 꽤 위험하긴 했죠. 나야 그렇다 치고 시리스는 엘프, 그것도 여자애인데, 잘못했으면 험한 꼴 당할 뻔 했다는 생각 못 했어요?"
그러자 레펜하르트의 안색이 확 변했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인간이라 해도 젊은 여자가 감옥에 갇히면 무슨 꼴 당할지 모르는데, 하물며 아리따운 엘프 노예라면 말할 필요도 없다. 입에 담지도 못할 참혹한 꼴을 당했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레펜하르트가 시리스의 어깨를 움켜쥐고 호들갑을 떨었다.
"괘, 괜찮아, 시리스? 그놈들이 무슨 짓 한 건 아니지?"
어깨가 아픈지 시리스가 살짝 인상을 썼다. 흠칫 놀라며 손을 떼는 레펜하르트를 향해 실란이 손을 내저었다.
"별일 없었다고 했잖아요. 그래도 테네스 기사단이면 명성 높은 이들이라 다들 신사적이더라고요. 그런 추잡한 짓거리 안 당했어요."
사실 명성 높은 기사단이라고 다들 신사적이라는 법은 없다. 기사단의 명성은 그들의 무용에서 나오는 것이지 그들의 인품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니까. 그나마 테네스 기사단은 유서스가 워낙 여색을 혐오하는 덕에, 그런 분위기가 단원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시리스를 탐하거나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실로 운이 좋았구나.'
레펜하르트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새삼 소름이 끼쳤다. 만약 시리스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으면 어쩔 뻔했나?
'앞으로는 좀 더 조심해야지.'
차탄 공국에서의 사례도 있다. 좀 더 주의 깊게 움직여야겠다며 레펜하르트가 다짐하던 차였다. 시리스가 그를 빤히 보더니 물었다.
"그래서, 원하는 것은 얻었나요, 레펜하르트 님?"
"응? 으응."
레펜하르트가 주머니에서 엘류시온의 목소리를 꺼냈다. 다들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겉보기엔 그저 네모난 검은 박스일 뿐, 실란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대체 이거 어디다 쓰는 거예요? 무술 수행하는 데 쓰는 물건으로는 통 보이질 않는데."
'그야 당연하지. 무술이랑 전혀 상관없는 은의 시대 유물인데.'
하지만 이 난리 피워 놓고 사실은 거짓말이라고 했다간 무슨 소리 들을지 모른다. 레펜하르트는 적당히 얼버무렸다.
"나도 몰라. 그냥 사부가 가져오라기에 챙긴 거야."
무난한 대답이었다. 그래서 다들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다. 엘류시온의 목소리를 다시 주머니에 넣고 레펜하르트가 일행을 재촉했다.
"자, 일단 이 영지를 빠져나가자."
이 정도 난리를 피웠으니 더 이상 켈베른 자작령에 있을 수는 없다. 다들 레펜하르트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붉은 노을이 성벽 위를 아스라이 드리운다. 저녁이 가까워 오는 시간, 켈베른 성은 사람들의 움직임으로 분주했다. 부상자를 수습하고 사방에 널린 파괴의 흔적을 간단하게나마 치우는 하인들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인파 속에는 여기저기 붕대를 감은 채 일을 돕고 있는 테네스 기사단의 모습도 있었다. 꽤나 비참하게 패하긴 했지만, 의외로 그 '오러 능력자 도둑'에게 목숨을 잃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중상을 입은 이도 극히 적었다. 에어리어스의 성직자들이 치유술을 써 주기도 한 덕에, 대부분 반나절 정도 만에 깨어나 그럭저럭 몸을 움직일 정도로 회복되어 있었다. 물론 마법사들은 모조리 부러진 다리 붙잡고 계속 낑낑대고 있었지만.
비참한 패배를 겪었으니 기사들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해야겠지만, 의외로 다들 그렇게 어두운 얼굴은 아니었다. 물론 떨어진 테네스 기사단의 명예에 대한 걱정은 다들 안고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희망을 가진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게 정말인가, 에브론?"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네, 바라스 경."
황금기사의 패배로 인한 굴욕은 새로운 영광 앞에 모두들 잊어버렸다. 다들 모두 새로운 테네스의 검, 진정한 검의 경지, 오러를 각성한 사이러스에 대해 떠들고 있었다.
아무리 유서스를 따르고 충성하는 그들이라지만, 그들 역시 귀가 있었다. 다른 가문이 마도구의 힘을 빌려 위세를 떨치는 그들의 단장을 어떻게 평가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마도구를 쓰는 기술 역시 본인의 실력이라는 유서스의 주장에는 다들 찬동하고 있었지만, 그렇다 해도 그들 역시 어쩔 수 없는 검사였다. 반쪽짜리 기사, 본인의 실력이 아닌 도구의 힘으로 행세할 뿐이라는 불명예스러운 평가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오러 능력자는 대륙 어디에 가도 대접받을 수 있다. 궁극의 경지라는 그 찬란한 빛을 머금은 검 앞에 경외를 보내지 않는 무인은 어디에도 없다.
"드디어... 테네스 기사단에 진정한 오러 능력자가...."
바라스가 감격에 젖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성 마당이 내려다보이는 3층 침실, 그곳의 발코니 창을 통해 유서스는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듣지 않아도 깨달을 수 있었다.
모든 기사들의 눈빛이 향하고 있는 것은 지금 그의 존재가 아니었다.
"...모두가 러스의 이름을 말하는가."
깨어난 뒤 로트 경에게 상황을 보고받았다. 무슨 일이 생겼는지 모두 전해 들었다. 이미 그의 머릿속에 엘류시온의 목소리를 잃었다는 사실, 은의 현자가 내린 임무를 해내지 못했다는 걱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러... 오러의 힘을 손에 넣었단 말이지...."
그 역시 한때 그토록 꿈꾸던 힘이었다. 열심히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는 자신에게도 그 위대한 빛의 끝자락이라도 허락되지 않을까 망상을 품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현실을 깨닫고 미련 없이 포기했다. 이미 가문에 오러를 향한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인정하고, 마검 엘드란을 다루는 마검사의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 더러운 창녀의 자식에게 어떻게 그런 힘이....'
믿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분명 오러로 향하는 길은 잃었다고 하지 않았는가? 더 이상 방법이 없다고, 그래서 엘드란을 휘두르라고 하지 않았나!
하지만 지금 그의 충실한 수하들, 한 치의 의심 없이 그를 따르던 모든 이들이 하나같이 러스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 그토록 경멸하고 무시하던 이들이 그저 칼에 빛이 떠올랐다는 이유만으로 태도를 싹 바꿔 마치 가문의 구세주라도 나타난 것처럼 굴고 있다!
"으으윽!"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창틀을 움켜쥔 손끝에서 희미하게 핏물이 배어 나왔다. 손톱이 깨진 것이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토록 환하다고 믿었던 자신의 길, 그 모든 미래가 흑암에 감싸 있는 기분이었다.
대놓고 러스를 귀여워하던 빌어먹을 아버지.
겉으로는 유서스를 칭송하면서도 뒤로는 여전히 오러 능력자가 없다는 사실을 아쉬워하던 가문의 모든 장로들.
이제 테네스 백작가에 오러 유저가 생겼다. 단 한 명만으로도 가문의 위상을 몇 단계는 올릴 수 있다는 지고의 무인이 생겼다.
'그럼 나는?'
지금껏 가문을 위해 몸을 던져 온 그는 어찌 되는 건가? 가문에 누가 될까 두려워 항상 몸가짐을 조심하며 황금기사의 이름을 드높여 온, 오러 유저가 아니더라도 훌륭한 기사가 될 수 있다고 믿으며 지금껏 검을 휘둘러 온 자신은 어찌 되는 것이냔 말이다!
"크으윽!"
유서스의 표정이 한껏 일그러졌다. 문득 그가 고개를 돌렸다. 침실 한구석에 얌전히 놓인, 산산히 금이 간 황금 갑옷이 보였다. 간신히 파편을 모아 자기 복구에 들어간 마갑 엘드라드, 마치 현재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한가운데 꽂혀 있는 마검, 엘드란, 그것을 향해 유서스가 넋 나간 사람처럼 걸어갔다.
"이것이 테네스의 검이다...."
떨리는 손을 뻗어 마검 엘드란을 움켜쥔다.
스르릉.
엘드란이 뽑혔다. 유서스가 다시금 중얼거렸다.
"내가 바로 테네스의 검이다...."
☆ ☆ ☆
러스는 야함 강이 내려다보이는 절벽, 그 위에서 지는 저녁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 이들이 뒷정리로 분주했지만 러스에게는 아무런 일도 시키지 않았다. 하긴, 움직이기 힘든 상태이기는 했다. 치유술을 받았음에도 부러진 갈비뼈는 채 붙지 않았고 다리 역시 지팡이를 짚지 않으면 걸을 수 없을 정도다.
하지만 러스가 일에서 열외된 이유는 딱히 부상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러를 발현한 그를 대하는 기사들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진 것이 이유였다.
경멸은 경외로 바뀌었다.
무시는 찬사로 바뀌었다.
그저 오러를 각성했을 뿐인데, 그를 둘러싼 세상이 모조리 변해 버렸다.
"하, 하하하...."
사실은 알고 있었다. 비록 러스가 오러 유저가 되었다고는 해도, 여전히 무력 자체는 유서스가 더 높다는 것을.
엘드라드의 힘은 어지간한 오러 유저를 압도한다. 그리고 유서스는 그 엘드라드를 다루는 기량에 있어 이미 완숙의 경지에 다다랐다. 아무리 오러를 일깨웠다 해도 러스가 유서스의 무력을 따라잡으려면 앞으로도 고난의 여정을 보내야 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벌써 러스가 새로운 테네스의 검이라도 된 것처럼 굴고 있었다. 웃기기도 하고, 기분 좋기도 했다.
그리고, 러스 역시 내심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직은 모자라겠지만...."
주먹을 쥔 채 그가 미소를 지었다.
"금방이야. 금방 따라잡을 수 있어."
이제 시작이었다. 이제 곧이다. 이제 곧 그는 진정한 테네스의 검이 될 수 있을 터였다.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을 느끼며 러스가 쾌소를 터트렸다.
"하하하핫!"
그때였다.
"같이 패한 주제에 무슨 기분이 그리 좋으냐?"
흠칫 놀라며 러스는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절벽 위에 유서스가 와 있었다. 평소라면 조금 의아해했을 것이다. 오러 유저인 그의 감각권에 유서스가 감지되지 않은 사실에 대해.
하지만 러스는 더 큰 이유로 놀라 버려, 미처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혀, 형님?"
놀라웠다. 언제나 자신을 없는 존재처럼 취급하던 유서스가 먼저 말을 걸다니! 게다가 그의 말을 들으니 살짝 부끄러웠다. 패배를 맛본 주제에 오러 유저가 되었다는 것에 정신이 팔려 반성조차 하지 않고 있다니.
하지만 러스는 이내 그 생각을 지웠다. 애초에 그는 패배했다고 반성하는 성격도 아니었다. 그랬다면 애당초 그토록 명령 무시하고 멋대로 덤벼들었다가 펑펑 날려 가지도 않았겠지.
유서스가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오러를 각성했다고 들었다."
다정한 목소리였다. 상상도 못했던 일이라 어색해하며 러스가 고개를 뻘쭘히 끄덕였다.
"아, 네. 네...."
"보여주겠니?"
침을 삼킨 뒤 러스는 허리춤의 검을 뽑았다.
웅웅웅!
작은 소음을 내며 푸르른 블레이드 오러가 롱 소드의 검신을 부드럽게 타고 올랐다. 그 찬란한 빛을 보며 유서스가 몽롱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름답구나...."
러스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드디어, 드디어 인정받았다. 그의 형제, 그의 가문으로부터 그의 검이 인정받았다.
'나도 테네스의 검으로 인정받았다!'
순간 배에서 둔탁한 통증이 느껴졌다.
"어?"
피가 배어 나온다. 붉은 핏물이 황금빛 검신을 타고 흐른다. 그리고 저 검날은 자신의 배를 깊숙이 관통하고 있다....
"쿨럭!"
피를 토하며 러스는 눈을 부릅떴다.
전혀 경계하지 않았다. 설마하니 유서스가, 그토록 뿌리 깊게 기사도에 심취해 있는 이가 설마 질투 때문에 자신을 해할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어, 어째서?"
경악한 이복동생을 바라보는 유서스의 입가가 길게 좌우로 찢어졌다. 음습한, 추악하게까지 보이는 미소였다.
"내 검에 깃들어 떨쳐 울리리!"
검을 꽂은 채 유서스가 언령을 토했다. 엘드란으로부터 가공할 기운이 퍼져 나와 내장을 뒤엎는다. 오러 유저라면 복부를 관통당했다 해도 죽지 않을 수도 있으니 확실하게 확인 사살을 한 것이다.
확실하다! 유서스는 지금 그를 죽이려 한다!
"크으윽!"
신음 섞인 기합을 터트리며 러스가 검을 횡으로 베어 갔다. 블레이드 오러가 유서스를 노리고 길게 뻗어 갔다. 하지만 유서스는 어느새 엘드란을 거두고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검광이 헛되이 허공을 가르며 절벽 위로 작렬했다.
콰아앙!
폭발로 인해 절벽이 진동한다. 배를 움켜쥐고 러스가 눈을 부릅떴다. 실핏줄이 터져 붉은 눈물이 흘러나왔다.
"왜, 왜 나를... 형님... 왜...."
유서스가 차갑게 뇌까렸다.
"테네스의 검은 나 하나로 족하다."
엘드란을 횡으로 들어 러스의 목을 겨눈다.
"더러운 들개의 배에서 난 놈을 테네스의 검으로 인정할 수는 없다!"
그때 뒤에서 술렁거리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조금 전의 폭음으로 인해 테네스 기사들이 몰려오는 것이었다.
"뭐냐?"
"또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잠깐 유서스의 정신이 뒤쪽으로 팔린다. 그 틈을 타 러스가 최후의 힘을 뽑아냈다.
"크윽!"
전력을 다해 러스는 강으로 몸을 던졌다. 유서스가 아차 하며 돌렸다.
"젠장!"
늦었다. 이미 러스의 몸은 야함 강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첨벙 하는 소리와 함께 검푸른 강물이 러스를 집어삼켰다.
"쩝...."
유서스는 혀를 찼다. 뭐, 설마하니 그 정도 부상을 입고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세상일은 모르는 것이다.
수많은 영웅담에서 나오지 않던가? 절벽에서 강으로 떨어진 놈이 나중에 팔팔하게 되살아나서 자기 찌른 놈 복수하는 이야기. 너무 흔해서 요새는 소재로 잘 등장하지도 않는 장면.
'혹시 모르니 대비는 해 놓아야겠지.'
유서스는 잽싸게 검을 들어 자신의 몸을 베었다. 여기저기 베어 핏물을 내고 나니 이내 로트 경과 다른 기사 몇이 절벽 위로 올라왔다.
로트 경이 유서스를 보더니 외쳤다.
"무슨 일입니까, 유서스 님!"
"러스다!"
고통스러운 표정을 연기하며 유서스가 외쳤다.
"러스가 가주 자리를 노리고 나를 습격했다!"
"그, 그런...."
다들 놀랐다가, 이내 러스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오러를 각성한 러스를 보며 감탄을 하긴 했어도, 그들은 역시 유서스의 충실한 기사였던 것이다.
게다가 유서스의 말은 꽤나 그럴듯했다. 평소에도 자신 역시 테네스의 검이란 소릴 입에 달고 살던 러스였다. 이제 오러 유저가 되었으니 유서스만 없다면 가주 자리가 손에 들어온다고 생각했겠지!
"크윽! 역시 더러운 핏줄은 어쩔 수가 없군요!"
"왜 하필 그런 녀석에서 그런 재능이 주어져서...."
계획대로였다. 다들 유서스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래서 사람은 평소 행실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럼 러스는?"
로트 경의 질문에 유서스가 힘든 척 더듬거리며 대꾸했다.
"다행히 제때 반격할 수 있었다. 복부에 부상을 입은 채 강으로 떨어졌으니 살아남기는 힘들 것이다."
설사 러스가 살아난다 해도 이제는 큰 문제는 없다. 유서스를 죽이려 한 시점에서 가문의 적이 되었으니까. 뭐, 흔한 영웅담처럼 복수하러 올 수도 있겠지만 그 정도쯤은 충분히 감당할 자신이 있었다.
'네가 아무리 오러 유저라 해도 엘드라드의 힘을 당할 수는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후계자 자리를 뺏기지 않는 것이다. 비열한 행위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사람들의 마음을 얻지도 못하는 이가 후계자가 되어 봤자 가문에 도움이 될 리가 없었다. 그는 옳은 선택을 했다.
로트 경의 부축을 받으며 유서스는 절벽 아래로 걸어 내려갔다. 고개 숙인 유서스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러게 인심 좀 사지 그랬느냐, 동생아.'
☆ ☆ ☆
레펜하르트 일행은 야함 강가를 따라 계속 걷고 있었다. 이대로 강줄기를 따라 하류로 내려와 켈베른 자작령을 벗어날 생각이었다. 이미 해가 어둑어둑하게 지고 있었지만 다들 이동을 멈추지 않았다. 평소였다면 슬슬 노숙할 준비를 했겠지만 지금은 한시라도 빨리 자작령을 벗어나는 게 중요했다. 그래서 밤을 새서라도 일단 이곳을 벗어나자는 계획이었다.
레펜하르트는 신중하게 주위를 경계하며 앞장서 걸었다. 혹시나 켈베른 자작이 추적대를 보내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뭐, 레펜하르트 본인이야 그까짓 추적대쯤 얼마든지 처리할 자신이 있었지만 그 와중에 시리스나 실란, 틸라가 다칠 수도 있으니 신중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레펜하르트를 보며 시리스가 슬그머니 물었다.
"그런데 레펜하르트 님."
요새 슬슬 시리스가 마음을 여는 것인지 먼저 말을 거는 일이 잦았다. 참으로 바람직한 현상이다. 레펜하르트가 안면에 미소를 띠며 대꾸했다.
"응? 왜?"
"저기, 틸라 양이랑은 대체 어떻게 알게 된 건가요?"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안 그래도 레펜하르트도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아까부터 고민하던 참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는 더 이상 시리스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사실대로 말해 주었다.
"황금기사에게 당해서 강물에 빠져 떠내려갔는데, 드워프들이 구해 주었어."
"...드워프가 인간을 구해 주었다고요?"
당연히 그렇게 의문을 가질 줄 알았다.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 포트의 신탁이 있었거든. 내가 드워프들을 구원할 존재라고."
"...네?"
시리스는 잠시 '이 새끼가 나 가지고 장난치나?'라는 표정으로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아니, 옆에 버젓이 틸라가 서 있는데 이렇게 뻔하게 들통 날 거짓말을?
그런데 틸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는 것이 아닌가.
"맞아요. 레펜하르트는 신탁이 내린 일족의 구원자. 그래서 제가 지금 그를 따르고 있지요."
옆에서 듣고 있던 실란도 어이없어하며 틸라를 바라보았다. 틸라가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6년여 전, 그들에게 내려진 신탁. 언젠가 구원자가 강물에 떠내려올 것이라는 것. 그래서 레펜하르트를 구하고 그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는 것까지.
이야기를 듣다 말고 실란이 황당해하며 레펜하르트를 돌아보았다.
"드워프들이 신도 믿어요?"
"신관도 있는데? 몰랐어?"
실란은 고개를 저었다. 나름 세상일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드워프 신관에 대한 이야기는 금시초문이다.
그러자 틸라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그야, 인간들에겐 노예 종족이 신앙이라는 고도의 정신적 활동을 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않겠죠."
"아니, 그런 건 아닌데요...."
이미 레펜하르트와 동행하며, 특히나 시리스를 보며 생각이 많이 바뀐 실란이었다. 하지만 이종족 개인이 인간처럼 감정이 있고 이성이 있다는 점은 이해해도, 이종족 전체에게 신앙이 있을 거란 생각까진 미처 하지 못한 것이다. 그가 배운 가르침에 의하면 이종족들은 모두 인간의 신이 점지한, 인간을 위한 노예들이었으니까.
"있지, 드워프들의 신. 알 포트가."
"알 포트라면 악신이잖아요?"
"대체 알 포트가 무슨 짓을 했는데?"
그러고 보니 알 포트가 악신이란 소리는 들었는데, 정작 무엇 때문에 악신인지는 배운 적이 없다.
혼돈에 빠져 실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던 중이었다. 문득 강물을 바라본 시리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레펜하르트 님, 저기 저거...."
"응?"
"제가 잘못 본 것 같기는 하지만.... 왠지 저거 사람 같은데...."
저 멀리 어둠 속에서, 뭔가가 떠내려오고 있었다. 흘러 흘러, 둥실둥실 떠내려오더니 결국 강변에 와서 멈춘다.
틀림없었다. 사람이었다. 그것도 꽤나 건장한 무인으로 보이는 사내였다. 기감을 펼쳐 보니 아직 숨이 붙어 있다. 레펜하르트가 허겁지겁 남자에게 달려갔다.
막 쓰러진 남자를 뒤집어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레펜하르트가 한쪽 눈을 치켜떴다.
"어, 이놈?"
대체 얘가 여기까지 떠내려 온 거지? 게다가 칼침도 맞았네?'
"아는 사람이에요?"
시리스의 질문에 레펜하르트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게, 안다면 알고 모른다면 모르는 사람인데...."
남자의 정체는 반나절 전 신 나게 치고 박았던 상대, 사이러스였다. 실란이 재빨리 치유술을 준비해 러스에게 시전했다. 그 모습을 보던 틸라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신탁에 후속편도 있었나?"
제10장 북北으로
1
덜컹덜컹.
희미한 바퀴 소리가 들려온다. 아득한 감각 너머로 몸이 흔들리는 것이 느껴진다. 러스는 신음을 흘렸다.
"으음...."
전신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대체 얼마나 자고 있었기에 이렇게 몸이 찌뿌둥한 거지? 게다가 여기는? 흔들리는 감각으로 보아 아무래도 마차 안인 것 같은데.
'왜 내가 이런 데에 누워 있는 거지?'
의아해하며 러스는 몸을 일으켰다. 순간 복부에 맹렬한 고통이 느껴졌다. 인상을 쓰며 이를 악무는 순간이었다.
"...아!"
탄식이 새어 나왔다. 흐릿했던 기억 속에 한껏 일그러진 그의 이복형, 유서스의 얼굴이 떠올랐다. 순간 모든 기억이 물 밀 듯이 밀려들어 왔다.
오러를 각성한 순간, 모두의 경외 어린 눈동자, 한껏 고무된 자신, 그리고 배 속 깊숙이 느껴지던 유서스의 칼날, 그리고 아득한 추락감과 함께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던 검푸른 강물....
기억났다. 모든 것이 기억났다.
손끝이 떨렸다.
'유서스 형님....'
러스는 머리를 감쌌다. 분노보다도 허탈감이 먼저 느껴졌다.
유서스가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언제나 느껴지는 그 경멸의 눈빛에 이를 간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마주 증오하기에 유서스는 너무도 위대한 기사였다.
기사 중의 기사, 무시당하는 자신이 보아도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인품의 소유자. 그런 기사가 자신의 형제라는 걸 듣고 얼마나 자랑스러워했던가? 그리고 자신이 그 자랑스러운 형의 자랑스러운 동생이 되지 못함을 얼마나 부끄러워했던가?
저토록 위대한 기사의 눈에 자신 같은 일개 기사가 형제로서 눈에 찰 리가 없었다. 그러니 인정하지 않는 것도, 경멸의 눈빛을 보내는 것도 당연하다 여겼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자신이 한 명의 기사로 오롯이 선다면, 테네스의 검에 부끄럽지 않은 힘을 얻는다면 결국은 유서스라도 자신을 인정할 거라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조급해져 대열을 이탈하고 명령을 어기는 행위도 잦았다. 그 때문에 더더욱 미움받는 처지가 되었고, 그래서 더더욱 조급해하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결국 오러에 눈을 떴다. 드디어 원하던 것을 이루었다. 이제야 유서스와 동등한 형제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런 자신을 보고 유서스 역시 기뻐해 줄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테네스의 검다운, 그의 형제다운 자랑스러운 동생이 되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나를 인정할 생각이 없었어....'
러스는 한숨을 쉬며 마차 천장을 바라보았다. 미몽에서 깨어나니 차가운 진실이 두 눈에 똑똑히 보였다.
그의 형제는 러스가 생각했던 기사 중의 기사가 아니었다. 후계자 자리가 위태로워지자 피를 나눈 형제를 가차 없이 찌르는, 권력에 찌든 평범한 귀족이었을 뿐이다. 그런 남자를 위대한 기사라 믿고, 오로지 그의 인정만을 받고자 달려온 자신이 미칠 듯이 우스꽝스러웠다.
"큭큭큭...."
허무한 웃음이 절로 흘러나온다.
덜컹!
마차가 멈췄다. 갑자기 밝은 햇살이 비치며 차가운 공기가 들어왔다. 누군가가 마차 휘장을 걷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러스는 흠칫 놀랐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붉은 장발의 머리에 여자애처럼 곱상하기 짝이 없는 외모. 바로 그 '오러 도둑놈'의 동료로 잡혀 왔던 그 소년이다.
"아, 레펜 씨! 이 기사분 깨어났어요!"
☆ ☆ ☆
마차 밖으로 나온 러스는 당황하며 레펜하르트 일행을 바라보았다. 레펜하르트가 그를 보더니 태연한 어조로 말을 건넸다.
"깨어났군. 몸은 좀 어떤가?"
"으음...."
러스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신음을 흘렸다. 실란을 보았을 때 대충 짐작은 했지만 정작 레펜하르트를 다시 보니 역시 당혹스러웠다. 저 오러 능력자는 테네스 백작가의 적이 아닌가?
"나를 구한 것이... 당신들인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러스가 물었다. 경계심 가득한 눈빛, 레펜하르트가 대꾸했다.
"다 죽어 가는 채로 강물에 떠내려오기에 건져서 살려 놨지."
아무래도 이들이 자신을 살린 것이 맞는 것 같다. 경계심을 풀지 않은 채 러스가 주위를 둘러보며 다시 물었다.
"그런 대체 여기는?"
사방이 평야였다. 아무리 봐도 산악 지대였던 켈베른 자작령으론 보이지 않는다. 구해 준 것은 그렇다 치고, 왜 자신을 이곳까지 데려온 건가?
의심 섞인 무뚝뚝한 러스의 표정에 레펜하르트가 쓴웃음을 지었다. 뭐, 이해 못 할 상황도 아니었다.
"여기는 베이드 남작령, 내가 켈베른 성에서 난리 피운지도 벌써 사흘이나 지났지. 딱히 여정이 급한 것도 아니니, 원래대로라면 자네가 깨어날 때까지 그냥 여관 같은 데서 묵으면서 치료하는 것이 좋았겠지만...."
레펜하르트 일행은 영주의 성에서 대판 난리를 친 몸이다. 언제 수배령이 내려질지 모르니 자작령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죽어 가는 사람을 버려두기도 뭣하고, 그렇다고 우리 처지가 있는데 한 자리에 머물 수도 없고. 근처 신전 같은 데 맡길까도 생각해 봤지만 실란 말이 자네 상처가 워낙 위중해서 자신 정도 수준의 신관이 아니면 살리기 힘들 거라고 하더라고."
이 변방의 시골 영지에 고위 성직자가 있을 리 없다. 만약 있다면 테네스 백작가를 따라온 에어리어스의 신관들 정도인데, 솔직하게 말해서 그들은 실란에 비해 상당히 실력이 모자란 이들뿐이었다. 나이가 너무 어려 중직을 맡지 못했을 뿐, 실란은 필라넨스 교단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엄청난 신성력의 소유자인 것이다.
실란이 겸연쩍어하며 겸양을 떨었다.
"에이, 러스 씨가 오러 유저라 그런 거예요. 보통 사람이 그 정도 상처를 입었다면 아무리 저라도 무리였죠."
솔직히 러스 입장에서는 조금 웃기는 소리였다. 저 어려 보이는 소년이 성직자로서 대단해 봐야 얼마나 대단하다고 자신이 아니면 무리일 거란 소릴 하다니?
하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천만다행이다. 저들이 만약 켈베른 자작령 내의 신전에 자신을 맡겼다면 유서스의 눈을 피하지 못했을 테니까.
'유서스....'
러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절로 살기가 피어오르며 이빨 사이로 빠드득 하는 소리가 난다.
그때, 레펜하르트가 혀를 차며 말했다.
"뭐, 생색내고 싶어서 이러는 건 아닌데 그래도 일단은 우리가 그쪽을 구해 줬거든? 고맙다는 소리까진 들을 생각 없지만 이렇게 딱딱하게 나올 필요도 없지 않나?"
"아...."
그제야 자신이 실례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깨닫고 러스가 고개를 들었다. 레펜하르트가 퉁명스레 말을 이었다.
"기껏 부상자 생각해서 마차까지 구입해서 이동했구먼."
러스는 조금 놀란 눈으로 마차를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니 저들은 원래 마차로 이동하질 않았었다. 그냥 구해 줬어도 고마울 지경인데, 그를 위해 특별히 말과 마차까지 구입했단 말인가? 말과 마차를 구입하는 비용이 결코 적지 않았을 텐데, 그냥 아는 사이도 아니고 적인 자신을 위해....
기분이 묘하다. 피를 나눈 형제는 기습을 해 가며 그를 죽이려 했는데, 검을 나눈 적은 돈까지 써 가며 그를 구했다.
어색한 감정이 가슴속을 치밀어 오른다. 살아오며 이토록 호의를 느껴 본 적이 없는 그였다.
솔직히, 굉장히 감동스럽다....
굳은 얼굴로 러스가 슬그머니 고개를 숙였다.
"...구명의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나름 진심을 담아 감사 인사를 한다고는 했는데, 마음과 달리 목소리가 영 딱딱하다.
'끄응, 이러려고 한 게 아닌데.'
러스는 속으로 혀를 찼다. 원체 미움만 받고 살던 처지다 보니 뭐, 남에게 감사를 할 일이 있어야지? 그렇다 보니 영 무뚝뚝한 어조가 나와 버렸다.
다행히 레펜하르트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머리를 긁으며 그가 슬쩍 실란을 가리켰다.
"쟤가 좀 착해서. 돈 낸 건 쟤니까 쟤한테 감사하라고."
실제로 그는 마차 구입에 땡전 한 푼 안 보탰다. (보탤 돈도 없고.)
"그나저나 정신이 들었으니 가문으로 돌아가야겠지? 여비 좀 보태 줄까?"
자기 돈도 아니면서 제대로 생색을 내는 레펜하르트였다. 뭐, 실란 성격에 반대할 리는 없다. 게다가....
'여기서 미래의 검성한테 신세 지워 놓으면 나중에 좋은 일 있을지도 모르잖아?'
아무리 타시드의 원수라지만 그것은 전생의 일, 이번 생애에서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다. 여기서 호의 베풀어 놓아서 손해 볼 일은 절대 없다!
'무려 생명의 은인인데, 최소 적이 되어도 전생에서처럼 막 덤비지는 않겠지.'
그러자 러스가 난처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 그게...."
잠시 우물쭈물하다가, 러스는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자신이 테네스 가문의 사생아라는 것, 유서스와 자신과의 관계, 그리고 오러를 각성한 그를 유서스가 찌른 일까지.
이미 유서스에 대한 경외심 따윈 내다 버린 러스였다. 머리가 맑아지니 이후 유서스가 취했을 행동도 익히 짐작이 간다.
"그래서... 저는 아마도 가문으로 돌아가기는 힘들 겁니다. 아마도 후계자를 암습한 배신자가 되어 있겠죠."
"흐음."
레펜하르트는 턱 끝을 매만지며 생각했다. 검성 사이러스에게 이런 일이 있었던가? 생각해 보니 비슷한 건 있었다. 안타레스 제국 시절 사이러스에 대한 정보도 상세히 조사했었던 그다. 젊은 시절의 일도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그때는 분명 오러를 각성한 뒤, 원래 후계자였던 형과 정식으로 결투를 벌여 가문을 이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워낙 존재감이 없어 그 정보에조차 유서스의 이름은 없었다. 그만큼 유서스는 잊힌 자였던 것이다.
'내가 끼어들어서 또 역사가 바뀌었나 보네.'
레펜하르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왠지 자신이 사이러스의 신세를 망쳐 버린 것 같아 묘하게 통쾌하기도 하고, 죄책감도 든다.
하여튼, 이대로라면 러스의 인생도 꽤나 꼬였다. 뭐, 살려 준 것도 감지덕지인데 그 이후까지 레펜하르트가 책임감을 느낄 이유는 없겠지만.
침울해져 있는 러스를 보며 레펜하르트가 슬쩍 질문을 던졌다.
"그럼 이제 어찌할 텐가?"
러스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린 겨울 하늘 위론 한 점 구름조차 보이지 않았다.
청명하다.
'어찌해야 하는가?'
가문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인생의 목적도 사라졌다. 모든 것이 붕 떠 버렸다.
혼란스럽다. 머릿속이 헝클어져 상념이 제멋대로 날뛴다.
유서스는 그가 상상했던 이상적인 기사가 아니었다. 그를 아껴 주었던 아버지조차도 지금 와서는 진정으로 그를 사랑했었는지 의심스럽다. 아들이라서 사랑한 것인가, 아니면 그저 오러를 각성할 만한 인재였기에 사랑한 것인가?
러스는 애써 생각을 정리했다.
'일단은... 가문으로 돌아갈 방법을 모색해야겠지....'
하지만 지금의 그가 테네스 백작가로 돌아가 봤자 배신자 취급을 당할 뿐이다. 적어도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만한 확고한 무엇인가를 가지고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기사는 검으로 자신을 증명하는 법.
조금씩 머릿속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확고한 무위를 지닌 검사가 되어야 한다.'
완전한 오러 능력자가 되어 돌아간다면 테네스 백작가라 할지라도 그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경지에 오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문득 러스의 눈에 레펜하르트의 모습이 들어왔다.
자신보다 훨씬 앞을 걷고 있는 강력한 무인, 난생 처음 만난 진정한 오러 능력자, 그에게 진실된 오러의 길을 알려 준 남자.
'그리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나를 구해 준 자....'
러스는 결심했다.
☆ ☆ ☆
사실 레펜하르트의 질문은 그냥 이야기 흐름상 던져 본 말이었다. 딱히 러스의 차후 계획이 궁금해서라거나 해 물어본 것이 아니란 소리다. 그런데 갑자기 러스가 그의 앞에 무릎을 꿇더니 넙죽 고개를 조아린다.
"폐가 되지 않는다면 당신을 따르게 해 주십시오."
"응?"
당황한 레펜하르트를 향해 러스가 말을 이었다.
"당신은 제 생명의 은인, 기사된 도리로 응당 은혜를 갚아야 합니다. 하나 저는 가문에서 버림받은 자, 이 한 몸 바치는 것 외에는 은혜를 갚을 길이 없습니다."
"아니, 그건 그렇게 신경 쓸 필요 없는데...."
이거 생색을 너무 과하게 냈나? 레펜하르트가 난처해하며 러스를 내려다볼 때였다. 러스가 고개를 들더니 눈을 빛냈다.
"그리고 제가 오러에 눈 뜨게 된 것은 모두 당신 덕분. 내 생애 최초로 보는 강자, 그의 뒤를 따르며 더더욱 내 기량을 갈고닦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은혜도 갚고, 따라다니면서 무술 기량도 훔치고 싶다는 소리다. 레펜하르트는 멍한 눈으로 러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레펜하르트를 마주하고 있었다. 그 눈빛은 확고함이 깃들어 있어, 신중히 생각하고 내린 결론이 분명해 보였다.
"그래도 그렇지... 내가 누군지도 잘 모르면서...."
"권왕 제라드의 후계자란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런데 왜 굳이 날? 전공도 다르잖아?"
칼 쓰는 놈이 주먹 쓰는 놈 따라다니면서 배울 게 뭐가 있다고? 레펜하르트의 의문은 타당했다. 하지만 러스는 고개를 저었다.
"제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검술이 아니라 오러 능력, 그 자체니까요."
실제로 검사인 러스는 권사인 레펜하르트를 보며 오러를 각성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러니 납득은 가는 이야기다.
"그, 그래도 너도 오러 능력자잖아? 그럼 혼자서 잘할 수 있는 것 아니야?"
"운 좋게 오러를 일깨웠지만 아직 멀었습니다. 그 정도는 저도 알고 있습니다."
"으음...."
레펜하르트는 고민했다. 러스의 상황은 이해가 갔다. 오러에 각성했다고 전부가 아니다. 각성한 오러를 갈고닦으려면 그에 걸맞은 용법을 익히는 것이 필수다. 레펜하르트 같은 경우도 오러를 각성하고도 2년 넘게 제라드 밑에서 수행을 하지 않았던가?
원래대로라면 러스는 이대로 가문에 돌아간 뒤, 그라임 왕국의 오러 유저들을 찾아다니며 가르침을 얻어 기량을 높이게 된다. 온갖 가르침을 받고, 온갖 실전을 겪고, 그렇게 마흔이 다 되어서야 비로소 검성이란 칭호를 얻으며 대륙의 모든 검사들 중 우뚝 서는 것이다.
하지만 가문의 배신자가 되어 죄인 취급을 받게 된 지금은 그것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타국의 오러 유저를 만나 가르침을 받거나 홀로 세상을 떠돌며 기량을 높이는 수밖에 없는데....
'그 타국의 오러 유저란 게 나잖아?'
오러 유저라는 게 그렇게 쉽게 만날 수 있는 존재도 아니니, 생각해 보니 지금 러스의 입장에서 저렇게 나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었다. 레펜하르트야 마법사 출신이라 어색해하고 있었지만, 사실 강자를 만나 잠시 몸을 의탁하며 자신의 기량을 높이는 일은 무인들 세계에서는 그리 희귀한 일이 아니다.
러스가 레펜하르트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언젠가 가문으로 돌아가야 할 처지, 그러니 주군으로 모시진 못합니다. 그러나 제 검이 자리를 잡는 그날까지는 당신의 명에 따르며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부디 받아 주시길!"
강한 의지를 담아 외치는 러스를 레펜하르트는 떨떠름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사이러스가... 그 검성 사이러스가 나를 따른다?'
전생의 적, 타시드의 원수.
이것이 레펜하르트가 지닌 사이러스에 대한 감상이었다. 구하기는 했어도 그는 러스를 어디까지나 잠정적인 미래의 적으로만 인식하고 있었다. 그가 자신을 따라다닐 것이라는 선택지는 아예 생각지도 못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러지 못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어차피 모든 시간은 리셋되었다.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미래의 적이 아군이 되지 못할 이유도 없다.
'그것도 미래에 검성이 될 것이 확실한 천재적인 재능의 검사가 말이지?'
생각해 보니 굉장히 매력적이다.
'이, 이대로 다른 놈들도 꼬셔 버릴까?'
그저 적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된 이상 다른 전생의 적들도 이쪽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지 않을까?
잠깐 혹했지만 생각해 보니 그건 무리였다. 일단 용사 알렉스와 성녀 엘린은 나이상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거나 태어났어도 갓난아기다. 그럼 남는 건 테스론이랑 사이러스, 빛의 마도사 제이드뿐인데, 지금 그의 육체가 권왕 테스론의 것이니 얘는 이미 제외.
'제이드, 그놈은 너무 음흉해서 줘도 가지기 싫고.'
타시드까진 그렇다 치고 시리스를 죽인 놈이랑 한 편이 되긴 싫다! 논리라고는 전혀 없지만 그래도 사람이 감정이란 게 있지 않은가? 게다가 제이드는 빛의 마도사라고 불리긴 했지만 상당히 음흉한 놈이었다. 정보에 따르면 칭호와 달리 뒷구멍으로는 온갖 더러운 짓거리도 서슴지 않았다고 들었다.
그렇게 레펜하르트가 잠시 딴생각을 하자 러스가 불안해하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역시 검을 완성하는 그날까지만 충성하겠다는 것이 기분 나빴던 걸까?'
생각해 보면 저 말, 빼먹을 거 다 빼먹으면 바로 등 돌리겠다는 소리도 되는 것이다. 하지만 테네스 가문을 포기하지 않은 이상 주군으로 모실 수는 없다. 이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다.
그렇게 러스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는데, 레펜하르트가 손을 내밀었다.
"뭐, 충성이랄 것까진 없고 그냥 동료로서 함께 다니는 것이라면 나도 좋은데."
러스가 화색이 되어 일어났다. 이걸로 그는 받아들여졌다. 저 강력한 오러 능력자에게! 앞으로 그를 따르며 그의 모든 것을 흡수할 것이다. 그리고 당당히 한 사람의 오러 유저, 진정한 초인이 되어 가문으로 돌아가리라!
레펜하르트의 손을 마주잡으며 러스가 감격해 물었다.
"형님이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순간 레펜하르트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저기... 지금 몇 살인데?"
"올해로 스물일곱이 되었습니다."
당당히 대답하는 러스를 보며 레펜하르트가 혀를 찼다. 왜 저러나 러스가 의아해하는데, 레펜하르트가 갑자기 딴청을 피우더니 작게 뇌까렸다.
"...나, 아직 스물셋인데."
"에에엑!"
러스는 경악해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아니, 저 덩치, 저 얼굴로 고작 스물셋이라고? 하지만 잘 보니 정말 얼굴이 앳되다. 워낙 몸이 좋아 미처 못 느꼈는데 얼굴을 보니 확실히 20대의 청년이었다. 로브로 몸을 가리고 얼굴만 보았다면 오해하지 않을 정도다.
'왜 이제까지 몰랐지?'
레펜하르트가 뭔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턱을 매만진다.
"내가 그렇게 노안인가?"
"그보단 분위기가.... 묘하게 나이 든 사람처럼 느껴져서...."
더듬거리는 러스를 보며 레펜하르트는 혀를 찼다. 하긴, 머릿속이 50대이니 그렇게 느껴질 만도 하겠다. 이 시간대로 회귀하며 많이 젊은이처럼 사고방식이 바뀌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남들이 보기엔 아니었던 모양이다.
러스가 난처해하더니 물었다.
"그럼 레펜하르트 님이라 부르면 되겠습니까?"
"그것도 좀 이상하잖아?"
비록 러스가 충성을 다하겠다고는 했지만, 그렇다고 레펜하르트의 종이 된 것은 아니다. 나중에 가문으로 돌아갈 입장에, 그런 식의 칭호는 역시 부담스럽다.
"그럼 스승님? 사부님?"
"그건 더 이상하다, 야."
둘 다 당혹해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미처 레펜하르트는 생각 못 하고 있었지만, 이것이 전생에서 사이러스가 대륙에서 최연소 오러 능력자로 알려진 이유였다.
사실 짐 언브레이커블은 대대로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이면 오러를 각성한다. 그러니 원래대로라면 테스론이나 제라드가 최연소 오러 능력자로 알려져야 하리라.
하지만 신장 2미터가 넘는 그들을 아무도 제 나이 때로 봐 주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짐 언브레이커블의 역대 계승자들도 굳이 그 사실을 정정하지 않았다. 자고로 남자들 세계에서 나이 어리면 깔보는 것은 어디를 가나 마찬가지이니까.
잠시 고민하다가, 러스가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나이에 상관없이 형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앞서 길을 걷는 선배 무인에게 형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색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기야, 액면가로 보나 정신연령으로 보나 어색하지 않기는 하지. 머리를 사정없이 벅벅 긁다가 레펜하르트도 귀찮다는 듯 손을 저었다.
"편할 대로 해, 그러면."
"네, 형님."
그렇게 러스가 함께 하기로 결정되자, 다른 이들도 자기소개를 했다.
"아, 저는 실란. 필라넨스를 섬기는 성직자예요."
"잘 부탁한다, 실란."
"시리스입니다."
"틸라입니다."
"음, 둘 다 형님의 노예인가 보군."
"둘 다 내 동료다. 노예 따위가 아니야!"
"...네?"
이해 못 하겠다는 듯 러스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뭐, 당장 설명해 줄 일도 아니고 해서 레펜하르트는 일단 넘어갔다.
마차가 다시 굴러가기 시작했다. 아직 상처가 낫지 않았으니 마차를 타라고 실란이 권했지만, 러스는 몸을 회복시키려면 좀 움직여 주는 게 좋다며 레펜하르트 곁으로 가 걷기 시작했다. 대신 시리스와 틸라를 마차에 태운 뒤 그들은 다시 가도를 따라 북상하기 시작했다.
걸음을 옮기던 중, 레펜하르트가 문득 물었다.
"아, 러스. 궁금한 게 있는데...."
"네?"
"너네, 대체 엘류시온 유적에 대한 정보는 어디서 얻은 거냐?"
"글쎄요? 저는 말단 기사였는지라 그런 건 잘...."
☆ ☆ ☆
그라임 왕국 수도, 템페라드.
인구 십만에 달하는 대륙 서부 최대의 도시인 이곳은 지금 한 가지 소문으로 떠들썩했다. 명성 높은 황금기사가 온갖 고난과 역경을 뚫고 은의 시대 유적, 엘류시온을 탐사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들이 쟁취한 고대의 유물들은 그 가치를 금은으로 바꾸면 마차 열 대를 가득 메울 정도라고 했다. 그 정도의 부를 획득한 테네스 백작가를 귀족들은 모두 시기했고, 평민들은 모두 부러워했다. 술집이며 거리마다 그들이 겪은 모험담이 음유시인들에 의해 읊어지고 골목마다 아이들이 검에 노란 칠을 한 채 '황금기사의 검을 받아라!'라며 칼싸움을 하고 놀곤 했다.
물론 켈베른 성에서 있었던 일, 유서스의 패배와 러스가 그를 암습한 일 등은 철저히 비밀로 붙여졌다. 뭐, 비밀로 해 봤자 귀족들 사이에서는 이미 알려진 정보지만 일반 시민들은 알 수 없는 것, 그들은 그저 열심히 그라임의 황금기사를 찬양하고 또 찬양할 뿐이다.
덕분에 가문 내 유서스의 평가는 여전했다. 레펜하르트에게 패했다 해서 그것이 누가 되지도 않았다. 엄청난 수입을 거두어 가문의 재력이 한층 두터워졌으니 가문의 원로들도 모두 흡족해했다. 상대가 무려 권왕 제라드의 제자인 만큼 그의 패배도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검 쥔 자로서 어찌 승리만을 계속할 수 있을까? 이번 패배를 교훈으로 삼아 더욱 정진하시라며 흘러 넘겼을 뿐이다.
러스의 사건도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테네스 가문이 오러 유저를 배출할 수 있었을 기회를 놓친 것에 대해선 다들 아쉬워했지만, 그렇다고 유서스의 말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다들 그런 승냥이 같은 놈에게 그런 재능을 내린 신을 원망하며 유서스를 위로했다. 그저 가주인 테네스 백작, 폴트만이 러스의 이야기를 듣고 한탄하다 등을 돌렸을 뿐이었다.
모든 면에서 유서스는 현재 왕도의 영웅 취급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 '왕도의 영웅'은 지금, 자신의 침실에서 무릎을 꿇은 채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실망이군요."
나직한, 하지만 차갑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귓전을 찌른다. 유서스는 더욱 죄송해하며 고개를 숙였다. 고개 숙인 그의 눈에 반투명한 두 발이 보였다.
"죄송합니다, 은의 현자시여. 제가 미욱한 탓에 명을 받들지 못했습니다."
유서스 앞에는 검은 머리의 잘생긴 청년의 환영이 허공에 투영되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 달 전, 유서스에게 엘류시온의 정보를 알려 주었던 바로 그 청년이었다.
"...모든 것은 제 잘못이니 저만을 벌하시고 부디 가문에는...."
유서스는 식은땀을 흘렸다. 지금 그가 부복해 있는 곳은 바로 자신의 침실이었다. 연무장보다도 오히려 더 엄중한 경계를 펼치고 있는 장소인 것이다. 이곳에조차 마음대로 환영을 보낼 수 있다니, 은의 현자가 지닌 권능에 대한 감탄과 두려움이 더욱 커졌다.
아무리 강력한 마법사라도 공간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 그저 마법이 걸린 수정구를 통해 서로의 모습과 음성을 확인하는 것이 현재 마법학이 지닌 한계, 그조차도 쌍방에 궁정 마도사급의 강력한 마도사가 있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강력한 은의 시대 유물을 이용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나름 유적 탐사에 잔뼈가 굵은 유서스조차도 접하지 못했던 고도의 아티팩트를.
사소한 환영 하나만으로도 은의 현자란 존재에 대한 경외심이 느껴진다. 유서스는 더더욱 머리를 조아렸다. 청년의 환영이 싸늘한 목소리로 뇌까렸다.
"정보가 부족했던 것도 아닙니다. 많은 것을 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제가 그렇게 무리한 임무를 내렸던가요?"
"죄송합니다...."
"아니면 그라임의 황금기사가 고작 이 정도 인물이었을 뿐인 겁니까?"
연이은 비아냥에 유서스의 미간이 점점 찌푸려진다. 아무리 은의 현자라지만 자신 역시 이름 높은 기사다. 이렇게까지 오만하게 굴 입장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감히 화를 낼 수는 없다. 상대는 테네스 백작가쯤은 간단히 짓밟을 수 있는 존재이니까.
"이대로라면 테네스 가문의 앞날도 순탄치는 못하겠군요."
"제, 제발 용서를!"
청년의 환영에서 혀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쯧쯧...."
거만한 태도를 한껏 과시한 뒤, 환영이 사라졌다. 유서스는 그 뒤로도 한참동안이나 고개를 들지 못했다. 지독한 불안감이 가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가 이를 갈았다.
"젠장!"
2
검은 방, 창문이라곤 하나 없는 사방이 막힌 장소에 한 청년이 서 있었다. 조금 전 유서스의 앞에 환영으로 나타난 바로 그 검은 머리 청년이었다. 청년은 인상을 구기며 발치에서 커다란 수정 하나를 주웠다. 이것은 팬텀 일루저니티, 미리 지정한 곳으로 언제든지 자신의 모습을 투영할 수 있는 은의 시대 아티팩트 중 하나였다.
"크윽!"
청년은 신경질을 내며 수정을 품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그런 짓까지 했는데도 결국 실패했나."
유서스야 청년의 신출귀몰함에 경악했겠지만, 사실 청년이라고 그리 쉽게 모든 일을 처리한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팬텀 일루저니티가 아티팩트급 은의 시대 유물이라지만, 아무 곳에나 척척 환영을 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최소한 시전자가 가 본 적은 있어야 거기에 환영을 보내는 것이다.
뭐, 기억 속의 장소라면 어디든지 환영을 보낼 수 있으니 역시 기적적인 권능이긴 하다. 하지만 청년이 무슨 유서스의 마누라도 아닌데 침실까지 가 볼 일이 어디 있었겠나? 덕분에 몰래 침실에 숨어들어 가 그 장소를 기억하느라 야밤에 담까지 탔다. 훈련장에 나타난 것도 사실은 세 시간이나 미리 들어가서 숨어 있다가 막 나타난 척 쇼를 한 것이었다.
"신비한 척하는 것도 참 힘든 일인지라...."
신출귀몰해 보이려면 참으로 보이지 않는 노력이 많이 필요한 것이다. 백조가 우아해 보여도 수면 아래론 죽어라 물장구치고 있다는 소리가 있던가? 청년은 실로 그 백조의 심정을 이해할 것 같았다.
"하여튼 반쪽짜리 마검사를 믿는 것이 아니었어. 이러니 황금기사가 검성에게 밀려서 싹 잊혔지."
툴툴대며 청년은 방을 나섰다. 은의 현자답게 '폼'을 내느라 뒤로 그 고생을 하고도 결국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으니 심사가 뒤틀릴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그 엘류시온의 목소리를 훔친 괴한의 정체를 청년은 잘 알고 있었다. 덩치 좋고 갈색 머리에 갈색 눈동자, 놀라운 근육질의 육체를 지닌 권왕 제라드의 후계자.
청년의 인상이 더더욱 일그러졌다.
'마왕 레펜하르트!'
방 밖은 근사한 귀족가 저택이었다. 3층으로 되어 수십 개의 방이 나열된, 적어도 공작이나 후작 정도에게나 허락된 거대한 저택이다. 방을 나선 청년이 복도를 걷고 있을 때였다. 하녀 하나가 그를 보더니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테스론 님, 이라나드 공작님께서 찾으십니다."
애써 표정을 관리한 뒤 청년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곧 가겠다고 전해 주시오."
☆ ☆ ☆
방을 들어서며 테스론이 정중히 예를 표했다.
"부르셨습니까, 공작님."
테이블에 앉아 있던 푸근한 인상의 중년의 사내가 그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어서 오게, 테스론 군."
테스론은 살짝 긴장한 얼굴로 사내, 이라나드 공작 앞에 가 앉았다.
이라나드 공작. 그라임 왕국 최대의 재력과 권력을 지닌 귀족이자 왕위 계승 서열 7위이기도 한 그는 현재 그라임 왕국 최강의 오러 능력자이기도 했다. 그 덕인지 60대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중년의 외모를 유지하고 있다. 명실공이 국왕을 제외한 그라임 왕국의 제 2인자가 바로 이 사람 좋아 보이는 사내의 정체인 것이다.
이라나드 공작이 문득 뒤를 돌아보더니 손짓을 했다. 하인들을 모두 물리라는 의미였다. 잠시 후 그가 테스론을 바라보더니 눈빛을 가라앉혔다.
"현자 레스틴이여."
테스론이 속으로 혀를 찼다. 칭호가 바뀐 것을 보니 이라나드 공작이 왜 그를 불렀는지 바로 짐작이 갔다.
'하긴, 모를 리가 없지.'
애써 내색하지 않으며 그가 대답했다.
"예, 현자 아펙투스."
이라나드 공작이 인상을 굳히며 말을 이었다.
"어찌하여 성표를 사용했는가?"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짧게 대답하는 테스론을 보며 이라나드 공작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그가 고개를 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대는 확실히 놀라운 인물이다. 현자 레스틴. 역사상 고작 스무 살의 나이에 오러를 각성한 자는 없었지. 심지어 그대는 마법의 경지 역시 낮지 않아. 게다가 그대가 가진 예지의 힘은 실로 놀라워 인류를 수호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지. 그리하여 나는 그대가 아직 어리고 경륜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은의 현자로 추천했고, 우리는 그대를 받아들였다. 그대에게는 그만한 미래의 가치가 있다 판단했으므로."
"잘 알고 있습니다."
테스론이 엄숙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순간 이라나드 공작이 언성을 높였다.
"즉, 그대가 은의 현자가 된 이유는 현재의 기량이 아닌 미래의 가치에 있다는 것이다! 아직 그대는 은의 현자로 나설 자격이 없다는 것이지! 알고 있는가?"
"잘 알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무런 변명 없이 테스론은 순순히 사죄를 표했다. 이라나드 공작이 잠시 인상을 찌푸리더니, 다시 원래의 푸근한 얼굴로 돌아왔다.
"물론 그대가 성표로 무슨 대단한 일을 벌인 것이 아니니 징계 같은 것은 없을 것이오. 하지만 그대의 위치를 자각할 필요는 있겠지."
"자중하겠습니다."
순순한 테스론의 태도에 이라나드 공작이 다시 말투를 바꿨다.
"그럼 나가 보게, 테스론 군."
"예, 공작님."
방을 나설 때까지도 테스론은 순진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문을 닫자마자 그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
굳은 얼굴로 테스론이 중얼거렸다.
"젠장...."
겉으로는 잔뜩 엄포를 줬지만, 사실 지금의 테스론에게는 테네스 백작가에게 해를 끼칠 어떨 힘도 없었다. 괜히 그토록 신비해 보이려 발악한 것이 아니다. 테스론이 한숨을 쉬었다.
'간신히 은의 현자의 일원이 되었지만, 아직 갈 길이 멀구나....'
인류의 수호자.
대륙을 어둠 속에서 지배하는 비밀결사, 은의 현자.
분명 그 힘은 의심할 바 없이 한 나라의 흥망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 정도다.
단 문제는....
'내가 아직 여기서 최말단이란 말이지.'
초조했다. 미칠 정도로 초조했다.
아직도 기억한다. 6년 전의 그날, 죽었다고 생각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의 그 충격을.
비참할 정도로 왜소한 소년으로 다시 깨어나고, 그 소년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았을 때의 그 경악의 감정을.
세상 그 누구보다도 신뢰했던, 강철과도 같던 자신의 육체는 더 이상 없다. 가진 것은 피골이 상접해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은 수수깡 신체뿐.
지독한 상실감도 상실감이었지만, 그보다 더 두려웠던 것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자신이 이 육체의 소유자가 되었다는 것은, 이 육체의 진짜 소유자가 자신의 육체를 차지했을 수도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엔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테스론의 육체, 어린 레펜하르트는 그 당시 델피아의 마탑에서 한 마법사의 도제로 수행 중인 견습 마법사에 불과했다. 자유라고는 전혀 없는, 반쯤 노예나 다름없는 신세였다. 저 최악의 추측을 증명할 힘도 돈도 없었다.
설마 설마 하면서도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비록 짐 언브레이커블의 수행을 다시 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 해도 그는 권왕 테스론, 한때 오러의 궁극에 달한 이들 중 하나였다. 그가 익히고 있던 모든 깨달음을 총동원해, 이 허약한 레펜하르트의 육체를 다시 무인의 것으로 탈바꿈시켰다.
그 와중에 마법도 열심히 익혔다. 과연 마왕이라 불릴 정도의 대마도사다운 두뇌였다. 전생의 테스론은 그리 머리가 좋지 않았지만, 일단 레펜하르트의 육체를 차지하고 나니 그야말로 헛소리처럼만 보이던 모든 마법이 쏙쏙 이해가 되었다.
스무 살이 되는 해, 결국 테스론은 전생에서보다 조금 늦게 오러를 각성하는 데 성공했다. 동시에 4서클에 입문해 정식 마법사의 자격도 획득했다.
세상을 나서자마자 최우선적으로 바실리 왕국 남부, 라키드 산맥으로 향했다. 악몽의 장소인 그의 사문, 짐 언브레이커블을 찾기 위해서였다.
물론 제라드를 직접 만나지는 않았다. 사부에 대한 공포는 이미 영혼에 각인되어 있어, 아무리 육체가 바뀌었다 해도 다시 만날 엄두가 나질 않았다. 대신 제라드가 물품을 구입하러 주로 들르던 인근 마을에서 정보를 얻었다.
그곳에서 확인했다. 제라드가 어린 자신을 가르치고 있음을. 게다가 이미 어린 자신을 테스론이 아닌 레펜하르트라고 부른다는 것까지.
악몽이었다. 마왕 레펜하르트는 틀림없이 이 시대에 부활했다. 권왕이라 불리던 자신과 마찬가지로.
당장 처리하고 싶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상대는 이미 오러를 각성해 그의 육체를 완벽히 다루고 있었다. 젊었을 때의 자신이 얼마나 강했는지 제일 잘 아는 것은 테스론 본인이었다. 아무리 오러를 각성했고 4서클까지 마법을 익혔다지만,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제라드의 도움을 얻겠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 그의 사부 성격상, 제자의 영혼이 바뀌건 말건 몸만 튼튼하다면 전혀 신경 쓰지 않을 게 뻔했다.
'나 같아도 그랬을 테니까.'
지금이야 레펜하르트의 두뇌를 얻어서인지 잔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테스론이었지만, 원래 짐 언브레이커들의 역대 문도들은 대대로 성격이 비슷했다. 인간성을 결정짓는다는 유년기 내내 맞고 맞고 또 맞으면서 10년간 살아 보라. 인간이 단순 무식해질 수밖에 없다.
눈앞이 캄캄했다.
그냥도 대륙을 공포에 잠기게 만들었던 전율적인 마왕이었다. 그런 자가 이제 자신의 육체, 강철의 신체를 손에 넣었다. 솔직히 레펜하르트를 쓰러트린 것은 순전히 체력 싸움이었다. 동료들의 희생과 불굴의 육체로 장기전을 벌여 겨우 쓰러트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유일한 약점마저 보충해 버렸다.
완벽해져 버린 그를 세상의 그 누가 상대할 수 있을까? 다가올 악몽 같은 미래를 누가 막을 수 있느냔 말이다!
"막아야 해...."
복도를 걸어가며 테스론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마법의 힘을 완전히 되찾기 전에 막아야 한다."
아직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제아무리 마왕이더라도 내 대가리로 왕년의 마법을 되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본인 입으로 말하고 나니 참 뭔가 비참한 대사다. 하지만 테스론은 전생의 자신이 돌대가리였음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있었다. 바뀐 육체를 보고 절망한 자신처럼 레펜하르트 역시 바뀐 두뇌를 보며 절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테스론 역시 이 부실한 육체로 오러를 각성하는 데 성공했다. 레펜하르트라고 그 반대의 일을 하지 못할 것이란 건 지나치게 낙관적인 처사다. 그는 대륙 역사상, 고금 제일의 마법사라 불리던 존재였으니까.
'그런 만큼 엘류시온의 목소리를 놓친 것은 뼈아프군.'
테스론은 혀를 찼다. 그는 엘류시온의 목소리가 무엇인지 몰랐다. 전생의 그는 무식한 주먹패일 뿐이었다. 복잡한 마법 도구 따위 알 리가 없는 것이다. 그저 테스론이 아는 정보는 엘류시온 유적에서 레펜하르트가 저 유물을 얻어서 그토록 젊은 나이에 대마도사가 되는 기량을 쌓았다는 것 정도다.
'엘류시온의 목소리, 그리고 사방신의 유물. 분명 제이드는 그 은의 시대 아티팩트를 이용해 마왕이 저 정도의 힘을 얻었다고 했었지.'
그렇다면 결코 그것들을 손에 넣지 못하게 하겠다. 사방신의 유물이 어디다 쓰는 물건인지는 물론 테스론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어디에 있고,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고 있다. 마왕의 정보에 대해서는 지겹도록 보아 온 그였으니까.
'어떻게든 사방신의 유물이란 건 미리 선수 쳐야 할 텐데.'
고민하며 테스론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마음 같아서는 자신이 직접 유적 탐사를 나서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힘이 부족하고....'
명색이 오러 유저였다. 게다가 마법 수행 역시 게을리하지 않아 슬슬 5서클의 경지에 다다랐다. 이 정도면 어딜 가도 꿀리지 않을 훌륭한 무력의 소유자임에는 분명했다.
하지만 엘류시온 정도의 초일급 유적을 탐사할 수준은 아니었다. 아무리 전생의 기억으로 정보를 알고 있다고는 해도, 테스론은 현재 자신의 기량으로 엘류시온을 탐사할 수 있을 것이란 자신이 없었다. 굳이 유서스를 이용한 이유가 이것이었다.
물론 이 점은 현재의 레펜하르트 역시 마찬가지다. 유서스조차도 유적에 대한 정보를 숙지한 상태에서 기사단과 마법사, 성직자를 잔뜩 거느리고서야 겨우 엘류시온 탐사를 성공하지 않았던가? 사실은 지금 레펜하르트의 실력으로 혼자 엘류시온을 탐사하는 것은 무리다.
문제는 테스론과 레펜하르트, 둘 사이의 유적 정보 수준이 상당히 차이 난다는 점이었다.
테스론은 레펜하르트가 마왕으로 불리지 않던 시절, 이미 이름난 유적 탐사자임을 알고 있었다. 그 역시 유적 탐사에 일가견이 있긴 했지만, 테스론이 아는 정보는 어디까지나 그 유적의 공략법이었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유적의 시스템 정보 자체를 숙지하고 있다. 시스템을 조작하고, 은밀히 숨겨진 백 도어를 이용한다면 현재 그의 무력으로도 어지간한 유적은 충분히 돌파할 수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힘을 더 키워야 해. 지금은 레펜하르트는 고사하고 황금기사조차도 상대할 수 없다....'
걸음을 옮기며 테스론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 ☆ ☆
세텔라드 산맥을 따라 놓여 있는 그라임 왕국 서부 가도, 사방이 평야인 그 도로를 통해 한 대의 마차가 덜컹덜컹 길을 가고 있었다.
그럭저럭 평범한 품질의 짐용 말 한 마리가 마차를 끌고, 붉은 장발의 소년이 마부석에 앉아 반쯤 졸면서 고삐를 잡고 있다. 소년의 좌우로는 엘프와 드워프 소녀가 사이좋게 앉아 뭔가 이야기를 나눈다. 마차 옆에서는 날렵한 체구의 검을 찬 청년 하나가 마차를 따라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검을 찬 청년, 러스는 문득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슬슬 날씨가 풀리려는지 겨울바람도 그리 시리지 않았다. 러스가 마차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대체 형님은 저 안에서 뭘 하시는 걸까?'
경지에 오른 무인이라 해도 매일 자신의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는 법이다. 그런데 지금, 이 일행과 합류한 지 사흘이 지나도록 러스는 레펜하르트가 무술 연습을 하는 꼴을 단 한 번도 못 봤다!
사흘 내내 그들이 서부 가도를 따라 북상하는 동안 레펜하르트가 한 짓이라고는 아침 먹고 마차 안에 처박혔다가, 점심 먹고 마차 안에 처박히고, 저녁 먹은 뒤 또 마차 안에 처박히는 것뿐이었던 것이다. 뭐, 본인 말로는 생각할 게 좀 있어서 그렇다는데, 대체 뭐 그리 생각할 게 많아서 하루 진종일 마차 안에 들어앉아 있는지 모르겠다.
'설마하니, 무술적인 깨달음 얻겠다고 명상하는 건 아닐 테고.'
뭐, 세간에는 경지에 오른 무인은 정신적인 수련이 중요하지 육체 단련은 더 이상 필요가 없다는 말이 널리 퍼져 있기는 한다. 하지만 기사인 러스는 그게 얼마나 근거 없는 소리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하루 놀면 하루만큼 뒤처지는 것이 무술의 기량이다. 깨달음이 필요 없다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경지에 올랐으니까 만날 데굴거리면서 놀아도 정신적으로 강해져서 기량이 쑥쑥 오른다? 그렇게 따지면 식물인간도 무신武神이 될 수 있겠지.
누가 뭐래도 무술을 발휘하는 기반은 육체다. 육체가 받쳐 주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시간 앞에 영원한 것은 없다. 아무리 완벽한 육체라도 매일같이 단련해 주지 않으면 조금씩 쇠퇴할 뿐이다.
레펜하르트 정도의 강자가 설마 저런 걸 모를 리는 없을 테고, 그렇다면 단련까지 빼먹어 가면서 왜 저러는 건지 도무지 짐작이 가질 않는다.
러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하긴, 이해하기 힘든 건 첫날부터였지.'
지난 사흘간, 러스가 제일 당황했던 점은 시리스나 틸라를 대하는 레펜하르트의 태도였다. 문득 처음 노숙했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서부 가도 근처 민가에서 구입한 식료로 배부르게 저녁을 먹고 나서였다. 러스가 막 그릇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참이었다. 갑자기 레펜하르트가 엄한 목소리로 그를 붙잡았다.
"어디 가?"
"네? 배도 꺼트릴 겸 검이나 좀 휘두르려 합니다만?"
그때 레펜하르트는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말했다.
"갈 때 가더라도 제비는 뽑고 가야지."
"네?"
뭔 제비를 뽑나 했더니, 식사 후 설거지 등의 뒤처리를 할 사람 두 명을 제비로 뽑는다는 것이었다. 순간 러스는 어이가 없었다. 아니, 뒤처리를 노예들이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 아닌가? 혹시 레펜하르트가 자신의 기를 죽이려고 일부러 저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1분 후, 적어도 그건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짧은 제비를 뽑은 것은 러스뿐이 아니었으니까.
"쳇, 또 졌네."
"오늘은 그릇 좀 뽀득뽀득 닦아요, 레펜 씨."
"야, 실란. 왜 항상 넌 제비에 안 걸리는 거야 도대체? 수작 부리는 거 아냐, 혹시?"
"필라넨스께서 항상 저를 가호하신답니다. 으히히!"
"수상한데...."
싱글거리며 실란과 시리스, 틸라가 노숙할 준비를 하러 가 버린다. 더러운 식기를 든 채 러스는 멍하니 서 있었다. 도저히 적응이 되질 않았다. 레펜하르트가 그의 등을 툭 쳤다.
"뭐해? 그릇 씻으러 가야지."
그러고는 정말로 식기를 들고 가도변의 작은 개울로 내려가는 것이 아닌가? 그 웅장한 덩치로 쪼그려 앉아 그릇을 뽀득뽀득 씻는데, 보아하니 하루 이틀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이 괴이한 사태는 결코 농담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도 어이가 없어 물어봤다.
"왜 노예들을 놔두고 직접 이런 일을 하는 겁니까, 형님?"
그때 대답이 이것이었다.
"세상은 저들을 노예라 취급하지만 난 결코 그러고 싶지 않다. 난 저들을 소중한 동료로 대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거다. 이것이 거슬린다면 러스, 네가 나를 떠난다 해도 충분히 이해한다."
덕분에 러스도 찍소리 못 하고 함께 식기를 닦아야 했다. 싫으면 떠나라는데 거기다 대고 뭔 말을 할 수 있겠나? 노예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는 전적으로 주인 마음이니 뭐라 할 수도 없다. 경지에 오른 무인들 중엔 꽤나 괴팍한 사람들이 많다더니, 정말 그런 것 같았다.
한참 마차를 바라보며 그때의 일을 떠올리다가, 러스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긴, 내가 신경 쓸 문제는 아니지.'
레펜하르트가 어떤 사람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이해하기 힘든 사람인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자신은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는 것. 비록 제한적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엄연히 기사의 맹세였다. 그렇다면 레펜하르트가 어떤 인물이건 그는 충성을 바쳐야 했다. 맹세했던 대로, 자신의 검이 완전해지는 그날까지.
'그날까지는 형님이 곧 나의 주군이다. 그렇다면 나는 형님의 뜻대로 따르면 될 뿐이야.'
속 편하게 생각을 정리한 뒤 러스는 허리의 검을 뽑았다. 칼날을 타고 푸른빛이 서서히 흘러내렸다. 그렇게 블레이드 오러를 끌어낸 채 러스는 마차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웅웅웅.
처음에는 일정하던 블레이드 오러가 시간이 지나자 조금씩 흔들리며 불규칙적인 소음을 낸다. 역시 힘들다. 러스는 땀을 흘리며 계속 오러에 집중했다. 오러를 자유자재로 변화시키는 것에는 재능이 크게 작용하지만, 오래토록 유지하는 데는 센스 따윈 필요 없다. 그저 인내심을 가지고 계속 수련해 익숙해질 수밖에 없다.
러스가 호흡을 고르며 한숨을 쉬었다.
'사흘째 꾸준히 하고는 있는데. 쉽지 않구나, 이건.'
하지만 러스는 이내 표정을 폈다. 레펜하르트의 마음을 생각해서라도, 이 정도로 엄살을 피울 수는 없었다.
레펜하르트는 러스를 받아들인 첫날 바로 오러를 균일하게 유지하는 용법에 대해 상세하게 전수해 주었다. 권과 검이라는 차이는 있지만, 이 오러 균일화 작업은 그냥 오러를 다루는 기본적인 수행 방식이라 러스에게도 충분히 통용이 되었다.
그때 러스가 얼마나 감동했던가? 물론 이 용법은 짐 언브레이커블의 비기라기보다는 그냥 오러 유저들이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비법이라 딱히 유파의 기술을 유출했다고 볼 수는 없다. 레펜하르트 입장에서는 가르쳐 줘도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러스 입장에서는 전혀 다르다. 만난 지 하루 만에 바로 기술을 전수해 준다는 것은 레펜하르트가 그를 진심으로 받아들였다는 의미, 가르침도 가르침이지만 그보다 상대가 보여 준 호의가 더더욱 감격스럽다.
언제나 천덕꾸러기 신세에 항상 무시받으며, 기본적인 검술조차도 배우지 못해 곁눈질로 훔쳐 익혀야 했던 러스에게 이런 호의는 난생 처음이었다.
땀 흘리는 와중에도 러스는 기분 좋게 웃었다.
그는 자신을 받아 주었다. 자신을 믿고 은혜와 호의를 베풀었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자신이 그를 따를 이유는 그것으로 충분하고도 남았다.
'상관없잖아? 형님이 어떤 사람인지는.'
뭐,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여전히 의문은 남아 있다.
'그나저나, 형님은 진짜 저 안에서 뭐 하는 거지?'
☆ ☆ ☆
러스의 생각과 달리 레펜하르트는 정말로 마차 안에서 명상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가 명상을 하는 이유는 무슨 말도 안 되는 무술의 깨달음을 얻겠다거나 하는 그런 건 아니었다.
휘장이 드리워진 컴컴한 포장마차 안, 한참 동안이나 가부좌를 튼 채 눈을 감고 있던 레펜하르트가 눈을 번쩍 뜨며 중얼거렸다.
"후우... 대충 다시 마력이 찼으니 또 시도해 볼까."
레펜하르트가 발치에 놓인 검은 상자를 건드렸다. 은의 시대 아티팩트, 엘류시온의 목소리였다. 그걸 손가락으로 누른 채 레펜하르트는 사흘간 지겹게 외운 시동어를 읊조렸다.
"스위치 온."
정해진 언령이 들리자 엘류시온의 목소리에서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상자 여기저기가 점등하며 빛을 내더니 강렬한 마력장을 주위에 퍼트린다. 둥근 마력장이 레펜하르트를 통째로 삼키고 마차 안을 메운다.
레펜하르트가 다시 언령을 외웠다.
"도전. 1단계. 초보자용."
동시에 그의 눈앞을 환한 빛이 가득 메웠다. 분명 어두운 포장마차 안이었던 곳이 환한 빛으로 가득한 방이 된다. 레펜하르트가 주위를 살피더니 중얼거렸다.
"이놈의 유사 현실도 슬슬 지겹네. 배경 좀 바꿀까."
허공에 손가락을 가져가니 빛으로 된 콘솔이 저절로 떠오른다. 환영의 콘솔 위 버튼을 몇 번 누르자 갑자기 주위 환경이 변했다. 새하얀 방 대신 백사장이 펼쳐지고 푸른 파도가 철썩이는 해변이 시야 가득 들어온다. 심지어는 얇은 천으로 아슬아슬한 곳만 간신히 가린 금발의 엘프 미녀들이 깔깔대며 백사장을 오가는 모습마저 보인다. 레펜하르트가 싱글벙글 웃었다.
"역시, 이왕이면 배경 화면도 눈요기가 되는 쪽이 좋잖아?"
레펜하르트는 이미 고대어를 해독해 저것이 은의 시대 여성들이 헤엄을 치기 위해 보편적으로 입는 복장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여성들이 저런 것만 입고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있다니, 은의 시대는 이 얼마나 축복받은 시대란 말인가!
어쨌든 눈요기나 하려고 엘류시온의 목소리를 가동한 것은 아니다. 레펜하르트는 백사장에 적당히 자리를 잡았다. 어차피 이 해변은 마력으로 생성한 일종의 유사 현실, 그가 아무리 움직여 봤자 실제 그의 몸은 여전히 가부좌를 튼 채 마차 안에서 미동도 하지 않을 것이다.
레펜하르트가 자세를 잡고 안색을 굳혔다. 심호흡을 하며 긴장감을 높이더니, 허공에 손짓을 했다. 곧바로 해변 위 하늘에 고대어가 떠올랐다.
Welcome to Magical Beat!
그리고 요란한 음악과 함께 허공에서 형형색색의 판자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레펜하르트가 이를 악물며 양손을 휘저었다.
"바람이여, 탄환이 되어 적을 쳐라! 에어로 블렛!"
1서클 풍계 주문, 에어로 블렛이 허공으로 날아가 푸른 판자 하나에 명중한다. 판자가 허공에서 소멸하며 폭죽처럼 터졌다. 레펜하르트가 재차 마법을 시전했다.
"폭염이여, 응집하라! 파이어 애로우!"
화염의 화살이 날아가 붉은 판자에 적중한다. 붉은 판자도 똑같이 허공에서 터지며 불꽃을 피워 냈다. 레펜하르트는 연거푸 마법을 준비하고 곧바로 날렸다. 에어로 블렛, 화이어 애로우, 매직 미사일, 아쿠아 볼 등 모두가 1서클 초보 주문이었다. 그리고 그 주문들이 떨어지는 판자에 하나하나 적중한다. 적중할 때마다 불꽃이 터진다. 그때마다 쿵짝쿵짝 음악이 울려 퍼지며 리듬감을 더한다.
점점 판자 떨어지는 속도가 빨라졌다. 레펜하르트의 안색도 점점 굳어 간다. 점점 밀려오는 판자의 낙하 숫자를 마법의 시전 속도가 못 따라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판자 하나가 백사장에 내리꽂히는 순간.
콰쾅!
폭발이 일어났다. 물론 유사 현실이므로 그 폭발이 레펜하르트에게 무슨 영향을 주거나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오! 신이시여!"
"이게 뭔가요!"
"제대로 좀 해 봐요!"
"당신은 고작 이것밖에 안 되나요!"
그때마다 금발 엘프 미녀들이 호들갑을 떨며 고대어로 레펜하르트를 타박하고 있었다. 아무리 유사 현실인 줄은 알지만, 여자들이 입을 모아 바가지를 긁어대는데 남성 된 입장으로 참 견디기 힘들다. 차라리 고대어를 못 알아들으면 모르겠는데, 레펜하르트야 어학 분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인물! 억양에 실린 비난의 기색까지 쏙쏙 다 이해가 된다.
"으이그!"
이를 갈며 레펜하르트는 계속 떨어지는 판자들을 마법으로 요격해 떨어트렸다. 벌써 판자를 세 개나 놓쳤다. 그리고 그때마다 엘프 미녀들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바가지를 벅벅 긁어 댄다.
"벌써 세 개째!"
"세상에! 이렇게나 놓치다니!"
"남자라면 이 정도쯤은 척척 해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 진짜 신경 거슬린다.
"...눈요기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청소년 모드 할걸 그랬나?"
레펜하르트는 애써 미녀들의 비난을 무시하며 마저 떨어지는 판자들을 마법으로 요격시켰다. 그러던 중이었다.
마지막 판자 하나가 아쿠아 볼에 적중되며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거대한 불꽃이 되어 사방으로 터졌다.
펑! 퍼펑! 펑!
수많은 불꽃이 해변의 하늘 위를 아름답게 수놓는다. 동시에 하늘 저편에서 유쾌한 어조의 고대어가 들려왔다.
Congratulation!
레펜하르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으아, 이제 겨우 성공했네."
미녀들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레펜하르트 곁으로 다가와 애교를 떨기 시작했다.
"축하해요!"
"역시 당신은 대단해요!"
"성공했어요! 굉장해요!"
레펜하르트는 인상을 썼다. 그리고 미녀들이 달라붙건 말건 바로 허공에 손짓을 했다. 그러자 바로 해변의 모습이 싹 사라지고 다시 세상이 하얀 방으로 바뀌었다. 혀를 차며 레펜하르트가 바닥을 툭툭 두들겼다.
"이놈의 엘류시온의 목소리가 성능은 참 좋은데...."
바닥을 두 번 치자 갑자기 하얀 방이 사라지며 어둠이 사방을 뒤덮었다. 유사 현실이 사라지며 다시 휘장이 덮인 마차 안으로 돌아온 것이다. 분명 서 있던 레펜하르트의 모습도 어느새 가부좌를 틀고 있는 자세로 바뀌었다. 레펜하르트가 눈을 뜨더니 마저 투덜거렸다.
"쓸데없는 기능이 너무 많단 말이지."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이내 표정을 풀었다. 지금 그는 유사 공간에서 1서클 주문을 거의 1, 2초 안에 모두 시전하는 데 성공했다. 이 정도면 어지간한 정식 마법사 수준의 시전 속도였다. 이놈의 돌대가리 테스론의 술식 연산 능력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쾌거인 것이다.
상자를 주워 들며 레펜하르트는 흐뭇하게 웃었다.
"역시 술식 연산 능력을 단련하는 데는 이것만한 게 없구먼."
아티팩트, 엘류시온의 목소리.
이것은 사실 은의 시대에서는 일종의 학습용 게임으로 개발된 마도구였다. 강력한 마력장으로 시전자를 유사 현실로 끌어들인 뒤, 떨어지는 마법들을 정확히 받아치면 점수를 얻는 방식이다. 옵션도 여러 가지가 있어 해변 말고 카지노라든가 학교, 공원 등등 온갖 다양한 배경 현실을 선택할 수 있었다.
리듬감 넘치는 음악과 미녀들의 응원, 그리고 각 스테이지를 통과할 때마다 점수를 얻는 성취감 등 시스템을 보아하니 딱, 사용자의 의욕을 높이고 마법의 경지를 올리기 위한 용도로 개발된 모양이었다.
솔직히 레펜하르트 입장에서는 조금 어이가 없는 마도구이기도 했다.
'아니, 은의 시대에는 얼마나 공부하는 걸 싫어하는 놈이 많았기에 이런 것까지 다 만든 거래?'
현 시대의 마법사 입장에서는 굳이 저런 옵션까지 달아 가며 마법을 익히는 상황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지식은 곧 힘이요, 사회적 지위였다. 익히면 익힌 만큼 강해지고 사회적으로도 인정받는 것이다. 그렇기에 마법사들이 단 한 개의 마법이라도 더 얻기 위해 온갖 비굴한 모습도 마다치 않는 것 아닌가?
저렇게 온갖 재미를 덧붙여서까지 마법을 익히게 만드는 마도구가 있을 정도라니, 은의 시대 인간들은 어지간히도 마법 익히기 싫어했던 것 같았다.
'게을러서인가, 아니면 지식이라는 것이 워낙 구하기 쉬워 가치가 떨어진 건가?'
뭐, 어느 쪽인지는 은의 시대를 살아 보지 않은 이상 알 수 없다. 하여튼 레펜하르트가 이 엘류시온의 목소리를 애용한 것은 물론 저 재미 때문은 아니었다.
엘류시온의 목소리가 가진 효능은 마력장으로 사용자를 유사 현실로 이끄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 마력장과 함께 특이한 마력파를 함께 쏘는데, 이 마력파가 두뇌에 작용하면 뇌 기능이 향상되어 술식 연산 속도를 높여 주는 것이다. 무슨 원리로 그렇게 되는지는 레펜하르트도 해명하지 못했다. 뉴런이 어쩌고 하는데 단어 자체가 생소해 도저히 해독이 되질 않았다.
어쨌거나 중요한 점은, 이 엘류시온의 목소리를 사용하면 마법사의 연산 능력이 엄청나게 올라간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는 마법사가 될 수 없는 이들도 마법사다운 두뇌로 개조되고, 마법사라면 자신의 연산력을 빠르게 단련시킬 수 있다. 이걸 학회에 발표했을 때 모든 마법사들이 경악하고 그를 부러워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세상에 알려진 거랑 달리 난 이걸로 별 재미를 못 봤었지만.'
워낙 엘류시온의 목소리가 가진 효능이 기적적이다 보니, 레펜하르트가 10서클의 경지에 오르게 된 이유가 저 유물 덕이라는 소문이 널리 퍼지긴 했다. 하지만 사실 레펜하르트는 저걸 쓰나 안 쓰나 별 차이가 없었다. 이미 전생의 그는 엘류시온의 목소리가 개조할 것도 없을 만큼 뛰어난 연산 능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대신 이걸로 시리스도 훈련시키고, 드워프 마법병단도 훈련시키고 그랬었지.'
추억에 잠기며 레펜하르트는 검은 상자를 주워 들었다.
'이 좋은 게 왜 세상에 하나뿐인지 모르겠단 말이야?'
전생에서도 가진 의문이었다. 엘류시온의 목소리는 아무리 봐도 단 하나만 있을 이유가 없었다. 학습용 도구라는 특성상 무한의 주머니처럼 상당히 많은 숫자가 발견되어야 정상인 것이다. 그런데 신기할 정도로 없었다. 레펜하르트가 학회에 발표한 이후 다른 마법사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정체를 몰라 방치되었던 유물들을 싹싹 뒤져 봤지만 닮은 기능을 가진 유물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개발된 것이 틀림없어 보이는데 세상에 단 하나뿐인 유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어쨌거나 이번 생애에서도 이걸 손에 넣었으니 천만다행이지.'
전생에서는 장난감일 뿐이었지만 지금은 이보다 더 유용한 물건도 없다. 이것이라면 이 테스론의 두뇌로도 상당한 수준의 마법 능력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
'물론 왕년 내 두뇌에 비하면 여전히 모자라겠지만, 그 정도는 마법적 이해도와 숙련도로 어떻게 커버가 될 것이고.'
레펜하르트는 허공에 손짓을 했다. 짧은 시동어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세상을 밝히는 등불, 라이팅!"
작은 광구가 손끝에서 형성되어 마차 안을 밝혔다. 1서클 광계 주문, 가장 기초적인 조명 마법일 뿐이지만 사흘 전의 그는 이걸 시전하는 데도 족히 10초는 넘게 걸렸다. 하지만 이제는 어지간한 정규 마법사 수준의 시전 속도가 나와 준다.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레펜하르트는 흐뭇하게 웃었다.
그때 밖에서 실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봐요! 레펜 씨!"
"응? 벌써 밥때가 됐나?"
아직 배는 안 고픈 것 같은데? 의아해하며 레펜하르트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인상을 쓰며 몸을 여기저기 움직였다.
"에구구, 너무 처박혀만 있었나? 몸이 찌뿌둥하네."
아무리 마법을 되찾는 것도 좋지만, 그렇다고 현재 얻은 힘을 무시할 이유도 없다. 지난 사흘간은 너무 집중하다 보니 이렇게 되었지만 앞으로는 매일 육체 단련도 게을리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살짝 반성하며 레펜하르트는 마차 밖으로 나갔다.
"왜 불렀어?"
마부석의 실란이 앞을 가리켰다.
"스트라샌드예요!"
"어? 벌써?"
레펜하르트는 혀를 차며 시선을 올렸다. 과연 길게 이어진 서부 가도 저편, 언덕 위로 거대한 도시가 석양 아래 붉게 물들어 있었다.
3
스트라샌드는 그라임 왕국 서부 가도와 세텔라드 산맥 북부 교역로가 교차하는 군사적, 상업적 요충지다. 그라임 왕국의 북부 관문이라고도 불리는 교역 도시답게 거리 곳곳에 여관과 술집들이 즐비하다. 그중 한 여관 뒷마당에서 네 명의 남녀가 한창 대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왼쪽이 비었다, 러스!"
성인 장정보다도 머리 하나는 더 큰 청년이 날카롭게 외치며 오른손을 내리친다. 희미한 황금빛이 감도는 수도가 검 쥔 청년, 러스의 어깨를 노리고 쇄도해 온다. 러스가 인상을 쓰며 몸을 비틀어 공격을 피한 뒤 마주 찔렀다.
"심장입니다! 형님!"
푸른빛이 감도는 롱 소드가 덩치 큰 청년, 레펜하르트의 가슴팍을 정확히 찔러 간다. 왼손을 휘둘러 칼날을 걷어 내며 레펜하르트가 외쳤다.
"괜찮은 반격! 하지만 오러가 흔들린다! 공격 시에도 위력이 줄어선 안 돼!"
"네, 형님!"
레펜하르트는 지적을 하며 러스를 상대로 대련에 열중했다. 지난 사흘간 내버려 둔 것이 미안하기도 했고, 또 본인도 몸을 좀 추스를 필요성이 있어 시작한 짓이었다. 러스도 레펜하르트의 움직임, 그리고 오러의 흐름을 느끼며 진지하게 상대하고 있었다.
한편, 이 두 사람에게서 한참 떨어진 마당 귀퉁이에서 두 소녀도 저마다 목검과 도끼를 들고 살벌하게 검투를 벌이고 있었다. 시리스와 틸라였다.
"머리!"
목검을 휘두르며 시리스가 짧은 외침을 터트렸다. 켈베른 성에서 롱 소드를 빼앗긴 그녀에게 근사한 검을 사 줄 때까지 임시로 쓰라며 레펜하르트가 만들어 준 것이었다.
목검이긴 하지만 이걸 만들기 위해 레펜하르트는 기백 년 잘도 자라던 아름드리나무 하나를 통째로 꺾었고, 그 나무줄기를 무려 오러를 깃든 수도로 슥슥 깎아서 시미터의 형태로 만드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목검 하나 만들자고 나무 하나를 통째로 꺾다니? 그 무식함에 실란은 기가 막혀 입을 쩍 벌렸고 러스는 과연 무인다운 호탕함이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이 차가운 인상의 청년은 평소에 얼마나 구박을 받고 살았는지, 레펜하르트가 좀 잘해 주자 그가 하는 모든 것이 다 멋져 보이는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외침 그대로 시리스의 목검이 틸라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든다. 틸라가 기합을 터트리며 땅을 박찼다.
"타앗!"
자신의 머리를 노리던 목검을 뒤로 뛰어 피하자마자 틸라가 다시 허리를 튕기며 앞으로 돌진했다. 뒤로 빠졌다가 바로 제자리로 돌아오는 동작이 어찌나 빠른지, 마치 원래부터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었던 것처럼 착각이 들 정도다. 그대로 틸라가 소리치며 배틀 액스를 휘둘렀다.
"어깨! 허리!"
보통 인간이라면 양손으로 간신히 다룰 거대한 배틀 액스를 작은 소녀 체구의 틸라는 가볍게도 휘두르고 있었다. 뭐, 사실 드워프 기준으로는 이미 성숙한 처녀인 틸라이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영 소녀로만 보인다. 지극히 언밸런스한 모습을 과시하며 틸라는 시리스의 어깨와 허리를 동시에 압박했다.
목검이 아니더라도 저 정도의 중병이 연달아 들어오면 도저히 맞받아칠 수가 없다. 시리스가 스텝을 밟아 지그재그로 공격을 피했다. 회피 동작 하나하나가 반격을 대비하고 있어 틸라도 후속타를 날릴 수가 없다. 거리를 벌린 뒤 틸라가 웃으며 말했다.
"이야, 기술적인 면에서 도저히 전 시리스의 상대가 안 되네요."
시리스도 화사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도 일격의 파괴력이 너무 차이가 심해서 파고들 틈을 못 찾겠어요. 드워프 전사의 혈족에 대해선 어린 시절 들었었는데, 대단하네요."
스틸해머 일족에서 유일하게 남은 전사의 혈족, 틸라 디 스틸해머. 그녀의 기량은 의외로 대단했다. 겉보기와 달리 무지막지한 괴력으로 밀어붙이는 그녀의 공격은 알아도 막을 수가 없고, 피하면 반격의 틈이 굉장히 좁다. 섬세한 검술을 자랑하는 시리스로도 쉽게 상대하기 힘들었다.
둘은 잠시 숨을 고른 뒤 다시 맞붙었다. 넓은 여관 뒷마당, 뒤채 하나를 통째로 빌린 덕에 다른 이들의 눈도 없는지라 다들 신나게 대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미리 공격 위치를 알려 주는 대련이니 다칠 일도 별로 없고, 혹여나 실수한다 해도 바로 옆에 최고급 약통이 있는 것이다. 부담 없이 즐겁게 대련에 임할 수 있었다.
물론, 그 최고급 약통은 구석에 쪼그려 앉아 뿌루퉁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무인들은 심심하지 않아 좋겠네요...."
상대도 없고, 신관이기도 한 실란은 심심해하며 하품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야 싸움 구경 재밌다고 봐 댔지만 그것도 몇십 분 지나니 영 지루한 것이다. 다시 러스를 상대하기 시작한 레펜하르트의 눈치를 보다가, 실란이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그럼 나도 훈련이나...."
귀신같이 알아채고 레펜하르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넌 일단 쉬라고 했잖아!"
사실 실란도 마냥 놀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미 그는 팔굽혀펴기 20회씩 나누어 다섯 번, 앉았다 일어나기 100회 등등 기본적인 근육 단련 스케줄을 소화한 후다. 레펜하르트가 맞춰 준 스케줄이었다. 지금 실란은 꽤나 전신에 알이 배겨 있는 상태인 것이다. 여기서 더 몸을 혹사해봐야 병날 뿐이다.
하지만 여유만 되면 병나기 직전까지 혹독하게 몸을 움직이던 실란 입장에서는 영 부족하게만 느껴진다.
"아니, 그냥 치유술로 회복하면 되는데...."
"내가 그랬지? 치유술 금지라고."
켈베른 자작성을 탈출한 이후, 레펜하르트는 본격적으로 실란의 몸도 봐 주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 수련 후 치유술 사용 금지였다. 신성 주문의 매커니즘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말해 주었는데, 문제는 실란이 그의 말을 미심쩍어한다는 점이었다. 뭐, 생각해 보면 당연했다. 나름 실란도 고위 신관인데, 그런 그도 모르는 신성 주문에 대한 걸 주먹패인 레펜하르트가 알고 있다? 미심쩍지 않을 수가 없다.
"으음...."
여전히 미련이 남는 표정을 짓는 실란을 향해 레펜하르트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실란."
"왜요?"
"내 몸이 더 좋냐, 네 몸이 더 좋냐?"
"레펜 씨요."
"그럼 누가 몸 더 잘 만들겠냐? 너냐, 나냐?"
"레펜 씨죠."
"그럼 좀 믿어 봐라. 5년간 효과 없었으면 슬슬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 때도 됐잖아?"
"네에...."
신성 주문에 대해서는 못 믿겠지만, 실제로 몸 만드는 쪽은 분명 레펜하르트가 전문가다. 실란은 겸허히 그 사실을 인정하기로 마음먹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레펜하르트가 쓴웃음을 짓더니, 다시 러스를 봐주기 위해 시선을 돌렸다.
그때, 갑자기 웬 중년인 한 명이 마당으로 들어섰다. 다들 의아해하는데, 중년인이 눈치를 보더니 질문을 던졌다.
"실례합니다. 여기 레펜하르트란 분께서 계시다고 들었는데요?"
☆ ☆ ☆
중년인은 일행을 둘러보더니 바로 레펜하르트를 알아보고 다가왔다. 하긴, 레펜하르트가 참, 인상착의만으로도 찾기 쉬운 타입이긴 하다.
곁에서 보고 있던 실란이 물었다.
"기다리는 일이 있다는 게 이거였어요?"
"응, 개인적으로 조사할 일이 있어서."
스트라샌드에 도착한 레펜하르트는 여관을 잡은 뒤 바로 타오반 상회와 접선했다. 예전에 청부했던 의뢰, 현재의 어린 레펜하르트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다. 타오반 상회 스트라샌드 지부는 바로 차탄 공국 제플린에 있는 본점에 연락을 취하겠다고 하면서, 사흘 정도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스트라샌드와 제플린 사이엔 험준한 세텔라드 산맥이 가로막혀 있다. 정식으로 말을 타고 전령을 보낸다면 왕복 한 달은 걸릴 거리다. 여기서 타오반 상회가 말한 사흘은 제플린까지 사람을 보내는 시간이 아니라, 스트라샌드 근처에 위치한 마법사의 탑까지 왕복하는 시간이었다.
대부분의 상회가 그렇듯이, 타오반 상회도 빠른 정보 전달을 위해 대륙 각지의 마탑과 장기 계약을 맺고 마법사의 수정구를 통해 연락을 취하곤 했다. 각 도시에서 정보를 보내려면 우선 가까이에 있는 마탑까지 가서 거기서 제플린 근처의 마탑으로 연락을 한다. 그러면 제플린 근처 마탑에서 본점까지 또 전령을 보내는 것이다. 대륙 1,2위를 다투는 차탄 상회나 롤페인 상회는 아예 마법사를 각 지점마다 상주시켜 시간 낭비를 줄이곤 했지만, 아직 타오반 상회는 그 정도로 큰 상회는 아니다.
하여튼, 사흘이라는 시간이 생긴 덕에 레펜하르트는 이 기회에 스트라샌드에서 머물며 여독을 풀자고 제의했고, 모두 좋아라 찬성했다. 무려 열흘 가까이 길에서 먹고 자고 했으니 다들 제대로 된 침대가 그리웠던 것이다.
"크, 하긴 오래 놀긴 했죠. 슬슬 출발할 때지."
살짝 아쉬움이 묻어나는 실란의 표정을 보며 레펜하르트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마당 구석으로 중년인을 데려갔다. 중년인이 품에서 작은 전서 한 묶음을 꺼내 건넸다.
"의뢰하신 내용입니다. 여기 확인차 서명을 부탁드립니다."
따로 내민 서류에 서명한 뒤 레펜하르트는 종이 묶음을 받아 들었다. 딱히 인장으로 봉해져 있거나 하지는 않았다. 수정구로 연락하면 어쩔 수 없이 마법사와 전령이 그 내용을 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정말 중요한 비밀은 여전히 인편을 통해 전달되곤 한다. 레펜하르트가 의뢰한 것은 딱히 비밀이라고 할 것은 없었기 때문에 그냥 평범한 전서 형태로 보내진 모양이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약간의 동전을 건네 전령에게 사례한 뒤 레펜하르트는 전서를 펼쳤다. 전서를 읽는 레펜하르트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전서는 꽤나 상세하게, 현재의 어린 레펜하르트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었다. 일단 제일 먼저 눈에 띠는 것이 열여섯 살 때의 일이었다.
'정체 모를 정신병으로 인해 자아를 잃고 날뛰었던 적이 있다라....'
척 봐도 자신이 시공 회귀한 시기, 이 육체로 들어왔던 그 시기다. 게다가 가장 눈에 띤 것은 그가 외친 자신의 이름이었다.
'자기는 레펜하르트가 아니라 테스론이라고 우겼다고?'
레펜하르트는 혀를 찼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역시 확인이 되니 입맛이 썼다. 테스론이라는 이름을 이 시대의 어린 레펜하르트가 알 리가 없다.
이걸로 확실해졌다.
권왕 테스론은 이 시대에 부활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육체를 입고서!
'쳇,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나....'
레펜하르트는 자기도 모르게 관자놀이를 짚었다. 이미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지만, 그래도 정작 눈으로 확인이 되니 역시 충격이 크긴 크다.
레펜하르트는 빠르게 남은 부분을 읽어 내려갔다.
원래 마법사들이 정신이 살짝 나가거나 하는 일은 은근히 잦다. 변신 마법이나 정신계 마법을 다루다가 자아를 잃거나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것은 초보 마법사들 사이에서는 꽤나 흔한 일, 그래서 어린 레펜하르트, 그러니까 테스론의 사건도 그리 크게 문제시되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며칠 후 테스론은 다시 이지적인 모습을 보였고, 도로 마법사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스무 살이 될 때까지 딱히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쓰여 있었다. 스무 살이 되고, 마법사치고는 이례적인 어린 나이에 정규 마법사가 되어 델피아의 마탑을 나갔고, 그 이후에는 소식이 끊겼다고 되어 있었다.
'그 이후는 알아내지 못한 모양이군. 하긴 무슨 전문적인 정보기관도 아니고 상회에서 지나가다가 소문 수집한 정도가 전부일 테니 이 이상 알아내는 것도 무리겠지.'
적어도 가장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충분하다. 서류를 접으며 레펜하르트는 잠시 고민했다.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었다.
'스무 살에 정규 마법사가 되어서 탑을 떠났다고?'
원래 그가 정식 마법사가 되는 것은 20대 후반의 일이었다. 스물여섯 살이 된 해에야 비로소 탑을 떠난 것이다. 물론 스무 살에 4서클을 수습했다는 점은 그리 이상하지 않았다. 전생에서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마법사들은 도제를 그리 쉽게 풀어 주지 않는다. 말 잘 듣고, 시키는 대로 척척 하는 시종을 일찍 놓아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전생의 레펜하르트는 20대 중반이 넘을 때까지 마탑에 갇혀 살다가 겨우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물론 타고난 재능이 있어 그 이후로는 무섭도록 성장해 대마도사까지 될 수 있었지만, 적어도 스무 살에 정식 마법사가 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실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위쪽에서 허락을 하지 않았으니까.
'테스론 이놈, 대체 무슨 수를 쓴 거지?'
레펜하르트는 인상을 썼다. 혹시나 테스론이 그처럼 이 시대에 부활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은 것은, 적어도 앞으로 5~6년은 델피아의 마탑에 갇혀 아무것도 못 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정보가 사실이라면 오히려 테스론이 그보다 더 먼저 세상을 나섰다는 소리가 아닌가?
'아무래도 좀 더 정보가 필요하겠는데....'
하지만 상회를 통한 정보는 이 정도가 한계였다. 이 이상의 정보를 얻으려면 전문가의 손길을 빌려야 한다. 마침 대륙에는 사람을 추적하는 전문 직업이 따로 존재한다. 현상금 사냥꾼bounty hunter이라는 추적 전문가가.
'타오반 상회를 통해 쓸 만한 현상금 사냥꾼을 소개받아야겠네.'
문득 레펜하르트가 혀를 찼다.
'아, 그러고 보니 지갑 사정이....'
돈이 없었다. 현상금 사냥꾼을 개인적으로 고용하려면 상당한 금액이 필요하다. 쉽게 말해서 현상금을 걸어야 한다는 소리다.
쓸 만한 놈을 고용하려면 적어도 금화 이백 닢은 필요할 텐데 현재 레펜하르트의 주머니 사정은 거의 무일푼, 현재 모든 여행 경비도 실란에게 빌리는 형식으로 지불하고 있지 않은가? 타오반 상회에 투자한 금액은 봄까지 기다려야 하니 적어도 석 달은 넘게 남았고.
'에휴, 그랜드 포지 들렀다가 적당한 유적 하나라도 털어야겠다.'
그렇게 앞으로의 계획을 대충 정리한 뒤 레펜하르트는 상념을 접었다. 어쨌거나 지금은 그랜드 포지로 가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일단은 신경 끄고, 내 할 일에 집중하자.'
레펜하르트는 오러를 일으켰다. 황금빛 오러가 종이 묶음을 뒤덮었다. 종이 묶음이 이내 검게 그을리더니 재가 되어 흩어진다. 그렇게 서류를 태운 뒤 몸을 돌리자, 러스가 그에게 물었다.
"이제 스트라샌드를 뜨는 겁니까?"
힐끔 하늘을 보더니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것저것 준비할 것도 많으니 내일 아침에 출발하자."
"네, 형님."
넙죽 고개를 숙인 뒤 러스가 숙소로 돌아간다. 그 뒷모습을 보다 말고 레펜하르트는 문득 안색을 굳혔다.
'그러고 보니 슬슬, 얘들한테도 진짜 목적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 할 시기군.'
☆ ☆ ☆
통째로 빌린 여관 뒤채, 레펜하르트 일행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거실에 모여 있었다.
다들 내일 아침, 출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러스는 자신의 검과 무구를 정비하는 중이었고 틸라와 시리스는 오후에 사 두었던 여행 물자를 정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딱히 레펜하르트가 시킨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정리정돈은 아무래도 남자 손에 맡겨 봐야 영 허술해질 뿐인지라 저 둘이 스스로 하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그리고 실란은 러스 곁에서 신나게 수다를 떠는 중이었다. 넉살 좋은 성격답게 실란은 동행하는 동안 계속 러스에게 말을 건네곤 했고, 그래서 지금은 둘 다 꽤나 친해져 있었다.
"처음 레펜 씨를 만났을 때는 그냥 산골 총각인 줄만 알았어요. 그런데 갑자기 웃통 까고 나타나서 악마를 후려 패는데, 우와! 멋있긴 진짜 멋있더라고요!"
"오! 과연 형님이시군. 저런 강함을 지니고도 겸손하게 힘을 감추시다니."
"겸손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힘을 감추고 있기는 했죠. 그렇게 악마를 후려패고 나서...."
실란은 레펜하르트와 처음 만났던 이야기를 열심히 러스에게 해 주고 있었다. 러스도 이미 콩깍지가 단단히 쓰였는지 그때마다 작게 감탄을 터트려 준다. 하긴, 평소에 러스가 언제 수다라는 걸 떨어 보았겠는가? 티는 안 내지만 은근 재밌어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레펜하르트는 심각한 얼굴로 그의 일행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찌해야 하나....'
현재 실란이나 러스, 시리스는 레펜하르트가 세텔라드 산맥 북쪽의 유적을 탐사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고 알고 있다. 사실 레펜하르트는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지만, 그가 그동안 보여 준 모습은 훌륭한 유적 탐사자였기에 이번에도 당연히 은의 시대 유적을 찾아간다고 믿은 것이다.
물론 레펜하르트가 세텔라드 산맥 최북단으로 향하는 진짜 이유는 그랜드 포지를 찾는 것이다. 그리고 그랜드 포지는 드워프들의 성지, 절대 인간에게 알려져서는 안 될 비경 중의 비경이었다. 시리스야 엘프니 별문제가 없다지만, 러스나 실란은 인간이니 함부로 데려갈 곳이 못 되는 것이다. 안 그래도 틸라도 여행 틈틈이 계속 눈치를 줬었다. 정말 저들을 그랜드 포지까지 데리고 갈 것이냐고.
슬슬 결정을 내려야 할 때였다. 실란과 러스의 처우에 대해서.
레펜하르트는 결심했다.
'이들도 내 동료들이다.'
일행을 향해 레펜하르트가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잠시 할 말이 있어."
모두들 의아해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레펜하르트는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 갈 곳은 사실은 은의 시대 유적이 아니야."
"에? 그랬어요?"
레펜하르트의 말에 실란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를 대변하듯 러스가 물었다.
"그럼 세텔라드 산맥으로 가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형님?"
"아니, 목적지는 그곳이 맞다."
실란과 러스는 똑같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니, 그 오지 중의 오지에 그럼 은의 시대 유적 말고 달리 갈 곳이 있나?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생각하는지 알고 있다. 그리고, 이걸 말하기 전에 나는 먼저 내 꿈, 내 인생의 목표에 대해서 말해야만 해."
다들 호기심 어린 눈으로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레펜하르트는 모두의 눈동자를 차례대로 둘러보았다. 실란, 시리스, 러스, 그리고 틸라까지.
레펜하르트는 잠시 침을 삼켰다. 그리고 최대한 태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나는 엘프나 드워프, 오크들을 노예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실란과 러스가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레펜하르트가 그런 모습을 보이는 건 그동안 함께 다니며 지겹도록 보아 왔다. 전혀 어색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다른 이들도 나처럼 생각하기를 원해."
이번에는 조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실란도 러스도 눈을 껌뻑거렸다. 너무 돌려서 말했나 싶어 레펜하르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대놓고 말해 버렸다.
"엘프와 드워프, 오크들이 노예가 아닌 세상을 만드는 것, 그것이 내 꿈이고 인생의 목표다."
침묵이 흘렀다. 다들 입을 열지 않고 황당해하는 눈으로 레펜하르트를 바라볼 뿐이었다. 단지 틸라만이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었다.
잠시 후, 러스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혀, 형님. 살짝 이해가 안 가는데 말입니다. 그러니까, 엘프나 드워프 같은 것들을 야생으로 풀어 주겠다는 소리이십니까?"
레펜하르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저것이 당연한 반응이겠지. 이제는 딱히 화도 나지 않는다. 그가 조용히 대답했다.
"그들도 이성이 있고 감정이 있다. 인간과 똑같지. 러스, 야생이라는 표현은 동물에게나 쓸 말이다."
"에, 뭐 그렇긴 하지만...."
러스는 벅벅 머리를 긁었다. 너무 뜬금없는 소리라 도무지 머릿속이 정리되질 않았다. 그에게 있어 이종족을 노예가 아닌 사람으로 취급한다는 소리는, 집에서 키우던 가축들을 사람 취급하자는 소리와 비슷하게 들리는 것이다. 단지 그 가축이 말을 할 줄 안다는 것이 차이점이랄까?
의문이 떠오르는 것이 당연하다.
'아니, 왜? 대체 뭐하러?'
러스는 고민했다. 달인들 중 괴팍한 성격이 많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좀 심하지 않은가? 자신이 혹시 잘못 선택한 것이 아닌가 하는 회의마저 들었다.
반면, 실란은 의외로 이해하는 표정이었다.
"뭐랄까, 레펜 씨답다는 생각은 드네요."
이미 실란은 레펜하르트 옆에서 많은 이종족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가 아는 것과 현실이 상당히 다르다는 것도 느끼고 있었다. 엘프나 오크를 노예로 삼는 이 사회에 분노를 느낄 정도는 아니지만, 적어도 저들이 단순한 노예라고 치부하는 사회적 인식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레펜하르트가 왜 저런 꿈을 꾸는지, 이제는 실란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레펜하르트 개인이 그렇게 느끼는 것과, 세상이 그렇게 느끼도록 만드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실란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그럼, 레펜 씨는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것인가요?"
"그렇다."
"단순하게 노예들을 몰래 풀어 주겠다는 소리 정도가 아니죠?"
"필요하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것이 내 최종 목적은 아니다."
레펜하르트가 모두를 돌아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필요하다면 세상과 싸워서라도, 나는 이 꿈을 이루고 싶다. 그래서 너희들에게 묻는 것이다."
그리고 진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 뜻을 따라 주겠나?"
☆ ☆ ☆
모두들 입을 다물었다. 다들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레펜하르트는 고민했다.
'괜히 이야기한 걸까?'
사실 이런 이야기까지 할 필요는 없다. 그냥 적당한 핑계로 실란과 러스를 따로 떼어 놓고 자신만 그랜드 포지를 후딱 다녀와도 될 일이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는 세상을 설득해야 할 몸이었다. 고작 동료 몇 명도 설득하지 못한다면, 설사 받아들이지는 못하더라도 저들이 최소한 그를 이해해 주지 못한다면 그의 꿈은 가능성이 없었다. 또다시 마왕이 되어, 또다시 대륙을 불길로 뒤덮으며 암흑 제국을 세워야만 했다.
'언젠가는 했어야 할 이야기다.'
레펜하르트는 실란을 바라보았다. 사실 러스는 그를 이해할 가능성이 없었다. 만난 지도 얼마 안 되었고, 딱히 이종족에 대해 접한 적도 없었으니까. 솔직히 말하면 전혀 기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실란은 달랐다. 레펜하르트는 알게 모르게 실란에게 그가 알고 있는 현실이 틀리다는 것을 은연중 계속 비쳐 왔다. 엘프나 오크들이 사실은 인간처럼 이성과 감정이 있고, 그들만의 문화와 전통이 있다는 사실도 지속적으로 알려 주었다.
적어도, 실란은 충분히 설득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과연 저 소년은 자신을 이해해 줄 것인가?
초조한 눈으로 레펜하르트는 실란을 바라보았다. 이건 단순히 뜻을 같이 하는 동료를 얻는 정도의 의미가 아니다. 그가 전생과 다른 길을 걸을 수 있을지 없을지를 가늠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윽고 실란이 입을 열었다.
"난 레펜 씨를 따라갈 거예요."
놀란 것은 레펜하르트가 아니라 오히려 시리스였다.
"실란?"
실란이 차분히 말을 이었다.
"뭐, 레펜 씨의 꿈에 완전히 동의하는 건 아니에요. 솔직히 터무니없는 꿈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레펜 씨가 말한 대로 이종족이 노예일 뿐인 이 세상이 이상하다고 느낀 것도 사실이기는 해요."
그동안 겪은 일이 있었다. 그동안 느낀 바가 있었다. 실란이 빙그레 웃었다.
"무엇보다 순례자로 세상을 돌면서 이만큼 스케일 큰 동료 만나기도 힘들잖아요?"
실란이 세상을 떠도는 이유는 순례자로서 필라넨스의 가르침을 설파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대부분의 신관들이 순례자로 떠도는 이유는, 명성을 얻어 교단의 성자로 이름을 남기고자는 명예욕 때문. 물론 실란이 저 이유만으로 순례자의 길을 선택한 것만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명예욕이 없다는 소리도 아니었다.
실란이 갑자기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지었다.
"엘프나 드워프, 오크들도 다 남자, 여자가 있잖아요?"
무슨 말을 하려나 싶어 모두들 그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실란이 말을 이었다.
"그럼 엘프나 오크, 드워프들도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거잖아요? 그렇다면 필라넨스 님의 가르침을 설파해야죠! 레펜 씨가 정말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 믿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따라다니면 숨어 사는 이종족들은 잔뜩 만날 거 아니에요? 그러면 교단 역사상 이종족들에게 신앙을 퍼트린 최초의 인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도 있을지도 모르는데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죠."
다들 말문을 잃었다. 뭐랄까, 전혀 예상치 못한 이유였다. 레펜하르트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이걸 대체 제대로 설득을 했다고 봐야 하나, 아니라고 봐야 하나?
"어쨌거나 따라오겠다는 소리지?"
"네."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인간들의 미움을 받을 수도 있어. 귀족들을 습격해서 노예들을 몽땅 풀어 주자고 하면 어쩔 건데?"
혹시 실란이 이 일의 경중을 파악하지 못했나 싶어 레펜하르트가 확인 차 물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것은 아닌 것 같다. 아주 태연한 대꾸가 돌아왔다.
"레펜 씨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거들 생각인데요?"
"엄연한 도둑질인데도?"
"얼굴은 가리게 해 줘요."
부드럽게 웃고 있는 실란을 보며 레펜하르트도 마주 웃었다. 아무래도, 이번 생애에서의 첫 번째 도박은 성공한 것 같았다. 이종족들에게 신앙을 전파하겠다는 소리는, 확실하게 그들을 사람으로 인정한다는 소리인 것이다.
'해낸 건가....'
아주 작은 한 걸음이지만, 제대로 내디뎠다. 뿌듯해하며 레펜하르트는 러스를 돌아보았다.
'이제 이놈 차례네.'
그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당연했다. 실란과 달리 러스는 제대로 설득할 시간도, 상황도 없었다. 오히려 여기서 그를 이해한다고 나섰다면 의심을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레펜하르트가 여기서 러스를 내칠 작정으로 이런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고작 일주일 만에 내칠 것이면 애초에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레펜하르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솔직히 잘 이해가 가지 않지, 러스?"
머뭇거리다 러스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형님."
"그럴 거다."
다 이해한다는 듯 레펜하르트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당장 나를 이해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당장 내 뜻에 따르라는 의미도 아니다. 너는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고 아무것도 듣지 못했지. 그러니 당황하는 것이 당연하다."
실란에게처럼 이것저것 보여 준 것도 아니고, 이종족의 진실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준 것도 아니다. 그래놓고 대뜸 '이종족은 노예가 아닙니다! 믿습니까? 닥치고 믿으십시오!'라고 외친다면 그건 사이비 교주나 하는 짓이겠지.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러스를 설득하기엔 너무 상식에 파인 골이 깊다. 한두 마디 말로 해결될 것이 아니다. 그래서 레펜하르트도 그런 것까진 기대하지 않았다.
그가 러스에게 바라는 것은 좀 더 간단했다. 레펜하르트가 입을 열었다.
"너는 나를 따르겠다고 맹세했다. 그렇다면 나를 따르며 그 눈으로 좀 더 많은 것을 보아라. 그리고 스스로 결정을 내려라. 내가 원하는 것은 그때가 올 때까지, 네가 나를 배신하지 않는 것뿐이다."
진지하게 말을 잇다 말고 문득 레펜하르트가 피식 웃었다.
"뭐, 배신이라고 해도 그리 거창한 것은 아니야. 그냥 입단속 좀 잘 하란 소리지. 앞으로 해야 할 이야기는 꽤나 비밀스러운 부분이 많거든?"
"형님...."
러스는 입을 다문 채 레펜하르트의 시선을 마주했다. 흔들림 없는 눈동자였다. 그저 괴팍한 사람이라 폄하하기에는 지나치게 확고한 의지를 가진 눈빛이었다. 광인의 눈빛은 결코 저렇지 않다.
게다가 실란이 납득했다는 것도 영 마음에 걸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헛소리로밖에는 들리지 않지만, 그런 것치고는 레펜하르트의 태도가 너무 자신만만한 것이다. 자신을 따르다 보면 분명 이해해 줄 것이라는 자신감이 확연히 느껴진다.
잠시 후, 러스가 결론을 내렸다.
"저도 형님을 따르겠습니다."
레펜하르트는 러스에게 자신의 생각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그저 옆에서 자신을 보고 판단하라고 했을 뿐이다. 이것은 결코 무리한 요구가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형님이 무슨 말씀을 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미 형님께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형님의 뜻을 이해할 순 없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것이 형님을 배신할 이유는 되지 않더군요."
갑자기 러스가 진지한 얼굴로 레펜하르트 앞에 무릎을 꿇었다.
"형님이 가시는 길이 제가 가는 길입니다. 그 사실은 결코 제가 가문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러스가 소리쳤다. 굳건한 의지가 가득한 목소리였다. 설사 상대가 어떤 인물이건 한번 충성을 맹세한 이상 그것을 지키겠다는, 실로 기사다운 모습이었다.
실란이 오글거린다는 표정으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우와, 누가 기사 아니랄까 봐 대사 참....'
어쨌거나, 이걸로 실란도 러스도 레펜하르트의 뜻에 일단 동참하게 되었다. 물론 완전히 그와 뜻을 같이 한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신뢰할 수 있게는 된 것이다.
후련해진 얼굴로 레펜하르트가 어깨를 풀었다. 안 그런 척하려고 했는데, 역시 꽤나 긴장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이제, 안심하고 이야기할 수 있겠군.'
홀가분해하며, 레펜하르트가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향할 곳은 그랜드 포지, 드워프들의 성지이자 그들의 주신, 알 포트를 섬기는 신전이 있는 곳이다. 인간에게 알려져서는 안 될 최고 비밀 중의 비밀이지. 내가 왜 이렇게 장황하게 말을 꺼냈는지 알겠지?"
4
세텔라드 산맥 최북단은 감히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험지 중의 험지다. 험난한 산세,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곳곳에 패여 있고 그 사이로는 수백 년, 어쩌면 수천 년일지도 모를 세월을 간직한 침엽수림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그 거대한 숲 위로 짙은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으니 아무리 강인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감히 이곳까지 발 디딜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안개가 피어오르는 깊은 숲 속, 오후임에도 불구하고 햇살조차 잘 들지 않는 그 짙은 수림 속에서 거대한 마물이 포효하고 있었다.
"우오오오!"
신장 3미터가 넘는 거대한 인간형 몬스터, 식인을 즐기며 호랑이 같은 맹수도 맨손으로 꺾어 죽일 수 있는 괴력을 지닌 마물, 오우거였다. 그런 오우거가 지금 수십 마리가 모여들어 숲을 질주하고 있었다. 모두들 분노한 기색이 역력했다. 감히 그들의 영역에 무단으로 침입한 '인간들'의 존재 때문이었다.
앞장선 오우거가 대들보 사이즈의 나무 몽둥이를 휘두르며 숲의 침입자들을 향해 돌진했다. 몽둥이가 휘둘러질 때마다 돌풍이 일며 바람 소리가 요란하다. 그때 가슴만 이상하게 풍만한 어려 보이는 소녀가 재빨리 앞으로 돌격했다. 소녀의 양손에 들린 것은 거의 그녀의 몸만큼이나 거대한 한 쌍의 배틀 액스. 그것을 머리 위로 교차하며 소녀가 소리쳤다.
"대지여! 힘을 주소서!"
콰앙!
오우거의 몽둥이가 소녀의 배틀 액스를 내리쳤다. 놀랍게도 소녀는 가뿐히 오우거의 일격을 막아 냈다. 저 작은 몸으로 오우거와 맞먹는 괴력을 발휘한 것이다. 그뿐 아니라 바로 몽둥이를 튕겨 내며 양손의 배틀 액스를 휘둘러 오우거의 복부를 깊이 벤다.
"타아앗!"
오우거가 비명을 지르며 내장을 쏟았다. 뒤에서 보고 있던 붉은 장발의 소년이 혀를 내둘렀다.
"거참, 그동안 익히 봐 왔지만 정말 적응 안 되네."
드워프 소녀, 틸라는 대지와 교감해 순간적으로 자신의 근력을 증폭시킬 수 있다. 대지의 정령의 후예인 드워프이기에 가능한 기술이었다. 전사의 피를 이어받은 틸라는 비록 노예 신분이었지만 아직도 조상들의 비의를 간직하고 있었다.
원래부터가 성인 장정의 몇 배에 달하는 괴력을 지닌 그녀다. 이 기술을 사용하면 순간적으로 오우거와 맞먹는 괴력도 낼 수 있는 것이다.
도끼를 거칠게 휘둘러 좌우로 피를 뿌린 뒤 틸라가 재차 다른 오우거들에게로 달려갔다.
"타아앗!"
오우거들 사이로 뛰어든 틸라의 배틀 액스가 연거푸 허공에 피를 뿌렸다.
그 옆에서 시리스도 다른 오우거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투박한 나무 몽둥이가 연거푸 그녀를 노린다. 몽둥이 하나하나가 그녀의 몸보다도 오히려 더 굵다. 스치기만 해도 내장이 파열되는 치명상을 입게 되리라. 하지만 시리스는 교묘히 공격의 빈틈으로 몸을 날리며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하압!"
맑은 기합과 함께 은색의 시미터가 춤을 춘다. 스트라샌드에서 새로 구입한 이 시미터는 무슨 미스릴제라거나 대단한 마법 무기는 아니었지만 괜찮은 대장장이가 벼려 낸 상질의 검이었다. 은빛 칼날이 오우거의 팔다리 힘줄을 연달아 베어 내며 선혈을 흘려 냈다.
시간이 지나자 틸라와 시리스의 움직임이 조금씩 느려지기 시작했다. 피로가 몰려오는 모양이었다. 실란이 또다시 기도를 올리며 낭랑한 외침을 터트렸다.
"필라넨스시여, 저들을 가호하소서! 저들의 두 팔이 끝없이 강건해지고 저들의 심장이 용처럼 뛰게 하소서!"
그러자 분홍빛 성광이 시리스와 틸라를 뒤덮으며 둘의 움직임이 다시 최고조로 돌아왔다. 지금 실란은 배후에서 동시에 틸라와 시리스에게 강화술을 걸어 주고 있었다. 어지간한 신관이 한 번에 한 명밖에 가호를 내리지 못하는 것에 비하면 대단한 역량이었다. 사실 실란은 전력을 다할 경우 스무 명의 기사에게도 동시에 가호를 건 적이 있었다. 이 정도는 그에겐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실란은 틸라와 시리스를 뒤에서 원호하면서도 슬금슬금 반대편을 살피는 여유를 가지고 있었다.
'이쪽은 잘하고 있나?'
그의 등 뒤에서 푸른 블레이드 오러가 연거푸 번뜩이며 비명을 자아내고 있었다. 틸라가 괴력으로 오우거와 정면 대결을 펼치고 시리스가 히트 앤 런으로 치고 빠지는 전법을 택했다면, 러스는 아예 막대한 실력으로 오우거들을 짓누르고 있었다.
"흡!"
짤막한 기합과 함께 러스가 몸을 날린다. 단숨에 신장 3미터인 오우거와 눈높이를 맞춘 러스가 블레이드 오러를 길게 뿌렸다. 몽둥이를 들어 막아 보지만 러스가 뿌린 파괴의 빛은 몽둥이와 오우거의 목을 동시에 베고도, 그 여파로 뒤에 서 있던 다른 오우거의 팔뚝까지 잘라 버릴 정도의 위력이 있었다.
"크아악!"
"크억!"
오우거 두 마리를 단숨에 처리하자마자 러스가 허공에서 몸을 돌린다. 원래대로라면 아무런 발판이 없으니 저런 동작이 가능할 리 없지만, 블레이드 오러를 날린 그 반동으로 자세를 바꾼 것이다.
몸을 돌리며 곧바로 날아오는 몽둥이를 세 조각 낸 뒤 연격을 퍼붓는데, 처음부터 이런 식의 기술이었던 것처럼 힘의 흐름이 자연스럽기 그지없었다. 임기응변으로 취한 행동이 평소 연습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나오다니, 과연 러스의 재능이 보통이 아님을 증명해 주는 부분이었다. 설사 레펜하르트라도 연습 없이 이런 식으로 움직이지는 못한다. 뭐, 레펜하르트라면 그냥 몽둥이 한 대쯤 얻어맞고 나서 뼈아픈 반격을 돌려주었겠지만.
웅웅웅웅!
블레이드 오러가 채찍처럼 허공에서 흐느낀다. 절단되는 오우거들도 고통으로 흐느낀다. 덤벼든 오우거의 태반을 홀로 상대하면서도 오히려 러스는 상황을 압도하고 있었다. 실란이 속으로 감탄을 흘렸다.
'역시 오러 유저는 오러 유저네. 오우거 정도는 상대가 안 되는군.'
흥이 올랐는지 오우거의 목을 쳐 날리며 러스가 호통을 터트렸다.
"흥! 더러운 마물이 어디 감히 세이어의 가호를 받는 인간을 노리느냐!"
'우와, 저거 무슨 기사 교본에 실려 있는 대사야? 어째 다들 하는 말이 똑같냐?'
오글거리는 대사를 듣고 나니 나오려던 감탄도 도로 들어간다. 실란은 입술을 비튼 채 이번에는 저만치, 그들이 전투를 벌이고 있는 장소로부터 30미터쯤 떨어진 숲 속의 공터를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레펜하르트가 커다란 괴물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몸길이가 10미터가 넘고 여덟 개의 머리를 가진 거대한 도마뱀, 히드라였다.
푸아아아악!
요란한 소음과 함께 히드라의 머리 중 하나가 불길을 내뿜는다. 레펜하르트가 두 팔로 머리를 감싼 채 앞으로 돌격했다. 맨몸으로 불구덩이에 뛰어든 주제에 털끝 하나 그을리지 않은 채 레펜하르트가 히드라의 머리 위로 날아올랐다.
"나의 육체는 강철! 그까짓 불꽃으로 범접할 수 있을까 보냐!"
호기롭게 소리치며 레펜하르트가 주먹을 휘둘렀다.
"기격탄!"
오러의 탄환이 히드라의 머리에 적중하며 폭음을 울렸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기격탄을 날린 채 레펜하르트가 히드라의 머리를 두 팔로 움켜쥐었다. 그리고 연달아 주먹질을 해 댔다. 한 방, 한 방이 강철도 우그러트릴 위력이다. 히드라가 비틀거리며 다른 머리를 동원해 레펜하르트를 향해 이빨을 들이댔다.
"카오오오!"
세 개의 머리가 자신을 향해 쇄도하는 순간, 레펜하르트가 오히려 히드라의 머리 하나를 잡고 발을 굴렀다. 양팔로 머리를 끼운 채 히드라의 어깨를 박차고 아래로 뛰어내린다. 제아무리 거대한 괴물이라도 지렛대의 원리에서는 자유로울 수가 없는 법,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리며 그 거대한 히드라가 기우뚱 앞으로 쓰러졌다.
기세를 탄 레펜하르트가 호탕한 기합을 터트렸다.
"으랏차라!"
그렇게 히드라의 머리를 잡은 채 레펜하르트는 놈을 통째로 메쳐 버렸다. 신장 2미터가 채 안 되는 인간이, 10미터짜리 괴물에게 엎어 메치기를 걸어 버린 것이다. 멀리서 보고 있던 실란이 자기 눈을 의심할 정도로 무식한 광경이었다.
'오메, 저 양반은 저런 것도 할 수 있는 거야?'
살아가며 히드라가 등으로부터 떨어질 일을 언제 경험했겠나? 당연히 자신의 체중을 고스란히 충격으로 돌려받게 되었다. 등짝부터 떨어진 히드라가 처절한 비명을 터트렸다.
꽤애애애애액!
입이 여덟 개나 되니 비명도 아주 서라운드로 들린다. 하지만 제대로 타격을 입혔음에도 불구하고 레펜하르트의 표정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았다.
'어우, 내가 미쳐 가나? 왜 저런 소릴 했지?'
내 육체는 강철이라니, 제 정신이면 쪽팔려서 차마 못 할 소리였다. 아무래도 제라드에게 너무 물이 많이 든 것 같았다. 반성하며 레펜하르트는 쓰러진 히드라를 노려보았다. 그때 머리 위로 러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세하겠습니다, 형님!"
어느새 오우거를 다 해치운 러스가 그를 돕기 위해 몸을 날린 것이었다. 허공을 뛰어오르며 러스가 좌우로 롱 소드를 휘둘렀다. 블레이드 오러가 채찍처럼 길게 늘어지며 자빠진 히드라의 머리들을 연거푸 베어 갔다.
러스가 레펜하르트에게 오러에 대한 용법을 가르침 받은 지도 슬슬 한 달이 되어 간다. 이제 그는 오러를 길게 늘려 형태를 변화하는 수준에까지 다다라 있었다. 현재의 레펜하르트가 저 경지에 오르기까지 1년 가까이 걸린 걸 생각하면, 치가 떨릴 정도로 빠른 진도였다.
'이래서 천재란 족속들이 재수 없다고 하는구먼.'
남은 1년 걸린 걸 한 달도 안 되어 수습하는 걸 보니 솔직히 기분이 묘했다. 전생에 만날 시기만을 받았지 남의 자질을 시기할 일이 없었던 레펜하르트에게는 꽤나 신선한 기분이기도 했다. 그를 보던 다른 마법사들의 심정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겠다고나 할까?
뭐, 그렇다고 딱히 레펜하르트가 러스에게 열등감을 가졌다는 소린 아니었다. 재능의 종류는 다르지만, 이 테스론의 육체는 분명 러스 못지않은 자질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그는 마법사, 무인의 자질에 대해 부러워할 이유가 없다. (어째 요즘 들어 자꾸 정체성이 흔들리는 기분이 들지만.)
러스의 블레이드 오러가 연달아 히드라를 후려갈긴다. 푸른 피가 사방으로 튄다. 하지만 히드라는 그래도 죽지 않았다.
"크르르르...."
메쳐진 충격에, 러스의 블레이드 오러에 여기저기 부상을 입었음에도 히드라는 천천히 다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평범한 야생동물이라 해도 그 생명력은 굉장한 것이라 급소를 정확히 꿰뚫지 않으면 일격에 쓰러트릴 수가 없다. 하물며 히드라쯤 되는 마물이라면 설사 머리가 서너 개쯤 날아가도 다시 일어나는 것이다.
"쩝...."
러스가 인상을 쓰며 일단 거리를 벌렸다. 고통과 분노, 굴욕으로 히드라가 포효를 터트렸다.
"크아아아!"
히드라는 정신없이 머리를 흔들며 사방으로 숨결을 토해 냈다. 강산과 부식액, 불꽃과 냉기, 전격이 연달아 러스와 레펜하르트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전신을 오러로 감싸 보호하며 러스는 허겁지겁 공격을 피했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오히려 앞으로 달려들었다.
"스파이럴 가드!"
공격의 속성과 종류를 모조리 무시하는 이 방어법을 뚫는 길은 하나뿐, 회전력도 무시할 만큼 강렬한 관통력을 지닌 공격뿐이다. 히드라의 숨결은 아쉽게도 그 정도 위력은 없었다. 스파이럴 가드를 펼쳐 모든 공격을 튕겨 내며 레펜하르트는 순식간에 상대와의 거리를 좁혔다. 코앞까지 다가가자마자 왼발로 바닥을 내리찍는다.
쿵!
거목처럼 한 발을 대지에 뿌리내린 뒤, 레펜하르트가 전신을 비틀며 모든 힘을 한 점에 쏟았다. 그 상태로 히드라의 몸통에 올려 차기 일격!
파아아앙!
오러의 파동이 히드라의 심장을 관통했다. 웅장한 폭음이 울려 퍼졌다. 선혈과 살점, 내장의 파편이 화산이라도 터진 것처럼 허공으로 솟구친다. 아무리 생명력이 강하다 해도 심장을 잃고서 살 수는 없다. 단 방에 히드라를 절명시킨 뒤 레펜하르트가 몸을 돌리는데, 저 멀리서 시리스와 실란, 틸라가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오우거들을 물리치고 레펜하르트에게 합류하는 것이었다.
"다들 어디 다친 데 없지?"
보아하니 상처는 없는 것 같았다. 하긴, 실란의 가호를 받은 시리스와 틸라의 실력이라면 오우거 대여섯 마리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이었다. 어차피 태반은 러스가 처리했으니까.
상태를 확인한 뒤 레펜하르트가 바로 손짓을 했다.
"그럼 어서 이동하자. 얼른 이 숲을 빠져나가야지."
☆ ☆ ☆
안개의 숲을 빠져나온 레펜하르트 일행은 작은 계곡 근처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개울 근처에서 물을 보충하고 각자 챙겨온 비상식량들을 씹어 삼킨다. 불은 피우지 않았다. 혹시나 연기나 냄새로 어떤 마물들이 다가올지 몰라서였다.
육포를 씹다 말고 실란이 고개를 저었다.
"와, 여기 진짜 지독하네요. 어지간한 유적보다 더한 것 같아요."
스트라샌드를 출발한 지 보름째, 본격적으로 세텔라드 산맥 깊숙이 들어선 지는 일주일이 지났다. 그리고 그 일주일 동안 레펜하르트 일행은 벌써 30회가 넘게 마물들의 습격을 받고 있었다. 처음에는 고블린이나 하피, 크롤베어 등 흔한 몬스터여서 크게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깊숙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강력한 마물들이 나타났고, 이제는 숫제 오우거 같은 마물들이 떼로 나타나지를 않나, 심지어 히드라 같은 희귀한 마물들도 습격을 해 오고 있었다.
수통에 담긴 물을 마신 후 레펜하르트가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그야, 인간들도 아직 손을 뻗지 못한 오지니까. 이 정도 되니까 드워프들도 인간의 손길을 피해 사는 것 아니겠어?"
"그런데 정말 이런 곳에 드워프들이 살 수 있는 겁니까? 우리도 이렇게 움직이고 있는데 어떻게 드워프가... 아, 물론 형님을 믿지 못한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아, 일단 따라와 봐. 직접 보면 알 수 있을 것 아냐?"
여전히 러스는 이런 험지에서 드워프 '따위'가 살 수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 듯했다. 틸라의 힘을 보고 드워프들에게도 전사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비록 인정했지만, 그렇다 해도 드워프를 낮춰 보는 인식이 바로 바뀌기는 힘든 것이다.
여하튼, 그렇게 다들 잠깐이나마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갑자기 레펜하르트가 인상을 썼다.
"젠장, 잠시 쉴 틈도 안 주냐?"
뒤이어 러스도 검을 쥐며 일어났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가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팬텀 그리핀이군요."
하늘 저편에서 홰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며 한 무리의 마물들이 날아오고 있었다.
독수리의 머리, 새의 날개, 사자의 몸통을 가진 몬스터, 그리핀은 대륙 각지에서 꽤 흔히 볼 수 있는 마물이었다. 주로 말이나 소를 노려 농민들의 원성을 사는데 하늘을 날아다니는 마물들의 특성상 쉽게 잡기가 힘들다. 물론 그렇다 해도 어지간한 기사단이라면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었다. 미끼를 놓고, 화살을 쏘고 그물을 던진다면 그리핀은 그리 위협적인 몬스터가 아니다.
하지만 지금 레펜하르트 일행의 머리 위를 장악한 저 팬텀 그리핀 무리는 그런 흔한 마물이 아니었다.
"꽤애애액!"
허공을 선회하며 팬텀 그리핀이 새처럼 울부짖었다. 겉보기엔 보통 그리핀과 전혀 달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문제는 저 팬텀 그리핀의 주위에, 날갯짓 하나까지 똑같이 하는 네 마리의 그리핀이 더 있다는 점이었다.
완벽하게 똑같은 동작을 하며 그리핀 다섯 마리가 동시에 아래로 하강한다. 러스가 허공으로 몸을 날리며 검을 휘둘렀다.
"꺼져라, 이 마물!"
오러 유저다운 도약력으로, 러스는 단숨에 10여 미터 이상 날아올라 블레이드 오러를 뿌렸다. 푸른빛의 채찍이 너울거리며 그리핀 한 마리를 단숨에 베어 넘긴다. 그 순간 오러에 베인 그리핀의 모습이 허공에서 사라지며 다른 놈들이 일제히 부리에서 독액을 뿜어냈다.
새애애액!
네 줄기 독액이 동시에 러스를 노리고 날아든다. 허공에서 오러를 날려 그 반동을 이용, 러스는 모든 독액 줄기를 피해 냈다. 빗나간 독액들이 저마다 계곡 여기저기 떨어졌다. 하지만 정작 부식되는 장소는 한 곳뿐이었다.
파지지직!
레펜하르트도 양 주먹을 불끈 쥐며 오러를 쏘아 냈다.
"연환 기격탄!"
황금빛 오러탄이 연달아 팬텀 그리핀들을 노렸다. 오러탄에 격중될 때마다 그리핀들의 모습이 허공에서 사라져 버린다. 개중에는 오러탄에 맞고 비틀거리며 비명을 지르는 놈들도 있었지만, 그것은 저 수많은 개체 중 극히 일부일 뿐이었다.
"니힐렌!"
시리스도 마궁 니힐렌을 발동하고 연거푸 빛의 화살을 쏘아 댔다. 시리스의 궁술은 과연 경지에 오른 것이라 거의 빗나가지 않았지만, 그렇다 해도 결과는 레펜하르트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날아가는 화살의 대부분이 저 팬텀 그리핀의 '환영 분신'을 맞추고 있었다.
마물들 중에는 특별히 마력을 타고나, 이성이 없이도 피에 각인된 마법을 본능적으로 구사할 수 있는 종들이 있다. 그리고 팬텀 그리핀은 타고난 마력을 이용, 환상 마법 미러 이미지를 사용할 수 있는 몬스터였다.
미러 이미지는 오러 유저의 기감으로도 실체를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게다가 유서스 때와 달리 팬텀 그리핀은 본능으로 마법을 발동시키는 것이라 딱히 마력 패턴이란 것도 없었다. 술식이 없으니 패턴이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덕분에 레펜하르트도 실체를 파악할 방법이 없다.
파닥! 파닥! 파다닥!
요란한 날갯짓 소리와 함께 팬텀 그리핀들은 연달아 레펜하르트 일행을 공격해 댔다. 레펜하르트와 러스, 시리스는 계속 공격을 날려 놈들을 쫓았다. 원거리 공격이 불가능한 틸라는 실란 옆에 찰싹 달라붙어 그를 지키고 있었다.
문득 레펜하르트가 소리쳤다.
"마법을 쓰겠다! 러스, 잠깐만 엄호해 줘!"
러스가 흠칫거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형님!"
러스가 레펜하르트의 앞을 가로막고 오러의 칼날을 사방으로 날려 댔다. 그 틈을 타 레펜하르트가 뒤로 물러서더니 수인을 맺으며 스펠을 외우기 시작했다.
"게텔라 드 파시드 폼. 진실을 비추는 거울이여, 그 빛을 내뿜을지니! 일루전 에나이얼레이션Illusion annihilation!"
레펜하르트의 머리 위로 연녹색의 빛의 거울이 형성되었다. 빛의 거울이 사방으로 회전하며 팬텀 그리핀을 비쳐 댔다. 그때마다 그리핀들 주위에 있던 환영들이 아침이슬처럼 사라져 버렸다.
"케, 케엑?"
"크락! 크라라락!"
팬텀 그리핀들이 당황하며 대열을 흐트러트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자신을 지켜 주던 환영이 사라진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며 러스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볼 때마다 어색하군, 저건."
처음 세텔라드 산맥에 들어왔을 때였다. 악령 계열의 마물을 만나 한참 검을 휘두르다 말고 러스는 기겁해야 했다. 갑자기 레펜하르트가 불의 마법을 구사, 악령들에게 날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 얼마나 경악했던가? 오러를 각성할 정도로 뛰어난 무인이 마법까지 다룰 줄 알다니!
실란이 다 이해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많이 놀랐어요. 분명 예전엔 엄청 부실하게 마법 썼었는데...."
환영 마법을 파훼하는 저 '일루전 에나이얼레이션'은 4서클 상급 주문으로 정식 마법사 정도 되어야 실전에서 빠르게 시전할 수 있다. 엘류시온 유적에서 문짝 하나 열려고 낑낑댄 지 두 달도 안 지났는데....
"갑자기 정규 마법사 못지않게 마법을 쓴단 말이지?"
그러던 실란이 문득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 봤자 조루지만...."
아니나 다를까, 마법을 시전 중이던 레펜하르트가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 댔다.
"야! 다들 뭐 해! 마력 다 떨어져 간단 말이야! 빨리 쳐!"
마법 시전한 지 몇 초 지났다고, 그새 빛의 거울이 깜빡깜빡 하면서 꺼질락 말락 하고 있었다. 분명 시전 속도는 무시무시하게 늘었지만 마력은 별 달라진 것이 없었던 것이다. 러스가 아차 하며 몸을 날렸다. 시리스도 피식 웃으며 니힐렌을 들었다. 덩치는 산만 해서 애들처럼 발을 동동 구르다니....
'가끔 귀여운 짓도 한단 말이야, 저 사람은.'
물론 지금은 이런 한가한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다시 진지한 얼굴로 돌아가 시리스가 연거푸 시위를 당겼다.
일단 환영이 없어진 이상, 본체뿐인 팬텀 그리핀은 그냥 평범한 그리핀과 별 차이가 없다. 다들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 서너 마리 정도를 땅에 떨구니 팬텀 그리핀 무리들은 이내 겁을 먹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멀어지는 팬텀 그리핀 무리들을 바라보며 다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암담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역시 이 땅은 만만한 곳이 아니다. 아무리 실란의 신성 가호가 있다 해도, 이렇게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연달아 전투를 벌이면 지치지 않을 수 없다.
다들 여기저기 엉덩이를 붙이고 휴식을 취한다. 니힐렌을 막대 형태로 바꾸며 시리스가 피로한 목소리로 틸라에게 물었다.
"앞으로 얼마쯤 더 가야 하나요?"
"적어도 보름은 더 가야...."
틸라는 대꾸하며 암담한 표정을 지었다. 길잡이로 선택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틸라가 그랜드 포지에 가 본 경험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그곳의 위치와 가는 길을 전해 들었을 뿐인 것이다. 힘든 여정일 거라 듣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보름이란 소리에, 심지어는 러스마저 질린 안색이 되었다.
"이런 습격을 계속 받아 가며 보름을 더 가야 한다고?"
그때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쪽으로 안 갈 거야."
"네?"
다들 의아해하는데, 심지어는 틸라마저 어리둥절해하는 가운데 레펜하르트가 손가락을 까닥이며 말을 이었다.
"지름길이 있거든. 앞으로 하루 정도만 더 가면 될 테니 다들 기운 내라고."
☆ ☆ ☆
더 이상 틸라의 인도를 따르지 않고, 레펜하르트는 멋대로 앞장서 일행을 이끌었다. 대여섯 번 정도 더 습격을 받고, 어찌어찌 마물들을 물리쳐 가며 계곡을 따라 올라갔다. 그렇게 하루가 지난 뒤, 일행은 한 커다란 절벽 아래에 도착했다. 절벽 아래쪽에 뚫린 동굴을 가리키며 레펜하르트가 말했다.
"자, 다 도착했다."
그것은 아무리 봐도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 동굴이었다. 벽면이 매끈한 데다가 정확히 마름모꼴 형태를 하고 있으며 천장에는 일정하게 뭔가를 매달았던 흔적까지 보인다. 이런데도 이곳의 정체를 짐작하지 못하면 바보일 것이다.
러스가 동굴 안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은의 시대 유적이로군요."
"그래, 유적 다이만이다."
신기해하며 시리스는 레펜하르트를 올려다보았다. 예전부터 느낀 것이지만, 그녀의 이 '특이한 주인'은 뭔가 다른 유적 탐사자들과 달랐다. 마치 모든 것을 다 알고 유적을 탐사하는 것 같달까? 보통 유적을 찾으려면 온갖 정보를 모으고 조합하며 여기저기 뒤져서 겨우 위치를 파악하는 법이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이곳까지 오는 데 전혀 헤매지 않았다. 이곳에 유적이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일직선으로 달려왔다.
도저히 호기심을 참을 수 없어, 시리스가 슬그머니 질문을 던졌다.
"여길 대체 어떻게 알고 있었나요, 레펜하르트 님?"
눈치를 보니 틸라도 이곳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드워프들에게 얻은 정보도 아닐 터. 그렇다면 레펜하르트는 대체 어디서 이런 정보를 얻었단 말인가?
"아, 그냥 이런저런 정보를 주워들었어."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그녀에게 사실을 말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번에도 언제나처럼 대충 말을 얼버무릴 뿐이다.
살짝 신경질이 난다. 아니, 평소에는 그토록 다정함을 퍼부으면서 사람 헷갈리게 만들면서, 이럴 때는 절대 중요한 이야기를 해 주지 않는 거야?
'모르겠어....'
모르겠다.
이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그토록 다정하다가도 어째서 이렇게 결코 속내를 내보이지 않으며 혼자서만 뭔가를 감추고 있는 것인지.
시리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빤히 레펜하르트를 노려보았다.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싱글벙글 웃는다. 대체 뭐가 저리 좋은 걸까?
정말 모르겠다.
'대체 이 사람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
그리고....
'난 대체 이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