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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9 - 9

☆ ☆ ☆

엘프 처녀, 샤일렌은 멍한 눈으로 레펜하르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타고난 청력 덕에 그녀는 모든 대화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처음 시리스가 나타났을 때, 그리고 노예 사냥꾼들을 상대하기 시작했을 때에도 샤일렌은 전혀 기뻐하지 않았다.

엘프 특유의 감각으로 인해 그 엘프 소녀가 자신과 같은 단하임 일족이라는 것은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저 소녀의 복장은 확연한 인간의 것이었다. 인간의 노예로 전락한 것이 분명한 엘프였다. 명예도 긍지도 잃고 인간의 노예가 된 일족, 전혀 인정할 가치가 없는 존재였다.

역시나, 곧바로 주인으로 보이는 인간이 나타나 노예 사냥꾼들을 척살하기 시작했다. 엘프 여성이 인간 사회에서 얼마나 고가로 거래되는지는 샤일렌도 잘 알고 있었다. 금새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탐욕에 물든 다른 인간이 나타나 저들을 습격을 한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샤일렌은 노예 사냥꾼들이 모두 죽어 가는 와중에도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다. 어차피 마을을 습격한 인간들 대신 자신들을 노리는 다른 인간이 나타난 것뿐이었다. 노예로 팔려 가는 운명은 바뀌지 않는다.

그런데, 어째 대화를 듣고 있자니 이상한 것이다. 저 덩치 큰 인간의 말대로라면....

'마치... 우리를 구해 준 것 같잖아?'

전투가 끝나자 시리스가 빠른 걸음으로 낙타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주인 잃은 십여 마리의 낙타들이 모래 위에 멀뚱히 서 있다. 그 뒤로 두 팔목이 묶인 채 힘없이 서 있는 엘프들의 모습이 보였다. 단검으로 빠르게 밧줄을 끊어 준 뒤 시리스가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꽤나 선명한 엘프어였다.

"괜찮아요?"

"...."

샤일렌은 대꾸하지 않았다. 비록 레펜하르트의 말을 듣기는 했지만, 그렇다 해서 대뜸 이들을 같은 편으로 치부하기에는 단하임 일족이 인간에게 당한 일이 너무 많았다. 그녀는 눈을 감고 이번엔 어떻게 이들에게서 도망쳐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때, 시리스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혹시...."

샤일렌의 얼굴을 보며 그녀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슬며시 물었다.

"...샤일렌 언니?"

순간 놀라 샤일렌은 눈을 떴다. 그리고 눈앞의 엘프, 인간의 노예가 된 일족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몇십 년 전의 기억이 뇌리 속에서 재생되며, 그녀는 이 엘프 소녀의 얼굴이 낯익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렌디?"

제13장 엘븐우드의 새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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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빗장이 끌러진다. 환하게 웃는 어린 소녀들의 환영이 파노라마처럼 뇌리 가득 펼쳐진다.

-이걸 봐, 세렌디!

-같이 가자, 세렌디! 오늘은 사막 전갈을 잡으러 갈 거야!

그녀를 부르던 그 목소리.

-세렌디!

그녀의 이름, 모두로부터 받아 모두로부터 불리었던 바로 그 이름.

세렌디 엘 아렐피아나.

"기억나...."

이름이 떠오르자, 다른 것들도 점점 추억의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틀림없었다. 눈앞의 이 엘프 처녀는 어린 시절 가장 따랐던 그녀의 자매, 샤일렌이었다.

시리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엘프에게 있어 모든 아이들은 형제자매이며, 모든 어른들은 아비이자 어미다. 그리고 샤일렌은 그 수많은 형제자매 중에서도 유독 친하게 지냈던 이였다. 다정한 미소로 이끌며 사랑으로 보듬어 주었던, 가장 사랑했던 언니....

"살아... 있었구나...."

애써 흐르려는 눈물을 참으며 시리스는 샤일렌의 두 손을 맞잡았다.

50여 년 전의 그 참극 속에서, 그 아수라장 속에서 헤어진 것이 마지막이었다. 당연히 자신처럼 인간에게 붙잡혀 어디론가 팔려 갔을 것이라고만 생각해 왔다. 그런데 이토록 당당하게 살아 있었을 줄이야.

그저 반가움이라는 단어 정도로는 감히 형용할 수 없는, 뜨거운 온기가 가슴 한구석에서 치밀어 온다.

하지만 샤일렌의 반응은 냉담하기 그지없었다.

"...그래, 너도 살아 있었네."

싸늘한 목소리였다. 시리스가 당황해 그녀를 바라보았다. 기억 속의 다정한 얼굴이 아니었다. 더러운 벌레라도 보는 듯한 경멸 가득한 얼굴이었다.

"...샤일렌 언니?"

샤일렌의 옷자락을 꼭 쥐고 숨듯이 등 뒤에 서 있던 두 엘프 아이들, 그중 사내아이가 시리스와 샤일렌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물었다.

"아, 아는 사이예요?"

"말 섞지 마, 라이데."

냉엄한 음성이었다. 라이데가 흠칫 놀라 다시 몸을 숨긴다. 샤일렌이 가라앉은 눈으로 시리스를 노려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더러운 인간의 노리개가 되어, 긍지도 명예도 없이 아직도 살아 있었구나, 세렌디."

순간 시리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나, 나는...."

순간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비록 스스로는 결코 인간에게 굴복하지 않으며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 해도 그녀는 50년 넘게 인간 밑에서, 인간이 주는 음식을 먹으며, 인간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왔다. 그 이후 이리저리 팔리면서 부끄러운 꼴도 많이 당했다. 다행히 정조를 더럽히진 않았지만, 더러운 인간 앞에서 알몸을 드러내는 수치스러운 경우도 있었다.

과연 자신이 더러운 인간의 노리개가 아니었나?

저 삶 속에서도 긍지와 명예를 지키고 있었다고 자신할 수 있나?

시리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슬며시 샤일렌과 맞잡은 두 손을 풀었다. 그토록 사랑했던 언니의 비난이 칼날처럼 가슴 속을 후벼 파고 있었다.

시리스는 고개를 숙였다. 그 표정을 본 샤일렌은 애써 시선을 외면했다. 살짝 가슴이 아팠다.

솔직히, 저 덩치 큰 인간의 말에 흔들렸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었다. 저들은 정말로 자신들을 구해 준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런 탐욕 없이, 아무런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그저 선의로 행한 일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상대는 인간이었다. 그리고 인간의 노예였다.

'...인간을 믿을 수는 없어....'

침묵이 흘렀다. 두 어린 엘프 아이들이 연신 샤일렌과 시리스를 번갈아 보며 눈치를 살핀다. 그때 나직한, 하지만 분노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가 그 침묵을 깼다.

"그녀는 내 동료다. 절대 노예 따위가 아니야."

순간 샤일렌은 당황해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레펜하르트가 곁에 다가와 한껏 굳은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겉보기엔 그저 우락부락, 무식해 보이기만 하는 젊은 인간 청년이다. 그런 그의 입에서 실로 정확하기 그지없는 엘프어가 흘러나온 것이다.

"어떻게 인간이 우리말을?"

생각해 보면, 그녀와 시리스는 계속 엘프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애초에 엘프어를 모른다면 이야기 도중에 끼어들지도 못했을 것이다.

샤일렌이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그녀의 의문을 풀어 줄 여유가 없는 모양이었다. 암탉이 병아리를 감싸듯 시리스의 앞을 가로막고 그가 매섭게 말을 이었다.

"계속 그녀를 노예 취급하는 것은, 설사 그녀의 가족인 당신이라 할지라도 용납할 수 없다."

여전히 차분한, 하지만 결코 감정을 숨기지 않은 목소리였다. 샤일렌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레펜하르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설마... 진심?'

대지의 아이들인 드워프가 진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듯이, 정령의 후예인 엘프들은 감정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하지만 타인의 감정에 감응하는 이 엘프들의 이능은 드워프들과 달리 교육과 훈련에 의해 각성하는 능력이었다. 즉, 인간의 노예로 살고 있는 엘프들에겐 불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훈련받은 샤일렌은 어느 정도 타인의 감정과 교감하는 것이 가능했다.

레펜하르트가 지근거리까지 다가오자 희미한 감정의 향기가 아련히 맡아졌다. 진심 어린 분노 속에 뒤섞인, 간지러울 정도로 지극한 애정의 감정이 코끝을 맴돈다.

점점 더 이 인간이, 다른 인간과는 뭔가 다르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샤일렌은 함부로 마음을 열 수가 없었다. 비록 감정을 교감한다 해도, 자신의 감각이 진실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가 없었던 탓이었다.

노예가 되어서도 여전히 대지의 품 안에 안겨 있는 드워프들과 달리 엘프들은 세계수, 엘븐하임을 잃었다. 이 감정 감응 능력은 정령술을 익히기 위한 기초 단계이기도 하다. 세계수가 없어진 지금의 엘프들은 대부분의 정령술을 잃었고, 그만큼 교감 능력 역시 현저히 떨어진 상태인 것이다.

그렇게 샤일렌이 당혹 속에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던 중이었다. 레펜하르트가 한숨을 쉬더니 시리스를 돌아보았다.

"시리스."

살짝 씩씩대는 목소리였다. 시리스가 차분히 대답했다.

"네, 레펜하르트 님."

"너도 문제야."

시리스가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훈계하듯 레펜하르트가 말을 이었다.

"왜 말을 못 해? 너는 노예가 아니라고!"

시리스가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안색이 차갑도록 굳어진다. 레펜하르트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확실하게 말하란 말이야. 노예가 아니라고, 자유로운 한 사람의 엘프라고!"

"...."

적막이 흘렀다. 시리스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레펜하르트가 도저히 이해 못 하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젓는다. 순간 시리스의 두 눈이 매섭게 뜨였다.

"정말로...."

그녀가 눈에 쌍심지를 켜며 턱을 들어 레펜하르트를 올려다보았다. 갑자기 변한 그녀의 태도에 레펜하르트가 움찔한다. 그녀가 차가운 목소리로 질문했다.

"제가 노예가 아닌가요?"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모르겠다.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레펜하르트가 반문했다.

"아니, 내가 언제 너를 노예처럼 대한 적이 있어?"

확실히 그런 적은 없었다. 그동안 레펜하르트가 보여 준 모습은 결코 노예를 대하는 것이 아니었다. 시리스도 그것은 인정하고 있었다.

차가운 음성으로 그녀가 대꾸했다.

"아니요."

"그럼 내가 언제 네 의사를 묻지 않고 행동한 적이 있어?"

"없지요."

"그런데 왜 계속 스스로를 낮추는 거야!"

답답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레펜하르트가 버럭버럭 소리를 지른다. 시리스가 나직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레펜하르트 님은 한 번도 제가 노예가 아니라고 말한 적이 없잖아요...."

"응...?"

순간 깨달았다. 그는 진심으로 시리스를 상대했다. 언제나 그녀의 의사를 물었고, 언제나 명령이 아닌 부탁만을 해 왔다. 충분히 행동으로써 자신의 의지를 보여 주었다. 그래서 미처 깨닫지 못했다. 자신이 한 번도 '입 밖으로' 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는 것을.

"쯧...."

혀를 차며 레펜하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얼마나 둔하게 굴었는지 새삼 느껴졌다.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레펜하르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원한다면 확실하게 말하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원한다면 해 줄 생각이다.

"넌 노예가 아니야. 너와 나는 동등하다. 넌 자유로운 엘프야."

하지만 시리스는 전혀 화가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화가 난 것 같았다. 그녀가 두 눈을 치켜떴다.

"내가 노예가 아니라고요?"

"그래, 너는 노예가 아니야."

달래는 듯한 레펜하르트의 대답에, 시리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애써 누르며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알아요. 당신이 엘프를 노예 취급하지 않는다는 것은. 엘프도, 드워프도 당신은 정말로 인간처럼 대하고 있지요. 그건 나도 잘 알아요."

"그, 그런데 왜...."

당황하며 레펜하르트는 시리스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백금발이 흔들릴 정도로 고개를 들었다.

"모르겠어요. 대체 뭐가 문제인지는... 하지만 하나는 알겠네요."

선명한 눈동자로 레펜하르트를 직시하며 시리스가 또박또박 말했다.

"...당신은...."

순간 가슴이 울컥했다.

"...나를 보고 있는 게 아니에요."

절대 표현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감정. 그 감정이 자기도 모르게 언어가 되어 그녀의 혀를 움직였다.

"나를 통해 다른 누군가를 보고 있을 뿐이죠...."

☆ ☆ ☆

레펜하르트는 석상처럼 그 자리에서 굳었다.

"어...."

잠깐 시리스가 무슨 말을 했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대체 그녀가 왜 저런 식으로 말하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뇌리 한구석에서, 주인의 의지와는 별개로 대화를 나누는 목소리가 있었다.

'내가 정말 그녀를 바라보았던가?'

진정 지금의 저 가녀린 엘프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인가? 멋대로 기억 속의 그녀를 대하듯 애정 어린 눈으로 보았지만, 그것이 과연 시리스에게 향하는 애정이라고 할 수 있었을까?

전신의 힘이 쭉 빠졌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복잡한 상념이 회백색 뇌 속을 어지럽게 흩어 지나갔다. 시리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상관없었어요. 어차피 노예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아무 문제 없었죠."

그녀의 목소리가 아득히 먼 곳에서 들린다. 레펜하르트의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하지만 그럴 거면 노예처럼 취급해 주세요."

시리스를 구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가올 불행한 운명으로부터 그녀를 구했다며 스스로를 대견스러워했다.

지독한 착각이었다. 레펜하르트는 그녀를 구한 적이 없었다. 그가 구한 것은 전생의 시리스일 뿐이었다. 이 시대에서, 그는 그저 엘프 노예를 돈 주고 산 인간일 뿐이었다.

"그렇게 진심으로 말하지 말아 주세요."

시리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다. 전혀 모르는 남자가, 자신을 돈 주고 사서, 멋대로 친절하게 대하고, 애정을 담뿍 주며, 너는 노예가 아니라고 말하는 상황....

소름이 돋았다.

"...내 것이 아닌 진심을 받을 수는 없어요."

결국 속내를 터트린 시리스가 후회하는 얼굴로 잠시 고개를 숙이더니 발길을 돌렸다. 레펜하르트는 그녀를 따라가지 못했다.

휘이이잉....

메마른 모래 바람이 사막 위를 달린다. 낙타들이 눈을 껌뻑이더니 제 자리에 주저앉아 뭔가를 우물거리기 시작한다. 레펜하르트는 돌처럼 딱딱하게 굳은 채 서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복잡하게 헝클어져 있던 상념이 차분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래, 그녀의 말은 틀린 점이 없었다.

그녀는 전혀 틀리지 않았다.

틀린 것은 자신이었다.

'그렇군....'

레펜하르트는 눈을 감았다.

결심했다. 절대 하고 싶지 않은 결심이었지만, 이로 인해 닥칠 일에 대해 공포마저 느껴졌지만, 그는 이 결심을 후회하지 않았다. 이것이 그가 그녀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사죄였으니까.

레펜하르트가 시리스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시리스."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더듬거리며 그가 입을 열었다.

"너는 자유야. 이제 너의 행동을 구속하는 것은 어떤 것도 없어."

그녀가 살짝 고개를 들었다.

"이제 너의 행동을 구속하는 것은 어떤 것도 없어."

힘없이 고개를 들어 자신을 올려다본다. 왜 이 이야기를 또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레펜하르트가 한숨을 쉬었다.

"아까와는 의미가 달라. 내 곁에 있는 것도, 나를 떠나는 것도 모두 네 의지라는 의미다. 원하는 대로 행해. 그것이 너의 의지라면 나는 전부 존중할 테니까."

시리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레펜하르트가 입술을 삐죽였다.

"다른 곳이었다면 이런 말도 가식에 불과했겠지만...."

대륙은 이미 인간이 지배하는 곳, 주인에게 버림받은 엘프에게 안주할 장소 따위는 없다. 다른 곳에서 시리스에게 이런 소리를 해 봤자 현실적으로 그녀가 레펜하르트를 떠나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는 네 고향, 네 가족이 있는 곳이야."

이곳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단하임 일족이 건재하다는 것을 확인한 이상, 그녀는 언제든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머무를 곳이 확실히 있는 것이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시리스, 아니, 세렌디 엘 아렐피아나."

시리스는 놀란 눈으로 레펜하르트, 더 이상 자신의 주인이 아닌 이 청년을 올려다보았다. 두 눈동자에 담긴 강렬한 빛, 진심이었다.

"당신을 떠나라는 말인가요?"

"아니야."

그녀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네가 내 곁에 남아 있어 주기를 원해."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다. 그녀가 아리송한 표정을 짓는다. 레펜하르트가 쓴웃음을 지었다.

"네가 왜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 이해해. 사정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시간을 거슬렀다는 잠꼬대 같은 소리를 해 봐야 믿어 줄 리 없다. 진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드워프, 그중에서도 가장 현명하다는 마켈린조차 증거를 보이기 전까지는 그를 믿지 못했을 정도다. 사랑하는 이에게서 버림받는 것까진 참을 수 있지만, 미친 자 취급 받으며 경멸 받는 것만은 견뎌 낼 자신이 없었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진심을 담아....

"이제 그대를 구속할 것은 어떤 것도 없어. 그저 간청할 뿐이지."

추억이 아닌, 눈앞에 확실하게 존재하는 이 가녀린 소녀를 직시하는 것뿐이다.

"앞으로도 그대가 나와 함께해 줬으면 좋겠어."

시리스는 멍한 눈으로 레펜하르트를 올려다보았다.

가슴이 뛰었다.

알 수 없는 통증이 가슴 한구석에서 흘러나왔다.

확신할 수 있었다.

이 남자는 지금, 자신만을 바라보며 자신만을 향해 말하고 있었다.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지금 이곳에 존재하는 자신, 아직 성숙하지 못한 소녀를 향해.

머뭇거리다가 시리스가 조용히 대답했다.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 ☆ ☆

샤일렌은 말없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처음에 느꼈던 레펜하르트에 대한 의심이나 두려움은 이미 가신 지 오래였다. 저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저 덩치 큰 인간이 정말 엘프들을 노예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확신마저 들 정도였다.

갑자기 레펜하르트가 터덜터덜 그녀에게 걸어왔다. 영 기운 없어 보이는 걸음걸이였다. 저 덩치, 저 근육으로 저렇게 힘없어 보이는 걸음이 가능하다는 것이 놀라울 지경이었다. 얼마나 이 청년이 상심해 있는지 뼈저리게 느껴진다.

샤일렌과 두 엘프 아이들을 번갈아 바라보며 레펜하르트가 물었다.

"마을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아, 낙타 한 마리만 빌려 주신다면...."

레펜하르트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저희 것도 아닌데 허락받을 이유가 없지요. 원하신다면 다 가져가셔도 됩니다."

순간 샤일렌이 눈을 빛냈다.

노예 사냥꾼들이 데리고 온 열 마리의 낙타들은 여전히 그들 주위를 서성대며 한가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가혹한 사막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단하임 일족에게 열 마리의 낙타란 엄청난 재산이었다. 게다가 저 낙타의 안장에는 노예 사냥꾼들이 챙겨 온 물과 식량도 가득했다. 엘프답지 않게 샤일렌이 탐욕의 눈빛을 보였다 해서 그녀를 탓할 수는 없으리라.

"구해 주신 것만도 감사한데 이렇게까지...."

감동으로 그녀가 말을 더듬을 때였다. 레펜하르트가 어려워하며 부탁했다.

"꼭 그래서는 아니지만... 저 아이를 가족과 만나게 해 주실 수 있을까요?"

그는 저만치 떨어져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시리스를 가리키고 있었다. 샤일렌은 새삼 신기하다는 눈으로 그녀의 자매를 바라보았다. 저 아이는 이렇게까지 생각해 주는 인간을 어떻게 만날 수 있었던 걸까?

그녀의 눈빛을 경계의 의미로 읽은 것인지, 레펜하르트가 서두르며 말을 이었다.

"그녀는 제 노예가 아닙니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요. 인간에게 마을의 위치를 알리거나 할 일은 없을 겁니다."

물론 샤일렌은 진작 시리스를 일족에게 데려가기로 마음을 굳힌 후였다. 상황을 여기까지 지켜본 이상, 설마 레펜하르트나 시리스가 그들에게 해코지를 할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쓸데없는 걱정일 뿐이다.

그러고 보니, 레펜하르트의 부탁에 자기 자신은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다는 것이 문득 떠오른다.

"당신..., 저 아이를 기다려야 하지 않나요?"

"네, 이 근처에서 적당히 기다리고 있을 셈입니다."

레펜하르트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샤일렌이 빙그레 웃었다.

"함께 가요."

"네?"

"저희를 구해 주신 분이잖아요. 은인에게 보답하지 않으면 일족의 명예에 누가 되지요."

완전히 마음을 연 샤일렌의 말에 도리어 레펜하르트가 놀랐다.

"함부로 은신처의 위치를 타인에게 알려도 되는 겁니까?"

"당신은 믿을 수 있으니까요."

태연한 샤일렌의 대답에 레펜하르트는 혀를 찼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경계심이 없으면 곤란하지 않은가? 그런 그의 의문에 샤일렌이 고개를 저었다.

"저 아이를 데려간다면, 당신을 데려가는 것과 별 차이가 없어요."

만약 레펜하르트가 엘프의 마을을 알아내기 위해서 자신의 노예와 이런 연기를 했다면, 둘 다 데리고 가나 시리스만 데리고 가나 어차피 은신처가 들통 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니 시리스를 허락한 이상 레펜하르트 역시 함께 가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어차피 여기서 둘 다 거절한다 해도, 당신들이라면 저희 은신처쯤은 금방 찾을 테니까요."

스펠라트 사막은 사람이 살기엔 지나치게 가혹한 땅이다. 사람이 살 수 있을 장소는 지극히 제한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외부 사람이라면 모를까, 시리스는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기억을 조금만 떠올리면, 단하임 일족이 은신처로 삼을 만한 장소쯤은 금방 떠올릴 수 있다. 애초에 엘프들이 모여 숨을 만한 장소가 몇 군데 없으니까.

모든 설명을 들은 레펜하르트가 납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합리적인 사고방식이군요."

"엘프는 언제나 합리적이죠."

물론 인간은 여전히 믿을 수 없다. 하지만 상황을 보건대 레펜하르트와 시리스는 믿을 수 있다는 것이 샤일렌의 결론이었다.

엘프들은 인간과 달리 감정보다 이성적인 판단에 근거해 움직인다. 상황을 파악한 샤일렌이 이런 결론을 내린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럼 채비를 해야겠군요."

레펜하르트가 오른손을 들어 낙타들을 모았다. 가벼운 정신 제어 마법을 쓰자 낙타 열 마리가 마치 조련사를 따르듯 자연스레 레펜하르트의 손짓대로 일렬로 와 섰다. 아이들이 신기해하며 레펜하르트 주위를 얼쩡거렸다.

"가자, 라이데, 네티나."

아이들을 불러 샤일렌이 낙타에 태웠다. 낙타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 낙타를 타 본 엘프 아이들이 환호성을 흘린다. 아이들이 떨어지지 않나 확인한 뒤 샤일렌이 천천히 시리스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대열 중앙쯤에서 말없이 걷고 있었다.

"세렌디...."

"이제 저를 인정해 주는 건가요?"

살짝 삐친 목소리에 샤일렌이 그녀를 달랬다.

"너도 나 같은 상황이었다면 그랬을 거잖아?"

"그건 그래요."

시리스가 살며시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샤일렌이 재차 사과하며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신기하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좋은 인간을 만났구나."

"네."

시리스는 바로 대답했다. 비록 상황이 복잡하긴 하지만, 그렇다 해도 레펜하르트를 만난 것이 행운이었다는 것은 결코 부인할 수 없었다.

"정말 좋은 사람이지요."

"그래...."

샤일렌이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이름을 알려 주었을 정도니까."

"네?"

순간 시리스가 의아해하며 샤일렌을 바라보았다. 샤일렌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렇잖아? 아까 네 본명을 부르던걸?"

"아...."

시리스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방금 나눴던 대화,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사실이 떠오른다.

레펜하르트는 분명하게 말했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시리스, 아니, 세렌디 엘 아렐피아나.

분명하게 말했다. 그녀의 원래 이름, 그녀조차도 기억하지 못했던, 그렇기에 입 밖에 꺼냈을 리도 없는 그 이름을.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멍해진 그녀를 보며 샤일렌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응? 왜 그러니, 세렌디?"

"...아, 아뇨."

시리스는 고개를 저으며 시선을 돌렸다. 그녀 자신도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화제를 샤일렌에게까지 꺼내고 싶지는 않았다. 시리스는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터덜터덜 뒤따르고 있는 레펜하르트가 보인다.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가 모든 이야기를 추궁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어차피 대답해 주지 않겠지....'

그렇게 싸워 댄 후라 딱히 말을 걸 기분도 아니다. 시리스는 일단 의문을 가슴에 묻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낙타 대열이 천천히 사막을 가로질러 서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2

단하임 일족의 마을, 데류 엘데에서 1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커다란 계곡이 하나 있다. 끝없이 펼쳐진 광야 사이에 움푹 파인 대지의 상처 같은, 생명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메마른 협곡.

단하임 일족은 지금, 그 협곡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50년 전의 대규모 노예사냥으로 일족의 대부분을 잃은 이들은 그 악몽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따로 대피할 만한 은신처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래서 이 협곡에 따로 은신처를 마련해 놓았다.

협곡 좌우, 깎아지른 절벽 사이에 짐승 가죽과 검불을 이용해 만든 천막들이 곳곳에 위치한다. 그 사이로 나 있는 협로 곳곳에는 번득이는 벽돌로 쌓아 올린 방어용 진지들이 구축되어 있다. 모래를 녹여서 만든 유리질의 벽돌이었다. 이 모든 것이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아채지 못하게 위장이 되어 있었다.

멀리서 보면 전혀 안쪽이 보이지 않는 데다가 가파른 벼랑에 푸석푸석한 사암으로 이루어진 이 협곡은 그야말로 천험의 요새였다. 사실 여건만 된다면 아예 마을을 이쪽으로 옮겼을지도 모른다.

그러지 못한 이유는 간단했다.

"물이 떨어져 갑니다, 렐하드 장로님."

짐승 가죽과 검불을 엮어 만든 조잡한 천막, 그 속에서 백금발의 청년 엘프 한 명이 중년 엘프를 향해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중년 엘프, 렐하드가 눈을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올해로 삼백마흔세 살이 되는 렐하드는 단하임 일족의 최연장자이자 수장이었다. 오래 사는 엘프 기준으로도 충분히 나이 든 그였지만, 외모 상으로는 40대 초반의 인간과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인간이라면 노인이 되어서도 이런 외모를 유지하고 있는 렐하드를 보며 감탄하겠지만, 사실 엘프들은 성인이 된 뒤 젊은 외모를 죽을 때까지 유지하기에 사실 노인이라는 것이 존재치 않는다. 늙지 않는 엘프가 무려 중년의 외모가 되었다는 것은, 이들이 이 험한 오지에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다.

렐하드가 한숨을 쉬며 눈앞의 엘프에게 물었다.

"남은 물로 어느 정도 버틸 수 있겠나?"

"아껴 쓴다 해도 하루 정도가 한계입니다."

이 협곡이 은신처 이상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이곳에는 물이 없다.

물론 단하임 일족도 따로 물 저장고를 만들어 두었다. 사막이라 해서 1년 내내 비가 내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가끔 사막은 무시무시할 정도의 폭우를 퍼붓기도 한다. 일명 돌발성 호우, 문제는 저것이 1년에 몇 번 되지 않는 일이며 메마른 사막은 아무리 많은 비가 내려도 그 수분을 유지할 수가 없다. 따로 저장고를 만들어 두지 않으면 보존할 수가 없는 것이다.

물 저장고에 저장된 수량으로 농사를 짓는다거나 할 수는 없지만, 은신처에 숨어 있을 동안 목을 축일 정도는 되었다. 물론 오랫동안 고인 물이기에 방치되는 동안 상당히 오염되지만, 사막의 모래로 물을 거른 뒤 정령의 축복을 받으면 충분히 식수로 쓸 수준까지는 정화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기껏해야 이백여 명이 일주일 정도 쓸 분량에 불과했다. 그것도 오직 식수용으로만 써서 그렇다는 이야기다. 도저히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척후로 보낸 이들은 돌아왔는가?"

"네, 주위를 유심히 살펴본 결과 인간들은 더 이상 탐색을 포기하고 돌아간 것 같다고 합니다."

렐하드의 미간에 떠오른 고뇌의 주름이 더욱 짙어진다. 그가 다시 물었다.

"일족의 전사들, 그들의 시신은 수습해 주었는가?"

일족을 피신시키기 위해 마을에 남아 목숨을 던진 숭고한 전사들, 그들의 시신을 짐승의 먹이가 되게 할 수는 없다. 젊은 엘프가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사막의 모래 아래 잠들어 있습니다."

"라그엘이 그들의 영혼을 거두어 정령의 품 안에 안기었기를."

불의 정령, 라그엘의 이름을 되뇌이며 렐하드는 죽은 전사들의 넋에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고민했다.

"그렇다면... 일단은 안전해졌다고 봐도 될는지...."

"어차피 이곳에서 더 머무를 수는 없습니다. 마을로 돌아갈 체력을 남기려면 물은 이제 한계입니다."

이곳에서 마을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중간에 놓인 거대한 유사의 강을 건너야 한다. 어른들은 몰라도 아이들에겐 험하기 그지없는 여로, 더 시간을 끌면 또 죽어 가는 아이들이 나올지도 모른다.

결국 렐하드가 승낙의 뜻을 표했다.

"...오늘 저녁, 해가 저물기 시작하면 돌아가세. 채비를 하라고 일러 주게."

"예, 장로님."

젊은 엘프가 고개를 꾸벅 숙인 뒤 천막 밖으로 나갔다. 렐하드는 심란해하며 고개를 들어 허공을 바라보았다.

'어찌해야 하는가.'

고민이었다.

'언제까지고 위치가 발각된 본 마을에서 살아갈 수는 없는데....'

50년 전, 마을의 위치가 알려진 이후 벌써 노예 사냥꾼들의 습격이 두 자릿수를 넘었다. 평소의 대피 훈련과 은신처 덕분에 그때처럼 멸족의 상황까지 가는 긴박한 경우는 없었지만, 그럴 때마다 소중한 일족의 여인과 아이들을 조금씩 잃어 갔다.

뭔가 방도가 필요했다. 이미 위치가 알려진 장소에서 이대로 계속 사는 것은 자살행위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곳 말고는 딱히 살 만한 곳이 없다는 게 문제지.'

스펠라트 사막에 오아시스가 단하임 일족의 마을뿐일 리는 없다. 하지만 어지간히 살 만한 오아시스는 이미 전부 인간 유목민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더 깊숙하게 들어갈 수도 없었다. 더욱 서쪽, 스펠라트 사막 깊은 곳에도 오아시스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곳에는 단하임 일족의 힘으로는 도저히 상대 못할 가공할 몬스터들이 출몰한다. 지금도 이미 태어난 아이의 절반만이 성인이 될 정도인데, 여기서 더 오지로 가면 인간의 습격이 없더라도 단하임 일족은 점점 죽어 갈 뿐이다.

이 은신처가 단하임 일족의 최후 한계선이었다. 이보다 더 물러서면 생존조차 불가능해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달리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엘디아여, 길을 내려 주소서...."

엘프들의 여신, 엘디아의 이름을 부르며 렐하드는 한탄을 터트렸다. 물론 엘디아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이미 세계수, 엘븐하임을 잃은 엘디아는 그녀의 아이들에게 어떠한 도움의 손길도 줄 수가 없었으니까.

그렇게 늙은 엘프, 렐하드가 깊은 한숨을 내쉴 때였다.

"음?"

렐하드는 뾰족한 귀를 쫑긋 세웠다. 왠지 밖이 소란스러웠다.

순간 그의 표정이 무섭게 굳었다.

"설마!"

인간들에게 이 은신처의 위치마저 들킨 것인가? 그는 놀라며 곁에 놓아 둔 검을 들었다. 그리고 무서운 속도로 천막 밖으로 뛰쳐나갔다.

☆ ☆ ☆

협곡의 입구, 황야가 내려다보이는 그 좁은 둔덕 위에는 이미 수십 명의 엘프들이 무장을 한 채 대기하고 있었다. 사막에서 금속은 귀한 법, 철검을 찬 엘프는 십여 명 뿐이고 대부분은 짐승의 뼈를 깎아 만든 골骨제 검이나 창을 들고 있었다.

한때 우아함과 고귀함을 자랑했던 하이엘프들이 이제는 짐승의 가죽을 두르고 짐승의 뼈를 휘두르고 있다니, 옛 시절을 기억하는 이가 있다면 실로 통탄할 일이리라. 물론 그 까마득한 옛 세월을 기억할 만큼 오래 사는 이는 세상에 아무도 없지만.

렐하드는 협로를 따라 빠르게 뛰어 협곡 입구로 나섰다. 그리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잠시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건 도대체?"

협곡 아래의 광야, 그곳에 열 마리의 낙타를 이끄는 한 무리가 있었다. 선두에 선 것은 백금발에 갈색 피부, 뾰족한 귀를 지닌 틀림없는 일족의 여인이었다. 게다가 낙타 등에는 두 아이도 타고 있었다. 모두 렐하드가 잘 아는 이들이다.

"샤일렌? 그리고 네티나와 라이데도?"

저들이 살아 있었단 말인가? 물론 그것만이라면 이런 소란이 벌어질 리가 없었다. 아니, 소란이야 벌어졌겠지. 돌아온 일족을 기쁘게 맞이하는 기쁨의 소란이.

하지만 저들 뒤에는 누가 봐도 인간의 노예인 것이 분명한 엘프 소녀와, 인간 치고는 좀 지나치게 크지 않은가 싶은 덩치의 인간 청년이 서 있는 것이다. 다른 엘프들이 당황하는 이유가 실로 이해가 갔다. 도대체 어째서 저런 상황이 벌어졌는지 짐작이 가질 않는다.

당혹해하는 렐하드의 모습에 샤일렌이 반색을 하며 걸음을 옮겼다.

"렐하드 님!"

그때 협곡의 엘프 중 하나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가까이 오지 마라!"

동시에 엘프들 몇 명이 짐승 가죽으로 만든 슬링을 들고 휘둘러 댔다.

휘이이익!

뭔가가 연거푸 날아와 샤일렌 근처에 떨어졌다. 상당히 거리를 둔 것이, 겨냥을 한 것이 아닌 위협일 뿐임이 명백했다. 그래서 시리스도 경계 태세를 갖출지언정 바로 응전하지는 않았다. 기분 나쁘거나 하지는 않았다. 솔직히 저들이 경계를 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실망했을 것이다.

시리스가 근처에 날아와 박힌 투사체를 내려다보며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슬링으로 그냥 돌 같은 것을 던진 줄 알았는데...

"금속도 아니고 돌도 아니고...."

날아온 투사체는 금속 특유의 광택이 없었다. 그렇다고 돌이라기엔 너무 매끄럽고 묘하게 투명한 느낌이다. 레펜하르트가 슬그머니 말을 걸며 그녀의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모래를 녹여서 유리로 슬링 탄환을 만든 거야."

"아...."

그러고 보니 이것, 유리구슬이랑 느낌이 닮았다. 처음에 못 알아본 것은 동그랗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은, 그야말로 녹다 만 구슬이라 알아채지 못했을 뿐이다.

"뭐, 그냥 던져서 맞출 용도니까 조잡해도 상관없지."

잠깐 서먹해하다가, 시리스가 슬쩍 질문을 던졌다.

"이런 곳에서 모래를 녹일 정도의 화력을 얻을 땔감이 있다는 건가요?"

아무래도 그 싸움 이후 영 어색해서 말을 피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레펜하르트를 계속 무시하기에도 영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일단 말문을 꺼내고 나니 한결 홀가분하다. 레펜하르트도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정령술을 썼겠지."

보통 엘프들이 가장 능통한 것은 바람의 정령술이고 그다음이 물의 정령술이다. 하지만 메마른 오지에서 수백 년을 살아온 단하임 일족은 하이엘프임에도 불구하고 사막의 열기 탓인지 불의 정령술에 가장 능했다.

"아무래도 세계수가 없어서 전투에 쓸 정도로 정령을 구현화시키지는 못하겠지만...."

일단 불의 정령을 구체화시킨 뒤 시간을 들여 점점 화력을 높이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순간적으로 높은 화력을 뽑아낼 정도는 아닐 것이라며 레펜하르트는 설명을 이었다.

"그게 가능했다면 저들 모두 손에 불덩이 하나씩은 들고 있지 않았겠어? 그리고 고작 저런 노예 사냥꾼들 정도에게 당하지도 않았겠지."

시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새삼 이 무식해 보이는 청년이 생각보다 훨씬 유식하다는 사실이 실감이 났다. 자신의 일족에 대한 것조차 이렇게 잘 알고 있다니.

시리스의 눈동자에 감탄의 빛이 맴돌자 신이 났는지, 레펜하르트가 물어보지도 않은 것까지 떠들어 댔다.

"너희 일족의 피부가 까무잡잡한 것도 그런 이유야. 사실, 아무리 오지의 태양에 검게 그을렸다 해도 너처럼 50년 가까이 이곳을 떠났다면 다시 원래의 피부색으로 돌아와야 정상이지. 그게 아닌 것은 이미 수백 년 동안 이곳에 살아온 단하임 일족이 불의 정령의 힘과 상당히 동화된 상태라, 피부색 자체가 고정된 케이스지. 그 피를 이은 너 역시 불의 정령력과 동화되었다는 뜻이고."

시리스가 한쪽 눈을 찌푸렸다. 유식한 것도 정도가 있다. 이쯤 되니 의문이 안 들 수가 없는 것이다.

"...설마 그 이야기도 사부에게 들은 건 아니겠죠?"

유적이야 그렇다 쳐도, 엘프들에 대한 것까지 이렇게 잘 알고 있는 건 역시 이상하다. 하긴, 생각해 보면 이상한 점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였다. 이상할 정도로 이종족 전반에 대한 지식이 너무 풍부하다. 오크어에 드워프어까지 자연스럽게 구사하더니 이젠 엘프어조차 능통하다. 이건 유적 탐사와 전혀 관계없는 지식이 아닌가?

그러자 레펜하르트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 그건...."

끙, 시리스가 말 상대를 해 주니 신 난다고 너무 이야기를 풀어 버렸다.

"우, 우리 사부님 친구가 엘프나 드워프들에 관해서도 학식이 깊으셔서... 나도 어깨 너머로 이것저것 주워들은 거야...."

더듬더듬 레펜하르트가 변명처럼 이유를 든다. 시리스가 눈을 빛냈다.

"그럼 제 이름은 어떻게 알고 있었죠?"

"응?"

"세렌디 엘 아렐피아나. 제 엘프 이름 말이에요."

"어?"

순간 레펜하르트의 안색이 창백하게 굳었다. 이제야, 그도 자신이 어떤 실수를 했는지 깨달은 것이다.

시리스가 날카로운 눈으로 계속 레펜하르트를 응시한다. 레펜하르트는 등 뒤로 땀을 뻘뻘 흘렸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진짜 큰 실수였다. 전혀 변명의 여지가 없다!

"으음...."

신음을 흘리며 레펜하르트는 시리스의 불신 가득한 눈빛을 슬금슬금 피했다. 하긴, 예전부터 시리스가 계속 그에게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느끼고 있었다. 앞으로도 점점 이런 상황을 늘면 늘었지 줄지는 않을 것이다. 솔직히 숨기는 것도 슬슬 한계이긴 하다.

'하지만 대체 어떤 식으로 말해야 하냐고?'

아무래도 그랜드 포지에 돌아가 마켈린이랑 이 문제에 대해서도 좀 조언을 구해 봐야겠다. 그렇게 결심하며 레펜하르트는 슬며시 시리스를 달랬다.

"나중에 제대로 설명해 줄게. 아무리 이런 상황은 좀 그렇잖아?"

확실히, 지금도 엘프들은 살기와 의문이 복잡하게 섞인 얼굴로 자신들을 노려보고 있다. 한가하게 담화나 나누고 있을 때는 아니지. 고개를 끄덕이며 시리스가 다시 협곡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 그럼 일단 적의가 없다는 것부터 알려야지....'

레펜하르트가 두 손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

"엘프들이여!"

휭윙윙윙윙!

그랜드 포지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대화고 뭐고 일단 유리 탄환부터 날아왔다. 물론 쇠로 된 화살촉도 가뿐히 튕기는 레펜하르트가 이 정도에 당할 리는 만무하다.

퉁퉁! 투둥!

슬링으로 쏘아진 유리 탄환들이 죄다 튕겨 나가는 모습에 엘프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레펜하르트는 잠시 목을 가다듬고서, 목청을 높여 소리쳤다.

"위대한 정령의 후손들이여, 나는 비록 인간이나 그대들의 적이 아니오! 엘프들이 지닌 역사를 아는 자로서 우정의 예를 바라고 있소!"

뚜렷한 엘프어였다. 엘프들이 당황하며 렐하드를 바라보았다.

"뭐, 뭐지?"

"렐하드 장로님?"

렐하드도 당혹스럽기 그지없다는 표정이었다. 정확한 엘프어도 엘프어거니와, 저 말은 너무도 엘프들의 예법에 정통해 있었다. 오지에서 살다 보니 엘프들조차도 거의 잃어버린 예법을 분명 인간인 이가 입 밖으로 꺼내다니?

'...적이 아닌가?'

그는 난감해하며 샤일렌과 낙타에 탄 두 아이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합리적으로 이 광경에서 유추되는 사실은, 저들이 일족을 구해 여기까지 데려다 주었다는 것이다. 상대가 인간만 아니었다면 의심할 필요도 없는 상황이다.

렐하드가 오른손을 들었다. 그러자 엘프들이 일제히 겨누고 있던 슬링을 거두었다. 공격이 멈추자 레펜하르트가 부드럽게 웃었다. 적의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호의 가득한 미소였다. 그 감정에 감응하며 렐하드는 더더욱 혼란스러워했다.

'일단 상대가 호의를 가졌다는 것은 분명해 보이지만....'

하지만 저것이 함정일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다. 인간은 실로 연기가 뛰어난 생물이라 겉으로는 태연히 웃으면서도 뒤로 칼을 찌를 수 있는 놀라운 종족이니까. 일단 공격은 멈추게 했지만, 그렇다고 상대를 무작정 믿을 수도 없다.

렐하드가 외쳤다.

"그대의 말은 그럴듯하게 들린다! 하지만 그대를 믿기에는 근거가 부족하다!"

'뭐, 그렇겠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드워프들이야 진실의 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 몇 마디만으로도 바로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엘프들은 다른 것이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엘프들의 신뢰를 얻을 방법을 이미 알고 있었다. 전생에서도 이들과 처음 만났을 때 이런 상황이었으니까.

"충분히 이해하오! 그러니 이제부터 그 근거를 보이겠소!"

엘프어로 고함을 친 뒤 레페하르트가 갑자기 무릎을 살짝 굽혔다. 그리고 전신의 오러를 끌어 올렸다.

화르륵!

황금빛 오러가 불길처럼 솟구친다. 안 그래도 기운에 민감한 엘프들이다. 갑작스레 터져 나오는 강렬한 파괴의 기운에 다들 화들짝 놀라 경계 태세로 돌아갔다.

"으윽?"

"허억!"

그 상태로 레펜하르트가 갑자기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허공에 강렬한 일격을 날렸다.

"캘러미티 혼!"

눈부신 황금의 빛이 사막의 하늘을 뚫고 솟아올랐다. 빛의 기둥이 대기를 밀어내며 막대한 기운을 사방으로 흩뿌렸다. 대기가 울리며 파문이 퍼져 나가 모래 위로 그 자취를 명확히 남겼다.

쩌어엉!

우레 소리 같은 굉음과 함께 빛의 기둥이 사막의 하늘을 관통했다. 실로 엄청난 힘에 엘프들의 표정이 싹 변했다. 렐하드가 기막혀하며 중얼거렸다.

"...오러 유저?"

상대는 오러 능력자였다! 선택받은 초인 중의 초인, 단신으로 군대에 필적한다는 엄청난 무력의 소유자다! 게다가 저 엄청난 기운은 단하임 일족이 모두 덤벼들어도 상처 하나 못 낼 것이 명백해 보인다!

우르르릉!

허공을 꿰뚫은 캘러미티 혼이 대기를 떨쳐 굉음을 내며 사라졌다. 레펜하르트가 다시 주먹을 거뒀다. 곁에 서 있던 시리스가 사색이 되어 따지듯 물었다.

"뭐, 뭐 하는 거예요!"

이건 아무리 봐도 시비 거는 것 아닌가? 평화롭게 다가가도 모자랄 판에 대뜸 무력시위를 하다니! 시리스의 비난에 레펜하르트가 빙그레 웃었다. 그녀는 연신 동족의 눈치를 보며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야 인간들이라면 이 경우 당연히 협박으로 받아들이겠지만...."

역시 시리스는 인간들 사이에서 너무 오래 산 모양이다. '엘프'답지 않은 사고방식을 보이는 걸 보니.

레펜하르트가 엘프들을 살며시 가리켰다. 시리스는 무심코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당황했다. 그토록 적의 가득하던 엘프들, 그들이 다들 호의 가득한 얼굴로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에?"

렐하드가 검을 허리춤에 꽂더니 환한 목소리로 외쳤다.

"당신 정도의 강자라면 함정 따위 팔 필요가 없겠지! 그대가 진정으로 호의로 다가왔음을 알겠소이다!"

"엘프들은 합리적으로 생각한다니까?"

그거 보라는 듯 레펜하르트가 어깨를 으쓱였다. 원래 전생에서는 강력한 마법을 시현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어필했지만, 뭐 오러 능력을 보인다 해도 결과는 전혀 달라질 것이 없다.

시리스가 납득이 안 간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니, 그렇다 해도 이렇게 믿어 버리는 것은...."

설사 레펜하르트가 오러 능력자라서 단하임 일족 전체를 상대할 수 있는 강자라 해도, 함정을 팔 필요가 아주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노예 사냥꾼들도 단하임 일족 전체를 상대할 힘이 없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레펜하르트가 만약 엘프들이 도망치지 못하게 방심시킨 뒤 몰래 동료들을 불러들여 사방에서 포위할 계획이었음 어쩌려고?

하지만 엘프들은 이미 레펜하르트에 대한 의심을 완전히 풀었는지, 방어 태세를 풀고 그들을 마중하기 위해 협곡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시리스가 고개를 저었다.

"합리적으로 생각한다면, 더욱 이런 의문을 가져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녀의 의문에 레펜하르트가 속삭이며 대꾸했다.

"응? 그런 이유로 믿은 게 아냐."

"그럼?"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나, 오러 능력자잖아? 그것도 그중에서도 꽤나 강한 축에 끼는."

"그렇죠."

"그런데 이 오지까지 와서 고작 엘프 잡아다 팔려고 이 귀찮은 일을 할 리가 없잖아? 오러 능력자라면 훨씬 쉽게 돈 벌 방법이 널렸는데."

"아?"

생각해 보니 그랬다. 레펜하르트 정도의 강자라면 이 짜증 나는 사막에, 고작 야생 엘프 좀 잡아보겠다고 올 일 자체가 없는 것이다. 오러 능력자쯤 되면 어딜 가도 대접받을 수 있다. 당장 저 란타스만 해도 그 끔찍한 죄를 저지르고도 배 두드리며 잘살지 않았던가? 오러 능력자가 화전민 촌락 터는 것 봤나?

적어도, 대마도사나 오러 능력자가 다른 이유 없이 그저 돈만으로 이 오지까지 왔을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한 것이다. 이것이 전생에서나 현생에서나 저들에게 레펜하르트에 대한 의심을 풀게 한 이유였다.

"그, 그렇군요...."

시리스는 감탄하며 다가오는 그녀의 일족을 바라보았다. 그 짧은 상황에, 게다가 이 촉박한 상황에서도 저리 명철한 이성을 유지했단 말인가?

뿌듯한 긍지가 가슴 가득 차올랐다. 이런 척박한 생활 속에서도 단하임 일족은 엘프다운 현명함을 결코 잃지 않고 있었다. 여전히 자랑스러운 일족이었다. 그 사실이 왠지 견디기 힘들 정도로 기쁘다....

"우리 일족의 아이들을 구해 준 것, 진심으로 감사하오."

가까이 다가온 렐하드가 오른손을 어깨에 얹고 고개를 숙였다. 진심을 담은 감사를 보내는 엘프의 예법이었다. 레펜하르트가 왼손을 어깨에 얹으며 대꾸했다. 겸양을 의미하는 엘프의 예법이다.

"천만에요, 진정 감사를 받아야 할 이는 따로 있습니다."

레펜하르트가 시리스를 가르켰다.

"진정 저들을 구한 것은 그녀입니다."

렐하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번엔 시리스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시리스는 당황했다. 레펜하르트는 아는 엘프의 예법을 그녀는 모르는 것이다. 결국 그녀는 어깨를 움츠리며 '인간처럼' 손사래를 쳤다.

"아, 아뇨. 대부분을 해치운 것은 분명 레펜하르트 님인데...."

대꾸하며 시리스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인간도 엘프의 예법을 따르는데 정작 엘프인 자신이 이렇게 굴다니 이 무슨 부끄러운 상황일까.

그때 렐하드가 시리스를 유심히 살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머리와 피부에 깃든 기운은 왠지 낯이 익구려."

샤일렌이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세렌디예요, 렐하드 님."

"응?"

시리스의 곁으로 다가가며 샤일렌이 상냥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렐과 피아나의 딸, 세렌디예요. 기억하시겠어요?"

순간 렐하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일족의 장으로서, 그는 그동안 태어나고 죽어 간 모든 일족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름을 듣는 순간 뇌리 저편에서 과거의 기억이 명확하게 떠올랐다.

"악몽의 날에 잃었던 아이인가!"

다른 엘프들도 웅성거리며 시리스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악몽의 날, 단하임 일족이 멸망 직전까지 갔던 그 참혹한 일에 대해 모르는 엘프들은 없었다.

소란이 일어났다. 놀라움과 반가움의 목소리, 그리고 노예로 팔린 아이가 돌아온 기적에 대해 엘디아에게 감사하는 음성이 협곡을 가득 메운다.

렐하드가 고개를 둘레둘레 저었다.

"이거야 원, 잃은 줄 알았던 가족을 되찾았을 뿐 아니라 옛 가족까지 돌아오다니. 그대는 실로 우리의 귀인이구려. 그런 귀인을 이런 자리에 계속 세워 둘 수는 없을 터, 안으로 들어오시겠소? 누추하나마 다리 펼 장소 정도는 있소."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렐하드의 초대에 레펜하르트는 정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레펜하르트 일행을 대동하고 엘프들이 협곡 사이로 하나 둘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3

그날 저녁, 엘프들은 자신들의 마을, 데류 엘데로 돌아갔다. 레펜하르트와 시리스도 협곡을 떠나 그들의 뒤를 따랐다. 마을에 도착한 뒤 단하임 일족은 의식을 행했다. 또 한 차례의 환난을 무사히 넘긴 것에 대해 여신, 엘디아에게 감사하는 의식이었다.

불의 정령술을 이용한 커다란 불꽃이 장작도 없이 사막의 모래 위에서 이글거리며 타오른다. 그 불을 둘러싸고 한 아리따운 엘프 여인이 노래를 부른다.

"라헬 리안드 엘린 스 피라나...."

오래토록 전승되어 온 엘프들의 진혼가다. 일족을 지키기 위해 죽어 간 전사들의 넋을 기리는 추모의 의식이었다. 이어 살아 돌아온 일족을 환영하기 위한 잔치가 열렸다. 모두들 불을 둘러싸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른다. 샤일렌과 두 아이, 그리고 50년 만에 돌아온 시리스를 위한 잔치였다.

사막 한가운데 흥겨운 노랫가락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다들 즐거워하는 모습이었다. 마을로 돌아와 다시 풍족하게 물을 마실 수 있게 되었고, 음식도 넉넉하다. 식량 사정이 여의치 않은 단하임 일족이지만 지금은 무려 열 마리나 되는 낙타들이 생긴 것이다. 렐하드는 큰마음 먹고 그중 네 마리를 도축하기로 결심했고, 덕분에 마을 곳곳의 모닥불에서는 신선한 낙타 고기들이 자글자글 기름을 떨어트리며 익어 가고 있었다.

천막 한쪽에 서 있던 레펜하르트가 쓴웃음을 지었다.

'통구이 앞에서 신바람 내는 엘프들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하구먼....'

옛이야기 속에서 엘프들의 연회는 언제나 신비롭고 경이로운 광경으로 묘사되곤 한다. 녹음 가득한 숲 속에서 온갖 동물들과 어울리며 고상한 모습으로 맑은 술과 신선한 과일을 취하는 옛 엘프들의 전설에 비하면, 지금 저들의 모습은 실로 타락했다고 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전설 속 엘프들처럼 신비롭지도 경이롭지도 않았지만, 그 사실이 저들의 아름다움을 쇠퇴시키지는 못했다. 원시적인 삶 속에서도 결코 야만스러워 보이지 않는, 옛 엘프들의 우아한 모습이 여전히 저들에게 남아 있었다.

하긴, 저들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았다. 자연에 순응하고, 자연과 동화하고, 그 속에서 최대한 조화를 이루어 살아가는 저들의 삶은 풍성한 숲 속이건 척박한 사막이건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엘프들은 신비롭고, 경이가 느껴지는 이들이었다.

그 사실이 못내 기뻐 레펜하르트는 빙그레 웃었다.

"...렐 드라이드 샤할라나...."

귓가를 간질이는 엘프들의 노랫가락을 음미하며 그는 마을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흥겨워하는 어른들, 그 사이를 열심히 오가는 어린 엘프 아이들의 모습이 보인다. 아이들은 모닥불 주위에는 놓인 각종 육류며 말린 과일들, 견과류 등을 집어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달다!"

"맛있어! 고소해!"

"너도 하나 먹어 봐, 엘리."

왁자지껄한 아이들을 보며 레펜하르트는 새삼 느꼈다.

'낙타들 챙겨 오길 잘했군.'

저것은 원래 브라이트 일행이 사막을 건너기 위해 준비했던 저장 식량이었다. 레펜하르트가 챙겨온 열 마리의 낙타에는 무려 40인분이 넘는 식량과 물품들이 각 안장마다 가득 실려 있었던 것이다. 언제나 거친 음식만 먹던 아이들에겐 이 저장 식량도 진수성찬인 모양이었다.

다른 쪽에서는 시리스가 기억 속의 옛 친구들을 만나고 있었다.

"돌아와서 기뻐, 세렌디! 나 기억나?"

"...제레인? 제레인이야?"

"기억하네! 나는?"

처음에는 어색해하는 듯했지만, 다들 반갑게 맞이하는 태도에 시리스도 점점 얼굴에 웃음기가 감돌고 있었다. 레펜하르트는 복잡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보기 좋구나, 시리스....'

그녀가 기뻐하는 걸 보니 그 역시 기쁘다.

하지만 그 기쁨을 순수하게 즐길 수 없다는 것이 레펜하르트의 슬픔이었다.

그녀가 기뻐하면 기뻐할수록, 단하임 일족이 그녀를 반가워하면 반가워할수록 그녀가 자신의 곁에 있을 가능성은 낮아지는 것이다.

'저토록 즐거워하는 시리스가 과연 나를 따라올까?'

점점 더 회의가 든다. 역시 조금은 강제적으로라도 종용할 것을 그랬나? 하지만 그렇다면 그는 평생 시리스의 마음은 얻지 못할 것이다.

어차피 그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가 원하는 것은 시리스라는 사랑하는 연인이지, 성욕을 해소할 엘프 노예가 아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뿐.

그저, 그녀가 자신을 선택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

무심코 한숨이 흘러나왔다.

"후우...."

그러자 렐하드가 레펜하르트에게 다가와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은인께서 어째 표정이 좋지 않은 듯합니다만?"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잽싸게 표정을 관리하며 레펜하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문득 렐하드를 빤히 바라보며 혀를 찼다.

'이 양반도 정말 변한 거 하나 없구먼.'

마켈린 때도 그랬지만, 렐하드도 원래 운명대로라면 지금으로부터 한참 후에나 만나게 될 이였다. 그런데도 참, 외모가 전혀 기억과 다른 부분이 없다.

'이래서 오래 사는 것들은....'

이러니 인간들이 엘프나 드워프를 무시하면서도 동시에 시기하지. 속으로 툴툴거리는데 렐하드가 난감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다시 한 번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은인께 당연히 뭔가 보답을 해야 할 텐데 상황이...."

워낙 없이 사는 살림이다 보니 뭐, 보답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심지어는 이 잔치조차도 레펜하르트 덕에 얻은 낙타와 식량으로 벌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레펜하르트가 손을 저었다.

"전혀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문득 그의 시선이 저만치 떨어져 있는 시리스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슬슬 인사를 다 나누었는지, 모닥불을 앞두고 샤일렌과 나란히 앉아 뭔가 조곤조곤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나누고 있는지 간간히 시리스가 웃음보를 터트린다. 언제나 무뚝뚝하고 무표정했던 그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저 웃음만으로도 저는 충분히 대가를 받았으니까요."

아련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레펜하르트가 대답했다. 렐하드가 나직한 목소리로 단호하게 부인했다.

"아니요, 저 웃음이야말로 저희가 대가를 드려야 할 부분이겠지요."

잠시 둘은 흥겨운 엘프들의 잔치를 말없이 지켜보았다. 문득 렐하드가 물었다.

"저 아이는 이곳에 남게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시리스, 아니 세렌디의 선택입니다. 제가 뭐라고 할 부분이 아니지요."

"당신은 저 아이를 이곳에 돌려보내 주고자 온 것이 아니었습니까?"

"꼭 그렇다기보다는... 그냥 가족을 만나게 해 주고 싶었던 것이랄까...."

레펜하르트는 난감해하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사실은 점수 좀 따려고 한 짓이란 말은 도저히 못 한다. 레펜하르트가 슬그머니 말을 돌렸다.

"사실은 다른 목적도 있긴 합니다. 그녀에게 엘프들만의 힘을 접하게 해 주고 싶었거든요."

렐하드가 이해했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령술 말이군요."

"네."

드워프의 기법을 인간이 구사하는 것이 불가능하듯, 엘프들의 정령술을 인간이 구사하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물론 레펜하르트는 전생에 엘프들의 정령술을 깊이 연구해 새로운 마법의 경지를 이룩했지만 그렇다 해서 직접 정령술을 구사할 수 있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정령술의 개념을 이해하고 그것을 마법에 접목시킬 수는 있어도, 정령술 자체를 구사하거나 남에게 가르칠 수는 없는 것이다.

"저도 정령의 힘을 조금 다룰 수는 있습니다만...."

레펜하르트가 나직하게 소환 주문을 영창했다. 그러자 작은 불의 요정이 그의 손아귀에서 형성되어 일렁이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저보다 훨씬 잘 다루시는데요?"

렐하드는 혀를 찼다. 마법사라는 소리야 이미 샤일렌에게 들어 알고 있었지만, 직접 눈으로 보니 역시 당황스러웠다. 오러 능력자 주제에 고위 마법사이기까지 하다니.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엘프조차도 눈을 의심할 만큼 비상식적인 일이다.

레펜하르트가 불의 정령을 거두고 중얼거렸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마법의 소환술일 뿐이지요. 엘프들의 정령술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러니 시리스를 가르칠 수 있는 것은 당신들뿐이지요."

"물론 일족의 가르침은 열려 있으니 세렌디에게 정령술을 가르치는 것은 오히려 일족의 의무,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만...."

문득 렐하드가 눈을 감았다. 그 상태로 한참 동안 정신을 집중한다. 1분쯤 지나자 그의 손에서도 불길이 확 하고 일어났다. 레펜하르트처럼 명확한 정령의 형태가 아닌, 그저 단순한 불길일 뿐이었다.

렐하드가 씁쓸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것이 현재 저희 단하임 일족이 가진 가장 강력한 힘입니다. 부끄럽게도...."

세계수를 잃은 엘프들에겐 더 이상 힘이 없다.

단하임 일족에서 가장 정령술에 통달한 렐하드조차도, 레펜하르트처럼 불의 정령 자체를 현세에 구현화시킬 수는 없다. 기껏해야 바람의 정령과 소통해 적의 위치를 알아낸다든가, 대지의 정령에게 부탁해 마나 탐지를 방해하는 정도가 전부.

"이걸 계속 유지하며 구현화시켜 불길을 유지하고 화력을 높일 수는 있습니다만...."

렐하드는 불길을 바닥에 내려놓고 허공에 고정시켰다. 그러자 점점 불길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이대로도 사막에서는 큰 도움이 되지요. 이곳에는 땔감조차 변변하게 없으니까요."

렐하드가 손을 휘저었다. 불길이 허공에서 소멸했다.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렐하드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전투에 사용할 수 있을 정도는 결코 아닙니다. 전 차라리 그 아이가 당신에게 마법을 배우는 쪽이 낫다고 봅니다만...."

렐하드는 부끄러워하며 말끝을 흐렸다. 엘프로 태어나 이런 말까지 하게 된 현재의 처지에 비관이 느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하지 않는 것은 더더욱 긍지에 상처가 갈 뿐.

하지만 레펜하르트도 그걸 몰라서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다.

"물론 마법도 틈나는 대로 알려 줄 겁니다."

전생의 시리스는 뛰어난 마검사였다. 레펜하르트, 지상 최강의 마법사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고 엘류시온의 목소리까지 써 가며 경지를 높인 그녀는 단순히 마법만으로도 꽤나 높은 수준에 올라가 있었다.

원래 레펜하르트는 사천왕에게도 시간 나는 대로 마법적 지식을 전수 했었다. 강력한 마법의 힘과 지식이 있는데 그걸 부하들에게 안 가르쳐 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뭐, 트롤 구루 아틸카와 하이 프리스트 마켈린은 능력 특성상 마법을 직접 구사할 수는 없어 지식과 지혜만을 전수받았고, 타시드야 워낙 돌대가리라 개념도 못 잡는 덕에 그냥 몇 번 가르쳐 보고 포기했으니 실질적인 제자는 시리스 하나라고 해야겠지만.

'안 그래도 슬슬 시리스에게 마법을 가르칠 수준이 되긴 했지?'

지금까지는 레펜하르트 자신의 경지를 올리느라 바빠 미처 시리스를 가르칠 여유가 없었다. 게다가 마법은 실제로 시전하는 모습을 보이며 스승이 마력을 인도해 주거나 해야 제대로 기초를 잡을 수 있다. 그렇지 않고서 그냥 이론만 가르치고 방치해 버리면 잘못된 습관이 들어 뒤로 가면 갈수록 경지에 오르기 힘들어지는 것이다.

'어설프게 익히는 건 안 익히느니만 못하니까.'

하여튼, 시리스에게 마법을 가르치지 않을 생각은 아니다. 당연히 가능한 한 자신의 모든 지식을 퍼 주고 싶다. 하지만 정령술은 그것과 별개의 이야기다. 단순히 전투에 구사할 수단이 하나 더 늘어난다는 정도가 아니라....

"엘프가, 정령과 대화할 수도 없다는 것은 너무 슬픈 일이지 않습니까?"

렐하드가 놀란 눈으로 레펜하르트를 응시했다.

"당신은 정말 우리들을 잘 이해하고 있는 것 같군요."

레펜하르트는 아무 대꾸 없이 다시 마을의 정경을 바라보았다. 렐하드가 슬슬 자리를 뜰 준비를 했다. 일족의 장로로서 해야 할 일이 많았다. 느긋하게 레펜하르트와 담소나 나눌 처지가 아닌 것이다.

막 발걸음을 옮기려다 말고 렐하드가 뒤를 돌아보며 말을 덧붙였다.

"만약 저 아이가 이곳에 남으려 한다면, 그리고 그대가 저 아이와 헤어지고 싶지 않다고 한다면 단하임 일족은 얼마든지 그대를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대가 보인 선의는 보답할 수준을 뛰어넘었으니, 이제 그대는 우리의 형제입니다."

경계심 가득한 엘프들에게 이것은 실로 엄청난 제안이다. 레펜하르트도 진심으로 고마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겠지. 그에겐 해야 할 일이 남아 있고 맺음 지어야 할 인연이 남아 있으니까.

"그럼 잔치를 즐기시길."

렐하드가 마을 저편으로 걸어간다. 그의 뒷모습을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다가, 레펜하르트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흔들리는 불빛, 온화하게 웃고 있는 엘프들의 모습을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레펜하르트의 갈색 눈동자 위로 선명히 비춘다.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

☆ ☆ ☆

이후 레펜하르트는 사흘간 데류 엘데에 머물렀다. 시리스의 대답을 듣기 위한 기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결심을 내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다른 엘프들과 어울리고, 그들의 일을 돕고, 엘프들의 문화와 전통에 대해 배우며 바삐 움직이는 시리스를 레펜하르트는 결코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나이 든 사람 특유의 인내심으로 차분히 지켜볼 뿐.

사흘째 되는 날 아침, 레펜하르트는 오늘도 자신을 위해 내준 천막에서 눈을 떴다. 아침 식사로 준비된 낙타 고기와 마른 과일을 대충 씹어 요기를 해결하며 그는 밖으로 나섰다.

평소처럼 마을은 아침 일찍부터 분주했다. 부서진 마을을 재건하는 등 각자 자기 맡은 일로 바삐 움직이는 엘프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너머, 오아시스 가장자리에서 한 소녀와 여인이 쪼그려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시리스와 샤일렌이었다.

"이런 방식이야. 되니, 세렌디?"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시리스는 오늘도 샤일렌에게 정령술의 가장 기초인, 감정 교감법을 배우고 있었다. 시리스와 손바닥을 마주한 채 샤일렌이 상냥하게 말을 잇는다.

"잘 익혀 두면 나중에는 바람이나 물의 정령들과도 감정을 교감할 수 있어. 그들과 감응하는 것이 정령들과 소통하는 첫걸음이야."

시리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정신을 집중했다.

"우웅, 잘 모르겠는데...."

"차분히 하다 보면 될 거야, 세렌디. 나를 구할 때 내 목소리를 들었잖아? 그때의 감각을 떠올려 봐. 서두를 필요 없어."

샤일렌이 서두르는 시리스를 격려했다. 어차피 그녀도 이 감응력을 느끼기까지 족히 2~3년은 걸렸었다. 사흘 만에 감응이 느껴질 리가....

"아, 이건가?"

"응? 벌써 감응이 느껴진 거야?"

샤일렌이 놀란 눈으로 시리스를 바라보았다. 정령술을 익힐 때는 사실 이 초반, 감응력을 키우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마법으로 치면 마력의 흐름을 느끼는 것과 비슷하다. 이걸 단 사흘 만에 익힌다?

"음... 음음...."

뭔가 감을 잡은 시리스가 눈을 감은 채 계속 정신을 집중한다. 그 모습을 샤일렌은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이론이야 그렇다 쳐도 어떻게 정령 친화력까지 이렇게?'

샤일렌에게서 정령술에 대해 배운지 사흘째, 짧은 시간이었지만 시리스는 이미 정령술에 대한 이론과 지식은 전부 익힌 후였다. 엘프들 사이에서 전승되는 정령에 대한 지식과 소통법, 그리고 그들을 부르는 정령의 노래까지.

가르치는 샤일렌이 경악할 정도로 시리스의 학습 속도는 빨랐다. 보통 엘프들은 이렇게까지 빨리 배우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것은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시리스는 어린 시절부터 인간의 노예로서 각종 교육을 빡빡하게 받아 온 몸이었다. 노예로 살아온 경험이, 마치 '인간'처럼 빠른 학습력을 길러 준 것이다.

그러나 사흘 만에 감응력에 눈뜬다는 것은 지나치게 상식 밖이었다. 이건 마치, 전설로만 들었던 '세계수가 건재했을 때의 엘프들' 같지 않은가?

샤일렌은 혼란스러워하며 시리스를 바라보다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어, 어쨌거나 잘했어. 이 정도라면 만약 저 남자를 따라간다 하더라도 혼자서 정령술을 계속 연습할 수 있겠구나. 대단하네, 세렌디."

문득 시리스가 눈을 떴다. 그녀가 묘한 표정으로 샤일렌을 바라보며 질문했다.

"혹시 인간의 감정도 느낄 수 있나요?"

샤일렌이 애매하다는 얼굴을 했다.

"가능은 하지만, 그렇다고 상대의 감정이 진심이라 착각하면 곤란해. 인간은 상황에 따라서 감정조차도 속일 수 있으니까."

정령들은 순수한 존재다. 그렇기에 그 감정도 순수하고, 소통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인간은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를 대할 때도 마음 한 구석에는 의심과 거짓이 숨어 있다. 여인을 꼬이는 바람둥이도 호의 가득한 감정을 표출할 수 있다. 인간의 감정은 실로 복잡해 단 하나로 정의 내릴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 엘프들은 감정의 동요가 적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지. 그래서 감정을 느끼는 것만으로 인간의 진심을 알아내려는 건 위험한 일이야."

"그렇군요...."

☆ ☆ ☆

'음, 슬슬 시리스도 정령술 기초는 잡았나 보군.'

오아시스 쪽으로 다가가며 레펜하르트는 시리스와 샤일렌을 물끄러미 보았다.

샤일렌의 표정에 놀란 기색이 역력한 걸 보니 아무래도 시리스가 정령 친화적 감각에 눈을 뜬 모양이다. 물론 레펜하르트는 놀라지 않았다. 전생에서도 시리스는 이 정도 진도를 보여 주었으니까. 게다가 그는 그 이유도 알고 있었다.

'역시 그거 효과가 좋네.'

레펜하르트가 다가오자 샤일렌이 슬쩍 목례하고 자리를 뜬다. 둘만 있게 해 주려는 배려인 모양이었다. 두 남녀가 호숫가에 나란히 섰다. 어색해하는 음성으로 레펜하르트가 입을 열었다.

"즐겁니, 시리스?"

"네, 즐거워요."

"그렇겠지, 그대의 가족이니...."

하지만 대답과 달리, 그리 즐거워 보이지는 않는 표정이다.

'쩝, 아직도 고민 중인가?'

레펜하르트는 침을 삼켰다. 그동안 열심히 참아 왔지만 역시 사흘쯤 되니 초조해진다. 아무리 나이 든 자의 인내심이 어쩌니 해도, 어쩔 수 없이 레펜하르트는 남자다. 남자 인내심으로 사흘 참았으면 오래 참았지.

결국 레펜하르트는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이들 곁에 남고 싶어?"

"네."

단호한 대답이었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멍해진 레펜하르트의 귀에 시리스의 목소리가 계속 들렸다.

"이들 곁에 남아, 이들을 돕고 싶어요."

다리 힘이 쑥 빠진다. 순간 레펜하르트가 비틀거리려던 찰나였다. 시리스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해도 이들의 삶이 달라지진 않겠지요?"

"응?"

레펜하르트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시리스가 단호한 얼굴로 그를 마주 보고 있었다. 단단히 결심한 얼굴로, 그녀가 묻는다.

"당신을 따라간다면 이들의 삶을 바꿀 수 있을까요?"

레펜하르트는 침을 삼켰다. 손끝이 떨렸다. 벅차오르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그가 또박또박 대답했다.

"바꿀 것이다. 내 목숨을 걸고 맹세하지. 반드시 바꿀 것이다."

시리스가 배시시 웃었다. 그리고 그토록 듣고 싶어 하던 대답을 해 주었다.

"그렇다면 전 당신을 따라가고 싶어요. 일족의 미래를 위해."

'그리고 제 마음을 위해....'

마지막 말은 속으로만 읊조렸기에 레펜하르트에게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레펜하르트에겐 충분했다. 그가 황소처럼 눈을 크게 뜨며 시리스의 어깨를 잡았다.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진짜야, 시리스?"

"네."

아까보다도 더욱 단호한 대답이다. 순간 가슴이 벅차올랐다.

"하하...."

레펜하르트의 입가가 점점 좌우로 올라간다.

"하하하...."

나중에는 숫제 귓가에 걸린다.

"하하하하핫...."

레펜하르트는 통쾌하게 웃었다.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이토록 기쁘게 웃어 본 적이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만큼 통쾌하게 웃었다.

"으하하하!"

레펜하르트가 주먹을 들어 허공을 때렸다. 콰아아앙! 황금빛 오러가 팔뚝을 타고 하늘을 찌른다. 창공을 쪼개며 우뚝 솟은 찬란한 빛의 기둥, 그 속에서 레펜하르트는 다시 한 번 다짐했다.

바꿀 것이다.

반드시 세상을 바꾸고야 말 것이다.

나를 선택해 준 이 여인을 위해서!

웅웅웅웅!

장엄한 오러의 빛이 하늘을 뚫고 점점 사라진다. 자신의 감정을 지고한 무武의 경지로 표현하는 이 짐 언브레이커블 특유의 시연은 분명 압도적일 정도로 장대한 광경이었다. 문제는, 이걸 이해해 주는 놈들이 세상에 짐 언브레이커블 문도밖에 없다는 점이지만.

"꺄악! 뭐 하는 거예요, 레펜하르트 님!"

시리스가 귀를 막고 기겁했다. 아니, 갑자기 애꿎은 하늘은 왜 때린단 말인가? 안 그래도 마을 전체가 레펜하르트의 엉뚱한 작태에 술렁거리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인상을 쓰며 재차 따졌다.

"아니, 대체 무슨 짓이에요, 이게?"

그제야 레펜하르트도 혀를 차며 손을 내린다.

"아, 글쎄? 기분이 너무 좋으니까 나도 모르게 그만...."

"아니, 기분이 좋은데 하늘은 왜 때리는 건데요?"

"그, 그러게?"

오러를 거두며 레펜하르트는 아리송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도 대체 왜 그랬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거 참, 내가 왜 이러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레펜하르트는 일단 의문을 접었다. 지금은 더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시리스."

그녀의 어깨를 잡고, 그녀의 눈동자를 똑바로 직시하며 레펜하르트가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보여 주마. 일족의 미래가 바뀌는 모습을. 바로 지금!"

☆ ☆ ☆

반나절 뒤, 레펜하르트와 시리스는 거대한 협곡의 입구에 서 있었다. 단하임 일족이 위급한 때마다 은신처로 삼는 바로 그 계곡이었다.

두 사람 뒤에 서 있던 렐하드가 도무지 이해 못 하겠다는 얼굴로 물었다.

"은인이여, 이곳에는 무슨 일로 온 겁니까?"

한참 마을 재건을 위해 이런저런 일들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갑자기 레펜하르트가 들이닥치더니 설명도 없이 함께 좀 가자며 그를 끌고 나왔던 것이다. 은인의 부탁이니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우선적으로 들어야 해서 아무 말 없이 그를 따라 마을을 나섰다. 그리고 사막을 횡단하며 계속 이동할 때까지도 얌전히 참았다.

하지만 여기까지 오고 나니 도저히 이유가 궁금해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시리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왜 이곳으로 돌아온 건가요, 레펜하르트 님?"

시리스를 향해 빙긋 웃어 준 뒤, 레펜하르트가 렐하드를 돌아보았다. 그가 선언하듯 말했다.

"이제부터 이곳이 단하임 일족의 마을이 될 것이오."

렐하드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설마 이런 쓸데없는 일 때문에 반나절이란 시간을 허비한 건가?

"소용없소. 이곳에는 물이 없으니까."

단하임 일족인들, 이곳이 지금 사는 마을보다 지리적 여건이 더 좋다는 걸 몰라서 은신처로만 쓰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물,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물이 전혀 나지 않으니까 울며 겨자 먹기로 이미 위치를 들킨 데류 엘데를 떠나지 못하는 것 아닌가?

답답한 마음에 막 설명을 하려던 차였다. 레펜하르트가 손을 들었다.

"더 이상은 아니오."

"네?"

의아해하는 렐하드를 뒤로한 채 레펜하르트가 뚜벅뚜벅 계속 안으로 걸어갔다. 렐하드와 시리스도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의 뒤를 따랐다. 걸음을 옮기며 렐하드는 혼란스러워했다.

'뭐지? 혹시 우리가 모르는 수맥이라도 발견한 건가?'

그럴 리는 없었다. 단하임 일족은 이 스펠라트 사막에서 몇백 년이나 살아온 이들이었다. 물론 레펜하르트가 강력한 오러 유저이자 뛰어난 마법사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사막에 관해서는 그들이 훨씬 전문가인 것이다. 이 은신처도 벌써 몇 번이나 샅샅이 조사했다. 수맥 따윈 없었다.

'아니면 혹시 마법으로 없는 우물이라도 만들어 낼 셈?'

물론 렐하드는 그런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결코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세 가지 기적, 그것은 바로 공간과 시간, 물질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일이다. 어떠한 마법으로도 바위를 물로 직접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바위 속의 수맥을 이끌어 물이 나오게 하면 또 모를까, 아무리 마법사라도 없는 물을 만들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 와중에도 레펜하르트는 거리낌 없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협곡 깊숙이, 엘프들이 은신처를 만들어 둔 곳을 한참 지나 더욱 깊숙이 들어선다. 완전히 메말라 시꺼먼 모래만이 가득한 협곡 한복판, 그곳에 다다르자 레펜하르트가 걸음을 멈췄다.

"레펜하르트 님?"

주위를 둘러보며 시리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무리 봐도 우물 따위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더더욱 의아해질 뿐이다. 갑자기 레펜하르트가 시리스를 돌아보며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시리스, 네게 주었던 니힐렌을 돌려줄 수 있겠니?"

"네?"

당황한 얼굴로 시리스는 레펜하르트를 올려다보았다. 아니, 왜 갑자기 줬던 선물을 도로 뺏나? 특히나 마궁 니힐렌은 유독 마음에 들어 그녀가 특히 아끼는 무기였다. 설마 아까워진 거?

하지만 엄숙한 레펜하르트의 표정을 보니 그런 저열한 이유가 아니란 것은 확실했다. 시리스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허리춤에서 니힐렌을 꺼냈다. 힘을 끌어내지 않아 작은 나무 막대기일 뿐인 그것을 레펜하르트에게 조심스레 건넨다. 니힐렌을 받아들며 레펜하르트가 문득 물었다.

"시리스. 너, 사흘 만에 정령 친화력에 눈을 떴지?"

"네? 아, 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지 궁금하지 않았어?"

물론 궁금했다. 샤일렌의 설명에 따르면 다른 엘프들은 감응력에 눈뜨는 데 최소 1년은 걸린다고 들었다. 재능도 정도껏이지, 남들 몇 년 걸리는 걸 사흘 만에 해결했다면 재능 이외의 뭔가가 있다고 보는 것이 당연하다.

"네가 이 니힐렌의 주인이었기 때문이야. 니힐렌의 이름을 부르고, 그 힘을 다루도록 인정받은 계약의 주인이었기 때문이지."

"...?"

이해 못 할 말에 시리스가 눈을 깜박였다. 레펜하르트가 몸을 돌리더니 니힐렌을 바닥에 꽂았다. 검은 모래 위에 초라한 나무 막대기가 우뚝 선다. 그 상태로 레펜하르트가 두 손을 가져가더니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엘 세레티 다운트 파트라드 셀...."

엄청나게 긴 주문이었다. 레펜하르트는 한참 동안이나 정신을 집중하며 고대의 룬어로 주문 영창을 이었다. 시리스도 렐하드도 숨을 죽인 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갑자기 레펜하르트의 주문이 바뀌었다.

"깨어나라. 지킴이로 지음받은 자, 세계를 지탱하는 거목의 씨앗이여...."

순간 시리스와 렐하드 모두 소름이 돋는 걸 느끼며 허공을 바라보았다. 보이지 않는, 하지만 확연히 느껴지는 기이한 기운이 니힐렌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퍼지고 있었다. 머리 위를 뒤덮고, 협곡을 가득 메우고 창공으로 뻗어 나가고, 대지 깊숙이 파고들며 진동하는 초월적인 기운!

"뭐, 뭐야?"

"이건?"

그들을 둘러싼 세상 전부가, 니힐렌으로부터 비롯된 기운에 뒤덮이고 있었다. 시리스가 순간 눈을 비볐다. 니힐렌의 형태가 변하고 있었다.

'...싹이 났어?'

수분이라곤 전혀 없는 이 메마른 대지 위에서, 그저 막대기일 뿐이던 니힐렌에서 푸른 새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새싹이 점점 자라나 가지가 된다. 니힐렌의 크기도 점점 커진다. 굵어지고 길어지고, 사방으로 싹을 틔우고 가지를 뻗는다.

"이럴 수가...."

시리스는 신음을 흘렸다. 그것은 더 이상 니힐렌이 아니었다.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고 푸른 이파리를 팔랑거리는, 어엿한 한 그루 나무가 되어 있었다. 비록 레펜하르트의 키에도 미치지 못하는 작은 나무일 뿐이지만, 그렇다 해도 놀라운 변화임에는 분명했다. 게다가 놀랄 일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니힐렌의 뿌리 부분, 그곳이 촉촉하게 젖어 가고 있었다. 점점 젖어 가더니 이내 물줄기를 터트린다. 솟구친 물줄기가 모래 위로 흘러내린다.

샘이다. 샘이 솟은 것이다.

"맙소사...."

렐하드는 경악해 이 모든 '이적'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찌나 놀랐는지 양 귀가 뾰족하게 곤두서서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지금 레펜하르트, 저 정체불명의 인간은 분명 아무것도 없던 이 대지 위에 녹음을 일구어 낸 것이다. 마법으로 설명될 일이 아니었다. 이것은 그야말로 신의 위업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운데, 더더욱 렐하드를 놀랍게 하는 것은 저 작은 나무로부터 풍겨 오는 감각이었다.

레펜하르트가 덜덜 떠는 렐하드를 돌아보더니 싱긋 웃었다.

"렐하드, 당신은 느낄 수 있겠지?"

"말도 안 되는... 어찌 이런 일이...."

전신을 감싸는 이 포근한 감각, 세포 하나하나가 연결되는 듯한 놀라운 충실감, 영혼을 일깨우는 듯한 강렬한 감각. 모든 것이 저 작은 나무로부터 느껴지고 있었다.

의심할 수가 없었다.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오로지 전설로만 들어 온, 하지만 엘프라면 누구나 확신할 수밖에 없는 감각.

"엘븐하임!"

렐하드가 눈물을 흘리며 소리쳤다.

"세계수 엘븐하임!"

☆ ☆ ☆

'에고, 겨우 성공했네.'

레펜하르트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시리스가 자신을 선택해 준 것이 너무 기뻐 좀 무리한 짓을 시도했는데 다행히 실패하지 않은 것 같다.

니힐렌 속에 잠들어 있던 생명력을 일깨워 대지에 뿌리내리게 한다. 그리고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하기 위해서 니힐렌에 깃든 마나 게더링의 힘을 증폭시킨다.

복잡한 마력적 정크 코드를 해석하고 그 패턴을 뒤바꿔 재조정하는 이 작업은 역시 지금의 그에게는 힘든 일이었다. 시리스나 렐하드는 모르고 있겠지만, 사실 레펜하르트도 속으로는 긴장 잔뜩 하면서 시전한 마법이었다. 너무도 복잡한 작업이라 중간에 인공 주마등까지 써 가면서 매달렸다.

'그나마 연구가 다 끝나서 지금 수준으로도 간신히 성공한 거지, 사실.'

연구가 끝난 다이만 유적의 공간 이동 포털을 조작하는 것처럼, 세계수의 부활도 이미 정보를 알고만 있다면 높은 수준의 마법은 필요치 않았다. 마력 역시 세계수가 자체적으로 지닌 마나 게더링의 힘을 빌리니 지금 수준으로 그럭저럭 제어가 되었다.

'물론 정보를 알려 줘도 다른 6서클 수준의 마법사가 세계수를 부활시킬 수 있다는 소리는 아니지만....'

세계수 부활에 가장 중요한 부분은 정확한 마력 운용과 순간적으로 계속 변화하는 마나 기류 제어다. 이것은 마력 연산 능력이나 마력량보다는 마법사 본인의 감각과 요령에 필요한 것인데, 이 경지가 되려면 최소 9서클 급의 대마도사가 아니면 불가능한 것이다.

마법 자체는 고서클이 필요 없지만, 제어에는 일종의 깨달음이 필요하달까? 이미 10서클을 넘본 레펜하르트이기에 6서클 정도밖에 안 되는 지금의 기량으로도 해냈지, 다른 마법사라면 답안지 펼쳐 놓고 시켜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뭐, 요령 자체야 전생에서 몇 번씩이나 해서 이미 익숙하니까.'

마궁 니힐렌, 유실된 세계수 엘븐하임의 가지.

전생의 그는 니힐렌을 연구해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엘븐하임의 잔해를 찾아내고, 그것을 되살리는 연구에 성공한 적이 있었다. 드워프나 오크, 트롤들과 달리 엘프들은 세계수에 그 영성을 의지하는 부분이 너무 컸기에 세계수를 부활시키지 않고서는 도저히 예전의 영화를 되찾게 할 수가 없었다.

결국 그가 전생에서 되살린 세계수는 모두 일곱, 하나하나가 인간의 성만큼이나 거대한 크기였다. 물론 전설 속의, 그 높이가 산맥을 뛰어넘었다는 진정한 세계수 엘븐하임의 위용에는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질이 안 되면 양이라고, 일곱 그루나 부활시키니 그럭저럭 엘프들의 잃어버린 영성을 회복할 수준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

'그래 봤자 한 그루 남기고 싹 다 도로 불타 버렸지만.'

과거를 떠올리니 문득 씁쓸해진다. 레펜하르트는 고개를 저으며 애써 기억을 떨쳤다. 그리고 이번 생에 최초로 되살린 첫 번째 세계수를 보며 만족의 웃음을 띠었다.

사아아아아....

바람이 불어 세계수의 잎사귀 사이를 빠져나간다. 확연히 나무의 형태를 취한 니힐렌은 이제 주변의 마나를 끌어모아 그 형질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불의 기운만이 가득하던 이 협곡에, 청량할 정도로 맑은 공기가 습기를 머금고 사방으로 불어닥친다.

"아아아...."

렐하드는 연신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눈앞의 이적은 단순히 단하임 일족에게 새로운 보금자리가 생긴 정도가 아니었다. 그보다 더 근원적인, 엘프라는 종족 전체에게 내려진 희망 그 자체였다.

세계수가 또다시 싹을 틔웠다.

지금은 비록 작은 싹일 뿐이지만....

이것이 언젠가 대지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넓게 가지를 펼치면....

이 근처는 녹음 가득한 숲이 될 것이다.

그리고 엘프들은 잃었던 영성을 되찾아 진정 숲의 수호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다, 당신은 누구요? 혹시 엘디아께서 우리에게 내려 주신 구원자인 거요?"

엘프들의 여신, 엘디아. 그녀가 학대받는 엘프들을 위해 구원자를 내려 그들을 구할 것이라는 전설은 단하임 일족 내에 오래토록 전해져 오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단하임 일족 내에서조차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동화 같은 이야기일 뿐. 나이가 찬 엘프라면 그 누구도 믿지 않았던 오래된 옛이야기였을 뿐일 텐데....

"나는 그대들의 친구요. 우정에 보답하는 것은 친구의 의무이지."

눈물을 펑펑 흘리는 렐하드를 향해 레펜하르트는 온화한 시선을 보냈다. 그리고 시리스를 돌아보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으음, 미안, 시리스. 니힐렌 써 버렸어. 대신 더 좋은 걸로 다시 구해 줄게."

물론 시리스는 지금, 고작 니힐렌이 없어진 것 따위에 신경 쓸 정신이 아니다. 그저 눈앞의 이적에 넋이 나가 머릿속이 텅 비었을 뿐.

"당신은...."

이미 레펜하르트에 대한 의문을 제기할 때가 아니었다.

"당신은 대체...."

그가 지금 보인 이 기적은 시리스의 인지를 아득히 초월하고 있다.

혼란에 찬 그녀의 어깨를 살며시 안으며 레펜하르트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이야기했지? 나중에 다 이야기해 준다고."

"네...."

시리스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쯤 되니 레펜하르트에게 의문을 가지는 행위조차 두려움이 느껴질 정도였다. 얌전해진 시리스를 보며 레펜하르트는 속으로 쾌재를 올렸다.

'오, 고생한 보람이 있구먼.'

분위기 봐서 슬쩍 안았는데도 이렇게 얌전하다니! 뭐, 이렇게 말하니 꼭 사심만으로 레펜하르트가 세계수를 부활시킨 것 같다만, 그도 그 정도로 정신머리 없는 인물은 아니다. 세계수를 부활시키는 것은 어디까지나 대의를 위한 것, 그것은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 와중에 살짝 개인의 실리를 챙긴다 해서 딱히 욕먹을 일도 아니지 않은가?

'한 가지 일로 여러 개의 효과를 노리는 것은 훌륭한 마법사의 자세지.'

뿌듯한 얼굴로 레펜하르트가 시리스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럼 이만 그랜드 포지로 돌아갈까?"

4

우우우웅!

그랜드 포지의 외곽, 반파된 알 포트의 신전 한쪽에서 공기가 떨리는 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거대한 포털이 열리며 두 사람을 토해 냈다. 스펠라트 사막을 떠나 다이만 유적을 경유해 돌아온 레펜하르트와 시리스였다.

두 사람이 완전히 빠져나오자 포털이 서서히 흔들리며 소멸하기 시작했다. 레펜하르트가 서둘러 허공에 수인을 맺으며 중얼거렸다.

"딴 놈이 못 쓰게 잠가 놔야지."

이 시대에 다이만 유적의 포털을 사용 가능할 정도로 연구해 낸 마법사는 없다. 하지만 그래도 세상일은 모르는 법이다. 우연히 고위 마법사가 다이만 유적을 탐사해 이 포털을 발견하게 되면 일이 골치 아파진다. 한 방에 그랜드 포지의 존재가 들통 날 테니까.

그래서 레펜하르트는 꼼꼼히 마력을 운용해 다이만 유적의 모든 포털에 개폐용 제어 코드를 심어 놓았다. 다른 마법사가 포털을 발견한다 할지라도 도저히 작동시키지 못하도록 암호를 걸어 놓은 것이다. 혹시 대마도사급 마법사가 코드를 해석할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 세 번 이상 암호가 틀리면 포털 자체가 소멸하는 술식도 곁들였다. 위대한 고대의 유산을 잃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지만 드워프들의 위험을 방치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포털이 완전히 사라지자 레펜하르트가 시리스를 내려다보았다.

"그럼 갈까?"

"네."

순순히 응대하는 시리스의 목소리에 레펜하르트는 부드럽게 웃었다. 여전히 차가운 인상이긴 했지만, 그래도 냉랭한 기색이 역력했던 예전에 비하면 한결 온화한 표정이었다. 게다가 항시 느껴지던, 경계심 가득한 느낌도 더 이상 없다. 오랜 시간 감정을 표현하지 않던 습관 덕분에 표정이 희미할 뿐.

'역시 처갓집 갔다 온 보람이 있구먼.'

흡족해하며 레펜하르트는 그랜드 포지 중심으로 걸음을 옮겼다. 시리스도 사뿐사뿐 그 뒤를 따랐다.

돌아온 레펜하르트를 제일 먼저 맞이한 것은 실란이었다.

"아니, 이 양반아! 둘이서 어딜 이리 쏘다녔어요?"

"아, 미안. 걱정했어?"

실란의 얼굴에는 화난 기색이 역력하게 떠올라 있었다. 레펜하르트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잠깐 자리 좀 비운다는 말만 해놓고 일주일 가까이 소식도 없이 사라졌었으니 실란이 이토록 화내는 것도 당연하겠지.

하지만 흥분한 실란을 달래는 법은 아주 간단하다.

"이야! 실란! 며칠 더 머물렀더니 제법 어깨도 벌어지고 근육이 생겼는데?"

"오옷? 정말요?"

조금 전의 분위기는 어디 갔는지, 실란이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고 좋아라 실실거리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다 이해한다는 태도까지 보였다.

"뭐, 좀 더 있다 와도 되는데 일찍 왔네요."

고작 며칠 더 지났다고 체형이 확 바뀔 리도 없거늘, 실란은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었다. 레펜하르트가 속으로 실소를 흘렸다.

'...단순한 녀석.'

뒤이어 한 무리의 드워프들이 그에게 다가왔다. 다양한 나이대의 드워프들이었는데, 다른 이들과 달리 전신에 회색빛 로브를 걸친 차림이었다. 드워프들이 레펜하르트 주위로 몰리며 반가워했다.

"오오, 스승님! 오셨군요!"

"말이라도 좀 하고 가시지 그러셨소?"

"그러게 말입니다."

다른 드워프들이 레펜하르트를 구원자라 부르는 것과는 확실히 다른 칭호다. 레펜하르트가 드워프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래, 다들 성과는 좀 있으셨소?"

"보시겠습니까?"

드워프들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서더니 허공에 어지럽게 손짓을 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덥수룩한 수염 사이에서 중후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델피르 라 스테린, 나 허공을 붙잡아 적을 치는 한 자루 탄환이 되리라. 에어로 블렛!"

말을 맺으며 드워프가 허공에 손을 뻗었다. 바람의 탄환이 대기를 가르며 10미터 정도 떨어진 돌바닥에 적중했다. 작은 폭음과 함께 돌가루가 살짝 튀어 올랐다.

1서클 풍계 공격 주문, 에어로 블렛이었다. 마법을 잃은 드워프의 손에서, 비록 저급할지언정 분명히 마법이 발현된 것이다.

레펜하르트가 찬사를 던졌다.

"훌륭하군요. 위력도 제어도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

마법을 시전한 드워프가 뿌듯해하며 감격하는 표정을 짓는다. 다른 드워프들도 앞다투어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나도 좀 봐 주십시오!"

"저, 저도!"

"자 자, 차례로 마법을 시전해 보시겠습니까?"

드워프들이 순서대로 허공에 마법을 쏘아 댔다. 전부 1서클의 기초적인 마법들이었다. 그때마다 레펜하르트는 한 명 한 명, 일일이 마력 제어를 교정해 주고 술식이나 영창에 대해 조언을 건넸다. 그 모습에 시리스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성공했군요, 레펜하르트 님.'

이들은 그랜드 포지에서 새롭게 신설된 병종, 드워프 마법병단이었다. 처음 그랜드 포지에 도착했을 때의 일이다. 레펜하르트는 마켈린과 의논한 뒤 마법을 가르치고 싶다며 드워프들을 모아 달라 부탁했다. 오래전 잃었던 마법의 힘을 되찾게 된 이 행운 앞에 수많은 드워프들이 지원했고, 그중 재능이 있는 이 스무 명 정도를 뽑아 기초부터 가르쳤던 것이다.

레펜하르트 자신도 지저 태양에 전신을 굽느라(?) 많은 시간을 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틈틈이 이들에게 지식을 전수하고 그들의 마력 제어에 대해 교정해 주었다. 그렇게 두어 달 가까이 지난 지금, 다들 1서클 주문을 훌륭히 시전할 정도의 수준까지 오른 것이다.

"두 달 만에 마력을 감지하고 제어할 수 있다면 상당한 성취입니다. 다들 노력하셨군요."

물론 전생의 레펜하르트는 마력 감지하는 데 딱 두 시간 20분 걸렸지만, 전설의 마왕과 일개 드워프들의 재능을 비교하는 것은 지나친 처사겠지.

그는 진심으로 드워프들을 칭찬했고 다들 기뻐하며 보람찬 표정을 지었다. 레펜하르트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일단 2서클 주문까지는 전부 이론서를 작성해 놓았으니 열심히 익히도록 하세요. 그 이후 부분에 대해서는 종종 그랜드 포지를 들리며 보완하겠습니다."

드워프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마법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도 속 편하게 그랜드 포지에 머무를 팔자가 아니다. 그래서 레펜하르트는 밤잠도 줄여 가며 그가 아는 지식을 총동원해, 가장 쉽게 마법을 이해할 수 있도록 원론적인 마법 총론과 상세한 개론서를 작성해 드워프들에게 건네주었다.

드워프들은 모르고 있었지만, 사실 이건 다른 마법 학파가 알았다면 기막혀할 행위였다.

시중에도 물론 마법 이론서가 유통되기는 한다. 『당신도 마법사가 될 수 있다!』라거나 『쉽고 빠른 마법 입문서』 등등. 개중에는 『누구나 가슴에 1서클 정도는 있는 것 아닌가요?』라든가 『내가, 내가 마법사라니!』 같은 해괴한 제목을 단 마법서들도 상당히 많았다.

하지만 대부분 쓸모없는 불쏘시개에 불과했다. 저급한 마법사들이 마법으로 먹고살기 힘들어 푼돈 벌려고 대충 써 갈긴 물건들뿐이라, 그걸 보고 마법을 익힐 가능성은 전무했다. 진짜 마법사들은 자신의 지식을 전수하는 데 지극히 폐쇄적이다. 마법 주문은 곧 힘이자 무기이며 권력이기도 하다. 그런 지식이 시중에 함부로 풀릴 리가 없는 것이다.

그에 비해 레펜하르트가 적은 이 이론서는 명확한 설명에 이해하기 쉬운 비유를 들고 있어 어느 정도 재능 있는 이라면 충분히 마법의 기초를 잡을 수 있었다. 명색이 고금 최강의 대마도사가 적은 총론서인 것이다. 항시 곁에 있을 수 없는 이상, 이 정도면 드워프들이 마법을 익히는 데는 충분하다.

'아무리 그래도 책자로만 마법을 익히는 데는 한계가 있어, 일부러 시리스에게는 가르치는 것을 보류했지만.'

그렇게 드워프들의 마법을 일일이 손봐 준 뒤 레펜하르트는 다시 실란에게로 돌아왔다. 어느새 소식을 들었는지 틸라와 러스도 와 있었다. 그녀는 그동안 다른 드워프 전사들과 대련을 통해 꽤나 기량을 높인 후였다. 아무리 전사의 혈족이라지만, 경쟁할 다른 전사 없이 그동안 홀로 수행을 한 덕에 꽤나 미숙한 면이 많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어엿한 드워프 전사로 제 몫을 할 수 있을 거예요."

자랑스럽게 웃는 틸라에게 믿음직스럽다는 눈빛을 보낸 뒤, 레펜하르트는 러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허리춤에 드워프들이 벼려 준 미스릴 롱 소드를 차고, 가죽 갑옷 위에 강철과 아다만티움을 섞어 만든 하프 플레이트 메일을 입고 있었다. 기사라기보다는 떠돌아다니는 전사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러스가 반색하며 레펜하르트에게 말을 건넸다.

"돌아오셨군요, 형님!"

"뭔가 느낀 게 있었다며?"

러스가 부끄러워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레펜하르트가 질문을 이었다.

"뭐 좀 건진 게 있어?"

"조금요."

검지와 엄지를 좁히며 러스가 살짝 의기양양한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레펜하르트의 전신을 훑어보더니 이내 표정을 구기며 혀를 찬다.

"그런데... 쳇."

뭐냐, 이 태도는? 의아해하며 레펜하르트가 눈살을 찌푸리려는 참이었다. 러스가 갑자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예전엔 몰랐는데 지금은 확실하게 보이네요."

"뭐가?"

"형님, 진짜 거대하군요."

"응? 그새 키가 더 컸나?"

레펜하르트는 공포에 떨며 자신의 머리에 손을 얹어 보았다. 안 그래도 어느새 신장이 195센티미터가 넘어 버려 걱정이 많았다. 이놈의 테스론의 육체는 대체 어떻게 된 구조인지, 짐 언브레이커블 특유의 호흡법을 전혀 하지 않고 있음에도 조금씩 더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들은 10대 중반이면 성장기가 끝난다는데 아직도 키가 커지다니?

'아으, 2미터 넘으면 안 되는데.'

다른 이들이라면 실로 부러워할 일이겠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전생의 테스론을 기억하고 있었다. 신장 230센티미터의, 건물 들어갈 때마다 허리 숙였는데도 문턱에 이마 툭툭 부딪히던 그 거구! 세상일에는 모두 정도라는 게 있는 법이다. 그렇게까지 커지고 싶은 마음은 절대 없다!

러스가 손사래를 쳤다.

"아뇨, 덩치가 거대하다는 소리가 아니라... 아니, 물론 덩치도 크시지만...."

난감해하며 말을 고르더니 러스가 애매하다며 말을 이었다.

"뭐라 설명하긴 좀 힘든데, 그냥 커요, 형님은."

"뭔 소리야?"

"그러니까, 영혼 자체가 엄청 크다고 해야 하나? 정말 형님 스물셋 맞아요? 이건 뭐 저보다 몇 배는 더 살아온 느낌인데요?"

'으잉? 이 녀석, 대체 뭘 얻어서 나온 거야?'

레펜하르트는 놀란 얼굴로 러스를 바라보았다. 그 역시 강력한 오러 능력자지만 도무지 러스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왜 영혼이 거대하다고 하는지야 이해가 간다만, 그걸 느낀다고? 대체 무슨 수로?

레펜하르트는 혀를 내둘렀다. 하여튼, 천재란 족속은 재수도 없는 데다가 이해하기도 힘들다.

'어쨌거나 강해졌다는 소리겠지.'

그러려니 하면서 레펜하르트는 적당히 축하의 말을 건넸다. 오랜만에 다섯 명이 모두 모인 자리였다. 실란이 어깨를 들썩이며 물었다.

"그럼 슬슬 그랜드 포지를 떠나는 건가요? 다시 유적 탐사?"

"아, 그래야지. 돈도 필요하고."

그러자 모두들 기뻐하는 표정을 지었다. 두 달 가까이 이곳에서 머무르고 있었으니 몸이 근질근질한 것이다. 실란도 러스도, 다시 세상으로 나가 변한 자신을 시험해 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유적 탐사가 최종 목적지는 아니야."

고개를 저으며 레펜하르트가 입을 열었다.

"이제 갈 곳은 크로방스 왕국이다."

의문 섞인 시선을 느끼며 그는 말을 이었다.

"그곳에 내 뜻에 찬동해 줄 사람이 있거든."

☆ ☆ ☆

깊은 밤, 그랜드 포지를 데우는 지열석들이 일제히 빛을 거두니 사방은 어둠뿐이었다. 몇몇 보초들을 제외하면 그랜드 포지 전역이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레펜하르트와 다른 일행들도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기 위해 일찌감치 잠에 든 후였다.

그 어두운 거리를 시리스는 홀로 걷고 있었다. 그녀를 만나고자 하는 이가 있는 탓이었다.

엘프다운 걸음걸이로 소리 없이 그랜드 포지 중심부로 향한다. 높게 솟은 철탑, 그곳에 도착해 계단을 오르는 시리스의 표정은 무섭도록 굳어 있었다.

문을 열자, 새하얀 수염으로 뒤덮인 듯한 늙은 드워프가 그를 맞이했다. 알 포트의 하이 프리스트, 마켈린이었다.

"어서 오시오, 젊은 엘프여."

안으로 들어서며 시리스가 싸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전갈을 받았어요. 그대가 내 의문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다고."

마켈린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허허롭게 웃었다.

"자, 일단 이쪽으로 앉으시구려."

시리스를 응접실로 안내한 뒤 마켈린이 조용히 물었다.

"그대의 의문이 무엇이오, 어린 엘프여?"

기다렸다는 듯, 시리스가 차분하게 대꾸했다.

"모든 것, 레펜하르트 님의 모든 것요."

그랬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레펜하르트의 태도는 그녀가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처음부터... 그는 나를 잘 알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의 눈빛, 행동, 말투는 결코 모르는 이를 대하는 것이 아니었어요."

게다가 이후 보인 그의 행보 역시 너무나 이해 불가능한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나이, 그가 살아온 세월로는 도저히 그의 기량과 놀라운 지식들을 설명할 방도가 없었다.

"심지어 그는, 나조차도 모르고 있던 내 본명조차 알고 있었어요. 대체 어떻게 하면 그럴 수가 있는 거죠?"

점점 다그치는 말투가 되는 시리스를 보며 마켈린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여기서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은 간단한 일이다. 하지만 레펜하르트가 그것을 몰라서 말 못한 것은 아니다. 뒤이을 파장을 두려워했을 뿐.

결국 마켈린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젊은 엘프, 시리스여."

"네."

"나는 그의 비밀을 알고 있습니다."

시리스가 눈을 반짝였다. 추궁하는 기색이 역력한 그녀의 시선을 느끼며 마켈린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는 당신이 이해해 주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지요."

"...어째서?"

혼란스러워하며 시리스가 나직하게 뇌까렸다. 대체 어떤 비밀이기에 그녀가 이해해 주지 못한다고 하는지 짐작이 가질 않았다. 마켈린이 빙그레 웃더니 달래듯 말했다.

"조금 더 오래 살아온 이로서, 그리고 똑같이 그와 다른 종족인 처지로 그대에게 조언하겠소."

시리스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마켈린이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를 믿을 수 있겠소? 그를 신뢰하고, 어떤 상황이라도 그를 오해하지 않을 수 있겠소?"

시리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뭔 비밀을 가지고 있기에 이렇게 거창하게 구는지 살짝 우습기도 했다. 레펜하르트는 모든 엘프들의 염원, 세계수 엘븐하임을 되살릴 수 있을 정도로 굉장한 권능을 지닌 자였다. 그때의 경이로운 광경은 아직도 뇌리에 선하다.

"솔직히 말하면 저는, 그가 지상에 현신한 신들 중 하나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살짝 장난스럽게 대꾸하는 그녀를 향해 마켈린이 진지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의미가 아니오."

마켈린은 잠시 상념을 정리했다. 늦저녁에 레펜하르트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난 시리스에게 모든 사실을 전할 자신이 없소.

레펜하르트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갔다. 진실의 목소리를 듣는 드워프인 마켈린조차도 너무 어이가 없어 증거까지 캐묻지 않았던가? 그러나 마켈린은 그 의견에 찬성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믿지 않을 것 같지도 않습니다. 시공 회귀라는 진실은, 당신이 그동안 보였던 행동을 모두 설명할 수 있을 테니까요. 엘프는 합리적인 종족입니다. 저는 믿을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솔직히 말하면... 믿어준다고 해도 문제요....

한숨을 쉬며 레펜하르트가 말을 이었다.

-그녀가 말하더군. 내가, 그녀 너머로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다고. 틀린 말은 아니었지. 왜 그녀가 그렇게 느꼈는지, 그대도 잘 알 수 있겠지?

그제야 마켈린은 그가 진정 고민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레펜하르트가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난, 그녀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소.

결국 레펜하르트는 마켈린에게, 시리스에게 모든 것을 대신 좀 설명해 달라 부탁하며 자리를 떴다. 남자 주제에 이런 걸 남에게 떠맡기다니, 꽤나 무책임한 모습이라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가끔은 제3자가 진실을 알려 주는 쪽이 나은 경우도 있다.

"다시 한 번 묻지. 그를 신뢰할 수 있겠소?"

시리스의 표정도 진지해졌다. 각오를 다진 표정으로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켈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모든 것을 알려 주리다."

☆ ☆ ☆

중앙탑을 나온 시리스는 허탈한 얼굴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머릿속에 아직도 마켈린의 목소리가 울리는 듯했다.

-그는 시간을 거슬러 온 자요.

역사상 유례가 없는 10서클의 대마도사.

이종족들을 위해 일어서 마왕이라는 오명까지 뒤집어쓰며 세상을 바꾸려 했던 자.

한 번 실패했음에도 시간을 거스르면서까지 다시 한 번 꿈을 이루려는 이.

모든 의문이 풀렸다. 왜 레펜하르트가 그토록 진실을 털어놓기를 저어했는지도 이해가 갔다.

솔직히 시리스 스스로가 생각해도, 세계수를 부활시키는 그 이적이 없었더라면 정신병자로 취급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딱히 레펜하르트가 그녀를 속인 것에 대해서는 전혀 감정이 없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기에.

조금 기쁘기도 했다.

그가 가진 꿈, 그가 가진 목표는 허황된 것이 아니었다. 그가 보여 주었던 모든 태도는 결코 가식이 아니었다. 그 사실은 분명 기뻤다.

하지만 그 진실이 시리스를 홀가분하게 만들어 주지는 않았다. 그 진실 속의 또 하나의 진실, 그녀 자신에 대한 이야기 때문에.

-그의 말에 의하면, 그대도 나도 그와 굉장히 가까웠던 사이라고 하더군. 특히나 그대는 그의 사천왕 중 한 명이자 연인이었다고 했소.

마켈린의 이야기를 되새기며 시리스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시리스 발렌시아...."

자신의 이름을 가진, 레펜하르트의 추억 속 연인.

대륙의 모든 엘프들의 수장이자 대변자이며 수호자.

그녀는 7대 정령술에 모두 통달한 마스터이자 대륙에서 손꼽히는 검사이며 8서클에 다다른 고위 마법사라고 했다. 이종족들에겐 그 누구보다도 자상하고 자비로워 엘디아의 현신이라고까지 칭송받았다 했다. 인간들에겐 악몽과 공포의 존재로서 광기의 여신이라 불리었다고 했다.

'...그게 나라고?'

시리스는 도저히 그 엘프 여인을 자신과 동일시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미래에 저런 엄청난 존재가 될 거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레펜하르트가 그녀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것이 당연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런 깊은 애정 가득한 눈빛을 보내는 이유도 너무나 이해해 버렸다. 그에게 있어서 시리스, 자신은 시간을 뛰어넘어 다시 조우한 소중한 연인일 테니까.

하지만, 시리스에게 있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시간일 뿐이다.

지독하게 혼란스러웠다.

'차라리, 날 보면서 옛 첫사랑을 투영하거나 하는 그런 흔한 일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이 흔들리는 마음을 확실하게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마음을 거절하건 받아들이건, 시리스 자신의 의지로 온전히 정할 수 있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상황은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가 없다.

레펜하르트는 분명 시리스를 통해 자신의 연인을 투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투영한 연인이, 바로 미래의 시리스 자신이었다. 그렇다면 레펜하르트가 애정을 보내는 상대는 대체 누구라고 해야 한단 말인가?

"하아...."

한숨이 나왔다.

혼돈 속에서 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새 숙소에 도착해 버렸다. 시리스는 잠든 동료들을 깨우지 않기 위해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갔다. 내일부터 먼 길을 가야 하니 잠이 부족해서는 일행에게 폐가 될 것이다.

안으로 들어서자 인기척이 느껴졌다. 시리스는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각자의 방으로 연결되는 커다란 거실, 그 테이블에 거구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이미 잠들었을 거라 생각했던 레펜하르트였다.

침착한 목소리가 울렸다.

"모든 걸 들었지?"

"네."

시리스는 살며시 레펜하르트에게 다가갔다. 애써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그였지만, 이미 정령술에 눈을 뜬 시리스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차분한 목소리 속에 불안해하는 기색이 절실하게 감응된다.

"...확실히 상상을 초월한 이야기였습니다."

나직한 목소리로 시리스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납득할 수 있어요. 레펜하르트 님이 그동안 보여 준 모습을 생각해 보면."

"그런가...."

살짝 안도하는 얼굴을 하던 레펜하르트가 재차 안색을 굳혔다.

"그럼... 내 '태도'를 용서해 줄 수 있겠니?"

시리스가 입을 다물었다.

어둠 속에서 침묵이 흘렀다.

한참 후에야,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당신을 따를 것입니다, 레펜하르트 님."

애매한 대답이었다. 레펜하르트가 의아해하는 표정을 짓는다. 시리스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금은 그것만이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이에요."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고민하고 또 고민해 봐도, 그녀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전 당신의 기억 속, '그' 시리스가 아니니까요."

나직한, 하지만 단호한 대답이었다. 순간 레펜하르트의 두 어깨가 축 처졌다. 못 본 척 시리스는 사뿐사뿐 자신의 방으로 걸어갔다. 휘장을 걷으며 태연하게 밤 인사를 건넨다.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으, 으응...."

대꾸하면서도 여전히 레펜하르트는 축 늘어진 채 힘없이 앉아 있었다. 마치 주인에게 버림받은 대형견을 연상시키는 듯한 서글픈 광경이었다.

그때 문득, 방을 들어가던 시리스가 중얼거렸다.

"그래도...."

"응?"

고개를 든 레펜하르트의 눈에, 자신을 향해 살짝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당신이 싫지는 않아요."

마지막 한마디를 던진 뒤 시리스는 곧바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거실에 홀로 남은 레펜하르트는 그저 그녀의 방문에 걸린 휘장을 마냥 바라볼 뿐이었다.

한참 후, 레펜하르트가 멍청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니, 그래서 용서해 준단 소리야, 아니란 소리야?"

제14장 드워프를 사랑한 왕자님

1

세상은 평화로웠다.

인류를 멸망시키려는 마왕의 존재도 없었고, 수십 개의 국가가 서로 창칼을 들이대는 거대한 전쟁도 없었으며, 전설 속의 드래곤이 날아올라 인간들을 다 죽여 버리겠다고 설치는 일도 없는, 참으로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대륙 전체를 보았을 때의 거시적인 관점일 뿐이다. 한쪽에서는 태평성대를 노래해도 다른 한쪽에서는 삶은 고해요, 지옥이라 울부짖는 자가 있는 것이 인간사인 법.

적어도 크로방스 왕국에 한해서만큼은, 세상은 결코 평화롭지 않았다.

크로방스 왕국 중부, 한 이름 없는 커다란 들판에서 한 무리의 기사들이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카르사스 님의 이름으로! 저 더러운 찬탈자의 무리를 해치워라!"

"그 더러운 입을 찢어 놓겠다! 정통한 왕가의 이름으로 반역자들을 죽여라!"

각 무리의 우두머리들이 고함을 지르며 말을 달려 적진으로 향한다. 그 뒤를 수많은 기사들이 달리고, 병사들이 창을 휘두르며 뒤따른다. 화살의 비가 쏟아지고 비명과 아우성이 전장 가득 울려 퍼진다. 페르난도 공작가의 후계자인 카르사스 경을 따르는 기사들과 크로방스 왕국의 제2왕자, 유벨 렌 크로방스를 따르는 병력이었다. 각자 자신이 모시는 이가 정통성을 지니고 있다고 믿으며, 서로의 생명을 빼앗고 또 빼앗기는 끔직한 전투를 끝없이 이어 가고 있었다.

"진정한 국왕, 카르사스 님을 위해!"

"유벨 님이야말로 이 나라의 진정한 국왕이시다!"

☆ ☆ ☆

전 국왕, 고트린 1세가 갑작스럽게 서거한 지도 어느덧 반년. 크로방스 왕국은 빈 왕좌를 놓고 카르사스 공자와 유벨 왕자의 세력이 맞붙어 심각한 내전 상태에 빠져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이렇게 큰 문제가 생길 상황은 아니었다. 고트린 1세에겐 텔리온이라는 후계자가 있었고, 국왕과 정실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이 왕자는 누구보다도 확실한 정통의 피를 지니고 있어 왕위를 계승하는데 아무런 문제도 없었으니까.

문제는 고트린 1세가 죽고 나서 후계자인 텔리온 역시 반달이 채 못 되어 정체불명의 질병으로 죽어 버렸다는 점이었다.

왕위 계승자의 죽음은 큰 문제였다.

더 큰 문제는 텔리온이 딱히 후사를 남기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현명한 텔리온은 자신의 결혼이 정치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20대 후반이 되도록 쉽게 왕자비를 결정하지 않고, 그 위치를 이용해 국내의 각 귀족 세력들을 조율해 가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왕위 후계자가 가질 법한 훌륭한 정치적 감각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가 죽어 버린 이상 제대로 된 후계자가 없다는 것은 큰 문제로 대두되어 버렸다.

국왕과 왕위 계승자를 보름 간격을 두고 모두 잃은 크로방스 왕국. 왕실의 대신들은 슬픔 속에서 장례를 치루고 바로 누구를 다음 국왕으로 모실지에 대한 논의에 들어갔다.

첫 번째로 떠오른 인물은 올해로 열여덟 살이 되는 제2왕자, 유벨 렌 크로방스. 하지만 이 왕자는 정통성에 있어 꽤나 큰 흠집이 있었다.

그는 후궁의 자식이었다.

한 나라의 국왕쯤 되면 후궁이나 첩을 두는 것이 그리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설사 후궁의 자식이라 할지라도 왕의 피를 이은 이상 왕자로 불리는 것은 당연하다. 국왕과 동침한 후궁은 몇몇 더 있었지만, 아쉽게도 고트린 1세는 그리 남자로서 뛰어난 이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여기저기 씨를 뿌렸지만 싹이 튼 것은 텔리온과 유벨 둘뿐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만큼, 어지간해서는 유벨이 왕위를 계승하는 데 큰 문제는 없어 보일 것이다.

하지만 유벨 왕자는 그 혈통에 있어 귀족가의 반발을 심각하게 받고 있었다. 그의 어미가 왕족도 귀족도 아닌, 원래는 타국 출신인 비천한 평민이었던 탓이다. 비록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는 해도, 근본도 없는 핏줄을 왕으로 모실 수는 없다는 것이 대부분의 귀족들이 가진 의견이었다.

그래서 나온 또 다른 후보가 바로 페르난도 공작가의 카르사스 공자였다.

올해로 28세가 되는 카르사스 공자는 비록 고트린 국왕의 아들은 아니지만 상당히 짙은 왕실의 피를 지니고 있었다. 전 국왕의 동생인 페르난도 공작의 아들이며 모계 쪽도 왕실의 핏줄인 브로젠 후작가, 혈통 면에서는 타국의 비천한 피가 섞인 유벨보다도 오히려 더 왕에 어울린다는 의견이 많았다.

게다가 카르사스는 뛰어난 무용을 자랑하는 기사로 이미 자자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인물이었다. 귀족다운 기품과 기사다운 용맹, 수하들에게도 신뢰가 깊었고 여러모로 존경을 받는 이였다.

반면 유벨은 다른 부분에서 명성이 높았다. 바로, 방탕아라는 이름으로.

그렇다고 유벨이 이 여자, 저 여자 집적거리는 그런 추잡한 짓을 벌인 것은 아니었다. 사실 그는 단 한 여인밖에 끼고 다니지 않았다. 문제는 그 여인이 인간이 아닌 드워프였다는 점이다.

엘프 암컷을 안는 것도 사실, 떳떳하게 자랑할 일은 아니다. 물론 뒷구멍으로야 어지간히 권력 좀 있는 놈이면 다들 하는 짓이지만 적어도 드러낼 일은 아닌 것이다. 하물며 드워프라면? 아무리 사실은 성인이라 할지라도 드워프 여인의 겉모습은 어린 인간 소녀와 비슷해 보인다. 그런 여인을 항시 대동하며 희롱하는 모습을 보이곤 했으니, 솔직히 좋게는 안 보이는 것이다.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기에 충분한 음탕한 모습이었다.

이렇다 보니 상황이 영 애매해졌다.

한 쪽은 전 국왕의 아들만 아닐 뿐이지, 존경받을 만한 기사이자 왕위에 지극히 어울리는 인물.

반면 다른 쪽은 국왕의 아들이란 것 외에는 전혀 뛰어난 점이 없는 하찮은 방탕아.

귀족들의 의견이 갈라지는 것은 차라리 필연이었다.

페르난도 공작가와 브로젠 후작가가 주축이 되어 카르사스를 국왕으로 밀었다. 각 지방의 영주들, 전통이 깊은 귀족 가문들이 그들을 지지했다.

유벨을 지지하는 것은 정통성을 중시하는 보수적인 귀족들과 당대에 일어선 신흥 귀족들이었다. 대부분이 상인들로서, 부를 쌓아 작위를 얻은 이들이었다.

사실 유벨의 어미가 비록 평민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가난하게 자랐다는 소리는 아니다. 애초에 가난한 평민 처녀가 어떻게 왕의 후궁이 될 수 있겠는가? 저거야 평민 처녀들의 로맨스를 만족시켜 주는 허황된 이야기 속에서나 나오는 것이고, 사실 그녀는 크로방스 왕국 최대의 상단인 페오닌 가문의 딸이었다. 페오닌 가문과 친분이 있는 대다수의 상가들이 유벨을 지지하고 있었다.

정통성을 두고 무수한 설전과 토론이 오갔지만, 결론은 나지 않았다. 양측 모두 흠집이 있었으니 말로 해결될 리가 없었다.

결국, 국왕이 서거한 지 두 달이 채 지나지도 않아 내전이 일어났다.

☆ ☆ ☆

크로방스 왕국 중부, 델피나 남작령.

벽돌로 쌓아 올리고 석회를 바른 새하얀 저택의 2층 발코니에서, 한 남자가 의자에 앉아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깨끗한 피부에 뚜렷한 이목구비, 황금처럼 빛나는 선명한 금발에 보석같이 빛나는 녹색 눈동자를 지닌 미모의 청년이었다.

청년은 시무룩한 눈으로 숲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기나긴 겨울이 끝나고, 봄의 새싹들이 파릇파릇 피어올라 숲은 꽤나 녹색으로 물들어 있다.

문득 청년이 중얼거렸다.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청년, 크로방스 왕국의 제2왕자 유벨은 기운 없는 표정으로 상념에 젖었다.

카르사스 군과의 내전은, 처음에는 유벨 측이 우세했다.

막대한 부를 지닌 상인들은 유벨의 승리를 위해 돈을 아끼지 않았다. 그들은 유벨이 왕위에 오름으로써 크로방스 왕국도 차탄 공국처럼 상업을 지지하는 국가가 되길 원하고 있었다. 크로방스 왕국은 대륙 최대의 곡창지대임에도 불구하고 상인을 무시하는 꽉 막힌 정책들 때문에 대부분의 부를 차탄 공국에게 빼앗기고 있었던 것이다.

원래 지니고 있던 병력을 총동원하고, 대륙 각지의 용병들도 고용해 유벨 측은 카르사스 군을 몰아쳤다. 아무리 용맹한 기사라도 숫자 앞에는 무용인 법이다. 병력이 세 배 이상 차이가 나니 그 유명한 기사 중의 기사, 카르사스라 할지라도 상대할 방법이 없었다. 그때만 해도 승리가 눈앞에 펼쳐진 듯했다.

상황이 역전된 것은 그 이후였다.

"하아...."

한숨을 쉬며 유벨은 숲에서 눈을 돌렸다. 그의 시선에 숲 저편에 널리 펼쳐진 광활한 보리밭이 보였다. 원래대로라면 슬슬 황금빛으로 넘실거리며 탐스러운 알곡이 매달려 있어야 할 곳, 하지만 지금은 잔뜩 메말라 죽어 가는 보리 잎사귀밖에 없다.

유벨이 절망스러운 어조로 뇌까렸다.

"하필 지금 이런 지독한 흉년이 올 게 뭐람."

크로방스 왕국 전역에 엄청난 가뭄이 들어 버렸던 것이다. 레단티의 축복을 받아 결코 샘이 마르지 않는다는 이 풍요의 땅에 극심한 대기근이 닥쳤다. 안 그래도 내전이 길어지며 치안은 악화되고 용병들과 탈영병이 왕국 곳곳에서 살인과 강간, 약탈을 일삼던 중이었다. 거기에 대기근까지 덮치니 지금 크로방스 왕국은 그야말로 현실에 펼쳐진 지옥도였다. 부모가 자식을 잡아먹는 것쯤은 이야깃거리도 되지 못할, 지독히도 흉흉한 소문이 각지에서 떠돌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유벨 측에 있어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었다. 상인들 대부분이 곡물을 다루던 이들이다. 망해 버리는 상회가 속출하고, 그 자리를 어찌 알았는지 귀신같이 곡물을 들고 나타난 차탄 공국의 타오반 상회가 대신했다. 자금이 떨어지자 용병들은 곧바로 배신했고 전세는 역전되었다.

덕분에 유벨은 지금, 크로방스 왕국 동쪽 오지인 이 델피나 남작령까지 피신한 처지가 되어 있었다. 물론 이곳도 안전하진 않았다. 대기근 탓에 카르사스 측도 계속 전쟁을 지속하기 어려워 잠시 휴전 상태가 되긴 했지만, 그렇다 해도 계속 외교적으로 압박이 들어오고 있다 들었다. 왕위를 노린 불의한 자의 목을 내놓으라고.

상인의 의리가 있어 델피나 남작도 아직까지는 무시하고 있었지만, 이 흉년이 계속된다면 상황이 어찌 될지는 알 수 없다. 하루하루가 가시방석이었다.

기지개를 켠 뒤 유벨이 입술을 내밀며 투덜거렸다.

"아니, 누가 왕 시켜 달랬냐고. 하기도 싫은 걸 억지로 밀어붙이더니 이게 무슨 꼴이야?"

그도, 그의 어미도 왕위 따위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욕심을 부린 것은 그의 외조부, 페오닌 상단주다.

투덜거리는 유벨의 등 뒤에서 한 소녀가 사뿐히 걸어왔다. 가녀린 몸에 검은 머리칼을 예쁘게 땋아 올린 귀여운 인상의 소녀였다. 뾰족한 귀와 어색할 정도로 풍만한 가슴이 그녀가 인간이 아님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유벨의 악명의 원인이 된 드워프 여인, 피니아였다.

피니아가 유벨 곁으로 다가오더니 가볍게 머리를 쓰다듬는다. 꽤나 장신인 유벨이 의자에 앉고 피니아가 그 뒤에 서니 적당히 높이가 맞는다. 부드러운 손길로 머릿결을 매만지며 그녀가 다정스레 물었다.

"유벨, 그렇게 왕 하기가 싫어?"

"응. 진짜 하기 싫어. 하지만 지금 분위기가 어째 왕이 되거나 단두대의 이슬이 되거나, 둘 중 하나인 것 같지?"

"아무래도 그렇지?"

유벨의 뺨을 쓰다듬으며 피니아가 태연하게 대꾸했다. 고개를 뒤로 젖혀 피니아의 얼굴을 마주보며 유벨이 투덜거렸다.

"어이, 남 일인 것처럼 말하지 마, 피니아. 내 목 떨어지면 다음엔 네 차례라고."

확실히, 왕족을 홀린 사악한 드워프 마녀를 저들이 살려 둘 리가 없지. 피니아가 쓴웃음을 지으며 앞으로 돌아가더니 유벨의 무릎에 사뿐히 앉았다. 두 팔로 목을 감싸며 피니아가 애교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게, 어쩌다가 이런 남자를 사랑해 버렸담."

"이런 남자라 미안하구먼."

뿌루퉁한 표정으로 유벨이 고개를 돌린다. 피니아가 깔깔 웃으며 그의 얼굴을 잡아 돌리고 입술에 키스를 했다. 이내 표정이 풀리는 유벨을 보며 피니아가 달래듯 말했다.

"괜찮아. 당분간은 안전해. 전쟁도 배가 불러야 하는 법이라잖아?"

대기근으로 인해 크로방스 왕국은 발칵 뒤집혔다. 상인들만큼 타격이 크지는 않지만, 카르사스 측도 자신의 영지를 돌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저쪽도 군량을 확보하기 전까진 못 움직일 거야."

"대신 움직이는 순간 난 훅 가는 거네. 시한부 인생이구먼."

피니아가 구시렁대는 유벨의 뺨을 톡톡 때렸다.

"그렇게 되면 눈치껏 도망가야지, 유벨."

"너랑 나랑 둘이서 사랑의 도피?"

"사랑의 도피는 이미 늦었고, 이건 그냥 망명이지. 신분도 정체도 숨기고 다른 나라로 도망가면 설마 잡으러 쫓아오겠어?"

"피니아, 난 곱게 자라서 험한 일 못하는데?"

"내가 막 자랐으니까 괜찮아. 너 하나쯤은 먹여 살릴 수 있어."

"아니, 남자 주제에 여자에게 얹혀사는 것도 좀...."

"왜? 주인이 노예를 부려서 돈 벌게 시키는 게 뭐가 이상해?"

"누가 노예라는 거야?"

유벨이 인상을 구긴다. 그 모습에 피니아의 두 눈이 촉촉하게 젖었다. 그녀가 유벨의 품에 안긴 채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그리고 속삭였다.

"할 수 없잖아. 이 세상에서 나는 노예일 뿐인걸. 네가 왕이건, 왕이 아니건 간에...."

"피니아...."

유벨도 그녀를 껴안고 한숨을 쉬었다.

알고 있었다. 설사 이 전쟁에서 이겨 왕이 된다 할지라도, 진정 원하는 것은 가지지 못한다는 것을.

"어딜 가도 없겠지... 우리를 연인으로 봐 주는 세상 따위는."

두 연인이 슬픈 눈으로 서로를 바라본다. 작게 속삭이며 뜨거운 숨결을 교차한다.

"사랑해, 유벨."

"사랑해, 피니아."

그때 안쪽 방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논다~."

순간 피니아의 두 눈에 불꽃이 튀었다.

"누구냐!"

외침과 동시에 그녀가 바로 유벨에게서 떨어지며 바닥을 걷어찼다. 바닥에 놓여 있던 커다란 도끼 창이 회전하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숙련된 움직임으로 도끼 창을 움켜쥔 뒤 피니아가 바로 거실 쪽을 겨누었다.

섬뜩한 눈동자가 빛을 발했다. 조금 전 사랑을 속삭이던 여인은 온데간데없고, 전신 가득 투기를 일으키는 전사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정체를 밝혀라!"

그러자 거실 구석의 어둠에서 한 남자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로브를 걸친, 마법사처럼 보이는 이였다. 후드를 깊게 뒤집어써 얼굴마저 보이지 않는 그 남자가 유벨에게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크로방스 왕국의 유벨 왕자님이 맞으신지?"

피니아가 잔뜩 독 오른 고양이처럼 경계심을 표한다. 유벨이 눈을 매섭게 뜨며 그녀의 등 뒤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차분하게 물었다.

"어떻게 이곳까지 온 건지 모르겠군. 일단 정체와 용무를 고하라."

붉은 로브의 사내가 웃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 이름은 레펜하르트. 마법사올시다. 크로방스 왕국의 정당한 국왕께 미력한 힘이나마 보태고 싶어 찾아왔습니다만."

"내 편이 되고자 왔다고?"

의심쩍은 눈으로 유벨이 피니아에게 눈짓했다. 그녀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거짓말은 아닙니다, 유벨 님."

☆ ☆ ☆

피니아의 말을 듣고 유벨은 일단 안심했다. 적어도 저 붉은 로브의 남자가 암살자 같은 부류는 아니란 의미니까.

긴장을 풀며 유벨은 유심히 눈앞의 남자,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일단 복장은 마법사인데....'

뭔가 기묘한 느낌이 든다. 원근감이 살짝 어긋난다는 느낌이랄까? 그리고 유벨은, 그가 천천히 자신에게 다가오자 그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오메? 뭔 덩치가 이리 크대?'

유벨도 나름 자신이 이 시대 청년의 평균 키는 된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 레펜하르트라는 마법사는 그런 그보다도 머리 하나는 더 컸다. 그냥 껑충하니 꺽다리인 것이라면 이해하겠는데, 어깨 넓이부터가 어지간한 기사들도 울고 갈 수준이다. 휘하 기사 중 가장 거한인 타웨인 경도 이 마법사에 비하면 작아 보였다. 멀리 있을 때는 미처 몰랐는데, 가까이 오니 눈앞이 붉은 로브로 가득 차는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다.

"사, 상당히 기골이 장대하군, 그대."

유벨이 기가 질려 중얼거렸다. 레펜하르트가 쓴웃음을 지었다.

"마법사로 안 보이십니까?"

'그래서 일부러 품이 넉넉한 로브로 전신 근육까지 가렸는데, 쩝.'

레펜하르트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래 봤자 체적 자체가 워낙 크니 영 숨겨지지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유벨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물론 레펜하르트가 좀 과하기는 하지만, 마법사 중에서도 덩치 좋은 이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전투 마법사인가 보군."

"네, 뭐...."

전투 마법사의 정의는 체술과 마법을 함께 익히는 전장의 마도사. 따지고 보면 틀린 말도 아니고 해서 레펜하르트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유벨이 자세를 바로 하고 레펜하르트를 차분히 올려다보았다. 방탕하다고 알려진 이 왕자의 입에서 진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진심으로 나를 도우려 왔다는 건가?"

"물론입니다."

"그런 것 치고는 방금 잘 논다~라는 대사를 들은 듯한 기분이...."

"기, 기분 탓이겠지요."

레펜하르트는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조금 전, 유벨과 피니아가 애정 행각을 벌이는 걸 보고 있자니 자기도 모르게 한 말이었다. 누구는 아직도 진도 전혀 못 뽑고 있는데 눈앞에서 짜디짜게 염장질을 하고 있으니 눈꼴이 시지 않을 수가 있나? 그래서 무심코 내뱉은 혼잣말이었는데 용케도 들은 모양이다.

유벨이 미심쩍다는 표정을 짓더니 힐끔 피니아를 돌아본다. 그녀가 눈을 흘기며 대꾸했다.

"거짓말이네요."

"헤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유벨도 눈을 흘긴다. 레펜하르트는 속으로 한탄을 터트렸다.

'아으, 이래서 드워프는 골치 아파.'

드워프의 종족 특성, 진실을 듣는 귀는 역시 여러모로 상대하기가 까다롭다. 물론 세상에는 진실만을 말하며 일부를 숨겨 거짓을 고하는 방법도 다양하니 속이려면 못 속일 것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저건 말발 되는 프로 사기꾼쯤 되어야 가능한 것이고, 레펜하르트에게 그 정도 말주변은 없다.

난처해하는 그를 보다 말고 유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물론 그대가 그런 눈으로 보는 것도 당연하겠지."

하지만 의외로 유벨은 전혀 화를 내지 않는 것 같았다.

"걱정 마라. 난 신경 쓰지 않는다."

어차피 피니아와의 관계로 온갖 눈빛 다 받아 본 유벨이었다. 뒷구멍으로 어떤 소문이 오가고 있는지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사실 '잘 논다~.' 정도면 유벨 입장에서는 꽤나 호의가 담긴 어조인 것이다.

난처해하며 레펜하르트가 후드를 걷었다. 의외로 얼굴이 젊어 유벨과 피니아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레펜하르트가 머리를 긁었다.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제 연인도 엘프니까요."

"응?"

연인이라는 단어는 함부로 붙일 것이 못 된다. 한층 더 놀란 표정을 짓는 유벨을 향해 피니아가 속삭였다.

"지, 진짜인 것 같은데?"

그녀도 꽤나 놀랐는지 가식적인 어투가 사라지고 평소처럼 반말이 나와 버렸다. 둘은 신기한 동물을 바라보듯 레펜하르트를 위아래로 훑어보기 시작했다. 머쓱해하며 레펜하르트가 물었다.

"아니,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겁니까?"

"그냥... 세상에 나 같은 변태가 또 있을 줄은 몰라서...."

"...."

하긴, 세상에 이종족 여인들을 성적으로 탐하는 놈들이야 많지만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는 얼마 없겠지. 유벨이 신기해하는 것도 당연하리라.

덕분에 묘하게 분위기가 방만해졌다. 레펜하르트는 속으로 한탄을 터트렸다.

'끄응... 어쩌다 분위기가 이렇게 된 거야?'

원래 계획은 신비롭게 나타나 왕자를 도우는 현자의 등장을 연출하려 했는데, 어째 말을 나누다 보니 현자는 고사하고 취향 특이한 놈들끼리 동아리 활동 하는 분위기가 되어 버렸다.

'역시 신비주의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구먼....'

어쨌거나, 그 덕에 유벨과 피니아의 경계심이 상당히 사라진 것도 사실이다. 유벨이 다시 왕자다운 얼굴로 레펜하르트를 바라보더니 문득 입을 열었다.

"그대는 나를 돕기 위해 왔다고 했었지?"

"그렇습니다, 유벨 전하."

"그렇다면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

위엄을 담아 유벨이 물었다. 레펜하르트도 자세를 바로 하고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금화 십만 닢에 달하는 군량이라면 어떻습니까?"

순간 유벨과 피니아의 안색이 동시에 굳었다.

"금화 십만 닢?"

금화 십만 닢이면 크로방스 왕실의 반년 치 예산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그 정도 액수의 곡물이라면 크로방스 왕국 전체를 석 달간 먹이고도 남을 것이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흉년이 들기 전의 가격이고, 곡식 값이 20~30배씩 뛴 지금은 그렇게까지 엄청난 액수는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유벨 군의 군량을 모두 대기에 충분한 수준인 것은 틀림없었다.

"...부자로군? 마법사가 그리 돈벌이가 잘되나?"

반쯤 농을 섞어 애써 당황을 숨기려 했지만, 유벨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밀리고 있는 유벨군에 저 정도의 지원이 들어온다면 기울어진 판도를 바꾸기에 충분하다!

"너무 타이밍이 좋아 질 나쁜 거짓말이 아닌가 의심이 갈 정도군...."

힘이 빠져 의자에 몸을 누이며 유벨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물론 저 제안이 사실인 것은 확실했다. 바로 옆에서 피니아가 진위를 확인해 주었으니까.

거기에, 레펜하르트가 쐐기를 박듯 추가타를 날렸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 병력도 원조할 것입니다. 숫자는 적으나 질은 높지요."

"...질이 높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어도 되겠소?"

이쯤 되니 유벨도 더 이상 반말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슬쩍 말투가 반공대가 되었다. 레펜하르트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오히려 되물었다.

"유벨 전하의 휘하에는 오러 능력자가 몇이나 있습니까?"

"...한 명도 없소만...."

표정을 구기며 유벨이 나직하게 대답했다. 현재 크로방스 왕국에 거하는 오러 유저의 숫자는 총 다섯이었다. 그중 카르사스 공자를 지지하는 이가 둘, 나머지 셋은 중립을 선언한 채 사태를 관망하는 중이다. 초반에 압도적인 금력으로 밀어붙이고도 유벨 군이 승리하지 못한 이유가 이것이었다. 오러 유저는 그 자체로 전술 병기라 할 존재, 그런 무인이 유벨 측엔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부끄러워하는 유벨을 향해 레펜하르트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여섯 명의 오러 능력자라면 큰 힘이 되겠군요?"

"여섯?"

너무 놀란 나머지 유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크로방스 왕국의 오러 유저를 다 합쳐도 다섯 명밖에 없다. 지금 이 마법사는 자신이 한 국가가 보유한 것보다도 더 많은 수의 오러 유저를 동원할 힘이 있다고 말하는 것인가?

레펜하르트가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유벨은 이제 숫제 꿈을 꾸는 게 아닌가 의심스러워졌다. 동시에 경각심도 들었다. 대체 이자는, 이런 엄청난 조건을 걸어서 과연 무엇을 바란단 말인가?

"그럼 그것에 따른 대가는?"

레펜하르트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유벨 전하께서 국왕이 되면, 제게 영지를 하사해 주셨으면 합니다."

유벨이 조금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조건에 비해 너무 흔한 요구였다.

"단지 그것뿐이오?"

저것만으로는, 레펜하르트가 굳이 유벨을 찾아온 이유가 납득이 가질 않았다. 지금 유벨은 거의 막바지까지 몰린 상황이었다. 굳이 패배할 가능성이 높은 쪽에 판돈을 걸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레펜하르트가 내건 조건이라면, 그냥 카르사스를 찾아갔어도 얼마든지 환대를 받았을 터였다. 군량이 없어 전쟁을 못 하는 것은 사실 저쪽이 더 급했으니까.

"왜 그런 의문을 가지시는지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유를 듣고 나면, 왜 제가 유벨 님을 찾았는지 납득하실 겁니다."

레펜하르트가 말을 이었다.

"제가 바라는 영지는 완벽한 자치령, 크로방스 왕국의 통속법으로부터 독립된 장소여야 한다는 조건이 붙으니까요."

유벨이 조금 이해가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레펜하르트는 공국이나 변경백 같은, 한 국가 내의 독립된 법과 체제를 지닌 영지를 원하는 것이다. 그것은 확실히 어지간히 큰 공이 없이는 내리기 힘든 조건이다. 왕실의 권위로부터 벗어난 존재를 인정하게 되는 일이므로.

"...그거라면 확실히, 승기를 잡은 카르사스 공자 측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을 조건이겠군. 하지만 대체 왜?"

레펜하르트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그 대답으로 인해, 유벨은 레펜하르트가 왜 자신을 택했는지 너무나도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엘프와 드워프, 오크들이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유벨 전하."

2

델피나 남작령에 위치한 한 작은 마을.

마을 분위기는 흉흉하기 그지없었다. 안 그래도 대기근으로 인해 아사자가 속출하는 와중이었다. 거기에 유벨 왕자와 그의 군대까지 왔으니 이곳이 전장이 될 가능성이 극히 높아진 것이다.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공포에 떨며 앞으로 어찌 될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오랜 가뭄으로 말라붙은 마을, 사람 없는 적막한 거리를 두 사람이 걷고 있었다. 막 유벨 왕자를 만나고 다시 성을 빠져나온 레펜하르트와, 성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리스였다.

다른 일행이 묵고 있는 여관을 향해 걸음을 옮기며 시리스가 슬쩍 물었다.

"이야기는 잘되었나요?"

"이야기 자체야 잘되었지."

유벨 입장에서는 레펜하르트의 의견을 반대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이대로라면 단두대의 이슬이 될 판인데 갓 구운 빵, 딱딱한 빵 가릴 처지가 아닌 것이다. 게다가 레펜하르트의 제안은 유벨도 언제나 바라던 것이었으니 더더욱 반대할 리가 없다. 이야기 자체야 막힐 일이 전혀 없는 것이다.

"문제는, 이야기한 대로 흘러가느냐지."

불만스러운 듯 레펜하르트는 입술을 삐죽였다. 유벨은 몰라도 그 휘하의 귀족들이 그의 의견을 과연 받아들여 줄까? 당장 유벨부터도 의견 자체는 찬동했으되, 실행에는 난색을 보였다.

-지금 상황이라면 그대의 요구 자체는 반대할 이가 별로 없을 것이오.

레펜하르트가 자신의 영지로 요구한 곳은 카르사스 공자 측, 겔페인 자작의 영지였다. 크로방스 왕국의 서부, 험한 글로텐 산맥에 위치한 척박한 땅으로 언제나 몬스터와 들짐승들의 위협에 시달리는 곳이다. 주요 산업은 드워프 노예를 이용한 광산업, 정작 인간은 얼마 살지도 않는 장소였다. 게다가 그 광산업조차도 광맥이 고갈되어 가는 탓에 거의 수익을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적측의 영지인 데다가 가져 봐야 그다지 건질 것도 없는 땅, 귀족들도 전혀 욕심을 내지 않는 곳이었다. 당장 겔페인 자작이 카르사스 공자 측에 붙은 이유도 바로 옆 영지를 집어삼키려는 욕심이었으니까. 그런 땅을 주고 금화 십만 닢에 달하는 군량을 얻을 수 있다고 하면 반대할 이가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정작 내가 왕위를 계승하고 난 뒤에 어찌 될지는 자신이 없소. 노예들의 신분을 해방시키는 새로운 법을 제안한다면 반대가 만만치 않을 것 같소만.

유벨의 걱정은 그것이었다.

사실, 가능하다면 이종족을 노예 신분에서 해방하는 일은 당장 유벨 자신도 하고 싶었다. 그래야 피니아랑 떳떳하게 행복하게 살 테니까. 왕비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후궁으로라도 떳떳하게 곁에 두고 싶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아무리 그가 왕이 된다 해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귀족들이 있고, 굳어질 대로 굳어진 전통이 있고, 여전히 이종족을 노예일 뿐이라 인식하는 민심이 있다.

이 모든 것을 타파하고 과연 원하는 뜻을 이룰 수 있을까?

유벨이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곁에서 듣고 있던 피니아, 드워프인 그녀조차도 실현 가능성이 없다는 의견을 냈을 정도니까.

"하지만 일단 자치령을 법적으로 인정시키고 나면 아주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지."

시리스와 함께 길을 걸으며 레펜하르트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어쨌거나 자치령은 자치령. 그 안에서 돌로 빵을 굽건 클레이모어로 이를 쑤시건 외부에서 신경 쓰는 것은 내정 간섭이 되거든. 일단 시스템을 만들어 놓으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해. 물론 이래저래 골치 아프긴 하겠지만."

전생의 레펜하르트는 인간의 의견을 신경 쓰지 않았다. 모든 것을 힘으로 누르고 밀어붙였다. 그래서 편하게 일이 진행되었지만, 그만큼 부작용도 심했다.

"이번에는 좀 느려도, 확실하게 가야지. 인간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방법으로."

"그렇군요...."

시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뜻에 찬동할 인간이 있다더니, 듣고 보니 꽤나 이해가 갔다. 방법도 현실적이었다. 잘만 되면 적어도 첫 발자국은 디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던 중, 문득 궁금한 점이 생겼다.

"레펜하르트 님."

"응?"

"혹시 유벨 왕자와 원래 알던 사이였나요?"

"아니, 얼굴 본 것도 이번이 처음이야. 소문만 들었었지."

"그럼 전생에서는 누가 이겼나요?"

별 상관없는 문제지만, 역시 궁금하다. 레펜하르트가 피식 웃더니 가차 없이 대답했다.

"카르사스 공자. 사실 전생에서 유벨 왕자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거든."

그리고 유벨 왕자는 그저 음탕한 취미를 지닌, 왕실의 수치로 역사 속에 사라지게 된다. 원래 역사대로라면 카르사스 공자가 크로방스 왕국의 국왕이 되는 것이다. 이야기를 들은 시리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역사대로 흘러가는 것은 아니겠죠?"

"내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그랬겠지."

레펜하르트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물론 그도 한 나라의 국왕을 바꿔 버릴 정도로 역사에 크게 개입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에 대해 불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실은 이쪽이 정상이지. 미래가 어떻게 되는지 아는 쪽이 오히려 비정상이라고."

어차피 되돌려진 시간.

어차피 새롭게 쓰이는 역사.

이미 레펜하르트가 이 시대로 돌아온 시점부터 그가 알던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 과거가 되어 버렸다. 음유시인이 지어내는 허황된 이야기와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이미 난 새로운 삶을 살고 있으니까. 보이지 않는 미래를 두려워하며, 그래도 최선을 다해 희망을 쌓아 올리는. 다른 모든 이들이 그렇듯이."

노래하듯 중얼거리는 레펜하르트를 보며 시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작게 속삭였다.

"잘되었으면 좋겠네요."

"잘되게 만들어야지. 그리고 난 꽤 괜찮은 결과가 나올 거라고 봐. 오크와 엘프, 드워프들과 함께 싸우며, 인간이 그들을 노예가 아닌 전우로 보게 된다면 말이지."

레펜하르트는 누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유벨과의 마지막 대화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유벨 전하, 전하께 원조하는 병력에 대해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오?

-그들은 오크와 드워프, 엘프 들입니다. 저는 그들의 의지를 대행해 이곳에 왔습니다.

☆ ☆ ☆

다른 일행들은 마을 외곽에 위치한 작은 여관에 묵고 있었다. 레펜하르트와 시리스가 안으로 들어서자 홀에 모여 있던 실란과 러스, 틸라가 그들을 맞이했다.

"이야기는 잘되셨습니까, 형님?"

"그럭저럭? 아직까지는 잘되어 가는 것 같다."

레펜하르트 일행은 홀에 놓인 벽난로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러스가 감탄 섞인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꽤나 거창하게 행보를 시작하시는군요, 형님."

그랜드 포지를 떠난 지도 벌써 한 달. 레펜하르트 일행은 그동안 정신없이 각지의 유적들을 탐사해 댔다. 그동안 그들이 탐사한 유적의 숫자는 무려 열 개! 이쯤 되면 탐사했다기보다는 그냥 털어 댔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실제로 모든 정보를 다 알고 있는 레펜하르트 입장에서는 전혀 탐사가 아니었으니까.

사흘에 한 번꼴로 유적을 탐사했다고 하면 아무도 믿지 않겠지. 하지만 전혀 불가능한 일만도 아니었다. 오러 능력자인 러스와 드워프 전사 틸라가 합류한 데다가 레펜하르트 역시 마법의 힘을 어느 정도 되찾은 것이다. 그냥도 탐사할 능력이 충분한데 정식 답안지를 옆에 끼고 들이댔으니 시간 절약이 장난이 아니었다. 질풍처럼 유물을 털어 댈 수 있었다.

그 일을 떠올리며 러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유적에서 악마들 상대할 때보다 유물 들고 나오는 게 더 힘들었어."

물론 유적을 여기저기 털다 보니 무한의 주머니 숫자도 상당히 늘어나긴 했다. 현재 레펜하르트 일행은 압축률이 열 배 가까이 되는 무한의 주머니만도 열 개가 넘게 챙긴 후였다. 하지만 아무리 부피와 무게를 줄인다 해도 절대량 자체가 너무 크다 보니 들고 돌아다니기 벅찬 사이즈임은 분명했다.

러스의 말에 실란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제가 근육이 늘었으니 망정이지."

"...아니, 수통 하나 들 수 있는 놈이 수통 두 개 들 수 있게 되어 봐야 별 차이는 없지 싶은데?"

"윽! 하지만 이제 곧 세 개도 들 수 있을 거예요!"

"그래 봤자 수통이잖아?"

러스와 실란이 농을 주고받으며 웃었다. 레펜하르트가 기가 차 헛웃음을 흘렸다.

"...어차피 절반 이상 내가 들고 나왔는데 무슨...."

하여튼 그렇게 은의 시대 유물들을 잔뜩 건진 레펜하르트는, 개중 값어치 나가는 것들을 타오반 상회에 팔아 상당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자그마치 유적 열 개, 그것도 비싼 것만 챙겨 온 정도가 아니라 아예 바닥까지 싹싹 긁어 왔으니 그 액수가 장난이 아니었다. 게다가 타오반 상회에 투자했던 금화 천오백 닢 역시 대기근에 힘입어 금화 삼만 닢이 넘는 거액이 되어 있었다. 실란이며 러스에게 각자의 몫을 떼어 주고도 지금 그의 총 재산은 거의 금화 육만 닢에 육박했다. 두 사람 역시 금화 일만 닢 정도의 재산을 타오반 상회에 맡겨 놓고 있었다.

러스가 검을 뽑아 어루만지며 웃었다.

"돈도 돈이지만, 전 역시 명성을 떨칠 기회가 온 것이 더 기쁩니다, 형님."

유적 탐사-라기보다는 유물 털이라 불러야 할 행위들을 벼락치기로 끝낸 뒤 레펜하르트 일행은 크로방스 왕국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내전에 가담하기로 한 자신의 계획을 일행에게 설명했다. 시리스나 틸라야 반대할 리 없겠지만, 러스나 실란이 어떤 식으로 나올지에 대해 조금 걱정했었는데, 의외로 둘 다 반색하며 찬성을 표했다.

-전 형님을 따르기로 이미 맹세한 몸입니다. 게다가 어차피 가문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명성이 불가피한 것, 전장에서 제 이름을 높인다면 제 목표도 더 가까워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러스의 대답.

-전 이미 레펜 씨의 뜻에 찬성했다고 했잖아요. 뭘 이제 와서? 그리고 유적 탐사도 좋지만, 역시 순례자라면 사람들 사이에 있어야죠.

이것이 실란의 대답.

둘 다 흔쾌히 레펜하르트를 따르기로 결심한 이상 거리낄 것이 없다. 레펜하르트 일행은 바로 유벨을 찾아 이곳 델피아 자작령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계획대로 유벨 왕자와 접선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때마침 여관 안주인이 푸짐한 음식을 들고 홀 안으로 들어왔다.

"식사 준비했습니다요. 많이들 드십쇼~."

타오반 상회와 연결되어 있는 레펜하르트 일행 덕분에 이 여관은 때아닌 횡재를 누리고 있었다. 식량이 없다는 걸 뻔히 알고 있는 레펜하르트는 아예 처음부터 타오반 상회를 통해 미리 이곳에 식재료를 몽땅 갖다 놓으란 의뢰를 해 두었다. 이들 입장에선 하늘에서 음식이 뚝 떨어진 격이었다. 지금 크로방스 왕국에서는 돈보다도 식량이 더 귀하다. 여관 주인 부부는 마치 레펜하르트 일행이 인세에 내려온 구세주라도 되는 것처럼 극진히 굴고 있었다.

"필요한 것 있으면 얼마든지 말씀만 하십시오."

"네, 수고하세요."

예의 바른 실란이 일행을 대표해 감사 인사를 건넨다. 안주인이 송구스러워하며 다시 들어가자 일행은 때늦은 저녁 식사를 시작했다. 에일 주를 벌컥벌컥 마시다 말고 문득 실란이 물었다.

"아, 그런데 레펜 씨. 궁금한 게 있는데요."

"응? 뭔데?"

"우리한테 금화 십만 닢이라는 거액이 있었어요?"

실란이 계산해 보기로, 그들 일행의 재산을 다 합쳐도 금화 팔만 닢을 넘지 않았다. 그런데 레펜하르트는 자신 있게 십만 닢을 부른 것이다. 피니아가 곁에 있었으니 거짓말은 아닐 터였다. 하지만 레펜하르트의 성격 상 일행 몰래 돈 꼬불쳐 놓을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가진 의문이었다.

레펜하르트가 씨익 웃었다.

"그러니까 금화 십만 닢이 아니라 '금화 십만 닢에 해당하는 곡물'이잖아."

현재 타오반 상회는 레펜하르트의 투자 덕분에 막대한 이익을 얻고 있었다. 차탄 공국 내에서 레펜하르트가 벌인 일―공국 2위의 대상단 회주를 가차 없이 죽여 버린 일―에 대해 감탄한 시볼트는 그의 식견이 남다름을 알아채고, 아예 상단의 모든 힘을 털어 곡물을 사 크로방스 왕국으로 옮겼다. 만약 대기근이 오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망해 버릴 위험한 짓이었지만 시볼트는 과감히 계획을 이행했다. 어차피 레펜하르트가 아니었다면 망하기는 마찬가지, 그렇다면 인생의 기회로 여기고 한번 도박을 해 보자는 심보였다.

다행히 도박은 성공했다. 그리고 시볼트는 순식간에 차탄 공국 2위의 대상회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그런 그가 레펜하르트에게 고마움과 경외심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뭐, 그렇다고 레펜하르트를 상회의 주인으로 모신다거나 하는 개념 없는 짓을 저질렀다는 소리는 아니다. 아무리 고마워도 그는 상인인 것이다. 대신 그는 레펜하르트에 한해서, 그가 곡식을 구입할 때는 현 시가가 아닌 구입 원가대로 판매할 것을 약속했다. 상단을 살리고 크게 키울 수 있게 해 준 은인에 대한 상인다운 보답이었다.

즉, 레펜하르트가 말한 '금화 십만 닢에 해당하는 곡물'은, 사실은 끽해야 금화 삼사천 닢 정도면 구입 가능한 양인 것이다.

이야기를 듣고 난 틸라가 혀를 찼다.

"묘하게 사기 같은데요, 그거."

완전히 짜고 치는 도박이 아닌가? 레펜하르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어때? 거짓말은 안 했잖아?"

피니아조차도 그의 말에서 거짓을 찾지 못했으니 확실히 거짓말은 아니다. 본인의 생각과 달리 레펜하르트도 은근 사기꾼 기질이 있는 것 같았다. 키득거리다가 문득 러스도 표정을 굳히고 물었다.

"저도 궁금한 게 있습니다, 형님."

닭다리를 으적으적 씹으며 레펜하르트가 러스를 돌아보았다.

"여섯 명의 오러 능력자라고 하셨잖습니까?"

"그랬지."

러스가 손가락을 꼽으며 셈을 시작했다.

"형님이랑 저, 그리고 드워프 오러 유저가 셋...."

오른손을 다 접은 러스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섯 명뿐인데요? 혹시 엘프 중에도 제가 모르는 오러 능력자가 있습니까?"

"아, 물론 엘프들에게도 오러 능력자는 있지만...."

그가 기억하는 엘프 오러 유저는 한 명뿐이었다. 그리고 그 엘프 오러 유저와 전생의 마왕 레펜하르트는 그리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아군이긴 하지만 친구는 아닌, 그런 관계?

'아무래도 설득하기 힘든 타입이라 지금 시점에서 찾아가긴 좀....'

레펜하르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엘프는 아니다. 그리고 나도 저 숫자엔 포함되지 않아. 난 어디까지나 뒤에서 움직일 뿐, 전면으로 나설 생각은 없거든."

러스가 더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둘이 비잖습니까?"

레펜하르트는 에일 주가 든 잔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시원하게 목을 축인 뒤 그가 눈을 빛냈다.

"괜찮아. 오크 대투사, 칼켄과 스탈라가 합류할 테니까."

"...오크요? 오크들 중에서도 오러 능력자가 있습니까?"

러스뿐 아니라 실란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같은 노예 종족이라도 엘프나 드워프에 비해 오크들은 멍청하다는 인식이 강했다. 그리고 실제로도 평균적으로 멍청한 이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런 오크에게도 위대한 검의 혼을 일깨운 자가 있단 말인가?

놀란 눈빛을 느끼며 레펜하르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라키드 산맥 남동쪽으로 보름쯤 되는 거리에 광야가 하나 있다. 인간 아닌 종족이 시련의 땅이라 이름 붙인 대지지. 그곳에 옛 전통을 그대로 보존한 오크들이 있다."

모든 야성을 잃은 겁 많은 오크 노예가 아닌, 오로지 야만성만을 키워 흉포할 뿐인 오크 검투사도 아닌, 이성과 야만이 절묘하게 결합해 긍지 높은 전사의 영혼을 유지하고 있는 이들.

"푸른 곰 부족이라 하지."

그리고 그들을 이끄는 수장이 바로 위대한 오크 대투사, 칼켄과 스탈라였다. 부부이기도 한 이들은 전생에서, 이미 노년이 되었음에도 엄청난 전투력으로 레펜하르트의 군세를 이끌곤 했다.

심지어 지금 시대에서는 전성기의 육체를 지니고 있을 터, 과연 지금의 그들이 얼마나 강할 지는 레펜하르트라 할지라도 짐작이 가질 않았다.

'그러고 보니 타시드도 그곳에 있겠군. 그 녀석, 많이 컸으려나?'

문득, 전생의 그 우락부락한 오크 전사와 왜소한 어린 오크 소년의 얼굴이 동시에 떠올랐다. 레펜하르트는 그리움에 히죽 웃었다.

러스가 믿기지 않는다며 고개를 저었다.

"물론 오크 검투사들 중엔 제법 쓸 만한 자들이 보였습니다만... 그렇다 해도 오크가 그렇게 강할까요?"

레펜하르트가 정색을 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아는 한 그들은 지상 최강의 전투 집단이다. 인간과 엘프, 드워프를 모두 포함한다 할지라도!"

<5권에서 계속>

5권

제15장 푸른 영혼의 전사들

1

그라임 왕국 최북단에 위치한 영구 동토, 프리즈랜드.

만년설이 끝없이 이어진 대설원의 황량한 계곡 사이에서 십여 명의 인원이 야영을 하고 있었다. 두꺼운 털가죽으로 짠 천막 세 개를 쳐 놓고, 계곡의 절벽을 방풍 삼아 그들은 불어오는 북풍을 피해 모닥불을 쬐는 중이었다.

두툼한 털가죽 모자를 쓴 노인이 곱은 손을 덜덜 떨며 허연 입김을 불어댄다.

"후우, 후우... 춥구먼."

함께 불을 쬐던 거한이 노인에게 추궁하듯 말했다.

"좀 더 화력을 높일 수 없습니까, 마법사 할?"

모닥불이라고는 했지만 불길을 피우는 장작 같은 것은 없었다. 이 끝없는 설원에서는 그 흔한 나뭇가지 하나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휴대할 수 있는 용량이 한정되어 있는데 장작을 따로 들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 그래서 할의 마법의 불길로 이렇게 애써 추위를 이겨 내고 있었다.

"참게나. 밤새도록 불을 피워야 하는데 벌써 마력을 낭비할 순 없지 않은가."

"그렇군요."

이들은 마법사 할이 이끄는 그라임 왕국 출신의 유적 탐사대였다.

올해로 쉰일곱 살이 되는 늙은 마법사 할은 이름난 유적 탐사자였다. 마법 실력은 6서클 후반으로 나이에 비하면 평범하다 할 수 있으나, 할의 고대어 해독과 정보 해석 능력은 출중하기 그지없었다.

이미 세 개의 유적을 탐사해 명성이 자자한 그가 이번에 도전한 곳은 프리즈랜드 오지에 위치한 던전, 살카나.

반년에 걸친 준비 끝에 할은 탐사대를 이끌고 이 얼어붙은 대지에 도전했다. 그리고 두 달이란 시간 동안 무수한 고초를 겪으며 결국 살카나 유적을 탐사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불을 쬐던 거한, 탐사대의 부대장 격인 검사 아론이 문득 야영지를 둘러보았다. 할이 피워 놓은 세 개의 작은 모닥불마다 서너 명의 인원이 달라붙어 바들바들 떨고 있다. 모두들 머리며 수염에 하얀 서리가 잔뜩 끼어 있어 이 추위가 어느 정도인지 여실히 보여 주었다.

아론이 한탄하며 중얼거렸다.

"올 때는 서른 명이 넘었거늘 생존자는 열 명뿐이라니...."

지난 여정을 떠올리며 아론은 몸서리쳤다.

은의 시대 유적들은 대부분 험하기 그지없는 오지에 위치해 있다. 하지만 프리즈랜드는 그중에서도 격이 다른 곳이었다.

피마저 얼어붙는 듯한 맹렬한 추위.

쉴 새 없이 불어닥치는 눈보라.

굳건한 의지마저 꺾어 버리는, 끝없이 펼쳐진 대설원.

프리즈랜드의 끔찍한 자연 환경은 그 자체로 최악의 마물이었다. 이곳을 통과해 살카나 던전까지 도착하는 데만 세 명의 동료를 잃어야 했다. 할의 탐사대가 이미 세 개의 던전을 경험해 본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 아니었다면 결코 살카나까지 도착하지도 못했으리라.

그리고 간신히 도착한 던전 살카나 역시 이제껏 겪어 왔던 유적들과는 격이 달랐다.

가공할 마법 함정들, 여태껏 만나 보지 못했던 강력한 마물들 앞에 할의 탐사대는 지옥을 맛보아야만 했다. 간신히 던전 중반까지 진행하긴 했지만 그 대가로 함께했던 수많은 동료들, 강력한 마법사와 성직자들마저 모두 잃었다. 그 상황에서 전멸하지 않고 다시 던전을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은 실로 행운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너무 피해가 크군요."

잃은 동료들을 떠올리며 아론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말에 다들 숙연한 표정을 짓는다. 할이 힘없이 웃으며 모두를 격려하듯 말했다.

"그래도, 이번 원정은 실로 많은 것을 얻지 않았나."

그러자 힘든 와중에서도 모두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많은 피해를 입었고, 탐사도 절반 정도밖에 진행하지 못했을 정도로 살카나 던전은 엄청난 곳이었다. 그리고 그런 만큼이나 대가도 컸다.

불을 쬐던 탐사대원들이 흐뭇한 표정으로 천막 안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온갖 은의 시대 유물들이 가득 채워진 무한의 주머니가 무려 열 개가 넘게 놓여 있었다.

그 전리품들을 보자 아론도 좀 기운이 났는지 목소리가 밝아졌다.

"하긴, 이제껏 얻은 유물을 다 합친 것보다도 이번에 한탕 터트린 것이 훨씬 많으니까요."

오지 중의 오지여서 그런지 살카나 던전은 이제껏 발견되지 않았던 신묘한 유물들이 상당했다. 그 귀하다는 무한의 주머니는 흔히 보였고, 강력한 마법검이며 갑옷 등의 무구도 수두룩하게 얻었다. 하나하나가 은의 시대 유물 중에서도 최상위의 것들, 이것들을 시장에 내놓으면 실로 엄청난 재산이 될 터였다. 살아남은 전원이 은퇴해 남은 평생 떵떵거리고 살기에 충분한 금액이었다.

하지만 지금 마법사 할에게 중요한 것은 저 유물의 가격 따위가 아니었다.

할이 문득 품안을 매만졌다. 추위에 벌벌 떨면서도, 노인이 희열에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

"흐흐흐, 이것이 학회에 발표된다면 엄청난 파장이 일 게야."

그가 매만지고 있는 것은 살카나 유적에서 발견된 서적 중 하나였다. 할 일행은 살카나에서 석판 몇 개와 빛바랜 서적들 역시 발견했다. 다른 대원들은 별 값어치도 없어 보이는 그 유물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할에게는 천금보다도 더한 가치를 지닌 것들이었다.

'고대어 수준이 너무 높아 제대로 해독하지는 못했지만, 대충 훑어본 것만으로도 내용을 짐작할 수는 있었지.'

이 서적은 비밀에 쌓여 있던 은의 시대, 그 신비한 고대인들에 대한 기록이었다!

수천, 어쩌면 수만 년 전일지도 모를 아득한 고대, 은의 시대.

그 시대의 유물들은 대부분 세월의 흐름 속에 풍화되고 사그라져 얼마 남지 않았다. 그나마 발견되는 것은 그중에서도 유독 내구도가 높은 유물들뿐이다. 군용 병기일수록 내구도에 신경 쓰는 법, 그래서 던전에서 발견되는 유물들은 대부분 전투적인 능력을 지닌 것들뿐이었다.

하지만 살루카 던전은 달랐다. 프리즈랜드라는 가혹한 환경은 생명이 살아남기에는 최악이지만, 유물이 보존되기에는 최상의 환경이었다. 원래대로라면 흔적조차 남지 않았을 은의 시대 사료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던 것이다.

'돌아가는 대로 이 사료들의 해독에 매달려야지. 기필코 은의 시대, 그 고대인들에 대한 베일을 벗길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흐흐흐.'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할의 심장은 젊은이처럼 맹렬히 뛰고 있었다.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사실을 발표한다면 할에게 얼마나 큰 영광이 주어질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학자로서, 인류의 역사 속에 불멸의 명예를 얻을 수도 있으리라!

"어서 그라임 왕국으로 돌아가세. 한시바삐 이번 탐사 결과를 학회에 발표하고 싶구먼."

닦달하는 할을 보며 다들 동의를 표했다.

"물론입니다."

학자의 그것은 아니겠지만, 다른 이들도 다가올 장밋빛 미래에 흥분하긴 마찬가지였다. 유물을 팔아 거부가 될 꿈에 부풀어 탐사대원들이 서로의 어깨를 두드리며 기뻐하던 때였다.

"음?"

탐사대원 중 한 명이 계곡 저편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맹렬히 부는 북풍, 그 자욱한 눈보라 속에서 흐릿하게 사람의 그림자가 비치고 있었다.

다들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뭐지?"

사람의 그림자가 늘어났다. 숫자는 모두 넷, 다들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이 혹독한 프리즈랜드의 환경에서는 몬스터조차도 살아남을 수 없다. 그들 외의 다른 생명체가 이곳에 있을 리 없는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들의 야영지 코앞까지 다가왔다!

다들 헛것을 보는 것인가 싶어 혼란에 빠진 표정을 지었다. 아론이 검을 빼들며 고함을 질렀다.

"누구냐!"

☆ ☆ ☆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지닌, 놀라운 미모의 청년이었다.

그 청년의 옷차림을 본 순간 할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청년은 평범한 레더 아머 차림에 망토를 두르고 허리에 장검을 차고 있었다. 복장 자체야 도시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지만 이곳은 영구 동토, 프리즈랜드다.

'어찌 저런 복장으로 이 추위 속을 저리 태연하게!?'

뒤이어 다른 그림자들의 형태도 뚜렷해졌다. 적갈색 로브를 걸친 붉은 금발의 여인과 새까만 전신 갑옷을 걸친 20대의 청년, 그리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황금빛으로 번쩍거리는 풀 아머의 금발 기사였다.

어느 누구 하나, 이 추위 속에서 버틸 수 있는 옷차림이 아니었다. 하다못해 털외투 하나 걸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도 추워하는 기색을 보이는 이는 한 명도 없다.

다들 어이가 없어 눈만 껌벅였다. 아론이 간신히 정신을 차리며 물었다.

"그, 그대들은 누구요? 그리고 대체 어떻게 이곳에?"

청년이 아론을 빤히 바라보았다. 갑자기 싯누런 빛이 아론의 눈앞을 가득 메웠다.

"아?"

아론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동시에 그의 목에 붉은 선이 천천히 생겨났다. 적색의 선 사이로 핏물이 조금씩 흐르더니, 머리가 스르륵 미끄러지며 아래로 떨어진다.

퉁!

아론의 머리가 얼어붙은 땅바닥 위를 데굴데굴 구른다. 극심한 추위 탓에 피는 조금 흐르려다 바로 싸늘히 식어 얼어붙는다.

잠시 후, 할이 비명을 질렀다.

"으, 으에엑!"

아론이 죽었다! 다른 탐사대원들도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정신없이 무기를 꺼내 들었다.

"아론 형님!"

"적이다!"

"유물을 노린 도적들이다!"

그제야 상황이 파악된 탐사대원들이 분노한 기세로 청년에게 달려오기 시작했다. 청년이 뒤에 서 있던 일행을 돌아보더니 차갑게 뇌까렸다.

"모두 죽이시오."

검은 갑옷의 청년과 황금빛 기사가 동시에 대답했다.

"네!"

"명대로!"

두 기사가 검을 뽑으며 탐사대원들에게 돌격했다. 검은 칼날이 춤을 추고 황금빛 장검이 피를 뿌렸다. 비명이 연달아 터지며 검붉은 선혈과 선홍빛 내장이 여기저기서 왈칵 쏟아진다.

"으악!"

"커헉!"

순식간에 탐사대원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져간다. 할이 당황하며 마법을 준비했다.

"차, 창공의 뇌전, 선더 볼트 애로우!"

3서클 뇌격 주문, 선더 볼트 애로우가 할의 주름진 손아귀에 맺히며 전격을 방전시켰다. 막 그가 마법을 쏘는 순간, 로브를 걸친 여인이 낭랑한 음성을 터트리며 수인을 맺었다.

"파괴의 힘, 순리대로 흐르라! 회피의 로드!"

회색빛 마법의 막대가 여인의 정면에 생성되며, 전격의 화살이 모조리 그 막대로 빨려 들어갔다. 할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저 여인이 구사한 마법은 3서클의 마력 흡수 주문이었다. 그녀는 저토록 어려 보이는 나이에 할과 비슷한 수준의 마법사였던 것이다.

"이, 이럴 수가!"

그러는 와중에도 탐사대원들은 죽어 가고 있었다. 이들 역시 던전 탐사를 통해 전투에 이골이 난 이들, 그런데도 누구 하나 저 두 검사의 상대가 되질 않았다. 다들 원통함에 눈을 부릅뜬 채 싸늘한 시체가 되어 갈 뿐이었다.

결국 채 몇 분 지나지도 않아, 할 외의 모든 탐사대원들이 죽음을 당했다. 할이 청년을 바라보며 공포에 질려 소리쳤다.

"유물을 원한다면 모두 가져가시오! 다 드리겠소!"

청년이 쓴웃음을 지으며 할에게 다가섰다. 할이 품속의 서적을 만지며 뒷걸음질을 쳤다.

'아, 안 돼....'

유물은 아깝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발견한 이 위대한 진실, 이 역사적인 사료를 공표하지도 못한 채 죽을 수는 없었다. 할이 애원하듯 말했다.

"부디 목숨만은 살려 주시오. 나 같은 노인을 죽여 보았자 그대들에게는 아무 이득도 없지 않소?"

그때, 청년이 입을 열었다.

"미안하군, 마법사."

청년이 장검을 들었다. 차가운 목소리가 할의 귓가를 후벼 팠다.

"우리가 온 이유는 사실 당신 때문이거든."

차가운 칼날이 할의 복부를 깊숙이 찔렀다. 극심한 통증이 할의 뇌를 강타했다.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아악!"

☆ ☆ ☆

차가운 북풍이 주검 가득한 계곡 사이로 냉기를 뿌리며 흘러간다. 그 참혹한 광경을 바라보던 로브를 걸친 여인, 필레나가 검은 머리의 청년을 향해 그의 이름을 불렀다.

"테스론...."

필레나가 시무룩한 얼굴로 테스론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칭얼대듯 물었다.

"꼭 이래야만 했던 거야?"

"은의 현자의 명령이다."

딱딱한 목소리로 대꾸하며 테스론이 할의 시체로 다가갔다.

"이들은 열어서는 안 될 문을 열었어."

우울해 보이는 필레나의 표정을 무시하며 청년, 테스론은 시체를 뒤졌다. 한 권의 빛바랜 서적을 꺼내 품에 넣으며 말을 이었다.

"이것은 알려져서는 안 될 역사, 모든 것은 인류의 수호를 위해서다."

필레나가 이해 못 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은의 현자가 인류의 수호자라는 것은 들었지만... 그래도 죄 없는 이들을...."

"인류 전체를 위한 작은 희생일 뿐이다."

차가운 목소리로 테스론이 필레나의 말을 잘랐다. 그때 검은 갑주를 걸친 기사가 테스론 곁으로 다가왔다. 테스론이 그를 보며 물었다.

"어떤가, 스테반? 버서커 아머는 쓸 만한가?"

검은 기사가 히죽 웃으며 대꾸했다.

"더 바랄 나위가 없습니다, 테스론 경."

검은 기사의 정체는 스테반 폰 레판토 알티온, 알티온 후작가의 차남이자 레판토 자작의 작위를 지닌 이였다.

조상의 마검 알티온을 찾는 와중에서 정체를 감춘 권왕 레펜하르트와 조우한 스테반은, 그 이후 자격지심에 시달린 나머지 주색잡기에 빠져 버렸다. 비슷한 나이에 이미 경지에 오른 오러 유저를 보고 나니 모든 수련이 허무해진 것이다.

한때 바실리 왕국에서 단호의 기사란 칭호로 불리던 이 전도유망한 기사는 그렇게 폐인이 되어 잊혔고, 그저 술로 시름을 달래며 레펜하르트에 대한 막연한 증오만을 품고 있었다.

그런 스테반에게 다가온 것이 은의 현자, 테스론이었다.

테스론은 약속했다. 그를 따르면 오러 능력자와도 필적할 위대한 힘을 주겠다고. 그 힘으로 레펜하르트를 무찌르게 해 주겠다고.

그리고 받은 것이 바로 이 새까만 전신 갑옷이었다.

마갑 엘드라드와 맞먹는 특급 아티팩트, 버서커 아머.

각종 마법을 구사하게 해 주는 엘드라드와 달리 버서커 아머의 특징은 하나뿐이었다.

끝없이 빠르고, 강하고, 튼튼하고, 지치지 않게 해 주는 것.

전설 속 광전사처럼 싸울 수 있으면서도 명철한 이성을 유지시켜 주는 이 갑옷의 위력에 스테반은 흠뻑 매료되었다. 희망이 생겨나자 주색잡기도 모두 끊었다. 모든 시간을 버서커 아머를 다루는 것에 투자했다.

'아직은 완벽하게 버서커 아머를 다루지 못하지만....'

이 갑옷이 온전히 그의 것이 되는 날, 그 건방진 천민 오러 능력자는 자신의 발아래 무릎 꿇게 되리라!

복수로 이를 가는 스테반을 향해 침착한 목소리가 전해졌다.

"복수를 꿈꾸는 것은 그대만이 아니오, 스테반 경."

"아, 유서스 경."

스테반은 쓴웃음을 지으며 황금 갑옷을 걸친 기사를 돌아보았다. 확실히, 레펜하르트에게 설욕하려는 이는 그 하나뿐이 아니었다.

이름 높은 그라임의 황금기사, 유서스 폰 테네스.

하지만 그 위명은 현재 상당히 빛이 바래져 있는 상태였다. 권왕 레펜하르트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탓이었다.

자신처럼 테스론에게 몸을 의탁한 유서스를 보며 스테반은 부드러운 눈빛을 보냈다.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유서스 경?"

"하하, 스테반 경. 아무리 그래도 이런 잡배들을 상대로 다칠 리가 있겠소?"

"그건 그렇지요."

따지고 보면 경쟁자인 셈이지만, 현재 스테반과 유서스는 꽤나 사이가 좋았다. 같은 처지에 같은 적을 지닌 이들이니만큼 동병상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유서스는 레펜하르트 '따위'와 달리 이름 높은 귀족의 혈통을 지녔고 명성 역시 높았던 이였다. 뼛속까지 귀족인 스테반에게 있어 실로 '친구로 사귈 만한 자'였다.

"그나저나...."

테스론에게 다다가며, 유서스는 착용하고 있던 마갑 엘드라드를 검집의 형태로 돌려보냈다. 한때 레펜하르트에게 당해 박살 직전까지 갔던 엘드라드였지만 자가 치유 능력과 테스론이 준 은의 시대 유물을 이용해 지금은 완전히 복구되어 있었다.

갑옷을 벗고 가뿐한 차림이 된 유서스가 몸을 둘러보며 감탄했다.

"이 온기의 목걸이는 정말 효과가 좋군요. 이 눈보라 속에서도 마치 봄바람을 맞고 있는 것 같으니."

테스론 일행 전원이 목에 걸고 있는 이 온기의 목걸이는 어떠한 추위에서도 일정 체온을 유지시켜 주는 은의 시대 아티팩트였다. 세상에는 결코 알려지지 않은, 오로지 은의 현자들만이 가지고 있는 기물이다.

유서스가 천막 안에 널려 있는 무한의 주머니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 유물들은 어찌합니까, 테스론 경?"

"쓸 만한 것은 거두고 나머지는 팔아 버리지. 하지만 이 중 명단에 있는 것은 모두 회수해 은의 현자가 보관한다."

테스론이 미리 받아 외워 뒀던 명단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이 살카나 던전에서 나온 유물 중에는, 현재의 인류에게 절대 허락되어서는 안 될 것들이 끼어 있었다.

"은의 현자는 인류의 수호자, 고대의 악으로부터 인류를 지켜야 할 사명이 있다. 은의 시대 유물들 중엔 위험한 성능을 가진 것들도 많으니, 올바른 관리자가 정당하게 관리하지 않으면 혼돈이 올 것이다."

테스론의 말에 유서스가 목에 건 목걸이를 매만지며 의아해했다.

"그건 알고 있지만 도대체 기준이 뭔지, 원...."

그들의 목에 건 이 온기의 목걸이는 물론 대단한 기물이었다. 하지만 이게 인류에게 허락되어서는 안 될 정도로 위험한 성능인가? 마갑 엘드라드나 버서커 아머같은 아티팩트도 세상에 내보이면서 온기의 목걸이는 안 된다니,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는 것이다.

유서스를 보며 테스론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은 그도 대체 은의 현자들이 무슨 기준으로 유물의 경중을 가리는지 모르고 있었으니까. 은의 현자라곤 하지만, 테스론 역시 그들의 비밀에 대해선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

하지만 그걸 티 낼 수는 없는 일, 테스론은 모른 척 넘어가며 무한의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미리 받은 명단대로 유물을 가리던 중 문득 유서스가 눈을 빛냈다.

"음? 이거 혹시 엘류시온의 목소리 아닙니까, 테스론 경?"

유서스가 손에 든 것은 네모난 검은 블록이었다. 테스론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응? 그냥 검고 네모난 블록일 뿐이지 않은가? 어째서 엘류시온의 목소리라 생각하는 것이지?"

"그야...."

유서스가 블록 옆면에 새겨진 고대어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여기 새겨진 문양이 똑같으니까요."

고대어에는 전혀 소양이 없는 유서스지만, 그는 기사답게 매서운 눈썰미를 지니고 있었다. 읽을 수야 없지만 똑같은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닌 것이다.

"으음...."

테스론은 살짝 신음을 흘렸다. 역시 엘류시온의 목소리는 현 시대의 인류에게 알려져서는 안 될 기물이었던 것인가? 그럴 법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왕 레펜하르트가 그토록 아끼는 기물이니까.

"이게 또 하나 있는 줄은 몰랐군."

대충 대답하며 엘류시온의 목소리를 분류하려다 말고 문득 테스론이 눈을 빛냈다.

'마왕이 그토록 중시한 걸 보면 이것 역시 보통 아티팩트가 아닐 터....'

테스론은 다른 이들의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검은 블록을 챙겼다. 그리고 무한의 주머니들을 챙겨 들며 일행에게 말했다.

"그럼 돌아가도록 하세. 은의 현자에게 반납할 것들을 제하고도 꽤 유물들이 남겠군, 이거."

테스론이 농담조로 말했지만 반응은 시큰둥했다. 다들 잘사는 집안이라 딱히 유물을 잔뜩 얻었다 해서 그리 기쁠 것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은의 현자의 명령이라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을 학살했으니 기분이 좋지도 않았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돌아갈 차비를 하며 필레나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대체 알려져서는 안 될 역사란 게 뭐기에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은의 현자들은?"

그녀를 바라보며 테스론은 입술을 깨물었다.

"알려 하지 마라, 관심 갖지 마라, 필레나."

아무렴, 결코 알려 해서는 안 된다.

알려지지 않은 역사를.

현재 노예 종족일 뿐인 엘프와 드워프, 오크와 트롤들에 대한 진실을.

그들에 대한 진실은 현재의 인류를 위험에 몰아넣을 뿐이다.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인류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진실일 뿐이다.

테스론이 엄숙히 선언했다.

"그것을 알 자격이 있는 이들은 은의 현자뿐이다."

2

크로방스 왕국과 바실리 왕국의 동부 국경을 이루는 거대한 산맥, 글로텐. 그 험준한 산세를 넘어가면 광활한 초원이 펼쳐진다. 끝없이 이어진 평원과 바위산이 지평선을 이루는 이곳은 아직 인간의 손이 거의 닿지 않은 장소, 페틀랜드 평원이다.

비교적 산맥과 인접한, 작으나마 계곡과 호수가 있어 경작이 가능한 지역에는 그래도 인간의 마을이 남아 있었다. 인간의 왕국이 세운, 국경 관문으로 통하는 길목에 자리 잡은 유목민과 행상인들의 마을이었다. 이들은 건조한 황야를 누비며 양과 염소를 치거나, 관문에 자리 잡은 국경 수비대를 상대로 장사를 하며 생계를 꾸려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조차도 그 이상 동쪽으로 향하지는 못했다. 밤낮의 기온이 극단적으로 바뀌는 가혹한 기후, 수시로 양과 염소를 노리는 몬스터들의 존재는 혹독한 삶 속에서 강인하게 단련된 유목민들조차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페틀랜드 평원 동쪽을 따로 데스트란드, 유목민들의 언어로 죽음의 땅이라 부르며 가까이 하지 않았다.

그 어떤 용맹한 양치기조차도 접근하지 않는 페틀랜드 평원 동쪽, 죽음의 대지 데스트란드.

그곳에서 지금 한 무리의 양과 염소가 한가하게 풀을 뜯고 있었다. 그리고 거구의 장정 한 명이 웃통을 벗은 채 근처 바위에 앉아 한가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인간이 보았다면 눈을 의심할 광경이었다. 데스트란드는 단순한 들짐승 정도가 아니라, 몬스터라 불리기에 합당한 강력한 괴물들이 들끓는 곳이다. 그렇기에 어떤 양치기도 설사 모든 풀이 말라붙었을지언정 이곳으로 양을 치러 오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장정은 이 위험한 곳에서도 평온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알고 보면 그리 희한한 일도 아니었다.

그는 인간이 아니라 오크였다.

2미터 가까운 거구, 나무 등걸처럼 꺼칠꺼칠한 녹색 피부에 납작한 들창코, 멧돼지처럼 아래턱에서 돋아난 섬뜩한 어금니를 지닌 이 오크는 그야말로 오크 특유의 모습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균형이 맞아 그리 흉악해 보이지 않는다. 인간 기준으로 보아도 제법 사내다운 멋이 느껴질 법한 외모랄까?

여기저기 듬성듬성 나 있는 풀들을 열심히 뜯고 있는 염소들을 살피다 말고, 그 녹색 피부의 오크 사내가 늘어져라 기지개를 켰다.

"하아암, 어째 오늘은 소식이 없네."

사내의 목소리에 바위 밑에서 불쑥 커다란 늑대 머리가 튀어나왔다. 사납게 생긴 늑대였는데 그 사이즈가 어마어마했다. 체구 1.2미터에 신장이 3미터에 달하는 몬스터, 다이어울프였다.

황소도 한입에 물고 간다는 이 사나운 몬스터가 오크 사내 근처로 가더니 개처럼 머리를 비비며 낑낑대기 시작했다.

"끼잉, 끼잉."

"어허! 이놈이! 한 것도 없이 밥부터 찾나?"

머리를 퉁 쳐 주니 진짜 개처럼 깨갱대며 꼬리를 만다. 자신의 발치에 엎드리는 다이어울프를 보며 오크 사내가 혀를 찼다.

"...아니, 그래도 한때는 초원의 제왕이었던 놈이 왜 이리 비굴해졌냐?"

그러자 다이어울프가 고개를 슥 들더니 '쳇, 안 통하네.'란 표정으로 혀를 날름 내밀고 위풍당당하게 바위 밑으로 내려가 버렸다. 오크 사내가 한 번 더 혀를 찼다.

"으, 저 영악한 놈."

그가 이 검은 털의 다이어울프, 흑왕을 길들인 것은 반년 전의 일이었다. 오크에게 있어 다이어울프를 길들인다는 것은 명예로운 용사의 증명이다. 모든 오크들이 울프 라이더가 되기를 꿈꾸지만 진정한 전사만이 이 흉폭한 몬스터에게 자신을 각인시켜 따르게 할 수 있다.

초원의 제왕이라 불리던 이 흑왕을 쫓은 것만 일주일, 흑왕의 반격에 시달린 것이 사흘, 그리고 반나절의 사투 끝에 그는 간신히 흑왕을 꺾었다. 그리고 흑왕에게 전사의 혼을 각인시켜 자신을 따르게 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어째 이놈의 흑왕은 보통 다이어울프와 달랐다. 영리한 것이 지나치달까? 말귀도 척척 알아듣고 사람처럼 구는 건 좋은데, 정도가 지나쳐 능글맞기까지 하다.

'어째 가끔은 내가 낚인 기분도 들고 말이지....'

고개를 젓다 말고 문득 오크 사내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음?"

바위 밑으로 내려가던 흑왕도 귀를 쫑긋 세웠다. 둘은 동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모습에 조금 떨어진 곳에서 양을 돌보던 다른 오크 사내 둘이 놀란 얼굴로 뛰어왔다.

"무슨 일이지?"

"드디어 나타났나, 타시드?"

오크들이 일제히 타시드의 시선이 향한 곳을 노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커다란 그림자가 들판 저편, 바위산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터틀 라이온, 거북이 같은 몸통에 사자의 머리와 팔다리를 지닌 육식 몬스터였다. 나이가 상당히 들었는지 크기만도 흑왕의 두 배에 가까워 보였다.

크허어어엉!

터틀 라이온이 포효를 터트리며 양들을 향해 맹렬히 달려오기 시작했다. 포효 소리에 얼어붙은 양이며 염소들이 도망칠 생각조차 못 한 채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메마른 기후에서 수분 증발을 줄이기 위해 진화한 이 몬스터는, 외견적으로는 우스워 보일지 몰라도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거북의 방어력과 사자의 공격력을 겸비한, 인간 병사 수십 명을 쉽게 쓸어버릴 수 있는 가공할 괴물인 것이다.

하지만 어째 오크들은 그리 긴장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오크 사내, 타시드가 곁에 놓은 거대한 참마도斬馬刀를 들어 올리며 히죽 웃었다.

"흑왕!"

다이어울프가 기다렸다는 듯 타시드의 발치에 엎드린다. 고삐를 잡고 날렵하게 흑왕의 등에 올라탄 타시드가 오크어로 외침을 터트리며 박차를 가했다.

"탈크라! 케차트라카!"

해석하면 '밥 왔다! 불 피워!'쯤 되겠다. 흑왕에 탄 채 타시드가 맹렬한 속도로 초원을 질주해 갔다. 투박한 참마도를 높이 든 채 타시드가 우렁찬 외침을 터트렸다.

"다카르!"

참마도의 이름을 불러 무기의 혼을 일깨운다. 타시드의 애병, 다카르의 검신에 희미한 빛이 맴돌았다. 오러와는 전혀 다른 방식의, 자신의 투기를 검에 씌우는 것이 아니라 검의 혼 자체를 끌어내는 오크 전사 특유의 용법이었다. 둔탁했던 참마도, 다카르의 칼날이 면도날처럼 예리해지며 섬뜩한 예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그렇게 검의 혼과 자신의 혼을 합일시키며 타시드는 질풍처럼 터틀 라이온을 향해 달려갔다. 막 염소 하나를 덮치려는 터틀 라이온의 앞을 날쌔게 가로막는다. 터틀 라이온이 분노와 경계의 포효를 터트렸다.

"크어허헝!"

흑왕도 송곳니를 드러내며 마주 울부짖었다.

"으르르릉!"

사나운 야수가 서로를 마주하며 상대를 살핀다. 순간 터틀 라이온이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몸을 날렸다. 동시에 앞발로 흑왕에 탄 타시드를 후려쳤다. 타시드가 참마도를 비껴들어 공격을 막았다.

터엉!

쇳소리가 울리며 타시드는 가뿐히 터틀 라이온의 공격을 막았다. 타시드의 두꺼운 팔 근육이 터질 듯 불끈거렸다. 하지만 밀리지는 않았다. 저 거대한 터틀 라이온의 모든 체중이 실린 일격을, 타시드도 그를 태운 흑왕도 가뿐히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크허어엉!"

분노한 터틀 라이온이 연거푸 앞발을 휘둘러 댄다. 계속 참마도, 다카르를 휘둘러 공격을 막아 가던 타시드의 눈이 일순간 불을 뿜었다.

"타아아앗!"

우렁찬 기합과 함께 투박한 참마도가 섬세한 궤도를 그리며 터틀 라이온의 목과 어깨를 동시에 베어 갔다. 화려한 3연속 베기가 허공에 선혈의 수를 놓았다.

피분수가 솟구치며 거대한 몬스터가 생을 잃고 서서히 침몰하기 시작한다. 뒤에서 백업을 위해 검이며 도끼를 들고 대기하던 다른 오크 전사 두 명이 화색을 띤 채 달려왔다.

"오오, 역시 용사 타시드!"

"이 정도면 당분간 굶주리지 않겠군!"

오크 전사들이 기뻐하며 쓰러진 터틀 라이온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등딱지 부분을 제거하고 가죽을 벗기는 손동작이 대단히 숙련되어 보였다.

사실, 이곳에서 살아가는 오크들에게 있어 양을 습격하는 몬스터는 재앙이 아니라 오히려 축복이었다. 도저히 유목만으로는 생활이 감당이 안 되기에, 간간히 이렇게 몬스터들이 습격해 주지 않으면 식량이 부족해지는 것이다. 오히려 이쪽이 주식이랄까?

물론 그 와중에 죽어 가는 오크들도 상당히 있었지만, 전사를 숭앙하는 이들에게 패배자를 위해 흘려 줄 눈물은 없다.

이 정도 크기의 터틀 라이온이라면 살코기만 발라도 한동안 먹고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게다가 등딱지며 가죽 역시 여러모로 쓸모가 많다. 타시드와 다른 오크 전사들은 신나게 해체 작업에 열중했다.

한창 피를 뽑고 가죽을 벗기고 있는데, 흑왕이 슬그머니 다가와 앞발로 터틀 라이온의 뒷다리를 툭툭 쳤다. 그리고 타시드를 돌아보며 이번엔 허벅지를 툭툭 친다.

"...뭐냐?"

퉁명스러운 타시드의 목소리에 흑왕이 코끝으로 뒷다리 부위를 가리켰다. 이미 흑왕과 영혼을 통한 타시드는 바로 이 다이어울프의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흑왕은 이리 말하고 있었다.

'대충 하고 빨리 내 몫 내놓으시지?'

"...옜다."

기막혀하며 뒷다리를 큼지막하게 썰어 던져 주니 흑왕이 좋아라 입에 문다. 그리고 이번엔 타시드의 어깨를 툭툭 쳤다. 누가 봐도 '오냐, 수고 많았다~.'라는 듯한 제스처였다.

"요물 같으니...."

저만치 떨어져 신 나게 뼈다귀를 뜯어 대는 흑왕을 보며 타시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초원의 제왕이라더니, 어째 힘이 아니라 정치력 쪽으로 왕 노릇한 게 아닌지 의심스럽다.

대충 들고 갈 채비를 끝내자 타시드가 짐을 어깨에 짊어지고 휘파람을 불었다.

"휘이이익!"

양과 염소들이 그 소리에 옹기종기 모여들기 시작했다. 동료들을 돌아보며 타시드가 벌떡 일어났다.

"자, 마을로 돌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