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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석양이 깔린 켈베른 성의 후원, 말라붙은 잔디밭 위에서 냉막한 인상의 청년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예리한 바스타드 소드를 양손으로 쥔 채 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린다. 순간 눈빛이 매섭게 빛나며 섬광이 허공을 가른다. 단순한 내려 베기. 하지만 자세와 호흡, 타이밍이 완벽해 중간 동작이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검의 달인이 보았다면 훌륭한 일격이라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리라.
그러던 중이었다. 후원으로 청년 기사 둘이 걸어오더니 러스를 보며 눈을 부라렸다.
"이봐, 러스. 대체 어제의 그 멍청한 짓은 뭐였던 거냐?"
그들은 어제의, 악마가 나타났을 때 행했던 러스의 무모한 돌진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그것은 러스뿐 아니라 테네스 기사단 모두를 위험에 빠트릴 수도 있을 위험한 행위였다. 당연히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러스는 들은 척 만 척 검만 휘두를 뿐이었다. 기사 중 한 명, 해리스 경이 발끈하며 외쳤다.
"이 자식아! 혼자 멋대로 설쳐 댔으면 최소한 사과 한마디는 해야 될 거 아냐!"
그러자 러스가 고개를 돌렸다. 섬뜩하기까지 한 차가운 눈빛이 해리스 경을 응시했다.
"나는 그 악마를 해치우려 했을 뿐이다."
동료를 위험에 빠트릴 뻔했다는 자각 따윈 조금도 보이지 않는 태도였다. 열불이 뻗친 또 다른 청년 기사, 파타인 경이 이를 갈며 외쳤다.
"누가 네놈더러 그 악마를 해치우라고 했더냐?"
둘 다 불만이 머리끝까지 뻗쳐 있었다. 이놈은 언제나 이랬다. 항상 명령을 거역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놈, 그런데도 별 처분이 없는 것은 그가 가주, 테네스 백작의 총애를 받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생아에 불과한 러스를 폴트 테네스는 이상할 정도로 아끼고 있었다. 심지어는 유서스 경이 그토록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테네스 기사단에 집어넣을 정도였다.
당연히 테네스 기사단의 그 누구도 러스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이 존경하는 단장, 유서스 경이 아니더라도 이 음침한 인상의 20대 청년은 도무지 좋아할 수가 없는 성격이었다. 사생아 주제에 정식 귀족이라도 된 양 사람을 무시하고 제대로 어울리지도 않으며 가주의 은총만 믿고 멋대로 설쳐 대니 다들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번에도 명령을 불복종하고 멋대로 세피아탄에게 덤벼들지 않았던가?
"단장님이 오실 때까지 기다리란 명령도 못 들었냐, 이 자식아?"
그러자 러스가 고개를 휙 돌리며 중얼거렸다.
"...나도 테네스의 검이다."
해리스 경과 파타인 경의 표정이 동시에 일그러졌다. 그런 그들을 향해 러스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살벌한 목소리로 뇌까렸다.
"불만이 있다면 결투를 신청하라. 받아 주겠다."
"크윽!"
둘 다 당장이라도 검을 뽑으려는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차마 뽑지는 못했다.
단순히 러스가 테네스 가문의 핏줄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핏줄이라고 해 봐야 사생아, 게다가 가주를 제외하고는 모두 싫어하는 놈이다. 결투로 베었다 해서 무슨 처벌 따위를 받을 리는 만무하다. 오히려 유서스 경이라면 몰래 칭찬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럼에도 둘 다 검을 뽑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러스가 강했으니까.
그가 배운 검술은 딱 하나뿐이다. 내려 베기, 그리고 그에 따른 호흡법.
나머지 검술은 모두 어설프기 짝이 없다. 하지만 그 어설프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유서스 정도의 강자가 보기에나 어설프다는 거지 일반 기사들이 보기엔 충분히 위력적인 것이다.
"더러운 들개 자식...."
이를 갈던 기사들이 결국 콧방귀를 뀌며 발걸음을 돌린다. 차가운 눈으로 멀어지는 그들을 바라보다 말고 러스는 다시 검을 들고 자세를 갖췄다. 그리고 검을 내려 벴다.
완벽한 호흡 속에서 검날이 허공을 가르며 완벽한 궤적을 낳는다.
만족스러운 감각이 두 팔을 타고 흘러 전신을 가득 메운다.
이번엔 자세를 바꿨다. 그리고 검을 횡으로 베었다.
어설픈 호흡, 어설픈 검격이 허공을 스친다. 보통 기사들이 보기엔 충분히 위력적이겠지만 이미 완벽함을 알고 있는 러스에겐 전혀 만족스럽지 않은 일격이었다.
그의 입에서 욕설이 흘러나왔다.
"빌어먹을...."
모르겠다. 아무리 수행하고 수행해도 모르겠다. 어떻게 하면 내려 베기처럼 다른 검로를 완벽하게 밟을 수 있는지 모르겠다.
뭔가 손에 잡힐 듯하면서도 미진한 감각. 뭔가가 부족했다. 그 부족한 조각은 아무리 검을 휘둘러도 채워지지 않았다.
아버지, 폴트 테네스의 말이 떠올랐다.
-미안하다, 아들아. 지금 네게 줄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구나.
진정한 검술은 잊었다 해도 테네스 백작가는 유서 깊은 기사 가문, 당연히 휘하 기사단을 위한 검술은 존재했다. 하지만 러스는 그 검술을 익히지 못했다. 그것은 테네스의 것이 아니라 가신들의 검술이었다. 그리고 모든 가신들은 사생아에 불과한 그에게 자신의 검술을 가르치는 것에 대해 반대했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단 한 가지만을 전수해 줄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우리 가문이 원래 지니고 있던 검술, 그 위대한 검로의 파편.
유일하게 남은 내려 베기의 검로, 그것은 여전히 테네스의 검술이었다. 그래서 가신들도 러스에게 그것을 가르치는 것까지 반대할 수는 없었다. 그 내려 베기만이 그가 배울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이었다.
러스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마갑 엘드라드는 유서스의 것이었다. 오러 유저와도 맞상대할 수 있는 그 강력한 힘은 그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그에게 주어진 것은 불완전한, 과거의 찌꺼기뿐이다.
이제는 어느 누구도 찾지 않는 쓰레기 검술.
-하지만 오러로 향하는 진정한 길이기도 하지.
한때는 위대한 힘을 끌어낼 수 있었던 진정한 검. 제대로 익힌다면 진정한 테네스의 검이 될 수 있을 터였다. 마도구의 힘 따위를 빌리는 부끄러운 무인이 아닌, 위대한 기사의 검을 손에 쥘 수 있을 터였다.
-너라면 이 잊힌 힘을 다시 깨울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아버지는 그렇게 기대했다. 그리고 러스는 그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내려 베기 하나만으로는 결코 다다를 수 없는 길이었다. 아무리 스스로 길을 찾고 또 찾아도, 아무리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둘러도 이미 사라져 버린 검로의 파편은 도저히 다시 떠오르지 않았다.
"으아아아!"
결국 러스는 검을 내던지며 절규를 터트렸다. 가슴이 터질 듯 답답했다.
☆ ☆ ☆
회색 벽돌로 쌓아올린 건물 2층, 말라붙은 담쟁이넝쿨이 무성한 창가 너머로 유서스가 말없이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해가 저물어 냉기가 도는 후원, 그 구석에서 수행에 매진하는 러스의 모습이 보였다. 유서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흥...."
자신의 배다른 동생을 보는 유서스의 두 눈에는 증오와 경멸, 그 외의 빛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 폴트 테네스는 차가운 성격이었다. 자신인 그를 대할 때도, 어머니인 테네스 백작 부인을 대할 때도 언제나 사무적이고 쌀쌀맞은 모습만을 보여 왔다.
어릴 적엔 그것을 그리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저 무인다운 냉정한 성격이라고만 생각했다. 밤마다 어머니가 몰래 우는 것을 보면서 가슴 아파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아버지를 증오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가 아버지를 증오하게 된 것은 15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신 직후 자신에게 배다른 동생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였다.
원래 귀족들치고 사생아 한둘쯤 없는 집안은 없다. 그러므로 배다른 동생의 존재에 대해 별로 놀라울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 동생을 만날 때 보인 아버지의 표정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평소의 차가운 표정이 아니었다. 러스를 바라보는 테네스 백작은 애정과 사랑이 가득한, 그야말로 '아버지'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어미를 가문으로 데려올 때의 그 모습은 저자가 과연 자신이 알고 있던 아버지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제야 알았다.
아버지는 사실 차가운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그 모습은 오로지 자신과 어머니, 테네스 백작 부인을 대할 때만 그랬다는 것을. 원래는 정열적인 성격이라 젊은 시절 러스의 어미, 에이리와 야반도주도 시도했을 정도라는 것을. 결국 실패하고 정략결혼을 통해 어머니와 결혼하고 나서도 기회만 되면 몰래 에이리와 만나 왔다는 사실을.
아버지는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사랑한 것은 평생 단 한 여인뿐이었다.
아버지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사랑한 것은 진정 마음에 두었던 여인 사이에서 낳은 아이뿐이었다.
가문의 후계자로서 결국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고 정략결혼을 할 수밖에 없었던 운명, 외부인이 본다면 아버지를 동정하겠지. 아름답고 슬픈 사랑 이야기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이야기 속에 본부인과 그 자식의 애환은 철저히 무시되어 있다. 비록 가문의 언약으로만 이어진 결혼이라 해도 어머니는 아버지를 사랑하려 노력했다. 아내로서, 백작가의 안주인으로서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살았다.
'그 대가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마자 저따위 들개를 집안으로 들이는 겁니까, 아버지!'
유서스는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돌아가신 어머니와, 그 자리를 차지한 비천한 여인의 모습만 생각하면 절로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마자 바로 에이리를 백작가로 데리고 왔다. 그리고 그 아들마저도. 사생아임에도 불구하고 정식 아들로 인정하는 한편 가문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사의 작위마저 내리는 파격을 저지르기도 했다. 이번 출전만 해도, 모두가 반대하는데도 억지로 유적 탐사대에 끼웠다. 아무리 사랑한다고는 해도 지나치게 귀족답지 않은 처사인 것이다.
그야말로 눈엣가시 같은 존재, 러스를 내려다보던 유서스의 눈빛이 문득 차갑게 가라앉았다.
러스의 내려 베기, 그 완벽한 궤적이 검사인 그의 눈에 생생히 들어오고 있었다.
공간을 가르는 듯한 부드럽고도 날카로운 움직임, 여전히 보기만 해도 섬뜩할 정도로 완벽한 내려 베기였다. 유서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역시...."
그 역시 저 내려 베기를 배우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테네스 백작가의 후계자로서, 그나마 하나 남은 검로를 무시할 수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저렇게 완벽한 궤적을 그릴 수는 없었다.
"저 자식은...."
물론 유서스는 저 내려 베기를 제대로 수련하지 않았다. 그는 엘드라드를 이어받을 후계자였고, 그래서 마갑 활용술을 익히는 데만 전력을 기울였으니까. 이미 쓰레기가 된 가문의 검술 따위에 매진하는 것보다 확실한 전력을 손에 넣는 것이 가문을 위한 길이니까.
하지만, 노력했다 해도 과연 저런 무위를 보일 수 있을지에 대해선 도무지 자신이 없다.
"천재야...."
그저 내려 베기 하나밖에 모르는 러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동작 역시 상당한 경지에 다다라 있었다. 내려 베기와 전혀 상관없는 동작이나 호흡법조차도 스스로의 재능만으로 창안해 내 버린 것이다. 그것은 물론 내려 베기의 위력에는 크게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별 볼 일 없다고 폄하할 수준도 아니었다. 저 정도만으로도 사실 어지간한 가신들의 검술에 비해 뒤떨어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배우지 않았는데도 저 정도라니....'
세상에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이를 천재라 부른다면.
하나도 가르치지 않았는데 열을 알아 버리는 이는 대체 뭐라고 불러야 할까?
러스가 그런 놈이었다.
저 자식은 천재란 말로도 모자란 재능의 소유자다. 그것은 아무리 러스를 증오하는 유서스라 할지라도 부인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더더욱 저 자식에게 매달리는지도.'
그라임의 황금기사라 하면 어딜 가도 경외의 눈으로 바라보곤 한다. 엘드라드를 다루는 마검사로서 어지간한 오러 유저와 검투를 벌여도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 그는 노력했고 노력한 만큼 강함이라는 대가를 돌려받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에 쐐기처럼 박혀 있는 감정이 있었다.
'역시 마검사는 마검사일 뿐.'
문외한들은 그를 경외했지만, 진정한 강자들은 아무도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겉으로는 찬탄하면서도는 뒤로는 그저 마도구의 힘일 뿐이라며 비웃곤 했다. 유서스라고 그 사실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마도구의 힘을 자신의 힘인 양 내세우는 뻔뻔한 기사, 이것이 명성 높은 그라임의 황금기사가 가진 이면의 칭호다.
그리고 이것은 테네스 백작가의 오랜 고민이기도 했다. 그런 보이지 않는 멸시 속에서 살아가던 테네스 백작에게 러스의 저 재능은 한 줄기 빛처럼 느껴졌겠지. 그런 의도라면 아버지의 태도도 아주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래 봤자겠지만.'
이해가 간다 해도 찬동한다는 소린 아니었다. 유서스는 콧방귀를 뀌었다. 무엇을 기대하는지는 알겠지만, 그래 봤자 현실적으로 러스는 그저 기술 하나만 원숙하게 다루는 일개 기사일 뿐이었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이라도 상황이 받쳐 주지 않으면 의미가 없지. 환경 역시 자신이 가진 재능 중 하나가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마갑 엘드라드를 물려받을 수 있는 유서스가 러스보다 재능이 떨어진다고는 볼 수 없다. 현실적으로 유서스는 3초 안에 러스의 목을 딸 수 있을 테니까. 물론 엘드라드가 있을 경우가 아니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럼 러스 역시 검이 있을 경우에만 제 실력을 발휘할 테니 피장파장이다.
검을 다루는 기술이 뛰어난 검사를 무인으로 인정한다면, 마갑을 다루는 기술이 뛰어난 마검사가 무인이 아니라는 것도 모순이라는 것이 유서스의 생각이었다.
'으음, 쓸데없는 것에 신경 쓰고 있을 때가 아니지.'
유서스는 애써 러스를 외면했다. 그리고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으려 노력했다.
안 그래도 할 일이 많았다. 유적에서 얻은 유물들도 정리해야 했고 기사단원들에게 공평하게 보상을 돌려줄 계획도 짜야 했다. 유적 내에서 죽은 이들을 위한 뒤처리도 중요한 문제다. 그는 테네스 기사단의 단장이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검만 휘두르고 살 수 있을 정도로 세상은 단순하지 않은 것이다.
"신경 쓸 가치도 없는 놈이다. 괜히 심력 소모할 필요는 없어."
유서스는 창가에서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그의 귀는 여전히 바람을 가르는 칼날의 노래를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 ☆ ☆
깊은 밤, 울창한 숲의 어둠 속을 한 그림자가 달리고 있었다. 전신을 검은 복장으로 통일하고 얼굴에 복면까지 쓴, 누가 봐도 수상하기 그지없는 차림의 건장한 사내였다.
가파른 산 능선을 산양처럼 가볍게 뛰어넘으며 채 발밑도 보이지 않는 숲 속을 쉽사리 가로지른다. 그렇게 한참 달리던 사내가 잠시 바위 위에 서서 숨을 골랐다. 그리고 복면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참 다시 태어나서 별짓을 다 해 보네. 두건 뒤집어쓰고 월담이라니."
복면 사내, 레펜하르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 그는 야밤을 틈타 켈베른 성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게할른 마을에서 하루를 묵은 레펜하르트 일행은 다음 날 아침, 바로 켈베른 성으로 향했다. 성이 있는 켈베른 자작 직할령은 게할른 마을로부터 대략 하루 거리였다. 성 밑 마을로 들어서니 어느새 어둑어둑하게 해가 지고 있었다.
적당히 여관을 잡은 뒤 레펜하르트는 바로 정보부터 입수했다. 이런 시골 영지에 왕도의 기사들이 찾아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라 여관 주인도 그라임 백작가의 동태에 대해 제법 잘 알고 있었다.
뭐, 동태라고 해도 무슨 상대의 인원수나 신상 명세 같은 대단한 정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자작님 성에 귀한 기사분이 오셨다더라. 그 귀한 기사분들이랑 자작님이 대단한 모험을 하셨다더라. 그리고 보물을 산더미처럼 가지고 귀환하셨다더라. 지금 자작님 성에서 그 기사분들이랑 신 나게 파티를 열고 계실 게 분명하다, 정도? 정보랄 것도 없는 입소문 수준이었다.
하지만 레펜하르트에겐 그 정도면 충분했다. 그는 유물, 엘류시온의 목소리가 아직 켈베른 성에 있다는 것만 알면 되었으니까.
간단히 저녁을 마치고 레펜하르트는 바로 의복점을 찾아 검은 복장부터 구입했다. 야밤에 몰래 담 넘는 처지에 검은 옷은 필수인 것이다. 도둑놈 주제에 얼굴 드러낼 팔자도 아니니 복면도 필요했다.
물론 세상천지 어느 의복점이건, 제정신이면 복면 따위는 팔지 않는다. 그래서 적당히 검은 천 사다가 구멍 뚫고 바느질해서 하나 만들었다.
복면의 실매듭을 만져 보다 말고 레펜하르트가 문득 실소를 흘렸다.
"이거, 그러고 보니 이번 생에서는 시리스가 처음으로 만들어 준 옷이네."
비록 여검사를 표방하긴 했지만, 슬레이어라는 것도 결국은 남자에게 봉사하는 여성 노예일 수밖에 없다. 당연히 가사 전반에 대한 기술 역시 검술과 함께 교육받는 것이다.
그래서 전생의 시리스는 요리며 바느질 쪽에도 실력이 좋았다. 틈나면 직접 목도리를 짜거나 수를 놓거나 해서 레펜하르트의 옷을 만들어 주곤 했다. 솜씨도 뛰어나서 제법 근사한 옷도 많았다. 과연 그 솜씨는 지금도 변함이 없는지 복면을 기운 매듭이 한 땀 한 땀, 정교하게 박음질되어 있었다.
'쩝, 잘은 만들었다만....'
레펜하르트는 한숨을 쉬었다. 연인이 손수 만들어 준 첫 의복(?)이 도둑질용 복면이라니 참 우울한 이야기다.
하여튼 그렇게 준비를 마친 뒤 레펜하르트는 홀로 여관을 나섰다. 시리스와 실란은 여관에서 기다리게 했다. 아무리 이해해 줬다고는 해도, 성직자에게 도둑질에 직접 가담하라고 할 정도로 그는 철면피가 아니었다. 게다가 프리스트는 전투 측면에선 굉장히 도움이 되는 존재지만 지금처럼 은밀한 행동을 해야 할 경우엔 오히려 걸림돌이 될 뿐이다.
시리스는 실란의 호위를 위해 남겨 놓았다. 원래 프리스트는 남의 전투력 빵빵하게 올리는 데는 도가 텄지만 정작 자신은 전투에 문외한이다. 차탄 공국의 사례도 있으니 만일을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아무리 그럴듯하게 거짓말로 포장하긴 했지만, 지금 하는 짓이 도둑질이라는 것은 레펜하르트 본인이 제일 잘 아는 것이다. 아무리 전생 타령해 봤자 현재 엘류시온의 목소리의 정당한 소유자가 그라임 백작가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다. 영 떳떳치가 못하다 보니 시리스를 데리고 올 마음이 들지 않았다.
'에잉, 어쩌다가 이렇게 꼬여서. 쩝.'
레펜하르트는 혀를 차며 계속 숲 속을 달렸다. 숲 사이를 빠른 속도로 질주하다 문득 그가 고개를 들어 나뭇가지 저편을 바라보았다.
"후, 슬슬 보이는군."
가지 사이로 어둠이 짙게 깔린 회색빛 성의 모습이 드러났다. 목적지인 켈베른 성이었다.
켈베른 성은 세텔라드 산맥에서 흘러내리는 야함 강변의 절벽 위에 세워진 3단 구조의 거성이다.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망루와 외성, 그리고 노예와 시중인들의 거처인 내성, 중앙에 자작의 저택인 탑과 고성이 세워진 구조였다.
성 뒤쪽은 강을 낀 절벽이고 앞쪽은 그가 지나온 숲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성을 통하는 성문은 단 하나뿐, 높게 축조된 외길 위에 세우고 그 앞에 도개교까지 놓여 있었다. 이 성을 공략하기 위해서 성문을 부수려면 저 좁은 길 위로 결코 많은 병력을 보내지 못할 것이다. 상당히 방어에 철저한 구조다.
성을 살펴보며 레펜하르트가 혀를 찼다.
'아니, 시골 영주 성이 뭐 이리 거창해?'
확실히 켈베른 자작령은 무슨 군사 요충지도 아니고 교역의 중심지도 아니다. 물론 세텔라드 산맥 인근의 몬스터들을 막기 위해서 성을 요새화할 필요는 있겠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과했다.
의아해한 그는 계속 성의 구조를 살펴보았고 이내 이유를 깨달았다.
"드워프들의 솜씨로군, 이건."
이 성을 축조한 것은 인간이 아니라 드워프였다. 성벽의 구조나 망루 위치 등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드워프 노예를 부린다면 훨씬 적은 가격으로 인간을 쓰는 것보다 월등히 뛰어난 건물을 지을 수 있을 테니 이런 시골 영주의 성이 저토록 거창한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켈베른 자작이 광산업으로 입지를 다진 인물이라더니....'
현 시대에 광산업을 하려면 드워프 노예를 부리는 것은 상식 중의 상식이었다. 인간에 비해 분진에 강하고―라기보단 아예 영향을 받지도 않고― 힘도 체력도 월등한 데다가 돌의 결을 본능적으로 읽을 수 있는 드워프들은 그야말로 채광과 건축에 특화된 종족이라 할 수 있었다.
단순한 노천광이라면 인간 광부를 부려서 채광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땅속으로 파고들어 가야 할 경우엔 역시 드워프들의 생산성을 따라가질 못한다. 켈베른 자작가도 그런 이유로 드워프 노예를 상당수 거느리고 있었고, 이 성을 축조할 때 그 노예 인력을 십분 활용한 모양이었다.
'어찌 되었든 침투가 쉽지는 않겠는데.'
수풀의 그림자에 몸을 숨긴 채 레펜하르트는 연신 눈을 굴렸다. 성문 앞에 인간 병사 둘이 경비를 서고 성벽 위쪽으로도 세 명의 병력이 오가며 순찰을 돈다. 성벽 곳곳에도 화톳불을 밝혀 최대한 시야를 확보하고 있었다.
마치 전시를 방불케 하는 삼엄한 경계였다. 아무래도 가치 높은 은의 시대 유물들을 잔뜩 지니고 있으니 특별 경계 태세를 갖추라 명령한 모양이었다.
'뭐, 다 예상 범위 내지만.'
슬그머니 미소를 지으며 레펜하르트는 기감으로 주변의 기척을 감지했다. 성벽 위쪽의 병력이 교차해 지나가는 순간, 그가 수풀의 그림자에서 뛰쳐나와 성벽 밑 공터를 가로질렀다.
탁탁탁!
세 번의 발놀림만으로 레펜하르트는 바로 망루 밑 어둑한 그림자 쪽까지 이동할 수 있었다. 덩치 좋은 사내가 불빛이 비치는 지역을 지나감에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상식적으로 경비병이 서 있고, 그곳에 순찰병까지 다가왔다면 경계가 강화되면 되었지 늦춰졌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허점이 있었다. 아무리 성실하게 사주 경계를 하고 있다 해도 인간인 이상, 누군가가 다가오면 그쪽에 신경이 쏠릴 수밖에 없다. 그것이 비록 아군임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순찰병과 경비병이 아주 잠깐 서로에게 신경을 쓰는 그때, 레펜하르트는 바로 그 순간을 노린 것이었다. 오러 능력자의 가공할 감각권은 단순히 기척을 느끼는 수준을 넘어서 상대의 심적 상태마저도 어느 정도는 감지하는 것이 가능하다. 보통은 무인의 심동, 무심동을 감지하는 데 쓰는데 그는 경비들의 인식이 잠깐 끊긴 그 순간을 바로 인지하고 움직인 것이다.
물론 레펜하르트가 무슨 도둑질을 전문적으로 배운 것이 아니다 보니 당연히 발소리는 났다. 순찰병과 밤 인사를 나누던 경비병 중 하나가 의아해하며 성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응? 뭐지?"
하지만 그때 이미 레펜하르트는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긴 후였다. 경비병이 고개를 갸웃거리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려 등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휘익!
바람 소리와 함께 검은 그림자가 성벽 위쪽으로 날아올랐다.
"...어? 켁!"
채 놀랄 틈도 없이 경비의 목덜미에 강렬한 충격이 와 닿았다. 그대로 경비병이 풀썩 쓰러진다. 갑자기 성벽 위로 나타난 괴한의 모습에 당황한 순찰병들이 막 호각을 불려는 찰나.
"미안하다!"
사과와 함께 레펜하르트가 좌우 주먹을 연거푸 날렸다. 황금빛 오러가 연거푸 쏘아져 세 명의 순찰병과 남은 경비병 하나를 강타했다. 넷 다 그 순간 아무것도 못하고 혼절해 버렸다.
경비를 처리하자마자 레펜하르트가 잽싸게 몸을 쭈그리고 사방을 살폈다.
'혹시 본 사람 있나?'
그의 주먹은 말 그대로 흉기, 어설프게 주먹질하느니 차라리 기격탄을 위력 낮춰 쓰는 것이 비살상용으로는 더 확실하다. 그래서 쓰긴 했지만 기격탄은 번쩍번쩍 빛이 나서 아무래도 은밀한 행동에는 영 맞지 않는 것이다.
물론 레펜하르트도 아주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 켈베른 성벽에는 경계 삼엄하게 한답시고 화톳불을 10미터 단위로 활활 태우고 있었다. 이 정도 광량이면 기격탄도 그리 티가 나지 않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다행히 사방은 조용했다. 들키진 않은 모양이었다.
'초심자의 행운이로군.'
레펜하르트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바삐 움직였다.
경비들의 창을 바닥에 꽂고, 거기에 기절한 이들을 허수아비처럼 기대 세워 놓는다. 멀리서 보면 멀쩡히 경비를 서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주변을 처리한 뒤 외성 안쪽을 살펴보았다. 화톳불이 여기저기 밝혀져 꽤 환했지만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긴, 시간이 시간이니만큼 전부 잠자리에 들었겠지.'
하여튼 서둘러야 했다. 아무리 경비들을 멀쩡한 척 꾸몄다 해도 임시방편일 뿐, 자세히 보면 어색할 테니 이 눈속임이 오래갈 리가 없다. 숨을 고르며 그는 다시 한 번 계획을 상기했다.
비록 오러를 각성한 초인의 육체를 지니고는 있다지만 레펜하르트는 자신이 아무도 몰래 귀족의 성에 슥 들어가 물건 슥 훔치고 쥐도 새도 모르게 빠져나오는, 그런 전설 속의 괴도와 같은 짓을 할 수 있을 거란 기대는 전혀 하지 않았다.
솔직히 뭔 수로 저렇게 하는지 짐작도 안 간다. 뭐, 전생의 마법을 되찾았다면 아예 광범위 수면 마법으로 성내의 인간을 죄다 재워 버리고 유유자적 들어가 물건 들고 나오는 뻔뻔한 짓도 가능했겠다.
'하지만 그것은 도둑질이라기보단 그냥 날강도 짓이고.'
그러니 지금의 자신 역시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어차피 안 들킬 방법은 없으니, 아예 들키기 전에 용건 해결해 버리는 수밖에 없다!
'속전속결. 잽싸게 털고 잽싸게 튀는 거지.'
휘리릭!
옷자락이 펄럭이며 레펜하르트가 성벽 아래로 몸을 날렸다.
☆ ☆ ☆
고성 내의 복도, 달빛만이 흐릿하게 창을 통해 비치는 그 어둠 속에서 등불을 든 병사 둘이 순찰을 돌고 있었다. 둘 다 이곳, 켈베른 자작령 출신으로 평소에는 사냥과 대장장이 일을 업으로 삼는 이들이었다.
사냥꾼 출신의 중년 병사가 복도를 걷다 말고 혀를 차며 말했다.
"그런데 영주님도 참 걱정도 많으시지. 그라임의 황금기사가 있는데 누가 감히 이곳에 침입한다고 우리까지 부르셨대?"
값비싼 유물을 지켜야 하는 입장이 된 켈베른 자작은 영지 내에서 힘깨나 쓴다는 이들을 차출해 성내를 경비하게 했다. 물론 유물들은 테네스 기사단이 엄중히 경계를 사고 있었지만, 그래도 주인 된 입장에서 성의를 보이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평민들이야 그런 사정을 모르니 쓸데없는 걱정으로만 보일 법도 했다.
다른 병사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어때? 우리야 술값 생기고 좋지."
차출된 입장이지만 두 병사 모두 딱히 불만은 없었다. 켈베른 자작은 후한 영주였다. 하룻밤 새는 것으로 짭짤한 부수입을 얻을 수 있으니 반발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영지전 중인 것도 아니고 누군가가 침입할 거란 정보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들이 보기에 이 경계 태세는 케블린 자작의 기우일 뿐이었다. 목숨 걸 일이 없으니 긴장도 되지 않았다.
그래서 두 병사 모두 그저 영주의 성을 구경한다는 들뜬 기분만을 가지고 순찰을 돌고 있었다. 솔직히 지금 그들이 하는 짓은 순찰이 아니라 어슬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역시 왕도 기사들은 뭐가 달라도 다르더만."
"그렇지? 갑옷부터가 번쩍번쩍 빛이 나던데."
"우리 자작님도 기사지만 역시 때깔이 달라, 음."
"에잇, 이 사람. 무슨 그런 망발을."
그렇게 한가하게 수다를 떨며 복도를 걷던 중이었다. 병사 중 한 명이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음?"
"왜 그러나?"
"아, 아냐. 기분 탓인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병사는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잠깐 뒤에 누군가 있었던 것 같은데, 돌아보니 아무도 없었다.
'하긴, 내가 무슨 전설의 무사도 아닌데 인기척 따위를 느낄 리가 없지.'
그대로 신경을 끊고 두 병사는 다시 이야기를 나누며 복도 저편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 둘이 코너를 돌아 사라지자, 어둠이 가득한 천장에서 누군가가 소리 없이 뛰어내렸다. 복면을 쓴 레펜하르트였다.
'헤에, 이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할 만 하잖아?'
멀어지는 인기척을 느끼며 레펜하르트는 혀를 내둘렀다. 고성 안으로 잠입한 그는 복도를 걷다 기척을 감지하고 바로 몸을 날려 천장에 붙어 있었다. 대낮에 이러고 있으면 완전 바보짓이겠지만 어두운 밤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등불을 들고 걷는 이들은 무의식중에 그 시선이 바닥으로 향하게 되어 있다. 굳이 천장으로 불을 비춰 보는 이는 보통 없다.
'괜히 이야기 속의 도적들이 뻑 하면 도마뱀처럼 천장에 달라붙는 것이 아니었군.'
다 근거가 있기에 그러고 사는 것이다. 물론 사람이 천장에 달라붙는다는 것은 보통 운동신경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니 어지간히 실력 있는 도적에게나 가능한 것이겠지만....
'이 무식한 육체라면 하루 종일도 매달려 있을 수 있는데, 뭘.'
역시 오러 능력자가 괜히 초인이라 불리는 것이 아니었다.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는 그 운동 능력에 가공할 감각권까지 있으니 도둑질에 초짜인 레펜하르트조차도 이곳까지 잠입하는 것이 그리 힘들지 않았다. 상대의 위치를 모두 파악할 수 있으니 잠입에 필요한 가장 큰 문제점이 해결된 것이나 다름없다.
'도둑질도 별것 아니네.'
물론 지금 레펜하르트의 가장 큰 적은 저 군기 빠진 순찰병들이 아니라 바로 시간이다. 그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고성 남쪽의 탑이었다. 유물이 모여 있는 곳은 특성상 어쩔 수 없이 마력이 새어 나오게 되어 있다. 경지에 오른 마법사라면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은 것이다. 비록 마력과 연산 능력은 떨어질지언정 마법에 대한 이해도와 깨달음, 감지 능력은 여전히 대마법사급인 레펜하르트다. 성내로 잠입하자마자 바로 유물을 보관한 장소를 알아낼 수 있었다.
복도를 가로지르고 가끔 창밖으로 나가 도마뱀처럼 외벽을 타고 오르기도 하면서 레펜하르트는 금세 탑 밑까지 도달했다. 여기까지 오는 데 채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이 정도면 사실 어지간히 실력 있는 도적들이라 해도 불가능한 위업이다.
'나, 사실은 괴도 쪽에도 적성이 있었던 걸지도.'
사실은 그냥 오러 유저가 그만큼 사기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을 뿐이겠지만.
하여튼 레펜하르트는 유심히 탑을 살폈다. 탑 안쪽에는 인기척이 없었지만 입구에 두 명의 기사가 경계를 서고 있었다. 사슬 갑옷에 검과 방패를 제대로 갖춘 기사들이었다. 기세부터가 이제까지의 병사들과는 비교하기 미안할 정도로 강인해 보였다.
'저게 테네스 기사단이군.'
어둠을 틈타 레펜하르트가 몸을 날렸다. 눈앞에서 갑자기 거대한 검은 그림자가 날아오르자 기사들이 기겁하며 소리쳤다.
"윽!"
"뭐냐!"
역시 단련된 기사들답게 이제까지와는 반응이 다르다. 멍 때리고 있던 외성 경비병들에 비해 바로 경계심을 끌어 올리고 방어 태세에 들어간다.
뭐, 그래 봤자 결과는 별 다르지 않았다. 레펜하르트가 단숨에 둘 사이로 파고들어 손가락으로 좌측 기사의 목울대를 튕겼다. 소리 지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수도로 쳤다가 목이라도 잘릴까 겁나서 손가락으로 튕긴 것인데, 역시 옳은 판단인 것 같았다. 그것만으로도 파괴력이 충분했는지 상대가 목을 붙잡고 캑캑거리며 다 죽어 가는 신음을 흘렸다.
"커, 커억!"
그 틈에 레펜하르트는 바로 반대편 기사의 뒤를 돌아 목을 졸랐다.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라 당하는 입장에서는 채 소리 지를 틈도 없었다. 두꺼운 팔뚝으로 경동맥을 10초 정도 가볍게 눌러 주니 이내 기사의 몸이 축 늘어졌다. 뒤이어 간신히 호흡을 되찾은 다른 기사 역시 초크를 걸어 혼절시켰다. 둘 다 단련할 대로 단련한 기사들이었지만, 인간인 이상 뇌로 피가 통하지 않으면 기절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단숨에 두 기사를 제압한 뒤 레펜하르트가 피식 웃었다.
'역시 소리 없이 제압하는 데는 서브미션 계열이 최고구만.'
게다가 상대를 해하지 않고 확실히 제압하는 데에도 관절기만 한 것이 없다. 아무리 힘 조절에 능하다 해도 사람마자 맷집이 다르니 타격기는 어쩔 수 없이 살상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관절기는 그런 부담이 확실히 적다.
기사들을 조심스레 근처에 앉혀 놓고 레펜하르트는 만일을 대비해 그들의 두 팔을 묶은 뒤 재갈까지 물렸다. 병사들과 달리 이들은 단련한 이들이라 단시간에 깨어날 가능성이 있으니 이 정도 보험은 필요했다.
그리고 탑을 살펴보았다. 문에서부터 희미한 마력이 감지되고 있었다.
'행동 감지 결계와 열 감지 마법인가.'
모든 마법은 고유의 술식과 마력 패턴을 가지고 있다. 물론 정확하게 파악하려면 역시 탐색 마법을 써야 하겠지만 레펜하르트의 수준이면 그저 감지되는 희미한 마력만으로도 저급한 수준의 결계는 바로 대충 감을 잡을 수 있었다.
'뭔지는 알겠는데 해제를 못하니 참 짜증 나네.'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레펜하르트는 문 주위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마법 결계라면 그 특성상, 이곳 어딘가에 그 핵이 있을 터.'
결계를 건 마법사가 탑 안에서 거하고 있지 않는 이상, 문 안쪽에 핵이 있을 리는 없다. 밖에서 결계를 걸어야 본인도 자기 침대 가서 편히 잘 수 있을 테니까. 레펜하르트는 마력의 흐름을 유심히 감지하며 정신을 집중했다.
잠시 후, 그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찾았다.'
결계의 중심핵은 문 근처에 놓인, 겉보기에는 평범한 돌멩이였다. 하지만 저 보이지 않는 안쪽에 분명 룬어가 새겨져 있으리라. 레펜하르트는 잠시 힘을 집중하고 돌멩이를 내리쳤다. 단순히 핵을 이동한다면 결계가 변형되어 알람 마법이 발동하겠지만 아예 단숨에 핵을 부숴 버리면 그냥 해제되기 마련이다.
퍽!
작은 소음과 함께 돌멩이가 깨지며 문에 걸린 결계가 소멸했다. 레펜하르트가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갔다.
문에 건 결계만으로 충분하다 여겼는지 안쪽에는 더 이상 결계 패턴의 마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있는 것은 오로지 유물뿐. 커다란 탑 내부에 수많은 은의 시대 유물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선박마다 분류된 채 놓여 있었다.
레펜하르트가 잠시 감회 어린 표정을 지었다.
'항마의 비보에 봉인의 항아리. 무한의 가방에 창천의 하프도 있네. 그립군.'
전부 전생의 그가 직접 발굴했던 유물들이었다. 유물마다 달아 놓은 마법사들의 꼬리표를 보니 더욱 옛 생각이 난다. 게다가 보다 보니 종종 틀리게 분류해 놓은 것들도 보였다.
'이건 누가 파악한 거야? 이건 헬티온 블레이드가 아니라 탈라드 소드란 말이다. 비슷해 보이지만 술식이 완전 다른데 이따위로 분류하다니.'
고쳐 줄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관두었다. 지금 그럴 여유는 없다. 그는 빠르게 유물들을 살펴보며 선반 사이를 누볐다. 문득 레펜하르트의 두 눈이 빛났다. 그의 시선이 미분류로 처리된 유물들이 모여 있는 선반, 그 아래쪽에 놓인 네모난 검은 상자로 향하고 있었다.
'있다! 엘류시온의 목소리!'
희열에 차 레펜하르트는 상자를 집어 들었다. 솔직히 걱정도 많이 했는데 생각보다 간단히 성공했다. 절로 웃음이 나왔다.
생각해 보면 비록 도둑으로는 초짜라 해도, 오러 유저의 신체 능력에 대마법사의 지식까지 가진 몸이다. 아무리 엄중한 방어 시스템이라도 그를 막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하지!
의기양양하게 레펜하르트는 상자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막 돌아 나오려던 참이었다.
갑자기 요란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딸랑딸랑딸랑!
"엥?"
레펜하르트가 당황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뭐지? 인기척도 확실히 없었고 마법 결계도 틀림없이 피했는데?'
당혹해하는 그의 눈에 무심코 발치가 들어왔다. 비싼 돈 주고 구입한 사슴 가죽 장화가, 채 보이지도 않을 만큼 가는 실을 밟고 있는 모습 또한 보였다.
시선을 실을 따라 옆으로 이동시킨다. 얼씨구? 실 저편 끝에 투박한 놋쇠종이 보란 듯이 매달려 있다.
순간 레펜하르트는 신음을 흘렸다.
"커억? 그냥 단순한 실 트랩?"
4
켈베른 성 2층, 영주용 침실.
켈베른 자작은 한참 기분 좋게 잠들어 있었다. 비록 저녁 식사 때 잠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지만, 역시 유서스 경은 기사 중의 기사였다. 자신의 무례를 덮어 주며 그의 딸들에게도 예의를 다해 준 것이다.
게다가 그 악마와의 사투는 대단했다. 기사로서 그런 엄청난 전투를 보게 되었으니 정원이 불탄 정도는 아깝지도 않았다. 아니, 일부러 그 폐허를 놔둘 생각이었다. 영웅의 전투가 남긴 흔적이니 후손들에게 보여 줄, 본받아야 할 기사의 자취로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켈베른 자작은 아내와 함께 오랜만에 단잠에 빠져 있었다. 그런 그의 작은 행복을 깬 것은 갑자기 들려온 창밖의 소란이었다.
챙챙챙챙!
한창 잘 자고 있는데 갑자기 요란한 쇳소리가 그를 깨웠다. 익숙한 소리였다. 바로 알람 마법이 발동하는 소리다. 그리고 현재 알람 마법은 단 한 곳에만 설치되어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으니 늙은 머리였지만 단숨에 잠이 확 깼다.
허겁지겁 침상에서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았다. 하지만 그의 방은 숲 쪽으로 창이 나 있어 상황을 파악할 수가 없다.
곁에서 자고 있던 노부인이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여보, 무슨 일이죠?"
"곧 알아볼 것이오!"
아내를 안심시키며 켈베른 자작이 밖을 향해 소리쳤다.
"이봐라! 대체 무슨 일이냐!"
요란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이내 대답이 들려왔다. 충실한 그의 집사가 문 밖에서 외치고 있었다.
"남쪽 탑에 침입자가 있습니다!"
노인의 주름진 얼굴이 한껏 일그러졌다.
"이런 수치스러운 일이!"
그는 한탄했다. 이곳은 자신의 성이었다. 그리고 유서스 경은 자신을 믿고 이 성에 거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침입자의 존재를 허락하다니! 기사로서, 그리고 한 성의 영주로서 씻을 수 없는 수치였다.
켈베른 자작이 호통을 쳤다.
"내 검을 가져오너라!"
☆ ☆ ☆
투박한 인상의 중년인이 미늘창을 들고 찔러 온다.
"으아아아!"
기합이라 칭하기도 부끄러운 괴성과 함께 창날이 허공을 허우적댔다. 고개를 젖혀 가볍게 피하며 레펜하르트는 미늘창을 그냥 움켜쥐었다. 중년인이 창을 빼앗기지 않으려 두 손에 힘을 주었지만, 그는 그냥 한 손으로 창과 사람을 동시에 들어 버렸다.
"으게게겍!"
몸째로 허공으로 뽑히니 중년인이 기괴한 비명을 질러 댔다. 만드라고라라고 마법사들이 쓰는 약초 중에 뽑히면 비명을 지르는 물건이 있는데, 어째 딱 그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그대로 중년인을 내팽개치며 레펜하르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휴, 미치겠네."
실 트랩이 발동해 종이 울리니, 종과 연결된 알람 마법도 울렸고 알람 소리가 성안을 진동하니 자고 있던 이들도 모두 깨어났다. 그리고 모두 레펜하르트가 있는 쪽으로 몰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일단 상대방이 경각심을 가지게 된 이상 천장에 달라붙는 정도로 눈을 피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결국 본격적으로 걸리적거리는 이들을 때려눕히는 방법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아, 어려운 건 전부 잘 통과하고 왜 그런 어이없는 트랩에 걸려서....'
레펜하르트는 자신의 자만심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차라리 도둑질 경험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그런 단순한 트랩은 피했겠지. 아무리 오러 유저에 대마법사라도 전문적인 도둑은 아니다. 능력이 있더라도 지식이 부족하니 이는 차라리 당연한 결과다.
'역시 도둑질은 도둑놈이 해야 하는 법이야.'
연신 몰려오는 병사들을 처리하며 레펜하르트는 내성 쪽 마당을 가로질렀다. 지금 몰려오는 병사들은 대부분 경계를 서고 있던, 켈베른 자작이 영지에서 차출한 일반인들이었다. 나름 힘깨나 쓰는 이들이긴 했지만 제대로 무술을 배운 이들이 아니니 레펜하르트의 상대가 될 수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이쪽이 차라리 더 까다로웠다.
'함부로 치면 죽을 것 같아서 이거....'
주먹으로 치면 반드시 죽을 테니, 그는 빼앗은 조악한 창 자루를 거꾸로 들어 몰려오는 병사들을 대충 후려갈기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다들 여기저기가 퍽퍽 부러지며 비명을 내지르는데, 이러다 잘못해 사람 하나 병신 만드는 거 아닌가 싶다.
이들은 진짜 아무 죄도 없는 이들이다. 게다가 검에 목숨을 건 이들도 아니니 마법사로서나 무인으로서나 이들의 목숨을 앗는 일은 그의 사고방식상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도둑놈 잡아라!"
"잡아라!"
"우어어어!"
켈베른 자작이 꽤 인망이 좋았는지, 동료들이 퍽퍽 쓰러지는데도 도망치긴 커녕 다들 분노에 불타 레펜하르트에게 덤벼들고 있었다. 조심조심, 몽둥이질 하나에도 신경을 쓰며 레펜하르트는 계속 외성으로 후퇴했다. 어차피 원하던 엘류시온의 목소리는 손에 넣었으니 더 이상 이곳에 볼일은 없었다.
그때, 외성 쪽에서도 한 무리의 병력이 나타났다. 제대로 갑옷을 걸치고 무장을 한 기사들이었다. 테네스 기사단 중 외성 경비를 하고 있던 대기 병력이 곧바로 출동한 것이다.
역시 일반 병사와 달리 그들은 바로 포위망을 구축하고 레펜하르트를 에워쌌다. 진형이 촘촘해 레펜하르트도 일순 도주로를 찾지 못했다. 그가 주춤하는 사이, 기사단에서 한 중년 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부기사단장, 로트 경이었다.
"꼼짝 마라, 이 악적!"
검을 겨누며 로트 경이 중후한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레펜하르트가 입술을 비틀었다.
'아니, 그래도 아무도 안 죽이고 나름 인도적으로 잠입했는데 악적이라니!'
뭐, 도둑놈이 무슨 변명을 해 봐야 도둑놈이다. 복면 쓴 주제에 억울해할 것도 없지.
쓴웃음을 지으며 레펜하르트는 포위망을 살폈다. 기사들이 선두에 서고 그 뒤로 열 명의 마법사와 신관 여섯 명이 포진하고 있었다. 연계가 빠른 걸로 보아 엘류시온 유적 탐사대의 일원인 것 같았다.
잠시 당황했지만 그는 이내 냉정을 되찾았다.
'에잉, 어차피 이런 상황도 생각 안 해 본 건 아니잖아?'
어차피 그의 계획에는 도중에 들켜서 도주하는 상황도 상정했었다. 당황할 필요 없다. 이왕 이렇게 된 이상 좀 미안하지만 싹 때려눕히고 황금기사 뜨기 전에 도망가는 것이 최선이다!
"하아아압!"
갑자기 레펜하르트가 우렁찬 기합을 내질렀다. 기합이라기보단 오히려 포효에 가까운 고함이었다. 순간적으로 기사들이 움찔하는 사이, 그가 땅을 박차고 포위망 한 쪽으로 달려갔다.
"이런!"
로트 경이 당혹 섞인 외침을 터트렸다. 어느새 레펜하르트가 포위망을 구축하는 두 명의 기사를 향해 연거푸 옆차기를 날리고 있었다. 둘 다 방패를 들어 제대로 방어했지만, 방어한 자세 그대로 허공으로 날려 가 버렸다. 무슨 공성추에라도 맞은 듯한 무지막지한 위력이었다. 기겁하며 로트 경이 소리쳤다.
"모두 자리를 지켜라! 마법사들이여! 원호를!"
안 그래도 마법사들은 이미 주문 영창에 들어가고 있었다. 저마다 전격이며 화염, 냉기의 화살을 구현해 레펜하르트에게 쏘아 댔다. 날아오는 각종 마법의 향연에 레펜하르트가 눈살을 찌푸리더니 곁의 기사를 노려보았다.
"정말 정말 미안하오!"
"응? 뭐가?"
순간 기사는 당황했다. 대체 뭐가 미안하다는 건가? 하지만 그는 이내 해답을 깨달았다.
레펜하르트가 말을 마치자마자 불쑥 그에게 접근하더니 뒷목을 붙잡고 들어 버린 것이다. 짐 언브레이커블 전통의 사람 들기 수법, 일명 '새끼 고양이 물고 가는 어미 스타일'이었다.
그렇게 기사를 들더니 레펜하르트가 그대로 날아오는 마법을 향해 기사를 내밀었다. 갑옷 입은 기사를 그대로 방패로 써먹은 것이다.
"으어억!"
전격이며 폭염, 얼음 화살에 정통으로 명중당한 기사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마법은 그의 갑옷에 닿자 스스로 소멸해 버렸다. 성직자들이 걸어 준 항마의 가호가 마법사들의 마법을 상대로 발동한 것이다.
로트 경이 분노하며 소리쳤다.
"사람을 방패로 쓰다니, 이 무슨 패악 무도한 짓이냐!"
'아니, 나도 갑옷에 가호 걸린 거 다 알고 한 짓인데.'
레펜하르트가 속으로 변명을 해 댔지만, 그래도 그가 생사람 붙잡아 방패로 썼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기사들이 분노에 차 돌격해 왔다. 방패를 앞세워 검을 찔러 오는 기사들의 공격에 레펜하르트는 연거푸 뒤로 후퇴했다.
로트 경이 재차 소리쳤다.
"화살을 쏘아라!"
어차피 화살 따윈 안 먹히는 몸이다. 그래서 레펜하르트는 날아오는 화살에 대해서는 싹 무시했다. 그런데 정작 화살을 맞아 보니 이게 보통 화살이 아니었다.
"윽! 뭐야, 이거?"
화살 끝에 쇠사슬이 달려 있고, 촉에는 끈적한 액체가 발려 있다. 접착력이 강한 칼리 나무의 수액을 화살 끝에 바르고 쇠사슬을 연결시킨 것이었다. 강력한 유적의 악마 중에는 어설픈 창칼이 통하지 않는 것들이 많으니 테네스 기사단은 이런 식의 무기도 구비하고 있었다.
십여 개의 사슬 화살이 레펜하르트의 전신에 적중했다. 끈끈한 액체가 화살을 고정시키고, 그에 매달린 쇠사슬을 기사들이 붙잡고 잡아당겼다. 일순 레펜하르트의 움직임이 묶여 버렸다.
그의 두 눈에 불길이 일었다.
"흥! 이까짓 거!"
레펜하르트가 거칠게 두 팔을 휘둘렀다. 아예 사슬을 든 기사 채로 휘둘러 버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역시 기사들은 그것 또한 예상한 모양이었다. 어느새 그들은 사슬을 놓고 레펜하르트에게로 돌진하고 있었다. 이 사슬 화살은 그를 포박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잠시 움직임을 제한시키려는 것에 불과했다.
기사들이 다시 방패를 앞세워 접근해 온다. 레펜하르트도 방패 위로 공격을 퍼부었지만, 이번에는 아까처럼 시원하게 뒤로 날려 가지 않았다. 성직자들의 가호가 깃들어 있어 다들 신체 능력이 상당히 향상된 후였다.
"가하르 경! 앞으로!"
"조드! 원호를!"
로트 경의 명령에 따라 포위망을 구축한 채 기사들이 빙빙 돌며 공격을 가해 왔다. 사이사이 사슬 화살이 날아오고 쇠사슬로 팔다리를 묶으려는 시도도 있는가 하면, 간간히 커다란 그물도 날아오고 있었다. 물론 특유의 괴력으로 모두 부수고 찢어 버렸지만 그러다 보니 단련한 이 육체도 점차 피로에 좀 먹기 시작한다.
레펜하르트가 식은땀을 흘렸다.
'이것들, 만만찮은데?'
이들은 팔톤 유적에서 만났던 알티온 후작가의 기사들과는 스타일이 달랐다. 기사로서의 역량은 알티온 기사단이나 테네스 기사단이나 크게 차이가 없다. 하지만 이들은 마검사인 유서스를 따르는 이들이다. 그래서 다른 기사들에 비해 도구의 힘을 빌리는 데 거부감도 적은 것이다. 귀한 마법 무기를 소지할 정도는 아니지만, 보통은 사냥꾼들이나 쓸 법한 그물이나 포박용 사슬 병기도 거리낌 없이 쓰고 있었다.
남의 일이었다면 융통성 있는 훌륭한 자세라며 칭찬했겠지. 하지만 막상 자기가 당하니 절로 이가 갈린다.
'젠장! 기사 주제에!'
그렇게 레펜하르트는 테네스 기사단을 상대로 계속 전투를 벌였다. 아무리 전술적으로 우위에 있다곤 해도 레펜하르트는 오러 유저, 테네스 기사단으로서도 뚜렷하게 결정타를 먹일 수가 없었다. 그저 포위망을 유지한 채 시간을 끄는 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리고 사실 이것이 테네스 기사단의 대표적 전술이기도 했다. 유적의 강력한 악마를 상대할 경우 되도록 시간을 끌며 인명 피해를 줄인 채 유서스에게 필살의 기회를 안기는 것이다. 지금 그들은 레펜하르트를 무슨 유적의 악마 대하듯이 상대하고 있었다.
시간 끄는 데 도가 튼 놈들을 상대하니 레펜하르트도 영 몸을 빼낼 타이밍을 잡기가 힘들었다. 그렇게 한참 그가 초조해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포위망 한쪽에서 웬 청년 기사 하나가 방패를 버리더니 검만 들고 달려오는 것이다.
"이 악적! 테네스의 검을 받아라!"
'응? 뭐야, 저 병신은?'
멀쩡한 포위망을 일부러 흐트러트리며 돌진해 오다니? 순간 레펜하르트조차도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어쨌거나 그의 입장에선 참 반가운 사태다. 잽싸게 그가 청년 기사를 향해 마주 달렸다.
그러던 중이었다. 청년 기사의 얼굴을 본 레펜하르트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어라? 왠지 낯이 익은 녀석인데?'
묘하게 낯은 익은데 누군지는 모르겠다. 저 멀리서 로트 경의 분통 가득한 외침이 들려왔다.
"러스! 대형을 유지해라!"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그냥 기분 탓인가? 그렇게 잠깐 의아해하는 찰나였다. 청년 기사, 러스가 그를 노리고 검을 내려 베었다.
"타아앗!"
순간 안이하게 생각하던 레펜하르트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헉!'
움직임도 호흡도 스텝도 평범하던 기사였다. 그런데 그 순간의 내려 베기만큼은 보통이 아니었다. 오러 유저인 란타스와 비교해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움직임이다!
번쩍!
세상을 통째로 가를 듯한 기세로 검광이 허공을 갈랐다.
표현은 뭔가 그럴듯했지만 결국은 빗맞혔단 소리다. 제대로 맞혔으면 허공이 아니라 레펜하르트를 갈랐어야지.
몸을 트는 것만으로 간단히 공격을 피하며 레펜하르트는 바로 러스의 옆구리에 미들 킥을 가했다. 물론 레펜하르트는 견제를 위해 날린 일격이었다. 방금 전의 검격을 볼 때 설마 이 정도 공격이 맞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커어억!"
정통으로 공격이 들어가 버렸다. 피를 토하며 날아가는 러스의 모습에 레펜하르트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뭐야, 이 자식?'
분명 내려 베기만큼은 완벽했다. 그래서 내심 경각심을 가지고 상대했다. 그런데 어째 그 이후의 동작은 다시 별것 없었다.
'참 언밸런스한 놈일세.'
하여튼 덕분에 포위망에서 빠져나왔다. 레펜하르트는 화색이 되어 성벽 쪽으로 달려갔다.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자, 그럼 탈출을!'
그렇게 막 그가 몸을 날려 성벽을 뛰어넘으려던 차였다.
"창공의 칼날, 허공을 찢노라!"
우렁찬 외침과 함께 강렬한 바람의 칼날이 날아와 그를 직격했다. 그 위력은 레펜하르트에게 상처를 주기엔 모자랐지만, 막 날아오르던 기세를 꺾기에는 충분했다. 허공에서 적중당하니 채 힘을 줄 방편이 없다. 다시 성벽 안쪽으로 추락하며 레펜하르트가 자세를 잡고 착지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며 이를 갈았다.
"젠장!"
이 마법을 날린 이가 누구인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오러 유저의 감각권은 눈보다도 확실하게 상대를 파악할 수 있으니까.
"그라임의 황금기사...."
전신이 금빛으로 빛나는 갑주를 걸친 기사, 유서스 테네스가 마갑 엘드라드를 걸친 채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 ☆ ☆
검을 들어 자세를 갖춘 채, 유서스는 곁눈질로 내성 안쪽의 상황을 살폈다.
태풍이라도 휘몰아친 듯 여기저기 박살 난 흔적과 쓰러져 신음을 흘리는 켈베른 자작가의 병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테네스 기사단도 그리 사정이 다르진 않았다. 반쯤 무너진 포위진 사이로 피 흘리는 소중한 부하들의 모습이 보였다.
절로 상대의 무위에 경탄이 나왔다.
'...이쯤 되면 자작가의 경비를 탓할 수도 없겠군.'
흩어진 사슬 화살이며 찢어진 쇠 그물 등을 보면 사태는 명확했다. 테네스 기사단은 분명 제대로 진영을 갖추고 제 실력을 모두 발휘해 침입자를 상대했다. 그런데도 당해 내지 못했다. 그러니 평소 일반인일 뿐인 자작가의 병사들이 상대가 될 리가 없지.
'대체 누구지?'
의구심 속에서 유서스는 정면을 바라보았다. 검은 복면을 쓴 흑의의 사내가 말없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건장한 체구의 사내였다. 어디 가서 키로 꿀리지 않았던 유서스지만 저 사내와 비교하면 주먹 두어 개는 더 작아 보였다. 게다가 단순히 덩치만 큰 것이 아니었다. 전신이 놀라울 정도로 단련되었음이 옷 위로도 확연히 느껴졌다.
저 정도 실력이면 이름 없는 자일 리가 없다. 본인이 상당한 명성을 지니고 있든가, 그게 아니더라도 상당히 명성 있는 자의 후예가 분명하다.
검을 겨누며 유서스가 입을 열었다.
"야밤에 남의 집 담 넘기엔 지나친 실력이군, 당신."
레펜하르트가 씁쓸해하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 사정이 좀 있어서."
유서스의 표정이 더욱 굳었다. 목소리가 상당히 젊었다. 아무리 높게 쳐도 자신보다 윗줄은 아니다. 그럼 저런 젊은 나이로 이 정도 실력을 갖추고 있단 말인가?
더더욱 상대의 정체에 대한 경각심이 강해진다. 마검 엘드란을 고쳐 쥐며 유서스가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그 사정, 나중에 천천히 들어 봐야겠군."
그래, 나중에. 두꺼운 사슬로 꽁꽁 묶어서 엄중한 감옥에 가두어 놓고 말이지.
레펜하르트의 등 뒤로도 보이지 않는 투기가 서서히 피어올랐다.
"미안하지만 담화는 좀 더 미루자고."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 교차했다. 투기와 투기가 얽혀 강렬한 기운을 흘린다. 고요한 침묵 속에,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한 섬뜩한 열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모두가 숨을 멈추고 그 광경을 바라보는 그 순간.
"타압!"
"허업!"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이 동시에 땅을 박차며 허공에서 격돌했다.
짐 언브레이커블의 가르침은 선수 필승, 애매하다 싶으면 일단 덤비고 보라는 식이다. 레펜하르트가 보기에 유서스의 실력은 충분히 애매했고, 그래서 그는 당연히 이번에도 먼저 몸을 날렸다.
그런데 문제는 테네스 백작가도 상당히 선수 필승을 신봉한다는 점이었다.
막 공격을 날리는 그 순간 상대도 함께 달려오니 유서스도 레펜하르트도 순간 당황해 버렸다. 찰나의 순간 참격과 스트레이트 펀치가 서로의 급소를 향해 날아가는데, 이건 완전히 너 죽고 나 죽자 식의 무식한 공격이다.
'윽!'
'이런!'
레펜하르트가 허겁지겁 허공에서 몸을 틀어 펀치를 거두며 참격을 피했다. 유서스도 놀라며 검을 거두고 펀치의 궤도에서 몸을 빼냈다. 이것도 마치 서로 짠 듯이 동시에 일어났다.
그러다 보니 구경하는 입장에서는 뭔가 웃기는 광경이 되어 버렸다. 막 죽일 듯이 달려들더니 코앞에서 갑자기 몸 사리며 뒤로 도망치는 것이다. 그것도 둘 다 동시에!
"...유서스 님이 뭐 하시는 거지?"
"...저 도둑놈은 또 왜 저러는 거야?"
검을 거둔 채 유서스는 다시 간격을 벌렸다. 등 뒤로 부하들의 수군거림이 들려오는데 이거 영 얼굴이 화끈거린다. 상대 역시 비슷한 기분이었나 보다. 복면 사이로 비치는 눈빛을 보니 쪽팔려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둘 다 서로를 향해 실소를 흘렸다.
"꼬였군."
"꼬였네.
하여튼 지금이 무슨 친선 대련도 아닌데 이런 훈훈한 눈빛 따위 나누고 있을 처지는 아니지. 유서스가 다시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 정신을 집중하며 소리쳤다.
"나, 심연의 그림자가 되어 포효하노라!"
유서스의 발치에서 검은 그림자가 일어나 세 줄기 칼날이 되어 레펜하르트를 덮쳐 갔다.
'하울링 쉐도우로군.'
바로 상대의 마법을 알아챈 레펜하르트가 한 걸음 뒤로 뛰어 거리를 벌리며 몸을 반회전시켰다. 그 상태로 그림자 칼날은 무시한 채 바로 수면 차기를 시도, 엉뚱하게 앞쪽 흙바닥을 쓸어 간다. 흙더미가 일어 오르며 바닥이 깊숙하게 파헤쳐졌다. 자작가 병사들이 순간 의아해했다.
'아니, 저 자식은 왜 갑자기 땅 파고 난리야?'
그 순간 날아오던 검은 그림자가 파헤쳐진 지면에 걸리며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 버렸다. 유서스가 인상을 썼다.
'어떻게 하울링 쉐도우의 약점을?'
마법의 그림자 칼날이 레펜하르트가 만든 새로운 어둠과 뒤섞여 지정했던 좌표를 이탈해 버린 것이다. 그걸 그 찰나의 순간 판단해 시행하다니? 이건 무술 실력과는 별개로, 마법에 대한 지식이 상당하지 않다면 불가능한 짓이다.
유서스가 감탄 섞인 목소리를 흘리며 검을 내리쳤다.
"마법에 대한 대처법이 능숙하군!"
좌우로 스텝을 밟아 참격을 피하며 레펜하르트가 대수롭잖다는 듯 대꾸했다.
"뭐, 대충 다 아는 거니까."
연신 회피 동작을 펼치다 바로 킥을 날려 반격한다. 절묘한 순간 들어온 반격이라 피할 방도가 보이지 않았다. 급한 대로 유서스는 몸을 웅크리며 킥을 받았다. 마갑 엘드라드의 방어력을 믿은 것이었다. 상대의 미들 킥이 유서스의 몸통 갑옷 위를 강타했다.
콰앙!
"크윽!"
신음이 새어 나왔다. 충격이 전신을 관통하는 기분이었다. 내장이 울렁이며 배 속에서 뭔가가 울컥 터져 나온다. 각오하고 받은 것인데도 충격이 장난이 아니었다.
'갑옷 위로 받아넘겼는데도 이런 파괴력이라니!'
그래도 덕분에 균형이 흩어지지는 않았다. 검을 횡으로 휘둘러 레펜하르트의 허리를 베어 가며 유서스가 연달아 외침을 토했다.
"바람, 화살이 된다! 폭염, 응집하여 적을 친다!"
에어로 블렛과 파이어 볼이 동시에 구현되어 레펜하르트의 좌우로 날아들었다. 에어로 블렛은 팔로 튕기고 파이어 볼은 수도로 내리쳐 레펜하르는 날아오는 마법을 모두 봉쇄했다. 그 순간을 노리고 유서스가 몸을 날렸다.
"깨어나라! 엘드란!"
몸을 날린 관성을 그대로 검에 실어 유서스는 상대의 정수리를 그대로 내리쳤다. 쇄도하는 황금의 검신에 어른거리는 마력 패턴을 감지한 순간, 레펜하르트는 기겁했다.
'매트리얼 디스트로이? 저런 고위 마법도 발동이 된단 말이야?'
엘드라드가 현존하는 최강의 은의 시대 유물 중 하나라더니 정말 빈말이 아니었구나! 그는 사색이 되어 뒤로 몸을 날렸다. 아무리 강철처럼 단련한 몸이라지만, 저 물질 결합 자체를 흩어 버리는 최악의 파괴 주문은 강철도 간단히 모래로 만들어 버린다. 방어했다간 그대로 황천행이다!
쌔애애액!
아슬아슬하게 칼날이 레펜하르트의 가슴을 지나 허공을 베었다. 검에 실린 마법이 지면을 내리찍으며 폭음이 울려 퍼졌다.
"으음...."
비산하는 모래 사이로 상대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인다. 재차 자세를 잡으며 유서스가 혀를 찼다. 방금 그 회피 동작은 채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마법으로 동체 시력을 초인의 영역까지 증강시킨 유서스가 놓칠 정도의 스피드라면 대답은 하나뿐이다.
'...오러 능력자?'
후퇴한 레펜하르트가 다시 앞으로 뛰쳐나왔다. 마치 쏘아진 화살을 연상케 하는 가공할 스피드, 단숨에 거리를 좁히는 상대를 보며 유서스가 다급하게 마법을 발동시켰다.
"부식의 숨결, 허공을 흐른다!"
강산의 안개가 피어올라 레펜하르트를 에워쌌다. 마법을 날린 뒤 허점을 만들어 강검의 일격을 날리려는 것이었는데, 레펜하르트가 갑자기 몸을 날리더니 연거푸 양발로 허공을 휘돌려 찼다. 어찌나 맹렬한 기세였는지 풍압만으로 바람이 일어 올라 강산의 안개를 사방으로 흩어 버렸다.
"타아앗!"
그렇게 '미스트 오브 애시드'를 파해하며 레펜하르트가 유서스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진각을 밟으며 정권을 깊숙이 찔러 넣는다. 막 후속타를 준비하던 차라 유서스도 미처 피할 틈이 없었다. 정통으로 명치를 얻어맞고 5미터 넘게 뒤로 밀려났다.
"으윽!"
엘드라드 위로 맞았는데도 내장이 상할 정도의 충격이었다. 핏물을 억지로 삼키며 밀려난 유서스가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호기를 놓치지 않고 레펜하르트가 연거푸 공세를 가했다. 연신 몸을 회전시켜 돌려 차기 연타를 날리며 유서스를 몰아쳐 갔다.
"타아아앗!"
유서스도 어떻게든 검을 휘둘러 반격하려 했지만 쉽지가 않았다. 상대는 절묘하게 그의 사각을 노리며 연신 펀치와 킥을 찔러 넣고 있었다. 욕설이 절로 나왔다.
'젠장! 뭐가 이렇게 빨라!'
연신 좌우로 스텝을 밟으며 신체를 좌우로 이동시키는데, 눈앞에서 보니 무슨 분신이라도 쓰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이미 엘드라드로 극한까지 육체를 강화시키고도 도저히 스피드를 따라갈 수가 없다.
확실했다! 이자는 오러 능력자였다!
'아니! 오러 능력자가 뭐가 아쉬워서 야밤에 담치기나 하고 있는 거냐고!'
이를 갈며 유서스는 방어 태세를 굳혔다. 크게 검을 휘두르다간 오히려 상대의 접근을 허락하게 되니 그저 검날을 세워 공격 궤도를 저지하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밀리던 유서스가 결국 복부에 상대의 정권을 허락했다.
"크어억!"
엘드라드에 걸린 방어 마법이 일순 깨질 정도로 강렬한 펀치였다. 유서스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떴다. 고통으로 그는 눈을 부릅떴다. 순간 복부에 구멍이 뚫린 게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먹혔다!'
레펜하르트가 회심의 표정을 지으며 몸을 날렸다. 비록 갑옷 위로 때리긴 했지만, 짐 언브레이커블에는 방어 갑주를 관통해 충격을 주는 수법이 얼마든지 있었다. 제대로 충격이 관통했음을 손맛으로 확신할 수 있었다.
그 순간 유서스가 남은 힘을 쥐어짜 약속된 언령을 외쳤다.
"겨울의 왕, 세상을 덮는다!"
눈보라가 일어나며 레펜하르트의 사지를 얼리기 시작했다. 물론 단련된 그의 육체가 이 정도로 동상을 입거나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순간 몸이 얼어붙어 움직임이 멈추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레펜하르트가 힘으로 달라붙은 얼음 조각을 부숴 버리는 사이, 유서스가 다른 약속어를 읊었다.
"불굴의 힘, 그 주인을 다시 일으켜 세울지니!"
엘드라드 표면에 마법진이 빛을 발했다. 치유 마법이 발동해 그의 내상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잠깐 사이에 유서스의 안색이 다시 원래의 빛으로 돌아왔다. 검을 고쳐 쥐고 다시 자세를 잡는 유서스를 보며 레펜하르트가 이를 악물었다. 기껏 호기를 잡았는데 그걸 놓치다니!
"쳇...."
숨을 고르며 유서스가 검을 겨누더니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그대, 어째서 오러 능력자씩이나 되는 자가 이런 짓을 벌였는지는 모르겠다."
연거푸 밀린 처지임에도 유서스의 두 눈에 패배의 기색은 엿보이지 않았다.
이제까지는 사실 상대의 힘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밀린 감이 없지 않았다. 아무리 오러 능력자와 필적할 힘을 가지고 있다 해도, 결국 그는 오러 능력자가 아니다. 그들처럼 감각만으로 한눈에 상대의 기량을 파악하고 적합한 대응을 할 재주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상대를 오러 능력자로 상정하고, 그에 걸맞은 대응을 하게 될 테니까!
유서스가 살의를 일으키며 선언하듯 외쳤다.
"테네스의 검은 오러에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
☆ ☆ ☆
유서스의 참격이 연신 레펜하르트의 팔방을 점유하고 날아든다. 배운 몸놀림으로 공격을 피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지만 그때마다 마법이 날아와 타이밍을 흐트러트린다. 연거푸 공방을 나누며 레펜하르트가 식은땀을 흘렸다.
'아으, 까다롭네....'
마법사이던 시절, 그에게는 오러 유저가 제일 까다로운 존재였다. 강력한 오러의 힘은 어지간한 마법을 모두 힘으로 밀어붙이며 씹어 버리곤 했다. 이 육체의 원래 주인, 테스론이 대표적인 케이스였다. 권왕 테스론은 그 가공할 오러로 마법의 상성을 무시하고 황소처럼 저돌적으로 달라붙어 결국 그의 목숨까지 취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참 무식한 것들이라며 왕년에 욕도 많이 했다. 하지만 상황이 반대가 되니....
'마법도 만만찮게 치사하구먼, 이거....'
입장 바꿔 상대해 보니, 뭐 좀 해 볼라치면 바로 마법으로 발목 잡고 늘어지는데 그야말로 환장할 지경이었다. 이래서 역지사지란 말이 생겨난 것 같았다.
게다가 저 엘드라드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엘드라드의 재질이 되는 금속, 진금 엘드릴은 은의 시대에서도 귀하게 취급받던 강력한 마법 금속이다. 산도 무너트리는 레펜하르트의 공격도 저 엘드릴을 부수기엔 조금 모자랐다. 기껏해야 전력으로 후려갈겨 우그러트리는 것이 전부였다.
뭐, 사실 진금 엘드릴을 우그러트린 시점에서 이미 인간의 한계는 가볍게 넘어섰다고 봐야 한다. 역시 괜히 오러 능력자를 초인이라 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불리하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타아앗!"
기합을 연이어 내지르며 유서스는 레펜하르트를 몰아치고 있었다. 초반에는 레펜하르트가 승기를 잡고 있었으나 시간이 지나니 점점 전세가 역전되었다. 엘드라드의 마력으로 상처와 피로를 회복하는 유서스에 비해, 레펜하르트는 시간이 지날수록 지칠 뿐이다. 게다가 가장 큰 문제도 있었다.
'젠장, 대놓고 오러를 쓸 수가 없으니....'
여기까지 몰린 가장 큰 이유는, 지금 레펜하르트가 오러를 외부로 발현시킬 처지가 못 된다는 점이었다.
그의 황금빛 오러는 너무 튄다. 보통 오러는 문파마다 고유의 색이 있기 마련이지만 대체로 붉은색이나 푸른색 계열인 법이었다. 거기서 좀 더 개성이 들어가 녹색이나 보라색 오러를 풍기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특이한 사상을 지닌 짐 언브레이커블은 그 오러의 색 역시 특이했다. 전 대륙에 황금빛 오러를 발하는 무문은 오직 짐 언브레이커블뿐. 도둑질하려고 복면까지 쓴 처지인데 정체를 밝힐 수는 없는 것이다.
점점 레펜하르트의 검은 의복이 붉게 물들어 갔다. 유서스의 검은 그의 강철 같은 육체를 베어 낼 만큼 강력한 마법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공격을 이으며 유서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희한하군. 그 운동 능력은 오러 능력자가 아니면 설명할 수 없다. 그런데 오러를 발현하지는 못하는 건가?"
결국 유서스의 검이 레펜하르트의 어깨를 길게 그었다. 피가 튀며 레펜하르트가 어깨를 부여잡고 신음을 흘렸다.
"크윽!"
비틀거리는 레펜하르트를 보며 유서스가 확신에 차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오러를 갓 각성한 모양이군. 그렇다면 내 상대가 될 수 없다!"
유서스가 검을 세로로 들어 올리더니 매섭게 눈을 빛냈다.
"끝을 보겠다!"
땅을 박차며 낭랑한 외침을 터트린다.
"눈을 떠라, 엘드라드! 깨어나라, 엘드란! 만물을 부수는 힘을 내게 허락하라!"
유서스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밤하늘에 또 하나의 달이 떠오른 듯 그의 전신이 황금빛으로 가득 뒤덮였다. 무시무시한 마력이 마검 엘드란의 검 끝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레펜하르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젠장, 이건 진짜 위험하잖아!'
이건 아무래도 엘드라드 고유의 마법 술식인지 레펜하르트도 정체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파괴력만은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검을 내려치며 유서스가 고함을 질렀다.
"엘드릴의 빛!"
참격이 허공을 갈랐다. 황금빛 섬광이 오로라처럼 너울거리며 무지막지한 기운을 담아 레펜하르트를 덮쳐 갔다.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절대 절명의 일격! 레펜하르트가 일순 죽음을 떠올리던 그 순간이었다.
'가만? 황금빛?'
반색을 하며 레펜하르트가 두 팔을 들어 방어 자세를 취했다.
"황금기사라서 참 고맙다!"
'무슨 소리지?'
당황하는 유서스를 뒤로한 채, 엘드릴의 빛이 레펜하르트를 강타했다. 그 순간 그가 전신의 오러를 끌어 올려 회전시켰다.
"스파이럴 가드!"
누리끼리한 빛 속에 잠긴 덕에 오러를 발현해도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 섬광과 회전하는 오러가 맞부딪혔다.
우르르릉!
천둥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켈베른 성이 통째로 진동하며 대기가 울려 폭풍이 불어닥친다. 미친 듯이 날뛰는 파괴의 빛과 무지막지한 굉음 속에서 자작가의 병사들이 모두 바닥에 붙어 벌벌 떨었다.
"으아아아...."
"어메, 뭐여, 이게!"
그리고 그 빛무리 속에서 레펜하르트가 허공으로 날려 가고 있었다. 한 줄기 핏물을 흩뿌리며 나가떨어지는 그의 모습에 유서스가 입을 쩍 벌렸다.
"맙소사! 엘드릴의 빛을 막아 냈단 말인가!"
놀라며 유서스가 몸을 날려 레펜하르트를 쫒기 시작했다.
레펜하르트는 분명 엘드릴의 빛을 막아 냈다. 하지만 그렇다고 멀쩡한 상태도 아니었다.
'조금 늦었다....'
발상을 전환한 건 좋았는데, 아무래도 타이밍이 살짝 늦은 것이다. 채 흘리지 못한 엘드릴의 빛은 그의 육체를 사정없이 파괴했다. 전신에 지독한 통증이 느껴졌다. 사지에 힘이 하나도 없다. 마치 전생에서, 테스론의 일격에 적중당했을 때와 비슷한 감각이었다.
'젠장! 또 그때처럼 될 수는 없잖아!'
멀리서 쫓아오는 유서스의 기척이 느껴졌다. 이대로 정신줄 놓으면 결과는 안 봐도 뻔하다. 애써 흐릿해지는 정신을 붙잡고 레펜하르트는 허공에서 몸을 뒤틀었다.
"으윽, 타앗!"
그렇게 자세를 제어한 뒤 그는 성벽 위에 착지했다. 사실 착지라기보다는 추락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엉망으로 바닥을 구르면서도 레펜하르트는 관성을 이용해 재차 몸을 날렸다. 그렇게 고성의 탑 쪽으로 전력을 다해 점프한 레펜하르트의 눈에 시꺼먼 강물의 모습이 보였다.
야함 강이었다. 순간 흐릿한 그의 두 눈이 반짝 빛났다.
'퇴로다!'
마지막 힘을 쥐어짜 레펜하르트는 절벽으로 뛰어내렸다. 그의 신형이 절벽 아래로 한없이 추락해 갔다. 때는 한겨울, 당연히 강 표면은 꽝꽝 얼어 있었다.
우지끈!
두꺼운 얼음을 박살 내며 레펜하르트가 강 속으로 첨벙 빠졌다. 허겁지겁 뒤따라온 유서스가 아래를 내려다보았을 때, 이미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뒤늦게야 테네스 기사단이 유서스가 있는 고성 탑으로 쫓아왔다. 로트 경이 그의 안위를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유서스 경?"
시꺼먼 야함 강을 내려다보며 유서스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서 유물을 파악하세요, 로트 경. 저놈이 무엇을 들고 갔는지 알아야 합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로트 경이 수하 기사에게 명령을 내린다. 유서스가 말을 덧붙였다.
"수색대도 준비해 주십시오. 저자를 이대로 보낼 순 없으니."
로트 경이 미심쩍어하며 반문했다.
"이미 죽지 않았을까요?"
한겨울, 게다가 산맥 지역이다 보니 강물이 꽁꽁 얼 만큼 강추위인 날씨였다. 이런 때에 강물에 빠졌으니 상식적으로 살아 있을 리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유서스는 고개를 저었다. 승리했음에도 불구, 그의 얼굴은 어쩐지 침울해 보였다.
"절대 이 정도로 죽을 자가 아닙니다...."
☆ ☆ ☆
"...."
누워 있던 시리스가 갑자기 눈을 번쩍 뜨고 몸을 일으켰다. 건너편에 누워 잠을 청하던 실란이 눈을 비비며 일어나 물었다.
"왜 그래, 시리스?"
시리스가 말없이 객실 창밖을 내다보았다. 푸른 달빛이 사위를 고요히 비춘다. 그 별빛 가득한 밤하늘 너머 아련히 보이는 검은 성의 그림자, 그것을 응시하며 시리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예감이 불길해요."
"응?"
실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리스가 굳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모르겠어요. 그냥 느낌이 좋지 않아요...."
요정의 후예인 엘프들은 희미하게나마 영성이 남아 있어 가끔 친지나 지인의 불행에 대해 예지를 하곤 한다. 물론 현 시대에는 엘프가 요정의 후예란 사실이 잊혔지만, 이들이 꽤나 감이 좋다는 정도는 알려져 있다.
그 사실을 떠올리며 실란이 안색을 굳혔다.
"설마 레펜 씨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3권에서 계속>
3권
제8장 드워프
1
도시 곳곳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른다. 황궁 가이라크의 중심부, 심연의 전당의 한 발코니에서 깡마른 중년 사내가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인간들로부터 마왕이라 불리는 자, 안타레스 제국 황제 레펜하르트였다.
레펜하르트는 무심한 눈으로 자신이 세운 도시가 불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눈 위의 주름, 강력한 마력으로도 채 지우지 못한 세월의 흔적이 미미하게 꿈틀거렸다.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작별 인사 올립니다, 폐하."
오크 대전사, 타시드의 목소리였다. 단순한 어조였지만 그 속에 깃든 통한의 감정은 확실히 느껴졌다. 레펜하르트는 말없이 몸을 돌렸다.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오크 전사가 무릎을 꿇고 채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부복하고 있는 이는 타시드 뿐만이 아니었다. 흉악하게 생긴 늙은 트롤과 흰 수염이 성성한 드워프, 그리고 아름다운 엘프 여인 역시 함께 무릎 꿇고 있었다. 모두들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아틸카, 마켈린, 시리스...."
레펜하르트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다들 표정들이 왜 그러나? 무슨 다 죽어 가는 사람 보는 것처럼 말이야."
황제의 웃음에 그들은 따라 미소 지을 수가 없었다.
전 대륙이 손을 잡았다.
전 인류가 한 목표를 향해 칼을 들었다.
인류의 적, 마왕 레펜하르트를 척살하기 위해 열국의 왕이 뭉쳐 군대를 모았다. 그 숫자는 자그마치 이백만. 전쟁의 상식을 모조리 무시한 그 숫자는 실로 대륙의 인간이 가진 모든 병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대륙의 모든 마법사가 이백만의 인류 연합군을 마법으로 지원했다. 대륙의 모든 성직자들이 그 병력을 신성력으로 가호했다. 모든 왕국의 오러 유저들이 그들을 이끌고 제국을 침공해왔다.
200만이라는 숫자는 그 어떤 강대한 마법도, 고도의 전략도 무시하는 절대적인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언제나 침략군 자체를 마법으로 싹 쓸어버려 전쟁을 종결짓던 레펜하르트의 방식도 이번만큼은 통하지 않았다.
아무리 레펜하르트가 강력한 마법사라 할지라도 그의 몸은 하나뿐이다. 인류 연합군은 레펜하르트를 교묘히 피하며 병력을 분산, 안타레스 제국을 착실하게 잠식해 갔다. 레펜하르트가 가공할 마법으로 성 하나를 수복하면 그다음 날 스무 개의 성이 동시에 침공된다. 압도적인 물량전 앞에서 결국 안타레스 제국군은 점점 패퇴할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오크 전사들이 인간의 검 아래 고혼이 되었다. 끝없는 재생력을 지닌 트롤들조차도 압도적인 숫자에 밀려 지치고 피로해져, 결국 사지가 찢겨 죽어 갔다. 드워프들의 피가 강을 이루고 엘프들의 시신이 산을 이뤘다. 그리고 이들이 죽은 만큼, 아니 그 몇 배나 되는 인간의 피가 대지 위로 흘렀다. 참혹한 전쟁의 불길이 제국 곳곳에서 피어올랐다.
반년이 지난 지금, 인류 연합군은 마지막 보루였던 안타레스 제국 수도 레펜하임까지 침공해 있었다.
발코니에 기댄 채 레펜하르트는 고개를 들었다. 수도 성벽 너머의 평야, 지평선 너머까지 빽빽하게 인간의 군대가 도열한 것이 보였다. 어디로 고개를 돌려도 사방이 모두 인간의 군세뿐이다. 문득 레펜하르트가 혀를 찼다.
"그나저나 진짜 무식하게도 동원했다. 다들 전쟁 한 번 하고 나라 말아먹을 작정인가? 대체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저렇게 끌고 온 거래?"
알 포트의 하이 프리스트, 마켈린이 침울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만큼, 저들은 우리의 존재를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겠지요, 폐하."
레펜하르트가 혀를 찼다.
"쩝, 쪽수 차이가 어지간하면 손을 써 보겠는데 이건 뭐...."
세상에는 레펜하르트가 백만의 어둠의 군세를 이끌고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그것이 열국의 왕들이 뒷생각 안 하고 이백만이나 되는 병력을 모은 이유기도 하지만), 사실 안타레스 제국 내의 모든 이종족의 숫자는 남녀노소 다 합쳐 봐야 오십만이 조금 넘을 뿐이다. 실제로 전투가 가능한 인구는 이십만이 채 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 중 절반은 이미 전쟁으로 인해 세상을 떠났다.
레펜하르트가 몸을 돌려 발코니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 태연한 말투로 손을 저었다.
"자, 그럼 얼굴들 봤으니까 이만 작별하도록 하세."
"...죄송합니다, 폐하...."
아틸카의 머리가 더욱 깊숙이 숙여졌다.
레펜하르트에 대한 충성심은 그 누구와 비교해도 부끄러움이 없는 아틸카였지만, 그는 지금 황제의 곁을 떠나야 했다. 아틸카 개인이 아닌, 트롤 전체의 존속을 책임지는 수장으로서.
사천왕은 단순한 황제의 호위병이 아니다. 그들은 각 종족의 대표자이자 수호자이며 일족의 안위를 책임지는 존재.
그래서 레펜하르트는 그들에게 명을 내렸다.
-그대들의 동족을 이끌고 피신하라. 결코 종족의 정신이 끊기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니.
간신히 노예에서 벗어난 이들이었다.
간신히 선조의 문화를, 긍지를 찾아가는 이들이었다.
단순히 살아남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겨우 찾은 긍지를 다시 잃을 수는 없었다. 살아남아 봤자 인간의 손아귀에 떨어져 다시 노예가 된다면, 죽어 간 이들을 볼 면목이 없었다.
"하지만...."
타시드가 인상을 쓰다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정녕 함께 가실 수는 없는 겁니까, 폐하?"
"이미 설명하지 않았나, 타시드? 내가 이 가이라크에 자리 잡고 있기에 탈출 기회도 있다는 걸?"
이미 전세는 기울었다. 레펜하르트도 그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이종족들의 전력을 보존해 수도에서 탈출시키느냐.
그걸 위해서 레펜하르트는 자신의 존재를 일부러 노출시켰다. 어차피 인류 연합군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레펜하르트의 목일 터다. 그러니 그가 제국 수도에 확실히 존재하는 한, 이종족의 탈출 시도에 인류 연합군은 전력을 다할 수가 없다. 그 틈을 타 레펜하르트를 놓친다면 이 전쟁은 실패나 다름이 없을 테니까.
즉, 레펜하르트는 황도의 모든 이종족을 탈출시키기 위해 미끼 역할을 자청한 것이다.
"그, 그건 알지만 그렇다 해도 어찌 폐하를 홀로...."
순간 레펜하르트가 호통을 치며 그의 말을 잘랐다.
"타시드! 감정을 앞세워 책임을 방기하지 마라! 그대는 나의 사천왕이기에 앞서 오크들의 대전사다!"
타시드는 이를 악물며 말을 삼켰다. 그리고 등을 돌렸다. 충성을 맹세한 주군의 마지막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그의 동족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그럼 저도 가 보겠습니다."
아틸카도 몸을 일으켰다. 그 역시 타시드처럼 트롤들을 이끌어 수도를 탈출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비탄에 찬 목소리로 늙은 트롤 주술사는 마지막 인사를 올렸다.
"폐하. 부디 옥체 보중하시길...."
"조심하게, 아틸카."
발코니를 나서는 오크와 트롤의 뒷모습이 실로 쓸쓸하다. 문득 레펜하르트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왼편에 서서 침울한 얼굴을 하고 있는 나이 든 드워프를 향해 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나저나 알 포트께는 죄송하게 됐군. 기껏 신께서 보증 서 주셨는데 부도나 버렸다."
드워프, 마켈린도 쓰게 웃으며 대꾸했다.
"보증이 아니라 신탁입니다만."
"그 소리가 그 소리지, 뭐."
드워프들이 레펜하르트에게 신병을 의탁한 것은 자그마치 10여 년 전, 안타레스 제국이 생기기도 전의 일이다. 다른 이종족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각 씨족 단위로 그에게 의탁한 데 비해 드워프들은 모든 부족이 단결하여 한꺼번에 레펜하르트 밑으로 들어왔는데, 그 이유가 바로 드워프의 대신관, 마켈린이 받은 신탁 때문이었다.
엘프를 곁에 두고 오크의 길잡이를 따르며 다이만의 심연을 통과하는 자, 호크릴의 기둥을 부수고 나타날지니 그를 따르라. 그가 곧 운명을 뒤틀어 구원을 줄 자이다.
그 당시 레펜하르트는 시리스와 타시드를 대동하고 한창 던전 다이만을 탐사하던 중이었다. 탐사 도중, 특이한 공간 왜곡 마법이 걸려 있는 기둥을 발견하고 연구차 이리저리 마법 걸다가 왕창 부숴 먹었는데, 그게 바로 드워프들의 은거지이자 알 포트의 신전과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땐 정말 당황했지. 신전 절반을 박살 냈는데 드워프들이 몰려오더니 화를 내긴 커녕 구원자라고 막 칭송하더라고. 진짜 상황 파악 안 되더군."
추억을 떠올리며 레펜하르트가 키득거렸다. 마켈린도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날 이후 드워프들은 레펜하르트 밑으로 들어왔고, 깊은 신뢰와 충성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그 신뢰와 충성은 황도가 불타는 지금에도 전혀 퇴색하지 않았다. 다른 이종족들과 마찬가지로....
마켈린이 고개를 숙이며 성호를 그었다.
"알 포트께서 가호하사, 다시 뵈올 날이 있기를."
"나도 그랬으면 좋겠군. 잘 가게나, 마켈린."
그렇게 마켈린마저 보낸 뒤 레펜하르트는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엘프 여인을 바라보았다.
"시리스."
"네, 레펜하르트 님."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시리스가 몸을 일으켰다. 각오를 다진 그녀의 모습에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이야 저렇게 엘프들의 수장다운 태도를 보이고 있지만, 어젯밤에는 정말 난리도 아니었다.
-레펜하르트 님! 정말 다른 방법은 없는 건가요? 아무리 레펜하르트 님이라도 대륙 최강자들을 홀로 상대하시는 건 너무 위험해요!
-시리스, 나의 사랑. 네가 선택한 남자는 그렇게 부실하지 않단다.
-가끔 부실해지시잖아요!
-...아니, 이 상황에 밤일 이야기는 왜 하누....
-몰라요! 같이 가요!
-설명 다 하지 않았니? 내가 움직이면 다른 이들을 구할 수가 없단다.
-그럼 저도 안 가요!
-...그럼 엘프들은 누가 이끌란 말이냐?
-몰라요! 어쨌든 전 레펜하르트 님 곁에 있을 거예요!
-아니, 그러니까....
비이성, 비논리, 감정은 대폭발! 이라는 히스테리 3대 요소를 몽땅 갖추고 생난리를 쳐 대는데....
'달래느라 죽는 줄 알았지.'
그래도 하룻밤 사이 많이 진정한 모양이었다. 침착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연인을 향해 레펜하르트가 다정한 음성을 이었다.
"...이제 너도 가야지."
"네."
대답을 마치며 시리스는 레펜하르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강한 의지를 담아 속삭였다.
"기다릴 거예요."
그 사랑스러운 표정에 레펜하르트는 더더욱 씁쓸하게 웃었다. 그인들 시리스와 떨어지고 싶을까? 하지만 상황이 너무 가혹하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자신을 기약 없이 기다리라 할 만큼 레펜하르트는 잔인한 남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대꾸했다.
"운명이란 어찌 될지 모른단다. 시리스, 그러니 만약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너도 다른 좋은 사람을 만나서...."
"반드시 기다릴 거예요."
"아, 물론 나도 너를 다시 만나고 싶지 않겠느냐? 하지만 상황이 좋지 않구나. 저들도 작정을 하고 왔으니 아무래도 쉽지 않을...."
"무! 조! 건! 기다릴 거예요!"
"...."
고집 센 눈동자를 보며 레펜하르트는 결국 실소를 터트렸다. 시리스가 레펜하르트의 목을 껴안았다. 레펜하르트도 시리스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불타는 황도를 뒤로한 채 두 연인은 말없이 키스를 나누었다.
☆ ☆ ☆
"으음...."
신음을 흘리며 레펜하르트는 눈을 떴다.
'오랜만에 전생의 꿈을 꾸었군.'
우울한 기억, 서글픈 추억의 단편이었다. 결국 자신의 미끼 역할에도 불구, 사천왕들은 모두 인간들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딱히 작전이 틀렸다고 볼 수는 없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아예 탈출 자체도 불가능했을 테니까. 병력 차가 나도 너무 심각하게 났으니 그 당시엔 저것 외에 대책이 없었다.
'후우....'
죽어 간 사천왕들을 생각하니 가슴 한쪽이 시려 온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애써 머리를 저으며 상념을 떨쳐 내려 애썼다.
'괜찮아.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막을 수 있는 일이야.'
애써 기분을 환기하며 레펜하르트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순간 인상을 썼다. 몸을 움직이는 순간 지독한 통증이 전신을 엄습해 왔다.
'으윽, 단단히 망가졌네.'
레펜하르트는 혀를 내둘렀다. 오러를 운용해 몸 상태를 점검해 보니 절로 기가 찼다. 갈비뼈도 대여섯 개 나간 데다 내장도 상했고 근육 곳곳이 파열되어 붕대를 붉게 물들이고 있다.
'역시 최강의 마도기 엘드라드.'
그토록 단련을 거듭한 육체이거늘 단 일격에 이 꼴이 되어 버렸다. 엘드라드의 명성은 결코 헛소문이 아니었던 것이다.
'바보짓을 했다.'
레펜하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마갑주 엘드라드를 다루는 유서스의 실력은 확실히 오러 능력자와 필적할 만했다. 과연 명성 높은 황금기사, 주색잡기에 찌든 란타스보다는 확실히 우위에 선 무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지만 레펜하르트가 감당치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처음부터 제대로 전력을 다해 맞붙었다면, 오러를 제한하고 싸우지 않았다면 능히 이길 수 있는 상대였다.
결국은 자신의 사고방식의 문제였다. 생사가 걸린 와중에서도 '나는 도둑질 중이다.', '나는 정체를 들켜서는 안 된다.'라며 스스로 족쇄를 걸고 싸우다니, 게다가 위기가 코앞까지 닥치도록 그 마음의 족쇄를 풀지를 못하다니 이 무슨 머저리 같은 짓이란 말인가?
'정말 한심하군.'
레펜하르트는 헛웃음을 흘렸다. 무엇이 문제인지 이번 일로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너무 소심하게 굴고 있다. 지금의 난...."
물론 차탄 공국에서 그토록 무식하게 날뛴 레펜하르트가 소심하다고 하면 그의 주먹에 맞아 죽은 이들이 울분을 터트리겠지. 하지만 그가 말한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이미 그는 전생에 한 번 실패했다. 고금 최강의 마법사였음에도 결국 대륙 전체의 미움을 받아 죽음을 당했다.
그렇다 보니 다시 태어난 후로도 너무 상황에 대해 눈치만 보고 있었다. 마왕으로서 세인들 앞에 나서면 안 된다는 생각만 가득해 어떻게든 자신의 존재를 숨길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잘 생각해 보면, 아직은 굳이 저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도둑질하니까 오러를 숨겨야 한다고? 정체가 들통 나면 안 된다고?
어이없는 생각이었다. 정체가 들통 나면 대체 무슨 일이 생긴다는 건가? 그래 봤자 그냥 오러를 다루는 강력한 권사 하나가 어울리지 않게 도둑질을 했다는 사실만 알려질 뿐이다. 뭐, 제라드의 귀에 그의 행각이 들어갈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무의식중에 저걸 워낙 두려워해서 정체 숨기려고 한 부분도 컸지만) 생각해 보면 제라드 성격상 호쾌하게 날뛰었다고 칭찬하면 했지 뭐라 할 것 같지는 않다.
전생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점은 좋다. 하지만 그렇다고 실패를 두려워해 몸을 사리고 있어 봤자 이루어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지금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나아가야 할 때였다. 실패를 두려워하는 건 실패할 만큼의 뭔가를 이루어 놓은 뒤의 일이다.
"진짜 바보짓 했다니까...."
레펜하르트는 피식 웃었다. 확실하게 문제점을 인식하고 나니 가슴속이 후련해졌다.
'뭐, 어쨌거나 결과는 나쁘지 않구먼. 좋은 교훈도 얻었고, 엘류시온의 목소리도 제대로 챙겼고.'
한층 편해진 얼굴로 레펜하르트는 호주머니를 뒤졌다. 그리고 네모난 블랙박스를 꺼냈다. 겉보기에는 도저히 마도구 같지 않은 그냥 평범한 상자. 하지만 이것은 은의 시대에서도 최상을 달리는 특급 아티팩트다.
'이걸로 마법을 되찾는 길도 한걸음 나아갔다.'
레펜하르트는 흐뭇하게 웃었다. 호된 대가를 치르긴 했지만 그래도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으니 일단은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아윽! 웃었더니 또 쑤신다."
물론 그 대가가 상당히 아프다는 점은 변함이 없지만.
옆구리를 매만지며 레펜하르트는 일단 상념을 접고 다시 몸 상태를 점검했다. 여기저기 상처가 심했고, 특히나 오러로 방어를 채 못 한 두 다리는 말이 아니었다. 아예 다리뼈가 으스러져 산산조각이 난 상태였다.
'그래도 오러 방어도 늦어서 사실 반쯤은 맨몸으로 맞은 것이나 다름없는데... 그걸 감안하면 사지 멀쩡한 게 더 신기하지.'
강철 같은 육체를 이 꼴로 만든 엘드라드의 마법에 경탄을 보내야 할지, 아니면 그 강력한 마법을 맞고도 이 정도로 끝난 육체에 경탄을 보내야 할지 영 아리송하다. 보통 이 정도 부상이면 아예 불구가 될 심각한 중상이겠지만....
'이렇게 다쳐 보는 것도 오랜만이네.'
레펜하르트는 마비된 두 다리를 내려다보면서도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정도면 짐 언브레이커블 기준에선 심각한 부상이 아니라 '적당히 사부와 구타 훈련을 한 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한두 번 당해 본 것도 아니고 오러를 각성하기 전엔 매일 이 정도 부상은 달고 살았으니 당황할 리가 없었다.
'이 정도면... 오러로 박살 난 뼈와 살을 다시 맞추고 자체 치유력을 높인다면 사흘 정도로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겠군.'
오러를 운용하며 레펜하르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여기는 어디지?'
작은 방이었다. 화강암으로 된 벽은 매끈하게 다듬어져 있고 문 쪽엔 얇은 휘장만이 쳐 있다. 특이한 것은 천장이 상당히 낮아, 레펜하르트가 만약 자리에서 일어난다면 허리를 상당히 굽혀야 할 것 같다는 점이었다.
'이거 혹시....'
뭔가 떠오른 레펜하르트는 자신이 누워 있던 침상을 살펴보았다. 지금 그가 깔고 앉은 침상은 작은 침대 네 개를 겹쳐 놓은 물건이었다. 아이 침대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넓고, 어른 침대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짧다. 그리고 레펜하르트는 누가 이런 사이즈의 침대를 쓰는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역시나...."
그때였다.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이내 누군가가 휘장을 걷고 안으로 들어왔다.
"호오? 깨어났구려."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며 레펜하르트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대로였다. 이런 사이즈의 침대를 쓰는 이는 대륙에 단 하나뿐이다.
드워프였다.
평균 신장 140 정도에 어깨 넓이는 1미터가 넘는, 작지만 단단한 체구를 지닌 대지의 아들들, 드워프.
휘장을 걷으며 나타난 것은 새하얀 머리에 갈색 눈을 지닌 드워프였다. 드워프다운 풍성한 수염으로 가슴을 덮은 그가 레펜하르트를 살펴보며 안부를 건넸다.
"몸은 괜찮소?"
"아, 예. 그럭저럭...."
엉겁결에 고개를 숙이며 레펜하르트는 눈앞의 상대를 바라보았다.
수염의 길이와 풍성함으로 짐작컨대 적어도 삼백 살은 넘은 늙은 드워프인 것 같았다. 인간들 눈에야 모든 드워프가 죄다 수염은 북실북실, 눈알은 부리부리, 몸통은 둥글 넙적한 것으로만 보이겠지만 포인트만 파악하면 나이를 구별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쨌거나 저들이 그를 구해 준 것은 틀림없었다. 레펜하르트가 정중히 사의를 표했다.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본의 아니게 폐를 끼쳤군요."
늙은 드워프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허허허, 당연한 것을 가지고. 난 헤토스라 한다오."
"...레펜하르트입니다."
통성명을 하면서도 레펜하르트는 내심 당황했다. 상대가 인간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서로 통성명을 하는 것이 별로 어색한 일이 아니겠지만....
'뭐, 뭐야? 왜 이렇게 분위기가 좋아?'
현 대륙의 실정을 생각해 볼 때, 드워프가 인간에게 좋은 감정 갖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애초에 죽어 가는 인간을 드워프가 구해 주는 경우도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뭐, 그거야 이 드워프들이 워낙 성격이 좋아서 그랬다 치자. 그래도 이렇게까지 호감어린 눈빛을 할 리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호의는 눈빛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아직 일어나기는 힘들 것이고... 음식은 드실 수 있겠소?"
"예? 예...."
"다행이군. 틸라 양, 준비한 것 좀 들고 오게나."
헤토스가 휘장 밖으로 소리를 질렀다. 뒤이어 귀엽게 생긴 인상의 드워프 여인이 커다란 쟁반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겉보기엔 마치 10대 초반의 어린 인간 소녀인 것도 같았지만,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어 바로 드워프 여인임을 알 수 있었다.
'가슴을 보니 혼기 꽉 찬 처녀로군.'
원래 드워프 여성들은 중년의 나이가 되어도 작달막한 소녀 체형에 인간 기준으로는 동안을 유지한다. 그 상태로 나이를 먹을수록 가슴만 풍만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들 중 특이한 취향을 지닌 놈들은 가끔 젊은 드워프 여성을 데려다 성노로 쓰는 경우도 있었다. 뭐, 수요는 그리 많지 않지만.
하여튼 남자는 수염, 여자는 가슴! 이것이 드워프들의 나이를 구별하는 제일 쉬운 방법이었다. 딱히 레펜하르트가 무슨 음흉한 속셈이 있어 대뜸 처음 보는 처자 가슴부터 훔쳐본 것이 아니란 소리다.
"아, 깨어났네요. 잘됐다. 드세요."
틸라라 불린 드워프 여인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쟁반을 침상 한구석에 놓았다. 쟁반 위에는 보리죽이 가득 담긴 커다란 대접이 놓여 있었다.
"가, 감사합니다."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며 레펜하르트는 계속 당황했다.
'드워프들이 인간을 좋아할 리가 없는데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지?'
그렇다고 잘 대해 주는 이들에게 '왜 이리 잘해 줘요?'라고 묻는 것도 웃기는 이야기다. 레펜하르트는 머쓱해하며 수저를 들었다. 죽을 퍼먹는 레펜하르트를 흐뭇하게 바라보더니, 헤토스가 다시 휘장을 열고 방을 나섰다.
"그럼 난 장로님을 모셔오겠소이다."
의문은 장로라 불린 늙은 드워프가 나타난 순간 바로 풀렸다.
"오! 깨어나셨소이까? 일족의 구원자여!"
"...구원자요?"
백발이 성성한 이 늙은 드워프의 이름은 겔파이드 델파이스톤. 이곳에 머무는 드워프 일족의 장로이자 알 포트를 섬기는 신관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의 설명을 듣자, 왜 이들이 레펜하르트에게 그리도 호의적이었는지도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6년여 전, 드워프들의 대신관에게 알 포트의 신탁이 내려졌다고 한다.
강철의 육체에 지고의 지식을 담은 자, 흑암의 길을 통해 북풍의 눈물을 타고 나타날지니 그를 따르라. 그가 곧 운명을 뒤틀어 구원을 줄 자이다.
쉽게 말해서 덩치 크고 머리 좋은 놈이 지하 동굴을 통해 얼음물에 동동 떠내려올 테니까 건져다 구원자 삼으란 소리였다.
대신관은 저 신탁을 전 대륙의 드워프들에게 은밀히 알렸고, 모든 드워프들은 자신의 거처에 동굴이 있고 그곳이 강과 연결되어 있다면 눈을 떼지 않았다고 한다. 이곳 역시 강과 연결된 지하 동굴이 있었고, 그래서 겔파이드는 6년 동안 겨울만 되면 그 동굴에 보초 세워 놓고 누군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다 결국 어젯밤, 커다란 인간 하나가 두둥실 떠내려 오기에 얼씨구나 하고 건져 냈다는 이야기.
"하하...."
설명을 들은 레펜하르트는 이마를 짚으며 헛웃음을 흘렸다.
상황이 바로 파악이 되었다.
'와, 알 포트 이 양반, 그새 말 바꿨구나.'
신탁이 내린 것이 6년 전이면 딱 레펜하르트가 이 시공으로 전생했을 그 시점이다. 레펜하르트가 이 시간대에 나타나자마자 바로 움직였다는 소리다.
'참 반응 한번 빠르시네. 한 번 말아먹었는데 그래도 아직 보증 서 주시겠다는 건가. 호인, 아니 호신好神이시구만.'
인과율을 뛰어넘는 이 사태에 레펜하르트는 피식 웃었다. 이걸로 이 드워프들이 처음 보는 자신을 이토록 환대하는 것도 확실히 납득할 수 있었다. 전생에서도 이랬었으니까.
그래도 혹시나 싶어, 그때 했던 질문을 되풀이해 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것만으로 처음 보는 인간을 이렇게 믿고 치료해 주었단 말입니까?"
역시나, 전생에서 들었던 대답이 돌아왔다.
"설마 알 포트께서 빈말하셨겠소?"
한 치의 의심도 없는 눈빛으로 대꾸하는 드워프 장로, 겔파이드였다. 레펜하르트는 더 이상 따지지 않고 속으로 알 포트에게 감사 인사를 올렸다. 아무리 레펜하르트라지만 이 정도의 부상을 입은 채 계속 얼음물에 잠겨 있었다면 생사를 장담하기 힘들었을 테니까.
'한 번 더 믿어 줘서 고맙습니다. 이번엔 잘해 볼게요.'
겔파이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을 나서며 그가 인자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환자를 앞에 두고 긴 이야기 하긴 그렇군. 일단은 푹 쉬면서 상처를 돌보시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합시다. 틸라를 곁에 둘 테니 필요한 것이 있다면 이 아이에게 말하시고."
탈라가 생글생글 웃으며 침상 옆 의자에 앉았다. 레펜하르트는 감사를 표한 뒤 다시 죽을 퍼먹기 시작했다. 어서 몸 상태부터 호전시켜야 했다.
'적어도 두 다리로 움직일 정도까지는 어서 나아야지. 용변은 혼자 볼 수 있어야 할 거 아냐?'
아무리 성인 여성이란 걸 머리로는 알아도, 틸라의 겉모습은 어린 소녀로밖에 안 보인다(특정 부위를 제외하곤). 그런 이에게 용변 처리를 부탁할 만큼 그는 뻔뻔하지 못한 것이다.
순식간에 보리죽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운 레펜하르트가 빈 그릇을 내밀며 아쉬운 목소리를 흘렸다.
"저기, 죽 좀 더 줄 수 있습니까?"
"잘 드시네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어린 소녀의 얼굴로 성숙한 여인의 미소를 지으며, 틸라가 빈 그릇을 받아 들고 방으로 나섰다. 다시 자리에 누워 레펜하르트는 오러를 운용하기 시작했다. 육체를 치유하며 그가 상념에 빠졌다.
'그나저나 이렇게 된 이상 실란과 시리스가 걱정이군. 아무 일 없었으면 좋겠는데.'
2
이른 아침, 아침 햇살이 가득한 켈베른 자작령의 한 거리.
평소와 전혀 다를 바 없는 햇빛 아래, 평소와 전혀 다른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쫓아라!"
"도적을 잡아라!"
한 무리의 기사들이 수많은 병사들을 이끌고 거리를 질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쪽, 다닥다닥 붙은 이층집 지붕 위를 정신없이 뛰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백금발의 단발머리 사이로 뾰족한 귀를 드러낸 아름다운 엘프 소녀와, 그녀의 손에 이끌려 정신없이 뒤를 따르는 붉은 장발의 소년이었다.
앞서 달리던 엘프 소녀, 시리스가 지붕 끝에 다다르자마자 손을 뻗었다.
"내 손을 잡아요, 실란!"
"이미 잡고 있는데요!"
거의 악을 쓰다시피 실란이 대꾸했다. 시리스가 바로 그를 잡아당겨 어깨 위로 짊어지더니 바로 몸을 날렸다.
"하앗!"
가벼운 기합과 함께 가녀린 엘프 소녀가, 더 가녀린 소년을 짊어지고 건너편 지붕으로 뛰어넘는다. 아득한 부유감을 느끼며 실란이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아니, 나도 그래도 남잔데 이렇게 번쩍번쩍 들어 버리면...."
시리스 어깨에 얹혀 있다 보니 자연스레 저 아래, 도로를 따라 열심히 자신들을 쫓는 기사들이 보인다. 기세등등하게 쫓아오는 그 모습을 보며 실란이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평소에는 세상 다 아는 것처럼 굴더니 결국 들켰구나, 바보 레펜 씨. 어쩐지 예감이 불안하더라."
레펜하르트가 돌아오길 기다리던 실란과 시리스는 새벽 동이 채 트기도 전에 불청객을 맞이해야 했다. 도적의 동료들을 체포하겠다며 켈베른 자작의 병사들이 테네스 기사단을 대동한 채 여관으로 찾아온 것이다. 이런 시골 영지에 외부인은 드물고 레펜하르트 정도의 덩치는 더더욱 드물었으니, 이들이 동행이란 것은 숨겨질 일이 아니다. 병사들은 바로 여관을 에워싸고 두 사람이 묵던 방으로 쳐들어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둘 다 잠들어 있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시리스가 미리 불길한 예감을 느낀 탓에 둘 다 떠날 채비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갑작스러운 기습이었지만 그 덕에 바로 여관에서 몸을 뺄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다시금 달려 다른 가옥 지붕 위로 뛰며 계속 도망쳤다. 정확히는 시리스가 뛰어넘어 도망치고 실란은 그냥 얹혀 다녔지만, 그렇다고 실란이 완전 짐덩이인 것만은 아니었다.
"필라넨스시여, 당신의 종을 보살피사 산양처럼 끝없이 뛰게 하소서!"
시리스가 힘들어할 때마다 실란은 신성 주문으로 그녀의 피로를 제거하고 활력을 불어 넣는 한편, 도약력을 증폭시켜 도주에 지대한 도움을 주고 있었다. 허약한 다리로 직접 뛰느니, 이렇게 얹혀 가고 열심히 신성 주문 걸어주는 쪽이 더 효율이 좋은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도 추격을 따돌리기는 요원했다.
"저쪽이다!"
"반대편으로 몰아라! 도주로를 차단해!"
지붕 위에서 힐끔 아래를 내려다본 시리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그들을 쫓고 있는 병력은 어림잡아도 백 명은 족히 넘어 보였다. 도저히 따돌릴 만한 숫자가 아니었다.
게다가 그들의 적은 기사들뿐만이 아니었다.
"어이구, 기사님. 저쪽으로 갔는뎁쇼."
"협조 감사한다!"
"저기로 도망가는구먼요!"
"그대들의 충성, 기억하겠다!"
켈베른 자작령의 주민들 역시 추격자들에게 협조적이었다. 켈베른 자작은 괜찮은 영주였고, 영민들에게도 평판이 좋았다. 게다가 워낙 시골이다 보니 추격전이라 봐야 사과 훔친 어린애와 몽둥이 들고 쫓아가는 과일상 주인 정도밖에 보지 못했던 것이다. 딱히 자작에게 충성도가 높아서라기보다는, 그냥 다들 이걸 무슨 흥미진진한 축제쯤으로 인식했는지 열심히도 손가락질을 해 주고 있었다.
"더 이상 도망갈 곳은 없다!"
막 지붕 두 개를 연달아 건너 뛴 시리스의 눈앞을 세 명의 검사가 가로막았다. 미리 그녀의 도주로를 예상하고 지붕 위로 올라와 있었던 것이다. 기사들이 검을 뽑아 시리스를 중심으로 포위망을 형성했다. 기사 중 하나가 검을 겨누고 위엄찬 목소리로 외쳤다.
"무기를 버리고 투항해라!"
상황을 살피던 시리스가 굳은 얼굴로 실란을 어깨에서 내려놓았다. 그리고 롱 소드도 풀어 지붕 위에 살짝 내려놓았다. 누가 봐도 명백한 항복의 표시라 기사들이 살짝 긴장을 풀었다.
'하긴, 저 엘프가 아무리 슬레이어라도 세 명의 기사를 상대로 감히 덤비려는 생각은 못하겠지.'
시리스가 연달아 느린 동작으로 허리춤에서 작은 막대기를 꺼내 들었다. 기사들은 그때까지도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저 작은 막대기가 무기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으니까.
순간 시리스가 외쳤다.
"니힐렌!"
막대기가 바로 빛의 마궁으로 형태를 변환한다. 기사들이 채 당황하기도 전, 시리스가 어느새 시위를 당겼다.
슈육!
바람을 가르며 빛의 화살이 기사 중 하나의 어깨를 관통했다.
"크억!"
비명을 지르며 화살에 맞은 기사가 지붕 아래로 굴러떨어진다. 그 틈을 타 시리스가 발치의 롱 소드를 걷어차 올리더니 허공에서 뽑아 들었다.
"타앗!"
검을 뽑아 기사들에게 돌진한 뒤 좌우로 빠지며 이연속 베기! 실란의 권능으로 한껏 증폭된 시리스의 움직임은 방심한 기사들이 감히 상대할 수준이 아니었다. 심리의 틈새를 정확히 노린 기습에 노련한 기사들도 미처 대응하지 못하고 피를 뿌렸다. 뒤에서 보던 실란이 놀라 외쳤다.
"주, 죽이진 마!"
검을 휘둘러 핏물을 흩뿌리며 시리스가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불필요한 살생은 하지 않아요."
과연, 쓰러진 기사들은 고통스러워는 해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 보였다. 시리스는 그 순간 절묘하게 기사들의 허벅지와 종아리만을 베어 기동력을 빼앗은 것이다. 실란이 안도의 한숨을 쉬며 새삼스러운 눈으로 시리스를 바라보았다.
'죽이지 않았으니 다행이긴 하지만....'
목소리에 담긴 냉혹함이 무섭다. 뒤집어 말하면....
'필요하면 살상도 할 수 있다는 소리잖아?'
하긴, 생각해 보면 차탄 공국에서도 시리스는 가차 없었다. 자신을 잡으러 온 인간들을 상대로 잘도 피를 봤었지. 한 사람을 죽이기도 했고.
'슬레이어치곤 그래도 착한 거겠지, 이거?'
엘프들이 생명을 소중히 여긴다고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평범한 엘프들 이야기다. 온갖 미사여구를 다 갖다 붙여도 검술이란 건 결국 사람 잡는 기술이다. 그 기술을 전문적으로 배운 슬레이어가 살인에 거부감을 가진다면 애초에 장사가 되질 않는 것이다. 시리스 정도면 그래도 양호한 편이리라.
"가요, 실란."
"으, 으응."
실란은 고개를 끄덕이고 시리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지금도 병사들이 계속 그들을 추격하고 있으니 느긋해할 여유 따윈 없었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실란을 재차 짊어진 시리스가 또다시 도움닫기로 뛰어 다음 건물로 건너갔다.
☆ ☆ ☆
"어찌 되었소?"
"죄송합니다, 유서스 님. 생각보다 보통 실력들이 아니어서...."
유서스의 재촉에 중년 병사가 죄송해하며 고개를 숙였다.
켈베른 자작가의 수비대장이기도 한 이 중년 병사는 비록 기사는 아니었지만, 나름 영지의 치안을 훌륭히 지킨다는 평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몬스터의 침략도 거의 없고 밤거리 범죄도 극히 드문 이런 시골 수비대장의 역량으로는 도저히 저 '날아다니는' 도둑놈들을 붙잡을 재간이 없는 것이다.
물론 활이나 석궁 등을 쓴다면 방법이 있겠지만, 이 이름 높은 황금기사는 분명하게 요구했다. 생포해 달라고.
굽실거리는 수비대장을 보며 유서스가 연신 표정을 구겼다. 그러더니 곁에 선 부단장 로트 경에게 작은 목소리로 신경질을 냈다.
"그러게 우리들이 직접 나서자 했잖소?"
로트 경이 고개를 슬그머니 숙이며 유서스를 달랬다.
"그럴 수 없다는 건 잘 아시잖습니까?"
아무래도 손님이니만큼, 켈베른 자작령에서 테네스 기사단이 직접 설치면 모양새가 좋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켈베른 자작가가 범인 검거를 주도하고 자신과 테네스 기사단은 협조하는 형식으로 진행하고 있었는데....
"이러다 놓치면 어쩔 생각이오?"
이 상황을 이해 못할 유서스도 아닌데, 이상할 정도로 그는 조급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해가 가질 않는군. 이렇게 크게 벌일 일이 아닌 것 같은데.'
로트 경은 속으로 의아해했다. 물론 간밤의 도둑놈은 확실히 보통 실력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들고 간 것은 그 수많은 은의 시대 유물 중에서도 단 하나, 정체를 알 수 없어 이름조차 붙이지 못한 작은 상자뿐인 것이다. 물론 은의 시대 유물들이야 하나같이 고가품이니 무시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난리를 피울 일도 아니다. 그냥 그것 하나쯤 잃어버리더라도 별 상관이 없을 만큼 테네스 기사단은 충분히 많은 유물을 거두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초조해하시지? 혹시 그 상자가 엄청 대단한 물건인가?'
로트 경은 간밤의 도둑이 훔쳐 간 유물을 보고하는 순간, 창백하게 변했던 유서스의 안색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가 모르는 무엇인가가 있는 걸까?
그렇게 로트 경이 잠시 상념에 빠져있을 때였다.
"이 정도면 됐소! 직접 나서겠소!"
유서스가 등 귀에서 마검 엘드란을 꺼내 들었다. 로트 경이 놀라며 말했다.
"아니, 고작 저런 놈들을 상대로 유서스 님이 직접 상대하실 필요는...."
유서스는 로트 경의 말을 무시하고 바로 엘드란을 바닥에 꽂았다. 역시 이상했다. 평소의 유서스라면 적어도 대답 정도는 했을 텐데.
당혹해하는 로트 경을 뒤로한 채 유서스가 준비된 언령을 외쳤다.
"눈을 떠라! 엘드라드!"
황금빛이 폭발하며 그의 전신을 감싼다. 마갑 엘드라드를 착용한 유서스가 발치를 가볍게 박찼다.
쾅!
폭음과 함께, 황금빛 그림자가 새처럼 허공을 날아올라 지붕 사이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 ☆ ☆
"타앗!"
날카로운 기합과 함께 검광이 번뜩인다. 세 줄기 붉은 선혈이 허공에 비산한다. 세 번의 칼질로 3인의 기사를 동시에 쓰러트려 퇴로를 확보한 뒤 시리스가 소리쳤다.
"실란!"
"네네, 업힐게요."
'아, 레펜 씨는 언제쯤 근육 수련 시켜 주려나? 남자의 자존심이... 흑흑.'
그렇게 실란이 한가한 생각을 하며 손을 뻗으려는 참이었다. 갑자기 등 뒤에서 우렁찬 외침이 들려왔다.
"울어라! 바람의 칼날!"
휘이익!
대기가 일그러지며 흐릿한 칼날의 형상이 두 사람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4서클 풍계 주문, 윈드 스매시였다.
콰쾅!
윈드 스매시가 실란과 시리스 사이를 정확히 가르며 지붕 위를 파헤쳤다. 실란이 기겁하며 고개를 돌렸다.
"뭐, 뭐야?"
고개 돌린 실란의 눈에 휘황찬란한 갑옷을 걸친 기사가 지붕 위로 착지하는 모습이 보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금빛으로 번쩍번쩍. 도저히 못 알아볼 수가 없는 차림이었다.
"그라임의 황금기사!"
마법으로 상대의 퇴로를 막은 뒤, 유서스가 검을 들어 시리스와 실란을 겨누었다.
"여기까지다, 이 쥐새끼들."
예의 바르기로 유명한 평소의 모습과 전혀 달리, 유서스의 눈빛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잠시 호흡을 고른 시리스가 대뜸 검을 휘두르며 돌진을 시도했다.
"흥!"
코웃음을 치며 유서스가 마검 엘드란을 아래에서 위로 크게 휘둘렀다.
"솟아오르는 대지의 숨결!"
검풍이 일어 오르며 네 줄기 회오리가 시리스의 사방을 에워싸고 휘몰아쳤다. 생포해야 하니 살상력이 높은 마법 대신 바람을 일으켜 움직임을 얽매려는 것이었다.
'잡았군.'
무심한 눈으로 유서스가 시리스에게서 눈을 떼려던 차였다. 갑자기 시리스의 롱 소드가 좌우를 빠르게 베어 갔다.
"타앗!"
검으로 바람을 베었으니 아무 소용도 없어야 정상이겠지만, 놀랍게도 검날이 회오리를 베어 내며 전격을 토했다.
파지지직!
네 줄기 회오리가 순식간에 소멸했다. 동시에 시리스가 지붕을 박차며 유서스의 턱 밑까지 미끄러져 들어왔다. 섬뜩한 검광이 빛을 뿌리고 길게 휘둘러졌다.
타앙!
검날과 검날이 맞부딪치며 시리스가 뒤로 튕겼다. 제대로 틈을 노렸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유서스가 황금의 검을 휘둘러 공격을 걷어 낸 것이다. 반격에 실린 검력이 얼마나 맹렬했던지 튕겨진 시리스가 채 자세를 못 잡고 지붕 위를 한 바퀴 굴렀다.
"으윽!"
신음을 흘리며 시리스가 구른 기세를 살려 다시 몸을 일으켰다. 무릎을 살짝 굽힌 채 재차 전투태세를 취한다. 그녀의 손에 쥐어진 롱 소드를 보며 유서스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보통 검이 아니군?"
마법의 바람을 평범한 칼날로 벨 수 있을 리가 없다. 엘드란만은 못해도 상당한 수준의 마법검이었다.
하긴, 무려 오러 유저씩이나 되는 란타스가 쓰던 검이다. 가진 건 돈 밖에 없다는 롤페인 상회가 귀한 오러 능력자에게 싸구려 검을 사 주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지금 시리스가 들고 있는 롱 소드 정도면, 어지간한 소국의 기사단장이나 들고 다닐 귀한 물건인 것이다. 물론 유서스가 저 속사정까지 알지야 못하겠지만, 적어도 노예 종족인 엘프 따위가 휘두를 물건이 아니란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고작 엘프에게 저런 귀한 검을 들렸단 말인가?'
그렇게 잠시 유서스가 당혹해하는 사이, 실란이 재빨리 신성 주문을 읊조렸다.
"필라넨스시여! 당신의 종에게 사자의 용맹을 허락하소서. 검 든 두 팔에 거인의 힘이 깃들고 그 눈이 매처럼 매서워지며 두 다리가 굳센 수소가 되어 적을 치게 하소서!"
일명 여신의 풀 서비스. 시리스의 전신이 분홍빛으로 반짝이며 가공할 기세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실란을 본 유서스가 더더욱 당혹해했다. 저 정도 실력이면 누가 봐도 최고위 신관이었다.
"역시...."
담 넘는 놈은 오러 유저에, 데리고 다니는 노예는 초고가의 마법검을 휘두르더니, 이제 애송이 순례자처럼 보이는 소년이 고도의 신성력을 선보인다.
"그냥 도둑놈들은 아니었군."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짓는 유서스를 보며 실란이 슬쩍 손사래를 쳤다.
"아니, 저기 오해할 만하다는 건 인정하겠지만 말이죠. 사실은 그게...."
"타앗!"
실란의 말을 중간에 끊은 채, 한껏 강화된 신체 능력을 바탕으로 시리스가 다시 돌격했다. 유서스가 차분히 공격을 받아넘겼다. 허공에 불꽃이 튀며 단숨에 수차례의 검격이 오고 갔다.
'확실히 지금은 대화로 풀 만한 상황이 아니지.'
혀를 차던 실란도 또다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필라넨스시여, 눈앞의 적에게 신성한 철퇴를 내리소서!"
분홍색 빛의 망치가 마구 날아들었다. 유서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고위 프리스트가 가끔 저런 식의 신성 주문을 쓰는 건 봤었지만, 저렇게 성광의 망치를 소나기처럼 퍼부어 대는 건 처음 봤다.
'진짜 어느 동네 주교쯤 되나?'
뭐, 놀라긴 했지만 그렇다고 맞서기 힘들 정도의 강자란 소리는 아니었다. 그는 그라임의 황금기사, 엄연히 오러 능력자 급의 마검사인 것이다.
"천공의 궤적, 바람 따라 흐른다."
유서스의 등 뒤로 마법의 기류가 생성되더니 허공을 휘몰아치며 날아드는 분홍색 망치들을 일제히 후려갈겼다. 강렬한 마력에 휩싸인 실란의 성광 망치가 단숨에 소멸해 허공에 녹아들었다.
"내 주문이 저렇게 간단하게?"
놀란 실란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 유서스는 눈앞의 엘프 소녀에게 정신을 집중했다. 방어에만 치중하던 그의 검세가 점점 공격으로 바뀌어 간다. 상대의 역량을 파악하느라 잠시 수세에 몰렸지만, 대충 파악이 된 이상 지체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황금빛 마검 엘드란이 본격적으로 시리스를 압박해 가기 시작했다. 신음을 흘리며 그녀가 점점 뒤로 밀렸다.
"크윽!"
시리스도 어떻게든 반격을 시도했지만, 안타깝게도 기본적인 신체 스피드가 너무 차이가 났다. 결국 유서스의 휘둘러 치기에 그녀의 롱 소드가 허공으로 날아올라 갔다. 검을 놓친 시리스의 다리를 걸어 넘어트린 뒤 유서스가 바로 검을 내려 겨눴다.
"끝이다."
차가운 칼날이 쓰러진 그녀의 목덜미를 정확히 겨눈다. 무심하던 표정이 무너지며 시리스가 이를 악물었다.
"...제길!"
"시리스!"
쓰러진 시리스를 보며 실란이 허겁지겁 기도를 준비했다.
"필라넨스시여!"
물론 유서스는 실란이 기도를 이어 가도록 놔두지 않았다. 고위 신관이 입 놀리게 놔두면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른다는 건 전장의 상식. 유서스가 바로 왼손을 뻗으며 마법을 발동시켰다.
"그대, 침묵하라!"
"당신의 종에게... 웁! 우우웁!"
입 주변의 대기의 흐름을 막아 언령을 구사하지 못하게 차단하는 수법이었다. 성직자나 마법사들끼리 싸울 때 서로의 주문 시전을 막는 꽤나 보편적인 방법이다. 물론 그런 만큼 어지간한 성직자나 마법사라면 이런 수법에 대한 파훼법도 다들 가지고 있다. 실란도 재빨리 대비책을 시도하려 했지만....
"피어라, 광휘의 꽃이여!"
이어진 유서스의 마법이 실란과 시리스를 동시에 뒤덮었다. 마력의 넝쿨이 지붕에서 피어올라 두 사람을 칭칭 감쌌다. 넝쿨에서 황금빛 장미가 피어오르며 아득한 향기를 피운다. 그 자욱한 내음에 둘의 정신이 점점 흐릿해졌다.
"...으윽!"
"...시, 실란...."
신음을 흘리며 결국 시리스와 실란은 기절해 버렸다. 고개를 숙이고 축 늘어진 두 사람을 보며 유서스가 그제야 숨을 골랐다.
"후우...."
보통 놈들이 아니었다. 성직자 소년도 소년이거니와, 이 엘프 소녀의 검술도 절대 무시할 수준이 아니다.
"슬레이어겠지? 그렇다 해도 실력이 너무 좋은데...."
워낙 고가의 노예이다 보니 유서스는 슬레이어가 없었다. 원래 슬레이어라는 건 실용성보다는 허영심이 더 크게 자리하는 품목이다 보니, 사실 가격 대 성능비가 전혀 안 맞는 것이다. 슬레이어 하나 살 돈이면 차라리 그 돈으로 마도구들을 잔뜩 사서 기사단의 실력을 높이는 것이 낫다는 게 유서스의 사고방식이었다.
하지만 다른 가문의 슬레이어는 제법 봐 왔다. 개중에는 어지간히 단련한 기사 수준의 검술을 지닌 슬레이어들도 꽤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이 엘프 소녀... 시리스라고 했던가?'
이 소녀는 검술만 치면 이름 높은 검사들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을 수준이었다. 솔직히 유서스보다도 우위인 것 같았다.
'맨몸으로 붙었으면 승패를 장담할 수 없었겠군.'
승패를 가른 것은 단순히 저 실란이란 소년의 신성 가호보다 마갑 엘드라드의 능력이 더 뛰어났기 때문일 뿐.
"...그렇다 해도 승리는 승리다."
찜찜한 기분을 애써 털어 내며 유서스는 고개를 돌렸다. 뒤에서 한 무리의 병사들이 지붕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사다리를 놓고 올라온 켈베른 자작가의 병력과 테네스 기사단, 그리고 유서스가 데리고 온 가문의 마법사들이었다.
"이들을 포박하라! 마법사 폴론, 금제를 준비해 주시오!"
"예! 유서스 님!"
폴른이라 불린 마법사가 시리스와 실란에게 수면 마법을 걸었다. 켈베른 자작가의 병사들이 둘을 포박하고 입에 재갈을 물려 호송할 준비를 갖췄다.
"이들을 성으로 데려가 배후에 대해 캐겠다!"
"예, 유서스 님!"
명령을 내린 뒤 유서스는 사뿐히 몸을 날려 지붕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준엄하게 소리쳤다.
"성으로 돌아간다!"
☆ ☆ ☆
레펜하르트는 두 발로 바닥을 짚고 서 있었다. 옆에서 보고 있던 드워프 처녀, 틸라가 감탄을 터트렸다.
"정말 굉장한 회복력이네요."
처음 그를 보았을 때 사실 틸라는 조금 실망했었다. 광산에서 일하며 부상을 입는 드워프들을 많이 본 그녀였다. 그녀가 본 레펜하르트의 상처는 반신불수가 되기에 충분한 수준이었다. 설사 상처가 아문다 하더라도 두 다리는 더 이상 쓸 수 없을 것이 분명해 보였다.
아무리 알 포트께서 예언했다지만, 걷지도 못하는 이가 과연 일족을 구원할 수 있을까? 솔직히 회의가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과연 신께서 점지한 이는 뭐가 달라도 달랐다. 그저 한나절 동안 침대에 누워서 보리죽을 미친 듯이 퍼먹는 것만으로, 자력으로 일어나 걸을 정도의 수준까지 회복한 것이다. 굉장하다 못해 비상식적인 회복력이었다.
'아니, 저쯤 되면 오히려 회복이라기보다는 트롤들의 재생력에 가까울지도?'
그렇게 틸라가 딴생각을 할 때였다. 벽을 짚고 조심조심 걸음을 옮기던 레펜하르트가 빙그레 웃으며 머리를 숙였다.
"챙겨 주신 덕분에 많이 나았습니다."
"...제가 드린 건 전설 속의 엘릭서 같은 영약이 아니라 그냥 보리죽인데요."
솔직히 정말 엘릭서를 퍼먹였어도 저렇게 빨리 나았을지는 의문이다. 틸라가 뺨을 긁으며 겸연쩍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좀 더 좋은 음식을 드렸으면 좋았을 텐데... 지금 있는 게 보리죽뿐이라...."
레펜하르트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정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이들이 구해 주고, 제대로 음식을 공급해 주지 않았다면 이렇게 빨리 낫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짐 언브레이커블의 오러가 신체 치유에 탁월한 효과를 보인다고는 해도 뭔가 뱃속에 집어넣어 주지 않으면 그 효능은 크게 반감하니까.
'고기를 좀 먹었다면 좀 더 빠르게 회복되었겠지만 뭐, 그런 것까지 기대하는 것은 무리겠지.'
노예로 살아가는 이들의 식량 사정이 좋을 리가 없다. 그걸 생각하면 지금 레펜하르트가 먹어 치운 보리죽도 꽤나 큰 지출일 터였다. 조금 먹은 것도 아니고 커다란 사발로 열댓 그릇은 해치웠으니까. 아마도 이로 인해 몇몇 드워프들이 본의 아닌 다이어트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것 참 미안하네. 쩝....'
어쨌건 지금은 몸 상태를 회복시키는 것이 최우선, 레펜하르트는 호흡을 고르며 계속 전신의 오러를 운용했다. 틸라가 문득 물었다.
"아, 몸이 많이 나았으면 신관님을 불러도 될까요?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던데."
뭐, 이야기 나누는 정도야 전혀 문제가 없다. 막 고개를 끄덕이려다 말고 레펜하르트가 생각을 바꿨다. 손님 주제에 자리에 앉아 주인을 오라 가라 하는 것은 아무래도 예의가 아닌 것 같다.
"아니, 제가 찾아가죠. 어차피 걷는 것에는 이제 문제가 없으니까요."
"아, 그럼 제가 안내할게요."
틸라가 자리에서 일어나 레펜하르트를 부축했다.
레펜하르트를 구해 준 드워프들은 스틸해머 일족, 켈베른 자작가의 노예로 살아가는 마운틴 드워프 계열의 부족이었다.
엘프나 오크 노예와 달리 드워프들은 비록 노예일지언정 어느 정도 자체적으로 마을을 이루어 전통과 문화를 유지하는 것이 보통인데, 그것은 전적으로 드워프의 쓰임새가 저 두 종족과는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오크나 엘프 노예가 인간 사회에서 하는 일은 크게 전문 지식이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크들은 보통 단순 노동력으로 쓰이고 엘프들은 시종이나 성노로 쓰이는데 이것에 딱히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치는 않은 것이다. 물론 개중에는 슬레이어나 검투사처럼 전문적으로 교육받은 노예들도 있지만, 이 교육은 인간들이 충분히 할 수가 있다.
하지만 드워프는 다르다. 인간이 드워프 노예를 부리는 분야는 탄광이나 건축, 대장장이나 세공 계열의 일이다. 그리고 이 전문 분야의 지식은 인간이 가르칠 수가 없다.
드워프가 인간의 지배를 받게 되며 그들이 숨겨 왔던 일족의 지혜 대부분은 인간에게 공개가 되었다. 하지만 그 지혜를 인간이 이해할 수는 없었다.
예를 들어 탄광을 파기 위해 광맥을 찾는 지혜를 배운다 치자.
인간이 요구한다.
광맥을 찾는 법을 공개하라!
드워프가 대답한다.
대지의 소리를 들으면 됩니다. 참 쉽죠?
이게 무슨 개소리냐 싶겠지만, 드워프들도 그 이상의 설명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냥 소리가 들려서 땅 파는 것인데 여기다 무슨 설명을 덧붙이라는 건가?
광맥 찾는 법을 포기한 인간이 이번엔 다른 걸 요구한다.
미스릴과 아다만티움을 합금화하는 방법을 공개하라.
또다시 드워프가 흔쾌하게 대답한다.
미스릴과 아다만티움을 녹여서 잘 담금질하다가, 두 녀석의 근성이 차오른다 싶으면 그때 합치면 됩니다.
드워프들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들의 눈에는 저런 것이 보이는 것이다. 그냥 들려서 땅 파고 보이니까 담금질하는데 설명이 될 리가 없었다. 빨강과 파랑을 구별하는 법을 알려 달라고 아무리 장님이 닦달해 봐야, 시력을 지닌 이가 설명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래서 드워프들의 기술 전수라는 것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광맥을 찾는다고 하면, 아무리 대지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해도 선조의 지식을 잇지 못한 드워프가 바로 광맥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지의 소리가 들린다 해도 어느 것이 강철의 소리이고 어느 것이 미스릴의 소리인지의 구별법만은 배우지 않으면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대장장이 일이나 건축 일도 마찬가지다.
드워프들이 특유의 기술력이 없다면 노예로서의 가치가 없다. 그리고 그 기술력의 전수는 오로지 드워프들 사이에서만 가능하다. 오크나 엘프 부족과 달리 드워프 부족이란 곧 전문가들의 집단이란 의미와도 같다. 오크 농장처럼 단순하게 그저 상관없는 드워프들을 모아 놓는다고 척척 광산 만들고 건물 올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즉, 드워프들은 사회를 이루고 있어야 비로소 인간에게 유용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드워프들은 다른 종족과 달리 부족 단위로 노예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만큼 종족 특유의 문화나 지혜도 제법 보존할 수 있었다. 노예 종족 중 유일하게 자신들의 신앙을 유지해, 신관이 존재할 수 있는 것도 이런 이유였다.
'덕분에 안타레스 제국을 세울 때 참 도움을 많이 받았지. 이종족 중 유일하게 사회라는 시스템을 이해하고 있었으니까.'
잠시 옛 추억을 떠올리며 레펜하르트는 조용히 웃었다. 지금 그는 틸라의 부축을 받으며 마을 내 공터를 걷는 중이었다.
틸라의 마을은 켈베른 성으로부터 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커다란 지하 동굴에 위치해 있었다. 마을이라고는 했지만 사실은 개미집 같은 느낌이다. 40여 미터 정도 높이의 커다란 공동이 있고, 그 공동 벽을 따라 드워프들의 동굴 집이 차례대로 뚫려 있다. 공동 천장에는 커다란 붉은 바위가 박혀 있어 빛과 열을 제공한다. 바위를 보며 레펜하르트가 턱을 매만졌다.
'저게 지열석이군. 마법적인 빛과 열을 낸다는.'
옛날에는 드워프들도 뛰어난 부여 마법을 익혀 자체적으로 마법 도구들을 생산해 냈다고는 하지만 지금 그들의 마법 지식은 모두 단절되었다. 인간들이 위험한 마법 지식을 드워프들로부터 모두 빼앗은 탓이었다. 그래서 지금 드워프들은 마법을 부여하기 쉽도록 온갖 도구들을 만들 수는 있어도, 거기에 직접 마법을 걸 수는 없는 처지가 되었다. 아마도 저 바위도 인간 마법사가 따로 주문을 걸어 완성시킨 것이겠지.
'그리고 동시에, 이들을 감시하며 생활을 제어하는 용도로도 쓰고 말이야.'
틸라는 레펜하르트의 허리를 안고 그를 부축하고 있었다. 신장 차이가 심하다보니 부축이라기보다는, 살아 있는 지팡이 쪽에 더 가깝다고 해야겠다. 레펜하르트는 그녀의 어깨를 짚고 걸음을 옮기고 있었으니까.
"정말 괜찮아요?"
미안해하며 레펜하르트가 묻자, 틸라가 별소리 다 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드워프 여자들을 인간 여자와 같이 보지 마세요."
물론 레펜하르트도 드워프 여성들이 어지간한 인간 성인 장정만큼의 근력을 가졌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머리로는 알아도, 겉보기엔 영 어린 소녀처럼만 보이니 원....'
하지만 표정을 보니 정말로 별로 힘든 것 같지가 않다. 솔직히 레펜하르트의 체중을 생각하면 아무리 드워프 여성이라 할지라도 꽤 힘들 것인데 이상할 정도로 태연한 얼굴이었다.
'보기보다 힘이 꽤 좋은 아가씨일세?'
하긴, 솔직한 드워프들의 성격상 힘들었다면 벌써 말을 했겠지.
레펜하르트는 공동 외곽을 따라 계속 걸었다. 마을 안은 꽤나 한산했다. 노인들은 자신의 동굴 앞에 의자를 놓고 앉아 담배를 태우고 있었고, 몇몇 어린 드워프들이 뛰어다니다가 레펜하르트를 보고 무서워하며 몸을 숨기고 있었다.
하나같이 마르고 안색이 좋지 않았다. 드워프라면 작지만 단단한 체구로 유명하다. 하지만 이곳의 아이들이나 노인들은 제대로 먹지 못했는지 하나같이 삐쩍 말라, 그저 작을 뿐이었다. 마을이라면 응당 있을 활기찬 분위기는 전혀 없고 그저 눈빛이 죽은 아이들과 늙은이들만이 여기저기 시체처럼 늘어져 있었다.
'마치 무덤 같군.'
안타레스 제국의 드워프들과 비교하면 천양지차였다. 이것이 노예인 자와 아닌 자의 차이겠지. 레펜하르트가 문득 틸라를 돌아보며 물었다.
"여긴 몇 명이나 살죠?"
"아이 포함해서 예순 명 정도예요."
"그렇군요. 모두 켈베른 자작의?"
"네, 켈베른 자작가의 노예지요."
틸라의 표정이 살짝 수심에 잠긴다. 그녀가 잠시 침묵하다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사내들이 보이지 않아서 그렇죠? 남자들은 평소에는 세텔라드 산맥에 있는 광산에 가 있어요."
아이 같은 얼굴 위를 나이 든 이의 수심 어린 표정이 뒤덮는다. 레펜하르트가 머쓱해하며 고개를 돌렸다. 미처 생각 못 했는데, 원래 인간들이 드워프들을 노예로 삼는 수법이 떠오른 탓이었다.
혹시 모를 반란을 막기 위해 보통 인간들은 드워프 가족을 인질로 삼는 방법을 쓴다. 남자들은 탄광이나 건축 일터로 몇 달씩 보내고 인간에게 충성을 보이는 이들만 가끔 가족에게 돌려보낸다. 가족이 인질로 잡혀 있으니 아무리 드워프들이 모여 있어도 함부로 반란을 일으킬 수가 없다.
그리고 생산력이 없는 아이와 여인, 노인들은 한곳에 모아 관리한다. 이 마을은 바로 그들의 감옥인 것이다.
'괜한 질문을 했군.'
고개를 저으며 레펜하르트는 계속 걸음을 옮겼다. 틸라가 공동에 뚫린 한 동굴 앞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저기가 겔파이드 신관님이 거하시는 신전이에요."
3
말이 좋아 신전이지, 그곳은 그냥 동굴이었다. 물론 드워프들의 동굴답게 벽도 반듯하게 서 있고 방도 있었지만, 그렇다 해도 변변한 가구 하나 보이지 않았다. 기껏해야 침대와 테이블, 옷장 정도가 전부. 그나마 신전임을 증명하는 것은 벽에 걸린 알 포트의 증표뿐이었다.
방에 들어가자 겔파이드가 자리를 권하며 안부 인사를 건넸다.
"많이 나으신 것 같소, 구원자여. 다행이구려."
"덕분에 많이 좋아졌습니다. 감사합니다."
신장 차이가 있다 보니 드워프들처럼 의자에 앉으면 눈높이가 맞지 않는다. 그래서 레펜하르트는 권하는 의자를 거절하고 그냥 바닥에 대충 앉았다.
"그리고 그냥 레펜하르트라 불러 주십시오. 구원자라는 호칭은 좀 부담스러워서...."
겔파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할 수 있소. 당신도 대체 왜 인간인 자신이 드워프의 구원자가 되어야 하는지 전혀 모르겠지. 그렇지 않소?"
'아니, 사실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한 번 했던 짓인데 실패해서 또 해 보려고요. 라고 대답할 수도 없다. 그냥 레펜하르트는 대답 없이 머리만 긁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겔파이드가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도 왜 당신이 구원자인지는 모르겠소. 일단 당신의 눈빛을 보면 그대가 우리를 노예로 보고 있지 않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겠지만...."
잠시 겔파이드가 수염을 쓸어내렸다. 레펜하르트는 말없이 겔파이드를 바라보았다. 단지 신탁만 믿고 인간을 구해 주고, 그를 구원자라 떠받들며 어찌 보면 위험한 이야기를 대놓고 하는 이 늙은 드워프.
그가 무심코 물었다.
"당신은 제가 누구인지, 뭐 하는 사람인지조차 묻지 않았습니다. 제가 드워프들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는 것이야 사실입니다만, 호의를 가지는 것과 한 종족의 운명을 구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지요. 대체 왜 제가 당신들을 구해 줄 거라 생각하는 겁니까? 솔직히 이 상황, 충분히 이상하지 않아요?"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 청년이, 아무것도 모른 채 이 상황에 맞닥뜨렸다면 충분히 던질 수 있는 질문이었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모를 이 늙은 드워프는 어떻게 대답할까? 살짝 기대하며 레펜하르트는 겔파이드의 대답을 기다렸다.
잠시 상념에 잠기더니 겔파이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알 포트께서 왜 인간을 우리 종족의 구원자로 점지했는지는 사실 우리도 모르오. 하지만 신께서 행하시는 일을 우리가 어찌 모두 알 수 있을까? 우리는 그저 신께서 내려 주신 희망을 붙잡고 최선을 다할 뿐인 게지."
겔파이드라고 처음 저 신탁을 전해 들었을 때 당황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인간이 드워프들의 구원자가 될 것이라는,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내용의 신탁이라니. 아마도 그가 인간이었다면 아무리 신앙이 깊다 해도 의심하고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드워프였다. 대지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드워프들은 본능적으로 진실과 거짓의 소리를 구별할 수 있다. 이들에게는 거짓말이란 것이 불가능한 것이다. 괜히 드워프들이 솔직한 성격이 된 것이 아니다.
좋게 말하면 담백한, 나쁘게 말하면 단순한 것이 드워프들의 사회. 그렇기에 드워프들은 설사 자신이 이해하지 못할 소리를 들었다 해도 그것이 진실임을 알게 된다면 굳이 따지려 들지 않는다. 그냥 아,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 버린다.
이것이 드워프들이 주로 즉물적인 분야에서만 각광을 드러낸 이유이기도 했다. 그들은 튼튼한 건축물, 뛰어난 무기, 놀라운 손재주를 바탕으로 한 세밀한 세공품을 만들 수는 있어도 예술적인 건축물, 아름다운 무기,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상상 속의 세공품을 만들 수는 없다. 예술 쪽 분야는 드워프들에게 있어 그냥 단순한 거짓, 그 이상은 아닌 것이다. 뭐, 워낙 기술력에서 차이가 나니 드워프들의 물건을 보고 인간들이 기능미를 느끼고 아름답다고 감탄할 수는 있겠지만.
"신탁은 거짓이 아니었소. 그걸 전달한 이의 말도 거짓이 아니었고. 그렇다면 당신은 분명 우리 일족의 구원자요. 물론 당신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할지는 우리도 모르고 당신도 아마 모르겠지. 하지만 운명이란 게 원래 그런 것 아니겠소? 지금 내 임무는 그저 최선을 다해 당신에게 협조하는 것뿐이오. 그다음에 운명이 당신을 구원자의 길로 이끄는 것은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지."
겔파이드는 태연자약하게 설명을 마쳤다. 참 인간 기준으로 보면 될 대로 되라 식의 패배주의인 것처럼도 보이는데, 이걸 드워프다운 확신을 가지고 말하니 또 뉘앙스가 미묘하게 다르다.
'하여튼 예나 지금이나 드워프들은 똑같군.'
전생을 떠올리며 레펜하르트는 속으로 웃었다. 결론적으로 구할 놈 제대로 구한 것이니 딱히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런 식으로 살면 사기 당하기 딱 좋다는 말이야 드워프들에겐 해당 사항이 없고.
문득 겔파이드가 장난기 어린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따지면 당신도 꽤 이상하다오, 인간 청년. 뜬금없이 드워프 마을에 와서 어색할 정도로 환대를 받으면서, 게다가 생뚱맞게 구원자라는 소릴 듣고도 당신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지. 상황만 보면 당신도 굉장히 납득이 안 가오."
레펜하르트가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겔파이드가 낄낄댔다. 머리를 벅벅 긁다가 레펜하르트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뭐, 대충 이해는 갑니다. 그럼 저를 부르신 이유는 뭡니까?"
겔파이드의 말대로라면, 그들은 레펜하르트를 구한 시점에서 할 일 다 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다음은 알아서 된다는 식이니 굳이 그를 부를 이유도 없는 것이다.
"아, 물론 신탁에 따르면 우리가 할 일은 더 없지. 이건 그냥 신탁과 상관없는 용건이오. 아니, 따지고 보면 상관은 있으려나?"
"무슨...?"
"대신관께서 당신을 만나보고 싶다고 하더군."
무심코 마켈린이요? 라고 되물을 뻔 했다. 애써 말을 삼키며 레펜하르트가 모른 척 물었다.
"대신관이라 하면...?"
"알 포트의 하이프리스트, 마켈린 님이시오. 모든 드워프 일족의 정신적 지주이시지."
'흐음, 그 양반 30년 전에도 하이 프리스트였구나.'
하긴, 드워프들도 엘프와 맞먹을 만큼 수명이 기니까 30년이라고 해 봐야 인간 기준으로는 7, 8년 정도 느낌이겠지.
순간 그리운 얼굴이 떠오른다. 언제나 엄격하고 고지식했던, 그럼에도 충실하게 그를 보좌해 주었던 마켈린. 그와의 추억이 떠오르며 다시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치솟았다.
"그렇군, 만나 보긴 해야겠군요...."
그러자 겔파이드가 신기해하는 눈으로 레펜하르트를 요리조리 살펴보기 시작했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 일단 들었으니 전하기는 했다만 아무리 그래도 인간인 당신이 이런 뜬금없는 이야기를 듣고 납득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소. 그래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굉장히 고심했거든. 인간은 우리와 달리 진실의 소리를 들을 수 없으니까. 그런데 하는 말이, 그냥 이야기만 전하면 바로 알아들을 거라 했지. 그 말이 진실임은 알 수 있었지만 그래도 정말 이렇게 되니 신기해서 그러오."
"으음...."
레펜하르트는 옅은 신음을 흘리며 입을 닫았다.
확실히 그는 마켈린을 만나고 싶었다.
다시 한 번 새로운 안타레스 제국을 건설해, 이번에야 말로 실패하지 않고 세상을 바꾸겠다는 각오는 물론 변함이 없다. 하지만 그에겐 아직 명확한 비전이 없었다. 마법을 되찾는다 해도, 그 힘으로 전생에서처럼 다른 인간들을 눌러 강제로 이종족들의 국가를 만든다면 전생과 다를 바 없었다. 결국 마왕으로 불리고, 결국은 전 대륙의 적이 되리라.
물론 전생 때처럼 물렁하게 세상을 상대하지 않고 제대로, 마왕답게 대륙을 짓밟는다면 안타레스 제국이 그렇게 쉽게 멸망하진 않겠지. 아예 안타레스 제국이 대륙 전체를 정복해 유일한 제국이 된다면 그것도 나름 성공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면 이종족들 대신 인간의 피가 대륙을 뒤덮을 뿐이다. 쳐들어오는 적을 물리치는 것과 아예 상대방에게 쳐들어가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 그리고 레펜하르트는 그렇게까지 인류를 증오하지는 않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이종족을 사람 취급해 주는 세상이지 인간을 사람 취급하지 않는 세상이 아니다.
'마켈린은 현명한 드워프, 이야기를 나눠 보면 뭔가 방법이 나올 수도 있겠지.'
전생에서 안타레스 제국을 실제로 꾸린 것은 거의 마켈린이었다. 이종족 중 유일하게 사회를 유지하고 있던 드워프들, 그 모든 드워프들을 정신적으로 다스린 것이 알 포트의 하이 프리스트 마켈린이었다. 그만한 지식과 지혜를 지닌 이의 말은 충분히 들어 볼 가치가 있다.
'이 시간대의 마켈린이라면 그랜드 포지에 있을 것이고, 그랜드 포지의 위치는 세텔라드 산맥 최북단. 그리 멀지는 않겠군.'
여하튼, 레펜하르트가 흔쾌히 승낙하자 겔파이드도 신이 났다. 그가 활기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마켈린 님은 알 포트의 대신전, 그랜드 포지에 계시오. 물론 그 위치는 극비 중의 극비, 드워프 중에서도 극히 소수만이 알고 있지. 그러니 당신에게 길잡이를 한 명 붙여 주겠소. 우리 일족 중에서 유일하게 남은 전사의 혈족이지. 어지간한 인간 기사와 맞붙어도 결코 밀리지 않을 것이오."
'끙, 이제 와서 사실은 위치 다 안다고 할 수도 없고.'
위치도 알고 길잡이도 필요 없지만, 그렇다고 마다할 핑계도 떠오르지 않는다. 뭐, 드워프들을 찾아가는 데 길잡이가 있어서 손해될 것도 없긴 하다. 이렇게까지 챙겨 주는 것이 고맙기도 했고.
레펜하르트는 그냥 납득하고 솔직히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우리 드워프들 좋으라고 하는 짓인데."
겔파이드가 손을 저으며 겸양을 표했다. 아니, 그런데 생각해 보니 겸양도 아닌 것 같았다. 정말로 드워프들 좋으라고 하는 것이 맞지 않은가?
그렇게 레펜하르트가 쓴웃음을 짓고 있는데, 갑자기 겔파이드가 표정을 바꾸며 안색을 굳혔다.
"그런데 구원자 양반."
"네?"
"사실은 알고 있다오. 그대가 우리에게 진실만을 말하지 않았다는 것쯤은."
아차 싶어 레펜하르트도 표정을 굳혔다. 생각해 보니 드워프들은 본능적으로 진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대는 우리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더구려. 게다가 하이 프리스트도 알고 있고, 심지어 그랜드 포지의 위치도 알고 있는 것 같은 마음의 소리가 들렸소."
뜨끔해하며 레펜하르트가 당황하던 찰나였다. 겔파이드가 표정을 풀고 푸근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대가 우리들을 생각하는 그 소리 역시 진실이었지. 그래서 난 그대를 의심하지 않소. 뭔가 숨기는 것이 있다는 건 알겠지만, 원래 인간들은 우리들과 달리 습관적으로 진실을 숨기곤 하니까 별로 이해 못 할 일도 아니지."
"아, 예...."
뭐라 할 말이 없어 레펜하르트는 그저 어색하게만 웃었다. 겔파이드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굳이 이 이야기를 하는 건 그대가 우리를 좀 더 이해해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요. 우리 드워프들은 진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오. 그러니 우리에게 뭔가를 숨기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대부분의 인간들은 드워프들과 대화하길 꺼려한다오."
"그건... 잘 알고 있지요."
레펜하르트는 머리를 긁었다. 겔파이드가 빙그레 웃었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진실이 아닌, 진심의 소리도 함께 듣는다오. 그러니 그대가 우리에게 호의를 가진 한은 우리를 상대할 때 꺼려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었소. 우리는 거짓을 모르기에 오해도 없으니까."
"네, 그것 역시 사실은 잘 알고 있지요."
레펜하르트도 빙그레 웃었다. 겔파이드가 다시금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신은 진실로 그 사실을 알고 있구려. 신기하군, 어떻게 아직 어려 보이는 당신이 우리를 이렇게 잘 이해하고 있는지. 물론 그 사실은 알려 줄 수 없겠지요?"
"네. 죄송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네요."
레펜하르트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겔파이드가 밖에 있는 틸라를 불렀다.
"그럼 좀 더 몸을 추스르시오. 그동안 우리도 길잡이에게 준비를 시키겠소."
그렇게 막 두 사람이 방에서 나서려던 참이었다. 저만치서 우렁찬 외침이 들려왔다.
"이보시오! 구원자 양반!"
동시에 늙은 드워프 한 명이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겔파이드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슨 일이오, 헤토스?"
겔파이드의 질문을 무시한 채, 헤토스가 호들갑을 떨며 레펜하르트에게 물었다.
"혹시 이곳에 올 때 동행이 있지 않았소? 엘프와 어린 인간 소년이?"
레펭하르트의 안색이 굳었다.
"틀림없습니다. 제 일행입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헤토스가 한숨을 쉬더니 수염을 쓸어내렸다.
"아무래도 그 동행분들이 켈베른 자작 성에 붙잡혀 있는 것 같소."
☆ ☆ ☆
도적의 동료들을 붙잡아 켈베른 성으로 돌아온 뒤, 유서스는 수하 기사 둘을 불러 엄중하게 명령을 내렸다.
"반드시 모든 것을 실토하게 해라! 기사도는 잠시 잊어라. 어떤 고문을 해도 상관없다! 반드시 간밤의 도둑이 숨어 있는 위치를 알아내야 한다. 알겠느냐?"
엄격하다 못해 살벌하기까지 한 명령이었다. 명을 받은 두 수하 기사, 렌토와 바라스는 당황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고문이라니? 잠깐 잘못 들었나 싶어 눈을 껌벅일 정도였다. 그들의 단장, 유서스는 실로 기사도의 모범이나 다름없는 사내였다. 결코 고문 같은 불명예스러운 단어를 입에 올릴 이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유서스는 그들이 반문할 여지를 주지 않았다. 그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손을 내저을 뿐.
"이만 물러가도록."
결국 두 기사는 예를 올린 뒤 방을 나갔다. 그리고 고민하며 지하 감옥으로 내려갔다. 추상같은 단장의 표정을 보니 이번 일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점은 이해가 갔다. 그런 만큼 고문을 해서라도 모든 것을 알아내어야 한다는 점도 납득할 수 있었다.
문제는 둘 다 명예로운 테네스 기사단의 일원이다 보니 고문 같은 것에는 영 거리가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기사답게 사람이야 많이 썰어 봤지만 고문은 또 다른 이야기가 아닌가?
"대체 고문이란 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그냥 대충 때리면 되나?"
"그러다 죽으면? 죽이면 안 되는데 죽을 만큼 아프게 하는 게 고문이지."
"어, 어렵군. 그거."
렌토와 바라스는 서로를 바라보며 난처해했다. 그렇게 성 지하로 내려간 뒤 둘은 감방 문 앞에 섰다. 붙잡혀온 엘프 소녀와 순례자 소년을 묶어 놓은 감방이었다.
"후우, 어쨌거나 명령이니 충실히 행하는 수밖에."
"그렇지. 그럼 내가 먼저 심문해 보겠네, 바라스."
"알겠네, 렌토."
한숨을 쉬며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갔다. 옥문을 여니 붉은 장발의 예쁘장한 소년이 사슬에 묶여 있는 것이 보였다. 바닥에 그려진 것은 봉인의 결계, 이 순례자 소년의 신성력을 억제하기 위해 창공의 여신, 에어리어스의 신관들이 특별히 설치한 결계였다.
소년, 실란을 바라보며 렌토가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테네스 기사단의 렌토다."
소년이 힘없이 고개를 들어 렌토를 바라보았다. 렌토는 순간 침을 삼켰다.
"으음...."
여자애로 의심할 만큼 가는 팔다리에 고운 선을 가진 얼굴, 실로 가련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대체 이 가녀린 소년을 어떻게 고문하라는 건가? 툭 치면 죽을 것 같은데.
암담해하면서 렌토는 심문을 시작했다.
그리고 반시간 후.
"...으음."
두 기사는 묶여 있는 실란을 보며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레펜 씨가 수행한 무문이 좀 과격해요. 들어 봤죠? 권왕 제라드의 무문, 짐 언브레이커블. 거기가 어떻게 수행을 시키냐면...."
"음, 음."
"...이렇게 수행한다더라고요. 진짜 사람 할 짓 아닌 것 같지 않아요? 솔직히 기사님도 그렇게까지 수련하진 않았죠?"
"음, 음."
"그런 무문이다 보니 마지막 시험도 장난 아니더라고요. 그게 바로 그 유물을 가져오는 거거든요. 그런데 테네스 백작가가 먼저 유물을 털었다고 하더라고요. 그 시험 통과 못하면 무슨 꼴 당할지는 뻔하지 않아요? 수행이 그 정도면 형벌은 어느 정도겠어요?"
"음, 음."
"그래서 도둑질을 해서라도 그 유물을 가져가야겠다, 이거죠. 어차피 원래는 짐 언브레이커블의 물건이고, 설마하니 권왕도 그 유적이 발견될 줄은 몰랐나봐요. 워낙 정보가 없던 유적이잖아요? 그 증거로 다른 유물은 손도 안 대지 않았나요?"
"음, 음."
고문을 채 시작하기도 전에 저쪽에서 먼저 알아서 나불나불 다 털어 버린 것이다. 덕분에 반시간 내내 렌토가 한 말이라곤 '음, 음.'이 전부였다. 뭐, 할 말이 있어야지? 채 질문하기도 전에 묻지도 않은 것까지 술술 털어놓는데 고문은 고사하고 심문도 할 필요가 없었다.
"하여튼, 저도 이번 일에 그렇게 찬동한 건 아니에요. 하지만 상황을 들어보니 이해도 가고 해서 그냥 우리는 마을에 묵고 있었던 거죠. 아, 너무 떠들었더니 입이 마르네. 저기, 물 한 잔만 주시겠어요?"
"어? 응, 그래라."
멍하니 서 있던 바라스가 분위기에 휩쓸려 물도 한 잔 떠다 주었다.
"아, 시원하다. 하여튼 그래서 말이죠...."
하여튼 나불나불 정말 잘 분다. 게다가 목소리도 태연한 것이, 묶인 모습만 보고 가련한 인상을 받은 것이 억울할 지경이었다. 감옥에 갇혀서 심문 받는 처지에 무슨 배짱이 이리 좋단 말인가? 계속 듣고 있자니 오히려 렌토가 걱정이 될 정도였다.
"어이, 이봐. 아무리 그래도 동료 이야기인데 우리에게 그렇게 전부 이야기해 줘도 되는 거야? 의리라는 게...."
"숨길 만한 일도 아닌데요, 뭘?"
"그래도 권왕의 후계자가 도둑질을 했다는 것이 알려지면 명예에 손상이...."
"명예 따질 거면 애초에 도둑질을 하지 말았어야죠. 안 그래요?"
"그, 그렇지."
그렇게 실란은 레펜하르트의 출신이라든가 자신이 어떻게 필라넨스의 신관이 되었는지 같은 신상명세부터 출발해 어떻게 레펜하르트와 시리스를 만났으며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까지 상세히 불어 버렸다. 그 와중에도 불리하다 싶은 이야기- 예를 들면 차탄 공국에서 일으킨 사건 같은 부분은 모르는 척 슬금슬금 넘겼는데, 어찌나 말발이 좋은지 듣고 있던 렌토와 바라스는 전혀 어색하게 느끼지 않을 정도였다.
뭔가 이게 아닌데 싶으면서도 계속 말려들어 고개만 끄덕이다가, 아무리 그래도 전혀 심문을 안 할 수도 없어 렌토가 애써 실란의 말을 끊고 물었다.
"어, 어쨌거나 사정은 알겠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그 훔쳐 간 유물의 행방이다. 그 행방은 모른단 말이냐?"
대답은 바로 나왔다.
"모르죠. 애초에 그냥 그 여관으로 돌아오기로 했다니까요?"
드디어 꼬투리를 잡았다. 심문자다운 엄격한 태도로 렌토가 호통을 쳤다.
"무슨 소리냐!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따로 연락을 취할 방법은 마련해 놓았을 거 아니냐?"
"뭐하러요? 기사님도 이제 알잖아요? 그 양반이 오러 능력자라는 걸. 오러 능력자가 고작 도둑질 실패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하겠어요?"
"그, 그렇군."
호통을 치려 해도 워낙 실란의 말이 논리적이다 보니 도로 말문이 막힌다. 결국 그렇게 심문을 끝낸 렌토와 바라스가 어색한 표정으로 감방을 나섰다.
"취조란 게 원래 이렇게 하는 건가?"
"뭔가 이게 아닌 것 같은데...?"
어쨌거나 필요한 정보 다 들었으니 유서스에게 보고는 해야 했다.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두 기사는 위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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