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자욱한 먹구름이 눈부시게 명멸하며 천둥과 벼락을 흩뿌렸다.
용의 포효와 뒤섞여,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이 이어졌다.
"...."
"...."
하지만 성벽 위의 그 누구도 그 광경에 비명을 내지르거나 도망치지 못했다.
강건한 야인 전사들조차, 용의 포효가 울려 퍼진 순간 무기를 떨어뜨리며 주저앉았다.
성벽 위의 모두가 넋을 잃은 것처럼 멍하니, 번쩍이는 먹구름과 그 사이로 드러나는 거대한 형체를 눈에 담을 따름이었다.
이안도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그 역시 주저앉지 않은 게 고작이었다.
게임에서도 최고 수준의 무력화와 공포 상태를 유발하던 용의 포효는, 그의 육체에도 영향을 미쳤다.
다만, 공포 상태에까지 빠진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가사 상태에서 깨어난 것처럼 보였는데. 기척이 느껴지지 않은 건 그래선가? 아니면 그저 의도적으로 감춘 걸지도. 육체를 잠재운 건 그게 이 권역을 유지하기 더 편해서일 수도 있겠어. 혹은 힘을 아껴야 한다거나. 그렇다면 움직일 수 있는 시간에 한계가 있다는-'
그의 뇌리로는 온갖 생각들이 어지럽게 이어지고 있었다. 답을 알 수 없는 추측과 상념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건 상황을 빠르게 받아들이고 이해하기 위한 본능적인 반응에 가까웠다.
어쨌거나 일어날 리 없다 여긴 상황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결국 중요한 건, 용이 나타났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곧 높은 확률로 놈과 싸우게 되리란 것도.
'그리고 비슷한 확률로 죽게 되겠지.'
그런 결론까지 곧바로 도출해 내면서도, 이안은 이성을 잃지 않았다.
그건 비단 높은 정신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저게 정말 멀쩡한 용이라면.'
과거 언급했듯, 지금은 용이 등장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기였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장했다면, 그에 걸맞은 무언가가 있을 터였다.
그게 무엇이건, 결국 끝까지 살아남는 건 그의 역량에 달렸겠지만.
'시발….'
이안이 내심 탄식하는 그때, 포효를 끝낸 용이 크게 날개를 펄럭였다.
놈은 지금까지 날갯짓 한 번 하지 않고 공중에 떠 있었다.
새카만 먹구름을 몰고 다니며 포효 한 번에 천둥과 벼락을 흩뿌리는 모습에 비하면 놀랄 것도 없는 일이긴 했지만.
용이 구름 사이로 솟구쳤다.
그의 날갯짓에 휘몰아친 먹구름이 요란하게 번쩍이며 뒤늦게 굉음을 흩뿌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계곡으로 미끄러지듯 하강한 용이 요새가 잘 보이는 위치에 착지했다.
거인을 막기 위해 높다랗게 지은 성벽은, 용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게 분명했다.
제법 먼 거리임에도, 놈의 형태는 원근감을 무시하듯 또렷했다.
'작은 아파트 정도는 되겠는데…'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놈의 전신을 차근히 훑었다.
그가 기억하는 용에 비하면, 어쨌거나 다소 깡마른 모습이었다.
다른 이들은 완전히 압도당해 전혀 그렇게 느끼지 못하겠지만. 저 용은 뼈 위에 마른 가죽을 덮어 놓은 것처럼 앙상했다.
일종의 미라화가 진행된 것처럼 보였다. 눈이나 얼음 속에서 오랜 시간 마력만을 추출 당하고 있었을 테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놈이 날개를 접자 날개의 관절을 따라 투두둑, 비늘이 가루가 되어 떨어졌다.
물론 그렇다 해서 저게 용이라는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었다.
과거 거인 여왕의 상태로 미뤄 봤을 때, 공허의 마력을 축적하고 있을 가능성도 충분해 보였고.
"------!"
하늘로 고개를 치켜든 용이 다시금 울부짖었다.
고막을 찢을 듯한 굉음뿐 아니라, 아까처럼 보이지 않는 충격파가 계곡과 요새를 휩쓸었다.
먹구름이 용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밀려나면서, 벼락을 온 사방으로 흩뿌렸다.
'포효를 또 한다고…?'
이안의 미간이 구겨지는 사이.
"컥...."
"...."
주저앉아 있던 병사들 몇몇이 풀썩 쓰러졌다. 이안의 근처에 있던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죽은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정신을 잃은 것이기를 바랄 뿐.
근처에 주저앉은 발베르는 아직 살아 있었지만, 탁 풀린 동공에는 전혀 생기가 남아 있지 않았다.
덜덜 떨리는 아래턱을 타고 침이 줄줄 흘렀다. 어느새 신성력은 완전히 사라진 채였다.
"후...."
하지만 이안은 이번에도 견뎌냈다.
또다시 버틸 수 있었던 건 혼돈력 덕분이었다.
혼돈의 파편이 공명하던 것을 떠올렸던 것이다.
파편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아서 아주 적은 양의 혼돈력만이 몸속을 맴돌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아까처럼 눈앞이 아찔해질 정도의 무력감은 피할 수 있었다.
물론 온몸이 감전된 것처럼 저릿저릿해서, 힘은커녕 여전히 움직이는 것조차 쉽지 않았지만.
크르르르….
포효를 끝낸 용이 요새 쪽을 바라보았다.
계곡 주위로 번개가 번쩍이며 떨어지는 가운데, 새파랗게 빛나는 안광이 성벽을 응시했다.
"...!"
이안은 숨을 들이켰다. 놈이 정확히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착각이 아니었다.
-■■한 대가를… 치■■라…
그르렁대는 듯한 사념이 뇌리를 후벼 파더니, 놈의 아가리로 푸르스름한 빛이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입자화되는 마력. 저게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명확했다.
용의 숨결.
'미친…?'
이안의 눈이 커졌다. 온몸의 피가 식는 듯한 불길함이 엄습했다.
어쩌면 그가 한 생각들은 그저 현실 도피성 망상에 불과했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공포 상태에 완벽하게 저항하지 못한 걸지도 몰랐다. 이성이 멀쩡하다고 여긴 것조차 착각일지도.
그런 불길한 생각을 이어가면서도, 이안은 스킬을 사용하려 했다. 하지만 마력은 평소처럼 그의 의지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포효의 여파가 분명했다.
거기까지 생각한 이안은, 도망치는 대신 상태 창을 열었다.
이 힘 빠진 몸으로는 아무리 애를 쓴들 용의 숨결을 피할 수 없을 터였다. 애먼 희생만 늘릴 뿐.
"후…."
그래서 이안은 한편으론 마력과 혼돈력을 일으키려 애쓰면서, 포인트를 정신력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몸속의 마력이 다시금 그의 통제에 따를 때까지.
효과는 몇 개쯤 올린 순간부터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용의 아가리가 벌어진 건, 이안의 눈동자에 푸른 마력이 맺히기 시작한 그때였다.
콰아아아아-
벌어진 용의 아가리에서 새하얀 숨결이 불길처럼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저건 대기를 얼어붙게 만들 만큼 지독한 냉기였다.
이안은 시야를 하얗게 물들이며 날아드는 용의 숨결을, 마력이 아른대는 눈으로 마주 보았다.
주문은 완성됐다. 앞에 얼음 결정이 피어오르는 게 육안으로도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아무리 빙하 방벽이라도, 밀려드는 저 숨결을 온전히 막아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이상하게도 한쪽 입술이 말려 올라갔다.
용에게 죽다니.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의 최후치고는 멋지다는, 어울리지 않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솨아아아아-
눈부신 황금빛이 시야를 가득 채운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
이안의 눈이 커졌다.
생성되던 빙하 장벽을 산산이 깨뜨리면서, 황금빛의 거대한 역장이 성벽 앞에 돌연 피어오른 것이다.
반투명한 역장이 성벽 앞을 가득 채우며 번져 나갔다.
콰아아아아-
용의 숨결이 그대로 역장을 뒤덮었다. 마력이 가득한 냉기가 역장 위로 분수처럼 솟구치고, 황금빛이 눈부시게 명멸했다. 솟구친 숨결이 그대로 얼어붙으면서 산산이 바스러졌다. 역장의 구조가 그 사이사이로 드러났다.
촘촘하게 이어진 벌집을 떠올리게 하는 육각형의 윤곽.
이렇게나 거대하고 정교한 마법을 순식간에 펼칠 만한 존재라면….
"...!"
이안은 목을 꺾듯이 위로 치켜들었다. 상공 한복판, 황금색 장막이 공간을 가르며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허여멀건 한 비늘을 가진 거대한 용이 장막을 가르며 날아드는 중이었다.
이안의 입이 설핏 벌어졌다.
'아르케아스…?'
저 용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대륙에 단둘만 남은 용 중 하나.
수많은 칭호와 아명을 가진, 백금룡 아르케아스.
눈앞에 퀘스트 창이 떠오른 건 그때였다.
순리를 거스른 자, 타후므리트.
"하…."
백금룡과 함께 타락용을 처치하라는 내용을 눈에 담던 이안의 입가에, 비로소 헛웃음이 번졌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그가 겪은 건, 일종의 보스전 이벤트 컷 씬에 불과했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아르케아스가 왜 이제야 나타난 것인가 하는 분노 섞인 의문이 뒤를 따랐다.
일찍 나타났다면 무고한 희생이 쌓이는 일도, 그가 능력치 포인트를 소모하는 일도 없었을 텐데.
'…그래서 기척을 감췄던 건가? 동족이 가로막지 못하게 하려고?'
상념은 거기까지였다.
푸스슷-
흐릿하던 붉은 신성력이 선명하게 타오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무력화 상태의 여파가 빠른 속도로 밀려나는 게 느껴졌다. 어쩌면 이것 역시 퀘스트에 포함된 이벤트일지도 몰랐다. 저 두 용의 싸움에 끼어들려면, 고작 2챕터 수준의 캐릭터로는 턱도 없을 테니까.
'정말 그런 거라면….'
이안의 시선이 문득, 손에 쥔 단죄의 검으로 향했다.
검신 내부에 신성력이 꿈틀대고 있었다. 푸르스름한 빛이 날을 타고 은은하게 번져 나왔다.
'하난 야만 전사고, 하난 기사 버프라 치면.'
그럼 마법사는?
생각할 찰나, 용의 숨결과 함께 황금빛 역장이 잦아들었다. 저 너머, 타후므리트를 향해 날아가는 백금룡의 뒷모습이 보였다.
머릿속의 의문들이 씻은 듯 사라졌다. 결국, 당장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들이었다.
'…부딪혀 보면 알게 되겠지.'
검 자루를 쥔 이안의 손아귀에, 비로소 힘이 들어갔다.
***
콰아아아-
아르케아스가 내뿜은 숨결이 타후므리트를 휩쓸고, 그 뒤의 망자 군단까지 불태우며 뻗어나갔다.
샛노란 불길이 폭발하듯 솟구쳤다.
캬아아아-!
그 한복판에서 타후므리트가 포효했다. 훅, 힘찬 날갯짓 한 번으로 허공에 멈춰 선 아르케아스가 마주 울부짖었다.
허공에서 맞부딪힌 마력의 파장이 산산이 흩어지면서 대기를 찢어발겼다.
뼈와 재가 뒤덮인 계곡에 흙먼지가 치솟았다.
다음 순간 타후므리트가 솟구쳤다.
숨결이 휩쓸고 간 부분의 가죽이 타들어 가서, 내골격을 고스란히 드러난 채였다.
말라붙은 근육과 뼈대 사이로 새파란 마력이 혈관처럼 번쩍였다.
쩌어엉-
두 용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아르케아스의 주위로 황금색 역장이 번쩍였지만, 그건 타후므리트도 마찬가지였다. 새파란 마력의 장막이 번개처럼 터지며 황금색 역장을 깨뜨렸다.
콰르릉-!
새하얀 뇌전이 아르케아스를 관통했다. 백금룡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의 아가리에서 솟구친 황금색 마력이 그대로 먹구름 한복판에 번뜩였다. 먹구름 사이로 황금빛 마력 회로가 번졌다. 꿈틀대던 검은 먹구름이 휘청대며 밀려났다.
콰드득- 그의 목덜미를 타후므리트가 물어뜯은 건 그때였다. 피가 튀거나 가죽이 찢겨나가지는 않았지만, 용을 추락시키기엔 충분한 공격이었다.
쿠우웅-
뒤엉킨 두 거체가 계곡 한복판을 굴렀다. 튕겨져 나온 타후므리트가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며 울부짖었다. 휘청대던 먹구름이 다시금 검게 물들면서, 그 사이의 황금빛 마력 회로를 집어삼켰다.
아르케아스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전신에서 황금빛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더니, 먹구름 사이로 흐릿한 빛이 아른거렸다.
두 용 모두, 마력을 끝도 없이 소모하며 인간은 짐작하기도 힘든 방식의 힘겨루기를 벌이고 있었다.
한쪽은 일대를 어둠에 물들이기 위해서. 또 한쪽은 그 어둠을 밀어내기 위해서.
"루… 솔라여…."
관문 망루 위에 주저앉아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던 겔루드 장군의 입에서, 비로소 나지막한 탄식이 흘렀다.
그나마 정신을 차리고 있는 그는 상황이 나은 편이었다.
아까 기절한 마법사인 멘데스는 미동도 없었고. 경호병들은 하나 같이 넋이 나간 얼굴이었으니까.
물론 그렇다 해서, 겔루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서로를 노려보며 대치 중인 두 용을 바라보며, 빛의 신께 기도를 올릴 뿐.
백금룡의 전신에서 마력이 빛의 기둥처럼 솟구친 건 그때였다.
-■■■… ■■… ■■■■…!
웅혼한 사념이 뇌리를 울렸다.
이해할 수 없는 고대어. 겔루드로선 백금룡이 타락용에게 무언가 의사를 전했으리라 짐작할 따름이었다.
-■■■■… ■■■- ■■■■-!
"컥...."
이어 뇌리를 울리는 사념에, 겔루드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이 역시 이해할 수 없었지만, 타락용이 분노했다는 것만큼은 명확했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타락용의 전신에서 새파란 마력이 솟구쳤다. 선명한 푸른빛이 아니라, 옅은 보랏빛이 섞인 듯한 불길한 색.
두 용이 뿜어낸 마력이 하늘의 먹구름을 뒤덮고, 물감처럼 얽히며 빙글빙글 돌았다.
콰아아-
백금룡이 타락용을 향해 달려든 건 그때였다. 쩍 아가리를 벌린 백금룡이 타락용의 비쩍 말라붙은 목을 물어뜯으려 했다. 타락용이 앞발로 백금룡을 후려치며 뒤엉킨 건 그 직후였다.
말 그대로 짐승의 싸움을 보는 듯한 원초적인 사투.
아르케아스와 타후므리트가 서로의 마법을 상쇄하는 데에 모든 마력을 쏟아붓고 있음을. 마력이 먼저 고갈되기 전에 교착 상태를 끝내려 육탄전에 돌입한 것임을 겔루드로선 알 도리가 없었다.
그저 전설처럼 전해 들었던 존재인 백금룡, 아르케아스가 끝내 승리하기를 기원하고 또 기원할 따름이었다.
저 강대한 존재들의 싸움에 끼어 봐야, 한낱 미물에 불과한 그들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테니까.
"...?"
겔루드의 미간이 좁아진 건 그때였다.
계곡 한복판, 누군가의 뒷모습이 문득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용에 비하면 작디작은. 전신에 타오르는 붉은 신성력을 두르고, 푸른 빛이 번지는 검을 움켜쥔 자.
"...!"
그가 누구인지를 깨달은 겔루드의 눈이, 이윽고 찢어질 듯 커졌다.
전투 내내 병사들을 수없이 위기에서 구해낸, 티르 엔의 성전사이자 북부의 대전사.
"이안… 호프…!"
그가 홀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용들을 향해서.
#117화
'시발….'
재와 뼈가 가득한 서걱대는 땅을 밟으며, 이안은 탄식을 삼켰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다리가 가늘게 떨렸다.
이건 일종의 본능이 보내는 경고였다. 더 이상 다가가지 말라는.
그건 눈이 달린 인간이라면 누구나 할 법한 생각이기도 했다.
저 앞에, 날개 달린 거대 괴수들이 한데 뒤엉켜 날뛰고 있었으니까.
콰아아- 쿠우우-
놈들이 맞부딪칠 때마다 대지가 들썩이고, 충격파가 이안의 전신을 휩쓸고 지나갔다.
수준 높은 주문이나 권능 따위가 만들어 내는 현상이 아니었다.
그저 두 용의 힘과 마력이 서로 충돌하며 만들어 내는 여파일 뿐.
'정말 가기 싫어지네….'
혀를 차면서도, 이안은 멈추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굳이 달리지 않는 건, 당장은 별다른 의미가 있을 것 같지 않아서였다. 저 괴수들의 사투가 조금은 진정되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지금 당장 저 사이에 들어갔다간, 말 그대로 고래 싸움에 낀 새우 꼴이 날 테니까.
콰아아-
그런 바람과 달리, 두 용의 격돌은 점점 더 격해졌다. 빛을 반사하면 노랗게 빛나는 아르케아스의 비늘이, 타후므리트의 발톱에 찢겨 후두둑 튀어 올랐다. 아르케아스는 그런 놈의 등을 날개로 내리찍고 목덜미를 물어뜯으려 했다.
타후므리트가 골격이 훤히 드러난 날개로 그를 후려쳐 밀어냈다.
타락용은 이제, 말라비틀어진 껍데기가 거의 다 떨어져 나간 상태였다.
탈피한 것처럼, 뼈와 근육만으로 이루어진 끔찍한 본모습을 드러냈다.
새카만 뼈와 근육 사이로, 보랏빛이 섞인 푸른 마력이 핏줄처럼 일렁이고 번쩍였다.
서로를 향해 짧게 포효한 두 용이, 다시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이어지는 또 한 번의 충격파.
고개를 숙여 견디면서, 이안은 실소를 삼켰다.
전장이 가까워질수록 선명해지는 건 두 용의 크기와 형태만이 아니었다. 저것들이 얼마나 강하고 빠르기까지 한지도 와닿았다.
단순한 근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 저것들이 나누는 일격 일격에 담긴 마력은, 매번 그가 가진 마력의 총량보다도 많아 보였다.
솨아아-
물론 그의 전신을 감싼 신성력은 여전히 건재했다. 오히려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팔다리에 힘이 넘치고 감각이 허물을 벗듯 예민하고 선명해졌다.
단죄의 검 역시 그의 일부가 된 것처럼 손에 감겼다. 티르 엔이 내리는 신성력은 갈수록 짙어져서, 이젠 푸른 빛으로 만들어진 검을 손에 든 것처럼 보였다.
물론 그 사실들이 이안에게 큰 용기를 불어넣어 주진 못했다.
'지금도 제대로 맞으면 한 방에 즉사일 것 같은데.'
그가 인간이라는 본질에는 변함이 없었으니까.
저 살아 움직이는 천재지변들을 상대로 겁 없이 날뛰다간, 신성이 서린 고깃덩어리가 될 뿐이리라.
그렇다고 멀리서 마법을 쏴 댈 수도 없었다. 그거야말로 가장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그가 시전하는 마법 따위, 저 타락용에게는 간지럽지도 않을 테니까.
'결국 접근해서 나는 안 맞으면서 신성력으로 쑤셔야 된단 건데.'
말로만 쉬운 얘기였다.
그렇다고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지금은 호각처럼 보이지만, 가만히 놔두면 끝내 패배하는 쪽은 아르케아스가 될 것 같았으니까.
퀘스트가 그런 미래를 암시하고 있다는 건 둘째 치고, 애초에 여긴 타후므리트의 권역 한복판이기 때문이다.
이 권역이 놈에게 어떤 식으로든 힘을 부여하는 게 틀림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백금룡이 권역부터 정화하려 들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그는 아마도, 권역의 정화하는 동안 타후므리트가 자신을 노리기를 바랐으리라.
하지만 타락용은 광기에 물든 와중에도 옳은 선택을 했다.
백금룡을 공격하는 대신, 자신의 권역을 지키는 걸 우선한 것이다.
이미 오염된 권역을 유지하려는 쪽과 정화하려는 쪽이 맞붙으면 전자가 더 유리한 건 당연한 일.
아르케아스가 먼저 타후므리트에게 달려든 건 그래서일 터였다.
'용도 마력이 정말 무한하지는 않은 거야.'
하늘에 뒤엉켜 소용돌이치는 마력을 회수하지 않는 건, 그 순간 뒤가 없어지기 때문일 터였다.
소모전에 돌입한다면, 강대한 권역을 이미 소유한 타후므리트 쪽이 압도적으로 유리할 테니까.
여기서 가장 현명한 선택은 작전상 후퇴겠지만, 아르케아스는 대신 놈과 맞서는 걸 선택했다.
이유야 어쨌건, 이안에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아르케아스가 물러나면 그는 죽은 목숨이었으니까. 어쩌면 북부 전체도.
'그래서 물러나지 않은 건가…?'
어쨌든, 아르케아스에겐 지원군이 필요했다. 같은 의미에서, 이안도 그를 도와야 했다.
콰앙-!
타후므리트가 아르케아스를 덮쳐 땅에 내리찍은 건 그때였다. 놈의 앞발이 백금룡의 머리를 찍어눌렀다. 날개를 펼쳐 목덜미를 보호하던 아르케아스의 황금색 눈동자가, 문득 저만치의 대지를 훑었다.
붉고 푸른 신성력을 두른 인간을 비로소 발견한 것이다.
-더는 다가오지 말거라, 고귀한 자여…!
이안의 뇌리로 다급한 사념이 날아들었다. 이번에는 제국 공용어였다.
-네 의지는 숭고하며 고결하나, 끝내 죽음만이 기다릴 지니…!
가만히 있어도 어차피 죽거든?
콧방귀로 대답을 대신하며, 이안은 멈추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아르케아스의 날개를 물어뜯으려던 타후므리트의 시선이 그에게로 돌아온 건 바로 그 직후였다.
푸른 안광이 타올랐다.
-제■■… ■■오다니… 고■■나….
사념과 동시에 놈의 아가리로 마력이 응집되기 시작했다.
밑에 깔려 있던 아르케아스가 다급하게 몸을 틀어, 앞발로 타후므리트의 턱을 떠밀었다.
콰아아아-
숨결이 치솟아 올랐다. 잿빛에 가까운 냉기가 구름 바로 아래까지 치솟다가, 그대로 결정이 되어 부서지면서 사방으로 쏟아졌다.
타타탓-!
이안이 달리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그의 시선은 타후므리트의 훤히 드러난 목뼈와 그 아래로 굵고 길게 이어진 쇄골에 고정되어 있었다.
쩌엉-!
타후므리트가 아르케아스의 앞발을 쳐낸 건 숨결을 모두 토해내고 난 다음이었다.
쿠- 확-!
그때 바람 칼날을 두른 이안은 이미, 놈의 목덜미를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푸른 섬광이 타후므리트의 거대한 목덜미를 훑었다.
카가가가각-
불똥 같은 푸른 신성력의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신성력이 실린 단죄의 검으로도 용의 뼈를 단숨에 잘라낼 수는 없었다. 뼈에 붙은 근육 줄기들을 베어내고, 새카만 뼈에 할퀸 듯한 흔적을 만들어 냈을 뿐이었다.
캬오오오오-!
하지만 타후므리트를 분노하게 만들기엔, 그걸로도 충분했다.
'원래 날파리가 위험해서 거슬리는 건 아니거든.'
생각하며 눈을 빛내던 이안이, 다급하게 허공을 박찼다. 울부짖음과 동시에 타락용의 거대한 앞발이 날아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쩍 벌어진 뼈 사이로 휘몰아치는 마력이 선명하게 보였다.
푸화악-!
스친 것만으로도 이안은 바닥에 처박히듯 떨어졌다. 본능적으로 몸을 돌린 이안은, 몇 차례 튕기고서야 간신히 착지했다. 이걸 낙법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죽지는 않았다.
투쟁의 축복 덕분이리라.
가슴이 뜨끔거렸다. 갈비뼈가 몇 대 부러진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안은 불만 없이 몸을 일으켰다. 지금은 오히려 팔다리가 무사한 것에 감사해야 할 상황이었다.
주위로 얼음 파편들이 우박처럼 떨어졌다. 하지만 한가롭게 그것들이나 막아낼 틈은 없었다.
'이런 시발….'
콰아아아-
헛발질을 한 타후므리트가, 이번엔 반대로 몸을 꺾으며 그를 향해 날개를 휘두르고 있었으니까.
뼈와 근육만 붙은 너덜너덜한 날개라는 사실은, 지금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 주위에 가득 일렁이는 마력은, 그 자체만으로도 장벽 같은 역할을 할 게 분명했다.
저기 휩쓸리면 몸으로 다이빙하는 수준의 충격으로 끝나지 않으리라.
'공격 두 번 만에 죽는다고…?'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혼돈력을 불어넣어 휘몰아치는 방벽을 펼쳤다.
피하기에는 이미 늦었고, 서리 방패나 빙하 방벽은 의미가 없었다.
돌개바람이 에어백 역할을 해 주며, 그를 튕겨내 주길 바랄 뿐.
콰과과과-
하지만 언제나 그를 지켜 준 돌개바람은, 용의 날갯짓에 맥없이 찢겨나갔다.
밀려드는 거대한 뼈들이 이안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쩌저저정-!
피어오른 황금빛 역장이 이안의 앞을 뒤덮은 건 그때였다. 몇 장은 그대로 날개뼈에 휩쓸려 터져 나갔지만, 그 사이의 마력으로부터 이안을 보호하기에는 충분했다.
콰지직-!
동시에 아르케아스가 타후므리트의 목덜미를 물며 솟구쳤다.
타후므리트의 관심이 이안에게 쏠린 빈틈을 정확히 노린 것이다.
두 거체가 치솟는 사이, 역장이 바스러졌다.
하지만 전부 사라진 건 아니었다.
"...?"
이안은 단 한 장만 남은 육각형의 역장을 미간을 좁히며 바라보았다.
그의 장갑 손등 부분에 황금빛 진언이 맺혀 일렁이고 있었다. 진언에 담긴 막대한 마력이 느껴졌다.
거기서부터 마력을 공급받는 게 분명한 한 장의 역장은, 마치 커다란 방패처럼 이안의 팔뚝 위에 약간의 거리를 둔 채 떠 있었다.
"이게 진짜 기사 버프인가…?"
이건 그냥 티르 엔의 가호고?
신성이 아른거리는 단죄의 검을 내려다본 이안이, 설핏 실소했다.
황금빛 마법 방패에 성검이라니.
콰아아앙-!
그사이 아르케아스에게 목덜미를 물린 타후므리트가 땅에 떨어졌다. 아르케아스는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놈의 목을 놓지 않았다.
타후므리트도 당하고 있지는 않았다. 발톱과 날개로 아르케아스의 몸통을 후려치고 할퀴었다. 백금색 비늘이 사방으로 튀었다.
"…하."
검을 고쳐 쥔 이안은 곧바로 달리기 시작했다. 저 둘에게는 작은 솟구침이었지만 그에게는 아니었다.
'성벽에서부터 내내 달리기만 하네.'
이번에는 그저 달리기만 하는 게 아니었다. 저만치에서 수많은 푸른 안광이 밀려오고 있었다.
아르케아스의 숨결에 휩쓸린 뒤론 지켜보고만 있던 망자들이, 죄다 이안을 향해 달려왔다.
타후므리트의 명령일 터였다.
아르케아스와 싸우는 동안, 날파리 같은 원수의 발을 묶어 놓으려는.
두 용의 몸부림에 휩쓸린 놈들이 마구 터져 나가고 있었지만, 망자들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속도를 늦추지 않은 건 이안도 마찬가지였다.
투쟁의 축복이 끓어 올랐다.
"아아아아아아-!"
시발. 의지와는 관계없는 함성을 토해내며, 역장 방패를 치켜든 이안이 선두의 언데드와 맞부딪혔다.
콰장창-!
검을 휘두를 필요도 없었다. 방패로 몇 놈을 밀어 버린 이안이, 왼팔을 후려쳐 그 뒤의 망자 두어 마리를 동시에 산산조각 냈다.
그제야 비로소 단죄의 검이 호선을 그렸다.
퍼석-! 콰직-!
푸른 빛이 쉴 틈 없이 어둠을 수놓았다. 그럴 때마다 그 호선에 휘말린 망자들이 터져 나갔다. 검을 휘두르며 만들어진 반동은 방패 강타로도 이어졌다. 어느새 시야에 망자 군단이 가득했지만, 이안은 신경 쓰지 않고 움직였다.
베고 휘두르고 후려치고 내리찍는 것의 끝없는 반복.
"그-아아아…."
전투 도끼를 내리치려던 거인 전사가 초승달을 그리는 푸른 섬광에 허리가 잘려 허물어졌다.
새파란 곡선과 황금빛 섬광이 춤을 추듯 휘몰아쳤다.
이안의 뒤로 뼈 무더기로 이루어진 길이 쉬지 않고 만들어졌다.
콰장창-!
그러던 한순간, 시야가 환하게 트였다.
저 옆에 작은 동산처럼 서로 뒤엉킨 용의 모습이 보였다.
포위를 뚫은 것이다. 아직도 저 너머에서 푸른 안광들이 밀려오고 있는 게 보이긴 했지만.
'도대체 얼마나 끌고 내려온 거야.'
생각하며, 이안은 고개를 숙였다.
후웅, 아르케아스의 날개가 만들어 낸 충격파가 그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의 뒤로 따라붙던 언데드들이 거기 휩쓸려 와장창 흩어졌다.
타후므리트는 목덜미를 물어뜯는 아가리를 떨쳐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여전히 아래에 깔려 있었다.
좀 전까지와 달리 필사적인 움직임이었다.
이안의 개입이 전투의 판도를 완전히 바꿔 놓은 것이다. 복수에 눈먼 용이 끝끝내 자신의 목적을 잊지 않은 덕분이기도 했다.
놈이 휘두른 발톱을 고개를 젖혀 피한 아르케아스의 황금색 눈이, 문득 저 옆에서 달려오는 이안을 발견하고는 멈춰 섰다.
두 시선이 교차했다.
그는 이번에는 물러나라 말하지 않았다.
'왜, 막상 도움이 좀 되냐?'
속으로 읊조린 이안이 타후므리트의 머리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대화는 없었지만, 생각이 통한 게 분명했다. 아르케아스는 날아드는 타후므리트의 날개를 막거나 피하는 대신, 그대로 어깻죽지를 내어주며 앞발을 뻗었다. 거대한 발톱이 돋은 발에 짓눌린 타후므리트의 머리가 땅에 내리 찍혔다.
쿠웅-!
굉음에 이어진 충격파를 역장 방패를 들어 막으며, 이안은 놈의 푸른 안광을 마주 보았다.
놈도 이안을 발견한 게 분명했다.
푸른 안광이 분노로 타올랐다.
짓눌린 와중에도 타후므리트의 아가리에 마력이 모이는 게 느껴졌다.
'집념이 엄청나시군.'
하지만 나도 한 독기 하거든.
보란 듯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이안은 두 다리에 더 박차를 가했다.
바람 칼날이 발작하듯 그를 떠밀었다. 거대한 머리와의 거리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그는 지금까지 경험한 모든 생명체들의 공통적인 약점을 향해 팔을 힘껏 내뻗으면서, 단죄의 일격을 사용했다.
타오르듯 뿜어져 나온 섬광이, 거대한 푸른 안광을 관통했다.
#118화
카- 가가가각-
손아귀에서 엄청난 저항감이 느껴졌다. 이안은 이를 악물면서 끝까지 팔을 뻗었다.
퍼석. 무언가 부서지는 듯한 느낌과 함께 안광이 폭발하듯 번쩍였다. 뻗어 나가지 못하고 응축되던 신성력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반작용을 더는 버티지 못한 이안이 뒤로 튕겨 나갔다.
키- 아아아아-!
타후므리트의 분노한 절규가 숨결과 함께 터져 나왔다. 바닥을 구르는 이안을 향해 숨결이 마구 밀려들었다.
콰직!
백금색 날개가 그 앞의 땅을 내리찍으며 가로막았다. 숨결이 날개에 막혀 사방으로 흩어지며 얼어붙었다. 날갯죽지 너머로 황금색 마력이 눈부시게 점멸하며 숨결과 포효를 막아냈다.
아르케아스의 눈매가 설핏 구겨진 순간.
콰아아!
타후므리트의 전신에서 터져 나온 보랏빛 충격파가 그의 거체를 밀쳐냈다. 한데 뒤엉켜 소용돌이치던 하늘의 마력이 번쩍였다.
더 강하게 튕겨진 건 이안도 마찬가지였다.
'어디까지 밀려나냐고…!'
그는 이를 악물며 왼팔을 땅에 찍듯 휘둘렀다. 카가각, 팔 끝의 역장 방패가 땅에 박혔다. 이안의 왼팔은 강력한 자력에 고정된 것처럼 방패에서 멀어지지 않았다.
절벽에 매달린 듯한 자세. 어깨가 끊어질 것 같은 와중에, 이안은 단죄의 검을 간신히 거꾸로 쥐었다. 검날도 땅에 박혔다.
콰과과-
방패와 검이 땅을 갈듯 밀려났다.
진언에 담긴 마력이 줄어드는 게 느껴졌다. 어이없게도 망자들의 공격을 막거나 후려칠 때보다, 지금 소모되는 마력이 더 많았다.
어쨌거나 어깨의 고통도, 밀려나는 속도도 줄어들었다.
이안의 발이 땅에 닿은 그때.
쿠우웅-
멀지 않은 곳에 아르케아스가 떨어졌다. 지축이 흔들리고 충격파가 역장 방패 위를 훑고 지나갔다.
한쪽 무릎을 꿇은 이안의 전신이 가늘게 떨렸다.
크르르….
하지만 아르케아스는 그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마력을 폭발시킨 타후므리트가 날개를 활짝 펼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푸른 빛이 아니라 보랏빛으로 타오르는 놈의 안광이, 마력이 뒤엉킨 하늘로 향했다.
놈이 치솟았다.
자세를 다잡은 아르케아스가 날개를 펼친 건 그 직후였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날아오르지 않았다.
대신 눈매를 슬며시 찌푸린 채 뒤를 돌아보았다.
"하아… 하아…."
꼬리 위로 뛰어올라 몸을 타고 오르는 인간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아르케아스의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으면 해보라는 듯, 짧게 한숨을 내쉬기까지 했다.
아르케아스는 감히 자신의 몸을 밟는 인간에게 분노하거나, 불경한 행동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았다.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거대한 송곳니를 슬쩍 드러내고는, 몸의 비늘을 살짝 세워 주었다.
그가 밟고 오르기 편하도록.
동시에 그의 전신에 옅은 금빛이 아른댔다.
떨어져 사라졌던 전신의 비늘이 전부 한순간에 새로 돋아났다.
양 날개뼈 사이의 비늘은 몇 겹으로 돋아나며 위로 솟아올랐다.
그사이 거의 달리듯 기어 올라온 이안은, 자신의 가슴 아래까지 여러 겹으로 돋아난 비늘 사이로 왼팔을 단단하게 끼워 넣었다.
"...!"
그 순간 아르케아스는 그의 몸속에 아른거리는 마력의 파장을 느꼈다.
흐릿한 공허의 힘과 선명한 신성력도.
마법사라니.
생각보다 더 흥미로운 존재라는 감상은, 물론 찰나에 불과했다.
타후므리트가 어느새 저 높이까지 솟구치고 있었으니까.
아르케아스가 날갯짓을 시작했다.
그의 거체가 대기를 찢으며 솟구쳤다.
***
콰과과과과-
눈도 뜨기 힘든 엄청난 풍압 한복판.
'이게 맞아…?'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찰나의 순간 속에서, 이안은 당연한 의문을 떠올렸다.
이게 정말 옳은 공략법인가 하는.
공략 글을 자세히 읽었어야 했다.
돌이켜 보면, 그가 공략을 제대로 읽은 시간은 불과 삼십 분도 되지 않았다.
스크롤을 휙휙 내리며 자신의 캐릭터가 왜 망캐인지 알아본 시간을 제외하면, 실제로 다른 것들에 사용한 시간은 채 절반도 되지 않으리라.
본래의 그는 그다지 똑똑하지도, 활자를 읽는 걸 즐기지도 않았다.
어차피 캐릭터를 새로 키우면서 중간중간 찾아가며 읽으면 그만이기도 했고.
'다른 직업 설명이나 퀘스트 목록을 훑어볼 시간에, 주요 퀘스트 공략이나 진득하게 읽을걸.'
하다못해 그렇게나 많이 건너뛴 북부의 공략이라도 차근히 눈에 담았더라면, 그는 지금 용의 등이 아니라 안전한 지상에 서 있었을지도 몰랐다.
아르케아스가 타후므리트를 다시 지상으로 끄집어 내려 주기를 기다리면서.
물론, 지금에 와선 의미 없는 생각이었다.
시간을 돌릴 수는 없으니까.
'저 새끼를 죽이면, 그게 옳은 공략법이 되는 거지.'
비로소 압력이 조금 줄어들었다.
휘몰아치는 구름 바로 아래였다. 거대한 마력의 바다를 머리 위에 둔 느낌. 저 소용돌이에 담긴 마력이 얼마나 방대한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마력을 이렇게나 쓴 채로 싸웠는데도 그 정도였단 말이지….'
아르케아스가 상승을 멈췄다.
저 너머, 타후므리트가 보였다. 놈은 소용돌이에서 마력을 흡수하고 있었다. 묵은 갈증을 해소하듯 필사적으로.
아르케아스는 물론 기다려 주지 않았다.
콰아아아-
솟구치는 동안 이미 응집되어 있던 마력이, 용의 숨결이 되어 눈부시게 뻗어나갔다.
타후므리트는 피하지 못했다.
콰과과과과-
눈부신 폭발과 열기가 놈을 집어삼켰다. 비늘 사이에 더 깊이 손을 끼우며, 이안은 놈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곧 불길에 삼켜졌던 타후므리트의 모습이 설핏 드러났다.
어느새 놈의 전신에 보랏빛이 뒤엉킨 마력이 막을 형성하고 있었다.
물론 놈도 온전하진 못했다.
근육은 완전히 타서 눌어붙고, 뼈 역시 마찬가지였다.
'깨지는 게 아니라 녹아내리다니.'
타후므리트의 날개 위로 두 장의 날개가 더 펼쳐진 건 그때였다.
마력으로 만들어진 날개였다.
거의 동시에 소용돌이 사이로 번진 황금빛 마력이 아르케아스의 전신으로 스며들었다.
솨아아아-
아르케아스의 날개 위로도 황금빛 마력 날개가 돋아났다.
"...?!"
이안의 눈이 커졌다. 자신의 몸 속으로 밀도가 엄청난 마력이 밀려들고 있었다.
용의 마력.
백금색의 커다란 비늘 하나가 왼손 손아귀에 들러붙어 있다는 사실이 그제야 느껴졌다.
이안의 입가에 헛웃음이 번졌다.
'이게 마법사 버프인가…?'
이제야 그가 마법사라는 걸 알게 된 게 분명했다.
마력이 무한대로 늘어난 것 같은 고양감이 뒤를 이었다. 그의 머리는 이 순간에도 그 이면의 진실을 깨달았다.
이 정도 마력은 아르케아스에게는 티끌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아마 그가 아무리 마법을 쏟아낸다 하더라도, 바다에서 물을 몇 냄비 퍼내는 것에 불과하리라.
'그렇다면….'
생각하며, 이안은 단죄의 검을 옆으로 뻗었다.
푸른 신성력이 검신을 타고 뻗어나가는 가운데, 황금빛 마력이 그 사이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치칙- 치치칙-
마력은 곧 새하얀 뇌전으로 화해 거미줄처럼 번져나갔다.
포효한 타후므리트가 날아든 건 그 직후였다. 놈의 목표는 이안이 틀림없었다.
아르케아스도 마주 뻗어나갔다.
쩍, 이안의 손아귀에 붙어 있던 비늘이, 안장 역할을 하는 비늘들 사이로 들러붙었다.
쩌엉-!
두 용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그들은 아까와 달리 추락하지 않았다. 마력 날개가 모종의 역할을 하는 게 분명했다.
공중전이 이어졌다. 포효와 마법, 숨결이 난무했다. 둘은 서로의 턱을 후려치거나 몸을 회전하며 숨결을 피하고, 역장과 충격파를 토해내 마법을 상쇄시켰다.
위와 아래의 구별이 무의미한 어지러운 전투. 요새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는 이가 있다면, 신화의 한 장면을 목격하는 기분이리라.
그리고 그 한복판의 이안은, 뜻밖에도 크게 괴롭지 않았다.
투쟁의 축복뿐 아니라 용의 마력까지 그의 능력치를 높여주고 있었다.
'버프가 대체 몇 겹인지.'
생각하며, 이안은 차분하게 숨을 골랐다. 단죄의 검은 어느새 새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뇌전이 아니라 빛의 검을 든 것 같았다.
용의 마력에는 마법을 증폭시키는 힘이 있었다. 이안은 거기에 혼돈력까지 섞어 넣었다.
마법을 더 증폭시키기 위해서일 뿐 아니라, 그게 타후므리트에게 더 큰 타격을 줄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놈은 지금 공허의 마력까지 사용하고 있었으니까.
혼돈력은 같은 공허의 존재들에게도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다는 걸, 이안은 지난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캐릭터를 타락시키면, 이런 식으로 타락자들과 싸우는 거겠지.'
이안은 지금이라면 마법을 끝도 없이 증폭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렇게 하지 않은 건, 단죄의 검이 버티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농담 삼아 강철 마법봉이라 부르긴 하지만. 어쨌건 검은 대부분 마법을 부리기 위해 만들어진 물건이 아니었다.
검으로 마법을 쓰면 내구도가 엄청난 속도로 떨어졌다.
그거 예비 성물인 이 튼튼한 검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금만 해도, 검 내부 어딘가에 자리한 신성의 근원이 휘청대는 게 느껴졌다.
내내 신성력을 한계까지 뽑아내며 휘두른 여파이기도 하리라.
'조금만. 조금만 더….'
다행히 적당한 순간은, 검이 더는 마법을 버틸 수 없게 되기 전에 찾아왔다.
쿠와악-
아르케아스의 앞발에 뒤엉켜 있던 타후므리트가 불쑥, 기습적으로 고개를 들이민 것이다.
이안을 그대로 찢어발기려는 듯, 보랏빛 마력을 머금은 아가리가 벌어졌다.
"댁도 좀 따끔할 거요."
아르케아스를 향해 내뱉은 이안이, 그 한복판으로 빛의 검을 내뻗었다.
용의 숨결조차 뇌전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새하얀 빛 덩어리 같은 뇌전이 타후므리트의 아가리를 관통했다.
파삭-
일렁이던 보랏빛 마력이 으깨졌다.
타락용의 뼈 사이로 새하얀 빛이 번쩍이고, 뒤이어 새하얀 뇌전 줄기가 거체를 뒤덮었다.
캬- 아아아아-!
놈에게도 확실히 깜짝 놀랄 정도의 충격인 모양이었다. 용의 마력과 혼돈력이 놈의 강대한 저항력을 뚫어낸 게 분명했다.
…이정도면 인간의 마법은 초월한 것 같은데.
생각하는 사이, 아르케아스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카드득-!
뇌전이 자신에게도 타격을 입히는 것을 감수하고, 타후므리트의 어깻죽지를 깊이 깨문 것이다.
그러면서 황금빛 마력이 가득 맺힌 양 앞발을 놈의 갈비뼈 한복판으로 틀어박았다.
번쩍이며 상쇄되는 마력과 충격파.
꽈지직-
기어코 그의 발톱이 타락용의 가슴을 으스러뜨리기 시작했다.
고통에 찬 절규를 토해내며, 타후므리트도 아르케아스의 목덜미를 깊이 깨물었다. 아르케아스는 방어에 돌릴 마력 조차 전부 공격에 동원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백금색 비늘이 으스러지며, 용의 피가 치솟았다.
튀어 오르자마자 기체가 되어 승화하는 황금색 마력.
까드드드득-
그사이, 타후므리트의 가슴이 점점 더 으스러졌다.
아르케아스는 목덜미를 깊이 물린 상태에서도 다시 한번 힘을 줬다.
그의 거체에 어마어마한 힘이 실리는 것이 이안에게도 전해졌다.
타후므리트가 조금씩 위로 솟았다.
아르케아스가 놈의 가슴에 박아넣은 양 앞발을 점점 벌리면서 치켜들고 있었다.
우지직, 어깨와 이어진 아르케아스의 목덜미가 찢겨 나가기 시작했다. 황금빛 피가 치솟으며 금빛 안개가 자욱해졌다.
마침내 백금룡의 살점을 한가득 입에 문 타후므리트가 고개를 젖혔다.
고통과 증오가 뒤섞인 절규.
곧 살점을 뱉어낸 타후므리트가 아르케아스의 목을 물어뜯었다. 아르케아스도 물러나지 않고 놈의 뼈만 남은 목을 물었다.
"...."
하지만 이안은 두 용의 뒤엉킨 머리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아르케아스가 치켜든 앞발 사이.
으스러진 티후므리트의 가슴이 좌우로 쩍 벌어지고 있었으니까.
그의 시선은 그 한복판, 거대하고 새카만 덩어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내부에 엄청나게 응축된 마력이 전해졌다.
용의 약점.
본래라면 몇 겹의 뼈와 마법으로 보호받는 용의 심장이, 같은 용에 의해 무방비하게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쩌적-
이안은 비늘에 붙어 있던 왼팔을 빼냈다. 그리고는 곧바로 걸음을 옮겨, 아르케아스의 어깻죽지 끝에 멈춰 섰다.
단죄의 검을 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강대한 마법을 펼친 여파로 위태롭게 깜빡이던 신성력이, 어느새 다시 선명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
이안은 문득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밑에서 볼 때는 그리 높아 보이지 않았건만. 여기선 모든 게 장난감처럼 보일 만큼 작았다.
사방에 자욱하게 깔린 짙은 어둠. 그 한복판, 불길과 재에 뒤덮인 폐허가 된 계곡과 벨리움 요새.
공포에 질린 것처럼 울부짖는 망자들.
이안의 입가에 옅은 실소가 스쳤다.
'…여기서 떨어지면 죽겠지?'
다음 순간, 그는 심장을 향해 몸을 날리며 단죄의 검을 치켜들었다.
#119화
푸른 궤적이 거대한 심장 윗부분에 틀어박혔다.
콰직-
손아귀에서 전해지는 단단함.
매달린 채로 검 자루를 고쳐 쥔 이안이, 온 힘을 다해 검을 내리긋기 시작했다.
타후므리트가 순간 굳어졌다.
카- 드득-
그 사이에도 심장에는 깊고 기다란 선이 이어지고 있었다. 푸른 신성력이, 균열을 타고 번지는 오염된 마력을 불태웠다.
키아-아악-!
타후므리트가 비로소 고통에 찬 비명을 토해냈다. 이안은 멈추지 않았다. 검신이 심장을 조금씩 계속 내리 갈랐다. 비명이 더 커졌다. 으직, 다음 순간 섬뜩한 소리와 함께 이안의 전신을 울리던 비명이 사그라들었다.
아르케아스가 물고 있던 타후므리트의 목을 꺾어 버린 것이다. 기괴한 각도로 비틀어진 타락용의 거대한 머리가 축 늘어졌다.
보랏빛 안광이 사그라들었다.
쿠르르….
소용돌이치던 먹구름 속에서 천둥이 울렸다. 잿빛 눈보라가 그 사이로 번지기 시작했다. 주인을 잃은 막대한 양의 오염된 마력이, 증발하는 것보다 빠르게 흘러내렸다.
그 한복판.
"...."
뒤틀려 꺾인 채 늘어진 타후므리트의 머리를 응시하던 이안이, 이윽고 시선을 돌렸다.
한쪽 목덜미가 찢겨 나간 아르케아스. 죽음을 맞이한 동족을 응시하는 그의 눈빛은, 전혀 기뻐 보이지 않았다.
그저 슬프고, 지쳤을 뿐.
아르케아스의 시선이 이윽고, 심장 한복판의 이안에게로 돌아왔다.
이안이 입을 열었다.
"나 좀 받아 주시오."
아르케아스의 눈매가 설핏 휘어졌다. 우지직, 타후므리트의 갈비뼈에 깊이 박혀 있던 한쪽 앞발이 천천히 빠져나왔다. 그는 한 팔로도 이 거대한 용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이 시체는 어쩐다. 내 지분도 3할 정도는 있으니까….'
생각하며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안의 미간이 문득 좁아졌다. 그의 시선이 자신이 기대고 있는 거대한 심장으로 돌아갔다.
중요한 의문이 고개를 든 것이다.
왜 퀘스트 완료 창이 안 뜨지,
'…설마.'
이안의 양팔에 힘이 들어갔다.
게임에서도 약점을 공격한다 해서 보스가 반드시 한 번에 죽는 건 아니었다.
거기다 상대는 용이라는 상식을 초월한 존재인 데다, 심지어 언데드이기까지 했다.
목이 부러지고 심장이 꿰뚫린 상태에서도 죽음을 유예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솨아아-
그 예상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번져 나온 보라색 마력이 심장의 갈라진 틈을 이어 붙였다. 검날을 옭아매는 압력이 느껴졌다. 푸른 신성력이 발작하듯 타오르고, 마력이 그 사이로 치솟았다.
푸스스, 옆에서 보랏빛이 번졌다.
'이런 씨…!'
이안의 미간이 구겨졌다.
축 늘어진 타후므리트의 머리에 안광이 타오르고 있었다.
이안을 노려보는 채로.
아르케아스도 놀란 듯 눈을 치켜뜨며 앞발을 다시 갈비뼈에 밀어 넣으려 했다. 하지만 타후므리트의 기습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키- 아아아아-!
어긋난 턱뼈가 벌어지며 절규를 토해냈다. 자욱한 잿빛 눈과 흘러내리던 오염된 마력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콰과과과과-
폭발과 충격파가 사방을 뒤덮었다.
충격의 대부분은 엉겨붙은 두 용이 막아 주긴 했지만, 이안도 몸을 움츠리며 역장 방패로 몸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
-복수■■… 반드시 이■■니…!
처절한 사념이 뇌리를 뒤흔들었다. 폭발이 거세졌다.
아르케아스가 황금빛 역장을 두르기 시작했다. 이안도 검을 내리그으려 애썼다.
'마력 밀도가 도대체 얼마나 높은 거야…?'
하지만 온 힘을 다해도 검신은 아주 조금씩만 움직였다. 검이 부러지는 게 더 빠를 것 같았다.
타후므리트가 축 늘어져 있던 날개를 펼쳤다. 끝에서부터 가루가 되기 시작한 두 장의 마력 날개도 마찬가지였다.
'미친…!'
놈의 의도는 명확했다. 이안은 단죄의 검을 포기하기로 했다. 어차피 이건 최후의 발악이었다. 검은 나중에 유해에서 회수하면 되리라.
거기까지 생각한 이안이 심장에 발을 얹고 도약을 준비한 순간이었다.
솨아아-
오염된 마력이 흐릿한 막을 형성해 벌어진 가슴을 감쌌다.
-너는 결■ 벗어나지 못■■■…!
으직, 으지직-
사념과 함께, 아르케아스의 앞발이 박힌 타후므리트의 갈비뼈가 으깨지기 시작했다. 곧 가슴 한쪽이 통째로 부서졌다. 앞발 하나가 함께 떨어져 나갔지만, 타후므리트는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캬오오오-!
아르케아스가 놀란 듯 포효했다.
하지만 몸이 조각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날갯짓을 시작한 타후므리트는, 이미 그에게서 벗어난 뒤였다.
몸을 거꾸로 뒤집은 채, 만신창이가 된 타락용이 솟구쳤다.
"...!"
역장 방패로 마력 장막을 후려치던 이안의 눈이 이내 커졌다.
먹구름에 맺힌 마력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콰과과과과광-
보라색 마력 장막 위로 충격파가 끝없이 터져 나왔다. 몸을 숙인 이안은 벌어진 갈비뼈 사이를 내려다보았다.
비처럼 쏟아지는 마력이 폭발하면서 아르케아스를 추락시키고 있었다. 그는 비명을 토해내는 와중에도 자세를 다잡았다. 그를 중심으로 끝도 없이 펼쳐지기 시작한 황금빛 역장이, 이안의 눈에 느릿느릿 새겨졌다.
콰아- 과과과과-
종말이 온 것 같은 폭발이 역장을 뒤덮는 걸 마지막으로, 모든 풍경이 멀어졌다.
***
"...."
트라벨가는 적막에 휩싸여 있었다.
그 누구도 거리를 오가지 않았다.
북쪽 하늘 너머에서 굉음이 번진 순간부터 시작된 적막이었다.
카링기온에서 온 지원군이 북쪽으로 향한 지 이틀도 채 되지 않은 시점.
벨리움 요새가 위치한 북쪽의 굉음은,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몇 채의 집에 나눠 모인 야인 정착민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다들 무사히 돌아올 겁니다."
아스켈이 집을 오가며 다독였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다른 집으로 들어가는 그의 기척을 좇던 테사이아의 얼굴에도, 옅은 불안이 감돌았다.
"이안은 괜찮은 거겠지? 설마-"
"헛소리는 내뱉지도 마라."
벽에 기대선 샬롯이 말을 잘랐다.
"이안은 절대 죽지 않아. 그렇게 약속-"
쿠구구구구-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수준의 굉음이 이어진 건 그때였다.
수인과 흡혈 요정이 말을 멈췄다.
테사이아가 안대를 벗으며 샬롯의 눈을 마주보았다. 곧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건물의 지붕 위로 튀어 올라갔다.
쉬지 않고 이어지는 폭음을 귀에 담으며 지붕 몇 개를 타 넘은 그들은, 이윽고 높고 좁은 굴뚝 위에 나란히 섰다.
밖의 전경이 드러났다.
어둠. 북쪽에 자욱한 먹구름과 저 먼 하늘에 번지는 번쩍임.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던 테사이아가 이윽고 탄식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그녀의 귀가 문득 쫑긋댔다. 홱 뒤를 돌아본 그녀의 눈빛이 붉게 번뜩였다.
침묵에 잠긴 어둠. 궁금증을 참지 못한 주민 몇몇이 슬쩍 문을 열고 나오는 모습만이 어렴풋이 보였다.
눈을 가늘게 뜨는 테사이아를, 이윽고 샬롯이 돌아보았다.
"왜 그러지?"
"…아니야. 뭔가 기분이 쌔 했어."
읊조린 테사이아가 다시 앞을 돌아보았다.
곧, 그녀는 자신이 느낀 불길함을 깨끗하게 잊었다.
저 먼 하늘. 밤하늘을 가린 먹구름을 뚫고, 허공에 보랏빛 궤적을 수 놓는 거대한 존재가 보였기 때문이다. 그 존재는 포물선 같은 궤적을 그리며, 엄청난 속도로 동쪽을 향해 날고 있었다.
그 존재가 이윽고 트라벨가에서 머지않은 상공까지 다가오자, 테사이아가 더듬대며 내뱉었다.
"용…? 용이야, 저거…?"
샬롯은 눈만 끔뻑였다.
그녀가 보기에도 그랬다. 저만큼 거대한 크기를 가진 날개 달린 존재는, 용 말고는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그 생김새만큼은 아주 괴상했다.
뼈밖에 남지 않은 데다 온몸이 너덜너덜하고, 결정적으로 거꾸로 뒤집어져 날고 있었기 때문이다. 괴상하게 꺾인 채로 축 늘어진 건, 꼬리가 아니라 머리였다.
허공을 수놓는 보라색 궤적은, 두 장의 날개가 부스러지면서 만들어 내는 마력의 잔해였다.
그때 용이 궤적을 틀었다.
한쪽 날개가 깊이 가라앉으면서, 누가 찢어발기고 헤집은 것처럼 엉망이 된 몸통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샬롯의 입이 더 벌어졌다.
보랏빛 마력이 아른거리는 그 한복판, 어딘가 낯이 익은 붉은 빛과 푸른 빛이 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키- 아아아-!
용이 섬뜩한 비명을 흩뿌렸다. 이어 잿빛 숨결이 땅으로 쏟아졌다.
번쩍이는 푸른 빛이 짙어졌다.
그 사이로 설핏 드러나는 작은 실루엣.
그대로 멀어지는 용의 뒷모습을 멍하니 응시하던 샬롯이, 이윽고 탄식하듯 내뱉었다.
"이안…?"
***
'시발….'
간신히 뽑아 든 검을 움켜쥐며, 이안은 생각했다.
적어도 지금 이건 게임에선 없었던 상황이 분명하다고.
제아무리 악랄한 제작자라도, 플레이어를 이런 상황에까지 밀어 넣는 건 말이 안 됐다.
물론 지금에 와선 달라질 것 없는 생각이었다.
그는 이미 죽어가는 용의 심장 위에 선 채,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고 있었으니까.
정확히는 추락하고 있었다.
고도가 조금씩 낮아지는 게 느껴졌다.
'확실히, 나랑 같이 죽을 생각이네.'
속으로 내뱉으며, 이안은 머리 위를 뒤덮은 마력 장막을 올려다보았다. 굳이 심장을 다시 찌를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이놈은 곧 알아서 죽을 테니까.
이 순간에도 심장에 담긴 마력이 흩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러니 놈이 땅에 추락하기 전에 먼저 탈출해야 했다.
'착지는….'
이안은 몸속의 마력을 확인했다.
손아귀의 비늘은 어느새 떨어져 나갔지만, 아직도 그의 몸속에는 용의 마력이 남아 있었다. 이걸로 휘몰아치는 방벽과 돌풍을 적절히 사용한다면, 뼈만 몇 군데 부러지는 정도로 착지할 수 있으리라.
아니라 해도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찰나의 순간 만에 결정을 끝낸 이안은 단죄의 검을 고쳐 쥐었다.
검신에 균열이 생긴 것이 느껴졌지만, 신성력만큼은 여전히 선명했다.
그거면 충분했다.
콰드득-!
이안은 마력 장막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효과는 충분했다. 몇 번 만에 깨질 것처럼 위태롭게 흔들리던 장막이, 부서지기 시작한 것이다.
-소용■■… 너는 ■■ 함께… ■■하리라….
사념과 함께, 이안의 머리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게 날개라는 걸 깨달은 이안의 미간이 잔뜩 구겨졌다. 우드득, 남은 하나의 앞발도 억지로 움직여 그 위를 덮었다.
이안의 머리 위로 용의 뼈를 얼기설기 엮은 새로운 가림막이 생겼다. 틈이 작진 않았지만, 타오르듯 일렁이는 마력을 보아하니 손을 댈 수도 없을 터였다.
'진짜 작정을 했네, 이 새끼.'
이안이 이를 갈았다. 저 뼈를 전부 갈라 내는 건 불가능했다. 균열이 시작된 검으로는 더더욱.
결국, 그의 고개가 다시 아래로 향했다. 이 감옥에서 탈출하려면, 이번에야말로 놈을 완전히 죽이는 수밖에 없었다.
콰직-!
양손으로 자루를 쥔 이안이 심장 한복판을 내리쳤다. 신성력과 맞부딪힌 마력이 불똥을 튀었다.
이안은 멈추지 않고 내리쳤다. 검신의 균열이 점점 더 커지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신성력 역시 더 짙어지고 있었다. 끝까지 자신의 역할을 다하려는 것처럼.
콰지직-!
심장을 두르고 있던 마력이 깨졌다. 검이 그 아래로 깊이 파고들었다. 이안은 온 힘을 다해 검을 끝까지 밀어 넣었다. 그의 의지를 읽은 것처럼, 신성력이 눈부시게 타올랐다.
쩍, 쩌적- 쩌저적-
심장 전체에 균열이 번졌다. 그 사이로 보랏빛 마력이 치솟고, 푸른 빛이 아른거렸다.
키- 아- 아-
발아래에서 타후므리트의 비명이 메아리쳤다. 단말마였다.
퍼억-!
검신이 폭발하면서, 동시에 심장이 사방으로 조각나 흩어졌다. 아래로 떨어진 이안이 착지했다.
퀘스트 완료 창이 비로소 뒤를 이었다. 이안은 창을 닫으며, 부러진 단죄의 검부터 눈에 담았다.
'…고마웠다.'
감상은 짧았다. 타후므리트의 몸이 축 늘어지고 있었다. 꽃이 피듯 몸통을 감쌌던 날개와 다리가 흘러내렸다.
비로소 밖이 보였다.
엄청난 속도로 추락하고 있었다.
땅이 멀지 않았다.
솨아아-
조각난 심장 파편들에서 마력이 휘몰아친 건 바로 그때였다.
'미친-!'
콰과과광-
이안이 몸을 날린 것과 파편들이 폭발한 건 거의 동시였다. 이안은 마구 회전하며 튕겨 나갔다.
고통과 함께 몸속, 용의 마력이 뭉텅이로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마력 폭발로부터 그의 몸을 지키고 대신 승화한 게 분명했다.
아쉬워할 틈은 없었다.
이안의 눈동자에 잿빛 마력이 휘몰아쳤다. 휘몰아치는 방벽. 동시에 돌풍이 거세게 회전하는 반대 방향으로 뻗어 나왔다.
몸의 회전이 줄어들었지만, 상황이 나아진 건 아니었다.
콰과과과과-
타후므리트의 시신이 땅에 추락했으니까.
흙먼지와 산산조각난 용의 뼈가 이안의 앞으로 솟구쳤다.
"...!"
이안은 앞으로 치솟은 뼈를 바라보며 황급히 역장 방패를 들었다.
카드드득, 방패가 뼈 표면을 긁듯 스치며 이안의 궤도를 틀었다. 진언이 사그라들면서 방패가 깨졌다.
다음 순간 휘몰아치는 방벽이 그의 몸을 밀쳐냈다. 높이 솟은 또 다른 뼈가 그의 팔을 스쳤다.
이안은 그것만으로도 왼팔이 부러졌다는 걸 깨달았다. 투쟁의 축복과 용의 마력도 물리적인 충격에선 완전히 그를 지켜내지 못했다.
그는 곧바로 다시 휘몰아치는 방벽을 펼치고는, 바로 앞으로 보이는 땅을 향해 오른손을 내뻗었다.
푸확-!
돌풍이 한순간 뻗어 나왔다. 속도가 아주 조금 줄어든 게 전부였다.
다음 순간, 엄청난 충격과 함께 그의 몸이 다시 떠올랐다.
이안은 자신이 비스듬하게 떨어지며 땅에 박힌 게 아니라, 축복과 용의 마력이 만들어 낸 반발력으로 튕겨 올랐음을 깨달았다.
용의 마력이 전부 흩어졌다. 몸 곳곳의 뼈가 부러진 게 느껴졌다.
의식을 잃지 않은 건 다행이지만, 상황이 달라진 건 아니었다.
이안은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다.
빙글빙글 도는 시야 속, 모든 게 느리게 느껴졌다. 흩어져 쏟아지는 용의 뼈. 어둠과 흙먼지. 다시 가까워지는 땅. 그리고 상태창.
돌개바람이 몰아치는 걸 느끼며, 그는 남은 능력치 포인트를 전부 다 체력에 투자했다.
그리고는 태초의 내성 스킬 바로 옆, 이미 과거에 1레벨을 찍어 두었던 공용 스킬인 태초의 생명력을 다섯 개 전부 올렸다.
그게 그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120화
-이번 역은… 이번 역은….
익숙한 진동과 함께 안내 방송이 귀를 파고들었다.
출근길, 지하철 한복판이었다.
"...."
그는 잠시 미간을 좁히며, 자동문의 창밖을 스쳐 지나가는 어둠을 눈에 담았다. 문 옆의 손잡이를 쥔 손아귀에 살짝 땀이 묻어났다.
-내리신 문은, 오른쪽입니다.
그는 손잡이를 놓고 몸을 돌렸다.
사람이 많았지만, 평소처럼 많지는 않았다. 그는 슬쩍 휴대 전화를 확인했다. 평소보다 10여 분 이른 시점이었다.
그래. 이 정도만 일찍 나와도 지옥철은 면했었지.
그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스쳤다.
어깨에 멘 가방의 무게가 익숙했다. 맨 윗단추를 풀어헤친 셔츠도.
열차가 느려졌다.
지치고 피곤한 표정의 사람들이 주춤주춤 문 주위로 모여들었다.
한숨. 짧은 기침 소리.
곧 문이 열렸다. 승객들이 표정과 달리 재빨리 내리기 시작했다.
그도 플랫폼으로 나왔다. 같은 열차를 탔던 이들이 우르르 계단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여유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흔한 아침 풍경.
그는 그 모습을 차근히 눈에 담으며 그들의 뒤를 따랐다.
띠딕-
개찰구를 통과한 그의 걸음이 문득 느려졌다.
좀 전부터 그의 코를 간질이던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의 근원지가 저만치에 있었다.
"하…."
작은 웃음을 흘린 그가 걸음을 옮겼다. 만쥬였다. 호두과자도. 틀을 심드렁하게 뒤집던 사장이 그를 힐끔 올려다보았다.
"드릴까요?"
"…네. 둘 다."
나지막하게 대답한 그가 품에서 지갑을 꺼냈다. 받아든 카드를 재빨리 긁은 사장이 종이 봉투를 내밀었다.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
"...."
봉투를 받아든 그는 곧바로 만쥬 하나를 입에 넣었다.
부드럽고 따듯하고 달았다.
입가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그는 입을 우물대며 걸음을 옮겼다. 그 옆 빵집, 가판에 놓인 온갖 빵들이 눈에 들어왔다.
고로케나 샌드위치를 먹을 걸 그랬나.
작은 아쉬움을 느끼면서도, 그는 멈추지 않고 걸었다.
곁을 스쳐 가는 이들이 이 무슨 냄새인가 하는 눈빛으로 한 번씩 그를 힐끔댔다.
역에서 나올 때쯤, 그는 슬슬 목이 막히는 걸 느꼈다. 마침 저 앞에 카페가 여럿 보였다.
걸음이 곧바로 그쪽으로 돌아갔다.
카페까지 들르면 기껏 일찍 나온 보람이 사라지겠지만, 지금 그런 건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그는 유명한 프렌차이즈 카페로 들어갔다. 평소엔 가지 않던 곳이었다. 한 블록 옆의 소형 카페 커피가 천 원 이상 더 쌌으니까.
"주문하시겠어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 그리고… 딸기 스무디 하나 주세요."
사이즈는 가장 크게. 마시고 가겠다고까지 내뱉은 그는, 주문을 기다리며 창가의 테이블에 앉았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오전의 호사였다.
바쁘게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웅성대는 카페 내부. 테이블에 놓은, 입구를 접어 둔 종이 봉투.
우우웅-
그 모든 광경을 즐기던 한순간, 벨이 울렸다. 그는 곧바로 음료를 들고 돌아왔다.
'솔직히 제일 마시고 싶은 건 콜라나 맥주지만….'
생각하면서도, 그는 커피를 입에 가져갔다. 약간 탄 듯한 쓴맛조차 기분 좋았다. 딸기 스무디는 새콤달콤했다. 하, 짧게 한숨 쉰 그가 종이 봉투를 열었다.
그사이 조금 식어 버린, 하지만 여전히 느끼하게 달콤한 만쥬. 그리고 쌉싸름한 커피.
그는 한마디 말없이 그 맛을 음미했다.
"네가 가장 원하던 게 이런 건가?"
내뱉으며, 누군가 그의 건너편에 앉았다.
처음 보는 남자였다. 특징 없는 인상을 가진.
그는 딱히 놀라지 않았다.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앞에 놓인 잔을 들어 스무디를 마셨다.
싱긋 웃은 남자가 시선을 돌렸다.
"재미있는 세상이야. 그렇지 않나? 덕분에 좋은 구경을 하는군. 탐이 나는데."
"...."
그의 움직임이 멎었다. 그는 눈동자만 굴려 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가 인간이 아니리란 건 본 순간부터 직감하고 있었다.
남자가 싱긋 미소 지었다. 이상하게도 그때부터, 남자의 이목구비를 제대로 구별할 수 없었다.
스르륵, 얼굴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세상이 반전됐다.
검붉은 빛이 내리쬐는 거리가 순식간에 폐허가 되었다. 비정형의 길고 낭창낭창한 검은 실루엣들이 비칠대며 거리를 오갔다.
종이봉투가 바스락댔다. 손을 보니 만쥬 대신 반 토막이 난 커다란 벌레의 몸통이 다리를 꼼지락대고 있었다.
더러운 잔에 담긴 건 정체를 알 수 없는 걸쭉한 액체.
벌레를 툭 바닥에 던지며, 그가 입을 열었다.
"역시, 나는 죽은 건가?"
킥킥대는 웃음소리가 번졌다. 앞에 앉은 남자의 머리가 점점 위로 길쭉하게 늘어나고 있었다.
변조된 음성 같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여긴 그저 네 꿈이지. 너에겐 이게 더 애석할지도 모르겠지만."
남자의 머리는 더 이상 머리로 보이지 않았다. 파충류의 꼬리 같기도, 촉수 같기도 했다.
공포가 그를 엄습했다. 하지만 정신이 으깨질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그제야 자신이 이 남자의 아주 작은 일부만을 마주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쩍, 쩌적-
그를 중심으로 보라색 균열이 번졌다. 균열이 빠르게 세상을 집어삼키고, 이윽고 뒤섞였다.
남자도 예외 없이 그 뒤엉키는 혼란 속으로 녹아들었다.
모든 게 흐려졌다.
"언젠간… 또… 다시…."
음성이 노이즈에 뒤섞여 바스라졌다. 이해할 수 없는 공허의 잔상이 아른거렸다. 그리고 다시 어둠.
***
물감이 번지듯 의식이 되돌아왔다.
악몽의 잔재가 흐릿하게 뇌리를 스쳤다. 그 존재가 무엇이었는지는, 솔직히 알고 싶지도 않았다.
'고로케에 콜라를 먹었어야 했는데….'
짧은 감상과 함께, 이안은 비로소 눈을 떴다.
회백색의 낯선 천장이 선명해졌다.
전신을 압박하는 감촉이 비로소 느껴졌다. 온몸에 붕대가 감겨 있었다. 심지어 팔다리는 부목으로 고정되어 있기까지 했다.
감각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묘하게 마음이 놓였다.
적어도 반신불수가 되지는 않았다는 뜻이었으니까.
'어디 하나 없어졌어도 이상하지 않은데… 다행이군.'
어렴풋한 기억을 곱씹은 이안은, 방심하지 않고 손가락과 발가락도 꼼꼼히 확인했다. 불편한 와중에도 감각이 전해졌다.
미구엘은 손목이 날아가도 손이 남은 느낌이라 했었지만. 적어도 지금처럼 꼬물대는 것까지 느껴지진 않았을 터였다.
"하…."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쉰 이안이 본능적으로 상태 창을 열었다.
남김없이 사라진 능력치 포인트.
그리고 그만큼 높아진 체력 수치.
'…이래도 힘이 더 높네.'
이안은 덤덤하려 애썼다. 후회해 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이러지 않았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테니까.
그나마 위안인 건 레벨 업 직전까지 오른 경험치였다.
'퀘스트 보상에 용의 경험치까지 다 들어온 건가.'
그의 레벨을 생각하면, 엄청나게 많은 양이었다.
받은 퀘스트는 전부 완수되어 있었다. 보상은 다 합쳐 스킬 포인트 두 개. 그리고 여러 개의 물음표였다. 물음표 보상은 지금까지의 경험상, 현실에서 손에 넣게 되는 전리품인 경우가 많았다.
이안의 의식이 자연스럽게 스킬 창으로 이어졌다.
보상이 들어온 건 분명했지만, 잔여 포인트는 오히려 줄어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생명력 자연 회복 수치를 높여 주는 공용 스킬인 태초의 생명력을 최고 레벨까지 올렸으니까.
다 찍을 필요까진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까지 다다른 이안의 입가에, 문득 쓴웃음이 스쳤다.
'사람 마음 참 간사하군.'
지금은 살아남은 거에 감사할 시점인데.
하지만 아쉬움을 깨끗하게 밀어낼 수는 없었다. 결과적으로 더 심각한 망캐가 된 셈이었으니까.
'…하긴. 이제 능력치만 봐도 도저히 마법사라고는 할 수가 없지.'
어쩌면 단추를 몇 개 완전히 잘 못 끼운 시점부터 예견된 결과일지도 몰랐다.
아무리 애써도 벗어날 수 없는.
끼익-
경첩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 건 그때였다. 바구니를 든 여사제가 장내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제야 장내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가 누운 장식 없는 침대. 마찬가지로 장식이라고는 없는 탁상과 의자. 원형으로 뚫린 창문.
'어디인가 했더니. 교회였나.'
생각하며, 그는 비로소 몸을 일으켰다. 몸이 뻣뻣해서 벌떡 일어서는 수밖에 없었다.
"히, 히익…?!"
방을 정리하던 여사제가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눈을 치켜뜬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이안은 팔을 구부렸다. 으직, 팔을 고정하던 부목이 부러졌다.
이제야 좀 움직일 만하네.
"루 솔라 맙소사…. 정말 깨어나셨군요… 엄청난 속도로 회복되시는 걸 보고 찬란한 여신의 은총이라 여기긴 했지만… 이건 정말…."
그가 뻣뻣한 목을 이리저리 돌리는 사이, 더듬대며 내뱉던 사제가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이안이, 이윽고 입가를 압박하는 붕대를 슬쩍 풀며 내뱉었다.
"페르마 사제를 불러 주시겠소?"
***
이안이 깨어났음을 알게 된 사제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그들은 침대에 걸터앉은 이안을 보자마자 무릎을 꿇고 루 솔라에게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기적의 산물 취급이냐고….'
이안은 헛웃음을 흘리며 그 사이의 페르마 사제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안과는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식은땀만 흘리며 기도에 열중하고 있었다.
기도를 끝낸 사제들을 슥 돌아본 이안이 이윽고 내뱉었다.
"둘만 들어오고, 나머진 돌아가시오. 또 기도하러 찾아오는 자가 있다면 평생 앞니 없이 살게 해 줄 테니까, 알아서들 전달하시고."
"예…!"
맨 앞에 선 사제 둘이 달려 들어왔다. 이안이 양팔을 펼치자, 그들은 말없이 붕대를 풀기 시작했다.
이안의 시선이 물러나는 사제들 사이에서 고개를 숙인 채 선 페르마에게로 돌아갔다.
"페르마 사제님."
"예. 말씀하십시오, 이안 경…."
페르마가 어정쩡한 자세로 허리를 숙였다. 그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눈빛이 퀭했다.
어쨌든, 편하게 대화할 상대는 아니군. 내심 실소한 이안이 입을 열었다.
"혹시, 루카스 경이 트라벨가에 와 있소?"
페르마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예, 그렇습니다."
"그럼 가서 불러오시오. 그와 얘기하는 게 편하겠군."
"그… 이안 경."
"...?"
"경께서 의식을 회복하시기를 기다리는 분들이… 계십니다만."
"누구?"
페르마가 난처한 듯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한 분은 울라프 대공 전하이시고 한 분은 교단의-"
"만날 생각 없소."
이안이 말을 잘랐다. 돌아가는 분위기로 보아하니, 그들을 만나 봐야 장황한 개소리나 들어야 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내가 깨어난 걸 알리지 마시오. 혹시 알려지면, 방문을 거부했다고도 알리시고."
단호하게 덧붙인 이안이 턱짓했다.
"가서 루카스 경이나 불러오시오. 페르마 사제님."
"…예."
페르마가 한숨을 삼키듯 눈을 감고는 몸을 돌렸다.
이안은 코웃음을 흘렸다.
어쨌건, 그가 타후므리트를 죽였다고 알려진 건 분명해 보였다.
그건 한 올 한 올 정성껏 붕대를 벗기는 사제들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신의 사도 수준이 아니라, 화신이라도 강림한 것처럼 그를 대하고 있었으니까.
…이러다 날 새겠군.
"내가 얼마나 잔 거요?"
이안이 불쑥 입을 열자, 사제들이 황급히 손가락을 펼쳤다.
"교회에 도착하신 지 일주일 정도 됐습니다."
"어쩐지 배가 고프더라니. 걸칠 옷과 식사나 준비해 주시오. 이건 내가 할 테니까."
"예, 그리하겠습니다… 이안 경."
꾸벅 허리를 숙인 사제들이 식은땀을 흘리며 물러났다.
어쨌거나 거만한 작자들이 쩔쩔매는 꼴을 보는 재미만큼은 확실히 있었다.
끼익-
문이 다시 열린 건, 로브를 걸친 이안이 탁상에 놓인 빵과 수프를 거의 다 먹었을 무렵이었다.
"...?"
루카스일 줄 알았건만 또다시 페르마였다. 그의 뒤, 하얀 베일로 얼굴을 가린 누군가를 눈에 담은 이안이 심드렁하게 미간을 좁혔다.
"나는 루카스 경을 불러오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 루카스 경께는… 연락을 넣었습니다."
"방문도 거부하겠다 했었고."
"그게, 제가 모신 것이 아니라…. 이분은… 이분으로 말할 것 같으면…"
페르마 신부가 식은땀을 흘리며 횡설수설했다. 가뜩이나 퀭해진 얼굴이 이젠 사색이 되어 있었다.
그때, 뒤에 선 자가 얼굴을 덮은 베일을 살짝 거둬 눈을 드러냈다.
그 눈동자를 본 이안의 입가에, 이내 옅은 헛웃음이 스쳤다.
"그런 거였군…. 들어오시오."
내뱉은 말에 신경 쇠약 직전이던 페르마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뒷걸음질 쳐 물러나는 그를 향해, 이안이 덧붙였다.
"페르마 사제?"
"예, 예에…?"
"복도 끝에서 기다리시오. 아무도 들어 오지 못하게 하고, 루카스 경이 오면 기다리라 전해주시오."
"예…."
"이번에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면, 앞날이 더 피곤해지실 거요."
"...."
고개를 숙인 페르마가 물러났다.
베일을 눌러쓴 자가 장내로 들어섰다. 탁, 문이 닫히자 베일 아래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번졌다.
"설득할 생각이었거늘. 바로 허락해 주어 고맙구나."
여자 같기도, 미성의 남자 같기도 한 묘한 목소리.
"거절하는 의미가 없을 것 같아서 말이오."
피식한 이안이, 다가오는 그를 바라보며 덧붙였다.
"위대하신 백금룡께서, 거절한다고 쉽게 물러나실 리가."
"바로 알아봐 준 건 기쁘다만…."
멈춰선 그가 베일을 걷으며 이안을 내려다보았다.
베일 아래의 황금색 눈동자가 옅은 호선을 그렸다.
"그리 말하니 조금 서운하구나. 우리는 전우가 아니더냐?"
#121화
용에게 이런 말을 들을 줄이야.
웃음을 삼킨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 비슷한 거긴 했었지."
"비슷한 거라니… 고약한 농담을 즐기는구나. 날 여러 번 서운하게 해."
말과 달리 전혀 기분 나쁜 어조가 아니었다. 오히려 즐거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르케아스가 베일을 완전히 벗었다.
빛이 바랜 듯한 금발이 어깨 아래로 흘러내렸다. 티끌 하나 없는 새하얀 얼굴과 황금색 눈동자.
…이래서 얼굴을 가렸군.
"조금 덜 눈에 띄는 외모로 변하시는 게, 가리는 것보단 편하지 않으시겠소?"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다른 모습으로 의태하면 불편하단다. 주문과 몸이 이 형태를 기억하고 있거든. 그러니 처음부터 다른 모습을 택했어야 하지만…."
이안의 건너편에 앉으며, 아르케아스가 옅은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어린 나이엔, 누구나 눈에 띄는 걸 즐기는 법이잖니."
"지금은 꽤 불편하시겠소."
고개를 대충 주억거리며, 이안이 남은 빵을 입에 넣었다.
아르케아스의 미소가 짙어졌다.
"내 이 모습을 보고 한 첫 질문이 그런 거라니. 역시 넌 재미있구나. 보통은 정말 내가 소문대로 황금이 가득한 둥지를 가지고 있는지 묻거나, 성별을 확인하려 들거든."
"…그런 질문에도 대답해 주시오?"
"물론이지. 소문이 아예 거짓은 아니나 그런 취미는 수백 년 전에 버렸으며, 용은 성별이 구분되어 있지 않지만 원한다면 어느 쪽이든 될 수 있다는 것도, 전부 알려 준단다. 지금 이 몸이 어떤 성별인지도."
"친절하시군…."
친절한 절대자라. 적어도 이 세계에선 더없이 모순된 말이었다.
강자의 아량, 혹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으리라.
그도 아니라면 오래 산 자들이 늘상 그렇듯, 그저 떠들어 대는 걸 즐기는 것일 뿐일지도 몰랐다.
탁상에 팔꿈치를 얹은 아르케아스가 손바닥으로 턱을 괴며 이안을 바라보았다. 기다란 손가락이 느긋하게 까딱였다.
"널 보고 있자니, 날 보던 인간들이 어떤 심정이었는지 알 것 같구나. 묻고 싶은 것이 아주 많아."
"알고 있소. 그러니 내가 깨어나자마자 오신 거겠지."
놀랍지도 않다는 듯 대꾸한 이안이, 물잔을 입에 가져갔다.
그는 용을 앞에 두고도 전혀 긴장한 기색이 없었다.
실제로도 그랬다. 어차피 긴장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적어도 그게 아르케아스를 기쁘게 한다는 건 분명해 보였다.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건 채, 그가 말했다.
"그러니 너도 내 질문들에 친절하게 답해 주지 않으련? 내가 네 목숨을 구한 것에 대한 작은 보답으로."
"...?"
이안이 잔을 내려놓으며 그를 마주 보았다.
"나도 귀하를 구한 건 마찬가지 같소만."
"물론 그렇지."
아르케아스가 로브의 소매 속으로 손을 넣었다. 곧 날이 부러진 검이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단죄의 검. 자루가 이안 쪽으로 향하게 내려놓은 그가 덧붙였다.
"난 그 이후를 말하는 것이란다."
"…날 발견한 게 귀하셨군."
"그 폭발을 막아내고 뒤를 보니, 저 멀리 지원군이 보이더구나. 해서 나머지는 그들에게 맡기기로 하고 네 뒤를 쫓았지. 하지만 내가 도착했을 땐, 이미 늦었더구나. 나는 아쉽고, 또 슬펐지. 그때였단다. 네가 또 내게 놀라움을 선사한 건."
이안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그가 미소 지었다. 그 거대한 백금룡이라고는 믿기 힘든 인간다운 감정이 묻어났다.
"네가 살아 있다는 걸 알게 됐거든. 네 육체는 그토록 처참한 몰골이 되어서도, 끝내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더구나. 기적적인 일이었지."
"...."
능력치와 스킬을 찍은 보람이 있었네.
태초의 생명력은 잃은 생명력에 비례해 회복력이 높아졌다. 그때는 죽음 직전이었을 테니, 효과도 가장 강했으리라.
고개를 주억거리는 그의 귓가로 아르케아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쩌면 네가 품은 그 혼돈 덕분일지도 모르겠군. 혼돈의 힘 역시 널 살리려 애쓰고 있었으니."
"...."
이안의 눈매가 설핏 꿈틀댔다. 하긴, 그의 몸속에 자신의 마력을 잔뜩 밀어 넣었던 존재였다. 그가 품은 혼돈 따윈 진작 눈치챘으리라.
그보다 뜻밖인 건 혼돈력이었다.
그를 살리려 했다니.
'마력도 신성력도 될 수 있는 힘이니까….'
생명력이 될 수도 있었던 건가.
이안은 문득 악몽을 떠올렸다. 그를 중심으로 번지던 보랏빛 균열.
그 역시, 그가 품은 혼돈력이었던 모양이었다. 공허의 존재로부터 그의 의식을 지킨 것이리라.
이안의 눈빛 변화를 즐기듯 응시하던 아르케아스가 덧붙였다.
"하지만 힘에 부쳐 보였단다. 그대로 두었다면 너는 끝내 죽었을 거야. 해서 나도 조금 힘을 보탰단다. 네 회복력이 죽음을 앞지르도록."
"교회로 날 옮긴 것도 귀하셨군… 의문이 풀렸소. 왜 여기서 눈을 뜬 건가 했거든."
"뜻밖이구나. 네가 바로 알아챌 줄 알았건만. 저 겁 많고 엉덩이 무거운 자들을 움직일 이는 많지 않잖니."
"하긴. 그건 그렇소만…."
"내 질문에 친절하게 답해 줄 생각이 조금은 들었으면 좋겠구나. 보아하니, 넌 말을 길게 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만."
그쪽은 말을 길게 하는 걸 아주 좋아하시고.
생각하며 피식한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알겠소. 그 후에 내 물음에도 답을 주신다면."
"흥정을 잘 하는구나. 그리하마."
"그래서, 뭐가 그리 궁금하시오?"
"가장 궁금한 건… 그래. 굳이 표현하자면 네 비법이란다. 적지 않은 시간을 살았지만, 너와 같은 존재는 처음 보았거든."
아르케아스가 손가락을 까딱이며 말을 이었다.
"여러 신들의 총애를 받는 마법사라니. 심지어 혼돈까지 품고 있지. 그런데도 영혼은 전혀 오염되거나 물들지 않았어.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거니?"
"포괄적인 질문이시군…. 내 영혼이 오염되지 않는 이유는…."
이안은 잠시 턱을 긁적였다. 그의 영혼은 다른 세계에서 왔으며 육신은 게임 캐릭터였다는 말이나. 그래서 아마도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스스로 타락을 선택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란 대답은, 물론 할 수 없었다.
사실 그게 정확한 이유인지도 불분명했다.
"솔직히 잘 모르겠소. 혼돈의 파편을 품고 있어서거나, 정신력이 강하기 때문이겠지. 어쩌면 혈통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겠소. 내 몸에는 고대인의 피가 흐르니까."
"호오… 고대의 혈통이라… 누구에게나 조금씩은 고대인의 피가 흐르지만, 너는 그보다 훨씬 진하다는 뜻이겠지. 그렇다면 정말 타고난 것인가… 그래… 네겐 당연한 일이니 오히려 이유를 알 수 없을 수도 있겠지. 아쉽구나…."
홀로 중얼대며 결론을 내린 아르케아스가, 이윽고 작은 탄식을 흘렸다.
이안이 피식댔다.
"백금룡께서 아쉬우실 이유가 있소? 그 무엇도 귀하의 영혼을 오염시키진 못할 것 같은데."
"대답하자면, 아니란다. 물론 용의 영혼은 단단하며 고결하지. 그러나 무한한 시간을 이겨 낼 수는 없단다. 오히려…."
아르케아스의 미소가 씁쓸해졌다.
"영원에 가까운 시간을 살기에, 모든 용은 언젠가 필연적으로 광기에 물들 수밖에 없단다. 그래서 대륙의 이변을 느꼈을 때, 거의 모든 동족들이 대륙을 떠났지. 타락과 광기가 빨리 찾아오게 될 것이 두려웠던 게야."
"그럼 귀하께서도 떠나시면 되지 않소?"
"나는 그게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않으리라 여겼단다. 그저 그 순간을 유예할 뿐이겠지. 새로운 낙원을 찾는다 한들, 끝내 벗어날 순 없을 것이야. 타후므리트가 그랬듯…."
금색 눈동자가 허공을 훑었다.
돌아오지 않을 과거를 회상하는 것 같기도, 예정된 미래를 헤아리는 것 같기도 한 흐린 눈빛이었다.
"그는 본래 아주 냉철하며 고고한 푸른 용이었지. 그런 그조차도 고작 사랑이란 광기에 물들어 타락했단다. 나 또한 언젠가는 그리되겠지. 예상치 못한, 아주 하잘것없는 이유로. 어쩌면… 이미 시작되었을지도 모르고."
그가 다시 이안을 마주 보았다.
목소리에 초연함이 감돌았다.
"나는 이번에 너무 많은 힘을 소진했단다. 오염된 마력도 아주 많이 받아들였지. 그러니 정화의 시간을 가져야 한단다. 회복하는 게 녹록지는 않겠지. 마력의 황혼기잖니. 꽤 긴 시간이 필요할 테고, 함께 축적되는 독도 빼내야 할 거야. 어쩌면 그 과정에서 영혼에 흠집이 생길지도 모르지."
이안의 낯이 설핏 굳어졌다.
둘 뿐인 줄 알았던 용이 사실은 셋이었지만. 어쨌건 다시 둘만 남았다. 그중 하나는 어딘가의 지하에 봉인되어 있으니, 현재로서 남은 용은 아르케아스뿐인 셈이었다.
그마저 미쳐 버린다면, 엄청난 희생을 초래하리라.
솔직히 이자와 싸워 이길 수 있으리란 생각은, 지금도 전혀 들지 않았다.
"…루 솔라께 도움을 청하시면 될 것 같소만."
"찬란한 여신께선 돕지 않으실 거란다."
"귀하는 교단의 성자이자 신의 사자가 아니셨소?"
"그래서 이렇게, 그저 지켜보기만 하는 아량을 베풀고 계시잖니?"
아르케아스가 느긋하게 양팔을 펼쳤다.
"신들은 용을 좋아하지 않으신단다. 균형을 파괴하는 존재로 여기시지. 과거를 돌이켜 보면, 틀린 말도 아니고. 내가 이번 일에 나설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동족이 관련되어 있었던 덕분이란다. 그게 아니라면, 신들이 나를 그저 지켜만 보고 있지는 않으셨겠지."
천벌이라도 내리는 건가.
하긴, 타후므리트가 자신의 권역을 형성한 이유가 하나 뿐일 리는 없었다.
생각하며, 이안은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결국 또 설정 놀음이었다.
속내를 읽은 듯, 아르케아스가 미소 지었다.
"내 질문은 이제 거의 끝났단다. 하나. 둘. 어쩌면 세 개 정도."
대답에 따라 질문의 숫자가 달라진단 건가.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본론만 짧게 해 주시오. 귀하의 호의에 따른 친절은, 이제 거의 다 닳아 없어지고 있소."
"저런. 내 이야기가 재미있지 않았나 보구나. 그래, 하긴. 너와는 관계없는 일이지."
아르케아스가 슬쩍 이안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네 영혼은 오염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신들의 손길도 전혀 닿지 않았더구나. 이유가 있느냐?"
"그 누구도 섬길 생각이 없기 때문이오."
"찬란한 여신이라 할지라도?"
"…여신께서 듣고 계실지도 모르오만."
"걱정 말거라. 신들은 지금 너와 나의 대화를 엿듣지 못해. 내가 그분들의 시야를 가리고 있거든. 너는 지금 태양 옆의 반딧불인 셈이란다."
반딧불까지야…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선선히 대답했다.
"나는 이미 루 솔라의 제안을 거절한 바가 있소."
"호오… 그럼 앞으로도?"
"그렇소. 그 누구도."
"그렇다면 공허는? 잊힌 고대의 신들이라면 네게 달콤한 속삭임을 멈추지 않을 것 같다만."
"그것들은 죽여야 할 대상이오."
"혼돈의 진리와 비의를 손에 넣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도?"
"그 대가로 다들 돌아 버리더군."
"그래… 과연… 너는 마법사이지만 마법사가 아니구나. 그야말로 너다워."
아르케아스는 이안이 내뱉는 말의 진위를 즉각적으로 판가름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이안이 짧게 코웃음 쳤다.
"말씀하신 질문 횟수는 이미 넘은 것 같소만."
"그래. 이제 네게 제안할 것만 남았구나. 이 말까지 하게 되리란 기대는, 사실 그리 크지 않았는데."
"제안…?"
이안은 여전히 그의 속내를 전혀 알 수 없었다. 사고의 전개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어쩌면 용이란 본래 죄다 이런 존재들인지도 몰랐다.
이안의 시선을 지레짐작한 듯, 아르케아스가 흐릿하게 미소 지었다.
"염려 말거라. 네가 거절한다 해도 강제하지 않을 것이며, 탓하거나 원망하지도 않을 테니까. 나는 그저 제안하려는 것뿐이란다. 그러니 들어보지 않겠니?"
그 순간 이안의 눈앞에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백금룡의 제안.
그의 이야기를 듣겠다 수락하면 완료되는, 간단한 퀘스트였다.
'또 조건부 퀘스트인가.'
하지만 이안은 이것이, 아주 많은 조건을 달성해야만 비로소 해금되는 퀘스트이리라 직감했다.
앞선 문답만으로도 근거는 충분했다.
또 다른 연계 퀘스트의 시발점이기도 하리라.
그런 생각들과 달리 무표정을 유지한 채, 이안이 입을 열었다.
"아시는지 모르겠소만, 내 본업은 용병이오."
"합당한 보상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이겠구나."
"바로 그렇소. 아무리 귀하라 해도, 나는 의뢰에 걸맞은 보상이 없이는 움직이지 않소."
"이런… 무게추가 협상을 시작하기 전부터 기울어졌구나. 나는 이미 가진 패를 많이 보여 줬으니."
말과 달리, 이번에도 아르케아스는 전혀 기분 상한 표정이 아니었다.
이안의 대답에서 희망을 본 것이리라.
"그런 의미에서. 귀하의 의뢰 내용을 자세히 듣기 전에, 나도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들이 있소. 보아하니 귀하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하면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아서 말이오."
"중간중간 물은 건 치지도 않는구나. 그래. 그 뻔뻔함이야 익히 알고 있었지. 순서대로 말해 보렴."
"나는 귀하와 함께 싸웠소."
"그렇지."
"그러니 타후므리트의 유해에 대한 소유권은, 내게도 일부 있다 할 수 있소. 거기다 나는 죽다 살아나기까지 했잖소?"
"...."
아르케아스가 순간 눈을 깜빡였다.
잠시 입술을 움찔댄 그는, 곧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용의 앞에서 다른 용의 유해를 내놓으라 하다니! 내 수많은 인간을 보았지만, 정말 너 같은 인간은 처음이다. 넌 정말 나를 조금도 어려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구나!"
"...."
그게 저렇게까지 웃을 일인가.
이안은 눈물까지 찔끔 흘리는 아르케아스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덧붙였다.
"그래서, 얼마나 주실 거요?"
아르케아스의 웃음이 커졌다. 이윽고 그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지독하다는 말을 종종 듣지 않느냐? 너라면 난쟁이나 오크들조차 혀를 내두르겠구나. 그래… 본래는 네게 작은 보답을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말을 듣고 보니, 그걸로는 부족해 보이네."
이윽고 내뱉은 아르케아스가 이안을 마주 보았다.
"그의 머리는 이곳에 남길 것이다. 북부가 용의 시련을 이겨 냈다는 증표로써. 나머지는 내게 양보하지 않겠느냐? 합당한 곳에 묻어 주어야 하니. 용의 뼈는 다루기도 어렵고 쓸 곳도 많지 않단다. 대신…."
타이르듯 말한 아르케아스가 미소 지었다.
"그에 걸맞은 가치를 지닌 보물을 주마. 가치는 충분할 것이야."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애초에 그는 용의 뼈를 트라벨가에 팔아넘길 생각이었으니까. 일부 부위를 남기긴 했겠지만, 제국에 발을 들이고 한참의 시간이 더 지나야 가공할 수 있으리라.
그보단 당장 눈앞의 이 백금룡이 줄 보물이 더 값어치 있을 터였다.
"들어 보겠소."
"네게 세 가지 선택지를 주마."
물잔과 포크, 스푼을 집어 든 아르케아스가, 이안의 앞에 하나씩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하나는 북부의 대전사인 네게 힘이 되어 줄 것이고, 또 하나는 엄정한 여신의 성전사인 너를 지킬 것이다. 마지막 하나는 혼돈을 품은 마법사인 네게 신비를 더해 줄 것이란다."
그가 양손을 펼치며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 중에서 무엇을 받고 싶니?"
"…다 주시면 안 되오?"
아르케아스가 다시 한번 웃었다.
이거, 재롱부리는 손주가 된 기분인데….
이안이 생각하는 사이, 그가 말을 이었다.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다만. 신들이 노하실 거란다. 네게 이 셋을 전부 준다면, 내 손으로 세상의 균형을 깨뜨리는 것과 다름없을 테니까. 네 위업에 걸맞은 보상은 하나란다. 이에 필적하는 다른 보물은, 네 힘으로 손에 넣도록 하렴."
하여간, 신이란 것들이 제일 문제라니까.
이안은 짧게 혀를 찼다. 어쩌면 이 역시 부여된 현실성일지도 몰랐다.
어쨌건, 더 받아내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그렇다면 무엇을 선택할지는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이안이 물잔을 들었다.
"마법사의 보상으로 받겠소."
#122화
"뜻밖이구나. 나는 네가 이것만은 택하지 않을 줄 알았거늘."
아르케아스가 슬쩍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이안의 입가에 쓴웃음이 스쳤다.
마법사인 걸 알아도 이런 반응이라니.
'하긴. 지금 날 보면 전사나 기사가 더 어울리겠지.'
하지만 그는 마법을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익힌, 그리고 앞으로 익힐 스킬은 결국 거의 마법이니까.
심지어 한층 더 심각한 망캐가 된 지금은, 외적인 도움이라도 가리지 않고 받아들여야 했다.
"하지만 네 선택을 존중하마."
느긋하게 덧붙이며, 아르케아스가 소매에 손을 깊이 넣었다가 뺐다.
그의 손아귀에 빈 유리병이 들려 나왔다.
이 자도 아공간이 있나.
생각하는 사이, 병을 탁상 위에 놓은 아르케아스가 부러진 단죄의 검을 집어 들었다.
이안을 슬쩍 본 그가 남은 검날로 자신의 왼손 손아귀를 그었다.
베인 단면에서는 피가 흐르지 않았다. 그저 선홍빛 속살만을 드러냈다.
유리병의 마개를 열고 그 위에 왼손을 가져간 아르케아스가, 설핏 미소 지었다.
"놀라는 척도 해 주지 않는구나. 이 또한 서운하군."
그가 실없는 농담과 함께 꾹, 주먹을 움켜쥐었다.
솨아아-
손가락 틈으로 황금색 빛이 아른거렸다. 금빛 액체가 손바닥을 타고 흘러내려 병으로 떨어졌다.
액체는 그대로 기화되어, 병의 둥그런 하단에 안개처럼 맺혀 일렁였다. 내부에 찬란한 황금빛이 가득 찰 때까지 지켜본 아르케아스가, 비로소 마개를 닫았다.
그는 단죄의 검을 다시 탁상에 놓으며, 병을 이안 앞으로 내밀었다.
병을 쥐는 이안의 귓가로 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내 심장에서 여과한, 가장 순수한 용의 마력이란다. 마법사에게는 영약이나 다름없지. 어떤 상승 작용을 일으킬지 까지는 나도 알 수 없다만…."
"…어떤 식으로 작용하든, 영구적인 효과가 있겠군."
이안이 나지막이 말을 받았다.
아르케아스가 고개를 끄덕이는 와중에도, 그의 시선은 유리병 속의 황금빛에 고정되어 있었다.
정확히는 용의 진원이란 이름이 붙은 정보창을.
최대 마력량, 마력 친화력, 마력 회복력, 시전 속도, 쿨 타임 감소 등등. 이 용의 진원은 아홉 가지 효과 중에서, 랜덤한 두 개의 상승효과를 영구적으로 부여해 주는 영약이었다.
증가 폭이 파격적으로 높은 건 아니지만, 충분히 유의미했다.
'기본 능력치가 높아질수록 추가 효과도 더 커지겠고….'
…이왕이면 마력량이 늘었으면 좋겠는데.
생각하며, 이안은 아르케아스를 슬쩍 바라보았다.
"바로 먹어도 되겠소?"
"얼마든지. 천천히 마시렴, 빼앗아 가지 않을 테니까."
아르케아스가 손바닥을 슬쩍 들며 말했다. 어느새 손아귀의 상처는 흔적도 없었다.
자꾸 어린애 취급이군.
피식한 이안이, 마개를 열고 단숨에 내용물을 들이켰다.
아무런 맛도 없었다. 그저 열기가 입을 통해 들어오는 느낌뿐.
"...?"
이내 그의 미간이 좁아졌다.
삽시에 번진 열기가 온몸을 질주하고 있었다. 몸속이 타는 것 같았다. 뒤이어 그의 온몸에서 악취가 나는 노란 땀이 돋아났다.
"호오… 그래… 네겐 이렇게 작용하는구나."
아르케아스가 미소 짓는 사이, 참고 있던 숨을 몰아쉰 이안이 불쾌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상태 창 상의 변화는 확인할 수 없었다. 게임에선 세부 설정으로나 확인 가능하던 능력치가 올라갔으리라.
어쨌든 적어도 최대 마력량이 오르지는 않았다는 건 확실했다.
더럽게 찝찝하다는 것도.
"몸속의 불순물이… 빠져나온 건가?"
"아마도. 네 혈관이 더 깨끗하고 단단해졌겠구나. 어쩌면 더 넓어졌을지도 모르지. 결국, 나보단 네가 더 잘 알 수 있을 거란다."
"흐음…."
침음하며, 이안이 손을 쥐락펴락했다.
마력이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시험 삼아 끌어올려 보니, 마력이 몸속을 순환하는 속도도 더 빨라졌다.
'시전 속도가 올랐겠고. 다른 하나는 마력 친화도인가? 마력 회복량? 어쩌면 쿨타임 감소일지도.'
어느 쪽이건 최악은 아니었다.
옵션 중에는 속성 저항력 같은 것도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이만하면 차선 정도의 결과는 얻었다고 볼 수 있으리라.
마법을 사용하는 전투를 겪어 봐야, 더 확실해지겠지만.
"훌륭하군…."
"만족스럽다니 다행이구나. 이만하면, 우리 사이에 남은 빚은 없다고 할 수 있겠지?"
"그렇소. 지금까지는."
이안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르케아스도 짧게 웃음 지었다. 분명 헛웃음이었다.
"앞으로의 거래는 별개라는 거구나. 하지만 그래, 아쉬운 쪽은 네가 아니지. 무릇 거래란, 아쉬운 쪽이 조금 더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법이고 말이야."
"말이 참 잘 통하는 분이시오. 한 번쯤 강짜를 부리실 법도 한데."
"그래서 얻을 게 있다면 그랬겠지. 하지만 네게 그런 게 통할 리 없잖니. 용들 간의 전투에 터벅터벅 걸어 끼어드는 이에게 무슨 으름장이 의미 있을까."
이안을 물끄러미 마주 본 아르케아스가, 이윽고 덧붙였다.
"해서, 이제 내 제안을 들어 보겠느냐?"
"그러겠소."
아르케아스가 미소 지었다.
퀘스트 완료 창이 떠오르는 가운데,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의도적으로 대륙을 망가뜨리는 자들이 있단다. 이미 무너지고 있는 균형을 바로 세우는 것보다, 아예 전부 무너뜨리고 다시 시작하는 게 순리라 여기는 자들이지."
"…원탁 의회를 말씀하시는 거요?"
"그리 부르기도 한다더구나."
아르케아스는 이안이 그 이름을 알고 있다는 걸 전혀 놀라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심 놀란 건 이안이었다.
백금룡의 입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오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저마다 다른 목적을 품고 모인 자들이라더구나. 그럼에도 원하는 바가 같다는 건, 참으로 재미있는 일이지."
"그래서, 그들을 처리할 대행자가 필요하신 것이오?"
"그렇게까지 큰 부탁은 할 수 없단다. 그럼 내가 너무 많은 부분에 개입하는 것이 돼. 나는 작은 부분까지만 개입할 수 있단다."
"글쎄… 보통 이런 건 하나를 뽑으면 고구마 줄기처럼 줄줄이 엮여 나오던데 말이오."
"아마도 그들 하나하나가 그 줄기의 가장 아래에 위치할 거란다. 그러니 누군가 뽑혀 나온다면, 함께 드러나기 전에 먼저 끊어 내겠지."
아르케아스가 이안을 부드럽게 마주 보았다.
"네가 북부에 계속 남아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 너는 오히려 이곳을 떠나겠지. 남아 있다면 귀찮은 일이 많을 테니까. 네가 어디로 가든, 나는 개입하지 않을 거란다. 그래서도 안 되고. 다만…."
그가 길고 흰 검지를 들었다.
"그 과정에서 언제라도, 그들 중 단 하나만 줄여 주렴. 원탁에 앉는 자들 중 단 하나만. 당장이 아니라도 좋고, 내 의뢰 때문이 아니라도 좋단다. 그저 모든 게 더는 돌이킬 수 없어지기 전에만 완수해 주면 돼."
작지만 작지 않은 의뢰로군.
속으로 읊조린 이안이, 이윽고 물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들 전체에게 영향을 끼치리라 보시는 거요?"
아르케아스가 미소 지었다.
자신의 의도를 바로 알아챈 것이 흐뭇하다는 듯.
"아슬아슬한 균형은, 작은 무게추가 하나만 사라져도 깨지는 법이란다. 그 결과가 또 다른 혼돈을 낳더라도, 그것이 파멸보다는 낫겠지."
이안은 턱을 어루만졌다.
아르케아스는 그의 시선을 여상하게 받아들였다.
곧 이안이 옅은 실소를 흘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귀하가 아니라 신들이 나서셔야 할 문제 같은데."
"그게 그들의 교묘한 점이지. 그들은 결코 급박하게 균형을 무너뜨리지 않는단다. 세상이 조금씩 더 엉망이 되고, 끝내 모든 법칙이 무너지는 게 자연스러운 섭리처럼 보이도록 만들지. 곳곳에 지엽적인 균열만을 만들어 내면서."
아르케아스의 표정이 흐릿해졌다.
"그러니 그 과정에서 신들은 나서지 않으실 거란다. 오히려 몇몇을 도우실 수도 있겠지. 당장은 그것이 균형을 유지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 물론 우연히 신의 대행자가 그들의 앞을 막아설 수는 있겠으나…. 신들께서 나서는 건 아마도, 최후의 순간일 거야. 그때는, 돌이킬 수 없겠지."
"…그래서 귀하도, 그들과 같은 방식으로 대응하시려는 거고."
아르케아스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저 미소 지을 뿐.
비로소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용의 대행자. 내용은 간단했다. 원탁의 일원 처치.
이안은 잠시 말없이 퀘스트 창을 바라보았다.
사실, 그의 결정은 정해져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게임에선 원탁 의회와 크게 부딪힐 일이 없었지만, 이번엔 아니었으니까.
'굴러들어온 연결 고리를 내 발로 차낼 필요는 없지.'
그런 속내와 달리, 이안은 건조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왜 나를 선택한 것이오? 귀하의 말이라면 목숨을 바칠 자들은, 나 말고도 많을 텐데."
"그렇기에 그들은 할 수 없단다. 보통 강자들은 어떤 식으로든 영혼이 물들어 있지. 그들에겐 필연적으로 외부적인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단다. 그리고 그건 곧, 그들의 약점이기도 하지."
툭툭, 아르케아스가 손가락으로 천천히 탁상을 두드렸다.
적어도 그가 지금 이 대화를 즐기고 있다는 건 확실했다.
"그리고 원탁의 그들은, 그걸 아주 손쉽게 이용할 거란다. 죽이거나, 회유하거나, 타락시키겠지. 하지만 너는 그런 제약이 존재하지 않는 독립적인 존재란다. 신의 힘을 다루면서도 신을 섬기지 않고, 혼돈을 품고도 거기에 빠져들지 않았지. 거기다 용을 향해 스스럼없이 몸을 던질 용기도 지녔어. 어쩌면 네 그 불가사의한 부분은, 그저 특출나게 강한 영혼을 타고났기 때문일지도 모르겠구나. 불멸자의 영혼에 가까울 만큼."
아르케아스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러니 현재로선, 그들과 맞설 수 있을 만한 존재는 네가 유일하단다. 너와 비견될 다른 선택지조차, 내겐 존재하지 않아."
"흐음…."
이안의 눈매가 설핏 가늘어졌다.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것까지 털어놓다니.
'용이라 배포가 남다른 건가. 아니면 이자만의 특징인가.'
어느 쪽이건 인상적이었다.
자신이었다면 의무감이나 사명감을 어떻게든 덧씌우거나, 수틀리면 협박도 서슴지 않았을 텐데.
그는 이 와중에도 끝내 어떤 협박이나 강요도 하지 않은 것이다.
어쨌거나. 신들에게 눈엣가시 취급을 받으면서도, 그가 대륙을 사랑한다는 건 분명해 보였다.
그게 아니라면 자신을 옭아맨 수많은 제약 사이에서 어떻게든 빈틈을 찾고 계획을 세워 둘 리가 없었다.
"내가 그놈들 중 하나를 죽인다고 칩시다."
이윽고 이안이 입을 열었다.
"그럼 귀하께선 무엇을 보상으로 주실 거요?"
"재미있구나. 흥정이 그 어떤 맹세보다도 믿음직스럽게 느껴지다니."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내뱉은 아르케아스가, 양손을 펼쳤다.
"합당한 대가를 주마. 신들께서 노하지 않으실 정도까지만. 내가 결코 허언을 하지 않는다는 건, 방금을 통해 알고 있지 않니?"
이번만큼은 아니라도, 꽤 좋은 걸 준단 얘기지.
이안은 더 캐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더는 자세히 알려 주지 않을 게 분명했다.
"완수 보고는 어떻게 하면 되겠소?"
"찬란한 여신께서 지켜보시는 아래 해야겠지."
아르케아스가 품에서 작은 부적을 꺼냈다.
"루 솔라의 전당에서 이걸 태우렴. 어디라도 상관없단다. 그럼 잠시 후에 날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렇다면…."
이안이 손을 내밀었다.
"의뢰는 성립되었소."
"받아 주어 고맙구나, 이안."
아르케아스는 그의 손에 부적을 놓아주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의 손을 양손으로 꼭 마주 쥐었다. 아르케아스의 눈동자에 금빛이 아른거렸다. 손의 온기만큼이나 따듯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너는 이 순간부터 공식적이며 유일한 나의 대행자란다. 그러나 신들이 그러하듯 힘까지 빌려주지는 못해 미안하다. 다만, 네가 항상 무사하며 건강하길 언제나 온 마음으로 기원하마."
"미리 말하건대, 그 대행자라는 건 이번 의뢰까지만 유효한 거요."
이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르케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그 후엔 다시 옛 전우로 돌아가자꾸나."
"그 몸일 땐, 식사도 하시오?"
"할 수 있지. 필요하진 않다만."
"그럼 다음엔 술 한잔합시다."
아르케아스의 미소가 짙어졌다.
지금까지 중에서 가장 기뻐 보였다.
"그래. 내 가장 좋은 술을 준비하고 기다리마."
이윽고 이안의 손을 놓은 그가 일어섰다.
"쉬거라. 사제들도 마음껏 부려 먹고."
"하나만 더 묻겠소."
"얼마든지."
"대공도, 귀하의 존재를 아시오?"
"물론이란다. 그 아이가 싹수가 노란 떡잎일 때부터 알았지."
"그럼 떠나시기 전에 한 번 들러 주시겠소? 날 귀찮게 하지 않도록."
"내 대행자의 첫 부탁이 고작 그런 거라니…. 하지만 들어주지 않을 수 없구나. 그리하마."
마지막까지 즐겁다는 듯 웃음 지으며, 아르케아스가 몸을 돌렸다.
다시 베일을 눌러 쓴 그가 밖으로 나갔다.
비로소 이안이 옅은 실소를 흘렸다.
하다하다, 이젠 용의 대행자라니.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용의 부적을 아공간에 넣은 그때였다.
"이안 경…!"
문이 벌컥 열렸다.
경외로 가득한 눈빛의 루카스가 그 앞에 서 있었다. 그 뒤로 퀭한 표정의 페르마 사제가 보였다.
그래, 역시 진작 와 있었군.
"오랜만이오."
"이토록 무사하시다니…. 그야말로 기적입니다. 찬란한 여신께서 은총을 내리신 것이 분명-"
"귀하에게 들을 말이 많소."
이안이 심드렁하게 말을 잘랐다.
루카스가 미소 지었다.
"물론이죠. 궁금하신 부분은 모두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안 경."
보증도 서 주겠군.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페르마를 바라보았다.
"목욕부터 해야겠군. 목욕물을 준비해 주시겠소, 사제님?"
"예… 물론입니다, 이안 경."
"당장 욕실로 안내하시오. 물도 사제님이 직접 끓여 오시고."
"...."
눈을 질끈 감은 페르마가 몸을 돌렸다.
그 뒤를 따르면서, 이안이 루카스를 돌아보았다.
"이야기는 씻으며 듣겠소. 내 몸 냄새를 내가 못 견디겠군."
"알겠습니다, 이안 경. 저, 그런데…."
재빨리 따라붙은 루카스가 목소리를 낮췄다.
"조금 전에 나가신 분은, 누구셨습니까? 얼굴을 가리신 걸 보면 보통 분은 아니신 것 같았습니다만."
이안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용이었소. 백금룡, 아르케아스."
"...?!"
#123화
"-해서, 그 후에 지원군은 다시 출병했습니다. 지금쯤 장벽 인근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잔당들을 소탕하고 있겠죠. 함께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기는 합니다만, 저도 이곳에서의 할 일이…."
조곤조곤 이어지던 루카스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욕조에 머리를 기댄 채 듣고 있던 이안이 한 손을 슬쩍 수면 위로 들었기 때문이다.
곧 욕실 문이 열렸다. 뜨거운 물이 담긴 냄비를 든 페르마 사제가 휘청대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피곤에 찌든 얼굴로 이안의 욕조에 물을 부었다. 넘친 물이 바닥을 적셨다.
이안이 눈도 뜨지 않고 물었다.
"내 보수는 언제쯤 도착하지?"
"사람을… 보냈습니다. 두 분의 이름을 모두 거론했으니, 바로 처리될 겁니다."
페르마가 체념한 목소리로 답했다.
이안은 자신에게 지급될 금화와 새로 착용할 방어구의 수령을 그에게 맡겼다. 직접 방문했다간 귀찮아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도착하면 바로 알리시오. 서두르시는 게 좋을 거요. 난 그걸 받기 전까진 안 나갈 거니까."
"…예."
고개를 숙인 페르마가 몸을 돌렸다.
밖으로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루카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며칠간 사제님이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경과 계약을 맺으라 종용한 게 사제님이셨으니, 교회의 관련 업무도 전부 떠맡으셨거든요."
"뭐, 자업자득이지."
"예…?"
"하던 얘기나 마저 이어갑시다."
말을 자른 이안이 덧붙였다.
"요새 수비군들은 어떻게 됐소?"
"말씀드렸다시피, 반 이상 살아 돌아왔습니다. 애석하게도 몇몇은 백치가 되긴 했습니다만… 전쟁에선 드문 일도 아니죠. 그들을 살릴 수 있었던 건 위대한 백금룡과 용살자 이안 경 덕분이구요."
이안은 자장가처럼 이어지는 루카스의 말을 가만히 귀에 담았다.
그의 설명은 아주 자세했다.
그날 밤 트라벨가의 많은 이들이 상공을 가로지르는 타락용을 보았으며, 덕분에 귀환한 병사들이 영웅으로 대접받을 수 있었다는 식의 이야기도 빠뜨리지 않았다.
이안이 거기 타고 있었다는 걸 알린 게 입 싼 사제들뿐만이 아니었다는 것도.
"…겔루드 장군께서 모든 전황을 직접 증언하셨습니다. 덕분에 경과 백금룡의 업적은 빠짐없이 북부의 역사에 기록되었습니다. 본국에서 유명한 화가를 모실 예정이라더군요. 교회 천장에, 그날의 위대한 전투를 기록할 거라고 합니다. 장군께서 감수를 책임지시고요."
"기록…? 천장화라도 그린단 말이오?"
이안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루카스가 미소 지었다.
"예. 북부의 전설이 현실이 되었고, 끝내 이겨 냈으니 당연히 그 신화적인 업적을 기려야죠. 완성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리겠습니다만, 완성 된 후엔 타락용의 두개골과 함께 전시될 겁니다."
"하…."
이걸 박제시키네.
이안의 입가에 헛웃음이 번졌다.
북부인 당사자들이 그리겠다는데, 말릴 명분도 없었다.
어쩌면 이미 아르케아스에게 허락을 받았을지도 모르고.
그라면 기꺼이 허락했으리라.
"겔루드 장군께선 다시 이안 경을 뵐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계십니다."
두 번 다신 안 봐야겠군.
생각하며 이안이 말을 돌렸다.
"야인 전사들은?"
"경께서 위중하신 동안에는 매일 성벽 앞에 모여들었었습니다. 경을 카르하와 거의 동일시하더군요. 하긴. 카르하와 싸웠다는 용을 경께선 죽이셨으니, 아예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점입가경이었다.
한숨을 삼킨 이안이 내뱉었다.
"지금도 그러고들 있소?"
"아뇨. 경께서 회복 중이시라는 걸 확인시켜 준 뒤에, 일단 정착지로 돌려보냈습니다. 지금쯤 요새의 복구 작업도 돕고 있을 겁니다. 며칠 뒤엔 그들도 경께서 깨어나셨단 소식을 듣게 될 테고요."
"…적어도 당장 귀찮아지진 않겠군."
이안은 교회를 나간 순간 곧바로 떠날 준비를 시작해야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했다.
여기 계속 있다간, 관심과 칭송의 바다에 빠져 익사할 터였다.
"용병들의 보수는. 내가 약속한 것이 있소만."
"제가 전부 처리했습니다. 누락되는 인원 없이, 전부 합당한 보수를 받았죠. 남은 건 이안 경뿐입니다. 물론 대공께선 직접 감사를 표하며 전달하고 싶어 하십니다만…."
"내 대답은 듣지 않아도 알고 계시리라 믿겠소."
"이안 경은 정말이지… 권력이나 명예에는 관심이 없으시군요. 그 누구보다도 명예로운 분이신데도요."
"난 명예와는 거리가 먼 인간이오. 필요도 없고. 그보단 돈과 전리품을 더 좋아하지."
"이런 순간에까지 그러실 줄은 몰랐습니다. 지금은 원하신다면, 북부의 총사령관이 되실 수도 있으실 테니까요."
"...?"
이건 또 뭔 소리야.
미간을 찌푸린 이안이 돌아보자, 루카스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경은 북부의 대전사이자 용살자이며, 백금룡의 용기사이기도 하십니다. 경이라면 대공과 북부인들뿐만 아니라 사제들도 당연하게 받아들일 겁니다. 물론 저 역시, 기쁜 마음으로 따를 거고요. 물론…."
루카스가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경께서 그리하시리란 기대는 크지 않습니다만. 고려는 해 보시라는 말씀을 드린 겁니다. 트라벨가에 머무시는 동안에라도요."
"...."
이놈도 결국은 귀찮게 하겠네.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이안이, 이윽고 내뱉었다.
"난 며칠 안에 떠날 거요."
"…이렇게 바로 말씀이십니까?"
루카스의 눈이 커졌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탄식이 이어졌다.
"어째서 그렇게 서둘러서… 이제야 겨우 다시 만났는데요. 왜 굳이…."
아쉬워하고 난리야. 징그럽게.
내심 코웃음을 치면서도, 이안은 느긋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저 입에서 더는 헛소리가 나오지 않게 할 명분은 이미 있었다.
"백금룡께서 부탁하신 일이 있소."
"배… 백금룡께서요?"
루카스가 순간 숨을 멈췄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대행자로서 수행해야 할 의뢰가 있지. 이 정도면 대답이 되겠소?"
"물… 론입니다. 백금룡께서 부탁하신 일이라면, 따라야지요. 혹, 대외적으로 알려져선 안 되는 일입니까?"
"상관은 없소만. 뭐, 이왕이면."
"찬란한 여신께 맹세코 비밀을 지키겠습니다. 백금룡의 대행자께 도움이 되진 못할망정, 방해가 될 수는 없지요."
뭘 또 맹세씩이나.
이안이 피식댔다. 진지하게 고민하는 얼굴로 턱을 어루만지던 루카스가, 이윽고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조용히 떠나시긴 쉽지 않으실 겁니다. 경께서 채비를 하신다면, 곧 다들 알게 될 테니까요. 많은 이들이 경을 붙잡고자 애쓰겠죠."
이안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가 루카스를 돌아보았다.
"그러니 경께서 돕겠단 말로 들리는데."
"물론입니다. 경께는 내내 도움만 받았으니까요.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다면, 뭐든 할 겁니다. 염려 말고 계십시오."
"마차면 충분할 거요. 내 말 두마리가 이미 마구에 있으니."
"그 말은 두고 가시죠. 가장 좋은 전마 두 마리를 내 드리겠습니다. 마차에 식량도 가득 채워서 대령하도록 하고요."
"그러시다면야. 사양하지 않겠소."
덕분에 또 손 안 대고 코 풀겠군.
이안은 기분 좋게 몸을 문질렀다.
기사들은 물론 냉정한 살인 병기 들이지만. 반대로 자신들이 인정하거나 충성하는 상대에게는 이런 호구가 또 없었다.
물론, 명예를 알고 신앙심이 깊은 기사들만 해당되는 얘기였다.
끼익-
이윽고 문이 살짝 열렸다.
페르마가 문 앞에 선 채 내뱉었다.
"이안 경. 경께서 받으실 물건들이 도착했습니다."
"내 방으로 가져다 놓으라 하시오. 사제님은, 여기 뒷정리할 준비를 하시고."
"…예."
페르마가 다시 문을 닫았다.
사제는 아무리 부려먹어도 전혀 미안하지가 않군.
생각하며, 이안이 몸을 일으켰다.
묵은 때를 벗긴 알몸이 드러났다.
온몸에 가득한 크고 작은 흉터들.
이 중 절반가량은 새로 생긴 흔적이었다.
'땅에 부딪히고 뼈가 살을 뚫고 나오고, 난리도 아니었던 거겠지.'
태연하게 물기를 닦던 이안이 문득 쓴웃음을 지었다. 그 몰골에서 이렇게 멀쩡하게 회복했으니, 살아 있는 기적 취급을 받을 수밖에.
"그러고 보니, 경께 이 말씀을 드린 적은 없군요."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루카스가, 문득 입을 열었다.
이안이 고개를 돌리자, 그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을 이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안 경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북부는 죽음과 혼란만이 가득했을 겁니다. 감사 인사를 드리는 것조차 부끄럽군요. 저는 경의 경고를 듣고도, 끝내 장벽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했으니까요."
…욕실에서 들을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었다.
"난 그저 의뢰를 완수하려 최선을 다한 거요. 그리고 북부는, 그저 한 번의 위기를 넘겼을 뿐이지."
"…아직, 안심할 때가 아니라는 말씀이시군요."
순간 굳어진 루카스가, 이윽고 탄식하듯 내뱉었다. 꿈에서 단숨에 깨어난 것 같은 얼굴.
수건을 툭 떨어뜨리며 이안이 덧붙였다.
"검은 벽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잖소?"
"...!"
"그러니까…."
그의 검은 눈이, 루카스의 흔들리는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다음번엔 철저히 대비하시오. 그때는 백금룡은 물론이고 나 역시 없을 테니."
"명심… 하겠습니다."
이윽고 루카스가 힘을 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의 눈은 어느새, 신탁이라도 내린 것처럼 비장해져 있었다.
두 번 방심은 안 하겠구만.
시선을 거둔 이안이 걸음을 옮겼다.
"부탁한 일은, 최대한 빨리 준비해 주시오."
그가 밖으로 나갔다. 끼익, 흔들리던 문이 다시 닫혔다.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던 루카스가, 비로소 탄식했다.
"검은 벽의 침식이… 결국은 다시 시작된단 말인가."
근거라고는 없는 말이었지만, 결코 흘려 들을 수는 없었다.
그 말을 한 이가 북부의 새로운 초인이었으니까.
손끝을 가늘게 떨던 루카스는, 곧 으스러질 듯 주먹을 움켜쥐며 욕실을 나섰다.
벨리움 요새에서의 위대한 승리는, 이미 그의 뇌리에 남아 있지 않았다.
***
"불편한 곳은 없으십니까, 이안 경?"
이안이 방어구를 걸치는 걸 돕던 남자가 깍듯하게 물었다. 그를 돌아본 이안이 짧게 혀를 찼다.
"그쪽 말투가 불편하군."
보상이 담긴 궤짝을 들고 온 건, 다름 아닌 트라벨가의 북문을 지키던 관문 대장이었다.
장비를 확인하고 검수한 뒤에, 병사 둘을 이끌고 직접 교회를 찾아온 것이다.
관문 대장이 머쓱하게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북부의 영웅께 펺게 대할 수는 없잖소. 심지어 난 벨리움 전투에 참여하지도 않았고."
"무슨 상관인지. 아는 얼굴이라 편하게 채비할 생각이었는데, 덕분에 별반 다를 것도 없군."
"왜 없겠소? 내가 귀하의 물건을 얼마나 꼼꼼하게 확인했는데."
풀썩 웃으며 대답한 관문 대장이, 한결 편해진 얼굴로 턱짓했다.
"불편한 부분이 있으면 말씀하시오. 바로 바꿔 올 테니까."
"필요 없소. 잘 골라 왔군."
이안이 장갑을 딱 맞게 조이며 대답했다.
사타구니까지 덮는 제국 강철로 만든 사슬 갑옷. 그 위에 겹쳐 입는 흉갑과 각반, 견갑 등등도 전부 제국 강철로 만든 희귀 등급의 방어구들이었다.
관문 대장이 하나같이 가장 좋은 물건들로 챙겨 온 것이다. 심지어 내구도 손실도 거의 없는, 관리가 잘 된 물건들이었다.
'이젠 사슬에 판금을 잔뜩 걸쳐도 별 불편함이 없네.'
북부에서 오른 힘 수치뿐 아니라, 이번에 잔뜩 올린 체력도 그의 육체에 큰 변화를 만들어냈다.
이제는 기사로 오해받는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쓴웃음을 삼킨 이안이, 문 앞에 선 관문 대장을 돌아보았다.
"난 곧 트라벨가를 떠날 거요. 아마 길어야 사흘 내로."
"...!"
"아마 남문으로 나갈 거요. 새벽이나 이른 아침에, 이왕이면 조용하게 떠나고 싶은데. 도와줄 수 있겠소?"
"…그런 건 물으실 필요도 없소."
잠시 굳었던 관문 대장이, 오히려 기쁘다는 듯 미소 지으며 답했다.
"귀하의 부탁이라면 죽는 것 빼고 뭔들 못 들어드리겠소. 며칠 밤새는 거야 일도 아니지."
"루카스 경에게 가시오. 내 부탁을 받았다고 하면, 알아서 처리해 줄 거요."
"걱정 마시오. 보고하고 바로 한숨 자러 가야겠군. 내일 아침부터 퇴근 없이 남문을 지킬 테니, 언제든 오시오."
고개를 까딱인 그가 몸을 돌렸다.
이래서 인맥이 중요하다니까.
생각하며 마무리를 마친 이안이, 문득 탁상 앞으로 다가갔다.
단죄의 검.
"…한동안 검 부러질 걱정 없어서 좋았는데."
읊조리며 검을 집어 든 이안의 눈매가, 이내 꿈틀댔다.
"호오…?"
부러진 검신 내부에서, 아직도 옅은 신성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정보창을 확인해 보니 아직도 내구도가 남아 있었다. 심지어 이름도 바뀐 채였다.
부러진 단죄의 검. 아직도 단죄의 일격을 사용할 수 있었다. 검의 내구도가 떨어지는 페널티가 추가되긴 했지만.
'원래도 버릴 생각은 없었지만….'
잘 가지고 다녀야겠군.
생각하며 부러진 단죄의 검을 아공간에 넣은 그는, 대신 북부 전사의 장검을 꺼내 허리에 찼다.
비로소 전신의 무게감이 은근하게 몸을 감쌌다.
벨리움 요새에서의 기억들이 절로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하나 같이 현실성이 없는 기억들이었다. 용과 싸우다니.
수많은 버프와 아르케아스가 아니었다면, 제대로 싸우긴커녕 뭔가 해 보기도 전에 죽음을 맞이했으리라.
그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그때의 감각이 아직도 몸에 남은 모양이었다.
"하…."
이안이 실소를 흘렸다.
루카스에게 잘난 척 하며 말하긴 했지만.
그저 하나의 고비를 넘겼을 뿐인 건, 사실 그도 마찬가지였다.
이 세계에는 타후므리트와 필적하거나 더 강할지도 모르는 것들이, 아직도 잔뜩 도사리고 있으니까.
이번과 같은 운과 도움을, 언제까지 기대할 수는 없으리라.
오롯이 자신의 능력만으로 그런 괴물들과 맞서야 할 순간이 분명히 찾아오겠지.
'끝까지 해낼 수 있을까? 이 망캐로?'
이안은 다시 한번 실소했다.
의미 없는 자문이었다. 죽고 싶지 않다면, 해내야만 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어떻게든.
이안은 궤짝에서 묵직한 돈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주머니의 무게가, 당분간 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리라는 걸 확인시켜주고 있었다.
주머니를 가볍게 던졌다가 받은 그는, 그대로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로브를 갑옷 위에 억지로 뒤집어썼다.
로브에 달린 두건까지 깊이 눌러쓴 그는, 더는 미적거리지 않고 몸을 돌렸다.
돌아갈 시간이었다.
***
끼익-
설산 두꺼비 여관의 문이 열렸다.
낮부터 적당히 북적이던 장내가, 몇 초 지나지 않아 조용해졌다.
"...."
안으로 들어선 이안이, 눌러쓰고 있던 두건을 벗었기 때문이다.
용병들은 물론, 심지어 여급마저도 시간이 멈춘 것처럼 이안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적막은 길지 않았다.
"대장…? 정말 대장이시오…?"
입에 머금은 술을 질질 흘리던 트루드가 이윽고 내뱉은 것이다.
개 더럽네 진짜.
미간을 찌푸린 이안이 대답했다.
"이제 대장은 아니지. 의뢰는 끝났으니까."
"루 솔라 맙소사… 북부의 초인이시여…."
탄식과 함께, 트루드는 물론 장내의 용병들이 하나둘씩 의자 아래로 내려갔다.
이안의 미간이 더 구겨졌다.
또 시작이군.
"동작 그만. 지금부터 내 앞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놈들은, 평생 무릎으로 걸어 다니고 싶다는 뜻으로 알 거다."
#124화
"...!"
엉거주춤 자세를 낮추던 용병들이 그대로 굳어졌다.
이안은 하나둘씩 다시 의자에 앉기 시작한 그들 사이를 지나쳐, 트루드의 건너편에 걸터앉았다.
"샬롯과 테사는, 위에 있나?"
"어… 그게… 우리가 돌아왔을 땐, 이미 여기가 아니라 야인들과 지내고 있었소. 둘이 외곽의 집 한 채를 통째로 쓴다던데."
트루드가 더듬대며 말했다. 이안이 자신의 앞에 있다는 게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외곽 지역?"
"이주민이나 빈민들이 많이 머무는 골목이 있소. 뭐, 그래도 샬롯 그 양반은 하루 한 번은 들러서 식사를 하고 가긴 했는데…. 그러고 보니, 벌써 못 본지 며칠은 됐군."
"...?"
술을 마시던 이안의 미간이 꿈틀댔다.
잔을 내려 놓은 그가 트루드를 마주 보았다.
"자세히."
"대장… 아니, 대전사… 아니, 어… 그냥 대장이라 하겠소. 도저히 형씨라고는 못 부르겠군."
이안의 잔에 떨리는 손으로 술을 따르며, 트루드가 말을 이었다.
"대장이 실려 온 뒤로, 둘 다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였소. 야인들과 우르르 몰려다녔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 같았지. 대장이 기적적으로 회복 중이란 걸 알고 나서야 안심한 얼굴들이 되더군. 야인들이 떠난 날, 샬롯이 여길 들렀었소. 술을 마시며 그랬지. 대장이 죽을 리 없다고. 알고 있었다고."
"그리고?"
"생각해보니 그게 마지막이오. 그날 이후론 본 기억이 없군. 요 며칠간 샬롯 본 놈 있냐?"
트루드가 소리쳤다. 이안의 시선을 받은 용병들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보니 코빼기도 안 보인다거나, 눈에 안 띌 리가 없는데 이상하다는 식의 대화가 간간히 오갔다.
"...."
이윽고 이안이 다시 트루드를 돌아보았다.
그의 가라앉은 눈을 마주 본 트루드가, 황급히 술을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그 집이 어딘지 알고 있는데, 모셔다 드리면 되겠소?"
술을 단숨에 털어넣은 이안이 일어섰다.
"당장."
***
트루드가 골목을 성큼성큼 나아갔다.
점점 외곽 성벽이 가까워졌다.
뒤따르는 이안의 눈치를 살피던 그가 문득 내뱉었다.
"여긴 볕도 잘 안 들고 가장 살기 불편한 곳이오. 그래서 그냥 여관으로 돌아오라고도 전했었소. 물론 거절당했지만. 지금도 이유를 모르겠소. 굳이 편하고 따듯한 곳을 놔두고 왜 여길 고집했는지."
그 녀석들에겐 여기가 오히려 더 안락했을 테니까.
속으로만 읊조리며, 이안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예감은, 거의 틀리는 법이 없었다.
'테사가 배신했나? 아니면 또 다른 심판자…? 서로 싸웠을 수도 있겠지.'
어느 쪽이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가 피떡이 된 채로 교회에 실려간 지, 일주일이 넘게 지났으니까.
'아무리 회복 중이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멀쩡하리란 생각은 하지 못하는 게 오히려 당연하지.'
그는 테사이아와 샬롯을 힘으로 억눌러 왔다.
물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둘이 가까워지도록 유도하긴 했지만.
그가 약해졌다 여긴다면 언제든 균열이 일어날 수 있는 균형이었다. 그리고 그건 루 사드의 뱀파이어들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그가 약해지거나 사라진다면, 심판자를 보내지 않을 이유 역시 사라지는 셈이었으니까.
"여기요. 다 왔소."
트루드가 멈춰 섰다.
낡아빠진 돌집 앞이었다.
천으로 가린, 깨진 창문.
끼이-
문은 잠겨 있지도 않았다.
어둑어둑한 장내로 들어선 순간, 이안은 자신의 예감이 현실이 되었음을 확신했다.
엉망진창이 된 내부. 옅은 피냄새와 누린내.
그건 상처 입고 궁지에 몰린 짐승에게서가 날 법한 냄새였다.
어둠 너머에서 주황색 눈동자가 살의를 머금고 번뜩였다.
이안이 두건을 벗었다.
"이젠 냄새도 못 맡나?"
뾰족하게 솟아 있던 수인의 동공이 확장됐다.
"이안…?!"
"그래. 나다."
"무사히… 돌아왔구나…!"
얼어붙은 샬롯을 가만히 응시하던 이안이, 이윽고 내뱉었다.
"부상 당했군."
"이건… 나는… 아니, 이건 전부 나 때문이다…."
샬롯의 안광이 목소리만큼이나 휘청댔다. 이안은 성큼성큼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아니, 시벌, 이게 뭔…?!"
엉망이 된 장내를 그제야 눈에 담은 트루드가 입을 벌렸다. 침상에 걸터 앉으며, 이안이 말했다.
"가서 가장 독한 술과 붕대, 먹을 걸 챙겨 와라. 식탁이랑 의자도."
"아, 알겠소…!"
트루드가 재빨리 몸을 돌렸다.
그 사이 이안은, 몰라보게 수척해진 수인을 마주 보았다.
샬롯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이안, 이건…."
"네 상처부터 보면서 얘기하지."
말을 자른 이안이 장갑을 벗었다.
샬롯이 뒤로 몸을 기댔다. 이안은 침대 주위로 대충 벗어 놓은 장비들을 슬쩍 훑어 보았다.
싸움이 있었던 건 분명했다.
옆구리에 엉망으로 감긴 붕대를 풀면서, 이안이 물었다.
"테사가 이런 건가?"
"…그래."
이안은 드러난 환부를 바라보았다. 할퀸 흔적들 사이, 옆구리를 깊이 찌른 흉터가 선명했다.
다행히 아물고 있었다. 썩거나 감염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술은 필요 없겠군.
생각하는 사이, 샬롯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먼저 그 녀석을 죽이려 들었으니까."
"처음부터."
이안이 샬롯을 올려다 보았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처음부터 말해. 야인들이 돌아간 직후인가?"
"…그래. 술을 마시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샬롯이 마른 혀로 입술을 훑고는 말을 이었다.
"테사보다 일찍 도착해야 했지. 그 녀석은 이틀을 굶어서, 근처로 먹을 걸 잡으러 갔었다. 나도 식사를 거의 하지 않아서, 각자 배를 채우고 모이기로 했다. 그때 골목 너머에서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붉은 눈이 보이더군. 처음에는 테사인 줄 알았다."
"…심판자였군."
"그 뒤로는 기억이 없다. 정신을 차리니 여기더군. 벽에 박힌 내 칼과, 우는 테사가 눈앞에 있었다. 그 녀석이 내 옆구리를 찔렀고. 그 덕분에 정신이 든 거야. 그러니까 나는…."
스스로에게 분노한 듯 낮게 그르렁댄 샬롯이, 이안의 시선을 피하며 내뱉었다.
"그 심판자 년들에게 홀렸던 거다. 그래서 내 손으로 그것들을 집에 들이고, 테사를 붙잡기 위한 함정을 팠던 거야."
아공간에서 봉인함을 꺼낸 이안이 붕대를 들었다. 샬롯의 허리에 붕대를 감으면서, 그의 시선이 장내를 훑었다. 부서진 식탁과 의자. 박살 난 가재도구들. 바닥에 떨어진 송곳니 검과 한쪽 벽면에 박힌 전투 도끼.
"심판자가 하나가 아니었군."
"둘이었다. 쌍둥이였지…."
샬롯의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 주황색 눈동자에 살의가 아른댔다.
"그것들은 나와 테사가 싸우는 걸 구경하고 있었다. 집안을 검게 물들인 채로. 외부와 공간을 차단한 거였겠지. 그것들의 속삭임이 들렸다. 계속 우릴 지켜보며 기다린 것 같더군. 우리가 둘만 남는, 그래서 서로를 죽이게 할 절호의 기회를."
"...."
이안은 딱히 놀라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가 본 뱀파이어들은, 괴벽이라 불릴만한 이상한 부분을 적어도 하나씩은 가지고 있었으니까.
아스콜드는 강함에 대한 자신만의 괴상한 미학이 있었고, 프레야는 사랑에 대해 그랬다. 어쩌면 테사이아의 생존에 대한 집착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내 눈을 본 테사가 미소 짓더군. 그리고는 한쪽 눈을 깜빡였다. 다음 순간 그 녀석이 송곳니를 드러냈다. 나는… 기꺼이 목을 내주었지."
이안은 그제야 살롯의 목덜미를 바라보았다.
털 사이로 피라냐에게 물린 듯한 흔적이 깊이 남아 있었다.
"그 녀석은 내 피를 힘껏 빨았다. 하지만 거기 취하지는 않은 게 분명했다. 내가 정신을 잃기 직전에 멈췄으니까. 내 귓가에 누워 있으라 속삭이더군. 그리고는 날 집어 던졌다. 나는… 그 녀석이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았으니까."
으득, 샬롯의 입에서 이 가는 소리가 번졌다.
"그 미친년들이 깔깔대는 소리가 내 의식을 붙잡더군. 그것들은 역시 동료끼리 서로 죽이는 걸 보는 게 가장 즐겁다며 속삭였지. 그러면서 내 피는 맛있었냐고 물었다. 테사는 코웃음을 치더군. 수인의 피는 정말 맛대가리 없다고 말이야. 그러면서 그 녀석들에게 고맙다고 했다. 언젠가는 죽이고 싶었는데, 그럴 수 있게 만들어 줘서 고맙다고."
꾸욱, 샬롯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손톱이 튀어나오면서 손아귀를 피로 적셨다.
이안이 혀를 차며 손아귀를 벌리는 사이, 샬롯이 작은 탄식을 흘리고는 내뱉었다.
"그리고는 어둠을 찢어 버리더군. 아마 매를 만들어 낸 것 같았다. 그리고 그사이를 뚫고 달아났지. 쌍둥이들은 당황했는지 그 뒤를 황급히 따라가더군. …그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나는 정신을 잃었고, 눈을 뜨니 한낮이었지."
"그 뒤로,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고?"
"…그랬다. 테사도, 그 미친년들도."
"...."
샬롯의 손아귀에 붕대를 감으며, 이안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들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건 딱히 놀랍지 않았다. 그를 놀라게 한 건, 테사이아의 선택이었다.
'살기 위해선 뭐든 하려던 녀석이….'
샬롯을 살리기 위해 몸을 던진 거나 다름없지 않은가.
물론 이유까지 고결한 건 아닐지도 몰랐다.
샬롯이 살아남아 그에게 말을 전하기를, 그래서 자신을 구하러 오기를 바랐을 지도.
어쩌면 그저, 샬롯이 죽으면 자신도 죽는다는 생각이 무의식에 박혀 있었을 뿐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결과가 바뀌는 건 아니었다.
"내 잘못이다, 이안. 나는… 아무런 쓸모도 없는… 쓰레기 같은…."
"자책이나 할 때는 아닌 것 같은데."
이안이 샬롯을 가만히 마주 보며 덧붙였다.
"테사를 되찾으러 가야지."
휘청대던 샬롯의 눈빛이, 이윽고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물론이다."
문이 다시 열린 건 그때였다.
"어머, 이게 다 뭐예요? 개판이네."
음식이 가득 담긴 쟁반을 든 여급이 미간을 찌푸린 채 장내로 들어섰다. 그 뒤로 술병과 붕대를 든 트루드와, 식탁과 의자를 든 용병 몇이 따라 들어왔다.
"술집보다 더 고약한 냄새가 나는군."
"지금 그게 중요하냐? 대충 치우고 자리나 만들어."
이안의 눈치를 슬쩍 살핀 트루드가 재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신경 쓰지 않고 샬롯을 바라보던 이안이, 이윽고 내뱉었다.
"일이 일어난 지 며칠이나 됐지?"
"…이틀. 어쩌면 사흘."
탄식하듯 내뱉은 샬롯이 이안을 마주보았다.
"어쩌면 그 녀석은 지금쯤…."
"벌써 죽진 않았을 거다."
이안이 덤덤하게 말을 잘랐다.
"그것들은 살아 있는 테사를 필요로 하니까. 아마 꽤 오래 살려둘 거야. 녀석도 알고 있었겠지. 그래서 너부터 살린 걸 거다. 아마도."
"...."
샬롯이 인상을 찌푸렸다. 여러 감정이 휘몰아치는 눈빛.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며, 이안이 덧붙였다.
"죽었다 해도 달라질 건 없어. 그때는 복수해 줘야지."
"...."
샬롯이 굳어졌다.
이윽고 이안을 다시 마주 본 그녀가, 씹어 뱉었다.
"그래. 반드시."
"그 전에, 그 심판자 년들에게도 당한 걸 되갚아 주고."
"부디. 내게 먼저 기회를 주면 좋겠군."
"또 꼭두각시가 되려고?"
"두 번은 당하지 않을 것이다. 머릿속으로 수십 번을 곱씹고, 또 곱씹었어. 그 미친년들만큼은… 내 손으로 찢어 놓기 위해서."
무슨 뾰족한 수가 있는 건진 모르겠다만.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일어섰다.
"지금은 먼저 일어나라. 복수도 나아야 할 수 있는 거니까."
"...."
샬롯이 군말 없이 일어섰다. 용병들이 눈치를 살피는 가운데, 식탁에 앉은 그녀가 말없이 음식을 집어 먹기 시작했다.
"…며칠은 굶으셨나 보네요."
샬롯의 잔에 물을 따른 여급이 중얼댔다. 이안이 그녀를 돌아보며 돈 주머니를 꺼냈다.
"가장 큰 방을 부탁하지. 그리고 돌아가서 바로 목욕물을 준비해 줘. 이 녀석 꼴이, 너무 엉망진창이니까."
"돈은 안 주셔도 돼요."
산뜻하게 대답한 여급이 몸을 돌렸다.
"대신, 대장님이 머무셨던 방에 용살자의 방이라는 이름을 붙일 거니까. 알아 두세요."
"...."
이안이 미간을 좁히는 사이, 그녀가 대답도 듣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숨소리도 내지 않고 서 있던 트루드와 용병들이, 그의 시선에 눈을 깜빡였다.
이안이 고개를 까딱였다.
"샬롯의 물건을 전부 챙겨라. 잘 닦아서 여관 방에 넣어 놔. 부서진 게 있으면, 바로 수리를 맡기고."
"알겠소…!"
용병들이 불에 덴 것처럼 움직였다.
"아니, 뭐가 이렇게 무거워…?"
"똑바로 들기나 해, 인마. 하나라도 잃어 버리면, 알지?"
곳곳에 널브러진 샬롯의 물건들을 집어 든 용병들이 밖으로 나갔다.
비로소 장내가 조용해졌다.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채 꾸역꾸역 음식을 씹어 삼키는 샬롯을, 이안은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가 자리를 너무 오래 비웠군.'
방심할 틈이 없는, 개 같은 암흑시대 같으니.
불평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샬롯의 잘못이나 그녀를 탓할 일도 아니었다. 그저, 일어날 일이 어떤 식으로든 일어났을 뿐.
턱.
이윽고 샬롯의 건너편에 앉은 이안이, 술병을 들어 자신의 앞에 내려놨다. 잔 두 개에 술을 나눠 따른 그가, 잔 하나를 샬롯의 앞으로 밀었다.
그대로 독주를 들이킨 이안이,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하는 샬롯을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듣고 싶지 않나?"
"...?"
"내가 무슨 일들을 겪었는지."
"...!"
샬롯의 눈이 커졌다. 이윽고 그녀가 슬며시 시선을 피하며 웅얼댔다.
"듣고… 싶다."
"좋아. 먹으면서 들어라."
빈 잔을 채우며, 이안이 심드렁하게 덧붙였다.
"나도 처음부터 이야기 해주지."
"...."
#125화
설산 두꺼비 여관.
주점으로 내려온 이안은 비로소 한 잔 들이켜며 숨을 돌렸다.
문이 열리고 트루드와 용병들이 들어온 건 바로 그 직후였다.
거참 부지런들 하군.
입맛을 다신 그가 두 번째 잔을 따르는 사이, 트루드가 그의 테이블로 다가왔다.
"수인 양반은, 잠들었소?"
술잔을 입에 가져가며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목욕을 끝낸 샬롯은 기절하듯 잠들었다. 아무리 강한 생명력과 회복력을 가진 수인이라도, 그 돼지우리 같은 집에서 홀로 피 말리는 시간을 보낸 여파가 없을 수는 없었다.
이안이 보기엔 상처가 덧나지 않은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마차는?"
이안이 물었다. 앞에 앉은 트루드가 미소 지었다.
"마구 옆에 가져다 놨소. 마구간지기한테도 몇 푼 찔러 줬으니, 언제 가셔도 바로 준비해 줄 거요."
***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루카스의 일 처리는 정말 빨랐다. 그가 샬롯과 함께 있는 사이, 여관 앞으로 마차를 보낸 것이다.
대행자를 자청하고 나선 건 트루드를 비롯한 용병들이었다.
"그리고 외곽을 한 바퀴 돌면서 조사도 해 봤소. 대부분 소란이 있었다는 걸 전혀 모르더군. 집에 마법적인 뭔가가 있었던 모양이오. 대신 커다란 은빛 새와 커다란 박쥐 두 마리가 성벽 너머로 날아가는 걸 본 자는 하나 있었소. 이틀 전 새벽이라던데. 술김에 헛걸 본 줄 알았다더군."
부탁하지도 않은 일까지 해 왔군.
생각하며, 이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다."
테사이아가 도시 밖으로 나갔으리란 건 진작 예상한 부분이었다.
도망은 어떤 의미로는 그녀의 전문 분야였다.
도시에서 소란을 피우는 건 자충수일 뿐이란 걸 모를 리 없었다.
어쩌면 아직도 붙잡히지 않고 도망 다니는 중일지도.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그렇다 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오히려 그가 도시를 떠나는 게, 그녀가 냄새를 맡고 따라오기에는 더 편하리라.
"…그 은빛 새가, 테사이아가 맞소?"
"...."
이어진 물음에, 이안이 트루드를 빤히 바라보았다.
트루드가 황급히 미소 지었다.
"그저 걱정되어서 여쭙는 것이오.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그런 것 같아서."
"그 녀석을 쫓는 자들이 있다. 루 사드에 도사린 마족들이지."
"마, 마족…?"
트루드의 눈이 커졌다. 주위 용병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숨을 멈춘 채 서로를 돌아보았다.
더 묻지 않을 줄 알았건만.
침을 삼킨 트루드가 목소리를 낮추며 덧붙였다.
"그럼, 마족들에게 납치된 거요?"
"아마도."
"도대체 왜…. 혹시, 루 사드로 가시려던 것도 그래서였소? 마족들을 쳐 죽이시려고?"
"그런 셈이지."
"허… 역시…."
용병들 사이에 탄식과 감탄이 번졌다. 이안을 바라보는 눈빛들이 부담스럽게 일렁였다.
이들은 전부 벨리움 요새에서 살아 돌아온 자들이었다.
몇몇은 이안의 전투를 목격하기까지 했다. 그를 대륙의 어둠과 싸우는 구원자쯤으로 여기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이안이 짧게 혀를 찼다.
"그딴 눈 하지 마라. 징그러우니까."
재빨리 시선을 돌리며 트루드가 말했다.
"그럼 어서 따라가셔야겠소. 이대로 도시에 남아 계시다간 최소한 한 달은 꼼짝없이 발이 묶이실 거요. 듣자 하니 대공께서도 대장을 만나고 싶어 하시고, 화로의 사원과 제국의 대교회에서도 사람을 보냈다던데."
대공은 그렇다 치고.
"화로의 사원에, 대교회라고?"
"소문이 돌고 있소. 대장의 위업을 칭송하고, 뭐, 교단의 성자나 사도로 모시려는 거 아니겠소?"
진짜 더럽게 유명해졌나 보군.
이안은 짧게 헛웃음을 지었다.
루시와 미구엘이 절로 떠올랐다.
다시 만난다면 분명 반갑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그저 산뜻한 재회만으로 끝나지 않을 테니까.
어차피 무사히 살아만 있다면, 언젠가 한 번쯤은 다시 만날 날이 있을 터였다.
"…귀찮아지기 전에 떠나야겠군."
"입단속은 염려 마시오. 우린 용살자의 전사들이잖소. 그런 주제에 용살자의 발목을 잡을 순 없지."
"그놈의 용살자는…."
이안의 헛웃음이 짙어졌다.
트루드를 비롯해 이안을 따라왔던 용병들은 용살자의 전사들이라는 이름의 용병단을 결성했다.
현재로선 트라벨가의 유일한 용병단인 셈이었다.
벨리움에서 함께 싸운 야인 전사들과 방위군과도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데다, 부상으로 남아 있던 용병들까지 단숨에 흡수하면서 입지도 탄탄하게 다졌다.
새로운 북부의 거대 용병단이 탄생한 것이다.
트루드가 황급히 말했다.
"대장을 따라다녔다간 목숨이 열 개라도 부족할 것 같아서 포기했지만. 어쨌든 대장의 앞길에 걸림돌이 될 일은 없을 거요. 우리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기꺼이 따를 거고. 이건 언제 어디서도 변치 않을 사실이오. 우리가 용살자의 전사들인 이상."
말은 잘하는군.
이안은 그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술잔을 들었다. 용병들의 의리를 믿는 건 사제에게 헌신을 기대하거나 주문쟁이에게서 신뢰를 찾는 것만큼이나 무의미했다.
"그거야 너희 자유다만. 그 이름을 걸고 도적질이나 하고 다니다 걸리면, 용살자가 직접 멱을 따러 올 거란 사실만 알아 둬라."
"우릴 뭐로 보시고… 하하. 그보다, 라 드린과 벨 론데를 거쳐서 내려가실 거요?"
애써 웃음 지은 트루드가 재빨리 말을 돌렸다.
이안은 어깨만 까딱였다.
본 계획은 안전하게 제국령을 통해 루 사드로 향하는 거였다.
상당히 돌아가게 되겠지만, 루 사드에 발을 들이기 전까진 변방의 전쟁과 엮이는 일 없이 이동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테사이아가 사라진 지금은, 북부에 발을 들일 때 그랬듯 최단 거리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트라벨가에서는 라 드린의 외곽과 벨 론데를 질러 남하하는 게 가장 빠른 길이었다.
"여기도 혼란스러워서 전처럼 정보가 빠르진 않지만, 라 드린은 지금 난장판이라고 들었소. 벨 론데와 가장 먼저 치고받은 나라잖소. 북부나 제국령으로 피난 온 자들의 말에 따르면 망조가 단단히 들었다고 하니까, 알아 두시오. 사방으로 싸우고 있는 벨 론데는, 더 말씀드릴 것도 없고."
"정보 고맙군. 참고하지."
"그럼… 쉬시오. 생각하실 것도 많아 보이는데, 그만 방해하겠소."
꾸벅 인사한 트루드와 용병들이 일어섰다.
"조용히들 마시다 올라가라. 대장 신경 거슬리시지 않게. 소리 크게 내다 걸리면, 목젖 뽑힐 줄 알아."
장내의 다른 용병들을 돌아보며 내뱉은 트루드가 성큼성큼 계단으로 향했다. 가뜩이나 조용하던 주점이 더 고요해졌다.
너희가 제일 시끄러웠는데.
피식댄 이안이 술잔을 들었다.
트루드의 말대로, 생각할 게 많은 건 사실이었으니까.
어느덧 늦은 새벽이었다.
텅 빈 주점. 새 술병을 꺼내다 준 여급까지 자러 간 시간에도, 이안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나비 효과라는 건 정말 예상할 수가 없단 말이지….'
술잔을 입에 가져가며, 그는 이미 몇 번이나 했던 생각을 다시 한번 곱씹었다.
흡혈 여제는 기다리겠다 했지만, 이안은 그 말을 그다지 믿지 않았었다.
물론 그의 방문을 대비하겠지만, 테사를 탈취하려는 시도까지 포기하진 않을 수도 있다 여긴 것이다.
그래서 가능하면 그녀를 인파 근처에 두었고, 자신과도 멀리 떨어뜨리지 않았었다.
벨리움으로 떠나면서 둘을 야인들에게 보낸 것도, 그저 야인들을 지키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때 게임이었던 이 세계에는, 그가 어떻게 해도 끝내 막을 수 없는 종류의 흐름이 존재했다.
작게는 메브의 영락이나, 크게는 변방의 전쟁이나 북부 망자 군단의 침공처럼. 운명이나 필연이라 표현해도 무방한 사건들.
'애초에 호위 퀘스트 한 번 뜬 적 없던 녀석이니까. 내가 흐름을 억지로 막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지. 빈틈이 생기자마자 쓸려 내려간 거고.'
이안은 가볍게 고개를 털었다.
이제 와선 아무래도 상관없는 추측들이었다.
이번에도 중요한 건 결국 대응이었다.
메브와 루시가 끝내 살았듯. 그가 용이라는 거대한 변수를 마주하고도 살아남았듯이.
큰 흐름이라 할지라도 결과까지 정해져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어쩌면 이번에도 테사이아를 죽이지 않고 퀘스트를 끝낼 수 있는 루트가 존재할지도 몰랐다.
적어도 지금의 그녀가 진혈의 여제로 거듭나진 않을 테니, 가능성은 충분했다.
테사이아가 주던 퀘스트를 현재의 진혈의 여제가 주게 된다면….
또 한 번 같은 가정에 다다른 이안의 입가에, 문득 실소가 스쳤다.
'자연스럽게 그 녀석을 살릴 생각만 하고 있군….'
이안이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이런 결론은 그저 희망 사항, 얄팍한 자기기만에 불과했다.
녀석을 죽여야 하는 상황이 오게 될 확률이, 사실 훨씬 높았다.
녀석은 게임에 존재하던 보스이자 마족이니까.
테사이아가 먼저 죽게 되리란 가정은 굳이 하지 않았다.
그때는 복수만이 남을 테니까. 그건 전혀 거리낄 게 없었다.
'…어떤 상황이 일어나더라도, 받아들일 수밖에.'
항상 그랬듯이.
이번에는 조금 다른 결론을 내리며, 이안은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독한 열기.
곧바로 술병을 든 이안은, 빈 병을 들었음을 깨닫고 옆의 다른 술병을 들었다.
이것도 어느새 반이나 비어 있었다.
"...?"
잠깐만.
잔을 채우던 그의 미간이 순간 꿈틀댔다.
내내 느끼지 못하던 이질감을 문득 깨달은 것이다.
그의 시선이 술잔에 고정됐다.
"설마."
읊조린 그가, 방금 채운 잔을 다시 한번 단숨에 들이켰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한 잔을 더 따라 단숨에 들이켠 그가, 비로소 허탈하게 잔을 내려놓았다.
"설마가 아니네…."
그는 본래도 쉽게 취하지 않았고, 취하더라도 판단력이 흐려지지 않았다. 숙취도 없었다.
하지만 어쨌거나, 독한 술을 마시다 보면 적당히 기분 좋은 취기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술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미 이 독한 술을 한 병 반이나 마시고, 거기다 추가로 석 잔을 연거푸 들이켰건만.
잠깐 목이 얼얼하고 살짝 현기증이 일어난 게 여파의 전부였다. 그나마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본래도 높던 정신력과 내성에, 이번에 새로 올린 체력 수치와 태초의 생명력 스킬까지 어떤 식으로든 추가적인 영향을 끼치는 게 틀림 없었다.
'알코올을 흡수하자마자 엄청난 속도로 분해하거나… 아예 흡수하지 않거나… 시발, 알 게 뭐야.'
어쨌건, 더는 취할 수 없게 됐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이 개 같은 세계를 버티게 해 주는 몇 없는 즐거움이었건만.
"하…."
탄식하면서도, 그는 잔에 다시 술을 따랐다. 씁쓸함을 잊기 위한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앞으로 능력치를 떨어뜨리는 저주받은 물건이라도 찾아봐야….'
계단에서 발소리가 울려 퍼진 건, 그가 끝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던 그때였다.
"…깨어 있었구나. 이안."
샬롯이었다. 그녀는 장비까지 전부 갖춘 채로 계단을 내려왔다.
한결 안정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안이, 이내 그녀의 목덜미를 바라보았다.
"그거, 테사의 안대 같은데."
"맞다."
머쓱하게 대답하며, 샬롯이 그의 건너편에 앉았다.
그렇게 못 잡아먹어 안달이더니.
이안이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거참 애틋하군. 그 녀석이 알면 좋아하겠어."
"…그래서가 아니다. 그 미친년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지."
"...?"
물잔에 술을 따르며, 샬롯이 읊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같은 결론이 나오더군. 내가 마법에 걸린 건 그것들과 눈이 마주친 순간이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걸로 충분했던 거야. 그러니 아예 눈이 마주치지 않게 가린다면… 그것들의 꼭두각시가 되는 건 피할 수 있겠지."
"뭐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소리라고 일축하려던 이안은, 이내 미간을 좁혔다.
게임 속 진혈의 여제, 테사이아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마지막 페이즈에는, 마주 본 캐릭터를 정신 지배 상태에 빠뜨리던 랜덤 패턴이 분명히 존재했다.
최면술은 모든 뱀파이어가 가진 기술이라 특이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그 쌍둥이들의 진혈을 흡수해서 더 강화했던 거라면….'
고개를 주억거리며, 이안이 내뱉었다.
"하지만 눈을 가린 채로 상대할 만큼 만만한 것들이 아닐 텐데."
"쉽진 않겠지. 하지만 나도 그 녀석 못지않게 예민한 감각을 타고났다. 숙련된다면 눈을 뜬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야. 그렇게… 만들 것이다."
샬롯의 목소리는 아주 차분했다.
결코 허언이 아니라는 듯이.
…말린다고 될 게 아니군.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물었다.
"몸은?"
"아주 가볍다."
"다행이군."
"…당장 움직일 수 있을 정도야."
"...."
"너만 괜찮다면."
이안은 슬쩍 미간을 좁히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샬롯은 흔들림 없는 눈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당장 움직이고 싶단 거지, 이거.
"잊었나 본데."
이윽고 피식 웃은 이안이, 술잔을 내려놓았다.
"난 일주일을 내리 잤다."
***
하늘이 어슴푸레하게 밝아지고 있었다.
다각, 다각. 발굽 소리가 대로의 고요를 깨뜨렸다.
굳게 닫힌 관문의 망루에 느슨하게 기대 있던 관문 대장이, 다가오는 마차를 눈에 담으며 피식댔다.
"거참, 성격 한번 급하시군."
읊조린 그가 병사들에게 문을 열라는 턱짓을 보냈다.
벽을 따라 이어진 계단을 내려간 그가 마차를 눈에 담았다.
마부석에 앉은 샬롯이 그를 알아본 듯 턱을 까딱였다.
병사들이 관문을 여는 사이, 관문 대장이 마차 옆으로 다가갔다.
"이렇게 바로 떠나시오? 적어도 하루는 더 쉬실 줄 알았는데."
이안이 피식대며 그를 돌아보았다.
"하루 더 쉬려다가 한 달을 시달릴 것 같아서 말이오."
"누가 묻거든 용살자의 부탁으로 문을 열었다고 하겠소. 그 외엔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그거면 되겠소?"
이어진 물음에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칼을 들고 협박했다고 해도 상관없소. 어차피 떠나는데, 다 떠넘기시오."
관문 대장의 미소가 짙어졌다.
"알아서 하겠소. 부디 어디서든 보중하시오. 북부의 용살자여."
"그쪽도. 그간 고마웠소."
문이 활짝 열렸다.
깍듯하게 인사한 관문 대장이 옆으로 비켜섰다.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이안을 마지막으로, 마차가 멀어졌다.
문이 다시 닫히는 것까지 확인한 관문 대장이 다시 망루에 올랐다.
관도를 나아가는 마차의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하던 그가, 이윽고 읊조렸다.
"매번, 정말 미련 없이 가시는군."
그가 이안의 예감이 정확했음을 알게 된 건, 바로 그날 오후였다.
그를 찾는 한 무리의 야인 전사들이 도시에 도착했으니까.
용살자가 사라졌다는 사실은, 이튿날 타오르는 여신의 사제들이 도착하고서야 비로소 알려졌다.
울라프 대공은 며칠 뒤 국경 초소에서 날아든 급보를 받고서야 그의 행방을 알게 됐다.
이안 호프는 북부를 떠났다.
#126화
어둠 한복판. 검붉은 안광이 소리 없이 번졌다. 뒤이어 주위가 은은하게 밝아졌다.
거대한 동공의 가장자리를 따라 검붉은 광원이 삽시에 번졌다.
석주 하나 존재하지 않는 드넓은 내부 곳곳에, 작은 동산처럼 쌓인 뼈 언덕들이 드러났다.
출입구조차 존재하지 않는 이 지하 동공은, 용의 무덤이었다.
그러나 이곳의 모든 용이 영원한 안식에 든 것은 아니었다. 반대로 산채로 영원한 고통 속에 남겨진 존재도 있었다.
"...."
깎아지른 절벽처럼 솟은 벽면. 그 한복판에서 피어오른 안광이, 숨소리와 함께 선명해졌다. 검붉은 마력이 용의 전신을 비췄다.
가슴 한복판과 복부를 꿰뚫고 벽면에 박힌 거대한 금속 말뚝. 활짝 펼친 양 날개에도 각각 두 개씩의 말뚝이 깊숙이 박혀 있었다.
벽에서 이어진 굵은 금속 고리가 목과 꼬리조차 제대로 움직일 수 없게 구속했다.
육각형을 그리는 말뚝과 고리 표면에 빼곡하게 새겨진 진언이, 검붉은 마력을 머금고 일렁였다.
그는 산채로 유폐된 죄인이자, 동공을 지키는 무덤 지기였다.
용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푸스스, 머리에 쌓여 있던 부스러기가 흘러내렸다. 용의 시선이 저 먼 공동의 끝, 황금빛을 머금고 빛나는 거대한 진언으로 향했다.
그 한복판에서, 하얀 로브를 걸친 인간이 홀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검붉은 안광이 설핏 가늘어졌다.
-오랜만이구나….
굵고 낮은 사념이 번졌다. 동시에 아주 부드럽기도 했다. 인간이 머리에 쓴 두건을 벗었다.
빛바랜 금발. 어둠 속에서도 스스로 빛을 발하는 듯한 새하얀 얼굴이 드러났다.
용의 시선을 정확히 마주하며, 아르케아스가 옅게 미소지었다.
"그래. 오랜만이로구나."
속삭이는 듯한 육성. 하지만 그들에겐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한동안 전혀 찾지 않더니…. 드디어 외로워지기라도 한 모양이지. 그렇다 해도 반갑구나…. 빛바랜 황금이여….
"나 역시. 그러나 오늘은… 너를 만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
아르케아스가 걸음을 옮겼다. 로브 자락 아래로 금빛 마력이 번지더니, 그의 몸이 날듯이 동공을 가로질렀다.
이윽고 그가 텅 빈 공간에 멈춰선 그가 손을 내저었다.
허공에 거대한 황금빛 진언이 피어올랐다. 그 한복판으로 뼈 무더기가 소리 없이 쏟아졌다.
쏟아진 뼈는 흩어지거나 허물어지는 일 없이, 작은 동산처럼 자리를 잡았다.
주위의 다른 뼈 무덤이 그렇듯.
사념이 탄식했다.
-아직 대륙에 남은 동족이 있었던가…. 그래… 이 잔재는… 기억나는군…. 타후므리트인가….
"광기에 눈멀었던 푸른 용이, 비로소 안식을 찾았노라…."
아르케아스가 읊조렸다.
-그래, 그리 된 것이로군… 다시 우리 둘만 남았구나… 빛바랜 황금이여….
용의 낮은 웃음소리가 번졌다.
-타후므리트가 순순히 안식에 들지는 않았던 모양이지…. 네 고통과 피로가 느껴진다, 아르케아스…. 하지만 이상한 일이군… 그럼에도 네 기분이 그리 나빠 보이지는 않아….
"...."
아르케아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건조한 눈으로, 영겁의 형벌에 처해진 동족을 바라보았을 뿐.
사념이 이어졌다.
-어째서지? 오랜만에 본모습으로 바깥세상을 거닐었기 때문인가…. 아니면 무자비하게 동족의 목숨을 빼앗던 옛 기억에 다시 피가 끓어서인가. 그도 아니라면… 눈에 든 새로운 필멸자라도 나타난 것이냐…?
묵묵히 듣던 아르케아스의 입가에, 비로소 흐릿한 미소가 번졌다.
"네 통찰력이 여전함에 기쁨을 감출 수 없구나. 라크마흐, 대륙에 남은 내 마지막 동족이여…."
비꼬는 것인지 진심인지 알 수 없는 부드러운 말투로 내뱉은 그가, 용을 돌아보았다.
"질문이 곧 해답이니… 굳이 더 답할 필요는 없겠구나."
그의 로브자락을 타고 황금빛이 번졌다. 아르케아스가 다시 동공을 가로질러 멀어졌다.
라크마흐가 낮게 웃음 지었다.
-너는 여전히 결코 보답받을 수 없는 사랑만을 하는구나…. 하지만 그렇기에 언젠가… 너는 끝내… 나를 이해하게 되리라….
아르케아스가 빛을 잃은 진언 위에 올라섰다.
그가 라크마흐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읊조렸다.
"헛된 기대는 품지 말거라. 내 영혼이 광기에 물든다 한들, 신을 참칭하는 일은 없을 것이니."
-큰 사랑은 언젠가 반드시, 그만큼 큰 증오를 낳는 법이니…. 어쩌면 네가 낳을 증오는, 그 누구보다도 거대할지도 모르지….
검붉은 안광이, 사념만큼이나 부드럽게 일렁였다.
-그럼에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다시 볼 수 있길 바라겠다….
진언이 눈부시게 빛났다.
무표정한 아르케아스가 그 너머로 사라졌다.
"...."
흩어지는 빛무리를 응시하는 용의 안광이, 이윽고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새로운 대행자를 찾은 것이로구나… 빛바랜 황금이여….
솨아아-
용의 전신에 마력이 일렁였다.
그럴수록 말뚝과 족쇄에 새겨진 진언이 짙게 빛나며, 그에게 더 큰 고통을 선사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검붉은 마력이 거미줄처럼 벽면 전체로 번졌다.
길고 긴 시간과 바깥세상의 혼돈은, 이 지하 깊숙한 무덤을 감싼 용의 진언에도 작은 균열을 일으켰다.
전체에는 아무런 영향도 끼칠 수 없을 만큼 작디작은 틈이었지만.
한때 역천을 꿈꿨던 고룡은, 끝내 그 너머로 작은 손길을 뻗치는 데에 성공했다.
저 공허의 고대 신들이 그러하듯. 그의 속삭임을 듣고 받아들일 추종자를 기다리면서.
신탁을 내리듯 마력을 발산한 그가, 심장을 파고드는 고통을 즐기듯 웃음 지었다.
-둘 중 하나는… 끝내 또다시, 대행자를 잃는 슬픔을 맛보게 되리라….
공동의 광원이 잦아들었다. 신들의 시선조차 닿지 않는 깊은 지하. 아직도 역천의 꿈을 꾸는 용이, 다시 눈을 감았다.
***
라 드린에 접어든 지 사흘째였다.
날이 따듯해졌다 느끼는 건, 그저 북부의 추위에 익숙해졌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느덧 봄이 오고 있었다.
'전혀 그런 풍경은 아니지만.'
의자에 기대 육포를 우물대던 이안은, 잿빛 하늘과 황량한 언덕을 눈에 담으며 생각했다.
그래도 오늘은 그나마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저 멀리 은은하게 번지는 연기가, 눈에 보이는 비극의 전부였으니까.
망조가 들었으리라던 트루드의 말은 정확했다.
북부로 이어진 길목의 초소는 전부 텅 비어 있었다.
약탈당하고 버려진 마을. 말뚝에 못 박혀 전시되거나 아무렇게나 버려진 시체들. 까마귀와 쥐가 들끓었고, 밤에는 원한을 품고 되살아난 망자들과 청소부를 자처하는 마물들이 들판을 배회했다.
라 드린 왕국은 이안이 기억하는 게임 속 변방의 모습 그대로였다.
'거꾸로 북부부터 거치고 내려왔더니, 이제야 얼추 시기가 비슷해진 거겠지….'
타락자들을 제외한 그 누구도 끝내 승리하지 못한, 혼돈과 파괴, 죽음과 약탈만이 가득한 전쟁.
하지만 그 한구석을 나아가는 그들의 여정은, 뜻밖에도 상당히 평화로웠다.
샬롯은 막상 이동하기 시작하자 서두르거나 조바심을 내지 않았다.
이안이 돌아오고 안정을 찾으면서,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한 게 분명했다.
어쩌면 그저 이안을 믿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라면 반드시 테사를 구해내리라고.
이안은 굳이 그 생각을 바로잡거나,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다 해서 달라질 것도 없었다.
게다가 게임에서도 별 볼 일 없던 변방의 마물은, 설원 지대의 마물도 거침없이 베어 넘기던 수인 전사에게는 짚단이나 다름없었다.
그녀가 아직 완벽한 컨디션을 되찾은 상태가 아님에도 그랬다.
물론, 그건 이안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 인근의 마물들은 솔직히 말해, 몸풀기 상대도 되지 못했다.
'게임에서도 이 동네 잡몹들은 3챕터가 넘어서나 짜증 났었지. 지금은 하수인들 정도나….'
육포를 씹으며 생각하던 이안이, 문득 눈동자를 굴렸다.
마부석의 샬롯이 그를 돌아보고 있었다.
"육포?"
이안이 손에 든 육포를 내밀며 물었다. 선선히 받아들면서도, 샬롯이 고개를 옆으로 까딱였다.
"언덕 너머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이안."
"...?"
"비명과 고함이 들리는군. 싸움이 일어난 것 같은데."
"아, 그래…."
언제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지.
속으로 읊조리며, 이안은 시야가 가려지지 않게 옆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황량하게 이어진 언덕길. 아직 그의 귀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계속 가라. 뭐건, 어차피 지나쳐야 할 길이니까."
"그러지."
덤덤하게 대답한 샬롯이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이안도 언덕 위에 시선을 고정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귀에도 다급한 발굽 소리와 마차 덜컹대는 소리가 희미하게 파고들었다.
곧 언덕 위로 마차 한 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비쩍 마른 말 한 마리가 끄는 낡은 짐 마차였다. 겁에 질린 얼굴의 여자가 마부석에 앉아 있었고, 짐칸에는 검과 방패를 어정쩡하게 든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곧 말 탄 기수 몇이 마차 주위로 순식간에 따라붙었다.
짐 마차의 둘과 달리, 제대로 무장을 갖춘 자들이었다.
"…약탈인가."
샬롯이 나지막이 그르렁댔다.
이안은 놀랍지도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라 드린 왕국은 붕괴되고 있었다. 용병뿐 아니라 병사들도 강도질을 일삼고 있으리라. 거기다 곳곳에 암약한 타락자들이 본격적으로 세력을 키우고 있기까지 할 터였다. 그들에겐 백성 따윈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런 식으로 시작되는 서브 퀘스트도 여럿 있었지.'
"저들을 구하긴 어렵겠군."
생각하는 사이, 샬롯이 덧붙였다.
그들의 마차와 언덕 꼭대기까지는 아직도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전력으로 달려간다 한들,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었으리라.
"그래도 복수 정도는 해 줄 수 있겠지."
마차 지붕 위로 훌쩍 올라가며 이안이 대답했다. 명분 따위를 붙이지 않더라도, 저 강도들이 그들을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아악…!"
그사이, 안간힘을 쓰며 저항하던 남자가 비명을 터뜨렸다. 짐칸에 훌쩍 올라탄 강도의 칼이 그의 어깨를 내리찍은 것이다. 남자가 방패를 떨어뜨리자, 그대로 다가선 강도가 뽑아 든 칼을 가슴에 깊이 박아 넣었다.
"여, 여보-!"
마부석의 여자가 울부짖었다. 남자를 툭 밖으로 던져 버린 강도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가 여자의 머리채를 휘어잡으며 고삐를 당겼다. 짐 마차가 멈췄다.
하지만 이안은 이미 마차를 보고 있지 않았다.
"...."
"...."
말을 탄 채 마차 옆을 따르던 다른 두 놈이, 그들 쪽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곧 고개를 돌려 서로 눈빛을 교환한 놈들이, 안장 옆의 쇠뇌를 집어 들고는 달려오기 시작했다.
'기본에 충실한 놈들이군….'
검을 뽑아 든 이안은 마부석 바로 뒤까지 이동해 자세를 낮췄다.
그가 슬쩍 발을 굴렀다. 두 겹으로 덧댄 나무 지붕은 아주 튼튼했다. 온 힘을 다해 도약하지만 않는다면 무너질 것 같지 않았다.
비로소 그의 눈에 잿빛 마력이 일렁이는 사이. 달려오며 마차를 겨냥하던 놈들이 쇠뇌를 발사했다.
샬롯이 기다렸다는 듯 마차를 옆으로 틀었다. 말을 노리고 날아들던 볼트가 마차 측면에 박혔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 쇠뇌를 다시 안장에 건 놈들이 검을 뽑아 들었다.
"말을 지켜라. 천천히 따라와."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 광경을 지켜보며, 이안이 내뱉었다.
강도들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다각- 다각- 다각-
차분히 기다리던 이안은, 놈들이 마차에 도달하기 전에 먼저 몸을 날렸다.
바람이 그의 몸을 힘껏 떠밀었다.
"으헉-?!"
그가 이런 식으로 달려 들리라고는 예상도 하지 못한 듯, 강도가 눈을 치켜떴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이안이 내리친 검이 놈의 머리 바로 앞까지 다다른 상태였다.
꽈지직-!
북부 전사의 검이 도적의 머리를 가슴팍까지 쪼개며 박혀 들었다. 이안과 충돌한 놈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그 사이 이미 몸을 움츠린 이안이, 놈의 가슴팍을 힘껏 박찼다. 벨리움 요새에서 거인들을 상대하며 여러 번 반복한 바로 그 움직임이었다.
푸확-!
한순간 뿜어져 나온 바람이, 강도의 시체를 바닥에 처박다시피 튕겨냈다. 투쟁의 축복을 받던 그때만큼 힘이 강하지는 않았지만, 달려들던 속도를 상쇄할 정도로는 충분했다. 이안이 말 위에 착지했다.
허공에 피 보라가 휘몰아쳤다.
"뭐 저런, 미친…?!"
엉망진창으로 땅을 구르는 동료의 시신과 안장에 묘기 부리듯 올라탄 이안을 번갈아 본 남은 강도가, 황급히 말 머리를 옆으로 돌았다.
이안은 말머리를 돌려 곧바로 놈의 뒤로 따라붙었다. 그의 눈동자가 잿빛으로 휘몰아쳤다. 곧바로 다시 휘몰아치기 시작한 바람이, 그가 탄 말까지 감쌌다. 도망치는 강도와의 거리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시발, 오지 마-! 오지…!"
소리치며 뒤를 돌아본 놈은, 이안이 전력으로 달리는 말의 안장 위에 두 발로 올라선 것을 보고는 숨을 들이켰다.
다음 순간 이안이 뛰어올랐다.
그의 몸이 바람의 저항을 전혀 받지 않는 것처럼 포물선을 그렸다.
콰직-!
도적이 몸을 비틀었지만, 고통만 더해질 따름이었다. 머리가 아니라 목덜미에 떨어진 칼이, 복부까지 깊이 갈라 버린 것이다. 놈이 걸친 사슬 갑옷과 가죽 견갑은, 바람 칼날이 더해진 이안의 검을 전혀 막아 주지 못했다.
"커… 허…."
단숨에 죽지 못한 강도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피를 토했다. 잘린 단면에서도 피가 치솟았다.
이안은 놈의 내장이 쏟아지기 전에, 머리채를 잡고 옆으로 던져 버렸다.
그대로 놈의 안장에 올라탄 이안이, 느릿느릿 언덕을 오르는 자신의 마차를 일별하고는 고삐를 후려쳤다.
짐 마차 위. 순식간에 동료 둘이 죽는 것을 본 강도가 언덕 반대편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치고 있었다.
마부석의 여자는 그에게 얻어맞아 얼굴이 엉망이 된 채로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겁에 질린 얼굴로 이안을 돌아본 강도가, 다급하게 재장전을 끝낸 쇠뇌를 들었다.
그 와중에도 조준은 정확했다.
쒸엑-
말을 향해 날아드는 파공음. 이안이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팔을 휘두른 건 거의 동시였다.
챙-
이안이 볼트를 쳐내자, 강도의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말도 안 된다고 중얼거리는 입 모양이 또렷하게 보였다.
#127화